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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 1권

2016.02.19 조회 4,189 추천 46


 # 프롤로그
 
 보라색의 하늘.
 지겹다. 파란하늘이 사무치게 그립다.
 마계 절봉 인페르노의 정상에 선 디아블로는 상념에 젖어있었다.
 디아블로?
 ‘내가 왜?’
 하지만 여기서는 디아블로다.
 제대 첫날, 재수 없게 탱크로리와 정면충돌했던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있던 ‘민간인’ 김건우가 아닌.
 
 ***
 
 8년 전.
 녹음이 짙어가는 어느 6월이었다.
 더웠다. 사상초유의 불볕더위라며 온 매스컴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우리 김 병장, 드디어 제대하는 건가?”
 “까분다.”
 신나게 물광에 불광 콤보를 시전 하던 말년 병장 김건우. 그런 그를 부러운 듯 쳐다보던 맞후임이 농을 걸었다.
 “제대하면 이제 뭐 할겨, 건우 형?”
 “글쎄다. 복학을 해야겠지?”
 “재미없게.”
 슬며시 다가온 맞후임은 김건우의 군화를 뺏으며 씩 웃었다.
 “내놔, 임마.”
 “가는 마당에 좀 닦아주려고 그러오. 까칠하긴.”
 슬며시 담배를 꺼내 문 김건우는 멀거니 앞산을 바라봤다.
 “아르바이트 좀 해서 배낭여행이나 해 볼란다.”
 “진짜?”
 “형님 꿈이잖냐. 유럽 찍고 남미 돌아 미국, 캐나다! 햐, 생각만 해도…죽이지 않냐?”
 
 ***
 
 ‘그랬었지. 그때는 배낭여행을 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지.’
 그런데 팔자 한 번 기구하다.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집으로 향하던 그 버스 안에서 모든 꿈이 쫑 날 줄이야.
 ‘그래, 여행은 하고 있지. 아주 신물이 날 정도로. 8년째 마계를 여행하는 중이니까…….’
 
 “마황, 디아블로시여. 모두 모였나이다.”
 상념을 깨는 목소리.
 군단 총사령관, 블레오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됐다.”
 디아블로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계의 중심, 인페르노. 그 정상에 선 마계의 지배자 디아블로.
 그는 지난 8년간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마계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108마신이 제각각 영주가 되어 다스리던 전국시대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지금! 최후의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다.
 마지막 남은 최후의 대적자 불멸자, 바알. 그와의 마지막 전투가 곧 시작될 것이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놈의 근거지며 추종자는 거의 소멸한 상태였다. 남은 건 오직 바알과 그의 친위대 일천뿐.
 형식적인 전투는 이제 의미가 없다. 놈의 군단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나, 마황 디아블로와 불멸자 바알간의 일기토뿐.’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오른 디아블로는 최후의 전장으로 향했다.
 
 
 # 1. 마계
 
 “으아악!”
 김건우는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과 함께 눈을 떴다.
 교통사고?
 맞다. 강원도 철원, 동송 읍내를 출발한 고물 버스에 몸을 실고 서울로 향하던 길이었다. 막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을 넘을 무렵이었다.
 급커브를 돌던 버스가 휘청거리며 중앙선을 넘었다.
 ‘병신 같은 운전사!’
 아마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밤새 뭔 짓거리를 했기에 대낮부터 졸음운전이란 말인가.
 어쨌든 중심을 잃은 버스는 그대로 맞은편의 무언가와 정면충돌했다.
 죽음의 순간이 오면 지난날들이 한순간 영화처럼 스쳐간다고 했던가. 웃기는 소리. 그런 건 없었다.
 다만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왜곡이 있을 뿐.
 지루한 죽음의 순간이 스틸 컷처럼 딱딱 끊어지며 이어졌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하나.
 ‘망했다!’
 그렇게 박살이 난 버스와 함께 건우의 몸뚱아리도 박살이 났다.
 그리고 눈을 떴다.
 ‘죽은 거겠지?’
 살았다면 로또에 버금가는 행운이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아하니 그런 행운은 없었다. 적어도 병원 침상쯤은 기대했건만.
 ‘안전벨트라도 맬걸 그랬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선 그는 주변을 살폈다.
 마치 산속과도 같은 느낌. 지리산 어느 두메골짜기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분명 죽긴 죽었을 텐데.’
 엄청난 고통과 함께 한순간 끊어진 의식. 그리고 눈을 뜬 곳이 바로 여기다. 지옥이나 천국. 뭐 그런 곳 중 하나일까?
 적어도 그런 생각에 확신을 준 것은 두 눈 가득 들어찬 하늘색이었다.
 짙은 보랏빛의 하늘. 군데군데 섞여있는 회색빛의 음영까지 더하면 천국보다는 지옥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색상이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 살았나?’
 
 ***
 
 같은 시각.
 
 “마황, 이제 포기하시지 그래.”
 바알을 필두로 한 108마신이 대전을 가득 메운 채 용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진 놈. 감히 네놈 따위가 날 능멸하려들다니!”
 비틀거리며 일어선 디아블로. 대전이 떠나갈 듯 광오한 대사를 읊어댔지만 왠지 힘이 없다.
 그때 여인 하나가 은빛 액체가 담긴 병을 흔들며 나섰다.
 고혹적인 미소와 뇌쇄적인 눈빛. 사내라면 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절색의 여인이었다.
 “오호호호! 마황, 당신 정말 날 믿은 거야?”
 여인은 손에 든 병을 바닥에 툭 던졌다.
 영롱한 빛깔.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과 함께 은색 액체가 대전바닥을 적셨다.
 “그, 그건!”
 “맞아, 천사의 피. 어젯밤, 당신이 마신 미주. 거기에 이걸 좀 섞었어.”
 “네 이년! 이름 없는 마족인 너를 내 친히 거두어 마신의 지위까지 내려주었거늘! 어찌 이런 만행을 저지른단 말이더냐!”
 은빛 액체, 곧 천사의 피. 말 그대로 천계의 전사이자 신의 대리인인 천사의 혈액이었다. 마계의 일족에게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액체가 바로 이 천사의 피였다.
 “마황, 오해가 있었군 그래.”
 여인의 어깨를 감싸며 비웃음을 흘리는 바알.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렀다.
 “이 아이는…내 둘도 없는 소중한 딸이다. 네놈의 노리개가 아니란 말이다!”
 “뭣이라…….”
 “정신 차려라, 디아블로. 네놈을 옥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내 피눈물을 흘리며 내 딸을 네게 보냈다. 드디어 오늘 그 결실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구나. 내 너를 산산조각내고 마계를 이 손안에 쥐리라! 크하하하!”
 
 반란이었다.
 마황 디아블로를 중심으로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던 마계에 일어난 대반란.
 급진적인 호전파 바알을 중심으로 한 99마신들의 연합. 비밀리에 세를 불린 그들이 결국 일을 내고 만 것이다.
 ‘마황 디아블로! 당신은 너무 물러 터졌어! 마계는 절대 이렇게 물러서서는 안 돼! 천족 따위와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알을 필두로 한 99마신 연합의 기치였다.
 
 지난 수백 년간 이어졌던 천마대전. 숱한 사상자와 피폐해진 세상을 남긴 그 전쟁은 천계와 마계가 극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계의 수장 디아블로와 천계의 대천사 미카엘 간에 맺어진 비밀협정. 사실 말이 비밀협정이지 결과를 놓고 보면 공공연한 비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쟁은 막을 내렸고 두 세계는 백여 년에 걸친 휴전상태를 이어가고 있었다.
 
 “마족은 마족다워야 한다. 알겠나, 디아블로. 네 놈의 죽음은 다시금 부흥할 마계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잘 가라, 어리석은 마황이여…….”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천년의 세월을 마황으로 살아온 마계의 절대자 디아블로. 그의 죽음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
 
 ‘내세란 곳이 이런 데였나?’
 몇 시간째 산속을 헤매던 김건우는 결국 퍼지고 말았다.
 어제까지의 신분인 대한 육군. 늘 하는 일이란 게 산을 타는 거였는데 죽어서도 산을 탄다.
 ‘뭐 이런 지랄 맞은 상황이 다 있어?’
 죽었으면 몸이라도 편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 영혼이 산 좀 탔다고 헥헥 대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빽빽한 밀림.
 이러다 또 말라죽는 건 아닌지 괜한 걱정마저 들었다.
 ‘나 영혼 맞아?’
 건우는 땀으로 번들대는 볼따구니를 쿡 찔렀다. 탱탱한 20대의 피부가 여실히 느껴진다.
 도무지 앞뒤맥락이 연결이 안 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다면 여긴 도대체 어딘지.
 “에라 모르겠다.”
 지칠 대로 지친 건우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우거진 수풀사이로 어느새 익숙해진 보라색 하늘이 한가득 들어왔다.
 ‘배고파.’
 괜히 서러워진다.
 벌써 집에 도착했어도 예전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버선발로 뛰어나온 어머니가 진수성찬을 차려주셨을 시간인데. 기름진 성찬과 하얀 쌀밥으로 배를 두둑이 채우고 뒹굴 거릴 시간인데!
 “으아아악!”
 건우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발버둥을 쳤다.
 ‘아, 씨바. 진짜 서럽다.’
 예비역 병장, 김 병장은 그렇게 남모를 서러움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으휴…….”
 그렁그렁 맺힌 눈물 때문인지 시야가 뿌옜다. 보라색 하늘이 눈물을 통과하며 흐릿한 무지개를 만들었다.
 “제기랄, 저 하늘색깔부터 맘에 안 들어. 에라이!”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낙엽더미를 그러쥐곤 냅다 집어던졌다. 얼굴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낙엽…
 “응?”
 나풀대는 낙엽사이로 시커먼 무언가가 그를 덮쳤다. 한순간에 그의 몸속으로 스며든 검은 형체, 아니 검은 연기.
 절망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던 건우의 눈에 암록색의 이채가 아른거렸다.
 8년간의 마계생활. 그 시작이었다.
 
 ***
 
 급작스런 교통사고. 그리고 죽음.
 당연히 현세를 벗어난 그의 영혼은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원인모를 이유로 영계가 아닌 마계로 떨어진 말년병장, 김건우.
 게다가 본의 아닌 계기로 마황, 디아블로와 한 몸이 되어버렸다.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버린 기이한 현상.
 정신적 주체는 분명 건우였다. 하지만 마신으로서의 기억과 권능이 결합한 그는 이전까지의 김건우가 아니었다. 김건우란 인물에 마계의 절대자 디아블로가 강신한 인간마신으로 전생한 것이다.
 이날 이후, 그의 행보는 하루하루가 전쟁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전투는 바로 건우가 떨어진 마수림에서 벌어진 12마신과의 일전이었다.
 마황, 디아블로가 건재할 당시에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던 떨거지들.
 마황의 영기를 쫓아 마수림까지 쫓아온 놈들은 그가 천사의 피를 마신 후, 모든 힘을 잃은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인간의 몸과 융합한 디아블로. 덕분에 천사의 피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었다. 대신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전투능력은 거의 10분의 1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정신적 주체가 인간, 김건우다보니 전투감각 면에서는 거의 바닥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떨거지 마신 따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이날 열두 마신은 건우의 맨주먹에 떡이 되도록 두드려 맞았다.
 이어진 수순은 열두 마신의 충성서약.
 당연한 힘의 논리였다. 마계의 모든 권력은 힘, 곧 전투력으로부터 나오는 것.
 좋다고 덤벼들었다가 박살이 난 마신들은 반란의 달콤한 열매를 누릴 틈도 없이 곧바로 그의 수하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3년간 건우는 디아블로의 8개 전투군단을 회복하는데 힘을 쏟았다. 더불어 일신의 힘을 회복하는데도 전력투구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능력으로는 절대 바알 같은 최상급 마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투군단을 키운들 결국은 마신대 마신의 싸움이 모든 결과를 좌우한다. 그만큼 마신이란 존재가 가진 힘은 절대적이었다.
 군단을 회복하고 실지를 수복하는 데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반란 세력의 대부분은 힘의 논리를 따랐다. 걸리는 족족 그의 휘하로 들어왔다.
 더불어 디아블로의 권능 역시 10분의 1수준에서 5분의 1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간 이어진 숱한 전투로 끌어올린 전투감각은 덤이었다.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남은 적대세력은 불멸자 바알과 그의 일천 친위대, 그리고 그의 딸 마신 엘렉트라. 단 둘 뿐이었다.
 ‘엘렉트라…네 년만은 영원한 불지옥에서 고통 받도록 만들어주마!’
 건우는 핏물이 배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불지옥의 영원한 고통. 그것은 마황 디아블로의 순정을 짓밟은 대가였다.
 
 ***
 
 건우는 인페르노 정상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펄럭이는 붉은 망토가 화려하게 창공을 수놓는다.
 80만 대군. 8개의 전투군단이 그의 발아래로 흘러간다.
 경외에 찬 그들의 함성이 온 천지를 뒤흔들었다. 바알과 엘렉트라를 제외한 106마신과 그들의 군대도 덩달아 소리쳤다.
 마계, 그 세상의 중심 인페르노. 그리고 그 땅의 주인 디아블로, 김건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이제 끝이다! 놈의 목을 이 손에 움켜쥐고 잡아 뜯을 테다! 놈의 붉은 피를 들이키며 승리를 만끽하리라!’
 일만 팔천 미터에 이르는 화산, 인페르노를 가볍게 뛰어내린 건우는 검은 평야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저갱의 협곡, 매소드 캐니언. 검은 평야의 최북단. 그리고 불멸자 바알이 최후를 맞을 바로 그 땅 위에.
 바알과 그의 친위대, 그리고 그의 사악한 외동딸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 마계의 끝자락에 몰린 그들은 평안한 죽음의 자비만을 바랄 뿐이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바알.”
 여유로운 발걸음.
 죽음을 목전에 둔 적장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한가롭기까지 했다.
 “이리 나와, 뒤에 숨어있지 말고.”
 건우는 천명의 바알 친위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아무런 반응이 없다.
 “왜 이래, 촌스럽게. 격에 맞게 놀아야지. 갈 때 가더라도 품위는 잃지 말자, 우리. 응?”
 비아냥이 먹힌 것일까. 이내 친위대무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거구의 바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르는 가냘픈 체구의 여인까지.
 “쓰읍!”
 건우의 눈꼬리가 급격히 치솟았다.
 디아블로의 기억. 분노에 찬 그 기억이 여인의 모습을 본 순간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 됐다, 됐어. 추하게 여자한테 뒤통수 맞고 아직도 꽁하기는.’
 건우는 비집고 나온 디아블로의 기억을 애써 억눌렀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어느새 건우의 코앞까지 다가온 바알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난 알고 있다. 내 별호는 불멸자가 다가 아니다. 내 눈을 보라. 난 천리안을 가진 바알이다. 세상 모두를 속여도 난 못 속인다. 넌 디아블로가 아냐. 겉모습 따위 폴리모프로 속여 봤자 안 통해. 너, 인간아. 왜 이렇게까지 마계의 일에 간섭하려드는 거냐?”
 “몰라서 물어?”
 “…?”
 “천리안이라며. 그럼 디아블로가 나와 하나가 된 것 정도는 눈치채야 하는 거 아닌가?”
 “웃기지마라. 이미 디아블로는 이 세상에 없다. 마족은 죽음과 함께 영원히 소멸한다. 넌 오직 그의 권능과 얄팍한 기억만을 계승한 인간일 뿐이야.”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사실 그럴지도…….”
 건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바알은 은근한 목소리로 한 가지 제안을 덧붙였다.
 “그래서 물으마. 인간, 너 다시 살아서 현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뭐?”
 현세로의 귀환? 살아서…?
 
 
 # 2. 귀환
 
 마음이야 굴뚝같지.
 ‘하지만 그건 안 돼.’
 그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디아블로. 이미 하나가 된 기억은 그를 반쯤 디아블로의 화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껍데기뿐인 기억의 편린이라지만.
 “너 내가 지난 8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나 하고 함부로 떠드는 거냐?”
 “잘 알고 있지. 건방진 인간 주제에 마황의 탈을 쓰고 마계를 쥐고 흔들며 아주 신나는 삶을 살지 않았나?”
 “헛소리! 네 놈은 모른다. 그 기억의 고통을. 밤이면 밤마다! 날이면 날마다! 악몽 같은 복수의 일념이 내 정신을 후벼 팠다.”
 건우는 더 떠들기도 귀찮았다. 서서히 들어 올린 그의 손끝에는 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지금 이 순간, 그 은원의 고리를 끊고 난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니까…죽어라.”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구나.”
 “사돈 남 말 하네. 너도 마찬가지야. 마황의 기억이 속삭인다. 네놈 따위에게 죽었다는 게 너무도 수치스럽다고. 마족이면 마족답게 굴어!”
 “닥쳐라! 감히 인간주제에…!”
 버럭 소리를 지른 바알이 등 뒤에 선 딸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뭐야, 또?”
 “아, 아버님?”
 놈의 굵은 손톱이 하얀 목줄기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퍼런 마족의 피가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줄줄 흘렀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당황스런 시추에이션이다. 왜 제 딸을, 그것도 이제 유일하게 하나 남은 제 편을?
 건우는 순간 공격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흐흐흐…….”
 자신의 딸까지 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게 마족인 것을. 인간의 상식을 가진 건우로서는 이해 못할 광경이었다.
 물론 이 역시 바알의 예상범위 안쪽이었다. 마계의 일족이 아니라면, 미천한 인간의 몸을 가진 적이라면 충분히 걸려들 술수.
 최후의 그리고 그 최후의 순간, 일발 역전의 기회로 삼은 그 술수!
 “내 딸의 별호를 잊었는가? 바람의 권능 엘렉트라. 흐흐흐! 바람은 어디든 간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어디든 있는 게 바람. 공간의 이동, 차원의 이동까지 가능한 유일한 마족이 바로 내 딸, 엘렉트라란 말이다!”
 단,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술법이 필요할 따름이었지만.
 하지만 바알은 딸년의 목숨 따위는 언제든 자신의 무기로 쓸 수 있는 작자였다.
 “내 딸, 엘렉트라여! 저 미천한 인간의 탈을 쓴 디아블로를 이 마계에서 추방 하여라!”
 벼락같은 노호와 함께 엘렉트라의 목줄기가 뜯겨나갔다. 퍼런 핏줄기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잘 하는 짓이다.’
 기가 찬 건우는 순간 멍하니 피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참, 저년의 목숨줄은 직접 끊었어야 하는데. 선수를 뺏겼다.
 
 수 미터나 치솟은 푸른 핏줄기가 허공에서 뭉쳤다.
 “가라! 너의 세상으로! 넌 마계에서 영원히 추방이다, 크하하하!”
 뭉쳤던 핏덩이가 한순간 마법진을 그렸다.
 멀건 허공에 펼쳐진 기하학적 무늬가 쓸데없이 아름답다. 영롱한 푸른빛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이게 아닌데!’
 한순간 쏘는 듯한 청광에 휩싸인 김건우의 의식이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
 
 “으아악!”
 고통은 없었지만 위협적인 푸른 청광.
 잔뜩 웅크린 건우는 찰나지간 끊어졌던 의식이 다시 돌아왔다.
 ‘여긴 또 어디야!’
 불타는 인페르노와 무저갱의 협곡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신록이 시야가득 들어왔다. 오랜 세월 잊고 지낸 푸르른 자연. 그다지 익숙하지가 않다.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음울한 보랏빛 하늘대신 푸른 하늘과 따가운 햇볕이 내리쬔다는 것 정도?
 ‘설마…!’
 
 ***
 
 43번 국도, 경기도 포천 인근.
 인적 드문 야산을 끼고 급커브를 이룬 43번 국도의 한 자락.
 녹음이 우거진 이 길 위로 두 시간째 차량 한 대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국도라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전쟁이라도 났다면 모를까.
 다행히 전쟁까지는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폭발이 있었을 뿐.
 폭발이 있은 직후, 국도는 신속하게 통제가 이루어졌다. 지난 8년간의 학습효과였다.
 불규칙적이고 비정기적이며 규모마저 천차만별의 폭발. 마치 155밀리 자주포 고폭탄이 떨어졌을 때와 흡사한 규모의 폭음을 동반한 폭발은 그렇게 지난 8년간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폭발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 이 43번 국도 상에서 발생한 것이다.
 
 “하필 이 동네에 ‘그것’이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폭발지점으로부터 약 4킬로미터 남단, 군경 바리케이드 책임자인 인근 군부대장이 난감한 얼굴로 누군가를 향해 하소연했다.
 “포탄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니까요.”
 곁에 선 포천 경찰서장은 한술 더 뜬다.
 대대장이 가볍게 그를 째려봤다.
 포병대대장인 그로서는 꿈에라도 듣기 싫은 소리였다.
 포탄 오발사고라니. 이 미친 서장이 할 소리가 있고 안할 소리가 따로 있지.
 “자, 진정들 하시구요. 일단 이 후로는 저희가 상황을 통제할 테니 마음 놓으세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여성이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팀장님, 확인 완료했습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엘리시움 수치가 3천. 3등급 옥타곤이 곧 생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여성은 무의식적으로 바리케이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정차중인 검은 스타렉스 한 대가 있었다.
 각종 전자 장비로 가득 찬 개조 차량. 그 내부에는 미지의 폭발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중인 정보 요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자, 확인 완료라는군요. 그럼 이만. 차량 통제 잘 부탁드립니다.”
 
 휭하니 자리를 뜬 그녀는 곧바로 대기 중인 차량에 올랐다.
 검은 스타렉스와 두 대의 지프. 총 세 대의 차량은 잘 뚫린 국도 위로 금세 모습을 감춰버렸다.
 “생각보다 예쁘네요. 하는 일은 좀 그렇지만.”
 “그러게 말입니다. 에이전트라고 다 뿔난 마귀는 아니겠죠. 똑같은 사람인데.”
 “쓰읍!”
 서장에게 가볍게 한방먹인 대대장은 모른 척 자리를 떴다.
 
 “3등급이면 만만찮겠는걸?”
 지프 조수석에 앉은 예의 여성이 입술을 씹었다.
 그녀의 이름은 주혜민.
 대(對)큐브 전담반 수도 방위 3팀장이 그녀의 직함이다.
 “뭔 걱정이야, 주 팀장. 5명씩 총 열 명. 두 개의 팀이 함께 움직이는데.”
 운전대를 잡은 남성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팀이라서 걱정이라는 거다. 이 작자야.’
 다크서클이 코끝까지 내려온 남성이 왠지 마뜩찮은 여성은 대답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8년이나 흘렀어…이 지겹고도 끝없는 싸움이.’
 
 2015년 6월.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폭발과 함께 나타난 큐브.
 그것은 재앙이었고 천재지변이었다. 예측도 예방도 불가능한 말 그대로 자연재해라 일컬을 만한 사고의 연속.
 느닷없는 미지의 폭발이 발생하고 나면 어김없이 그곳에는 암회색의 큐브가 생성되곤 했다.
 아니 예외란 없었다. 무조건 생겨났다.
 그리고 놈들이 나타난다. 뭐, 흔히들 말하는 그 마수란 놈들.
 놈들은 괴물이며 악마이며 몬스터이며 악령이었다.
 규모도 형체도 능력도 천차만별이다. 아마 지금까지 전 세계에 나타난 큐브를 통계 내어 본다면 나타난 몬스터의 종류만 수백 종에 이를 것이다. 단지 특징이 있다면 큐브마다 나타나는 놈들이 정해져 있다는 정도?
 큐브는 현재까지 총 네 종류로 분류되고 있었다.
 삼각기둥 형태의 트라이앵글, 정육면체의 테트라곤, 오각기둥의 펜타곤, 그리고 육각기둥의 헥사곤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각각의 큐브는 고유한 특질이 있었다. 정확한 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큐브를 바꿔가며 나타나는 마수가 없는 걸 보면 확실했다.
 발생한 큐브는 24시간의 유예기간을 가진다. 정확히 24시간.
 몬스터의 처리는 반드시 그 안에 완료해야 한다. 단 1분의 추가시간도 없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2차 폭발이 발생하고…….
 첫 폭발보다 족히 열 배가량의 파괴력을 가진 그 폭발이 일어난 후에는 생지옥이 펼쳐진다. 큐브의 개방. 바로 그것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개방은 지난 4월, 경북 포항이었다.
 한창 프로야구 경기가 진행 중이던 포항 야구장. 바로 그곳에서 큐브가 열렸다.
 아마 그날 포항 야구장은 올해 들어 첫 만원 관중이라고 했다.
 신고는 즉시 이루어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집채만 한 테트라곤이 투수 마운드 위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 보는 눈만 일만에 육박했다. 내야 수비수 모두와 타자가 즉사한 것은 덤이었다.
 대 큐브 전담반, 경북 방위 2팀이 뜬것은 테트라곤 발생 1시간 후였다. 경주에서 출발한 것 치고는 꽤나 신속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전은 실패였다.
 한 마리의 사자가 지휘하는 99마리의 양은 한 마리의 양이 지휘하는 99마리의 사자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란 중요한 것이다.
 당시 2팀장을 맡고 있던 이가 바로 주혜민의 옆자리에서 운전 중인 김기만이었다.
 전투 결과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테트라곤으로 진입한 팀원들이 몰살했고 홀로 살아남은 김기만은 큰 부상을 입고 후송 되었다.
 작전 실패는 곧 2차 폭발로 이어졌다.
 뛰쳐나온 마수는 엘모라라는 이름의 거대 촉수괴물. 신속한 대피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놈을 잡기 위해 출동한 포항 해병 1사단은 처절한 사투 끝에 간신히 놈을 제압했다. 그러나 사단 병력은 그날부로 반 토막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김기만은 어떠한 문책도 받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부친이 육군 참모총장이라는 소문이 도는 걸 보면 유야무야 일이 마무리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날 이후 프로야구팀은 10개 구단에서 8개 구단으로 축소 운영되었다.
 
 ***
 
 [치직! 팀장님, 팀장님!]
 무전기를 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해.”
 [앞으로 1킬로미터만 더 가면 옥타곤이 나타납니다. 현재 시각 13시 08분. 앞으로 2차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약 20시간입니다.]
 “오케이. 지원 차량은 여기서 대기한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곧바로 무전기 버튼을 다시 클릭한 주혜민은 다시 누군가를 호출했다.
 “정기철!”
 [소위 정기철!]
 “2번 차량은 1번 차량과 함께 곧바로 옥타곤으로 향한다. 확인 즉시 진입할거니까 준비 확실히 하도록.”
 [옛설! 걱정 붙들어매십쇼!]
 “쯧쯧, 말투가 왜 저래? 주 팀장네 애들은 자기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여자라고 말이야. 교육 좀 똑바로 시켜야겠어.”
 김기만이 괜한 태클을 걸었다.
 “뭐, 나쁠 건 없잖습니까?”
 ‘너나 잘하세요.’
 주혜민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뒷말을 도리질과 함께 날려버렸다.
 
 ***
 
 “으아앗!”
 잔뜩 웅크린 모양새의 김건우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봐도 지상 10미터는 너끈히 넘을 높이였다. 게다가 빽빽한 수림이 우거진 야산 자락.
 난데없는 환경 변화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굴러 떨어졌다.
 “크으…….”
 누가 볼까 두렵다.
 명색이 마계의 일인자, 디아블로라는 작자가 꼴사납게 야산을 데굴데굴 구르다니.
 대신 어디 부러지거나 찢어진 곳 따위는 없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목숨마저 장담 못 할 추락이었지만 그는 특별하니까.
 ‘특별한건 특별한 건데 모양 빠지게스리…….’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당황한 나머지 날아 내릴 생각까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벌떡 일어난 건우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래, 바알! 그 썩을 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음에 분명하다. 분명 자신의 딸을 제물삼아 괴이한 마법을 펼쳤는데.
 차원이동이라던가? 얼핏 기억나기로는 현세로의 귀환 어쩌고 그랬던 것 같다.
 ‘그래…귀환이란 말이지?’
 
 당시에는 분명히 거부했었다.
 당연하다.
 8년 동안 시달린 악몽. 놈의 명줄을 끊어 놓지 않는다면 그 지랄 맞은 악몽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디아블로의 기억.
 그 집요하고 처절한 기억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고 그를 괴롭혔다.
 “이상한데? 생각보다 견딜 만하네.”
 자나 깨나 그 고통은 항상 그를 짓눌러왔다. 그런데 왠지 견딜 만하다.
 굳이 떠올리자면 디아블로의 기억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크게 괴롭지는 않았다. 두통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며 뜬눈으로 맞는 공포와도 흡사한 그 느낌이 더 이상은 없었다.
 마계에서 끊어진 의식이 다시 이어진 이후 단 한 번도 디아블로의 괴롭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바알의 술수가 전화위복이라도 된 건가?
 마계와 현세의 경계를 넘으면서 알 수 없는 조화가 일어난 모양이다.
 “하하, 아하하하하!”
 저절로 웃음이 났다.
 기쁘다. 날아갈 것만 같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란 말인가.
 이제 맘만 먹으면 무념무상의 멍 때림도 가능하다.
 ‘사람들은 모른다.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를…나도, 이제 나도 사람이 된 거다. 지옥 같은 고통은 더 이상 없다!’
 “끼야호!”
 건우는 벅찬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는 저도 모르게 땅을 박차고 수 미터나 치솟으며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한참을 미친 원숭이 마냥 뛰어다니던 건우.
 무려 한 시간을 날뛴 후에야 겨우 평온을 되찾았다. 그래도 두근대는 기쁨만은 여전했다.
 게다가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꿈에도 그리던 현세라니. 절대 살아서는 다시 못 볼 세상이라 생각했건만…
 엄청난 교통사고로 산산이 부서졌던 그가 멀쩡한 육신을 갖고 돌아오다니!
 ‘8년 동안 헛고생만 한 건 아니었구나. 바알이란 놈에게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가볍게 야산자락을 빠져나온 그는 4차선 도로와 마주쳤다.
 익숙한 산세로 보아 분명 한국일 것이라 짐작은 했는데…문득 눈에 띈 도로 표지판은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포천 12Km 서울 45Km]
 ‘한글이로구나! 한글!’
 단 네 글자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부모님은 잘 계실까? 동생 년은 올해 몇 살일까? 8년이란 세월이 짧지만은 않은데.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 까무러치시는 건 아닐런지.’
 텅 빈 도로를 걸으며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냥 날아갈까?
 명색이 마계의 제왕 디아블로의 현신인데 서울까지 날아가는 거야 누워서 떡먹기일터.
 하지만 괜히 더 즐기고 싶었다.
 이 밝은 햇살과 고즈넉한 산세. 그리고 조용하기만 한 도로…조용한 도로…라…?
 ‘너무 조용한데?’
 대충 가늠해 봐도 최소한 30분은 걸은 듯싶다.
 표지판을 보니 43번 국도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복무하던 철원의 모 부대에서 버스로 내려오던 바로 그 길이란 소리다.
 뭐, 사라졌던 곳에 다시 갖다 놓은 것 까지는 이해하지만…….
 ‘이 도로가 원래 이렇게 한적한 길이었나?’
 혹시 이 길 대신 새로운 길이 뚫려서 폐쇄된 건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든다.
 ‘뭐, 상관없지만.’
 히치하이킹을 할 일도 없으니 중요한 건 아니다.
 ‘딱 저 굽이진 커브까지만 걷자. 이 느낌 조금만 더 만끽하자. 그리고 후딱 집으로 가는 거다. 그리운 나의 홈 스위트 홈으로!’
 산수 유람하는 한량의 발걸음이다.
 대한민국 야산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토악질 나게 지겨운 산타기의 연속이던 군 생활. 제대하고 나면 다시는 산 따위 쳐다도 안보리라 다짐했었는데.
 ‘이거 눈 닿는데 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이구만. 저 멋진 조형물도 말이지…응?’
 딱 굽이 길을 돈 순간 난데없는 조형물이 건우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애매한 위치다. 뭐 현대미술의 난해한 사상이 집약된 무언가일지도…….
 그런데 위치가 영 이상했다.
 ‘아무리 현대미술의 어쩌고라고 한들 도로 한가운데는 좀 아니지 않나?’
 
 ***
 
 맹렬한 속도로 내달리던 두 대의 지프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이제 옥타곤까지는 단 200미터.
 2차 폭발의 위력을 생각하면 딱 여기까지가 안전지대였다. 만약 작전이 실패 할 경우 탈출을 위한 차량의 안전을 위해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작계 상 1차 저지 인원인 대 큐브 전담반은 작전 실패 시 무조건 후방으로 빠지게 되어 있다. 이후의 대 몬스터 전은 정규군의 몫이었다.
 아무리 에이전트가 날고 기는 전투력을 가졌다지만 고폭탄과 기관포, 전차 주포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책임질 수 있는 한계는 딱 큐브가 개방되기 직전까지다.
 
 “주 팀장, 3팀이 먼저 앞장서라. 2팀은 후방을 맡을 테니까.”
 차량에서 하차한 김기만이 선수를 쳤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남몰래 고개를 돌린 주혜민은 퉤 침을 뱉었다.
 후방은 개뿔. 어디 뒤에서 뭐라도 튀어나올 일 있나.
 ‘말을 말아야지 내가.’
 저 겁쟁이 2팀장을 앞장세우고 불안하게 움직이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3팀! 빨리 빨리 움직여라!”
 주혜민은 2번 차량에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대 큐브 전담반은 항상 팀 단위로 움직였다. 각 팀은 팀장 포함 보통 5명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혜민의 3팀은 정기철 소위, 이민호 중사, 김하성 중사, 조성하 하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팀장 잘못 만난 2팀은…뭐 그쪽도 대충 5명이다.
 
