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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릭 : 그의 직장 성공기 1권

2015.08.27 조회 4,369 추천 45


 # 신입사원
 
 무려 140:1의 L&S 상사 신입사원 공채.
 당당히 합격하고 연수를 마친 김민호.
 드디어 정식 출근으로 꿈을 품은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정장은 처음으로 사들인 브랜드 뉴. 거기다가 머리도 단정히 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백수였던 그는 평범한 옷을 벗고 어엿한 L&S 그룹 신입사원의 프레쉬한 냄새가 났다.
 이렇게 거울을 보는 이유 또 하나.
 예쁜 여자가 많기로 유명한 회사라 알려졌기에 기대감도 있었다.
 실제로 출근할 때 본 많은 여직원.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미모의 여사원들이 많았다.
 취업준비생일 때부터 그는 L&S 그룹, 특히, L&S 상사에 연예인 뺨치는 여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취직하기를 바랐다. 실제로 합격하니 올해 그에게는 행운이 따르는 것 같았다.
 
 “자, 신입 사원이 왔어요.”
 
 자신을 소개하는 신주호 과장은 조직사회에 딱 들어맞는 인상이었다.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관료주의가 흐른다고 보면 된다.
 이대 팔 가르마가 특히 인상적인 그가 민호를 소개했다.
 소개를 받고 허리를 90도로 굽히면서 하는 인사.
 낭랑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김민호입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첫인상에 호감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음성을 키웠다.
 잠시 여사원들이 그를 힐끗 보았다. 그러다가 눈길을 더 깊이 보냈다.
 얼굴에는 다들 ‘나쁘지 않군.’이라는 표정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남자 사원들은 아니다.
 그다지 관심이 없는 표정들.
 평범한 외모인데도 여자들이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뭔가 있는 것 같았다. 특유의 매력이라고나 할까?
 
 ‘역시 예쁜 여자들이 많구나.’
 
 속으로 희희낙락.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민호에게는 네 명의 여사원이 다 미인이라서 기분이 좋았다.
 그들을 포함해서 선임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김아영이에요.”
 
 그중 가장 예뻐 보이는 여사원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속으로 되뇌는 민호.
 절대 까먹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다른 남자 선배들의 이름은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나중에 익히면 된다. 일일이 이름을 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사는 아니다.
 빠르게 조직사회에 적응하려면 상사의 이름을 익히는 것은 기본.
 자신을 소개했던 신주호라든지, 아니면 조금 전에 인사를 나눈 이종섭 대리는 꼭꼭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부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요구에 싹싹하게 대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시작된 바쁜 일정.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다른 사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그 혼자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당연한 풍경이었다.
 신입사원. 이들이 첫날 맞이하는 조직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나 L&S 그룹은 이들이 적응할 때까지 웬만한 것은 심부름 이상을 시키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다.
 일에 익숙지 않은 신입에 대기업의 톱니바퀴 하나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작은 일이 큰 사고로 터질 수 있기에.
 적응 후 일을 배우는 것은 신입 사원을 맞는 좋은 기업 문화였다. 이곳에 취직하려는 이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익히라는 직속상관 이종섭 대리. 선배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다. 민호는 그의 친절함에 직장생활이 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눈치가 보인다.
 가만히 있기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 군대에 있을 때도 이런 때가 있었다.
 신병이었을 때 내무반에 종일 앉아만 있었던 그 시간, 정말 시간이 가지 않았다.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함에, 잠시 후 종섭이 자리에 없자 일어섰다.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려 하지만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두 다 바쁜 것 같았다.
 박스 안에서 자기 일만 하는 대기업 직장인들.
 이제 그도 이 일원이 되기는 하겠지만, 아직 잘 모르니 목소리라도 크게 내서 말을 건넸다.
 대상은 모른다. 누군가 듣겠지 하는 마음뿐.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말에 반응할 줄 알았던 민호.
 하지만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머쓱해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화장실에서 물건을 꺼내며 지금까지 참아왔던 몸의 액체를 방출했다.
 시원하게 쏟아졌다.
 적어도 정력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민호.
 하지만 써먹을 데가 없었다.
 지금까지 취업 백수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기는 쉽지 않았다.
 직업이 있는 여자를 만나면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경험한 바다.
 그래서 전 여자 친구와는 헤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백수로 있는 동안 자존심이 좀 상하는 일이 많았기에.
 물건에서 시작된 생각이 여자 친구에까지 이르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민호는 ‘Exit'가 새겨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전화를 돌렸다.
 
 “상철이냐? 나 민호다. 김민호.”
 (응 웬일로? 이 형님한테 전화를?)
 “바쁘냐?”
 (좀. 할 일이 많네.)
 “아 그래? 짜식 바쁜 척하기는. 나도 바빠. 그래도 그때 하던 이야기는 매듭지어야지. 지난번 소개팅 이야기 좀 하려고. 그때 네가 말했던….”
 (아, 나 거래처 만나야 해서 나중에 통화하면 안 될까? 바로 전화 줄게.)
 “그래, 그래. 알았어.”
 
 결국, 목적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일어나려는 찰나에 아래쪽 비상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들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거기다가 급하게 채근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리고 벌써 몇 번째야?”
 “오해야. 네가 오해한 거야.”
 
 들어오자마자 두 남녀는 치열하게 말싸움을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종섭 대리였다.
 또 하나의 목소리는 생소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목소리를 들으니 귀속이 맑아졌다.
 
 “오해? 네 폰에 있는 그 여자 벗은 몸을 봐봐. 이미 증거도 다 있는데 발뺌하지 마.”
 “화 좀 그만 내! 아니라잖아. 오해라고. 그 여자애가 일부러…. 아… 정말, 아닌 일로 내가 이렇게 계속 변명해야 해? 그러니까 점점 네가 질리는 거지.”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대화의 내용을 이것만 들어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걸린 것 같았다. 민호는 피식 웃었다.
 
 ‘바람을 피워도 관리를 잘해야지. 쯧쯧.’
 
 갑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그의 미소가 생각이 났다. 역시 잘생겼으니 여자가 꼬이는 거다.
 
 “됐어. 이제 더는 못 참아. 헤어져. 헤어지자고.”
 “…….”
 
 드디어 최종무기 개봉 박두였다. 하긴 헤어지지 않으면 평생 고생할 것 같았다.
 민호는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숨죽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미야! 왜 이러니?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까.”
 “난 쫓아다니는 놈 없어서 그러는 줄 알아? 나도 너처럼 바람피울 줄 몰라서 그러는 줄 아느냐고? 나도 다른 남자랑 잘 거야.”
 “하… 정말 너 못 말리겠구나. 좋아. 원한다면 그렇게 해봐. 네가 나를 떠나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바람? 그 바람은 나랑 끝인 거야. 딴 놈이랑 자는 게 바람이 아니라 그놈이랑 사귄다는 거 아니야? 해 봐. 해 보라고.”
 
 띠리리리링.
 그때 눈치 없게 민호의 전화벨이 울렸다.
 민호는 당황했다. 그래서 재빨리 통화대기를 누르는데….
 
 “누구야?”
 
 이미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종섭이었다.
 
 “이 대리님, 저… 접니다.”
 “어? 민호 씨, 거기서 뭐 해?”
 
 얼굴을 삐쭉 내민 그에게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종섭.
 이미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가 다 들었다고 생각하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해보라고 했지? 좋아. 알았어. 나 쟤랑 잘 거야.”
 
 갑자기 그녀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와서 민호에게 다가갔다.
 드디어 여인의 얼굴을 보게 된 민호.
 한눈에 반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보고 분비되는 호르몬.
 처음 본 여인을 보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왜 그런지 감정도 생각도 확인할 시간도 그녀는 자신에게 주지 않았다.
 
 “가자.”
 “네?”
 “가자고.”
 “어디를?”
 “지금까지 이야기 다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야. 가자. 어차피 퇴근 시간 다 됐어. 그리고 네가 갔는지 신경도 쓰지 않을 회사니까 걱정하지 마. 빨리 와. 가자.”
 “아, 저….”
 
 당황한 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여자의 힘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주어야 할 것 같았다.
 
 “민호 씨! 잘 좀 달래줘. 지금 화가 나서 그러는 거야. 내가 그냥 퇴근시켰다고 보고할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아… 아… 네.”
 
 그는 어리둥절해졌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을 마쳤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따라 나갔다.
 황당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황당함은 계속 이어졌다.
 어딘가로 가는 그녀였는데, 회사 옆에 있는 프리머스 호텔이다. 설마 진짜로 자신이랑 자겠다는 결심인가?
 
 “뭐 해? 어서 들어가지 않고.”
 “아…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뭐가 아니야? 내가 못생겼어? 잘 봐. 내 얼굴.”
 
 그녀가 호텔 앞에서 얼굴을 들이댔다.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큰 눈은 서구적이다.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은 육감적이었다. 계란형 얼굴.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연예인 급 일반인이었다.
 
 “예쁘십니다.”
 “그지? 이 정도면 네 상대 되는 거지? 가자, 빨리 올라가자.”
 “헉.”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채고 가는 그녀. 체크인하는 것을 보니 정말인가 보다.
 
 ‘그래도 아니겠지. 아마도 이 대리가 뒤에서 따라올까 봐 연기하는 걸 거야. 들어가서 펑펑 울면 달래주기나 해야겠어.’
 
 그렇게 그녀에게 맞바람의 상대로 찍힌 민호.
 설마 했지만 호텔 방에 들어와 버렸다.
 엉겁결이었는데,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고 간다고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라고 여겼기에.
 만약 그녀가 울면 달래줄 생각이다.
 
 “뭐 해?”
 “네?”
 
 그런데 울기는? 생각해 보니 아까 비상계단에서 다른 여자였다면 눈물 질질 짜면서 이야기했을 텐데 그렇게 당돌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그녀의 당돌함으로 인해 지금 이 맞바람이 장난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
 그는 비로소 느꼈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
 
 “샤워 안 해? 같이 해 줘?”
 “아뇨, 아뇨. 진정하십시오.”
 “뭘 진정해?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마음먹은 거 아냐? 그러니까 하자. 하자고. 나도 복수를 해야겠어.”
 “네?”
 “빨리 샤워해.”
 
 그녀는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옷을 벗겼다.
 훌렁훌렁. 그의 웃옷이 벗겨졌다.
 허리띠까지 그녀의 손이 거쳐 갔다.
 매우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아마 종섭과 갈 데까지 간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요즘 세상에는 당연한 건데 살짝 아쉬웠다.
 그런데 신체는 자신을 배반하고 있었다.
 사실 여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좋은 것은 남자의 본능 아닌가?
 다만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뭔가 끌려 다닌다는 느낌.
 그래서 민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그시 보는 그의 눈.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순간 살짝 눈빛이 변하는 그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일까.
 
 “그만. 내가 벗을게.”
 
 # 매력을 얻다.
 
 민호의 목소리가 조용해지자,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 그는 이 당황스러운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는 것처럼 너무나 빨리 그리고 황당하게 사건이 흘러가고 있었다.
 뭔가 생각을 할 시간도 주지 못했다.
 그때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
 
 “애인 없지?”
 “없어.”
 “없을 것 같았어. 그럼 성병 없지?”
 
 들어올 때는 앞뒤 가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민호는 웃었다. 점점 자신과 잠자리를 안 해야 할 이유를 찾는 그녀.
 
 “있으면?”
 “당… 당연히 안 돼! 절대 안 돼!”
 “그러니까, 있으면?”
 
 이번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민호는 잠시 발걸음을 떼고 샤워실의 닫힌 문 앞에 앉았다.
 문 바로 밖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 그대로 계속 있으면, 나가서 늑대가 될 거야. 그러니까… 이제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아프겠지?”
 
 갑자기 자신의 말을 끊는 그녀.
 민호는 잠시 그녀의 말을 곰곰이 씹어보았다.
 그리고 난 결론.
 
 “혹시, 경험 없어?”
 “……..”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그의 추측이 맞았다.
 민호의 추리를 계속되었다.
 
 “이런 이야기하기 좀 그렇지만… 혹시 이 대리랑 계속 잠자리를 피한 거야? 욕망을 억제 못 한 이 대리는 다른 여자를 찾은 거고?”
 “…….”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긍정이라는 것을 민호는 잘 알 수 있었다.
 
 “휴우….”
 
 민호는 한숨이 나왔다.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게 웬 떡?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고자라고 놀릴 수도 있지만, 내일 종섭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점에서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애정 없는 하룻밤 불장난과 직장 상사와의 불편함.
 무게 중심이 심각하게 후자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나 물어보자.”
 “뭔데?”
 “너도 여자 친구랑 사귈 때 잠자리를 요구하면 거부를 한 적이 있니?”
 “내가? 아니면 여자 친구가?”
 “여자 친구가.”
 “생리할 때 빼놓고는 없었어.”
 “그래? 그럼 내가 문제구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민호의 입에서 격려의 한 마다가 나가고….
 
 “사람마다 다른 거야. 네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마.”
 “예전부터 사귄 남자친구들한테도 모두… 그러니까 떠나가 버리더라고.”
 “흠. 그렇군.”
 “이번에는 떠나간 것은 아닌데 당당히 바람을 피우더라. 내가 만족을 시키지 못하니까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지만 난 결혼 전까지는 남자와 잠을 자지 않는 게 목표였어.”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남자에게는 환상이 있다. 자신의 여자가 자신에게는 처음이었으면 하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민호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뭐 하나 물어볼게.”
 “…….”
 “이왕 이렇게 된 것 나 어때?”
 “네가 어떻다니? 설마 잠자리 파트너로?”
 “아, 그런 것도 있었네. 그것도 상관은 없지만, 내 말은 남자 친구로서 어떻겠냐는 말이지.”
 
 잠시 정적이 흐르고, 문밖에서는 예상했듯이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그럴 수 없어.”
 “왜? 내가 이상해 보여? 이래봬도 나름 여자들에게 인기 좀 있었는데.”
 “응. 그럴 것 같아. 착해 보이는 인상이야. 다루기 쉬워 보여.”
 “음….”
 
 착해 보여서 그리고 다루기 쉬워서 인기가 많았다고 생각하는 그녀.
 사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입이 뚫렸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사귄 여자들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그 착해 보이는 인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편해지면 약간 막 대했다.
 민호는 또 그런 면에서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헤어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안 되겠어. 그냥 이렇게 살아갈래. 사실 네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은 아니야. 난 나쁜 남자 스타일이거든. 그래서 이렇게 맨날 마음고생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착해 보이는 인상도 그렇지만 실제로 그는 그렇게 나쁜 남자 스타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여자들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배려도 잘했고.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은 매우 잘 떠나간다. 바로 지금처럼.
 
 “이제 난 가야겠다. 오늘 고마웠어. 하지만….”
 “…….”
 “잊어줘….”
 
 @@@
 
 유미가 나간 후 민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금액까지 치른 상황에서 하룻밤 머물까도 생각해 봤지만, 샤워하고 그 역시 호텔 문을 나섰다.
 
 “오빠? 오늘 첫 출근 어땠어?”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첫 출근을 한 심경을 물어보는 여동생.
 그는 대충 답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계속 유미가 떠올랐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다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엄마야, 들어가도 되니?”
 “네, 들어오세요.”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 그리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다.
 늘 취업 때문에 안타까워했던 두 분 부모님이 이제는 그의 합격 소식에 기쁜 눈빛이 한가득.
 지금도 그렇다. 그를 보며 밝은 목소리로 오늘의 일과를 물어보셨다.
 
 “오늘 별일 없었어?”
 “아직 신입이라 아무 일도 시키지 않더라고요.”
 “그래? 하긴… 내려와서 밥이나 먹어라.”
 “네. 알겠어요.”
 
 그러고 보니 배가 몹시 고팠다.
 밥도 먹지 않은 채 충격과 놀라움의 일을 겪었으니 더욱 허기짐을 느꼈다.
 식사 중에도 그에게 관심을 두는 가족들.
 아무래도 첫 직장, 첫 출근이니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한 일이 별로 없는 그의 대답은 정말로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정식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알려드릴게요. 하하하.”
 
 결국,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짓고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했는지, 일찍 눈이 감겼다.
 오늘 밤은 그녀의 꿈을 꿀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그는 정말 그녀와 진한 하룻밤을 가졌다.
 느낌이 이상해서 일어난 민호.
 
 “젠장, 몽정이라니, 이 나이에….”
 
 팬티가 젖어 있었다. 창피했다. 자신의 속옷을 빠는 것은 그의 어머니다.
 들킬까 봐 우려되어 빨리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고, 찜찜한 기분을 지우려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샤워까지 마치고 아침을 먹으러 나오자 그의 어머니가 말을 한다.
 
 “역시, 취직하니 달라지는구나.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다니?”
 “그… 그럼요. 당연하죠.”
 
 당연하지 않다. 오늘도 늦잠을 자고 싶지만 야릇한 꿈 한 방에 날아가 버리고만 그의 아침잠이다.
 이래서 빨리 여자 친구를 사귀어야 하나보다.
 성인이 되면 반드시 성욕을 풀어 주어야 하는 게 장성한 남성 아니겠는가?
 
 ‘상철이에게 이따가 전화해야지….’
 
 어제 황급히 전화를 끊은 상황. 소개팅 이야기가 오가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한 것도 못내 아쉬웠다.
 저녁에 그와 통화할 시간이 있었지만, 어제 원체 황당한 일을 겪었기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차피 오늘도 아무 일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그는 오늘도 예상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있을 것이라는.
 그러니 상철과 통화할 충분한 시간은 분명히 주어질 것이다.
 다만 종섭이 걸렸다. 그의 직속상관. 분명히 자신에게 따지고 들 것이다.
 어제 그렇게 가고 나서 궁금해 하지 않는다면 남자 친구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아침을 먹고 나서는 길.
 해가 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전날 있었던 일은 해프닝으로 생각하며 회사에서 그녀를 만나더라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직장 생활을 꼬이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
 민호는 헐레벌떡 출근 준비를 하고 나갔다.
 지하철은 항상 만원. 그래서 지옥철이었다.
 그래도 이것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취업 백수였을 때에는 이것마저도 직장인의 특권이라고 생각을 했으니.
 더구나 여기저기 여자들의 몸매의 굴곡이 그의 몸에 전해져 왔다.
 만원 지하철은 이런 재미도 가끔 있었다.
 기분은 좋지만, 그들에게 치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
 그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여자들이 많이 있는지 몰라서 진땀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주변에 웬 여자들이….’
 
 옆에 있는 여자는 그에게 완전히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뿐만이 아니다. 서 있는 여자, 앉아 있는 여자들 모두 다 그를 잠시 보고 있었다.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의 표정.
 물론 남자들에게는 그저 진땀을 흘리고 살짝 찡그린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달랐다.
 심지어 여고생들도 그의 앞뒤에 포진되어 있었다.
 미성년자에까지 성욕을 느낄 수는 없는 법.
 그는 상당히 조심해야 했다.
 주변에 있는 남성들은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다.
 슬금슬금 자신을 뚫고 민호에게 가는 여인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의도적인 접근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민호의 얼굴을 보는 남자들.
 평범한 축에 속했다. 꽤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왜 여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둘까?
 그들은 속으로 질투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민호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물론 지하철에 많은 사람이 있기에 산소가 부족해서 더위를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그와 밀착된 사방의 여성들 때문이다.
 목적지까지 겨우겨우 뚫고 나오고 있는 민호.
 그를 따라 여자들이 또 이동하고 있으니 참으로 진풍경이었다.
 
 “휴우….”
 
 그는 드디어 벗어난 지옥철을 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같이 내린 여자들이 많았다.
 모두가 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을 시키려는 조짐도 보였다.
 그는 화들짝 놀랐다.
 
 ‘이크, 고의는 아니었는데… 이 여자들이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네.’
 
 그는 재빨리 이동했다.
 걸음을 빨리하는 민호의 모습을 안타깝게 눈으로만 쫓는 여성들.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나중에 한 번 만났으면….’
 # 머리가 좋아지다
 
 드디어 출근. 그러나 할 일이 없다.
 신입사원이란 참 애매한 위치였다.
 시키는 일도 딱히 없고 알아서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으니.
 웬만하면 말도 잘 붙이지 않았다.
 분위기 파악을 하라고는 하는데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경험자들은 알고 있다.
 이때가 그나마 제일 편한 시기라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민호는 할 일을 바랐다.
 심심한 것보다 바쁜 게 좋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의 소원을 들었을까? 드디어 호출당한 민호.
 
 ‘젠장….’
 
 할 일을 그렇게 바라던 민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업무가 아니었다.
 그를 보자고 한 사람은 종섭이었고, 분명히 그 어떤 일을 물어보려 자신에게 말을 붙이는 것일 테니.
 
 “이야기 좀 할까?”
 
 예상대로였다. 종섭이 부를 거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궁금했을 것이다. 어제의 일이.
 비상구가 적혀진 곳. 그곳 계단으로 가는 종섭의 뒷모습은 참으로 당당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여사원들은 힐끗 그를 보았다.
 잘생기고 훤칠한 그의 모습은 그들의 방심을 뒤흔들었다.
 늘 당연히 겪는 모습에 마치 연예인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는 종섭.
 매끈한 미소로 그들에게 가끔 눈길을 주며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여자들의 눈빛이 길어지고 있었다.
 종섭의 뒤를 따라가는 민호에게도 눈이 꽂혔다.
 물론 자신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민호는 그 눈빛을 의식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자신을 부른 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나 직장 생활 꼬이는 거야?’
 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직장 상사의 여자를 본의 아니게 건드려 버린 것이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지만, 과연 그렇게 말하는 게 옳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것은 자신이 긍정하고 부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한다면….
 분명히 자신에 앞에서 비상구를 향해 가는 남자는 아직 한 번도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못했을 텐데, 큰 원망을 들을 게 분명했다.
 아니 원망이 뭔가? 만약 종섭이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비상구에 들어가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 얼굴로 자신에게 종섭은 물어보고 있었다.
 분명히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는 표정이다.
 그리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얼굴에 비극적인 소식을 전할지, 희소식을 말할지는 민호의 몫.
 드디어 귓속에 그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어제 호텔 갔었다며?”
 “아, 네.”
 
 종섭이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
 민호는 당황하지 않는 척했다.
 부정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분명히 어젯밤 그녀가 이야기한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란 자신의 여자가 자신을 쉽게 배신했다고 믿지 않는 동물.
 종섭은 살짝 표정을 굳혔지만, 그래도 참을성 있게 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무 일 없었지?”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한데요.”
 
 이제야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종섭.
 그에게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자신에게 살짝 짜증이 나 보였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에 약간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 봐. 직장생활 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가 보지? 군대로 치면 내가 네 사수야. 꼬이고 싶어?”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씀드리면 저도 피해자인데. 차라리 그 여자 친구 분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연락해도 받아주지 않으니 그렇지. 문자하면, 어제 너랑…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하지만 대충 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확신하니까 뭐.”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민호의 표정을 살펴봤다.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확신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지 않는 몸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던졌을 리가 없다고.
 하지만 불안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오늘이 되어 설마 하고 물어보는 것을 보니.
 
 “용무가 끝나셨으면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라고.”
 
 민호는 먼저 비상구에서 탈출했다.
 그의 입장에서 완전히 피해자가 되었다.
 어쨌든 이걸로 그는 불편한 상관과 부하직원 관계를 시작한 셈이 아닌가?
 자리에 돌아와서 다시 할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모습. 그런 그를 종섭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일종의 응징이 필요한 것인지 그에게 다가 와 임무를 주었다.
 
 “오늘까지 이거 다 읽고 머릿속에 숙지해라. 내일 검사한다.”
 
 탁. 자신의 앞에 떨어진 문서. 아니 문서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두꺼웠다.
 숙지를 하루에 다 하기에는 벅찬 양일 텐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고 떠나갔다.
 민호는 겉표지에 있는 제목을 읽어 보았다.
 
 - 최근 10년간 국내외 유통시장의 흐름.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서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명확히 조금 전의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대가이리라. 고의적인 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보아서.
 덕분에 주변에 있는 선배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의외의 눈빛을 하면서. 그러면서 안 됐다는 눈빛도 던지는 몇몇이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여사원이다. 김아영도 그중에 한 명.
 신입사원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눈이 가는 민호였기에 그녀는 안타까운 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도 잘 알 것이다. 후배 사원을 괴롭히는 방식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짓을 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텐데, 가재는 게 편이다.
 특히나 조직 내에서 잘 나간다고 평가받는 종섭일 경우에는 일부러라도 게 편을 하는 가재들이 많았다.
 보통 남녀 가리지 않은 이유가 종섭의 잘생긴 외모 때문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여사원들의 눈빛이 달랐다.
 계속 동정의 눈빛이었다.
 그들은 게 편을 하는 가재가 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민호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그들은 지금까지 상한가 치던 종섭에서 신입사원으로 호감도가 옮겨갔다.
 아영이 이들을 끌고 나간 것은 당연한 일.
 이들 중에서는 언니 역할이다.
 
 “언니, 이 대리 너무 하지 않아요?”
 “그러게… 이제 하루밖에 안 된 신입 사원한테 저런 것을 던져 주다니.”
 
 L&S 그룹은 기업문화가 매우 자유로웠다.
 사내 연애도 허용할 정도였다.
 따라서 호칭은 언니나, 오빠, 그리고 형과 같은 호칭도 자주 있었다.
 그룹 회장이 오히려 그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그 역시도 그런 분위기에서 창업 공신들을 다루어 왔고, 이게 성공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난 갑자기 이 대리의 매력이 뚝 떨어져 버렸어.”
 “어머, 넌 원래 종섭 ‘빠’였잖아. 이거 왜 이래?”
 “아니에요, 오늘부터는 민호 ‘빠’로 살래요. 호호호.”
 
 근무시간의 휴식은 가끔 갖는 일이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길게 수다를 떠는 것은 과히 보기 좋지 않았다.
 나간 목적은 사무실에 커피를 돌린다는 핑계였다.
 해외 영업부에 여 사원은 넷이다.
 그중 아영은 민호와 같은 해외영업 3팀.
 나머지 여사원들이 각 팀의 커피를 가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세 개를 더 가지고 왔다.
 신주호 과장과 이종섭 대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민호의 것.
 
 “자아아, 커피 대령입니다.”
 
 열심히 무언가를 하다가 그녀를 보는 민호.
 의외였나 보다. 빙그레 웃으며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선배의 모습이.
 그녀의 향이 콧속으로 들어오고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고맙습니다, 선배님.”
 “네, 그럼 고생해요.”
 
 그녀가 남긴 여운을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는 민호.
 그러다가 저 앞에 앉아 있는 종섭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그를 째려보는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그가 준 자료에 다시 한 번 집중해본다.
 계속 보는 그의 눈. 그리고 그 시각으로 전달되는 내용.
 이상하게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히는 것 같았다. 다 외워진다. 갑자기 머리가 좋아지는 것일까?
 이상하게 잘 외워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를 보는 종섭은 비웃음의 연속이었다.
 그가 준 서류는 일반 학습지가 아니었다.
 소설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그는 마치 소설책을 넘기듯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분명히 귀찮아서 대충 보는 것인데, 다음 날 그가 꾸중할 명분이 생겼다.
 
 ‘어디 한 번 고생해 봐라.’
 
 그는 아직도 민호가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했다는 사실을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유미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고루하리만큼 정절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바람이 난 것이다.
 
 ‘네가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속으로는 이런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절대 자신을 벗어날 수 없을 유미를 생각하면서.
 설사 그녀가 자신을 떠나가도 상관이 없다.
 지금 만나는 여자는 엔조이 상대가 아니기에.
 아니 어차피 못 먹을 감이면 떠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을 했다. 자신의 성공 가도를 위해서는 그게 낫다고 판단한 종섭.
 그런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자료를 뒤적이고 있는 민호다.
 어느덧 마지막 장에 눈이 가 있었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모든 자료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더군다나 그 자료가 가지고 있는 맹점까지 분석되었다.
 
 ‘아니, 이때에는 왜 미국 진출을 늦추었을까? 분명히 승부수를 띄워도 좋을 상황이었는데….’
 
 남들이 보지 못한 시각까지 커지고 있었다.
 아무튼, 모든 자료를 입력하고 기지개를 살짝 켠 민호.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반나절이 흘러갔다.
 사무실 내에서는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벌써 모두 나가서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 꼬르륵
 
 배에서 나는 아우성.
 이것은 밥을 달라는 것이다.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자료를 볼 생각도 없고, 이미 끝낸 자료를 다시 한 번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L&S 상사의 구내식당은 유통전문 기업답게 음식이 맛있었다.
 식사를 받아들고 자리를 찾는 그의 눈에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을 뻔했던 그녀가 보였다.
 아는 척하지 말라던 그녀의 말을 기억한다.
 그래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는데 그녀 옆에 또 다른 눈과 마주쳤다.
 
 “오빠! 민호 오빠!”
 “어, 지민아.”
 
 신입사원 연수 때 살짝 인사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붙임성이 좋고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 전지민.
 나이는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스물여섯이다.
 아직 파릇파릇한 나이. 겨우 두 살 차이라 자신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거기다 살짝 눈여겨보았지만, 몸매도 훌륭한 것 같았다.
 어느 틈에 그것을 다 확인했을까?
 남자라면 눈이 갈 곳에 갈 수밖에 없고, 파악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더구나 글래머라면 순식간에 사이즈까지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은 남자의 본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쨌든 지민이는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의 친절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여기, 여기 앉아.”
 “응? 일행이 있는데 그냥 저쪽으로 갈게.”
 “아냐, 여기 와. 괜찮아. 괜찮죠? 선배님?”
 
 민호의 눈에 당황하는 유미의 얼굴이 보였다.
 사실 그 역시 불편하다. 그래서 거절하려는 찰나에….
 
 “그래. 괜찮아. 이쪽으로 앉아요.”
 
 자신을 바라보며 자리를 권하는 모습.
 뜻밖이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지민이 살짝 자신의 셔츠를 잡아당겼기에 정신을 차렸다.
 어디를 앉아야 할까? 두 명의 여자가 동시에 자기 옆자리를 추천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민호는 망설이지도 않고 지민의 옆에 앉았다.
 유미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민은 그 귀여운 얼굴에서 나오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옆에 앉은 민호에게 말을 걸었다.
 다 알지만,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질문.
 
 “오빠가 해외영업부라고 했지?”
 “응. 그중에 3팀. 넌 기획팀이지?”
 “기억하네. 하도 정신이 없어서 다 까먹을 줄 알았더니.”
 “뭘. 너도 다 기억하잖아.”
 
 L&S의 사원 연수는 2박 3일이었다.
 L&S 상사 말고도 각 계열사 신입사원이 다 모여서 교육을 받는다.
 그 기간 동기들과 인사들을 나누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회사 생활을 하는지 배웠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과대표를 해봤다는 이유로 민호는 당시 조장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의 프레젠테이션은 매우 중요했는데, 자신이 조장이 된 조원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지민이었다.
 
 “아, 참. 여기 소개해드려야지. 같은 부서에서 일하시는 선배야. 우리보다 일 년 선배.”
 “처음 뵙겠습니다. 김민호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정유미예요.”
 
 처음 보는 게 아니지만 이렇게 한다는 게 좀 우스꽝스러웠다. 더 웃긴 것은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그녀다. 그러나 주변 시선으로 인해 이들은 처음 보는 사이여야 했다.
 
 “선배 예쁘지? 나 하루 만에 친해졌어. 무지 잘해주셔.”
 “아, 그래? 잘 됐다. 하하.”
 
 그녀는 계속 조잘거렸다.
 선천적으로 말이 많은 스타일이다. 붙임성도 좋아서 사실 연수 당시 같이 보내면서 많이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식사를 끝내고 일어섰다.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할 게 있어서.”
 “어? 커피 한잔 해야지.”
 “아냐, 할 일이 있어.”
 “그래? 벌써 일을 맡은 거야? 부럽다. 난 분위기만 파악하라고 해서 심심해 죽겠는데.”
 
 커피 한 잔을 제안하는 그녀를 놔두고 그는 일어섰다.
 그러면서 잠시 유미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그녀도 밥을 먹는데 여념이 없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런 척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는 짐작했다.
 진짜 그녀가 자신이 아는 척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럴 때에는 재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
 
 “나중에 보자. 그럼.”
 “응. 연락할게.”
 
 # 호르몬 작용
 
 인사를 나누고 식당에서 빠져나가는 도중 그는 종섭과 마주쳤다.
 자신이 유미와 밥을 함께하는 것을 본 모양이다.
 그의 표정이 무섭게 변해 있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지만, 뭔가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변명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오후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퇴근할 때쯤 문자가 왔다.
 
 - 잠깐 보자 오빠.
 
 지민이었다. 귀여운 그녀가 이렇게 보자는 데 거절을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일이다.
 
 - 그래. 어디서?
 - 음. 회사 앞에 베아트리체. 아까 못 한 커피 한잔 어때?
 - 응. 알았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친구 녀석이 소개팅 해준다고 연락이 왔다.
 어제 비상계단에서 배터리를 빼는 바람에 받지 못했던 전화였는데 바로 그 내용이었다.
 취직하니 여기저기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조만간 혹시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혼자만의 공상으로 들뜬 민호에게 이번에는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김민호 씨, 잠시 나 좀 보고 가.”
 “네?”
 “아까 내가 숙지하라는 것 다 했지?”
 “하긴 했지만….”
 
 민호는 종섭의 눈에서 ‘불신’을 읽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그 어려운 것이 머릿속에 쏙쏙 잘도 들어왔다.
 원래 예전에도 그렇게 기억력이 좋았었나? 알 수 없었다.
 그냥 직장에 취업하니 스트레스가 없어져 머리가 좋아졌다고 치부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자신이 있었다. 그가 무엇을 물어보든지 간에.
 
 “정말입니다. 그런데 내일 확인하신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민호는 살짝 귀찮았다.
 어차피 막 나가는 후임으로 찍힌 상황.
 될 대로 되라고 생각을 했다.
 
 “맘이 바뀌었어. 오늘 하려고.”
 “저 약속이 있는데요.”
 “약속?”
 “네. 약속이요.”
 
