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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마이 라이프 1권

2015.08.26 조회 11,020 추천 105


 # 루저 같은 인생
 
 밥풀이 붙어있는 밥그릇과 수저와 젓가락을 싱크대에 넣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지금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
 휴대폰을 구멍이라도 낼 듯이 게임에 집중해 있다.
 “가람아 이제 그만하고 학습지랑 영어해야지?!”
 “…조금 있다가요”
 “그럼 7시 되면 공부하러 들어가는 거야?”
 “네….”
 거실바닥은 카펫이 아닌 비닐장판이 깔려있었다.
 바닥을 걸레질하지 않으면 모래먼지와 방바닥에 눌러 붙은 밥풀과 반찬국물로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내가 짜증을 내기 때문이다.
 내가 실업자냐면 그건 아니다
 엄연히 일하는 사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경기불황으로 현상유지도 힘들다.
 말이 좋아 사장이지 건물주인 좋은 일만 하고 다닌다.
 몇 달째 아내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이번 달 생활비는요?”
 “그게… 조금 힘들어서….”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
 “때려치우고 어디 가서 막일이라도 해봐요 이번 달도 마이너스에요”
 회사에 다니는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하다….’
 아내 말대로 하던 일 때려치우려면 소상공인 대출금 4천만 원을 바로 반환해야한다.
 보증금 2천만 원에 월 120을 내야하는데 보증금 받아도 2천만 원뿐이다.
 게다가 은행 마이너스통장 2개에서 500만원과 600만 원짜리 두 개가 다 찬상태다.
 매달 이자만 10만원 가까이 나온다.
 아내가 전기세와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나는 가스비와 인터넷과 전화비를 낸다.
 주유비가 20만원 가까이 나오고 부모님 생활비로 매달 10만원씩 보내드리고 있다.
 국민연금에 의료보험 비까지 합하면 한 달에 얼마가 나가는지 계산하기도 두렵다.
 그러니 아내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게 빠듯하다.
 한 달에 150만원도 못 버는 한심한 40대중반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정말 실속 없는 인생이었다. 한숨 쉬며 고개를 푹 숙이자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가 보였다.
 운동은 귀찮아서 못하고 일하는 것이 운동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안 먹으면 안 찐다고 생각하지만 군것질을 좋아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정말 한심하다.
 이달 임대료도 못주고 있다.
 느닷없이 나오는 자동차 수리비며 집세 전기세를 내고나면 여유가 별로 없었다.
 문자가 왔다. 필터 공급 상에게서 결제해달라는 문자였다.
 
 몇 주 전부터 약속된 동창회에 나갔다.
 휴대폰의 밴드를 통해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동창모임은 숫자가 제법 늘어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모두가 반가웠다.
 서로 변한 모습과 옛날 일을 추억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생각하던 것처럼 잘 나가는 친구가 목에 힘을 준다거나 누구를 험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말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난 모임 후부터는 나가는 것이 약간 꺼려졌다.
 그냥 자격지심이었다. 험담하거나 듣기 싫은 말을 하는 동창은 없었다.
 그런데 세 번째 모임인 오늘에는 안 들어도 될 말을 들어버렸다.
 
 “준후가 어릴 때 하곤 많이 달라졌다 그치?”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그런 말을 하냐?”
 “어릴 때는 얘가 귀엽기도 하고 잘생겼었는데….”
 “뭘 그래? 지금도 나쁘진 않잖아.”
 “나이 때문에 그런가? 살도 찌고 옷 입는 것도 그렇고…. 나이 앞에 어쩔 수 없나봐”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래…. 우리는 안변했냐?”
 “근데 재한이는 완전 달라졌지 않냐?”
 “걔 사업에 성공 했대나봐. 어렸을 때는 코 흘리고 맨날 맞고 울고 그랬던 것 같은데”
 “걔 외제차가 억대가 넘는다고 하더라.”
 “정말? 햐~ 사람 일은 모른다니까”
 
 두 명의 여자동창이 식당 복도에 나와 하는 이야기를 화장실 가기 위해 신발 신다가 들었다.
 마렵던 소변을 참고 다시 들어갔다가 여자동창들이 들어온 다음에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고물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저 좋게 생각하면 조금 고된 인생이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답답하고 한심한 인생이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남루한 인생이었지만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울한 마음을 전환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라디오 전원을 켜자 항상 듣던 교육방송의 진행자들의 영어가 흘러나왔다.
 다른 채널로 돌려 음악을 크게 틀었다.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때마침 브라보 마이라이프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 가사를 생각하니 정말 힘들게 살아온 내 인생 나의 용기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루저 같은 내 인생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았는지 나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면 내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이런 내 삶이 아닌 좀 더 존재감이 확실한 삶으로 바꾸고 싶었다.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도 재벌이 아니라도 지금보다 더 여유로웠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내 인생을 바꿀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붉어진 내 눈시울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느덧 광주로 들어오는 마지막 지하도 터널에 다다랐다.
 터널의 입구가 갑자기 둘로 겹쳐보였다.
 순간, 얼른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잘못 보이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물을 훔쳤지만 터널의 입구가 두 개로 나누어져 보이더니 그대로 차가 빨려 들어갔다. 불빛 없는 어두움 속으로 돌진하는 차를 세우기 위해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그러나 차는 이미 없어지고 나 홀로 어두운 길을 걷고 있었다.
 흐려진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봤다.
 앞쪽에 안개가 살짝 끼어있는 아치형태 돌다리 위에 나 혼자 서 있었다.
 느낌에 이 돌다리를 건너면 저세상으로 가는 길일 것 같았다.
 ‘천사든 저승사자든 누가 나와 있어야 정상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고 싶었다.
 
 “다리를 건너면 안 돼…. 돌아가야 해!”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리 중간에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죽을힘을 다해 되돌아 왔다.
 두려웠다. 죽는다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거지같은 내 인생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삶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
 …
 …
 “아~ 악 난 살고 싶어~!!”
 
 덮고 있던 무거운 솜이불을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꿈이었구나!!”
 
 잠이 덜 깬 상태로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몸을 뒤척이려는데 내 몸이 무척 가볍게 뒤집기가 되었다.
 86Kg이나 하는 무거운 몸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몸이 뒤집어졌다.
 뒤이어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얼른 일어나야지? 준후야 준걸아 학교 늦겠다.”
 “…!”
 
 준후라는 내 이름은 맞는데 들리는 목소리가 귀에 익으면서도 낯선 목소리였다.
 ‘뭐야? 학교라니? 그리고 이 소리는 엄마 목소리 같은데….’
 상체를 일으켰다. 이상하게 익숙하지 않은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조그마한 발등과 자그마한 내손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보이지?”
 
 그러고 보니 방안 벽지도 촌스럽고 생경한 가구며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시골 벽돌집에 벽지 썩는 냄새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젊은 아줌마가… 아니 우리 어머니였다.
 
 “어… 어 이…게 어떻게?”
 “뭐하냐? 얼른 세수하고 밥 먹어”
 “네? 혹시… 엄마?”
 “이놈 시키가 장난 하냐? 얼른 안 나가?”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때리며 내쫓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가를 확인을 해야 했다.
 '집사람과 아들 가람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지?'
 이게 꿈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싶어 볼을 꼬집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이씨 준후형 왜 손을 밟고 그랑가?”
 
 이불속에서 꿈틀대던 동생 준걸이가 짜증을 냈다. 2살 아래 동생 말도 잘 안 듣는 꼴통이었지만 나중에 사업에 성공해 제일 잘 사는 동생이었다.
 비록 부스스한 몰골이었으나 생각처럼 밉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큰 머리통을 자랑하듯 귀여웠다. 내쫓기다 시피하며 부엌으로 나왔다.
 생각해보니 약 30여 년 전 시골 우리 집이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설마… 그 지하도 안에서 뭔가 바뀐 것인가?”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오셨다.
 
 “헉!”
 “어째 그라고 놀라냐? 얼른 학교 가그라.”
 
 아버지 특유의 무심한 듯 자상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너무도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결국, 나도 아버지를 닮은 것이었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 어머니도 이렇게 젊을 때가 있으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들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게 되니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다시 살아야하는 인생인가? "
 이게 진짜 현실이라면 올바른 선택을 하며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부엌에 나와 아무 칫솔이나 골라잡고 칫솔질 했다.
 자기 것을 찾던 동생이 짜증을 냈다.
 
 “준후 형은 자기 칫솔도 모른가?”
 “네 것이었어?”
 “에휴~ 아직도 엠비시 하고 케이비에스 채널 모르지?”
 나는 무심했다. 공부도 그랬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 신경을 끄는 스타일이었다.
 “미안 준걸아.”
 
 평소 같으면 ‘조용해 새캬~’하고 쥐어박았을 테지만 내 정신연령은 40대 중반이었다. 아들 뻘 동생인 셈이었다.
 
 “야 그런데 내가 몇 학년이냐? 그리고 올해가 몇 년도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째려보던 동생은 포기한 것 같은 얼굴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1980년이고 형은 4학년이야”
 “고마워.”
 
 동생은 머리가 큰 만큼 공부를 곧잘 했다. 그리고 형 정준서는 전교 학생회장을 했을 정도로 시골 학교에서 공부 잘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소위 어머니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하는 꼴통이었다. 평소처럼 깨작깨작 먹던 밥이 아니라 후딱 먹어버리자 어머니가 놀랬다.
 
 “먼 일이냐? 오늘은 평소하고 다르게 밥도 잘 먹고….”
 “앞으로 엄마 속 안 썩힐게요.”
 
 식사하시던 아버지가 나를 신기한 눈으로 보시더니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시고 웃으셨다.
 
 “별일이다. 둘째가 그런 말을 다하고. 허허허.”
 
 자식 잘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인 것은 모든 부모들 마음인가보다.
 어려서 못했고 철없어서 못했던 것들이 지금에서야 후회가 되었다.
 
 “준걸이랑 함께 학교가라. 한눈팔지 말고 잘 다녀와.”
 
 등에 멘 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들고 학교로 걸어갔다.
 동네 아이들이 학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용식이 재후, 석인이, 수정이, 형호, 금석이 형, 인철이 형, 영혁이 형, 금란이, 그리고 우리학교 얼짱 누나인 희선이 누나와 숙영이가 보였다.
 그 외에도 얼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많은 동네 형 누나 친구들 동생들이 학교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 다시 살아보고 싶다
 
 시골 외진 마을이라 버스가 없었다.
 
 “안녕 형! 안녕 누나!! 반가워~”
 
 일일이 인사하자 같이 가던 동생이 말했다.
 
 “오늘따라 어째 그런가?”
 “왜?”
 “전에는 누가 인사해도 아는 체도 안하고 인상 팍팍 쓰면서 댕기 더만 오늘은 별라도 그라네잉~”
 
 나의 인사를 받는 누나들은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피식~’ 웃음소리를 내고 웃었고 친구들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나는 짙은 갈매기 눈썹에 남자아이인데도 보조개가 있었다. 상당히 귀여운 얼굴이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누나들이 자꾸 귀엽다는 말을 해 서 어린놈이 재수 없게 인상 쓰고 다녔던 것이다. 귀엽다는 말이 계집애처럼 생겼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 그랬구나. 이런 비뚤어진 성격이 아이들에게 썩 좋지 못한 인상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새 학기 시작이라 새로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문주란 선생님이셨다. 생각해보니 가수이름이랑 같아서 선생님이 그렇게 소개하셨던 데자뷰 현상이 일어났다.
 26살 처녀 선생님이었고 내 어린 기억에도 예쁜 선생님이셨다.
 겉은 아이였으나 속에 중년이 들어 앉아있으니 어렵고 무서울 수 있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예쁘고 참한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 안하도록 조심 해야겠다. 휴우~’
 첫 시간에는 선생님 소개와 함께 번호를 정하고 자리배치를 다시 하는 것이었다.
 키에 따라 작은 학생은 앞자리 큰 학생은 뒷자리였는데 어김없이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짝꿍을 정해 주셨다. 예상대로 남자 여자로 앉히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남자여자가 짝이 되는 것을 꺼려했다.
 11살짜리 아이들은 당연히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좋았다. 내 기억에도 생생하게 남아있던 혜미가 내 짝꿍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집스럽고 오기가 많아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는 모습이 별로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착실하고 자기관리가 뛰어난 여자애였던 것이다.
 “지금 나누어준 종이를 짝꿍이랑 반으로 나누어서 칠판에 쓰여 있는 질문에 답을 써내라”
 1번 가족.
 2번 좋아하는 음식.
 3번 취미.
 4번 좋아하는 과목.
 5번 싫어하는 과목.
 6번 선생님께 바라는 것.
 별로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으나 아이들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1. 아버지 : 정규원, 어머니 : 박옥순, 형 : 정준서, 동생 : 정준걸
 2. 과일.
 3. 독서.
 4. 전 과목.
 5. 전 과목.
 6. 저에 대해 놀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써서 제일 먼저 제출했다. 그런데 깜빡 잊은 게 있었다.
 나의 필체였다. 초등학교 4학년의 필체가 아니라 40대 아저씨 필체였다. 썩 좋은 필체는 아니었으나 어렸을 때 하도 필체가 안 좋아 붓글씨 연습부터 펜글씨까지 부지런히 연습을 했기 때문에 약간 흘림의 누가 봐도 어른이 쓴 글씨였다.
 흔히 백노지라 불리는 종이에 어른스럽게 쓰인 글씨를 보던 선생님의 눈빛이 흥미로웠다.
 “정준후”
 “네, 선생님.”
 “이거 네가 쓴 거야?”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빙긋 웃었다. 등까지 내려온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가 참 매력적이었다.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에 모두 전 과목이라고 쓰는 것은 무슨 뜻이야?”
 아마도 고약한 남자 선생님들 같으면 매를 맞거나 장난 치냐며 꿀밤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옛날 선생님들은 조금 무식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6번 선생님께 바라는 사항을 놀래지 마시라고 썼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이 녀석 보게?’ 하는 것 같았다.
 “전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어? 정말이냐?”
 “네, 선생님.”
 “너 정준서 동생이지?”
 “네, 맞습니다.”
 “네 말대로 그렇다면 네 형만큼 해봐 그럼 인정해줄게!”
 살아오면서 누구랑 비교 되는 것 중에서 형이랑 비교되는 것이 제일 싫었다. 어디를 가나 항상 형과 비교되었다. 부모님도 그랬고 동네 어른들도 그랬고 학교 선생님들도 그랬다.
 사고치거나 실수하면 어김없는 비교의 말이 튀어나왔다.
 ‘형은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러냐?’
 ‘네 형만큼만 해라.’
 ‘형만 한 동생 없다더니… 쯧쯧’
 그 생각들이 떠올랐다. 내가 공부를 못한 것에는 노력부족이전에 그 비교 대상이 항상 준서 형이어서 공부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나중에야 깨닫고 열심히 공부해서 4년제 전기대인 국립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그걸 깨닫는데 까지 시간이 너무도 오래 걸렸던 것이다.
 
 “선생님 만약 제가 형보다 더 잘하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짜리의 발언은 당돌하다 못해 싸가지 없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문주란 선생님은 이런 도발적인 발언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셨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소원을 말해. 그걸 들어주지.”
 마음속에서 능글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미녀선생님보다도 더 오랜 시간 세상 경험을 했던 사회 선배였다.
 “월말고사에서 올백을 맞으면 우리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께서 다과회를 열어주세요”
 “오~ 그래? 좋아, 약속하지.”
 선생님은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런데 옆자리 앉은 혜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봤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가 이혜미였다.
 “흥!! 잘난 체 하기는.”
 나를 보며 비웃는 혜미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보통 남자아이들은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철없는 행동을 했겠지만 나는 혜미가 너무 귀여웠다. 딸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이 교무실에 간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선생님 그리고 교장, 교감 선생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건방지다는 남자 선생님도 계셨지만 대다수 선생님들은 나의 그런 태도에 아이들의 학습 태도가 좋아지고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셨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미술, 체육과목들의 반복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씩 학급회의라는 것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대박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의 시간이었고 지루하고 귀찮았다. 하나마나한 소릴 늘어놓고 있었다.
 이미 아는 내용이었고 대학교 때 학원 강사 생활을 오래한 탓에 공부 자체는 어려움이 없으나 암기 과목에는 신경을 써야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린 용어와 단어들이 불쑥불쑥 나왔기 때문이다.
 형을 통해서였는지 동생을 통해서였는지 부모님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허허, 진짜로 선생님하고 그런 내기를 했냐?”
 “네, 아빠.”
 “자신 있냐?”
 “자신 없는 내기는 하지 않아요.”
 “오호~ 그래? 아빠도 지켜보겠다. 그리고 열심히 해라. 허허허.”
 
 여태 형만 못한 동생이었고 걸핏하면 문제만 일으키는 둘째 아들에서 이상한 녀석으로 변했고 뭔가 많이 달라져 버린 궁금한 녀석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한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바꿔야하는 중요한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김없이 월말고사 날짜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시험이고 교과서를 몇 번이고 재 반복해서 봤다면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우습게도 긴장이 되었다. 목표가 올백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실수하지 않아야 했다. 교과서 내용 전체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렸을 때는 잘 이해가지 않던 것이 어른이 되면 의외로 쉽게 이해되는 것들이 있고 어렵고 복잡한 것도 오래 들여다보면 일정한 규칙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일에는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빨리 찾아 공식화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행동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에서 오는 착각과 편견이다. 이것을 빨리 떨쳐버리고 항상 오류가 없는지 흘려서 뭔가 놓치지 않았는지 체크를 해야 한다.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다. 선생님들마다 문제를 출제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꼭 알아야 할 부분에서 내는 것이 60%이상이며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30%를 낸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어렵게 낸다. 다시 말해 교과서에서 나오긴 하지만 변별력을 높이고 만점자수를 줄이려는 것이었다. 주관식 문제가 그것이고 대다수학생들은 같은 말인데도 다른 용어로 바꾸어 내는 문제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 점을 캐치하면 모두 맞게 된다.
 
 산수문제는 대다수 계산이 맞는 답을 찾으라고 하지만 그중에는 꼭 옳지 못한 것을 하나 골라내라는 것이나. ‘답으로 옳지 않는 것은?’이라는 말로 꼬아둔다. 보통 맞는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3개의 답이 맞고 나머지 하나가 틀린 답이 나온다면 문제를 정확히 읽은 학생은 틀린 것 하나를 골라내지만 신중하게 문제를 읽지 않는 학생은 계산을 풀어 나오는 답을 옳은 것인 줄 알고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시험이 끝났다. 그날따라 선생님들의 관심은 나와 문주란 선생님의 내기 시합에 관심들이 있으셨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말이다.
 혜미가 나의 시험결과에 대해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내 눈치만 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채점은 우리가 하교한 뒤 하시는 것이라 먼저 종례시간을 가져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은 몇 번 답이 뭐였냐고 묻거나 시험 잘 봤냐고 질문을 해왔다.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이 되어서 관심의 한가운데 있었다.
 6학년 희선이 누나가 가까이 왔다.
 “준후야, 너 시험 잘 봤어?”
 “아~ 누나 잘 모르겠어요. 내일이면 알겠죠.”
 “작년에 비해 올해 너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래요? 작년에는 어쨌는데요?”
 “그냥 좀… 그랬어. 호호호”
 “한마디로 싸가지 없었죠?”
 “호호호, 나는 그런 말 한적 없다.”
 눈웃음은 내 어릴 때 기억과 똑같이 예뻤다. 반달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시골에서 자랐지만 도시 어느 아이들보다도 희고 고운 피부와 가지런한 치아를 가진 미인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약간 곱슬머리였으나 그 이유 때문인지 항상 머리핀을 여러 개 꼽고 다녔다.
 
 나중에 간호사로 근무할 때 수많은 남자 의사들의 대시를 받게 될 정도의 미모였다. 그 누나에게 언제 아버지가 돌아가실지 그리고 장차 의사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은 불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형과 동생이 먼저 와 있었다.
 형은 자전거가 있어서 막내인 준걸이를 뒤에 태우고 먼저 온 것이었다.
 형이 흥미로운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물었다.
 “어째? 잘 봤냐?”
 “아직 모르지. 결과는 내일 나오지 않아?”
 예전과 다르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부쩍 관심이 많아지셨다. 왜냐하면 불과 한 달 전 일이었지만 많은 행동이 달라져있었고 공부를 귀찮아한다거나 아니면 꼭 해야 할 일을 후딱 처리해놓고 책을 읽는 모습에 감탄을 하신 것이다.
 “그래, 시험 보느라 고생했다. 얼른 씻고 밥 먹어라”
 “응, 엄마.”
 처음에는 꼬박꼬박 ‘네’ 라고 대답하자 어머니가 낯설어하셨다. 그래서 아이에 맞는 대답으로 바꿨다.
 평소에는 ‘응~’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 과거의 힘든 기억
 
 요즘은 공부라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형보다 더 어른스러워진 나를 더 대견해 하신다.
 형은 네가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 하는 심리였나 보다. 심성은 착했지만 경쟁심이 누구보다 강했고 형으로서의 위신이 조금이라도 깎인다 싶으면 가차 없는 보복을 가하던 성격이었다.
 즉, 한 마디라도 대들면 주먹이 곧바로 날아왔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건들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고 철없을 때는 겁 없이 대들었으나 지금은 그래야할 이유도 없었고 책잡힐 만한 이유조차 없었다.
 아버지도 시골에 사셨지만 대학을 나오셨다. 그래서 큼지막한 책장 두 개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독서실이 되어주었다. 아버지는 과일 농장을 크게 하고 계셨다. 배와 사과가 우리 집의 주 수입원이었다. 수확 철에는 큰돈을 만지셨고 시골에서도 무시당하지 않는 유지 축에 속했다. 그때 당시 내 기억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난 뒤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
  단테의 상상 속에서 나온 우의적(寓意的) 여행담은 실제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생활체험에서 얻은 진실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조잡한 생활이나 이성과 덕이 결핍된 생활을 상징하는 ‘어두운 숲’은 ‘3마리의 야수’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들 야수는 원죄에 유래하는 3가지 아집 즉, 색욕 ·교만 ·탐욕의 상징이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에 인도된 단테는 이 숲을 벗어나 이성과 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걸 맞는, 현세에 있어서의 지선즉, 지상낙원에 이른 다는 내용이다.
 
 우리 가족이 믿는 기독교적 사상에 맞는 내용이었으나 힘들고 가난한 미래의 부모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너무나 비참하고 눈물 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고 정직하게 사시려고 노력하시던 아버지 어머니가 겪어야하는 시련이 아집에서 나온 것 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문호 단테를 비방하고 무시해서가 아니라 우리식구의 미래의 삶이 우리가족의 원죄 때문이라기보다는 세상이 악했고 사람들이 악했던 이유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 어린 그 시절 시골에서 우리 집에는 냉장고며 컬러 TV가 있었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가지고 계셨다.
 1980년대 초 시골에서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나름 시골에서는 있는 집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과수원을 가지고 계셨다. 사과와 배를 출하 할 때면 우리 집은 잔칫집 분위기였다.
 황토 땅이었고 남향이어서 과일의 당도가 높았다.
 그런데 집이 힘들어지기 시작한때가 내가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먼 친척과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러 자주 드나들었다. 부모님은 인심 좋고 사람을 박대하는 분들이 아니셨다.
 그렇게 몇 백만 원부터 천만 원씩 빌려주셨다가 제대로 받지도 못하신 것이었다.
 어린마음에 왜 그렇게 조건 없이 빌려주시는 것인지 이해를 하기 힘들었다.
 나는 화폐의 가치를 잘 모르는 나이였고 그렇게 큰 액수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1983년도에 이름이 ‘애비’라는 태풍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기록적이지도 않은 태풍이었다.
 그런데 하필 우리가 사는 곳에 강한 바람이 불었다.
  아직 수확이 한참 먼 과일의 낙과가 심했다.
 8월말에 들이닥친 태풍이라 피해가 더 심각한 것이다.
 
 문제는 태풍이 지나고 난 뒤 다른 해에 비해 부모님이 가지고 계신 돈이 얼마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 아버지가 돈을 빌려간 사람들에게 돌려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하고 부탁해도 당장 갚을 능력이 안 된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들으신 것이다. 그나마 몇 십만 원을 우선 마련해준 친척이 그나마 착한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다음 해에는 여유자금이 없어서인지 제때 사람을 사서 일을 못해서인지 작황 자체가 좋지 못했다. 1~2년을 힘들게 과수농사를 지으시다가 결국, 과수원을 팔기로 결정하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과수원과 딸린 집을 팔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집안일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시골에서는 제법 유지라는 말을 들었지만 서울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1만평이 넘는 과수원을 판돈으로 서울에서는 조그만 아파트하나 사기도 힘들었다. 시골이었고 평당 3천원 정도였으니 팔고 이것저것 떼고 빚을 정리하다보니 3천 5백만 원이 조금 넘었다. 과수원의 비탈진 위쪽에는 배나무가 있었고 비교적 비탈이 덜한 밭쪽에 사과나무가 있었지만 평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3형제를 공부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 올라오신 것이다.
 과일 장사를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시골에서 올라 온데다가 세상물정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었다.
 과일을 키워 높은 당도와 좋은 품질의 사과와 배를 만들어내시는 비결은 아셨지만 그 외에는 숙맥이나 다름없으셨다.
 서울에 올라와 가게를 구하시다가 늑대 같은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해 가게전세금을 날리셨다.
 봉천동의 15평 남짓의 시장구석 방이 딸려있는 가게 전세금이 2000만원이었다. 변두리였고 그리 비싸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싼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피 같은 돈을 사기당해 날려 버렸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5명의 식구가 살 수 있는 주택을 보증금 700만원에 월 30만원에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내복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셨고 아버지는 과일가게에서 배달을 하시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사람 많고 번화한 도시에 대한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어도 우리 집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서울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의 시골마을은 무척 따뜻하고 좋은 추억으로 가득했었는데 말이다.
 서울사람들은 항상 바쁘게 움직이며 우리보다 한 박자 빨랐다.
 서울생활에 막 적응이 될 무렵 우리 집안의 시련도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 내린 눈이 비탈진 응달에서는 더디게 녹았다.
 경사진 골목길을 퇴근해 올라오시던 어머니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왼쪽 발목을 다치셨다.
 어머니의 금이 간 발목뼈가 붙을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은 꼭 겹쳐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추운겨울 무거운 과일상자를 나르시다가 허리를 삐끗하셨다.
 며칠 과일가게를 못나가시자 그만두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일을 못하시는 한두 달이 그렇게 치명타가 되어 돌아올지 아무도 몰랐다.
 희망에 찬 서울행은 불과 2년도 되지못해 냉랭한 찬바람 속에 난방비며 식비, 전기료 등의 생활비는 고사하고 집세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버지는 급박한 집 사정을 생각해서 예전에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 돈을 갚아줄 것을 통사정했지만 모두들 귀찮아하고 외면하기 시작했다.
 재판을 걸어보았으나 법원에서 판결은 돈을 받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몇 달에 한 번씩 찔끔찔끔 주다가 연락을 끊어버리는 그들을 찾을 여력마저 없어져 버렸다.
 근근이 살아가던 우리는 결국 살던 보증금 일부를 찾아 광주로 내려왔다.
 그나마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었고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래 전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으셨다는 교회 장로님이 보증을 서주셔서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광주의 주택가 구석에서 가게를 열었다. 가게를 얻고 나자 살 집까지 구할 여력이 안 되셨던 아버지가 가게 건물 주인에게 부탁해 4층 옥상에 임시건물을 짓고 살아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다만 이사 갈 때는 옥상 건물에 대한 권리나 양도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돈도 없고 급한 아버지께서는 그것마저 감사하다고 생각하셨다.
 쇠파이프로 철골을 세우고 트럭포장용 천막지붕을 덮었다.
 태풍이 불면 천정이 들썩거리고 해가 비치면 덥고 형형색색의 천막 재질에 빛이 통과하면서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사는 느낌이었다.
 준서 형이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과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천장을 보던 형의 친구들은 한동안 말문이 막혀서 말을 하지 못했었다.
 내 생각에 형은 일부러 그랬던 것 같았다.
 
 지금은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리신 부모님은 젊어서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모으셨지만 모두 그렇게 저렇게 잃기만 하셨다. 온 식구들이 무려 20년 가까이 어렵게 고생한 결과 현재 아버지 어머니가 사시는 조그만 아파트를 힘겹게 마련하게 되었다.
 
 약 20년 뒤 부모님이 팔아버린 땅은 그곳에 도청 이전이 결정되자 땅값이 거의 수백 배로 뛰어 올랐다. 생각해보면 환장할 노릇 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들이 다가온다. 그때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모든 선택들에서 승리자가 아니었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선택들을 다시 바로 잡고 싶었다. 조그만 내 역사서를 다시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되돌아간 인생을 비겁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다가 여러 가지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생각에 잠겼던 나는 아이의 체력으로 감당이 안 되는 밤 12시까지 버티지 못했다.
 잠깐 쉰다며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집밖의 화장실을 가시던 아버지께서 작은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들어오셨다. 그리고 나를 안아다가 잠자리에 누이셨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셨다.
 
 “이놈이 앞으로 뭐가 되던 크게 될 놈이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리 변했는지 궁금하군.”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드디어 오늘 시험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아침에 아버지께 말씀 드렸다.
 “아버지, 죄송한데 2만원만 주세요.”
 “아니! 그렇게 큰돈을 어디다 쓰려고 그러냐!!”
 “제가 전 과목 모두 100점을 맞으면 선생님께서 우리 반에 다과회를 열어주신다고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못하면 저라도 다과회를 열어주어야 될 것 같아서요”
 “시험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냐?”
 “아니요, 모두 100점을 맞았다면 기분 좋은 일이지만 박봉인 선생님께 무리한 부탁이 아닌가도 싶고, 제가 백점을 못 맞았다면 기대하던 반 친구들에게 실망감을 심어줄 것 같아서입니다”
 내 말을 들으시던 아버지는 선생님의 박봉을 운운하는 나의 말을 들으시고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렇다면 학교 끝나는 시간에 내가 먹을 것을 사서 찾아가도록 하마.”
 “괜찮으시겠습니까?”
 “허허~ 걱정 말아라. 아빠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어른 같은 말투 좀 고쳐라.”
 
 아침 학교에 등교해 반 교실에 들어서자 칠판에 선생님이 붉은 색과 노란색 분필로 이렇게 써 놓으셨다.
 ‘ 경 정준후 전 과목 백점 축’
 내가 들어오자 반 아이들은 ‘워~’하는 소리를 냈다.
 별거 아닌 애들 장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 새로운 나로 인식시키다
 
 기뻐하는 아이들 속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수업 끝나고 아버지께서 다과회 준비를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응? 정말이야?”
 “선생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셨어요.”
 “준후는 네가 모두 100점일 것이라 예상한 거야?”
 “아닙니다. 제가 모두 100점을 맞지 못하면 반 친구들이 먹고 싶은 과자를 먹지 못해 실망할 것 같아서 아버지께 부탁드린 것입니다.”
 선생님은 약간 놀라신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교무실에 간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께 그 말씀을 전하시면서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날 아버지는 읍내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셔서 음료수와 과자를 몽땅 사오셨다.
 우리 반은 신나는 과자파티를 열었다. 교무실에서는 아버지가 전달해드린 음료수와 먹거리를 선생님들끼리 나누어 드셨다.
 집으로 돌아가자 형은 썩 기분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아빠, 저도 모두 100점을 맞으면 준후한테 해준 것처럼 해주실 수 있어요?”
 “음, 그러고 보니 준서는 1등은 했어도 올백은 한 번도 못했나?”
 “….”
 “알았다 너희 삼형제 모두에게 해당된다. 모두 백점을 맞아오면 그렇게 해주지.”
 역시 경쟁심이 많은 우리 형이나 짝꿍 혜미는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싶었다.
 ‘올백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놓쳐서는 안 되겠군!’
 그 후로도 월말고사와 기말고사 모두 정신 차리고 시험을 치른 탓에 실수가 없었다.
 비교 대상 중에서 열등아였던 나는 이제 형과의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심부름을 종종 시키신다. 그래서 예외 없이 문주란 선생님께서도 늙은(?) 나를 시키셨다. 선생님들이 사용하시는 칠판용 삼각자를 6학년 3반 선생님께 가서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수업시작 직전이라 빨리 뛰어 옆 건물에 있는 6학년과 교무실이 붙어있는 건물로 뛰어갔다.
 수업이 막 시작 되었는데 선생님들이 계시는 앞쪽 미닫이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6학년 형들과 누나들이 먼저 알아보았다.
 “쟤… 준서 동생 준후지?”
 “쟤가 걸어 다니는 100점짜리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표정의 변화가 없이 눈 밑에 제법 큰 점이 있지만 여자 선생님들에게 인기가 있는 한경민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온 목적을 말했다.
 “수업 중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문주란 선생님께서 삼각자를 빌려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말꼬리 흩트리지 않고 정중하게 말하는 내가 신기한 듯 선생님은 웃음 띤 얼굴로 내려다 보셨다.
 “네가 정준후구나.”
 “네.”
 혹여 꼬투리라도 잡힐까 긴장해서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섰다.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선생님 앞에서는 조심스러웠다. 아니면 몸에 밴 서비스 업계 종사자 마인드였는지 모르겠다.
 “잠깐 들어와 봐 겁먹지 말고….”
 겁먹은 게 아니고 행여 이상한 것 시킬까봐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현실로 나타나는 듯 했다.
 ‘끙~ 또 노래라도 시키려나….’
 선생님은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보더니 칠판을 가리키며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다.
 “이 문제를 풀면 삼각자 빌려주고 아니면 못 빌려줘.”
 ‘아~ 젠장 테스트야?’
 속으로는 귀찮았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칠판에 써져있는 문제를 쳐다보았다.
 6학년들이 푸는 문제를 칠판에 써놓으셨다가 나를 시킨 것 같았다.
 보통은 그날 당번이나 날짜 번호를 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쩔쩔매는 내 모습이 보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반의 맨 뒷 자석에 희선이 누나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사실 풀던 못 풀던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형들과 누나들에게는 이미 개과천선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아래처럼 움직이는 자전거의 시속을 구하시오
 
 간거리 | 걸린 시간
 --------+------------
 9 km | 1시간 30분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으나 초등학교 6학년 문제를 4학년에게 풀라고 말씀하신 선생님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수식을 써서 구해야한다면 분수 계산이 이루어 져야 하겠지만 암산으로도 충분했다.
 
