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0
그날에 빛이 있었다. 그 강렬한 빛 앞에 태양은 숨을 죽였고 달은 창백했으며 지구는 변화했다.
지구의 변화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커졌다고 볼 수 있었다. 넓이는 1.5배 정도로 늘었고, 반지름은 1.22배가량 증가했다.
그 덕분에 수백조 원에 달하는 유성쇼가 펼쳐졌다. 저 궤도 위성의 추락 때문이었다.
각국 항공 우주국에서 부랴부랴 궤도를 수정한 끝에 정지 위성 일부는 건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위성의 수명이 팍 줄어들기는 했으나,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지구는 견과류가 잔뜩 박힌 쿠키 모양이 되어 있었다.
견과류는 반투명한 구형의 막이었다.
기존의 땅이 줄어들거나,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구형의 막은 기존의 땅을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집이 분리되어 방과 방 사이가 수십 킬로미터가 떨어지게 되는 경험을 한 사람도 있었다.
구형의 막 안에는 새로운 땅이 있었다. 지형과 식생, 기후마저 막 바깥과는 완벽하게 다른 곳이었다.
학자들은 이곳을 두고 엑스트라 에어리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곳을 EA 또는 앞의 말을 생략하고 에어리어라 불렀다.
TV에 나온 학자들은 엑스트라 에어리어를 두고 저마다 열띤 토론을 벌였으나 토론은 그저 토론일 따름이었다. 기존의 이론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 역시 처음에는 많은 관심을 뒀으나, 직접 얽히지 않는 사람들은 곧 관심이 시들해졌다. 그저 지구 크기의 변화에도 사람들이 느낄 만큼의 커다란 기후 변화나 중력의 변화가 없다는 점에 안심할 따름이었다.
엑스트라 에어리어 덕분에 각국의 영토는 절반가량 넓어졌다. 각국은 이 사실에 내심 좋아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조사단을 파견했다. 혹시 모를 위협에 조사단은 우주 비행사와 흡사한 복장을 갖추었다.
이런 조사단에 의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반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에어리어와 기존의 땅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또한, 지형과 기후, 식생 역시 달랐다. 사막 한가운데에 설원으로 이루어진 에어리어가 나타나기도 했으며, 극지방에 열대우림으로 이루어진 에어리어가 나타나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에 살던 사람들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와 더불어 조사단은 에어리어 내부의 공기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오염물질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지구보다 더 좋은 환경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에어리어에서는 지구에 없던 식물과 신물질이 발견되었다. 이는 각국 정부의 움직임을 가속화 하는 일이었다.
이를 발견한 각국 정부는 에어리어 내부의 혹시 모를 위험성을 설파하며 기득권층인 대기업 위주로 개발을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의 강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조사단에 참여했던 학자의 양심선언 덕분이었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각국 정부는 ‘개척자’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참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힘든 투쟁 끝에 얻어낸 것임에도 일반인의 참여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인이 눈에 불을 켜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개척자로 에어리어 탐사를 하던 백수 청년 한 명이 금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시민단체와 정부에 각각 알렸다.
아직 관련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정부는 이례적인 보상책을 내놓았다. 개발권을 정부가 갖는 대신, 수백억 원에 달하는 보상을 청년에게 준 것이었다. 이것은 일자리가 없어 방바닥을 긁고 있던 청년들의 눈이 단숨에 뒤집힐 만한 일이었다.
백수 청년의 수백억 대박 소식은 단숨에 전국으로 퍼져 갔고, 할 일 없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엑스트라 에어리어에 몸을 던졌다. 이는 서부 개척시대의 골드 러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를 두고 정부의 수작이라느니, 노림수가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진실은 엑스트라 에어리어가 너무 넓다는 점에 있었다.
더군다나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반투명한 막 탓에 위성으로 정찰할 수 없었다. 위성 사진에 찍힌 에어리어는 그저 반짝이는 동그란 원에 불과했다. 항공기로 찍은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에어리어 내부에서는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었다. 외부로 가지고 나오면 다시 작동하기는 했지만, 일단 에어리어 안에 들어가면 외부와 통신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였다. 유선으로 연결해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항공기 역시 수많은 전자기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에어리어 안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각국에서 전자기기가 들어가지 않는 기계식 항공기 개발에 착수했으나, 완성하고 양산에 들어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막혀버린 통신, 그리고 막혀버린 항공정찰.
에어리어는 기존 영토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광활했고, 그 안에 어떤 혁신적인 신물질과 자원이 잠들어 있을 줄은 누구도 몰랐다.
획기적인 발견 하나로 기존 문명의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각국은 에어리어 탐사에 경쟁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각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에어리어에 많은 사람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 홍보 수단으로 백수 청년의 수백억 신화가 사용되었다는 점이었다.
한 가지 불안한 점도 있었다.
에어리어 내부에서는 폭발적인 연소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화약을 터뜨리려 해도 그저 장작불처럼 느긋하게 타오를 따름이었다.
즉, 총알이나 포탄 등이 발사되지 않는 상황.
비록 에어리어 내부에 동물이 없어 화기를 사용할 일이 좀처럼 없었지만, 자신을 지킬 무기는 반드시 필요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이 꼭 맹수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와 단절되었다는 점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몸은 자기 자신이 지켜야 했다. 이 덕분에 개척자들의 필수 물품 중에 칼이나 창, 활과 같은 냉병기가 포함되었다.
처음과 같은 대박은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번 개척자가 된 이들은 어지간해서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금광과 같은 대박이 아니더라도, 식물에서 추출한 수액이나 열매 채취만으로도 웬만한 직장인의 월급에 해당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투입하는 개척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엑스트라 에어리어에 대한 것들이 하나, 둘 밝혀졌고 이곳에서 발견한 각종 신물질로 인류 문명은 한 단계의 도약을 꿈꿀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6개월가량이 지난 후.
에어리어 내부에서 알 수 없는 실종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고, 잔혹하게 찢긴 시신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로부터 전에 없었던 기이하고 흉악한 인상을 지닌 기이한 생명체의 출현 사실이 알려졌다.
몬스터, 괴수였다.
에어리어 내부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한 몬스터는 대박을 꿈꾸며 에어리어에 진입했던 사람들을 공격했고, 엄청난 숫자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어느 정도 이상의 숫자가 쌓이자 서로 영역 다툼을 시작했고, 거기에서 밀려난 몬스터들은 에어리어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름 하여 몬스터 웨이브였다.
몬스터 발생 이후, 각국은 철책을 세우는 등 나름의 방어책을 세웠으나, 몬스터들의 무시무시한 괴력 앞에서 그것은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괴수에게는 총알이나 포탄조차 통하지 않았다.
인류는 속절없이 밀려났다.
영상 분석을 통해 몇몇 학자들은 피격 시 몬스터의 몸 주변에 생성되는 푸르스름한 막을 확인했다.
학자별로 에너지 실드니, 포스 실드니 하는 이름을 붙였지만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닌, 그것을 무력화하거나 뚫어낼 방법이었다.
학자들은 총력을 다해 방법을 찾았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실드는 기존의 지식이나 기술을 뛰어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다.
보호막이 소실될 때까지 그야말로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 붓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몬스터 한 마리당 수백에서 수천 발 정도의 미사일이 필요했다.
방사능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추측도 있었지만, 자국의 영토에 핵을 터뜨릴 정신 나간 나라는 없었다.
인류에게 한가지 다행인 것은 몬스터를 감싼 실드가 불과 며칠 후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이와 더불어 철판을 찢어발기고, 콘크리트를 무너뜨리던 무시무시한 괴력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약해졌다.
이때를 틈타 인류는 사활을 건 반격을 시도했고 많은 희생 끝에 엑스트라 에어리어 밖으로 벗어났던 몬스터를 박멸할 수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에어리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즉, 에어리어는 더는 안전하게 신물질과 자원을 채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신물질 유입이 필요했고, 개척자들의 몸값은 급격히 올라갔다.
개척자 대부분은 에어리어 진입을 거부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이승에 있을 때 벌어야 좋은 것. 죽은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물질과 자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지일 것이 빤한 곳에 강제로 사람을 밀어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듯 각국 정부가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한 가지 희소식이 터져 나왔다.
바로, 능력자의 등장이었다.
그들 중에는 맨몸으로 괴수와 맞서 싸울 정도로 육체 능력이 향상된 이들도 있었고, 불덩이를 만들어 쏘아 내거나, 염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이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치유 능력자들은 모든 능력자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관심을 받은 이들이었다. 생명과 건강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능력자의 등장으로 사회는 또 한 번의 변혁을 맞이했다.
# Chapter 1
1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온몸이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정말 죽을 뻔했지. 진형 하나 제대로 못 갖추는 그딴 놈들이 무슨 능력자라고…….’
오늘의 사냥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인간의 보잘것없는 몸 따위는 단숨에 찢어발기는 괴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능력자들뿐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능력자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탱커와 딜러, 힐러.
게임에서나 사용할 법한 용어들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 또한 게임과 같았다.
끊임없이 몬스터의 주의를 끌며 자신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 탱커. 그 사이 몬스터의 후방으로 돌아가거나 원거리에서 데미지를 가하는 딜러. 그리고 부상당하는 탱커나 딜러를 회복시키는 힐러.
몬스터의 주의를 끄는 행동을 흔히 ‘어그로’라고 표현했는데, 오늘의 탱커는 어그로를 제대로 끌지 못했다. 그를 상대하던 몬스터가 느닷없이 돌변하여 딜러들 쪽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뒤돌아온 탱커와 서포터들이 총력을 다해 막아 그나마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었지만, 아찔했던 상황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한유찬은 그때 일을 되새기며 힘없이 주먹을 쥐어 봤지만, 이내 풀렸다.
‘하지만 난 그저 서포터일 뿐이지.’
생각하고 나니 입맛이 썼다.
서포터.
능력이 없으면서도 에어리어에 들어가 능력자들의 몬스터 헌팅을 돕는 이들을 말함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돈 때문이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거나, 웬만한 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운 이들이 주로 택하는 일이라는 의미였다.
청년은 여전히 많았고 일자리 또한 여전히 없었다.
한 자리를 놓고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도 될까 말까 한 게 취업이었다.
이렇다 할 스펙도 없고, 변변한 학벌이나 인맥도 없는 청년들이 대기업 직원만큼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일은 서포터가 거의 유일했다.
물론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면 단 한 순간에 목숨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은 기본수당과 더불어 헌팅의 수입이 좋았을 때 능력자들로부터 받는 보너스는 한 번 서포터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마약과도 같았다.
‘그래. 마약이지……. 죽음을 옆에 둔 마약…….’
초기와 달리 지금은 사망자가 많이 줄어든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에어리어에서는 매일같이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중 거의 90% 이상은 서포터의 몫이었다.
툭.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와중 무언가가 한유찬의 발끝을 가로막았다.
슬쩍 눈을 들어보니 끝이 아득해 보이는 계단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잠시 계단 끝을 바라보던 한유찬은 이내 무거운 몸을 이끌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비로소 익숙한 낡은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그그극.
삭아 빠진 철판이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밀려났다. 낡았지만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놓인 작은 마당이 눈에 들어왔고, 불 켜진 반지하 방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쯧! 나올 것 없다고 해도 매번 저러네.”
한유찬은 투덜거리듯 중얼거렸지만, 슬며시 올라간 입가에는 작은 웃음이 맺혀 있었다.
아마 지금의 미소를 그가 일하는 헌팅 사무소의 사람들이 보았다면 적잖이 놀랐을 터였다. 그곳의 이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미소였기 때문이다.
늘 무뚝뚝한 표정과 차갑게 끊는 말투 덕분에 웬만한 사람은 한유찬의 주변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이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서포터는 늘 죽음과 함께 하는 존재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사람이 저녁에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 오거나,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친한 사람의 죽음은 한유찬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이미 한 번 겪어 보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부모님의 실종.
그 당시 한유찬은 그 지독한 상실감에 반쯤 넋을 놓았었다. 그가 유난히 부모님을 따르기도 했지만, 고작 이십대 초반에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내던져졌다는 사실은 끝없는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가까스로 한 번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두 번은 자신 없었다.
‘내겐 이곳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생각이 끝날 무렵, 반지하 방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다다닥! 쿵!
문이 활짝 열리며 교복 차림의 소녀가 튀어나왔다.
“유찬 오빠! 다녀오셨어요?”
하얀 피부에 작은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에 유달리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녀가 한유찬을 향해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미소녀의 요건을 충분히 갖춘 소녀였건만, 안타깝게도 한 가지 티가 있었다.
바로, 입술 주변을 빨갛게 장식한 붉은 양념이었다.
“맛있었어?”
“네?”
한유찬의 물음에 소녀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동그랗게 뜬 눈은 토끼를 연상시켰다.
소녀의 되물음에 한유찬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소녀의 입가를 가리켰다.
“그건 아껴뒀다가 밤참 하려고?”
소녀는 슬며시 손을 올려 자신의 입가를 더듬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 붉게 묻어난 양념을 확인한 소녀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꺄악!”
소녀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그대로 몸을 돌려 달음질쳤다.
쿵!
반지하 방의 문이 세차게 닫히며 비명과 같은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악! 몰라! 몰라! 몰라!”
“푸헤헤헤! 그러게 내가 거울 좀 보고 나가라니까? 유찬 형이 다 봤지? 누나 이제 어떡할래?”
“이익! 서윤석! 너 죽을래? 안 그래도 창피해 죽겠는데!”
닫힌 문 너머로 익살스러운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악에 받친 소녀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녀석들은 오늘도 변함없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유찬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에게 두 남매는 가족이었다.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의지하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그나저나 이나 저 녀석은 저렇게 칠칠맞아서 어쩌지? 나중에 제대로 시집이나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어째 일곱 살 때나 지금이나 하나 변한 게 없을까?”
생긴 건 조신한 미소녀건만, 행동은 왈가닥인 서이나를 떠올리며 한유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에도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지금처럼만 커라. 구김 없이. 주눅 들지 말고. 너희 다 자랄 때까지는 내가 돌봐줄 테니까.”
반지하 방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한유찬은 어둑한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이나의 실수로 웃은 덕분인지 힘겨웠던 그의 걸음에는 다시 힘이 실려 있었다.
끼이이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어둠에 잠긴 실내가 한유찬을 반겼다. 한유찬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렀다.
달칵.
환하게 밝아오는 거실의 정면 벽에는 어깨동무한 중년 부부의 사진이 한유찬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사진을 향해 인사를 건넨 한유찬은 그대로 낡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낡은 만큼 익숙한 쿠션의 감촉이 그의 몸을 감싸왔다. 눌러 두었던 피로감이 급격히 치솟았다.
한유찬은 스르르 감겨 오는 눈꺼풀을 슬쩍 밀어 올리며 옆을 더듬었다. 쿠션 사이에 묻혀 있던 리모컨이 잡히자 더듬거리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크기는 컸지만 군데군데 광점이 찍히고 색 번짐이 일어난 LCD TV가 밝아지며 뉴스가 흘러나왔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오전 강원도의 EA-191의 수복에 나선 불사조 클랜이 에어리어 안의 모든 괴수를 토벌하고 빼앗겼던 에너지 스톤 광맥을 되찾았다는 소식입니다.]
‘에너지 스톤 광맥?’
반쯤 흐려졌던 한유찬의 눈빛이 또렷하게 살아났다.
[수복한 에너지 스톤 광맥에는 순도 D등급의 에너지 스톤이 매장되어 있으며 매장량은 수백 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를 환산하면 우리나라의 20년에 달하는 에너지 소비량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입니다. 학계에서는 이로써 만성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던 국민의 시름이 한풀 덜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래 봤자 에너지 요금이 내릴 일은 없을 테고……. 시도 때도 없는 정전이나 좀 해결됐으면 좋겠군.’
한유찬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또한, 이 작전에서 불사조 클랜은 사망자가 없는 완벽한 공략을 보여주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1위 클랜의 모습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한유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없겠지. 공식적으로는…….’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인원이 동원된 작전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처치해야 할 괴수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괴력과 흉포한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웠다.
‘얼마나 죽었을까?’
공식적인 집계는 어디까지나 능력자들의 숫자만을 따졌다.
하지만 모든 작전을 오로지 능력자들 만으로만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능력자보다 몇 배 많은 숫자의 서포터들이 동원되었고, 민간인 연구인력 또한 적잖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집계가 능력자들의 숫자만 다루는 것은 에어리어의 위험도를 낮추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하나라도 더 많은 숫자의 인력이 에어리어 공략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후우……. 귀찮아도 씻어야겠지?”
TV를 끈 한유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외투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며 욕실로 들어갔다.
스르륵. 스륵.
옷감이 살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한유찬의 몸을 감싼 옷들이 한 꺼풀씩 사라졌다. 이윽고 드러난 그의 몸은 잘게 갈라진 근육이 짜임새 있게 들어찬 모습이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온몸을 도배하다시피 뒤덮은 흉터였다.
‘많이 변하긴 했네.’
온몸에 그득한 흉터를 바라보며 한유찬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 모습을 부모님께서 보시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퍼하실까? 아니면 기특해하실까?’
허공에 던진 물음은 의미 없이 사그라졌다. 부모님을 직접 만나야만 답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쭤봐야지. 꼭!’
한유찬은 굳은 눈빛으로 샤워기의 레버를 올렸다.
몬스터 웨이브 당시 실종자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실종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망을 의미했다.
하지만 한유찬은 실종이란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미 2년이 지났지만, 분명 어디에선가 살아 계실 거라고 믿었다.
쏴아아아.
세찬 물소리가 욕실을 채웠다.
2
달칵.
욕실 문을 열고 나서자 구수하고 매콤한 냄새가 한유찬을 반겼다.
거실 중앙의 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빠. 다 씻으셨어요?”
얌전하게 다리를 모으고 밥상 옆에 앉아 있던 서이나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이에 한유찬은 짓궂은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너도 잘 씻었고?”
입가를 향한 한유찬의 시선에 서이나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 오빠……. 그건 시, 실수! 실수였어요!”
귀여운 반응에 한유찬은 서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렸을 때에도 그랬지만 역시, 놀리는 맛이 있는 아이였다.
“어디 보자. 닭발이네? 아하! 요 녀석이 범인이었구나?”
밥상을 둘러보던 중 한유찬은 빨간 양념이 도드라진 닭발을 발견하고 그것과 서이나의 입술 주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서이나의 얼굴이 한층 더 붉은빛을 띠었다.
“맛있겠네. 매번 말하는 거지만, 고마워. 공부하는 것도 힘들 텐데, 이렇게 신경 써줘서.”
“아, 아니에요! 늘 고마운 건 저희인데요! 오빠가 아니었다면 저랑 윤석이는…….”
서이나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듯 작아졌다.
자칫 우울해질까 싶어 한유찬은 밥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
우울한 분위기는 싫었다.
특히나 집에서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늘 죽음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한유찬이 유일하게 위안과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음! 맛있어!”
감상과 함께 엄지를 치켜세워주자 굳어가던 서이나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한유찬에게 두 남매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두 남매는 늘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이는 한유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2년 전 부모님의 실종으로 반쯤 넋을 놓아 버렸던 그를 일깨워준 것이 바로 두 남매였기 때문이다. 만약 두 남매가 계기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결코 그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터였다.
“후우! 잘 먹었다! 이나 요리 솜씨는 갈수록 늘어가는 것 같아. 나중에 시집가면 사랑받을 거야.”
“헤헷! 정말요?”
배를 쓸어내리며 하는 한유찬의 말에 서이나가 양볼을 감싸며 되물었다. 한유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이나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럼…….”
슬쩍 식기를 들고 일어서려는 한유찬의 모습에 서이나가 양손을 흔들며 만류했다.
“아! 오빠, 그냥 두세요. 설거지는 제가 하면 돼요.”
“아니, 그래도 매번 먹기만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이렇게라도 도와야…….”
“무슨 말씀을! 저희 때문에 항상 고생하는 게 누군데요!”
단호함이 느껴지는 서이나의 말투에 한유찬은 빙글거리며 답했다.
“내가 왜 너희 때문에 고생해? 다, 나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지. 너희한테 해주는 것은 다 투자야. 투자!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낼 테니까 떼먹을 생각은 일절 하지 말도록!”
“피! 알았으니까 얼른 방으로 들어가 쉬세요!”
입술을 삐죽이는 서이나의 외침에 한유찬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입술을 잡았다.
“이건 무슨 오리도 아니고…….”
“느! 느으!”
팔뚝을 잡고 흔드는 서이나의 손길에 한유찬은 슬쩍 입술을 놓았다. 그리고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짚었다.
“쯧! 진지해지면 못생겨지는 거는 어릴 때나 똑같단 말이야.”
“흥칫뿡이네요! 내가 학교에서는 여신으로 통하거든요?”
“꼬꼬마 여신?”
“흥! 내가 꼭 멋진 남자 데려왔을 때 찬무룩하고 있지나 말라구요!”
“오구오구! 제발 좀 그러세요? 제발?”
한유찬은 눈매를 매섭게 일그러뜨리는 서이나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린 후 몸을 돌렸다.
‘이거, 하루라도 놀리지 않으면 밥을 굶은 느낌이니……. 저 녀석 나중에 시집가면 시원섭섭하겠는데?’
어쩐지 활기가 도는 듯한 기분에 한유찬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놀리는 것에도 한도와 선이 있었다.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면서도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만큼. 한유찬은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정신적인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지 말고. 적당히 하고 자라. 몸 상하면서 전교 1등 하는 것보다, 건강하게 꼴등 하는 게 나는 더 낫다고 본다.”
“아! 오빠는 아주 많이 건강하셨구나?”
‘어쭈? 요게 머리 컸다고 반격까지 하네?’
문고리를 잡으며 한유찬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잘 자라.”
“네! 오빠도 주무세요!”
3
방으로 들어온 한유찬은 곧장 침대에 누우려 했다. 오늘의 헌팅으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내일 역시 헌팅 계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흘이 예정된 헌팅이었기에 투입 전날인 오늘은 특히 잘 쉬어야 했다.
그런데 침대로 다가가던 그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췄다. 침대와 책상 사이를 번갈아 오가는 한유찬의 눈길에서는 심대한 고민이 엿보였다.
‘아우! 정말…….’
머리를 벅벅 긁던 한유찬은 몸을 돌려 책상으로 향했다.
‘딱 한 판이다. 정말 딱 한 판!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게임!’
의자를 빼고 앉자, 낡은 모니터가 그를 향해 방긋 웃었다.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참지, 감히 네가 게임을 참아?’라고 묻는 듯했다.
‘정말 딱 한 게임이야! 내일 헌팅도 있으니까!’
한유찬은 자신에게 다짐을 거듭하며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드르륵. 드르르륵.
덜그럭거리는 펜 소리와 함께 모니터가 환하게 밝아졌다.
딱 한 게임만.
게임 중독자의 흔한 패턴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부팅이 끝나기 전에 살짝 변형되는 것 역시 흔한 패턴이었다.
‘딱 10시까지만.’
한유찬의 시선이 슬쩍 시계를 향했다.
현재 시각은 9시. 어쩐지 1시간만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11시! 아니야. 내일 사무소 집결 시간이 정오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12시 전에는 자는 거다!’
힘겨운 부팅은 몇 분씩이나 잡아먹으며 끝났고, 심하게 단출한 바탕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유찬은 게임을 엄청나게 좋아하기는 했으나, 게임을 즐길 만한 형편은 되지 않았다. 위험한 서포터 일로 수입은 제법 된다지만, 아래층의 고등학생 두 남매를 건사하기에는 빠듯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유찬은 고아인 두 남매가 친구들에게 주눅이 들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상처받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비싸지는 않지만, 중간은 되는 브랜드의 옷. 역시 최고가는 아니지만, 유행에 뒤처지지는 않은 휴대폰. 더불어 대학 입학을 대비한 적금까지 들어 놓았다.
덕분에 정작 한유찬 자신의 삶은 신형 컴퓨터 하나 사지 못할 정도로 빈곤했다.
혹자는 어리석다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한유찬은 만족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뒷바라지해주는 만큼 큰 사고 없이 잘 자라고 있는 두 남매를 보며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둘 다 공부도 곧잘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정작 받은 것의 크기로 따지자면, 내가 더 크지.’
한유찬은 자조 섞인 얼굴을 뒤로 한 채, 마우스를 움직였다.
달깍.
인터넷 브라우저의 시작 페이지는 대부분이 사용하는 포털 사이트가 아니었다.
검과 방패가 그려진 로고를 사용하는 플래시 게임 전문 사이트 웨폰 게임즈(Weapon games). 이곳은 한유찬이 유일하게 즐기는 여가 생활을 즐기는 장소였다.
게임 마니아답게 하고 싶은 게임은 많았지만, 컴퓨터 사양의 한계로 선택의 폭은 좁았다.
그 때문에 저 사양으로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해낸 것이 바로 플래시 게임이었다.
요즘에는 플래시 게임의 수준도 올라가 가끔 버벅거리는 경우가 생겼으나, 한유찬이 즐기는 분류는 화려한 그래픽을 요구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디펜스 게임.
한유찬이 빠져든 장르였다. 그는 단순, 반복적인 사냥과 레벨업 중심의 RPG보다는 차라리 장기나 바둑처럼 머리를 써서 플레이하는 게임을 좋아했다. 특히, 남들이 웬만해서는 클리어할 수 없는 난이도 높은 게임을 클리어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이 좋았다.
웨폰 게임즈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는 이미 저장된 상태. 클릭 한 번으로 가볍게 로그인을 한 한유찬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랭킹 탭을 선택하고 그 중 디펜스 분류를 확인했다.
[1. God’s Defender 87,899P]
최상단에 적힌 자신의 아이디를 확인한 한유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다른 건 몰라도 디펜스 만큼은 내가 갓이지!’
게임의 재미도 재미였지만, 한유찬은 이곳이 자신이 어깨를 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팍팍하고 위험한 삶이었다. 또한, 헌팅 때마다 받아야 하는 능력자들의 무시와 괄시는 절로 한유찬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비록 한 분류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최고라는 사실은 움츠러들었던 그의 어깨를 활짝 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물론 누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게임의 랭킹 1위, 더군다나 유명 메이저 게임도 아닌 마이너한 플래시 게임 사이트인데다가, 전체 랭킹도 아닌 한 분류의 랭킹 1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유찬은 자신의 랭킹을 확인할 때마다 웃었다. 어차피 자기만족 아니겠는가.
‘오늘은 뭘 하지? 잼 크레프트? 커스드 트레져? 아님, 오래간만에 고전으로 돌아가 볼까?’
요즘에는 디펜스 게임의 방식도 많이 변형되어 갖가지 게임이 나왔지만, 한유찬은 처음 접했던 고전적인 타워 디펜스 류가 좋았다.
한유찬이 고민하며 이곳, 저곳을 클릭하고 있을 무렵,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쪽지가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의 디펜스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와 더불어 친절하게 링크까지 걸려 있었다.
‘신의 디펜스? 신작인가?’
한유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고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미 클리어한 게임에서 랭킹 포인트 얻기는 쉽지 않았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줍기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작은 아직 추수하지 않은 논이었다.
랭킹 1위의 유지를 위해서는 신작 게임이 나오는 대로 될 수 있으면 클리어해주는 편이 좋았다.
달깍.
링크를 타고 들어가자 검은 화면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검은 화면이었다.
‘뭐야? 이 성의 없는 화면은. 설마, 이름은 거창하게 신의 디펜스면서 아마추어가 대충 만든 건 아니겠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럴듯한 이름이거나, 퀄리티 높은 스크린 샷을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게임 자체는 형편없는 경우였다.
불만이 치솟을 무렵 화면이 환하게 밝아지며 큼지막한 문구가 떠올랐다.
[신의 디펜스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부디 이름만큼만 재밌어라!’
한유찬은 피식 웃으며 ‘YES’를 클릭했다.
[귀하의 실력 확인을 위해 프리 스테이지(pre-stage)를 진행합니다.]
큼지막한 문구가 떴다가 사라지고, 이어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큼지막한 직사각형 필드가 나타났다. 필드의 양옆에는 뻥 뚫린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응?’
한유찬의 눈은 빠르게 화면 전체를 훑었다.
화면 좌측상단에는 각종 타워 모양의 버튼들이 늘어서 있었고, 게임 머니를 나타내는 코인과 생명력이 표시되었다.
‘흐음……. 코인 10,000에 기본 타워의 가격은 100. 이건 거의 샌드박스 모드인데? 뭐, 프리 스테이지라고 했으니 몸이라도 풀라는 건가?’
한유찬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앙의 필드를 바라보았다.
‘이런 게 또 재미있지.’
정해진 길을 따라 나타나는 몬스터를 요격하는 것도 재미지만, 자신이 직접 길을 만들어 몬스터를 유도하는 것 또한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디펜스 게임의 기본 룰은 스테이지마다 튀어나오는 적을 출구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이었다. 적이 출구에 도착하면 생명력이 깎여나가고, 모두 소모하면 게임이 끝난다.
요즘에는 이 룰을 여러 가지로 변형한 게임들이 만들어졌으나, 이 프리 스테이지는 디펜스 게임의 기본 룰을 따르고 있었다.
‘일단 길은 간단하게 두 갈래로 만들어서 드리블하면 되겠고…….’
길을 두 갈래로 만드는 방식은 입구에 들어온 몬스터가 무조건 출구 쪽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이용한 공략 방법이었다.
출구 자체에는 타워를 건설할 수 없었다. 출구를 아예 막아버리면 몬스터는 빠져나갈 곳이 없었고,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두 갈래로 만들어 놓고, 몬스터가 출구에 도착하기 직전 반대편 출구를 열고, 그 방향의 길을 막으면 몬스터는 반대편 출구로 나가기 위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이용해 양쪽의 출구를 끊임없이 여닫는 일을 한유찬은 ‘드리블’이라 불렀다.
‘문제는 공중인가?’
지상의 몬스터는 드리블 컨트롤만 잘하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장애물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비행 몬스터는 그런 꼼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스 타워로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화력을 집중해 녹이는 수밖에 없었다.
한유찬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타워를 배치해 나갔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4
현란한 드리블 컨트롤과 압도적인 공중 화력으로 웨이브 100까지는 무난하게 클리어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101번째 웨이브가 들이닥쳤다.
‘어라? 더 있나?’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한유찬은 다시금 게임에 열중했다.
‘설마……. 아직 안 끝나는 건 아니겠지?’
웨이브 200을 앞두고 한유찬은 슬금슬금 일어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웨이브 200을 클리어하자마자 201 웨이브가 이어졌다.
‘흐음……. 이걸 계속해야 하나?
웨이브 301.
화면 귀퉁이에 떠오른 숫자를 바라본 한유찬은 슬쩍 시계를 쳐다보았다.
막 자정을 넘어가는 시각.
내일을 위해서라면 분명 자는 게 옳을 터인데, 그렇다고 자기에는 지금까지 플레이한 시간이 아까웠다.
‘뭐, 설마 밤을 새우기라도 하겠어?’
한유찬은 가볍게 생각하며 넘겼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헐! 이거,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한유찬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웨이브는 490.
시각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게임을 시작한 지 벌써 여섯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을 지새운다 해도, 과연 클리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일단 500 웨이브까지만. 만약 거기서 더 나오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잠이나 자자.”
501 웨이브.
“쓰읍……. 이거 어쩐지 신경 거슬리는데?”
슬그머니 오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무려 여섯 시간 넘게 투자한 게임이었다. 그것을 클리어하지 않고 포기하기에는 지금껏 투자한 시간이 너무 아깝고 또, 허무했다.
물론, 클리어한다 해도 또 다른 허무함을 느낄 테지만, 적어도 클리어하면 랭킹 포인트라는 소득이라도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잠자리에 드는 게 누가 봐도 옳았다. 게다가 당장 정오에는 헌팅 계획까지 잡혀 있지 않은가?
‘일단 고!’
한유찬은 오기 서린 눈동자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601, 701, 801…….
시간이 갈수록 한유찬의 눈가는 거무스름한 빛을 띠었고,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나 단 하나, 그의 눈빛만큼은 모니터를 잡아먹을 듯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999 웨이브, 그리고 대망의 1000 웨이브.
“어!”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채 타워를 짓고, 취소하며 컨트롤하던 한유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더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이 보인다! 끝이 보여!”
웨이브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화면에 나타난 몬스터만 처리하면 클리어라는 뜻이었다.
화면에는 지금껏 처리하지 못하고 쌓인 몬스터가 득시글거리고 있었으나, 끝이 보이는 이상 클리어는 시간문제였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창밖의 빛을 맞으며 한유찬은 마무리 컨트롤에 열중했다.
- 꾸에에에에엑!
기괴한 비명과 함께 커다란 몬스터가 쓰러졌다.
1000번째 웨이브에 나타난 최종 보스였다.
“하하. 하…….”
한유찬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게임이 원래 그렇기는 했다. 특히나 혼자 즐기는 싱글 게임의 끝은 언제나 그렇듯 허무했다.
창밖으로 환한 빛이 들이쳤다.
아침이다.
“에휴!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깟 게임이 뭐라고…….”
후회가 밀려왔다.
당장 클리어하지 않아도 다음에 하면 될 일을 가지고, 왜 굳이 밤을 지새워가며 끝장을 보았을까? 그것도 당장 정오에 헌팅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귀하의 끈기와 타오르는 집념, 그리고 번뜩이는 재치에 감탄을 보냅니다. 축하합니다! 신의 디펜더로 선정되었습니다.]
‘신의 디펜더? 뭐, 세계를 지켜내는 스토리인가?’
