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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클래스 1권

2015.10.28 조회 3,251 추천 35


 # 그리고…….
 
 하루가 지나간다.
 그리고 또 하루가 찾아온다. 변하는 것은 없이 그저 괴로울 뿐이다. 방바닥에 누워 위를 올려다본다.
 김동현은 하얀 천장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저절로 옛 기억이 떠오른다. 처참했던 과거……. 잊을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된다.
 그는 바닥에 있던 소주병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빈병이었다.
 ‘아무것도 없군.’
 속이 비어서 이제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소주병이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군.'
 동현은 비어버린 소주병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
 "젠장."
 들고 있던 소주병을 던져 버렸다. 벽에 부딪힌 병이 산산조각이 나며 날카로운 잔해들이 바닥을 어지른다.
 "……."
 동현은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향했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그의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샤아아아…….
 
 물을 맞으며 동현은 눈을 감았다.
 
 뚝……뚝…….
 
 샤워기를 끄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욕실 거울에는 흐린 눈빛의 남자가 서있었다.
 "잊어버리자.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부정해버리고 말았다.
 '아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끌어들인 것은 나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마왕과의 결전……. 전투는 치열했다. 마왕은 너무나도 강했다. 용사 레이븐은 모든 힘을 발휘했지만 동료의 희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일 먼저 타쓰가 죽임을 당했다. 제일 앞에서 막강한 마법을 막아주다 한줌의 핏물로 녹아버렸다. 두 번째는 세드릭. 그는 마왕의 독무에 당하고 말았다. 푸르스름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세드릭. 그 다음 차례는 소피아였다. 고귀한 성녀는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디아나. 젊고 아름다운 그녀…….
 힘이 다해 쓰러져있던 동현을 지키기 위해 마왕의 앞을 막았다. 그녀 혼자 절대 마왕을 이길 수 없다. 분명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비켜서지 않았다.
 -레이븐, 도망쳐.
 그녀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마왕의 오른손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든다. 디아나는 한차례 피를 토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동현은 몸을 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디……디아나?
 -살……고 싶……어.
 그녀는 동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입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왔지만 막을 수 없었다. 천천히 생기가 빠져나가는 디아나를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현을 제외한 모두가 죽어버린 것이다.
 -용사여, 너의 무능이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었구나. 불쌍한 자들이로고. 마치 부나방과 같구나.
 마왕은 조롱하는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상으로 고통 없이 죽여주마. 잘 가라.
 동현은 그저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탁!
 
 죽은 줄 알았던 세드릭이 마왕의 뒤를 붙잡았다.
 -레이븐, 지금이다. 어서 공격해.
 세드릭과 마왕은 한데 엉겨 붙어 있었다.
 -마법사? 네 놈은 분명 아까…….
 -네 녀석을 잡기 위해서 스스로 언데드가 되었다. 멍청한 마왕아!
 -뭐…… 뭐라?
 세드릭은 금지된 술법을 사용해 다시 부활한 것이다. 자신을 저주 받은 생명체 언데드로 바꾸는 술법. 지금은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곧 이성이 사라진 좀비가 되고 말 것이다.
 -다시 살아난다고 바뀐 것이 있는 줄 아는가? 다시 죽여주마.
 세드릭은 남아있는 마력과 힘을 전부 집중해서 마왕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미약해서 금방이라도 마왕이 풀려나올 것 같았다.
 -레이븐, 지금이다! 내 등을 찔러서 녀석의 심장을 파괴해. 지금이라면 마왕의 실드를 무너트릴 수 있다.
 그는 집요하게 마왕의 방어마법을 교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너도 죽어!
 그렇게 되면 세드릭 역시 완벽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멍청한 녀석!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란 말이다.
 -네 놈. 어서 놓아라.
 동현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그리고 세드릭의 몸을 갈랐다.
 -그래. 너라면 할 줄 알았어.
 세드릭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미천한 인간! 감히 나에게……. 감히!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왕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세드릭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예언대로 나는 마왕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졸렬하기 그지없었다.
 힘없이 당하다가 동료의 목숨을 제물삼아 마왕을 무찔렀다. 동현은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모두…… 모두 나를 두고 가면…… 아!"
 동현은 후회하고 후회했다.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
 
 띠리링 띠리링-
 동현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침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젯밤에 켜 놓은 tv에서 날씨예보를 하고 있었다.
 -……날씨는 맑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타선 치수는 12입니다. 균열이 일어날 일은 0.0001퍼센트이니 안심하고 활동하셔도 되겠습니다.
 동현은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지구로 돌아온 지 이제 3달째. 이계를 멸망에서 구원하고 돌아왔지만 지구는 그가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동현이 이계로 가고 난 후, 지구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대기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했지만 그것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1년 후. 2015년 2월 4일. 인류는 그 날을 둠스데이 라고 지정했다. 조용히 있던 균열이 급속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팽창을 거듭 진행했다. 어떤 저명한 과학자나 용감한 군인들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것은 흉악한 괴물들이었다. 날카로운 손톱과 강인한 육체로 무장한 그들은 마구잡이로 인간을 사냥했다. 인간은 군대를 동원했지만,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괴물을 막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몇몇 괴물은 인간의 무기에 100%에 가까운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총알이 통하지 않자 군대는 전략 무기까지 동원했다. 그럼에도 괴물은 잠깐 주춤 할 뿐 다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균열이 열리고 난 후, 불과 한 달 만에 인류의 수는 사분의 일로 줄었다. 인류의 멸망이 가까웠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대급부가 있었다. 바로 능력자의 탄생이다. 균열이 열리는 날, 인류 중 소수는 새로운 능력을 깨닫게 된다. 마치 초능력과 같은 힘으로 그들은 괴물을 몰아내었다. 화기가 통하지 않던 괴물도 그들이 나서자 깨끗하게 처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영웅들의 탄생이었다. 덕분에 인류는 가까스로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지구는 지역을 나눌 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아웃랜드와 쉘터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아웃랜드는 괴물들이 활개 치는 장소를 말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웃랜드에서는 단 1시간도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쉘터.
 그것은 괴물을 막기 위해 장벽으로 둘러친 도시를 말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쉘터 안에서 생활한다. 쉘터는 이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공동체였다. 모든 생산과 소비가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괴물들 때문이었다. 괴물을 잡으면서 나오는 코어라는 물질은 그 어떤 천연자원보다 뛰어난 에너지 자원이었다. 좁쌀만한 코어하나가 플로토늄보다 더욱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친환경적인 에너지 자원이었다. 그 외에도 괴물의 부산물은 효용가치가 뛰어난 점이 많았다. 괴물은 엄청 위험한 황금인 셈이었다.
 
 동현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일하러 갈 시간이다. 옷을 입은 동현은 거울 앞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일그러진 흉터가 눈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에 있는 흉터를 가리기 위해 안대를 착용했다. 그는 일부러 흉터를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흉터는 늘 아픈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흉터를 지우는 것은 과거의 잘못까지 회피하는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흉터를 그대로 두었다. 대신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게 하려고 검은 색 안대를 착용했다. 둠스데이 이후 불구자는 많았기 때문에 새삼 그의 안대가 그렇게 큰 눈길을 끌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그의 얼굴을 세차게 때린다.
 "후우……."
 하얀 입김이 나온다.
 그는 곧장 근처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이동했다.
 딸랑딸랑
 편의점 문을 열자 전자음이 울린다.
 "어서 오세요."
 포니테일의 여성이 방긋 웃으며 동현을 맞이한다.
 "아! 동현 선배."
 활기차고 입이 큰 여자 아이였다. 몸집이 작은 편이지만 힘이 넘치는 편이랄까? 그녀는 왼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
 하지만 동현은 그저 고개만 까딱 거릴 뿐이다. 그런 성의 없는 태도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 있잖아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나요?"
 "아니."
 고저 없는 음성으로 동현이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해맑게 웃는다.
 "헤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의 이름은 이지현. 동현의 학교 후배이다.
 딸랑딸랑-
 문이 열리고 편의점 사장이 들어왔다. 반쯤 벗겨진 머리와 튀어나온 뱃살, 그리고 흘러내리는 개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약간 비호감이다. 하지만 인사성 밝은 이지현은 웃으며 반겨주었다.
 "어서오세요. 사장님."
 "어. 그래. 그래."
 어둡던 사장의 얼굴이 약간 펴졌다. 팍팍한 현실 때문에 스트레스 받던 와중이었지만,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이 웃으며 반겨주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도는 것이다. 그녀가 이곳 편의점에 오고 난 후, 매상도 크게 올랐다.
 "요새 강도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더라. 경찰들이 순찰 돈다고 하지만 조심해야 돼. 괜히 까불지 말고 몸 사려라. 총 맞으면 죽어"
 "네. 사장님."
 사장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하여튼 이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 때문에. 내가 망하겠다.”
 
 쉘터 안이라고 해서 괴물에게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도시 안에서도 균열이 열리고 괴물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다만 평소에는 확률이 엄청 낮을 뿐이다.
 일기예보처럼 균열이 열리는 것 역시 예보가 가능했다. 제타선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균열의 안정성을 측정할 수 있었다. 치수가 낮으면 균열이 열릴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간혹 치수가 50까지 올라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균열주의보가 열리고 바깥 외출을 금지하게 된다. 만약 치수가 100이상 올라가게 된다면, 그 때는 정말 위험한 날이다. 균열 경보가 울리게 되고, 모든 일반인들은 방공호로 대피해야 했으며 쉘터의 능력자와 군인들은 모두 비상경비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균열 경보는 쉘터가 생긴 이후로 단 한번만 울렸지만 사상자의 숫자는 2000명. 그 이후 시민들은 자신을 방어할 무기를 구하려고 했다.
 
 # 도살자
 
 정부 역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장할 수 있는 권리를 모조리 빼앗을 수는 없었다.
 결국 쉘터의 주민은 약간의 노력만 거치면 권총이나 샷 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낮은 등급의 괴물 상대로는 일반 시민도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빈부격차라고 할까?
 둠스데이 이후,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쉘터의 토지는 좁은 반면에 인구는 너무 많았다. 양극화는 단연한 수순이었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굶주린 자들은 하루 먹을 식량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불만이 터져 나왔고 불법적인 일은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법이 바뀌게 되었고 개인 무장의 길이 열렸다. 화재가 난 곳에 기름을 얹은 꼴이랄까? 폭력 범죄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제일 피해를 보는 것은 선량한 자영업자들이었다. 특히 빈민촌에 영업하는 작은 가게들은 1차 목표나 다름없었다.
 편의점 사장 역시 근방에 일어나는 사건들로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경찰들이 가끔 순찰오지만 그건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름없다. 오히려 시체만 더 늘 뿐이라고 사장은 생각했다.
 "하여튼 총기 규제를 푸는 짓은 바보 같은 일이야. 강도가 오면 달라는 대로 다 줘버려.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사장 역시 괴물이나 범죄자를 대비해 매그넘 한 자루를 늘 가지고 다녔다. 그는 편의점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동현은 식품 코너에서 즉석 식품을 하나 골랐다. 제품 이름은 크롤라티나라고 하는 녹색 점액질 식품이다.
 "으헥……. 그거 드시려구요?"
 지현은 혀를 내밀면서 말했다.
 "응."
 지현은 포장된 크롤라티나에 바코드 기계를 대었다.
 삐빅.
 "500원입니다."
 동현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주었다.
 "전 그거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
 크롤라티나는 괴물의 서식처에서 발견되는 점액질을 가공한 식품이다. 쉘터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바로 구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것을 입에 대려고 하지 않았다. 녹색 점액질의 비쥬얼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매우 불쾌해 할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둠스데이 이후, 식량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괴물의 점액질은 굉장히 영양이 풍부했다. 365일 점액질만 섭취해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건강식이라 할 수 있다.
 "맛이 없지만 먹을 만 해."
 동현은 툭 던지는 어투로 말했다.
 "네? 선배. 맛만 없으면 다행이지요. 크롤라티나는 말 그대로 미각에 대한 테러라구요."
 지현의 말대로 크롤라티나는 극도로 맛이 없었다. 점액질에서 나름 먹을 수 있도록 가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기피하는 음식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자들만 먹는 음식이었다.
 크롤라티나는 제일 가난한 사람들만 찾는 그런 음식이었다.
 "먹기 간단하고 요리 안 해도 되니까."
 동현은 그렇게 말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동현에게 식도락은 의미가 없었다.
 "선배……."
 지현은 동현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8년 전만 해도 동현은 활기찬 사람이었다. 같은 과 동아리 선배였는데, 모두가 기피하는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동현이었다. 지현은 그때부터 동현 선배를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식 이후 동현과 지현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고 둠스데이가 다가왔다. 다행스럽게 지현과 그의 가족에게는 가까스로 불행이 닥치지 않았다. 하지만 동현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밝던 동현이 저렇게 어두운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선배, 집이 여기 근처죠? 제가 선배 집에서 맛있는 요리라는 것이 어떤 건지 보여드릴게요. 기대……으음. 하셔도 되요오……."
 지현은 당차게 말하다가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처음은 단순하게 동현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말하고 보니 여자 친구나 하는 대사가 아닌가? 지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괜찮아."
 동현은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애써 신경써주는 후배가 고맙긴 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선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었다.
 지현을 뒤로 하고 동현은 바깥으로 나왔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찬바람뿐인 듯 했다.
 
 편의점에서 나온 그는 곧장 작업장으로 향했다.
 동현의 직업은 도축자이다. 그가 하는 일은 죽은 괴물의 뼈와 살을 바르면서 돈이 되는 부산물을 깔끔하게 추출하는 일이다. 괴물 도살자의 일은 매우 힘들고 고된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괴물의 냄새가 너무 고약하고 가죽은 질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이 되는 몇몇 주요 부위는 약간만 칼을 잘못 놀려도 상품가치가 확 떨어지기 때문에 세밀한 솜씨가 필요했다.
 "야! 김동현. 출근 시간 제대로 안 지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털복숭이의 덩치가 큰 남자가 동현에게 소리쳤다. 그가 들고 있는 도축용 칼에는 괴물의 붉은 피가 묻어 있어서 공포감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김동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작업할게요. 삼촌."
 "으이구. 맥아리 없는 녀석."
 김동현의 외삼촌인 최민수 감독관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둠스데이가 있던 날, 동현의 가족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다행이 시간이 지나 먼 해외에 있는 쉘터에서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주하는데 돈이 너무 들었다. 괴물들 때문에 예전처럼 해외여행은 생각도 못하게 된 것이다. 위험부담과 돈 문제로 최민수가 동현을 거두어주기로 했다.
 유일한 친척인 최민수는 혼자가 된 조카에게 굉장히 신경을 썼다. 폐인이 된 녀석을 위해 집과 직업도 구해줬다. 놀라운 것은 억지로 시켜서 하는 도축 일이었지만, 숙련된 도축자보다 칼솜씨가 더 좋았던 것이다. 아무리 난해한 작업이라도 김동현의 손에 걸리면 순식간이었다.
 "붙임성만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최민수 감독관은 멀어져가는 조카의 뒤통수를 보고 말했다. 일이 험하긴 해도 도축업자는 각광받는 직업이다. 간혹 백정이라고 얕잡아 보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 안정되고 수입만 좋다면 무슨 상관이랴?
 최민수 감독관은 언제 조카와 술이나 한잔하면서 진솔한 대화를 하기로 결심했다.
 동현은 탈의실에서 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의 개인 장비를 꺼내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단검이었다. 길이는 25cm정도로 긴 편이지만 폭은 좁다. 그리고 검신에는 기이한 형상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단검의 이름은 베리샬. 이계에서 가지고 온 물품이다. 대마도사 아크리치의 단검으로서 최상급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낱 도축용 나이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개인 작업실로 바로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은 공동 작업실을 쓰는 반면에 그는 독방에서 홀로 작업했다. 직장 동료들은 혼자 작업실을 쓰는 동현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다만 동현 혼자 5명분의 일을 하기 때문에 차마 불만을 터뜨리지 못할 뿐이다.
 작업실에는 이미 그가 작업해야 할 괴물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마 이것을 다 해결해도 밖에는 그가 해야 할 작업물이 가득 있을 것이다.
 동현은 커다란 장갑을 착용했다. 그리고 작업대에 놓인 시체를 살펴보았다.
 괴물의 이름은 울로그였다. 괴물 개체 수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종류로서 언뜻 보기에는 원숭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안에는 수 십 미터까지 늘어나는 혓바닥이 존재했다. 텅스텐보다 더 질긴 그 혓바닥으로 먼 곳에서 희생자를 낚아채곤 했다. 내구성은 약한 편이란 총으로도 쏴죽일 수 있지만 굉장히 민첩해서 맞추기가 어렵다.
 동현은 베리샬을 꺼내어 도축을 시작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손동작은 거침없었다. 용사로 지내는 동안 그는 수많은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러면서 쌓인 노하우가 지금 도축업자로서 훌륭한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울로그의 혓바닷을 움켜쥔다. 그리고 쭉 빼내자 길이가 계속 늘어난다. 그리고 적당한 길이로 차례대로 토막 내었다. 울로그의 혓바닥은 굉장히 자르기 어렵지만 동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마법 단검으로 단번에 잘라내었다. 잘린 단면이 깨끗해서 추가금액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 다음 돈이 되는 부분은 척추 부분이다. 동현은 곧 바로 괴물의 등을 갈랐다. 악취가 사방을 풍겼지만 동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틈 사이로 하얀 뼈들이 보이자 단번에 손을 괴물의 등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빠각.
 괴물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흡."
 투두둑 툭.
 길고 하얀 척수가 달려 나온다. 그리고 필요 없는 뼈들은 가지 부러뜨리듯이 가볍게 분질러버린다. 나머지 사체부분은 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숙련된 도축업자라도 30분이 걸릴 일을 동현은 단 3분 만에 끝내버렸다. 일반인을 훨씬 뛰어넘는 악력과 해박한 해부학 지식, 그리고 무엇이든지 쉽게 갈라버리는 마법 단검 덕분에 엄청난 작업속도로 일을 끝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처리해야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는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몇 시간 뒤…….
 
 띠리링
 
 휴식시간이었다. 20분 정도 휴식을 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동현은 마법 단검을 칼자루에 넣었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악취에 익숙해졌더라도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그는 곧장 휴게실로 이동했다. 이미 그곳에는 동료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새참을 먹고 있었다. 괴물 고기로 만든 바베큐에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는 중이었다. 작업이 고되기 때문에 이렇게 고열량의 음식을 새참으로 먹는 경우가 많았다.
 "……."
 다만 문제라면 테이블에 동현의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동료들의 눈길도 호의적이지 않다. 많은 회사 동료들은 동현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관의 조카라는 이유로 편애 받고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있었다. 사실 순전히 동현의 작업 실력으로 대우를 받는 것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동현은 자신의 평판이 나쁘든 좋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속 좁게 자신의 새참을 챙기지 않은 동료를 탓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저 귀찮을 뿐이다. 시선을 회피하고 그는 자판기로 다가갔다. 그리고 동전을 넣고 탄산이 든 음료수를 뽑았다.
 덜컹-
 동현은 캔 음료의 뚜껑을 따고 들이켰다.
 꿀꺽. 꿀꺽.
 목울대에 따가운 탄산이 훑고 지나간다. 막힌 가슴이 약간 뚫리는 기분이다. 동현의 등장으로 잠깐 조용해진 휴게실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이봐. 김씨. 막내는 어디간겨? 보이질 않구만."
 "글쎄. 냉동고에 보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뭔 일 생긴거 아녀? 김씨는 걱정도 안 돼?"
 "좁디좁은 이곳에서 뭔 일이 있을까? 어디서 농땡이라도 부리는 모양이지."
 "그러지 말고 좀 찾아봐. 아직 고기가 많이 남았잖여."
 동료의 타박에 김씨라는 사람이 일어섰다.
 "이놈의 자식이 사람 귀찮게 하네. 젠장."
 그렇게 말하고는 김씨는 사람 찾으러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지 얼마 후…….
 "으아아악."
 멀리서 비명소리와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응? 무슨 일인겨?"
 사투리가 심한 도축업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쾅!
 
 문이 열리고 사람 찾으러 갔던 김씨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어섰다. 그는 쉽게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김씨, 무……슨 일이여?"
 "괴……괴물이…… 으으윽."
 김씨는 말을 끝까지 잊지 못했다. 그는 흰 눈동자를 보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김씨의 등 위를 타고 있던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괴물이었다.
 
 "히익."
 "젠장. 괴물이다."
 괴물은 소형견 크기의 도마뱀 같은 모습이었다. 그놈은 김씨의 등 위에 올라타 주둥이를 등에 박고 있었다. 그러다가 괴물은 고개를 들었다. 괴물의 긴 주둥이에는 김씨의 장기가 물려있었다.
 
 아그작. 아그작.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괴물의 이름은 바쿠. 성체의 크기가 무려 3m에 달하는 중형 괴물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놈은 크기가 매우 작았다.
 "새끼로군."
 동현은 김씨를 죽인 괴물이 아직 새끼라는 것을 바로 간파했다.
 끼리리릭…….
 바쿠는 총 4쌍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괴물은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 모두를 죽여서 먹고 싶었던 것이다. 성체 바쿠는 알만 깔뿐 새끼를 전혀 돌보지 않는다. 수많은 바쿠가 어렸을 때 죽지만 그 중 살아남은 녀석은 진정한 사냥꾼이 되었다. 아직 새끼인 바쿠 역시 유전자에 깊숙이 박힌 명령을 듣고 있었다.
 
 [살을 찢고 뼈를 씹어 먹어라!]
 
 바쿠가 자세를 낮추고 앞을 바라봤다. 휴게실의 인간들은 대혼란이었다. 비록 수많은 괴물의 사체를 분해해 왔지만 이렇게 살아있는 괴물은 처음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괴물과 대항할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젠장."
 그들 중 몇 명이 주변에 있는 의자를 들었다. 가까이 오면 내려칠 생각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때려보았자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는 어렵다. 그에 비해 바쿠의 민첩성은 일반인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바쿠가 도약하려는 찰나,
 "쉬익."
 동현은 입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바쿠의 신경이 온전히 동현으로 집중 되었다.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가 없다. 새끼는 본능에 이끌러 동현을 향해 돌진했다.
 "키에엑."
 거리는 불과 1m. 바쿠는 단거리를 엄청난 속도로 주파하는 생물이다.
 놈은 단숨에 뛰어올라서 동현의 목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새끼 바쿠의 입은 꼬챙이처럼 날카로워서 사냥감을 꿰뚫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위험해!!"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외쳤다. 누가 봐도 동현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탁!
 
 잠깐의 침묵.
 "끼이……이이……."
 괴물의 주둥아리는 놀랍게도 동현의 왼손에 잡혀있었다. 단순히 인간의 반사 신경으로 해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새끼 바쿠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퍼억!
 
 동현은 그대로 바닥에 바쿠를 내리찍었다.
 "꾸엑!"
 물이 가득 든 가죽 주머니를 바닥에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동현은 다시 바쿠 새끼를 들어올렸다. 아직 살아있는지 몸을 바들바들 떤다. 동현은 다시 바닥을 향해 바쿠를 내려쳤다.
 퍽! 퍽!
 세 번 정도 바닥에 내려치자 바쿠 새끼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바쿠의 내부 장기가 완전히 파괴되고 뼈도 마디마디 부서져버린 것이다. 바쿠의 입에서 녹색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현은 바쿠 새끼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바닥에 쓰레기 버리듯이 던졌다.
 "……."
 일반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괴물을 잡는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비록 그것이 새끼라고 하지만 등급으로 따지면 3급 몬스터이다. 1급 몬스터는 일반인이라도 총기가 있다면 잡을 수 있다. 하지만 3급 이상부터는 화기가 통하지 않는 괴물로 알려져 있다. 오로지 능력자만이 상위 괴물을 잡을 수 있다는 게 정설이었다.
 "말도 안 돼……."
 희생자가 될 뻔한 도축업자 한 명이 말했다. 하지만 동현은 주변의 반응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문에 쓰러져 있는 김씨의 사체를 살펴보았다. 등 부분에는 괴물이 만든 상처가 둥글게 파여져 있었다.
 '바쿠의 공격이 단번에 심장을 꿰뚫었군. 고통도 느낄 새도 없이 즉사했다.'
 동현이 사체를 살펴보는 와중이었다.
 "으아악. 괴물이다."
 "도……. 도와줘."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삼촌?'
 동현의 머릿속에 최민수 감독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도시의 유일한 피붙이이자 자신을 걱정해주는 존재이다. 그를 확인해야 했다. 동현은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 바쿠 새끼 여러 마리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들 발밑에는 이미 희생자 한 명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최민수 감독관은 아니었지만, 동현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뻐억!
 
 동현이 인간의 살을 찢어 먹던 바쿠의 몸을 걷어찼다. 전직 용사의 킥을 온전히 받은 괴물은 단번에 천장으로 날아갔다.
 
 푸확!
 
 천정에 부딪힌 바쿠가 물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천장에 달라붙은 사체에서 찐득한 녹색의 피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키킥?"
 주변에 있던 십여 마리의 바쿠들이 동시에 동현을 주목했다.
 바쿠는 야수이다. 비록 새끼라고 하지만 그들은 태어나면서 이미 완벽한 사냥꾼이었다. 기척을 느끼는 능력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 그런 그들이 동현이 다가서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점이 바쿠들을 당황스럽게 한 것이다.
 사실 동현이 새끼 바쿠를 습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쌔신의 비기, 그림자 숨기 때문이다. 환영 마법의 일종인데 유능한 암살자는 당연히 터득하고 있어야 했다.
 수많은 마왕의 부하들이 이 수법으로 용사에게 순살 당했다. 그 외에 용사로 살아남기 위해 동현은 수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사, 성전사, 도둑, 암살자, 몽크, 마법사 등등 수많은 판타지 직업의 능력을 배우고 익혔다. 그가 터득하지 못한 것은 흑마법과 신성 마법 두 가지 뿐. 그것도 시간이 부족해서 배우지 못한 것 일 뿐이다. 마왕을 막기 위해 동현은 온갖 비기를 갖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
 그 많은 능력으로도 마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소중한 동료를 모두 잃고 동현도 곧 죽임을 당할 처지였다. 그 상황에 겨우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세드릭의 숨겨진 한 수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희생양 삼아 동현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다. 친우의 등을 찌르고 나서야 마왕을 무찌를 수 있었다. 말만 번지르르한 용사 일 뿐, 빌어먹을 겁쟁이.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크에엑. 크엑."
 우두커니 서 있는 생각에 잠겨 있는 동현을 향해 바쿠들이 달려든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동현의 존재가 매우 불길하게 느껴진 것이다. 만약 성체였다면 도망가는 길을 선택했겠지만, 지금 막 피 맛을 봤을 뿐, 경험이 부족한 어린 야수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스컹!
 
 빛이 반짝였다.
 "크랴략."
 단번에 바쿠의 목이 둥실 떠오른다. 찰나의 순간 동현은 마법 단검인 베리샬을 휘둘렀다. 다크 엘프 전사들의 비기인 달빛 가르기이다. 마나로 근육을 미세하게 조정해서 초고속으로 주변의 적을 단번에 갈라버리는 기술이다. 세밀하게 마나를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전사의 기술 중 최상급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남은 바쿠의 숫자는 5마리, 그들은 슬슬 물러서기 시작했다. 동료가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모습에 그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적의 존재는 단 하나. 원래 인간은 맛 좋고 대항수단이 없는 벌거숭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대는 이해할 수 없는 강함으로 동료 수 마리를 단번에 죽여 버린 것이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바쿠는 도망가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바라테, 아둠 크라샤티 베스타."
 동현이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 규모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 몰려 있던 바쿠들을 단 한 마리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력한 결계를 쳐버린 것이다.
 
 쿵!
 
 도망가던 바쿠가 투명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괴물은 손톱을 내세워 그 장애물을 찍어 눌렀다.
 
 카강 캉!
 
 오히려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바쿠의 몸이 뒤로 튕겨났다. 동현을 중심으로 사방 10M는 물샐 틈 없이 차단된 것이다. 그것을 뚫어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마법이나 물리력이 동원되어야 했다. 새끼에 불과한 바쿠의 노력은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빠직-
 
 동현은 도망가려는 바쿠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퀙."
 바쿠 한마리가 마치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동현은 지그시 발에 천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끄르르르."
 낮은 비명음이 나오다가 이내 파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강력한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야수 머리가 깨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새끼 바쿠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괴물 역시 약자가 되는 법이다.
 "키리리……."
 남은 바쿠 5마리를 처리 하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후우."
 동현은 바쿠들에게 당한 사람을 모두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중에 최민수 감독관은 없었다. 그가 안전이 확실하진 않지만 약간 마음이 놓인다. 동현은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괴물의 발자국을 살펴보니 그것은 냉동고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평소의 냉동고는 문이 잠겨 있지만 오늘은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피 비린내가 났다.
 "흠……."
 그곳에는 갈가리 찢긴 시체가 누워 있었다. 남겨진 물품을 살펴보니 얼마 전 입사한 동료가 틀림없다. 김씨라고 불리던 희생자에게 기술을 배우던 청년이다. 인사성 밝고 열심히 일하던 자라 더욱 안타까웠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커다란 시체가 하나 보였다.
 "바쿠 성체로군. 그것도 암컷."
 길이가 3m가 되는 괴물이다. 혀를 내밀고 죽은 괴물의 배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뱃속에 있던 알들이 부화해서 빠져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된 것은 바로 막내라는 별명의 동료가 분명하다. 동현은 다시 죽은 막내의 사체를 눈 여겨 보았다.
 '바쿠의 손톱에 의해 배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지만 가까스로 떨쳐냈어. 냉동고의 추위 때문에 바쿠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했군. 기어가던 도중 다시 습격을 받았다.'
 피로 이어진 선이 얼마간 이어졌다. 그리고 가까스로 출구까지 도착했다.
 '그가 제일 마지막에 한 행동은…….'
 문에는 피로 된 손바닥 자국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에 문을 밀어서 잠근 것이다.
 '막내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기보다는 문을 스스로 잠갔다. 바쿠가 나와서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희생했군.'
 동현은 쓸개즙을 마신 것처럼 입이 씁쓸했다. 그는 목숨을 버리면서 동료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 그럼에도 결국 사상자는 더 늘어났다. 안타깝지만 재수가 너무 없었다.
 '김씨는 막내를 찾기 위해 냉동고의 문을 다시 열었겠지. 그러자 보인 것은 막내의 시체. 그는 그것을 보고 곧바로 도망쳤지. 하지만 그 뒤를 바쿠들이 쫓아왔군.'
 
