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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창천마신(蒼天魔神) [E]

창천마신(蒼天魔神) 1권

2015.08.26 조회 9,471 추천 70


 # 1장, 천무대(千務隊).
 
 백여 명이 넘는 무인들이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
 사이사이에 나부끼는 깃발에는 천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무대(千務隊).
 천 가지 사무를 처리하는 조직이라니.
 이름부터 곤궁한 냄새를 물씬 풍긴다.
 하나 그네들의 행색은 부대명보다 더 초라했다.
 허름한 무복과 무딘 검, 그리고 헤진 신발.
 거지 떼와 다를 바가 없는 무인들은 무기력하게 걸음을 내딛는다. 만약 가슴에 수놓인 남궁세가의 표식이 없었다면 화적 떼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저들이 왜 모였을까? 라는 의문보다 중늙은이들을 모아놓고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의구심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
 마치 경극을 구경하는 것처럼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 가능했다. 심지어 그네들의 대화는 물론이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재미없는 광경에 점점 흥미가 사라진다.
 중늙은이들이 싸구려 화주를 마시고, 질긴 육포를 씹고 있으니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그 사이 달빛이 골짜기 사이로 스며든다.
 초라한 몰골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드러낸다.
 삶에 찌든 표정들이 가득하다.
 한데 그 중 유달리 낯이 익은 무인이 있었다.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도 무기력하게 축 늘어져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나였다.
 아니 늙어 버린 나다.
 아마도 삼십 년 쯤 험하게 살다보면 저리 되지 않을까 싶다.
 충격과 공포를 지나 불신의 단계에 이르렀다.
 왜 내가 저기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그보다 내가 맞기는 한 건가?
 의문에 쌓여 있는 사이 늙은 내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한 줄기 빛이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하나둘씩 고개를 들어 빛을 좇았다.
 빛은 정점에 닿았는지 올라갔던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내리꽂힌다.
 천무대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시(火矢)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대원 중 한 명이 뒤로 튕겨나갔다. 불화살에 꿰뚫린 얼굴은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하나 죽은 대원을 걱정하거나 보살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원들은 하늘을 응시한 채 시선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솨아아아아아아아아-
 밤하늘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수백 발의 화시가 불벼락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
 
 천위는 진저리를 치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불화살도 없고, 시체도 없고, 골짜기도 아니다.
 이제는 익숙하기만 한 천장과 작은 창을 확인한 후에야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꿈이네. 그래, 꿈이겠지.”
 개꿈에 불과했지만, 남들처럼 웃어넘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꿈 치고는 너무도 현실감이 넘친다.
 당장이라도 살타는 냄새가 코끝을 찌를 것만 같았다.
 “아, 진짜 간만에 개똥같은 꿈이었어.”
 사실 천위의 삶은 꿈과 함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꿈을 꿨다. 길몽과 흉몽을 가리지 않고, 온갖 잡스러운 꿈으로 새 아침을 열었다. 덕분에 자고 일어나면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 몸이 뻐근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심신(心身)을 안정시켜준다는 진기도인법도 몇 개나 수련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꾸는 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심법의 도움 탓인지 꿈을 꾼다는 행위 자체가 시간이 흐를수록 무의미해졌다.
 이제 천위는 온갖 잡다한 꿈을 꾸면서도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꿈을 꾸는 행위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한 가지 꿈이 이십일 넘게 이어지는 게 말이 돼?”
 무슨 장편 소설도 아니게 이게 뭐란 말인가!
 절로 한 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런데 그게 또 개꿈이야. 이 빌어먹을 정도로 허접한 상상력 같으니라고.”
 예쁜 여자가 나오거나 돈이라도 줍는 꿈이라면 피곤할지언정 기분은 좋았을 것이다.
 늙은 나라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진다.
 천위는 싸구려 화주와 질긴 육포의 향이 입안에 남아 있는 것처럼 침을 뱉으며 인상을 썼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남 탓이다.
 “이 동네, 알고 보면 터가 안 좋은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이곳이 바로 잠룡비원(潛龍秘院)이기 때문이다.
 
 - 남궁세가가 직접 건립하고, 운영하는 수련원!
 
 이 한 마디가 잠룡비원의 위상을 드러낸다.
 당금 강호를 양분한 것이 바로 무림맹과 남궁세가다.
 지금껏 잠룡비원을 수료한 제자들은 남궁세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니 잠룡비원에 입관만 하면 입신양명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하나 황궁대학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비단금침을 덮고, 호의호식한들 본인이 좋지 않으면 편할 턱이 없다.
 천위가 딱 그러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창틀에 몸을 기댔다. 창밖의 펼쳐진 잠룡비원의 전각군은 웅장했지만, 왠지 모르게 황량했다.
 “쯧,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구만.”
 잠룡비원이 싫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부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
 
 - 여유가 있다면 부족한 이에게, 강하다면 약한 이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 네가 검을 들었으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항상 노력하고,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네게 전하는 협(俠)이란다.
 
 천위는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셨다.
 “칫, 그딴 거 누가 알아주기나 한답니까?”
 사부는 평생 남을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 사부는 협행을 대가로 늙고, 병든 몸뚱이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사부는 여전히 검을 놓지 않았다.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기침을 하면서 수련을 하고 계실 게다.
 사부라면 제자에게 솔선수범해야 한다며.
 “네, 게으름 피우지 않을 게요. 합니다. 해요!”
 천위는 사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부는 그에게 스승이자, 가족이었고, 친구였다.
 그것만으로도 잠룡비원의 생활을 버텨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
 
 잠룡비원은 최고 수준의 시설을 자랑한다.
 삼백 명이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창궁대전(蒼穹大殿)과 오백 명이 동시에 무공을 시연할 수 있는 대연무장이 잠룡비원의 중심부에 위치했다.
 그것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자리한 것이 사관이다.
 사관(四館)의 명칭은 각기 등급에 따라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천위가 있는 이곳이 황룡관이다.
 이름과 달리 황룡관은 가장 자질이 떨어진다는 관도들의 집합소였다.
 천위는 연무장이 아니라 뒤뜰로 향했다.
 이 시각이면 황룡관의 관도들이 하나둘씩 학당이나 연무장으로 기어 나올 것이다.
 그들이 나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뻔했다.
 강한 자를 찾아다니며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다진다.
 잠룡비원은 이름만 수련원이지, 인맥을 넓히는 친목단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녀석들과 함께 하느니 조용한 곳에서 홀로 수련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쉬잉-
 잠룡비원에서 지급한 철검이 밤낮을 동시에 품은 새벽녘의 서늘함을 잘라냈다.
 날카롭고, 매끄럽다.
 고향에서 사용했던 투박한 쇳덩어리와 달리 손에 감기는 맛이 일품인 녀석이다.
 “훗, 남궁세가는 돈이 넘쳐난다더니……. 어쨌든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어둠을 산산조각 내고 싶었다.
 하지만 수련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천위는 철검을 내려놓고 마보 자세를 취했다.
 “후우…….”
 두 손으로 하늘과 땅을 번갈아 가리켰다.
 하늘을 밀어 올리듯, 땅을 짓누르듯.
 여덟 번을 반복한 후 자세를 바꿨다.
 허공에 활을 쏘듯 좌우로 팔을 당겼다.
 그렇게 여덟 자세를 여덟 번씩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송(宋) 대부터 이어져온 도인법으로 유명한 팔단금(八段錦)의 과정이다. 팔단금이 유명한 이유는 간단했다. 누구나 쉽게 따라했고, 누구나 쉽게 변형이 가능했기에 저잣거리의 촌부들마저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만의 팔단금을 수련했을 정도였다.
 천위가 펼치는 도인법은 남무팔단금(南武八段錦)이라 하여 사부가 직접 창안한 것이다. 하나 수련 과정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천위의 움직임에는 진지하다 못해 경건한 분위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후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수록 머리는 맑아진다.
 전신의 근육이 뭉칠수록 호흡은 잦아든다.
 “후아,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아.”
 찬바람이 몇 번이나 폐부를 훑고 지나간 후에야 개꿈으로 인한 찝찝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무팔단금의 수련만으로도 반 시진을 훌쩍 넘겼다.
 정신을 집중한 채로 최대한 느릿하게 펼쳤기 때문이다.
 천위는 조금씩 어둠을 밀어 올리며 등장하는 해의 위치를 살피며 미간을 찡그렸다.
 “벌써 이렇게 된 건가?”
 수련을 마무리하려면 조금 더 서둘러야 할 듯하다.
 천위는 이마의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검을 쥐었다.
 수련할 검법은 두 가지.
 구기전검(九氣轉劍)과 소호검법(巢湖劍法)이다.
 전자는 사부가 가르쳐준 것이고, 후자는 잠룡비원에서 배운 것이다.
 당연히 구기전검에 먼저 손이 갔다
 검은 팔방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잔영을 남겼다.
 하지만 따로 힘써서 익혀야 할 만큼의 특별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날카로운 기운이 철검의 끝을 타고 번뜩였다.
 촤악!
 손목 굵기인 통나무의 상단부가 잘려 나갔다.
 촤악! 촤악!
 이후에도 두 번의 예기가 다시 발출됐다.
 구기전검은 평범한 검로(劍路) 사이에 절초를 숨기는 것이 오의(奧義)였다. 대성하게 되면 이름처럼 아홉 번의 절초를 마음 내킬 때마다 발출할 수 있게 되니 능히 상승검법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했다.
 내력을 나눠 절초를 발출해야 하니 평소의 검로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내력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쏟아 붓기에 후사를 도모하기가 난해했다.
 “후우…….”
 천위는 한 숨을 내뱉었다.
 그가 검로 사이에 절초를 숨길 수 있는 횟수는 고작해야 세 번에 불과했다.
 십여 년 간 수련했음에도 대성은 멀게만 느껴졌다.
 사부조차 대성하지 못한 검법이 아닌가.
 ‘이거 대성을 할 수 있긴 한 건가?’
 천위는 구기전검을 가르치던 사부의 말을 떠올렸다.
 본래 구기전검은 다른 검법에서 떨어져 나온 불완전한 검법이라 했다. 그렇기에 구기전검을 대성하면 자연스럽게 단점이 사라지고, 원형이 드러날 것이라 가르쳤다.
 ‘구기전검의 원형이 될 정도면 평범한 검법이 아닐 텐데……. 도대체 뭘까?’
 사부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남궁세가가 운영하는 잠룡비원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천위는 이곳에 왔다.
 이제 삼 년의 시간을 버텨 졸업만 한다면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이 삭막한 곳에서 허비하기에 삼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구기전검은 사부의 숙원! 제가 반드시 이룰 겁니다.’
 부모나 다름없는 사부를 떠올리는 순간 온 몸의 피가 들끓는다.
 쉬익!
 천위는 가슴 속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나무 위에서 바라본 잠룡비원의 전경은 여전히 낯설고, 삭막했다.
 하지만 적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부가 죽기 전에 꿈을 이뤄드릴 것이고, 고향의 평화 또한 되찾을 것이다.
 잠시 천위가 결의를 다지는 다시 나무 아래서 누군가의 경박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 높이에서는 여관도들의 숙소를 훔쳐볼 수 없어.”
 
 ***
 
 잠룡비원은 강호의 축소판과 같았다.
 뛰어난 무재를 지닌 관도는 대우받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한다. 강호의 삶이 그러하듯 강한 자는 모든 것을 얻고, 약자는 모든 것을 잃는 법이다.
 정파라는 안전망을 제외하면 강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잠룡비원은 진검을 사용한 비무만 금지했을 뿐, 암암리에 차별적인 행태가 빈번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잠룡비원의 관훈은 제마멸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진의가 강자존(强者存)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룡비원은 삭막하다.
 천위가 정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의미에서 백주룡(白朱龍)은 달랐다.
 잠룡비원에서 정을 붙인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천위는 속내와 달리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왜 왔어?”
 백주룡은 귀를 후비며 하품을 했다.
 “후원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있어야지. 누구 때문에 말이야! 너, 일찍 일어난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키 안 커. 여자들은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훗, 너보다는 큰데?”
 천위가 받아쳤지만, 백주룡은 키득거릴 뿐이다.
 “네 인생의 목표가 나라니 고맙구만. 하긴 나 정도의 미남자라면 누군가의 목표가 될 만하지!”
 “하아, 저 놈의 주둥아리.”
 백주룡은 천위의 한 숨에 으스대며 말을 이었다.
 “패배를 인정했다면 나랑 같이 가자.”
 “어디를?”
 “북소연.”
 천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룡비원 생활이 달포 째지만, 북소연(北小涓)은 처음 듣는 곳이다.
 백주룡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잠룡비원 북쪽에 작은 연못 있잖아.”
 “누가 지은 지명인지 진짜 대충 지었구나.”
 “후훗, 그건 중요하지 않아. 북소연에서 누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천위는 철검을 쥐고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수련해야 해.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가라.”
 “여관도들이 아침에 세면하는 곳이다. 구경 가자!”
 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나마 사부의 숙원을 잊고, 여관도들의 모습을 떠올려버렸다.
 잠시나마 멈칫한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한데 말을 걸거나 꼬시는 것도 아니고 구경이라니.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배가됐다.
 천위는 짐짓 모른 척하며 소호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안 간다. 금지에 갔다가 뒷감당은 누가 하려고?”
 백주룡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세면만 하는 게 아니야. 날이 날이잖아! 여름이라고! 태양이 내리쬐고, 후끈한 바람이 가득한 여름! 잘하면 목욕하는 것도 볼 수 있다고. 너 한 번도 못 봤지? 여체가 주는 신비함은 그 어떤 영약보다…….”
 천위는 불현 듯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 모습을 백주룡에게 들키면 가을이 올 때까지 놀림감이 되리라.
 촹-
 천위는 검을 뽑아들며 백주룡의 망상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백주룡은 혀를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쳇. 청춘의 혈기를 수련으로 발산하는 금욕적인 삶이라니. 너는 남궁세가가 아니라 절에 갔어야 했어. 내가 비구니 많은 절이라도 소개해주랴?”
 천위의 미간에 잠시나마 내 천(川)자가 새겨졌다.
 백주룡은 좋은 녀석이다.
 그 뿐 아니라 녀석은 수려한 외모와 타고난 친화력으로 유명했다. 황룡관 내에서 백주룡을 싫어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녀석과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유쾌하단다.
 하지만 천위가 봤을 때 백주룡은 말이 너무 많다.
 유쾌한 녀석이지만,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지 않던가. 녀석과 대화를 하다가 정신적으로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백주룡의 경박함을 접할수록 그의 잘 생긴 얼굴이 아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일까? 짜증 섞인 한 마디가 이어졌다.
 “그럼 청춘의 혈기를 너한테 발산해 줄까?”
 천위의 검이 방향을 바꾸기 무섭게 백주룡은 멋들어지게 검을 뽑았다. 하나 그는 천위와 검을 맞대는 대신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수련하자! 수련. 관도라면 수련을 해야지!”
 백주룡은 호흡을 고르지도 않고, 다짜고짜 소호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차핫! 나 어때? 방금 좀 멋지지 않았냐?”
 천위는 백주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인상 쓰는 것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얼굴로 수련하냐?”
 황룡관의 관도는 가장 먼저 소호검법을 배운다.
 입관 후 달포가 지났으니 대부분의 관도는 소호검법에 익숙했고, 몇몇은 이미 대성한 상태였다.
 하나 백주룡의 검법은 누가 봐도 소호검법과 거리가 멀었다. 춤을 추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잘 생기고, 팔다리가 길쭉한 놈이 펼치니 제법 멋있기는 했다.
 실전과는 담을 쌓아야겠지만 말이다.
 ‘하아, 저 인간적인 놈.’
 천위는 예전 일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백주룡이 장난치는 줄 알고 폭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수련할 때의 녀석은 더없이 진지했다.
 단지 표정만 진지했기에 문제였다.
 소호검법의 수련을 끝낸 백주룡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후우, 어제보다 한결 나아진 것 같아.”
 ‘헉! 만족하는 거냐?’
 백주룡은 천위의 멍한 표정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시선은 우정에 감점 요소라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하고 있네.”
 “사람에게는 먹을 수 있는 게 따로 있고, 할 수 있는 게 다른 거야. 어차피 무공으로 대성하겠다는 생각은 포기한지 오래야. 기왕이면 잘하는 걸 발전시켜야지.”
 저 놈의 주둥이는 정마대전 한복판에서도 말상대를 찾아 떠돌 기세다.
 천위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는 뭐가 되고 싶은데?”
 백주룡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정보단체의 수장. 그래! 하오문주 정도면 멋있겠다. 어때? 괜찮지.”
 저렇게 쉽게 말할 직위는 아니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어보이지는 않는다. 녀석에게는 상대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무기가 있지 않은가.
 수려한 외모와 타고난 말발로 인한 친화력이다.
 지금도 황룡관, 아니 잠룡비원 내에서 가장 정확한 소식통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고 하더라. 그러니 정보를 얻어내고 수하들을 다루기에는 제격인 듯도 싶다. 물론 하오문도가 아닌 이상 문주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한데 녀석의 꿈을 응원하려니 왠지 모르게 비위가 상했다.
 “그런데 조금 소박하지 않냐? 우리 나이면 무림맹주가 되거나, 천하제일인을 꿈꿔야 하는 것 아냐?”
 천위의 말에 백주룡은 코웃음을 쳤다.
 “애도 아니고 천하제일인은 개뿔. 나는 내가 알아. 저 정도면 나한테는 원대한 목표란다.”
 “그래. 열심히 해라.”
 백주룡은 정보단체의 수장이 됐을 때를 생각하는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크큭, 하오문주가 되면 중원의 모든 기루를 관리할 수 있겠지? 예쁘고, 몸매 좋은 기녀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하면서…….”
 천위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백주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키득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천위는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백주룡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놈.”
 저 녀석과 노는 것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
 천위는 망상에 빠진 백주룡을 두고 후원의 중심부에 섰다.
 소호검법을 수련할 요량이다.
 백주룡은 대수롭지 않게 대하지만, 소호검법이야말로 남궁세가의 뿌리라고 할만 했다.
 열여섯 초식으로 공수(攻守)에 대한 기본을 정립한다.
 이것이 바로 소호검법의 묘리였다.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벼락처럼 검이 뽑혔다.
 촹-
 검의 끝이 검집을 긁어내는 소리가 발검의 속도를 증명한다.
 천위의 검은 눈부신 잔영을 남기며 사방팔방을 점했다.
 백주룡과는 천양지차에 가까운 실력을 뽐내며 후원의 곳곳을 검 끝에 담았다.
 남무팔단금을 펼칠 때와는 달리 삽시간에 소호검법의 수련을 끝냈다. 소호검법의 열여섯 초식은 빠른 속도와 미세한 균형을 통해 공수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천위는 몇 번이나 소호검법을 연이어 펼치며 초식을 점검했다.
 “하아, 진짜 소호검법 하나는 끝장나는구나.”
 백주룡이 망상을 끝냈는지 박수를 치며 외쳤다.
 “기녀나 계속 주무르지 그러냐?”
 천위의 시큰둥한 대꾸에도 백주룡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봐도 놀랍단 말이지. 열흘 만에 소호검법을 대성한 녀석이 어째서 황룡관에 있는 거지? 설마 소호검법이 인생검법이었던 건가?”
 천위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과연 내가 펼칠 수 있는 검법이 소호검법 뿐일까?”
 백주룡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보이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진신무공은 훨씬 대단한가 보지? 뭐냐? 남궁세가의 무슨 무공을 익힌 거야?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비전의 무공이라도!”
 천위는 대답 대신 사선보(蛇線步)를 수련했다.
 백주룡은 사선보를 확인하는 순간 혀를 차며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기껏 하는 게 사선보냐?”
 뱀의 움직임을 흉내 낸 사선보를 대성하려면 보법을 펼치는 내내 발자국을 연결시켜야 했다. 천위는 어차피 소호검법을 펼치며 함께 운용해왔기에 따로 펼치는 것은 더욱 손쉬웠다.
 “그러는 너는 사선보나 할 줄 아냐?”
 천위는 백주룡의 입을 틀어막은 후 다시 한 번 남무팔단금을 펼쳤다.
 백주룡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사선보 다음에는 팔단금이야. 맙소사! 팔단금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수련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아니지. 저기 구화산 아래에 있는 촌부들은 밭 갈기 전에 열심히 하겠네.”
 “팔단금이 아니라 남무팔단금이야.”
 백주룡의 눈빛에 호기심이 드리워진다.
 “강호에 존재하는 팔단금만 해도 수백 종이라지. 남무팔단금에 뭔가 다른 효능이라도 있는 거냐?”
 그래도 무인이랍시고 궁금하기는 한가 보다.
 하나 천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몸이 찌뿌듯할 때 펼치면 활력이 돋는다고 해봤자, 대부분의 팔단금이 그러하지 않은가.
 “사부가 처음으로 가르쳐 주신 거야. 그것만으로도 수련할 이유는 충분해.”
 백주룡은 흥미를 잃었는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모든 대화의 끝은 사부님이군. 가족이라고 해도 너처럼 애틋하지는 않을 거다. 설마 사부가 아리따운 여인이신 건 아니지?”
 천위는 사부를 떠올렸는지 입 꼬리를 올렸다.
 “사부는 존경받아야 마땅한 사내대장부시다. 그리고 손꼽히는 협객이시지. 내가 얘기했던가? 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인데…….”
 백주룡은 사내라는 대답에 흥미를 잃었나 보다.
 “그 일화라면 세 번이나 들었다. 너는 수련하느라 힘을 뺐을 테니 내가 대신 설명해줄까?”
 그러나 천위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부의 협행을 논하자면 삼일밤낮도 자신이 있었다.
 백주룡은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천위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사제관계가 어땠기에 그리도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냐? 젠장! 나와 사부가 비정상인가? 진심으로 부러워지려고 하네.’
 결국 참다못한 백주룡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야! 내 꿈은 얘기했잖아. 네 꿈은 뭐냐?”
 백주룡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 사부처럼 되겠다는 누구나 예상할 법한 꿈이거나, 하오문주가 되겠다는 비열한 꿈은 아니겠지?”
 천위는 백주룡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내 꿈은 개꿈이지.”
 백주룡은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중얼거렸다.
 “자식, 확실히 말 받아치는 게 늘었어. 기특해지려고 하네.”
 감탄하며 만족스러워하는 녀석을 보니 꿈에 관해 상의하고 싶던 마음이 싹 달아난다.
 # 2장, 꿈의 변화.
 
 잠룡비원은 단일 수련원으로는 강호제일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입관은 물론이고, 수련과정까지 하나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본래 잠룡비원에 입관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였다.
 남궁세가의 방계나 속문의 제자인 경우다.
 대부분의 관도가 이 방식으로 입관했다.
 하나 어디에나 특별함을 빙자한 뒷문이 존재하는 법이다.
 잠룡비원도 그러했다.
 정파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최고의 자질을 지녔고, 정도문파라고 해서 항상 부유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궁세가가 인정한 명숙의 추천을 받은 기재이거나 엄청난 후원금을 납부한 경우에도 입관이 가능했다.
 그러다보니 잠룡비원에서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속문의 제자들이었다.
 즉 힘과 돈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최고의 으뜸 패였다.
 그리고 그것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바로 잠룡비원의 사부들이다.
 “자, 여기까지다. 궁금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냐?”
 모태붕의 시큰둥한 한 마디가 경전 수업의 끝을 알린다. 그의 눈빛을 살피거나, 목소리만 들어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잠룡비원의 문사부로서 제자들을 향한 관심과 열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없냐고 묻지 않더냐?”
 모태붕의 짜증 섞인 물음에 관도들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괜히 모 사부에게 밉보일 필요는 없지.’
 ‘질문해봤자 면박이나 당할 텐데 뭐.’
 잠룡비원의 무사부와 문사부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그들이 매긴 점수와 평가가 수료 이후의 삶을 결정한다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면 기본 점수라도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모태붕은 관도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훗, 이래서 황룡관에서의 강론은 시간 낭비라니까. 적당히 칼질이나 가르쳐서 써먹으면 되는 놈들에게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정파가 곧 의협이던 시절도 있었다.
 하나 작금의 강호는 의협보다 명성과 실리를 좇는 세상이 아니던가. 강호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잠룡비원은 그것이 더욱 심했다.
 잠룡비원은 관도들을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사 단계로 나눴다.
 명가의 자제이거나, 자질이 뛰어난 관도들을 천급으로 분류했고, 세가의 방계인 경우 지급과 현급에 배치된다. 그 외에 속문의 제자들은 문파의 영향력에 따라 등급을 나눴다. 그리고 등급에 맞춰 천지현황에 용(龍)을 붙인 사관을 만들어 숙소를 제공했다.
 그래서 천위가 있는 곳은 가장 아랫단계인 황급이었고, 숙소의 이름은 황룡관이 된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달랐고, 가르쳐 주는 것도 달랐다.
 그렇기에 졸업할 때까지 황룡관도는 황룡관도로 남았고, 현룡관도는 현룡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협의지심을 논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으리라.
 ‘쯧쯧, 자질이 없으면 근성이라도 있어야지. 하기는 그것도 없으니 밑바닥에서 빌빌 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찮은 칼받이들에게 무엇을 바라랴!’
 모태붕은 조소를 머금고 돌아섰다.
 한데 그의 걸음을 막는 한 마디가 있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천위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을 번쩍 든 것이다.
 관도들은 모태붕의 표정을 살피며 미간을 찡그렸다.
 천위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관도들 전체가 밉보일 것을 걱정한 것이다.
 “뭐냐?”
 “제물론을 강론하실 때 만물은 일체이며 꿈과 현실, 생사귀천의 구별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꿈을 꾸는 건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인가요?”
 모태붕의 미간 사이에 접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하나 질문을 허락한 것은 자신이지 않은가.
 물론 할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당연히 짜증 섞인 대꾸가 이어졌다.
 “꿈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대가에게나 기적처럼 일어나는 현몽이 아닌 이상에야 마음속의 잡념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에 불과해. 한데 어째서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것이냐?”
 천위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매일같이 꿈을 꾸거든요. 그래서 혹시 이유가 있나 하고…….”
 모태붕의 일갈이 천위의 말을 끊었다.
 “이놈! 지금 내게 해몽 따위를 바라는 것이냐? 버르장머리가 없기로서니 어찌 이리 무도할까. 정신이 똑바로 박혔다면, 수련에 매진했다면 미몽 따위에 휘둘릴 까닭이 없다. 너 스스로 반성하며 마음을 갈고닦아라. 하긴 네깟 놈이 할 수나 있겠느냐마는.”
 모태붕은 천위를 노려보다가 관도들을 향해 불 같이 화를 토해냈다.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급이야 불가능하겠지만, 현급이라도 되어야 사람 구실을 할 것 아니더냐. 남궁세가에서 거둬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야! 크흠! 이런 놈들에게 황룡이라는 귀한 명칭을 쓰다니! 아깝다. 아까워!”
 관도들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전전긍긍했다.
 모태붕이 떠나고 관도들은 천위를 노려보며 하나둘씩 흩어졌다.
 “크큭! 제물론하고 꿈을 엮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여간 가끔 보면 너도 참 특이해. 어찌됐든 모태붕한테 찍혔으니 네 앞길도 그리 순탄치는 않겠구나.”
 천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아, 혹시나 해서 물어본 내가 바보지.”
 “잠룡비원이 관도들 줄 세우기에 앞장서는데 문사부라고 다르겠냐? 모 사부 뿐 아니라 다른 사부들도 마찬가지야. 어떤 애들은 별 이유도 없이 수련이랍시고 하루 종일 마보만 했다더라.”
 천위는 더욱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역시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모 사부 엉덩이라도 걷어차고, 멋들어지게 떠나는 건 어때?”
 백주룡의 너스레에 천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구 재밌으라고 그걸 할까.”
 “뭐 만회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으니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소리야?”
 천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주룡은 주변을 살피더니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며칠 후에 남궁세가에서 선배들이 온단다.”
 “선배?”
 “우리보다 먼저 잠룡비원을 졸업한 사람들. 잠룡비원을 수료하면 남궁세가 소속의 세가원이 되고, 그 중에서도 특출난 사람들은 내원에 들거나, 무림맹으로 발령 나잖아. 그런 사람들이 와서 쓸만한 녀석들을 점찍어 둔데. 나중에 승급했을 때를 대비해서 마음 맞는 수하들을 미리 선별하는 거지.”
 하나 천위는 백주룡의 바람과 달리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까지 오겠냐?”
 “생각해봐라. 천급이나 지급 녀석들은 어차피 세가의 직계들과 한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되어 있다고. 수료만 하며 바로 내원에 들어가서 조장 급으로 임명 될 걸. 그러니 선배들이 점찍는 건 오히려 현룡관도나 황룡관도란 말이야. 너처럼!”
 “나? 너는 왜 빼냐?”
 백주룡은 검지를 흔들며 히죽거렸다.
 “나는 아니지. 나는 장차 하오문주가 될 몸이니까.”
 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하아, 어련하시겠습니까.”
 “후훗,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라. 문주가 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저렴하게 정보를 물어다 줄 테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반응은 차가웠다.
 “개냐? 물긴 뭘 물어와.”
 
 ***
 
 천위는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배와의 만남이라…….’
 사실 잠룡비원 내에는 암암리에 사조직이 존재했다.
 황룡관도를 제외한 천지현의 관도들이 무리를 이뤘고, 사부들이 이름을 알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곳도 있었다. 사조직으로 인한 관계는 잠룡비원 수료 후에도 이어질 것이고,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대를 잇는 주종관계의 시작.
 천위는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 것만 같았다.
 어차피 사부의 숙원은 잠룡비원만 졸업하면 해결될 일이다. 그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사부와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그러니 다시 볼 일 없는 저들과 얽혀서 같이 진창을 뒹굴고 싶은 생각이 전무했다.
 ‘그들은 다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선배라는 강호인들 역시 잠룡비원에서 지금의 관도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 간 사람들이 아니던가. 오히려 잠룡비원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사조직을 유지했던 당사자였다.
 그들은 진짜 강호에서 활동하면서 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정파이기에 지니는 협의지심이 아니라 협의지심을 품었기에 정파인이 되었을 것이라 막연하게 희망해 본다.
 그렇게 천위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꿈은 오늘도 이어졌다.
 
 ***
 
 꿈은 이어졌으나 시기가 달랐다.
 천무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에 그슬린 흔적이 역력했고, 곳곳에 붕대를 감은 무인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에 늙은 나도 있었다.
 다만 더 초라하고, 더 무기력하게 변했을 뿐이다.
 
 ***
 
 “하아, 등신같이 저게 뭐하는 짓이래.”
 눈을 뜨자마자 흘러나오는 한숨.
 이것이 천위의 몸 상태를 알려주었다.
 보통 잠에서 깨는 순간 꿈은 희미해진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몽롱해지는 것이 꿈이라는 녀석인 게다.
 한데 천위의 꿈은 마치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하고, 선명했다.
 ‘빌어먹을! 더럽게 재미없는 경극을 수십일 동안 보는 것 같아.’
 벌써 사십 일 가까이 반복되는 생활.
 하지만 천무대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손톱만큼도 궁금하지 않았다.
 ‘차라리 늙은 내가 죽어버리면 그만 꾸지 않을까?’
 그만큼 천무대의 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게 안 되면 최소한 천무대에 여자 대원이라도 넣어 달라고!”
 오죽 했으면 잠들기 전에 협객지와 춘화집까지 훑어봤을까. 하나 천무대에 관한 꿈은 마치 굴레처럼 매일 밤 그를 찾아왔다.
 그러니 천위로서도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나 잠룡비원의 사부들이나, 출입이 가능한 서고에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남무팔단금을 더욱 열심히 수련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
 이것 또한 사부의 가르침이었기에.
 남무팔단금을 펼치면 머리가 맑아지고, 육신에 활력이 넘쳐났다.
 결국 찝찝할 때는 수련이 최고다.
 그 덕에 천위는 황룡관에서 수련광으로 소문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다. 소문은 소문으로 그쳤고, 황룡관도들은 여전히 수련보다 인맥을 쌓는 것에 열중했다. 스스로를 갈고 닦아 위명을 쌓겠다는 의지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딴 놈들, 알게 뭐야.’
 천위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잠룡비원만 무사히 졸업하면 볼 일 없는 놈들이 아닌가. 하나 사부들의 비위를 맞추고, 또래에게 아양을 떠는 관도들을 볼 때마다 인상을 쓰게 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희들의 강호는 내가 살아온 강호와 다르구나.’
 고향에서의 삶을 떠올릴 때마다 혀를 차게 된다.
 짠 내와 피 냄새가 가득한 곳.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곳.
 삼 년 후에는 돌아갈 수 있으리라.
 천위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한 번 수련에 집중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다.
 천위는 멈추지 않았다.
 목표는 오직 하나, 구기전검의 완성이다!
 
 ***
 
 백주룡이 말했던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남궁세가 외원의 진무대(鎭武隊)에서 조장 급으로 활약하는 무인들이 잠룡비원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진무대는 외원에 존재하는 열두 개의 타격대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유명했다. 그러니 관도들의 화제는 단연 진무대와 언제 만날 수 있는 가였다.
 “오늘 오후 첫 수련이다. 그 때 진무조장들이 수련에 참관할 거야.”
 천위는 백주룡의 단언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업무상 기밀.”
 “훗, 어련하시겠습니까.”
 백주룡은 연무장에서 웅성거리는 관도들을 피해 목소리를 낮췄다.
 “잠룡비원에 온 이상 선배들은 모든 관도들을 만날 거다. 그런데 그 정도로 만족하면 안 돼.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우리는 친구니까 내가 알려줘야겠지?”
 한데 백주룡은 은근한 어조와 달리 엄지와 검지를 비벼대는 것이 아닌가.
 천위는 검배에 슬그머니 손을 올리며 말했다.
 “설마 친구끼리 돈 달라는 건 아니겠지?”
 백주룡은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훌쩍 물러서더니 헛기침을 했다.
 “친구 사이에 돈 거래라니! 그럴 리가 있겠냐? 이번만은 신뢰를 쌓는 것에 만족하도록 하지.”
 천위는 헛웃음을 지었다.
 ‘핫, 언젠간 받겠다는 얘기군.’
 “어쨌든 조장급이 문제가 아니야. 이번에 온 사람 중에서는 진무대의 부대주도 있단다.”
 이번에는 천위도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진무대의 부대주라면 능히 절정의 고수일 것이고, 강호에도 이름을 알려졌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백주룡은 천위의 표정을 즐기듯 말을 이었다.
 “필검. 그가 온다.”
 놀람의 연속이다.
 필검(畢劍)이라면 잠룡비원의 지룡관 출신으로 팔 년 만에 부대주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무인이 아닌가. 게다가 온화한 성품으로 신망이 두텁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아…….”
 천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탄성을 흘렸다.
 보통 선배들은 믿고 쓸 수 있는 수하들을 얻기 위해서 잠룡비원에 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필검에게 수하가 더 필요한 상황이 생긴 거다.
 ‘대주로 승진할 가능성이 생긴 건가. 그래서 자기 사람들을 모집하려고?’
 백주룡은 큰 공을 세운 사람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자! 난 칭송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
 하나 천위가 언제 백주룡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던가.
 “그런데 너 하오문도냐?”
 백주룡은 천위의 딴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하오문도면 하오문에 있지. 잠룡비원에 어떻게 오냐?”
 “그건 그렇지. 신분부터 검증했을 테니. 그런데 너 어떻게 하오문주가 되려는 거야?”
 “다 방법이 있단다.”
 천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설마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초고속 승진으로 하오문주가 되겠다는 천진난만한 방법은 아니겠지?”
 백주룡은 춘화집이라도 보다가 걸린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누가 봐도 정곡을 찔린 표정이 아닌가. 아니나다를까 녀석은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게 말이 되냐? 더 대단한 방법이 있어!”
 천위는 백주룡이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충분히 구경한 후 원래의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필검이 유명한 건 알겠지만,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일이냐?”
 백주룡은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필검이라면 향후 무림맹의 대주도 가능하다는 게 호사가들의 평이야. 알아두면 무조건 이득이라고!”
 하나 천위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백주룡은 자신이 필검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어지간히도 힘들게 얻어온 정보인가 보다.
 하나 천위는 냉담한 어조로 백주룡의 말을 끊었다.
 “그 사람이 나한테 관심을 보인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가 감격할 필요는 없잖아?”
 “너한테 오면 어떻게 할 건데?”
 “헤어진 정인하고 재회 하냐? 뭐 그런 걸 벌써부터 고민해.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하고, 소호검법이나 수련해라. 이러다 너 쫓겨날라.”
 천위는 웃으며 백주룡을 지나쳤다.
 
