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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초감각 지배자 [E](종료230728)

초감각 지배자 1권

2016.04.20 조회 12,535 추천 173


 # 1. 끝자락에서
 
 - 당신이랑은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저도 이제 지쳤어요. 아이는 제가 키울게요. 양육비는 필요 없으니 서로 힘 빼지 말고 이혼서류에 서명해주세요 -
 
 아내에게서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
 받은 문자에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정해진 수순이겠지···.’
 -아이 잘 부탁해-
 ‘뚝~’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휴대폰 액정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떠오르는 아이 얼굴 때문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수천 갈래가 되어버린 가슴으로 한 달이 더 흘렀다.
 
 서류 몇 장에 지난 세월들이 힘없이 갈라져 버렸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고물차 한 대에 옷 몇 벌이 전부였다.
 며칠을 허름한 모텔 방에서 지내며 머리를 쥐고 고민하다가 남쪽 바다로 차를 몰았다.
 내려가는 동안 그리 길지 않은 남자의 살아온 인생영상이 스쳐지나갔다.
 아내를 만나 꽃피고 좋은 시절부터 연구하던 일이 실패로 괴로워하던 때···.
 여기저기 돈을 빌려 새로 시작한 일들이 허무한 결과로 되돌아왔을 때 좌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모두에게 미안한 생각뿐이었다.
 나와 함께 했던 직원들과 성공을 바라는 가족형제들 그리고 사랑했던 아내와 아들에게···.
 
 정처 없이 남쪽으로 달리고 달렸다.
 철지난 이름 모를 남쪽바다 해수욕장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려오는 길에 번개탄과 연탄, 화덕 그리고 소주 몇 병을 샀다.
 술을 마실 줄 모른다.
 답답하고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견딜 수 없었다.
 조수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유서···.
 어둑해진 밤바다를 보며 화덕에 불을 붙여 차안에 들여놓았다.
 매캐한 연기에 고개를 돌렸다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죽으러 온 놈이 연기에 고개를 돌리나···.’
 
 소주를 병째 들고서 바다를 벗 삼아 마셨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차안에서 목 놓아 울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이런 인생이 아니길 빌었다.
 소주를 억지로 벌컥거리며 마셨더니 입안과 목구멍이 얼얼해졌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늦겨울인데 차안이 따뜻했다.
 
 ‘술 때문일까? 아니면 피워 놓은 연탄일까? 어쩌면 벌써 봄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따뜻해지며 졸음이 몰려왔다.
 
 ‘빠직!!’
 차 유리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들었지만 몸에 기운이 없었다.
 
 “······.”
 
 “뭔 염병 났다고~ 죽을라믄 집에서 죽지 여기서 지랄이야~”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지 여자의 목소리에서 걱정보다 신경질이 앞섰다.
 조수석의 흰 봉투에는 유서라고 쓰여 있었다.
 
 “이봐요~ 젊은 양반!! 정신 차려요!! 워~매 냄시여~”
 
 차안의 사내를 흔들어 깨우던 아낙은 유리창을 깨고 차문을 열어준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 수영 아부지 얼른 119에 전화 좀 하쇼잉~ 얼른 이라우!!”
 “끄~응···.”
 
 놀라고 긴장한 남자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쇼 거시기··· 거 머시냐!! 119지라우~ 여기 모사금 해수욕장인디··· 아~따 얼른, 말이 안 나오네. 주차장··· 응~ 긍께, 오촌 3길 주차장~인디 사람이 죽을라고······.”
 
 눈을 떠보니 형광등이 켜진 천장이 보였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링거 팩을 만지는 중년 간호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여기가 어디죠? 왜 내가 여기에···?”
 “다행히 민박집 주인아저씨랑 아주머니가 환자분을 빨리 발견해서 119에 신고했대요.”
 
 어젯밤일이 생각났다.
 술을 몇 병 마시고 세상을 떠나려 했던 것이다.
 조각난 어젯밤의 기억은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나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응급실로 이송되는 자신이 떠올랐다.
 