 심기가 불편한 팀장의 목소리에 팀원들은 평소보다 두 배나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늘어진 당나귀 같은 2팀은 3팀이 이동 간 대형을 갖춘 후에야 슬금슬금 하차하기 시작했다.
 ‘팀장이나 팀원들이나 아주 골고루들 하는구나.’
 완전히 마음을 비운 주혜민.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철아.”
 “네, 팀장님.”
 “이번 작전에 투입된 팀이 둘이라고 느슨해지면 안 되는 거 너도 알지?”
 “당연하지 말입니다.”
 정기철 소위가 흘낏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2팀 쪽 애들도 참 안됐습니다. 팀장 바뀌고 나서 영 개판 오 분 전이지 뭡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서 잘 해야지. 쟤들은 그냥 참관인이다 생각하고 없는 셈 치자고.”
 “걱정 마십쇼.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거도 아니잖습니까?”
 척하면 척이었다.
 내내 김기만에게 시달렸던 주혜민은 그제야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믿을 건 팀원들뿐이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그녀는 힘찬 걸음으로 앞장서 나아갔다.
 “자, 이제 저 커브만 돌면 바로 옥타곤이다. 모두 긴장 늦추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쫄지도 말고. 그래봐야 3등급이다. 구호 시작! 우리는!”
 “악마다!”
 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악마 잡는!”
 “악마다!”
 일견 여유로워 보이지만 군기 잡힌 3팀의 모습은 꽤나 믿음직했다.
 
 “여자가 저래 나대서 어따 써? 저거 시집이나 가겠어?”
 느릿느릿 지프에서 하차한 김기만이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이죽거렸다.
 발까지 질질 끄는 모양새가 딱 마실 나온 동네 노는 형의 포스다.
 “하하하!”
 당나라부대 사촌격인 2팀원들이 덩달아 낄낄거린다.
 그 상사에 그 부하였다.
 
 선두에 선 정기철이 막 커브를 돌았다.
 슬그머니 장검을 뽑아든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굽이진 길을 살폈다.
 “성하야, 넌 쓸데없이 소총은 왜 메고 있냐? 무겁기만 한걸.”
 정기철 바로 뒤에서 이동하던 이민호가 조성하의 등을 쿡쿡 찔렀다.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에이전트 경력 두 달짜리 초짜인 조성하 하사. 그는 아직 장검 보다는 소총의 위력을 더 믿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큐브 안에서는 무용지물이란다. 그 안에서 총검술이라도 하게?”
 “…….”
 “옥타곤이 개방된 다음에 호신용으로 쓸 생각이겠지 말입니다.”
 곁에선 김하성이 맞후임을 두둔했다.
 “재수 없는 소리. 개방은 무슨. 혹시라도 개방이 되고 나면 그거 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달아나는 게 이득이겠다.”
 
 미지의 에너지, 엘리시움으로 가득 찬 큐브.
 현재 이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큐브는 그 수치가 3천에 해당하는 3등급의 옥타곤이었다.
 참고로 지난 4월, 개방으로 까지 일이 번졌던 포항의 테트라곤은 수치 2천, 즉 2등급이었다.
 일천 당 등급이 상향조정되는 큐브의 특성상 3등급이면 2등급에 비해 1.5배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당연히 출현하게 되는 마수의 등급도 더 높다.
 대 큐브 전담반은 이러한 큐브가 발생했을 시, 적극 대응하도록 편성된 특수부대였다.
 하지만 아무나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큐브로의 진입은 의외로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엘리시움.
 바로 그 마성의 에너지와 동기화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일차적인 필수 요소였다.
 물론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흔치가 않다.
 확인 절차를 거쳐 선발된 극소수의 인원만이 대 큐브 전담반이란 부서에 들어갈 수 있다.
 업무가 업무이다 보니 만 20세 이상, 병역 의무가 있는 남성이 주요 확인 대상이었다. 여성의 경우는 직업군인 신분인 여군에 한해 선별적으로 확인 절차를 거친다.
 이들 중 엘리시움 에너지와 동기화가 가능하다는 판별을 받은 인원만이 일차적 지원이 가능해진다.
 이후 갖가지 테스트와 훈련과정을 거친 극소수의 인원만이 대 큐브 전담반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비교적 위험한 직업군이라 꺼려하는 사람도 많은 반면 넘쳐나는 청년실업으로 인해 각광받는 직업이기도 했다.
 우선 사회적 인식이 매우 좋다.
 현재 소방관과 함께 1, 2위를 다투는 ‘명예로운 직업군’ 탑 랭킹 직업이었다. 게다가 동기화 수치에 따라 파격적인 대우가 보장된다. 엘리시움 동기화 감도는 곧 큐브 내에서의 전투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기화 감도가 1.0이 넘어가면 아무 조건 없이 곧바로 위관급의 계급이 주어진다. 2.0의 수치라면 중위, 3.0급부터는 대위다.
 그래서 훈련병 신분에서 하사관, 때로는 소위계급으로 점프하는 일이 심심찮게 인터넷 뉴스를 장식하곤 했다.
 
 “정지! 정지!”
 눈이 동그래진 정기철이 급하게 소리 질렀다.
 그런데 정지명령의 방향이 이상하다. 팀원들은 쳐다도 안 보고 저 앞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의 이상 행동에 놀란 3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거기 아저씨! 멈추세요!”
 ‘아저씨?’
 맨 뒤에서 팀원들을 따라가던 주혜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3팀이 접근중인 옥타곤 반대편이었다.
 특이한 복장의 사내 하나가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치 무슨무슨 페스티벌의 참가자들이나 입을 법한 요상한 옷차림.
 “코스프레 복장 같은데요?”
 “코스 뭐?”
 뒤따라온 이민호가 생소한 단어를 읊어대자 정기철의 되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제야 커브 길을 돌아 나온 주혜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
 
 조형물(?) 주위를 얼쩡대던 건우는 갑작스런 군인들의 출현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대신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그다지 유쾌해보이지는 않았다.
 ‘8년 만에 돌아와서 처음 본 족속들이란 게 군바리라니…나 참!’
 이제야 감이 왔다.
 한 시간 가까이 텅 비어있는 도로. 그리고 마주친 특수부대틱한 저들.
 ‘도로까지 막아놓고 훈련을 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 3. 옥타곤
 
 괜히 여유 부렸나 하는 자책이 밀려왔다.
 곧바로 서울로 날아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저런 시커먼 녀석들 대신 어여쁜 도시의 미녀들로 지난 8년간 찌들었던 눈을 정화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시작부터 일이 꼬인다.
 “정지! 정지!”
 저쪽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건우를 향해 소리쳤다.
 ‘알았다, 임마.’
 건우는 여유로운 손짓을 해보이며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마치 나 착한 사람입니다 라고 온 몸으로 표현하듯이.
 하지만 저쪽의 반응이 영 마뜩찮았다. 아니 상당히 놀란 눈치다.
 ‘뭐가 문제라는거야? 민간인이 이정도로 호의적인 제스처를 보였으면 된 거 아닌가?’
 괜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거기 아저씨! 멈추세요!”
 도무지 이유를 알 길이 없는 다급함.
 건우는 어쩔 수 없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섰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픈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으니까. 지나가는 행인임이 밝혀지면 알아서 보내주겠지.
 오랜만에 찾아온 정신적 평화를 쓸데없는 다툼으로 깨고 싶지는 않았다.
 ‘좋게 좋게 가자. 좋게 좋게.’
 슬쩍 두 손을 들어 보인 건우는 어색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최대한 선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간만에 찾아온 평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네 명의 군인들이 주춤대는 사이 뒤쪽 커브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묘령의 여인. 얼룩무늬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가냘픈 몸매며 자그마한 두상은 확실히 여성이었다. 게다가……!
 얼굴마저 너무나 익숙했다. 절대 좋은 의미의 익숙함이 아니었다.
 ‘엘렉트라?’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계집이 왜 여기를! 아니 어떻게? 무슨 수로?
 슬그머니 두 손을 내리는 건우의 두 눈에 불길이 확 일었다.
 
 “저 아저씨 표정이 왜 저럽니까?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본 것처럼. 복장까지 특이해가지고는.”
 의심어린 눈초리의 조성하가 무의식적으로 소총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야, 야. 총은 왜 만지니?”
 이민호가 그의 손을 붙들며 인상을 팍 썼다.
 “무슨 일이야?”
 “저기 민간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말입니다.”
 커브길을 돌아 나온 주혜민의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네 이년!”
 분노에 찬 포효가 온 계곡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 울렸다.
 그 순간 5명의 에이전트들은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우스꽝스런 복장의 사내가 거대한 무언가로 변하는 모습. 뜨거운 열풍이 훅 휘감으며 순식간에 시야가 붉어진 느낌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래, 당연히 말이 안 되는 광경이다. 분명 헛것을 봤음에 틀림없다.
 “봐…봤어?”
 “설마 벌써 개방이?”
 그 자리에 얼어버린 5명의 팀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버버거렸다.
 “다들 정신 안 차리지! 보긴 뭘 봤다고 그래?”
 제일 먼저 평정심을 되찾은 주혜민이 팀원들을 다그쳤다.
 ‘헛걸 본거야. 분명 옥타곤의 영향으로 헛걸 본 게 틀림없어!’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제야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 팀원들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지의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순간 거대한 악마의 형상으로 휘감겼던 사내는 예의 골 때리는 복장을 하고 이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악마라니…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옥타곤은 아직 꿈쩍도 않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옥타곤 바로 옆이라지만 개방되지 않은 옥타곤은 그저 시커먼 상자일뿐이었다.
 “아, 씨바! 괜히 놀랐잖아.”
 “저 인간, 마술산가?”
 “하여튼 세상도 흉흉한데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군.”
 그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다만 잘 걸렸다, 엘렉트라. 내 친히 네년의 목을 쳐주마!”
 그러나 이상한 사내는 여전히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 뭐래?”
 “야, 성하야. 저 사람 네가 좀 맡아라. 함부로 옥타곤 근처에 못 오게 말이야.”
 “네? 잠깐만요! 저 아저씨가 갑자기 이리로…!”
 
 건우의 눈에 비친 주혜민은 딱 엘렉트라였다.
 생김새며 체형이 딱 그 배신자 바알 놈의 딸내미였다.
 과연 차원 간 이동이 가능한 바람의 마신이란 말인가. 비정한 아비의 손아귀에 목숨을 잃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잘 됐어!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디아블로의 은원을 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는 다짜고짜 군인들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날카롭게 세운 건우의 손날에서 흉흉한 불길이 치솟았다.
 
 ‘빠…빠르다!’
 5명의 에이전트는 대응 할 틈조차 없었다.
 지금껏 보아온 어떤 마수보다도 빠른 몸놀림. 사내는 단숨에 옥타곤 옆을 스치며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아아악!
 딱 그때였다.
 커다란 불길을 일으키며 덮쳐오던 사내가 옥타곤 옆을 스치는 그 순간, 옥타곤으로부터 폭사된 암회색의 에너지파가 사내를 휘감았다.
 눈 깜짝 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내.
 얼빠진 표정의 에이전트들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
 
 “죽어라앗!”
 복장이야 어쨌든 저 년의 정체는 씹어 먹어도 모자랄 악녀, 엘렉트라. 디아블로의 기억 속에 가장 큰 상처로 남아있는 마신이었다.
 본능적인 무아지경에 빠진 건우는 무작정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신중의 마신 디아블로의 참격.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아무리 최전성기의 디아블로에 비해 2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전투능력이었지만 어떠한 마신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극강의 무위였다. 그런데…….
 ‘어디냐! 어딜 간 거냐!’
 빛살처럼 짓쳐들어 간 건우는 당황스러움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목과 몸통이 절단 났어도 수십 번은 절단 났어야 할 악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년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던 군복 입은 놈들도 보이질 않았다.
 “아니! 저…….”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건우는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빠져나간 적들을 보곤 기겁을 했다. 지난 8년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찌 감히, 어느 누가 절대 마신 디아블로의 일격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낌새도 없이 등 뒤를 점하는 적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건우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패배감과 그 몇 배에 이르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오냐,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는 내 모르겠다만 어디 끝까지 해 보자.”
 이를 악 문 건우는 지옥의 불꽃으로 온 몸을 휘감으며 적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티잉!
 “으악!”
 마치 탱탱한 젤리 같은 느낌의 장벽에 부딪친 그는 몇 미터나 뒤로 밀려나버렸다.
 “뭐 이런 거지같은 일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우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 미세한 변화가 생긴 것을 감지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은 강렬해지고 있었다.
 ‘이건 마치 마계와 흡사하잖아?’
 이제까지와는 공기의 흐름이 딴판이었다.
 마기(魔氣)로 가득 찬 대기.
 사방을 에워싼 희뿌연 안개 같은 대기는 딱 마계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저 쪽에 모여서 아직 웅성거리는 엘렉트라와 그 떨거지들.
 건우와 그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저들은 코앞에 건우를 두고도 본척만척 투명인간 취급을 하고 있었다.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사태파악을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도대체 정체가 뭐죠?”
 얼빠진 표정의 조성하가 선임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3팀.
 “옥타곤이 반응한 거야.”
 한참이 지나서야 주혜민이 입을 열었다.
 “늘 보던 현상이잖아. 옥타곤이 빨아들인걸 보면 엘리시움 에너지와 동기화가 가능한 인물임에 틀림없어.”
 “일반인이잖아요.”
 “너도 몇 달 전까지는 일반인이었어, 임마.”
 “자자, 그만. 일단 빨리 들어가자.”
 주혜민은 웅성거리는 팀원들의 대화를 재빠르게 정리했다.
 “뭐하는 작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민간인이 저 안에 빨려 들어갔다는 건 문제가 심각해. 아무리 엘리시움 감도가 높아도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일 뿐이니까.”
 그녀의 말이 맞다.
 예를 들어 아무리 타고난 강견을 가진 일반인이라 해도 훈련 없이 강속구를 던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선천적인 엘리시움 감도는 그저 타고난 기본 능력치일 뿐이었다. 결국에는 평범한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게다가 그 일반인이 무슨 사고라도 당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민간인 통제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군대라는 오명을 뒤집어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백 프로 뒤집어쓴다.
 ‘하이에나 같은 매스컴들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 일이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쭈뼛 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작전 개시! 정기철 소위부터 차려로 투입이다!”
 세차게 머리를 내저은 주혜민은 팀원들을 독촉했다.
 
 “뭐가 그렇게 바빠? 무슨 일 있나, 주 팀장?”
 이제서야 슬금슬금 나타난 김기만이 밉살스런 질문을 던졌다.
 “민간인이 있었습니다.”
 “그래? 이 동네는 대 큐브 통제를 어떻게 하는 거야? 별일은 없지?”
 사태파악 수준이 영 꽝이다.
 “아뇨, 지금 저 안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주혜민은 엿먹어보란 심정으로 냉큼 돌직구를 날렸다.
 “뭐?”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표정으로 돌변한 김기만.
 그는 노골적인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냈다. 괜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역시 문책을 피할 길이 없을 테니까.
 “도대체 뭘 한 거야! 그거 하나 못 막나? 어? 3팀 수준이 그거밖에 안 돼?”
 그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2팀처럼 느지막이 현장에 도착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넘어갔을 텐데 말이죠. 저희가 쓸데없이 빨리 움직인 탓입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2팀을 본받아서요.”
 드디어 뚜껑이 열린 주혜민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뭐…뭐? 너, 주혜민 다시 말해봐!”
 “팀장님, 그만 하시죠. 팀원들 전부 옥타곤으로 진입했습니다. 어서…….”
 똥이 무서워서 피할까. 괜히 자신의 팀장이 험한 꼴을 당할까 걱정된 이민호가 주혜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휴…….”
 참고 참고 또 참았건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 사이코 또라이 낙하산과 앞으로 척을 질 생각을 하자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
 
 “아저씨, 무사하셨군요!”
 가장 먼저 옥타곤으로 진입한 정기철은 반가운 마음에 덥석 건우의 양 손을 움켜잡았다.
 “아, 네.”
 길길이 날뛰던 건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약 2분 전.
 갑자기 주변을 에워싼 마기의 정체를 고민하던 건우는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이 현세가 아님을 직감했다.
 ‘저 젤리 같은 장벽. 그리고 온 몸으로 흘러드는 이 마기. 이곳은 아마도 크러스트?’
 
 크러스트(crust)!
 단어 뜻 그대로였다.
 일종의 경계면을 이룬 표층. 마계며 천계, 유계, 환계 등 별개의 세상으로 나누어진 세계의 계층들.
 그 각각의 세상은 마치 시루떡의 모양과도 흡사했다.
 하나하나의 세상은 별개였지만 결국은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세계.
 그 각각의 세상들은 경계면을 따라 불안정한 크러스트 층을 가지고 있었다.
 천계라면 천계의 형상을 본뜬 일종의 조각세상을, 마계라면 마계의 형상을 본뜬 작은 조각들. 그런 조각들을 크러스트라 불렀고 토성의 고리처럼 뭉쳐있는 크러스트의 무리를 크러스트 층이라 불렀다.
 그것들은 본래의 세상이 변형되고 이형화 된 또 다른 작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특정 세상의 불안정한 틈을 비집고 지금처럼 모습을 드러내곤 했던 것이다.
 ‘대충 알겠는데 왜 마계의 크러스트가 현세로 비집고 들어온 것일까?’
 건우가 아무리 디아블로와 하나가 된 몸이라지만 거기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크러스트란 세계는 마계의 지배자인 디아블로조차 손길이 닿지 않는 변방중의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이 확실히 크러스트라면 지금 저 장벽 너머 보이는 이들은 엘렉트라와 그 졸개들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그래. 분명히 내 두 눈으로 비정한 애비의 살수에 목이 달아나는 걸 직접 봤는데 다시 살아났을 리가 없지.’
 그제야 평정을 되찾은 건우는 서서히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저 엘렉트라를 빼다 박은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분노로 들어찼던 마음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의문과 호기심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죠?”
 정기철은 건우를 세워놓고 여기저기 살피기까지 했다.
 ‘왜 이러냐. 부담스럽게.’
 건우는 손사래를 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이들과는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크러스트든 군사 훈련이든 이제 저쪽이 알아서 할 문제일 뿐.
 그는 괜한 일로 시간낭비를 하고픈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결국 별 일 아니었다는 소리지. 대충 둘러대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어.’
 저 엘렉트라 쌍둥이 같은 여자가 약간 걸리긴 했지만 세상에 어디 닮은꼴이 한둘이겠는가.
 군인치고 미모는 꽤 화려했지만 기억속의 엘렉트라가 오버랩 되자 왠지 밥맛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반이 여잔데. 죽여 버리고 싶은 년과 닮은꼴인 여자에게 관심 둬서 무엇 하리.’
 
 간신히 정기철을 뿌리친 건우는 다시 옥타곤 표면으로 다가섰다.
 ‘난감하네. 나가긴 나가야겠는데…이걸 어떻게 부수고 나가지?’
 건우는 물컹대는 표면에 머리를 박고는 고민에 빠졌다.
 크러스트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해법을 찾을 길이 없었다.
 ‘아, 참! 저 군바리한테 물어보면 돼는 거잖아?’
 스스로 여길 걸어 들어왔다는 얘기는 나갈 방법을 안다는 소리였다.
 “저기…….”
 그 순간 옥타곤이 다시 출렁거렸다.
 김하성이 내부로 진입한 것이다. 연이어 3팀원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이 사람이야?”
 이민호와 함께 맨 마지막으로 들어온 주혜민이 턱짓으로 건우를 가리켰다.
 표정이 썩 탐탁찮다.
 불청객을 바라보는 모습. 딱 그 짝이다.
 
 ‘건방진……!’
 표독스럽게 생긴 계집이 하는 짓까지 엘렉트라 판박이다.
 생긴 대로 논다더니 역시 밉상이었다.
 
 “예, 다행히 별다른 부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건우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주혜민은 곧 흥미를 잃은 듯 팀원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성하, 네가 저 민간인을 좀 맡아줘. 엄한 짓 못하게 딱 붙어있는 거야.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2팀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작전개시다. 명심해, 2팀은 없다 생각하고 알아서 잘들 움직이는 거야.”
 
 “어이쿠!”
 “뭐야, 넌 또!”
 줄줄이 기어들어오던 2팀의 누군가와 건우가 그대로 이마를 들이받았다.
 “3팀 뭐하나! 민간인 통제도 이렇게나 안 되면서 무슨 작전을 수행하겠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머리를 문지르는 그 누군가는 김기만이었다.
 ‘마! 그게 민간인을 이마로 구타한 자식이 할 소리냐?’
 발끈한 건우는 그의 멱살을 틀어쥐려 했다.
 “저, 아저씨. 이리로…….”
 조성하 하사가 다급하게 건우를 붙들었다.
 “뭐요?”
 “어떻게 여길 들어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와 함께 계시죠. 여긴 생각보다 꽤 위험한 곳입니다.”
 크러스트 따위가 위험해 봤자지.
 건우는 ‘흥’하며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김기만에게 살벌한 눈빛을 쏘아 보내는 건 잊지 않았다.
 ‘저 건방진 자식을 확 뭉개버려?’
 초면이었지만 거만한 쥐새끼 같은 저 놈이 왠지 싫었다. 엘렉트라 쌍둥이 같은 여군보다 더 비호감이다.
 “참으세요. 원래 저런 사람입니다.”
 건우가 끝까지 버팅기자 조성하가 귓속말로 다독였다.
 “쓰읍…….”
 애먼 조성하가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추자 건우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쪽 구석으로 이동한 조성하와 김건우.
 조성하는 일단 작전에 방해가 안 되도록 건우를 안정시키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운이 나쁘셨습니다. 어떻게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작전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여길 나가는 건 힘듭니다.”
 “작전?”
 “예, 여긴 뉴스에서도 많이 보셨던 그 큐브거든요.”
 큐브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
 여기서는 크러스트를 큐브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각각의 크러스트는 또 하나의 세상. 이곳 주인이 곧 신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이들이 말하는 작전이란 아마도 크러스트의 주인을 처치하는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크러스트와 운명을 함께하는 녀석일 테니 이곳 주인을 처리하고 나면 결계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건 그렇고 이런 게 왜 포천 땅에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느낌상 마계의 크러스트 같은데 말이다.
 “저 하사님?”
 건우는 친절한 조성하가 맘에 들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예, 말씀하세요.”
 “여기 포천 맞죠?”
 “네, 한 십 킬로미터만 가면 바로 포천 시냅니다.”
 “이런 큐브가 종종 나타나곤 합니까? 보아하니 처음은 아닌 듯싶은데.”
 “이런, 뉴스 안 보십니까? 종종이 뭡니까, 큐브가 출몰한지도 어언 8년이 넘었습니다. 이젠 뭐, 웬만한 큐브의 출현정도는 뉴스거리도 아니죠. 혹시 개방이 된다면 모를까.”
 알 수 없는 소리만 자꾸 해댄다.
 “개방이 되고 나면 이 일대는 단숨에 쑥대밭이 되기 때문에 우리 같은 대 큐브 전담반이 미리 선수를 치는 거죠.”
 “꼭 이렇게 이 안에 들어와서 처리해야만 하는 겁니까?”
 “여러 이유가 있긴 하지만 우선 피해의 최소화가 가장 큰 목표죠. 웬만한 마수 한 마리만 해도 거의 일개 사단급에 육박하는 파워를 가진 놈들이 부지기수니까요.”
 건우는 머릿속으로 숱한 마수들을 떠올렸다. 그 놈들이 그렇게 셌던가.
 “그리고 우리 같은 에이전트들은 바깥에서는 큰 활약을 못합니다. 엘리시움 에너지로 가득한 이 큐브 안에서만 최대의 능력치를 발휘하죠. 뭐, 소위급 이상인 분들은 밖에서도 어느 정도 능력을 발휘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분들도 바깥보다는 큐브 안에서 더 강합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릎 쓰고 이렇게 큐브 내부에서 작전을 수행하곤 합니다. 어쨌든 개방되기 전에 모든 걸 해결하는 게 장땡이란 소리죠.”
 개방이라…….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이제 알겠군. 앞뒤 문맥을 유추해 보면 아마도 별개의 세계로 튕겨나간 크러스트의 동화현상을 여기선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구만.’
 크러스트 층을 벗어난 개별적인 크러스트가 유입된 세상에 동화되는 과정은 필히 결계의 소멸을 동반한다. 바로 그 결계의 소멸, 즉 동화현상을 이들은 개방이라고 불렀다.
 ‘뭐 그렇다면 길어야 24시간이겠군. 얘들이 전멸한다 해도 귀찮게 크러스트의 주인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어. 그건 그렇고 내가 없는 동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해버렸구나.’
 
 “준비 완료!”
 “준비 완료!”
 여기저기서 복명복창이 이어졌다. 슬슬 사냥에 돌입 할 모양인가 보다.
 ‘이거 꽤 흥미진진한데?’
 관객모드로 전환한 건우는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이들을 쳐다봤다.
 ‘옳거니! 예정에 없던 싸움 구경이로구나. 애들 싸움이나 진배없긴 하지만 나름 흥미진진한걸? 이럴 땐 팝콘이 필요한데 말이야…….’
 조성하는 전혀 긴장감 따위는 보이지 않는 건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래도 이 사람 좀 이상해.’
 
 “작전 준비 완료입니다. 시작 할까요?”
 주혜민이 김기만에게 물었다.
 같은 팀장이지만 계급이 다른 두 사람.
 주혜민은 중위였고 김기만은 대위였다. 대위면 팀장급으로서는 최고 계급이었다.
 명색이 군대이다 보니 아무리 낙하산에 무능력 상관이라도 지휘체계에 따르는 건 순리였다. 꼴 보기 싫은 건 오직 사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뭐, 형식적인 거니까…….’
 이제 와서 작전이 변경되거나 취소될 일도 없고. 단지 지휘체계에 따라 최종 결정권자인 김기만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의 명령이 떨어져야 작전개시가 이루어질 테니까.
 “음…….”
 그러나 김기만은 팔짱을 낀 채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턱만 쓰다듬을 뿐 묵묵부답. 뭔가 고민하는 눈치다.
 “김 팀장님?”
 뭘 그렇게 뜸 들이는 건지. 살짝 다급해진 주혜민이 다시금 김기만을 독촉했다.
 “잠깐, 나는 저쪽 민간인 호위를 맡도록 하지. 이번 작전은 주 팀장이 알아서 잘 진행하도록.”
 “예?”
 이 작자가 하다하다 별 소릴 다 한다.
 명색이 팀장에 현재 최고 지휘관인데 지금 뭘 하겠다고?
 3팀은 물론 당나라 2팀도 지금 헛걸 들었나 싶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말이야, 3팀이 민간인 통제만 제대로 했어도 내가 이렇게 나설 필요가 없었잖아. 작전 성공여부보다 중요한 게 민간인의 안전이니까 별 수 있나. 내가 총대를 메야지. 에이, 속 터져!”
 ‘미친놈…….’
 ‘겁쟁이 자식!’
 기가 찬 8명의 에이전트들은 동시에 온갖 욕지거리를 떠올렸다.
 
 ‘차라리 잘 됐어. 작전 중에 되도 않는 걸로 감 놔라 배 놔라하는 것 보다야 낫겠지.’
 제일 먼저 마음을 비운 주혜민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지금부터 본관이 2팀과 3팀을 함께 통솔한다. 전원 사주경계 철저히 하고 이동!”
 
 현재 이들이 위치한 곳은 부유섬의 끝단이었다.
 물이 아닌 허공에 떠 있는 섬.
 작은 땅덩어리는 보랏빛 하늘과 시커먼 무저갱 사이에 둥둥 떠 있었다. 축구장만한 크기의 이 부유섬은 고풍스런 느낌의 돌다리로 건너편 절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보통 이런 형태를 띤 곳에는 몇 가지 정해진 마수가 출몰했다.
 “3등급에 옥타곤. 그리고 부유섬이면 보통 ‘나가’들이죠?”
 “거의.”
 이민호의 질문을 주혜민이 짧게 받아쳤다.
 적당히 수풀이 우거진 부유섬을 벗어난 2팀과 3팀 연합은 폭 3, 4미터의 돌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갔다.
 
 이제 부유섬에 남은 건 건우를 포함해 조성하 하사, 그리고 김기만 대위뿐이었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의 조성하가 일행을 배웅했다. 섬 끝단까지 따라나선 그가 손을 흔드는 동안 느긋한 얼굴의 김기만은 슬그머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조성하는 공격팀이 시야에서 사라지 후 낮은 한숨을 내쉬며 건우 곁으로 돌아왔다.
 “큐브의 주인이 저 절벽 너머에 있는 겁니까?”
 “예, 아마도 나가가 출몰하지 않을까 싶네요.”
 ‘나가……?’
 건우에게도 익숙한 놈들이었다.
 디아블로 산하의 8개 군단 중 제 4군단의 주력 마수인 나가.
 놈들은 평균 3미터의 체고에 전봇대만한 두께의 몸통을 가졌다. 전체 길이는 약 5미터. 딱 봐도 뱀이구나 싶은 파충류 형 마수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상체가 인간 여성의 몸과 흡사하다는 정도? 거기에 2미터짜리 삼지창을 휘두르는 꽤나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한낱 나가 따위가 크러스트의 주인이라니…빵부스러기 같은 크러스트답게 별 볼일 없는 곳이군.’
 생각보다 이 큐브란 곳을 빠져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싶었다.
 “흐흐흐. 엄청난 놈이죠. 아마 놈을 구경하게 된다면 오줌이라도 지릴지 모르니 맘 단단히 먹으쇼.”
 어느새 불까지 붙인 김기만이 되도 않게 겁을 준다.
 “저, 김 팀장님. 담배는 좀…혹시라도 놈들이 불을 보고 이쪽으로 오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민간인분도 함께 계시잖습니까.”
 “뭐 임마? 요즘 하사는 대위한테 거리낌 없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모양이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엉? 팀장이 계집년이라고 남의 팀장도 우스워 보여?”
 “아,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닥치고 볼일이나 보셔. 저 민간인 아저씨 털끝 하나라도 다쳤다간 너부터 당장 물고를 내줄테니까.”
 “…….”
 울상이 된 조성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얌전히 찌그러졌다.
 ‘하, 새키. 말하는 폼새하고는.’
 괜히 남의 집안싸움에 끼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살짝 맘에 든 조성하가 탈탈 털리는 꼴을 보자니 기분이 영 찝찝했다.
 ‘어디 엿 한 번 먹여줄까.’
 명색이 마계의 절대자 디아블로였다.
 나가 따위는 그의 수족 축에도 못 끼는 잡벌레일 뿐. 맘만 먹으면 이곳에 있는 나가들을 모두 불러서 줄을 세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재밌겠는데?’
 슬며시 눈을 감은 건우는 정신을 집중했다.
 단숨에 옥타곤 전체로 퍼져나간 그의 영파(靈波).
 채 2, 3초도 지나지 않아 한 마리의 나가가 그의 영파에 걸려들었다.
 
 주혜민을 필두로 한 공격팀은 막 돌다리 너머 절벽 안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길이 두갭니다. 어떡하죠?”
 마치 계곡과도 같은 좁은 소로였다.
 3등급 옥타곤의 나가는 통상 4마리.
 다행히 뭉쳐 다니는 경우는 드물어서 두개의 팀이면 어렵잖게 잡을 수 있다.
 ‘그래도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주혜민은 일단 한쪽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옥타곤라는 게 그렇게 큰 구조물도 아니고 24시간이면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급할 것도 없는데 괜히 팀을 나눠서 전력을 분산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응집된 전투력으로 적을 각개격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단 오른쪽으로 간다. 슬슬 느낌이 오니까 경계 늦추지 말고.”
 
 8명의 공격팀이 한쪽 소로로 사라진지 약 3분 후.
 반대편 길에서 거구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지체 없이 이들이 건넜던 돌다리로 돌진했다.
 바로 건우의 부름을 받은 그 나가였다.
 
 “이봐요, 대위님.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저 하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좀 주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쓸데없는 걱정 마세요. 저 짬밥도 안 되는 놈이 뭘 알겠습니까. 큐브 밖으로 나가실 때까지 아무 일 없을 테니 얌전히만 계시죠.”
 마치 네가 뭘 알겠냐는 듯한 얕잡아보는 미소.
 무슨 똥 자존심인지 김기만은 필터 끝까지 담배를 빨아댄 후에야 꽁초를 털어냈다.
 ‘아, 싫다. 건방진 놈. 하여튼 간부는 맘에 안 들어.’
 벌써 8년 전 일이지만 FM만 따지던 예전 중대장이 떠오르자 입맛이 썼다. 물론 허점투성이의 김기만과 FM 중대장과는 정반대 성향의 인물이었지만.
 ‘대위란 것들은 원래 다 저런가?’
 건우의 눈밖에 나다보니 괜한 대위란 계급까지 미운털이 박혔다.
 
 [위대한 마황이시여…부름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오케이 왔구나!
 아무리 변방의 크러스트라도 이곳은 결국 마계의 부스러기.
 철저한 계급사회인 마계의 정점, 디아블로의 부름은 크러스트에서도 유효했다.
 ‘어서 오너라. 나의 종아!’
 
 건우는 두 사람 몰래 돌다리 너머를 주시했다.
 그곳에는 희뿌연 안개가 을씨년스럽게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바알과 투닥거리던 마계의 대기와 너무도 흡사했다.
 안개…….
 비슷하긴 하지만 저건 안개가 아니다. 크러스트 내부에 가득한 마기의 응집체였다.
 ‘맘껏 들이마시고 싶다.’
 그는 허옇게 뭉친 마기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건우에게는 둘도 없는 에너지원인 마기. 사실 저것만 흡수해도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가 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마기가 피부에 닿기만 해도 시커먼 수포가 돋는다. 혹여나 미량이라도 들이켰다가는 폐가 썩어문드러질 암흑의 기운이었다.
 그래서 동기화 감도가 중요했다.
 최소한의 수치인 감도 0.1. 참고로 0.1은 하사계급의 커트라인이다.
 거기에도 못 미치는 자는 절대 큐브 근처에 얼씬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감도가 0이라면 큐브 내부로 빨려 들어갈 일은 없다. 하지만 큐브 밖으로 흘러나오는 미량의 마기만으로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 큐브 전담반이란 특수 조직의 에이전트는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저 무시무시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파워를 내는 존재들. 그들이 바로 ‘신인류’ 에이전트였다.
 그 기운을 몸에 축적하고 그만큼 감도가 상승하게 되면 이들은 마족 못지않은 힘을 발휘 할 수 있었다.
 단 그 힘은 큐브 안에서만 백퍼센트 활성화된다. 마기가 존재하지 않는 바깥세상에서는 큰 활약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특이한 사람들이야…….’
 처음에는 미처 몰랐지만 슬슬 이들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하긴 저렇게 몸 안에 마기를 품고 있었으니 내가 엘렉트라와 그 똘마니들로 오해를 했겠지.’
 