 천위는 자신 앞에 선 사람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아무래도 백주룡을 만나서 비웃었던 일을 사과해야 할 듯싶다.
 “반갑다. 장취우라고 한다. 필검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쓴단다. 눈빛이 좋구나.”
 필검 장취우는 소문대로 선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오만하지도 않았고, 관도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마치 고향 후배를 대하듯 다정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다.
 하나 그의 부드럽게 휜 눈빛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전해졌다.
 절정고수는 눈빛부터 다른 법이다.
 천위는 어색하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아, 네. 천위라고 합니다.”
 장취우는 천위의 자음을 묻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하하! 자유로울 천(擅)에 위엄 위(威)라. 아주 광오한 이름을 쓰는구나. 멋지다. 멋져. 그 이름에 어울릴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려무나.”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관도들과 인사를 나눈 장취우는 관도들에게 강호의 정세를 알려주었다.
 ‘정파의 세상도 옛 이야기네.’
 강호는 여전히 혼탁했다.
 무림맹과 남궁세가는 여전히 무림의 태산북두였고, 정파의 세는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사마외도는 비 온 뒤의 죽순처럼 중원과 새외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혈겁을 일으키는 형국이었다.
 천위의 고향 또한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지 않은가.
 “협의지심에 경중이 없듯, 사마외도를 상대함에 있어서 강자와 약자는 의미가 없다! 사마외도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동지요, 가족인 것이다.”
 장취우의 끝맺음에 관도들은 새로운 세상이라도 엿본 것처럼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사부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존경이 가득 담긴 눈빛이다.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마라. 협객은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
 관도들은 열정적으로 한 목소리가 되어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천위 역시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취우의 연설은 사부의 가르침과 통하는 면이 많았다.
 ‘아! 저 사람은 협객이로구나.’
 한데 그 순간 장취우과 천위의 시선이 마주쳤다.
 장취우는 천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마음이 맞는 관도 몇몇과 정무당(正務堂)의 별실에서 조촐하게 모임을 가지려 한다. 너도 시간이 된다면 함께 하는 것이 어떻겠니?”
 필검은 사부의 가르침을 떠올릴 만큼 훌륭한 협객이 아닌가.
 그라면 교분을 나눌 가치가 충분했다.
 천위 역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날 밤, 꿈이 바뀌었다.
 # 3장, 뜻밖의 오수(午睡).
 
 모든 것이 변했다.
 늙은 나는 예전의 거지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군청색의 무복을 걸쳤고, 수술이 흔들거리는 화려한 검도 지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궁세가의 표식을 살폈다.
 진무(鎭武)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진무 아래 새겨진 문양은 조장을 의미한다.
 나는 잡무를 처리하는 천무대의 일개 조원에서 진무대 육 조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당당한 시선으로 땅이 아닌 전면을 응시한다.
 나는 더 이상 비굴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준 대상이 눈앞에 있다.
 진무대주 장취우!
 세월이 흘렀는지 중년이 된 그의 눈빛은 더욱 깊었고, 몇 개의 주름은 그를 더욱 인자하게 만들었다.
 시선을 돌려 진무대를 살폈다.
 십 조, 이백여 명의 무인들은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들의 기도는 천무대와 하늘과 땅 차이다.
 새로 편성된 듯 보이는 팔, 구, 십 조의 무인들마저 천무대보다 몇 배는 뛰어나 보였다.
 대원들의 눈빛은 의협심으로 가득하다.
 장취우에 대한 믿음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협의지심의 기운을 보라.
 그래, 이게 정파다!
 이게 진정한 강호인의 모습인 게야!
 천무대는 쓰레기야!
 그들의 무기력함은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진무대의 협행을 느긋하게 감상하기로 했다.
 때가 되었는지 장취우가 산 아래를 가리켰다.
 정찰인가?
 십 조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 중 몇몇은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듯도 싶다. 하나 기억을 더듬기도 전에 이십여 명의 무인은 질풍처럼 산비탈을 내달리며 협곡으로 향했다.
 한데 그들이 협곡에 들어서자마자 송림(松林)에서 적이 튀어 나왔다.
 그 수가 무려 마흔이다.
 매복이 분명하다. 구하러 가야 했다.
 동료를 사지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주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장취우의 뒤에 선 조장과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유롭다.
 장취우가 다시 한 번 출진을 알렸다.
 구 조와 팔 조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선다.
 그들 역시 십 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일견하기에도 강호초출의 긴장이 전해진다.
 한데 적의 매복은 끝나지 않았나 보다.
 팔 조와 구 조가 십 조와 합류하는 순간 다시 한 번 적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일견하기에도 오십 명은 족히 되는 듯하다.
 장취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남은 조장과 조원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진다.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들거렸고, 심지어 입맛을 다시며 키득거리는 자도 있었다. 동시에 진무대의 무인들은 진득한 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마치 신입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본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적과 아군의 생사투(生死鬪)를 구경할 뿐이다.
 적은 사마외도답게 잔악한 수법으로 십 조를 유린했다. 숨통을 끊는 것도 모자라, 재차 검을 날려 시신을 난자했다.
 구 조와 팔 조 또한 다를 것이 없다.
 하나둘 씩 피투성이가 되는 가운데 등을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경공도 펼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했다. 하나 이내 수십 개의 수전을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진무대 삼개 조가 전멸하는 것은 시간문제!
 그럼에도 장취우는 그들을 돕지 않았다.
 미끼를 던지고 먹잇감을 유인하듯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잠시 후 송림에서 다시 한 번 적이 나타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매복하고 있던 적의 본대였다.
 백여 명이 충원됐으니 사마외도의 수는 이백에 가까웠다.
 동시에 장취우의 얼굴에서 온화한 기색이 사라진다.
 사마외도의 무리 속에서 목표를 찾은 것이다.
 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광기가 맺혀 있었고,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는 살기를 머금었다. 대원들의 희생보다 목표를 끄집어낸 것에 만족하는 것이 분명했다.
 장취우가 표홀하게 신법을 펼치며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진무대의 무인들이 뒤따랐다.
 진무대의 위명은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일 조부터 칠 조까지 도합 백사십 명으로 이백에 가까운 사마외도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전력 차라면 굳이 수하들을 사지로 내몰 필요가 없지 않은가.
 특히 진무대주 장취우의 능력은 어마어마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시퍼런 검기가 넘실거렸고, 동시에 사마외도 서너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적의 수괴조차 열 합을 넘기지 못하고 머리와 몸통이 분리됐다.
 장취우는 적의 피를 뒤집어쓴 채 폭소를 터트렸다.
 그를 따라 진무대의 무인들도 피 묻은 검을 흔들며 승리를 만끽했다. 축제를 벌이듯 날뛰는 그들의 발길에 죽은 진무대원들의 시체가 나뒹군다.
 행여 숨이 붙어 있을까 걱정하는 무인은 전무했다.
 그저 애초부터 저렇게 버려질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무관심할 뿐이다.
 불현듯 협곡을 가득 채운 혈향에 욕지기가 났다.
 
 ***
 
 천위는 부지불식간에 입을 틀어막았다.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쉰 끝에야 익숙한 방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하아…….”
 천위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다가 협탁 옆에 놓인 물통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얼굴을 박은 채 목이 따가울 때까지 물을 들이켰다.
 “와! 뭐 저런 개새끼가 다 있지?”
 하지만 이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꿈속에서 일어날 일로, 애먼 사람을 욕하는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여전히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꿈의 잔상을 되새김질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렸다.
 지금까지 꾸었던 그 어떤 개꿈보다 기분이 더러웠다.
 똑같은 개꿈이라도 차라리 빈궁한 쪽이 나았다.
 “필검이 맞긴 한데.”
 전 날 마주했던 장취우를 떠올렸다.
 그 온화함과 꿈속의 장취우가 보인 분위기는 같았다.
 단지 젊은 장취우와 늙은 장취우일 뿐이다.
 꿈속의 장취우를 떠올리는 순간 수하들을 미끼로 던지던 냉혈함에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광기 가득한 눈빛과 비열한 웃음은 뇌리에서 사라질 줄을 모른다.
 “진짜일 리가 없잖아?”
 하지만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하지 않은가.
 입안은 흙이라도 한 움큼 집어삼킨 것처럼 텁텁했다.
 천위는 그 어느 때보다 짜증 섞인 표정으로 무복을 걸쳤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남무팔단금을 펼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뚱이에는 활력이 넘쳐야 마땅했다.
 지금껏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하나 새벽 수련을 끝마칠 때까지 천위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꿈이 아니야.’
 “여자 훔쳐보다가 따귀 맞은 표정인 걸?”
 백주룡은 천위를 놀리면서도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갑자기 검을 뽑아 겨눌 것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천위는 평소와 달리 생각에 잠긴 채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쳇, 재미없구만.”
 투덜거리던 백주룡은 황급히 서책에 얼굴을 묻었다.
 문사부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한 까닭이다.
 “거기! 방금 대가리 박은 놈하고 옆에서 넋 놓고 멍 때리는 놈!”
 백주룡은 서책에 더욱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닥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천위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나 천위가 정신을 차리는 것보다 문사부의 호통이 먼저였다.
 “이 놈들이 감히! 내 수업에 딴 짓을 해? 일어나!”
 천위와 백주룡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
 백주룡이 헤실거리며 허리를 한껏 굽혔다.
 “저는 백주룡이고, 여기 멍 때리던 녀석은 천위라고 합니다.”
 문사부의 미간이 더욱 일그러졌다.
 “천위? 담천위? 네가 그 문제아로구나.”
 아마도 모태붕이 문사부들에게 험담을 했나 보다.
 백주룡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는 이 녀석을 깨우려고…….”
 “닥쳐라!”
 천위는 변명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고, 백주룡은 입술을 삐죽이며 소리 없는 원성을 이어갔다.
 문사부는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가!”
 “저도요?”
 백주룡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문사부의 호통에 무기력하게 자리를 떠야 했다. 백주룡은 천위를 흘겨보며 연방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의 빚! 잊지 않겠다!”
 하나 천위의 표정은 여전했다.
 여전히 지난 밤 꿈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다. 마냥 개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꿈의 잔상이 너무도 강렬했다.
 백주룡은 천위가 점심까지 거르자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서성거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이 형님한테 고민을 상담해보는 것이 어때? 여자 문제라면 삼일 밤낮도 가능해. 아니면 여자라도 소개시켜 주랴? 수련 고민만 아니면 얼마든지 내가 시간을 내서…….”
 백주룡은 천위가 고개를 들자 말꼬리를 흐렸다.
 천위의 표정은 오전보다 밝았다.
 무언가 심경의 정리를 한 것처럼 말이다.
 “부탁 하나만 하자.”
 백주룡은 대뜸 부탁을 하는 천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이 뜬금없는 시기에 그 어색한 말투는.”
 “됐고, 뭐 하나만 알아봐.”
 백주룡은 천위의 평상시 말투를 접하자 그제야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제야 예비 하오문주의 능력을 믿기 시작했군. 좋아. 어디 한 번 간절하게 부탁해 보거라.”
 천위는 백주룡의 너스레를 귓등으로 흘린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필검에 관해서 알아봐. 진무대 부대주면 독립작전도 했을 거야. 그 때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좀 알아봐라.”
 백주룡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탄성을 흘렸다.
 “이여,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정무당에 가기 전에 필검에 대해 알고 가겠다는 건가?”
 천위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안 가.”
 “어디를 안 가?”
 “정무당에 안 간다. 필검도 안 만날 거고.”
 이번에는 백주룡이 놀랄 차례였다.
 “안 간다고? 필검의 초대를 거절한다고? 너 미쳤냐?”
 백주룡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몇몇 관도가 천위를 흘겨보며 웅성거렸다. 수십 명의 관도 중 몇몇만 초대받은 자리가 아니던가.
 참석하는 자의 비웃음과 참석하지 못한 자의 질시 어린 시선이 꽂혀들었다.
 “안 미쳤다.”
 오히려 백주룡이 안달이 나서 되묻는다.
 “그런데 왜? 왜 안 가는데?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르는 거냐?”
 “말했잖아. 오란다고 내가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안 갈래. 찝찝하고, 귀찮고, 머리 아파. 그냥 수련이나 하련다.”
 백주룡은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허어, 귀찮아서 가지 않겠다니! 어리석다. 어리석어. 모 사부 말처럼 평생 황룡관도로 빌빌거릴 상이로다. 이 어리석은 친구 놈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꼬? 하오문에 꽂아줘서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해줘야 하는 건가.”
 천위는 말이 길어지는 백주룡을 향해 나직이 한 마디를 흘렸다.
 “네 얘기를 네 입으로 하는구나.”
 백주룡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어리숙할 때가 좋았어. 쯧쯧!”
 천위는 백주룡을 보낸 후 다시 웃음을 지웠다.
 필검에 관한 백주룡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황룡관도들만 봐도 필검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이에게 필검의 초대는 기연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하나 천위는 여전히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악몽의 잔상을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꿈이 바뀌었다.
 장취우를 만나고, 약속을 잡은 직후에 말이다.
 이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사십일 동안 꿈이 지속된 것도 문제였지만, 비범한 존재를 만나는 순간 꿈이 바뀐 것은 더 큰 문제였다.
 어떻게, 그리고 왜?
 매일 같이 꾸는 꿈에 다른 의미가 있는지 의심해봤지만, 해답을 낼 수 없으니 답답함은 배가됐다.
 ‘고향에 있을 때가 차라리 편했어. 그래도 그 때는 나름대로 평범한 개꿈만 꿨잖아. 하여간 입관한 후부터 제대로 풀리는 것이……. 잠깐, 역시 잠룡관에 입관한 것이 문제인 건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쉼 없이 이어졌다.
 결국 오전 내내 고심한 끝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키지 않아.’
 마음속의 의문이 깊어질수록 명확해졌다.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려 했다면 벌써부터 관도들과 어울리며 저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상태로 필검을 만나는 것 또한 그에게 무례한 행동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속내를 숨겨본다.
 ‘후우, 찝찝해.’
 천위의 뇌리에는 여전히 장취우의 표정이 선명했다.
 수하를 미끼로 내세우고 공을 탐하던 모습.
 적을 학살하며 보인 광기와 비열한 웃음.
 이것은 장취우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결됐다.
 ‘정말 만나야할 인연이라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만나겠지.’
 이제야 한결 마음이 후련했다.
 천위는 무거운 숨을 토해낸 후에야 입가에 미소를 되찾았다.
 “가볼까.”
 그의 발걸음은 정무당이 아닌 후원으로 향했다.
 새벽 수련을 망쳤으니 이제라도 복구할 요량이었다.
 
 그날 밤, 다시 꿈이 바뀌었다.
 
 ***
 
 천위는 정신을 차렸음에도 눈만 깜빡였다.
 “뭐냐? 이건.”
 내심 잠들기 전만 해도 장취우에 대한 악몽이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지난 꿈도 입관 이후 매일 같이 계속되지 않았던가. 한데 진무대의 육 조장이 되었던 꿈은 정말 꿈이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이 천무대였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변했다.
 꿈 내용이야 늘 그랬듯 별 볼일 없고, 비루한 내용이 이어졌다. 천무대는 여전히 기약 없는 여정을 이어갔고, 그들의 행색은 더욱 초라하게 변해 있었다.
 희롱당한 여인네의 심정이 이러할 듯싶다.
 ‘누가 부적이라도 붙여놨나?’
 부적과 진법을 사용하는 사이한 문파도 있다지 않은가.
 하나 이내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이냐? 설마 내가 필검을 만나러 가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건가?”
 허공을 향해 물어봤자 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하나의 가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천위는 철검 한 자루를 들고 후원으로 향했다.
 “웬일로 이렇게 늦었냐?”
 후원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백주룡은 눈치 없이 손을 흔들며 천위를 반겼다.
 녀석과 어울려 주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생각할 게 있어서.”
 천위는 대충 얼버무린 후 남무팔단금의 자세를 취했다.
 수련으로 잡념을 지우려는 요량이었다.
 한데 시도 때도 없이 떠들던 백주룡이 조용하다.
 “웬일로 그렇게 조용하냐?”
 백주룡은 받은 대로 돌려줬다.
 “생각할 게 있어서.”
 녀석, 평소랑 다른 줄 알았더니 입심만은 여전하구나.
 “그래라. 그럼.”
 천위는 그 말을 끝으로 수련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 했다. 하나 지난 밤 꿈은 여전히 뇌리에 각인된 채 사라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악몽을 꾸었을 때보다 더욱 심란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검이 나무를 벴다.
 ‘……것처럼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거지.’
 수련이 종극으로 치닫을수록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후우.”
 백주룡은 천위의 수련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흰 천을 던졌다.
 “선물이야.”
 천위가 마른 천으로 얼굴을 닦는 사이 백주룡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신경 쓰이지 않냐?”
 “뭐가?”
 “내가 네 수련을 지켜보는 게. 보통은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잖아.”
 백주룡의 말이 맞다. 가족에게도 숨기는 것이 수련이다. 무공의 종류, 수련의 깊이, 검의 움직임만으로도 파해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살수를 펼쳐도 탓할 수 없을 만큼의 금기인 셈이다.
 하나 천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와서 그게 왜 궁금한데?”
 백주룡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더 친해지고 싶어서.”
 “알려주면 더 친해질 것 같아서 싫다.”
 “야! 임마! 이 청출어람 같은 놈아!”
 하나 천위는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수련에 집중했을 때보다 개운한 표정으로 후원을 떠났다.
 
 모태붕에게 찍힌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무사부들은 덜했으나, 문사부들은 천위를 볼 때마다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안달을 했다.
 덕분에 천위는 본의 아니게 잡념을 떨쳐내고 수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다. 하나 옆자리에 앉은 죄로 함께 찍힌 백주룡은 동의할 수 없었나 보다.
 “하아, 입관하고 이렇게 힘든 건 처음이야!”
 백주룡은 탁자 위에 널브러지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투덜거렸다.
 “야! 원흉.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나 때문에 미안해. 내지는 앞으로 내가 더 잘 할게. 뭐 이런 말…….”
 천위가 빙긋 웃더니 치고 들어왔다
 “그래, 미안한 줄 알면 됐다. 앞으로 더 잘하는 모습 기대할게.”
 백주룡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내 말의 맥을 끊고 들어왔어.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그는 방금 전의 상황을 빠르게 복기했다.
 천위는 숨도 쉬지 않고 자신의 말을 받아쳤다.
 녀석의 성격상 미리 준비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는 뜻이 아닌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네 글자가 낙뢰처럼 정수리를 두들긴다.
 백주룡은 황급히 눈동자를 굴리며 받아칠 말을 떠올렸다. 신랄하면서도 우정의 경계를 넘지 않는, 그러면서도 한 가닥 재미를 품고 있는 화려한 화술이 필요했다.
 생각나라! 생각나! 이건 내 전문이잖아!
 한데 단 한 번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던 매끄러운 혀가 점혈이라도 당한 것처럼 뻣뻣하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몇 호흡이 흘렀다.
 때를 놓친 화술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백주룡의 어깨가 패배감으로 인해 축 늘어졌다.
 ‘맙소사! 내가 말발에서 밀렸다고?’
 지금껏 수려한 외모와 타고난 화술을 무기 삼아 살아왔다. 지난 세월 자신의 활약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그를 존재하게 만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빼앗긴 듯했다.
 ‘이렇게 당하고 넘어갈 수는 없어!’
 백주룡이 그렇게 의미 없는 위기의식에 빠져 있을 때였다.
 천위는 우왕좌왕하는 백주룡을 구경하고 있었다.
 ‘꿈이 이 녀석만 같아도 지루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던 중 뒤통수를 따갑게 만드는 시선이 느껴졌다.
 ‘쟤 뭐야?’
 황룡관도 한 명이 적의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이 일면식도 없는 관도였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왜소한 체구 외에는 눈에 띠는 것이 전무한 녀석이다. 한데 녀석이 위압감이라도 주려는 모양인지 앙상한 손가락을 꺾으며 인상을 썼다. 저잣거리의 왈패나 할법한 유치한 짓거리에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데 관도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비웃었다고 여겼나 보다.
 천위는 비웃지 않았다. 단지 무시했을 뿐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녀석의 뜨거운 시선이나 치기 어린 적대감은 사절이다.
 한데 눈을 돌리니 앞에는 백주룡이 젖은 빨랫감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뒤통수는 그 놈의 적의 어린 시선으로 인해 따가웠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괜스레 귀찮기만 하다.
 ‘쯧쯧, 마음 편한 녀석들이네.’
 이쪽은 수련에 꿈까지 고민거리가 한 가득이라고.
 천위는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음 강론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바람이나 쐴 요량이었다.
 콰당!
 한데 녀석은 그 모습을 도발이라 여겼는지 격렬하게 반응했다. 의자를 밀치며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서 투쟁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천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밖으로 향했다.
 관도는 버름함을 감추지 못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담천위!”
 나를 알아?
 녀석의 분노보다 그것이 더 의아했다.
 겉으로 드러난 잠룡비원은 친목단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입관 당시 자기소개를 하는 일 또한 없었다. 한데 지금껏 홀로 수련해온 자신을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니 녀석이 빠르게 다가온다.
 뭔가 귀찮은 일에 휘말린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잠룡비원 생활이 피곤하다.
 모태붕과 장취우, 거기에 저 놈의 황룡관도까지.
 천위는 백주룡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로 정신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한데 저 놈의 황룡관도까지 엉겨 붙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한 순간 짜증이 치민다.
 “너 뭐야?”
 천위가 미간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드러내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앞을 막아섰다.
 ‘얘는 또 왜 이래?’
 백주룡은 마치 자신이 천위의 호위라도 되는 냥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진소백.”
 관도의 이름인가 보다.
 “백주룡, 너랑 싸우고 싶지 않다. 물러서!”
 “지금이라도 네가 물러난다면.”
 진소백은 천위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난 담천위와 할 말이 있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천위는 백주룡과 진소백의 딱딱한 대화를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자는 거야?’
 백주룡은 진소백을 향해 혀를 차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진소백(秦小白), 십칠 세. 호남진가의 삼남, 형 진대백, 동생 진소희과 함께 입관. 현룡관도인 진가 출신에 비해 홀로 황룡관으로 결정! 왜소한 체구와 미숙한 검술. 거기에 편향된 독서 취향으로 인해 졸업까지 황룡관을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 거기에 강호를 향한 동경으로 정신 못 차리는 치기 어린 녀석이지.”
 천위는 기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녀석의 정보력은 인정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히 입관을 허가한 총사부가 아니면 직계 가족이나 알 법한 신상내력이 아닌가.
 하나 진소백은 천위보다 몇 배는 더 놀랐을 것이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버벅거렸다. 적의로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하는 과정은 나름대로 괜찮은 볼거리다.
 “너! 너! 그걸 어떻게…….”
 녀석의 반응을 보니 백주룡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천위는 자연스레 진소백이 들고 있던 책을 쳐다봤다.
 겉면은 귀하다는 녹지(綠紙)였고, 표제는 흰 실로 자수까지 새겨져 있지 않은가.
 “뭐, 뭘 봐?”
 진소백은 천위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책을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백주룡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할까? 네가 더 놀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어디 네 편향된 독서 취향이나, 네가 화를 내는 진짜 이유에 관해 얘기해볼까?”
 진소백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나는 너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부리나케 학당을 나섰다.
 백주룡은 그제야 돌아서며 천위를 향해 으스댔다.
 “후훗, 고맙다는 말은 들은 걸로 치지.”
 “그래, 고맙다. 고마워. 그런데 나를 지켜준 것치고는 너무 괴롭히는 모양새던데?”
 진소백과 백주룡의 키 차이만 해도 한 뼘이고, 체구는 청년과 소년처럼 보일 정도였다.
 “허험! 잠룡비원에 든 이상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백주룡은 애써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나 방금 전만 해도 진소백에게 황룡관도를 운운하며 기죽이던 녀석이 아닌가.
 천위는 불현 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 나한테 자랑하고 싶은 거였나?’
 어찌됐든 백주룡의 정보력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까 편향된 독서 취향은 무슨 소리냐? 녀석이 들고 있던 책을 보니까 범상치 않던데.”
 백주룡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알고 싶나?”
 “왜 돈 필요하냐?”
 천위의 시큰둥한 한 마디에 백주룡은 대답 대신 엄지와 검지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헤헤헤.”
 “됐다. 안 알란다.”
 “싸게 해줄게!”
 “필요 없어. 수련하러 갈란다.”
 백주룡은 애달프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냥 알려줄까?”
 천위는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꺼져.”
 하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여간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평소처럼 수련하면서 졸업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귀찮음은 시작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이곳은 지룡관(地龍館)이다.
 그러니 오만한 표정의 청년은 지룡관도다.
 그리고 그는 남궁세가의 속가 서열 십구 위인 칠보검문(七步劍門)의 제자였다. 세가의 속문은 백여 곳이 넘으니 칠보검문의 힘은 그리 적지 않았다.
 청년은 아마도 잠룡비원을 졸업하면 사문의 힘으로 보통의 관도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런 그에게 겸양 어린 모습을 바라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백주룡이 그 정도였냐?”
 현룡관도는 청년의 하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관도의 신상내력을 읊어대는데 막힘이 없었습니다.”
 “확실히 해야 해. 우리는 진무회야. 어중이떠중이를 받아들였다가는 회주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야.”
 잠룡비원의 사조직 중 진무회(進武會)의 위상은 놀라웠다. 회주와 부회주가 모두 천룡관도였고, 수뇌부는 대부분 지룡관도였다.
 “지금껏 백주룡을 지켜본바 녀석의 정보력은 잠룡비원 내에서 최고입니다. 향후 잠룡비원 내에서 치러질 비무제나 진법 시연을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한 녀석으로 사료됩니다.”
 청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룡비원 내에서 진무회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진무회는 다소 신생 사조직에 가까웠다.
 이미 잠룡비원은 탄생시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창천회(蒼天會)와 백검회(百劍會)가 양분한 형국이 아닌가. 돈 많고, 배경 좋고, 능력 좋은 놈들은 죄다 창천회와 백검회에 가입했다. 후발주자인 진무회가 저들보다 우위에 서려면 정보의 독점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책임질 수 있어?”
 “저, 허주평은 입회 후 단 한 번도 허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허주평은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녀석이다.
 그래서 옆에 두고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룡관도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인정한다. 백주룡이라는 녀석, 입회시켜.”
 “일전에 백주룡을 데리고 인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한데 녀석이 거절하더군요.”
 청년의 미간 사이로 한 가닥 노기가 스쳐갔다.
 “감히 진무회를 거절해? 백검회냐? 창천회냐? 어디랑 줄이 닿아 있는 거지?”
 “그건 아닙니다. 가입할 생각이 없다더군요. 몇 번 설득해봤는데 말로 통할 성격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청년은 미간을 찡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네. 알량한 재주를 믿고 까부는 게지. 어디 출신이야?”
 “방계나 속문이 아니라 기부 쪽입니다.”
 허주평의 말에 청년은 흥미를 드러냈다.
 “기부입관이라고? 잠룡비원에 기부했을 정도면 적은 금액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상단 출신인가?”
 “제 능력으로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추천과 기부 여부는 원주나 부원주 정도나 되어야 확인이 가능했다.
 청년은 관자놀이부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꼬며 침음을 흘렸다.
 “흐음, 정보에 돈까지 있는 녀석이라. 구미가 동하는데? 내가 허락하마. 방법은 묻지 않겠다. 열흘 안에 가입시켜.”
 허주평이 눈을 빛내며 은밀하게 물었다.
 “하면…….”
 “황룡관의 우리 애들을 총동원해도 좋다. 일임하마.”
 “근시일 내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청년은 손을 내젓는 것으로 축객령을 대신했다.
 그도 허주평도 이번 일의 성패를 고민하지 않았다. 진무회가 하는 일이다. 문제없이 해결되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지룡관도인 청년은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간간히 입술을 핥는 모습에서 욕정이 느껴진다.
 ‘천룡과 지룡관도가 주축이 되는 잠룡대연이라……. 최상급 술과 안주, 거기에 기녀들까지 부른다고 했지?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 후훗.’
 이미 황룡관도에 대한 일은 기억에서 지운지 오래였다.
 
 ***
 
 허주평은 황룡관으로 향했다.
 현룡관도인 그가 지나가는 모습에 황룡관도들은 눈치를 보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지룡관도 앞에서와는 달리 오만한 표정으로 뻥 뚫린 소로를 걸었다.
 이것이 당연한 게다.
 현룡관도는 황룡관도보다 배경이나 무위가 뛰어나다.
 허주평은 그것을 절대적인 가치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인기척도 없이 목적한 관도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의 주인인 관도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관도는 쥐를 연상케 하는 외모를 지녔다. 그는 언제 놀랐냐는 듯이 헤실거리며 자리를 비켰다.
 “헤헤, 오셨습니까. 미리 기별이라도 주시지.”
 허주평은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했다.
 “앉아라. 주열”
 황룡관도 중 진무회에 가입한 관도는 총 아홉이다.
 주열은 다른 여덟 명을 관리하는 자였다.
 그리고 허주평의 직속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어인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허주평은 주열의 아부를 귓등으로 흘리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허락은 떨어졌다. 그가 백주룡의 능력을 높이 샀어. 이제 네가 그를 입회시킨다면 위쪽에서도 네 공을 잊지 않을 게다.”
 주열의 간사한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저 같은 놈에게 공이라니요. 그저 진무회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요. 하면 제가 백주룡과 다시 한 번 접촉해 볼까요?”
 허주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보다 고집이 세더군. 천지 분간 못하는 놈에게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역효과만 날 뿐이야.”
 “회유가 안 되면 협박이라도?”
 “기부로 입관한 놈이야. 협박이 통할까? 무엇보다 놈의 뒷배가 어디인지도 모르잖아.”
 주열은 가뜩이나 작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읊조렸다.
 “정면에서 안 되면 우회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방법이 있어?”
 “백주룡에게 담천위라고 매일 같이 어울리는 친구 놈이 하나 있습니다. 둘이 아주 죽고 못 살지요. 한데 백주룡이 담천위를 일방적으로 따르는 형국이랍니다.”
 허주평은 그것만으로도 짚이는 것이 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가능하겠어? 쓸데없이 잡음이라도 나면 좋지 않아. 가뜩이나 창천회와 백검회 때문에 위쪽에서도 몸을 사리고 있다고.”
 하나 주열은 경험이 많은지 여유롭기만 했다.
 “수련광으로 소문이 난 녀석입니다. 한데 수련하는 것이 고작해야 소호검법과 잡다한 무공이더군요.”
 “잡다한 무공?”
 “확인한 바로는 팔단금과 진기도인법, 그리고 구기전검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검법입니다.”
 허주평은 팔단금을 수련한다는 말에 혀를 찼고, 구기전검을 거론할 때에는 코웃음을 쳤다.
 “크큭, 사문이 어디기에 그딴 걸 수련하는 거지?”
 주열은 허주평과 마찬가지로 웃음을 머금었다.
 “남무문이랍니다.”
 허주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세가의 영역은 강남 전체를 아우른다.
 속문의 숫자는 알려진 곳만 해도 백여 곳을 훌쩍 넘긴다. 그래서 남궁세가는 매 년 속문의 서열을 정하여 백여 곳 정도를 발표한다.
 그들이 가리켜 창궁백가(蒼穹百家)라 부른다.
 하나 기억 어디에도 창궁백가의 목록에서 남무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백가 출신이 아니군.”
 주열은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헤헤, 허 형의 말이 옳습니다. 한데 잠룡비원은 백가 출신이 아니더라도 속문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하찮은 녀석들도 받아들이잖습니까. 그렇게 굴러들어온 놈이겠지요.”
 허주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뒤탈은 없는 거지?”
 “당연합니다.”
 주열의 당찬 확답에 허주평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사부들이 관도 간의 다툼을 모른척한다지만, 자칫 잘못해서 공론화되면 피곤해져. 그 때는 알지?”
 “담천위는 이미 문사부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행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저 혼자 안고 가는 것이 당연하지요.”
 허주평은 그제야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진무회의 일원으로 회에 누를 끼쳐서야 되나.”
 주열은 간사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 제게 다 수가 있습지요.”
 
 ***
 
 이곳은 구화산(九華山)이다.
 남궁세가의 남부에 자리한 불가의 명산.
 하나 불가의 성지도 이제는 옛 말이다. 남궁세가는 잠룡비원을 구화산 아래 건립했고, 이제는 향화객보다 무인들의 출입이 빈번한 곳으로 변화했다.
 오늘 황룡관의 무공 수련은 구화산의 초입에서 진행됐다. 명산의 기운을 받아 호연지기를 기르겠다는 거창한 명분은 지녔으나, 사실상 가르치기 귀찮으니 외부 수련을 핑계로 외유라도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지. 황룡관의 사부들은 자리만 지켜도 월봉이 나온다더니.’
 천위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늘에 앉아 있는 무사부를 노려봤다.
 어찌됐든 수련을 하겠다고 구화산에 오른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무사부는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개인 교습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나쁘지 않아. 계속 그런 식으로 수련해라. 다음.”
 소호검법을 반 각이나 펼친 관도에게 하는 말이 고작해야 저거다.
 다른 황룡관도 한 명이 나섰다.
 그는 방금 전에 평가받은 관도보다 소호검법에 관한 성취가 뛰어났다.
 “음, 나쁘지 않아. 잘하고 있어. 다음.”
 몇 명의 관도가 더 나섰지만, 평가는 대동소이했다.
 이제 더 이상 조언을 받겠다고 나서는 관도가 없다.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는 무사부의 속셈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 없냐?”
 무사부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저 위의 구릉부터 이 아래의 공터를 벗어나지 마라. 걸리면 벌점이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검을 들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관도들을 가르쳐야 할 시간에 개인수련을 할 요량인가 보다.
 황룡관의 사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자질이 부족한 관도들에게 화풀이를 하며 지내는 쪽과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쪽이다.
 무사부는 그 중 후자였다.
 강호 최대, 최고의 수련원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물론 황룡관도들이 모인 황룡관만 그럴 것이다.
 “하하, 반 시진도 안 지났잖아. 이게 웬 횡재냐?”
 “횡재는 무슨! 어차피 마을에 내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까 챙겨온 거나 처리하러 가자.”
 “나도, 나도 가자!”
 황룡관의 관도들은 무사부의 태업을 탓하는 대신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위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한 숨을 내쉬었다.
 ‘쯧쯧, 참 여유로운 놈들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관도들을 선도할 생각은 전무했다.
 이쪽은 이쪽대로 할 일이 산더미였다.
 “천위야. 아까 말했던 곳에 가자!”
 백주룡은 해의 위치를 살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안가.”
 “진짜로 보인다니까! 오늘 같이 날씨가 좋은 날에는 현룡관의 후원까지 보인다고. 졸업한 선배들이 남긴 서책에 분명히 적혀 있었어!”
 천위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현룡관에 뭐 볼 게 있다고 난리야. 수련하는 거 훔쳐보다가 칼침이라도 맞으려고 그러냐?”
 백주룡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여관도들의 숙소! 황룡관에는 없는 여 관도가 득실대는 현룡관 숙소를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허, 또 시작이냐?”
 “이번에는 진짜야. 진짜로 보인다고 했어! 구름이라도 끼기 전에 빨리 가자.”
 백주룡은 떼를 쓰다시피 했지만, 천위는 요지부동이다.
 “미친놈. 너나 가라.”
 “넌 언제고 오늘의 거절을 후회하게 될 것이야!”
 천위는 멀어지는 백주룡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필코 여관도를 훔쳐보겠다는 의지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정상이 아니다.
 “저 놈은 하오문주가 아니라 색마가 될 거야. 분명!”
 천위는 관도들을 피해 산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공터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결에 간간히 술 냄새가 섞여 드는 것이 아닌가. 어쩐지 수련하러 가는 놈들마다 호리병을 하나씩 들고 있더라니. 아마도 관도들의 몸을 수색하면 골패와 춘화집도 무더기로 압수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 누구도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는 않을 게다.
 “이래서야 황룡관이라고 무시당해도 누굴 탓하랴?”
 어차피 잠룡비원만 졸업하면 볼 일 없는 녀석들이다.
 관도들의 미래 따위 알게 뭐람.
 천위는 한적한 공터를 차지하고, 바위에 대자로 누웠다.
 끝없이 펼쳐진 창천(蒼天).
 그 사이로 누군가 흩뿌려놓은 듯한 구름이 흘러간다.
 창공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만은 꿈도 수련도 잊고, 햇살을 마음껏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햇살의 따뜻함으로 인해 전신이 나른하다.
 그래, 이것이 일상이다.
 참으로 좋지 않은가?
 백주룡은 이런 여유를 즐길 사이도 없이 떠나버린 것이다.
 ‘못난 놈.’
 여자나 훔쳐보겠다고 친구를 떠나다니.
 ‘그래도 한 번만 더 물어보지.’
 그 순간 천위는 미간을 찡그리며 옆으로 누웠다.
 왠지 모를 아쉬움은 인간의 선천적인 본능에 불과한 것이다.
 잊어야 한다.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나는 아쉽지 않아!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다독였다.
 한데 오랜만에 외출을 했던 탓일까.
 눈꺼풀이 무겁고, 수마가 쏟아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낮잠을 잔 적이 있던가?
 기억을 되새기다보니 서서히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낮에 꿈을 꾸었다.
 # 4장, 기연(奇緣).
 