 # 귀찮은 일
 
 냉동고에서 나온 바쿠 새끼들은 주변의 인간을 습격했다. 그 중 한 마리가 끝까지 김씨를 쫒아온 것이다. 김씨는 휴게실까지 가까스로 도망쳐 왔지만 결국 쫓아온 바쿠 때문에 죽고 말았다.
 '사냥한 자들의 미숙한 조치 덕에 사상자가 생긴 것이다.'
 능력자로 이루어진 헌터들은 바쿠를 사냥하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임신한 바쿠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 알을 품고 있던 바쿠를 좀 더 안전하게 처리했다면 이런 비극이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어쨌든 샛길로 빠진 바쿠는 없다. 더 이상 사상자 없이 처리한 것 만해도 다행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결계를 펼친 것이 현명한 행동이었다. 이것으로 더 이상 피해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동현의 나쁜 예감은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 편이다.
 
 ***
 
 둠스데이 이후, 인류는 가까스로 멸망에서 빗겨나게 되었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능력자'의 출현으로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능력자는 단순히 몬스터만 잡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인류라고 불리는 그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고, 등급이 높은 능력자는 일인군단이라고 칭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영웅의 출현이 모두에게 달갑지는 않았다. 능력자들이 힘을 오남용한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것인가? 둠스데이 이후 인류의 힘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세계의 지도자들이 모여 하나의 기구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시국에 생겨난 것이 LOC였다. 줄여서 '록'이라고 하는데 풀어 쓰면 League of Cypher이다. 그들은 모든 능력자들을 관리하고 힘을 오남용하지 않도록 조정한다. 더불어 지구에 남은 마지막 한 마리의 괴물까지 처치해서 다시 인류를 지구의 주인으로 되돌리려는 것이 그들의 존재의의이다.
 리그 오브 사이퍼, '록'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단체보다 거대한 규모로 자라났다. 각각의 쉘터에는 LOC 지부가 건립되었고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록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 리그 오브 사이퍼는 이제 사회를 지탱하는 커다란 축이 된 것이다. 이렇게 LOC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쉘터의 지도자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존재 때문이다. 몰락한 인류는 생존을 위해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성이 있었다. 쉘터의 지도자들은 막대한 자원을 록에 투자했다. 동시에 록이 독단적인 단체가 될 수 없도록 틈틈이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현재의 정국을 비판했다. 능력자라고 불리는 신인류가 언젠가는 그 창을 구 인류에게 겨눌 것이라고. 사람들은 과대망상이라고 치부했지만 말이다.
 리그 오브 사이퍼의 창설과 함께 모든 쉘터는 공동법안을 내놓았다. 이름하야 '초인법'이라 불리는 그것은 능력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한편 그들의 발목에 감긴 족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법안의 내용을 간략하게 줄이면 다음과 같다.
 
 1. 능력자는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LOC에 등록하여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반란분자로 지정하고 극형에 처할 수 있다.
 
 2. 능력자는 인류를 수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며, 몬스터가 준동할 시 일선에서 맞서 싸우는 인류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
 
 크고 작은 조항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알려진 법안은 이렇게 2가지로, 지켜야 할 법이 있는 반면 '록'에 가입한 능력자에게는 각종 혜택도 주어졌다. 세금 감면은 물론이고 매년 수여되는 보조금의 액수는 상당했다. 등급이 높은 능력자에게는 공짜로 집까지 주어졌으며, 가벼운 경범죄는 따지지도 않았다. 채찍과 당근은 어느 하나 소홀히 하면 안 되는 법이다.
 바로 그런 법 때문에 머리 아픈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니까요. 파장이 검출 되지 않는데, 당연히 능력자가 아니죠."
 공무원 백동준은 억울한 마음을 담아 소리쳤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당신의 생각으로 결정했단 뜻이군요. 만약 당신이 틀렸을 경우에는 어떻게 책임 질 겁니까?"
 조용하지만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반문했다.
 "그…….그건."
 무사 안일주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백동준은 말끝을 흐렸다. 나름 100퍼센트 확실한 일이었지만 상대가 책임 소재를 따져 물으니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들고 만 것이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아름답지만, 냉혹하고 쌀쌀맞은 태도 때문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저는 LOC를 대표해서 왔고, LOC는 지금 당장 확답을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추궁하는 여자의 이름은 김혜진. B등급 능력자로서 전도유망한 LOC 요원이다. 그녀는 얼마 전 있었던 바쿠 난동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왔다. 백동준은 이미 마무리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서류에 체크만 하고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오였다.
 "하지만 측정기에 오류가 있을 수는 없어요. 정확을 기하기 위해 능력자 측정기란 측정기는 모조리 동원했단 말입니다."
 볼멘소리로 항의를 해봤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비웃음이었다.
 "그럼 저보고 민간인이 바쿠 수 십 마리를 격살한 것을 믿으란 이야기군요. 그렇죠?"
 "그……. 그건?"
 백동준은 항의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궁해졌다.
 "알에서 깨어난 바쿠는 모두 14마리. 그 중 한 마리도 누출되지 않았어요. 덕분에 피해는 거의 발생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음절에 악센트를 주었다. 덩달아 백동준의 어깨는 더욱 움츠려들었다.
 "B등급인 저도 도망가는 바쿠를 붙잡아 둘 수는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겁에 질린 바쿠들은 도망도 치지 못하고 단 한명의 인간에 의해 일방적으로 도살당했다고 한다.
 "으음……. 그럼 제가 대체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백동준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단순히 책임소재를 따지기 위해서라면 그의 상사를 통했겠지만 그녀는 추궁만 할 뿐 고자질은 하지 않았다.
 "이 사건 담당자를 불러주세요."
 얇고 탄력 있는 눈꺼풀, 크고 시원한 눈매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눈이다. 하지만 백동준의 눈에는 독사의 눈으로 보였다. 한숨을 쉬듯 그가 말했다.
 "가디언즈 소속, 이민서 경위입니다."
 
 ***
 
 그 날 이후, 동현은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도축 회사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보험금을 거하게 챙긴 사장이 회사를 헐값에 처분해버린 것이다. 덕분에 동현은 하루 종일 집에만 죽치고 있게 되었다. 문제라면 귀찮은 사람 하나가 생긴 것이다.
 
 똑똑똑.
 
 문을 열자 경찰 제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
 동현은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다.
 "잠깐!"
 그녀는 문이 닫히기 전 잽싸게 왼발을 문틈에 넣었다.
 "하아……. 무슨 일입니까? 선배."
 지친 음성으로 동현이 물었다. 그러자 단발머리의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는다.
 "배고파서 그러지. 밥이나 먹자."
 "크롤라티나 드실래요?"
 동현이 그렇게 묻자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라면 끊여줘."
 "안됩니다."
 동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여경이 집에 들어오고 난 후였다.
 "남자 사는 원룸치고는 깨끗한데? 혹시 내가 올 줄 알고 청소 한 거 아냐?"
 "민서 선배. 변한 것이 없군요.".
 160cm의 작은 키지만 당차고 단단한 느낌이 드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동현이 속해 있던 봉사 동아리의 회장으로, 발이 넓고 과도하게 활달해서 항상 넘치는 일감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매달 극빈층을 돕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학교나 지역 행사라도 있으면 빠지는 경우가 없었고, 대인관계까지 훌륭해서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 탓에 주위가 항상 시끌벅적한 타입의 그야말로 회장이랄까. 학생들의 상담이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하는 일까지 했으니 슈퍼걸이라고 해도 믿을 일이다.
 "이런 귀엽지 못한 녀석이라니."
 민서는 동현의 머리를 붙잡고 헤드락을 걸어버렸다. 그리고는 꿀밤을 먹여주면서 말했다.
 "요거 요거. 말대꾸 하는 거 봐라."
 그녀는 체중에 비해 가슴이 굉장히…… 비대한 편이다. 허리는 그렇게 잘록하면서 영양분이 어떻게 가슴으로만 간 것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이다.
 "선배. 그만해요."
 동현은 겨우 그녀를 떼어냈다.
 "무슨 일입니까?"
 "용건만 간단히? 에, 우리 사이가 이거 밖에 안 되었어?"
 지우는 머리를 긁었다. 한숨을 쉬다가 옆으로 비켜주었다.
 "차만 드시고 가세요. 그럼."
 "오케이!"
 민서가 식탁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동현은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나 솔직히 깜짝 놀랐다?"
 "……."
 동현은 대꾸 하지 않았다.
 "민간인 혼자 바쿠 수 십 마리를 잡았다고 해서 숨겨진 능력자인줄 알았거든. 근데 그게 순딩이 김동현이라니."
 "……."
 "하지만 측정기에서는 아무 것도 안 나온단 말이야."
 능력자에게는 고유의 파장이 있다. 측정기란, 그 파장을 통해 능력자의 강함이나 종류를 파악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로 오차는 있을지언정 오류가 잦은 기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동현에게는 그 어떤 파장도 검출 되지 않았고, 맨손으로 바쿠를 잡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은 의문으로 남겨졌다.
 "완전 서프라이즈인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헤헤."
 이제는 아주 식탁에 반쯤 눕다시피 한 민서가 고개만 빼꼼히 돌려 동현을 살펴보았다.
 "선배. 빨리 드시고 나가주세요."
 동현은 차를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최대한 무덤덤하게 말했다.
 "달콤한 건 없어? 케이크라던가. 아니면 케이크가 괜찮을지도. 그게 안 되면 케이크라도 줘."
 "하아……. 선배. 저는 단 거 싫어해요."
 동현은 그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긴지 민서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서 있던 동현이 물었다.
 "뭐가 웃겨요?
 "너 한숨 쉬는 거. 그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 거의 7년 전인가? 내가 사고치고 다니면 동현이가 맨날 수습하고 다녔잖아. 그 때마다 넌 어떻게 했는지 아니?"
 "글쎄요."
 그녀는 동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한숨을 푹 쉬었지.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잖아. '선배 뒤치다꺼리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크크크. 그 때가 참 재미있었는데."
 신나서 동현의 억양을 따라하던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동현도 머리를 긁적이면서 식탁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민서가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고 물어온다.
 "네?"
 "왜 그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장난 어린 얼굴이 아니었다. 보는 상대로 하여금 편안한 기분이 드는 눈웃음이다.
 "저는 슬프지 않아요, 선배."
 "아냐. 슬퍼하고 있어. 아주 숨 막히게 힘들어 하고 있어. 나는 그걸 알아."
 "……."
 동현은 침묵을 지켰다
 
 "뭐 지금 당장 말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그녀는 호언장담 했다.
 "그나저나 얼마 전 가디언즈에 LOC요원이 다녀갔어. 아무래도 네가 의심스러운가봐."
 "LOC요?"
 리그 오브 사이퍼. 능력자 연맹이라고 알려져 있는 범국제 조직이다.
 "그 일은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보다 저는 능력자가 아니라고요."
 "아니. 녀석들이 냄새를 맡았어. 네가 능력자든 아니든 바쿠 14마리를 혼자서 잡았단 거야. 그게 중요한 거지."
 "어차피 달리질 것은 없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일뿐이니까요."
 동현은 다짐하듯 말했다. 분명, 동현은 능력자는 아니었다. 그가 가진 힘은 오로지 노력과 재능으로 얻은 것으로 능력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슈퍼 파워와는 그 맥을 달리하는 힘이다. 용사가 되기 위해 수많은 생사기로를 건넜고 강력한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러면서 쌓인 힘과 경험을 한낱 측정기가 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측정기에 파장이 개미 코딱지만큼이라도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너 그러다 아주 훅 가는 수가 있어. 혹은 네가 어떤 교묘한 수로 측정기를 속인 걸 수도 있지. 내가 알기로 다른 쉘터에서 그런 방식으로 측정기를 속이려다가 아주 된통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더라."
 "선배……."
 동현이 말을 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그녀가 말을 가로챘다.
 "잘못하면 사형이라고 사형! 물론 걔들이 그러진 않겠지. 대신 무보수로 아주 잔혹하게 부려먹을 것이 분명하잖아. 너 현대판 섬노예가 되고 싶은 거야?"
 동현은 벌떡 일어나 민서가 마시고 있던 차를 그대로 싱크대에 넣고는 현관문을 열면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선배. 담에는 서로 남인 척 해요."
 "헤에? 세게 나가는데? 너 선배를 물로 보는 거니."
 "잘 가세요."
 동현과 민서의 눈이 공중에서 얽힌다.
 "알았어.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할게. 잘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좋아."
 "……."
 "네가 제안을 듣지 않으면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거야. 내 고집 알지?"
 동현은 터벅터벅 걸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단 그 제안이라는 것만 듣죠. 하지만 미리 말하지만 저는 거절할겁니다."
 "알았어. 군말 없이 비켜나주지. 나 가디언즈 소속인 것 알지?"
 "네. 알다마다요. 국민의 믿음직한 방패. 가디언즈."
 불이 나면 소방대원이 출동한다. 범죄가 일어나면 경찰이 출동한다. 그렇다면 괴물이 나타났을 때에는? 바로 가디언즈가 출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쉘터에서 운영하는 공영기관으로서 100퍼센트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기관이다.
 한때는 공무원이 철밥통인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의 사정은 정반대였다. 괴물 때문에 물가는 치솟고 치안은 개판이다. 사회가 불안정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쉘터의 공공재는 매우 한정적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가디언즈는 사실상 정부의 보조를 거의 받지 못했다. 때문에 최고로 열악한 환경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들이 '가디언즈' 였다.
 "솔직히 이야기할게. 보호 받아야 할 사람은 많은데 우리 가디언즈에는 능력자가 턱 없이 부족해. 눈 씻고 찾아봐도 더 이상 인재가 없어."
 보상은 쥐뿔도 없는데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 자연히 아무도 가디언즈에서 일하려 하지 않았다. 능력자의 대부분은 편하고 대우가 좋은 사설 경비 업체의 경호원이 되거나 돈이 되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가 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사실 지금 우리는 사상누각이나 다를 바 없어. 살짝만 건드려도 저절로 무너질 거야."
 지금 가디언즈에 남은 사람은 오로지 시민을 지킨다는 이상을 위해 불합리한 조건에도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큼의 능력이 뒤따라주지는 않았고, 출동이 있는 날이면 혹여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고 이민서는 가슴을 졸여왔다.
 "만약 네가 가디언즈가 된다면 LOC의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보고서를 조정해줄게. 측정기 오류로 처리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가디언즈는 훌륭한 능력자를 얻고, 너는 LOC의 처벌에서 벗어나니 이정도면 공정거래 아니니?"
 그녀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동현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 거절할게요."
 "알았어. 네 말대로 포기할게."
 의외로 단번에 포기한다. 동현은 민서가 좀 더 달라 붙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쉽게 포기하자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사정이고 지금은 귀찮은 짐 덩어리를 벗어던질 기회였다.
 "그럼 선배. 만나서 반가웠어요."
 "휴. 알았어. 사실 가디언즈가 된다는 것은 고생길이 훤히 열린다는 뜻이니까. 강요는 못하지."
 동현이 자신을 능력자로 속인다면 단숨에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가디언즈가 된다면?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실 가디언즈 권유는 그냥 한번 찔러보는 질문이었다.
 "특별히 보고서 조정해줄게. 측정기 오류라고 하면 아무도 태클 못 걸 거야. 공짜로 해주는 거니까 이참에 개 쩌는 능력자가 되어라. 동현아 부자 되면 나 잊지 말고."
 민서가 직접 동현의 집에 찾아온 이유는 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만약 LOC가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가면 이대로 조용히 일반인으로 살아도 된다. 하지만 끈질기게도 LOC 요원이 직접 재조사에 나섰다. 만약 법을 어긴 사실이 드러나면 동현은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능력자인줄 몰랐다고 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측정기를 일부러 속였다는 정황이 드러나면 감당이 안 된다.
 "저 진짜 능력자 아닙니다. 그러니 헛수고 안 하셔도 되요. 그리고 LOC 요원님은 웬만하면 내일 오라고 하세요. 오늘은 선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야. 김동현. 나는 일부러 너를 위해서 법까지 어기려고 하는데. 너 진짜 이러기야?"
 "네. 이럴 겁니다. 선배 말대로 다 했으니까 얼른 나가세요. 얼른."
 민서는 그 이후로 한참 동현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나중에 너 울고불고 해도 내가 안 봐줄 거야. 그때 두고 보자."
  그녀는 닫힌 문을 세게 걷어찬 후 가버렸다.
 
 ***
 
 랜덤한 상대방이 대화방에 입장하였습니다. 편하게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낯선 상대: ㅎㅇ
 당신: ㅎㅇ
 낯선 상대: 자기 소개 점
 당신: 남 24
 당신: 님은?
 낯선 상대: 먼 곳에
 당신: 암호는 맞네요. 의뢰 내용부터 말씀해주세요.
 낯선 상대: 혹시 여기 대화방 누가 보는 건 아니지요? 다른 사람이 알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당신: 걱정 마세요.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알아야 신고를 하죠.
 낯선 상대: 그럼 다행이지만
 당신: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말씀하세요.
 낯선 상대: 음…….
 낯선 상대: 섹터 32지역에 몬스터를 소환해주십시오.
 당신: 그 곳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몬스터 등급은 어느 정도 해드릴까요?
 낯선 상대: 1급이나 2급정도?
 당신: 가디언즈가 출동하면 간단히 정리되겠는데요.
 낯선 상대: 그 정도가 좋습니다. 사상자가 너무 많아지면 곤란해요.
 당신: 알겠습니다. 그럼 비용 문제로 넘어가지요.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위험부담은 있어요. 혹시라도 LOC 요원이 냄새라도 맡으면 곤란하거든요.
 낯선 상대: 얼마를 원하시나요?
 당신: 일단 선입금으로 이천만원 부탁드리고요. 후불로 이천 주시면 됩니다.
 낯선 상대: 알겠습니다. 돈은 곧 보내드리죠.
 당신: 감사합니다.
 낯선 상대가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간만에 일감이 들어 왔는걸? 게다가 통이 큰 아저씨였어. 가격을 그대로 쳐주네."
 능력자 박상민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깍지 않은 턱 수염, 퀭한 눈, 그리고 비쩍 마른 몸은 폐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만든 랜덤 채팅 프로그램은 클라이언트의 비밀이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대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은 탓에 일감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늘 허탕만 치다가 이제야 돈 되는 일이 들어온 것이다.
 "휴 다행이다. 약이 떨어져서 걱정이었는데."
 박상민은 자리에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 뒤에 숨겨 놓은 종이 박스를 하나 꺼내었다. 그 안에는 주사기와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있었다.
 "흐흐……."
 그가 꺼낸 것은 극도의 중독성을 가진 마약이었다. 마약의 별명은 베이글 이었는데 유럽인들이 아침 식사로 먹는 빵과 같은 이름이다. 빵과 지독한 마약의 이름이 동일한 이유는 그 출처 때문이었다. 마약의 주성분은 바슈륨이라 불리는 몬스터가 내뿜는 포자 성분에 있었다. 이 바슈륨 포자에서 추출한 환각 성분은 여태까지 존재 했던 그 어떤 마약보다 효과가 더 좋았던 것이다. 그걸 안 몇 몇 능력자들은 대번에 그 가치를 파악하고 포자를 얻기 위해 보이는 족족 바슈룸을 사냥했다. 그리고 채취된 포자는 마약의 재료로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마약의 이름이 베이글이 된 이유는 바슈룸의 생긴 모습이 꼭 둥근 빵모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을 해야 하니까……. 주사는 하지 말자."
 그는 신문지 위에 하얀 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1000원짜리 지폐를 둘둘 말아서 빨대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말린 지폐를 이용해 하얀 가루를 코로 흡입했다.
 "흡…… 크읍…… 큽."
 하얀 가루는 코의 점막을 통해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
 이윽고 몰려드는 약 기운에 그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누워 허공을 응시했다. 정신은 몽롱하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낀다. 시야는 좁아졌다가 갑자기 확장되면서 알록달록한 색깔이 세상을 물들기 시작했다.
 "하…….하하."
 고양감으로 몸이 가득찼다.
 "아……. 정신을 완전히 놓으면 안 돼. 일을 해야…… 일을 해야 돼."
 정맥에 직접 약을 넣는 주사를 했다면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다. 물론 그만큼 약 효과는 더욱 쩔어주겠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만 완수한다면 한 동안 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으음."
 넘어지려는 몸을 가누고 기듯이 PC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섹터 32를 검색해보았다. 그에 관련 된 뉴스가 주르륵 뜨기 시작했다.
 
 -섹터 32지역 재개발 보상 협상이 수년간 난항
 -세입자들과 철거 용역의 다툼으로 사상자 발생
 
 섹터 32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쉘터에서 제일 싼 땅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재개발 계획이 세워지면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는 세입자들이 문제가 되었다. 생존권이 위협받자 주민들은 하나로 뭉쳐서 시위를 벌였다. 수차례 충돌이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물러나야 했던 건 경찰과 용역업체 쪽이었다. 악과 깡만 남은 그들에게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몬스터를 풀어서 주민을 쫒아내자? 크흐흐흐……. 이 놈도 병신이고, 저 놈도 병신이야."
 그는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가진 것 없는 철거민은 너무나도 힘이 약하기 때문에 조롱 받아 마땅했다. 그리고 정부와 건설업체들은 그깟 돈 몇 푼 벌기 위해 철거민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양심이란 것이 아주 약간만 남아 있어도 저런 악당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박상민은 두 진영 모두를 향해 욕을 날렸다.
 "병신들……. 크크……."
 더러운 돈의 대가로 몬스터를 섹터 32에 풀어버린다면 철거민은 견디지 못하고 헐값에 거주지를 정부와 건설업체에 넘길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대가로 수 천 만원을 받는 박상민은 그 길로 약을 사는데 돈을 탕진 할 것이다.
 "하지만 제일 병신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 지옥
 
 LOC 요원 김혜진은 아침 일찍부터 신경이 곤두섰다. 휴대폰에서는 계속해서 진동음이 흘러나온다. 착신자가 '엄마'로 표시 된 액정을 언제고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귀찮은 일이 생길 텐데……."
 그녀는 한참이나 전화를 피했지만 진동음은 쉬이 끝나지 않고 계속 울렸다. 강력한 몬스터와 싸워도 이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다. 계속 전화를 안 받는다면 나중에 더 큰 후폭풍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휴우……."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 전화를 받았다.
 -혜진이니?
 "응. 엄마."
 -아니 얘가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니?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너는 엄마랑 통화하는 게 그렇게 싫니? 그 시간 조금도 투자 못하니?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바쁘단 말이야."
 -그렇구나. 이제 엄마가 귀찮은 거지? 정말이지. 어렸을 때에는 말도 잘 들었는데…….
 김혜진은 몰려드는 두통을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 알았어. 무슨 일이야?"
 분명 나중에 전화를 한다고 했음에도 말이 통하질 않는다.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이롭다.
 -이번에 내가 선 자리를 한번 봐놓았다. 토요일 12시에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아! 엄마.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왜 맘대로 약속을 정해?"
 -하나뿐인 딸내미가 노처녀로 늙어 죽을까봐 이런다. 너도 얼른 시집가야지. 응?
 "지금 중요한 시기란 말이야. 연애할 시간 같은 거 없어."
 승진 시험이 눈앞이다. 동기들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으로 눈도장을 받아둔 상태이다. 이럴 때 쓸데없이 사랑 놀음이나 하다가는 나락으로 미끄러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지 말고 한번만 만나봐. 혜성 기업의 팀장급이란다. 이름이 보자……. 김성규라고 능력자들에서는 유명하다더라.
 김성규라면 그녀도 들어본 적이 있다. 혜성 기업이라면 능력자로 이루어진 몬스터 토벌 업체이다. 대한민국의 13번째 쉘터는 그들이 해방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 중에서도 김성규는 회사 내에서도 제일가는 능력자이다. 김성규란 이름보다 실버 나이트로 더 알려져 있고, 잘 생긴 마스크와 뛰어난 실력이 어우러져 연예인처럼 팬클럽도 있을 정도니 김혜진이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다.
 "아 정말. 하필이면 능력자한테 선을 넣은 거야?"
 그 정도 이름값이면 함부로 거절하기도 힘들다. LOC 요원으로서 잘 나가는 능력자와 척을 지는 미련한 짓은 피해야 한다.
 -이렇게라도 안하면 네가 만나질 않잖니?
 "……."
 커리어 우먼으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김혜진도 엄마 앞에서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하지만 만나기만 할 거야."
 -아유, 그래. 일단 자리에만 나가. 꼭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일중독인 김혜진은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다시 일에 집중할 시간이다. 그녀는 주소지를 확인하면서 길을 찾았다.
 
 "정부는 생존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멀지 않은 곳에서 소동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여러 개의 플랜 카드를 든 시위대가 용역단체와 대치 중이었다.
 "뉴스에서 나오던 장소가 여기였네."
 재개발로 인해 주민들은 한순간에 집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막대한 보상금을 노린 알박기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안 되었지만 어쩔 수 없지."
 기본적으로 능력자 협회 LOC는 정치적인 중립을 지킨다. 그들의 목적은 괴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는 순간 변질되는 것은 순식간이리라.
 시끄러운 시위 장소를 지나쳐서 그녀는 김동현의 거주지에 도착했다.
 "허름하네."
 둠스데이 이전에도 낡은 주택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몇몇 집은 보수도 하지 않고 부서진 그대로 살기도 했다.
 
 띵동.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몇 초 후 문이 열리고 한 명의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에 안대를 찬 남성이었다. 큰 덩치는 아니지만 얇은 옷 사이로 튼실한 근육이 보였다. 만약 능력자라면 강화계일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혜진은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혜진예요. LOC에서 왔답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요원님."
 김동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 안은 따뜻했다.
 '이상하다. 아무런 파장이 느껴지지 않아.'
 능력자로서 김혜진은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고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서 상대의 능력을 어렴풋이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힘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저기?"
 "네?"
 동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을 너무……."
 그러고 보니 김혜진은 한참동안 동현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정도면 간단한 악수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게 힘을 꽉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 미안해요."
 혜진은 손을 놓고 사과했다. 애써 부끄러운 모습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동현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죠."
 둘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커피와 차 중에 어느 것을 드시겠어요?"
 "저는 커피가 좋아요."
 동현은 커피를 대접하고 자리에 앉았다.
 "음……. 향이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동현은 단조롭게 응대했다.
 "김동현씨. 25세로 아직 미혼이시고, 지금은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거주하고 계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간단히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람을 착각하면 곤란하다.
 "제가 이곳에 왜 온 줄은 아시겠죠?"
 "네.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죠."
 동현은 고저차 없는 어조로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당신이 일하고 있던 작업장에서 수십 마리의 바쿠가 인간을 습격했죠. 사상자의 수는 모두 6명 이었고요."
 "네."
 동현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목격자들이 말하기를 김동현씨가 괴물을 모조리 처치했다고 하더군요. 사실인가요?"
 바쿠를 처치할 때,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많았다. 인간 같지 않은 몸놀림으로 위험한 괴수를 처리했던 것은 누가 봐도 능력자의 모습이었다.
 "바쿠들은 냉동고에 있었던 탓인지 약해져 있더군요. 그래서 능력자가 '아닌' 저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동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냉동고에 있어서 약해져 있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군.'
 비디오 자료를 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혜진은 이곳에 오기 전 일일이 목격자들과 1:1로 면담을 진행했었다. 그들의 목격담을 총정리하면 김동현은 묘기 같은 능력으로 바쿠를 압살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그저 일반인이라고 어필하는 모습이라니. 새삼 김동현의 태도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혜진은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김동현씨 동료의 말로는 달려드는 바쿠를 맨손으로 잡았다고 하더군요. 사실인가요?"
 "네. 운 좋게 손에 딱 잡히더군요."
 '그 사나운 괴물을 맨손으로 잡는다고? 차라리 내려치는 칼날을 잡는 게 더 쉽겠다.'
 짜증이 난 혜진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김동현씨, 저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온 겁니다. 그러니 약간이라도 협조적으로 응해주세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시치미 떼는 모습이 얄미워지려고 했다. 하지만 김혜진은 능력자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개념이 잡힌 여자였다. 만일 다른 요원이었다면 온갖 협박으로 겁부터 주었을 것이다.
 "김동현씨, 저는 당신의 행동을 높게 사고 있어요. 어떤 이유로 당신의 능력을 감추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괴물들과 싸운 것이잖아요."
 "저는 능력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김혜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당신이 측정기를 속인 정황이 있어요. 그런 위법행위에 엄격한 처벌이 뒤따른 것을 모르진 않으실 테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보급형 측정기를 속인 것으로 기고만장하신 것 같군요. 제가 가져온 신형 측정기에는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아요."
 "잘 되었군요. 지금 한번 해봅시다."
 동현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네?"
 놀란 그녀는 다시 되묻고 말았다. 눈앞에 남자는 대체 무슨 정신인지 오히려 검사를 하자고 나선다.
 "정말 후회하지 않나요?"
 "네. 어차피 능력자가 아닌데 후회할 일은 없지요."
 김혜진은 진짜로 눈앞의 남자가 능력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군요."
 김혜진은 가방에서 측정기 하나를 꺼내었다. 크기는 작지만 정확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LOC 자체 개발의 신형 모델로 능력자의 속임수에도 대비 가능한 최신식 측정기였다.
 "자 팔을 주세요."
 동현은 소매를 걷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김혜진이 측정기를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끼이이익…….
 쾅!
 
