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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뉴 빌런(New Villain) [E]

뉴 빌런(New Villain) 1권

2015.11.10 조회 2,258 추천 37


 # Super Villain Rises
 
 미국 샌프란시스코 해안가
 
  에메랄드 빛으로 찰랑거리는 해변이 보인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바람도 적당히 부는 것이 정말 오랜만에 보는 완벽한 날씨다. 이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광경에 나도 모르게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해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해변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곳이 얼마나 될까?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해수욕장은 전부 폐쇄해버렸으니까. 뭐, 솔직히 말로만 폐쇄지 몰래몰래 해변에 가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what’s the matter? young man?”
 
  잠시 아무 생각 없이 해변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쳤다. 뒤를 돌아보니 안경을 쓴 백인 노인이 보였다. 한 손에는 식료품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핫도그를 든 노인. 날 친 것은 핫도그를 든 손등이었다. 노인은 먹으라는 듯 손에 든 핫도그를 내밀었다. 눈앞에서 솔솔 냄새를 풍기는 핫도그를 보자 뱃속이 꼬르륵 거렸다. 생각해보니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
 
 “감사합니다.”
 “아니, 너무 멍하니 바다를 바라봐서 말이야. 요즘 그런 젊은이들을 많이 보다보니 남일 같지 않아서 말이지.”
 
  노인은 씨익 웃으며 내가 앉은 벤치 옆에 앉았다. 그리곤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좀 많이 힘들지. 이해해. 내 나이대의 늙은이나 정치인들은 ‘자기 젊었을 적에는 이런 것은 위기도 아니었다.’는 둥 ‘요즘 젊은이들이 곱게 자라서 도전을 안 하려고 한다.’는 둥 그러는데……. 그건 다 뻥이야 뻥. 요즘 세상만큼 각박한 때는 없었어. 기묘한 구멍이 열리고, 보도 못한 괴물이 쏟아져 나오고…… 도대체 뭔 알 수가 있어야지!”
 
  말하면서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맥주 캔을 꺼내 들이키는 노인. 차가운 듯 김을 뿌리는 맥주 캔을 호쾌하게 꿀꺽꿀꺽 마시는 것을 보니 절로 침이 넘어갔다. 나도 마시고 싶지만…… 이렇게 공짜로 핫도그도 받은 마당에 맥주 좀 달라고 할 정도로 난 뻔뻔하지 않다. 침만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날 바라보며 맥주 캔을 들어 올린 뒤 씨익 웃었다.
 
 “힘든 세상이지만 삶을 포기하진 말게. 어찌되었든. 살 구멍은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노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광경이라서 그냥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 것뿐인데……. 아마 내가 자살할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내가 왜 자살을 하겠는가? 지금 이 세상은 자신이 날뛰기 딱 좋은 세상이다. 남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맨땅에 헤딩할 때 나 혼자만 공략법을 다 알고 시작하는 것이니까. 노인이 준 핫도그를 한입 베어 물며 나는 입을 열었다.
 
 “딱히 세상이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래? 요즘 젊은이들과는 다르군. 이곳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자살을 생각하던데 말이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직장도 줄어들고 절망적이라고 하더군.”
 
  확실히, 취업하려는 젊은이들에게는 힘든 시기다. 바다에서 생겨난 균열에서 튀어나온 거대 해양 괴물에 나라간 교역은 줄어들었고, 장사도 잘 안 돼서 기업들도 인원을 감축하는 편이니까. 국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몇몇 작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미 망했다. 좀 더 순화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무정부 상태. 젊은이들만 힘든 시기는 아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다. 아, 물론 난 빼고.
 
 “뭐 그렇죠. 대부분이 힘든 시기죠. 그것도 좀 많이.”
 “그래도 바다를 바라보는 자네를 보니……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노인의 말에 난 턱을 긁적였다. 뭐랄까……. 확실히 고민은 있다.
 
 “음……. 뭐 특이한 고민은 있습니다.”
 
  내 말에 노인은 내가 앉은 벤치 옆에 앉더니 맥주를 마시며 말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이 노인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나 말고도 대화한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아무래도 이 노인네는 고민거리 가득한 젊은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취미인 듯하다. 그래도, 혼자서 고민하는 것 보다 남이 고민을 들어주면 좀 낫겠지. 나름 연륜이 있으니 내가 생각하지 못한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음, 약간 불법적인 일이죠.”
 “음…… 마약(drug)?”
 “아뇨. 불법적인 일이긴 한데 나쁜 일은 아닙니다. 단지 법에 저촉될 뿐이죠. 오히려 제 일은 좋은 일해 속해요.”
 
  음…… 좋은 일에 속할까? 솔직히 좀 찔린다. 뭐, 좋은 일에 속할 거다. 번 돈의 일부도 자선단체에 꼬박꼬박 기부도 하고…… 봉사활동도 가끔 하고……. 아, 물론 세금은 안 냅니다. 껄껄…….
 
  음…….
 
  앞의 것들은 나름 당당하게 말했는데 세금을 안 낸다고 하니…… 왠지 엄청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것 같다. 양심이 찔리는 것을 무시하며 나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을 계속 하는 중인데…… 이 일을 계속할지 고민 중 입니다. 뭐, 솔직히 말하면 고민만 할 뿐, 계속 할 예정이긴 하지만요. 전 이제 그것 말고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하거든요.”
 
  내 말에 노인은 잠시 벙쪄 있더니 이내 무릎을 치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곤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로 내게 자신이 마시던 맥주 캔을 건넸다. 이 햇볕이 쨍쨍한 날씨에 양복을 입었는지라 많이 더웠는데…… 이렇게 시원한 캔 맥주를 권하니…… 이건 거부할 수 없다. 넙죽 고개를 숙이며 받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내가 맥주 마시는 것을 보며 노인은 입을 열었다.
 
 “시원하지?”
 “예. 아주 좋네요.”
 “좋아. 그럼 지금이 1920년대라고 가정해보도록 하지. 금주령이 있던 시대로 말일세. 그 당시는 술 마시는 게 불법이었어. 그럼 이제 자네에게 묻지. 자네는 이 시원함을 포기할 수 있겠나? 딱히 남에게 피해도 안주고 자기 혼자 시원하게 즐기는 이 즐거움을?”
 
  노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극소수의 또라이를 제외하면 이 즐거움을 포기할 사람은 없을 거다. 내가 고개를 젓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지? 설명 끝. 너무나도 간단한 것을 고민하는군.”
 
  노인의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해답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이 벌어졌다. 뭐랄까…… 해답이 아닌 것 같은데…… 또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한 요상한 대답이었다. 내 표정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는지 노인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 이건 매우 간단하게 축약한 해답이고……. 표정을 보니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도록 하지.”
 “아니, 더 설명하실 필요까지는…….”
 “잘 들어. 자네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니 특별히 풀어서 설명해주는 거야. 전직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생각하는 법에 관한 것이라고.”
 
  갑자기 근엄하게 말하는 노인에 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뭐, 노인의 말을 들어보니 나름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변호사라? 변호사들은 법을 어떻게 생각할까?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던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법이란 것이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국 법은 사람들이 서로간의 분쟁을 좀 더 정의롭게 해결하기 위해 만든 거야. 자네가 하는 고민은 알겠네. 자네가 하는 일. 법에 저촉되는 행위겠지. 하지만, 사실은 좋은 일에 속한다고 했지?”
 
  노인의 말에 나는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위에서는 좋은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좋은 일도 아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남에게 미움 많이 받는 일이니까. 하지만 공익적인 측면에서 보면 난 애국자에 속할 것이다. 원래는 사회에 환원되어야 할 돈을 대신 환원되게 해주니까. 뭐, 나머지 절반은 내가 수고비로 받아가지만…… 애초에 받지 못할 것을 받아주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세상일이 참 요상한 하거든. 서로간의 분쟁을 좀 더 공평하게 정의롭게 해결하기 위해 법이 존재해. 근데 말이야, 공평하고 정의롭게 해결해야 되는 일이 그렇게 해결이 안 돼. 법이라는 둘레 안에서 말이야.”
 “예, 그거죠. 제 사회 생활하면서 제일 많이 느낀 게 그겁니다. 제가 법을 개 껌으로 최급하게 만든 이유기도 하죠. 그거하고, 어떤 녀석에게는 법을 엄격히 적용하면서 다른…… 정확히 말하면 ‘좀 높으신 분들’에게 엄격히 적용하려하면 또라이 취급받는 거. 제가 이곳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미스터리중 하나입니다.”
 “흐…… 아무래도 자네 이야기 같은데.”
 
  노인의 말에 난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에 노인은 유쾌하게 한차례 웃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 정말 유쾌한 젊은이군. 자네 같은 사람이 판사가 되면 딱 일 텐데 말이야. 누구에게나 엄격하고 공평한, 정의로운 판사.”
 “답답해서 못 합니다. 제 성격상 할게 못 돼요.”
 “아쉽군. 좋은 판사가 이렇게 사라지다니 말이야. 뭐, 아무튼. 자네가 느꼈다시피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법은 좀 많이 변질 됐어. 아주 많이…….”
 
  노인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멍하니 바다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 눈빛이 흐릿한 것을 보니 노인은 바다가 아닌 기억속의 어떠한 것을 보는 것 같았다. 자기말로 전직 대형 로펌의 변호사라 했으니 자기가 변호했던 사건들을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말끝을 흐리던 노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의로워야 하는 법. 그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야. 그래서 일까? 법 또한 완벽하지 못해. 법을 만들면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일부로 법을 교묘하게 뒤틀기도 하지. 설령 법이 제대로 되었다 하더라도 법 이외의 테두리. 인맥과 돈, 그리고 권력에 의해 판결이 다르게 나오기도 해. 많은 예도 필요 없고 한 대학 논문만 봐도 알 수 있어. 90년대에 시카고 대학에서 조사한 논문인데 말이야,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백인이 흑인보다 더 낮은 형량을 받고, 또 미녀가 평범한 외모의 사람보다 더 낮은 형량을 받는다는 내용이지.”
 “흠…… 결국 백인에 미녀가 아니면 법은 제 편이 아니겠군요.”
 “하하하! 그렇다고도 볼 수도 있겠네. 그렇게 보면 자네와 나는 법 앞에서 약자야. 아, 난 백인이니 자네보다는 강자겠군. 뭐, 아무튼…… 이 사회는 돈을 써서, 혹은 권력을 써서 자신의 죄를 줄이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는데 익숙해져있지. 늙은이들은 그걸 ’사회의 쓴 맛’이라고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는데……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야. 오히려 아직까지도 그런 게 남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질 못할망정 당당하게 떠벌리다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노인. 말이 논점에서 좀 빗나갔지만 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노인이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알아들었으니까. 그나저나 전직 변호사였다는 양반이 하는 말이 이렇게 논점에서 벗어나는 일이 많다니. 이 양반, 왠지 사기꾼 같은데? 물론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낼 정도로 난 멍청하진 않다. 나에게 핫도그와 시원한 맥주를 준 양반인데 이 정도 주절거림은 불평 없이 들어줘야지. 내가 맥주를 홀짝거리며 아무 말 없이 있자 노인은 눈앞에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수단에 얽매여서 쩔쩔대고 정의를 외면하면 주객이 전도되는 거지. 자네가 하는 일은 정당하네.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예, 감사합니다. 덕분에 자신감을 좀 가지게 됐네요.”
 “클클. 그냥 노인네의 넋두리라고 생각하게. 자, 이제 젊은이의 고민도 해결됐으니 난 이만 가봐야 겠구만.”
 
  대화가 끝난 뒤, 노인은 바지를 털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내가 잘 가라고 손 흔들어주려는 찰나, 하늘에서 점점 커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두두두 거리는 커다란 소리. 헬기 소리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내 쪽에서 방향에서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헬기가 보였다. 그리고 그 헬기 입구에 있는 익숙한 모습이…….
 
 “우워…… 엄청나네.”
 
  이곳을 향해 도약했다. 언뜻 보기에도 100m가 넘어가는 높이에 50m 이상 떨어진 위치. 감탄사를 내뱉는 나완 다르게 노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살지망자를 보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쯧 잔소리 좀 듣겠네.’
 
  떨어지는 인영을 보며 한숨을 쉬는 나. 그리고, 나완 다르게 안색이 굳은 노인. 노인의 얼굴은 낙하하는 물체가 지면에 다가갈수록 시시각각 변했다. 걱정과 안타까움,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노인의 예상과는 다르게 헬기에서 도약한 물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의 보도블록을 박살내며 나와 노인 앞에 안착했다. 생각과는 다른 육중한 굉음에 노인은 찔끔하며 고개를 돌려 지면에 안착한 물체를 보았다. 그리고,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오…… 맙소사.”
 
  검은색 공성망치를 든 기사. 165cm 정도의 작은 키에 치마형태의 갑주를 입은 흑기사였다. 작은 키와 흉부쪽 갑옷이 살짝 솟아 있는 것을 보면 여성. 하지만, 작은 키와는 별개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가시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새카맣고 흉악한 공성망치에 갑옷과 투구 바이저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이글거리는 주홍빛 광채. 딱 봐도 위험해 보였다. 갑작스러운 괴물의 등장에 노인이 얼어있을 때, 흑기사는 노인과 내가 있는 벤치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투구의 턱 부분이 열리며 주홍빛 광채와 함께 쇠 긁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뭐하냐?
 “잠시, 해변을 바라봤지. 아름답잖아? 이런 해변은 이제 별로 없다고. 대부분 나라는 해변가는 위험하다고 죄다 폐장해 버려서…… 언제 한번 이곳에 올까? 휴가로? 여기 핫도그도 맛있더라.”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다른 변조된 목소리로 답하자 노인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 노인의 안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동양인 청년의 모습이 아닌 검은색 양복 정장에 검은색 헬멧 바이저를 쓴 모습. 입을 벌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에 난 가볍게 웃었다. 하긴, 노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나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하구만. 맙소사. 내가 상담한 젊은이가 현상금 2000만 달러짜리 악당일 줄은 몰랐는걸?”
 “하하. 뭐, 저도 항상 이 모습으로 다니진 않죠. 변장도하고……. 지금 저 녀석도 변장한 모습이에요. 아마 쟤 진짜 모습을 알면 기절하실 걸요?”
 
  내 말에 흑기사의 투구에서 이빨 가는 소리, 아니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개소리 그만해라.
 “이크…… 쎈 척하기는. 숙녀가 그런 말 하면 못 써요.”
 
  내 대답에 흑기사의 어깨에 걸쳐진 커다랗고 흉악한 공성철퇴가 위협적으로 보도블록에 떨어졌다. 산산조각 나는 보도블록들. 무력시위 하는 건가? 코웃음 쳐주고 싶지만…… 아무리 나라해도 300kg이 넘는 저 쇳덩이에 맞으면 즉사다. 물론, 죽이지는 않겠지만…… 다리뼈나 갈비뼈 한두 개는 부러뜨리고도 남을 녀석이다. 크……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더니. 흑기사의 위협에 나는 조용히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었다. 내가 흑기사의 무력시위에 항복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흑기사가 내렸던 헬기가 근처에 착륙했다. 이윽고, 헬기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나와 비슷한 정장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백인남성. 딱 봐도 영화에 나오는 FBI요원처럼 보이는 남자는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Mr. black face?”
 “예, 맞습니다.”
 “현재 목표물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어서 빨리 헬기에 타고 이동하시죠.”
 
  요원의 재촉에 난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섰다. 잠시 딴 데로 새나가서 빈둥거렸지만, 내가 이곳, 샌프란시스코까지 발걸음 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미 정부의 의뢰. 물론 비공식적인 의뢰다. 천문학적 현상 수배금까지 걸린 악당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밝히는 것은 정부입장에선 떳떳하지 못하니깐. 내가 일어서자 몇 분전까지 나와 잡담을 나누던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 정부쪽에서 섭외한 건가? 그러고 보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대 괴물이 있다고 그랬는데…….”
 “예, 아시다시피 이쪽 분야는 제 전문이지 않습니까.”
 
  내 대답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초고액 현상수배범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악명과는 별개로 최고의 괴물 사냥꾼이기도 했다. 실제로 국가가 처리 못하는 괴물 몇 마리를 나 혼자서 마법재료 수집을 위해 혼자 처리했으니까. 미국이 자신들이 처리 못하는 괴물을 나에게 처리 맡긴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핫도그 잘 먹었습니다. 저도 할아버지처럼 좀 당당해졌으면 좋겠군요.
 
  노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며 헬기에 탑승했다. 같이 온 일행들도 전부 탑승하고 곧 헬기가 이륙하려는 찰나, 밖에 있던 노인은 나를 향해 웃는 얼굴로 큰소리로 소리쳤다. 시끄러운 헬기 소리 사이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역시 자네는! 악당이 맞는 것 같아!”
 
  노인네의 일침. 뭐, 부정은 안한다. 나도 내 욕망을 위해 행동한 적이 많으니까. 역시, 난 좋은 놈은 아닌 듯하다.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 때문에 안 보이겠지만 난 노인을 향해 웃으며 혼잣말 하듯 대답했다.
 
 “뭐, 사실…… 저도 압니다.”
 
 # 이방인
 
 새카만 하늘이 보였다. 빛이 쏟아지는 검은 하늘. 하늘이 검은데 빛이 쏟아지다니? 언뜻 생각하면 모순적이거나 은유적인 말로 착각할 법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기가 사라진 하늘
 
  태양의 빛은 산란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내리 꽂혔고, 하늘은 평소에 알던 푸른빛이 아닌, 심연과도 같은 외우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따스하고 자비로운 햇빛. 그것은 대기가 존재할 때나 그런 것이다. 대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내려쬐는 햇빛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햇빛에 의해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대지
 
  대량의 자외선과 감마선에 의해 땅에 있는 거의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은 괴사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다시없을 엄청난 재앙이었지만, 아직 재앙은 끝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대륙
 
  중력에 의해 속박되어 있어야할 대지가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올랐다. 마법으로 띄운 것이 아니었다. 행성의 중력장 일부분이 아예 사라져버려서 대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중력이라는 족쇄가 사라지자 대지는 내부에 끓어오르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이내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다. 지각은 물론이고 깊숙한 곳의 암석 또한 하늘을 향해 솟구쳐 둥둥 떠올랐다. 터져버린 대지 아래에는 행성의 내핵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아찔했다. 지각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갈 곳을 잃은 바닷물도 대지와 같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칠흑 같은 하늘, 붕괴된 대지와 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위로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
 
  행성의 종말, 황혼의 시간이 도래했다.
 
 ***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입에서 안도의 한숨에 가까운 욕이 튀어나왔다.
 
 “젠장.”
 
  꿈. 꿈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등 부분이 축축했다. 방금 전까지 누웠던 요를 보니 식은땀으로 보이는 찝찝한 액체로 펑 젖어 있었다. 질척거리는 찝찝한 느낌에 입고 있던 러닝을 벗었다. 그리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 20분. 아직 출근까지는 한참 남았다.
 
 “잠은 다 잤군.”
 
  한숨을 쉬며 일어난 뒤 이부자리를 개기 시작했다.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잔 시간은 3시간 20분 정도. 잠이 부족해서 인지 아직 머리는 몽롱하고 몸은 피곤했다. 이렇게 졸리고 피곤하지만 난 잘 수가 없다. 난 쉽게 잠드는 체질이 아니다. 그리고 매우 쉽게 깬다. 선천적인 것은 아니다. 방금 전 꿨던 악몽. 그 악몽을 다시 꿀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항상 똑같은 내용의 악몽들. 이 세상에서 살아간 지 거의 30년,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이 악몽은 지금까지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뭐, 다행이라면 악몽을 꾸는 빈도가 많이 낮아졌다는 거?
 
  어렸을 적에는 매일매일 잠들 때마다 악몽을 꿔서 거의 잠을 못 잤다. 덕분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린애와는 어울리지 않은 짙은 다크 서클에 해골처럼 삐쩍 마른 몸. 얼마나 심각했으면 학교선생이 내가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줄 알고 가정방문까지 했었을까?
 
 ’이젠 다 옛날 일이지.’
 
  눅눅한 요와 이불을 갠 뒤, 오피스텔 베란다로 나와 담배를 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5시 30분 정도, 아직 어슴푸레하지만 동이 떠오르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매연이 가득한 하늘.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은 아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그래, 여기는 전생이 아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야.”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
 
 ***
 
  난 전생을 기억한다. 전생에서의 직업은 마법사. 흔한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설정이다. 만약, 이 세상이 소설과 같다면 마법사의 능력을 사용해서 무슨 일이라도 했었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마법을 사용하는 필수적인 질료인 마나. 여기, 내가 태어난 이 세상에는 마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력이 없는 마법사? 그냥 몽상가에 지나지 않는다. 잉여인간이다. 잉여인간. 그래도 좀 성숙한 정신으로 어린애가 됐으니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고 출세 길을 달릴 법도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의 유년시절은 정상이 아니었다. 밤마다 악몽에 괴성을 지르고 잠을 못자서 항상 퀭했다. 그것뿐인가? 이곳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에 이 몸의 부모들은 내가 귀신들린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별의별 치료를 다 받아봤다. 정신과 치료에 토속 신앙에 기댄 제사까지. 영혼에 각인된 트라우마는 유년시절의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래도 한 10대 중반쯤 되니 상태가 호전되어서 어찌어찌 공부해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한 뒤, 나름 유명한 벤처 IT기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이곳은 나 같은 이방인이 살기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너 돌았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대머리가 보였다. 흠, 저렇게 화를 내면 그나마 있는 머리카락이 빠질 텐데…….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걱정해주면서도 나는 친절히 대답했다.
 
 “왜 그러십니까? PM(project manager)?”
 
  내 친절한 대답에 앞에선 대머리는 더욱 얼굴이 붉게 변했다. 마치 꼭 잘 익은 사과 같다. 내 대답에 대머리는 자기가 들고 있는 A4용지를 내 눈앞에서 흔들며 입을 열었다.
 
 “너…… 나뿐만 아니라 고객하고 영업이사, 운영이사, 사장님께 e메일을 보냈더라?’주신 프로젝트를 검토하였으나, 업무시간에 맞춰서도 도저히 맞추지 못할 내용이니 재검토를 바란다.’라고?”
 “예. 무슨 문제라도?”
 
  내 친절한 대답에 대머리는 들고 있던 A4용지를 바닥에 집어던진 뒤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대머리의 눈. 그 눈에 서린 감정은 짜증이었다.
 
 “그게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이 할 말이야? 해보지도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맞출 생각은 하지 않고 시작하자마자 못하겠으니 시간 좀 더 달라고 메일을 보내?”
 
  바락바락 소리치는 대머리. 대머리의 호령에 안 그래도 안 좋은 사무실의 분위기가 착 가라 앉았다. 팀원들의 사기는 북돋지 못할망정 떨어뜨리다니. PM이라는 직책이 해야 될 일을 생각하면 이 대머리는 참 무능하다. 그냥 바락바락 소리 지르면 다 되는 줄 아나? 식식거리는 대머리를 향해 나는 짜증을 억누르며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PM님. PM님이 가져온 프로젝트에 대해서 아십니까?”
 “진성해상보험의 콜 센터용 어플리케이션 아냐? 그거 만드는 게 뭐가 어렵다고……!”
 
  또다시 소리치며 폭발하려는 대머리를 나는 대머리의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조용히 시켰다. 나의 제지에 대머리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좋다. 이제야 전혀 쓸데없는 괴성이 멈췄다.
 
 ’이것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입을 다문 대머리를 보며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의 말싸움이다. 이곳의 사람들이 하는 말싸움은 좀 특이하다. 냉철하고 냉정하게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일단 서로를 향해 윽박지르는 방식. 그리고 신기하게도 거의 대부분 목소리 크고 화내는 사람이 이긴다. 내가 아는 말싸움, 상대방의 주장이 잘못된 것을 입증하려는 마법사들의 말싸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이곳의 방식대로 싸우면 난 이 대머리를 이길 수 없다.
 
 “전 PM님과 말싸움 하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행동이 타당함을 가르쳐 드리려는 것이지요. 이 프로젝트는 주성그룹의 콜 센터용 어플리케이션 제작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콜 센터 상담원용과 관리자용 어플리케이션 제작이죠. 이것만으로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죠. 하지만, 고객의 세부요구사항을 PM님은 읽어보셨습니까?”
 
  내 말에 대머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한심한 모습이다. 이 인간은 요번 프로젝트를 가져온 뒤, 우리들에게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를 연발하면서 조기퇴근 했던 인간이다. 고객이 요구한 세부사항을 보면 절대 저런 말이 안 나온다. 이렇게 무능한 인간이 상사라니. 그리고 저런 인간이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도록 짜여진 회사의 시스템이라니. 이 회사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이 사회가 이상한 건가? 내가 살았던 전생의 세상이었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름 이 세상에 적응하려고 하지만 이런 건 도무질 적응할 수가 없다. 입을 다문 대머리를 보며 나는 내심 깊은 한숨을 쉬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요구사항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통화를 하면서 녹취서버로부터 녹취를 하되, 통화마다 파일이 생성되어야하고, 이 파일들을 추후에 Web에서 들을 수 있게 만들랍니다. 이것만 해도 PM님이 요구하신 두 달은 훌쩍 넘습니다. 또 있습니다. 일단 제 말을 다 듣고 말하시죠.”
 
  또 머리가 불게 변하며 입을 열려하기에 나는 다시 재빠르게 검지를 대머리의 주둥이에 가져다 대었다. 상당히 무례한, 아니 이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긴 하지만 저 대머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이번 일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근성과 책임감에 관한 개소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행동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일의 본질을 흐리는 쓸데없는 잡설이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니까. 대머리가 다시 화를 내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CTI 서버로부터 상담원으로부터 콜이 인입되면 인입된 전화번호를 근거로 DB(database)로부터 고객테이블을 검색해서 자동으로 데이터를 상담원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교환기로부터 생성된 로그를 통하여 통계수치를 산정하여 관리자 어플리케이션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CTI 서버의 전략을 관리자가 손쉽게 변경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요구합니다. 주성그룹의 요구대로 하려면 녹취서버와 CTI서버, 그리고 교환기를 전부 함께 연동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PM님은 두 달 내에 끝내라고 하셨죠. 하지만, 저희의 인원은 너무 부족합니다. 시스템 엔지니어 한 명에 개발자 두 명.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갓 들어온 꼬맹이 두 명. 5명이서 이 많은 일을 끝내라고요? 하루 업무시간 9시간 동안에?”
 
  내 친절한 설명에 대머리는 다시 머리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까 전처럼 소리를 내지르지는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 채, 잠시 콧김을 내뿜던 대머리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신 대리. 그쪽이 힘든 것은 알긴 아는데…… 이건 꼭 해야 하는 것이니 고생스럽더라도 해야죠.”
 
  머리가 아프다. 안 그래도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서 몽롱하고 머리가 아픈데 이 인간의 대답을 들으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대머리를 보며 나는 잠시 ‘내가 오크를 붙잡고 설명하고 있는 건가?’ 생각을 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가? 지금까지 왜 ‘정해진 시간 내에서 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어떻게 ‘꼭 해야 된다.’라는 말이 나올까? 아니, 오크도 이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 세상에 아인종이 없는 이유는…… 모든 종이 뒤섞여서 일지도 모르겠네. 저 대머리는 오크의 멍청한 인자가 발현된 것인지도…….’
 
  상사의 멍청함에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속으로 쉰 것이 아니었다. 대머리의 면전 앞에서 했다. 아무리 내가 인내심이 깊어도 이렇게 멍청하고 막무가내인 인간을 상사로 모시니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해야 되는 것이니 해야 하는 것은 아주 잘 압니다. 근데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은 구분해야죠. PM님이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계획이에요. 그래서 제가 E메일로 보내드리지 않았습니까? 두 달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이 아닌, 실천 가능한 일정으로 짜서.”
 “개발기간 5개월에 QA 및 안정화 기간 포함 1개월. 총 6개월짜리 프로세스? 그래서 내가 수정한 프로세스 보내 줬잖아? 그것대로 하면 되지.”
 
  확실히…… 이 멍청한 오크 같은 인간은 내가 보낸 메일을 받고 수정 계획안을 줬다. 근데, 그 수정 계획안이 참 골 때린다. 스케줄은 전혀 늘리지 않은 채, 내가 보낸 프로세스를 전부 1/3 씩 줄였다. 그게 끝. 이게 이 대머리 오크의 수정 계획안이다. 머리가 아프다.
 
 “PM님이 보낸 수정 계획안은…… 제가 보낸 프로세스를 그냥 1/3 씩 줄인 것뿐이잖습니까. 일을 시키시려면 하루 업무시간 9시간을 근거로 PM님이 스케줄링을 해주셔야죠.”
 “그래서? 네가 잘했다는 거야? 상급자를 통해 말하지 않고 그냥 다이렉트로 사장님, 이사님, 그리고 고객에게 메일 보낸 게?”
 
  또 다시 커지기 시작하는 목소리. 대머리의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격렬한 것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들끓는 심화. 대화의 주제가 또 요상한 곳으로 흘러가려고 한다. 갑자기 어떤 인간이 했던 명언이 생각났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그래. 바로 이거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어떻게 대화할 수가 없다.
 
 ‘내가…… 졌다.’
 
  대머리를 보며 체념한 나완 달리, 대머리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기가 살은 듯, 또다시 의미 없는 울부짖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신 대리. 생각해봐, 회사가 자네에게 돈 주는 이유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야. 응? 이게 사회의 생리, 법적인 계약관계야. 근데, 자네는 일을 못하겠다고 하고 있어. 회사의 돈을 받으면서 말이야.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그것뿐인가? 자네 때문에 팀의 분위기도 나빠지고 있어. 자네가 나름 유능한 것은 알아. 하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대머리는 말을 하지 않고 가볍게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회사에서 잘라버리겠다는 제스처. 안 그래도 사무실 안에 돌던 흉흉한 분위기가 대머리 오크의 모가지 치는 시늉에 더 싸해졌다. 그 조용해진 분위기가 마음에 든 건지 대머리는 미묘하게 웃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겠어? 자네의 역할에 충실해. 응? 자네의 역할은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거야. 야근을 하든지, 아니면 도와줄 사람을 구하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기양양한 대머리의 말에 절로 이가 갈렸다. 이 멍청한 오크새끼에게 지다니. 사실 이 프로젝트를 6개월 안에 끝내는 것 자체도 엄청 빠른 거다. 그런데 ‘네 역할에 충실하라고?’ 난 이미 내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저 대머리 오크새끼와는 다르게! 아주! 엄청나게! 어떻게 저 오크에게 빅 엿을 먹여줄 방법이 없을까? 저 하는 역할 없이 그냥 놀고먹…… 그래. 역할이라……. 이게 있었지?
 
 생각해보니 난 이미 이 멍청한 오크에게 나름 빅 엿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당한 권리 요구지만, 이 오크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에게 먹이는 빅 엿이겠지. 의기양양해 하는 대머리를 보며 나는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제 역할요? 전 이미 최선을 다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PM님이나 제 역할을 하시죠.”
 “뭐?”
 “저기 애들.”
 
  손을 뻗어 아직은 앳돼 보이는 애들을 가리켰다.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한 꼬맹이들. 기초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만 배우고 이 IT 회사에 인턴쉽으로 들어온 애들이었다. 내가 꼬맹이들을 가리키자 꼬맹이들은 죄지은 듯이 움츠러들었다. 쯧…… 이게 아닌데. 왜 지은 죄도 없는데 움츠러들까? 안쓰럽기만 하다.
 
 “쟤들, 하루에 9시간. 6일 근무…… 아니, 솔직히 이곳에서 야근 때문에 먹고 자는 애들이에요. 근데, 월급은 겨우 53만원 받더군요. 법정 최저시급은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쟤들은 배우는 단계라서…….”
 “전 저 꼬맹이들 들어온 두 달간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쟤들 월급 제대로 줘야한다고. PM님이 강조하시는 명령계통을 통해서, 상급자인 PM님에게 직접. PM님에게는 가지 않았겠지만 이번 프로젝트 메일 보냈을 때, 쟤들 월급에 대해서 사장님하고 이사님에게도 보냈습니다. 인턴 월급을 PM이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서 못 받고 있다고. 자기 역할을 강조하시는 분이 이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뭐? 이 미친놈이?”
 
  내 말에 대머리는 기겁하더니 내 옷깃을 잡았다. 순식간에 구겨지는 와이셔츠. 다림질한지 얼마 안 되는 것인데 좀 아깝다.
 
 “너…… 진짜 막나가자는 거냐? 나랑 해보자는 거야?”
 
  옷깃을 붙잡고 눈을 부라리는 대머리. 얼굴이 붉어진 것이 나름 험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동물한번 죽여본적 없는 나약한 현대인이라면 좀 두려워했겠으나 나에게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행성이 종말을 맞이한 황혼의 시간. 그곳에서 날 뛰던 괴물들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했던 것이 바로 나다. 대머리의 막나가는 행동에 나는 싸늘한 살기어린 시선으로 화답했다.
 
 “이것 놓고 말하시죠.”
 
  육체적 능력을 따지면 난 저 대머리에게 상대가 안 된다. 저 대머리는 좀 땅딸만하지만 근육질이고, 난 다크 서클이 퀭하고 비실비실한 몸이니까. 하지만, 진짜 살의가 담긴 눈빛을 지금껏 온실 속에서 자라난 일반인이 견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아주 약한 살기여도 말이다. 싸늘한 말투와 살기에 대머리는 화들짝 놀란 것처럼 잡았던 옷깃을 놓았다. 잠시 대머리 때문에 구겨진 와이셔츠를 핀 뒤, 나는 대머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강조했던 원리원칙, 그리고 법에 따라서 일을 진행 했습니다. 왜 이것이 잘못됐는지요? 쟤들 월급 제대로 챙겨주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겁니까? 법적으로 보장된 월급인데요? 최저시급?”
 
  논리적인 내 대답. 보통 이때쯤 다시 터질만하건만, 대머리는 내가 뿜었던 살기에 겁먹은 듯 어버버하며 아무런 말도 못했다. 멍청하게 서있는 대머리. 이 대머리를 보니 내가 뭐하는가 싶다. 오크와 대화해봤자 남는 것은 없다. 한숨을 쉬며 나는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앉은 상태로 대머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다시 한 번 고객이랑 다시 컨텍 해보겠다고 메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쟤들 월급 못 받은 몫까지 주겠다고 하셨고요. 아마 곧 수정된 일정이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일이나 하죠.”
 
  이제야 자신이 겁먹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대머리는 얼굴을 붉히곤 몸을 돌려 자기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팀원들. 난 팀원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해서.”
 