 꿈속의 주인공은 여전히 천무대였다.
 하나 날씨는 현실과 달랐다.
 폭우가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바람이 몰아쳤다.
 산이 무너져 내리고, 강이 범람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악천후가 계속됐지만, 천무대는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은 피풍의도 없이 짚단을 엮어 몸을 감쌌다.
 여전히 구질구질한 모습에 이제는 화가 난다.
 한데 그런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구화산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어도 구화산의 산세(山勢)는 여전했다. 천위가 황룡관에서 매일 같이 지켜보던 그 산세와 다름이 없었다.
 ‘그 고생을 하고 도착한 곳이 고작해야 여기야?’
 천무대가 갑자기 속도를 냈다.
 잠시 후 길의 끝에서 천진사라는 절이 나타났다.
 하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절의 내부는 서늘하기만 했다.
 폐사찰이다. 대웅전 옆에 쓰러진 삼 장 길이의 불상을 보니 한때 유명했던 절인가 보다.
 천무대는 그곳을 지나쳐 산을 올랐다.
 아마 그들만이 아는 지름길을 찾아가는 듯했다.
 하나 천무대는 잰걸음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멈춰 섰다.
 길이 끊긴 것이다. 구릉이 허물어지면서 토사가 강처럼 흘렀다. 무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길을 찾으려 했다. 한데 늙은 내가 구릉 아래쪽을 가리키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어찌됐든 내가 하는 일이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언가를 발견했나 보다.
 천무대의 무인들은 토사를 따라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이 멈춰선 곳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절벽이다. 한데 절벽의 맞은편에는 사람이 두어 명 정도 지나갈 수 있는 동굴이 존재했다.
 넝쿨과 잡목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폭우로 인해 산기슭이 쓸려나가면서 모습을 드러낸 듯 보였다.
 한데 안력을 돋우니 동굴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천위는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동굴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꿈속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천위의 육신은 늙은 자신과 연결된 것처럼 그의 주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뭐야? 저기 뭐가 있는 거지?’
 호기심이 강해질수록 빛이 짙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덩달아 천위의 열망 역시 강해졌다.
 알고 싶다.
 그 순간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지고, 암흑으로 물들었다.
 
 날씨가 맑다.
 방금 전까지 몰아치던 비바람과 귓가에 들릴 듯이 번쩍이는 뇌성벽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천위는 한 순간 꿈에서 깨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허공에서 지상을 내려 보는 중이었고, 그 아래에는 수백 명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시간이 흘렀어?’
 이 역시 처음 일어난 변화였다.
 지금껏 천위는 두 개의 꿈을 동시에 꾼 기억이 전무했다.
 하루에 한 가지 꿈.
 십 수 년 간 늘 그러했다.
 한데 오늘 꿈속에서 처음으로 시간이 흐른 것이다.
 천위는 구화산에 모여 있는 무인들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큰돈을 들여야 구할 수 있는 천리경을 쥔 것처럼 시야가 당겨진다.
 무인들은 모두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었다.
 그 뿐 아니라 몇몇은 남궁세가의 직계나 지닐 법한 복장에 보검을 지녔다.
 그들의 시선을 좇으니 폭우가 몰아치던 날 발견한 동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아, 결국 상부에 보고한 건가?’
 강호인에게 기연이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다.
 천혜의 험지 속에 잠들어 있던 동굴이 수백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함정이 있든, 괴물이 있든 들어가야 마땅했다.
 하지만 동굴의 입구는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다.
 그 말은 곧 천무대가 동굴만 확인하고 물러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뭐가 됐든 먼저 먹는 게 임자잖아!’
 천위의 외침이 저들에게 닿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설령 닿았다 한들 이제는 무의미할 뿐이다.
 ‘하아! 답답한 양반들! 그러니 천무대라는 이름표나 달고 저러고 살지!’
 천위가 한탄하는 사이 무인들이 이동했다.
 반대편이 아닌 동굴의 위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잠시 후 기둥 두 개가 절벽 위에 꽂혔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나섰다. 그들은 허리에 굵은 동아줄을 감고 있었고, 줄의 끝은 기둥에 묶여 있었다. 아마도 직접 절벽을 타고 내려갈 생각인가 보다.
 한데 그들 모두 천무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서도 저들의 역할은 뻔했다.
 동굴에 먼저 들어가 안전을 확보하려는 게다.
 천무대의 무인들은 하나둘씩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절벽 위에서 반원을 그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세가의 직계로 보이는 장년인은 그 후에야 절벽으로 다가섰다.
 잠시 후 장년인 앞에 줄사다리가 놓였다.
 ‘아니 처음부터 저걸 썼어야지!’
 하나 천위는 뒤이은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절벽은 비바람과 토사로 쓸려나갔다고 해도 여전히 경사가 높았다. 게다가 협곡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바람의 세기 또한 칼에 베이는 것처럼 서늘하기 그지없다.
 ‘맙소사!’
 하나 줄사다리는 마치 절벽에 고정된 것처럼 흔들릴 줄을 모른다. 시야를 넓혀 보니 천무대의 무인들이 절벽에 붙어서 줄사다리를 고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매달린 천무대의 무인들 중에는 여지없이 늙은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진짜 가지가지하네.’
 남궁세가는 정파, 그 중에서도 명문이다.
 그리고 천무대 역시 엄연히 세가에 속한 타격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대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보급품을 확인했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실제로 목도하니 그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쓰레기 같은 놈들!’
 저러고도 정파 운운할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일어났다.
 반면 장년인은 줄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절벽을 내려갔다. 그리고는 동굴의 입구를 확인하자 폭소를 터트렸다.
 무언가를 본 것이 분명했다.
 장년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굴로 사라졌다.
 보고 싶다. 동굴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늙은 내가 절벽에 매달려 있는 이상 동굴 안을 확인할 방법이 전무했다.
 ‘빌어먹을!’
 천위가 투덜거리는 사이 동굴 안으로 사라졌던 장년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는 다시 한 번 광소를 터트리더니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줄사다리와 넝쿨을 박차며 삽시간에 절벽 위로 올라섰다.
 일견하기에도 내려갈 때와는 천양지차의 모습이다.
 호기심이 더욱 깊어진다.
 ‘도대체 뭐가 있기에?’
 
 천위의 의문이 한도 끝도 없이 깊어질 무렵 시야가 다시 까맣게 물들었다.
 
 ***
 
 천위는 흐느적거리며 인상을 썼다.
 “짜증나.”
 마치 지루하기 그지없던 경극이 마침내 절정에 다다랐는데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속된 말로 큰 일 보고 뒤처리를 안 한 것처럼 찝찝했다.
 지금까지 천위의 의문은 하나였다.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인가?
 한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으로 꿈의 내용 자체에 큰 호기심을 느낀 게다.
 그 안에 뭐가 있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울 정도였다.
 ‘하아, 그러면 무엇 하나?’
 구화산의 산세는 하루 이틀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평탄하지 않았다. 봉우리만 해도 수십 곳이고, 사람이 손이 닿은 곳보다 닿지 않은 곳이 훨씬 많을 터였다.
 ‘다시 잘까?’
 터무니없는 생각이 날 정도로 아쉬웠다.
 하나 혼자 구시렁댄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천위는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잠시 후면 집합시간이다.
 황룡관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꿈은 꿈으로 남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이어질 것이다.
 왜 이런 꿈을 꿔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지닌 채.
 그래야만 했었다.
 하나 천위는 공터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
 무사부의 외침과 호각 소리가 귓가를 스쳐간다.
 그러나 천위는 삐죽이 솟은 숲 너머의 광경을 눈에 담은 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거. 거긴데.”
 눈을 깜빡여 보았다.
 혹시 꿈이라면 깨기를 바라면서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숲 너머에 우뚝 솟은 구화산의 산세는 너무도 익숙했다.
 폭우를 뚫고 천무대가 향한 곳.
 그리고 그들이 마주했던 협곡이 저곳에 있었다.
 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손을 들어 봉우리 중 한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저쯤이던가?’
 
 ***
 
 이제야 길이 보이는 듯하다.
 천위는 집합 장소로 향하면서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현실과 꿈의 접점은 나라는 존재가 전부였다.
 현실의 젊은 나와 꿈속의 늙은 나.
 어차피 삶이 구질구질할 뿐 죽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구경꾼의 입장이 강했다.
 한데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열린 것이다.
 비록 수십 년의 시간차가 존재했지만, 장소는 동일하다.
 ‘혹시나?’하는 작은 의문.
 그렇다면 확인해볼 가치가 충분하지 않겠는가.
 저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더!
 “다 모였냐?”
 무사부는 수련의 강도를 드러내듯 땀을 뻘뻘 흘렸다.
 관도들을 저렇게 챙겨보라는 핀잔이 나올 법도 했지만, 다른 녀석들의 상태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노름을 하다가 돈을 잃었는지 죽을상을 하고 있는 녀석도 보였고, 그 외에는 취기를 숨기지 못하는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천무대나 너네나.’
 천위는 관도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찾고자 하는 녀석을 발견했다.
 “저 자식은 또 왜 저래?”
 백주룡은 그루터기에 앉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삶의 기력을 소진 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촌부처럼 보일 지경이다.
 평소였다면 딴죽이라도 걸었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급한 일이 있지 않은가.
 “너 천진사라고 들어봤냐?”
 천위의 말에 백주룡은 딴소리를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선배, 아니 선배는 개뿔! 그 자식들이 남긴 서책을 믿은 내가 등신이지. 하아…….”
 이번에도 여관도를 훔쳐보지 못했나 보다.
 백주룡은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현룡관! 현룡관이 뭐기에 사람을 이렇게 차별해! 뭔 후원이 그리 큰 거야? 현룡관하고 비교하면 황룡관은 거지 소굴 같더라. 사람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그래, 네 마음은 알았어. 그러니까 천진사가.”
 백주룡이 중언부언하며 다시 한 번 천위의 말을 끊었다.
 “내가 조금만 강했다면! 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달랐을 거야!”
 천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았으니까 그만 해라. 그나저나 천진사가…….”
 백주룡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기괴한 빛을 뿜었다.
 “내가 더 강했다면 볼 수 있었어! 희뿌연 형체가 아니라 그녀들의 얼굴과 몸매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십 장 정도만 더 가까웠다면 성공이었는데…….”
 결국 천위가 참다못해 백주룡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퍽!
 “정신 넋 빠진 자식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백주룡은 눈을 끔뻑이더니 물었다.
 “이거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녀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아, 이 자식의 머릿속에는 여자밖에 없는 건가?
 천위는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게 제일 중요하지. 그런데 너 천진사라고 들어봤냐?”
 백주룡의 눈동자에 다시 한 번 기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한데 녀석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목소리를 낮춰 읊조리는 것이 아닌가.
 “자식, 이제야 너도 좀 사내같구나.”
 “또 무슨 흰소리를 하려는 거야?”
 백주룡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현룡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 바로 천진사야. 입구에서 좌측으로 빠지면 거기가 바로 명당이지! 그런데 거리가 너무 멀어. 그래서 내가 그녀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거잖냐. 그런데 지금 가려는 거냐? 아무리 너라고 해도 잘 안 보일 텐데.”
 천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백주룡의 끝없는 집착에 어이가 없었고, 천진사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저쪽 길로 올라가면 된다는 거지.”
 “백 장 정도만 올라가면 나오지. 그나저나 천진사는 구화산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 중 한 곳이잖아. 너는 도대체 아는 게 뭐냐?”
 천위는 대답 대신 행렬을 벗어나 천진사가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백주룡은 그런 천위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식,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네. 그래, 모르는 건 내가 죄다 알려줄 테니 너라도 꼭 그녀들의 용모와 몸매를 확인하도록 해라.”
 
 ***
 
 산로를 오가는 향화객이 조금씩 늘어난다.
 천위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저 멀리 천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꿈속에서 보았던 절의 전경이 희미하게 겹쳐진다.
 사찰 내부에 우뚝 솟은 불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처음 본 것 같지가 않아.’
 천위는 왠지 모를 경건함에 손을 모았다.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몇 개의 이정표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꿈속의 천무대가 향했던 곳을 찾게 된다.
 “시중평과 염화애라…….”
 천무대가 도착했던 곳이 시중평(示衆平)일 것이고, 동굴을 발견한 절벽이 바로 염화애(拈華厓)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천위는 마른 입술을 축인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발을 내딛었다.
 걸음마다 천무대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갔다.
 꿈이 꿈으로 끝날지, 현실로 이어질지 확인하기 일보직전이다. 이미 필검으로 인해 꿈이 바뀌었을 때부터 의심하지 않았던가.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천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본래 꿈속의 내용은 깨어난 후에도 잊히지 않았다.
 그러니 불과 일각 전에 꿈속에서 보았던 길을 못 찾을 리 만무했다.
 천위는 천무대가 폭우를 헤치고 힘겹게 나아가던 길을 빠르게 내달렸다. 사선보까지 펼치며 나아가니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숲이 한순간에 멀어진다.
 잠시 후 시야가 탁 트이며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하아, 하아.”
 천위는 시중평이라고 적힌 팻말 앞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다. 폭우가 쏟아지고, 벽력이 사방에서 번뜩이는 가운데 지켜보았던 그곳이 분명했다.
 시중평의 끝은 천장단애(千丈斷厓)다.
 절벽과 절벽 사이의 거리는 사오 장 정도였고, 그 안을 희뿌연 안개가 가득 채웠다. 그로 인해 아쉽지만 반대편 절벽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쳇.”
 본래 천무대는 위쪽으로 이동하려다 되돌아오지 않았던가. 분명 절벽을 건널 방법이 존재할 것이다.
 아쉬움도 잠시, 발길을 산 위쪽으로 돌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머뭇거릴 시간도,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십여 장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걸쳐 있는 흔들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거렸지만, 누군가 관리를 하는 듯 견고해보였다. 본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활용하는 다리가 아닐까 싶다.
 천위는 빠르게 다리를 건넜다.
 주변 풍광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벽의 반대편으로 다가서는 순간 작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위는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 또한 기억에 존재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모여 있던 장소가 아닌가.
 모두 꿈속에서 보았던 곳이다.
 세월이 흐르지 않았고, 무인들이 모여 있지 않을 뿐이다.
 이곳은 분명히 천무대가 동굴을 발견한 절벽의 위였다.
 천위는 바짝 마른 입술을 매만지며 거리를 쟀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기둥을 박았던 곳을 어림잡아 가늠해본다.
 “저쪽이고, 여기쯤인가.”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이 현실의 풍경에 덧씌워졌다. 두 개의 기둥이 박혔던 그 중간 부분이 줄사다리를 내렸던 장소일 게다.
 천위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염화애의 끝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안개가 저절로 길이라도 열어주는 것처럼 좌우로 밀려났다.
 그렇게 염화애의 끝에 섰다.
 꿈속에서는 산기슭이 쓸려나갔고, 폭우로 인해 토사가 강을 이룰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염화애는 그야말로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다.
 안개는 옅어졌지만, 칼바람은 여전하다.
 쉬이이이이이잉-
 마치 검에 베인 것처럼 전신이 따끔거린다.
 천위가 절벽 아래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거대한 이무기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 새카만 골짜기는 심신을 옥죄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하다.
 어서 오라고. 빨리 내려오라고.
 무저갱과도 같은 단애는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흐릿해진 안개도 이제는 천위를 향해 손짓하는 것처럼 너울거린다.
 천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십 수 년 간 남무팔단금을 수련하며 평정심을 갈고 닦지 않았던가.
 이제 천위의 눈빛은 또렷했다.
 귓가의 속삭임은 바람을 타고 사라졌고, 흐느적거리던 안개 또한 완연히 흩어진 후였다.
 이제 마음 속에 남은 의지는 단 하나.
 매일 밤 꿈을 꾸는 가운데 어느덧 자리 잡은 가설.
 그것에 대한 확인이었다.
 ‘과연 꿈은 미래를 보여주는가?’
 스스로 질문을 했으니, 스스로 답을 찾을 차례였다.
 
 나는 지금 절벽을 내려갈 것이다!
 
 ***
 
 천위는 시중평에 가득한 넝쿨을 모았다.
 최대한 깊게 뿌리가 박혔고, 길게 늘어진 것만 모아서 몇 번이나 허리를 감쌌다.
 길이는 충분하다.
 이미 꿈속에서 동굴의 위치를 확인한 상태였다.
 ‘여기서 칠 장 정도.’
 천위는 묶고 있던 결건(結巾)을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절벽에서 동굴의 길이만큼 되는 곳에 묶었다. 이 정도면 절벽을 내려가는 중에도 칠 장의 길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게다.
 천위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염화애로 향했다.
 솨아아아-
 결건을 푼 탓에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개는 희미했고, 바람도 조금은 잦아들었다.
 때가 된 듯 싶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마냥 편하게 웃으며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에 하나 동굴이 없을 경우도 감안해야 했다. 수십 년이 흘러 비바람에 넝쿨과 잡목이 쓸려나간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던 동굴이 아닌가.
 천위는 다시 한 번 허리에 감싼 넝쿨을 확인했다.
 그 후에야 절벽가에 서서 허리에 묶은 넝쿨을 쥐었고, 다른 손으로 엉켜 있는 잡목을 움켜쥐었다.
 몸의 절반이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그 순간 무저갱처럼 입을 벌리고 있던 협곡의 깊은 곳에서 폐부를 시리게 만드는 냉기가 솟구쳤다.
 솨아아아아아아-
 하나 이미 내친걸음이 아닌가.
 천위는 있는 힘껏 넝쿨에 몸을 밀착시켰다.
 오랜 세월 이뤄진 자연의 조화가 여기서 발휘됐다. 넝쿨은 아예 절벽과 한 몸처럼 단단히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강풍이 연이어 전신을 두들겼다.
 그러나 천위의 호흡은 조금씩 잦아들었고, 이내 남무팔단금을 펼칠 때와 같이 안정됐다.
 절벽 아래로 한 걸음씩 내려갈 때마다 꿈이 떠올랐다.
 천무대의 구질구질한 복색은 물론이고, 남궁세가의 무인을 위해 절벽에 매달려 있던 모습들이 이어졌다.
 싫다.
 그 어떤 업보가 있다한들 저리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천위는 망설임 없이 절벽을 내려갔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내려가면 도착이다.
 하지만 거미줄처럼 엉킨 넝쿨과 곳곳에 튀어나온 잡목으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그래,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 아닌가.
 ‘과연?’
 동굴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약 동굴이 없다면 뒷일은 간단했다. 그냥 다시 올라가서 잊으면 되는 것이다.
 꿈은 꿈으로 끝난다.
 반면 동굴이 있다면 꿈은 현실이 된다. 늙어서 천무대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남궁세가의 무인이 그랬듯 동굴의 내용물을 취한다.
 그렇다면 반드시 변할 것이다.
 필검과 약속을 한 것만으로도 변했던 꿈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어!’
 그 순간 절벽의 밖으로 결건이 흩날렸다.
 목적했던 곳에 도착이다.
 천위는 거친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흥분은 금물이야. 동굴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낼 때까지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투둑!
 절벽에 박혀 있는 넝쿨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허리와 어깨에 감았다. 허벅지에도 묶을 수 있을 만큼 묶어서 안전을 도모했다.
 “후우…….”
 몸을 고정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천위는 자유로운 양 손으로 절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분명 장정 두엇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존재한다면 반듯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천위의 표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워졌다.
 현재 계절은 여름이지만, 이곳은 북풍의 한설과도 같은 칼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손이 부르트도록 절벽의 면을 매만졌고, 넝쿨과 잡목을 뜯어냈다.
 조금씩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하지만 동굴의 입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닌가? 아니란 말인가?’
 텅-
 그 순간 천위의 주먹 끝에 걸린 벽면에서 반발력이 일어났다. 바위를 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다.
 ‘뭔가 있어.’
 천위는 몸을 고정한 넝쿨을 다시 한 번 살핀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남무팔단금을 수련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텅! 텅!
 하나 몇 번을 두들겨도 흙먼지만 날릴 뿐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천위는 협곡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빛을 등불 삼아 유심히 절벽을 살폈다.
 “아!”
 동굴의 입구가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넝쿨과 잡목의 뿌리가 흙과 함께 엉켜들면서 천혜의 흙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곳이 주먹질로 무너질 리 만무했다.
 천위는 벽을 부수는 대신 손끝을 찔러 넣었다.
 뿌리를 뜯어내고, 흙벽을 파헤쳤다.
 그러던 중 마침내 천위의 손이 벽 속으로 쑥하고 들어갔다.
 “있어!”
 흥분되는 마음을 억지로 잠재웠다.
 아직 절벽에 매달린 상태였고, 동굴 안에 있는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진정하자.
 아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어.
 천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작은 구멍을 파헤쳤다.
 잠시 후 주먹을 넣었던 구멍에 머리를 넣을 수 있었고, 이내 장정 한 명이 기어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조심스럽게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 몸에 두르고 있던 넝쿨을 풀러 동굴 위쪽의 잡목에 묶었다.
 동굴에서 뭘 얻든 돌아갈 방법 또한 잊지 않은 게다.
 쉬이이이잉-
 잠시 후 천위는 동굴 안에 두 발을 디디고 설 수 있었다. 꿈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장정 두엇은 족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동굴이다.
 퍽! 퍽! 퍽!
 주먹으로 흙벽을 두들겼고, 발로 걷어찼다.
 미약한 내공을 모조리 담아 쉴 새 없이 두들겼다.
 구멍은 점점 커졌고,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콰쾅!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에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흙벽의 나머지 부분이 터져나갔다.
 쉬이이이잉-
 동시에 휘황찬란한 빛이 동굴 내부로 스며들었다.
 천위는 동굴의 입구에 서서 햇빛을 마주했다.
 이제 돌아서면 동굴의 내부가 보일 것이다.
 남궁세가의 직계로 보이는 무인이 몇 번이나 광소를 터트리며 얻었던 그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다.
 “하아…….”
 천위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제아무리 천위라고 해도 이쯤 되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싸움터를 전전했고, 도인법을 평생 수련했어도 지금 이순간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하게 마음먹었던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강렬한 호기심과 기대감이다
 천위가 돌아섰다.
 그 순간 동굴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거꾸로 매달린 종유석, 그리고 이끼가 가득한 벽과 바닥은 평범한 동굴과 다를 바가 없다.
 한데 동굴의 끝이 햇빛을 받더니 희뿌옇게 번들거리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동굴의 끝에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만큼 작고, 얕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한데 연못의 물은 소젖처럼 희고 묽었다.
 ‘동굴이 석회로 되어 있는 건가?’
 천위는 연못물에 대한 상념을 이어가지 못했다.
 동굴의 가장 깊은 곳, 연못의 끝 부분.
 그곳에 일견하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그것이 있었다.
 두 개의 작은 바위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그것.
 “꽃(華)?”
 이파리 하나 없이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그것은 분명 한 송이의 꽃이었다.
 연분홍의 꽃잎이 오밀조밀하게 겹쳐 있었고, 꽃잎의 뾰족한 끝은 피라도 머금은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연꽃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연꽃일 리가 없다.
 본래 연꽃보다 훨씬 작았고, 애초에 이런 곳에 연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천위는 그래서 더욱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저 꽃이다.
 이 동굴을 존재하게 만드는 원인이자, 결실.
 천위는 연꽃에 이끌리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데 그 순간 동굴 안으로 일진광풍이 몰아쳤다.
 쉬이이이이이이익-
 흰 연못의 표면에 파문이 일었고, 가냘픈 꽃잎이 추위를 타는 듯 파르르 떨었다.
 떨어진다!
 천위는 본능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바닥을 박찼다. 그 순간 놀랍게도 꽃잎이 꺾이더니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안 돼!
 단전의 내공을 빨래 비틀 듯이 쥐어짰다.
 한 호흡에 거리가 좁혀졌다.
 녹은 꽃잎은 붉은 방울이 되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먹어야 해!’
 연꽃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한 점의 의혹도 없었다.
 십 수 년 간 꿈을 꾸며 알게 모르게 느꼈던 기시감이 본능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천위는 입을 오므린 채 과실을 먹는 것처럼 빨아들였다.
 지잉-
 방울은 혀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혀가 얼얼하면서도 후끈했다.
 그것에 의문을 품을 겨를도 없이 꽃잎은 하나둘씩 방울져 흘러내린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흡!”
 천위는 만족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인상을 썼다.
 마치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후끈한 양기(陽氣)가 아랫배를 관통한 것이다. 양기는 단전을 이리저리 건드리더니 만족하지 못한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감히 네가 나를 품으려 하는가?
 양기가 그렇게 노호성을 내지르는 것만 같았다.
 붉은 방울에 담긴 양기가 사지백해로 흩어졌다.
 쩡-
 머리끝과 사지의 끝에 다다른 양기가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분노를 표출했다.
 “크흑!”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서든 양기를 단전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조금도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쾅! 쾅! 쾅!
 양기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자, 더욱 노도와 같이 혈맥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공격! 파괴! 점령!
 혈도를 두들기고 깼으며 짓눌러 버린다.
 그러니 혈맥 또한 무사할 리가 없다.
 천위의 얼굴은 붉게 부풀어 올랐고, 이내 전신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육신이 터져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해. 평정심을 유지해야 해.
 항상 인자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던 사부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간다.
 이겨 내야 해! 사부 얼굴도 못 보고 죽을 수는 없다!
 “끄으으.”
 천위는 어느새 뻣뻣해진 사지를 억지로 움직였다.
 양 손을 펴고 팔을 조금씩 들어 하늘을 향하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땅을 가리켰다.
 남무팔단금을 펼쳐 청명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한 동작을 펼치는데 걸린 시간이 영겁과도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조금이나마 남무팔단금의 자세가 완성되는 순간 숨이 트이는 듯했다.
 천위는 맑은 공기를 빨아들였으나, 몸속의 양기는 여전히 격렬한 반응을 이어갔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손가락 끝을 까딱거리는 데에도 유수와 같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무팔단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데 남무팔단금의 두 번 째 자세인 사조식(射雕式)을 펼치기 위해 활을 쏘는 것처럼 자세를 취하는 순간 눈앞에 기사가 펼쳐졌다.
 솨아아아-
 육신에 갇혀 있던 양기가 손끝을 타고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내력의 발출을 할 수 있었던가?’
 사조식을 펼치는 와중에도 허공에는 몇 개의 붉은 줄이 그려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초식을 완성할수록 열기(熱氣) 또한 잦아드는 것이 아닌가.
 천위는 환상을 보는 듯한 착각 속에서도 남무팔단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마지막 초식 또한 마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어느덧 동굴 안은 천위가 발산한 붉은 기운으로 가득하다. 너울거리는 붉은 기운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웠다.
 반면 천위의 몸은 모든 열기를 토해내고, 원래대로 돌아간 후였다.
 “후우…….”
 한데 천위가 남무팔단금을 끝내고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순간 다시 한 번 기사가 일어났다.
 솨아아아아아아-
 동굴에 퍼져 있던 붉은 기운이 전신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적을 공격하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모공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악!”
 이번만은 천위도 비명을 참지 못했다.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온 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가죽 포대처럼 전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정신력으로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결국 천위는 한 움큼의 핏물을 토해냈고, 뻣뻣해진 몸은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더욱 부풀어 오른다.
 놀랍게도 염화애의 동굴은 아직도 모든 신비를 풀어낸 것이 아니었나 보다.
 연못의 희고 묽은 물이 조금씩 빛을 잃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그랬듯 연못의 기운까지 스며든 것이다.
 잠시 후 천위를 중심으로 물이 맑아지더니 이내 연못 전체가 정화된 것처럼 깨끗하게 변했다.
 쉬이이이이이이잉-
 한 줄기 바람은 동굴 속의 상황이 궁금했는지 강하게 휘몰아치고 사라졌다. 그리고 바람이 떠난 자리에 홀로 누워 있는 천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평온했다.
 
 # 5장, 염화시중(拈華示衆).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꿈은 미래를 보여준다.
 동굴을 찾았고, 연꽃을 먹었으며 붉은 기운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믿지 않을 수가 없네.”
 그리고 꿈은 현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무대의 기억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위는 지금껏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무사히 잠룡비원을 졸업하고 창천무고에서 구기전검의 진짜 검법의 이름을 찾을 것이라 믿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부의 숙원을 이뤄준 훌륭한 제자로 남지 않겠는가.
 ‘그런데 고작 천무대라고?’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두렵기까지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걸까?
 천위는 팔을 들고 한참동안 자신의 손바닥을 응시했다.
 몇 번이나 허공을 휘저었지만, 걸리는 것이 없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아랫배에서 시작된 작은 열기가 혈맥을 질주하더니 주먹을 휘감고 흩어진다.
 ‘이게 생겼지.’
 잠룡비원의 지루했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오직 천위에게만 허락된 변화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에야 불안했던 마음이 슬그머니 사그라졌다.
 “이제 가자!”
 천위는 기절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아무래도 꿈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했기 때문인 듯했다. 지금껏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꿈을 꿨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 또한 놀랍기 그지없었다.
 한데 연꽃이 있던 자리를 확인한 후에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맑아졌잖아?”
 천위는 투명한 연못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이내 하나의 가설이 뇌리를 스쳐갔다.
 양(陽)이 있는 곳에 음(陰)이 있고, 독(毒)이 있는 곳에 해약(解藥)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기연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던 게다.
 그리고 천위는 그 둘을 모두 얻었다.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연못을 벗어났다.
 그리고 한달음에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아…….”
 동굴 밖은 여전히 훤한 대낮이었다.
 따스한 햇볕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한 번 아랫배가 후끈 달아올랐다.
 “제대로 한 번 펼쳐볼까?”
 천위는 동굴 밖의 탁 트인 전경을 마주한 채 내공을 뽑아 올렸다.
 이미 혼절하기 전에도 양기를 발출하여 동굴을 가득 채우지 않았던가. 완숙한 일류의 경지에 도달해야 가능한 것이 바로 내공의 발출이다.
 한데 천위는 그것을 황망한 와중에도 성공시켰다.
 정신을 놓기 직전에 가능했으니, 심신에 활력이 넘치는 지금이라면 더욱 능숙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되기만 하면 구기전검도 펼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되면 잠룡비원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될 텐데…….’
 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팔단금의 자세를 취했다.
 “후우!”
 다시 한 번 호흡을 고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곧게 내뻗었다.
 단전에서 흘러나온 양기가 혈맥을 타고 질주한다.
 후끈한 열기 탓에 내력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팔꿈치의 곡지혈을 지나 주먹의 노궁혈까지 이르렀다.
 동시에 천위의 권격(拳擊)이 공간을 두들겼다.
 팡-
 권풍이 일어나며 전방으로 꽂혀들었다.
 지금껏 내질렀던 그 어떤 일격보다 강렬하고, 빨랐다.
 하지만 천위의 표정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발출이 되지 않아.’
 천위는 몇 번이나 주먹을 내질렀다. 그 후에는 팔꿈치로 공간을 찍고, 어깨로 밀쳤다. 무릎으로 올려쳤으며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매 일격마다 잡목이 터져나갔고, 넝쿨이 뜯겨나갔다.
 천위는 자신의 공세가 예전보다 몇 배는 빨라졌고, 강해졌음을 확인했다. 지금이라면 구기전검의 절초를 세 번이 아닌 여섯 번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데 그게 전부였다.
 마음먹을 때마다 끌어낼 수 있는 양기(陽氣)는 몸속을 휘돌 뿐이다. 주먹의 끝에 다다르면 단전으로 돌아갔고, 발의 끝에 다다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보물 상자를 얻고도, 열지 못하는 형국이 아닌가.
 결국 천위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애초부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었어. 연못이 아니었다면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러니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얻으려고 애쓰지는 말자.’
 후우욱-
 두 주먹을 불끈 쥐자, 단전에서 일어난 양기가 전마(戰馬)처럼 질주하여 휘감아 버린다. 비록 한 순간에 단전으로 돌아가는 매정한 녀석들이지만, 이 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강호에는 천지였다.
 천위는 아쉬움을 털어내고 동굴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가 허리에 묶고 온 넝쿨은 여전히 매달려 있었고, 저 위에는 길이를 표시했던 결건도 묶여 있었다.
 “좋은 일만 가득했으니 이제는 집에 가자!”
 천위는 청명한 일갈을 내지르며 넝쿨에 몸을 의지했다.
 한데 협곡 사이로 들이치는 바람은 춘풍처럼 미지근한 것이 아닌가.
 아마도 거대한 양기를 품은 탓에 생긴 효능인가 보다.
 “좋은 거 하나 더 발견!”
 장난처럼 읊조리며 절벽을 올랐다.
 내려갈 때에는 바람에 휘둘리고, 높이에 두려웠다.
 그러나 절벽을 오르는 천위의 모습은 마치 벽호공(壁虎功)이라도 익힌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기연으로 인해 약력은 물론이고, 체력 자체가 탄탄해 것이다.
 천위는 아예 넝쿨과 잡목을 번갈아 쥐며 절벽을 올랐다.
 솨아아아아아아아-
 염화애 위에 올라서는 순간 내공을 거뒀다. 그러자 미지근했던 바람이 한순간에 서늘하게 변하며 사방에서 들이쳤다.
 천위는 땀도 식힐 겸 느긋하게 염화애와 시중평의 전경을 둘러봤다. 구화산의 산세가 워낙 준험하다보니 이곳의 풍광은 크게 도드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불현 듯 지명(地名)을 떠올리다보니 불경의 고사가 뇌리를 스쳐갔다.
 “염화애와 시중평을 합치면 염화시중(拈華示衆)이잖아. 그리고 나는 동굴에서 연꽃으로 기연을 얻었고…….”
 불경의 고사에서 이르길 석가가 어느 날 연꽃을 쥐고 말없이 비틀자, 모든 제자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단다. 한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으므로 석가는 그에게 불법을 전했다고 하더라.
 천위는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것을 그저 단순한 기연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꿈을 매개체로 하늘이 준 기연이다.
 경건함이 짙어질수록 기연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확신 또한 커져갔다.
 “그럴 리가 없지.”
 어느덧 태양은 산기슭을 타고 조금씩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마치 오늘 할 일을 끝마친 사람처럼 당당하게 서산마루로 사라진다.
 천위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우욱-
 단전에서 휘몰아친 양기가 주먹을 휘감고 사라진다.
 하나 이번에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석가의 마음을 받았던 가섭존자처럼.
 ‘잘 받았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주었으니 어떤 다짐도 하지 않겠다.
 애써 감사를 표하거나, 제를 올리지도 않을 것이다.
 뜻은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던가.
 꿈, 숙원, 그리고 운명.
 앞으로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길 위에 선 이상 끝까지 가보련다.
 천위는 염화애를 등지고 시중평을 건넜다.
 해가 지기 전에 잠룡비원까지 가려면 걸음을 바삐 놀려야 할 것이다.
 한데 불현 듯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그런데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지?”
 