모니터에 떠오른 문구를 바라보며 한유찬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세계는 다음에 지키기로 하고, 일단은 내 몸 상태부터 고쳐 놔야겠네요. 제작자 아저씨.”
한유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고물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컴퓨터, 제대로 종료 절차를 밟아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풀썩.
한유찬은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잠을 청했다.
정오의 헌팅에 참여하려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한유찬이 막 잠이 들 찰나, 까맣게 꺼져 있던 모니터에서 다시 빛이 뿜어졌다.
[프리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으로 베이직 타워를 개방합니다. 200 DP, 1 SP와 1 CP를 획득하였습니다.]
잠시 밝아졌던 모니터는 이내 들려오는 한유찬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 Chapter 2
1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황무지의 마른 대기를 찢어발겼다.
“빌어먹을 능력자 새끼들!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한유찬은 욕설을 외쳐대며 달리고, 또 달렸다.
“끄어어억!”
또다시 들려오는 비명에 한유찬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코뿔소를 닮은 괴수의 뿔에 복부를 꿰인 채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썩을! 동진이형까지!’
안면이 있는 인물의 죽음에 다시금 욕설이 터져 나왔으나,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괴수와의 거리는 백여 미터 남짓. 괴수와 인간의 속도 차이를 고려해 보면 단숨에 따라 잡힐 거리였다.
한유찬과 괴수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이 더 있었으나, 화가 날 대로 난 괴수 앞에서 인간의 몸뚱이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했다.
사실 능력자들이 도망친 이상 서포터들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기적과도 같은 변수를 찾아야 할 때였다.
콰직!
“크아아아악!”
다시금 등 뒤에서 울려 퍼진 비명을 들으며 한유찬은 직각으로 방향을 꺾었다.
흙먼지가 풀풀 피어오르는 황무지 위로 솟아오른 깎아지른 암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희박한 확률에라도 승부를 걸어보려면 저기밖에 없어.’
한유찬은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면서도 눈매를 좁히며 암벽을 살폈다.
틈을 찾아야 했다. 그것도 사람은 통과할 수 있으면서, 괴수는 통과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여야 했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희망이었지만, 계속 달려봤자 어차피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돌아오는 것은 괴수의 날카로운 뿔과 이빨에 갈가리 찢기는 길뿐이었다.
‘저기다!’
한유찬의 눈이 한순간 반짝였다.
밝은 갈색의 암벽에 세로로 그어진 한 가닥 어두운 줄. 그가 바라던 틈새가 틀림없어 보였다.
‘제발 좁아라! 그리고 깊어라!’
한유찬은 간절한 바람을 담은 채 다리를 놀렸다.
“허억! 허억! 후욱!”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간신히 내쉬며 달리기를 일 분가량. 암벽의 틈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두두두두두두.
육중한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뭐가 이리 빨라?’
한유찬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을 모두 처리했는지, 입가와 뿔에 붉은 얼룩을 잔뜩 묻힌 괴수가 마지막 목표인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거리는 대략 오십여 미터.
거리는 제법 있었지만 육중한 체구를 가진 괴수의 덩치 덕분에 한유찬은 마치 바로 등 뒤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제발! 제발! 제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한유찬은 달렸다.
쿼우우우우!
흉포한 괴성과 함께 괴수의 콧김이 목덜미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더는 안 된다. 이미 따라 잡혔다.
“으아아아아아!”
암벽의 틈새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한유찬은 그곳을 바라보며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땅에서 솟아오른 직후.
퉁!
한유찬은 강력한 힘이 그의 몸을 떠미는 것을 느꼈다.
“커헉!”
외마디 신음을 내지르며 한유찬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날아가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다행히도 굴러간 그의 몸이 향한 곳은 암벽 사이의 틈새 앞이었다. 한유찬은 채 정신이 돌아오기 전임에도 본능적으로 바닥을 기어 틈새 안으로 들어갔다.
쿠쿵!
시야가 어두워짐과 동시에 땅이 격하게 울었다.
한유찬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군데군데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으나, 심각한 상처는 없었다. 어쩐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공중에 뜬 그의 몸을 밀어낸 것이 뿔이 아닌 다른 부위였던 것 같았다.
“사, 살았다!”
한유찬은 기쁨의 탄성을 토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악취를 머금은 뜨끈한 숨결이 한유찬의 목덜미를 스쳤다.
‘서, 설마……. 아니겠지?’
한유찬은 떨리는 몸짓으로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광포한 기운이 담긴 괴수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흐억!”
한유찬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일 미터 남짓 거리에 틈새 사이로 낀 괴수의 머리가 있었다. 날카로운 뿔이 먹잇감을 찢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으나, 한유찬의 반 발짝 앞에서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천운인지, 눈썰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유찬이 찾은 틈새는 그가 원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겠지?’
“휴우우우우우…….”
한유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괴수가 자신을 해칠 수 없음을 깨달은 다음에야 그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어쩐지 오늘은 나오기 싫더라니…….’
밤을 꼴딱 새워서 한 게임이 문제였다. 잠깐 눈을 붙이기는 했다지만, 밤에 자는 잠만큼 피로가 풀리지는 않았다.
덕분에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한유찬은 헌팅 사무소로 나가기 전, 휴대폰을 들고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오늘 같은 날은 쉬는 게 옳았다. 헌팅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EA, 엑스트라 에어리어는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능력자들조차 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장소였다.
능력자도 그러한데, 별다른 능력도 없는 서포터는 오죽하겠는가?
그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사지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헌팅을 나가기 전, 서포터는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상식이었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좋지 않거나, 느낌이 이상하면 쉬는 게 옳았다.
하지만 쉬기도 쉽지 않았다.
신용도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미 참가하기로 하고 계획까지 세운 상태였다. 여기에서 능력자도 아닌 서포터가 갑자기 빠진다면 앞으로 헌팅에 참여하는 일은 쉽지 않아질 게 빤했다. 게다가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나면, 더는 이 바닥에 발을 붙일 수조차 없게 된다.
‘그냥 쉴 것을, 뭐하자고 기어 나와서는…….’
후회가 밀려왔으나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후회는 사치지. 당장 눈앞에 괴수가……. 어!’
한유찬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앞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괴수가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십 미터 뒤에서 발길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젠장!”
한유찬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등 뒤는 딱딱한 벽으로 막힌 상태.
“설마 뚜, 뚫리지는 않겠지?”
떨리는 손으로 더듬어본 암벽은 제법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괴수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두!
괴수가 돌진했다.
쿠웅!
격렬한 진동과 함께 돌조각이 튀어 올랐다.
다시 물러선 괴수가 재차 돌진했다.
쿠웅!
암벽 틈새에 절반쯤 머리를 틀어박은 괴수와 한유찬의 눈이 마주쳤다. 콧김을 씩씩 뿜어내는 괴수의 표정에는 암벽을 무너뜨려서라도 반드시 그를 잡아먹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제길! 코뿔소처럼 생겼으면 풀이나 뜯어 먹을 것이지! 무슨 육식이야?”
쿠웅!
암벽은 탄탄했지만, 몇 번이고 반복되는 돌진 앞에 서서히 굴복하고 있었다.
쩌적.
불길한 소리가 한유찬의 귓가를 찔렀다.
황급히 살펴보니 입구를 막은 암벽에 실금이 가 있었다.
‘뚜, 뚫리겠어!’
한유찬은 절박함으로 물든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위?’
틈새는 폭이 좁고 아주 긴 쐐기 모양이었다. 팔과 다리로 양쪽 벽을 지지하면 위로 올라갈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해 보자!’
마냥 손 놓고 잡아먹힐 수는 없었기에, 한유찬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놀리며 틈새를 올랐다. 그러나 채 몇 발짝 올라가기도 전에 괴수의 돌진이 암벽을 강타했다.
쿠웅!
양쪽 암벽을 흔드는 격렬한 진동에 한유찬은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크윽!”
까진 손바닥이 통증을 호소했으나, 한유찬은 이를 악물고 다시 암벽을 올랐다. 괴수의 뿔과 이빨은 그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울 터였다.
쿠웅! 쿠웅! 쿠웅!
오르고 미끄러지고, 또 오르고 미끄러지기를 몇 차례.
쩌적! 쩌저저적!
무척이나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를 막았던 암벽이 마침내 굴복했다. 무너져 내리는 돌무더기 사이로 괴수의 머리가 불쑥 밀려들어왔다.
“으아아앗!”
충격으로 바닥에 미끄러져 있던 한유찬은 안간힘을 쓰며 등 뒤의 암벽에 몸을 붙였다.
다행히도 아직 닿지는 않았다. 코에 난 뿔이 아슬아슬하게 앞섶을 스치는 정도였다.
푸욱! 푸훅!
악취를 머금은 괴수의 콧김이 얼굴에 와 닿았다.
괴수가 씩 하는 웃음과 함께 머리를 뺐다. 물론 인간이 괴수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한유찬의 눈에는 괴수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멀찌감치 물러난 괴수가 발길질하며 힘을 모았다. 그러기를 몇 차례. 괴수의 육중한 몸이 다시금 돌진했다.
두두두두두두!
한유찬은 땅을 울리는 괴수의 발소리가 마치 자신을 향한 장송곡처럼 들려왔다.
다시금 암벽을 오르려 했으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몇 차례 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한 탓에 체력이 바닥난 탓이었다.
“빌어먹을!”
문득 욕설이 터져 나왔다.
‘결국, 여기서 죽게 되다니…….’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 화는 지금의 상황을 만든 인물들에게 돌아갔다.
“개 같은 능력자 새끼들!”
어쩐지 헌팅 사무소에서 처음 얼굴을 봤을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쥐새끼 마냥 얄팍하게 생긴 놈부터, 비열한 인상의 놈, 푸근한 인상이었으나, 어쩐지 가식적으로 보이는 놈까지.
혹시 모를 불안감에 한유찬은 에어리어 기록용으로 사용하는 소형 필름 카메라를 배낭끈에 부착해 중간중간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D급 몬스터를 상대하다가 밀리자 서포터들을 미끼로 남긴 채 냅다 도망치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나가기만 하면……. 아주 다시는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도록 영원히 추방해 줄 텐데.”
억울하고 아쉬웠다.
이렇게 죽게 된 것도 아쉬웠지만, 사람 목숨을 미끼로 사용했던 능력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다는 점도 아쉬웠다.
‘하긴. 이젠 증거도 없으니…….’
쫓기는 도중 배낭은 이미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도중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 유찬 오빠! 유찬이 형!
두 남매의 얼굴이었다.
‘미안하다. 나도 살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방법이 없다. 딱 한 줄기 희망이라도 보이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돌아갈 텐데, 정말… 방법이 없다. 니들이 정말 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문득 눈앞이 흐릿해졌다.
“병신아! 운다고 저놈이 봐줄 것 같냐?”
쿠우웅!
마치 한유찬의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굉음과 함께 격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정말이지 방법이 없었다. 어디선가 본 것처럼 초월적인 존재가 딱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이상에는, 이곳에서 살아 나갈 방법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한유찬은 문득 고개를 들어 암벽 틈 사이로 작게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정말 미친 척하고 부탁하는데, 위에 계신 분. 딱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문득 어제 했던 게임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마치 삶을 달관한 듯한 웃음이었다.
“이래 봬도 제가 신의 디펜더인데 말입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딱 벽 하나만 만들 수 있게 해 주십쇼.”
우웅.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뭐, 뭐야?”
어리둥절한 한유찬의 귓가로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 띠링!
소리와 함께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점차 강해진 그 빛은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도 유난히 또렷하게 보이는 창을 하나 형성했다.
[10 DP를 소모하여 기본 방벽을 소환합니다. 소환할 장소를 지정해 주십시오.]
“뭐, 뭐지?”
한유찬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신기한 것은, 시선이 변하고 보이는 광경이 변함에도 눈앞에 떠오른 창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여도 보았다.
빛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창은 여전했다. 마치 미래 세계를 다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홀로그램 영상이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두근.
한유찬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살아날 방법이 생겼다.
왜 갑자기 이런 문구가 튀어나왔는지, 방벽을 어떻게 소환한다는 것인지는 몰랐다.
중요한 것은 방벽이라는 단어였다.
이름 그대로 방어를 위한 벽이니, 소환만 된다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뭐가 됐든 좋으니까 입구! 입구를 막아줘!”
[소환할 장소를 지정해 주십시오.]
“입구라니까! 아!”
다급하게 소리치는 순간 한유찬은 은은한 녹색 빛이 바닥을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마치 바둑판처럼 격자무늬를 그리는 빛이었다.
격자 한 칸의 크기는 대략 1미터 가량.
한유찬은 그것을 보는 순간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시선? 아닌가? 마우스가 없으니…….’
한유찬은 슬그머니 손가락을 들어 바닥을 가리켜보았다. 그러자 벽처럼 생긴 흐릿한 홀로그램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나타났다.
‘이렇게 만들면 된단 말이지!’
한유찬은 활짝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벽 모양의 홀로그램은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크기는 너비 2칸에 높이 2칸인가?’
좁은 틈새에서는 양옆의 암벽 때문에 구분할 수 없었지만, 벽 모양의 홀로그램이 틈새 바깥으로 나가자 비로소 벽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본 방벽 소환이라고 하면 되겠지?’
한유찬은 소환할 자리에 선명하게 떠오른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시선은 홀로그램 너머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괴수의 모습이 보였다. 발길질하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돌진할 듯 보였다.
‘그래, 와 봐라. 꿈을 꾸는 건지, 헛것을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되기만 하면 넌 끝이야!’
한유찬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괴수가 돌진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미약한 땅울림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괴수의 육중한 동체를 바라보며 한유찬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거리가 5미터 이하로 줄어들었을 때, 한유찬은 목이 터지도록 크게 소리쳤다.
“기본 방벽 소환!”
한유찬의 외침에는 지금이 꿈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임을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웅!
미약한 진동과 함께 한유찬이 가리킨 곳에서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금세 사라진 빛무리는 너비 2미터, 높이 2미터의 튼튼해 보이는 벽을 남긴 후 사그라졌다.
“저, 정말 생겼어! 방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찰나였다.
콰직!
우당탕탕탕!
쿠워어어어어!
무언가 단단한 물체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물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고, 뒤이어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막았어!’
한유찬의 입가에 찢어질 듯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의 웃음이 채 피어오르기도 전에 그는 다시금 입매를 굳혀야 했다.
[방벽에 가해진 충격으로 소환시간이 2시간 차감됩니다. 남은 소환시간 21시간 59분]
‘내구도 비슷한 게 있는 건가? 이게 정말 무슨 게임도 아니고……. 후우! 집중하자. 집중!’
한유찬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남은 시간으로 볼 때, 기본 소환시간은 24시간. 충격을 받을 때마다 2시간씩 차감되므로 앞으로 11번. 최선은 놈이 그 안에 포기하고 물러나는 건데.’
쿼우우우우우!
분노에 찬 괴수의 흉성이 귀를 때렸다.
‘절대로 그럴 것 같지는 않군!’
한유찬은 남은 힘을 쥐어짜며 암벽 틈새를 기어올랐다.
콧김을 씩씩 뿜어대며 발길질하는 괴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날카롭던 뿔의 끝이 살짝 부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괴수가 화가 난 원인으로 보였다.
“훗! 네가 멋대로 들이 받아놓고, 나한테 성질이냐?”
방벽이라는 든든한 보호막 때문일까?
한유찬의 말투에는 전에 없던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두두두두두두!
땅 울림과 함께 시작된 돌진, 그리고 충돌.
쿠웅!
한유찬은 양쪽 벽을 단단히 지지하며 충격에 대비했으나, 방벽과 암벽이 약간 떨어져 있던 탓인지 방벽의 진동은 그가 있는 암벽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저 방벽을 어떻게 소환했느냐는 건데.”
일단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됐겠다, 이제는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할 때였다.
“방벽. 분명 익숙한 단어야.”
디펜스 게임 중에는 몬스터가 타워를 공격해 파괴하는 종류도 있었다. 이런 방식에서 타워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을 가로막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방벽이었다.
“설마, 타워도 있는 건 아니겠지?”
자기도 모르게 떠오른 시답지 않은 생각에 한유찬은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방벽을 하나 더 소환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까 어떻게 했더라?”
쿠웅!
잠시 생각하고 있는 사이, 괴수가 한 차례 더 돌진했다.
고통스러운 괴수의 괴성과 함께 소환시간이 1시간 30분 차감되었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뿔이 부러져 아팠는지, 괴수의 돌진은 처음보다 힘이 빠져있었다.
“쯧! 저건 학습 능력도 없나? 몇 번 해봐서 아프기만 하고 안 뚫리면 그냥 갈 것이지…….”
나름대로 바람을 담은 중얼거림을 괴수가 듣기라도 한 걸까? 괴수의 행동양식이 변화했다.
쿵! 쿠쿵! 콰직!
멀리 떨어져 돌진하는 방식이 아닌, 제자리에 서서 뿔과 앞발, 몸통을 사용한 공격이었다.
[소환시간이 10분 차감되었습니다.]
[소환시간이 4분 차감되었습니다.]
[소환시간이…….]
연달아 떠오르는 알림에 한유찬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빌어먹을! 말이 씨가 된다더니, 오늘따라 왜 이래?”
돌진처럼 시간 단위로 뭉텅 차감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유찬에게는 오히려 지금이 더 무서웠다. 차츰차츰 자신의 생명력이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발동 원리! 소환 방법! 이걸 찾아야 해!”
[소환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문구에 한유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 이거야! 듣겠다! 설명해줘!”
한유찬의 대답과 함께 갑자기 그의 시야가 울긋불긋한 빛으로 채워졌다.
“이, 이건…….”
가운데의 시야를 중심으로 주변에 죽 늘어선 갖가지 글과 간단한 그림으로 이루어진 버튼들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인터페이스였다.
- 신의 디펜더.
상단 중앙에 큼지막하게 박힌 글자가 한유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말이었어?’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밤을 새워가며 진행했던 게임이 출력한 마지막 문구. 그것은 분명 그를 신의 디펜더로 선정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후! 일단 이유는 나중에! 지금은 살펴볼 때야!’
한유찬은 시선을 쭉 훑으며 인터페이스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유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길쭉한 탑 모양의 꼭대기에 화살 모양이 그려진 버튼이었다.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탑을 가리키자 익숙한 알림창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베이직 타워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정말 타워가… 있었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한유찬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엿보였다.
‘이거 잘하면…….’
살아날 수 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놈! 잡을 수도 있겠는데?’
지금 순간에도 열심히 방벽을 두드려대고 있는 괴수의 명칭은 철갑가죽 코뿔소이고, 등급은 D등급이었다. 물론 단계를 구분 짓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들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등급이었다.
비록 A급이나 B급에 비해 낮은 등급이기는 하지만, D등급 몬스터도 그것들과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피부 주변을 둘러싼 보호막이었다. 이 때문에 능력자들의 능력이 아닌, 일반 무기로는 자그마한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한유찬은 방벽에 들이받은 후, 코뿔소의 날카로운 뿔의 끝 부분이 약간이지만 부러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뿔은 일반적인 피부가 아닌, 무기였기에 분명 다른 부분보다 더욱 강력한 방어막이 형성되었을 터였다. 그런 뿔이 부러졌다는 것은 방벽에 방어막을 뚫거나 무효화시킬 힘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저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벽도 그러할 진데, 직접적인 공격력을 가진 타워라면 어떨까?
‘통할 거야. 아니, 반드시 통해!’
한유찬은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다시 한 번 타워 그림이 그려진 버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튼 아래에는 100DP라고 적힌 자그마한 글자가 있었고, 옆의 방벽에는 10DP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슬쩍 시선을 위로 올려 보니 190DP라는 글자가 다소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남은 게 190이니 처음 주어진 것은 200DP였겠군.’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방벽에 낭비하지 않았다면 타워를 두 개 소환할 수 있는 비용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디펜스 게임이었다면 절대 이런 낭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쿠웅!
다시금 들려온 소리에 입맛을 다시던 한유찬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휴! 이 와중에 무슨 게임 생각을!’
세차게 머리를 흔든 한유찬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하나만 생각하자.’
그의 시야에 발광에 가까운 몸짓으로 방벽을 두드리는 철갑가죽 코뿔소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놈을 잡는 것!’
한유찬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두근거림이 두려움과 공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면, 지금의 두근거림은 설렘이 담겨 있었다.
‘잡기만 하면! 나도…….’
3
쿠웅!
[소환 시간을 모두 소모하며 방벽의 소환을 해제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문구. 그와 함께 암벽 틈새의 입구를 철벽같이 막아주던 방벽은 빛무리로 화해 사라졌다.
쿠워어어어어!
꿀꺽!
한유찬은 마른 침을 삼키며 흉성을 내지르는 괴수를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그는 양쪽 암벽을 지지한 팔다리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상처 방지와 조금이라도 더 큰 마찰력을 얻기 위해 그의 양팔에는 일부러 찢어낸 티셔츠가 둘둘 감겨 있었다.
‘버티기만 하면 돼! 딱 한 번만 버티면 돼!’
두두두두!
몇 발짝 물러났던 괴수가 돌진했다.
쿠웅!
충격과 함께 입구가 조금 더 부서지며 돌조각이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 괴수가 뿔을 휘저었다.
입구가 조금 더 부서진 탓에 머리도 조금 더 깊숙하게 들어왔고, 뿔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슷!
종아리 아래쪽이 부러진 뿔의 날카로운 부분에 스치며 길게 찢어졌다.
‘크윽!’
한유찬은 이를 악물며 조금 더 위로 기어 올라갔다.
‘만약 저 뿔이 온전했다면…….’
섬뜩한 생각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마 다리가 통째로 잘려나가던가, 아니더라도 뼈가 상하는 큰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주르륵. 뚝. 뚝.
상처에서 새어 나온 핏물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핏물과 비릿한 피 냄새는 괴수의 흉포함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쿼우워어어!
괴수는 흉성을 터뜨리며 계속해서 머리를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더욱 격렬하게 뿔을 휘저었다.
다행히도 아슬아슬한 차이로 뿔은 닿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한유찬은 종아리를 타고 오르는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유찬은 눈을 반짝임과 동시에 힘껏 소리쳤다.
“지금! 방벽 소환!”
우웅!
미약한 진동음과 함께 은은한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빛무리는 하나로 뭉쳐 단단한 벽을 형성했다.
쿠익?
괴수가 의문이 담긴 소리를 흘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수의 펑퍼짐한 엉덩이는 바로 뒤쪽에 솟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었다.
방벽이었다.
암벽의 틈새 사이로 파고든 머리, 그리고 엉덩이 부근을 가로막은 방벽.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끼었어!”
한유찬은 기쁨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쿼우어어어어!
안간힘을 쓰며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방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방벽에 가해진 강한 힘으로 소환시간이 1분 차감됩니다. 남은 소환시간 23시간 58분]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바라보며 한유찬은 피식 웃었다. 이런 식이라면 방벽이 사라질 때까지 최소한 몇 시간은 걸릴 것이다.
“너 이제…….”
한유찬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괴수를 향해 물었다.
“어떡할래?”
괴수는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 쳤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단단히 끼었다. 뒷발질마저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괴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온 힘을 다해 뒷걸음질치며 엉덩이로 방벽을 밀어내는 행위 정도였다.
[소환 시간이 1분 차감되었습니다.]
[소환 시간이 40초 차감되었습니다.]
‘직접 적인 타격이 아닌, 힘만으로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건가?’
한유찬은 여유로운 얼굴로 처음의 방벽에 가해진 공격과 지금을 비교했다.
‘만약 길을 만든다면 괴수의 폭보다 아슬아슬하게 넓은 정도가 좋겠군. 그리고 돌진을 할 수 없도록 쭉 뻗은 통로보다는 자주 꺾이는 식으로 만드는 게 좋을 거야. 그러려면 일단 DP를 모아야 할 텐데……. 그건 어떤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거지?’
잠시 생각하던 한유찬은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타워가 몬스터에게 통하는지도, 얼마만큼의 위력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일단 저놈부터 잡고 나서!’
한유찬은 괴수의 등 뒤쪽으로 5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타워를 소환했다.
우웅!
미약한 진동음과 함께 빛무리가 피어올랐고, 커다란 타워를 형성했다. 아래쪽은 한 변이 2미터인 정사각형이었고, 높이는 대략 5미터 가량의 타워였다.
[베이직 타워. 공격력 10. 사정거리 100m.]
타워를 바라보자 간단한 설명이 떠올랐다.
‘공격력이 10이란 말이지. 횟수만 잘 세면 체력을 알 수 있겠어.’
타워의 꼭대기에는 커다란 십자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조종하는 사람이나 기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십자궁은 타워가 생성되자마자 아래의 괴수 쪽으로 방향을 돌리더니 커다란 화살을 쏘아냈다. 사람 손목만 한 두께에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대형 화살이었다.
슈욱! 푹!
쿠워어어어어!
괴수가 고통에 찬 울음을 터뜨렸다.
‘응?’
한유찬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화살이…… 박혔어?’
일반적으로 방어막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괴수의 몸은 물리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방어막이 모든 충격을 상쇄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화살이 박혔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방어막을 무시해?’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애초에 방벽과 타워를 소환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래. 중요한 것은 상황이 더욱 유리해졌다는 점이지!’
한유찬은 눈을 빛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슉! 슉! 푸슉!
타워는 계속해서 대형 화살을 쏘아냈고, 화살은 쏘는 족족 괴수의 몸에 박혀 들었다.
그럴 때마다 괴수가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한유찬에게는 천사들의 노랫소리로 들렸다.
‘연사속도는 대략 2초에 한 번!’
화살은 계속 날아갔고, 괴수의 몸은 고슴도치처럼 변해갔다. 괴수는 괴성을 질러대며 그곳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헛된 몸부림일 뿐.
쿠웨에에에엑!
처절한 단말마를 끝으로 괴수의 거대한 몸은 축 늘어졌다.
‘50번! 죽은 건가?’
한유찬이 이런 의문을 품을 무렵, 문득 경쾌한 알림음이 그의 귓가를 울렸다.
- 띠링!
[60DP를 획득하였습니다.]
알림음과 함께 눈앞에 떠오른 문구에 한유찬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DP! 몬스터를 잡는 걸로 DP를 얻을 수 있다면!’
타워를 계속 건설하는 게 가능했다.
‘아니, 그뿐만 아니지! DP만 충분히 모을 수 있으면!’
에어리어 내부를 디펜스 게임의 맵처럼 만들고 활용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한유찬은 머릿속으로 그 광경을 그려 보았다.
타워에서 쏘아지는 화살. 그 공격을 받은 몬스터들이 흉포한 괴성을 내지르며 몰려들었으나, 타워 주위를 감싼 방벽에 의해 가로막힌다. 어떻게든 자신을 공격한 타워를 부수기 위해 방벽 주변을 돌아보지만, 이번에는 다른 쪽의 타워에서 화살이 날아들었고, 그렇게 미로처럼 만들어진 방벽의 길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다.
계속되는 공격에 몬스터는 더더욱 흉포하게 날뛰건만, 주변을 막은 방벽은 요지부동. 결국,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의 비에 몬스터는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진다.
“캬아!”
한유찬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능력자가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아예 에어리어 하나를 장악해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어. 그렇게만 되면…….”
헤벌쭉 벌어진 입으로 밝은 미래를 그려가던 한유찬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빛무리에 상상에서 벗어났다.
‘아! 결정화 과정!’
괴수의 사체에서 하얀 빛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명 결정화 과정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이었다.
괴수는 사체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괴수가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푸른 보석을 남겼는데, 이것을 두고 각국은 마석, 코어, 결정체 등의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이 보석은 엑스트라 에어리어에서 생산, 채굴, 채취되는 모든 것의 효과를 증폭하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에너지 스톤에 결정체를 갈아 넣으면 에너지 스톤의 에너지 생산량과 방출량이 증가하고, 신약의 베이스가 되는 신물질에 첨가하면 약효가 월등히 향상된다.
또한, 금속을 제련할 때 추가하면 강도나 연성, 전기 전도도와 같은 물성이 증가하는 등, 결정체는 그야말로 만능의 물질이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만으로도 결정체는 훌륭한 가치를 가졌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바로 능력의 증폭이었다.
결정체를 사용해 만든 장비를 착용하면 능력의 사용이 훨씬 수월해짐은 물론 능력 자체의 효과가 훨씬 강화되었다.
항상 생명을 걸고 에어리어에 들어가야 하는 능력자들에게 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장비는 일종의 생명보험과도 같았다. 어차피 돈은 넘쳐 났기에 그들은 장비 하나당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쏟아부어 가며 좋은 장비를 맞추려 했다.
결정체의 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된 원인이었다.
한유찬은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와 괴수의 결정화가 이루어지는 괴수의 사체로 다가갔다.
얼마 후, 빛무리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빛무리가 빨려 들어간 자리에는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보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게 결정체인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결정체를 살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사냥이 끝난 괴수의 결정체를 능력자가 줍는 것을 멀찌감치에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쓰임새만큼 결정체의 가격은 고가였기에, 헌팅에 나선 능력자들은 괴수를 처치한 뒤, 주변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았다. 자칫 잘못 접근했다가는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한유찬은 홀린 듯 다가가 결정체를 집어들었다.
‘후후! 이게 천만 원짜리란 말이지?’
한유찬은 엄지손가락만 한 결정체를 눈가에 가까이 대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결정체는 그 결정도에 따라 가격이 산출된다. 현재 시세는 결정도 1당 2만 원 정도이고, D등급 괴수가 남기는 결정도가 500 근처였으니 천만 원 정도가 된다.
‘이러니 능력자들이 에어리어에 목맬 수밖에 없겠지.’
직장인이 몇 달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한순간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메리트일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다면 한 번 사냥으로 열 개 이상의 결정체를 얻을 수도 있으니, 헌팅에 참여한 능력자 숫자대로 나눠도 충분한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여기에서 등급을 올려 1000 이상 되는 결정체를 얻으면 소득이 다시 몇 배가 증가하겠지.’
결정체는 결정도가 높을수록 효과가 증대된다.
이것은 특히 자릿수가 증가하는 곳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는데, 결정도 999짜리와 1001짜리는 고작 결정도 2의 차이임에도 그 효능은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였다.
아직 학자들이 정확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드러난 사실이 그러했으니 그저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결정도 1000 이상의 결정체의 시세는 결정도 1당 5만 원.
즉, 1000짜리 결정체 하나가 5천만 원의 값어치를 가지는 셈이었다. 물론 시세는 여러 가지 요소에 따라 정부가 정해 놓은 평균 가격이었고, 실제로 매입하는 회사나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쯧! 아직은 무리지. D등급도 50발인데, C등급 이상은 최소한 수백 발은 쏴야 할 거야.’
한유찬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막연한 분홍빛 미래보다는 현실이 중요했다.
‘아니, 잠깐! 디펜스 게임이라면 타워 업그레이드 같은 게 분명히 있을 텐데?’
한유찬은 눈을 빛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인터페이스.”
시야를 가득 메운 홀로그램을 살펴보던 한유찬의 눈이 어느 순간 빛을 발했다.
‘있다!’
얼핏 보아서는 잘 시선이 안가는 시야 오른쪽 아래 구석진 곳. 그곳에 [업그레이드]라는 버튼이 반짝이고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버튼을 클릭하자 ‘팟!’ 하는 빛과 함께 세부 항목이 떠올랐다.
[타워]
[타워 스킬]
[캐릭터 스킬]
‘오오! 이거면! 이거라면!’
한유찬은 뛸 듯한 기쁨을 애써 내리누르며 각 세부 항목을 살펴보았다.
- 신규 타워 개방
- 아이스 타워 800DP
- 화염폭발 타워 1000DP
‘어라? 이것밖에 없어?’
타워 항목을 클릭하자 떠오른 세부 내용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그가 기대하던 타워의 성능 향상은 없었을뿐더러, 소모되는 DP마저 높았다.
‘쯧! 화염폭발은 범위형 공격을 하는 것이겠고, 아이스라면 역시 이동 속도나 공격 속도를 늦추는 거겠지?’
입안이 씁쓸해지는 아쉬움이 남았으나, 영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DP만 충분히 모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DP란 말이겠지.’
DP가 모자라서인지 어두운 회색으로 물든 항목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한유찬은 타워 스킬 항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 소환 유지시간 강화 1SP
- 방어력 강화 1SP
타워 스킬 항목 역시 단출했다.
‘흐음……. 하긴, 이제 막 시작한 게임이니 처음부터 많을 리가 없겠지. 그보다 스킬 트리 전체를 보여준 다음 선택하는 편이 좋았겠지만…….’
애초부터 그가 선택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훗! 배부른 소리겠지.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다더니 딱 그 짝이군.’
어차피 모든 게임은 제작자가 만든 룰에 따라 클리어할 수밖에 없었다. 사용자의 역할은 게임의 클리어를 위해 제작자가 부여한 룰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뿐이었다.
‘어? 1SP? 이건 또 뭐지?’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스킬 포인트인가? 그런데 이건 회색이 아니네? 지금 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한유찬은 하얗게 반짝이는 두 항목을 바라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스킬이라는 항목 오른쪽 옆에 작게 적힌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 1SP
‘흐음……. 뭐, 특별히 찍을 만한 것도 없으니 일단은 패스.’
SP를 바라보며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던 한유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킬 항목을 접었다.
물론 소환 유지 시간 강화나 방어력 강화도 좋은 스킬이기는 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의 한유찬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스킬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워의 사정거리는 좁았고 괴수의 활동영역은 넓었기 때문이다. 또한, 괴수의 처리 시간에 비해 타워의 소환 시간이 너무 긴 탓도 있었다.