 ***
 
  점심시간이다.
 
  월급쟁이들이 유일하게 마음껏 쉴 수 있는 시간. 다른 팀원들은 밥 먹겠다고 나갔고, 난 서랍에서 에너지 드링크 한 병과 담배를 꺼낸 뒤 빌딩 옥상으로 올라갔다. 일하는 회사는 다르지만 같은 빌딩에 있는 흡연 동료에게 가볍게 손인사 한 뒤, 한편에 있는 옥상 벤치에 앉았다. 그리곤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볍게 빨아들였다.
 
 “하아…….”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었다. 서너 시간 참았다가 흡연하는 이 느낌. 살짝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곧바로 타우린이 듬뿍 들어간 걸로 유명한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키니 지친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살 것 같군.’
 
  에너지 드링크와 담배, 일시적인 각성효과가 있지만 나중에 더 큰 피로로 돌아오는 물건. 건강을 생각하면 안 좋은 녀석들이었지만 나의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다. 이렇게라도 몸에 활력을 불어넣지 않으면 난 남은 시간동안 버틸 수가 없다. 진짜 시체가 된달까? 잠시 아무생각 없이 담배를 피는데, 담배를 든 오른손이 가늘게 떨렸다.
 
 ’뭐지? 수전증인가?’
 
  처음 보는 증상에 담배를 재떨이에 지지고 살짝 떨던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지금 보니 딱히 큰 이상은 없어 보인다.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손. 잠깐 손이 떨렸던 것은 아무래도 피곤해서 그런 걸 거다.
 
 ‘하긴, 요즘 계속해서 잠을 설쳤지.’
 
  일주일에 한두 번 꾸는 악몽. 요즘 2주간 그 악몽을 꾸는 빈도가 높아졌다. 일주일에 5~6번 정도? 덕분에 잠도 계속해서 설쳤다. 하루에 2~3시간씩 밖에 안 되는 수면시간. 몸이 피곤할 만하다.
 
 ‘정신과 치료 한번 받은 뒤 수면제 처방 좀 받을까…….’
 
  잠시, 오른손을 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 내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알 수 없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있었다.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든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여자애. 모르는 얼굴은 아니다. 몇 분 전, 회사 사무실에서 팀원들과 점심 먹으러 간 꼬맹이였으니까.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하고 인턴으로 입사한 파릇파릇한 꼬맹이. 내가 뒤돌아보자 꼬맹이는 헤실헤실 웃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도림 선배?”
 “너야 말로 뭐하니, 꼬맹아? 팀원들이랑 점심 먹으러 간 거 아니었냐?”
 “또 꼬맹이. 전 성인이라고요. 술 마셔도 되는 성인.”
 “나보다 거의 10살이나 어린 게……. 내가 보기엔 꼬맹이야.”
 
  정확히 따지자면 꼬맹이는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이제 19살? 몸은 다 컸다. 발육이 좋은 요즘 애들답게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때는 들어간…… 음…… 착한 몸매. 얼굴도 예뻐서 회사 내에서 이 녀석 꼬시려는 놈들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난 아무리 봐도 이 녀석이 꼬맹이로 밖에 안 보인다.
 
  도저히 어른으로는 안 보이게 만드는 초롱초롱한 눈빛
 
  만성 피로에 찌들어서 허연 동태눈인 나와는 대조되는 눈빛이 날 부담스럽게 만든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에 불편함을 느끼고 살짝 피하려고 하는데, 이 꼬맹이 녀석은 은근슬쩍 내가 앉은 벤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내 옆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살짝 나를 향해 봉투를 미는 꼬맹이. 봉투를 보니 내가 자주 마시는 에너지 드링크가 한 박스 들어있다. 뭐지?
 
 “뭐야 이건?”
 “그냥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
 “오늘 아침 일말이에요. 월급에 대한 거. 더 좋은 거 사드리고 싶은데 지갑에 오천 원밖에 없어서……. 헤헤.”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는 꼬맹이. 꼬맹이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걸 왜 고마워해. 당연히 네가 받아야 될 것이 안 오니까 나는 네 상급자로서 상부에 요청했을 뿐인데? 나는 내 일을, 내 역할을 했을 뿐이야.”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흠…… 뭐, 이건 잘 받을게. 안 그래도 음료수가 다 떨어져서 사러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사왔네.”
 
  사실은 서랍장 안에 두 박스가 더 있지만, 날 위해 사다준 것이니 감사히 먹어야지. 비닐봉지를 들고 나름 힘차게 웃어주자 꼬맹이도 싱그럽게 웃었다.
 
 “대리님. 저…… 여기 온 김에 상담 좀 해도 돼요?”
 “상담?”
 “네. 상담.”
 “……난 다른 사람을 상담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꼬맹이의 상담이라. 의외의 말에 난 턱을 긁적였다. 왜 나에게 상담하고 싶다고 그러는 걸까? 솔직히, 난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부적응자다. 회사 인사고과에서는 최저를 달리는 인간. 그나마 사장과의 친분과 프로그래밍 실력이 월등해서 안 짤리고 있지 이 두 가지가 없었으면 이미 짤렸다. 난 잠시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입사한지 갓 두 달 된 꼬맹이. 아직 사내에서의 내 평판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꼬맹아. 나에 대해서 잘 모르나 본데, 상담은 어느 정도 뛰어난 사람이야 해줄 수 있는 거야. 넌 온지 두 달 밖에 안 돼서 모를 수도 있는데, 회사 내에서 내 별명이…….”
 “싸이코 잖아요. 싸이코. 알아요. 입사했을 때, 옆에 있던 최진혁 선배가 말해줬어요.”
 
  최진혁. 내 옆자리에 앉은 시스템 엔지니어다. 나랑은 입사동기. 꼬맹이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이가 말했다시피, 사내에서의 내 별명은 싸이코다. 광인을 뜻하는 단어. 처음에는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꼬맹이의 말에 난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다시피 내 별명은 싸이코야. 미친놈. 인사고과는 최악을 달리고, 상사에게는 미운털이 박혔지. 그나마 이렇게 붙어있을 수 있는 것도 사장과의 인맥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부끄럽지만 실력이 좋아서야. 난, 네 고민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아냐.”
 “대리님, 아니, 선배. 선배는 싸이코가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회사에서 봤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 훌륭해요.”
 “설마 네 월급 챙겨준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설마, 자신의 월급을 되찾아준 것에 고마워서 립서비스 하는 것일까? 내가 질문하자 꼬맹이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도 있죠.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최진혁 선배가 저에게 대리님 별명 설명해주면서 해준 말이 뭔지 알아요?”
 
  같이 해준 말? 처음 듣는 소리다. 꼬맹이의 말을 들어보니 내 동기가 나에게 뭐라 평가했는지 갑자기 궁금하다.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자 꼬맹이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좀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지만 꼭 필요한 사람. 잘못된 것이 있으면 절대 못 넘어가는 성격. 상사들한테는 싸이코라고 불리지만, 총대 매고 우리들이 말하기 힘든 것을 대신 말해주는 사람이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후한 평가에 나는 헛기침했다. 내 동기가 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긴, 생각해보면 꼬맹이의 말대로 난 상사에게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인데…….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겠단 말이야.’
 
  아직 남아있는 음료수를 마시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도 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 중 하나다. 이곳 사람들은 상급자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일을 시키면 무조건 Yes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 줄 안다. 상급자가 말한 것에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한 상급자도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상급자가 내린 말이 부당하고, 비효율적이고, 실천불가능 해도 무조건 예, 예, 예. 대답하려고 한다. 난 그것이 싫어서 대답한 것뿐이다.
 
  비효율적인 방식은 다른 효율적인 방식이 있다고 말하고,
  실천 불가능한 것은 실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부당한 명령은 거절했을 뿐이다.
 
  그렇게 3년, 어느새 난 회사에서 싸이코라고 불리고 있었다. 내가 꺼낸 반론과 행동에 대해서 상급자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내 주장에 꺼림칙한 표정으로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상급자들은 나에게 광인을 뜻하는 단어인 싸이코를 별명으로 붙여주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솔직히 이해 못하겠다. 에너지 드링크 특유의 알딸딸한 맛에 취해 나는 꼬맹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냥 내 성격이야. 도무지 고치질 못하는 성격. 이것 때문에 그래? 솔직히 난 이것을 배우라고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점심시간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나랑 같이 점심 먹으면 상사에게 미운털 박힐까봐 설설 피하는 거.”
 “그런 이유 때문에 맨날 점심 안 먹는 거예요?”
 “아니, 난 아침 시간대에는 만성 소화불량이야. 아침, 점심을 먹으면 장 트러블이 심하지. 그래서 아침, 점심은 간단한 유동식과 영양제로 때워. 나로서는 괜찮지. 사람들 점심 먹으러 가자는 말 거절하기 귀찮았는데 아무 말도 안하니 말이야.
 
  꼬맹이에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꼬맹이. 난 꼬맹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훌륭함의 기준은 대다수의 타인이 정해 주는 거야. 난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꼬맹아. 그리고, 나에게 상담하고 그 조언대로 실천하면 나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어. 아주 피곤하고 힘든 일이지. 차라리 최진혁 그 녀석에게 상담해. 그 녀석, 인사고과도 좋고 상사와의 관계도 좋아. 아마 관리직까지 될걸? 걔에게서 상담 받는 게 훨씬 도움 될 거다.”
 
  빠르게 말하고 이만 회사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꼬맹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왠지 처량한 느낌. 이대로 그냥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은 낌새다. 잠시 망설이다가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에고, 그래! 내가졌다!
 
 “에효…… 그래. 말해봐. 어차피 네가 선택하는데 내가 끼어들 권한은 없지. 대신, 나중에 후회하지마라.”
 내가 벤치에 앉으며 한숨을 쉬며 말하자 꼬맹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리님.”
 “그래.”
 “저…… 제가 이곳에서 계속 있을 수 있을까요?”
 
  살짝 떨리는 꼬맹이의 목소리. 항상 고민 없이 명랑해 보였던 꼬맹이인줄 알았는데, 지금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꼬맹이는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이제 겨우 두 달인데…… 너무 힘들어요. 일은 끝이 없고, 배워야 할 것은 많고, 다른 선배나 윗분들은 무섭고, 불쾌한 농담에 찝쩍거리고……. 이렇게 힘든데, 월급은 겨우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나오고……. 다행히 대리님이 챙겨주셔서 좀 나아지겠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워요. ‘내가 진짜로 이곳에서 계속 버틸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요…….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요. 저보다 더 오랫동안 회사 다니고, 더 힘들게 회사생활을 한 선배에게 말이죠. 어떻게 회사생활을 버틸 수가 있었죠? 무슨 동기로 이렇게 꿋꿋하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나요?”
 
  현실적인 꼬맹이의 말. 꼬맹이의 말에 난 머리를 긁적였다. 상사에게 대들면서 일하는 내가 이 꼬맹이는 참 대단하게 보였나보다. 하긴, 나름 유연하게 회사생활 하는 꼬맹이와는 다르게 내 회사생활은 좀 다이내믹하다. 아마 스트레스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난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아니다. 정정 하겠다. 심한 스트레스라고 느끼지 못한다. 회사 생활에 적응되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생의 끔찍한 경험들이 나를 웬만한 일로는 꿈쩍하지 않는 강철 멘탈로 만들었다. 물론, 이 개떡 같은 불면증과 약간의 편집증을 덤으로 줬지만. 아, 생각해보니 이 일을 하는 이유도 전생의 경험이 크네.
 
  컴퓨터 프로그래밍
 
  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전생의 마법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많다. 컴퓨터가 이해하는 기계어는 0과 1로 이루어진 언어다. 전기가 ‘흐르냐.’, ‘안 흐르냐.’ 를 표현하는 언어. 내가 사용하는 마법 계통의 룬어도 비슷하다. 많은 룬어가 있지만, 결국 최소단위로 파고들면 마력이 흐르냐, 안 흐르냐를 표현한다. 컴퓨터가 컴퓨터를 이루는 수많은 통로들 각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기가 흐르냐, 안 흐르냐의 수많은 조합에 의해 작동되는 것처럼, 마법도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의 마력회로에 마력이 흐르냐, 안 흐르냐에 의해 작동된다. 프로그래밍과 마법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았다. 컴퓨터를 알게 된 뒤, 나는 이것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공대를 간 것도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갔다.
 
 ‘근데 이걸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문제지.’
 
  생각해보면 내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많다. 강철 멘탈에 월등한 프로그래밍 실력. 고민하는 이 꼬맹이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될까? 사실을 말해줘야 될까? ‘난 그냥 잘 버틸 수 있어서 이곳에 다니고 있어.’ 이렇게? 아무리 내가 성격이 털털해도 이런 꼬맹이에게 가혹한 말을 할 정도는 아니다. 이 꼬맹이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줘야 한다.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연초와 에너지 드링크라는 연료가 들어간 머리는 아는 정보들을 조합해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난, 꼬맹이가 사온 에너지 드링크를 두 개 꺼냈다. 그리고 하나를 꼬맹이를 향해 내밀며 입을 열었다.
 
 “버티지 마.”
 “……네?”
 “버티지 말라고.”
 
 ***
 
  내 말에 꼬맹이는 당황한 듯 보였다. 당황하는 꼬맹이에게 음료수를 건네준 뒤, 나는 실실 웃으면 다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버티기 힘들면 다른 곳에서 일하면 되지.”
 “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직까지 말을 못하는 꼬맹이. 꼬맹이를 바라보며 나는 꼬맹이의 이름을 불렀다.
 
 “정아야.”
 “……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난 프로그래밍 실력이 좋아. 아주 뛰어나지.”
 
  내 말에 꼬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내 프로그래밍 실력은 엄청나다. 사실 당연한 거다. 전생에 하는 짓이 프로그래밍과 비슷한 마법 밖에 없었던 미친놈이었으니까. 마법 연산과 술식 구축이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비슷하기에 내 경력은 여기에서의 13년 정도와 전생에서의 77년, 총 90년 정도 된다. 당연히, 매우 능숙하다. 솔직히 말하면…… 낮에 대머리 오크와 싸웠던 일도 빡세게 하면 한 달 만에 혼자 끝낼 자신 있다. 현재는 팀원들의 속도와 맞춰서 고만고만하게 놀아주는 정도. 그래도 좀 답답해서 남들보다 두 배 정도는 빠르게 일한다. 그 정도만 해도 아주 뛰어나다고 말할 정도다.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정도 되면 어떻게 알고 스카우트 제의가 와. 요번 년도만 해도 4곳에서 왔지. 중국에서 2곳, 미국에서 1곳, 그리고 다른 한국계 기업에서 한 곳. 월급? 가장 세게 부른 곳이 중국인데 그쪽에서는 1년 연봉 9천 부르더군. 내가 회사 입사한 지 겨우 3년인데 말이야.”
 
  내 말에 꼬맹이는 입을 벌렸다. 그런 꼬맹이를 바라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근무 조건도 그쪽이 훨씬 좋아. 이쪽은 야근수당 잘 안 주는데 그쪽은 야근수당도 철저히 챙겨준다고 하더군. 이쪽에서 내가 받는 세금 떼고 연봉은 3000만, 근데 내가 왜 이곳에서 일할까?”
 “선배님…… 설마 자기자랑? 아니, 허세 부리는 거예요? 구라?”
 
  인상을 찌푸리는 꼬맹이. 허어…… 나에게 상담 받는 주제에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니! 내 손은 어느새 꼬맹이에게 정의의 꿀밤을 먹여줬다. 맞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울상 짓는 꼬맹이를 보며 나는 나름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왜 너에게 허세 부리겠냐.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그러면 왜 이곳에서 일해요? 나 같으면 바로 떠나겠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꼬맹이의 말이 맞다. 더 많은 돈에 더 좋은 근무조건. 하지만, 난 둘 다 그렇게 끌리지 않는다. 돈? 지금 받고 있는 돈만으로도 충분했다. 근무조건?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회사의 일은 나에게 그렇게 힘든 게 아니다. 나는 그냥 회사 나와서 설렁설렁 일한다. 내 외형이 워낙 초췌해서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건 만성피로에 의한 것이고 난 야근을 안 한다. 칼 퇴근을 신봉하는 정시퇴근 족이다.
 
  상사 눈치 안 보고 칼 퇴근하는 인간
 
  해야 될 일 다 끝내놓고 퇴근하는데 눈치 주는 이상한 인간들이 좀 있지만 깔끔하게 무시한다. 뭐, 말이 이상한 데로 흘렀는데……. 아무튼, 난 회사에서 그렇게 불만이 있지 않다. 사실, 회사를 옮기지 않는 이유는 귀찮음이 더 크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회사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거리다. 먹고사는 것 충분하고, 취미생활도 잘하고 있는데, 괜히 타지 가서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 사실도 꼬맹이에게 그냥 말할 수는 없지.
 
 “사장님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날 도와준 사람이거든. 지금 이렇게 정상적으로 일하는 것도 그 형님 덕이야. 다른 애들이 중학교 다닐 나이대에, 나는 정신병원에 있었어. 그 분이 자원봉사 대학생으로 와서 나에게 수학하고 영어를 가르쳐 줬지. 병원에 있는 내내, 그리고 퇴원하고 대학교 입학했을 때까지 개인적으로. 덕분에 난 진도에 뒤쳐지지 않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패스하고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
 
  이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 회사에 처음으로 입사하게 된 이유기도 하고.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꼬맹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오…… 소리를 연발했다. 꼬맹이의 감탄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담배를 빨아들인 뒤 아래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그리곤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정아야.”
 “네.”
 “넌 보석이야.”
 
  뜬금없는 내 말에 꼬맹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꼬맹이를 보면서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요즘 20대 개발자들은 거의 없어. 씨가 말랐지. 왜? 프로그래머가 힘들다는 거 소문이 쫙~ 퍼졌거든. 특히 SI쪽에는 20대 개발자는 거의 없고 30대 개발자 밖에 안 남아 있지. 심지어 일 없을 때도 몇 십만 원씩 주면서 개발자 잡고 있는 회사도 있어. ‘일이 생겼을 시 지체 없이 계약을 해준다.’ 라는 조건으로 말이야. 지금은 퇴사하고 다른 데에서 일하는 내 사수가 그러하지. 그만큼 기본 실력이 되는 개발자 구하는 게 요즘 회사들의 힘들고 제일 큰 리스크야. 새로 시작하는 스타트업들도 보통 다른 직원 월급은 안줘도 개발자는 지분주고 월급 주고 들어가.”
 
  내 말에 꼬맹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하긴, IT계열이 힘들다. 힘들다 소리만 들었지 이렇게 희망 찬 이야기는 처음 들었을 것이다.
 
 “진짜에요?”
 “……그럼 내가 거짓말을 말하겠냐?”
 “근데 왜 저는 못 들었을까요……. 하긴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그런 이야기 했었어요. 하지만 회사 들어오면서 전부 거짓말인줄로만 알았는데…….”
 
  꼬맹이의 대답에 난 피식 웃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해준다. 간혹 도는 말도 개소리라고 일축할 뿐. 오히려 ‘이 회사를 제외하고는 넌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 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물론 구를 대로 구른 30대 개발자들은 코웃음 치지만, 아직 20살도 안된 이 꼬맹이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나보다.
 
 “그치들은 프로그래머들이 이 회사가 유일한 구원의 밧줄이라고 믿어야 잘 굴릴 수 있으니 당연히 안 말해주지. 최진혁, 그 녀석에게 한번 물어봐. 진짜냐고. 진짜라 할걸? 그 녀석 곧 외국계 회사로 빠진다고 했으니 물어보면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오오…….”
 “내가 널 왜 보석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겠냐? 넌 20대도 아니고 10대야 10대. 아직 20살도 안된 병아리. 내가 볼 때, 넌 어느 정도 소질이 있어. 아마 3~4년도 안 돼서 나랑 비슷해질걸? 그 뒤로는 나보다 더 잘하게 될 테고.”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나는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내 희망 섞인 말을 듣자 꼬맹이는 내가 준 드링크 병을 꼬옥 쥔 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쯧, 말 몇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다니, 참 귀가 얇은 꼬맹이다.
 
 “결국 내가 해준 말도 결과적으로는 ‘일단 버텨라.’ 이 정도 밖에는 되지 않겠네. 흠……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식상하고 한심한 걸? 그래도 일단 네 고민에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일단 실력을 쌓아. 그리고 이직해. 네가 생각하는 ‘너의 가치’보다 넌 더 ‘가치’ 있어.”
 
  내 말에 꼬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한 말은 이곳의 꼰대들이 한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그치들은 이곳을 벗어난다면 끝이라고 말하는 거고 나는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말하는 정도? 내 말에 꼬맹이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풋’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결국, 선배님이 하는 말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과 똑같네요. ‘일단 버텨라.’ 그래도, 훨씬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런데…… 만약 선배 말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장난스러운 꼬맹이의 질문에 난 턱을 쓰다듬었다. 음…… 뭐라고 대답해야 될까? 잠시 생각하던 난 이내 씨익 웃었다. 어차피 장난스럽게 묻는 질문인데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장난에는 장난으로 대답해 주는 것이 예의겠지.
 
 “내가 먹여 살리마. 시집와라. 난 앞으로도 계속 이 일로 먹고 살 자신 있으니까. 네 몫까지 먹여 살릴게.”
 “우와…… 엄청 뻔뻔하다. 선배님하고 나하고 나이차가 10살인데.”
 
  꼬맹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다 마신 드링크와 꽁초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곤, 벤치에서 일어난 뒤, 검지로 꼬맹이의 머리에 딱밤을 먹였다.
 
 “그러니깐 나에게 시집오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라. 알겠냐?”
 
 # 이변
 
 꼬맹이의 가당치도 않은 인생 상담을 해준 지도 어느덧 한 달, 회사는 나름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일단, PM이 가져온 프로젝트는 고객과의 재협상을 통해 픽스 되었다. 내가 맨 처음 고객과 사장에게 보낸 6달 계획으로. 생각보다 부드럽게 일이 끝난 것을 보면, 그쪽도 이쪽 이 자신들의 준 프로젝트를 2달 안에 끝내겠다는 것이 미친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뭐, 약간의 재조정 덕분에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받아야할 계약금 일부가 날아갔지만 어쩔 수 없다.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정이었는데.
 
  아, 내가 힘쓰면 가능한 일정인가?
 
  근데 내가 왜 그일 해야 하나? 돈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그 일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 담당 PM은 사장에게 쓴 소리를 들었고 회사 상급자들 내에서 내 악명은 더 높아졌다. 아무튼, 한 달 전에 그 일 때문에 대머리 오크는 요즘 사사건건 내 주위를 살피며 ‘트집 잡을 거리가 없나?’ 하고 기웃거리고 있다. 바로 지금처럼.
 
 “음? 신 대리. 그리고…… 옆에는 정아 씨? 왜 둘이 같이 있나?”
 
  내 자리를 기웃거리다 내가 꼬맹이와 같이 있자 대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와 내 옆의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주눅 든 꼬맹이와는 다르게 난 대머리와 비슷하게 인상을 팍팍 쓰며 대꾸해 줬다.
 
 “네, 이 꼬맹이가 자기 파트에 모르는 게 있다고 가르쳐달라고 했거든요.”
 “자기 몫의 일은 다 끝냈습니까?”
 “당연하죠. 전, 누구와는 다르게 제 일은 충실히 하거든요.”
 
  명목상 상급자지만 이미 이 대머리와 나는 틀어진 지 오래다.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 당연히 회사 밖이면 서로 모른척한다. 내 대답에 대머리는 아무런 반문도 하지 못한 채 인상을 찌푸리곤 시선을 꼬맹이에게로 돌렸다.
 
 “정아 씨. 인사고과는 별게 아니에요. 사람의 행동거지를 평가하는 겁니다. 인사고과 나쁜 사람 곁에 있으면 나빠질 수밖에 없어요. 신 대리 쪽은 특이한 케이스에요. 사장님과 안면 있는 사이라서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가는 특이 케이스. 정아 씨는 아직 정직원도 아닌데 조심하도록 하세요.”
 “네…….”
 
  대머리의 협박 아닌 협박에 꼬맹이는 찍소리도 못하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와, 이 인간. 진짜! 내가 반격을 위해 입을 열려고 하기 전에, 대머리는 쌩 하니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내가 분노에 이를 바득바득 가는 반면 꼬맹이는 풀이 죽은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람 가지가지로 빡치게 하는군. 웬만해서는 계속 이곳에 있으려고 했는데……. 저 대머리는 자꾸 내 인내심에 한계를 측정하네.”
 “죄송해요. 선배. 괜히 물어봐서…….”
 “아니, 네 잘못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냐? 다 내가 꼬인 탓이지. 그리고, 꼬맹아. 저 인간이 웬만한 인간이라면 그냥 무시하라고 그러겠는데. 저 인간은 무시하긴 힘들 것 같다. 사장에게 물어봤는데 자기 위쪽에서 취직시켜달라고 부탁으로 들어온 인간이란다. 난 괜찮은데, 넌 저 인간에게 찍히면 피곤하니까 앞으로는 인트라넷 메신저로 물어봐.”
 “네.”
 
  꼬맹이가 사라진 뒤, 나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온 몸에 힘이 없고 나른하다. 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았다. 머리가 띵하다. 회사 내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는 나름 평온한 한 달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날 미치게 만드는 악몽
 
  일주일에 한두 번 꾸던 악몽을 지난 한 달 내내 계속 꾸고 있었다. 이미 수면제 처방 받고 있지만, 수면제를 먹어도 악몽을 꾸는 것은 매한 가지였다. 지금은 오히려 수면제를 먹는 것이 두려웠다. 악몽을 꾸면 도중이라도 깰 수가 있는데 수면제를 먹으면 도중에 깰 수조차 없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서랍에서 영양제를 에너지 드링크를 꺼낸 뒤, 함께 입에 털어 넣곤 눈을 감았다. 안 그래도 말랐던 몸은 악몽에 시달려 이제 거의 뼈다귀만 남았다. 현재 몸무게가 55kg, 한 달 전 몸무게가 62kg였으니 7kg가 넘게 빠져버렸다. 피곤하다. 몸은 휴식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지만 정신은 거부한다. 정신과 본능의 괴리.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흠…… 생각해보니 죽는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다. 내가 꾸는 이 빌어먹을 악몽과 기억에서 자유로워진다면…….
 
 ***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사무실 천장이 아닌, 오색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하늘. 아니, 하늘이 아니었다. 천장이다. 현대의 건축공법으로도 불가능할 거대한 돔. 떠받치는 기둥은 하나도 없는, 작은 도시는 거뜬히 들어갈 법한 광활한 공간이었다. 눈을 뜬 순간,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 차렸다. 꿈이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회사 의자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그 사이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그래도 괜찮은 꿈이군.’
 
  꿈속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 꾸는 이 꿈은 내가 꾸는 전생의 기억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기억이라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 내 복장을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로브에 미스릴과 자수정로 만들어진 싸이킥 써클릿. 그리고 푸른 머리카락. 거울은 없지만, 지금은 내 모습은 전생의 모습이랑 똑같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최소한 지옥 같은 꿈은 아니지 않냐? 꿈 중에서 제일 괜찮은 꿈이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나는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돔 주변을 돌아다니던 나와 비슷한 복장의 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어차피 꿈, 저것들은 내가 만들어낸 생각의 파편들이다. 내가 답변을 하지 않아도 인사한 꿈속의 인물들은 답변을 받은 것 마냥 내 옆에 다가와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부 귀로 흘렸다.
 
  이곳에서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과거의 기억에 따라 실에 묶인 꼭두각시처럼 정해진 대로 움직일 뿐이다.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내 동료들은 정해진 말을 떠들다가 사라졌다. 처음에 이 꿈을 꿨을 때는 내 의지대로 해보려 했다. 움직이지 않기도 했고, 바닥에 드러누워 보기도 했다.
 
  하지만, 꿈의 내용은 단 한 치도 오차도 없이 똑같이 흘러갔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주변의 풍경이 스스로 움직여 전생의 내가 가던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고, 드러누운 순간 어느새 또다시 서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사형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사형수처럼 나는 예정된 길을 걸었다.
 
 ***
 
  오색의 돔형 공간 아래, 거대 실험실. 돔형 축구장을 능가하는 커다란 공동 중심에 황금빛 구체가 떠 있었다.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구체.
 
  난 저 구체의 크기를 정확히 안다.
 
  이곳의 길이로 따지면 지름 2m 45cm 7mm 정도. 물론, 저쪽의 빛의 속도와 이쪽의 빛의 속도가 같다는 전제, 그리고 같은 자전주기를 가지고 있다는 조건 하에 따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다. 다른 차원이니 빛의 속도가 다를 수도 있을 수도 있고, 이 행성의 자전속도도 저쪽 내가 살던 세상의 행성자전속도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어때? 아름답지?”
 
  옆에서 들리는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황금빛 구체를 바라보았다. 아름답다고? 그래, 겉보기에는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저건 전생에 내가 살던 세상을 박살낸 흉악한 병기다. 지금 내 감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는 내 기억의 잔재는 홀린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신의 지팡이…… 머리 부분! 행성의 중력장을 조절하는 아티팩트! 저기에 우리가 만든 부품도 들어가 있을 거야. 난 저 위대한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넌 자랑스럽지 않냐? 아르도르?”
 
  옆에서 들리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의 기억속의 환영. 친한 친구였던 녀석의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녀석의 얼굴은 흐릿한 유리창에 비친 얼굴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이 꿈을 꿨을 때는 또렷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 슬슬 잊혀져가나 보다. 흐릿한 기억의 잔재를 무시한 채, 공터 중앙 황금빛 구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것으로 인해 모든 것의 종말이 닥칠 거야. 대지는 찢어지고, 공기는 사라질 테지.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정령들은 분노에 미쳐 날뛰면서 모든 생명체들을 죽일 테고, 극소수의 마법사와 마력 생명체만이 살아남을 거야. 너도 결국 죽어. 분노한 대지, 움직이는 바위산에 의해 짓뭉개져 사라진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야. 저건 마법사의 오만의 상징이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오만. 앞으로 벌어질 그 단 한 번의 실패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이 박살나 버리지.”
 
  물론, 기억속의 나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말단 테크 메이지가 설계한 부품이 저 아티팩트에 사용되다니……. 아직도 잘 안 믿겨지는군.’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뭐, 지금으로 따지면 기술자가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에 사용되는 부품중 하나를 설계해서 정말 꿈만 같아. 내가 자랑스러워!’ 이렇게 대답한 거랑 비슷하겠지.
 
 “꽤나 냉소적이군. 오만이라니.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건가?”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환청인가 싶었지만, 얼마 안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예상치 못한 대답. 내가 아는 대답이 아니었다. 저 기억의 파편은 저런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기억의 잔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억의 잔재는 흐릿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저건…… 내가 알던 기억의 잔재가 아니었다. 저렇게 비틀린 웃음을 짓는 것은 이 세상, 이 꿈속에는 없다.
 
 “넌…… 누구지? 뭐지? 이 건? 꿈이 이렇게 흘러가다니? 넌…… 이런 대답을 하는 존재가 아니야.”
 
  꿈이건만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기억의 잔재를 중심으로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의 소용돌이 뿐인 심연의 공간.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 심연 속에서 흐릿한 얼굴이 천천히 선명해졌다.
 
 푸른 머리카락에 미스릴과 자수정으로 만들어진 싸이킥 써클릿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는 냉혈한 눈
 그리고…… 입가에 있는 비틀린 웃음
 
  괴물의 모습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다. 나의 모습. 정확히 말하면 내 전생의 모습이다. 내 놀라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전생의 내 모습을 한 괴물은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너야. 아니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나는 너의 ‘원본’이야.”
 “원본?”
 “그래, 원본. 넌 그저 ‘복제품’일 뿐이고. 한마디로 넌…… 나를 따라한 가짜란 소리지.”
 
  괴물의 말에 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내 안의 무의식이 형상화된 존재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제품이라니? 이곳은 내 공간. 나의 꿈, 그 자체다.
 
 “개소리. 여기는 나의 꿈이다. 넌,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아.”
 “그러면 왜 이곳에서 못 벗어날까? 응? 넌 이 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 않나? 간단해. 그건 이 꿈이 ‘네 꿈’ 이 아니라서 그래.”
 
  내 말에 답하면서 환영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건 ‘내 꿈’이야.”
 당당한 환영의 말에 당혹스러웠다.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될까? 일단 여기가 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꿈은 자신의 무의식이 발현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은 꿈으로 발현되기 전에 인간의 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의 내용을 ‘검열’이라는 과정을 통해 압축하고 형상화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나’의 모습으로 있는 존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나’라는 표현. 그리고 ‘내 꿈’이라는 표현. 저것은 아마도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이 형상화된 존재가 아닐까?
 
 “날 무의식의 잔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생각을 읽은 것인 듯, 내 모습을 한 존재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왠지 재수 없는 모습이다. 전생의 내 모습은 저러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참자.’
 
  한대 쳐주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이곳에 태어난 지 28년, 태아 때부터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악몽, 변화가 없던 그것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변화였다. 도대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봐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뒤, 난 앞에 있는 환영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의식이 있고, 지금까지 28년간 이곳에서 살아왔다. 현실에서. 하지만 넌 꿈속에서 밖에 존재하지 못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때, 넌 나의 무의식이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아. 전생의 내 외형과 똑같은 모습. 나라는 상징성을 빌려 발현된 내 안의 잠재의식의 파편이지.”
 “걸작이군. 걸작이야. 하하하하!”
 
  수천 개의 종소리가 퍼지는 것처럼 공허가 환영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큰 파동. 아마 현실이었으면 온몸이 진동에 의해 몸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는 조용히 환영이 웃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광소를 터뜨리던 환영은 웃음을 그치고는 정색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난, 네 무의식이 아니야.”
 “그럼 뭐지?”
 “전달자.”
 
  심연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영의 앞에 무언가를 토해냈다. 살색의 작은 형체. 아기였다. 외형적으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난 저것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나다. 현생의 나. 내 어렸을 적의 모습이다. 튀어나온 아기를 집어든 환영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미소 지었다.
 
 “아기는 순결하지. 순백의 존재야. 아직, 자아도, 생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원시적인 백지. 있는 것이라고는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초적이고 순수한 본능밖에 없지.”
 
  섬세하다고 해야 하나? 환상에 불과할 진데 아기는 살아있는 것처럼 옹알거리며 환영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그 아기를 바라보며 환영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왠지 꺼림칙한 분위기. 뭔가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인상을 쓰며 환영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환영은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거기에 기억을 불어 넣는 거야.”
 
