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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산다 1권

2016.03.16 조회 12,724 추천 168


 # 제1회 발단
 
 청목방주(靑木幫主)가 나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청목방.
 강서성(江西省) 길안(吉安)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방파로 당당히 강서오대방파에 속해 있었다.
 청목방주 염천광(閻千光).
 염천광이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최악이라고 보면 된다.
 오만하고 거칠고 포악하고.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게는 한 없이 약하고. 염천광과 관련된 모든 소문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었으니까.
 靑木, 푸른 나무. 정말이지 지들 방파 이름과는 정반대되는 그런 자다.
 이게 왜 문제냐고? 염천광은 절대 자신보다 약자를 찾아가지 않으니까. 약자는 높은 태사의에 앉아 손가락질로 부르고, 강자에게는 맨발로도 달려가는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염천광이 약자를 찾아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죽이기 위해서다.
 일단 이 즈음해서 내 소개를 해야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으리라.
 
 이름, 서태양(西太陽).
 대정협(大正俠) 강서성 태화지부 칠 급무객(七級武客).
 
 내가 속한 대정협은 ‘크고 바른 협’이란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영리단체다.
 조직의 성격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돈을 받고 사람을 죽여주는 곳.
 살수조직이 아니냐고?
 아니다. 대정협은 오직 죽어 마땅한 악인만 죽이는 곳이다. 일반인으로 따지면 관청의 포두(捕頭)가 죄를 지은 범죄자를 잡는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그것의 강호판.
 다른 점은 억울한 일을 당한 개인이 현상금을 건다는 점이다.
 현상금이 걸리면 조사관(調査官)이 파견되고 정말 그 대상이 죽어 마땅한 악인인지를 철저히 조사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살수조직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조사관에 의해서 진짜 악인으로 판명이 되면 비로소 대정협에 소속된 무인을 보내 그를 추살한다.
 정해진 기한 내에 잡거나 죽이면 현상금은 대정협이 가진다.
 만약 잡지 못하면 현상금은 다시 그것을 걸었던 이에게 되돌려 주고.
 자,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청목방주는 악독한 성격의 유명방파의 수장.
 나는 대정협의 하급 무객.
 
 일단 체급이 맞지 않는데…… 일이 제대로 꼬여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바로 어제 북창문(北窓門)이 개최한 연회때문이었다.
 
 ***
 
 “서 무인, 모쪼록 즐겁게 즐기시게.”
 내 손에 쥐어진 연회 초대장 한 장.
 초대장 아래에 서태양이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일을 잘 처리해줘서 고맙다는 답례로 얻은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연회 참석을 망설였다.
 대정협 하급 무인이 참석할 연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찢어버렸어야 했는데…….
 대체 명문 후기지수들의 연회는 어떨까?
 결국 그 호기심에 졌다.
 이것도 젊은 시절의 좋은 경험이야! 핑계를 패기로 포장했다.
 와서 보니 태화의 젊은 강호인이 모여 화합을 다지자는 원래 취지와는 달리, 사실은 한 사람을 위한 자리였다.
 청목방주의 아들 염사독(閻思獨).
 북창문이 청목방과 친분을 쌓기 위해 그의 아들을 특별히 초대한 연회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혹여 네깟 놈이 여긴 왜 왔느냐고 시비라도 거는 놈이 있을까 싶어 조용히 술만 마셨다.
 다행히 그런 시비를 거는 놈은 없었다. 다들 염사독에게 잘 보이기 바빴으니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좋은 술과 안주가 있었고, 예쁜 여자들도 많이 있었으니까.
 반면 염사독은 초저녁부터 취해 있었다.
 여인들 사이를 누비며 흥청망청.
 그는 제 아비만큼이나 악명이 높았는데 대단한 가문이란 태생의 장점은 다 버리고 최악의 부작용만 물려받은 놈이었다. 집안만 믿고 안하무인에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놈.
 놈에게 연회란 공식적으로 미쳐 날뛰어도 되는 무대쯤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나 다를까 한창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사고를 쳤다.
 “까아아악!”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술에 취한 염사독은 여인을 강제로 끌어안고 있었다. 한 손은 이미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치마 아래로 들어가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봤을 때, 그녀는 이곳에서 시중을 들던 시비였다.
 저 미친 새끼가!
 희롱을 해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다니? 한마디로 시비는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것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말리기는커녕 몇몇은 킬킬거리며 농지거리를 던지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물론 쓰레기들만 모인 것이 아니었기에 정색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린 이들도 있었지만 나서서 말리지는 못했다.
 여자의 상의가 길게 쭉 찢어졌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여인의 맨살이 보였다.
 맙소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말 겁탈을 하려는 것이다.
 쓰레기 파락호들이 모여서 개지랄을 떨어도 이렇게 매정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 하나는 ‘그 더러운 하물 그만 흔들어라.’며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물며 강호의 잘 나가는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모인 연회인데.
 그때 나는 여인의 눈빛에서 깊은 절망을 보았다.
 어쩌면 자신을 희롱하는 눈앞의 염사독보다, 그냥 지켜만 보는 사람들을 향한 절망이 더 컸으리라.
 보다 못한 내가 소리쳤다.
 “그만!”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젠장! 이 역할을 내가 해야 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여인이 염사독을 밀어내며 내 쪽으로 달려와 등 뒤에 숨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여인의 떨림이 내 등을 통해 느껴졌다.
 염사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이곳으로 뛰어오는 여자를 말리지 않은 이유가 뭐겠는가? 새 먹잇감이 생겼다는 것이겠지.
 “장난이 너무 심하신 것 같습니다.”
 누그러진 어조로 미소까지 지었다.
 붙으면 나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인성은 쓰레기지만, 저놈이 배운 무공은 쓰레기가 아닐 테니까.
 놈이 내 위아래를 훑어보며 기분 나쁘게 툭 내뱉었다.
 “이 병신이 지금 뭐라는 거야?”
 울컥했지만 꾹 참았다. 길바닥에 떨어진 똥은 치우라고 있는 것이지, 똥에 주먹질을 하면서 함께 뒹굴 수는 없는 법.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연회가 처음이라, 너무 주제넘게 나선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좋게 넘어가려고 했지만 염사독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체 이 덜 떨어진 자라 새끼는 뭐야? 누가 이 허접한 새끼를 초대했어?”
 이 새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옷차림만으로 나에 대한 평가를 끝낸 것이다. 내가 만약 저보다 훨씬 고수에 배경도 더 좋으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따위로 나오는 것인가?
 놈이 내 얼굴 가까이 면상을 들이밀며 한껏 조롱했다.
 “자, 한 번 볼까? 요즘 세상에도 모르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진짜 남자가 있는지.”
 지켜보던 몇몇의 키득거림이 반주가 되어 염사독의 흥을 돋웠다.
 “아니면 너도 같이 할래? 저 년 몸매 죽이잖아.”
 주먹을 터질 듯 움켜쥐었다. 수치심과 분노, 두려움.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오! 이놈 봐라. 부들부들 떠는 것이 남자다, 남자. 야. 이 새끼들아, 구경만 하지 말고 박수라도 한 번 쳐줘라. 제 죽을지도 모르고 설쳐대는 용기가 가상하지도 않냐?”
 실제로 몇 놈은 진짜 박수를 쳤다.
 바로 그때였다.
 내 허리를 동아줄처럼 잡은 채 벌벌 떨고 있던 여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손을 풀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마음을 느꼈다.
 
 ‘그래, 당신은 뭔 죄라고.’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비키면 자신이 겁탈당할 더러운 상황에서도.
 순간 억지로 가슴 속에 눌러두었던 화가 활화산처럼 치밀어 올랐다.
 
 “에라 이 발정난 개새끼야!”
 
 퍼억!
 내 주먹이 놈의 턱을 강타했다.
 놈은 술에 취해 있었고, 설마 이 연회장에서 자신에게 손찌검을 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 한 방은 제대로 들어갔다.
 염사독이 허공을 붕 날아서 뒤에 있던 탁자를 부수며 쓰러졌다.
 놈이 벌떡 일어나서 덤볐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지켜보던 자들은 내게 덤비지 못했다.
 와아! 저놈 죽여라 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청목방주의 아들을 한방에 날린 상대였다.
 일단 나에 대해서 아는 자가 없었다.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혹시 염사독을 두들겨 패도 될 정도의 신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북창문주 주백(周伯)은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대충 이런 느낌으로.
 ‘대체 이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왜 내 연회를 망치는 것인가? 어차피 뒈지는 것은 너겠지만, 나까지 골치 아파졌잖아?’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가서 염사독 발바닥이나 핥다가 뒈져 버리라고! 저기 누워 있으니 핥기도 쉽겠네.
 굳이 그런 말을 내뱉진 않았다. 지금 벌인 사건만 해도 충분히 최악이었으니까.
 염사독도, 청목방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젠장!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철부지 십대냐? 십대냐고!
 울고 싶은 심정으로 망연자실 서 있던 그때 누군가 내게 인사했다.
 눈물범벅이 된 채 고개를 숙이는 그녀. 그녀는 바로 봉변을 당할 뻔한 여인이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물기 가득한 그녀의 인사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잠깐 들었던 후회는 비에 씻겨나가는 흙먼지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이 일로 내 인생도 달라지겠지만, 그녀의 인생도 달라질 것이다.
 그래, 그럼 된 거다.
 이렇게 좋은 마음을 하늘이 알아준다면 상황이 흐지부지 될 법도 하건만…….
 날이 밝기가 무섭게 염사독의 아비인 청목방주가 나를 찾아오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네까짓 것이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갈아 마셔 버리러 갈 테니, 모가지 빼고 딱 기다리라고.
 엄밀히 따지면 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강호에 경고하는 것이리라.
 자신들을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당당히 밝히는 이유는 도망갈 테면 가보란 뜻이겠지.
 어디로 달아나야 하나?
 돈과 권력으로 진실을 조작해서 오히려 내게 현상금을 걸지도 모를 일이다.
 젠장.
 내겐 현상금이 얼마나 걸리려나?
 
 
 # 제2회 징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에는 언제나 징후(徵候)라는 것이 존재한다.
 불길한 징후는 그 며칠 전에 있었다.
 그날 서태양은 추객 이도(二刀)와 함께 조만호(曺慢浩)를 뒤쫓고 있었다.
 조만호, 나이 이십칠 세, 이웃의 여염집 여인을 간살(姦殺)하고 달아난 자였다.
 “이쪽이야.”
 이도가 빠르게 숲을 헤치며 앞장섰다. 그의 허리에는 작은 도 두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두 개의 칼을 가지고 다닌다고 우린 그를 이도라 불렀다.
 이도는 추격전문인 추객이었는데, 서태양과 같은 칠 급이었고, 같은 해에 입맹한 동기였다. 둘 모두 대정협 칠 년차.
 이도는 추격하고, 서태양은 제거했다.
 애초에 서태양은 추객을 지원할까도 생각했었다.
 바로 남다른 기억력 때문이었다. 서태양은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는데, 그냥 좋다는 표현으로는 그 대단한 기억력의 반의반도 설명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이름이든 지형이든, 어떤 것이든 그림을 찍듯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 마음을 먹으면 한 번 읽는 것으로 얇은 책 한 권 정도는 통째로 외울 수도 있었다.
 이후 이도를 보면서 서태양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추객에게는 기억력보다는 다른 장점들이 필요했다. 도망자의 습성을 이해하고 그림자처럼 뒤쫓을 수 있는 동물적 육감 같은 것.
 그런 면에서 이도는 탁월했다.
 이 날도 이도는 서태양이라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했을 몇 가지 단서만으로 조만호가 숨은 은신처를 찾아냈다.
 이제 서태양이 활약할 차례였다.
 바깥에 이도를 기다리게 하고 서태양이 조용히 담을 넘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걷는 것은 무객이라면 기본이다.
 조만호, 이웃 여인을 겁탈하고 살해한 자다.
 거기까지라면 체포해가서 평생 뇌옥에서 죗값을 치르게 했을 것이다.
 대정협에서는 체포를 원칙으로 한다. 반항이 극심해서 체포하기 어려운 상황에만 상대를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
 악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냐고?
 천만의 말씀. 다 돈 때문이다.
 악인을 생포해서 데려오면 대정협의 진짜 장사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현상금을 건 사람이 추가금을 내면 그가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직접 지켜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 추가금이 처음에 걸린 현상금만큼이나 크다. 처음에는 그냥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그들도 막상 원수를 잡아왔다고 하면 그가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심지어 웃돈을 주면서 더욱 잔인하게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연유로 뒤쫓던 악인을 죽이면 고과(考課)에 반영되면서 감점이 된다. 서태양이 다른 칠 급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악인들을 처리했음에도, 특진을 하지 못한 이유였다.
 딱 성과만 놓고 보면 지금쯤 오급은 되어 있었을 그였다. 칠 년 차 무객이 오급이면 거의 최연소 승진이라 볼 수 있었다.
 이도는 ‘너 때문에 나도 칠 급’이라며 울상을 짓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시다.
 추객과 무객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건마다 배정이 달라진다.
 녀석이 여전히 칠 급인 것은, 나 이외의 다른 무객과의 추격은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한다는 뜻. 왜 그런지 궁금하긴 하다.
 어쨌든 그래서 이번에는 어지간하면 생포해 가려고 마음먹었건만.
 아내의 죽음에 슬픔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남편이 아이와 함께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만호, 이 빌어먹을 개새끼는 즉결심판이다.
 살(殺)!
 대정협의 심사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서태양은 이미 그렇게 판결을 내렸다.
 잠시 문에 귀를 대고 기척을 살피던 서태양이 도구를 이용해서 조용히 잠긴 문을 땄다.
 소리 없이 걷는 기술만큼이나 조용히 문을 여는 것도 무객들의 장기이다.
 만능(萬能)이 되지 않으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도망자를 이 넓은 중원에서 어떻게 잡겠는가?
 간단히 문이 열렸다.
 서태양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폈다.
 침상에 누군가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잠이 든 것이 틀림없었다.
 서태양은 검을 빼어든 채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침상 옆까지 다가갈 때까지 조만호는 깨지 않았다.
 검으로 그의 목을 겨누며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만호.”
 조만호가 눈을 떴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태양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 새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위기본능이 요동쳤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불알이 쪼그라들었다. 여기서 얼어붙으면 뒈지는 거고, 이 불쾌한 느낌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면 사는 거다.
 푸아아아앙.
 날카로운 파공음이 귀를 찢었고 세찬 바람이 앞머리를 날렸다.
 무엇인가 서태양의 이마를 스치며 천장에 날아가 박혔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만호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이걸 피할 수가 있지란 뒷말은 끝내 할 수 없었다.
 푸욱!
 서태양의 검이 놈의 목을 사정없이 찔러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조만호는 즉사했다.
 툭.
 놈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하자 놈이 마지막에 보인 반응이 이해가 갔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염라속(閻羅速)이었다.
 세 발짝 내에서 발출되면 반드시 상대를 죽인다고 해서 삼보살(三步殺)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암기였다.
 가까운 곳이라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단 한번만 사용할 수 있는 암기지만 그 값이 상당히 비쌌다.
 휴,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서태양이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다시 한 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박힌 암기가 시퍼런 빛을 내고 있었다.
 다행히 독은 발려 있지 않았다. 독이 발리는 순간, 금용암기(禁用暗器)로 지정되어 제작과 판매가 금지되기 때문에 삼보살에는 독이 발리지 않는다. 굳이 독을 바르지 않아도 상대를 죽이는 암기니 사실 바를 필요도 없었다.
 그 삼보살을 피해낸 것이다. 정말이지 간발의 차이였다.
 예전에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중에 한 번은 정말이지 누가 봐도 죽을 상황이었는데, 이번처럼 아슬아슬하게 살았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이란 말이었다.
 이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믿어주겠는가? 코앞에서 발출된 삼보살을 피했다는 것을.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서태양은 조만호의 목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들며 사정없이 돌아섰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그의 검이 누군가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상대를 알아본 서태양이 간신히 검을 멈춘 것이다.
 이도였다. 그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나야, 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그를 찌를 뻔했다는 사실에 서태양은 화가 폭발했다. 정말 까닥했으면 이도를 죽일 뻔한 것이다.
 검을 내던지며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서태양의 격한 반응에 이도가 당황했다.
 “그게 예감이 좋지 않아서…….”
 “예감? 야, 이 미친놈아! 네가 점쟁이야? 점쟁이냐고!”
 사실 이도의 예감은 정확했다.
 조만호는 염라속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추객은 절대 제압작전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 잊었어? 뒈지고 싶어? 내가 그렇게 우스워? 그렇게 설쳐대고 싶으면 네가 무객을 해!”
 버럭 쏟아내면서도 서태양은 후회했다.
 화를 낼 수는 있지만, 그와의 친분을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정색하며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걱정되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이다.
 “미안해!”
 “닥쳐!”
 “어라? 염라속이네? 설마 이걸 피한거야?”
 속도 좋은 이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닥치라고!”
 미안하니까.
 이상하게 올해 들어 화를 참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이유 없이 화를 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냈고, 매사에 짜증이 났다.
 가슴이 답답했고, 한숨을 자주 쉬었다. 한숨을 자주 쉰다는 말도 이도가 해준 말이다.
 너 요즘 나라 잃은 것처럼 한숨을 쉰다고.
 젠장, 전생에는 나라를 구하고, 올핸 나라를 잃었나?
 그게 다 올해 들어서 생긴 변화다.
 이도는 늙어서 노여움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놀렸지만, 당연히 그럴 나이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리 화가 나는 걸까?
 몸 안에 화를 담고 있는 주머니가 찢어져 계속 새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도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따 화해주 한잔하자. 내가 살게.”
 서태양이 검을 주워들며 말없이 그곳을 걸어 나갔다.
 이 자식아, 술은 내가 사야지. 사과주로.
 
 그날 밤, 술을 마시다가 도리어 더 큰 싸움이 났다.
 초반에는 잘 화해했는데.
 문제는 둘 다 술이 취하고 나서였다.
 대부분 친구 사이의 싸움이 그렇듯 시답잖은 일이 술기운을 타고 번지며 점점 큰 싸움이 되었다. 낮의 일 때문은 아니었다. 적어도 서태양은 그랬다.
 결국 고성이 오가는 싸움이 되었고. 아침이 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사소한 것들까지 다 끄집어내서 싸워댔다.
 중간 중간 술기운에 기억이 사라졌다.
 눈을 뜰 때마다 다른 소재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서태양은 주위가 조용해지는 경험을 했다.
 눈앞에서 이도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언극을 하는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느낌. 너무 어지러웠다.
 그런데 문득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난 거울 같은 사람이야.
 
 가끔씩 이도가 하는 말이다. 궁지에 몰렸을 때 장난으로 하는 말이다. 상대가 너 나쁜 놈이야 할 때, 저 말을 하면 기가 막힌 방패가 된다.
 어쨌든 가끔 이도가 하는 장난인데, 그 말이 불쑥 떠오른 것이다. 취기 속에 그 말이 진짜처럼 여겨졌다.
 
 지금 내 모습이 저런 모습일까?
 대체 난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일까?
 내 일에 지쳐버린 것일까?
 아니다. 난 악인들을 체포하고, 죽이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거기에 돈까지 받는다.
 자신의 일에 지쳐버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일까?
 서태양은 올해 들어 급격하게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
 
 “으하하하하! 청목방주가 오고 있다지?”
 아침 일찍 서태양의 거처로 달려온 이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친구란 이름을 달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기뻐해도 되는 걸까?
 “그를 직접 보게 되다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드디어 그 유명한 청목검법(靑木劍法)을 보게 되는구나.”
 “이 자식아! 날 죽일 때 사용할 검술이라고!”
 “사람은 언젠가 다 죽는다고.”
 “그럼 대신 죽어주든지.”
 못들은 척 이도가 딴청을 부렸다.
 “최대한 다섯 번째 초식까진 버텨야 해.”
 “왜?”
 “청목검법은 그때부터가 진짜 화려하다더라고.”
 “그 초식은 내 시체를 회 뜰 때나 보겠지.”
 놈의 첫 번째 초식에 죽고 말 테니까.
 서태양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모습에 이도가 장난기를 거두며 말했다.
 “별 수 있나? 튀어야지.”
 “어디로?”
 “어디 멀리 무인도에 가서 살아. 가서 개똥밭을 구르며 농사나 짓고 사는 거지.”
 “멍청이. 섬이니까 물고기를 잡아야지.”
 “하하하. 맞아, 맞는 말이야.”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럴 리가? 너를 잡으라는 임무가 떨어지면 일부러 반대방향으로 추적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여전히 녀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렇게 놀려댈 때의 모습과, 자신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모습. 그와 함께 있다 보면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다.
 “그래도 넌 잘 생겼잖아. 잘 생긴 사람은 고난을 겪어야지. 암, 그래야 공평하지.”
 서태양이 고개를 돌렸다. 한옆에 놓인 동경에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잘 생긴 것은 잘 모르겠고, 적어도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호감 가는 인상은 확실했다.
 “잘 생기긴. 저 피곤에 절은 얼굴 좀 봐.”
 “하긴. 처음 봤을 때는 얼굴에서 빛이 났었는데.”
 “이젠 완전히 맛이 갔지.”
 그러자 서태양의 얼굴 옆으로 이도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 얼굴 보면서 그런 말을 하라고. 그게 맛이 간 거면 이 얼굴은 애초에 맛이 없냐?”
 서태양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
 “하하하.”
 “나 좋은 친구지?”
 동경 속의 이도가 씩 웃었고, 서태양이 따라 웃었다.
 그래, 그는 정말 좋은 친구다. 이렇게 좋은 녀석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도가 물었다.
 “나 같으면 어젯밤에 사고 쳤을 때 그길로 달아났을 텐데. 아직까지 달아나지 않은 것은…….”
 그가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덧붙여 물었다.
 “혹시 자존심 때문인가?”
 
 
 # 제3회 전설
 
 자존심?
 이 강호에서 목숨을 잃기 가장 좋은 유혹이자 덫. 가장 손쉽게 고수를 죽일 수 있는 미끼이자 사신(死神)이 마당에서 키우는 꽃이다.
 항상 쓸데없는 상황에 불쑥 튀어나와 자신과 상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
 서태양이 생각하는 자존심이다.
 그렇다고 그가 아예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존심은 자신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이 지켜주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자존심은 자아의 영역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의 영역.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자존심은 무슨. 청목방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아무리 빨리 와도 이틀은 걸리니까.”
 말을 바꿔 타며 쉬지 않고 내달렸을 때 기준이니까, 그보단 더 걸릴 것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사직서는 내고 떠나야지. 칠 년이나 몸담은 곳인데. 이달 정산도 받아야 하고. 여기저기 작별인사도 해야 하고.”
 인간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떠날 때 인사정도는 하고 갈 관계들이 몇은 있었다.
 “하긴, 돈은 챙겨서 가야지. 돈 없이 쫓기면 그것만큼 최악인 일도 없지.”
 이도의 말처럼 돈은 꼭 챙겨야 한다.
 문득 칠 년이나 일한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거창한 자존심까진 아니지만 분통이 터진다.
 그런 놈을 피해서 달아나야 하다니?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달아난단 말인가?
 아들이 그런 개망나니면 그 아비는 고개를 들지도 못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도망은 그것들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이 강호는 정말이지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것이다.
 청목방주가 정말 나를 죽일 작정이었다면 은밀히 실력 있는 수하나 보낼 것이지. 아예 찾으러 온다고 온 강호에 소문을 냈다.
 “말똥에 붙은 똥파리 취급하는 거지. 날아봤자 근처를 앵앵거릴 것이라고.”
 처음에는 서태양도 이도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청목방주의 시커먼 속은 그게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달아나기를 바랄 것이다. 그가 달아나는 순간, 어제의 사건은 완전히 왜곡되고 진실은 묻혀 버릴 것이다.
 그날 구경만 하던 놈들이 어디 진실을 말하기나 하겠는가? 시비여인에겐 협박을 가하겠지. 결국 그런 일은 없었다는 증언을 듣게 될 것이고.
 서태양이 나서서 무죄를 주장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진실이 왜곡될 판인데.
 거기에 달아나 버린다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까’란 이유를 들어 청목방주가 만든 이야기에 놀아날 것이고.
 자신에게 붙여질 이름표는 이것이 될 것이다.
 청목방주의 아들을 기습한 괴한.
 한구석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리겠지.
 청목방의 후계자를 질투한 나머지 술김에 기습을 가한 찌질이.
 놈은 내가 달아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게 미치도록 싫은 것이다. 차라리 버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가만히 서태양을 응시하던 이도가 불쑥 말했다.
 “아무튼 잘 팼어. 아예 패 죽여 버리지 그랬어.”
 “차라리 그럴걸 그랬다.”
 “아니야. 네가 한 것만 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적어도 그날 그곳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은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너무…….”
 서태양은 말을 잇지 않았다. 원래는 ‘너무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버린 것 같아.’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불쑥 그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 사소하지 않은 존재가.
 “더럽네. 상황이.”
 서태양이 말을 돌리자 이도가 진지하게 말했다.
 “싸워.”
 “누구랑?”
 “당연히 파렴치한 청목방주 놈이지. 당당히 맞서 싸워서 짓밟아 버려!”
 “이봐. 놀리는 것도 제발 일관성 있게 하라고.”
 “싸우라고.”
 “함께 싸우자라고 하든지.”
 “자네라면 이길 수 있어! 염라속도 피했잖아?”
 “그건 운이 좋아서지.”
 “지난번에는 사풍(砂風)에 휩쓸려 십 리나 날아갔는데도 살았잖아?”
 “그건 진짜 운이 좋았던 거고.”
 “옛날에 운남에서 늪에 빠졌을 때 생각나? 오히려 늪 아래로 기어들어가서 다른 구멍을 찾아 기어 나온 놈이 너야.”
 “일부러 찾은 것이 아니라 허우적대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라고! 너도 옆에서 봤잖아! 그러고 보니 이 자식! 그때 넝쿨 찾는다고 허둥거리기만 했지? 오호, 그때부터였군! 내가 죽기를 바란 것이!”
 “그 운으로 청목방주를 이길 수도 있지.”
 “미친 놈.”
 서태양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이도는 더욱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청목방주가 아니라 도제(刀帝)나 검성(劍聖)이 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이 강호의 절대강자들.
 그들을 이야기하려면 작금의 강호에 관해 짤막하게나마 설명을 해야 한다.
 이백 년 전, 정사마에서 발발한 삼십년 전쟁으로 결국 정사마는 공멸(共滅)했다.
 이후 중원은 각 지역의 패자들이 난립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정사마의 이념이 아니라 개인과 단체가 저마다의 철학과 이익을 위해 싸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현 강호의 중원육강(中原六强)이라 불리는 여섯 개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무적십자성(無敵十字城)
 천의맹(天意盟)
 
 두 절대강자 아래 다시 네 개의 세력.
 
 오뢰검문(五雷劍門)
 구월회(九月會)
 황금상회(黃金商會)
 혈수곡(血手谷)
 
 위의 두 세력은 압도적으로 강했고, 그 아래로 네 개의 세력이 비슷한 힘으로 다리가 되어 받치고 있는 형국이었다.
 다시 이 여섯 개의 대표세력들 아래로 청목방과 같은 중소방파들이 수없이 자리하고 있다.
 도제와 검성은 바로 강호육강 중 압도적으로 강한 두 세력, 무적십자성과 천의맹의 주인들이다.
 도제는 무적십자성주이고, 검성은 천의맹주이다.
 청목방주조차 그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
 서태양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런 대단한 칭찬을 평소에는 왜 안 해주셨을까?”
 기왕 나온 헛소리였는지 이도가 한술 더 떴다.
 “아니지, 그 이상이야. 자넨 대살성(大殺星)이 와도 이길 수 있을 거야!”
 대살성이라 기억되는 한 사내. 대흉살(大凶殺)이라고도 불렸고, 사신(死神)이라고 불렸으며, 도귀(刀鬼)라고도 불렸던 사내.
 그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나이도, 생김새도 아는 사람이 없다. 별호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사내.
 그는 단신으로 천하세가(天下世家)를 멸문시킨 인물이었다.
 천하세가의 가주는 강호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인물이었는데 당시의 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천하세가를 돕기 위해 나섰던 무적십자성과 천의맹의 고수들도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당시 천하세가는 무적십자성과 천의맹과 더불어 강호삼세(江湖三勢)라 불렸다.
 이후 천하세가가 몰락하면서 천하는 무적십자성과 천의맹이 양분했다. 강북무림은 무적십자성이, 강남무림은 천의맹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대살성은 천하세가주를 죽였으며 도제와 검성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고 했다. 그러니 그 대살성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였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설마 지금 정사마가 몰락한 이후 가장 강한 무인이라고 알려진 대살성을 말하는 건 아니지?”
 “왜 아니겠어?”
 “그가 살아 있어?”
 “살아 있다는 소문도 있어.”
 “그건 술자리에서나 도는 객잔괴담이지.”
 “암튼. 그가 와도 이길 수 있어. 자넬 보고 있으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느껴지거든.”
 서태양이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 혹시 술 먹고 실수한 것 있냐? 지난번 싸웠던 일로 앙심품고 있지?”
 “아니. 전혀.”
 “그럼 청목방주에게 돈이라도 받았냐? 저 올 때까지 나 달아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돈벌이기 되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날 못 죽여서 안달이시냐?”
 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영원히 지는 태양은 없으니까.”
 서태양의 이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언제는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라고 놀렸으면서.”
 “아냐, 아냐. 자넨 서쪽에서 뜨는 상식을 벗어난 태양이야.”
 이도는 자신이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넨, 자네를 잘 몰라.”
 아니, 난 너를 잘 몰랐던 것 같아. 친구의 탈을 쓴 살인마 같으니라고.
 
 ***
 
 “불의에 굴하지 말게.”
 맙소사! 왜들 이렇게 날 못 죽여서 안달인 것일까?
 설령 농담이라도, 청목방주에게 갈가리 찢겨 죽기 일보직전인 내게 할 농담이란 말인가?
 서태양은 정말이지 살아온 지난날을 심도 깊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나 하는 말이십니까?”
 “청목방주라면서? 석성(石城)에서 잘 나간다고 소문났던 풍양은 척추가 뽑혀 죽고, 비산검은 껍데기가 벗겨져서 죽었다지? 진패권 단양수는 손발이 잘리고 눈알까지 빠진 채 저자에서 동냥질을 하고 있다더군.”
 정말이지 정확히도 알고 있군.
 어쨌든 단양수가 청목방주에게 당한 일은 서태양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태양은 예전에 우연히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강한 느낌이었는데. 그도 청목방주에게 당했단 말이지?
 눈앞의 중년사내 흑사(黑師)는 대정협 태화지부 근처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잡화점이었지만 그는 무객과 추객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비밀스러운 물품들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태화지부 무인들은 이곳을 녹주(绿洲)라 불렀다. 사막 가운데 물이 있는 녹지를 뜻하는 말로, 그만큼 귀중한 물건을 파는 곳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병장기에서부터 암기, 독과 해독제, 여러 약제들, 무공서, 위장신분패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그는 뭐든지 요구하면 구해왔다. 그의 입에서 ‘그건 구할 수 없네’란 말을 듣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단지 돈과 시간일 뿐이다.
 이렇게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 왜 이런 촌구석 태화에서 잡화점이나 운영하고 사는지 모두들 궁금해 했지만, 다들 사연 하나쯤은 안고 사는 강호인지라 필시 말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청목방주 같은 놈이 득세하는 강호가 되어선 안 되잖나?”
 “하하, 제 죽음으로 이 강호가 좀 더 나아지려나요?”
 서태양의 서글픈 농담에 흑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왜 죽는다고만 생각하나? 자네가 이길 수도 있지.”
 “청목방주쯤 한 수에 죽여 버릴 기가 막힌 암기라도 나왔습니까?”
 “있긴 하지만…… 아주 비싸지.”
 절대 공짜로는 줄 수 없을 정도로 비싸겠지.
 그래, 좋다. 놈과 싸워서 정말 천운이 따라 놈의 검에 벼락이라도 떨어져 이겼다 치자. 자신을 철천지원수처럼 여길 나머지 청목방 무인들은? 벼락이 수백 개는 필요할 것이다.
 자, 이제 그만 불의에 굴하고 방문한 목적을 이룰 시간이다.
 “인피면구(人皮面具)가 필요합니다.”
 오늘 서태양이 그를 찾은 주된 이유였다.
 요즘은 짐승의 가죽을 특수하게 처리해서 만드는데, 그 값이 보통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질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조금 비싼 값의 인피면구를 하나 주문했다.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의 면구였다.
 서태양의 얼굴 이목구비의 길이를 재면서 흑사가 말했다. 최고급 면구는 아예 본을 떠서 제작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흑사의 손대중에 의해 제작된다. 대충 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제법 그럴듯한 면구가 제작된다.
 “인피면구에 맞는 위장신분패도 부탁합니다.”
 “그럼세.”
 그는 나이와 생김새에 맞는 위장신분패까지 구해준다.
 인피면구와 신분패는 어떤 검문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수단이자 집요한 추적자를 따돌릴 수 있는 생명줄이다.
 흑사는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을 다 구해오는 것일까? 하긴 이것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있겠지. 이런 불법적인 일들을 해가면서도 그는 용케도 이곳을 운영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뇌물이라도 주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강호는 참으로 신기하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수많은 일들이 모여서 이 강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오늘 밤이면 물건이 준비될 걸세.”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암기도 한 상자 주십시오.”
 “그건 지금 줄 수 있지. 마침 며칠 전에 좋은 놈이 들어왔지.”
 그가 뒤쪽으로 들어가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던지기용 작은 비수가 이십여 자루 담긴 암기상자였다.
 암기는 평소 잘 쓰지 않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 상자 정도는 미리 사둬야 할 것 같았다. 흑사가 파는 물건은 품질이 평균 이상이었으니까 손해 볼 것은 없다.
 “모두 얼마입니까?”
 “은자 칠백육십 냥이네.”
 서태양의 평균 한 달 수입이 은자 백 냥이다.
 무려 일곱 달 치의 수입.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서태양은 단 한 번도 흑사와 거래를 하면서 물건 값을 깎은 적이 없다. 돈을 낭비하는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흑사의 물건들은 자신의 목숨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라서 그렇다.
 값을 깎으면 물건의 질이 떨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떨어질 것이다.
 물론 제값을 받으면서 질 나쁜 물건을 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흑사는 그런 비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서태양이 값을 치렀다.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던 천 냥에서 이제 이백여 냥이 남았다.
 “언제 떠날 작정인가?”
 “물건을 받는 대로 뜰 생각입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우선은 이곳에서 멀어지고 봐야겠지요.”
 사실 목적지는 정해두었다. 안휘를 거쳐 산동으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그곳에서 신분을 감춘 채 기루의 칼잡이나 무관 사범을 하면서 당분간 숨어 지낼 생각이었다. 아니면 이도 말처럼 정말 농사라도 짓든지.
 어쨌든 함부로 입 밖에 낼 말이 아니었기에 모른 척 했을 뿐이다.
 흑사가 다시 한 번 앞서의 말을 반복했다.
 “불의에 굴하지 말게.”
 누군들 굴하고 싶겠나?
 엇비슷한 것 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싸워서 이기고, 또 살아남을 확률이 이삼 할이라도 되면 한 번 싸워보겠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개죽음이다.
 서태양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나중에 밤에 뵙겠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었다.
 