 약속이라는 말에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시작된 눈싸움.
 결국, 이 싸움은 종섭이 이길 수가 없었다. 학교도 아니고 선생님이 나머지 공부를 시키듯 민호를 남길 수는 없었기에.
 
 “좋아. 내일 보자.”
 
 두고 보자는 말로 들렸지만, 민호는 자신 있었다.
 지민이를 만날 생각에 신 나서 그의 앞에서 빨리 사라져 줬다.
 회사를 나오면 회사 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기분까지도.
 그리고 귀여운 얼굴의 지민이를 보려면 더욱 그렇다.
 커피숍에서 그녀는 역시 재잘거렸다. 순수한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약간 요염한 눈빛이었다.
 반반한 얼굴에 두툼한 입술. 그리고 긴 생머리.
 남자에게 꽤 인기가 있을 유형이었다.
 연수 기간에 그녀와 나눈 이야기는 사적인 것도 많았다.
 당연히 젊은이들의 관심사인 연애에 대해서는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가까워진 둘 사이.
 이미 둘 다 서로 임자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녀라면 충분히 여자 친구로서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민호는 오늘 로맨스를 꿈꾸고 있었다.
 더구나… .
 
 “우리 밥도 먹을 겸, 술 한 잔 할까?”
 “술? 좋지.”
 “그럼 나가자.”
 
 그의 예감이 적중했다.
 오히려 그녀의 입에서 술을 먹자는 제안이 나왔다.
 혹시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닐까?
 어쩌면 오늘 좋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그의 예측이 현실화될 수도 있었다.
 이윽고 비어 바로 향하는 그들. 술과 함께 안주를 시켰다.
 맥주가 들어가서 그런지 지민이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물론 조명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많이 마셨다.
 민호도 얼굴도 뜨거워지니 취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사람은 편하게 자신의 마음을 끄집어낼 수도 있었다.
 
 “이제 취직도 했겠다, 오빠는 여친, 나는 남친을 만나기만 하면 되겠다. 그지?”
 “그렇지. 그래서 친구 놈에게 소개팅 부탁했어. 이번 달에 말이야. 어엿한 직장 남이라서 소개팅도 잘 주선이 되는 것 같아.”
 “맞아, 맞아. 나도 친구한테 부탁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나도 소개팅이 있는데. 호호호.”
 
 무엇이 좋은지 그녀는 계속 밝게 웃으면서 조잘거렸다.
 마치 새가 재잘거리는 것처럼.
 웃을 때마다 그녀의 눈이 귀여워 보였다.
 큰 눈은 아니지만 매력적이었다.
 맥주를 마시는 모습. 그녀가 병을 입에 넣는데 왜 야한 상상이 머리에 그려질까?
 민호는 재빨리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야한 상상은 무죄이지만 왠지 모르게 들킬 것 같아서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다시 깔깔거리는 지민.
 
 “왜 그래? 무슨 야한 상상이라도 했어? 호호.”
 “응. 갑자기 막 야한 상상이 드네. 하하.”
 “무슨 생각? 나 야한 이야기 하는 것 되게 좋아하는데.”
 “이야기해줄 수 없는 비밀이지.”
 “핏. 남자가 비밀이 많으면 안 되지.”
 “그럼 여자는 비밀이 많아도 되는 거야?”
 “물론이지. 난 비밀이 많지롱.”
 
 애교 섞인 목소리가 그의 심금을 울렸다.
 술의 탓이다. 술을 마시니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니다. 그녀와 이렇게 시간을 보내게 되니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넌 처음 만난 사람이랑 하룻밤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응? 원나잇 스탠드 말이야?”
 “흠.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어떻게 생각해?”
 “난 못할 것 같은데. 최소한 마음이 통하고 나서 같이 자야지.”
 “왜? 그런 경험 있어?”
 “아… 아니.”
 
 그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어제 생각이 나서 지민이에게 물어본 것이다.
 갑자기 유미가 떠올랐다. 잘못하면 그녀와 만리장성을 쌓을 뻔 했는데, 술을 마시고 취기가 도니 또 그 일이 생각났다.
 
 “오빠는 부모님이랑 같이 산다고 했지?”
 “응. 너는 떨어져 산다고 했나?”
 “나도 집밥 먹고 싶은데 말이야.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맨날 먹으면 그것도 질려. 난 자유가 좀 필요해. 하하.”
 “집 떠나면 고생이야. 있을 때 잘하라고.”
 “떠나서 한 번 고생을 해보고 싶어서 말이야.”
 
 이런저런 대화가 마음의 거리를 좁혔다.
 말이 통한다는 느낌. 남녀 간에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일어섰다.
 분위기가 잡히는데 일어서는 것은 혹시라도 사고를 칠까 봐서이다.
 왠지 그녀의 눈빛이 그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어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에 모든 행운을 다 빼앗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종섭에게 찍힌 것도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일어선 것이다.
 점점 익어가는 분위기에 살짝 물을 끼얹기 위해서….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벌써? 아쉽다. 아무도 없는 아파트는 가기 싫은데.”
 “늦었어. 너무 늦으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피곤해.”
 “피. 무슨 남자가 이래. 원래 여자가 먼저 가야 한다고 이런저런 핑계로 붙들어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좀 바른 생활 사나이라서 말이야.”
 “멋없이 사는구나.”
 
 그래도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니.
 바에서 나오니 자신의 팔에 지민이 팔짱을 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 마치 연인과 같았다.
 그 바람에 그의 팔에 촉감이 왔다.
 그녀의 가슴은 생각보다 더 풍만한 것 같았다.
 아직 초봄이라서 얇지 않은 옷을 입었기에 인식하지 못했는데 여자 경험이 있는 그는 대충 그녀의 사이즈를 알 수 있었다.
 
 ‘C컵은 되어 보이는데?’
 
 이 생각을 하자 갑자기 자신의 신체적인 변화가 감지되었다.
 밑을 보니 정장을 입어서 바로 표시가 났다.
 
 ‘아, 미치겠다. 다른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는 빨리 다른 생각을 했다.
 오늘 종섭이 준 자료를 머릿속에 넣어 놓았는데 내일 테스트를 보기 위해서 다시 꺼내 보았다.
 잘 숙지가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좋아진 머리에 그 자신도 놀랐다.
 
 “오빠, 우리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응? 너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뭐 이 정도로. 편하게 마실 곳이 떠올랐단 말이야.”
 “그래? 어딘데?”
 “우리 집.”
 
 민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집에서 술을 마시자고 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녀의 눈에 묘한 빛이 어렸다.
 그것을 파악하기에는 그는 아직 순진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은 더 있었다.
 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작용.
 그것은 여인을 유혹하는 강력한 페로몬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의 매력에 점점 빠질 수밖에.
 
 “왜 그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오늘 말도 잘 통하고, 나 집에서 너무 심심하단 말이야. 지금 아홉 시밖에 안 됐어.”
 “알았다. 그럼 맥주 두 병만 사간다. 많이 안마시기로 약속.”
 
 새끼손가락을 꺼내는 민호.
 그녀가 그 고리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이런 약속이 과연 지켜질지는 모른다.
 집에서 나오면 보통 직장 근처에 집을 얻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 아파트를 얻어주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집이 꽤 잘 사는 것 같다.
 
 “우와 집 좋다. 몇 평이야?”
 “24평. 혼자 살기에는 좀 크지?”
 “넓게 살면 좋지 뭐.”
 “잠시만 과일 좀 깎아 올게.”
 
 그녀가 부엌으로 갈 때 그는 소파에 앉았다.
 아파트를 둘러보니 역시 여자가 사는 집답게 깔끔했다.
 아니면 구한 지 얼마 안 된 곳이라서 깨끗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집 어때?”
 “깨끗한데. 나도 이런 데서 자고 싶다. 내 방은 워낙 지저분해서 말이야.”
 “그럼 자고 가. 집도 넓은데 뭐.”
 
 민호는 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진도가 빨라도 될까?
 
 “너 막 그런 말 아무 남자한테 던져도 돼? 나 늑대로 변할지도 몰라.”
 “아까 바른 생활 사나이라며? 늑대로 변한 모습을 보여줘도 상관없어.”
 “어어, 정말 방심하다가는 크게 당한다.”
 “응. 지금 방심 중이야. 오빠한테 마음을 열고 있으니.”
 
 술을 많이 먹어서 이러는 것일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호감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이렇게 적극적이니 덜컥 겁이 났다.
 물론 연수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을 따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우연히 오늘 만났고, 커피와 술로 이어진 지금.
 이렇게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말문을 닫았다.
 미처 그녀가 이런 식으로 대응할지 몰라서였다.
 그런 그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민.
 그녀의 귀여운 얼굴에 색기가 도는 것 같았다.
 둘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던지는 그녀의 말.
 
 “나 원래 이런 여자 아니야.”
 
 # 숙제 검사
 
 꿈을 꿨다. 아주 야한 꿈이었다.
 꿈에서 빠져나오면서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크고 말랑말랑하고… 거기다 부드럽기까지 했다.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헉….’
 
 민호는 입을 재빨리 막았다.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시간을 보니 새벽 여섯 시.
 지금 집에 들어가면, 재빨리 씻고 나올 수 있었다.
 지민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탈출이 먼저였다.
 조용히 일어나서 그녀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취업한 지 이틀 만에 외박하는 자신에게 잔소리 신공을 늘어놓으시는 어머니.
 그것을 참아가며 겨우겨우 지옥철을 뚫고 다시 출근했다.
 입사 3일 차. 취업이라는 태산을 넘으면 태산을 볼 줄 알았건만, 민호의 현재는 만만치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 종섭 때문이다.
 전날 그가 내준 미션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제만 해도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한 민호였는데…
 
 “김민호 씨!”
 “…….”
 “이제 아예 대답도 안 합니까?”
 
 유미가 만나주지 않아 생기는 허탈감에 더더욱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자유로운 기업문화가 넘친다는 L&S 그룹이 원래 이런 곳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그래도 그의 갈굼이 끝나자 잠시간 맞이한 평화.
 오늘 저녁까지 다시 외우라고 말한 종섭을 뒤로하고 다시 <최근 10년간 국내외 유통시장의 흐름>이라는 자료를 보는데, 어제와는 달리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결국, 포기했다. 종섭이 갈구든 말든 차라리 맘 편하게 있기로 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 벌써 점심시간.
 민호는 재빨리 밥 먹으러 내려갔다.
 서둘러 먹고 올 생각이다. 잘못하면 지민과 마주치게 되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변명했다.
 그녀를 피하는 게 아니라,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속으로 외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굳이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어차피 어제 과음했겠다, 근처 회사의 해장국 집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유미가 앉아 있었다.
 호랑이를 피하려다가 여우를 만난 건지, 아니면 호랑이보다 더한 구미호를 만난 건지 모르겠다.
 
 “아… 안녕하세요….”
 “…….”
 
 유미는 자신의 인사를 받고 얼굴을 붉혔다.
 만날 때마다 변하는 그녀였다. 어떤 게 그녀의 본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래도 자신에게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식사하러 오셨나요?”
 “아… 네, 어제 과음해서….”
 “그럼, 같이 먹어요. 저도 오늘은 구내식당에 가기 싫어서….”
 
 왠지 그녀가 오늘 구내식당에 가지 않은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녀를 본 게 혹시 운명이나 인연 아닐까?
 헛된 망상은 그만해야겠다. 어제 지민과 사고치고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계속 흐르는 정적.
 그것을 먼저 깬 것이 바로 유미였다.
 
 “저 때문에 괴롭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미안했어요.”
 “아… 네. 하하하. 괜찮습니다.”
 
 종섭에게 고문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해외 영업부에 그녀의 동기라든지, 아는 사람이 전해주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다시 시작된 정적. 다행히 해장국이 나왔다.
 얼굴만 보면 이런 음식이 아닌 서구적인 취향 같았는데, 아주 잘 먹는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식사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해장국은 맛있었다. 다행히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먹기에.
 다 먹은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 헤어지느냐가 관건.
 
 “아, 맛있다.”
 “제가 낼게요.”
 “네? 아니, 저….”
 
 계산대와 가까운 곳에 앉은 유미가 재빨리 일어서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저렇게라도 해서 자신에게 든 미안함을 해소하려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 말을 뱉었다.
 
 “제가 다음에 술 살게요. 하하….”
 
 @@@
 
 “다음에 술을 산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깊은 후회 중인 민호.
 자기도 모르게 허허 웃음부터 나왔다.
 전형적인 작업 멘트였다. 그것도 밥을 얻어먹은 찌질남의 허세.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는 않았지만,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도 계속 떠오르는 어색한 상황.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종섭에 의해서 현실로 돌아왔다.
 
 “김민호 씨….”
 “네.”
 “자료 안 보십니까?”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반항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다. 순간, 그의 머리에 자료의 모든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기한 현상이었다. 시험해보고 싶을 만큼.
 
 “다 숙지했습니다.”
 “…….”
 “지금 검사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종섭의 눈을 보고 말했다.
 종섭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막 나가자는 거죠?”
 “아뇨.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전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민호의 눈에 다른 사원들이 보였다.
 모두 안 됐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얼마 못 버티겠군….’이라는 표정을 내보였다.
 여사원들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그러지 말라고 민호에게 암시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민호는 종섭의 눈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신호했다.
 뭐든지 물어보라고.
 결국, 종섭은 안 되겠다는 듯이 그의 자리에 와서 자료를 들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유통개방에 따른 국내 유통 산업 변화에 관해서 이야기해봐.”
 “1997년 국제 개방에 따라 제정된 유통법이 시작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기는 하지만, 급격한 환경 변화에 구조 개선을 고도화하고….”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질문하는 종섭이 당황할 정도로.
 아침과 다른 오후.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 기억력은 쓸 만하군요.”
 “응용력도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바뀐 유통발전법을 조금만 이용했어도, 해외시장에 더 빨리 진출했을 겁니다. 떠 먹여주는 밥을 받아먹기만 한 결과, 기형적인 유통시장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만. 됐습니다.”
 
 갑자기 위기감을 느껴서였을까?
 종섭은 그가 계속 말하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민호는 살짝 웃으며 종섭의 등 뒤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뭐 다른 숙제 없습니까? 다 해낼 수 있습니다.”
 
 @@@@
 
 그 이후 민호는 별다른 미션을 받지 못했다.
 사실 신주호 과장이 없을 때, 왕이었던 종섭이 개인적인 기분으로 자신을 괴롭힌 것이다.
 자주 반복하다가는 오히려 민호가 뛰어나다는 것을 상급자에게 알리는 일이 되니, 중단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따라서 민호에게 주어지기 시작한 일은 매우 간단한 업무들.
 처음에는 데이터를 옮기는 일을 하다가, 그 다음에는 몸 쓰는 일이 찾아왔다.
 
 “김민호 씨, 저 박스 좀 자재실로 옮겨 줘.”
 “김민호 씨, 복사기 위치 좀 바꿔야 하는데….”
 “김민호 씨….”
 
 이제 종섭만 그를 부려 먹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다른 선임들이 ‘김민호 씨’라는 이름을 불러대며 몸을 쓰는 잡일을 시켰다.
 민호는 성질이 났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입사원에게 있는 게 열정과 패기였다.
 무엇을 시켜도 다 해주겠다는 다짐. 그래서 묵묵히 일했다.
 다만 머리로 하는 일이 아닌 몸으로 하는 것을 하다 보면, 떨어트리기 일쑤, 거기다가 우왕좌왕 실수 연발이었다.
 그때마다 다가와서 그에게 말로서 채찍질을 가하는 종섭이다.
 
 “도무지 시킨 일을 제대로 못 하는군. 어떻게 입사한 거야?”
 
 매번 무역용어를 헷갈려 말하는 바람에 ‘개념 없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그뿐인가! 스스로 챙겨야 할 서류는 왜 그렇게 많은지.
 이런 민호의 이야기가 남 일 같이 느껴지겠지만, 사회 초년생이라면 흔히 겪는 어려움이다.
 새로움과 어려움의 연속인 사회 초년생.
 그는 그래도 묵묵하게 버텨 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렵게 얻어낸 직장에서 떨어져 나갈 생각은 없다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3일째의 일과가 끝이 났다.
 목요일이 지나고 금요일이 되었을 때, 민호는 비로소 왜 직장인이 주말을 기다리는지 알게 되었다.
 드디어 오늘 하루만 버티면 종섭의 얼굴을 안 볼 수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러려면 오늘 하루를 잘 버텨내야 하는데, 오자마자 종섭은 자신에게 몸 쓰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일부러 만들어 오는 게 분명했다.
 오늘은 아예 물류창고로 가서 분류작업을 도우라고 지시했으니.
 심지어 그는 민호에게 오늘 퇴근할 때까지 거기서 일하라고 말했다.
 민호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종섭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기분이 좋았다.
 몸 쓰는 일이 피곤하기는 하지만, 아무 눈치 안 본다는 게 속 편해서 시간이 잘 갔다.
 다만 멍하니 머리가 다시 텅 비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일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분명 어제까지는 지하철 노선을 다 외운 머리가, 창고에 있는 물건 위치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줄이야!
 민호는 잠시 종섭이 자신을 시험했던 자료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그렇게 또렷했던 내용이 어렴풋하게만 기억이 났다.
 그나마 그것도 시간이 갈수록 긴가, 민가로 바뀌고 있었다.
 이렇게 머리가 휙휙 좋아졌다가 나빠질 수도 있을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이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느라고 회사를 나오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빠!”
 
 이제야 귀에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지민이었다.
 그녀가 유미의 팔짱을 끼고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어… 안녕.”
 
 민호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순식간에 두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하나는 밝았고, 다른 하나는 무표정이었다.
 밝은 사람이 지민이었는데, 아예 자신에게 와서 특유의 귀여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가는데, 같이 갈래?”
 “응?”
 
 민호는 뜻밖에 제안에 잠시 고민했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한 명은 같이 호텔까지 가서 자신의 회사 생활을 꼬이게 한 직접적인 원흉(?)이었다.
 다른 하나는 우발적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낸 여자. 민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에게 술 마시자는 그녀를 보며 오히려 속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정리가 필요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할 일이 있거든. 다음 기회에 보자. 하하.”
 
 잠시 지민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것을 보니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집에 와서 전화를 들고 지민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받지 않은 그녀.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라서, 결국, 자신과 그녀의 관계 정립을 나중으로 미뤄야만 했다.
 그렇게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는 복잡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 그 날 있었던 일.
 
 직장인들이 자주 걸리는 월요병.
 민호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일주일이 지나고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익혔다고 판단한 종섭은 그에게 업무지시를 했다.
 해외 영업부는 주 업무가 해외의 기업을 상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어는 필수였다.
 영문과를 나온 그이지만 바다 밖으로 나가본 것은 제주도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당장 회화를 익히라고 주문을 했다.
 영문과를 나오면 다 영어를 잘하는 줄 아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건지….
 과외나 학원을 알아봐야 할 것만 같았다.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의 여유는 걱정에서 시작되어 걱정으로 끝났다.
 이제 민호의 아지트가 된 비상구의 계단.
 생각을 끝내고 계단에서 일어서려고 하는 그의 귀에 비상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보는 눈이 있는데?”
 “유미야, 너야말로 왜 이러니? 우리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것 아니었어?”
 “이미 끝났는데 무슨 소리야? 다른 여자랑 잔 사람이 무슨 얼굴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
 “너는? 너도 다른 남자랑 잤다며?”
 “맞아. 그러니까 우리 끝내자.”
 “안 잔 거 다 알아. 나 화나게 하려고 한 것 안단 말이야.”
 “화나게 한 것 맞지만, 그게 사실인 것도 맞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호는 속으로 웃었다.
 
 ‘저 여자가 이제 없는 데서 나를 파는구나. 혹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 대신 종섭에게 복수해주는 느낌이었다.
 종섭은 계속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그녀에게 화를 내는 상황.
 솔직히 쌤통이었다.
 문제는 민호의 전화가 오늘도 역시 눈치 없이 군다는 것.
 
 -지이이이잉.
 
 다행히 진동으로 해 놓았다.
 그는 지난번 일로 버릇이 생겼다.
 비상구 안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휴대전화기 진동상태를 확인하는 일. 민호는 허벅지에 울리는 진동을 느끼면서 계속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내가 너를 왜 몰라? 나에게 몸을 허락하지도 않은 애가 처음 본 놈이랑 잤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야?”
 “이제부터 나 가치관을 바꾸기로 했어. 왜냐하면, 그 날 좋았거든. 생각해보니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누구처럼 바람도 안 피울 것 같고, 얼굴도 그만하면 됐고.”
 “유미야, 제발 좀. 내가 잘못했다고 하잖니?”
 “나도 제발 좀.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말자.”
 “정말 이럴 거야?”
 “앞으로 나 아는 척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너 정말?”
 
 이제 진짜 화가 난 모양이었다. 험한 말이 나오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깨닫고,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하라지 않습니까?”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비상구 안에서 충분히 들릴만한 소리다. 정적이 흘렀다.
 움찔. 잠시 상황을 파악하려는 종섭. 위를 올려다보니 민호가 바라보고 있었다.
 
 “너, 거기서 뭐 해?”
 “여기 원래 제 자리입니다. 오늘도 저번에도 그래서 제가 원래 먼저 와 있었다고요.”
 
 민호는 계단을 내려왔다. 어차피 찍힌 몸, 더 찍히든 말든 상관없다는 심리상태가 그를 막 나가게 했다.
 잠시 후 마주 선 두 남자.
 유미는 양쪽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종섭은 민호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너? 왜 참견이야?”
 “참견할 만해서 참견하는 겁니다. 저랑 잤다고 유미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 말 사실이에요.”
 “뭐… 뭐?”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거 맞죠?”
 “너, 죽고 싶어?”
 “죽이시던지요.”
 
 눈과 눈이 부딪혔다. 눈싸움에서 전혀 질 생각이 없는 민호.
 종섭은 주먹을 꽉 쥐며, 갑자기 왼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민호의 키가 그보다 더 컸다.
 약 180은 족히 넘어 보였다.
 하지만 멱살을 일부러 잡혀주는 것 같았다.
 
 “먼저 때리시겠다? 해보시죠.”
 “이… 이….”
 
 주먹을 올리는 종섭. 진짜 때릴 듯한 기세였다.
 부르르 떠는 그의 주먹이 망설임을 담고 있지만, 눈빛은 몇 번이라도 그를 치고도 남았다.
 민호는 상대가 절대 자신을 때리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느낌이다. 남자가 남자를 보면 알 수 있는 느낌.
 오히려 유미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말릴까 말까 고민을 하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쩌면 그녀가 말리면 더 화를 낼까 봐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멱살을 놓고 비상구의 문 쪽으로 나가면서 할 말을 뱉는 종섭.
 
 “됐다. 내가 참는다. 하지만 너, 편하게 직장생활 못 할 거야. 각오해.”
 “선배도 참 쪼잔하시네. 맘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첫날부터 꼬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쾅.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종섭이 할 말만 다하고 나가는 문에 대고 민호가 한 말이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유미와 그 둘뿐이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그런데 헷갈려요. 반말했다, 존댓말 했다. 나이는 제가 한 살 더 위인데….”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농담이 최고였다.
 그리고 그의 이 시도는 성공했다.
 유미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으니까.
 
 “사회에서는 선배가 왕이야.”
 
 그 미소를 본 민호의 머리가 맑아지고 있었다.
 
 @@@@
 
 이상한 현상이 사무실에 복귀한 이후에 민호에게 생겼다.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째려보는 종섭의 눈빛이 따가웠지만, 갑자기 사람들이 해외 바이어와 영어로 대화하는 게 들렸다.
 
 “인보이스는 내일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같은 팀에 있는 아영이는 미국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어민 수준으로 대화하고 있는데, 민호의 귀에 쏙쏙 그녀가 이야기하는 게 박혔다.
 저쪽에서는 신주호 과장이 낑낑거리며 전화로 응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그가 가장 영어 실력이 낮은 것 같았다.
 갑자기 민호와 눈이 마주친 신 과장은 전화통화를 하면서 손짓을 했다.
 민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정말 부르는 것 맞느냐고.
 빠른 속도로 신 과장의 머리가 아래위로 올라가고, 민호가 다가가자 수화기를 가리며 이렇게 말했다.
 
 “김민호 씨, 영문과 나왔다며? 난 도통 못 알아듣겠어. 내가 좀 옛날 사람이라 영국식으로 배웠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민호는 그에게 흔쾌히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죄송합니다. 담당자가 잠시 바쁘셔서 제가 전화를 바꾸었습니다.”
 (네. 세금 계산서 때문에 문의 드리는 겁니다.)
 
 세금 계산서는 간단한 거였는데, 신 과장이 이 정도로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신 과장에게 눈을 크게 뜨니, 그가 이면지에 적어서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 영세율 세금 계산서가 필요한지 물어봐 줘.
 
 알고 보니 세금 계산서 자체는 의사소통할 수 있지만, 더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신 과장이었다.
 명색이 해외 영업부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가 여기서 버틸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나중에 확인해야 할 일이고, 자기 일도 아니었다.
 일단 민호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영어 단어가 입력되는 현상.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게 듣고 말하기가 가능했다.
 그는 무늬만 영문과였다. 그래도 예전에 배웠던 가락이 있었는데, 지금 그게 다 기억이 나는 것은 웬일일까?
 
 “고마워.”
 “아… 아닙니다.”
 
 갑자기 신 과장의 영웅이 된 민호.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새로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특히, 여사원들의 눈에는 하트가 뿅뿅 그려졌다.
 하지만 민호는 자리에 돌아와서 계속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이상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이 머리가 맑아지며 모든 것이 쏙쏙 들어왔고, 어떤 날은 다시 평소와 같았다.
 사실 평소와 같다는 게 진짜 민호의 모습이었다.
 즉, 이상하다는 의미는 갑자기 머리가 좋아지는 느낌에 해당했다.
 지금이 그렇다. 또다시 지난번에 종섭이 괴롭히려고 준 자료를 떠올려보자 금세 머릿속에 모든 내용이 그려졌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집에 돌아온 그 날 저녁까지 반복되었다.
 머리가 좋아진 참에 모든 것을 밝히려고 노력한 끝에, 비상구에 들어갔을 때와 나왔을 때가 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 과거를 추적한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유미….”
 
 민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문제는 지금 밥을 먹고 있었다는 것.
 
 “그게 무슨 소리니? 유미라니?”
 “오빠 여자친구 생겼어? 그리고 차였어?”
 “아… 아니에요.”
 
 자신도 모르게 밥 먹다가 나온 이름이었다.
 하필이면 부모님과 여동생 앞에서.
 이제 취직도 했겠다, 엄마와 여동생이 그의 여자관계에 대해서 부쩍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민호야. 너도 알겠지만, 남자란 아래를 조심해야 한다. 몽둥이를 잘 못 휘두르면… 으악!”
 
 아버지는 민호에게 충고하려다가 어머니의 응징을 당했다.
 옆구리를 부여잡는 것으로 보아서 꼬집힌 것 같았다.
 
 “딸내미 앞에서 말 잘하시네요. 네?”
 “얘들도 알건 다 아는 나인데….”
 
 전형적인 공처가 모습인 아버지를 뒤로하고 민호는 웃으며 일어섰다.
 더 있어봤자 쓸데없는 말만 오갈 것 같아서 잘 먹었다고 말하며 방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을 이었다.
 어차피 거의 결론이 났다.
 유미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머리가 좋아진다는 기현상.
 그것을 발견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다만 시간제한이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자신의 기억을 역추적해도 애매했다.
 언제부터 천재에서 범재로 변하는지는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명확한 시간 측정이 불가능했다.
 일단 24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는 민호.
 기억을 역추적 했을 때, 유미를 만난 후 48시간 이후에 해당할 때 곤란을 겪었던 게 생각났다.
 바로 지난주에 종섭이 숙지하라는 자료를 말하지 못했을 때였다.
 이제 가설을 세웠으니, 실험이 필요했다.
 대략 아까 유미를 본 시간이 점심 먹고 난 후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
 내일 1시가 되어 기억력 감퇴 현상이 온다면?
 그럼 24시간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그 사이에 유미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그는 최대한 유미를 피해 다녔다.
 어차피 해당 부서가 층이 달라 만나기 쉽지 않았다.
 만날 확률은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일 가능성이 있는데, 요즘 유미는 밥을 먹으러 오지 않는다.
 그래도 몰라서 점심까지 거르려고 마음먹은 민호.
 최대한 그녀를 안 만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의 계획을 초 치는 신 과장.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나가는 사이에 그가 서류 봉투를 내밀며 심부름을 부탁한 것이다.
 
 “김민호 씨. 나가는 길에 이거 바로 아래층, 경영전략부 기획팀에 갖다 주세요. 조 과장이 어제 술집에서 놓고 갔더라고.”
 “네?”
 
 하필이면 실험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군대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상명하복이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사적인 일은 과장님이 해주실래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종섭에게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유미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든지 기획팀으로 심부름시키실 일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과장님.”
 “잉? 왜? 아아, 혹시 누구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네? 아, 네. 하하하….”
 
 L&S 그룹은 사내연애를 크게 규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권장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민호.
 대충 얼버무리고 밖으로 나갔다.
 뒤통수에는 종섭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든 고소한 기분도 잠시. 일단 오늘의 실험을 전면 취소해야 하나 고민한 민호는 갑자기 전화기를 들었다.
 
 - 지민아….
 
 지민에게 문자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물건은 기획팀의 조 과장에게 가면 된다.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달하면 유미와 마주치지도 않을 것 같았다.
 
 - 응? 오빠. 아… 미안,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새로 하느라.
 - 아, 그랬구나.
 
 생각해보니 지민과의 일도 중요했다. 아직 그녀와 해결하지 못한 일도 남아있었기에.
 그래서 조 과장한테 물건 전달해 달라고 문자했다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못된 놈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민호의 문자 내용은.
 
 - 혹시 잠깐 시간 돼?
 - 응? 언제?
 - 지금. 혹시 돼?
 - 응….
 
 민호는 그녀와 만나는 장소를 늘 가던 비상구로 정했다.
 설마 완전히 끝난 종섭과 유미가 다시 만날 일은 없다고 확신하면서.
 잠시 후 지민이 들어왔고, 그녀는 그 귀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민호를 불렀다.
 
 “오빠….”
 “어. 그래.”
 “왜 불렀어?”
 “아, 이것 좀 조 과장님한테 전해주고, 또… 할 말도 있고.”
 
 봉투를 건네주면서 그는 살짝 말끝을 흐렸다.
 막상 지민을 보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은 그녀에게 치명적일 것 같았고, 그렇다고 대뜸 책임지자고 하기에는 아직 서로에 대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의 망설임을 읽었는지 지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날 아무 일도 없었어.”
 “……?”
 # 30 시간의 비밀
 
 잠시 멍하니 지민의 말을 곱씹어 보는 민호.
 생각해보니 그날 그녀와 자신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당황해서 그냥 빠져나온 게 실수였다. 오히려 당당하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어야 했었는데.
 
 “그럼 우리가 잔 것은 잔 게 아니야?”
 “잔 것은 맞지만, 나한테는 아쉽게도 그런… 잔 게 아니지, 뭐.”
 
 귀여운 표정으로 말하는 지민. 하지만 민호는 속이 후련했다.
 
 “휴우, 살았다. 난 너랑 같은 침대에서 자 가지고….”
 
 띠리리리링.
 민호의 말을 이어지지 않았다. 전화벨 소리가 들렸고, 화들짝 놀란 두 남녀가 위를 보았을 때…
 황급히 전화기를 들고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선임, 아영이가 눈에 보였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아영이 거의 모든 것을 들었다는 데 민호는 오른손을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
 직장 생활… 참, 복잡했다. 자신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더구나 의혹도 풀리지 않았다.
 비상구에서 어색한 미소를 남기고 찜찜한 기분에 점심까지 거르며 사무실에 앉아 있던 민호.
 현재시간 두 시. 여전히 그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이제 어렴풋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느낌을 알았다.
 만약 이런 행운을 고등학교 때 맞이했다면, 그는 자신의 대학 레벨을 더 올릴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느낌에 잠시 책상 밖으로 시선을 빼서 바라보니 아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고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솔직히 자신은 상관없었다. 지민이가 문제였지.
 아직 한국 사회에서 이상한 소문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무 일도 없었지만, 한 침대에서 같이 잤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그녀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결국, 퇴근할 때 잠시 아영에게 다가간 민호.
 
 “저….”
 “네?”
 
 잠깐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예쁜 미소로 다시 민호를 보며 낭랑한 목소리를 내는 아영.
 그녀가 말할 때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말씀하세요, 민호 씨.”
 “잠시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으세요?”
 “아….”
 
 그녀가 먼저 퇴근할까 봐 말한 민호였다.
 아직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당연히 ‘저놈 뭐야?’라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반면, 여자들의 눈에 아영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이 새겨졌다.
 
 “긴 시간은 아니니까… 잠시만요.”
 
 간절함이 통했을까?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를 좋아하는 많은 남자는 좌절감과 실망에 폭풍처럼 퇴근하고 있었다.
 그 부산함에 주위를 둘러본 민호. 자신을 차가운 웃음으로 보는 종섭이 눈에 띄었다.
 바람둥이의 눈에는 바람둥이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작업을 거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어차피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지금은 빨리 아영에게 비밀유지에 대해 부탁할 상황.
 그런데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왜 이렇게 갈 곳이 없는 것일까?
 L&S 상사 주변에는 L&S 상사 사원들이 쫙 깔렸으리라.
 비밀로 묻어 둘 일을 자신이 공개할 우려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 사람들로 가득 찬 커피숍이 보이며 점점 더 많이 걷게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직장 선임을 계속 걷게 하다니. 짜증이 나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눈치 챘는지 아영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민호 씨.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까.”
 “네? 아, 네….”
 
 일단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물론 완전히 믿을 수 없긴 했지만, 최소한 안심이 되었다.
 더구나 그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그녀는 웃으며 그의 불안감을 완전히 해결했다.
 