 “아직 젊으신데 왜 그러셨어요.”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간호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답하고 싶은 의욕도 없었고 온몸에 기운도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누웠다.
 
 링거를 뽑을 때가 된 낮이 되어 낯선 남자가 병실로 찾아왔다.
 
 “거 괜찮으쇼~?”
 “누구신지···?!!”
 “또 큰일 치르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당께요.”
 
 간호사가 말한 민박집 남자인가 보다.
 사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었다.
 
 “근디 집이 으디다요? 내가 연락해 주까라우??”
 “가족이··· 없습니다”
 
 귀찮다는 생각에 가족이 없다며 얼버무렸다.
 일어나서 간호사를 찾아 링거를 빼달라고 했다.
 옷을 뒤져 병원비를 계산하고 나왔다.
 안정을 취해야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포기하려했던 생에 안정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응급실 사용료 몇 만원과 약값이 조금 나왔다.
 의료보험에 가입되어있어 생각보다 많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젊은 양반 나랑 같이 갑시다. 차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응께 가지러 갑시다.”
 
 나는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아저씨의 낡은 트럭을 함께 타고 갔다.
 여수시를 빠져나가 엑스포 단지를 거쳐 해수욕장근처로 갔다.
 병원을 찾아와 준 남자의 낡은 트럭을 타고 가는 동안 바다만 바라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
 민박집 아저씨는 무슨 말을 걸려고 했다가도 눈치만 살피고 다시 운전을 했다.
 도착한 해수욕장이 모사금 해수욕장이라는 것을 그제야 안내간판을 보고 알았다.
 조수석 유리창이 깨진 내차가 을씨년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보기 흉하고 또 싫었다.
 
 “아저씨 부탁이 있습니다.”
 “잉? 말하쇼. 괜찮응께~”
 “제 차를 팔 수 있을까요···?”
 
 비록 오래되긴 했어도 인기 있는 차종이라 중고차 매매상이나 동남아 수출 상인들이 구매하리라 생각했다.
 “아~ 예··· 알았소. 근디 차가 없으면 어떻게 갈라고 그라요?”
 “민박하신다고 그러셨죠?”
 
 눈치 빠른 아저씨가 얼른 대답한다.
 
 “예~ 그람 당분간 민박 하실 거요?”
 “네···.”
 “근디, 우리 민박집서 딴 생각하믄 곤란하요. 잉~ 겨울이라 손님이 거의 없긴 한디. 소문이라는 것이 겁나 무섭단 말이요”
 “폐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중고차 매매상이 올 때까지 물이 빠진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장사수완이 좋은 아저씨였다.
 차 유리가 깨졌고 별 기대를 안했지만 이백만 원을 받았다고 했다.
 
 “일단 방 하나만 내어 주십시오.”
 
 차를 판매한 돈 절반인 백만 원을 내밀었다.
 비수기에 민박집이 백만 원을 벌기란 쉽지 않았다.
 
 “이거면 얼마나 묵을 수 있나요?”
 내가 묻자 오랜만에 목돈을 만져보게 되는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정도면 식사해드리고 한 달 정도??”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쩌면 나를 살려준 사람들인데 하는 생각에 아깝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가 차안에 있던 옷가지며 트렁크 속에 들어있던 몇 가지 물건을 내려 놓았나보다.
 
 정희만.
 차에서 내려놓은 양복안주머니에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쪽으로 오쇼~ 손님, 이방이요.”
 
 방안이 깨끗하고 바다가 보이는 제일 좋은 방이었다.
 전망 좋은 방을 들여다보는 동안 뒤 쪽에 있던 방문이 반쯤 열렸다.
 누군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 같았다.
 
 
 # 2. 인간의 조건
 
 “수영아 밥 묵게 건너 온나~”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방문이 다시 닫혔다.
 