 ***
 
 환영의 말을 듣는 순간, 난 환영이 하고 있는 말이 뭔지 눈치챘다. 그리고, 뒤에 나올 말이 대충 무엇인지도. 나를 바라보며 환영은 아이의 머리통을 붙잡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 인간의 기억, 행동, 그리고 생각까지. 일생에 경험했던 것 모두! 한 점도 남김없이! 집어넣는다면……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환영은 아기에게서 손을 뗀 뒤, 그대로 아기를 내려다 놓았다. 환영이 아기를 내려다 놓자마자 아기는 믿기지 않을 속도로 성장했다. 순식간에 어린아이가 되고 소년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기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푸른 머리카락에 비틀린 미소를 가진 남자. 내 앞에 있는 환영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한 아기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완벽하게 똑같은 인간이 탄생하게 되지. 바로 너처럼 말이야.”
 “한마디로 복제품이지. 타인의 복제품. 전생의 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혼이 다른 타인이야. 넌 타인의 기억을 주입받은 존재, 타인을 흉내 내는 꼭두각시일 뿐.”
 
  앞에서 떠드는 환영들의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겨우 저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거창한 준비를 한 건가? 확실히, 저 환영의 말이 맞는다면 환영의 말대로 난 타인의 흉내를 내는 ‘복제품’이나 다름없다. 뭐, 나름 놀라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서 뭐?”
 “음?”
 “어처구니가 없네.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던 도중에 왜 갑자기 나에 대해 말하고 난리야? 닥치고 네가 누구인지나 말해. 뭔 개떡 같은 소리를 하고 앉아있어?”
 
  내 말에 선 환영들은 내 말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넌, 네 자신이 타인의 복제품이란 것이 놀랍지 않은가?”
 “뭘 놀래? 전생…… 아니 네가 주입해준 기억들에서도 있지 않나? 타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 최소정의.”
 “흠…… 넌 애초부터 전생의 자신이 타인이라고 생각했었나? 놀랍군. 클론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인데.”
 
  놀랍다는 듯한 환영들의 대답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환생하면서, 아니, 저 환영들 말에 의하면 환생한 것이 아니지만…… 뭐 아무튼.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난 몇 년 동안 나는 도대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었다. 환생을 했다. 전혀 다른 타인, 전혀 다른 인종으로. 그럼 전생의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과 똑같은 존재인가?
 
  영혼, 기억만 똑같으면 ‘나’인가?
  그럼 신체는 ‘나’라는 개체를 정의할 때 쓸모없는 것인가?
 
  상당히 철학적인 문제였다. ‘나’라는 정체를 정의할 수 있는 최소 단위에 대한 고찰.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사실 이 문제는 전생의 세상에서는 이미 해결된(정확히 말하면 사회적으로 결정된) 문제였다.
 
  생체 클론으로 양산된 마법사, 기억이식으로 동일한 기억이 심어졌을 때, 과연 클론들을 누구로 취급해야 하는가?
 
  전생의 기준으로는 ‘영혼’과 ‘육체정보’, 그리고 ‘기억’이 원본과 동일해야만 같은 인간으로 취급했다. 클론은 기억과 육체정보는 똑같이 할 수 있지만 영혼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전생의 기준으로는 타인 취급한다. 그럼 나는 어떨까? 영혼과 기억은 똑같지만 육체정보가 다르다. 결국, 전생의 기준으로 따지면 나도 ‘타인’이라는 것인데……. 클론으로 만들어진 마법사들이 ‘자신’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처럼, 나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개체라고.
 
  뭐, 그 사실을 인정하면 이 지긋지긋한 악몽의 덜 꿀 줄 알았기에 받아들인 감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오랜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똑같은 의지를 지닌 다른 존재’라는 것. 환영의 말을 듣고 좀 놀랐지만, 오래전부터 전생의 자신을 타인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은 도대체 뭐길래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흠…… 맨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냥 내 안의 무의식일까? 아니면 내 생각대로…….
 
 “그나저나, 네 정체나 말해봐라. ‘전달자’니 뭐니 했을 때부터 살짝 감이 오긴 했지만……. 너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고 싶군.”
 “그래. 확실히, 나에 대해 궁금할 테지…….”
 
  말끝을 흐리며 두 쌍둥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기억 속, ‘내’가 마지막에 행했던 의식, 그 의식의 잔재. 다시 태어난 너에게 ‘나’의 기억을 주입시킨 존재.”
 “전생의 ‘내’가 남긴 기억의 파편, 현생의 너에게 기억을 전달한 전달자. 너의 어두운 면, ‘내’가 시행한 흑마법의 자아. 원래대로라면 네 몸을 차지했을 영혼.”
 
  두 쌍둥이는 번갈아 말하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합쳐지는 육체. 어느새 나 앞으로 다가온 쌍둥이는 하나가 되어있었다. 전생의 내 모습…… 아니지, 저 녀석의 말이 맞으면 내 영혼이 아닌데…… 뭐라 해야 되나? 음…… 아, 모르겠다. 그냥 같은 기억과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내’ 모습이라고 해야겠다.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곤 나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아르도르의 영혼. 이게 내 정체다.”
 
 ***
 
  아르도르
 
  전생의 ‘나’라고 생각했던 이름,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름이다. ‘전달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설마했지만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왜? 저 영혼이 이렇게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게 가능한 일인가? 저 존재에게 전달받은 기억에 따르면 이렇게 ‘나’라는 존재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내가 가진 영혼은 저 ‘아르도르의 영혼’에 의해 쫓겨났어야 했다.
 
  황혼의 시간, 전생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르도르는 폐허가 된 흑마법 연구소에서 ‘환생’에 관한 마법 의식 자료를 발굴해냈다.
 
  환생의 의식
 
  죽음 그리고 환생. 우주의 인과율을 교묘하게 속여서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하는 흑마법 마술을 발견한 것이다. 굉장한 보물, 원래 자신의 직책인 ’말단 테크 메이지’는 접근도 못할 비술이었다. 아르도르는 이 비술이 얼마나 강력한 마법인지 알고 있었다.
 
 전 세계의 마법사들을 통치하는 7명의 하이로드
 
  그 7명의 하이로드 중 ‘영원의 베르단’이라고 불리는 대마법사의 비전절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환생’.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영혼에 통째로 봉인한 뒤, 다른 이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비술. 비록, 육체의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타인’으로 취급되었지만, 역대 하이로드들 중 ‘영원의 베르단’은 항상, 그리고 언제나 존재했었다. 이 비술을 발견한 뒤, 아르도르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 아르도르가 세운 계획의 결실이 바로 자신이었다.
 
  이곳, 이 세상에서 태어난 ‘아르도르의 기억과 영혼을 가진 존재’. 근데…… 저 존재가 아르도르의 영혼이라니?
 
 “이상하군. 말이 안 돼. 네가 ‘아르도르의 영혼’이라고? 내가 행했던 흑마법 의식은 완벽했어. 순서도 틀리지 않았지. ‘나의 영혼’이 갓 태어난 아기의 영혼을 밀어내고 이 몸에 안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맞아! 내가 행했던 의식은 완벽했어!”
 
  내 대답에 내 앞의 환영은 흥분하며 외쳤다. 그리곤 분하다는 듯이 로브 옷자락의 쥐고는 날 바라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다.
 
 “원래대로라면 난 그 몸을 차지해야 했어! 하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에 떨어지면서 불가능하게 됐지. 마력이 없는 세상이라니! 지옥 같은 곳이지! 아니 차라리 지옥이 더 나을 거다. 지옥은 분명 마력이 있을 테니까! 덕분에…… 난, 흑마술 의식의 마지막 부분을 수행하지 못했어.”
 “마지막 부분이라…….”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억들. 그 기억들 중에는 아르도르가 행했던 의식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 흑마법 의식의 최종 단계는…… 들어갈 몸에 있는 아이의 영혼을 쫒아내는 것이었다. 영혼인 상태에서 하는 최종의식. 그리고 그 과정에는 마력이 필요했다. 굉장히 많은 마력이. ……아하! 이런 말이었나?
  아르도르의 영혼을 보며 나는 천천히 내키지 않는 말문을 열었다.
 
 “아이의 영혼을 쫒아내기 위해서는 의식을 행해야 하고…… 그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마력이 필요한데……. 이 세상에는 마력이 없지. 네 영혼에 속박되어 있는 마력으로는 그 의식을 진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맞다.”
 
  내 말에 환영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빌어먹을 세상 때문에 나는 네 몸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어. 인간의 무의식 가장 깊숙한 곳,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심연의 공간에 말이야. 정말…… 끔찍했어.”
 
  끔찍했다는 것을 표현하듯이 환영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난세월동안 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가기 위해서 계속 발버둥 쳤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지. 아직까지 유효한 흑마법을 이용해…… 아기에게 끝임 없이 나의 기억과 감정, 생각들을 주입시키는 것. 아기의 영혼과 자아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 물론, 이 시도는 실패했지. 네 영혼은 그 충격을 수월하게 버텨내더군.”
 
  환영의 말에 난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이 녀석의 말은 그동안 날 괴롭힌 정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백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지금까지는 악몽의 원인이 나 자신인 줄 알아서 참고 넘어갔는데…… 저렇게 원흉이 있었다니! 쌍욕과 함께 주먹이 나가려는 것을 참으며 나는 천천히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동안 나를 괴롭힌 원흉이 바로 너였군?”
 “음…… 맞아. 너에겐 괴롭힘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군.”
 
  주먹을 꽉 쥐었다. 후우우…… 진정하자…… 일단 저 녀석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고 주먹을 날려도 충분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라는 자아의 기반이 된 아르도르의 생각과 기억은 냉혹하고 음흉했다. 저 녀석도 이런 생각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똑똑하고 교활한 저 녀석이 이렇게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들을 말할 리가 없었다. 아, 물론, 나는 냉혹하고 음흉하지 않다. 마음만큼은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임. 잠시 진정의 시간을 가진 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28년간 내 무의식 아래에 있다가 이 사실을 말하는 이유가 뭐지?”
 “왜냐고? 이제 곧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너에게 제안을 하려고 하는 것이지.”
 “중요한 변화?”
 
  내 반문에 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꿈꾸는 듯한 미소. 마치 연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미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르도르의 모습 중에서…… 저런 모습을 한 기억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저 냉혈한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내 궁금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영은 꿈꾸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력.”
 “마력?”
 “그래, 마력!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어…….”
 “미친 소리. 이 세상에 마력은 없어.”
 “그래 나도 알아. 이 세상에는 마력이 없. 었. 었. 지. 하지만…… 의식과 영혼만 남은 나는 느낄 수 있어. 시간과 공간을 찢고 이곳을 향해 오는 마력의 힘이. 희미하지만…… 점점 강해지고 있어. 그 축복받은 힘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지금도 희미하지만 이 세상에! 이 대기 중에! 떠돌고 있어. 흥분되지 않나?”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떠는 환영. 흥분에 부들부들 거리는 환영과 달리 나는 시큰둥했다. 흠, 저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기쁘긴 하겠다만……. 저렇게 부들부들 떨 정도로 기쁘지는 않았다. 그만큼 마력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흥분에 몸을 떨었던 환영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 사실을 파악한 순간…… 나는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을 이용해 지금까지 지속되는 흑마법 의식의 술식을 수정해서 네 앞에 나타나기로 결심했지. 그래서…… 오랜 시간 끝에 나는 이렇게 너와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양팔을 벌리며 오만하게 말하는 환영. 환영을 향해 나는 조롱의 의미 비슷한 박수를 쳐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제안은 뭐냐?”
 
  내 심드렁한 질문에 환영은 씨익 웃은 뒤,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력을 갈구하는 마법사. 마력이 사라진 순간, 난 어마어마한 박탈감을 느꼈다. 너도 나와 같겠지?”
 “맞아. 충격이었어. 아주.”
 
  사실이다. 엄청나게 충격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마력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 먹고 발광하던 것이었으니까. 뭐,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환영의 반응을 보니 저 환영은 아직까지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당연히 마법을 사용하고 싶겠지?”
 “당연하지.”
 
  당연히, 나도 마법을 사용하고 싶다. 없어도 이냥저냥 살아갈 수 있지만, 편리한 수단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인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환영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나를 받아들여라.”
 
 ***
 
 환영의 말에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긴 나완 달리 환영은 양팔을 벌린 채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도 알지? 생명체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
 
  환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안다. 저 녀석의 기억을 전부 이어받았으니까. 생명체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은 총 3가지다.
 
  첫 번째는 마력,
  두 번째는 뛰어난 육체,
  마지막 세 번째는 영혼이다.
 
  영혼이 있어야 정신력이 존재할 수 있고, 정신력이 있어야 정신력에 반응하는 마력을 응집시킬 수 있다. 그리고,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육체가 있어야 술식을 계산한 뒤 마력을 배치시켜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 단 한 가지라도 만족을 시키지 못한다면 마법은 발동하지 않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환영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당연히 영혼이 강할수록 강한 마법사가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영혼이 강하다는 것은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정신력이 강할수록 그에 반응하는 마력량이 많아지고 마력량이 많아져야 자연스럽게 고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내 긍정에 환영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네 육체를 차지하면 어떻게 될까? 알 다 시피, 난 매우 강한 영혼이다. 행성이 박살난 폐허, 지옥 같은 아수라장을 경험하면서 내 영혼은 단련될 대로 단련되었지. 겨우 8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이로드 급의 마력을 갖춘 강자가 되었으니 말이야. 참 아쉬워, 만약 황혼의 시간이 오지 않았다면 7명의 하이로드 중 한 명이 되었을 텐데 말이지.”
 
  입맛을 다시는 환영. 저 말도 사실이었다. 아르도르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행성이 붕괴한 지옥 같은 환경에서. 50년이 넘도록. 혼돈의 시대에 있었던 하이로드 급 강자. 그가 바로 아르도르였다. 만약 아르도르가 이 육신에 깃든다면, 그리고 저 환영의 말대로 이 세상에 마력이 존재한다면, 난 얼마 지나지 않아 굉장히 뛰어난 마법사가 될 것이다. 나를 바라보며 환영은 은밀한 목소리로 유혹했다.
 
 “엄청난 기회지 않은가? 아주 강력한 마법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진짜 너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기회이기도 하고.”
 
  이 시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영혼을 포기하고 힘을 얻다니? 악마의 계약과 별 다르지 않는가? 하지만, 전생에는 저런 비슷한 제안에 홀라당 넘어가는 마법사들이 은근히 많았다.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현대의 관점으로는 영혼을 굉장히 귀중한 무언가로 생각하지만, 전생의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영혼이라는 것은…… 음……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래, 컴퓨터의 부품으로 비교하자면 영혼은 [서브 메모리 + 변압기] 합친 것과 비슷하다.
 
  어느 정도 기억을 저장하면서, 외부의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전압으로 만드는 변압기.
 
  마법사들에게 영혼은 ‘자신’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중 하나’였다. 너무 가볍게 표현한 감이 많지만, 대충 마법사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덤으로 육체는 [메인 메모리 + 본체], 마력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전력]으로 취급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영혼을 자신을 구성하는 필수요소라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몇몇 또라이 새끼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마법사들 중에서 이 또라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자아를 구성하는데 영혼을 어느 정도 중요한 요소로 보긴 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 또라이들이.
 
  덕분에 새로운 영혼을 구해서 억지로 갈아 끼우는 포제스드 메이지(Possessed Mage)도 있었다. 물론,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법이었다. 생각해봐라, 다른 마법사를 습격해서 영혼을 뽑아낸 뒤, 그 영혼을 이식하는 미친놈들을. 악마를 소환한 뒤, 악마의 영혼을 자신의 몸에 넣는 놈들을.
 
 ‘젠장.’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꿈속이건만 식은땀이 흐르다니.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는 그걸 매우 혐오한다는 것이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닦아낸 뒤, 난 환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넌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아?”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환영. 심연과도 같은 눈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동공. 그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공포에 떠는 듯한 모습. 영락없는 희생양의 모습이었다.
 
 “영혼은 그저 ‘너’라는 자아의 여러 가지 부속품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너도 인정하지 않나? 영혼 약탈자 아르도르?”
 
 ***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내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 그래, 맞다. 젠장, 전생의 나는 그 미친놈들 중의 하나였다. 아니, 미친놈들 중에서 제일 악명 높았지.
 
  영혼약탈자 아르도르
 
  내 기억 중 하나이다. 전생의 내가 발굴했다는 비술의 주인 ‘영원의 베르단’. 그가 항상 하이로드 중 하나였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사실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할 것이다. 영혼이 빠져나가 환생하는데, 그 환생의 기간 동안에는 공백이 있을 터. 어떻게 계속해서 하이로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진실은 간단했다.
 
  그 자신의 영혼을 뽑아내어 환생의 굴레에 집어넣은 뒤, 남은 육체는 ’포제스드 메이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불법이 아니었다. 남의 영혼을 빼앗는 게 아닌, 불운하게 불상사로 죽은 메이지의 영혼을 보관해 이식시키는 것이니까. 평범한 영혼을 이식하는 것이었지만, 베이스가 되는 육체 그 자체가 워낙 뛰어나기에 포제스드 메이지가 된 베르단은 계속해서 하이로드의 한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환생한 베르단이 나타나 하이로드에 도전하면, ‘전대의 베르단’, ‘환생한 베르단’ 두 명이 실력을 겨룬 뒤…….
 
  ‘한 명을 죽여 버리고’
 
  ’살아남은 베르단’이 하이로드의 자리를 이어 간다. 이렇게 해서 베르단은 항상, 그리고 언제나 하이로드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베르단의 비술을 익히면서 당연히 아르도르는 포제스드 메이지(Possessed Mage)의 비술 또한 같이 익혔다.
 
  황혼의 시간 당시, 아르도르는 내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적대적인 정령들, 부족한 식량과 자원, 야만적인 폭도들, 속박이 풀린 제어 불가능한 키메라…… 공포에 안 질린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미쳐버린 세상, 심약한 이들은 모두 자살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생존을 원했다.
 
  아주, 매우. 지독할 정도로.
 
  베르단의 비술을 익힌 뒤, 아르도르는 빠르게 실력을 쌓았고, 간혹 자신보다 더 뛰어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면 상대방을 죽인 뒤, 그 영혼을 ‘약탈’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당장 제압당했겠지만, 황혼의 시간이 닥친 그 때에는 누구도 아르도르를 제지할 수 없었다. 평화로운 이곳에 도착해서야, 나는 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아르도르는 미쳐있었다. 아니, 미치광이 괴물이었다. 그 자신도 피해자나 다름없는 미치광이 괴물.
 
  공포에 질려있던 자신은 다른 이들에게 더 큰 공포의 존재였다. 이곳에 와서 나 자신에 대해 고찰할 때, 나는 ‘전생의 나’라는 존재를 다른 존재로 규정지었다. 어떻게 보면 도피이기도 했다. 내가 저질렀던, 나 자신도 피해자나 다름없는 죄악으로부터의 도피. 지금 저 환영은 그 추잡스러운 짓을 다시 하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고뇌와 성찰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영혼을 애도했다. 평화로운 곳에서 어느 정도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나완 달리, 이 불쌍한 영혼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아직까지도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벌이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고 환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심연과도 같다고 생각했던 눈동자. 그 눈동자에 서린 것은 심연이 아니었다. 공포의 질린 자신의 모습, 겁쟁이의 공포였다.
 
 “거절하도록 하지.”
 “왜? 왜 이렇게 좋은 기회를 거절하지?”
 “너를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나’가 아니게 되어버려. 난 이미, 스스로 완벽한 존재야. 너를 필요로 하진 않아.”
 
  내가 거부를 표하는 순간 환영의 얼굴은 일그러지더니 이내 악귀처럼 변해버렸다. 아니, 악귀로 변했다. 인간의 형체가 아닌, 거대한 육신에 수천 개의 얼굴을 가진 악귀가. 악귀에 달린 수천 개의 얼굴들, 전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애처롭군.’
 
  악몽에서 나올 법한 무서운 외형이지만 나는 그 모습을 동정했다. 나는 저 얼굴들이 무엇인지 안다. 영혼을 약탈한 뒤, 약탈한 영혼에 남아있던 공포의 기억들이다. 아르도르, 그 자신에 대한 공포. 그 자신이 자신을 고문하고 있는 꼴이었다. 내 측은한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귀로 변한 환영은 내 몸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몸에 달린 수천 개의 입으로 음성을 내뱉었다.
 
 -내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대우해 줬더니…… 겁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수천을 얼굴을 가진 마귀로 변한 환영이 나를 움켜쥐었다. 무서운 형상? 아니다 비참한 형상이다. 내 코앞 얼굴을 들이댄 채 으르렁거리는 괴물을 바라보며 나는 속박당한 와중에서도 태연하게 품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이 꿈속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담배.
 
  담배를 입에 문 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과거의 망령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괴물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아르도르의 모습이 아닌 현실의 나, ‘신도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롭게 변한 내 모습에 괴물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너…… 어떻게……? 설마 그 모습은?
 “넌…… 몇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어.”
 
  온 몸에 끔찍한 격통이 몰려왔다. 그리고 시야가 돌아갔다. 흩날리는 살점과 그 위로 보이는 거대한 괴물. 괴물의 손에 있던 나는 산산이 터져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괴물이 손안에 있던 날 으스러뜨린 것이다. 하지만, 온몸이 으스러지는 와중에서도 내 정신과 의식은 존재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빌어먹을……. 내심 준비하고 있었지만, 진짜 더럽게 아프네. 이를 악물고 양팔로 바닥에 떨어진 으스러진 상반신을 일으키며,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이곳이 내 무의식속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 지금까지 이 악몽에 저항할 수 없었던 가장 이유는 변화하지 않는 꿈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을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책감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어. 하지만, 타인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끝까지 저항할 수 있어. 비록 내 정신력이 너를 상회하지 못해서 이곳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은 마음대로 되는 것 같군.”
 
  괴물은 비참하게 바닥아래에서 기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접근했다. 몸이 으스러졌지만, 나의 몸은 서서히 상반신을 중심으로 응집하고 있었다. 아직 뼈밖에 없는 다리로 일어서며 나는 괴물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네 두 번째 실수는…… 지금까지 나에게 끊임없이 기억을 주입한 거야.”
 
  심연이 움직였다. 그리곤 수천의 창살이 되어 괴물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불길한 영기가 넘실거리는 흑색의 창살. 무의식에 의해 창살로 표현되었지만 이것은 창살 따위가 아니다. 아르도르가 ‘환생의 의식’ 때 사용하였고, 아직까지 남아있던 ‘흑마법의 기운’이었다. 코앞에서 창살에 가로막힌 괴물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그 지옥 같은 악몽에 시달리면서 나는…… 내 정신은 단련되었지. 비록 현실은 아니었지만, 내가 저질렀던 죄악들에 대해 괴로워했어. 솔직히, 지금은 홀가분해. 그 죄악들이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니 말이야. 난, 네가 아는 마법을 모두 알아. 그리고 어떻게 하면 너를 쫒아낼 수 있는지도 알고 있지. 마지막으로, 네 지옥 같은 기억을 겪으면서 마법을 시행할만한 정신력도 갖추었어. 너에 비하면…… 너무 미약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홈그라운드 이점이 있지.”
 
  창살에 가로막히자마자 아르도르는 자신을 가로막은 창살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그리고 빠르게 박살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가는 술식들.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공할 정신력 이었다. 얼마가지 않아 이 창살을 구성하는 수식은 수정되고 박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의 약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네가 흑마법을 수정해서 나와 만났다는 것을 말한 순간부터…… 나는 너를 배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내 안에 있는 영혼. 내 몸에 깃든 흑마법. 그 마법의 술식을 너와 대화할 때 몰래 약간 수정했지. 정말 다행이야. 내가 내 안에 있는 마력을 느낄 수 있다니. 난 솔직히 너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거든.”
 
  괴물 주위로 쳐진 창살 위로 수천 개의 쇠사슬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검붉은 쇠사슬. 불길한 영기를 뿜고 있는 쇠사슬을 보는 순간, 괴물의 표정에서 다급함과 죽음의 공포가 어렸다. 발작적으로 창살을 해체하려는 괴물. 창살이 박살나기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하지만, 내가 더 빠르다. 창살을 휘감은 쇠사슬 위로 손을 올렸다.
 
 “만약 너를 받아들였다면…… 너도 얼마안가 네가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반성할 수 있겠지. 지금의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주입한 기억들을 내가 저질렀던 것으로 알고 엄청 많이 죄책감을 느꼈거든. 지금 넌,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미쳐있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쇠사슬 위에 손을 올린 순간, 쇠사슬에 닿은 손끝을 중심으로 섬광과 함께 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는 출구가 생겼다. 무의식의 공간이 아닌, 몸 밖으로 나가는 출구. 만약 저 방벽으로 나간다면…… 더 이상 흑마법 마술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아르도르의 영혼은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다. 지금, 창살이 해체되는 속도라면……. 아르도르는 빠져나가지 못한다.
 
 “물론, 너에게 육체를 양보해서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겠지.
 
  내 말에 괴물의 얼굴들에게서 일순간 희망이 어렸다. 아주 미약한 희망, 겁에 질린 괴물을 얼굴을 보며 나는 씨익 웃어줬다.
 
 “하지만, 난 내 영혼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하는 호구 새끼가 아니야.”
 
  출구가 서서히 창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아르도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화해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쇠사슬들을 붙잡았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비명에 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너, 내 영혼. 내 영혼을 봉인이라도 시켜줘. 아니, 아니! 그냥 아무 짓도 안하고 이곳에 있을게! 제발……! 이대로 가면…… 난 죽어버린다! 너도 나에 대해 잘 알잖아. 난…… 너야!
 “아니, 넌 아르도르가 아냐. 아르도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 넌, 타인의 영혼이야. 아르도르의 기억을 가지고 아르도르의 흉내를 내는 타인의 영혼. 너도 나와 다를 바가 없어. 너를 동정한다. 괴물아.”
 
  지금껏 다른 누군가에게 공포가 되었던 괴물은 공포에 질려 애처롭게 비명을 질렀다. 두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건 자신이 일으켰던 죄악이기도 했으니까. 괴물이 갇힌 쇠사슬로 휘감긴 감옥이 점점 밖으로 빨려 들어가고, 이제는 극히 일부분만 남았을 때, 괴물은 두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는 탈출하는 것을 체념한 듯싶었다. 나를 바라보며 괴물은 섬뜩한 목소리로 마지막 단발마를 외쳤다.
 
 -최후의 날……! 결국 너도 나와 같은 기억,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상…… 나와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괴물은 완전히 밖으로 빨려 들어갔다. 괴물이 빨려 들어간 문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괴물의 마지막 말, 확실히 나는 그와 많이 닮았다. 기본 베이스가 되는 생각과 기억이 똑같으니까.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보다 주입받은 기억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아마 똑같은 극한 상황이 닥치면……. 그 미친 짓을 할지도 모르지.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말이야.
 
  ‘나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 라는 오만한 다짐은 하지 않았다.
 
  황혼의 시간을 겪으면서 난, 인간의 다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리창처럼 깨지기 쉬운 것인지 경험했다. 난 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 공허한 결심대신, 난, 내 영혼을 포기해야 될 정도의 극한 상황이 닥치는 과정, 그 자체를 막아낼 것이다. 지금의 나, 내 생각과 결심을 유지하기 위해.
 
  하지만, 일단 지금은 나를 괴롭히던 괴물을 쫒아낸 것에 자축할 때다.
 
  괴물이 빨려들어간 문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젠, 악몽과는 영원히 안녕이다. 중지를 들어올리며, 난 지옥으로 갔을 괴물을 향해 마지막 말에 대한 답변을 내뱉었다.
 
 “fuck ➚ you ➘”
 기분 나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뇌가 흔들리는 느낌. 외부의 충격을 인지하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흐릿하지만 익숙한 광경. 사무실 내부였다. 그리고, 내 앞에서 어른거리는 이 붉은 문어는…….
 
 “신 대리! 업무시간인데 낮잠을 자나? 회사가 집이야?”
 
  다시 한 번 머리를 때리는 불쾌한 충격. 대머리의 손에 들린 서류철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아주 세게는 아니지만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이 인간, 은근슬쩍 쇠로 되어있는 부분으로 때리네.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맞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 앉았다. 자리에 앉은 채, 은근슬쩍 곁눈질로 나를 보는 사람들. 사무실 분위기를 보니 대충 어떻게 일이 흘러갔는지 알 수 있었다. 업무시간에 내가 그만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꿈…….’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내가 꾼 꿈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 처음으로 꾼 악몽이 아닌 꿈. 그 꿈에서 나는 ‘아르도르의 영혼’을 만났고, 결국 그 영혼을 몸 밖으로 보내버리는데 성공했다. 개꿈은 아닐 것이다. 개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이었으니까. 개꿈이 아니라면…… 꿈속에서 말했던 내용들은 사실이라는 것일까? 망령이 했던 이야기들. 그중에서 다시 마력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는…….
 
 “신. 도. 림. 씨……? 지금 제 말 무시 합니까?”
 
  바로 앞에서 들리는 성난 목소리에 난 그제야 내가 처한 상황을 인지했다. 내가 잠들고 대머리가 내 머리를 치고 있는 상황. 그냥 ‘죄송합니다.’ 한마디하고 끝내면 좋겠지만…… 이 대머리의 눈을 보니, ‘아주 잘 걸렸다!’하는 심보가 줄줄 흘러 내렸다. 아마 내가 무슨 말을 꺼내든 말도 안 되는 독창적인 꼬투리를 잡아서 2~30 분은 지랄 할 것 같았다. 그냥 싸늘하게 무시하면 좋겠다만…… 이건 내가 잘못한 것이니 어찌 피할 도리가 없다.
 
 ‘후…… 젠장.’
 
  짜증이 솟아올랐다. 그냥, 저 면상에 주먹 날리고 다 때려치울까? 손이 근질 거렸다. 무언가 만져지는 듯한 느낌이다. 아니, 손뿐 만이 아니다. 온몸에서 미묘하게 근질거리는 이 느낌. 마치, 마력을 처음 느낄 때처럼…….
 
 ‘마…… 력?!’
 
  느껴지는 근질거림이 마력을 처음 느낄 때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순간, 머릿속이 섬광으로 휩싸였다. 머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섬광은 몸의 척추를 타고 온몸의 신경을 따라 흘러들었다. 섬광이 몸 안의 신경들을 휘감으면서 전혀 새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피부의 감촉, 오감으로 표현되었던 엉성한 느낌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 마력의 느낌이었다. 그래, 이거다. 마력.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힘. 꿈속에서 만났던 아르도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지금? 이렇게 나타났을까? 이 세상은 마력이 없는 곳일 텐데?
 
  피가 떨어졌다.
 
  코에서 흐르는 피. 그것도 쌍 코피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답답한 가슴. 폐 안에서 차오르는 무언가를 기침과 함께 뱉어냈다. 새카만 피. 쌍코피와 피를 토하는 내 모습에 사무실 공기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대머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서…… 선배님! 누…… 눈이.”
 
  새빨갛게 변한 꼬맹이가 날 보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새빨갛다. 아마 눈에 실핏줄이 터져서 이런 것 같은데…… 눈이 껄끄럽다. 천천히 숨을 들이 쉰 뒤, 코피를 닦으며 나는 대머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 너무 피곤합니다. 병원…… 쿨럭, 병원에 좀 갈 수 있을까요?”
 “어…… 그…… 그래, 몸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빨리 가보게.”
 
  내 질문에 대머리는 바로 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사라졌다. 대머리가 사라지자마자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힘. 온몸이 화끈 거렸다. 익숙지 않은 통증에 휘청거리자 옆자리에 있던 진혁이 녀석이 빠르게 날 부축했다.
 
 “괜찮냐? 너? 한 번도 안자던 낮잠도 자고…….”
 “괜찮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괜찮다. 몸이 아프고 온몸에서 피를 쏟았지만 이건 어느 정도 당연한 현상이니까. 이건 기존에 있던 신경에 새로운 신경, 속칭 ‘마력회로’가 새겨지는 현상이다. 중요한 중추신경에서부터, 손끝의 말초신경까지 전부! 온몸의 신경이 뒤바뀌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자극이 심하다.
 
  원래대로라면 철저히 대비하고 각성해서 충격을 최소화 하겠지만, 난 너무 갑작스럽게 마력회로를 개화해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각성하는 와중에서도 정신을 붙잡아 충격을 최소화하고 제대로 된 마력회로를 개통했다는 거다. 만약, 아까 대머리가 각성 순간에 내 머리를 때렸으면…… 마력이 폭주해 내출혈로 뒤졌을 거다.
 
 ‘후…… 죽을 뻔했구만.’
 
  천천히 몸을 추스르며 발을 내딛었다. 눈이 따끔거려서 눈을 만져보니 이젠 눈에서도 피가 줄줄 흐른다. 아무래도 한번 화장실에 들러서 피 좀 닦고 난 뒤에 나가야겠다. 내 모습에 기겁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119를 누르려는 꼬맹이를 보며 난 고개를 저었다.
 
 “119 부르지 마. 내가 가던 병원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돼.”
 “네, 근데 119를 부르는 게…….”
 “119 불러봤자 결국 응급실 갔다가 그 병원가게 되어있어. 게다가, 보기엔 심각해 보여도 이건 별것 아니야.”
 
  한 여직원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눈, 코, 입에서 피 줄줄 흘리며 하는 말이라 별 신빙성 없어 보이겠지만, 진짜 별것 아니다. 내가 피를 닦는 와중에 진혁이는 꼬맹이에게 자기 차키로 보이는 열쇠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정아야. 너 운전할 줄 알지? 내 차 열쇠 줄 테니까, 도림이 데리고 가라. 저 녀석 저 상태로 아무것도 못한다.”
 “괜찮아. 나 혼자…….”
 “우리야 말로 괜찮아. 정아가 하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간단해. 우리가 일만 조금 더 분담하면 될 정도야. 근데 너 쓰러지면 일 완전히 펑크 난다.”
 “그건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내가 일 펑크 낸 거 본적 있어?”
 “아무튼 정아가 병원 데려다 줄 거니까. 같이 가라.”
 “……그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꼬맹이와 함께 회사 주차장에 있는 진혁이 녀석의 소형차에 탑승한 뒤, 난 뒷좌석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난 운전석에 앉은 꼬맹이에게 입을 열었다.
 
 “꼬맹아.
 “네“
 “진성 빌딩 쪽 사거리 알지? 이쪽에서 진성 빌딩 쪽까지 간 뒤, 우회전 해. 그리곤 쭉 직진해. 그러면 5~10분 이내에 공원이 나올 거야. 일단 거기까지 데려다줘.”
 