 “나중에 한턱 쏴요. 그럼 돼요. 사실 저…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 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90도 인사는 이런 것이다. 바로 민호가 그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것도 몇 차례나.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이 다 한 번씩 쳐다보니, 아영이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며 그를 잡았다.
 
 “그 정도만 하세요. 별것도 아닌데… 그만… 해요.”
 
 민호의 팔을 붙잡은 순간 그녀의 얼굴은 매우 빨개졌다.
 마치 능금처럼. 단순히 무안해서 빨개진 게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민호는 알지 못했다. 다시 그녀를 당황하게 해서 또 미안할 뿐.
 다만 잠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가 이상해서 사과하려 했다.
 
 “제가 또 실수했군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그럼 가볼게요.”
 “네, 다음에, 아니 이번에 월급 타면 꼭 한턱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아영.
 몸을 돌려 황급히 떠나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옮겨보지만, 이상하게 뒤를 보고 싶은 마음.
 그래서 뒤돌아보니 그가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호는 손을 들어 자신에게 흔들었다.
 아영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한 다섯 걸음 갔을 때, 다시 뒤돌아보는 그녀.
 무엇에라도 홀린 듯이 민호의 얼굴이 또 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볼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을 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민호였기에.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약속을 깨고 그와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다.
 한 턱을 지금 내라고. 아니 돈이 없는 경우 자신이 내겠다고 말하면서.
 만약 그녀에게 도의적으로 지조를 지킬 남자 친구만 없었다면, 진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마음을 먹고 다시 가야 할 길을 가는 아영.
 
 신기한 현상은 민호에게도 일어났다. 사실 그는 전혀 눈치 채고 있지 않은데, 지하철만 타면 주변에 여자들이 접근했다.
 늘 퇴근 시간이라 혼잡하다고 생각하며 치부했지만, 아침에도 그러더니 저녁도 마찬가지.
 
 ‘내일부터는 아예 일을 만들어서 야근해야겠다.’
 
 퇴근 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차를 사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그런데 두 정거장을 갔을까?
 갑자기 여자들이 그를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도 자신의 몸을 밀착하던 여성들은 조금이라도 그와 닿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앉아 있는 남자들은 이들이 이상해 보였다.
 저 평범하게 생긴 남자에게 붙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떨어지려고 하는가?
 덕분에 한 쪽만 완전히 밀집되어 있고, 다른 쪽은 살짝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는 전체적으로 다시 밀집되기 시작했다.
 민호는 이때 늘 하던 지하철역 외우기를 속으로 하고 있었다.
 가던 곳이야 머릿속에 잘 그려졌지만, 요즘은 서울부터 경기 일대까지 다 외웠다.
 그러나 갑자기 끊기는 현상. 그의 표정이 바뀌며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삼십오 분이다.
 유미를 접하지 않은지 약 30시간으로 추정된다.
 집에 도착해서 그는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첫째, 유미를 만나면 자신의 머리가 좋아진다. (이유는 모른다.)
 둘째, 이것은 시간제한이 있다. (오늘 확인한 결과 30시간.)
 일단 여기까지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에게 행운이 온 셈이다. 한 여자를 본다는 것 하나만으로 비록 시간제한이 있지만, 천재가 될 수 있으니.
 전에 자신이 영어로 해외에 있는 바이어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뿐만 아니라 종섭이 준 자료의 맹점을 파악하며 사업적인 역량 또한 높아진 것도 경험했다.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장밋빛으로 변할 것 같은 기분에 잠도 못 자는 민호.
 선잠을 잔 채로 다음날 일찍 출근해 가장 먼저 기웃거리는 곳이 바로 기획팀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시간을 보니 7시 50분이었다. 당연히 누구도 출근하지 않을 시간.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컴퓨터를 켰다.
 지금 민호의 멘탈은 뭔가 할 수 있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상태.
 이따 시간에 맞춰서 유미를 한 번 보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마음에 컴퓨터에서 할 일을 찾았다.
 그런데 행운도 함께 찾아오는 것 같았다.
 저쪽에서 나이 지긋한 노신사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민호는 그를 발견하고 일어서서 깍듯이 인사했다.
 박상민 사장이다. L&S 상사 안판석 회장의 친구라고도 알려졌고, 그룹의 실세라고도 불리는.
 그는 반백의 머리에 인자한 미소로 민호를 보며 말했다.
 
 “늘 이 시간에 출근하나?”
 “네? 네, 그렇습니다.”
 
 거짓말이지만, 이게 또 기회였다. 높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일단 말하고 내일부터 이 시간에 계속 출근하면 되니 말이다.
 
 “자네 이름이… 김민호….”
 
 자신의 사원증을 보고 이름을 머릿속에 입력하는 것으로 보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민호. 올해 이 회사에 입사해서 종섭을 만난 것 빼고는 안 풀리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역시 젊음이 최고야. 또 보세.”
 “네! 들어가십시오!”
 
 민호는 그가 등을 돌렸지만, 여전히 90도로 인사했다.
 확실히 얼굴과 이름 도장을 찍었다고 생각하며 희희낙락.
 그리고 앉아서 아까 찾던 것을 계속 찾았다.
 문제는 머리가 평범해지니 어떤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
 아직 신입사원인 그가 L&S 상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있으니까 사무실에 사람이 차기 시작했다.
 사무실의 꽃 여사원들도 왕림했고, 그중 최고 미인인 아영도 도착해 그를 한 번 힐끔 보고 자리에 앉았다.
 
 “일찍 왔네요.”
 “네? 네. 오셨습니까?”
 
 모두 한마디씩 할 때마다 민호는 씩씩하게 답했다. 그리고 이제 유미가 오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아래층으로 잠시 내려간 민호.
 맘이 급해서 비상구를 이용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시간이 약 8시 45분쯤.
 역시 그의 생각이 맞았다. 아니 정확하게 유미가 오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타이밍이었다. 심지어 자신과 눈이 마주치며 미소까지 보여주었다.
 어쩌면 여사원 중 가장 예쁜 것 아닐까 생각해보는 민호였다.
 문제는 그녀 옆에 지민이 붙었다는 것.
 아직은 불편해서 황급히 등을 돌리며 다시 위층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면서도 느끼지만, 머리가 좋아지는 기분이란 이런 거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자신감이 생기니 눈빛도 달라졌다.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방금 출근한 2대 8 가르마 신주호 과장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출시한 L&S 라면의 미주판매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 기획안
 
 L&S 상사의 해외 영업부 3팀은 주로 식품을 관장했다.
 최근에는 미주 판매에 집중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L&S의 스낵이나 껌 등은 국제 경쟁력이 없었다.
 못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만큼 만들 수 있기에, 큰 수익을 내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이는 L&S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른 회사 제품도 다 마찬가지.
 그나마 경쟁력이 있는 것이 라면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L&S의 주력 상품이 아니라서 국내에서도 다른 식품 기업에 밀리는 상황.
 그래서 차라리 미국 수출용으로 승부를 걸 계획이었다.
 회의시간에 주로 나온 이야기였는데, 그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이제야 굿 아이디어가 떠오른 민호.
 그러나 그의 자신감 넘치는 제안은 신 과장의 무시로 결말을 맺었다.
 
 “아, 그래. 좋은 아이디어. 일단 난 회의가 있어서! 나중에 들을게, 김민호 씨. 하하하.”
 “네….”
 
 민호는 자신을 지나쳐 바쁘게 어딘가로 러쉬하는 신 과장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길을 내주었다.
 잠시 그와 보조를 맞추며 걷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건네주는 방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곧 고개를 젓는 민호. 아이디어를 전달할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상대방이 들을만한 마음의 여유는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열흘 남짓 회사에 있어봐서 안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신 과장이 다시 왔을 때 말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때 종섭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용 쓴다, 용 써.”
 
 민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볼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머리가 언제까지 좋아질지 예측할 수 없다.
 30시간 기준으로는 내일 오후쯤 다시 평범해질 시기인데, 그 이후에는 번거롭게 또 유미를 보고 와야 한다.
 틈틈이 문서로 남기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민호.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후 인쇄하고 신 과장을 기다렸다.
 신 과장은 물론 금세 다시 왔다가,
 
 “나 외근이야. 안산 공장에 설탕 인도해 놔.”
 “네, 다녀오십시오!”
 
 라고 말하며 바쁘게 뛰어 나갔다.
 그 뒤로 명랑하게 인사하는 종섭과 프린터로 인쇄한 문서를 전달하지 못한 민호가 눈을 다시 마주쳤다.
 곧바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각각 옮겼다.
 당연히 민호의 눈은 신 과장의 등을 향했다.
 원래 저렇게 바빴는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바쁜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경보를 하듯이 걸어가는 모습으로 보아 마음의 여유는 절대 없을 것 같았다.
 지이이잉.
 민호는 문서분쇄기에 다가가 방금 뽑은 인쇄물을 집어넣었다.
 
 “보안 철저하군, 그래. 무슨 아이디어기에?”
 “누가 볼까 봐서요. 가끔 사무실에는 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종섭의 비아냥거림이 다시 들렸을 때, 민호는 이제 가만있지 않았다. 약간 버릇없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게 또 보고 있는 여사원들에게는 매력으로 다가갔을까?
 민호의 호감도가 그들에게 계속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것을 민호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사실 중고등학교는 시커먼 남자만 있는 곳을 나왔고 대학교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평범함으로 설마 여자에게 인기를 얻을 줄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하고 있는 민호였다.
 지난번 지민이네 집에서 잔 것도 술기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현재 포커스는 오전 내내 매달리는 기획안에 맞춰져 있었다.
 다만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드디어 종섭이 그를 호출해서 몸 쓰는 일을 시키지 시작했으니까.
 
 “물류창고 들러서 물건 받아서, 안산 공장에 설탕 인도해 주고 오라고.”
 “네? 저는 지금….”
 “아, 자꾸 몇 번이나 말하게 하네. 좋아. 자세히 설명해줄게. 그쪽에서 지원이 필요하다니까, 그동안 당신이 몸 쓰는 일에 재능을 보였잖아. 거기다가 주변을 보라고. 다 바쁘게 일하고 있잖아?”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민호의 귀에 여기저기 전화하며 그 나라 언어로 통화하는 내용이 다 들려왔으니까.
 참 신기했다. 영어와 일어는 물론, 러시아어와 중국어까지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양이 많으니까 오늘은 거기서 점심도 먹고, 퇴근해도 상관없어. 아, 정찬우 씨”
 “네, 이 대리님!”
 
 종섭은 민호에게 지시를 내리다가 뚱뚱한 사원 하나를 불렀다.
 그리고 인상 좋은 뚱뚱보, 찬우가 힘차게 대답하자 말을 다시 이었다.
 
 “여기 신입 사원에게 안산 공장 위치 알려주고 보내.”
 “알겠습니다.”
 
 결국, 아예 오늘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다.
 종섭의 눈을 보니 악독한 계획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까 자신이 짠 기획안을 전달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러는 것이다.
 그나마 그에게 문서 도난을 당하지 않도록, 민호는 컴퓨터로 가서 USB 메모리를 뺐다.
 혹시나 작성한 문서를 찾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예 모든 기록도 지웠다.
 나름 철저하게 마무리하고 나서는 길.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외근이란 것을 해보게 되니 뿌듯했다.
 정장을 입고 어딘가로 가는 회사원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던 게 벌써 한 달 전이었는데….
 어쩌면 지금도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하철 안에 주위를 둘러보는 민호.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피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여성들이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다들 자신을 보고 있다가 눈이 가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졌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아이고, 젊은 청년이 아주 잘 생겼네.”
 
 앞에 앉은 나이 많은 할머니는 자신을 잘 생겼다고 대놓고 칭찬했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칭찬받을 정도로 잘났다고 생각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웃으며 할머니의 말을 받았다.
 
 “에이, 제가 무슨 잘생겼어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하하하.”
 “아니야. 여기 있는 가시내들이 총각을 다 쳐다보는데 뭘. 못났으면 보겠어?”
 “아, 하하….”
 
 민호는 살짝 당황했다. 할머니의 과찬을 주변에 여자들이 듣고 웃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명도 웃는 사람은 없고 일부는 동의하는 눈빛을 보였다.
 심지어 어떤 아줌마는 이런 말까지 했다.
 
 “겸손도 하네. 누가 집어갈는지 모르겠지만, 그 처녀는 복이 터졌어.”
 
 처음으로 겪는 일과 말. 혹시 취직한 후 좀 더 당당해지니 이런 평가를 듣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안산 공장에서 설탕 인도 작업을 하고 다시 돌아올 때에는 아예 적극적으로 눈빛을 피하지 않는 여자가 있었다.
 미모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는데, 딱 봐도 성형 티가 다 났다.
 거기다 아직 날씨도 따뜻해지지 않았는데,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치마를 입었다.
 
 “가방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네?”
 “무거우실 것 같아서요. 호호호.”
 
 여우웃음까지 짓는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가방을 전달했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는데, 아예 가방을 빼앗듯이 가져가 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 친절에 그냥 있기도 뭐 해서 한 번 웃어줬더니 눈에는 하트가 뿅뿅 새겨진 것 같았다.
 
 ‘정말 나 잘생겼나? 혹시 시대가 원하는 유행이 내 얼굴형으로?’
 
 잠시 환상에 빠진 민호. 머릿속에서 자신에게 구애하는 많은 미녀가 그려졌다.
 삼성역에서 내릴 때, 아쉬운 눈빛을 한 그녀를 보면서 더더욱 왕자병이 심해져 갔다.
 그 왕자병이 삼성역에서 그를 내리게 했다.
 사실 처음에는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지금 내린 것은 충동이었다.
 굳이 직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유미가 생각났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계속 머리가 좋아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번 자신의 매력을 그녀에게 어필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회사 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마음먹었다.
 아침처럼 어색하게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도 매일 지속할 수는 없는 일.
 차라리 그녀와 연인 관계가 된다면….
 더 나아가서 혹시 아는가? 미모에 지성을 갖춘 그녀가 자신의 평생 파트너가 된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용기를 주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회사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전화번호만 알아도 이런 수고는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참 안타까웠다.
 잠시 후 회사 정문을 나오는 그녀와 지민.
 아무리 머리가 좋아져도 깜빡하는 것은 버릇일까?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둘이 같이 퇴근할 가능성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거기다가 젠장, 이미 눈까지 다 마주쳐 버렸다.
 
 “어? 오빠? 여기서 뭐 해?”
 “아… 나 외근 나갔다가 지금 올라가려고. 보고 할 게 있어서.”
 “벌써 외근? 대단한데. 난 복사나 풀 붙이기 같은 거만 시키는데.”
 
 코를 씰룩거리는 지민의 외모는 확실히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서 웃고 있는 유미가 더 맘에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에게 능력을 줄 수 있는 여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오늘은 꽝이다. 아니 지민이가 유미 옆에 있는 한 불편해서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모르게 유미에게 책잡힐 것 같았다.
 결국,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 위로 올라갔을 때, 치열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이 텅 비어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저쪽에서는 뭔가 비상이 난 듯 영업 2팀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영업 2팀의 윤명준 대리가 고개를 숙인 채.
 
 “네가 지금 몇 년 차야? 그러니까 동기들 과장으로 승진할 때, 이 모양 이 꼴 아니야? 왜 영업망을 로컬로 돌려, 돌리긴?”
 
 2팀 과장에게 크게 혼나는 중이었다.
 그 이외에 전화통을 붙잡고 각종 외국어로 상대를 설득하는 이들.
 그 가운데에 이종섭 대리도 있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조금 전에 자신은 쉽게 세상을 살아가려는 욕심으로 가득 찼었다.
 노력 없이 무언가를 얻는 게 과연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 김민호 씨. 아까 무슨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야 틈이 나는지 자신을 알아보며 신주호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 네.”
 “지금 시간이 되니, 한 번 볼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아까 회의 때 그 이야기로 비상이야, 비상. 아니 기획팀은 뭐 한 거야? 우리 회사에서 라면이 되겠어? 아, 나, 참!”
 
 민호의 아이디어가 괜찮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하도 위에서 보채니,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의 기획안을 보려고 했는데, 민호에게는 당연히 기회였다.
 그래서 그가 투덜거리는 동안 민호는 재빨리 컴퓨터를 켜고 프린트를 뽑았다.
 아직 전화에 열중인 종섭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되뇌면서.
 조금 전 자신에 대한 반성은 저 멀리 사라졌다.
 물론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기회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머리 좋을 때, 이 기획안을 주고 설득하자! 그게 계속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잠시 후 기획안을 받아 든 신 과장.
 
 “이… 이거 정말 자네가 생각한 거 맞아?”
 “네?”
 “아… 아냐. 정말 좋군. 굿 아이디어야! 굿 아이디어! 역시 영건의 머리가 비상하고 똑똑해. 하하하.”
 
 세파에 찌든 듯한 표정에 웃음이 들어가니 이제야 봐줄 만한 얼굴이 되었다.
 
 “다만 보고서 형식은 더 배워야겠어. 나나 되니까 이걸 봐주는 거야. 상관 잘 만난 줄 알라고. 완전히 중구난방으로 요약도 안 되어 있고, 무슨 소설 읽는 것 같았어. 다행히 추가적인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될 수는 있겠지만.”
 “아,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어쨌든 칭찬이다. 보고서 내용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분명히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인데, 기분 좋게 자신에게 충고하고 있으니.
 문서를 가지고 부장에게 가는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아주 맘에 든 게 분명했다.
 비좁은 사무 공간. 그의 동선이 부장까지 가는 게 다 보였고, 다시 오는 표정조차 민호의 눈에 똑똑히 드러났다.
 웃고 있었다. 자신을 보면서. 그리고 앞에 도착해서 이렇게 말했다.
 
 “민호야, 우리 오늘 술 한 잔 하자. 하하하.”
 
 ‘김민호 씨’에서 ‘민호’라는 호칭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아마 오늘 술자리에서 모든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 거듭된 행운
 
 직장 생활에서 술자리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신입사원 환영회라는 명목으로 오늘 하는 회식.
 이 급작스러운 술자리도 빠지면 바로 눈치가 보이니, 영업 3팀의 다섯 명 팀원이 전원 참석했다.
 기분이 좋은지 신 과장은 벌써 거나해졌다.
 
 “이야, 정말 아이디어가 굿이야, 굿. 딸꾹.”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에이, 겸손하지 않아도 돼. 이럴 때에는 당당하라고. 하하하. 자, 한 잔 더 받아….”
 
 신 과장은 민호의 소주잔을 채워주었다.
 받자마자 그것을 목으로 넘기는 민호. 소주잔을 입에서 떼었을 때, 자신을 부러워하는 선배들의 시선이 보였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 명은 강한 질시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종섭. 더구나 그는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장님, 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아, 무슨 소리야? 중간에 빠지는 게 어디 있어?”
 “내일 아침 일이 있어서요.”
 “그래? 알았어. 들어가라고. 하긴 이 대리가 뭐… 눈치 볼 일도 없지, 이제는….”
 
 약간 술에 취한 눈빛으로 신 과장은 손을 흔들어 그에게 대충 인사했다.
 사실 적게 마신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부장에게 칭찬을 받았다.
 물론 민호의 아이디어였지만, 어차피 직장은 팀워크.
 만약 조만간에 민호의 기획안이 추진된다면, 공을 같이 나눌 수 있었다.
 그럴 때에는 자신이 반드시 신입사원을 보듬어서 데리고 가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좀 컸다고 싸가지 없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 종섭은 더더욱 꼴도 보기 싫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종섭이 나가자 그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
 보통 술자리에서 직장 상사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인데, 보란 듯이 당당히 일어서는 종섭이 더 얄미워졌다.
 이를 풀어주려고 하는 것일까?
 뚱뚱보 사원, 정찬우가 아부의 종을 울리고 있었다.
 
 “간 사람은 지 복을 걷어찬 거죠. 안 그렇습니까? 이제 과장님의 전성시대가 앞에 다가올 텐데, 제 잘난 맛에 팀워크를 흐리기나 하고. 그리고 맨날 신입사원만 괴롭혀서 눈 뜨고 봐줄 수도 없습니다.”
 “뭐? 저놈이 그랬어? 우리 민호를 건드렸어?”
 
 민호는 자신이 이야기의 화두로 올라서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회식 자리에서 빠지면 상사에게 찍히는 것은 물론 뒷담화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까지도.
 또한, 가끔 종섭에게 붙어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찬우가 지금 표정을 바꿔 우호적인 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아직은 사회 초년생의 순수한 마음이 남아있는 민호.
 그는 아무리 종섭이 싫더라도 분위기에 편승해서 같이 욕하고 싶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 대리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에이, 배울 게 뭐 있었다고. 이상한 거나 외우라고 하고, 고된 일이나 시키고. 그냥 이참에 과장님께 다 말씀드려. 이제 과장님이 김민호 씨 우산이 될 거야. 안 그래, 아영 씨?”
 
 지금 이 자리에는 민호를 포함해서 영업 3팀의 모든 인원이 일어서지 못하는 상황.
 심지어 여사원인 아영조차도 남아 있었다.
 그녀 역시 살짝 알딸딸한 상태. 자신에게 말 거는 찬우를 무시하고 기분 좋은 미소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좋겠어요. 벌써 과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셨네요.”
 
 민호는 계속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거니 받거니 술이 술을 먹는 상황이 되자, 모두 취해서 곧 필름이 끊겼다.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어났을 때,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또 급하게 출근하는 민호.
 숙취에 머리가 아팠지만, 별다른 술버릇이 없는 그로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어제 좋은 일이 있었다고, 오늘 또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법이 없다. 방심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지내리라.
 그런 다짐 속에 도착한 사무실.
 너무 서둘렀나 보다. 아직 8시도 안 됐다.
 털썩 자리에 앉아서 잠시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어제 본 박상민 사장이 다시 들어왔다.
 당연히 허리가 부러지도록 인사하는 민호.
 
 “정말이군. 혹시나 해서 다시 들러봤는데.”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목소리에 아주 그냥, 패기가 넘치네. 김민호라… 김민호. 이제 확실히 외워지는군. 사실 어제 기억이 안 나서 찾아온 거야. 허허허.”
 
 그런데 단지 그 이유로 찾아오지 않았다는 게 곧 증명되었다.
 신 과장이 출근 후 갑자기 부장에게 호출을 받았고, 조금 있다가 민호를 불렀다.
 
 “요즘 일찍 출근해?”
 “네?”
 “사장님이 네 이름을 기억하신다던데. 뭐,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젯밤에 네 기획안이 저 위까지 올라갔어.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더라.”
 “정말입니까?”
 “응. 일단 한국에 진출한 미국계 유통 기업을 노리라는 것.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어. 다만 ‘어떻게’가 중요하지. 사실 기획이 아무리 좋아도, 성공하지 않으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잖아.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너랑 나랑 발로 뛰어야 할 것 같아.”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연속해서 행운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기회만 잘 살리면 되는 상황. 신 과장 말로는 위에서 오케이 사인이 나오면, 실행에 옮긴다고 했다.
 매우 기쁜 나머지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데, 유미를 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앉았다.
 
 “어? 선배. 나중에 제가 한 턱 낼게요. 선배 덕에 아주 좋은 일만 생겨요. 하하하.”
 
 어찌 된 일인지 때마침 지민이도 없었다. 이게 더 맘 편하게 말한 이유였다.
 
 “나 때문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그냥… 하하하. 선배 만나고 나서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의미였어요.”
 
 사실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말에 유미가 얼굴을 굳혔다. 민호는 흠칫했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것은 아닌지 하고.
 하지만 곧 알았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뒤를 향해 있다는 것을.
 그곳에 종섭이 그들이 앉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옆에 앉아도 되지?”
 
 이미 유미의 옆에 앉아서 허락을 구하는 꼴이라니.
 그나마 유미가 일어서며 민호의 옆으로 옮기자 무안해진 그의 얼굴이 참으로 볼만했다.
 
 “좋아? 이 풋내기가?”
 “네, 좋아요. 최소한 바람둥이는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종섭은 목소리를 높이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여기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신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현재 이들의 복잡한 관계는 이들밖에 모른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종섭과 유미가 사귄 것도 대부분 모르는 상황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죠. 이번에는 사장님 딸하고 스캔들이 있던데….”
 
 이번에는 민호가 중간에 끼었다.
 어젯밤 신 과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이제야 떠오르고 있었다.
 완전히 취해서 필름이 끊긴 줄 알았더니,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회식에서 눈치 보지 않고 빨리 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며 분개하는 신주호 과장의 붉어진 얼굴.
 확실히 종섭은 뻔뻔한 것 같았다. 민호의 말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니.
 종섭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되려 이렇게 말했다.
 
 “뭐, 이미 헤어진 사이니 말하는 건데… 이 녀석 또한 바람기를 살살 흘리고 다니는 녀석이니 조심해라. 옛 연인으로서 충고하는 거니까.”
 
 민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 살짝 찔렸다. 갑자기 지민이가 떠올랐기에.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완전히 생사람을 잡는 선무당 소리였다.
 
 “저번에도 우리 팀의 김아영한테 추근거리던데, 이거 뭐 대놓고 여자에게 치근덕대는 놈이야. 킥킥킥.”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시고 계시네요.”
 “내 눈으로 봤거든? 뭐, 증거는 없으니까, 시치미 떼려면 떼라고. 어쨌든 난 일어설게. 생각해 보니 여기서 말싸움해 봐야 나만 손해네, 이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바로 일어서는 종섭.
 그 이후의 식사는 어색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민호는 혹시 그녀가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커피 한 잔을 제안했다.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민호였고, 연인이 아니더라도 머리가 좋아지는 능력 때문에 계속 그녀를 봐야만 했다.
 다행히 흔쾌히 승낙한 그녀는 민호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만남의 장소가 된 것일까?
 최근 문제의 비상구에 된 이곳에 두 남녀가 들어왔다.
 민호는 혹시나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와 아래의 계단을 살폈는데, 그것을 보고 유미가 웃었다.
 
 “풋! 뭐 하는 거예요?”
 “아, 혹시 누가 엿들을까 봐서요.”
 “제가 그랬어야 했는데. 두 번이나 민호 씨가 튀어나와서 속으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하하하. 그렇죠?”
 
 어색함은 금세 풀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가 민호의 심장을 뛰게 했다.
 이제 그녀는 민호의 에너지 충전기였다. 30시간에 한 번씩 반드시 플러그를 꽂아야 하는.
 그렇게 유미와의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내고 올라온 민호.
 사무실에 들어갈 때, 그는 한 가지를 각오했다.
 종섭의 괴롭힘. 이번에는 과연 무엇으로 자신의 인내심을 실험할까?
 그런데 오늘 그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매우 부산했다. 마치 사무실을 떠날 것처럼.
 그리고 퇴근이 다 되었을 때, 그는 민호를 지나치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 이야기 들어봤어? 재주는 곰이 부린다는 것.”
 
 이건 무슨 소리일까?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였는데, 이상한 예감을 더 하는 그의 기분 나쁜 이야기가 눈에 힘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아, 이런. 그렇게 눈에 힘을 주니? 에이, 내가 계속 네 위에 있었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는데… 어쩔 수 없네. 잘 살아. 난 간다.”
 
 혼잣말하듯이 안녕하고 떠나는 종섭. 그 뒤로 찬우가 허리를 90도로 구부리며 그를 마중했다.
 
 “들어가십시오, 대리님!”
 “어어, 찬우 씨도 나중에 볼 수 있기를.”
 
 궁금했다. 그래서 찬우에게 가서 물었다.
 
 “일단 인사 발령인데….”
 “인사 발령이요?”
 “응. 조만간 과장으로 승진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민호는 깜짝 놀랐다. 자신보다 세 살 위인 종섭. 벌써 과장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표정을 보고 찬우가 웃으며 말했다.
 
 “어때? 부럽지? 그래도 부러우면 지는 거야.”
 “아, 네….”
 
 사실 부러웠다. 좁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질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말이 걸렸다. 재주는 곰이 부린다는 그 말.
 혹시 자신을 두고 한 말 같았다.
 의심스러워서 외근을 나갔다 온 신 과장에게 물었다.
 
 “아, 네 기획안? 내가 여기저기 라인을 통해서 알아본 결과 팀이 만들어질 거래.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싱긋 웃으면서 민호를 안심시키는 신 과장. 하지만 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팀이라니요? 저희 영업 3팀이 추진하는 것 아니었나요?”
 “응? 뭐 위에서 생각이 있겠지. 설마 우리를 배제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답해도 이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그러니 동기들 다 출세해서 차장 달고 부장 달 때, 아직 과장으로 남아있는 거로 생각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영도 고개를 흔들며 안 됐다는 눈빛을 보냈다.
 
 “과장님, 제 생각에는 민호 씨 기획안을 가지고 다른 팀을 꾸린다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럴 리가 있어? 에이, 아영 씨, 너무 부정적이다.”
 “아니에요. 솔직히 이 대리님을 차출하는 것도 영업 4팀을 만든다는 소문이 쫙 깔렸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왜 나한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안 되겠어. 부장님한테 당장 물어봐야겠어.”
 
 지금 자리에 없는 부장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신 과장.
 그 뒷모습을 보며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당했다.
 하긴 신입 사원 입장에서 경험이 너무 없었다.
 그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고 아영이 위로의 말을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어요. 그러니까 기획안은 함부로 내주는 게 아니에요. 진짜 번뜩이는 거면, 꼭꼭 감추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 내놓고 윗선과 거래를 해야죠.”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아무튼, 힘내요. 이번에 좋은 아이디어를 낼 사람이라면, 다음에는 더 대단한 게 생길 거예요.”
 
 그 말이 많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매우 허탈해서 옥상까지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많은 사람과 차가 개미만 한 크기로 치열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신도 저 중의 한 명이리라.
 그냥 거대한 조직이라는 톱니바퀴 중에 하나의 이.
 최근 들어 그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건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는가 보다.
 친구들에게 듣기로는 상사를 잘 만나야 한다던데.
 종섭에게 찍히고, 신 과장은 무능한데다가 눈치도 없었다.
 행운이 거듭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결실은 이렇게 불운이었다.
 살짝 우울함에 젖어 있는데, 옆에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신 과장이었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칙! 불을 붙였다.
 
 “후우….”
 
 내뱉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하는 말은.
 
 “민호 씨, 미안해.”
 “아닙니다.”
 
 미안하다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울릴까? 저런 모습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공감되는 이유는 또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내가 반드시… 언젠가… 꼭, 지금의 이 빚 갚을게.”
 “…….”
 “나도 내가 무능하고 눈치 없는 것쯤은 알아. 만년과장에서 승진도 못 하고, 천대받으며 구박받는 인생. 당장에라도 때려치워도 이상할 것 없지. 그런 사람이 나중에 빚을 갚는다니까, 별로 신용이 안 갈지도 모르지만, 정말 약속할게. 정말이야.”
 
 민호는 잠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솔한 눈빛이 이런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울리고 있었다.
 분명히 이렇게 무능력한 사람 옆에 있으면, 피해 볼지도 모르는데….
 
 “그 약속 지키십시오. 아니, 제가 지키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
 
 제법 호탕한 척 오히려 신 과장을 위로했다.
 
 @@@
 
 다음 주 월요일 회사 인트라넷과 각 곳의 게시판에 새로운 소식이 떴다.
 해외 영업부와 국내 영업부가 혼재된 새로운 프로젝트 영업팀이 생긴다고 발표가 되었다.
 이름은 창조영업부. 부장이 선임되었고, 과장 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종섭이었다.
 아직 나이와 경력 때문인지 과장이라는 타이틀은 바로 달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번 프로젝트팀의 성과에 따라 ‘보’ 자를 뗄 수도 있었다.
 영업 3팀도 직위 변경이 생겼다. 종섭이 비운 자리를 아영이 대리 보로 발령받았다.
 
 “역시, 예상이 맞았네요. 이 대리님이 과장 보를 벌써 달다니, 부럽네요. 선배님도 축하합니다. 하하하.”
 “찬우 씨, 쉿!”
 
 인트라넷을 보던 정찬우가 아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신 과장의 눈치를 보며 검지를 입술에 대는 그녀.
 그러나 신 과장은 그녀를 보며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나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왜 이래? 어쨌든, 아영 씨. 축하해. 그리고 민호 씨는 잠시 나 좀 봐.”
 “네? 네, 알겠습니다.”
 
 자신을 옥상으로 부르는 신 과장.
 올라가니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네?”
 “이번 기획안 다시 한 번 쭉 읽어 봤거든. 해외 기업의 국내 유통망을 뚫어서 역으로 해외 진출을 도모한다는 것. 매우 좋은 아이디어고, 아마 그대로 추진되겠지만, 추가적인 설명은 반드시 있어야 할 거야.”
 “그렇죠. 거기다가 모든 것을 써 놓은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게 왜….”
 
 민호는 그 말을 왜 하는지 몰라서 말끝을 흐렸다.
 만약 지금 머리 회전이 좋은 상태라면, 신 과장이 묘하게 웃는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월요일은 주말 내내 유미를 보지 못한 후유증이 있었다.
 당연히 그의 머리도 빠르게 회전되지 않았다.
 
 “어허, 이 사람이 어떤 때에는 머리가 비상하더니, 지금은 또 눈치를 못 채네. 분명히 기획을 한 사람을 찾게 될 거야. 안 그런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제야 슬쩍 신 과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겠다.
 결국, 자신을 찾을 때, 협조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아니면 협조하더라도 프로젝트에 직접 개입할 거라는 거래를 하던가.
 신 과장은 그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더 부연 설명했다.
 
 “처음 그 기획안을 봤을 때… 뭐랄까 참 좋았거든. 신선했어. 방법적인 면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상사맨이야. 방법이 없으면 바로 무대포로 돌진하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그때에는 욕심이 생겼지. 신입사원의 기가 막힌 아이디어에 기대어 한 건 할 수 있겠다는 욕심. 어차피 기획한 자네가 옆에 있는 한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네.”
 “…….”
 “지금은 솔직히 욕심 없네. 단지 자네의 아이디어에 대한 보상을 자네에게 돌려주고 싶어. 그러니까… 누군가가… 저 위에서 부르면 말하게. 그 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래서 능력을 발휘하게.”
 