 날카로운 소리가 창 밖에서 들려왔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 분명하다.
 "……."
 "사람이 크게 다치진 않았어야 할 텐데요."
 동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짓으로 측정기를 가리켰다. 마저 측정을 끝내라는 뜻이다.
 "음……. 그렇죠. 큰 사고가 아니어야 할 텐데."
 그리고 다시 측정하려는데 이번에는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멀지 않은 곳이 분명하다.
 "꺄아아악."
 "살려 줘."
 심상치 않은 소리에 김혜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그 때였다.
 
 쾅쾅! 쾅!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강도가 문이 부서질 정도로 강했다.
 "누구세요?"
 김혜진이 먼저 물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문을 더욱 강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동현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강하게 두드리던 소음이 멈추었다.
 의아한 것도 잠시.
 
 쨍그랑!
 
 창문이 깨지면서 무언가가 집안에 침입했다.
 "으어어어……."
 극도로 억눌린 사람의 음성이었다.
 “저……. 저건.”
 창문을 박차고 나온 남자의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지 손을 휘저으며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남자의 머리에 붙어있는 커다란 꽃으로, 줄기를 따라 연결된 머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요동치는 꽃잎이 상당히 그로테스크 했다.
 "감염체?"
 혜진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둠스데이 이후 수많은 몬스터들이 인간을 해쳐왔다. 그 중 최고의 킬 스코어를 올린 괴물은 아말테이아라고 알려진 식물형 괴수이다. 한 기의 아말테이아 때문에 도시 전체가 괴멸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아말테이아가 하는 주된 공격 행위는 단 하나, 씨 뿌리기다. 뿌려진 씨앗은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다 유기 생명체가 있으면 맹렬히 달려든다. 그리고 몸에 박혀들어 뇌를 점령하려고 시도한다. 만일 그것을 막지 못하면 이지를 상실한 감염체가 되고 만다. 감염체는 새로운 희생자를 감염시킨다. 이런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감염체가 퍼져나가는 것이 아밀테이아의 무서운 점이다. 게다가 아밀테이아는 이렇게 감염된 인간의 에너지를 먹고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면 정말 답이 없어진다. 성체 아말테이아는 2급 몬스터에서 6급까지 올라간다. 감염 능력과 더불어 본체까지 막강한 무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누구라도 손쉽게 처치할 수 있지만 제대로 성장만 한다면 도시 전체가 나서도 제거하기 어려운 몬스터가 되버리는 것이다.
 
 혜진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미안해요. 차라리 죽음이 당신에게는 안식일 겁니다."
 김혜진은 자신의 능력을 개화시켰다.
 코드명, 플레임 위치(Flame Witch).
 코드명에서도 알려 주듯이 그녀가 가진 능력은 화염을 다루는 에스퍼였다. 인류가 만든 미사일은 몬스터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만든 화염은 강력한 몬스터도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능력이 눈앞에 선보이려고 한다.
 
 화르륵!
 
 붉은 화염이 손 안에서 솟구친다. 그 열기가 자못 대단하다.
 그녀는 화염을 쏟아내어 감염체를 소각시켜 버리려 했다. 그의 방해만 없었다면 말이다.
 
 탁!
 
 "앗!"
 화염을 쏟아내기 직전 김동현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지금 뭐하는 짓 이예요?"
 화가 난 그녀가 외쳤다. 하지만 김동현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사람을 불태워 죽이려는 겁니까?"
 "무슨 소리예요? 저 남자는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요. 차라리 죽음으로 해방시켜주는 것이 도와주는 길이라구요."
 아말테이아에 감염된 생명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 내놓으라는 박사들도 뇌에 깊숙이 박힌 식물의 줄기를 안전하게 제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으어어……."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순간 어느새 그 남자는 바로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녀가 다시 화염을 발화하기 전 동현은 강력한 발차기로 감염체를 날려버렸다.
 
 퍼억!
 
 마치 차에 받힌 듯 감염체는 집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엄청난 리액션이었지만 감염체는 금세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강력한 적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기생체의 판단 때문이리라.
 "에?"
 화염을 발하기 전에 이미 타겟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다. 놀란 김혜진은 멍하니 동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했습니다."
 궁색한 변명이다. 김혜진은 마구 따지고 싶었지만 오히려 동현이 선수를 치고 말았다.
 "어서 본부에 연락해야 되지 않나요?"
 동현의 말대로 지금 상황은 초 비상사태였다. 한시가 급한 지금 본부에게 연락해서 지원을 받아야 했다.
 김혜진은 곧장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나 갔을까?
 -네. 김혜진 요원.
 사무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혜진은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섹터 32지역입니다. 혹시 이곳에 균열 주의보가 있었나요?"
 -아니오. 확인 결과, 현재 제타선 수치는 평이한 수준입니다. 균열이 열릴 확률은 매우 낮아요. 음……. 방금 가디언즈 측에서 괴물이 출현했다는 제보를 받긴 했습니다. 다만 1급 몬스터 몇 마리뿐이라 그들 선에서 금방 진압 될 듯합니다.
 그럼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김혜진은 미칠 것 같은 심정을 느끼며 소리쳤다.
 "본부에서는 대체 뭘 보고 있는 겁니까. 지금 여긴 감염체가 나타났어요. 아말테이아의 재림이란 말입니다!"
 -사…….사실입니까?
 "제가 미친 게 아니라면요. 지금 당장 지부의 모든 능력자와 사설 공격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 아말테이아가 성체가 되어버리면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겁니다."
 아말테이아가 성체가 되기 전이라면 아직 희망은 있다. 만약 능력자들이 빠르게 백업만 온다면 무사히 도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하지만…….
 상대가 말을 쉽게 잇지 못한다. 김혜진은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정부의 주도하에 사설 공격대와 지부의 능력자들은 쉘터 확장을 위해 북으로 넘어 갔어요. 지금 당장 연락해도…….
 "연락해도??"
 -8시간 이상……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잡은 겁니다.
 김혜진은 다리에 힘이 빠졌다.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8시간?"
 허망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그녀는 8시간이라는 단어만 읊조렸다.
 "무슨 소리입니까?"
 김혜진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 동현이 말을 걸었다. 그러자 김혜진은 절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8시간 후면……. 도시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사라질 거란 뜻이라고요!"
 그녀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
 
 2시간 전.
 박상민은 섹터 32지역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전동차 안은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좁아. 복잡해. 기분 나빠. 살이 닿았어.'
 박상민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과 부딪힌 남자를 째려보았다. 깊게 충혈 된 눈과 고약한 악취가 어우러져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상민의 인상에 불쾌감을 더한다. 심지어 무섭게 노려보고 있자니 상대방이 고개를 돌리며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퇴근길로 붐비던 전동차 안 이었지만 상민을 중심으로 둥근 원이 형성되어 금세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게 되었다.
 '뭐야? 그 눈빛은? 지금 나를 혐오하는 거야?'
 박상민은 주위의 시선이 괴로웠다. 자신을 하찮게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허접쓰레기.
 -내가 저럴 줄 알았어.
 -능력자면 뭐해? 반쪽짜리 능력자는 쓸모가 없어.
 
 어느 순간 환청이 박상민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려 할수록 환청은 더 집요하게 그를 괴롭힌다.
 "조용해……."
 박상민의 이 사이로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워낙 작은 소리라 아무도 듣지 못했다.
 "조용하란 말이야!"
 박상민은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환청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
 고함소리에 전철을 탄 사람들이 모두 박상민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정말 노력 했단 말이야."
 -물론 너는 노력했다. 하지만 실패했지.
 "최선을 다했어. 이를 악물고 했다고……."
 -그래서 더욱 꼴사나운 거다. 열등 종자!
 "나는 열등하지 않아. 나는…… 능력자다."
 -푸하하. 지금 네 꼴을 봐. 얼른 그 잘난 고개를 들어서 능력자의 몰골을 보라고.
 박상민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듬성듬성 빠진 이빨과 오랜 마약 투입으로 늙어버린 피부. 무엇보다 썩은 동태눈알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이런 폐인의 모습은 상상도 못했을 테지? 크크크…….
 "이번 역은 섹터 32, 섹터 32지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이봐. 지옥으로 가는 문이 열리고 있어. 네 더러운 몸을 누일 곳은 그 곳뿐이겠군.
 전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상민이 홀린 사람처럼 비틀대며 내려섰다.
 섹터 32지역……. 쉘터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정부의 재개발 정책으로 철거민과 갈등이 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 상황. 결국 정부 측에서는 최악의 수를 생각해냈다. 바로 능력자를 고용해 32지역 한복판에 몬스터를 강제소환 하는 것이다. 큰 피해를 입은 철거민은 헐값에 땅을 팔 것이고, 정부와 건설 회사들은 각자의 이익을 챙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비밀리에 고용된 능력자가 바로 박상민이였다.
 박상민처럼 균열의 틈을 열어 몬스터를 소환하는 자를 채널러라고 하는데, 정신지배를 통해 소환된 몬스터를 길들이는 것은 그중에서도 최상위급 능력에 속한다. 컴퓨터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소환사 계열과 비슷하다. 그러나 박상민은 일반적인 채널러와는 조금 달랐다.
 3년 전, 상민은 희귀 능력자로서 LOC에 스카웃 되어 전도유망한 능력자로서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강력한 몬스터도 단번에 소환 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소환된 몬스터를 지배 하는데 매번 실패했던 것이다.
 제일 약한 몬스터조차 제어에 실패하자 그는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비웃음을 당했다. 그것은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박상민은 참지 못하고 LOC에서 빠져나오고 만다. 어렸을 때부터 히어로를 꿈꾸었지만 결국 실패자가 된 자신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끝없이 방황을 하다가 결국 마약까지 손을 댔다. 괴로운 현실을 잊고자 했던 마약이 이제 그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제어가 되지 않는 능력을 가진 박상민은 LOC에서 위험인물로 분류되었지만 도망가는 능력만은 일품이라 아직까지 잡히진 않았다. 결국 히어로를 꿈꾸던 박상민은 마약 살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악당이 되고 말았다.
 "하악……하악."
 끊임없이 들려오는 환청을 피하기 위해 박상민은 정처 없이 달렸다. 달리다 넘어져서 구르기도 하고 사람과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길을 헤매다 보니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장소로 와버리고 만 것이다.
 -나약하구나. 너는 약해. 기어 다니는 벌레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말았지.
 조롱하는 소리가 또 다시 들린다. 박상민은 허리를 펴고 외쳤다.
 "제발 그……만. 그만 하라고."
 -그만? 웃기는군.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아.
 "약하지 않아. 나에겐 강력한 능력이 있단 말이야!"
 -정말? 그렇다면 나에게 보여줘. 너의 능력을 보여주렴.
 박상민은 능력을 개화시켰다. 깡마른 손을 들어 공간을 찢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아아!"
 새하얀 빛이 틈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불가해의 영역에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지이이이이잉!
 
 귀를 간질이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균열이 열렸다. 평온한 제타선인데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몬스터가 나올 수 있는 입구가 완성된 것이다.
 "이건?"
 박상민은 화들짝 놀랐다. 마치 꿈꾸다가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명확해진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자신이 열어버린 균열을 보고 말을 흐렸다. 왜냐하면 눈앞의 그것은 그가 살면서 해본 소환 중 가장 규모가 큰 균열이었던 것이다. 환청에 이끌려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아……. 어서 다시 닫아야 해."
 계약상 그가 할 일은 소규모 균열만 몇 개 여는 것으로 족했다. 충분히 처리 가능한 괴물을 소환했어야 했는데, 어째서인지 감당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제…… 젠장"
 그는 능력을 다시 발휘해서 균열을 잠재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커져버린 균열은 닫힐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박상민의 능력을 흡수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 멈출 수가……."
 그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치 불장난을 하다가 화재를 일으켜버린 아이처럼…….
 "아……. 난 대체 무슨 일을……. 아니야,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박상민은 몸을 돌려서 어디론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어가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균열 사이로 꽃봉오리 하나가 쑥- 하고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딸랑딸랑
 전자음이 울리고 유리문이 열린다. 그리고 어김없이 손님들이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포니테일 머리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인사를 건넨다. 손님은 알바생의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순간적으로 손님의 동공이 커졌다.
 '헉……. 이쁘다.'
 20대 남성은 물건을 고르는 척하면서 알바생이 일하는 모습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생긋생긋 웃으면서 손님을 맞이했다. 남자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친구들에게 메신저를 날렸다.
 
 -야 대박 예쁜 알바생 봄
 =넌 임마 치마만 입으면 다 예쁘다고 생각하잖아-
 -진짜라니까. 개 쩔어. 연예인보다 더 예쁜 거 같다
 =ㅇㅇ
 =거기가 어딘데?
 -OO 은행 옆에 편의점인데. 그 왜 있잖아.
 =똘구 새끼 설명 좀 제대로 해봐.
 -아 그러니까…… 아 그래. 너 요번에 시위하는 철거민들 봤지?
 =엉
 -그 근처에 있는 편의점이야. 근방에 다른 편의점은 없거던.
 =어딘지 알겠다. 난제 나도 함 가봐야지. 근데 넌 거기 뭐 하러 감?
 -담배 사러 왔지.
 =그래. 집에 들어가면 겜이나 같이 하자. 나 골드 가고 싶어.
 -안 됨. 트롤이랑 하면 나도 점수 낮아짐.
 =개쉥끼.
 
 친구가 농담으로 욕을 하자 답장을 하려고 손가락을 급히 눌렀다. 그런데 눈앞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들어보니 웬 처음 보는 아줌마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머리에 커다란 꽃을 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응?"
 의아해하고 있는데 아줌마가 두 손으로 청년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뭐에요 아줌마?"
 청년은 몸을 흔들어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아줌마의 손아귀 힘은 너무 강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어?"
 그 사이 아줌마의 머리에 있던 꽃에서 수십 가닥의 식물 줄기가 뻗쳐 나왔다.
 "히이익."
 징그러운 촉수들은 그대로 남자의 입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르으으……."
 남자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는 흰 눈동자를 드러내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꺄아아악……."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본 아르바이트생 이지현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스으윽.
 
 감염체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그로테스크해서 지현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으어……. 으어어어……."
 새로운 희생자를 발견한 감염체는 지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빠른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아까 공격당했던 청년까지 다시 일어서서 지현에게 다가왔다. 넋 나간 표정을 한 청년의 머리 위에는 예의 그 불길한 꽃이 달려 있었다.
 
 쿠당탕!
 
 지현은 뒷걸음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붙잡힐 것 같았다. 지현은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서 직원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쾅! 쾅!
 
 감염체들이 연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
 지현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휴게실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덜컹거렸고, 감염체가 들어오면 꼼짝없이 괴물이 되어야 할 판국이었다.
 "제발……."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빌었다. 위기의 순간되자 그녀의 머리 에 한 명의 남자 얼굴이 떠올랐다.
 "동현 선배, 도와줘요."
 감염체에 포위당한 편의점 알바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긴박한 순간 하필이면 동현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위기의 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른다고 하던데……. 혹시?'
 지현은 자신이 너무 공포에 질려서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렸구나 싶었다.
 
 쾅! 쾅!
 
 단단한 철제문이라 감염체가 쉽게 부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버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문이 부서지라고 두드려대던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밖에서 뭔가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그리고는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지?"
 밖에 누군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있는 문이라 열릴 리가 없다. 문틈 사이로 잠시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더니 문이 덜컥 하고 열려버렸다.
 동시에 지현의 심장도 쿵 하고 내려간 느낌이었다. 문 너머에는 분명 감염체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지현은 손을 마주 잡고 앞을 주시했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던 마대 자루를 잡았다. 마지막 순간이 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으로…….
 
 덜컥!
 
 문이 열리고 검은 실루엣이 눈에 보였다. 지현은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보았다.
 "동……현 선배!"
 의식을 잃은 감염체 사이로 김동현이 홀로 서 있었다.
 "응. 다행이 늦지 않았네."
 지현은 들고 있던 마대자루를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팔을 활짝 벌리고 동현에게 뛰어갔다.
 "으아아앙……. 선배. 무서웠다고요."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그만 동현의 품안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마구마구 부비면서 울고 말았다.
 "흑……흑……."
 후배의 육탄 공격에 그만 일격을 당하고만 동현이었다. 바르르 떨고 있는 지현을 동현은 냉정하게 떨칠 수가 없었다.
 "……."
 동현은 할 수 없이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
 
 동현은 지현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다행이 그동안 감염체의 습격은 없었다.
 "흐극……. 흑……."
 지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그 모습이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이제 좀 괜찮아?"
 동현이 물어보니 그제야 지현은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다.
 "으으…… 괜찮아요오……."
 "일어설 수 있겠어?"
 그의 말에 지현은 벌떡 일어난다.
 "미안해요. 동현 선배. 못난 모습을 보여드리고 말았네요."
 "괜찮아. 여긴 위험하니까 얼른 방공호로 대피하자."
 그렇게 말하며 동현은 손을 내밀었다. 지현은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그 손을 잡았다.
 "가자."
 "네."
 무사한 지현의 모습을 보며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혜진이 직접 방공호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을 거절하길 잘 했다 싶었다. 그의 거절에 김혜진 역시 크게 고민을 하지 않았다. 바쿠 수십 마리를 압살한 사람인데 기껏 감염체 정도는 쉽게 벗어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런데 지현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걱정이 된 동현이 물었다.
 "우리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서요."
 "연락해봤니?"
 "아뇨."
 동현은 자신의 휴대폰을 빌려주었다.
 "고마워요."
 지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통화음만 계속 이어지자 지현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버리는 것 같았다.
 "어쩌죠?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 설마…….“
 "지금쯤 부모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있어?"
 "두 분 모두 집에 계실 거예요. 아버지께서 재택근무를 하시거든요."
 "여기서 거리는 얼마나 되지?"
 "그리 멀지 않아요."
 지현은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문제가 있다면 그 방향은 방공호로 가는 길과 반대쪽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한번 찾아가보자. 별 일 없으실 거야."
 "미안해요. 이렇게 폐만 끼쳐서……."
 거리는 위험하다. 자신을 구해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가족의 안위까지 걱정해주고 도와주려 한다. 이렇게 보면 동현은 학창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늘 나서서 도와주곤 했다. 어쩔 때에는 그 때문에 손해를 본 적도 많지만 그럴 때마다 내색 않고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다.
 "힘들 땐 서로 도와야지."
 그렇게 동현이 지현을 데리고 편의점을 빠져나오니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있었다. 화재가 일어난 곳곳에서 감염체의 습격에 시민들이 사냥 당하고 비명소리와 폭발음이 뒤섞여 현대판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다.
 
 위이이이잉.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기계음 섞인 경보 발령이 선포되었다.
 -균열 경보가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균열 경보가 선포되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 가까운 방공호로 대피하십시오. 다시 말씀 드립니다. 균열 경보가 선포…….
 
 이미 쑥대밭이 돼버린 후였다. 눈앞에 감염체들이 득실거리는데 이렇게 방송하는 것은 사람을 농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와."
 동현은 먼저 움직였다. 가끔 감염체들이 동현을 향해 달려들 때면 동현은 나서서 발차기 한번으로 떨쳐 내버렸다. 워낙 압도적인 무위덕분에 감염체들은 가까이 오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대로를 따라 걷다보니 남은 생존자들은 자연스럽게 동현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다.
 "나……나도 같이 가세."
 나이 든 남성이 말했다. 동현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아있던 생존자도 여럿이 모이기 시작했다.
 "능력자 양반인가봐."
 "젠장.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야?"
 "쉿 들리겠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동현에게 이해하지 못할 눈초리를 주었다.
 "선배. 능력자였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지현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난 그저……."
 다만 전직 용사로서 막강한 마법과 무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구나. 오빠 무술 배우셨구나."
 지현은 편의점에서 구함을 받았을 때, 동현이 여러 마리의 감염체를 쓰러뜨렸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했거든."
 동현은 또 무리한 거짓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천연 계열인 지현은 그것을 믿어버렸다.
 "오빠 진짜 대단해요."
 동현은 아파오는 양심을 애써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따라 걷던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저기 능력자 양반.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방공호랑 반대 방향인데?"
 "알고 있습니다.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서 확인차 가고 있습니다."
 "이봐. 그럼 우리가 위험해지잖아. 나는 그곳으로 가는 거 반대일세."
 "그렇다면 방공호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동현은 안색의 변화 없이 말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면서 소리쳤다.
 "니기미. 내 세금으로 배부르게 처먹었으면, 제대로 지켜주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남자는 동현의 멱살까지 쥐었다. 능력자의 작은 경범죄는 눈감아주는 관례가 있다. 하지만 폭력사태는 경우가 달랐다. 오히려 능력자가 폭력사태를 일으킬 경우 일반인들보다 더 큰 처벌을 받게 된다. 남자는 그 점을 알고 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합의 명목으로 돈푼깨나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다행이 주변에 목격자도 많으니 몇 푼 쥐어주면 증언을 도와줄 것이다.
 "오…….오빠."
 그것을 본 지현은 안절부절 못했다. 사실 이렇게 방공호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는 온전히 지현의 부탁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동현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견디기 힘든 압박으로 작용했다.
 
 "당장 되돌아가잔 말이다. 또 다시 괴물 놈들이랑 엮이는 건 상상만 해도 싫다고!"
 자신을 지켜주려는 사람을 오히려 협박한다. 그럼에도 그 남자의 표정에서는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의 생존자 그룹 역시 말릴 생각 없어 보였다. 오히려 무례한 남자의 의견대로 방공호 쪽으로 진로를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은 어딜 가나 있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은 동현에게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용사 시절,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해내면서, 본인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타인을 지키는 일에 앞장 서 왔다. 그럼에도 무지한 자들은 동현에게 이렇게 외쳤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내 집과 재산이 이미 불타버렸잖아. 물어내……. 당장 보상해달라고.'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뒷골이 당기곤 했다. 어쨌든 지금도 그 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오빠. 나 때문에 그럴 필요까진 없어. 나 혼자 다녀 올 테니까 오빠는 그만 방공호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지현은 억지로 지어낸 미소로 동현을 설득해 보려했다. 자신의 가족도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동현에게 이렇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마침, 거리에는 감염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피해 없이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방공호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동현의 생각은 달랐다. 동현의 존재 때문에 감염체들이 잠깐 다른 곳으로 흩어진 것뿐이다. 언제 다시 습격이 이어질 것인지 알 수 없다.
 동현은 멱살을 쥐고 있던 자의 손을 간단히 꺾어 버렸다.
 "윽."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바로 무릎을 꿇는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온 몸이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너어, 고…… 고소할거야. 으윽."
 남자의 협박에 동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동현이 손을 들어 안대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안대가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기다란 자상과 함께 냉혹한 야수의 눈빛.
 "헉……."
 남자는 순간 심장마비가 오는 기분을 느꼈다. 결국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알겠나?"
 이리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함부로 입을 놀린다고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뼈 두어 개 정도는 분질러 주지."
 그렇게 말하고 붙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붙잡혔던 남자는 동현의 협박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방금 그 눈! 저 새끼는 날 죽이고도 남을 놈이야.'
 그는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동현은 그것으로 모든 분쟁을 끝내버렸다. 이계의 바바리안들은 투지를 이끌어내 적의 심령을 제압하곤 하는데, 동현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투기'를 살짝 흘려서 남자를 협박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더 이상 이견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만이 많던 남자까지 조용히 무리와 합류했고, 지현의 집까지 도착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멀지 않은 곳에 감염체 무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먼저 가서 살필 테니까, 넌 여기서 사람들과 기다리고 있어."
 평소보다 자상한 동현의 말투에 지현도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도 감염체를 이길 수가 없는데 지현이 같이 따라 와봤자 짐이 될 뿐이다.
 "나도 도와주겠소."
 일행 중 중년 남성 한 명이 나섰다. 오는 길에 무리의 맨 뒤에서 샷건을 들고 사주경계를 하던 남자다. 일반인도 총기로 무장하면 감염체에 대항 할 수 있겠지만 동현은 고개를 저었다.
 "총 소리가 오히려 근방에 감염체들을 불러올 수 있어요. 제가 조용히 해결 할 테니 물러서 있어요."
 동현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남자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고 물러섰다. 혼자서도 충분하다는데 괜히 나설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동현은 총소리보다 그것으로 감염체가 사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마음이 걸렸다. 이왕이면 아무런 피해 없이 일을 처리 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지현이 알려준 방향으로 얼마가지 않아 큰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감염체 3마리가 닫힌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분명 집 안에 생존자가 있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리라.
 동현은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림자 숨기'를 이용해서 그들 뒤로 다가갔다. 기척을 지우는 기술이라 그 누구도 눈치 챌 수가 없었다. 동현은 손을 들어서 주문을 외웠다.
 '지이라 크돔 베스트라.'
 무음 주문은 소리 내어서 발현하는 것보다 곱절로 어려운 기술이다. 하지만 동현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간단하게 성공시켰다.
 
 파직! 파지직!
 
 백색의 스파크가 동현의 손에서 번뜩였다. 원소 마법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스파크'가 구현되었다. 하위 주문이지만 자유자재로 강도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나름 유용한 마법이었다. 상대방을 간단히 기절시킬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바싹 탄 통구이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동현을 제외한 마법사들이 전투에서 자주 쓰는 마법은 아니었다. 마법 매커니즘이 단순해서 오로지 터치를 통해서만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공간 너머의 적을 타격하려면 그보다 긴 캐스팅 시간을 요구해야 했다.
 동현은 '스파크' 마법이 씌워진 손으로 감염체를 접촉했다.
 "크걱."
 "꾸엑."
 감염체들은 전기 충격을 받고 졸도를 해버렸다. 동현은 넘어지는 그들을 부축해서 2차 부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눕혀 놓았다. 길을 막고 있던 감염체는 순식간에 무력화 되었다. 머리에 피어있던 꽃들 역시 축 늘어져 버렸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가 분명하다.
 '이걸 어떻게 떼어내지?'
 동현은 기생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렇지만 수백 개의 뿌리가 숙주에 깊숙이 침입하고 있었다. 이것을 아무런 피해 없이 떼어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방법을 쓰려면 동현은 칩거를 깨야 했다. 용사로서 가지고 있던 막강한 힘을 이곳 세계의 사람들에게 낱낱이 공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남을 위해 자신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기희생은 적어도 동현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이계에서의 동현은 피 흘리고 뼈가 부서져도 누군가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면 나름 괜찮은 거래 조건이라는 생각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선하다. 젊고 아름다웠으며, 찬란한 미래를 가진 4명의 조력자들…….
 타쓰, 소피아, 세드릭, 그리고 디아나. 멍청하고 무능한 용사 때문에 그들 모두가 어두운 대지에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아니었다.
 어떠한 희생 없이 세상을 구한다? 그것은 주제넘은 오만이었다. 지독한 무지가 아닐 수 없다.
 이계에서 동료를 허무하게 잃어버린 후 스스로 다짐했다. 영웅 놀이는 더 이상 없다고.
 "……."
 지현의 부모를 구해주는 것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는 금물이다. 동현은 그렇게 생각을 하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누구요?"
 안에서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그러자 안에서 대화소리가 들렸다.
 "오 드디어 가디언즈가 온 모양이구려."
 "어서 문을 열어요."
 잠금 장치가 열리고 지현의 부모가 동현을 맞이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는 연신 머리를 굽신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이윽고 지현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근엄해 보이는 남자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귀밑이 하얗고 말이 점잖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밖에서 살펴보아도 집 안에는 책이 굉장히 많았다. 학식이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서 방공호로 가야 합니다. 언제 다시 위험해질지 몰라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걱정스런 눈빛을 했다.
 "우리 딸이 아직 집에 오지 않았어요. 휴대폰이 고장 나서 통화도 되지 않고……."
 "저기…….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여기 남아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딸이 여기로 올 수 있으니.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여기 부인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십시오."
 그러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보?"
 그녀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안 돼요. 저도 남을 거예요."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은 탓이 분명하다. 아마 지현이 없었다면 그들을 두고 와야 할지도 몰랐다.
 "걱정 마세요. 바로 근처에 지현양이 있습니다."
 "어머? 우리 지현이를 아세요?"
 "네. 학교 후배였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동현의 권고에 따라 그들은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 가족상봉이 이루어졌다.
 "우리 딸 무사했구나."
 "엄마. 흐어엉……."
 지현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여자였다. 가족이 무사한 모습을 보자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 방공호로 움직입시다. 제가 앞장 설 테니 괴물이 나오면 뒤로 물러나세요. 절대 앞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떡인다.
 방공호로 가던 도중 간혹 감염체가 길을 막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면 태권 소년 동현이 나서서 깔끔한 발차기로 격퇴해주었다.
 "지현아, 저 양반이 네 학교 선배였니?"
 "네. 엄마, 같은 동아리 선배였어요."
 "그래? 우리 지현이가 능력자와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러자 지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니에요. 선배는 무술만 배웠다고 했어요."
 지현의 아버지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술?"
 "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지현의 아버지, 이정민은 둠스데이 이전에는 생물학을 전공한 교수였다. 지금은 몬스터에 의해 대학이 파괴되어 더 이상 교수일은 할 수 없지만, 가끔 정부나 관련기관에서 몬스터에 대한 자문을 물어오기도 하는, 나름 몬스터에 정통한 학자였다.
 그가 능력자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은 없지만, 적어도 감염체를 맨손으로 이겨내는 무술가가 없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과연 동현이라고 했던 젊은이의 정체가 무엇일까?
 "허어……."
 하지만 그보다 더욱 걱정은 눈앞의 딸내미였다. 길을 막는 감염체를 단번에 처리하는 동현의 모습을 지현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정민은 딸을 20년 넘게 지켜봤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지현은 난생 처음이었다.
 