방어력 역시 값싼 방벽으로 커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끌리는 스킬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초반이고, 아직 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또한, SP를 얻는 방법도 알지 못했으니, 일단은 아껴둘 작정이었다.
- 질주
- 타워의 주인
마지막 캐릭터 스킬 항목을 열자 두 개의 세부항목이 나타났다.
‘질주는 알겠는데, 타워의 주인?’
한유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타워의 주인을 주시했다.
- 캐릭터가 타워 내부에 있거나 타워와 접촉할 시, 타워의 전반적인 능력이 25% 향상됩니다. 타워의 각 면에 캐릭터만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생성됩니다.
‘오호! 예상대로야. 집중해 바라보니 정보가 나오는군.’
속으로 탄성을 터뜨린 한유찬은 이내 고민에 찬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질주와 타워의 주인 모두 그에게 필요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거참, 타워 스킬에는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더니, 여긴 왜 두 개야? 차라리 하나씩 나눠서 나오던가.’
한유찬은 불평을 터뜨리며 질주에 시선을 집중했다.
- 30초간 이동속도가 200% 증가합니다. 사용 후, 1분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필요합니다.
‘헐! 이거 정말 고민되는데?’
현재 한유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몬스터를 잡아 결정체와 DP를 얻는 것 역시 중요했다.
질주가 있으면 몬스터의 추격을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잘 만하면 몬스터를 이끌고 타워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식으로 유인할 수도 있었다.
타워의 주인 역시 몬스터의 사냥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위기의 순간 타워의 문을 열고 몸을 피하면 적어도 타워의 소환시간만큼은 안전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한유찬은 결국 선택을 내렸다.
‘집에 가야지. 살아서!’
그의 선택은 질주였다.
# Chapter 3
1
“후우!”
한유찬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코끼리보다 반 배가량 커다란 철갑가죽 코뿔소 한 마리가 바위에 뿔을 갈아대고 있었다.
아직 괴수의 인식범위 바깥의 먼 거리임에도 한유찬은 왠지 ‘서걱서걱’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한유찬은 팔뚝 언저리에 돋아난 소름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팔뚝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는 미세한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겁이 나지만 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앞으로의 안전을 위한 발판이 되어 줄 터였다.
한유찬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보이는 타워를 바라보니 두려웠던 마음이 한결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한, 그와 타워 사이에 듬성듬성 자리한 바위 사이로 얼기설기 엮인 등산용 자일을 확인하자 미약하게나마 자신감이 생겨났다.
‘준비는 완벽해. 할 수 있어!’
떨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한유찬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D등급 몬스터의 인식범위는 대략 500미터 내외. 하지만.’
한유찬은 500미터를 한참 남긴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뒤로 한껏 젖혔다가 폄과 동시에 팔을 휘둘렀다.
휘이이익.
주먹만 한 돌멩이가 날아가 앞쪽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바위에 뿔을 갈아대던 괴수의 동작이 일순 멎었다. 놈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움직이더니 그 뒤에 서 있는 한유찬에게 딱 꽂혔다.
- 쿠워어어어어!
괴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한유찬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괴수의 육중한 몸체가 돌진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거리의 차이는 500미터 남짓. 그리고 이것은 초당 10미터 정도로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후욱!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유찬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괴수는 그와 일직선을 그리며 쫓고 있었다.
‘할 수 있어!’
주문을 외우듯 자신감을 더하며 한유찬은 눈앞으로 다가온 높이 2미터 가량의 바위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손으로 바위 끄트머리를 잡으며 반동을 가해 바위 위로 완전히 올라설 수 있었다.
슬쩍 뒤를 살피자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철갑가죽 코뿔소의 모습이 보였다.
‘넌 무조건 직진이지?’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은 철갑가죽 코뿔소의 특성이었다. 설사, 장애물이 가로막더라도 단단한 육체와 무식한 힘으로 뚫어버리며 쫓는 습성.
한유찬이 올라선 바위는 폭이 2미터 가량이지만, 길이는 5미터에 달하는 길쭉한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그를 쫓는 철갑가죽 코뿔소는 5미터 두께의 단단한 바위를 몸으로 뚫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한유찬은 피식 웃으며 바위 위를 달리다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발이 닿는 즉시 다시금 전력을 다해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탓탓탓탓!
콰앙!
한참을 달려가는 도중, 등 뒤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본 한유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무식한 놈! 그걸 한 번에 뚫어?’
정확히 말하자면 괴수가 5미터 두께에 달하는 바위를 뚫어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딪힌 충격으로 바위의 앞면이 부서졌고, 무너져 내린 경사면을 괴수가 그대로 타고 올라와 바위 위로 올라선 것이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세운 계획이었건만, 괴수의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 앞에서는 별반 쓸모가 없었다.
‘쩝! 그래도 속도를 늦추기는 했으니까.’
한유찬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다리에 힘을 더했다.
500미터, 400미터, 300미터…….
전력을 다해 달림에도 괴수와의 거리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몇 번이나 질주를 사용할까 망설였으나, 한유찬은 사용하지 않았다. 아직 준비한 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한유찬은 듬성듬성 바위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번에는 통해라!’
한유찬은 허들을 넘듯 바위 사이로 얼기설기 엮인 밧줄들을 넘어가며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은 다시금 와락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툭. 투툭. 툭.
바위 사이에 엮인 밧줄은 무려 톤 단위의 장력을 자랑한다던 등산용 자일이었다. 하지만 서포터 용품점 주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그 자일은 너무도 무력하게 끊어지고 있었다.
“뭐? 코끼리가 매달려도 안 끊어져? 공룡도 데려오면 매달아 준다고? 썩을!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그 아저씨, 이걸로 번지점프 시켜준다!”
한유찬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세 가지 함정 중, 그가 가장 공들여 만든 함정이었다. 나름대로 괴수가 달릴 때 발목이 걸리게끔 높이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함정이 이토록 허무하게 수포로 돌아갈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한유찬은 속이 타는 심정으로 타워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타워와의 거리는 대략 1킬로미터 남짓이었고, 괴수와의 거리는 300미터도 채 남지 않았다.
“젠장! 질주!”
[30초간 이동속도가 200% 증가합니다.]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땅을 박차는 다리가 부풀어 올랐고, 내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 쑥쑥 앞으로 밀어냈다.
귓가에 쉭쉭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거라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300미터 정도로 줄어든 거리가 유지되고 있었다. 괴수의 속도는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에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30초. 그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시간 안에 무조건 타워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서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에휴……. 그놈의 욕심이 문제지. 그냥 살아난 것만으로 만족할 것이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짓을 해?’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무모한 짓임은 분명했다.
감히 어느 누가 몬스터를 유인해 사냥할 생각을 할 것인가?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한유찬의 계획을 들었다면, 열이면 열 모두 미쳤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을 터였다.
능력자라면 또 모른다. 그들은 말 그대로 초인이었기 때문이다.
‘저건, 아무래도 안 통하겠지?’
한유찬은 시선을 조금 멀리 두었다.
아직 남아 있는 함정이 하나 더 있기는 했으나, 솔직히 기대를 걸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고작 깊이 1미터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황무지를 굴러다니는 덤불로 위를 대충 덮어 놓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저건 잊고, 일단 타워로 가는 것만 생각하자.’
한유찬은 강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다리에 힘을 더했다.
두두두두두!
괴수는 맹렬하게 돌진했고, 거리는 서서히 좁혀졌다. 질주의 사용시간이 끝난 것은 아니었으나, 한유찬의 체력이 문제였다. 질주를 사용하기 전부터 전력으로 달렸기 때문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타워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500미터 이상 남았다. 그리고 질주의 적용 시간 안에 도착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듯싶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라고!”
강하게 소리치며 달려 보았으나, 속도는 오히려 줄어들 따름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빌어먹을!”
한유찬이 욕설을 내지를 때였다.
- 쿠워어어어!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이어 분노에 찬 괴수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등 뒤를 돌아본 한유찬의 얼굴에 갑자기 꽃이 폈다. 자욱하게 피어난 흙먼지 사이로 바닥을 뒹구는 괴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한유찬은 활짝 웃으며 공중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살아날 수 있다는 강렬한 희망이 떠올랐다.
바닥을 박차는 다리에 다시금 힘이 붙기 시작했다. 몸은 여전히 지친 상태였으나, 살아날 희망을 붙든 정신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 쿠워어어!
다시금 괴성과 함께 땅 울림이 일어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속해서 함정에 걸려주는 괴수 덕분에 질주의 사용시간이 끝났음에도 괴수와의 거리는 더 벌어졌다.
“이거거든! 당연히 이랬어야지! 내가 이걸 노렸다고!”
한유찬은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실, 기대감이 가장 낮았던 함정이었다. 스스로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던 함정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결과다. 예상이나 심정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 사이 타워와의 거리는 200미터 아래로 접어들고 있었다. 괴수와의 거리는 300미터 이상이니 이제는 안정권이라 할 수 있었다.
한유찬은 마지막까지 달려 타워의 사정거리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은은한 녹색 빛의 바닥.
세상에서 오로지 그에게만 보이는 그곳에 들어서자 한유찬은 바짝 조여들었던 마음이 일순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지!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지!’
한유찬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날카로운 뿔을 앞세우며 돌진해오는 괴수의 모습이 보였다.
두두두두두두!
거리는 백여 미터. 사람이라면 한참이겠지만, 괴수에게는 순식간에 좁힐 수 있는 거리였다.
“후욱! 후욱! 후욱!”
한유찬은 눈빛을 빛내며 쇄도하는 괴수를 바라보았다.
‘자, 투우 한 번 해보자고!’
괴수와의 거리가 20미터 안으로 접어드는 순간, 한유찬은 힘껏 땅을 박차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괴수는 그가 있던 자리를 짓밟고 지나갔고, 그 순간 타워 쪽에서 활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웅!
푸욱!
괴수의 몸 위에 길쭉한 막대 하나가 돋아났다.
- 쿠워어어어어!
바닥을 구르느라 한유찬은 타워가 괴수의 속도를 예측하고 화살을 쏘았는지, 아니면 화살에 유도 기능이 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웬만한 창대만 한 크기의 화살이 괴수의 몸에 박혔다는 점이었다.
‘이제 어쩔래? 나야? 타워야?’
한유찬은 괴성을 내지르는 괴수를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괴수의 모습에 자세를 바짝 낮추며 언제든 몸을 피할 준비를 했다.
괴수가 막 돌진을 시작하려는 찰나, 다시금 활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괴수의 몸에 막대 하나가 더 돋아났다.
- 쿠워어어어어!
괴수는 흉포한 괴성을 터뜨리며 펄쩍 뛰었고, 그러는 사이 다시 한 발의 화살이 괴수의 몸에 추가되었다.
비명처럼 울려 퍼지는 괴수의 울음을 들으며 한유찬은 씩 웃었다. 그가 괴수에게 쫓기던 상황을 생각하니 고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괴수에게 쫓기던 상황을 돌이켜보니 한유찬은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크흠! 그러게 왜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어? 적당히 할 것이지.’
한유찬은 괴수에게 쫓기며 한탄하고 후회했던 순간이 유독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적잖이 얼굴이 뜨거웠을 터였다.
‘에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죽을 상황에서 후회 안 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한유찬은 자신의 행동을 애써 정당화하며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방향은 그가 처음 괴수에게 쫓겨 숨어들었던 암벽 틈새를 향해서였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지만 괴수는 이미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섬뜩한 붉은빛으로 물든 괴수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오로지 커다란 타워뿐이었다.
괴수는 자신에게 무지막지한 고통을 안겨 준 원흉을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괴수는 육중한 땅 울림을 만들며 타워를 향해 돌진했고, 그 사이 두어 발의 화살이 더 날아들어 괴수의 몸에 박혔다.
‘아! 유도였네!’
처음 두 발은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괴수가 있던 자리를 향해 쏘아진 화살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괴수의 몸에 틀어박히는 모습을.
‘그런데 어떻게 화살이 공중에서 휠 수가 있지? 저 안에는 무슨 로빈후드라도 들어 있는 건가?’
언젠가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주인공이 화살의 깃털을 입으로 물어뜯고 화살을 쏘자, 화살이 날아가는 도중 휘어져 적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인터넷에서는 공기의 저항을 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굳이 자세한 원리까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아니, 저기엔 깃털도 없잖아?’
타워의 화살은 길쭉한 막대에 촉이 달린 모습이었다. 모습만 놓고 따지자면 화살보다는 창에 가까웠다.
‘하긴, 내가 언제부터 말이 되는 걸 따졌다고.’
사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커다란 타워가 솟아오른 시점부터 상식적인 이해는 포기해야 했다.
쿠웅!
잠시 생각하는 사이 괴수가 타워를 들이받았다. 정확히 말해 괴수가 들이받은 것은 타워 주변을 감싸듯 소환된 방벽이었다.
[기본 방벽 3의 소환시간이 2시간 15분 차감됩니다. 남은 소환시간 19시간 32분]
한유찬은 손을 휘저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치우며 타워를 바라보았다. 각 방벽과 타워에는 남은 소환시간이 표시되고 있었는데, 타워의 소환 시간은 변화가 없었다.
‘열 배나 비싼 건데, 소환 시간이 다 될 때까지는 최대한 우려먹어야지.’
- 쿠워어어어어!
쿵! 쿠웅! 쿵!
괴수는 발광하듯 방벽을 들이받으며 울분을 토해냈고, 관전 모드로 들어선 한유찬은 발소리를 줄이며 암벽 틈새로 향했다. 그리고 암벽 틈새 앞에 놓인 방벽에 다가서자 그곳에 기대어 괴수의 사투를 지켜보았다.
괴수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지기까지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어? 뭐가 이리 빨라?’
타워가 화살을 발사한 횟수는 스무 번 정도. 처음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쓰러진 괴수의 모습을 살펴보던 한유찬은 괴수의 정수리 부분에 삐죽 솟은 활대를 발견했다.
‘설마, 급소를 맞추면 데미지가 더 들어가는 건가? 크리티컬처럼?’
꼭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직 사례가 너무 부족했다. 다만, 가능성은 있어보였다.
‘노려서 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한유찬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아! 타워의 주인. 그걸 익히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화살을 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마저도 아직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허무하네.’
조심스럽게 주변을 정찰하는 데 한 시간. 또, 함정을 만들고 도주로를 확보하는 데 두 시간. 마지막으로 마음 졸이며 괴수에게 쫓겼던 십여 분.
하지만 정작 전투는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했다.
- 띠링!
[60DP를 획득하였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며 한유찬은 괴수가 공격했던 기본 방벽 3의 남은 소환시간을 살폈다.
‘방벽 소환시간 10시간 소모로 60DP면…….’
한유찬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개이득!’
그저 DP뿐만이 아니었다.
한유찬은 은은한 빛무리에 휩싸인 채 결정화하는 괴수의 사체를 향해 다가갔다.
‘흐흐! 돈 벌기 쉽네?’
괴수가 남긴 푸른 결정체를 집어 들며 한유찬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천만 원! 합이 이천!’
결정체를 집어들고 히죽거리는 한유찬의 모습은 영화에 나오는 악당의 그것과 흡사했다.
‘한 가지. 정말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화살이 사라지는 건데…….’
창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한 화살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괴수의 방어막을 뚫고 괴수의 몸에 박힌다는 점이었다.
‘그것만 가져다 팔아도 최소한 몇천 단위는 할 텐데 말이야.’
괴수가 사라짐과 동시에 텅 비어버린 바닥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한유찬은 이내 머리를 털어냈다.
‘욕심부리지 말자! 괜히 그러다가 부정 탈라. 벌써 2천이나 벌었잖아?’
한유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암벽 틈새로 향했다.
2
첫 번째 괴수를 처치한 후, 한유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괴수에게 쫓기느라 벗어 던진 배낭을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배낭 안에 여분의 옷과 침낭, 지도 등 그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초소형 카메라를 되찾을 목적도 있었다.
한유찬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행히 근처에 괴수는 없었고, 흙먼지 속에 뒹굴고 있던 배낭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조심조심 돌아와 암벽 틈새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들어선 에어리어의 몬스터는 대부분 대형종인지라 암벽 틈새와 그 앞을 가로막은 방벽 덕분에 잠자리만큼은 안전할 듯싶었다.
‘남은 식량은 나흘 분. 아껴 먹으면 어떻게 일주일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만 그러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더 위험하다. 활동하는 시간은 사흘로 잡고, 나머지 하루 분은 돌아갈 때를 위해 남겨 두는 편이 좋겠지.’
한유찬은 에너지 바를 씹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유인하기에는 너무 위험한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돈도 좋고, DP도 좋았지만, 너무 위험한 게 문제였다. 조금 전처럼 한 마리 유인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다른 것보다 정신이 먼저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 한유찬은 괴수에게 쫓길 때와 안전한 곳에 들어온 다음의 심리 변화가 너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정찰은 원래 서포터가 한다지만, 유인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일반적인 헌팅에서의 정찰은 서포터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괴수를 유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찰을 통해 괴수가 있는 장소를 확인하면, 그 뒤에는 능력자들이 나서서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함정이나 기타 장치 같은 것은 괴수에게 별반 소용이 없었다. 괴수의 몸을 두른 보호막이 모든 충격을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유찬이 판 구덩이처럼 돌진형 괴수의 속도를 죽이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그러한 함정이 전투를 벌이는 능력자들의 움직임마저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양날의 검.
아군에게 독이 될 지도 모를 확률을 안고 싸우느니, 차라리 변수 없이 정직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편이 더 나았다.
MMORPG 게임의 전형적인 탱커, 딜러, 힐러 전술이 구축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높은 곳……. 높은 곳이라면 좀 낫지 않을까? 몬스터를 발견하기도 쉽고, 안전하기도 하고……. 또, 돌멩이 같은 걸 던져서 타워가 있는 쪽으로 유인하기도 쉽고…….’
생각에 잠겨 있던 한유찬의 시선이 문득 위로 솟구쳤다.
길쭉한 쐐기처럼 갈라진 좁은 틈새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올라갈 수 있을까?’
높은 곳은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정찰도 쉬웠고, 유인하기도 편했다. 무엇보다 안전한 장소라는 점이 한유찬은 마음에 들었다.
괴수가 제아무리 뛰어봤자 수십 미터 높이를 한꺼번에 뛰어오를 수는 없을 터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암벽은 정말 까마득한 높이였다.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까짓것. 괴수한테 쫓기는 것만 하겠어?’
한유찬은 암벽 등반을 결심했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그것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두 번째 괴수를 유인했던 곳으로 돌아가 등산용 자일을 거두어 왔고, 그중 일부를 사용해 신발을 꽁꽁 동여맸다. 마찰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등 쪽으로는 두툼한 옷을 넣어 등판이 쓸리는 것을 막았고, 손에도 두꺼운 채집용 장갑을 꼈다.
“후우!”
암벽 틈새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 한유찬은 등반을 시작했다. 방법은 한쪽에는 등을 대고 양쪽 발로 반대편을 지지하며 조금씩 몸을 끌어 올리는 형태였다.
“끄응!”
처음에는 다리를 쭉 뻗어야 닿을 정도의 거리였던지라 힘도 들고 속도도 더뎠지만, 어느 정도 올라가자 틈새의 거리가 좁혀지며 한층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몸이 끼는 것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틈새가 좁아졌다.
“헉! 허억! 헉!”
한유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앞으로 1미터 정도면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머리를 내밀 생각은 없었다. 혹시라도 주변에 몬스터가 있다면 순식간에 머리 없는 시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호흡이 고르게 돌아오자 한유찬은 조심스럽게 올라가 작은 손거울을 꺼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근처에 몬스터는 없는 듯싶었다.
한유찬은 그런 후로도 다시 한참을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암벽 위로 올라섰다.
암벽 위는 황량했다. 주변을 가득 메운 울퉁불퉁한 바위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유찬은 일단 타워가 있는 쪽 절벽으로 다가가 텐트 고정용 팩을 박았다. 챙겨온 개수대로 모두 박은 뒤, 팩의 고리에 등산용 자일을 걸고는 하나로 엮었다. 그리고 끄트머리를 절벽 아래로 던졌다.
끊어진 부분을 이어 묶은 탓에 볼품은 없었지만, 만약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위험한 순간 한유찬의 목숨을 지켜 줄 생명줄이었다.
물론 그가 올라온 암벽 틈새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았기에 아무래도 다급한 와중에 몸을 피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휴! 이 정도면 되겠지?”
한유찬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털었다.
본래 준비란 해도 해도 모자란 것이건만, 그나마 이것이 그의 배낭 속에 있는 물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였다.
한유찬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천천히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너비는 대략 50미터로 멀리 보면 완만한 호를 그리며 휘어지는 모양새였다.
‘어라? 이건!’
반대편 끝에 다다른 한유찬은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가 올라온 곳과 마찬가지로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설마…….’
한유찬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절벽을 따라 한참을 걸어간 끝에 그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분지?’
어디선가 스멀스멀 냄새가 피어올랐다.
대박의 냄새였다.
3
한유찬은 도넛처럼 생긴 암벽 위를 한 바퀴 빙 돌아가며 살펴본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손목의 기계식 시계를 살펴 시간을 확인했다.
‘걸린 시간은 2시간. 빠른 걸음이니까 시속 5킬로미터로 잡으면 둘레는 대략 10킬로미터. 반경은 대충 1.5킬로미터 정도로 잡으면 되나?’
분지 중앙에는 큼지막한 호수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분지 안쪽은 바깥의 황무지와는 달리 수풀이 자라난 초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몬스터가 득시글거린다는 점이었다.
철갑가죽 코뿔소나 강철 뿔 사슴 등의 초식동물 베이스의 몬스터부터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노리는 육식동물 베이스의 몬스터까지.
숫자는 대충 헤아려도 백 마리 이상으로 보였다.
‘흐흐흐! 여기 있는 거, 다 내꺼!’
한유찬은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분지는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즉, 한유찬 자신처럼 암벽 등반을 하지 않는 이상 이곳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다.
‘만약 알려졌다면 대규모 토벌대가 왔을 거야. D급이라도 한 자리에서 몰아 잡을 수 있다면 충분히 메리트가 있으니까. 그리고… 어?’
생각을 이어가던 한유찬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잠깐! 이거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잖아?’
사방이 분지로 둘러싸인 지형이었다. 분지 안의 몬스터만 토벌하면 더는 몬스터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지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호수.
비록 깨끗한 물은 아니겠지만, 정수 장치를 사용한다면 식수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특히나 이곳의 환경은 황무지, 물값이 금값되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이점들을 종합하면 하나의 결론이 만들어졌다.
‘전진기지! 그것도 안전한 전진기지!’
대박이 초대박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한유찬은 덜컥 겁이 났다.
수백, 어쩌면 수천억 원에 달하는 가치를 지닌 곳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힘도, 배경도 없는 그에게 이러한 보물은 언제든 독으로 변할 수 있었다.
“후우……. 가질 수만 있다면 최고겠지만, 아무래도 무리겠지?”
아쉽지만 지역에 대한 욕심은 버려야 했다. 아예 기억에서 지우는 편이 좋았다.
정보를 파는 방법도 있겠으나, 정보의 거래 또한 이렇다 할 힘이나 배경이 없다면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괜스레 운을 띄웠다가는 자칫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정보만 빼앗길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나마 곱게 보내 주기라도 하면 다행일 테지만, 행여나 구린 짓이 들킬까 조용한 곳에 묻히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유찬으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와 힘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한유찬의 머릿속에서 그러한 그림이 그려질 따름이었고, 혹시 모를 위험은 피하는 편이 좋았다.
한유찬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일단은 사냥에만 집중하자! 여기 있는 몬스터만 다 잡아도 이나, 윤석이 대학 보낼 자금은 충분히 나올 거야.’
한유찬은 마음을 다잡으며 철갑가죽 코뿔소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특징이나 습성을 모르는 생소한 놈들보다는 이미 공략법을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았다.
# Chapter 4
1
서벅. 서벅. 서벅.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위를 가득 메운 어둠을 밀어내며 붉게 빛나는 구슬 두 개가 나타났다.
‘왔다!’
한유찬은 눈을 빛내며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투웅!
화살이 발사되었고, 물을 마시느라 고개 숙인 괴수의 몸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 크라라라락!
귀청을 찢을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괴수가 타워를 향해 돌진했다.
‘잠깐 대기! 대기! 아직! 아직!’
한유찬은 괴수의 맹렬한 돌진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사격 시작!”
달려오는 괴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치자 사방에서 활줄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퉁! 투투투퉁!
타워에서 발사된 화살들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괴수의 몸을 향해 내리꽂혔다.
푸푸푸푹!
괴수는 일순 움찔거렸으나, 온몸을 잠식한 고통을 떨쳐내며 다시금 전진했다. 분노와 고통으로 활활 타오르는 괴수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다섯 개의 타워였다.
중앙이 불룩 튀어나온 ‘>’ 모양으로 늘어선 다섯 개의 타워가 다시금 화살을 발사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 크에에에엑!
구슬픈 비명을 끝으로 괴수가 쓰러졌다. 그리고 은은한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져갔다.
잠시 후, 주위가 잠잠해졌을 때였다.
스르륵.
다섯 개의 타워 중, 선두에 튀어나와 있던 타워의 아래쪽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나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검은 그림자는 발소리를 죽인 채 괴수가 사라진 곳을 향해 다가간 뒤, 몸을 숙였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림자의 손아귀에는 푸른색의 결정체가 쥐어져 있었다.
구름을 밀쳐낸 달이 어둠을 밀어내며 은은한 빛으로 세상을 물들였다.
결정체를 움켜쥔 한유찬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이걸로 오십 개를 채운 건가?’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5억이었다.
어제의 한유찬으로서는 평생 모아도 만져볼 수 없는 막대한 액수였다.
‘후! 이렇게 간단히 벌 수도 있는 것을 그동안 왜 그리 힘들게만 벌었는지…….’
아무리 모으려고 노력해도 돈은 늘 어디론가 줄줄 새기만 했다. 통장 잔고는 늘 바닥이었고, 어쩌다 모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돈이 들어갈 일이 생겼다.
그런데 평생 꿈도 꿔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돈을 순식간에 벌어 버리니, 어쩐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훗! 그간 고생했던 보상을 이렇게 받는 건가?’
한유찬은 그렇게라도 자신을 이해시켰다. 그러지 않으면 힘들게 살아왔던 지난 일들이 헛된 짓이 돼버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등급이 오를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인가?’
한유찬은 고개를 설설 내저으며 선두의 타워를 향해 다가갔다. 타워 아래 선 그가 문에 손을 대자 문은 소리 없이 스르륵 밀려났다.
타워 안은 텅 빈 공간이었다. 한 변의 크기가 2미터에 약간 못 미치는 작은 방 하나가 달랑 있을 뿐이다.
비록 작고 초라했지만, 한유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안식처였다. 적어도 소환 시간이 모두 소모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또한, 이곳에는 신기한 기능이 숨어 있었는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타워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처럼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기능이었다.
게다가 그 상태에서 한유찬은 그가 들어가 있는 타워는 물론, 인접한 타워에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손가락으로 공격 목표를 지정할 수 있었고, 공격과 대기를 지정할 수 있었으며, 방벽과 타워를 추가로 소환할 수도 있었다.
작은 방은 주변 타워를 지휘하는 일종의 통제실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은 한유찬이 타워의 주인을 습득하면서 생성된 기능이었다.
한유찬의 계획은 일직선 돌파였다.
목표는 분지 중앙에 있는 호수.
괴수 역시 생명체였기에 언젠가는 물을 마시러 올 터였다. 그러므로 호수 주변만 타워로 장악하면 분지 내부에 있는 괴수들이 알아서 타워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것이고, 타워의 공격에 희생되어 결정체를 남길 것이다.
주기적으로 결정체를 생산하는 생산 라인. 한유찬이 노리는 최종목표였다.
이후, 한유찬은 분지의 가장자리에서부터 괴수를 잡아가며 중앙의 호수 쪽으로 접근했다.
호수까지 가는 길을 뚫는 타워는 어차피 한 번 사용하면 용도를 다하기 때문에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었다. DP를 아끼기 위해 소환 시간이 위태로워질 때까지는 방벽으로 보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진하며 괴수를 열 마리쯤 잡았을 때였다.
한유찬을 중심으로 하얀빛이 피어올랐다. 순간 한유찬은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을 타고 흐르며 힘이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의 눈앞에 한 줄기 메시지가 떠올랐다.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SP 1과 CP 1을 부여합니다.]
타워 스킬은 특별히 추가할 게 없어 미뤄두었고, 캐릭터 스킬에서 타워의 주인을 습득했다.
타워의 주인을 습득하자, 타워를 통제할 방법은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 글자를 새겨 넣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이질적인 느낌을 뒤로한 채, 한유찬은 타워의 주인을 사용해 타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타워를 통제해본 결과, 그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괴수의 사냥은 훨씬 수월해졌고, 그 덕분에 한유찬은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목표했던 호수 근처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적당히 진형을 짜, 그간 모인 DP로 타워만 소환해 놓으면 끝이었다. 물을 마시러 호수로 다가온 괴수는 한 모금 입에 머금었던 물이 생의 마지막 한 모금이 되었다.
‘이왕이면 등급을 하나 더 올리고 가고 싶은데. 욕심인가? 타워 소환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소환 시간을 떠올리자 주변의 다섯 개 타워의 소환 시간이 시야 한구석에 떠올랐다. 각각 두 시간 남짓이었다.
본래 타워를 보호하기 위한 방벽도 소환했었지만, 계속되는 괴수의 타격으로 이미 모두 소환이 해제되었다.
그 뒤로는 굳이 다시 소환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방벽이 없더라도 일점사 컨트롤만 잘하면 타워의 타격 없이 괴수를 잡을 자신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컨트롤 하며 한유찬은 컴퓨터로 즐기던 디펜스 게임을 실제로 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즐겁기도 했을뿐더러, 무엇보다 그것이 돈이 된다는 점이 중요했다.
좋아하는 게임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으니, 한유찬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일점사 컨트롤을 통해 타워의 타격 없이 괴수를 잡아내는 데 익숙해지자, 한유찬은 최대한 타워와 가까운 곳에서 괴수를 잡는 기술을 연습하기에 이르렀다. 결정체를 회수하러 밖으로 나가는 거리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함이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괜스레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느니 차라리 조금 일찍 접고 돌아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한유찬이 집중을 풀고 타워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투웅!
귓가에 들려온 소리에 한유찬은 황급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호수 쪽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 캬오오오오오!
‘이런! 육식형!’
초식동물을 베이스로 한 초식형 괴수와 육식동물 베이스의 육식형 괴수는 눈빛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특히 어두운 밤에 더욱 확실하게 표가 나는데, 초식형 괴수의 눈은 불꽃처럼 붉은빛을 띠었고, 육식형 괴수의 눈은 푸른빛을 띠었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육식형이.’
한유찬은 다급히 선두의 타워 바로 앞에 하나의 타워를 더 소환했다.
초식형이라면 방벽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육식형은 그럴 수 없었다. 탁월한 민첩성을 발휘해 방벽을 뛰어넘어 타워를 직접 타격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슴 종류의 초식형 괴수도 점프력이 뛰어났으나, 공격을 받으면 뿔을 앞세워 돌격하기 바빴다.
‘1에서 5번 타워가 먼저, 6번은 가장 마지막에 공격한다. 놈이 죽을 때까지 연속으로 사격!’
투웅! 퉁! 투웅!
푸른 불꽃은 어두운 공간을 지그재그로 물들이며 쇄도했고, 여섯 개의 타워에서는 화살 비가 쏟아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육식형 괴수의 엄청난 속도에도 유도 기능이 달린 화살이 정확하게 괴수를 공격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육식형 괴수의 체력은 초식형 괴수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게다가 민첩한 움직임을 쫓느라 화살이 박히는 곳은 대부분 엉덩이 쪽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다시 말해 급소를 타격할 확률이 낮다는 의미였다.
물론, 엉덩이 쪽에도 치명적인 급소가 있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놈의 그것을 노려서 맞추기는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대놓고 노리기에는 어쩐지 꺼림칙하기도 했다. 한유찬도 남자였기 때문이다.
카각! 카가가각!
어느새 타워에 접근한 육식형 괴수가 발톱을 세워 타워를 할퀴고 있었다.
[소환시간이 2시간 13분 차감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육식형 괴수의 공격력이 초식형 괴수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이었다. 충격량 자체는 초식형 괴수의 돌진과 비슷했으나, 육식형 괴수는 그만한 공격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한 방만 맞아도 소환 해제일 텐데. 보험 삼아 옆에다 하나만 더 소환할까?’
앞으로 대략 열 번의 화살 공격, 20여 초의 시간이면 육식형 괴수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육식형 괴수의 목표가 변경된다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소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타워들이 줄줄이 소환 해제될 터였다. 특히, 한유찬이 머물러 있는 타워가 소환 해제되면 그의 몸은 그대로 바깥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유찬은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마지막에 소환한 타워로 어그로만 잘 끌면 돼. 내 컨트롤이면 추가 소환 없이도 충분히 잡을 수 있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한유찬은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안전만 생각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의 타워 양옆에 새로운 타워를 소환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곧 사냥을 그만둘 시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DP 문제도 있었다.
조금만 더 DP를 모으면 새로운 타워를 개방하고, 그것을 조합하는 구성을 짤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DP를 낭비하기는 싫었다.
특유의 공격력으로 타워를 빠르게, 그리고 직접 때려대는 통에 육식형 괴수를 잡으면 득보다 실이 컸다.