 “답은 시속 6Km입니다.”
 
 6학년들은 나의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도 안 되었지만 곧바로 내뱉은 나의 대답에 놀라워했다.
 선생님은 눈이 커졌다. 답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계산식 없이 암산으로 바로 맞췄기 때문이다.
 
 “어떻게 맞춘 것이지? 설명해봐!”
 “1시간 30분은 90분입니다. 90분에 9km를 갔다면 10분에 1Km를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한 시간은 60분이니까 결국 6km를 갔다는 말이 됩니다.”
 
 간결하게 답을 내줬다.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간단한 문제에 불과했다.
 선생님은 잠깐 멍하니 계시다가 삼각자를 꺼내주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예전 나의 행동거지는 남자 선생님들에게는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삼각자를 빌려왔다. 선생님께 내밀면서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제발 심부름 그만 시켜요 지겨워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선생님께 그런 소릴 했다가 바로 찍히기 때문이다.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서 혜미의 어두운 표정이 보였다.
 얼굴을 관심 있게 보자 많이 힘들어 했다. 분명 어디가 아픈 것 이었다.
 얼른 손을 번쩍 들었다.
 “왜 그래, 준후야?”
 “선생님, 혜미가 아픈 것 같아요.”
 “응? 그래? 혜미야, 괜찮아?”
 선생님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혜미는 대답을 못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안색이나 식은땀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 체한 것 이었다.
 “혜미야, 아프면 양호실로 가라.”
 나는 혜미의 이마에 손을 대봤다. 열은 없었다. 한 쪽 속을 꼭 쥐고 있었다.
 손등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내가 이마에 손을 대자 내 손을 걷어치웠다.
 “너 체했구나? 얼른 화장실가자”
 혜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한 가지 착각하고 있었다.
 아픈 혜미가 내 아들이나 딸 조카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같이 가자고한 것이다.
 입안에 침이 고인 것 같았다.
 ‘헉, 이제야 생각나다니….’
 혜미가 그때 교실바닥에 토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주 오래 전 일이라 잊고 있었다.
 “선생님, 혜미를 양호실로 데려가 주고 오겠습니다.”
 “그래, 준후야. 네가 갔다 올래?”
 “네.”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러자 자존심 센 혜미가 손을 뿌리쳤다.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너 교실 바닥에 토하고 창피 당할래? 얼른 화장실로 가.”
 결국, 상황이 안 좋아지자 혜미가 일어났다. 어린 아이들은 속이 메스꺼우면 빨리 화장실로 가면 될 일이지만 사고가 날 때까지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신을 신고 복도의 끝에 다 와서 혜미가 토하려고 했다.
 방법이 없었다. 얼른 왼손으로 혜미의 입을 막고 그대로 복도 밖의 맨땅으로 나왔다.
 손을 떼자 바로 토사물을 쏟아냈다.
 “우웩!”
 “괜찮아 토하고 나면 속이 편해질 거야”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혜미는 나에게 저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암튼 자존심 센 거 하나는 알아줘야해!”
 얼른 청소 도구를 모아 둔 관사 쪽으로 달려서 삽과 빗자루를 가져왔다.
 그사이 혜미는 수돗가로 간 것 같았다.
 어린 나였지만 능숙하게 뒤처리를 했다. 아들놈도 종종 토하는 경우가 있었고 아이 엄마도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해도 나는 차분하게 정리를 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일단 흙으로 토사물을 덮어 삽으로 떠서 재래식 화장실 안에 버렸다. 그리고 빗자루로 쓸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청소도구함에 삽과 빗자루를 가져다 놓고 돌아오니 토한 자리에 혜미가 돌아왔다.
 “네가 치웠어?”
 “응, 그래. 얼른 들어가.”
 “누가 너보고 이런 거 해달라고 했어?”
 “애들하고 선생님께는 말 안할 테니 그냥 얼른 들어가라.”
 혜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있는 듯 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나는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교실로 먼저 들어갔다.
 대다수 같은 반 여자애들이 아프면 친한 여자애들이 양호실로 데려갔다.
 짝꿍이라고 해서 남자애들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준후야, 혜미는 어때?”
 “괜찮을 거 같아요. 선생님”
 “준후는 친구가 아프면 얼른 도와주고 선생님이 칭찬해주고 싶구나! 여러분도 친구를 돕는 사람이 되어야해. 알았지?”
 “네에~”
 그때 혜미가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해있었지만 거북했던 속이 괜찮았는지 선생님께 목례를 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5월 달이 되자 세상이 시끄러웠다. 그때 당시 ‘광주 항쟁’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5.18 광주민주화 항쟁’으로 이름이 바뀌었던 사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도 뉴스 방송대로 폭도들이 일으킨 반정부시위로만 알고 계셨다.
 “아버지, 역사의 진실은 일어난 그때가 아니라 먼 훗날 진실이 드러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셨다.
 나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래전 혜미의 구토사건과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정해진 시간대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내가 어린 내 모습으로 되돌아왔지만 나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일이 진행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때쯤부터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오후 내내 고민했다. 어떻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 시켜야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나의 존재를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미래를 알려드리느냐 아님 다른 방법을 쓰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우리 가족의 고난의 역사를 다시 밟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놔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신통력이나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은 신기한 능력을 만들어내야 했다.
 오늘이 1980년 5월 30일 금요일이었다. 내 기억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6월초에 중앙정보부장서리직을 사퇴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8월 한여름에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고 군정을 1981년까지 이어간다.
 이 기억은 먼 훗날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공부하면서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금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야 합니다.”
 달라진 준후가 그날따라 평소와 또 다르게 진지하게 어른들의 눈빛을 보며 부탁을 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말하니 걱정 된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가족의 미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응? 우리 가족의 미래라고 했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제가 조금 이상해 보일 수 있으시겠지만 제가 머리가 이상하게 되거나 헛것을 보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걱정 말고 말해봐라. 예전에 너였다면 아이들 장난으로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엄마 아빠 모두 네 말을 우습게 듣지 않을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정관리 상태를 묻고 싶습니다.”
 
 
 # 미래를 말하다.
 
 “응? 이 아빠가 돈이 얼마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야?”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생뚱한 얼굴로 어머니와 눈을 맞추다 어이없는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글쎄 네가… 아빠의 재산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저는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하하하하!”
 아버지는 한참을 웃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계셨다.
 공부를 많이 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표정이셨다.
 “제 말을 들어주시기로 약속 하셨죠? 조금 황당하더라도 끝까지 들어주세요.”
 아버지는 웃음을 그치고 약속대로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친척과 주변지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얼마간은 빌려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 그래 네 외삼촌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느냐?”
 “오늘 이후부터는 절대로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됩니다.”
 “어허~ 아무리 네가 예전에 비해 영특하고 달라졌지만 어른들 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나중에 어머니 아버지의 눈에서 피눈물 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도 저의 철없는 이야기로 치부하실 것 입니까?”
 11살짜리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진지하게 말을 토해내는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 어머니는 많이 놀라하셨다.
 장장 30분에 걸쳐 우리 가족의 역사를 말했다. 부모님께서 믿고 믿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에 설마 하는 표정이 나중에는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지셨다. 어린 아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하기엔 너무나 생생했고 자신들의 성격이나 우유부단함까지 모두 알고 있는 한 맺힌 말투에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이 움직이셨다.
 “내가 그렇게 못난 애비더라는 거냐?”
 “아버지의 잘못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착하기만 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용해 먹은 것이죠!”
 “그런데 너는 그 일을 어떻게 알고 있냐?”
 어머니께서 궁금해 하셨다.
 “얼마 전부터 저의 행동이 갑자기 달라진 것을 아셨죠?”
 “그래 정확히 3월 3일부터였지. 네 학교 개학일 이었으니까”
 “제가 달라진 것은 미래를 전부 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내가 믿어야하는 것이냐?”
 “아버지, 제가 정신 나간 놈 취급당할 수 있음에도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엄마와 아빠한테 믿을만한 증거를 대보 거라”
 “오늘이 5월 30일 금요일입니다. 6월 2일 전두환 중앙정보부서리가 사표를 내고 8월쯤에 임시대통령자리에 올라앉을 것입니다”
 “뭐? 임시대통령? 무슨 소리냐?”
 “일단 6월 2일에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신문에 나오는지 확인해주십시오.”
 “앞으로 3일 남았구나! 알았다. 너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화요일 신문을 보고 난 뒤에 이야기하자.”
 나는 아버지에게 내 말이 확실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절대로 빌려주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그리고 6월 2일 오후 우편 배달원이 다녀간 뒤 아버지는 내가 말한 대로 신문 첫 장에 실려 있는 기사를 접하시고 손을 덜덜 떠셨다.
 
 국가 정책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고 있던 때였고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저녁에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긴장된 목소리로 나에게 물으셨다.
 “정말로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족이 그런 고생을 겪게 되는 것이냐?”
 “네, 아버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느새 내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의 칭얼거림이나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한이 맺혀 내리는 눈물이었다.
 사실 확인 때문에 옆에 계시던 어머니도 함께 우셨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지?”
 “네, 아버지.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여기 세 사람 이외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우리가족과 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좋은 일보다는 궂은일부터 신변의 안전위협이 생기게 된다.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망설였지만 아버지가 과수원을 파는 이야기를 집고 넘어가야 했다.
 “저기… 아버지, 어머니….”
 “말하거라. 아빠가 들어주마!”
 “1983년도 애비라는 태풍으로 우리 과수원이 커다란 피해를 보고 2년 뒤에 과수원을 팔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씀을 드렸죠?”
 “응 그래!!”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뒤 1999년 6월에 광주에 있는 전라남도 도청이 이곳으로 이전이 확정됩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네 아버지 반대 여론도 많았지만 결국 그렇게 처리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과수원 땅값은 지금보다 수백 배 이상으로 치솟게 됩니다.”
 아버지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백배라 하더라도 평당 3천 원짜리가 30만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실거래는 200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거래될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여기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 오지 갯마을 아니냐?”
 “아버지, 곧 영산강 하구언 공사마무리가 되면 있을 것이고 저 뻘 바닥이 모두 농지로 변할 것입니다.”
 “그것은 알고 있다만 변하는 것이 있더냐?”
 “시기와 때가 되면 아버지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아들의 말에 놀라워 하시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곧 내 말을 믿으신다는 것이었다.
 이걸로 부모님의 설득이 끝났다.
 이제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나의 조그만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게 조절해가야 했다.
 
 우리 과수원에는 국광사과를 재배하다가 후지사과로 몇 년 전 바꾸었다.
 5월 꽃따기를 해주고 사과가 수정되면 한곳에서 5~6개의 사과가 달리게 된다.
 제일 실 한 놈만 남기고 적과를 해야 한다.
 어른들이 바빠하시니 나도 적과작업에 동참했다.
 “준후야, 그만하면 되었다. 가서 쉬어라.”
 “아니에요, 아빠. 아직 절반 밖에 못 하셨잖아요. 적과는 빠를수록 좋아요.”
 “허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사과나무도 양분을 만들어 최대한 많이 사과를 맺으려하다 보니 골고루 영양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 사과 알이 작아지죠.
 “그래? 그러면 우리 집 사과나무 특징에 대해 알고 있냐?”
 “그럼요 부사는 일본에서 국광 종에 딜리셔스종을 교배한 것 인데 저장력이 좋고 맛도 괜찮은데 너무 익으면 저장성이 떨어지는 흠이 있어요. 그리고 자연광을 고루 쬐어주려고 과실을 움직여 줘야하는 단점이 있죠.”
 “하하하, 지금 보니 너 사과농사 혼자 지어도 되겠다.”
 “아니에요, 아직은 아빠하시는 일을 더 배워야 가능해요.”
 “그런데 준후야. 너는 아빠가 계속 사과농사 지었으면 하냐?”
 “음. 사과농사로 돈을 버시는 것은 부수입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주 수입을 무엇으로 잡아야하냐?”
 “땅이죠.”
 “허허허 참나 너 초등학교 4학년 맞냐?”
 마음속으론 ‘아버지보다 나이 많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참 아빠, 언제 목포 시내 나가시면 값싼 은박 포장지 좀 알아보세요.”
 “응? 뜬금없이 뭔 은박 포장지를?”
 “부사는 햇빛을 받아야 과피가 빨간색으로 변하게 되는데 과수원바닥에 풀을 베고 은박지를 넓게 깔아두면 반사햇빛으로 과피색이 예쁘게 자리 잡게 되고 당도가 높아져요.”
 적과로 전정가위를 쉴 새 없이 움직이시던 아버지가 가위의 움직임을 멈추시고 나를 보셨다.
 “너 정말로 미래를 보고 온 것이냐?”
 “그럼 지난번 제가 드린 말씀을 이해 못하셨어요?”
 “아니다, 네 말대로 절대로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너를 보면 볼수록 신기하구나. 은박지를 이용한 사과재배법은 아빠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알았다하더라도 은박지를 구하고 까는 것이 귀찮아서 못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나는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주 전공은 축산학 지금의 동물자원학이다.
 고3이 다되어서 부랴부랴 시작한 공부였으므로 점수가 그리 좋지 못했다.
 국립 대학교를 가기위해선 낮은 점수대에 지원가능한 과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가서 공부하다보니 인문대학이나 경영대학보다 취직이 더 잘되는 과였다.
 다만, 컴퓨터가 좋아 컴퓨터공부를 열심히하다보니 그쪽으로 빠졌었다.
 학원 강사에 컴퓨터학원 원장까지 지냈지만 시대의 흐름을 잘 타지 못하면 생존경쟁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 경쟁사회의 원리인 것 같다.
 탄생과 성장을 지나 정점을 찍으면 반드시 퇴화기를 거쳐 소멸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수목학이니 원예학이나 초지학같은 공부를 찾아서 했다.
 그나마 짧은 지식이나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박식함에 놀라하셨고 가끔씩 내뱉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로 놀라시곤 했다.
 아버지가 위장이 안 좋으셔서 신트림을 자주하시기에 어머니보고 특이한 음식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그걸 먹겠다는 거야?”
 “엄마, 옻닭은 몸에 좋은 거예요. 아버지의 위장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을 거예요.”
 어머니는 어처구니없어 하셨다.
 “글쎄, 옻 탈까봐 걱정이다.”
 “면역이 생길 때까지는 옻이 오르지만 그 후에는 괜찮아요. 준서 형은 옻에 민감해서 한 3-5번 정도 고생하면 먹을 수 있고 나머지 식구들은 괜찮았어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멍해지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큰아들인 형을 무척 아끼셔서 그런지 형이 옻 탄다는 말에 거절하셨다.
 별 수 없었다. 엄마를 졸라 돈을 2만원을 받았다.
 음식을 잘하시는 같은 교회 강명례 집사님 댁을 찾아갔다.
 나는 돈을 2만원을 내밀고 집사님에게 부탁했다.
 “아버지가 위장이 안 좋으셔서 그런데 집사님이 옻닭을 좀 해 주세요.”
 “어머니가 시키셨냐? "
 "네, 어머니는 옻 오르셔서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 어머니 부탁인데 해줄게. 근데 만원이면 충분해.”
 “아니에요, 재료비에 수고비까지 드리라고 하셨고 괜찮으시면 몇 마리 요리해서 저희랑 집사님 식구들이 함께 먹죠!”
 “호호호, 그래. 그러자.”
 평소 옻닭을 잘하시는 것을 알았다. 바닷가에서 ‘운저리’라는 물고기나 ‘짱뚱어’라는 물고기를 잡아서 요리를 잘하시는 집사님이셨다. 집사님 딸이 숙영이 누나다. 누나 어머니께 부탁한 이유가 숙영이 누나와 회귀 이전에 친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누나는 나보다 한 살 더 많다. 조금 이상하지만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시쳇말로 내가 까져서 그랬나 싶다. 사고를 치거나 그랬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뽀뽀까지 해봤던 기억이 있다. 아직 그때는 아니다. 서로 관심이 없을 때니 지금 디밀었다간 등짝에 주먹세례가 작렬할 것이다.
 
 다음날 저녁에 연락이 왔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함께 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기특한 둘째 아들이 말하는 특효약에 반신반의 하면서 따라오셨다. 평소 안면이 있고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이라 어색함 없이 함께 식사했다. 처음 먹는 옻닭이 입맛에 조금 쓰긴 했으나 군소리 안하고 맛있게 먹었다.
 
 
 # 조금 살아봤습니다.
 
 이미 기억에 익숙해진 맛이었기 때문이었다. 숙영이 누나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같은 학교 3학년과 1학년이었다.
 “준후가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이 좍~ 났든디, 비결이 뭐래요?”
 숙영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얼른 대답을 못 하시고 있었다. 복잡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얼른 대답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 그랬냐? 우리 딸이랑 아들은 언제 그런 생각이 들까잉.”
 “지금도 착하고 예쁜 아들딸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버지를 포함한 아저씨와 집사님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그래 준후, 네 말이 정답이다”
 아저씨가 내 등을 토닥거리셨다. 숙영이를 봤다. 관심 없는 척 밥만 먹고 있었다.
 아버지도 식사를 마치시고 함께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집사님 요리솜씨가 좋으셔요.”
 “하하하 고맙다. 우리 아저씨한테도 못 들어 본 칭찬을 네가 해준다.”
 아버지도 잘 먹고 간다고 몇 번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한 3개월 정도 아버지는 속 쓰리는 일이 없으셨고 아프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사셨다.
 6월 중순이 되면 농번기가 시작된다. 보리 베기며 모내기며 정신없이 바쁠 때다.
 우리 집에 화장품을 팔러오는 아줌마가 왔다. 시골에서도 비교적 화장품을 잘 사는 우리 어머니는 단골손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화장품 판매하는 아주머니는 항상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했다.
 화장품 하나를 내려놓고 원래 만 원짜리인데 그냥 쓰라면서 인심 쓰는 척 던져놓고 가기를 몇 번하면 돈을 안 빌려줄 수가 없다. 그것이 시골인심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했다. 이미 내말을 들어 알고 계신 어머니는 그냥 쓰라는 화장품을 집어 다시 가방에 넣어주고 말씀하셨다.
 “아이고 경남댁, 그냥 가져가. 나 부담됑께. 그라고 필요하면 돈 주고 내가 살게. 알았지?”
 평소와 다르게 어머니는 잘 대처 하셨다. 어머니의 시큰둥한 반응에 화장품 외판원 아줌마는 일어서 다른 곳으로 갔다.
 “엄마 잘했어요.”
 “내가 10살짜리 아들 말을 믿고 그런다만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것다!”
 “엄마, 돈은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고 했어요.”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입모양을 동그랗게 벌이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농번기가 되면 학교에서 며칠간 방학처럼 쉬는 날을 만들어준다. 시골에서는 집안일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적과작업이 끝난 우리 집은 딱히 할 것이 별로 없었다. 책을 읽다가 오후 해가 떨어지자 아버지가 일하시는 사과밭으로 갔다. 아버지는 풀베기를 하고 계셨다. 읍내 가셔서 은박지를 구하셨지만 찾을 수 없자 목포에 나가셔서 주문해두셨다고 했다. 용도는 선물포장지인데 자르지 않고 통으로 구해달라고 부탁하셨나보다.
 “아빠, 은박지를 구하신거에요?”
 “응? 아직이다. 아직 몇 달 시간이 있어 익을 때 쯤 바닥에 깔 거야. 어째? 심심해서왔냐?”
 “네 풀 베는 거 도와드릴게요.”
 “허허, 낫질은 할 줄 알아?”
 “네, 할 줄 알아요. 조선낫은 무거우니 왜낫으로 하면 돼요”
 지금 같으면 예초기나 풀 베는 조그만 농기계가 있지만 옛날이라 죽으나 사나 낫질을 해야 했다. 집에서 왜낫을 찾아냈더니 녹도 좀 슬고 무뎌졌다. 숫돌을 꺼내 물을 발라가며 낫을 갈고 있었다. 손이 작아서 그렇지 부엌칼이나 낫 같은 것은 능숙하게 잘 갈았다.
 날을 잘 세워서 신문지로 날을 감싼 다음 조심스럽게 들고 사과밭으로 들어갔다.
 시골말로 ‘깔치기‘라는 말이 있다. 손이 작은 우리는 풀을 한 움큼 잡기 힘들기 때문에 손목 스냅으로 풀줄기 아래쪽을 쳐 낸 다음 한 번에 들어 올리는 방법을 쓴다.
 아버지는 형이나 동생처럼 놀지 않고 와서 과수 농사일을 곧잘 돕는 나를 보시면서 빙긋 웃는 버릇이 있으셨다. 모든 일은 다 집중력이었다. 풀베기도 지루해하지 않고 집중해서 열심히 하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준다.
 “너무 무리 하지마라.”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과나무 아래 50미터 길이 두 칸을 베고 있었다. 한쪽 팔이 아프면 왼손으로 낫을 잡고 쳐내는 형식이었다.
 “허허, 네가 어른 몫을 하는구나!”
 “저 낫질은 조금해요.”
 잘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군대 가면 죽어라고 풀베기 작업하기 때문이다. 공군이었고 전술사격장에서 복무했기 때문이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일하는 모습을 한참 보시더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네 덕분에 빨리 끝이 났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사과나무 아래는 바람이 잘 들지 않는 편이다. 나무 사이 거리가 있어도 잎사귀가 많으면 바람골 아래로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준후, 너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다 혹시 아빠한테 바라는 것 있냐?”
 “네, 아빠. 토요일에 저랑 밭 좀 보러가요.”
 “밭을 보러가자고? 우리는 과수원외에는 밭이 없다”
 “아니요, 좋은 땅을 보러가자는 말씀이에요.”
 “하하하하.”
 아버지는 한참을 웃으셨다. 내가 말하는 모양이 복덕방 영감 같았나 보다.
 “그래, 알았다 알아. 그렇게 하자.”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용돈을 하라며 3천원을 주셨다. 시골에서 3천원이면 꽤 큰 용돈이었다.
 “아빠, 나도 주세요.”
 동생 준걸이가 손을 내밀고 돈을 달라고 했다.
 형도 돈을 줬으면 하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준후는 아빠 일을 도와서 과수원 풀베기를 두 시간 동안 했다. 그래서 준거야.”
 “에잉, 나도 주세요.”
 동생은 떼를 쓰고 형은 포기한 듯 별 말이 없었다.
 “아빠, 형이나 동생이 꼭 풀베기해야 했던 것은 아니니 저만 받기 그러네요.”
 “그래, 알았다. 준서는 2천원, 준걸이는 천원.”
 형과 동생은 날름 돈을 받아 챙겼다. 어머니는 한마디 잊지 않으셨다.
 “아껴 써라. 아무것이나 사지 말고.”
 밥 먹고 형과 동생은 동네 점빵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보나마나 맛동산 아니면 보름달빵 사먹겠지 뭐’ 속으로 그 생각을 했다.
 3형제의 식성은 거기서 거기였다. 우리 셋은 앉은자리에서 사과 20개 정도는 게 눈 감추듯 해치웠었다. 3천원이 생기자 별생각 없이 책 속에 끼워 넣었다. 특별히 써야할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3일간의 농번기 방학이 끝나자 금요일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면 지루한 것도 있지만 아이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들 또래 아이들과 한 반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티비에서 나오는 만화영화였다. 남자아이들 뿐 아니라 여자아이들도 마징가제트는 꼭 본다. 토요일 오후 4시 50분에 MBC에서 방영했다.
 몇 번 봤지만 이젠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라 유치해 지겨웠다. 마징가제트를 보지 않고 그 시간에 동네를 돌아다니는 나는 별종 중에 별종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밭을 보러 나갔다.
 “여기는 하루 중 반이 그늘진 곳이고 비탈이 심해 토질이 별로에요, 아빠.”
 비가 내리면 흙이 자주 쓸려 내리다 보니 간간히 돌 쪼가리들이 보였다. 옥암 쪽으로 넘어갔다.
 남향에 볕도 잘 들고 괜찮은 밭이 보였다.
 “여기 밭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세요. 아빠”
 “어쩌냐? 땅 투기꾼 아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냐?”
 “괜찮아요. 밭의 경작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뭘 보냐?”
 “나중에 아파트나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보는 것이에요. 땅도 평지에 가깝고 남향인데다 관공서자리가 아니에요.”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정말 여기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이냐?”
 “네, 아빠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는 성경말씀이 있죠?”
 “그래, 그 말대로 된다 이거지?”
 “네, 그래요.”
 아버지는 돌아오는 길에 계속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20년 뒤에 일어날 일이다보니 현실감이 없고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많으면 사람이 지치게 된다.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 학문에 대해 탐구하고 연구하는 일에는 좋을지 모르나 기다림이 길어지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도청이 이전되기만을 기다리기보다 그전에 해놓아야 할 일이 많았다.
 “아빠, 아직도 저에게 가지고 있는 재산을 말씀 안하셨는데요. 아직도 곤란하신가요?”
 “꼭 그건 아니다만 아무리 너의 말투와 생각이 어른스러워도 아직 어린 내 아들일 뿐인데 그런 말까지 해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돌아온 탕자가 생각나셔서 그러시나요?”
 “허허허, 성경에 나오는 탕자는 너보다 큰 어른이다.”
 “그럼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빠에게 물어보는 것은 우리 가족과 저를 위해 그러는 거예요”
 
 옥암리에서 우리 동네로 넘어오면서 아버지와 나의 대화는 이어졌다.
 “집에 현금으로 한 3천만 원 있고 농업협동조합에 2천만원정도 된다. 이제 됐냐?”
 “흠, 나름 돈 좀 모으셨군요?”
 “허허허 이놈 보게? 그래, 네 생각을 들어보자. 내게 묻는 이유가 있을 테니….”
 “농협에 저금해둔 돈의 이자가 얼마죠?”
 “이자?? 글쎄… 잘 모르겠다.”
 “네? 이자도 모르시고 넣어 두신 거예요?”
 “그냥 농기계를 사려고 넣어둔 것이라 신경 안 썼다만.”
 “혹시 일반 저금으로 넣으신 거 아니에요?
 “아마 그럴 거다. 왜?”
 답답해서 내가 가슴을 쳤다. 아무리 어려움 없는 집안이라고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자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집에 돈을 묵혀두고 계신 것이다. 옛날 분들은 집에 뭐가 많아야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목포를 오가려면 시간이 걸리고 복잡해서 농기계살 때 넣어두신 돈이 2천만원정도 있으신 것이다.
 “아빠, 지금 신문보시면 대출이자가 23.7%정도에요 그러면 그냥 장기적금에 들어도 최소 연 12%이상 이자가 자라는데 집에다 3천만 원을 묵혀 두고 계시다니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뭐, 딱히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고 급히 쓸 수도 있을 것 같아 놔두었다만….”
 “그러니 누가 와서 빌려달라면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처럼 인심 쓰시게 되는 거예요.”
 “허허 녀석, 집에 돈이 좀 있어야 든든할 거 아니냐?”
 “휴~ 아빠 그럼 재형저축 같은 거 혹시 해놓으셨어요?”
 “아니다. 그게 우리에게 필요하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배 농사는 10주도 안되어서 그냥 식구들 먹으려고 한 것 이었고 사과농사가 우리 주 수입원인데 사과품질이 좋아 해마다 좋은 값을 받으셨기 때문에 목돈이 있으셨다. 우리 3형제가 아직 어리고 아버지는 주색잡기를 모르시는 분이어서 돈을 잘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빠, 복잡하게 생각하면 끝이 없어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 거예요”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아빠가 여태까지 돈을 모으신 것은 근면 성실했기 때문이에요”
 “그래? 그러면 다음에는 달라지냐?”
 “네, 많이 달라지고 달라져야 합니다. 묻고 싶어요.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이에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음, 네 놈들 교육이다. 너희들 태어나기도 전부터 생각한 것이다.”
 
 
 # 재테크 상담해 드릴게요.
 
 "네, 역시 아빠 생각은 변함이 없으시네요. 그런데 자녀들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크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글쎄, 아직은 못 느끼겠다.”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될 때 대도시로 가시려했던 것도 저희들 교육 때문이었어요.”
 “그래, 그건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빠는 아무런 준비가 안 되었어요. 아니 오히려 최악의 선택을 하신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먼 훗날 재산을 늘리는 기술이라 해서 재테크라 불리는 용어가 생깁니다. 그런데 아빠는 돈을 모으는 것 까지는 성공하셨는데 불리려는 노력이 전혀 없으셔요.”
 “재산을 모으는 거나 불리는 거나 같은 말이 아니야?”
 “달라요. 아빠 우물을 예를 들게요. 제일 좋은 우물은 아랫동네 우물처럼 일정량 흘러 넘쳐야합니다. 다시 말해 퍼내든 아니든 일정량이 계속 솟아나는 우물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최악의 우물은 비올 때만 쌓이는 우물입니다. 수질도 안 좋고 한꺼번에 퍼내면 비오기 전까지 물이 없는 것이죠.”
 “그럼 이 아빠가 최악의 우물 같다는 말이냐?”
 “죄송하지만 그러고 계셔요.”
 “음, 그래 그러면 네가 말하는 좋은 우물처럼 되려면 지속적인 수입원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냐?”
 “네, 아빠. 제가 미래를 안다고 해서 일확천금을 노린다고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일확천금도 준비된 사람에게만 하늘이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 애비라고 생각이 없었겠냐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구나. 사실 돈을 빌려준 이유가 은행 이자보다 더 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헐, 그런 말에 속으신 거예요?”
 “사람을 신뢰해야지. 아빠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순진한 분이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대학을 나오시고도 시골 와서 농사 지으셨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이 은행이자보다 더 주겠다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은행가서 돈을 빌려야지 왜 아빠한테 왔겠어요. 담보로 잡힐 것이 없다는 말 아니에요?”
 “….”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11살짜리 아들 입에서 이자와 담보라는 말을 듣고 계시다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느끼셨나보다. 담보로 땅문서를 받아놓은 것도 아니고 각서 한 장 쓰고 빌려주셨기 때문이다. 참고로 각서는 법적효력이별로 없다. 증거 사실이 될 뿐 재판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겪고도 채무자가 불성실하게 이행했을 때 기껏해야 감방 간다며 버티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은 반드시 담보를 잡는 것이다. 아직 신용사회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신용카드가 흔한 시기는 아니었다.
 
 “고리대금업자들이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사채라는 높은 이자를 받기 위함이고 반드시 주먹을 끼고 일을 하는 거예요. 채무자가 어디로 도망가 숨던지 찾아내는 근면성실함을 가지고 있죠. 그런 사채업자에 비하면 아빠는 그냥….”
 아버지에게 ‘호구’라는 말을 쓸 뻔 했다. 속으로 입조심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습관이 무서웠다.
 “아빠는 그냥 뭐?”
 “그냥 자선사업가나 다름없다고요”
 “이제 그만해라. 애비가 네 말 뜻 알아먹었다”
 “네, 죄송해요 아빠 그런데 저희 3형제를 위하신다면 두 가지를 준비해주세요.”
 “응? 두 가지? 그게 뭐냐?”
 “지금 밭과 땅을 사서 준비하는 것보다 혹시 모르니 저희 3형제에게 각각 재형저축 통장을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힘드시겠지만 주식을 사놓으세요.”
 “왜 하필 주식이냐?”
 “주식은 과거와 현재를 알면 돈이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음…. 그래? 그럼 어떤 걸 사야하냐?”
 “아빠 이것은 저와 아빠 둘만 아는 사실이에요! 절대 다른 분들에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만 다짐하고 말해봐라. 아빠가 네 말을 새겨들으마.”
 “삼O전자 주를 최대한 많이 사두세요.”
 “그런데 이거 많이 오르냐?”
 “나중에 전자부분에서 혁명적인 일이 일어날 거예요. 오래놔 두었다가 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기억했냐?”
 “그건 설명해도 이해하시기 힘들어요. 그냥 그 정도만 아시고 한 가지 약속해주세요.”
 “약속이라니? 이젠 네가 아빠처럼 말을 하는구나.”
 “헤~ 죄송해요 엄마 아빠와 우리 형제를 위해서예요. 주식은 구매해놓고 이후로 자주 들여다봐서는 안 됩니다.”
 “음…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냐?”
 “네, 아빠. 주식은 특성상 오르고 내리고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때마다 기뻐하고 속 끓이고 하시면 곤란해요. 결론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엄청나게 불어 있을 거예요.”
 “그래, 알았다. 그리고 기다리기만 하냐?”
 “아니요. 이제부터 착실하게 우리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일해야죠.”
 “이웃들을 위해 일한다??”
 “우리 가족만 호의호식할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야죠.”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 애비보다 낫구나.”
 목포에 나가시는 아버지는 주식통장을 만드시고 3천만 원을 삼O전자 주로 사셨다. 주당 1040원이었다. 액면가가 1000원이었으며 액면가보다 40원 더 주고 구매한 셈이다. 대략 3만장 가까이 사놓으신 것이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대한증권사 직원이 우수한 다른 주를 소개하면서 무리한 집중투자는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한다.
 
 지식은 배움에서 나오고 지혜는 지식이 쌓이면서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아는 지식은 두 번 인생을 살며 축적되는 것이며 두 번의 인생이 가져다주는 지혜는 고급스러운 것이다. 거만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가 아닌 혜안이 생긴 것이다. 조금 미안하지만 그 혜안이 우리가족과 이 마을 사람들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방법을 알고 있었다.
 