 ***
 
 천위는 잠룡비원에 돌아오자마자 백주룡을 찾을 생각이었다. 일단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인해야 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있는지도 파악해야 했다.
 한데 백주룡은 황룡관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야!”
 그는 천위를 확인하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서 마주한 백주룡의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했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일 있냐?”
 백주룡은 아랫입술을 베어 물더니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천위를 노려봤다.
 “무슨 일 있냐고? 아우! 이 자식아. 너야 말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틀 동안 돌아오지 않은 거야!”
 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틀?”
 “그래! 이틀 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모른다.
 백주룡의 말처럼 이틀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위는 백주룡의 표정을 마주한 채로 농담을 던지기 어려웠다. 녀석은 진심으로 화를 냈고,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천위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개를 으쓱거렸다.
 “미안하다. 이렇게 오래 걸릴지는 몰랐네.”
 백주룡도 천위의 사과가 낯설었나 보다.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천위의 어깨를 툭 밀쳤다.
 “멀쩡한 것 같으니까 됐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백주룡이 먼저 버름함을 참지 못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미안한건 마찬가지야. 이틀이나 돌아오지 않았는데 찾아 나서지 않았잖아. 말로만 친구라고 한 것 같아서 부끄럽구먼.”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한 번 정적이 감돌았고, 버름함은 배가 됐다.
 “그런데 봤냐?”
 백주룡의 말에 천위의 편안하던 표정이 산산조각 났다.
 “미친놈.”
 두 사람은 황룡관을 가로질렀고, 어느덧 처소에까지 이르렀다. 짧게 농을 주고받았지만, 이대로 숙소에 들어가면 더 어색할 것이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발길은 후원으로 향했고, 두 사람은 바위를 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이틀이나 돌아오지 않았으니 뒷말이 나오겠는 걸?”
 천위가 슬그머니 입을 뗐다.
 한데 백주룡은 씁쓸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뒷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까.”
 잠룡비원에서 황룡관도를 대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화풀이를 하고, 무시 하던 저들의 언행.
 모태붕의 악담처럼 남궁세가는 황룡관의 존재 이유를 칼받이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관도 한 명이 사라진 것은 큰 문제가 아닐 터였다.
 “하기는 황룡관에서만 벌써 몇 명이나 도망쳤지?”
 잠룡비원에 있는 관도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후기지수들이 아니던가. 최소한 자신의 동네에서는 독보적이었기에 입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후기지수라고 해도 뒷배와 자질이 공평한 것은 아니었다.
 뒷배와 자질을 통해 관도들의 등급을 나눴고, 차별은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결국 몇몇 관도가 견디지 못하고 야반도주를 했다.
 각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겠지만, 잠룡비원의 그 누구도 그들을 걱정하거나, 찾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만 여덟 명이지. 사부들은 너를 아홉 번째라고 생각하더라. 수색대를 꾸리기는커녕 내 외출조차 허락하지 않았어.”
 천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부들의 행태보다 백주룡의 결심이 더욱 놀라웠다.
 ‘설마 황룡관 입구에서 계속 나를 기다린 건가?’
 어째서 녀석은 저렇게까지 했던 것일까?
 반대의 경우가 일어나면 나도 그랬을까?
 부지불식간에 뇌리를 스치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 작은 의문은 좀 더 원초적인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천위는 백주룡을 향해 물었다.
 “야! 왜 그랬냐?”
 백주룡은 감정이 잦아들었는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가?”
 대놓고 물으려니 생각보다 쑥스럽다.
 “내가 애도 아니고, 뭐 그리 걱정을 하고 그래.”
 백주룡은 못 볼꼴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위는 그 모습에 후회 아닌 후회를 해야 했다.
 ‘하아, 내가 미쳤구나. 왜 저런 말을 했지?’
 한데 천위의 표정을 살피던 백주룡이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친구잖아.”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성어가 절로 떠올랐다.
 그래, 친구였지.
 어찌됐든 이곳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준 녀석이 아닌가.
 천위는 백주룡의 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백주룡은 스스로 생각해도 낯 뜨거운 대답이었나 보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더니 말을 보탰다.
 “네가 잠룡비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만큼 나도 그리 이곳을 좋아하지는 않아. 그런데 어쨌든 그 중에서 처음으로 시선이 가던 놈이었으니까.”
 ‘후훗,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녀석이었구나.’
 천위도 편한 마음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나도 그랬어. 여기 놈들은 죄다 썩은 생선 눈깔을 해가지고 우르르 몰려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크큭, 손을 하도 비벼 대서 손바닥이 매끈할 거다.”
 “하하하! 네 혀만큼이나 매끄러울 걸?”
 천위가 폭소를 터트리며 던진 농에 백주룡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혀가 매끄러운 이유는 언젠가 만날 반려를 위함이지. 항상 갈고 닦아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생각이다.”
 태연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천위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내저었다.
 “하아, 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쓰레기 같아.”
 백주룡은 히죽 웃으며 천위를 가리켰다.
 “그리고 네 친구지. 크크큭!”
 천위는 백주룡의 너스레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아, 네깟 놈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았다면 차라리 돌아오지 말 걸 그랬어.”
 한데 백주룡은 천위의 말을 듣고 뒤늦게 생각난 것이 있었나 보다.
 “아! 그런데 나 말고도 너를 걱정하던 녀석이 있었어.”
 천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주룡을 제외하면 황룡관 내에서 인맥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자신을 기다리기는커녕 사라진 것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사실 무사부한테 네가 없는 걸 알린 건 나보다 그 녀석이 먼저였어. 소용없다는 걸 알고는 나한테 와서 네 행적을 묻더라고.
 “그게 누군데?”
 백주룡은 입을 열려다 손을 들어 후원의 입구를 가리켰다.
 “쟤.”
 천위는 백주룡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곳에는 일전에 시비를 걸었던 진소백이 헐레벌떡 뛰어온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
 천위는 진소백을 가리키며 탄성을 흘렸다.
 진소백 역시 천위를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왔구나!”
 하나 뒤이은 천위의 말에는 얼굴을 붉혀야 했다.
 “이상한 책을 들고 다니던 놈이다.”
 “아니야!”
 
 ***
 
 천위와 백주룡은 간신히 민망함을 벗어난 상태였다.
 한데 거기에 진소백이 합류함으로서 다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연에 대해 생각도 해야 하고, 수련도 해야 하는데 이 자식들은 왜 여기 둘러 앉아 있는 거야?’
 ‘황룡관 입구에 너무 오래 서있었나? 졸리네.’
 천위와 백주룡이 제각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진소백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진소백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득하다.
 천위는 난감함에 입을 닫았고, 백주룡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진소백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도망쳤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어. 모두가 도망치더라도 너는 끝까지 남아서 졸업할 거라고 믿었거든.”
 그리고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천위가 돌아왔을 때 백주룡이 지었던 표정과 흡사했다.
 ‘어째서?’
 진소백과의 접점이라고 해봤자 시비가 붙었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 후에는 서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으니 그걸 인연이라고 포장하기에는 무리가 분명했다.
 “너 얘 싫어하자 않았냐?”
 백주룡이 천위의 호기심을 대신해서 물었다.
 하나 진소백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호불호(好不好)를 논할 정도는 아니야. 굳이 표현을 해야 한다면 눈여겨본다고 해야 할까? 어찌됐든 시선을 끌 만큼 특이하잖아.”
 천위와 백주룡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우리가 서로 관심을 가졌던 거랑 같아?’
 진소백은 남자 셋이 둘러앉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천위와 백주룡이 대꾸를 하지 않음에도 말문이 트인 사람처럼 술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알기에 황룡관에 대한 대우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래. 비록 등급은 나눴지만, 황룡관도라고 해도 어느 정도 자질은 충분했으니까. 실제로 황룡관도로 시작해서 지룡관도로 졸업한 선배들도 있었데. 그 때의 잠룡비원은 관도들에게 많은 지원을 했지.”
 진소백의 출신지인 호남진가는 남궁세가의 속문 중에서도 중하위권에 불과했다. 하나 속문의 역사를 따진다면 스물 안짝에 이를 정도로 전통이 있는 무가였다.
 그래서 따로 알려주지 않는 잠룡비원의 역사에 관해서도 술술 풀어낼 수 있었다.
 천위는 조금씩 진소백의 말을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진소백은 스스로가 아닌 황룡관 자체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저 악화된 쪽은 잠룡비원이 아니라 관도였어. 어차피 수련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러나 황룡관도는 수련보다 인맥을 늘리고, 정치질을 배우기 시작했어. 같은 황룡 관도를 짓밟고, 지룡관도나 천룡관도에게 잘 보이려고 별의 별짓을 다 했데. 함께 성장하거나, 선의의 호적수가 되는 대신 적으로 대했던 거지. 잠룡비원은 그런 황룡관을 그대로 내버려줬어.”
 백주룡은 진소백이 잠룡비원의 내력을 풀어내는 게 마뜩찮았나 보다.
 정보력에 대한 질투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뻔하지. 어차피 능력이 뛰어난 관도는 알아서 크고 있잖아. 그러니 황룡관에 대한 지원을 잘난 놈들에게 밀어주자. 그러면 더 잘 클 테니까. 그게 잠룡비원을 위해서도, 남궁세가를 위해서도 이득이잖아.”
 천위는 백주룡이 말을 끝내고 자신을 쳐다보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칭찬해달라는 거냐?’
 한데 시선을 돌리니 진소백도 백주룡과 비슷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어미 새를 올려다보며 먹이를 바라고 있는 새끼들 같았다.
 ‘넌 추임새라도 넣어 달라는 거냐?’
 천위가 더듬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래서?”
 그러자 진소백이 눈을 빛내더니 말을 이어갔다.
 “황룡관의 생활은 듣던 것과 다르지 않았어. 그래도 황룡관이 엉망진창이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 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야.”
 천위는 자신을 가리키는 진소백을 생각에 잠겼다.
 ‘백주룡만큼이나 말이 많은 녀석이었던 건가? 아니면 지금껏 대화할 사람이 없었던 건가?’
 아무래도 후자가 유력해 보였다.
 진소백이 누군가와 어울리거나 대화하는 모습을 본 는 것을 본 기억이 전무했다. 외톨이였던 녀석에게 처음으로 대화 상대가 생긴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그냥 소문처럼 흘려들었어. 그런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모두가 아첨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한 사람만은 하루 종일 수련에 매진하다니. 그것이야말로 정파의 기상을 드높이는 후기지수가 보여야할 자세가 아니었을까?”
 천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정파라서 한 일은 아닌데?”
 백주룡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냥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한 일이잖아?”
 하지만 진소백의 눈빛은 강한 열망을 드러냈고, 그의 입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말을 토해냈다.
 “강북에 무림맹이 있고, 강남에 남궁세가가 있다! 강호의 현재 상황을 대변하는 말이지. 그야말로 정파의 세상이야. 하지만 정파가 득세했을 뿐 협의지심이나 영웅의 기상은 찾아볼 길이 없어졌어. 정파의 명숙들은 정치를 했고, 후기지수들은 강해져서 이름을 알리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 이런 강호를 과연 정파의 세상! 협객이 살아 숨 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소백의 강렬한 눈빛이 천위와 백주룡에게 꽂혀들었다. 두 사람은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채 대꾸했다.
 “뭐 그건 그렇지.”
 “그,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오랜만에 일치한 상태였다.
 ‘뭐야? 저 새끼, 좀 이상해. 도망칠까?’
 ‘왠지 귀찮은 일이 더 늘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진소백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파는 정파다워야 하고, 무인이라면 당연히 의협심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 정도문파와 정파인은 양민을 보호하고, 악인을 처단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리고 옳고, 선한 것을 널리 알려 정파의 기상을 드높여야 마땅한 거야. 그래서 천위, 네게 실망했었어.”
 천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백주룡이 귀엣말로 한 가지 정보를 전해주었다.
 “예전에 필검 장취우의 초청을 거절했던 거.”
 그게 왜? 진소백이 필검의 지인이었나?
 천위가 의아해하는 사이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필검이라면 후기지수 중에서도 의기가 높기로 유명한 사람이야. 나 역시 그 사람과 교분을 나누고 싶었어. 하지만 그가 선택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지. 속으로 축하했어. 매일 같이 수련에 힘쓰던 너라면 선택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어.”
 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런 좋은 기회를 내가 뻥 차버렸으니 화가 났던 거로군?”
 진소백은 빙긋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 나도 아직 정파의 협객으로서 수양이 부족했던 거지. 네게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도 모른 채 화만 냈으니까. 그 날 일은 내가 다시 한 번 사과할게.”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인다.
 천위는 이미 기억에서 지웠을 만큼 하찮은 일이었으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그래. 괜찮아. 그런데 협객, 의협, 정파를 말끝마다 달고 사는 이유가 뭐야?”
 진소백은 눈을 끔뻑였다.
 “정파인이 협의지심을 논하는 게 왜 이상해?”
 녀석의 눈빛을 보아하니 다시 한 번 강호에서 정파의 역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기세였다.
 천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이상하지 않아.”
 진소백은 히죽 웃더니 소매 속에서 몇 권의 서책을 꺼냈다.
 “너라면 알아 줄 알았어. 이건 선물이다.”
 천위는 서책을 받아 표제를 살피고는 눈을 끔뻑였다.
 검협신녀전(劍俠神女傳).
 대 십팔동주(對 十八洞主).
 검후담록(劍后談錄).
 “이게 다 뭐냐?”
 진소백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맨 위의 책은 검후께서 젊은 날 강호행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지. 두번 째는 사천의 악마들이라 불렸던 십팔동주를 상대하셨던 이야기. 그리고 검후담록은 정파인이 반드시 지녀야 할 협의지심에 대해 말씀하셨던 내용들을 책으로 엮은 거다.”
 검후(劍后)라면 정마대전 당시 정파를 대표하던 검호 중 한 명이다. 여중제일인을 넘어 간간히 천하제일로도 손꼽히던 절대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정마대전을 끝으로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제는 늙은 호사가들이 옛 일을 회상할 때에나 가끔 흘러나오는 별호인 것이다.
 “다 검후에 관한 책이네. 엄청 좋아하나 보다?”
 진소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내가 가장 존경하고, 애모하는 삶의 등불이시지. 지금은 서책으로나마 그분을 추억하고 있지만, 언제고 그 분께 당당하고, 멋진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협의지심을 지키며 사는 후학이 이렇게 존재한다고 말이야!”
 천위는 반쯤 정신을 놓았다.
 ‘검후의 정파이상론에 완전히 빠졌군. 그러니 정파랑 협객을 입에 달고 살지.’
 그 사이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아! 책은 아직도 많으니까 다 보면 언제든 말해. 너라면 기꺼이 빌려주마.”
 그 순간 백주룡이 천위를 향해 슬그머니 귀엣말을 했다.
 “독서 취향이 편향됐다고 했잖아. 아줌마, 아니 이제는 할머니나 다름없는 사람을 좋아한다니. 쟤 처소에 검후 초상화만 해도 열 장이 넘는단다. 쯧쯧, 저것도 제정신은 아닌 게지.”
 천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무거운 숨을 토해내며 빙긋 웃었다.
 검후는 존경할만한 존재가 맞다. 진소백만큼은 아닐지라도 정파인이라면 누구나 그리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사부를 생각하는 것과 진소백이 검후를 생각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그러자 녀석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한 꺼풀 벗겨졌다.
 “좋아. 지금은 안 되지만, 시간을 내서 꼭 보마.”
 진소백은 천위가 책을 챙기자, 웃음으로 화답했다.
 “재밌고, 유익한 시간이 될 거다.”
 한데 백주룡이 껄끄러운 표정으로 나직이 한 마디를 읊조렸다.
 “아……. 뭔가 이렇게 훈훈하게 엮이니까 기분이 그러네. 낯 뜨겁기도 하고, 근질거리기도 하고 말이야.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천위는 빙긋 웃으며 결론 아닌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냥 친구끼리 이러고 노는 거지 뭐.”
 한 명은 수련광이고, 한 명은 정보광이다. 거기에 검후광이 추가된 것뿐이다. 처음부터 이상한 조합이었으니 한 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니라.
 
 우정이 깊어지는 것은 바란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우정의 시작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히 가능하단다.
 
 사부에게만 마음을 열고, 하루 종일 수련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사부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왠지 모르게 알 것도 같다.
 백주룡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을 반쯤 뽑으며 말했다.
 “친구할 거면 우리도 도원결의처럼 혈주(血酒)라도 마셔볼까?”
 진소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천지신명과 검후께 우정을 맹세하는 것이 좋겠어.”
 천위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에게 시급한 사안은 염화애에서 얻은 기연을 정리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한데 두 녀석과 보내는 이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우정을 담아 한 마디를 날려주었다.
 “에라이, 미친놈들아.”
 # 6장, 누가 시켰냐?
 
 천위의 귀환을 반긴 것은 비단 백주룡과 진소백만이 아니었다.
 “놈이 돌아왔다고?”
 주열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날 진무회의 현룡관도인 허주평에게 백주룡을 끌어들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던가. 그는 천위를 공략하여 마음을 얻고, 그걸 통해 백주룡과 친분을 다지려 했다. 계획만 제대로 이행됐다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렸을 것이다.
 한데 계획을 실행하려는 순간 천위가 사라졌다.
 주열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허주평의 문책으로 끝나지 않아. 이 일은 최소한 지룡관도인 간사 급까지 연결되어 있어. 반드시 성공해야 해.’
 진무회는 회주와 부회주, 총무가 수뇌부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밑에서 간사(幹事)가 실무를 담당하는 구조였다. 진무회의 간사라면 회원을 제명시키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이번 일은 간단했다.
 성공하면 현룡관도가 되고, 실패하면 평생 황룡관도로 살아야 할 터였다.
 ‘뱀의 머리보다는 용의 꼬리가 낫지!’
 주열은 이번 일을 반드시 성공하여 현룡관도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가 해결해 볼까?”
 진무회의 회원들이 슬그머니 나섰다.
 하나 주열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우리 목표는 담천위가 아니라 백주룡이야. 너희들이 나서서 담천위를 괴롭힐 수는 있겠지. 그리고 뭘 할 건데? 백주룡한테 쳐맞기 싫으면 가입하라고 할 거냐?”
 주열은 진무회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는 모습을 본 후에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의 공은 내꺼야. 현룡관으로 올라가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고!’
 “그럼 어떻게 할까?”
 주열은 뾰족한 턱을 쓰다듬으며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당인걸 패거리를 쓴다. 힘만 쎈 멍청이들이니까 뒤탈도 없을 거야.”
 동료가 주열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나섰다.
 주열은 의자에 상체를 깊이 묻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잠룡대연 전에 현룡관도가 됐으면 좋겠는데.”
 잠시 후 또래보다 덩치가 큰 세 명의 관도가 처소로 들어섰다. 그 중 대장 격이라 할 수 있는 당인걸이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어이, 주열. 오랜만이야.”
 주열은 마뜩찮은 표정을 숨기고 애써 웃음으로 화답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당인걸은 한순간 표정을 굳혔다.
 “잘 지냈을 리가 있나. 진무회에 입회 시켜주겠다고 한 게 벌써 한 달이야. 한데 아직도 소식이 없잖아. 우리가 널 계속 믿어도 되는 거냐?”
 “당연하지. 이번 일만 잘 되면 입회는 따 놓은 당상이야.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쾅!
 주엽은 당인걸이 탁자를 내리치며 상체를 들이댔어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가 당인걸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약속한다니까. 나 못 믿나?”
 당인걸은 주열의 능글맞은 한 마디에 입매를 푸르르 떨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이빨을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크큭! 믿지. 믿어. 우리 친하잖아?”
 “그렇지. 그럼 일 이야기 좀 해도 될까?”
 주열의 말에 당인걸은 팔짱을 끼고 맞은편에 앉았다.
 “담천위가 돌아왔다.”
 당인걸은 입꼬리를 올렸다.
 “뭐야? 도망쳤다며.”
 그의 패거리인 방표와 우대명이 시시덕대며 떠들어댔다.
 “집에 간다고 반겨주겠냐? 겁나서 돌아왔나 보지.”
 “크큭, 어찌됐든 우리한테는 잘 된 일이잖아.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리도 진무회인 거지?”
 당인걸이 우대명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렇다는데?”
 주열은 관도들을 보며 속으로 투덜댔다.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한 놈들!’
 하나 그의 입매는 여전히 호선을 그렸다.
 “그럼.”
 당인걸은 몇 번이나 확답을 받은 후에야 팔짱을 풀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주면 될까?”
 주열은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몇 대 패주면 돼. 그리고 절묘하게 내가 나타나서 말리는 거지. 그 후에는 너희가 알아서 슬쩍 빠져주면 돼. 어때? 쉽지.”
 당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네. 그런데 담천위도 입회시킨다며. 놈을 입회시킨 후에 우리 차례가 오기는 오는 거야?”
 주열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했다.
 “당연하지. 어차피 담천위는 백주룡을 끌고 오기 위한 미끼에 불과해. 둘이 같이 입회해도 백주룡은 최소한 현룡관도가 될 거다. 그 후에 혼자 남은 담천위를 밀어내는 건 일도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입회를 한다. 확실한 거지?”
 이번에는 주열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으르렁거리듯이 한 마디를 흘렸다.
 “우리 진무회야. 지금 진무회의 약속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당인걸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누가 뭐랬냐? 크흠! 어쨌든 그렇게 하지.”
 주열은 그제야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자율 수련이 있지? 그 때 하는 게 좋겠어.”
 “관도들이 모였을 때? 아니면 혼자 있을 때?”
 “그건 네 판단에 맡길게.”
 당인걸은 패거리를 이끌고 떠났다.
 주열은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코웃음을 쳤다.
 “병신 같은 새끼들.”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은 현룡관도가 된다.
 그 후 당인걸 패거리와 만날 기회가 전무했다. 그리고 설령 만난다 해도 현룡관도가 된 이상 녀석들에게 휘둘릴 까닭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현룡관도라도 된 것처럼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평생 남의 칼받이나 하면서 살거라. 크큭!”
 
 ***
 
 천위는 연꽃을 먹고 얻은 기운에 이름을 붙였다.
 “왜 염화기가 발동을 하지 않는 거지?”
 염화애(拈華崖)에서 얻었으니 같은 음을 사용해서 염화기(炎火氣)라 지은 게다. 더 멋진 이름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천위는 다시 한 번 팔단금을 펼쳤다.
 하지만 단전 어딘가에 자리 잡은 염화기는 몸속을 휘돌고 사라질 뿐이다.
 ‘어째서?’
 분명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붉은 기운은 꿈이 아니었다. 심지어 붉은 기운이 너울거리며 동굴 전체에 가득 차는 것까지 확인하지 않았던가.
 예전보다 강해진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고작해야 첫 걸음을 내딛은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구기전검과 소호검법을 펼쳐 보았다.
 촤라락-
 세 번의 절초를 펼쳤지만 단전은 여전히 충만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염화기는 희미하게 한 줄기 기운을 흘려냈을 뿐이다.
 소호검법은 이미 대성했으니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저 좀 더 빠르고, 날카로운 검세가 돋보였을 뿐이다.
 ‘오후에는 자율수련이 있으니까 그 때 제대로 다시 한 번 해봐야겠어.’
 천위는 수련을 마무리하며 팔단금의 자세를 취했다.
 비록 염화기를 운용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팔단금의 효능을 엿보지 않았던가.
 ‘분명 팔단금을 펼쳤을 때 염화기가 제대로 움직였어.’
 염화기의 열쇠는 팔단금이 확실했다.
 이유를 파악하는 것은 차후 문제였다. 지금은 팔단금을 더욱 열심히 수련하여 염화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 선결되어야 했다.
 천위는 기연을 얻었던 그 순간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수련을 이어갔다. 한데 팔단금을 끝내는 순간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친구! 오늘도 아침부터 수련하고 있구나. 정파의 미래가 밝아! 여러분! 정파의 기상을 이은 영웅 후보가 여기 있습니다. 모두 모이세요!”
 백주룡은 진소백의 열변을 흉내 내며 등장했다.
 천위는 수련을 마무리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 어제 혈주 마시고 싶어 했지? 내가 네 손가락 좀 베어 주랴?”
 백주룡은 상체를 웅크리며 부르르 떨었다.
 “정파의 영웅이 되어야 할 놈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어.”
 한데 천위는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백주룡을 향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 말이야.”
 “불안하게 왜 그러냐?”
 천위는 평소와 다르게 굳은 표정으로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꿈을 바꿔보는 게 어때?”
 백주룡은 갑작스런 말에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웬 꿈?”
 “너 하오문주는 안 될 것 같다.”
 천위가 입꼬리를 올리며 한 마디를 하자, 백주룡이 얼굴을 붉히며 길길이 날뛰었다.
 “야! 이 자식아. 아침부터 악담이냐!”
 “악담이 아니야. 넌 안 된다고. 하하하!”
 백주룡이 소매를 걷고 쫒아오자, 천위는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도주했다.
 그 와중에 전날 꾸었던 꿈의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천위는 기연의 영향인지 천무대의 조장으로 등장했다.
 아마 기연은 얻었으되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작 해야 조장이 되었나 보다. 그래도 빗물을 받아먹던 일개 조원보다는 나았다.
 한데 꿈은 천위가 승급한 것 외에도 다른 변화를 보였다.
 백주룡이 천무대의 조원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날 우정을 확인한 것이 원인이었을까?
 갑작스럽게 녀석이 등장했지만, 반길 수가 없었다.
 늙은 백주룡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어깨는 천근의 짐을 짊어진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어찌 보면 천위보다 더 힘든 삶을 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가운만큼 안타까웠다.
 “이 새끼! 너 잡히면 죽어!”
 천위는 백주룡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변했으니 너도 변할 거다!’
 그래도 녀석이 하오문주가 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다.
 
 ***
 
 오후는 알려진 대로 자율 수련이다.
 천위는 염화기를 고심하느라 관도들과 헤어져 조용한 공터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수련에 매진했지만, 염화기는 여전히 어딘가에 숨어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운기조식을 해봐야겠어.’
 앉아서 수련하는 좌공은 반드시 호법을 필요로 한다.
 하나 천위가 익힌 것은 토납법의 일종으로 참선의 한 분류였다. 그렇기에 조용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수련이 가능했다.
 게다가 참선으로 심상을 들여다본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니겠는가. 염화기를 운용했던 순간을 재구성한다면 반드시 놓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염화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만 있다면 고향 전체를 청소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런 그를 조심스럽게 뒤따르는 세 명의 관도가 있었다.
 당인걸 패거리다.
 “주열이 약속을 지킬까?”
 “그 새끼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방표와 우대명이 주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당인걸은 혀를 차며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리가 황룡관도인 이상 진무회에 입회하려면 놈의 허락이 필요해.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더 속는 셈치고 해보자. 이번에도 안 되면 그 새끼 뒤통수는 내가 찍어버릴 거야.”
 방표는 납득을 했지만, 우대명은 못내 아쉬웠나 보다.
 “우리도 진무회에만 목매지 말고, 창천회나 백검회 쪽하고 접선해보는 건 어때?”
 당인걸은 인상을 쓰더니 우대명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 이 새끼야. 그 새끼들이 우리를 받아주기나 한데? 창천회는 속가 서열 삼십 위, 백검회는 오십 위가 입회조건이야. 네 사문이 그 정도냐?”
 우대명은 뒤통수를 매만지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면 그 쪽 수뇌부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냐?”
 대꾸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창천회와 백검회의 수뇌부는 잠룡비원의 사부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방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
 “하기는 창천회나 백검회가 황룡관도를 신경이나 쓸까. 거기는 그냥 그들만 사는 세상이잖아.”
 “그래도 황룡관도 중에 백검회에 입회한 애들이 있잖아. 그것도 두 명이나!”
 우대명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가, 당인걸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고 시선을 돌렸다.
 “걔들이야 무늬만 황룡관도지. 조만간 현룡관도로 승급할 걸?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일에 집중해. 우리를 받아줄 곳은 진무회밖에 없다. 진무회에 가입하지 못하면 영원히 삼류로 사는 거야!”
 방표와 우대명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투기를 불살랐다.
 당인걸 역시 검붉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십여 년 간 외공(外功)을 수련했고, 사문의 흑사권(黑斜拳)은 삼 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내공과 외공의 우열을 가르는 방법은 간단하다.
 절정고수가 되었다면 내공(內功)이, 그렇지 않다면 외공(外功)이 강했다.
 그렇기에 당인걸은 천위를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천위가 자신의 일격도 감당하지 못하고 기절해버리면 곤란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가 힘 조절을 걱정하는 사이 적당한 곳이 나타났다.
 ‘막다른 공터라. 좋은데?’
 당인걸은 방표와 우대명에게 눈짓을 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한데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천위가 돌아서버렸다
 녀석은 휴식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당인걸은 그런 천위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 담천위 맞지?”
 이름을 알고 있지만, 위압감을 주려면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지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말투라고나 할까.
 “그런데?”
 천위의 말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당인걸은 녀석이 속으로는 당황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보통 사람은 좁은 곳에서 호의적이지 않은 다수를 만나면 겁을 먹기 마련이다.
 당인걸은 히죽 웃으며 가슴을 폈다.
 “새끼가 혀가 짧네.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미움을 사는 게 아니겠냐?”
 커다란 덩치와 적당한 욕설은 상대를 겁먹게 만들 것이다. 지금껏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항상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었고,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기게 만들었다.
 한데 천위는 당인걸이 예상하던 방향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와! 돼지 새끼가 말도 하네? 넌 누구한테 그리 잘 보였기에 말도 배웠냐?”
 
 지금껏 백주룡과 어울리며 얻은 것이라고는 상대를 화나게 만드는 화술이 전부였다.
 ‘수투를 낀 걸 보니 주먹을 쓸 테고, 건들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한두 번 시비를 건 놈들이 아니구만.’
 천위는 이미 당인걸 패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염화기는 육신의 강화뿐 아니라 기감마저 날카롭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염화기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저기 미움을 샀다고? 사주라도 받았나보네. 쯧쯧, 제 입으로 저렇게 떠벌리는 걸 봐서는 머리가 좋은 놈도 아니야.’
 잠룡비원은 후기지수를 모아서 기초부터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미 각자 어느 정도 성취를 이른 제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도 중에서는 비무를 능숙하게 하는 녀석은 물론이고, 실제로 강호행을 통해 악인을 척살한 후기지수도 있었다. 그러니 사람을 상대로 힘을 쓰거나, 검을 휘두르는 일이 낯설 리 만무했다.
 저 녀석들도 그럴 것이다.
 약자를 괴롭히고, 폭력을 사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익숙하겠지.
 하지만 천위는 그 모든 것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의 고향, 남무문이 있던 곳.
 그곳은 바다의 짠내 만큼이나 익숙한 것이 피 냄새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곳.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곳.
 그곳에서 살아온 천위였기에 당인걸의 도발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일단 패고 물어봐야겠네.’
 반면 당인걸은 천위의 도발 아닌 도발이 상당히 불쾌했나 보다.
 “저거 혼자 지내더니 미친 거 아냐?”
 방표와 우대명의 표정도 일그러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외공을 익혔기에 또래보다 커다란 덩치를 자랑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몸을 비하하는 천위에 대한 분노는 배가 됐다.
 “조용한데서 처리하기로 한 게 좋은 선택이었어. 저 새끼는 한두 대 쳐맞고 정신 차릴 놈이 아니야.”
 “검도 없는 새끼가 정신을 놨네. 내가 먼저 칠게.”
 당인걸이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우대명을 막아섰다.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여기 막고 있어. 방표, 저 새끼 내 앞에 무릎 꿇려라.”
 그래도 정파라는 놈들이 육두문자나 내뱉으면서 뒷골목 왈패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천위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인상을 쓰고 있는 방표를 멀뚱히 쳐다봤다.
 “작전 다 짰으면 와봐.”
 방표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새끼야. 이빨 꽉 물어라. 잘못하면 턱 나간다.”
 “내 걱정도 해주고, 착한 아이네.”
 천위의 시큰둥한 한 마디가 방표의 인내심을 증발시켰다.
 “죽어!”
 방표는 천위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꼴이다.
 “이 새끼야!”
 천위는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방표를 보며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이거 얼마나 얕잡아 보인 거지?’
 일견하기에도 녀석이 잔뜩 힘을 준 오른 주먹은 허초(虛招)다. 진초(眞招)는 옆구리에 슬그머니 붙이고 있는 왼 주먹이 확실했다.
 팟-
 천위는 가볍게 방표의 오른 주먹을 피했다.
 애초에 상대도 맞추려고 때린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만으로도 주먹을 흘려낼 수 있었다.
 그 순간 방표가 왼 주먹을 올려치려 했다.
 턱을 노려 한 방에 천위를 무력화시키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천위는 이미 반격을 시작한 상태였다.
 미끄러지듯 반 보를 내딛는 순간 그의 하체가 대지에 뿌리박힌 것처럼 파고든다.
 쿵!
 동시에 그의 손바닥은 무방비상태로 드러난 방표의 명치에 직격했다.
 퍽!
 방표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그의 몸은 직각으로 꺾였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배를 움켜잡더니 토악질을 시작했다.
 “우웩!”
 천위는 인상을 쓰며 한 걸음 비켜섰다.
 그리고는 우대명을 향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야! 길 잘 막아라. 아무도 못 도망치게.”
 천위는 당인걸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냈다.
 당인걸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방표는 데굴데굴 구르며 토악질을 하고, 신음을 흘렸다.
 “인걸아. 나, 나 죽는다.”
 방표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다.
 당인걸은 그 모습을 보자 이를 갈며 방표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에 걸리는 대로 아무 곳이나 후려쳤다.
 퍽! 퍽! 퍽!
 “닥쳐! 이 새끼야. 한 대 맞고 병신같이 뭐하는 거야?”
 당인걸은 악에 받힌 사람처럼 발길질을 이어갔고, 방표는 아예 게거품을 물며 괴로워했다.
 하나 천위는 자신의 손바닥을 살폈다.
 염화기로 인한 변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예상 외로 강력하지 않은가.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것 이상의 힘 조절이 가능했다.
 어차피 예전부터 황룡관 내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실력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황룡관이 아니라 현룡, 아니 지룡관도도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만약 염화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천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너 오늘 네 발로 기게 만들어주마.”
 당인걸은 분풀이가 끝났는지 걸레짝이 된 방표를 버려두고 천위를 노려봤다.
 녀석은 보법도 펼치지 않고 그냥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방표보다 몇 배는 더 위압감을 드러냈다. 단순하게 덩치만 큰 놈이 아니라 언제든 출수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싸울 줄 아는 놈이다.
 게다가 놈의 눈빛은 고향의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피를 본 놈이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두고두고 귀찮을 놈이다.
 천위는 당인걸이 접근할수록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놈은 초장에 확실히 잡아놔야 다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리라.
 당인걸은 천위의 지척에 이르자 대뜸 멱살을 쥐려 했다. 잡으면 좋고, 뒤로 피하면 어깨로 들이박을 요량이었다. 한데 천위는 뒤로 피하는 대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옆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어쭈! 이 새끼 봐라?’
 당인걸은 멱살을 쥐려던 손을 말아 쥐더니 횡으로 거세게 휘둘렀다. 권격의 궤적이 직각으로 꺾인 것이다. 이것은 당인걸의 덩치로 보았을 때 무리한 동작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부드럽게 동작을 연계시켰다.
 팡-
 천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눕히자, 당인걸의 주먹은 허공을 휘저었다. 하지만 당인걸 역시 놀라지 않고 몸 전체를 휘돌렸다. 그러자 당인걸의 상체가 천위를 뒤덮는 형국이 되었다.
 “뒈져!”
 당인걸은 훤히 드러난 천위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내리 꽂았다.
 방표가 당했던 그대로 돌려주려는 것이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위가 스스로 두 발을 띄우며 누운 것이다.
 당인걸의 주먹은 이미 지척에 이른 상태였으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충격을 줄일 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데 천위의 몸은 누가 짓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떨어졌다.
 ‘내 공격을 읽어?’
 당인걸이 놀라는 사이 천위는 등으로 땅을 튕기며 두 다리를 차 올렸다. 다리를 바람개비처럼 휘돌리니 당인걸은 창졸간에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크흑!”
 두 팔로 어찌어찌 막아보려 했지만, 회전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천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점에 이르렀을 때 두 팔로 대지를 다시 한 번 밀쳤다.
 파파파파팟!
 이것만은 당인걸도 막을 도리가 없다.
 천위의 다리는 눈앞에서 원을 그렸고, 그 궤적의 끝에 당인걸의 얼굴이 있었다.
 퍼퍼퍼퍼퍼퍽!
 천위의 발등이 당인걸의 뺨을 수차례나 후려쳤다.
 “크흑!”
 당인걸은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채 급히 물러났다.
 얼굴은 고통과 수치심으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천위는 그 모습을 보미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연한 척 하더니 이건 못 피하네?”
 당인걸은 아예 콧김을 뿜어낼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크흑! 너! 진짜 죽여 버린다!”
 단순히 화만 난 것은 아닌 듯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았고, 주먹은 힘줄이 꿈틀거릴 정도였다.
 본래 흑사권(黑斜拳)은 검은 모래와 기름을 사용하여 수련한다. 주먹을 단련한 후 뼈와 살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로 인해 당인걸은 남보다 관절을 부드럽게 사용하는데 능했다. 한데 지금은 관절기로 큰 이득을 보지 못했으니 권법의 파괴력으로 승부를 볼 요량이었다.
 “그래도 잠룡비원에 있으면서 사파처럼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천위가 시큰둥한 한 마디를 던지자, 당인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주열과의 거래는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당인걸의 살의가 전해진다.
 하나 천위는 오히려 느긋하기만 했다.
 지금껏 수많은 실전을 거쳐 왔다.
 고향을 노리는 적들은 살인귀였고, 그들에게서 고향을 지키려면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죽는 것은 약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흥분하고 투기를 드러내는 자들이 먼저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었다.
 ‘이제 끝내야겠네.’
 당인걸은 염화기가 없어도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데 염화기로 인해 육신의 능력이 향상되기까지 했으니 위기감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천위는 가볍게 한 걸음 내딛었다.
 당인걸은 그 모습을 보고 괴성을 질러댔다.
 “크아아아아아!”
 두 사람이 격돌하려는 순간 한 줄기 외침이 들려왔다.
 “관도들끼리 뭐하는 거야?”
 진소백이다.
 어찌된 일인지 녀석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공터의 입구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둘 다 멈춰!”
 당인걸은 진소백의 만류를 귓등으로 흘렸다.
 진소백인지도 몰랐지만, 설령 무사부가 왔더라도 지금의 당인걸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당인걸의 주먹은 잔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천위의 상체를 향해 꽂혀들었다.
 “죽어라!”
 천위 역시 진소백의 만류를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당인걸의 품안으로 몸을 날렸다.
 시작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하지 않겠는가. 절대로 다시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끝맺음을 해야 했다.
 남무팔단금의 자세를 변형하는 것만으로도 당인걸의 모든 공세를 흘려낼 수 있었다.
 천위는 구기전검의 묘리를 주먹으로 펼쳤다.
 빡!
 당인걸의 콧잔등이 터져나갔다.
 천위는 주먹을 짧게 끊어 친 후 당인걸의 허리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당인걸의 배후를 점한 후 녀석의 무릎 뒤를 후려쳤다.
 “크헉!”
 당인걸의 비명은 시작에 불과했다.
 천위는 당인걸의 등 뒤에서 관자놀이를 노려 주먹을 휘둘렀다.
 빡!
 앞뒤로 비틀거리던 녀석이 우측으로 튕겨나갔다.
 솨사사사사사-
 천위는 사선보를 펼치며 빠르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녀석의 소매를 잡아채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당인걸의 소매를 당기며 무릎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찍었다.
 “꺼어억!”
 천위는 삼연격을 끝내고 당인걸을 풀어주려 했다.
 이후에는 그저 내키는 대로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한데 생각보다 내공의 흐름이 수월하다. 마치 방금 단전에서 내공을 뽑아낸 것처럼 힘차게 휘도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염화기조차 발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구기전검의 절초는 세 번의 한계.
 하나 지금 마음만 같아서는 여섯 번이라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하다!
 천위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한 번 내공을 풀어냈다.
 그리고 밀려나간 당인걸을 쫓았다.
 사선보로 빠르게 접근했고, 공격 전 남무팔단금의 자세를 응용했다.
 당인걸이 뒤늦게 반격을 하려 했지만,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녀석의 권격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균형을 잃은 탓에 느릿하기만 했다.
 “카아아아! 죽어! 죽어!”
 천위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당인걸의 공세를 흘려냈다.
 그리고는 하체의 중심축이 잡히는 순간 당인걸의 옆구리와 턱을 후려쳤다.
 퍽! 빠각!
 한 대만 맞아도 버티기 쉽지 않은 일격이다.
 한데 그것을 다섯 번이나 얻어맞았으니 당인걸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비틀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빠각!
 천위의 마지막 일격이 당인걸의 안면을 파고들었다.
 이미 피범벅인 콧잔등이 아예 뭉개져 버렸다.
 “꺼어…….”
 당인걸은 기이한 신음을 흘리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간간히 팔다리를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천위는 그제야 자세를 풀고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하아…….”
 마치 평탄한 길을 걷듯이 여섯 번의 절초를 풀어냈다.
 이것을 무공의 성취로 따진다면 칠성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주먹으로 펼쳤으니 검으로 펼치는 것은 더욱 수월할 것이다.
 이제 오늘 일의 마무리를 지을 차례였다.
 천위는 당인걸과 방표를 지나, 공터의 입구를 지키던 우대명의 앞에 서서 물었다.
 “누가 시켰냐?”
 