 민호는 신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의 말대로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종섭의 밑에서 일하기는 싫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다른 팀으로 간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던 최근이었기에.
 일단 결론은 없었다. 아직 자신을 부르는 윗선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소문에 국내에 진출한 유통기업 A&K 마트에 종섭이 접선했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소문은 믿을만한 것이었다. 영업부의 정보는 매우 빠르고 정확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무능한 신 과장이지만, 짬밥을 무시할 수 없는 예측은 확실히 맞아 들어갔다.
 창조영업부의 나준영 부장이 드디어 민호를 호출한 것이다.
 해외영업부는 7층이었다. 바로 아래층에 새로운 살림을 장만한 창조영업부에 민호가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섭이 그를 보았다.
 
 “나 부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저를 보자고 하셔서 왔는데요.”
 
 대답해주기 싫은지 종섭은 시선까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저, 이 대리님. 아… 아니지. 과장… 보! 님. 재주 부리는 곰이 왔는데, 안 반겨주실 겁니까?”
 
 
 # 콜!
 
 반겨달라는 민호의 입에서 나오는 비아냥거림.
 종섭의 얼굴이 구겨지며 한바탕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나준영 부장이 나타났다.
 
 “오오, 김민호 씨 왔군. 하하하. 어서 와.”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나 부장은 미중년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생긴 창조영업부는 미남들의 밭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자, 저쪽에서 이야기하지. 이리로.”
 
 일단 나 부장은 민호에게 유리로 된 회의실을 가리켰다. 사방이 투명하지만, 방음 처리가 잘 되어 있는 그곳에 들어가면서 민호는 ‘약오르지롱’의 표정으로 종섭을 바라보았다.
 매우 고소해서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신입사원의 기획안으로 팀이 생기는 경우가 꽤 드물어. 나도 그 기획안을 봤는데, 정말 혹했지. 특히나 사장님이 가장 맘에 들어 하셨어. 해외에 라면 팔라고 보채셨는데, 떡 하니 그 기획안을 발견하셨거든.”
 “과찬이십니다.”
 “아냐, 아냐. 다만 이론은 좋은데, 이곳에 진출한 A&K 마트 쪽에서 탐탁지 않아 해.”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 A&K는 현재 대한민국에 난립한 몇 개의 마트 중에 시장 점유율이 고작 5%도 되지 않는다.
 현지화에서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지화 과정에서 도움을 주고 그들의 해외유통망을 이용하겠다는 요지의 민호 기획안이 꽤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니 민호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불안해하는 것 같더라고. 업무 제휴라는 게 양면의 날이어서, 자신들의 노하우를 우리가 다 뽑아갈까 봐. 안 그래도 한국에서 시장 점유율로 고민하는데, 우리까지 마트에 진출하면 머리가 아프잖아.”
 “그럼 안 한다고 약속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그런 약속은.”
 “네? 그럼….”
 
 민호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나 부장을 바라보았다. 약속할 수 없다는 의미는 L&S에서 대형 마트를 준비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민호의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나 부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자네가 생각하는 게 뭔지는 알겠지만,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아. 내 말은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함부로 그런 약속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
 “아… 네.”
 “그래서 자네를 불렀네. 분명히 이 기획안을 짰을 때에는 방법적인 부분도 있었을 것 아닌가? 신입 사원에게 이런 것을 물어볼 날이 올 줄은 내 몰랐네만, 난 그런 것 따지는 사람이 아니야. 성공할 수 있다면, 저기 말단 사원에게도 머리 숙일 수 있거든.”
 
 과연 그럴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한 달도 안 된 신입 사원은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거대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기를 감춰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슬쩍 운을 띄웠다.
 
 “방법은 물론 있지만….”
 “그래? 뭔가? 말해주게.”
 “그게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다이어리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필이면 오늘 집에다가 그것을 놓고 왔죠. 여기에 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그… 그런가?”
 
 살짝 아쉬워하는 나 부장. 거기다 대고 민호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 방법은 계속 생각나는데, 일이 좀 많아서, 다 기록하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기획안은 제가 짰지만, 그게 이곳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도 조금 멀어져서….”
 
 척하면 척이다. 나 부장은 민호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부서 이동은 내 관할 밖의 일이네. 사장님과 인사팀에 말은 해볼 수는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네.”
 “아, 그럼 그때 부르시면, 제가 다이어리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
 “전 다시 올라가 봐야 합니다. 가뜩이나 이종섭 대리가 빠지는 바람에 영업 3팀에 구멍이 났거든요. 그럼 용건이 끝나셨으면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성장하면서 배짱은 있다고 들어왔던 민호였다. 지금은 나 부장의 눈치를 볼 때가 아니라 베팅을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가 한 말 중에 사실이 있었다.
 바로 바쁘다는 것. 올라가자마자 그에게 눈코 뜰 새 없는 일이 쌓였다.
 
 “아, 민호 씨. 이야기 잘 됐어?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작년 인도네시아 코코아 거래 대장 좀 가지고 와.”
 “네, 알겠습니다.”
 
 아직 신입 사원이었지만, 그에게조차 일이 배당되고 있었다.
 이제 배우고 익히는 단계가 거의 끝나가는 시기라 할지라도, 업무가 할당된다는 것은 매우 빠른 경우. 아무래도 종섭의 빈공간이 크다는 의미도 되었다.
 사실 종섭이 유능하다는 것은 회사 내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소문에 사장 딸을 잡아서 벌써 승진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의 역량이 신 과장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없으니 구멍이 속출했다.
 신 과장의 인상이 변하고 아영의 얼굴 또한 바뀌었다.
 
 “뭐야? 8월 인수 물량이 왜 펑크가 났어?”
 “그건… 이 대리가 잘 알고 있을 텐데….”
 “인수인계 안 받았어? 언제까지 이 대리 타령할 건데?”
 
 아무리 무능하다지만, 과장 밥만 벌써 6년 먹었다. 아영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내는 모습은 그래도 리더의 모습이 엿보였다.
 감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호 역시 달라붙어서 서류를 한 장 한 장 꼼꼼히 찾아야 했다.
 혹시나 다른 곳에 섞여 들어가지 않았는지 다시 되밟는 작업.
 겨우 찾아냈는데, 이것에 발목이 잡혀서 다른 일이 올 스톱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미룬 일을 다 하고 나면 점심을 걸렀다는 걸 알게 되고, 뒤늦게 과장 재량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오라고 말했지만, 차라리 조금 버티다가 퇴근 후에 배를 채우려고 팀원들 모두 다 참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일이 끝날 듯 안 끝난다는 점이었다.
 꿀맛 같은 휴식은 전혀 없었다. 신 과장부터 말단 민호까지 하루를 풀로 써서 겨우 일을 마쳤을 때가 시간이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괜히 미안해졌나 보다. 신 과장이 작은 목소리로 팀원들에게 말했다.
 
 “고생들 했어. 술은… 말하고 싶지만 다들 힘들어 보여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 쌩쌩한데… 하하. 술 한 잔 할까요? 어떠십니까, 선배님들?”
 
 민호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자 찬우와 아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어진 술자리.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름대로 정을 쌓는 자리가 되었다.
 민호는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이들과 쌓은 정이 만만치 않게 크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약간 꼬인 목소리로 신 과장을 보며 말했다.
 
 “과장님…, 저 그냥 영업 3팀 안 떠날 겁니다. 여기가 좋아요. 정말입니다.”
 “에이, 나중에 후회할 소리 하지도 말고…. 민호야! 민호야!”
 
 신 과장은 민호보다 더 취했다. 민호를 부르며 이어지는 내용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영이 깔깔거렸다.
 
 “아유, 두 분 귀여우셔라.”
 “선배님, 저도 좀 귀여워 해주세요. 혹시 살쪘다고 무시하시는 건가요?”
 “에이, 아녜요.”
 “그럼 물을게요. 제가 나아요, 저기 신입이 나아요.”
 
 사람 곤란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찬우. 그래도 아영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나름대로 다 매력이 있죠. 다만 가끔 민호 씨의 매력 포텐이 터지면, 그 날은 정말 끌리더라고요. 남자 친구를 버리고 갈 정도로. 호호호.”
 “헐… 그 정도입니까? 젠장. 역시 여자들은 뚱뚱한 남자를 싫어하는군요.”
 “그러니까 살 빼세요.”
 
 아영이도 술이 들어갔는지, 평소에 하지 않던 상처 주는 말로 찬우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곰곰이 듣는 민호는 자주 매력 포텐이 터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특히 유미 앞에서 말이다.
 삘릴릴릴리. 삘릴릴릴리.
 그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민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민호 씨?)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름 아닌 유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누구야? 애인이야?”
 “아뇨, 아뇨. 하하하.”
 
 혀 꼬인 목소리로 그에게 누구냐고 묻는 신 과장.
 그에게 웃음을 보내며 나오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아, 유미 씨? 무슨 일이세요?”
 (아, 잠시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무슨 일이 있어요? 혹시 이종섭이가 괴롭혀요?”
 (그게 아니라… 지민이가 완전히 취해서 저도 어디다가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몰라서요.)
 
 민호는 뜨거워졌다가 다시 식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 어디죠?”
 
 @@@@
 
 회식자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니까 파장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바로 달려왔는데, 술집 앞에서 유미가 안간힘을 쓰며 지민이를 일으키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아, 민호 씨.”
 “에고,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대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작 전 얘가 취할까 봐 많이 마시지도 못했는데.”
 “술 마시고 싶으셨구나. 그럼 말씀을 하시지. 헤헤.”
 
 장난스럽게 말을 건 후 민호가 지민이를 둘러업었다.
 물컹하고 푹신한 가슴이 등에 느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바로 걷는 민호.
 그때 유미가 그에게 말했다.
 
 “어디로 가세요? 혹시 지민이가 어디 사는지 아세요?”
 
 당황하는 민호.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다.
 
 “네? 아, 네. 당연히 모르죠. 하하. 내가 왜 이러지? 혹시 유미 씨가 아세요?”
 “L&S 아파트 111동 602호! 아까 취할까 봐 미리 알아놨거든요.”
 
 그 말을 하고 유미는 스마트폰으로 지민이의 아파트를 검색했다. 이미 어디인지 잘 아는 민호지만, 시치미를 뗀 것은 물론이다.
 지민이의 아파트에 도착하고 나서는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겨우 침대에 눕혀 놓았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아보았을 때, 유미와 눈이 마주쳤다.
 술기운에서인지 모르지만, 민호는 강렬하게 유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그녀였다.
 어색함에 민호가 웃으며 말했다.
 
 “휴우, 물 한 잔 먹어야겠네요. 냉장고에 있겠죠? 물론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여기를 와봤어야 알죠? 하하.”
 
 냉장고로 가면서 횡설수설. 그 모습이 우스운지 유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여자 둘이 있으니 긴장한 거예요? 매번 보면 전혀 긴장 안 하는 사람 같던데.”
 “당연하죠. 긴장되죠. 두 명의 미인이 있는데.”
 
 외모를 칭찬하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던 유미. 그런데 그의 입에서 ‘미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히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그려지고,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민호는 붕 뜨는 기분이 되었다.
 술기운과 그 기분이 합쳐지니 민호의 입에서 드디어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내일 해장국 사주세요.”
 
 약간 황당했지만, 유미 역시 웃음으로 그 말을 받았다.
 
 “콜!”
 
 
 
 # 충전
 
 어설피 뱉은 말이었는데, 그녀의 승낙에 깜짝 놀란 민호.
 
 “정말입니까?”
 “저도 오늘 좀 마셨어요. 어차피 늘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민호 씨 해장국 정도는 당연히 사줄 수 있죠.”
 “네.”
 
 좋다가 말았다. 미안한 마음보다는 설레는 마음 때문에 사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과욕은 금물.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
 
 “자, 이제 제 임무는 끝났으니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때 유미의 눈이 아쉬움으로 물든 것을 보았다.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낌 그대로 말하는 것 역시 민호의 성격이었다.
 
 “아, 유미 씨는 안 가시나요?”
 “저도 가야죠. 그런데 괜찮을까요?”
 
 그녀의 눈이 지민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괜찮아요. 필름 끊겨 본 적 없어요? 나중에 일어나서 다 잘 살아갑니다. 밖에서도 그런데 집에서는 더 안전하죠.”
 “그렇군요. 그럼 같이 나가요. 어디 사시죠? 방향 같으면 택시 같이 타요.”
 “그럴까요? 전 자양동 살아요.”
 “어, 우리 집이랑 가깝네요. 전 잠실 사는데.”
 
 민호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집의 거리가 가깝다고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방향이 같으니 나중에 흔히 말하는 ‘썸’ 타기도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고, 앞자리에 앉은 민호. 기사에게 먼저 잠실을 들린 다음 자양동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택시에서 내리는데 그녀가 돈을 꺼내려고 하자 민호가 말렸다.
 
 “괜찮아요. 내일 해장국 사주시는 걸로 퉁 칩시다. 하하.”
 “그래도, 그건 다른 거죠.”
 “그럼 나중에 술 한 번 사주세요. 기사님, 이만 가주십시오.”
 
 자꾸 인연을 만들려는 민호. 만남이 잦아지면, 무언가 이루어질 거라고 희망했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 오늘 역시 회사는 매우 바빴다.
 오전이 후딱 지나갔다. 다행히 유미와 해장국을 먹을 약속 때문에 기분 좋게 일했다.
 점심 먹으러 갈 때쯤 신 과장이 그에게 말했다.
 
 “민호 씨, 어제 많이 마셨으니까, 해장국 어때?”
 “네? 아… 저는 약속이 있어서.”
 “그래? 아쉽군.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아, 참 아까 말했던 것 잊지 마. 점심 먹고 1시에 출발한다.”
 “네, 과장님.”
 
 오늘 오후에는 신 과장과 함께 거래처에 외근을 나간다.
 보통 아영이나 찬우를 파트너로 데리고 가는데, 오늘은 민호를 데리고 나간다고 했다.
 언젠가 영업 3팀에서 떠나기 전에 더 가르치고 싶다고 하면서.
 그 말을 들으면서 민호는 살짝 마음의 울림이 생겼다.
 착한 사람이다. 신 과장은. 그래서 떠나기 싫었다.
 해장국을 먹으면서도 그 고민을 유미에게 털어놓았다.
 
 “민호 씨도 마찬가지네요. 보통은 야망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요?”
 “그러게요. 전 야망이 없는 놈인가 봅니다. 하하.”
 “그럼 인사 발령이 나기 전에 나 부장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네, 그래야죠. 뭐 이게 하루 이틀 안에 발령이 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유미가 가만히 민호를 들여다보았다. 해장국을 후루룩 다 마시는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훈훈해졌다.
 요즘 여사원들 사이에서는 민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물론 기복이 있다. 어떤 날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다른 날은 별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은 또 매력이 넘친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유미는 민호의 장점을 찾고 있었다.
 
 “다 드셨어요?”
 “네? 아, 네.”
 “정말이요? 역시 날씬한 데는 다 이유가 있군요. 그래도 너무 조금 드셨는데.”
 
 너무 깊이 그를 탐색했나 보다. 유미는 해장국을 거의 먹지도 못한 채, 자리를 떠야 했다.
 그리고 언제나 뜻밖의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나오면서 두 남녀가 신 과장과 팀원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뚱뚱보 찬우가 깐죽거리면서 민호에게 다가왔다.
 
 “어? 민호 씨? 여기서 뭐 해? 와아, 이거 기획팀 유미 씨 아니야? 둘이 데이트? 얌전한 고양이들이 부뚜막에 올라섰네. 응?”
 “헉,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와 유미 씨는 정말 우연히 여기서 만난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농담한 건데, 설마 회사에서 최고 퀸카가 민호 씨랑 데이트하겠어? 하하하.”
 
 유미의 미모는 회사 내에서도 꽤 알려진 상태. 많은 남성이 선망하는 대상이 바로 그녀였다.
 그래서 둘이 사귄다고 해도 믿지 않을 찬우였다.
 하지만 민호의 강한 부정에 유미는 또 마음이 살짝 상했다.
 일단 먼저 들어가 본다는 말과 함께 서둘러 떠났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지민이가 밝은 얼굴로 자신에게 말했다.
 
 “언니! 몰래 어디를 갔다 와?”
 “아, 그냥….”
 “흠. 수상한데. 혹시 남자 만나고 온 것 아냐?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 또 누구 사귀는 거지?”
 “그래, 그래. 에고, 내가 무슨 말을 못 하겠네. 호호호.”
 
 요즘 자꾸만 민호랑 얽히는 유미. 이게 인연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
 
 오후에 신 과장을 따라나선 민호.
 신기하게 대기업 과장이나 되는 사람이 경차를 몰고 다녔다.
 검소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신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내 차를 와이프가 써. 내가 늦둥이가 있는데, 경차에 태우고 다니기 그렇잖아.”
 “아, 그러시군요.”
 
 살갑게 대해주는 신 과장. 거래처에 가는 동안 자신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중에는 개인사도 있지만,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L&S 그룹은 내수에 특화된 그룹이다. 유통이나 식품, 호텔 등이 발달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현재 민호가 있는 L&S 상사는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관리했다.
 
 “그러다가 현재 사장님이 작년에 오시고 나서 수출을 강화하라는 경영방침을 전달한 거야. 아주 그때부터 바빠졌지. 해외영업부가 거의 수입만 처리하다가, 이제는 수출까지 신경 써야 해서 일이 두 배로 바빠졌어.”
 “아, 네.”
 
 민호는 거의 ‘아, 네.’와 같은 말로 장단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신 과장이 하는 말을 다 알고는 있었다. 어제와 오늘 ‘유미 충전기’로 만땅 채워진 머리.
 그동안 살펴본 자료와 회사의 히스토리가 기억세포에 고스란히 새겨졌다가 떠올랐다.
 그래도 직장 상사가 말하는데,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지금 가는 곳은 나로서는 6개월을 공들인 곳이야. 너를 데리고 가는 이유도 잘 배우라고 하는 거니까, 이참에 꼭 배워. 알았지?”
 “넵! 알겠습니다.”
 
 가르쳐주겠다는 상사의 열망. 민호의 가슴에 훈훈함이 전달되었다.
 그런데 그 훈훈함이 우울하게 바뀐 것은 거래처에 도착한 이후였다.
 보통 대기업에서 갑질을 한다는 말을 들었던 민호.
 그런데 지금은 중소기업이 그것을 하고 있었다.
 신 과장과 함께 찾아간 (주) 베스트 가발.
 이름은 촌스럽지만, 이곳은 국내에 몇 개 없는 가발 회사였다.
 자체 수출이 힘들어 몇 년간 다른 무역회사를 거쳐 수출했는데, 소문이 돌았다. 그 무역회사가 부도 직전이라는.
 당연히 여러 곳에서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수출 한국의 첨병이었던 가발 산업이 내림세를 걷다가 최근에 다시 블루칩으로 떠올랐기에.
 그래도 신 과장이 앞서 갔었다.
 지난 6개월간 간과 쓸개를 다 빼준 후에 드디어 계약 일보 직전이 되었는데….
 
 “미안하네, 신 과장. 조금만 더 시간을 주게.”
 “혹시 맘에 안 드는 이유라도….”
 “아냐, 아냐. 그냥 저기….”
 
 거래처의 김 사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때 같이 있던 젊은 남자가 신 과장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 죄송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더 좋은 조건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S&K가 굿딜을 제안했고, L&S의 조건보다 더 나았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S&K와 계약하겠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민호는 김 사장과 아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신 과장은 김 사장의 아들이 별로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보여주는 게, 같은 말을 해도 정말 싸가지 없어 보였다.
 민호의 표정이 변할 정도였다.
 하지만 신 과장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김 사장을 보며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러시군요. 아이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곤란하게 해드렸네요. 어차피 영업하는 사람 이런 일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제 기분을 살피신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 저… 정말 미안합니다, 신 과장님.”
 “아니라니까요. 절대 그런 마음 가지지 마세요. 나중에 혹시 인연이 닿으면… 그때는 꼭 L&S와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정중한 모습에 민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면서 신 과장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과장님!”
 “됐어. 무슨 말 할지 아니까 가만히 있어. 이것도 네가 배울 거야.”
 “네?”
 
 이게 배울 거라니. 인간적으로 신 과장을 좋아해도, 그의 무능함은 익히고 싶지 않은 민호였는데.
 
 “왜? 무능해 보이나? 그런데 이걸 배우라고 하니까 답답하고 화가 나?”
 “그게 아니라….”
 “자, 저기 좀 앉아서 이야기 좀 나누세.”
 
 신 과장은 회사 내 흡연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도 열을 식히지 못한 민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똑똑한 줄은 잘 알아. 그래서 요즘 걱정이야. 만약 자네가 창조영업부로 간다면, 머리만 믿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 소홀할까 봐서.”
 
 입을 꾹 다문 민호. 신 과장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계속 할 말을 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영업사원의 최고 덕목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야. 그런데 그 가슴에 뭐가 있어야 하고, 뭘 버려야 하는지 알아? 열정이 있어야 하고, 자존심을 버려야 해. 간과 쓸개도 마찬가지야. 그런 거 있어봤자,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
 “내 말이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지. 사실 나도 오늘 성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해. 이렇게 실패하는 것도 봐야 해. 그래야 일이 어렵다는 것을 자네가 알 테니까. 머리로 기획안을 짜고 기획안을 제출하는 것은 사무실에서 하는 일이지만, 직접 나와서 사람을 만나고 그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절대 머리로 할 수 없어. 그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네.”
 
 그의 말 중에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무언가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처음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 신 과장에게 점점 배울 게 많아지고 있었다.
 민호는 머리를 숙였다.
 
 “정말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아니. 난 자네 나이 때, 지금 자네가 하는 말도 하지 못했어. 내가 제일 잘 난 줄 알았거든. 똑똑한데다가 사람들 말을 잘 받아들이고, 노력까지 하고 있어. 분명히 크게 성공할 거야. 난 그렇게 믿네.”
 
 과연 그럴까? 극찬을 받고 온종일 신이 나서 일한 민호.
 유미 충전기 덕분에 내일 저녁까지는 머리 회전이 빨라질 것이다.
 그것을 믿고 업무 파악에 박차를 가했다.
 일이 재미있어지는 순간. 그는 워크 홀릭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다 퇴근하고 밤 11시라는 것을 확인한 민호.
 가끔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귀신이 나온다는 괴담을 찬우에게 들었다. 다 큰 나이지만, 으스스했다.
 그래서 서둘러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할 찰나에.
 
 “흠. 자네 퇴근도 늦는구먼.”
 
 화들짝 놀란 민호가 뒤를 돌아보자 박상민 사장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 파격적인 조직 개편
 
 쾅. 황급히 일어나려다가 책상에 무릎을 찧은 민호.
 
 “어이쿠, 괜찮나? 뭐, 그렇게 놀라나?”
 “괜… 괜찮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무릎을 비비며 인사까지 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공교롭게도 혼자 있을 때, 꼭 보게 되는 박 사장. 이것을 행운이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업무가 많아? 신입 사원이? 신 과장이 업무량을 많이 주나 보지?”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과장님은 항상 잘해주십니다. 제가 남은 겁니다. 공부하고 싶은 게 많아서요.”
 “공부? 공부라….”
 
 금세 기특한 눈빛이 된 박 사장. 그는 사원부터 출발해서 계열사 CEO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민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기분인가 보다.
 자신과 다른 것은 약간 쑥스러움을 많이 탄다는 것. 젊었을 때 상민은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배짱 있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런데 이건 그의 오해였다. 곧바로 민호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또 다른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이 기대된 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민호를 바라보았다.
 
 “창조영업부의 나 부장님이 제 인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고, 결재까지 했네. 아마 곧 인사 발표가 있을 것이네.”
 
 그럴 줄 알았다. 신 과장도 아영과 찬우도 모두 예상한 거였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랐다.
 사장의 일 처리는 신속하기 이를 데 없어서 가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더니 이렇게 빠를 줄이야.
 민호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무례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 결정을 철회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그 말을 듣고 박 사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분노는 아니었다. 호기심이 가득했을 뿐.
 
 “저는 해외영업 3팀이 좋습니다. 며칠 전 나 부장님과 이야기했을 때에는 욕심이 살짝 생겼지만, 최근 신 과장님과 일하면서 느꼈습니다. 아직은 여기서 더 배울 게 많습니다.”
 “배울 게 더 많다?”
 “그렇습니다.”
 
 민호는 그 말을 하면서 슬그머니 상대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나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그런데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의 박 사장.
 
 “이번에 조직한 창조영업부에 회사 내의 모든 인재를 배치했네. 설마 자네를 더 잘 가르칠 사람으로 나 부장과 이 과장이 적합하지 않단 말인가?”
 “아뇨, 아뇨. 그분들은 훌륭하신 분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다만 영업 3팀에서 머리로 배우는 것 말고 가슴으로 익히는 것을 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흠….”
 
 묘하게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점점 민호가 마음에 쏙 드는 박 사장. 하지만 확실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일 나 부장과 상의는 해야 하겠기에.
 
 “일단 고려해 보겠네. 그럼 일 마무리하고 퇴근하게. 나도 들어가야 하니까.”
 “넵!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허리가 부러지도록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민호.
 자신의 설득이 잘 먹히기를 바라며 집으로 퇴근했다.
 늦게까지 일했는데도 피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자신이 일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성적이 별로였는데, 2학년 때부터 공부에 맛을 들리고, 3학년 때 중독이 되어 버렸다.
 더 일찍 공부에 맛이 들렸다면 하버드도 갈 수 있었다고 부모님이 말했지만, 민호는 자신을 잘 안다. 그 정도의 머리는 아니었다는 것을.
 차라리 지금 머리로 대충 공부했다면, 위대한 석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이 이렇게 편리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도 기획실 앞을 서성거렸다.
 잠시 후 자신을 보고 밝게 웃어주는 유미에게 화답의 미소 한 방 날리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민호.
 
 ‘충전 끝.’
 
 @@@@
 
 오전에 민호는 사장실로 불려갔다.
 박 사장이 아무리 파격을 좋아한다지만, 이렇게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직접 일개 사원을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긴장한 모습으로 사장실로 올라갔을 때, 그는 나준영 부장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게.”
 
 박 사장이 준영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르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민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사팀에서 결재 올렸었어. 곧 인사이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자네가 또 틀어버렸군. 하하하.”
 “그렇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번에 자네가 우는소리 하기에 영업 3팀 보충 건도 말해놨었거든. 사실 신 과장이 내 동기야. 사람이 눈치 없어 보이지만, 우직한 것은 내가 잘 알지. 그 친구 고생시키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구먼. 자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부러워, 이번에는 정말 신 과장이 부럽네. 하하하.”
 
 민호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인사이동이 취소되었다는 말과 같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서 두 사람에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부장님.”
 
 둘은 허리가 부러지도록 굽히는 민호를 보며 웃었다. 그러다가 박 사장이 입을 열었다.
 
 “아직 발표는 안 했지만, 또 하나 할 말이 있네.”
 “…….”
 “해외영업 3팀은 곧 해체될 거야.”
 
 순간 민호의 얼굴에 느낌표가 그려졌다. 병 주고 약 주었다가 다시 병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신 과장이 창조영업 1팀 과장으로 들어가고, 이종섭 과장이 2팀을 이끌게 되었네. 앞으로 선의의 경쟁을 기대해보겠네.”
 
 이건 정말 뜻밖이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대답하고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신 과장과 팀원들이 그의 얼굴을 보면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이제 가는 건가?”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축하해 민호 씨!”
 “젠장, 운이 좋은 놈인가? 아니면 실력이야? 부럽다, 부러워.”
 
 이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하지만 민호는 입 꾹 다물고 알리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이들의 놀란 표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오후에 인트라넷에 올린 파격적인 조직 개편.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게요, 과장님. 정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신 과장과 아영은 놀란 표정으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신색의 변화가 없으니 당연히 그들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자네 알고 있었어?”
 “네, 오전에 사장님께 들었습니다.”
 “그럼 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있었지?”
 
 그 물음에 민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찬우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았다.
 안타까운 게 팀원 모두 창조영업부로 이동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신 과장과 아영, 그리고 민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해외영업부의 다른 팀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찬우 역시 영업 2팀으로 배속되었는데, 못내 서운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민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바빴던 것은 바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정말 대규모적인 인수인계 작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금요일까지는 정말 숨 쉴 틈도 없었다.
 특히 인수인계가 끝나는 마지막 날.
 해외영업 1팀과 2팀에서는 아우성이었다.
 갑자기 3팀에서 미결된 여러 거래 대장들이 폭탄 드롭.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진 만큼, 그들의 얼굴에 다크서클은 더 길어졌다.
 그래서 한 번 항의해보는 주 과장. 그는 신 과장의 4년 후배다.
 
 “신 과장님, 이건 뭡니까? 밀가루는 가져가셔야죠!”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창조영업부로 가져갈 게 정해졌단 말이야.”
 “정말입니까? 정말입니까, 부장님?”
 
 신 과장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영업 1팀의 주 과장이 부장을 불렀지만, 그가 부른 사람은 바쁘게 사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 미안. 나 외근이야. 자네가 나 대신 여기 인수인계 작업 좀 하라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울상인 주 과장. 그리고 그를 보는 신 과장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면서 민호 또한 웃었지만, 그렇게 여유 있지는 않았다.
 이제 대대적인 이사가 시작되었다.
 가져갈 서류를 아래층으로 대량 이동시켜야 한다.
 눈만 겨우 보일 만큼 잔뜩 서류를 집어서 엘리베이터를 탄 민호. 문이 닫히자 손등으로 6층을 간신히 눌렀다.
 다시 6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의 눈앞이 환해졌다.
 유미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를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민호는 최선을 다해서 비켜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어디를 가려는 게 아니었을까?
 
 “아…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요.”
 
 유미는 민호가 들고 있는 서류의 윗부분을 빼서 들었다.
 한결 가벼워진 민호.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또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종섭이었다. 창조영업부에서 나오면서 민호와 유미를 보게 되었다.
 옆에 신 과장이 지나가는데도 인사도 하지 않는 종섭.
 떫은 감을 씹는 표정으로 눈에 거의 살기를 담은 것처럼 둘을 노려보았다.
 민호는 그가 신 과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복수의 의미로 더 다정하게 유미의 옆에 붙었다.
 유미 역시 마찬가지. 보란 듯이 민호에게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이 틈을 노렸을까? 민호는 유미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말에 영화 보러 갈래요?”
 
 생각지도 못한 민호의 말이었을 텐데도, 유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언제나 콜! 이죠. 호호호.”
 
 # 소개팅
 
 3월의 마지막 주말은 민호에게 특별했다.
 바로 유미와의 첫 데이트가 잡혔기에.
 어제 슬쩍 한 말이 현실이 되자 매우 흥분한 민호.
 토요일 내내 들떠 있었다. 거기다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지, 빨리 다음날이 오기를 바랐는데….
 저녁에 상철의 전화가 울렸을 때, 그의 표정이 변했다.
 
 “앗, 젠장. 내일 소개팅 있었지?”
 (응? 응. 그래서 지금 전화한 거야. 장소와 시간 기억하지?)
 “야, 야. 정말 미안한데, 소개팅 좀 미뤄주라. 아니, 아예 취소해주라.”
 (무슨 소리야? 그렇게 애걸복걸해서 간신히 잡은 건데. 절대 안 돼. 절대. 사무실에서 얼굴 부딪히고 다닐 텐데, 나보고 계속 미안하라고?)
 
 야단났다. 민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밤새 고민하는 그는 결국 두 탕을 뛰기로 결정했다.
 일단 소개팅이 먼저였다.
 다음날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그의 친구 상철이가 이미 와 있었다.
 
 “여어, 신수가 훤하다.”
 “뭘. 취직 빨 인가? 하하하.”
 “어쭈? 이제 좀 여유도 있네. 농담도 다 하고?”
 “원래 이랬다. 그나저나 안 왔어?”
 “원래 여자는 좀 늦는 거야. 그리고 기대할 만해. 우리 부서에서, 아니 우리 회사에서 퀸카야.”
 “오오, 정말? 그건 너무 부담되는데?”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원래 뻥이 심했던 친구였으니.
 퀸카면 좋은 일이지만 그냥 폭탄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늘 소개팅을 대충 치르고 저녁에 만나는 유미에게 온 정신이 가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상철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다가, 자신이 지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일이 발생했다.
 민호의 앞으로 걸어와 앉는 그녀.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녔다.
 최근에 본 여자들과 다른 순수한 매력이랄까? 외모만 보자면 말이다.
 
 “벌써 맛이 갔네. 야, 인마! 입 다물어.”
 “어? 어어….”
 
 상철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었던 민호는 입을 다물었다.
 첫인상부터 추태였다.
 하지만 이런 미인을 보고 정신을 놓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는 당연한 생리현상과 같다고 자위하면서 그는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민호입니다.”
 “저는 이도경이라고 해요.”
 
 일단 이름을 알았으니 다음 진행은 일사천리다. 그는 평소와는 자신의 소개에 대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느라고 상철의 존재까지 까먹었다.
 
 “나 먼저 일어난다. 빠져 주는 게 순서인 거 같아서. 도경 씨, 이 친구가 좀 착해. 만만치 않게 착한 도경 씨가 잘 좀 거둬 줘.”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 그녀. 그 모습도 천사 같았다. 그는 벌린 입을 다시 다물기가 힘들었다. 떠나는 친구에게도 대충 손을 흔들었다.
 마음속으로는 거하게 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그러느라고 잊고 있었다. 빨리 소개팅을 해치우고 저녁에 만날 유미를.
 문자가 오고서야 그녀의 존재가 떠올랐다.
 
 - 영화 보기 전에 저녁 식사할래요?
 
 민호의 눈에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애초의 약속은 저녁 먹은 후, 7시에 만나서 영화를 보는 코스였다. 그리고 그 이후 술 한 잔이 민호의 계획이었는데.
 