 
 # 제4회 검을 손질하다
 
 태화지부 내 반점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했다.
 보통은 하루가 어떻게 갔나 모를 정도로 금방인데 , 오늘은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흐르고 있다.
 상황을 생각하면 목구멍에 밥 한 술 넘기기 어려웠지만, 서태양은 이럴 때 일수록 제대로 먹으려고 애썼다.
 끼니를 거르면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결정적으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위기일수록 잘 챙겨먹자.
 서태양의 평소지론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무송(毋松)의 너스레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영웅? 이 시대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다들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데. 하지만 드디어 이 강호에 영웅이 탄생했다네. 그것도 바로 우리 태화지부에서 말이지! 거대권력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 그 이름도 찬란한 서태양!”
 마치 비무장에 오르는 무인을 소개하듯 무송이 큰 소리로 말했다.
 멀리서 밥을 먹던 몇몇 무객과 추객들이 박수를 쳤다. 다들 아는 얼굴들이다.
 서태양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괜히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무송은 더욱 자신을 부끄럽게 할 요량으로 입을 놀려댈 것이다.
 무송은 대정협 태화지부 소속 책임숙수다. 그는 다섯 명의 후배 숙수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속한 무인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강호의 소식통(消息通)이었는데 귀가 빠른 만큼 입도 빨라서, 무송이 알면 모두가 알게 된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모두들 무송을 좋아했다.
 입이 공평하게 쌌으니까. 누구에겐 말해주고 누구에겐 비밀이고, 이런 것 없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방에 설거지하는 아낙들에게까지 다 말한다. 그와 있으면 여러 소문들을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새 소식이 있었다.
 “자네가 알아야할 일이 있다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귀가 얇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자네 일이 본협의 협주님 귀에 들어갔다는 소문이야.”
 “벌써요?”
 서태양은 화들짝 놀랐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불과 어제, 그것도 야밤의 일이었다. 한데 다음날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 소문이 협주의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아, 이럴 때 협주가 나서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수하는 내가 지킨다!”
 
 그럼 상황 끝이다. 청목방주도 대정협주 앞에서는 그냥 ‘깨갱’이니까.
 하지만 고작 칠 급 무객을 위해 대정협주가 나서줄 리는 없겠지.
 대정협은 일체 강호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오직 대정협이 만들어내는 이익만을 고수했다. 다른 이권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정협이 이 강호에서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한 해 대정협이 벌어들이는 돈은 막대했다.
 그럼에도 강호육강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의 견제를 최소화한 것은 강호의 질서를 유지하는 조직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대의적 합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대정협의 주축이 되는 추객과 무객, 조사관들이 자유계약무인이기 때문이다.
 대정협은 절대적인 충성심이나 단합으로 뭉쳐진 조직이 아니라 돈에 의해 유지되는 조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대정협이 빠르게 커온 원동력이자,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었다.
 아무튼 협주가 도와줄 확률은 갑자기 이도가 장식으로 차고 다니는 두 개의 도를 양 손으로 뽑아서 ‘사실은 나, 숨은 고수였음’이라며 한 쪽에선 강기를, 다른 한쪽에선 이기어도를 날릴 확률만큼이나 희박했다.
 앞서 박수를 쳤던 추객 중 하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와 몇 번 추격에 나선 적이 있었다.
 “청목방주, 그 자 아주 악질이라 들었네. 실력으로 안 되면 살수들을 보내고, 심지어 독을 사용한다는 소문까지 있어. 조심하게.”
 정말이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란 말이 떠올랐고, 실력만 있으면 정말이지 시원하게 썰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서태양이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다스렸다.
 무송이 혀를 차며 말했다.
 “요즘 청목방주를 영웅시하며 따르는 젊은 애들까지 있다고 하더군.”
 “대체 왜요?”
 “잔인해서 좋다더군.”
 “미친놈들.”
 “놈을 죽이면 단숨에 강호의 영웅이 될 수 있을 텐데.”
 “죽일 수도 없거니와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영웅, 그딴 것 관심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나이 들어 경치 좋은 곳에 자그마한 장원 하나 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관을 하나 열어서 애들이나 가르치며 유유자적 사는 것이 꿈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렇게 조용하게 사는 것이 꿈인데…… 갑자기 염사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젠장!
 그런 더러운 놈들이 판치는 세상에 혼자 조용히 살면 뭐하겠는가라는 생각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울컥하는 마음을 느끼며 서태양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확실히 요즘 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있음을.
 “이번 일 신사갈(申蛇蝎)도 알고 있나?”
 듣고 싶지 않았던 물음이었기에 서태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사갈은 신충(申忠)으로 서태양의 직속상관이자 태화지부의 부지부장이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뱀, 전갈처럼 지독한 인간이었다.
 정말이지 이 지부 무인이라면 그에게 치를 떨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아무튼 밥 해주는 무송도 아는 일을 그가 모를 리 없지.
 “알겠지요.”
 무송이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태양을 쳐다보았다.
 온갖 지랄을 다 할 텐데.
 하긴, 지금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신충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때려치우고 떠나야 하는데.
 서태양이 안되었는지 무송이 비싼 술을 내왔다.
 “자, 특별히 주는 술이네.”
 “감사합니다.”
 특별히? 제발 그런 말 하지 맙시다. 불길하잖아요?
 “쭉 마시고 힘내서 그 악당 놈을 없애버리게.”
 그래, 쭉 마셔서 쓸모없이 남아있는 분노와 자존심이나 없애버리자.
 ‘특별히’라는 말이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평범한’ 도주가 필요한 때다.
 
 ***
 
 대정협의 무인은 세 부류다.
 무객과 추객, 그리고 조사관.
 추적에 특화된 무인들을 추객이라 부르고, 그렇게 찾아낸 악인을 무객이 처리했다.
 보통 추객과 무객은 한조가 되어서 움직이는데 현상금 액수에 따라 그들의 등급이 다르다.
 등급은 구급(九級)에서 특급(特級)까지.
 이렇게 세분해서 나눠놓으니 정말 대단한 정예조직 같지만, 무객과 추객, 조사관은 모두 자유계약무인(自由契約武人)들이다.
 일 년 단위로 혈판장(血判狀)에 장인(掌印)을 찍어 계약을 맺는데,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라도 그만두면 된다.
 배신은 곧 죽음. 조직을 떠나도 죽음, 이런 것 없다.
 대정협에 들어오기 위한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다. 하긴, 놀고 있는 강호인들이 굴러다니는 돌보다 많은 시대니까.
 
 대정협 태화지부의 인원은 정확히 구십칠 명.
 지부를 운영하는 인원이 삼분지 일, 나머지가 자유계약무인인 무객과 추객, 그리고 조사관들이었다. 지부 중에서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했는데, 그러다보니 다들 서로 인사정도는 하고 지냈다.
 보통 지부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칠 급 아래가 대부분이었다.
 지단에서 주로 활동하는 이들이 육 급에서 삼 급, 본단을 가야 일, 이 급들을 볼 수 있다. 특급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활동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럼 급은 어떻게 나누느냐?
 최소 현상금 단위인 오십 냥에서 백 냥까지는 구급 추객과 무객이, 백 냥에서 오백 냥까지는 팔급이, 오백 냥에서 천 냥까지는 칠 급이. 이런 식으로 현상금의 액수에 따라 동원되는 추객과 살급의 등급이 달라진다.
 특급은 말할 것도 없고, 일 급만 되어도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자들을 상대해야한다.
 서태양이 태화지부의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여러 시선들이 느껴졌다. 단 하루 만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지부 사람들은 대부분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보내오는 눈빛들이다.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였나? 에구 이 일을 어쩌누? 과연 어떻게 될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내 알바는 아니지…… 등등.
 서태양은 소문이란 놈이 상상 이상의 속도로 퍼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남들 소문을 들을 때면 대수롭지 않게 듣고 전했는데, 막상 그것의 주인공이 되고 보니 소문이 어검술처럼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이윽고 서태양이 신충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손에 든 사직서를 내려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신충은 자리에 앉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보다 차분한 느낌.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그에게 한 장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신충이 힐끗 고개를 들어 서태양을 쳐다보았다. 겉에 사직서라고 쓰여 있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왜 이딴 것을 내미느냐는 뜻이겠지.
 “사직서입니다.”
 서태양은 그가 미친 발작을 떨기 전에 할 말 부터 내뱉었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달에 제가 받아야 할 돈을 미리 좀 챙겨주셨으면 합니다. 최대한 빨리요.”
 서태양은 쏟아져 나올 사갈의 독에 대비했다.
 일단 욕설부터 한 바가지 터져 나오지 않을까?
 
 이 미친 새끼야! 사춘기야? 십대냐고! 꼴리면 기루에 가서 계집이나 품을 것이지 왜 어울리지도 않는 연회에는 쳐가서 이 난리지랄이냐고! 그만 두면 다야? 사고치고 그만두면 다냐고! 그런데 돈을 내놓으라고? 네 목숨이나 내 놔!
 
 책상에 놓여 있는 벼루가 날아올 수도 있었다. 그건 조심해야 한다. 눈 먼 벼루에 머리통이 터지면 나만 손해였으니까.
 하지만 조용했다.
 신충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다가 나직이 물었다.
 “사직의 이유는?”
 이 양반이 약이라도 드셨나? 왜 이러지?
 신충의 차분한 반응에 오히려 더 불안했다.
 어쨌든 그가 내막을 모를 리는 없다. 그냥 일신상의 이유라고 대답했다간 이번에 폭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술을 마시고 실수를 했습니다.”
 솔직히 그가 한바탕 지랄을 해도 다 받아줄 수밖에 없다. 사직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진 여전히 상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충은 평소와 달랐다.
 “알겠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돈이 준비되면 연락하지.”
 서태양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면구라도 뒤집어썼는지 볼살을 확 잡아당겨보고 싶었다.
 대체 너 누구냐!
 “더 할 말이 있나?”
 “아닙니다. 그간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뒤에서 신충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실수는 아니었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신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서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서태양은 그 말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연회장에서 술 마시고 실수를 했다는 말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실수는 아니라고.
 열 번 못하다가도 한 번 잘하면 크게 감동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서태양은 그 말 자체를 싫어했다.
 그 마음은 열 번 잘하다가도 한 번 못하면 크게 실망하는 인간의 간사한 마음과도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많이 본다.
 항상 잘 하던 사람이 단 한 번 잘못했다고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연을 끊는 사람들.
 자신에게 잘했던 그 나머지 아홉 번은 대체 어디다 팔아먹었느냐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서태양은 신충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독만 뿜어대던 그가 마지막은 제대로 된 해약을 첫눈처럼 뿌려준 것이다.
 암튼 그와는 유종의 미.
 
 ***
 
 다행히 내 주위에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안 달아나고 뭐하는 겐가? 어서 멀리 달아나게.”
 이 최초이자 제대로 된 조언의 주인공은 태화지부의 철방을 책임지고 있는 양억(梁憶)이다. 사람들은 그를 양철골(梁鐵骨)이라 불렀다.
 일흔이 다 된 노인네인데, 노인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 근육질에 등이 곧고 정정했다.
 서태양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철골에게는 인사를 해야겠다 싶어서 잠깐 들른 것이다.
 임무를 나갈 때마다 무객들의 무기를 관리해주는 사람이 바로 양철골이다.
 “검이나 줘보게.”
 “손질한 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손질한지 꽤 지나서 그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웠다.
 “줘 보래도.”
 계속되는 요구에 서태양은 결국 검을 뽑아주었다.
 근래의 게으름이 잔뜩 묻어나는 검이었지만 그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질을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순식간에 검에서 빛이 난다.
 양철골의 실력은 그야말로 강서의 모든 지단, 지부를 통틀어 최고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런 실력자가 왜 이런 촌구석 지부에 박혀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잡화점의 흑사도 그렇고, 양철골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태화지부에 의외의 인재들이 많다.
 “올해 자네가 칠 년차였던가?”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가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서태양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
 하지만 자신은 그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양철골이 다시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부끄럽습니다.”
 “뭐가?”
 “동기들은 다 육 급인데 저만 칠 급입니다.”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면 안 되지.”
 “그럴지는 몰라도 실력에는 등급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실력이 곧 그 사람인 세상이다. 그게 지금의 강호다.
 “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 들어봤나?”
 “그럴 수도 있습니까?”
 “있지. 가령 상대의 옷차림이나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여인의 화장법이라거나, 술버릇 같은 것도 그렇고. 하다못해 어떻게 걷는지, 옷을 어떻게 개느냐에 따라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서태양은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수긍했다. 양철골 정도 되면 병장기를 보고 뭔가 알아차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제 검에도 뭐가 보입니까?”
 보이고 말고 할 것이 뭐 있겠는가? 검날을 갈고 닦아봤자 삼류 무공을 익혔는데.
 무한한 가능성이 보이니 실망하지 말라는. 그런 위로의 말을 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양철골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 제5회 집을 나서다
 
 “부조화(不調和)라네.”
 부조화?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인데?
 “검과 제가 말씀입니까?”
 양철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저와 검술이 말입니까?”
 한 번 더 물었지만 그는 골똘히 검을 쳐다보기만 했다.
 서태양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 바를 불쑥 떠올려 말한 것인데, 굳이 이유까지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그나마 그 느낀 것이 ‘분노’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여기에서까지 그 말을 들으면 정말 내게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양철골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떠날 곳은 있는가?”
 “아직 정해둔 곳은 없습니다.”
 “어디 산속에라도 박혀 숨어 지내다보면 다 지나갈 일이지. 청목방주가 앞으로 살아봤자 몇 년이나 살겠나?”
 “그렇겠죠.”
 하지만 그것은 그의 아들인 염사독을 배제한 가정이었다. 정작 아비는 잊어도 당사자인 염사독은 이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다.
 비열한 놈일수록 제가 당한 수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까.
 아비는 내 도주를 정치적으로 풀겠지만, 놈은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내가 반드시 달아나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다 잘 풀릴 테니 걱정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묵묵히 검을 갈고 있는 그를 보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떠날 때가 되니 맺고 있던 관계의 성격이 명확해진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대했던 이들이 새롭게 보인다.
 자연스럽게 후회가 따른다. 있을 때 좀 더 잘 할 것을. 하긴, 누가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될 줄 알았나?
 양철골이 손질이 끝난 검을 서태양에게 돌려주었다.
 “혹여라도 젊은 혈기로 인생을 망치진 말게.”
 이미 다 망쳐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남은 인생이 있다면.
 “명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잘 갈린 검을 허리에 차자, 서태양은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당분간 뽑을 일이 없겠지만.
 
 ***
 
 “빌어먹을!”
 북창문주 주백은 치미는 화를 참지 못했다.
 청목방에 잘 보이려고 준비한 연회는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물이 흐려진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강물이 핏물이 되어 흐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북창문의 총관이 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그는 염사독을 치료하고 있는 의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다행히 턱이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답니다.”
 “젠장!”
 염사독은 물론이고, 그 아비인 염천광 역시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연회장에서 놈을 붙잡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염사독을 때린 자는 서태양이라는 대정협의 하급무객으로 밝혀졌다.
 그러자 주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될 말이다.”
 그를 붙잡아뒀다고 염천광이 칭찬이라도 해주리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만약 그를 붙잡아 두면 우린 그 일에 직접 개입하는 꼴이 된다. 놈을 붙잡을 수 있다면, 미리 막을 수도 있었다고 여기겠지.”
 “아! 그렇겠군요.”
 “이번 사건은 철저히 서태양이 개인적으로 저지르고 달아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너무 갑자기 터져서 아무도 막지 못한 사건으로.”
 “소인은 문주님의 깊으신 혜안에 감복했습니다.”
 “다시 연회를 준비해라. 지난번 보다 더 성대하게. 청목방주를 초대할 것이다.”
 “곧장 청목방주에게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총관이 달려 나갔다.
 주백이 천천히 한옆 책장으로 다가갔다. 구석에 꽂힌 책을 건드리자 책장이 옆으로 열리며 비밀금고가 드러났다.
 주백이 품에서 철시(鐵鍉)를 꺼내 금고를 열었다.
 황금과 전표들.
 주백이 가장 깊숙이 들어있던 나무상자를 꺼냈다.
 “결국 이것을 바쳐야 하나?”
 상자를 열자 향긋한 향이 방안에 풍겨나갔다.
 그 안에 든 것은 아홉 개의 잎을 가진 영약 구엽신선초(九葉神仙草)였다.
 일반인이 복용하면 죽을 때까지 무병장수하고 강호인이 복용하면 단숨에 반 갑자의 내공을 얻게 해준다는 희대의 영약이었다.
 청목방의 방군이 예상한 백년하수오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다.
 몇 년 전에 어렵사리 구한 영약이었다. 직접 복용하고 싶은 것을 참고 또 참았다.
 강호를 살아가다보면 반드시 위기의 순간이 오고, 복용해서 얻게 될 반 갑자 내공보다 더 유용하게 사용될 순간이 있으리란 믿음으로 아껴둔 것이었다.
 이제 그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악독한 염천광은 아들이 다친 일을 꼬투리로 북창문을 흔들어대려 할 것이다. 돈과 이권을 뜯어내 한 몫 잡으려 들겠지.
 결국 그렇게 될 당할 바에야 미리 큰 것을 바치는 것이 낫다.
 아깝긴 했지만 어차피 청목방과 제대로 선을 대려고 하던 중이었다.
 구엽신선초라면 그 목적을 제대로 이뤄줄 것이다.
 언제까지 이 구석진 태화의 소문파로 살아갈 순 없다.
 이번 일을 계기로 청목방과 손을 잡고 세를 키워나가면 몇 년 내에 강서오대방파로 올라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방으로 그의 딸 주양(周洋)이 들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
 “양이로구나.”
 “새로 연회를 연다고 하셨나요?”
 “그럴 작정이다.”
 “어제 염사독 그놈에게 당할 뻔한 언니가…….”
 “닥쳐라!”
 주백이 버럭 소리쳤다.
 “염공자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게다가 한낱 시비 년에게 언니라니? 그 무슨 해괴한 짓거리냐!”
 서태양이 구해준 시비와 주양은 아주 친하게 지냈다. 본래 심성이 착한 주양은 신분이 낮다고 천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청목방과 가까이 하지 마세요. 그들의 악명이 강호를 울리고 있습니다.”
 “닥치래도! 어린 것이 뭘 안다고 헛소리냐!”
 “아버지!”
 “썩 물러가거라.”
 주양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언젠가 아버지는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순간이 자식을 잃어가는 과정이었음을.
 아니, 어쩌면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
 지금 아버지가 아쉬워하는 것은 애지중지 다시 금고에 집어넣고 있는 목곽이었으니까.
 한 번 커지기 시작한 욕심은 그 사람을 통째로 잡아먹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까.
 
 ***
 
 서태양은 마지막 집 정리를 했다.
 집은 월에 스무 냥씩 내는 빌린 집이었다. 선불로 방값을 계산하였기에 이미 이달 계산은 끝난 셈이다.
 간단히 서찰을 남긴 후 짐을 챙겨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서태양이 방 한옆에 놓인 의자에 몸을 실었다.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서태양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직접 잡은 호랑이였고, 가죽 손질 역시 손수 한 것이라 그랬다.
 여기에 파묻혀 있으면 하루의 피곤이 눈 녹듯 녹았다.
 “이 안락함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떠나려니 몹시도 착잡했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훌훌 털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 핑계 김에 인생설계 다시 하는 거다.
 그 결심의 끝자락에 떠오른 얼굴은 이도였다.
 그는 지금 추객 일을 나갔다. 며칠 후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오늘밤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려온 임무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과 시간을 보내줄 법도 한데, 그는 임무를 나가버렸다. 솔직히 조금은 섭섭했다.
 역시 그날 싸운 것 때문일까?
 그래도 마지막 순간이 되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이도다.
 “이 자식아. 죽지 말고 잘 살아라.”
 서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인에게 서찰을 남겼다.
 다른 물건은 다 처리해도 좋지만 이 의자만은 친구인 이도에게 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도가 몇 번이나 탐을 냈던 의자였다. 주인은 착한 사람이니 부탁을 잘 들어줄 것이다.
 “늦게 줘서 미안하다.”
 서태양이 한옆에 세워진 옷장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뒤쪽 벽에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등에 맬 수 있는 제법 큼직한 혁낭(革囊)이 들어 있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기본적인 물품을 챙겨둔 가방이었다.
 안에는 은자 백 냥, 몇 가지 내상약과 외상약, 중원 각 지역의 지도,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 등이 들어 있었다.
 그곳에 옷 몇 벌을 추가로 넣었다.
 깨끗하게 집을 정리한 후 서태양이 혁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
 
 한 대의 마차가 태화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주위를 말을 탄 백여 명의 무인이 호위하며 함께 달리고 있었다.
 마차에 탄 사람은 청목방주 염천광이었다.
 그는 아주 신경질적인 외모를 지녔는데 송곳으로 쿡 찌르면 날카로운 창 열 개가 한꺼번에 튀어나올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와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사내는 염천광의 오른팔이자 청목방의 군사를 맡고 있는 방군(方軍)이었다.
 “서태양이란 놈이 정협맹에 사직서를 냈다고 합니다.”
 “후후, 예상대로군.”
 “놈이 사라지고 나면 강호의 여론을 우리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번 사건은 손쉽게 덮을 수 있습니다.”
 이미 수하들을 보내 그날 연회에 있었던 이들을 회유하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 시비 년은 없애버려라.”
 “혹시 모르니 살려두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염천광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후환을 남겨두는 것 봤나?”
 “아닙니다.”
 “혹시 모른다는 말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지. 혹시 모르니 자결한 것으로 처리하도록.”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하찮은 시비 년이 본방의 명성에 해를 끼치게 할 수는 없지.”
 차갑게 가라앉은 염천광을 기쁘게 해줄 소식도 있었다.
 “북창문주가 연회를 열고 방주님을 초대했습니다.”
 염천광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번 일로 한창 애가 타겠군.”
 “방주님 몸보신거리를 준비했다고 흘리는 것으로 볼 때, 영약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영약이라면 어떤 것을?”
 “적어도 백년하수오(百年何首烏)정도는 준비를 했을 겁니다.”
 염천광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흐흐흐흐.”
 한껏 고조된 염천광을 실은 마차는 태화를 향해 더욱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이틀 후 한 사내가 좁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혁낭을 등에 짊어진 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는 서태양이었다.
 인피면구를 착용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흑사는 강호를 떠나지 않는 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며 후일을 기약했다.
 서태양은 그의 손을 굳게 맞잡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흑사의 인피면구.
 면구를 쓰면 정말 답답했다. 그나마 흑사에게 구입한 면구는 잘 만들어진 것이기에 좀 나았지만 그래도 고역이었다.
 면구를 착용했다고 방심해선 안 되었다. 경험이 많은 고수들은 상대가 면구를 착용한 것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얼굴은 답답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태화를 완전히 빠져나오자 서태양은 비로소 안도했다.
 일 급이나 특급추객이 뒤쫓지 않는 한, 혹은 수천 명의 무인을 풀어서 자신을 잡으려 하지 않는 한, 이제 붙잡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 너른 중원 땅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서태양이 태화에서 길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첫 번째 객잔에 들러서 몇 가지 마른 요리를 주문했다.
 청목방에서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붙잡을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그래도 안전을 위해 큰길이 아닌 산과 들로만 이동할 생각이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양의 음식을 주문했다.
 산에서 동물을 잡아먹으면 되겠지 싶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맛이 없는 것이야 억지로 참는다지만, 동물을 잡느라고 여기저기 낯선 산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다. 까닥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쫓기는 처지에서의 사냥, 그다지 추천할 일은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오래 보관이 가능한 마른 음식을 최대한 많이 싸들고 이동하는 거다. 아껴먹고, 멀리가고. 도주의 기본이다.
 신충 역시 나중에 받아야 할 돈을 미리 정산해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무객 일을 하면서 보람도 많이 느꼈지만, 힘도 많이 들었다.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추격을 해야 했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잤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놈을 붙잡아 제압해야했고, 악인이라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래, 이제 좀 쉬자.
 주방 근처 탁자에 앉아서 요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자리에 앉은 사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청목방 이야기 들었나?”
 “무슨 얘기?”
 “그 아들이 연회장에서 암습을 당했다고 하네.”
 “암습을?”
 “그래. 어떤 미친놈이 청목방의 소방주를 죽이려고 했다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서태양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이럴 줄 예상했었다.
 더러운 놈들! 잘 먹고 잘 살아라! 퉤퉤.
 앞으로는 서태양이란 이름으론 살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되는구나.
 서태양의 한숨에도 사내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청목방주 아들쯤 되면 무공실력도 고강할 텐데?”
 “일하는 시비와 짜고 그랬다는군.”
 “허. 그랬다면 당할 만도 했겠군. 그래서 흉수는 잡았나?”
 “남자는 달아났고, 시비는 자결했다더군.”
 순간 서태양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갑자기 옆의 사내가 끼어들자 대화를 나누던 사내가 깜짝 놀랐다.
 “뭐라고 했냐니깐!”
 “남자 놈은 달아났고…….”
 “그 다음에!”
 “시비는 자결했다고 했소.”
 “확실하오?”
 “그렇다고 들었소. 뇌옥에서 목을 매서 죽었다지?”
 서태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자결했을 리 없다. 그날 자신도 그녀도 집으로 돌아갔으니, 뇌옥에서 목을 맸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다.
 청목방주 놈이 죽인 것이 틀림없었다. 혹은 죽게 만들었거나.
 아무리 더러운 놈들이라도 자신이나 죽이려 들지, 그녀까지 죽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개 쌍놈들이! 그냥 곱게 꺼져주겠다는데.
 그때 주인장이 포장된 요리를 들고 나왔다.
 “주문한 요리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가시다 적적하실 때 씹어 드시라고 육포를 따로 챙겼습니다.”
 잠시 말없이 음식을 내려다보던 서태양이 탁자위에 음식 값을 올린 후에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오겠소.”
 “그러시겠습니까? 아, 그럼 이 육포라도 가져가시지요.”
 하지만 이미 서태양은 객잔을 나간 후였다.
 잘근잘근 뼈까지 씹어 삼켜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 제6회 암기를 사다
 
 쿵쿵쿵!
 밤늦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흑사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서태양이 다짜고짜 말했다.
 “그 새끼 죽일 수 있는 암기 있습니까?”
 흑사가 흥미로운 눈빛을 발하더니 이내 차분히 대답했다.
 “있네.”
 서태양이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만이천 냥으로 살 수 있습니까?”
 서태양이 정협금고(正俠金庫)에 저축한 돈 전부였다. 정협금고는 대정협이 운영하는 자체 전장(錢莊)이었다.
 잠시 서태양을 응시하던 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가서 돈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냥 들어오게.”
 “네?”
 “후불로 받지.”
 흑사는 절대 외상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현금만을 받고 거래했다.
 “아닙니다.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확실히 위험한 일이긴 했다. 이미 청목방주는 이곳 태화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어쩌면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추격자들은 최우선적으로 객잔과 전장부터 감시한다.
 그 다음이 기루와 도박장. 의외로 쫓기는 자들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쾌락과 도박으로 마지막 시간을 탕진해 버릴 때가 많았으니까.
 서태양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누군가를 뒤쫓는 일도 하루에 몇 번씩 욕설이 절로 나오는 힘든 일이거늘, 끝없이 쫓겨 다니는 일이야 말로 사람 할 짓이 아니었으니까.
 “들어오게.”
 서태양이 더는 사양하지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흑사가 안내한 곳은 평소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뒤쪽 밀실이었다.
 그곳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러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눈에도 비싸고 귀해 보였다.
 명검(名劍)과 보도(寶刀), 신궁(神弓)들.
 가령 창이라면, 무거운 철창(鐵槍)이 아니라 가벼우면서도 더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창이 세워져 있었다.
 분리, 합체해서 사용할 수 있는 한 쌍의 단창(短槍)도 눈에 띄었다.
 하다못해 던지기용 비수라도 일반 비수가 아니었다. 날의 예리함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고, 비수의 무게 배분 역시 완벽한 것들이었다.
 막 쓰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
 젠장! 이 비싼 것을 막 쓰고 버리는 사람들도 있겠지.
 한옆에는 호위갑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떤 것은 두꺼운 갑옷 형태로, 또 어떤 것은 속옷처럼 얇게. 당연히 얇을수록 비쌀 것이다.
 서태양이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은 얼마나 하는 겁니까?”
 “십칠만 냥이라네.”
 예상치 못한 비싼 가격에 서태양이 뜨악했다.
 하긴 누군가의 목숨 값은 그보다 훨씬 더 비쌀 수도 있겠지.
 문득 청목방주 놈이 이런 호위갑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고 가능한 얼굴을 공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젠장, 철면피 같은 놈이라서 얼굴이 더 단단할지도 모르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흑사가 구석의 장식장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서 진열대에 올렸다.
 “암기는 대부분 일회성이지만 그 값이 결코 싸지 않다네. 오히려 검이나 도보다 더 비싼 것들이 많지.”
 서태양은 그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암기는 태생적으로 누군가를 반드시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
 암기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튀어나온다.
 암기는 곧 누군가의 생명이다.
 아마도 암기가 비싸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흑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네도 알다시피 강호에는 금용암기들이 있네. 사용하면 무림공적으로 몰리는 암기들이지.”
 대부분 치명적인 독이 발린 암기들로 강호에서 사용이 제한된 것들이었다.
 근래 금용암기를 사용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 없다. 강호인들 스스로가 워낙 엄격하게 규제했기 때문이다.
 “금용암기가 아닌 것들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네.”
 비로소 흑사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작은 원통으로 생긴 암기였다.
 “바로 염라속이지.”
 일전에 조만호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이보다 훨씬 강력한 것들도 있네. 하지만 대부분 비현실적인 액수지. 누가 뭐래도 현실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암기는 염라속이네. 쉽게 사용할 수 있고 효과는 확실하지.”
 “놈이 염라속에 당할까요?”
 서태양의 마음속에 불쑥 든 의구심은 자신이 그것을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왠지 이것으로 염천광을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자넨 설마 청목방주가 염라속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저는 피했거든요. 그게 만약 운이었다면, 놈에게도 그런 운이 없으리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굳이 자신이 염라속을 피한 이야기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아닙니다.”
 “흐음. 염라속으로 불안하단 말이지. 좋네, 잠시 기다리게.”
 흑사가 다시 앞서의 장식장으로 가서 또 다른 상자를 꺼내왔다.
 “정 걱정이 된다면 이것을 가져가게.”
 상자를 열자 안에는 똑같은 염라속이 들어 있었다. 다만 모양과 재질이 조금 달라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폭뢰염라속(爆雷閻邏速)이네. 염라속의 일차개량형이지. 일반이 삼보살이라면 폭뢰염라속은 칠보살(七步殺)이라네. 세 걸음이 아니라 일곱 걸음이 떨어진 곳에서도 상대를 죽일 수 있지.”
 “일차라면 또 다른 것도 있습니까?”
 “물론이네. 최근에 나온 광폭염라속(狂暴閻羅速)이 있다네. 성능이 더 개선되어서 십보살(十步殺)이 되었지. 물론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서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물건이지.”
 서태양은 내심 깜짝 놀랐다.
 자신도 그렇고 주위 동료들은 삼보살까지만 알았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 보다 강한 위력을 가진 것이 있었고, 또 그것보다도 더 강한 위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단 작은 암기의 세계도 이러할진대 진짜 고수들의 세계는 또 얼마나 광대하고 신비로울까?
 “그런데 제게 개량형으로 주셔도 됩니까? 그냥 원래 것으로 가져가겠습니다.”
 값이 비싸도 한참 비쌀 것이다.
 “괜찮네. 이것으로 가져가게.”
 흑사가 억지로 그것을 건넸다.
 굳이 사양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서태양은 순순히 받았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보답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가 베푼 일을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사용법은 간단해. 여기 아래에 안전장치가 있네. 이걸 옆으로 재껴서 푼 후에, 상대를 겨누고 여기를 누르면 발출된다네.”
 서태양이 사용법을 제대로 기억했다.
 “한데, 이것이 비록 금용암기는 아니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죽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게 될 거네.”
 “괜찮습니다.”
 정정당당? 그렇게 이길 생각 추호도 없다.
 상대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비겁함을 넘어 추악하게 사는데, 왜 내가 정당하게 놈과 싸우겠는가?
 뒤통수에 설 기회가 오면 그냥 갈겨버리고 나올 작정이다.
 이곳에 오는 길에 소식을 들었다.
 북창문에서 다시 연회를 열고 그곳에 염천광을 초대했다는 것을.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연회를 연다고?
 그래, 한 번 열어봐라.
 너희가 내게 연회에서 살수짓을 했다고 뒤집어 씌웠지?
 딱 너희들이 소문낸 대로 살아주마.
 네 아들이 연회에서 시작한 일이니 연회에서 끝장내주마.
 다시 말하지만 놈과 양패구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완벽한 기회를 얻어서 놈을 죽인 다음, 이곳을 뜰 작정이다.
 “한데 왜 생각이 바뀌었나?”
 “제가 구해준 시비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여 죄책감이 든다면 그러지 말게.”
 “아뇨. 분명 그녀의 죽음에는 제 책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책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서태양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놈이 죽인 상대가 강호인이었으면…… 어쩌면 그냥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욕이나 실컷 하면서요. 하지만 상대는 무공 한 자락 할 줄 모르는 여자입니다.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인간 세상에는 인간들만 살아야지요.”
 잠시 서태양을 응시하던 흑사가 처음에 내놨던 일반 염라속도 함께 내밀었다.
 “이것도 가져가게. 필요할 걸세.”
 “아닙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여자 아이, 저승길 가는 노잣돈이라고 생각하게.”
 그래도 망설이자 흑사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난 장사꾼이네.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네. 그러니 넣어 두게.”
 서태양은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대신 반드시 이번 일을 성공시키리라 결심했다.
 “일을 끝낸 후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세.”
 서태양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지금까지의 싸움과는 다른 싸움이다.
 지금까지는 조직 내에서 내려온 명령만 수행했다. 악인을 처단하고자 하는 의지는 분명 확고했지만, 그 악인을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대정협이란 조직에서 내려온 명령.
 하지만 청목방주를 죽이려는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
 이도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괜히 이번 일에 얽히면 그의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까.
 
 그렇게 서태양이 나가고 나자 뒤쪽 문에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태양과 비슷한 또래의 사내였다. 그는 흑사 아래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융(融)이었다.
 “자그마치 십일만 냥짜리를 만 이천 냥에 파셨군요. 거기에 염라속까지 덤으로 주시고요. 심지어 외상으로 말입니다. 그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제자에게 흑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사를 하다보면 때론 손해도 보는 법이지.”
 “너무 큰 손해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이익이라 여기고 있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가진 일부와 상대가 가진 전부를 바꾸지 않았나?”
 “궤변이십니다.”
 여전히 융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흑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차분했다.
 
