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미들라이커

미들라이커 - 1화

2016.01.12 조회 84,003 추천 1,166


 “벌써 시즌이 마지막이군.”
 나는 까맣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풋볼 리그 챔피언십 46라운드에 이르는 여정이 끝난다.
 한때 축구천재로 칭해지며 대한민국과 영국에 기대를 불러 일으키며 유스 리그를 평정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군 무대로 올라설 거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감독이 부임하고 모든 것이 뒤틀렸다.
 부상을 입었다. 점점 내 자리가 사라져가는 다급함에 회복되기 무섭게 다시 필드 위에 섰다.
 처음 몇 경기에서 부진했다.
 아직 경기 감각이 올라오지 않아서였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팀이 원하는 활약을 펼칠 자신이 있었다.
 감독도 그런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멀티 플레이어로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중앙에서 내가 가진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마음과 다르게 팀에서 내 입지는 점점 더 작아졌다.
 조금 더 침착할 걸, 후회하면서 나는 감독의 포지션 변경을 받아들였다.
 더 많은 출전과 발전을 이뤄낼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언제든지 중앙 미드필더로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미드필더였던 나를 중앙 수비수로 기용했다. 몸싸움에 능하고 수비가 좋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중앙 수비수로 내 자질은 꽝이었다. 연이은 출전에서 부진을 거듭했고, 고대하던 중앙 미드필더 출전도 수비수 포지션의 부진과 맞물리면서 폼이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중앙 수비수로 부진하자 풀백 전환을 권유했다. 발이 빠르고 수비력이 좋으니 측면 수비수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는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시간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출전해서 내 가능성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측면 수비수 적응도 실패하고, 부진이 길어졌다. 자연히 출전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중앙 미드필더로 뛰면 활약을 펼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부진하던 내게 중앙 미드필더는 자존심의 버팀목이었다.
 그 길로 감독을 찾아가 포지션 고정을 요구했다. 코치에게도 내 의견을 전달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1년간 부진은 최고의 유망주에서 부상 후 폼을 회복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유망주로 전락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패배자였다.
 내가 무너지는 순간, 그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유스팀 감독은 인종차별 주의자였으며, 코치들도 동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었다.
 세상의 인심은 혹독했다. 망가진 유망주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방인.
 나는 이곳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상황이 잘못 돌아가는 걸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다.
 내 잘못도 있었다.
 계속 잘했다면 저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동양인을 깔보는 자들이 아니라 소속 팀 선수를 다독이고 감싸줄 수 있는 감독이었다면?
 몸싸움도 안 되고 활동량도 안 되는 반쪽짜리 태환 정이란 선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길.”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표정을 찌푸렸다.
 당시 좌절한 나는 술과 담배에 빠져들었다.
 재능을 눈여겨보던 2부 리그 팀에서 계약을 제안했으나, 그 시절 퍼포먼스를 재현하지 못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조금이라도 시비가 붙으면 주먹부터 나갔다.
 팀의 트러블 메이커였고, 언론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결국 계약파기 통보를 받게 되었다.
 어떻게든 다시 기량을 끌어올려 계약하려 했지만, 언론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나는 팀에 분란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로 확정되어 있었다.
 과거의 영광만 믿고 날뛰는 것처럼 포장된 나를 받아 주는 팀은 없었다.
 세상의 냉정한 눈초리를 피해 숨어들었다. 그러면서 날 이렇게 만든 모든 녀석들을 저주했다.
 술과 담배, 심지어 약까지 하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영국 나이로 25세 때였다.
 연락이 끊긴 아들을 찾아 영국에 왔다가 오열하던 어머니와 실망하던 아버지,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여동생의 모습에 깨달았다.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고.
 그때부터 모든 걸 끊고 이를 악 물고 기량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3부 리그 팀에서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다년간 술과 담배, 심지어 약까지 했던 몸은 3부 리그에 적응하기 급급했다.
 정신이 나약해질 때마다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면서 리그에 안착할 수 있었다.
 “내가 최고였을 때 노력을 했다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2부 리그와 3부 리그를 떠돌며 10년이 넘는 선수 생활을 이어 왔다.
 자신만의 무기를 개발해 내고, 비록 1류는 아니라지만 리그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나이는 30대를 훌쩍 넘긴 후였다.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해마다 기량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했지만 간절하게 붙잡은 현역에 대한 열망은 저버리지 못했다.