 [마황이시여, 저 놈들을 없애버릴까요?]
 어느새 돌다리 반대편까지 이른 나가가 다시 한 번 건우를 찾았다.
 ‘기다려라.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말씀하소서.]
 ‘나를 지금부터 마황으로 생각하지 마라. 여기 있는 인간들과 똑같이 여기고 네 능력껏 활개 쳐라.’
 […]
 ‘싫으냐?’
 [아닙니다. 하오나 제가 어찌 마황께…….]
 ‘내가 허락한다. 아니, 명령한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나이다.]
 나가와의 텔레파시를 종료한 건우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으며 김기만을 째려봤다.
 
 촤르르르…….
 미세한 기음이 들려왔다. 슬슬 나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건우는 짐짓 모른 체하며 돌다리 너머를 가리켰다.
 “예?”
 벌떡 일어난 조성하가 날카로운 눈으로 돌다리를 주시했다.
 “글쎄요. 별다른 징후는 없는 것 같은데…….”
 청력의 차이도 큰 모양이었다. 건우에게는 마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소리였지만 조성하의 귀에는 전혀 감지가 되지 않았다.
 “하하하! 겁먹으셨나보네. 보기보다 귀여우셔.”
 꼴사나운 호기로움. 김기만은 또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며 피식거렸다.
 돌다리란 단 하나의 외길.
 그 길을 통해 여덟 명의 요원이 작전에 투입되었고 상대는 나가다.
 ‘그들이 전멸하지 않는 이상 나가가 이쪽으로 올 일은 없다.’
 간단하게 통박을 굴려 봐도 위험요소가 없는 게 정상이었다. 몇 마리의 나가를 상대로 그들이 완패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상황에 따라 몇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을 수는 있겠지만. 흐흐,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고. 길도 하나뿐인데 뭘.’
 더욱더 느긋해진 김기만은 얄미운 표정으로 끽연 삼매경에 빠졌다.
 ‘재수 없는 놈. 저걸 어떻게 아작 내줄까.’
 건우는 무의식중에 돌멩이 하나를 움켜쥐었다. 으스러진 돌멩이는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촤르르르!
 드디어 뿌연 마기를 헤치며 나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한 돌바닥에 부딪치는 뱀 비늘의 마찰음이 청명하게 울렸다.
 “아직도 안 들리세요?”
 건우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돌다리를 가리켰다.
 왜 안 들리겠는가. 이미 위풍당당한 거구가 흐릿하나마 실체마저 드러냈는데.
 이미 조성하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어가고 있었다.
 낙하산 대위 김기만만이 귀를 후비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안개 속 뿌연 형상이며 촤락대는 마찰음을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명색이 대위인데 엘리시움 동기화 수치가 하사만도 못했다. 아니면 엄청 굼뜨거나.
 “쟨가 보네. 꽤 큰데?”
 친절한(?) 건우는 김기만 곁에 바싹 붙어서 돌다리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잠시 후, 연무 같은 마기를 헤치며 흐릿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봐도 체장이 10미터 가까이 되는 초대형 나가였다. 평균 신장의 두 배는 너끈히 될법한 놈이었다.
 “이쪽으로 오려나본데요?”
 무심한 표정의 건우가 김기만을 힐끗 돌아봤다.
 “헉! 왜 나가가 여기를…”
 곰탱이 김기만도 눈은 달렸는지 나가의 실체를 확인하곤 눈이 땡그래졌다.
 ‘왜는 내가 불러서 왔지.’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불에 덴 듯 펄떡이며 일어난 김기만. 튀어나올 듯이 눈이 커진 김기만은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뭐가 저렇게 커!”
 “김 팀장님, 지원요청 할까요?”
 “당연한 거 아냐? 빨리 호출해! 당장 이리로 튀어오라고 연락 넣으란 말이야!”
 김기만은 피다 만 담배를 내던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동공에 지진이라도 난 듯 김기만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조성하는 황급히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그러면 곤란하지.’
 조 하사가 막 통신을 시작할 찰나 건우의 눈이 붉게 반짝였다.
 파바박!
 무전기 내부로부터 강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금세 시커먼 연기가 뭉글거렸다.
 “아…이런…….”
 망연자실한 표정의 조성하는 무전기를 툭 떨궜다. 물론 그걸 보는 김기만의 표정은 더욱 가관이었지만.
 이로써 완벽한 고립이 완성되었다.
 ‘지금부터 쇼타임이다.‘
 
 “김 팀장님, 제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여기 계신 민간인 아저씨를 좀 부탁드릴게요!”
 “그, 그럴까?”
 하여튼 이런 건 거절하는 법이 없다.
 ‘안 되지요, 하사님. 그건 계획에 없던 일이라오.’
 책임감 넘치는 우리의 조성하 하사를 사지로 내몰 만큼 건우는 매정하지 않았다.
 “원래 저런 건 상급자나 리더가 솔선수범하는 것 아니었나요? 매스컴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다르네요?”
 건우는 본적도 없는 뉴스를 들먹이며 김기만을 건드렸다.
 “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요!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내가 곁을 지켜야지 별 수 있습니까! 작전보다 민간인의 보호가 최우선입니다!”
 그놈의 민간인 보호타령은! 나 없었으면 오늘 어쩔 뻔 했냐?
 미꾸라지 사촌도 저런 사촌이 없지 싶었다.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슬슬 승부욕이 발동한 건우는 김기만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빨리 뒤로!”
 김기만은 건우의 허리춤을 붙들고 뒷걸음질 쳤다.
 맘 같아서는 혼자 빠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건우는 그의 방패이자 면피용 대의명분인 관계로 포기할 수 없었다.
 건우 역시 그걸 알기에 순순히 따라가는 척 하면서도 끝까지 버텼다.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얌전히 뒤로 빠져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적은 하나잖습니까? 두 분이 잘 커버하는 게 낫지, 한 명이 뒤로 빠지는 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당신이 실전에 대해 뭘 안다고 자꾸 끼어듭니까! 잠자코 계세요!”
 얼굴까지 벌게진 김기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조 하사! 팀원들이 돌아올 때까지 무조건 여길 사수하도록! 절대 민간인에게 놈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 알았나!”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
 저건 김기만 자신에게 나가가 접근하는 걸 막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네, 알겠습니다!”
 순진한 조성하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두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건우는 눈치 챘다.
 쿵쾅대는 그의 심장소리가 일렉트릭 드럼처럼 귓가를 울려댔다. 줄줄 흐르는 그의 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견습 생활 한 달, 그리고 전투에서 보조역할만 한 달을 수행했던, 토탈 두 달짜리 생짜 초보 조성하로서는 당연한 신체반응이었다.
 ‘빌어먹을 감각 같으니. 저 하사의 반응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잖아.’
 덕분에 혼절 직전의 조성하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휴, 정말 대한민국 국군의 미래가 걱정스럽구만.’
 팔푼이 지휘관에 햇병아리 하사관이라니.
 아무리 나가가 마계의 그렇고 그런 몬스터라지만 이들의 힘으로는 택도 없는 상대였다.
 밉살스런 김기만에게 본때를 보여줄 요량으로 불러내긴 했지만 괜스레 미안할 지경이었다.
 
 “씨바, 저 하사 놈이 싸우다가 죽기 전에 주 팀장네가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나만 안 죽으면 돼. 나만.”
 건우를 거칠게 잡아 끌던 김기만이 입술을 씹으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그걸 건우가 듣고 말았다.
 ‘이 새끼 이거 순 말종이잖아!’
 순간 그의 관자놀이가 빠직거렸다.
 
 덜떨어진 겁쟁이까지는 봐 줄 수 있었다.
 어차피 다시 볼 인간도 아닌데 겁 좀 주고 기분전환만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건 아니지.
 지난 8년…그간의 경험이었다.
 아무리 마계가 악마들의 소굴이며 만악의 근원이라 해도 지킬 건 지키는 세상이었다.
 하물며 그게 마황의 철칙이라면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불문율이 된다.
 디아블로와 하나가 된 마황 김건우의 철칙. 그 단 하나의 철칙만은 모든 율법의 최상위에 존재했다.
 ‘배신자에게 죽음을!’
 용서는 한 번이면 족했다.
 머리를 숙이고 그의 휘하로 들어온 마신들에게는 절대 지난 죄를 묻지 않았다. 바알과 쿵짝 맺고 뒤통수를 쳤든 악녀 엘렉트라와 놀아났든 상관없었다. 건우가 발을 담그기 이전의 일은 모두 잊어주었다. 마신의 지위도 영지도, 하다못해 그 수하의 사병조차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기회는 오직 단 한 번뿐.
 믿음에 대한 배신은 반드시 죽음으로 대가를 받아냈다. 예외는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난 8년의 세월.
 디아블로, 김건우는 철저하게 원칙을 고수했다.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누구라도 수긍할 원칙이었다.
 깔끔하지 않은가. 단순 무식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보다 확실한 건 없었다.
 덕분에 건우의 마계통일이 예상외로 빨랐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게 인간이라더니…….
 ‘그 악의 소굴이라는 마계에서도 본 적 없는 쓰레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벌레만도 못한 놈…넌 오늘 혼 좀 나봐야겠다.’
 계획 변경이다.
 ‘나가는 들으라!’
 [마황이시여, 하명하옵소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와 저 검을 든 인간은 더 이상 공격대상이 아니다. 내 옆에 있는 이 놈! 이 벌레만도 못한 놈이 오늘 너의 먹잇감이다. 원하는 대로 물어뜯어라!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존명!]
 
 돌다리를 넘어선 초대형 나가는 곧바로 김기만을 향해 돌진했다.
 “으아악! 야, 조 하사! 빨리 안 움직이고 뭐해!”
 조성하가 안 움직인 게 아니었다. 물 흐르듯 바닥을 스치는 나가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을 뿐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조성하는 검을 고쳐 쥐고 나가의 뒤를 쫓았다.
 쫄보 김기만은 마치 건우의 품을 파고들 듯이 몸을 밀착해왔다.
 ‘뭐 이런 병신이…….’
 아예 건우의 허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김기만. 건우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지었다.
 카아아!
 명령에 충실한 나가가 삼지창을 쳐들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나가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살벌하다.
 “에이 씨!”
 서슬 퍼런 살기를 느낀 것일까. 건우에게 들러붙어있던 김기만은 아예 건우를 방패삼아 나가쪽으로 들이밀었다.
 덕분에 나가와 코앞에서 정면으로 마주한 건우.
 나가의 눈빛과 건우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 순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가의 살기가 순식간에 풀려버린다.
 내리꽂으려던 나가의 삼지창이 멈칫했다.
 “이야아압!”
 찰나의 타이밍을 잡은 조성하가 몸을 던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그의 검이 곧바로 나가의 등짝에 틀어박혔다. 차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가의 비늘이 곤두섰다.
 “죽어라, 이 괴물아! 아저씨, 이 틈에 빨리 피하세요!”
 그 바쁜 와중에도 건우를 챙기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난감하게 용감한 친굴세. 쓸데없이 정의롭고…….’
 역시 맘에 들었다.
 하지만 나가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 했다.
 등짝 깊이 박혀버린 조성하의 장검. 놈은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워, 워. 나가여! 목표는 그쪽이 아니다! 정신 차려!’
 천하의 마황 디아블로가 수족 같은 마수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아 놔…….”
 그러나 꼭지가 돈 나가의 눈에는 조성하만 보였다. 놈의 핏발 선 두 눈에는 불같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햇병아리 조성하는 요동치는 놈의 등짝에서 가볍게 튕겨져 나가버렸다.
 “거, 검이!”
 안타깝게도 조성하의 검은 곤두선 나가의 비늘 틈에 끼어 그의 손을 떠났다.
 카아아…….
 이미 조성하를 향해 몸을 튼 나가는 건우의 명령 따위는 말아먹은 지 오래였다.
 “이 새퀴가 감히…주제 파악도 못하고 내 말을 무시해?”
 천하의 108마신도 벌벌 기는 그의 명령을 한낱 마수 따위가 무시하는 상황. 좌시할 건우가 아니었다.
 더구나 인간다운 인간이 마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명령 불복종의 대가는 단 하나, 죽음뿐이었다. 마계의 존재들 사이에 자비란 없었다.
 화르륵…….
 곧게 편 건우의 손날에 시뻘건 불길이 일었다.
 
 “끄으윽…….”
 겁에 질린 조성하의 입가에 게거품이 부글거렸다.
 이내 그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삼지창.
 자라목이 된 조성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죽기 전에 기절이라도 하길 간절히 바라며.
 
 푸화악!
 건우의 손날을 타고 오른 불의 검이 수 미터나 치솟았다.
 이어진 참격!
 너풀거리는 금발을 휘날리며 목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꽤나 아리따운 얼굴을 한 나가의 목이었다.
 수천 도에 이르는 초고온을 자랑하는 불의 검.
 덕분에 절단면이 단숨에 익어버렸다. 오그라든 표피며 살덩이에서 고기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잘 익은 탓에 피 한 방울 보이질 않는다.
 ‘굳이 손을 쓰고 싶지 않았건만. 멍청한 나가놈 때문에…’
 힐끗 돌아보니 김기만이 입을 딱 벌린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마도 건우의 일격이 나가의 목을 치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쉿!’
 건우는 조용히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기만. 자동 반사였다.
 하여튼 저런 부류는 꼭 실력행사를 보여줘야 알아듣는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어쨌든 반푼이 대위놈을 지리게 만들었으니 반쯤은 성공인가.
 고개를 돌린 건우는 아직도 눈을 못 뜬 채 웅크리고 있는 조성하에게 다가갔다.
 “하사님, 눈 떠요. 상황종룝니다.”
 건우는 조성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허억!”
 스프링처럼 튕기며 일어난 조성하가 눈을 번쩍 떴다.
 “수고했습니다. 하사님.”
 “예…예?”
 가볍게 눈을 찡긋해 보이는 건우.
 조성하는 그런 건우와 목 없는 나가를 번갈아 쳐다본다. 하지만 퉁방울 만해진 두 눈에는 초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다. 집나간 정신은 아직 복구가 덜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암회색의 결계가 푸들거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옥타곤의 외벽이 아이스크림 녹듯 허물어지고 있었다.
 큐브의 소멸.
 아마도 바로 지금, 저쪽 짝퉁 엘렉트라의 패거리가 나머지 나가들을 전부 처리한 모양이었다.
 ‘영 빙충이들만 모인 건 아니었나보네.’
 어쨌든 결계가 사라졌다면…….
 ‘더 이상 여기엔 볼일이 없다는 거겠지?’
 흩어지는 마기를 마지막으로 쭉 들이킨 건우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자, 그럼 수고들 하십쇼. 일개 민간인은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건우는 겨우 정신을 수습한 조성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아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서 마지막으로 김기만을 살짝 째려봤다.
 마치 저승사자라도 본 듯 사색이 된 김기만. 딸꾹질까지 해대는 추태가 아주 가관이다.
 “거기 대위씨는 인생 그렇게 살지 맙시다. 예?”
 “예, 예! 열심히 살겠습니다!”
 뭘 열심히 살아?
 ‘나 참, 저런 인간한테 발끈한 내가 한심해지려고 그러네. 쪽팔린다, 쪽팔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건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지금은 미련 없이 사라져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어버버 대는 저 두 사람에게는 크게 신경 쓸 필요 없겠지만 주혜민 일행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보아하니 꽤나 비밀스런 특수부대 같은데 이들과 엮이는 건 사양이었다.
 괜히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모처에 있는 군사기관에 끌려가기라도 한다면…….
 최하 진술서라도 써야할 상황이라도 온다면…본인만 피곤해질 뿐.
 
 
 # 4. 집으로
 
 건우가 커브진 도로너머로 황급히 사라졌다.
 두 사람은 멀거니 그가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약 1분여가 지났을까.
 “아, 참!”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기만이 조성하를 향해 손짓했다.
 “너 저 사람 신원 확인했어?”
 “네?”
 이제 와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김기만의 표정은 어느새 거만함과 당당함이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저거 안 보여?”
 그는 머리위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방범용 CCTV카메라인지 교통정보수집용 카메라인지가 걸려있었다.
 분명 아까 그 민간인이 큐브로 끌려 들어간 상황이 적나라하게 녹화되었을 것이다.
 재수 없으면 쓸데없는 추궁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는 책임소재를 떠넘기는 게 상책.
 “안되겠어. 넌 복귀 후에 최하 시말서다. 어쩌면 헌병대나 군사재판 회부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왜 저만…….”
 “네가 민간인 보호담당이었잖아! 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이거 보자보자 하니까 영 못쓰겠네? 너 지금 책임회피 하는 거지? 너희 팀장까지 줄줄이 문책당해야 정신 차리겠어?”
 울상이 된 조성하는 대꾸도 못한 채 한숨만 내쉬었다.
 차라리 저 머저리 2팀장이 아까 죽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쯤 왔으면 안 보이겠지?’
 한산한 도로 한 귀퉁이에 이른 건우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하긴 대놓고 무력시위를 한 마당에 이제 와서 몸 사려봤자겠지만.
 ‘그래도 직접 본건 그 대위놈 뿐이잖아.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신경 끄자.’
 이제 그리운 집으로 갈 시간이다. 괜스레 가슴이 설렌다.
 느닷없는 죽음. 그리고 마계에서의 생활.
 정신없이 흘러간 지난 8년간 잊다시피 하고 살아온 세상이었다. 아니 애써 기억에서 떠올리지 않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괜히 생각해봤자 속만 쓰리고 가슴만 아플 테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작스럽게 현세의 땅을 다시 밟게 될 줄이야!
 찝찝했던 기분은 금세 사라지고 기쁨이 벅차올랐다.
 ‘빨리 가자! 집으로!’
 건우는 감각을 확장시켜서 주변을 탐색했다.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다. 비어있는 도로는 아까 그 큐브의 출현으로 통제가 이루어진 탓임에 분명하다.
 그럼 부담 없이 한 번 날아볼까.
 건우는 가볍게 마력을 회전시켰다.
 돌풍이 불 듯 무형의 에너지가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중력이란 만고불변의 힘이 서서히 흩어진다. 멋들어진 붉은 망토가 바람에 날리듯 펄럭였다.
 콰아아앙!
 가볍게 발을 구른 건우는 빛살처럼 창공으로 사라졌다.
 
 ***
 
 8년. 결코 짧지만은 않은 세월이었다.
 과연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흘러간 시간만큼 숫자로 치환된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이었다.
 물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마황 디아블로의 현신인 만큼 외모의 변화는 미미했다.
 ‘그래도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서른이지.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까.’
 게다가 그는 죽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교통사고로.
 과연 내 시체가 발견되었을까.
 마계로 넘어간 그는 분명히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혼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일종의 실종상태인거겠지. 무려 8년이란 시간동안.’
 생각해보면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제대 첫날 실종이라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세상을 다 얻은 것과 진배없는 날 소리 소문 없이 모습을 감출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종이라기보다는 비명횡사 쪽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가족들도 날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세상에서 존재자체가 지워졌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쓸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됐다, 됐어.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그럼 된 거지 뭐.”
 
 단숨에 80여 킬로미터를 주파한 건우는 경기도 하남시인근에 내려섰다.
 ‘기억난다. 이 야산.’
 이성산이라고 했던가.
 근처에 있는 남한산성 짝퉁스런 이성산성이란 사적지가 있는 곳.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만큼 인적이 드문 지역이었다. 가끔 산책로를 이용하는 등산객이 지나지만 평일 오후의 야산은 고요하기만 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굽이진 능선 하나. 이제 저 언덕 하나만 넘어가면 그리운 가족이 살고 있는 홈 스위트 홈이다.
 “후우…….”
 마황이란 이름에 안 어울리게 괜히 가슴이 설레어왔다.
 
 오후 3시.
 주택가의 느지막한 오후는 한산했다.
 건우는 문득 자신의 옷차림이 범상치 않음을 인식했다. 다행히 오가는 행인이 없어 시선을 끄는 상황은 없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본다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8년간의 실종.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아들. 그리고 하고 있는 꼴은 무슨무슨 애니메이션에서나 봄직한 유치한 복장이라니.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구나.’
 조용한 비탈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이제 저 앞, 세탁소와 목욕탕이 마주보고 있는 모퉁이만 돌면 된다.
 그러면…그러면 보일 것이다. 그곳이.
 그립고도 그리운 그곳이.
 건우는 스멀대며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골목길을 돌았다.
 이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전봇대를 끼고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내내 조용하던 골목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묵직한 시장바구니를 든 여인.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짐바구니를 힘겹게 나르는 여인. 바로 어머니였다.
 ‘엄마……?’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교차했다.
 달리 눈길 둘 곳도 없었다. 이 휑한 골목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었으니까.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던 어머니가 장바구니를 툭 떨궜다.
 건우의 볼에는 한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명색이 마신인데 격에 안 맞게스리…주책맞게 목까지 메어와 소리도 안 나왔다.
 닭똥 같은 눈물을 아무렇게나 슥 닦아낸 건우.
 잠시 주저하던 그는 이내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터벅터벅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들린다.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맹렬한 심장소리가.
 저러다가 심장마비라도 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만큼 엄청난 심박수였다.
 건우는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린답시고 어색한 미소로 씨익 웃어보였다.
 그걸 본 어머니도 결국 참고 계시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엄마…나 왔어.”
 나이에 안 맞게 ‘엄마’라니.
 멋지게, 폼 나게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었건만…….
 20년이 넘도록 입에 밴 엄마란 단어는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그냥, 그냥 무의식중에 튀어나왔다. 엄마란 말이.
 한참을 마주보던 건우는 머쓱해하며 두 팔을 뻗었다. 떨리는 두 손으로 살며시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파르르 떨리는 어머니의 가녀린 육신이 품안에 쏙 들어왔다.
 ‘몰랐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자그마한 분인지…….’
 차마 열리지 않던 어머니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건우야…건우야…내 아들 건우야…….”
 울음을 참는 목 메인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귓가를 간지럽혔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어머니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건우는 가볍게 어머니를 부축했다. 마음 같아서는 번쩍 안아들고 싶었지만 길거리다보니 그건 좀…….
 두 모자는 말없이 서로를 의지한 채 집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 이른 어머니는 건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난 믿었다. 세상 모두가 널 죽었다고…그만 잊으라고 했지만 난 알고 있었어. 네가 살아있다는 걸. 고맙다. 이렇게 돌아와 줘서…살아있어 줘서…….”
 “엄마도 참…….”
 그렇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모자는 집 앞 현관에서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참고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았다.
 8년이란 시간을 성토하듯 두 사람은 한참을 끌어안고 울었다.
 
 저녁식사는 조촐했다.
 주지육림에 산해진미가 넘쳐나던 마황의 식탁에 비하면 너무도 조촐했다.
 하지만 최고였다.
 그토록 그립던 어머니의 집밥이 아니던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성찬이었다.
 게다가 무려 8년 만에 받아본 정성어린 밥상이라면…맨밥에 물 말아 신 김치 한 조각인들 그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식사를 마친 두 모자는 밤이 늦도록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왜 연락 한 번 없었던 거니?”
 내내 궁금하셨으리라.
 건우가 입을 열지 않기에 차마 물어보지 못하시던 어머니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떼셨다.
 하지만 대답이 궁했다.
 ‘제가 제대하던 그날 죽었거든요. 교통사고로. 그래서 마계란 곳에 떨어졌습니다. 거기서 8년을 살면서 마황 노릇도 했구요,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렇게 다시 오게 되었네요.’
 이딴 소리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첫 대면에 입고 있던 복장이 해괴한들 그게 씨알이나 먹힐 소리인가.
 “제대 하던 날 사고가 있었어요. 자세한건 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냥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정신병원이더라구요.”
 차라리 스스로를 정신병자로 몰았다. 그냥 오랜 시간 기억을 잃었다고 둘러댔다.
 제대 첫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갖다 붙이기엔 뭔가 허술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변명거리도 없었다. 순간 생각난 게 고작 정신병원이었다.
 무슨 착오가 있었기에 발생한 일이 아닐까 짐작된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오늘, 운 좋게도 특별 행사가 있어서 그 틈을 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말했다.
 ‘과연 이걸 믿어 주실지…….’
 졸지에 미친놈이 되어버렸지만 어머니는 대충 넘어가주셨다.
 그저 살아서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셨다.
 
 대화가 길어지다 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윤아는 어디 갔어요? 시간이 몇 신데 아직 안 들어와, 이 자식은. 오라버니가 몇 년 만에 돌아오셨는데 말이야.”
 윤아는 건우와 8살 터울의 여동생이었다.
 마계로 떨어지던 시점에 고작 14살밖에 안되던 꼬맹이였다.
 갓 중학생이 된 꼬꼬마 여동생. 그의 기억 속에는 아직 그런 동생이었기에 밤이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게 영 마뜩찮았다.
 ‘정신 나간 어린 영혼 같으니. 요거 간만에 정신교육을 좀 받아야겠구만.’
 건우가 실눈을 뜨며 혀끝을 찼다.
 “걔도 벌써 대학생이야. 과 전체 MT라고 어제 짐 싸들고 나갔단다.”
 “대학생이요? 걔가요?”
 “그래, 윤아도 벌써 대학 2학년인걸.”
 세월무상. 머쓱해진 건우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참, 아버지는요?”
 “…….”
 “많이 늦으시네. 빨리 뵙고 싶은데.”
 “…건우야.”
 
 ***
 
 이튿날.
 건우는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홀로 강변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한 그는 대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마신씩이나 되는 이가 웬 고속버스?
 하지만 날아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얌전히 가고 싶었다.
 아니, 빨리 가고 싶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맞는 말일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현실.
 그것을 맞닥뜨리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버지…….’
 
 ***
 
 “건우야, 네 아버지…작년에 돌아가셨다.”
 “예? 아니 왜요!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암이었다.
 오랜 기간 위암으로 고생하던 아버지는 작년 이맘때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아버지도 항상 말씀하셨단다. 네가 살아있을 거라고. 반드시 살아있다고…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계셨어.”
 “…….”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얼마나 널 그리워하셨는지…”
 
 
 # 5. 일자리를 찾아서
 
 건우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때도 군인이었고 8년 전, 입대하던 해에도 군인이셨다.
 모 부대 주임원사로 복무하며 군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6년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하셨다고 했다.
 불가항력적인 의가사제대. 가세는 기울어만 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모진 투병생활을 이어나갔다.
 오래전부터 건우의 아버지에게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대를 이은 군인가족. 그는 하나뿐인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을 가기를 내심 바랐다.
 “싫어요! 전 절대 군인 따위는 되지 않을 겁니다!”
 건우의 의사는 완강했다.
 어쩔 수 없는 의무복무는 거쳐야 했지만 아버지처럼 평생을 군인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뿐인 인생. 아버지처럼 딱딱한 삶은 살기는 싫었다.
 자유롭게, 즐기면서. 그렇게 인생을 신나게 살고 싶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건우는 일반 사병으로 입대를 했고 이렇게 오늘 아버지의 부고를 접했다.
 
 ***
 
 대구에 도착한 건우는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경북 군위군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로 향했다.
 선산이 있는 곳.
 하지만 일가친척이 전무하다시피 한 건우네는 선산을 자주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군인인 탓도 컸다. 어린 시절 한두 번 조부모님의 성묘를 온 적은 있었지만 기억이 희미했다.
 ‘여긴가?’
 터벅터벅 산길을 걸은 지 약 한 시간. 흐릿한 기억속의 그 장소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풀이 무성한 조부모의 묘소 앞에 갓 조성된 묘가 눈에 띈다.
 어색하다. 저게 아버지의 묘라고? 저 풀떼기가 듬성듬성한 봉분 아래 아버지가 누워계신다고?
 직접 보고나니 더욱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모습으로 대면하고 싶지 않았는데. 항상 크고 당당한 분이셨는데…….’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은 건우는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아버지의 묘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건우는 준비해온 소주를 컵에 따랐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간단하게 차려진 제상 위로 살포시 소주 컵을 올려놓았다.
 “엄마와 윤아는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저 이제 강해졌습니다. 보이시죠?”
 건우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처럼 멋진 사나이가 되었어요. 하하…하하하…….”
 웃음과 함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건우는 해가 넘어가도록 묘소 곁을 지켰다.
 한숨과 함께 피워댄 줄담배 탓에 꽁초가 수북했다.
 ‘먼 길을 돌아 이렇게 다시 이 땅에 섰다. 남들은 이해 못 할 엄청난 삶을 살다가 이렇게 돌아왔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지켜야 할 두 명의 가족. 그리고 다시 이어가야 할 나의 삶. 남들보다 많이 늦었지만 열심히 달려보자!’
 자리를 털고 일어선 건우는 힐끗 묘역을 돌아봤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 편히 주무세요.”
 
 마기의 일주천과 함께 중력장이 옅어졌다.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른 건우.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순간 난기류가 대기를 찢어발겼다.
 밤하늘로 시선을 돌린 건우는 순식간에 선산너머로 사라져갔다.
 
 ***
 
 “네, 거기 문명 피시방이죠? 다름이 아니라…….”
 벌써 오늘만 다섯 군데였다. 퇴짜 또 퇴짜.
 도대체 알바몬스터며 알바지옥이며 올라온 구인광고마다 입을 맞춘 것 같다. 하나같이 이미 사람을 구했단다.
 ‘구했으면 광고를 내려야 할 거 아냐!’
 건우는 홧김에 마우스를 쾅 내리쳤다.
 
 복학까지는 아직 몇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등록금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오늘 아침에는 구인광고지 배달원을 기다렸다가 갓 나온 광고지에 실린 곳도 전부 전화를 돌렸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기에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듣기로 웬만한 편의점이나 피시방은 알바 대기자만 기본 열 명이라고 했다.
 당연히 질 낮은 농담이려니 하고 흘려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8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넘쳐나는 청년 실업이 극에 달한 세상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대로 대학에 복학을 한들 의미가 있을까…….’
 이젠 복학마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건우의 죽음을 믿지 않던, 아니 살아있음을 간절히 바라며 확신하던 어머니가 휴학에 휴학을 거듭하며 간신히 지켜낸 학적.
 하지만 대학 졸업장이란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나날이 한숨만 늘어갔다.
 숫자상의 나이는 이미 서른.
 갈수록 극악해져만 가는 청년 실업률은 올 초에 40퍼센트를 돌파했다.
 나이 서른에 복학. 서른셋에 졸업. 지방 3류대에 그렇고 그런 학과. 학점도 지금까지 별 볼일 없었고 스펙이란 것도 아직 갖춘 거 하나 없는 신세였다.
 ‘차라리 마계생활이 더 나았으려나…….’
 방구석에 틀어박힌 건우는 예상치도 못한 스트레스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건우야, 들어가도 되니?”
 “예, 엄마. 들어오세요.”
 대충 머리를 쓸어내린 건우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소담한 과일 접시.
 어머니는 손바닥 만 한 접시를 책상위에 내려놓았다.
 “이야, 맛있겠네. 잘 먹을게요.”
 건우는 괜스레 호들갑을 떨며 과일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오늘도 일자리 알아보고 있었니?”
 “아 예…마냥 집에만 있기도 심심하고 해서요. 금방 구할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
 “…….”
 “영 뭐시기 하면 공장이나 노가다 판에서 몇 달 일하면 돼요. 제가 힘은 좀 세요, 하하하!”
 “너무 무리하지 말어. 혹시 등록금 때문에 걱정 되서 그런 거라면 아버지 사망 보험금도 있고 군인 연금도 나오고 하니까.”
 얼핏 들으면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건우는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동생 윤아와 처음 가졌던 술자리.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던 중 그간 있었던 집안일도 솔찬히 듣게 되었다.
 개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집안 경제 사정이었다.
 약 5년 전, 아버지가 진 빚보증, 그리고 그 당사자의 야반도주. 떠안은 빚만 수억 원이라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수년째 붓고 있던 계도 얼마 전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놈의 계주 역시 야반도주. 이웃 주민 80여명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았다.
 ‘이런 상황에 놀고먹으면 그게 인간입니까, 어머니. 제 밥값은 제가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실없는 농담으로 어머니의 시름을 덜어주던 건우는 답답한 마음에 동네 산책을 나섰다.
 
 ***
 
 “오빠!”
 막 버스정류장근처를 지날 무렵이었다.
 동생 윤아가 갑자기 나타나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어, 왔냐? 오늘은 좀 일찍 왔다?”
 “뭐야. 나 시험 기간인거 몰랐어? 관심 좀 주십쇼, 오라버니.”
 윤아는 어디서 봤는지 포권지례 흉내를 내며 히죽거렸다.
 “됐다 그래라. 들어가. 난 좀 더 돌다가 갈께.”
 무성의한 손 인사를 남긴 건우는 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로 옆, 횡단보도를 건넌 건우는 다음 골목으로 쑥 들어갔다.
 허겁지겁 뒤를 쫓는 인기척.
 “왁!”
 “꺄악!”
 골목 뒤에 숨어있던 건우는 갑자기 튀어나오며 뒤따르던 인기척을 덮쳤다.
 “놀랬잖아!”
 인기척의 주인은 윤아였다.
 “왜 따라오는데?”
 “그냥. 오빠가 고민이 많아보여서. 얼굴에 세상 짐 다 짊어진 사람입니다 하고 써져있는걸? 그냥 가려니까 영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헤헤.”
 말괄량이 같은 게 그래도 맘 씀씀이는 예뻤다.
 “그래…고민. 많지, 많아.”
 “뭔데? 뭔데?”
 윤아는 한숨을 푹 내쉬는 건우에게 코를 들이밀며 눈까지 반짝거렸다.
 “생각보다 일자리가 영 안구해지네.”
 “역시.”
 “뭐가 역시냐?”
 “오빠, 요즘은 그렇게 전화만 띡 한 통 한다고 알바자리를 구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그럼?”
 “최소한 50군데!”
 윤아는 손바닥을 쫙 펼쳐 보이며 단언했다.
 “아니, 그 이상 되는 곳에 연락처며 이력서를 다 뿌려 놔야해.”
 “정말?”
 “그렇게 해도 운 좋아야 한 달은 걸릴걸? 난 지난 겨울방학 때 알바자리 하나 구하려고 초가을부터 뛰어다녔어.”
 한숨 나오는 어드바이스였다.
 “무슨 취업 면접 같다?”
 어깨가 저절로 축 처진 건우는 한숨만 연달아 내쉬었다.
 “비슷해. 하여튼 요즘은 그래. 오빠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이랑은 하늘과 땅 차이라구.”
 “너도 고민이 많겠다. 공부하기 힘들지?”
 “웅, 오빠. 나 힘들어. 그래서 말인데 우리 기분전환도 할 겸 저기 가서 떡볶이나 먹을까?”
 “돈 없다.”
 “췟.”
 