 “손님 쫌만 기달리쇼. 밥상 들여 보낼라요.”
 
 일꾼 밥을 담아 해산물과 함께 푸짐한 반찬이 나왔지만 그는 손대지 않았다.
 
 밤새 병원에 누워있었는데도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팔을 접어 베고 잠이 들었다.
 
 ‘이보시게 정 박사 고작 이런 게임기나 만들자고 우리가 그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니란 말이네.’
 ‘사장님 이 제품은 게임기가 아닙니다. 식물인간이 된 환자와도 소통이 가능하도록 개발된 혁신적인 발명품입니다.’
 
 ***
 
 ‘마인 테크사에서 시제품으로 먼저 나온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소.’
 
 ***
 
 ‘박사님 큰일 났습니다. 실험 참가자중 수면유도 주사를 맞은 환자에게서 쇼크가 일어났습니다.’
 ‘아~ 안돼~~’
 
 ***
 
 “아~~악~안돼~!!”
 “헉~ 헉~ 헉~ ”
 희만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적셔지고 꿈에 보았던 과거의 충격들이 떠올라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눈물을 쏟아냈다.
 
 “으흐흑~”
 
 오랜만에 소리를 내며 울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들썩이는 희만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혀진듯했다.
 순간,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고 상대를 봤다.
 
 “누··· 누구요??”
 
 내 행동에 상대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손을 가슴에 모으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양손을 이용해 사내로서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수화를 하는 듯 했다.
 
 딸을 찾던 아주머니가 방문이 살짝 열린 것을 알았나보다.
 “아~따!! 가시내야~ 어째, 손님방에 들어갔냐.”
 “손님 죄송하요. 우리 딸이 모르고 들어갔는갑소.”
 
 여자는 주인아주머니 딸인 모양이다.
 얼른, 민망함을 감추려 눈물을 닦았다.
 일어나는 그녀를 봤다.
 사슴처럼 맑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어머니 부름에 얼른 일어나서 그녀의 방으로 건너갔다.
 
 다음날 아침 모사금 해수욕장을 걸었다.
 바다냄새와 바다의 찬바람이 폐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1시간에 걸친 바닷가 산책을 마치자 배가 고파왔다.
 민박집에 들어가자 어젯밤 그 여자가 대문을 나오면서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먼저 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얼른 빼고 급히 목례로 인사하고 자신의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젯밤 그 여자에게 울다가 들킨 것이 무척 민망했다.
 
 “오메 손님 밖에 나갔다 오셨소? 식사차려 놨응께~ 얼른 드쇼.”
 
 들어가는 나를 향해 아주머니가 말했다.
 “어제 밤에 놀라셨지라? 손님방에서 비명 소리가 나서 들어갔다고 합디다.”
 “아~ 네···.”
 
 멀리 걸어 나가는 자신의 딸을 쳐다보며 그녀가 넋두리하듯 말했다.
 
 “허~매··· 딸이라고 하나있는 것이 말을 못 항께~ 내가 까깝해 죽것소.”
 “······.”
 “워~매, 속없이 내가 밸 소리를 다하네. 호호호.”
 “어렸을 때부터 그랬나요?”
 
 대다수 농아들은 청각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장애시설발달과 가르치는 특수학교 교사가 많아 예전에 비하면 더 나아지기는 했다.
 
 “병원에서는 어렸을 적에 고열성 질환인가 뭔가 때문 이라고 합디다만···.”
 “들을 수는 있나요?”
 “우덜이(우리들이) 하는 말은 알아 듣기는 한디요. 말을 못 한다요. 일하느라고 수화를 제대로 못 배워서 간단한 것은 우리도 보고 알기는 한디, 진짜~ 중요한 것은 딸이 글씨를 써서 보여 주지라~”
 
 방안에서 주인아저씨 소리가 들렸다.
 
 “아~ 손님 식사하시게 붙잡고 있지 말어!!”
 “오메~ 어째야 쓰까잉~ 얼른, 식사하쇼~”
 
 방에서 식사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르내렸다.
 