 6월이 지나고 7월 달이 되었다. 듬성듬성 뭉게구름이 피어있는 논길로 하교하는 길이었다.
 벼가 자라는 농로길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은 내 걸음으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풀 냄새, 논에서 나는 냄새와 희미한 농약냄새 마저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늘을 향에 눈을 감고 시골의 향기를 느끼고 있는 모습을 본 동창 애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피식피식’ 웃었다.
 “왜? 바보 같아?”
 “쪼끔 모질해 보여야!”
 “하하하, 그래! 그렇게 보이겠구나!”
 다른 반인데 같은 동네 사는 금란이였다.
 금란이는 옛날 이장님 딸이라고 해서 ‘구이장 딸’ 이라고 불렀다.
 “너 그런데 진짜 이상하게 된 거 아니지?”
 “뭐? 이상하게 되다니?”
 “다른 애들도 네가 이상하게 변했다고 하고 내가 봐도 너 이렇게 된 거 같어야.”
 금란이는 한손을 귀 옆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미쳤다는 표시를 했다.
 나는 시큰둥하니 웃었다. 옛날 성격 같으면 분명히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금란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
 “뜬금없이 뭐 하러 물어보냐?”
 “그냥 물어보는 거야.”
 “나? 음…. 간호사? 선생님?”
 “아직 확실하지 않구나?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러면 선생님 될 거야.”
 “그런 말은 나도 하것다. 열심히 하면 다 되는 거.”
 “그런데 왜 열심히 안하냐?”
 금란이는 화난 것처럼 제자리에서 옆 눈을 흘기며 서있었다.
 “그러다 사시된다. 얼른 와라. 같이 갈 거 아니면 먼저 간다?”
 “너 공부 잘한다고 그라고 말하냐?”
 “넌 내가 왜 변했다고 생각해?”
 한참을 삐져서 서있던 금란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큰 키의 용식이가 금란이하고 같이 걸어 한 무리를 만들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네가 말해야제.”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낀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주 아주 슬퍼지기 때문이야”
 “둘이 무슨 이야기 하냐? 연애 하냐? 키키킥.”
 그 말에 금란이 주먹이 가방 멘 용식이 어깨에 작렬했다.
 “아야~ 이씨!”
 용식이는 금란이를 때리려다 손을 내렸다.
 모두 속이 없다고 놀렸지만 용식이는 천성이 착한 녀석이었다.
 “용식아, 나는 너도 좋아하니 질투하지마라.”
 “캬하하하하 준후 너 진짜 이상해!”
 내 말을 들은 금란이가 배를 쥐고 웃었다.
 우리 또래 아이들은 좋아한다는 말에 인색했다.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애들은 없었다.
 “금란이한테 왜 공부를 열심히 안하냐고 물어봤어. 용식이 너한테도 똑같이 물어볼게.”
 “공부를 왜 안하냐고?”
 용식이와 금란이는 한동안 대답을 망설였다.
 “몰라, 그냥 놀고 싶고…. 집에 오면 공부생각이 전혀 안 들어.”
 “공부 잘하고 싶지 않아?”
 “아~ 잘하고 잡제~ 근디 그것이 되냐?”
 용식이는 마디 대가있는 풀을 뽑더니 이빨로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했다.
 “그럼 함께 공부하면서 공부하는 거 도와줄까?”
 “뭐? 진짜야?”
 두 명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시골에서는 모르는 문제가 있어도 4학년 이상이 되면 형과 누나가 없으면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누가 나서서 공부를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학원 같은 것은 읍내에 가야 한두 개 있을까 말까했다. 시골이어도 돈 많은 조합장이나 우체국장같이 있는 집 자녀들은 과외선생님을 쓸 수 있었다. 학교선생님들이 부업으로 과외를 했기 때문이다.
 “곧 방학하니까 방학 동안에 산수공부라도 함께 할래?”
 “그래? 진짜지?”
 “응 대신 엄마아빠한테 허락 받고 와야 해.”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내 또래 동네 아이들 전부에게 말해도 몇 명 안 올 것이라 생각했다.
 ‘후후, 역시 제 버릇 개 못 주나보네.’
 학원 강사 생활을 대학 다닐 때부터 20년 가까이 했다.
 종목이 컴퓨터이긴 했어도 영수도 가르쳤었다.
 불과 3일 만에 소문이 온 동네를 돌았다.
 애들이 자기들끼리 말한 것인데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가르쳐주겠다는 말이 다른 사람 아닌 내 입에서 나온 것 이어서 결국 어른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 구이장님이 직접 오셨다.
 그리고 마을 회관에 공간을 마련해줄테니 거기서 애들 공부 좀 가르쳐 주라는 것이었다.
 시골 어른들의 교육열이 도시 사람보다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돈이 없다는 것 빼곤 말이다.
 3월 이후로 월말고사에서 단 한 번도 올백을 놓치지 않는 정준후가 시작한 조그마한 사건이었다.
 “어이~ 아들 선생님. 이웃을 돕고 산다는 것이 이걸 말하는 거셨어요?”
 “네, 이것도 그중 하나에요.”
 “오냐 그래, 잘 생각했다. 이 애비보다 네가 더 낫다. 대신 너도 공부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가르침은 깨달음에 앞잡이 입니다.”
 “응? 무슨 소리냐?”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공부할 내용파악과 핵심을 알아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가 알아야 가르치기 때문에 빨리 깨닫게 되죠.”
 “오~ 그렇구나!”
 기말고사를 치렀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몇 번을 반복해서 공부하고 또 참고서도 들여다봤다.
 준서 형도 동생에게 밀리는 자신의 위치를 되찾으려는 듯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2개나 틀렸다고 씩씩대고 있었다.
 
 
 # 나는 죽지 않으려고 공부해
 
 선생님이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식 때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여러분들 점수 평균을 내야하는데 평균내기 제일 쉬운 사람이 정준후야. 왜 그런 줄 알아?”
 “올백이어서요.”
 애들 몇이 제비새끼처럼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 그리고 선생님이 더 기쁜 것은 준후 말고도 다른 친구들이 열심히 해줘서 우리 반이 1등이다”
 “와아!”
 “혜미가 아쉽게도 하나 틀렸어 자연 문제에서 주관식을 틀렸는데 그거 빼고는 올백이야. 박수쳐 주자.”
 “짝.짝.짝.짝.짝.”
 그러나 혜미 얼굴은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1등을 맡아 놓고 했을 터인데 도깨비 같은 녀석에 자신이 밀린 것이다.
 
 “너… 어떻게 공부 하냐?”
 “응? 내 공부 방법?”
 꽤 오래전부터 나에게 무슨 말을 묻고 싶어 하는 듯 했는데 지금 꺼내는 것 같았다.
 무척 궁금하고 알고 싶었을 것이다. 혜미가 안쓰러웠다.
 “나는 너를 이기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나는 살아남기 위해 공부한단다.”
 초등학교 4학년에게 너무 어려운 말이 아닌가 생각했다.
 “누가 너를 죽이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제대로 안하면 어른이 되서 이런저런 핑계 대다가 내 스스로가 나를 죽이게 된다는 말이야.”
 “관두자.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다.”
 “혜미야.”
 혜미는 갸름하고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알던 너는 최고였어!”
 “흥~!”
 나는 그냥 웃었다. 많이 미안했다. 그러나 바꿔줄 수는 없었다.
 여름방학은 7월 말경에 시작해 8월 말까지 하는 게 보통이었다.
 시골의 커뮤니티는 교회다.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라고해서 교회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니 몰린다. 시골 아이들이 딱히 갈 곳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여름성경학교에서 끝날 때 나누어주는 ‘쭈쭈바’ 때문이라도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오는 것이다.
 평소에 교회안다니는 애들까지 모이면 120명 가까운 아이들이 조그만 예배당에 들어찬다.
 옛날이라 에어컨도 없는 교회에 연신 부채질을 해가면서 애들은 재밌는 놀이와 노래를 배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 지겨워.’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씀 드렸다.
 “아빠 엄마 부탁인데요, 엄마 아빠 따라 어른예배 참석 할 테니 성경학교와 주일학교에서 빠지면 안 돼요?”
 “안 돼~ 애들은 애들 예배에 나가야지 뭔 소리여~?”
 “차라리 목사님 설교 말씀 듣는 게 나아요.”
 아버지는 조용히 듣고 계시다가 대답하셨다.
 “그래라. 그 대신 예배에 집중하는 거야?”
 “네 아빠 걱정 마세요.”
 주일학교는 반사 선생님들이 대다수 고등학생들이다. 공과 책을 읽고 있거나 자신도 잘 이해 못하는 내용을 가르치겠다고 애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모양새가 한심했다.
 한때 집사 신분으로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선생까지 했던 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해서 졸거나 딴 짓 안하고 말씀을 듣고 있으니 교회어르신들이 처음에는 그냥 ‘엄마 따라 왔나보다’ 생각했다가 진지하게 말씀을 듣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 반 걱정 반의 반응을 보였다. 목사님은 어린애가 주일학교에 참석안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말씀이 어렵지 않냐?”
 “아뇨, 목사님.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한다더니 성경 말씀도 금방 이해하는구나.”
 “집중해서 듣고 있어요, 목사님.”
 “잊지 않고 너를 위해 기도하마.”
 “감사합니다.”
 
 예정대로 마을회관에서 애들과 함께 산수공부를 하기로 했다.
 첫날은 애들이 3명 왔다. 금란이랑 용식이, 그리고 나보다 두 살 어린 애희였다. 애희는 예쁘고 똑똑한데 훗날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잘못하는 바람에 고생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음, 예상대로 3명 정도가 왔네? 과목을 산수로 정한 이유는 어렵기도 하지만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쉬운 것이 산수야. 그래서 산수 과목으로 정한 것이고 일단 자신 없는 부분부터 하나씩 개인적으로 알려줄게.”
 용식이는 산수에 완전 젬병이었다. 4학년인데도 2자리 곱셈을 어려워했다. 그건 3학년 때 모두 이해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용식이가 공부할 동안 금란이랑 애희는 각자 가져온 산수책의 문제를 풀어보고 있어. 차례대로 알려줄게.”
 용식이는 자리올림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인데 문제는 구구단도 제대로 외우질 않았다.
 구구단을 시켜봤더니 웃기만하고 부끄러워 안하려고 했다.
 “네가 뭘 모르는지 알아야 가르쳐주지! 웃지 말고 해봐, 임마!”
 “2X1은 2, 2X2는 4, 2X3은 6….”
 
 5단까지는 그럭저럭 외우는 듯 했지만 6단부터 헤매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공부 안했나보다. 제법 크게 구구단 표를 만들어서 용식이에게 쥐어주고 늦어도 내일까지 구구단을 다 외우라고 했다.
 2학년인 애희가 ‘킥킥’거렸다. 구구단은 2학년 과목이기 때문이다.
 “애희야, 용식이 지금 심각하다 웃지 마라.”
 “응~ 오빠 미안.”
 “금란아, 너는 뭐가 어려워?”
 “나는 분수계산이 어려워.”
 “그래, 일단 분수는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설명할 것이니 잘 들어?”
 “응, 그래.”
 “분수라는 것은 한자인데 ‘分’자가 나눌 분자야. 그리고 분수는 비례라는 것을 사용하는데, 금란이 네 주먹 크기와 내 주먹크기는 다르지?”
 “응.”
 “그런데 네 주먹도 한 개고 내 주먹도 한 개야. 이해가지?”
 “그래, 이해가.”
 “자, 그럼 네 주먹 크기의 사과 한 개를 반으로 쪼갰어. 그리고 내 주먹 크기의 사과 한 개를 쪼갰다고 하자. 너의 사과 반쪽과 내 사과 반쪽의 크기는 다르지만 반개라는 사실은 같지?”
 “응, 그래. 같아.”
 “그걸 비례가 같다고 해. 그리고 너의 사과 한 개를 1이라고 했을 때 그리고 반으로 쪼개면 어떻게 표시해?”
 “0.5.”
 “아니, 분수식으로 뭐라고 해?”
 “이분의 일.”
 “내 것도 똑같이 0.5이면서 ‘이분의 일’, 크기가 서로 다르지만 같은 비례라 하는 거 알지?”
 “응, 그래. 알아.”
 “앞에 나온 ‘이분’이 바로 두 개로 나눈 것이고 마지막 ‘일’이 그 둘 중 하나를 집어 든 거야.”
 “이분의 일이 그러면 사과를 둘로 쪼갠 것 중에 하나라는 것이라 표현한다고?”
 “그래, 바로 그거야.”
 “사분의 일은 하나를 네 조각으로 나눈 것 중에 하나라는 것이고?”
 “맞아, 거기까지는 알았고 분수를 이해했다면 그다음에는 소수점 계산 방법을 배워야해.”
 
 * * *
 
 산수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용어의 정의부터 왜 그렇게 부르며 정의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해갈 때까지 짜증내지 않고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금란이에게 지나치게 많이 알려주려고도 안했고 모자라게 설명을 아끼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 적당한 선이라는 것을 지켜 가르쳐 주는 것이 사실 제일 어려운 것이다.
 
 두 자리 수 덧셈과 뺄셈을 공부하는 애희는 크게 가르쳐줄 것이 없었지만 신중하게 풀 것을 당부했다. 산수를 잘하는 애들이 만점이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빨리 풀다보니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아 알면서도 틀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었다.
 
 더운 여름날 저녁 마을회관에 모인 네 명의 아이들이 1주일 만에 10명이 다되었다.
 4학년 이하 아이들만 모였지 그 이상의 형, 누나들은 오지 않았다.
 용식이는 거의 일주일 만에 구구단을 외웠다. 내 동생 같았으면 두들겨 패고 싶었겠지만 학원을 운영할 때 깨달은 점이 있었다.
 학원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아이들이 바로 용식이와 같은 아이들이었다. 느리지만 그래도 발전이 있는 아이들. 선전효과가 최고였었다.
 
 “용식아, 이제 두 자리 곱셈이 어렵지 않지?”
 “응, 인자는 풀 수 있어야 헤헤.”
 “공부에도 자신감이 필요하단다. 자신감만 있으면 실패해도 여러 번 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자신감이다.”
 “아따 뭔 말이냐? 쉽게 이야기해봐야?”
 “형오야, 너 1학년짜리하고 싸우라면 무섭냐?”
 “허~메 장난 하냐? 콱 조사불제~잉.”
 “자신 있지? 이길 수 있다는….”
 “아, 당연히 이기제.”
 “그런데 1학년짜리한테 발이 걸려 넘어졌어. 그럼 포기해?”
 “안하지 그건 실수제.”
 “네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다시 덤비는 거야 반대로 6학년 형한테 덤비라면 자신 있냐?”
 “아, 어뜩게 형을 이긴데.”
 “그건 네가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야. 아직 싸워보지 않았잖아?”
 “….”
 “공부를 조금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조금 해보고 어렵다고 손놔버리니까 안 되는 거야.”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면 된다. 즉 내가 그 아이의 답답함을 이해하고 보면 열 번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야 진짜 나쁜 것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거야? 알겠어?”
 “응.”
 “모르면 제발 물어봐. 아는 것처럼 있다가 문제 풀어보라면 혼자 끙끙대지 말고.”
 “근디 너 진짜 선생님 같아야~ 학교선생님보다 더 쉽게 가르쳐준다.”
 “나하고 너하고 같은 나이니까 쉬운 거야.”
 말을 살짝 흘렸다. 사실은 학원 선생님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하면 다양한 학습법과 강좌를 듣게 된다.
 해마 학습법이니 연상 기억법이니 하는 다양한 암기법부터 재미있게 강의하는 방법까지 연구한 나였다. 거의 20년을 학원 강의를 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학생들에게 자격증 강의를 하라고 해도 충분히 가능했다.
 
 8월하고 중순이 되었다. 예상대로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정치적 사건이나 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들춰 욕하지는 않겠다. 내가 나설만한 크기의 역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 크기에 맞는 역사를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었다.
 “준후야, 네 말대로 되었구나….”
 “네, 그러네요.”
 “이 다음에는 누가 대통령이 되냐?”
 “알려고 하지마세요. 다쳐요, 아빠.”
 “허허허 그 녀석 참 별소리를 다하네.”
 “제 말이 농담같이 느껴지세요?”
 “아이고 알았다 이놈아 허허허.”
 
 토요일 아버지와 어머니 형 그리고 나까지 과수원 사과밭에 은박지를 깔았다. 다른 해에 비해서 비오는 날이 많아 일조량과 과피착색을 위해 조금 일찍 은박지를 깐 것이다. 은박지를 깔아놓자 동네 어른들이 신기한 듯 물어보곤 하셨다.
 등목으로 시원하게 몸을 씻고 저녁을 먹는데 동네 아주머네가 오셨다 보니까 용식이 엄마였다. 참외를 꽤 많이 사오셨다.
 “오메~ 한 집사님 어쩐 일이요?”
 “박 집사님, 준후한테 고맙다고 말만하고 있기가 그래서요.”
 “아따~ 한 집사님, 그냥 괜찮해요. 즈그들끼리 모여 공부하는 것인디.”
 “아녀라~ 우리 용식이가 준후한테 배우는 산수가 재미있다고 하기에, 하도 좋아서 그래요.”
 “아, 그래도 부담되게 이런 걸 사오고 그래요.”
 “준후야, 많이 먹어? 우리 용식이 잘 좀 가르쳐주고?”
 “네 집사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용식이 어머니는 키도 크시고 서글서글한 인상이셨다. 그래서 그때 당시 우리학교 얼짱이었던 희선이 누나말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얼짱 누나가 바로 영숙이 누나다. 누나는 용식이의 친누나였고 키도 크고 살결도 희고 목소리도 고왔다. 나중에 우리 옆 마을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던 청년회장 형에게 시집을 갔다.
 참외나 수박은 우리 동네에서 나지 않는다. 읍내 아니면 목포에서 사왔다는 말이었다.
 
 
 # 발랑 까져서 이러는 걸까요?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일이 잘되어간다 싶으면 문제가 하나씩 생기게 마련이다.
 마을에 골칫거리 하나가 있었다. 생긴 것은 괜찮게 생겼는데 항상 문젯거리만 일으키고 다니는 인간이었다.
 정석이는 사고라는 사고는 다 저지르고 다녔다. 훔치고 싸우고 하는데 이골이 난 그놈 때문에 부모들이 속 깨나 썩었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형이었고 중학교 1학년 이었다.
 마을회관 안으로 불쑥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막말을 늘어놓으며 마을회관 신발 벗는 곳에 발을 놓고 몸은 장판바닥에 그대로 눕는 것이다.
 
 “어이~ 새끼들이 공부한다고 지랄을 떨고 있네. 야, 새끼들아! 가서 텔레비전 봐라.”
 
 마을회관에 모여 있던 내 또래 애들과 저학년 아이들이 겁을 먹었다.
 
 “정석이형! 애들 겁주지 말고 나가줬으면 좋겠어.”
 “어? 이 새끼 봐라. 쥐 붕알만한 새끼가 공부좀한다고 지랄하네. 너 뒤질래?”
 
 내 또래 위로 누나나 형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일부러 나타나는 것은 뭔가 행패를 부리려는 것 밖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이 새끼 저 새끼하지마라. 듣는 새끼 기분 나쁘다.”
 “이 X팔 새끼가.”
 
 정석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서 주먹을 휘둘렀다.
 힘으로는 내가 밀리겠지만 나는 요령도 있었고 중학교 1학년이라 내 눈에는 가소롭게 보였다. 한 걸음 물러서자 학교에서 쌈꾼인 정석이 바로 발로 차고 들어왔다. 한 걸음 더 물러나면서 내지른 발을 잡았으나 정석이의 신발이 벗겨졌다.
 어렸을 때 정석이는 무서웠지만 내 눈에는 어린 녀석으로만 보였다.
 벗겨진 신발을 얼굴에 내 던졌다. 이미 마을 회관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 애희가 맨발로 뛰어나가 동네 어른을 부르러 갔었다.
 “억!”
 정석은 신발이 얼굴에 정확하게 맞자 주춤했다.
 힘과 덩치에 밀리는 나로서는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써야했다.
 주저 없이 낭심을 발로 차버렸다.
 “아악~ X팔.”
 “이 새끼가 더럽게 입이 거치네?”
 나도 잔뜩 독이 오른 상태였다. 주먹으로 있는 힘껏 얼굴을 후려쳤다.
 정석이의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시골에서는 코피를 먼저 터트리면 이기는 싸움이다.
 그런데 내가 조금 독한 것이 있다면 일어서지 못하게 밟아버리는 성격이 있었다.
 코피를 보며 당황한 정석의 얼굴을 돌팔매질하듯 한 번 더 가격했다.
 “빠악!”
 정석은 관자놀이 아래턱을 가격당해 나동그라져 볼을 감싸 잡고 아파했다.
 “쥐뿔도 없는 것이 지랄하고 다니지? 너 오늘 한번 뒈져봐, 이 새끼야.”
 험한 욕설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시쳇말로 꼭지가 돌아버리니 쌓였던 응어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플라스틱 빗자루가 있었다. 발로 힘껏 밟아 손잡이를 뽑아 들고 문밖으로 나가자 형오와 용식이가 말렸다.
 “야! 그만해 그러다 저 형 죽는다. 참아!”
 “준후야, 참아라!”
 
 그때 마을 어른 몇 명이 달려오셨다. 문턱 앞에 있던 정석이는 어른들이 오자 신발 한 짝을 남겨두고 도망쳤다.
 애희는 어른들에게 준후 오빠가 맞고 있다고 했는데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애들이 나서서 사태를 설명하자 어른들이 한마디씩 했다.
 “정석이 그 미꾸라지 새끼하나가 사방곳곳을 흐리고 댕기네잉~ 다리몽둥이를 콱 분질러버리든지 해야지.”
 “그 썩을 놈의 새끼가 애들 공부 하는데 와서 행패를 부려? 내가 가만히 안 둔다.”
 
 어른들은 그렇지 않아도 눈 밖에 난 정석이가 잘 걸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에 비하면 힘도 딸리고 키도 작았지만 군대도 다녀왔고 중, 고등학교 때 싸움 깨나 했던 기억이 있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흥분이 가라앉고 멋쩍었다.
 어른들은 내게 괜찮냐고 물어오셨지만 나는 죄송하다는 말만했다.
 
 “아니다 잘했어야~ 그런 놈은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 담부터 안 그러는 것이여.”
 
 동네 어른들에게 창피를 당한 정석의 부모들은 결국 오래지않아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버렸다. 동네사람들은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어버린 나쁜 사례가 될 것이다. 희선이 누나도 정석이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희선이 누나에게 찝쩍대던 정석이 매너 있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의 집 농작물을 망가뜨리고 바다에 쳐놓은 어망을 칼로 찢어 고기를 훔쳐가고 신발과 돈을 훔치는 것은 범죄자의 행동이지,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내 기억에도 이유 없이 나를 때렸던 정석이의 옛 기억이 있어서 폭발했는지 모르겠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희선이 누나가 공부방에 놀러왔다.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척 반가웠다. 누나를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누나~ 잘 왔어요.”
 “와~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동네아이들도 누나를 좋아했다.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다. 누나는 그만큼 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누가 와서 도와주었으면 했는데….”
 “그랬어? 말하지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럼 누나, 여자애들 문제 푼 거 맞는지 채점해줘요”
 “그래 알았어.”
 
 누나에 대한 기억이 좋았던 이유가 있다. 성격이 차분하고 선했던 누나는 가끔 집에서 만든 음식도 주고 만화책과 같은 것도 빌려주고 했었다. 우리 집 바로 아래에 누나 집이 있어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가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그때 동네 형들이 쥐불놀이 깡통을 돌리며 노는 곳에 구경 나왔었다. 시골에서 3월 달은 밤은 제법 차가웠다. 내가 옷을 조금 얇게 입고나와 추운 듯이 움츠리고 있으니 누나가 지퍼달린 겉옷을 벗어 주었다.
 별 생각 없이 받아 입은 누나의 옷에서는 좋은 냄새가 묻어나왔다. 기분까지 묘해졌다. 여자로서 누나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친누나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마을회관에서 공부는 모아놓고 한꺼번에 가르치는 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일이 하나씩 개인상대를 해야 했다. 사실 준서 형한테 부탁할까도 생각했다가 포기했다. 준서 형은 잘은 가르쳐 주지만 가끔 오버를 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오버하면 배우는 사람은 오히려 더 헷갈린다. 핵심을 가르치는 것보다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부분까지 알려주다 보니 부수적인 내용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핵심을 놓치게 되는 행동이다. 본인은 신나서 설명하지만 듣는 사람은 더 어렵고 헷갈린다.
 결국 한두 번 설명하다가 화난 목소리로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 가냐?”
 
 내가 형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가르치려는 오버를 말하는 것이다. 형은 나중에 종교철학 교수가 되었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형이 부러운 것이었다.
 
 “누나가 애들 봐줘서 한결 쉬워졌어요. 누나 괜찮으면 계속 나 좀 도와줘요.”
 “그래? 나는 방해될까봐 조심스러웠는데….”
 “아니에요.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애들이 잘 따르니 도와준다면 애들도 좋아할 거예요.”
 “음…. 그래? 어차피 노는 시간이라 나쁠 것은 없는데….”
 “왜? 걱정 되는 거 있어요?”
 “엄마가 곧 중학교 가는데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그러셔서….”
 나는 순간, 기회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쁘고 착한 누나와 과외를 핑계로 같이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누나, 혹시 선행학습이 뭔지 알아요?”
 “그게 뭐야? 처음 들어보는데….”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공부해두는 거예요”
 “그래?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애들 공부하는 거 도와주면 내가 중학교 선행학습 과외 시켜 줄게요.”
 “호호호, 농담하는 거야?”
 “농담 아닌데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4학년짜리가 어떻게 중학교 교과내용을 가르치냐?”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되면 배우겠다는 거네?”
 “사람들이 들으면 웃어야~!”
 중학생들 수학과 고등학생들의 영어 독해를 가르쳤던 경험도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일하던 종합학원에는 실업계 학생들이 입시를 공부하는 경우도 있었고 영어와 수학 그리고 컴퓨터가 함께 있는 학원들이 많았다.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수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더욱이 영어를 모르면 컴퓨터를 마스터하기 힘들기 때문에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요령도 알고 있었다.
 
 웬만큼 해서는 누나를 믿게 만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누나는 이유를 몰랐지만 굳이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좀 우스웠나보다. 누나가 좋아서도 그랬지만 오기도 발동했다.
 
 “내가 가르쳐 주는 공부는 큰 도시에서 비싼 과외에요”
 “너 진짜로 나를 가르칠 수 있다는 거야?”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내일 영어책이랑 수학책 빌려와 봐요. 내가 거기 나온 문제 풀고 영어 해석하면 내말 믿을 거지?”
 “너 정말이야?”
 “예쁜 누나한테 거짓말해서 창피 당하게? 아참! 엄마 아빠도 함께 계시면 되겠네!”
 누나는 그 말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일 애들하고 공부 끝나고 증명해 보여 줄게요 ”
 “그렇게 자신 있어?”
 “보면 알거에요”
 나는 누나가 간호사보다는 의사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어른이 되서도 잊지 못했던 마음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새 마을회관에서 누나네 집까지 다 왔다.
 나랑 마주 보고선 누나는 키가 10Cm이상 더 컸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멈춰서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좋아~ 일단 내일 너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볼게.”
 “그래, 누나 잘 들어가요.”
 다음날 희선이 누나가 와서 아이들을 함께 지도해주자 애들도 좋아하고 더 집중해서 가르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누나네 집으로 함께 갔다. 누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누나의 아버지는 사실 내게 할아버지로 보였다.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딸이었다. 위로 언니가 둘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언니들은 시집을 갔었다.
 “어서오니라.”
 “안녕하세요, 아저씨.”
 보통 애들은 할아버지라 부른다. 나는 일부러 아저씨라고 불렀다. 앞니가 몇 개 없으신 아저씨는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항상 새끼를 꼬고 계시거나 뭔가를 만들거나 수리하고 계셨었다.
 “안녕하세요, 집사님.”
 “오냐~ 어서 와라. 근디 네 말이 참말이냐?”
 “그걸 보여드리기 위해서 온 거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에요.”
 “그래 알았다.”
 누나가 빌려온 책은 중학교 2학년 경희 누나한테 빌려 온 것이었다. 약간 낡은 1학년 수학과 영어교과서였다.
 책을 펼치자 눈에 초보 수준의 영어들이 나와 있었다.
 영어는 알파벳 쓰기를 제외하고 첫 문장이 ‘I am a Boy ; You are a Girl ; I am a Student ; You are a Student Too… 이런 것 들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단순한 영어책을 쭉 읽어갔고 글자보다 그림이 더 크게 나온 중학교 1학년 영어책을 아무 곳이나 펼쳐 읽고 해석 해주었다.
 
 
 # 누나 나 믿지?
 
 아저씨, 어머니, 희선이 누나는 커질 대로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나, 고등학교 영어책을 빌려오지 그랬어요. 헤헤.”
 장난스럽게 말하자 누나가 말했다.
 “네가 하는 거 영어 맞는 거지? 그냥 장난으로 하는 거 아니지?”
 “아참, 누나는 이거 모르겠구나!!”
 그 당시에 시골에서는 중학교에 가기 전 알파벳을 제대로 읽고 쓰는 초등학생은 거의 없었다. 나는 영어책의 뒤 쪽 부분에 있는 긴 문장을 한국말로 해석해서 써줬다.
 “누나, 이거 고등학교 다니는 현경이 누나한테 해석이 맞는 것인지 확인해봐.”
 누나에게 교과서 내용을 해석한 연습장 종이를 건넸다. 수학책은 집합과 명제 부분의 문제를 풀어서 답을 써줬다. 예제 문제를 제외하고 답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함께 확인해 봐요. 맞았는지 아닌지.”
 들어간 지 10분도 안 돼서 내 모든 테스트를 끝냈다.
 
 “내가 쓴 답이 맞는다면 누나는 나한테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야 할 거야. 왜냐하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형, 누나들은 문제를 풀 수 있더라도 가르치는 것은 힘들거든?”
 “준후야, 너 예전에 우리 반에서 산수문제 풀던 거 진짜였어?”
 “그럼 찍은 답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예요?"
 “오메~ 뭔 일이래? 준후 쟤가 저렇게 똑똑했냐? 놀랬다.”
 
 희선이 누나 어머니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어른들은 정준후가 갑자기 공부를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계셨지만 학년을 넘는 중학교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모르는 사실 이었다. 그 사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다음날 현경이 누나는 모두 맞는다고 했고 희선이 누나는 6학년 공부, 그리고 중학교 영어와 수학을 번갈아가며 가르쳐 달라고 했다.
 누나 어머니는 자꾸 돈을 쥐어주시려고 해서 곤란했다. 끝까지 거절하고 마을회관에서 봉사하는 대가로 가르쳐주는 것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누나의 착한 심성 때문에 둘만의 오붓한 과외는 누나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끝내야 할 것 같다. 동생으로만 생각하던 내가 가르치는 방법은 누나의 상상을 넘어섰다. 내가 추구하는 교육은 첫 번째가 흥미유발이고 두 번째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부가 재미있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공부한다. 흥미를 느끼게 하고 재미있는 요소를 섞어가면서 설명해주면 어린학생들의 뇌세포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반응을 한다.
 “준후야, 네가 가르쳐주는 과외 공부 나 혼자만 하는 거 나중에 애들이 알면 얼마나 서운해 할까?”
 “그래서 비밀로 하고 있잖아요.”
 “다른 애들이랑 함께하면 안 될까?”
 “누나 사람이 많아지면 개인 지도의 장점이 떨어져요.”
 “그래도 나 혼자만 배우기엔 친구들한테 미안해….”
 “음…. 그러면 누나 중학교 입학할 때 즘에 친구들과 일주일에 2~3번 정도 함께 공부할 시간 마련해 줄게요 지금은 일단 열심히 배워야 나중에 함께 누나 친구들을 가르칠 거예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어?”
 “대신 누나 입학 할 때 까지는 비밀이에요”
 “그래요 알았어요. 선생님~!”
 그러면서 누나가 보조개 생기는 내 볼 살을 살짝 잡았다. 나도 모르게 입이 ‘헤~’하고 벌어졌다.
 
 중학교 입학 때 까지는 6개월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때까지 영어와 수학의 진도는 중 1학년 과정을 끝내려고 생각했다. 그래야 전체 수업을 진행할 때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수업 진행할 때 보조교사 역할을 하려면 앞서 말한 대로 본인이 제대로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누나도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안 될 것이다.
 
 드디어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그을린 우리 반 아이들을 학교에서 만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문주란 선생님은 긴 머리를 짧게 자르신 듯 했다. 개인적으로 짧은 커트머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선생님은 어울리는 듯 했다.
 
 “다들 방학 잘 보냈어요?”
 “네에.”
 “탐구생활하고 방학 숙제는 내일까지 모두 다 가져와. 알았지?”
 “네….”
 애들은 시큰둥했다. 방학숙제 제대로 해가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나는 독후감 하고 식물채집표본 20점 그리고 탐구생활을 내는 것으로 대충 해결했다. 방학 과제물은 성적에 반영되지도 않았다. 안했다고 해서 크게 야단치는 선생님도 별로 없었다. 선생님들은 꼭 방학이 끝나면 방학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앉아있었는데 용식이가 공부방 이야기를 꺼냈다.
 방학동안 마을회관에서 산수공부를 했고 내가 가르쳐주었는데 모르는 것을 배우고 산수가 재미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차! 입단속을 안 하고 놔두었구나!’
 
 공부방은 동네 아이들에게 전달되길 바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라는 말을 빼먹은 탓이었다. 동네일이니 굳이 비밀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예상 밖에 이야기가 부풀려졌다. 이유는 4학년 이하 거의 모든 반에서 방학동안 운영된 우리 마을 공부방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이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산수 공부 열심히 했다는 것은 큰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그저 어느 해수욕장에 가서 재미있게 놀았다가 더 큰 이야기 거리였지만 선생님들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정준후, 네가 애들 가르쳤어?”
 “아, 네….”
 “정말 훌륭한 일을 했구나~! 어른들도 하기 힘든 일을 준후가 했구나. 모두 박수쳐주자.”
 “짝짝짝.”
 나는 그냥 조용히 지나가주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공부방이야기가 조용히 지나가는 것 같았다. 교무실에선 선생님들끼리 바닷가 앞 우리 마을 이야기가 그날 대화 내용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애들끼리 모여 놀면서 함께 공부했겠지’라고 생각들을 하신 것 같았다. 즉, 산수공부의 품질은 크게 따지지 않았고 공부를 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혜미와 다른 애들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일반적인 대화만 오갔다.
 하교 후 저녁 밥 먹고 아이들은 동네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숫자가 제법 되었다. 5~6학년을 제외하고 동네아이들 23명 정도였지만 사정이 있어 못 오는 아이들 빼면 18명 정도는 고정적으로 오는 것이다.
 애들이 안 가려고 해도 부모들이 등 떠밀어 보낸다. 먼저 온 아이들부터 차례로 풀었던 문제 중에 틀린 문제와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그날도 변함없이 희선이 누나와 함께 아이들의 공부를 도왔다. 그날 누나는 중1 수학과 영어단어 익히기와 발음하기를 배웠다. 아무래도 영어사전이 있어야했다. 그때는 영어사전을 딕셔너리가 아닌 콘사이스라고 했다. 큰 사전이 아니라 조그만 소형사전이어서 콘사이스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목포에 나가시면 딕셔너리와 콘사이스를 각각 한 권씩 사달라고 했다.
 “준후야, 마을회관 공부방에서 산수 공부 하는 거 아니었어?”
 “영어는 미리 준비해두려고요.”
 “벌써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너무 이른 것 아니냐?”
 “아버지 영어는 공부가 아니라 습관이에요. 습관처럼 해야 영어가 익혀지는 거예요.”
 “허허허 그래. 나보다 똑똑한 아들 말이니 아빠가 목포시내 나가면 사줄게. 걱정마라.”
 “아버지 돈 여유 되시면 연습장이랑 필기구 좀 구해주세요”
 “그래? 학교 문방구에서 팔지 않냐?”
 “그게 조금 많이 필요해서요.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나누어 쓸 거예요.”
 아버지는 내말을 들으시곤 두 말하지 않으셨다.
 “오냐, 그래. 알았다.”
 