 ***
 
 연회는 인파로 붐볐다.
 이번 연회는 초대장이 필요 없었다. 청목방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누구라도 참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태화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강호인들이 대다수 참석했다.
 호기심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청목방과 연줄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감히 청목방의 소방주를 건들다니,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구려.”
 “흉수는 바로 대정협의 무객이라고 하더이다.”
 “한낱 무객 따위가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곧 붙잡혀서 참살 당하게 되겠지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모두들 청목방의 눈치를 보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회장 곳곳에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청목방에서 나온 고수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백 명에 달했다.
 염천광이 청목방의 주력을 끌고 나온 이유는 강호의 여론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서는 힘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일백이나 되는 고수들이 곳곳에서 기세를 드러내자 모두들 위압감을 느끼며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속으로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일단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들은 이런 것이었다.
 “청목방주님이야 말로 강호의 일대영웅이시지.”
 “청목방이야 말로 강서제일방이지.”
 정의는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었다.
 온갖 군상들이 북적대는 그곳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인피면구를 쓴 서태양이었다.
 
 ***
 
 화려하게 꾸며진 객청에 주객이 전도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상석에 앉은 사람은 청목방주 염천광이었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좁힌 사람은 북창문주 주백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니네.”
 “일전의 불미스러운 일은 죄송합니다.”
 주백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염천광이 호탕하게 말했다.
 “괜찮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주백은 안다. 이번 사건은 염천광의 인생에 ‘절대 그럴 수 없는’ 혹은 ‘그럴 수는 있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범주에 속해 있다는 것을.
 “흉수 놈은 곧 붙잡힐 겁니다.”
 염천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이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불러들이며 화제를 돌렸다.
 늘씬한 시비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나무상자가 들려 있었다.
 주백은 염천광의 시선이 시비의 얼굴과 몸을 훑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염사독 못지않은 색정광임을 알고 있었다.
 시비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들어오게 한 것도 그 이유다.
 주인의 시커먼 속도 모른 채 여인은 공손히 나무상자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이게 뭔가?”
 “먼 길에 피곤하실 텐데, 보신하시라고 준비했습니다.”
 주백이 나무상자를 열었다.
 안에든 것을 확인한 염천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구엽신선초인가?”
 “그렇습니다.”
 “하하하하하, 좋군. 아주 좋아.”
 염천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구엽신선초는 군사 방군이 예상한 백년하수오보다 훨씬 등급이 높은 영약이었다. 당연히 효과도 더 좋고 값도 비쌌다.
 반 갑자 내공을 단숨에 얻을 수 있는 대단한 영약이 아니던가!
 주백은 염천광의 기쁨에 날개까지 달아주었다.
 “복용하시는 데 도움이 되시라고 조금 전 그 아이를 들여 시중들게 하겠습니다.”
 선물이 하나가 아님을 알아차린 염천광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 제7회 징벌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다섯 명의 청목방 고수들이었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그들은 염천광의 수행무인들이었다.
 그곳으로 숙수 복장을 한 사내가 수레를 끌고 왔다.
 “멈춰라!”
 북창문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사님들께서 시장하실 듯해서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과연 수레에 실린 것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이 지역에서 제일가는 선배 숙수분이 만든 요리라 아주 맛이 괜찮습니다.”
 “그래?”
 제일가는 숙수란 말에 무인들의 호기심이 동했다.
 그들 중 하나가 은침으로 요리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
 또 다른 무인이 숙수의 몸을 수색했다. 아무런 무기도 나오지 않았고 음식에도 독은 들지 않았다.
 그때 독을 확인하던 무인의 시선이 작은 원통에 머물렀다. 음식 옆에 대여섯 개의 원통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뭐냐?”
 “젓가락 통입니다. 위생을 생각해서 이곳에 담아 쓰고 있습니다.”
 원통을 열자 그 안에서 젓가락이 나왔다.
 “자, 그럼 드시지요.”
 숙수가 또 다른 원통을 열어 사내들에게 젓가락을 나눠주었다.
 “전 안에 계신 분께 음식을 드리러 가겠습니다.”
 숙수가 다시 수레를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해라. 안에 계신 분은 예민하신 분이니까.”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숙수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건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염천광은 시비여인의 몸에 올라타서 개처럼 헐떡대고 있었다.
 “망할 년!
 염천광이 여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짜아악!
 이미 여러 차례 얻어맞은 여인의 뺨은 시뻘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눈빛 뭐야? 내가 싫어?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 이 하찮은 년아!”
 “아니에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짝! 짜악!
 무지막지한 손찌검에도 여인은 속수무책이었다.
 염천광의 시선이 탁자에 놓인 목곽을 쳐다보았다.
 여인도 차지하고, 영약도 차지하고.
 “크하하하하하!”
 이게 권력의 힘이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는!
 “이게 사는 맛이지!”
 괘락이 깊어질수록 여인을 향한 손길이 더욱 거칠어졌다.
 폭행과 겁탈이라는 천인공노한 짓이 벌어지는 방문 앞을 지키는 무인이 있었다.
 그는 수행무인들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난 이였다.
 염천광은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악행을 저지를 때면, 언제나 이 호위만을 곁에 두었다.
 사내는 안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비명에도 못들은 척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안의 상황을 상상하며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공은 강했지만 인성은 제 주인을 꼭 닮은 자였다.
 그때 그곳으로 숙수가 걸어왔다.
 사내가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며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
 다가온 무인이 허리를 숙인 채 공손히 말했다.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필요 없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라 간단히 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무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오너라.”
 따로 수색은 할 필요가 없었다. 입구에서 출입하는 자들의 몸수색을 철저히 하고 있었으니까.
 숙수가 식판에 놓인 원통을 보며 물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젓가락 통입니다. 열어 보시면 이 안에 젓가락이 들어 있습니다.”
 숙수가 원통을 들었다.
 “이렇게 돌리고, 여기를 누르면.”
 쇄애애애액! 퍽!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사내가 가슴이 꿰뚫리며 쓰러졌다.
 숙수의 손에 들린 것은 염라속이었다. 그는 바로 서태양이었다.
 서태양은 염라속과 비슷한 모양의 원통을 여러 개 구했다. 원래는 향(香)을 담는 통이었다. 그것을 젓가락 통으로 위장하면서 염라속도 같은 색을 칠해서 위장한 것이다.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번 연회를 위해 태화의 모든 숙수들을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서로 얼굴을 다 알지 못할 테니까. 바쁘고 혼잡한 틈을 타서 음식을 챙겨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서태양이 문 앞에 쓰러진 시체를 옆으로 치웠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다. 이 문 앞을 지키고 서는 인생을 선택했을 때, 이미 그의 운명에는 ‘응보(應報)’란 이름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졌으니까.
 서태양인 음식 옆에 놓인 마지막 원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염천광은 여전히 헐떡거리고 있었다.
 침상 위의 여인은 몸이 축 늘어져 숨을 거둔 후였다. 계속되는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망할 년! 이 비루한 년이 누구 마음대로 뒈져?”
 흥분한 상태로 욕설을 퍼붓느라 밖에서 난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이다.
 서태양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제야 누군가 방에 들온 것을 알아차렸다.
 “너 뭐야?”
 염천광이 여인의 몸에서 벗어나며 버럭 소리쳤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는 당황했다.
 “너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고 여길 들어와?”
 서태양이 일곱 보쯤 되는 곳에 멈춰 섰다. 일곱 보만으로도 충분한데,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두 보 더 다가선 것이다.
 “인간 말종 쓰레기지.”
 “이 새끼가!”
 “그렇게 욕심이 많다면서? 그래서 내 전 재산을 바치러 왔다.”
 “뭐?”
 복잡한 염천광의 머릿속에 의아함이 더해지는 순간.
 “실컷 처먹어!”
 서태양이 손에 들린 폭뢰염라속이 발출되었다.
 
 푸아아아아아앙!
 퍼어억!
 
 염천광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서태양이 빠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혹시 살아 있으면 머리통을 박살내려 했다.
 하지만 염청광은 한쪽 얼굴이 뻥 뚫린 채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개새끼!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받아라!”
 지난 칠 년간 벌은 돈이 다 들어가는 한방이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앞으로 이 새끼 때문에 고통 받을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준 것이니까.
 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더 많았다. 세워놓고 귀싸대기를 한 백대쯤 때린 후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고수다. 폭뢰염라속만 믿고 있다가 혹시라도 놈에게 기회를 줄까 망설이지 않고 죽여 버린 것이다.
 그래, 죽였으면 됐다. 놈에겐 불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렇게 믿자.
 서태양의 시선이 침상 위를 향했다.
 침상의 여인은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날 자신이 구해줬던 시비의 얼굴이 겹쳐졌다.
 서태양의 두 눈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울림이 있었다.
 그르르르릉.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나직한 울림.
 서태양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
 밀려드는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
 
 내가 좀 더 강했으면.
 
 서태양이 죽은 시비의 눈을 감겨주고 이불로 몸을 덮어 주었다.
 그 앞에서 합장하며 진심으로 기원했다.
 “부디 더 좋은 세상에서 환생하시기를. 그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사십시오.”
 이제 떠나야 한다.
 서태양이 서둘러 벽에 박힌 암기를 뽑았다.
 어차피 다시 쓸 수는 없지만, 흔적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암기를 염라속 통에 담은 후 품에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 나오려는데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상자에 눈길이 갔다.
 뭐지?
 안을 들여다본 서태양이 깜짝 놀랐다.
 “구엽신선초!”
 다른 영약은 몰라도 아홉 개의 잎을 가진 구엽신선초는 알고 있었다. 피 냄새를 몰아내는 강한 향만으로도 그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서태양이 힐끗 염천광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넌 이승에서 많이 해먹었으니 저승은 노잣돈 없이 가도 되겠지?”
 서태양이 상자를 닫아 품에 챙긴 후 방을 나섰다.
 
 서태양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이제 이대로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연회였기에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건물만 나가면 된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청목방 무인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날렵한 것이 상당한 고수처럼 보였다.
 서태양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태연히 걸어갔다.
 사내와 막 스쳐지나가는 순간.
 “잠깐!”
 사내의 외침에 서태양이 발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들려오는 날선 목소리.
 “너 누구지?”
 서태양이 천천히 돌아서서 태연히 행동했다.
 “전 주방의 숙수입니다. 무사님께 음식을 가져다드리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래?”
 서태양은 보았다. 사내가 코를 벌름거리고 있음을.
 냄새를 맡고 있다!
 어딘가 옷에 피가 튀었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품 안에 든 구엽신선초의 향을 맡았을 수도 있다.
 위기본능이 요동치며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움직이면 살고, 얼어붙으면 죽는다!
 쉬익.
 사내가 반쯤 검을 뽑는 순간, 서태양이 한 발 먼저 사내를 덮쳤다.
 퍽!
 서태양의 팔꿈치가 사내의 얼굴에 적중했다. 턱이 돌아가며 비틀거렸지만 사내는 쓰러지지 않았다.
 사내가 마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하며 서태양이 다시 한 번 쇄도했다.
 서태양의 머리통이 사내의 얼굴을 박치기했다.
 뻑하는 소리를 내며 사내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심하게 벽에 부딪쳤지만 사내는 쓰러지지 않았다.
 “이 새끼가!”
 다시 검을 내지르려는 그때, 한 발 먼저 서태양의 몸이 붕 날았다.
 꽈직!
 서태양의 무릎이 반쯤 기울어져 있던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제야 사내가 무너지며 정신을 잃었다.
 서태양이 입구 쪽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건물만 나가자!
 모퉁이를 도는 순간 서태양이 발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안으로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앞서 사내와 싸우는 소리를 누군가 들은 모양이었다.
 서태양이 다시 왔던 복도를 내달렸다.
 젠장!
 복도 끝방이 열리며 사내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퍽!
 달리는 기세를 살려 서태양이 붕 날아서 사내의 턱을 찼다.
 사내가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기절했어야 할 타격인데, 사내가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이 건물 어디에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달려들어 한 방 더 때리면 기절시킬 수 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서태양이 곧장 이층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뒤에서 신경질적인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이층 복도를 내달리며 뛰어내릴 창문이 있는지 찾았다.
 하지만 이층 복도 쪽에는 아예 창문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아무 방문이나 열고 뛰어들었다.
 “꺄아아악!”
 방에 있던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서태양이 벽에 난 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창이 너무 작아서 그곳으로 나갈 수 없었다.
 다시 서태양이 방을 나서서 삼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만약 복도에 창이 있다 하더라도 삼층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운이 좋아야 발을 삐지 않고 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층에도 창문은 없었다.
 빌어먹을!
 다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뒤따르던 자들은 방을 수색하면서 올라오고 있었기에 곧장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사층에도 창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서태양은 알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철저히 외부와 격리된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입구가 틀어 막히면 나갈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층에서 사내들 발걸음 소리가 다급히 들려왔다.
 그야말로 붙잡힐 위기에 빠진 것이다.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방문이 열리며 한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북창문주의 딸 주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서태양은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를 따라 뛰어들었다.
 그녀가 침상으로 다가가서 구석에 튀어나온 장식을 건드렸다.
 드르륵.
 그러자 침상이 아래로 열리며 비밀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통로로 나가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어요”
 “왜 나를 돕는 거요?”
 주양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언니는 자결하지 않았어요. 언니는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 말에 서태양은 상대가 왜 자신을 돕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주양은 언니처럼 따르던 시비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이지 청목방의 행태에 치를 떨고 있었는데, 아버지인 주백은 청목방주에게 또 다른 시비를 바친 것이다.
 안절부절 못하고 시비가 끌려간 방 주위를 맴돌던 그녀는 서태양이 수행 무인을 죽이고 침입하는 것을 본 것이다.
 “복수해줘서 감사해요.”
 “별 말씀을.”
 그녀는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탈출을 도운 것이 밝혀지면 아버지는 물론이고 자신도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결과를 생각하면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이 일은 죽은 그녀를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잘 가세요.”
 “고맙소.”
 서태양이 통로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침상이 다시 닫히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서태양은 저 멀리 보이는 밝은 빛을 향해 빠르게 미끄러졌다.
 
 
 # 제8회 구엽신선초
 
 북창문을 빠져나온 서태양은 인근 민가의 한 허름한 창고로 숨어들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이곳에 숨겠다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예전에 우연한 기회에 이곳 민가의 창고에 주인이 쓰지 않는 지하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곳이었는데, 주인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때 서태양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집을 짓게 되면 이런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거기에 굴을 파서 탈출로까지 만든다면 금상첨화겠다고.
 어쨌든 이곳 지하실은 그냥 봐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었다.
 “후우.”
 지하실에 숨고 나서야 서태양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바깥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강서오대방파에 속한 청목방의 방주가 살해당했으니,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우선 이곳에서 며칠만 숨어 지내면 놈들은 자신이 태화를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고, 외부수색을 강화할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기를 바라며 당분간 이곳에서 숨어 지내는 거다.
 서태양이 품에서 나무상자를 꺼냈다. 다행히 구엽신선초는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이걸 팔면 얼마나 될까?
 언젠가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일단 잎만 아홉 장 붙으면 일단 십만 냥에서 시작한다고.
 최하품이 그런 것이니까 품질에 따라 이십만 냥, 혹은 삼십만 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냥 십만 냥이라고 하자.
 십만 냥.
 단순 계산만으로 평생 일해도 벌 수 없는 돈.
 정말 돈 걱정하지 않고 여생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경치 좋은 산자락에 작은 장원 하나 사고, 여러 전장에 분산해서 돈을 넣어둔 다음, 하고 싶은 것 하면서, 강호유람이나 다니면서 사는 거다.
 굳이 산동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다.
 하늘엔 천당(天堂), 땅에는 소항(蘇杭)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소주(蘇州)와 항주(杭州)가 아름답고 좋다는 뜻이다. 그곳에 가서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아볼까?
 아, 생각만 해도 좋다.
 이 구엽신선초를 어떻게 처분하느냐고? 그야 방법이 있지.
 흑사가 처분해 줄 것이다. 그라면 값도 제대로 쳐 줄 것이고.
 못 다준 돈도 갚고, 남은 돈으로 멋지게 사는 거다.
 하지만 채 반 각이 지나기도 전에, 서태양은 한 가지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밀폐된 공간에 있으니 구엽신선초의 향이 진하게 나고 있었던 것이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였지만, 문제는 그 향이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추적자들은 자신이 구엽신선초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안 돼! 어떻게든 이 향을 없애야 해.
 서태양이 서둘러 상자를 닫았지만 그래도 향이 흘러나왔다.
 탈출하는 중에 충격을 받았는지 뚜껑이 꽉 닫히지 않았다. 게다가 반대쪽 모서리는 깨어져 구멍이 나 있었다.
 서태양이 겉옷을 벗어 상자를 칭칭 감쌌다.
 하지만 그럼에도 향이 새어 나왔다.
 사실 얼마나 진하게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좁은 그 공간은 구엽신선초의 향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태양이 주위를 살폈다. 땅에다 묻을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닥은 흙바닥이 아니라 돌바닥이었다.
 조만간 이 집에도 청목방 무인들이 들이닥칠 텐데.
 서태양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론 운이 좋으면 그냥 지나쳐 갈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향이 많이 퍼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서태양은 이제 불안과의 싸움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냥 확 먹어 버릴까?
 차라리 지금 복용해 버리면 놈들이 들이닥칠 때쯤이면 바깥으로 흘러나간 향은 모두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마음이 급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망설이는 이유가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태양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는 내공이 없었다.
 보통 강호인이라고 하면 일류든 삼류든 내공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태양은 내공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운기조식을 해도 내공이 쌓이지 않았다.
 무관에서 배운 기본적인 토납법(吐納法)이라서 그런가 싶어, 다른 호흡법을 배워보았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같은 구결로 연마를 한 다른 사람들은 단전에 내공이 쌓였다.
 느리게라도 쌓이면 소질이 없나보다 할 텐데, 애초에 몸 내부에서 아무런 내기(內氣)가 느껴지지 않았다.
 열심히 부채질을 해도 차갑게 식어버린 아궁이 같은 느낌.
 주위에서 알게 될까봐 다른 지역까지 가서 이름난 의원들에게 진맥을 받아도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태양이 살아남은 것은 내공 때문이 아니라 싸움에 대한 감각과 집중력이 뛰어나서였다.
 그래서 서태양은 상급 무객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리 싸움에 대한 감이 좋아도 진짜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평범한 삶을 꿈꾸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상급 무객이 될 수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이니 고민이 될 수밖에.
 구엽신선초를 복용했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원래 영약은 심법이나 복용자의 재능과 체질, 운용하는 심법에 따라 흡수하는 양이 달랐다.
 당연히 재능이 뛰어나고 상급의 심법일수록 영약이 가진 최대의 효과를 얻었다.
 그 기준에서는 서태양은 최악이었다. 심법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었고, 단전에는 한줌의 내공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운기조식의 효과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강력한 유혹이 들었다.
 이 향을 없애려면 당장 먹어 치워야해!
 명색이 영약인데. 복용하면 이제부터라도 내공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붙잡히면 빼앗기게 될 거다.
 뭐든 아끼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그래, 설령 내공을 못 쌓으면 무병장수라도 하겠지.
 
 그 뜨거운 유혹에 맞서는 찬물 한 바가지.
 
 돈만 날려!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걸?
 무병장수? 지금도 충분히 건강하잖아? 너무 건강해서 탈이지.
 내공만 있으면 뭐해? 무공이 구리고 후진데.
 
 상반된 두 유혹 사이에서 서태양은 갈등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 때, 서태양의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들.
 바로 앞서 죽은 두 시비였다.
 왜 이 순간에 그녀들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좀 더 강했다면. 그랬다면 모두를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팽팽한 균형을 이루던 저울 한쪽에 간절함이 올려졌다. 분노와 서글픔이 더해졌다.
 “그래,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먹자! 그래서 제발 강해지자!”
 서태양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것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맛은 쌉싸름했고 향은 강렬했다.
 미친 짓이 될지, 잘한 짓이 될지 이제 알게 될 것이다.
 한 잎, 두 잎, 세 잎. 잎도 뿌리도 모두 남김없이 먹었다. 잔뿌리 하나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약효는 즉각 나타났다.
 곧바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태양이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래봤자 기본적인 토납법이었지만, 구엽신선초를 내공으로 녹이려면 그것이라도 해야 했다.
 호흡을 시작하자 뜨거운 기운이 온몸 혈맥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헉!”
 서태양이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몸속에서 어떤 기운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라운 일이 계속되었다.
 스스스스스스슷.
 서태양의 몸이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마치 화선지에 먹이 번져나가듯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온몸의 혈맥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반 갑자 내공을 모두 흡수했다. 아니, 반 갑자에서 몇 년의 내공을 더 흡수했다.
 그야말로 구엽신선초가 지닌 모든 기운을 비틀어서 짜낸 것이다. 서태양의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서태양은 몸 안에서 그런 현상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지금 그는 엄청난 열기가 온몸의 혈맥을 휘도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태양은 왜 내공이 쌓이지 않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론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그래서 몸속 모든 혈맥과 혈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론만으로 알고 있던 혈맥을 이제야 제대로 느껴보는 첫 순간이었다.
 십이경맥(十二經脈)과 기경팔맥(奇經八脈)의 흐름을 직접 느껴보았고 삼백예순다섯 개의 혈도를 하나하나 되짚어 볼 수 있었다.
 혈맥을 생생히 느끼며 그곳을 물결처럼 흐르는 뜨거운 기운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 운기를 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것을 못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온몸을 일주천한 기운이 단전으로 향했다. 이제 그것이 단전에 반 갑자의 내공이 되어 쌓이게 될 것이다. 단전에 쌓이기 전까지는 아직 그냥 뜨거운 기운에 불과했다.
 이제 운기조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서태양이 짤막한 비명을 내뱉었다.
 “윽!”
 단전으로 통하는 혈맥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선천적으로 혈맥이 막힌 것이 아니었다.
 혈맥에 뭔가가 있었다. 공처럼 생긴 둥근 것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게 뭐지?
 그것은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뭉쳐진 것이었다.
 구엽신선초의 기운이 그것을 뚫으려고 세차게 밀려들었다.
 가려고 하는데 막혀 있으니 당연히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었다.
 “으으윽!”
 서태양이 이를 악물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내 몸에 왜 이런 것이?
 구엽신선초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원래 자신의 몸에 있던 것으로 구엽신선초를 복용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 수 없었으리라.
 서태양이 비명소리를 내뱉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혈맥을 막고 있는 둥근 기운은 반 갑자의 기운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아무리 몰아붙여도 그것은 뚫리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지만 서태양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고통을 참아내던 그때,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뚫는 것을 포기한 구엽신선초의 기운이 막혀 있는 둥근 기운 앞에서 새롭게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맙소사!
 서태양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경악했다.
 쉽게 설명하면 길을 커다란 공 같은 것이 막고 있었다.
 이제 그 길을 막은 공이 두 개가 되려는 것이다.
 안 돼!
 하지만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구우우우우우!
 결국 또 하나의 둥근 기운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 강력함의 차이가 있었다.
 뒤에 만들어진 기운이 그냥 돌이라면, 처음의 그것은 만년한철(萬年寒鐵).
 그야말로 구엽신선초 한 뿌리 정도의 기운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증유(未曾有)의 힘이 느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너무 큰 심력소모를 한 탓에 수마(睡魔)가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왜 내 몸에 저런 것이 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왜 자신이 내공을 쌓을 수 없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위안을 끝으로 서태양은 잠에 빠져들었다.
 
 
 # 제9회 신비한 기운
 
 “찾아! 아버지를 죽인 놈을 찾지 못하면 너희들도 다 죽을 줄 알아!”
 미친놈처럼 고함을 질러대는 사내는 염사독이었다. 그는 아직 턱이 다 낫지 않아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눈이 뒤집히면 눈에 보이는 것을 다 때려 부수는 성격임을 잘 알았기에 수하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하셔야 합니다.”
 염사독을 진정시킨 사람은 청목방의 군사 방군이었다.
 “지금 침착하게 되었소?”
 염사독이 청목방 내에서 유일하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방군이었다. 그는 염천광이 아끼던 사람으로 실제 방 내에서 큰 힘을 지니고 있었다.
 “대체 누구 소행이오?”
 “곧 밝혀낼 수 있을 겁니다.”
 “날 연회장에서 기습했던 그 새끼! 그놈이 틀림없소!”
 방군은 염사독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자는 아닙니다. 일개 대정협의 하급 무객 따위가 방주님을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암기를 썼다면서요?”
 “네, 염라속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염라속이라고요?”
 “아시다시피 염라속은 값이 비싸서 일개 무객 따위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도 두 개나요.”
 “그만한 돈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소?”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런 막대한 돈을 들이면서, 거기에 목숨까지 걸고 방주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대체 왜요? 설마 시비가 죽은 것을 복수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염사독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자신들의 기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모르는 사람을 위해, 그것도 미천한 시비를 위해 목숨을 건다?
 자신의 인생에선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때 염사독이 서태양의 얼굴을 떠올랐다.
 “그날도 놈은 시비를 위해 나섰소!”
 왠지 놈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
 “틀림없이 그놈이라고!”
 “알겠습니다. 놈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아무튼 본방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흉수를 찾고 있으니 곧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소방주님께서는 아버님의 뒤를 이어 방주의 자리에 오를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방주란 말에 염사독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비가 죽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표정에서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지만, 그래도 염천광의 눈치를 봐왔다. 세상은 안 무서웠지만 아버지는 무서웠다.
 이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보며 방군은 생각했다. 딱 그냥 이전 주인을 모시듯 모시면 될 것이라고.
 세상에는 호부호자(虎父虎子)도 있고 호부견자(虎父犬子)도 있으며, 이렇게 견부견자(犬父犬子)도 있는 법이다.
 아마도 방군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그 견부견자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견하(犬下)라는 것을. 유유상종, 초록동색은 자신의 삶에도 여지없이 적용되고 있음을.
 
 ***
 
 서태양은 꿈을 꾸었다.
 그는 절벽에 홀로 서 있다. 끝도 없이 떨어질 것만 같은 만장절벽의 끝.
 자욱한 안개가 주위를 흐르고 있었다.
 처음 와본 곳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후회하실 겁니다.”
 
 돌아보니 안개 속에 대여섯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 너머에 수십 명이 더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안개가 너무 짙어서 보이지 않았다.
 앞에 선 사람들도 형체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고수들이란 사실을.
 한 번도 직접 보진 못했지만 특급 무객들을 본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뒤따르는 또 하나의 느낌.
 자신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깊은 신뢰와 충성심.
 명령을 내리면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던질 것이란 믿음이 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서태양이 단호히 말했다.
 
 “아니, 난 후회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울려서 그런지 왠지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그러자 앞서 말했던 사내가 다시 말했다.
 
 “아니요,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그 말이 귓가에 크게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서태양이 잠에서 깨어났다.
 낯선 천장, 창고 지하실이었다.
 대체 얼마나 잔 것일까?
 난생 처음 꾸는 꿈이었지만 너무 생생했다. 안개 너머에 서 있는 이들의 숨결이 아직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으니까.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하긴. 요 며칠 겪은 무지막지한 일을 생각하면 어떤 꿈을 꾸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서태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뒤늦게 드는 영약 생각.
 아! 그렇지! 구엽신선초!
 단전 앞을 둥근 기운이 막고 있었고, 구엽신선초의 기운마저 그 앞에 뭉쳐진 것이다.
 제발 그것이 꿈이었기를!
 혹 떼려다 하나 더 붙인 것이 아니기를!
 그냥 단전에 반 갑자의 내공이 딱! 하고 있기를.
 서태양이 재빨리 몸을 살폈다. 그냥 몸 내부를 느낄 경지는 아니었기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러자 몸 내부를 느낄 수 있었다.
 안 돼!
 안타깝게도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두 개의 기운.
 단전으로 통하는 길목을 떡 하니 막고 있는 그것은 구엽신선초가 뭉쳐진 기운이었다.
 그 너머 또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잠력이 깃든 신비로운 기운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던 서태양이 눈을 반짝였다.
 어? 그런데?
 몸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
 서태양은 단전에 내공을 쌓는 것을 실패했음에도 몸 내부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는 못했던 일이다.
 몸 내부를 느낀 것도 이번에 구엽신선초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서태양이 다시 한 번 운기조식을 해보았다.
 그러자 미약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 기운이 남아 있어서였구나!
 구엽신선초가 뭉쳐지고 남은 기운이 혈맥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기운이 혈맥을 돌면서 서태양에게 몸 속 정보를 주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그 기운이 정찰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서태양은 안타까웠다.
 이 운기조식이 끝날 때에는 남아있던 기운이 단전을 향해 갈 테고, 결국 앞서 공처럼 뭉쳐진 구엽신선초의 기운에 흡수될 것이다.
 내공을 쌓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몸속의 혈맥을 느끼는 것만 해도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내상을 입으면 어디에서 탈이 났는지 곧장 알 수 있을 테니까.
 그 와중에도 혈맥의 기운은 단전을 향해 달려갔다.
 아, 안타깝지만 여기까지구나.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 그 기운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기운이 단전에 뭉친 구엽신선초에 닿는 그 순간이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아아악.
 기운이 흡수되지 않고 뭉쳐있던 기운을 한 번 감싼 후에 다시 떨어져 나와 온 몸의 혈맥으로 흩어진 것이다.
 그 순간 느꼈던 경이로운 경험.
 녹였어? 설마 녹인 거야?
 사악 감싸면서 분명 기운을 녹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제발 착각이 아니었기를!
 서태양이 다시 한 번 운기조식을 했다.
 오! 있다, 살아 있어.
 앞서 정찰 역할을 했던 기운이 다시 혈맥을 타고 전신을 돌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진기를 일주천했다.
 사아아악.
 단전을 향했던 기운이 다시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휘감더니 다시 떨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확실히 느꼈다.
 녹였다!
 둥글게 뭉친 기운을 녹인 것이다.
 정말 그 양이 너무 미약해서 녹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쉽게 예를 들자면, 어른 머리통만한 단단한 당과(糖菓)를 혀로 한 번 핥은 정도였다.
 하지만 서태양은 분명 단맛을 느꼈다.
 정말 미약하게나마 혈맥의 기운이 늘어난 것을 느낀 것이다.
 아! 이제 몸속을 살필 수 있다!
 서태양은 기뻤다.
 게다가 좋은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기분문제겠지만 몸이 더 가볍고 상쾌해진 것 같았다.
 단전에 내력이 쌓이는 것이 아니더라도, 몸에 도움이 된다면?
 그럼 운기조식을 할 맛이 날 것이다.
 미약한 효과? 변화가 있는 것이 어디인가? 지금까지 아예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다 녹일 수 있다면?
 구엽신선초를 다 녹이고, 그 뒤에 있는 신비한 기운까지 다 녹인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그 어마어마한 기운들이 단전으로 들어가서 내공이 된다면?
 그때까지 혈맥이 견뎌줄까?
 혈맥이 견딘다 하더라도 단전이 그 많은 기운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자신의 단전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온전히 내 힘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내 서태양이 고개를 내저었다.
 욕심이다!
 바다는 채워도 사람 욕심은 다 못 채운다는 말이 있다.
 그렇잖아도 마음에 분노가 이글거리는 요즘인데 욕심까지 부글부글 끓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없이 잘 살았으니 편하게 생각하자. 그냥 자연스럽게 몸이 흘러가는 대로 두자.
 반 갑자의 내공은 얻지 못했지만 대신 희망을 얻었다.
 “하하하하하!”
 서태양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허기가 지는 것을 봐선 몇 시진은 지난 것 같은데.
 서태양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몸 밖 세상을 정찰해야 할 순간이다.
 
 ***
 
 “감사해요, 양 어르신.”
 커다란 손이 능숙하게 농기구를 고치고 있는 것을 보며 촌부(村夫)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고쳐야 할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지 가져 오게.”
 태화지부 무인들의 병장기를 손봐주는 양억은 시간이 날 때면 인근 농민들의 농기구도 손질해주었다.
 도검을 손질해주는 실력만큼이나 농기구를 고쳐주는 손길도 뛰어났다.
 인근 주민들이 고마워하는 것은 그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찾아와도 한 번도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귀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인근 농민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분이가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겠군.”
 “그렇잖아도 걱정입니다요. 나이는 차는데, 마땅한 혼사자리가 없네요.”
 “원체 예쁘고 똑똑한 아이니 좋은 배필을 만나게 될 거네.”
 “그래야 될 텐데요.”
 “자, 다 되었네.”
 양억이 내민 농기구는 잘 고쳐진 것은 물론이고 새것보다 더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정말이지 이 기적 같은 솜씨에는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가져온 것은 잘 먹겠네. 고맙네.”
 촌부가 가져온 것은 찐 감자와 고구마였다.
 “그것밖에 대접을 못해드려서 송구하네요.”
 “별 말을 다하는구먼. 그럼 잘 가시게.”
 촌부가 다시 고마움을 표한 후 그곳을 떠났다.
 양억이 기지개를 쭉 켰다.
 그때였다.
 징.
 그가 발밑에서 작은 진동을 느꼈다.
 순간 그가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양억이 철방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구석에 세워진 낡은 병장기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철컥! 하는 소리가 나며 벽이 튀어나왔다. 그곳에 손바닥 모양이 파여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정교한 기관장치였다.
 양억이 그곳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벽면이 스르륵 부드럽게 열렸다.
 아무 것도 없는 벽.
 그곳에 한 자루의 도(刀)가 걸려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에 평범한 손잡이.
 언뜻 봐선 평범해 보였는데, 자세히 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도신의 색이 달랐다. 일반적인 쇠의 색이 아닌 그보다 짙은 검푸른 색이었다.
 날을 타고 흐르는 예리함.
 대상이 무엇이든 댕강 잘라버릴 것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보고만 있어도 베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뒷걸음질을 치게 만들었다.
 굳이 그런 날카로움이 아니더라도 칼은 자신이 천하에서 둘도 없는 신도(神刀)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었다.
 
 징―!
 칼이 홀로 울고 있었다.
 
 양억은 흥분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자만이 담을 수 있는 감격이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
 “드디어 깨어나시려는가?”
 하지만 이내 칼은 울음을 뚝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했다.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던 양억이 다시 병장기를 조작하자 벽이 닫혔다.
 벽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양억도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아,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근래 좀처럼 술을 마시지 않던 그였는데.
 “오늘은 한 잔 해야겠군.”
 미처 다 지우지 못한 흥분과 기쁨의 흔적이었다.
 