 이제 와서 물러날 수 없다.
 어떻게든 다시 올라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컴컴한 밤하늘을 볼 때면 가장 화려했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화려하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필드를 종횡무진 누비던 나.
 젊은 선수와 몸싸움도 버거운 현재와 전혀 달랐다.
 해마다 피지컬은 하락하고 경기 소화에 부담을 느꼈다.
 “으음!”
 쌀쌀한 바람이 전해지자,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도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했다면.’
 내일 경기를 앞두고 바이오리듬부터 생각하는 모습에 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상념을 접어 두고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았다.
 경기 전날에는 감기라도 걸릴까 봐 함부로 외출도 하지 않는 지금, 유일한 낙은 게임이었다.
 TV 앞으로 연결한 게임기 버튼을 누르자, 버벅거리다가 실행되었다.
 멋들어진 필체로 떠오른 게임은 ‘Football Line 2025’였다. 좋아하는 팀을 고르고 선수를 육성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20년 전 게임이기도 했다.
 “…….”
 이미 구식이 되어 버린 게임이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화면에 떠오른 선수 때문이다.
 내 시선은 TV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다.
 앳된 얼굴이 무색하게, 어떤 선수들보다 뛰어난 하드웨어를 지닌 선수는 바로 20년 전 나였다.
 축구 인생에 가장 화려하던 시절, 풋볼라인 2025 버전에서 나는 당장 1군 백업 멤버로 데뷔해도 모자라지 않을 오버롤(Overall)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리그 최고의 포텐셜을 부여받았다.
 게임 회사에서도 내 재능을 알아본다며 으스대던 게 어제 일 같았다.
 게임 속에서 나는 최고였다.
 팀의 주장이고 전술의 중심이었다. 실력도 월드 클래스로 가장 많은 주급을 받았다.
 “……너무 심했나?”
 지금, 내 캐릭터 오버롤은 무려 95에 육박했다.
 세계 3대 리그를 호령하는 최고 공격수들의 오버롤이 96~97이었다.
 미드필더 중에서도 95 이상의 선수는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중된 성장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게임 속에서 최고의 환경에서 마음껏 재능을 펼칠 수 있으니까.
 당장 내일 경기에서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과는 그야말로 극명한 대비되었다.
 정신없이 게임에 몰입했다.
 기어이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달성하고는 후련한 얼굴로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옛 과거를 그리워하며 회상하는 날이 많아지는 요즘, 게임으로 찬란한 성과를 이뤄내는 내 모습은 대리만족하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을 구겼다.
 “벌써?”
 서둘러 게임을 끄고 잠잘 준비를 했다.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철저한 훈련과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생활 패턴 삼박자를 지키고자 했다.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이만한 관리를 하기에 현재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잠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내일 경기에 지장이 생길 텐데.”
 생활 패턴이 깨지면 자신 같은 노장은 필드에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몸은 피로를 호소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잠들기 전 게임 속에서 골을 넣고 세레머니를 펼치던 자신의 모습이 생생했다.
 비록 게임에 불과했지만 최고의 무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었다. 그 속에서 빛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최고의 무대에서 뛸 수 있었을까?”
 현역으로 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과거에 내 퍼포먼스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압도적인 피지컬, 그리고 활동량.
 명문 클럽에서 물밑 접촉을 해왔고, 동료들은 내게 환심을 사고자 했다.
 성공이 보장된 삶.
 나를 비롯해 주변의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됐지.”
 당장 현실은 내일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30대 후반 노장 선수였다.
 강등된 팀은 축소된 재정 속에서 젊고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선별할 것이고, 나처럼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선수들은 방출 수순을 밟을 테니까.
 “다시 한 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고를 향해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텐데.
 게임 속 최고의 자신. 그리고 강등권에서 분투하는 현실의 자신.
 두 모습이 교차되는 가운데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작가의 말

주인공의 부진이 부상과 주변 여건이 연관된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46)

남성객체    
아 축구는 안 읽는데.
2016.01.13 13:47
rjadmsqkek    
몰아서 봐야지. 기대됩니다. 축구계를 평정해 주시기를...
2016.01.15 12:20
글글글글    
3
2016.01.15 15:45
자요    
잘 보고 갑니다.
2016.01.21 21:07
더비    
뭐뭐했다. 뭐뭐했다. 뭐뭐했다... 작가님 저는 문맥을 좀더 매끄럽게 고쳐야 할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2016.01.22 23:12
二月    
아 축구는 잘 읽는데.
2016.01.23 07:16
구름달    
ㅋㅋㅋ고고
2016.01.23 09:01
포스아인    
즐감하고 갑니다
2016.01.23 16:06
물물방울    
회귀물이군요.
2016.01.24 13:33
지구폭군    
풀백하고 중앙수비수하고 뭐가 다르죠?
2016.01.24 21:23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