 10여 분을 걸어 두 사람은 공원에 도착했다.
 마침 보이는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캔을 뽑아온 윤아가 선심 쓰듯 하나를 건넸다.
 “땡큐.”
 건우는 캔 뚜껑을 따자마자 곧바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시 탄산은 현세가 짱이다. 마계에서 이 탄산음료가 땡길 때마다 얼마나 향수병에 시달렸었는지.
 ‘다시 돌아오니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있긴 하네. 이것저것 문제가 훨씬 많긴 하지만…….’
 “잇차! 나도 앉아야지!”
 윤아도 건우 곁에 털썩 앉으며 캔 뚜껑을 땄다.
 “오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복학은 정말 할 거야?”
 “글쎄다. 처음에는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게 영 비전이 없는 것 같아서 요즘 고민이야.”
 “그럼 혹시 말이야…이거 본 적 있어?”
 “뭔데?”
 윤아는 가방을 열더니 곱게 접힌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뭐냐 하면…….”
 주섬주섬 펼쳐 보인 종이의 정체는 전단지였다.
 “사실 오빠가 돌아오고 나서 계속 고민이 많은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이걸 한 번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가져와 봤어. 볼래?”
 윤아는 16절지 크기의 매끈한 종이를 건넸다.
 “뭐야, 이게?”
 “하사관 모집공고.”
 “하사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무슨 이런 뜬금없는 전개가…….
 건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윤아를 빤히 바라봤다.
 말똥말똥 해맑은 눈으로 쳐다보는 여동생. 왠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내 성의를 봐서 한 번 읽어봐 줄래? 밑져야 본전이잖아.’
 눈빛은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었다.
 “그래, 한 번 읽어나 보자.”
 전단지는 크게 두 분야로 나눠서 모집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상단의 하사관 모집요강은 늘 보아오던 평범한 내용.
 ‘이건 나이 제한 때문에 턱도 없을 것 같고…….’
 시선을 내린 건우는 하단의 내용을 주욱 훑기 시작했다.
 ‘대 큐브 전담반?’
 무슨 콜센터 이름 같네.
 “너, 혹시 나더러 이 큐브 어쩌고에 지원하라고 갖고 온 거야?”
 “응? 아니. 그건 힘들고. 그 밑에. 봐봐. 단기 계약직 군무원을 모집한다는 내용 말이야.”
 “아, 이거. 그런데 이건 전문대 졸업 이상인 걸?”
 “엥? 정말? 내가 왜 그걸 못 봤지? 아쉽네.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버려, 오빠.”
 “잠깐만. 그런데 이 콜센터는 안 돼는 거야? 이건 학력제한이 없는 것 같은데. 연령제한도 없고.”
 “콜센터?”
 “이거 말이야.”
 건우는 대 큐브 전담반 모집 공고문을 가리켰다.
 “오빠,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냐. 정말정말 특수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야.”
 “여기 써져있는 동기화 감도 테스트란 걸 말하는 거야?”
 “그래. 거기 들어가기만 하면 좋기야 좋지. 시작부터 계급도 엄청 높고. 처우도 일반 직업군인에 비해 훨씬 좋고. 하지만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오빠는 안 돼.”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윤아. 왠지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쪼그만 게.
 ‘잠깐! 이거 혹시…….’
 
 집으로 돌아온 건우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튀어 들어갔다.
 곧장 컴퓨터를 켠 그는 병무청 홈페이지로 접속했다.
 
 ***
 
 윤아가 일찍 하교한 덕에 간만에 세 식구가 함께 저녁밥상 앞에 앉았다.
 재잘대는 여동생과 간간히 맞장구치시는 어머니.
 묵묵히 밥을 먹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건우의 표정에는 미소가 어렸다.
 ‘아버지도 함께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었다. 식사 분위기가 밝으니 더욱 마음이 아리다.
 ‘하지만 이제라도 아버지의 유지를 이을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맘 편히 먹자.’
 “오빠, 아까부터 혼자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한창 시험얘기를 나누던 윤아가 건우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어? 아니. 참, 엄마.”
 “응?”
 “저 군대 다시 갈까 해요.”
 “…?”
 “…!”
 이러저러 설명 하나 없는 폭탄선언에 두 여인네의 눈이 땡그래졌다.
 “오빠 왜 그래? 우리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건우야, 아르바이트 자리가 잘 안 구해져서 속 많이 상했구나. 어떻게든 네 등록금정도는 마련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말마라. 다시 군대를 간다니…….”
 “직업 군인 말이에요. 사병 말고.”
 “오빠, 혹시 아까 그 전단지?”
 “응. 잠깐 알아봤는데 충분히 해 볼만 하겠어. 처우도 좋더만.”
 “그게 가능하겠니? 된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나이도 있고…그렇다고 사관학교를 다닌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내심 기대를 하시는 모양이었다.
 
 최근의 취업난은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웬만한 대학, 웬만한 학과로는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스펙 하나 없이 꾸역꾸역 채워놓은 계란 한판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도 지금의 내 상황정도는 충분히 파악했어. 복학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없는 길을 계속 걷는 거나 마찬가지일 뿐. 반드시 다른 활로를 모색해야 해.’
 사실 어느 정도 복학에 대한 미련은 접은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 알게 된 새로운 정보.
 그것은 현재의 건우에게 더없이 딱 맞는 일자리에 관한 정보였다.
 마수 따위를 잡는 일.
 ‘그딴 거야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할 자신 있지.’
 건우를 위한 맞춤직업.
 그것이 바로 대 큐브 전담반이었다.
 
 “에이, 엄마. 오빠는 그거 힘들어요. 그거 하려면 동기화 감도란 게 엄청 뛰어나야 된대요.”
 “야, 나라고 그걸 못한다는 보장 있어?”
 건우는 차마 디아블로 어쩌고 할 용기가 없어 투정부리듯 대꾸했다.
 “그래, 네 오빠 정도면 어디 내놔도 안 빠지지.”
 고슴도치의 새끼 사랑이었다.
 “엄마도 참. 우리 학교에서 올해 군대 간 사람 중에 딱 한 명이 그 테스트를 통과했대요. 감도 수치도 꽤 높아서 하사로 바로 스카우트됐다니까 그 사람 인생은 앞으로 탄탄대로죠.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거. 아시잖아요. 요즘 실업률이 엄청나서 입대 대기자가 넘쳐난다고 허구한 날 뉴스에 나오는 거. 그 많은 군 입대자 중에서도 수백 명중에 한 명이 그런 감도 특기자가 될까 말까예요. 이번에 그 사람 그거 통과했다고 학교에 플랜카드도 걸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런 걸 오빠가 어떻게…에이, 안돼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였어?”
 윤아의 얘기를 들은 어머니는 금세 어깨가 축 처지셨다.
 “걱정 마세요.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해 보죠 뭐. 혹시 압니까? 그 동기화 감도란 거 저도 있을지. 하하하!”
 건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감도란 게 뭘 말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당연히 나야 만땅이겠지만.’
 “그래, 오빠. 시도는 해 봐야지. 도전하는 청춘이 아름답다. 좋네!”
 말투가 넌 해보나 마나다 라는 느낌이 다분했다.
 ‘꼬맹이, 넌 내가 가볍게 통과하고 와서 한 푸닥거리해 주마.’
 여동생과 북어는 한 달에 한 번씩 두들겨줘야 제 맛.
 8년 만에 돌아온 오라버니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맛보도록 해 줄 테다!
 
 일단 그렇게 진행하기로 결정이 났다.
 분기별로 있는 테스트는 앞으로 일주일 후. 다행히 신청마감이 오늘까지였다.
 방으로 돌아온 건우는 후다닥 인터넷 신청을 마쳤다.
 “건우야, 과일 좀 먹어라.”
 “예, 엄마.”
 마루로 나가 보니 윤아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이 시험 마지막 날이라더니 그새 놀러 나갔나보다. 하긴 그 나이 때는 시험 끝나고 부어라 마셔라가 인생 최고의 낙이지.
 조용히 TV만 바라보며 과일을 씹는 모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 될 거다. 너무 걱정마라.”
 건우의 손을 쓰다듬으며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하, 걱정 안 해요, 당연히 잘 될 거니까요.”
 “그래. 잘 되어야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게다. 그렇게 널 군인으로 키우고 싶어 하셨는데 이제라도 아버지 소원을 풀어드리게 됐으니 좋은 결과가 있겠지.”
 ‘아, 아버지…….’
 
 마당으로 나온 건우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버지, 지켜봐 주세요. 저, 멋지게 해 내겠습니다. 가장 노릇도,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바라셨던 군인 노릇도…….’
 
 ***
 
 [이번 역은 서초, 서초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자 뜨거운 열기가 훅 덮친다.
 어느덧 7월의 초입.
 지하역사도 생각만큼 시원하지가 않다. 줄줄 흐르는 육수를 닦아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들 덥냐?’
 더위는 물론 추위까지, 온도 변화 따위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건우.
 파김치가 된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새삼 여름임을 실감했다.
 ‘확실히 마신이다 보니 여러모로 편해.’
 그에게 있어 옷이란 가리개 내지는 패션용도일 뿐이었다.
 민소매에 핫팬츠, 얄딱구리한 반투명 소재의 옷가지를 걸치고도 헐떡대는 평범한 사람들이 새삼스럽기까지 했다.
 ‘이놈의 땀 냄새가 문제긴 하지만…….’
 예민하기 그지없는 감각. 이런 계절에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후각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휴, 도저히 못 참겠군.’
 건우는 인위적인 감도제어를 시전했다. 개 코 저리가라 하는 후각이 순식간에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제 좀 살만하네.’
 쿵!
 “어이쿠, 비켜 봐요! 좀 지나갑시다.”
 웬 덩치가 어깨를 부딪치곤 후다닥 사라졌다. 휘청하며 벽을 짚는 건우는 쳐다도 안 본다.
 ‘아, 이런 예의 없는 새퀴…….’
 하마터면 벽과 한 몸이 될 뻔한 건우가 발끈하며 돌아섰다.
 아무리 마신 디아블로와 한 몸이 된 건우였지만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었나보다. 무방비로 몸무게가 두 배는 나갈듯한 놈의 보디첵에 얻어맞고 그대로 나가떨어질 뻔했다.
 정말 싫다. 기본도 안 된 것들이란.
 예전부터 그랬다. 왜 모르는 사람과 툭 부딪쳐 놓고도 사과 한 마디 없는 게 당연시되어 버린 걸까. 고작 반응한다는 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어?’ 한마디 하며 틱 쳐다보는 게 다다.
 8년이 지나도 여전한 이 예의 없는 동방예의지국의 모습.
 맘 같아서는 저 육수를 흩날리며 질주중인 덩치를 쫓아가서 바닥에 메다 꽂아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지옥불 한 방에 잿가루를 만들어버리던가.
 ‘나의 소셜 포지션을 생각해서 참아준다. 좀 바쁘기도 하고. 쯧!’
 툴툴대며 시계를 꺼내는 건우. 현재 시각, 정확하게 오전 8시 55분이었다.
 분기별로 한 번 있는 대 큐브 전담반 입대 테스트.
 정해진 도착 시간은 오전 9시까지였다. 지하철의 배차간격이 비교적 일정함에도 두 번의 환승에서 버벅댄 관계로 시간이 촉박했다.
 군대니까 당연히 시간 약속은 칼 같이 지킬 터. 1분이라도 늦었다가는 다시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8번 출구! 8번 출구를 찾아야 해!
 마음이 급해지자 저절로 두 발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릴렉스! 릴렉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하나같이 제 갈길 가기도 바쁜 사람들인지라 누구하나 신경 쓰는 이가 없다.
 목적지 까지는 대략 사오백 미터의 거리. 길만 헤매지 않는다면 뛰어가도 충분할 거리다.
 ‘오케이, 8번 출구 발견!’
 이리저리 기웃대던 건우는 탄환처럼 바닥을 박차며 튀어나갔다.
 적당히 제어된 속도. 딱 우사인 볼트급의 스피드였다.
 
 목적지는 대 큐브 전담반 수도 방위 대대.
 서초구 서울 지법 인근의 서도 빌딩이란 건물이었다.
 왜 시내 한복판에 이런 부대가 존재하는지 의아했지만 그건 나중에 확인해 볼 일.
 ‘아마도 인근에 있는 국군 정보 사령부와 연관이 있을지도…….’
 왠지 설득력 있는 예상범위다.
 
 대로를 벗어난 건우는 막 네 번째 이면도로로 접어들었다.
 무슨무슨 법률사무소와 은행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
 눈앞에는 익숙한 체구의 비계 덩어리가 뒤뚱대며 달리고 있었다.
 ‘뭐야, 너 아직도 여기냐?’
 피식 웃음이 난다. 하여튼…부산 떨 때 알아봤다.
 덩치의 옆을 스치며 윙크를 날려준 건우는 다시 바람처럼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5층짜리 건물. 서도 빌딩.
 면접 장소는 교육관이란 이름의 바로 옆 2층 건물이었다.
 건우는 정확히 9시, 10초 전에 교육관 입구에 도착했다.
 간단한 신분증 제시.
 입대신청 확인을 마친 담당자는 파란 명찰을 교부해 주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테스트도 못 받고 돌아가실 뻔했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담당자가 벽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랬습니까?”
 별 감흥 없는 표정의 건우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도 눈썹을 찡긋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헉! 헉! 잠깐만요, 저도 확인 해 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문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뭡니까?”
 깜짝 놀란 담당관이 멈칫한다.
 “일단 열고 말합시다. 영차!”
 억지로 문을 잡아당기며 누군가가 몸을 들이밀었다.
 익숙한 체취가 건우의 코끝을 훅 자극한다.
 ‘그 놈인가?’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보는 덩치. 녀석도 테스트 신청자인 모양이었다. 땀으로 샤워를 한 덩치는 숨넘어가는 얼굴로 신분증을 내밀었다.
 ‘용쓴다.’
 실내로 걸음을 옮기던 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가운 눈길로 힐끗 벽시계를 쳐다보는 담당자.
 “지금 몇 십니까?”
 “예?”
 “지금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아, 9시요.”
 “제 눈이 잘 못 된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9시 2분이 넘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
 “돌아가세요.”
 담당자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덩치를 돌려세웠다.
 “아, 좀 그러지 마시고 들여보내 주세요. 겨우 2분 늦은 거 가지고 너무 빡빡하게 구시네.”
 인상이 확 구겨진 덩치가 언성을 높였다.
 “여기가 그렇게 만만한데로 보이십니까? 만약 지금 신분증 확인절차를 원하시면 그렇게 해 드리죠. 대신 그쪽은 앞으로 영구적으로 테스트 지원자 명단에서 제외하겠습니다. 확인 해 드릴까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덩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아무리 아쉬워도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겠지.
 건우는 느긋한 자세로 가슴팍에 명찰을 달며 덩치의 반응을 살폈다.
 “석 달 후에 뵙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칼같이 잘라버린 담당자가 곧장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멍한 얼굴을 한 덩치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꼴좋다. 3개월 후에 보자. 덩치야.’
 건우는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실내로 들어섰다.
 
 
 # 6. 테스트
 
 생각보다 내부는 한산했다.
 고작해야 열 명 남짓한 인원이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
 테스트 담당자들까지 다 합해도 채 스무 명이 안 돼 보였다.
 넘쳐나는 청년실업이 어쩌고 하더니 이거 잘못 알고 온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김건우 씨?”
 아까 명찰을 교부해 준 담당자가 건우를 불렀다.
 “김건우 씨는 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2층이요?”
 “예, 여기는 이번 논산 훈련소에서 뽑혀온 특기자들이 최종 확인절차를 거치는 테스트 1부이고 일반 신청자는 2층에서 기본 테스트를 받습니다. 자, 저쪽 계단으로…….”
 어쩐지.
 다시 보니 열 명의 대기자는 전부 군복 차림이었다.
 딱 봐도 어리숙한 훈련병의 모습.
 아마 윤아네 학교에 플랜카드를 걸게 만들었다던 그 사람도 이런 과정을 거쳤음에 분명하다.
 ‘귀여운 것들.’
 건우는 얼룩무늬 병아리들을 뒤로 하고 2층 계단을 휘적휘적 걸어 올라갔다.
 
 계단을 반쯤 올라갈 무렵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교육관 2층은 말 그대로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수백 명은 모인 듯한 인파. 빠끔한 틈이 없다.
 혹시나 싶어 신청한 어중이떠중이들로 발 디딜 틈도 없는 상황이었다.
 ‘청년실업의 현실이란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직업인데…….
 하지만 생활전선의 끝까지 내몰린 이들에게는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1차 테스트는 간단했다.
 막대기 타입의 탐지기로 슥 한 번 훑는 걸로 끝이었다.
 순번대로 줄지어 담당자 앞으로 나서면 단 몇 초안에 결과가 나왔다.
 당연히 통과자는 극히 드문 상황. 약 30분이 지나도록 단 한명도 1차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이 없었다.
 결과가 바로바로 나오는 관계로 담당자를 거친 이들은 곧바로 아웃이었다.
 덕분에 복닥대던 대기실은 순식간에 썰물 빠지듯 비어갔다.
 ‘통과자가 있기나 할까?’
 병무청 홈페이지에 나온 도표대로라면 체내에 마기를 갈무리 할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마기 자체와 호응하는 신체반응만 보여도 통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합격자가 안 나온다는 건 그냥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찾아온 자들이 대다수란 소리였다.
 ‘보자, 도표에 나온 수치가 어떻게 정리되어 있더라?’
 건우는 휴대폰을 꺼내 병무청 앱을 구동시켰다.
 
 엘리시움 동기화 감도 0.1부터 0.3은 하사. 0.4부터 0.6까지는 중사, 0.7부터 0.9까지가 상사였다.
 최하 입대가능 수치는 0.01부터.
 단, 0.09까지의 하사계급 미달자들은 하사관후보생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특별 교육기간을 거쳐 최종 테스트를 다시 받은 후, 임관하게 된다.
 여기서 탈락하는 인원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이건 좀 억울하겠군.’
 하지만 아무리 용 써도 0.1에 미달한다면 후보생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더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동기화 수치가 1.0을 넘어서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들은 곧바로 소위로 임관할 수 있다.
 1.0이상의 특징은 엘리시움의 체내 갈무리 능력이었다. 즉, 소위급부터는 능력치가 대폭 상승한다는 의미다.
 단, 최초 확인 수치가 아무리 높다 해도 무조건 처음 시작은 소위부터였다.
 2.0이든 3.0이든 감도 수치가 아무리 높게 나와도 그 이상의 계급은 일정 기간의 경력을 거쳐야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겠지. 기본 전투력은 전투력이고 경험이란 건 절대 무시 할 수 없는 거니까.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예외겠지만 딱히 저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이후 매년 있는 테스트를 통해 기준점 도달 여부를 따져 계급상승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초장부터 모난 돌처럼 굴 필요가 없다는 소리잖아? 맥시멈이 소위라면 거기에 맞춰주면 되겠군. 수틀리면 그때 가서 계급을 확 뻥튀기 하지 뭐.’
 
 우와아아!
 막 휴대폰을 집어넣던 건우는 술렁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테스트 담당자의 등 뒤로 보이는 전광판에 0.1이란 수치가 떠오른 것이다.
 ‘0.1이라면…….’
 후보생 기간을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하사 진급을 할 수 있는 최소 수치였다.
 장내는 거의 열광의 도가니였다.
 ‘미친…무슨 광신도 집단 같아!’
 그러나 아직 건우가 모르는 이 사회의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요즘은 일반 하사관 임관조차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은 기본이었다. 하물며 대 큐브 전담반의 하사로 들어간다는 건 작으나마 인생역전의 기회였다.
 기본급여만 일반적인 하사관의 무력 다섯 배였으니까.
 부가적인 혜택까지 더하면 웬만한 대기업도 비교불가였다.
 
 첫 번째 하사관의 탄생 이후 다시 30분가량 아웃의 연속이었다.
 대기 인원은 눈에 띄게 쭉쭉 줄어들었다.
 그러나 간신히 턱걸이로 현관문턱을 넘어선 건우는 아직도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할 듯싶었다.
 ‘심심하다…마냥 기다리려니 답답해 죽겠구나…….’
 하나같이 휴대폰에 머리를 박고 뭐를 그렇게 열심히들 들여다보는지. 대화 한마디 나눌 상대가 없었다.
 아직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지 않은 그로서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윤아가 좀 과하게 쓴다 싶더니만 걔만의 문제가 아니었어. 이건 뭐 전부 중독자 수준이니.’
 마치 홀로 섬처럼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럼 혼자 노는 수밖에. 어디 한 번 볼까?’
 무료함에 지친 건우는 조심스럽게 감각을 확장시켰다.
 공기 중으로 미량의 마기를 흘려보내서 그 기운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과연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이 테스트를 통과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운 좋은 놈 하나가 얻어걸리긴 했지만 과연 그런 운발 좋은 놈이 더 있을까?’
 내심 궁금했다.
 엘리시움 에너지에 동기화가 가능한 인물이라면 당연히 건우의 마기에도 반응을 보일 터.
 인체에 무해한 극소량의 마기라 해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가볍게 두 눈을 감은 건우는 마기의 흐름을 따라서 실내를 한 바퀴 훑었다.
 확장된 감각은 마치 적외선 카메라처럼 실내를 커버했다. 하지만 성능만큼은 카메라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전후좌우상하 가릴 것 없이 전 방위로 뻗어나간 감각은 단숨에 실내를 훑어 내렸다.
 심심해서 시도해 본 것이지만 워낙에 뛰어난 성능 탓에 순식간에 스캔이 완료되어버렸다.
 ‘풋! 역시 없네.’
 결과가 나오는 데는 단 1초도 안 걸렸다.
 동기화 수치 0.1 미만의 하사관 후보생감이 두 명 있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김건우 씨, 나오세요.”
 ‘나?’
 헛물켜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히죽대던 건우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아직 남아있는 대기자가 백 명이 넘는데 왜 날 부르지? 설마 동명이인인가?
 “김건우 씨, 안계세요? 그럼 다음 ㅂ…….”
 “아뇨, 여기 있습니다!”
 
 착오가 있었던 오류가 있었던 건우를 부르는 건 맞는 듯 했다.
 건우는 사람들을 헤치며 급하게 달려 나갔다.
 “오래 기다리셨죠? 깜빡 조셨나 봐요? 자 이리 올라서세요.”
 테스트 담당 여군의 상냥한 목소리.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철을 흘낏 들여다보니 그의 연락처가 이름 옆에 적혀 있었다. 확실히 건우를 호명한 게 맞았다.
 그녀는 금속 발판 위로 건우를 안내했다.
 “꼴찌로 들어왔는데 이렇게 먼저 테스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살짝 미안한 기분이 든 건우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이실직고했다.
 “테스트 순서는 온라인 신청순입니다.”
 “아…….”
 그럼 상관없지.
 신발을 벗은 건우는 냉큼 발판위로 올라섰다.
 곧이어 군의관 한 명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긴장 푸시구요. 자세 바르게 부탁드립니다.”
 그는 예의 막대기 같은 테스터기로 건우를 쭉 훑었다.
 아래위로 딱 두 번. 테스트는 그렇게 단 3초 만에 끝났다.
 삐익!
 곧 이어 울리는 찢어지는 경보음.
 한 시간 전, 실내에 울려 퍼졌던 바로 그 소리였다. 0.1의 동기화 수치를 전광판에 새겼던,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던 그 하사관급 지원자. 그의 테스트 때 났던 소리가 다시 한 번 실내에 울려 퍼졌다.
 금세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저 전광판에 1.0이란 숫자만 뜨면 게임 오버지.’
 1.0의 수치는 건우가 나름 머리를 굴려 생각해 놓은 동기화수치였다.
 괜히 전체 능력치를 드러내서 남들보다 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봤자 계급이 올라가는 것도,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쓸데없이 겸손한 척 하사관급으로 내려갈 생각도 없었다.
 ‘정확하게 1.0의 수치. 딱 소위로 임관 할 수 있는 만큼의 동기화 수치면 충분하다.’
 느긋한 표정의 건우는 천천히 발판을 내려와서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런데 군의관의 표정이 이상하다.
 상냥하기만 하던 저 여군의 얼굴마저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뭐지?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분명히 체내에 있는 모든 마기를 꽁꽁 감싸듯이 갈무리해서 절대 튀지는 않았을 텐데…이거 실수라도 한 건 아닌지 괜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아무리 내가 현세로 돌아와서 설렁설렁 지냈기로 소니 그 정도 일도 제대로 처리 못했을까.’
 그래도 불안했다.
 아무래도 이 친구들의 반응은 동기화 수치를 보고 놀란 것이 확실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혼자 이리저리 넘겨짚던 건우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하며 김칫국을 들이켰다.
 
 사실 테스트 룸 담당자들이 모두 놀란 건 사실이었다. 군의관도 여군도 데이터 입력 담당자까지 전부 다.
 하지만 건우의 예상과는 달리 이들은 전혀 뜻밖의 내용으로 놀라고 있었다.
 
 “저, 김건우 씨? 혹시 시간 되시면 따로 추가 테스트를 진행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한참을 쑥덕이며 의견을 나누던 담당자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건우에게 물었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건우의 목소리에 살짝 경계심이 서렸다.
 “아뇨, 건우 씨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테스팅 기계에 오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산출된 데이터가 좀 이상하게 나와서요. 그래서 말인데 좀 더 정밀한 장비로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너무 과도하게 나타난 수치에 기계 오작동을 의심하는 게 확실했다.
 ‘나 원 참. 그동안 너무 긴장을 풀고 살았나? 이거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귀찮은 상황을 만들어버렸군. 인간들 얼굴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인데…….’
 
 그렇게 건우는 별도의 방으로 따로 안내되었다.
 테스트 담당 군의관과 데이터 산출 담당자까지 두 명이 함께 따라왔다.
 아직 남아있는 테스트 대기자가 상당수임에도 건우를 따라 나선 건 상당히 의외였다.
 아마도 그들보다 건우에게 더 관심이 큰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작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곧이어 차까지 내 오는 여군. 대우가 상당하다.
 “자 드시죠.”
 “아, 예.”
 예상에도 없던 귀빈 접대에 건우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찻잔을 들이켰다.
 “김건우 씨, 엘리시움 동기화 수치에 대해 들어는 보셨겠죠?”
 “네, 큐브로 진입하기 위한 기본적 소양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설마 그것도 모르고 여길 왔을까. 별걸 다 물어본다.
 “다행입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찻잔을 내려놓은 대위 계급의 군의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엘리시움 동기화 수치는 사실 총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치란 표현은 그 네 가지를 통합한 평균치를 말하는 거구요.”
 “…?”
 네 가지?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마기에 감응하는 능력치라면 하나면 족했다. 저쪽 세상에 건우가 모르는 또 다른 마계가 존재한다면 또 모를까.
 ‘설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돼!’
 건우는 슬슬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큐브의 종류가 네 가지란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바입니다만, 우선 간단하게 설명 드리죠. 큐브는 트라이앵글, 테트라곤, 옥타곤, 헥사곤. 이렇게 네 가지 형태로 출몰하고 있습니다.”
 “…….”
 “트라이앵글의 경우는 유계의 요수들이 출몰하는 큐브이며 적색의 엘리시움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이상했다. 유계라고? 마계가 아니라?
 “테트라곤은 환계, 청색. 옥타곤은 마계의 흑색. 마지막으로 헥사곤은 천계의 백색 엘리시움 에너지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이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아니, 모르겠는데?’
 건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현세에 출몰하는 큐브라는 게 오직 마계의 크러스트만을 통칭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겪은 바도 있고.
 그런데 이제 보니 온갖 계층의 크러스트들이 짬뽕으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보통 엘리시움 동기화 수치를 체크하게 되면 이 네 가지 수치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개별적 수치는 크게 신경을 안 썼죠. 어차피 평균 수치나 개별수치나 그게 그거였으니까요. 그런데…….”
 군의관은 잠시 말을 끊고 막대그래프가 그려진 A4용지 한 장을 탁자위로 올려놓았다.
 “이게 김건우 씨의 엘리시움 동기화 수치입니다.”
 A4용지에는 잡다한 신체 정보가 데이터화된 상태로 줄줄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테지.’
 건우는 신체건강 보고서 같은 상단의 데이터는 일단 스킵 했다.
 중요한 건 바로 저 하단의 커다란 그래프.
 건우는 종이의 절반가까이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그래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여기 보이시죠?”
 ‘그래, 보인다. 아주 잘…….’
 그래프에는 검은 막대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었다.
 적색과 청색, 백색의 막대는 바닥에 붙어서 흔적만 살짝 있을 뿐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런 경우는 지난 8년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테스팅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킨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추가확인이 필요한 상황이죠.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뭐…….”
 
 건우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오작동? 그런 건 없었어.’
 그래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당연히 기계도 멀쩡할 테고.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다시 테스트 해 봤자 결과는 마찬가지일게 뻔하잖아.’
 뜻밖의 난관에 건우는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김건우 씨의 반응 수치는 아주 훌륭합니다. 시작부터 소위관급으로 대 큐브 전담반에 들어가는 분은 흔치 않거든요. 아마 기계가 잘못 되었을 거예요.”
 군의관 옆에 앉아있던 담당관이 애써 그를 위로했다.
 
 “자, 이리로.”
 군의관은 옆방으로 건우를 안내했다.
 방 안에는 엄청난 크기의 침대 비스무리한 뭔가가 떡 하니 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마치 CT 영상 촬영기기와 흡사한 장비였다.
 “원래 2차 테스트용 장비로 1차 통과자의 최종 확정 판정용으로 쓰이는 장비입니다. 하지만 건우 씨의 경우는 상황이 좀 특별해서 바로 이리로 모셨습니다.”
 “음…….”
 약간 미심쩍었다. 설마 특이 케이스 발견이랍시고 모르모트 실험을 하는 건 아니겠지?
 ‘한다 해도 얘네가 날 어떻게 할 주제도 못 되고.’
 수틀리면 여길 날려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주면 될 일이었다.
 건우는 살짝 떠올랐던 경계심을 애써 억눌렀다.
 일단 믿고 테스트에 참여하는 게 순리였으니까.
 직업을 필요로 하는 건 이들이 아니라 건우였다. 심적인 을의 입장.
 ‘쓰읍…유쾌하지만은 않구나.’
 
 약 10분 후.
 엄청난 크기의 장비를 동원한 것 치고 테스트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이후 약 30분간 건우는 방 안에 그대로 방치되어버렸다.
 ‘뭐하자는 거야? 도대체!’
 짜증이 솟구치려는 찰나, 두 담당자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난감한 표정이 가득했다.
 즉, 결과는 역시나 마찬가지란 소리.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한 건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똑같죠?”
 “아, 예…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당황한 두 사람은 건우를 남겨두고 옆방으로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군의관님 이거 어떻게 하죠?”
 “낸들 알아?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원…….”
 “그냥 탈락시킬까요?”
 “장난하나, 자네? 수치가 1.0이라구. 초장부터 저런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어디 흔하던가? 탈락은 무슨…….”
 군의관이 버럭 했다.
 “그럼 어떡합니까. 이건 완전 반쪽짜리, 아니 사분의 일 쪽짜리잖습니까.”
 “…….”
 두 사람의 권한 범위를 넘어선 상황에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뭐야, 왜 또 나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또 방치된 상황. 게다가 또다시 감감무소식이었다.
 ‘이것들이 진짜…날 뭘로 보고!’
 참다못한 건우가 확 벽을 박살내고 나가버릴까 고민할 찰나 드디어 그들이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주 오래 기다렸죠.”
 “흠, 흠!”
 “테스트 결과가 여전히 애매해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라서 말이죠.”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따위 군바리노릇 안 해도 찾아보면 먹고 살 만 한 일거리쯤은 어떻게든 찾아낼 자신 있었다.
 그냥 재능기부 겸, 익숙한 일이라 한 번 해볼까 했더니만 사람을 아주 물로 본다. 짜증나게…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는 건우가 부담스러웠는지 군의관이 시선을 회피했다.
 “아, 일단 돌아가시고 저희가 추후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저희가 함부로 결정을 내릴 사안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 이런 거지같은…….”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시간은 시간대로 끌고 결과마저 신통찮았다. 군의관 일행도 꽤나 미안했던지 할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가버렸다.
 ‘확 엎어버릴까 보다…….’
 