 # 반격
 
 "지…….지현아?"
 이정민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평생 딸바보로 살아온 그에게 지금 있는 일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혹……혹시 동현이라는 저 친구……."
 "네. 아빠."
 "혹시 너랑 사귀니?"
 이정민의 질문이 너무 놀랐던 것일까? 지현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네?"
 그 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주변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지현은 주변의 시선이 부끄럽기도 하고 황당한 질문을 꺼낸 아빠가 밉기도 했다.
 "아……니에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지현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얼굴은 마치 당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현은 가슴에 손을 얹고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저처럼 평범한 여자아이를 선배가 좋아해줄까요? 하아……."
 그녀는 고민 많은 여자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이정민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고 말았다.
 '내가 지현을 너무 순진하게 키우고 말았구나.‘
 
 ***
 
 LOC 요원 김혜진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것마저 방해하고 있었다.
 지금 김혜진은 재난 컨트롤 타워의 회의실에 있다. 둠스데이 당시 최고의 사상자를 기록했던 최악의 마수, 아말테이아가 재림했다. 초비상사태인 지금 쉘터의 총력을 기울여 수습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관의 장이라고 모인 사람들은 서로 책임만 떠넘길 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없던 두통도 저절로 생길 판국이었다.
 “매번 이딴 식으로 일을 처리하니까 사태가 커진 것 아닌가? 도대체가 월급만 받을 줄 알지? 하는 게 뭐야?”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배가 툭 튀어나온 남자가 소리쳤다.
 그의 이름은 배기성. 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형 쉘터의 대표, '시장'직을 맡고 있는 권력자이지만 그 이면은 부패하고 욕심 많은 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타고난 정치 감각과 웅변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선거의 귀재'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죄……죄송합니다. 하지만 감염체의 확산이 너무 빨라서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청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도 보고 받은 대로 이야기 할뿐 전반적인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다.
 배기성 시장은 화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각종 기관장들은 땀만 뻘뻘 흘릴 뿐,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곳에 시야가 멈추었다.
 “김성식 지부장, 진정 방법이 없겠소? 이러다간 도시에 아무것도 남지 않겠소.”
 호명된 남자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일어났다.
 “물론 저희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LOC 지부장 김성식은 뒷말을 흐렸다. 뛰어난 능력자인 그도 지금 사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방안이 보이지 않았다.
 쉘터 확장을 위해 비전투 인원을 제외 한 능력자 전부가 외부로 빠져나간 이때. 성식 혼자서 현장에 나서는 것은 무모하다는 판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말테이아는 강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 아말테이아가 최종단계까지 성장해버린다면 한낱 도시가 막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 버린다.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쉘터가 아니라 대륙 단위의 능력자들이 투입되어야 한다. 적어도 5시간 안에 아말테이아를 처치하지 못하면 피해규모는 상상도 하기 싫은 수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원정 나간 능력자들이 제 시간 안에 귀환 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뚜루루루루…….
 
 모두가 침묵하는 사이 회의실에 비치된 전화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실무진 한 명이 그것을 받았다.
 “네……. 네. 정말입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받던 사람의 표정은 점점 환해지기 시작했다. 곧 전화 연결이 끊어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혜성 기업의 공격대가 귀환했다고 합니다.”
 “분명 그들도 원정을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궁금증은 LOC 지부장 김성식이 대답했다.
 “고스트가 차원문을 열었군요. 그는 국내 최고의 채널러 이니까요.”
 채널러는 몬스터를 소환하는 것 이외에도 균열을 열어서 공간을 넘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일류급의 능력자만 할 수 있는 기술인데다가 그렇게 열어버린 균열은 금세 닫히기 때문에 이동 가능한 인원은 기껏해야 30명 정도가 한계이다.
 “혜성 기업의 공격대 대장이 그 실버 나이트가 맞소?”
 누군가가 기억을 떠올려서 말했다.
 “네. 27세에 S급을 달성한 실버 나이트가 맞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도 랭커가 나올지도 모르지요.”
 능력자의 급수는 D급부터 차례대로 C, B, A, S급으로 나눠지게 된다. 그리고 S급을 능가하는 능력자들은 랭커라고 하면서 순위를 매기게 된다.
 랭커의 힘은 막강하기 그지없는데 최하위의 랭커라도 S급 10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랭커에 근접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실버나이트를 꼽기도 했다.
 “그들이 왔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성식 지부장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내놓은 계획은 단순했다. 귀환 중인 LOC요원들과 혜성 공격대, 그리고 가디언즈의 C급 이상 능력자들로 아말테이아를 요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디언즈 대원들은 지금 시민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빠져나가면 방공호에 있는 시민의 안전은 누가 지킵니까?”
 가디언즈 대원을 책임지는 곽우석 부장이 말했다. 곽부장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않소. 나 역시 가슴 아프지만…….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 수밖에.”
 배기성 시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시장을 호위하는 보디가드는 등급 높은 능력자로 알려져있다. 게다가 시장은 쉘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헬기도 대기시켜 놓았다. 옥상에 준비된 헬기는 언제든지 시장을 데리고 안전한 다른 쉘터로 떠날 수 있으리라.
 최고책임자로서 안전한 곳에서 희생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열한 것은 없다.
 진정성이 전혀 없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지지만, 힘이 없는 곽우석 부장은 그저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급회의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김혜진 요원.”
 김성식 지부장이 회의실에 남은 그녀를 불렀다.
 “네 지부장님.”
 절도 있는 모습으로 지부장 앞에서 대답을 기다린다.
 “이번 공격대가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혜성 공격대의 귀환으로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부끄럽지만, 저는 김요원을 사선에 보내야만 해요.”
 김상식은 작전의 성공을 위해 혜진을 공격대에 합류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녀는 20대의 아름다운 처녀가 아닌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누락되었다면 자원해서라도 참여했을 것입니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당찬 모습으로 말한다. 그런 그녀가 대견한 지부장은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이번 작전에 쉘터의 운명이 결정되겠지요. 김 요원은 최선을 다해 제 곁을 지켜주세요.”
 “그렇다면 지부장님도 공격대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혜진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연하지요. 저 역시 능력자입니다. 괴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김성식 지부장은 현장에 나서는 일이 드문 사령관급 인물이다. 그런 그의 출격이니 만큼 혜진도 결의를 다졌다.
 “알겠습니다.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든든하군요.”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혜진은 곧 있을 전투를 생각하며 전의를 가다듬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런데 문 밖에서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렇게 들고 있으면 되겠나?”
 비장한 표정을 한 배기성 시장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사고 현장을 비추고 있는 LCD 모니터와 그 옆에는 ‘구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써진 표지가 붙여 있었다.
 배기성 시장은 언론에 뿌릴 설정샷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그녀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가며 현장을 지키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불이라도 확 질러버리고 싶었다.
 “더러운 정치인들, 투표 한번만 잘하면 되는데…….”
 
 ***
 
 섹터 32지역 방공호.
 김동현과 그의 일행은 무사히 방공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길목을 지키고 있던 가디언즈 요원의 지시에 따라 지하에 있는 입구로 들어서니 일행의 긴장도 함께 풀렸다.
 “휴 다행이다. 이제 살았어.”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깐.”
 방공호의 입구는 웬만한 괴물은 흠집도 못 낼 거대한 철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부는 이미 피난민들로 들어차 좁디좁았다. 수용정원에 비해 피난민의 숫자가 넘어서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할 것 없이 불편했지만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불편해도 바깥보다는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야! 김동현!”
 갑작스런 부름에 주위사람들이 놀랐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푸른색 제복을 입은 단발머리의 여경, 이민서 경위였다.
 “선배?”
 동현보다 먼저 반응한 사람은 지현이었다.
 “오오!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염둥이 지현이 아니야?”
 이민서는 놀란 표정으로 지현의 손을 잡았다. 거의 8년 만에 재회였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학생 때부터 잠재력이 있었는데! 이정도로 포텐이 터질 줄이야.”
 민서는 음흉한 표정으로 지현의 얼굴과 몸매를 훑어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라 지현은 살짝 몸을 떨어야 했다.
 “아저씨 같아요. 선배.”
 동현이 오바하는 민서를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서는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현의 볼 살을 꾹꾹 찌르며 말했다.
 “이것 봐. 우유 같은 피부에 살결이 정말 부드럽다구. 게다가 몸매도 이정도면 훌륭하지. 아아 이것이 젊음이란 말인가?”
 지현에 비해 민서의 미모도 절대 뒤처지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슴 크기에서는 민서의 압도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선배, 그만해요.”
 울상 짓는 지현을 위해 동현이 나섰다. 그는 민서를 끌고 사람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입니까? 선배.”
 동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김동현군! 역시 눈치가 빠른데?”
 
 민서는 어깨를 으쓱 거렸다.
 “매번 부려먹을 때 짓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하하! 누가 들으면 내가 나쁜 사람인줄 알겠네?”
 동현은 마음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검은 꼬리를 감추고 있을 거야.’
 “부탁이 있어. 들어주면 상으로 키스 해줄게.”
 “싫습니다.”
 동현은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 싫은 거야? 키스가 싫은 거야?”
 “키스 쪽이 조금 더 싫군요.”
 민서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흑…… 변했군요. 동현씨.”
 “하아……. 농담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갑시다.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그게 말이지…….”
 민서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대화를 엿듣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동현의 귀에 대고 작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 사실 G컵이야.”
 천하의 김동현도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네?”
 “하하하하하.”
 민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었다.
 “아 속 시원하다. 당황한 표정이 제법 볼만한데?”
 “선배!”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남자가 되어서 맨날 뚱한 표정만 짓고 말이야. 그럼 안 되는 거야.”
 “여자가 자기 입으로 그런 말해도 안 되는 겁니다.”
 “정말?”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내밀었다. 셔츠 앞섬 부분이 압력을 받아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녀의 키는 160cm에 몸무게는 47kg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아담한 몸매에 어떻게 저런 무기(?)를 장착할 수 있는 건지 인체의 신비라고 할만하다.
 “흠흠.”
 “동현아? 눈을 왜 옆으로 흘기는 거니?”
 장난이 가득한 목소리로 민서가 놀린다. 동현은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응대했다.
 “더 볼일 없으면 저 갑니다.”
 김동현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4명의 젊은 남녀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가디언즈 제 3기동타격대, 이경 백경태.”
 우락부락한 근육남이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이면서 말했다.
 “이경 이정아.”
 “이경 박수정.”
 “이경 최민규.”
 뒤이어 나머지 3명의 가디언즈도 관등성명을 말했다.
 “어. 그래. 수고한다. 별일 없지?”
 백경태가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상 없습니다!”
 “으휴. 곰탱아 귀청 떨어지겠다. 너 임마? 내 귀 상하면 책임질래?”
 민서는 태경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백태경은 전혀 아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걷어찬 민서의 다리가 더 아픈 모양이다.
 “아휴 이 무식한 능력자 놈. 대체 뭘 먹이면 이렇게 튼튼한 거야?”
 백태경의 클래스는 뮤턴트였다. 그들은 변이를 통해 육체를 강화 시킬 수 있었다.
 백경태의 경우 변이를 하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곰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 변이를 마치면 인간 폼일 때에 비해 수십 배의 내구력과 반사 신경을 가지게 된다.
 강화계라고도 불리우는 뮤턴트는 파티에서 주로 탱커와 근접 딜러 역활을 수행했다. 만일 그들이 일선에서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주지 않는다면 금세 파티가 붕괴돼 버릴 것이다.
 “정아야?”
 “이경 이정아.”
 눈빛이 매서운 여경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녀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인상 좀 풀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
 “그렇지 않습니다.”
 이정아는 목소리를 높여서 대답했다. 그녀의 클래스는 채널러였다. 채널러는 균열 에너지를 다룰 수 있는데, 몬스터를 소환해서 지배를 할 수 있는 직종이었다. 그렇게 만든 몬스터를 펫처럼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혹은 균열 에너지를 무기에 덧씌울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인간의 무기로도 높은 등급 몬스터에게 심각한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다만 무기에 균열 에너지를 주입하는 것은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했다. 대부분 냉병기를 통해 균열 에너지를 실어 몬스터를 타격했다.
 간혹 높은 등급의 채널러들은 열병기에도 균열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매우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균열 에너지를 다루는데 익숙한 최고 등급의 채널러는 균열의 틈을 열어서 공간을 넘나들 수도 있었다.
 파티에서 채널러의 역할은 원거리 딜러 혹은 암살자의 형태를 가지는데, 간혹 지배능력이 뛰어난 채널러들은 대량의 몬스터를 소환해서 물량전으로 적을 압도하기도 했다.
 “요새 너희들 많이 편한가 보다? 응? 수정아.”
 "시……시정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박수정이 대답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제일 키가 작은 대원이었는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탓에 귀여운 토끼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이민서가 특히 무서운지 커다란 눈망울이 벌써 그렁그렁거리고 있었다.
 박수정의 클래스는 디사이플이었다. 신의 대리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들은, 손대는 것만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신의 권능이라고 일컬어지는 능력으로 사지가 절단되어도 뛰어난 디사이플만 있다면 다시 복구가 가능했다.
 그 외의 능력은 신체 강화능력이었다. 디사이플은 신체를 조작해서 더 강한 힘, 빠른 몸놀림, 굴하지 않는 의지를 부여하기도 했다.
 등급이 높은 디사이플은 직접 자신의 몸에 강화능력을 걸어서 뮤턴트와 함께 일선에서 파티의 탱커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디사이플은 파티에서 힐러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민규야, 너는 왜 실실 쪼개고 있는 거니?”
 눈이 작은 민규는 음흉한 변태였다. 그가 가디언즈에 들어온 이유가 단지 예쁜 여경과 사귀고 싶어서라는 말도 있었다. 지금도 그는 최대한 작은 눈을 이용해서 민서의 가슴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에스퍼였다. 에스퍼는 화염, 냉기, 전격 중 하나를 다루는 능력자 들이다. 파괴적인 자연의 힘을 이용해서 단번에 몬스터를 격퇴하는 것이 가능한 그들이었다.
 무엇보다 에스퍼의 효용가치는 범위타격의 효율성이다. 채널러나 뮤턴트는 비교적 단일 대상의 적을 타격한다. 그에 비해 에스퍼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수십에서 수백까지 적을 섬멸시킬 수 있었다.
 등급이 높은 에스퍼는 혼자서 불리한 전황을 뒤집곤 했다. 파티에서 에스퍼는 순수 딜러의 역할을 맡아 후방을 지원한다.
 “동현아, 소개가 늦었네. 애들은 가디언즈 신삥들이야.”
 4명의 젊은 대원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동현을 보았다. 까다롭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그 능력만은 탁월한 이민서 경위가 민간인을 상대로 가디언즈를 소개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가서 입구나 지켜. 감염체 오는지 잘 지켜봐야 한다.”
 “옛 써!”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민서의 행동에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그들에게 축출령을 내린다. 명령에 따라 4명의 가디언즈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가버렸다.
 “무슨 뜻입니까?”
 동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민서의 행동에는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 별거 아냐? 방금 본 애들 있지?”
 동현은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방공호를 지키고 있는 유일한 능력자들이야. 등급은 모두 D등급이지.”
 “네?”
 기가 막힌 동현이 되묻고 말았다. 지금 방공호에는 수 천 명의 민간인이 대피해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장소를 제일 낮은 등급의 능력자 4명으로만 막고 있다니…….
 “아니 뭐, 그렇다고. 아말테이아를 요격하기 위해 쓸만한 애들은 다 빼갔거든. 결국 남은 아해들은 D등급 쭉정이만 남았다는 거지.”
 민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지?”
 “…….”
 동현은 침묵을 지켰다.
 “근데 요즘 나이가 드는지 기억력이 안 좋아지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까먹었다. 데헷~”
 그녀는 윙크를 하면서 자기 머리에 살짝 꿀밤을 놓았다. 귀엽게 보이려는 행동이었지만 동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까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신경 꺼도 될 거야, 동현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나는 먼저 가볼게.”
 동현은 가슴속에 불이 확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녀는 넌지시 가디언즈를 비롯한 방공호의 시민들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현은 더 이상 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와 오만으로 사랑하는 동료들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그 순간부터, 동현은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했다.
 동현이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챘다.
 “어?”
 놀랄 틈도 없이 동현은 그녀를 향해 울분을 토해냈다.
 “지금 뭐하는 수작이죠?”
 “도……동현아?”
 민서는 갑작스러운 동현의 태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랜 기간 알아오던 동현이 이렇게 분노를 쏟아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바보로 아는 겁니까? 왜 나에게 짐을 지우려는 거죠?”
 ‘아니다. 민서 선배는 아무 잘못도 없어.’
 “제가 왜 당신들을 구해야 합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뭔지 말해줘요.”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어떤 보상을 바랬다면 애초에 용사 따윈 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한번 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래서 두렵다. 나는 실패했기 때문에.’
 “대체 무슨 염치로 다시 요구하는 겁니까?”
 ‘그 아픔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아.’
 “지긋지긋해요. 너무 역겨워 토해버릴 것 같습니다. 제발 좀 그만 하세요!”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나를 내버려 둬. 제발…….’
 동현은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심장을 뜯어내고 싶은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저를 찾지 마세요.”
 동현은 완전히 굳어버린 민서를 두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도……동현아…….”
 민서는 떠나가는 김동현을 잡을 수 없었다. 절절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의 표정을 봤기 때문이다.
 “대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방공호 입구.
 4명의 능력자는 감염체의 습격을 막기 위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언제 감염체가 튀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백경태는 우직하게 서서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는 파티의 유일한 탱커로서 신체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뮤턴트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의욕과다에다가 열혈 바보라는 문제점이 있었다.
 반면 에스퍼 최민규는 바닥에 앉아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에스퍼 속성은 냉기였다. 공기 중에 있는 수분기를 결정화시켜서 미소녀 얼음 조각을 만들고 있었다.
 채널러 이정아는 자신이 다루는 냉병기를 손질 중이었다. 그녀는 컴포짓 보우를 애용했는데, 능력자로서의 등급은 낮지만 자존심과 함께 궁술도 타고나 정확도에서 만큼은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디사이플 박수정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디사이플 자체가 신을 믿는다고 주어지는 능력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위험한 임무가 있으면 이렇게 신을 찾는 시간이 길어지는 편이다.
 
 # 구원
 
 “다들 이야기 들었어? C등급 능력자 위로는 아말테이아를 요격하러 갔다던데.”
 최민규는 가지고 놀던 얼음 조각을 터뜨리며 말했다.
 “에? 민규야. 그럼 설마, 우리가 여기 남은 유일한 능력자란 말이야?”
 제발 감염체가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던 박수정이 말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디사이플 아가씨의 안색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누나는 참 걱정도 많아. 사수들이 없지만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덩치가 산만한 박경태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다.
 “너 혹시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어 진거야? 우린 겨우 등급 D에 지나지 않아.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쯧, 이래서 멍청한 놈들과는 있기 싫었는데.”
 채널러 이정아가 날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번 도발에 넘어간 경태가 반문했다.
 “그런 태도가 바로 나약함의 증거다. 진정한 힘은 등급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야! 바로 여기.”
 경태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포기 하지 않는 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열혈가이 백경태는 웅변을 토해냈다. 박수정은 그런 경태의 웅변에 감화되었고 이정아는 ‘멍청한 놈’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아까 이민서 경위님 옆에 있던 남자는 누굴까?”
 최민규는 곧 있을 불화를 피하기 위해 대화주제를 바꾸었다.
 “글쎄? 애인이라도 되는가 보지.”
 크게 관심이 없던 정아가 말했다. 하지만 수정이 반대하고 나섰다.
 “에이 설마……. 경위님의 성격을 감당할 남자가 있다고 생각해?”
 그녀의 말에 나머지 일행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경위님의 미모에 꾀여 접근 했다가 박살난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최민규가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은 만나자마자 박살이 났지.’
 민규는 민서에게 대쉬했다가 큰 고난을 겪었다.
 “아까 들어보니 선,후배 관계라고 하던데?”
 뮤턴트들은 대개 신체조건이 뛰어나며 오감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는 멀리서 동현이 민서에게 선배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해냈다.
 “선배라? 경찰 관계자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 민간인 복장이잖아.”
 그들은 금세 김동현에 대해서 이런 저런 가설을 꺼내기 시작했다.
 “혹시 비밀리에 파견된 LOC 요원이 아닐까? 이런 커다란 방공호를 딸랑 우리 4명보고 지키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수정의 말에 정아가 대답했다.
 “언니. LOC 요원이 눈에 그런 흉터를 남기고 다니겠어? 디사이플이 한번만 치료하면 깔끔하게 나을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동현의 눈에는 긴 자상이 그어져 있었다.
 “그냥 학교 선,후배 관계겠지. 별거 있겠어?”
 단순한 경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말했다. 의외로 사실을 짚은 것이지만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바보야. 학교 후배한테 우리를 소개시킬 이유가 없잖아. 경위님이 좀 엉뚱하긴 해도, 나중에 보면 거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정아의 말에 민규 역시 동의했다.
 “그 말이 맞아. 경위님 속셈이 무언 줄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가 있어.”
 동현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경태가 손을 들어 말했다.
 “저 아저씨도 양반은 못 되겠는걸?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가 한 명 보였다.
 바로 김동현이었다.
 
 ***
 
 나는 용사였다.
 1000년 전의 예언으로 내려오는 단 하나뿐인 인류의 희망. 마왕의 유일한 대척점이자 세계를 구할 구세주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들 이계에서 나를 소환했고 필요에 의한 요구가 있었을 뿐이다.
 구해달라고. 살려달라고.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뿐이었다. 같이 멸망당하거나, 혹은 용사의 길을 걷거나.
 난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냥 무력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용사의 길을 선택한 후, 나는 점점 강해졌다. 영웅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능력을 배웠다. 동시에 막강했던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때의 나는 늘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뼈가 부러지지 않는 날이 없었고 피를 토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하지만 나는 이겨냈다. 하루에도 수백 번 포기하고 싶었지만 끈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혹은 ‘할 수 있다!’ 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계의 주민들은 환호했고 내 이름은 어느새 승리라는 뜻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내 옆을 지켜주었던 동료들이었다.
 용사는 외로운 존재다. 기본적으로 용사는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타쓰, 디아나, 소피아 그리고 세드릭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직접 나의 곁으로 다가왔고 나의 편이 돼 주었다.
 그들의 이타적인 행위는 나를 감싸는 커다란 활력이었다.
 진정한 용사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등에 떠밀려 용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명은 달랐다.
 땡전 한 푼의 보상도 받을 수 없는 일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뻔히 함정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무고한 자의 희생을 막기 위해 서슴없이 적의 소굴로 뛰어들기도 했다.
 4인의 동료들 덕에 나는 진정한 용사가 될 수 있었다. 모두를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내 안을 가득 채웠고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내 앞을 비추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표를 향해 돌진했다. 마왕을 처단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그리고…….
 숨어있던 오만과 무지는 그때 드러나고 말았다.
 
 ***
 
 동현은 방공호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구로 향했다. 출구 쪽에는 좀 전에 소개 받은, 가디언즈 4인방이 서 있었다.
 “…….”
 동현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백경태가 앞을 막으며 말했다.
 “균열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나가면 위험합니다.”
 동현은 앞을 막아선 자를 보았다. 경태는 동현보다 키가 큰 편이라 올려다보아야 했다.
 “타쓰?”
 동현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용감한 전사이자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한 왕자의 모습이 그와 겹쳐 보였던 것이다.
 동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트라우마로 인해 심신이 지친 나머지 헛것이 보이는 듯 했다. 타쓰 왕자는 마왕에게 당해 이미 죽고 없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봐요? 아저씨. 저희는 시민을 지키는 일을 하는 것이지, 시체 치우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요. 오래 살고 싶으면 어서 방공호로 다시 내려가세요.”
 ‘디아나!’
 중간에 나와서 독설을 날린 사람은 이정아였다.
 예전에 용사의 옆에서 늘 핀잔만 주던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겉은 쌀쌀 맞지만 사실 세심하고 배려 깊은 마음씨를 가졌던 그녀.
 마치 디아나가 했던 것처럼 정아 역시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설을 날렸다. 그녀의 언행이 디아나를 떠오르게 했다.
 “정아야.”
 키가 제일 작은 수정이 나서서 정아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질책이 담긴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정아에게 속삭였다.
 “가디언즈가 되어서 그런 실례되는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니?”
 “미…….미안. 언니.”
 이들 중 제일 연장자인 박수정이었다. 수정은 비록 겁은 많고 소심한 편이었지만 연장자로서 파티를 이끌고 있었다.
 “제 동료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릴께요. 보기완 다르게 착한 동생이랍니다.”
 ‘소피아.’
 동현은 눈앞의 여자에게서 옛 동료 소피아를 떠올렸다.
 “눈에 그 상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눈에 난 상처는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있어요. 무…….물론 공짜랍니다. 잘 생기신 분이 그런 흉터라니……. 앗, 방금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주세요.”
 수정은 횡설수설하며 부끄러워했다. 그 이면에는 상대방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박수정처럼 예의 바르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동료가 한 명 있었다.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베푸는 것을 아끼지 않아 진정한 성녀라고 불릴 만한 여인이었다.
 “필요 없습니다.”
 동현은 냉정히 거절했다. 뇌가 멋대로 망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동현은 스스로 벽을 쌓기 시작했다.
 박수정이 나름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동현의 태도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방공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때, 최민규가 나섰다. 평소에는 실실 웃기만 하고 전혀 진지한 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건 그의 한 가지면만 보는 것과 같다.
 그는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기름과도 같은 사내였다. 그리고 비협조적인 시민을 달래는 일은 그의 전문 분야였다. 동현이 무슨 일로 위험한 밖으로 나가려는지 모르지만 사고가 나기 전에 막아야 했다.
 “안녕하세요. 하하. 방공호 안이 좁긴 하죠? 답답해서 그러신다면 저도 이해합니다.”
 민규는 일단 동현을 데리고 다시 방공호 안쪽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동료가 불편해하고 있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민서 경위와 동현의 관계가 궁금한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혹시라도 민서 경위님의 숨겨진 남친이 눈앞의 남자라면! 그것은 엄청난 뉴스가 될 것이다. 그래서 민규는 타고난 말솜씨로 살살 달래서 이것저것 알아볼 속셈이었다.
 “응?”
 하지만 동현은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간만에 진상을 만났다는 위기감이 민규의 두뇌를 활성화시켰다.
 “와 아저씨? 운동하셨어요? 몸이 엄청 단단하시네. 꿈쩍도 안하셔.”
 민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아무리 운동해도 워낙 마른 체질이라 도저히 답이 없더라고요. 능력자로 태어난 것은 좋은데, 하필 능력이 에스퍼라니. 저도 저 친구처럼 뮤턴트였다면 따로 운동 안 해도 여자들이 줄을 서는 몸매를 가졌을 텐데. 참 아쉽죠?”
 “…….”
 말솜씨가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동현의 관심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현이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려 할 때였다.
 
 파앗!
 
 민규의 손에서 작은 얼음 결정이 형성되었다.
 “그래도 작은 재주가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잘 보세요.”
 얼음알갱이는 공중에서 회전하며 모여 들더니 어떤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음으로 이루어진 미소녀 형상이 완성되었다.
 “저 오타쿠 또 시작이네.”
 멀리서 보고 있던 정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그런데 동현은 민규가 만든 형상에 눈을 떼지 못했다.
 ‘세드릭…….’
 동현은 얼음 형상을 보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계의 아크 메이지였던 세드릭은 극도의 사회성 결핍으로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소중한 취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피규어 수집이었다.
 특히 마법을 통해 직접 미소녀 피규어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그 솜씨가 명장급에 이르렀다.
 늘 시큰둥한 세드릭이었지만 자신의 소중한 애장품을 소개할 때에는 어린 아이와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헤에……. 아저씨, 작품을 보는 눈이 있네요.”
 민규는 동현이 자신의 얼음 형상에 감복한줄 알고 더욱 멋진 피규어를 연달아 만들어 냈다.
 “이건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두 손으로 붙잡지만 팬티를 보여주고만 미미짱! 그리고 요거는 부서진 검을 다시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버니 걸!”
 대부분 야시시한 복장이 주를 이루지만 이미 흥이 나버린 민규였다.
 
 ‘요즘 너무 나약해진 탓인가?’
 가디언즈 4명에게서 옛 동료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분명 다른 사람이고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다.
 “…….”
 동현은 뒤돌아섰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리려는 생각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대신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어? 저기?”
 말없이 동현이 떠나버리자 민규는 급 뻘쭘해졌다. 간만에 취미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너무 진도가 나가버린 듯했다.
 “으이구, 멍청아.”
 정아가 민규를 타박했다. 하지만 민규는 변명하듯 둘러 댔다.
 “어쨌든 저 아저씨 나가는 것만은 막았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그래. 잘했어.”
 박수정 만이 민규를 격려 해주었다.
 
 ***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
 도시의 생존자 무리는 감염체에 피해서 방공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럼 우린 살 수 있어.”
 그룹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갑작스런 감염체의 습격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다. 응당 있어야 할 능력자의 출동소식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결국 앉아서 감염체에 당할 바에 한 가지 희망에 의지해서 위험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보인다.”
 무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방공호의 모습이 육안으로 확인 된 것이다. 무리의 환호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사태는 반전되었다.
 “괴…… 괴물이다!”
 이미 폐허가 된 인근 건물의 벽면이 부서지면서 거대한 감염체가 나타난 것이다.
 “능력자가 감염 되었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늑대의 형상을 한 수인이었다. 변이를 마친 뮤턴트였는데, 그의 머리 위에 한 떨기 기괴한 꽃이 피어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말도 안 돼. 우린 다 죽었어.”
 능력자 감염체가 일반 감염체보다 위험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퍼억.
 
 뮤턴트 감염체가 맨 앞의 남자를 후려쳤다. 희생자는 단번에 피떡이 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붉은 피보라가 일어났다.
 “으아아아…….”
 압도적인 무력에 피난민은 반항 할 의지까지 잃어버렸다. 그들은 공포에 감염되어 사방으로 도망쳤다.
 
 찌리리리…….
 