다행히 나타나는 빈도가 초식형 괴수보다 적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DP를 모으기는커녕 DP가 모자라 사냥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모으면 제대로 된 조합을 짤 수 있어. 사냥은 훨씬 쉬워지고, 지금처럼 일일이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거야. 잘하면 타워만 세워놓고 소환이 해제될 때까지 다른 곳에 다녀와도 될 거야.’
한유찬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는 이것이었다.
먼저, 한 곳에 조합된 타워들을 건설해 놓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타워를 건설한다. 그렇게 여러 개의 타워 군을 만들어 놓은 뒤, 자신은 편하게 결정체만 수확하려는 계획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선두의 타워를 할퀴어대던 푸른 불꽃이 돌연 방향을 틀었다.
‘젠장! 몹이면 몹답게 어그로를 먹으란 말이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한유찬은 재빨리 외쳤다.
“타워 소환!”
하지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타워를 소환할 부분에 나타난 붉은색 격자무늬 때문이었다. 이것은 장애물이 있다는 뜻이었고, 그곳에는 타워를 소환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간발의 차이는 크나큰 결과를 초래했다.
카각! 카가각!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한유찬이 위치한 타워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와 더불어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환 시간을 모두 소모하여 타워의 소환을 해제합니다.]
몸이 어디론가 추락하는 아득한 느낌과 함께 딱딱한 바닥이 발에 와 닿았다. 다행히 충격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한유찬은 그것을 깨달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고도로 집중된 정신은 그 와중에서도 최선의 대처 방안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방벽 소환!’
한유찬은 등 뒤쪽 공간에 방벽을 소환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카칵!
새로 소환된 방벽 윗부분에 불똥이 튀었다. 바닥에 엎드리기 전, 한유찬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곧장 바닥에 엎드린 행동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한유찬은 그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시선을 돌린 그가 방벽 반대편의 바닥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붉은 점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머리 위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덮쳐오는 중이었다.
‘뛰어올랐던 건가?’
어쨌든 한유찬에게는 기회임이 분명했다.
“방벽 소환!”
한유찬은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우웅!
은은한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새로 소환된 것까지 두 개의 방벽이 1미터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한유찬은 그 사이의 공간에 납작 엎드린 모양새였다.
초식형 괴수와 비교해 날렵한 몸매를 가진 육식형 괴수였으나, 안으로 파고들어 공격하기에 1미터 간격은 너무 좁았다.
카각! 가가각! 카각!
연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방벽의 소환 시간이 차감되었다는 메시지가 꼬리를 물었다.
‘휴!’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한유찬은 바닥을 기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마지막에 소환한 타워의 문이 있었다.
쉭! 쉬익! 쉭!
어느 순간, 방벽을 긁어대는 소리 대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뒷골이 서늘할 만큼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와 더불어 기어가는 한유찬의 몸 위로 싸늘한 바람이 쏟아졌다.
한유찬은 방벽의 높이가 2미터라는 점이 고마웠고, 괴수의 팔과 발톱이 생각보다 짧다는 점 역시 고마웠다. 그중 하나만 어긋났어도 그의 몸은 이미 괴수의 날카로운 발톱에 갈가리 찢겼을 터였다.
바닥을 열심히 기어간 끝에 한유찬은 타워의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난관이 더 남아 있었다.
‘쯧! 이걸 생각 못 했네.’
타워의 아랫면은 한 변이 2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이었다. 그리고 타워의 문은 그 중앙에 위치했다.
문제는 타워에 딱 붙어 소환한 방벽이었다. 소환물의 최소 단위는 격자 한 칸. 즉, 1미터였다.
그런 방벽을 타워에 딱 붙여 소환했으니, 타워의 절반은 방벽으로 가로막힌 상태였다. 당연히 문도 절반이 가려졌다.
스르륵.
문에 손을 대자 소리 없이 문이 밀려났다.
‘역시 기어서 통과하기는 어려운가?’
온전한 문도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큼 좁았다. 그 좁은 문이 절반으로 좁아졌으니 그것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몸의 너비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옆으로 몸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격자 사이로 이어지는 괴수의 공격이 몸에 닿을 듯, 말 듯한 상황이었다. 즉, 몸을 옆으로 세우는 순간, 그의 몸은 너덜너덜하게 찢긴다는 의미였다.
‘잠깐! 꼭 타워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나?’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신의 안전이었다.
괴수의 공격은 방벽에 가로막혀 닿지 않았고, 새로 소환한 방벽의 소환 시간은 넉넉했다. 거기에 사방의 타워에서 괴수를 향해 계속 공격이 날아들고 있으니,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도 된다.
‘생각이 한쪽으로 기우니 멍청해지는가 보네. 너무 급하게 생각해서 그런가?’
가만히 있어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괴수 사냥이 쉽다 보니 너무 들떴어. 아니, 타워를 컨트롤 할 수 있게 되니 나도 모르게 현실이 아닌, 게임으로 생각했던 것도 같아.’
한유찬은 지금까지의 일을 돌이키며 반성했다.
‘목숨은 하나다. 정신 차리자, 한유찬!’
- 카오오오오오!
마음을 다잡음과 거의 동시에 괴수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120DP를 획득하였습니다.]
파아아앗!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름과 함께 한유찬의 몸은 폭발하듯 터져 나온 빛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몸을 채웠고, 그와 더불어 힘이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치밀었다.
“흐어어어어…….”
절정의 쾌감과도 비슷한 느낌에 한유찬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SP 1과 CP 1을 부여합니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한유찬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툭.
작은 물체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푸른빛의 보석, 결정체였다.
‘오토 루팅인가? 훗! 편해서 좋네.’
등급의 상승으로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우스갯소리가 절로 나왔다.
“읏차!”
몸을 일으킬 생각으로 가볍게 땅을 밀자 튕기듯 상체가 솟구쳤다.
“뭐, 뭐야?”
한유찬은 자신이 한 일에도 깜짝 놀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살피고,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이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데?”
힘이 넘쳤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괴수가 덤벼들어도 때려눕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서라 한유찬.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기분은 그저 기분일 뿐.
하지만 힘이 강해진 것만큼은 사실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볍게 땅을 미는 동작으로 온몸을 일으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흐음…….’
타워의 문으로 들어서려던 한유찬은 걸음을 멈추며 쓸었다.
‘테스트 한 번 해봐?’
힘의 수치를 알아낼 만한 방법이 떠올랐다.
문 앞에 섰던 한유찬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상의를 벗어 주먹을 둘둘 감쌌다. 행여나 다칠까 싶어 정권 부분이 두툼하게 올라오도록 신경을 썼다.
이어 한유찬은 양쪽 방벽의 중앙에 서서 오른팔을 뒤로 잡아당겼다.
“후웁!”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 후, 눈앞의 방벽을 노려보며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마치 샌드백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벽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방벽의 소환시간이 30초 차감됩니다.]
‘흐음……. 이건 좀 애매한데?’
육식형 괴수의 공격은 소환 시간을 2시간가량 떨어뜨렸다. 초식형 괴수의 돌진 역시 비슷했다. 그리고 초식형 괴수의 일반 공격은 3-10분 정도를 차감했다.
이에 비해 한유찬의 차감 시간은 30초. 굳이 비교하자면 초식형 괴수의 평균 공격력의 10% 정도가 된다.
물론 초식형 괴수라고 절대 약하지 않았다. 가볍게 후려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몸쯤은 갈가리 찢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유찬은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감쌌던 상의가 너덜너덜 찢겨 있었다.
‘확실히 강해지긴 한 것 같은데…….’
빗겨 친 것이 아님에도 주먹을 감싼 천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으니 이는 최소한 일반인의 힘은 넘어섰다.
‘아무래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능력자 측정용 기계를 사용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지.’
등급이 오르면서 힘이 강해졌으니, 등급이 더 오르면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터였다.
‘훗! 이러다가 괴수고 뭐고 주먹으로 다 때려잡는 거 아니야?’
먼 훗날의 일이 될 테지만, 이대로 등급이 오른다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나저나… 조심해야겠네.’
괴수보다는 못해도 일반인보다는 월등히 강한 힘이었다.
자칫 평소대로 행동하다가는 가볍게 툭 친 것만으로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나와 윤석이를 다치게 할 수는 없지.’
한집에 살기에 가장 많이 부대끼는 남매를 위해서라도 힘 조절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건 그렇고, 새로 열린 스킬 같은 건 없으려나?’
간단한 테스트를 마친 후, 한유찬은 타워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인터페이스.’
2
[신의 디펜더. 3등급. DP 2330, SP 3, CP 1]
‘신의 디펜더. 볼 때마다 그렇지만, 이건 좀 낯간지러운데? 내가 무슨 중학교 2학년도 아니고.’
인터페이스 상단의 글귀를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짓던 한유찬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시야 하단의 업그레이드 버튼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오오! 열렸다! 열렸어!’
기존의 항목에 몇 가지 추가된 항목이 더해져 있었다.
- 스나이핑 타워 개방 1500DP
- 포이즌 타워 개방 2000DP
먼저, 타워 부분에서 추가된 항목은 두 가지였다.
‘흐음……. 장거리 공격과 지속적인 피해를 누적시키는 타워인가? 쓸모야 당연히 있기는 하겠지만……. 이것보다는 차라리 1단계가 더 낫겠는데?’
한유찬은 심드렁한 얼굴로 타워 부분의 항목을 넘겼다. 그런데 타워 스킬 항목을 열자 그의 눈빛이 다시금 강렬해졌다.
“엇! 설마 이건!”
- 재배치 1SP
- 리셋 1SP
한유찬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각 항목을 주시했다. 그러자 세부 설명이 떠올랐다.
- 소환 시간을 2시간 차감하여 소환된 건물의 장소를 이동합니다.
- 소환 비용의 절반으로 소환 시간을 초기화합니다.
“대박!”
한유찬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야말로 그에게 딱 필요한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타워는 한 자리에 고정된 채로 공격한다. 따라서 멀리 있는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는 타워의 사정거리까지 몬스터를 끌어오거나, 아니면 몬스터의 근처에 새로 타워를 건설해야 했다.
한유찬이 처음 건설했던 타워도 지금 암벽 너머에서 놀고 있었고, 분지 내부에서도 호수까지 진출하는 동안 몇 개의 타워를 버려야 했다.
하지만 재배치 스킬을 사용한다면 소환 시간이 다소 줄어들기는 해도 DP를 아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줄어든 소환시간을 절반의 비용으로 다시 채울 수 있는 리셋까지 있지 않은가!
새로 개방된 두 개의 스킬은 그야말로 한유찬을 위해 만들었다 싶을 정도로 딱 맞는 스킬이었다.
‘이건 무조건 배워야 해!’
재배치와 리셋을 배우고 나니 왠지 모르게 배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밤을 새워야겠는데?’
절반의 DP소모로 소환시간을 다시 채울 수 있으니, 철수하면 그만큼 손해였다. 그리고 내일 다시 괴수 사냥을 시작하려면 그 두 배의 DP를 소모해야 했다.
‘일단 캐릭터 스킬까지 살핀 다음에 생각하자.’
한유찬은 타워 스킬 항목을 접고, 캐릭터 스킬 항목을 열었다.
추가된 항목은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한 순간, 한유찬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대박! 대애박!”
- 보호막 생성 1CP
- 소환물의 사정거리 안에서 캐릭터의 몸을 감싸는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강도는 소환물의 방어력의 절반이며 충격을 받았을 때, 연결된 소환물의 소환 시간이 차감됩니다.
“이거, 어쩌란 거야? 나보고 어쩌란 거야?”
한유찬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이로써 무엇보다 중요한 안전이 확보되었다. 물론 제한 사항이 있기는 했지만, 최소한 한순간에 목숨을 잃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타워 스킬에 방어력 강화가 있었구나! 그래! 이래야 게임 할 맛이 좀 나지. 제대로 된 공략법도 못 찾게 숨겨 놓고, 한 방이면 게임이 끝나는 하드코어한 게임은 아무도 안 한다고!’
한유찬은 망설임 없이 보호막 생성을 습득했다.
우웅!
미약한 진동과 함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몸 주변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보호막이란 말이지?’
손을 뻗어 만져보려 했으나, 보호막은 그의 손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아무래도 시험해 봐야겠는데?’
한유찬은 새로 얻은 기술을 사용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철수’라는 단어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한유찬은 소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타워의 소환 시간을 리셋하고, 타워 항목에서 아이스 타워를 개방을 선택했다.
[아이스 타워를 개방하시겠습니까?]
“그래!”
[800DP를 소모합니다.]
인터페이스 창이 반짝이며 베이직 타워 옆자리에 푸른빛을 띠는 타워 버튼이 생성되었다. 소환 비용은 200DP였다.
‘어디 보자. 위치는… 이쯤이면 좋겠지?’
한유찬은 베이직 타워 5개가 모여 있는 곳에서 약간 벗어난 호숫가 쪽에 아이스 타워를 소환했다.
우웅!
미약한 진동과 함께 빛이 피어올랐고, 반투명한 푸른빛을 띤 타워를 형성했다. 바닥의 넓이는 베이직 타워와 같은 2*2였지만, 높이는 1미터가량 더 높았다. 그리고 꼭대기는 진한 푸른빛이 도는 지름 1미터 정도의 구체가 둥실 떠 있었다.
“쏘는 사람도 없는 발리스타는 좀 없어 보였는데, 이건 좀 낫네.”
한유찬은 감상을 중얼거리며 방벽을 소환해 아이스 타워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소환된 아이스 타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이스 타워. 공격력 20. 사정거리 150m. 둔해짐]
‘쩝! 효과만 보고 소환했더니 오히려 공격력이 더 높잖아? 사정거리도 더 길고.’
아이스 타워의 정보를 확인하니 지금껏 좋다고 써왔던 타워가 갑자기 허섭스레기처럼 느껴졌다.
‘역시 베이직 타워라 이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화염폭발 타워를 개방할걸 그랬어.’
대부분의 디펜스 게임에서 적에게 특수 효과를 부여하는 타워는 다른 타워에 비해 공격적인 효과가 떨어졌다. 오로지 특수 효과만을 노리고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이스 타워의 공격력이 이 정도였으니, 화염폭발 타워의 공격력은 최소한 그 몇 배는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중에 소환해 보면 알겠지. 일단 여기 있는 놈들은 이 정도 조합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한유찬은 이미 베이직 타워와 방벽의 조합만으로도 이곳의 괴수를 50마리가량 사냥한 경험이 있었다. 여기에 전력이 더 강해졌으니 사냥은 더욱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놈들이 미쳐서 한꺼번에 몰려오지 않는 이상에는.’
3
어스름하게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 한유찬은 찢어질 듯 벌어진 입으로 하품을 토해내고 있었다.
“흐아아암……. 물 마시던 놈을 다 잡아서 그런가? 한참이 지나도 아무것도 안 오네.”
괴수는 늦은 밤에도 한두 마리씩 호숫가로 나타났다. 하지만 새벽녘이 되자 괴수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더니 이제는 뚝 끊겨 버렸다.
‘마지막 놈을 잡은 지 한 시간도 더 된 것 같은데 말이야. 이렇게 시간만 죽이면 손해인데…….’
각종 소환 물의 소환 유지시간 때문에 시간은 곧, DP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또한, DP가 있어야 괴수를 사냥하고 결정체를 얻기 때문에 DP는 곧 돈이라는 말이 된다.
풍부한 호수의 수증기가 새벽의 낮아진 기온에 뿌옇게 뭉치고 있었다.
지루함에 깜빡 졸던, 한유찬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짙은 안개가 호수 주변을 가득 메운 다음이었다.
“어? 뭐야? 갑자기 웬 안개가!”
한유찬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느낌에 졸음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안개는 무척 짙었다. 여기에 살짝 구름에 가린 흐릿한 달빛이 더해지니 시야는 십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한유찬은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며 타워에 명령을 내렸다.
‘가장 가까운 놈부터 자동사격. 아이스 타워는 둔해짐이 걸리지 않은 놈부터 우선 공격.’
스멀스멀 피어올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안개처럼,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한번 자라나기 시작한 불안감은 이미 타워에 공격명령을 내려놓았음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에이! 안전이 제일이지!’
한유찬은 아이스 타워의 반대쪽에 하나를 더 추가했고, 이어 베이직 타워도 다섯 개 더 소환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방벽으로 둘렀다.
순식간에 1000DP 정도가 빠져나갔다. 밤새 획득한 DP의 총량이 3000 정도였으니, 단번에 삼분의 일가량을 소모한 셈이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투자였음에도 한유찬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하고도 대비하지 않는 건 바보짓이야. 위험한 상황을 자청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해!’
DP는 물론 중요했지만, 정작 그것을 사용할 사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와 더불어 알 수 없는 기운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이런 게 살기라는 건가?”
비록 아직 드러난 위협은 없었지만, 한유찬은 위험한 상황이 곧 닥칠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돈은 이미 충분히 벌었다.
지금껏 모은 결정체의 숫자는 백여 개. 개당 천만 원씩만 계산해도 10억이었다.
‘그래. 돈은 충분해. 이것만 잘 팔아도 최소한 몇 년은 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살 수 있어. 날이 밝을 때까지만 버티다가 미련 없이 돌아가자!’
아무래도 가시지 않는 불안감에 한유찬은 방벽 바깥으로 한 겹의 방벽을 더 소환했다. 그리고 바짝 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쉬이익!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왼쪽 아이스 타워에서 발사된 냉기로 이루어진 구체가 날아가고 있었다.
‘뭔가가… 오고 있어!’
쉭! 쉬익! 쉬이익!
아이스 타워는 연속해서 냉기 구체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하나가 아니야!’
스멀스멀 바닥을 기는 기분 나쁜 안개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드러났다.
‘초식형에 육식형까지? 무슨 괴수가 떼로 몰려와?’
한유찬은 2년 전의 몬스터 웨이브 이후로 지금껏 이런 경우가 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초식형 괴수가 그들을 잡아먹는 육식형 괴수와 함께 나란히 달려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했다.
‘무언가가 있어! 놈들이 함께 몰려올 만한 이유가!’
퉁! 투퉁! 투투투퉁!
이유를 찾아내려 고심하는 한유찬과는 별개로 십여 개의 타워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 하나가 2미터 길이에 팔뚝만 한 두께였다.
- 쿠워어어어!
- 크에에에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다가오던 괴수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운 좋으면 한 번의 집중사격으로 쓰러졌지만, 그렇지 않으면 3번이 필요했다. 평균을 내자면 5초에 한 마리 정도. 그러나 안개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의 숫자는 최소로 잡아도 수십 마리 이상이었다.
‘아무래도 이거…….’
한유찬은 입매를 굳혔다. 그리고 인터페이스를 열고 화염폭발 타워를 개방했다.
[화염폭발 타워를 개방하시겠습니까?]
“개방한다.”
[1000DP를 소모합니다.]
아이스 타워 옆에 붉은색 타워의 모습이 나타났고, 한유찬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소환했다.
가격은 300DP.
‘후! 바닥까지 탈탈 털어야겠네.’
타워 주변을 감싸는 삼각형 모양으로 총 세 개를 소환했다. 2000 가까이 남아있던 DP가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한유찬은 바닥난 DP를 일견하고는 곧바로 화염폭발 타워에 시선을 집중했다.
[화염폭발 타워. 공격력 200. 사정거리 20m.]
‘사정거리가 짧다는 것은 역시 광역이란 의미겠지?’
콰앙! 콰아앙!
한유찬이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던 괴수들은 덤프트럭에 밀린 사람처럼 뒤로 밀려났다.
후두둑. 후두두둑.
이어, 찢기거나 터져나간 괴수의 피와 살점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허! 이거, 생각 이상인데?’
어느 정도 기대는 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 특히 적을 뒤로 밀어내는 것은 다수를 막아내야 하는 한유찬에게 무척이나 좋은 효과였다.
‘넉 백이라니! 딱이야!’
밀려난 괴수 중 치명상을 입은 놈이 없다는 것이 살짝 아쉬웠지만, 그것마저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괴수들은 계속해서 다가왔고, 폭발과 함께 다시 밀려났다. 비슷한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자 신체 일부가 날아가거나,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괴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덕에 밀려오던 괴수의 물결이 일순 주춤거렸다.
‘좋았어! 이대로만 가면 된다!’
한유찬이 주먹을 불끈 움켜쥘 때였다.
-그오오오오오오.
낮고 거대한 울림이 분지 내부에 울려 퍼졌다.
딱히 큰 소리도 아니었고, 위협적인 소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순간 한유찬은 자신의 몸이 굳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대한,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최상위 포식자 앞에 발가벗겨진 채 던져진 기분이었다.
‘뭐, 뭐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굳어버린 몸과는 별개로 생각은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타워의 주인이 주는 효과였다.
만약 한유찬이 타워의 주인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바깥에서 굳어진 채로 고스란히 괴수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공산이 컸다.
주춤했던 괴수의 물결이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했다.
쉬익. 쉬이익.
퉁! 투퉁! 투투퉁!
타워는 괴수가 사정거리에 접어드는 것과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고, 한유찬은 그것을 바라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설마! 괴수들을 조종하는 괴수가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을 떠올리자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맞아떨어졌다. 초식형과 육식형 괴수가 한데 어울리는 것부터, 괴수들이 일정한 진형을 형성한 채 밀려오는 것까지.
‘D등급 괴수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움직이려면 얼마나 강해야 하지? C등급? 아니면 B등급?’
힘껏 움켜쥔 손아귀 사이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 Chapter 5
1
놈은 어느 날 갑자기 답답하기 짝이 없는 분지 안에 갇히게 되었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갇혀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본 후, 놈은 그것이 생명체 축에도 못 드는 작은 벌레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놈은 분노했다.
당장 그곳을 벗어나 벌레란 벌레들은 모조리 짓밟아 주고 싶었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높다란 절벽뿐이었다. 뛰어넘기에는 너무 높았고, 기어오르자니 너무 미끄러웠다.
본래 있던 곳의 강자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있었다면 벗어날 수 있었겠으나, 안타깝게도 놈에게는 발톱 대신 튼튼한 이빨이 있을 따름이었다.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분을 풀 곳이 없어 발광하기를 몇 차례. 그러던 도중 놈은 자신이 갇힌 곳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이곳에는 강자가 없었다.
놈 역시 육식을 했었지만, 항상 강자의 눈치를 보며 조그마한 것들을 사냥해야 했었다. 운 좋게 큰놈을 잡아도 강자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분노가 밀려왔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분을 못 참고 덤벼들었다가 한 번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돌아오는 것은 먹다 남은 고기가 몇 점 붙어 있는 뼈다귀뿐. 울분을 삼키며 그것이라도 뜯어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것은 하나같이 약자였다.
풀을 뜯는 것은 그의 기척만으로도 몸이 굳었고, 고기를 먹는 것은 그의 냄새만 맡아도 오줌을 지렸다. 강자의 눈치를 보며 살던 삶에서 벗어나 강자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몇 마리 잡아먹어 보니 맛도 있었다. 게다가 가운데에 있는 맑은 호수에서 언제든 목을 축일 수도 있었다.
언제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대낮에 배를 깔고 낮잠을 자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곳.
놈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놈은 나갈 생각을 접었다. 오히려 알지 못할 강자가 침입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낮과 밤이 수백 번 바뀌도록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놈은 없었다. 반대로 나가는 놈도 없게 되자 놈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영역 안에 득시글했던 먹잇감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놈이 이를 인식했을 때는 벌써 영역 안 먹잇감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먹잇감은 전부 사라질 테고, 자신은 쫄쫄 굶게 된다는 사실을. 물론 굶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맛있는 것마저 먹지 못한다면 그보다 괴로운 일이 없을 터였다.
놈은 먹잇감의 숫자를 다시 불릴 방법을 궁리했다.
가장 먼저 타깃이 된 것은, 놈이 보기에 같은 먹잇감임에도 다른 먹잇감을 잡아먹는 괘씸한 놈들이었다.
놈이 없을 때에는 나름대로 분지 안의 강자로 통하던 녀석들이었으나, 놈은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였다. 그런 놈이 작정하고 달려들자 육식형 괴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처음의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들었다.
놈이 육식형 괴수의 씨를 완전히 말리지 않은 것은, 육식형 괴수 나름의 쫄깃한 맛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것만 먹으면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질릴 터였기에, 그때를 위해 남겨둔 일종의 별미였다.
놈은 육식형 괴수를 잔뜩 줄인 후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사냥의 빈도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줄였고, 사냥할 때에도 잡아먹을 놈을 선택했다. 대상은 초식형 괴수 중에도 수컷이나 늙어서 새끼를 낳지 못하는 암컷 등이었다.
맛은 좀 없었지만, 앞으로의 풍족한 식생활을 위해서는 조금 참는 것쯤이야 충분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년을 참은 끝에 겨우 놈이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숫자의 먹잇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가축을 사육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이를 기념 삼아 아낌없이 포식했다. 그리고 부른 배를 따뜻한 바닥에 대고 잠을 청했다.
오래간만에 배부르게 포식한 탓인지, 놈이 잠에서 깬 것은 늦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그리고 그 직후, 놈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먹잇감의 기척이 확연히 줄어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생명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놈은 바짝 긴장했다. 자신처럼 다른 곳에서 온 강자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날이 밝으면 제대로 살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침입한 강자는 도가 지나쳤다.
이미 많은 먹잇감을 잡아먹었기에 배가 부를 만도 하건만, 먹잇감의 기운이 사라지는 현상은 그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먹잇감이 사라져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에 판단을 내일로 유보한 것이 실수였다.
참다못한 놈은 상대가 사냥하는 곳으로 다가가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먹잇감의 기척이 줄어드는 속도가 느린 것을 보고 약간은 상대가 만만하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놈은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곳에 강자로 보이는 생명체는 없었다.
퉁! 투웅! 투퉁!
쉬이익! 쉬익!
대신 놈이 발견한 것은 자신의 키만 한 길쭉한 곳에서 무언가가 날아가 먹잇감을 사냥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먹잇감이 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확인한 순간, 놈의 눈빛은 변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 벌레다.
작디작은 몸과 하찮은 힘으로 놈과 비슷한 생명체를 사냥하는 것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이 벌레들에게 사냥당하는 생명체는 그 생명을 농축한 정수를 남긴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놈과 같은 생명체에게 벌레는 반드시 박멸해야 할 존재였다. 그와 더불어 놈에게는 다른 생명체보다 더더욱 벌레를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주 약간 방심한 탓에 잠깐 기절했던 자신을 이곳에 가둔 원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놈의 생각을 확인시켜주듯, 길쭉한 곳의 아래에서 벌레 한 마리가 나와 생명의 정수를 주워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놈의 눈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 크르르르.
짓밟아 주리라.
놈은 사념파를 발산해 먹잇감으로 여기던 생명체들을 불러모았다.
분지를 지배하는 놈의 분노를 가득 담은 사념파였기에 감히 거부하는 먹잇감은 없었다.
놈은 그렇게 끌어모은 생명체들을 이끌고 진군했다.
사념파를 발산해 생명체들을 끌어모으는 사이, 길쭉한 물체들이 있는 곳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평상시라면 수 킬로미터 밖의 물체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진 놈이라도, 안개로 가려진 안쪽은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이곳의 최강자인 놈이라지만, 원래부터 강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본래 있던 곳에서는 오히려 강자의 눈치를 보았었다.
그런 습성이 남아 있었기에, 시야가 가려진 곳에 섣불리 발을 들여놓기는 꺼려졌다.
시험 삼아 먹잇감 중 일부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안쪽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었으나,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과 생명의 기운만큼은 안개를 뚫고 전해졌다.
안으로 들어간 먹잇감들의 기운은 하나, 둘 줄어갔다. 그런데 어쩐지 전에 느꼈던 것보다 속도가 훨씬 더 빠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놈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안개 안의 벌레에게서 힘을 숨긴 채 먹잇감을 노리는 강자와 비슷한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먹잇감들을 한 뭉텅이 더 밀어 넣어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기운이 줄어드는 속도에 놈은 서서히 긴장감이 차오름을 느꼈다.
안쪽에 있는 벌레는 강자였다.
비록 벌레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벌레 중에는 강자를 사냥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춘 것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놈은 고민했다.
자신을 이곳에 가두고, 허락도 없이 먹잇감을 갈취한 벌레를 응징할 것인가.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 벌레가 알아서 물러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선택의 시간이었다.
2
푸푹!
창대만 한 화살이 괴수의 몸에 틀어박혔다. 화살은 주로 움직일 때 사용하는 관절 같은 부위에 집중되었다.
- 쿠워어어어어!
괴수는 화살에 맞고도 계속 움직이려 했고, 그 탓에 맞은 부위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쉬이익!
때마침 날아든 냉기 구체가 피를 흘리는 부위에 명중했다. 이것은 단순히 피만 얼리는 것이 아니라, 화살을 통해 상처 입은 괴수의 내부로도 스며들었다.
쿠드득. 쿠득.
관절의 내부가 얼어버린 괴수는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아이스 타워의 효과인 둔해짐보다 훨씬 뛰어난 효과였다. 조금 과정을 섞어 말하자면, 나무늘보와 비슷할 정도로 느렸다.
괴수는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괴수 몇 마리가 마찬가지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 사이, 베이직 타워의 화살과 아이스 타워의 냉기 구체는 또 다른 괴수를 향해 날아가며 그 괴수 역시 비슷한 처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괴수의 숫자가 어느 정도 쌓였을 때, 삼각형의 꼭짓점에 놓인 화염폭발 타워에서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 일어났다.
쿠아아앙!
거센 화염과 폭발의 충격파가 굳어 있던 괴수들을 휩쓸었다.
후더덕. 후더더덕.
이어 묵직한 물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관절 부분에서 떨어져 나간 괴수의 팔, 다리였다.
‘그래! 이거였어! 괴수 역시 생명체란 말이지!’
한유찬은 뛸 듯이 기뻤다. 이제는 타워를 어떻게 사용해 괴수를 사냥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60DP를 획득하였습니다.]
[60DP를 획득하였습니다.]
[90DP를…….]
시야를 가득 메운 메시지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씁쓸한 감정도 들었다.
‘쯧! 진즉 이럴 것을! 멍청하게 보호막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능력자들의 사냥 방식을 따르다니!’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는 자책이었다.
능력자들의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괴수의 보호막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부위에 상관없이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붓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보호막을 소멸시키면, 남은 육체 따위는 능력자들의 강력한 화력으로 순식간에 녹여버릴 수 있었다.
보호막이 너무 강력했기에, 괴수의 육체적 약점이나 특성 따위를 연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괴수의 공격력과 공격 방식은 중요했는데, 이는 탱커가 직접 괴수의 공격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유찬이 소환한 타워는 보호막을 관통해 육체를 직접 타격할 수 있었다.
당연히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보아야 했건만, 한유찬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고정 관념의 폐해이기도 했고, 그동안 서포터의 일에 너무 익숙해졌던 까닭이기도 했다.
또한, 한유찬은 한 가지 실수를 더 했다.
바로, 괴수를 생명체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괴수는 생명체다.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 하물며 번식까지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괴수의 이질적인 모습 때문에 그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몸 주변에 두른 강력한 보호막이 문제였다.
어떠한 현대 화기도 통하지 않는 강력한 보호막은, 그 안에 있는 것이 기존의 생명체가 아닌 다른 존재이거나, 외계 기술로 만들어진 기계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죽은 괴수가 사체를 남기지 않고 결정체로 변한다는 사실 역시 괴수를 생명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한유찬 역시 그러했기에 타워의 공격력을 생각하고 괴수의 체력을 계산하려 했다. 디펜스 게임에서처럼 괴수의 체력이 모두 떨어져야 괴수가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게임처럼 공격력 수치가 표시되는 게 함정이었어. 아무리 인터페이스가 생겨도 현실은 현실인 것을…….’
물론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도 괴수를 상대하는 데 충분했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타워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디를 어떻게 맞추느냐가 중요한 거야!’
괴수는 생명체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사냥은 더욱 쉬워졌다.
찌르고, 얼리고, 터뜨린다.
이런 간단한 프로세스만으로도 한유찬은 타워 근처로 다가오는 괴수들을 몰살 수준으로 처리해갔다.
‘그나저나, 그놈은 왜 안 나타나는 거지?’
한유찬은 몇 분 전에 들었던 거대한 울림을 떠올렸다.
괴수가 내지르는 포효도 아니었고, 모습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그 울림을 만들어낸 존재가 지금 상대하는 괴수와는 차원이 다른 강자라는 사실이었다.
“후우…….”
한유찬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저었다.
‘그래. 지금은 일단 이것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만 신경 쓰자. 나타나기 전부터 겁먹어서 뭐하려고?’
일단은 당면한 과제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것들과 합동해서 공격해 오는 것보다는 홀로 상대하는 편이 나아.’
아무리 강력한 놈이라도 숫자가 하나라면 어떻게든 공략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듯싶었다.
한유찬은 이런 생각으로 다가오는 괴수들의 처리에 온 신경을 쏟았다.
3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호수 주변을 뒤덮었던 짙은 안개도 서서히 걷혀 갔고, 그 사이로 드러난 광경은 한유찬으로 하여금 탄성을 토하게 했다.
푸른빛을 뿜어내는 보석이 바닥에 박힌 채, 별처럼 반짝이는 광경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하지만 한유찬의 탄성은 광경의 아름다움보다는 다른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헐! 이게 다 얼마야?”
어림잡아도 수백 개.
가치로 따지자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결정체였다.
‘그나저나 저걸 어떡하지?’
당연히 나가서 주워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괴수를 이곳으로 몰아넣은 존재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민하는 사이 해가 떠올랐고, 안개는 완전히 사라졌다.