 
 # 제10회 심법을 수련하다
 
 서태양이 지하실에서 나와 보니 놀랍게도 사건이 있은 지 오 일이나 지난 후였다.
 장장 오 일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원래라면 허기가 져서 걷지도 못했어야 했다.
 구엽신선초가 얼마나 효험이 좋은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서태양은 숨어 있던 민가에서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여전히 태화 곳곳에 경계가 삼엄했던 것이다.
 청목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방파들이 청목방의 수색을 돕기 위해 속속 태화로 모여들고 있었다.
 사방에 범인의 용모파기(容貌疤記)가 뿌려졌다.
 다행히 사건을 벌인 날 인피면구를 착용했기 때문에 진짜 얼굴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사용했던 인피면구는 이제 버려야 했다.
 서태양은 쉽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추격자의 심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려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전장에서 돈을 찾아서 흑사에게 줘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믿고 일반 염라속이 아닌 폭뢰염라속을 외상으로 주었다. 거기에 덤으로 일반염라속도 주었다. 덕분에 무사히 일을 치를 수가 있었고.
 이대로 그냥 떠나버리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중에 돌아와서 갚는다고?
 세상일이 뜻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갚을 수 있을 때 갚고 가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다.
 하지만 당장은 정협금고에 가서 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추적자들이 가장 먼저 감시하는 곳이 전장과 객잔, 기루, 도박장 등이었으니까.
 한두 달은 더 지나야 태화의 경계가 느슨해질 것이다. 하긴 태화를 빠져나가는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쉬울 테고.
 그때까지 이곳 지하실에서 운기조식을 하며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녹이면서 버티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
 
 “자네, 정말 간도 크군.”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은 무송이었다.
 대정협 태화지부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바로 그다. 입 싼 무송.
 대낮에 태화지부 내 반점으로는 갈 수가 없어 야밤에 그의 집을 찾아온 것이다.
 그의 말처럼 큰 모험을 했다.
 아직은 태화 내 자신을 찾기 위한 수색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니까.
 태화의 뒷골목까지 속속들이 알았기에 경계망을 피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걱정해주신 덕분에.”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지난 칠 년간 태화지부에서 일하면서 무송의 집에는 처음 와 보았다.
 “아직도 안 떠나고 뭐하고 있는 겐가?”
 “염천광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자, 자네가 죽인 건가?”
 “당치도 않습니다. 제 실력으로 어떻게 염천광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굳이 이런 일을 알아봤자 그만 위험해 질 것이다.
 “자네가 염천광을 죽였다는 소문이 있었네.”
 당연히 그랬겠지. 그의 아들 염사독과의 일로 태화가 시끄러웠으니까. 당연히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올랐을 것이다.
 “난 솔직히 자네가 죽였기를 바랐지.”
 그 전에도 그는 염천광을 죽이면 영웅이 될 거라고 바람을 잡았었다.
 “워낙 적이 많은 자 아닙니까? 원한이 깊은 사람이 죽였겠지요.”
 “그렇겠지. 어쨌든 죽어 마땅한 자가 죽었으니 다행한 일이지.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겐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오래두고 먹을 수 있는 식량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최대한 많을수록 좋습니다.”
 왜 그런 식량이 필요한지 물어볼 법도 했는데 무송은 그러지 않았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게.”
 무송이 방을 나갔다.
 서태양은 그를 전적으로 믿었다.
 그가 나가서 청목방에 고발이라도 하면 꼼짝없이 잡혀가게 될 상황임에도 순순히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사람 일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럼에도 서태양은 그를 믿었다.
 무송이 선한 사람임을 믿는 자신의 본능을 믿었다.
 과연 무송은 그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가 식량을 한보따리 짊어지고 돌아온 것이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벽곡단과 육포, 말린 과일이라네. 넉넉히 구해왔으니 그냥 먹으면 한 달, 아껴 먹으면 두 달은 버틸 수 있을 거네.”
 “충분합니다.”
 그 정도 시간이 흐른 뒤라면 태화의 경계도 많이 해소될 것이다.
 “참, 그리고 이것도 받게.”
 고맙게도 무송은 부탁하지도 않은 것까지 준비해주었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가볍게 깔고 덮을 얇은 이불도 준비했네.”
 “아, 제게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서태양은 생각지도 못한 무송의 배려에 감격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마움이지만, 그래도 계산할 것은 정확히 해야겠지.
 “다 얼마입니까?”
 “쫓기는 처지에 돈이 있나?”
 “물론입니다. 걱정 마시고 받으십시오.”
 “하하, 그럼 받아야지. 대신 음식 값만 받겠네. 모두 스물일곱 냥일세.”
 “여기 있습니다.”
 돈을 건네며 서태양이 물었다.
 “왜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청목방에 저를 고발하면 큰돈을 받으실 수 있었을 텐데요.”
 “이 사람아, 내가 친구를 배신할 사람으로 보이나?”
 “아닙니다만, 저는 친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었나? 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당황한 채 눈만 껌벅였다.
 “혹시 나와 친구가 되는 것이 부끄러운가?”
 “그럴 리가요. 어르신께선 연세도 많으시고 강호 식견도 풍부하시고 해서. 저야 보잘 것 없는 칠 급 무객이고요.”
 “그렇게 따지면 나야 밥이나 짓는 외로운 늙은이 아닌가?”
 아, 그러고 보니 무송은 혼인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들었었는데, 잊고 있었다.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서, 그에게 행복한 가정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참으로 무심하게 살아왔구나.
 그는 친구라고까지 표현해 주는데.
 서태양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넨 좋은 사람이야.”
 서태양은 무송의 우호적인 눈빛에 담긴 깊은 정을 느꼈다.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서태양이 음식을 지고 방을 나서려는데 무송이 불쑥 물었다.
 “두렵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내가 실수로라도 자네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지 않나? 알다시피 난 태화에서 가장 입이 싼 사람이니까.”
 “그러셨습니까?”
 “몰랐나?”
 “전 입이 싼 게 아니라 식견이 넓으신 분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걸 아끼지 않고 전해주시는 분이라고요.”
 “하하하하.”
 무송이 기분 좋게 웃었다.
 물론 무송의 입이야 태화에서 제일 싸지. 하지만 적어도 친구를 파는 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따로 자신이 찾아왔다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사람들이 지켜주겠다고 마음먹으면 제대로 비밀을 지켜주는 법이다.
 무송의 기분 좋은 웃음을 뒤로 하고 서태양은 그곳을 나왔다.
 
 서태양은 수색망을 잘 피해서 창고 지하실로 무사히 돌아왔다.
 딱 한 달만 이곳에서 심법수련을 하는 거다.
 아쉬운 것은 자신이 익힌 토납법이 너무 기본적인 것이란 점이었다.
 상급의 심법이라면 그 효과가 엄청날 것이다.
 당과를 한 번 핥는 것이 아니라 톡톡 깨어먹을 수도 있을 텐데.
 아니지, 아니야! 왜 자꾸 욕심을 내려는 거냐?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 그냥 몸 내부를 공부하는 시간으로 삼자.
 그렇게 서태양의 최초이자 본격적인 심법수련이 시작되었다.
 
 ***
 
 며칠이 지나도록 흉수를 잡지 못하자 염사독의 짜증이 폭발했다.
 “대체 그깟 놈 하나 못 잡고 뭘 하는 겁니까?”
 그 분노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없었다.
 “아! 그 새끼를 못 잡으면 다들 날 병신취급 할 텐데.”
 방군이 좋은 어조로 그를 달랬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본방과 동맹관계인 많은 방파에서 무인들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곧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수색작전은 초반 며칠이 가장 중요했다. 그 며칠에 잡지 못하면 영원히 못 잡을 가능성이 높았다.
 ‘잡기가 쉽지 않겠군.’
 흉수의 배후를 추측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죽은 방주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서태양 그 새끼를 잡으세요! 틀림없이 그놈이니까!”
 염사독은 여전히 흉수를 서태양으로 여기고 있었다.
 방군은 서태양이 흉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고려했을 때 다른 경쟁문파나 원한이 훨씬 깊은 사람이 암살했을 가능성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서태양을 흉수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누군가 잡긴 잡아야 했으니까.
 염사독의 체면 때문이 아니라, 청목방의 체면 때문이었다.
 “방주 취임식은 내달 초에 하겠습니다.”
 “그렇게 늦게요?”
 염사독이 대놓고 싫은 내색을 드러냈다.
 “방주님께서 귀천(歸天)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흉수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방주직에 오르는 것은 보기가 좋지 못할 겁니다.”
 아직 자유다운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염사독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지. 빌어먹을! 계집을 품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군.’
 방군이 당분간 절대 여인을 만나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게다가 잔소리는 어찌나 많은지.
 염사독은 진심으로 방군이 못마땅했다. 정말이지 군사만 아니면 벌써 잘라버렸을 것이다.
 “취임식을 좀 더 당길 수는 없소?”
 “내달 초가 최대한 빠르게 잡은 길일(吉日)입니다.”
 염사독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방군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내일 당장이라도 즉위식을 할 것처럼 굴더니 자꾸만 미루는 것이 수상했다.
 ‘이 자식이! 혹시 딴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겠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욕구불만이 만들어낸 의심의 불씨 하나가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
 
 수련을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났을 때, 서태양은 혈맥에 녹아든 기운이 확실하게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내공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팔다리에 힘이 늘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몸이 가벼워지고, 경쾌해졌다. 근력과 더불어 민첩성도 늘어난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내공에서 나오는 무지막지한 힘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강호인에게 내공의 힘이란 가공한 것이다.
 바위를 부수고 절벽을 날아오르게 한다. 검기를 날리고 검강을 뿌리게 해준다. 검막(劍幕)을 치고 이기어검술을 날리는 것도 다 내공이 있어서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천.
 그것이 바로 내공이다.
 지금 서태양이 얻는 힘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원래 쌀가마니 하나를 들 것을 두 개를 들고, 아이 키만큼 뛰어오르는 것을 어른 키만큼 뛰어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육체가 조금 더 강해지는 정도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내공은 소모적이다. 단전에 있던 것을 꺼내서 쓰고, 다시 쓰려면 다시 내공을 모아야 하는 식이다.
 하지만 지금 얻고 있는 힘은 영구적으로 서태양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본연의 신체능력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실에서 햇빛도 제대로 쐬지 못하는 상황, 거기에 먹을 것도 부실했다.
 그럼에도 서태양의 몸은 더 튼튼해졌으며 눈빛은 맑아지고 있었다.
 이 효과가 언제까지 갈까? 언제까지 더 강해질까? 끝없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육체의 능력이 한없이 향상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느 정도까지 향상되다가 멈추겠지.
 그 최대치가 그야말로 최대치가 되길 바랄 뿐이다.
 
 다시 닷새 후.
 서태양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엽신선초를 녹이는 양이 아주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다시 비유를 하자면 당과를 핥는 혓바닥의 힘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혈맥을 돌던 기운이 파도처럼 단전으로 밀려갔다가 그 길을 막고 있는 기운에 부딪쳐 그것을 녹이고 돌아 나오는 셈인데, 파도의 힘이 점점 더 세지면서 녹이는 양도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원래라면 평생을 운기조식만 해도 구엽신선초의 기운조차 다 녹이지 못할 양이었다.
 하지만 만약 혈맥을 흐르는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진다면?
 다시 말해 파도가 거칠어진다면?
 열 번 운기해서 얻을 양을 한 번 해서 얻고, 백 번이 한 번이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다 녹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다 녹이면?
 이제 반 갑자의 힘이 담긴 파도가 밀려갈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서.
 지금보다 더 나은 심법을 구할 수만 있다면?
 서태양은 처음으로 ‘욕심’이 아닌 ‘현실적인 희망’을 보았다.
 
 
 # 제11회 결심하다
 
 “자넨 걱정도 되지 않는가?”
 무송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쏘아 보낸 상대는 이도였다.
 “뭐가요.”
 이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젓가락질만 계속했다.
 “친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 가느냐는 말이네.”
 “친구 누구요?”
 “서 무인 말일세. 자네와 찰떡처럼 붙어 다니던 서태양!”
 “친구 아닌데요.”
 “그럼 뭔데?”
 “동료지요. 같이 일하는 동료. 추객과 무객.”
 “이런 냉혈한(冷血漢) 같으니라고!”
 그러자 이도가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잘 보셨습니다. 저야말로 풍진강호를 고독하게 걸어가는 냉혹한 남자지요.”
 주위에서 듣고 있던 무객과 추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요? 잘 달아났겠지요.”
 이도의 말을 무시하며 무송이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가장 친한 친구를 조심하게!”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때 그곳으로 중년사내가 들어왔다.
 “여기 혹시 이도라는 분, 계십니까? 이곳에서 식사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무송이 이도를 향해 턱짓을 했다.
 “분은 모르겠고, 놈은 저기 있소만.”
 중년사내가 반가운 표정으로 이도에게 다가갔다.
 “이도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중년사내가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을 부르자 사내 하나가 의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이 들고 온 것은 호랑이 가죽이 덮인 서태양의 의자였다.
 사내는 바로 서태양의 집주인이었다. 방값을 받으러 갔다가 서태양이 남긴 서찰을 보고 의자를 전해주러 온 것이다.
 “서 무인이 떠나면서 이것을 친구 분께 전해주라고 하셨소. 그럼 전 전했습니다.”
 주인사내는 의자를 두고 가버렸다.
 멍하게 서서 의자를 쳐다보고 있는 이도 옆으로 무송이 다가왔다.
 “어떠신가? 냉혈한 선생.”
 “편해 보이네요.”
 “소감이 그뿐인가?”
 “그렇게 달라고 해도 안 주더니, 이제야 줘? 치사한 녀석.”
 무송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둑놈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더니?”
 “착하면 뭐합니까? 다들 이용이나 해먹으려 들죠. 저 밥이나 더 주세요.”
 “없네!”
 “그러지 말고 주세요.”
 “고독하고 냉혹한 우리 무사님, 이제 그만 젓가락 놓으시고 저 멀리 석양을 향해 떠나시지요.”
 무송이 홱 돌아서 주방으로 가버렸다.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숙수들에게 모두가 다 들리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밥 더 주지 마!”
 그래놓고선 무송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이도는 서태양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털을 쓰다듬고 있는 손이 보였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
 
 서태양이 심법수련을 시작한지 한 달이 되었다.
 한 달간의 수련.
 지난 한 달간 중원에서 이뤄진 모든 수련의 효과에 순위를 매긴다면?
 서태양은 장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십위 안에는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어쩌면 우승일지도 모른다고.
 심법수련의 효과는 확실했다.
 그의 육체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원래 가졌던 능력치가 열(十)이었다면 지금은 열다섯(十五)이 되었다.
 자그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체 능력을 절반 이상 향상시킨 것이다.
 더 빨라지고 힘도 강해졌다.
 서태양은 이렇게 효과가 확실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 워낙 가문 땅이었다. 이 한 달의 심법수련은 그야말로 해갈(解渴)의 단비가 되었던 것이다.
 뭐든 처음의 성장은 팍팍 표가 나는 법.
 이제부터 성장이 더딜 것으로 예상되었다.
 서태양의 목표는 두 배였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두 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태양은 한 달 더 수련을 결심했다.
 식량을 아껴 먹어서 아직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열악하고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것은 먹는 것이었다.
 삼시세끼 같은 음식을, 그것도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계속 먹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당장이라도 태화객잔으로 달려가 온갖 종류의 고기를 다 시켜놓고 먹고 싶었다. 기름진 손으로 술병 채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기게 해준 것이 바로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서태양은 절실히 깨달았다.
 힘이 없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직접 당해보니 알 수 있었다.
 힘이 없으면 혼자 조용히 사는 일조차 힘든 것이 이 강호임을.
 다행히 운기조식 자체는 아주 흥미로웠다.
 특히 몸속을 살펴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은 꽉 막혀 있었지만 나머지 혈맥은 소통이 원활했다.
 진짜 고수가 되려면 저 임독양맥을 뚫어야 한다고 들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명문가의 노고수가 혈육을 위해 많은 내공을 소모해가며 희생하거나, 대단한 영약을 얻는 기연을 얻어야만 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일반 혈맥이라도 이렇게 뻥 뚫려서 자유롭게 운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루.
 또 하루.
 반복되는 수련. 그 수련이 지루해질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냥 일반적인 수련으로 사람의 육체가 두 배 강해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할까?
 지금은 운기조식만으로 육체가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 그렇다면 그건 강해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당해도 싼 사람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딱 두 배만 강해지자!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그렇게 서태양은 심법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서태양은 두 달을 꽉 채운 후 밖으로 나왔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났고, 옷은 더러웠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피골이 상접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 그는 오히려 몸이 더 좋아진 상태였다.
 육체는 더욱 단단해졌다. 몸놀림은 빨라졌고 힘은 더 강해졌다.
 목표는 초과달성했다.
 원래는 두 배만 이루려고 했는데, 두 배 반을 이뤄낸 것이다.
 처음 서태양의 능력이 십이었다면, 이제 이십오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나무를 부러뜨려 보고 싶었고,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고 싶을 법도 했건만. 서태양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
 두 달의 수련을 통해 느낀 바가 많았다.
 마지막 식량을 먹으며 이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마음속에서 강한 울림을 들었다.
 
 더 강해지고 싶다.
 
 서태양은 인근 개울가에서 깨끗하게 목욕을 했다. 덥수룩한 수염도 깨끗이 깎고 머리도 정리했다. 나갈 때 입으려고 아껴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보통 정체를 감추려고 수염을 깎지 않거나 더러운 옷을 입고 거지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노련한 추격자들은 가장 먼저 그런 사람들을 주목한다.
 가장 좋은 것은 평범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표가 나지 않는, 말 그대로의 평범함.
 사건이 벌어진 지 두 달.
 태화에 아직까지 경계망이 쳐져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거의 포기단계이거나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져 있을 거다.
 원래라면 정협금고에서 돈을 찾아 흑사에게 준 후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태양이 향한 곳은 다른 곳이었다.
 
 ***
 
 “아아아아! 살아 있었구나!”
 서태양에게 매달린 이도가 과장되게 기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영원히 지는 태양은 없는 법이지!”
 “이렇게 막 고함질러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지?”
 “아, 미안. 너무 기뻐서.”
 이도가 그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녀석과 어울리지 않게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언제와도 깨끗한 녀석의 방. 이 이해할 수 없는 청결함이라니.
 “한데 왜 날 찾아왔어?”
 서태양이 아무 대답도 않고 가만히 그를 쳐다만 보았다.
 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의자 찾으러 왔어?”
 “왜? 벌써 팔았어?”
 이도가 움찔하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하나 남은 우정의 증표인데.”
 서태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에는 의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다른 방에 있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이도가 더욱 크게 웃었다.
 서태양이 불쑥 말했다.
 “돈 좀 빌려줘.”
 순간 이도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이거 왜 이래? 친구 간에 돈거래 하는 것 아니잖아? 서 무인,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나?”
 “전에 내 돈 빌릴 때는 그 액수가 우정의 척도라고 했잖아. 왜? 증표는 팔고 척도는 잊었어?”
 이번에는 이도의 두 눈썹이 추욱 처졌다.
 “그래, 친구 사이니까 솔직히 말할게. 사실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아프셔서 일전에 큰돈을 보냈어. 어떻게 해? 아프다는데.”
 “너 고아야.”
 “아, 그래?”
 “응.”
 “그건 또 언제 말했대.”
 이번에는 이도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정말 솔직히 말할게. 사실 나 도박에 빠졌어. 너 떠나고 나니까 인생에 낙이 없더라고. 그래서 재미삼아 한두 판하다 보니…….”
 서태양이 말을 자르며 물었다.
 “월패(月牌)가 높아, 일패(日牌)가 높아?”
 그러자 망설이지 않고 나오는 대답.
 “당연히 일패가 높지.”
 “그런 패 없어. 너 도박장 가본 적도 없지?”
 “…….”
 이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짜 솔직히 말할게. 나 여자가 생겼어. 그래서 그녀에게…….”
 “여자한테 돈 갔다 바치는 녀석들이 제일 한심하다면서.”
 “인생관은 바뀌는 거니까.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거지.”
 “그 바뀐 인생관에 우정도 포함된 모양이네.”
 “거기까진 확인을 안 해봐서.”
 “에잇, 자식아!”
 서태양이 이도의 머리통을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고는 흔들어댔다.
 “아앗! 숨 막혀! 아파!”
 “죽자, 죽어! 아버지는 편찮으시고, 도박에는 빠져 허우적대며 여자에게 돈까지 바쳐야 하는 인생, 살아서 뭐해. 차라리 죽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는지 이도가 아이처럼 웃었다.
 “헤헤헤.”
 서태양이 그를 풀어주며 함께 웃었다.
 “하하하.”
 그를 다시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래, 상대의 속마음을 잘 모르면 어떤가? 함께 있으면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잠시 기다려.”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이도가 방을 나서려 했다.
 “어디 가는데?”
 “돈 찾으러. 전장에 칠천 냥쯤 있어. 아는 후배들 몇 동원하면 얼추 만 냥까진 맞출 수 있을 거야. 얼마까지 필요해? 아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이도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자신은 이도가 돈을 빌리러 왔을 때, 이렇게 흔쾌히 전 재산을 빌려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빌려가며 돈을 빌려줬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따지고 물었겠지. 어디에 쓸 거냐고.
 하지만 지금 이도는 내게 묻지 않고 있다. 어디에 쓸 것이냐고.
 이 자식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돈 빌리러 온 것 아냐.”
 이도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괜찮아. 부담 안 가져도 돼.”
 “농담이었어.”
 “정말?”
 “그래.”
 이도가 휘청하더니 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그가 문고리를 붙잡고 울기 직전의 얼굴로 안도했다.
 “어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정말 빌려줘야 되는 줄 알고. 아아아, 다행이다.”
 서태양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도가 주저앉아 문에 기댄 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럼 왜 왔어?”
 이도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거울 같은 사람이야.
 
 이번에 수련을 하면서 서태양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동경 하나를 찾았다.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말했다.
 
 ‘달아나고 싶지 않아.’
 
 그 솔직한 마음의 울림을 이도에게 전했다.
 
 “난 달아나고 싶지 않으니까.”
 
 이 현실에서, 주어진 운명에게서.
 
 “강해져서 특급무객이 되고 싶어. 그래서 세상에서 진짜 없어져야 할 놈들을 다 없애고 싶다.”
 
 여기 왜 왔느냐고?
 이 말을 하기 위해서다.
 
 “너, 나를 위해 특급추객이 될 수 있겠어?”
 
 
 # 제12회 백리추종
 
 보통의 칠 급 추객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특급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그들이 상대하는 악인들은 괴물들이라고! 수십, 수백 명의 무인들을 한 자리에서 썰어버리는 가공할 것들이야! 사람 죽이라는 명령을 밥 먹다가 물 떠오라는 식으로 내리는 놈들이라고.”
 
 한바탕 쏟아낸 다음에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겠지.
 
 “그래, 마음이야 되고는 싶지. 하지만 어떻게? 너희는 무공이 기준이겠지만, 우린 진급체계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롭다고. 당장 경공술(輕功術)만 해도, 지금보다 다섯 배는 더 빨라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감수성까지 풍부한 성격이라면 이렇게 마무리 할 것이다.
 
 “도피생활을 한다고 많이 힘들었지? 이리와, 내가 안아줄게.”
 
 하지만 이도의 반응은 이랬다.
 서태양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칠년 전, 그를 처음 만난 이후 가장 진지한 눈빛이었다.
 서태양은 느꼈다.
 눈빛에 담긴 것이 뜨거운 격정임을.
 그는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온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앞서 서태양의 모든 느낌을 착각으로 만들었다.
 
 “좋아! 너만의 특급추객이 되어주지. 지금까지 일부러 칠 급에 머문다고 너무 힘들었어. 왜냐고? 당연히 우정 때문이지. 네가 칠 급인데 나 혼자 어떻게 위로 올라 가? 그래, 이젠 널 위해 특급추객이 되어 주마. 하하하, 기분 최고다!”
 
 말없이 그를 보던 서태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분이 날아가시는 것은 돈을 안 빌려줘도 되어서고. 어차피 내가 특급무객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말을 막 던질 수 있는 거고.”
 “하하하하.”
 이도가 웃었고, 서태양도 따라 웃었다.
 사실 노력만 한다고, 실력만 된다고 특급무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운명이란 놈이 자신을 그쪽으로 이끌어야 할 테니까.
 요즘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운명이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과연 내 운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어쨌든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너무나 후련했다.
 “그 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잖아?”
 이도의 말에 서태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목방.”
 태화에 놈들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해서, 청목방주가 죽은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한 자신이 염사독을 두들겨 팬 일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 염사독은 청목방의 방주가 되었다고 했다.
 이제 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는데, 자신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단칼에 죽여 버리고 싶었다.
 연회장에서 여인을 겁탈하려던 놈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놈인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겠는가?
 하지만 그를 제거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뒷감당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놈의 호위는 물샐틈없이 강화되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흉수가 잡히지 않은 상황.
 신체능력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봤자 기존에 하나를 상대할 것을 둘, 혹은 셋을 상대할 수 있게 된 정도다.
 결국 암살을 해야 하는데 암기를 살 수 있는 돈이 없다.
 결정적으로 아비인 염천광을 직접 죽였는데, 그 아들의 피까지 손에 묻히고 싶진 않았다.
 “청목방 내부 사정을 좀 알아봐 줘.”
 “어쩌려고?”
 “어린 염사독이 방주가 되었는데, 분명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있을 거야. 못마땅한 자들도 있을 테고.”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유도하자?”
 “그렇지.”
 “잘못해서 일이 꼬이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겠지.”
 “제대로 들은 거야? 이해당사자인 너 말고, 아무 죄도 없는 나도 죽는다고.”
 “그래, 친구와 함께 죽겠지.”
 “맙소사! 차라리 돈을 빌려달라고 해!”
 “청목방 내부 사정에 관해 알아봐 줘. 그 사이 난 처리해야할 일이 있어.”
 “아직 도와준다고 안 했어! 그리고 명령조로 말하지 마! 누가 대장인지 아직 안 정했잖아!”
 “그럼 나 먼저 간다.”
 서태양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에게 미안해서다.
 문 앞에 서서 서태양이 나직이 말했다.
 
 “날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생각 안 났어.”
 
 이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조금은 두려웠다.
 서태양이 문을 반쯤 열었을 때, 뒤에서 이도가 입을 열었다.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있어.”
 
 서태양이 천천히 이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도가 담담하게 물었다.
 
 “이 결정 후회하지 않겠어?”
 
 서태양이 확신에 찬 마음으로 대답했다.
 
 “난 후회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
 이윽고 이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우린 후회하지 않을 거야.”
 
 ***
 
 서태양이 저자에 들어섰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서태양이 태화객잔 벽에 붙어 있는 청목방의 수배전단 앞에 섰다.
 인피면구를 썼던 그 얼굴.
 바람에 찢겨 너덜너덜해진 그것은 사건은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사건은 진행 중일 것이다. 방주가 죽었는데 그냥 포기할 리는 없으니까. 아직도 흉수를 찾아 중원 곳곳을 뒤지고 있겠지.
 
 서태양이 도착한 곳은 정협금고였다.
 정협금고는 다른 강호인들은 상대하지 않고, 오직 대정협에 속한 무인들과 거래하는 곳이다.
 중원 곳곳에 지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정협 지부가 있는 곳에만 있었다.
 보통이라면 중원전장(中原錢莊)이나 대륙전장(大陸錢莊)과 같은 믿을 수 있는 전장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많은 대정협 무인들은 이곳을 이용한다.
 자신이 맡긴 곳 이외 지점에서는 돈을 찾을 수 없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에 돈을 맡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중원의 그 어떤 전장보다도 이자를 더 많이 주기 때문이었다.
 서태양은 대정협이 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전장을 운영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무객과 추객을 비롯한 모든 수하들을 더욱 옭아맬 수 있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번 돈을 맡긴다는 행위는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상징적인 일이다.
 큰 신뢰가 있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
 돈을 맡기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대정협에 대한 신뢰가 커지는 것이다.
 자유계약무인이란 소속감 부재의 단점을 정협금고란 해결책으로 만회한 것이다.
 대정협의 수장은 정말 똑똑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면 아주 똑똑한 사람이 머리 역할을 해주고 있거나.
 서태양이 담당 회계원 앞에 섰다.
 그는 몇 개월 전에 새롭게 바뀐 담당자였는데 바짝 마르고 신경질적인 외모에,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하고 정이 안가는 그런 사람이다.
 “돈을 찾으러 왔소.”
 자신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법도 한데, 그는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대했다.
 하긴, 자신을 찾는 이들은 청목방이지 대정협이 아니었으니까.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 세상 사람들이 다 무송 같진 않을 테니까.
 “이것을 작성해 주십시오.”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서태양은 찾아야 할 금액을 쓰는 곳에 만이천 냥이라고 썼다.
 월봉과 상여금, 여러 부수입들, 그리고 이자까지. 지난 칠년간 거의 쓰지 않고 모은 돈이었다.
 사내 혼자 살림에 무객 일하기 바빠 돈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고작 써 봤자 이도와 술이나 마시는 정도였다.
 시원하게 염라속 한 방 당기면서 다 써버린 전 재산.
 서태양은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살면서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류를 확인하는 회계원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놈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번 돈인지 알기나 하냐?
 아니, 녀석은 모른다.
 만약 안다면 이 멸치대가리 같은 놈이 나를 올려다보며 이 따위 말을 내뱉진 않을 테니까.
 “죄송하지만, 돈은 지급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태양은 깜짝 놀랐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돈을 지급해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유가 뭐요?”
 서태양은 정말이지 회계원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물론 이 정도로 그를 겁줄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우선 두 사람 사이의 철망은 검기로도 자를 수 없는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곳곳에 서 있는 무인들은 그야말로 일류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대정협 태화지부의 무인들이 아니라, 대정협 산하 정협금고 본점에서 직접 파견되어 나온 고수들이었다.
 같은 대정협 소속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남과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어느 전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큰돈이 오가는 이곳에서 쓸 데 없는 소동을 일으켰다간 개죽음 당하기 딱 좋다.
 회계원이 사무적인 어조로 이유를 밝혔다.
 “서명(署名)의 필체(筆體)가 다릅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근래 손을 다친 적이 있습니까?”
 “없소.”
 근래 여러 번 싸움이 있긴 했지만 손을 다치지는 않았다.
 “예전에 손을 다쳤던 적이 있었소. 그땐 서명이 조금 달라도 돈을 찾을 수 있었는데?”
 돈을 찾으려면 서명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자신을 증명하는 신분패를 제시해야 하고, 돈을 맡기면서 만든 서류와 암어(暗語)가 필요했다. 거기에 손바닥 장인까지 확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돈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서명이 조금 다르다고 돈을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꼬투리 잡고 있다는 뜻.
 이거 뭔가 수상한데?
 설마 내 돈을 지급하지 못하게 청목방에서 대정협에 압박을 한 것일까?
 서태양이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전장을 지키는 고수들은 처음 그대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별 다른 수상한 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청목방이 대정협에 압박을 가할 수는 없다. 청목방이 제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강서에서나 행세하는 중소방파다.
 그에 반해 대정협은 전 중원에 지단과 지부를 갖춘 대규모 조직.
 더구나 정협금고는 신용과 관련된 곳이기에 절대 외압이 먹힐 리가 없다.
 따라서 이곳에 청목방의 무인을 상주시킬 수도 없다. 정협금고에서 그 일을 허용할 리 없었으니까.
 그걸 확신했기에 이렇게 당당히 돈을 찾으러 온 것이고.
 그런데 왜?
 다음 순간, 서태양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회계원 사내를 향했다.
 
 이 녀석을 포섭한 것이라면?
 
 그러고 보니 몇 개월 전에 새로 온 놈이 아니던가?
 다시 말해 오래된 회계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회유나 협박이 쉬울 것이다.
 가만 있자, 이 자식 이름이 뭐였더라? 처음 만난 날 얼핏 들었던 그 이름이…… 아, 그렇지.
 오삼(吳三), 녀석의 이름이다.
 서태양의 귀신같은 기억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죄송하지만 규정상 한 가지라도 의심이 가면 정식으로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상급자가 와서 재확인을 한다는 뜻입니다. 한데 현재 상급자가 외부에 나가 있어서…… 내일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본장이 정한 규율에 따라 해드릴 터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태양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하지 않았다.
 “알겠소. 내일 다시 오겠소.”
 돌아서 나오던 서태양이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오삼이 자신이 서명한 것을 슬쩍 옆으로 챙겨두는 것을 보았다. 원래라면 당장 폐기처분해서 버려야 할 서명이었다.
 서태양이 못 본 척 돌아서 나왔다.
 이 자리에서 왜 그것을 버리지 않느냐고 따지면, 버리려고 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수상했다. 확실히 수상했다.
 만약 저 자가 청목방의 사주를 받았다면? 한데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혹시?
 서태양이 슬쩍 자신의 손바닥 냄새를 맡아보았다.
 순간 서태양의 표정이 확 굳었다.
 손바닥에서 나는 향은 추종향이었다. 보통 사람은 구별해 낼 수 없는 미세한 향이었지만 서태양은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추종향은 무객과 추객들이 악인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추종향이었던 것이다.
 검신 앞에서 칼춤 추고, 권왕 앞에서 주먹자랑 한다더니.
 이 새끼가 추종향을 내게 처발라?
 장인을 확인할 때 종이엔 손바닥을 가져다 댔었다. 거기에 추종향을 발라둔 것이 틀림없었다.
 추종향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다.
 지금 이것은 백리추종향이다. 백리까지는 추적할 수 있는 강호에 널리 사용되는 일반적인 추종향이다.
 물론 그보다 효능이 좋고 비싼 것들도 있다.
 천리추종향, 나아가 만리추종향까지.
 물론 만리까지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효과가 좋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급이 올라갈수록 당연히 비쌌고, 효과가 오래갔으며 추종향에 당한 것을 알아내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은 백리추종향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서태양은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그 미세한 향을 구별해 낸 것이다.
 정협금고의 회계원이란 놈이 같은 식구에게 이따위 짓을 해?
 서태양이 치솟는 화를 가라앉혔다.
 뜨거운 것은 흥분.
 분노는 차가운 법이다.
 