 뮤턴트 감염체의 꽃이 파르르 떨기 시작한다. 그것은 주변의 일반 감염체를 부르는 신호였다. 도망가던 피난민 앞에 숨어 있던 감염체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제……젠장.”
 “길이 막혔어.”
 피난민의 숫자는 100여명. 그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
 
 뮤턴트 능력자 백경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음?”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박수정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태야, 무슨 일이야?”
 “멀지 않은 곳에 비명소리가 들렸어. 누나.”
 “뭐?”
 바로 그 때, 그들의 귀에 통신음이 들어왔다.
 -치익. 가디언즈 대원들은 들으라. 지금 멀지 않은 곳에 뮤턴트 감염체가 나타났다. 다시 반복한다. 뮤턴트 감염체가 나타났다. 절차에 따라 입구를 봉쇄하겠다. 가디언즈 대원들은 조속히 방공호 안으로 대피하라.
 백경태는 망원경을 통해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늑대형상의 뮤턴트 감염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력하게 도축당하는 일반인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젠장. 감염체가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어.”
 급박한 상황에 박수정은 발을 동동 굴렸다. 상부의 지시는 입구를 봉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생존자 무리들이 모조리 사망하고 만다.
 -나 이민서 경위다. 30초 안에 문을 닫을 테니까, 어서 모두 방공호 안으로 대피해.
 그들이 주춤하고 있을 때, 이민서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방공호 안에 숨어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저들은 모두 죽고 말거야.”
 경태의 말은 하나도 틀린 점이 없었다.
 “멍청아. 우리가 간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정아는 민서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행동에 나선 사람은 박수정이었다.
 “누나!”
 “언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수정은 이미 밖으로 나간 후였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저 누나가 제일 막무가내였지?”
 수정은 겁이 많다. 하지만 눈앞에 무고한 사람이 죽는 것이 제일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할 수 없지. 명령도 명령이지만, 누나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아?”
 민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따라갔다.
 “이런 자리에 내가 빠질 수 없지. 기다려라 전우들이여 내가 간다!”
 의욕 충전한 경태도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왜 다들 자살하고 싶어서 안달이지?”
 마지막 남은 정아는 한탄 했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무기를 챙기고 있었다. 컴포짓 보우와 화살이 가득 든 활통을 챙긴 후 그들을 뒤따라 나섰다.
 “…….”
 그리고 동현은 가디언즈가 하는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무모한 결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너희들…….”
 사지를 향해 뛰어가는 가디언즈의 모습과 그가 사랑했던 옛 동료의 모습이 겹쳐졌다.
 자신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중심은 바로 ‘나’다. 생물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목숨은 소중하다. 하지만 사람은 가끔 어떤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 목숨이 위험한 일을 자처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앞에 4인의 가디언즈처럼…….
 용사를 돕던 4인의 조력자처럼…….
 그들은 용사가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거라는 확신은 당연히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험한 행동을 자초한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남을 돕기 위해서!
 
 동현은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있었다. 실패했던 과오가 다시 자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현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발…….
 두발…….
 동료가 지나갔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동현도 사실 알고 있었다. 동료들은 각자의 죽음에 대해서 늘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타쓰는 황제가 될 수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동생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죽음의 길을 떠났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위해.
 디아나는 매번 돈을 밝혔다.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에게는 다량의 후원금을 뜯어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자란 고아원에 모든 금을 기부했다. 디아나가 죽는다면 아무도 고아원을 돌보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겨진 고아들의 미래를 위해.
 소피아는 성녀라고 불리었다. 고귀한 성품의 그녀는 세상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난의 길을 남에게 위탁하지 않았다. 모두가 물러설 때, 그녀는 직접 용사의 파티에 참여했다.
 희망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세드릭은 유아독존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아크 메이지의 경지에 도달했다. 자신의 탑을 가지고 있었고 미래는 그의 것이었다. 정해진 성공가도를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를 대신할 메이지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탑을 버리고 전도유망한 경력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용사를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
 멍청하고 덜떨어진 친구(동현)를 위해.
 ‘그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용사의 길을 걸어갔다. 타성에 젖어 남이 시키니까 싸움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동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의 의지를 이어받을 것이다. 더 이상 무력하게 있을 수는 없다.’
 동현은 결정했다.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용사임을 자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희생정신을 이어받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다.
 
 지잉 철컥!
 
 아직 10여초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문은 훨씬 일찍 닫히고 말았다. 수십 cm 크기의 두께의 철문은 어떠한 침입자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늦었어. 너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어.”
 문을 닫은 사람은 이민서 경위였다. 그는 무선 컨트롤러를 통해 동현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저 아이들은 모두 죽고 말거야. 뮤턴트 감염체의 힘은 4급 몬스터를 상회해. 저 아이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민서는 자신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무력한 자신을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자신이 사무치도록 미워졌다. 하지만 방공호 안에는 수 천 명의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까지 위험에 처할 수는 없었다. 민서는 입술을 적히는 붉은 피가 무척 쓰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내가 좀 더 일찍 왔다면.”
 민서는 견딜 수 없는 현실에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었다.
 “…….”
 동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모두 죽을 것이다. 너는 또 다시 실패할 것이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너를 저주 할 테지? 나락에 떨어진 용사를 과연 누가 구원할까?’
 트라우마가 다시 동현의 몸을 잠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항거할 수 없는 절망이 스물스물 몸집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현은 말했다.
 “나는…… 용사다.”
 
 쾅!
 
 동현은 주먹으로 철문을 때렸다. 엄청난 소음이 방공호 안을 뒤흔들었다.
 “동현아?”
 민서는 동현의 행동에 아연실색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누가 봐도 미련한 짓이었다.
 “누구도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어.”
 
 쾅!
 
 연속으로 철문에다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단단한 철문의 한 부분이 우그러지기 시작 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
 
 쾅!
 
 “내 운명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쾅!
 
 동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옛 동료들의 즐거웠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모두를 떠나보냈던 순간까지…….
 동현은 오롯이 서서 자신의 과오를 지켜보았다.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동현은 모든 것을 품었다.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맞이한 것이다.
 “그 무엇이라도 부숴 버리겠다.”
 동현은 주먹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철물은 향해 내질렀다.
 
 콰과광!!!!
 
 수백 톤이나 되는 철문이 병따개처럼 우그러져서 튕겨 나갔다.
 용사의 귀환이었다.
 
 가디언즈 4명의 능력자는 감염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예상대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감염체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뮤턴트 감염체의 위용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일단 녀석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려야 해.”
 뮤턴트 감염체는 마치 양 떼에 뛰어든 이리처럼 마구 자비로 살육을 감행하고 있었다. 피해를 늦추려면 일단 뮤턴트 감염체를 막아야 할 터였다.
 백경태는 전투하기에 앞서 변이를 시작했다.
 “쿠와와아!”
 경태의 입에서 짐승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에서 야수의 형상으로 형태가 변화했다. 온 몸에서 길게 털이 자라기 시작하는 동시에 몸집이 점점 커졌는데, 인간일 때에 비해 1.5배나 커졌다. 변이를 마치자 그 크기만 해도 2.5미터는 되었는데 마치 북극의 백곰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네 상대는 나다!”
 경태는 감염체를 향해 돌진했다. 곰처럼 네 발로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수처럼 벌어진 입 속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이미 적을 향하고 있었다.
 
 퍽!
 
 뮤턴트 감염체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판 틈을 타 첫 번째 공격이 성공했다. 먼 거리를 달려온 반동으로 들이받아, 적 뮤턴트를 쓰러뜨린 것이다. 경태는 그대로 놈의 목줄기를 깨물었다.
 
 콰직!
 
 “구오오오!”
 경태의 공격은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뮤턴트 감염체의 몸에서 식물 줄기가 스물스물 기어 나와 경태의 온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크륵.”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더 강하게 물어뜯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식물 줄기가 경태의 온몸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으윽.”
 고통을 참기 힘들어진 경태가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렇지만 감염체는 한번 잡은 그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야.”
 정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컴포짓 보우에 화살을 장전했다. 거리는 30m정도.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정도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능숙하게 궁도 자세를 취했다.
 “스으읍…….”
 정아는 호흡을 멈추고 균열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켰다. 이렇게 화살촉에 응축된 균열 에너지는 작은 양으로도 괴물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곤 했다.
 
 탁!
 
 화살이 곡선을 그리며 목표를 향해 쇄도한다. 그리고 정확히 뮤턴트 감염체의 이마에 적중했다.
 “우어어억!”
 빠직!
 화살촉은 단단한 육체에 부딪혀 단숨에 부러졌다. 하지만 균열 에너지가 감염체의 몸에 스며들었고, 그것은 괴물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주었다.
 그 틈을 타서 경태는 식물줄기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멍청아, 혼자 나대지마.”
 정아가 외쳤다. 그녀는 다시 연달아 화살을 쏘아 올렸다.
 
 팍!
 
 이번에는 조준이 흔들린 탓일까? 감염체를 맞추지 못하고 애꿎은 땅에 박혔다.
 “집중해.”
 옆에서 민규가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능력을 발화 중 이었다. 열심히 긁어모은 하얀 냉기덩어리가 그의 손에서 힘차게 피어올랐다.
 “얼어붙어라.”
 동현은 적을 향해 원뿔형의 냉기를 분사했다. 그것은 곧 감염체의 온 몸을 뒤덮어 버렸다. 이윽고 감염체의 거대한 몸 곳곳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감염체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져 갔다.
 “으으……. 힘들다.”
 하지만 민규는 금세 지치고 말았다. 아직 D급 능력자로서 오랜 시간 능력을 발휘할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태는 팀원의 도움으로 뒤로 몸을 뺄 수 있었다. 지친 경태에게 박수정이 다가왔다.
 “기다려. 내가 치료해줄게.”
 그녀의 두 손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디사이플이 가진 능력은 신체를 수복하고 강화시킬 수 있다.
 “고마워. 누나.”
 경태는 다시 차오르는 활력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우으으으.”
 뮤턴트 감염체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생존자들을 뒤쫓던 감염체들의 행동 패턴이 바뀌었다. 수십의 감염체들이 일제히 가디언즈에게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산 넘어 산이라니.”
 아직 뮤턴트 감염체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일반 감염체들의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생존자들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점이랄까?
 “저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도록 최대한 버텨보자.”
 경태가 앞장서서 외쳤다. 이곳에서 방공호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생존자들의 안전만 확보된다면 그들 역시 후퇴해도 될 것이다.
 “그게 과연 말처럼 쉬우면 좋겠다만.”
 양손으로 냉기를 모으고 있던 민규가 탄식조로 말했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경태는 다가오는 감염체의 몸을 앞발로 쳐냈다. 감염체는 끈 없는 연처럼 멀리 날아갔다. 정아 역시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렸다. 적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쏘는 족족 화살이 명중했다. 한번이라도 맞은 감염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수정은 과도하게 능력을 쓴 민규를 보조해주었다. 기운을 차린 민규는 모으고 있던 냉기를 조종해서 바닥에 넓게 깔아버렸다.
 감염체가 딛고 있던 땅바닥은 금세 빙판이 되었다. 마찰 계수가 낮아지자 감염체들이 스스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나이스.”
 가디언즈의 분전 탓이었을까? 적의 공세가 한풀 꺾였다.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 상황을 반전 시키는 존재가 있었다.
 “그어어어!”
 뮤턴트 감염체가 다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민규가 쏘아낸 냉기가 시간이 지나자 흩어지면서 거동일 자유로워지자, 녀석은 울분을 토해내듯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경태는 앞장서서 뮤턴트 감염체에 맞섰다.
 
 퍽 퍼벅!
 
 정면으로 맏닥뜨린 뮤턴트의 힘은 경태를 뛰어넘고 있었다. 덕분에 연달아 공격을 허용하고만 경태가 비틀거렸다.
 “크윽.”
 그 사이로 정아가 활을 쏘아 견제했다. 하지만 경태와 몸이 겹치는 바람에 조준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에 더해 일반 감염체까지 다가와 공격해오니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으악.”
 그 사이 건물 뒤로 돌아온 감염체가 민규를 공격했다. 전방의 적에 신경을 쓴 탓에 습격을 허용해버린 것이다.
 “민규야?”
 수정은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격실력은 말 그대로 형편없었다. 게다가 감염체의 본체는 죄 없는 일반인이다. 압박감이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손은 극도로 떨리고 있었다.
 민규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능력자를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아는 수많은 감염체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경태는 뮤턴트 감염체에게 깔려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4명 모두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뻔했다.
 수정은 방아쇠에 힘을 주려고 했다. 그 순간!
 “아…….”
 겨누고 있던 팔을 누군가가 제지한다. 놀란 수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바로 김동현이었다.
 “당신은?”
 동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수정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을 느꼈다.
 동현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스팟!
 
 눈 깜짝할 사이에 동현은 민규가 있는 곳으로 질주했다. 그 운신이 너무 빠른 탓에 수정은 동현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크웩!”
 동현이 단번에 감염체의 뒷목을 가격했다. 오랜 세월 수련해 정진한 몽크에게 배운 수법이다. 치명적인 상해를 주지 않고 적을 기절 시킬 수 있는 특이한 공격법.
 
 털썩!
 
 “헉헉……. 감사합니다.”
 죽음을 감지했던 민규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동현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 시각 정아는 감염체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그녀는 컴포짓 보우를 버리고 두 자루의 군용 대검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할 생각이었다.
 
 촤르르르…….
 
 동현은 성전사의 오래된 기술인 속박의 사슬이 구현 되었다. 강력한 신념과 실체화된 마나가 결합된 기술로 원거리에서 적의 움직임을 포박할 수 있는 기술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금세라도 달려들 것 같던 감염체는 사슬에 포박되어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어떤 능력자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기술이다.
 동현은 마지막으로 뮤턴트 감염체를 주시했다. 그는 경태를 끝장내기 위해 마지막 타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태가 내구력이 뛰어난 뮤턴트가 아니었다면 이미 차디찬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공격을 허용했다. 그의 몸에 있는 하얀 털들은 이미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구어어어…….”
 뮤턴트 감염체가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그는 그것을 내리쳐서 경태의 머리를 으깨어버릴 생각이었다.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경태는 이번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안 돼!”
 수정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쿠와악.”
 치명적인 주먹질이 가해질 찰나!
 “크으으으으…….”
 뮤턴트 감염체는 신음을 흘렸다. 온힘을 다해 찍어 눌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먹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멈추고 만 것이다.
 “맙소사.”
 민규는 눈앞의 상황이 믿겨지지 않았다. 일반인의 몸으로 뮤턴트의 강력한 공격을 맨 손으로 막아낸 것이다.
 동현의 작은 손에 잡힌 감염체의 주먹이 오히려 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룩?”
 뮤턴트 감염체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눈앞의 방해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조그만한 인간일 뿐이지만 알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특히 두 눈에서 뻗어져 나오는 살기는 괴물이 되어버린 뮤턴트에게 쉴 새 없이 울리는 경보음과 같았다.
 “크라락.”
 뮤턴트 감염체는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뮤턴트의 잠들어버린 의식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아말테이아의 명령을 거부할 만큼 동현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촤르륵.
 
 도망치던 뮤턴트 감염체가 우뚝 서고 말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에 황금색 사슬이 묶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현의 손과 연결되어 있었다.
 “크르륵…….”
 뮤턴트 감염체는 앞으로 풀쩍 뛰었다. 허공에 부유한 것도 잠시…….
 
 쿵!
 
 감염체는 땅바닥에 그대로 낙하해버리고 말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슬을 당겨버린 것이다.
 “크아앙…….”
 뮤턴트 감염체는 바짝 엎드린 상태로 앞으로 기어갔다. 죽어도 동현과는 마주하기 싫었다.
 
 질질…….
 
 앞으로 기어가려고 했지만 사슬이 뒤로 잡아끈다. 긴 손톱을 땅에 박아서 그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했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끙……끙…….”
 정신이 마비되는 공포에 감염체는 몸을 떨었다. 어느새 괴물은 동현의 발아래 엎드려서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순한 양처럼 가만히 있었다.
 동현의 손에서 강력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잘 자라.”
 동현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력한 뮤턴트 감염체는 ‘스파크’ 마법에 의해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휘이이…….
 
 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감염체는 동현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당해 쓰러지고 말았다.
 가디언즈의 4명은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허…….허허.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민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황당한 일을 당하면 웃음이 나오기 마련이다.
 “끄응…….”
 죽사발이 난 경태가 몸을 일으켰다. 위험한 순간까지 갔지만 수정의 치료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경태는 변이를 풀고 동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다…….당신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 출전
 
 아말테이아를 요격하기 위해 쉘터의 능력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렇게 모은 능력자의 숫자는 총합 400명. 최하급인 D급을 제외한 가용 할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이다.
 ‘과연 이들 중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이번 작전이 성공 할 수나 있을까‘
 ROC 지부장 김성식은 답답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말테이아는 성장형 몬스터이다. 어릴 때에는 D급 능력자도 그것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성장이 완료해버리면 대륙급 스케일로 강해져 버리는 무서운 잠재력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시간이 이미 많이 흘렀어. 여기서 막지 못 하면 쉘터는 전멸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방공호에 숨어있다. 단단한 철문으로 입구를 봉해놓았기 때문에 일단은 안전하다. 하지만 아말테이아에 의해 쉘터가 점령된다면…….
 방공호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아말테이아의 통조림 간식이 되고 말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지부장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코드명 플레임 위치, 김혜진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동원할 수 있는 능력자는 다 모였다. 이제 죽이 되 든 밥이 되 든 시작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출발하도록 하지요.”
 그녀는 무전을 통해서 각각의 파티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400명에 달하는 능력자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공격대는 크게 3가지 부류로 나눠졌다.
 첫째가 혜성 공격대이다. 30명으로 인원은 제일 적지만 등급으로 따지면 가장 우수하다. 원래라면 북에서 쉘터 확장에 힘쓰고 있을 그들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아말테이아의 준동을 전해 듣고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먼 거리를 포탈을 통해 넘어온 진짜배기 능력자들이다.
 두 번째는 LOC 요원들로 이루어진 능력자들이다. 인원은 40명 정도로 대부분 신입과 경력이 부족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능력을 우선시하는 LOC요원들의 특성으로 인해 개개인의 화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세 번째는 가디언즈 대원과 동원령으로 모집된 C급 이상 능력자들이었다. 대부분 사설 경비대라거나 방범대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능력으로 따지면 제일 약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숫자만으로 따지면 330명이나 되어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 400명이나 되는 능력자들을 동원했지만 김혜진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분석가들에 따르면 성공확률은 50%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실패했을 때의 상황을 감안하면 절망적인 수치였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다. 쉘터의 운명이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삑. 김혜진 요원님.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통신음이 들렸다. 혜진은 빠르게 응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실버 나이트님께서 김성식 지부장님과의 접견을 요청하셨습니다.
 “알겠어요.”
 그녀는 곧장 지부장에게 접견 사실을 알렸다. 사실 이번 작전은 시간이 일분일초라도 급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공격대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혜성 공대장과 LOC지부장은 아직 서로 통성명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보급도 마치고 전투 준비가 완료된 지금에서야 서로 인사정도는 나눌 짬이 생긴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쉘터의 유일한 S급 능력자 실버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실버 나이트 김성규입니다.”
 훤칠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능력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웬만한 연예인 뺨칠 만큼 미모도 뛰어났다. 만약 그가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CF나 드라마를 수십 편 찍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성식입니다. 이런 시기만 아니었다면 좋은 만남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군요.”
 곧 있으면 아말테이아와 사투가 벌어질 것이다. 과연 이들 중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분위기가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작전은 성공시킬 것입니다.”
 실버 나이트의 클래스는 디사이플이었다. 대부분의 디사이플이 힐을 하는 보조계라고 볼 때 실버 나이트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는 스스로의 몸을 강화해서 뮤턴트처럼 일선에서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동시에 주변 파티원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버프까지 척척 해냈다. 혼자서 두 가지의 역할을 하는 멀티 클래스였던 것이다.
 “과연 믿음이 가는군요. 저는 혜성 공격대만 믿겠습니다.”
 전의를 가다듬고 격려의 말이 오갔다. 그러던 도중 실버 나이트가 김혜진을 보고 아는 척을 해왔다.
 “생각보다 일찍 만나고 말았군요. 주말에 뵐 줄 알았는데.”
 “그러네요.”
 김혜진은 실버나이트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말테이아가 아니었다면 주말에 같이 데이트를 했을 상대다.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장소에서 만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쨌든 김혜진은 실버 나이트가 부담스러웠다. 만약 실버 나이트가 모르는 척했다면 끝까지 꾹 입을 다물고 있었으리라.
 “아름다우시군요. 아! 이건 빈말이 아니랍니다.”
 실버 나이트는 낮은 음성과 함께 씨익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여성들을 뻑 가게 만든 바로 그 표정이었다.
 ‘으……. 느끼해. 하지만 웃어야지.’
 “감사합니다. 근데 하필이면 복장이 전투복이라…….”
 김혜진은 민망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커리어 우먼답게 그녀가 평소에 입는 옷은 검은 색 정장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 괴수와 싸우기 위해서 전용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검은 색 전신 타이즈로 만들어진 옷이었는데, 몸의 굴곡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와 몸매 죽인다.’
 ‘과연! 플레임 위치.’
 그녀가 전투복을 입는 날이면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곤 했다. 그녀가 이렇게 야시시한 옷을 입는 이유는 그녀의 화염 속성 때문이었다.
 에스퍼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속성에 대해서는 완벽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에 통할뿐 입고 있는 옷에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만약 혜진이 평상복을 입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한다면?
 견디기 힘든 화염이 주변을 휩쓸 것이다. 그에 더해 그녀의 옷도 순식간에 타버리고 만다. 원치 않은 누드쇼가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녀는 몬스터 벨로테즈의 가죽으로 만든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 강력한 화염저항을 가진 옷감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을 자랑했다.
 값이 비싼 만큼 최소한의 소재로 옷을 만들다보니 본의 아니게 노출도가 높아져버린 패션이 되었다.
 게다가 김혜진은 에스퍼답지 않게 쉬지 않고 몸을 단련했다. 매일 3시간씩 강도 높은 단련을 통해 전투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녀의 복직근은 완벽한 내 천(川)자를 그리고 있었고, 다리는 얇으면서 엉덩이 부분에 근육이 붙어 힙업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슴은 절대 납작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균보다 큰 편이었는데, 타이즈 옷이 작은 탓에 깊은 가슴골이 드러나고 있었다.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만든 옷이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돋보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저는 오히려 그 복장 때문에 혜진씨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요. 뭐랄까?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요?”
 ‘변태인가? 멀쩡하게 생겨서 왜 저러는 거야?‘
 “아…… 네.”
 김혜진은 실례가 되지 않게 최대한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삐익 12시 방향에 감염체 발견.
 갑작스런 적과의 조우임에도 실버 나이트는 긴장하지 않았다.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고 말았군요. 혜진씨,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작전을 성공시키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주 토요일 약속 잊지 마세요.”
 그는 상쾌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갔다. 남은 혜진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살아남아도 걱정거리 한 가지는 남겠구나.’
 
 ***
 
 “너무 조용한데?”
 “그러게. 그 많은 감염체들이 다 어디 간 거지?”
 일행은 개전 초기에 소규모 감염체 그룹과 교전을 벌였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 공대 규모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한 감염체들을 순식간에 제거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이후의 길은 텅텅 비어있었다.
 “너무 순조로운데?”
 실버 나이트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거리에는 수많은 감염체들로 물샐 틈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텅 빈 거리라니…….
 혜성 공격대의 부대장 고스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피해 없이 가면 좋은 거 아냐?”
 실버 나이트와 같은 S급 능력자로서 균열 이동이 주특기인 사내다. 게다가 그의 주무기는 대구경 저격총이었다. 화기에 균열 에너지를 주입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대부분의 채널러들이 냉병기를 더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의 탑 채널러답게 그는 그것을 자유자재로 해냈다.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며 사각에서 나타나 적을 타격하는 솜씨는 마치 유령과도 같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 고스트였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공격대의 대장이라는 자리는 필수적으로 책임감이 강해야 한다. 대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공격대가 전멸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강자라 자부하는 실버나이트 또한 거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젠장. 시간이 충분하다면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됐을 텐데.’
 시간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능력자들을 산개해서 천천히 투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말테이아가 성장할 시간을 주어선 안 되는 긴급 상황이었다.
 “곧 섹터 32지역에 진입합니다.”
 파티원의 보고가 올라왔다.
 “본체의 예상 위치는?”
 “지하철 역 안에 멈춰 있습니다. CCTV로 확인 결과 100% 정확합니다.”
 정황으로 볼 때, 아말테이아는 공격대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정신없이 영양분을 흡수해서 성장에 주력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시민들이 아말테이아의 뱃속으로 사라진 것은 애도 할 일이지만 지금이야말로 괴물을 잡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다면!’
 실버 나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때야 말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LOC 지부장님과 연결해줘.”
 금세 통신이 연결 되었다.
 “본체의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이 있습니다.”
 아말테이아를 요격하기 위해서는 좁은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염체와 아말테이아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흠……. 협소한 공간 때문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탁 트인 공간에서도 심심찮게 프렌들리 파이어(아군사격)로 사상자가 발생한다. 하물며 지하의 좁은 공간에서 잘못 싸웠다가는 피해가 막심할 것이 분명하다. 손발이 맞지 않는 능력자들과 혜성 공격대의 협공은 오히려 마이너스에 가깝다고 보면 되었다.
 “저희 혜성 공격대가 선진입하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예비대가 되어주십시오.”
 오랜 기간 사선을 넘나든 파티원들이다. 어쭙잖은 능력자들의 도움보다 소수 정예로 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사실 400명이나 되는 능력자들을 데리고 온 것은 수만 명이나 되는 감염체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저항 없이 적의 본진까지 도착했다면 이제는 혜성 공격대만 움직이는 것이 현명하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차피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지원이 필요하다면 무전 하십시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혜성 공격대만 따로 지하철 안으로 진입했다.
 
 “으어어어…….”
 “아아아아.”
 지하로 내려가자 감염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도록.”
 비록 기생체에 의해 괴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원래는 민간인이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쓰지만, 공격대원들 역시 달갑지 않은 표정이 묻어났다.
 
 파지직…….
 
 전격 속성의 에스퍼가 전방으로 다량의 전기를 쏟아낸다. 한 번의 공격에 감염체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상대하면 끝이 없으니, 일직선으로 돌파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실버 나이트 역시 투구를 썼다. 값비싼 장비를 착용한 그의 모습은 마치 중세의 기사를 연상 시켰다.
 몬스터의 사체에서 나온 뼈와 비늘은 훌륭한 무기와 방어구로 탈바꿈했다. 은색의 라운드 실드와 함께 무거운 메이스를 꺼내들었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장비만 해도 300kg의 중량이 넘었다. 하지만 그는 디사이플의 능력으로 자신의 몸을 강화시킨 상태다.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방을 향해 돌격했다.
 “으어어어…….”
 그 앞을 감염체가 막아섰다.
 
 퍽!
 
 감염체는 1초의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마치 기차에 부딪힌 듯 튕겨져 나가버린 것이다.
 “생긴 것 답지 않게 불도저라니깐.”
 부대장 고스트와 동료들은 실버 나이트가 열어 놓은 길로 뛰어갔다.
 “곧 적의 중심부에 돌입합니다.”
 “모두 끝까지 정신 차려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선에서 적을 처리한다.”
 아말테이아를 혜성 공격대에서 처치한다면, 그 이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아말테이아의 사체에 나오는 희귀한 아이템은 모두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에 더해 쉘터의 구원자로 혜성의 이름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어쩌면 아말테이아에서 마커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만 있다면 나도 랭커가 될 수 있어!’
 마커.
 그것은 능력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아이템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빛나는 돌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능력자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신비한 결정체였다. 마커는 오직 6급 이상의 몬스터에게만 추출이 되는데, 아말테이아라면 충분히 순도 높은 마커를 뱉어낼 것이 분명하다.
 “곧 아말테이아와 조우합니다.”
 지하철의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정보에 의하면 분명 이곳에 거대한 아말테이아가 꽈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흠 저기 있군.”
 조명이 꺼진 탓에 윤곽이 완벽히 드러나진 않았다. 하지만 역 안을 가득 채우는 질량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얗게 질리게 만든다.
 “하압.”
 실버 나이트는 자신의 갖고 있는 능력을 최고조로 뿜어냈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빛은 주변 동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힘과 활력, 집중력 그리고 굳은 의지가 공격대원들의 능력을 배가시켰다.
 “공격 개시.”
 먼저 에스퍼와 채널러의 원거리 공격이 이어졌다. 균열 에너지가 담긴 화살과 총알이 먼저 적에게 닿았다. 곧 이어 3가지의 속성 공격이 연달아 아말테이아에 직격했다.
 “…….”
 그 순간 실버 나이트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격 중지!”
 실버 나이트는 새된 목소리로 공격을 중지 시켰다. 가까스로 공격이 중지되고 일방적으로 직격당한 아말테이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말……도 안 돼.”
 눈앞의 거대한 몸집의 실체는 아말테이아가 아니었다. 수십 미터의 괴물의 정체는 속이 텅 빈 유기물에 지나지 않았다.
 “더미(dummy)라니…….”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실버 나이트를 엄습했다.
 
 ***
 
 같은 시각.
 LOC 요원들은 지하철 근처에서 언제든지 투입 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반면 낮은 등급의 능력자들은 각기 흩어져 비교적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하철 안으로 혜성 공격대 녀석들이 들어갔더군.”
 “아아. 나도 들었어.”
 사설 경비대의 능력자 두 명이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대다수의 능력자들은 무모한 작전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둠스데이 이전 한국의 건장한 남자라면 누구라도 군대를 가야 했던 것처럼.
 “아말테이아를 잡는다면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겠지? 혜성 녀석들만 대박 나겠군. 이거야 말로 빈인빈 부익부 아니겠어?”
 “그거야 말로 개소리군. 보상으로 억만금을 준다하더라도 역 안으로 들어가는 건 싫어. 저기 들어가면 너나 나나 살아남을 것 같아? 자고로 사람이란 자기 분수를 알아야 돼.”
 “이런 배알도 없는 친구라니. 그러니 맨날 C급에서 못 벗어나지.”
 “아아 그래. 나는 길게 살아서 벽에 똥칠까지 할 거다.”
 그는 돈을 받고 부자들의 저택에서 경비 서는 일을 했다. 몬스터 사냥보다 수입은 적은 편이지만 일이 편하고 위험부담이 적었다. 단점이 있다면 부자들이 파티를 즐길 때, 경호를 위해 칵테일을 못 마신다는 정도? 그런 사소한 점만 제외한다면 나름 만족한 인생을 살고 있는 그였다.
 ‘아! 어서 작전이 마무리되었으면, 냄새나는 동네는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아.’
 낙후되고 위험한 섹터 32지역을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다. 반면에 그의 친구는 삶이란 도전하는 자의 것이라고 웅변을 토하고 있었다.
 “답답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으응? 땅이 왜 이렇게 흔들거리지?”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이 일어났다. 유리창이 깨어지고 자동차에서는 경보음이 쉴 세 없이 울렸다. 갑작스런 진동에 몇몇 이들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쿠구궁…….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 진동을 일으키는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쿠워어어어.
 