훤히 트인 시야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한유찬은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아무런 대책 없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방어막이라면 나도 가지고 있으니까.’
아직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한유찬은 타워를 믿는 만큼 방어막의 성능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사 덤벼들더라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막아주겠지. 그리고 한 방만 버틴다면 살 수 있다.’
방어막의 설명에는 타워와 소환시간을 공유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타워의 소환시간은 리셋 스킬로 다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 번에 타워가 파괴될 정도의 충격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바로 한유찬의 믿는 구석이었다.
‘게다가 등급도 하나 더 올랐고.’
무려 수백 마리의 괴수를 잡았으니, 등급 상승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스킬이 열리지 않은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신체 능력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으니까.’
한유찬은 빙긋 웃으며 정신 집중을 풀었다.
그러자 타워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처럼 탁 트였던 시야가 빠르게 좁혀졌고, 이내 캄캄한 어둠이 밀려왔다.
눈을 뜨자 투박한 돌로 이루어진 작은 방의 모습이 보였다.
‘좀 어색하긴 하네.’
마치, 고층빌딩의 전망대에 있다가 단숨에 반지하 방으로 이동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유찬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사방 가득 돈이 널려 있었다.
특히, 결정체는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는 폭발 타워의 사정거리를 약간 벗어난 곳에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많은 괴수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관절에 화살이 박히고, 얼어붙은 상태에서 일어난 폭발은 괴수를 폭발 반경 바깥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팔다리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연이어 날아든 화살이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대는 괴수의 숨통을 끊어 놓는 식으로 사냥이 이루어졌다.
“흐흐흐! 농부들이 이 맛에 농사를 짓는 거구나.”
한유찬은 흡족함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결정체를 주웠다. 그러면서도 몇 개를 주운 다음에는 꼭 허리를 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언제나 방심에서 비롯되는 법.’
단순한 울림만으로도 두려움을 주었던 적이 어디선가 자신을 비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방심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휴…….”
마지막 결정체를 집어들며 한유찬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좋아졌다지만, 허리를 숙였다가 펴는 동작을 수백 번 반복하는 일은 정신적인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종의 단순반복 노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수입이 좋기는 했지만, 어쨌든 노동은 노동 아닌가?
‘D급 결정체 492개. 50억 정도인가? 이 정도면 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관리만 잘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은행 이자는 거의 없지만, 결정체 쪽 회사 주식을 사면 연 10%는 일도 아니라고 했어. 1년에 무려 5억이야!’
에어리어와 괴수가 등장하고, 인류가 신물질과 결정체를 얻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산업은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기존의 산업이 쇠락하는 만큼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는 것이 바로 결정체 관련 산업이었다.
물론, 결정체 산업이라고 해서 모두가 잘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투자처만 잘 정하면 어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일 년에 10%라는 말은 서포터 일을 하는 도중 누군가가 흘린 말이었지만, 절반인 5%만 되어도 한유찬으로서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팔지?’
결정체를 처음 얻었을 때에는 돈을 벌었다는 생각만 했지, 그다음은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이 많아지니 슬슬 걱정되기도 했다.
아무리 D급 결정체라지만 한 번에 많은 양을 풀면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고, 이는 곧 좋지 않은 날파리가 꼬일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조금씩 분산해서 처분하는 수밖에 없나?’
한유찬이 그런 생각을 하며 타워 쪽으로 몸을 돌리는 찰나였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한유찬의 등 뒤를 향해 날아들었다.
4
- 크르르르.
놈은 낮은 구릉 뒤에 숨어 낮은 울음을 흘렸다.
화도 났지만, 두렵기도 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먹잇감들의 기운이 모두 사라졌다. 아무리 놈이라 해도 수백 마리에 달하는 먹잇감을 그 시간 안에 처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벌레에 불과했지만, 놈은 그 벌레가 엄청난 강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어쩔 수 없음을 알았다. 무릇 강자라면 약자에 대한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크르르르.
그럼에도 자꾸 화가 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먹잇감의 숫자를 원래의 수준으로 되돌리느라, 그동안 억눌러두었던 식욕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상실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먹잇감이 모두 사라지자, 길쭉한 물체의 문이 열리며 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 크릉?
놈의 시선에 의문이 깃들었다.
다름 아닌 벌레의 행동 때문이었다.
생명의 정수를 줍고,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 이는 결코, 먹잇감 수백 마리를 처치할 힘이 있는 강자가 취할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못한 약자의 행동에 가까웠다.
게다가 실제로 느껴지는 기운 또한 그러했다. 보잘것없이 작은, 어지간한 먹잇감보다도 못한 기운이었다.
당장 달려들어 울분을 풀어내고 싶었으나, 한 가지 생각이 놈의 발목을 잡았다.
강자가 자신을 꾀어내려고 일부러 기운을 낮췄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방비한 상태로 보인 벌레의 등을 보는 순간, 놈은 그동안 억눌러두었던 분노와 억울함을 더는 눌러둘 수 없었다.
강렬한 본성과 비교하자면 약하디약한 이성.
놈의, 괴수의 한계였다.
탓!
땅을 박찬 놈이 훌쩍 뛰어올랐다.
십여 미터에 달하는 동체는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며 등 돌린 벌레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놈은 발톱을 세운 채 떨어져 내렸다.
고양잇과 강자의 날카로운 발톱에 비하면 볼품없는 발톱이었으나, 벌레의 몸뚱이를 찢어발기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통한다. 할 수 있다.
놈은 확신했다. 도약한 후, 땅으로 내려서기 직전까지도 벌레는 자신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런 벌레가 강자일 리가 없었다.
벌레 따위, 짓밟아 주마!
놈은 착지와 동시에 벌레의 머리 위를 내려찍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발톱이 연약한 육체를 찢어발기는 느낌을 기대하며 입꼬리를 쭉 늘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상황은 놈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퉁!
부드러운 오줌보 같은 것은 때린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놈에게는 웬만한 괴수의 오줌보 따위는 단숨에 찢어발길 힘이 있었지만, 벌레의 몸을 감싼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질기고 탄력적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벌레는 바닥을 퉁퉁 튕기며 날아갔다. 그리고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길쭉한 물체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살고자 안간힘을 쓰는 약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지금은 약하지만, 저기에 들어가면 강해지는 건가?
놈은 그런 벌레의 행동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 크릉!
사냥의 기본은 먹잇감의 약점을 철저히 공략하는 것.
그것을 잘 아는 놈은 벌레의 행동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뛰어들기에는 길쭉한 물체에서 쏘아지는 가시가 약간 마음에 걸렸다.
사박. 사박. 사박.
털을 곤두세운 채로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길쭉한 물체는 반응하지 않았다.
- 크르르!
왜 벌레가 그토록 길쭉한 물체에 다가가려 하는지, 놈은 이제 이해했다. 벌레가 안에 들어가야만 길쭉한 물체가 가시를 쏘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탓!
놈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어두운 그림자가 벌레의 머리 위를 다시 뒤덮은 순간, 벌레가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놈을 향해 빙긋 웃었다.
놈의 시선에서는 어쩐지 불길해 보이는 미소였다.
5
‘통했어!’
한유찬은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처음 괴수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이라면, 괴수의 공격력이 보호막을 한 번에 부술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베이직 타워의 소환시간이 11시간 차감되었습니다.]
퉁! 퉁!
탄력 있는 고무공처럼 바닥을 튕기면서도 한유찬의 머리는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이어 그는 타워에 명령을 내렸다.
‘대기! 내가 공격하라고 할 때까지는 무조건 대기!’
아직 타워 밖에서 타워에 명령을 내려본 적이 없었기에, 살짝 불안함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타워는 그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휴우! 다행이네.’
한유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괴수 쪽을 살짝 살펴보았다.
사박. 사박.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움직임.
‘역시, 머리가 좋은 놈이었어.’
이곳으로 몰아넣은 괴수가 모두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만 보아도 괴수가 매우 조심스러운 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빈틈을 노려 공격한 것으로 보아 놈이 교활하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기회는 한 번뿐. 놈이 접근했을 때 점사로 녹여 버리지 않으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한유찬은 입술을 굳게 깨물며 의지를 다졌다.
여기에는 단순히 놈을 처치할 기회뿐만이 아니라, 그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타워에서 살펴본 결과, 분지 내부에 남은 괴수는 거의 없었다. 시야에서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기에,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었다. 잘하면 별다른 방비 없이 분지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놈이 이곳에서 도망친다면 말이 달라졌다.
단순히 공격력만 봐도 놈은 이 분지의 최강자였다. 게다가 다른 괴수보다 머리도 좋고, 교활했다.
즉, 방비가 약해질 때를 노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한유찬이 분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DP의 소모가 필요했다. 교활한 놈이 언제 덮칠지 모르니, 이동하면서 방어에 극도로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타워 한두 개로는 절대로 놈을 막을 수 없어 보였고, 그렇다면 이곳의 타워 대부분을 재배치를 통해 이동시키며 분지를 둘러싼 절벽까지 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물론 DP가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모두 소모하는 것 역시 좋지 못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탓!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유찬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자신의 계획이 그대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훗! 제까짓 게 아무리 머리가 좋아 봤자 괴수지.’
한유찬은 자신의 바로 앞에 방벽을 소환하며 옆으로 몸을 던졌다.
꿍!
[방벽의 소환시간이 10시간 차감되었습니다.]
육중한 물체가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한유찬은 마음으로 소리쳤다.
‘지금! 화염폭발 타워만 빼고, 집중공격!’
투퉁! 쉬이익!
소리와 함께 화살과 냉기 구체가 괴수에게 쏟아졌다.
- 쿠워어어어어!
공격에 노출된 괴수는 포효했다.
소리를 들은 한유찬은 일순 몸이 굳었지만, 다행히 생각은 그대로 이어졌다.
‘방벽 소환, 방벽 소환, 방벽 소환…….’
한유찬은 괴수의 주변을 방벽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괴수를 살폈다.
처음 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정신이 없어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괴수는 늑대나 하이에나와 같은 갯과 동물의 생김새였다.
물론, 미간 사이에 흉측스럽게 자리 잡은 세 개의 뿔과 날카로운 가시가 무수히 돋아난 꼬리가 놈이 동물이 아닌 괴수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만큼은 그러했다.
문제는 크기였다.
괴수는 머리부터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까지의 길이가 10여 미터에 달했고, 바닥에서 어깨까지의 체고는 4미터 가량 되는 거체였다. 그 덕분에 괴수를 둘러싼 방벽은 괴수의 다리 부분을 겨우 가리는 형태였다. 괴수가 살짝만 뛰어도 방벽을 넘어 도망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도망치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해. 아이스 타워의 효과가 통해야 할 텐데…….’
티팅. 티티티팅!
베이직 타워의 화살은 대부분이 튕겨 나갔다. 괴수가 강력한 만큼 피부와 가죽 역시 단단하고 질겼다.
‘공격력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나?’
한유찬은 괴수의 피부에 튕겨 나가는 화살을 보며 공격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디펜스 게임에서처럼 괴수의 체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 타워가 발사하는 투사체나 공격에 담긴 순수한 힘을 뜻하는 것이었다.
‘쉽지 않아. 쉽지 않아.’
한유찬은 머리를 살살 가로저으면서도 시선만큼은 괴수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냉기 구체는 괴수의 몸에 맞아 스며들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괴수의 움직임이 상당히 둔화되었다.
- 쿠워어어어어!
괴수가 포효했다.
그 소리에 몸이 굳은 상태에서 한유찬은 괴수의 다리가 살짝 굽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이 고비야.’
한유찬은 괴수의 다리를 자세히 살피던 중, 다리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름을 확인함과 동시에 소리쳤다.
“소환!”
하얀 빛무리와 함께 아이스 타워 한 기가 소환되었다. 정확히 괴수의 머리가 향한 방향이었다.
그리고 타워가 소환됨과 동시에 괴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고, 괴수의 거대한 머리와 아이스 타워가 충돌했다.
꿍!
[아이스 타워의 소환시간이 8시간 차감되었습니다.]
충돌할 때의 소리는 방벽에 부딪혔을 때보다 더 컸으나, 차감된 소환시간은 오히려 적었다.
‘오호! 성능이 더 좋은 타워는 방어력도 더 좋다는 뜻이겠지?’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한유찬은 그 생각을 순식간에 접으며 괴수를 관찰했다.
쉬익. 쉬이이익.
새로 소환된 아이스 타워가 냉기 구체를 발사하기 시작하자 괴수의 몸은 더욱더 느려졌다.
- 쿠워어어어어!
괴수는 다시금 포효했지만, 처음과 같은 박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굳어지는 현상 역시 처음보다 약했다.
‘겁먹었어!’
한유찬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그는 이어 두 개의 아이스 타워를 더 소환해 괴수를 삼각형으로 감쌌고, 그 안쪽에 화염폭발 타워 한 기를 더 소환했다.
DP의 소모는 많았지만, 베이직 타워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화염폭발 타워 공격 시작!’
콰앙! 콰아앙!
안쪽에 소환한 화염폭발 타워가 먼저 폭발을 일으켰고, 기존에 소환해 놓은 것 중 괴수를 사정거리 안에 둔 화염폭발 타워도 폭발을 일으켰다.
양쪽에서 번갈아 일어나는 폭발로 인해 괴수의 몸은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렸다.
‘좋아! 중심이 무너졌어.’
한유찬에게는 커다란 의미였다. 중심이 무너졌다는 것은 괴수가 도약할 힘을 모을 수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괴수는 휘청거리면서도 방벽과 타워에 몸을 부딪치며 빠져나갈 길을 찾았으나, 힘을 모아 도약하지 않는 이상에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괴수가 공격할 때마다 소모되는 타워나 방벽의 차감시간은 한유찬이 그때그때 리셋 스킬로 채워 버렸으니, 괴수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감옥에 갇힌 셈이었다.
쉬익. 쉬이이익.
그 사이, 아이스 타워는 끊임없이 냉기 구체를 괴수의 몸에 쏘아댔고, 괴수의 피부에 얼음 결정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폭발에 서서히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아! 냉각! 충격!’
한유찬은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렸다. 바로, 단단한 은행 금고의 문을 액화 질소로 냉각한 다음, 망치로 두드려 부수는 장면이었다.
쩌적!
어느 순간, 얼음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피부 표면이 쫙 벌어져 얼어붙은 속살이 깨져 나가는 장면이 한유찬의 눈에 들어왔다.
- 쿠워어어어어!
괴수의 포효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유찬의 몸은 전처럼 굳어지지 않았고, 희열에 찬 심장의 두근거림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잡을 수 있어! 아니, 잡았어!’
괴수는 표면부터 서서히 부서져 내렸고, 그러는 와중 다리가 부서지자 괴수는 행동력을 완전히 잃었다.
남은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
뚝.
어느 순간, 괴수의 거대한 동체의 가운데 부분이 부러졌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나머지 부분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파사사삭.
얼어붙은 뼈와 살이 흩날리는 장면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장면이었으나, 한유찬이 보기에는 그다지 끔찍하지도, 소름 끼치지도 않았다.
얼어붙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괴수를 처리했다는 기쁨 때문이기도 했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이 숨이 끊어진 괴수의 몸을 감싸며 피어올랐다.
결정화 과정.
‘이건 결정도가 얼마나 될까? 천? 이천?’
한유찬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괴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1200DP를 획득하였습니다.]
먼저 메시지가 한유찬의 눈앞을 가렸고, 막대한 DP의 획득에 그의 입이 벌어질 무렵, 경쾌한 알림음이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띠링!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SP 1과 CP 1을 부여합니다.]
‘좋았어!’
한유찬은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로 올려쳤다.
비록 작은 위기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극복해내자 많은 보상이 뒤따랐다.
‘이래서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라는 소리가 나온 건가?’
한유찬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보상을 확인해 봐야겠지?’
타워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이번에는 뭐가 나왔을까?’
기대감의 원인은 새로운 스킬이 생겼을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아직 많은 정보를 알아낸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운 스킬이 생긴 것은 3등급에서였다. 2등급과 4등급에서 새로운 스킬이 생기지 않았으니, 5등급에서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인터페이스.”
작은 방에 들어선 한유찬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Chapter 6
1
[신의 디펜더. 5등급. DP 17230, SP 3, CP 2]
“휘유! 많이도 모았네!”
만 단위를 넘어선 DP의 수치에 한유찬은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전투 중에는 급박한 상황인지라 인터페이스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하긴, 그만큼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는 말이겠지.’
새벽의 전투에서 처치한 괴수의 숫자는 4백 마리에 가까웠다. 마리당 평균 DP를 70으로만 잡아도 28000DP를 획득한 셈이었다.
하지만 몰려온 괴수의 숫자는 많았고, 그만큼 타워나 방벽이 공격받은 횟수도 많았다. 특히 최외곽에 소환한 화염폭발 타워가 빈번한 공격에 노출되었다.
폭발이 일어나면 주변의 괴수가 한꺼번에 밀려났으나, 다시금 몰려와 방벽을 부수고 타워를 공격했던 것이다.
화염폭발 타워는 위력도, 효과도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바로 폭발의 재사용대기시간 10초로 다소 길다는 점이었다.
‘10초면 육식형 괴수에게는 수십 번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한유찬은 타워가 공격을 받을 때마다 방벽을 다시 소환하고, 리셋 스킬로 소환시간이 아슬아슬한 타워의 소환시간을 초기화했다. 하필이면 공격받은 것이 타워당 소환 DP가 300이나 되는 화염폭발 타워였기에 리셋 스킬의 비용인 절반이라고 해도 DP의 소모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이스 타워로 최대한 접근을 막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오히려 DP가 모자랐을 거야.’
그와 더불어 아쉬운 점도 하나 더 느껴졌다.
‘DP가 이 정도로 소모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주변을 모조리 타워로 도배해버릴 것을 그랬어.’
물론 뒤늦은 후회였다. 하지만 전투는 급박했고, 격렬했다.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이러한 사실을 알았더라도, 섣불리 실행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이미 타워를 소환하면서 DP는 바닥난 상태였고, 제대로 된 공략법을 세우기 전의 초반에는 소모된 타워의 소환시간을 다시 채우는 것에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DP가 모인 것은 중반 이후, 몰려든 괴수를 손쉽게 처치할 방법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
‘뭐, 반성은 이 정도면 되겠고……. 이제 선물 상자를 열어 보실까?’
한유찬은 설레는 마음으로 업그레이드 버튼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역시 늘어났어!’
전보다 항목이 늘어난 것을 확인하자 가슴의 두근거림이 한층 거세졌다.
- 연사 석궁 타워 개방 3000DP
- 도발 타워 개방 5000DP
먼저 타워 란의 항목을 살펴보니 두 가지가 추가되었다.
‘연사 석궁은 모자란 화력을 늘려주는 용도겠고, 도발이라니……. 설마 괴수를 불러들이기라도 한다는 건가?’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던 한유찬이었으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의 입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만약 도발 타워가 괴수를 불러올 수만 있다면!’
타워의 성능은 두말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동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재배치 스킬을 통해 이동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면 소환시간이 차감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데 미리 세워둔 타워 근처로 괴수를 끌어모을 수 있다면 어떨까?
사냥이 엄청나게 쉬워질뿐더러 DP 역시 아낄 수 있었다.
‘후우……. 너무 김칫국 마시지는 말자. 단순히 탱커처럼 괴수의 공격을 대신 받아내는 용도일 수도 있잖아?’
한유찬은 터질 듯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다음 타워 스킬 항목을 열었다.
- 보관함
소환물을 보관할 수 있는 아공간을 획득합니다. 크기는 3*3이며 총 9개의 소환물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보관된 소환물은 소환 시간의 차감이 멈추며, 다시 소환하는 순간 소환 시간이 다시 차감됩니다.
‘대박!’
한유찬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에게 딱 필요한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DP의 소모가 높아진 타워 때문에 걱정이 많았건만, 보관함은 그런 걱정을 단번에 날려주는 스킬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등급이 오를수록 타워의 가격은 더더욱 올라갈 터였고, 그럴수록 보관함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많아질 것이다.
‘헐! 이건 정말…….’
한유찬은 마치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자신을 돕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유찬은 이어 캐릭터 스킬 항목도 마저 살펴보았다.
- 변환
결정체를 소모하여 DP로, DP를 소모하며 결정체로 각각 변환할 수 있습니다.
‘흐음! 뭐, 나쁘지는 않지만…….’
효용성을 따지면 충분히 좋은 스킬이었다.
어느 정도 여분의 결정체를 가지고 다녀야 하겠지만, 이 스킬로 적어도 DP가 모자라 위기에 처할 상황은 모면할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럼에도 한유찬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은, 타워 스킬의 보관함이 월등히 좋았던 까닭이었다.
‘일단 보관함은 무조건 올려야겠지. 변환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아니니 보류해 두고……. 새로운 타워 역시 지금 당장은 필요 없겠지. 일단 보류한 다음, 집에 돌아가 천천히 고민해 보는 게 낫겠어.’
한유찬은 타워 스킬의 보관함을 올리고 업그레이드 항목을 접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타워를 나와 방벽 앞으로 다가갔다.
마지막 확인을 위함이었다.
“후웁!”
방벽 앞에 선 한유찬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한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힘을 다해 방벽을 향해 내질렀다.
꽈앙!
제법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다가 처음의 테스트처럼 천 따위로 주먹을 감싸지 않았음에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보호막의 효과였다.
[방벽의 소환시간이 5분 차감됩니다.]
[아이스 타워의 소환시간이 4분 차감됩니다.]
한유찬의 눈앞에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처음의 메시지는 방벽에 가해진 충격이었고, 두 번째 메시지는 주먹을 둘러싼 보호막이 받은 충격이었다.
‘5분!’
이 정도의 차감시간이라면 D등급 초식형 괴수의 일반 공격에 해당하는 공격력이라 할 수 있었다.
‘과연 몇 등급이나 나올까?’
한유찬은 에어리어를 나간 뒤, 능력 측정을 받아볼 생각이었다.
그가 지금껏 모은 결정체를 팔기 위해서는 능력자 등록을 하는 편이 아무래도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후우……. 됐어. 이 정도면 나가서도 충분히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어.’
한유찬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주변을 정리했다.
정리라고 해봤자, 결정체가 가득 든 주머니를 들고, 소환해 놓은 타워 중에서 비싼 순서대로 보관함에 정리하는 것뿐이었지만, 한유찬은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혹시 모를 결정체가 떨어져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렇게 몇 개의 결정체를 더 획득한 뒤, 한유찬은 귀환 길에 올랐다.
2
터벅. 터벅. 터벅.
육중한 체구의 괴수가 황무지를 배회하고 있었다.
몸길이 5미터에 2.5미터의 체고를 가진 코뿔소를 닮은 괴수였다. 코 부분의 뿔은 유난히 길고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으며, 온몸을 감싼 가죽은 철갑을 연상시킬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철갑가죽 코뿔소.
한유찬이 속해 있던 팀을 몰살로 몰아간 놈이기도 했고, 한유찬의 목숨을 노린 놈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타워 한, 두 개만으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는 괴수로 평가 절하되었다.
‘저걸 어쩌지?’
한유찬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세를 낮춘 채, 철갑가죽 코뿔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해봐? 말아?’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등급의 상승으로 얻은 신체 능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없던 힘이 갑자기 생기면 누구나 한 번쯤은 써보고 싶기 마련이었다.
사실, 놈을 처치하는 것은 간단했다. 보관함에 보관된 아이스 타워와 베이직 타워 하나씩만 소환하면 끝이었다. 둔해짐을 유발하는 아이스 타워 덕분에 도망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고, 베이직 타워에서 발사한 화살로 철갑가죽 코뿔소는 고슴도치가 되어 생을 마감할 터였다.
‘후우! 그래. 까짓것, 한 번 해보지 뭐! 위험한 상황이 오더라도 벗어날 방법은 충분하니까.’
짧은 한숨을 내쉰 한유찬은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철갑가죽 코뿔소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푸륵! 푸륵!
한유찬의 접근을 감지했는지, 놈이 콧김을 내뿜으며 뒷발질을 시작했다.
돌진의 예비동작이었다.
두두두두두!
이윽고 육중한 덩치를 가진 철갑가죽 코뿔소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박력만큼은 대단했다.
그런데 한유찬은 빙그레 미소 지은 채, 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철갑가죽 코뿔소가 지척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던 한유찬이 짧게 중얼거렸다.
“방벽 소환.”
눈앞에 솟아난 방벽이 솟아남과 동시에 철갑가죽 코뿔소의 돌진이 그곳에 꽂혀 들었다.
쿠우웅!
[방벽의 소환시간이 2시간 차감되었습니다.]
- 쿠워어어어!
괴수가 내지르는 괴성을 들으며 한유찬은 주먹을 몇 번 움켜쥐었다가 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이미 방벽과 보호막을 연결한 상태였기에 안전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공격이 놈에게 얼마나 통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철갑가죽 코뿔소는 방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비틀거리며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놈의 볼에 한유찬의 말아쥔 주먹이 꽂혔다.
콰직!
[방벽의 소환시간이 5분 차감되었습니다.]
뼈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고, 이어 괴수의 입이 벌어지며 괴성이 터져 나왔다.
- 쿠워어어!
명백한 고통이 담긴 괴성이었다.
‘통한다!’
한유찬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D등급 괴수에게 공격이 통한다는 것은, 최소한 D등급 능력자와 비슷한 공격력을 가졌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또한, 괴수를 때린 주먹의 충격은 보호막을 연결한 방벽이 대신 흡수해 주었기에 전혀 타격이 없었다.
이후의 상황은 한유찬의 일방적인 공격에 철갑가죽 코뿔소가 얻어터지는 그림으로 흘러갔다.
한유찬의 일방적인 폭력에 견디다 못한 철갑가죽 코뿔소가 고통을 참지 못한 채 도망치려 했지만, 그 순간 소환된 아이스 타워가 놈의 도주를 저지했다. 그리고 이어진 공격에 철갑가죽 코뿔소는 생을 달리했다.
- 휘유!
하얀빛에 휘감겨 결정화되는 괴수를 바라보니 절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이거 정말…….”
한유찬은 잠시 말을 멈춘 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정에 몸을 맡겼다.
“짱인데?”
3
콰앙!
“그 새끼들 어딨습니까?”
부서질 듯 문을 걷어찬 한유찬이 헌팅 사무소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잡아먹을 듯한 그의 기세에 사무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 한유찬 씨? 사, 살아 있었습니까?”
사무소의 소장은 한유찬의 강렬한 기세에 눌려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서포터들 미끼로 내던지고 자기들만 도망친 개새끼들 어디로 갔냐고요!”
“예? 그럴 리가……. 그분들 말에 따르면, 서포터들이 먼저 실수를 해서 괴수를 자극했다고…….”
“그 개새끼들이 그래요? 서포터가 먼저 잘못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장의 행동에 한유찬은 피식 웃으며 품을 뒤적였다. 그리고 작은 카메라 하나를 꺼냈다.
“소장님, 이게 뭔 줄 알아요?”
“그거야. 카메라…….”
“그럼,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도 잘 알겠군요.”
“그거야, 기록 보관용으로……. 헙!”
머뭇거리며 대답하던 소장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설마!”
“그 새끼들, 이제 엿됐습니다. 크큭! 내가 아주 이 바닥에서 매장해 버릴 테니까.”
한유찬은 그 말을 남긴 채, 쿨 하게 몸을 돌려 헌팅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쯧! 그러고 싶은데……. 정말 당장 그놈들 매장시켜 버리고 싶은데…….”
새봄 헌팅 사무소.
멍한 얼굴로 건물에 붙은 간판을 바라보던 한유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상상이었다.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마음이야 이미 머릿속 상황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놈들의 행동에 대한 증거까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있었으니, 능력자 협회에 찾아가 제출하기만 하면 놈들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문제는 그 뒤였다.
에어리어는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었지만, 그곳을 지키는 몬스터는 너무 강력했다. 따라서 몬스터를 처치하고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자의 주가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에 반해 능력자를 보조하는 서포터에 대한 대우는 흔한 일용직 노동자와 별다를 바 없었다. 에어리어 공략의 공식적인 기록에서 사망하는 서포터의 숫자를 빼는 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포터가 능력자의 치부를 고발하면 어떻게 될까?
협회 차원에서 어느 정도 처벌은 하겠지만, 한유찬이 원하는 만큼 심각한 처벌은 아닐 공산이 컸다.
능력자들은 자신들을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컸고, 일반인과는 선을 긋는 편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능력자 협회는 능력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같은 능력자를 감싸고 돌 게 빤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유찬이 고발한 능력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면, 곤란해지는 것은 한유찬이었다.
등급의 상승으로 자기 한 몸 지킬 힘은 얻었다고 생각하는 한유찬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아닌 그와 함께 사는 서이나, 서윤석 두 남매였다.
악한 마음을 먹은 능력자들이 보복을 작정한다면, 자신은 몰라도 두 남매는 분명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꾸드득.
움켜쥔 주먹이 하얗게 변화했다.
‘그래. 잠시 미루는 것뿐이야.’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놈들을 확실하게 몰락시킬 수 있을 때. 혹은, 아예 뒷일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한유찬의 눈동자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쉽고 빠른 것은…….’
한유찬은 움켜쥐었던 주먹을 펴며 하얗게 변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핏기가 가셨던 손바닥에 점차 붉은 기가 돌아왔다.
‘힘. 그 누구도 감히 날 어쩌지 못할 힘!’
신의 디펜더라는 능력을 얻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욕망을, 더 큰 능력에 대한 갈망을…….
사실 이러한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현실적인 상황에 부딪히거나 그 자신의 능력이 그에 미치지 못해 억눌러 두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를 만나게 되면, 눌러 두었던 것들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능력자들이었다.
능력이 없었을 때에는 보통사람처럼 살던 그들이었으나, 능력을 깨달아 인간을 초월한 힘을 얻게 되자 억눌러 두었던 각종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 나는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존재다. 그런고로 나는 일반인과 다른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일종의 선민의식이라고 봐도 좋았다.
물론, 능력자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능력을 얻은 이들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다만, 지금껏 이슈가 된 능력자들이 그러했고, 한유찬이 서포터로서 겪어본 이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자신이 겪어본 이들이 그랬기에 한유찬의 인식 속의 능력자는 대부분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이들이었다.
‘어리석은 짓이지.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그렇게 적을 만들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테니까.’
부메랑의 한 예가 바로 서포터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던 이들이었다.
‘후우……. 일단 디펜더의 능력을 완벽하게 파악할 때까지는 조용히 있는 편이 좋을 거야. 괜스레 나섰다가 적이라도 만들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왜 자신을 숨기는지,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얻었음에도 왜 그토록 감추려 드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까.’
흔히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사람이 강해진다고는 하지만, 한유찬의 생각은 반대였다.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사람은 약해진다. 약점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모한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들의 최선의 방안은 그 약점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주 조금만…….’
한유찬은 한기 어린 눈으로 헌팅 사무소를 노려본 후, 몸을 돌렸다. 이어 그가 향한 곳은, 결정체를 감정하고 매입하는 곳이었다.
[결정체 관리소 EA-76 지부]
결정체 관리소는 결정체의 물량 확보와 관리, 가격의 안정 등을 위해 국가가 만든 정부기관이었다.
물론 가격만 생각하면 암시장 쪽이 가장 좋았다. 결정체 가격 자체는 정부나 업체보다 15%가량 쌌으나, 20%에 달하는 세금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판매자가 가져가는 돈은 약간 더 많았다.
그다음은 기업이나 업체였고, 가장 싼 것이 바로 정부가 만든 결정체 관리소였다. 그럼에도 한유찬이 이곳을 찾은 것은 안전성 때문이었다.
‘일단은 한, 두 개만 처분하는 게 좋겠지. 나머지는 능력 측정을 받고 능력자가 된 다음에 처분하는 편이 나아.’
능력자만 결정체를 팔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능력자 외의 일반인이 결정체를 취급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껏 해봐야 업체의 직원이 능력자 대신 결정체를 처분하는 정도였다.
‘지금까지는 나와 상관없는 곳이었지만…….’
커다란 간판을 잠시 올려다본 한유찬은 당당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앞으로는 다를 거야.’
4
띠릭!
복잡한 기계 장치가 비프음을 울렸다. 그리고 기계의 액정 화면을 확인한 직원이 밝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결정도 1,523입니다.”
“헙! 1,523?”
한유찬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삼키며 큰소리로 되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 보스급 괴수를 잡아서 얻은 결정체였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배낭 안의 주머니에 수백 개는 들어 있는, D등급 괴수를 사냥하고 습득한 결정체 중 하나였다.
당연히 500정도를 예상했건만, 감정 장비가 내놓은 결과는 그보다 세 배나 높은 수치였다.
‘대체 뭐가…….’
심각하게 굳은 한유찬의 얼굴을 바라보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기, 혹시 어떤 몬스터를 사냥하셨는지…….”
“네?”
직원의 목소리에 그쪽을 바라본 한유찬은 직원의 얼굴에 어린 조심스러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 지금 결정도 측정 중이었지!’
아차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나를 어려워하고 있다?’
아무래도 능력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결정체의 감정을 담당하는 직원인 만큼 능력자를 대할 경우가 많았을 테고, 최대한 그들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도록 교육받은 듯 보였다.
‘그런데 왜?’
직원이 그렇게 조심스러워 하는 이유가 뭘까?
감정 장비를 다루는 직원이 그럴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능력자가 자기 생각보다 결정도가 낮게 나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나 보군. 그렇다면…….’
한유찬은 슬쩍 직원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김소미씨. 미안하지만 이렇게 된 김에 차라리 능력자 행세 좀 해야겠어요.’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편이 나았다.