  말하자마자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고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꼬맹이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동안, 난 눈을 감은 채 내 주변을 떠도는 마력을 느꼈다. 대기 중의 마력. 정신력으로 마력을 응집해 빨아들인 뒤, 몸 내부로 투사시켰다. 몸 내부에 흘러들어간 무형의 마력은 내 의지에 따라서 몸 전체를 휘돌며 어느 순간에는 유형의 물질로, 또 어느 순간에는 무형의 물질로 변화하며 몸 내부를 휩쓸었다.
 
 ‘이제 거의 끝났군.’
 
  몸 내부를 관조하며 피를 닦던 수건을 내려놓고 피범벅이 된 상의도 벗었다. 그리곤 바지 호주머니에서 회사를 나올 때 몰래 서랍에서 꺼내 가지고 온 송곳을 꺼냈다. 사무용 치고는 매우 길고 날카로운 송곳. 송곳을 한 번 바라본 뒤, 난 운전하고 있는 꼬맹이 몰래 내 가슴팍에 송곳을 꽂아 넣었다.
 
  가슴이 관통되는 아픔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이를 악물고 소리가 안 나게 서서히 그리고 깊숙이 송곳을 가슴에 박아 넣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명백한 자살행위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자살행위가 아니다. 일종의 치료행위다. 몸 내부의 마력 흐름을 느끼며 나는 심장으로 들어가는 대정맥부위를 정확히 인지하고 송곳으로 꿰뚫었다. 그리고 송곳이 대정맥을 꿰뚫는 걸 확인하자 곧바로 송곳을 뽑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
 
  방금 전까지 덮고 있었던 수건을 상처 주위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에는 흘러나온 피가 수건을 적셨으나, 이내, 피가 아닌 노르스름한 기름덩어리들이 고름처럼 상처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내 몸의 혈관 사이에 꼈었던 노폐물들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력을 투사해 완전히 분해해서 땀구멍으로 배출해버리는 폐기물들
 
  하지만 지금 나에겐 그 정도의 정교한 마력 컨트롤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온몸에 혈관에서 모은 노폐물들을 전부 대정맥 쪽으로 모은 뒤, 가슴을 꿰뚫고 대정맥에 상처를 내서 직접적으로 뽑아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한결 낫군.’
 
  상처 사이로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기름덩어리와 검은 핏덩이들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잠시, 몸 안에 있었던 노폐물을 뽑아낸 뒤, 다시 피가 흘러나오자 천천히 가슴 부분을 치료마법으로 지혈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 색으로 보인다. 대정맥이 막혀 가슴이 옥죄는 고통도 사라졌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꼬맹이는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다음은 어디로 가죠?”
 
  어느새 자동차는 내가 가자고 했던 공원 앞이었다. 가슴에 대었던 수건을 떼어낸 뒤, 난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병원에 갈 필요는 없어.”
 “네? 지금 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요? 게다가, 병원 갈 필요가 없다뇨? 그렇게 피토하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건 내가 앓던 지병 중 하나야. 요즘 약을 잘 안 먹어서 이렇게 된 거지.”
 “아니, 그건 선배님이 아니라 의사가…….”
 “네가 날 걱정해주는 것 잘 알겠는데…… 꼬마야, 난 멍청이가 아냐.”
 
  차 안에 있는 물티슈로 얼굴을 닦으며 꼬맹이에게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대답에 꼬맹이는 놀랬는지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꼬맹이를 보며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나도 내 목숨 소중하고, 죽기 싫어해. 위험하다 싶으면 병원에 갔을 거야. 너희들은 처음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런 것을 자주 겪었거든. 괜찮아. 더 이상 병원가라고 뭐라 그러지 마. 자세히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신의 주장만 하는 것은 더 이상 호의가 아니야. 쓸데없는 오지랖이지.”
 
  내 말에 충격 받은 듯 아무런 말을 못 하는 꼬맹이. 음…… 마음에 찔리지만 어쩔 수 없다. 벗었던 옷을 다시 걸치며 난 꼬맹이에게 입을 열었다.
 
 “차갑게 말해서 미안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네 호의는 알겠어. 고맙다 꼬맹아. 이렇게 오랜만에 나온 거, 좀 놀다가 그냥 퇴근해라. 최근 며칠간 너 휴일도 없이 맨날 회사에서 야근 했잖아? 공짜로 받은 휴일이라 생각해. 진혁이에게는 차, 나중에 가져다준다고 내가 말할 테니까 말이야.”
 
  아까 꺼냈던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5만 원권 3장, 내 지갑에 있는 돈 전부다. 그 돈을 난 꼬맹이 옆에 내려놓았다.
 
 “이건 내가 주는 보너스라 생각해라. 맛있는 것도 좀 사먹고. 아무튼 고맙다.”
 
  말을 끝으로 난 빠르게 자동차에서 내렸다.
 
 ***
 
  내가 내리자마자 꼬맹이가 운전하던 자동차는 아무 말도 없이 쌩하니 사라졌다. 내가 싸늘하게 말했을 때 살짝 울먹거리던 표정을 생각하면…… 흠…… 내가 나쁜 짓했다. 사실, 너무 심하게 말했지. 나중에 한 번 더 사과해야겠다.
 
  하지만 병원에 가기도 뭐했다.
 
  몸에 이상이 없을뿐더러 뭔가 복잡한 검사도 많이 해야 될 텐데……. 그동안 까먹는 시간과 혹시라도 내가 뭔가 일반인과 다른 신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또 일이 복잡해진다. 꼬맹이 성격상 나를 부축해서 병원까지 끌고 갈 텐데, 그리고 진찰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텐데 어떻게 도중에 도망칠 명분이 없거든. 차라리 이렇게 빨리 끊어버리는 게 낫지.
 
 ‘그나저나…… 마력이 있다니? 이게 도대체 뭔 일이지?’
 
  가지고 있던 수건과 휴지를 근처 쓰레기통에 버린 뒤, 공원 벤치에 앉았다. 나른한 햇살, 그리고 대기 중에 존재하는 마력.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턱을 매만졌다.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말아야할 힘. 그 힘이 나타났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아직, 이곳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건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대사건이다.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벌어졌거나.
 
 ‘일단,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겠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단순하게 마력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뭔가 큰일이 닥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혹시라도 닥칠지 모르는 극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오랜 보관이 가능한 비상식량과 통조림 류 식료품들을 사놓고, 비상시에 쓸 만한 물품들을 사놓고나 제작한다. 그리고, 정보에 귀를 기울여야겠지.
 
  딱히, 내가 직접 나서서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큰 사건이 터진다면 이곳의 발전된 통신망으로 순식간에 인터넷으로 퍼져나갈 테니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한 뒤, 난 벤치에서 일어섰다. 앞으로의 준비도 좋지만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니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왔다. 거의 한 달간 설친 잠. 피도 토하고 난리를 쳤더니 너무 피곤하다. 오피스텔도 코앞이니 돌아간 후, 샤워하고 한숨 푹 자야겠다.
 
  악몽 없는, 즐거운 수면을.
 
 # 악당이 나타났다!
 
 마력회로를 개화한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아직까지 세상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평화로웠다. 안타깝게도 난 전혀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진짜로 3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면 그냥 속 편하게 걱정을 놓아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나만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점점 강해지는 대기 중의 마력농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위부피당 마력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서서히, 그러면서도 꾸준히. 마치 차오르는 물병을 보는 것 같달까? 계속 아무런 이상 없이 꾸역꾸역 물이 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병이 다 찼을 때…… 왈칵! 흘러 넘쳐버리는 것처럼, 어느 순간 임계를 지나면 무언가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런 예감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만약에, 만에 하나 닥칠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난 적금을 깨서 생존을 위한 장비들을 사고, 비상식량도 사들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로 나는!
 
 “좋아요! 좋아! 조금만 더! 옳지! 한 번만 더! 할 수 있어요!”
 
  헬스에 등록했다.
 
  옆에서 들리는 재촉소리에 죽을힘을 다해 바벨을 들어올렸다. 머리 위로 한번 들어 올린 뒤, 곧바로 바벨을 내동댕이쳤다. 욱신거리는 몸, 손가락하나 까닥하기 싫다. 그대로 매트 위에 쓰러진 채 나는 잠시 ‘내가 왜 이런 개짓거리를 해야 하나?’ 고뇌했다. 매트 위에 너부러진 날 보며 방금 전까지 옆에서 소리치던 근육질의 남자 트레이너는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스포츠용 음료수를 내밀었다.
 
 “고생했어요. 신도림 씨. 이제 웨이트는 끝났으니, 러닝머신 한 시간 정도만 한 뒤 나가셔도 좋아요. 아, 요번 달 권장 식단을 드릴 테니, 나가기 전에 한번 받아가세요.”
 “예…….”
 
  욱신거리는 배(바벨 하기 전에 윗몸일으키기를 했다.)를 움켜쥐며 떨리는 손으로 음료수를 받아 마셨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수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몸 안으로 쑤셔 넣은 뒤, 음료수 캔을 든 손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보기 좋게 달라붙은 근육. 아직도 좀 마르긴 했지만 3개월 전의 뼈만 남은 형체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 이건 뻘짓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다. 혹시라도 닥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비도 음식도 아니다.
 
  바로, 몸.
 
  자신의 신체다. 극한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는 튼튼한 몸.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자신의 전생…… 아니, ‘아르도르의 경험담’이었다. 허수아비 같은 몸이라면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했다 하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 한다. 혹은 다른 인간, 약탈자에게 준비한 것을 빼앗길 테지.
 
 ‘아직…… 아직 부족해.’
 
  손 안에 든 캔을 우그러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3개월간의 하드 트레이닝. 한 달에 200만원이 넘어가는 전문 트레이너도 고용해서 3개월간 하루에 4시간씩 미친 듯이 투자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키 180cm 에 70kg, 순수한 근육들이라서 겉보기에는 나름 좋지만, 원하는 모습에 비하면…… 엄청 부족했다. 더 짜증나는 사실은 자신의 몸이 벌써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체질이랄까?
 
  지난 시간 동안 악몽에 시달려 온 탓에 이 몸은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았었다. 항상 피곤한 상태, 아마 계속 악몽에 시달렸으면 40대가 넘어가기 전에 요절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악몽을 꾸지 않게 되면서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그동안 악몽에 시달려 오면서 몸 자체가 많이 상했다. 내 몸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아르도르의 몸과는 천지차이야…….’
 
  전생의 몸과 지금을 비교하니 한숨만 나왔다. 마력에 민감하고 아름다웠던 아르도르의 육체, 전생의 몸과 지금의 몸을 비교해서는 안 되지만, 어느새 자꾸만 비교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태어나는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우월’했다.
 
  이곳에서는 우생학이 사장되었지만, 아르도르가 살았던 세상에서는 우생학이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던 세상이었다. 그 우생학이 판치던 세상에서 ‘마법사’라는 인종은 수백 세대에 걸쳐서 개량한 교배종이었다. 뭐, 순종 품종의 개를 생각하면 편하겠다. 이곳에는 마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우월함의 기준을 두기 힘들었지만, 마력이 존재하는 세상은 달랐다.
 
 혼자서 수천 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 마법사
 
  이걸 우월하다고 표현하지 않으면 뭘 우월하다고 표현해야 될까? 전생의 우월함의 기준은 딱 하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 다. 당연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종들은 자연스럽게 지배계층이 되었고, 지배계층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똑같은 지배계층, 마법사들 간에 혼인하였다.
 
  이게 만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지속되었다.
 
  거의 ’종의 분화가 일어났다.’ 라고 말할 만큼 마법사와 보통 인종간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생체 공학이 발달하고 인공적으로 유전인자를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마법사란 인종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완벽한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르도르였다. 지금, 자신의 육체도 ‘아르도르의 영혼’이 선택한 만큼 꽤나 괜찮은 자질을 가졌지만, ‘인간으로서의 종의 한계’에 가까웠던 아르도르의 몸과 비교하면 차이가 심할 수밖에 없다.
 
 ‘전생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데……. 난 아르도르가 아니야. 지금 난, 그곳을 혐오한다.’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전생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아르도르와 나는 전혀 다른 타인일뿐더러, 애초에 아르도르라는 존재, 마법사라는 인종은 뒤틀린 것들이다. 그곳은 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지옥이나 다름없다.
 
  우생학이 판쳤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우생학이 판쳤던 시절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시절 나치스와 몇몇 백인 우월 단체들, 그 작자들이 한 막장 짓을 알고 있는가? 내가 살았던 전생은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우생학이 수천 년간 지속되었다. 이곳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전생은 지옥 같은 세상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닌, ‘가축’ 취급 받았으니 말이다.
 
 사회가 발달했으니 민주주의가 융성하지 않았냐고?
 
  이곳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사회가 발달할수록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한다.’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내 경험담에 의하면 사회의 발달과 민주주의와 인권은 전혀 연관되어 있지 않다.
 
 민주주의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지배층에게 다수의 피지배층이 영향을 얼마나 줄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한마디로 ’지배적 소수를 조종하는 다수’의 지배다. 하지만, 수천 명의 인간보다 한 사람의 마법사가 더한 노동력을 휘두르는 세상에선 ’사회의 발전’과 ‘민주주의’는 서로 관계없는 무관한 것이다. 절대 다수의 민중이 권력자의 횡포에 대항할 수 있는 ‘집단적 폭력’은 애초에 가공할 무력을 가진 권력자들, ‘마법사’에 의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다.
 
  저항할 힘이 없는 인간은 그저 가축일 뿐.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마법사들의 통치 아래, 인간들은 가축처럼 소모되었다. 애초에 생체 마법공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힘없는 ‘수많은 가축’들의 희생이 있어서였다. 현대의 기준에서 전생의 세상은 고도로 발전했지만 암울한 미래세상, 디스토피아(dystopia)와 비슷했다.
 
 이곳에 와서 현대의 지식과 개념을 받아들이고 난 개과천선했다.
 
  아니 솔직히 개과천선은 아닐 것이다. 내 인격의 베이스가 된 아르도르는 냉혹하고 이기적이니까. 나도 그 영향을 받았을 거다. 그냥 내가 우월한 마법사의 육체가 아니니까 내게 유리한 생각으로 바뀌었을 뿐이겠지. 아마, 마법사로 태어났다면 현대에 인권과 개념을 무시하고 나에게 유리한 전생의 관점으로 살았을 것이다.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을 비웃으면서.
 
 ‘전생 생각은 그만하자. 되게 꿀꿀하네.’
 
  한숨을 쉬며 천천히 매트에서 일어섰다.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짜증내고 울적해하는 건 멍청한 일이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다 마신 음료수 캔을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곤,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쉬고 싶지만 아직 오늘치의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좋아…… 러닝머신, 한번 죽어라고 달려볼까?”
 3개월 전부터 나의 생활은 완전히 급변했다.
 
  음, 뭔가 굉장히 보람차고 꽉 찬 생활이 되었달까? 그 전까지의 생활 패턴은 매우 단순했다. 기상하고 회사, 퇴근시간에 퇴근하고, 저녁식사한 뒤, 몇 시간동안 취미생활. 그 다음에 수면.
 
 기상-회사-퇴근-저녁식사-여가시간-수면
 
  대충 이렇다. 참고로 여가시간은 영화감상과 만화 감상이다. 음…… 성실한 회사원 오타쿠 같은 하루….… 피규어도 좀 있고, 한정판 DVD도 있지만 난 오타쿠는 아니다. 그래…… 아니야. 포니, 그 귀여운 망아지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좋아하는 귀여운 생물이니까.
 
 음…….
 
  말이 딴 데로 흘러갔지만 아무튼, 이렇게 무료하게 흘러가던 하루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기상 이후에는 아침식사(프로틴 음료수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자전거 출근한다. 그리고 회사에서 규칙적인 식단에 짜여진 점심 식사를 먹고, 퇴근하고 저녁 먹기 전에 헬스장에 들러서 4시간 동안 운동한다. 그리고 늦은 저녁식사. 식사 후 남은 시간에는 사온 물품들로 아티팩트 제작에 몰두한다.
 
 기상-출근 겸 아침식사-점심식사-퇴근-운동-저녁식사-아티팩트 제작-수면
 
  이렇게 말이다. 물론, 휴일에는 회사대신 용접 학원도 가고 삶의 활력소인 만화영화도 본다. 용접학원은 아티팩트 제작하는데 필요해서 다니고 있고, 만화영화는 안 보면 뒤에 펼쳐질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히거든. 지난 3개월 동안, 난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기준비에 이렇게 매일매일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투자했다. 시간이 워낙 빠듯해서 시간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회사를 퇴사하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이내 그만 두었다.
 
  지금 내 처지에 회사만큼 안정적인 자금 공급원을 찾기 힘들거든.
 
  내가 하는 작업들, 특히 아티팩트 제작 부분은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물품에 마력회로를 새기는데 들어가는 금이며, 회로에 룬어를 새기는데 필요한 보석가루까지……. 마법 아티팩트의 가치는 약간 과장을 보테서 같은 무게의 금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금 덩어리다! 금 덩어리!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무작정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마법적인 요소로 돈을 벌면 어떻겠냐고?
 
  솔직히 생각해봤다. 양판소 소설에 많이 나오는 ‘아티팩트 판매’ 같은 거. 전생의 주력이 테크 메이지인 만큼 난 아티팩트 제작기술은 도가 텄다. 마법 재료가 워낙 부족해서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긴 힘들지만, 이곳의 엉성한 재료로도 충분히 ‘히트 칠 만한 물건’은 만들 수 있다.
 
  공간을 왜곡한 마법주머니, 몸의 혈류 상태를 개선시키는 반지, 호신용 역장을 발생시키는 마법 팔찌…….
 
  충분히 먹힐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신나게 팔아먹다가 내가 마법 사용하는 것을 걸리는 것이지. 아니, 내가 파는 것들이 애초에 불법적 판매니 수사가 들어올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이 물품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는 거지. 그리고, 날 찾아낼 것이다. 검은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오고…… 날 감금하고…… 어디서 이런 물건을 구했는지 추궁하고…… 직접 제작하는 것을 알아낸 뒤, 어떻게 제작하는지 추궁하고…… 골방에 갇혀서 노예처럼 물건만 만드는…….
 
 어휴, 무섭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난 내 목숨은 소중하게 여긴다. 아무리 내가 마법사라해도 슈퍼맨은 아니야. 머리에 총 맞으면 죽는다. 몰래 판다고? 도시 구석구석에 있는 CCTV에 찍혀서 잡고자 하면 하루도 안가서 다~ 들킬 거다. 물론, 안 들키면서 돈 버는 방법도 해봤다. 예를 들면…… 복권 긁기나 도박.
 
  하지만 가성비가 너무 안 좋았다.
 
  복권 긁기는 투시마법으로 은박 내부의 글자를 보는 것인데, 복권에 있는 은박은 투시하기 상당히 힘들어서 복권잡고 한참을 뚫어져라 봐야한다. 아직 사지도 않은 복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해봤다가 편의점 아가씨에게 도둑의심 받고는 그만 뒀다. 사실…… 도둑 의심보다는 의심이 풀어진 뒤, 아가씨가 보내는 ‘경멸’에 가까운 ‘한심’하단 시선 받고 그만 뒀다. 에잇…… 성질 뻗쳐서 증말! ……근데, 솔직히 삐쩍 마른 아저씨가 눈이 벌게져라 복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라도 그렇게 볼 것 같다.
 
  그 다음은 도박.
 
  어디서 도박을 할까? 소시민인 내가 아는 도박장이라고는 유명한 강원 랜드 카지노 밖에 없다. 사실, 이 도박은 상당히 재미를 봤다. 문제는 그 재미가 딱 한번 뿐이라는 거지. 강원 랜드 갔다가 한 번 거하게 땡겨서 그쪽에서 더 이상 안 받아 준다. 딱, 한 번 갔는데 찍혀서…… 쩝. 하긴 500만원 들고 가서 2시간 만에 2억으로 뻥튀기 했는데, 나 같아도 안받아주겠다. 같이 포커 치는 딜러가 울상 짓는 게 참…… 하긴, 딱 봐도 초짜인데 귀신같이 배팅하니 말이다. 아무튼 그걸로 끝! 2억을 번 뒤 끝났다. 그래도 2억이나 벌어들였는데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해…….”
 
  집 거실 바닥에 늘어놓은 ‘작품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해외 유명 뮤지션 ‘다프트 펑크의 기마누엘이 사용하는 헬멧’……의 짝퉁. 그리고 백화점에서 큰마음 먹고 구입한 잘빠진 ‘정장’. 마지막으로 ‘커다란 여행용 보스턴 가방’.
 
  이 녀석들이 카지노에서 벌어들인 2억을 빨아들인 아티팩트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2억 원어치의 금을 처먹은 녀석들. 참고로 금값은 1g 에 40200원 줬다. 1kg 골드바를 무려 5개씩이나 들어간 작품들이다. 금말고도 부수적인 재료 사는데 적금 들어놓았던 5천만 원도 들어갔으니…… 재료값만 2억 5천만이네? 이 녀석들 덕분에 알뜰살뜰하게 모아놓은 돈도 이제 거의 바닥을 쳤다. 엉엉…… 양복 값과 헬멧 가격은 논외로 치자. 가슴이 쓰리니까.
 
 왜 헬멧과 양복을 아티팩트로 만들었냐고?
 
  당연히 정체를 가리기 위해서다. 얼굴을 가리는 헬멧, 그리고 흔하게 볼 수 있는 디자인의 양복. 착용한 자의 신분을 노출 시키지 않고, 무엇보다 이것들은 신경 써서 인챈트 한 광왜곡(光歪曲) 마법을 발동만 하면 투명하게 변한다. 한마디로 투명망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숨기는 것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살았던 나는 잘 안다. 세상이 힘들어지면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지는지. 아마 이 세상에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난 뒤, 어떤 개인이 신비한 마법물품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그 물품들을 빼앗거나 그 개인을 포획하려고 할 것이다. 이 물품들은 그런 인간들에게 내 정체를 숨기고, 그들에게 대항할 힘을 줄 것이다. 나도 되도록이면 사용 안했으면 좋겠다.
 
 ‘참 험난한 날들이었지.’
 
  미끈하게 빠진 헬멧을 든 채, 이것을 만드느라 했던 고생들을 생각했다. 지난 석 달간, 자비로 용접, 납땜을 배우고, 헬멧을 해체하여 그 안에 금으로 마력회로를 새겨 넣고……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는 마법 아티팩트를 만들 만한 재료가 너!무! 부족하다. 마력을 포함하고 있는 마법금속들은 아예 없으니 말이다. 이 아티팩트들은 그 얼마 안 되는 재료들도 마음껏 쓰지 못했다.
 
  백금과 루비가루, 그리고 마력 증폭에 필요한 최하 15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
 
 ‘부족해……. 너무 부족해.’
 
  손에 든 헬멧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상태로도 나름대로 괜찮은 물건이다. 방호력은 물론, 적외선 시야에 음성변조(목소리로 정체를 들킬 수는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기능을 추가했다.)까지 갖춘 아티팩트. 하지만, 부족함을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아티팩트의 최소 기준(방독면, 산소호흡기, 망원 능력 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료,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역시…… 돈이 없다고 그냥 대충 때우는 것은 직무유기야.’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나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이 세상에 닥칠지도 모르는 이변, 재앙을 막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가진 이런 장난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난 더 강해져야 한다.
 
 ***
 
 점심시간이다.
 
  3개월 전이었다면 담배와 에너지 드링크를 꺼낸 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웠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면서 억지로 깨어있기 위해 담배와 에너지 드링크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됐거든. 게다가 잠을 잘 자니 체질도 바뀌더라고. 덕분에 나도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점심은 트레이너가 짜준 맛대가리 없는 식단대로 먹는다…….
 
  닭 가슴살 샐러드에 토마토 한 개에 견과류 한줌, 마지막 후식으로 저지방 우유 한 팩. 이게 내 점심이다. 적게 먹는 편이라서 이 정도만으로 배가 부르긴 한데……. 맛이 없는 게 문제다. 소금을 덜 사용한 저염식 영양식단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소금을 깜빡하고 안 친 것 같아.
 
 “선배, 또 닭 가슴살 샐러드에요? 와, 엄청 독하시네. 안 물려요? 3개월 넘게 이것만 먹는데?”
 
  텅 빈 사무실 한 쪽, 휴식용 테이블에 앉아서 도시락을 꺼내자 뒤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자기 몫의 도시락을 든 채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꼬맹이가 보였다.
 
 “또 왔냐?”
 “넵.”
 
  꼬맹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맡은 편에 앉아 자기가 싸온 도시락을 꺼냈다. 4개월 전, 나에게 상담했던 꼬맹이. 내가 도시락을 싸오고 점심을 먹기 시작하자 자기도 같이 도시락을 싸면서 함께 밥 먹는다. 이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싸는 사람은 나와 꼬맹이 밖에 없다. 내가 ’나와 있으면 인사고과에 안 좋을 거다.’ 라고 겁주니까, 꼬맹이는 ’어차피 이곳이 아니라 해외 쪽 회사로 이직할 건데 승진 못해도 괜찮아요! 게다가 돈도 아끼니 더 좋고!’라고 당돌하게 대답했다. 꼬맹이의 당돌한 대답에 난 당장 말렸지만 워낙 막무가내여서 이제는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얘도 참 무대뽀란 말이야…….’
 
  꼬맹이의 선택이지만, 그래도 꼬맹이의 인생을 꼬이게 할 수는 없기에 난 짬짬이 꼬맹이에게 일의 테크닉 같은 걸 가르쳐 주는 중이다. 최소한 먹고 살게는 해줘야지. 다행히 꼬맹이는 일을 잘 배운다. 나 말고도 다른 팀원들도 그 실력을 인정할 정도이니 회사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이쪽 인맥으로 다른 곳에 취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나도 참 많이 유해졌군.’
 
  내 샐러드에 젓가락을 가져가는 꼬맹이를 보며 내심 피식 웃었다. 전혀 다른 타인의 앞날 걱정하는 것 하며, 이렇게 같이 밥 먹는 것까지. 정말, 전생의 ‘나’, 아르도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아, 생각해보니 이게 끝이 아니네.
 
  3개월 전, 처음 마력 회로를 개방했을 때 꼬맹이에게 쌀쌀하게 대한 것 때문에 꼬맹이가 삐졌었는데, 그때 화 풀어주느라 엄청 고생했었다. 꼬박꼬박 꼬맹이에게 음료수 바치는 것은 물론, 좀 자잘한 업무는 내가 대신 떠맡아서 해줬으니까. 음…… 지금 생각해보니 꼭…… 어장관리 당하는 남자 같잖아? 아니야, 아닐 거야. 일 조금 대신 해준 거하고, 끝나고 일 좀 가르쳐 준 것 밖에 없어. 그 대가로 같이 밥 먹는 것 밖에는……. 으으, 내가 생각해도 완전 어장 관리 당하는 것 같네.
 “뭔 생각해요? 선배? 갑자기 젓가락질도 멈추고.”
 “응……? 아냐, 아. 잠시 잡생각이 들어서.”
 
  꼬맹이의 핀잔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부지런히 내가 가져온 샐러드를 축내고 있는 꼬맹이. 꼬맹이가 먹을 몫까지 생각해서 넉넉하게 싸왔는데 무지막지한 기세로 흡입하고 있다. 이런, 잘 못하면 오늘 점심은 못 먹겠다. 꼬맹이의 젓가락질에 모두 사라지기 전에 나도 부지런히 샐러드에 젓가락을 넣었다. 닭 가슴살 샐러드를 입 안에 넣으며 꼬맹이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선배. 요즘 사무실 여자들 사이에서 선배가 화제인거 알아요?”
 “그래?”
 “네.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 난리에요. 전에는 해골 같았는데 지금은 ‘훈남’이라고. 3개월 만에 사람이 완전 변신하니까,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는 선배 보며 다이어트 의욕에 불타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선배 덕분에 다이어트 식단 하잖아요.”
 
  꼬맹이의 말에 나는 왼손 검지로 뺨을 긁적였다. 음……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몸들 바를 모르겠다. 뭐, 나도 남잔데 여자에게 받는 관심이 싫지만은 않다. 하긴, 몸은 확실히 좋아졌지. 철저한 식이조절에 계속된 운동, 그리고 마력을 이용한 체계적인 근육 재생. 덕분에 내 몸은 며칠 전 부터 체지방률이 7%이하다.
 
  한마디로 선명한 식스팩이 나왔다.
 
  한 달에 200만원 씩 주는 엘리트 트레이너도 이렇게 근육이 잘 붙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으니까 말 다했지. 내가 변하자 남자들 사이에서도 운동 붐이 불었다.’저 비실이도 저런 몸짱이 됐는데, 자신도 할 수 있다!’ 고. 하지만, 다들 얼마 못 가 나가떨어졌음. 쯧쯧…… 난 마력의 도움도 있고, 운동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근육을 더 키워야 하는데, 잘 안 붙어. 체질이 아닌 것 같더군.”
 “에이 지금이 딱 좋아요. 요즘 트렌드는 마른 근육이라고요. 마른 근육! 남자들은 우락부락한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휴, 징그러워요.”
 “더 키우고 싶어도 못 키워. 몸이 하도 안 좋아서 벌써부터 한계에 부딪힌 것 같으니까.”
 
  꼬맹이가 싸온 냉 두부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대답에 꼬맹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조잘조잘 다이어트와 헬스에 대해 떠들어댔다. 선배는 어떤 운동을 하냐는 둥, 어디에서 운동 하냐는 둥, 왜 운동을 결심했냐는 둥……. 참 신기한 게 난 먹으면서 말을 못 하겠는데 꼬맹이는 먹으면서 잘도 말한다. 덕분에 오늘도 내 샐러드의 절반 이상은 꼬맹이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먹어대면서 ‘왜 전 다이어트 식단으로 먹는데 살이 안 빠질까요?’ 물어보는 것을 보면…… 음, 진실을 말해주고 싶지만 그냥 조용히 입을 닫았다. 아무리 다이어트 식단이더라도 많이 먹으면 찐단다. 꼬마야.
 
 “아참, 그나저나 선배. 오늘 저녁에 할 일 있어요?”
 
  다 먹은 도시락을 치우는 와중에 꼬맹이가 기습적으로 물어봤다. 오늘 저녁? 시간? 흠…… 이건 사적으로 만나겠다는 건데……. 꼬맹이는 나와 친구사이도 아니니 남녀가 사적으로 만나는 거라면 데이트 밖에 없다. 설마…… 이 꼬맹이나 지금 나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걸까? 방금 전 꼬맹이가 했던 훈남이라는 말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평생 생각지도 않았던 망상이 머리를 헤집었다. 음…… 어떡하지? 만약, 꼬맹이가 설마 날 좋아하면…… 거절할까? 하지만 영계인데…….
 
 “저녁? 왜?”
 “저 이번에 2년 계약 됐잖아요. 그 기념으로 한 번 선배에게 쏘려고요. 지금까지 선배가 많이 도와줬잖아요. 뭐, 선배가 몸 만드는 거보니 함부로 밥 사는 것은 힘들 것 같고……. 대신 선배의 그 꽝인 옷 센스와 머리 스타일을 코디해 주려고요.”
 “음…… 내 스타일이 좀 많이 별로냐?”
 
  꼬맹이의 지적에 내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음, 내가 보기엔 상당히 괜찮다. 인터넷 배송으로 구입한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 그리고 운동화. 캐주얼하게 입고 출근하는 IT회사라서 난 거의 항상 이런 복장으로 출근한다. 요즘 애들이 보기에는 많이 별로인가? 내가 은근하게 물어보자 꼬맹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손질하지 않은 더부룩한 머리에 거의 맨날 청바지에 검은 셔츠 차림. 센스 꽝이라고요. 60년대 스타일이랄까? 스티븐 잡스 따라하는 거예요 선배? 진짜 안 어울려요. 완전 촌스러워.”
 
  심장을 관통하는 3연격에 난 침묵했다. 역시나…… 내가 인기가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센스꽝, 60년대 스타일, 잡스 짝퉁이라니……. 이건 도저히 용납 못 할……. 아니지. 확실히, 잡스 스타일 이긴 하지 이 복장. 내 침묵에 꼬맹이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요즘 선배 몸 좋고 얼굴도 괜찮으니까 쪼금만 코디하면 완전 훈남될 거예요. 어때요? 콜?”
 
  그냥 쿨 하게 ‘시간 안 된다.’ 하고 싶지만 꼬맹이의 말이 아른 거렸다. 센스 꽝, 60년 대 스타일, 잡스 짝퉁…… 하긴, 지난 살아온 시간을 생각해보면 패션이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나도 훈남이 돼볼까?
 
 “음…… 오늘은 힘든데……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내일은 안 되겠니?”
 “저도 내일은 친구들과 약속 있어서 힘든데……. 이번 주 토, 일요일은 부모님 만나러 가야하고요. 그럼 다음 주는 어때요?”
 “좋아. 그럼 다음 주에 가는 거다.”
 
 ***
 
  꼬맹이의 ’한턱’ 도 미룬 채, 난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아까 전, 꼬맹이에게 말 한대로 오늘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나쁘지 않군.
 
  나지막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들어도 변조된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기괴한 음성.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감색이 감도는 깔끔하고 고급스런 양복정장
  정장과 잘 어울리는 갈색 가죽구두
  마지막으로 얼굴을 가리는 헬멧
 
  거울 속에는 완벽하게 정체를 가린 괴한이 서 있었다. 확실히, 3개월 동안 죽어라고 운동했더니 핏이 잘 맞네. 비싼 양복이니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근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름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지만 몇 시간 전 꼬맹이의 3연격에 관통되었던 가슴에서 의심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혹시…… 이것도 센스 꽝 인건가? 음…… 아니겠지. 비싼 양복인데 뭐, 양복은 별로 유행에 안타니 충분히 깔끔해 보일 거다.
 
 -뭐…… 패션쑈 하러가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음성변조마법은 잘 작동하고 방호력은 어떠려나?
 
  탁자에 미리 준비한 식칼을 들었다. 미리 날카롭게 날을 세워둔 식칼. 후…… 좋아. 살살 식칼로 양복 위를 찔렀다. 물론, 매우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힘을 가했다. 이미 양복을 뚫고 들어갈 때가 한참 지났지만 식칼은 양복을 전혀 뚫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한곳만 이런 것은 아닌지 식칼로 여러 군데 질러본 뒤 식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장도리를 집어 들었다. 다시 똑같은 행위 반복, 장도리도 식칼로 찔렀을 때처럼 약간 둔중한 압력이 느껴질 뿐, 충격은 완벽하게 흡수되었다. 헬멧 또한 마찬가지. 잠시 착용한 모든 마법장비를 점검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다.
 