 단단한 아스팔트를 부수고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금속 구리 색깔의 거체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아말테이아다!”
 “말도 안 돼. 저게 왜 여기 있는 거야?”
 갑작스런 괴물의 등장에 몇몇은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도……도망쳐야 해.”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겠어.”
 의지가 약한 이들은 이미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는 정신을 오염시키는 오오라를 뿜어냈다.
 
 푸지직…….
 
 고동색의 거체가 수액을 뿜으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엔 자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재앙의 시초였다.
 “으어어어…….”
 “그아아아…….”
 지옥의 무저갱이를 보고 싶다면 멀리 갈 것도 없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염체다!”
 거의 보이지 않았던 감염체의 모습이 그제야 드러난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소화액에 몸이 녹아 있었다. 손가락이나 약한 피부조각은 녹아내려 안의 장기까지 보이고 있었다.
 “우욱…….”
 욕지기가 저절로 나온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에 정신 오염수치는 훨씬 올라갔다. 대부분의 능력자는 반항할 생각도 못했다.
 “도망쳐.”
 광장 한복판에 나타난 아말테이아를 피해 사방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새로 나타난 감염체에 의해 간단히 좌절되고 말았다.
 “길이 막혔어.”
 “괴물 새끼! 처음부터 이럴 의도였던 거야.”
 처음부터 섹터 32지역의 감염체의 숫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이 잘 풀리는 것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대다수였다. 혹은 문제가 있더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수많은 감염체들이 아말테이아와 함께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공격대의 제일 약한 능력자를 노릴 것이라고는…….
 “당장 지원을 요청해.”
 “이미 했습니다. 하지만 혜성 공격대들과 LOC요원들도 지금 감염체에 의해 공격 받고 있……아악.”
 통신을 담당하던 능력자가 감염체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근접 공격에 무력한 디사이플에 지나지 않았다.
 “커걱.”
 감염체의 촉수가 능력자를 덮치기 시작했다. 몸에 있는 구멍에 침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해……줘.”
 그는 억눌린 음성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붙잡힌 능력자를 구해줄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감염체 때문에 자기 한 몸 사리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모두 자리를 지켜라.”
 그들 중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B급의 뮤턴트가 변이를 마치자 3M급의 거체를 드러냈다. 마치 인도신화의 가네샤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코끼리 머리에 기다란 코는 그 하나로도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부웅.
 
 길이만 해도 2M가 넘는 기다란 코는 채찍이 되어 감염체를 휩쓸었다. 한 번의 공격에 감염체 다섯 명이 튕겨져 날아갔다.
 “어차피 도망갈 곳은 없다. 정신 차리고 눈앞의 적과 싸워라.”
 덩치만큼 우레 같은 목소리이다. 뮤턴트의 혼이 담긴 외침은 정신오염에 허우적거리는 능력자들 일부를 제정신으로 되돌렸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조금만 버티면 혜성이 구하러 와줄 거야.”
 사태는 순간 진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아말테이아가 나서자 그것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르르르…….
 
 아말테이아의 본체에서 수백 개의 촉수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방으로 뻗쳐 나가서 능력자들을 공격했다.
 “으아악.”
 에스퍼는 날아오는 촉수에 화염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공격에 지나지 않았다. 불길을 뚫고 들어온 촉수는 능력자들을 단번에 뭉개버리고 말았다.
 코끼리 형상의 뮤턴트는 아말테이아의 촉수공격을 막기 위해 직접 나섰다. 거대한 촉수를 끌어 잡고 당기기 시작했다.
 “흐라압.”
 과연 괴력의 뮤턴트였다. 두께지름만 1m가 넘어가는 것을 단번에 뽑아서 던져버렸다.
 “조심해.”
 뮤턴트의 동료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음?”
 뮤턴트는 눈 앞에 다가오는 수십개의 촉수를 보고 신음을 흘렸다.
 “이건 사기야.”
 3M급의 거체 뮤턴트는 촉수에 휘감겨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강력했던 B급 능력자가 당해버리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비명소리는 금세 멎어들었다. 뮤턴트를 감싸고 있던 촉수는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뮤턴트는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 촉수에게 당하는 순간, 그 누구도 그의 생존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장? 괜찮아?”
 동료가 가까이 다가왔다. 급박한 와중에도 그는 동료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어어…….”
 거체 뮤턴트의 머리 한편에는 불길한 꽃이 피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아군이었던 뮤턴트는 이제 아말테이아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기생체에 감염된 능력자는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저항이 불가능하다. 이미 모든 이지를 상실하고 아말테이아가 시키는 일만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퍼벅!
 
 그는 뮤턴트의 발에 채여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리고 방금과 같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은 지옥이야.”
 수백 명의 능력자가 무력하게 전멸 당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감염체가 되어 동료들을 공격했다. 쉘터의 능력자들은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완전히 당하고 말았군.”
 김성식 지부장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망연자실 했다. 아말테이아는 공격대가 깊숙이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미끼삼아 혜성 공격대를 유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만작전에 지나지 않았다.
 아말테이아가 노리고 있었던 것은 대부분 C급으로 이루어진 능력자였던 것이다. 아말테이아는 지하철 통로로 이동해서 마음을 놓고 있던 능력자들을 습격했다. 동시에 능력자들을 감염시켜 강력한 감염체로 탈바꿈 시켰다. 이제 남은 공격대는 늘어난 능력자 감염체까지 감당해야 했다.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김성식 지부장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쉘터는 이제 그녀(아말테이아)의 것입니다. 남은 방법이 없군요.”
 옆에서 보좌하던 김혜진은 김성식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그건 안 됩니다. 지부장님. 너무 위험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죠.”
 김성식 지부장은 남은 LOC요원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를 지킬 생각이었다. 최대한 많은 능력자를 살려보내야 시민들을 다른 쉘터까지 대피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고요. 이곳에 뼈를 묻을 작정이십니까?”
 김혜진은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키우고 말았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임에도 김성식 지부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각자 사람마다 책임을 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 공격대의 책임자로서 마지막을 지켜야 해요.”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곳에서 변하지 않는 결심을 엿볼 수 있었다. 김혜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할 수 없죠. 대신 저도 남겠습니다. 저는 지부장님의 보좌관이니깐요.”
 “그건 안 돼요. 누군가는 LOC요원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명령입니다. 이들을 이끌고 시민을 대피시키세요.”
 매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부하들을 다독이는 김성식 지부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명령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명령 불복종으로 요원직을 상실하고 싶은 것입니까?”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김혜진은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김혜진 요원. 당신을 믿겠습니다.”
 수많은 의미가 담긴 한마디였다.
 
 ***
 
 “다…….당신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가디언즈 백경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김동현에게 물었다.
 ‘용사라고 대답하면 화내겠지?’
 
 동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반면에 대답 없이 웃고 있는 동현을 보며 가디언즈 4명은 식은땀을 흘렀다.
 ‘왜 웃는 거지?’
 ‘처음부터 정상은 아니었던 같은데?’
 위기상황에 뿅하고 나타나 구해준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은 그들로 하여금 위화감을 조성시켰다. 그래서 4명의 가디언즈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김동현은 새로 깨어난 기분이었다. 마음을 갉아먹던 트라우마가 해소된 탓이다.
 ‘과거를 잊지는 않겠다. 하지만 더 이상 무책임하게 살 수는 없어. 타쓰, 디아나, 소피아 그리고 세드릭이 걸어왔던 길을 나도 같이 걷겠어.’
 일단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가디언즈들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동현은 최대한 친근한 태도로 말했다.
 “제 이름은 김동현입니다. 민서 선배랑 고등학교 같은 동아리였고요. 흐음……. 일단 능력자라고 해두죠.”
 동현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하지만 경태를 비롯한 4명의 남녀는 어이가 가출한 기분을 느꼈다.
 ‘일단 능력자라고? 겨우 그딴 말 한마디로 퉁 치려고? 누가 봐도 억지잖아.’
 정아는 입에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에 비해 민규는 방금 있었던 전투를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일단 신체적 스펙은 뮤턴트를 뛰어넘는다. 하지만 변이를 하지도 않았어. 그렇다면 디사이플로 자신의 몸을 강화한 것인가? 그보다 어떻게 감염체에게 공포심을 심어줄 수 있는 거지? 그의 자아는 이미 기생체에게 완벽히 조종당하고 있을 텐데. 마지막으로 황금색 사슬은 뭐야? 살면서 그런 능력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구.’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는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민서의 통신에 의해 방해받았다.
 -병신들아. 죽고 싶어 환장했냐? 니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니들 머리통 다 부숴버릴 거야.
 “헉. 경위님 머리끝까지 열 받으셨다.
 민규는 곧 다가올 일 때문에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3명의 동료들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차라리 지금 도망 가버릴까?’
 ‘오 주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부와아아앙…….
 
 멀지 않은 곳에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한 대의 오토바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동현은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민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끼이익…….
 
 엄청난 속도의 오토바이는 정확히 앞에 섰다. 깔끔한 주행실력이었다.
 “너희들…….”
 이민서 경위는 4명의 가디언즈 대원들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 모습이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았다.
 “할 말 있는 사람 지금 해라.”
 사람이 극도로 열 받으면 오히려 차분해진다고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저차 없이 평온하기까지 했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상관의 명령을 불복종 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만약에 김동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4명의 가디언즈들은 모두 죽거나 감염체가 되었을 것이다.
 “좋아. 변론의 시간은 끝났군. 너무 걱정은 하지마라. 너희 기일마다 내가 꼭 제사상은 차려줄 테니까.”
 민서는 주먹을 불끈 쥐자 우두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은 4명의 가디언즈 대원들의 안색은 실시간으로 창백해졌다.
 “선배.”
 행동을 나서려는 민서의 어깨를 동현이 잡았다. 뒤돌아보는 민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동현의 눈빛을 의식해서였을까? 민서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알았어."
 마지못해 민서는 화를 누그러트렸다.
 “너희들 운 좋은 줄 알아라. 지금 당장 방공호로 복귀한다. 실시!”
 “실시!”
 4명의 가디언즈는 복창을 하고 허둥지둥 방공호로 향했다. 분이 덜 풀린 민서가 경태의 엉덩이에다가 발자국을 남겨주었다.
 “발이 보인다. 더 빨리 못 뛰어?”
 발에 불이라도 난 듯 그들은 최선을 다해 방공호로 돌아갔다.
 그들이 방공호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민서와 동현만 남게 되었다.
 “동현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민서였다.
 “네. 선배.”
 “고맙다.”
 그녀의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동현은 미소를 지었다.
 “김동현, 제법 괜찮은 표정을 할 줄 알잖아?”
 “선배야말로 성질이나 좀 죽여요. 학생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어요.”
 대원들을 쥐 잡듯이 혼내는 민서를 나무란 것이다.
 “많이 컸다? 고딩 때에는 반항도 못 했으면서.”
 “원래 키는 제가 더 컸습니다만?”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예전의 김동현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원래 유쾌하고 농담도 제법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방공호로 돌아가자.”
 민서는 바이크에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워줄게.”
 “아뇨.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말린다고 하면 들을 거니?”
 민서는 맑은 눈으로 동현을 직시하고 있었다. 동현은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 대신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동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받아.”
 민서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던져주었다.
 “나랑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야. 내가 서포팅해줄테니 영광으로 알라고.”
 민서는 가디언즈 소속이었지만 능력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높은 등급의 대원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내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아군을 서포팅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전술가로서, 상황판단 능력과 멀티태스킹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특유의 카리스마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도 단번에 휘어잡는 모습을 보여줬다.
 “고마워요.”
 동현은 바로 이어폰을 착용했다.
 “나는 일단 방공호로 돌아갈게. 네가 부숴놓은 입구 때문에 얼른 보수 작업을 해야 되거든.”
 방공호의 입구가 날아간 것이 치명적이긴 하다.
 “그거라면 제가 해결하죠.”
 동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공호로 뛰었다.
 “야! 같이 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모습에 민서가 급히 뒤따라갔다.
 
 끼이이익.
 
 “무슨 다리가 그렇게 빨라?”
 민서는 약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디언즈의 제일 등급 높은 뮤턴트보다 훨씬 빨랐다.
 “글쎄요. 제가 예전부터 달리기는 빨랐잖아요. 그 때보다 더 빨라진 것 같아요.”
 체육대회 때마다 동현은 반대표로 달리기를 했었다. 육상선수 급은 아니었지만 늘 1등을 도맡아 하곤 했다.
 “글쎄……. 보통은 한계라는 것에 부딪힌다고.”
 민서의 말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하지만 김동현의 체질은 달랐다. 마치 레벨 제한이 없는 게임 캐릭터처럼 끝없이 성장했다.
 “그나저나 이거 심한데요?”
 동현은 심하게 우그러진 문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봐도 이걸 다시 재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동현아……. 누가 들으면 다른 사람이 한 짓인 줄 알겠네. 범인은 너라고.”
 동현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대신 그보다 더 멋진 것을 보여드리죠.”
 동현은 정신을 집중했다. 방공호의 사람들이 안전하도록 결계를 칠 생각이었다.
 "바라테, 아둠 크라샤티 베스타."
 푸른색의 결계가 방공호의 입구를 막아버렸다. 동현의 주먹에 박살나버린 철문보다 수배는 튼튼한 방어막이었다.
 “이걸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민서는 난생 처음 보는 방어막을 보고 놀라워했다.
 “대체 어떤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거야?”
 “글쎄요. 설명하면 긴데…….”
 곤란해 하는 동현을 보며 민서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말해줄 거지?”
 “네.”
 “그럼 기다릴게.”
 민서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다녀 와.”
 마치 마트에 심부름 보내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부담 없는 태도가 동현은 좋았다.
 “네. 금방 올게요.”
 
 ***
 
 방공호의 안전은 해결되었다. 이제 쉘터를 위험하게 만든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동현아 들리니?
 “네. 잘 들려요.”
 블루투스 이어폰은 잘 작동했다.
 -좋아. 나는 방공호에서 최대한 어드바이스를 해줄게. 오른쪽 상단을 봐.
 방범용 CCTV 카메라가 동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쉘터 안에는 수많은 CCTV가 준비되어 있어. 이걸로 너의 눈이 되어줄게.
 “이거 불법 아닙니까? 사생활 침해로 봐도 되는 거죠?”
 -누굴 빅브라더(정보 독점을 통해 권력자들이 행하는 사회 통제수단)로 아니? 훈남들 샤워 하는 거 훔쳐볼 때만 쓰고 있다고.
 “그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선배.”
 이어폰 너머로 민서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희망
 
 -좋아, 농담은 이정도로 하자.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않거든. 아까 시민들 공격하던 능력자 감염체 봤지?
 방금 제압한 늑대형 뮤턴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네.”
 -분석해보니 아말테이아를 잡으러간 공격대 소속이었어. 그 외에 여러 곳에서 능력자 감염체가 발견되고 있거든.
 “그렇다면 그들이 실패했다는 것입니까?”
 -그런 거 같아.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공격대의 능력자들 대다수가 감염체가 되어버렸어. 혹 떼려다가 혹 붙은 격이 된 거지.
 민서는 쉘터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알려주었다.
 “일이 생각보다 어렵겠군요. 선배, 그 아말테이아에 대해서 좀 디테일하게 설명 부탁해요.”
 -알았어. 아말테이아는 둠스데이 때, 처음 나타났지. 처음에는 크기가 1미터도 되지 않지만 성장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자란다고 해. 관측된 것 중 제일 큰 것은 길이만 40m가 되었다고 하지.
 “무슨 우주괴수입니까?”
 40M라면 거의 15층 아파트 크기라고 보면 되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 영화에나 등장할 스케일이다.
 -그렇게 커버리면 사실 답이 없거든. 그래서 공격대들이 시간에 쫓겨서 싸우러 간 거야.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볼 때 공격대는 실패했고 더 이상 기대할 만한 카드가 남아있지 않아.
 “암담하군요.”
 -추가 설명을 하자면 아말테이아는 씨를 뿌려서 감염체를 생산해 내고 있어. 감염체 머리에 예쁜 꽃들 봤지? 그게 바로 기생체야. 단순히 미쳐서 머리에 꽃 단 것이 아니란 말이지.
 “네. 감염체에 대해서라면 여러 번 조우했어요. 어려운 상대는 아니지만 숫자가 많아서 번거롭더군요.”
 -하지만 이제 더 힘들어질 거야. 능력자들 역시 감염체가 될 수 있거든. 아까도 만나봐서 알겠지만 능력자는 감염체가 되어도 그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어. 게다가 감염체들 특징이 고통을 겁내지 않거든. 물불 안 가리고 덤벼 들 테니 일반 능력자들보다 더 까다롭다 고 생각해야 돼.
 “알겠습니다. 선배, 그런데 아말테이아가 어디 있는지는 확인되었습니까?”
 -섹터 32지역에 잠깐 나타난 것 같아. 하지만 다시 모습을 감추었어. 그 커다란 몸을 숨기려면 쉽지 않을 텐데. 아마 녀석은 쉘터의 감시체제에 대해서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은 것 같아.
 “그 말인즉 머리를 쓸 줄 아는 괴물이란 뜻이군요.”
 -그래. 꽤 교활한 녀석이야.
 “그럼 섹터 32지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동현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움직였다. 아말테이아와 맞서기 전에 챙겨야 할 물건이 있었다. 그것을 다시 꺼낼 날이 올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사람이 걷는 도로로 움직이면 방해물이 너무 많다. 최단거리로 목적지에 주파하려면 건물 위로 이동하는 것이 유리했다.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동현은 짧게 스트레칭하고 중얼거렸다.
 “간만에 달려볼까?”
 그는 신발 끈을 세게 동여매고 앞으로 뛰어갔다. 이미 인간의 한계는 바닥에 던져버린 지 오래다. 쏜살같이 달리는 동현 탓에 근처 쓰레기통이 풍압으로 인해 넘어져버렸다.
 이윽고 높이 15m가 넘는 건물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 차가 동현과 같은 속도로 와서 박아버리면 순식간에 폐차가 되어버릴 정도다.
 
 탁!
 
 동현은 가볍게 점프했다. 단번에 5M 높이까지 뛰어오른다. 이미 점프하기 전에 속도를 한번 줄여서 벽이 부서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현은 직각으로 된 벽에 매달렸다. 그가 벽에 달라붙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은 1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흠이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몸무게 전체를 감당해냈다.
 “흡.”
 동현은 짧은 호흡과 함께 발에 힘을 주었다. 벽을 발로 차서 그 반동으로 점프를 한 것이다.
 두 번의 도움닫기로 건물 옥상까지 단번에 올라갔다.
 “휴…….”
 동현은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붉은 석양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위이이잉…….
 때 늦은 균열 경보가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시끄럽기만 할뿐 쓸모없는 기계였다.
 거리는 쥐 죽은 듯 한산했다. 감염체가 희생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이지만, 살아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러지 못한 자들은 은신처에 숨어서 구조대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릴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머리를 쳐야 해.’
 도시에 흩어진 감염체 하나하나 처리해서는 답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아말테이아를 빠른 시간 안에 섬멸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피해로 쉘터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동현은 주저하지 않고 건물 사이를 뛰어다녔다. 높이만 해도 15m가 넘는다. 자살하고 싶다면 그냥 뛰어내리면 되는 높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마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과 같았다.
 이윽고 동현은 자신의 거주지에 도착했다. 감염체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는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보일러실로 들어간 그는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티케. 바르오. 프레시드.”
 캐스팅이 마치자 숨겨져 있었던 상자가 드러났다. 일종의 은폐마법으로 물건을 숨길 때 유용하게 쓰였다. 방금 동현이 외운 마법은 은폐를 풀 때 사용하는 역주문이었다.
 
 달칵.
 
 상자가 열리자 그곳에는 한 가지 물품이 들어가 있었다.
 크기는 엄지 손가락만한 작은 큐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의 숨겨진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바로 전설의 아티팩트 중 하나인 홀란드 큐브였다.
 홀란드 큐브가 가진 능력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루에 한번만 사용 가능한 신성 보호막이 그 첫 번째이다. 착용자가 위험에 처할 때, 큐브는 자동으로 보호막을 생성한다. 꽤나 유용해서 용사 시절 여러 번 도움을 받곤 했다.
 두 번째 기능은 바로 편리한 수납기능이었다. 홀란드 큐브만 있다면 배낭이 필요가 없었는데 수 백 개가 넘는 아이템들을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김동현이 바쁜 와중에도 집을 들린 이유는 홀란드 큐브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 큐브에 잠들어 있는 단 하나의 아이템이 필요해서였다.
 
 명검 칼라드볼그(Kaladbolg)
 용사를 위해 명장 볼그셰비프가 밤낮을 새워가며 만든 명검 중의 명검이다.
 ‘나는 죽어도 이보다 뛰어난 명검을 만들 자신이 없다.’
 볼그셰비프가 검을 완성하고 남긴 말이었다.
 칼라드볼그는 기본적으로 특수 능력이 전무했다. 하지만 완벽한 벨런스와 뛰어난 절삭력은 최상급 마법 검보다 오히려 더 나은 편이다.
 칼라드볼그는 기본적으로 양날 편수검(한손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파괴력으로 따지면 양손검이 훨씬 강하겠지만, 동현의 전투 스타일은 마법과 검을 동시에 쓰는 마검사 스타일이었다.
 마법을 발현할 손은 비어있어야 했기에 한손으로 휘두르기 편한 크기로 제작된 것이다.
 “오랜만이구나. 칼라드볼그.”
 동현은 감회에 찬 표정을 검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검신이 매끄럽게 뻗어져 있었는데 칼밑에는 그 어떤 보석도 박혀있지 않았다. 용사의 검이라고 하기에는 단순하고 너무 실용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사선을 함께 넘나들었던 애병의 가치를 저울질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그가 이계에서 가져온 아이템은 단검 베리샬, 홀란드 큐브 그리고 명검 칼라드볼그가 전부였다. 수많은 마법 아이템을 이계에 남겨두고 왔지만, 그것이 아깝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진정한 강함은 한낱 무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칼라드볼그는 오랜 시간 쓰지 않았지만 예기는 그대로였다. 동현은 다시 홀란드 큐브에 칼라드볼그를 넣었다. 약한 빛과 함께 검 한 자루가 그대로 큐브로 빨려 들어갔다.
 -동현아, 큰일 났다.
 이어폰으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일단 공식적으로 공격대가 전멸되었다는 것을 알려줄게. LOC요원들에게 연락이 왔거든.
 “예상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서 모든 방공호의 피난민은 쉘터를 버리고 아웃랜드로 대피하라고 하더군.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군요.”
 아말테이아를 피해 쉘터를 떠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은 못 되었다. 자신이 살던 주거지를 버린다는 것은 생활기반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게다가 아웃랜드에는 위험한 몬스터들이 돌아다닌다.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까운 쉘터까지 도망가더라도 피난민으로 받아줄지도 의문이고.
 “일단 LOC요원과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겠군요.”
 -저번에 너와 한번 이야기를 해봤을 거야. 김혜진 요원이라고 알지?
 동현은 아름답고 자신만만하던 여성 한명을 떠올렸다.
 “네. 오늘 한번 만났었죠.”
 -그 여자가 책임자야. 지금은 감염체한테 쫓기는 중이야.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데?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멀지 않아. 11시 방향으로 800M 떨어져 있어
 “오케이.”
 동현은 또 다시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800M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는 빌딩 옥상에서 LOC 요원들을 찾았다.
 “저기 있군.”
 20명 남짓 되는 인원들이 감염체에 쫓기고 있었다. 능력을 발휘해 최대한 감염체를 떨쳐내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 꽁무니에 따라 붙은 능력자 감염체의 숫자는 50명은 넘어 보였다. 확실한 것은 추격하는 자들의 숫자는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선배, 저 들어갑니다.”
 -화이팅.
 동현은 메뚜기처럼 건물 위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타핫.”
 건물 위에서 도움닫기로 하늘 높이 솟구쳤다.
 
 솨아아…….
 
 기분 좋은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질이는 듯하다. 하지만 이제 추락할 때다. 동현은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었다.
 “자락. 아툼. 아나토스.”
 동현은 하늘을 향해 마법을 외웠다. 그가 발현한 마법은 에어 봄이다. 원래의 용도는 강한 압력으로 공기를 압축하다가 터뜨리는 술법인데 주로 위험한 화염이나 유독 기체를 밀어낼 때 사용한다.
 에어 봄 주문의 특징은 주문 술식의 일부가 시전자를 보호하는 실드 주문이다. 작용 반작용의 물리법칙에 따라 압축된 공기가 터질 때, 충격파가 시전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사 김동현은 에어봄 마법에 있는 실드 주문을 과감히 생략했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그렇게 했다면 대번에 뼈 한두 개쯤은 순식간에 부러질 것이다. 잘못하면 갈비뼈 전체가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김동현은 바바리안에게 배운 훈련법으로 인해 인간 같지 않은 내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정도 충격파는 간지럽지도 않은 것이다.
 
 슝…….
 
 동현은 수십 미터 위에서 지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해 갔다. 에어봄에 의해 엄청난 가속도까지 얻은 상태였다.
 그는 인간탄환이 되어 지상에 떨어졌다. LOC요원과 감염체 사이로 직격한 것이다.
 
 푸확!
 
 커다란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그와 가까이 있던 감염체 몇몇이 볼품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요란한 등장 탓일까?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뭐야?”
 “젠장, 적인가?”
 먼지가 자욱해서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중 한 명은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바로 김혜진이었다.
 “모두 정신 차려. 아군이 도와준 것이 분명하다. 후퇴를 계속한다.”
 김성식 지부장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감염체는 금세 LOC요원들을 따라잡았다. 이대로라면 전멸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던 중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설사 그것이 새로운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기력을 다해 도망쳐서 얼마 남지 않은 능력자들을 보존해야 했다.
 
 휘이이이…….
 
 바로 그 때, 한줄기의 바람이 먼지를 확 날려버렸다. 커다란 크리에이터* 사이로 20대의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저 사람은?”
 김혜진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김동현이라는 것을 알았다. 능력을 숨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곳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위험해요.”
 그녀의 입에서 그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 십 명의 감염체가 일제히 동현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김동현이 바라던 상황이었다. 그가 요란하게 등장한 이유는 감염체들의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였다.
 “크와악.”
 거대한 두꺼비 형태의 뮤턴트가 거대한 혀를 이용해서 내려쳤다. 하지만 김동현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한가했다. 허나 일반인이 뮤턴트의 공격에 것을 맞게 된다면 머리가 터져나갈 것이 분명하다.
 
 퍼억.
 
 거대한 혀는 어이없게도 애꿎은 바닥만 내려쳤다.
 “헛?”
 가까이 있던 LOC 능력자는 헛바람을 삼켰다. 그의 눈에는 분명 공격에 명중한 것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김동현은 순간이동 한 것처럼 옆으로 비껴서 있었다. 다크엘프의 전사들은 신체를 마나로 자극시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이곤 했다. 다만 육체에 엄청난 무리를 주기 때문에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은 절대 자제해야 한다.
 “으랴랴랴…….”
 두꺼비 뮤턴트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동현이 그의 혀를 발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은 없어요.”
 동현은 그렇게 말하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죽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상대는 변이를 마친 뮤턴트이다. 어느 정도 힘을 주지 않으면 쓰러뜨리지 못한다.
 
 뻐어억!
 
 주먹질 한 방에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
 “꾸엑.”
 뮤턴트의 거대한 동체가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그의 몸무게가 200kg이 넘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동현이 내지른 주먹의 위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두꺼비 뮤턴트는 혀를 길게 주욱 내밀고 뻗어버렸다.
 그럼에도 이성이 마비된 감염체들은 불빛에 이끌린 나방처럼 끊임없이 동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살펴보기 어려웠다.
 ‘옛날 느낌이 나는데?’
 이계의 용사시절에도 그는 늘 압도적인 병력차로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마왕의 군대인 마물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에서 마지막에 서 있었던 자는 바로 김동현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여유가 넘치다 못해 하품이 나올 정도다.
 문제가 있다면 이들을 죽이지 않고 딱 기절할 만큼 때려눕히는 것이다.
 
 ***
 
 1:50의 전투는 점점 치열해져갔다.
 
 쉬이익…….
 
 채널러의 소환수인 비쉬크가 사각에서 덤벼들었다. 3개의 머리를 가진 몬스터로서 각기 다른 독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그 독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이루어내기 때문에 특히 위험하다.
 덩치가 작고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등급 높은 능력자들도 방심하다가 물려서 죽는 경우가 많다. 3중첩의 독 한 방울은 건강한 소 1000마리를 죽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동현은 몬스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기감으로 그는 비쉬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쿵푸 기술 중에 호미각이라고 있다. 마치 황소가 뒷발로 걷어차는 모습과 닮았는데, 동현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비쉬크를 발꿈치로 까버렸다.
 “끼익.”
 비쉬크는 공중에서 두 조각이 나버렸다. 단순한 발차기라고 믿기 어려운 위력이다. 동시에 동현을 향해 지쳐 날아드는 화살을 주먹으로 쳐낸다.
 몽크의 비기인 화살 쳐내기이다. 채널러가 쏘아올린 화살을 교묘하게 빗겨 쳐서 각도만 바꾼다.
 
 칵!
 
 쳐낸 화살은 디사이플 감염체의 손에 박혀들었다. 뮤턴트 감염체를 치료하던 그의 손이 바닥에 박혀들고 만 것이다.
 “아으…….”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지만 능력을 발휘해 기절한 뮤턴트를 치료하지는 못할 것이다.
 위기감을 느껴서일까?
 근접한 뮤턴트들이 동시에 달려든다. 무려 세 방향에서 공격한 것이다. 시간차가 거의 나지 않아서 몸을 빼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화르륵…….
 