‘결정도가 높아진 이유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한유찬은 표정을 한층 더 굳힌 채 대꾸했다.
“얼음 가시 도마뱀을 잡았는데, 무슨 결정도가 이따위야? 못해도 3,000은 나간다더니.”
불만스러운 한유찬의 말투와 굳어진 얼굴에도 직원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아! 손님.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몬스터가 아직 새끼인 경우도 있고, 생이 얼마 남지 않을 정도로 늙을 경우나, 부상을 당한 경우. 또는, 질병에 걸린 경우에도 이 같은 경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교육을 잘 받았는지, 직원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유찬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쳇! 기계가 잘못된 건 아니고?”
“손님. 저희가 사용하는 감정 장비는 미국 CR 사에서 개발한 제품으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안정적인 기계입니다. 그러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한유찬은 퉁명스럽게 직원의 말을 자르며 손을 내밀었다.
“네?”
“돈.”
짧은 대답에 한유찬의 의도를 파악한 직원은 미소와 함께 되물었다.
“아! 예, 고객님. 현찰로 받으실 건가요? 계좌 이체로 받으실 건가요?”
“현찰. 그리고 가지고 가기 불편하니까, 주머니 같은 거라도 하나 주면 좋고.”
“예. 알겠습니다. 고객님. 지금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예의 밝은 미소로 응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직원의 손에 들린 것은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였다.
“여기 있습니다. 결정도가 1,523이고, 현재 C등급 결정체의 매입 단가가 52,300원이니 총 정산액은 79,652,900원입니다. 여기에서 세금 20%를 제외하면 63,722,320원입니다. 주머니에는 오만 원권 뭉치로 육천만 원을 넣었고, 나머지는 여기 따로 준비했습니다. 금액 확인하시고…….”
“뭐, 알아서 잘 넣었겠지.”
한유찬은 심드렁한 얼굴로 주머니와 따로 내미는 돈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슬쩍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소, 손님? 왜, 그렇게 보시는지…….”
지금껏 미소를 잃지 않았던 직원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유찬의 시선 때문이었다.
‘훗! 귀엽네. 뭐, 미안하기도 하니까.’
한유찬은 직원이 따로 건넨 돈에서 오만 원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뚝 떼었다.
‘350만 원까지는 오만 원권이고 나머지 20만 원 정도인가?’
어림잡아 액수를 가늠해 본 한유찬은 그것을 내밀었다.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한 채였다.
“예? 이, 이걸 왜…….”
당황스러워하는 직원에게 한유찬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설명 값.”
“네?”
한유찬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직원의 얼굴에서 슬쩍 시선을 내려 그녀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명찰을 확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김소미 씨 설명이 좋아서 주는 팁이라고.”
“아, 예.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 결정체 관리소 직원은 고객님께 따로 보상을 받거나 하는 일은…….”
“연락처는 안 물어볼 테니까 안심하라고. 그럼.”
한유찬은 거절하는 직원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저기 소, 손님!”
직원이 다소 높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한유찬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초면에 반말한 게 미안해서 드리는 거니까, 알아서 잘 쓰라고요.’
한유찬은 히죽 웃으며 결정체 관리소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제야 손에 든 주머니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칠천구백이라니! 육천삼백이라니!’
관리소 내부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한유찬의 머릿속은 돈으로 가득 찬 곳에서 마구 굴러다니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개당 천만 원을 예상했던 결정체 가격이 무려 여덟 배로 뛰었다. 게다가 배낭 안주머니에는 비슷한 결정체가 무려 오백 개 가까이 들어 있었다.
400억. 세금을 제하더라도 300억 원 이상이 지금 그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한유찬에게는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것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능력에 타워에 돈까지…….’
최근 며칠 동안 한유찬에게 벌어진 일은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들이었다.
‘그나저나, 어째서 D등급 괴수의 결정체가 1,523이 나온 거지?’
궁금한 점도 많았고 알아봐야 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기까지 가장 최근의 궁금증부터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 에너지 총량! 설마 그것 때문인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절로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예? 손님?”
룸미러를 통해 택시 기사의 놀랄 눈이 보였다.
“아닙니다.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한유찬은 대충 얼버무리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에너지 총량.
이는 결정체가 가진 에너지를 측정하는 장비를 발명한 학자가 주장한 것으로, 결정체에 담긴 것은 괴수가 지닌 총 에너지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학자는 그중에서 특히 많은 에너지가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데, 만약 보호막을 소모 시키지 않고 괴수를 사냥할 수 있다면 결정도가 훨씬 높은 결정체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능력자 중에서 보호막의 소모 없이 괴수를 사냥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즉, 이론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밝혀진 사실이 있기는 했다. 같은 종류, 같은 체구의 몬스터라도 비슷한 등급의 능력자가 사냥했을 때와 등급이 월등히 높은 능력자가 사냥했을 때 얻은 결정체가 결정도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학자는 이것을 두고 괴수가 소모된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해 체내의 에너지를 끌어와 보호막에 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어느 정도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즉, 같은 등급의 괴수라도 빨리 잡을수록 결정체의 결정도가 높아진다는 의미였다.
효과는 10~20% 정도.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이 이론으로 인해 고등급 능력자의 저등급 사냥터 장악이 일어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한 등급 높은 능력자가 낮은 등급의 막바지에 있는 괴수를 사냥하는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예를 들어 D등급 막바지에 있는 은빛 뿔 늑대의 결정도는 대략 900~950가량. 그리고 이것을 고등급 능력자 파티가 순식간에 잡아 버리면 결정도는 1000을 돌파한다.
즉, D등급 괴수를 사냥해 C등급 결정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C등급 최하급 괴수가 남기는 결정체가 1500이었으니, 그보다는 좀 적었으나 어쨌든 1000을 돌파했으니 가격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냥하기가 쉽고 안전했다. 조금 모자란 개당 정산액은 더 많은 숫자를 사냥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 덕분에 사냥터를 빼앗긴 저등급 능력자들이 항의했지만, 힘없는 자의 목소리는 그저 허무하게 흩어질 따름이었다.
이렇듯 10~20%의 차이도 헌팅 양상에 변화가 생길 정도로 커다란 여파를 낳았다.
그런데 세 배의 차이라면 어떨까?
‘절대로 남들 앞에서 내가 사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군. 특히, 타워의 공격이 괴수의 보호막을 뚫는 장면을 보이면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 생길 거야.’
특히 강한 힘을 지닌 거대 클랜이나 권력자들에게 이런 정보가 노출되면, 한유찬의 삶을 고달파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그에게 두 남매라는 약점이 있는 이상,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적어도 벙커나 패닉룸 수준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해. 유사시에 언제든 숨어들 수 있도록.’
사실 지금도 만들고자 마음먹으면 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타워와 방벽의 소환시간이었다.
‘타워 스킬 중에 소환시간을 연장하는 기술의 효과는 50%. 그걸 익힌다 해도 하루 반인가?’
에어리어에서 사냥할 때에는 그저 막연하게 조심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에어리어를 벗어나 결정체를 팔고 돈을 얻고 나자 위기감이 급속도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이는 한유찬이 자신이 얻은 힘의 무한한 가치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 택시는 어느덧 목적지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아! 기사님, 저기 마트 앞에서 세워주세요.”
돈을 벌었다.
무려 육천하고도 삼백만 원.
예전 같았으면 몇 년을 벌어도 모으지 못할 액수를 단 며칠 만에 벌어들였다.
물론 배낭 안의 결정체를 팔면 삼백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테지만, 너무 큰 액수라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민의 경제관념에서 ‘억’단위가 넘어가는 돈은 그저 큰 숫자일 따름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한유찬은 마트에 들러 갖가지 먹을거리들을 잔뜩 샀다. 평소에 먹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기에 포기했던 것들을 하나, 둘 고르다 보니 커다란 박스에 담아도 모자랄 만큼의 양이 되었다.
“배달해 드릴까요? 두 시간 정도 걸릴 텐데…….”
물어오는 점원의 말에 한유찬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박스나 큰 걸로 두어 개 주세요.”
“아! 차 가져오셨나 봐요. 잠시만요.”
차는 없었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답해봤자 의미 없는 시간만 소모될 뿐, 득이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차도 하나 알아봐야겠군.’
“자! 다 됐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구매한 물품의 액수가 커서 그런지 점원의 태도는 무척이나 사근사근했다.
묵직하고 커다란 박스 두 개를 겹쳐 들고, 한유찬은 집으로 향했다. 사실 과할 정도로 커다란 박스였다. 무게 역시도 신체 능력이 향상되지 않았다면 몇 걸음 옮기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한유찬의 걸음을 그저 가벼울 따름이었다. 가는 길에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힘겨워했을 계단을 두어 개씩 오르며 한유찬은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나야. 윤석아. 조금만 기다려라. 오늘은 아주 배가 터지도록 한 번 먹어보자!’
# Chapter 7
1
그르르륵.
낡은 철문이 바닥을 쓰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앗! 이 소리는!”
반지하 방에서 반가움이 가득한 서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한바탕 부산스러운 소리가 일어나더니 문을 뻥 걷어차며 서이나가 뛰쳐나왔다.
‘쯧! 얌전한 척하려면, 그렇게 문을 걷어차고 나오는 것부터 고치라고.’
한유찬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 앞에서 얌전한 척하려는 서이나가 문을 걷어차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급하게 나오는 이유. 그만큼 그를 빨리 보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찬 오빠! 잘 다녀오셨어요? 그런데 삼일 걸리신다더니, 하루 일찍 오셨네요?”
종알종알 묻는 서이나의 목소리는 한유찬의 기분을 편안하게 했다.
‘그래. 이게 집이지.’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편안함과 안도감을 주는 자신만의 안식처.
“누가 많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헤헷! 정말요?”
서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쩐지 살짝 홍조를 띤 볼이 깜찍해 보여 한유찬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양손에 들린 무거운 박스가 그의 행동을 막았다.
“뭐, 그래서 내가 멱살 잡고 하드 캐리 좀 했지. 그랬더니 금방 목표치를 채우더라고.”
멱살 잡고 하드 캐리.
게임에서 나온 용어로 팀이 불리할 경우, 그것을 혼자 힘으로 이끌어 뒤집는다는 의미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허풍이었다.
한낱 서포터 따위가 감히 하늘 높은 콧대를 가진 능력자들을 이끈다는 말인가?
그러나 오늘의 발언만큼은 진실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그 홀로 이루었지만 말이다.
“오올! 역시 우리 유찬 오빠!”
여기에 더해 허풍이 빤히 보임에도 맞장구를 치며 좋아하는 서이나까지. 웬만한 커플보다도 더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건 다 뭐예요?”
“후후후! 느님을 모시고 있지.”
“네?”
추측이 잘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서이나. 이에 한유찬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하명했다.
“서가의 이름 모를 소녀여. 언제까지 거친 풀로 쓰라린 위장을 달랠 텐가? 그대의 입과 치아와 식도, 위장과 소장과 대장에 미안하지도 않단 말인가? 이 몸이 특별히 가련한 네 장기에 기름기를 더할 귀하신 분을 모셨으니, 그대의 모자란 동생과 함께 나와 귀히 영접하도록 하라!”
다소 장황한 말이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 고기 사왔으니 먹자.
추릅.
“지, 진짜요?”
서이나는 입가의 침을 훔쳐가며 되물었다.
‘쯧! 모양 빠지게 그걸 왜 다시 묻고 그래? 평소에 고기 한 점 제대로 못 먹어본 사람처럼…….’
고작 고기 먹자는 소리에 말 만한 소녀가 침을 흘리고, 사실을 재차 확인까지 하는 모습에 한유찬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짠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더욱 애달팠다.
“특별히 오늘 모신 분은 잡식을 일삼는 후덕한 분이 아닌, 거친 황야에서 풀을 뜯고 자라신 지고하신 분이니 준비 단단히 하고 건너오도록. 이상!”
“소, 소, 소님이다! 윤석아! 윤석아! 빨랑 튀어나와! 안 나오면 문 잠그고 안 열어준다! 밖에서 냄새만 맡게 할 거야!”
서이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
쿠당탕탕!
“우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들려온 서윤석의 외마디 비명에 한유찬과 서이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2
치이이익. 치익.
앞뒤로 한 번씩. 시간은 10초 내외.
육즙을 뚝뚝 흘리며 몸단장을 마친 고기는 끄트머리에 약간의 소금을 묻히고는 그대로 입안으로 직행했다.
좋은 고기에 거창한 양념장은 언어도단.
한유찬은 언젠가 그의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 모름지기 좋은 고기란 고기 자체의 육향과 육즙만으로도 오감을 만족하게 하는 법.
한유찬은 이를 느껴보기 위해 무거운 상자를 들고도 길을 돌아 도축장과 연계된 정육점에 들리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능력도 얻고, 돈도 벌고.
예전과 백팔십도 전환된 삶을 기념하는 날에 먹는 고기였다. 충분히 공을 들일 가치가 있다는 의미였다.
몇 번을 씹은 후 목구멍으로 넘기니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맺혔고, 입꼬리와 광대는 하늘 높이 승천했다.
“헐! 이거 뭐야! 녹아! 녹아! 개… 아니, 완전 맛있어!”
서이나는 호들갑스럽게 맛을 표현했다.
나중에 말을 슬쩍 바꾼 것은 한유찬 앞에서 사용하기에 ‘개’라는 접두사가 그리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름의 조신한 몸가짐으로 현모양처를 꿈꾸던 그녀였기에, 되도록 상스러워 보이는 말투는 지양했다. 특히, 한유찬의 앞에서는 더더욱 얌전을 떨었다.
반면 서윤석은 조용했다. 그저 전투적으로 고기를 씹어 목구멍으로 넘길 따름이었다. 단 한마디 말조차 없이 고기 흡입에 여념이 없었다.
흐뭇한 미소를 띤 채 고기를 굽던 한유찬을 향해 서이나가 야무지게 싼 쌈을 들이밀었다.
“오빠도 드시면서 하세요.”
여전히 아빠 미소를 지은 채로 받아 한 입 깨무는 순간, 한유찬은 코를 톡 쏘는 매운맛에 눈물이 핑 돌았다.
‘대체 마늘을 몇 개나 넣은 거냐!’
“헤헤……. 오빠 오늘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마늘이 피로회복에도 좋고, …자한테도 좋데요.”
서이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중간에 살짝 얼버무리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장난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을 기대하는 강아지 눈빛이었다.
‘쩝! 이것 참……. 화를 낼 수도 없고…….’
설령 장난이라 한들 어쩌겠는가!
이렇듯 말이라도 그를 위해 주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오로지 둘뿐이었다.
“쳇! 누나가 그렇게 안 챙겨도 형은 장난 아니거든? 내가 형이랑 같이 목욕탕 가봐서 아는데, 거기 가면 사람들이 형 근처로는 절대로 안 와! 코끼리… 아니지. 매머드라고 했던가?”
“쿨럭! 무, 무슨!”
서윤석이 툭 던진 말에 한유찬은 격렬한 헛기침을 터뜨렸고, 서이나는 완연한 석류 빛으로 물든 얼굴을 푹 수그렸다.
‘매, 매머드래! 어쩌지? 처음에는 엄청 아프다고 하던데……. 설마 주, 죽지는 않겠지?’
푹 숙인 서이나의 얼굴에 떠오른 일말의 걱정. 이미 친구들의 수다와 각종 시청각 자료를 통해 성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은 습득한 그녀였다.
“으흠! 큼! 아! 그렇지! 나 능력자 됐다!”
한유찬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네?”
서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어 올렸고, 서윤석 역시 한껏 치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 리얼리?”
“훗! 자, 봐라.”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 하나를 꺼낸 한유찬은 그것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세우고는 그대로 눌렀다. 그러자 동전은 힘없이 반으로 접혀버렸다.
일반인이라면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기예였다.
“헛!”
“어떡해!”
서윤석은 놀람을 표현했지만, 서이나는 울상을 지었다.
‘응? 이나는 왜 저러지? 설마, 능력자가 무서운 건가?’
한유찬의 추측이 틀렸음은 이어지는 서이나의 행동에서 드러났다. 그녀가 후다닥 일어나 다가오더니 한유찬의 손가락 사이에 접힌 동전을 황급히 빼내었기 때문이다.
“히잉……. 오백 원이… 오백 원짜리가…….”
‘으잉?’
한유찬은 살짝 당황했다.
“형! 이거 다시 펼 수 있지? 접기만 할 줄 아는 건 아니지? 그치?”
이어진 서윤석의 말에 한유찬은 서윤석의 놀람 역시 오백원짜리를 망가뜨린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놀랄 포인트가 그게 아닌데 왜들 이러지? 내가 그래도 용돈은 넉넉하게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너무 적었던 건가?’
한유찬은 다소 황당한 기분이었다.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했건만, 아무래도 조금 모자랐던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아무리 그래도 진짜 부모님만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유찬은 약간의 씁쓸함을 뒤로하며 밝게 말했다.
“물론 다시 펼 수 있지. 이렇게.”
접힌 동전을 양손으로 잡고 슬쩍 힘을 가하자 동전은 금세 원래 모양으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너희 용돈 많이 모자라니? 나도 이제부터는 돈 많이 벌 수 있으니, 용돈 두 배로 올려주마.”
“형! 무슨 소릴!”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해요!”
격렬하게 부정하는 두 아이의 모습에 한유찬은 더욱더 알쏭달쏭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뭐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백 원짜리 하나에 그리 쩔쩔매면서, 그렇다고 용돈을 올려준다는 말에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이유가 뭘까?
‘뭐, 나중에 윤석이 녀석한테 슬쩍 떠보면 알아서 불겠지.’
“그나저나, 나 능력자 됐다니까? 아직 측정은 안 해봤는데, 최소한 D등급은 나올 것 같아. 어때? 대단하지?”
“아! 추, 축하해요. 오빠.”
“훗! 난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고! 늘 죽도록 고생하는 형을 그대로 가만히 놓아두는 건 저기 위에 계신 분의 근무태만이라고! 물론, 아직도 조금 밉긴 하지만…….”
서이나는 수줍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서윤석은 큰소리를 치다가 갈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더욱 그의 부모님과 한유찬의 부모님을 너무 일찍 데려간 하늘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쯧쯧! 고기느님 영접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그 무슨 망발을! 서윤석, 네 죄를 용서받고 싶다면 지금 당장 다섯 분을 한 번에 영접하도록!”
“예이!”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자 한유찬이 반전을 시도했고, 서윤석이 경쾌하게 받아넘기면서 분위기는 다시금 화사하게 밝아졌다.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은 후, 뒷정리를 맡겠다는 서이나를 남긴 채 두 남자가 바당으로 나섰다.
“불어.”
한유찬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네? 뭐, 뭘요?”
뜬금없는 한유찬의 물음에 서윤석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확실히 뭔가 있기는 하군.’
말을 더듬는 것과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으로도 한유찬은 서윤석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서로의 양친을 잃은 후, 가족처럼 지내던 세 사람이었다. 눈빛만으로 마음이 통할 정도는 아니어도, 표정 변화로 상대의 심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애들한테 돈이라도 뜯기는 거냐?”
“풋!”
서윤석의 입술을 비집고 기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어이없음이 가득 묻어났다.
한유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름대로 걱정을 담아서 한 물음이건만, 돌아온 게 이런 반응이라니.
한유찬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느낀 서윤석은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치는 빠른 편이었다.
“형, 잠깐만 기다리세요.”
잽싸게 몸을 돌려 반지하로 들어가는 서윤석의 모습을 한유찬은 의문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잠시 후, 다시 마당으로 나온 서윤석은 뭔가를 들고 있었다. 약간 두꺼운 비닐 사이에 낀 빳빳한 종이.
‘통장? 통장을 왜?’
“일단, 한 번 보세요.”
한유찬은 서윤석이 내민 통장을 비닐에서 꺼내 펼쳐 보았다. 통장은 모두 두 개였는데, 하나는 예금주가 서이나였고, 다른 하나는 서윤석이었다.
- 09.11. 입금 190,000
- 10.11. 입금 190,000
- 11.11. 입금 190,000
서이나의 통장 내역이었다.
그녀가 매달 한유찬에게 받는 용돈은 이십만 원. 그중 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꼬박꼬박 은행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날짜.’
첫 입금 날짜가 유난히 눈에 띠었다.
한유찬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큼지막한 흉터가 새겨진 직후였기 때문이다.
한유찬은 당시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붙잡고 목 놓아 울던 서이나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자기는 굶어도 좋으니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안전한 일을 찾아보라고 계속해서 한유찬을 설득했었다.
하지만 한유찬은 서포터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대학도 제대로 못 나온 그에게 고액의 수당을 제시하는 곳은 헌팅 사무소뿐이었기 때문이다.
통장이 개설된 날짜는 그가 다시 서포터 일을 시작하고 두 남매에게 첫 용돈을 준 바로 그 날이었다.
‘하여간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유찬의 얼굴이 씁쓸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마음 한구석에서 솟구치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애써 가리려는 시도였다.
“짠순이가 그러더라고요. 형이 목숨 걸고 벌어온 돈을 어떻게 허투루 쓸 수 있냐고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야 하지만, 정말 위험할 때를 대비해 수술비 정도는 보태야 한다면서 제 귀를 잡고 은행으로 끌고 갔죠.”
서윤석은 멋쩍게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뭐, 저도 백퍼 동감했지만.”
이어 살펴본 서윤석의 통장은 서이나보다 더했다.
매달 받는 15만 원의 용돈 중에서 14만 5천 원이 꼬박꼬박 입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슴의 울컥거림은 갈수록 심해졌고, 시큰거리는 느낌이 눈가를 맴돌았다.
‘이런 녀석들을 버리라고?’
한유찬은 누군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몬스터 웨이브로 양친을 잃고, 겨우 실의에서 벗어나 두 남매를 건사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였다.
‘어리석은 짓이라고? 후회할 거라고?’
또 다른 누군가의 말.
그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들에게 해줄 말은 하나였다.
‘개소리!’
물론, 사람에 따라 어차피 그가 준 돈을 그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저금하는 게 무슨 대수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두 남매가 없었으면 그가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두 남매를 건사하느라 한유찬이 일정 부분 희생한 면도 있었다. 어린 두 남매에게 경제적인 능력이 있을 리 없었기에, 특히 물질적인 부분은 오로지 한유찬의 힘으로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꼭 물질적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때로는 오히려 형태가 없는 것이 더 커다랗게 다가올 때가 있었다.
당시의 한유찬에게 삶의 의욕을 되찾아준 것은 두 남매였다. 그리고 그 후에도 지금처럼 의욕을 고취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한유찬은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어. 진즉 굶어 죽었거나, 아직도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겠지.’
두 남매는 늘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리고 한유찬 역시 두 남매에게 죽을 때까지 갚아 나가야 할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하면 중학생이 한 달 오천 원으로 생활할 수 있는 거지?’
울컥거리던 감정을 겨우 가라앉히자, 이번에는 궁금증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을 때였다. 용돈을 받아도 순식간에 다 써버리고, 어떤 핑계로 부모님께 용돈을 더 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기였다.
적어도 당시의 한유찬은 그러했다.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한유찬의 모습에 서윤석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첫날이 중요하더라고요. 친한 놈들 두 명에게 깔끔하게 몰빵해 버리고, 그것을 핑계로 빌붙는 거죠. 다행히 학교도 가깝고, 급식비도 형이 따로 내주니까. 딱히 돈 쓸 일은 없더라고요.”
‘독한 녀석…….’
서윤석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그를 받아주는 친구들도 참 착하고 고맙다는 마음이 일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관계에서도 냉정하게 쳐내지 않고 친분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 언제 한 번 데려와라. 내가 아주 비싸고 맛있는 걸로 대접할 테니까.”
“헤헤. 저야 녀석들에게 얻어먹은 것이 워낙 많으니 형이 그래 주시면 좋죠. 그런데 괜찮겠어요?”
서윤석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뭐가?”
“경쟁자인데? 그 자식들, 우리 짠순이한테 꽂혔거든요?”
짠순이.
언젠가부터 서윤석이 서이나를 일컫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 부를까?’ 하는 의문을 품었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풋!”
한유찬은 실소를 터뜨렸다.
‘벌써 그럴 때인가? 하긴, 이나가 예쁘게 크긴 했지. 콧물 줄줄 흘리며 업어달라 보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등학생이라니…….’
스물다섯.
한유찬도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두 남매의 성장만 생각하면 세월이 참 빠름을 느꼈다.
문제는 그렇게 성장한 서이나였음에도, 그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그의 등에 업혀 등판을 온통 콧물투성이로 만들던 일곱 살 꼬맹이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난 그 결혼 반댈세!”
“오오! 아빠 코스프레? 하긴, 우리 짠순이가 조금 쪼잔하긴 해도, 남 주기는 또 아깝죠? 이참에 그냥 확!”
꿍!
헤실헤실 웃으며 이죽거리는 서윤석의 정수리에 통렬한 꿀밤이 내리꽂혔다.
“아악! 형! 능력자가 사람 때리는 거! 그거 살인 미수예요! 살인미수!”
서윤석은 양손으로 정수리를 감싸며 소리쳤다.
“네 누나야 인마. 네 누나. 너는 남동생이라는 놈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지는 못할망정, 확? 확? 그 뒤는 또 뭔데?”
“이왕 지킬 거면 같이 지키자는 거죠. 저야 한 글자만 더 붙이면 부르기도 편하잖아요?”
아마 덧붙이는 글자는 ‘매’가 될 확률이 높았다.
매형이다.
한유찬도 서이나의 마음을 안다. 또한, 서윤석이 그런 서이나를 어떻게든 자신과 엮어 보려 노력한다는 것도 안다.
평소 그렇게 티를 내는데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눈을 내다 버려야 할 터였다.
‘다 한때 마음이겠지. 의지할 사람이 없어 기대는 마음을 착각해 그렇게 생각할 뿐이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나중에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후회할 일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솔직히 아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콧물 줄줄 흘려대던 것을 업어서 고이 키워놨더니, 느지막이 나타난 누군가가 확 채 간다면?
적어도 껄껄 웃으며 보내줄 기분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 이런 게 아빠의 마음이란 건가?’
한유찬, 방년 이십오 세. 그는 시집보낼 딸을 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형. 솔직히 말해요. 남 주기 아깝잖아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날 잡아서 형이 확!”
꿍!
다시 한 번 정수리에 떨어진 꿀밤.
“으악! 진짜! 살인 미수라니까요!”
“힘 조절했거든?”
그렇지 않았다면, 서윤석은 이렇듯 소리를 내지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사라졌을 테니까.
“이익!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요! 내가 아주 어마어마하게 잘나가는 능력자 하나 섭외해서 짠순이한테 붙여버릴 거니까!”
서윤석은 머리를 감싼 채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훗! 그러시던가!”
“쳇! 하여간 꽉 막혔다니까. 능력자도 됐다면서……. 아! 설마 포돌이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죠? 철컹철컹?”
양손을 모아 수갑 차는 시늉을 하는 서윤석의 도발에도 한유찬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무튼, 그건 이제 필요 없게 됐으니까 형이 알아서 써요. 이제 하루살이 서포터는 안녕이니까.”
서윤석은 한유찬의 손에 통장을 남긴 채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 어린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서윤석도 서포터가 얼마나 위험한 위치인지는 잘 알았다. 다름 아닌 한유찬이 하는 일이었으니, 기사가 보일 때마다 클릭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하루살이라는 별명이 다 붙었을까.
하지만 이제 능력자가 됐으니, 위험에서 한 발 벗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무사히 에어리어를 빠져나올 확률은 능력자 쪽이 월등했다.
‘어떻게 필요가 없다 말할까?’
한유찬은 손에 든 통장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너희 마음이 이렇게 가득 담겨 있는 것을…….’
손아귀에서 어쩐지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해 한유찬은 다시 한 번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대학 갈 때 꼭 백배로 돌려주마.”
설 다음 날 부모님의 세뱃돈 갈취 스킬과 뉘앙스가 비슷해 보였으나, 그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한유찬의 말투에서 실행 의욕이 넘치도록 충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Chapter 8
1
‘어떻게 해야 좋을까?’
두 남매와 함께 화기애애한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온 한유찬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민의 주제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하는 것이었다.
‘돈이 될 것은 이미 충분히 있어.’
장롱 깊숙이 숨겨둔 주머니에는 개당 칠천만 원 이상의 결정체가 무려 오백 개에 조금 못 미치게 담겨 있었다. 결정체 관리소에 하나 팔아본 결과, 모두 처분하면 사백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세금을 제외하면 삼백억 원정도로 줄어들겠지만, 어쨌든 한유찬에게는 꿈에도 만져볼 수 없는 거금임이 분명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건데…….’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었다.
D등급의 결정체는 흔하게 거래되지만, C등급 이상부터는 거래량 자체가 많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한꺼번에 대량의 C등급 결정체가 풀린다면 한유찬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보가 거대 클랜이나 대기업 같은 곳에 흘러들어 가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 공산이 컸다. 한마디로 위험해진다는 의미였다.
한유찬은 힘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에 대한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게 그들이라는 게 한유찬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설 루트를 타면, 오히려 더 위험해 질 것이 빤하고 말이야.’
결정체를 정부 소속의 기관이 아닌, 다른 기업이나 암시장 같은 곳에 파는 방법도 있었다. 가격은 정부보다 훨씬 더 비싸게 쳐주지만, 이 역시 대량으로 풀려 버린다면 그쪽 업계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위험도는 오히려 사설 루트 쪽이 더 높았다. 그들 중에도 역시 힘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겉으로 드러난 정부 쪽보다 훨씬 더 악의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을 터였기 때문이다.
‘결국, 한두 개씩 나누어 파는 수밖에 없나?’
한유찬은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릴지라도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두 남매가 부족함 없이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체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음은 그것을 모두 바꾼 뒤에도 안전하게 지켜낼 힘이겠지.’
수백억의 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성을 가진다. 통장에 있든, 부동산을 사든 아니면 주식에 투자하든 누군가의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조사를 통해 그것을 가진 자에게 지킬 힘이 없어 보인다면 수작을 부릴 수도 있었다.
‘등급 측정을 받아봐야 하나? D등급, 아니 팔아야 할 것이 C등급이니까, 이것을 무리 없이 팔기 위해서라면 최소한 C등급은 받아야 할 텐데…….’
한두 개씩 나누어 팔더라도, 한 사람이 많은 양을 팔면 언젠가 소문이 돌기 마련이었다. 이때를 대비해서라도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어야 했다.
‘일단 등급 측정부터 해보기로 하고, 다음은…….’
다음에 대한 생각에 한유찬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놈들이군.’
한유찬은 서포터들을 내팽개친 채 도망친 능력자들을 떠올렸다.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살아 돌아온 다음에도 여전히 위협으로 남은 이들이었다.
‘그놈들이 D등급이었지? 능력 측정에서 C등급 이상만 받아내면 한꺼번에 해결할 수도 있겠군.’
한유찬이 걱정하는 것은 능력자 협회가 같은 능력자의 편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들보다 높은 등급을 받는다면 상황은 역전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유찬은 일단 능력 측정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2
삐빅.
- 귀하의 측정 결과는 E등급입니다.
‘E등급?’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딱딱한 기계음에 한유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등급 판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D등급 괴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이력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등급의 판정은 같은 등급의 괴수를 한 파티로 잡을 수 있는 것인가가 기준이었다.
즉, 탱커 한 명과 두 명의 딜러 그리고 한 명의 힐러가 필요한 것이었으니, 이를 홀로 해결했다면 상식적으로 봐도 D등급 이상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뭐지? 왜 그렇지?’
한유찬이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자, 유리벽 너머에서 그를 지켜보던 연구원이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저, 능력자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닙니다. 아!”
고개를 가로젓던 한유찬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탄성을 터뜨렸다.
‘방어막 관통! 그것 때문이었어!’
한유찬의 능력은 일반적인 능력자와는 달랐다. 방어막을 무시하고 괴수의 본체에 직접 타격을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맞을 수도 있겠어. 보호막이 소실된 괴수는 같은 등급 능력자가 한, 두 방이면 때려잡을 수 있으니까.’
이해가 되는 한편으로 난감한 생각도 들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아무리 그래도 E등급은…….’
E등급 능력자가 사냥할 수 있는 괴수는 E등급이었다. 하지만 E등급 괴수는 돈이 되지 않았다. 결정화 과정까지는 같았으나, 빛이 사라진 후 남겨진 것이 없었다. 즉, 결정체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 주제에 보호막은 갖췄으니, 돈도 되지 않는 주제에 사냥만 어려운 쓸모없는 괴수였다.
여기에서 E등급 능력자의 선택이 갈라졌다.
능력자임을 잊고 평범하게 살거나, 아니면 투자한다는 셈 치고 소득 없이 E등급 괴수 사냥에 나서는 것이었다.
일명 고난의 행군.
사냥에 들어가는 기본 비용 때문에 오히려 돈을 소모해가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었다.
오로지 미래를 향한 희망 하나만을 믿고 고난을 감내하는 것은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기는 했다.
바로 D등급 이상의 능력자와 연줄이 닿는 경우였다. 그럴 때 그들은 D등급 헌팅에 참여하여 괴수를 사냥하고 능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
능력자의 능력이 향상되는 일은 괴수의 결정화 과정 중에 일어났다. 결정체로 뭉치는 에너지 일부가 사냥에 참여한 능력자에게 흡수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사냥하는 괴수의 등급이 높을수록 흡수되는 에너지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에 능력자들 사이에서는 이것을 두고 ‘경험치’라는 말을 사용하곤 했다.