 ***
 
 우대명의 목울대가 한 차례 꿀렁거린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지켜봤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죽 했으면 진소백이 난입을 했는데도 제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쟤 뭐야?’
 잠룡비원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수련원이 아닌가.
 그 말은 곧 제자들의 능력을 완벽히 파악했으며, 그걸 통해 등급을 나눴다는 뜻이다. 수십 년 간 후기지수를 선별한 사부들이 저런 존재를 황룡관에 보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우대명은 천위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로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존재가 묻는다.
 우대명은 이런 상황에서 의리를 지킬 만큼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주모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주, 주열. 주열이 시켰어.”
 천위는 낯선 이름에도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모르는 놈이 시켰을 거라 예상했던 바였다.
 그저 나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더.”
 그것만으로도 우대명의 목울대가 다시 한 번 꿀렁거렸다. 천위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굳었고, 우대명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했다.
 “주열, 그 개자식은 진무회의 황룡관도야. 황룡관의 진무회원들을 통솔해. 그 새끼가 우리한테 거래를 제안했어. 우리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주열과는 평소에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사이다.
 하나 천위의 신위를 목격한 이상 놈은 개자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천위는 대꾸 없이 우대명의 토설을 듣기만 했다.
 우대명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모든 죄를 주열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래서?”
 우대명은 부르르 떨며 손사래를 쳤다.
 “없어. 그게 끝이야. 이 모든 게 주열 탓이라고.”
 이미 주열과 당인걸을 비롯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붓 듯이 자백한 상태였다.
 한데 천위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진짜야! 쟤들한테 물어봐도 이게 전부라고.”
 우대명은 당인걸이 맞던 모습을 떠올렸는지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천위는 그제야 우대명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가라.”
 우대명의 얼굴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그의 귓가에 천위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혼자 가냐? 데리고 가야지.”
 하나 우대명은 이미 돌아서서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중이었다.
 천위는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쯧쯧,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그래도 방표는 우대명보다 나았는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당인걸을 질질 끌며 사라졌다.
 진소백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괜찮아?”
 천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주먹을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
 하긴 당인걸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었을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얻어맞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걱정을 한다면 상대가 잘못된 셈이다.
 “그나저나 진무회가 노리고 있다니 주룡이도 귀찮게 됐구나.”
 천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유치한 계략이지만, 성공 가능성은 높지. 그리고 이번에 실패했으니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나설지도 몰라. 이래저래 귀찮게 됐구나.”
 진소백은 팔짱을 끼고 한 숨을 내쉬었다.
 “흐음, 어쩌면 좋을까?”
 천위는 생각에 잠긴 진소백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가뜩이나 체구가 왜소한 녀석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나름 귀엽지 않은가.
 깐깐한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인가?
 “그런데 언제부터 백주룡과 이름을 부르는 친근한 사이가 된 거냐?”
 진소백은 천위의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냥. 어제 네가 돌아가고 이런 저런 얘기 좀 했지. 새벽까지 얘기하다보니 나름 친근해진 것 같아. 뭐 녀석이 떠드는 걸 일방적으로 들어준 것뿐이지만.”
 녀석, 친구가 없기는 없었나 보다.
 그 시끄러운 백주룡의 입담을 밤새도록 들어준 것을 보면 말이다.
 천위는 히죽거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소백의 옆구리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책을 안 들고 왔네. 설마 백주룡하고 조금 친해졌다고, 검후는 버린 거냐?”
 “무, 무슨 소리야! 검후께서 남기신 명언과 협의지심은 매일 되새겨도 부족할 정도라고! 그냥 저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가기에 혹시나 해서 급하게 따라오다 보니 놓고 온 것뿐이야. 검후께서 말씀하시길…….”
 천위의 표정이 슬그머니 굳었다.
 진소백은 그냥 두면 검후의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기세였다. 불현 듯 자신이 사부 이야기를 할 때의 백주룡의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녀석도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천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진소백의 말을 끊었다.
 “검후의 영웅담은 나중에 듣자.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잖아.”
 진소백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검후보다 중요한게 있을 리가……. 아! 주룡이! 그런데 어떻게 해결하려고?”
 천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떻게 하긴. 당사자와 해결해야지.”
 진소백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천위가 진소백의 어를 감싸며 말했다.
 “일단 너는 돌아가라.”
 “응? 왜?”
 천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여기에 수련하러 온 거라고. 게다가 너, 책도 놓고 왔다며. 그 중요한 책을 누가 가져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진소백은 그제야 탄식하며 우물쭈물했다.
 “알았어. 그런데 당사자랑 해결한다는 말은 뭐야?”
 “지금 당장 어쩌겠다는 건 아니었어.”
 천위가 연이어 축객령을 내리자, 진소백은 그제야 못이기는 척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진소백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천위가 싸늘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와.”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천위는 누군가를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외쳤다.
 “진무회라면서 하는 짓은 뒷골목 왈패 같잖아. 설마 너희들 자릿세나 보호비도 뜯냐?”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이 흔들린다.
 그리고 주열이 뾰족한 턱을 쓰다듬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야 원. 하찮은 것들은 항상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모른단 말이지. 감히 진무회를 모욕하다니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잠룡비원의 내부니까 설마 칼부림이야 하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홧김에 내지르는 것은 아니겠지?”
 천위는 주열을 탐색하듯 살폈다.
 일견하기에도 주열의 기세는 당인걸을 상회했다.
 체구는 진소백보다 조금 큰 편이었지만, 드러난 팔뚝만 봐도 잔 근육이 꿈틀거렸다.
 게다가 주열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당인걸이 멧돼지와 같았다면 녀석은 승냥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서늘한 기세를 흘렸다. 사문에서 영약이나 받아먹으면서 안일하게 수련한 녀석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래봤자 당인걸보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닌가.
 “네 생각은 어때? 내가 홧김에 이러는 것 같냐?”
 주열은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히죽거렸다.
 “아니.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 불러냈겠지. 하지만 네 패착이 뭔지 알려줄까? 아주 많은데 말이지.”
 천위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열은 비릿한 혈소를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첫째, 검도 없이 이런 곳을 배회하는 거지. 잠룡비원은 생각보다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거든.”
 “나쁘지 않은데?”
 한순간에 평가받는 위치가 된 주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새끼, 진짜 살심 돋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그래서 말인데 두 번째는 당인걸 패거리나 진소백을 돌려보낸 거야. 이래서야 목격자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잖아. 안 그래?”
 천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주열을 격려하듯 박수까지 치며 추임새를 넣는 것이 아닌가.
 “옳지! 타당하다.”
 반면 주열의 얼굴에서는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
 살의가 짙어질수록 감정을 숨기는 것이다.
 주열은 허리춤의 검을 손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세 번째. 네 능력을 너무 과신한 거지. 그리고 그게 가장 큰 패착이며 네가…….”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천위가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순간 주열이 활에서 쏘아낸 화살처럼 튕기듯 몸을 날렸다.
 “죽는 이유다!”
 경고도 없었고, 공격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첫 수부터 잔뜩 살의를 드러내는 주열의 손은 어느새 검배를 움켜쥔 채 발검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졌다.
 빠르다. 잠룡비원에서 익힌 보법이 아니라 사문에서 익힌 보법을 펼치는 것이 분명했다.
 ‘미친놈! 다짜고짜 살수냐!’
 천위는 주열의 허리춤에 매인 검을 노려보며 회피하려 했다. 한데 주열은 잰걸음으로 내달리다가 지척에 이르자 보폭을 크게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발검을 위한 준비동작이지만, 너무 노골적이다.
 ‘그렇게 순진한 놈일 리가 없지!’
 천위는 주열이 발검하는 것을 맞상대하기보다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그 순간 두 줄기의 검영(劍影)이 천위의 상의를 스치듯 번뜩였다.
 촤악-
 주열은 어느새 허리춤의 검이 아닌 손바닥 만한 비수(匕首) 두 자루를 양 손에 쥐고 있었다. 비수의 손잡이 부분에는 손가락을 넣기 위한 작은 고리가 존재했다.
 그는 검지를 고리에 넣은 채 비수를 원반처럼 휘돌렸다.
 “새끼, 감 좋네.”
 천위는 상의의 잘린 부분을 매만지며 한 숨을 내쉬었다.
 “아, 내 옷.”
 주열은 생각처럼 반응하지 않는 천위를 향해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냐? 옷이 아니라 네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고!”
 한데 천위가 고개를 들더니 히죽 웃었다.
 “너야말로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주열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위의 한 손은 잘린 옷을 매만졌지만, 다른 손은 왠지 모르게 낯익은 검 한 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검이 어디서?’
 주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허리춤을 살피고는 기겁을 했다. 허리춤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할 자신의 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어, 언제?”
 천위가 빙긋 웃으며 검을 흔들었다.
 “옷값은 이걸로 퉁 쳐줄게.”
 
 ***
 
 주열은 확실히 당인걸과 달랐다.
 검을 빼앗기고도 표정을 금방 수습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느낌이나 감촉도 없이 말 그대로 빼앗겼다.
 잠룡비원 생활은 어느덧 삼 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간 주열은 경계해야 할 관도와 부려야할 관도를 선별했다. 심지어 백주룡과 진소백도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담천위라는 존재는 단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혼자 수련이나 하나가 슬그머니 도망칠 녀석이라 결론 내린지 오래였다.
 ‘설마 저 새끼가 나보다 쎄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살의가 더욱 짙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만에 하나 자신이 졌을 때를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진무회가 지시한 일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자신을 그냥 둘 리가 없지 않은가.
 퇴출(退出)이라는 두 글자가 뇌리에 박혔다.
 ‘크흑!’
 지금껏 주열은 진무회를 등에 업고 숱한 위세를 부려왔다. 자신을 욕하고, 원망하는 놈들은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현룡관도만 되면 다시 볼 일없는 하찮은 놈들이 아니던가.
 한데 공든 탑이 무너질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담천위 때문이다.
 등골이 서늘해진 주열은 애써 핑계거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저 새끼랑 싸워서 이겨봤자 남는 것도 없어.’
 주열은 잔뜩 웅크렸던 자세를 펴고 투기를 가라앉혔다.
 동시에 그의 비수가 소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뭐하냐?”
 천위의 말에 주열은 애써 담담한 척하며 말했다.
 “그 검, 조만간 다시 받으러 오마. 그 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길게 끌어봐야 모양새만 나빠진다.
 주열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백주룡을 포섭하는 방법은 다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한 오늘의 수모는 수하들을 동원해 몇 배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하나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돌아가던가.
 “야!”
 주열은 인상을 구겼다.
 ‘저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천위의 여유로운 말투는 주열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천위의 말을 무시한 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천위의 한 마디가 그 모든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너 진무회라며? 그런데 지금 겁나서 도망치는 거냐?”
 주열은 점혈이라도 당한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천위가 진무회를 거론한 이상 주열의 선택권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도망치면 진무회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회의 명예를 먹칠한 죗값까지 치러야 했다.
 
 - 진무회는 적 앞에서 꼬리를 마는 겁쟁이들이다.
 
 주열은 천위가 퍼트릴 소문을 떠올리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창천회야 고고한 척하느라 바빠서 신경도 쓰지 않을 게다. 하지만 진무회와 세력 싸움을 하고 있는 백검회라면 없는 일도 덧붙여서 퍼트릴 놈들이 아니던가.
 이제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유일한 활로(活路)였다.
 주열은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 이 새끼, 진짜 끝까지 가자는 거냐?”
 하지만 천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가 이상한 거냐? 아니면 진무회가 원래 그러냐? 먼저 죽이겠다고 칼 빼든 건 너잖아. 겁먹어서 그것도 잊어버린 거냐?”
 주열은 말끝마다 진무회를 운운하는 천위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 놈이 혹시 뒷배라도 있는 건가? 도대체 뭘 믿고 저리 뻣뻣한 거야!’
  천위는 기고만장하던 주열이 우물쭈물 하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큭, 머리 아플 거다.’
 주열은 이각 전만 해도 진무회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놈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궁지에 몰려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천위가 일부러 의도한 상황이었다.
 지금 주열을 보내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저런 음흉한 놈과는 무조건 이 순간 끝을 봐야 뒤탈이 없을 터였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잽싼 놈이기에 일부러 빠져나갈 구멍을 모조리 막아버린 것이다.
 ‘시간은 충분히 끌은 것 같네.’
 천위는 장난치는 것처럼 검을 휘돌리며 말했다.
 “남궁세가가 검은 참 잘 만들어.”
 주열은 별다른 대꾸 없이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한 치 앞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빌어먹을!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천위는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주열을 향해 검을 겨눴다.
 “아까 잠룡비원은 그리 튼튼한 울타리가 아니라고 했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진무회도 그리 쓸 만한 울타리는 아닌 것 같은데?”
 주열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너! 고작 한 번 피했다고 진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천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알려줄래?”
 “닥쳐!”
 주열이 입을 뗐을 때 그의 손은 소매로 사라졌고, 입을 닫았을 때에는 비수를 쥔 손이 튀어나왔다.
 손잡이에 고리가 달린 비수가 빗살처럼 꽂혀들었다.
 슉!
 천위를 처음 공격했을 때에는 징벌의 의미가 강했다. 하나 이번 공세는 그야말로 한 치의 망설임이나 방심 없이 전력을 다했다.
 이제 놈과의 싸움은 이기면 본전이고, 지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생사투(生死鬪)가 되어버렸다.
 “잔재주 따위!”
 땅!
 천위가 검을 횡으로 긋는 순간 비수가 튕겨나갔다. 그리고 비수를 튕겨내자마자 검을 바로 세웠다.
 아니나다를까 주열은 비수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쇄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의 양 손에는 여전히 비수가 휘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본래 비도를 사용하는 자들은 더 많이 들고 다니지 못해서 안달하지 않던가. 그러니 주열이 앞으로 열 개의 비수를 더 던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터였다.
 “흥!”
 천위와 주열의 거리가 삼 보로 줄었다.
 한데 주열은 갑자기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켰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우측으로 튕겨나갔고, 쥐고 있던 비수를 내던졌다.
 슉슉!
 ‘이제 시작이다!’
 주열은 팔목에 감겨 있는 비수를 동시에 네 자루나 뽑아들었다. 한 손에 두 개씩 쥔 비수가 다시 한 번 천위를 향해 꽂혀들었다.
 슉슉슉슉!
 천위는 검으로 중단을 겨눈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주열은 승기를 잡았다는 쾌감에 절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팔목에 감고 있는 회혈비(回穴匕)는 모두 열여덟 자루였다.
 ‘다 막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슉슉슉슉슉슉슉슉!
 여덟 자루의 회혈비가 다시 한 번 팔방에서 쇄도했다.
 총 열네 자루의 회혈비를 발출했다.
 이것이야말로 음양사방팔괘술(陰陽四方八卦術)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회혈비의 정수였다.
 “죽어!”
 주열의 일갈과 함께 처음으로 날린 두 자루의 회혈비가 천위에게 꽂혀들었다.
 음양(陰陽)이 각기 목과 아랫배를 노린다.
 한데 천위의 방어는 손목을 까딱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중단을 겨누던 검이 한순간에 위와 아래를 막아냈다.
 따당!
 동시에 천위가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니 사방(四方)은 더욱 지척에 이르러 회전하는 비수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머리와 명치, 그리고 양 어깨를 노리는 회혈비.
 천위는 이번에도 손목을 서너 번 휘젓는 것으로 네 자루의 회혈비를 튕겨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주열은 그제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에게는 동시에 여섯 자루의 회혈비가 튕겨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천위가 회혈비를 막아낸 것은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천위의 서늘한 눈빛이 주열에게 꽂혀든다.
 주열은 아직 세 자루의 회혈비가 남았음에도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 순간 여덟 자루의 회혈비가 팔방에서 꽂혀들었다.
 따당!
 비수를 튕겨내는 소리가 짧다.
 주열의 표정이 한순간 화색을 띄었지만, 이내 검붉게 죽어버렸다.
 천위는 앞을 가로막은 두 개의 비수만 튕겨냈을 뿐이다. 그리고 주열을 향해 일직선으로 뚫린 경로를 그대로 밟으며 내달렸다.
 “크흑!”
 주열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팔목을 더듬었다.
 하지만 천위의 검은 어느새 주열의 목을 꿰뚫을 것처럼 쇄도했다.
 ‘이 새끼는 진짜로 찌른다!’
 주열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푹-
 아프지 않다. 턱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천위는 팔을 들고 있었지만, 검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니 땅에 박힌 검이 보였다.
 “…….”
 주열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천위는 해맑게 웃으며 양 손을 들었고, 천천히 물러섰다.
 “아! 나는 진무회만큼 겁나 대단한 울타리가 없어서 말이지. 차마 죽일 수가 없네. 동기를 죽인 살인마로 인생을 종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너, 너!”
 “후훗, 네 표정을 보니 잔뜩 기대했나본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천위의 비아냥거림이 이어졌지만, 주열의 창백했던 얼굴은 빠르게 화색이 돌았다.
 나를 못 죽여? 그렇다면 쫄 필요가 없지.
 주열은 입매를 비틀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 나는 살인마가 되도 괜찮은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목에서 회혈비가 뽑혔다.
 촤라라락-
 회혈비가 천위의 목을 긋기 위해 원반처럼 회전했다.
 “죽어!”
 주열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꼈던 수치심을 되갚기 위해서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회혈비를 휘둘렀다.
 촤악! 촤악! 촤악!
 양 손에 걸림 회혈비는 공간을 찢어발길 것처럼 사방팔방을 가리지 않고 긁어댔다.
 천위는 미간을 찡그린 채 피하기에 바빴다.
 주열의 혈소는 더욱 짙어졌다.
 마음을 졸이며 피하는 쪽보다 마음 내키는 대로 공격하는 쪽이 오래 버티는 것은 자명했다.
 결국 쓰러지는 것은 네 놈이다.
 광기가 서린 주열의 외침이 공터를 가득 채웠다.
 “죽어! 죽어! 죽어버려!”
 뭐에 홀린 것처럼 공격을 펼치는 사이 주변 풍광에 이상한 것이 섞여들었다.
 ‘응?’
 사람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모두 똑같은 옷을 입었고, 대부분 안면이 있다.
 황룡관도다.
 그 사이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무사부가 보였다.
 ‘왜 저들이 여기에?’
 그러던 중 싱글벙글 웃고 있는 놈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저 새끼가 데리고 온 건가?’
 진소백을 확인하는 순간 주열의 얼굴이 악귀상처럼 일그러졌다. 그 순간 천위가 검을 버리면서 너스레를 떨었던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계략이었던 건가?’
 주열은 그 와중에도 회혈비를 휘두르고 있었다. 한데 지금껏 수세에 몰려 있던 천위가 히죽 웃더니 자신의 팔목을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너무도 쉽게 잡혀버렸다.
 천위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주열의 왼팔을 잡은 채 오른 팔을 어깨 뒤로 젖혔다.
 남무팔단금의 이 초식인 사조식을 펼치려는 게다.
 활시위를 당기던 손이 화살처럼 주열의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꽂혀들었다.
 왼 손을 잡힌 상태로는 피하기도 녹록치 않다.
 쩍!
 따귀를 맞은 것처럼 뺨 전체가 화끈했다.
 하나 천위는 주열의 얼굴을 훑어내는 대신에 덥석 잡아버렸다. 왜소한 녀석이다 보니 주열의 얼굴 절반이 손에 잡힌다.
 “잘 가라.”
 주열에게만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였다.
 “너!”
 천위는 주열의 말을 듣는 대신 녀석의 왼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녀석의 얼굴을 후려치는 기세 그대로 대지를 향해 내리꽂았다.
 빡!
 주열은 얼굴부터 땅에 쳐박혔다.
 천위가 왼 손목을 끝끝내 놓지 않은 탓에 고통은 몇 배로 증가했다.
 “크허헉!”
 주열은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내질렀다.
 천위는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감흥 없이 물러났다.
 그리고는 공터의 입구를 가득 채운 황룡관도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정리됐다.
 이미 무사부를 비롯해 모든 관도들은 주열이 천위를 향해 수십 차례 살수를 펼치는 모습을 목격한 상태였다.
 “모두 돌아가라! 구경났느냐? 에잇! 황룡관 놈들!”
 무사부는 자신의 수업에서 싸움이 났다는 게 불쾌했는지 노기를 드러냈다. 하나 싸움의 원인이나, 뒤처리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무사부가 황룡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쟤가 담천위지?”
 “주열보다 쎄잖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관도들은 주열의 패배보다 천위의 승리를 눈여겨봤다.
 그 중 진무회원으로 보이는 몇몇이 슬그머니 나서더니 주열을 부축했다. 말이 부축이었지 질질 끌고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이 천위를 보는 시선은 의외로 담담했다.
 천위는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바지만, 진짜 거지같은 것들이네.’
 
 ***
 
 진소백이 웃음기를 지웠다.
 녀석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네 말대로 하기는 했는데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린 거야?”
 천위는 진소백을 떠나보내기 직전 어깨동무를 한 채 한 가지를 부탁했다.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진소백은 당시만 해도 당인걸의 일을 정리하기 위함인 줄 알았다.
 천위는 빙긋 웃으며 진소백의 어깨를 두드렸다.
 녀석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나 이미 우대명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확인한 후부터 계획은 세워졌다.
 단순히 당인걸을 두들겨 팬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주열을 끄집어냈고, 녀석을 궁지에 몰아 자충수를 두게 유도했다.
 “주열은 진무회의 하급간부야. 진무회는 물론이고, 주열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천위는 느긋하게 나무에 기대앉았다.
 “뭐 어때?”
 진소백은 여유로운 천위를 보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내 형님이 현룡관에 계시니까 한 번 부탁해볼게. 그러니까 너는 당분간 혼자 다니지 마.”
 녀석의 안색과 말투를 보니 형님이라는 자와 가깝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진소백은 잠룡비원이 아니라 호남진가에서부터 대화할 상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같이 어울릴 사람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검후의 협객지를 탐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을 해보겠단다.
 그냥 두면 근심으로 밤을 지새울 녀석이니 내버려 두기도 안쓰러웠다.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나?”
 진소백은 천위가 갑자기 살인을 거론하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게 나았을 수도 있었겠다. 물론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겠지만…….”
 천위는 순수하기만한 진소백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강호, 아니 검을 쥔 이상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란다.’
 진소백도 잠룡원을 벗어나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녀석에게 검을 쥔 자의 운명을 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천위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냥 죽이면 통쾌하기는 하겠지만, 손해를 보는 건 오히려 이쪽이라고.”
 진소백은 영문 모를 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손해라고?”
 “나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야. 죽여도 상관없지. 네 말처럼 보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을 알고 있는 자들이 있지.”
 “진무회!”
 “그래. 내가 주열을 그냥 죽였다면 진무회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 복수!”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열이 죽었으니 진무회는 복수를 해야 마땅했다.
 그렇지 않으면 회의 결속력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천위는 입꼬리를 올리며 나직이 한 마디를 흘렸다.
 “그러니 굳이 지금 죽일 필요는 없어. 주열이 진무회의 간부라며?”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룡관에 진무회 소속만 여덟이야. 주열이 대표고. 일단은 주열의 수하들부터 조심해야겠다.”
 천위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 생각해봐. 진무회의 간부가 백주대낮에 일반관도를 향해 살수를 펼쳤어. 그것도 수십 회나. 그런데 이게 웬걸! 목격자가 수십 명이네. 어때? 창피하겠지. 개망신이지?”
 “그건 그렇지.”
 “그런데 살수를 펼쳤는데 졌어. 심지어 한 방에 뻗어버린 거야. 진짜 개망신은 이거지. 그리고 이게 진짜 큰 문제야. 진무회라면 어떻게 대응할까?”
 진소백은 그제야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탄성을 흘렸다.
 잠룡비원에 존재하는 사조직은 세 곳이다.
 세 곳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 창천회는 오만하고, 백검회는 치열하며, 진무회는 비열하다.
 
 천위는 진소백이 근심을 훌훌 털어낼 수 있도록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까 주열을 데리고 가던 녀석들 봤지? 화를 내지도 않고, 복수를 다짐하지도 않았어. 같은 진무회인데도 남을 대하듯 하더라. 심지어 어떤 놈은 주열을 비웃었어. 아마도 주열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놈이겠지.”
 진소백이 손을 들더니 외쳤다.
 “나도 알겠다! 이번 일로 아예 복귀 못하도록 주열에 대한 평판을 깎아내리겠구나.”
 천위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 진무회는 주열을 먼저 처리해야 해. 녀석과 선을 그어서 개망신의 그림자가 회에 드리워지는 것만은 막아야 하거든.”
 그제야 진소백의 표정에서 근심의 빛이 옅어졌다.
 “그럼 우리는 시간을 번 셈이구나!”
 천위는 ‘우리’라는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었다.
 “나에 대한 복수나, 징치는 그 후의 일이지. 어찌됐든 주열은 끝났어. 차라리 나한테 죽는 게 속 시원했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떨어질 거다.”
 진소백은 배움을 청하는 사람처럼 경건한 표정으로 천위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천위의 말처럼 진무회는 회의 이름에 먹칠을 한 주열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퇴출은 기정사실이고, 자칫하면 주열의 사문에 압력까지 행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진무회는 그 후에야 백주룡을 영입하든, 천위에게 복수를 하든 선택할 것이 분명했다.
 “하아! 너 잠룡비원에 관심 없지 않았어?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한 거야?”
 천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에게는 떠버리가 있잖아.”
 그 한 마디에 진소백은 납득했다.
 진소백의 말처럼 잠룡비원에 대한 관심은 전무했다.
 오직 잠룡비원을 졸업하여 창천무고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하나 천위의 곁에는 백주룡이 있지 않은가.
 녀석은 매일 같이 옆에 붙어서 잠룡비원에 관해 떠들었다. 대부분 여관도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 사이사이에 사조직에 대한 정보와 그들 간의 세력 다툼도 섞여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천위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녀석한테 가야지.”
 이번 일을 키운 것은 천위였지만, 원인은 백주룡이 아니던가.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백주룡의 상황과 심경도 확인해야 할 터였다.
 “나도 같이 가.”
 진소백은 종종걸음으로 천위를 쫓았다.
 하나 끝끝내 입안에서 맴돌던 질문은 하지 못했다.
 황룡관도라면 누구나 한 수 양보하는 진무회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라.
 평범한 관도가 그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자신이 결코 넘지 못하는 벽처럼 여기던 친형도 저 정도는 아닐 게다.
 불현 듯 천위의 언행과 흡사한 평이 뇌리를 스쳤다.
 창천회와 백검회, 그리고 진무회의 평가를 뭉뚱그리면 천위와 같지 않을까 싶다.
 ‘너는 입관 전에 어떤 삶을 산 거니?’
 # 7장, 활로를 모색하다.
 
 천위는 백주룡을 찾지 못했다.
 황룡관과 그 주변을 탐문했지만, 백주룡을 본 사람이 없었다.
 “난 이쪽으로 가 볼게!”
 진소백이 잰걸음으로 멀어진다.
 천위는 황룡관의 연무장 근처에 서서 불현 듯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가 잠룡비원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졸업만 하면 안녕이다.
 사부와 함께 평생 남무문이나 지키며 살 생각이었다.
 한데 그 굳건하던 다짐이 조금씩 변화했다.
 잠룡비원에 와서 바뀐 꿈, 그로 인해 받아들인 기연.
 그리고 마침내 꿈이 미래를 보여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즐겁고, 두근거렸으며 신기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꿈은 미래를 보여주니 천무대 또한 미래일 터였다.
 ‘빌어먹을 천무대!’
 늙은 자신이 남궁세가의 하급부대에서 빌빌거리는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내가 천무대 따위를 납득할 리가 없잖아!’
 심지어 염화기라는 기연을 얻었음에도 꿈에서 보여준 미래는 천무대였다.
 위기의식이 전신을 옭아맸다.
 이대로 수련에만 집중한다고 해서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가 변해야 했다.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겠어!”
 그때 마주한 것이 당인걸 패거리였다.
 예전의 천위였다면 별 다른 생각 없이 당인걸을 처리했을 것이다. 진무회 역시 자신과 상관없는 조직이라 여기고 무시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 천위는 예전과 달리 본성을 드러냈다.
 무위를 드러냈고, 적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본래 주열이나 당인걸은 천위의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진무회를 다루는 방법 또한 새로울 것도 없었다.
 ‘훗, 옛날 생각나네.’
 천위는 고향에서 사부와 함께 싸웠다.
 적을 상대한 세월만 해도 십 년은 족히 될 것이다.
 정면으로 대결했고, 미끼를 쓰기도 했다. 양동작전으로 섬멸한 경우도 있고, 적과 연합을 맺고, 다른 적을 척살한 횟수도 상당했다.
 그 세월을 버텨온 천위에게 주열이나 진무회는 물정 모르는 초보들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끝낼 놈들은 아닐 테고…….’
 천위는 백주룡이 흘려냈던 잠룡비원의 정보를 떠올렸다. 잠룡비원은 사부와 관도로 구성되지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쪽은 오히려 사조직이었다.
 창천회, 백검회, 진무회.
 각기 천룡관도와 지룡관도들을 주축으로 잠룡비원에서 주인처럼 군림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인맥은 명예, 무력, 금전을 가리지 않고 거미줄처럼 얽혀 있을 터였다.
 강호의 축소판이라는 평은 농담이 아닌 것이다.
 천위는 그 중 한곳과 적대관계가 되었지만,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셋 중에 제일 약한 거면 별 볼일 없는 거지.’
 한데 낯선 시선이 사방에서 꽂혀든다. 황룡관의 관도와 하인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소문이 돌았나 보다.
 한데 그 중에서 유독 탐색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관도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주열을 두들겨 팼을 때에도 지켜보던 녀석이다.
 ‘쟤가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는다고 해서 이름이 생각날 리가 없다.
 관도를 살피던 중 녀석의 무복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가슴 어림에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킨 문양이 보였다. 황룡관의 관도 중 그 누구도 저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잠룡비원에서 지급한 무복을 마음대로 개량하는 것은 징계를 부르는 행위였다.
 누군지도 모르겠고, 문양의 정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예상할 수 있었다.
 ‘혹시 저게 백검회인가?’
 백주룡의 정보에 따르면 백검회는 황룡관에서 두 명의 관도를 입회시켰단다. 창천회와 함께 잠룡비원을 양분한 백검회라면 무복의 변형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잠시 후 한 명의 관도가 더 합류했다.
 그 역시 같은 문양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두 관도는 천위를 바라본 상태로 대화를 나눴다.
 그 중 한 명이 천위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천위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린 후 돌아섰다.
 ‘주룡과 대화하기 전에는 저들과 엮이지 않는 게 나아.’
 발길을 인적이 드문 황룡관의 후원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백주룡이 있었다.
 “왔냐?”
 백주룡은 아직 소문을 듣지 못했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천위를 반겼다.
 “아까는 없더니?”
 “괜찮은 곳이 있다고 해서 답사하러 갔었어. 이번에도 말짱 황이었지만…….”
 이번에도 여관도를 훔쳐보러 갔었나 보다.
 남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왔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데 녀석을 타박하려다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보였다. 언제나 생기발랄하던 녀석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무슨 일 있냐?”
 백주룡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나 일부러 짓는 표정인 것이 태가 난다.
 “그 때부터였냐?”
 천위는 백주룡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말을 보탰다.
 “일전에 나한테 땀 닦으라고 면포 던진 날. 그 날 생각할 게 많다며?”
 백주룡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건 네가 생각할 게 많다니까 따라 한 것뿐이야.”
 천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진무회와 붙었다.”
 백주룡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진무회! 네가 진무회랑 왜?”
 천위는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백주룡에게 전했다. 백주룡은 눈을 휘둥그레 뜨기도 하고, 탄식을 쏟아내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그걸 내가 봤어야 했는데! 아깝다. 아까워!”
 “됐고,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백주룡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간의 일을 풀어냈다.
 얼마 전 진무회가 영입을 타진했고, 허주평을 주축으로 입회를 종용했다고 한다. 사실 백주룡은 진무회와 백검회 두 곳에서 입회를 권유받았다.
 하나 백주룡은 양쪽 다 거절했다.
 백검회는 순순히 물러난 반면 진무회는 끈질겼다.
 허주평과 주열은 번갈아가며 백주룡에게 입회를 종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온 주열은 은근한 어조로 백주룡을 협박하기까지 했단다.
 “나를 잠룡비원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천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주열의 협박 내용을 들으니 더 때려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무회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넌 문사부들한테 찍혔고, 뒷배가 그리 빠방한 것도 아니니까.”
 창궁백가에 포함되지 않은 속가.
 변경의 이름도 생소한 남무문이라는 곳의 제자라면 언제 쫓겨나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천위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고민했던 거냐?”
 “나 때문에 네가 쫓겨나는 건 좀 그렇잖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
 “어이구! 그냥 뒀으면 나를 위해 진무회에 가입했겠구나!”
 천위의 너스레에 백주룡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 가입해서 무슨 꼴을 당하라고.”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백주룡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너한테 소개장이나 한 장 써주려 했지. 예를 들면 하오문?”
 천위가 코웃음을 쳤다.
 “하오문에서 네 소개장을 퍽도 받아주겠다!”
 백주룡은 그제야 쓴웃음을 지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안받아주면 어쩔 수없이 백검회에 가입했겠지. 또 내가 우정과 의리를 빼면 시체지 않냐?”
 천위는 백주룡의 거만한 한 마디를 귓등으로 흘렸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는 진무회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백검회도 싫어하는 것 같다.”
 “싫은 건 아니고. 벌써부터 편먹고 으쌰으쌰하는 체질이 아닐 뿐이야. 어린놈들이 꿈과 희망을 버린 채 어른 놀이하는 건 우습잖아?”
 백주룡의 생각은 천위와 상당 부분 일치했다.
 ‘여자 문제는 빼고.’
 저 녀석에게도 말 못하는 과거와 비밀이 있을 게다.
 천위와 마찬가지로 백주룡 역시 졸업장만 받고 떠날 것처럼 잠룡비원을 대했기 때문이다.
 궁금했지만 애써 캐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얘기하지 않겠는가.
 백주룡은 창공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까?”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간에 ‘우리’를 참으로 좋아하는 듯싶다.
 천위는 바위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뭘 어떻게 해? 그냥 열심히 사는 거지.”
 백주룡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설마 네가 머리를 굴린 건 주열이 한계였냐? 만약 그렇다면 소개장 안 써준다.”
 녀석의 소개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이대로 바보 취급을 당하는 건 더욱 굴욕이다.
 “너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치자.”
 “치는 게 아니라 많아.”
 백주룡의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녀석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음을 전하기 부끄러워서, 또는 신분이 달라서 혼자 끙끙 앓고 있는 것뿐이야. 내 고향에서 저잣거리만 나가도 추파를 던지는…….”
 천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백주룡의 헛소리를 흘려버렸다.
 흔들린 내색을 하지 말자. 녀석의 되도 않는 말에 휘둘린다면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자백하는 셈이다.
 “됐다. 네 수준에 비유는 개뿔!”
 “비유라니? 진짜라니까. 내가 저잣거리에…….”
 천위는 뒷목을 잡으며 황급히 녀석의 말을 끊었다.
 “알았어. 알았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앞으로의 계획에 관하여 이것저것 논하고 싶은 마음이 흙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천위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도 뭐 하나 만들까? 남무회 어때?”
 “못들은 걸로 하마.”
 “야박한 자식. 난 오늘 너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백주룡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 걸.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지 않았을까 싶다.”
 “왜?”
 천위는 별 생각 없이 물었지만, 백주룡은 회한 어린 눈빛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관하기 전에 많이 봤거든. 너 같은 사람.”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싸우는 게 일상이 되어서 오히려 휴식이 불안한 사람들. 일단 내 사부부터 그런 사람이었거든. 어릴 때부터 참 많이 봤지.”
 천위는 자신의 과거를 들킨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강하고, 약함의 차이는 있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눈빛이 달라. 잠룡비원의 천룡관도와 지룡관도가 어떨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너는 황룡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을 지녔거든. 그런 네가 당인걸이나 주열하고 드잡이 질을 했다고?”
 백주룡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내 눈이 잘못됐다면 하오문주라는 원대한 꿈을 포기하마!”
 천위는 대꾸할 말이 없으니 툴툴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넌 그래도 하오문주는 안 될 거야.”
 백주룡은 천위가 자신의 식견을 인정하자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가자.”
 “어디를?”
 “너도 알잖아. 진무회랑 척을 진 이상 그냥 시간만 축내는 건 위험해.
 백주룡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함께 백검회로 가자.”
 반면 천위는 백주룡의 진지함이 무색할 정도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백검회가 어디 야유회나 다니는 친목단체냐? ‘어서 오세요.’ 하고 받아줄 것 같아?”
 하지만 백주룡은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해결책이라고 해봤자, 별 거 있겠어? 나는 네가 생각한 방책도 백검회라는데 다시 하오문주의 자리를 걸겠다! 아니라면 내가 양보하마!”
 진짜 하오문의 문주가 보면 뒷목을 잡을 정도로 하오문주라는 자리를 가볍게 사고파는 녀석을 보라.
 천위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검회가 해결책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적이 된 진무회는 구성원조차 비밀에 쌓여 있었다. 그런 놈들과 전면전을 치루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백검회의 그늘에 들어가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천위는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눈앞의 쉬운 길이 반드시 옳은 것일까?
 ‘이미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잖아.’
 