 ***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
 건우는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헛웃음을 지었다.
 무려 8년의 시간을 마계의 제왕으로 군림해왔던 그였다.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인간들의 푸대접은 화가 난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멍청한 군의관놈. 굴러온 복덩이도 못 알아보고 찬밥취급이라니.
 사실 큐브 따위는 나타나는 족족 혼자 처리해 줄 용의도 있었다. 뭐 힘든 일도 아니고 마계의 떨거지와 놀아주는 재미도 쏠쏠할 테고 말이다.
 ‘그런데 뭐? 나중에 연락? 됐다 그래라. 이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니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새로 알게 된 정보는 꽤나 신선했다.
 그 큐브라는 것이 한 종류가 아니란 말.
 ‘무려 네 가지라고 그랬던가?’
 이 세계의 계층이 총 일곱 개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소리였다.
 오직 마계의 크러스트만이 시공의 틈을 비집고 현세에 출몰한다는 건 사실 어폐가 있다.
 마계 외에도 유계와 환계, 천계의 크러스트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세상이라…….
 어찌 보면 저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입장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나 마황이요, 마계에서 쭉 살다 온 짱 센 마황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딴 구분 따위 나한테는 안 먹히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뭐 다시 연락이 오면 오늘 받은 수모에 더해서 제대로 갑질 한번 해 주지 뭐.
 건우는 분명 그쪽에서 다시 연락이 오리라 확신을 했다.
 생각해보면 저쪽도 한 명의 인력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집으로 돌아온 건우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일단 소득 없이 돌아왔으니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건우야, 들어가도 되니?”
 그러나 내내 궁금해 하며 기다리시던 어머니는 곧바로 그의 방문을 두드리셨다.
 “하아…….”
 문을 연 건우는 기대에 찬 어머니의 눈빛과 마주쳤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차마 떨어졌다는 말은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엄마, 사실은…….”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해드렸다. 각색을 거쳐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행이구나. 그래도 완전히 끝난 건 아니잖아? 기다려보자꾸나. 아마 곧 좋은 소식이 올 거야.”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보다 밝았다.
 “너무 기대는 마세요.”
 “아니다. 사실 네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마음도 불편했고…또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내심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설마요.
 건우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건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잔뜩 기대가 묻어났었는데.
 ‘누가 봐도 마음을 비운 얼굴은 아니었어요, 엄마.’
 어머니의 귀여운 거짓말에 건우의 마음이 한결 풀어졌다.
 “그게 알고 보니 합격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라. 윤아 말대로 거기 붙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고들 하대? 이정도 결과만 해도 다행이지. 기다려 보면 아마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위로와 기대가 뒤섞인 어머니의 말씀.
 확 때려치우려 생각했던 건우는 어머니를 봐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래, 연락 정도는 기다려 보자. 가정형편도 생각해야지.’
 
 ***
 
 같은 시각, 서도 빌딩 5층.
 대대장의 호출을 받은 주혜민과 김기만이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차가운 냉기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잘 하는 짓이다. 일처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따위 상황을 만들어?”
 “그게 제 잘못입니까?”
 “그럼 누구 잘못인데? 내 잘못이란 말이야?”
 “…….”
 말을 말자.
 주혜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 대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중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 7. 상황 변화
 
 “주 팀장,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해결 될 일이야?”
 대대장은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김 팀장은…음, 아 됐고. 그래도 주 팀장은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 왜 갑자기 이런 폭탄을 터뜨려서 일을 힘들게 만들어? 안 그래도 바쁜 시국에!”
 그는 탁자위로 사진 몇 장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닦달을 했다.
 ‘제길…!’
 주혜민도 하루 종일 몇 번이나 본 사진이었다.
 오늘 아침,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 놓은 저 사진들.
 사진 속에는 의문의 사내가 큐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친절하게도 약 10초간 있었던 일을 무려 열 장이 넘는 사진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할 확실한 증거품이었다.
 투철한 기자정신을 가진 익명의 뉴스기자가 올려놓은 그 작품은 오늘 하루 조회수만 무려 백만에 육박하는 히트상품이었다.
 ‘왜 하필 거기에 CCTV카메라가 달려 있어가지고…아니, 찍혔으면 멀쩡히 살아서 나간 화면도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니야? 못돼 처먹은 기자놈 같으니!’
 후회해 봐야 이미 물 건너갔다.
 벌써 포천 경찰서장은 감봉조치가 취해졌고 그쪽 바리케이드를 담당했던 모 포대장은 강등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주 팀장, 그러게 내가 미리미리 확인 제대로 하라고 그렇게 얘길 했잖아. 선임 말을 개코로 듣더니만…쯧쯧.”
 김기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주혜민을 쳐다봤다.
 마치 네가 잘못해서 나까지 이런 추궁을 듣는 거 아니냐는 뉘앙스.
 불같은 성격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주혜민의 이성이 툭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듣자듣자 하니까…김 팀장님은 그럼 뭘 그렇게 잘했습니까? 작전지역에 도착해서 세월아 네월아 큐브까지 걸어가는데 10분이 넘게 걸리고! 안에서는 그 민간인을 직접 케어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갔습니까? 잡아먹었습니까?”
 “큭! 야,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잠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주 팀장, 그 민간인이 큐브에서 살아남았다는 소린가?”
 “우리 잘난 2팀장님께 물어보시죠.”
 “…….”
 근처만 가도 엘리시움 에너지의 영향으로 즉사할 수 있는 게 큐브였다.
 그런데 그 안에서 민간인이 살아있었고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면…그를 찾아내어 무사귀환을 공식 보도할 수만 있다면 사건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
 기본 통제를 제대로 못한 포천 쪽이야 면피가 불가능하겠지만 대 큐브 전담반은 오히려 좋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김 팀장, 말해봐. 어떻게 된 거야?”
 “아…저…….”
 “김 팀장, 이대로라면 자네 아버지 이름에도 먹칠하는 상황이 올 수 있어. 자, 빨리!”
 대대장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김기만의 연줄을 생각해서 최대한 꾹꾹 눌러 참으며 그를 다독였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뭐라고? 자네 정말……!”
 “저한테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쇼! 애초에 3팀장이 민간인 통제만 제대로 했어도 이런 일은 없는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섭섭합니다, 대대장님!”
 “이…이……!”
 대대장은 저도 모르게 사진들을 움켜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후우…….”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은 대대장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다시 사진들을 내려놓았다.
 “그래, 김 팀장. 주 팀장이 조금 소홀한건 인정함세. 그래도 지금 중요한건 그 민간인의 생사여부야. 요점은 그거라고.”
 생각보다 강한 대대장의 압박에 김기만도 슬슬 움츠러들었다. 지금 상황은 육군 참모총장의 아들이란 백만 가지고는 버티기에 한계가 있었다.
 “저 사실은…….”
 “그래, 말 해 보게.”
 “그 민간인을 말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보호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가장 안전한 지역에서요.”
 “그래서?”
 “부유섬 가장자리에 붙들어놓고 잘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갑자기 나가가 들이닥쳤습니다. 주 팀장, 저게 똑바로 처리를 못해서 말입니다.”
 “김 팀장! 주 팀장 탓은 좀 그만하고! 요점만 빨리 말해!”
 대대장마저 뚜껑이 열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어진 김기만의 변명은 듣는 입장에서 아주 가관이었다.
 산삼보다 보기 드문 초대형 나가의 출현부터 시작해서 그걸 맨손으로 때려잡은 민간인의 이야기, 그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는 결론까지.
 “그런데 그 작자의 신원을 저 3팀의 막내 하사놈이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았지 뭡니까. 그렇게 미리 얘길 했는데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성하의 탓으로 돌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휴우…….”
 대대장과 주혜민이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이 인간이 이제 하다하다 별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다 하는구나.’
 주혜민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대대장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됐네. 나가보게, 둘 다.”
 더 이상 들을 얘기도 추궁할 필요도 못 느낀 대대장은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의 김기만이 도망치듯 대대장실을 빠져나갔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머뭇대며 발길을 돌리던 주혜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네 탓이 아니야.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내 최대한 잘 무마해 볼 테니까.”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기운이 쭉 빠진 주혜민은 엘리베이터 앞에 선 김기만에게 터벅터벅 다가갔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맘 같아서는 따로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그냥 예의상 그의 곁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함께 기다렸다.
 “내 덕인 줄 알아.”
 “예?”
 이건 또 뭔 소리?
 “내가 총대를 메고 사실대로 말씀드렸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주 팀장은 오늘 큰 일 치렀을걸?”
 “아, 예.”
 앞뒤 맥락 없는 잘난 척. 이제 그러려니 했다.
 “그건 그렇고 팀원들 교육 좀 잘 시켜. 그 하사 놈 이름이 뭐더라? 조 뭐시기. 다 그 놈 때문이라구. 멍청한 지잡대 출신 같으니.”
 이젠 학력까지 들먹이며 잘난 척인가? 하긴 김기만이 서울대 출신인건 의외였지만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지가 뭔데 남의 팀원가지고 난리야?’
 어이가 없다.
 “참, 주 팀장도 연세대 출신이지?”
 “예.”
 “역시 엘리시움 동기화 감도도 학력에 비례하는 건가, 하하하!”
 ‘내 알기로 넌 0.1도 될까 말까거든?’
 말도 안 되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데는 역시 선수였다.
 “주 팀장,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시간 좀 있어?”
 “왜요?”
 “왜긴. 대 큐브 전담반의 꽃, 수도 방위팀장끼리 건설적인 대화의 시간을 좀 가져보면 어떨까 싶어서 하는 말이지.”
 은근한 눈빛으로 돌변한 김기만이 주혜민을 아래위로 훑으며 씩 웃었다. 미끌대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훔치는 꼴을 보자니 역겹기까지 했다.
 ‘젠장…욕 나오네.’
 
 마신 엘렉트라에 비견될 정도의 미모를 가진 주혜민.
 새까만 단발머리에 커다란 눈망울. 립스틱이 필요 없는 붉은 입술에 군복조차 감출 수 없는 육감적인 몸매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휘어잡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사실 그녀가 마음만 먹었으면 연예계 진출쯤은 껌이었다. 군인이 되기 전까지는 한 달에도 몇 번씩 길거리 캐스팅의 표적이 되곤 했었으니까.
 김기만 역시 그런 주혜민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 그녀를 향한 본능적인 욕망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지 남남이상의 적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는 점은 항상 기본 베이스였다.
 
 “엘리베이터가 늦네요. 전 그냥 계단으로 가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팽 소리가 나게 돌아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상구 출입문으로 사라져버렸다.
 쾅!
 문짝이 부서져라 있는 힘껏 닫아버린 건 덤이었다.
 
 “싸가지 없는 년…….”
 살벌한 표정으로 돌변한 김기만이 입술을 씹었다.
 땡!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대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김 팀장. 웬일이야, 여긴?”
 전날 건우의 테스트를 담당했던 바로 그 군의관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볼일 보십시오, 그럼.”
 괜히 엄한 짓 하다 걸린 꼬마 같은 표정의 김기만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대대장실.
 방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군의관이 서류파일 하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게.”
 막 외근을 준비하던 대대장이 마지못해 마주앉았다.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거야! 지금 여기저기 다니면서 입막음을 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닌데.’
 마뜩찮은 표정의 대대장은 팔짱을 끼며 무관심한 표정으로 군의관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좀 애매한 문제라서요. 이것 좀 봐 주시겠습니까?”
 그는 서류철 상단에 있던 데이터 용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뭔가 이게?”
 “어제 있었던 분기별 신규 채용 테스트에서 나온 특이 케이스 자료입니다.”
 “이리 줘봐.”
 그의 눈길은 곧바로 동기화 수치 쪽을 훑었다.
 “쓸 만하군.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그래프를 봐 주십시오. 단일 수치인 옥타곤 동기화 수치만 극단적으로 높은 특이 케이스입니다.”
 “뭐?”
 대대장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눈빛을 보내며 다시 데이터 용지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이잖아?’
 달랑 검은 막대만 한 줄 서 있는 그래프라니.
 지난 8년간 이런 데이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상하죠? 1.0이란 놀라운 수치만 놓고 본다면 바로 합격시키는 게 정상이지만 저 혼자 쉽게 결정을 내릴 사안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대대장역시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건 뭐 계륵도 이런 계륵이 없구만.’
 대 큐브 전담반이 개인플레이를 위주로 하는 집단이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트라이앵글이 됐든 옥타곤이 됐든 각각의 큐브에 필요한 동기화 수치는 한 가지 뿐일 테니까.
 그러나 반(班)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팀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해진 팀원의 수는 5명.
 그런데 어디에는 5명이 모두 투입되고 어디에는 한 명이 빠진 4명이 투입되는 상황이라면…팀워크나 작전수행능력 면에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도 아까운데…시작부터 1.0이라니.’
 대대장은 차마 용지를 내려놓지 못했다.
 “응?”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무렵, 그는 데이터 용지 상단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선명한 컬러 사진.
 날렵한 외모에 짙은 눈썹. 중상은 되 보이는 외모의 남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뭐지? 낯이 익은데?’
 “대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잠깐, 기다려봐.”
 대대장은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던 CCTV 스틸컷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자다!’
 손가락을 딱 튕긴 대대장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얼떨떨한 표정의 군의관을 덥석 끌어안았다.
 
 ***
 
 연락은 금세 이루어졌다.
 대대장이 지켜보는 앞에서 바로 수화기를 집어든 군의관.
 그는 재촉하는 대대장의 눈빛에 쫓겨 급하게 건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 8. 면접
 
 [여보세요.]
 심드렁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김건우 씨?”
 [맞는데요. 누구시죠?]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앞뒤 잘라먹고 다짜고짜 날린 합격 통보 멘트.
 하지만 건우는 금세 상대방의 정체를 눈치 챘다.
 [그런가요?]
 “아, 예. 기…기쁘시죠?”
 군의관은 예상 밖의 반응에 본능적으로 대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몸이 단 대대장은 눈빛과 손짓으로 더욱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마치 그 친구를 포섭 못할 경우 넌 오늘 최소 사망이라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풍기면서.
 “지난번엔 제가 좀 실례가 많았습니다. 김건우 씨의 데이터가 생소해서 말이죠. 그래서 방금 윗선의 컨펌을 받고 이렇게 바.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는 ‘바로’란 단어에 힘을 주면서 자신이 최대한 성심성의껏 건우를 배려했음을 포장했다.
 [흐음…….]
 그러나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태도.
 ‘이 새키, 뭐야!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안달인데 반응이 왜 이래? 건방지게!’
 군의관도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지금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을까요?”
 울컥하는 덩어리를 간신히 집어삼킨 군의관이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그를 유혹했다.
 [이번엔 확실한 거죠?]
 “물론입니다! 특별 전형으로 확실히 합격하셨습니다!”
 특별 전형?
 ‘합격이면 합격이지 특별 전형은 또 뭐란 말인가. 대학입시 전형도 아니고, 나 원 참.’
 건우는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
 “어감이 영 거시기 합니다? 마치 넌 사실 별 볼일 없지만 불쌍해서 봐준다는 식으로 들리는데…….”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김건우 씨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란 판단 하에 저희가 적극적으로 영입을 추진한 겁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살짝 누그러진 건우는 이쯤에서 저들이 내민 손을 잡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럼 몇 시까지 가면 됩니까?”
 “가, 감사합니다! 저…몇 시까지냐 하면…….”
 군의관이 대대장을 흘낏 쳐다봤다.
 대대장의 입모양은 ‘당장’이라고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지, 지금 바로요.”
 
 딸깍!
 “뭐라던가?”
 대대장은 군의관이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알았답니다.”
 “오겠대?”
 “예. 지금 출발한답니다.”
 “좋아, 잘했어!”
 상황을 알 길이 없는 군의관은 갑작스런 대대장의 태도변화에 어리둥절해했다.
 “수고했네. 자넨 그만 나가보게.”
 “예, 그럼…….”
 
 방금 전까지도 외근준비를 서두르던 대대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느긋한 자세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살다보니 이런 일발 역전의 카드를 손에 쥐는 순간도 오는군. 하하하!’
 사실 그의 속내는 간단했다.
 ‘오늘 만나게 될 그 예비 에이전트는 이미 민간인이 아니었다는 보도 자료를 내면 된다. 원래부터가 우리 쪽 요원이었던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쪽 팀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겠고. 어쨌든 언론 쪽의 설레발은 이로써 대충 마무리 지을 수 있겠어.’
 대대장은 반쯤 태운 담배를 비벼 끄며 초조하게 시계를 쳐다봤다.
 
 ***
 
 “엄마, 다녀올게요.”
 “그래, 잘 하고 오렴.”
 어머니는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셨다. 하지만 건우의 귀에는 두근대는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북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너무 걱정 마세요, 엄마. 모든 건 제가 원하는 대로, 어머니가 바라시는 대로 될 테니까요.’
 건우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집을 나섰다. 이내 낡은 빌라 건물이 등 뒤로 사라지고 넓은 대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건우의 눈빛은 어느새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건방진 놈들. 진즉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받아들였으면 좀 좋아. 한 번만 더 튕겨봐라, 내 제대로 뒤집어 엎어줄 테니까.’
 더 이상 그는 을의 위치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면 무슨 수를 쓰던 들어간다. 싫으면 붙잡고 늘어져도 빠이빠이고.’
 하찮은 능력으로 잘난 척 해봤자 저들은 건우의 실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갑의 위치.
 건우는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즐길 마음의 준비도 마쳤다.
 
 ‘서도 빌딩이라고 했지?’
 서초역에 도착한 건우는 지도 앱을 통해 다시 목적지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였나?’
 알고 보니 전날 테스트를 받았던 교육관 바로 옆 건물이었다.
 특별히 표식이 될 만한 간판 하나 없었지만 촌스런 녹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건물은 딱 봐도 국방부 소속임을 알 수 있었다.
 곧바로 안내데스크로 다가간 그는 신분증을 제시했다.
 “반갑습니다, 김건우 씨. 저쪽 휴게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금방 담당자분들이 내려오실 거예요.”
 키보드를 몇 번 또닥거린 하사계급의 데스크 요원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죠. 금방 오겠죠.’
 빙긋 웃어 보인 건우는 잘 꾸며진 휴게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런데 휴게실에는 이미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10여 미터 밖에서 이미 건우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저 사람들인가?’
 생각보다 빠른 대응에 건우는 얕은 휘파람을 불었다.
 어쩌면 별 문제 없이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지도…….
 “김건우 씨?”
 “그렇습니다만?”
 “반갑습니다. 나는 이곳 대 큐브 수도 방위대대장을 맡고 있는 이정욱 중령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반갑소. 대 큐브 전담반 수도 방위 1팀장, 박정환 소령이오.”
 처음 보는 영관급의 에이전트.
 이들이 풍기는 기운은 주혜민이나 정기철같은 위관급과는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동기화 수치 1.0이상부터 체내에 엘리시움 에너지를 갈무리할 수 있다던가?’
 건우는 전날 무료함을 달래려 찾아봤던 계급별 수치표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최대 3.0까지의 위관급을 넘어선 이들의 수치는 적어도 5.0은 상회한다는 소리였다.
 ‘소령이 최하 5.0이고 중령은 7.0부터라고 나와 있던 것 같은데. 보던 중 그래도 쓸 만해 보이는군.’
 그래봤자 떨거지 마신 수준에도 한참 미달이긴 하지만.
 가볍게 스캔을 마친 건우는 대대장 이정욱 중령이 내미는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저 소령이란 1팀장에게서는 살짝 거만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엉덩이만 들썩하더니 빳빳이 고개를 들고 그대로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내밀었던 손이 뻘쭘해진 순간이었다.
 ‘뭐지?’
 살짝 어이가 없다.
 그러고 보니 대대장이란 사람과 저 1팀장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분명 대대장이 계급에서나 직책에서나 상급자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1팀장이란 작자는 마치 자기가 이 자리에서 가장 윗사람인양 묘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우선 단정한 자세의 대대장과 비교되는 다리를 꼰 자세하며 홀로 소파 깊숙이 몸을 누이고 앉은 모양새는 아무리 봐도 무슨 사단장쯤 되는 작자의 행태처럼 보였다.
 ‘알만하군.’
 저 1팀장은 확실히 풍기는 기운이 영관급다웠다. 그에 비해 대대장은 잘 봐줘야 그 엘렉트라 짝퉁 여군과 비슷한 수준이랄까.
 듣기로 대 큐브 전담반은 엘리시움 수치에 비례하여 계급이 상승한다던데 뭔가 이상했다.
 
 사실 이곳 대대장은 행정직에 가까운 보직이었다.
 실전에 투입되는 팀장과 달리 부대 관리 및 상급 부대와의 유기적 관계유지가 주 업무다보니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실력이 최우선시 되는 이곳에서 그의 입지는 그리 탄탄하지 못했다. 특히 대대장의 능력치를 한참 상회하는 1팀장의 경우 노골적으로 그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 자리에 1팀장을 대동한 이유는 뭐란 말인가?
 사실 신입 팀원 영입건과 같은 사안은 대대장 고유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이 일 역시 1팀장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필요에 의해 대대장이 결정권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1팀장이 걸고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수가 있었다.
 말이 군대지 힘의 논리가 암암리에 작용하는 마계스러운 단체가 바로 이곳이었다.
 건우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급 못지않게 힘센 놈이 한 점 먹고 들어가는 일종의 약육강식의 세계. 바로 그런 단체가 대 큐브 전담반이었다.
 
 “김건우 씨, 운이 좋으셨습니다.”
 이정욱 대대장이 데이터 용지 한 장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네?”
 “원래 기본방침대로라면 김건우 씨는 합격이 힘든 케이스입니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엘리시움 수치는 총 네 가지의 감도 능력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기본이거든요.”
 종이를 받아든 건우는 데이터 표와 그래프를 유심히 훑었다.
 ‘아, 그거.’
 달랑 한 줄만 서있는 그래프.
 대대장이 한 말의 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1.0이란 동기화 수치는 쉽게 나올 수 있는 능력치가 아닌 관계로 이번에 한해서 특별히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역시나 선심 쓰듯 ‘널 어여삐 여겨 받아주마’란 식으로 퉁쳤다.
 물론 대대장입장에서는 이 말이 진심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매스컴 무마용으로 그가 필요했을 뿐 내심 불합격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잠깐만요, 대대장님.”
 내내 팔짱만 끼고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박정환이 손을 살짝 들며 끼어들었다.
 “이게 언제 결정 난 일입니까?”
 “아, 됐어. 박 팀장. 이러저러해도 일단 합격시켰으니까 넘어가자고.”
 “이 편중된 수치를 좀 보세요. 이걸 감안하시고 결정하신 겁니까? 너무 실무와는 동떨어진 탁상공론식 결정 아닙니까?”
 “그냥 그렇게 진행해.”
 “대대장님…….”
 한 발 걸친 태도로 일관하던 박정환의 목소리에 슬슬 노기가 어렸다.
 “아 그게 말이야…자세한 이유는 내가 따로 설명해줄 테니까. 그러니까…좀.”
 이정욱은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며 우물쭈물 거리기 시작했다.
 “나 원 참…….”
 비릿한 썩소를 머금은 박정환은 그제야 다시 뒤로 물러났다. 쪼그라들고 비굴해진 대대장의 모습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계급이 우선인 군대란 곳의 위계질서. 그런 단체 속에서 상급자를 맘대로 쥐고 흔들었다는 치졸한 성취감을 만끽하는 모습. 건우는 본능적으로 그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눈치 챘다.
 ‘새키…적당히 좀 하지.’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마계의 정점으로 살아온 그 세월동안 숱하게 보아온 모습이다. 그래도 여긴 마계가 아니잖아? 게다가 원리원칙이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군대란 곳이고. 그런 의미에서 박정환의 태도는 그리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참, 김건우 씨라고 했던가요?”
 “예…….”
 뭔가 위태로운 분위기.
 대대장은 살짝 긴장을 했는지 건우의 이름까지 되물었다. 건우마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운 때문인지 어영부영 묻어갈 수밖에 없었다.
 “군 미필자는 기본적으로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후 합류하는 게 정상이지만 그쪽의 경우는 이미 제대를 한 상태더군요. 그러니까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
 “당장 부여될 계급은 아마 준위계급이 될 겁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1.0급의 동기화 수치를 최대한 배려한 결정입니다. 어때요, 괜찮겠죠?”
 아쉬운 대로 만족할 수준이었다.
 내심 바라기는 애초에 소위계급이었지만 편중된 동기화 수치가 데이터 상에 나타나버렸으니.
 ‘형평성을 생각하면…뭐 그럭저럭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쾅!
 “듣자듣자 하니까…대대장님!”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를 깨며 박정환이 탁자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이건 아니죠. 절름발이 능력치에 고작 1.0의 수치뿐인 작자를 받아들이는 것도 기가 막힌 판국에 준위요? 군대 계급이 무슨 동네 꼬맹이들 딱지치깁니까? 딱지 따먹기냐고요!”
 “자, 자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도를 넘어선 박정환의 도발.
 불끈한 대대장은 잡아먹을 듯이 박정환을 노려봤다. 하지만 1팀장, 박정환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 눈빛을 그대로 맞받아치고 있었다.
 ‘오호라. 이거 재밌게 돌아가는데?’
 
 역시 구경거리 중에는 싸움구경이 최고였다.
 다 큰 어른들이 벌이는 유치한 헤게모니 다툼이라니. 절로 웃음이 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제 3자의 입장. 건우는 모른 척 담담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아 됐고. 백번 양보해도 준위는 턱도 없는 소립니다.”
 “그, 그럼 어쩌잔 말이야?”
 “거기, 김건우 씨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만…….”
 “그쪽에게 부여될 계급은 상황이 애매한 관계로 하사관 후보생과 하사의 중간단계가 어울릴 것 같소. 즉, 후보생 교육은 받지 않겠지만 약 한 달간의 견습 기간을 거친 후, 정식 하사로 임관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이의 없으시죠?”
 “아…저…….”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대대장이었다.
 분명 1분전에 부여하기로 한 계급이 준위였는데 단숨에 앉은자리에서 서너 계급을 강등시켜버리다니. 이건 대대장의 위신문제를 떠나서 건우를 보기가 괜히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한껏 불타오른 박정환의 타깃이 건우에게로 옮겨간 순간이었다.
 “김건우 씨, 여긴 일반 회사가 아닙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군대예요. 이렇게 경어를 쓰며 예의를 갖추는 것도 오늘까집니다. 그쪽은 겨우 하사계급에도 못 미치는 후보생급이고 난 이 부대의 제 1팀장이란 말이오.”
 박정환은 건우를 아예 하사관 후보생으로 낙점한 모양이었다.
 ‘미친놈. 지가 뭔데?’
 테스트 때부터 이미 건우는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결정했다. 그래서 낮추고 낮춰서 최대한 물러선 게 바로 소위계급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보여준 능력치도 정확히 거기에 일치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대대장이 제시한 준위계급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지만…….
 ‘뭐? 하사관? 아니, 하사관 후보생?’
 건우의 표정이 급격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저, 김건우 씨?”
 불안한 마음에 대대장이 건우를 조용히 불렀다.
 “내가 만약 거절하면?”
 “네?”
 “그쪽의 제안을 거절하면 난 잘난 당신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그 하사관 후보생이 아니란 말이 되죠. 맞습니까?”
 “아니 설마 거절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다급해진 대대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멍청한 1팀장 놈이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뻗대서 건우가 저 문으로 그냥 나가버리기라도 한다면…!
 ‘안 돼! 절대 그렇게 돼서는…….’
 “박 팀장. 그래도 하사관 후보생은 모양새가 좀 그렇군. 적어도 하사 계급은 부여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대대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박정환에게 숙이고 들어갔다.
 더구나 저 문제덩어리 예비 합격자도 뻣뻣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양 팔에 시한폭탄 두 개를 껴안고 있는 느낌. 대대장은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은 그에게 중재자 역할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명색이 최고 지휘관인데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자자, 그렇게 합시다. 내일부터 출근하는 걸로 하고 그리고 곧바로 하사로 임관하는 걸로…….”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요.”
 건우의 반응은 예상외로 완강했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두 사람은 설마 건우가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사실 이게 보통 기회인가.
 세상 어느 누가 대 큐브 전담반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쉽게 걷어 찰 수 있을까.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농담…이시죠?”
 “진담인데요.”
 “잘됐네요, 대대장님. 어차피 골치 아픈 사안이었는데 곱게 물러나준다니 그럼 된 거 아닙니까? 그럼 전 이만.”
 박정환은 가소롭다는 듯 건우를 흘낏 째려보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이보게! 그렇게 가 버리면 어떡하나! 박 팀장!”
 “잠깐만요, 대대장님.”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건우가 대대장의 팔을 붙들었다.
 “휴…뭡니까?”
 “아까 말씀하신 거 확실히 지킬 수 있습니까?”
 “뭘 말입니까?”
 “준위로 절 영입하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예? 그, 그건…보셨다시피 그렇게는 힘들 것 같은데요.”
 “제가 저 팀장님을 설득해보죠. 그러니까 대대장님만 확답을 주시면 됩니다. 확실한 거죠?”
 “1팀장이 합의만 해 준다면야…….”
 “그럼 좋습니다. 한 시간 후에 뵙죠.”
 
 ***
 
 “멍청한 놈. 어디서 되도 않게 상급자 행세야.”
 박정환은 오늘도 가볍게 대대장을 즈려밟았다는 성취감을 만끽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딸칵!
 
 서도 빌딩 5층.
 단출한 5층짜리 건물의 최상층부인 이곳에는 단 세 개의 방만 존재했다.
 하나는 대대장실, 그리고 거기에 딸린 자그마한 CP룸. 나머지 하나는 수도 방위 1팀장, 박정환의 방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CP룸의 크기는 지금보다 배는 컸었다. 그리고 대대장 전용의 회의실, 대 큐브 전담 대대 특유의 비서실까지 존재했었다.
 그러나 팀장급으로서는 거의 독보적인 박정환이 이곳 수도 방위 팀장으로 부임해 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스스로를 대대장과 동급, 아니 그 이상이라 믿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히 4층에 있는 쥐똥만한 1팀장실이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멋대로 밀어붙여서 현재의 방을 얻어낸 그는 실내 장식도 어찌나 화려하게 꾸몄는지 처음 들르는 사람이라면 어디가 대대장실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상관없어. 내년 진급심사 때 나는 바로 중령으로 진급한다! 그러면 저 머저리 대대장은 바로 아웃이지.’
 
 “그때까지만 아쉬운 대로 이 방을 쓰지 뭐.”
 한껏 흥이 오른 박정환은 여유롭게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허억!”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시나 했더니 이리로 오셨군요.”
 “너…너 뭐야! 네가 여길 어떻게?”
 박정환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삿대질을 해댔다.
 “뭐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널린 게 문인데.”
 건우였다.
 여유롭게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그는 활짝 열려있는 창문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말도 안 돼! 여긴 5층이잖아…그리고 이 건물은 모든 출입문이며 창문에 경보장치가 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어버버 대던 박정환은 그래도 명색이 소령급 팀장이었는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더불어 체내의 엘리시움 에너지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거 위험하지 않나? 민간인을 상대로 함부로 그런 위험한 걸 막 써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뭐라고?”
 “지금 당신 몸속에서 뱅뱅 돌고 있는 그 기운 말이야.”
 이 작자, 도대체 정체가 뭐지?
 박정환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눈앞에 앉아있는 사내는 끽해봐야 1.0급의 갓 입대한 소위나 진배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그만도 못한 반쪽짜리가 아니던가.
 그런데 무슨 수로 타인의 체내 에너지 순환까지 알아챌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건 나도 알 수 없는 건데…이 자식, 위험한 놈이다. 없애버려야 해!’
 박정환은 단숨에 건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불순분자. 잘만 몰고 가면 간첩의 누명정도는 충분히 씌울 수도 있다.
 대 큐브 전담반은 나름 비밀스런 특수기관이다. 이런 곳에 남몰래 잠입한 놈이라면 무슨 죄목을 갖다 붙이든 그건 박정환 맘 대로였다.
 쾅!
 스멀거리며 뻗어나간 박정환의 에너지가 방문을 거칠게 닫았다. 더불어 활짝 열려 있던 창문마저 스르륵 닫혀 버렸다.
 “넌 이제 독안에 든 쥐다. 건방지게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어디긴. 앞으로 내가 다닐 직장이지. 크크크…….”
 “이거 완전 또라이잖아? 반쪽짜리 후보생주제에!”
 “윗사람을 개떡으로 아는 너보단 낫다, 자식아.”
 “웃기는 놈이군. 됐다, 너 따위와 더 이상 말다툼을 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 어디서 백수처럼 찌그러져서 살다가 운 좋게 여기서 일 할 기회를 얻었나본데 그것도 오늘부로 쫑이야.”
 “말이 심하시네.”
 건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심할 것 없어. 사실이니까. 그리고 넌 이제 내 손에 걸린 이상 최소 반신불수다.”
 “으드득…건방지기까지?”
 건우의 어금니에서 맷돌 갈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그뿐일까? 네놈 가족은 평생 간첩의 누명을 쓰고 버러지같이 살게 될 거다. 내 장담하지. 흐하하하!”
 “이 새끼가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나!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찍소리 않고 평화롭게 지내온 지 어언 한 달.
 마황 디아블로의 현신, 김건우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푸화아악!
 건우의 몸에서 뻗어나간 기운이 단숨에 방안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살장 같은 분위기로 돌변한 팀장실. 일종의 환영이었다. 더불어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결계였다.
 ‘환영 따위, 내 전공은 아니지만 이딴 삼류 따라지 같은 놈에겐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먹히고도 남겠지.’
 “으헉! 뭐, 뭐냐!”
 역시나였다.
 갑작스런 환경변화에 박정환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그러나 고작 세 발짝이 다였다.
 너무나도 실감나게 느껴지는 환영의 결계. 덕분에 뾰족하기 그지없는 창날들로 빼곡히 들어찬 문짝은 박정환의 등짝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뭐 이런 지랄 같은…!”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지만 마치 용접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넌, 마수?”
 “빈곤한 상상력 하고는…정말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냐, 넌?”
 “그럼 누…누구?”
 휘이익!
 둥실 허공으로 떠오른 건우는 단숨에 박정환의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누구긴. 네놈 직장동료지.”
 바싹 달라붙은 건우는 박정환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
 “못 믿겠어?”
 “아, 아닙니다. 믿…….”
 “아냐, 넌 아직도 못 믿고 있어.”
 “믿는다니까요! 으아악!”
 순간 고양이 눈처럼 변해버린 건우의 눈동자.
 그는 마치 박정환과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웰컴 투 헬이다, 이 새끼야.”
 
 ***
 
 [간단한 부연 설명]
 
 대대장이 왜 건우에게 준위란 계급을 제안했는가.
 -작중 소위 계급이 부여되는 동기화 수치 1.0부터는 체내에 엘리시움 에너지를 갈무리 할 수 있는 능력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0.9까지의 상사 계급과는 전혀 다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테스트를 거친 결과, 건우는 오직 한 가지의 수치(옥타곤 수치)만이 1.0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대대장은 형평성을 고려하여 곧바로 소위로 받기는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시움 에너지에 반응만 할 수 있는 부사관급과는 또 전혀 다르죠.
 건우의 상태는 이들 입장에서 상당히 애매합니다.
 결국 그 순간 내린 판단이 그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준위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소위에 준하는 능력자란 명목으로 준위 계급을 부여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군 경력이 어마어마한 일선 군부대의 준위와 건우의 대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없는 계급을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말 그대로 소위에 준하는 ‘준 소위’란 개념으로 입대하라는 뜻입니다.
 작중 흐름상 만들어진 계급이니 너무 계급체계에 연연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여기는 평범한 군부대가 아닙니다. 어디 감히 소령 따위가 중령한테 저렇게 깝칠 수 있겠습니까.
 작중에 등장하는 부대는 힘 센 놈이 먹고 들어가는 세렝게티 초원입니다.
 