 -좋아, 착용장비 이상 무. 준비물들도 이상 없고…….
 
  탁자에 놓인 장도리와 식칼, 마지막으로 직접 만든 사제 스턴건을 여행용 가방에 집어넣었다.
 
 준비는 완벽하다.
 
  확인 과정이 끝나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을 생각했다. 명백한 범법행위, 하지만 그 의도는 순수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세상을 지키기로 결심한 몸. 결국, 이건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재앙을 막기 위해 행하는 고결(?)한 행위다. 뭐, 덤으로 쪼끔 사익도 챙기고.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 질 수 있는 저녁 8시, 지금이라면 조끔 나쁜 짓을 해도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 같아!
 
  ……는 개뿔. 그나마 내가 행하는 나쁜 짓의 대상이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에 위안을 느끼자. 어차피 나쁜 놈 걸 터는 건데 괜찮겠지. 가방을 들고 집밖을 나가기 전, 장식으로 걸린 십자가를 향해 나는 가볍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부디 정의로운 강도가 되게 해주세요.
 
 
 ***
 
  현대 사회에서 강도짓은 하기 힘들다. 옛날과는 다르게 집에 돈을 쌓아두지도 않을뿐더러(다들 은행에 예금한다), 물건을 훔친다 하더라도 장물추적이 매우 쉽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나는 내 정체가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
 
 그러니, 가정집에서 장물을 훔치는 것은 보류
 
  결국, 결론은 써도 들키지 않는 현금을 털어야 한다는 것인데……. 대량으로 현금이 있는 곳을 생각했을 때, 맨 먼저 생각나는 곳은 은행이다.
 
 하지만 이것도 보류
 
  아무리 범법행위를 한다지만 전혀 쓸데없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기에 은행은 범위에 넣지 않았다…….
 
  는 건 거짓말이고.
 
  은행을 터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은행을 터는 것은 객관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두꺼운 철제금고를 뚫는 것도 문제고, 금고에 설치된 수많은 방범장치를 뚫는 것도 문제다. 무엇보다도 은행을 터는 순간, 3분 이내에 자랑스러운 민중의 몽둥이, 경찰 아저씨들이 권총을 들고 ‘하하 호호’ 하며 날 잡으러 달려올 거다.
 
 앞서 말했다 시피 나는 좀 쫄보의 성격이 강하다
 
  아무리 아티팩트로 무장했어도 그 성격은 어디가지 않는다. 경찰이 가지고 있는 총이 내가 착용한 아티팩트에 안 통한다면 은행털이를 시도해 봤겠는데…… 아직 통하는지 안 통하는 지 테스트도 못해 봤수다. 총을 구해서 쏴봤어야 알지. 뭐, 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만든 아티팩트들이 방탄복보다는 더 방호력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난 테스트도 안하고 권총 앞에서 깝칠 정도로 간 큰 녀석이 아니다.
 
 그래서 은행은 포기
 
  같은 이유로 경찰 공권력이 미치는 곳들은 전부 포기했다. 난, 경찰, 정확히 말하면 경찰이 가진 권총이 무서우니까. 공권력이 미치는 곳들을 제외하니 내가 털만한 장소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어버렸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내가 털 수 있을 만한 호구 녀석들을 열심히 찾았고, 결국 딱 알맞은 녀석을 찾아냈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여의도에 위치한 15층 빌딩
 
  착용한 장비들의 광왜곡 마법을 해제하면서 난 내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찾아낸 곳이 바로 이곳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건물이지만 이 건물은 평범한 곳이 아니다. 폭력조직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건물에 입주한 대부업체도 그 폭력조직의 산하 회사다. 한마디로 건물 자체가 조직폭력배들의 성이다. 칠…… 뭐였더라…… ‘칠’자로 시작되는 조직이었는데……. 좀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여서 조직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이 녀석들을 털어먹을 수 있다는 거니까.
 
 공권력이 미치지 않아야 하고
 가지고 있는 현금이 많아야 하며
 아티팩트를 뚫을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은 곳.
 
  이 3박자를 완벽히 충족시키는 호구는 바로 조직폭력배들이다. 3개월 전이었다면 좀 쫄았겠지만 지금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난 온몸을 아티팩트로 도배한 ‘마력사용자’다. 이것만으로 절대적은 우위를 점할 수 있건만, 플러스알파로 전투에 관한 수많은 기억도 가지고 있다.
 
  총을 가지지 못한, 주먹과 칼을 휘두르는 이런 원시적인 폭력집단은 내 적수가 못 된다.
 
  우리나라가 손꼽히는 총기규제국가라서 참 다행이다. 아마,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녀석들도 패스했을 거야……. 역시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일에 들어가기 전에 지문을 숨길 손장갑을 끼며 가볍게 손을 쥐었다 폈다. 딱 맞는 피트감. 완벽하다.
 
 -좋아. 일하러 가볼까.
 ’칠성파’는 경찰청에서 관리하는 범죄 조직 리스트에 들어가 있을 정도로 큰 대형 폭력조직 이다.
 
  경찰청이 추정하는 인원수는 대략 80명
 
  정식으로 ’칠성파의 조폭’이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이 80명이라는 뜻이지, 칠성파가 움직일 수 있는 양아치, 조폭을 동경하는 고등학생, 끄나풀 삐끼들까지 생각하면 거의 천여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집단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 거대 집단의 본거지, 요새나 다름없는 건물이었다. 건물 자체가 칠성파의 유령회사인 부동산회사 자산으로 잡혀있고, 빌딩에 들어선 대부업체도 칠성파 소속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들어가 보지 못했을 인외마경.
 
 -인테리어가 좋군. 마음에 들어.
 
  가져온 여행 가방을 잠시 내려놓은 뒤, 양손으로 입구 유리문을 열어젖히며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보통 조폭의 사무실이라고 하면 금이 잔뜩 가고 더러운 낡은 건물에 조폭 몇 명이서 배달 온 짜장면을 먹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보는 쌍팔년도 조직폭력배 이미지였고, 현실은 아주 달랐다.
 
  여의도의 알토란같은 노른자 땅 위에 지은 세련된 15층짜리 건물
 
  지은 지 10년이 넘어가는 걸로 알고 있건만 관리를 아주 잘해서 입구부터 깔끔했다. 하긴, 요즘시대에 그런 쌍팔년도 조직폭력배를 생각하면 안 되겠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입구 안내 데스크 쪽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딱 봐도 ’나 조폭이요.’라고 선전하는 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
 
  살이 뒤룩뒤룩 쪘지만 얼굴에 난 여드름과 이목구비를 보면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똘마니 2명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조직폭력배 한 명이다. 어려보이는 똘마니들이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 부동자세로 안내 데스크 앞에서 입구를 바라보며 서있는 반면,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조폭은 안쪽에서 안내 데스크에 발 올리고 의자에 앉은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건물 입구 쪽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똘마니들 중 안내 데스크와 가까이 있던 한 명이 데스크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이상한 녀석이 왔는데 어떡할까요?”
 “너 또 선배 얼굴 기억 못한 거 아냐? 아까 전에도 그랬잖아? 시발, 어떻게 된 게 3일이나 됐는데 형님들 얼굴을 못 알아보냐? 게임하는데 방해하지 마라. 안 그래도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어야 돼서 짜증나는데…….”
 
  똘마니의 말에 드러눕다시피 앉아있는 조폭은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똘마니를 바라보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말 걸지 말라는 짜증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음성, 하지만 똘마니는 겁먹은 듯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저…… 근데 지금 앞에 나타난 사람은 헬멧을 쓰고 있어서…….”
 “뭐?”
 
  꼬맹이의 대답에 의자에 앉아있던 조직폭력배는 그제서야 휴대폰에서 손을 떼고 문 쪽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저 양복 입은 헬멧은? 야, 넌 뭐냐? 짱깨냐? 요즘 짱깨는 양복도 입고 다니나 보네. 센스 한 번 꽝이구만.”
 
  머리에 혈관이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무시하면 좋으련만…… 아직 낮에 들었던 꼬맹이가 날린 핵 펀치가 가슴에 남아있었다. 센스 꽝…… 아저씨 패션…… 60년대 스타일……. 아니?! 이게 왜 센스 꽝이지? 엄청 비싼 명품 양복에 구두인데! 센스가 꽝이라니!? 양복은 유행이 별로 안 타는 게 아니었나? 딱딱한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어차피 헬멧에 가려서 안보일 테지만) 난 경비실에 있는 조폭을 바라보았다.
 
 -나 말인가?
 “그래, 너 말고 여기에 누가 있어. 짱깨 하이바야.”
 
  ‘짱깨 하이바’란 조폭의 비아냥거림에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몸의 마력을 순환시켰다. 그리고 흐르는 마력을 통제해 몸 내부, 신경에 흐르는 전기신호를 마력으로 대체했다. 명료해지는 오감, 그리고 상대적으로 느려지는 시간흐름. 모든 것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주 기초적인 마법,’신경가속’이다.
 
  마력사용자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이고 효율이 좋은 마법, 조폭이 떠는 말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에서 나오는 말처럼 느리게 들렸다. 몸이 무거웠다. 깊은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몸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정신이 외부의 과정을 너무 명료하게 인지하다보니 생긴 착각일 뿐이다. 지금, 내 반사 신경은 일반인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향상되었다.
 
 ‘할 수 있다.’
 
  명료한 감각을 느끼며 내 앞에 있는 3명을 바라봤다. 저런 민. 간. 인. 들에 비해 난 신체적인 능력에서도, 싸움 경험도 비교가 되지 않게 우월하다. 가볍게 손을 풀며, 난 데스크에 있는 조폭을 향해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말을 끝으로 조폭이 앉아있는 안내 데스크를 향해 튀어나갔다.
 
 ***
 
  급작스러운 내 돌진에 똘마니들은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날 막아보려 주먹을 뻗었지만 허점투성이의 대응이었다. 하긴, 조폭들은 상대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사들이 아니다. 안락한 사회에서 되도 않는 알량한 힘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한량들. 이런 이들에게 전사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겠지.
 
 ‘경화’
 
  손에 낀 장갑에 마력을 투사하며 다가오는 똘마니들의 주먹을 가볍게 손등과 팔꿈치로 흘려냈다. 무협 영화에서 나오는 엑스트라 악당처럼 자기 힘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똘마니들. 그 똘마니들을 뚫고 지나가면서 양손으로 똘마니들의 뒷목을 향해 당수를 내리쳤다. 경화 마법을 건 장갑, 강철로 정도로 단단한 물체가 뒷목을 정통으로 내리쳤으니 좀 많이 아플 거다.
 
  힘 조절?
 
  음…… 목에서 우두둑 거리는 소리가 난 것도 같긴 한데……. 괜찮겠지. 이 똘마니들 뒷목에 낀 지방이 얼만데. 어쨌든, 똘마니들을 처리하고 자연스럽게 경비실에 앉은 조폭을 향해 쇄도했다. 살짝 곁눈질로 안내 테이블 위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겨우 3초 지났다. 한 40~50초 지난 것 같은데 3초라니…….
 
 ‘대략 15배 정도인가? 나쁘지 않은 가속 비율이군.’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제압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굼벵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똘마니들의 주먹질 궤도를 읽고 반응한 것뿐이다. 사실 이 정도 슬로우 모션 상태라면 그 누구라도 이 정도는 할 것이다. 서서히 일그러지는 조폭의 얼굴, 재빨리 의자를 박차고 피하려고 하지만…… 내 손을 피할 수는 없다.
 
 -느려.
 
  앞을 가로막는 안내 데스크를 박차고 도약했다. 앞에 보이는 것은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느라 균형이 무너진 조폭, 오른손을 뻗어 조폭의 목을 낚아챘다. 목을 낚아채자마자 마력을 통제해서 얼굴을 움켜쥔 팔 부위의 신경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마력을 혈관과 팔 근육 사이사이에 채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마법을 완성시켰다.
 
  주문이 완성되자 근육 사이에 들어간 ‘형체가 없는 마력’이 ‘실존하는 물질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무와도 같은 탄력을 지닌, 인간의 근섬유보다 훨씬 질기고 강한 물질의 형태로. 무형의 에너지인 마력이 물리적 형태를 띠게 되자 팔이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당연한 결과다. 이건 어떻게 보면 팔 근육사이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몸 안에 있는 마력을 형태변환 시켜 근육과도 비슷한 물질로 바꿔버리는 마법.
 
  ‘근력 증폭’ 이다.
 
  생명체의 육체적인 힘은 결국 근육에서 나온다. 그리고 근육의 힘은 결국 근섬유의 수축과 이완에 의해 결정된다. 이 마법은 인간의 근섬유를 능가하는 인위적인 마법물질을 창조해 팔 근육과 골격 사이사이에 끼워놓고 마치 ‘근육’처럼 다루는 마법이다. 인체 골격과 근육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준 높은 물질창성마법을 익히고 있어야 사용가능한 마법. 물론, 아르도르는 이 기술에 정통했다.
 
  현재 내 근력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인공적으로 생겨난 마력근육들은 의지에 따라 급격하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인간을 초월한 근력을 지닌 팔은 자신이 붙잡은 희생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붙잡은 희생양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 쳐버렸다.
 
 쿵!
 
  바닥에 패대기쳐지자마자 조폭은 마치 어린애가 ‘가지고 놀다 싫증나 던져버린 인형’처럼 바닥에 통통 튀기며 한쪽 벽까지 굴러갔다. 실로 무지막지한 힘. 정신을 잃은 듯, 패대기쳐진 조폭은 눈을 까뒤집은 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타박상은 물론이고 속도 완전히 뒤집혔을 것이다. 바닥에 우아하게 착지한 뒤, 난 곧바로 몸에 건 마법들을 해제했다.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지고, 부풀어 올랐던 팔도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팔이 좀 쓰리군.’
 
  오른손을 쥐었다 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제 크기로 돌아온 팔. 다른 곳은 딱히 이상이 없었지만 너무 과하게 ‘근력 증폭’ 마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팔이 쓰라렸다. 근육 사이에 인조 근육을 창조해서 강제적으로 근력을 늘리는 마법, 당연히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가장 사소한 부작용이 바로 이것, 피부의 찢어짐이다. 마력으로 만든 인조 근육이 진짜 근육 사이에 들어가니 팔의 부피가 커지고, 팔을 감싸는 피부도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다. 그나마 지금 내가 겪는 건 가장 사소한 부작용에 속하고, 이 마법을 잘못 사용하면 근육이 손상되거나 신경을 잘못 건드려 불구가 되기도 한다. 다행히 내 영혼에 각인된 기억과 경험은 능숙하고 완벽하게 근력증폭마법을 구사했다.
 
 ‘좋아. 실전에서의 마법사용은 문제없고…….’
 
  잠시 몸 상태를 확인 한 뒤, 고개를 돌려 조폭이 앉아있었던 안내 데스크를 바라보았다. cctv화면이 나오는 모니터와 컴퓨터, 키보드 자판이 보였다. 안내 데스크와 경비실을 합친 형태. 모니터에 다가가 살펴보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약간 구형의 cctv 프로그램이다. 요즘 나오는 신형 cctv 프로그램은 인터넷 서버와 연동해서 실시간으로 서버와 기기, 두 곳에 녹화되는데 이 기기는 경비실 컴퓨터 한 곳에만 녹화되는 형식이네?
 
  컴퓨터에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나온 영상은 싹 다 지워버려야지. 파일도 복구하지 못하게 컴퓨터도 완전히 박살내고. 뭐, 지금 모습이 찍혀도 아무도 내 정체를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명확히 영상이 남는 것은 좀 껄끄럽다.
 
  하지만, 박살내기 전에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어야겠지.
 
  최상층에 있는 조폭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에, 난 안내 데스크에 있는 비상구 안내도와 cctv에 나온 사무실 밖 조폭들의 위치와 동선을 살펴봤다. 뭐, 그냥 올라가도 다 쓸어버릴 자신이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전화로 지원 병력 부를지도 모르니 밖에 있는 적의 위치와 동선을 파악하고 사무실에 있는 녀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제압하는 게 좋겠지.
 
  cctv에 나온 조폭들의 위치를 비상구 안내도에 마커(데스크에 필통에 있었다)로 표시한 뒤, 내가 올라가서 움직일 동선을 생각해 봤다.
 
  15층 엘레베이터 입구 쪽에 대기하는 조폭 2명에, 사무실로 보이는 입구에 2명, 복도에 4명. 생각보다 경계가 별로 없군. 좋아. 일단 엘레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두 녀석을 제압하고, 복도에 있는 4명을 소리 안 나게 제압하려면 어떻게 해야…… 음?
 
 ‘오호…… 저게 저기에 있네?’
 
  cctv 화면에 보이는, 15층 엘레베이터 정면에 있는 무언가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이 핑핑 돌아갔다. 오호…… 이거 괜찮다. 크크, 나도 참 사악하단 말이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미소지은 뒤, cctv 녹화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컴퓨터에서 저장된 걸 모조리 삭제했다. 마지막으로 컴퓨터에서 하드 디스크를 뽑아 박살냈다. 좋아, 증거인멸 완료.
 
  하지만,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문 앞에 놓아 둔 가방까지 다가간 뒤, 가져온 청 테이프를 꺼냈다. 바로 로비에 널브러진 조폭과 똘마니들을 정리하는 것. 밖에 누군가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면 귀찮아지니까 대충 안 보이는 곳에 치워둬야지. 청 테이프를 뜯은 뒤, 기절한 조폭을 향해 난 사심 가득한 미소 지으며 다가갔다.
 
 -남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지. 안 그래? 친구?
 
  청 테이프가 게거품을 문 입에 달라붙었다.
 조폭과 똘마니를 로비 화장실에 던져놓은 뒤, 난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천천히 올라가는 층수. 그렇게 15층에 도달할 잠깐의 시간 동안 난 몇 가지 준비 했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3개면 충분하다.
 
  ‘신경 가속’, ‘근력 강화’, 그리고 로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버프형 마법주문 하나
 
  15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음이 나오고 문이 열리는 순간, 정확히 외우고 있던 주문이 완성되었다. 몸에 건 주문의 효과가 시작되자 시야가 형형색색의 빛으로 가득 찼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그 어떤 영역의 색에도 속하지 않는 신비로운 광채. 무리가 가는지 눈이 약간 뻐근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좋아, 준비는 끝났고…….
 
  이제 친구들을 만나러 가볼까?
 
  들고 있는 여행 가방을 엘레베이터 문 앞에 살짝 내려놓은 뒤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 밖에 서있는 친구들. cctv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까 안내 데스크에서 봤던 고딩 똘마니들과 비슷해 보인다. 뒤룩뒤룩 찐 살에 여드름이 가득한 얼굴, 그리고 멍청해 보이는 배바지. 그냥 조폭으로 보이는 녀석들은 그냥 깔끔한 정장이던데……. 아마 똘마니들만 이렇게 멍청하게 입히나 보다.
 
  똘마니들은 바짝 굳은 얼굴로 엘레베이터 입구 옆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나름 각 잡고 서 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지키는 거라면 엘리베이터를 바라보게 서 있어야지 왜 병풍처럼 엘리베이터 버튼 옆 벽에 서서 반대편 벽을 보고 서 있는 건데? 침입자인 내가 너무 쉽게 들어갈 수 있잖아. 오늘 저 녀석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멍청한지 가르쳐 줘야겠다. 물론, 그 대가가 좀 비싸겠지만.
 
  선빵을 치는 놈이 싸움을 지배하는 법
 
  경화 마법이 걸린 장갑으로 오른쪽에 서있는 똘마니의 턱을 강타했다. 물론, 전력을 다해서. 자고로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 …… 은 아니고, 혹시라도 어설프게 손속을 뒀다가 나중에 곤란해지느니 확실히 조지는 게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턱을 강타하자 똘마니의 고개가 훽 돌아갔다. 장갑 너머로 이빨이 부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턱뼈가 금가는 느낌도. 내 선빵을 맞은 똘마니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는지 바닥에 무릎 꿇고 쓰러졌다.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제서야 다른 똘마니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쯧쯧, 처음부터 엘리베이터쪽을 보고 경계했으면 대처가 빨랐을 것을…….
 
  이번 똘마니도 꿈나라로 보내주기 위해 바로 주먹을 날렸다. 먼저 때려눕힌 똘마니처럼 턱을 날려버리려고 했는데……. 이번 똘마니는 내 생각보다 빠르게 대처했다.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가드를 올렸다. 와, 얼마나 살을 찌웠는지 고개를 숙이자마자 턱이 살에 파묻혀서 사라졌다. 그리고, 뒤룩뒤룩 살 찐 몸 치고는 상당히 날렵한 걸?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내게 대항하는 건 어림도 없단다.
 
  가드가 올라가고 제대로 타격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곧바로 다리를 들어 니킥을 날렸다. 물론, 급소가 될 수 있는 ‘그곳’을 향해서.
 
 “끄어어어어…….”
 
  ‘그곳’을 강타 당하자 똘마니는 기괴하게 신음을 흘렸다. 비명 지르려고 하는 것을 재빨리 주먹을 날리려던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았다. 허허…… 내가 그 고통 잘 알지. 남자라면 질색하는 고통이니까. 하지만, 워낙 살이 찐 터라 이것도 잘 안 먹혔다. 기절할 정도로 쳤는데 아직까지 버티다니. 참, 맷집이 대단하구나!
 
  그럼, ‘상’으로 한 번 더.
 
  손으로는 똘마니의 뒤통수와 입을 잡은 채, 다시 한 번 ‘그곳’을 향해 니킥을 날렸다. 두 번 째가 돼서야 똘마니는 신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주저앉자마자 난 똘마니의 입을 막던 손을 떼고 아래턱을 향해 주먹질을 날렸다. 그제서야 기절하고 축 늘어진 똘마니. 쯧쯧, 최대한 깨끗이 끝내주려고 했는데 왜 버텨서 매를 버니?
 
  엘레베이터 입구에 있는 두 명을 제압하는 것은, 채 엘레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기도 전에 끝났다.
 
  뭐, 이 정도야 간단하지. 바닥에 널브러진 똘마니들을 내버려둔 채, 난 엘리베이터 문 앞에 놓아둔 여행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곤 안에 넣어둔 소품을 꺼냈다.
 
  바로 장도리
 
  한 손으로 장도리를 든 채, 엘리베이터 앞 쪽에 있는 분전함 철판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장도리의 뒷부분, 못 뽑게 부분을 철판 이음새 부분에 넣고 장도리를 잡아당겼다. 약간 삐걱거림이 있었지만 그렇게 큰 소리는 나지 않고 철판이 구부러졌다. 음, 그래. 큰 소리가 나면 들키지. 조심조심…… 서서히 힘을 주면서 철판을 구부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철판이 손 하나 들어갈 정도로 휘어졌을 때 철판 뒤에 보이는 것은…….
 
  빙고~
 
  위로 올라가 있는 전원차단기. 전원차단기를 바라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주 좋다. 위로 올라가 있는 스위치에 손을 가져다 대며 난 조그맣게 속삭였다.
 
 -밤이 되었습니다.
 
  복도에 어둠이 드리앉았다.
 
 
 ***
 
 
  칠성파의 행동대장 중 한 명인 윤상필은 키 190cm에 120kg 이 넘어가는 거한이다.
 
  똘마니들처럼 단순히 덩치불리기 위해 살을 찌운 것이 아닌 근육으로 꽉 찬 몸. 평소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 후배들에게 ‘두려운 형님’으로 인식되어 있는 윤상필은 지금 매우 기분이 안 좋았다. 아니, 안 좋다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 앞에 웅크리고 있는 이 년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형님, 그만 하소. 진짜 죽겠싐더.”
 
  옆 의자에 앉은 후배의 말에 윤상필은 숨을 몰아쉰 뒤,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옆으로 던졌다. 얼마나 세게 던졌던지 사무실 문 근처에서 열중 쉬어 자세로 가오를 잡고 있던 똘마니들 중 한 명이 내던진 야구 배트에 얼굴을 맞고 코피를 흘렸다. 하지만 끽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제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식구들 이었지만, 그들은 윤상필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신음소리를 냈다가는 자신들도 지금 두들겨 맞고 있는 저 여자처럼 될 것이다. 식식 콧바람을 뿜어 대며 분을 삭이던 윤상필은 자신 앞에 있는,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움켜쥔 채 웅크려 있는 알몸의 여자.
 
  얼마나 맞았는지 웅크리고 있는 등이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 야구배트에 집중적으로 맞은 오른쪽 팔은 딱 봐도 부러진 걸로 보였고, 갈비뼈도 몇 대는 부러진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배트에 두들겨 맞은 우반신 전체가 엉망이었다. 윤상필은 우악스럽게 손을 뻗어 웅크린 여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여인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오른쪽 얼굴이 부풀어 오른 여인, 정신을 잃은 듯 침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부풀어 오르지 않은 왼쪽 얼굴은 상당히 예쁘장했다. 아니, 예뻤다. 왼쪽의 예쁘장한 얼굴이 오른쪽의 얼굴과 심하게 비교되었다. 퉁퉁 부어오른 광대뼈, 눈이 떠지지 않는 눈. 안쓰러운 감정이 들 법도 하건만, 윤상필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야, 일어나. 이 년아.”
 
  부풀어 오른 얼굴 부분을 솥뚜껑 같은 손이 두드렸다. 얼굴을 두드리는 타격에 여인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여인이 눈을 뜨자 윤상필은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마지막이다. 어디다 숨겼어? 더 이상 안 물어볼 거야. 진짜로 죽여 버리기 전에…… 아니, 네 애미, 애비까지 바닷물에 담가버리기 전에 말해라.”
 
  위협적으로 말하는 윤상필. 험악한 떡대가 자신 앞에서 으르렁 댄다면 누구라도 오금이 저릴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윤상필의 위협에도 입꼬리를 올리더니 피와 이빨이 섞인 침을 면상에 뱉었다. 그리곤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리…… 어마…… 이미…… 하달 전에…… 주거다. 시바로마. 그애서…… 이 지 한 거고.”
 
  여인의 도발적인 말에 윤상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되든 말든 이 년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솥뚜껑 같은 손이 천천히 머리위로 올라가려는 찰나, 옆의 의자에 앉아있던 윤상필의 후배가 일어서서 윤상필의 팔을 잡아챘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 백정처럼 번들거리는 윤상필의 눈빛에 살짝 질린 듯 했지만, 후배는 기죽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 죽이더라도 어따 숨겼는지는 알아내고 죽여야 함다. 큰형님이 뽕 사라진 걸 알면 우리도 저년과 같이 끝장입니다.”
 
  후배의 대답에 윤상필은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그래, 저년을 족치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건 저 년이 가져간 필로폰이다.
 
  1~2 kg 도 아니다. 무려 15kg, 5년 동안 서울 일대의 업소에서 뛰는 ’선수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필로폰을 저 년이 혼자 빼돌려 버렸다. 자신의 실수였다. 미쳤다고 저년 앞에서 자랑스럽게 필로폰을 금고에서 보여주다니. 이 옆에 있는 후배 녀석도 실수했다. 이 년이 필로폰을 빼돌릴 때, 자신의 애첩인걸 알고 자신이 달라고했단 말에 그냥 아무런 확인 없이 순순히 필로폰을 건넸다. 둘 다 책임이 있는 상태. 이대로 큰형님의 귀에 들어가면 자신들은 끝장이다. 빨리 필로폰을 확보하지 않으면…… 윤상필의 다급한 마음을 알아챘는지, 후배 녀석은 진정하라는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심하게 안 해도 됨다. 어차피 슬슬 약 빨 돌 시간이니께, 앞에서 약 들고 흔들면 지가 술술 말할 겁니다. 이 바닥에서 약 이기는 놈 봤습니까? 제가 15년이나 이 짓해왔지만 단 한 번도 본 적 없쓰요. 형님도 많이 봐왔지 않습니까? 큰형님 오늘 물 좋~은 곳에서 밤샐 거니까 천천히 해도 충분함다.”
 
  후배의 말에 윤상필은 깊게 숨을 내 뱉은 뒤, 소파에 앉았다. 후배 말이 맞다. 어차피 이렇게 힘 뺄 필요가 없었다. 이제 얼마 안가 약빨이 떨어질 때 쯤, 약을 앞에 두고 흔들면 지가 알아서 술술 불 것이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여자를 보며 윤상필은 나지막하게 이를 갈았다.
 
 “저년…… 귀여워 해줬더니만…… 섬에 팔아버릴 거야. 시발. 외노자 상대하는 2만 원짜리로 만들어서…….”
 
  윤상필이 이를 갈며 말하는 찰나 갑작스럽게 불이 꺼졌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윤상필은 인상을 찌푸렸다.
 
 “햐…… 이건 또 뭐냐. 정전? 오늘 정전 있을 거라고 한 적 있나?”
 “없었습니다. 형님, 아마 누전 때문에 차단기 내려간 것 같은데요? 요번에 들어온 아가들…… 햐…… 어두우니 아무것도 안보이네…… 그래, 아까 맞은 놈? 이름이 뭐지?”
 
  후배의 말에 코피를 흘렸던 똘마니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권! 혁! 범! 입니다!”
 “아따, 목청 크네. 좀 조용히 대답하고…… 너 아래 안내 데스크에 내려가서 분전함(누전차단기가 들어가 있는 함) 열쇠 받고 누전차단기 좀 살펴봐라. 참고로 15층 분전함은 엘리베이터 앞에 있데이.”
 
  하늘같은 형님의 말에 똘마니는 곧바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어두운 실내, 딱히 할 것이 없는 지라 어느 정도 짬되는 조폭들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똘마니가 나간 지 채 5분이 지났을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리는 소리에 몇몇 조폭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이 고장 났나? 아무나 가서 문 닫으래이.”
 
  문 근처에 있던 똘마니 한 명이 다가가 문을 닫으려 할 때, 똘마니의 얼굴이 ‘뻑!’ 소리와 함께 돌아갔다. 사람의 몸에서 났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큰 타격음. 목이 돌아간 똘마니가 그대로 뒤로 쓰러진 가운데,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를 때리다니. 신사가 할 짓이 아니군…….
 
  생각할 수 없는 괴이한 일에 사무실에 있는 모든 이(쓰러진 여자를 제외한)들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환청일까? 옆에 있는 동료들의 굳은 모습을 보니 동료들도 똑같은 음성을 들은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다시 기괴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특별히 애정을 담아 때려주지.
 새카만 곳에서 섬뜩한 타격음이 들린다. 그리고 동료들이 쓰러진다.
 
  이미 어둠에 적응되었고, 창밖에서 흘러나오는 도심의 불빛에 어느 정도 시야가 보였지만, 동료들이 쓰러진 곳에서는 동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경악할만한 괴변(怪變)에 사무실 내에 있는 조폭들은 경악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이 경계하건 말건,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착실하게 사무실 내에 있는 사람들을 박살냈다. 무언가에 맞은 듯, 섬뜩한 타격음과 함께 나뒹구는 조폭과 똘마니들. 턱이 빠지고 입에서 피와 함께 이빨이 흘러나왔다. 안면이 박살날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미친……!”
 
  나뒹구는 똘마니들과 후배들을 보면서 윤상필은 침을 삼켰다. 완전히 박살난 이빨과 안면. 자신이 전력으로 주먹을 갈기면 저런 위력이 나올까? 저건, 거의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수준의 위력이었다. 입구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는 착실히 후배들을 박살내며 점점 안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몇몇 눈치 빠른 후배들이 재빨리 휴대전화로 동료들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투명한 무언가의 표적이 되어 쓰러지거나 어디선가 날아오는 물체에 휴대전화가 박살이 났다.
 
 ‘진정하자. 생각을 해라. 생각……!’
 
  피와 이빨로 보이는 이물질을 흩뿌리며 날아가는 똘마니를 보며 윤상필은 이를 악물었다. 우왕좌왕하는 똘마니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싸움터에서 굴러본 윤상필은 어느 정도 냉정하게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쓰러져서 나뒹구는 똘마니와 후배들. 그 둘의 공통점은 전부 입 주위, 속된말로 아구창이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 상대방은 아구창만 노린다. 일단, 입을 방어하고. 한 번 막기만 하면…… 반격할 수 있다. 저건 유령이 아니야. 유령은 없어. 저건 사람이야. 사람이야. 사람. 사람. 때릴 수 있는. 사람. 때리면 죽는. 사람.’
 
  주변을 경계하며 윤상필은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주변에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유난을 떠는 후배들의 발자국 소리 가운데, 천천히 흔들림 없이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있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마침내 발자국 소리는 자신의 근처에서 멈췄다. 그리고…….
 
 ‘여기다!’
 
  옆에서 들리는 조그마한 소리에 윤상필은 소리가 울린 곳을 향해 재빨리 가드를 올렸다. 그리고 카운터를 준비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올린 가드에는 아무런 충격도 없었다. 순간, 윤상필은 섬뜩함을 느꼈다.
 
 -속임수야.
 
  세상이 뒤집어졌다. 땅이 지 멋대로 솟아올라왔다. 머리가 울리고 입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턱이 모조리 박살난 듯한 아픔. 균형 감각이 무너졌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정신을 못 차릴 정도건만 곧바로 다른 통증이 그를 엄습했다. 왼쪽 갈비뼈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
 
 “커어…….”
 
  너무 강한 충격에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철퇴로 맞은 것 마냥 움푹 패여 있는 왼쪽 옆구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투명한 무언가가 윤상필의 머리를 붙잡았다. 양 관자놀이에서 느껴지는 압박, 누군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은 것 같았다. 창밖에서 비치는 밝은 도심의 불빛에 윤상필은 자신의 앞에서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가 일렁이는 모습을 보았다.
 
 -너도, 오래 버틴 ‘상’이다.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그의 이마에 떨어졌다.
 
 ***
 
 광왜곡 마법은 자신에게 비치는 빛을 일정부분 일그러뜨려 자신의 몸을 감추는 일종의 투명화마법이다. 고차원의 광왜곡 마법은 빛의 왜곡이 매우 교묘해서 대낮에 움직여도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지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양복에 걸린 광왜곡 마법은 재료가 빈약(?)한지라 그 수준이 낮았다.
 