 지금껏 수련에만 집중하면 꿈은 이뤄진다고 믿었지만, 결국은 천무대라는 잡무 처리 조직의 말단 조원이 되지 않았던가.
 꿈은 미래를 보여주고, 그것은 곧 기연이다.
 고금제일의 무인도 이런 기연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니 감사하게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잠룡비원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던 천위가 아니라 남무관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천위로 돌아가야 했다.
 “백검회에 가입할 방법은?”
 천위의 말에 백주룡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걸 내가 어찌 아냐? 정보는 내가 모아올 테니 방법은 네가 찾아라. 아까 진무회 상대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머리 잘 쓰더라. 아끼면 똥 되는 머리, 거기에나 써라.”
 뒷말은 무시하자. 저 녀석 말이야 말로 똥이다.
 한데 정보 운운하는 내용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저 녀석은 갑자기 왜 체계적인 척을 하는 것일까?
 여자를 훔쳐볼 때가 아니면 효율과 담을 쌓은 녀석이 아니던가.
 천위의 멍한 표정을 본 백주룡은 단호하게 말했다.
 “반드시 백검회에 가입할 방책을 찾아라.”
 저 결의에 가득 찬 표정과 말투는 뭐지?
 불안하다. 저 녀석 입에서 나올 말이 예상된다.
 하지만 천위가 만류하기도 전에 백주룡의 진지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현룡관도가 되면 합법적으로 여관도와 만날 수 있어!”
 한 순간 머릿속이 짜증으로 가득 찼다. 주열과 당인걸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한 살의가 솟구쳤다.
 “너! 이 새끼.”
 천위의 표정을 본 백주룡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더니 딴 소리를 늘어놨다.
 “백검회에 가입하면 현룡관으로 승급하지 않겠냐? 내 말은 그러니까 미리미리 준비를 하면 좋겠다는 심경을 친구인 네게…….”
 백주룡은 천위의 주먹을 피해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몸을 날려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소림으로 갔어야 해! 혈기왕성한 나이에 여자 얘기만 나오면 주먹질이라니! 여자가 그렇게 싫으면 남자로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천위는 기죽지 않고 수다를 늘어놓는 백주룡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아! 저 자식이랑 있으면 이상하게 즐거운 만큼 지친단 말이지.’
 백주룡은 천위가 몸에 힘을 빼자 그제야 슬그머니 다시 다가왔다.
 “소백하고 같이 있었다며. 어디 갔냐?”
 “너 찾으러 갔다. 그리고 저기 왔네.”
 천위는 때마침 공터로 들어서는 진소백을 가리켰다.
 진소백은 안쓰러울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지금껏 백주룡을 찾기 위해 쉬지도 않고 찾아다녔나 보다. 녀석은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백주룡을 향해 다가왔다.
 “너 괜찮아?”
 백주룡은 슬쩍 얼굴을 붉히더니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뭐라는 거야. 물이나 마셔!”
 그리고는 슬그머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도 우리랑 백검회나 가자.”
 진소백은 갑작스런 제안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백검회는 갑자기 왜?”
 천위가 빙긋 웃으며 농을 했다.
 “여자 꼬시러 간다. 됐냐?”
 백주룡은 천위의 말을 듣자마자 신이 나서 외쳤다.
 “일단 내가 백검회에 관한 정보를 모아 볼게.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엉덩이라도 비벼볼 수 있지 않겠냐?”
 천위가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너! 또 백검회의 여관도들 명단이라도 구해오면 죽을 줄 알아!”
 “내가 여자에 빠져서 친구도 버릴 놈으로 보이냐?”
 “응.”
 “이 새끼! 쓸데없이 단호해가지고 말이야.”
 천위와 백주룡은 물어뜯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진소백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내가 알아볼게.”
 백주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검회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진소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는 아니고, 내 동생이 백검회랑 친해.”
 천위는 백주룡이 거론했던 진소백의 신상내력을 떠올렸다. 형과 여동생이 있었고, 두 사람은 다 진소백과는 다르게 현룡관의 관도가 되었다고 했다.
 천위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 이름이 아마…….’
 백주룡의 눈동자가 기광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마치 섭혼술에 걸린 사람처럼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진소희! 진소백보다 한 살 어린 동생으로 하남진가의 가주가 만금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장중보옥. 천덕꾸러기인 진소백과는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지! 일례로 진소희는 열두 살에 가문의 보물이라는 백홍쌍검을 선물로 받았을 정도야. 진소백과는 다르게 이미 백홍쌍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일류가 되었음. 스물이 되기 전에 절정의 경지도 가능하다는 평!”
 이번에도 타인의 신상내력을 술술 풀어낸다.
 ‘와! 저 자식, 진짜 정체가 뭐지?’
 천위가 감탄하는 사이에 진소희라는 여아의 평은 외모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소 작은 키에 성격은 다소 괄괄하지만, 외모만은 하남에서 세 손가락…….”
 퍽!
 천위는 입술을 오므린 채 탄성을 흘렸다.
 “오호!”
 진소백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백주룡은 얼굴이 절반이나 돌아간 상태로 입술을 삐죽였다.
 “아, 때린 놈이 당황해하는 이 상황은 뭐지?”
 진소백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백주룡의 뺨을 짓누르고 있는 주먹을 뗐다.
 “미, 미안.”
 백주룡은 창졸간에 얻어맞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천위야.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천위는 대답 대신 녀석의 반대편 뺨을 가볍게 어루만져주었다.
 퍽!
 대답은 진소백의 몫이다.
 “내 동생은 건드리지 마!”
 백주룡은 양 손으로 뺨을 감싼 채 눈을 끔뻑였다.
 “본 적도 없다만…….”
 “넌 인기가 많아서 따르는 여자도 많잖아!”
 천위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닐 거다.’
 진소백은 울상이 되어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내 동생은 쳐다보지도 마. 내 동생은 착해서 너한테 홀라당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내 동생은 건드리지 마!”
 ‘아마 그것도 아닐 거다.’
 백주룡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만…….”
 역시 녀석의 변명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진소백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노골적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지금 발언은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걸?”
 백주룡의 퉁명스런 대꾸에도 진소백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좋은 친구와 좋은 제부는 다르니까.”
 천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허물없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느긋함이 전해졌다.
 
 ***
 
 그날 밤도 여지없이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천무대(千務隊)가 되어 강호를 종횡하는 미래가 이어졌다. 물론 전마(戰馬)를 타고 검을 휘두르는 멋들어진 강호행은 아니었다.
 천무대가 발견한 염화애의 기연은 천위가 가로챈 상태 가 아니던가. 그러니 저들의 삶에 염화애의 동굴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들의 행색은 전과 다르지 않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어제가 오늘로 이어졌다.
 한데 늙은 천위의 복장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조원으로 시작한 꿈이 조장으로 바뀌었다.
 염화기를 얻은 탓에 미래가 조금은 나아졌나 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드디어 천무대의 대주가 되었다.
 백 명의 무인을 거느리는 대장!
 그것이 대주라는 직위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아.’
 대주라고 해봤자 짚으로 만든 신발이 가죽으로 변했고, 낡은 무복의 소매에 문양 몇 개가 추가됐을 뿐이다.
 그나마 조원들보다 덜 거지같아 보이는 것이 다행일까.
 ‘어?’
 천위는 천무대를 내려다보다가 탄성을 흘렸다.
 늙은 자신의 곁에 서있는 두 명의 무인은 다름 아닌 백주룡과 진소백이 아닌가.
 백주룡에 이어 진소백까지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녀석들은 각기 부대주의 표식을 달고 있었다.
 ‘이거 반가우면서도 미안한 걸?’
 저들의 미래 또한 자신과 얽히는 순간 바뀌었을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미 결정된 것을 어쩌겠는가.
 ‘최소한 백주룡은 나 때문에 부대주라도 됐겠지.’
 꿈속에서 녀석의 꿈이 이뤄지지 않아서 내심 안도했다.
 늙은 자신이 천무대에서 빌빌거리는 동안 백주룡이 하오문주라도 됐다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지 않겠는가.
 어찌됐든 백주룡과 진소백의 영향인지 늙은 나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천위의 표정 또한 예전보다 훨씬 평온했다.
 ‘나아지고 있어.’
 한데 천무대가 하는 일을 확인하는 순간 평온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공터에는 혈전(혈전)을 치른 흔적이 역력했고, 시신과 부러진 병장기가 가득했다.
 아마도 산적들의 산채였던 곳으로 여겨졌다.
 천무대의 무인들은 창고에서 양곡을 짊어졌고, 금은보화가 든 상자를 감싸 안았다.
 ‘뒤처리라도 하는 거냐?’
 한데 무인들의 표정이 사뭇 밝다.
 몇몇은 부러진 병장기 중에서 쓸 만한 것을 챙겼고, 간혹 시체의 품을 뒤지는 자도 있지 않은가.
 천위는 그 모습에 한 숨을 내셨다.
 ‘진짜 내가 대주가 됐는데도 저 구질구질함은 변하지 않는 건가?’
 그 순간 백주룡이 미간을 찡그리더니 시신을 뒤지는 무인을 향해 외쳤다.
 “야! 임마.”
 천위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목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지금껏 꿈속에서 마주했던 모든 것은 눈으로만 확인이 가능했다. 그 외의 감각은 차단되었기에 미루어 짐작하는 것만이 가능하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 이 순간 백주룡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린 것이다.
 염화기를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변하려 했기 때문일까?
 명확한 것은 꿈 또한 변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천위가 가슴 벅찬 감동과 놀람에 휩싸인 사이 백주룡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방금 그거 금환(金環)이지? 그거 가지고 와. 아주 그냥 말단 놈이 꿍치는 것부터 배워가지고! 맞고 가져올래? 그냥 가져올래?”
 한순간에 감흥이 사라졌다.
 천위는 백주룡을 보며 혀를 찼다.
 ‘어쩜 저리도 변하지 않았냐.’
 한데 늙은 천위도 백주룡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천위가 바라던 것처럼 타박을 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내놔.”
 천위는 입을 벌린 채 넋을 놓았고, 백주룡은 도리질을 쳤다.
 “내놔.”
 늙은 천위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자, 백주룡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금환을 건넸다.
 천위는 두 사람의 한심한 모습에 한 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진소백은 낡아빠진 서책을 쥔 채 홀로 히죽거렸다.
 ‘이건 뭔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
 투덜거리는 사이에 시야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현실로 돌아갈 시간인가 보다.
 한데 예전보다 마음은 훨씬 편안했다.
 ‘하아, 한심한 놈들 때문에 앞길이 깜깜하구나.’
 
 ***
 
 소녀의 피부는 또래보다 고왔고, 이목구비는 색목인의 그것처럼 또렷했다. 서글서글한 눈망울이 조금만 흔들려도 뭇 사내들의 심금을 울릴 만큼 아리따운 소녀였다.
 한데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황룡관을 오가던 관도들은 소녀의 수려한 외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구지? 귀엽잖아.”
 “황룡관에 여자가 있었나?”
 슬픈 중얼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소녀는 황룡관도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선은 정면, 두 손은 허리춤에 매인 두 자루의 검배에 닿아 있었다.
 “현룡관이네.”
 누군가 소녀의 무복을 살피고 한 숨을 내쉬었다
 현룡관도라는 말에 관도들은 누구 하나 할 것없이 시선을 돌리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저긴가?’
 소녀는 황룡관도들의 처소를 지나 후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후원에 모여 있는 세 명의 관도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소녀의 붉은 입술을 살포시 벌어졌고, 날카로운 일갈이 터져 나왔다.
 “어떤 새끼가 우리 오빠한테서 돈 뺐었냐?”
 # 8장, 남궁세가의 몰락.
 
 “죄송합니다.”
 두 손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는 순간 다시 한 번 저 대사가 튀어나온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현룡관도에게서 볼 수 없는 겸양 어린 모습이 아닌가.
 “저는 하남진가의 소희라고 합니다. 초면에 결례가 많았어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릴 게요.”
 그럴 줄 알았다.
 공터에 난입하더니 진소백의 앞을 가로막고 검을 뽑던 순간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오해가 있었나 보네.”
 진소희(秦小禧)의 거듭된 사과가 부담스러워서 던진 한 마디였다. 한데 그녀의 반응은 단순히 사과를 받아줬다는 기쁨 이상의 것이었다.
 “천위 오라버니시죠?”
 천위는 자신을 알아본 것보다 그녀의 말투가 더 낯설었다. 마치 이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편안하고, 다정한 말투가 아닌가.
 “맞는데.”
 떨떠름한 말투에 대한 대응 또한 가관이다.
 진소희는 갑자기 배꽃처럼 하얗고 싱그러운 얼굴로 홍조를 띠더니 배시시 웃는 것이 아닌가.
 “헤헤, 그럴 줄 알았어요.”
 일견하기에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그녀의 호의적인 모습을 마냥 순수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어딘가 모르게 작위적인 모습이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진소희는 갑자기 안쓰러운 표정을 짓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소백 오라버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부디 돈도 뺐지 마시고, 심부름도 시키지 마시고, 심심하다고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천위는 눈을 끔뻑였고, 진소백은 손으로 눈을 감싼 채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친구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진소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진소백을 노려봤다.
 “지금껏 오라버니가 친구라고 데리고 왔던 사람들을 생각해 봐. 술주정뱅이, 왈패, 도박꾼. 또 누구였지? 하여간 그런 사람들한테 매번 휘둘리니까 내가 오해를 안 하게 생겼어?”
 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아하!”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진소백은 남의 일이라면 나서지 못해 안달이 아는 녀석이다. 저 녀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순간에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진소희가 어째서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는 오라비의 말에 격분해서 여기까지 한 달음에 달려왔는지도 말이다.
 진소백은 천위와 백주룡의 시선이 꽂혀들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나쁜 애들은 아니야. 다 나름 사정이…….”
 천위와 백주룡이 동시에 외쳤다.
 “그게 봉이야.”
 진소백은 반박할 말이 없는지 의기소침한 상태로 주저앉았다.
 진소희는 그런 오라비를 다독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저분들은 좋은 사람 같아. 오라버니도 잠룡비원에 온 이상 새롭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잘 지내 봐. 지난 일은 모두 안녕! 남자라면 이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한데 오라비를 위로하던 진소희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잖아? 내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저거 우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 맞지?
 진소희의 얼굴과 어울리는 대사는 아니었지만, 오라비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어여쁘기 그지없다.
 백주룡이 가슴을 쫙 펴고 나서며 말했다.
 “소희라고 했던가? 소백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잘 보살펴 줄게. 나와 함께 지내면 소백도 금세 진짜 남자가 될 수 있어!”
 천위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그 방법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겠지?’
 한데 진소희와 자신의 마음이라도 통한 것일까?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인다. 마치 처음 공터로 난입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당신,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마. 우리 오빠한테 이상한 짓 가르치면…….”
 진소희는 말끝을 흐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댔다.
 검신을 가볍게 두드리는 모습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백주룡은 눈을 끔뻑이다가 천위를 돌아봤다.
 그리고 얼굴을 손으로 감싸더니 물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천위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진소희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현룡관에 소문이 파다해. 매일같이 현룡관을 훔쳐본다는 사람. 그거 당신이지?”
 백주룡은 당당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잘못된 소문이야.”
 진소희가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백주룡의 말이 이어졌다.
 “훔쳐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하지만 언젠가는 성공할 거야.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거든.”
 엄지를 추켜세우며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잖아.
 그 순간 진소백의 곁에 있던 진소희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라 빠르게 이동하면서 잠시 잔영이 남았나 보다.
 천위는 진소희를 쫓으며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빠르다.’
 일견하기에도 경공과 비도술을 자랑하던 주열보다 빠르고 간결했다.
 진소희는 백주룡의 지척에 이르자,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검을 뽑았다.
 검의 궤적으로 보아 백주룡의 목을 노린다.
 비록 경고의 의미겠지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챙-
 진소희의 검은 백주룡의 목이 아닌 허공을 겨눠야 했다. 천위가 검집을 비스듬히 내지르면서 진소희의 검을 튕겨냈기 때문이다.
 “아…….”
 천위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오라비 친구에게 검을 겨누면 안 되지.”
 진소희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누구한테 밉보였어요?”
 뜬금없고, 당돌한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 않으면 제 검을 막을 실력으로 황룡관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천위는 피식 웃으며 검집을 거뒀다.
 “그냥 잠룡비원에 가면 된다고 해서 왔을 뿐이야.”
 진소희의 눈동자에 묘한 호기심이 드리워졌다.
 “그렇군요. 어쨌든 오라버니 말씀처럼 무례한 행동이었네요. 앞으로는 조심할 게요.”
 뭘 조심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 자주 볼 사이도 아닌데 세세하게 캐묻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천위가 물러나려는 순간 백주룡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썼다.
 “잠깐! 사과의 대상이 잘못되지 않았어?”
 진소희는 퉁명스런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신하고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백주룡은 어이없는 표정을 천위를 노려봤다.
 “다시 잠깐! 왜 쟤는 오라버니고, 나는 당신이야?”
 하나 진소희는 쀼루퉁한 표정을 시선을 돌릴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진소백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미안하다. 연년생이라 조금 버릇이 없어. 나도 동생이지만, 친구처럼 지내고 있으니 이해해라.”
 “아니! 그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버릇에 일관성이 없냐? 지금 나 명백하게 차별 받고 있거든?”
 백주룡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공터에는 묘한 침묵만 지속됐다.
 진소희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물었다.
 “혹시 내가 마음에 들어요?”
 백주룡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 나는 좀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까 서로 신경 끊고 살도록 하지요?”
 백주룡은 울상을 지었다.
 “내가 생각하던 여동생은 저런 애가 아니었어.”
 
 ***
 
 백주룡과 진소희의 관계가 그렇게 정리됐다.
 진소희는 진무회의 일을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검회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는 알겠어요. 제 친구가 있으니 말을 전해놓을 게요.”
 그녀는 천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한데 백검회는 황룡관의 관도를 신경 쓰지 않아요. 가입도 권유하지 않아요. 쉽지 않을 거예요.”
 백주룡이 손을 번쩍 들더니 말했다.
 “나한테 가입하라고 하더라. 나 권유받았어!”
 진소희는 백주룡의 자랑을 귓등으로 흘렸다.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백주룡을 다루는 방법이 능숙하다. 천위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진소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창천회든, 백검회든 이미 정비가 끝난 상태에요. 지금쯤 친목을 도모하면서 남을 비웃기 바쁘겠네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란 추천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거예요.”
 진소백는 백주룡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천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쪽은 어찌어찌해서 가입할 수도 있겠지요.”
 백주룡이 미간을 찡그리며 외쳤다.
 “어찌어찌라니! 백검회에서 나한테 대놓고 가입권유를 했다니까? 내가 거절한 거야!”
 진소희는 거드름을 피는 백주룡을 보며 혀를 찼다.
 “거절했더니 그냥 갔어요?”
 “응.”
 “백검회에서 진짜 인재라고 생각했다면 과연 한 번만 권유하고 말았을까요?”
 백주룡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끔뻑였다.
 진소희는 양 허리에 손을 얹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세 번이나 권유받았어!”
 백주룡은 다시 바람 빠진 가죽 공처럼 짜부라졌고, 진소희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소백 오빠는 하남진가의 이름을 대면 퇴짜 맞지는 않을 거예요. 본가의 성세가 예전 같지 않지만, 이름값은 소중하니까요. 진가의 차남이라면 머릿수를 채우려는 의미로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소백 또한 백주룡처럼 짜부라진 상태로 중얼거렸다.
 “좋은 말 같지만 자존심 상한다.”
 “다 잘 되라고 하는 말이잖아! 그러기에 평소에 잘했어야지. 황룡관을 개선시키겠다는 허황된 협의지심 때문에 이게 뭐야?”
 백주룡은 진소백을 흘겨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풉! 설마 너 일부러 황룡관에 온 거냐? 어쩐지 하남진가의 직계가 현룡관이 아닌 황룡관에 어인 일인가 했는데…….”
 진소백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남들도 그럴 줄 알았지. 검후께서 그런 식으로 정사지간의 방파들을 교화하셨거든. 그런데 생각처럼 쉽지는 않더라. 그러니까 내가 못한 거야. 검후의 방식이 틀린 게 아니라고!”
 “검후 이야기는 아무도 안 꺼냈다.”
 “크흠.”
 백주룡의 퉁명스런 대꾸에 진소백은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러자 천위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진소희는 일단 한 숨을 흘리며 머뭇거렸다.
 “백검회에 입회한다는 건 자연스럽게 현룡관도가 된다는 뜻이에요. 백검회의 명성 때문이라도 황룡관에 회원을 버려두지는 않을 테니.”
 그녀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뻔했다.
 “창궁백가에도 없는 속문을 받아주면 명성에 누가 된다?”
 진소희는 물론이고, 백주룡과 진소백도 천위의 사문인 ‘남무문’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지 않았다.
 남궁세가는 속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준에 미치지 못함에도 제자를 받아들이곤 했다. 그러니 본래 창궁백가에 속하지 못한 속문의 제자가 잠룡비원에 입관한 것만으로도 소문이 무성할 터였다.
 그런 관도들의 끝은 수십 년 간 동일했다.
 황룡관도로 입관하여 황룡관도로 졸업한다.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법칙과도 같았다.
 “쉽지 않을 거예요.”
 결국 세 사람은 수긍 아닌 수긍으로 천위의 질문을 피해야했다.
 한데 진소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쉽지 않다는 거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강호는 누가 뭐라 해도 강자존의 법칙으로 굴러가잖아요.”
 천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훗, 난 백검회 앞에서 검무를 추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진소희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배시시 웃는다.
 왠지 모르게 천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헤헤, 처녀는 제일 비쌀 때 시집가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칼춤이나 추는 건 값어치를 떨어트리는 일이라 생각해요.”
 백주룡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천위에게 집중하는 진소희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쯧쯧, 어린 여자애가 말투 봐라. 나중에 누가 데려가려나?”
 진소백이 미간을 찡그리더니 백주룡의 어깨를 밀쳤다.
 “누가 데려가든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동생 건드리지 마!”
 백주룡은 한 숨을 내쉬며 가슴을 두드렸다.
 “하아, 이 답답한 놈을 어떻게 사람 만들어야 하나?”
 그 순간 진소희의 고개가 돌아가더니 서늘한 눈빛이 꽂혀든다.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말랬지?”
 
 백주룡은 헛웃음과 코웃음을 번갈아 치며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겁니까?”
 신도, 천위도, 그리고 진가의 남매도 백주룡의 넋두리를 신경쓰지 않았다.
 “비유가 조금 적극적이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네. 방법이라도 있어?”
 진소희는 밥을 들고 온 주인을 보는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요. 아직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큰 행사가 열릴 거예요.”
 “행사?”
 천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룡비원의 행사라면 입관 후 일 년이 되던 때 대대적으로 치루는 창궁삼신제(蒼穹三神祭)가 있다. 남궁세가에서 직접 준비하는 창궁삼신제는 잠룡비원의 관도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행사였다.
 진소희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발표하려는 순간 백주룡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잠룡대연이 열릴 거다! 본래 천룡관도와 지룡관도를 중심으로 친목 도모 겸 벌이는 연회라고 알려졌지. 하지만 실제로는 남궁세가의 직계도 참석할 정도로 유력무가의 제자라면 죄다 모여서 누가 잘났고, 누구한테 빌붙어야 할까를 정하는 자리야.”
 녀석의 히죽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일부러 틈을 보다가 진소희의 말을 끊었나 보다.
 진소희는 얼굴을 붉히며 분개했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런데 현룡관이나 황룡관의 관도들은 잠룡대연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한데 올해에는 누가 귓 바람을 넣었는지 소규모 비무제를 연회에 포함시켰어요.”
 진소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무제가 있어도 우리랑은 상관없잖아.”
 진소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비무제 참가에는 자격 제한이 없어요. 누구나 참가할 수 있지요. 다만 참가하려면 비무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아! 그 정도의 정보력도 없고, 인맥도 없으면 끼일 생각도 하지 마라는 뜻인가?”
 진소백이 탄성을 흘리자, 진소희가 코웃음을 쳤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애들은 원래 남을 평가하지 못해서 난리잖아.”
 한데 천위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비무제에 참가해서 힘껏 싸워봐라?”
 진소희의 눈동자에 묘한 기대감이 어렸다.
 “혹시 천위 오라버니가 우승이라도 하면 백검회가 아니라 창천회가 달려들지도 모르지요.”
 백주룡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승? 개나 소나 참가하는 비무제가 아니야. 지룡관, 아니 천룡관도가 참가할 수도 있다고. 자칫하면 진무회를 피하려다 다른 놈들과 원한을 맺을 수도 있어.”
 하긴 정파의 제자라고 해서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개인의 싸움도 친구, 문파까지 확대되는 것이 명문이라는 정파의 방식이었다.
 천위는 묘한 호승심에 휘감겨 입꼬리를 올렸다.
 “우승이라도 하면 진짜 난리가 나겠군.”
 백주룡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키득거리며 말했다.
 “크큭! 네가? 거기 참가하는 놈들은 주열하고 급이 달라. 잘난 척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잘난 놈들이라고. 적당히 재주를 보이고 어우러지는 게 상책이야.”
 하지만 진소희는 웃음기를 잃지 않는 천위를 남몰래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과연 그럴까?’
 진소희는 천위가 자신의 검을 밀어내던 순간을 떠올렸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도 쉽게 검로의 궤적을 들켜버린 것이다.
 하남진가의 비전은 신조공(迅造功)으로 축약된다.
 신조공은 내력을 폭발적으로 운용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검법도 보신경도 모두 극쾌(極快)를 대성으로 보았다.
 결국 하남진가의 흥망성쇠는 가원들이 신조공을 얼마나 익혔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당금 진가의 가주는 신조공의 성취가 오성에도 미치지 못하여 창궁백가에서 오십 위 밖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다음 대는 달랐다.
 진가의 적통인 진대백과 장중보옥이라 불리는 진소희.
 남매는 태중에서부터 신조공을 수련한 사람처럼 빠르게 성취를 늘렸다. 약관이면 당금 가주의 성취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평도 있었다.
 그런 진소희가 펼치는 신조검법이 막힌 게다.
 천위가 가볍게 내지른 한 수에 말이다.
 ‘큰 오라버니가 말하길 현룡관도 중에는 적수가 없다고 했어.’
 그녀는 스스로 진대백과의 격차를 종이 한 장 두께 정도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천위에 대한 평가는 더욱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사람이 어째서 지금까지 눈에 띠지 않았을까?’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다.
 저 정도로 날카로운 송곳이라면 잠룡비원 전체가 요동을 칠 것이다.
 그리고 잠룡대연은 그 무대가 될 것이다.
 
 ***
 
 잠룡대연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장소는 잠룡비원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창궁대전이고, 관도라면 누구나 참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황룡관의 관도들은 잠룡대연의 존재조차 모른 채 평소와 같은 일상을 이어갔다. 저들끼리 시기하고, 이간질하며 편을 가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고사가 떠오를 정도였다.
 천위는 황룡관도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아예 관심이 없었으니 감정의 유무 또한 무의미할 터였다.
 ‘수련할 시간도 없다.’
 백주룡은 본업에 집중했다.
 진무회의 동향을 주시했고, 잠룡대연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 중 백주룡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잠룡대연을 거창하게 개최하는 연유에 관해서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남궁세가까지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다른 정보를 물어왔다.
 “야! 예전에 필검에 관해서 물어봤었지?”
 천위에게 있어서 필검이란 지나간 과거에 불과했다. 이미 꿈은 미래를 보여준다고 확신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 말은 곧 꿈에서 보았던 필검 장취우의 언행 또한 언젠가 현실이 될 것을 의미했다.
 “그랬지.”
 백주룡은 천위의 심드렁한 말투에도 개의치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더니 의외로 뒷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실제로 필검 장취우의 공적은 대단하지만, 남의 피와 살로 쌓았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더라.”
 “지금은 상관없어.”
 어차피 지나간 사람이고, 오히려 다시 만나게 될까 두려운 존재였다.
 천무대도 싫고, 진무대도 싫다.
 남궁세가의 바닥에 얽매인 미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내일을 살고 싶었다.
 한데 백주룡은 어렵게 정보를 알아냈을 텐데도 순순히 수긍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 죽었으니까.”
 천위의 검이 허공을 베던 중 주춤거렸다.
 “죽었다고?”
 “응, 좀 어이없이 죽어버렸지. 작은 산채를 점령하다가 의문의 적에게 목이 잘렸단다. 마인이라는 소문도 돌던데, 정확한 건 저쪽 사람들이 잘 알겠지.”
 백주룡은 남궁세가가 있는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끝냈다.
 천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필검 장취우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기보다 신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내 미래가 바뀌듯 그의 미래도 바뀐 건가?’
 
 ***
 
 꿈은 바뀌지 않았다.
 늙은 나는 여전히 천무대주였고, 두 녀석은 부대주의 자리에 만족해하며 거들먹거렸다. 오늘도 그들은 시답지 않은 임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난번에는 산적이더니 이번에는 뒷골목 왈패냐?’
 그래도 산적 때는 뒤처리를 담당하더니 이번에는 왈패가 상대라고 독자적으로 나섰나 보다.
 저자의 뒤쪽,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뒷골목이 왈패들의 거처였다.
 “쳐라!”
 늙은 나의 나직한 한 마디가 개전을 선언했다.
 백여 명의 무인들은 그 순간만이라도 투기를 불태우며 왈패들의 본거지로 들이닥쳤다.
 제아무리 천무대가 막장이라고 해도 일단은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아니던가. 왈패들이 녹슨 칼과 가시 박힌 도리깨를 들고 대항했지만, 천무대는 파죽지세로 본거지를 점거했다.
 백주룡은 부대주였지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진소백도 마찬가지였다. 백주룡은 안전한 곳에 서서 쉴 새 없이 명령을 쏟아냈다. 하나 천무대가 일방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주룡의 명령은 잔소리나 다름없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눈치가 없었나?’
 진소백은 다를까싶어서 살펴보니 녀석은 더욱 가관이다. 녀석은 빛바랜 서책을 눈앞에 가져다대고 연방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검후를 애모한다지만, 저건 너무 심한 듯하지 않은가.
 천위는 늙은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뭐가 잘못 되도 한참은 잘못됐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모를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크아악!”
 짜증 섞인 탄식이 이어지던 중 비명이 섞여들었다.
 왈패들의 수장을 잡으러 들어갔던 천무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온 것이다. 바닥을 나뒹구는 천무대원들의 사지는 어딘가 한 군데씩 부러지거나, 기이하게 꺾여 있었다.
 “우리는 남궁가의 천무대다! 누가 본대의 행사를 방해하는가?”
 일견 정중한 질책처럼 보였으나, 싸움을 회피하는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쾅!
 반쯤 부서졌던 문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세 명의 중년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중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자가 왈패들의 수장일 터였다.
 ‘다른 두 명은 뭐지?’
 천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늙은 천위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그 옷을 보니 마가인 듯 싶소만?”
 마가(魔家)라면 마도인의 가문을 뜻할 터였다.
 그 말은 곧 저들이 마인이라는 뜻이 아닌가?
 ‘어째서 남궁세가의 영역에 마인들이!’
 천위의 의문이 중첩되는 사이 적의무복을 입은 마도인이 싸늘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꺼져라. 여기는 우리의 영역이다.”
 “지난 날 이쪽은 남궁가에게 맡긴다고 하지 않았소. 한데 어째서 마가가 뒷골목 왈패 따위를…….”
 늙은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마도인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도인은 눈을 두어 번 깜빡하기도 전에 지척에 이르렀고, 패도를 뽑으며 소리쳤다.
 “우리가 하겠다면 하는 거지. 몰락한 남궁가 따위를 누가 신경이나 쓴다더냐?”
 쩡-
 늙은 내 검과 마도인의 검이 시끄러운 파열음을 쏟아내며 격돌했다. 늙은 내가 생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꿈을 지켜보던 천위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뇌리 속에는 온통 마도인이 외치던 한 마디만 끊임없이 맴돌 뿐이었다.
 “남궁세가가 몰락했다고?”
 
 ***
 
 꿈에서 깨어난 순간 제일 먼저 중얼거린 말이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남궁세가의 몰락이라는 엄청난 미래를 엿봤음에도 담담하기만 했다. 사부가 세가의 무인이었고, 남무문이 속가라는 사실이 남궁세가의 애정을 강제하지는 않았다.
 지금껏 사부가 겪었던 고초와 남무문의 피폐한 환경을 생각하면 오히려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크큭, 남궁세가처럼 오래 해먹었으면 이제 망할 때도 됐지. 화무십일홍이라는 말도 있잖아.”
 어차피 수십 년 후에 벌어질 일이고, 한 사람이 어찌할 수도 없는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한참동안 낄낄거리던 천위는 불현 듯 침음을 삼켰다.
 남궁세가의 몰락은 ‘그럴 수도 있다.’였지만, 그 적수가 너무 생뚱맞지 않은가.
 마가(魔家), 마도인(魔道人), 마공(魔功).
 십오 년 전에 일어난 정마대전은 정파의 대승으로 끝을 맺었다. 마도의 잔존세력을 갈가리 찢겨서 새외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 후 정파 내부의 이권다툼이 벌어졌고, 정사지간을 자처하던 문파는 제일 먼저 희생됐다. 그러니 당금 강호에서 마(魔)를 거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런데 강호의 주인이 바뀌었다. 남궁세가에서 또 다른 정파가 아니라 아예 마도천하가 되어버렸다. 꿈속의 내 나이를 따져본다면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안짝이 되지 않을까 싶다.
 ‘흠!’
 천위는 장시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이런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잖아?”
 