 - 네? 네. 네. 좋죠. 하하.
 
 일단 도경의 눈치 보며 문자를 보내는 민호.
 문자를 다 보낸 후 주머니에 넣고 도경을 향해 웃었다.
 
 “하하하. 친구 녀석이 술 한 잔 하자고 해서….”
 
 어색한 웃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변명을 하고 있었다.
 참 조용한 그녀. 그래서 말은 주로 그가 해야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자신의 말을 받아주었다.
 
 “술 잘 드시나 봐요.”
 “아뇨. 그렇게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위기를 즐길 정도는 됩니다.”
 
 그는 이제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말을 하란다고 해서 그녀가 하라는 법은 없었다.
 이것은 분위기의 문제였다.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래서 소개팅은 쉽지가 않았다.
 그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녀 역시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하면 가만히 듣고 있지만, 자신만 말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
 다소 수다스럽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든 소개팅의 끝에서는 갑자기 자신감을 잃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것을 발산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 의기소침함은 상대에게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했다.
 그녀에게 자신이 별로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그렇게 도경을 보낸 민호. 휴대전화기를 보니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 그럼 5시로 할까요?
 - 대답이 없으시네…. 5시 괜찮아요?
 - 바쁘신가 보다. 그냥 7시로 할까요?
 - 아무래도 힘드신 것 같은데 7시에 원래 약속 장소에서 봐요.
 
 많은 문자였다. 죄책감이 들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한 마리도 못 잡을지도 모르는 바보짓을 자신도 모르게 했다.
 그래서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계획을 바꾸려고 해서 부담 준 것 같아… 미안하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정말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민호는 더더욱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절대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답장이 늦은 제가 죽일 놈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부터 영화까지 풀로 제가 서비스하겠습니다.”
 
 이래서 죄짓고 못 사는 것 같았다.
 물론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기 합리화에 능숙하다.
 잠시 후 민호는 유미와 아직 사귀는 상태도 아니니, 죄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그녀 앞에서 괜히 위축되기 싫었다. 그래야 오늘 자신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매력은 아주 잘 보여주게 되었다.
 스테이크를 먹으러 온 식당에서 유미가 민호 쪽으로 얼굴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신기한 게 여기서도 여자들이 민호 씨를 가끔 흘겨보네요.”
 “네? 아, 그런가요?”
 “네, 들어오면서 여기 앉을 때까지, 안 보는 척하면서도 민호 씨를 계속 쳐다보고 있어요. 거의 전부가….”
 
 민호는 웃었다. 볼수록 유미가 맘에 들었다. 이런 말로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까 도경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용해서 말이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랬을 것으로 확신한 민호.
 그래서 더더욱 유미가 좋았다. 이제 그녀에게만 충성하리라 다짐했다.
 
 @@@@
 
 직장인이 가장 싫어하는 월요일 오전.
 특히 지옥철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민호는 지하철을 타면서도 밝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 이유가 드러났다. 강변역에서 잠실역에 도착했을 때, 천천히 가는 지하철 출입문 밖으로 유미가 보였다.
 주변에 온통 자신을 누르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그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지하철이 멈추었을 때, 일단은 내렸다. 많은 사람이 내리고, 다시 많은 사람이 타는 잠실.
 
 “자, 어쩔 수 없습니다. 잠시 실례할게요.”
 “…….”
 
 민호는 내리자마자 인사도 없이 유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온몸으로 그녀를 방어해 내리라 다짐하며 사람들을 뚫고 들어갔다.
 
 “전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시고, 저만 믿으세요.”
 
 이미 지하철에 탑승했지만, 손을 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행히 유미도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다시 이들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거의 여자들이라는 점. 민호가 유미와 함께 있을 때 발산되는 매력은 더더욱 그들을 이끌게 되었다.
 
 “휴우, 차를 사든지 해야지….”
 
 간신히 삼성역에 도착해서 내린 민호는 유미를 힐끗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하철은 사람 때문에 힘들지만, 차는 길이 막혀서 답답해요.”
 “그런가요? 그래도 가끔 사람들이 너무 밀려들어서요. 특히 요즘은 주변 여자들에게 치한 취급받을까 봐 걱정돼요.”
 
 민호는 유미와 함께 지하철 개찰구로 향하며 말했다.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아까 그녀도 목격했다. 수많은 여자가 그의 곁으로 몰려드는 모습을. 심지어 그녀들은 자신을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걸어가는 민호의 옆모습을 힐끗 보았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인기 폭발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함에 가까운 얼굴.
 그래서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사원들이 민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와, 오늘 출근할 때 김민호 씨 봤어?”
 “응. 정말 광채가 나는 것 같았어. 그런데 그 옆에 있던 걔는….”
 
 한 여사원이 대화하다가 유미를 발견하고 지금 말하는 여자에게 신호했다.
 그러자 그들이 질투의 시선을 유미에게 보내며 살며시 자리를 피했다.
 그녀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사원들도 유미를 힐끗 보고
 덕분에 휴게실에서 모닝커피는 쓸쓸히 혼자 마실 수 있었다.
 유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입사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여사원들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 들어온 지민이가 살갑게 대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만 있던 휴게실에 종섭이 등장했다.
 그가 불편한 유미.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정말 그놈이 좋아?”
 
 유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둘러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종섭이 재빨리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놔요.”
 “대답해주면 놓을게.”
 “좋아요. 좋으니까 어제 영화도 보고 술도 마셨죠. 오늘 아침, 같이 출근했으니까, 이 정도면 답이 된 것 맞죠?”
 
 스르륵.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은 종섭.
 그 틈에 재빨리 유미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허탈했는데, 잠시 후 다시 분노한 눈이 되었다.
 민호가 등장한 것이다. 미운 놈은 늘 결정적일 때 나타난다고 생각한 그는 보자마자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인사 안 해? 네 눈에는 내가 안 보이지? 조직사회에서 아무리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다는 것 몰라?”
 
 아침부터 재수 없게 걸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민호는 정중히 인사하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도 이 과장…보! 님께 보고 배운 거라서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종섭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러자 민호가 종지부를 찍는 말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신 과장님께 인사 안 하시는 것 말입니다. 그때 보고 배웠습니다. 아, 이곳은 사람 봐가면서 인사하는 곳이구나! 라고요.”
 # 팀 간 경쟁
 
 지난 금요일 창조영업부에 두 개의 팀이 생겼을 때부터, 종섭은 신 과장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오늘도 마찬가지. 아까 출근하고 나서 신 과장을 보았지만, 인사하지 않았다. 그것을 지금 민호가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대로 따라 한다는 후임을 향해 이를 갈 뿐.
 ‘두고 보자!’라는 눈빛만 잔뜩 하고 휴게실에서 나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민호는 겁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꼬였고, 영원히 친해질 수 없는 사이라고 규정했다.
 월요일 오전 회의 때도 둘은 으르렁댔다.
 처음에는 눈빛만으로 다투더니 점점 말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히는 종섭.
 
 “김민호 씨!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이제 한 달밖에 안 된 신입이 무슨 협상을 하러 간다고?”
 “흠…, 이 과장, 진정하게.”
 
 종섭의 목소리가 커지자 나 부장이 그를 제지했다. 그의 눈에는 종섭이 민호를 핍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종섭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졌다.
 자신의 상사가 볼 때만 저랬다. 지금도 고개를 숙이며 연기하는 게 눈에 다 보이는데.
 
 ‘개 새….’
 
 속으로 욕하며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화장실에서 종섭이 소변 볼 때, 그 옆으로 민호가 와서 넌지시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웃는 이유는 간단했다. 물건이 작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민호의 것이 더 컸다.
 종섭은 재빨리 끊고 지퍼를 올렸다. 그러느라고 살짝 손과 팬티 안이 젖은 것은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당연히 손을 씻으러 가는데 그의 귀에 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 사원이 협상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까?”
 “닥쳐! 너랑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아아, 그러시군요. 그럼 듣기만 하십시오.”
 “이 새끼가….”
 
 시선을 돌려 민호를 노려보는 종섭. 하지만 민호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거 어떻습니까? 두 팀이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겁니다. A&K와의 협상을 같이 한다고 부장님께 말씀드립시다. 물론 진짜는 각 팀이 나서서 설득하는 거고, 나중에 성공하면, 주 거래처를 이긴 팀에게 양보하는 걸로.”
 “흥.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미 그 건은 우리 팀 건데.”
 “그렇습니까? 정말 확신하십니까?”
 
 민호는 종섭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
 
 사실 1팀과 2팀 모두 확실히 이 건을 맡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민호가 최근 박 사장의 눈에 들어오기는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박 사장의 성향은 내부간섭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1팀이 유리하다고 볼 수 없었다.
 비록 조직 개편은 파격적으로 하지만, 이른바 팀의 자유도가 높아야 창의적인 생각을 한다는 ‘주의’를 가졌다.
 이렇게 되니 지금 상황에서는 나 부장의 뜻이 절대적이었다.
 지금 나 부장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창조영업부의 실적은 현재 전무했다.
 거의 A&K에 매달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건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반드시 성공하고 싶은 야망.
 밑에 사람은 위를 잘 만나야 한다지만, 반대로 상사도 부하직원을 잘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지금 종섭과 민호의 불타오르는 의욕이 맘에 들었다.
 더군다나 현재 나 부장의 운신 폭이 매우 좁았다.
 몇 차례 약속을 잡았지만, 아예 자신은 만나주지 않은 A&K 지사장.
 
 “아래에서부터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부장님이 나서시면 그쪽에서도 비즈니스가 커지고 업무제휴에 대한 부담감이 짓눌러서 거절하는 거니까요. 지금으로서는 실무자끼리 만나는 게 실타래를 푸는 최초의 방법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민호의 의견이 쏙쏙 귀에 들어왔다.
 팀을 둘로 나눈 것은 이사진에게 A&K 이외에 다른 실적 진행 상황을 보고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래서 두 팀 중 하나에 다른 업무를 주려고 했건만, 나 부장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아. 두 팀이 호흡을 맞춰 보라고.”
 
 민호는 웃었다. 결국은 허락이 떨어졌다.
 이제 기회를 잡았으니, 결과를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첫 타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은 민호가 종섭을 이기기 힘들었다.
 신 과장이 발언권을 좀 강화해야 하는데, 늘 사람 좋은 얼굴로 양보만 하는 것도 문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주일 동안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종섭.
 이번에는 민호 차례였다. 신 과장과 함께 움직였다. 다시 한 번 그의 경차가 씽씽 달렸다.
 
 “무슨 방법이 있는 거야?”
 “네, 있습니다.”
 
 사실 신 과장은 막상 닥치니 이 일에서 살짝 빠지고 싶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의 약점이 영어였기 때문이다.
 그는 영어를 못해서 국내 영업부에만 있었는데, 그곳에서 승진하는 게 더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성실히 새벽 공부하며 토익 고득점을 받아서 인사이동을 신청했던 몇 차례.
 마침내 국내 영업부에서 해외 영업부로 재작년에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현재까지 다시 큰 변수는 없었다. 원래 대기업에서 진급의 무덤은 부장이라고 하던데, 그에게는 과장이 한계였다.
 그래서 민호를 만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여긴 신주호 과장.
 
 “어련히 잘하겠지만, 큰소리친 이상 결과물을 보여줘야 할 거야. 이종섭이하고는 달라. 그 녀석은 실패해도, 지금까지 잘 해왔기에 기회가 있어. 하지만 자네는 잘못하다가는 처음부터 무능력으로 찍혀.”
 
 신 과장의 말이 맞았다.
 밑져야 본전! 민호가 이 일을 성공시키기 힘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초반 반짝한 회사의 기대감은 실망으로 변하게 되리라.
 이것이 종섭의 생각이라고 민호가 짐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안했다. 기필코 성공해서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저뿐만 아니라, 과장님도 이번에 큰 실적을 올리도록 해보겠습니다.”
 “헌데 어떤 방법을 쓸 건지 살짝 알려줄 수는 없겠나? 내가 영어가 짧아서 눈치로라도 대충 알아야 하니까.”
 
 하도 호언장담을 하는 통에 신 과장은 정말 궁금했다. 도대체 민호가 어떤 방법으로 돌파구를 마련할지.
 그의 호기심 넘치는 얼굴을 보고 민호가 당당하게 말했다.
 
 “과장님한테 배운 방법으로 할 겁니다.”
 “……나한테 배우다니….”
 “저번에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거래처에 머리 말고 가슴으로 다가가라고.”
 “…….”
 
 거의 다 도착해서 황당한 말을 하는 민호.
 신 과장은 말문이 막혀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설마 하니 이렇게 계획 없이 올 줄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인제 와서 다시 방향을 돌리기는 힘들었다.
 
 ‘젠장, 내가 가르친 거라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쩝….’
 
 너무 잘 배워도 탈이라고 생각하며 드디어 A&K에 도착했다.
 A&K 한국 지사는 경기도 광명에 있었다.
 지하와 1층은 대형 마트였고, 2층 전체가 한국 내 마트들을 총괄하는 지사였다.
 여기에 민호와 신 과장이 등장하자 프런트에서 한국인 아가씨 한 명이 인사하며 그를 반겼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와, 정말 미인이십니다. 전 이곳에 외국인만 있는 줄 알았는데, 프런트에는 한국인이 있군요.”
 
 이런 것은 신 과장에게 배운 멘트였다.
 물론 속이 뻔히 드러나는 것이라서 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칭찬 싫어하는 여자가 없다는 신 과장의 말이 지금 민호의 귓전을 때리는 것 같았다.
 그게 진짜인가 보다. 얼굴을 살짝 붉히는 프런트의 그녀가 민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민호는 이게 먹히자 신이 나서 용건을 말했다.
 
 “약속은 잡지 않고 왔습니다. 저 말고 몇 번 여기에 온 분이 계시거든요. L&S 상사에서 온 사람인데….”
 “아아, 그 잘 생긴 분 말씀하시는구나. 이종섭 과장.”
 “네, 맞습니다.”
 “그분과 만났던 담당자는 미국으로 가셨어요. 새로 온 담당자는 다신 안 보겠다고 해서….”
 
 민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새 담당자가 종섭을 안 본다고 했을까?
 아까 자신과 신 과장이 여기에 간다는 말을 하자 얼굴을 구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말씀 드려주시겠습니까?”
 “아…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그녀의 망설이는 눈빛. 그리고 잠시 후 뭔가 결심한 표정이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민호가 다시 한 번 부탁하려는 찰나에.
 
 “어? 저기 오시네요. 저분이에요. 케이티! 케이티!”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미국 여자 한 명을 불렀다. 민호의 시선은 그곳으로 따라갔고, 늘씬한 미녀 하나가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케이티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다 한 민호. 다만 종섭을 만나지 않겠다는 이유도 몰랐고, 그게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점도 문제였다.
 더군다나 얼굴은 화사했지만, 투명하듯 푸른색 눈동자가 차가운 것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신 과장은 오늘 꿔다 놓은 보릿자루일 뿐이다.
 그녀의 돌출된 큰 가슴을 가끔 훔쳐보는 게 그가 하는 일 전부였다.
 다행히 케이티는 신 과장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민호.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자신의 가슴에 꽂혔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정확히는 프런트 아가씨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민호에게 꽂혔다.
 
 “이분은 누구시지?”
 
 묘하게 목소리에 흥분감이 묻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민호는 재빨리 그녀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늘 그렇지만, 황당하게도 유창한 영어가 자신의 입에서 나올 때면 너무나 신기했다.
 
 “저는 김민호입니다. L&S에서 왔습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시간이요? 당연히 내드려야죠. 그런데… 저쪽 분도 일행이세요?”
 
 그녀가 가르치는 사람은 바로 신 과장.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해주었다.
 
 “맞습니다. 제 직장 상사입니다.”
 “그러면 저분과 제가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
 
 탐탁지 않은 눈이 신 과장에게 꽂혔다. 그러자 그는 움찔 놀랐다. 훔쳐 본 가슴이 걸렸다고 생각해서 민호에게 한국어로 물었다.
 
 “야, 설… 마 내가 엉큼하다고 하는 거냐?”
 “아뇨. 과장님과 협상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내켜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럼 네가 해라.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련다. 어차피 영어도 잘 못 알아들어.”
 “네? 네….”
 
 약간 무책임한 상사. 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케이티의 눈을 보고 둘러댔다.
 
 “아무래도 단둘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에 마트를 보고 계신다고….”
 “아아, 그래요? 잘됐네요. 그럼 따라오세요. 호호호.”
 
 이상하게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가는 민호. 너무 쉽게 일이 풀리는 것 같아서 오히려 이상했다.
 # 어시스턴트 매니저
 
 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보면 여자 주인공이 발을 꼬는 장면이 있었다.
 민호의 머릿속에 감명 깊게 남은 그 자세를 케이티가 했는데….
 그녀의 발이 교차할 때마다 민호가 하는 설명은 살짝 버퍼링이 생겼다.
 
 “… 따라서 미국 내에 우리 회사의 라면이 진출할 수 있게 된다면, 이곳에서 A&K의 시장 점유율을 끓어 올릴 수 있도록 최대한 돕겠습니다.”
 “매우 흥미롭네요.”
 
 진짜 그렇게 생각할까? 민호는 이상했다. 만약 이게 안 먹히면 2타, 그리고 3타의 설득할 수 있는 제안을 머릿속에 그리고 왔다.
 신 과장에게는 가슴으로 거래처를 대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무 계획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매우 긍정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말은 오케이 사인과 같다고 생각한 민호. 혹시라도 립 서비스가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혹시 지사장님과 만나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죠. 당연하죠.”
 
 민호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의 열망과 패기, 그리고 가슴으로 대하는 진심을 그녀가 느꼈을 거라고 확신할 뿐.
 
 “일단 그럼 저는 본사로 돌아가서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오늘 지사장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민호. 그래서 이 정도면 되었다고 여기며 일어섰다.
 
 “자… 잠시만요. 벌써 가시려고요?”
 “네? 네… 혹시 무슨 궁금한 사항이라도….”
 “아뇨. 지금 미스터 킴이 주신 모든 자료는 거의 완벽해요. 아마 지사장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
 “제가 지금 이 자료를 전해주고 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 점심같이 하는 것은 어때요? 곧 점심시간인데.”
 
 잠시 눈을 깜빡이는 민호. 쉬워도 너무 쉬웠다. 갑자기 자신이 영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와중에 대답이 늦은 것을 알고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저야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하하.”
 “그런데….”
 “네, 말씀하십시오.”
 “점심도 단둘이 먹을 수 없나요? 아까 그분은 그냥….”
 
 말끝을 흐렸지만, 민호는 알 수 있었다. 신 과장을 돌려보내라는 뜻이라는 것을. 도대체 그가 무엇을 밉보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일단 승낙하고 신 과장에게 전화했다. 그동안 케이티는 민호의 기획안을 가지고 사무실을 나갔다.
 
 (어, 민호야.)
 “여기 일이 좀 더 빨리 진행이 되는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지?)
 “지사장에게 서류를 보여준대요.”
 (뭐?)
 
 신 과장의 놀라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민호도 이처럼 빠른 일 처리 속도에 놀라고 있었으니까.
 
 “일단 이쪽 어시스턴트 매니저가 점심을 제안해서, 전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어…시스턴트 뭐?)
 “대충 주임이나 대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알았어. 점심은 네가 사고 나중에 회사에 청구해. 진행비로 처리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 신 과장의 말은 흥분에 겨운 말투였다. 민호 따라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이윽고 케이티가 들어왔다.
 사실 민호는 그녀의 직급으로 지사장을 바로 만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미국은 좀 더 수평적인 관계의 조직 문화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그 이유가 밝혀졌다.
 이곳 지사에서 가장 한국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이 바로 케이티였던 것. 그래서 신임 지사장 역시 그녀에게 많이 의존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케이티도 신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다가 미국으로 가서 6개월 정도 있었죠. 그리고 다시 나온 거예요. 그 전에 4년 있었어요. 물론 다른 회사였지만.”
 
 한국에 머문 기간이 꽤 되어서 그랬을까? 그녀는 분식을 먹고 싶다고 했고, 주변에 있는 분식집에 민호와 같이 왔다.
 지금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기다란 오뎅을 보면서 자꾸 야릇한 상상이 연상되어 민호는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케이티는 꽤 도발적이었다. 그녀는 미국인이다. 굳이 한국의 여성처럼 내숭을 보일 필요도,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걸 프렌드 있어요?”
 “네?”
 “인기 많으실 것 같아서요.”
 “아… 아닙니다. 하하하.”
 
 식사하면서 비즈니스 이야기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로 넘어가 버렸다. 물론 민호에게는 이게 비즈니스의 연장선상이었다. 또한, 알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아까 듣기로 전에 왔던 이종섭 과장을 만나기 싫어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거기다가 시원시원했다. 망설이지 않고 묻는 것에 대해 다 대답해주는 케이티.
 
 “사실 미스터 리하고는 처음 만난 것은 아니었어요. 예전에 한국에 있었을 때, 거래했어요. 친절하고, 잘 생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죠.”
 “그렇군요.”
 “하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거래만 하려고 했어요. 그 당시에도 몇 차례나 스캔들이 있었죠.”
 “미… 미국인하고요?”
 
 부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민호가 다시 물어보자 케이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하지만 저와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안심하세요.”
 “…….”
 
 무엇을 안심하라는 건지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 민호. 그래도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아쉬운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전 업무가 더 있네요. 지사장님은 아까 그 기획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하셨습니다. 아마도 L&S에 조만간 연락을 드릴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좋은 거래라면, 당연히 해야죠. 안 그래도 우리 회사가 한국 점유율이 낮은 데 대해 신임 지사장님이 의욕을 가지고 오셨어요. 전 지사장님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는 마음 자세도 갖지 못하셨어요. 하지만 지금 지사장님은 꽤 다릅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가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 할 거예요.”
 
 민호는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케이티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돕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설득하려는 준비와 전략이 다 필요 없었다. 그냥 너무 쉽게 일사천리로 돌아가는 상황이라서 어안이 벙벙했을 뿐.
 결국, 하나의 결론을 내린 민호.
 
 ‘역시 진심이었어. 가슴으로 다가가니 통한 거야. 이게 바로 신 과장님이 가르쳐 주신 것 때문이다.’
 
 또 하나 생각해보는 것은 유미였다. 최근 그녀 때문에 회사도 생활도 즐거웠다. 이런 에너지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주었다고 여긴 민호.
 L&S 상사 6층에 창조영업부와 전략기획부가 같이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어가면서 또 한 번 그녀와 마주친 민호. 요즘은 충전이 이토록 쉽고 간편하게 된다.
 거기다가 사무실에 들어가니 나 부장이 활짝 편 얼굴로 자신을 환영했다.
 
 “신 과장에게 들었네. 지사장까지 기획안이 닿았다면서?”
 “아, 네. 아직 결과는 확신할 수 없지만, 케이티가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어디야? 지사장까지 그 업무 기획안이 간 것만으로 최초일세, 최초야. 하하하.”
 
 나 부장은 민호의 어깨를 잡으며 크게 웃었다. 조금만 더 있었다면, 자신을 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민호. 남자에게 안기기는 싫어서, 잠시 화장실을 간다고 말했다.
 화장실에는 종섭이 거울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들어오자 거울 속의 눈이 거의 잡아먹을 듯이 째려봤다.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면서 민호 역시 수도꼭지를 틀고 얼굴을 씻었다.
 그때 민호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역시 전에 한 말이 맞았어. 재주는 곰이 부리는 거야.”
 
 민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혼자 입 아프게 떠들어 봤자 종섭이 얻어갈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럼 계속 고생하라고. 나중에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테니까.”
 
 무슨 헛소리를 계속 해대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민호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휴지로 얼굴을 닦았다.
 계속 거울을 보고 스스로 자학하라고 마음속으로 종섭에게 이야기한 뒤 화장실을 나왔을 때, 다시 희소식이 들려왔다.
 
 “A&K 지사장에게 연락이 왔어요. 지금 나 부장님이랑 통화 중이세요.”
 “정말이요?”
 
 아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민호의 눈에 전화로 열심히 상대를 설득하는 나 부장이 보였다.
 잠시 후 전화를 끊고 나 부장이 민호에게 다가와서 아까보다 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만나자는군. 다음 주에 보기로 했어. 하하하.”
 “정말입니까?”
 “정말이야. 모두 자네 덕이야.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신 과장!”
 “네!”
 
 아무리 동기라도 회사에는 직위가 먼저였다. 더군다나 조직을 중요시하는 신 과장은 사심 없이 나 부장에게 예의를 지켰다.
 
 “회식 괜찮지? 오늘 창조영업부 전 직원 회식이니까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게 하라고. 알았지?”
 “네, 부장님.”
 
 그날 저녁, 한쪽에서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회식 자리를 차지한 종섭은 민호를 노려보았다. 점점 취기가 올라왔다. 도대체 케이티를 설득한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1차를 끝내고, 2차로 가는 길에 그는 슬쩍 빠졌다.
 
 “죄송하지만, 전 몸이 좋지 않아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 그런가? 그래, 오늘 고생했어. 가보게.”
 
 종섭의 말에 더 그를 붙잡지 않은 나 부장.
 사실 지금 그의 눈에는 민호밖에 보이지 않았다.
 창조영업부에 그가 온 것은 호박이 넝쿨째로 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섭의 시기심 가득한 눈을 전혀 보지 못하고 2차로 출발했다.
 다음날 나 부장은 A&K 지사장과 어제 잡은 약속을 하러 갔다.
 이제 민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일개 말단 사원이 높은 사람의 사인을 직접 받아낼 수는 없는 법. 마음속으로 성공을 기원하면서 나 부장을 기다렸다.
 꽤 긴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도 나 부장은 오지 않았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창조영업부 모두 퇴근까지 미루는 상황.
 신 과장이 퇴근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민호의 귀에 신 과장의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모두의 이목이 신 과장에게 쏠렸다. 민호 역시 마찬가지. 어제 먹은 술로 인한 숙취가 확 깨는 것 같았다.
 떨리는 음성으로 전화를 받는 신 과장.
 
 “여보세요.”
 
 민호는 예감했다. 신 과장의 저 표정과 저 음성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분명히 전화를 건 주인공이 나 부장이었다.
 
 
 # 급한 업무
 
 민호는 신 과장의 얼굴을 보았다.
 잠시 굳어졌기에 불길한 예감도 들었고, 그렇다고 이 마당에 쉽게 웃으면서 상사의 전화를 받을 리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성공과 실패는 사인할 때까지 모르는 일.
 신 과장은 주변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던지 중앙의 유리 회의실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까 더 궁금했다.
 민호는 어제 잘 될 거라고 확신했지만, 지금 보니 또 뭔가 꼬인 것만 같았다.
 하긴 하루 만에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너무 과한 기대였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 신 과장이 입을 열었을 때, 그는 살짝 기대를 접었다.그런데….
 
 “역시 미국놈들 립 서비스는 알아줘야 해. 당장 계약할 것처럼 사람을 부르더니, 여러 가지 문제를 설명해달라는군. 누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누가’란 민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기획안 입안자가 가서 설명하는 게 가장 상대를 잘 이해시킬 수 있으니.
 하지만 종섭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응? 자네가? 이왕이면 민….”
 “아뇨. 원래 제 일이었습니다. 제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불타오르는 의욕. 민호는 속으로 비웃었다.
 
 “책임질 수 있습니까? 다 설명하실 수 있나요?”
 “뭐?”
 “대형 마트의 국내 점유율을 높이는 부분에서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이번에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고요. 그쪽에서는 자기가 내주는 것보다, 얻을 것을 먼저 생각한 게 분명한데… 맘에 들지 않으면 어쩌시렵니까?”
 “그럼 네가 그 자료를 나에게 주면 되잖아!”
 “전 재주 부리는 곰이 되기는 싫은데요. 그럴 바에야, 제가 가겠습니다.”
 “뭐! 이 자식이….”
 
 민호는 그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머리가 좋아지니, 말발도 세지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종섭의 말은 의욕만 있고, 명분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굳이 민호가 머리가 좋아지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허점이 보였다. 그래서 신 과장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민호야, 여기 열쇠 있어. 내가 여기 마무리할 테니까, 내 차 써라. 급한가 보니까 빨리 가라.”
 “네, 과장님.”
 
 종섭의 표정이 더 굳어졌고, 민호는 의지를 불태우며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다 생각났다. 어제 오후에 유미를 보고 지금까지 못 봤다는 것을.
 A&K에 매달리느라 충전하는 것을 잊었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다 되어간다. 남은 시간은 약 두 시간가량.
 재빨리 전략기획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미가 퇴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대했건만.
 
 “어, 오빠? 웬일이야?”
 
 지민이가 퇴근하면서 그와 마주쳤다.
 
 “유미 씨는?”
 “아까 퇴근했는데, 왜?”
 
 관심을 두었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찾는 경우 여자의 표정.
 그것을 보여주며 지민은 최대한 서운하지 않은 척 말했다.
 
 “아, 그래? 젠장.”
 “무슨 일인데?”
 “아냐, 됐어. 업무 때문에 그래.”
 “업무? 창조영업부랑 같이하는 건 아직 없는데.”
 
 지민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할 때에는 이미 민호가 뒤돌아서 어디론가 뛰어가는 상황이었다.
 민호는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에 빨리 A&K 본사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유미를 불러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차에 시동을 걸고 나갔는데, 때마침 걸린 러시아워. 차로 빽빽한 공간에서 과연 광명까지 제시간에 도착할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다. 다시 내리기는 힘들었다. 운전대를 붙잡고 차가 빠지기를 애써 기원했다.
 피가 마르는 느낌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10분을 남겼을 때, 나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이제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알았어. 빨리 올라와.)
 “네, 알겠습니다.”
 
 조급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민호의 마음은 나 부장보다 더 조급했다.
 사실 이미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냥 자신의 머리를 믿고 상대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가 영어였다. 이것을 대비해서 평소에 영어회화를 익혔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소용없다. 주차한 후 엘리베이터를 누르는 민호의 손이 급해지기만 할 뿐.
 이미 3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빨간 불이 뜬 버튼을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모른다.
 스윽.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 지사장의 오피스가 있는 5층을 몇 번이나 눌렀다.
 
 - 5층입니다.
 
 5층에 당도했을 때, 들리는 여성의 기계음이 왜 이렇게 크게 들릴까.
 문이 열렸을 때, 케이티가 웃으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그 웃음이 살며시 없어진 이유는 민호도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케이티는 어제와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민호의 매력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잠시 어제 무언가가 눈에 씌웠으리라. 가끔 컨디션이 안 좋았을 때가 있었고, 어제가 동양인에게 꽂힌 그날일 공산이 컸다.
 따라서 그녀의 목소리가 슬며시 차가워졌다.
 
 “지사장님 실은 여기서 쭉 가셔서 오른쪽에 있어요. 전 그럼 퇴근해야 해서.”
 “아… 네,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등으로 받는 케이티를 보면서 민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제한시간은 끝이 났으니까. 자신감이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서툰 영어가 나올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때.
 
 “누구세요?”
 
 뒤에서 케이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저… 어? 김민호 씨!”
 
 민호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게도 유미가 자신을 향해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현실!
 하지만 유미가 자신의 앞에 섰을 때, 확실히 알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저를 찾으셨다면서요? 지민이에게 연락받고 서둘러 왔어요. 급한 업무라던데… 제가 뭔지 몰라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유미.
 그런데 덥석. 민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민호가 입을 좌우로 찢어지게 벌리며 웃음을 내뱉었다.
 
 “네, 급한 업무 맞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방금 해결되었어요. 하하하.”
 
 케이티의 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뒤를 돌아본 케이티는 두 가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나는 다시 민호의 매력이 되살아났다는 것. 그래서 가던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끌려가듯이 다가가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기분은 강한 질투심이었다. 유미의 손을 잡은 그가 저렇게 환한 미소를 짓다니.
 
 “생각해보니 제가 안내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네?”
 “조금 전에는 무례했네요. 사과드려요.”
 
 아직도 유미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민호.
 케이티가 다가와서 아까와는 180도 다른 나긋나긋한 말투로 자신에게 안내를 말했다.
 그러면서 보는 시선은 자신의 손이었다. 유미의 손을 아직도 잡고 있는 그 손.
 놓고 싶지는 않았지만….
 유미가 뺐다. 아무래도 쑥스러운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민호가 진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만약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오늘 저녁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의미심장한 민호의 말이었다. 유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가 기대된다고 묻는다면, ‘예스’였다.
 
 “밑에서 쇼핑하고 있을게요.”
 “그러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민호는 다시 한 번 웃어주며 케이티를 따라 나섰다.
 이미 앞서 가는 케이티. 그런데 민호의 눈이 호강한다. 착 달라붙은 스커트가 그녀의 둔부 라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엉뽕일까? 가슴도 크던데, 그것도 역시 뽕일지도 모른다.
 엉뚱한 상상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호는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중요한 만남을 앞두고 잠시 정신이 산만해진 것 같아 반성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에는 케이티가 지사장실 앞에서 노크하는 게 보였다.
 드디어 A&K 지사장의 실물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민호.
 살짝 까진 머리에 살찐 50대 남성이 자신에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이름을 스미스라고 말한 지사장에게 재빨리 민호도 자신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더 빨리 나 부장이 소개했다.
 
 “아까 말했던 김민호 씨입니다. 더 디테일한 설명을 해줄 겁니다.”
 “그렇습니까? 기대되는군요.”
 
 기대된다는 스미스의 웃는 얼굴. 그러나 민호는 그의 눈빛에서 큰 경계심을 느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을, 그리고 나 부장을, 더 나아가서 L&S를 경계하고 있었다.
 과연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면서 업무 협약으로 이끌 수 있을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민호는 그것을 인정하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L&S는 현재 대형 마트에 진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갑자기 스미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지어 나 부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괜히 민호를 불렀다는 후회가 스며든 모습. 그것을 민호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지사장님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를 보시라고.”
 “…….”
 “더 솔직해지겠습니다. L&S는 대형 마트를 준비조차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출할 것 같습니다. 일개 말단 사원의 시각이 옳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곳 A&K의 잠재적 경쟁자가 되겠죠.”
 “기… 김민호!”
 