 동시에 검붉은 화염 덩어리가 이곳을 향해 날아온다. 동현이 몸을 빼내더라도 근접한 뮤턴트는 화염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이지가 상실된 에스퍼들에게 프렌들리 파이어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앞을 가로막는 적을 죽이거나 감염시키는 것만 목표로 삼을 뿐이다.
 “이에드. 아싼. 어스케이드.”
 동현은 맨바닥을 향해 마력을 주입했다. 마법사로서 새로운 주문이 또 한 번 발현되었다. 그가 발현한 마법은 스톤 엣지라고 하는 전투 마법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돌기둥으로 적에게 공격하기도 하지만 방금처럼 마법을 막아주는 장애물이 되어주기도 한다. 사용자의 센스에 따라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한 셈이다.
 
 콰드득…….
 
 수 미터나 되는 돌기둥이 뛰쳐나온다. 동서남북으로 솟구친 돌기둥 때문에 동현과 뮤턴트는 완벽히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돌로 지어진 감옥이 탄생한 셈이다.
 
 퍼버벅.
 
 화염 덩어리와 돌기둥이 부딪혔다.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 중 파괴당한 것은 없었다.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하지만 막강한 공격력과 범위공격이 가능한 에스퍼는 까다로운 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아군 사격에 ·대해 아무런 자각이 없다. 대형 사고가 터지기 전에 에스퍼부터 잠재울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동현은 감염체 에스퍼를 처리하기 위해 은신 마법을 사용했다. 어쌔신의 투명화 마법은 움직일 때마다 일렁거리는 증상이 보인다. 그래서 급하게 움직이면 금세 정체가 탄로난다. 하지만 동현은 그것을 대비해서 스톤 엣지를 쓰는 것과 동시에 듀얼 캐스팅으로 투명화에 성공했다. 수준 높은 마법사도 하기 어려운 듀얼 캐스팅을 동현은 밥 먹듯이 해낸 것이다.
 원래라면 뮤턴트와 채널러의 방해를 받아야 할 터였지만 스톤엣지로 적의 시야를 한 곳에 쏠리게 만든 탓에 여유 있게 적의 후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멀뚱히 앞을 보고 있는 에스퍼를 잠재우기 위해 어쌔신의 비기인 그림자 숨기가 발동되었다. 제일 후방에 서 있는 감염체의 목을 두꺼운 팔로 압박했다.
 “…….”
 공격과 동시에 투명화는 풀려서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감염체는 그 누구도 동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 숨기로 인해 존재감이 옅어졌기 때문이다.
 
 털썩!
 
 산소가 공급되지 못한 감염체는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특히 육체적으로 일반인과 비슷한 에스퍼이기에 더욱 쉽게 당한 측면도 있었다.
 
 털썩!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동현은 5명 넘는 적들을 기절시켰다. 하지만 감염체들은 아말테이아의 지시를 받는다.
 감염체들 중 일부가 느닷없이 소식이 끈기자 의아하게 여긴 아말테이아가 나머지 감염체로 하여금 주변을 살피게 했다.
 “쳇, 너무 쉽게 가려고 했나?”
 동현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만일 동현이 살상을 전제로 암살을 시도했다면 감염체들 반 이상은 차가운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죽이지 않고 상대를 제압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 것이다.
 "속전속결로 갈수 밖에."
 동현은 성전사의 기술인 속박의 사슬을 구체화 시켰다.
 
 촤르르르르…….
 
 열개 남짓의 황금색 사슬이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모두 에스퍼를 노리는 것이었다.
 "으어?"
 "으으……."
 에스퍼들은 모두 동현에게 묶이고 말았다. 각자 속성 능력을 끌어서 사슬을 해체하려고 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다.
 “베이드. 카살. 이아테스.”
 스파크보다는 더 높은 단계의 전격마법이 실현되었다. 그렇지만 그만큼 마력의 세기를 제어하기 어렵다. 그래서 간만에 머리가 아프도록 마력제어에 힘을 썼다. 새하얀 전류가 사슬을 타고 감염체를 감전시켰다.
 “으으아아…….”
 “크라랍.”
 10명의 에스퍼들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세심한 마력제어 탓에 아무도 사망에 이른 자들은 없었다.
 “윽……. 코피가 나네.”
 동현은 코를 훔치며 말했다. 약간 현기증이 나는 편이지만 이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다. 대신 5년 만에 자신의 피를 본 탓일까?
 ‘현역에서 너무 오랫동안 물러나있었나? 전성기 때 비하면 진짜 약해졌네.’
 멀리서 동현의 활약을 지켜보는 LOC요원이 들었다면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요원님, 저 이방인 덕택에 부상자까지 수습했습니다. 이대로 후퇴합니까?”
 압도적인 동현의 활약 때문에 LOC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김혜진은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기술로 동현이 감염체를 상대로 압도하고 있는 점은 좋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쫓아오는 감염체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이대로 김동현을 두고 LOC요원들끼리 도망간다면 생존 확률은 분명 높아질 것이다.
 ‘김동현이라고 했던가? 우리끼리 빠져버리면 저 사람이 위험에 처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감염체에 의해 모두가 위험해진다.’
 사람 된 도리로서 도와주러온 김동현을 버리고 가는건 무척이나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에는 수많은 시민의 목숨이 달려있다. 대의를 생각한다면 동현을 버리고 시민들을 규합한 뒤 아웃랜드로 떠나야 한다.
 위험한 여정을 대비해 최대한 많은 능력자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만일 지금 동현을 돕기 위해 전투에 참여하면, 계속 몰려드는 감염체에 의해 능력자 전원이 전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모두 몬스터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어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갈팡질팡 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결국 마음을 정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 어그로 : aggravation(도발), aggression(타인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하거나 시도하는 것), aggressive(공격적인 또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공격적인), aggro(폭력 또는 분쟁) 등 넓은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는 ‘주의’나 ‘관심’정도의 의미로 쓰였다.
 
 * 크리에이터 : 운석 충돌로 생긴 움푹 파인 자국을 말한다.
 
 그녀는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LOC요원들은 방공호의 시민들을 대피시키세요.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네? 하지만 그건 너무 무모한…….”
 “여기서는 제가 최고 책임자입니다. 당장 지시에 따르세요.”
 나머지 LOC요원들은 모두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오직 플레임 위치, 그녀만 이곳에 남은 마지막 능력자였다.
 ‘지부장님, 죄송합니다.’
 마지막까지 명령을 못 지킨 점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퇴로를 열어준 김동현을 버리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남기로 했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막아 보겠어. 내 목숨이 다하더라도.’
 그녀는 손에 강력한 화염이 일렁거렸다.
 
 화르르…….
 
 그녀는 무늬만 B등급의 능력자일뿐, 곧 A급으로 승급할 예정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음먹고 능력을 발휘하자 엄청난 크기의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그녀는 후미에 감염체가 여럿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지름 1M가 넘는 화염구가 그곳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김동현은 고온의 화염구가 날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이건 뭐야?”
 동현은 기가 막혔다. 최대한 힘 빼서 기절만 시키는데, LOC 능력자중 하나가 화염구를 날린 것이다. 나름 도와준다고 한 행동이 오히려 동현의 발목을 잡았다.
 ‘할 수 없지. 그렇다고 줄초상을 치르게 할 수는 없으니.’
 동현은 상대하고 있던 뮤턴트의 팔을 꺾어 버렸다.
 그리고는 공깃돌 던지듯이 바닥에 내팽개치고 화염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앗! 지금 무슨 짓을?”
 날아가는 화염구에 몸을 던지는 동현을 보며 김헤진은 비명을 질렀다. 최선을 다해서 쏘아올린 능력이다. 그것을 맨몸으로 맞선다는 것은 미친 짓과 다름없다.
 
 쾅!
 
 화염구와 동현은 곧 부딪혔다. 소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사방을 에워쌌다.
 “이럴 수가.”
 그녀는 기가 막혀서 말을 잊지 못했다. 자신의 손으로 도와준 은인을 장사지낸 것이다.
 
 타닥.
 
 절망한 그녀 앞에 도움닫기한 자가 있었다.
 “으응?”
 그녀의 눈은 토끼눈처럼 동그랗게 되었다. 연기를 헤치고 온 동현은 어떤 상해도 입지 않았다.
 “이봐요.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겨우 막아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저 사람들 다칠 뻔 했잖아요.”
 동현은 성난 얼굴로 다그쳤다. 늦지 않게 발견해서 화염구를 막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일이 너무 놀라워서 그냥 되묻고 말았다.
 “화염구를 맨 몸으로 막았다고요?”
 사실 맨 몸으로 막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라도 그런 화염구를 정통으로 맞으면 다치지 않을 리가 없다. 죽지는 않겠지만, 팔 다리 하나쯤은 충분히 날아갈 만한 파괴력이었다.
 그는 부딪히기 직전 성전사의 기술인 뇌호의 방패를 펼친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이 깊을수록 단단한 장막이 형성되어 시전자를 보호한다. 다만 유지력이 짧은 것이 흠이었다.
 하지만 동현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기……. 김요원님이라고 했던 가요? 방해가 되니까 저리가 있어요. 알았죠?”
 평생 살면서 그녀가 처음 듣는 단어다. 거의 A급에 도달한 그녀에게 누가 방해가 된다고 할까? 그녀는 화가 나서 외쳤다.
 “죽을 각오로 도와주려고 했는데, 방해가 된다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만 그녀는 말을 모두 잊지 못했다. 감염체들 중 채널러들이 원거리 공격을 한 것이다. 균열에너지가 담긴 볼트와 화살이 그들을 노렸다.
 “윽.”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화살이다. 아무리 평소에 몸을 단련했다고 하더라도 신체 스펙은 일반인과 차이가 없는 에스퍼다. 그녀는 마지막을 예상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아픔도 없었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남자의 넓은 등이었다.
 “혹시 당신이 맨손으로 잡은 거예요?”
 김혜진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멀리서 동현이 활약했을 때에는 그의 무력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부상자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말고 또 누구 있습니까?”
 동현은 퉁명스런 음성으로 답했다. 그러면서 손 안에 가득한 화살을 쓰레기 버리듯이 던져버렸다.
 “위험하니까 여기서 나오지 마세요. 아까처럼 쓸데없는 짓 하면 버리고 갈 겁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동현은 결계를 펼쳤다. 푸른색의 막이 그녀를 가둬버렸다.
 
 탕탕!
 
 그녀는 갑자기 생긴 결계에 놀라서 마구 두드렸다. 하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결계가 사라질 리가 없다.
 “그럼 마무리 지어볼까?”
 동현은 뒤돌아서서 말했다. 아직 수십의 감염체들이 있다.
 
 뚜두둑 뚜둑
 
 동현은 가볍게 손을 풀어주었다. 일단 이들을 모조리 처리해야 도망간 LOC 요원들이 안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오던 감염체들이 슬금슬금 물러난다.
 “응?”
 그러다니 동현과 반대 방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어라, 도망가네.”
 허탈한 표정으로 동현이 말했다. 김혜진이 설명해주었다.
 “저들은 아말테이아의 지시를 받고 있어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겠죠.”
 그러고보니 전에도 동현을 이기지 못하자 도망쳤던 감염체가 있었다.
 “음, 근성이 부족한 녀석들이군.”
 동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왕의 부하들은 저돌적인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전 병력을 꼴아박더라도 용사에게 생채기만 줄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았다.
 “이봐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이거나 풀어줘요.”
 동현이 마력을 거두자 결계는 사라졌다.
 “대체 당신 정체가 뭐예요?”
 김혜진은 팔짱을 끼고 물어보았다. 그 덕분에 전멸을 피할 수 있었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은 산더미였다.
 “글쎄요. 설명한다고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그걸 일일이 이야기할 시간도 없는데.”
 “그럼 짧게 이야기해요. 믿어 줄테니까.”
 “외계인한테 납치당했어요. 그들이 풀어줄 때, 초능력을 주더라고요. 초능력을 쓸 때마다 ‘호잇’ 하고 생각하면 이루어지죠.”
 김혜진은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말았다.
 “뭐라구요? 지금 장난쳐요?”
 이계에서 온 용사나 외계인에 납치되어 초능력을 쓰는 것이나 말도 안 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지금 당신이랑 말싸움할 시간 없습니다. 어서 아말테이아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인지 말해줘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요?”
 “당연히 잡으러 가야죠.”
 마치 낚시라도 가는 것처럼 말한다. 그 모습에 기가 막힌 그녀가 말했다.
 “아말테이아를 잡기 위해 400명의 능력자가 동원되었어요. 하지만 실패했단 말입니다. 그런 적을 당신 혼자서 처리하겠다는 건가요?”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방금 제가 하던 것 못 봤나요?”
 동현은 뒤에 널브러진 감염체들을 가리켰다.
 “일부러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저들을 모두 원래대로 되돌릴 자신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말테이아를 찾아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말테이아에 의해 감염체가 된 인원은 수만 명이 된다. 그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협력이라도 해야 했다.
 “어차피 실패해도 달라질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의심하지 말고 믿어 봐요.”
 아말테이아가 재림한 후, 그녀는 실패만을 맛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차분한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믿고 싶어졌다. 무거운 짐을 버리고 한 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아말테이아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 두었어요. 이게 있으면 추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조그마한 단말기를 꺼내어 주었다. 그곳에는 아말테이아의 위치가 액정에 출력되고 있었다. 김성식 지부장이 직접 박아 넣은 위치추적 장치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겨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그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로 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그녀는 두 손을 쥐고 물어보았다.
 “…….”
 동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와 함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 마디 말보다 더욱 믿음을 주었다.
 
 휘이이잉…….
 해가 저물고 있었다. 동시에 차가운 바람이 그들 곁을 스쳤다. 혜진은 추운 듯 몸을 웅크렸다.
 “날씨도 추운데 옷을 그렇게 헤프게 입고 다닙니까?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네요.”
 동현이 점잖은 말투로 그녀를 나무랐다. 왜 그런 옷을 입는지 알 리 없는 동현이 보기에 혜진의 복장은 지나치게 야했던 것이다.
 “뭐라구요?”
 그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려는데, 갑자기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다.
 “이거라도 걸쳐요.”
 동현은 자신이 입고 있던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안 돌려줘도 되요. 괴물 물리치고 올 테니까 조심해요.”
 “아…….”
 그의 발달된 상체가 두 눈에 확 들어온다. 그녀는 최대한 두 눈을 돌리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
 
 위치 추적기는 간편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김동현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아말테이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이크를 통해 이민서에게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곳이라면 신형 빌딩을 짓기 위해 공사 중이었을 거야. 지하에는 쇼핑몰을 지으려고 공간을 만들었다고 해. 아마 그곳에 아말테이아가 있을 거야.
 아말테이아는 영양분만 충분하면 끝없이 성장하는 타입이다. 이번에는 여러 명의 능력자를 감염시켰다. 일반인보다 훨씬 양질의 식사가 마련된 셈이다.
 “그럼 볼 것도 없군요. 다녀오겠습니다.”
 -김동현.
 “네?”
 -살아서 돌아오기다. 만약에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털끝하나 안 다치고 오겠습니다.”
 민서의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통신을 마치고 동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위치 추적기에 표시된 곳에 도착했다. 차단막으로 쳐진 공사 현장은 조용했다.
 “비스크. 아단. 스칸다비젼.”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게다가 그가 싸워야 할 곳은 빛이 통하지 않는 지하였다. 그가 쓴 마법은 시전자의 시야를 적외선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덕분에 그는 공사 현장 구석구석을 모두 살필 수 있었다.
 ‘흠……. 능력자 감염체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괜히 저들을 건드렸다가는 진입하는데 어렵겠어.’
 비록 동현이 가진 무력이 강력하다고 하나, 수백명의 능력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매우 까다롭다. 살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러면 원래 목적과 상충된다.
 ‘최대한 들키지 않고 움직인다. 아말테이아만 먼저 상대해야 돼.’
 장기든 체스든 왕만 잡으면 된다. 그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
 그는 은신마법과 그림자 숨기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드문드문 감염체가 있었지만 누구도 동현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는 거대한 던젼과 같았다. 소싯적에 동현은 강해지기 위해서 마물의 소굴인 던젼을 제 집처럼 들락거렸다. 나올 때마다 적과 본인의 핏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곤 했는데, 그 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대체 그 때는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거냐?’
 동현은 힘들었던 과거는 잊고 지금 당면한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10분쯤 주위를 살피며 걸었을 때였다.
 
 그르르르…….
 심상치 않는 소음이 감지되었다.
 
 # 결착
 
 ‘아말테이아로군.’
 
 이곳에서 지하가 울릴 정도로 소음을 낼 녀석은 그 놈뿐이다.
 ‘처음 시작이 중요하다.’
 적이 눈치 채지 못할 때, 가하는 암습은 그러지 못할 때보다 훨씬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아말테이아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주름진 껍질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점액이 주르륵 흐른다. 타원형의 거대한 몸통으로만 이루어진 아말테이아는 마치 숨을 쉬듯 주변을 향해 뿌연 기체를 내뿜기도 했다.
 ‘성장 중인가? 어쩌면 좋은 타이밍에 온 것일지도.’
 아말테이아는 공격대와 싸우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래서 그녀는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흡수한 영양분으로 몸집을 불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군.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큰 걸로 가자.’
 그가 알고 있는 마법 주문 중 제일 파괴력이 강한 것은 플라즈마 버스터이다.
 일반적으로 물질은 고체, 액체, 기체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기체의 상태에서 더 높은 에너지가 가해지면 전자와 원자핵이 분리되어 플라즈마 상태가 된다. 쉽게 말해 플라즈마란 엄청나게 뜨거운 물질이라고 볼 수 있다.
 “마샨. 디아큰. 베이드. 론디아드. 바라테. 가이오.”
 위력이 강한만큼 엄청난 마력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충전 시간도 긴 편이라 마구잡이로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아말테이아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기에 가능한 주문이었다.
 “플라즈마 버스터!”
 그의 손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몰려들었다. 아무 곳이나 튕겨나갈 것 같은 플라즈마를 이를 악물고 제어해 냈다.
 
 드르르르…….
 
 아말테이아가 이상을 감지하고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주문은 완성되었다.
 “늦었어.”
 동현은 모았던 에너지를 아말테이아에게 발사했다. 그가 발현한 순백색의 기둥은 일직선으로 아말테이아를 직격했다.
 
 그오오오오오오…….
 
 파괴적인 광선은 단번에 아말테이아의 몸통을 녹여버렸다. 고동색 거체의 한복판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다.
 “헉…… 헉…….”
 플라즈마 버스터는 시전자에게 후유증을 가져다준다.
 
 주르륵…….
 
 “또 코피가 나네.”
 동현은 손등으로 피를 훔치며 말했다. 그런 반면에 아말테이아는 불의의 일격으로 몸의 일부가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리는 타격을 받았다. 구멍이 난 부분은 마치 수도꼭지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진액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 번 더 쏘고 싶지만, 그럴 여력은 안 되겠군.’
 위력이 큰 만큼 잡아먹는 마력도 엄청나다. 대신 그는 홀란드 큐브에서 하나의 아이템을 끄집어냈다.
 명검 칼라드볼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아말테이아는 커다란 한 방을 맞고 그로기 상태에 처해져 있다. 지금 손을 쓰면 큰 힘 안들이고 적을 무너뜨릴 수 있다.
 “타핫.”
 에어 봄을 터뜨려서 그 반동으로 적에게 쇄도한다. 동시에 그는 칼라드볼그에게 성전사 기술인 징벌의 칼날을 덮씌웠다.
 
 지이잉…….
 
 황금색의 입자가 검을 감싼다. 더불어 검 길이 역시 2M나 늘어났다. 검의 절삭력과 더불어 공격 범위까지 늘이는 기술이다.
 
 스겅!
 
 그는 단번에 적을 베어 넘겼다. 적이 워낙 큰 탓에 절단까지 바라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반쯤 도려내서 출혈을 강요할 수는 있었다.
 “그아아…….”
 고통에 아말테이아는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는 손속에 사정을 주지 않았다. 천장까지 올라간 그는 다시 괴물을 향해 점프를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빠지직…….
 
 “헉.”
 순백색의 전격이 동현을 강타했다. 눈앞의 적에 집중하느라 감염체들이 근접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콰광…….
 
 동현은 그 충격에 튕겨나가 벽에 처박혔다.
 “크윽…….”
 전격 충격에 더해 낙하 데미지까지 쌓였다.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확실히 실력이 녹슬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평범한 생활이 그의 감각을 무디게 한 것이 분명하다.
 ‘젠장. 부끄럽기 그지 없군.’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마법에 적중하는 순간 홀랜드 큐브가 신성보호막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막았다.
 ‘만약 보호막이 없었다면 꽤나 곤란했을 거다.’
 방금 그 전격은 낮은 등급의 능력이 아니다. 최소한 A급 이상은 되는 실력이다.
 ‘음?!’
 그 순간.
 동현은 살기를 감지했다. 뒤돌아보니 멀리서 저격총으로 자신을 겨누는 채널러가 보인다.
 ‘피할 수 있을까?’
 
 타앙!
 
 생각은 짧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것은 동현의 움직임이었다. 극도로 압축된 마나를 활용해 신체를 각성시켰다. 그리고 있는 힘껏 허리를 뒤로 젖혔다.
 
 퍽!
 
 뒤에 있던 아스팔트 기둥에 총탄이 박혔다.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머리에 구멍이 날 뻔했다. 균열에너지가 담긴 총탄에 적중하면 그라도 위험하다.
 ‘생각보다 감염체들이 빨리 왔다. 일이 쉽지는 않겠어.’
 동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본 라운드에 돌입한 것이다.
 
 ***
 
 일 대 다수의 전투는 매우 불리하다. 개인이 한 번 행동할 동안 적들은 그 곱절로 공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일단 시야부터 차단한다.’
 “미세트. 크라우드. 비우드.”
 
 펑!
 
 연막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터지는 소리와 함께 짙은 회색 연막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밀폐된 공간이라서 금세 시야가 차단되었다.
 “우으…….”
 감염체들은 갑작스러운 시야 차단에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아말테이아에게 간단한 명령을 들을 뿐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 차이가 동현으로 하여금 커다란 이득으로 작용했다.
 적의 시야가 좁아진 패널티는 동현에게도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는 성전사의 기술인 ‘진실의 시야’를 사용했다. 신심이 깊은 성전사들은 미혹된 거짓이나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이런 짙은 연막은 더욱 간단하게 무력화 할 수 있었다.
 연막에 의해 우왕좌왕 하는 적들이 보였다. 제 아무리 강한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칼날 치기 한 번에 모두 자리에 눕고 말았다.
 
 수우우우웁…….
 
 동현이 감염체를 처리하는 동안 아말테이아는 급한 대로 상처 부위를 수복 중이였다. 그리고 엄청난 흡입력으로 연막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단번에 끝을 냈어야 하는데.‘
 아말테이아의 개입으로 연막작전은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 반 수 이상의 감염체가 남아있는데다 아말테이아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부우우웅.
 
 아말테이아의 몸에서 튀어나온 촉수는 그대로 동현을 향해 쇄도한다. 한 대라도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것이 뻔하다.
 
 스겅.
 
 단숨에 베어낸다. 두 동강 난 촉수 사이로 동현은 손을 내밀었다.
 “아샨티, 크로, 바레크.”
 파이어볼 마법이 즉석으로 완성되었다. 이글거리는 불덩이는 구현되는 것과 동시에 날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말테이아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쾅!
 
 지하를 이어주는 입구와 부딪힌다. 그러자 돌무더기가 쏟아지면서 입구를 막아버렸다.
 ‘이것으로 일단 적의 증원을 막았다.’
 감염체가 이보다 더 늘어나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남은 감염체 수는 대략 14명,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아말테이아를 친다.’
 아말테이아는 보스답게 내구력이 엄청났다. 플라즈마 버스터를 직격으로 맞고 버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감염체에게 뒤통수를 내어주는 것 자살행위다.’
 지하에 모인 감염체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일부러 등급 높은 능력자들을 근방에 배치한 것이 틀림없다. 그 말은 반대로 이들만 처치하면 당분간은 큰 방해가 없다는 뜻이다.
 
 찌직…… 찌지직…….
 
 촉수의 후려치는 공격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번데기 같은 몸에서 액체가 튀어나왔다.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그것에 샤워할 생각은 없다. 동현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치이이익…….
 
 그 액체가 바닥에 닿자 지글거리며 땅을 녹이기 시작했다. 강력한 산성으로 이루어진 수액이었다.
 ‘별에 별 공격을 다하는구먼.’
 거리를 벌였다고 해서 한숨 돌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감염체들이 덤벼들었다. 커다란 소머리 형태의 뮤턴트가 뿔로 들이박기 위해 정면에서 달려온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하나하나 처리해야 해.’
 놈의 머리에 달린 뿔은 날카롭고 단단했다. 공격을 허용한다면 단번에 뱃살을 뚫고 장기를 휘저어버릴 것이다.
 그는 칼라드볼그를 홀란드 큐브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맨손으로 달려드는 뮤턴트의 뿔을 잡았다.
 
 드르르르륵…….
 
 “흡!”
 가공할만한 힘이 느껴졌다. 수 미터나 뒤로 밀리면서 바닥이 부서졌다. 동현의 발목부분은 말 그대로 땅 밑에 들어가 있었다.
 “투르르르…….”
 뮤턴트는 더 이상 앞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오히려 점점 뿔이 아파온다.
 동현은 잡고 있던 뿔을 놓았다. 하지만 힘이 빠져버린 뮤턴트는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동현은 목을 휘감아 헤드락을 걸었다.
 “끄으으으…….”
 뮤턴트는 금세 흰 눈자를 드러낸다. 목에 가해지는 압박에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털썩!
 
 하지만 연이어 에스퍼의 공격이 빗발쳤다. 화염과 전격 그리고 냉기가 동시에 들어온 것이다.
 동현은 뇌호의 방패로 맞받아쳤다.
 
 콰아앙…….
 
 “으윽.”
 만만치 않는 충격이 그의 온몸을 때렸다. 그럼에도 황금색 방패는 3가지 속성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먼 곳에서 저격총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이건 뚫린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동현은 칼라드볼그를 꺼내었다. 바바리안의 초인적인 감각으로 날아드는 총탄의 궤적이 눈에 보였다. 그에 더해 다크엘프의 전사의 비기인 달빛 가르기가 그 뒤를 이었다.
 ‘베었다.’
 균열 에너지가 담긴 총탄은 손쉽게 뇌호의 방패를 뚫었다. 하지만 처음의 저격이 예상치 못한 것이라면, 지금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칼라드볼그의 검날이 정확히 총탄을 반으로 잘라내었다.
 
 팅!
 
 채널러가 연달아 사격을 가한다. 그만큼 균열에너지는 거의 충전되지 않았지만 굉장히 성가셨다.
 
 팅! 팅!
 
 그때 마다 동현은 검으로 총탄을 쳐냈다.
 
 촤르르륵…….
 
 신념의 사슬이 동현의 한쪽 손에 생성되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황금빛 쇠사슬은 채널러를 향해 쇄도했다.
 
 챙!
 
 그 앞을 뮤턴트가 가로막았다. 방어력이 약한 채널러를 위해 뮤턴트가 사슬을 붙잡은 것이다.
 동현은 사슬을 당기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뮤턴트 역시 동현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슬을 힘껏 당겼다. 서로의 힘겨루기가 성사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현이 바라지 않던 바였다.
 순간적으로 힘을 풀어버린다. 그리고 오히려 몸을 띄워 앞으로 도약했다. 적의 근접을 방해하려고 했던 행동이 오히려 도와주고만 것이다.
 “크헝.”
 먼 거리를 단번에 도약한 그를 뮤턴트가 온 힘을 다해 막으려 했다.
 
 타닥!
 
 다크엘프의 고속이동을 한낱 뮤턴트가 막을 수 없었다. 뮤턴트가 두 손을 내밀어보지만 이미 동현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으?”
 채널러는 그제서야 총을 겨누지만 이미 늦었다. 동현의 검이 호선을 그렸다.
 
 슥!
 
 저격총은 단번에 두 조각이 나버렸다. 그리고 채널러의 멱살을 쥐었다.
 바둥거리는 채널러의 이마를 향해 박치기를 날렸다.
 
 퍽!
 
 채널러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축 늘어져버렸다. 이로서 감염체들 중 제일 까다로운 채널러를 잠재워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동현의 파죽지세를 막을 자가 없었다. 아말테이아가 연달아 공격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두 동강 나는 것은 그녀의 촉수였다. 결국 마지막 남은 감염체가 바닥에 거꾸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5분도 되지 않았다. 이제 그곳에 서 있는 자는 김동현과 아말테이아 둘뿐이었다.
 “자 이제 오붓하게 둘이서만 대화 해볼까?”
 
 아말테이아는 공포를 느꼈다.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저벅.
 
 동현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동시에 거대한 촉수가 날아들었다.
 
 스걱
 
 하지만 그것은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하고 단번에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오오오오…….
 
 정신오염을 노린 울부짖음이다. 하지만 동현에게 있어서 그것은 귀가 아픈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강력한 마왕과 사투에서도 정신은 굴복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보다 나약한 아말테이아의 정신 오염에 영향을 받을 리 없다.
 마지막 수단으로 아말테이아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응?”
 동현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데굴데굴.
 
 아말테이아는 엄청난 속도로 구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도너츠 모양의 괴물은 비대한 중량을 이용해서 닥치는 대로 파괴하며 돌진하듯 굴러왔다. 그리고 그 선상에는 김동현도 포함되었다.
 ‘젠장.’
 육중한 질량만으로 파괴력은 엄청나다. 저걸 맨몸으로 막아서는 짓은 미련한 행동이다.
 ‘일단 회피한다.’
 에어봄까지 활용해서 순간적으로 위치를 이동시켰다. 일직선으로 달리기 때문에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엄청난 진동이 사방을 엄습한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쉼 없이 떨어진다. 아말테이아 때문에 지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지상위의 건물이 아래로 무너질 염려가 있었다.
 ‘돌에 깔려도 마법을 사용한다면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 잡은 아말테이아를 놓치게 된다. 엄청난 중량의 돌덩이들까지 헤치고 추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기절한 감염체도 문제다. 아직까지 운 좋게 깔려 죽은 감염체는 없지만 이대로 두면 분명 사망자가 나올 것이다.
 