  밝은 곳에서 보면 살짝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게 보일 정도
 
  하지만, 이렇게 어둠에 휩싸인 지금이라면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메리트지만 난 거기에 하나를 더 더했다. 바로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면서 몸에 건 ‘시야 확장 마법’. 눈의 시신경에 간섭해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빛의 영역 자체를 늘려버리는 이 마법으로 나는 대낮처럼 생생하게 상대방의 행동과 반응을 보고 공략할 수 있었다.
 
 ‘너무 쉽군.’
 
  안면이 박살난 채 쓰러지는 남자를 보며 난 가볍게 손을 털었다. 운동 좀 한 듯이 보이는 근육질 거한. 만약 빛 속에서 이 거한을 제압하려 했으면 시간 좀 걸렸을 것이다.
 
  아무리 ‘근력 증폭’을 사용해서 근력을 강화하더라도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
  ‘신경가속’으로 반사 신경이 강화되었다 하더라도 모든 공격을 피할 수는 없다.
 
  빛 속에서 내 정체를 드러내고 싸웠으면 조폭들도 이렇게 당황하지 않았을 거다. 조직적으로 둘러싸고는 날 상대했겠지. 물론, 그렇게 반항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내가 가진 힘은 이 ‘주먹 좀 쓰는 민간인’에 비해 압도적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쉽게는 제압은 못했겠지. 남아있는 떨거지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공황상태 빠져 따로 행동하고 있는 적들. 공포에 빠진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
 
 어둠은 두렵다
 
  이것은 유전자에 각인 된 공포다. 수십만 년 전, 아직 불의 쓰임새도 발견하지 못한 인류의 조상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공격하는 포식자들을 경계해 왔고, 포식자를 만나더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본능적으로 어둠을 경계하고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둠을 두려워하고 경계한 개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각이 박탈된 어둠 속에서는 인간은 철저한 피식자가 된다. 토끼처럼 작은 소리와 충격에도 움찔 놀란다. 물론, 인간은 의지로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공포를 극복할 ‘의지’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어둠에서 튀어나와 공격한다. 사선을 넘나들며 정신을 갈고닦은 전사도 혼비백산할 일이다. 이런 한량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휴대폰 불빛이 비치는 적을 우선 제압했다. 근처에 떨어진 재떨이나 화분을 던지고, 직접 달려가서 안면을 박살냈다.
 
  한 명씩 차곡차곡
 
  도망치지 못하도록 살살 코너로 몰며 쓰러뜨리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한 명만 남았다. 커다란 참치해체용 회칼을 든 녀석. 위험한 무기를 들고 있어서 가장 나중으로 미뤄둔 놈이다. 내가 잠시 조용히 있자 더 큰 불안감을 느끼는지 조폭은 떨리는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렸다.
 
 “어느 새끼야! 나와!”
 
  이리저리 칼을 휘두르며 눈을 부라리는 조폭. 나름 호기롭게 외친 듯하지만…… 보이는 저건 겁에 질렸다는 표시다. 조폭을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명색이 주먹으로 먹고 산다는 조폭인데 일반인과 다른 건 덩치가 좀 크다는 것밖에 없다. 싸움은 거의 대부분 초보. 그나마 좀 싸울 줄 알던 녀석은 박치기로 마무리 해줬던 떡대 거한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저 조폭이라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다. 벽을 등져서 경계 범위를 줄인 뒤,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나마 파악할 수 있는 상대방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반격을 노렸겠지. 뭐, 이렇게 수준이 낮으니 나로서는 감사할 뿐이다.
 
 -이제 너 한 명 남았군.
 
  약간의 공포분위기 조성을 위해 일부로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조폭의 주위를 맴돌았다. 창백하게 질린 채, 떨리는 눈으로 발자국 소리가 나는 곳을 보는 조폭. 그런 조폭을 바라보면서 난 양복 주머니 쪽을 더듬었다. 어디 있더라? 복도에서 내가 한번 써먹고 이쪽에 넣어놨는데? 나도 내 모습이 잘 안보여서 찾기가 힘들다. 몇번 더듬자 양복상의 호주머니 쪽에서 딱딱한 이물감이 만져졌다. 좋아, 찾았다. 조용히 양복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제 마무리를 할 때다.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곧바로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꺼낸 뒤, 조폭의 다리를 향해 겨누고 쏘았다. 조폭의 허벅지에 박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난 손잡이 쪽에 있는 스위치를 살포시 눌렀다.
 
 “끄아아아아아아엑.”
 
  돼지 멱따는 듯한 괴성을 지른 뒤 바로 바닥에 쓰러진 채 간질 환자처럼 온몸을 덜덜덜 떠는 조폭. 음…… 입을 막지 않으면 이런 목소리를 내뱉는구나.
 
  내 손에 들린 전기면도기 비슷한 물건
 
  내가 직접 만든 사제 테이저 건이다. 전기충격기는 파는데, 테이저 건은 구할 수가 없어서 직접 만들었지. 전기충격기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교체해서 길게 늘인 뒤, 충격기 끝 부분 전체를 투사체로 만들고 장난감 총과 컨버젼해서 만든 녀석이다. 물론, 딱히 이런 것 사용하지 않더라도 주먹으로 시원하게 두들겨 패줄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발작적으로 휘두르는 눈먼 칼에 헬멧 이음새나 장갑 이음새 부분, 맨살에 칼이 들어가면 어떡해…….
 
  다른 사람이 아픈 건 참아도 내가 아픈 건 못 참는다고요!
 
  딱히 주먹만 써야하는 이유도 없는데 되도록 안전하게 가는 게 당연한 거지. 저녀석이 칼 들고 있을 때부터 테이저 건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조폭이 게거품 물고 기절한 걸 확인한 뒤, 나는 조용히 손잡이 부분에 달린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조폭에게 다가가서 다리에 박힌 투사체를 뽑아냈다.
 
 -좋아. 정리 끝.
 
  끝난 걸 확인한 뒤, 천천히 마법 시야를 해제했다. 내 눈에 보이던 인간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색상의 빛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장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 눈 뻐근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속에서 난 잠시 헬멧을 벗고 양 눈을 문질렀다. 일시적인 실명과 눈의 통증. 이건 시야확장마법의 부작용이다. 애초에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빛의 영역인 적외선, 자외선을 보는 마법이다. 부작용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거겠지. 잠시 눈 마사지를 한 뒤,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자 다시 헬멧을 썼다. 좀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흐릿하게나마 물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히 하다.
 
  이제, 노동의 과실을 수확할 차례다.
 모든 정리가 끝나고 난 다시 엘리베이터 로비 쪽으로 이동해 내려간 차단기를 올렸다. 다시 들어오는 불빛. 어둠에 잠겼던 복도가 전기가 들어오니 다시 환해졌다.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난 차단기 앞에 있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가지고 왔던 마법가방이다.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밖에 있는 4명의 똘마니들을 제압할 때,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놔둔 채로 갔거든.
 
 이제, 보물찾기 할 시간이다.
 
  장비도 되찾았고 불도 들어왔겠다. 가방을 한 손에 든 뒤, 다시 사무실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조폭들의 사무실에는 어떤 게 있을까? 영화처럼 금고에 돈다발을 쌓아뒀을까? 아니면 다른 것이? 마치 선물 보따리를 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을 향해 걷고 있는데, 사무실 쪽에서 커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뭔가가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벌써 누가 깨어났나?
 
  비명 비슷한 신음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거의 반나절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때렸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폭들이 벌써 깨어날 리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뭔가를 때리는 소리가 나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에 사무실 쪽으로 달려가니 생각지도 못한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알몸으로 쓰러져 있던 아가씨
 
  그 아가씨가 왼손으로 금속제 야구배트를 들고 커다란 장한을 있는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맞고 있는 사람은 아까 전, 맷집이 좋아서 나에게 3방이나 맞은 뒤에야 뻗은 커다란 조폭. 신음 흘리며 비척거리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가씨가 휘두르는 방망이질에 깨어난 것 같았다. 거한의 체형과 실력을 생각하면 그냥 간단하게 여자를 제지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상대방을 기절시킬 때, 턱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 이유가 있다.
 
  턱을 때리면 뇌까지 충격이 다이렉트로 꽂혀서 몸을 가눌 수 없거든. 도중에 깨어난다 하더라도 저렇게 균형 감각이 흔들려서 쉽게 일어설 수 없다. 덕분에 조폭은 입에서 폭포수 같은 피를 흘리며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근데…… 때리는 여자도 정상은 아니네. 아니 더 심한 걸?’
 
  왼손으로 야구배트를 들고 있는 힘껏 조폭을 때리는 여자. 처음 봤을 때부터 폭행의 흔적이 보였는데 이렇게 환한 빛 속에서 보니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오른쪽, 우반신 전체가 부풀어 오르고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 오른쪽 팔 다리는 거의 으스러지다 시피 했다. 아마, 저 조폭보다 더 아플 텐데……. 그런데도 여자는 집요하게 배트로 조폭을 때리고 있었다.
 
 -워…… 무서운 아가씨인데.
 
  내 말에 아가씨는 잠시 흠칫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입술을 깨물고는 또다시 배트를 움켜잡았다. 여자의 행동에 잽싸게 다가가 손목을 잡아챘다. 이러다 진짜 시체 치울 것 같았다.
 
 -그만하지 아가씨? 살인은 곤란해. 살인이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경찰의 수사가 커진다고. 난 주목을 받으면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놔! 노아라고!”
 
  내가 제지해도 여자는 놓으라는 듯이 몸을 흔들었다. 워…… 살짝만 움직여도 엄청 아플 텐데…… 증오에 가까운 눈빛으로 조폭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단순히 폭행당한 것뿐만이 아니라 쌓인 것이 많은 것 같았다. 이렇게 시간 끄는 것은 좋지 않은데……. 다른 조폭들처럼 기절시켜야 하나? 내가 여인을 붙잡고 갈등하고 있을 때, 여인은 잠시 발버둥을 멈추더니 이내 주저앉아 야구배트를 내려놓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와…… 진짜 미치겠네.
 
 “흑…… 흑…… 내갸…… 내갸 어떤꼴을 당해느데…… 엉엉…….”
 -저기 아가씨…… 울음 뚝! 울음 뚝! 하……. 정말 강도 짓하기 더럽게 힘들군……. 젠장.
 
  내 한탄하는 말에 아가씨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왼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여자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철제금고가 있었다. 아가씨는 곳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4자리 숫자를 말했다. 설마…… 비밀번호 인가? 엉엉 우는 아가씨를 들어 근처 소파에 앉힌 뒤, 금고에 다가가 아가씨가 말한 번호를 눌러보았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우와……. 진짜 비밀번호다. 금고 같은 거 있으면 뜯어내려고 가스 절단기까지 가져왔는데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다. 근데…… 기대한 돈뭉치는 없고 장부로 보이는 공책하고 몇 개의 수표책만 있네?
 
  설마 꽝…… 인가?
 
  아니…… 아닐 꺼다. 금고에 보관한 만큼 뭔가 있을 거다. 일단 손에 잡히는 공책을 대충 훑어보았다. 역시나, 평범한 공책이 아니다. 장부다. 이름과 함께 옆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금액들. 액수가 1~2백만 원도 아니고 0이 무려 8개, 억 단위다. 그리고, 금액들 옆에 적힌 이름들은…….
 
  우리 구 국회의원 이름이네?
 
  정치에 관심 있지는 않지만 국회의원 이름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지 이제 일주일도 안 지난지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안그럼 내가 어떻게 국회의원 나리 이름을 알겠어……. 먹고 살기 바쁜데 까맣게 잊어버렸겠지.
 
 국회의원 ’홍전표’…….
 
  이가 갈리는 이름이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 앞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기호 1번~ 홍전표’, ‘기호 1번~ 홍전표’ 라고 외치며 확성기든 차량과 알바가 와서 춤추고 노래했는데, 새벽 6시부터 그 짓거리를 해서 거의 한 달간 강제 기상해야 했다. 이제 악몽은 거의 안 꾸지만 잠버릇이 예민한 건 여전하거든……. 구청에 항의해도 씨알도 안 먹혀서 내심 떨어지기를 바랬던 인간이었는데, 결국 당선돼서 낙심했었지.
 
  그나저나…… 장부에 적혀 있는 돈은 조폭이 건넨 정치후원금인가?
 
  워…… 이런 게 진짜로 있구나, 조폭에게 돈 받아먹는 국회의원이…… 유치한 쌍팔년도 영화 레퍼토리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신기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누군가는 매우 흥미 있어 할 물건이지만…… 나에게는 그냥 종잇장이다. 젠장…… 이걸로 국회의원을 협박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고. 경찰에게도 쫄아서 이런 양아치들이 털어먹는 나에겐 국회의원은 너무 거물이다. 그래도 일단 챙겨둬서 나쁘진 않겠지. 골프가방에 장부를 쑤셔 넣은 뒤, 금고에 남아있는 수표책을 봤다. 도장과 함께 있는 수표책. 이건…….
 
 ‘당좌수표네.’
 
  은행 계좌에 돈을 넣은 뒤, 은행에게 수표를 가져온 사람에게 돈을 지급하도록 하고 개인이 발행한 수표. 그 액수가 대단했다. 무려 억 단위. 전부 합쳐보니 20억 정도 된다. 이 수표책에 도색 찍고 은행에 제출하면 당장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빼돌리기에는 문제가 많다.
 
  수표가 털렸다는 것을 알아채면 조폭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 수표를 정지 시키겠지. 그러면 이 수표는 휴지조각이 된다. 지금은 한밤 중, 은행은 문 닫았다. 내일 아침 당장 간다 하더라도 돈을 빼내기는 힘들다. 만에 하나 정지를 안 해서 돈을 빼냈다 하더라도 CCTV하고 돈이 어느 계좌로 인출되었는지는 전부 기록에 남는다. 그러면? 답은 뻔하다. 돈을 인출 한다 하더라도 금방 덜미를 잡힌다. ‘암흑가의 거물’ 이나, 내가 빼돌린 장부에 기록된 ’높으신 분’ 들은 차명계좌, 대포통장이니 뭐니 해서 흔적이 남지 않게 다 빼내시겠지만…… 나는 겨우 통장 두 개 있는 소시민이다. 크흡…….
 
 ’그림의 떡…….’
 
  아무 말 없이 수표책에 손을 놓았다. 허허허…… 이런걸 현자타임이라고 해야 하나. 허탈하다. 내가 욕망에 빠져 어리석었구나……. 공수래공수거. 결국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 곳곳에 너부러진 조폭들. 그럼 이 녀석들은 그냥 봉변 맞은 거네? 아니지. 이 조폭들 틈에서 폭행당하던 여인을 구했잖아. 금전적인 이득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의로운 일을 했네. 음…… 이렇게 생각하니 나름 뿌듯하다. 뭐 어쩌겠어. 이렇게라도 정신승리 해야지.
 
 ’그나저나…….’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선 뒤, 내가 구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예쁜 얼굴이다. 소파에 앉은 채 엉엉 울고 있는 아가씨와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뱉고 있는 떡대.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길래 아가씨가 이렇게 기를 쓰고 아 떡대를 야구배트로 내려치려 한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까 전까지는 그닥 관심이 없었지만 일도 다 끝나고 이번 원정에서 얻은 유일한 수확이라고 생각하니 관심이 갔다. 여인에게 다가간 뒤,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건넸다. 훌쩍거리며 손수건을 바라보는 아가씨 아가씨를 향해 나는 웃으며(전혀 보이지 않겠지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덕분에 시간을 절약했습니다.
 
  내 호의에 아가씨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골절되고 부러진 듯한 오른손…….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조폭들에게 폭행당한 것일까? 여인을 바라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가능하면 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가능하신가요?
 잔뜩 움츠린 채 날 올려다보는 여인의 눈빛. 아직 시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좀 이상하다. 잔뜩 조여진 여인의 홍채, 그리고 불안하게 떨리는 눈, 마지막으로 얼굴에서 보이는 희미한 근육 경련. 여자의 신체증상과 이곳이 조폭의 아지트라는 것을 생각하니 답은 금방 나왔다.
 
  마약이다.
 
  신체 증상을 보니 슬슬 금단증상이 오는 것 같은데…… 이래서는 정상적으로 대화를 할 수가 없다. 흠…… 남은 약이 있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됐든 이곳은 폭력조직이니까. 약 하나 있다고 해서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 답변도 하지 못한 채 덜덜 떨기 시작하는 여인을 내버려 두고 깨어난 떡대를 바라봤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위치로 보였던 녀석. 이 녀석이라면 약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거한에게 다가가 목을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숨이 막히는지 켁켁 거리면서도 나름 눈을 부라리며 살기를 흩뿌리는 거한. 그냥 평범한 위협이 아닌 진짜 사람을 죽여 본 듯한 살기, 널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살기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쫄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선 웃음만 나올 뿐이다.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 요리사를 보며 눈을 부라리는 것 같달까? 몸에서 나오는 살기와 기세를 보니 사람 몇 명 죽여보고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줘야겠다. 무법자의 방식으로.
 
 -기 죽지 않고 눈을 부라리는 것은 칭찬해주마. 하지만…….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기, 조폭의 그것과는 비교하는 것이 모욕일 정도로 지독한 살기가 내 몸을 중심으로 후광처럼 퍼져나갔다. 살기와 마력이 뒤섞인 일종의 마법적인 기세다. 작은 동물이 호랑이나 사자를 만나면 소변을 지리며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굳어버리는 것처럼, 내 살기에 조폭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생선을 손질하는 요리사의 심정으로 나는 굳어버린 조폭의 눈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서서히 찔러 넣었다.
 
  서서히 눈을 파고드는 손가락. 고통에 몸부림 칠만도 하지만 조폭은 비명도,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그대로 서서 방뇨했다. 눈에 파고든 손가락은 아주 느긋하고 여유롭게 조폭의 안구를 천천히 빼냈다. 똑똑히 고통을 느끼게. 간단한 화염마법으로 시신경이 뜯겨진 부위를 지혈해준 뒤, 이젠 하나 남은 조폭의 눈앞에서 나는 뽑아낸 안구를 천천히 짜부라트렸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눈을 부라리면…… 남은 눈도 이렇게 될 거야. 알겠지?
 
 ***
 
  나의 ‘진심어린 설득’으로 고분고분해진 거한은 곧바로 약이 어디 있는지 입을 열었다. 아까 참치해체용 회칼을 들고 휘두르던 조폭, 그 조폭의 안주머니에서 비닐 팩에 담긴 하얀 가루와 주사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닐 팩을 열자마자 올라오는 비린내, 으…… 그렇게 좋은 냄새는 아니다. 하지만, 이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여인에게는 아닌가 보다.
 
 “그…… 그거!”
 
  여인의 눈앞에서 가루와 함께 봉지를 뜯자 여인의 눈이 번뜩거리며 돌아갔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혐오하는, 애증 섞인 눈빛이다. 정신은 거부하는데, 몸은 간절히 원하니 괴롭겠지. 손을 뻗으려는 여인을 제지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해드릴 테니, 어떻게 투약하는지 말해주십시오.
 “가…… 가루를 불로 녹이고…….”
 
  여인의 말에 따라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아직 멀쩡한 탁자에 약을 쏟아 부은 뒤, 손가락에 불꽃을 일으켜 녹여버렸다. 손가락에서 불꽃이 나오는데 여인은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 뭐, 금단증상에 정상적인 생각이 힘들겠지. 여인이 시키는 대로 난 완전히 녹인 약을 그대로 주사기로 빨아냈다.
 
  투명한 약이 든 주사기
 
  투약할 준비가 완료되자 여인은 그나마 성한 자신의 왼쪽 발을 내밀었다. 오른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하게 부은 발목. 발목을 돌리니 발목 안쪽에 새파랗게 멍이 든 게 보였다. 음, 팔에다 주사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네. 하긴, 팔목에 하면 엄청 많이 티가 나니 이렇게 잘 안 보이는 발목 쪽에 하는 게 맞겠지. 내가 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여인은 빨리 넣으라는 듯이 발을 흔들었다.
 
 ‘쯧……. 안타깝군.’
 
  발목을 바라보며 난 혀를 찼다. 엉망인 여인의 몸. 오른쪽 광대뼈는 부러진 것 같고 오른팔과 오른 다리는 퉁퉁 불어 오르기 시작했다. 갈비뼈도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 않고…… 이렇게 부상이 심한데도 약부터 찾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여인의 재촉에 난 조심스럽게 발목을 더듬으며 주사바늘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아주 살짝 밀어 넣었다. 다 밀어 넣을 수는 없지. 투약양을 모르지만 이건 좀 많아 보이거든……. 그 살짝 만으로도 여인은 만족한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약효가 돌기에는 이르지만, 약이 들어갔다는 심리적 안정감에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안정한 듯이 보이는 여인을 향해 나는 다시 한 번 손수건을 내밀었다.
 
 ***
 
  범죄 조직은 말 그대로 ’범죄’, ’나라에서 금지하는 행위’로 돈을 번다.
 
  단순히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 의도를 가지고 단체로 모여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국가의 입장에선 이런 범죄 조직은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상종할 수 없는 사회의 악성종양이다. 당연히 가만두지는 않는다. 일벌백계 식으로 범죄 조직이 저지른 범죄는 보통 단순 범죄보다 훨씬 가혹하게 처벌된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
 
  불법적인 일을 통해 버는 돈은 좋아하지만, 이런 가혹한 처벌은 싫어하는 범죄자들은 일이 들켜도 자신들은 잡히지 않기 위해 전혀 관계없는 민간인들을 자신들 일에 끌어들인다. 이런 일이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바로 ’마약 운반’이다.
 
  진짜 범죄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마약을 운반하지 않는다.
 
  핵심유통과정에는 개입하지만 검문이나 검사가 심한 지역에선 그들이 부리는 끄나풀이나 마수에 걸려든 민간인을 운반책으로 사용한다. 최근에는 공항에서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대신 짐을 들고 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약운반책이 되어 체포된 일들이 많이 소개되면서 다들 조심하고 있지만, 사실 이 수법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범죄조직들 사이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법이었다.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 마약을 운반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저 떡대가…….
 “내…… 제가 초등하교 다니 때, 처음 말 걸었던 인간이에요.”
 -인간 쓰레기들이군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여인, ‘채현아’의 말을 들으며 난 혀를 찼다. 그녀를 통해 듣게 된 사연은 단순히 마약을 대신 운반해주다가 마약사범이 된 것보다 더 지독했다. 내 대답에 채현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죠. 그냥 어떤 아저씨가 신문지에 쌓인 벽돌을 주고, ‘아저씨가 바빠서 그런데, 이것 좀 저쪽까지 옮겨줄 수 있니?’ 라고 물어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옮겨 줬죠. 그리고, 수고비로 만원을 받았어요. 학원가는 도중에 자주 만나서 부탁해서…… 나중에는 오히려 기다리기 까지 했죠.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예요.”
 
  아직 어린 초등학생, 경찰들도 웬만해서는 어린애들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을 노려서 이 녀석들은 그녀를 마약 운반책으로 써 먹었다. 지금은 닳고 닳은 여자지만, 그땐 너무 순진했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일 끝난 뒤 받는 용돈에 좋아하며 열심히 마약을 운반했다. 이것만으로도 이곳의 윤리관에서는 충분히 분노할 일이지만 그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약운반은 단순히 더 큰 물고기를 잡기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한 번 시작된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중학교 들어가고 중 2 정도가 되었을 때…… 그때 전 제가 운반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챘어요. 마약…… 무서워서 손을 떼려고 그랬는데 저 새끼가 협박하더군요. 만약, 일을 그만두면 부모님하고 네 또래, 선생님, 경찰…….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그리고, 너네 가족들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이 더 큰일 날 일이었는데, 그때는 겁에 질려서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어요. 보복이 두려웠죠.”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게다가 ‘이제, 아주 가끔씩 일을 부탁할 테니 계속해라. 어차피 초등학생 때부터 계속한 일 아니냐?’라고 설득했죠. 실제로, 일을 아주 가끔씩 시켰어요. 3~4 개월에 한 번 정도? 잊을 만하면 전화가 와서 시켰죠. 받는 돈은 더 커졌고요. 한 번에 100만원…… 여중생에게 100만원은 정말 엄청 많은 돈이었죠. 그렇게 간간히 심부름을 하다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소식이 끊겼어요. 그때 전 그냥 순진하게 ‘이제 경찰들에게 의심받을 만한 성인이니 일을 시키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지금까지 일을 시킨 것이 전부 포석이라는 것을 모른 채…….”
 
  거기까지 말한 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내가 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그녀는 나지막하게 이를 갈며 거한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조금씩 몰래몰래 문 쪽으로 기어가던 거한은 그녀가 바라보자 흠칫한 얼굴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몰래 도망치려하는 움직임에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금속배트를 줍고, 그대로 거한의 발목을 향해 내리쳤다. 근력증폭마법을 푼 상태였지만, 발목을 향해 전력으로 내리친 야구배트의 위력은 작지 않았다. 짐승의 신음소리 비슷한 비명을 내지르는 거한을 향해 난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거한의 코앞에서 배트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흉흉한 살기가 담긴 몽둥이가 눈앞에서 휘둘러지자 거한은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웅크렸다. 거한에게 몽둥이를 겨눈 채,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턱짓했다.
 
 -계속하시죠. 아가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을 얻으려고 했을 때, 이 새끼가 나타났어요. 그리곤 협박했죠. ‘당신이 마약 운반한 거에 대해 회사나 경찰에게 알리겠다고.’. 당황했죠. 그냥 자수할까 생각해봤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기뻐하던 부모님하고, 자수했을 때 받게 될 불이익들을 생각하니…… 자수 할 수가 없었어요. 입막음 대가로 전 오피가 됐어요. 한 달에 1번. 뛰는 창녀.”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녀는 영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2번이 되고. 4번이 되고, 8번이 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나도 많이 들어와 버렸어요. 회사에서는 소문이 퍼져서 짤렸고, 저 새끼들이 피로회복제라고 준 것은 마약이여서 중독된 상태. 부모님에게 알려볼까 생각해봤지만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친척들에게 자랑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알릴 수가 없었군.
 “예……. 너무 깊이 빠져들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너무 늦었죠. 마약에, 매춘에……. 경찰에 신고하면 못해도 감옥에 4~5년은 들어가 있어야 했어요. 게다가 빨간줄 그어지면 인생 끝이죠. 취직도 못 하고…… 불어버리는 순간,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무너져 버릴 지경이 왔어요. 절망적이었죠.”
 
  만약 처음부터 저런 강행군을 시켰으면 그녀는 다 포기한 채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천천히 끓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모르다가 결국 삶아죽는 것처럼, 이 녀석들은 교묘하면서도 차근차근 희생양을 수렁으로 끌어드렸다. 그녀, 채현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물끄러미 내 앞에서 몸을 웅크린 거한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혼자 그런 일을 꾸몄을까?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겁에 질린 듯 보이는 조폭. 사람을 외형만으로 판단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은 그런 머리 굴릴 만큼 똑똑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 녀석 혼자 단독으로 한 짓은 아닐 것이다. 아마 조직적으로 이 짓을 했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뒤로, 가족들에게 창녀라는 것을 숨긴 채 살아가다가 부모님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져서 자살을 결심했는데, 죽기 전에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 개자식에게 큰 엿을 선사하려고 조직의 마약을 훔쳐다가 숨겼다고 했다.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오기 전까지 맞고 있었던 거고.
 
  흠……. 마약이라.
 
  마약을 숨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난 조용히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지금 ‘여인이 처한 상황’, 그리고 ‘여인이 원하는 것’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당좌수표’……이거 잘하면, 아주 잘하면 내가 가진 수표를 환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여인이 내게 협조해야 한다. 이 여인을 움직이려면…… 먼저 그녀가 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거래를 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뭐할 거죠?
 “글쎄요. 딱히…… 생각해놓은 게 없네요. 그저 저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을 뿐.
 -흠……. 아가씨 말을 들어보니 저랑 약간의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어차피 산 거 좀 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당신을 이 꼴로 만든 녀석들에게 큰 엿도 먹여야 하고?
 
  회칼을 들고 설치던 조폭 근처로 가서 떨어진 회칼을 집어 들었다. 날 부분만 50cm 가 넘어가는 참치해체용 대형 회칼. 이 정도면 사람의 살도 뭉텅뭉텅 자르겠지. 회칼을 든 뒤, 나는 들고 온 가방을 뒤져 금고 해체용으로 가져온 가스 절단기를 꺼내 켰다.
 
  토치건에서 나오는 새파란 불꽃.
 
  가방 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휴대용 가스 절단기 치고는 믿을 수 없는 화력이었다. 당연하다. 이건, 휴대용 가스 절단기가 아니니까. 금고가 두꺼워도 충분이 절단할 수 있도록, 난 간이 가스 절단기가 아닌 산소통이 달려있는 커다란 절단기를 가방에 통째로 우겨넣었다. 불꽃이 나오는 토치건만 꺼내서 그렇지, 사실은 무지 커다란 녀석이다. 내가 절단기를 꺼내자 조폭은 뭔가 섬뜩함을 느낀 듯,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서 도망치려 했지만, 힘이 풀리는지 계속해서 일어서지 못하고 휘청대다 넘어졌다. 뭐, 발버둥 치라지. 도망치더라도 다시 잡아오면 되니까. 꺼낸 절단기로 회칼을 달구며 나는 아가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만약, 제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돈도 챙겨드리죠. 음……. 한 5억원 정도……? 덤으로 당신을 괴롭힌 이 녀석도 좀 손봐드리고. 이 폭력조직에게도 어느 정도 피해가 갈 겁니다. 어때요? 별로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닙니다만?
 
  내 제안에 현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다. 아니, 너무 후한 제안이지. 그녀의 승낙에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좀 잔인할 수도 있습니다.
 
  잘 달궈진 회칼을 들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하는 조폭을 향해 움직였다. 벽을 짚고 간신히 일어선 거한. 일어선 조폭의 발목을 향해 난 가볍게 로우킥을 날려 쓰러뜨렸다. 그리곤, 곧바로 거한의 얼굴을 향해 뜨겁게 달궈진 회칼을 내밀었다. 검 끝을 집중적으로 데운 회칼은 조폭의 코끝에서 주홍빛 광채와 함께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이글거렸다.
 
 “나…… 나를 건드리며 칠서파가 가만히…….”
 -닥쳐.
 
  달궈진 회칼을 역수로 쥐고 그대로 거한의 허벅지에 박아 넣었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거한의 얼굴. 버둥거리며 발버둥치는 거한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현아 씨. 복수는 철저하게 하는 겁니다. 아까 전처럼 엉성한 몽둥이질은 안돼요. 확실하게, 후환이 없도록…… 철저하게 짓밟는 게 우선이죠. 저라면 먼저 이 녀석을 불구로 만들 거예요. 칼을 사용해서 힘줄을 날려버리겠죠. 주먹질 밖에 먹고살게 없을 것 같은데 병신이 되면? 끝나는 거죠. 게다가 아가씨한테 금고에 마약 있다고 말했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경찰에 마약이 걸린 게 밝혀지면 이 녀석은 주먹 패한테도 버림받아요. 아마 배신자 취급당할 겁니다. 아, 일단 주위에 있는 휴대폰 하나 집어 들어서 경찰서에 신고부터 하세요. ‘이곳에 어떤 괴한이 습격했다고’, 그리고 마약이 있는 곳도 말하시고……. 일을 크게 키워야 하니까.”
 
  내 말에 지금까지 좀 반항적이었던 거한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불구로 만든다는 말’ 그리고 ‘조직의 배신자로 만든다는 말’ 거한, 윤상필은 그 뜻이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알았다. 자신이 당하는 일도 끔찍하지만 조직을 배신한다면…… 자신의 가족 또한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자신 앞에 있는 양복 괴인은 지금 자신 앞에서 보란 듯이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일을 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채, 윤상필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나! 나는 경차서에 갈거야! 죄가플 바들 거라고…… 제바…… 나…… 나는 부야해야 하는 부모니미 있서…… 제바…….”
 -미안하지만, 내 고객님을 만족시키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함과 동시에, 난 허벅지에 박힌 회칼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 그었다. 그리고 무릎 부근까지 잘라내며 뽑아냈다. 근육에 박힌 칼을 다시 뽑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근력 증폭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나에게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칼날이 좀 뜨거워서 근육이 익어버렸거든. 피가 흘러나왔지만 칼에 의해 익어버린 살이어서 그렇게 콸콸 흐르지는 않았다. 칼에 엉겨 붙은 피를 장갑으로 닦아낸 뒤, 난 거한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 법을 어겨온 놈들이 정작 자신이 불리할 때 법을 찾는다는 것이 말이야. 최소한 범법자면 범법자답게 굴어야 하지 않겠나? 저 아가씨 말고도 많은 여자 인생 조졌을 것 같은데……. 넌 편하게 콩밥 먹는 것보다 불구자로 평생 바닥을 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아니, 팔, 다리가 모조리 병신이 되는데 바닥을 길 기회나 있을까? 기대해도 좋아. 난 정확해. 어디를 잘라내야 병신으로 만드는지 잘 알고 있지. 신경과 근육을 지져버려서 수술 같은 것도 소용없을 거야.
 
  말을 끝으로 다시 절단기가 있는 소파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절단기로 회칼을 달궜다. 달구는 동시에 나는 거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다시 절단기로 회칼을 지질 테니 한번 도망쳐봐. 뭐, 한쪽 발이 잘 안 움직여서 움직이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내 행동에 조폭은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렇게 쉽게 될까? 나는 달궈진 칼로 조폭의 허벅지 아래 신경을 끊어 냈다. 한쪽발이 마비상태다. 상당히 잔인한 광경인데도 내 고객님께서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거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더 부족하다는 눈치. 역시, 이것만으로 우리 고객님이 만족 할리 없지. 어느 정도 다시 회칼이 달궈지자 나는 회칼을 들고 거한을 향해 다가갔다.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기어가던 거한은 내가 다가가자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겁에 질린 채, 다시 소변을 지리는 거한을 향해 나는 천천히 타이르듯이 입을 열었다.
 
 -경찰이 올 때까지만 할 거야. 경찰이 빨리 온다면……. 혹시 모르지. 불구가 안 되는 팔다리가 있을지도? 빨리 경찰이 오기를 기도해봐.
 
  달궈진 회칼이 거한의 발목을 향해 떨어졌다.
 
 ***
 
  칼질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거한의 팔과 다리, 그리고 성대까지
 
  칼을 박아 넣은 뒤 길쭉하게 내려 그으며 뽑아냈다. 뼈를 긁어내면서 말이다. 살아있는 것을 잘라서 그런지 칼날이 금방 무뎌졌는데…… 그냥 우악스럽게 힘으로 절단했다. 이미 팔, 다리를 쓸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는데도 고객님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눈치다.
 