 명문거파의 잘나가는 명숙들이나 고민할 사안이다.
 반면 천위는 해결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지 않은가.
 ‘강호 걱정은 노인네들한테 맡기고, 난 우리 사부나 챙겨야겠다.’
 천위는 시원시원하게 결론을 내렸지만,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왜?”
 즐거움도 잠시, 이내 짜증이 솟구쳤다.
 남궁세가에 망조가 들면 천위가 가장 먼저 잠룡비원을 뛰쳐나갈 것이다. 한데 수십 년 동안 남궁세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천무대에서 빌빌거리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창천무고 때문에?’
 떠올리는 순간 기억에서 지웠다.
 남궁세가에 문제가 생겼다면 창천무고나 구기전검이 대수랴. 일단은 살아서 남무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른 뭔가가 있어.’
 남궁세가는 망해도 된다. 하지만 나까지 휘말릴 까닭은 없다. 살 길을 찾자. 꿈은 계속 될 것이고, 미래의 정보가 모일수록 원인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게다.
 천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복을 걸쳐 입고 검을 들었다.
 ‘넋 놓고 있다가 당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지.’
 구기전검과 남무팔단금을 수련했다.
 어느덧 칠성에 이른 검법은 간간히 검광을 번뜩이며 팔방을 휘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력이 남아 공수를 조율하는 것이 가능했다.
 천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구기전검의 성취는 나날이 발전하는 반면 염화기는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었다.
 염화기는 사지백해로 퍼져 간간히 느껴지는 열기가 아니라면 존재조차 잊어버렸을 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내공의 증진인가?’
 남무팔단금으로 축기한 내공은 예전보다 훨씬 맑고, 순수했다.
 한데 수련을 끝마친 천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손끝이 근질근질하네.’
 본래 구기전검과 남무팔단금을 수련하면 심신에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활력이 넘치는 것과 다르게 몸이 찌뿌듯했다.
 천위는 촌락의 노인처럼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비라도 오려나?”
 
 그 날 오후 기어코 비가 내렸다.
 운기조식을 끝낸 천위의 표정을 그리 좋지 않았다.
 구기전검과 남무팔단금을 펼쳐도 심신이 피폐했기에 앉아서 하는 진기도인법을 수련한 상태였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근질거렸고, 가슴은 체한 것처럼 먹먹하기만 했다.
 만약 아랫배가 근질거렸다면 염화기의 영향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전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몸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이래저래 찝찝한 날이네.’
 천위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폭우는 많은 것을 지우기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적의 기척과 피 냄새다.
 ‘생각만으로도 짜증나.’
 천위는 맞은편에 앉아서 차를 홀짝이고 있는 진소희를 보며 다시 한 번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문이 열릴 때까지 몰랐을까?’
 천위는 고향을 지키기 위해 백여 회가 넘는 혈전을 치렀다. 그렇기에 타인의 기척을 인지하고, 자신의 기도를 수발하는 것이 익숙했다. 실전으로 갈고 닦은 감각이기에 또래보다 몇 수는 윗줄일 것이다.
 그러나 진소희의 접근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천위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최악의 몸 상태와 폭우, 거기에 답답한 침묵까지 추가할 생각은 없다.
 “무슨 일이야?”
 그래도 진소백의 동생인데 너무 시큰둥했나?
 천위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진소희가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딴청 피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진소희는 천위의 뜨거운 시선을 배겨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다 같은 잠룡비원의 관도잖아요. 서로 무예를 겨루고, 무리를 토의하는 게 잠룡비원의 창설이념과도 부합하지 않을까요?”
 중언부언하는 것을 보아하니 핑계다.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천위가 팔짱까지 껴고 노려보자 진소희는 한 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는 원래 그렇게 삐딱해요?”
 “아니.”
 진소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혹시 정혼녀라도 있어요? 그래서 여자라면 일단 밀어내고 보는 거예요?”
 이번만은 천위도 무표정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다.
 “뭐?”
 진소희는 얼굴을 붉히더니 양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귀를 막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아니, 나는 애초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 아! 그러니까 그것은…….”
 ‘지금 노래라도 부르는 건가?’
 백주룡이 읊조린 진소희에 관한 정보는 옳았다.
 좋게 보면 시원시원했고, 나쁘게 보면 너무 괄괄했다. 진소백의 동생이지만,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곤해질 것이다. 삶의 순수함을 갉아먹는 건 백주룡 한 명으로 족했다.
 “하아, 난 이미 한 명으로도 힘든 사람이야. 그러니까 볼 일 없으면 돌아가라.”
 진소희는 별안간 눈을 부릅뜨더니 한참동안 천위를 노려봤다. 몇 번이나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무 날짜가 정해졌어요. 열흘 후에요. 그럼 이만.”
 천위는 갑작스레 냉랭해진 분위기에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진소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천위를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
 “소희! 놀러왔냐?”
 때마침 천위의 방으로 들어서던 백주룡이 환한 미소와 함께 진소희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나 진소희는 백주룡을 힐끔 쳐다보더니 뛰쳐나가듯 방을 떠났다.
 “하아, 나를 좋아하는게 확실하군.”
 “무슨 소리야?”
 천위의 물음에 백주룡은 이마를 짚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나를 보면서 얼굴을 붉히더라. 죄 많은 얼굴 같으니라고. 우리 소희, 괜찮으려나?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
 천위는 한결 더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너까지 힘들게 하지 마라. 왜 왔냐?”
 백주룡은 그제야 생각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를 낮췄다.
 “주열이 사라졌다.”
 # 9장, 함정에 빠지다.
 
 잠룡비원에서 버림받다시피한 황룡관이지만, 그 안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존재했다. 서열을 통한 인맥과 이권을 담보로 한 우정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주열은 그 복잡한 관계에서 최상위 권에 위치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서열이 높았다. 한데 그런 그가 사라졌음에도 황룡관은 고요하기만 했다.
 일각 후 황룡관의 하인들이 주열의 물건을 챙기고, 숙소를 청소했다. 그리고 다시 일각이 흘렀을 때 황룡관 학당 입구에 작은 벽보가 붙었다.
 
 - 황룡관도 주열이 야반도주한 까닭에 퇴교 조치함.
 
 관도가 도망칠 때마다 붙었던 벽보다.
 하나 주열이 사라진 시각은 고작해야 반 시진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쾌속하게 진행된 처벌 과정을 살펴보면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무회 수뇌부가 움직였겠네.’
 백주룡은 걱정스런 어투로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천위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소희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있냐?”
 백주룡이 눈을 찡그린다. 녀석의 속내가 여실히 전해진다. 저 놈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잡생각에 빠져서 망상 속을 헤매겠지.
 ‘저 새끼는 이럴 때에도…….’
 천위의 짜증 가득한 표정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백주룡은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기계적으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충분히.”
 “진소희가 관도들의 출입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까?”
 “비원 외부의 출입 기록은 안 돼. 하지만 현룡관에서 황룡관으로의 기록은 공개되어 있으니까 가능해.”
 천위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알아오라고 해.”
 “친구 동생한테 명령하는 나쁜 남자!”
 백주룡은 그 말을 끝으로 부리나케 도주했다.
 천위는 한 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었다.
 ‘주열이 졌으니 황룡관도로 해결하지는 않을 거야. 분명히 현룡관에서 나오겠지.’
 천위는 진무회의 공격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 이후 진무회는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대응한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할 리 만무했다. 애초에 야반도주라는 명목으로 주열을 처리한 자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대응책은 간단했다.
 현룡관에 속한 진무회원들이 움직이면 밝은 곳으로 움직인다. 백주대낮에 관도들이 보는 앞에서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 자체가 진무회의 이름값에 먹칠을 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몰래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천위가 얻은 가장 큰 무기였다.
 ‘문제는 밤인데.’
 밤은 드러나지 않게 일을 처리하기에 참으로 좋은 시간이 아니던가. 일단은 잠자리를 바꾸는 방법으로 버텨야 할 듯싶다.
 
 “그건 좀 창피하지 않아?”
 진소백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나 천위는 오히려 진소백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잠자리를 바꾸는 게 창피해?”
 “아무래도 모양새가…….”
 진소백이 중얼거리며 뒷말을 흘렸지만, 천위는 녀석의 속내를 쉽게 눈치 챘다.
 “당당하지 못해 보여서 창피하다는 거야?”
 천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현룡관에서 누가 올지도 모르고, 몇 명이 올지도 몰라. 한데 단순하게 방을 바꾸는 방법으로 적의 예봉을 피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창피를 감수할 수 있어.”
 진소백은 천위의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얼굴을 붉혔다.
 “미, 미안해.”
 천위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녀석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마 진무회의 일이 끝났을 때 나쁜 소문이라도 돌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죽고 나면 모든 게 부질없단다.’
 지난 날 살기 위해 바다 속에 몸을 숨기고, 진흙을 온 몸에 바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끄럽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다.
 하나 수치심도, 협행으로 인한 뿌듯함도 살아 있어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천위는 애써 진소백을 납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지 않던가.
 사부가 그랬고, 천위도 그러했다.
 진소백 역시 그런 시기가 올 것이다.
 백주룡이 분위기를 전환을 위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문이 아예 닫혔단다. 폭우가 쏟아진 탓에 여기저기 보수하느라 난리도 아니더군.”
 하나 천위는 창밖을 내다보며 침음을 삼켰다.
 ‘비가 빨리 그치는 편이 좋은데.’
 대낮임에도 먹구름과 폭우로 인해 시계가 맑지 않다. 처마 밑에 꽂아놓은 횃불이 힘없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니 악천후는 한동안 지속될 듯싶었다.
 천위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진소백과 백주룡의 쓸모없는 대화가 원인이었다.
 “어제 네 동생이 천위랑 한 방에 있더라.”
 “응. 그래서?”
 백주룡은 눈을 끔뻑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니까 얼굴을 붉히더니 급히 자리를 뜨더라.”
 “뭐 이 새끼야!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소백이 그답지 않게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백주룡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천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천위는 사람이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질 수 있는지를 증명해보였다.
 “조용히 좀 해라. 또 찍히고 싶냐?”
 천위가 ‘더 이상 사부들에게 밉보이면 그들 곁에서 안전을 추구하려는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어.’라는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싸늘한 호명이 들려왔다.
 “담천위. 백주룡, 진소백. 일어나.”
 천위는 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 왜 저 자식이랑 엮이면 늘 같은 결과가 나올까.
 백주룡과 진소백은 그 사이에도 눈짓으로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하아, 이제는 저 자식이 아니라 저 자식들이 되었군.’
 문사부는 여전히 어수선한 세 명을 보며 입매를 실룩거렸다.
 “담천위, 끝나고 사인당으로 와.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간다.”
 사인당은 황룡관 사부들의 집무실이며 평소에는 관도들의 출입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사인당으로의 호출은 엄청난 벌점과 함께 황룡관 사부들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 혼자요?”
 문사부는 당연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 놈이 두목이잖아.”
 
 ***
 
 천위는 사인당을 앞에 두고 한 숨을 내쉬었다.
 짚을 엮은 녹사의를 어깨에 둘렀지만, 상체는 이미 비를 맞은 것처럼 축축했다.
 ‘빌어먹을 모태붕!’
 천위는 투덜거리며 사인당의 문을 지났다.
 사인당의 구조는 회(回)자 형태로 만들어졌다.
 문을 지나자마자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와 본 적이 있어야 찾아가지.”
 투덜거리던 중 땅을 파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허름한 녹사의를 걸친 청년은 비가 고이지 않도록 배수로라도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지?”
 청년의 말에 천위는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담천위라고 합니다. 호출을 받아서.”
 “아! 네 소문은 익히 들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라. 사부들은 그곳에 계실 거야.”
 천위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향했다. 청년은 천위가 모퉁이를 지나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천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나직이 한 마디를 흘렸다.
 “손님 왔으니 문 닫아라.”
 
 ***
 
 서늘하다. 그리고 음습하다.
 단순히 폭우로 인해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방마다 호롱불이 켜져 있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회랑(回廊)에 걸린 작은 등불의 일렁임은 위험을 경고했다.
 ‘이건 너무 심하잖아?’
 천위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황룡관의 사부들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문사부나 무사부가 개인적으로 호출을 했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무회의 영향력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설마 사인당 전체를 비워둘 것이라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만큼 적의 결의가 느껴졌다.
 ‘살려 보낼 생각이 없군.’
 천위는 물러서지 않았다.
 적을 얕봐서가 아니다. 사인당의 안쪽까지 유인한 이상 외부로 통하는 정문에 적이 매복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걸음을 멈추거나, 사부들을 부르지도 않았다.
 ‘여기에 내 편은 없어.’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것은 천위다.
 비바람으로 인해 줏대없이 흔들리는 호롱불의 그림자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 뿐 아니라 회랑의 안쪽에 조성된 작은 정원의 수목은 학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천위는 아예 눈을 감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적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 기척을 잡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스윽-
 발을 끌듯이 내딛을 때마다 천위의 감각은 더욱 민감해졌다. 그리고 천위를 기다리는 적의 긴장감 역시 증폭될 것이 분명했다.
 ‘한 명쯤은 긴장할 만도 하잖아?’
 천천히 걸었음에도 회랑이 끝을 보였다.
 다시 나타난 모퉁이 너머의 어둠이 불길하게 일렁인다.
 누구라도 모퉁이 너머를 경계하고 감각을 집중했을 것이다.
 적은 그리 예상했다. 그래서 모퉁이의 대각선 쪽에 위치한 방을 암습 장소로 정하지 않았던가.
 하나 천위는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의 감각은 여전히 넓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인내심이 부족한 누군가가 움직였다.
 뚜둑.
 비바람에 묻혔어야 할 작은 소리였지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누군가에게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척이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기에 어린놈의 무릎이 저 지경일까.’
 천위는 질문하는 대신 상체를 비틀었다.
 그 순간 호롱불이 심하게 일렁이더니 그림자가 번졌다. 동시에 문틈을 비집고 한 자루의 검이 천위의 심장을 노리며 꽂혀들었다.
 슉!
 허공을 꿰뚫은 검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꽂혀든다. 이번에는 천위가 있을 법한 곳을 대충 찔러 넣은 것이다.
 ‘뻔 하네.’
 적은 기본이나 다름없는 합공을 펼치고 있었다.
 성동격서에 양동작전으로 평정심을 흐트러트리고,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이 아닌가.
 우습다. 놈들은 합공을 글로 배웠나 보다.
 천위는 뒤도 돌아볼 것 없이 양 팔을 교차시킨 상태로 처음 공격을 펼친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슉슉!
 천위가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회랑의 바깥쪽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적이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하나 천위는 이미 문을 부수고 적과 마주한 상태였다.
 “헛!”
 당황한 적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복면도 쓰지 않고, 현룡관의 무복까지 갖춰 입은 적을 보니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얕보는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지금껏 호의호식하며 명사의 지도와 영약으로 지금의 성취에 이른 놈들이다. 그리고 찌르면 찌르는 대로 찔려주는 알맞은 상대만을 상대했던 놈들이 아닌가.
 고향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허무할 정도로 죽어갔던 사람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다 필요 없다! 꺼져라!”
 천위는 몸통 박치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를 들이댄 채 달려들었다. 적은 당황한 와중에도 급히 검을 수습한 채 반격을 노렸다.
 ‘철두공을 익혔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상대와 충돌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만 시간을 번다면 동료들이 상대의 등을 꿰뚫을 것이다.
 적은 뒤로 슬쩍 몸을 뺐다.
 여차하면 창문을 부수고라도 물러날 생각이었다.
 한데 천위가 갑자기 넘어치는 것처럼 상체를 숙이더니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앞돌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저게 무슨?’
 기세를 일부러 늦추고 불필요한 동작을 펼친다.
 저잣거리의 원숭이나 자랑할 법한 재주가 아닌가.
 그러나 적은 천위의 행동을 비웃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앞돌기를 하고 바로 선 천위의 두 손에는 서탁이 쥐어져 있었다. 애초에 바닥이 아닌 서탁을 짚은 것이다.
 천위는 그 기세 그대로 적을 향해 서탁을 던졌다.
 “흡!”
 하나 적은 현룡관의 관도답게 무방비하게 당하지 않았다. 횡으로 휘두른 검을 바로 세우더니 종으로 내리치며 방어했다.
 콰쾅!
 산산이 부서진 서탁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추잡한 짓을!”
 적의 표정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뒷골목 왈패나 할법한 공격에 절로 분노가 치솟은 게다.
 하나 짜증과 분노를 분출하기도 전에 하반신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크악!”
 무릎이 안쪽으로 심하게 꺾였다. 관절 자체가 부러진 것이다. 무릎의 바깥쪽을 짓누르고 있는 발의 주인공은 천위였다. 외마디 비명은 찰나간 이어진 두 번째 고통으로 인해 입안으로만 삼켜야 했다.
 천위는 적의 무릎을 짓밟자마자 몸을 휘돌렸다.
 적의 배후를 점하자마자 팔로 목을 감았다. 그리고 창문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쾅!
 창문을 부수고 튕겨나간 적이 폭우 속에서 꿈틀거린다.
 하나 천위는 어느새 자세를 한껏 낮추면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등 뒤를 노리던 두 명의 적과 마주했다.
 그들은 각기 우당과 소조혁이라는 이름을 지닌 현룡관의 관도였다. 그 중 우당은 빗속에서 널브러져 있는 관도와 친분이 깊었다.
 “이 새끼가!”
 욕으로 당황스러움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천위는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튕겼다. 경공의 성취 중 궁신탄영을 펼치듯 전신의 탄력을 총동원했다.
 파팟-
 둘 중 평정심이 무너진 우당을 노렸다.
 얇은 검을 보니 쾌검을 익힌 듯하다.
 쾌검을 상대하는 법은 간단하다. 상대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쾌검이란 무릇 첫 검격을 시작으로 물 흐르듯 쉼 없이 이어지는 것을 요체로 하지 않던가.
 ‘마음이 무너졌으니 다음은 몸뚱이다!’
 천위는 우당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주먹을 찔러 넣었다. 좌권(左拳)은 노골적으로 우당의 얼굴을 향해 꽂혀든다.
 “흥!”
 우당은 상체를 가볍게 젖히는 것으로 일격을 피했다. 하나 천위는 허공을 휘저은 주먹을 강제로 멈춰선 후 역으로 다시 한 번 휘둘렀다. 흑사권을 익혔던 당인걸과 같은 연격(連擊)이지만, 훨씬 빠르고, 부드러웠다.
 이번만은 우당도 가볍게 여기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나 의도하지 않은 자세에서 시작된 쾌검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란 요원했다.
 천위의 허리는 두 번의 연격을 통해 비틀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손이 검배에 닿았고, 검을 쥐는 순간 그대로 쳐올렸다.
 촤악-
 갑작스런 발검이기에 이 역시 온건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우당의 옷자락만을 벤 채 허공으로 솟구쳤을 뿐이다.
 소조혁이 뒤늦게 반응하며 몸을 움직였다.
 우당과 천위가 대치한 상태에서 뒤를 노리려는 것이다.
 뻔하다. 너무 뻔한 움직임에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천위는 코웃음을 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놓아버렸다.
 아래쪽에서 위쪽을 베던 검은 놓는 순간 천장에 박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헛!”
 우당은 물론이고, 소조혁마저 창졸간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이곳은 병장기를 휘두를 만큼 넓은 곳이 아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인이 병장기를 버린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시선을 빼앗긴 찰나의 순간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퍼퍼퍼퍼퍼퍽!
 천위의 주먹이 우당의 가슴팍을 삽시간에 십여 번이나 두들겼다. 우당은 검을 놓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고 물러났다. 시뻘게진 얼굴로 노려보더니 이내 한 움큼의 피를 토해버렸다.
 “쿠웩!”
 소조혁은 이번에도 늦었다.
 남궁세가의 속문 중에서 기재라는 녀석들을 모아놓은 게 잠룡비원이다. 호사가들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수련원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기재라고 해서 처음부터 능숙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천위에게 있어서 저들은 정파천하라는 안전한 울타리와 명문이라는 부유함으로 취해버린 애송이에 불과했다.
 솨아악-
 소조혁은 미끄러지듯 쇄도하는 천위를 향해 일검을 내질렀다. 묵빛의 패검이 바람을 가르며 천위의 정수리를 노렸다.
 천위는 첫 적이나 우당이 그랬던 것처럼 달려들다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는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소조혁의 입가에 옅은 혈소가 맺혔다.
 좁은 공간에서 허공으로 몸을 띄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내력을 수발할 수 있는 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면 천위는 천리(天理)를 거스르지 못하고 다시 떨어질 것이다.
 “꼬치를 만들어주마!”
 촤악!
 패검은 천위의 아랫배를 향해 꽂혀들었다.
 한데 소조혁은 사람을 베는 쾌감을 느끼는 대신 눈매를 찡그렸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천위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존재했다.
 천위가 우당을 상대할 때 천장에 박아뒀던 검이다.
 하나 소조혁은 하늘에서 검이 뚝 떨어진 것처럼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쩡-
 올려친 검과 내려친 검의 우열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소조혁은 끝까지 검을 놓지 않고 버텼지만, 그의 검은 허무할 정도로 바닥을 파고들었다.
 “큭!”
 끝까지 버틴 탓에 손끝이 찢어진 것처럼 아렸다.
 하나 천위는 소조혁의 고통을 동정하는 대신 다른 고통을 선사했다.
 콰직!
 주먹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갈비뼈까지 파고든 고통에 소조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천위는 손속에 정을 두지 않았다.
 옆구리에서 시작된 권격은 양 어깨와 명치로 이어졌다.
 또한 주먹을 거둬들일 때마다 발등으로 소조혁의 허벅지 안쪽을 후려쳤다.
 빡! 빡! 빡!
 타격음만 들어도 피부가 아니라 근육까지 충격이 전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조혁은 아랫배를 감싸 쥔 채 허물어졌다.
 천위는 다시 회랑으로 나가 정원을 응시했다.
 쉴 새 없이 퍼붓는 비바람은 여전했지만, 가산 앞에 서있는 사내를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신기하군. 너 같은 놈이 왜 황룡관에 있는 거지?”
 사내가 통성명 없이 나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 어때? 저런 놈들도 현룡관에 있잖아.”
 천위는 뒤에 널브러진 관도들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사내의 표정에서 호기심이 사라졌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현룡관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급은 아니지.”
 “황룡관도 그래.”
 천위의 시큰둥한 대꾸에 사내의 눈매가 슬쩍 꿈틀거렸다. 하나 사내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살기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개싸움을 즐겨하는 놈답게 입도 천박하군.”
 “내가 개는 좀 팰 줄 알지.”
 사내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진다.
 “대화할 가치가 없는 놈이군. 역시 천박해.”
 천위는 사내의 도발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혀를 끌끌 차더니 사내를 향해 손짓했다.
 “쯧쯧, 너는 시간 끄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겠다. 모른 척하기도 안타깝다. 올 놈 대충 왔으면 그만 이쪽으로 건너오지?”
 
 ***
 
 사내의 뒤로 두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셋 다 현룡관의 무복을 입은 상태였다.
 ‘저것들은 마실 나간다는 기분으로 온 건가? 하아, 얼마나 우습게 본 거야? 이거 서운해지려고 하네.’
 천위가 혀를 차는 사이 배후에서 황룡관도가 한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의 퇴로를 막은 황룡관도의 숫자는 모두 여덟이다. 현룡관은 몰라도 황룡관에 있는 진무회원은 죄다 끌고 온 듯했다.
 주열과 당인걸이 당했다고 해도 상당한 숫자가 아닌가.
 천위는 적의 숫자를 확인하고 사내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치밀한 놈이군.’
 한데 놈의 치밀함이 천위의 계획을 완성시킬 것이다.
 천위가 알게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는 사이 사내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허주평이다.”
 갑작스런 통성명은 사내의 결의를 드러낸다.
 이름을 알려줘도 손해 보지 않도록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아니겠는가. 마치 생사투를 앞둔 검객이 검집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물론 천위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만은 꿈이라는 기연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우치고, 체득한 경험을 믿었다. 그렇기에 천위는 함정에 빠졌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적을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일막이 끝났으니 이막을 열어야 한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도울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다.
 ‘크큭,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잖아.’
 허주평은 현룡관도 다섯과 황룡관도 전원을 끌고 왔다.
 일견하기에도 수뇌부는 아닐 테니 저 정도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분명했다. 놈은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 감명이라도 받은 적이 있는가 보다.
 어찌됐든 허주평에게 여력은 없다.
 하지만 놈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싸움은 처음부터 천위에게 너무도 불리했다.
 적은 죽이려하지만, 천위는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에서 관도를 살해하기라도 한다면 놈들이 어떤 모략질로 천위를 함정에 빠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천위는 일부러 적을 불러들였다.
 그것을 위해 제 발로 포위당하기 좋은 장소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다 나온 것 같으니 시작은 좋네.’
 사인당의 문사부가 이 시간에 자신을 불러들인 것을 아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만약 사인당에서 다수의 시신이 나타나거나, 피가 낭자한 현장이 발견된다면 천위가 의심받을 것이다. 황룡관의 사부들이라면 설령 천위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누명을 씌우고 범인으로 몰아넣을 것이 분명했다.
 살기 위해서,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정파인이 아니라 썩어빠진 어른에 불과했다.
 ‘귀찮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천위는 처음부터 도주를 염두에 뒀다.
 그러니 허주평의 자신감과 결의는 오히려 천위를 도운 셈이었다.
 ‘쯧쯧, 그게 실패했을 때의 상황도 생각했어야지.’
 허주평은 주열이라는 꼬리를 잘랐다. 만약 허주평이 실패한다면 진무회의 수뇌부 역시 그럴 것이다. 허주평 한 명을 감싸는 것보다 이번 일을 완전히 없던 일로 하여 진무회의 체면을 세우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똑같은 놈들끼리 모였으니 하는 짓도 같을 터였다.
 천위가 탈출 계획을 실행시키려는 사이에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현룡관도 중 한 명의 시선이 어정쩡했다. 게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지 않고, 어둠 속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봐도 이번 일에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 모습에 절로 실소를 머금었다.
 놈들의 머릿속에 실패라는 두 글자가 떠오른 게다. 진무회라는 철벽에 금이 갔으니 제 몸부터 챙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놈을 이용해야겠다.
 ‘이제야 복면을 쓰지 않은 게 후회되는 건가?’
 한데 허주평은 동료의 생각 따위는 관심이 없었나 보다.
 “진상, 고대역. 현룡관의 힘을 보여줘라.”
 고대역이 도롱이를 벗고 나서는 것과 달리 진상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남몰래 인상을 썼다.
 한데 인상을 쓴 건 천위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현룡관의 힘을 보여준다며. 그런데 둘이 나오는 거야?”
 천위의 투덜거림에는 빈정거림이 강하게 배여 있었다.
 허주평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덩치가 큰 고대역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진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저깟 놈을 상대로 우르르 나가는 건 모양이 좋지 않은데…….”
 진상은 허주평의 싸늘한 시선을 접하고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고대역을 향해 중얼거렸다.
 “젠장! 저 새끼, 반드시 죽이자.”
 “다 들린다.”
 고대역이 대꾸하기도 전에 천위의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고대역은 진상과 잠시 눈을 맞추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 근육이 부풀며 현룡관의 무복은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흑웅 같군.’
 손목이라도 붙잡히면 뼈째로 으스러질 것만 같다.
 게다가 사람의 머리통만한 주먹은 스치기만 해도 살이 뭉텅이로 으스러질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애초에 잡히지 않으면 되는 문제였다.
 천위는 차력사를 구경하는 심경으로 쳐다봤다.
 ‘너희들과 드잡이질 하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온단 말이지.’
 천위는 진상과 고대열을 번갈아 쳐다본 후 주인 잃은 검 한 자루를 주워들었다.
 “훗, 두 명이 상대라 검도 두 개를 들은 거냐?”
  진상이 코웃음을 쳤고, 고대역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해했다.
 “멍청한 놈들. 내가 쌍검을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정보는 없었나 보네?”
 백주룡이 말하길 진무회는 정보력의 부재로 인해 끈질길 정도로 입회를 권유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진상의 눈동자가 슬며시 흔들렸고, 고대역을 잠시 허주평을 쳐다봤다.
 허주평은 정보력의 부재를 인정하는 대신 천위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만 떠들고 처리하는 명령이다.
 고대역은 허주평의 턱짓에 즉각 반응했다.
 솨아아아아-
 빗줄기를 헤치며 고대역이 달려들었다.
 “정말 능숙한지 시험하겠다!”
 양 팔을 벌린 채 달려드는 모습은 마치 맹수가 달려드는 것처럼 위압적이다. 그리고 진상이 그 옆에 바짝 붙어서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천위는 검을 들더니 그대로 고대역을 향해 던져버렸다.
 주인 잃은 검이 회전하며 꽂혀든다.
 고대역은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검을 피했다. 하나 최소한의 움직임을 보였을 뿐이다. 오히려 그는 천위가 도주할 것을 염려하여 담벼락을 끼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천위는 이미 진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놈은 이번 일에 소극적이었고, 회피하려는 시도까지 하지 않았던가.
 탈출의 시작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이 새끼가!”
 진상은 얕보였다고 여겼는지 이를 갈았다.
 그는 천위의 아랫배를 노리고 검을 비스듬히 쳐올렸다. 한데 천위의 행동은 진상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천위는 진상과 시선을 마주한 채 목을 노리며 검을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같이 죽자는 동귀어진의 한 수였다.
 진상은 이런 곳에서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현룡관은 다르다는 허주평의 말을 증명하듯 무리 없이 검로를 비틀었다. 물론 천위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지만 말이다.
 채챙!
 두 자루의 검이 불똥을 튀기며 파열음을 쏟아냈다.
 진상은 손바닥을 저릿하게 만드는 반탄력에 후속타를 포기했다. 대신 천위의 다음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자세를 한껏 낮췄다.
 ‘예상대로!’
 천위는 공격하는 대신 보법을 빠르게 펼쳤고, 진상이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지나쳐버렸다. 마치 진상이 스스로 길을 열어준 것처럼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허주평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천위를 보며 검배에 손을 올렸다. 지금껏 천위가 현룡관도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육신을 극한까지 단련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군. 천박할 정도로 변칙적이야. 뒷골목의 왈패들이나 할 법한 개싸움으로 나를 상대하려고?’
 하나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천리(天理)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사이함은 결코 올바름을 이기지 못한다.
 “잔재주는 잔재주일 뿐!”
 촤악-
 허주평의 검이 뽑히는 것과 동시에 일검양단의 기세로 내리꽂혔다. 내력을 유형화하는 절정에는 미치지 못하나, 가히 일류라고 칭할 만했다. 단순히 검을 내리 그은 것으로 보였지만, 그 안에는 여덟 번의 변화가 숨어있었다.
 “죽어라!”
 천위의 미간이 천(川) 자를 그리며 일그러졌다.
 허주평의 일격은 자랑을 삼아도 될 정도의 거력을 품고 있었다. 정파의 검법답게 기세가 올곧았고, 내력의 흐름은 순리를 따라 이어졌다.
 그래서 더 짜증과 분노가 치솟았다.
 처음부터 이런 곳에서 이런 일로 사용하기 위해 익힌 검법이 아니지 않은가.
 정파의 검을 가지고, 사파나 할 법한 짓을 하다니.
 천위는 폭우를 뚫고 허주평의 검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검이 정수리에 꽂히기 직전 천위의 신형이 핑그르르 돌았다.
 한 바퀴를 도는 순간 이미 발검을 끝냈다.
 폭우를 횡으로 가르고, 어둠을 찢어발긴 검이 허주평의 목으로 꽂혀들었다.
 구기전검의 첫 번째 절초였다.
 쇄애애액!
 한데 허주평의 검은 변화를 일으켰고, 한순간에 목으로 꽂혀드는 검을 쳐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위의 검은 두 번 째 절초를 토해냈다. 검은 마치 뱀처럼 흐느적거리더니 허주평의 옆구리를 노렸다.
 “큭!”
 허주평의 얼굴이 찰나 간 경직됐다.
 어째서 저런 뒷골목 삼류 잡배 같은 놈이 이처럼 예리한 검초를 구현한단 말인가.
 놀라는 것도 잠시, 한 쪽 무릎을 굽혀 검신의 경계를 옆구리까지 넓혔다. 그것만으로도 옆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모든 공격에 대한 방어가 가능했다.
 “걸렸다!”
 나직한 읊조림.
 하나 이것은 왠지 모르게 빗줄기를 뚫고 허주평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천위의 검은 허주평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뚫을 생각조차 없었다.
 한껏 여력을 둔 움직임이기에 천위는 몸을 비틀어 허주평의 전면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계단처럼 준비된 허주평의 무릎을 밟고 뛰어 올랐다. 동시에 왼 무릎으로 허주평의 턱을 쳐올렸다.
 탁! 빠각!
 “크헉!”
 천위는 허주평이 비명과 함께 비틀거리는 사이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그리고는 허주평의 어깨를 짓밟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진상이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리는 사이 천위는 작은 연못을 건너뛰더니 가산(假山)을 밟고, 담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10장, 통(通).
 
 강호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
 열에 아홉은 강자존(强者存)을 거론할 것이다.
 그렇다면 강자는 누구인가?
 강자란 개인의 무력과 경험은 물론이고, 집단의 머릿수와 세력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한다. 그러니 혼자 강하다고 날뛰거나, 단순히 쪽수가 많다고 해서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무회(進武會)의 수뇌부는 잠룡비원의 강자라고 할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련관을 떠나 진짜 강호에 발을 들여도 여전히 강자일 것이다. 그들의 가문이 누대에 걸쳐 이뤄놓은 인맥과 금력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만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패배는 너무도 낯선 결과였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개망신은 처음이야.”
 여유롭게 섭선을 흔들던 청년은 고개를 내저으며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지만, 누구도 트집을 잡지 않았다.
 그가 바로 진무회의 회주인 백익선 남우혁이다.
 백익선(白翼扇)이라는 별호답게 하나의 부채로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창궁백가 서열 칠 위인 군자문(君子門)의 소문주가 넋두리를 늘어놓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부회주의 기도 또한 남후혁에 뒤지지 않았다. 고목처럼 삐쩍 마른 청년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후우, 아까 백검회 간사 놈이 지나가면서 히죽거리더라. 입을 찢어버릴까 하다가 겨우 참았네.”
 회주는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부회주나 되어가지고 간사한테 무시당하고 온 거냐?”
 “잠룡대연을 코앞에 두고 백검회랑 전쟁하자고? 누구 골로 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회주는 유력무가의 자제들이 모두 모일 잠룡대연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무거운 한 숨을 내쉬었다.
 “후우……. 잠룡대연이 코앞인데 꼴이 우습게 됐군.”
 두 사람의 대화를 이어갈수록 단상 아래에 서있는 청년은 점점 어깨를 움츠렸다.
 청년의 사문 또한 어디가서 무시당할 위치는 아니었다. 하나 그는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법이 없을까?”
 회주의 간절한 한 마디에 부회주가 코웃음을 쳤다.
 “열댓 명이 우르르 몰려가서 쳐맞고 왔어. 아니, 그 전에도 한 번 건드렸다가 된통 당했다며? 이거 소문나면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 시간이 약이야. 열흘 후면 잠룡대연이다. 연회도 하고, 비무도 하다보면 어느 정도 사그라질 거야. 그 때까지는 짜증나고, 창피해도 참아.”
 부회주는 냉정한 판단을 내렸으나,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나 보다. 그는 단상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년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지?”
 회주인 남우혁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회의 간사인데 이름 정도는 외워라.”
 “빌어먹을! 네가 꽂아 넣은 새끼잖아. 저딴 놈 이름을 내가 외울까 보냐?”
 단상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년이 때를 보아 고개를 들었다. 그는 허주평에게 백주룡의 영입을 일임했던 지룡관도였다.
 하나 그의 표정은 허주평을 대할 때와 달랐다.
 마치 생사의 간극에 선 사람처럼 초조하면서도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창궁백가 서열 십구 위인 칠보검문의 제자라면 어디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닐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더없이 간절했다.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회주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고, 부회주는 불륜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하아, 내가 꽂아줬지만, 진짜…….”
 “저 새끼는 그냥 두면 안 되겠네.”
 부회주는 단상을 내려오더니 청년 앞에 섰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였다.
 쫘악!
 “이 새끼, 이거 큰일 낼 놈이네.”
 쫘악!
 청년은 내공으로 버티지 않고, 부회주가 때리는 대로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그, 그만.”
 “한 번만 말할 테니 똑똑히 들어라. 너는 회주와 친하고, 가문의 후광 덕분에 간사가 됐잖아. 그런 네가 진심으로 덤벼들면 그 새끼랑 우리랑 동급이 되잖아. 동급! 언제부터 진무회가 출신도 모르는 새끼랑 같이 어울렸냐? 똥 묻은 놈이 잘못했다고 같이 똥 묻힐래? 개는 개랑 어울리는 거고, 뒷골목 왈패는 뒷골목 놈들에게 맡기는 거야.”
 부회주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따귀를 올려붙이고서야 후련한 듯 코웃음을 쳤다.
 “하아, 이제야 속이 좀 풀리네.”
 “죄송합니다.”
 청년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뒷걸음질치며 사라졌다.
 회주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 나직이 한 마디를 건넸다.
 “알아들었을까?”
 부회주는 혀를 차며 대꾸했다.
 “쯧쯧, 알아들었으면 진무회의 이름을 걸지 않고 해결할 것이고, 못 알아들었으면…….”
 회주는 부회주가 말끝을 흐리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처리해버려. 쓸 만한 녀석들은 여기저기 많이 널려 있잖아. 그나저나 저런 놈은 잊고,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어떤?”
 “잠룡대연에 기녀 부른데?”
 