 쿠구구구…….
 
 한 바퀴 돌더니 다시 되돌아온다.
 ‘조금 아플지도.’
 동현은 피해 없이 아말테이아를 잡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움직이지 않고 정면으로 분쇄해버린다는 마음을 가졌다.
 ‘No pain, no gain.'
 일차적으로 걸 수 있는 성전사의 버프를 모두 몸에다 걸었다. 뇌호의 방패로 전방에 보호막을 걸었다. 그에 더해 결계 마법을 3겹이나 중첩했다.
 칼라드볼그는 마법검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마법검이 필요하지 않는 이유는 동현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상황에 맞게 검에 마법을 부여할 수 있기에 오히려 무속성의 검이 더 유리한 것이다.
 불의 속성이 걸린 검에 냉기를 부여하면 이도저도 아닌 검이 되고 만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무속성의 명검이 동현에게 더 유용한 아이템이 되는 것이다.
 “루샨. 미다스. 비에드.”
 칼라드볼그에게 화염 속성이 부여되었다. 붉게 달아오른 검신은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불길이 치솟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징벌의 칼날로 칼라드볼그를 강화시켰다. 검신은 두 배로 길어지고 검의 예기 역시 더욱 날카로워졌다.
 ‘아직 부족하다.’
 몽크에게 배운 호흡법을 통해 마나를 일시적으로 격발시킨다. 몸 안의 마나를 불태워서 단기간동안 곱절의 힘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으드득…….”
 다만 마나가 증발하면서 느끼는 고통은 수만 마리의 벌레가 온 몸을 갉아먹는 아픔과 비견 할만 했다. 저절로 이가 갈리고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해.’
 바바리안의 기술 중 광폭화 라는 기술이 있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분노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잘못 사용했다가는 대형참사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엄청난 체력과 힘도 동시에 가져다주는 도박이었다.
 ‘아그리마의 분노!’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온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근육은 팽창하고 힘줄이 징그럽게 일어선다. 동시에 그의 눈이 붉게 변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광인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을 집중하자. 폭풍은 거칠어도 그 중심은 고요하다.’
 수련이 깊은 몽크는 내면의 안식처를 준비한다. 일종의 뇌를 보호하는 잠금 장치로서 정신에 악영향을 미치는 마법이나 저주를 방어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가졌다.
 마찬가지로 아그리마의 분노로 인해 생기는 광증을 몽크의 기술인 내면의 안식처로 방어해낸 것이다.
 오로지 두 가지 기술을 모두 사용가능한 동현만이 쓸 수 있는 콤보인 셈이다.
 
 쿠구구구…….
 
 아말테이아가 지척에 다가왔다. 이제 몸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부딪히는 것만이 남았다.
 ‘둘 중 하나는 이곳에서 뼈를 묻겠군.’
 그는 마지막으로 다크 엘프 전사의 비기 달빛 가르기를 준비했다.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 준비한 기술만 해도 8가지나 된다. 동현이 지구로 귀환 후 처음으로 최선을 다해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파직!
 
 뇌호의 방패가 제일 먼저 아말테이아와 닿았다. 하지만 단번에 파훼되고 말았다. 연이어 3겹의 결계 마법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아말테이아의 구르는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아말테이아가 가지는 중량은 위험했다.
 동현은 다크 엘프들의 비기를 활성화 시켰다.
 
 솨아아아…….
 
 그 순간 그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느려졌다.
 검을 휘둘렀다.
 
 파직!
 
 또 한번 더 휘두른다.
 
 파직!
 
 이를 악물고 쉬지 않고 베기 시작했다.
 
 파직! 파직! 파직!
 
 1초에 12번 넘게 휘둘렀다. 인간의 한계를 까마득히 뛰어넘었다.
 그는 아말테이아의 몸체의 반절을 검으로 썰어버렸다. 칼질 한 번씩 할 때마다, 괴물의 살결이 튕겨 나왔다. 마치 야채를 채썰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뻐억!
 
 하지만 고속이동을 무한정 할 수는 없다. 이윽고 검이 느려지자 아말테이아와 충돌하고 말았다.
 “크억.”
 동현은 그대로 튕겨나가 맞은 편 벽과 부딪혔다.
 “쿨럭.”
 붉은 피를 한 사발 토해낸다.
 “젠장. 너무 아프잖아.”
 예상은 했지만 참기 힘들다. 몸 안의 내장이 진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다.
 온갖 비기를 몰아서 쓴 탓일까? 휴우증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혹사당한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몸 안의 마나는 들끓고 있어서 제어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에 더해 피를 갈구하는 광증 때문에 정신을 계속 다잡아야 했다.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난다. 온 몸에 피가 한 번에 빠져나가는 착각이 들 정도다. 끊임없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끝없는 잠에 빠져들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오오오오…….
 
 아말테이아는 구슬피 울고 있었다. 동현에게 당한 공격에 몸의 절반이 잘 다져진 고기처럼 되고 말았다.
 그에 더해 화염 속성을 띈 마법검 때문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재생할 수 있는 괴물에게 화염이나 산은 치명적인 효과로 작용했다. 결국 아말테이아는 시간이 지나면 괴사하고 말 운명이었다.
 죽어가는 아말테이아에 다가갔다. 쉴 새 없이 체액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는지 거대한 동체를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꽤 힘들었다.’
 어린 아말테이아는 약한 능력자도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한 아말테이아는 무지막지한 몬스터로 성장해버린다.
 눈앞에 아말테이아처럼 다 자란 성체를 죽이기 위해서는 대륙급 스케일의 능력자들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했다는 랭커들이 10명 이상 동원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직 용사인 김동현은 오로지 혼자서 아말테이아를 잡는데 성공했다. 이미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무력의 극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에스란다. 바탄드. 그란디스. 에더. 비올더.”
 새로운 마법을 캐스팅한다. 그가 준비하고 있는 마법의 이름은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주문 이름에서 알려주듯이 심령을 제압하는 마법이다.
 강력한 마법사 주문인 마인드 컨트롤에는 제약이 있다. 주문을 걸기 전에 대상자를 완벽히 굴복시켜야 한다. 동현의 손에 박살난 아말테이아는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반항 의지가 소멸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손을 들어 아말테이아와 접촉했다.
 “…….”
 아말테이아의 사념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그것은 절규하고 있었다. 괴물은 그저 생존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만 그것을 위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파괴한 점이 문제였다.
 “복종하라.”
 그는 심령의 제압을 시도했다. 아말테이아가 완전히 사멸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아아아아…….
 
 그녀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저항이었다. 이윽고 조용히 숨을 쉴 뿐 모든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모든 기생체를 사멸시켜라.”
 기생체를 통해 아말테이아는 감염체를 조종했다. 보통은 아말테이아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기생체는 감염체에 뿌리 내어 계속 생존한다.
 그저 컨트롤 타워가 없어진 것뿐, 감염체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감염체가 되면 좀비와 같은 상태로 인식했다. 오로지 죽음만이 감염체에게 안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지.’
 전직 용사인 동현은 그 누구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말테이아가 만든 감염체 숫자만 하더라도 수 만 명이 넘어간다. 처음부터 동현은 그들 모두를 구원할 방법을 머릿속에 염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흡…… 스흡…….
 
 심령이 제압된 아말테이아는 모든 기생체에 명령을 내렸다. 모든 뿌리를 제거하고 숙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한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능력자 감염체의 머리에 피어있는 꽃들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 했다. 그 어떤 정교한 외과수술도 제거 할 수 없었던 기생체들은 스스로 숙주의 몸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을 사용할 수 있는 김동현만이 감염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좋았어.’
 
 그 시각.
 아말테이아에 고통 받던 감염체들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끼에에…….
 
 기생체는 숙주에게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몸에서 빠져나온 지금은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다.
 -치이…… 치이익……. 동현아, 들리니?
 민서에게서 통신이 들어오고 있었다. 신호가 약한 탓에 잡음이 섞였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네. 이야기 하세요.”
 -믿을 수 없어. 감염체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고 있어. 맙소사!
 기쁨에 가득 찬 민서의 목소리가 동현의 귀에 들렸다.
 ‘역시 감염체를 죽이지 않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만약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감염체들을 학살했다면 이 순간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동현아 해냈구나. 그렇지?
 “네. 민서 선배, 이제 아말테이아는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혼자서 그걸? 진짜 믿기질 않는데.
 “선배, 여기에 사람 좀 보내주세요. 능력자들 대부분이 찬 바닥에 누워있거든요.”
 -찬데서 함부로 자면 입 돌아갈 수도 있지. 알았다. 가디언즈와 응급대원을 보내도록 할게.
 “그리고 선배,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
 “오늘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함구해주셨으면 해서요.”
 -흐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내가 굳이 입을 열지 않더라도 곧 드러날 일이야.
 “그 문제라면 한 가지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응?
 “전에 저에게 주었던 제안 있죠? 그 제안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요. 가디언즈가 되겠습니다.”
 
 # 가디언즈
 
 민서는 기억을 되돌렸다. 예전에 그녀는 동현을 숨겨진 능력자라고 생각하고 가디언즈 대원으로 들어오라고 넌지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민서에게 있어서 능력자 보고서를 조작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서는 순간 말을 잇지 못 했다. 10명의 랭커가 모여야 해낼 일을 혼자서 이루어낸 동현은 강자 중의 강자다. 그것에 비해 가디언즈는 정말 손색이 많다. 유일한 장점은 공무원이라서 연금이 좀 더 많이 나오는 점 정도가 있을까?
 그것도 법이 바뀌면서 크게 퇴색되었지만…….
 -나야 그렇다 치고. LOC 요원들은 어떻게 하려고?
 “걱정 마세요. 다 방법이 있으니까요.”
 동현은 LOC 요원 김혜진의 얼굴이 떠올렸다. 대화를 해본 결과 꽉 막힌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그 때 가봐야 하겠지만. 동현은 민서와 통신을 종료했다.
 
 그르르르…….
 
 아말테이아는 거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동현은 명검 칼라드볼그를 손에 쥐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확실한 마무리를 하지 않는다면 소생할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극도로 약해져서 마인드 컨트롤이 성공한 것이지만, 기운을 차린 아말테이아를 굴복시킬 자신이 없었다.
 “징벌의 칼날!”
 황금색 입자가 검을 감싼다. 한 번의 공격으로 고통 없이 보내 줄 생각이었다.
 
 “응?”
 
 그런데 아말테이아의 상태가 희한하다.
 
 꿀럭 꿀럭.
 
 고동색의 거체의 상처에서 빛이 나는 무언가를 토해낸 것이다.
 “뭐지?”
 동현은 새끼 손가락만한 돌을 살펴보았다. 빛이 나긴 한데, 그것 말고는 그저 평범한 돌멩이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앗 뜨거.”
 돌을 집자마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그것과 동시에 돌맹이는 빛을 잃었다.
 “뭐지?”
 동현은 아픈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빛을 잃은 돌맹이는 더 이상 특별해보이지 않았다.
 “혹시 독이라도 묻은 건가?”
 강인한 바바리안의 신체를 가진 동현에게 독은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르르르…….
 
 빛나는 돌을 뱉어낸 아말테이아는 숨이 다한 듯 조용히 죽어버렸다. 거대한 짐승의 마지막은 왠지 장엄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것이 인류의 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는 손을 내밀어 아말테이아의 거체를 한 번 쓰다듬었다. 한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위기로 몰았던 적에 대한 예우였다.
 “응?”
 근데 그 순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가 동현을 자극했다. 마치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이질적인 기운이 한바탕 내부를 휩쓸었다.
 
 수우우욱…….
 
 아말테이아를 만지고 있던 손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쑥 들어왔다. 동현은 깜짝 놀라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동현의 손과 맞닿은 아말테이아의 가죽이 푸석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응?”
 기이한 현상에 동현은 깜짝 놀랐다. 동시에 부상당해서 아픈 몸이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몸이 가벼운데?”
 손바닥을 통해 뭔가를 빨아들인 것 같았다. 마치 거머리처럼 아말테이아의 양분을 흡수해서 몸을 치료한 것 같았다.
 “혹시?”
 동현은 다시 손바닥으로 아말테이아의 몸을 건드렸다. 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한 착각이었던가? 어떻게 하는 것이지?”
 그러다가 몸에서 다시 이질적인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동현은 그 기운을 손으로 인도했다.
 
 츠즈즈즈…….
 
 그러자 손과 맞붙은 부위가 점점 옅은 색이 되더니 재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동시에 아말테이아와 전투에서 얻었던 상처들이 급격히 아물기 시작했다. 동시에 들끓던 마나는 안정이 되었고 혹사한 근육은 생생한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피를 갈구하는 광증에는 효과가 없었다.
 ‘빛나는 돌을 통해 흡수 능력을 얻은 것인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어떤 매커니즘으로 능력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확실한 자가 회복 수단을 얻었다.
 용사시절 신성 마법을 배우지 못한 동현은 늘 아군의 힐링으로 몸을 치유해 왔다. 하지만 지금의 흡수 능력이라면 신성 마법이 굳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몬스터 몸 안에 빛나는 돌이 있었던가?”
 도살자로 수많은 몬스터를 도살했지만 빛나는 돌은 본 적이 없다.
 ‘나중에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다.’
 어차피 지금 머리를 굴려봤자 답은 안 나온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자리를 뜨는 것이다. 곧 가디언즈와 LOC 요원들이 이곳으로 찾아 올 것이 분명하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동현은 자신이 했던 위업에 대해 일일이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아말테이아를 처단한 것은 아니다.
 타쓰, 디아나, 소피아 그리고 세드릭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에는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럼 가볼까?”
 쉘터의 구세주는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
 
 악몽의 그날. 섹터 32지역에서 아말테이아 발호
 사망자 327명 발생
 역대급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쉘터 내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아말테이아가 발호한 것인데요. 다행이 정부의 빠른 대처로 그 피해는 미비합니다.
 (중략)
 섹터 32지역, 오후 1시경 처음 감염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태는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됩니다.
 (중략)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혜성 공격대가 무사히 아말테이아를 처치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감염체들의 증상이 호전되었는데요. 이는 학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중략)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정부의 발빠른 대처와 능력자의 희생정신으로 무사히 쉘터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에 시민들의 칭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삑!
 TV가 꺼졌다.
 “새빨간 거짓말이네.”
 가디언즈의 신입 능력자 이정아가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뒤에서 무거운 덤벨로 운동하고 있던 백경태가 볼멘 목소리로 항의했다.
 “정아야. 사람이 보고 있는데 그걸 끄면 안 되지.”
 “미련 곰탱이가?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꼬라지를 넌 계속 보고 싶니?”
 정아가 화를 버럭 낸다. 정아는 경태의 몸무게의 반도 되지 않지만 늘 지는 것은 남자 쪽이었다.
 “무슨 아침부터 사랑싸움이니? 너희 둘 적당히 해라.”
 능글능글한 민규가 옆에서 나섰다. 그러자 이정아는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오늘 저놈 죽이고 콩밥 먹고 만다.”
 “으으……. 저…….정아야. 참아. 곧 있으면 이민서 경위님이 오실거라구.”
 제일 연장자인 박수정의 중재로 겨우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근데 정아의 말대로 언론에서 완전히 거짓말하고 있네요.”
 정아에게 살해(?)당할 뻔 한 민규가 말을 꺼내었다.
 일주일 전, 4명의 가디언즈들은 이민서 경위의 명령에 따라 빌딩 지하로 출동하였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감염체의 습격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 어떤 위험도 없었다.
 감염된 능력자들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다시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커다란 상해 없이 기절한 상태였다.
 가디언즈는 기절한 능력자들을 응급대원에게 맡기고 지하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아말테이아였다.
 “그런 엄청난 괴물은 머리털 나고 처음 봤다니깐.”
 수십 미터 크기의 아말테이아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혜성 공격대가 아말테이아를 잡았다고?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하지.”
 그들이 본 혜성 공격대는 대부분 바닥에 쓰러져서 꿈이나 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말라비틀어진 기생체들이 하나씩 존재했었다.
 “실버 나이트가 아말테이아를 처치한 것이 아닐까?”
 수정은 자기의 의견을 말했지만 바로 반론에 부딪혔다.
 “누나. 내 친구가 재난청에서 일하는데, 실버 나이트는 혼자서 겨우 살아서 그곳에 빠져나왔거든. 적어도 그가 한 일은 아니야.”
 “그럼 대체 누가 아말테이아를 막은 거야?”
 경태의 질문에 나머지 3명은 머릿속으로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위님의 후배라고 했던 그 남자!’
 ‘난생 처음 보는 능력자였어. 잠깐만…… 근데 그 사람 능력자 맞나?’
 ‘만나서 물어볼 수도 없고, 진짜 답답하네.’
 그들의 상념은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깨졌다.
 “좋은 아침.”
 푸른 제복의 여경, 이민서 경위였다.
 “이경 백경태.”
 “이경 이정아.”
 “이경 박수정.”
 “이경 최민규.”
 가디언즈 4명은 꼿꼿한 자세로 관등성명을 외쳤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야야. 긴장 풀어. 누가 보면 내가 맨날 너희들 잡는 줄 알겠다.”
 민서는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쥐 잡듯이 잡고 있잖아요.’
 ‘정말 가증스러운 사람이다!’
 ‘시간아 빨리 지나가라.’
 속마음과 다르게 그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얼마 전 명령을 어기고 난 후 그들은 지옥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사는 언뜻 보기에는 미녀인데다가 쾌활해 보이지만 사실 뱃속에 구렁이 백 마리는 숨겨 놓은 사람이었다.
 “내가 너희들만 따로 부른 이유가 있는데, 혹시 맞춰볼 사람?”
 4명은 서로 눈치만 볼뿐, 침묵을 유지했다.
 “이번에 내가 새로 팀 하나를 만들었거든. 이름은 제 4 기동타격대이고, 팀원은 너희들 4명이랑 신입 하나다. 기분 좋지?”
 4명의 안색은 급속도로 하얗게 변했다. 악마와 같은 이민서 경위 직속 대원이라니.
 “응? 무슨 일 있어? 다들 안색이 안 좋은데?”
 “경……경위님, 저희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들 중 경태가 나서서 무거운 짐을 지었다.
 “당연히 처음 듣겠지. 내가 직접 너희들을 뽑았거든.”
 ‘악마다. 악마.’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러고 보니 내가 신입이 한 명 더 있다고 했지? 지금 소개할게.”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문이 열리고 이민서 경위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바로 김동현이었다.
 “오늘부로 너희들과 함께 생활할 김동현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너희들이 잘 가르쳐줘야 한다.”
 4명의 가디언즈 대원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자 인사해.”
 민서는 동현의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 때리며 말했다.
 “선배. 이거 직장 내 성희롱입니다.”
 “어허 선배라니? 경위님이라고 불러.”
 동현은 그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가디언즈 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이경 김동현! 잘 부탁드립니다.”
 “뭐해? 박수 안 치고?”
 민서의 강요에 의해 4명은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자자…… 처음은 서로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여기 김동현군은…… 일단 능력자인데. 음…… 뭐로 해야 되냐?”
 “에스퍼입니다. 등급은 D등급이고요.”
 동현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에스퍼? D등급? 어딜 봐서?’
 ‘이 사람들 즐기고 있어. 우리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거야!’
 ‘하느님 맙소사.’
 가디언즈 4명은 완전히 멘붕하고 말았다. 어떤 모종의 이유로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동료라니. 오늘 참 기념할만한 날이다. 이런 날, 그냥 지나 갈 수는 없지. 오늘 내가 통 크게 쏜다.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뭐든지 말해. 아 참고로 나는 짜장면이야.”
 “…….”
 눈치 없는 경태가 손을 들고 말했다.
 "경위님. 탕수육도 하나……."
 "뭐?"
 그들은 점심을 모두 짜장면으로 통일했다.
 
 LOC 요원 김혜진은 초조한 마음을 다잡으려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능력자 연합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시코프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시코프는 러시아의 군부 과학자 출신으로 LOC를 건립하는데 공헌 한 핵심인물이었다. 그가 주도한 초인법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았을 것이다. 둠스데이 초기, 각국 정부의 무분별한 능력자 강제 징병으로 원성이 자자 할 때에 시국을 바로 잡고 지금의 인류를 보존 했다고 평가 받는 남자.
 
 똑똑똑!
 
 “들어오시오.”
 문 너머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칵!
 
 방안에는 과학자라기보다 노련한 정치가의 인상을 풍기는 40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혜진은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림자처럼 서있는 4인의 경호원이 눈에 들어왔다. 센스가 뛰어난 김혜진은 그 4인이 최소 S급 이상의 능력자일 거라 짐작했다. 그 중 몇은 서 있는 것만으로 숨막히는 존재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소, 이쪽으로.”
 동그란 안경을 낀 칼리시코프는 인자한 미소로 김혜진을 맞이했다. 이렇게 볼 때면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이지만 사실 그는 일국의 지도자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감사합니다.”
 “일단 축하의 말부터 전해야겠군요. 김요원의 능력자 등급이 한 단계 상향 조정되었다고 들었소.”
 김혜진이 A급으로 등급이 조정된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칼리시코프가 가지는 관심이다. 고작 등급 조정의 이유로 그녀와 직접 만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김요원의 보고서를 읽어봤습니다…….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혜진은 ‘드디어 본론이 나왔구나.’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유형의 능력자라는 대목에서 특히 관심이 가더이다.”
 모든 능력자는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뮤턴트, 채널러, 디사이플 그리고 에스퍼이다. 학계에 보고된 능력자는 모두 이 사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무엇보다 아말테이아를 처치한 자가 ‘김동현’씨로 예상된다고 적었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시원한 물 한잔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 보고서를 올렸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고서를 얼굴에 집어던지며 장난 치냐고 소리쳐도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는 보고서다.
 “개인의 무력으로 다 자란 아말테이아를 막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당신의 보고서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더군요.”
 LOC 요원들이 감염체에게 쫓길 때, 김동현이 도와주면서 보인 무위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 그녀의 보고서를 무작정 거짓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당장은 그가 인류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덕분에 쉘터는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김혜진 역시 똑같은 생각을 가졌다. 그가 정체불명의 사나이지만 적어도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능력자들은 LOC의 관리를 받아야 해요. 만약에 그가 가진 능력이 나쁜 방향으로 인도된다면…….”
 칼리시코프가 뒷말을 흐린다. 아말테이아를 처치할 만큼 강력한 존재가 인류의 적이 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내 생각이 억측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LOC 임원으로서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당신에게 한 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겼으면 합니다.”
 혜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와는 안면이 있고 도움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모든 교섭권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김동현씨를 만나서 스카웃 제의를 하십시오.”
 “스카웃 제의라고요?”
 놀란 그녀는 되묻고 말았다.
 “네. 그렇습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본인을 제외하고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큰 아군을 얻게 될지도 몰라요. 아! 최고급 대우를 약속 한다고 하세요. 어쩌면 대한민국 첫 랭커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랭커.
 그것은 현대에 이르러서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S급을 뛰어넘는 랭커들은 그 존재만으로 국가의 위상이 달라졌다. 특히 동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제외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는 모두 한명 이상의 랭커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새로운 랭커 탄생은 매우 고무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해……. 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맡았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미팅은 끝나고 김혜진은 서둘러 그 곳을 떠났다.
 “과연 재미있군. 하필이면 이런 때에 새로운 이레귤러라니……. 얼마나 큰 변수로서 작용할지 그 점이 기대 돼.”
 칼리시코프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
 
 가디언즈는 기본적으로 소방서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비번일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준비 태세로 관내에 거주한다.
 그러다가 몬스터에 관련된 사건이 접수되면 곧장 출동 하는 것이다. 인명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빠른 대응이 가능한 시스템이 편성되었다.
 “발이 보인다. 어서 움직여!”
 가디언즈 본부 내에는 대원들을 위한 훈련장이 크게 지어져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5명의 인원이 크게 원을 그리며 달리기를 하고 있다.
 “최민규, 니가 지금 제일 늦다! 더 빨리 못 뛰어?”
 이민서 경위의 구령 아래 '제 4기동 타격대'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헉…… 헉…….”
 특히 뒤처지고 있는 인물은 박수정과 최민규였다. 백경태와 이정아는 전투 시 전방에 서다보니 그나마 체력들이 좋았다. 하지만 후미에서 지원을 하는 에스퍼와 디사이플은 상대적으로 몸 쓰는 일이 드물다. 그들이 뒤처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에 제일 앞장서서 달리고 있는 인물은 김동현이다.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는데, 이마에서는 땀 한 방울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T-1000이냐? 사람처럼 좀 행동해!’
 그나마 동현과 비슷하게 달리고 있는 백경태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처음에는 오기로 그와 비슷한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그건 커다란 실수였다. 동현은 마치 로봇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일정한 속도로 달렸고, 수정과 민규를 벌써 2번이나 추월했지만 속도를 줄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만.”
 동현을 제외한 가디언즈 대원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헉…… 헉…… 헉…….”
 거침 숨을 몰아쉬고 있는 와중에 이민서 경위는 한심한 듯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미래가 창창한 청춘 남녀가 이정도 뛰고 벌써 죽을상이냐?”
 이민서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호통을 쳤다.
 ‘젠장, 우리랑 나이차이도 그렇게 안 나면서…….’
 ‘계급이 깡패구나.’
 ‘자기는 편안한 그늘에서 쉬고 있었으면서!'
 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그들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들의 고달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김동현이 가디언즈에 들어 온 지도 어느새 3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4인방은 이민서 경위의 지도편달로 매일 야위어 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에스퍼 최민규는 뭉친 근육을 주무르며 말했다. 체력이 약한 그로서 매일 이어지는 고강도 훈련에 살이 쑥 빠졌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몸 쓰는 일에서 밀릴 줄이야…….”
 뮤턴트 백경태는 신체 스펙으로 누구에게 꿇리는 일이 드물었다. 적어도 같은 뮤턴트가 아니라면 늘 우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단 한명, 김동현에게만은 도저히 체력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 번은 동현과 팔씨름에서 이기려고 변이까지 해버렸다.
 결과는?
 변이를 해서까지 승부욕을 불태웠지만 이기지도 못하고 이민서 경위에게 혼쭐만 났다. 이유는 체육관에 털 날린다고…….
 ‘퉷! 입에 털 들어가잖아. 털갈이 하는 개도 아니고, 역시 경태 너는 특별 관리가 필요하다.’
 그날 백경태는 하늘이 노랗게 될 정도로 집중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게 다 그 김동현이라는 작자 때문이야. 그 때 그 녀석이랑 엮이는 바람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 거라고.”
 이정아가 볼멘 목소리로 투정을 부린다.
 “그래도 동기끼리 있으니까 좋잖아. 안 그래?”
 가디언즈 4인방은 훈련생을 같이 보낸 동기들이었다.
 “어휴, 언니는 참 성격도 좋아.”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이민서 경위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대원들은 빳빳하게 차례 자세를 취했다.
 “어라? 동현이는 어디 갔어?”
 “모르겠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습니다.”
 “어? 그래? 그럼 좀 기다리지 뭐. 리모컨 줘 봐. 재미있는 거 안 하냐?”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TV를 켰다. 턱을 괴고 TV를 보는데 그 중 단 5초도 채널고정하지 않았다.
 “볼 게 하나도 없다. 그치?”
 그러던 와중에 김동현이 돌아왔다. 그러자 이민서는 TV를 껐다.
 “모여 봐. 할 말이 있으니까.”
 동현을 제외한 4명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가디언즈 대원에게 순찰 업무가 주어졌다. 갈수록 민심이 흉흉해져서 말이야.”
 아말테이아의 발호 이후, 동현의 활약으로 사상자의 숫자는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감염체의 난동으로 부서진 시설이나 재산 피해는 막심했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였다.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주어져야 할 정부의 보조금 집행이 늦어지고 있었다.
 “하여튼 정부 놈들이 문제야. 상류층은 돈으로 안전을 살 수 있지만, 하류층은 상대적으로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지.”
 그녀의 말대로 하류층이 몬스터를 만났을 때,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114로 신고해서 가디언즈를 기다리거나, 자체 무장해서 몬스터와 싸우거나.
 “그래서 정부가 고작 생각해낸 것이 이거다. 가디언즈가 직접 거리를 순찰하면 시민들의 불만이 사그라질 것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지만.”
 일반적으로 가디언즈는 관내에서 대기하다가 신고가 들어오면 출동하는 형식이다. 물론 그들도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순찰을 하면 좋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디언즈의 대원 숫자가 너무 적다.
 능력자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직업이라서 늘 인원이 모자란 면이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셈이지. 인재풀이 부족한 가디언즈를 혹사시키면, 정작 사고가 터질 때 어쩌란 말인지…….”
 매년 제일 먼저 삭감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가디언즈의 예산이다. 부족한 장비는 대원들이 직접 사비를 들여서 사기도 했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인 셈이다.
 “하여튼 까라면 까야지. 그나마 다른 팀들보다 우리가 여유가 있으니까. 오늘 저녁부터 지구대 순찰을 시작한다. 각각 2인 1조로 짝을 짓고 남는 1명은 관내에서 대기한다.”
 그녀는 지도를 펼쳐서 정해진 순찰 구간을 알려주었다.
 “먼저 동현이랑 박수정이랑 한 조로 묶고, 경태랑 정아랑 한 조로 묶는다. 민규, 넌 내 옆에서 대기해.”
 
 <『멀티클래스』 2권에 계속>

댓글(3)

에로선인    
이걸재밌다고 "재밌어요" 누른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하네 이거 왜이렇게 유치한지 오글오글함
2016.07.15 18:09
임가입니다    
필력은 탄탄함 고구마라서 그러지
2019.02.02 13:49
배드문    
유치하긴 하네요. 고구마에 다가.
2019.02.2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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