 ***
 
 마치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박정환은 척추를 타고 오르는 짜르르한 소름에 진저리를 쳤다.
 ‘살아야 돼! 살아야 돼!’
 그는 본능적인 공포에 오직 그 생각만 되뇌었다.
 그러나 코앞에서 뱀을 맞닥뜨린 생쥐 신세일 뿐이었다. 박정환은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마비상태에 빠져들었다.
 “흐읍……!”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건우의 눈동자.
 뾰족한 동공의 고양이 눈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흰자위 하나 없는 새까만 동공으로.
 평범한 인간이라면 영겁의 세월을 산다 해도 한번을 볼까 말까 한 마신 디아블로의 눈이었다.
 공포의 제왕. 디아블로.
 박정환은 그 무지막지한 두려움에 영혼마저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실제로 격한 진동을 보였다.
 결국 극한의 공포는 그의 영혼과 육체를 갈라놓는 괴리현상을 발생시켰다.
 ‘빙고!’
 이때다 싶은 건우가 허물 벗듯 너덜대는 그의 영혼을 쑥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육과 영이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박정환의 육체는 마치 생기 없는 마네킹처럼 굳어버렸다.
 오직 희끄무레한 영혼만이 건우에게 붙들린 채 끌려나왔다.
 ‘육체에 손상이 가면 나중에 피곤해지니까.’
 건우는 덜렁대며 매달려 있는 박정환의 영혼에 마기를 주입했다. 바람 빠진 풍선에 입김을 불어넣는 것과 비슷했다.
 흐릿한 유령처럼 보이던 박정환이 점점 실제 육신과 흡사하게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완성.”
 건우는 한손에 틀어쥐고 있던 멱살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박정환은 바닥으로 털푸덕 떨어져버렸다.
 그는 자신의 육과 영이 분리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즐겨볼까?”
 “뭐?”
 “부담 없이 네 놈의 팔다리를 찢어주겠다는 말씀이지.”
 “헛소리 하ㅈ…끄아아악!”
 건우는 오로지 완력으로 그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쥐어짰다. 뒤틀린 근육과 관절이 뼈마디를 튕겨냈다. 처절한 비명이 온 방안에 울려 퍼졌다.
 “더럽게 시끄럽네.”
 뿌드드득!
 건우는 닭다리 뜯어내듯 그의 팔다리를 뽑아버렸다.
 “이게 방금 전까지 네놈 몸뚱이에 붙어있던 팔뚝이다.”
 그는 박정환이 보는 앞에서 주저 없이 손가락 서너 개를 물어뜯어버렸다.
 “악! 으아악! 그만해!”
 “그러지 뭐. 퉤!”
 건우는 씹다만 껌이 된 손가락들을 뱉어버렸다. 그리고 양 손에 쥐고 있던 팔다리마저 방구석으로 휙 집어던졌다.
 “자, 그럼 다음은 어디를 뽑아줄까?”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시커먼 동공이 반달을 그렸다. 오히려 그 모습이 더욱더 박정환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또?’
 이제 살아도 산목숨이 아닌 박정환이었지만 본능적인 생존욕구는 그의 몸을 다시 일으켰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밖에 남지 않은 비대칭의 몸뚱이였지만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으억…흐억……!”
 그는 피바다를 허우적대며 뒤로 또 뒤로 도망쳤다.
 “끄으윽…….”
 피거품을 부글대며 창날이 가득 박힌 문짝을 쥐어뜯었다.
 “거 아프기만 하다. 안 열릴걸?”
 저벅…저벅…저벅…….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건우가 점점 다가왔다.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야!”
 그러나 더 이상의 대꾸조차 없었다. 박정환의 발치에 이른 건우는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쭉 늘어난 건우의 팔은 그대로 박정환의 복부를 직격했다.
 ‘젠장, 아파도 너무 아프잖아!’
 주먹질인줄 알았던 건우의 손이 날카롭게 그의 뱃가죽을 찢어버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온갖 내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죽여, 날 차라리 죽여!’
 돌아버릴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사람 목숨이 이렇게 질겼나? 이정도 했으면 벌써 죽었어야 정상이 아닐까?’
 상황은 지랄 맞기 그지없었지만 쉽게 죽을 수도 없었다. 미칠 듯한 고통만 점점 커져갈 뿐 이상하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다.
 도망치는 건 이미 글러버린 몸. 이젠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
 이제 믿을 거라곤 저 악마 같은 예비 합격자뿐.
 박정환은 남은 한 팔로 엉금엉금 기어와서 건우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제발 살려달라고, 아니 죽일 거면 빨리 죽여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하나만 묻자.”
 “네, 네! 말씀하십시오!”
 “내 계급이 어떻게 되지?”
 “준…아니 대, 대위십니다!”
 “시답잖은 아부는. 똑바로 말 안해?”
 “준위십니다.”
 “그러냐? 그런데 아까는 왜 그랬어?”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봅니다! 형님은 분명 준위십니다!”
 “그렇지? 진즉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냐.”
 “…….”
 “뭐야, 그 표정은?”
 “아닙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이실 겁니까?”
 “죽이긴 왜 죽여. 오해 하지 마. 나, 사람 함부로 죽이는 그런 놈 아니다.”
 ‘지랄…고맙다, 그래.’
 이래 살아 무엇 할까 싶었지만 내심 안도하는 박정환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지금 이 방에서 우리는 뭘 하고 있었지?”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난 여기에 온 적이 없어. 너, 날 여기서 봤어?”
 “아뇨, 전혀요! 전 여기에 혼자 있습니다. 예! 저는 아무 일도 없이 이 방에 혼자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 똑똑하네.”
 건우는 그제야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후아악!
 돌풍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박정환의 고막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다시 육체 속으로 빨려들어간 박정환. 방금 전까지 피바다를 허우적대던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느새 핏자국 하나, 땀방울 하나 없는 멀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살장 같던 그의 방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한 원래의 형태로 복구되었다.
 “잊지 마.”
 건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창가로 다가서며 한마디 덧붙였다.
 “참, 당신 상급자한테 너무 막 하대? 휴게실에 있던 그분, 당신네 대대장 아니었나?”
 “맞습니다.”
 “그럼 제대로 예우를 해 줘야지. 명색이 군대인데 안 그래?”
 “…….”
 ‘그러는 너는 한낱 준위 주제에 소령한테 이따위로 구냐?’
 기가 찬 박정환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참았다.
 “대답.”
 “예, 맞습니다!”
 “그래, 지켜보겠어. 나 먼저 갈 테니까 5분 후에 휴게실에서 보자. 늦지 마.”
 “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대장님.”
 정확히 한 시간 만이었다.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던 건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얘기는 잘 됐습니까?”
 “뭐 그럭저럭요. 박 팀장님이 의외로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더군요.”
 “그래요?”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후 이정욱 대대장은 내내 휴게실을 지켰다.
 딱히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오늘의 주요 업무 및 목표는 매스컴에 나도는 소문의 무마였다. 그를 위한 최선의 방책이 바로 건우의 영입.
 부디 건우가 좋은 소식을 안고 돌아오길 간절히 빌 뿐이었다.
 다행히 한 시간여 만에 돌아온 건우는 희소식을 안겨주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화장실에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적어도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기에는 그게 정상이었으니까.
 당연히 화장실 창문을 통해 건물 벽을 타고 올랐던 건우와 바로 옆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던 박정환,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육체의 대화는 알 길이 없었다.
 명색이 마황 디아블로가 펼친 결계였으니까.
 아마 4층, 아니 박정환의 방 바로 앞이었다 해도 숨소리 하나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잘 됐다니 다행이긴 한데…이 친구는 왜 안 오는 거지? 바로 올라갔나?’
 살짝 불안했다. 건우가 전한 희소식에 한결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건우의 말만 믿고 컨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발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긴 하겠지만 말이다.
 “저…확실한 거죠?”
 건우는 대답대신 미소를 띠며 복도 쪽을 가리켰다.
 “저기 오시는군요. 직접 물어보시죠.”
 “충성! 대대장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부리나케 달려온 박정환은 절도 있는 자세로 이정욱을 향해 경례를 올려붙였다.
 “어? 어, 그래. 충성.”
 “대대장님, 대대장님의 혜안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혜…뭐?”
 “제가 경솔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 계신 김건우 씨는 우리 부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재라고 생각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준위 계급으로의 영입은 정말 탁월하신 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대대장님의 의견에 적극 찬성합니다. 아니, 무조건 동의합니다!”
 “…….”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이정욱은 얼빠진 표정으로 박정환을 쳐다볼 뿐 대답할 타이밍마저 놓쳐버렸다.
 “대대장님, 보시다시피 박 팀장님도 저를 흔쾌히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최종적으로 대대장님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될 것 같네요.”
 건우는 환하게 웃으며 이정욱을 바라봤다.
 “아, 예. 물론, 당연히…….”
 “그럼 됐군요. 전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는 겁니까?”
 “아, 그건…….”
 일단 상부에 보고가 들어가야 했다. 기본적인 서류작업과 간단한 신분 조회 등 형식적인 절차가 남아있었다. 물론 시간이 좀 소요될 뿐 큰 문제는 없었다.
 “대대장님, 뭘 뜸들이십니까. 어차피 여기서 난 결정이 확정이나 마찬가진데요. 빨리 처리하시죠. 여기 김건우 씨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습니까?”
 지옥구경을 한 번 하고 나더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보다.
 박정환은 쓸데없는 설레발까지 치면서 대대장을 윽박질렀다.
 “박 팀장님.”
 건우는 남몰래 싸늘한 눈빛으로 박정환을 노려봤다.
 “아, 아닙니다! 그렇죠, 명색이 군대인데 절차에 맞게 진행하셔야죠. 맞습니다, 아하하…….”
 “흠, 흠! 나도 미적대고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긴 하겠지만 거의 합격하신 거나 진배없어요. 그리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대 큐브 북부 사령부 쪽으로 발령이 날겁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늦어도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연락드리겠습니다.”
 “북부 사령부요?”
 “네, 대 큐브 관련 최상위 부대는 북부와 남부 두 사령부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경기, 강원, 충청도를 커버하는 곳이 북부 사령부입니다. 나머지 전라, 경상, 제주 쪽은 남부 사령부 관할이구요.”
 “그렇군요. 쉽진 않겠지만 웬만하면 북부, 그 중에서도 이쪽 수도방위 부대에서 복무하고 싶네요. 뭐 그냥 제 희망사항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건우는 넌지시 압박을 넣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 하나. 이정욱 역시 그가 이 부대에 배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 그렇게 만들 거고.’
 이유는 뻔했다.
 그래야만 매스컴의 뭇매를 피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건우가 대 큐브 전담반 수도 방위팀이 아니라면 그 CCTV에 찍힌 사진을 무마할 방법이 없다.
 ‘2팀이냐 3팀이냐 만 결정하면 될 뿐. 무조건 너는 우리 부대다.’
 이정욱은 어찌어찌 잘 마무리된 건우의 영입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하시는 근무지로 배속되도록 힘을 써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소기의 목적을 성취한 건우와 이정욱은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살펴 가십시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박정환이 군기 바짝 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저 인간이 아까부터 왜 저러지? 갑자기 돌았나?’
 갑작스런 박정환의 태도 변화에 이정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예, 박 팀장님도 수고하세요.”
 건우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 9. 출근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어떻게 됐어? 잘 된 거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아가 튕기듯 달려들며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건우가 되물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침을 꿀꺽 삼키시며 건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설마?”
 “당연한 거 아니야? 엄마, 저 합격했습니다.”
 “하아…정말 다행이구나. 잘 됐다, 잘 됐어.”
 어머니는 잔뜩 굳어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리시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의외네? 이거 파티라도 해야겠는걸?”
 덩달아 신이 난 윤아도 손뼉을 치며 방방 뛰어다녔다.
 “파티는 무슨. 그것보다 어이, 꼬맹이. 너 오라버니가 안 될 거라고 초쳤었지?”
 “내가? 내가 언제. 난 당연히 오빠가 합격할거라고 믿었어. 헤헤, 정말이야.”
 “말은 잘한다.”
 “엄마, 오늘 우리 외식해요! 이제 오빠 돈 많이 벌 거니까 오늘 오빠 용돈으로 우리 맛난 거 실컷 먹어요, 엄마.”
 “얘는.”
 “아니에요, 엄마. 오늘은 제가 쏠게요.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시면 말씀만 하세요.”
 세 가족은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
 
 연락은 생각보다 일찍 왔다. 월요일은 돼야 줄 것처럼 말하더니 토요일 오전에 바로 합격통지서가 도착한 것이다.
 더불어 도착한 소포에는 군복 한 벌이 들어있었다. 대 큐브 전담 부대용 의전 예복이었다.
 ‘이걸 입으라고?’
 동봉된 간략한 지침서에는 월요일 출근 시간 및 엄수해야 할 사항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역시 군대는 군대구나.’
 아마 약식으로나마 계급장 수여식 따위가 준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준위 김건우]
 반짝거리는 노란 다이아몬드 계급장과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준위라…….’
 원사계급을 뛰어넘는 준사관 장교이자 부사관의 최고봉.
 보통 나이 지긋한 연대장급의 노친네들이 주로 앉아있는 계급장이다.
 그런 계급을 고작 나이 서른의 건우가 엘리시움 감도 테스트 한 번으로 올라섰다.
 ‘하하, 아버지 어떡하죠? 이거 벌써 아버지보다 제가 계급 하나가 높네요. 우격다짐으로 받아낸 거긴 하지만…그래도 기뻐해주실 거죠?’
 건우는 거실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전혀 다른 마계란 세상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경험은 있지만 여기는 또 다른 세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현세의 대한민국이란 땅에는 그만의 법과 규칙이 있다.
 대놓고 악마노릇하며 세상을 뒤엎을 게 아니라면 그 테두리 안에서 능력을 꽃피워야 한다.
 ‘힘 좀 세다고 얼치기처럼 개 망나니짓을 하며 날뛰는 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다. 세상은 언제나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무섭도록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으니까. 제아무리 마황이고 마황 할애비라도 세상모두를 적으로 돌려세우고 살 수는 없는 법.’
 이제부터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로 결심 한 순간, 미래는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을지니.
 ‘이제 나는 매년 일계급씩 진급한다. 우선 목표는 그거다! 30대 중반에 별을 다는 거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히죽대는 건우를 두 모녀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마지막 백수시절의 주말은 다른 날보다 빨리 흘러갔다.
 그리고 맞이한 대망의 월요일.
 대 큐브 전담반 수도 방위대대로의 첫 출근 날이다.
 안면 있는 안내 데스크에게 눈인사를 건넨 건우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삑!
 접촉식 출입카드로 허리높이의 게이트를 통과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 게이트 바로 앞, 화장실까지가 그가 갈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정해진 규범 안에서 선을 넘어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언제나 방법은 존재한다. 바로 지금처럼.
 카드를 다시 목에 건 건우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구획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5층, 대대장실.
 그곳에서 건우의 공식적인 첫 임무인 계급장 수여식이 있을 예정이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5층에 도달했다.
 스르륵!
 “충성! 어서 오십시오.”
 “아…….”
 낯이 익은 누군가가 건우에게 경례를 했다.
 바로 지난 주 있었던 테스트 담당관 중 하나였던 중사계급의 사내였다.
 대대장실까지 건우를 가이드 할 목적으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색하군요.”
 “이제 익숙해지셔야지 말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저쪽인가요?”
 “네, 이리로.”
 문 앞에 이른 담당관은 간단한 예식순서를 일러주면서 건우의 복장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일단 들어가시면서 장내를 향해 경례를 하시고…소파 앞 선에 서셔서 대대장님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짧은 듯 긴 듯 애매한 설명을 약 2, 3분가량 잇던 담당관은 ‘이제 문을 열겠습니다’라는 신호를 눈짓으로 보내왔다.
 ‘콜, 갑시다!’
 건우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실내에는 대대장을 비롯해서 3개 팀장, 그리고 부대대장, 부관 및 정보장교와 정훈장교 등이 도열해 있었다.
 아직 초면인 부대대장 이하 장교들은 일반 장교들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실전과는 무관했기에 엘리시움 능력치와는 상관이 없었다. 어쨌든 오늘 이후 다시 마주칠 일은 극히 드문 사람들이란 사실임에는 확실했다.
 ‘그렇다면 저 눈에 익은 3인방과 얽히고설키며 지내야한다는 소리겠지?’
 건우는 좌측에 열 지어 선 박정환, 김기만, 주혜민을 슥 훑었다.
 최대한 건우와 시선을 피하려는 두 남자, 그리고 ‘네가 왜 여길?’이란 눈으로 갸우뚱하는 여자 하나.
 ‘앞으로 재미있겠구만. 흐흐흐…….’
 
 식순에 따라 간략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실내에는 대대장과 3개 팀장, 그리고 건우만이 남았다.
 “그래, 박 팀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사람은 김 준위와 모두 초면이지?”
 능구렁이 같은 대대장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양 건우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난 달, 포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건우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려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김 준위는 앞으로 3팀 소속으로 움직이게 된다.”
 “네?”
 안면은 있다지만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사이.
 주혜민으로서는 크게 반길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3팀은 5명 정원이 풀로 찬 상태가 아니던가.
 “3팀은 당분간 6명 팀원체제로 운영될 거야. 우리 김 준위가 근래 들어 들어온 신입 중에서는 능력이 출중한 편이니까 주 팀장은 복 받았다 생각하고.”
 박정환과 김기만은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저 악마 같은 놈이 자신의 팀으로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꿈에라도 생각하기 싫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주혜민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절할 명분도 그럴 이유도 특별히 없었다. 까라면 까는 수밖에.
 “축하해, 주 팀장.”
 “화이팅! 힘내.”
 전에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박정환과 김기만이 주혜민을 다독였다.
 ‘이 인간들이 왜 이러지?’
 
 대대장실에서의 일정이 끝난 후, 건우는 주혜민을 따라 3층으로 이동했다.
 3층은 2팀과 3팀이 함께 쓰고 있었다. 덕분에 김기만도 본의 아니게 엘리베이터에 동승하게 되었다. 역시나 그는 내내 엘리베이터 벽만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아주 죽을 맛이지?’
 건우의 귀에는 김기만의 널뛰는 심장소리가 난타공연처럼 신나게 울려댔다. 더불어 줄줄 흐르는 땀 냄새까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땡!
 느릿느릿 움직이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문 앞에 코를 박고 있던 김기만은 꽁지 빠지게 사라져버렸다.
 “바쁜 척은…….”
 주혜민은 그의 모든 행동이 맘에 안 드는지 입을 삐죽거렸다.
 ‘후후, 바쁜 척이 아니라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이랍니다.’
 남몰래 미소를 짓던 건우와 주혜민의 시선이 부딪쳤다. 알 수 없는 건우의 표정.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주 팀장님, 우리 구면이죠?”
 “그런 것 같군요. 뭐, 어쨌든 반갑습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김 준위.”
 내막도 모르고 크게 부딪친 일도 없었기에 그녀는 쿨 하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 들어갑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경어는 생략합니다. 명색이 군대잖아요? 오케이?”
 “물론이죠. 당연한걸…….”
 
 “모두 주목! 오늘 새로 들어온 김건우 준위를 소개하겠다.”
 3팀 전용 사무실로 들어선 주혜민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손뼉을 딱딱 부딪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슨 일인지 옹기종기 모여 있던 네 명의 팀원들.
 그들은 일제히 출입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두 뭐하고 있었어?”
 “하하, 점심내기 사다리 한판 하고 있었지 말입니다. 팀장님도 끼워드릴까요?”
 “뭐야, 오늘도 외식하게?”
 “월요일부터 우울하게 짬밥 먹을 일 있습니까? 소화불량 걸립니다. 짬밥은 짬날 때 먹는 게 짬밥이죠. 하하!”
 이민호가 되도 않는 농담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됐고, 오늘은 내가 쏜다. 신입 에이전트도 들어왔고 인사도 할 겸 그렇게 하자구.”
 “오올!”
 이민호가 사다리가 그려진 종이를 황급히 구겨버리며 히죽거렸다.
 “자, 모두 회의실로 이동.”
 “넵.”
 “예이!”
 
 사무실과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둔 회의실에 3팀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럼 먼저 김 준위가 자기소개를 하는 걸로 시작할까?”
 “네, 알겠습니다. 충성!”
 건우는 자유롭게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있는 팀원들을 향해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렸다.
 “반갑습니다, 팀원 여러분. 저는 오늘부로 이곳 대 큐브 전담반 수도 방위 3팀으로 배속된 준위, 김건우라고 합니다.”
 “준위?”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준위라면 대 큐브 전담반 내에서는 극히 드문, 아니 처음 보는 계급장이었다.
 “아, 조용. 김 준위는 특별 케이스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 할 테니까 일단, 김 준위 계속해.”
 “예, 저는 올해 나이 서른. 얼마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편모와 여동생을 건사하게 된 가장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이번에 좋은 기회를 얻어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얕은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 계신 팀원들께 작으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박수.”
 짝짝짝…….
 “그럼 한 명씩 일어나서 계급과 이름, 나이 등을 간단하게 소개해 볼까?”
 “저부터 하겠습니다.”
 맨 앞에 앉아있던 정기철이 손을 들며 일어났다.
 
 
 # 10. 출동
 
 “반갑네, 김 준위. 난 정기철이라고 해. 보다시피 소위고. 나이는 김 준위보다 다섯 살 어리지만 군대니까 이해해줘. 앞으로 잘 지내보자구.”
 “좋아, 다음.”
 “반갑습니다, 준위님. 전 중사, 이민호라고 합니다…….”
 간단한 인사와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3팀의 구성원은 건우를 제외하고 총 5명이었다.
 우선 팀장인 주혜민 중위.
 수도 방위 대대의 유일한 여성 팀장이었다.
 비교적 올곧은 성품이나 꼭지가 돌면 물불 안 가리는 다혈질이기도 하다. 올해 나이는 25세. 팀 내에서 정기철과 함께 가장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부 팀장, 정기철 소위.
 주혜민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대했지만 작년 주혜민이 진급하면서 그 역시 자연스럽게 부 팀장으로 승진했다. 주혜민에 비해 상당히 유한 성품이라 팀원들을 다독이며 잘 이끄는 타입이다. 팀의 밸런스를 잘 조율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중사 계급의 이민호와 김하성이 있다.
 하지만 같은 중사라도 호봉수가 높은 이민호가 선임이었다. 나이 역시 한 살 많았다. 그는 약간 껄렁거리긴 하지만 나름 분위기 메이커역할도 도맡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위 세 명은 모두 동갑이었다.
 그리고 차분한 성격의 김하성은 팀 내에서 궂은일을 묵묵히 소화해 내는 성실한 타입으로 외유내강형의 군인이었다.
 ‘그리고 저 막내 하사, 조성하. 후훗.’
 갓 석 달된 신참 조성하는 알고 보니 윤아와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조 하사, 혹시 김윤아라고 알아?”
 건우는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김…윤아요? 글쎄요, 연예인인가요?”
 “아, 신라대 출신이라길래. 내 동생도 거기 다니거든. 올해 2학년인데, 하도 휘젓고 다니는 녀석이라 혹시 알까싶어서 말이지.”
 “아! 신라대 김윤아요? 알죠! 설마 윤아 씨의 오빠가 김 준위님이십니까?”
 “이야, 아는 사이였어? 이것 참 세상 좁아.”
 “아뇨, 안다기보다는…음, 윤아씨가 좀 유명하죠. 학교에서.”
 “왜?”
 “헤헤, 예쁘잖아요. 인문대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의외였다. 윤아가 학내에서 그렇게 인기가 좋을 줄이야.
 요즘 애들 취향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우가 보기에는 그냥 족제비 사촌처럼 보일 뿐인데 말이다.
 “그래? 걔 남자친구 있어?”
 “글쎄요. 뭐, 쫓아다니는 남자는 여럿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거기까지는 잘…….”
 
 “팀장님, 오늘은 부대찌개로 할까요?”
 앞장서서 걷던 정기철이 허름한 가게 하나를 가리켰다.
 포스가 느껴지는 낡은 간판. 맛집스런 분위기를 한껏 풍기는 식당이었다.
 “그러자.”
 흡족한 표정의 주혜민이 고개를 끄덕일 찰나,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지원팀, 정미선 상사.
 ‘제길, 밥 먹을 시간도 안 주는 거야?’
 지원팀에서 연락이 올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정 소위, 잠깐만 기다려.”
 주혜민은 막 가게 문턱을 넘어서려던 정기철을 불러 세웠다.
 
 ***
 
 역시나 지원팀으로부터 날아온 소식은 긴급출동이란 메시지였다.
 ‘언제는 긴급 아니었나?’
 황급히 복귀한 3팀은 투덜거릴 틈도 없이 곧바로 차량에 탑승했다.
 운전석에는 정기철이 앉았다.
 조수석에 앉은 주혜민은 간단한 브리핑 자료를 뒤적이느라 정신없었다.
 나머지 팀원들 역시 급하게 챙겨온 장비를 점검하느라 분주하기만 했다.
 “김 준위님, 기본 장비는 보다시피 이렇게 구성되어있습니다.”
 김하성이 밀봉된 팩 몇 개를 건네며 빠르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무기로는 특수 합금강의 장검 한 자루와 단검, 그리고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그런데 탄창에는 총알이 딱 두 발 뿐이었다.
 “이거 장식용인가?”
 “아…사실 그건 절체절명의 순간에 쓰실 물건입니다. 어차피 큐브 안에서는 쓰지도 못할 물건입니다만 개방 시에 영 가망이 없다 판단될 때 뭐 그렇게 쓰라고 지급된 물품이죠.”
 알만했다.
 마수며 환수 따위에게 찢겨나가는 고통을 당하느니 깔끔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배려.
 ‘고맙기도 하지…….’
 방어구는 최신형 방탄조끼, 같은 재질의 견갑과 팔목 보호대등이 있었다.
 ‘생각보다 장비가 단출하네. 이 친구들 마냥 거저먹는 직업은 아닌가보군. 까딱하다가는 황천길 건너는 건 한순간이겠는데?’
 건우는 새삼 이들의 직업정신이며 용맹스러움에 살짝 놀랐다.
 
 “기철아, 출발해.”
 “넵!”
 “모두 주목! 간단하게 현재 상황을 전파하겠다.”
 주혜민은 요약된 브리핑자료를 빠르게 읊기 시작했다.
 “현재 용산 인근에 큐브가 발생했다. 발생 단계는 트라이앵글. 보고시각은 11시 정각. 발생장소가 인구 밀집지역이다 보니 현재도 주민 대피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뭐 그건 경찰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현재 시각 12시 25분. 도착 예정시각은 음…….”
 주혜민은 차창 밖과 내비게이션을 번갈아 쳐다봤다.
 “대략 12시 50분이다. 큐브 진입 시까지 최대 지연 잡아도 13시면 진입완료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이 22시간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지. 하지만 트라이앵글이 어떤 덴지는 다들 잘 알지?”
 “넵!”
 “지저분한 놈들이니까 좀 더 유의하고 작전에 임하도록. 아, 그리고…….”
 주혜민은 페이퍼를 접으며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던 건우를 쳐다봤다.
 “김 준위는 이번 작전에서 빠진다. 이유는 알고 있지?”
 “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일부러 따돌리는 건 아니니까. 괜히 근처에서 얼쩡댔다가는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안전거리 유지하고 대기하도록.”
 서운할 것까지야.
 저들이 알고 있는 건우의 능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배려였다. 오히려 끌고 들어간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트라이앵글이라면 유계라고 했던가?’
 유계라면 건우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계층 구조상 무한계의 바로 윗단계 세상인 유계.
 유계는 총 7단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무한계 바로위에 있는 세상이었다.
 마치 피라미드와도 흡사한 계층구조. 세상의 형태는 딱 그런 모양새였다.
 우선 가장 아래 위치한 무한계.
 무한계는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의 세상이었다. 건우조차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 더구나 큐브란 이름의 크러스트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현세의 인류에겐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 위로는 유계, 환계, 마계, 현세와 영계가 하나로 연결된 세계, 천계, 신계가 차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 현재 큐브가 출몰하는 세상은 유계를 포함한 총 네 개였다.
 트라이앵글의 유계, 테트라곤의 환계, 옥타곤의 마계, 마지막으로 헥사곤의 천계가 바로 그것들이다.
 트라이앵글과 테트라곤은 비교적 수월한 상대라서 보통 한 개의 팀이 출동하곤 한다. 옥타곤의 경우는 통상 두 개의 팀이 연합하여 처리했다. 하지만 마지막 헥사곤만은 이들의 처리 능력을 넘어서는 경우가 종종 있는지라 특별한 팀이 도맡고 있었다.
 
 우선 유계를 표현할 수 있는 느낌으로는 끈적함과 질척함이다.
 기본적인 오욕칠정의 감정과 본능만이 가득한 원시의 세계.
 건우는 한때 이들을 끌어들여 제 9군단으로 활용하려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대로 실패했지. 내 살다 살다 그렇게 무뇌아적인 놈들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군. 무슨 말이 통해야 군단 비슷한 거라도 만들지, 쩝.’
 유계의 요수들은 적아의 구분도 없고 동족이며 피붙이의 개념도 안 통했다.
 오로지 욕망에 사로잡힌 순수한 욕구덩어리들.
 그런 놈들로 가득 찬 세상이 유계였다.
 
 “팀장님, 이제 동작대교 남단에 진입합니다!”
 지원차량과 한창 통화중이던 주혜민에게 정기철이 소리쳤다.
 목적지는 금강 아산 병원 옆, 이촌 지하차도 상단. 이제 저 다리만 건너면 바로였다.
 3팀의 지프차와 지원 차량이 텅 빈 다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쿠타타타!
 다리 중앙을 지날 무렵, 머리 위로 육군 공격 항공 여단 소속의 AH-1S 코브라 헬기 편대가 날아갔다.
 “많이도 모여들었네.”
 동작대교 북단에는 2기갑 여단 소속의 K1 전차 2개 중대도 눈에 띄었다. 대신 상대적으로 보병의 숫자는 적었다.
 지난 포항사태의 교훈이었다.
 현재 이곳에 모여든 보병 1개 연대는 경찰병력과 함께 민간인 통제에 주력할 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주 병력은 기갑부대가 맡고 있었다.
 “역시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큐브는 달라도 뭔가 다르군요.”
 거의 전쟁 통을 방불케 하는 병력집중에 건우는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면 나가 서너 마리쯤은 순식간에 통구이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무슨 말씀을. 무조건 큐브 안에서 끝낼 겁니다. 일단 큐브란 우리 밖으로 놈들이 튀어나오면 피해규모는 수백 수천 배로 커질 테니까요.”
 이민호가 히죽거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래, 한 번 잘 해봐. 죽지 말고.’
 일단 이번 작전에서 제외된 건우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들을 응원할 뿐이었다.
 
 동작대교를 막 건넌 3팀의 차량은 강변북로 바로 위에서 정차했다.
 이제부터는 엘리시움이란 에너지의 위험구역이었다. 그리고 2차 폭발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위험지역이기도 했다.
 주혜민을 포함한 에이전트들은 재빨리 차량에서 하차했다.
 “김 준위!”
 “네.”
 “김 준위는 차량 옆에서 대기한다. 나머지 팀원들은 바로 큐브로 진입하자. 남은 작전 시간은 정확히 22시간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퇴각여유 시간을 고려하면 약 21시간 내에 적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 건투를 빈다. 자, 구호 시작! 우리는!”
 “악마다!”
 “악마 잡는!”
 “악마다!”
 “좋아, 가자!”
 
 ‘멋진데?’
 능력치는 둘째 치고 이들의 활활 타오르는 전의만은 확실히 높이 평가할 만했다.
 ‘무사히들 돌아오라고. 만약 놈들이 튀어나오면…후후, 내가 깔끔하게 처리 해 줄 테니까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마음 같아서는 따라 나서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오랜만의 유계 나들이. 건우에게는 즐거운 취미생활의 일환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반쪽짜리 능력자 행세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재미를 위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사양이다.
 ‘언젠가는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오겠지. 유계든 환계든 제집 드나들 듯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우선은 그랬다.
 
 ***
 
 늘 그렇듯 정기철이 가장 먼저 결계를 통과했다.
 출렁이는 젤리 같은 느낌의 결계.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정기철은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익숙한 자세로 빠르게 주변을 탐색해나갔다.
 다행히 시작부터 특별한 징후는 없었다. 다만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괴한 풍경만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을 뿐.
 뿌연 안개, 그리고 푹푹 빠지는 늪지대의 연속.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수생식물과 습한 기운은 눅눅했고 찝찝했으며 불쾌했다. 그냥 기분 나쁜 분위기였다.
 ‘딱 유계스러움의 표본이구나.’
 희뿌연 대기는 은은한 적색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요수들이 출몰하는 유계의 분위기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직 별일 없지?”
 맨 마지막으로 큐브에 진입한 주혜민이 팀원들을 쭉 훑었다.
 “예, 아직 정확한 적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써는 별다른 위험요소는 안 보입니다.”
 “좋아, 천천히 이동하자구. 이열로 맞춰서 전진이다.”
 “옙!”
 
 
 # 11. 트라이앵글
 
 그렇게 3팀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한가해진 건우는 미처 마무리 못한 일을 매듭지으러 다시 차에 올랐다.
 ‘자, 먹던 밥이나 마저 먹어볼까나.’
 그는 차창에 놓인 콜라 캔을 집어 들며 입맛을 다셨다.
 