 주인아주머니가 내 차에서 내려놓은 물건 중에 차트렁크에 실어놓고 잊어버린 노트북과 초기형 VR-HMD(Vertual Reality-Head Mounted Display)가 들어있었다.
 뇌파를 이용한 대화가 가능한 프로토타입 이었다.
 머릿속에서 문장이나 단어를 생각하면 소리로 재생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일반인이 머리에 쓰고 문장을 생각해도 소리가 나온다.
 완성품에 가까웠지만 일상생활이나 업무을 보면서 그렇게 큰 HMD를 쓰고 다닐 수 없었고 연구와 실험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제품이었다.
 처음 야심차게 개발한 제품이었지만 상용화도중 내부 소프트웨어를 마인테크사에게 도용당해 다른 용도로 실용화시킨 바람에 연구가 물거품이 돼 버린 것이기도 했다.
 
 말을 못한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딸을 위해 노트북을 켜고 HMD를 연결한 뒤 정상적으로 동작하는지 테스트했다. 다행히 이상 없이 동작하고 있었다.
 
 “촉매 프로그램이 제대로 활성화만 되었더라도···.”
 
 제대로 활성화가 되어 성장했다면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있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개발해놓은 제품을 도용해간 마인테크사에서도 게임에 사용될 촉매프로그램 활성화를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저녁 6시 30분경에 그녀가 돌아왔다.
 방안에서 노트북장비와 VR-HMD를 시험했다.
 잠시 후 주인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손님, 저녁 식사 합시다.”
 
 점심때 밥상을 들고 오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매 식사 때마다 번거롭게 들고 오시지마시고 괜찮으시다면 아저씨 아주머니와 함께 먹어도 괜찮습니다.”
 “오~메 그라믄 내가 겁나게 편하지라.”
 
 밥상에 자신의 자리 건너편에 앉아있던 그 여자는 내가 들어가자 짐짓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내게 목례를 하였다.
 
 “어서 오쇼 차린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많이 드쇼.”
 
 주인아저씨가 바다가두리 양식장에서 가져온 생선이 몇 마리 올라왔다.
 희만 자신이 함께 먹자고 했지만 막상 주인아저씨네 가족과 식사는 처음이라 그런지 서먹했다.
 말없이 한동안 식사하다가 아저씨가 물었다.
 
 “근디, 무슨 일을 하셨소? 직업 말이요”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연구회사를 운영했습니다.”
 “오~ 그라요? 그라믄 병원에서 쓰는 기계를 만들었다는 말인갑소 잉~”
 “네, 그런 셈이죠.”
 “아따~ 똑똑한 양반이구만!! 근디, 어쩔라고 차안에서~ 윽.”
 
 아주머니가 눈치없다는 듯 아저씨 옆구리를 찔렀다.
 
 “괜찮습니다 지난일인데요···.”
 “아~ 그라죠 잉~ 하하.”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녀는 어제 낯선 남자 방에 불쑥 들어간 것도 미안했고 마주앉아 밥 먹는 것은 더욱 어색했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따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박수영이라요.”
 
 자신의 딸을 소개하는데 이골이 난 듯 내쉬는 한숨에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이를 많이도 처~묵었소. 올해 30살이라요. 염 씨 아들이 그라고~ 좋다고 쫓아 댕겨도 지복을 발로 타~악 차 불고 내속이 천불이다 천불~.”
 
 쌓인 것이 많다는 듯 아주머니는 묻지 않은 말까지 털어놓았다. 그쯤이면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타박에도 고개를 숙이면서도 화를 내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저는 정희만입니다.”
 