 
 # 제13회 비밀을 듣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오삼이 정협금고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그곳에서 백 장 거리에 있는 가옥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인상이 강한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청목방 소속의 정소(鄭紹)였다.
 “서태양입니다.”
 “정말이냐?”
 오삼의 보고에 정소가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금고에 돈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놈의 손바닥에 추종향을 발라 두었습니다.”
 “잘 했다!”
 정소가 안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놈을 찾았다! 당장 개를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건물 안에서 사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뒷마당에서 개소리가 들려왔다.
 정소가 다시 오삼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돈은?”
 오삼이 옷깃을 열자 작은 보따리가 들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전표 다발이 보였다.
 정소가 함지박 웃음을 지었고 반대로 오삼은 잔뜩 불안한 얼굴이었다.
 “놈이 찾아간 것처럼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놈을 제거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놈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여러 마리의 개를 끌고 나왔다. 추종향을 뒤쫓는 훈련을 받은 개들이었다.
 “먼저 출발해라! 놈을 찾으면 없애버려라!”
 “알겠습니다.”
 사내들이 개들과 함께 달려 나갔다.
 이제 그곳에 두 사람만 남자 비로소 오삼이 품안에 있던 돈을 정소에게 건넸다.
 “되도록 소액전표로 쪼갰기에 추적당할 걱정은 없습니다.”
 서태양의 전 재산 만 이천 냥이었다.
 정소의 입에서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생각지도 못한 거금을 차지하고, 서태양을 잡아 죽이면 보상까지 받게 될 것이다. 아직도 염사독은 서태양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
 “약속은 지켰으니 제 비밀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말래도.”
 거짓말이었다. 화근을 살려둘 그가 아니었다.
 정소는 일이 끝나는 대로 오삼마저 제거해 버릴 작정이다.
 “그리고 꼭 놈을 죽이셔야 합니다. 아니면 제가 큰일 납니다.”
 “이 새끼가 속고만 살았……”
 정소가 오삼의 머리통을 한 대 때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누군가 정소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퍼억!
 기습할 기회만을 노리던 바로 서태양이었다.
 “큭!”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소가 휘청거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서태양이 달려들어 발로 정소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퍽! 퍼억!
 내부가 진탕할 강한 공격에도 정소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가 바닥을 뒹굴어 공격을 피했다. 비록 기습을 허용했지만 그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몇 차례 바닥을 뒹군 정소가 벌떡 일어나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개 같은 놈이! 토막을 쳐주마!”
 서태양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소의 검이 서태양보다 빠르게 뽑혀 나왔다.
 쉬이익!
 날아든 검이 서태양의 얼굴을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보고 피하면 늦다.
 느낌과 본능으로 피해야 했다.
 쉭! 쉬이익!
 연속해서 날아든 공격을 서태양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피했다.
 다행히 서태양의 몸놀림은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 있었다.
 이번에 지하실의 수련이 아니었다면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웠을 것이다. 앞서의 기습이 어찌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정소의 검은 정교하고 빨랐다.
 검이 있었다면 조금 더 편한 싸움이 되었겠지만, 돈을 찾으러 가면서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검을 두고 왔던 것이다.
 회심의 공격을 연속해서 피하자 정소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그때 엉거주춤 서 있던 오삼이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소가 버럭 소릴 질렀다.
 “이 새끼야! 거기 안 서!”
 오삼이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이 미친 새끼가! 내가 질 것 같아서 튀는 거야? 그런 거야?”
 “아닙니다.”
 “이 머저리 같은 놈이 꼬리까지 달고 와서는. 콱 썰어버리기 전에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
 “네! 알겠습니다.”
 정소가 불룩하게 혹이 난 뒤통수를 매만지며 서태양을 노려보았다.
 “너, 대체 뭐야?”
 오삼이 그제야 서태양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앗! 저자가 서태양입니다!”
 정소가 깜짝 놀랐다. 이내 그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제 발로 찾아왔단 말이지?”
 정소가 여유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칠 급 무객임을 알았기에. 그에게는 칠 급 정도는 가볍게 썰어버릴 실력이 있었다.
 서태양이 그를 자극했다.
 “제 발로 찾아왔을 뿐더러 그 발로 네 대갈통도 찼지. 젠장!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돌대가린 줄 누가 알았나?”
 격장지계임을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는 조롱이었다.
 정소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달려들었다.
 “버릇없는 주둥이만큼 실력이 있는가 보자!”
 쉬이이익!
 정소가 검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상대가 칠 급이란 방심에 격장지계로 인한 흥분이 합쳐지자 정소의 동작이 더 커졌다.
 허점!
 오직 기회는 단 한 번뿐!
 서태양이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쉬익.
 날아든 검이 서태양의 몸을 스치고 지났다.
 서태양이 정소의 몸에 박히듯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겁을 먹으면 절대 시도할 수 없는 한 수였다.
 뻐어억!
 서태양의 팔꿈치가 정확히 그의 명치를 강타했다.
 꽈직.
 뼈가 박살나는 끔찍한 소리.
 정소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정소가 서태양의 몸에 기댄 채 축 늘어졌다.
 늑골이 박살나면서 즉사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오삼은 사색이 되었다.
 겁에 질린 채 뒷걸음을 치던 그 순간, 서태양이 싸늘히 경고했다.
 “이 놈과 친구야? 저승길도 함께 가고 싶어?”
 그 한 마디에 오삼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서태양이 정소의 품 안에 있던 전표가 든 보자기를 꺼내서 자신의 품에 넣었다.
 받치고 있던 몸을 빼자 정소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놈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습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전보다 강해졌다.
 이제 자신이 지닌 싸움감각을 몸이 온전히 받아내는 느낌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육체의 능력이 두 배 반 향상되어 있었다.
 세 배, 할 수만 있다면 네 배, 다섯 배까지 향상시키는 거다. 물론 갈수록 향상되는 폭이 줄어들겠지만 노력하는 거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자신에게 믿을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당면한 일을 해결할 때였다.
 서태양이 바닥에 떨어진 정소의 검을 들었다.
 그 모습에 오삼이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서태양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앞서 오삼과 정소의 대화를 통해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청목방은 정협금고에 손을 써서 자신의 담당자 오삼을 매수한 것이다.
 그 일을 담당한 자가 정소였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으로 볼 때 오삼에게는 약점이 있을 것이다.
 그게 뭘까? 여자문제? 도박문제? 혹은 세상에 드러나면 인생이 끝장 날 무엇인가겠지.
 정소가 돈에 욕심을 낸 것은 결과적으로 서태양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추종향만 바르고 순순히 돈을 내주었으면 놈들에게 붙잡혔을 수도 있었다. 손바닥에 추종향이 발렸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앞서 개를 끌고 나갔던 이십 여명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면 절대 그 자리를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적의 탐욕이 자신을 살린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욕심이 적을 살릴 수도 있겠지.
 오늘의 일을 교훈으로 두고두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오삼의 목에 검이 겨눠졌다.
 “제발 살려주세요.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간절한 애원에도 서태양의 눈초리는 더 없이 차가웠다. 반드시 자신을 죽여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던 그였다.
 오삼이 묻지도 않은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노름에 빠졌습니다. 원래 정협금고 본단에서 일했었는데, 그 일이 문제가 돼서 이곳 태화지부까지 쫓겨 온 것이고요.”
 “이곳까지 와서도 끊지 못했군.”
 “앞으로 개과천선하겠습니다.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말에 서태양이 코웃음을 쳤다.
 개과천선?
 자신이 상대했던 악인들 중에서 그 짧은 네 글자를 실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서태양이 내린 결론이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자는 애초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지.”
 오삼이 눈물을 글썽였다.
 서태양은 마지막 순간 악인들이 흘리는 눈물을 믿지 않았다. 목에 검이 겨눠졌을 때만 흘러내리는 위선적인 눈물.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후회한다고? 죄를 지었다는 후회가 아니라, 붙잡힌 것에 대한 후회겠지.
 그럼에도 서태양은 그를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가라.”
 “네?”
 오히려 오삼이 놀랐다.
 “가라고. 이제 청목방에서 너도 뒤쫓을 거다. 저 죽은 놈과 마지막에 같이 있던 사람이 너였으니까.”
 “하지만 제가 죽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다고 그들이 너를 살려 줄까?”
 “아니겠지요.”
 오삼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목이 죽은 분풀이를 자신에게 할 것이다. 앞서 달려 나간 놈들은 앞뒤 가리지 않는 무식하고 잔인한 자들이었다.
 “한데 왜 저를 그냥 보내주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되나?”
 “전 당신의 돈을 가로채려고 했고, 죽여 달라고 당부까지 했지 않습니까?”
 “너 역시 협박을 받은 거잖아? 억지로 돈을 빼내야 했고, 내가 죽어줘야 횡령이 들통 나지 않을 테고. 아니야?”
 “맞습니다.”
 “너나 저놈이나 모두 희생양에 불과하겠지.”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염사독이었다. 끝장을 봐도 놈과 봐야한다.
 오삼이 고개를 숙였다.
 “살려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노름이나 끊어. 그거 멀쩡한 사람도 한순간에 미친놈 만드는 거니까.”
 서태양이 백 냥짜리 전표를 한 장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전표를 받아든 오삼이 울컥했다.
 “어서 꺼져. 어물대다간 너나 나나 좋은 꼴 못 본다.”
 서태양이 먼저 나가려는데 오삼이 불쑥 말했다.
 “저 만이 아는 청목방의 비밀이 있습니다.”
 오삼이 꺼낸 청목방의 비밀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청목방에서 장보도(藏寶圖)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장보도?”
 장보도는 보물이 묻혀 있는 지도를 뜻했다. 강호에서 장보도란 무공비급이나 영약 혹은 신병이기가 보관된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태양은 청목방과 관련해서 단 한 번도 장보도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소문에 밝은 무송조차 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
 “아닙니다. 맹세코 사실입니다.”
 그냥 지어낸 말이라기에는 너무 황당하고 허무맹랑해서 오히려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어디서 들었지?”
 “옛날에 노름방에서 들었습니다.”
 서태양이 인상을 찌푸렸다. 노름꾼들만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자들은 없었다.
 “아닙니다. 제게 그 말을 했던 자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장보도를 발굴했던 사람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입구에 새로이 기관도 설치했고요.”
 “더 말이 안 되잖아? 그런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을 그냥 내보내주다니.”
 “말씀대로 동원한 사람들을 다 죽였답니다. 그는 운 좋게 아무도 모르는 탈출구를 찾아내서 살아남았고요.”
 “왜 그를 믿지?”
 “그는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판돈으로 그 정보를 걸었거든요.”
 오삼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전 상대의 눈을 보았습니다. 도박사의 감으로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딱!
 서태양이 오삼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아, 노름은 이제 안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그곳의 위치는?”
 “위치는 저도 모릅니다. 그 자가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하지만 분명 강서지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놈아, 네 말이 더 횡설수설이다.”
 녀석을 닦달해 볼까 고민이 들었다.
 청목방의 일이었고, 또한 무인이라면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는 장보도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혹시 이 녀석은 장소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마음에 덜컥 비밀을 털어놓았다가 막상 장소까지 말해주려니 후회가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서태양은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세상에서 억지로 되는 일은 꽉 닫힌 마개를 따는 일 정도임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말해줘서 고맙다.”
 “그럼 전 이만.”
 오삼이 그곳을 벗어나 달아났다.
 “이 봐, 도박사의 감 따윈 잊고 철저히 계산하는 인생을 살아!”
 그에게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다.
 서태양도 그곳을 떠났다.
 
 
 # 제14회 장보도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관도를 질주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차였는데 그 안에는 뜻밖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바로 새로운 청목방주 염사독이었다.
 보통 염사독이 어딘가 행차를 할 때면 수많은 호위가 뒤따랐다.
 특히 염천광이 죽고 난 이후에는 호위가 강화되어서, 청목방의 실력 있는 고수들은 모두 호위임무에 투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단 한 명의 호위도 없이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군사인 방군이었다.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요?”
 염사독이 소리쳐 물었지만 마부석의 방군은 가보면 안다는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
 “젠장! 누가 방주인지 모르겠군.”
 방주가 된 이후에 방군의 간섭은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바로 방주가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예전에 아버지를 볼 때면 만날 술만 마시고 놀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것도 다 방주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나마 말 안 통하는 늙은이들과 술을 마시는 일은 여자들 보는 재미라도 있지, 알아듣지도 못할 서류를 억지로 읽어야 할 때면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것만 같았다.
 방주에 오른 지 이제 한 달여가 지났을 뿐인데, 몇 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오늘 갑자기 방군이 자신을 불러내더니 이렇게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다.
 ‘이거 혹시 나를 죽이려는 것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방군이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굳이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여러 방법들이 있었으니까.
 먹는 음식에 독 한 방울이면 끝일 테니까.
 그게 가능할 만큼 방군은 청목방 내에서 입지가 대단했다.
 “서태양을 붙잡았다는 소식은 아직 없소?”
 염사독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없습니다.”
 방군의 짤막한 대답에 염사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지가 방주지, 방주야.”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방군이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며칠을 바쁘게 달려서 마차가 도착한 곳은 인적 드문 울창한 숲속이었다.
 “다 왔습니다, 방주님.”
 염사독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런 곳에는 왜 데려 온 것이오?”
 “자, 저를 따라 오십시오.”
 방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염사독이 다소 긴장한 채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동굴의 입구였다.
 풀과 넝쿨로 입구를 교묘하게 막아둬서 그냥 봐서는 그곳에 동굴이 있는 줄 알 수 없었다.
 “이제 방주가 되셨으니 이 일도 아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의 보시는 것을 절대 외부에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방주님과 저만 알고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알았소. 알았으니 대체 여기가 어딘지나 말해주시오.”
 방군은 오는 내내 가장 많이 했던 말을 마지막까지 반복했다.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방군이 앞장서서 동굴로 들어갔다. 염사독이 긴장한 채 그 뒤를 따랐다.
 동굴 곳곳에 삼엄한 기관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방군이 그것들을 능숙하게 그것들을 일시 해제했다. 보아하니 자주 이곳에 와 봤던 것 같았다.
 ‘대체 이곳이 어디이기에 이런 장치들을 해 놓은 것일까? 본방의 보물창고라도 되는 것일까?’
 염사독은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마지막 기관을 지나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광장 같은 큰 공간이 있었다.
 “헉! 이런 곳에?”
 염사독은 펼쳐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어도 너무 넓었다.
 그 좁은 동굴 끝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천장은 높아서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고 단단한 벽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저길 보십시오.”
 방군이 손을 들어 한쪽 벽을 가리켰다.
 “헉!”
 염사독의 입에서 놀람의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동굴의 벽에는 온갖 상처들이 나 있었다.
 병장기가 만들어낸 상처가 분명했지만 보통의 강기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떤 곳은 마치 검막이라도 펼쳤던 것처럼 거미줄처럼 촘촘한 흔적이.
 또 어떤 곳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길게.
 그리고 이곳은…….
 “맙소사!”
 한쪽 벽에 거대한 한 줄기 파인 흔적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그 높이와 두께, 깊이가 어마어마했다.
 “설마 검으로 만든 것은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그렇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이 흔적은 뭡니까? 지진이라도 났던…….”
 “칼입니다. 검이 아니라.”
 흔히 강호에서는 도(刀)를 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도의 흔적이라는 뜻.
 염사독이 불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방군을 쳐다보았다.
 “칼이라고요?”
 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칼입니다.”
 염사독은 그 흔적 앞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아버지 염천광이 처음 이곳에 섰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무공이 높으면 높을수록, 충격과 놀람은 더욱 컸다.
 그쪽 벽만이 아니었다.
 사방 벽에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대체 이곳은 뭡니까?”
 “몇 년 전에 우연히 발견한 곳입니다. 추측컨대…….”
 방군의 입에서 놀랄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대살성이 무공을 수련했던 장소로 보입니다.”
 “대살성이라니?”
 사신이라고 불렸으며, 도귀라고도 불렸던 사내. 현 강호를 살아가는 모두가 아는 그 이름.
 “이것들이 그가 남긴 흔적이라니!”
 “방주님을 모신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요?”
 “이쪽으로 오시죠.”
 방군이 다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진짜 보셔야 할 곳은 여기입니다.”
 광장 가장자리에 문이 하나 있었다.
 푸르스름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밀어서 열어야 하는지, 당겨서 열어야 하는지 도통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염사독의 얼굴에 기대감이 스쳤다.
 “어서 여시오.”
 특별히 이곳을 보여주려는 이유는 뻔하지 않겠는가? 이 안에 든 어떤 귀중한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과연 영약인가, 비급인가? 아니면 신병이기일까?
 하지만 방군에게서 기대를 깨는 실망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불가능합니다.”
 “무슨 말이오?”
 “아직 이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몇 년 전에 이곳을 발견했다지 않았소?”
 “맞습니다. 한데 지금까지 열지 못했습니다.”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염사독이 두 손으로 문을 밀어보았다. 내공을 최대로 일으켰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대 방주님도 열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도요?”
 그렇다면 자신은 어림도 없다는 뜻.
 “아버지보다 더 내공이 강한 고수가 밀면요?”
 “그에게 이곳이 알려지겠지요.”
 “아! 그렇겠군.”
 “전대 방주님은 차라리 이곳을 봉인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외부에 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염사독이 안타깝게 문을 쳐다보았다. 열지 못한다고 하니까 더 귀중한 것이 들어있을 것 같았다.
 “병기로 부숴 버리면 되지 않소?”
 “이미 시도를 해봤지만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이 문은 일반적인 철문이 아니라 훨씬 더 강한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설마 만년한철이라도 된단 말이오?”
 “재질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진천뢰(震天雷)를 사용하면요?”
 “그랬다간 이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무너져도 해봤어야지요!”
 “안에 있는 것이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젠장! 그렇다고 이곳을 몇 년이나 방치하다니!”
 “방주님은 언젠가 이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셨죠.”
 염사독의 마음이 급해졌다. 원래도 욕심이 많은 그였다. 가지고 싶은 것은 무조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자랐다.
 만약 저 방 안에 대살성이 남긴 무공비급이 있다면? 혹은 희대의 영약이 남겨져 있다면?
 단숨에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드시 저 문을 열어야 해.’
 방군도 염사독의 이글거리는 열망을 느꼈다. 걱정보다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앞에 서면 자신조차 이렇게 마음이 떨렸으니까.
 
 ***
 
 “뭐? 정협금고에서 돈을 주지 않았다고?”
 이도가 후다닥 달려가서 옷장을 뒤져 뭔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뭐해?”
 “서류 찾아. 내 돈 찾아야지. 이거 금고가 망한 것 아냐?”
 “정협금고는 멀쩡해.”
 “한데 왜 돈을 안 줘? 헉! 설마? 내 돈을 빌리기 위해서 지금 연기 중이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회계원 놈이 청목방과 손을 잡고 내 돈을 빼돌리려고 했어.”
 “그래서? 그놈은?”
 “그냥 보내줬어.”
 “너 답네.”
 나다운 것이 어떤 모습일까?
 일전에 이도가 그랬다. 너는 너를 잘 모른다고.
 이도가 보는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에게 청목방주를 죽였다는 말은 아직도 하지 않고 있다.
 과연 해야 할까?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를 위해서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는데, 왠지 그를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그 놈이 그러더라고. 청목방에서 장보도를 발굴하고 있다고.”
 “그래, 장보도는 발굴해야지…… 뭐? 뭘 발굴해? 장보도? 장보도!”
 이도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크게 소리쳤다.
 “영약과 무공비급이 가득 쌓여 있는 그 장보도?”
 “아니, 죽음의 진법과 기관, 함정이 가득한 그 장보도.”
 “어딘데? 거기가 어딘데?”
 “녀석도 모른데.”
 “그 자식을 그냥 보내면 어떻게 해? 너 답지 못하게! 어디야, 내가 가서 잡아올게!”
 “벌써 멀리 달아났어. 왜? 붙잡아서 고문이라도 하게?”
 “했어야지. 손톱 뽑고 발가락 자르고! 바늘로 찌르면서 다 불어, 했어야지.”
 “장보도 이야기 노름꾼에게 들었대.”
 “아아아아아.”
 새어나오는 탄식.
 한순간 터질 듯 부풀었던 이도의 희망이 바람 빠진 공처럼 가라앉았다.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나중에. 나 다녀올 데가 있어.”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이도가 소리쳤다.
 “쫓기시는 분이 뭐가 이리 바빠!”
 “저녁에 한잔 해.”
 역시 친구 사이는 속이는 것이 없어야겠지.
 그때 청목방주의 일을 말해주어야겠다.
 
 ***
 
 “하하하.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네.”
 흑사는 서태양의 무사귀환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다행히 운이 좋았습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가?”
 “없습니다.”
 “하늘이 도왔구먼.”
 사실은 흑사의 도움 때문이다. 그가 두 자루의 염라속을 내주지 않았다면, 결코 이뤄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걱정을 말인가?”
 “혹시 염천광의 사인(死因)을 분석해서 그것이 어르신께서 판 염라속임을 밝혀낼까봐 말입니다.”
 흑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렇게 쉽게 드러났다면 벌써 장사를 접었겠지.”
 하긴 염라속은 강호에서 워낙 많이 이용되는 대표적인 암기였기에 추적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철두철미한 흑사라면 더욱 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 날 못 드렸던 돈 여기 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태양이 전표를 그에게 전했다.
 “소액전표니 추적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하, 꼼꼼하게 처리했구먼.”
 흑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돈을 받아서가 아니라, 염천광을 죽여서 좋은 것 같았다.
 “자, 여기 이천 냥은 돌려줌세.”
 “네?”
 “이 강호에 악당을 하나 없애준 고마움에서 주는 돈이네. 내가 개인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다고 생각하게.”
 “받을 수 없습니다. 다 드려도 모자란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아닐세, 만 냥만 받아도 충분하네.”
 “괜찮습니다.”
 “받으래도. 왜? 적어서 그런가?”
 “아닙니다!”
 “그럼 받게.”
 서태양이 엉겁결에 돈을 받았다.
 사실 돈은 필요했다.
 이후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에 이천 냥은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흑사가 또 다른 것을 꺼내놓았다.
 “이것도 받게.”
 그것은 새로운 인피면구와 또 다른 위조신분패였다.
 “유용할 걸세.”
 서태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이상 인피면구는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
 이유를 물어볼 법도 한데, 흑사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서태양이 웃으며 여지를 남겼다.
 “꼭 필요하면 그때 사러 오겠습니다.”
 그래도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하하. 언제든지 오게.”
 서태양이 정중히 포권하며 작별을 전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흑사는 처음에 이별할 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잘 가게. 강호를 떠나지 않는 한 다시 만나게 될 거네.”
 서태양이 나가자 그곳으로 흑사의 제자인 융이 들어왔다.
 “아직도 이번 장사가 이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주 많이.”
 “네?”
 “난 이 돈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저는 도통 어르신의 깊은 뜻을 모르겠습니다.”
 “본래 장사란 하루를 마치고 밤이 되어서야 얼마를 벌었는지 셈을 하는 법이지.”
 “저이와 거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흑사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눈에는 이제 막 해가 떠오르려 하는 것이 안 보이느냐? 내 장사는 이제부터니라.”
 
 
 # 제15회 암어를 찾다
 
 서태양은 이도의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 옆 숲속에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는 아까 풀어줬던 회계원 오삼이었다.
 그는 온몸이 난자당해서 죽어 있었다.
 아까 죽은 정소의 수하들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상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두목이 죽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누군가 달려들었고, 군중심리에 휩쓸려 다들 달려든 모양이었다.
 주위에는 회계원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짐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놈들이 마구잡이로 짐을 뒤진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이미 다 가져가 버린 후였다.
 서태양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박에서 시작된 비극이 결국 그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만 것이다.
 살인현장에 얼쩡거려봐야 좋을 일은 없었기에 서태양이 황급히 돌아섰다.
 빠르게 몇 걸음 옮기던 서태양이 흠칫 멈추더니 다시 돌아섰다.
 여기저기 흩어진 오삼의 물건들.
 서태양의 시선이 강력한 위화감을 주는 하나의 물건에 날아가 박혔다.
 그것은 수판(數板)이었다.
 회계원들이 계산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바쁘게 떠나면서 수판을 가져가려 했다고?
 
 그 사실이 서태양의 의구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회계원이니 수판을 가져가려 한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평소 아끼는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얼핏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싶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도망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애쓴다. 혹시라도 검문이나 추적자에게 걸려도, 다른 사람인 척 굴어야 한다.
 오랫동안 도망자들을 상대해 왔기에 그들의 심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
 한데 저 눈에 띄는 수판을 가져가려 했다고?
 내가 도주 중인 회계원이오,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서?
 오삼이 그 정도로 어리석은 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수판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물건이다.
 다시 말해 정체가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져가야 할 물건이란 뜻.
 서태양이 수판을 주워들었다.
 가만히 수판을 살피던 그가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촤악, 촤악.
 과연 움직임이 뻑뻑한 알이 있었다.
 서태양이 비수를 꺼내 그 알을 분리했다.
 안에서 작게 말린 종이가 나왔다.
 종이를 펼치자 알 수 없는 문자와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암어(暗語)?”
 정협금고에서 사용하는 암어가 아니었다.
 대체 뭘까?
 어디 다른 돈도 횡령해서 숨겨둔 것일까?
 그때 문득 장보도와 관련해서 오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판돈으로 그 정보를 걸었거든요.”
 
 어쩌면 그 상대가 판돈으로 건 것은 이 암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단지 그 허황된 말만 믿었을 리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게 무엇이든 이곳에 오래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서태양이 다시 수판의 알을 원래대로 끼어 넣은 후, 암어만 챙겨서 재빨리 그곳을 떠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까마귀 떼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
 
 동굴에서 돌아온 염사독은 하루 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오직 그 문 안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뿐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무공에 큰 재능이 없었다.
 아버지인 염천광은 술만 마시면 아들의 부족한 재능을 한탄했다.
 직접 가르쳐도 보고, 더 뛰어난 무술선생도 붙여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헷갈려하는 그였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재능이 아예 없었다.
 내공이라도 키워줄 요량으로 비싼 돈을 주고 영약도 먹여보았지만 흡수하는 양이 너무 적었다.
 예를 들어 효능이 열 개인 영약을 먹이면 고작 한 개만 몸에 흡수했다.
 영약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막대한 돈이 드는 그것을 마구 먹일 수도 없었다.
 “어디서 저런 멍청한 놈이 태어나서는!”
 염사독은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며 내뱉던 아버지의 독설을 잊지 못한다.
 그는 열등감과 증오심으로 점점 삐뚤어져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무공으로 대성하는 것은 아예 접어두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런데 대살성의 무공이라면?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열망이 피어올랐다.
 강해져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다.
 일장에 고수를 쳐 죽이는 모습을.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무인인지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보여주고 싶었다.
 아버지가 틀렸음을.
 그때 수하가 들어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따르던 믿을만한 무인이었다.
 “그 말을 전했느냐?”
 “네, 전했습니다.”
 “뭐라더냐?”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잘 했다.”
 돌아서 나가는 수하에게 염사독이 말했다.
 “이 일이 절대 군사의 귀에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사독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에겐 희망을, 방군에게는 절망을 안겨줄 일이 은밀히 진행 중이었다.
 
 ***
 
 이도의 집 뒷마당에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마당에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 두 사람의 흥취를 더했다.
 이도와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으레 친구 놈과의 술자리가 그렇듯, 여자 이야기 하고, 싸움 이야기 하고, 옛날이야기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왜 추객이 됐지?”
 이것도 몇 번이나 묻고 대답했던 이야기다.
 “말 안 했나? 누군가 찾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어?”
 이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게 누군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누구?”
 “있어, 그런 사람이.”
 “왜 지금까지 말 안했어?”
 “했으면? 네가 같이 찾아 주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
 “됐네, 이 사람아.”
 이도가 술잔을 내밀었다. 서태양이 건배한 후에 잔을 비웠다.
 정말 그래서 추객이 된 것일까?
 워낙 장난을 많이 치는 녀석이니까,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이래서 녀석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러는 너는?”
 “나는 뭐…….”
 술이 취해서였을까? 그때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왜 무객이 되었지?
 갑자기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을 칼로 딱 끊어버린 것처럼, 당시가 기억나지 않았다.
 서태양이 멍하니 빈 술잔을 내려다보다 불쑥 말했다.
 “청목방주, 내가 죽였어.”
 엉뚱한 대답에 잠시 흐르는 침묵.
 “청목방주 죽이려고 무객이 되었다고?”
 “농담 아니야. 흑사에게 암기를 사서 쏴 죽였다.”
 진지한 얼굴로 이도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서태양을 응시하던 이도가 뒤늦게 깜짝 놀라며 말했다.
 “헉! 정말? 정말 네가 죽인 거야? 아아아! 정말 놀랍다! 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어색한 연기에 서태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알고 있었군. 그렇지?”
 “아냐,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아냐. 넌 알고 있었어. 그렇지?”
 서태양이 계속 추궁하자 결국 이도가 실토했다.
 “그래.”
 “어떻게 알았어?”
 “염천광이 죽었다는 소식을 딱 듣는 순간, 그냥 네가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점쟁이냐? 그것만으로 알아차리게?”
 “네가 구해준 시비가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거든.”
 잠시 사이를 두고 이도가 말했다.
 “네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어.”
 이것이 그가 보는 내 모습인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자신이 그렇게 정의로운 놈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동시에 그에게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도가 달빛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
 “힘들었지?”
 서태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가 다가와서 술잔을 채워주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위로가 되는 그 말에 서태양의 마음이 울컥했다.
 누군가에게 잘 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진정으로.
 술잔에 비친 달이 흔들렸다.
 고맙다.
 왠지 입 밖으로 꺼내면 퇴색될 것 같아서 술과 함께 삼켰다.
 이런 진지한 분위기로 술자리가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참, 그리고 그 회계원 죽었어.”
 “정말?”
 “그의 유품에서 암어가 적힌 종이를 찾아냈어.”
 “암어?”
 이도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소리치듯 말했다.
 “온갖 영약과 무공비급이 묻혀 있는 장보도를 찾아갈 수 있는 암어?”
 “아니, 그냥 알 수 없는 글자와 숫자가 적힌 종이.”
 “장보도의 비밀을 알고 있다던 그 회계원이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바람 빠졌던 이도의 희망이 다시 공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도가 바짝 다가섰다.
 그의 눈빛이 과도하게 반짝였다.
 서태양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진정한 우정은 장보도 따위에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다던데?”
 “어떤 장보도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어떤 우정이냐에 따라겠지. 이 자식아!”
 서태양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쥐고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이도가 죽는 소릴 냈다.
 “숨 막혀! 암어는 네가 가졌는데, 왜 날 죽여!”
 “역시 네 머릿속에는 암어를 가진 쪽이 죽는다로 인식되어 있군.”
 “알았어, 그럼 반만 줘! 켁켁! 살려 줘!”
 “하하하.”
 잡았던 손을 풀면서 서태양이 크게 웃었다.
 그에게 비밀을 털어 놓은 것이 정말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암어해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서태양의 물음에 이도가 고개를 내저었다.
 “본단이나 가야 있을 텐데.”
 설령 대정협 본단에 암어해독자가 있다고 해도 그에게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를 이 암어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앗! 그러고 보니 너 예전에 암어해독에 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더라?”
 “내가?”
 고개를 갸웃하던 서태양이 잊고 있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 있다!”
 해독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 제16회 절세미녀
 
 양억은 말없이 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전에 홀로 울었던 바로 그 칼이었다.
 이후에 칼은 다시 울지 않았다.
 양억은 습관적으로 칼을 보며 그것이 다시 울기를 기다렸다.
 그 눈빛에 담긴 그리움과 회한이 깊었다.
 아주 긴 시간.
 자신은도, 그리고 다른 모두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제는 그 기다림을 끝낼 수 있을까?
 그때 뒤에서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칼이 울었다면서요?”
 
 귀뿐만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양억이 돌아보자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두 눈동자는 사람의 시선을 한 눈에 빨아들였다.
 ‘그 눈에 빠져들고 싶다’는 표현이 비단 여자를 유혹할 때 사용하는 바람둥이들의 미사여구가 아님을 실감했다.
 그 눈만 해도 평생 잊지 못할 눈인데, 그것은 아름다움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도톰하면서도 붉은 입술, 그 사이에서 빛나는 새하얀 치아.
 이름난 화공이 얇은 붓으로 세밀하게 그린 것 같은 깔끔한 얼굴선.
 그녀의 맑은 피부는 탱글탱글한 탄력이 느껴졌다.
 싱그럽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어딘지 모르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귀함까지 느껴졌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었다.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매끈하게 쭉 뻗은 다리까지.
 그녀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이 말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비현실적(非現實的).
 
 누군가의 그림에서, 혹은 이야기책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여인이었다.
 그야말로 그녀의 아름다움은 폭력적이었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양억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이 모습, 오랜만이군.”
 “저도 오랜만이라 적응이 잘 안 되네요.”
 “남장으로 지내기 힘들지?”
 그녀는 지금 남자인 척 행세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양억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하, 그래도 이제 많이 익숙해졌답니다.”
 여인이 웃자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히 천하제일미라 해도 될 만한 외모였다.
 그때였다.
 
 징―
 
 마치 인사라도 하듯 칼이 한 번 울었다.
 양억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과연 자네만은 알아보는군.”
 칼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떨렸다.
 칼 주인이 생각나서이리라.
 
 “칼이 깨어났네.”
 “예전에도 깨어난 적이 있었지요.”
 “그때와는 달라.”
 
 양억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칼이 그를 찾고 있네.”
 
 양억의 표정에는 기쁨과 걱정이 함께 얽혀 있었다.
 
 “칼의 힘이 더 강해지면 결국 그들도 알게 될 거네.”
 “네.”
 “그를 죽이려 들 거야.”
 “그렇겠지요.”
 태연한 그녀의 반응에 양억이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걱정되지 않나?”
 양억은 자신이 던지고서도 참으로 어리석은 물음이라 생각했다. 그를 그녀만큼 걱정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여인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되죠. 그런데 이번에는 믿으려고요.”
 그녀의 시선이 칼을 향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깨어날 것이라고. 그렇게만 되면…….”
 그녀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걱정은 그들 몫이 될 거예요.”
 
 징―
 
 ***
 
 서태양이 도착한 곳은 태화지부 인근의 학당이었다.
 글선생 제갈륜(諸葛倫)은 예고 없는 방문에도 반갑게 서태양을 맞아주었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사정이 생겨 갑자기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례라니? 자네라면 얼마든지 환영일세. 자, 우선 들어감세.”
 제갈륜이 서태양을 객청으로 안내했다.
 제갈륜은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공짜로 글을 가르치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몇 년 전에 서태양이 그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학당의 학생 하나가 흑회(黑會)의 일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 흑회에 아는 얼굴들이 있어 서태양이 그 일을 해결해주었다.
 이후 그와 두어 번 술자리를 했었는데, 그때 그에게 들었던 인상 깊었던 말이 있다.
 
 “틀어박혀 무공을 익히지 마시게. 학문도 마찬가지지. 세상에 나가서 배울 때, 진짜 배우는 것이라네.”
 
 서태양은 그가 태화 같은 작은 도시에서 글선생이나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깊은 학식과 혜안을 지닌 인물이었다.
 어쨌든 술자리에서 그가 암어도 해독할 줄 안다는 말을 흘리듯 했었다. 그게 신기해서 이도에게도 이야기를 했었는데, 마침 그 일을 기억해낸 것이다.
 “부탁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뭔가?”
 “이것을 해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암어를 해독하실 수 있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서태양이 암어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어디서 어떻게 구한 것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제갈륜 역시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가능하겠습니까?”
 제갈륜이 흥미롭게 그것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시간에 맞춰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그리 어려운 암어는 아닌 듯 보이니 저기서 잠시 기다려 주겠나?”
 “아, 감사합니다.”
 제갈륜이 자리에 앉아 백지에다 뭔가를 써가며 암어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대체 글방 글선생이 암어해독은 어떻게 배우게 된 것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서태양은 잠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에는 책이 많았는데 온갖 종류의 책들이 있었다. 글공부와 관련된 책부터 문학, 역사, 철학, 예술, 그 외에 금기서화(琴棋書畵)와 관련된 책과 여러 잡서들까지. 그야말로 제갈륜의 다양하고 방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었다.
 “읽어봐도 됩니까?”
 제갈륜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물론이네.”
 서태양이 책장에 꽂힌 책 중에서 제목이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무림대변혁(武林大變革).
 
 정사마의 몰락 이후 강호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책이었다.
 재미삼아 쭉 읽어가다가 이내 하나의 소제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대살성의 난.
 