  끙…….
 
  경찰이 ‘경찰은 항상 여러분의 3분 거리에 있습니다!’ 라고 홍보해서 못해도 15~20 분 뒤에는 오겠지 했는데, 이놈의 경찰은 신고한 지 40분이 넘어가는데도 올 생각을 안 하네.
 
 ’팔, 다리, 성대까지 했고……. 남은 눈깔이라도 뽑아버려야 하나?’
 
  빨리 더 하라는 고객님의 눈짓에 한숨을 쉬며 다시 칼날을 데우고 있는데, 밖에서 싸이렌 소리가 들렸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3~4 대의 경찰차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휴, 대충 40분 만에 온 건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난 현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더 하고 싶지만…… 경찰차가 왔으니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잘 있어요. 그리고, 제가 말한 거 잊지 마시고.
 
  범행에 쓴 회칼을 전리품으로 가방에 집어넣은 뒤, 현아를 향해 가볍게 손 인사 하고 광왜곡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계단으로 2층까지 내려온 후 창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근처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 양복과 헬멧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데, 속속들이 추가 경찰차가 도착하는 게 보였다. 경찰들에게 있어서도 큰 사건이겠지. 한 대형폭력조직의 본거지가 괴멸당하고 마약까지 연루됐으니 말이야. 아마 조폭들은 당분간 경찰에게 쪼임 당하느라 정신없을 거다. 게다가 조직원들이 모조리 경찰에 잡혀가서 당장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도 힘들 테고…….
 
  그동안 수표를 환전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겠지.
 
  웃으며 가방을 바라보았다. 무려 20억원. 아가씨에게 약속한 5억을 떼어내 준다고 해도 15억이다. 아직 어떻게 환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밤새도록 방법을 찾아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내일 회사는 아프다고 병가내고 수표 정지되기 전에 부지런히 현금을 회수해야지. 15억 정도의 돈이면 좀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참 보람찬 하루군.’
 
  휘파람을 불며 난 정류장을 향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 괴물
 
 다음날, 칠성파(뉴스보고 조직이름 알았다.)의 일은 아침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크게 다뤄졌다.
 
  조폭들 간의 전쟁이라고 했나? 뭐, 사실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게 알려진 듯하다.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약에 관한 건은 방송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공중파 방송에 나갈 정도로 크게 일이 커졌으니까. 칠성파도 엄청 당혹스러울 것이다. 경찰도 매스컴을 의식해 보란 듯이 조폭을 조지고 있었고, 기자들도 특종을 위해 하이에나처럼 칠성파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함부로 뭔 짓 하기 힘들겠지.
 
  뭐, 그쪽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겠지만 결국은 인과응보다.
 
  아니,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인과응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족한데…… 나중에 한 번 더 방문해 줘야겠다. 폭력조직은 이득에 기생하는 곰팡이 같은 존재라서 칠성파를 없애봤자 곧 다른 조직이 그 자리를 차지할 거다. 폭력조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방문교육’을 해준다면 심하게 횡포 부리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다.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그걸 통제하고 이용해야지. 조직은 살려두고 적당히 계속해서 뜯어 먹어야겠다.
 
  아무튼, 그렇게 칠성파가 경찰들의 수사에 의해 잡혀있는 사이 나는 착실히 계획한 일을 진행했다.
 
  먼저 아프다고 꾀병으로 이틀정도 병가(3달 전에 피 토하고 난리쳐서 PM도 그렇게 큰 지랄 안하고 OK했다)내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당좌수표를 환전할 방법을 찾았다. 인터넷에서서 대포통장 범죄사례들을 찾아보니 범인들이 어떻게 범행을 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똑같이 따라했지. 생각보다 쉬워서 깜짝 놀랐달까? 일단, 자신의 명의가 아닌 타인의 명의가 필요한데 이런 타인의 명의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방 범죄의 위험이 있기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 생각보다 쉬웠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수수료 명목으로 500만원 준다고 하니 많이 OK 하더라고. 정체를 감추기 위해 헬멧과 정장을 착용한 채 거래를 했다. 대포 통장으로 돈을 받고 안 돌려주려는 인간들도 있었는데 살짝 살기를 흘리며 손가락뼈를 분지르자 고분고분해졌다. 좀 너무한 처사 같지만 나는 분명히 거래하기 전에 돈의 출처와 위험성에 대해 말했다. 서로 약속을 하고도 단순히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약속을 어기려 하다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다.
 
  아, 나는 관대하기에 약속을 어기려 했던 분들에게도 돈을 지급했다. 험험…….
 
  목숨이 걸리지 않은 이상 되도록 약속은 지켜야지. 20억이라는 돈을 모조리 현금으로 인출하는 통에 부피가 상당했지만 나에게는 공간 확장 마법이 인챈트 된 가방이 있었다. 재료가 워낙 좋지 않아서 가방의 확장 비율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요즘 나오는 5만 원권은 얄상해서 충분히 20억이 들어간다. 내가 잘 마시는 비타민 드링크 ‘비타민 3000’ 10개 들이 박스, 그 작은 박스에 3천만 원이 넘게 들어갈 정도니 말 다했지. 수고비 명목으로 12명에게 500만원씩 뿌렸기에 가방에 든 돈은 19억 4천만 원 정도. 그 중에 5억 원은 나와 거래했던 아가씨에게 줄 돈이니 빼놔야 한다. 실제 남는 돈은 14억 정도인가? 뭐, 나쁘지 않았다.
 
 “힘들다~”
 
  모든 환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난 돈 가방을 내팽개치고 양복과 헬멧을 벗은 뒤 소파에 드러누웠다. 하…….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남의 돈 뜯어먹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배가 꼬르륵 거렸다. 슬슬 저녁시간. 이렇게 힘든데 오늘도 몸매 관리 식단, 그 맛대가리 없는 걸 먹으면…… 정말 우울할 것 같아. 오늘은 나 자신에게 상을 좀 줘야겠다. 지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수화기로 향했다. 그리고 항상 외우고 있던 번호를 눌렀다. 잠시 통화음이 울리고 전화가 연결됐다.
 
 “네, 여기 상록오피스텔 706호인데요.”
 
  잠시 망설였다. 뭘로 할까? 음……. 에이! 고민하지 말자. 어차피 돈도 넘쳐나는데…… 그냥 둘 다 시키면 되지!
 
 “양념에 후라이드 한 마리씩, 그리고 치킨 무는 두 팩 가져다주세요. 아, 생맥주 1000cc도 같이요.”
 
 ***
 
  그렇게 금, 토, 일요일이 지나가고 또다시 출근하는 월요일이 왔다. 지긋지긋한 월요일. 하품을 하며 나는 화장실에서 잠에서 깨기 위해 세수를 했다. 얼굴을 비누칠하고…… 면도를 하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니 좀 잠에서 깨는 것 같았다.
 
 ‘회사가기 싫다…….’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 직장 다니는 모든 이들이 그러하겠지만…… 요즘 들어 부쩍 회사에 가기 싫었다. 하긴, 회사를 다닌다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해서인데 돈은 이미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벌었으니…… 슬슬 회사를 관둘 때가 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싶었다.
 
  요즘 들어서 대기 중의 마력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서서히 차오르던 마력농도, 마력농도는 지난 일주일간 급상승해서 내가 있던 세상의 마력농도와 비슷할 정도까지 차올랐다. 지수함수 그래프처럼 급증가 했달 까? 당좌수표 환전 한다고 까먹고 있다가 금요일 날 치킨 먹으면서 마력을 측정해봤는데 대기 중의 마력이 엄청 많이 느껴져서 깜짝 놀랐다. 그 어마어마한 증가폭에 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하며 황금 같은 토, 일요일 동안 집안에 콕 박혀있었다. 뭐, 사실 일이 없었어도 밖에 나갈 곳 따위는 없지만…… 왠지 이렇게 말하니 비참하네.
 
 ‘오늘…… 그냥 쉴까?’
 
  대기 중의 농밀한 마력은 여전했다. 그래도 이제 마력농도 상승폭은 사라졌다. 이틀 전, 토요일 아침부터 현상유지 수준. 오늘도 불안하긴 하다. 뭔가 터질 것 같기도 하고…….
 
 ‘흠……. 어떡하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마력이 차오르고 있긴 하지만 아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 이 현상이 어떤 일인지도 난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막연한 불안감에 그냥 닥치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 내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닐까? 아무런 일도 안 벌어질 지도 모르는데……. 아니야, 아니야. 최소한 준비를 하는 건 나쁘지 않잖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거니까……. 하지만, 무슨 큰일이 벌어질 확률은 적을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뭔 짓거리냐……. 망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울을 바라보며 눈을 매만졌다. 확 티가 나지는 않지만 눈 밑에 살짝 나있는 다크 서클, 막연한 불안감에 이틀간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전전긍긍하며 걱정하는 꼴이라니……. 여기는 아르도르가 살던 시간, 황혼의 시간이 아니다. 아주 평화로운 세계다. 고개를 저으며 난 불안감을 애써 털어냈다.
 
  긴장하는 것도 좋지만 항상 긴장해 있을 수는 없다.
 
  한번 긴장을 풀어줘야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설마 오늘 재수 없게 ‘펑!’ 하고 뭔가 터지겠어?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다. 얼굴에 가볍게 로션을 바른 뒤, 양 뺨을 찰싹 쳤다. 그래, 내일 사표를 쓴다 하더라도 오늘은 가자.
 
  한 번 훈남, 품절남이 돼보자고.
 
 ***
 
  월요일, 항상 야근에 치이는 IT 회사답지 않게 우리 팀원들은 대부분이 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대머리 오크랑 싸우며 결국 6개월 프로젝트로 바뀐 진성그룹 어플리케이션 의뢰, 아직 4개월인지라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슬슬 막바지 인지라 여유가 있었다. 원래 이런 일은 막바지에 갈수록 속속들이 발견되는 오류와 버그를 땜빵하느랴 피 말리지만…… 엣헴! 내가 워. 낙! 일을 꼼꼼하게 잘해서 이제 마무리 단계만 남았다. 아니, 솔직히 이미 다 끝낸 거나 다름없지.
 
  내가 한 번 팀원들이 짠 프로세스를 보며 오류를 일으킬 만한 코드를 내가 모조리 수정했으니까.
 
  원래는 이렇게 열심히 일 하지 않는데, 잠을 잘 자니 모든 일이 즐거워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일을 처리해 버렸다. 아무튼, 나 덕분에 팀원들은 요즘 싱글벙글 웃으며 퇴근한다. 뭐, 우리의 PM 님께서는 칼퇴근 하는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을 찌푸리지만, 팀의 고참들(나하고 최진혁)은 모두 이 회사에 더 이상 마음이 없기에 PM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는 터라 솔선수범해서 칼 퇴근한다. 덕분에 아래애들도 슬슬 눈치 보며 퇴근하지. 일을 다 끝냈는데 퇴근은 자유죠! 높으신 분들은 이걸 몰라요!
 
 “으아……! 6시도 아니고 5시 칼 퇴근이라니……. 꿈만 같아요.”
 
  회사의 정문을 나오며 꼬맹이는 기지개를 활짝 폈다. 꼬맹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즐겁냐?”
 
  내 반문에 꼬맹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전에 회사 다니는 사람들 보면 죄다 미소 짓고 있어서 ‘회사 다니면 즐거운가?’ 했는데, 제가 직접 다녀보니 그냥 회사가 아닌 밖에 있는 게 즐거워서 웃는 거였어요. 요즘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매일 이렇게 생활하면 좋겠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또 밤샘 작업하겠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듯 꼬맹이는 추욱 늘어졌다. ‘조울증 걸렸나?’ 의심될 정도로 기쁨과 슬픔이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한다. 축 늘어진 꼬맹이를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어쩌겠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앞으로 일 생각하면서 늘어지지 말고 일단 오늘에 충실하자고.”
 “맞아요. 일단 오늘은 즐거우니까…….”
 
  잠시 고개를 세차게 한든 꼬맹이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자, 이제 한번 가볼까요? 선배? 훈남이 되러?”
 
  퇴근하는 회사원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강남역
 
  꼬맹이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유니클로 매장이었다. 높다란 빌딩에 빽빽한 사람들. 번화한 강남역의 모습에 나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음마…….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음? 선배 왜 이렇게 두리번거려요. 번화가 처음 와본 사람처럼.”
 “아니, 그냥. 오랜만에 와봐서.”
 
  꼬맹이의 대답에 웃으며 대답했지만…… 음……. 사실 대로 말하면 처음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내 인생은 정신병원과 학교, 회사. 집. 거의 이 4곳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학창시절에는 정신병원을 들락날락, 그 뒤로는 만성적인 불면증 때문에 항상 피곤해서 기분 좋게 밖으로 쇼핑갈 체력이 없었다. 그저 집에서 축 늘어진 채, 컴퓨터 하는 게 내 낙이었지. 아무튼, 난 난생처음 번화가 유니클로로 들어갔다.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싼 가격과 많은 종류의 옷에 눈이 핑핑 돌아갔다.
 
  으와……. 옷 참 많네. 내가 입는 옷은 전부 통신 판매로 구입해서 이렇게 옷을 사러 매장에 간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옷이 많은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촌놈처럼 이리저리 매장을 둘러보는 사이 꼬맹이는 잠시 이것저것 주위를 돌아다니더니 내게 입어보라는 듯이 옷이 가득들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자, 제 추천리스트. 선배는 몸 좋으니까, 약간 스키니하고 스타일리쉬 한 옷이 좋을 거예요. 그쪽 계통으로 뽑아왔죠.”
 “윽……. 옷 색들이 너무 밝은데…….”
 “입어 봐요. 빨리.”
 
  꼬맹이의 재촉에 난 조용히 유니클로 매장 피팅룸(이런 게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입어보고 살 수 있다니. 오오……)에서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었다. 청바지에 긴팔 티까지……. 처음에는 나도 신나서 이것저것 입어봤는데……. 이것도 한두 번이지 20분 동안 계속해서 갈아입고 하니 힘이 쪽 빠졌다. 음……. 원래 옷 고르는데 이렇게 많이 걸리나? 내가 보기에는 입는 옷 전부 괜찮은데…… 꼬맹이는 뭔가 조금씩 맘에 안 드는 듯하다.
 
 “이건 어때?”
 
  갈아입은 검정 색 와이셔츠와 청바지를 보여줬다. 꼬맹이가 코디해준 룩. 꼬맹이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약간 나이 들어 보이긴 한데…… 멋있어요. 이번 코디는 합격. 이거하고 이제는 이거 입어봐요.”
 “음…….”
 
  꼬맹이가 바구니에서 꺼낸 건네준 옷을 보며 나는 신음했다. 어느새 벌써 8번 째, 꼬맹이가 가져다 준 옷을 입느라 20분간 피팅룸에서 한발자국도 못나가고 있었다. 힐끗 꼬맹이 옆에 있는 바구니를 바라봤다. 이제 더 이상 가져온 옷은 없다.
 
 “이제 옷은 끝이지?”
 “예, 이제 여기서 고를 수 있는 건 끝났고 다른 곳에 가야죠.”
 
  꼬맹이의 기습적인 말에 나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
 
 “다른 데도 가냐?”
 “예, 슈즈 몰하고 청바지 몰도 들러봐야죠. 여기서 살건 딱 2개 정도 밖에 없어요. 이왕이면 좋은 거 사야죠. 한 3~4군데는 돌아다녀야 해요.”
 “머리도 잘라야 하잖아. 아직 저녁밥도 안 먹었고. 3~4군데 들르면 시간이 오버되지 않을까?”
 
  옷만 고르는 것이 아니다. 옷도 고르고 머리카락도 잘라야 한다. 그리고, 밥도 먹어야지. 내 지적에 꼬맹이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길 바랬지만…… 내 지적에도 꼬맹이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걱정마요. 제가 아는 언니가 헤어샵 원장님이에요. 제 머리카락도 다듬어 줬죠. 김혜연 알죠? 탤런트? 그 사람도 거기서 머리 잘라요. 그런 원장님이 특별히! 선배를 위해서! 야간 영업까지 해준다고 했다고요. 뭐, 정확히 말하면 사람 없을 때 오라고 말한 거지만.”
 
  다리가 휘청였다. 으으…… 이럴 수가. 아직 6시. 2~3시간 동안 돌아다닌다면…… 난 녹초가 돼서 쓰러질 거다. 아니지, 밥도 먹을 거니까 한 시간 빼면…… 내가 상심에 빠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꼬맹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바구니에 든 옷을 건넸다. 옷을 보니…… 힘이 쭉 빠졌다. 옷을 건네는 꼬맹이를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이곳에서 다 사면 안 될까?”
 “사긴 뭘 사요. 꼼꼼히 골라야지. 빨리 입어요. 오늘 여러 군데 들러야 하니까. 이 정도로 훈남이 될 줄 알았어요? 자 빨리빨리!”
 
  꼬맹이의 등 떠밈에 나는 다시 피팅룸으로 처박혔다.
 
 ***
 
 꼬맹이와의 쇼핑시간은 기나긴 괴로움과의 사투였다.
 
  유니클로에서 수십 가지 옷을 입어가며 옷 고르기를 한참. 슈즈 몰에서 별의별 신발을 신어보며 신발 고르기를 한참……. 꼬맹이와의 쇼핑은 마력사용자로서 월등한 체력을 가진 나도 못 따라잡을 정도의 강행군 이었다. 이럴 수가! 마력사용자의 체력으로도 따라가지 못할 강철 체력이라니! 이것이 젊음의 힘인가? 쇼핑을 할수록 점점 생기를 얻어가는 꼬맹이와는 다르게 나는 시간이 갈수록 푸석하게 말라 비틀어졌다.
 
  으으……. 이건 필시 이 꼬맹이에게 양기를 빼앗기는 것이야…….
 
  내가 말라비틀어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꼬맹이는 활기차게 돌아다녔다. 그래도 다행인 게 이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쇼핑의 강행군은 내가 낸 꾀에 의해 중지되었다. 어떤 거냐고? 매우 간단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는 오랑캐로 막고, 쇼핑은 쇼핑으로 막는다. 꼬맹이의 강압에 슈즈 몰에서 한참 신발을 신어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 신발을 고르는 와중에도 꼬맹이의 눈길은 민활하게 돌아가며 여성용 구두에 눈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꾀를 내었다. 슈즈 몰에서 신발을 고르고 다음 옷가게로 왔을 때 나는 가게 앞에서 딱 한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남녀 공용 매장이지? 네 것도 하나 골라라. 나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나만 사니 미안하네.”
 
  내 대답에 꼬맹이는 괜찮다면서 손사래 쳤지만 난 끈질기게 설득했다. 뭐, 거절하면 물러가는 게 내 스타일이지만 이건 꼬맹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날 위해서니까 포기하지 않았지. 꼬맹이가 여기 비싼 곳이라고 거절하려하기에 오히려 괜찮다고 밀어붙였다. 꼬맹이는 내 제안에 잠시 갈등했지만 이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난 상당히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꼬맹이가 옷을 고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선배 이거 어때요?”
 “음…… 좋아 보여. 예쁘고.”
 “그렇죠? 근데 너무 비싸네……. 다른 거 있나?”
 
  어느새 내 옷 사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자기 옷을 고르는 꼬맹이……. 아무리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고는 하지만 이제 고등학교 졸업한 10대다. 한창 패션과 외모에 민감할 나이지. 암암. 이렇게 날 까맣게 잊고 일에 몰두하는 것도 난 이해할 수 있다. 난 관대하니까. 그래……. 슬프지 않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최소한 내가 옷 갈아입는 주인공은 아니잖아?
 
 ‘근데 이것도 만만치 않네…….’
 
  꼬맹이가 옷 고르는 것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옷 고를 때부터 꼼꼼히 골라서 대충 예상은 했다만, 꼬맹이의 쇼핑은…… 엄청났다. 여자의 쇼핑이란 이런 것이었나?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인 것 같건만…… 꼬맹이는 이건 넥(neck)부분이 원형이네, 평면이네, 색깔이 더 진하네……. 꼬맹이가 옷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난 슬쩍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9시, 한 시간 넘게 이곳에 있는 듯하다. 나는 슬슬 배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꼬맹이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옷을 방금 고른 옷을 들고 피팅룸에 들어가고 있었다. 진짜…… 옷 사준다는 게 나름 묘책이긴 했는데, 이 기세라면 아마 폐점할 때까지 옷 고르느라 못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꼬맹이가 기세 좋게 피팅룸에 들어간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피팅룸 앞에 놓인 옷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꼬맹이가 한 차례 입어봤던 옷들. 그중에서 ‘최종 구매 후보’로 뽑힌 녀석들 이었다. 한 3개? 아 꼬맹이가 지금 피팅룸에서 입고 있는 것 까지 치면 4개네. 바구니를 든 채, 난 천천히 계산대 앞으로 갔다. 계산대에 있는 여직원이 쓴 웃음 짓는 걸 보면 내 심정을 이해하는 듯하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난 한숨 쉬듯이 입을 열었다.
 
 “계산해주세요. 지금 피팅룸에서 입어보고 있는 것까지. 전부 다.”
 
 ***
 
  꼬맹이가 골라둔 옷을 모조리 다 사버린(150만원 나왔다) 뒤, 나는 직원에게 ‘피팅룸에서 여자가 나오면 강남역에서 기다린다고 말해주세요.’ 라고 부탁하곤, 산 옷을 들고 강남역을 향해 도망쳤다.
 
  왜냐고?
 
  내가 옷을 다 사버린 걸 알아채면 꼬맹이는 환불하라고 난리 부릴게 뻔하니까……. 그리고 꼬맹이는 미안함에 내 옷을 골라주려고 할 것이다. 아. 주. 꼼 . 꼼. 하. 게……. 나에게는 지옥의 악순환이다. 일단 이렇게 도망치면 다시 가기는 힘들겠지. 부지런히 강남역까지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이라는 목소리.
 
  뒤 돌아보니 여자가 전력질주로 달려오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걸쳤지만 신고 있는 신발은 평범한 스니커즈라서 상당히 언밸런스 해 보인다. 아니, 아녀자가 저렇게 조신치 못하게 뛰다니……. 게다가 선배라는 소리 때문에 꼬맹이가 보고 있는 나에게 시선이 쏠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니 쪽팔린다. 아니, 저 계집애는 화통을 삶아 먹었나, 왜 이렇게 목청이 커?
 
 “거기! 서욧!!!!”
 “어디 안 도망가. 그리고 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이 다 보잖아.”
 
  꼬맹이의 ‘빼애애애액!’ 거리는 소리에 내가 대답하니 꼬맹이는 그제서야 사람들 시선을 눈치 챘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꼬맹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황급히 얼굴을 가리며 내 곁으로 뛰어왔다. 껄껄……. 나 같은 철면피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10대 감수성을 지닌 꼬맹이에게는 엄청난 쪽팔림이겠지. 내 곁에 오자마자 꼬맹이는 울상인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혼자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선배!”
 “벌써 9시 30분이야……. 너 옷 고르다가 배고파 죽겠다.”
 “아…….”
 
  그제서야 시간을 눈치 챈 듯, 꼬맹이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잠시 뒤, 내 손목을 붙잡았다.
 
 “빨리 가서 환불해요. 그리고 밥 먹으러 가요.”
 “싫어. 그리고 이거 받아라.”
 
  난 꼬맹이의 옷가지가 들은 쇼핑백 두 개를 건네줬다. 그리곤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옷이야. 뭘 입을지는 네가 집에 가서 결정해. 참고로 환불은 안 돼. 카드로 계산했으니 말이야. 난 너에게 카드 안 줄거야.”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싼데요…….”
 “훗, 이 정도야 괜찮아.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네가 밥 쏴라.”
 
  뭐, 비싸긴 하다. 돈이 없었으면 예상치 못한 지출에 벌벌 떨었을 지도……. 훗, 하지만 14억을 벌었으니 이 정도야 기분 낼 수도 있지. 내 제안에 꼬맹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아마 150만원 어치를 사줬으니 그만한 요리를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그런 고급 요리 먹어본 적도 별로 없고, 와인 같은 거보단 달달한 콜라를 더 좋아하는 인간이다. 안절부절못하는 꼬맹이를 보며 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일식 돈가스가 좋더라.”
  번화한 강남역인지라 근처에 괜찮은 일식 체인점이 있었다. 체인점에 들어가 나는 곧바로 돈가스 정식을 시켰다. 돈가스……. 그래, 바로 이거지. 젓가락을 들고 소스를 찍어 한 입에 집어넣었다. 크으……. 맛대가리 없는 헬스 식단만 고집한지 3개월. 3개월 만에 들어가는 돈가스의 맛은…… 끝내줬다. 배고플 때 먹어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가?
 
 “후……. 이게 얼마 만에 먹는 돈가스냐.”
 “더 드시려면 더 시켜요.”
 
  내가 돈가스를 먹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자 꼬맹이가 자기 몫의 우동정식을 먹으며 말했다. 아직도 많이 미안한 눈치다. 꼬맹이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된장국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아니, 난 정식 하나도 다 못 먹어.”
 “……죄송해요. 선배. 제가 괜히 들떠서…….”
 “괜찮아. 아직 넌 어리니까. 게다가 내가 잘못한 면도 없지 않으니까. 옷들은 그냥 힘내라는 선물로 생각하고 받아 둬. 마음에 두지 말고. 네가 끝내주는 미용실에 데려다주는 비용이라 생각해. 연예인 머리 관리해주는 사람에게 데려가준다니. 이 정도 가격정도는 할걸? 풀죽지마. 네가 나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내가 맨 마지막에 뭐라고 했지? ‘너의 가치’는 ‘네가 생각하는 너의 가치’보다?”
 “더…… 많다.”
 “그래, 이것도 똑같아. 그러니 그렇게 풀죽은 모습하지 말고 먹어. 정 뭣하면 나중에 한 번 더 밥 사주던가.”
 
  풀이 죽은 듯한 꼬맹이. 꼬맹이를 보며 나는 괜찮다고 말한 뒤 열심히 밥을 비웠다. 뭐, 꼬맹이 덕분에 좀 고생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 이제 10대 후반, 원래대로라면 대학교에서 이리저리 놀 때다. 한창 활발할 때, 만약 내가 꼬맹이 같은 10대라면 같이 죽이 맞아서 좋아라 돌아다녔을 지도……. 게다가 이제 곧 퇴직할 건데 선물 좀 줘도 되겠지. 잠시 뒤, 내 말에 꼬맹이는 위로를 얻었는지 싱긋 웃고는 평소처럼 밥을 폭풍흡입하기 시작했다. 크……. 참 복스럽게 잘 먹네. 근데 어떻게 저런 몸매를 유지할까? 참 미스터리야. 더 먹으라고 돈가스 두 점 정도 꼬맹이 우동에 올려준 뒤 난 식사를 끝마쳤다. 꼬맹이도 우동정식을 다 먹고 입을 닦았다. 배부르다는 듯이 가볍게 배를 두들긴 꼬맹이는 입을 열었다.
 
 “이제 옷은 어느 정도 샀고 머리만 남았네요. 선배. 머리는 평소에 어디서 해요?”
 “집 근처 동네 미용실.”
 “역시…… 제가 확실하게 바꿔줄게요! 진짜. 이 언니 겁나 유명하거든요.”
 
  마음이 스크래치가 날 법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이 꼬맹이는 날 아저씨로 보니까. 내가 기대한다고 대답하자 꼬맹이는 당당하게 일어서더니 가자고 손짓했다. 후……. 밥 다 먹자마자 가자고 하다니. 커피 한 잔도 안하나. 꼬맹이를 바라보니 눈이 또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끙……. 그래, 오늘만 좀 고생하자.
 
 ***
 
  꼬맹이가 날 안내한 곳은 강남역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강남역 도로 옆에 있는 높은 건물들 뒤편에 있는 3층 건물. 부드러운 빛을 뿜어내는 백열등과 세련된 디자인.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있는 곳이었는데 그 안에 빼곡한 미용실 의자들이 보였다. 이 건물 전체가 미용실 인 것 같았다. 동네 평범한 미용실에서 머리 깎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별천지였다.
 
 “지연 언니!”
 
  꼬맹이는 환하게 웃으며 건물 입구에 있는 한 사람에게 달려갔다. 보기 힘든 자줏빛깔 머리카락에 비녀로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머리 스타일.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미녀였다. 꼬맹이가 달려오자 미용실 입구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여자는 같이 환하게 웃으며 담배를 지져 끈 뒤 달려드는 꼬맹이를 안았다.
 
 “어이구 언제 오나 기다렸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 머릿결이 엉망이네.”
 “헤헤……. 자주 오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어휴, 왜 이렇게 일을 많이 시키는지 원…….”
 “아, 언니. 여기. 내가 말한 선배야.”
 
  꼬맹이가 나를 가리키자 엉겹결에 고개를 숙였다. 꼬맹이의 언니라는 여자는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꼬맹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너에게 인생 상담 해줬다는 선배가 바로?”
 “응. 맞아. 원판은 괜찮은 선배인데 너무 꾸미는 걸 못해서 언니에게 맡기려고.”
 “음……. 괜찮네. 옷 스타일도 괜찮게 입었는데……. 머리가 영 아니네. 윗층에 먼저 가서 짐 풀고 있어.”
 “알았으……. 아, 선배. 선배 짐도 이리 줘요.”
 
  꼬맹이는 내 손에서 짐을 빼앗더니 혼자 잽싸게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으윽……. 전혀 모르는 사람과 내버려 두다니. 이게 제일 뻘쭘한데……. 뭐라 말해야 하지? 난 대인관계가 별로 없어서 이런 일에 쥐약인데……. 하지만 여자는 날 한번 보며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아 노리는 건 아니죠?”
 
  사납게 치켜뜬 눈매. 마치, 사위를 데려온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포스였다. 으으음……. 기가 드센 걸 보니 꼬맹이의 기상은 이 언니를 닳았나 보다. 누님의 포스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순진무구 해보여서 여자가 아니라 어린애로 보입니다.”
 “……그렇죠? 저도 그렇게 보이는데. 근데 저 아이를 노리는 녀석이 많아서…… 남자들은 믿을 수가 없더군요. 솔직히 당신 이야기 들었을 때, 정아에게 접근하려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보이진 않네요. 잘 부탁해요. 당신 덕분에 정아가 많이 힘내는 것 같으니까.”
 
  누님은 날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그 옷들 정아가 골라준 게 확실하네요.”
 “네, 사자마자 입으라고 해서…….”
 “20대 초반 아이돌 스타일이에요. 후후. 아직 10대인 만큼 아이돌을 좋아하니 말이죠. 정아가 있을 때는 어울린다고 말해줬는데……. 솔직히 그쪽하곤 좀 안어울리네요.”
 
  크흡……. 4시간 동안의 삽질은 헛된 것이었나. 내가 한숨을 푹 쉬자 미녀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하며 건물 안을 향해 등을 돌렸다.
 
 “따라와요. 옷은 그래도, 머리 쪽은 확실하게 봐드리죠. 덤으로 피부도.”
 
 ***
 
 내가 평소에 다니던 미용실은 그냥 평범한 동네 미용실이었다. 외모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항상 피곤에 찌든 상태여서 그냥 대충 오피스텔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리 깎았다. 뭐, ‘머리 깎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라는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은 싹 사라졌다.
 
  야매 스타일리스트 꼬맹이가 몇 시간 동안 나를 끌고 다니며 ‘상큼한 아이돌 스타일(?)’로 코디한 반면, 꼬맹이가 소개해준 이 누님은 진짜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오늘의 원정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라면 믿어지겠는가? 머리 깎고 세안하고 약간의 화장까지 한 내 모습에 옆에서 여성잡지 보며 자기 차례 기다리던 꼬맹이는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우와와와……. 선배……. 진짜…….”
 “어때? 마음에 들죠? 직장인이라는 걸 감안해서 얌전하면서도 뭔가 야성적인 느낌이 들도록 변형 포마드(pomade) 스타일로 꾸며봤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스를 발라 얌전하게 발라넘긴 머리. 옆 머리쪽은 차분하면서도 단정하지만…… 정수리 쪽은 한껏 파도모양으로 살짝 삐죽 솟아있었다. 살짝 날카롭고 퀭한 내 눈매와 머리스타일, 그리고 내 분위기. 모든 게 잘 어우러졌다. 진짜, 방송에 나가는 연예인처럼 되었달까? 진짜 머리 스타일과 약간 눈썹화장 한 걸로 이렇게 인상이 달라지다니. 놀랄 노 자다. 자신의 작품에 만족한 듯, 누님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 인상이 왠지 얌전해 보이지만…… 살짝 반항적인 기운이 느껴졌달 까요? 그쪽 체형과 얼굴, 분위기까지 생각해서 코디해 봤는데…… 이건 진짜 변신이네요. 변신.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그쪽 모습 한 번 찍어도 될까요? 코디 전, 코디 후 비교사진. 이거 선전용으로 굉장히 좋을 것 같네. 대신 돈은 받지 않을 게요. 콜?”
 “저야 좋죠.”
 “좋아요. 사진은 좀 있다 찍을게요. 우리 정아 머리 좀 잘라주고.”
 
  꼬맹이의 누님의 말에 나는 가볍게 승낙했다. 뭐, 거절할 수도 있지만 날 이렇게 만들어준 사람의 부탁인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크으……. 온 보람이 있다. 이렇게 잘생겼을 줄이야. 캬, 내 외모에 취하는구나. 이런 멋진 외모를 그냥 둘 수는 없지.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꺼내 난 난생처음 셀카라는 걸 찍어봤다. 음……. SNS 를 했다면 사진을 올려서 자랑했을 텐데 난 하고 있는 게 없네. 뭐, 그래도 기념이니까. 잠시 내가 휴대폰에 찍힌 셀카를 보며 자화자찬 하고 있는 사이, 누님은 꼬맹이를 미용실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머리를 자르는 와중에도 꼬맹이는 거울로 나를 바라보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내일 회사 나가면 다들 경악할 거예요. 선배.”
 “그래. 진짜 대단해. 것 봐 꼬맹아. 내 말이 맞지? ‘너의 가치’는 ‘네가 생각하는 너의 가치’보다?”
 “많~다.”
 
  꼬맹이의 대답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따봉을 날리며 소파에 앉았다. 나와 꼬맹이의 말이 웃긴지 미용실 누님은 머리를 자르면서도 큭큭 웃었다. 소파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사표 내려 했는데……. 머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들었다. 회사 다니면서 그 대머리 문어 앞에서 살짝 썩소를 날려주면…….
 
 ‘끝내주겠군.’
 