 그녀는 큰 눈을 깜빡이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따님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잉? 그것이 뭔 말이다요?”
 “따님이 수화를 하지 않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얼른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지만 박수영은 정희만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들은 듯 두 눈이 더욱 커졌다.
 희만의 말뜻을 알아들은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참말이요? 그게 참말이요?”
 “네, 아직 투박하지만 장치를 머리에 쓴다면 따님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합니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서로를 쳐다보며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내 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수영에게 헬멧보다는 간단한 HMD를 씌우고 노트북과 케이블을 연결시킨 후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며 뇌파를 읽어내는 ‘에이다’를 가동시켰다.
 
 “수영 씨가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 글을 쓰듯 그려보세요.”
 어색해 하던 그녀는 몇 초를 머뭇거렸다.
 
 “어··· 엄마!!”
 
 그 순간, 스피커를 통해 20대의 여성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아주머니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답했다.
 “오냐~ 오냐 내 새끼야!”
 “아빠~”
 “그래 나다~ 우리 딸!! 아빠다.”
 “엄마 아빠 너무너무 사랑해요.”
 
 50대 후반 부부는 딸을 끌어 앉고 엉엉 울었다.
 장성한지 30년이 넘어 ‘엄마’와 ‘아빠’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것이다.
 나는 감격한 부부와 딸의 울음 섞인 대화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
 그들의 대화를 웃는 얼굴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직은 사람의 말소리처럼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으나 대화가 길어질수록 감정까지 묻어나는 대화가 가능해졌다.
 
 
 # 3. 어떻게 이런 여자가 있지?
 
 “지난번에 엄마가 맞선보라고 데려간 자동차 정비소 남자 있었잖아요.”
 “응, 자동차 정비한다던 장 씨 아들?”
 “응~ 나는 엄마한테 싫다고 손사래를 쳤는데 그 남자는 자기한테 반갑다며 손을 흔드는 줄 알고 좋아하길래 미안해 혼났어!”
 “하하하하~”
 
 세 사람은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난이야기와 답답함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잠깐, 따님과 대화를 해도 될까요?”
 “아~ 예~ 예~ 얼마든지요.”
 
 두 부모는 얼마나 좋았는지 볼과 귀가 빨개지도록 흥분해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수영을 보며 말했다.
 
 “수영 씨 혹시, 말하고자하는 내용을 머릿속에 글로 쓰시나요 아니면 생각하시나요?”
 “처음에는 글씨로 쓴다는 생각으로 말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 마음을 바로 읽어내는 것 같아요.”
 “그래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활동하면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부모님께서는 제 생명을 구해주셨는데요. 하하.”
 “그리고··· 어젯밤에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 죄송했어요.”
 “아~ 아닙니다.”
 
 그녀는 자살을 기도했던 사연이 있어 보이는 그 남자의 마음속 상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기뻐하고 생각했던 일들을 실천에 옮기기로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터미널로 갔다. 우등고속을 타고 서울로 올라가 예전 우리 연구소 선임 연구원 김명석에게 전화를 했다.
 
 “나일세··· 정희만이네~”
 
 우리 연구회사가 망하고 난 다음 한때 경쟁사였던 마인테크사 건물 앞에서 김명석과 만났다.
 
 “사···사장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새로 일하는 회사는 마음에 드나??”
 “그··· 그냥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도 먹고 살아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여기로 들어왔습니다.”
 “나에게 죄송할 일이 뭐가 있나!! 자네에겐 잘된 일이지!”
 
 동료 연구원들은 김명석이 우리 회사 연구 자료를 빼내 경쟁사에 건넨 스파이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으나 나는 그를 믿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왔네. 내 사정 자네도 잘 알고 있지?”
 
 그 말을 듣자 김명석은 뒤로돌아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정희만 손에 쥐어주었다.
 
 “내 이야기를 끝가지 들어보고 행동 하게나 자네에게 푼돈 뜯어내자고 온 것이 아니네.”
 
 쥐어준 수표를 다시 명석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자네 사무실이 차압당할 때 신형 고글MD를 따로 보관해 놓은 것 가지고 있지?”
 “네··· 사장님.”
 “그거랑 신형 박스컴을 가져다 줄 수 있겠나?”
 “어차피 사장님 것인데 어려울 것은 없지만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될까요?”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러네.”
 “아~ 네···. 알겠습니다.”
 