 나 부장은 그를 막으려고 했다. 민호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내부 검토 중인 특급 기획안이다. L&S가 대형 마트에 진출한다는 것은.
 
 “죄송합니다. 나 부장님. 이게 진짜 추진되는 일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L&S가 언젠가 대형 마트에 진출할 것이다!’ 이 추측은 저 말고 조금만 짐작해 봐도 외부에서 알아챌 수 있는 일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지사장님도 그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들은 이야기죠. 현재 진출한 대형 마트와 잠재적으로 진출할 몇몇 기업군들. 유통법 개정만 되면 바로 뛰어들 것이다. 저는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스미스의 이야기를 듣고 나 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대가 자신을 속인 줄 알았다. 립 서비스만 하고 정작 업무 협약을 진행할 때에는 계속 태클을 걸었기 때문에.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었다. L&S가 전혀 대형 마트에 진출하지 않을 것처럼 말해놓았으니, 오히려 스미스가 자신을 의심해 버린 것이다.
 이것을 알아챈 신입사원. 도대체 어떤 시선으로 그를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나 부장의 눈빛을 민호는 담담히 받아냈다.
 
 “자, 그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제로 베이스 부터요. 여기에는 ‘if’가 있습니다. 즉, 만약 L&S가 대형 마트를 준비할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것을 펼쳐 보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호감을 이끌어낸 모양이다.
 
 “좋습니다. 사실 그랬다면, 저는 오해 없이 설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미스는 나 부장을 보면서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말줄임표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이다.
 민호는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진 나 부장을 두고 얼른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자신을 보는 스미스의 눈빛은 이제 경계를 풀기 시작한 것 같았다. 물론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아챘다.
 그래도 프레젠테이션이 끝났을 때, 스미스는 긍정적인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시겠지만,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작으니까요. 본사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이제 업무 협약을 위해서 우리 말고 더 윗분들이 개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공황 상태였던 나 부장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힘들게 상대를 설득했던 민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스미스의 이 말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민호의 귀에 나 부장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즈음에서 민호는 빠져야 했다.
 아무리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지만, 계약 조건이 오고 가려면 일개 사원이 듣는 것은 L&S 매뉴얼에 상반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그를 오히려 나 부장이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아, 전 약속이 있어서….”
 “미안한데, 그 약속 뒤로 미루거나 취소해 줘. 이미 L&S의 일급비밀을 여기에다가 팔아먹은 사원이 나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차라리 더 많은 비밀을 머릿속에 넣어두라고. 그래야 만약 이게 새어나가면, 범인이 자네와 나, 둘로 압축되지. 안 그래? 하하하.”
 
 민호는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분명히 좋은 경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미에게 문자를 해야 했다.
 
 - 좀 늦어지네요. 어떻게 하죠?
 
 자신의 소식을 기다렸는지 곧바로 그녀의 답이 왔다.
 
 - 기다릴게요. 천천히 일 보세요.^^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고 밑으로 내려가 유미를 보았을 때, 그녀는 아예 장을 본 모양인지 비닐봉지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뭐예요, 이건? 진짜 장을 보신 거예요?”
 “아뇨. 라면이에요. 요즘 기획부에서는 상품기획 때문에 난리거든요. 물론 식품 쪽에서 기획하고는 있지만, 우리도 종종 가서 도와야 해요.”
 “그런 거예요? 몰랐어요.”
 
 L&S 식품과 L&S 상사의 기획부는 상품 연동성이 매우 컸다. L&S 그룹 자체가 식품으로 유명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라면을 사서 먹고 판별할 줄은 몰랐다.
 
 “원래는 마케팅팀에서 해야 하는데, 이번에 일이 커지는 바람에 기획팀으로까지 넘어왔어요. 휴우, 덕분에 각 종류의 라면을 다 먹고 보고서 써야 해요. 요즘 살쪄서 미치겠는데….”
 “헛, 유미 씨가 무슨… 살찐 곳이 어디 있다고요.”
 “여자는 안 보이는 곳 구석구석 살이 쪄간답니다.”
 
 유미의 마지막 말은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유미의 안 보이는 곳이 어디인지 머릿속에 그릴 수밖에 없었으니.
 유미는 잠시 공상에 빠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이게 민호 씨 기획안 때문에 커진 일이라던데요? 그래서 기획부에서는 민호 씨를 거의 공적으로 삼고 있죠. 킥킥.”
 “네?”
 “농담 반, 진담 반이에요. 아무튼, 그런 큰 죄를 지으셨으니, 어때요? 도와주실 거죠? 어차피 저에게 할 말도 있으시다면서요? 그러니까… 라면 먹고 갈래요?”
 # 승진
 
 라면을 먹으러 민호와 유미가 온 곳은 이태원이었다.
 사실 민호가 그녀를 끌고 왔다.
 
 “일본 라면이잖아요.”
 “맞습니다. 라멘이죠.”
 “여기는 왜?”
 “라면 먹고 가자고 하셨잖아요. 설마 집으로 초대한 것은 아니시겠죠?”
 
 당연히 아니었다. L&S 상사 건물 6층 휴게실에서는 간단히 라면을 끓여 먹을 수도 있었다. 야근하는 사람을 위한 곳이었다.
 아마 유미는 그곳에서 라면 맛을 보자는 말을 한 것이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보다, 차라리 밖에서 라면을 먹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또한, 이것이 유미에게 주는 일종의 팁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사람들이 봉지 라면을 먹을 때 이런 맛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서요.”
 “그래요? 정말이에요?”
 “대학 때 들었어요. 하버드 나오신 교수님이 말씀하신 건데, 미국인들이 한국 라면도 좋아하지만, 매워서 잘 못 먹는다고. 그런데 일본 라면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네요.”
 “그렇군요.”
 
 유미는 드디어 눈에 열기를 품고 민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언가의 집중하는 유미의 모습.
 약간 입이 벌어지며, 가지런한 치아가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꽤 고혹적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우연히 본 영화, 천녀유혼의 왕조현을 닮았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에 절로 흐뭇해짐을 느끼며 민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달했다.
 
 “좋은 아이디어예요. 결국, 현지에서 좋아하는 맛을 생각해보라는 거군요.”
 “제너럴 하되 스페셜하면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죠. 저는 식품 기획에 문외한이지만, 계약 다음 단계가 우리 라면의 미국 진출이니까… 잘 만들도록 유도 좀 해주세요. 하하.”
 
 일에 열정적인 남자를 싫어할 여자는 거의 없었다.
 유미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민호가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여사원들이 이상했다.
 크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펙이 매우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빨리 성공할지도….’
 
 @@@@
 
 A&K와의 업무 협약은 매우 순조로웠다.
 물론 한 번에 사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통 이런 업무 협약이 세부 조율에 들어가고, 상호 간에 만족스러운 협약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몇 달이 걸린다고 했다.
 그나마 첫 원안의 완벽함과 민호의 솔직한 프레젠테이션으로 그 시간이 대폭 단축될 것이라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중역 회의에 다녀온 나 부장.
 인상을 한껏 편 채로 이렇게 외쳤다.
 
 “사인했어. 하하하. 이제 미국 진출이야! 드디어 미국 진출이야!”
 
 영업부 양 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민호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같이 기뻐하는 종섭이 신기하게 보였다.
 아무리 자신에게 앙심을 품어도 창조영업부의 성공은 기뻤나 보다.
 박상민 사장은 이례적으로 창조영업부에 와서 민호의 일 처리를 칭찬하며 금일봉을 전달했다.
 당연히 그날은 거한 회식이 있었다. 민호는 그야말로 코가 삐뚤어지게 먹었다.
 이제 ‘직장 생활이란 이런 것이다.’를 알아갈 무렵….
 그가 유미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소문들은 본인들의 귀에 잘 들어가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잘 모르고 계속해서 아침마다 유미의 얼굴도장을 찍는 민호.
 아직 분위기는 무르익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호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유미는 유미대로 매일 민호가 아른거리니 오지 않으면 이상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분명히 얼굴을 비칠 때가 되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허전했다. 심지어 식사 시간에도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이럴 때에는 커피가 제격. 커피 한잔 타서 잠시 비상구를 열어 보았다. 신기한 게 여기에 민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예감이 맞을 줄이야!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해요?”
 “아, 유미 씨.”
 
 아주 깊이 생각에 빠져있었기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유미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에 미소를 그려내는 민호.
 
 “커피 한 잔 드실래요? 아직 입… 안 댔는데.”
 “유미 씨가 타주는 것은 독이 들었어도 먹어야죠, 하하하.”
 
 너스레를 한 번 떨어주자, 유미도 가볍게 웃으며 자신이 든 커피를 내주었다.
 
 “근데 웬일이에요?”
 “유미 씨야말로. 저번에 말씀드렸지만, 이곳 계단은 제 공간 아닙니까? 하하하.”
 “저도 오늘 이상하게 이곳이 끌려서요.”
 
 솔직히 말하면 민호가 여기 있을 줄 알아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유미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는 힘들었다.
 
 “그래요? 이것 참 이심전심이네요. 저도 오늘 오랜만에 이곳이 그리워서… 가 아니라, 아침에 승진 발표 보고 잠시 생각하려고 왔어요.”
 “아….”
 
 아침에 상반기 승진발표가 나왔다. 창조영업부에 좋은 소식이 몇 개 날아들었다.
 신 과장이 차장으로 승진한 것에다가 아영이 ‘보’ 자를 떼고 정식으로 대리를 달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민호가 속해 있는 영업 1팀의 겹경사였으니까.
 다만 종섭이 ‘보’ 자를 없앤 것이 찝찝했다.
 이제야 그가 말한 ‘재주는 곰이 부린다.’라는 말이 머리에 들어왔다.
 이번에 A&K와 협력 관계를 맺은 것은 민호의 공이 가장 컸다.
 기획안부터 실무까지 말이다.
 하지만 조직에 속해 있는 한 공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신입 사원을 승진시킬 수도 없는 법.
 결국, 가장 많이 승진한 부서의 팀원으로서 만족해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를 유미에게 털어놓으니 속이 좀 시원해진 민호.
 
 “아마 내년쯤에는 대리를 다실 거예요. 사장님도 그렇고, 다른 임원들도 이번에 민호 씨의 이름을 머리에 각인시켰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그럼요. 당연하죠. 분명히 1년 만에 대리를 다는 민호 씨의 초고속 승진이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거예요.”
 
 그녀의 격려에 다시 미소를 짓는 민호.
 사실 종섭의 승진이 짜증이 나긴 했지만, 인정할만한 일이었다.
 창조영업부가 A&K 일을 집중해서 진행하는 동안, 그는 다른 실적을 쌓았으니까.
 그것이 창조영업부를 이끄는 또 하나의 축이 되었다.
 다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민호로서는 몇 년 안에 반드시 그를 따라잡거나 추월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입사 1년 만에 대리를 달았다고 한다.
 일단 1년도 되지 않아 대리 직급으로 올라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내년 이맘때 상반기 승진을 노리는 게 민호의 욕심.
 유미와 헤어지고 나서 사무실로 들어가는 민호의 표정에 큰 동기 부여가 보였다.
 그런데 신 과장 자리에서 짐을 풀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 또 의문에 휩싸였다.
 
 “오, 저기 오는구먼. 민호 씨, 어디 갔다 왔어? 여기 새로 1팀을 이끌어 줄 과장이야. 인사해.”
 “아, 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동글동글한 얼굴에 작은 키. 자신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받는 과장의 이름은 안재권이었다.
 누군가 새로 팀에 합류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창조영업부가 커지면서 나 부장 밑에 신주호 차장을 두고, 공석이 된 1팀 과장이 오리라는 예상은 쉽게 할 수 있었으니까.
 
 “잘해보자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일에 거의 초보야. 김민호 씨한테 배운다는 자세로 일할게. 하하하.”
 
 그런데 재권이 이렇게 말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민호는 잠시 신 차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오묘한 눈짓을 했다.
 
 ‘옥상 위로 잠깐….’
 
 대충 신 차장의 뜻을 짐작한 민호는 재권에게 잠시 용무를 보겠다고 나왔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신 차장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이 일에 초보라니요? 과장이 그럴 수가 있나요? 아니, 거기다가 우리 창조영업부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와도 되는 겁니까? 그냥 하는 말이죠?”
 “휴우….”
 
 민호의 의문에 신 차장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럼 정말 초보란 말입니까?”
 “응. 그것도 실무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야.”
 “네?”
 
 민호는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커졌다. 신 과장은 혹시나 하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유학을 마치고 온 회장의 막내아들이라고. 비록 적통은 아니지만….”
 “적통이 아니라는 말은?”
 “에이, 대충 눈치 챘잖아. 꼭 확인해야 하겠어?”
 
 그렇다. 민호는 눈치를 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룹 회장들의 여성 편력. 그로 인한 배다른 자식이 종종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로만 여겼다.
 
 “막내아들이긴 하지만, 안 회장이 거의 챙기지 못하는 자식으로 알고 있어. 그나마 이곳 L&S 상사로 보낸 것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신을 증명하라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알다시피 각 계열사 CEO는 상사 출신들이 꽤 많으니까. 뭐니 뭐니 해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경영자들은 무역회사 출신 비중이 높잖아.”
 “물론 그렇죠. 다만 아까 잠시 봤을 때에는 좀 얼빵해 보이던데요?”
 
 아까 잠시 본 재권. 민호의 눈에는 사람이 좋아서 실컷 이용당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도 착해 보이지만, 재권은 그것을 넘어서 아예 만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신 차장은 민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보다 더 맹해 보이는 사람은 처음 봤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글세….”
 
 신 차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민호를 보았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소한 자네를 만났으니까, 첫 단추는 잘 채운 것 아닐까? 하하하.”
 # 스파이
 
 회장의 아들을 상관으로 두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행운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대한민국 기업은 아직도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시했다. 그런 게 없다면, 최소한 미래를 위해 선을 잘 대는 수밖에 없었다.
 회장 아들과 유대감을 나누는 거라면, 누구라도 가장 강력한 선을 잡았다고 부러워할 것이다.
 다만 민호가 잡은 선은 나중에 숙청될지도 모르는 1순위라서 문제였다.
 확실히 그가 상사 복은 전혀 없다는 게 여기서 또 한 번 증명이 되었다.
 오늘 회의에서도 그랬다. 민호의 눈에 비친 재권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반쯤 감긴 눈은 언제 졸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현재 나 부장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두 개의 큰 줄기를 설명하고 있었다.
 창조영업부의 핵심 사업인 L&S 라면의 미국 진출과 A&K의 한국 내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파트너쉽 구축.
 이를 위해서 1팀과 2팀이 둘 중에 하나씩 가져가야 하는 상황.
 
 “어느 팀이 가줄 건가?”
 
 나 부장은 미국출장을 먼저 꺼내놓았다. 문제는 그의 시선이 민호가 앉아 있는 쪽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매듭을 지은 자가 풀라는 말이 있다. 이 일을 시작한 1팀, 그 중 핵심인 민호가 끝까지 책임지기를 바랐다.
 
 “저희 팀에서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선의 다른 쪽에서 손을 드는 남자가 있었다.
 민호는 그의 별명을 하이에나라고 불렀다. 지금도 얄미운 듯이 그를 쳐다보았는데, 종섭은 그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주어서 말했다.
 
 “솔직히 이것은 경험 문제입니다. 저희 2팀은 경험 많은 인력이 충분합니다. 미국 출장도 많이 가 봤고요. 당연히 이쪽에서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물론 경험이 중요하지. 그런데….”
 
 나 부장은 뜻밖에 종섭이 강력한 주장을 하고 나서자 살짝 진지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내 생각은 기획안을 시작한 1팀에서 마무리까지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아. 안 과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네? 네. 알겠습니다.”
 “아니, 그냥 알겠다고만 하지 말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네? 네. 저는 부장님의 생각이 옳다고….”
 
 나 부장은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민호도 마찬가지. 도무지 주관이 전혀 없어 보였다.
 원래 재벌 아들이란 오만하며, 싸가지가 한 반 푼어치는 없어 줘야 하는데, 참 이상했다.
 신 차장은 이에 대해서 민호에게 다음과 같이 분석해 주었다.
 
 “거의 회장님이랑 같이 살지 못했대. 밖에서 낳아서 밖에서 자란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니, 그래도 너무 자신감이 없어 보여요.”
 “그래도 재벌 아들이잖아. 혹시 알아? 아영 씨랑 잘 될지? 킬킬킬.”
 “차장님!”
 
 아영이는 빽 하고 소리쳤고, 민호는 웃었다. 오늘 오랜만에 예전 해외영업 3팀의 동지끼리 한잔하기로 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민호는 하나를 집고 입속에 넣은 후 다시 소주를 입에다가 부었다. 오늘은 전혀 취할 것 같지 않았다.
 쪼르르르. 빈 잔을 재빨리 아영이 따라주었다.
 
 “민호 씨, 오늘 또 필름 끊기는 것 아니야? 저번에도 완전히 취해서 유미 씨 데리고 오라고 얼마나 외쳐댔는데.”
 “제… 제가요?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그죠, 차장님?”
 
 신 차장 역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김 대리 말이 맞아. 그리고 그때 김 대리가 얼마나 서운해 했는데. 아깝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봤지.”
 “제… 제가 언제요?”
 “아님 말고. 하하하.”
 
 이번에는 아영이 당황했다.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껄끄러운 대화가 싫었는지,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근데 우리 팀이 미국에 가야 하는 것은 맞잖아요. 민호 씨 기획안이고, 가장 큰 역할을 했으니까. 아까 안 과장님이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잘못하면 그 하이에나에게 가버릴 것 같아요.”
 
 그녀 역시 종섭을 하이에나라고 불렀다. 얼마 전에 취해서 민호가 하이에나라고 지칭하는 것을 듣고는 별명을 매우 잘 지었다면서 그녀 역시 따라 했다.
 민호는 아영의 이야기를 듣고 살짝 웃었다. 직장 생활할 때, 실적을 올려야 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 아영 역시 실적을 올리고 싶어 했다.
 다만 민호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국에 출장이라니? 과연 그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유미가 곁에 없다면, 제대로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일단 영어에서부터 걸렸다. 자신의 영어 실력은 유미에게서 충전 받지 못할 경우 속된 말로 ‘뽀록’ 난다.
 그래서 아까 회의 때 적극적이지 못했던 민호.
 다음 날에도 다시 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침묵했다.
 나 부장은 이를 이상히 여겼다. 마음은 민호였지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종섭의 의견을 계속 무시할 수도 없었다.
 재권이 미덥지 못하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일의 중요도에 따라서 최소한 과장급 이상이 미국을 가야 했다. 신 차장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역시 영어는 꽝!
 결국, 누가 누구를 인솔하는 꼴인지 모르겠지만, 재권이 민호를 동반하고 미국에 들어가는 게 더 모양새가 좋았다.
 고심 끝에 그는 민호를 조용히 부르며 말했다.
 
 “민호야, 너무 조용히만 있는 것도 좋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무조건 수직적인 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안 과장은 사실 너보다 경험이 없어. 네가 회의에서 나서야, 내가 너에게 일을 주지.”
 “…….”
 “왜? 무슨 문제 있어? 말을 해, 말을. 내가 최대한 해결해 줄게.”
 
 민호가 말이 없자 나 부장은 그를 채근하고 나섰다. 약간 답답한 모양이었다. 유리 회의실 밖에서 보면 그가 민호를 질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민호는 고민하는 중이었다. 회화 학원에 다닌 지 벌써 2개월. 과연 이 정도 실력으로 미국에서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맘속으로 이게 큰 기회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닌데, 자꾸 망설여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감을 품은 나 부장의 눈빛과 자신의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야망.
 불과 얼마 전에 종섭을 추월하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그게 부끄러울 정도로 소극적인 자신의 모습에 살짝 실망하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넌 유미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냐? 너 혼자의 힘으로는 못 하는 거야?’
 
 민호는 갑자기 배에 힘을 주고 눈에 불꽃을 그렸다. 차라리 약해지기 전에 지르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잠시 안 과장님께 기회를 드려보려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나서는 게 보기 안 좋을 것 같아서.”
 “전혀 안 그래. 사실 자네한테만 이야기하는 건데….”
 
 나 부장은 잠시 유리 밖에 있는 시선들을 살펴보며 목소리를 줄였다. 방음 시설이 완벽한데도, 살짝 불안한 모양이다.
 그러나 결심한 듯 민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안 과장을 스파이로 규정하고 있네.”
 “……!”
 “그냥 여기까지만 알고 있어. 자네니까… 정말 내가 아끼는 자네니까 말해주겠네. 안 과장은 스파이야!”
 
 나 부장의 이야기를 들은 민호는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요즘 유미를 자주 만나면서 그의 두뇌 회전은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알 수가 없었다. 회장의 막내아들을 스파이라고 규정하는 나 부장의 말을.
 
 “안재권이는 한국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뉴욕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어. 그런데 저렇게 바보 같은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잖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스파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최근 안 회장의 건강이 매우 안 좋아지면서, 측근들을 자주 불러 모으고 있어. 사장님은 그 ‘측근’에 들어가지 않아. 아예 실세에 들어가지. 본격적인 견제를 하기 시작하는 거야.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사후에 자기 자식들에게 제대로 재산을 승계하려는 은밀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 그런 가운데 막내아들을 제일 잘 나가는 부서에 밀어 넣었어. 그게 무슨 의미겠어?”
 
 민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나 부장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복잡한 회사 내 역학 관계는 끼고 싶지 않았다.
 일단 미국 출장만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유미가 없는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찾았다.
 해외 출장 스케줄은 5일이다.
 그중에 초반 30시간이 중요했다. 유미 충전기를 사용해서 배터리가 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30시간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스케줄 표를 재권에게 내민 순간 상대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을 확인했다.
 
 “뭐야? 가자마자 업무를 본다고? 이거… 살인 일정인데?”
 “굳이 4박 5일을 다 채울 필요 있겠습니까? 빨리 처리하고 빨리 오죠. 그래야 또 여기서 업무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
 
 재권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A&K의 본사가 있는 시애틀까지 가는데 대략 10시간이었다.
 그렇게 오전에 도착하자마자 A&K 본사를 방문한다는 것이 너무 강행군인 것 같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누가 회장 아들인지 모르겠어? 하하하.”
 
 반면 재권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민호는 보았다. 그의 눈에 서린 복잡한 의미를. 물론 그것은 곧바로 사라졌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다음 날부터 공식적인 일정이 자네와 내가 따로따로인데….”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처음만 제가 그쪽 본사를 상대하고, 그 이후에는 직위로 봐도 과장님이 더 중요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니까요. 그동안 저는 미국 한인회 대표들을 만나서 한인 슈퍼마켓에 공급할 스낵류에 대해 협상하겠습니다.”
 “그…렇군.”
 
 재권은 꼼짝없이 당했다. 거의 물샐 틈 없이 민호가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처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민호가 하고, 그래도 과장이니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부차적인 것들을 준다는 의미. 그래서 따질 수도 없었다.
 그동안 한인 타운과 접선해서 새로운 사업 목표까지 설정한 계획이야말로 탄성까지 나오게 하는 계획이었으니.
 
 “좋아, 정말 좋아. 역시 김민호 씨야. 하하하.”
 
 옆에서 나 부장의 추임새까지 어우러지며, 거의 그 계획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번 주 일요일로 확정된 출장 날짜를 앞두고 민호의 업무는 대폭 줄어들었다.
 나 부장의 지시였다. 그것은 1팀 자체의 업무량을 당분간 주지 않는 배려와 함께, 다가올 미국에서의 결전에 만전을 기하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업무가 줄어들었다 할지라도, 민호는 역시 계속 바빴다.
 저번에 이곳 지사장을 설득했을 때에는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L&S의 실질적인 이득을 위해 얼마만큼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느냐가 관건이었고, 나 부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기에 부담 또한 작지 않았다.
 그게 약간의 스트레스가 되었나 보다.
 민호는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가장 친한 친구인 상철을 불러냈다.
 어렸을 때부터 허물없이 지내왔던 사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비밀도 없었던 친구에게 고민을 다 털어놓고 싶었다.
 
 “어쩐 일이냐? 그동안 바빠서 술 한 잔 하자고 해도, 코빼기 한 번 비치지 않더니.”
 “내가 그랬나? 에이, 그래도 너보다 낫다. 넌 일 년 동안 만나주지도 않았잖아, 새끼야. 하하하.”
 제약 회사 개발팀에 있는 상철.
 170이 약간 안 되는 키에 쌍꺼풀이 짙은 눈으로 짐짓 인상을 썼지만, 민호도 질 생각이 없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도경 씨에게 전화번호도 안 물어봤다면서? 무슨 매너가… 완전 개매너네. 그러니까 네가 여친이 없지.”
 “그건 내가 좀 미안하네. 꼭 전해줘. 미안하다고. 알았지?”
 “됐어, 인마. 나중에 직접 네가 와서 사과해.”
 
 늘 그렇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스스럼이 없어, 처음에는 주변 잡기부터 시작하다가 하는 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원래 오늘은 일 이야기에서 벗어나려고 관련 없는 사람을 불러낸 것인데, 이렇게 되니 민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미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거지? 그것도 회장 아들이랑?”
 “되게 간단히 요약하네. 난 길게 말한 것 같은데.”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자신의 표정이 친구가 봐도 별로였나 보다. 실제로 민호는 미국에 가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게 얼굴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냥… 아, 맞다. 너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혹시 머리가 갑자기 좋아질 수도 있냐? 의학적으로?”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상철은 의대를 다녔다. 민호는 그가 미래의 의사가 될 거로 생각했는데, 결국은 실패했다.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입학한 지 2년도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의 의문을 채우길 바랐다.
 하지만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은 끝까지 비밀로 가져가는 게 옳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가 말했던 회장 아들. 지금까지 본 모습으로는 어리숙한데… 혹시 약이나 치료법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해본 말이야.”
 “그런 게 어딨냐, 세상에. 짜식, 취했냐?”
 “그렇지 그런 게 없지? 하하하.”
 “이 자식 진짜 취했냐? 인제 그만 마셔. 일요일에 출장이라며. 이제 일어나자.”
 
 그 말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취한 건 아니었지만, 잘못하면 녀석에게 끝까지 비밀로 유지해야 할 이야기까지 할 것만 같아서.
 집으로 오는 길에 계속 생각나는 사람은 유미였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로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것이 1번.
 그리고 미국 출장과 관련해서 그녀를 보지 못해 걸리는 부분이 2번.
 그 생각에 잠을 못 이룬 탓일까?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몸이 좋지 않았다.
 몸살 기운이 있는 것처럼 몸이 떨리고, 살짝 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내일이 미국 출장이라는 점이 신경 쓰였다.
 일단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덜컥 겁이 났다.
 # 고백
 
 몸이 좋지 않으면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민호도 마찬가지. 더구나 미국에서 아파 버리면 대책도 없었다.
 병원 갔다 와서 어머니가 준 생강차도 마시고, 누워서 휴식을 취했지만.
 
 “콜록… 콜록….”
 
 이제 기침까지 나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스트레스가 만든 병인 것 같았다.
 미국에서 성공할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일 유미와 만나야 한다는 것.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녀를 불러내야 최소한의 충전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토요일 저녁.
 민호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여러 마음이 혼재되었다. 그녀를 불러내야 한다는 마음과 이참에 고백하면 어떨지에 대한 고민.
 이제 그녀와는 경계에 와 있었다고 생각했다.
 고백하면 성사되거나, 친한 지인을 잃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연 듯 아닌 듯 알아채기가 너무 힘이 들었기에.
 민호는 일단 한 번 찔러봤다.
 
 “저… 내일이요… 유미 씨 얼굴 보고 미국 가고 싶은데요….”
 (네?)
 “한동안 못 볼 것 같아서요. 출국할 때 보는 마지막 얼굴이 유미 씨였으면 좋겠다는 거죠. 하하….”
 
 공허한 웃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찔러보려고 하다가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으니.
 그러나 곧바로 항복이다. 이 어색함이 싫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하. 진담인 줄 아셨죠?”
 (…….)
 “여보세요? 유미 씨, 유미 씨?”
 
 농담이라고 말하는 순간 더 어색해짐을 느낀 민호. 그녀를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니 마지막에 한마디 하고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그럼 잘 갔다 오세요.)
 “네? 아, 네. 저기….”
 
 말을 잇지 못한 민호. 이미 끊긴 전화에 대고 할 수 있는 말이란 없었기에.
 다만 흐르는 감정 교류로 인해, 이렇게 전화를 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심장을 자극했다.
 곧바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그를 향해 어머니가 외쳤다.
 
 “어디 가, 민호야? 민호야! 내일 출장이라면서? 몸도 안 좋은 애가 어디를 나가?”
 
 말은 들렸지만,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큰길에 나와서 손을 흔들고 택시를 잡았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말하며, 가는 동안 휴대폰에 입력된 그녀의 이름 옆 통화버튼을 몇 번이나 누르려다 말았다.
 통화는 다시 어색함을 만들 뿐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자를 했다.
 
 - 아파트 앞으로 갈게요. 잠깐만 봐요.
 
 이 문자를 보고 과연 나올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아까 괜히 그녀에게 쓸데없는 농담을 해서 안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여자에게 주는 부담은 가끔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나와 있기를.
 택시 문을 열고 아파트 앞으로 뛰어가는 민호.
 때는 여름이라 구슬땀이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그런데 너무 서둘렀나 보다. 거의 다 와서 균형을 잃기 시작하는 민호의 몸.
 
 “윽!”
 
 약간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우당탕 넘어졌다.
 발목에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시 일어났다.
 손바닥이 다 까져서, 피가 새어나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때.
 부드러운 손이 갑자기 그의 손 위에 등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잡은 그 손의 주인공이 이렇게 말했다.
 
 “많이 안 다쳤어요? 조심하시지….”
 
 유미였다. 그녀가 잔뜩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민호와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안 아파요. 정말입니다. 정말 안 아파요.”
 “…….”
 “정말이라니까요. 유미 씨가 이렇게 잡아주니까…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유미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민호가 오히려 그 손을 잡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힘까지 주었다.
 
 “아까 전화로 한 말 진심입니다. 내일 미국 가기 전에 유미 씨의 얼굴을 꼭 보고… 미국 가고 싶었습니다.”
 “…….”
 
 그의 말에 유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붉힌 얼굴로 민호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손을 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민호는 웃었다. 이것이 대답이 되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일 여섯 시 비행기입니다. 공항에서 창조영업팀은 네 시에 모이기로 했고요.”
 
 계속해서 말이 없는 유미.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었다. 민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표시다.
 
 “그 말 하려고 왔습니다. 내일 나와 주세요. 대답은 지금 듣지 않겠습니다. 그럼… 제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마지막 그 말은 왜 했을까? 혹시 그녀의 동정을 사려고? 아니면 감기 기운이 있으니 옮기 전에 떠난다는 말이었을까?
 민호도 잘 몰랐다. 어쩌면 두 가지 의도가 다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그는 유미의 손을 놓았다.
 유미는 그제야 민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의 눈이 얽혔다.
 그리고….
 민호만 느끼는 것인지 몰라도, 스파크가 튀었다고 생각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 때문에 잠시 기대가 생겼다.
 심지어 유미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맘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분명히 자신의 진심이 전달되었다.
 표정과 행동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 생각만 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고, 행복한 꿈을 꾸었다.
 당연히 유미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꿈이었다.
 일어났을 때에는 12시. 그는 화들짝 놀라서 출장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엄마! 왜 안 깨웠어?”
 “아니, 왜? 6시 비행기라며? 벌써 나가게? 몸이 안 좋아 보여서 푹 자도록 놔뒀지.”
 “에이, 정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린애다. 물론 어머니 앞에서는.
 씻고, 어머니가 끓여주신 죽 먹고, 재빨리 준비했을 때, 밖에 차가 와 있었다.
 어제 재권에게서 차를 보내주겠다는 전화가 왔었다.
 좀 더 빨리 보내달라고 말했는데, 그게 한 시였다.
 겨우 그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데, 왜 이렇게 막히는 것일까?
 마음이 조급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유미에게 4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시 이전에 자신을 배웅하러 오라는 말과 같았다.
 재권이 오고 나서 그녀가 등장한다면, 누가 봐도 사내커플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녀가 그 불편한 공식선언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와 있을 텐데, 잘못하면 자신이 늦을 수도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달리는 민호.
 티켓팅하는 곳에 그녀가 있으리라 기대하며 도착했는데….
 
 ‘없네….’
 
 그렇다고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보니 세시였다. 자신이 먼저 도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네 시가 되어 재권이 등장했을 때에 그는 기대만큼 큰 실망에 젖어버렸다.
 오히려 다른 일로 깜짝 놀랐다. 재권과 같이 나타난 사람 때문에.
 
 “김 대리님이… 어떻게?”
 “아, 내가 추진했어. 미국에서 대학 나온 사람인데, 도움이 될 거 아냐? 부장님한테 다시 이야기해서 급하게 티켓 예약했지.”
 
 아영을 보고 놀란 민호에게 재권이 대신 이야기해 주었다.
 민호는 재권이 자신 없어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의지할 사람 한 명이 더 필요해서 결국 아영까지 동반한다는 것도.
 민호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그 역시 어쩌면 그녀에게 의존해야 할지도 몰랐다.
 30시간. 그 안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30시간… 이 아니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30시간도 아니었다. 어제 유미를 보고 왔으니 미국 도착하면 방전되기에 충분한 시간대였다.
 전화나 화상통화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이제는 미국 도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의 눈에 유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너무 생각한 나머지 착각처럼 눈에 뭐가 씌운 것일까?
 확인해봐야 했다.
 
 “잠시만요, 과장님.”
 “응? 어디를… 빨리 와야 해! 곧 출발해야 하니까!”
 
 재권에게 말한 후 민호는 어딘가를 향해 뛰었다.
 그가 달린 곳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 거기서 유미를 본 것만 같았다. 이쪽을 보고 뒤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얼핏 눈에 띈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을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확인하고 싶었다. 거리를 좁힐수록 누군가의 뒷모습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과 일치하는 것 같았다.
 