  대머리를 약 올리며 내 머릿칼을 한 번 쓰다듬어주면 더 좋겠지. 깔깔. 아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선 비명소리를 내지를…….
 
 음? 비명소리?
 
  갑자기 들리는 비명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꼬맹이와 누님도 비명소리를 들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명소리.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굴을 굳혔다. 아르도르의 기억이 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평범한 비명소리가 아니다. 공포에 질린 피식자가 내뱉는 비명이다. 이 비명이 간헐적으로 들린다는 말은…….
 
  아직 공포의 대상이 살아있다는 말이겠지.
  들리는 비명소리에 꼬맹이의 머리를 깎는 누님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 큰 사고라도 났나?”
 “사고라면 이런 계속 비명이 안 울릴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잠시 불을 끄고 숨는 것은 어떨까요?”
 “에이, 너무 과민반응이에요. 선배.”
 
  내 제안에 꼬맹이와 누님은 너무 과민반응이라며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태연하게 다시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하긴……. 아프칸 같은 분쟁지역이라면 몰라도 이 나라는 전쟁과는 거리가 먼 평화로운 나라다. 이 비명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도 이렇게 생각하겠지. 후……. 진짜 내가 그냥 과민반응 한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역시, 이건 보통 소리가 아니야.’
 
  내 안의 감이 계속해서 날 자극했다. 이건, 평범한 비명소리가 아니라고. 숨을 내쉬며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눈을 민활하게 굴리며 미용실 내부를 살폈다. 내부의 구조는 물론,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어디 있는지 까지. 밖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점점 가까이서 들리는 비명소리에서 누님과 꼬맹이도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려가는 여자가 보였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 하이힐을 신어서 달리는 게 힘들 텐데도 여자는 뭔가에 쫓기듯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필사적으로 달리는 여자 뒤로 커다란 검은 무언가가 덮쳤다. 인간형의 무언가. 거의 공중에서 덮치는 듯이 여자를 덮친 무언가는 여자를 쓰러뜨렸다.
 
 커다란 거한
 
  2m 50cm는 되어 보이는 키에 터질 듯한 근육으로 꽉 찬 거한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눈에 튀겠지만 거한의 외형이 좀…… 이상했다. 하의만 간신히 가린 가죽 쪼가리에 오른 손에는 시커먼 몽둥이처럼 보이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피부색이 거무튀튀한 잿빛이다.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 가로등이 있어서 색은 선명하게 구분 가능했다. 흑인일까? 흑인의 피부색은 검은색 비슷한 갈색이지 저런 잿빛이 아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피부색이 아니다.
 
  쓰러진 여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덮친 괴한을 보더니 공포에 질렸다. 공포에 질린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용실 안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살려달라는 간절한 눈빛, 하지만 그 간절한 눈빛은 얼마가지 못했다.
 
 “꺄아아아아아악!”
 
  꼬맹이의 비명소리가 내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아, 거울에 비친 걸로 밖을 보고 있었나 보다. 여인을 덮친 거한은 한 손에 들린 몽둥이, 아니 칼 비슷한 쇳덩이로 들어 올리더니 여자의 몸을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세. 로. 로.’
 
  양단해버렸다. 피가 촥하니 튀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진짜로 죽여 버렸다. 괴한은 여자의 한 쪽 팔을 잡고 들어올렸다. 깔끔하게 절단된 여인의 반신이 축 하니 올라왔다. 반신에 흘러내리는 창자와 내장들, 그것들을 거한은 꺼내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신장, 피부색, 신체능력. 끔찍한 외모, 무엇보다도 어두운데도 야성에 번들거리는 샛노란 눈. 인간이 아니다. 저건…… 괴물이다. 괴물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내가 너무 안일했다. 점점 차오르는 마력농도에 뭔가 일어날 걸 알면서도 이렇게 안일하게 굴다니, 나오더라도 아티팩트를 가지고 왔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 이미 지나간 걸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다.
 
 “숨어요! 어서!”
 
  벌벌 떨고 있는 꼬맹이와 누님에게 말한 뒤, 난 급하게 몸을 일으켜 미리 봐둔 옷장을 뒤졌다. 옷걸이를 걸어놓는 철봉(행거)이 보였다. 재질이 뭔지 모르겠지만 나름 가볍고 쓸 만해 보이는 철봉. 그대로 철봉을 옷장에서 뽑았다. 탈 부착식이라 잘 뽑혔다. 길이는 내 키와 비슷한 정도. 착 감기는 그랩감이 은근히 좋았다. 음……. 전생에 쓰던 마법지팡이 같달까? 나중에 재료 좀 모이면 마법지팡이도 하나 장만해야지. 내가 숨으라고 말했음에도 꼬맹이와 누님은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며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 둘에 다가가려고 했을 때, 괴물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괴물의 샛노란 눈빛에는 선명한 살기가 담겨있었다.
 
 ‘젠장.’
 
  괴물의 손에 있던 시체가 전면의 유리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유리창을 박살내며 내부로 굴러 들어왔다. 반 토막 난 여인의 시체. 꼬맹이와 누님은 그걸 보곤 완전히 굳어버렸다. 도망치기는 글렀군. 내가 괴물을 바라보자 괴물은 히쭉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
 
  천천히 다가오는 괴물을 바라보며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쥐고 있는 철봉을 꽉 쥐었다.
 
  마법사는 어느 정도 호신술을 할 줄 안다.
 
  정확히 말하면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이용해 근접해 오는 적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 마법사의 무술, 근접격투기 랄까? 뭐, 최후의 최후에나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하지만, 난 그런 호신술의 달인이다. 모든 생명체들과 무한 생존경쟁을 해야 했던 ‘황혼의 시간’,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이가 바로 아르도르다. 지나가다 습격당하는 비일비재. 그가 지팡이로 괴물들과 드잡이질 하던 기억도 내 머릿속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강하군. 평균이상이야. 오크? 아니야. 오크보다 훨씬 강해. 근육형태와 힘을 보면 오크와 오우거의 중간 정도일까? 칼을 든 것하고 국부를 가린 걸 보면 어느 정도 지능도 있어. 오히려 오우거보다 더 까다로울 수도…….’
 
  박살난 유리창 밖에 선 괴물을 보며 나는 천천히 침을 삼켰다. 내가 살짝 긴장한 것과는 다르게 괴물은 나를 바라보며 괴물은 비웃는 듯한 표정과 함께 타액을 뚝뚝 흘렸다. 이 녀석……. 설마 나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건가?
 
 이 새끼가?
 
  입가에 묻은 피를 핥으며 괴물은 흉맹한 살기를 쏘아냈다. 동시에 녀석의 몸이 커져보였다. 괴물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력유동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보통살기가 아니다. 마력이 뒤 섞인 살기, 피어(fear)다. 음……. 유동하는 살기를 보니 아까 평가는 취소다. 오우거보다 훨씬 세다. 괴물이 흘리는 살기에 꼬맹이와 누님은 주저앉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확실히……. 보통의 인간은 이 마력 섞인 살기를 버티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난 보통 인간이 아니거든.
 
  ‘근력증폭’ 마법을 시전해서 몸 전체에 강제적으로 인공근육을 만들었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살짝 부풀어 올랐다. 인간을 초월하는 탄탄한 인공근육, 이걸로 나는 저 괴물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저항 가능할 정도의 근력을 가졌다. 그리고 무기에 대한 패널티는…….
 
 ‘내구력 강화(strength)’
 
  미미한 노란빛이 철봉을 휘감았다. 미용실의 조명이 강한지라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만약 야밤에 봤으면 철봉이 빛나는 게 그대로 보였을 것이다. 좀 재료가 좋았으면 여러 마법을 중첩해서 걸겠는데, 이 철봉은 마법 하나만 걸어도 금방 깨질 것처럼 보였다. 뭐, 그래도 마법을 걸 수 있다는 것이 어디야. 내가 마법을 사용하자 괴물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뭔가 한 것을 눈치챘나보다. 일그러진 괴물을 보며 나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덤벼, 못생긴 녀석아.”
 
  소리를 지르며 괴물이 달려들었다.
 잿빛 피부 괴물의 힘은 가공했다.
 
  투박한 도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공기 찢는 소리가 쫙쫙 울려 퍼졌다. 흉흉한 기세, 아까 전에 사람을 단박에 세로로 갈라버린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괴물을 상대로 나는 침착하게 맞서고 있었다. 괴물보다 느린 속도와 약한 힘을 가졌지만, 난 그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경험과 마력으로 강화된 가공할 반사 신경을 가지고 있다.
 
  지독하게 빠르게 오가는 공방
 
  괴물이 휘두르는 검격을 빠르게 ‘피하고’ ‘쳐내고’ ‘반격’했다. 어찌나 격렬한지 나와 괴물의 싸움에 주변에 있는 의자와 기구들이 휘말려 박살나버렸다. 4~5번 칼을 부딪치자 난 대충 어떻게 이 괴물을 상대해야할지 감을 잡았다. 정신을 집중해 가속된 의식으로 괴물이 칼을 휘두르려 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괴물이 행동하기 전에 움직여 철봉 끝으로 녀석의 검의 손잡이 부분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휘두르기 전부터 타격하는 반격
 
  내 순수한 속도는 상대방에 비해 약간 느리지만, 생사의 위기를 맞아 날카로워진 ‘감각’과 ‘기억’은 노련하게 상대방의 행동을 읽고 상대방이 행동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약간의 ‘서두름’이 속도의 차이를 메꾸고, 어느 정도 대등하게 상대방과 맞설 수 있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내 반격에 녀석이 휘두르는 검의 기세는 대폭 감소했다. 내가 계속해서 공격의 맥을 끊자, 녀석은 몇 차례 주춤거리더니 이내 짜증이 났는지 괴성을 지르며 우격다짐으로 크게 무기를 휘둘렀다. 이대로 나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이러면 더 좋다.
 
  우격다짐으로 검을 휘두느라 괴물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아무리 검격이 강하다 하더라도 검격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은 서있는 자세에서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흔들리지 않는 발판에 붙인 발에서 나오지. 이렇게 흐트러진 자세에서 휘두른 검격은 쳐내기가 수월하다. 민활하게 검의 궤적을 예상하고 철봉으로 내려치는 검의 끝부분을 옆으로 밀었다. 살짝 일그러진 검의 궤적. 궤적을 일그러뜨리고 난 뒤, 곧바로 철봉으로 검 끝을 아래로 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내 ‘도움’에 괴물은 검을 쥔 채 힘에 휘둘려 땅에 칼을 박아버렸다. 검에 휘둘리느라 살짝 숙여진 괴물의 동체, 굳건한 상태에선 공략할 수 없는 괴물의 안면이 내 공격범위에 들어왔다. 다신 없을 기회! 칼이 박히자마자 한발로 칼등을 누르곤 철봉 반대편 끝으로 괴물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게 끝이 아니다. 철봉이 괴물의 면상을 타격하는 순간, 곧바로 빠르게 철봉을 쥔 한 손을 뻗어 괴물의 양 눈을 헤집었다.
 
 “크아아아아악!!”
 
  손가락이 눈을 헤집자마자 괴물은 칼을 놓고 날 향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이미 빠진 상태, 투박한 녹슨 칼로 사람을 일도양단한 힘답게 흉흉한 파공성이 내 앞을 스쳤다. 이거 한 대만 제대로 맞아도 뼈가 으스러질 것 같다. 상식을 초월한 힘. 내가 이렇게 번거롭게 맥을 끊는 전략을 하기로 결정한 것도 저 가공할 힘 때문이었다. 한번 저 괴물의 검격을 기세를 죽이지 않고 비스듬히 막아봤는데…… 왼쪽 손목이 나가버렸다. 어찌어찌 인공 근육을 만들어서 손목의 힘줄과 관절을 대체해서 움직이고는 있지만 통증이 끔찍했다. 지금은 아픔을 참고 휘두르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저 괴물의 검격을 기세를 줄이지 않고 막았다간…… 왼손목이 꺾이고 철봉이 휘어질 거다. 그 다음은? 잘 쪼개진 고깃덩어리가 되겠지.
 
 ‘난감하군…….’
 
  양 눈에 피를 흘리는 괴물을 바라보며 나는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눈의 상처. 어느 정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음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내가 든 철봉으로 저 괴물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힘들었다. 괴물과 싸우면서 난 대략적으로 괴물의 신체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넘치는 근육, 비정상적으로 단단한 골격. 피부에 흐르는 충만한 마력. 이런 싸구려 철봉으로는 타격한다 하더라도 근육과 골격이 충격을 해소시켜 버린다.
 
  뭔가 날카로운 것이 필요했다.
 
  상대방의 근육을 뚫을 만한 커다랗고 날카로운 것이.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하는 공격은 무의미 했다. ‘타격강화’ 마법 같은걸 사용해서 두들겨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이 철봉은 재질이 워낙 별로라서 두 개 이상 마법을 걸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지금 걸린 ‘내구력강화’ 마법을 풀고 ‘타격강화’를 걸고 때렸다가는…… 철봉이 휘어지겠지. 흠……. 마법을 써볼까? 아냐, 지금 내 수준의 마법력으로 무빙캐스팅으로 할 수 있는 마법 중에서 저 녀석의 항마력을 뚫을 마법은 없다.
 
 ‘웬만한 마법으로도 꿈쩍도 안할 것 같고. 캐스팅 시간이 좀 긴 마법을 써야 죽일 것 같은데……. 그 전에 내가 두 쪽 나겠지. 타격도 소용없고, 마법도 소용없어. 결국, 일단은 대치하는 게 최선인가?’
 
  섣부르게 공격해봤자 힘만 빠질 뿐, 오히려 상대방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 것이다. 천천히 철봉을 들고 괴물의 주위를 맴돌았다. 괴물도 성급히 나에게 달려들지 않고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왼쪽 눈을 부릅뜬 채 날 경계하고 있었다. 무작정 달려들지 않는 걸 보니 내가 흐트러질 기회를 보는 것 같았다. 끙……. 차라리 살기를 흩뿌리며 달려들면 좋으련만……. 지능이 있는 적은 이래서 상대하기 싫다니깐.
 
 “저기, 누님. 뭔가 날카로운 것 없습니까?”
 
  괴물과 눈싸움을 하면서 난 입만 열어 미용실 한구석에 있는 누님을 향해 말했다. 미용실 한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누님과 꼬맹이. 둘 다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누님은 내 말에 좀 정신을 차렸는지 덜덜 떨면서도 입을 열었다.
 
 “없…… 없어요. 미용 가위하고 면도칼 밖에…….”
 
  면도칼과 가위라……. 이걸로는 절대 저 녀석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 어떻게 근육을 파고들어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흠……. 눈을 한 번 더 노릴까? 눈에 칼을 박아 넣는다면…… 가능성이 있긴 하겠지. 문제는 체고 2m 50cm 가 넘어 보이는 괴물의 머리통, 그것도 눈만 정확히 노린다는 게 엄청 힘들다는 거지.
 
  아니, 잠깐. 칼이라…….
 
  괴물의 칼을 바라본 뒤, 잠깐 곁눈질로 유리벽 밖을 바라보았다. 미용실 유리 벽면, 박살난 정면이 아닌 옆쪽에 있는 유리벽이었다. 건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라 그대로 옆 콘크리트 건물 벽이 보이는 곳인데, 삭막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인조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창문 너머에 보이는 대나무……. 그래, 저런 거라면……! 생각한 순간 빠르게 계산을 끝냈다. 그래 저거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가능성이 있어. 문제는 이 괴물을 어떻게 유인하냐는 것인데…….’
 
  하지만, 어떻게 이 괴물을 구슬려야 할까? 빠르게 생각했다. 이건 실패하는 순간 위험이 너무 크다. 게다가 기회는 단 한번 뿐이다. 실패하면 다시는 통하지 않는다. 아니, 일방적으로 밀리겠지. 싸우는 동안에 내가 의도하는 바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문제는 저 새끼가 지능이 좀 높다는 것……. 교활하게 눈깔을 굴리는 게 웬만해서는 안 낚일 것 같다. 안전하게 가는 것은 포기해야겠군. 내 약점을 보여주고 달려드는 걸 역이용하는 수밖에.
 
 ‘살을 주고 뼈……. 아니, 목숨을 가져가야겠군.’
 
  철봉을 다 잡으며 난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
 
  다시 괴물의 칼과 철봉이 맞부딪혔다. 정신없는 맹공. 방금 전까지는 괴물이 공격하고 내가 받아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내 공격에 괴물은 신중하게 내 반응에 맞춰서 철봉을 쳐냈다. 괴물의 검과 맞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진동……. 젠장, 손목이 떨어질 것 같다. 검을 휘두르면서도 괴물은 간간히 발차기과 주먹을 날려 내 움직임을 견제했다. 덕분에 내 손발도 뒤엉켰다.
 
 ‘웬만한 전투마법사라도 이 녀석 앞에서는 순식간에 목이 달아나겠군. 전투 센스가 좋아.’
 
  적의 반격을 막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검으로 막을 수 없는 빈틈을 검이 아닌 손, 발길질로 때우다니. 나로서는 더 까다롭게 됐다.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주먹이나 발길질이나 칼이나 맞으면 한방이거든. 고도의 집중상태에서 다음에 이어질 동작들을 생각하며 나는 묘기처럼 상대방의 반격을 ‘피하고’ ‘막고’ 다시 공격했다. 점점 심해지는 손목 통증…….이제 한계다. 하지만…….
 
 ‘계획대로다.’
 
  앞으로 펼쳐질 ‘수’를 생각하며 움직인 끝에 내가 원하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적의 반격에 살짝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 교활하게 빛나는 괴물의 눈은 잠깐 드러난 그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카아아아!!”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과 함께 괴물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올려 베어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괴력. 재빠르게 몸을 뒤로 빼려했지만 너무 늦었다. 궁여지책으로 철봉을 들어대며 막자 철봉이 비스듬하게 빗겨진 채 잘려나갔다. 아무리 내구력 강화마법을 걸어도 속은 반쯤 빈 싸구려 철봉이다. 정면에서 저런 검력을 맞으면 버티질 못한다.
 
  그래도 다행히 철봉은 잘리기 전에 큰 힘을 분산시켜줬다.
 
  무지막지한 힘에 뒤로 날려졌다. 그리고 그대로 유리창에 직격했다. 유리창에 부딪혔음에도 던져진 내 몸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유리창을 박살내며 뚫고 나갔다. 그리곤, 인조 대나무들을 부수고 옆 건물 콘크리트 벽에 처박혔다.
 
  완전히 박살난 유리창과 유리파편에 망신창이가 된 몸
 
  괴물은 내가 허점을 보이자 그대로 달려들었다. 육중한 거체에 무지막지한 박력을 팍팍 뿜어내며 달려드는 괴물.
 
  그래, 지금까지는 모두 계산대로다
 
  끔찍한 통증을 참아내며 나는 한계 그 이상으로 근력강화 마법을 시전 했다. 몸의 신경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물리적 형체를 띄었다. 유리파편이 박힌 티셔츠가 부풀어 오르는 근육에 찢어졌다. 인간의 근육 형태와는 조금 다른 상체근육. 인간의 골격과 골격근을 생각해서 강화할 수 있는 최대치의 근육이다. 젠장, 끝나면 당분간 근육통에 좀 골골 거릴 거다. 유리파편 속에서 나는 튕기듯이 일어섰다. 양손에 든 조각난 철봉. 비스듬히 잘린 철봉은 마치 ‘죽창’ 처럼 보였다.
 
  그래, 이게 바로 내 ‘해답’이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괴물을 바라보며 재빠르게 양손의 철봉에 ‘내구력 강화’마법을 건 뒤, 오른손에 있는 철봉을 던졌다. 내가 던진 철봉은 그대로 그나마 상태가 좋은 괴물의 왼눈을 향해 쏘아졌다. 내 반격에 괴물은 기겁하며 칼을 휘둘러 내가 던진 철봉을 쳐냈다.
 
  하지만…… 아직 한 발 남았다.
 
  오른손으로 철봉을 던지는 동시에 나도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괴물의 시야가 사라진 오른쪽으로. 아, 괴물입장에서 오른쪽이지 내 쪽에서는 왼쪽이지. 코앞에 닥친 날카로운 철봉에 시야가 막혔고, 게다가 일부로 시야가 제한된 왼쪽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내가 던진 철봉을 처내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 이래서는 즉각적으로 반격할 수 없다!
 
 “죽어라!”
 
  왼손에 있는 역수로 쥔 철봉이 그대로 녀석의 왼쪽 가슴에 살짝 박혔다. 인간형이라면 심장이 있는 부분. 괴물은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칼에서 손을 놓고 곧바로 손을 뻗어 나를 밀쳐내려 했지만 내가 더 빠르다! 괴물의 가슴에 날카로운 철봉 끝이 살짝 박힌 상태에서, 나는 마치 정을 후려치는 망치처럼 오른 주먹으로 전력을 다해 가슴에 박힌 철봉을 후려쳤다.
 깊숙이 박히는 철봉
 
  철봉이 박히는 감촉을 느끼며, 철봉을 친 반동으로 재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와 동시에 괴물의 주먹이 내 코끝을 스쳤다. 가슴이 관통당한 괴물. 인간형 괴물이기에 그쪽에 심장이 있겠거니 해서 쑤셔 박은 거지만…… 인간이 아닌 괴물인 만큼 모른다. 그냥 터프하게 가슴에 창이 박힌 채 덤벼들 수도 있겠지. 이대로 또 덤벼들면 진짜 낭패인데……. 방금 전 주먹으로 철봉 후려쳐서 중지하고 검지 손가락이 부러졌다. 게다가 철봉도 반 토막 난 상태. 완전 무방비 상태다. 따로 무기로 삼을 만한 것들도 안보이고……. 이게 내가 생각한 최후의 수단이다. 제발…… 제발 그냥 죽어라.
 
 “쿠헉……. 컥. 컥.”
 
  가슴에 박힌 철봉을 보며 괴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속이 텅 빈 철봉, 그 빈 관에서 새카만 괴물의 피가 콸콸 흘러나왔다. 괴물이 관을 막고 철봉을 뽑아내려고 했지만 그것도 몇 초뿐, 서서히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이내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쓰러졌다.
 
 “후…….”
 
  쓰러진 괴물을 보며 나도 안도하듯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안도감이 드는 순간, 등이 쓰라렸다. 바닥을 보니 내가 앉은 자리도 붉은 피가 흥건했다. 유리 파편이 잔뜩 박힌 등, 괴물과 싸우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지금 보니 정말 끔찍하게 아팠다. 으으……. 내가 이걸 어떻게 버텼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다. 창문 너머 대나무를 봤을 때, 죽창이 생각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도 계속해서 괴물과 대치했을 것이다. 밖에 박힌 대나무는 굵기도 작고 인조 대나무인지라 무기로 사용할 게 못됐지만, 내가 든 철봉이 대나무와 비슷해 보였다.
 
  속이 텅텅 빈 거하며 나름 튼튼한 구조
 
  그래서 생각했다. 죽창 만드는 것처럼 즉석에서 철 죽창을 만들자고.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들 중에서 철봉을 절단할 만한 것은 없었다. 괴물이 휘두르는 저 무지막지한 검격만 빼고는. 결국 괴물의 힘을 빌려야만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당연히 대놓고 철봉이 잘리게 하면 상대방이 경계할게 뻔하기에 일부로 희생을 각오했다. 정말 최후의,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도박에 나는 모든 걸 걸었고 그리고, 그 도박은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후……. 창 앞에선 괴물도 한방이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흥건한 검은 피. 쓰러진 괴물을 놔둔 채로 난 벌벌 떨고 있는 누님과 꼬맹이를 향해 걸어갔다. 괴물이 죽자 미용실 누님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반면 꼬맹이의 상태는 여전히 안 좋았다.
 
 죽은 괴물의 시체와 반 토막 난 여인에게 고정된 시선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하긴, 평화로운 현대인의 기준에선 눈앞에서 사람이 세로로 갈라졌는데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하겠지. 물론, 난 현대인이 아니니 논외고. 상황이 괜찮다면 마음을 추스르게 그냥 놔두겠지만…… 밖에서 들리는 비명은 아직도 끊이질 않았다. 여긴 아직 위험하다. 먼저 그나마 정신을 차린 미용실 누님을 일으켜 세운 뒤, 나는 꼬맹이에게 조용히 수면 마법을 시전 했다.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서인지 저항이 없었다. 정신을 잃은 꼬맹이를 한 손으로 들어서 옆구리에 끼곤 심호흡하고 있는 미용실 누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전 괜찮아요.”
 “아직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이런 녀석들이 더 돌아다니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숨는 게 나을 듯한데…… 여기 숨을만한 곳 있습니까?”
 “네……! 3 층에 제 개인 방이 있어요. 일단 거기로 데려가죠. 그…… 그리고…… 정아는 기절한 거죠?”
 
  누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너부러진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아직 멀쩡한 소파에 꼬맹이를 잠깐 내려놓은 뒤, 쇼핑백에서 꼬맹이가 골라준 검정색 와이셔츠를 꺼내 웃통에 걸쳤다. 와이셔츠가 등 뒤에서 흐르는 피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흠, 다행히 와이셔츠가 피를 다 빨아먹어서 핏방울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와이셔츠를 걸치는 모습에 미용실 누님은 눈을 살짝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그쪽 등은 안 아픈가요? 아까 보니 유리 파편이 박혀있던데…… 피가 철철…….”
 “참을 만합니다. 옷으로 피가 흐르는 걸 안 막으면 혈흔이 남을 수도 있거든요. 재수가 없으면 괴물이 혈흔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올 수도 있고요. 후각은 어쩔 수 없지만 보이는 흔적은 지워야죠.”
 
  누님에게 설명한 뒤, 나는 소파에 눕힌 꼬맹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복도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1, 2층에 비해 살짝 좁은 3층 공간, 그 공간 스탭실이라고 써 붙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원룸처럼 꾸민 방이 나타났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누님은 불을 키곤 한쪽 붙박이장을 열며 입을 열었다.
 
 “자, 정아는 소파에 올리고. 여기 구급함이 있으니 그쪽 응급치료부터 하죠.”
 “먼저 119에 전화하는 게 어떨까요?”
 
  꼬맹이를 소파에 내려놓은 뒤, 하는 말에 누님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119는 소용없어요. 그쪽이 싸울 때, 맨 먼저 휴대전화로 전화해 봤는데 안 받더군요. 112도 마찬가지고요. 일단 지금은, 그쪽 치료부터 하는 게 먼저에요. 셔츠 벗고 바닥에 엎드려요.”
 
  누님의 대답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경찰서, 소방서 두 곳 다 전화를 안 받는다라……. 한숨을 쉬며 나는 누님의 벗으라는 제스처에 따라 와이셔츠를 벗었다. 피에 펑 젖은 와이셔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 이런…….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살짝 휘청거리다 자세를 잡은 뒤, 난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내가 바닥에 엎드리자 누님은 살짝 놀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맙소사……. 이 상태로 움직인 거예요? 유리파편이 그대로 다 박혔네.”
 “뭐……. 죽기 싫으면 움직여야죠.”
 “자, 핀셋으로 하나씩 뽑을 게요.”
 
  조심스럽게 등을 훑는 무언가가 느꼈다. 아마 핀셋이겠지. 잠시 상처부분을 훑던 핀셋은 본격적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크으……. 진짜 더럽게 아프다. 그래도 아픈 척은 할 순 없지. 입 꾹 다물고 참고 있을 때, 유리파편을 뽑아내고 있던 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엄청 잘 싸우던데……. 직장인이 아니라 무술강사셨어요?”
 “아뇨……. 그냥 평범한 직장인인데요.”
 “……당신이 괴물과 싸울 때, 마치 무협영화 보는 것 같았어요. 아니, 무협영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박진감 넘치더군요. 근데 평범한 직장인이라니……. 믿겨지질 않는데요?”
 
  누님의 말에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 싸움을 보면 민간인이라는 것을 못 믿겠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싸움이었으니까.
 
 “취미로 기본기만 닦은 수준입니다.”
 “후후……. 그게 취미라면 운동하는 선수들은 나가 죽어야 해요. 뭐, 아무튼 정말 고마워요. 만약 당신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전 아마 시체가 되었겠죠.”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도 침묵을 지켰다. 음……. 아무래도 아까 죽은 여자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꼬맹이만큼은 아니지만 이 누님도 충격이 크겠지. 누님의 침묵에 나는 일부로 씨익 웃으며 밟게 대답했다.
 
 “고맙다면 말로만 말고 보상을 주시죠? 예를 들면…… 평생 헤어샵 이용료 30% 할인 이런 거.”
 “하하, 그걸로 되겠어요? 평생 공짜로 해드릴게요.”
 “에이, 전 그렇게 날강도 아닙니다. 게다가 뭔가를 공짜로 받으면 그 가치를 0으로 떨어뜨리는 거예요. 전 30% 할인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솔직히 30% 할인도 굉장히 무례한 거죠.”
 “……후후. 아부 잘하시네요.”
 “진짠데…….”
 
  난 등에 박힌 유리파편들을 빼내는 누님과 웃으며 대화했다.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충격이 점점 사라진다. 이렇게 잠시 말을 돌려서 시간을 끌면 나중에 그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충격이 덜하겠지. 잠시간의 잡담이 이어지는 사이 미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소파 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님과 내가 소리가 돌린 소파로 고개를 돌리자 부스스하게 일어난 꼬맹이가 보였다. 꼬맹이는 잠시 멍하니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더니 날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선배……! 드…… 등에……! 설마? 119……. 내 휴대폰……. 휴대폰이 어디 있지?”
 
  허둥지둥 거리며 자신의 옷을 더듬거리는 꼬맹이를 향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119, 112 전화해도 안 받아. 허둥대지 말고 와서 등에 박힌 유리 파편 좀 뽑아.”
 “파편 뽑는 건 끝났어요. 일단 보이는 건 전부 다 뽑았는데 미세 파편이 아직 박혀 있을지도 모르니 내일 병원 가서 진찰받아보죠. 일단, 지금은 소독하고 붕대만 두르면 돼요.”
 “그…… 그건 제가 할게요.”
 
  꼬맹이는 구급상자로 다가오더니 소독약을 꺼냈다. 그리곤, 벌벌 떠는 손으로 내 등에 확 부어버렸다.
 
  으아니……!
 
  등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 악! 이…… 이건……! 정말 뼛속까지 아프다! 지금껏 비명을 잘 참아왔지만, 이건 너무 아파서 비명도 안 나왔다. 입만 뻥긋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누님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꼬맹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정아야. 그거 알보칠인데……. 그것도 순도 높은 옛날 거……. 옆에 베타딘쓰지…….”
 “아……. 괘…… 괜찮아요? 선배?”
 “자…… 잘…… 했어. 아직, 괴물이 남아있으니……. 빨리 나아야지. 자 이제 붕대로 상처 좀 감기만 하면 돼.”
 
  내 대답에 꼬맹이는 다시 허겁지겁 붕대를 집어 들었지만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자꾸 실수를 했다. 결국 옆에서 누님이 도와주고 나서야 붕대를 감을 수 있었다. 응급조치를 마친 후 난 천천히 일어섰다. 후……. 피를 좀 많이 흘려서인지 약간 어지럽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확실히 피곤하긴 피곤하다. 이틀간 잠을 못자고 이렇게 격렬히 싸우고 피도 왕창 흘렸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쉴 수는 없다.
 
  잠시 몸 상태를 점검한 뒤,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꼬맹이. 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과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면 정상은 아니었다. 꼬맹이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며 나는 꼬맹이와 눈을 맞췄다.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드냐?”
 “……네. 네.”
 
  딱 봐도 억지로 괜찮다고 하는 모습. 한숨을 쉬고 싶지만…… 지금 한숨을 내쉬어서 분위기를 가라앉힐 필요는 없지. 꼬맹이와 눈을 맞추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잊어버리라는 말은 안할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지도 모르는 기억이니까. 하지만, 일단 지금은 참아. 지금 감정을 터트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위험하니까. 네 몸이 안전해졌을 때,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려. 알겠니?”
 
  내 말에 꼬맹이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정신을 차리고 야무지게 변한 느낌. 아직, 완전히 제정신인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최소한 괴물 앞에서 도망은 칠 수 있겠지. 꼬맹이를 소파에 앉힌 뒤 천천히 몸을 돌려 밖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하자 누님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일어서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저……. 어디 가시게요?”
 “이곳에 박혀 있다가 적이 습격하면 꼼짝없이 당하거든요. 보초는 서야죠.”
 “그건 몸 멀쩡한 제가…….”
 
  누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가능하면 그러는 게 베스트지. 하지만, 평생 싸움이나 전쟁이라는 걸 모르던 사람이 제대로 보초를 설 줄이나 알까?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서는 게 마음 편하다. 푹신한 미용실 소파 하나를 창가로 올려놓은 뒤, 앉아서 감시하면 될 거다. 이런 긴장상태에서의 휴식은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전, 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하거든요. 보초 말고…… 아까 붙박이장에 라면 있던데 라면이나 끓여주시죠. 좀 많이 움직였더니 배고프네요.”
 
  말을 끝으로 방문을 나섰다. 1층과 똑같은 옷장이 보이기에 다시 지팡이 대용 행거를 뽑은 뒤, 불을 다 끄고 미용실 의자를 옮겨 밖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곤 미용실 의자에 앉아 밖을 경계했다. 어둠에 잠긴 도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광과 함께 총성과 비명이 들린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이건만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쓴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비명이 울려 퍼지는 때가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던 때보다 더 편안했다. 뭐, 최소한 대지가 스스로 일어서서 사람들을 짓뭉개려 날뛰지는 않으니까 많이 양호하지.
 
 ‘그나저나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마력이 나타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나타났다. 마치, 현실이 비현실에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라면냄새가 코를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누님이 놋쇠 냄비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지금 고민해봤자 답은 없다. 내일이 되면 뉴스들이 알아서 떠들겠지.
 
  다가오는 라면 냄비를 보며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뉴 빌런(New Villain) 』 2권에 계속>

댓글(6)

음악.생존    
호옹이?
2015.11.24 23:08
음악.생존    
으흐흐 첫댓글!
2015.11.24 23:09
OLDBOY    
잘 보고 있습니다.
2018.04.05 19:09
방구석영웅    
싸움는 중에 열줄이 넘는 대화를..
2018.09.11 10:19
철퍼억    
재미있네요
2018.11.24 08:29
Cadil    
잘 읽었습니다. 직장에서는 세월의 풍파에 닳고 닳은 아재였던 남주가 건물 들어가고나서부터 좀 유치해진 것 같지만 상당히 재밌습니다.
2021.06.0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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