여러모로 RPG 게임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 군상이 여럿인 만큼 순수한 선의가 아닌 다른 의도로 E등급 능력자를 헌팅에 참가시키는 일도 있었다.
노예계약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E등급 능력자를 빠르게 D등급으로 승급시킨 다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년 이상 터무니없이 낮은 보수로 부려 먹는 일이었다.
물론 도의적으로는 옳지 않은 일이었으나, 빠르게 등급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혹해 계약서에 사인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계약서에 묶인 이들은 그야말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후회하고 저항해봤자 소용없었다. 그런 일을 행하는 이들이 대부분 거대 클랜이나 권력자를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던 이의 제안이 아니면 E등급 능력자가 상위 등급 사냥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유찬이 난감해하는 이유는 이렇듯 E등급 능력자가 여러모로 애매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유찬이 입술을 뗐다.
“혹시 특기별 측정, 가능합니까?”
한유찬의 물음에 스피커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어떤 특기를 측정하시길 원하십니까?”
능력자 등급 측정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한유찬이 이미 받은 것과 같이 능력자의 신체 내부에 잠재한 에너지를 측정하는 방식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특기별 측정이었다.
특기별 측정이란 탱커와 딜러, 힐러의 특기별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에 대한 역량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제 능력이 신체 강화인 것 같으니, 당연히 탱커 능력을 측정해야겠죠?”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연구원의 말에 한유찬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 감수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당부 드리겠지만, 특기별 측정을 해봐도 에너지 측정 결과 이상의 등급을 받을 경우는 열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실패하지요. 특히, 탱커 능력 측정은 방식이 위험하므로 얻는 것 없이 부상만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만류하는 연구원의 말을 부정하자 연구원은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특기별 측정실로 이동하겠습니다.”
“아! 그 전에 잠시 화장실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일을 보신 후, 733호 측정실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한유찬은 유리벽 너머의 연구원을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측정실을 나섰다.
이어 그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최상층의 버튼을 눌렀다.
‘방법이야 만들기 나름이겠지.’
엘리베이터에 오른 한유찬의 얼굴에 자신감이 내비쳤다.
3
733호 측정실은 사방이 두꺼운 유리벽으로 막힌 공간이었다. 모양은 길쭉한 복도형이었는데, 한쪽 벽에 용도를 알 수 없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특이했다.
‘이곳이란 말이지? 능력자 협회의 고위 임원 중에 변태 사디스트가 있다는 소문을 만든 곳이.’
조금 전, 연구원이 한유찬을 두 번씩이나 만류한 이유는 바로 탱커 능력 측정 방식의 과격함 때문이었다.
탱커 능력 측정자는 방패를 들고 날아드는 강철 공을 막아내야 했다. 물론 등급에 따라 강철 공의 무게나 속도 등이 달라진다.
그런데 문제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한 능력자들이 욕심을 부린다는 점이었다.
갈수록 강철 공의 위력은 강해졌고,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능력자들은 이미 한계에 부딪혔음에도 욕심 부려 더 높은 등급에 도전하고는 했다.
그 결과는 측정 기계에 붙은 별명이 설명해 주었다.
‘이것이 본 브레이커인가?’
한유찬은 한쪽 벽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본 브레이커.
한 번 발동되었다 하면, 반드시 뼈 한두 개는 부러뜨린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가지 논란이 일었으나, 능력자 협회는 적어도 탱커라면 부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들어 반발을 일축해 버렸다.
능력자 협회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파티원의 안전을 책임지고,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내던져 괴수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바로 탱커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측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측정자께서는 측면 거치대에 놓인 방패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의 목소리에 따라 한유찬이 묵묵히 방패를 집어들자, 다시금 연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기본 능력 테스트입니다. 파괴력은 E등급 초식형 괴수 수준입니다. 준비되셨다면 고개를 끄덕여 주십시오.”
한유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구원은 망설임 없이 기계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후우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벽면의 본 브레이커에서 지름 1미터 가량의 강철 공이 한유찬을 향해 날아들었다.
생각보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또한, 날아오는 도중 미세한 떨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당히 속이 비었거나, 가벼운 재질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한유찬은 방패를 든 팔을 세워 강철 공의 경로를 막아섰다. 비스듬히 기울여 흘릴 수도 있지만, 그러면 테스트는 불합격이었다. 실전이 아니라 탱커가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막아낼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테스트였기 때문이다.
텅!
묵직한 소음과 함께 강철 공이 튕겨 나갔다. 한유찬은 방패를 든 팔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에너지 측정 결과가 제대로 된 것이로군. 타워 능력을 제외한 내 몸의 능력은 E등급이야.’
하지만 한유찬의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그가 다시 방패를 들고 본 브레이커를 주시하자 스피커에서 연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본 측정을 통과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다음은 E등급 육식형 괴수의 파괴력입니다.”
육식형 괴수는 초식형 괴수보다 공격력이 강하다. 이는 한유찬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대신, 보호막의 소모가 빨랐는데, 초식형 괴수의 사냥이 가늘고 길게 이루어진다면, 육식형 괴수의 사냥은 짧고 굵게 이루어진다고 보면 되었다.
“준비되셨다면 고개를 끄덕여 주십시오.”
한유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구원은 묵묵히 측정 시작을 가리키는 버튼을 눌렀다.
후우우웅! 터엉!
[방벽의 소환시간이 1시간 차감되었습니다.]
강철 공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한유찬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처음과 달리 별다른 충격이 느껴지지 않음에 한유찬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거 아무래도 보호막이 방패까지 감싸는 것 같은데?’
한유찬이 화장실을 핑계로 옥상에 오른 이유는 바로 방벽 소환에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건물 뒤편에서도 최대한 외진 곳에 방벽을 소환하고 그것을 자신과 연결해 보호막을 발동했다.
보호막을 발동한 이상, E등급 괴수의 공격 정도는 막아내는 게 당연했기에 한유찬이 더 관심 깊게 지켜본 것은 그가 들고 있던 방패였다.
그리고 강력한 강철 공의 위력에도 방패에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은 점에서 한유찬은 자신의 신체와 연결된 것까지도 보호막이 퍼져 나감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무기를 들어도 효과가 있겠어.
칼과 같은 날카로운 무기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몽둥이 같은 둔기에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한편, 유리벽 너머 연구원의 얼굴에는 약간의 놀람이 서려 있었다.
‘처음에는 힘들게 막은 것 같은데, 그보다 강한 공격을 이렇게 쉽게 막아도 되는 건가? 설마, 오늘 복권 사야 하는 날인 건 아니겠지?’
연구원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처럼 도는 말이 있었다. 바로 에너지 측정 등급보다 높은 등급을 받은 능력자가 나올 때에는 복권을 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확률이 낮다는 말을 빗댄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연구원은 피식 웃으며 다시금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E등급 탱커 테스트를 통과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다음은 D등급 육식형 괴수의 파괴력입니다.”
한유찬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막아내 보십시오. 당장 달려가 생전 처음으로 복권을 살 테니까.’
이런 생각과 함께 연구원은 진행 버튼을 눌렀다.
씨이잉!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소리.
터어엉!
충격 역시 한유찬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날 정도로 컸다. 하지만 한유찬은 자세를 흩트리지 않은 상태로 막아냈다.
[방벽의 소환시간이 2시간 차감되었습니다.]
‘헉! 정말 막았어!’
연구원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유찬은 힘에 겨운 표정을 하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세우며 말했다.
“후우! 팔이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막아냈으니 통과한 것 맞죠?”
“아, 예. 그, 그렇습니다. 축하합니다! 제가 측정실에 들어온 이후로 최초로 에너지 측정보다 높은 특기별 등급 테스트를 통과하신 분입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연구원의 축하를 들으며 한유찬은 방패를 다시 한쪽 구석에 세웠다.
‘더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한 등급 위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반응이었다. 만약 여기서 다시 한 등급 위를 도전해 성공한다면 연구원은 단순히 놀라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윗선에까지 보고가 올라가겠지. 그리고 엄청난 관심을 끌어모을 테고.’
더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음에도 한유찬이 포기한 이유였다.
‘그나저나 큰일인데……. 결정체를 아무런 의심 없이 팔기엔 D등급 정도로는 부족하단 말이야…….’
고민이 밀려왔으나, 한유찬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측정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은 흔치 않은 일을 성공한 사람으로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4
‘후우! 어쩔 수 없이 다시 에어리어로 들어가야 하나?’
능력자 연구 센터의 정원에 마련된 벤치.
한유찬은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고민에 잠긴 얼굴이었다.
에어리어는 위험했다.
능력을 얻기 전에도 위험했지만, 능력을 얻은 후에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떻게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서포터 일을 할 때에는 자신과 두 남매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했으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의 돈이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 돈도 어디까지나 결정체를 제대로 팔아야 나오겠지만…….’
이후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현재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후우! 어쩌겠어? 어차피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신의 디펜더 등급을 올려야 하니까 들어가 사냥을 할 수밖에.’
측정에서 그가 원하는 등급이 나왔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좌초되자 이후에 세운 계획들까지 와르르 무너져 내릴 상황이었다.
‘인터페이스.’
[신의 디펜더. 5등급. DP 17290, SP 2, CP 2]
‘지금이 5등급이니 일단 7등급이면 에너지 측정에서 D등급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타워와 연결해 방어막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그 이상의 등급을 받을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는 먼저 에너지 측정 등급을 올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D등급에 다다르면, 자연스럽게 C등급 테스트에 도전해서 통과할 수 있었다. 한 단계 위까지는 드물기는 해도, 성공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7등급! 딱 7등급까지만 올려보고 다시 측정을 받아 보는 거야!’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B등급이나 C등급은 아직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렇다고 D등급 에어리어에 들어가자니 남의 눈에 띌 수도 있다는 게 문제겠지.’
다른 것은 몰라도 타워는 남의 눈에 띄면 곤란했다. 여태껏 이런 능력을 얻은 능력자가 없었다는 점도 문제였지만, 타워를 통해 사냥하면 본래 등급 이상의 결정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더욱 큰 문제였다.
‘잠깐! 본래 등급 이상?’
한유찬은 번뜩 머리를 스친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거라면!”
5
전 세계에 나타난 에어리어의 숫자는 수천 개에 달했지만, 모두가 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중 절반에 달하는 에어리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중에는 특히 E등급 괴수가 출몰하는 곳이 많았는데, 이는 위험성은 컸으나 얻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E등급 괴수는 돈이 되지 않았다.
잡아봤자 결정체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D등급 이상의 괴수처럼 결정화 과정은 일어났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빛무리가 사라진 다음 남겨진 것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또, 보호막은 있었다. 능력자가 아니면 사냥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런 위험을 뚫고 탐사해봤자, E등급 괴수가 출몰하는 지역에서는 경제성 있는 자원이나 신물질 등을 발견할 확률이 낮았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후 2년가량이 지났다.
그리고 에어리어와 몬스터의 상관관계가 차츰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있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좋은 자원, 돈이 되는 신물질이 자리한 곳일수록 그곳을 지키는 괴수의 등급이 높았고, 등급 낮은 몬스터가 출몰하는 곳에는 쓸 만한 자원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이라면, 에어리어 내부의 괴수가 일정한 숫자를 유지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계속 불어나기만 했다면, 각국 정부는 자국의 영토 내부의 E등급 에어리어와 괴수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을 터였다. 불어난 괴수가 언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지 몰랐기 때문이다.
버려진 땅, 웨이스트 에어리어.
E등급 이하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에어리어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공식명칭 EA-128, 에어리어 128로 불리는 이곳은 그중 하나였다.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경계는 을씨년스러울 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차라리 경제성이라도 있었다면 이곳을 드나드는 능력자들을 위한 각종 시설이 있었을 테지만, 버림받은 지역인데다가 언제 다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지 몰랐기에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것이었다.
‘나에게는 딱이지.’
한유찬은 어둠을 벗 삼아 에어리어의 경계를 넘었다.
‘여기 출몰하는 괴수는 독 가시 시궁쥐. 남들은 쓰레기라고 부르는 E등급이지만…….’
사삭. 사사삭.
작은 발소리와 함께 이동하는 시커먼 그림자가 한유찬의 눈에 들어왔다.
‘내 생각대로라면, 나에게 경험치와 DP, 그리고 결정체를 안겨줄 소중한 존재가 될 거야.’
한유찬은 눈을 빛내며 달려나갔다. 조금 전 시커먼 그림자가 이동한 경로를 향해서였다.
- 키이익?
달려가던 시커먼 그림자가 기이한 소리와 함께 몸을 돌렸다.
달빛에 드러난 그림자는 털 대신 진한 녹색 빛깔의 가시가 촘촘히 나 있는 쥐 형상의 괴수였다. 체구는 1미터 가량, 꼬리를 뺀 몸길이는 2미터 정도로 괴수치고는 아담한 크기였다.
다다다다.
한유찬을 발견한 독 가시 시궁쥐가 잰걸음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D등급 괴수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한유찬에게 고작 E등급 괴수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아이스 타워 소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한유찬의 빛과 함께 옆쪽 땅이 불쑥 솟아올랐다. 자칫 다른 사람의 눈에라도 띄면 주목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가 얻은 능력에 대해 이런저런 테스트를 한 결과. 타워나 방벽 등을 소환할 때 나타나는 빛은 오로지 한유찬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덕분에 한밤중에도 마음 놓고 사냥할 수가 있지.’
쉬이익.
날아든 냉기 구체가 달려오던 독 가시 시궁쥐의 몸통에 스며들었다. 인간의 전력질주 이상의 속도를 내던 시궁쥐의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쉬이익. 쉬익. 쉬이익.
냉기 구체는 계속해서 날아들었고, 점차 달려드는 속도가 느려지던 독 가시 시궁쥐는 어느 순간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한유찬은 그런 시궁쥐를 향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길이 1.5미터 가량, 손목만 한 두께의 쇠파이프를 손에 든 채였다,
툭툭.
한유찬은 먼저 쇠파이프 끝으로 얼어붙은 시궁쥐의 몸을 몇 번 두드려보았다.
그야말로 꽝꽝 얼어붙은 상태였다.
‘D등급하고는 다르네. E등급이라 그런가?’
D등급 괴수는 시궁쥐보다 더 많은 숫자의 냉기 구체를 맞았지만, 고작 관절이 굳어 움직임을 멈춘 정도였다.
‘저항력 같은 게 있는 건가? 등급이 높을수록 강해지고?’
아직 사례가 부족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차근차근 알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
한유찬은 양손으로 쇠파이프를 잡고 힘껏 휘둘렀다.
콰창!
시궁쥐의 머리 부분이 산산이 부서졌다.
다소 끔찍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건만, 이런 장면을 꺼렸다면 애초에 에어리어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터였다.
[30DP를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D등급 괴수와 비교하면 절반 정도에 불과했으나, 한유찬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몰아 잡으면 되니까.’
에어리어 128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이었고, 사방에 널린 것은 오로지 괴수뿐이었다.
한유찬은 하얀 빛무리에 휩싸인 시궁쥐의 사체에 시선을 집중했다. DP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있었다.
줄곧 여유로웠던 한유찬의 얼굴에 슬며시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번 계획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하얀빛으로 휘감긴 시궁쥐의 사체를 노려보던 한유찬의 눈동자가 한순간 반짝였다.
‘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푸른 빛깔의 보석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D등급 괴수가 남긴 것보다 약간 흐릿해 보이기는 했지만, 결정체임이 분명했다.
D등급 괴수에게서 나온 결정체가 C등급이라는 점에서 한유찬은 ‘에너지 총량’의 법칙을 떠올렸고, 이를 토대로 계획한 것이 바로 웨이스트 에어리어, 즉 E등급 에어리어에서의 사냥이었다.
비록 평범한 능력자는 E등급 괴수에게서 결정체를 얻을 수 없었지만, 자신은 얻을 수 있다는 가정이었다.
물론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유찬은 E등급 괴수가 가진 방어막에 주목했다. 괴수가 방어막을 생성할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유찬은 결정체를 형성하는 데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할 것으로 추측했다.
다른 능력자들이 E등급 괴수에게서 결정체를 얻지 못하는 것은, 방어막이 사라진 다음 괴수의 체내에 남은 에너지가 결정체를 형성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는 의미.
하지만 방어막을 소모하지 않고 잡으면, 충분히 결정체를 생성할 수 있다는 가정이었다.
모든 것이 가정과 추측에 불과했으나, 한유찬은 어느 정도 자신의 계획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추측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됐어! 좋았어!’
한유찬은 불끈 쥔 주먹으로 하늘을 찔렀다.
# Chapter 9
1
띠릭!
복잡한 기계 장치가 비프음을 울렸다. 그리고 기계의 액정 화면을 확인한 여직원이 웃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유찬 능력자님, 처음 측정한 것부터 각각의 결정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결정도 488, 502, 495, 511, 474입니다. 그리고 총합은, 마침 끝자리가 딱 맞아떨어지네요. 2470입니다. 평소대로 환전하시겠습니까?”
“네. 그래주세요.”
한유찬의 대답에 여직원은 더욱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D등급 결정체 매입 단가는 어제보다 100원 오른 20,200원입니다. 총 2470의 결정도이니 총 정산액은 49,894,000원이고, 세금 20%를 제외하면 39,915,200원입니다. 방법은 예전처럼 계좌이체로 할까요?”
“네. 그래 주세요. 제 계좌번호는…….”
“두리은행, 9982 033 405503 한유찬 님이죠?”
말을 끊으며 대답하는 여직원의 모습에 한유찬은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강지연 대리님. 이거, 저에 대해 너무 잘 아시는 것 아닙니까?”
너스레를 떠는 한유찬의 대꾸에 강지연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사실, 우리 관리소에 찾아오시는 능력자분 중에서 한유찬 능력자님이 가장 성실한 분이거든요. 지난 한 달 동안 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오시니, 잘 알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로 D등급 능력자의 사냥 횟수는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였다. 그 이상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이 들었다. 에어리어에 들어가는 것은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제대로 된 몸 상태가 아니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런 이유로 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사냥하는 능력자는 무척이나 성실한 편에 속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네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유찬의 모습에 강지연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게다가 담당직원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도 한유찬 능력자님뿐이에요. 덕분에 다른 여직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한유찬은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자신이 처음 측정소를 찾았을 때를 떠올리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에는 안하무인격으로 직원을 대했었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찾아가서 사과라도 해야 할 텐데…….’
물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결정도가 높게 나와 당황한 나머지 일반적인 능력자의 성격을 연기하느라 그랬던 것뿐이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아니지. 괜히 찾아가면 긁어 부스럼이려나?’
“저기, 그래서 말인데…….”
은근하게 들려오는 강지연의 목소리에 한유찬은 활짝 웃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하핫! 아시다시피 제가 돌아오길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동생들이 있어서 말이죠.”
“치! 맨날 그 말씀. 대신 다음에는 데이트 신청 꼭 받아 주셔야 해요? 알았죠?”
“하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유찬의 대답에 강지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입금이 완료됐음을 알려왔고, 한유찬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결정체 관리소를 빠져나왔다.
“후우……. 친해지는 것도 좋지만, 이거 너무 친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하지만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다는 게 한유찬의 생각이었다.
능력자도 사람이었고, 일반인도 사람이었다. 비록 능력자가 갑인 세상이었지만, 을이라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똑같은 사람이기에 잘 해주면 좋은 감정을 느끼고, 못되게 굴면 좋지 못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비록 자신의 행동 덕분에 처음 들렀던 결정체 관리소에는 다시 가지 못했으나, 이곳은 앞으로 꾸준히 들러야 할 곳이었기에 매너 있는 행동과 말투로 직원들을 대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담당 직원은 물론이거니와, 측정을 담당하는 다른 모든 여직원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친절함도 친절함이었지만, 능력자인데다가 성실함까지 겸비했으니 한유찬은 그야말로 일등 신랑감의 요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다.
‘그나저나 남은 것들은 어떻게 처리하지?’
한유찬이 들르는 결정체 관리소는 이곳 하나가 아니었다. 모두 세 군데의 결정체 관리소를 번갈아 방문해가며 결정체를 팔았다.
그러면서도 의심을 피하려고 다른 두 곳에서는 판매대금을 서이나와 서윤석의 계좌로 받기까지 했다.
원래대로라면 증여세를 내야 했지만, 최대한 결정체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제정한 결정체 특별법 덕분에 본인이 아닌 다른 계좌로의 이체에도 세금은 부과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같이 결정체를 팔아도 결정체는 날로 쌓여만 갔다. 사냥해서 얻는 것보다 파는 숫자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한유찬이 E등급 에어리어에 들어가는 것은 삼일에 한 번이었고, 한 번 사냥에서 얻는 D등급 결정체의 숫자는 평균 백여 개에 달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피하면서 한 번에 팔 수 있는 결정체의 숫자는 다섯 개에서 열 개 사이.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지금 한유찬이 보유한 D등급 결정체의 숫자는 팔백여 개에 달했다.
‘뭐, 언젠가는 팔 날이 오겠지. 오늘 6등급에 올랐으니까! 앞으로 두어 달 정도만 더 사냥하면 7등급에 오를 수 있을 거야.’
한유찬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SUV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중고 매장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사실 돈은 외제차를 사도 충분할 만큼 있었으나, 한유찬은 자신이 스스로 정한 등급에 오르기 전까지는 최대한 조심할 작정이었다.
‘차는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되지.’
물론, 자신이 원하는 등급에 올라도 굳이 사치를 부릴 생각이 없기도 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뭘 먹이지?’
한유찬은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할 두 남매의 모습을 떠올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2
마트에 들러 갖가지 먹을거리를 잔뜩 산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나저나 집은 좀 좋은 곳으로 구해야 할 텐데…….’
묵직한 상자를 들고 차에서 내린 한유찬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계단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까지 올라오는 찻길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차는 길 아래에 두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아파트가 좋을까? 아니면, 보안이 확실히 갖춰진 고급 빌라?’
한유찬은 나름대로 꿈꾸던 집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계단을 올랐다. 그러던 도중 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집의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그림자 때문이었다.
‘누구지?’
한유찬은 조심스럽게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근처 골목길의 외진 곳에 방벽을 소환하고 그것과 연결한 방어막을 발동했다.
‘설마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꼬리가 붙은 것은 아니겠지?’
한유찬은 긴장감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변의 담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접근했다.
그러기를 몇 걸음.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드러나며 사방이 환하게 밝아왔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린 상대방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어?”
한유찬의 얼굴에 어렸던 긴장감이 살짝 누그러졌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형철… 아저씨?”
한유찬은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과 흡사했다.
김형철은 한유찬이 어렸을 적 보았던 인물이었다. 가끔 놀러 와서는 한유찬과 잘 놀아주기도 했고, 매번 적잖은 용돈까지 흔쾌히 주었기에 그가 삼촌이라 부르며 많이 따랐던 인물이었다. 부모님과의 친분도 아주 두터웠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오던 김형철은 어느 순간 한유찬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보고 싶었던 한유찬은 그가 언제 오느냐고 부모님께 칭얼거렸던 적이 있었는데, 한유찬의 부모님은 곤란한 얼굴로, 그가 멀리 이사해서 찾아올 수 없다는 대답을 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소식이 끊긴 지 벌써 십오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비록 한유찬의 부모님이 실종되었을 때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적 기억이 워낙 좋았기에 서운했을망정 싫은 감정은 들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유찬의 얼굴을 확인한 김형철의 얼굴에도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유찬이냐?”
‘혹시 내가 능력자가 된 걸 알고 찾아온 건가?’
일말의 경계심이 들었지만, 성큼성큼 다가와 덥석 끌어안는 김형철의 모습에 슬그머니 풀어져 버렸다. 끌어안기 전 그가 보였던 눈빛과 표정에 순수한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기 때문이다.
한유찬이 그동안 그토록 조심스러워 했던 것은 세상에 의지할 곳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김형철은 어렸을 적 기억과 버무려져 무척이나 반가운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유찬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마음을 완전히 풀지는 않은 채 김형철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멀리 이사 가셨다면서요? 다시 이쪽으로 이사 오신 거예요?”
한유찬의 물음에 김형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런. 형님이랑 형수님이 말씀을 안 했나 보구나.”
“네?”
“그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다. 기밀이라 자세한 말은 못하겠지만, 아무튼 한국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 곳이었지.”
상대의 말을 통해 한유찬은 어렸을 적, 그가 군복을 입고 찾아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검은색 바탕에 태극기를 비롯한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손으로 잡아 뜯으면 찍 하고 떨어지는 그림이 신기했기에 한유찬의 손은 그 그림을 뜯고 붙이느라 바빴었다.
“아! 그럼 임무가 끝나서 돌아오신 건가요?”
한유찬의 물음에 김형철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스쳤다.
“때려치웠다. 그보다, 형님이랑 형수님은 어디 가셨나? 집에 불은 꺼져 있고, 웬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던데. 혹시나 싶어 기다리다가 이제 막 돌아갈 참이었다.”
“아…….”
한유찬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두워진 그의 얼굴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김형철의 얼굴 역시 어두워졌다.
“혹, 좋지 않은 일이더냐?”
“실종… 되셨습니다. 몬스터 웨이브로…….”
“이런, 이런……. 고생 많았겠구나.”
눈가에 물기까지 맺힌 김형철의 모습에 한유찬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애써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게다가 꼭 다시 찾아서 모셔올 생각이거든요.”
싱긋 웃는 한유찬의 어깨를 김형철은 말없이 두드릴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들어가시죠. 마침 먹을거리도 잔뜩 사왔으니, 오래간만에 과자파티 한 번 해야죠?”
과자파티.
김형철이 찾아올 때 한유찬이 좋아하는 과자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외쳤던 말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는 김형철을 그대로 둔 채, 한유찬은 계단을 내려가 박스를 집어 들고 다시 올라왔다. 외진 골목길에 소환해 두었던 방벽도 슬그머니 거두었다.
“이리 줘라. 무거울 것 같은데…….”
“끄떡없습니다! 이래봬도 저 능력자거든요?”
“능력자?”
김형철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갔다. 그리고 한유찬은 그런 그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러시지? 혹시, 군을 나온 이유가 능력자와 관련된 일이라서 그런가?’
한유찬은 슬며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표정을 바로 하며 대문을 열었다.
그르르륵.
특유의 소리가 일어나자, 반지하 방 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유찬 오빠!”
오늘도 한결같이 서이나는 문을 박차고 달려나와 소리쳤고, 그 모습에 한유찬이 빙긋 웃는 찰나 서이나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누구… 세요?”
서이나는 김형철을 바라보며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온 것은 한유찬에게서였다.
“어렸을 적 아주 좋아했던 아저씨야. 우리 부모님하고도 친하게 지내셨어.”
서이나에게 설명을 끝낸 한유찬은 이번에는 김형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이쪽은 서이나. 그리고 지금은 저 아랫방에 있지만, 서윤석이라고 남자아이도 있어요. 두 사람 모두 제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수줍게 인사하는 서이나의 모습에 김형철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반갑구나. 보아하니, 몇 년만 지나면 유찬이 녀석이 데려갈 것 같으니,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거라.”
“어머!”
서이나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고, 한유찬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3
“푸하하하! 그래서 한번은 말이다. 유찬이 이 녀석이…….”
“아저씨! 그만!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아저씨, 뭔데요? 궁금해요. 말씀해 주세요!”
평소대로의 인원에 단 한 명, 김형철이 추가되었을 뿐임에도 식사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김형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주도했고, 한유찬을 비롯한 두 남매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주된 내용은 한유찬의 어렸을 적 실수담. 이 때문에 한유찬은 부정하기 바빴고, 반대로 두 남매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이야기를 재촉했다.
특히 한유찬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서이나의 눈은 더욱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가 이사 왔을 때의 한유찬은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중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한유찬의 부모님이 담가 두었던 술까지 꺼내, 한 잔씩 기울이자 김형철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그의 강권에 몇 잔 얻어 마신 한유찬의 얼굴 역시 열기가 올랐다.
어느새 밤이 깊었고, 두 남매는 그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바람을 쐰다고 김형철이 마당으로 나가자, 한유찬은 따뜻한 생강차 두 잔을 타서 밖으로 나왔다.
“남 잘 챙기는 성격은 형님이나 매한가지구나.”
“그런가요? 전 가족 외에는 나 몰라라 하는 성격이라.”
“쯧! 그게 잘 챙긴다는 거다. 자기 한 몸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놈들이 천지인 세상에서, 가족이나마 챙긴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 줄 몰라서 그러냐?”
김형철의 물음에 한유찬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알싸하면서 달콤한 생강차가 입안에 들어가자 한겨울 추위가 한 걸음 물러서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조카 손주는 언제 보여줄 거냐?”
“쿨럭!”
갑작스러운 말에 한유찬은 머금었던 생강차를 밖으로 뿜어냈다.
“아저씨! 그냥 동생 같은 아이라니까요. 어렸을 적 등에 업혀서 어찌나 콧물을 흘려대는지…….”
“그래서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전혀?”
“그게…….”
한유찬이 말을 머뭇거리자 김형철이 그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에끼! 이 녀석아.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도, 네 녀석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훤히 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이거다 싶으면 그냥 확 잡아채! 그게 후회 없이 사는 방법이다.”
‘후회 없이…….’
한 단어가 유난히 깊숙이 한유찬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마치 자신은 후회하는 삶을 살았으니, 너는 그러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유찬아.”
그토록 밝았던 김형철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게 깔렸다.
“예, 아저씨.”
“등급은 어떻게 되냐?”
“D등급 탱커입니다.”
“돈은 많이 벌었고?”
“조금 벌기는 했습니다.”
한유찬의 대답에 김형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강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유찬아.”
“예, 아저씨.”
“딱 한마디만 하마. 웬만하면 에어리어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 혹시 에어리어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건가요?”
한유찬의 물음에 김형철은 묵묵히 생강차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좀 이해해주렴. 나 역시 마음 같아서는 모두 털어놓고 싶으니…….”
말을 하던 김형철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더니, 마당 한쪽 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이! 아무 소리 안 했으니까, 관심 끄라고! 니들도 이미 다 듣고 있었잖아?”
‘어?’
한유찬은 김형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 담장 쪽에서 살짝 들려온 미세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쯧쯧! 미안하구나. 되도록 폐는 끼치지 않으려고 했건만, 벌써 폐를 끼친 것 같으니. 아마, 한 며칠 집에서 쉬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려무나.”
‘대체 무슨 일이…….’
“오늘은 이만 돌아가마.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한유찬이 무어라 물어보려는 찰나, 김형철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휘적휘적 걸어 마당을 벗어났다.
“아저씨…….”
한유찬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오늘의 만남이 김형철을 보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조심하세요!”
한유찬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핫! 네가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 김형철이다, 이거야! 맨손으로 괴수를 때려잡고,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한 강철 몸이라고!”
김형철은 유쾌한 듯 소리치며 등진 자세로 한 손을 들어 휘휘 흔들었다. 어렸을 적, 그가 떠나는 게 아쉬워 마당까지 쫓아 나온 한유찬에게 보이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어렸을 적 보았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한유찬은 어쩐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르르륵.
김형철은 철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남긴 채,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유찬 씨 되십니까?”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야밤에 선글라스까지 눌러쓴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비밀 요원 티가 나는 모습에 한유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저씨는 대체 무슨 일을 하셨던 거야?’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한유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검은 정장의 인물이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국가정보원에서 나왔습니다. 방금 다녀가신 김형철씨와 관련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다 들었다면서요? 뭐, 도청기? 그런 걸로 다 듣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투로 보아, 검은 정장은 그 이상을 원하는 것 같았다.
“뭐, 뒤져보고 싶으시면 그러시죠. 단, 정리는 깨끗이 해 놓아야 합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검은 정장의 인물은 품 안에서 작은 기계를 꺼냈다. 휴대폰처럼 생긴 물건이었는데, 다른 점은 길쭉한 안테나가 뻗어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쭉 뻗은 안테나로 한유찬의 몸을 한번 훑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물건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검은 정장은 손에 든 기계로 스캔하듯 집 안을 훑었다. 뒤늦게 장롱 속에 숨겨둔 결정체가 생각난 한유찬이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검은 정장은 장롱을 기계로 쓱 훑은 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후우! 그런데 저 기계는 대체 뭘 찾는 거야?’
한유찬은 검은 정장이 들고 있는 기계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왔으나, 굳이 물어봤자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검은 정장은 막 잠이 들려 하는 두 남매를 깨워 그들의 몸과 반지하 방까지 스캔한 뒤에야 물러났다.
별다른 말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계에 걸린 것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에휴……. 갑자기 나타나서 잘 지내던 사람 울컥하게 했다가, 또 그렇게 사라지면 어떡하라고요…….”
집안에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한유찬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하소연했다.
불과 몇 시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어느새 김형철의 존재는 한유찬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았다.
추억을 공유한 사이란, 특히 지금은 없는 이들에 대한 추억을 나눠 가진 사이란 그만큼 각별한 법이었다.
“에이!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해지게…….”
머리를 벅벅 긁던 한유찬은 그 사이에서 툭 떨어지는 물체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언제…….’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한유찬은 김형철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 꿀밤?’
김형철이 그의 머리와 접촉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집어 들어 살펴보니, 아주 얇은 종이가 작게 말려 있었다.
쪽지를 펼쳐보니 알 수 없는 기호가 적혀 있었다.
‘이건…….’
어쩐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흐아아암!”
한유찬은 하품소리를 크게 내며 터벅터벅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한구석에 쌓인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유찬은 박스 속에서 손때가 탄 책을 한 권 찾아냈다.