 아버지는 베푼다는 것에 인색하지는 않으셨다. 내가 하는 말뜻을 금방 알아들으셨다. 1980이 풍족한 때는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공책이나 연필 같은 것을 대다수 교회나 학교 운동회, 소풍 같은 곳에서 부상으로 받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준후야. 동생 준걸이 데려가서 함께 공부하지 그러냐.”
 “준걸이가 오고 싶을 때 오라고 하세요. 억지로는 안 해요. 가족을 가르치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걸 아빠도 아시죠?”
 “그래 허허허.”
 “다시 한 번 말은 해 볼게요”
 역시 형이나 준걸이는 형제라는 이유로 다루기가 힘들 듯 했다.
 형은 내가 없어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라 상관없었지만 동생은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게으른 구석이 있었다. 물론, 예전 나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배우는 것을 별로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의 하루가 지금으로 되돌아오기 전과 비교하면 많은 여유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6시 이전이다. 씻고 밥 먹고 마을회관으로 바로 갔다. 참고로 밥 먹을 때 형과 동생은 티비를 보면서 밥 먹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뉴스 외에는 거의 티비를 보지 않았다.
 풀 HD LED TV를 보다가 14인치 볼록티비 그것도 흑백 티비를 보자니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티비의 변화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삼O전자가 메모리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가 IMF시기를 지난 후부터였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쯤에는 오히려 티비와 가전에 관계된 주식들이 괜찮았던 것 같았다. 티비를 보면서 떠오르는 그때가 생각나 추석을 지나면서 생기는 여유자금을 삼O전관과 다른 종목으로 분산투자하도록 아버지에게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IMF 직전에 대박을 쳤던 코스닥 주 하나가 떠올랐다. 같은 학원에 근무하던 동료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액면가의 168배가 뛰어 세간에 화재가 되었던 코스닥 주였다. 하지만 그 대박은 약 17년 후에나 일어날 이야기였다.
 
 애들 공부는 대략 한 시간 정도다 희선이 누나가 공부를 도와줘서 시간이 그나마 줄어든 것이다. 애들을 1시간 이상 붙잡아 놔두면 집중력만 떨어진다. 희선이 누나 영수공부도 대략 45분 정도만 한다. 마음 같아선 밤 9시 넘어서까지 해주고 싶지만 누나는 아직 13살이다.
 집에 돌아오면 숙제와 암기과목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그리고 아버지 책장에 있는 책들을 꺼내 읽었다.
 올해는 이상하게 한여름 더위가 약했던 달이었다. 비가 많이 내린 탓이었다. 농작물 작황에 영향이 있었다. 일조량 부족으로 아무래도 우리 과수원의 사과 품질이 걱정되었다.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2시쯤 되었다.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6학년 영혁이 형이 우리 갯벌에 맛 조개를 잡으러 가자고했다. 그런데 오는 길에 영혁이 형의 동생 애희와 친구 형오, 금란이가 같이 가겠다고 했다. 용식이는 아버지 따라서 밭에 가봐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준서 형은 낚시를 좋아하지 뻘에 들어가 발 빠져가며 힘든 조개 잡기는 별로라며 가기 싫다고 했다. 형이 안가니 동생 준걸이도 티비를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머지않아 없어 지게 될 우리 마을 앞 갯벌 체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집에 가방을 놔두고 간편한 차림으로 나오면서 희선이 누나를 불렀다.
 “나 갯벌에 조개 잡으러가요. 누나 함께 갈래요?”
 “그래? 재미겠다. 같이 가자.”
 
 
 # 면역이 생기지 않는 것들
 
 누나는 갯벌에 들어갈 만큼 몸이 튼튼하지 않았다. 키만 껑충하니 컸지 몸매는 청순가련형 이었으니 뻘에 들어가 30분만 움직이면 기운이 빠져버릴 그런 체형이었다.
 역시 양말 벗고 들어와 10분도 못되어 퇴장하고 갯벌 둑에서 구경하겠다고 했다.
 영혁이 형은 말할 것이 없고, 금란이랑 형오는 서로 경쟁하듯 무지막지하게 잡아가기 시작했다. 한두 번 잡아 본 솜씨들이 아니었다.
 갯벌이 모래가 거의 섞이지 않은 순수한 뻘이어서 발이 무릎까지 빠져들어 갔다.
 체력이 약하면 1시간 안에 녹초가 된다. 요령이 있던 나는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조심스럽게 뻘에 생긴 구멍을 찾아다녔다. 제법 재미있는 조개잡이였다. 1시간 이상 잡다보니 둑에서 기다리는 희선이 누나가 지루할 것 같았다.
 나는 반바지위로 뻘을 거의 묻히지도 않고 요령껏 걸어 나갔다. 그런데 어린 애희가 나를 따라다니느라 힘이 빠져버렸다.
 “아이고~ 힘들어!”
 “이제 돌아가자. 희선이 누나도 기다리느라 지치겠다.”
 “힝~ 오빠 자꾸 발이 빠져서 못 나가겠어.”
 영혁이 형을 찾았다. 나랑 떨어져 멀리가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나가자 희선이 누나는 앉아있던 둑에서 일어서 햇볕을 손으로 가리고 서있었다. 가을 하늘빛 아래 갯바람에 한들거리는 누나의 얇은 선이 곱게 보였다.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내가 손을 흔들자 누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애희야, 천천히 나가자.”
 하지만 뻘이 잡아당기듯 어린 애희 발을 놔주지 않았다. 표정이 점점 울상이 되었다.
 조개잡이에 빠진 세 사람은 이미 멀리 떨어져있어 안되겠다 싶었다.
 “애희야 오빠한테 업혀.”
 “그럼 오빠 발이 더 빠지잖아.”
 “괜찮아. 오빠가 빠져 나가는 요령 아니까 그냥 업혀. 더 있으면 힘 빠져서 못나온다.”
 애희는 갯벌에 조개 잡으러 처음 들어온 것이다. 영혁이 오빠를 믿고 따라왔는데 조개잡이에 신이난 형은 동생을 팽개치고 멀리 들어간 것이다.
 애희를 등에 업고 기어가는 자세로 뻘을 나왔다. 손과 무릎아래 다리로 뻘과 닿는 면적을 넓혔다. 힘들긴 했어도 나올 수 있었다. 갯벌 둑에 가까워지니 조심스레 걸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발도 덜 빠지고 걸을 수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오빠 미안해.”
 “괜찮아, 얼른 수로에 가서 뻘 씻어내자.”
 애희가 조그만 아이였지만 업고 나오기가 꽤나 힘이 들었다.
 “누나 오래 기다렸지? 애희가 힘이 빠져서 못 나오겠다고 해서 데려오느라 더 늦었네.”
 “으…응…. 괜찮아….”
 “나 금방 수로에서 뻘 좀 씻고 올게!”
 “그래…. 다녀와.”
 지쳤는지 누나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 보였다.
 ‘피곤해서 그런가?’
 애희랑 수로에 가서 다리와 팔에 묻은 뻘을 씻어냈다.
 몇 마리 잡은 맛조개를 누나한테 주었다.
 “아냐, 난 괜찮아. 네가 잡은 거니 가지고 가서 엄마 드려.”
 “누나는 잘 모르겠지만 난 조개나 굴 같은 거 안 좋아해. 생선은 좋아하는데 패류는 안 먹어.”
 “패류는 또 뭐야?”
 “아~!! 조개나 굴처럼 바닷속 뻘이나 바닥에서 사는 생물을 말하는 거야.”
 “흐~ 너 입맛 참 특이하다?”
 “응, 나도 계속 먹어보려고 했는데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그러니 누나가 가져가….”
 “어른들 드시라고 해”
 “우리 식구들 대식가들이야. 이거 누구 코에 붙이겠어? 누나 엄마 드려요.”
 맛조개를 억지로 건네고 남은 세 사람을 기다렸다.
 “누나 맛조개는 저렇게 뻘을 뒤져서 잡는 것보다 맛소금을 뿌리면 촉수를 내밀거든. 그때 뽑아 올리면 쉽게 잡을 수 있어.”
 “어머 그러니?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했어?”
 “엄마들이 가는 소금 들고 나오면 가만히 계시겠어?”
 “하하하하 그렇구나!!”
 누나가 다시 웃는 모습을 보여주니 안심이 되었다. 둑에 앉아 짱뚱어와 게를 구경하면서 한 시간 동안을 더 기다리니 영혁이 형이랑 형오, 금란이가 꽤 많은 조개를 잡아왔다.
 희선이 누나에게 몇 개씩 더 내밀어 누나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 되었다.
 “야, 너는 안 가져 가냐?”
 “나 그냥 여기 재미로 온 거야. 잡아서 먹으려고 온 것은 아니었어.”
 “암튼 준후 너 진짜 이상해.”
 갯벌을 다녀와 저녁을 먹고 애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 공부방에 갔다.
 희선이 누나가 먼저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목포에 다녀오시면서 지난번 부탁드린 사전과 학용품을 사오셨다.
 아이들에게 연습장과 연필, 지우개를 나누어주고 나중에 사용할 것들은 마을회관에 보관해두었다.
 수업이 끝나고 누나 집에서 콘사이스라 불리는 소형 사전을 건넸다.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응, 내 선물이야. 열심히 해요, 누나.”
 “준후야, 이걸 받아도 되니? 비쌀 거 같은데….”
 “누나 우리 집 잘살아. 이거 사줬다고 안 망해요.”
 “호호호.”
 “작은 것에 신경 쓰지 말아요. 누나 더 멀리, 크게 보세요. 나중에 누나한테 도움을 받을지 어떻게 알아요?”
 “그래…. 아무튼 고마워. 열심히 공부할게.”
 영어사전 찾는 법부터 발음기호 읽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사전의 크기가 작아서인지 누나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야 했다.
 익숙해질 때 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발음을 잡아 주었다.
 누나는 옆에 붙어 앉았어도 볼을 내게 가까이 디밀어야했다.
 누나의 가느다란 숨결이 느껴졌다.
 비누향인지 뭔지 잘 모르겠으나 누나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10살짜리 어린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누나에게 들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른해지는 느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연필은… 펜슬이라고 읽어. 펜실이 아니라.”
 “펜슬 이라고?”
 “으… 응 그래….”
 나는 호흡까지 가빠졌다. 내가 마른 침을 삼킬 때 고개를 틀어 내 얼굴에 볼을 들이대던 누나가 힘들었는지 그대로 내 어깨에 턱을 걸쳤다.
 동생인데다 평소에도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을 만지는 등의 익숙한 스킨십을 했었다.
 전에 누나는 자신이 막내여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어른의 사고인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어린 이 녀석의 신체반응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나는 까진 녀석인 듯 했다.
 누나를 거부하거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계속 발음기호 읽는 법을 알려주었다.
 “생각처럼 잘 안 된다.”
 “처음에는 쉽지 않을 거야. 누나 그런데 익숙해지면 쉬워져.”
 “그래?”
 “그러니까 자꾸 해봐야지.”
 “경험이 중요한 거구나.”
 “그래, 맞아. 자꾸 하다보면 늘어.”
 대화만 듣자면 상당히 야한 대화를 한 것 같았지만 엄연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너는 항상 어른스럽게 말하더라. 가끔 네가 진짜 선생님이나 오빠처럼 느껴져.”
 “난 누나가 내 동생이나 제자처럼 느껴져요.”
 “뭐야? 호호호.”
 “크흐흐.”
 누나는 수업이 끝나고 미숫가루를 타주었다.
 갯벌에 다녀와 조금 피곤했던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누나, 고마워 잘 마셨어요.”
 “사전 고마워. 잘 가.”
 “응 누나.”
 발그레한 얼굴로 집에 들어갔다.
 조금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준후야, 너 얼굴색이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아뇨, 잘 모르겠어요. 조금 피곤해요.”
 어머니는 내 머리에 손을 얹어보시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씀하셨다.
 “열이 좀 있네. 오늘 갯벌에 갔다고 하드만 감기 걸린 것 아니냐?”
 자꾸 피곤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몸의 이상 신호였나 보다.
 일요일 내내 누워있었다.
 옛날이라 감기약도 별로 없었고 그저 감기는 누워있는 것으로 견뎌야 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려고 일어났다. 열이 있었고 몸이 무기력한 느낌이었다.
 시골 어른들은 감기 정도로 결석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나도 집에서 뒹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밥을 물 말아서 몇 수저 떠먹고 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바람도 쐬고 걸어가니 견딜 만 했다.
 그러나 수업시간 2교시 때에 너무 열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준후야, 너 많이 아파?”
 “열이 조금 있어요. 감기 같아요.”
 “양호실로 가라. 혜미야, 네가 준후를 데려다줘라.”
 “네.”
 “괜찮아 혼자갈 수 있어….”
 나지막이 내가 말하자 혜미가 대답했다.
 “빚 갚는 거야!!”
 ‘가시ㄴ 말하는 거 하고는.’
 나는 걸어서 교실 뒤 미닫이 쪽으로 가자 혜미가 먼저 문을 열어줬다.
 부축을 한다거나 하는 기대는 버려야한다.
 양호실에 가자 서무선생님 겸 양호선생님이 몇 개의 알약을 주시고는 나가셨다.
 물과 함께 약을 삼키고 누웠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서 공부해. 빚 갚았잖아.”
 “그래, 먼저 간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힘이 들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끙끙거렸다.
 누군가 내 머리에 손을 대자 나는 눈을 떴다. 담임선생님이었다.
 “열이 아직도 있구나. 많이 아프니?”
 “아뇨 조금….”
 “주말에 뭘 했기에 감기에 걸렸냐?”
 “갯벌에 조개 잡으러 갔다가 왔는데 젖은 채로 오래 있어서 그랬나 봐요.”
 “그래? 준후가 강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약하구나.”
 “네…. 저도 건강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요.”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선생님은 힘없는 웃음을 보이셨다.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니? 사람은 모두가 아프면서 사는 거야.”
 “선생님도 아프세요?”
 눈치 빠른 나의 말에 문주란 선생님은 조금 놀라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였니?”
 “선생님은 긴 머리가 훨씬 더 어울리신데 방학이 끝나고 머리가 많이 짧아지셔서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하는 생각 했어요.”
 “준후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구나!”
 “그래서 6번에 놀라지 마시라고 썼던 거예요. 혹시,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셨어요?”
 약간 여윈 얼굴의 문주란 선생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약 때문에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의 몸에는 면역이라는 것이 있다 들었어요. 그런데…감기와 사랑은 면역이 없다네요. 참 나쁘죠?”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잠이 들었다.
 선생님은 양호실을 나가셨다. 애들 말로는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한참 뒤에 오신 선생님의 눈이 빨갛게 되어서 들어오셨다고 했다. 아이들은 내가 아프자 걱정하셔서 우셨다고 생각했다. 나는 반 아이들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괴롭히던 몸살감기가 가시자 어느덧 추석이 열흘 앞으로 가까워졌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추석 전에 과일을 많이 팔아야 제 값을 챙길 수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일조량이 많지 않아 농민들이 고민을 많이 했다. 다행이 우리 집 사과는 은박지를 바닥에 깔아놓은 덕에 다른 곳의 사과보다 색과 당도가 더 좋다고 했다.
 
 추석 때 나가는 과일은 무조건 크기와 색깔이 예뻐야 했다. 제수용으로 사용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나온 사과는 최상품이었다. 다른 해에 비하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1980년에 냉해피해를 입은 다른 과수 농가에서는 출하가 불가능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았고 당도와 크기가 형편없었다. 가격이 크게 오르는 추석 전이라 15Kg 상자에 2만 5천 원까지 받았다. 다른 과수 농가에 비하면 우리 집은 잘 된 것이다.
 # 밥 먹고 가
 
 2만 5천 원짜리 600백 상자와. 2만 원짜리 300상자를 실어냈다. 우리 과수원은 약 3헥타르 규모다 약 9천 5백 평이 넘는다. 15kg상자가 약 3천 상자 정도 나온다. 그것은 판매 가능한 상품만을 계산했을 때다.
 “역시 정 사장님네 과일은 언제 봐도 최고에요. 알도 굵고 당도도 높고…. 도대체 누가 바닥에 은박지를 놓으라고 알려준 거죠?”
 “허허허 그런 사람이 있다네!”
 삼분의 일을 출하해서 2천 100만 원을 벌었고 그동안 사용된 낙과방지제와 병충해 약값과 일하시는 분들의 노임을 빼고 거의 1000만 원 가까이 번 것 이었다. 올해는 남아있는 약 60% 정도 순수하게 남는 돈이 된다. 여러 대의 트럭을 실어내고서 우리는 행복한 추석을 맞이했다.
 우리 집 추석준비는 송편을 빚고 고기전과 식혜 그리고 약과까지 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정말 최고였다. 외증조할아버지가 영산포에서 지주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주 어렸을 때 쇠고기와 조기반찬이 상에서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음식 하는 법을 배우신 것 같았다. 물론, 옛날이야기지만 말이다.
 
 철없는 막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에게 손을 벌렸다.
 “아빠, 장난감 사게 돈 좀 주세요.”
 형과 동생은 모두 초등학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추석이 되면 부모님들이 용돈을 주시고 불꽃놀이며 폭죽을 사서 놀았다. 아버지는 5천 원씩을 삼형제 모두에게 주셨다.
 형과 동생은 학교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기어이 샀다.
 아버지는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부르셔서 따로 만원을 더 쥐어주셨다.
 “어쨌거나 우리 준후 네가 사과나무 아래에 은박지를 깔도록 알려준 덕에 이번 과수농사가 성공했다.”
 “다행이에요. 아빠 사실 다른 해에 비해 썩 좋은 작황은 아니었지만 다른 과수농가들의 실패가 우리의 성공이 되었네요.”
 “나도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일조량이 적어지리라고 생각을 못했다. 생산량이 전체적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우리 사과는 좋은 가격을 받은 것 같구나.”
 “저… 아빠 제 기억에는 올해 가격이 좋았다가 다음 해에 생산량이 늘어나면 가격폭락이 예상 되는데요.”
 “내년에는 작황이 좋아지냐?”
 “올해처럼 저온현상이 없다면 출하량이 많아질 거예요.”
 “올해 사과 값이 비쌌으니 내년에 풍년이면 폭락한다는 거야?”
 “네…. 아무래도 좋은 가격을 받기는 힘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사과밭을 판매하고 여기를 떠나시려 했던 이유가 이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에요.”
 “앞으로도 사과는 제 가격 받기 힘든 것이냐?”
 “아빠, 앞으로 몇 년 동안 사과가격이 별로 좋지 못할 거예요.”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냐?”
 “네, 제가 알기로는 사과농사 짓는 사람이 줄어들고 재배면적이 줄고 나서야 가격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야?”
 “미리 대비를 해야죠. 아빠 며칠만 제게 시간을 주세요. 제 머릿속에서 정리가 아직 안 되었어요. 생각 좀 해보고 말씀을 드릴게요.”
 “오냐, 그래. 알았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저온창고와 가스저장법을 사용하면 해결이 된다. 하지만 초기비용이 많이 들어갈 것이다. 나는 간단한 비닐봉지 포장 법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부탁할 것은 예냉법과 저장창고건설, 그리고 소독에 관련된 사항이었다. 아직 크기별로 선별해주는 장치가 나온 것이 아니므로 힘은 들겠지만 사과 값 폭락시기를 넘겨 봄까지 출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했다.
 3일 만에 다시 아버지와 과일폭락에 대비한 대비사항을 의논드렸다.
 “아빠, 일단 우리 집에 초대형 냉장고하나를 세워요.”
 “도대체 얼마나 크기에 초대형이라고 하는 거야?”
 “한 열 평 정도 크기로 일단 한 개 지어보구요, 결과가 좋으면 더 늘이기로 해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단순히 저장만 하면 되는 거야?”
 “제가 노트에 정리해서 드릴게요.”
 “오냐, 그래. 알았다.”
 
 과일을 딸 때부터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먼저 꼭지는 짧게 잘라내서 사과끼리 서로 상처내지 않도록 한다. 과일을 나무 아래 바닥에 내려놓으면 안 된다. 곰팡이 균에 옮기 쉽기 때문이다. 사과를 따면 하루정도 얼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 예냉시켜 사과가 숨을 쉬면서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척과 인체에 무해한 살균소독도 해야 한다. 그리고 비닐봉지에 바늘구멍을 20개가량 뚫어 영상 2~0도 사이에 보관한다. 최대 8개월까지 보관하려면 탄산저장법을 사용하면 된다. 탄산저장법은 탄산가스를 사용해야하므로 비용이 더 발생될 수 있었다. 이런 기록을 아버지에게 드렸다.
 
 “준후, 네가 말하는 10평 규모의 냉장고를 지을 사람이 있냐?”
 “네, 아빠. 있어요.”
 “그래? 그런 사람을 아는 거야?”
 “원양어선이나 대형선박의 냉동 창고를 짓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찾으면 돼요”
 “그래? 그럼 목포의 조선소를 알아 봐야겠구나.”
 “네, 그래요. 냉동설비업자들은 우리가 원하는 정도는 쉽게 지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알았다. 그러면 냉동 창고는 어디 쪽이 좋겠어?”
 “뒷마당이 적당할 것 같아요.”
 추석이 지나고 과일가격이 떨어졌다고 해도 15Kg상자에 평균 18000원선으로 총 1200상자를 출하시켜 약 2160만원을 벌었다.
 창고를 짓는데 800만 원 가까이 들어갔다. 그리고 700상자 정도는 저온창고에 보관시켜 최대한 오래 보관시켜보기로 했다. 내 생각으론 3월까지 보관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상품가치가 조금 떨어지는 것들은 우리가 먹거나 아는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는 내 힘으로 들고 갈수 있는 양만큼 누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누나, 내 힘이 이정도 밖에 안 돼서 많이 못 가져왔어”
 “감기는 다 나은 거지? 너무 무리한 것 아니야?”
 열이 있는지 이마를 만져 보더니 땀이 나있는 것을 알고 손을 자신의 옷에 닦더니 다시 내 이마에 묻은 땀을 이리저리 닦아주었다.
 시골에 사는 엄마들이 수건이 없을 때 자식들 땀을 닦아주는 모양과 비슷했다.
 “누나가 와서 사과 담아가라고 해도 안 오니까 내가 이렇게 힘들잖아!”
 “너희 부모님께서 고생해 지은 과일인데 그렇게 마구 줘도 되는 거야?”
 “나는 그래도 돼요.”
 “뭐? 호호호, 무슨 말이야?”
 “올해 날씨가 별로였는데 우리 과수원 농사는 잘됐거든?”
 “그런데 그게 너랑 무슨 관계가 있어? 아버지 어머니가 고생 하신 거잖아.”
 “누나, 활용 못하는 지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넌 가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더라. 뭔 말이야?”
 “내가 사과 농사에 대해 조그만 지식을 알려드렸지요.”
 “그럼 네가 아버지한테 사과농사 방법을 알려드렸다는 거야?”
 “그렇다고 말하면 내가 이상해 보여?”
 “아니, 이상하다기 보단 뭐라고 해야지? 맞다, 너는 꼭 어른 같아….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
 “내가 어른이라고 하면 안 믿을 거지?”
 누나는 나를 끌어안듯 당겨 앞에 세우더니 말했다.
 “이거 봐라. 내 코 높이 밖에 안 되잖아.”
 “어차피 키 크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밥 잘 먹고 무럭무럭 커라. 그러면 생각해 볼게.”
 “응? 생각…?”
 “왔으니 밥 먹고 가라. 계란말이 해줄게.”
 “진짜? 먹고 갈게요.”
 영화 봄날은 간다의 ‘라면 먹고 갈래?’가 생각났다.
 ‘흐흐흐.’
 나는 속으로 음흉한 웃음이 나왔다.
 그래봤자 별 볼일은 없지만 말이다.
 
 어느덧 9월 월말고사가 3일 앞으로 다가왔다.
 공부방 아이들은 별스럽게도 열심히 공부하는 듯 했다.
 이런 것을 흔히 ‘탄력 받았다’는 표현을 쓴다.
 “월말고사 3일 남았으니 산수랑 전 과목 공부 준비하자. 그리고 항상 말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아야해. 그래야 좋은 점수를 얻는 거야.”
 “네.”
 2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은 각자의 다양한 문제지와 표준전과 또는 동아전과를 펼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만하더라도 출판사에서 전과라는 종합해설 및 문제지인 두꺼운 책을 출판했었다.
 
 산수 말고 암기과목은 주관식 단답형 문제에 신경 써야 한다.
 아이들 공부를 지도해주는 누나와 나 그리고 배우는 공부방 아이들 모두는 학생들이다.
 기왕 공부하는 것 시험을 잘 보는 요령까지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칠판에 암기과목의 시험요령을 몇 개 적어주었다.
 1. 자신 스스로 선생님이 되어서 문제를 출제해 보자
 2. 답이 여러 개 있다면 그것은 문제로 나온다.
  예) 다음 중 사육신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가) 성삼문 나) 박팽년 다) 신숙주 라) 이개
 3. 연속적인 인물과 사건들은 반드시 외워라.
  예) 조선왕의 이름외우기 :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 -> 문종
 4. 헷갈리는 것은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문제가 나온다.
  예)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신 해전은? : 노량해전
 5. 암기가 잘되지 않을 때는 충격을 주는 방법으로 암기하라.
  곤충을 3등분으로 나누는 명칭 : 머리, 가슴, 배
  예) 곤충이 지 머리를 뚝 떼어서 가슴을 때리며 배로 크게 말했다. 난 3등분이다~!
 
 아이들은 칠판에 씌어져있는 내용 중 유독 5번째 내용에 흥미를 보였다.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새롭고 충격적인 이야기는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각인이 되기 때문이다. 수학천재와 달리 암기천재들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연상기억법을 사용하면 문제들이 해결된다.
 그런데 아이들의 상상력은 어른의 그것을 뛰어 넘는다. 그냥 건성으로 알려줬는데도 아이들은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리고 직접 해보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외워야하는 간단한 용어들을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만들어 혼자 웃고 있었다.
 그렇게 3일후 시험을 치르고 난 용식이는 뭐가 좋은지 표정이 밝았다.
 “용식아 시험 잘 봤냐?”
 “겁나게 잘 봤어야!”
 나는 깜짝 놀랐다. 용식이가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하리라곤 생각을 못했다.
 ‘이 녀석 보게. 정말 100점이라도 맞은 것인가?’
 그런데 막상 용식이 점수를 보고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산수가 65점이었다.
 물론, 잘한 것이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용식의 표정을 생각하니 웃겼던 것이다. 그리고 반 친구들은 용식이 남의 답을 베껴 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고 쓴 거 아니어야, 준후한테서 배운 것이랑께!”
 선생님도 점수가 오른 몇 명의 학생들을 칭찬했다. 용식이의 점수는 산수 뿐 아니라 다른 과목에서도 올랐다. 그러나 전 과목 백점을 맞은 또 다른 학생 혜미에 대한 칭찬에 묻혔다.
 “드디어 우리 반에 올백이 두 명 나왔다. 준후랑 혜미한테 박수~!”
 “워~ 짝짝짝!”
 “와! 너 드디어 올백이구나. 축하해. 역시 넌 최고야. 하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기특했다.
 마치 내 학원생이 자격증시험 합격해 왔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표정은 마지못해하는 표현과 확실히 다르다. 상대는 그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 그래 함께 가는 거야!
 
 내가 진심으로 기뻐해주자 혜미의 표정이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진짜로 좋아서 그러냐?”
 “왜? 볼에 뽀뽀라도 해줘야 믿을래?”
 “뭐야?”
 “시험결과 나오면 화난 얼굴로 나를 째려보던 네 얼굴이 처음으로 편해 보여서 좋다. 내가 2등하고 네가 1등해도 너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없다. 나의 경쟁상대는 나야. 그렇게 알고 있어!”
 “또 영감 같은 소리냐?”
 “웃어 임마! 좋잖아.”
 내가 양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혜미는 손바닥으로 나를 때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날을 계기로 혜미는 나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내 도시락 반찬을 슬쩍 밀어주면 마지못해 하나 집어가는 정도가 되었다.
 
 정상에 도달해본 사람의 여유는 아직 정상 직전의 사람과 큰 차이가 난다.
 아버지는 또 3개 차이로 올백을 못 맞은 형을 안쓰럽게 생각하시고 5학년 전체 1등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큰 아들에 대한 특별한 혜택이라 생각했고 나는 그런 소소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와 나의 비밀 대화 장소는 뒷마당 냉장창고 앞이었다.
 “준후야, 너한테 물어 볼 것이 있다.”
 “네, 말씀하세요.”
 “저기 말이다. 네 말대로 돈을 빌려주지 말라 해서 빌려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말꼬리를 흐리셨다. 또 누군가에게 거절하기 힘든 부탁을 받으신 것이다.
 “말씀하세요. 아빠 아들인데 못할 말씀이 어디 있어요.”
 “서 장로님 알지?”
 “네, 아빠.”
 “서 장로님이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거야. 그런데 현경이가 이번에 대학을 가고 싶어 한다는 구나. 등록금부터 서울에 자취라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아빠한테 어렵게 부탁하더라.”
 아버지의 고민이 충분히 이해갔다. 돈을 빌려가는 것의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갚지 못하는 이유는 많지 않다.
 갚을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갚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목포 여자고등학교 3학년 현경이 누나는 아까운 인재다.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수재로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을 들어갔다는 말을 나중에도 듣지 못했다.
 아마 돈을 아버지가 빌려준다 했어도 집안 형편을 생각해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돈을 갚아야한다는 사실이 부모님을 괴롭힐 것이라 생각한 현경이 누나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내 어린기억에도 그것 때문에 많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빠, 그럼 현경이 누나만큼은 돈을 빌려주는데 대신 조건이 있다고 하세요.”
 “조건? 무슨 조건?”
 “앞으로 생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우리에게 넘기고 서 장로님은 우리 소작을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앞으로 생길 땅은 뭐고, 소작이라니?”
 “아빠, 저랑 서 장로님 댁에 같이 가요”
 “너도 돈을 빌려주는 것을 찬성하는 거야?”
 “아빠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것은 갚을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아빠는 현경이 누나가 우리 딸 이었으면 맨날 그러셨잖아요.”
 아들만 셋인 아버지는 항상 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셨다. 준걸이가 태어날 때 아들이자 아버지는 아쉬워하시면서 ‘또 꼬추네!’ 라고 하셨다 했다.
 
 서 장로님은 우스갯소리로 우린 딸이 많으니 하나 데려가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정말로 데려오시려고 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어서 무산 되었다.
 서 장로님 댁에 도착한 나와 아버지가 함께 장로님 방으로 들어갔다.
 나에 대한 소문은 마을전체에 좋게 퍼져있었고 마을어른들은 나의 총명함에 감탄하고 계셨기에 이런 일도 가능한 것이었다.
 “서 장로님, 우리 아들이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말해봐라.”
 “누나가 서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드릴게요.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제 말에 동의하시면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담보로 잡을 만한 마땅한 것이 없다. 그리고 현경이 말고 다른 애들이 많아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을지도 확실히 모르겠다.”
 “장로님께서는 돈을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장로님은 나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보셨다.
 “앞으로 약 2년 뒤에 마을 사람들의 공동 명의로 땅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제가 만들어 드릴 거예요. 그 땅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지금 작성하시고 저희 집에 해당하는 땅과 장로님 소유의 논농사를 지으시고 저희에게 30%의 소작료만 내시면 됩니다.”
 “혹시, 너 영산강 하구언 공사 갯벌 땅을 말하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장로님.”
 “갯벌에 소금기가 가득인데 어떻게 거기에다 농사를 짓겠다는 거야?”
 아버지와 장로님 두 분 모두 나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부분은 제가 할 걱정이구요 장로님은 손해 보실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소출의 70%를 갖게 되실 것입니다. 농사방법은 제가 알려 드릴 것이고 지금보다 소득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실 것입니다.”
 
 누가 봐도 우리 아버지가 불리한 계약이었다. 이런 조건을 내미는 내가 미친 녀석이었고 계약을 못한 사람은 땅을 치고 후회할 조건이었다.
 세부 조건을 달았다. 현경이 누나의 등록금 일체와 하숙비를 아버지가 내는 것으로 했다. 미리 돈을 주면 다른 용도로 써버릴 위험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규원장학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 장로님은 잃을 것도 없었고 소득도 늘어나는 1석2조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로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그 땅에 도청이 들어오기 때문에 분쟁의 여지조차 없었다.
 