 ***
 
 “잠룡대연에 관한 소문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몇 가지만 골라봤어요.”
 천위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소희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잠룡대연의 비무에 참가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사실이다. 진무회에 다시 한 번 똥물을 끼얹었으니 이제는 정말 백검회의 끈을 잡아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모든 신경은 손끝으로 향해 있었다.
 ‘왜 이렇게 근질거리지?’
 손은 허주평과 싸우기 전부터 간지러웠다. 그러니 적이 독을 살포한 것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수련을 끝낸 후에만 일각 정도 근질거렸기에 원인을 찾기가 힘들었다.
 천위가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사이에도 진소희의 말은 이어졌다.
 “대연은 원래 유력무가의 자제들이 방탕하게 놀면서 친분을 다지는 자리에요. 한데 이번 잠룡대연은 세가에서 직접 참석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마 세가 안에서 흘러나온 소문이겠지요. 잠룡비원과 관련한 큰 발표가 있을 거래요.”
 진소희는 천위의 무반응에 점차 풀이 죽었다.
 ‘지난번에 내가 오해해서 화라도 난 건가?’
 
 - 하아, 난 이미 한 명으로도 힘든 사람이야. 그러니까 볼 일 없으면 돌아가라.”
 
 천위가 귀찮은 듯 말한 내용은 충격이었다.
 이미 그에게 여자가 있는 줄 알았다.
 한데 진소백과의 대화를 통해 그 한 명이라는 존재가 백주룡임을 알았다.
 진소희는 밤새 이불을 걷어차며 뒤척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때 깨달았다. 자신이 천위에게 가진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천위에게 연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용당하기 일쑤였던 자신의 오라비에게 좋은 친구가 나타났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은 그저 그렇게만 생각하려 했다.
 ‘사과를 해야겠어.’
 진소희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을 꺼내려는 순간 천위의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진무회는?”
 “그쪽은 별 움직임이 없어요.”
 천위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인당에서 암습당한 게 벌써 이틀 전이다.
 그러나 사부들은 물론이고, 어디에서도 그 날 있었던 싸움에 대한 뒷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꼬리 만 개처럼 물러갈 놈들이 아닌데?’
 어쩌면 잠룡대연을 의식해서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위는 피식 웃었다.
 ‘후훗, 하여간 덩치 큰 놈들은 공격할 곳이 많아서 편하단 말이지.’
 한데 그러고 나니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천위는 진소희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온 거야? 별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잖아.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진소희는 갑작스레 천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가 오라버니 보러 왔대요? 겸사겸사 지나가다가 들렸을 뿐이라고요. 현룡관도나 황룡관도 모두 다 같은 잠룡비원의 관도로서…….”
 천위는 진소희의 말이 길어지는 것을 보고 나직이 한 숨을 내쉬었다. 진소희의 얼굴은 중언부언하는 가운데에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지난 번 만남과 오늘의 일을 겹쳐보니 짚이는 바가 있었다.
 ‘설마 나한테 호감이라도 있는 건가? 얘 왜 이래?’’
 삶이 점점 더 고달파지는 듯하다.
 콰당!
 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천위의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일등공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주룡은 천위를 확인하자마자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큰일 났다.”
 녀석의 호들갑이야 어디 하루이틀이던가.
 하나 천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응을 해주었다.
 “뭔데?”
 백주룡은 잠시 천위와 진소희를 번갈아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녀석의 눈빛이 번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망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직전인 듯 보였다.
 “뭐냐고?”
 그제야 녀석은 탄성을 흘리더니 황급히 입을 열었다.
 “진소백이 이상한 소리를 해.”
 진소희가 벌떡 일어나더니 백주룡에게 다가갔다.
 “뭔데? 우리 오빠가 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백주룡은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꼈는지 평소와 다르게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현룡관에 가지 않겠데. 그냥 황룡관에 남겠다더라.”
 천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는 것과 달리 진소희는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멍청이가 또!”
 진소희는 천위와 마주앉았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며 방을 나섰다. 천위와 백주룡 역시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진소백은 이제 만남의 광장이 되어버린 후원의 바위에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바보가 된 것도 아니야.”
 천위는 백주룡의 귀엣말을 무시했다.
 “오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진소희의 공격적인 물음에 진소백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더니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는 현룡관에 가지 않을 거야. 진무회와 직접적인 원한을 맺은 것도 아니고, 목표가 되지도 않았잖아. 그들은 내 존재도 모르고 있을 걸?”
 백주룡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쳇, 배신자같으니라고.”
 “시끄러워. 구시렁거리고 싶으면 다른 놈 붙자고 해.”
 천위는 백주룡을 타박한 후 진소백의 얼굴을 바라봤다. 때마침 진소백 역시 천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라면 이해해줄 것이라 믿어.”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응원은 못하겠다.”
 그 말 그대로였다.
 진소백이 황룡관에 남으려는 이유는 뻔했다.
 검후의 협과 의를 계승하고, 황룡관의 관도들에게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겠는가.
 아니나다를까 진소백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파의 세상이지만, 지금의 강호를 올바르다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황룡관의 녀석들을 나쁘다고 하지 말자. 녀석들은 보고, 배운 대로 행동할 뿐이잖아. 살기 위해서 협의보다 이권과 명성을 쫓을 뿐이잖아. 그건 저들의 잘못이 아니야.”
 진소희는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누가 뭐래? 내가 짜증나는 건 그걸 왜 오빠가 해야 하는 가야?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누구를 돕겠다는 거야! 잠룡비원에서는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비원을 졸업하면 어떻게 할 건데? 하남진가의 이름에도 물러나지 않고 살수를 펼칠 사람들이 수두룩하단 말이야.”
 그녀의 말은 격했지만, 오라비를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진소백 역시 그것을 알기에 진소희를 탓하기보다 타이르듯 말했다.
 “누가 하고, 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막연하게 좌충우돌하려는 것은 아니야.”
 진소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소희야, 네 말처럼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현룡관에 갈 수 없는 거야. 나는 현룡관에 가서 의협의 뜻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황룡관에서 저들과 함께 뒹굴며 조금씩 함께 변하고 싶을 뿐이야.”
 어리석다. 옳은 일을 하겠다지만, 어리석어 보였다.
 막아야 한다. 세상은 녀석이 생각하는 것보다 냉정하고, 위험했다. 저대로 그냥 뒀다가는 이름도 없는 들판에서 죽어나자빠지기에 제격이다.
 하나 누구도 진소백을 만류하지 못했다.
 진소희마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울상만 지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진소백은 빛나고 있다.
 그의 눈동자는 광채를 머금었고, 평소의 왜소한 체구와 다름이 없지만 왠지 모르게 장대했다.
 하나의 의지를 품었기 때문이다.
 그 의지는 고스란히 기도로 드러났다.
 진소백이 지금의 의지를 갈고닦는다면 언젠가 엄청난 기백을 보여줄 것이다. 그에 걸맞은 실력까지 갖춘다면 가히 강호에서 손꼽히는 존재로 추앙받을 게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협객이라고 하더라.
 천위는 진소백의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사부가 떠올랐다. 마치 사부의 형상이 진소백에게 덧씌워진 것과 같은 착각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검후께서는 한때 고금제일로 손꼽혔던 매화검신을 마음의 스승으로 삼았어. 매화검신의 어록 중에 ‘내가 바뀌니 네가 바뀌고, 네가 바뀌면 우리가 바뀌며, 우리가 바뀌니 마침내 세상이 변하더라.’라는 말이 있어.”
 진소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부터다. 비록 끝끝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지언정 나부터 바꾸겠어. 그러니 너희들은 너희들의 길을 가. 나는 내 길을 갈게.”
 진소희는 끝끝내 울음을 터트렸고, 백주룡은 감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소백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우리가 현룡관과 황룡관으로 갈렸다고 절교하는 건 아니잖아.”
 백주룡은 진소백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방 멋있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나 천위는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무거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저 녀석은 마치 사부 같다.
 
 ***
 
 잠룡대연이 삼 일 앞으로 다가왔다.
 천위는 진소백의 황룡관 잔류 선언 이후 두문불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성어가 뇌리를 스친다.
 짐짓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젠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성어다.
 사부야 말로 우공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다.
 협의지심을 품고, 일평생 정진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사부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외쳤던 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남무관이 있는 남해는 해적과 외적의 수탈로 몸살을 앓았다. 사부는 고통 받는 양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천위를 데리고 싸움터를 전전했다.
 천위는 어린 나이에도 무의미한 일이라 여겼다.
 적을 없애고, 적의 거점을 불태워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심지어 양민이 검을 들고 해적이 되기도 했다.
 무한하게 반복되는 지옥도의 재림이었다.
 강남의 지배자라는 남궁세가는 몇 번이나 도움을 요청해도 묵묵부답이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의욕을 잃어갔다.
 오직 사부만이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힘을 모으자! 약자를 지키자! 함께 싸우자!
 그것이 검을 쥔 우리의 의무이며, 권한이다!
 그렇게 십여 년을 보냈을 때 조금씩 사부의 외침에 반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소규모 무관과 방파들이 하나둘씩 사부의 뜻에 동참하더라.
 그 결과 약자들이 모인 작은 연합이 결성되었다.
 남궁세가는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 허술하고, 약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남해의 양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살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사부는 그즈음 천위에게 남궁세가로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두 눈으로 기적을 목격했기에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부의 말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만큼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 구기전검을 완성시키거라.
 
 떠나기 전 사부의 마지막 말이다.
 저 말이 바로 천위를 두문불출하게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것만큼 사부와 어울리지 않는 말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사부는 무명이나 금전을 탐하지 않았다.
 그가 검을 익힌 이유는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검을 휘두르는 이유 또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의협의 기치 아래서 행동하는 사부였다.
 그런 그가 천리 밖으로 제자를 떠나보내며 검법의 완성을 당부했을 리가 만무했다.
 어째서 더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부는 이유 없는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고, 제자를 위험에서 빼내기 위해 핑계를 대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를 왜 이곳으로 보내신 건가?’
 천위는 알 수 없었기에 처소를 떠나지 않았다.
 간간히 손끝이 근질거릴 때를 제외하면 하루 종일 이것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근접할 수 있었다.
 ‘이곳이어야만 했던 건가?’
 내가 이곳에 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와야만 가능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천위는 나직이 읊조렸다.
 “사부는 알고 있었던 건가?”
 
 ***
 
 십육 년.
 사부와 천위가 함께 보낸 시간이다.
 천위는 생의 대부분의 시기를 사부와 함께 했지만, 단 한 번도 사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부는 언제나 진실했고,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최소한 천위의 기억 안에서는 그러했다.
 그런 사부가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천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어둠을 노려봤다.
 어느 때나 머릿속으로 그려냈던 사부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안개가 출렁이는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왜? 도대체 왜?’
 사부에게 묻고 싶었다.
 분노나 억울함, 배신감을 토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천위는 잠룡비원에 오게 됨으로서 꿈의 의미를 깨달았고, 기연까지 얻지 않았던가. 게다가 앞으로 꿈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얻을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의 두문불출은 그저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됐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운명(運命)? 사명(使命)?
 천위는 조소를 머금었다.
 ‘개소리지.’
 정마대전 당시 허름한 강보에 쌓여진 채 버려진 아이에게 무슨 운명이고, 사명이란 말인가. 사부가 아니었다면 누군가에게 짓밟히거나, 울다가 지쳐 죽었을 삶이다.
 잠룡비원에 오기 전까지도 그렇다.
 사부의 협의지심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저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이곳에 왔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언제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오래 살기 위해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지금도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하고 있지만,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목표는 오직 생존이었다.
 ‘이제 와서…….’
 천위는 창을 통해 밤하늘을 쳐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내게 뭔가를 맡기겠다고?’
 입매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욕설이 열 단어를 넘어섰다.
 하나 하늘도, 달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니 공허하기만 했다.
 천위는 대자로 누워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수련을 거른 것이 벌서 며칠 째다.
 구기전검은 물론이고, 남무팔단금마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모략에 빠져서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때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어디 있더라?”
 천위는 불을 켜고 짐을 꺼냈다. 애초에 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바랑과 보퉁이 하나가 전부였다.
 잠시 후 천위는 작은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주머니는 광목을 엮어 만든 낡은 주머니로 작은 종이가 접혀 있었다. 사부가 먼 길을 떠나는 천위에게 부적 삼아 적어준 것이다.
 
  -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것이 곧 정도(正道)이니라.
 
 마치 제갈량의 꾀주머니처럼 대단해 보이더니, 적혀 있는 것은 달랑 한 줄이다.
 천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폭소가 되어 처소를 가득 채웠다.
 “크하하하하하하!”
 사부는 늘 의협을 마음에 담았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다. 신념이란 스스로 세우고, 스스로 굳혀야 하는 것이라 했다. 심지어 천위에게도 검을 쥐는 이유가 협의에 있음을 가르쳤을 뿐 따르라며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짤막한 한 줄의 글귀는 너무도 사부다운 말이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족쇄이며 기분 좋은 압박이기도 했다.
 ‘내 목표는 간단하지.’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강해지고 싶었다.
 하나 더 넓게 따져보면 강해져서 부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 목표였다. 협의지심으로 인해 비롯된 목표가 아니라 놈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거에 대한 반감이 더 컸다.
 천위는 꿈을 떠올리며 홀로 다짐했다.
 “나는 강해질 겁니다.”
 이제 꿈과 사부를 관계 짓지 않는다.
 사부는 천위에게 스스로 나아갈 길을 찾으라 했고, 그것이 정의라 응원하지 않았던가. 천위가 당장 잠룡비원을 뛰쳐나가 사부를 찾아간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전무했다. 사부는 한 줄의 글귀를 통해 그가 줄 수 있는 최선과 최강의 것을 건네줬기 때문이다.
 잠시 후 검을 쥐고 일어난 천위는 훨씬 더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은 미래를 보여주지만 내가 바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내일을 향한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겠어.’
 며칠 간 두문불출한 결과였다.
 천위는 소연무장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잠룡대연은 삼일 후에 개최된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천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온갖 잡생각이 가득할 때에도 양 손의 근질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근질거림을 참아보려 했다. 하지만 천위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끝은 제멋대로 근질거렸다.
 ‘안 씻었다고 이러는 건 아닐 텐데…….’
 되도 않는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검을 들었다.
 구기전검의 초식을 따라 몸을 움직이니 자연스레 소연무장에 천위의 그림자가 여기저기 늘어졌다.
 하나 천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내공이 전부가 아니야.’
 염화기의 공능으로 인해 내공은 점점 단전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여전히 동굴에서 선보였던 신위를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면 내력의 증가로 인해 구기전검의 성취를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천위는 이제 구기전검을 펼치는 동안 여덟 번의 절초를 섞어서 날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홉 번의 절초로 대성한다고 하셨지,’
 사부의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하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아니다. 단순히 내공의 힘으로 가능했던 일이라면 사부가 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촤악- 촤악- 촤악-
 천위는 평범한 검로와 섞어야만 했던 절초를 연이어 펼쳤다. 사람의 팔뚝만한 나무토막이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이번에는 내력의 배분 없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무토막은 산산조각 나거나, 뭉개지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이 썰려 나갔을 뿐이다.
 “후우!”
 천위의 내공은 전신에 퍼져 절초의 위력을 더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공을 쏟아 부어도 일정 수준의 위력만 발현될 뿐이다. 한 마디로 전력을 다해 절초를 발휘해도 내공만 허비되는 상태였다.
 천위는 지금이 자신의 한계라는 점을 직시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길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씩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천위는 단전에서 조금씩 내공을 풀어냈다.
 솨아아아아-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낯설지 않다.
 이제 남무팔단금으로 축적한 내공과 염화기는 한 몸처럼 섞였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내공의 양과 정순함은 또래의 누구보다 월등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에 부딪친 것처럼 나아갈 수가 없었으니 좌절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천위는 그렇지 않았다.
 “벽은 벽이고, 한계는 한계인데…….”
 두렵거나, 불안한 마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벽을 깨면, 이 한계를 넘어서면 고수로 대접받는 절정(絕頂)의 경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천위는 아예 미세하게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수련을 한 탓에 근질거림은 평소보다 배가됐다.
 몸속에, 혈맥에, 혈도에 갇힌 염화기.
 벽을 깨고, 한계를 넘어서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하다.
 “재촉하지 마라.”
 천위는 남무팔단금의 자세를 취했다.
 양 손의 경련이 심해수록 입가의 미소는 깊어졌다.
 천위는 스스로 벽을 깰 준비가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집집마다 사방에 가득한 것이 벽이다.
 하지만 강호를 종횡하는 무인들에게 벽이란 곧 한계였다. 처음 검을 쥐었을 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뭐든 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자부한다. 하나 그런 무인 중 대부분은 절정의 벽 앞에 모여서 원치 않는 회합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인이라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절정의 경지를 염원한다.
 절정이란 그런 것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루고 싶은 경지.
 천위는 절정을 이루려 한다.
 만금을 들이는 것도 아니고, 영혼을 팔지도 않는다.
 가르침을 줘야 할 사부는 천 리 밖에 존재했고, 누대에 걸친 경험이 녹아 있는 무공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천위는 자신의 벽을 넘어 한계를 깨부술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도 꿈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뤄낼 것이다.
 ‘사부가 그랬지.’
 사부는 한 점의 의혹 없이 단호하게 말했었다.
 평범한 검초 속에 아홉 번의 절초를 섞을 수 있다면 구기전검의 대성할 수 있다고 말이다. 또한 그 후에야 진정한 구기전검의 진명을 엿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부는 명확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거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부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천위의 생각처럼 사부는 말하지 않을지언정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천위는 사부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자신의 몸을 살폈다.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내공이라.’
 각고의 수련 끝에 아홉 번의 절초를 풀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전에는 여전히 내력이 충만했다. 모든 내공을 쏟아 부어야 하는 구기전검을 전력을 펼쳤음에도 여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열 번이나 열한 번의 절초를 펼치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래서 이번에는 절초를 연이어 펼치거나, 겹치듯 한 번에 쏟아내려 했다.
 하지만 합쳐서 펼치든, 나눠서 펼치든 위력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 때 깨달았다.
 ‘아홉 번이면 족한 거였군.’
 구기전검으로 아홉 번의 절초를 펼칠 수 있는 내공만 있다면 조건을 충족한 것이다.
 대저 절정이란 몸과 마음을 극한까지 단련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어야 오를 수 있는 경지라 했다.
 천위는 십 수 년 간 구기전검과 남무팔단금으로 심신을 단련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꿈의 기연을 통해 염화기를 얻었으니 절정의 벽을 마주하는 것은 당연했다.
 ‘구기전검으로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했으니…….’
 이제 육신의 단련을 통해 부동심(不動心)을 추구하는 남무팔단금의 힘을 빌릴 차례였다.
 방법 또한 생각한 바가 있었다.
 “후우…….”
 천위는 호흡을 조절했다.
 남무팔단금의 극의라는 부동심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절정의 벽으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정도의 평정심은 되었다.
 ‘한 번 해보자!’
 팔단금이란 본래 송, 금 시대에 퍼진 도인체조였다.
 호흡을 통해 혈맥과 혈도를 살피고, 근육과 피부를 단련하는 외가기공의 일종인 셈이다.
 이것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북파와 남파로 갈렸다.
 북파는 짧게 끊어 치는 동작을 통한 육신의 단련을 최고로 쳤지만, 남파는 노인의 춤사위처럼 느릿하게 기의 흐름을 살피려 했다. 향후 남파는 다시 문팔단과 무팔단으로 나눠지기까지 하며 세상에 전파되었다.
 팔단금의 종류는 수백 종이고, 실전된 것까지 합치며 수천 종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의 원칙이 존재했다.
 바로 등속(等速)이다.
 빠르게 펼치려면 끝까지 빨라야 했고, 느리게 펼치려면 끝까지 느려야 했다. 이것은 문팔단과 무팔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남무팔단금의 종을 굳이 정한다면 남파의 무팔단이다.
 하나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따져보면 북파의 팔단금마저 포용했다. 도대체 사부가 이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아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염화기와 기가 막히게 어울리지.’
 구기전검을 펼치면서 의아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염화기는 남무팔단금을 수련할 때와 구기전검을 수련할 때의 반응이 달랐다. 그래서 천위는 좌공이나 또 다른 진기도인법으로 시험을 해보았다.
 한데 그 때의 염화기는 구기전검을 펼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직 남무팔단금을 펼칠 때만 반응이 달랐다.
 염화기는 구기전검을 빠르게 펼치든, 나눠서 펼치든 항상 같은 흐름을 유지했다. 하지만 남무팔단금을 펼칠 때에는 천위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 아닌가.
 ‘왜냐? 왜 너만 다른 것이냐?’
 천위는 양 손으로 하늘을 받치는 탁천식으로 남무팔단금을 시작했다. 느릿하게 펼치는 모양새를 보면 죽을 날을 받아놓은 노인의 팔단금처럼 무기력하다. 탁천식을 지나 좌우로 활을 쏘는 듯한 사조식에 이르렀고, 비조식과 후초식을 지나 남무팔단금의 전반부가 마무리됐다. 요파식과 수반식, 촬권식과 칠전식까지 끝내니 어느덧 남무팔단금의 첫 회가 끝을 맺었다.
 천위는 단전에서 흘러나와 사지백해를 떠도는 염화기의 움직임을 뇌리에 각인했다.
 잠시 후 남무팔단금의 이 회째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첫 회보다 더 느리다.
 염화기 역시 천위에게 반응하듯 더욱 느리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다른 무공을 펼칠 때와 달리 염화기는 남무팔단금과 동화되어 혈맥을 휘돈다.
 남무팔단금의 각 초식과 염화기는 이 순간 등속을 이뤘다.
 천위는 이 회째를 끝내고, 삼 회째에 이르자 남무팔단금을 더욱 느리게 펼쳤다. 시간의 흐름을 비껴난 것처럼 느릿하게 펼쳐지는 모습은 구경하기만 해도 복장이 터질 정도였다. 사 회 째는 더욱 심했다. 언뜻 보고 지나가면 아예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느렸다.
 천위는 지금 이 순간 호흡만 유지한 채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다.
 ‘보여 다오. 내게 너를 보여 다오.’
 십 수 년 간 매일같이 수련한 남무팔단금이 아니던가.
 의식하지 않아도 그의 몸은 순리에 따라 남무팔단금의 초식을 이어갔다.
 반면 그는 점점 심상의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일체의 잡념이 사라질수록 모든 감각은 육신의 흐름을 따랐다.
 솨아아아아-
 마침내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나타난 체형은 또 한 명의 천위였다.
 마치 꿈에서 늙은 나를 봤듯 이제는 육신의 밖에서 육신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으나,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손끝의 희미한 반응은 손가락을 타고 이어졌고, 손목과 팔뚝을 지나 팔꿈치까지 연결됐다. 어깨를 지나는 순간부터 육신의 변화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분화했다.
 오장육부로 흘러가는 기운과 임독맥을 타고 원을 그리는 기운을 구분했고, 근육과 혈맥의 작은 꿈틀거림마저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단전에서 흘러나온 내력이 혈도를 타고 흐르며 혈맥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천위는 이제 그 단계를 지나 자신의 육신을 낱낱이 해부하려 한다. 그리하여 뼈와 근육, 피와 피부가 반응하는 경로와 힘의 경중마저 보고, 깨우치며 담았다.
 “후우…….”
 어느새 호흡까지 느려졌었나 보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걸린 시간만 해도 수십을 헤아렸을 정도였다. 이제 숨을 내뱉으려는데 단전에서 붉은 빛이 희미하게 일렁이더니 염화기가 반응했다.
 솨아아아아아-
 사지백해를 떠돌던 염화기는 단전에서 쉴 사이도 없이 천위의 호흡을 따라 스르륵 흘러나왔다.
 보인다. 녀석의 움직임이 똑똑히 보인다.
 한데 염화기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발버둥을 쳤다.
 천위는 아이를 어르듯 천천히 이끌었다.
 지금껏 천위가 보고, 느끼며, 깨우쳤던 육신의 통로 중 가장 자연스러운 곳을 하나씩 거쳤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릿한 인고의 시간이다.
 하지만 천위는 정신을 집중한 채 염화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남무팔단금의 마지막 초식인 칠전식은 본래 ‘배후칠전 백병소(背後七顚百病消)’라 하여 뒤꿈치를 일곱 번 들고, 백병을 해소하는 행위였다.
 천위가 뒤꿈치를 일곱 번 째 들어 올리는 순간 때마침 염화기가 손끝에 이르렀다. 그렇게 뭉쳐든 염화기는 천위의 뒤꿈치가 일곱 번째로 땅에 닿는 순간 폭발하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쩡-
 정수리의 백회혈을 강타당한 듯한 고통!
 바늘이 임독맥을 타고 흐르는 듯한 찌릿함!
 기경팔맥까지 뒤흔든 충격이 연이었다.
 동시에 붉은 기운이 손끝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기운은 천위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어둠을 산산조각내기에 충분했다.
 천위가 관조를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후우…….”
 시원한 바람이 천위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천위는 땀을 닦을 사이도 없는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딛고 선 바닥의 청석은 산산조각이 나서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 장의 거리를 격하고 존재하던 수풀은 태풍에라도 휘말린 것처럼 엉망진창이 아닌가.
 천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근질거림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열기를 휘감은 것처럼 불그스름하게 번들거릴 뿐이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이 현실임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드리워졌다.
 “후훗.”
 오늘 천위는 절정의 경지를 밟았다.
 
 그 날 밤 천위는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
 
 꿈속의 세상, 그러니까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의 세상은 여전히 마도천하였다. 그리고 남궁세가는 패망하여 이름만 남아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늙은 나 역시 천무대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천위는 기루의 별실처럼 보이는 작은 공간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크흠, 아직도 남궁세가냐?’
 절정의 경지가 곧 천하무적이나, 무소불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몸을 추스를 정도는 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나와 늙은 백주룡, 그리고 늙은 진소백까지 여전히 천무대에 속해 있었다.
 ‘나는 왜 사부에게 돌아가지 않는 거지?’
 남궁세가에 애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빚을 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데 어째서 늙은 나는 족쇄라도 찬 사람처럼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궁금했다.
 천위는 주연을 벌이고 있는 세 명을 살폈다.
 백주룡은 늙어서도 변한 것이 없다.
 “그거 팔면 얼마나 할까? 배분할 거지? 혼자 먹으면 배탈 난다. 알잖아? 내가 또 친구가 아파하는 꼴은 못 보는 거. 그러니까 내가 너그럽게 받아주마.”
 일전에 산채를 정리하면서 수하에게 빼앗은 금환(金環)을 거론하는 듯싶다.
 저 녀석처럼 일관성이 있게 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리라.
 늙은 나는 손등을 긁적이며 코웃음을 쳤다.
 “쓸 곳이 있으니까 꿈 깨라.”
 진소백이 중얼거리며 끼어들었다.
 “크큭, 그딴 금붙이가 대수냐. 검후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것이 신외지물이라고 했어. 그 분의 말씀만 따르면 세상은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흥! 너부터 정상이 아니란다.”
 진소백은 예전에 살폈던 것처럼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다. 낡은 책을 부여 쥔 채 키득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녀석의 과거가 문득 궁금해졌다.
 한데 절정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일까?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소백이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음울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끈적끈적한 기세가 아닌가.
 마치 사마외도처럼 음습했다.
 ‘진소백이 저렇게 강했나?’
 하남진가의 차남이 강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녀석을 보고 있자니 결코 긍정적인 이유로 강해진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세 사람이 술을 마셨지만, 대화는 늙은 나와 백주룡이 주도했다. 대부분 시시껄렁한 주제를 생각나는 대로 주고받을 뿐이다.
 ‘이렇게 쓸모없는 꿈도 진짜 오랜만인데?’
 천위는 슬그머니 미간을 찡그렸다.
 꿈은 확정된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처럼 살다보면 저리 될 것이라며 보여주는 장면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천위가 중요한 선택을 하거나, 일신의 변화가 생기면 꿈도 바뀌었다.
 또한 꿈은 의미를 지녔다.
 천위로 인해 변하거나, 변할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잠룡비원에 온 이후로 진짜 개꿈이라고 치부할만한 꿈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데 오늘은 절정이 된 기념비적인 날이 아닌가.
 천위는 잡생각을 지우고 꿈에 집중했다.
 ‘뭔가 있을 거야!’
 저들의 쓸모없는 대화와 의미 없는 몸짓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끼익-
 갑자기 별실의 문이 열렸다.
 문 밖으로 보이는 기루의 실내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여기는 별실이 아니라 창고였던 거냐?’
 천위는 여전히 궁상(窮狀)을 벗어나지 못한 세 사람을 향해 혀를 찼다.
 그 사이 노파가 별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각이에요.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늙은 천위는 부스럼이라도 났는지 손등을 긁적이며 눈치를 봤다. 그러더니 어색한 웃음과 함께 백주룡에게서 빼앗은 금환을 건넸다.
 “이걸로 더 안 되겠나?”
 하나 노파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설향이는 우리 기루를 대표하는 기녀 중 하나에요. 이 반지는 지금까지 사정을 봐드린 대가로 그냥 받을게요. 일각입니다. 아셨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올 겁니다.”
 노파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별실의 문을 닫았다.
 “쳇! 야박한 할망구같으니라고! 남궁세가에 있을 때 식모였다며? 세가가 풍비박산 났을 때 한 재산 챙겼으면 서로 돕고 살아야 하잖아.”
 “공짜 술 마시면서 그러는 거 아니다.”
 백주룡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금환은 그냥 팔아먹자고 했잖아. 괜히 반지만 넘겨준 꼴이잖아. 그거 팔면 못해도 은자 열 냥은 나왔을 텐데!”
 늙은 천위 역시 짜증이 났는지 손을 쥐락펴락했다.
 “소백을 위한 일이다. 그만 투덜거려. 나도 짜증나려고 하니까.”
 백주룡은 그제야 입을 닫았다. 하지만 남몰래 입술을 삐죽이며 구시렁거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별실의 문이 다시 한 번 열리며 노파가 들어왔다. 노파의 곁에는 아리따운 기녀가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수수한 옷차림을 한 채로 서있었다.
 “일각만 앉아 있다고 와.”
 기녀는 술자리에 앉은 세 명을 보고 짜증을 부렸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해요? 아프면 의원을 찾아가야지. 왜 여기에 오는 거야!”
 하나 노파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기녀는 결국 진소백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일각입니다.”
 노파가 떠나자 기녀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진소백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라버니.”
 그녀의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술자리를 지켜보던 천위였다. 그리고 기녀가 다음에 내뱉은 말을 듣고는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저 소희에요. 제가 왔어요.”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기녀는 소희가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소희를 닮지도 않았고, 명가의 품격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진소희에게서 명가의 품격이 느껴진다는 뜻은 아니다.
 한데 진소백이 다시 한 번 천위를 놀라게 했다.
 “소, 소희야! 소희야. 네가 왔구나.”
 그는 신주단지처럼 감싸고 있던 낡은 책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기녀의 어깨를 감싼 채 연방 진소희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단다. 다행이야. 남궁세가나 되는 곳의 전각이 그렇게 한 순간에 불탈 줄은 몰랐어.”
 기녀는 헛웃음을 짓더니 무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가 죽기는 왜 죽어요.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두 사람은 이산가족이 해후한 것처럼 대화를 나눴다.
 천위는 그 모습을 보며 몇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가 망할 때 소희가 죽은 건가? 그리고 진소백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미쳤다?’
 늙은 천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괴감 가득한 표정으로 몇 잔의 술을 연이어 들이켰다.
 백주룡은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빌어먹을! 저게 뭐하는 짓이래.”
 “별 수 없잖아. 저런 식으로라도 회포를 풀지 않으면 저 녀석 진짜 미쳐.”
 “지금도 진짜 미친 것 같거든. 어차피 저 기녀와 닮은 것도 아니잖아. 괜히 비싼 기녀를 붙잡고 소희를 찾는 바람에 이게 뭐야?”
 백주룡은 늙은 천위를 따라 술을 들이켰다.
 그러다 분기가 치솟았는지 이를 갈며 말했다.
 “빌어먹을! 남궁세가는 왜 망해가지고! 이게 다 남궁세가 때문이야! 고고한 척만 하는 멍청이 새끼들! 정파의 지주는 개뿔! 네 놈들 때문에 망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늙은 천위가 불현 듯 손을 쥐락펴락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몹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손에는 천위가 그러했던 것처럼 불그스름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아……. 근질거리지가 않아. 병이 나은 건가?”
 늙은 천위는 갑자기 별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불현 듯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표정을 굳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백주룡에게 물었다.
 “남궁세가가 왜 망했는지는 너는 잘 알지?”
 백주룡은 키득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면 뭐해. 어차피 다 박살난 후에야 알았던 건데. 아이고! 의미 없다. 그냥 마교 새끼들이 대단했던 거야. 삼종의 후계자였던 나조차 놈들의 말살대계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걸?”
 마교(魔敎)의 말살대계(抹殺大計).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용어였다.
 “정파의 세상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난세였던 거지.”
 “그러고 보면 혈겁의 시작도 정말 어이없었지. 세상 그 누가 말살대계의 시작을 잠룡대연이라고 생각했겠어. 좀 더 거창하고, 대대적이어야 정상 아니냐? 꼬마들 재롱잔치에 마교 놈들이 들이닥치다니…….”
 말살대계를 되뇌던 천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혈겁(血劫)이 잠룡대연으로 시작한다고?
 설마 이제 삼 일 남은 그 잠룡대연은 아니겠지?
 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지금껏 미래의 자신을 보며 비웃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었다. 하나 그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자신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천무대와 작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마도천하가 되었어도, 남궁세가가 망했어도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남의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그 순간 늙은 천위가 한탄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때 이곳에 없었던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뭐야? 도망쳤는데도 이 꼴인 거냐?’
 천위가 허탈해하는 사이 백주룡은 늙은 천위를 달래듯 말했다.
 “그게 네 탓이냐? 마교 새끼들이 애초에 노린 건 우리가 아니었잖아. 가주의 직계가 참석하지만 않았어도 잠룡대연은 그저 평범한 친목도모 행사로 끝났겠지. 그나마 네 덕에 우리도 산거야. 저 녀석이 저렇게라도 숨 쉬는 건 다 네 덕이라고.”
 늙은 천위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차라리 이곳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녀를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무언가 변했을까?”
 백주룡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가주의 하나뿐인 딸이다. 네가 있었어도 어차피 그녀와 만날 일은 없었을 걸? 그나마 세가가 망하고 난 후였으니까 남궁세가의 딸내미와 어찌어찌 엮였던 거지.”
 “과연 그랬을까?”
 백주룡은 늙은 천위의 잔에 술을 따르며 타이르듯 말했다.
 “어차피 시간은 흘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후회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냐.”
 그 순간 늙은 천위는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강력한 의지가 전해졌다.
 “만약 달라질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됐고, 술이나 마시자.”
 하나 늙은 천위는 사방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한 차례씩 노려봤다.
 그리고 결국에는 천위와도 시선을 마주했다.
 한데 늙은 천위가 입을 뻐끔거리는 것이 아닌가.
 보아하니 동서남북을 쳐다보면서 목소리는 내지 않고 저 행동을 반복했나 보다.
 천위는 늙은 천위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독순술(讀脣術)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늙은 천위의 말은 마치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 그도 그랬고, 나도 그랬지. 너는 어떻게 할래?
 
 “저 녀석, 또 벽보고 씨름하네. 벽에 보물이라도 박아놨냐? 술 쳐마실 때마다 저러는 것도 병이다. 병!”
 백주룡의 말에 늙은 천위는 그제야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진소백에게 안겨 있던 기녀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정신 나간 늙은이들.’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 천위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늙은 천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를 알아?’
 
 <『창천마신(蒼天魔神)』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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