 차 안에는 팀원들이 급하게 먹다가 남겨둔 음식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전부 편의점표 간편 조리 음식들이었다.
 삼각 김밥이며 소시지등의 반 이상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건우는 김밥 몇 개를 주워들었다.
 ‘맛있겠는데?’
 우연찮게 은박을 뜯은 김밥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참치김밥이었다.
 창가에 기대선 그는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즐겼다.
 ‘보자, 지원차량은 어디로 사라졌지?’
 그러고 보니 내내 뒤따르던 검은 스타렉스가 언제부턴지 보이질 않았다.
 사실 공격 팀의 서포트가 주 임무인 그 차량은 벌써 동작대교 남단까지 내려가 있었다. 큐브로 진입하기 직전까지가 그들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이제 홀로 남아버린 건우의 지프차.
 주변에 전투부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만 망망대해위의 외로운 섬과 같았다.
 이따금씩 선회비행을 펼치는 헬기편대를 제외하면 고요한 적막만 감돌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
 생사를 건 전투를 목전에 둔 전장의 분위기는 싸늘했고 또 무거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장된 시간.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꽤 늦네. 일단 한숨 자야겠다.’
 
 ***
 
 한여름의 태양은 생각보다 일찍 떠올랐다.
 건우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햇빛을 피해 다녔다. 그간 백수생활에 길들여진 탓이었다.
 해 떴다고 일어나는 건 그에게 아직 익숙지 않은 생활패턴이다.
 ‘몇 시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전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면서 주변의 움직임이 살짝 분주해졌다. 덩달아 분위기에 휩쓸린 건우도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벌써 7시라…….’
 느낌이 안 좋다.
 앞으로 약 한 시간 남았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팀원들이 저 큐브 내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도 한계에 다다른다.’
 뒷골이 쎄하다.
 ‘불안한데…….’
 분명히 지난번 포천에서는 이렇게까지 늦지 않았다. 아니, 반나절도 안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유계 따위의 요수 놈들이 그렇게 강했던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유계와 마계는 엄연한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당연히 개개의 개체가 가진 힘을 비교해 봐도 그 차이는 극명하다.
 아무리 잘난 요수라 해도 나가를 능가할 만 한 놈은 그리 흔치 않다. 있다 해도 이렇게 잡는데 시간차가 극명한 놈이 존재할까?
 없다. 그렇게 센 놈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당연히 대 큐브 전담반에서도 이런 정보쯤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지난 8년간 타격 팀이며 지원팀이 마냥 놀고먹지는 않았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이들도 지난번 포천 옥타곤 때와는 달리 한 개의 팀만 출동했으리라.
 ‘그런데 왜……?’
 저쪽 세상에 빠삭한 건우로서도 의아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현재 흘러간 시간이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하다!’
 번거로운 놈들.
 ‘이거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고 뭐하는 거야? 하여튼 손 많이 가는 것들은 귀찮아.’
 아직 결계 때문에 내부 상황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천하의 마황이 구원자로 나서야 할 타이밍인가?’
 악의 정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포지션이다.
 뭐 어때? 직장동료잖아?
 애들은 착해보였다. 그거면 됐다.
 
 이제 2차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시간은 충분하다.
 
 ***
 
 약 19시간 전.
 3팀은 사냥감을 찾아 한 시간이 넘도록 이동 중이었다.
 질척대는 늪지대 탓에 이동속도는 평소보다 상당히 느렸다. 덕분에 아직 수색반경은 그리 넓지가 못했다.
 다시 30분가량 시간이 흐른 후.
 ‘정지!’
 선두에 선 정기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정기철은 전방을 향해 손짓했다.
 흐릿한 안개 탓에 정확한 거리는 측정하기 어려웠다. 대충 100미터 정도였다.
 야트막한 둔덕을 이룬 그곳에 붉은 기운이 가득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사방은 어두컴컴한 해질녘의 느낌과 흡사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 붉은 기운은 홀로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붉은 기운. 느낌이 안 좋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형태가 선명해졌다. 희뿌연 안개가 옅어지며 타원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귀 둥지다!’
 왜 하필……!
 3팀원들의 입에서 동시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식귀(食鬼).
 놈들은 트라이앵글에서 출몰하는 잡다한 요수 중에서 탑 쓰리를 다투는 최강의 요수다. 아니 요수‘들’이다.
 놈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약 3년 전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넓디넓은 포도밭 한가운데 떡 하니 생성된 트라이앵글. 식귀는 그 속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단일 개체로는 평범한 요수만도 못한 식귀.
 하지만 놈들은 한두 놈이 아니었다. 수백, 아니 수천단위를 넘어서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숫자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바로 저 식귀 둥지를 통해서.
 듣기로 당시에 미국 공격 팀은 세 개의 팀이 힘을 합쳐 큐브로 진입했다고 한다. 인적 물적 자원이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풍부한 나라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큐브는 폭발했다.
 이어진 수순은 큐브를 에워싸고 있던 주 방위군의 패전이었다. 트라이앵글이라고 우습게봤던 주 방위군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3년 전 그날,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 새크라멘토는 지도상에서 지워져버렸다.
 
 이후로 놈들은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타 마수들이 골백번도 더 출몰하던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랬던 놈들이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거대 메트로폴리스인 서울 한복판에…….
 
 “팀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이 나오기 전에 저 터널을 파괴해야 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차원터널을 무슨 수로 부수나!”
 식귀 둥지는 일종의 차원게이트였다.
 두세 명이 겨우 지날 법한 크기의 자그마한 규모.
 실제로 저 징글맞은 터널이 차원의 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차원을 관통하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그 많은 놈들이 저 좁은 문짝 안에서 바글댄다는 건 세 살 먹은 꼬마도 안 믿을 소리였니까.
 그리고 지랄 맞은 사실 또 하나.
 저 식귀 터널을 포함한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차원터널도 절대 파괴가 불가능하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
 저 터널 같은 둥지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놈들을 모조리 섬멸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해법이었다.
 모든 걸 쏟아낸 차원터널이 ‘하얗게 불태웠어’를 외치며 백기를 흔들게 만들어야 한다. 에너지를 다 한 차원터널이 스스로 붕괴하는 그 순간, 작전완료다.
 
 “팀장님, 저기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끄드드드!
 “타이밍 한 번 죽이네. 전원 전투대형으로!”
 주혜민의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팀원들이 흩어졌다.
 ‘나오는 족족 처리해야 한다. 살아남은 놈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순간, 두 겹, 세 겹의 포위망이 금세 형성될 터. 방어망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더구나 우리가 패배한다면…….’
 큐브 밖에서 대기 중인 부대로 놈들의 공세를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봐야한다.
 ‘무조건 막는다! 무조건…!’
 주혜민의 충혈 된 두 눈에서 살기어린 안광이 폭사했다.
 “나옵니다!”
 까드드득…….
 흐릿한 붉은 터널을 뚫고 첫 번째 식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갈색의 피부. 깡마른 팔뚝에는 힘줄이 불뚝불뚝 솟아있었다.
 놈들의 가죽은 핏기 하나 없는 나무줄기 같았다. 거칠고 투박하기가 코끼리가죽 저리가라다. 톱으로 썰면 그나마 흠집 좀 가려나?
 놈은 목각인형처럼 기괴한 꺾임을 반복하고 있었다.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티, 팀장님…?”
 차원터널을 부채꼴로 포위하고 있던 팀원 중 하나가 재촉하듯 주혜민을 찾았다.
 “아직 대기!”
 고작 팔뚝 하나 썰겠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처음 보는 식귀의 모습.
 ‘어디 보자꾸나. 어떤 몰골의 놈인지. 어서 나와 봐!’
 끄어어엉!
 “흐윽!”
 인세에는 없는 괴음에 조성하가 헛바람을 삼키며 주춤거렸다.
 하지만 누구하나 그를 탓하지 않았다.
 이런 미친 게이트를 코앞에 두고도 용감하게 맞서는 신참이 어디 흔할까. 맞선임 김하성은 힘껏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몰골 예술이네.”
 반쯤 튀어나온 식귀를 보며 이민호가 이죽거렸다.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도 저 정도는 아닐 듯싶었다.
 뼈와 가죽이 하나가 된 듯 말라비틀어진 모습. 딱 외소한 성인 남성 정도의 키에 벌거벗은 몸.
 ‘역겨운 새끼들…!’
 진물이 줄줄 흐르는 눈구멍에는 안구가 없었다. 당연히 시력은 제로.
 식귀는 오직 후각과 청각에 의지해서 먹잇감을 찾아다녔다.
 영원한 기아에 고통 받는 식귀.
 놈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아귀의 현신과도 같았다.
 
 첫 번째 식귀가 튀어나온 걸 신호로 시뻘건 차원터널이 미친 듯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정신 바짝 차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옙!”
 
 ***
 
 “잠깐, 거기 정지!”
 한가로이 발걸음을 옮기던 건우를 누군가가 제지했다.
 “뭡니까?”
 상대는 일선 보병 소대, 소대장이었다.
 그의 뒤편으로는 두세 개쯤 되어 보이는 분대원들이 줄줄이 뒤따르고 있었다.
 “아, 준위님이십니까? 웬 얼빠진 사병 녀석인 줄 알았습니다.”
 소대장은 비교적 동안의 건우가 어울리지 않게 준위계급장을 달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쨌든 물러나세요. 보시다시피 큐브 반경 200미터 내로는 접근 금지입니다.”
 “저, 대 큐브 전담반입니다만.”
 건우는 자신의 어깨에 붙어있는 부대 비표를 가리키며 씩 웃어보였다.
 “아, 그,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어제 공격 팀이 진입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전 히든카듭니다, 소대장님. 이제 시간도 다 됐고 버저비터 타임이잖습니까? 주인공이 등장하기에 딱 적당한 시점이죠.”
 “……?”
 “그럼, 이만.”
 건우는 껄렁한 자세로 경례하는 시늉을 하곤 다시 발길을 돌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소대장과 그 부하들은 멀거니 건우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
 
 첫 전투 이후 약 19시간 경과.
 
 엉망이 된 몰골의 주혜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3년 전, 미국에서 발생했던 트라이앵글이 2차 폭발까지 이어졌는지.’
 우리나라에 비해 몇 배나 더 잘 갖추어진 미국의 시스템으로도 끝내 감당해내지 못했던 바로 그 이유.
 그건 저 썩을 차원터널 때문이었다. 무려 세 번에 이르는 식귀 무리를 토해내고도 여전히 건재한 저 놈 탓이었다.
 그간 흔히 봐 왔던 차원터널과는 그 궤가 전혀 다른 변종 터널.
 ‘시발…욕 나오네.’
 차원터널은 보통 한 번의 공격 이후 스스로 소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저 뻘건 놈은 벌써 세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멀쩡한 모양새로 우뚝 서 있었다.
 이제 2차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시간.
 
 “아따, 많이도 잡았습니다. 이정도 했으면 일 계급 특진 정도는 시켜줘야 정상인데 말입니다. 하하하!”
 이민호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띄워보겠다고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렇지? 우리 이놈들 귀라도 전부 잘라갈까? 증거가 필요할 거 아냐?”
 정기철까지 맞장구치며 슬금슬금 주혜민의 눈치를 살폈다.
 “자식들. 여유 넘치는데? 일단 살고 보자구. 자, 일어날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혜민의 시선은 여전히 산처럼 쌓인 식귀의 시체더미를 떠나지 못했다.
 잡을 만큼 잡았다. 웬만한 큐브였다면 이미 예전에 상황종료가 됐어야 정상인데…….
 “휴, 3연타 공격은 보다보다 첨봅니다.”
 “중요한 건 아직 끝날 기약이 없다는 거겠죠.”
 피로에 지친 막내 2인방은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타박할 수 없었다. 그게 정상이었으니까.
 
 놈들의 첫 공격은 백여 마리로 시작됐다.
 얼핏 어마어마한 숫자 같지만 이제 와서 보면 고작 애피타이저 급 수준이었다.
 이후 3시간 만에 이어진 300마리의 습격. 하마터면 그때 조성하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이미 2차 공격만으로 차원터널 주변은 시체의 벽으로 둘러싸여버렸다.
 그리고 약 열두 시간 전에 있었던 세 번째 공격.
 이젠 적의 숫자를 세는 것도 무의미했다. 대충 가늠해본 숫자만 천 마리에 육박했다. 어쩌면 훨씬 많을지도…….
 그저 그렇게 짐작만 할 뿐이었다.
 무려 세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간신히 놈들을 제압했다.
 이제 한계다.
 지치고 상처 입은 대원들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그리고 저 차원터널은 아직도 멀쩡하게 서 있었다.
 횟수를 더해갈수록 점점 늘어만 가는 식귀의 공격.
 그저 믿을 거라고는 24시간이 땡 치는 그 순간이 어서 오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2차 폭발을 맞게 되면 저 차원터널도 동시에 소멸할 테니까.
 ‘예상컨대 이대로 곱게 사라져줄 놈은 절대 아니야.’
 피곤에 지친 주혜민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붉은 터널을 노려봤다.
 분명!
 ‘분명히 저 식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 상황을 보건데 적어도 한 번의 공격은 더 남았으리라.’
 
 ***
 
 철벅, 철벅, 철벅…….
 고요한 큐브 속을 한명의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방금 단독으로 유유히 결계 안으로 들어온 건우였다.
 ‘크러스트 따위가 유계 흉내를 아주 제대로 내고 있구나.’
 하나의 행성을 유계로 비유하면 고작 소행성 조각만한 크기의 크러스트. 하지만 모양새만큼은 흔하디흔한 유계의 어느 늪지대를 빼다 박았다.
 “색깔 봐라. 토 나오게 생겼네, 진짜.”
 그는 질척대는 군화바닥을 나무둥치에 아무렇게나 슥슥 닦아냈다.
 건우의 진입시점에 이미 2차 폭발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남은 시간은 채 한 시간이 안 된다. 더 이상 능력을 감추고 자시고 할 여유는 없다.
 건우는 마른 흙을 탈탈 털어내며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시간도 없고,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최대한 빨리 팀원들을 찾아야 한다!’
 건우는 유영하듯 허공을 가르며 늪지대를 가로질렀다.
 
 ***
 
 “팀장님, 어떡하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곧 2차 폭발인데. 그만 여기서 발을 빼야 할 듯싶습니다.”
 “조금만 더 있어보자. 아직 시간 있잖아.”
 “잠깐만요!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끄드드드…….
 거의 열두시간만이었다.
 저 식귀의 뼈를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
 ‘그래, 왜 안 오나 했다!’
 주혜민은 이를 부드득 갈며 벌떡 일어났다.
 “전 팀원, 전투대형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다! 싹 쓸어버리고 오늘 찐하게 회식 한번하자, 내 어제 못 쏜 거 배로 쳐서 확실하게 쏜다!”
 
 ***
 
 ‘저 소리는?’
 건우는 이미 주혜민과 팀원들이 웅성대는 목소리를 감지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기괴한 소음이 섞여 있었다. 바로 이성도 지각도 없는 유계 특유의 요수들이 내지르는 포효였다.
 ‘한두 놈이 내는 소리가 아닌데?’
 빛살처럼 날아가던 건우는 벌써 양손에 시뻘건 불덩이를 틀어쥐고 있었다.
 수가 많으면 그에 걸맞게 양으로 받아쳐주면 될 일. 어느새 어른 머리통 만해진 불덩이들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보인다!’
 기괴한 수생식물사이로 산을 이룬 시체더미가 건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팀원들은 어디 있는 거지? 그리고 적의 정체는?
 안력을 끌어올린 건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
 
 대폭발이었다.
 마치 차원터널 자체가 터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팔방으로 팝콘 튀듯 쏟아져 나오는 식귀들.
 방어선이고 뭐고 그딴 걸 유지할 여력 따윈 없었다.
 십수 미터나 치솟아 오른 식귀들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단숨에 천 단위를 넘어선 식귀 무리는 끝도 없이 밀려나왔다.
 “팀장님, 피해야합니다! 더 이상은 무리예요!”
 “제길…!”
 정기철은 힘으로 주혜민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엘리시움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주혜민이라 해도 일격에 너덧 마리가 한계였다. 초당 수백 마리씩 토해내는 차원터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인 용력이었다.
 결국 주혜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 무조건 뒤로 빠진다!”
 그러나 퇴각명령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암담했다.
 아직 2차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이상.
 마지막 10분 무렵, 결계가 흐트러지는 순간까지는 꼼짝없이 이 큐브 안에 갇힌 신세였다. 그때까지는 바늘 틈 만 한 개구멍도 없었다.
 ‘그래도 별 수 없잖아! 남은 시간동안 몇 명이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해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계의 빈틈이 생길 때까지 도망만 다녀야 할 신세라니.’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팀원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건 김기만 사촌이나 할 짓이었다. 이런 상황에 고집을 부리는 건 지휘관으로서 자격미달이다.
 결국 주혜민은 억울함과 분함에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그렇게 달려서 어디 밥 벌어먹고 살겠습니까?”
 구원의 음성이었다.
 돌풍을 몰고 날아든 건우는 순식간에 팀원들 머리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김 준위? 뭐야, 나…날고 있어!’
 하지만 위기에 몰린 이들은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왜 건우가 여기를 들어왔는지, 또 유계의 큐브 속에서 어떻게 건우가 멀쩡하게 살아있는지. 그런 근본적인 의문은 떠올릴 틈도 없었다.
 그저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다들 거기서서 죽을 작정인가? 뛰어! 뛰어!”
 잠시 주춤하던 팀원들은 건우의 호통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거기, 정 소위님, 팀장님 좀 챙기시죠?”
 “네? 아…예! 팀장님, 이리로!”
 정기철의 말투는 어느새 반말에서 경어체로 바뀌어있었다.
 
 찰나의 빈틈.
 잠시 멈칫한 사이 식귀 무리가 3팀의 꽁무니를 물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헤이! 거기가 아니다! 네놈들 상대는 이쪽이야!”
 건우는 3팀 뒤쪽에 바짝 붙어버린 수백 마리의 식귀들을 향해 불덩이를 날렸다.
 거대한 폭음이 귓가를 때렸다. 천지가 진동하듯 온 큐브가 휘청거렸다.
 특별할 것도 없는 디아블로의 통상적인 일격.
 하지만 그 일격에 3팀을 뒤쫓던 모든 식귀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가공할 파괴력이다. 감히 고폭탄이나 네이팜탄 따위로는 흉내도 못 낼 힘이었다.
 덕분에 일단 한고비는 넘겼다. 적어도 일순간에 3팀이 전멸할 위기는 버텨냈다.
 하지만 식귀 무리의 움직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감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욕망의 화신들.
 식귀들은 건우의 폭발적인 무력시위 앞에서도 어떠한 두려움이나 공포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로지 목표물만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놈들의 표적은 여전히 죽어라고 달아나고 있는 다섯 명의 인간들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건우는 애초에 목표물에서 제외된 듯했다.
 “그렇다면 이쪽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뭐.”
 일차 공격으로 약간의 공간을 확보한 건우는 3팀과 식귀 무리사이에 살포시 내려섰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식귀의 이목을 끄는 가장 좋은 수단은 냄새와 소리.
 이왕 미끼 역을 자처한 마당에 제대로 끌어 모아 보기로 작정했다.
 후우욱!
 잿가루가 된 식귀의 사체더미에서 모락모락 치솟던 연기가 건우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주면…….’
 생뚱맞게 고기 굽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냄새의 근원인 뿌연 연기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건우의 주위를 맴돌았다.
 곧이어 수천 마리의 식귀들이 동시에 건우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냄새 좋냐? 어서 와라, 시간 끌지 말고.”
 
 “김 준위님이 괜찮을까요?”
 한참을 내달리던 조성하가 멈칫하며 돌아섰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단계는 넘어섰어. 김 준위를 믿어볼 수밖에.”
 또다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주혜민이 읊조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폭발적인 공격력. 괜히 근처에서 얼쩡대봤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김건우란 자, 도대체 정체가 뭐지? 듣기로 잘 쳐줘봐야 소위급이라고 했는데. 분명히 그렇게 들었는데…저건 마치 말로만 듣던 [헥사곤 전담반]의 전투모습 같잖아.’
 
 건우는 두 발의 불덩이를 모두 폭발시켰다.
 첫 발에 300마리, 두 번째 공격에 500마리.
 웬만한 적이라면 순식간에 패닉에 빠져 전열이 흐트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식귀란 놈들은 애초에 두려움이란 감정자체를 모르는 놈들이었다.
 게다가 남은 숫자는 죽은 놈들의 다섯 배도 넘었다. 그리고 지금도 차원터널을 통해 무수한 식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놈들의 적은 차원이 다른 등급외의 존재, 마신중의 마신 디아블로였다.
 “좋아, 아주 좋아!”
 지옥불 공격은 이쯤이면 됐다.
 “지금부터 쇼타임이다, 흐아압!”
 곧게 내뻗은 건우의 양 손에서 2미터 길이의 화염검이 솟아올랐다. 시뻘건 불길이 야생마처럼 펄떡였다.
 
 “허억…저건 또 뭐야!”
 다섯 명의 3팀원들은 비명 같은 소리를 동시에 내질렀다.
 화염돌풍!
 족히 10미터는 넘을 듯한 길이의 거대한 붉은 돌풍이 휘몰아쳤다.
 하나가 아니었다. 줄줄이 생성된 화염돌풍은 벌써 다섯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무작위로 식귀 무리를 헤집었다. 불바다를 만들고 있었다.
 바로 건우의 화염검이 만들어낸 작품들이었다.
 
 “비켜봐, 새끼들아!”
 건우는 근접한 십여 마리의 식귀를 향해 화염검을 휘둘렀다. 순간 4, 5미터나 쭉 늘어난 검이 일격에 놈들의 허리를 절단 냈다.
 “오케이, 하나 더!”
 양 팔을 교차시킨 건우는 마치 가위질하듯 두 개의 검을 휘둘렀다.
 푸화아악!
 거대한 풍압과 화염이 뒤섞였다. 용트림하는 불길은 매섭게 타올랐다. 고막을 울리는 소닉붐은 근처에 있던 식귀 십여 마리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마치 드래곤 브레스와도 흡사한 불바람.
 거칠게 휘몰아치며 덩치를 키우던 불바람은 일순간 회오리를 형성했다. 순식간에 또 하나의 화염돌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냄새 좋지? 다 모여들어라, 전부 다 모여라! 고기타는 향기와 함께 행복한 최후를 맞아라, 으하하하!”
 건우는 화염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돌풍들을 조종했다. 십여 개의 화염돌풍들은 무자비하게 늪지대를 쓸고 다녔다.
 돌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찢기고 타버린 식귀의 잔해만 흩날릴 뿐 무엇 하나 남아나는 게 없었다. 초단위로 줄어드는 놈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이었다.
 ‘남은 시간, 이제 15분. 슬슬 결판을 낼 때가 왔군.’
 건우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 순간 식귀를 몰살 중이던 돌풍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주 팀장님! 팀원들과 같이 이쪽으로 좀 오시죠!”
 
 남은 식귀 잔당은 이제 백여 마리. 그나마 팔다리가 떨어져나가고 심하게 그을린 환자몰골의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밀리고 튕겨서 여기저기 흩어졌던 찌끄러기들. 꼬락서니에 걸맞게 움직임도 굼떴다.
 “남은 놈들 좀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아…그, 그래.”
 “준위님, 어디 가시게요?”
 어느새 건우의 광팬이 된 조성하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저거.”
 건우의 손가락을 따라 3팀원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예? 차원터널이요? 뭘 어쩌시려고…….”
 “박살내야지. 그래야 2차 폭발을 막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무슨 수로…….”
 “다들 조용! 일단 김 준위가 시키는 대로 하자. 우리는 남은 식귀들을 모두 처리하는 거야. 시간 없어. 이제 10분도 안 남았다. 한 마리라도 남겨뒀다가는 전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오호…….
 맘에 든다. 저 여자.
 상황파악능력도 저 정도면 준수한 편이고.
 ‘생긴 건 누굴 닮은 관계로 영 별로지만 저 정도면 쓸 만한 지휘관이지.’
 저 잘난 맛에 자존심만 세울 줄 아는 멍청이들과는 확실히 뭔가가 달랐다.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수고 좀 해줘, 김 준위.”
 “예.”
 
 붉은 게이트는 더 이상 식귀를 토해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즉, 아직도 쥐어짜낼 식귀놈들이 더 남아있다는 소리.
 “징글맞은 문짝 같으니. 적당히 좀 하자.”
 건우는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5분.
 사방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결계가 곧 무너질 조짐이다.
 그 시간 안에 남은 식귀들을 팀원들이 잘 처리해야 할 텐데.
 건우의 걱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코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차원터널 따위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건우 자신이 책임진 이상 놈은 곧 박살 날 운명이었다.
 철벅, 철벅, 철벅…….
 터널 앞에 이른 건우는 놈을 유심히 살폈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자꾸 나타나는 걸까.
 ‘뭐,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때까지 나타나는 족족 없애주면 되는 거고.’
 건우는 주저 없이 터널 안쪽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평범한 에이전트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짓이다. 아니, 해서도 안 되는 짓이었다.
 절대적인 미지의 영역. 지난 8년간, 보고된 바에 의하면 그랬다.
 이따금씩 출몰하는 차원터널로 진입한 능력자는 하나같이 행방불명이었다.
 말이 좋아 행방불명이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눅눅하구만.’
 터널 안쪽의 첫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눅눅함과 찝찝함. 유계의 크러스트가 가진 분위기를 확실하게 촉감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쪽 세상에 나타났으면 깔끔하게 새 단장을 해야겠지? 확실하게 건조시켜주마.’
 건우는 손끝에서부터 화염을 끌어올렸다. 태양의 표층온도에 버금가는 고온의 불길이 순식간에 일었다.
 끼아아아!
 바로 반응이 왔다.
 터널의 비명.
 놈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저항했다.
 ‘그래, 역시 네놈이 이 트라이앵글의 핵심이었구나.’
 식귀 따위는 그저 놈이 배설하다시피 한 부산물에 불과했다.
 “사라져라앗!”
 쿠콰콰콰!
 건우의 어깨를 휘감으며 화염기둥이 솟구쳤다.
 수십 가닥의 화염은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다발을 이루었다.
 곧바로 터널내부를 향해 빨려 들어간 화염다발. 사람 키의 두세 배에 이르는 거대한 다발은 터널의 내부와 외부를 통째로 뒤덮었다.
 초고온의 불길에 휩싸인 터널은 마지막 발광을 하며 뒤틀렸다. 그리고 점점 오그라들었다. 축축한 느낌의 내부의 그 무언가도 함께 오그라들었다.
 놈은 오그라드는 와중에도 끝없이 저항하며 팽창을 시도했다.
 이제 2차 폭발까지 남은시간은 단 2분.
 “새끼, 끈질기게도 버티네.”
 살짝 조급해진 건우는 나머지 한 손에도 불기둥을 일으켰다.
 “어디 이거도 먹어봐라!”
 그는 불길에 휩싸인 오른손마저 터널 안쪽으로 쑥 집어넣어버렸다. 두 번째 불기둥은 첫 번째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급격히 수축하는 터널.
 펄떡이며 저항하던 터널이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쭉쭉 오그라들었다.
 얼마 후 건우의 팔뚝을 감싼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소멸해버렸다.
 “오케이, 상황 종료.”
 건우는 임무완수를 확신하며 두 팔을 쑥 뽑아냈다.
 거의 주먹만 하게 작아진 터널의 흔적.
 건우는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두 손으로 남은 잔해를 콱 움켜쥐었다.
 징글징글하게 버티던 터널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이제 끝난 건가?”
 건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뱉으며 팀원들 쪽을 돌아봤다.
 저쪽도 거의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남아있는 식귀는 이제 단 십여 마리.
 푸들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결계의 틈새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비친다.
 
 이제 폭발까지 남은 시간, 약 40초.
 
 “빨리 없애! 민호, 뭐하고 있어!”
 “잠깐만요, 저도 바쁘거든요?”
 정기철의 닦달에 이민호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능숙한 칼질만큼은 일품이었다.
 “아앗, 김 중사님, 이 놈 좀 잡아주십시오!”
 “기다렷!”
 조성하의 등 뒤로 치고 들어오던 식귀를 향해 김하성이 검을 집어던졌다.
 “몇 시야? 제길…이제 도망칠 시간도 없어! 폭발하면 우린 여기서 바로 골로 가는 거야, 힘내!”
 목숨이 경각에 달한 3팀은 죽을힘을 다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으악! 큰일 났습니다, 이제 5초 남았어요!”
 “걱정 마세요! 다 잡았습니다!”
 “나도 완료!”
 간발의 차이로 전원이 맡고 있던 적을 모두 처리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리를 스쳤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전투 중이던 3팀은 혹시라도 남아있을 적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설마 더는 없겠지…….
 “아…저기 한 마리가!”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더구나 거리마저 애매했다.
 휑한 벌판 한가운데서 팔다리가 너덜대는 식귀 한 마리가 넘어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퍼덕대고 있었다. 거리상 누구도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없는 위치였다.
 ‘망했다!’
 팀원들은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찢어지는 파공성과 함께 건우가 짓쳐들었다.
 
 ***
 
 암적색의 큐브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구난 전차를 제외한 스무 대의 전차는 일제히 포신을 돌렸다. 포탄 장전은 이미 마친 상태다.
 내내 선회비행 중이던 헬기 편대도 공격대형을 갖췄다.
 미지의 적을 향한 이들의 시선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곧 폭발한다! 일제 사격 준비!]
 전차 중대장의 무전이 각 전차장의 귓가를 때렸다.
 “후우…….”
 난생 처음 큐브를 보는 2중대 1소대장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과연 어떤 놈이 나타날까.
 바짝 긴장한 그의 오른손은 방아쇠를 움켜쥔 포수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어? 뭐지?”
 조종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1소대장은 화들짝 놀라며 조종수를 바라봤다.
 “보십시오. 큐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미 폭발할 시간은 넘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라지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브리핑 때 들은 큐브의 폭발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러네. 저건 폭발이 아니야! 사라지고 있어!’
 트라이앵글의 폭발.
 듣기로 핏빛의 붉은 기운이 폭사하며 거대한 폭음을 동반한 후폭풍이 발생한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놈의 행태는 아무리 봐도 너무 얌전했다.
 더구나 이미 한계 시간도 10여 초나 지난 상황.
 ‘저건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이잖아?’
 [전 중대,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때맞춰 중대장의 무전이 다시 날아들었다.
 
 우려했던 상황은 급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폭발시한 직전, 결국 소멸의 길을 걷기 시작한 트라이앵글.
 아직 얼떨떨한 분위기였지만 방어 부대는 일단 경계모드로 다시 전환했다.
 
 큐브의 소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공간에 나타난 여섯 명의 사람들. 바로 대 큐브 전담반 수도 방위 3팀원들이었다.
 몰골은 너저분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낄낄대며 농담 따먹기 중인 인원도 보였다.
 비교적 밝은 분위기였다. 잔뜩 긴장해 있는 기갑차량과 연대 병력, 헬기 편대가 무색해질 만큼.
 이들은 마치 피크닉이라도 나온 사람들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기 중인 차량 쪽으로 향했다. 중사계급의 누군가는 한가롭게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차량에 탑승한 대 큐브 전담반 팀은 바로 시동을 걸고 현장을 떴다. 속도를 높인 지프차는 금세 동작대교 너머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
 
 “김 준위님, 아까 그 차원터널을 어떻게 처리하신 겁니까?”
 조성하가 건우 곁에 바싹 다가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표정에는 존경심과 경외감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조금만 과장을 덧붙이면 선임이 아닌 아이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어떡하긴, 뭘.”
 괜히 쑥스러워진 건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 왜이러실까. 저도 봤습니다. 거 있잖습니까, 차원터널 안쪽까지 손을 쑥 집어넣으신 거 말입니다.”
 마주보고 앉아있던 이민호까지 호들갑을 떨어댔다.
 “진짭니까?”
 내내 차분하게 검을 손질 중이던 김하성마저 깜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진짜지, 그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야, 이민호. 넌 하라는 전투는 안하고 남 싸우는 거 구경만 했냐?”
 조수석의 주혜민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민호를 타박했다.
 “아하하, 제가 좀 능력이 되다보니까 살짝살짝 여유 좀 부렸지 말입니다. 아, 이놈의 출중한 능력이라니…훗.”
 “아, 그러셔요? 그래서 폭발 1초전까지 죽을 둥 살 둥 하셨어요?”
 “아…그게…….”
 “됐다. 어쨌든 모두 수고 많았어.”
 
 
 # 12. 회식
 
 그즈음에서 말을 끊긴 했지만 사실 주혜민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건…….
 ‘김 준위를 테스트 한 담당 군의관이 실수를 했다는 점이겠지.’
 아니면 장비가 고장 났거나.
 ‘그래, 말이 안 되지. 세상에 옥타곤 수치만 가진 에이전트가 어딨어? 분명히 모든 엘리시움 수치에 반응할 수 있는 게 확실해. 그러니까 멀쩡하게 트라이앵글에서 살아나왔겠지.’
 그녀의 추측은 당연히 잘못 넘겨짚은 것이었다.
 테스트는 정확했다. 다만 건우가 이들이 말하는 엘리시움 수치란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존재라는 게 그 이유일 뿐이었다.
 하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런 오해를 할만도 했다.
 트라이앵글 관련 엘리시움 반응도 없는 사람이 버젓이 큐브 내부에서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더욱 놀라운 건 중위인 그녀 자신조차 버거운 적들을 일격에 몰살시킨 그의 무위였다. 아마 박정환 소령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턱도 없는 소리지. 김기만 따위는 당연히 논외고.’
 중위인 자신마저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능력.
 두 눈으로 목도했지만 사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훌륭한 팀원, 능력 있는 팀원이 함께 한다면 생존확률도 그만큼 높아질 테니까. 더불어 팀의 임무수행능력에도 큰 도움이 되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그저 미스터리한 여러 가지 정황이 살짝 궁금할 뿐이었지 건우에 대한 시기나 적개심 따위는 없었다.
 ‘궁금한 것들이야 나중에 차차 알아 가면 될 일. 아직 팀에 들어온 지 만 하루도 안 된 팀원을 닦달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좋은 게 좋은 거다.
 의문점이 한보따리였지만 주혜민은 쿨 하게 일단은 묻어두기로 했다.
 