 마을 주민들의 말라비틀어진 갯벌을 외면해서 외지인들이 상당량 토지를 국가로부터 임대했었고 나중에 지역별로 구역을 정해줘서 농사짓게 되었지만 미리 그 권리를 사버린 셈이어서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번구획이 생기면 그때 지번을 기록하는 것으로 빈칸을 놔두고 인감을 찍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치밀하고 영악한 나의 행동에 아버지는 ‘이놈이 내 아들 맞나?’하는 눈으로 보셨다.
 계약서에 세부조항까지 첨부해 도장을 찍고 오는 나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누나에게 들어간 돈은 4년 동안 나누어 지급하는 형식이라 1년에 500만원 정도였다. 그 돈은 시골에서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납부금과 교재비보다 하숙비와 생활비가 더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사과를 판매한 돈의 여유가 있었고 내년부터 가격 폭락이 되어도 대비책을 가지고 있어 큰 걱정이 없었다. 저가의 300박스 분량과 30박스의 배를 판매한 일부를 제외하고 300만 원 정도를 삼O전관과 남O유업 주식을 조금 더 구매해 두었다.
 일요일 오후 희선이 누나가 나를 불렀다. 가봤더니 조그만 선물을 내밀었다.
 “집에 가서 열어봐. 너에게 해준 게 없는 거 같아서 준비했어.”
 “어~ 진짜? 히히 고마워.”
 이럴 때는 기뻐하면서 받아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최대한 배려다.
 누나 집의 형편으로는 큰 여유가 없을 것이다.
 용돈을 아껴 샀을 거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 아팠다. 그냥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보상받는 것 같았는데 누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흠~! 그리고 이번에 나 반에서 1등이다!”
 “정말? 와!”
 우리 둘은 서로 손을 잡고 뛰었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어, 누나.”
 “다 똑똑한 선생님 덕이야.”
 “누나 가게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나는 누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내가 사줘야지. 네가 왜 사냐?”
 “가르친 제자가 좋은 성적 받았다고 선생님이 얻어먹는 거 봤어?”
 “뭐? 호호호.”
 “나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자야 걱정 하지 마! 먹고 싶은 것 몽땅 다 골라,”
 “그래~ 가자!”
 호기롭게 말하고 누나 손을 잡고 마을에 유일한 가게로 향했다.
 아버지가 쥐어주신 만 원이 있었다. 시골 애들이 만 원을 벌수 있을 때는 설날 빼고는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자라는 돈과 만들 수 있는 액수는 몇 천만원대를 넘나들기 때문에 쓸데없는 곳에 돈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누나의 성적향상은 내 기쁨이나 다름없었다. 과자 한 봉지만 고르는 누나에게 먹지도 못할 만큼 몽땅 사서 누나에게 들려주었다.
 “왜 이렇게 많이 사냐? 누가 다 먹으라고?”
 “삐쩍 마른 누나 먹고 살 좀 찌라고,”
 아직 어리지만 입을 가리고 웃는 낭낭한 웃음소리는 천상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웃음소리다.
 소설에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표현을 볼 때 짜증이 났었는데 옛날로 돌아온 지금 누나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이해가 갔다.
 
 집으로 돌아와 선물 포장지를 열었다. 안에 조그만 손 편지와 일기장이 들어있었다.
 “하하~ 역시 이건 소녀감성이라는 것인가?”
 편지를 펼치자 눈에 익은 귀여운 글씨가 보였다.
 
  ‘선생님께 라고 해야 할지 준후에게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생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빠 같고 선생님 같아!
  공부 가르쳐줘서 고마워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 누나가 걱정 많이 했다.
  밥 잘 먹고 열심히 커라 히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쓸데없는 추리를 하자면 내가 감기로 아파서 수업 못했을 때 무척 걱정했다는 말이다.
 밥 잘 먹고 열심히 크라고 쓴 것은 키라도 커서 오빠 같았으면 하는 바람 일 것이다.
 한참을 그런 생각을 생각하다가 누나를 다시 봤을 때부터 하던 걱정이 떠올랐다.
 ‘나의 간섭이 혹시 누나의 미래를 안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은 아닐까?’
 자꾸 누나에 대해 욕심이 생겨 걱정이 들었다. 누나를 그냥 그대로 놔둬야 좋은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좋은 성적을 얻었다고 해서 미래가 행복 하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평소 30점도 못 받던 산수시험에 65점을 받은 용식에게 자전거가 생겼다.
 용식이 아버지가 키 큰 용식이에게 어른용 중고자전거를 사준 것이다.
 
 “아~ 모르겠다. 세상을 다시 살아도 알 수 없는 것들 천지구나!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순리에 맡겨야지.”
 저녁에 현경이 누나가 떡을 가져왔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따끈따끈한 인절미였다.
 
 “어? 현경이 누나, 어서 와요.”
 “준후야 안녕? 아빠 계셔?”
 “네, 들어오세요.”
 
 누나는 감사 인사차 우리 집을 방문했다. 딸처럼 예뻐하던 누나가 찾아오자 아버지는 대학에서 무슨 전공할 것이냐고 물으셨다.
 
 “약대에 가고 싶어요.”
 “그래, 좋구나. 그럼 어느 대학교를 생각하고 있는데?”
 “서울대학교에 지망하려고요.”
 아버지는 만족스러우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현경이 누나의 생각을 처음 들은 것이라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봤다. 약대가 그때 당시 알려지기로는 높은 점수대의 대학이었다. 하지만 개업을 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으면 차라리 교수나 선생님이 나을 듯 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안정지원해서 합격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인사하고 나오는 현경이 누나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 가을 소풍에서 생긴 일
 
 “누나, 잠깐 시간되세요?”
 “응? 왜 그래, 준후야?”
 “시간되시면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해요.”
 “그래, 시간 괜찮아.”
 
 나에 대한 소문과 누나 아버지에게 거절할 수 없는 좋은 조건으로 누나 대학 교육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나였으므로 기꺼이 내 대화에 응했다.
 
 “누나 약대 가려는 거 그거 누나생각이에요?”
 “응, 졸업하고 약국차려도 되고 병원에서도 약사는 꼭 필요하잖아.”
 “혹시 의사될 생각은 없어요?”
 “의사는 무서워서 못 하겠어.”
 “그래요? 누나 내 말을 들으시고 그냥 누나만 알고 계셔요.”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약대는 점수대도 높고 좋은 직업이 맞아요. 물론 돈 버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누나 성격상 교수나 선생님이 더 어울릴 거 같아서요.”
 
 초등학교 4학년짜리이지만 말하는 투와 자신을 특성파악까지하는 나를 보고 누나의표정이 바뀌었다.
 
 “너 정말 준후 맞아?”
 “왜요? 저 준후 맞아요.”
 “귀신들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하하하 아니에요. 누나의 미래를 걱정해서 조언해드리는 것이에요.”
 “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뭐가 좋을까?”
 “누나 혹시 모의고사 점수대는 어느 정도에요?”
 “나? 음… 296점에서 305점 사이야.”
 “와~ 누나 공부 잘하는 정도가 아니네요?”
 “아니야, 준후야. 진짜는 예비고사를 치러봐야 알지!”
 “제 생각은 서울대 교육학과 아니면 서울대 사범대학교는 어떠세요?”
 “졸업하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선생님 하라고?”
 “네, 그래요. 그리고 대학 교수님도 가능하시구요.”
 “너무 힘들고 봉급도 쥐꼬리만큼 이라고 하잖아.”
 “아니에요, 누나. 미래에는 최고의 직장이 교육공무원이 될 때가 와요.”
 “정말? 그게 네 생각이야? 아니면 사실이야?”
 
 머리 좋은 누나에게 내 실체가 들통 날까봐 걱정이 되었다.
 
 “누나, 지금은 우리나라가 과도기에서 머지않아 성장기로 넘어가는 시대에요.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의 성장을 보면 성장기를 지나고 거품경제라고해서 한껏 부풀었다가 거품이 꺼지면 다시 힘들어져요. 누나가 어른이 되고 결혼해 아이를 낳을 때쯤엔 틀림없이 최고의 직장이 될 거예요.”
 “그래? 선생님이나 교수라….”
 
 누나도 선생님의 대한 이미지가 좋게 생각되었나 보다.
 
 “누나,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원서 쓰기 전에 결정하셔도 돼요.”
 “그래 알았어. 준후야, 그런데… 너 정말 정준후 맞지?”
 “하하하 맞아요. 누나 되도록 서울대로 가세요. 과 선택을 조금 하향으로 하시더라도 서울대로 가시는 게 좋아요.”
 “그래, 참고할게. 도와줘서 고마워. 나중에 누나가 네 아버지와 너한테 은혜 꼭 갚을게….”
 “은혜 갚는 것은 누나가 내 말대로 하시는 거예요. 알겠죠?”
 나중에 누나는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에 지원을 했고 당당하게 합격했다.
 우리 시골 마을 최초로 서울대생이 나온 것이다.
 10월 달이 되면 행사가 많아진다. 매스게임으로 지겨웠던 운동회와 촌구석 산으로 가는 소풍이어도 그때는 즐거웠다. 김밥을 싸가고 삶은 계란과 사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대표 빙과인 쭈쭈바 장수들까지 소풍에 따라 나선다.
 보물찾기, 장기자랑을 빼면 그저 먹는 즐거움이 대부분이었다.
 고학년이라 불리는 4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교에서 40분 거리의 저수지 옆의 야산으로 소풍을 갔다. 사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쩝~ 삼겹살 파티나 했으면 딱인데….”
 입맛을 다시며 우리 반 아이들의 재롱을 구경했다.
 점심을 먹고 소풍 온 전체학생이 모여 장기자랑을 했다. 우리 반에서 노래잘하는 정균이가 나갔다. 나중에 반창회모임에서도 마이크를 쥐었다하면 몇 곡을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다. 얼른 소풍이 끝나고 돌아갔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회를 보시던 한경민 선생님이 느닷없이 나를 불렀다.
 “우리학교의 명물이면서 전 과목 모두 백점이라는 연속기록을 만들어낸 4학년 1반 정준후 앞으로 나와 주세요~!”
 ‘아이고~ 왜 또 저러신다냐!’
 선생님들이 예뻐하는 학생은 누가 뭐래도 공부 잘하는 학생이다. 웬만큼 잘못도 용서 해 주실 정도로 공부 잘하는 학생이 선생님들에게 예쁨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하필, 희선이 누나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낸 것이다.
 “얼른, 빨리, 후딱, 냉큼 나와라.”
 마지못해 약 600명이 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앞으로 나갔다.
 “자기소개하고 모두에게 끼를 보여주세요.”
 “안녕하세요. 4학년 1반 정준후입니다.”
 “뭐 보여 줄 거예요?”
 이주일이 뭔가 보여주겠다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선생님이 마이크에 대고 물었다.
 “노래 부를게요.”
 지금처럼 노래방 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이크 들고 라이브 공연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티비를 잘 안 봐서 현재 유행하는 노래가 뭔지 잘 몰랐다.
 그보다도 가사를 모르면 노래 부르다 낭패를 당한다.
 차라리 민요를 선택했다. 그게 속편할 듯 했다.
 “제목은? 뭐?”
 “진도아리랑 부를게요.”
 “응? 진도아리랑?”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 쟤 머냐 하는 얼굴로 표정으로 나를 봤다.
 티비에 국악이나 민요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을 것이다.
 “말하는 것도 영감탱이 같다만 노래도 꼭 지 같은 것만 부르네.”
 형은 어이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어린 학생들과 보는 관점이 달랐다.
 대학교 다닐 때 교양과목으로 국학의 이해시간에 배워둔 것이다.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었어도 내가 부르는 진도아리랑을 들어줄 만 했었나보다. 1절만 하고 끝내려고 했더니 음료수 컵을 들고 나오신 교장선생님이 서 계셨다.
 
 교장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셨다. 소풍오시면 술 드시는 재미로 오신 것 같았다. 얼큰하게 취하셔서 내가 부른 진도 아리랑에 흥이 나신 것이다. 취하신 교장선생님은 음료수를 주신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맥주 같았다.
 ‘맥주한잔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한 잔을 마셨다. 어른이 주신 것 인데 버릴 수는 없었다.
 교회를 다니던 나는 술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도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옛날 맥주라 맛이 다른가?’
 
 마시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11살짜리 어린애 몸이 점점 취하니 내 정신도 같이 취해 어지러웠다.
 ‘이상하네, 맥주가 아니었나?’
 그때 얼큰하게 취하신 교장선생님이 한 곡 더 부르라고 하셨다.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나가 나에게 볼을 들이밀 때처럼 흥분이 되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 것 같은데 그 뒤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필름이 끊겨버린 것이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라면 다리 앞에 누군가 서서 웃고 있었다.
 낭떠러지처럼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 깜짝 놀라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나는 집에 와있었다.
 쫒기는 꿈이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은 키가 크려고 꾸는 꿈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성장기 때 꾼 꿈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누굴까? 분명 누군가 있었는데…. 나를 잡으려하거나 막으려하지도 않았어….’
 “오메~ 우리아들 일어났냐?”
 “아 엄마. 내가 여기에 어떻게 와 있는 거예요?
 소풍이 끝나고 준서 형이랑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집까지 업어오셨다고 했다. 잠든 나를 업고 오느라 모두 고생하셨다고 했다.
 역시 형은 형이다. 준걸이를 자전거 뒤에 태워 집까지 데려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취해 잠든 나를 선생님과 교대해서 업어왔다니 기특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어머니가 알고 계신 내용이었다.
 
 없어진 내 기억 때문에 겁이 덜컥 났다.
 티비보는 형에게 조용히 물었더니 형은 ‘피식피식’ 웃어가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네 꼴통 짓을 하는 거 보면서 웃겨 디지는 줄 알았어야 크크크.”
 ‘헉~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형은 그렇게만 말하고 티비 보니깐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다시 머리통을 감싸 쥐고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심히 걱정 되었다. 나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리고 너 담임선생님한테 고맙다고 말씀드려라. 선생님 고생 많으셨다.”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별 수 없어서 희선이 누나 집으로 찾아갔다.
 누나는 대문 밖으로 나와 어슴푸레한 어둠속에서도 눈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궁금해서 온 거야?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나?”
 “누나 내가 어쨌어? 응? 혹시 내가 이상한 짓 한 거야?”
 누나 말을 정리를 하자면 그거였다. 교장선생님이 모르고 주신 술을 마시고 한 곡 더 부르라는 말씀에 약간 취한채로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처음 듣는 노래였단다.
 그리고 처음 보는 이상한 춤을 추더라는 것이었다. 평소 춤 같은 것은 전혀 모를 것 같던 내가 엄청 신나게 추더라는 것이었다. 술 취해 춤추며 노는 모습이 하도 웃기고 귀여워서 선생님들은 눈물을 찍어가면서 웃느라 정신없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끊긴 필름조각이 재생되듯 한 장면,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런 젠장’
 내가 부른 노래는 박남정의 ‘널 그리며’였다. 1988년도에 발표된 곡이다. 무려 8년 뒤에나 나오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 춤은 'ㄱ‘ ’ㄴ‘춤이라 불리는 춤을 췄다.
 학원 아이들을 데리고 노래방에 가면 나의 18번 노래였던 것이 습관처럼 나와 버린 것이다.
 주정 반 노래 반이 끝나자 나는 제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걱정하는 담임선생님보다 누나와 우리 공부방 애들이 먼저 나왔다.
 용식이랑 형오가 붙잡고 데려가려고 하는데 꿈쩍을 안하더니 누나가 등을 대며 업히라고 하니 금방 업혔다고 했다.
 누나는 나를 업어다가 나무그늘 아래 나를 눕혔다고 했다. 잠든 나는 소풍이 끝나고 형과 선생님이 집까지 업어왔다는 것이다.
 “아~ 창피해!”
 “아냐, 너 엄청 귀여웠어. 히히히.”
 “내일 담임선생님을 어떻게 봐~!”
 “야,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교장선생님도 취해서 너한테 음료수 준다는 게 캡틴 큐 줬다더라.”
 “어? 그게 정말이야?”
 “응, 너희 담임선생님이 그러셨어. 음료수 컵에 있어서 음료수인줄 알고 주셨대!”
 “그랬구나.”
 “근데… 준후야.”
 “응?”
 “너 나한테 뭐라고 한말 기억 안나?”
 “으…응?? 내가 뭐라고 했어?”
 누나의 말에 나는 뭔가 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나간 나라는 녀석이 뭐라고 주절거렸나 싶어 무서웠다.
 “나보고 자꾸 가지 말라고 그러더라!”
 “윽!”
 “어디 안가고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했어?”
 “취해서 그랬겠지…. 신경 쓰지 마, 누나.”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했나보다. 내가 6학년 때 누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 집에 울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러 온 누나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어린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누나가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일에는 이유와 순서가 있어요
 
 항상 웃는 얼굴로만을 기억하던 나는 누나의 우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상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서울에 사는 언니가 누나와 누나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헤어져 버린 것이다.
 2년이 못되어 우리 가족도 서울로 이사를 갔었지만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몇 년이 흐른 후에야 광주에 내려와 아는 분을 만나 누나의 주소를 겨우 알게 되었다.
 
 어릴 땐 몰랐는데 누나를 많이 좋아 했었나보다. 어쩌면 한 살 많은 숙영이와 친해진 것도 누나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다. 예전 그때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금 앞에서 웃고 있는 누나가 울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노환으로 돌아가신 누나 아버지를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술에 취해 오후 일찍 자다 깨서인지 새벽 2시가 다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46살이던 내가 11살짜리 몸으로 되돌아온 것을 이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큰 고민 없이 벌써 8개월 동안을 지내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술 취한 사건보다도 풀리지 않는 꿈속의 장면이 걱정되었다. 3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에 빠져 들었다.
 
 어린 나로 돌아온 후 학교 가기 싫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평소 노인네 같던 내가 저지른 코미디에 대놓고 킥킥거렸다.
 혜미는 내색 안하려는 티가 났고 용식이는 속없이 그 춤이 뭐냐고 가르쳐 달라고 했다.
 “어후~ 좀 창피하니까 가만히 있어.”
 선생님은 교실 들어와 나에게 물으셨다.
 “준후야, 괜찮아?”
 “네, 죄송해요 선생님. 힘들게 해드려서요.”
 “아니 처음으로 내가 니 선생님 같았어. 괜찮아.”
 나한테 한 대 얻어맞은 용식이 빼고는 무사히 그날이 지나갔다.
 신문과 뉴스에는 개헌투표와 미국 대통령선거며 이란 이라크전쟁으로 유가가 올라가는 뉴스 말고 김대중 씨의 내란음모죄 재판이 열렸다.
 온난화가 진행되기 전이어서인지 11월에 눈 내리고 얼음이 어는 추위가 다가왔다. 비교적 마른 체형의 나는 옷을 껴입어야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토요일 오후 엄마를 따라 30분을 걸어 나가 시골 8번 버스를 타고 목포로 나갔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과 누나들은 매일 이 길을 따라 학교에 갔다. 읍내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면 요리를 좋아하신다. 목포 제2광장부근 중국집에 들렀다. 짜장면가격 400원 이었다. 하지만 잘게 썬 오이와 삶은 계란 반쪽도 올려 나왔다.
 어머니는 우동을 나는 요즘 표기로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을 시켰다. 짜장면이 훨씬 정감 있었다. 11살짜리에게는 양이 많았다. 시장을 따라갔다.
 어머니는 항상 헌옷을 입게 하기 미안하셨던지 내 옷을 사려고 목포로 데려오신 것이다. 운동화와 겨울옷 몇 개를 샀다.
 “엄마 저 이 옷 하나 더 살게요.”
 “응? 이거? 네가 입을 거야?”
 내가 가리킨 옷은 빨간색 겨울 외투였다. 남자 것이 아니라 여자 것이었다.
 어머니는 눈치가 빠르신 분이다.
 “희선이 누나 주려고 그러냐?”
 “네. 누나는 할머니 조끼 같은 것을 걸치고 다녀서요.”
 “너는 엄마옷보다 누나 꺼 먼저 챙기냐?”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에 서운하셨나보다.
 “나한테 밍크코트 살 돈 있었다면 엄마 꺼 먼저 살 거예요.”
 “뭐? 호호호 그래? 나중에 밍크코트 사줄 거냐?”
 “엄마 아들인데 뭔들 못 해드려요?”
 “내가 받고 싶어 그러는 거 아니다. 그만큼 잘되라는 말이다.”
 어머니는 절대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누구보다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가 잘 안다.
 어머니는 누나를 불러 빨간색 겨울외투를 건네셨다. 외투에 달린 모자까지 덮어쓰면 동화 속에 나오는 귀여운 주인공처럼 보였다.
 그 옷을 입고 학교 가는 모습이 너무 너무 예뻤다.
 마음 같아선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서양 속담에 ‘Beauty is only skin Deep’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움은 한 꺼풀의 가죽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나가 단순하게 예뻐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착한 심성이 때문에 그런 아끼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어느새 중늙은이의 마음으로 중얼 거렸다.
 “제발, 지금처럼 예쁘고 착하게 자라줘요, 누나.”
 
 12월 달에는 겨울방학이 있고 크리스마스가 있으며 눈이 내려 좋은 계절이다.
 단, 어른들은 그렇게 좋지만은 못했다. 농한기라 할 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수입원도 적었고 돈 쓸 일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이들은 자기세상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 데리고 타던 겨울 유원지의 눈썰매보다 동네 언덕길에 비료부대 깔고 타던 동네 표 눈썰매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 평소에 자치기며 팽이 돌리기, 연날리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나도 눈썰매만큼은 타러나갔다.
 두꺼운 겨울옷으로 전신무장하고 미끄러져 내려가면 속이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다.
 어른들은 언덕길을 오르내릴 때 조심스럽게 지나 가시면서도 우리를 크게 혼내시는 분들은 없었다. 다만 조심하라고만 하셨다. 다들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일 것이다.
 겨울방학은 보통 12월 20일이 넘어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나는 교무실에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준후야, 무슨 일이야? 교무실로 나를 찾아오고.”
 “선생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요.”
 “그래? 말해봐.”
 “5학년 때는 남영준 선생님 반으로 해주세요.”
 그때 당시 학년 선생님들은 거의 자기 학년대만 가르치셨다.
 “뭐야? 아직 결정 난 것도 없는데! 왜 그래? 이유라도 들어 보자.”
 진짜 이유를 숨긴 채 다소 평이한 대답을 했다.
 “남영준 선생님이 좋아서요. 그 분에게 배우고 싶어요.”
 “가르치는 방법이 특별하신 거야?”
 “멋지잖아요. 헤헤.”
 “뭐야? 하하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별일이네.”
 이유는 간단했다.
 4학년에서 5학년으로 올라가면서도 혜미는 나와 같은 반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혜미가 나와 한 반이 되어 매번 1등자리를 놓치는 게 안타까웠다.
 게다가 남영준 선생님은 축구부 지도교사여서 수업을 비울 때가 많았다.
 그 이야기는 자습 시간이 많다는 거였다. 그렇다는 것은 학과 공부 이외의 책을 읽거나 다른 공부를 할 시간 여유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으나 아직은 말하기엔 지켜봐야 할 것이 많았다.
 “어찌될지는 모르겠다만 5학년 선생님들께 너의 의견을 전하도록 하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반 결정이 끝나고 나서 문주란 선생님이 내 의견을 말씀드렸고 남영준 선생님은 자신에게 배우고 싶어 한다는 나의 말을 전해 들으시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고 하셨다. 반면 유명식 선생님은 무척 서운해 하셨다고 했다.
 드디어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주일학교 참석을 하지 않는 나는 저녁마다 교회에 가서 연극 연습과 노래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준후야, 하루 종일 그렇게 이불 속에서 책만 보고 있어?”
 어머니가 말씀을 하셨는데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나의 시력이 노안이 아니라 어떤 거리에서도 책이 잘 보였다.
 그리고 나는 주인공에게 동화되어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아이구 준후야, 엄마 말 안 들려? 밥 먹으라니까?”
 “아~ 엄마, 죄송해요. 헤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그 상황과 이야기가 영화처럼 그려진다. 그 속에 주인공과 하나가 된 나는 괴테가 쓴 상상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다녔다.
 “너는 아빠가 읽는 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더라. 안 어려우냐?”
 “아뇨, 재미있어요.”
 “휴~ 책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던데….”
 “그 반대일 거예요, 엄마.”
 “그나저나 너 희선이 공부 계속 가르칠 거냐?”
 “어? 엄마가 어떻게 아셨어요?”
 “희선이네 엄마가 옷 감사하다면서 공부도 가르쳐주는데 ‘내가 사줘야하는데….’ 라고 하시더라.”
 “아.… 그랬구나. 엄마 미안한데 그냥 모른체 해주세요.”
 “근데 네가 정말로 희선이를 가르칠 수 있는 거야?”
 “네 그래요.”
 “그럼 네 형이랑 동생 준걸이를 가르쳐주지.”
 “둘 다 나한테 배울 생각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르칠 거예요.”
 “하긴… 네 형 자존심에 너한테 배우겠냐!”
 “일단 엄마만 알고 계셔요. 이것도 일종의 투자에요.”
 “뭐? 투자? 허~ 너는 알 수 없는 소리만 골라하는구나.”
 “나중에 보시면 알아요.”
 “너 희선이한테 맘 두는 것 아니지?”
 “엄마!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알고서도 그러셔요?”
 “하하하 그냥 해본소리다.”
 엄마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크셨다.
 모든 부모님들의 같은 생각일 것이다.
 화난 듯이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누나에게 투자는 어쩌면 어머니의 조건을 맞추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아니, 꼭 그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누나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시골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들떠있다. 티비와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캐럴이 흘러나왔다.
 상업적인 목적이 앞서더라도 캐럴을 들으며 젊은 청춘들과 나 같은 아이들은 항상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꿨던 것 같다.
 
 들뜬 분위기와 반대로 나는 두꺼운 옷 대신 얇은 옷을 여러 개 껴입은 채로 집을 나섰다. 눈 덮인 마을 풍경을 보고 싶었다. 더불어 운동한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날이 추워지니 집에서 책만 읽게 되고 내 자신이 나태해진 것 같았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있을 때 아무도 없는 뒷산을 오른다면 남들이 뭐라고 할까? 염전 소금처럼 하얀 눈을 조심히 밟고 올라갔다. 겨우 뒷산 중턱에 올랐는데도 남쪽으로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눈 덮인 마을을 보고 있자니 고즈넉한 마을 풍경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항상 가지고 있었던 휴대폰이라도 있었다면 사진을 찍어 두었을 것이다.
 
 달동네의 서울생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성냥갑 같은 집과 또 높이 솟은 아파트촌을 지나면서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기다리면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때가 저절로 찾아올 것이란 환상을 품고 원망 섞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스스로를 채우는 일에 소홀이 하면서 세상을 원망만 한 것 이었다. 회귀라는 기연을 통해 지하 터널을 통과하면서 무려 35년 가까이 세월을 되돌렸다. 하지만 기억과 지식은 고스란히 가져왔다. 그동안의 지식과 기억을 그대로 쌓아둔 채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것을 분명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우리 마을 그리고 등 뒤에는 자방포의 넓은 평야 건너에 일로 읍내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등을 돌리니 아직 바다의 모습을 한 미래의 땅이 보였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성급하고 처음 사는 인생처럼 실수투성이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 의지와 기상을 꺾고 싶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서서 전체를 보고 한 걸음 앞서서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채우고 더 노력해서 실수를 줄여 최고를 선택하는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산에 오르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길러진다는 말이 이것이구나 하아.”
 
 
 # 뜨거운 것이 좋아
 
 눈 덮인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 갈 때가 더 힘들었다.
 조심조심 내려가 산 아래 비탈진 밭 위쪽에 쭈그려 앉았다.
 두껍게 쌓인 눈이 어머니가 해주신 설기 떡과 닮아 있었다.
 비탈진 밭가에서 눈을 뭉쳐 아래로 굴려보았다.
 경사가 제법 있어서 눈뭉치가 잘 굴러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제법 큰 눈뭉치를 굴리려는데 인기척이 났다.
 “너도 어린애 맞구나?”
 “응?”
 고개를 돌리자 숙영이 누나, 아니다. 나랑 실제로 5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 숙영이였다.
 “머리에 어른이라고 써 붙이고 다닌 적 있었어?”
 “아니… 갑자기 네가 너답지 않아져서 말붙이기도 힘들었는데….”
 “그래? 난 그대로 나야. 변한 것은 없어.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일인데?”
 “방금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야. 너는?”
 “여기 우리 뒷밭이야 보리심어 놓은….”
 “아~ 그렇구나.”
 지금 내가 앉아서 눈 장난하는 비탈진 밭 아래가 오동나무가 서있는 숙영이네 뒷밭이었다.
 “너희 밭이었어? 뭐 아직 보리 싹도 안 나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야! 아까부터 계속 반말 하냐?”
 “누나 소리 듣고 싶어? 5개월 먼저 태어났다고?”
 “너 내 생일을 알아?”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영이 생일을 알게 된 것은 사귀고 나서 실제 5개월밖에 안 난다며 누나를 빼라는 숙영이 말 때문이었다.
 숙영은 신기한 듯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약간 숙여 나를 봤다.
 “뭐 같은 동네고 우리 형이랑 같은 학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너희 형도 내생일 모를 걸? 같은 반도 아니고 ”
 “….”
 ‘하아~ 가시나, 집요하게 파고드는 건 여전하네.’
 “근데 너 갑자기 공부 잘하게 된 이유가 뭐야?”
 잠깐 동안의 대화중에 뭉쳤던 눈이 제법 커졌다. 내 머리통보다 크게 되자 숙영이 눈치가 보였다.
 “이거 너희 밭으로 굴려도 되냐?”
 “말 할 거면 굴리고 대답 안 할 거면 굴리지 마.”
 “유치하기는….”
 나는 주저 없이 눈덩이를 굴려버렸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눈사태가 난다든가 만화영화처럼 눈이 커져 집채만큼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굴러가다가 덩치 큰 오동나무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공부를 갑자기 잘하게 된 이유?”
 “그래….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
 “공부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숙영이는 성격상 궁금한 걸 못 참는다.
 내가 비밀을 말하지 않으면 간지럼을 태워서라도 알아내려고 했다.
 “네 나이에 무슨 인생 낭비라는 말이 나오냐?”
 “그러면 내가 물어볼게…. 너는 공부 잘하고 있냐?”
 “나? 글쎄?”
 “못하는 것은 아니어도 잘 한다고 말하긴 힘들지?”
 “그래, 그런 것 같아.”
 “마을회관 공부방에 나올래?”
 “거기는 전부 네 또래 아니면 어린애들뿐이잖아.”
 “희선이 누나도 있어.”
 “언니는 애들 공부하는 거 도와주는 거라며.”
 “맞아. 그런데 나와서 애들 공부하는 거 좀 봐주고 너도 공부하면 좋잖아.”
 “글쎄, 희선이 언니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그렇고 차라리 너희 형한테 말하지 그러냐.”
 “우리 형 자존심에 내가 가르치고 자기는 돕는 거 하겠냐?”
 “그럼 나중에… 생각해보고.”
 “그래 네 생각 바뀌면 나와도 돼.”
 “계속 반말하는데 반말하라고 한적 없다!”
 “왜? 누나라고 불러줘?”
 “…… 됐다 너 편한 데로 불러라.”
 숙영이는 자기주장이 확실하며 시원한 성격이었다. 같은 또래보다 더 성숙해 보였고 나를 무척 챙겼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입맞춤을 하게 만든 것도 숙영이였다. 노래와 악기에 소질이 있었으나 내가 대학생일 때 일찍 시집 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새로 사주신 신발이었는데 눈길을 다녀왔더니 흠뻑 젖어있었다. 운동화의 품질이 30년 전이라 형편없었다. 양말을 벗고 차가운 물에 발을 씻었다.
 온수 시설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우리 집은 연탄을 사서 때고 있다.
 시골에서 연탄보일러를 때는 집은 그나마 사정이 좋은 것이었다.
 아궁이 짚불을 때서 가마솥에 물을 끓여 아침에 겨우 세수를 하는 정도로 만족해야한다.
 그것도 어른들이 먼저 쓰고 그 다음 아이들이 쓰다보면 물이 모자라기 일쑤였고 긴 머리를 관리하는 여자들은 겨울이 정말 힘든 계절이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모여 공부하는 마을회관에 보일러 시설이 없어 엄청나게 추웠다.
 어른들이 공부하는 곳이라 해서 특별히 유리창과 출입문 쪽에 헌 담요로 냉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주셨지만 전기난로나 석유난로 같은 것을 놓기 힘들었다.
 앞으로 이런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장기적인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을 이장님을 찾아가봐야겠다.”
 양말과 예전 운동화를 꺼내 신고 다시 숙영이네 집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이장님.”
 “오냐, 준후 왔구나. 무슨 일이냐?”
 “저기 마을회관 난방 때문인데요, 해가 제일 높게 뜨는 낮에 공부해도 추워서요.”
 “음… 그렇지 않아도 그거 생각 했었는디…. 많이 춥디?”
 “예, 보온작업해주셨는데 시멘트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랑 공기가 썰렁하니 애들이 잘 안 오려는 것도 있고요…. 방학 때 애들 공부 집중해서 해야 하는데….”
 “연탄보일러라도 놔야것제…. 돈이 문제라는 것이지….”
 “이장님, 그러면 제가 돈은 마련 할 테니 마을 회관에 보일러 놓는 일 좀 도와주세요.”
 “네가 돈을 마련한다고?”
 “네, 아버지에게 부탁드리려고요.”
 “그렇다면야 보일러 놓는 거는 어른들이 해야지 동네 어른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네…. 그러면 크리스마스 끝나고 공사 좀 해주세요.”
 “그래, 알았다.”
 “보일러랑 겨울 내내 쓸 만큼의 연탄은 제가 마련할게요.”
 “공짜로 공부 가르쳐주는 고마운디, 보일러에 연탄까지 사준다고 하믄 우리가 염치없다. 연탄은 마을에서 돈을 걷어 마련해보마.”
 “아니에요. 농한기고 어른들 힘들 때인데 그렇게 하면 부담스러워서 애들 못 보낼 경우가 생길지 몰라요. 이번 겨울은 아버지에게 부탁할 것이니 다음 해부터는 그렇게 하죠.”
 “아따 그라믄 진짜 고마운디, 그래도 될랑가 모르것다.”
 