아동용 추리소설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곳에 간단한 암호와 풀이 표가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한유찬은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쪽지와 암호를 비교했다.
- 등장. 루비. 피신. 지방. 조용한.
‘루비가 등장하면, 조용한 지방으로 피신할 것? 대체 무슨 말씀이지?’
한유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뜻풀이는 할망정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까 하신 말씀을 되짚어보면,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 테니 지방으로 피신하라는 말씀 같기는 한데…….’
한유찬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에 그가 느낀 감정은 원망이었다.
괜스레 그런 것을 남겨 불안감을 심어주고, 그가 다녀간 덕분에 국정원 요원의 시선이 그에게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마움으로 변화했다. 김형철이 남긴 경고가 생각할수록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위협을 맞이하는 것과 미리 대비한 뒤에 위협을 맞이하는 것은 명백히 달랐다. 최악의 경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피할 수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부모님께 경고를 해드리려고 오신 거겠지?’
김형철의 태도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한유찬의 부모님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더불어 한유찬은 김형철의 진심 어린 걱정 또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무려 십오 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하는 곳에 있다가 기껏 한국에 돌아와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 그것도 요원의 감시가 따라붙을 것을 알면서도 찾아왔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한유찬은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는 김형철의 모습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뒤, 번쩍 눈을 떴다.
그가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강해지는 것. 지금보다 훨씬 더!’
국정원 요원이 시선이 머무는 동안은 조용히 지내야 하겠지만, 이후의 행보는 한층 바빠질 것 같았다.
4
두두두두두두.
땅 울림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무리가 있었다. 크고 작은 괴수 백여 마리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무리의 선두에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가는 청년이 있었는데, 백여 마리에 달하는 괴수에게 쫓기면서도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이것만 정리하면 이곳도 얼추 정리되겠지?’
한유찬은 슬쩍 뒤를 돌아본 후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방벽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보였다.
“도발.”
한유찬은 방벽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며 짧게 소리쳤다.
그러자 중앙에 있던 검붉은 타워가 불길한 빛과 함께 낮은 울림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우우웅.
- 크륵?
- 키이익?
괴수들의 얼굴에 의문스러움이 떠올랐다. 멀찌감치 떨어진 방벽에 기대어 있는 한유찬과 중앙의 검붉은 타워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결국 타워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 쿠워어!
- 키이이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괴수들이 다시금 진격을 시작했다. 중앙의 타워를 향해서였다.
‘효과만큼은 확실해. 범위가 조금 좁아서 그렇지.’
한유찬은 그동안 E등급 에어리어에서 사냥하며 미뤄두었던 신규 타워의 개방을 모두 시행했다.
스나이핑, 포이즌, 연사석궁, 도발.
스나이핑 타워는 사정거리가 2킬로미터에 달했고, 무려 400에 달하는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화살을 발사했다. 다만, 연사 속도가 5초가량이라 저 등급의 괴수 여럿을 잡는 것보다는, 소수의 강력한 괴수를 사냥하는 것에 특화된 타워라고 볼 수 있었다.
포이즌 타워는 진한 녹색의 기류를 내뿜어 주변의 괴수들까지 한꺼번에 중독시키는 공격을 했다. 다만, 중독된 괴수가 죽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유찬은 한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면 포이즌 타워 역시 가면 갈수록 강력한 타워가 될 것을 예상했다.
독으로 가해지는 데미지가 정해진 양이 아닌, 정해진 퍼센트로 들어간다는 조건이었다. 물론 아직 시험해 보지는 못했기에 하나의 가정에 불과했으나, 그의 추측대로만 된다면 포이즌 타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강력한 전력이 될 터였다.
연사석궁 타워는 공격력 100짜리 거대 화살을 1초에 두 발씩 발사했다. 사정거리는 200미터 정도. 성능을 확인한 한유찬은 앞으로 이것을 주 화력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마지막 도발 타워.
검붉은 색으로 빛나는 이것은 묘한 울림을 토하며 괴수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사정거리가 고작 200미터 남짓이라는 것이 살짝 아쉬웠으나, 이 도발 타워에 한 번 끌린 괴수는 다른 타워가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하더라도 오로지 도발 타워를 향해서만 달려들었다.
한유찬의 마음에 가장 든 것 역시 도발 타워였다.
또한, 도발 타워로 향하는 길이 막혀 있을 때는 괴수들이 광분하여 무차별적으로 사방을 공격하는데, 이것 역시 지금처럼 괴수가 뭉쳐 있을 때에는 도움이 되었다. 괴수가 같은 괴수를 공격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을 개방했음에도 아직, 남은 DP는 일만 이상이었다. 이는 한유찬이 E등급 에어리어에서 무수히 많은 괴수를 잡았다는 의미였다.
‘다만, 얻은 DP에 비해 경험치가 너무 적다는 게 흠인데 말이야.’
한유찬이 6등급에 오른 후, 벌써 두 달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수백 마리 이상의 E등급 괴수를 잡았음에도 아직 7등급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만큼 E등급 괴수를 처치했을 때의 경험치가 적다는 의미였다.
‘아니면, 내 등급과 비교해 괴수들이 너무 약하던가.’
콰쾅! 콰콰쾅!
도발 타워 주변을 삼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던 화염폭발 타워가 일제히 폭발을 일으켰다.
- 쿠워어어!
- 키에에엑!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날아가는 괴수들을 향해 연사석궁 타워가 거대 석궁의 끄트머리를 돌렸다.
투퉁. 투퉁. 투퉁.
한 발에 한 마리.
공격력 100에 달하는 화살이 급소에 틀어박히자, 이미 화염폭발 타워의 폭발로 상처 입은 괴수들의 생명은 여지없이 끊겼다.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 괴수들.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괴수가 불쌍해 살짝 망설일 법도 하건만, 안타깝게도 타워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렇게 모든 괴수가 처리되었을 때. 마침내 한유찬이 기다리던 알림음이 그의 귓가를 울렸다.
- 띠링!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SP 2와 CP 2를 부여합니다.]
‘좋았어!’
한유찬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7등급.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본다면, 새로운 스킬이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6등급 때부터 2포인트씩 들어오기 시작한 SP와 CP도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꼭 필요한 스킬도 하나밖에 올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획득하는 SP와 CP의 양이 많아지면, 스킬 중에서 효율이 높은 것은 2레벨 이상으로 올릴 수도 있을 터였다.
“인터페이스.”
한유찬은 곧바로 인터페이스 창을 열어 새로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 감지 타워 개방 6000DP
‘감지 타워?’
한유찬은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감지 타워 개방 항목을 주시했다.
- 반경 5킬로미터 내부의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감지한 생명체는 시야에 표시됩니다. 은신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건…….’
한유찬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니맵? 거기다 은신 감지까지?’
일부 디펜스 게임의 경우,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적을 보낼 때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을 감지할 타워가 없는 경우, 앗 하는 사이에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 투명화 능력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못 들었지만…….’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니맵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유용한 기술이었다. 괴수를 정찰하기도 쉽고, 상황에 따라 전략을 짜기도 수월했다. 또한, 갑자기 접근하는 괴수의 움직임도 미리 알아볼 수 있으니 한유찬에게는 꿀과 같은 기술이었다.
비록 지금까지와는 달리 달랑 하나만 개방되었을 뿐이었지만, 기능이 좋았기에 한유찬의 얼굴에는 웃음이 감돌았다.
- 타워 업그레이드 1SP
DP를 소모하며 타워의 성능을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단, 각 타워의 업그레이드에는 경험치가 필요합니다.
‘경험치?’
타워의 성능 향상은 무엇보다 한유찬이 바라는 바였다. 가만, 경험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살짝 마음에 걸렸다.
‘공격용 타워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도발이나 감지 타워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지? 설명, 경험치. 설명, 경험치를 얻는 방법. 경험치 정보!’
한유찬이 머릿속으로 외친 말 중에 명령어가 있었는지,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험치.
-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를 처치했을 때, 캐릭터가 습득할 수 있는 에너지를 뜻합니다. 타워의 경우 타워의 사정거리 안에서 처치한 생명체의 에너지를 나누어 받습니다.
“아하!”
설명을 읽은 한유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타워의 범위 안에서만 사냥하면 비전투형 타워도 경험치를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시작이 좋았고, 두 번째도 좋았다.
‘마지막 캐릭터 스킬은 어떨까?’
한유찬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마지막 캐릭터 항목을 살펴보았다.
- 마법 / 체인 라이트닝 1CP
항목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한유찬의 눈동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체인 라이트닝! 마법이라니!”
한유찬의 시선이 꽂힌 것은 마법이라는 단어였다.
- 체인 라이트닝 100DP (재사용 대기시간 1분)
디펜스 포인트를 전격 속성으로 가공해 적을 타격합니다. 최초 표적이 된 적을 타격한 후, 거리가 가장 가까운 적에게로 전도됩니다. 전도되는 횟수에 따라 데미지는 20% 경감되며 5회 이후, 전격은 소멸합니다.
“정말이었어! 게다가 전도라니! 한꺼번에 다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비록 DP가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한유찬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능력이었다.
타워와의 연결을 통해 안전은 확보되었으나, 타워를 제외하면 별다른 공격 기술이 없어 아쉬웠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탱커에 이어 딜러인가? 이러다가 힐러 능력도 얻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한유찬은 얼굴 가득 밝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타워를 감춰도 제대로 행세할 수 있겠어.’
다른 것은 몰라도, 타워만큼은 감춰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소환된 타워는 지금까지 알려진 상식을 벗어나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다름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였다.
특히 자신이 가진 기득권이나 이득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게다가 타워 소환으로 사냥한 결정체의 등급이 상승한다는 점도 커다란 이유였다. 이득에 눈이 먼 거대 클랜이나 대기업, 국가 권력 등이 한유찬을 향해 탐욕의 손길을 들이댈 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유찬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힘을 남에게 보일 수 없었다. 물론, 신상에 커다란 일이 벌어진다면 어쩔 수 없었겠으나, 감출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 감추는 것이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 기술을, 그것도 마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한유찬에게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었다.
‘위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DP100을 소모하는 기술이야. 적어도 한 방에 D등급 괴수 정도는 처치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중요한 것은 다른 대상으로 전도된다는 점이었다. 즉, 한꺼번에 다수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전도가 단일 개체로 되는지, 여러 개체로 되는지 알아봐야겠군. 후자라면 대박이겠지만 뭐, 아니어도 최소한 다섯은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만약 후자라면, 체인 라이트닝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괴수를 모아놓고, 그것들의 중앙에 사용하면 한꺼번에 수십 마리를 동시에 타격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디펜스 게임에도 이런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했지. 대부분 미티어 스트라이크나 어쩌고 필드 같은 범위 공격이었고.’
한유찬의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
앞으로 등급이 더 오르면 더욱 강력하고 범위도 넓은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 Chapter 10
1
삐빅.
- 귀하의 측정 결과는 D등급입니다.
스피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한유찬의 입꼬리가 위로 솟구쳤다.
‘드디어 D등급! 이젠 C등급을 받을 수 있어!’
한유찬은 기쁜 표정을 애써 내리누르며 유리벽 너머의 연구원에게 말했다.
“특기별 측정을 받고 싶습니다.”
“무슨 특기를 측정하시겠습니까?”
“탱커입니다.”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측정을 맡은 인물은 예전의 연구원과는 다른 인물이었기에, 한유찬은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하며 탱커 능력 측정실에 들어간 한유찬은 무난하게 C등급 측정에 성공했다.
측정실에 들어서기 전 미리 외진 곳에 소환해둔 방벽을 이용한 것이었다.
“축하합니다! C등급 탱커 능력 측정에 통과하셨습니다!”
로또라도 살 듯한 연구원의 표정에 한유찬은 주먹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예스!”
실제 마음도 그러했지만,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을 연구원에게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기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한참을 좋아하던 한유찬이 환호를 멈추며 물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두 가지 능력을 가진 능력자도 있습니까? 탱커나 딜러, 딜러나 힐러, 뭐 이런 것 말입니다.”
“아! 복합 능력자 말씀이십니까?”
연구원의 대답에 한유찬은 희색을 띠며 되물었다. 연구원이 복합 능력자라는 말을 꺼냈다는 것은 곧, 그런 능력자가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어? 정말 있나요?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인터넷에는 그런 사람이 없던데요.”
“있기는 했습니다. 다만…….”
슬쩍 말끝을 흐리는 연구원의 모습에 한유찬은 더욱 궁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각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사망했습니다.”
“죽었다고요?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요?”
한유찬의 물음에 연구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세계의 유수한 석학들이 모두 달려들어 이유를 파악하려 힘썼습니다. 복합 능력자의 존재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런…….”
한유찬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그의 속마음은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조마조마했다.
‘설마, 나도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이런 두려움이 자라나는 한편, 한유찬은 감춰야 할 것이 또 하나 늘어났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쩝! 괜한 걸 물어봐서 걱정만 늘었네.’
타워도 그러했지만, 이번에 익힌 체인 라이트닝 역시 누군가의 눈에 띄면 커다란 이슈가 될 것이 자명했다.
‘후! 잘못되는 것이라면 체인 라이트닝을 익혔을 때 이미 문제가 생겼겠지. 그것보다는 앞으로 일에 주목하자.’
머리를 털어낸 한유찬은 연구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후, 측정실을 벗어났다.
2
“하웅…….”
커다란 눈동자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미소녀가 묘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응? 이나야. 왜 그래?”
서이나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또 다른 미소녀가 생글거리며 서이나의 볼을 쿡쿡 찔렀다.
“왜? 서방님이 바람이라도 폈어?”
“아니야!”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뾰족한 소리에 수다를 떨던 여학생들의 이목이 서이나에게 집중되었다.
“뭐야뭐야! 바람?”
“우리 이나, 차인 거?”
“흐규흐규! 불쌍한 것.”
“이리와. 언니가 네 서방 생각은 싹 잊을 정도로 사랑해 줄게!”
반 여학생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서이나는 붉어진 볼을 부풀리며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 왜 비 맞은 강아지 표정이야?”
옆자리에서 다시 들려온 물음에 서이나는 다시금 양팔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히잉……. 아랑이 넌 몰라도 돼!”
“흠흠! 이보게. 아무래도 우리 이나의 입을 열기 위해선 자네들 도움이 필요할 듯싶네만.”
신아랑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다듬으며 도움을 청하니 사방에서 화답이 들려왔다.
“네이~!”
대답과 함께 우르르 달려든 여학생들이 서이나의 사지를 붙들었다. 억지로 들린 서이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아랑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하문했다.
“당장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히잉……. 이거 놓아줘. 놓아줘어~!”
애교 섞인 서이나의 목소리에 그녀의 사지를 붙든 여학생들의 표정이 무너지려 했다.
“사또. 죄인의 애교가 너무 강해 힘을 쓸 수가 없나이다.”
“이런 고얀……. 여봐라! 이 년이 바른말을 할 때까지, 매우 쳐라!”
신아랑의 호통에 서이나의 사지를 붙든 여학생들이 남은 손을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꺄하하! 그, 그만! 꺄하하하하하!”
허리와 옆구리, 목덜미를 사정없이 간질이는 손길에 서이나는 굴복했고, 결국 항복을 표했다.
“그, 그만 좀 하라니까! 그러니까 오빠가…….”
“오오! 오빠가!”
사정없이 간지럼을 태우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며 서이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 집에 잘 안 들어온단 말이야. 히잉…….”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여학생들의 표정이 일순 싸늘하게 변했다.
“바람이네.”
“바람맞네.”
“차였네. 쯧!”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발언에 서이나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잡혔다.
“이것들이! 바람 아니라니까!”
“크흠! 큼! 우리 이나.”
신아랑이 서이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언니랑 속옷 사러 갈까? 아주 섹시한 망사로다가.”
신아랑의 제안은 주변 여학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오오! 망사!”
“망사 어쩔!”
“들이대! 들이대는 거야!”
“안 돼! 우리 이나의 속옷은 나만 볼 수 있거늘!”
떠들썩한 주변 반응에 서이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해봤단 말이야!”
“지, 진짜로?”
예상을 깨는 대답에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 그러니까 시, 실수로…….”
서이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대박!”
“그런데도 안 넘어와?”
“이나야. 이건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 볼 문제인데 말이야. 그 오빠라는 사람, 혹시 고자인 건…….”
마지막 말은 숙였던 서이나의 고개를 다시 번쩍 들어 올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니야! 우리 오빠, 아침에 텐트 확실히 치거든?”
서이나의 반박은 다시금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오오! 봤어? 텐트 안도 봤어?”
“커? 색깔은? 만져는 봤어?”
“맛은 어떤데?”
“이것들이 정말!”
갈수록 대담해지는 발언에 서이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사방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한순간 조용해진 가운데 한발 늦게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흑! 얌전한 이나 침대 위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이 언니도 아직 못 해본 것을…….”
여학생들 사이에 섞인 가냘픈 인상의 소녀였다.
“우씨! 윤민아! 넌 왜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는 건데? 고자도 네 입에서 나온 거, 내가 딱 봤거든?”
서이나가 쌍심지를 켠 채 윤민아를 노려보자 윤민아는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꼬았다.
“이나 넌, 내 거니까.”
“유후! 받아줘! 받아줘!”
“키스해! 키스해!”
“하아…….”
사방에서 들려오는 합창에 서이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조각배를 몰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풍랑 속에 뛰어든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이것들이! 뭐 이리 시끄러워? 당장 자리로 안 가?”
교실 안의 풍랑은 뿔테 안경을 쓴, 날카로운 눈매의 여교사가 들어섬으로써 잦아들었다.
“히잉……. 오빠……. 오늘은 집에 들어오는 거지?”
서이나의 힘없는 중얼거림만 창밖을 향해 조용히 흘러갔다.
3
“이젠 C등급이니 슬슬 움직일 때도 됐는데 말이야.”
C등급 능력자 등록증을 받은 뒤, 차로 돌아온 한유찬은 운전석 시트에 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툭. 툭. 툭. 툭.
적막한 차 안에 한유찬이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한유찬은 서포터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능력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제 그들보다 높은 등급에 올랐으니, 증거 자료를 가지고 능력자 협회로 찾아가 정식으로 그들을 고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막 행동으로 옮기기 전, 한유찬의 머릿속에 한 가지 걸리는 생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놈들, 한두 번 그런 짓을 한 게 아닌 것 같아. 싸우다가 도망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단 말이지.”
툭. 툭. 툭. 툭.
한유찬은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리며 괴수와 그들이 싸울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 전투가 진행되다가 탱커가 방패에 바짝 달라붙더니, 뒤를 돌아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능력자 파티 전원이 일거에 전장을 이탈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한유찬은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능력자들이 도망치는 훈련을 따로 받은 것이었고, 둘째는 그들이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은 것이었다.
그리고 한유찬의 판단은 후자 쪽에 기울었다.
‘뭔가, 뒷배가 있을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징계가 따르는 임무 실패를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는 없어.’
헌팅을 실패한 능력자에게는 일정 수준의 징계가 가해졌다. 실패는 곧 인명 손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징계는 당분간 헌팅을 금지한다거나,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그런 행위가 일정 수준 이상 반복되면, 헌팅을 위한 각종 장비의 대여나 서포터를 지원받는 일에 필요한 헌팅 면허가 취소된다.
“쯧! 등급만 오르면 알아서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막힐 줄이야…….”
만약 그의 추측대로 능력자들에게 뒷배가 있다면,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오게 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실질적인 위협을 일으키는 셈이었다.
“하아! 그마저도 확실치 않으니……. 대체 뭘 알아야 움직일 것 아니야?”
한유찬은 정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 번 사람을 시켜서 알아봐? 그런데 뭘 믿고? 그들이 역으로 놈들에게 내 정보를 흘리면?’
아무런 인맥이 없는 한유찬이 정보를 얻을 방법은 흥신소나 심부름센터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유찬의 머릿속 흥신소나 심부름센터의 이미지는 아슬아슬하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걸쳐 있는 곳이었다.
‘잠깐……. 정보?’
정보에 대해 생각하는 도중, 문득 한유찬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다.
‘아! 정보! 컴퓨터!’
한유찬은 운전대를 힘껏 움켜쥐었다.
꾸드드득!
기묘한 소리와 함께 휠의 가장자리가 살짝 으스러졌으나, 한유찬에게 중요한 것은 운전대가 아니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신의 디펜스로 능력을 얻었으니 그곳에 다시 접속해 보면!’
어쩌면 능력을 더 키울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얻은 능력에 대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 듯싶었다.
부르릉!
한유찬은 다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그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능력자들에 대한 생각도 이미 저 멀리 집어 던진 후였다.
‘만약 다음 단계로의 진행만 가능하다면!’
어쩌면 그들의 뒷배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무시할 힘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4
‘어, 없어! 사라졌어!’
한유찬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모니터를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몇 번을 뚫어지게 살폈음에도 그가 원하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쪽지가 사라지다니!’
신의 디펜스.
초대 쪽지로 게임으로 끌어들인 후, 엄청난 난이도와 경악할 정도로 긴 플레이 타임으로 밤을 지새우게 한 게임이었다. 그리고 한유찬에게 신의 디펜더라는 인터페이스와 타워를 소환할 능력을 준 게임이기도 했다.
한유찬은 그가 클리어한 것이 ‘프리 스테이지’라는 점에 주목했다. 한마디로 말해 본 게임에 들어가기 전, 몸풀기 게임이라는 의미였다.
한유찬은 프리 스테이지에서 타워를 소환할 능력을 얻었으니, 본 게임으로 넘어가 그것을 클리어하면 더욱 강력한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웨폰 게임즈 사이트에 접속해보니 그를 신의 디펜스로 초대했던 쪽지가 온데간데없었다. 다음 단계로 진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페이지 주소라도 복사해 놓을 것을…….”
한유찬은 안타까운 마음에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봤자, 사라진 쪽지가 다시 나타날 리 없었다.
‘설마 시간제한이 있었던 건가? 에어리어에서 돌아왔을 때, 바로 접속했다면 남아 있었을까? 바보같이 이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을 탓하던 한유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우!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야. 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해.’
한유찬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탁 치며 일어섰다.
바로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똑똑똑똑.
“응?”
고개를 돌려보니 반투명한 창문 너머로 선이 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오빠! 유찬 오빠!”
다급한 듯 보이는 서이나의 목소리에 한유찬은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울상을 짓는 서이나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다쳤어요……. 히잉…….”
서이나가 한 손으로 감싼 손가락을 내밀었다. 제법 깊숙이 베인 검지에 진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런, 어쩌다가.”
“오빠 드리려고 과일 깎다가……. 히잉…….”
목소리는 우는 소리건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의도가 있어 보였다.
서이나의 의도를 읽은 한유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매일 같이 얼굴 보며 산 지가 십 년도 넘었으니, 이 정도는 척 보면 알 정도였다.
특히 한유찬도 어렸을 적 이와 비슷한 기억이 있었기에, 관심을 끌어 보려는 서이나의 의도를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어이구. 우리 이나, 그렇게 아파?”
“훌쩍! 으응!”
콧물까지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꼭 초등학교 저학년을 보는 듯했다.
‘하긴, 7등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요즘 좀 정신없이 돌아다니긴 했지. 에어리어에서 밤을 새우는 바람에 집에도 거의 못 들어오고.’
한유찬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스쳐 갔다.
사람의 정에, 따스한 손길과 사랑에 굶주린 것이다.
한유찬은 서이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후,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해주셨었던가?’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한유찬은 핏방울이 몽글몽글 솟아난 서이나의 손가락을 그대로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를 부드럽게 혀로 어루만졌다.
“오, 오, 오빠!”
서이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한유찬에게 붙잡힌 손을 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 띠링!
경쾌한 알림음이 한유찬의 귓가를 울렸다.
[숨겨진 목표를 달성하였습니다. 신뢰 100%, 호감 100%, 흡혈.]
‘뭐지? 숨겨진 목표… 달성? 아! Achievement!’
성취 또는 달성이란 의미의 이것은 많은 게임에서 사용하는 요소였다. 게임의 제작자가 정해둔 목표를 달성하면 게임머니나 능력 혹은 스킬 등이 보상으로 지급되는 방식이었다.
‘인터페이스!’
인터페이스 창을 열자, [목표 달성]이라는 버튼이 하나 생겨나 있었다. 그것을 열어보니 아직 열리지 않은 많은 칸이 눈에 들어왔고, 그중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달성 : 유혹의 흡혈]
[보상 : 타워 가디언(타워 스킬)]
‘타워 가디언?’
생소한 단어에 의아해하면서도 한유찬은 재빨리 목표 달성 항목을 닫고 업그레이드 항목을 열었다.
‘가디언이라면 일단 무언가를 지키는 사람이야. 얘들 보호할 수 있는 스킬이면 좋겠는데…….’
한유찬은 자신의 입에 서이나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입을 우물거리며 인터페이스를 살폈다.
타워 스킬 탭에 타워 가디언이라는 항목이 생겨나 있었다.
“아앗, 오빠. 가, 간지러워요…….”
서이나가 몸을 배배꼬며 말했으나, 긴장한 얼굴로 타워 가디언 항목을 바라보는 한유찬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 타워 가디언
지정한 대상을 타워의 가디언으로 지정합니다. 가디언과 연결한 타워는 성능이 상승합니다. 가디언에게는 타워의 절반에 달하는 공격력이 주어지며, 능력의 사용은 타워의 소환시간 감소를 가져옵니다. 또한, 연결된 타워가 가진 방어력의 절반에 달하는 보호막이 생성되지만, 공격받았을 때 소환 시간은 두 배 차감됩니다.
설명을 읽어갈수록 한유찬의 눈동자는 더욱 커졌고, 그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건 대박이야!”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한유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보호막이라는 한 단어뿐이었다.
그동안 그가 그토록 조심하고 몸을 사렸던 이유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서이나와 서윤석의 안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한유찬 자신의 안전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본인이 이미 방어력의 상징인 탱커였으며, 언제든 방벽만 소환하면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그와는 달리, 두 남매에게는 몸을 지킬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그런데 타워 가디언을 사용한다면, 두 남매에게도 몸을 보호할 수단이 생긴다. 그것도 보호막이라는 강력한 기술이었다.
물론 타워 방어력의 절반이라는 말과 소환시간의 차감이 두 배가 된다는 사실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일단 두 남매가 안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한유찬은 만족했다.
한유찬은 망설임 없이 타워 가디언 소환에 SP를 투자했다.
하지만 너무 다급한 탓에 그가 한 가지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꺄악!”
뾰족한 비명에 한유찬은 그제야 입안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대박이야!’라고 소리칠 때 조금 깨문 것 같기도 했다.
“응? 아! 미안.”
입을 벌리자 그의 입안에서 퉁퉁 불은 서이나의 손가락이 쏙 빠져나왔다.
“하하! 피는 멈췄네.”
멋쩍은 한유찬의 웃음에 서이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힝……. 물리고 빨렸어……. 이제 난 어쩌지?”
“응? 뭐가?”
“그런 일을 당했으니…….”
“뭐? 당해?”
한유찬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젠 다른 데 시집도 못 갈 거야. 히잉…….”
논리적 모순과 비약이 심각하게 느껴지는 발언.
“허어…….”
한유찬은 그저 허탈한 소리를 흘릴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책임져요.”
꿍!
가차 없는 응징이 서이나의 정수리에 작렬했다.
“아주 재밌지? 오빠 놀리는 게?”
“히잉! 아닌데…….”
“우는 소리 뚝!”
한유찬의 엄한 표정에 서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그녀의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쯧쯧! 열일곱, 아니 이제 열여덟이나 먹은 녀석이, 하는 행동은 왜 일곱 살 때와 같은지 원.”
혀를 차던 한유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너 잠깐, 이쪽으로 와봐. 아니다. 내가 밖으로 나갈게.”
한유찬은 창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집을 빙 돌아 자신의 방 앞으로 향했다.
“오, 오빠. 왜 그러세요?”
약간은 당황한 얼굴로 묻는 서이나를 한유찬은 대뜸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어머! 오빠. 가, 갑자기 이러시면…….”
말과는 달리 홍조를 띠기 시작하는 서이나의 볼.
“같이 뒷산에 좀 다녀와야겠다.”
“네? 산에요?”
서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들의 집은 산자락을 타고 자리 잡은 달동네였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이 자리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되묻는 서이나의 얼굴에는 약간의 걱정과 함께 기대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냥 방에서도 좋은데. 아! 그럼 윤석이한테 들리려나? 내가 부끄러울까봐 산으로…….’
서이나의 얼굴은 보기 좋은 사과 색으로 물들었고, 콩닥거리는 심장은 그토록 바라던 염원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흥분을 나타냈다.
탓!
한유찬이 가볍게 땅을 박차자 담장이 바로 그의 발아래로 다가왔다.
휘익! 착!
가볍게 담을 딛고 바닥에 내려선 한유찬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찔할 정도의 속도감과 함께 서이나의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는 점차 거세졌다.
한유찬은 산정상 부근에 자리 잡은 작은 공터에 다다라서야 안고 있던 서이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나야, 사실은.”
“네. 오빠라면… 저도 괜찮아요. 히, 힘낼게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대답하는 서이나의 모습에 한유찬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꿍!
한유찬은 서이나의 정수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 그게……. 매, 매머드?”
“어후! 윤석이 그 녀석은 왜 그런 허튼소리를 해서.”
“어? 아닌… 가요? 하긴. 역시 사람의 그, 그게 매머드라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죠. 그럼 코끼리?”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쩐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 한유찬은 차라리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스 타워 소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두 남매에게는 타워를 보여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에 대한 서이나의 신뢰가 이미 100%인 것을 확인한 다음이었으니 한유찬은 더욱 거리낌 없었다.
이윽고 공터 한가운데가 불쑥 솟아오르며 거대한 타워를 형성했다. 얼음처럼 투명한 푸른빛을 띤 아이스 타워가 달빛을 받은 모습은 순식간에 서이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뻐!”
크기는 좀 작았지만, 언젠가 보았던 애니메이션 얼음왕국에 나오는 성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타워 가디언 지정은 어떻게 하지?’
명령어를 떠올리자, 한유찬은 서이나의 몸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이렇게 하면 되나?’
서이나의 머리 위에 떠오른 빛의 점을 손가락으로 잡아끌자, 점이 늘어나 선이 되었고, 그것을 아이스 타워로 가져가자 자석처럼 척 달라붙었다.
“어……. 어! 어? 뭐, 뭐지? 내 머릿속에 뭐가…….”
서이나는 갑작스레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소한 지식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손바닥을 펴 앞으로 내밀었다.
“이, 이렇게?”
후우우웅!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푸르스름한 기류가 일어났다. 아이스 타워에서 발사하는 냉기 구체와는 달랐으나, 무척이나 차가운 기운이라는 점은 한유찬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까지 한기가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와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서이나의 모습에 한유찬 역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좋아! 이제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겠어!’
한유찬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걱정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서이나가 지금 사용하는 냉기의 기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호막이었지만, 아이스 타워의 특징인 냉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보호막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오빠! 이거 봐요! 이거!”
서이나는 신이 난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번갈아 뻗으며 푸른 기류를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노래를 흥얼거렸다.
“넷 있고! 넷 있고!”
“응?”
서이나가 흥얼거리는 멜로디는 한유찬의 기억 속에도 있는 노래였다. 서이나가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한유찬도 어쩔 수 없이 얼음왕국을 본 적이 있었다.
영화는 꽤 재미있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얼음왕국의 여왕이 눈사람 넷을 만들어 함께 뛰어노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명장면이었다.
“L사?”
“헤헷! 유찬 오빠? 같이 눈사람 만들까요?”
생긋 웃는 서이나의 얼굴은 가지고 싶던 장난감을 얻은 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개구쟁이처럼 웃음 짓는 서이나의 표정이 한유찬은 어쩐지 걱정스러워 보였다.
“이나야. 그거, 사람한테 함부로 쏘면 안 된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굳이 다른 사람한테 보일 필요도 없고.”
“피!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요?”
볼을 살짝 부풀리며 대답하는 서이나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 한유찬은 그녀의 볼을 쿡 찔렀다. 무릎을 때리면 튀어 오르는 다리처럼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치! 맨날 어린애 취급이나 하고…….”
“그건 그렇고, 이나야. 저기 나무 한 번 때려 볼래?”
“네? 나무… 요? 맨손으로?”
서이나는 자신의 작고 하얀 손을 내려다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 믿지?”
“네!”
서이나의 얼굴에 떠올랐던 약간의 의문은 당찬 대답과 함께 씻은 듯 사그라졌다.
나무 앞에 선 서이나는 잠시 나무를 노려보더니, 야무지게 말아쥔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이얍!”
귀여운 기합과 함께 뻗어진 주먹이 두꺼운 나무줄기와 만났다. 그리고.
푸욱.
그대로 박혔다.
한유찬과 서이나의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변했다.
“오, 오, 오빠! 이, 이거!”
[아이스 타워의 소환시간이 10초 차감되었습니다.]
한유찬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로써 한유찬은 서이나를 보호하는 보호막이 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유찬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이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우리 이나, 이제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는데?”
‘히잉……. 나 어떡해…….’
서이나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L사처럼 냉기를 뿜어내는 것은 마음에 들었지만, 단단한 나무를 뚫을 정도의 괴력은 절대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울상 짓는 서이나를 바라보면서도 한유찬은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타워 가디언의 조건은 피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일단, 윤석이 녀석 피도 좀 먹어보면 알 수 있겠지.’
두 남매의 안전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자, 한유찬은 자신의 몸을 옥죄던 단단한 사슬 하나가 풀려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힘 있게 움켜쥔 한유찬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타워 심고 우주방어』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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