 퇴근 후 김명석은 내가 말한 장비를 가져왔다.
 박스컴은 미국 Astone사에서 만든 가로세로 15Cm 크기의 휴대용 슈퍼컴이다.
 배터리 팩을 장착하고 휴대가 가능했으며 웬만한 데스크톱 10대 이상의 병렬처리속도를 자랑했다.
 
 “고맙네. 은혜는 잊지 않겠네.”
 “네 사장님 몸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고속버스가 터미널을 떠나자 김명석은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내뿜었다.
 
 “이번엔 또 뭘 만드시나~ 어차피 다 알게 되겠지만··· 흐흐~”
 
 박수영은 아침마다 복지관에 봉사활동을 하러나가는 것이었다.
 오늘은 새로 가져 온 안경처럼 생긴 가상 비주얼 고글과 박스 컴을 핸드백 속에 넣고 스피커는 브로치에 블루투스 무선통신으로 연결해 주었다.
 
 “방에서 사용했던 것보다 거부감이나 이물감이 훨씬 덜할 거예요.”
 
 헬멧처럼 머리에 쓰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가볍고 일반 안경처럼 생긴 신형고글은 디자인과 기능이 월등하게 뛰어난 것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프로그램 반응속도와 목소리의 자연스러움이 점점 더해갔다. 스피커 특유의 소리만 아니라면 진짜목소리로 착각할 만큼 정확한 발음이 나왔다.
 시외버스가 도착하자 출근하는 수영은 버스에 올라서며 인사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으응? 이게 먼 일이당가? 아가씨가 말을 하는 거시여??”
 “네~ 아저씨!!”
 “그게 어떻게 된 거여?”
 “아는 분이 이런 좋은 기계를 주셨어요.”
 “아~따메 오래살고 봐야것네. 목소리 들으니 겁나 좋구먼!!”
 “감사 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시에 있는 장애인복지관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말을 했다.
 
 “모두 안녕하세요?”
 항상 소리없이 수화로 인사하는 그녀였기에 처음 들리는 소리에 복지관 직원과 도우미 봉사자들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며 멍한 얼굴로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우리가 잘못 들은 것이야?”
 “분명, 수영 씨가 우리한테 인사한 것 같은데?”
 “호호호 맞아요. 저 수영이에요 박수영!!”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복지관에 반가운 소란이 일어났다.
 10년 넘도록 점자책 제작과 수화봉사를 맡아했던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곳의 모인 사람들에게 반가움을 넘어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다.
 소문은 무서운 것 이었다.
 특히, 입소문으로 퍼지는 진실은 더욱 그러했다.
 
 내가 묵는 방안에서 어제 박수영이 사용했던 구형 HMD를 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예전에 실패작이라 팽개쳤던 것이지만 연구원 특유의 호기심에 촉매프로그램 ‘에이다’에 접근을 했다.
 
 -로긴 아이디:supervisor
 -비밀 번호 : *********
 -2차 비밀번호 :*****
 ‘DEBUG source-code Sector -a012’
 - 전두엽 활성 부위와 싱크로율 : 32.45%
 
 “어라?? 이거 봐라!!”
 정희만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놀라운 수치를 보고 있었다.
 비교통계 데이터 값을 표시하도록 했다.
 
 * Syncro Data [ 싱크로 데이터]
 - Simulation[모의실험자] : AVG 11.98 %
 - Patient[일반환자] : AVG 9.25 %
 - last user[최종사용자] : AVG 32.45 %
 
 MAX: 35.31% MIN : 22.75%
 
 AVG : 평균, MAX : 최대치, MIN : 최소치
 
 최종사용자는 박수영을 말하는 것이다.
 박수영의 평균 뇌파 싱크로율이 32.45%였다.
 모의실험자는 연구원들이 대부분이었고 익숙해진 상황에서 실험을 했으므로 피실험자인 일반인들보다 높은 수치가 나온 것이었다.
 