 아버지에게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두말하지 않으시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옆에 계신 어머니는 한마디 하셨다.
 “좋은 일 한다니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근디 뭐가 나오냐?”
 “엄마 우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여유 있을 때 베풀고 사는 게 좋아요.”
 “돈은 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드만 어째 그런 것은 푸지냐?”
 “항상 말씀 드리잖아요. 이것도 투자라고.”
 “아이고 그래 알았다. 느그 아부지가 허락했는디…. 너 알아서 해라.”
 아버지에게 부탁해 적어도 10년 이상 쓸 수 있도록 동관을 사달라고 했다. 돈이 더 들어갔지만 PVC관이 아닌 동관으로 바닥을 깔고 시멘트를 모래와 물을 섞어 개어서 솜씨 좋은 이장님의 흙손 손질에 마을회관 바닥에 평평하게 마무리되었다. 회관창고를 치우고 연탄을 500장정도 주문했다. 연탄 한 장은 약 8시간 동안 타기 때문에 애들이 있는 시간은 화력을 높여 최대한 따뜻하게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없는 시간에 마을 어르신들이 와서 쉴 수 있도록 쉼터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마을회관 바로 옆에 사시는 나이 드신 어르신은 밤에 와서 주무시고 쉬시면서 연탄을 갈아주셨다. 한두 번 꺼져 애를 먹은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꺼트리는 일없이 따뜻한 공부방이 되었다. 아이들 공부방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오전으로 옮기고 여유 있게 아이들을 일대 일로 지도할 수 있었다.
 하루는 내말을 잘 안 듣던 동생 준걸이 준서 형에게 끌려 찾아왔다. 애희랑 같은 학년 같은 반인데 애희는 성적이 올랐는데 준걸이는 성적이 떨어져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보다 못한 형이 데려온 것이다.
 “엄마가 말 안 들으면 패서라도 공부 가르치라고 했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말만 남기고 뒤도 안돌아보고 가벼렸다.
 동생을 가만히 보니 형에게 한 대 맞았는지 눈 밑에 눈물자국이 있고 훌쩍이고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일단 앉아있어. 조금 있다가 형이랑 이야기 좀 하자.”
 억지로 끌려온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공부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특히, 엄마가 끌고 오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 경우는 성적이니 진도니 하는 말보다 학원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줘야 한다. 그리고 공부하는 아이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서 자신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줘야한다.
 희선이 누나는 동생 준걸이를 데려가서 자리에 앉히고 달래주고 있었다.
 30분가량 지나서 동생 준걸이를 불렀다.
 “형이랑 이야기 좀 할까?”
 “….”
 “준서 형한테 맞았냐?”
 대답이 없는걸 보니 안 따라 오려고 버티다 맞은 듯 했다.
 “준걸아 공부하는 거 싫지?”
 “몰라!”
 “세상에 공부하고 싶어 미치고 환장한 사람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는데?”
 “정신병자!”
 “키키키.”
 평소에 웃음이 많은 동생은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럼 형이 정신병자야?”
 “내가 공부에 환장한 사람으로 보여?”
 “응.”
 “그래 내가 정신병자인가보다 하하하.”
 “키키키킥.”
 옛날 같으면 머리에 혹 여러 개를 붙여줬겠지만 지금은 동생을 달래는 것이 중요해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준걸아, 그런데 공부 잘하는 사람 보면 안 부러워?”
 “쪼금 부러워.”
 “준서 형 전교1등이라고 손목시계 사주신거 안 부러워?”
 “부러워! 큰형이라고 시계도 사주고…. 씨이.”
 “봐라, 공부 잘하면 엄마아빠가 다 해주시잖아.”
 “그래도 학교에서 하는 공부 집에 와서까지 하기 싫어.”
 “우리가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는 우리 나이에 실력이 빨리 늘기 때문이야. 할아버지들이 하루 종일해도 못 외우는 것 우리는 딱 5분만에도 외울 수 있어. 그래서 공부 할 시기가 정해져 있는 거야.”
 “어른들은 공부 못 하는 거야?”
 “아니, 똑같은 내용을 우리보다 몇 배를 노력해야 겨우 따라올 수 있어”
 “진짜로 그런 거야?”
 “엄마가 입버릇처럼 나이 먹으니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소리 안 해?”
 “응, 맨날 그 소리하셔.”
 “그거 그냥 하는 소리 아니다. 정말로 그런 거야, 사과나 벼처럼 농작물도 비료를 줘야 할 시기가 있고 햇볕을 받아야할 시기가 있는 거야. 이미 사과 떨어져버렸는데 비료주고 물 줘 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그래서 모든 일은 시기와 때가 중요한 거야.”
 
 나도 그랬었고 동생도 그랬었다. 아버지, 어머니 노력으로 먹고 살만했을 때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대충해도 우리처럼 먹고 사는 줄 착각했기 때문이다.
 동생에게 말하려던 내용을 공부방에 모인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기모인 모두가 다 해당되는 말이야. 자신이 타고난 특별한 재주가 없다면 성공하는 가장 빠른 길은 공부야!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불변의 진리다. 공부 안 해도 의사, 판검사, 선생님 되고 좋은 회사 취직될 수 있다면 공부할 필요 없다.”
 
 
 # 둘만의 나들이
 
 평소와 다르게 목에 핏대세워가며 말하는 모습에 아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집중했다.
 
 “지금 좀 더 놀고 티비보고 편한 것만 찾다가 미래에 더 많은 돈, 명예, 집, 자동차, 여유, 예쁜 아내, 잘난 남편을 포기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말리지 않겠어.”
 
 왜 공부해야하는지 여태 아무 말이 없었다가 다소 속물적인 용어로 각인시켰다. 공부방 아이들은 배우고자 한 생각이 있었던 반면 내 친동생은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형 준서는 나에게 자극을 받아서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동생은 피눈물 나는 가족의 고생사를 겪지 않고 이 내용을 알아야했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이다.
 속물 같은 표현이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내용이어야 했다.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준걸아, 그래도 귀찮다면 내가 엄마 아빠한테 말씀드려서 놀 수 있도록 해줄게. 엄마아빠는 내말을 잘 들어주시잖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동생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공부할게….”
 “좋아, 여기 있는 공부방 학생들이 증인이야. 모두 준걸이 약속 들었지?”
 “네에.”
 가장 힘든 동생을 설득시켰다. 부모님과 형의 강압이 있었지만 그런 계기가 있어야만 했다.
 가족은 든든한 지원군이지만 가장 설득하기 힘든 상대가 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는 채찍질 다음으로 당근이 필요했다.
 “좋아. 여태 열심히 잘해준 우리 공부방 친구들과 내 동생 준걸이가 공부방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내일은 다과회를 열어줄 거야.”
 “와아.”
 과자파티라는 단어보다는 다과회가 익숙하던 시절이었다.
 시골아이들에게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50원 100원만 생기면 구멍가게나 학교 앞 문방구를 기웃거렸다. 문방구를 들어가면 어린 시절 맡아 봤던 향긋한 과자냄새가 풍겨 나온다. 흔히 불량식품이라고 하지만 그걸 따져가면서 먹지 않았다.
 쫀드기, 콩과자, 아폴로, 왕소라, 라면땅,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유리 테이프처럼 둘둘 말린 과자 등 어른이 되서도 인터넷으로 주문해 먹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불량식품 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때 당시에도 요즘제과회사가 그대로 있어 30년 이상 오래 된 과자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맛동산, 초코파이, 사루비아, 웨하스, 땅콩크래커, 브라보콘, 티나크래커가 지금 제크로 다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과자들이 있다. 맛동산 한 봉지에 100원이었다. 지금은 15배 가격이지만….
 신문에 나오는 농산물코너의 사과가격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실거래 가격이 비싸더라도 신문에 게재되는 가격은 정부물가 안정책으로 최하급의 가격으로 게재되고 있었다. 일반창고의 저장분이 거의 소진되는 3월 지나면 당연히 더 오를 것이다. 우리 저온 저장고에 저장된 부사는 싱싱했다. 아버지는 몇 개 꺼내 드셔 보시고는 만족하셨다. 10월 말경에 넣어둔 것이 몇 달 넘었는데도 방금 딴것처럼 싱싱했다. 상온에서는 기껏해야 한 달을 넘기기 힘들었지만 과감하게 저온 저장고를 지은 탓에 아버지는 만족할 만한 가격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사과를 최대 3월을 넘기고 4월 중순에 판매했다.
 중간거래상은 15kg 한 상자에 3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서울의 백화점 구매담당자에게 여러 번의 전화 시도를 통해 샘플을 가져와보라는 답을 받았다. 아버지는 온도 변화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스티로폼을 잘라 사과를 담아 서울로 가져가셨다.
 사과의 상태와 맛을 본 백화점 구매담당직원은 놀라서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이철에 어떻게 이런 사과가 있죠?”
 “특별한 저장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지고 계신가요?”
 “15Kg짜리 700상자정도 됩니다.”
 “상자 당 얼마 정도에 받으실 생각입니까?”
 가장 중요한 가격이 나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무조건 상자 당 5만 원 이상 부르라고 말씀드렸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첫마디에 5만원을 말씀하셨고 백화점 구매담당 직원은 바로 계약하자고 말했다한다.
 150상자를 먼저 주문했고 3일 만에 모두 나갔다. 며칠 간격으로 180박스씩 주문이 들어왔다. 하우스재배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때라 4월 중순경에 나오는 과일은 많지 않았다. 더욱이 그런 품질의 사과는 찾기도 힘들었다. 고급백화점이었고 5Kg 한 바구니에 3만원에 팔았다고 했다. 잘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 과일이면 비싼 축에도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운임 비용과 여태까지 전기세를 제하고 3천만 원 넘게 버셨다.
 우리 삼형제 앞으로 재형저축이 쌓여가고 있었고 과수원을 위한 재투자 비를 제외하고 땅 구매와 주식 구매 등으로 분산투자가 이루어졌다.
 
 방학 중에 누나를 위한 개인 과외수업이 2시간 가까이 늘었다.
 머지않아 중학교에 입학하는 누나를 위해 수학과목의 단원별 이해도를 체크하고 넘어갔다. 영어는 꾸준한 단어와 문장암기를 체크해 중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의 대다수 지문은 암기할 수준이 되었다.
 수학은 실생활에 크게 필요치는 않다. 그럼에도 수학이 중요한 것은 입시 및 각종고시와 취업시험에서 변별력을 가늠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일차방정식과, 함수와 그래프는 특히 신경써야해. 나머지 도형이나 진법, 정수 유리수는 공식과 정의를 단순 이해, 암기하는 수준에서도 해결이 되지만 방정식과 함수는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올라갈수록 응용의 범위가 넓어지고 어려워질 거예요. 알겠죠?”
 “너 고등학교와 대학교 수학을 알고 있는 거야?”
 “말하자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누나는 설마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나는 화제를 얼른 돌렸다.
 
 “누나 이번 주 토요일 목포같이 갈래요?”
 “목포에? 왜?”
 “아니… 그냥 뭐… 바쁘면 말구요.”
 “가끔 준후는 묻는 말에 대답 안하는 거랑 ‘요’자 부치는 습관 언제 고칠래?”
 누나가 좋고 속사람은 나보다 어렸지만 현실에선 누나였고 배려해야하는 상대였다.
 “누나 그럼 ‘요’자는 뺄까?”
 “응 ‘요’자는 빼…. 그리고 너는 선생님이잖아.”
 “그럼 선생님이라 불러봐, 누나.”
 “뭐? 어쭈?”
 
 누나는 내 볼을 꼬집으려고 손을 내밀자 피한다는 것이 반닫이 농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아야!”
 반닫이 농이 울려 제법 큰소리를 냈다.
 “어머~ 어떻게 해!”
 
 뒤통수가 무척 아팠다. 부딪친 뒷머리를 손으로 잡고 비볐다.
 그런데 갑자기 향긋하고 포근한 것이 내 얼굴을 감쌌다.
 놀란 누나가 내 머리를 안고 아픈 뒷머리를 만져주고 있었다.
 
 “어떡해~ 미안 미안.
 
 너무 좋았다. 포근하고 향긋한 냄새, 가슴 뛰는 행복한 느낌이었다.
 ‘종종 머리 부딪쳐야하나?’
 
 “괜찮아?”
 “응, 괜찮아 누나.”
 
 누나의 얼굴을 봤다. 누나도 나처럼 약간 발그레한 얼굴이었다. 당황해서 나를 안았지만 누가 보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나보다.
 
 “고…구마… 먹을래?”
 “응, 나 고구마 좋아해.”
 “그래, 잠깐 기다려.”
 
 오늘은 누나에게 준거보다 받은 것이 많은 것 같은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얼굴에 계속 미소가 번졌다.
 ‘이 발랑 까진 녀석아~ 그만 쪼개라.’
 누나는 나와 함께 토요일에 목포에 함께 가기로 했다.
 목포에 데려가려했던 것은 곧 중학교에 가는 누나를 위해 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부탁해 용돈을 받았다. 평소에 돈 달라는 소리도 잘 안했고 쓰더라도 나보다는 남을 위해 베푼다는 것을 아셔서 묻지도 않고 주셨다.
 ‘아버지, 조금 죄송합니다만 저의 개인사를 위해 쓰겠습니다.’
 
 목포 시내를 가려면 30분 가까이 걸어 시외버스 승강장을 찾아가야했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 가는 사람이 있어서 즐거웠다.
 누나의 용돈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리 버스비만 내라고 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곤란해 했지만 평소에 베푸는 것을 잘 알던 누나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돈을 모아 가족과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기쁨이나 행복은 나를 위해, 내 가족만을 위해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고 행복하다면 기쁨과 행복은 몇 배로 내게 돌아오는 것 같다.
 
 누나는 교복세대다. 먼저 두발자율화에 이어서 1983년도에 교복자율화가 되어 준서 형 때부터 중학교에 사복을 입고 등교했다. 그래서 교복 입던 누나의 모습이 내 기억에 있었다. 80년대의 학생들의 사교장은 롤러장도 있었지만 소소한 만남은 빵집이 단골이었다.
 목포의 번화가 한가운데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어릴 때는 맛있었는데 지금은 설탕을 들이부은 것처럼 달았다.
 
 “누나, 이따가 맛있는 거 먹을 테니 이거로 배 채우지 마.”
 “이거 점심 아니야?”
 “이건 그냥 맛만 보려고 한 거야.”
 “너는 참 이상한 것투성이야.”
 “그래? 내가 이상해?”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른 애들은 이 빵 없어서 못 먹어”
 나는 웃으며 누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목포 온 김에 영화보고 가자.”
 “영화? 만화영화?”
 “아니? 007영화 나왔어 그거 보고서 밥 먹으러 갈 거야.”
 “그거 우리 못 볼 걸? 중학교 2학년인가? 부터 볼 수 있어”
 “괜찮아, 보는 방법이 있어.”
 “뭐? 진짜?”
 
 세상을 일찍 배운 나는 세상에 규칙과 법뿐 아니라 융통성이라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는 어른이었다. 목포극장으로 갔다. 개봉한지 얼마 안 된 영화가 ‘007 문래이커’ 이었다.
 그때 당시 파격적인 제작비로 SF영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할 정도였다.
 물론, 스타워즈가 있었지만 지금보아도 007 시리즈 중에 스토리나 제작기법이 뛰어난 영화였다.
 극장 앞에서 검사하는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서 있었다.
 학생들을 돌려보내는 역할이었으나 적당히 봐주는 눈치였다.
 개학되어 학생들이 몰려다니거나 각 학교 선생님이 단속을 나오는 것이 아니면 크게 막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조금 어리다는 것이다.
 영화가 영화다보니 남녀의 키스신이나 정사장면이 리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려니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더니 막았다.
 
 “너 국민 학생이지?”
 “네!”
 “안 된다. 네 누나는 들여보내줄 수 있어도 너는 너무 어려서 안 돼.”
 
 나는 미리 준비한 5천원을 접어 아저씨 손을 잡으며 주었다.
 
 “방학이 되어 아저씨 조카들이 영화 보러왔다고 해 주세요.”
 
 아저씨는 손바닥에 뭔가 잡히는 걸 알았다.
 슬쩍 뒤집어 본 뒤 5천 원짜리가 접혀져있는 것을 보고서 아저씨는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학생 영화표 값이 1600원이다. 5천원은 상당히 큰 액수다.
 
 “아~ 그래그래. 우리조카 왔구나. 이리와라.”
 “네.”
 “혹시 누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 와라. 무서워하지 말고.”
 “네, 삼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던 누나에게 표를 쥐어주고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얼른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안심이 되었던지 누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냐?”
 “영화배우 지망할까?”
 “그래도 되겠다, 히히.”
 
 
 # 이별 그러나 멈추지 않는 심장
 
 영화가 시작되자 눈을 떼지 않고 재미있게 지켜봤다.
 나는 성인이 된 후 데이트할 때 극장에 가곤 했다.
 같은 학과 여학생이랑 가기도 했고 소개팅으로 만난 여자와 영화 본 적도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극장 뒷자리에서 남모르게 입을 맞춘 적도 있고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잡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14살이 되는 누나와 12살의 내가 극장에 왔다고 생각하니 우습기도하고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기도 했다.
 키스신이 나올 때는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운 듯 구경하고 무섭거나 긴장되는 장면이 나오면 내 팔을 꽉 잡았다.
 마지막에 우주정거장 전투신이 나오자 누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관 가서 손잡거나 뽀뽀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재미있는 영화는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영화마지막 장면에 제임스본드와 본드걸의 베드신이 나오자 누나는 ‘아잉~’하면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이고, 이 순진한 어린양을 어쩌누~ 흐흐.’
 누나를 보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영화관을 나온 누나는 영화가 너무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배고프다. 누나,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중국집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볶음밥 하나와 탕수육을 시켰다.
 누나는 내가 탕수육을 시키자 그게 뭔지를 몰랐다
 “이거는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입혀서 기름에 튀겨 낸 거야.”
 나는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문할 때 소스를 붓지 말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이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집하면 짜장면이나 우동을 먼저 떠올리던 누나는 우리 또래로는 비싸서 잘 시키지 못했던 음식을 처음 먹어본 것이다.
 둘이 열심히 먹었지만 반도 못 먹었다. 볶음밥을 먹으면서 먹었기 때문이다.
 “남는 거 따로 담아주세요.”
 “그래, 알았다.”
 주인아저씨는 조그만 아이들 둘이 와서 탕수육과 볶음밥을 시키자 분명 다 먹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양념은 비닐봉투 두 개에 겹쳐 담고 탕수육은 밀가루포대로 만든 종이봉투에 담아주셨다.
 
 싫다는 누나를 나는 억지로 끌고 가방가게로 들어갔다.
 중학교에 가면 분명 가방이 필요할 것이다.
 여자 중학생들의 가방이 교복자율화의 바람이 불면서 바뀔 것이다.
 전통적인 모양의 가방을 고집하는 누나와 새로운 디자인의 가방을 선택한 조그만 실랑이도 역시 나의 승리였다.
 가격도 비싸고 더 좋은 줄은 알지만 튀는 것이 싫은 눈치였다.
 신발까지 사주려고 하자 누나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어른들에게 야단맞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 내 생각이 짧았군. 무조건 사준다고 좋아할 성격이 아닌데….’
 “아빠에게 허락 받은 거나 다름없으니 걱정 말아, 누나.”
 
 우리 부모님은 누나를 많이 예뻐하셨고 누나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지금 누나가 입고 있는 옷도 어머니가 사주신 것이다.
 내가 사달라고 한 것이지만 어머니가 싫으셨다면 안사셨을 것이다.
 월요일 과외 할 때 누나 어머니에게 말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전에는 아이들과 공부방에서 2시간 수업과 누나과외를 끝나면 오후는 내 시간이었다. 책을 보면서 고구마나 사과를 먹고 편하게 지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키가 죽순처럼 자라 있었다.
 
 어느 날 과외공부 끝내고 일어선 내 앞에 누나가 바짝 다가서더니 말했다.
 
 “어머? 준후 너 많이 커버렸네?”
 “히히 누나 말대로 밥 많이 먹었어.”
 
 처음 마주보고 쟀던 내 키가 코 높이였지만 지금은 누나의 이마에 가까웠다. 그렇게 우리는 수시로 서로의 키를 쟀었다.
 그리고 나와 누나의 키가 비슷해진 시점에서 누나와 나는 더 이상 서로의 키를 잴 수 없었다.
 떠나기 전날 눈물로 범벅된 누나를 보며 나는 말했다.
 
 “조금만 참고 열심히 공부해줘. 나도 누나 따라 올라갈 테니, 알았지?”
 
 누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내 심장은 면역이 생기지 않는 것을 겪고 있다 느꼈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아픔은 절대로 처음 이별보다 덜하지 않았다. 서울로 나의 기반을 옮기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한 번 더 죽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새로운 출발점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모든 것이 허무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누나가 아니더라도 어느 누구 앞에서도 똑같은 비루한 인간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내 계획과 포부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누나 조금만 기다려줘요.’
 
 1983년 내 나이 14살 8월말쯤에 태풍 ‘애비’의 강한 바람이 마을을 강타 할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손목시계 모양의 단순한 투명 비닐 띠 하나로 사과를 묶어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싸매었다.
 “준후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모른다면 당하고 있지만 자연재해도 대비하면 막을 수 있어요, 아버지.”
 “적과할 때 이미 튼튼한 가지의 과실만 남겼지 않아?”
 “아버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 우리 둘째가 생각해낸 손목시계모양의 비닐 띠로 사과를 싸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야”
 예상은 적중했다. 시골 초가지붕과 슬래트 지붕이가 날아가는 강풍이었다. 그러나 낙과는 많지 않았다. 먼저 사과나무의 잔가지 쪽에 쇠파이프를 일렬로 박아 가지를 고정시킨 다음 철선을 빨랫줄처럼 식재된 사과나무에 일직선으로 통과하게 만들었다. 가지의 움직임을 줄여 고정하려는 생각이었고 특별히 고안한 비닐 띠로 사과를 감싸서 맨 것이다. 사실은 미래의 대학생들의 낙과방지 디자인을 베낀 것이다. 나중에 그 학생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이걸로 특허를 내지 않을 것이다.
 
 지난 1981년 12월경 이후로 우리 마을 앞의 갯벌은 더 이상 갯벌이 아니었다.
 하구 물막이 공사가 완공된 것이다.
 바닷물이 들어와야 할 갯벌에 한 달 이상 밀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뻘 속의 조개들이 전부 밖으로 나와 껍데기를 열고 죽어버렸다. 비가 내리고 마르기를 몇 달 반복하자 수천, 수 만 년 전부터 쌓였던 갯벌퇴적층이 경운기가 들어가도 빠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굳었다.
 
 그때쯤 마을 이장님의 주도하에 농지를 더 늘리고 싶어 하는 마을 어른들을 위주로 헝겊에 이름을 써서 갯벌 땅 위에 말뚝을 박았다. 경운기에 쟁기를 달아 벼농사를 짓겠다는 분들에게 구획을 정했다. 그러나 절반이 넘는 어르신들은 회의적이었고 서 장로님처럼 우리에게 자기 경작 권리를 싸게 넘기셨다. 갯벌에 쌀농사를 짓겠다는 몇 분의 어른들을 빼고는 모두 고개를 저으셨다. 무상농사를 거의 20년을 지을 수 있고 그 후에 국가에서 일명 ‘딱지’라는 것을 줘서 저렴한 가격으로 농지구매를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 딱지의 권리를 모두 사버린 셈이다. 1982년도가 되어 적은 인원으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기계화를 서둘렀다. 아버지는 기계다루는 솜씨가 좋으셔서 기계화된 농사를 생각하셨다.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하시는 마을 이장님과 우리아버지는 트랙터사용에 능숙하셨다.
 
 “준후야, 무공해 농사 어쩌구 하더니 뭔 화학비료를 이렇게 많이 사놓으라는 것이야?”
 “아버지 그건 꼭 필요한 거예요.”
 “아이구~ 네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것다.”
 
 평소 과수원의 병충을 잡기위해 효소 통을 걸어놓고 농약도 되도록 하지 말자고 노래 부르는 나였다. 모내기 전 알칼리성이 강한 갯벌 논바닥에는 쉴 새 없이 영산강물을 양수기로 퍼 넣고 소금기를 우려내는 작업을 계속적으로 반복했었다. 그 후 산성의 화학비료를 쏟아 부어 강한 알칼리성을 중화시켰다.
 그 해 추곡 수매가 끝나고 우리 동네 방앗간의 기계가 고장이 날 때까지 쌀을 찧었다.
 곡식 말리느라고 추수가 끝난 길바닥과 갯벌땅바닥에 비닐과 포장을 깔고 널어놓은 곡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갯벌에서 나온 쌀은 윤기가 흐르고 맛도 좋았다.
 갯벌은 한마디로 영양 덩어리다. 갯벌 자체가 바닷물 속에 사는 미생물이며 동식물의 사체가 바닥에 가라앉은 퇴적물이니 그런 것이다.
 결과가 풍년일 것이라는 예상했지만 너무도 많은 양이 나오다보니 쌀값이 떨어져버렸다.
 그러나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장사였다. 조금씩 구역을 나누어 짓는 벼농사가 아니라 광활한 면적을 기계로 한꺼번에 경작해서 인건비가 거의 안 들어갔기 때문이다.
 
 쌀이 풍작 되고 갯벌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쌀이 나온다는 것을 안 몇 명의 어른들이 계약을 취소하고 자신들이 짓겠다고 했으나 선례가 남으면 서로 피곤해지므로 계약서를 보여주면서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대신 소작을 원하면 떨어져 있는 구획을 주겠다고 했다.
 
 기계가 고장 나서 몇 번 애를 먹은 것 빼고는 소수의 인원으로 만들어낸 소출은 십일조를 쌀로 바쳐 교회 창고에 다 집어넣지 못한 사태가 일어날 정도였다.
 추곡수매가 끝나고 남은 많은 쌀을 간척지 쌀이라는 쌀 포대를 주문해 마을 이름으로 팔기 시작했다. 1kg짜리 비닐봉투에 담아 친척과 아는 분들에게 맛보라며 보냈다.
 택배가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적어도 한 트럭분이 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서울에 사는 이모에게 부업거리를 마련해주겠다면서 아파트 주민들에게 우편봉투로 한 개씩 나눠주라고 부탁했다.
 사람의 입맛처럼 간사스럽고 또 정직한 것은 없다.
 좋은 쌀은 금방 알아본다.
 일반미나 대충 1년 지난 쌀을 햅쌀이라고 찧어 팔던 가게의 쌀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작을 해주시는 서 장로님도 집을 새로 지을 정도로 큰돈을 만지셨고 아버지는 5천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버셨다.
 어김없이 예전에 봐두었던 밭과 그 일대의 땅 그리고 주식을 사두었다. 밭이 없었던 그 땅에 고추농사를 비롯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해 봤다. 아버지는 특히 실험정신이 강하셨다.
 아버지는 손바닥 크기의 국화꽃을 애기 얼굴보다 큰 국화로 개량해 내시거나 같은 감자나 야채를 재배해도 훨씬 굵고 맛있게 만들어내는 솜씨를 보여주셨다.
 
 공부방 운영이 3년쯤이 되자 나 말고도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는 학생이 몇 명이 생겼다. 그중 애희와 금란이가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에게 개별 과외를 받았다.
 그리고 또 달라진 점은 중학교 2학년 수학과 영어는 준서 형이 6명의 학생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중학교 3학년이하 학생들은 칸막이 공사가 되어있는 마을회관 공부방으로 모여 들었다. 이제 공부방은 이 마을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집에는 반찬이며 각종 먹거리가 넘쳐났다. 시골에 사시는 어른들이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것이 생기면 우리 집으로 들고 왔다. 돈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아이들을 위해 학용품과 난방비등을 구매해주시는 아버지와 우리 식구를 위한 것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들을 가르쳤다. 내 부탁으로 형이 2학년을 가르쳤다. 형의 위신이 서는 대목이다. 누가 봐도 형이 더 나아보이는 것이다.
 
 
 # 선생님을 위하여
 
 형은 힘들 때 가끔 말했다.
 “네 말에 속았다”
 그러나 나와 형은 알고 있었다.
 이웃을 위한 봉사와 인재 양성으로 얻어지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말이다.
 십년수목백년수인(十年樹木百年樹人)이라는 말이 있다.
 10년을 내다보면 나무를 키우고 100년을 내다본다면 사람을 키우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한다.
 나는 나무도 키우고 사람도 키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쌀이든 사과나무든 그것으로 돈을 벌어 교육 사업에 투자할 것이라는 포부가 생겼다.
 누구든지 원하는 공부를 제대로 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펼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기존의 관행을 가진 일반 교육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리더십을 가진 특별한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었다. 거의 모든 업종은 탄생, 성장, 쇠퇴를 거치면서 사라져가지만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교육 사업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기가 ‘엄마’, ‘아빠’라는 단어부터 시작해 성장하면서 삶과 직업에 관한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것은 내가 항상 말하는 불변의 진리다.
 나무와 다르게 사람은 꼭 원하는 대로 커가지는 않는 것 같다.
 애희는 삐뚤어지거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식은 성장해 가지만 욕심과 고집이 약간 걱정스러웠다.
 예쁘게 자랐고 공부도 잘해서 동생 준걸이를 제치고 학년 1등을 맡아했지만 집착이 강했다.
 여름방학 때 금란이와 애희를 아이들의 수업이 끝난 공부방에서 1대 1로 개인지도 했다.
 가끔, 중학생인 금란이에게 시간 할애가 많을 수 있었다.
 한참을 움직임 없이 조용하다 싶어 애희를 보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나는 이유를 몰라 당황했었다.
 “애희야, 왜 그래? 응? 무슨 일이야?”
 금란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것도 모르것냐? 이제 지 시간이 됐는데 내가 안 비키니까 저러잖아!”
 “아…그렇구나. 미안, 금란이 언니는 중학생이니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
 소매로 눈물을 ‘쓰윽~’ 닦고서는 별 대꾸 없이 책을 펼쳐 디밀었다.
 “오늘 여기였지? 6과 12의 공약수를 구해보자….”
 욕심이 많아 학업 성적이 좋았는데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한 번은 여름 오후 두 사람의 과외 수업이 끝나 돌려보냈다.
 졸리기도 하고 피곤해서 공부방 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회전하는 선풍기바람을 쐬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는데 눈앞에 시커먼 덩어리가 있었다.
 “뭐야?”
 놀라서 일어나보니 애희가 내 머리 방향으로 머리를 대고 누워 자는 것이다.
 “아니, 얘가 집에 안 갔었나?”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 녀석이 여기에서 자고 있는 거지?
 잠든 애희를 흔들어 깨웠다.
 “애희야~ 일어나봐.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내가 부르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오빠~ 아… 그만 잠들어 버렸네.”
 가만 보니 미숫가루를 타 온 것이었다.
 “이거 오빠 주려고 왔는데 잠들었기에 안 깨우고 있다가….”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다 큰 애가….”
 “뭐 어때? 칫!”
 “이거 마시고 나가자. 아~ 피곤해.”
 미숫가루를 마시고 통을 쥐어주면서 선풍기와 전기를 끄고 마을 회관 공부방을 나왔다.
 “오빠! 토요일에 읍내에서 봐요. 오뎅이랑 튀김 사먹어요.”
 “나 바빠. 아버지 일도 도와드려야 하고, 너희들 가르치려면 준비도 해야 해.”
 “잉~ 옛날에 희선이 언니랑 목포에 영화도 보러갔다면서 나랑은 왜 안가?”
 “엥? 어떻게 알았어?”
 “치~ 오빠가 희선이 언니 좋아했다는 거 동네소문 다 났어. 오빠만 몰랐구나?”
 ‘헐~ 이런, 잘 피한다고 했는데도….’
 “그걸 알면서 그래?”
 “지금은 언니 없잖아.”
 “애희야, 오빠 바쁘니 다음에 알았지?”
 “치이!”
 
 1984년도가 되었다. 산업 사회 전반적인 발전과 더불어 떠오르는 인기 직종 중 컴퓨터산업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불어오는 PC열풍은 2000년대가 되면서 극에 달한다.
 
 과거 오랫동안 가르쳐서 대다수의 내용은 기억이 났지만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형태로 변했다. 필기는 어려울 것이 없었고 중요한 것은 실기였다. 실기시험은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된 특정 알고리즘을 구멍을 내놓고 빈칸에 들어갈 명령어나 변수를 기입하는 방식이었다.
 전체적인 흐름을 알지 못하면 무척 까다로운 시험이 된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시험이라 기본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아버지는 내가 펼쳐놓은 프로그래밍언어 실기문제를 보시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고나가셨다.
 “개가 꼬막 보기다.”
 도무지 뭔지 모르시겠다는 말씀이다.
 
 일요일에 시간을 내서 목포의 중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나왔다. 기능사 실기를 보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어렸다. 대다수 고등학생이상 어른들이 많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이지만 키가 170정도로 고등학생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목포에서 일로 방면으로 가는 8번 버스를 탔다.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에서 낯익은 사람이 버스에 올라탔다.
 남영준 선생님이셨다. 나는 자리를 옮겨 선생님께 다가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 준후야, 어쩐 일이냐?”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셨다.
 “볼일이 좀 있어서요. 잘 계시죠?”
 “아~그럼! 너도 건강하지?”
 “네 문주란 선생님은 어떠세요?”
 “이제 산달 얼마 안 남았다. 아들이면 이름을 준후라고 지을까 생각중이다 허허허.”
 “네? 아~ 선생님 그러지는 마세요. 흐흐.”
 “임마, 고마워서 그래 허허!!”
 
 벌써 2년이 다된 이야기였다.
 남영준 선생님은 인상 좋고 성격도 좋으신 분이다.
 그런데 앞이마가 살짝 넓고 키가 작으셨다. 작다는 것이 문주란 선생님보다는 컸지만 평균키보다 약간 작은 키였다. 그래서 선생님 구두굽이 높았었다. 구두 신으시면 172Cm정도였고 벗으면 168Cm이라고 하신데 내가보기엔 167Cm정도였다.
 문주란 선생님이 우리 국민학교에 먼저 부임해오셨고 남영준 선생님은 읍내 초등학교에 계시다가 축구부 지도교사를 구하기 위해 교장선생님이 거의 모셔 온 셈이었다.
 남 선생님은 문주란 선생님을 봤을 때 한 눈에 반했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애석하게 문주란 선생님은 애인이 있었고 키도 크고 잘 생긴 남자였다. 학교에 몇 번 찾아와 선생님들에게 인사해서도 모두 알았다고 했다. 남녀사이는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방학 중에 문주란 선생님은 시부모 되실 분들에게 인사를 갔지만 뭔가 잘 안된 것 같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나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개학 때 나타나신 문주란 선생님은 마음을 정리하는데 무척 힘이 드셨던 것이다.
 