 ‘볼수록 쓸 만해. 저 여자.’
 건우도 단박에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질투나 시기를 할 법도 한 상황이다. 아니 열에 여덟아홉은 그러고도 남는 게 정상이다.
 인간이란 원래 아무리 통 큰 척 해도 옹졸한 구석은 누구나 있는 법.
 저보다 아랫사람이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 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하극상, 상급자의 자존심을 구기게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그런 면에서 주혜민은 남달랐다. 적어도 겉으로 그런 티는 전혀 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차량 탑승 전, 건우를 향해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진심어린 미소를 보이기까지 했다.
 ‘팀원 애들이 볼수록 쓸 만해. 꽤 맘에 들어. 단지 팀장이 엘렉트라 년과 닮았다는 게 껄끄럽긴 하지만 뇌구조는 확실히 달라. 그럭저럭 합격.’
 대대 전체적으로는 낙제점이지만 적어도 3팀만은 쓸 만했다.
 
 여기까지가 건우의 심플한 평가였고 팀원들도 역시 건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낙하산처럼 뚝 떨어지듯 준위란 계급을 달고 나타났지만 이젠 누구도 뭐랄 사람이 없었다.
 건우는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단 하루 만에 팀원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팀장님, 우리 회식은 안합니까?”
 “뭐?”
 이민호의 엉뚱한 발언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정기철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아 왜요? 팀장님이 약속하셨잖습니까. 쫄쫄 굶고 한바탕 했는데 소주라도 배불리 먹어야 인지상정 아닙니까?”
 “아직도 넌 그럴 정신이 있냐?”
 졌다는 표정의 정기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뭐.”
 “후후, 그래. 그런데 그건 이 중사가 결정할 사항은 아닌 것 같다. 김 준위 어때? 오늘의 히어로가 어떻게 할지 정해봐.”
 “환영회 겸해서 한 잔 하시죠, 김 준위님.”
 이때다 싶었는지 이민호는 건우를 부추겼다.
 “그럴까? 술은 낮술이 최고지. 팀장님, 거국적으로 낮술 한 잔 땡기러 가시죠, 그럼.”
 “큭…….”
 “팀장님, 일단 좀 씻고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조용히 장비를 정리하던 김하성이 끼어들었다.
 “새키, 깔끔한 척 하기는.”
 “닥쳐, 이민호. 보통은 저게 정상이거든?”
 “…….”
 
 초과 근무에 식귀란 괴물들까지 깔끔하게 처리했다. 설마 이정도 성과를 냈는데 막판에 옆길로 샜다고 타박하진 않겠지.
 3팀 차량은 복귀도 미룬 채 곧바로 인근 찜질방으로 직행했다.
 ‘한소리 들으면 적당히 받아쳐주지, 뭐.’
 그녀는 희희낙락 하차중인 팀원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주혜민에게는 고생한 팀원들이 우선이었다. 팀장이라면 그 정도 바람막이는 돼 줘야 한다.
 “좋아 후딱 씻고 한 시간 후에 만나자.”
 휴대폰으로 간략한 상황보고를 마친 주혜민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늦는 놈은 버리고 갈 거니까 알아서들 해.”
 여탕으로 향하던 그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걱정 마십쇼! 설마 여자보다 목욕 오래 할 남자가 여기 있겠습니까?”
 “너 말이야, 너.”
 주혜민은 피식 웃으면서 이민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그럼 낮술 밑반찬은 뭘로 할까요?”
 한껏 흥이 오른 이민호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말투를 보아하니 꽤나 말술인 듯싶다.
 “일단 배라도 좀 채우고 술을 드시는 게…….”
 막내 하사, 조성하가 말끝을 흐렸다.
 “마, 배는 술로 채워야지. 안주발만 세웠다간 배탈 난다, 너.”
 “에휴…….”
 이민호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조성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왜, 조 하사는 술 못해?”
 괜히 미안해진 건우가 조성하의 어깨를 다독였다.
 “왜 못합니까? 너 술 잘 하잖아. 뜬금없이 왜 약한 척이냐?”
 딱!
 “아야!”
 “넌 좀 맞아야 돼. 종일 쫄쫄 굶고 술부터 찾는 네가 정상이니, 아니면 밥부터 먹자는 조 하사가 잘못된 거니?”
 “당연히 조…….”
 딱!
 “아 놔. 연속 폭행! 팀장님 자꾸 이러시면…….”
 “뭐?”
 “확 뽀뽀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민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얼굴을 쭉 들이밀며 헤헤거렸다.
 “오냐, 오늘 너 반 죽여 놓고 간만에 영창 구경 좀 해보자.”
 팔까지 걷어붙인 주혜민이 이민호의 면상을 향해 냅다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퍼억!
 
 여기저기 잔부상은 많았지만 큰 피해 없이 작전을 마친 3팀.
 이날 쌍코피의 이민호가 가장 큰 부상자였다.
 
 팀원들 간의 의견을 수렴한 주혜민은 결국 인근 국밥집으로 회식 장소를 결정했다.
 “말도 안돼요! 무슨 회식을 국밥집에서…….”
 휴지 조각 두개로 콧구멍을 틀어막은 이민호가 끝까지 도리질 쳤다.
 “쓰읍…!”
 뿌득 소리를 내며 주먹을 움켜쥔 주혜민.
 이민호는 그녀의 찰진 주먹맛을 떠올리며 곧바로 입을 닫아버렸다.
 
 “자, 들어가자.”
 술꾼 한 명을 제외한 모두의 동의를 얻은 주혜민은 곧바로 국밥집 문턱을 넘어섰다.
 뒤이어 들어선 조성하는 발 빠르게 테이블 두 개를 이어 붙였다.
 구수한 국밥 냄새가 텅 빈 위장을 자극했다.
 김하성은 눈까지 게슴츠레 뜨며 입맛을 다셨다. 24시간 이상을 꼬박 굶었으니 오죽할까. 아마 정신마저 혼미해졌을 것이다.
 물론 나머지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기본세팅 반찬은 테이블로 올려짐과 동시에 동이 나 버렸다.
 “이모! 여기 김치랑 깍두기 좀 더 주세요!”
 이민호는 새우젓까지 주워 먹으며 빈 그릇을 흔들어댔다.
 추가반찬과 함께 커다란 수육 접시 두 개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곧이어 돼지국밥 여섯 그릇, 소주 두 병도 추가되었다. 나름 진수성찬이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이민호의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소주에는 회를 먹어줘야 하는데…….”
 “너 혼자 회 먹으러 가, 그럼. 물론 그건 네 돈으로 계산해야 한다.”
 “아유, 수육이 있었네요. 역시 소주에는 회보다 수육이죠. 잘 먹겠습니다, 팀장님!”
 식귀보다 무서운 게 돈이었다.
 벌떡 일어난 이민호는 넉살좋게 실실 웃어대며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우선 팀장님부터.”
 재빨리 주혜민의 잔에 술을 따른 그는 팀원들의 술잔에 차례로 소주를 따랐다.
 “특별히 팀장님 잔에는 저의 사랑까지 덤으로 따랐습니다.”
 이민호는 술병을 내려놓으며 주혜민을 향해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장난스런 아부가 밉지 않다.
 결국 실소를 터뜨린 주혜민이 고개를 내저으며 맞하트를 날려주었다.
 “내가 졌다. 하여튼 넌 어디가도 굶어죽진 않을 거야. 이거 먹고 2차는 횟집으로 가자.”
 “감사합니다!”
 건우를 포함한 나머지 팀원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주혜민이 먼저 잔을 들었다.
 “자, 오늘 모두 수고 많았다. 조촐하지만 새로 팀에 들어온 김 준위의 환영회도 겸해서 마련한 자리니까 맘껏 먹어보자.”
 “잘 먹겠습니다!”
 여섯 개의 잔이 부서져라 부딪쳤다.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몇 순배의 술이 돌았고, 국밥에 머리를 박고 열심히 퍼먹던 조성하는 이민호의 갈굼을 견뎌야 했고, 건우는 나머지 다섯 명과 일대 오로 돌아가며 잔을 부딪쳐야 했고, 서서히 꽐라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두 병의 소주는 단 10분 만에 바닥이 났다.
 한 시간이 흐른 지금, 테이블 위에는 벌써 열 개의 빈 병이 빼곡히 들어찼다.
 “이모! 여기 소주 두 병 더요!”
 “네!”
 냉큼 술병을 챙겨들고 온 주인 아주머니는 유쾌한 손님들과 벌써 친해져 있었다.
 “복장들을 보아하니 군인들 같은데, 맞지? 나라 안 지키고 이래도 되는 겨? 대낮부터 말술들이네, 하하!”
 “군인도 쉴 때는 쉬어줘야 하거든요. 저희 24시간을 꼬박 새고 이제 첫 끼니 먹는 중입니다, 이모.”
 “저런…….”
 “그러니까 탈영병들이 국밥집에서 술판벌이고 있다는 둥 그런 신고는 하지 말아주세요, 알았죠?”
 벌써 얼굴이 벌게진 이민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알았어, 걱정 말고 많이들 먹어. 필요한 것 있으면 또 부르고.”
 “옙, 충성! 감사합니다!”
 
 또 다시 네 병의 소주가 추가로 하얗게 산화했다.
 내내 잘 버티던 주혜민도 슬슬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피로감과 알코올의 공격에 온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김 준위?”
 그녀는 잔을 들고 건우의 옆자리로 옮겨왔다.
 “예, 이리 앉으시죠.”
 아직 멀쩡한 건우는 다리 풀린 그녀가 엉덩방아라도 찧을세라 황급히 의자를 갖다 댔다.
 “땡큐! 자, 일단 한 잔 받아.”
 “그러죠.”
 챙!
 “오늘 고마웠어.”
 “별말씀을요.”
 “그래도 김 준위가 잘못한 거 하나 있는 건 알고 있지?”
 주혜민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빈 잔을 들이밀었다.
 “그럼요.”
 꽤 귀엽다.
 하긴 엘렉트라 따위와의 사건은 건우가 디아블로와 한 몸이 되기 전에 있었던 일. 이제 놈의 기억이 신경 긁을 일도 없는데 덩달아 미워 할 이유는 없었다.
 ‘성격 좋은 애가 얼굴까지 예쁘면 좋은 거지. 괜한 남의 기억에 얽매여 복잡해질 필요는 없다.’
 건우는 처음으로 살가운 미소를 띠며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안다고?”
 눈이 동그래진 주혜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령하셨잖습니까. 차량에서 대기하라고요. 제가 본의 아니게 명령 불복종을 저질러버렸습니다. 이 잔 받으시고 그만 잊어주세요, 팀장님.”
 건우는 눈만 깜빡거리는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살짝 부딪치며 씩 웃었다.
 “…….”
 할 말이 없어진 주혜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술잔을 털어넣었다.
 “알면 됐어. 앞으로 주의하도록. 음…그래도…….”
 “……?”
 “잘했어. 명령 불복종…그거 아주 잘했어. 이렇게 모두 살아서 웃을 수 있게 된 거. 모두 김 준위 덕분이야. 고마워. 여기 모든 팀원들도 같은 생각일거야.”
 “그런가요?”
 얘 괜찮다. 지휘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왠지 인간적으로도 맘에 든다. 융통성도 있고.
 건우는 오랜만에 느껴본 따뜻한 감정에 사람 사는 맛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모! 저, 잔 좀 바꿔주십시오!”
 소주가 추가로 세 병이나 더 나왔다.
 살짝 고민하던 이민호는 아예 술잔을 글라스로 바꿔들었다.
 “거기 두 분! 뭘 그렇게 속닥속닥 밀담을 나누고 계신 겁니까? 저랑 같이 한 잔 더 하시지 말입니다!”
 이민호는 두 사람을 향해 찰랑대는 글라스 잔을 치켜들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정기철은 곁에 앉은 김하성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성아, 쟤 오늘 제대로 발동 걸렸다. 네가 끝까지 책임져라. 보니까 저거 혼자 내보냈다가는 사고치기 딱 좋은 상황이다.”
 “하하,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토털 소주 열다섯 병이 산화한 시각, 오후 4시.
 식사 겸 술자리를 거하게 마무리한 3팀은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지만 아직도 해는 중천이었다.
 “즉, 2차 가기 딱 좋은 시간이란 말이죠, 헤헤…….”
 “그치? 그치?”
 어느새 어깨동무를 한 채 거리로 나선 주혜민과 이민호.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 상당히 친한 사이의 대화처럼 들렸다.
 “저기가 좋겠네요. 길 건너에 횟집이 보입니다, 팀장님!”
 “좋아, 히힛…고고!”
 완벽한 꽐라로 변신한 두 사람은 당당하게 무단횡단을 시도했다. 김하성이 황급히 두 사람을 호위하며 함께 길을 건넜다.
 “휴…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요.”
 “보기 좋은데요, 뭘.”
 횡단보도 앞에 선 정기철과 건우가 시트콤을 찍고 있는 팀원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중사는 김 중사가 책임진다고 했고. 아무래도 팀장님도 누가 바래다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정기철은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넌지시 말을 꺼내는 폼이 그녀를 건우에게 떠넘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솔선수범하는 그가 저런 식으로 나오는 게 왠지 불안했다. 팀장의 술주정이 그렇게 심한가?
 하지만 먼저 저렇게 말을 꺼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제가…….”
 “제가 모시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인근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음료를 한 아름 사들고 나오던 조성하가 냉큼 대답을 가로챘다.
 “그럴래?”
 “예, 걱정 마십쇼. 우선 이거.”
 조성하는 들고 있던 음료를 하나씩 건네며 당차게 대답했다.
 “그럼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부탁 좀 하자.”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정기철이 미소를 지었다.
 뭔가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든 건우.
 ‘술기운인가?’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두 사람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막무가내의 두 남녀 덕에 결국 회식은 2차까지 이어졌다.
 장소는 당연히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는 횟집이었다.
 대단한 이민호. 그는 술이 떡이 된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내일 잠에서 깨고 나면 오늘 일을 기억도 못할 듯 보였다. 그건 주혜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은 비교적 멀쩡해보였다. 밤을 꼴딱 새고 소주를 반 짝씩이나 해치운 것 치고는 대단한 체력들이 아닐 수 없었다.
 
 횟집에 도착하자마자 두 남녀는 한쪽 구석에 사이좋게 찌그러졌다. 서로 부둥켜안고 이미 반기절상태다.
 시끄러운 두 사람이 사라지자 술자리는 비교적 차분해졌다.
 이런 저런 대화는 시시콜콜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정치, 경제, 연예 등 그렇고 그런 잡담이 쉼 없이 이어졌다.
 ‘좋다. 이런 분위기. 사람 사는 느낌 물씬 풍기는 이런 대화들. 정말 그리웠었는데. 별스럽지도 않은 평범한 술자리가 이리도 즐거울 줄이야…….’
 건우로서는 몇 년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다.
 마계의 정점에 올라 보낸 지난 8년간의 세월.
 아무리 거칠 것 없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지만 그는 외로웠다. 누구하나 맘 터놓고 지낼 자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이 너무나 좋았다.
 가족을 만난 것도 좋고, 특별한 직업을 가지긴 했지만 ‘사람’과의 소소한 술자리가 좋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네 사람의 대화는 어느덧 대 큐브 전담반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 준위님.”
 “어, 그래.”
 “준위님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3팀 보다는 ‘헥사곤 전담반’에 어울리실 분 같습니다.”
 항상 조용조용하던 김하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헥사곤?”
 “천계의 큐브 말입니다.”
 “마, 너 쓸데없는 소리할래? 우리 팀 에이스를 왜 멋대로 다른 데로 보내려고 용 쓰냐?”
 정기철이 인상을 팍 쓰며 김하성의 입을 막았다.
 “맞습니다. 김 준위님 아니었으면 오늘 우리 팀 전원 다 초상 치를 뻔 했잖습니까? 절대 다른 데로 보내드릴 수 없지 말입니다.”
 조성하마저 정기철을 거들고 나섰다.
 “걱정마라, 조 하사.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런데 헥사곤 전담반이 뭐하는 데야?”
 “…….”
 난데없는 두 사람의 협공에 김하성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기철과 비슷한 성향인 듯하지만 좀 소심한 구석이 보인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정 소위님, 뭡니까? 그 헥사곤 전담반이란 게?”
 “아, 자식이 쓸데없는 소릴 해가지고. 하긴 뭐, 언젠가는 김 준위도 알게 되겠지만…뭐 그런 게 있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허, 참.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말 나온 김에 좀 알려주세요. 이거 궁금해서 술도 안 넘어가네요.”
 “아…걔들이 뭐하는 애들이냐 하면요…….”
 
 헥사곤 전담반.
 말 그대로 네 가지의 큐브 중 오로지 헥사곤만을 전담 마크하는 팀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일선에서 뛰고 있는 대 큐브 전담반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트라이앵글, 테트라곤, 옥타곤을 처리하는 일반적인 대 큐브 전담반, 그리고 오직 헥사곤만을 상대하는 헥사곤 전담반으로.
 번거롭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전담반이 나누어진 데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었다.
 
 “헥사곤은 차원이 다른 큐브거든요.”
 “천계의 크러스트라서요?”
 “크러…뭐요?”
 건우의 질문에 정기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십쇼.”
 “예, 사실 헥사곤은 그 출현 빈도가 극히 낮습니다. 대신 헥사곤 내부에서 출몰하는 타락천사란 놈들은 여타 큐브에서 발생하는 요수나, 환수, 마수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거의 뭐…하늘과 땅 차이라고나 할까요?”
 ‘타락천사?’
 건우의 미간이 꿈틀했다.
 
 마계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 간간히 마주쳤던 쓰레기 같은 놈들.
 오만하고 저 잘난 맛에 사는 천사 놈들보다는 좀 나았지만 알고 보면 오십 보 백 보였다.
 천계의 크러스트는 여타 크러스트와 조금 달랐다. 그것은 일종의 유배지며 감옥이었다.
 즉, 천계에서 눈 밖에 난 천사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바로 천계의 크러스트, 이곳 말로 헥사곤이었다.
 
 ‘타락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좀 곤란하긴 하겠군. 놈들이라면 거의 마신과 비등한 수준을 가진 놈들도 충분히 존재할 테니까.’
 하지만 천사들에게도 등급이란 게 있었다.
 108마신과 견줄만한 놈들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그렇다고 흔하디흔한 마수들과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타락천사라면 나가 수준의 마수는 손쉽게 처리 할 수 있는 능력은 가졌다고 보는 게 정설이었다.
 ‘그랬군. 알만해. 이들 대 큐브 전담반의 실력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타락천사를 상대하긴 버거울 테니까.’
 그렇다면 헥사곤 전담반이란 놈들은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란 소리?
 “그 헥사곤 전담반은 몇 개나 있습니까?”
 “몇 개씩이나 있겠습니까. 현재 우리나라에는 한 개의 팀이 운용되고 있습니다.”
 “아…….”
 “그래도 그 정도면 대단한 겁니다. 헥사곤 팀을 꾸릴 정도의 능력자를 보유한 나라는 생각보다 많지가 않거든요. 전 세계를 통틀어도 많아야 10여 개국 정도?”
 “그렇게 많았습니까?”
 깜짝 놀란 표정의 조성하가 되물었다.
 ‘그게 많은 거야?’
 건우는 그 정도로 눈이 땡그래진 조성하가 더 놀라웠다.
 “그럴걸? 대놓고 떠들지는 않아도 암암리에 자기 나라의 힘을 과시하는 게 요즘 추세니까. 아마 그 정도 될 거야. 게다가 미국이나 중국 같은 경우는 세 개 이상의 헥사곤 팀이 존재한다고 들었어. 러시아도 두 팀은 되고. 그래도 그쪽은 땅덩이가 워낙에 넓어서 두세 팀 가지고는 쉽게 커버하긴 힘들 거야.”
 “그런데 부 팀장님, 제가 듣기로 헥사곤 전담반은 착용하는 장비도 우리랑은 차원이 다르다던데 맞습니까?”
 조성하는 신입답게 궁금한 것도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 맞아. 사실 거기도 최초 기본 장비는 우리랑 동일했다고 하더라구.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 헥사곤에서 출몰하는 타락천사들이 가진 장비를 획득한 후 그걸 재사용한다더라. 놈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며 무기가 사람이 착용하기에도 용이해서 말이지.”
 입이 딱 벌어진 조성하.
 표정을 보아하니 ‘마수가 입는 장비를 어떻게 사람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대 큐브 전담반이라면 당연히 가질 만한 의문이다.
 수차례 눈으로 보아온 마수들의 장비. 그것들은 생각보다 질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장비다운 장비를 착용한 놈들은 옥타곤에서나 볼 수 있었다.
 오늘 겪었던 트라이앵글이나 테트라곤 따위에서는 그마저도 구경하기 힘들다.
 식귀만 봐도 올 누드였다. 또한 지난번 포항 야구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테트라곤의 환수는 촉수괴물이었다.
 마계의 크러스트인 옥타곤 마수쯤 돼야 그나마 뭐라도 걸치고 있었다.
 개중 인간형인 놈들의 경우 갑옷이나 검 등의 무구를 소지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다못해 나가들도 거대한 삼지창을 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놈들은 말만 인간형이었다.
 체구며 체형이 보통의 사람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무구의 품질도 크게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었고.
 ‘마신도 아닌 마수 따위가 가지고 있는 게 다 그렇지 뭐.’
 건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특이한 걸 수집하는 컬렉터들에게나 팔려면 팔 수 있을까…….’
 마수의 무구정도는 현대과학이 만들어낸 최신 장비에 비하면 크게 두드러진 물건이 아니었다.
 
 “마수의 장비를 착용하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리고 마수가 입고 있는 게 쓸모가 있다니…믿을 수 없습니다.”
 조성하는 무의식중에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티타늄이 보강된 초합금강의 검. 거기에 웬만한 총알 따위는 흠집도 낼 수 없는 초경량의 방탄복까지.
 아무리 마수가 날고기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들 그보다 좋을 수 있을까. 그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몰라, 좋으니까 쓰겠지.”
 “그럼 말입니다, 그 좋은 걸 지들만 쓴답니까? 팀 인원이 얼마나 되길래요.”
 건우가 소주잔을 탁 털어 넣으며 비딱한 어조로 물었다.
 “글쎄요, 거기도 다섯 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남아돌겠네. 그 잘난 타락천사 표 장비.”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쪽까지 넘어오기가 쉽지가 않다는 게 문제죠.”
 “왜요?”
 
 
 # 13. 대련
 
 “말씀드렸다시피 그 헥사곤에서 획득한 장비는 성능이 엄청나답니다. 초합금강 검 정도는 무 썰듯 잘라내는 무기도 세고 셌다더군요.”
 “그러니까요. 그걸 지들만 독점하는 건 완전 자원낭비 아닙니까?”
 “그만큼 비쌉니다.”
 “예?”
 “사실 따지고 보면 헥사곤 전담반은 거의 수출 역군수준입니다. 헥사곤 아티팩트는 굉장히 비싼 수출 품목이거든요. 웬만하면 국내 대 큐브 전담반에 불하할 만도 한데…그게 잘 안됩니다. 워낙에 고가라서 국방비로 그걸 구입하느니 그냥 사람을 뽑아서 빈자리를 메꾸는 식이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윗선에선 말이죠.”
 “…….”
 “…….”
 건우와 조성하는 기가 찬 표정으로 딱 굳어버렸다.
 김하성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인지 어깨만 으쓱할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런 물건을 하나 획득하면 당사자나 팀에게 보너스가 돌아가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라고 하더라구요. 정말 세상 더럽죠?”
 많이 더럽다.
 ‘그런데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잖아?’
 마계처럼 단순무식한 세계는 그만의 더럽고 추잡함이 있고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그렇고 그런 그늘이 있다.
 ‘혼자 고고한 척 할 이유는 없지. 게다가 그 모든 게 합법적인 거라면 더욱 더.’
 때가 되면, 기회가 닿는다면 이직을 고려해 볼 일이었다.
 참, 이직이 아니라 부서이동인가? 어쨌든 좋은 정보다.
 
 ***
 
 이날 이후, 수도권에는 한동안 큐브의 출몰이 잠잠했다. 보름 동안 단 한 건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테트라곤이었던지라 순번에 따라 1팀이 놈을 처리했다.
 다음 차례는 2팀.
 혹시라도 옥타곤이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3팀은 한동안 개점휴업이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한 번 나타나면 줄줄이 몰아서 나타나곤 했지만 없을 땐 영 출몰이 더뎠다.
 이런 분위기라면 올 가을까지는 꽤나 한가한 날이 이어질 듯 보였다.
 
 “다들 좀이 쑤시지? 오랜만에 훈련 좀 할까?”
 늦여름, 어느 날.
 주혜민은 출근과 함께 팀원들을 닦달하며 일으켜 세웠다.
 “괜찮은데요?”
 미적대며 엉덩이를 빼던 이민호가 구시렁댔다.
 “넌 내가 특별히 두 배로 굴려주겠어.”
 “왜요!”
 “사랑하니까.”
 “농담도 무슨 그런 살벌한 농담을…….”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은 만났다 하면 아웅다웅이었다.
 지난 회식자리부터 시작된 악연.
 두 사람이 고주망태가 되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유튜브 영상에 고스란히 올라간 탓이었다. 누가 찍었는지 화질도 예술이었다.
 노발대발한 대대장에게 끌려간 둘은 한 시간이 넘도록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만약 거기서 끝났다면 쿨 한 성격의 주혜민이 이렇게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이은 선임 팀장들의 습격.
 특히 이때다 싶어 물어뜯던 김기만에게 당한 이후로 주혜민은 돌변했다. 즉, 이민호는 그녀의 밥이 되고 말았다.
 “거기까지 해라.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 아예 초상 치를래?”
 주혜민의 주먹다짐을 예견한 정기철이 이민호를 뜯어말렸다.
 “어제?”
 “아, 김 준위님은 점심시간에 외출하셨었죠? 그런 일이 있습니다.”
 건우의 질문에 조성하가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또 한 판 했냐?”
 “점심때요. 이 중사님이 또 외식하자고 바득바득 우겼거든요. 왜들 저러나 모르겠습니다.”
 어제, 유독 짬밥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민호와 외식 무용론의 주혜민이 대판 붙었다고 한다.
 결과는 누구나 예상하는 대로였다.
 여기는 군대.
 계급이 깡패라는 말의 원산지에서 뜻밖의 결과 따위가 나올 리 만무했다.
 쌍코피의 이민호는 주혜민에게 멱살이 잡힌 채 구내식당으로 질질 끌려갔다고 한다.
 
 ***
 
 3팀은 주혜민의 주도하에 전원 지하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특별 대련이다.”
 “검술 훈련이 아니고요?”
 “그 말이 그 말이다.”
 “췟!”
 “이 중사는 특별히 김 준위와 묶어주지.”
 주혜민은 사악한 미소를 머금으며 틱틱대는 이민호를 노려봤다.
 “아니…왜 저만…!”
 “뭐가 저만이야? 비는 사람 없이 딱 인데. 6명이니까 둘 씩 짝지어서 대련하면 되잖아.”
 “아뇨, 그러니까 왜 제가 김 준위님과…….”
 “실력 출중 하시다면서요? 그래서 전투 중에 여기저기 둘러 볼 여유도 있으셨다면서요?”
 이민호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지난번에 트라이앵글 처리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네가 한 말 가지고 꼬투리 잡으시나보다. 왜 넌 쓸데없는 소릴 해서는…….”
 정기철이 이민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설마! 그걸 아직도 기억하시고…….”
 정말 무서운 여자다.
 이민호는 결국 GG를 칠 수 밖에 없었다.
 
 “후후, 그래서 이 중사가 내 상대란 말이지?”
 목검을 휘휘 돌리며 건우가 싱글거렸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살살 좀 부탁드립니다, 김 준위님. 헤헤…….”
 “살살이 어딨나? 훈련 중에. 제대로 해야지.”
 “컥!”
 
 두 명씩 짝을 지은 팀원들은 넓디넓은 대련장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일정에 있는 정기 훈련이나 측정 따위가 아닌 즉흥적인 훈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홀로 비장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민호였다. 그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냐, 김 준위님이 무지막지한 기술을 쓰시긴 하지만 검술은 다를지 몰라. 어쩌면 해 볼만 할지도…….’
 그는 힘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자기최면을 걸었다.
 “시작할까, 이 중사?”
 “아, 예!”
 대련장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2, 3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는 이민호.
 건우는 느긋한 자세로 그를 기다렸다.
 
 대련 시작!
 중단 자세를 잡은 이민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하긴 이민호 정도면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었다. 대 큐브 전담반 경력만 3년이 넘는다.
 게다가 그는 전직 검도선수였다. 국가대표까지는 아니어도 고등학교 때까지 도 대표는 했던 몸이다.
 ‘엘리시움 능력치야 팀장님이나 부 팀장님에게 밀리지만 실전에서 움직임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이민호는 최대한 자신감을 끌어올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까짓것. 죽기야 하겠어? 쫄지 말자!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재밌는 친굴세.’
 건우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이민호의 표정을 읽으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 모든 생각이 표정으로 다 드러날까.
 순수한 건지 어리숙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은 드는군.’
 “흐아압!”
 시작부터 이민호의 저돌적인 머리치기가 건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모름지기 공격이 최선의 방어! 안 맞으려면 무조건 선방이닷!’
 거대한 호선을 이룬 날카로운 검풍이 대기를 갈랐다.
 확실히 능숙했다. 웬만한 사람, 아니 검술의 달인이라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큼 그의 공격은 위력적이었다.
 생사를 건 실전을 몇 년이나 헤쳐 나온 절정의 고수다웠다.
 평소 헬렐레거리는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멋진 일격이었다.
 ‘성공이다!’
 의외로 쉽게 결판이 났다는 생각에 이민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실제로 그의 목검은 건우의 머리를 제대로 가격했다.
 ‘너무 셌나?’
 찰나의 순간, 자신이 너무 힘을 실었나 하는 자책이 밀려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으억!”
 타점과 균형을 동시에 잃은 이민호는 휘청하며 몇 걸음이나 앞으로 밀려나갔다.
 분명히 맞았는데! 정타로 들어가야 정상인데…….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검날이 건우의 정수리를 가격할 찰나 그는 잔상만을 남기며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꽤 하는데?”
 언제 돌아갔는지 이민호의 등 바로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크윽, 잠깐만요, 준위님. 다시, 다시!”
 급하게 돌아선 이민호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았다.
 “오케이, 들어와 봐. 이번엔 나도 피하지만 않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옙, 그럼 갑니다아!”
 역시 쉽지만은 않은 상대라는 걸 확인한 이민호는 필살기를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다년간 갈고닦은 나만의 필살 공격. 어디 한 번 받아보시죠!’
 이를 악 문 이민호는 한순간 건우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응?”
 쑥 꺼지듯 자취를 감춰버린 이민호의 움직임에 건우도 움칫했다.
 바닥을 쓸 듯 납작 붙어서 밀려드는 하단 공격이었다.
 이전보다 움직임도 빨랐고 이동방향도 절묘했다.
 실전에 기반을 둔 허슬 플레이. 한마디로 이민호는 꼼수를 부렸다.
 그러나 살짝 발을 든 건우는 간발의 차이로 검을 흘리며 이민호의 등짝을 꾹 밟아버렸다.
 이어진 이민호의 이 타, 삼 타 공격도 더 이상 먹히지가 않았다.
 마치 물 흐르듯 유연한 건우의 움직임은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잡힐 듯 말 듯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공격을 흘려보냈다.
 오로지 초월적인 동체시력과 감각적인 움직임만을 이용했다. 단지 그것만으로 검술의 고수라 자칭하는 이민호를 갖고 놀았던 것이다.
 “슬슬 이쪽도 들어가 볼까?”
 “아, 저…잠시만! 마음의 준비를…….”
 “그딴 게 어딨어. 자, 간다!”
 후아악!
 선 자세 그대로 짓쳐든 건우는 일순간 이민호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검 따위도 필요 없었다. 그는 가볍게 손끝으로 이민호의 가슴팍을 툭 밀어냈다.
 그 순간 공중으로 붕 뜬 이민호는 몇 미터나 날아가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크…….”
 머리가 핑핑 돌았다.
 비틀대며 일어나는 이민호를 향해 건우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도발했다.
 “아웃. 다시.”
 
 절묘하게 반복되는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또, 아웃. 다시.”
 이런 저런 자세로 서너 번 연속으로 당하자 이민호도 슬슬 오기가 치솟았다.
 “이런 짓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돌변한 눈빛의 이민호가 발검자세를 취하며 이를 악물었다.
 맨손으로 발검을 했다가는 온 손바닥이 너덜너덜해질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나이 마지막 자존심.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농락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오십쇼!”
 대놓고 받아치겠다는 선포였다.
 다른 팀원들도 하던 대련을 멈추고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간만에 보는 구경거리였다.
 “이 중사가 아예 작정을 하고 덤빌 모양인데?”
 “그러게요. 볼만하겠습니다.”
 “쉿! 모두 조용.”
 어느새 관객 모드로 전환한 팀원들은 손에 땀을 쥐며 이번 일합에 집중했다.
 “그럼 성의를 봐서 들어가 주지.”
 예의상 목검을 치켜든 건우는 부드럽게 바닥을 지치며 밀고 들어갔다.
 푸화아악!
 일체의 회피동작도 없는 맞불작전. 한마디로 동귀어진이었다.
 일순간 팀원들은 경악했다. 실전도 아닌 훈련 상황에 저렇게 저돌적으로 몸을 던지다니!
 너무 과한 승부욕이 화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건우는 순식간에 이민호를 지나친 후 뒤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발검궤적 안쪽을 정확히 관통했다.
 괜한 호승심에 큰 부상을 당하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허억!”
 그런데 헛바람을 삼키며 주저앉은 쪽은 오히려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아릿한 명치끝을 부여잡으며 풀썩 고꾸라졌다.
 “말도 안 돼…!”
 
 <『마신귀환』 2권에 계속>

댓글(4)

붉은여왕1    
너무비싸.
2016.06.11 23:18
as*******    
넘 잼 없어,,
2019.02.01 13:00
Shristi    
1편만보고 그럭저럭 대여로는 볼만할 것같아 전체 대여했는데.. 너무 재미.없음.. 대여한 돈도 아까움..
2019.02.18 10:14
Shristi    
전체 대여해서.. 돈아까워서라도 끝까지 보려했는데.. 포기.. 도저히 못 보겠음..
2019.02.2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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