 십 년 전 그 일을 이렇게 불렀다.
 책은 우선 대살성에 의해 멸문당한 천하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천하세가는 무적십자성과 천의맹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독보적인 강호제일세가였다.
 대살성은 단신으로 그곳을 공격했다.
 이유는?
 아직까지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책에는 만약 대살성이 중원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라면 천하세가가 아닌 다른 세력부터 쳤을 것이란 의견이 적혀 있었다.
 서태양도 그 의견에 동감했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강호에서 가장 강한 세력과 단신으로 맞서 싸우는 일은 무모한 일이다.
 더구나 당시 천하세가는 강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명문이었다.
 그런 곳을 공개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전 강호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도 거의 그렇게 되었고.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책에서는 결국 대살성의 난은 개인적인 원한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단락을 끝맺고 있었다.
 이 책만이 아니라 보통의 다른 책들도 다 이렇게 정리를 했다.
 그때 불쑥 뒤에서 들려온 한마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놀라 돌아보니 제갈륜이 뒤에 서 있었다. 책에 몰두하다 보니 그가 다가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대살성 말일세. 자네도 책에 나온 이야기를 믿나?”
 무슨 뜻으로 묻는 말일까?
 얼핏 듣기에는 이런 뜻이 담긴 듯 했다.
 “책 내용이 틀렸단 말씀이십니까?”
 “때론 진실이란 놈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야 밝혀지기도 한단 말이지.”
 물론 그렇다. 이번에 염천광을 죽이지 않았다면 강호에 서태양이란 인물은 청목방주의 아들을 죽이려던 살수로 기억될 테니까.
 “대살성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용감한 사람이란 생각은 듭니다. 아, 물론 그가 저지른 짓을 옹호하려는 뜻은 아닙니다만.”
 “그래. 단신으로 중원 전체와 맞서 싸웠으니.”
 “그가 악인이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호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었을 텐데요.”
 “과연 그랬을까?”
 “네?”
 “지난 역사로 볼 때 영웅이란 결국 남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느냐 말일세.”
 이번에는 서태양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가 악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군요.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이 만드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깊은 눈빛을 발하던 제갈륜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걸 누가 알겠나?”
 서태양은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살성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참, 암어는 모두 해독했네.”
 “벌써 하셨습니까?”
 “여기 있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빨리 해독을 해낼 줄은 몰랐기에 서태양은 내심 감탄했다.
 그가 내민 종이를 펼쳐보니 그곳에는 한 장소가 적혀 있었다.
 백운산(白云山)자락 어디쯤이었다.
 태화에서 빠르게 가면 열흘 정도 걸리는 거리. 대충 어디쯤인지 아는 곳이다.
 지난 칠년간 악인들 뒤쫓는다고 강서지역을 워낙 휘젓고 다닌 탓에 어지간한 곳은 다 알고 있었다.
 암어가 어떤 장소를 의미한다?
 정말 이 암어가 청목방의 장보도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직접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제갈륜 덕분에 암어를 해독할 수 있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 우리 사이에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의 방문을 막 나서려는데 뒤에서 제갈륜이 불쑥 말했다.
 “대살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나?”
 돌아보니 제갈륜이 앞서의 책을 책장에 꽂고 있었다.
 대살성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그의 최후가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무적십자성과 천의맹조차 대살성에 관한 그 어떤 언급도 불허했다. 그들은 대살성을 역병(疫病)처럼 취급했다.
 “그의 최후는 어떤 문헌에도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네. 그저 강호삼세의 합공을 받아 죽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지.”
 “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갈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 만약 그랬다면 무적십자성과 천의맹이 그를 살려뒀을 리 없을 테니까. 그럼 잘 가게.”
 
 
 # 제17회 입구를 찾아내다
 
 “정말 거기에 간다고?”
 이도의 물음에 서태양이 혁낭을 챙기며 대답했다.
 “오고가고 넉넉잡아 한 달쯤 걸릴 거야.”
 가야할 곳이 산속인 만큼 야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챙겼다. 혹시 몰라 질긴 밧줄도 함께 챙겼다.
 “그 산이 장보도의 위치라고 믿는 거야?”
 “오삼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간 수판에서 암어가 나왔어. 거기에 이 장소가 적혀 있었고. 그 물건의 주인은 장보도에 관해 언급했고. 이래도 안 가?”
 “만약 그렇다면 오삼이 지금까지 안 갔을 리가 없잖아?”
 “암어를 해독하지 못했겠지. 우린 아주 운이 좋았던 것이고.”
 만약 제갈륜이 없었다면 여전히 자신도 암어를 해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호에 암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귀할 뿐더러,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결국 확실히 해독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강호인이 아니라 일반 회계원이었다. 장보도에 관한 관심 자체가 자신처럼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이 정말 장보도의 장소이든, 오삼이 횡령해둔 돈이 묻혀 있든, 그냥 아무개네 개똥밭이든. 일단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서 청목방과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아아아아! 나도 가고 싶어! 온갖 영약과 무공비급을 얻고 싶어.”
 “그럼 같이 가.”
 “그러고 싶은데 임무가 있어.”
 “장보도의 보물보다 더 중요한 임무야?”
 그러자 이도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임무는 꼭 잡아야 할 악인을 뒤쫓는 일이잖아? 놈에게 당한 사람은 억울해서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을 텐데. 잡아야지, 그런 놈.”
 잠시 흐르는 침묵.
 “마음에도 없는 말 하려니, 힘들었지?”
 이도가 못들은 척 비장미를 뿜어냈다.
 “나라도 협의를 지켜야지. 비록 친구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장보도의 보물에 푹 빠졌지만 나라도 남아야지. 이 한목숨 바쳐…….”
 “그럼 안줘도 되겠네.”
 “협의를 지키고…… 그런데 뭘 안 줘?”
 “뭐긴? 영약이나 무공비급이지. 그래도 친군데 좀 남겨다 주려고 했더니 그럼 안 될 것 같아. 개인의 영달을 나눴다가는 협의를 지키려는 네 진실한 마음이 훼손될 테니까.”
 이도의 눈썹이 축 늘어지면서 입이 삐죽 나왔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나눠도 괜찮지 않을까?”
 이번에는 서태양이 못 들은 척 계속 말을 이었다.
 “그곳에 뭐가 있을까? 한옆에는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가 도라지처럼 마구 자라고 있고, 만년화리(萬年火鯉)가 헤엄쳐 다니는 연못 옆 벽에는 우유빛깔 공청석유(空靑石乳)가 흘러내리고 있겠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혀를 내밀어서.”
 “으아아아아아! 그만!”
 이도가 머리를 감싸며 진심으로 괴로워했다.
 이래도 안 가?
 이런 심정으로 한 말이지만 이도는 함께 가려하지 않았다.
 “한 방울만이라도 남겨다 줘야해! 꼭!”
 서태양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전에 자신이 태화를 떠나려고 했을 때, 그때도 그는 임무가 있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땐 솔직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비슷한 경우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 발을 빼려고 한다.
 자신의 전 재산을 흔쾌히 빌려주려던 그와 지금의 그.
 대체 어느 쪽이 진짜 그의 모습일까?
 “그럼 다녀올게.”
 “조심히 잘 다녀와.”
 “너도 임무 조심하고.”
 서태양이 그곳을 나섰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아직도 이도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비는 시늉을 하며 뭐라도 남겨다 달라는 뜻을 전했다.
 서태양도 작별하듯 손을 흔들어주며 이렇게 전했다.
 국물도 없어!
 
 ***
 
 “수색을 중단하세요.”
 염사독의 말에 방군이 깜짝 놀랐다.
 “중단이라고 하셨습니까?”
 “더 이상 흉수를 잡는 일은 그만두세요.”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하루에 들어가는 돈이 수천 냥이라면서요? 수색이 시작된 지 두 달이 훨씬 넘었어요. 이대로라면 아무리 본방이라도 재정이 버텨내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말처럼 수백 명의 인원이 수색작업에 동원되고 있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그야말로 막대한 돈이 들고 있었다.
 청목방 내부 인원을 제외하고도 여러 조직을 통해 수색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곳에 드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아직 흉수의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방파의 이목도 생각해야 할 텐데요.”
 “그럼 대폭 축소를 하세요. 구색만 갖추는 정도로. 아니면 그럴듯한 놈 하나 잡아다 뒤집어씌우세요.”
 방군은 애초부터 염사독이 아버지의 복수 따윈 관심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수색작업을 계속해온 것은 염사독은 제 자존심을 위해서, 방군은 청목방의 위신을 위해서였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방군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동굴에 다녀온 후에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으니까.
 과연 염사독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돈으로 그 문을 열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염사독은 방군 몰래 은밀히 진행해온 것을 밝혔다.
 “만박선생(萬博先生)을 부를 생각입니다.”
 만박선생은 만박서림(萬博書林)의 주인으로 강호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만박서림은 젊은이들이 모여 글공부며 세상공부를 하는 곳이었다.
 특히 당대의 만박선생은 기관진식에 조예가 깊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라면 그 문을 열 수 있을 겁니다.”
 “안 됩니다! 외부 인사를 끌어들여선 절대 안 됩니다. 아버님이 만박선생을 몰라서 안 불렀겠습니까?”
 “겁이 나서 안 불렀겠지요. 빼앗길까봐. 소문이 날까봐.”
 “아, 제발 방주님. 이렇게 즉흥적으로 일처리를 하시면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늙은이처럼 전전긍긍 궁상떠는 것은 내 성질에 안 맞아서요. 그 문짝이 예쁜 계집이라도 된답니까? 바라보며 애를 태우게요.”
 방군은 염사독의 여러 한심한 짓을 겪어왔지만 이번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이러다간 외부에 소문이 나게 됩니다. 자고로 강호의 보물이란 큰 화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소문 안 납니다!”
 단호한 확신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힘이 약한 서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문을 열고나면…….”
 염사독은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사악한 눈빛은 살인멸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들을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방주님 말씀처럼 그들이 일개 글쟁이들에 불과하다면 이 험난한 강호에서 어찌 지금까지 살아남았겠습니까?”
 합리적인 설득임에도 염사독에게 먹히지 않았다.
 “이미 늦었소.”
 불길한 예감이 방군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늦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래요, 이미 그를 불렀습니다.”
 방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비동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까?”
 “했으니까 온다고 했겠지요.”
 “맙소사!”
 “걱정하지 마시오. 대살성은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꼭 열어야 할 문이 있다고만 했소.”
 때마침 수하가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만박서림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염사독이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모셔라.”
 방군은 망연자실 낭패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학사풍의 옷에 단정히 건을 쓴 사내가 그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호리낭창한 몸에 박식해 보이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만박서림에서 온 천뇌(千腦) 갈사량(葛思良)이라 합니다.”
 그를 보자 염사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박선생께서 오실 줄 알았소만.”
 갈사량이 한 장의 서찰을 건넸다.
 “스승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제자인 제가 대신 왔습니다. 여기 스승님께서 보낸 글이 있습니다.”
 염사독이 못마땅한 마음으로 서찰을 읽었다.
 거기에는 갈사량이 만박서림의 뛰어난 인재니 믿고 맡겨도 좋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망할 늙은이가! 직접 오라고 불렀더니, 제자를 보내? 이게 죽고 싶어 환장했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드러났지만 갈사량은 모른 척 했다.
 ‘천뇌? 지랄하네. 콱 그냥 뇌를 천 조각 내버릴까 보다.’
 뜻밖에 갈사량은 일행이 있었다.
 “오다가 아는 분을 만나 함께 왔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인사를 시켜드리겠습니다. 들어오시지요.”
 그러자 그곳으로 일남일녀가 걸어 들어왔다.
 ‘어디서 허락도 없이’로 시작하는 욕설을 내뱉으려던 염사독이 입을 벌린 채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삼십 대의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인이었다.
 얼굴은 좋게 말하면 요염했고 나쁘게 말하면 싸 보였다.
 그녀는 유난히 눈매가 날카로웠는데, 그것을 감추기 위한 짙은 화장 때문에 오히려 인상이 강해보였다.
 어쨌든 그녀는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로 그 모든 단점을 감추고 있었다.
 ‘정말 죽이는구나!’
 염사독은 여인의 가슴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갈사량이 나서서 여인을 먼저 소개했다.
 “혈수곡주님의 천금(千金)이신 묘수선자(妙手仙子) 당화정(唐華情)소저이십니다.”
 여인의 정체에 염사독과 방군이 화들짝 놀랐다. 어디 아무 곳에나 굴러먹는 낭인 쯤 되는 줄 알았는데, 자그마치 혈수곡주의 딸이었던 것이다.
 혈수곡.
 강호육강에 속한 중원의 절대강자.
 함께 온 사내는 혈수곡 사대고수 중 일인인 탈수표(脫手鏢) 서홍락(徐洪樂)이었다.
 당화정이 비밀에 싸여 있는 인물인 반면 서홍락은 강호에서 유명했다.
 암기술의 고수로 그가 사용하는 비표(飛鏢)는 십장 거리에서도 상대의 목을 꿰뚫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필하기에 충분한 거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반쯤 화난 채로 망연자실하던 방군이 바짝 긴장한 채 앞으로 나섰다.
 애초에 만박서림 사람이 방문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저 혈수곡 사람들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인은 본방의 군사를 맡고 있는 방모입니다. 여기 이 분이 염방주이십니다.”
 방군이 어서 제대로 인사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염사독이 내심 긴장한 채 포권하며 인사했다.
 “사독이라 합니다.”
 방군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귀하신 분께서 본방까지 어인 일로 오신 겁니까?”
 “강호를 유람을 하다 여기 갈선생을 만났소. 귀방에 재미난 일이 있을 것 같다 해서 함께 찾아온 것이오. 괜찮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원하시는 만큼 푹 쉬시다 가시지요.”
 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과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우연히 만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혼자 왔다간 큰 화를 당할 수 있음을 저 갈사량이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필 혈수곡의 묘수선자라니!’
 강호육강은 크게 둘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일단 절대강자인 무적십자성과 천의맹. 천외천인 그들은 어차피 열외로 두고.
 나머지 네 세력.
 오뢰검문과 구월회, 황금상회와 혈수곡.
 어디 하나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폭력성을 띤 곳이 혈수곡이었다.
 죽은 염천광이 청목방을 거대하게 키우면 딱 혈수곡 같은 조직이 되었을 것이다.
 ‘묘수선자도 분명 문에 대해 듣고 왔을 것이다. 갈사량은 물론이고 저들도 뭔가 냄새를 맡았겠지.’ 낭패 중의 낭패였다. 이제 와서 별 일 아니라도 할 수도 없을뿐더러, 믿지도 않을 것이다.
 혈수곡이 개입한 이상 까닥 잘못했다간 청목방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큰 화를 불러들였구나!’
 방군이 힐끗 염사독을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도 염사독은 당화정의 몸매를 훔쳐보고 있었다.
 어쩌면 염사독이 방주가 되는 그 순간, 이미 비극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열흘 후 서태양이 백운산에 도착했다.
 “분명 이 근처가 맞는데?”
 암어에 표시된 위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왠지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기시감(旣視感)을 느꼈다.
 하지만 분명 이곳은 처음 와 본 것이다.
 서태양은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헤맨 후에 서태양은 이윽고 목적한 곳을 찾아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구멍이었다.
 어른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쉽게 찾지 못한 것은 그 입구를 풀과 나뭇잎이 덮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서태양이 구멍을 쳐다보았다.
 어두컴컴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괴물의 아가리처럼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이 장보도의 그 장소가 아니라면?
 장보도는 맞지만 온갖 죽음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면?
 단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파 놓은 함정이라면?
 만약 들어갔는데 다시 나올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면?
 공포는 무지에서 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서태양이 혁낭에서 밧줄을 꺼냈다.
 가까운 나무에 단단히 묶고, 반대쪽은 자신의 허리에 묶었다.
 언제든 줄을 끊을 수 있도록 비수를 허리에 찼고 허리에 찼던 검은 등 뒤로 찼다. 횃불로 쓸 나무도 함께 챙겼다.
 서태양이 혁낭을 꽁꽁 싸맨 후 아래로 집어 던졌다.
 귀를 기울이니 저 멀리서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그렇게 깊은 곳은 아닌 모양이다.
 서태양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이 막연한 두려움을 미지(未知)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래, 모험은 씩씩해야 한다.
 서태양이 줄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제18회 비동에 들다
 
 안은 어두웠다.
 서태양은 오직 감각에만 의지해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벽이 울퉁불퉁해서 손과 발을 지지할만한 곳이 있어서 내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내려갔을까?
 서태양이 바닥에 도착했다. 다행히 줄은 모자라지 않았다.
 재빨리 허리에 감긴 줄을 풀고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곳은 아무 것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는데 한옆으로 작은 틈이 나 있었다.
 서태양이 횃불을 내밀어 비춰보았다. 어른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틈이 어디론가 이어져 있었다.
 구멍으로 내려오는 것보다 이 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너무 좁아서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쉽게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독충이나 독사가 있다면?
 정말이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겠지.
 서태양이 용기를 내서 그 틈으로 들어갔다. 너무 좁아서 옆으로 걸어야만 했다.
 다행히 독충이나 뱀은 없었다.
 이리저리 굽어진 통로가 삼십 보쯤 이어졌다.
 마지막은 기어서 나와야 했다.
 과연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나 싶은 길. 횃불은 꺼서 통로에 세워두고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통로가 굽어져 있어 빠져나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힘겹게 그곳을 통과해 나오는 순간 서태양은 깜짝 놀랐다.
 그곳은 커다란 공간이었다.
 수십 명이 동시에 수련해도 될 정도로 큰 광장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밝았다. 벽과 천장 곳곳에 난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왔던 것이다.
 서태양이 홀린 듯 광장으로 걸어갔다.
 사방이 막힌 곳이었지만 공기가 통하고 빛이 들어오고, 심지어 한옆에는 깨끗한 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서태양이 흐르는 물을 한 모금 마셔 보았다. 먹을 수 있는 물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들어온 틈 말고 다른 쪽에 정식 입구가 있었다.
 그쪽으로 걸어가던 서태양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 있었다.
 바닥을 새로 깔고 벽을 뚫었다. 이상한 기관장치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서태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이 그 장보도의 장소임을.
 서태양이 자신이 나온 쪽 틈을 쳐다보았다.
 눈으로는 거기에 틈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튀어나온 바위가 뒤쪽 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착시효과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봐서는 그 사이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음을 알 수 없는 구조였다.
 한데 이곳.
 왜 이리 익숙하게 느껴지지?
 광장 가운데 서 있자 앞서 백운산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꼈다.
 언젠가 이 광장 가운데 서 있었던 적이 있었던 느낌. 그냥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와본 것 같은 익숙함.
 하지만 분명 이곳은 처음이었다.
 비슷한 분위기의 장소와 착각하는가 싶어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생각나는 곳은 없었다.
 서태양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벽에 난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칼이 남긴 도상들.
 무공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도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가 남긴 흔적인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하다며 감탄 한 번 하고 그냥 지나쳐도 될 것들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흔적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로와 세로, 사선으로 그어진 선들.
 기이한 각도로 연달아 꺾인 선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곡선.
 촘촘하면서 세밀하고, 때론 강력한.
 서태양은 자신도 모르게 그 흔적에 빠져들었다.
 그림에 미친 화공이 혼신을 다해 그린 그림 같았고 주름진 노악공이 회한을 담아 연주하는 선율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암어처럼 복잡하게 얽힌 선들이 서태양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기억하라고.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닌데, 그 흔적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본능이 왜 그것을 기억하고 싶은지, 왜 기억하려 하는지 자신의 마음이지만 알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서태양이 지닌 기억력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벽에 남긴 흔적들이 그림을 그리듯 정확하게 각인되듯 서태양의 머릿속에 기억되었다.
 본능이 움직여 뭔가를 기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 가장자리에 위치한 문이 눈에 띄었다.
 서태양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굳게 닫힌 문.
 서태양이 그곳에 손을 가져다댔다. 방군이 봤다면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을 광경이 이어졌다.
 스르륵.
 가볍게 밀었는데 문이 열린 것이다.
 염천광과 방군이 지난 이 년을 노력했지만 끝내 열지 못한 문이었다. 만박선생까지 불러서 열려고 한 문이었다.
 한데 그 문이 마치 빙판에 미끄러지듯 소리하나 없이 열린 것이다.
 너무 쉽게 열려 서태양마저 놀랐다.
 바로 그때였다.
 저 뒤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태양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들어왔던 틈으로 달려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태양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문을 소리 없이 닫혔다.
 스르륵.
 
 문 앞에 도착한 사람은 다섯 사람이었다.
 바로 염사독과 방군, 갈사량, 그리고 당화정과 서홍락이었다.
 그들 중 방군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세 사람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곳만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염사독이 단 하루 만에 망쳐버렸다.
 그녀가 온 그날 밤, 그녀와 잠자리를 한 것이다. 그리고 상세한 위치까지 홀랑 다 말해버린 것이다. 벽에 남은 어마어마한 흔적으로 볼 때, 대살성의 비동으로 추측한다는 말까지.
 ‘발정난 개새끼! 병신 머저리 같은 놈!’
 정말 방군은 진심으로 염사독을 혐오했다. 어리석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당화정이 의도적으로 그를 유혹했다.
 그녀의 방중술(房中術)은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았다.
 염사독과 같은 애송이를 다루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는 불이었고, 염사독은 좋다고 날아드는 나방이었다.
 이미 두 사람은 약속까지 했다.
 무공비급이 나오면 염사독에게 가지고, 신병이기가 나오면 당화정이 가지기로. 영약은 반씩 나눠 먹고, 건방진 갈사량은 없애버리는 것으로.
 복잡할 것도 없었고, 싸울 일도 없었다.
 합의가 쉽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당화정이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에 든 것은 구석에 떨어진 먼지뭉치까지 모두 자신이 가질 것이다.
 염사독은?
 화장에 가려진 찢어진 눈이 차갑게 웃고 있었다.
 만박선생을 불러놓고 염사독이 지었던 바로 그 눈빛이기도 했다.
 문을 살피던 갈사량이 감탄하며 말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입니다.”
 "지난 이 년 동안 이 문을 열지 못했소.”
 “그랬을 겁니다.”
 방군이 나서서 충고했다.
 “조심해야 할 거외다. 이 문을 만든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그래서 저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자부심 가득한 갈사량을 지켜보며 염사독이 싸늘한 조소를 지었다.
 그는 처음부터 갈사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난 척 하는 눈빛이며 말투. 결정적으로 놈은 힐끗힐끗 당화정의 몸을 훔쳐보았다.
 ‘망할 새끼. 일이 끝나면 보자.’
 눈깔부터 뽑아버리겠다고 염사독이 내심 이를 갈았다.
 눈치 빠른 당화정이 염사독의 팔짱을 끼며 그의 관심을 돌렸다.
 “동생, 우린 이곳이나 둘러볼까?”
 “그럽시다, 누님.”
 두 사람이 석벽을 보러 걸음을 옮겼다.
 갈사량은 문을 살폈고 방군이 그 옆에서 구경을 했다.
 서홍락은 조금 거리를 두고 당화정과 염사독의 뒤를 따랐다.
 사실 호위는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이 싸울 일도 없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염사독은 당화정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 서홍락은 항상 당화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암기를 사용하는 그였기에, 조금 떨어진다 하더라도 언제라도 그녀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었다.
 번쩍하는 순간 상대의 목에 그의 암기가 박힐 테니까.
 
 서태양은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석실 문에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 중 염사독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청목방에서 발굴하고 있던 장보도의 동굴임이 확실했다.
 한데 이상한 점 하나.
 이 문을 이 년 동안 열지 못했다고? 왜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는 거지? 혹시 저들을 죽이려고 데려온 것일까?
 혹시 함정?
 지금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섬뜩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굳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내막이 무엇이든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들어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바짝 긴장해 있던 서태양이 그제야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일단 통로는 자신이 들어온 그것 하나였다.
 밖에서 볼 땐 차가운 느낌의 석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곳은 아늑한 방이었다.
 은은한 빛의 벽은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고 한옆에 세워진 낡은 장식장은 아주 고풍스러웠다.
 석실의 내부가 그리 어둡지 않은 이유는 방 가운데 놓인 다탁에 야명주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낡은 책자 한 권과 각기 다른 크기의 상자 세 개가 쌓여 있었다.
 서태양이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다가가서 그 앞에 앉았다.
 들고 있던 검을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서태양이 다탁에 놓인 야명주를 들어보았다.
 은은하면서도 아름답게 흘러나오는 빛.
 실제로 야명주를 만져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야명주는 품질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이라 들었다.
 수천 냥에서 수만 냥, 극상품은 수십만 냥에도 이른다고 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돈 주고 야명주를 왜 사겠는가? 평생 편하게 먹고 살지.
 하지만 결국 야명주도 사치품이다.
 돈이 수천만 냥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구매가치가 있는 물건일 것이다.
 만약 무사히 나갈 수 있다면 꼭 챙겨서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야명주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다탁에 놓인 한 권의 책과 세 개의 상자.
 상자부터 먼저 열었을 터인데 책자에 먼저 시선이 간 것은 인상적인 긴 제목 때문이었다.
 
 광세지존무상대심법(曠世至尊無上大心法).
 
 그것은 무공비급이었다. 무공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심법서.
 아! 살면서 이렇게 거창한 이름의 무공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너무 광오한 이름이라서 오히려 저잣거리에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가짜 비급처럼 느껴졌다.
 무공 이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지존심법’이라 적혀 있었다.
 원래의 제목과 서체가 다른 것을 보니, 후대의 누군가 저 무공을 줄여서 지존심법이라고 쓴 모양이었다.
 서체가 나와 비슷한데?
 정말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해도 될 것처럼 서체가 닮아 있었다.
 단지 비급의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 단전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태양이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실질적인 운용법인 실용구결(實用口訣)에 앞서 대구결(大口訣)이 적혀 있었다.
 
 사사로운 마음을 거두고 고요함을 유지하며 천지의 기운을 감지해 몸의 기운과 일치시킨다. 혈맥은 서로 연관되게 하여 음과 양은 조화를 이루고 백회(百會)에서 용천(湧泉)에 이르는 길이 안정되어야 한다. 기의 움직임은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 경쾌해야 하며 허공에 길을 만드는 것처럼 자유로워야 한다. 십이경맥이 원활하면 기경팔맥을 다스리고 특히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반드시 타통하되 삼백예순다섯 개의 혈도는 하나처럼 이어져야 한다.
 
 그 아래 구체적인 기의 운용에 관해 적혀 있었다.
 구결은 기존에 서태양이 알고 있던 토납법의 구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복잡했다. 그야말로 심오하고 어려웠다.
 구결을 보고 나니까 이 심법이 싸구려 가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딱 알 수 있는 진짜만이 풍기는 기운이 있었다.
 하긴 이 신비로운 동굴의 가장 안쪽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비급인데 이게 가짜 비급일 리가 있겠나?
 대단한 심법을 얻었다는 기쁨만큼이나 커다란 절망이 찾아왔다.
 이 무공이 천하제일의 심법인들 무엇 하겠는가?
 곧 저 문이 열리면 자신은 죽게 될 텐데.
 열리기 전에 이 심법을 다 익힌다고? 그래서 놈들을 다 없애버린다고?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더구나 이 비급은 도법이나 검법 비급이 아닌 내공과 관련된 심법이었다.
 그 순간 서태양의 머릿속을 벼락처럼 내리치는 한 가지 생각.
 익힐 수는 없지만…… 비급을 외울 수는 있잖아?
 그래, 비급을 외우는 거다!
 
 
 # 제19회 비급을 외우다
 
 밖에 있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비급일 것이다.
 저 문을 열기 전에 이것을 모두 외운 후 없애버린다면?
 설령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나 하나 죽이자고 비급을 포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는 것이다.
 다행히 비급은 그렇게 두껍지 않았고, 서태양은 남다른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냥 있다간 어차피 죽는다.
 서태양이 서둘러 비급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두 번째 장을 외우고 다시 세 번째 장을 넘겼다.
 그가 제대로 집중력을 발휘할 때면 주위가 고요해진다.
 의식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집중의 대상만이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놀랍게도 서태양은 채 반 시진이 되기도 전에 비급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한 것이다.
 다행히 그때까지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암기 과정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
 다시 단전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 느낌을 달리 표현하자면.
 본격적으로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전, 예열(豫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현상이었다.
 구결에 따라 운기를 해야지만 몸 내부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단지 구결을 머릿속에 외웠을 뿐이었다. 한데 몸이 반응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잠시 착각한 것이겠지.
 아까도 그랬다. 비급의 제목을 봤다고 단전이 뜨거워질 리가 없었다. 더구나 알 수 없는 기운과 구엽신선초의 기운으로 길까지 꽉 막혀 있는 단전인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구결이었음에도 너무 잘 외워진 것이다.
 무엇인가를 외울 때 이렇게 쉽게 잘 외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제 막 외운 심법이었는데 혼자서 운기 할 수 있을 자신감이 들 정도였으니까.
 혹시 쓰레기 무공인가?
 그런 의심도 당연했다. 정말 극상승의 무공이라면 이렇게 쉽게 느껴질 리가 없었으니까.
 어쨌든 서태양은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확실히 외웠다.
 서태양은 곧바로 비급을 잘게 찢었다. 다시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잘게 찢었다. 그야말로 실처럼 잘게 찢었다.
 중요한 부분들은 아예 꼭꼭 씹어서 삼켜버렸다.
 이제 비급은 제목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제야 서태양이 안도했다.
 
 이 자식들아! 이제 마음대로 해 봐라!
 
 문을 향했던 서태양의 시선이 이제 상자를 향했다.
 서태양이 떨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순간 서태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명주보다 더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황금색 단약이 들어 있었다.
 짙은 바다 냄새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서태양은 이것이 어떤 영약인지 알았다. 바다냄새를 풍기는 황금빛 영약은 이 강호에 하나였다.
 
 금구신단(金龜神丹).
 
 황금빛 껍질을 지닌 수백 년 묵은 거북이의 내단이 바로 금구신단이었다.
 강호인이 복용하면 단숨에 일 갑자의 내공을 얻고 일반인이 먹으면 평생 무병장수한다는 영약이었다.
 앞서 복용한 구엽신선초가 반 갑자의 내공을 준다면 이 금구신단은 그 두 배인 일 갑자의 효능이었다.
 서태양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다음 순간 서태양이 화들짝 놀랐다.
 앗! 냄새!
 서태양이 재빨리 상자를 닫았다.
 짙은 바다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문이 워낙 잘 만들어져 있어서 좀처럼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 같긴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앞서 지하실에서 구엽신선초를 복용한 것도 냄새 때문이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정녕 고상하게 향을 음미하면서 영약을 복용할 복은 없단 말인가?
 물론 그때와 달랐다.
 어차피 이곳에 두면 놈들이 먹을 것이다.
 염사독의 입에 이 귀한 것이 들어가는 꼴을 본다고?
 죽어도 그 꼴은 못 보지. 이 자식아, 내 똥이나 먹어라!
 서태양이 망설이지 않고 금구신단을 입에 넣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금구신단이 사르르 녹았다.
 아, 정말 기분이 끝내주는구나.
 세상에 어떤 것이 영약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황홀함에 견줄 수 있겠는가?
 곧이어 서태양의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서태양이 운기를 시작했다.
 금구신단의 기운이 혈맥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상쾌하면서도 강렬한 느낌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모두 살아나며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앗.
 신단의 기운을 흡수하는 양이 점점 더 많아졌다.
 흡수하고 빨아들이고, 이윽고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짜내는 느낌으로.
 그렇게 금구신단이 가졌던 일 갑자의 기운이 전신혈맥으로 녹아들어갔다.
 영약을 흡수하는 능력만큼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그였다.
 다음 순간!
 서태양이 흠칫 놀랐다.
 어? 지금 내가 뭐하고 있지?
 놀랍게도 서태양은 새로 익힌 광세지존무상대심법, 즉 지존심법을 운기조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태양의 의지가 아니었다. 서태양은 원래 알고 있던 기본 토납법으로 운기했다.
 그렇게 시작했던 운기가 어느새 지존심법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몸이 제 마음대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서태양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뒤늦게 아차했지만 이미 내력은 물살을 타버린 후였다.
 본격적인 운기를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운기를 멈췄다간 애써 흡수한 일 갑자의 기운은 혈맥에 자리 잡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집중하자! 집중해야 했다.
 서태양이 앞서 외운 구결에 따라 진기를 움직였다.
 서태양은 잘해나갔다.
 아무도 이것이 이제 막 외운 심법의 첫 운기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주위를 배회하는 늑대처럼 어슬렁거렸다.
 서태양이 늑대를 쫓아냈다.
 자연스럽게, 비급에 나와 있던 구결대로만 따르자.
 앞서 지하실에서 두 달간 심법수련만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때 몸속 내부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운기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보통 어떤 일을 할 때도 그렇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할 때는 괜찮다가, ‘난 지금 잘하고 있어.’라고 의식을 하는 순간 실수를 하게 된다.
 ‘의식하지 마’라는 본능과 ‘하지만 그 조차도 의식을 하는 것이잖아?’란 걱정이 이어졌다.
 그래서 다시 ‘아무 것도 떠올리지 마’란 결론까지.
 이 생각들이 순차적으로 반복되었다.
 이런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운기는 잘 이루어졌다.
 운기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서태양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
 이 새로운 심법구결은 임맥과 독맥을 포함하는 운기법이었다.
 임맥과 독맥은 무공을 수련하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혈맥으로, 처음에는 막혀 있다.
 임독양맥이 타통되어야 진짜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임독양맥이 뚫리면 힘이 넘쳐 나고 내공이 막힘없이 흐르기 때문에 고난도의 초식도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효능이 뛰어난 영약을 복용시킨 후 실력 있는 고수가 진신진기를 소모해가며 침이나 뜸, 추궁과혈(推宮過穴)로 도와야 했다. 혈육에게나 가능한 희생이었다.
 그랬기에 대부분의 무인들은 이 두 혈맥이 모두 막혀 있었다.
 당연히 서태양도 막혀 있었다.
 몸속을 돌던 기운이 그곳에 부딪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솨아아아아아.
 금구신단의 일 갑자 기운이 임맥의 시작점인 회음(會陰)혈을 향해 거세게 내달렸다.
 기운과 혈맥이 충돌하는 순간 기절하면 죽거나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고통스러워도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될 테니까.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일이다.
 솨아아아아아.
 기운이 회음혈에 부딪치려는 순간, 서태양이 이를 악물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회음혈에 부딪치려던 기운이 그 앞에 멈춰선 것이다.
 서태양은 느낄 수 있었다.
 이 기운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지존심법이 알아차린 것이다.
 이 일 갑자의 힘만으로는 저것을 뚫지 못한다는 것을. 누군가 고수가 돕고 있다면 이 금구신단의 기운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지금은 서태양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단전조차 막혀서 내력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힘이 부족하다!
 지존심법이 내린 결론이었다.
 지존심법이란 무공이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지고지순한 무공만이 지니는 어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정신을 잃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최상급의 신법이 스스로 그 충격을 최소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비슷했다.
 스스스스슷.
 기운이 회음혈 앞에서 전신혈맥으로 흩어졌다.
 어떻게 된 거지? 기운이 혈맥에 흡수된 것인가?
 서태양이 의아해하던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시작되었다.
 솨아아아아아.
 흩어졌던 기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몸 안에 있던 모든 기운을 다시 끌어 모은 것이다.
 그것이 향한 곳은 회음혈이 아니었다.
 단전을 막고 있는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향해서였다.
 왜 그쪽으로 가지?
 이어지는 놀라운 현상.
 일 갑자의 금구신단의 기운이 단전을 막고 있는 구엽신선초의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모자란 힘을 그곳에서 얻으려는 것이다.
 맙소사!
 서태양은 믿을 수 없었다.
 혈맥의 기운이 그것을 녹여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존심법은 어떻게든 일주천을 마치려는 것이다.
 심법의 요구에 서태양의 본능과 육체가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다.
 광세지존무상대심법은 이름 그대로 신공(神功)이었다.
 스스스스슷!
 녹여내는 양이 서태양이 혼자서 토납법으로 녹여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앞서 들었던 예를 다시 들자면, 예전에 당과를 빨아서 녹이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톡톡 깨어서 먹고 있었다.
 먹어치우는 양이 달랐다.
 광세지존무상대심법에게 있어 반 갑자 내공쯤은.
 