 “유미 씨… 유미… 유미야!”
 
 처음에 작던 목소리가 다가갔을 때에는 커져 있었다.
 결국, 그 사람이 돌아보았다.
 곧 둘의 눈이 마주치고 상대는 약간 놀란 눈동자로 민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차가 막혔어요. 기다렸다면… 정말 미안해요.”
 
 민호는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안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의 심장이 더 빨리 뛰고 있었다.
 # R U OK?
 
 비행기 안.
 민호는 비즈니스 좌석을 처음 타봤다.
 180도로 젖혀지는 의자가 심신의 피로를 완화해주는 것 같았다.
 사실 피로라는 것도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몸속에 왕성한 호르몬 작용이 펼쳐져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한껏 뒤로 몸을 젖힌 민호의 귀에 재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아 보여. 아까 여자친구 만나고 온 것 같던데. 하하.”
 “넵, 좋습니다!”
 “누구야? 설마 회사 사람?”
 “그건 노코멘트입니다.”
 “윽, 아영 씨는 혹시 알아…?”
 
 재권은 아영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런데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네? 네? 뭐라고 하셨어요?”
 “뭐야? 방금 우리를 보고 있었는데… 설마 민호 씨야? 그것도 아니면 나?”
 
 참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 아영은 대꾸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그녀는 민호의 몸에서 밝은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본 민호 중에 오늘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미국에 있는 남자 친구가 잠시 머릿속에서 떠날 정도로.
 공교롭게도 그녀의 남자 친구가 머무는 곳은 벨뷰. 시애틀 바로 옆 타운이다.
 일만 일찍 끝낸다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잠시 다른 남자에게 매혹된 죄책감 때문에 그에게 더 잘해주리라 다짐하는 그녀.
 그런데 왜 창문에 다시 민호의 모습이 비치며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시작할까?
 그녀가 창문을 통해서 보는 민호는 지금 눈을 감았다.
 드디어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서 꿈속에서 유미와 만나기를 기대하며 숙면을 취했다.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온몸을 망치로 두드린 듯 몸살 기운으로 물들었다.
 몸살감기가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콜록… 콜록….”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지 몰라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일단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재권과 아영뿐이었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민호에게 각각 말했다.
 
 “무슨 잠을 그렇게 깊게 자? 깨워도 안 일어나네.”
 “민호 씨, 어디 아파요?”
 
 이미 착륙한 상황이다.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민호를 깨운 것 같았다.
 
 “네, 약간 몸 상태가 좋지 않네요.”
 “흠… 바로 A&K 본사로 들어가도 괜찮을까? 너무 무리는 하지 마.”
 “야뇨. 가야죠. 당연히 가야 합니다.”
 
 약간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고 할까? 언제나 당당한 그의 음성이었는데, 지금은 그조차도 통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일어나는 것도 힘에 버거웠다.
 
 “뭐야? 이거 장난 아닌데. 곧바로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돈 걱정 때문에 그래? 괜찮아. 다 회사에서 처리할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말할 때마다 목이 아팠다. 무엇보다도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사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도 민호는 반드시 A&K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권은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하지만 A&K 본사 앞에 도착했을 때, 결국은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잠이 든 건지,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겠지만, 민호는 눈을 뜨지 못했다.
 
 @@@@
 
 민호가 눈을 떴을 때에는 미국에 있는 병원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물과 환경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의 감각 기관이 최선을 다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손에는 바늘이 꽂혔다. 링거를 맞는 중이었다.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부실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처음이었다. 몸살 따위로 정신을 잃고 병원 신세를 진 것이.
 그래도 병원에서 무슨 조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상당히 가뿐해졌다.
 그는 전화기를 찾았다. 옆에 협탁 위에 자신의 휴대폰이 보였다.
 시간을 보니 벌써 미국에 도착한 지 24시간이 지났다.
 재빨리 안 과장에게 전화했다.
 
 (여어, 일어났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민호 씨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시켰지. 돈 걱정은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게 아니라 어제 A&K와 미팅 건이요? 하셨습니까?”
 (당연히 안 했지. 민호 씨 없이 어떻게 그걸 해. 연기했어. 며칠 후에 연락 준다고 하고서는. 회사에도 그렇게 보고했지.)
 
 민호는 답답했다. 큰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직장 상사다.
 차라리 자신이 아픈 게 죄였다고 자책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신 한인회를 만나서 일을 추진하고 있어. 나도 놀기만 한 건 아니라고. 하하하. 거의 다 했으니까, 자네는 A&K 일만 집중하면 돼.)
 “…….”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한국에서 거의 다 추진하고 밥숟가락만 꽂으면 되는 일로 생색내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생색도 아니었다. 잘 보면 오히려 민호에게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인데 민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A&K 실무자와 재 만남을 갖는 것.
 전화를 돌려 담당자와 통화하니 오늘은 힘들고 내일 오전에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민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오늘이나 내일이나 크게 상관없었다.
 이미 유미 충전기의 시간이 다 지나간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는 민호.
 
 “뭐야? 내 영어 실력이 이렇게 유창했나?”
 
 분명히 30시간이 지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원래의 김민호가 되어 있어야 했는데, 그는 A&K의 담당자와 의사소통을 무리 없이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각종 기억을 떠올렸다. 막힘 없이 술술 뽑혀 나왔다.
 여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결론을 얻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충전시간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별생각을 다 해봤다.
 아플 때에는 잠시 시간이 연장되는 것은 아닌지.
 나라가 다를 때에는 30시간이 적용될 가능성이 없는지.
 어떤 생각을 해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다만 마음은 급해졌다. 내일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는데, 그때에는 또 지금 자신의 능력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조급함.
 그것으로 인해 다시 전화했고, 담당자를 압박하며 시간을 앞당겼다.
 
 (딱 30분입니다. 그 시간 이외에는 정말 여유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차를 보내드릴까요?)
 “아뇨.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민호는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재권에게 전화했다. 급하게 잡은 약속이니, 빨리 와달라는 게 골자였다.
 미국 출장 때 렌트카를 이용하는데, 재권이 그 차를 끌고 와야 했다.
 거기다가 프레젠테이션 관련 자료도 없다. 아마도 예약한 호텔에 갖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재빨리 차를 끌고 온 재권이 전화하자마자 바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 이래저래 시간이 가는 것에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것도 모르고 재권은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진짜 괜찮아? 하루쯤 푹 쉬었다 가도 되지 않아? 어차피 계약은 다 한 거고, 우리 쪽 라면을 파는 마케팅 조율이잖아.”
 “그게 중요한 겁니다. 회사에서 이 일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사장님이 기대하시는 만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미국 출장이 무의미해지는 거죠.”
 “그… 그런가?”
 
 답답했다. 진짜 무능한지 무능한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후자라면 연기력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재권에 대한 신경은 더 쓰고 싶지 않아, 호텔에 들릴 때까지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을 점검했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맛을 라면에 포함했고, 제품을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마케팅이었다.
 한국에서 짜온 전략을 선보이기에 앞서서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하는 이유. 혹시라도 머리가 나빠지기라도 하다면, 이렇게 해서라도 외워지기를 기대하는 마음뿐이다.
 그것도 모자라 호텔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을 때, 그는 계속해서 영어로 말했다.
 
 “A&K 미국 내 모든 점포에 라면이 들어갑니다. 종류는 세 가지 맛이고, 프라임 타임에 반드시 시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러 요리 방송에 들어가서 미국인들의 눈에 노출되는 것 또한 해야 할 일입니다.”
 
 민호가 스스로 중얼거리는 것이 재권의 귀에 들렸다.
 그래서 재권은 운전하면서도 감탄하고 있었다. 이렇게 회사에 열정적인 민호의 모습이 새삼 대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모습만 봐도 자신이 그의 상사인지 의문이 갔다.
 더군다나 회장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봐 민호 씨 정말 열심히 일하는 거 아냐? 내가 부끄러워지는데….”
 “… 또한, 도시 중심으로 판매량을 늘려야 하며, 공급이 부족할 때에는 현재 시애틀 인근에서 인수한 공장의 생산 라인을 가동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아예 재권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되뇌는 민호.
 그렇게 하니까 재권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는 아영까지 차에 탔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고 들었는데, 다투고 온 것 같았다.
 잠시 호기심이 생겼지만, 생각을 나눌 틈은 없었다.
 거의 다 도착해서 재권이 웃으면서 그에게 말할 때조차도 마찬가지.
 
 “자, 도착했다고.”
 “빨리 가죠. 시간이….”
 
 A&K 본사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재권에게 무안을 주는 민호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없어지지 않을 때, 빨리 이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정확한 시간 엄수를 좋아하기에, 늦으면 애써 시간 내달라고 했던 모양새가 우스워져 버린다.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안내에 따라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고, 관계자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한 명, 안경 끼고 매우 뚱뚱한 중년 백인이 민호의 눈에는 ‘대빵’으로 보였다.
 
 “월컷?”
 “맞습니다. 당신이 김민호 씨?”
 “그렇습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기분이 좋네요.”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한국에 있을 때 보내주셨던 자료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로의 유통망을 이용하는 방안은 아마 최고의 업무 협약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민호는 웃었다. 이미 사전작업은 다 해놓은 상태. 오늘 프레젠테이션만으로 상대를 백 퍼센트 이해시킬 수 없었기에 미리 연락을 취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칭찬했다.
 이제 월컷 말고 그 밑에 실무진을 이해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사실 이게 중요했다. 정작 A&K의 지점으로 실무를 전달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호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
 드디어 배터리가 방전되고 만 것이다. 앞에 있는 미국인들이 말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아는 단어만 들렸다.
 갑자기 멘붕이 왔다. 머리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눈앞은 새까매졌다.
 이게 표정으로도 드러났다.
 
 “민호 씨, 괜찮아?”
 
 그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본 재권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뇨….”
 
 결국, 민호는 최후의 수단을 생각해야 했다. 재권을 본 순간 떠올랐다.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몸이… 갑자기 안 좋아…졌습니다… 몸살이… 몸살이….”
 
 민호는 머리를 잡고 앉을 자리를 찾았다. 누가 봐도 아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Mr. Kim? Are you okay?”
 
 그가 걱정되는지 월컷도 다가와서 물었다. 아무리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원래의 민호로 돌아왔다지만, 이것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Yes, yeah. But….”
 
 민호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을 더 잇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재권을 보았다.
 
 “과장…님…이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내가 어떻게…”
 “아까… 차 안에서 제가… 하는 것을 들으셨잖아요….”
 “그걸 한 번 듣고 어떻게 하겠….”
 
 재권은 못한다고 말하려다가 민호의 눈을 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간절함을 읽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미증유의 힘이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좋아. 해보는 데까지 해볼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끄덕끄덕. 민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이어폰을 전달했다.
 
 “여기… 아까 제가… 말한 것들이… 녹음이 되어… 있습니다.”
 # 스파이의 실체
 
 녹음되어 있다는 민호의 말에 재권은 계속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가 아까 계속 차 안에서 연습했는지 알 것 같았다.
 녹음한 이유는 이렇게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럴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야말로 밥상을 다 차려놓고, 자신은 숟가락 한 술만 뜨면 되는 상황이라는 점.
 
 “흠, 흠. 프레젠테이션은 시작하겠습니다.”
 
 재권은 일단 앞으로 나서며 프로젝트를 열기 시작했다.
 떨리지는 않았다. 그가 비록 어리바리하기는 했지만, 이어폰으로 귀에 꽂은 민호의 음성은 머리에 착착 감겼다.
 그리고 가끔 보는 민호는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하며 동그라미로 자신을 안심시켜 주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덜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 최고 대학과 미국의 명문 대학을 나왔는데….
 이런 프레젠테이션은 모의로 수없이 많이 해봤다.
 마음을 굳혔다. 자신의 본모습을 서서히 드러내 보이기로.
 어쩌면 민호도 그것을 알고 자신에게 믿고 맡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민호 대신 한 프레젠테이션은 상대 담당자의 눈을 반짝이게 했고, 이대로 진행된다면 양사의 윈윈은 보장될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그렇게 성공적인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민호는 다시 회복된 모습을 보였다.
 
 “괜찮은 거야?”
 “네, 괜찮습니다. 아까는 정말 죽을 거같이 아팠었는데, 희한하게 지금은 정상 컨디션이네요. 하하하.”
 
 민호는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재권과 뒤에 앉은 아영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러다 방금 본 아영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 김 대리님?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뇨. 그냥 좀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제가 괜찮아지니까, 이제 김 대리님이 아프신가 봐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는 민호. 그러나 어디가 아프냐는 질문은 하지 못했다. 여자에게 묻지 말아야 할 것이 가끔 있으니까.
 다만 눈치 없는 건지 재권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가 아픈데? 혹시….”
 “과장님, 그만 물으시죠.”
 “응? 응. 하하. 내가 좀 주책없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으면서 운전하는 재권은 상당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남자들이 예상한 그것 때문에 몸이 좋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날 밤 갑자기 술을 먹자는 아영은 미국의 도수 높은 술을 들이켜더니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남자들은… 왜 그래요? 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그렇게 막… 바람피워도 되는 거예요?”
 “저… 저한데 왜 이러세요? 김 대리님, 취하셨어요?”
 “기… 김 대리? 혹시 남자 친구랑 무슨 일 있었어?”
 
 민호와 재권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밝고 쾌활한 아영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더군다나 마지막 재권의 말이 촉발되어 아영은 확실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남자는 다 바람둥이라는 둥, 멀리 있으면 다른 여자를 찾게 된다는 둥 계속해서 떠들어대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호텔 객실은 두 개를 예약했는데, 하나는 재권과 민호가 같이 쓰는 곳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영을 위한 1인실이었다. 문제는 지금 아영이 쓰러진 곳이 재권과 민호가 묵어야 할 방이라는 것.
 
 “휴우… 그냥 여기서 재워야 하겠지?”
 “그… 글쎄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다행인 점은 두 남자가 자신들이 신사라고 믿고 있다는 점. 결국, 방을 나서서 밖으로 나가기로 합의했다.
 때는 새벽 두 시.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 주는 이 시간에 주류를 살 수 없다.
 아영의 폭주로 알코올 흡수가 약간 모자란 감은 있었다.
 
 “김 대리 룸에 술이 남아 있을 텐데….”
 “그럼 거기로 갈까요?”
 “1인실이지만, 한 명은 바닥에서 자면 되잖아.”
 “그렇죠. 제가 침대를 양보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오늘의 영웅이 그래선 안 되지.”
 
 손사래를 젓는 재권을 보며 민호는 웃었다. 그의 모습에서 전혀 ‘스파이’의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이건 분명히 나 부장이 착각했다고 봐야 한다.
 아니면 재권의 연기에 사람들이 완전히 속고 있거나.
 그래서 물었다.
 
 “제가 속마음 숨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스파이십니까?”
 “응?”
 “그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회장님이 L&S 상사의 사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막내아들을 침투시켰다고.”
 “……!”
 
 완전 돌직구였다. 그게 아무 말을 못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민호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재권.
 
 “일단 올라가서 술 한 잔 할까? 맨 정신으로는 말하기 힘든데….”
 
 그리고 두 남자와 1인실.
 그나마 미국 호텔 방이 작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서로의 표정까지 살필 수 있을 만큼은 좁았다.
 
 “민호 씨 말대로 스파이가 맞아.”
 
 ‘선빵’을 맞은 재권이 순순히 털어놓자, 민호의 표정은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 표정을 보고 피식거리면서 재권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쓸모도 없는 스파이야. 생각해 봐. 이미 아버지와 아저씨가, 정확히 말하면 큰형과 아저씨지만, 이 회사를 두고 싸운다는 걸 다 아는 상태야. 그 와중에 나를 이곳 핵심 부서에 과장으로 밀어 넣었어? 대놓고 스파이라고 광고하는 꼴이지. 안 그래?”
 
 여기서 그가 말한 아저씨는 박상민 사장을 말하는 것이다.
 민호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죠. 그래서 저도 이상했습니다. 그렇다고 과장님의 능력이… 아, 죄송합니다.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하는 일이라서.”
 “괜찮아. 그게 사실인걸. 난 아직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잖아. 하하.”
 
 꿀꺽 꿀꺽 꿀꺽.
 재권의 목으로 시원하게 맥주가 넘어간다.
 그 모습이 민호의 눈에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런데 슬픔과 허무도 느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살짝 알 수 있기는 하지만, 민호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세계였기에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아무튼, 캔 맥주 하나를 비운 상태에서 재권은 다시 말을 꺼냈다.
 
 “사실 이곳으로 넣은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큰 형이야. 내게 말했지. 가서 회사를 파악해야 한다며. 난 거부할 수 없었어. 내가 받을 아버지의 상속분은 정말 미미하거든. 공교롭게도 L&S 지분이 다야.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형은 만약 내가 일을 잘한다면 L&S 상사는 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걸 믿으시나요?”
 “아니, 안 믿어.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 난….”
 
 민호는 그가 더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대충 눈치 챘다.
 큰 형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이복동생.
 그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재권의 큰 형이라면, 안재현이었다. 재권과는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난다.
 둘은 배다른 형제였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도 몇 남매가 있다는 사실.
 당연히 재권에게 떨어질 상속분은 그의 말대로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자네도 알다시피 L&S 상사 사장님이 어떤 분이야? 사원부터 시작해서 계열사 대표가 되신 입지전적인 분이잖아. 그 사이에 올해의 상사맨은 몇 차례나 석권하셨고. 내가 잘하면 이 회사를 나에게 맡긴다는 말은 믿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디까지 상대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라서, 지금은 그저 판단을 유보해야 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평범해진 머리로는 계산이 명확해지지 않았다.
 그 이후 재권의 입에서 나오는 우호지분과 합병 이야기는 더더욱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누가 누구랑 친해서 그 지분이 어디로 가고, 그래서 몇 퍼센트면 안정이 된다.
 원래의 민호가 이해할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결국, 조금 있다가 재권은 제풀에 취해서 잠에 빠져드는 것을 본 민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마셔대더니 취할 줄 알았다.
 민호는 시차 적응이 전혀 안 돼서 술이라도 취했어야 한다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룸의 술도 모두 동이 나버렸다.
 잠시 바닥에 누우니 드디어 자신의 능력 상태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30시간이 지난 상황에서도 두뇌 활동이 왕성해졌던 그때.
 비행기로 인천공항에서 미국의 Seatac 공항까지 온 시간이 약 10시간. 그리고 하룻밤을 지새웠으니 24시간이 추가되었다. 그로부터 6시간 후에 약발이 떨어진 것으로 보였는데….
 
 ‘지속시간이 40시간이라…. 어떤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스터리였다.
 다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정도로.
 40시간의 비밀. 도대체 무엇이 민호의 능력을 더 지속시킨 것일까?
 혹시 유미를 그냥 보는 것과 포옹하는 것 사이에 연장된 시간의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평범해지니 답답했다. 물론 머리가 좋아져도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당장 알아내기 힘들겠지만.
 그래서 룸에서 나온 민호.
 로비를 지나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애틀은 일 년 중 비 내리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다.
 비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시간의 비밀을 오래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갑자기 유미가 보고 싶었다.
 지금이 새벽 네 시.
 계산해보니 이미 퇴근도 다 했을 시간이었다.
 아직도 전화할 때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민호.
 신호음이 울리고 그녀가 받았을 때,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여보세요? 유미 씨?”
 (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진 것 같았다. 아니면 그새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민호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불길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 일은 잘되었어요. 갑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네, 저도요… 콜록… 콜록….)
 “어? 감기 걸렸어요?”
 (그런가 봐요. 사실 오늘 회사도 못 갔어요.)
 
 알고 보니 목소리에 힘이 없던 이유가 감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그녀의 마음이 변했을까 노심초사한 민호는 자신을 자책했다.
 
 “집이에요? 병원 갔다 왔어요? 아니다. 대답하지 말고 푹 쉬어요. 제가 전화 안 할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그녀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기쁜 미소가 지나갔다. 잠시 말을 하지 않자,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민호 씨? 끊었어요?)
 “아뇨. 하하하. 근데 진짜 쉬게 하고 싶은데….”
 (원래 잔병이 많았어요. 오히려 최근에 민호 씨 만나면서 좀 건강해진 거예요. 근데 안 보니까 이상하게 다시 아프네요.)
 “그게 아니라 제가 그때 감기에 걸린 상태였어요. 그걸 옮겼나 봐요. 괜히 미안하네….”
 (그럴 리가요? 우리가 뭘 했다고….)
 
 유미는 말끝을 흐렸다. 민호는 대충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 뽀뽀 같은 행위도 않았는데, 감기가 옮을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수화기 넘어서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남자의 본능. 안으면 이제 그 다음 단계라고 하던데, 민호가 바로 그랬다.
 
 “그죠? 우리가 뭘 했다고? 근데 다음에는 뭐라도 하고 감기를 옮겨야겠어요. 그럼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하하하.”
 
 민호의 목소리는 더욱 밝아졌다. 통화하면서 그녀도 자신에 대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잔잔한 대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전화 통화.
 새벽이 깊어가도록 계속되었지만, 민호는 피곤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민호의 머릿속에 새롭게 ‘리뉴얼’된 이론 하나가 그려졌다.
 유미를 보면 30시간.
 그녀를 안으면 40시간.
 
 ‘그럼 그녀와 키…스…한다면….’
 
 룸에 들어와서 그 생각마저 하자 갑자기 유미의 입술이 머리에 가득 그려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호흡도 빨라졌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왠지 유미를 이용한다는 죄책감에 재빨리 다른 생각을 했다.
 당장 남은 일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쪽으로 생각하다 보니 점점 졸음이 왔다.
 다음 날 아침. 민호는 졸음이 몇 차례나 밀려와서 차로 이동할 때에는 종종 수면을 취해야만 했다.
 남은 일은 A&K와 물류 쪽의 협상을 확정 짓는 일이었는데, 훨씬 수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와중에 아영은 그날 밤 취한 일이 쑥스러운지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재권이 어색하지 않도록 그녀에게 말을 시켰지만, 그때뿐이었다.그래도 출장 일정을 마칠 때까지, 민호는 재권에 대해서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자신의 능력을 감춘다는 점.
 박상민 사장과 사이가 소원해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인지는 살펴봐야 했다.
 그것은 귀국 후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미를 만나서 머리가 좋아진 뒤에 그와 더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재권은 완전히 마음을 연 것으로 보였다.
 일정을 끝내고 귀국하고 나서 헤어질 때, 재권은 이렇게 말했으니까.
 
 “난 이번 출장에서 친구가 생긴 느낌이야. 그것도 두 명이나.”
 “악수는 하겠지만, 전 사양할게요. 워낙 대단하신 신분이라서 제가 감당이 안 되네요.”
 “윽, 그런 농담은 제발….”
 
 아영의 말에 웃는 재권.
 이번에는 민호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이야기인데, 왠지 모르게 그 손을 잡으면….
 
 “도와달라고 표시하는 거 같습니다. 제 착각인가요?”
 “맞아. 도와줘. 그런데 정확히 하자고. 난 회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게 끝이야. 견제니 스파이니 이상한 소문은 사양이라고.”
 
 민호를 믿는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르겠다. 후자였으면 좋겠지만, 더 지켜봐야 하리라.
 그래도 그의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회사가 잘 되면, 제가 잘 나가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게 헤어진 세 사람.
 민호는 일단 시간이 지나면 재권의 의도가 파악되리라 생각했다. 악수의 의미는 나중에 되새기리라.
 우선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유미를 만나고 싶었다.
 미국에서부터 진행된 마음은 비행기를 타고 내리자마자 더 깊어졌다.
 더구나 몸이 아프다고 했다. 어제는 쉬었겠지만, 오늘도 직장을 쉴 리가 없으니 무리해서 일하는 모습이 선했다.
 저녁 6시.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통화버튼을 누른 민호.
 
 (여보세요?)
 
 몇 번 울리지 않아서 그녀가 받은 것을 보니,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매우 좋지 않았다.
 
 
 “어. 목소리가 더 안 좋아졌네요?”
 (그러게요. 그래서 오늘은 입원했어요.)
 “……!”
 # 워크홀릭
 
 민호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프다니 더 죄책감이 들었다.
 
 “저 때문에 그런 거죠? 제가 감기만 안 옮겼어도? 어디에요? 지금 바로 갈게요.”
 
 그 말을 듣고 유미는 환자복 입고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원하지 않는다며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막무가내였다.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공항에서 바로 택시 타고 병원에 도착한 민호는 그녀의 병실을 찾았다.
 2인실이었다. 한 명의 여성 환자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고, 유미가 있었던 듯한 자리는 아무도 없었다.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잠시 나간 것 같은데….
 
 “왔어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민호가 돌아보자 방금 화장한 얼굴을 보여주는 유미였다. 이런 것도 맘에 들었다. 신비감을 유지하려는 모습조차도.
 그런데 화장을 했는데도 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감기 때문에 입원하다니요? 링거까지 맞은 거예요?”
 “네, 그런데… 이상해요.”
 
 유미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민호를 보며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네? 뭐가요?”
 “하나도 안 아파요. 민호 씨 얼굴을 보니까….”
 
 그녀는 마지막 그 말을 할 때 매우 쑥스러워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말한다고 걱정을 덜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가 간호하겠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머니가 오실 거예요. 이따 밤에.”
 “그런가요?”
 
 그는 아쉬운 눈빛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을 걱정의 그것으로 받아들였을까? 유미가 다시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정말 괜찮아졌어요. 아까는 계속 기침도 하고, 목소리도 안 좋았는데… 지금은 정말 좋아진 것 같아요. 거짓말 아녜요.”
 
 그러고 보니 전화 목소리와는 딴판인 그녀의 옥구슬 음성이었다. 절묘하게 그녀가 회복될 시점에 찾아온 것 같았다.
 
 “알았어요. 그럼 몸조리 잘하고…, 전 가볼게요. 전화… 해도 되죠?”
 “제 대답은 항상 같은 거 아시잖아요. 민호 씨는 언제나 콜! 이에요. 호호.”
 
 민호는 그녀가 혈색까지 돌아오는 것을 보며 병원을 나왔다.
 그래도 안도감과 아쉬운 마음이 반반씩 섞였다.
 원래 미국에서 나름대로 주말 계획을 세웠다.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하겠다는.
 하지만 일이 꼬이려니 이렇게 되었다.
 뭐 오늘만 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민호. 차라리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나가는 그에게 어머니는 잔소리로 포격했다.
 
 “어제 귀국했잖아! 근데 왜 또 나가?”
 “정리가 덜 된 게 있어서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너 그러다가 몸 축나! 아유, 저거… 일 중독 아니야?”
 
 마지막 말까지 들었다. 웃으면서도 민호는 자신이 워크홀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이 즐겁다. 자신의 손으로 큰 규모의 회사가 움직이는 게 쾌감이 느껴졌다.
 사실은 유미를 만나 다가온 행운 때문이다.
 그리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처럼, 행운이 다가왔을 때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귀국해 좋아진 머리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싶었다.
 그렇게 다짐하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토요일 오전.
 
 ‘아… 한국에 온 게 다시 한 번 확실히 느껴지는구나.’
 
 민호는 주변에 붙는 여자들을 보며 다시 지옥철을 절감했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여전히 그가 있는 칸에는 인산인해였다.
 날씨가 좋아져서 다들 놀러 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거로 생각한 민호.
 삼성역에서 내려 돌아보니 다른 칸은 텅텅 비어서 모두 앉아서 갈 정도였다.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지만, 다시 머릿속에 들어차는 것은 출장 보고서.
 회사에 도착해서 경비 아저씨에게 상쾌한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누군가 창조영업부가 있는 6층에 왔는지 엘리베이터가 그곳에서부터 출발했다.
 민호는 누가 왔을지 호기심이 들었다.
 다른 부서일 수도 있지만, 왠지 재권이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회장 아들이래서가 아니라 그는 L&S 상사에 상당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도 그런 목소리를 냈다. 대표이사를 욕심내는 것은 전혀 없고,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고 싶다고.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그의 목표라고 말했다.
 다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만약 그의 그 다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사무실에 와 있는 것은 그여야만 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보기 싫은 사람이 와 있었다.
 
 “여어, 미국물은 좋았나? 얼굴이 훤해졌군.”
 “…….”
 
 종섭이었다. 느물느물하게 웃는 그의 얼굴. 확실히 잘생기기는 했다. 그래도 얄미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일단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국내 일은 아주 잘 끝냈어. 케이티라는 애가 예전에 나에게 뻑 갔거든. 근데 내가 신경 안 써주니까 또 삐쳐서…. 이제야 친절히 잘 해주더라고.”
 
 묻지도 않을 일을 민호에게 해주는 이유는 잘난 체를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일단 민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 케이티가 종섭을 입에 담았던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에. 마치 경멸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A&K와의 업무 협약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짠 기획안은 거의 한 치의 틈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공치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럼 마치 잘난 체하는 그와 비슷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민호 대신해 주는 사람이 등장했다.
 
 “우리도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마 이번 A&K의 협약 때문에 미국에 우리 라면이 불티나게 팔릴 거예요. 앗, 인사 안 했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
 
 재권이었다. 그는 민호가 일어나 인사하자 자리에 앉으면서 한마디 더 했다.
 
 “주말에 나오다니. 캬아, 역시 민호 씨 대단해. 요즘은 인재 확보 전쟁이라고 하는데, 우리 회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이야.”
 “과찬이십니다.”
 “겸손이 지나치면 교만이라고. 그러니까 자꾸 누가 이용하려고만 들지.”
 
 민호는 웃었다. 그가 한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이용하려는 사람이 바로 종섭이었는데, 그 앞에서 하다니. 미국에 갔다 오고 나서 이제 좀 변화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반면 종섭은 뭐 씹은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재권에게 따지지는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너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그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믿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왔을 때, 사무실에 한 여자가 찾아왔다.
 
 “어, 영서야!”
 “어! 영서야….”
 
 한 명은 반가움에 다른 하나는 놀라움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전자가 종섭이었고, 후자는 재권이었다.
 민호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옷은 까무잡잡한 피부와 묘하게 대조적이었다.
 그녀를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검은색 섹시미라고 해야 할까? 물론 현재 유미가 머릿속에 꽉 들어찬 민호는 관심 없이 바라보았지만.
 
 “재권 오빠도 나와 있었네.”
 “그래, 오랜만이다.”
 
 영서라고 불린 여자는 잠시 재권에게 시선을 주다가 종섭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둘은 미리 약속된 만남이었던 것 같았다.
 종섭은 보란 듯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좀 일찍 왔네. 나 아직 일이 안 끝났는데.”
 “괜찮아요. 조금 기다리죠, 뭐.”
 “그래 줄래? 저쪽 휴게실에 커피 있으니까 마시든지….”
 
 종섭은 말을 하다가 끝을 흐렸다. 영서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이 끝나는 곳에 바로 민호가 있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 가자.”
 “응? 벌써? 아직 일 안 끝났다며?”
 “아냐, 네가 왔는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우리 공주님 오늘 뭐 먹고 싶어? 하하.”
 
 민호는 그 말을 하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 종섭을 보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면서 한마디 하려 했다.
 
 “아까 말씀하신 케이티요. 예전에….”
 “빨리 가자, 영서야!”
 
 민호는 자신의 말이 끊겼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종섭의 서두르는 모습에 웃고 말았다.
 바람이 불도록 시원하게 떠나는 종섭. 그리고 손에 잡혀 끌려가면서 뒤를 바라보는 영서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 러브홀릭
 
 참 신기했다. 지금 서둘러 나가는 종섭과 영서.
 그 모습에서 갑자기 종섭의 전 여자 친구인 유미가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민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더 큰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하는 데 입이 귀에까지 걸려있어?”
 “아… 아닙니다. 하하하.”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닌데, 웃고 있어서 물어본 거야. 저 녀석을 라이벌로 생각한다면, 민호 씨는 지금 한 발 뒤처져 있어.”
 “아뇨. 라이벌이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재권의 말을 듣고 웃음을 지운 민호. 금세 얼굴이 진지함으로 물들었다.
 
 “이야, 자신감 좋은데. 그러니까 저 녀석은 네 라이벌 자격조차 안 된다는 거 아냐?”
 “그렇다고는 말씀드리기 좀 뭐하네요.”
 “좋아, 아무튼, 아까 온 여자애는 박 사장님 딸이야. 자네도 소문은 들었지?”
 
 민호는 뜻밖의 표정을 지었다.
 그 소문을 들었지만, 그게 사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확실히 종섭은 여자 후려치는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았다.
 새삼 부럽기도 하면서도, 자신은 절대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뭐 사장 딸과 사귄다고 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지만…, 그러고 보니 민호 씨 꿈이 궁금한데? 목표가 뭐야? 지금이야 신입을 갓 벗어난 신분이지만, 승승장구하는 걸 보면 크게 될 것 같은데…”
 “글쎄요, 지금 목표는….”
 
 민호는 잠시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평소에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어서, 재권의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었다.
 
 “일단 L&S 상사가 무역회사에서 1위는 하도록 만들어야죠.”
 “아니… 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고…, 개인적인 목표가 있을 거 아냐?”
 “그건 제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만약 제 힘으로 회사를 1위 하게 만들면 전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현재 L&S 상사는 동종 업계에서 10위에 해당했다. 그 정도도 대단한 위치이기는 하지만, 상위권에 있는 무역회사와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작년에 상사를 맡게 된 박상민 사장은 그 때문에 임원진에게 목표를 부여하고 있었다.
 앞으로 3년 안에 5위 안에 들자!
 한 번 선점하면 순위가 쉽게 변하지 않는 이 계통에서 그것조차 불가능한 일인데, 민호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 재권은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만약 회사 대표라면, 자네에게 대표직을 넘기겠어.”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대표보다 훨씬 능력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데, 왜 안 그러겠어?”
 “좋습니다. 지금 하신 말 잊지 않겠습니다.”
 