 나는 5학년이 되자 남영준 선생님께 문주란 선생님이 싱글이 되셨다는 고급정보를 넘겼다. 운동회 때 담임선생님의 사주를 받고 음료수도 건네 드렸었고 지나는 말로 말했다.
 “남영준 선생님. 정말 괜찮지 않아요?”
 “너 왜 그런 말 하는 거야? 혹시 나랑 남 선생님 엮어줄려고 그러는 거야?”
 “어? 눈치 채셨어요? 히히히”
 “너희들은 공부나 열심히 해. 그런거 신경 쓰지 말고 알았어?”
 “네, 선생님. 근데…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응?”
 중얼거리듯 그러나 문주란 선생님께 밑밥은 확실하게 깔아 놨다.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하고 우리 반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은근히 신경이 쓰이게 된다. 연애심리를 잘 이용한 방법이다. 자신을 좋아해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께 ‘남자는 박력’이라며 펌프질을 해댔다. 결국, 문주란 선생님도 마음을 여셨고 내가 중학교로 올라간 겨울 방학쯤에 두 분은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신 것이다. 결혼식이 있고 한 달 후쯤에 문주란 선생님 댁에 초대받아 갔다. 그때 문주란 선생님의 얼굴이 생기 있고 활짝 피어 있으셨다. 또 다시 쓸데없는 나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축구선수 출신이셨고 항상 운동을 즐겨하시는 남영준 선생님의 다리 힘이 장난이 아니셨다.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정보처리 기능사 시험의 결과가 한 달 후에 나왔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험이었고 기초적인 부분에서 많이 나왔던 것 같다.
 거의 모든 자격증 시험이 그렇지만 초기에는 비교적 쉽게 출제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출제 된 연도가 쌓이면 거의 모든 시험에 30%에 이르는 문제가 기출문제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학원을 운영한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다.
 신중하게 공부하고 유형파악까지 끝낸 문제는 만족할 만한 점수로 모두 통과되었다.
 이제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나면 기사2급을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전산을 전공하면 1학년을 마치고도 가능했다.
 합격자 발표나 나고 자격증 합격 소식을 누나에게 편지로 썼다. 며칠 후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사는 누나 배희선에게서 편지가 왔다.
 
 보고 싶은 준후야.
 자격증 합격 정말 축하해!
 너는 도대체 못하는 게 뭐니? 너 또래 교회 중등부 애들을 봐도 너만큼 대단한 아이는 없는 것 같아 내 조카가 지금 4학년인데 그때 너랑 비교해도 철없기만 하고 공부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 인지 몰랐어. 흑흑.
 밥은 잘 먹지? 키는 많이 컸어? 이제는 나보다 더 클 것 같은데 사진 좀 보내라니까 말도 안 듣고 정말….
 준후 네가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사진 넣어 보낸다. 봄 소풍 때 찍은 거야 쪼금 이상하게 나온 것 같아. 히히~ 너도 다음에 편지 보낼 때 꼭 사진 보내. 알았지?
 조카들 산수 가르치다가 숫자 6을 항상 반대로 쓰는 네가 생각나서 나도 따라서 그렇게 썼더니 조카들이 이상하다고 웃더라. 산수도 재미있는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는 거 너한테 배운 거 써먹는데…. 해보니까 애들도 좋아하고 이해도 빨라 학습에 많은 도움이 된단다.
 어느새 밤 11시가 넘었다. 지금, 이 시간에 넌 자고 있을까?
 
 아참, 부탁인데 헌 잡지 속을 파내고 돈 넣어 소포 보내지마. 애들 가르치는 대신 언니한테 용돈 받고 있으니깐 알았지?
 1984년 9월 어느 날.
 추신 : 보낸 사진 잘 가지고 있다가 다음에 만날 때 꼭 돌려줘야해!
 
 읽는 동안 내내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나가 보낸 사진을 봤다. 흰색 블라우스에 모자를 쓴 누나는 헤어질 때 보다 훨씬 더 예뻐져 있었다. 이상하게 나왔다는 사진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제법 아가씨 티가 날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누나에게 보낸 돈은 순수하게 내가 버는 것이었다. 양계장에서 달걀을 사다먹는 불편함을 덜어볼 생각으로 예전에 암탉 4마리와 수탉 한 마리를 사다 사과농장에 풀어놨다. 숫자가 꽤 불어나고 사료를 사다 먹이긴 하지만 그놈들은 농장을 돌아다니며 벌레도 잡아먹어서 사과농사에도 도움이 되었다.
 
 
 # 무료 공부방이 세상에 알려지다.
 
 사과가 익어갈 무렵에는 닭장에 가두어 놓아야한다. 떨어진 낙과도 싼값에 팔거나 우리가 먹는데 자꾸 쪼기 때문이다. 달걀이랑 개체 수 조절을 위해 닭을 팔았다. 가끔 부모님에게도 팔았다. 팔아먹은 닭은 결국 옻닭이 되어 우리 식구 뱃속으로 들어간다. 위장이 안 좋으신 아버지를 위해 가끔 옻닭을 먹기 때문이다. 첨에는 옻 때문에 고생한 준서 형은 이제 약 없이도 옻을 타지 않았다.
 그렇게 돈이 모이면 책자 봉투 소포를 통해 보내곤 했었다. 친언니집이라고는 하지만 서울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조금 무식한 방법을 쓴 것이다.
 항상 편지에는 필요한 참고서나 책을 사라는 명목이었다.
 
 동네 공부방이 생긴 지 벌써 5년이 다되어간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뾰족한 것은 주머니에 넣어도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전국 어디를 가도 어른이 아닌 학생들이 스스로 운영해가는 공부방은 없었다.
 우리 동네 공부방 이야기가 소문에 소문을 타고 광주 MBC 방송국 기자에게 들어간 모양이다.
 매일저녁 6시 35분에 하는 저녁뉴스의 지방소식에 소개되어 나온다는 것이었다.
 방송국 이름을 붙인 봉고차가 시골 오지마을까지 들어오자 동네가 들썩였다.
 무식하리만큼 큼직한 방송카메라와 양복을 차려입은 기자가 동네 어른들에게 동의도 없이 무작정 찍기 시작했다. 그때당시에는 초상권이니 뭐니 하는 것은 신경 쓰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와 기자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상황이었다. 가끔 중앙방송을 자르고 나오는 지방 방송 때문에 짜증을 내며 욕을 하곤 했었다.
 기자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한참을 이것저것 묻더니 나를 찾아왔다.
 공부방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네가 정준후야?”
 “네, 그런데요?”
 “공부방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뭐야?”
 “그냥 함께 공부하려는 것이에요.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동네 어른들 이야기로는 네가 천재나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다던데 정말이야?”
 “에이~ 그 말을 믿으셔요?”
 “글쎄…. 동네 어른들의 말을 들었고 대화해보니 진짜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네 말투도 그렇고 너에 대해 말하는 동네 어른들도 미래를 보는 것 같다고 들었어. 그리고 너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예상하고 있는 느낌이야.”
 역시 기자는 매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기자는 사람마다 가진 미세한 차이점이나 미묘한 감정의 틈을 파고드는 노하우가 배어 있다.
 기자로서 갖춰야할 날카로운 감각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자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 보니 언어구사가 뛰어날 수도 있죠.”
 “그래? 그럼 인터뷰라고 알지?”
 “네.”
 “내 인터뷰에 응해줄래?”
 “아뇨, 싫습니다. 다른 사람 인터뷰하세요. 저기 우리 형을 해주세요. 형도 학생들 가르치거든요.”
 그러나 기자는 이미 나에게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고 나 외에는 안중에 없는 듯 했다.
 “나와 친해지면 너에게 많은 득이 될 수도 있어 반대로 그렇지 않을 땐 무척 힘들어질 수도 있단다.”
 “그만큼 투철한 기자정신을 가지셨다면 1980년 광주 항쟁 때 왜 그렇게 조용히 계셨나요?”
 순간 기자는 움찔하듯 놀라는 눈치였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것이 기자인가요?”
 “허어~ 이런…. 아무래도 우리 대화가 시작부터 잘못된 것 같구나.”
 “미안해요, 아저씨.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우리 저쪽에 앉아서 얘기 좀 할까?”
 기자가 가리키는 쪽으로 걸어가 마을회관 화단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촬영 준비를 하던 카메라 기자와 보조가 인터뷰대신 화단에 걸터앉은 것을 보자 삼각대에 세워둔 카메라 전원을 껐다.
 “내가 너를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미안하다. 그리고 너는 상대의 약점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구나. 그때 상황을 굳이 해명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 취재를 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오늘 너를 만난 게 어쩌면 행운처럼 느껴진단다. 내 말뜻 이해하겠니?”
 “글쎄요….”
 “도움을 주고 싶은데 여기서 좋은 일을 하는데 지역주민들에게 훈훈한 이야기로 소개되면 안 될까?”
 적으로 돌리면 무서운 게 기자다. 하지만 아군이 되면 득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응? 그래, 말해봐.”
 “취재에 응할 테니 내년 추수가 끝날 때 쯤 한 번 더 와주세요”
 “그래? 이유가 뭐지?”
 “우리 마을 간척지 쌀과 사과를 홍보 좀 해 주세요. 맛이 아주 좋거든요.”
 “오~ 그래? 좋아, 약속하지.”
 인터뷰 내용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처음에는 써준 대로 하라고 했다가 내가 짜증난 듯이 기자 선생에게 말했다.
 “제발 ‘지금 기분이 어때요?’ 라든가 하는 판에 박힌 질문 좀 하지마세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인터뷰하는 것으로 바꿨다.
 “공부방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면 재미도 있고 친구들끼리 서로부담 없이 묻고 답하기가 되거든요.”
 “주로 가르치는 입장이라던데 주변반응이 어땠나요?”
 “당연히 좋았죠. 그랬으니까 어른들이 마을회관에 공부방을 마련해 주신거구요.”
 “혹시 공부하는데 불편한 것은 없어요?”
 “공부방에 모이는 학생들이 늘어나다보니 좁은데다가 여름에 덥고 그래요”
 무사히 인터뷰를 마쳤다. 분명 여기서 대화 한 컷만 잘려서 나올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기자가 자기 명함을 줬다.
 이상득 기자였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MBC 광주방송국 기자를 거쳐 중앙방송 오전뉴스 메인앵커까지 했던 사람이다. 너무 젊어 내가 못 알아본 것이다.
 방송 녹화를 마치고 장비를 봉고차에 실었다. 이상득 기자가 봉고차를 차러 가다가 나를 돌아보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런데… 레이건 대통령 다음이 누구지?”
 기자특유의 미끼투척이다. 상대가 마치고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안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던지는 방식으로 형사들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나는 순간 누구였더라 생각하다 웃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하하.”
 “아참 당연히 모르지. 허허허.”
 ‘저런 교활한 인간… 눈치 챘나?’
 사람은 기억을 더듬거나 생각을 하게 되면 눈동자의 움직임이 바뀐다.
 대개는 눈동자가 위쪽으로 올라가거나 한 쪽으로 쏠리기도 한다.
 ‘혹시 그걸 봤다면…. 후~ 심증은 가겠지만 물증은 없으니 오리발 내밀면 되겠지 뭐.’
 “또 보자. 만나서 반가웠어. 준후야.”
 “네, 아저씨. 조심히 가세요.”
 
 다음 날 저녁 뉴스에서 우리 마을 공부하는 아이들을 찍은 배경 앞에서 소개하는 이상득 기자의 멘트로 시작했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 오지마을에 학원도 없고 어른 선생님도 없이 학생들이 서로가 친구와 동생들을 가르치는 마을 공부방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화면에는 옹기종기 모여서 상급생이 하급생들의 공부를 봐주는 모습이 찍혔다.
 “지난 1980년도에 정준후 학생이 친구 두 명과 동생 한 명을 시작으로 어느덧 40명 가까운 학생들이 서로의 공부를 도와주는 정감 넘치는 공부방이 되었습니다. 최초 공부방 운영자인 정준후 군은 학교에서 전 과목 100점을 맞는 천재라는 마을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공부방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학업 성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부모들의 평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시골 마을에 무료로 운영하는 이 공부방은 보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화면 컷이 바뀌고 어리지만 긴장한 표정 없는 내 얼굴이 나왔다.
 
 “혹시 공부하는데 불편한 것은 없어요?”
 “공부방에 모이는 학생들이 늘어나다보니 좁은데다가 여름에 덥고 그래요.”
 
 자막에는 내 나이와 이름, 그리고 무료 공부방 운영자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화면에 나오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아들 티비 나온다’며 손뼉을 치고 좋아하셨다. 방송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1년 전에 마을에 한국통신전화가 신청한 가정에 저렴한 가격에 보급되었다. 학교선생님들부터 친척들까지 전화가 걸려왔다.
 모두가 칭찬하고 잘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전화 받느라 정신 없으셨다.
 그런데 애희랑 금란이의 과외가 끝난 후 집으로 들어가니 아버지가 전화번호 하나를 내밀었다.
 “서울에 뭐라고 하던데 아무튼 그 사람이 너한테 전화 한 통 해달라고 하더라.”
 밤도 늦었고 별 생각 없이 내 방 책상에 전화번호를 올려놓았다.
 
 누나에게….
 답장이 조금 늦었네. 미안….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는 옆에 앉아 집중해 설명 듣던 누나가 떠오르네! 보내준 사진 잘 봤어 많이 예뻐져서 좋기는 한데 걱정 되네….
 그리고 지금은 공부에 신경 쓸 시기야. 남자친구 사귀고 그러면 곤란해!
 도서비로 보내는 돈은 내가 번 돈이고 누나 참고서나 문제집 사라고 보내는 거야. 떨어져 있지만 내가 누나의 선생님이라는 거 잊지 마!
 엊그제 광주 문화방송국에서 우리 공부방 취재를 나왔었어. 인터뷰 안하려고 했는데 기자 아저씨가 협박(?)과 회유에 까지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취재에 응했어. 티비에 나오는 내 얼굴을 보는데 어색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누나 내가 서울 올라가려면 아직 남아있지만 조금만 참으면 시간은 금방 흐를 거야. 그때까지 꾸준히 공부해 나가는 거 잊지 말고….
 고등학교 배정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잘되겠지 뭐….
 음… 사진은 내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내가 서울로 이사 갈 때 줄게 그리고 내 사진을 보내려고 찾았는데 최근에 찍은 사진이 없어서 그냥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지금은 햇볕에 그을려서 차라리 안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써놓은 편지 다시 읽어보면 멋대가리 없는 내용이 되어 있지만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없어. 알고 있지?
 항상 건강하길 바라.
 
 1984년 9월 19일
 준후가 씀.
 
 추석 전에 사과를 따서 판매를 준비해야 했다. 빨갛게 익은 사과를 수확하고 계신 아버지에게 갔다. 전정가위를 들고 플라스틱 사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비닐 띠에 쌓여있는 사과꼭지를 잘라내면 비닐이 자연스레 벗겨졌다.
 추석 전에 되도록 많이 출하 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우리 다섯 식구와 마을 어른들을 몇 분을 사서 작업했다.
 지금은 사과가지를 고정시키는 철선을 사과나무 사이에 통과하게 만들어 고정하는 방식으로 사과나무의 높이도 조절하고 풍해를 방지하는 역할도 겸하도록 바뀌었다.
 
 매년 사과로 벌어들이는 돈을 모아 갯벌 경작 권리를 헐값에 사들였다. 갯벌 논은 3군데로 나누어져 있지만 총 3만 8천 평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중에 1만 평 정도는 서 장로님에게 소작을 맡긴 논이고 나머지는 아버지가 직접 지으시는 우리 논이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웃 마을과 갯벌 건너에 사는 마을사람들도 갯벌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옥암리 쪽의 밭을 합쳐 13000평을 사서 고추나 고구마 감자를 심었다.
 
 
 # 새 건물을 세우다.
 
 일손이 많이 딸리는 상황이라서 밭을 구매해 80%는 마을 주민들에게 소작을 맡겼고 소출의 30%만 달라고 했다.
 대다수 소작료는 40%정도 받지만 그냥 30%정도만 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땅을 사더라도 관공서 자리는 되도록 피했다.
 땅값이 오르더라도 관공서와 부딪치는 것이 싫었다.
 그 외의 땅은 도청 이전계획발표가 나기 오래 전부터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큰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땅부자라는 소문만 났을 뿐 주식에 관한 내용은 마을 분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삼O전자주는 어느덧 14만 3천주가 넘어섰고 삼O전관이 29800주 남O유업이 3만 4천주였다. 아직 원하는 만큼 오른 상태가 아니었고 삼O전자 주는 최소 30만주이상을 목표로 지속적인 매입을 하고 있었다.
 가격이 아직도 천 원 대에 머물고 있어서 돈이 생기는 족족 지속적으로 사들였다. 마을뿐 아니라 인근 동네까지 우리 집의 재산 규모가 상상을 넘는다는 소문을 듣고 여전히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우리와 안면이 없는 사람들까지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담보 없이는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마을 OO씨와 저는 친척입니다. 꼭 갚겠습니다.”
 “저희랑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말을 어떻게 믿고 돈을 빌려줍니까? 그리고 집에 돈을 놔두지도 않아요. 돈이 생기면 바로 바로 써버려서 없습니다.”
 게다가 간혹 월남전 참전해서 팔을 잃었느니 하면서 와서 먹을 거나 농산물을 갈취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보다 못해 112에 신고했다. 경찰차가 30분 만에 마을에 도착했다.
 잡아놓고 보니 팔이 잘린 사람도 아니었고 옷 속에 팔을 감춘 것이었고 월남전에 참전했던 상이용사도 아니었다. 그냥 협잡꾼일 뿐이었다.
 바로 현장에서 연행 되가는 일도 있었다. 아버지 이름을 대고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에 바로 경찰이 달려온 것이다. 아버지는 면장님부터 경찰서장까지 모두 안면이 있었다.
 마을에서 유지들이 와야 관공서 공무원들에게 밥을 사든지 술을 사든지 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그런 것이 관례였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저녁을 먹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정규원 씨 댁의 정준후군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네, 제가 정준후입니다 누구십니까?”
 - 아, 그래요? 아이구, 반갑습니다. 저는 구성건설의 김지환 대리입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 저희는 회사가 서울에 있는 회사입니다만, 저희 사장님께서 정준후군이 나온 뉴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을 회관에 공부방 건물을 지어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네? 서울에 방송이 나갔나요? 그거 광주 방송에 나간 것인데요.”
 - 서울지역에도 저녁뉴스에 나왔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건물을 지어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일단 어른들과 말씀을 나누어보고 결정지으려고 했는데 어르신이 정준후군과 이야기한 다음에 결정하라고 하셔서요.
 “사장님께 전해주세요.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다고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보세요? 잠깐만요 여보….
 ‘딸깍.’
 “아이들 공부방건물을 지어주겠다는데 왜 반대하는 것이냐?”
 “아~ 아버지 이런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런 좋은 일했다고 유세를 떠는 사람일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돕는 척하면서 우릴 자신들의 선전도구로 쓰는 경우도 있구요.”
 “음… 그렇구나. 애비도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다.”
 “힘들더라도 우리끼리 오붓하게 지내는 것도 좋아요.”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 마을 회관을 차라리 증축하거나 새로 지어서 공부방도 늘리고 어르신들이 쉴 공간을 늘려보는 것이 어떻겠냐!”
 “어? 아버지 정말이세요?”
 “그래 그동안 사과농사며 벼농사 하는 것마다 잘되고 가격폭락에 대비할 수 있어서 땅 사고 주식 구매한 돈 외에 가용한 돈이 조금 있단다.”
 “저야 아버지가 지어주신다면 찬성입니다. 현경이 누나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들 에게 납부금도 지원하시니 규원장학재단을 만들고 그 이름으로 건물하나 세우죠.”
 “얼마 정도 예산을 들여야 할 것 같으냐?”
 “아마 아파트 한 채 값 이상은 들어야하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예산을 잡으신 것이 3천 5백만 원이었다. 1984년 당시에는 꽤 큰돈이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놓으셨다.
 예전 같으면 여유가 없었을 터인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분들도 갯벌농사를 직접 짓거나 우리 소유의 소작논과 밭을 추가로 경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신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다행인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에서 일하셨던 마을 어른들이 2명이나 계셨다. 중동 건설 붐 때 가셨다가 돌아오신 분들이었는데 그분들이 직접 나서서 건물을 짓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1500만 원 정도를 내셨고 나머지 700만 원만 여유 있는 마을 어르신들이 나누어서 내셨다. 현재의 마을회관에서 조금 떨어진 땅을 주인에게 싼값에 아버지가 구매하셨고 그곳에 2층 신식 건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바닥을 깊게 파서 바닥의 단단한 층이 나올 때까지 파낸 다음에 철근을 고정해 세우고 거푸집을 만들어 콘크리트를 부었다. 2층 콘크리트 붓는 날에는 굳기 전에 부어야했기 때문에 마을 어르신들이 거의 다 나오셨다. 경운기엔진과 도르래를 이용한 임시 승강기를 만들어 콘크리트를 몇 대로 왕복해가면서 열심히 부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들어간 2층의 근사한 건물의 뼈대가 들어섰다. 완성된 뼈대에 칸막이 공사와 미장 공사를 위해 마을 어르신들은 돌아가면서 모래를 나르거나 벽돌을 나르는 일을 하셨고 약 두 달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제대로 된 지하 1층 지상2층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개관식 때는 온 마을의 잔치를 벌였다.
 아버지 이름을 딴 규원빌딩과 규원장학재단이라는 이름의 명패가 건물 입구 양쪽에 걸렸다. 1층은 초등학생, 2층은 중학생들을 위한 공부방들이 만들어졌다. 선풍기와 기름보일러를 갖췄고 화장실과 세면실까지 갖춰진 학원건물이 생긴 것이다.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면 주변의 연속적인 반응들이 일어났다. 바로 교회의 증축이 들어갔고 마을 주민들은 갯벌농사로 번 돈을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바꿔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이런 것이 진짜 새마을 운동이라고 하셨다. 관공서가 주관하는 것이 아닌 마을 주민 스스로가 이룩해낸 결과물인 것이다. 국민 학생들(초등학생)들은 놀이방개념으로 방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공부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중학생들의 공부방은 의자와 책상이 들어가 정식적인 학원형태를 갖게 되었다.
 나는 공부방의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기가 없더라도 대신 일을 해줄 사람을 키워내라는 말을 했다.
 내가 없으면 금란이가 대신 일을 할 것이고 금란이가 없으면 애희가 대신 할 것이다.
 준서 형은 금석이 형이 대신 할만 했다. 삼각 김밥처럼 생긴 금석이 형은 아버지도 안계시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납부금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리더는 후임을 개인 지도로 다시 가르치고 후임은 열심히 공부해서 동급생이나 후배를 선택해 가르쳐야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전통이 자리 잡기 시작한 때부터 마을에 작은 일들이 일어났다. 우리 동네의 소문을 들은 옆 동네에서도 갯벌 건너 외동마을과 안정마을에서도 아이들이 오기 시작하고 목포시내에서 사는 마을 친척이 아이를 우리 학교로 전학시키고 우리공부방으로 밀어 넣었다. 물론 반대할 이유도 없고 모두가 환영했다. 우리 마을 공부방에 보내는 어른들의 생각은 단순히 공짜여서가 아니라 우리 공부방 아이들 실력은 이미 보통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공부를 등 떠밀려하는 것과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의 효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배우는 아이들도 언젠가는 누구를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허투루 공부했다간 낭패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가르침은 깨달음의 앞잡이다.’
 “모두 이 말을 명심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르치다간 창피 당한다. 알겠지?”
 “네에~ 선생님.”
 수업을 끝나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학년별로 풀어놓은 문제지 채점이 끝나갈 때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이제 끝난 거야?”
 “어? 왔어? 어쩐 일이야?”
 숙영이가 내민 것은 카세트 테이프였다. 마이클잭슨 음반인데 복사한 짝퉁이 아니라 정식 라벨이 붙어있었다.
 “유행이 지난곡인데 이걸 왜 주는 거야?”
 “빌리진의 가사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는 것 같아서.”
 “가사 내용을 듣고서 좀 실망한 거야?”
 “글쎄, 그런 것도 좀 있고 뜻도 모르고 부르던 노래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그냥 내버려둘걸 그랬나?”
 “빌리진의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야를 처절하게 부르는 것인데 난 뜻도 모르고 신나했잖아.”
 “뭐 굳이 가사 내용을 파헤쳐가면서 들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문화가 아닌 것을 뜻도 모르고 무조건 열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해석해준 것이야.”
 
 가사내용에 남자를 아기 아빠로 법정 판결을 받지만 남자는 빌리진이라는 여자와 그냥 춤만 같이 췄다며 항변 내용이다. 하지만 우는 아이 사진의 눈매를 보자 자신과 닮았다는 내용이다. 상당히 가사가 파격적인 내용인 것이다. 가사의 내용을 해석해주자 숙영이는 단지 음악만을 좋아했지 내용도 모르고 따라 불렀던 노랫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팝송가사 해석 좀 해줄래?”
 “음… 지금?”
 “내일 또 오라고 그럴 거야?”
 2층 옆 칸의 준서 형은 이미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상태고 마을 공부방은 나와 숙영이만 남아있었다. 나는 항상 제일 마지막에 문을 잠그고 갔기 때문이다.
 
 “뭘 가져 왔는데?”
 숙영이 내민 것은 조지마이클의 Careless Whisper 이었다.
 공부방에 오지 않는 숙영이 찾아온 것이 신기했다.
 
 나를 테스트하려고 그러나 싶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지난 크리스마스 때 숙영이와 나는 이미 키스를 해야 맞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미 한 사람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굳이 그런 사이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난 무척 불안해요.>
 <당신의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가지만.>
 <음악이 멈추면서 당신 두 눈에 비치는 뭔가가.>
 <영화 슬픈 이별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해요.>
 <난 다시는 춤을 추지 않을 거예요.>
 <죄책감 때문에 박자에 맞춰 발을 옮길 수가 없네요.>
 - 중략 -
 <우린 정말 서로 잘 지낼 수 있었어요.>
 <영원히 함께 춤을 출 수도 있었어요.>
 <난 다시는 춤을 추지 않을 거예요.>
 <제발 머물러 주세요.>
 
 
 # 영어 동화구연대회(지방예선)
 
 꽤나 긴 가사였다. 해석이 끝날 때 즘에 숙영이가 갑자기 입맞춤을 해왔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너 가사내용 이미 알고 있었구나.”
 “응.”
 “고백 같은 건 남자가 먼저 하는 거 아니었어?”
 “내 성격상 기다리는 것 질색이라서 말이야.”
 역시, 시원한 성격의 숙영이다. 예전에 나랑 사귈 때 물었다. 한 살 어린 내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 때는 몰랐는데 어느 순간에 남자가 되어있더라고 했었다.
 “휴우~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 몰랐어?”
 “알고 있어 희선 언니 좋아했다는 거?”
 “그런데 왜?”
 “지금이라도 털어놓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언니는 서울로 올라갔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너를 받아줬을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꼭 지금이 아니어도….”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야?”
 “최소한 답례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 찾아오는 거 얼마나 고민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서서 숙영이를 안아주고 볼에 뽀뽀해줬다.
 “어른이 되면 뭐든지 해줄 수 있는데 아직 우리는 어린 애들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가야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나가자.”
 숙영이는 자조 섞인 웃음을 ‘픽’ 웃더니 나를 따라 나왔다.
 “선물 고마워.”
 “그래, 조심히 들어가.”
 숙영이는 화통한 성격이어서 큰 걱정 안했다. 몇 년 후면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갈 것이다.
 
 사실은 그전에 숙영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숙영이네 막내 남동생은 나보다 3살이 어렸다. 발목을 다쳐서 공부방에 이장님이 데려 오셨다. 그날따라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워서 혼자서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가 끝날 때 즘 숙영이가 찾아왔다. 눈 내린 길이 얼었고 날씨도 추웠다. 상욱이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20분 가까이 걸어 숙영이 집으로 향했다. 평소 걸음으로는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 세 사람의 걸음은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힘들었다. 상욱이는 안방으로 곧바로 들어가고 이장님 내외분들은 구역 예배에 가신 모양이었다.
 “안 미끄러지고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나 돌아갈게.”
 “준후야, 들어와. 추우니까 몸 녹이고 가.”
 안방과 붙어있는 작은 방이 숙영이와 숙영이 동생 미영이 방이었다. 작은 방에는 미영이가 함께 있었다. 시골에 살 때는 가끔 친구 집에 예고 없이 찾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특별히 문을 잠근다거나 얼굴도 모르고 옆집에 사는 도시와 다른 분위기였고 추운 겨울은 아무개집 뒷방이나 사랑방에 모여 놀기도 했다. 미영이는 진작 공부방 수업 끝내고 집에 와있었다.
 “오빠 왔어? 들어와요.”
 “어, 그래. 미영이 있었구나.”
 방바닥이 후끈했다. 이불 밑으로 언 발을 집어넣고 얼어붙은 몸도 함께 녹였다. 그 사이에 숙영이는 식혜를 가지러 나갔다. 미영이는 드라마를 본다며 티비가 있는 안방으로 갔다. 시간을 보니 9시가 넘었다. 숙영이는 그 사이 식혜를 따뜻하게 덥혀왔다. 그리고 부모님이 사다놓은 나뭇가지에 끼워진 곶감을 가져왔다. 나한테만 그렇게 잘하는 것인지 원래 그렇게 사람을 잘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식혜도 쇠 그릇이나 플라스틱 그릇이 아닌 고급스러운 도자기 그릇에 따뜻하게 담아왔다.
 “시집가면 남편한테 예쁨 받겠다.”
 “왜?”
 “식혜를 덥혀 담은 그릇만 봐도 마음이 보여.”
 “피이~ 별소릴 다 하네.”
 “잘 먹을게!”
 내가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감해진 방안 공기를 애써 모른척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대충 이 장면쯤에서 먹던 그릇을 내려놓고 작업을 진행해야 옳겠지만 숙영은 아직 어렸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빨리 마시고 일어나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약간 뜨거운 식혜를 서둘러 마신 후 일어났다.
 “벌써가려고? 몸 더 녹이고 가지….”
 “밤도 늦었고 오래 있으면 일어나기만 더 힘들어져.”
 숙영이는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사코 내가 돌아가는 길에 함께 따라 나왔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괜찮아, 돌아오려면 춥고 힘드니 그냥 집에 있어.”
 “그래…. 그럼 조심히 가~!”
 
 혼자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학원 강사 시절 서로 좋아했던 동료 강사 정미도 내가 자취방에서 일어나 되돌아가려면 항상 그런 표정으로 더 있다가기를 바랬었다. 이리저리 꼬여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연애경험과 삶의 체험에서 베어 나오는 것이었다.
 
 “누나 나 잘한 것 맞지?”
 
 쌓인 눈 위로 눈이 다시 내렸다. 길에 어지럽게 패인 발자국들 위로 눈이 덮여 쌓였다. 미래라고 해야 할지 과거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아내와 아들 가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랑했었고 사랑하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항상 마음을 강하고 또 강하게 다짐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감정의 자유를 허락했다. 인기 연속극 덕분에 눈 내리는 밤 눈물을 훔치며 돌아가는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학교의 영어선생님은 모두 여자 선생님이었다. 간혹, 영화에 나오는 선생님처럼 끊어 읽기도 안 되고 발음도 엉망인 그런 분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몇 년간 살다오셨고 발음 또한 명쾌하면서 좋았다.
 뜬금없는 내 자랑을 조금하자면 미군들과 2년 가까이 복무를 한 경험이 있었다. 벙어리 3개월 귀머거리 3개월의 시기를 보내고 나서야 영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고 비록 유창한 영어는 아니어도 원하는 바를 어려움 없이 전달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미군이 제공한 전술 레이더 장비를 함께 나누어 쓰는 곳이어서 미군 2명에 한국군 2명씩 함께 근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루 8시간을 함께 생활하다보면 별의별 대화가 오가고 친해지고 영어 대화 실력도 당연히 늘 수밖에 없다.
 가끔 외국인들과 마주쳐도 전혀 긴장하거나 떨지 않고 필요한 영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정준후, 너 혹시 외국에서 살다왔니?”
 서울 말투의 김화영 선생님은 3학년 영어교과서를 읽는 나를 보시더니 하신 말씀이었다.
 “외국이라곤 태… 아니 가본 적이 없습니다.”
 신혼여행을 태국으로 간적 외에는 없다고 말할 뻔 했다.
 “오~ 그래? 내가 여태 들어본 학생 중에 가장 네이티브한 발음이야 이따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볼래?”
 반 남학생들은 “워~”하며 소리를 냈다.
 김화영 선생님은 미혼의 여자 선생님인데다 부임하자마자 미모 때문에 인기 있는 여자 선생님으로 등극하셨다. 남학생들만 우글거리는 학교에서 미모의 여자 선생님들의 인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는 중학교에 와서도 항상 1등은 놓치지 않았다. 김화영 선생님은 내가 3학년 때 부임하신 선생님이셔서 나에 대해 모르셨던 것이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대다수 교무실에 불려오는 학생들은 야단맞거나 학생주임선생님께 혼나러 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반장들은 예외였다. 말썽 일으키는 학생들은 교무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오가는 선생님께 눈총을 받거나 쥐어 박힘을 당하지만 나는 그 예외상황에 해당되었다.
 “다름 아니고 이번 영어 동화 구현 대회가 있는데 너 한번 참가해볼 생각 있어?”
 “영어 동화 구현 대회요?”
 나는 갑자기 ‘이게 뭔 비둘기 응가 하는 소리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선생님 혹시 다른 학생들 알아보시면 안 될까요?”
 “왜? 싫어?”
 “저는 좀 바쁜 일이 있어서요. 아버지 농사도 도와드려야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내가 봤을 땐 네가 나가면 딱 우승일 것 같은데?”
 “아니에요, 선생님. 저 말고도 잘하는 애들 수두룩해요.”
 사실 그랬다. 읍내로 여러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모이다보니 저마다 잘하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차하면 1등을 놓칠 수 있으리만큼 잘하는 애들이 있었다.
 “내가 몇 명 찾아봤는데 너처럼 긴장 안하면서도 발음이 좋아야 해. 물론 가르치면 되겠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학생이 시작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나는 일부러 대답을 안 하고 물러 주십사하는 표정으로 기다렸다.
 “그래? 하루 더 생각해봐. 지역 대회 우승 상금이 20만원이고 전국 우승은 상금 50만원과 14박 15일 미국연수가 주어진다는데….”
 “네? 미국연수요?”
 그때는 한참 그럴 때였다. 영어열풍이 불어서 아침방송에 민O철 생활영어가 나오고 책방에는 영어회화 교재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정말 미국연수 기회가 있나요?”
 “그럼~ 내가 뭐 하러 거짓말 하겠니?”
 선생님은 팸플릿을 직접 보여주셨다. 지도교사에게도 부상이 주어지는 대회였다.
 “하겠습니다.”
 “진짜? 그래~ 잘 생각했어. 하하하.”
 지나가던 체육선생님이 나를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우리 준후가 또 한건 했냐?”
 “영어 동화 구연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어요. 선생님.”
 김화영 선생님은 좋아서 선생님들께 자랑했다.
 1학년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던 고행민 국어선생님은 웃는 모습으로 김화영 선생님께 말씀하셨다.
 “김 선생, 정준후 그녀석 잘 잡으셨네. 그놈 우리학교 명물인거 모르시죠?”
 “네? 명물이요?”
 “여태 1등을 놓친 적도 없고 동네에서 벌써 6년 가까이 무료 공부방을 운영하는 선생님이에요.”
 “네? 공부방 선생님이요? 무슨 말씀이세요?”
 “동네 아이들 모아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무료 공부방 운영하고 있어요. 그쪽 동네 애들이 우리학교 상위 클래스인거 모르셨죠?”
 “어머 세상에~ 이게 무슨 말이야?”
 “광주 엠비시 방송에서 취재한 것 서울방송까지 나온 거 모르셨나보네, 허허허.”
 김화영 선생님은 놀란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말씀하셨다.
 “정준후, 우리 진짜 잘해보자 꼭 우승하자 응?”
 “선생님, 너무 부담주지마세요.”
 내가 솔깃한 이유는 미국 연수였다. 나는 기회가 생기면 꼭 미국을 가야했다. 미국관광도 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선생님은 구연동화를 ‘혹부리영감’으로 선택했다. 영문 번역은 선생님 담당이셨고 몇 번의 원고수정을 통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외국 사람들에게 공감이 갈만한 영어동화로 변신을 했다.
 문제는 그걸 모두 암기하고 얼마나 맛깔나게 잘 표현하느냐의 문제였다.
 아들 가람이에게 동화책을 수 십, 수 백 권을 읽어줬다.
 동화책을 읽기 전에 명화 극장이나 토요 명화에 나오는 시그널 음악까지 라이브로 재생한 다음 동화를 읽어주었다. 어린 가람이는 잠들기 전에 보통 2권정도 동화를 듣고 난 다음 잠에 들었다.
 처음 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은 옛것이지만 내 머리는 16살짜리 두뇌였다. 3일간에 걸쳐 모든 동화내용을 암기했다.
 “처음이니까 그냥 너 외운 것을 한번 들어보자.”
 Long long time ago, There lived an old man….
 -이하 생략 -
 
 
 # 누나 믿어도 되지?
 
 그냥 외운 듯이 초등학생 국어책 읽는 소리로 말해도 되지만 문장의 의미와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아들 가람이에게 들려주듯 동화구연을 했다.
 