 ‘오호, 저기 남는 힘이 있네. 지금 힘이 필요하니 저것을 가져다 써야겠다.’
 
 딱 이런 느낌이었다.
 기운이 녹는 느낌은 너무 좋았다.
 앞서 금구신단을 복용하면서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있었다. 바로 몸속의 구엽신선초가 한방에 녹는 이 기분이다.
 구엽신선초의 너머의 알 수 없는 기운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구엽신선초의 반 갑자 기운이 모두 혈맥에 녹았다.
 이제 혈맥의 기운은 일 갑자 하고도 반, 구십 년의 기운이었다.
 솨아아아아!
 천군만마를 얻은 기운이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기운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뒤쪽에 있던 알 수 없는 기운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앞서보다 빠르고 힘찬 움직임이었다.
 서태양이 이를 악물었다.
 이 기세로 한 번에 모든 임맥을 다 뚫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꽝!
 첫 번째 혈인 회음혈이 뚫렸다.
 “끅!”
 서태양의 입에서 앙다문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막혀있던 혈맥이 뚫리는 것이니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기운은 멈추지 않았다.
 꽝!
 다음 곡골(曲骨)혈이 뚫렸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충격.
 서태양은 참았다.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알았기에.
 다른 날 백번 기절하고 천 번 쓰러져도 지금은 안 돼!
 그런 마음으로 참았다.
 꽝!
 세 번째 중극(中極)혈이 뚫렸다.
 정말이지 이렇게 아픈 고통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지만 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정말 미친 듯한 고통이었다.
 그래, 참자. 고통을 친구처럼 생각하자. 미워하면 더 참기 힘들…….
 꽝!
 으윽! 이 새끼야! 이러고도 네가 친구냐!
 꽝! 꽝! 꽝!
 일 갑자 반의 기운은 그야말로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완(下脘), 중완(中脘)혈을 거쳐 옥당(玉堂)혈을 꿰뚫었다.
 서태양이 작살에 찍힌 고기처럼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를 앙다문 채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서태양은 살고 싶었다.
 소리를 질러 고통에 지는 순간, 정신이 무너지고 몸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문밖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주화입마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나면 과거의 일이 될 육체의 고통에 지고 싶지 않았다.
 콰콰콰콰콰!
 미친 듯이 밀려든 기운이 이제 마지막 승장(承獎)혈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발!
 
 
 # 제20회 타통하다
 
 서태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꽝!
 기운이 승장혈을 꿰뚫으면서 임맥이 완전히 타통되었다.
 아아아아!
 서태양이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통과 기쁨이 뒤섞인 떨림이었다. 그 끔찍한 고통을 참아낸 자신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이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임맥을 빠져나가 한 바퀴 돈 기운이 다시 어디로인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설마?
 서태양이 깜짝 놀랐다.
 목표는 바로 독맥의 시작점인 장강(長强)혈이었다.
 안 돼! 이제 못 견뎌!
 하지만 기운은 그런 서태양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진기를 완전하게 일주천하려면 독맥도 통과해야 한다.
 한 번 승리를 맛 본 혈맥 속의 기운이 다시 가속도를 내며 장강혈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서태양이 다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젠장! 그래, 하자. 해! 대신 단숨에 뚫자!
 그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노도처럼 밀려가는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달려든 기운이 단숨에 장강혈을 뚫었다.
 한 번 겪은 고통이라서 그나마 나을 줄 알았는데, 혼이 나가는 줄 알았다. 임맥을 뚫을 때와는 또 다른 아픔이었다.
 서태양은 구결에 집중하면서 뭔가 다른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끔찍한 아픔을 잊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파도 너무 아팠다.
 머릿속에든 생각은 오직 하나,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꽝! 꽝! 꽝!
 순식간에 몇 개의 막힌 혈을 뚫으며 중추(中樞), 신주(身柱)를 지나 백회(百會)혈을 향해 내달렸다.
 혈맥을 뚫을 때마다 서태양의 몸이 들썩거렸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이제 이번 타통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닥쳐왔다.
 콰콰콰콰콰!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은 가장 위험한 혈 중에 하나였다.
 이곳을 뚫다가 잘못 터지면 그대로 즉사.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서태양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부디 이 고비를 넘기게 해달라고. 제발!
 꽝!
 하지만 의외로 부드럽게 혈맥을 뚫었다.
 서태양은 느낄 수 있었다.
 조심하려는 마음을 지존심법과 자신의 몸이 알아주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어느 혈보다 신중하게 백회혈을 타통했다는 것을.
 이후는 아주 순조로웠다.
 정수리에서 인중으로 향하는 전정(前頂), 상성(上星), 소료(素髎)혈이 연이어 뚫려나갔다.
 꽝! 꽝! 꽝!
 이제 거의 끝이라고 생각하니 아픔도 잊을 수 있었다.
 먼 길을 힘차게 달려온 기운이 마지막 은교(齦交)혈을 향해 달려갔다.
 꽝!
 은교혈을 끝으로 독맥도 모두 뚫렸다.
 임독양맥의 타통!
 그야말로 진짜 고수로 가는 첫 번째 큰 산을 넘는 순간이었다.
 서태양은 너무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노래를 부르라면 부르고 춤을 추라면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털썩.
 모든 심력을 다 써버린 서태양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의 입가에는 해냈다는 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혹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방군의 말에 엎드려서 작업을 하던 갈사량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 말씀이시오?”
 “못 들었다면 되었소.”
 얼핏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하긴 이 년이나 열지 못한 이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겠는가?
 “여는데 얼마나 더 걸리겠소?”
 방군의 물음에 갈사량이 엎드려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지면서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아주 복잡한 기관으로 만들어진 문이오.”
 문 앞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거기에 기관장치가 있었다.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있었고 알 수 없는 장치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정해진 사람만 열 수 있게 만들어졌소. 정말이지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군요.”
 어느 틈에 다가온 염사독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언제 열 수 있다는 거요?”
 갈사량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다행히 돌아앉아 있어서 염사독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망할 놈, 기관 톱니에 갈아버릴 새끼!’
 하지만 그런 말을 겉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당화정이 자신을 지켜주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없는 틈을 노리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이 천지분간 못하는 놈이라면 어떤 사고를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리라.
 갈사량이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며칠 더 걸릴 것 같소.”
 그에 반해 염사독의 눈빛은 아주 못마땅했다.
 “며칠이나?”
 “워낙 정교한 기관이라서…….”
 염사독이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고?”
 갈사량이 표정을 굳혔지만 오히려 염사독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방군이 나섰다. 문이 열리고 당화정이 자신들을 해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 둘까지 사이가 틀어져봐야 좋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방주님,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그렇잖아도 배가 고프군.”
 “가시지요. 제가 식사를 차리겠습니다.”
 “누님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셨습니다.”
 “그 자도 같이?”
 그 자란 다름 아닌 서홍락을 의미했다.
 방군이 갈사량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네. 함께 나가셨습니다.”
 아무리 청목방의 방주라 하더라도 서홍락은 강호에서 유명한 무인이었다. 함부로 말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아니, 애도 아니고. 왜 그리 붙어 다녀?”
 짜증난다는 얼굴로 염사독이 성큼성큼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갈사량이 방군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참 개 같은 놈 밑에서 고생이 많다.’
 웃음에 담긴 그 뜻을 모를 리 없었지만 방군은 모른 척 자리를 떴다.
 
 ***
 
 서태양은 다시 꿈을 꾸었다.
 앞서 꿨던 꿈이었다.
 
 절벽 위.
 자욱이 흐르는 안개, 들려오는 말소리.
 “후회하실 겁니다.”
 여전히 안개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느껴지는 신뢰와 충성심, 그날의 꿈과 똑같았다.
 “아니, 난 후회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던 사내가 다시 말했다.
 “아니요,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지난 꿈은 이때 깼었다.
 하지만 오늘은 꿈이 더 이어졌다.
 
 “그래, 후회할지도 모르지.”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가련다.”
 “놈은 괴물입니다.”
 “그러니까 잡아야지. 인간 세상에 괴물이 살게 할 수는 없잖아?”
 “가주님!”
 “너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 강호에 괴물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 감아버리라고?”
 
 서태양의 화난 눈빛.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태양이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가 말했지? 내가 천하제일이라고.”
 “네.”
 “천하제일이면 천하제일답게 굴어야지.”
 “그럼 저희도 데려가십시오.”
 “그럴 수 없다는 것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너희들이 함께 가면 그나마 살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진다는 것을.”
 “짐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인질이 된다면 자결할 겁니다.”
 “내게 그런 상처를 안기고 싶으냐?”
 “……가주님.”
 “안다. 이 역시 너희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란 것을. 하나 참아라. 우린 마음의 상처에 불과하지만, 지금 죽지 않아야 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 자들의 추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서태양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비라도 내릴 것 같은 궂은 날씨. 거기에 안개까지 자욱해서 하늘은 잘 보이지 않았다.
 서태양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뽑아들었다.
 주위에 흐르던 안개가 칼의 예기에 밀려 흩어졌다.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맑은 하늘을 되찾아 주마. 반드시.”
 
 징―
 칼이 우는 순간 서태양이 눈을 번쩍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석실의 낯선 천장이 보였다.
 왜 자꾸 이 꿈을 꾸는 것일까?
 절박한 상황 때문에 꾸는 개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너무 생생해서 꿈같지도 않은.
 꿈속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분노와 의지가.
 적들은 누구이며 괴물이란 자는 대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어쨌든 꿈은 꿈이고.
 이러고 한가롭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태양이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몸을 일으켰다.
 몸은 가볍고 상쾌했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상태에서 운기조식부터 해보고 싶었다.
 어떤 느낌인지. 이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하지만 언제 문이 열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먹을 것은 먹고 없앨 것은 없애야겠지.
 서태양의 시선이 아직 열지 않은 두 상자를 향했다.
 
 ***
 
 비동 주위의 들판에 당화정과 서홍락이 서 있었다.
 “정말 저 안에 든 것이 대살성이 남긴 유지(遺志)라고 믿으십니까?”
 서홍락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벽에 새겨진 흔적을 보면 분명 대살성이 남긴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실력, 하지만 그렇다고 대살성의 것이란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러길 바라고 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
 만약 저 곳에서 대살성이 남긴 비급을 발견해 낸다면?
 “오라버니를 누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녀는 혈수곡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오라비인 당문정(唐文政)과 다투고 있었다.
 하지만 후계싸움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세에 밀리고 있었다.
 “상황을 역전시킬 한방이 필요해.”
 모두들 당문정이 혈수곡의 후계자라 생각했다.
 혈수곡 사대고수 중 세 사람은 당문정을 따르고 있었다.
 오직 서홍락만이 당화정을 주인으로 선택했다. 모두들 그의 선택이 어리석다고 말했다.
 서홍락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마도 그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대단히’란 말까지 붙여서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하루는 당화정이 서홍락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도와주세요. 그럼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겠어요.”
 “사대고수 중 왜 나를 선택했느냐?”
 “당신이 제일 잘 생겼어요.”
 
 그 말에 그녀를 선택했다. 모두들 미쳤다고 할 일이다.
 그녀를 좋아하느냐고? 글쎄.
 어쨌든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옆에서 여러 사내가 거쳐 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덥군.”
 당화정이 겉옷을 하나 벗자 허연 팔과 어깨가 드러났다.
 서홍락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당화정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생각 있어?”
 순간 서홍락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당화정은 먹으면 죽는 독초(毒草)다.
 한 번 발을 들이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늪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내들이 그녀의 품에서 죽어갔다.
 서홍락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일이 끝나고 나면 염사독을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없애버려야지.”
 “우리가 함께 청목방을 나온 것을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청목방의 군사 방군은 방을 나서기 전, 주위의 여러 문파에 당화정과 서홍락이 방문한 사실을 알렸다. 행선지는 알리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나간다는 사실까지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아무리 막 나간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죽이진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냥 나와서 곧바로 헤어졌다면 되잖아? 우겨. 우기면 다 통하잖아?”
 “아가씨!”
 “하하, 농담이야. 걱정 마.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당화정의 입가에 한 줄기 사악한 미소가 지어졌다. 사악한 마음을 드러내자 표정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녀의 악은 아주 본질적인 느낌을 준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났을 것 같은 그런 악이다.
 “군사 놈을 잘 감시해. 그놈을 이용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저기 머저리 놈이 오는군.”
 저 멀리서 염사독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당화정이 서홍락을 달래듯 말했다.
 “조금만 참아, 곧 끝날 테니까.”
 “네.”
 그 사이 염사독이 그곳에 도착했다.
 “누님, 여기 계셨소?”
 염사독이 보란 듯이 당화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서홍락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이 여자는 내 것이라는 아주 유치한 치기.
 서홍락이 못 본 척 그곳에서 물러났다.
 저만치 물러나는 그를 보며 염사독이 나직이 말했다.
 “저 자, 눈에 안 띄게 할 수 없소?”
 당화정이 염사독의 귀를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
 “그냥 물건이라 여겨. 굴러다니는 돌. 원래 그런 존재니까.”
 염사독이 킥킥대며 웃었다.
 일부러 당화정이 제법 큰 소리로 말했기에 그 말은 서홍락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서홍락은 아무런 감정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 제21회 상자를 모두 열다
 
 두 번째 상자는 첫 번째 것보다 크기가 컸다.
 서태양이 긴장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으악!
 서태양은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안에 든 것은 뱀 대가리였다. 그것도 보통 뱀이 아니라 머리가 둘 딸린 쌍두사였다.
 게다가 대가리에는 달팽이의 더듬이처럼 생긴 검은 뿔까지 나 있었다.
 
 흑각쌍두사(黑角雙頭蛇)!
 
 저기 멀리 운남(雲南)의 울창한 숲에서만 산다는 아주 희귀한 영물이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쌍두사 대가리 옆에 술병이 하나 있었다.
 마개를 열어보니 술이었다. 술에서 아주 역겨운 냄새가 났다.
 서태양이 재빨리 마개를 닫았다.
 언젠가 무송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흑각쌍두사의 내단을 복용하면 어지간한 독에는 절대 중독되지 않지. 허나 내단이 워낙 독하고 역겨워서 그냥은 먹지 못하고 술에 담가서 먹는다더군.”
 
 이 술은 흑각쌍두사의 내단으로 담은 술이 틀림없었다.
 이걸 마셔? 말아?
 쉽게 결론을 내리게 해준 것은 역시 염사독이었다.
 염사독이 이제 앞으로 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희희낙락 술을 마시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 꼴도 내가 못 보지.
 서태양이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먹기 힘든 것일수록 한 번에 다 마셔버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쉬지 않고 들이켰다.
 대번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정말 비리고 역했다.
 하지만 서태양은 꾹 참았다. 이 귀한 것을 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대신 온몸이 붉어지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술을 수십 병은 마신 것처럼 어지러웠다.
 이거 잘 못 마신 것 아냐?
 서태양은 덜컥 겁이 났다. 후회해봤자 이미 술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뱃속으로 다 들어간 후였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서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서태양이 한옆으로 기어가서 벽에 기댔다.
 지존심법의 구결을 떠올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오직 몸이 견뎌야 했다.
 몸이 붕 날아오르다가 다시 곤두박질치는 느낌을 받았다.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고 그 와중에 구역질이 났다. 속은 쓰렸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서히 몸이 안정되어갔다.
 만약 자신의 육체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지 않았다면 이 내단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서태양이 정신을 차렸다.
 정말이지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이제 진짜 독에 중독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일부러 독을 마셔서 시험해 볼 자신은 없었다.
 어쨌든 전해지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어지간한 독에는 중독되지 않는 몸이 된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서태양이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 든 것은 반지였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평범한 가락지였다.
 흔히 사용되는 금이나 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철도 아닌 듯 보였다. 무엇인지 모를 독특한 재료로 만들어진 가락지였다.
 앞서 두 상자에 든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뭔가 의미가 있을 물건인데, 그냥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서태양이 그것을 손가락에 맞춰 끼었다.
 자신의 것처럼 딱 맞았다.
 상자 안에 작은 종이가 한 장 있었다.
 
 포양호(鄱陽湖), 귀선루(鬼仙樓).
 
 포양호는 강서지역 북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였다. 귀선루란 곳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반지를 끼고 포양호의 귀선루로 오라는 뜻인가?
 다른 설명이 없었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서태양이 장소가 적힌 종잇조각을 씹어서 삼켰다.
 이제 비동과 석실에 있던 모든 것들은 서태양이 접수했다. 그 대부분이 뱃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벽에 남겨진 도흔.
 광세지존무상대심법.
 금구신단.
 흑각쌍두사의 내단.
 가락지.
 거기에 임독양맥 타통까지.
 
 정말이지 제대로 한밑천 챙긴 것이다.
 덤으로 야명주도 있었다.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면 그것도 가져나갈 작정이다.
 서태양이 포권을 하며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어느 고인(古人)께서 남기신 귀품(貴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반드시 옳고 선한 일에 쓰겠습니다. 부디 밖에 있는 자들보다는 더 나은 인연이라 여기시고 너무 노여워 마시기를.
 
 물론 이 고마움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서태양이 미뤄뒀던 운기조식을 위해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이 순간의 느낌은 위험천만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몸이 어떻게 변했을까? 혈맥에 있을 일 갑자 반의 기운은 운기를 마쳤을 때 어떻게 될까?
 상자를 열 때 보다 마음이 더 떨렸다.
 서태양이 천천히 지존심법의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맥에 녹아 있던 일 갑자 반의 기운이 잠에서 깨어났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혈맥은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단지 사용되지 않았던 혈맥이 열린 것뿐인데, 마치 혈맥 전체가 환골탈태 한 것 같았다.
 운기 속도가 빨라졌고 안정감이 더해졌다.
 심법 자체가 주는 청량감이 달랐다.
 그렇게 온몸을 한 바퀴 돌고난 기운이 단전을 향해 달려갔다. 단전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는 알 수 없는 기운.
 솨아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혈맥의 기운이 그 알 수 없는 기운 앞에 딱 멈춰선 것이다. 앞서 임맥을 뚫을 때도 이렇게 멈춰 섰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고요했다.
 적대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은 무심한 대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까?
 쏴아아아앗.
 일 갑자 반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한편으론 다행한 일이었다.
 비록 그것을 뚫지는 못했지만 이제 전신 혈맥에 녹아든 기운은 일 갑자 반이 되었다.
 이전에 두 배 반 향상되었던 잠재력은 이제 다섯 배가 되었다.
 처음 연회장에 참석하던 그 서태양보다 정확히 다섯 배나 힘이 세고 몸놀림이 빠른 육체가 된 것이다.
 두 배 반 일 때는 세 배가 한계일 것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육체를 너무나 과소평가한 것이다.
 서태양은 각오했다.
 저 기운이 무엇이든, 반드시 저것을 뚫겠다고.
 그래서 이 넘쳐나는 기운들을 모두 단전의 내공으로 바꾸겠다고.
 
 ***
 
 서태양은 온종일 석벽에 귀를 대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임독양맥이 타통되고 난 후 몸의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청각 역시 이전보다 상당히 좋아졌다.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도 이제는 똑똑히 들렸다.
 그는 오직 하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갈 기회.
 바깥에서 문을 열면 자신이 탈출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문 안에 무엇이 있나 잔뜩 긴장한 다섯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비급을 외운 것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
 결국 탈출하려면 방법은 하나였다. 자신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서태양은 간절히 기대했다.
 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확률로 일어나는 그 분열이 문이 열리기 전에 딱 한번만 일어나 주기를.
 
 다음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분열의 시작은 역시 염사독이었다.
 “만박서림도 별 것 없군.”
 결국 염사독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갈사량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지금까지 염사독이 계속 깐족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지만 자신이 속한 만박서림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오늘 염사독이 선을 넘은 것이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귓구멍까지 막히셨나?”
 염사독은 한껏 독이 올라 있었다. 그는 이 동굴에서의 며칠이 너무 힘들었다. 먹는 것도 힘들었고, 잠자리는 불편했다. 아까는 볼 일을 보다가 뱀에게 물릴 뻔했다.
 결정적으로 그를 화나게 한 것은 당화정이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는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끌어안고 입맞춤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서홍락은 호위를 핑계로 눌어붙은 누룽지처럼 붙어 다니고 있었고, 당화정은 서홍락 핑계를 댔다.
 ‘이제 이용가치가 없어졌다 이것인가? 이 갈보 년이 나를 무시해?’
 소인배의 분노는 자주 엉뚱한 곳을 향하기 마련이다.
 갈사량은 갈사량대로 염사독의 빈정거림을 참아내느라 힘들었는데 이젠 더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염공자!”
 “이 새끼야! 염방주라고 불러!”
 짝!
 염사독이 사정없이 갈사량의 뺨을 후려쳤다.
 설마 자신에게 손찌검을 할 줄 몰랐기에 갈사량은 놀라고 당황했다.
 갈사량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뭘 믿고 이 지랄이야? 뒈지고 싶어?”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싸늘한 당화정의 한 마디.
 “그러는 너는?”
 깜짝 놀란 염사독이 돌아섰다.
 짝!
 당화정이 사정없이 염사독의 뺨을 때렸다.
 잠시 멍하게 있던 염사독이 버럭 소리쳤다.
 “이 썅…….”
 하지만 제대로 욕이 나가기도 전에.
 짝!
 당화정이 또다시 뺨을 때렸다.
 염사독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날리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당화정은 그보다 훨씬 무공이 강했다.
 짝! 짝! 짜악!
 양쪽 뺨에서 불이나자 그제야 염사독이 고개를 숙이며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누님, 왜 이러시…….”
 퍼억!
 당화정이 사정없이 염사독을 걷어찼다.
 염사독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뒤로 자빠졌다.
 매질은 이제부터였다.
 퍽! 퍽퍽! 퍼억!
 당화정이 모질게 그를 짓밟았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누님!”
 염사독의 입에서 치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당화정이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뭘 잘못했는데?”
 염사독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그게…….”
 그의 마음속에는 이 순간을 모면하고 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갈사량이 통쾌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서홍락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군은 화난 얼굴이었다. 아무리 못난 주인이라 해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장이었다. 마치 자신이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여기 왜 왔지? 저 문을 열려고 왔지?”
 “네, 네.”
 “네가 열 수 있어?”
 “아닙니다.”
 “나도 못 열어. 오직 저 사람만이 열 수 있지. 그런데 저 사람을 때려? 그러다 머리나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화정이 염사독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또 때리려는 줄 알고 염사독이 움찔했다.
 그녀가 부드러운 손길로 염사독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뺨을 매만졌다.
 “아팠지? 동생.”
 염사독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 어깨 너머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갈사량과 눈이 마주쳤다.
 염사독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 새끼가! 웃어?’
 다시 그의 뺨에서 불이 났다.
 짝!
 “네가 이래서 맞는 거야. 알아?”
 “압니다, 누님. 잘못했어요.”
 당화정이 달래듯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저깟 백면서생(白面書生)은 일일이 상대할 필요가 없어. 이용해먹고 버릴 놈이라고. 알았어?”
 “네.”
 당화정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뒤쪽 폭포로 와. 이 누님이 확실하게 기분 풀어줄게.”
 그 말에 염사독의 입이 헤벌쭉 열렸다.
 그녀가 먼저 동굴을 나갔다. 서홍락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염사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 늘어진 어깨로 걸어 나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제22회 복수는 태양처럼
 
 염사독이 방군에게 나직이 말했다.
 “나가서 망을 좀 봐주시오. 누님이 오면 당장 알려주고.”
 “어떻게 하시려고요?”
 “잠깐이면 되오. 안 때려, 걱정 말라고. 몇 마디만 하고 나갈 거니까. 어서!”
 죽일듯한 눈빛으로 재촉했기에 방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그는 마음을 굳혔다. 돌아가면 더 이상 염사독을 주인으로 삼지 않겠다고. 자신은 물러날 생각이 없으니, 갈아치워야겠지.
 둘만 남게 되자 염사독이 험악한 분위기로 갈사량에게 다가갔다.
 “왜 이러시오?”
 “아까 웃었지? 골방에서 먹이나 갈던 놈이 감히 날 보고 웃어?”
 “안 웃었소.”
 염사독이 때리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겁먹은 갈사량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요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새끼가.”
 애초에 갈사량을 두들겨 팰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 당화정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을 테니까.
 염사독이 갈사량의 뺨을 치욕적으로 툭툭 건들이며 말했다.
 “누님에게 이르기만 해봐. 넌 정말 뒈진다.”
 “알겠습니다.”
 이제 좀 기분이 풀렸다. 이렇게라도 분을 풀지 않으면 미쳐서 돌아버렸을 것이다.
 염사독이 입구 쪽으로 돌아섰다.
 ‘기분 좋게 해준댔으니, 오랜만에 몸을 풀 수 있겠지?’
 그때였다.
 퍼억!
 뒤에서 난 둔탁한 소리에 염사독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이 머저리 같은 놈아. 괜히 문에다 화풀이 하지 말고!”
 그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데.
 퍼억!
 빠르게 날아온 주먹에 턱을 강타당한 그가 허공을 붕 날아서 떨어졌다.
 털썩.
 누구에게 얻어터졌는지도 확인할 틈도 없이 그가 뻗었다.
 그에게 주먹을 날린 사람은 서태양이었다. 앞서 뒷목을 강타당한 갈사량도 기절해 있었다.
 서태양이 성큼성큼 염사독에게 다가갔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넌 죽여야겠다!”
 염사독의 가슴을 향해 검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아니지.”
 기절한 염사독을 내려다보며 서태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아비 닮아서 욕심 많지? 그래, 다 가져라! 네 소원 들어 주마.”
 
 ***
 
 잠시 후 염사독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니 주위가 캄캄했다.
 “어이쿠, 턱이야. 이 갈사량 개자식! 날 쳐? 너 정말 뒈졌어.”
 그는 자신을 때린 사람이 갈사량이라 생각했다.
 갈사량은 반대로 자신을 때린 사람을 염사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염사독이 턱을 매만지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젠장. 뭐가 이리 어두워?”
 그때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방군의 목소리.
 “방주님!”
 염사독이 소리쳤다.
 “나 여기 있어!”
 그때 당화정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어? 너 어떻게 들어간 거야?”
 “안? 어디 안?”
 염사독이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석실 안이었다.
 “내가 왜 여길?”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당화정의 목소리.
 “동생! 아무것도 손대면 안 돼! 절대 안 돼!”
 염사독이 주위를 살폈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밝히던 야명주마저 없었다.
 밖에서 다급한 당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열어! 빨리!”
 염사독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그럼에도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당화정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건드리면 안 돼! 아무것도! 절대!”
 
 ***
 
 문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세 시진이 지나서였다.
 열린 문으로 빛이 들어오며 실내가 밝아졌다. 가장 먼저 뛰어 들어온 사람은 당화정이었다.
 염사독은 한쪽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 당화정과 염사독 사이에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머리를 얻어맞고 깨어보니 여기였다.
 알았으니 그냥 가만히 있어라.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마라.
 갈사량의 소행이다. 놈을 붙잡아라.
 그래, 알았으니 차라리 누워서 자라.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다탁위에 상자들이었다.
 당화정이 재빨리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텅 빈 상자.
 상자에는 금구신단만의 짙은 바다향이 남아 있었다.
 “금구신단!”
 냄새로 볼 때 조금 전까지도 신단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두 번째 상자를 열던 그녀가 흠칫 놀랐다.
 말라비틀어진 흑각쌍두사의 대가리.
 비어 있는 술병.
 병을 뒤집어 봤지만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흑각쌍두사의 끝을 집어 들었다. 허공에 대롱대롱 들린 두 개의 대가리. 허옇게 말라비틀어진 두 쌍의 눈이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당화정이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집어던졌다.
 마침 그곳에 갈사량이 서 있었다. 날아든 뱀 대가리에 그가 기겁했다.
 며칠 내내 고생해서 문을 열었는데 고생했다는 한마디 칭찬은 고사하고 숨도 크게 못 쉴 살벌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당화정이 싸늘히 식은 얼굴로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텅 빈 상자.
 냄새조차 나지 않아 거기에는 뭐가 들었던 것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저 새끼, 깨워.”
 그녀의 목소리가 차악 가라앉았다.
 서홍락이 다가가서 염사독을 발로 툭툭 찼다.
 그제야 염사독이 잠에서 깼다.
 “아, 누님! 문을 열었군요!”
 염사독이 반갑게 그녀에게 다가가려다 흠칫 놀랐다. 그는 태어나서 이렇게 싸늘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저 놈 몸을 뒤져 봐.”
 그녀의 명령에 서홍락이 염사독의 혈도를 제압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마혈을 찍으면서 말을 못하게 아혈도 함께 제압했다.
 ‘이 미친 놈! 왜 이러는 거냐!’
 염사독이 눈을 부릅떴지만 서홍락은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염사독의 몸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화정이 물었다.
 “네가 다 처 먹었냐?”
 염사독은 불안하게 눈알만 굴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혈이 제압당했기에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을 가로저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서홍락이 아혈을 제압하면서 목을 움직일 수 없게 그쪽 혈도까지 찍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돌처럼 굳었다. 돌멩이 취급을 했던 서홍락에게 당해서.
 “그래, 그 주둥이로 변명을 하는 것도 웃기지.”
 당화정이 서늘한 눈빛으로 명령했다.
 “군사 놈을 끌고 와.”
 서홍락이 방군을 석실로 끌고 왔다. 그는 이미 마혈이 제압당해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방군을 데려다 놓은 후, 당화정이 염사독에게 다가갔다.
 부드러운 손길로 천천히 그의 볼을 매만졌다.
 “동생, 저 귀한 영약을 혼자서 다 쳐 먹으면 내가 ‘아차, 한 발 늦었네. 하하하, 이번은 동생에게 양보할게’ 이럴 줄 알았어?”
 얼굴을 매만지던 당화정의 손이 염사독의 아랫배로 내려갔다. 진기를 불어넣어 단전을 확인했지만 영약의 효과는 느낄 수는 없었다.
 염사독이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고 영약의 효능 또한 열에 하나만 흡수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병신이 영약을 헛되이 날려버렸군.’
 당화정의 눈이 길게 찢어지는 것을 보며 염사독은 공포에 질렸다.
 변명할 말은 많았다.
 자신이 어떻게 문을 열 수 있었겠냐부터, 영약은 구경도 못했고, 손대지 말라고 해서 아무 것도 만지지도 않았다고, 다 저기 있는 갈사량이 자신을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내가 말했지? 건들면 죽는다고.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웠어?”
 하지만 아혈을 제압당했기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하긴 온갖 변명을 다 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이상, 죄가 있든 없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쇄애애액!
 당화정의 손바닥이 염사독의 이마를 강하게 내리쳤다.
 쩍 하는 두개골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염사독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녀의 일장에 비명 한 마디 질러보지 못하고 절명한 것이다.
 서태양은 일부러 이곳에 비급을 남겨두지 않았다.
 만약 비급이 있었다면 염사독이 그 비급을 외웠을까봐 그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당화정은 차분히 상황을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유형의 악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염사독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영약을 처먹은 이상, 그냥 작살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잘 죽었다며 통쾌해하던 갈사량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녀의 하얀 손이 갈사량의 가슴을 꿰뚫었다. 피 묻은 그녀의 손이 등 뒤로 튀어나왔다.
 ‘왜 나까지?’
 마지막 순간 갈사량이 떠올린 의문이었다.
 그녀의 악심을 과소평가한, 어리석고 순진한 믿음의 결과였다.
 다음이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한 방군이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그녀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방군에게 다가갔다.
 “아시겠지만 우리가 함께 방을 나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주면?”
 방군은 이 대답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 일의 뒤처리를 확실히 하겠습니다.”
 “어떻게?”
 “방주와 갈사량이 술을 먹고 다투다 양패구상한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갈사량은 무공을 모르잖아?”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대답은 곧장 나왔다.
 “청목방은 앞으로 아가씨에게 충성할 것입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살기가 가득했다. 살기에 눌린 방군은 뱀 앞에 웅크린 쥐새끼처럼 덜덜 떨었다.
 “네가 배신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지?”
 “염사독과 같은 자에게 무슨 존경심이 있었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전 오늘에서야 진정한 주인을 만났습니다.”
 방군이 그 자리에서 절을 하며 이마를 바닥에 댔다.
 그를 내려다보는 당화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방군은 똑똑한 자다. 차라리 이럴 때는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낫다.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제대로 알고 있을 테니까.
 “좋아. 믿어주지.”
 앞으로 지속적인 공포를 심어준다면 그는 충성을 바칠 것이다. 공포는 때론 실제의 힘보다 강한 법이니까.
 당화정이 그곳을 걸어 나가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재수 없는 이 곳, 진천뢰로 날려버려!”
 문을 여는데 필요할지 몰라 갈사량이 가져온 진천뢰가 다수 있었다.
 서홍락이 갈사량과 염사독의 시체를 동굴 밖으로 가져나갔다.
 그리고 진천뢰를 석굴 곳곳에 설치했다.
 
 꽈아아앙!
 진천뢰가 터지면서 비동이 무너져 내렸다.
 모두가 떠난 그곳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서태양이었다.
 자신이 들어왔던 틈에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고수인 서홍락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염사독이 죽음을 당할 때, 서태양은 처음 연회장에서 만났던 그 시비를 떠올렸다.
 자신의 뒤에 숨었던 그녀.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걱정하던 착한 그녀를.
 