 재권은 어이가 없었다. 민호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가 민호의 표정을 보았을 때 살짝 느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짜 동종 업계 1위를 향한 야망의 불꽃이 그의 눈에 새겨져 있었다.
 결국, 충고 아닌 충고를 하는 재권.
 
 “너무 진지한데…? 이 봐, 1위를 한다는 거… 쉬운 일 아니야.”
 “쉽다고 말 안 했습니다. 언젠가는 하겠죠. 그보다 이번에는 과장님 차례입니다.”
 “응?”
 “과장님의 목표. 그걸 말씀하실 차례죠. 저처럼 아주 진지하게요.”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
 진지한 대답을 원하는 표정.
 그래서 질문 받은 재권이 당황했다.
 
 “저번에 미국에서 말했던 거 같은데. 그냥 회사가….”
 “아뇨. 과장님은 그룹의 주인이 되고 싶으신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안 그렇습니까?”
 “……!”
 
 이제는 재권의 표정도 볼만해졌다.
 더 이상은 대충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상대가 집요해졌으니까.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수습하려면 최소한 자신의 일부를 밝혀야 가능했다.
 아니면 계속 우길 수는 있었다.
 그렇게 되면 또 바보나 스파이가 되어야 한다는 건데….
 여러 가지 감정을 담은 재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고, 드디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유, 아니라고 하면 믿지 않겠지. 맞아. 내 꿈은 그룹 총수가 되는 거였어.
 “…….”
 “어렸을 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랐고, 커서는 어렴풋이 그 목표가 생겼지. 야망 때문은 아니야. 나를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어. 태생적으로 그게 힘들다는 걸… 철든 이후에 깨닫게 되었거든.”
 
 그렇다. 거의 불가능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수치상으로도 불가능했다.
 심지어 지금 그가 소속되어 있는 상사의 주인을 노리기도 쉽지가 않았다.
 L&S 상사에 있는 그의 지분 2.8%로는 해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민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왜죠? 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당연히….”
 “당연히 혼자서는 불가능하죠. 하지만 수가 없지는 않습니다. 박상민 사장님하고 손을 잡으세요. 이런 말씀 드리면 외람된 이야기지만, 회장님 사후 분명히 형제들 간에 난리가 날 텐데… 이곳에 자리를 박으면 미래를 도모할 수 있잖아요.”
 
 번쩍 눈이 뜨이는 소리.
 그래서 정면으로 응시했을 때, 민호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민호는 그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회전되고 있었다.
 아까 잠시 본 L&S 그룹의 순환출자 구조와 지분 현황이 입력되면서, L&S 상사가 독자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반면 재권 입장에서는 지금 민호의 이야기가 놀랄 ‘노’ 자였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법이다.
 박상민 사장이 자신을 견제한다고만 생각했지, 접근해서 이야기해볼 여유도 갖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민호 씨, 나 확실한 목표가 생겼어.”
 “…….”
 “바로 민호 씨를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거… 그게 지금 내 목표야.”
 
 그 말을 듣고 민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고백입니까? 갑자기 닭살 돋는데요? 하하.”
 
 진지와 장난을 뛰어넘는 대화법.
 어느새 민호는 누군가의 감정을 움켜쥐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약한 상대가 있었다.
 고백인 듯 고백 아닌 듯….
 어쨌든 나름대로 고백을 했던 상대, 유미.
 그녀가 보고 싶었지만, 이날 민호는 유미에게 전화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병이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회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대신 인터넷으로 L&S 그룹에 대한 조사를 꼼꼼히 하기 시작했다.
 검색어를 쳐 보자 최근 기사 타이틀이 떠올랐다.
 
 - L&S 그룹 안판석 회장 대장암 3기에서 말기로.
 - 안재현, 차기 L&S 그룹의 강력한 상속자로 부상.
 - L&S 그룹 안판석 회장의 사후 형제의 난 벌어질 것.
 - 안정적인 상속을 위해 L&S 계열사의 합병 작업 가속화.
 
 대 그룹 순위 10위에 자리한 L&S의 현재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많은 머리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조사가 끝나갈 무렵, 민호는 다음 날에 유미와 데이트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함께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유미를 안으면 40시간의 효과….’
 
 유미와의 포옹은 10시간을 늘려준다는 가설.
 미국에서 생각했고, 귀국해서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
 일단 유미와 다시 한 번 포옹해야 하는데….
 민호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계획을 점검했다.
 
 첫째, 유미가 얼마나 아픈지 확인한다.
 둘째, 많이 아프다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안는다.
 셋째, 크게 회복되었다면 다행이라는 얼굴로 기쁘게 안는다.
 
 무엇을 선택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결국은 그녀를 안는 게 목표였는데, 지난번 마음이 동해서 시도한 이후라서….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요일 오전.
 그녀에게 전화하고 다시 기침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다시 안 좋아졌네요?”
 (그러게요. 어제 좋아져서 퇴원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다시 콜록거려요.)
 “아이고, 오늘까지 쉬세요, 그럼.”
 (네….)
 
 민호는 오늘 그녀와 데이트할 계획을 세웠다가 걱정만 가득 안게 되었다.
 안절부절.
 그녀와 전화를 끊고 나서 불안한 민호.
 얼마나 아픈 걸까?
 자기가 어떻게 그녀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오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미에 대한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깊어져 갔다.
 저녁이 되어서야 민호는 살짝 걱정을 덜게 되었다.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시 전화했는데, 출근할 정도는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요일 오전.
 민호는 유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기다렸다.
 
 빵빵.
 
 그때 민호의 의식을 일깨우는 소리. 아파트 앞에서 빠져나오는 소형차가 경적을 울렸다.
 혹시나 하고 다가간 민호.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미를 발견했다.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민호도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다가….
 옆에 앉은 중년 부인이 직감적으로 유미의 어머니라는 것을 깨닫고 90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 기브 앤 테이크
 
 90도 폴더 인사 후에 유미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민호의 귀에 들렸다.
 전화 목소리와는 달리 건강을 되찾은 완벽한 그녀만의 음성.
 
 “민호 씨, 뒤에 타요.”
 
 유미의 어머니는 인사에 대한 답을 웃음으로 받았는데, 민호의 눈에 비친 그 미소가 유미의 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일단 망설임 없이 탄 민호.
 유미의 몸 상태에 대한 걱정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단지 속절없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이렇게 나온다고 말씀 좀 해주시지. 하하….”
 “저도 엄마가 갑자기 태워주신다고 해서요.”
 “아, 네… 어쨌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민호라고 합니다.”
 
 이런 때 씩씩함은 민호의 장기였다. 예전부터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인상으로 아줌마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유미의 어머니도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우리 애를 잘 챙겨준다고.”
 “네? 아닙니다. 선배님이 후배를 잘 챙겨주신 거죠. 덕분에 회사 생활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아무튼, 잘 부탁해요. 얘가 철이 없어서 늘 걱정이네요.”
 “그럴 리가요? 아주 제 맘에 쏙 드는 성격이라서…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솔직하게 제 맘을 말해버렸네요. 하하….”
 
 민호는 앞에서 유미가 잠시 자신을 바라볼 때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자신에 대한 ‘호감’이 잔뜩 묻어있다는 것. 그게 착각만이 아니기를 바랐다.
 
 “둘이 좋은 감정으로 만난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뭐, 남녀 사이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얘 아빠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 일찍 들여보내 주세요. 그거 하나만 부탁할게요.”
 “그럼요. 당연하죠. 당연합니다. 그거 자신 있습니다.”
 
 유미의 어머니는 그의 재빠른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작된 질문. 차 안에서 민호는 면접을 보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유미의 집안 분위기를 살짝 파악할 수 있었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약간 독재자 같았는데, 유미가 또 그 부분을 좋아한단다.
 그녀 또한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이유가 그 때문일 것 같았다.
 회사에 도착해 다시 90도로 인사하며 유미 어머니를 보낸 민호.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유미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민호 씨에 대해서 궁금하셨나 봐요. 그래서 연락 못 했어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하. 벌써 어머님까지 소개해주시고, 정말 기분 좋네요.”
 
 민호의 환한 미소에 유미도 같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제 연인이 되어가는 이들에게 위기는 없을 것 같은 분위기.
 그런데 찰나의 순간.
 민호는 유미의 표정이 갑자기 굳은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시선은 자신의 뒤에 가 있었다.
 
 ‘도로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은 짧고 행동이 먼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민호의 눈이 커졌다.
 
 빠아아아앙!
 
 자신을 덮쳐오는 중형차. 유미에게만 집중하느라 뒤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이 때문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할 위기가 발생했고, 순간적으로 유미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 민호.
 그때였다.
 엄청난 힘이 자신에게 안기면서 공중으로 뜬 느낌을 받았다.
 시각은 이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머릿속에 입력시켰다. 이 순간에도 빌딩을 넘어 저 하늘이 차례차례 자신의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후각은 향긋한 유미의 냄새를 전달했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의 코를 간질였으니.
 마지막으로.
 
 쾅!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그는 정신을 잃었다.
 아득해지면서 들리는 소리는 꿈이런가?
 
 “민호 씨! 민호 씨! 정신 차리세요!”
 
 @@@@
 
 정신이 들었을 때, 민호는 응급차에 실리는 중이었다.
 눈을 떠보니 유미가 울고 있었다.
 
 “어? 왜 우세요?”
 “민호 씨? 민호 씨, 괜찮아요?”
 “네? 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당연히 병원 가야죠. 일단 머리를 부딪친 거 같으니까,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어디 다친 데 없는지 살펴봐야 해요.”
 
 유미의 그 말을 듣고 민호도 겁이 덜컥 났다. 그녀를 만나 머리가 좋아졌지만, 하늘이 가끔 조건 없는 행운을 베풀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조건에는 늘 대가가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대가. 결국, 그녀를 안게 되었잖아. 하하하.’
 
 아까 갑작스럽게 당한 사고의 순간.
 분명히 자신을 안고 돌진하던 차를 피한 것은 유미였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웃는 그 얼굴을 유미가 보고 놀랐나 보다.
 
 “진짜 괜찮아요? 이봐요. 이 사람 지금 웃고 있는데 혹시….”
 
 그녀가 응급대원에게 이야기했다. 구조요원이 대답하는 것을 먼저 뺏은 게 민호였다.
 
 “저 괜찮아요. 방금 웃은 것은… 어쨌든 아까 유미 씨가 저를 안아줬잖아요. 그래서 웃은 거예요. 하하.”
 “네?”
 “…….”
 
 그녀는 황당한 눈을 하고 있었고, 더불어 응급요원도 어이없어했다. 그러다가 차를 출발시키라고 신호했는데, 그때 민호가 급하게 목소리를 키웠다.
 
 “앗, 잠깐만요. 여기 여자 분은 내려주세요. 괜히 저 때문에 회사에서 계속 찍힐 수도 있으니까.”
 “아뇨. 전… 같이 갈게요.”
 “괜찮다니까요. 빨리 내리세요. 지난주에 아파서 며칠이나 회사에 못 나갔잖아요. 이번에 또 빠지면… 저 때문에 곤란하신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빨리요.”
 
 그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내리는 유미. 응급차 뒷문이 닫히고 떠나는 것을 보는데 망막이 다시 뿌예졌다.
 그렇게 잠시 서 있다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는지 알 것 같았다. 아까 그녀도 자신에게 놀랐으니까.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유미는 어렸을 때부터 몸과 마음이 다 약하기로 유명했다.
 잔병치레는 물론이고 겁도 많아서 조금 전 상황에서 민호에게 덮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성격이었다.
 그런데 해냈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빠른 움직임으로 그를 구했다. 이런 용기라니.
 생각보다 더 많이 민호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나 보다.
 그래도 이 사람들의 눈빛은 꽤 부담스러웠다. 마치 스파이더맨을 보는 시선. 이 중에는 회사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녀는 서둘러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원증을 꺼내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손등이 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은은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래를 보니 스타킹도 나갔다. 그 안에도 무릎이 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통증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재빨리 의무실로 직행. 치료를 받고 스타킹을 벗고 나니 다시 민호가 걱정되었다.
 가슴이 옥죄어진다.
 가슴이….
 
 ‘……?’
 
 유미는 또 한 번 가슴이 옥죄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얼굴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그렇다. 지난번 공항에서 민호에게 안겼을 때부터 확실히 느낀 신체 변화.
 원래 그녀의 사이즈는 A컵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샌가 가슴이 답답해져서 B컵으로 바꿨다.
 약간 헐렁했지만, 아니 때로는 아예 헐렁해졌는데, 지난번 민호에게 안겼을 때 가슴이 옥죄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마 온종일 쪼이는 느낌에 답답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현상이 왠지 민호와 관련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시 민호 생각으로 돌아갔다.
 아까 하던 걱정이 재발했다.
 그렇게 하루 내내 그에 대한 걱정과 답답한 가슴으로 힘겨워하던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해도 받지 않던 민호에게 온 것이다.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유미 씨?)
 “아, 네. 민호 씨. 어떻게 되었어요? 많이 안 다쳤어요?”
 (네, 괜찮습니다.)
 “정말이요? 다행이네요. 많이 걱정했어요.”
 (저 기사에 나왔어요. 급발진하는 차에 애꿎은 시민 하나가 다쳤다고. 그게 접니다. 하하.)
 
 밝은 목소리는 여전했다. 참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유미는 생각했다. 더구나 마지막에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까지 하는 민호.
 
 (어쨌든 덕분에 병원비 걱정은 없을 것 같아요. 차 회사에서 나와 보상금까지 다 해결해준다고 했으니까요.)
 
 대한민국에서 급발진이 인정된다니.
 민호가 하는 말을 믿어주는 유미였다.
 사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올 필요까지는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휴우….”
 
 전화를 끊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민호.
 크게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하루 이틀 쉬면 된다고 하니, 내일 퇴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밤에 재권에게 전화가 왔다.
 
 “어이, 민호 씨. 내일까지 나오지 말고, 거기서 푹 쉬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병원비도 걱정하지 마.”
 “네? 아니 어떻게… 그리고 미국 갔다 온 거 보고도 해야 하고 회사 일도 아직 할 게 많은데….”
 “에이, 어떨 때 보면 일 중독자 같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랄 때, 쉬어. 알았지?”
 
 조금 있다가는 신 차장한테서도 연락이 왔고, 밤에는 아영에게 문자까지 왔다.
 모두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쉴 틈이 없을 거라면서.
 결국, 그렇게 하루 정도 푹 병원에서 쉬는 동안.
 신입 사원으로 회사에 들어와서 여기까지 온 길을 점검해 보았다.
 사실 이런 시간이 없었다.
 이게 직장인의 삶일지도 모르지만, 여유를 찾기 힘든 촉박한 시계 같은 인생을 산다는 것.
 어느새 민호는 그 치열함 속에서 매일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호는 어쩔 수 없이 그 치열함과 경쟁에서 살아갈 운명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에는 여유를 되찾고 싶은 마음은 다 사라졌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L&S 상사가 독자적으로 자생하는 방법을.
 또한, 그룹 안에 속하되 거리를 두면서 현재 경영진이 교체되지 않는 길도 계산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스마트 폰 검색에 들어가며, 지분 분포까지 싹 알아냈다.
 이럴 때에는 누군가가 되어보는 것도 중요했다.
 물론 그 누군가란.
 현재 그룹 회장의 부재로 경영의 전권을 잡아내려고 하는 맏아들이자, 그룹의 부회장인 안재현이었다.
 자신이 만약 그가 된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예측하고 계산했다.
 그래서 행동범위 내에 있는 그의 조치를 막을 방법까지도 머릿속에 기록하고 있었다.
 민호의 머리가 더 팽팽 돌아갔다.
 이것도 점점 훈련되는지 요즘은 머리가 좋아지지 않을 때에도 어느 정도 번뜩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고….
 
 따르릉! 따르릉!
 
 방정맞은 알람이 그의 계획을 방해했을 때, 비로소 민호는 현실로 돌아왔다.
 드디어 40시간이 지났다.
 이제 분명해졌다. 유미와 포옹하면 40시간이 확보된다는 사실이.
 미소를 짓는 민호.
 이것이 하늘이 내린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퇴원해서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당연히 상대는 유미였다.
 
 (여보세요?)
 “저예요. 걱정 많이 했죠. 저 지금 퇴원해서 집에 가는 중이에요.”
 (어? 정말이요? 잘됐네요.)
 
 민호는 유미에게 내일 아침 데리러 가겠다고 말했다.
 이제 그러고 싶었다. 매일 같이 출근하는 사이. 마음 놓고 안을 수 있고… 그리고 또 그 이상을 하고 싶은….
 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일단 나중에….
 그녀와의 전화를 끊고 그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확인했다는 소득만으로 충분했다.
 어쨌든, 착각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목소리에서 자신에 대한 걱정과 내일 데리러 간다는 데 대한 설렘을 느꼈다.
 지난번 사고 났을 때에도 살짝 감을 잡았는데, 이제 그녀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이래저래 이번 사고가 아찔하기는 했지만, 전화위복이 된 것만 같았다.
 다음날 유미와 만나고 상쾌한 아침으로 출발한 민호.
 지하철을 타고 올 때마다 차 소유욕을 불끈 느꼈다.
 그래도 옆에 유미가 있어서 좋았다. 특히 그녀와 밀착된 기분을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좋은 기분은 사무실에 들어가서도 계속 이어졌다.
 출근하자마자 미국 출장에 대한 보고서가 잘 처리되었는지 신주호 차장에게 물어보러 갔을 때, 신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후에 시간 비워 놔. 사장실에서 호출이 왔어.”
 “네?”
 “지금까지 회사생활 하면서 자네처럼 자주 사장실에 들락거리는 평사원은 보지 못했네. 축하해. 아주 잘 찍혀서.”
 “아, 네… 감사합니다.”
 
 옆에서 질투의 시선으로 보는 종섭을 느끼며, 민호는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오전 내내 재권이 없다는 게 이상했지만, 박상민 사장의 예상 질문을 준비하느라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재권이 있던 장소가 밝혀진 것은 그가 사장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박 사장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 재권은 이렇게 말했다.
 
 “놀란 표정이네. 그럴 필요 없어. 민호 씨 제안을 깊이 생각해 봤거든. 그게 바로 내가 여기 있는 이유야. 하하.”
 
 민호의 제안.
 박상민 사장과 안재권 과장이 손을 잡을 경우 혼란스러운 L&S 그룹의 현 상황에서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그것을 지난번에 말했을 때,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며칠이 지나서 바로 이렇게 둘이 함께인 것이 민호의 머리 회전을 자극했다.
 
 “일단 앉게. 나도 궁금한 점이 많으니까.”
 
 이번에는 박 사장이 민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 역시 상당히 놀라워했다. 처음에 재권이 와서 힘을 합치자는 말을 했을 때, 그 저의를 의심했을 정도이니.
 사실 지금도 완전히 의심을 푼 것은 아니었다.
 
 “안 과장과 자네가 이렇게 쿵 짝이 맞을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네.”
 “그냥 옛날처럼 재권이라고 불러주세요, 아저씨.”
 “지금은 공적인 자리니까… 일단은 먼저 자네에게 묻겠네.”
 
 박 사장은 바빴다. 재권의 말을 듣고 다시 민호를 보면서 궁금한 점을 물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민호였다.
 
 “헌재 L&S의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대주주, 그다음이 L&S 식품입니다. 미국의 퀸즈 펀드가 3대 주주…/\.”
 “됐어.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곳이 중요합니다. 제가 분석한 것으로는, 두 분이 힘을 합치게 될 때, 3대 주주의 지분을 능가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래 봤자 L&S 식품을 이길 수 없어. 국민연금은 의결권을 포기하기로 유명하니, 만약 안재현이가 L&S를 먹으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지키기는 쉽지가 않아.”
 “아니요. 어렵지 않습니다.”
 “…….”
 “…….”
 
 무슨 묘수가 또 나오는 것일까? 침을 삼키면서 민호의 입을 바라보는 재권과 상민.
 
 “퀸즈 펀드까지 끌어들이면 되니까요.”
 # 라이벌이란
 
 퀸즈 펀드는 미국계 헤지 펀드 투자 회사였다. 손익에 따라 움직이는 자금이라, 잘못하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은 자명한 일. 그래서 박상민 사장은 고개를 흔들며 민호에게 말했다.
 
 “안 될 말이야. 우리랑 손을 잡을지도 미지수고, 잡는다 해도 너무 위험해.”
 “그렇죠. 그런데 말씀드리기 힘든 더 위험한 일을 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뭔가?”
 
 여기서 민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재권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눈빛. 그것을 보내니 재권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뭐야? 어서 말해. 답답하게 하지 말고.”
 “위에서 사장님 해임 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상민의 표정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충격을 좀 받았을 것이다. 현재 병석에 누워있지만, 한때 충성을 다했던 안판석 회장이 이렇게 쉽게 그를 팽하리라 생각지 못했을 테니.
 아니다. 회장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상민의 머리에는 안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후계 구축을 위해서 숙청작업을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일단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실 텐데… 결정하시면 또 부르세요, 아저씨.”
 
 재권이 이렇게 말하며 민호에게 눈짓했다. 민호 또한 재빨리 인사하고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충격 받은 상민의 모습을 지켜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흘러갔다.
 다시 사무실로 갔을 때였다. 이번에는 나 부장과 종섭이 사장에게 호출을 받았다고 하며 일어서는 게 눈에 보였다.
 특히, 종섭은 민호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민호는 유치한 그 얼굴을 간단히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신 차장이 자신을 보고 계속 신호하고 있었기에.
 잠시 후 옥상.
 
 “뭐야? 도대체 이 창조영업부에 왜 나만 모르는 분위기가 감지되는 거야?”
 “글… 쎄요….”
 “김민호 씨도 나를 못 믿는 거야? 이거 너무 소외감 느끼잖아.”
 
 그럴 만도 했다. 신 차장을 제외한 창조영업부 중요 인물이 다 불려갔다. 바꿔서 말하면 신 차장은 사장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 서운함이 절절히 민호에게 전달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 차장에게 다 밝힐 수도 없었다. 그를 믿고 있긴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는 하기 힘들었다.
 칙. 신 차장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벌써 두 개비 째다.
 ‘후욱’하고 빨아들이더니, ‘후우’하고 내뱉은 후 마음을 가라앉힌 것처럼 보였다.
 
 “좋아, 좋아. 말하기 힘든 극비사항이구나.”
 “네, 사실 그렇습니다.”
 
 말하기 힘들다는 뜻을 표현한 민호. 그래서 신 차장은 이제 우회작전으로 민호를 떠보기 시작했다.
 
 “나도 조직생활을 오래 해 봐서 눈치빨로 알겠는데…, 일단 김 민호 씨랑 안 과장을 부른 것은 뭔가 의견을 듣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지?”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는 했죠.”
 “그리고 나 부장이랑 이 과장은 최근 사장님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자네에게 들은 의견을 저들에게 물을 거야. 그지?”
 “네? 정말이요?”
 
 이건 민호가 알지 못한 사실이다. 상민이 그들을 신뢰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들에게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정보는 많은 사람이 알면 가치가 떨어지는 법인데….
 
 “당연하지. 사장님 라인에 저 두 사람이 포함되잖아. 정 상무와 조 이사도 당연히 불려갔을 거고. 후우, 난 언제 힘 있는 라인을 붙잡나….”
 
 신 차장은 이제 은근히 동정심까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여기에 현혹될 민호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정보 유출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져만 갔다.
 그런데 다음날 민호는 신 차장의 표정이 좋아진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그가 신 차장을 불러낼 차례. 듣고 싶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어제 회사 내에 과장급 이상은 거의 모두 연락을 받았을 거야. 사장님이 직접 이메일을 보내셨거든.”
 “그게 무슨……?”
 
 질문하다가 말꼬리를 흐리는 민호. 그의 머릿속에서 일련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다.
 
 “사퇴 거부 의사를 표명하셨군요!”
 “맞아. 본사에서 자신을 해임하려 한다고, 도와달라면서 구구절절이 직접 쓰셨지. 오랜만에 감동했어.”
 
 이 또한 묘수였다. 민호는 곧바로 이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계산해 나갔다.
 하나씩 하나씩. 변수를 대입해서 중간과정을 도출하니 결론이 나왔다.
 박 사장이 여론을 등에 업고 현재 그룹 내의 실권을 쥐고 있는 안재현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결과가 눈에 선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걸까요?”
 “응? 그게 무슨…?”
 “사장님이 생각하신 걸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조언했을까요? 저보다 오래 사장님을 보셨으니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아무리 머리가 좋아진 민호도 해낼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인간관계. 그리고 그에 따른 유대감이었다. 이제 신입 티를 벗을락 말락 한 민호가 극복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한 신 차장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덕이 많으신 분이야. 파격적이라는 말을 듣는 게 다 이유가 있어. 본인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다, 부하직원의 파격적인 생각을 다 존중해주시거든. 그렇게 아래를 보호하고 위와 조율하며 저 자리까지 올라가셨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이라는 거죠?”
 “내 생각에는 나 부장이나 이 과장의 아이디어일 가능성이 높아.”
 
 신 차장의 말에 민호의 머리가 아래위로 끄덕여졌다. 그 역시 같은 예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잘만 된다면 L&S 상사가 더 단단해지겠는데요?”
 “그렇지. 솔직히 그룹 내 분위기가 아주 요상해. 회장님은 병석에서 일어나시지를 못하고, 형제들끼리는 암투를 벌이고 있어. 합병 소문도 있던데, 그렇게 되면 자기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걱정하고. 파벌 싸움도 극심해. 당장 방 전무만 해도 사장님하고 대립관계잖아.”
 
 이 이야기는 민호도 알고 있었다. 방용현 전무는 안 회장의 맏아들인 안재현을 지지한다.
 이른바 상속전쟁의 여파는 그룹 전체 계열사에서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신 차장과 이야기를 끝내고 사무실로 왔을 때, 다시 한 번 종섭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 확실히 느꼈다. 이번 아이디어는 종섭의 것이라는 강한 예감.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알게 모르게 라이벌 의식이 솟구쳤다.
 결국, 옆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정확했다.
 지난 주말 재권이 그에게 말한 게 기억났다.
 종섭을 라이벌로 생각한다면, 민호가 한 발짝 뒤처져 있다는 말.
 심지어 종섭의 여자 친구는 박 사장의 딸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두 눈을 불태웠다.
 넘어 서보겠다는 의지. 그게 눈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 눈빛을 눈치 챈 것일까? 종섭은 싱긋 웃으며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입력하고 있었다.
 띠링.
 민호의 스마트폰이 울리고 종섭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 그렇게 째려보지 말라고. 내가 좀 미안해지잖아.
 
 일단 민호는 그 문자에 자극되지 않았다. 그리고 간단히 무시한 후에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번 기획안은 퀸즈를 우군으로 끌어들일 방법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L&S 상사의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도 추가했다.
 지금 민호의 마음에 불타고 있는 경쟁심리.
 그것이 박 사장의 종섭에 대한 신임을 빼앗아오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아까 신 차장이 말한 부분에 힌트가 있었다.
 박 사장 특성상 부하직원에 놀랄만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채택한다는 점.
 이는 민호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논리적으로 쓰는가에 달렸다.
 말로 설득하는 것과 글로 납득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더 좋은 것은 오감을 모두 사용해서 상대방에게 어필하는 것.
 프레젠테이션만큼 좋은 게 없었으니, 민호는 이것을 만들어 박 사장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재권의 협조였다.
 일개 사원이 사장에게 함부로 시간을 내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기획안을 작성하느라 오전이 다 갔다.
 요즘 점심은 유미와 함께했다. 오늘 역시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바깥에 나가서 밥을 먹고 난 후, 다시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민호는 뜻밖의 호출을 받았다.
 그를 잠시 사무실 밖으로 불러낸 신 차장. 그의 입에서 방용현 전무의 이름이 나왔다.
 민호는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신 차장에게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네? 누가 보자고 했다고요?”
 “방 전무가 나와 자네를 불렀어. 다른 사람 모르게 자신의 사무실로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저희를… 왜 부르셨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어쩌면 어제 사장님이 보내신 이메일 때문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야.”
 
 그럴 수 있었다. 다만 회사 내에 방 전무 사람도 있을 텐데, 굳이 세력이 없는 신 차장과 신출내기 사원을 부른 이유가 매우 궁금했다.
 일단 가보면 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용현 전무의 사무실로 가는 두 사람.
 민호는 몇 차례 방용현 전무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노크하고 들어가니 오늘따라 방 전무의 다크서클이 더 크게 느껴졌다.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눈 주변에 저 검은 부분이 음산하게 만들었으니.
 특히 신 차장의 이 대 팔 가르마와 그의 다크서클이 묘한 앙상블을 주고 있어서 민호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어서들 오게.”
 
 방 전무는 신 차장과 민호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신호를 했다. 최대한 좋은 인상을 유지하려고 웃는 게 민호의 눈에 띄었다.
 이로써 그가 부른 이유가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시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요즘 창조영업부가 회사를 먹여 살리는 것 같아. 미국에서 라면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고작 일주일인데… 웅심의 매운 라면 아성을 위협한다는 기사도 나오고….”
 “그건 홍보팀에서 신경 써줘서… 하하.”
 
 회사 홍보팀에서 좋은 기사가 나가도록 신경 쓴 부분을 언급하는 신 차장.
 민호는 알고 있었다. 고개를 한 번 숙이면서 말하는 신 차장의 습관을. 이게 조직사회에 물든 중년의 처량함이었다.
 좀 당당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 전무의 다음 말이 나왔을 때, 그는 더 고개를 숙였다.
 
 “늦었지만, 차장 승진 축하하네. 사실 신 차장이야말로 언젠가 큰일 할 줄 알았어. 제대로 키워준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원래 능력은 대단했잖아. 하하하.”
 “아… 과찬이십니다, 전무님.”
 “아냐, 아냐. 그리고….”
 
 방 전무는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민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김민호 씨의 활약은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어. 언젠가 같이 기획도 짜고, 술도 하고… 나 있잖아… 사원들이랑 편하게 지내는 거 좋아하거든.”
 
 신 차장의 굽실거리는 모습을 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민호는 좀 더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 짧은 말에 방 전무의 눈빛이 변했다. 그러나 민호는 상대에게 자신의 대답이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럴 때에는 상대가 패를 던지도록 유도하는 게 낫다는 것을.
 그래서 일단 민호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방 전무는 다시 신 차장을 공략했다.
 
 “내가 알기로 차장 달기까지 꽤 오래 걸린 것 같은데…, 승진은 말이야, 신 차장. 조직사회라는 게 자네도 알다시피 눈치를 잘 봐야 해. 어디가 튼튼한 줄인지 파악하는 거야말로 정말 중요한 거야. 그렇지 않은가?”
 “네, 네. 맞습니다.”
 “창조영업부로 가기 전에 해외영업부 3팀을 내가 계속 봐왔거든. 사실 이번 건도 그래. 실적이 창조영업부 전체랑 같이 나누게 되었잖아.”
 
 이렇게 가끔 민호를 보면서 하는 말에는 핵심이 숨어 있었다. 공을 나누어서 민호에게 득이 될 것이 별로 없었다고.
 이제 말이 먹힌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다시 침을 튀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영업 3팀에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어. 난 그렇게 생각하네. 뭐,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지만, 앞으로는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지. 신상필벌! 공을 세운 사람은 상으로 다스리라고 했네. 부장과 대리. 그 직함 다는 거… 내가 앞당길 수 있거든.”
 “…….”
 “…….”
 
 방 전무의 눈은 삼각형 모양으로 변했다.
 그것을 보고 민호는 잠시 뱀의 눈을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저 제안을 신 차장이 받아들일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졌다.
 신 차장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에 고민까지 떠안은 얼굴.
 이럴 때에는 자신이 나서서 선수를 치는 게 나았다. 그래서 입을 열려는데….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전 아직도 눈치도 없고, 어디가 더 튼튼한 곳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
 
 뱀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커져도 옆으로 찢어지기까지밖에 안 되었지만.
 
 “어허, 신 차장! 이건 기회야, 기회! 자네가 잡을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이라고.”
 “그렇겠네요. 하지만 썩은 동아줄이라도, 의리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아… 답답하군.”
 “죄송합니다. 하실 말씀 다 끝났으면 일어서겠습니다.”
 
 신 차장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그리고 같이 일어나서 이렇게 수습했다.
 
 “저는 신 차장님 라인이라서, 뜻을 같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방 전무의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탄 순간. 민호는 신 차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의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뭘?”
 “저쪽으로 줄을 대시는 거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어요.”
 “음….”
 
 민호의 그 말에 신 차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호는 대충 눈치 챘다. 신 차장이 많이 망설였다는 것을.
 지금 표정에서는 일종의 후회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격려하는가. 민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선택,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차장님과 다른 분들, 즉, 성실하게 고생하신 분들은 지금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 예상으로는 그룹이 흔들리면서, 잘하면 네 개, 다섯 개로 쪼개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좋다는 거지?”
 “결국, 사장님이 승리할 것 같으니까요. L&S 상사가 계열 분리를 하게 되고, 남은 사람들은 크게 중용될 겁니다. 군인도 전쟁이 벌어져야 승리하고 진급하듯이, 회사가 혼란스러울 때 내린 ‘굿 초이스’는 곧 승진으로 답하게 될 겁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 말에 신 차장이 웃었다.
 민호 역시 같이 웃었다.
 그의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도록 하고 싶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같이 승진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습을. 그래서 기업의 핵심이 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성공을 이룬 한 가정의 가장이자, 회사에서는 존경받는 상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 의도는 확실히 먹힌 것 같았다.
 이제 이해한 듯 신 차장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으니까.
 
 “고마워, 격려해줘서. 사실 말이야. 아까 많이 고민했는데… 자네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어. 상사의 모습이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주고 싶었거든…. 무능해도 지조는 있어야 한다. 난 그걸 말하고 싶어. 뭐 그럴 정도로 내가 사장님의 라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존경하는 분은 박 사장님이니까. 하하하”
 
 웃는 신주호 차장.
 민호는 오늘따라 그의 이대팔 가르마가 참 말쑥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홀릭 : 그의 직장 성공기』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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