 <와~ 놀라운 표현력과 발음을 가지고 있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선생님.>
 <영어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구나.>
 <매일 반복하고 공부한 결과입니다.>
 
 일부러 나의 회화능력을 보시려고 영어로 말씀하신 걸 간단한 용어를 써서 받아넘겼다.
 
 “중학생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구나. 다시 봐야겠는데?”
 “아직 부족하고 배울 것이 많습니다.”
 “동화 구연 시 정확한 인토네이션과 호흡 점을 찾고 표정과 손동작이나 시선처리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보자.”
 “네, 선생님.”
 
 광주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제대로 하게 보이는 학생들 몇을 빼고는 거의 외운 것을 기억해 내는 것도 힘들어했다.
 많은 사람들 앞이었고 모두 긴장한 탓인지 암기한 동화의 문장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여학생 하나는 발음도 좋았고 동화를 제스처와 표정을 섞어가며 잘 구현한 듯 했으나 너무 기계적인 모습을 보였다.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공연하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앞에 우리 공부방 아이들을 모아놓고 동화를 들려주듯 아니, 내 아들을 앉혀놓고 동화를 들려주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들려주고 때론 과장된 동작으로 부럼 깨는 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도깨비 흉내도 내주었다.
 긴장한 표정을 보이거나 떨지도 않았다. 객석에 앉아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자연스러운 발음과 절제된 호흡에 듣는 심사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채점표에 뭔가를 써넣고 있었다.
 심사결과 발표를 하시는 영어영문과 교수님이 심사평을 해주셨다.
 “광주여중 3학년 이지현 학생은 발음도 좋고 다른 학생에 비해 표현도 좋았는데 동작진행과 말하는 영어의 진행내용에서 다소의 시간차이가 보였습니다. 정확하게 암기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구연하지 않으면 자연스럽지 않는 상황 표현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합니다. 물론, 아주 잘 했습니다. 그리고… 무안중학교 3학년의 정준후 군은 서류상으로는 미국에서 생활한 적이 없다고 제출 하셨는데요, 그 말을 믿기 힘들 정도로 정말 잘했습니다. 저희 대학 영문과 학생들도 이런 정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를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아주 인상 깊게 잘 봤습니다.”
 
 장려상과 은상이 호명되고 마지막 대상에 내 이름이 호명되자 김화영 선생님은 체면도 잊으신 채 나를 안고 뛰시며 좋아하셨다. 지역 예선 대상으로 본선 진출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기뻐하시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의 편지를 받은 누나가 집으로 축하 전화를 했다.
 한참동안 아버지와 안부 인사를 나눈 뒤 나에게 전화를 바꿔 주셨다.
 “여보세요?”
 -준후야 나… 희선이야…. 목소리… 알겠지?
 누나의 목소리가 억누르기 힘든 감정 때문에 약간 목 메이는 소리가 났다. 나 또한 곁에 부모님이 계셨지만 떨리는 심장소리와 그리움으로 심호흡을 필요로 했다.
 “어, 누나. 잘 있었죠?”
 -편지에 영어 동화 구연 지역 예선 통과소식 듣고 용기내서 전화 했어. 정말 축하해. 우리 준후는 뭘 해도 다 잘 하는구나.
 “고마워요, 누나. 몸은 건강하죠?
 -지금은 괜찮아. 항상 준후 선생님이 지켜본다는 마음으로 밥도 잘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
 “그래요 지금 장거리 전화인데 다음 주 월요일에 서울 올라가면 전화 할게요. 그때 봐요.”
  -그래 그때 봐 꼭 연락해!
 전화를 끊고 달력을 바라봤다.
 이제 5일이 지나면 지난 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끊을 수 없는 무언가가 서로를 붙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화영 선생님과 함께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와보는 서울이었다. 서울은 2010년대 보다 오히려 1980년대가 더 활기차 보였다. 김화영 선생님의 집은 서울이다. 서울 토박이셨는데 우리 중학교까지 오신 것이다. 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 올라온 것이다. 내일이면 연세대 대강당에서 영어 동화 구연 대회 본선이 진행될 것이다.
 김화영 선생님 댁에 오후 1시쯤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구연동화를 최종적으로 다시 점검했다.
 “아무래도 전국에서 모이다보니 실력들이 모두 뛰어 날거야.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대학교 교수님들과 외국인교수들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긴장하지 않고 지난번처럼 여유 있게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알았지? 파이팅하자”
  “네, 선생님. 그리고 저기 이따 저녁쯤에 아는 사람 만나고 와도 될까요?”
 “어 그래? 너 서울지리 잘 아니?”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크게 어려움 없어요. 금방 돌아 올 거예요.”
 “내가 함께 나가줄까?”
 “아뇨, 선생님. 괜찮아요.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래,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이리로 전화해라.”
 선생님은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내밀었다.
 “네.”
 
 공중전화의 버튼 식 다이얼을 천천히 눌렀다.
 벨이 몇 번 울리자 귀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준후야?
 “어? 바로 받네? 누나, 나야. 지금 서울이야. 그리고 휘경역 앞 2번 출구 쪽에서 전화하는 거야.”
 -그래, 알았어.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어디가면 길 잃으니까 바로 택시타고 갈게. 일단 끊어.
 차분한 내 목소리에 반해 누나의 목소리는 떨리면서 약간 긴장한 목소리였다. 분명 서울에 처음 온 것이라 생각하고 혹시 길 잃어버릴까봐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기다렸더니 멀리서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3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몇 번 사진을 본적 있었지만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으며 그리워하던 상대를 직접 만나게 되니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택시에서 내린 누나는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누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누나 여기야.”
 내가 손을 흔들자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하는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너 정말 준후 맞니?”
 “잘 있었어. 누나?”
 우리 둘은 사복을 입고 있어서 내가 누나라고 부르기 전에는 친구로 보였다. 내키는 175Cm고 아직도 크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커보이던 누나는 내가 내려다 봐야하는 키가 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커버릴 수가 있어?”
 누나는 반가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나를 감싸 안았다. 나도 더 이상은 누나가 어리다는 생각보다는 그리워하는 연인처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란히 걸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누나.”
 “자꾸 누나라고 부르지 마.”
 누나는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사진 안 보낸 거야?”
 “논이랑 밭에 나가서 일하느라고 그을렸는데 사진 찍으면 잘나오겠어? 시커먼 흑인처럼 보일 텐데 흐흐.”
 “아냐 정말 남자답고 멋지게 보여~ 요만했을 때 너를 봤는데 어쩜 이렇게 컸는지 믿기지 않는다.”
 “누나가 전에 한말 기억해?”
 “무슨 말?”
 “내가 키 크면 생각해보겠다고 한말….”
 “그걸 아직도 기억해?”
 “누나도 잊은 것 같지 않은데?”
 “아직 학생이니 남자 사귀고 그럼 곤란하다고 편지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하하 맞아, 그랬었지!”
 “항상 선생님처럼 공부 열심히 해라 밥 잘 먹고 건강해라고 잔소리하더니.”
 “참, 누나. 학교 성적은 어때?”
 “오늘처럼 좋은 날에 그걸 묻고 싶어?”
 “나에게 배운 학생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묻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래?”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SKY에 갈 정도야?”
 “뭐? 스카이? 하늘에 가다니?”
 “흐흐흐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앞 자를 딴 것이 SKY야.”
 “아하~ 그래?”
 “먼저 물었던 말도 아직 대답 안했어, 누나.”
 “나는 나를 가르친 사람을 믿고 있어. 됐어?”
 “그래? 그럼 나도 누나 믿어도 되지?”
 
 그렇게 말하자 누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하는 말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 높이 밖에 안 되는 여자가 내 팔을 감아 잡고 근처 국수집으로 들어갔다.
 소문난 칼 국수집이었다.
 
 김화영 선생님 댁의 빈방에서 아침 일찍 일어났다. 새벽 5시 30분이었다. 항상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이다. 아버지는 새벽 기도 다녀오시면서 논을 둘러보시거나 과수원에서 일을 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버지를 도우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오늘 해야 할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영어 동화 구연이 내 인생을 바꿀 뭔가는 아니었다. 그저 내게 필요한 해결책을 제공해줄 것이다.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는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짚어가며 동작과 표정, 시선처리까지 연습했다.
 
 예상대로 본선은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의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특히, 대도시출신의 학생들은 발군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역시, 뽑고 뽑아놓은 애들만 모이니 우승을 장담할 수 없겠네….”
 전국에서 총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출전했다. 지역1위와 2위가 함께 출전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대회는 점심 먹고 오후 3시까지 이어질 것이라 했다. 학생당 최소 3분에서 5분씩만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해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애들의 실력이 내가 봐도 결코, 나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함께 오신 김화영 선생님도 대도시 학생들의 실력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몇 년 사이에 영어 회화 실력이 그렇게 발전했으리라곤 예상 못하신 표정이었다.
 “준후야, 일단 최선을 다하고 혹시 안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알았지?”
 “네, 선생님.”
 나는 가만히 다시 생각해봤다. 동화는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유치원 선생님이 또는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녀나 손자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학생들이 나와서 객석에 앉아있는 어른들에게 재롱을 부리듯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분명 외국인들이 상당수 있고 한국 교수들도 영문과 출신이면 서방의 영어권국가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꼭두각시놀이를 하는 것보다 가장 한국정서로 표현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닐까?’
 
 이미 영어의 발음이나 표현 동작 같은 것으로는 변별능력이 없어져 버린 듯 했다. 간혹, 실수하는 것으로 승패가 좌우되리라는 짐작을 할뿐이었다. 그런데 실수하는 학생들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이미 예선에서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 뒤쪽 번호이니까 점심 먹고서나 돌아오겠죠?”
 “응, 그래. 49번이라 그럴 듯한데.”
 “그럼, 선생님. 방법을 조금 바꿔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 무슨 생각이 있는 거야?”
 “보통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잖아요.”
 “응 그래… 그런데?”
 # 영어동화 구연대회 (서울본선)
 
 “심사위원들은 어른들이고 외국인들은 한국의 정서에 대해 궁금할 거예요.”
 “그럼 혹시 노인 분장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요?”
 “아~ 그래 맞아. 외국 아이들도 다들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잠들기 전에 동화를 들려주는 것이 일반적이야.”
 “혹시 할머니들이 입는 한복과 지팡이를 구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시계를 보셨다 운이 좋다면 원하는 물건을 구해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셨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밖으로 뛰어나가셔서 선생님 댁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려서 한복, 고무신과 옆집할아버지 지팡이를 빌려와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흰 수건도 가져오라고 하셨다. 택시를 타고 연세대 안으로 들어오셔서 가져온 소품을 선생님께 건네주셨다. 다행히 20분정도 시간이 남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연기였다. 어차피 그만그만한 실력으로 동화 구연 해봐야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생각을 전환한 것이다.
 수건을 뒤집어쓰고 얼굴에 사인펜으로 주름을 그렸다. 할머니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나서니 영락없는 할머니였다.
 바쁜 와중에 복도 구석에서 분장을 하면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 이정도로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가 없을 것 같다. 내려가면 맛있는 거 사줄게 준후야. 편하게 해. 부담 갖지 말고.”
 “네, 선생님. 한 판 놀다올게요.”
 “그래, 준후 파이팅!”
 
 등장부터 쇼킹했다. 내 번호가 불려도 한 5초 동안 반응이 없자 사회자는 다시 나를 불렀다.
 “광주 전남대표 49번 정준후 군 나와 주세요.”
 느릿느릿한 지팡이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서자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여태까지 50명이 다 되는 그만그만한 동화 구연을 지루하게 듣다가 느닷없는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신선했을 것이다.
 “사회자 양반 쪼까 기다리랑께. 아따 승질도 급하네.”
 “와하하.”
 제한시간이 6분 이내였다. 조금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동화 구연이 시작되었다.
 지팡이 위에 손을 겹쳐 올리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 전에는 원래 대사에 없는 영어를 집어넣었다.
 의미 전달 관계상 우리글로 대신 기록하겠다.
 “이 할미한테 옛날이야기 듣고 싶은 거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오냐 내 새끼. 그래 이 할미가 해주마.”
 그 때까지 심드렁하던 심사위원들도 웃음을 띤 채로 이름한번 들어보지 못한 시골 중학교에서 올라온 괴짜 소년의 모노드라마를 감상했다.
 
 약 4분간의 동화구연이 끝나고 쓰고 있던 수건을 벗고서 허리를 편 채로 객석에 인사를 하자 모두 큰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외국인 교수 한 사람은 박수를 치면서 계속 ‘브라보~’를 연발하고 계셨다.
 김화영 선생님은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을 안경 밑으로 집어넣어 닦고 계셨다. 거기 모인 모두는 예상 못했던 상황이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내가 구연한 동화가 다른 아이들 것보다 좋다거나 더 잘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보는 이들의 부모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오후 4시가 다되어서 마지막 참가자의 구연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심사결과 발표였다. 연세대 교수한 분이 일어나셔서 전체적인 심사평을 하고나서 앉았다. 전체적으로 모두 훌륭했고 준비를 많이 해왔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글로벌 시대에 발전된 미래 인재들을 보는 것 같아 기분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서울대 교환교수로 온 외국인 여자교수가 일어나 영어로 심사평을 했다. 약간 의외였다.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심사평을 할 때 대다수 선생님들을 제외하고 학생들은 빠른 영어에 원어민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여자 교수의 발표를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우수한 민족이 유태인과 독일인 그리고 한국인들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 된 한국의 역사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영어로 표현하고 말하는 능력이 아주 대단하다. 솔직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두에게 상을 주고 싶을 만큼 대단하다. 하지만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학생은 혹부리영감이라는 제목으로 동화 구연하는 학생이었다. 무엇보다도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하며 말하는 말투마저 우리 할머니랑 비슷해서 감동했다. 할머니는 생김새만 달랐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똑같이 변하는 듯하다. 그게 여자들의 운명이면 나도 좀 슬프긴 하다. (웃음)’
  “그런데 독해비? 이게 뭔지 모르겠네요. 준후 군 설명해줄 수 있나요?”
 마이크를 잡은 여교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여 있던 학생과 청중 모두 놀랬다.
 여자 교수는 의도하고 나선 자리는 아닌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도깨비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캐릭터로 악한 이미지나 나쁜 이미지가 아닌 해학적이고 능력이 넘치는 캐릭터입니다. 수수떡을 좋아하고 씨름을 좋아한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혹부리영감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권선징악의 주체자로 나왔는데, 도깨비의 근원은 과거 아시아대륙의 넓은 영토를 정복한 치우대제의 별명이었습니다.”
 약간 오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버렸다. 설명을 듣는 교환교수부터 객석에 앉아있던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 더욱이 옆자리의 김화영 선생님까지 멍하게 나를 보고 계셨다.
 ‘이런! 실수다. 그냥 한국의 전통적이고 해학적인 캐릭터라고만 할 걸!’
 한때 중국의 동북공정에 열을 받아서 공부했던 내용이었다.
 “아~ 그런 깊은 내력을 갖고 있는 캐릭터였는지 몰랐네요. 설명 고마워요 준후 군.”
 “어머, 준후야. 그런 내용까지 알고 있었어? 준후 대단하네? 선생님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아 선생님. 혹시 동화내용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둔거에요.”
 “정말이야? 나보다 훨씬 훌륭한 원장선생님이 맞구나.”
 발표를 앞둔 심사위원석에서 제법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듯 했다. 외국인 교수들과 한국 교수들 사이에서 뭔가 계속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우리 뒤에 앉아있던 선생님 한 분이 김화영 선생님께 조용히 말씀을 건넸다.
 “혹시 이 학생 외국에서 살다온 학생인가요?”
 “아니에요.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는 학생이에요.”
 “혹시 시골마을에 무료 공부방을 운영하는 학생 아니에요? 예전에 뉴스에서 본적 있는 것 같은데…. 맞죠?”
 “네… 맞아요. 하하… 저도 안지 얼마 안 되어서요.”
 “아~ 그렇군요. 정말 반가워요. 학생 여기서 만나다니. 하하.”
 뒤쪽에서 계속적인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작년에 방송된 우리 마을 공부방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지루한 심사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심사발표가 있었다. 동상과 은상 다음 금상이 발표되고 나서 대상 발표가 남은 시점에서 나이든 다른 교수 한 분이 마이크를 잡고 앉아있는 우리에게 중대한 사실을 발표했다.
 
 “이미 대상수상자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실력으로 보나 우리 심사위원들이 원하는 모든 사항을 만족시킨 참가자가 있었습니다만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의견 대립이 조금 있었습니다.”
 “혹부리영감을 구연한 정준후 군?”
 “네!”
 “최근 5년 이내에 영어권 국가에서 살다 온 적 없다는 내용이 사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서류상에는 외국생활을 한 적이 없다고 제출했는데 언어학자인 저도 그렇고 외국인 교수들도 비슷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우리 대회 참가 조건은 외국에 생활한 경험이 없는 학생으로 제한이 되어있습니다. 정준후 군은 미국의 특정 지역의 억양이 도드라지는 점도 그렇고 영어 실력으로 봐서는 대학생을 넘어서는 실력으로 판단이 됩니다. 대상 수상자라는 점에서는 아무도 반대의견을 제시할 심사위원들이 없습니다만 정말로 한국에서만 살았는지 사실여부를 살펴 본 후….”
 “교수님! 정준후 학생은 한국에서 살던 학생 맞습니다!”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중에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다른 학교 영어선생님이 크게 소리치셨고 나머지 학생과 선생님들도 동조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작년 MBC저녁뉴스에 정준후 학생의 이야기가 방송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5년 전부터 마을 아이들을 위해 무료공부방을 운영해오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여기 앉은 대다수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약간 당황한 교수는 심사위원석의 교수들 쪽으로 걸어가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사실 확인 후에 서면 상으로 발표하려고 했습니다만 참가자 여러분들이 아는 사실을 저희들만 모르고 있었군요. 그렇다면 대상 발표를 연기할 이유가 없겠네요.”
 
 대상에 내 이름이 호명되자 모두가 기립해서 박수를 쳐주었다.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마음껏 축하해주었다.
 부상으로 미국연수증서와 상금을 받았다. 김화영 선생님은 지도교사상을 받았다. 그리고 교환교수로 서울대에 와있는 여자 교수님은 자기대학에 입학한다면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수가 추천하는 학생은 합격이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고 베푼다는 마음으로 살았더니 이렇게 큰 행운으로 되돌아 오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수추천서만 믿고 세월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교수의 추천서는 부수적인 행운일 뿐이다. 운명을 개척해나가다 보면 행운이 따르는 것이지 그 교수의 추천서만 믿고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밥을 먹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내려가기 전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여보세요?
 “누나, 나에요.”
 -오 그래 준후야. 어떻게 됐어?
 “아~ 사실은 상을 못 탔어….”
 -그래? 괜찮아. 지역우승도 어딘데 고생했어. 우리 준후 항상 힘내고 파이팅이야. 알았지?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크크크.”
 -뭐야? 장난 친 거야?
 “대상이야. 미국연수기회도 땄고. 하하하.”
 -어머 어머 정말? 꺄~아 축하해 준후야!
 전화기를 들고 방방 뛰는 모습이 느껴졌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누나가 있어 좋았다.
 “제일먼저 누나한테 전화 하는 거야.”
 - 역시 너는 내 남… 아니, 내 예상대로 대단한 선생님이야.
 “고마워 누나 일단 부모님께 연락 드려야하니 이만 끊을게. 그리고 내려가면 편지할게.”
 -그래. 조심히 내려가. 그리고 꼭 편지해!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똑같이 기뻐해주셨다.
 맛있는 거 준비해 놓을 테니 어서 오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바로 옆 공중전화박스에서는 김화영 선생님이 교장선생님께 전화를 걸고 계셨다. 평소 창백한 얼굴이던 선생님도 대상을 받은 결과에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다. 통화중에 연신 ‘감사합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 가족들과 피서
 
 목포행 무궁화호 열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준후야. 외운 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때 심사위원들이 했던 이야기 중에 특정지역의 악센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너 잘 아는 미국 사람 있어? 동부지역 사람 말이야”
 “아뇨.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외국인의 발음을 계속 따라하는데 원어민 발음하던 사람이 그 쪽 사람이었나 봐요”
 “그래… 동부 지역 외국인이 녹음했나 보구나.”
 선생님은 고개를 약간 갸웃하셨다. 실력이 없다 해도 지역사투리의 악센트를 녹음 할 때도 사용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동부 지역 사람이 맞지만 사실은 카세트테이프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다.
 군복무시절 미국인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친했던 녀석이 밥이었다. 본명이 프렌치인데도 자기를 밥(Bob)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녀석이 프랑스에서 이민 온 미국의 동부지역출신이었다. 꽤 긴 시간 친구로 지내다보니 말투가 밥을 닮은 것이다. 그런데 서부와 남부로 가면 사투리가 아주 심하다고 했다.
 선생님께 군복무 할 때 미국인 친구가 있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16살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은 대학원까지 졸업하시고 박사학위과정을 준비하다 집안형편이 좋지 못해 임용시험을 치르신 것이라고 했다.
 아직도 영문학과 교수직에 대한 미련이 있는 듯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의 진짜 나이를 알려주셨다. 올해 28살이라고 하셨다. 내가 이시대로 오기전이라면 아직 결혼에 늦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1985년도라면 많이 늦은 나이다.
 말을 조심히 가려서 했지만 선생님께 조언 비슷한 것을 해드렸다. 선생님은 결혼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있으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결혼 안하세요?”
 “주변에서 소개해주는 사람도 많고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잘 모르겠어. 다들 나더러 눈이 높다고만 하더라.”
 “선생님은 스스로 눈이 높은 것 같으세요?”
 “난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오해하는 것 같아 결혼을 하기 싫은 것도 아닌데…. 아직 내 짝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거든?”
 나도 결혼을 늦게 했다. 학원원장이었을 때였다. 학교의 방과 후 수업으로 학원생들이 몰려 떠나기 전까지는 먹고 살만했다. 그때는 나도 내 짝이 나타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호랑이는 조그만 토끼를 잡을 때도 죽을힘을 다해 사냥하다고 하셨어요. 아직 젊다고 생각하시거나 주변에서 좋아해주는 남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가 아닐까요? 선생님은 그것을 아직 내 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의 눈이 높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 제자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도대체 너 정체가 뭐냐?”
 “그냥 선생님 제자에요.”
 “그래, 네가 나에게 그런 조언을 해준다면 물어볼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역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결혼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과일가게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과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흠이 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이 드는 과일을 고르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최고의 과일을 선택하면 안 되는 거야?”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흠이 있죠. 정말로 결혼할 마음에 준비가 된 사람은 한두 가지 결점이 있어도 그것을 덮어줄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해요.”
 “내가 인생과 결혼상 담을 너에게 받는구나. 어쩐지 닥터에게 카운슬링을 받는 느낌이야 넌 보통 녀석이 아니야 .그렇지?”
 “약간 이상한 녀석인 것은 인정할게요.”
 “그래그래, 하하하.”
 
 선생님은 그날 이후부터는 선생님은 교감선생님께 싫은 소릴 듣거나 동료교사와의 불화가 생길 때면 가끔 영어 회화반 교실에서 나를 붙잡고 하소연하시기도 했다.
 
 누나에게.
 벌써 일주일이 흘러버렸네….
 아직도 나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던 누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얼마나 예쁘던지.
 처음엔 서울 올라가는 것을 비밀로 할까 생각 했어. 아직 1년이 더 남아있는데 누나를 보게 되면 남은 1년이 더 힘들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역시 만나보기를 잘한 것 같아. 그때의 기분이 1주일정도 지나서야 진정되는 것 같아. 차분해지면 편지를 쓰려고 기다리다가 1주일이 지난 거니까 오해 말아줘…. 항상 밥 잘 먹고 건강한지 공부는 열심인지 체크하는 나를 잘 알지?
 그리고 누나 부탁이 하나 있어. 누나의 대학자금을 우리 규원장학재단이름으로 지원할거야. 그리고 학교 다니면서 사용될 생활비를 지원하고 싶어. 내 미래에 대한 투자로 생각하고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나가 원하는 공부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지난번 만났을 때 말하고 싶었는데 말을 꺼내지 못 했다네.
 선생님처럼 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탁하는 내 입장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그러니 목표를 좀 더 크게 잡아달라는 거야. 평소처럼 멋없는 편지를 쓰고 말았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길 바라.
 1985년 4월 22일 준후가 씀.
 
 편지 기다렸는데 이제야 쓰니?
 장학금을 받는 것은 좋은데 생활비까지는 솔직히 부담스럽다.
 그리고… 용서해줘~ 잉 네 생일인데 까맣게 잊어먹고 지나쳐버렸어 미안해~ 흑흑.
 4월 22일이라는 글자가 어쩐지 낯익다 싶었는데 한참 뒤에야 생각났지 뭐니. 그런 거 미리 좀 말해주면 좋았잖아! 내가 아무리 바빠도 미리 생일축하 전보라도 보냈을 것인데….
 사진관에 들러 함께 찍은 사진 찾아와 보낸다. 이 생각 정말 잘한 거 같아. 이 사진을 내방에 걸어두었더니 조카들이 누구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미래 애인이라고 해두었어. 히히 이제 한눈팔면 안 돼? 그리고 동화 구연 대회 전국 우승 다시 한 번 축하해. 역시 너는 내 선생님이야!!
 나도 분발해서 절대 너에게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될게.
 1985년 4월 26일 희선이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방학이 되었다. 어머니의 발의로 우리 가족의 피서지가 결정되었다. 신지도의 명사십리로 가기로 하신 것이다. 서울 상도동의 이모 집에 유학 생활하던 형도 내려왔다. 시골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 형은 서울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반에서 5등 정도로 밀려버렸다. 충격이 컸던지 한동안 연락도 끊고 부모님의 걱정을 한 짐 지워줬었다. 나는 올라가기 전에 형에게 예방주사를 놓긴 했었지만 효과는 미지수였다.
 “사람이 큰물에서 놀아야한다는 말을 실감할거야. 절대 좌절하거나 슬럼프에 빠지면 안 돼.”
 “그 영감탱이 같은 소리 그만 좀 해라. 먼저 형이 자리 잡아 놓을 테니 너는 와서 형의 위대함을 누려라 하하하.”
 “성적이 분명 떨어질 것이니 각오하라는 말이야.”
 준서 형은 허세 좋게 올라갔으나 거의 그로기상태에서 K. O. 패 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형의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얻었던 안정감이 박탈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모가 아무리 잘해줘도 부모님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도 조금 빠지고 예전의 괄괄하던 성격이 많이 누그러진듯했다. 여름 방학이 되어 내려온 형을 본 어머sl가 기분 전환 겸 여름피서를 가자고 말씀을 꺼내신 것이다. 내 생각에도 형에게는 기분전환 또는 재충전이 필요해 보였다.
 
 완도에서 철선을 타고 40분정도를 들어가니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미래에는 다리가 생겨 차로 바로 드나들 수 있지만 지금은 배를 타고 가야했다. 피서지에 갈 때 거의 살림살이가 이동한다고 봐야한다. 다행히 우리 집은 남정네들만 4명이라 짐꾼이 충분했다. 금속파이프 텐트 폴을 연결해 돔형 텐트를 치고 코펠로 밥을 지어먹었다. 부탄가스를 이용할 수 있어서 나름 편리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조개껍데기를 줍거나 물이차면 들어가 수영을 빙자한 개헤엄을 치다가 나왔다. 나는 제대로 수영을 배운 적이 없었다.
 
 나를 제외한 아버지, 형, 동생은 낚시 광이다. 나는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모래사장끝 쪽 둑 위에서 갯지렁이를 끼워 붕장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완도에서 배타기전에 갯지렁이를 샀다. 바닷가에 살았지만 나는 갯지렁이는 딱 질색이었다. 그게 싫어 저녁 방파제 낚시를 가지 않으려고 했다.
 “야, 갯지렁이는 내가 꿰줄 테니 함께 가자. 닐낚시 던지는 것도 보여줄게”
 “그래? 그럼 잠깐 기다려.”
 나는 준비해온 슬리퍼를 신고 형과 함께 닐 낚싯대를 들고 따라 나섰다.
 몇 명의 어른들은 제법 굵직한 장어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잘 봐라. 낚싯줄이 풀려나갈 때는 베일을 열어주고 감을 때는 베일을 이렇게 젖혀 스피닝 릴을 감는 거야.”
 “알았어. 먼저 형이 던져봐.”
 준서 형은 미끼를 꿴 바늘과 제법 큼지막한 봉돌을 몸 뒤로 젖혔다가 힘껏 앞으로 던졌다.
 “퐁!”
 투하된 봉돌의 소리가 믿음직하지 못한 시간차이로 1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떨어지는 것이다.
 “크흐흐흐 달밤에 체조야?”
 “에이~씨 타이밍을 못 잡았다.”
 “다시 해 봐. 첨대 끝을 바닥으로 향하지 말고 45도 지점에서 멈춰야 제대로 날아가지 첨대 끝의 탄력을 이용해서 말이야.”
 “어쭈? 네가 나를 가르치려 드냐?”
 “내가 말한 대로 해봐”
 “시끄럽다! 형이 하는 거나 잘 봐라.”
 “그래? 어디 보여줘 봐.”
 두 번째도 신중을 기해서 던졌으나 역시 처음과 비슷한 지점에 처박았다.
 “아~씨 뭐야!”
 낚시를 잘한다고 설쳐대기만 했지 역시 허당이었다.
 “그냥 봉돌 손으로 들고 던지지 그래?”
 “오랜만에 맞고 싶냐?”
 “크흐흐.”
 “네가 해봐 임마!”
 “그래 알았어. 내가 한 50미터만 날려줄게.”
 “못하기만 해봐라.”
 두 형제의 실랑이를 옆에서 보시던 아저씨들이 웃었다.
 베일을 열고 닐첨대의 탄력을 이용해 튕겨냈다. 그리고 첨대 끝을 40도 이상이 되게 멈춰 섰다. 역시 예상대로 5~60미터는 날아간 듯 했다.
 사실 그 방법은 대학생이 돼서 형이 내게 직접 알려준 것이다.
 “얼씨구? 잘하는데?”
 “이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야. 형 실전에서 잘해야지.”
 형은 두 번 더하더니 감을 잡은 듯 했다.
 밤에 총 4마리의 장어를 낚았다.
 누구보다 좋아 하신 분은 어머니였다. 그냥 불에 구워 소금만 찍어먹어도 맛이 좋았다. 형은 낚시 바늘 투척에만 코미디를 했을 뿐 막상 혼자서 3마리를 낚았고 부모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평소 아버지 일을 솔선수범해서 돕거나 앞장서서 뭔가를 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아이처럼 곱상한 외모에 수재 소릴 듣는 형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나름 힘든 생활을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형이 많은 내적 성장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공부와 인생살이 모두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낮게 내려와 있는 듯 했다.
 영화 제목이었나?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가 떠올랐다.
 “그래 자주 봐야지 하늘을….”
 밤바다 해변을 연인들이 다정하게 걷고 있었다.
 ‘누나랑 함께 왔다면 좋았을 텐데….’
 식구들과 즐거운 피서를 보내는 동안에도 계속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피서 온 해변의 연인들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피서지도 갈 때가 오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끈적거리는 살갗에 달라붙는 모기와 모래를 털어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권에 계속>

댓글(4)

[탈퇴계정]    
하...초딩으로 회귀...언제 커서 브라보 라이프가 시작되남? 국.중.고 시절은 벨로 안중헌디
2020.07.11 05:22
廣野    
전두환이 집권초기면 전라도보단 경기도권이 투자하기 알맞죠 20년을 묵혀둬야하는데 쥔공 연령을 생각하면 10년후 종잣돈을 마련하는것도 괜찮고요
2022.07.08 14:24
야간비행1    
10
2022.07.17 10:13
n9************    
ㅋ ㅋㅋ 아빠가 스스로 난 바보다를 선언함
2022.12.03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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