 이제 부디 억울함을 잊으시오. 다시는 그대와 같은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내 작은 힘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소. 지켜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결국 염천광과 염사독 부자는 두 명의 여인을 죽임으로써 천벌을 받게 된 셈이었다.
 서태양은 그녀들의 복수와 동시에 자신도 큰 짐을 덜었다.
 차도살인으로 염사독을 죽였기에 청목방의 복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번 일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것이다.
 마음 같아선 직접 죽이고 싶었지만 결과는 이것이 훨씬 더 나았다. 어차피 그에겐 ‘원하지 않는 죽음’이란 강력한 형벌이 내려졌으니까.
 비동은 무너져 버렸지만 벽에 새겨져 있던 흔적들은 모두 서태양의 머릿속에 담겨 있었다.
 서태양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 제23회 재산을 되찾다
 
 열흘 후, 서태양은 태화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이도였다. 마침 그는 임무 하나를 마치고 다음 임무를 위해 대기하던 중이었다.
 “염사독이 죽었다고? 정말?”
 이도는 깜짝 놀랐다.
 “혈수곡의 당화정이 그를 죽였어. 만박서림의 갈사량이란 자도 함께 죽었고.”
 “맙소사!”
 “그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거야.”
 “무섭다, 무서워.”
 그래, 무서운 일이다.
 제갈륜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책에 적힌 사실을 믿느냐고.
 지금 이 순간에도 중원 어디에선가는 진실이 진흙탕 속으로 묻혀 버리고 있을 것이다.
 이도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고, 줄 건 줘야지.”
 “뭘 줘?”
 “뭐긴 영약이지. 설마 혼자 다 먹은 것은 아니겠지? 아냐,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양이 넌 그런 몰인정하고 매정한 사람이 아니잖아. 뭘 남겨 왔어? 대환단(大還丹)? 만년설삼(萬年雪蔘)? 긴장하지 마. 다 안 줘도 되니까. 환이라면 끄트머리를 살짝만 썰어 주고. 삼이면 곁뿌리 한 뿌리만.”
 서태양이 뭔가를 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도가 환하게 웃으며 뭐를 내려놓을지 기대했다.
 서태양이 이도의 손을 꽉 잡았다. 물론 빈손이었다.
 “끝?”
 “다시 봐서 정말 반갑다. 진심이야.”
 “정말 끝?”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도 넌 물질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친구의 무사귀환을 위해 오히려 돈주머니를 여는 진짜 우정의 화신이잖아. 기꺼이 마셔 주마.”
 “이 뻔뻔함,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거야?”
 “거울 같은 사람 있잖아? 거울 보면서 연습했지.”
 “제대로 배웠네.”
 “스승이 원체 훌륭해서.”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그때 이도가 서태양의 손가락에 끼인 가락지를 보았다. 뺄까 말까 하다가 그냥 끼고 있었던 그것이다.
 “맙소사! 여자 생겼어? 예뻐? 잤어?”
 서태양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지, 어떻게 만났는지를 물어야지.”
 “얼마나 예뻐? 좋았어?”
 “여자한테 받은 것 아니야.”
 “그렇겠지. 네가 두 개 사서 나눠꼈을 테니까.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그런 것 아니라고. 석실에 있던 거야.”
 석실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자 이도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 금이나 은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겠어.”
 “괜히 신비롭게 느껴진다. 내공이 주입되면 뭔가가 팍!”
 “그냥 가락지야.”
 뭔가가 팍 까진 아니었지만 서태양도 이 가락지가 평범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귀선루라고 들어봤어? 포양호에 있는.”
 “처음 듣는데? 왜?”
 “가락지와 함께 그곳이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거든.”
 “오! 그러니까 반지가 더 신비해 보인다. 빛이 나는 것 같아.”
 “더 반짝이는 것 보여줄까?”
 서태양이 품에서 야명주를 꺼냈다.
 “선물 고마워.”
 야명주를 보자마자 이도가 잽싸게 그것을 가로채려했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곧 취소해야 했다. 이도의 손길을 피하며 서태양이 그것을 다시 품에 넣은 것이다.
 “꿈 깨.”
 “뭐가 이리 빨라?”
 서태양의 움직임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해져 있었다.
 “그나저나 야명주라니! 정말 장보도가 맞구나!”
 아마도 그곳에서 얻었던 것들을 말해주면 난리법석을 떨 것이다. 얼마나 아쉬워할지 잘 알았기에 비급과 영약은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도가 넌지시 다가와서 새색시같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선물은 오갈 수 있잖아?”
 서태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는 이 야명주로도 밝힐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있어서.”
 그러자 이도가 표정을 험악하게 바꿨다.
 “네 욕심이 만들어낸 어둠일지니!”
 “그 어둠은 영원할거야.”
 “아아아! 나 줘!”
 “같이 가자고 할 때 가셨어야지!”
 그렇게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 난 후에야 이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서태양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다시 대정협에 들어가야지.”
 태화로 돌아오면서 서태양은 앞날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했다.
 사실 이곳보다 포양호로 먼저 가볼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포양호는 강서뿐만 아니라 중원에서도 알아주는 아주 넓은 호수였다. 주위에 있는 도시와 마을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무작정 가서 귀선루를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서 반지의 주인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한 번은 만나기는 해야 할 것 같지만, 혹시라도 그가 비급과 영약의 주인이라면?
 그냥 두었으면 당화정이 차지했겠지만, 그래도 주인허락을 구하지 않고 복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소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 나중에 혹시라도 귀선루를 찾게 되면 모른 척 가보자.
 일단은 자신의 삶부터 원래대로 되돌려야 할 때다.
 “그런데 너, 좀 바뀐 것 같아.”
 “뭐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어. 확실히 달라졌어.”
 “오랜만에 봐서 그렇겠지.”
 서태양이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자 이도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친구에게 관심 좀 가져.”
 “우리 사이엔 짙은 어둠이 있잖아? 야명주를 주면 환하게 밝아질 텐데.”
 “하하하.”
 정말이지 이도를 다시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래, 보면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다. 바로 이도 같은 사람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참, 정협금고에서 연락이 왔었다.”
 “정협금고에서? 뭐라고?”
 이도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전했다.
 “돈 찾으러 오란다.”
 
 ***
 
 서태양이 정협금고 태화지부로 들어섰다.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태화를 떠나려고 할 때였다.
 이제 태화로 돌아와서 이곳에 다시 오게 되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정협금고 태화지부의 책임자인 서성(徐星)이 직접 서태양을 맞이했다.
 “서 무인, 어서 오시게.”
 “저를 찾으셨다고요?”
 “자, 내 방에 가서 이야기하세.”
 그는 서태양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잘 꾸며진 그곳은 귀빈만 모시는 곳이었다.
 시비가 차를 내왔다. 비싼 차라서 그런지 향도 좋고, 맛도 괜찮았다.
 날씨 이야기로 시작된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성이 같아서 더 친근하게 여겨진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대정협과 정협금고는 한식구나 다름없다는 말까지 이어진 후에야 서성이 본론을 꺼냈다.
 “일전에 돈을 찾으러 왔다가 지급받지 못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본 금고에서 작은 문제가 있었네. 이제 해결이 되어서 이렇게 돈을 지급해 줄 수 있게 되었지.”
 그는 오삼이 서태양의 돈을 횡령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태지만 서태양은 모른 척 했다.
 이미 그 돈은 오삼에게 돈을 뜯으려고 했던 정소를 통해 회수했던 것이다.
 서성이 전표를 내밀었다.
 “여기 있네.”
 그가 준 전표를 확인했다. 천 냥짜리 열두 장, 자신이 예금했던 만 이천 냥이다.
 “그리고 이것도 받게.”
 그가 다른 전표를 한 장 내밀었다. 천 냥짜리 전표였다.
 “지급이 늦어진 데 대한 일종의 보상금이네.”
 “고맙습니다.”
 서태양은 거절하지 않고 그것까지 챙겼다.
 횡령한 돈을 되찾기 위해 서태양은 목숨을 걸었다. 이 돈을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설령 받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려면 지난 일을 모두 밝혀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정협에게 만삼천 냥 정도는 푼돈에 불과할 테니, 고맙게 받을 작정이다.
 서태양은 기분이 좋았다.
 생각지도 않게 전 재산을 되찾게 된 것이다.
 하늘이 도왔나? 어쩌면 두 시비 여인이 선물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은 돈 중에서 삼천 냥만 대정협에 다시 저축했다.
 이번에 한바탕 난리를 한 번 겪고 나니, 무작정 정협금고를 믿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금고를 나온 서태양은 저자에 있는 전장거리로 들어섰다.
 여러 전장들의 지부가 모여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믿을만한 전장은 둘.
 중원전장과 대륙전장이었다.
 서태양이 우선 중원전장에 들러 남은 만 냥을 맡겼다.
 당장 쓸 돈은 흑사에게 받은 이천 냥이 남아 있었다.
 만 냥을 몇 걸음 옆에 있는 대륙전장에 분산해서 맡기지 않은 이유는 그곳에도 돈을 맡길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환한 빛을 내는 돈을.
 서태양이 야명주를 팔기 위해 흑사가 있는 녹주를 향했다.
 과연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
 
 “자,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가?”
 흑사는 평소처럼 자신을 맞아주었다.
 흑사를 통해 얻는 교훈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변함없는 모습이 주는 힘이다.
 위기 때 가나, 지금처럼 위기가 끝나고 가나, 그는 변함없는 태도로 상대를 대한다.
 그를 보면 믿음이 갔고, 그래서 그는 타고난 상인이다.
 “오늘은 이것 때문에 왔습니다.”
 서태양이 품에서 부드러운 천에 잘 싸인 야명주를 내놓았다.
 흑사가 유심히 야명주를 살폈다.
 “오! 상급이군.”
 감탄과 함께 나온 상급이란 말에 서태양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을 팔고 싶은가?”
 “네, 그렇습니다.”
 다시 야명주를 살피던 흑사가 불쑥 물었다.
 “나를 믿나?”
 “물론입니다.”
 그러자 흑사가 즉시 가격을 제시했다.
 “사만 냥에 사겠네.”
 생각보다 비싼 값에 서태양이 깜짝 놀랐다.
 “그렇게나 비싼 것입니까?”
 서태양은 만 냥 정도를 예상하고 왔다. 공짜로 삼만 냥이 생긴 기분이었다.
 “너무 고마워할 것 없네. 이 물건은 임자만 잘 만나면 십만 냥에도 팔 수 있는 물건이라네. 물론 시간이 걸리고 큰 거래에 따르는 위험이 있겠지만 분명 그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네. 어떤가? 그래도 내게 사만 냥에 팔겠나?”
 서태양이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팔겠습니다.”
 “내가 나중에 십만 냥에 팔 수도 있는데?”
 “더 비싸게 파셔도 됩니다.”
 “그럼 자네 배 아프지 않겠나?”
 “백만 냥에 파신다고 해도 그렇지 않을 겁니다.”
 가장 어려울 때 흔쾌히 도움을 준 흑사였다. 백 냥에 사겠다고 했어도 줬을 것이다.
 “전 사만 냥이면 충분합니다.”
 “하하하, 시원해서 좋군. 당장 거래하세.”
 흑사가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했다.
 만 냥짜리 전표로 네 장.
 “비록 액수가 크지만 이 전표는 아주 깨끗해서 문제가 생길 일이 없을 걸세. 혹시 곤란한 상황이 생겨 출처를 밝혀야 한다면 내가 빌려줬다고 하게.”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서태양은 새삼 실감했다. 눈앞의 흑사가 절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서태양이 작별을 고하고 그곳을 떠나자 다시 흑사의 제자인 융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정말 이득을 얻으셨군요.”
 흑사의 말처럼 이와 같은 상급 야명주는 언젠가 주인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앞서 말처럼 충분히 십만 냥에 팔 수 있었다.
 그리고 흑사는 이것을 살만한 거물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그냥 막 퍼주시다가 이번에는 왜 이문을 남기신 겁니까?”
 흑사가 웃으며 말했다.
 “나야 장사꾼이지 않느냐? 큰 투자도 장사는 해가면서 해야지. 하하하하.”
 
 ***
 
 서태양은 사만 냥을 다시 나눠서 이만 오천 냥을 대륙전장에, 만 오천 냥을 중원전장에 맡겼다.
 이제 두 전장에 각각 이만 오천 냥의 돈이 예금되었다.
 거기에 정협금고에 삼천 냥, 수중에 가지고 있는 이천 냥까지. 총 오만 오천 냥의 거금이 수중에 생긴 것이다.
 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액수다.
 든든한 마음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서태양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양억의 철방이었다.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다시 돌아왔군. 반갑네.”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 여전하다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근육이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어쩐 일로 왔는가?”
 서태양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도를 사고 싶습니다.”
 
 
 # 제24회 칼을 얻다
 
 도를 사고 싶다는 말에 양억이 깜짝 놀랐다.
 “자넨 검을 쓰지 않나?”
 “그렇지요.”
 “한데 갑자기 왜 도를 사려는 것인가?”
 서태양은 벽에 그려진 도흔이 자꾸 떠올랐다.
 물론 그 흔적만 보고 초식을 펼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자꾸만 그것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한 번쯤 도를 연마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법을 익혀볼까 합니다.”
 아주 잠깐 양억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이제 와서?”
 “어차피 제가 익힌 검술이야 별 볼일 없지 않습니까? 오늘 당장 버리고 새 도법을 익힌다고 해도 크게 아쉽지 않습니다.”
 서태양이 배운 검술은 반월검법(半月劍法)이었다.
 이름은 그럴 듯해 보였지만 그리 대단한 검술이 아니었다.
 중원 곳곳에 지부가 있는 유명무관에서 가르쳐주는 검술이었기에 익힌 사람이 강호에 수천 명은 되었다.
 하루에도 길에서 동문을 몇 명이나 만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니까.
 “어떤 도법을 익히려고?”
 “아직 도법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도라도 한 자루 있으면 뭔가 길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 천릿길도 한걸음부터지.”
 “초심자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아서 한 자루 골라 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양억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다시 와 주겠나?”
 철방에 널린 것이 칼인데, 굳이 내일 다시 오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급한 일도 아니었기에 서태양은 흔쾌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서태양이 돌아가고 난 후 양억은 철방문을 닫았다.
 비밀 벽을 열고 들어가 그곳에 걸린 칼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듯 화려한, 그리고 극강의.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벽에 걸려 있던 칼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칼날이 너무 예리해서 보통 사람은 감히 칼을 잡지도 못할 정도였다.
 양억이 푸른빛이 나는 깨끗한 비단 위에 칼을 올렸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양억의 눈빛에 격정이 스쳤다.
 “이제 때가 된 듯하구나.”
 양억이 철방 한옆의 장식장에서 도를 한 자루 가져왔다.
 철컹.
 도가 나눠지며 그 안에 칼을 넣을 공간이 나왔다. 벽에 걸려 있던 칼이 정확히 딱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본래의 칼을 숨기기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었다.
 양억이 벽에 걸려 있던 칼에 칼옷을 입히며 차분히 말했다.
 “당분간 조금 갑갑하더라도 참아라.”
 
 다음날 서태양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양억이 한 자루의 칼을 내놓았다. 아주 평범한 모양의 투박한 칼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들 차고 다니는 도보다 크기가 조금 더 컸다.
 “마음에 드나?”
 겉으로 봐선 너무 평범해서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양억이 하루의 시간까지 두고 애써 골라준 도이니만큼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네, 마음에 듭니다.”
 “내가 아끼는 도라네.”
 그렇게 말하니 왠지 칼이 특별해 보였다.
 “아끼시는 칼인데 제게 파셔도 됩니까? 혹시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본래 무인과 병기는 운명처럼 엮여 있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네. 이 칼과 자네가 인연이 있다면 결코 자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까.”
 서태양이 도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이 칼과 인연이 있을까? 그건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지.
 “감사합니다.”
 서태양이 허리에 도를 찼다. 왠지 가슴이 뿌듯했다.
 “얼마입니까?”
 “선물이네.”
 서태양이 당황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의로 주는 이 칼에 굳이 돈으로 값을 매길 텐가?”
 그렇게 말하자 더는 돈을 내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서던 서태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전에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제 검을 보면 부조화가 느껴진다고. 혹시 기억나십니까?”
 “내가 그랬던가?”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잘 가게.”
 서태양이 그곳을 나갔다.
 잠시 멍하니 있던 양억이 천천히 걸어가서 비밀 벽을 열었다. 칼이 걸려 있던 벽은 이제 비어 있었다.
 “후우.”
 양억이 후련함과 걱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칼을 주셨군요.”
 돌아보니 이전에 찾아왔던 그 절세미녀가 서 있었다. 면사가 달린 죽립을 내려놓는 그녀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철들이 가득한 칙칙한 그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네.”
 양억이 조심스럽게 덧붙여 물었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나?”
 그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을 내주는 것이 옳았는지를.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이곳에 와서 칼을 달라고 했잖아요.”
 힘 있게 이어지는 결론.
 “그럼 줘야지요.”
 여인이 같은 마음이란 것을 확인하자 양억은 다소나마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혹시라도 칼이 울까 봐 조마조마했다네.”
 “칼은 알고 있을 거예요. 지금 주인이 처한 상황을. 주인이 깊고 어두운 미궁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주인이 길을 찾아내어 미궁을 빠져나올 때, 그때 비로소 크게 울 거예요.”
 “그가 칼을 지켜낼 수 있을까?”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손에 칼이 들렸는데 상대방 걱정을 해야지요.”
 양억은 여인에 비해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나도 이제 늙었나 보네. 걱정만 자꾸 느니.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그가 돌아오면 꽤 바빠질 테니까.”
 그때였다.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지금 그렇게 한가할 때가 아닙니다.”
 들어선 사람은 놀랍게도 서태양의 상관인 신충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양억은 깜짝 놀랐다.
 “신대주(申隊主)!”
 양억은 태화지부의 부지부장인 그를 대주라고 불렀다.
 한때 철검대주(鐵劍隊主)라 불렸던 사내.
 그에게도 무서울 것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여인이 신충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나요? 신대주님.”
 “진 소저는 여전히 아름답구려.”
 신충이 여인에게 포권하며 예를 갖춰주었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예의를 갖추는 것에 가까웠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대주님.”
 여인의 이름은 진설현(秦雪炫)이었다. 그녀는 지난 십 년간 그 이름으로 살지 못했다.
 인사가 끝나자 양억이 신충에게 물었다.
 “아까 한가할 때가 아니라고 한 말, 무슨 뜻인가?”
 신충이 굳은 얼굴로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편복(蝙蝠)들이 태화를 향해 오고 있소.”
 “편복이!”
 양억이 깜짝 놀랐다.
 편복은 강호의 절대강자 무적십자성의 정예조직인 흑살(黑殺)의 무인들을 뜻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요인암살이었는데 검은 무복에 복면 차림을 하고 주로 밤에 활동한다고 해서 그들을 박쥐를 뜻하는 편복이라 불렀다.
 실력이 뛰어나고 자비란 없었기에 편복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설마 가주께서 살아 계심을 알아차린 것인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양억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소. 이곳으로 오고 있는 인원은 불과 여덟이오.”
 “속단해선 안 될 일이야. 그들은 십년이 지나도록 가주께서 살아 있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네.”
 신충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찰이 목적이라면 다른 은밀한 자들을 보냈을 거요.”
 “이곳 강서는 천의맹의 영역이 아닌가? 그래서 소수의 인원만 은밀히 보낸 것일 수도 있지.”
 “그렇다 하더라도 가주의 일이라면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보냈을 거요.”
 그 말에 수긍하며 양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괜한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망할 놈들! 이 강호가 제 것인 냥 설쳐대는구나!”
 진설현은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편복과 관련해서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지만 그것을 두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주님을 태화 밖으로 내보내도록 조치하시게.”
 “그러지요.”
 이번에는 신충이 양억에게 물었다.
 “지금 상태에서 가주께서 편복들을 몇이나 상대할 수 있겠소?”
 “한둘이라면 모를까, 여덟이라면 무리네. 사실 그 한 둘도 운이 따라줘야 할 것이네. 한데 그건 왜 묻는 겐가?”
 “차라리 가주를 박쥐 떼에 던져 놓으면 어떨까 싶어서요. 놈들과 싸우다보면 예전 기억이 나지 않겠소?”
 그러자 양억이 버럭 화를 냈다.
 “거 무슨 헛소리인가? 절대 아니 될 말일세.”
 신충이 이번에는 진설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 소저 생각은 어떻소?”
 진설현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태양 아래에서 박쥐가 날 수나 있답니까?”
 “역시 진 소저다운 대답이시오.”
 양억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가주께선 준비가 덜 되셨네. 장장 십 년을 기다렸는데 일시적인 조바심으로 일을 그르칠 작정인가?”
 “답답해서 그냥 해본 농이었소.”
 “농담이었다고?”
 “어찌 진진 소저도 알아듣는 것을 선배께선 못 알아듣소?”
 양억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진설현을 보고서야 두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고얀! 늙은이를 놀리다니. 이 같은 상황에서 농담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답답해서 그랬소. 마음 같아선 직접 확 쓸어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간 박쥐 떼가 아니라 온갖 것들이 다 몰려오겠지.”
 이윽고 진설현이 차분히 말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모두의 운명을 바꿀 흐름이 서태양을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 시기에 편복들이 태화에 오는 것조차 그를 깨울 운명의 한 흐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는 깨어나기 시작했으니까요.”
 
 ***
 
 한 노인이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장엄했다. 거대한 연무장과 그를 둘러싼 전각들, 다시 그 너머에 또 다른 연무장과 높게 솟은 마천루.
 노인은 이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벽에 걸린 중원전도. 그 절반에 가까운 지역이 한 단체를 의미하는 작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무적십자성.
 노인은 바로 강호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자 무적십자성주 도제 여불천(呂彿天)이었다.
 무적십자성이 지배하는 지역은 광대했다.
 감숙(甘肅), 섬서(陝西), 산서(山西), 하북(河北), 산동(山東), 하남(河南)까지. 그야말로 중원의 북쪽지역 전부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아래 다른 거대한 세력도 있었다.
 또 다른 거대세력을 나타내는 깃발.
 천의맹.
 광서(廣西), 광동(廣東), 복건(福建), 절강(浙江), 강서(江西), 호남(湖南).
 그곳은 천의맹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북쪽과 남쪽, 그 양대 세력 사이에 중립지역이 있었다.
 중경(重慶), 호북(湖北), 안휘(安徽), 강소(江蘇).
 이 네 개의 지역은 각기 중원육강 중 남은 네 세력이 하나씩 지배하고 있었다. 동시에 두 거대세력의 완충작용을 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한 중년인이 들어섰다.
 그는 오랫동안 여불천을 보필한 총군사 허립(許立)이었다.
 부드러운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냉철하고 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여불천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가 이내 말했다.
 “그 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 죽은 자를 생각하십니까?”
 여불천이 힐끗 허립을 돌아보았다. 지난 세월 내내 반복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시체가 걸어서 사라진 것이더냐?”
 “그날 짐승들에 의해 훼손된 시체가 많았습니다. 그중 한 구였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살아 있다면 왜 지금껏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어디선가 절치부심하고 있겠지.”
 “당시 그 자는 천하세가주의 쇄풍장(碎風掌)에 정통으로 적중당한 몸이었습니다. 거기에 성주님의 능파도기(凌波刀氣)에 세 차례나 휩쓸렸고, 천의맹주의 일심검(一心劍)에 가슴도 찔렸습니다. 그 어느 하나도 인간이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공격이었습니다. 놈은 반드시 죽었습니다.”
 여불천이 말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립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불천은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있음을.
 그의 가슴 한 가운데 두려움이 화인처럼 찍혀 있음을.
 “설령 그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 해도 걱정 없습니다. 지난 십년간 성주님은 훨씬 더 강해지셨습니다. 본성의 전력은 몇 배나 더 강해졌고요. 전 차라리 그 자가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성주님이 보시는 앞에서 놈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우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정도면 안심할 법도 했는데 여불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새로울 일도 아니었다.
 허립이 조심스럽게 오늘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아, 그리고 대정협과 관련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여불천은 즉각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대정협과 관련된 일은 근래 무적십자성에서 극비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일이었다.
 “문제?”
 “우리가 사람을 심은 것을 대정협주가 낌새를 챈 모양입니다.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관을 파견했습니다.”
 여불천의 얼굴이 무섭게 찌푸려졌다.
 그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무적십자성주에 어울리는 품위 있는 얼굴과 지금처럼 본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초적인 얼굴. 지금은 후자였고 드러난 감정은 분노였다.
 허립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다행히 의심을 받고 있는 자는 하나입니다.”
 “누구인가?”
 “강서 태화 쪽 인사입니다. 이미 흑살 일개 조를 보냈습니다. 상황을 봐서 꼬리를 잘라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잘 마무리 짓도록.”
 “알겠습니다.”
 허립이 조용히 그곳을 물러났다.
 나가려던 그가 문 앞에서 잠시 여불천을 돌아보았다.
 창가에 선 여불천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이제 잊을 만도 한데.’
 그가 한 번씩 과거에 연연할 때마다 허립은 궁금했다.
 무엇이 저토록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대체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제25회 산해의 도법입문
 
 칼을 가지고 돌아온 날, 서태양은 다시 꿈을 꾸었다.
 이전의 그 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바람 부는 들판에 한 여인과 서 있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인.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서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흐릿해서 보이지 않았다.
 마치 꿈에서 얼굴은 삭제된 그런 느낌이었다.
 
 “기어이 가겠다고?”
 말의 어감에서 화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그녀의 한숨.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당신은 야망이 큰 사람이었으니까.”
 야망이란 말이 송곳처럼 찔러왔다. 꿰뚫린 상처에서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야망? 이게 야망으로 보여?”
 “적어도 내게는 야망이지. 정의를 이루려는 야망. 사람들을 구하려는 야망.”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
 “그래, 그 사람들 구해야겠지. 일을 꾸민 그 개 같은 놈들도 다 없애야 하고. 하지만 난! 나는…… 당신을 잃게 되겠지.”
 “살아서 돌아올 거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다면 우리 모두와 함께 갔겠지.”
 “…….”
 “날 협의도 모르는 이기적이고 비정한 년이라도 욕해도 좋아. 하지만 그 어떤 달콤한 말로도 나를 두고 위대하게 죽겠다는 당신의 야망을 포장하려 들지 마. 적어도 내게만은!”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표정일지 짐작이 갔다.
 “……미안하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당신이 떠나는 순간, 난 당신을 잊을 테니까.”
 “할 말이 있어.”
 “하지 마! 이 순간부터 우린 남이니까!”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일이…….”
 “하지 말라고, 이 자식아! 제발!”
 
 그 순간 서태양이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외침이 여전히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이번 역시 너무나 생생해서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기분이다.
 몸속에 이상한 기운이 있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어쩌면 단순한 꿈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어떤 기억이 아닐까?
 올해 들어 이상하게 화가 많이 났던 것도 이 이상한 꿈과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체 그녀는 누굴까?
 바로 그때 밖에서 이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나. 어서 나와 봐.”
 서태양이 나가 보니 그는 수레에 의자를 싣고 와 있었다.
 “의자 돌려주려고 왔어.”
 팔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 준거야. 가져.”
 “다음에 더 좋은 걸로 줘. 호랑이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아니긴. 그렇게 달라고 졸라놓고선.
 “그래, 그러자.”
 정말 다음에 좋은 놈으로 하나 만들어 주마.
 이도는 바쁘다며 의자만 두고 곧장 가버렸다. 만날 뭐가 저리 바쁜지 알 수가 없다.
 이곳은 서태양이 원래 살던 집이었다. 그가 다시 태화로 돌아왔을 때, 다행히 아직 집이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서태양이 다시 쓰기를 원하자 주인장은 아주 기뻐했다.
 “서 무인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네.”
 집도 깨끗이 관리했고, 돈도 밀리지 않았으니 오히려 주인장이 돌아와 달라고 부탁할 처지였다.
 서태양이 의자를 방으로 옮긴 후 그곳에 앉았다.
 이도가 깨끗이 손질을 해두어서 의자는 새것 같았다.
 오랜만에 그 의자에 앉아 있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여기만 앉으면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서태양이 창밖으로 보이는 맑은 하늘을 보며 의자에 푹 파묻혔다.
 “역시 집이 좋네.”
 
 ***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난 후 서태양은 뒷산 계곡에 갔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어 약초꾼도 잘 오지 않는데다가 몸을 씻을 수 있는 흐르는 물도 있었다.
 그야말로 조용히 수련하기 좋은 곳이었다.
 서태양이 자신의 집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계곡이 가까이 있어서다.
 서태양이 햇살이 잘 드는 바위에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지존심법을 일주천하자 집 정리를 하고 대청소를 하느라 피곤했던 몸이 단숨에 가뿐해졌다.
 단전에 내공을 쌓지 않아도 몸이 더 튼튼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존심법은 몸의 잠재력을 계속 끌어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다섯 배 강해진 상태다.
 일반 심법이라면 더 이상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지존심법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았다.
 운기조식을 할 때 마다 혈맥에 흐르는 일 갑자 반의 기운이 더 정순해졌다.
 이 힘이 점차 강해진다면 어느 순간, 단전을 막고 있는 그 기운을 한 방에 녹여버릴 수 있지 않을까?
 지존심법 역시 계속 연마하다보면 점차 더 발전해 나갈 것이고.
 분명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서태양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이 그가 단전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주로 내공을 쓴다.
 외공만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내공을 이용해서 무공을 사용한다.
 따라서 신체단련을 하는 것도 무공수련의 초반에 주로 했다.
 내공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면 그때부터는 신체단련의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설령 그때 신체단련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육체의 능력을 두 배, 세 배 넘어서는 훈련까지는 아니었다.
 반면 서태양은 단전을 막고 있는 이상한 기운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잠재력을 끌어내며 신체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겉부터 제대로 만들고 속을 채우는 거다!
 
 운기를 마친 서태양이 이번에는 도를 들고 빈 공터에 섰다.
 서태양이 이리저리 도를 휘둘러보았다.
 그냥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휘둘러보니 제법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무거워서 이 도를 사용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신체능력이 월등이 향상된 상태였다. 오히려 이 무거움이 적당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무공을 익힌 후 도를 사용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 병장기를 고르는데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강호인 열에 일곱은 검을 사용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쓴다는 것은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뜻.
 그래서 서태양도 큰 고민 없이 검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조금은 성급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각자에게 맞는 무공이 있을진대 말이다.
 서태양이 반월검법의 초식을 사용해서 도를 휘둘러보았다.
 아무래도 검술에 도를 쓰니 많이 어색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왠지 칼이 손에 착 감겼다.
 분명 제대로 도를 휘둘러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인데, 지난 칠년간 사용했던 검보다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벽에 그런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아니, 그 이상의 욕심이 났다.
 서태양이 뒤쪽 절벽을 바라보았다.
 이 칼로, 저 절벽을 반으로 가르고 싶었다. 손잡이를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기 위해선.
 “쓸 만한 도법이 필요해.”
 칼이 마음에 드니 도법이 간절해지는 서태양이었다.
 
 ***
 
 같은 시각, 수레에 짐을 실은 행렬이 태화로 들어서고 있었다.
 선두 마차에 꽂힌 표기에는‘하남표국(河南鏢局)’이라 적혀 있었다.
 하남표국은 하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표국으로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하남표국의 표사들을 중원 어디서든 자주 볼 수 있었다.
 또한 하남은 무적십자성의 본성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차를 호위하는 표사와 쟁자수는 모두 합해 여덟.
 그들은 하나 같이 피풍의나 머릿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가리고 있었는데, 눈빛이 보통 날카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흔한 농담 한 마디 주고받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표행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태화 외곽의 한 장원으로 수레가 들어갔다.
 물건을 내리고 다시 나와야 할 시간이 지나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처음으로 도를 휘둘러본 서태양은 곧장 흑사를 찾아갔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흑사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태양을 맞아주었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혹시 어르신께서는 무공비급도 취급하십니까?”
 무공비급이란 말에 흑사가 흥미롭다는 눈빛을 발했다.
 “물론이네. 나는 강호의 모든 물건을 다 취급한다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혹시 초심자용으로 쓸 만한 도법이 있습니까?”
 “초심자용 도법이라.”
 흑사가 턱에 난 수염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했다.
 “있긴 하네만, 아주 기초적인 것 밖에 없다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쓸 만한 것이 있지.”
 흑사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두툼한 책 한권을 가지고 나왔다.
 
 산해(山海)의 도법입문(刀法入門).
 
 뭘까? 산해라는 사람이 쓴 도법서인가?
 책장을 넘겨보니 그야말로 비급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생초보용 입문서였다.
 처음 무관에 가서 도법을 배울 때 한 번쯤 읽어보라고 던져주는 정도의 책. 그것도 대충 읽고 마는 그런 류의 책이었다.
 흑사를 믿는 마음이 있었기에 서태양은 차분히 책을 살펴보았다.
 도법에 관한 여러 설명들과 함께 기초적인 동작들이 나와 있었다. 친절하게도 자세를 설명하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일단 베는 동작이 기본이었다.
 종으로 베고, 횡으로 베고, 사선으로 베고. 서서 베고, 앉아서 베고. 누워서 베고. 달려서 베고. 뛰어올라 베고, 미끄러지면서 베고……. 그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베기 방법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베는 것이 끝나니 찌르기가 있었다.
 도는 주로 베는 용도로 사용되는 병기지만 찔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여러 상황에서의 찌르기가 역시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막기였다.
 좌우, 위아래. 다양한 방향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어떤 자세로 막을 것인지에 대해 설명이 나와 있었다.
 쳐서 막기, 비껴내면서 막기, 도신으로 막기…… 그야말로 다양한 방식의 수비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화려한 초식은 고사하고, 싸우는 법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 책은 도를 처음 든 사람을 위한 기초 중의 기초 책이었다.
 “어설픈 것으로 익히는 것보단 이것이 나을 것이네.”
 “네, 알겠습니다.”
 솔직히 서태양은 내심 실망했다. 아무리 자신이 처음 도법을 배운다지만 이 책은 너무 기초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흑사가 이것을 권했을 때는 나름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흑사에 대한 믿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한 냥이네.”
 아, 한 냥짜리 비급이라니.
 돈을 건네며 서태양이 말했다.
 “기초를 다 익히고 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내가 취급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도법은 이미 자네들이 가지고 있지 않나?”
 “저희가 가지고 있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흑사가 미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들에게는 만서고(萬書庫)가 있지 않나?”
 
 <『칼에 산다』 2권에 계속>

댓글(10)

최시우    
왜 이북으로 만들어지면 더 비싸질까요?
2016.04.16 21:50
벤팁    
양이 확연히 차이나거든요 한두편이 아닌 한권이니까 훨씬 비싸됴
2016.12.22 23:39
236    
뭐가 양이 차이가 난다는 것인지. 같은 양의 글로 그저 묶어놓는게 다인데 ..? 이북이 연재글보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이해를 함. 소장이 가능하다거나, 폼이 더 특색있고 편하다던가, 하지만 그런것도 아니고 이북 폼도 연재글과 똑같음, 그저 글을 모아놓았다는게 다임. 이 소설 기준 완결까지 이북 : 16000 / 연재글 : 12500 ..?????
2016.12.28 15:46
곰슬기S2    
설현이란 이름이름은 언제나 진리지
2017.03.29 20:38
띵작    
한조...각!?
2018.03.14 10:05
k5*****    
97프로 서태양인 오타같은데요
2020.07.01 19:03
k5*****    
도 라했다가 칼이라했다가... 이상해요
2020.07.25 01:43
어림없지    
진심 손에 꼽는명작 ㅠㅠ
2022.02.14 02:30
    
잘보고 갑니다.
2022.02.23 23:09
Shristi    
적당히 볼만합니다.. 대여로 본다면 돈값은 합니다..
2022.03.10 18:54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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