 “수영 씨의 싱크율이 이처럼 높은 이유가 뭐지?”
 
 데이터를 보던 나는 예전의 의욕에 찬 연구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Defend on last user by Result of AI increase Ratio
 최종 사용자에 의지한 인공지능 성장률
 - last user’s 2.34 %
 - Compare’s AVG 0.000012 %
 
 박수영 그녀는 싱크로율도 높았지만 가장 중요한 인공지능 촉매 소프트웨어의 성장속도가 일반인에 비해 20000배 가량 더 높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 말은 박수영 그녀가 HMD를 사용하는 동안 대뇌 전두엽과 촉매역할을 해주는 뇌파반응 프로그램 ‘에이다’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켜줄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었다.
 
 
 # 4. 에이다의 출현
 
 인공지능 성장률 2.34%는 수치상으로 낮은 것이지만 인공지능의 자가 학습 성장만을 놓고 본다면 엄청난 것 이었다.
 연구소 직원들이 모두 매달려 주어진 프로그램조건과 학습 환경에서 1년 동안 성장률 0.01%를 올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것에 비하면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희만은 흥분되고 심장이 떨려 누군가 기분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오늘 그녀가 가져올 데이터가 무척 궁금하군···.”
 
 그녀가 나타내주는 데이터 수치를 보면서 가슴속에 새 희망과 기대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희만은 그녀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모사금 해수욕장 도로 옆을 1시간에 한 대꼴로 있는 시외버스였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고 마침내 버스는 도착했다.
 
 끼이익~ 치익~~
 
 “감사합니다. 아저씨 수고하세요.”
 
 인사하고 내리던 수영은 정류장에 희만이 서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궁금한 듯 물었다.
 
 “어머! 선생님 어디가시는 거예요?”
 “아뇨, 수영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에? 저를요??”
 “오늘 기기를 사용해보시니 어떤가요? 혹시, 불편한 것은 없었나요?”
 
 의욕에 찬 희만이 이것저것 묻자 수영은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생을 포기하려 했던 사람이 뭔가에 집중하고 열심인 모습을 보자 그녀도 한결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지난번 밤에 사용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았어요.”
 “혹시, 머릿속에 노이즈가 나타나지는 않던가요?”
 “네, 잠깐씩 잡음 같은 것이 있긴 했는데 금방 괜찮아졌어요.”
 “그래요? 집에 들어가서 살펴봐야겠네요.”
 
 희만과 수영이 나란히 민박집으로 들어오자 주인아주머니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마? 손님이랑 같이 오네?”
 “다녀왔어요. 엄마”
 
 주인아주머니가 희만을 바라보자 희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제법 익숙해진 아주머니에게 스치며 대답했다.
 
 “수영 씨가 착용하고 나간 장비가 궁금해서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의외로 잘 어울리네!!’
 “오메!! 내가 뭔 생각을···.”
 
 몰래 심어둔 지능형 웜이 보내준 메시지가 마인테크사 김명석의 데스크톱 피시에 도착했다.
 그 메시지를 열어본 순간 명석은 전기에 감전된 듯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사용자 매칭률 : 32.45%
 인공지능 학습 성장률 : 2.34%
 
 짤막한 그 메시지에 담겨진 것은 놀라운 수치였다.
 
 “이··· 이건 대···대박이다!!”
 
 김명석은 교활하게 박스 컴 내부에 정희만에게 넘겨 주기전 지능형 웜(Worm)을 심어뒀다. 정교하게 위장된 웜은 명석의 PC에 우선 짤막한 메시지만 전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김명석은 흥분하면서도 몹시 궁금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데이터를 생산한 것일까?”
 
 김명석은 차분하게 기다리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지능형 웜은 정해진 크기의 실행모듈에 기생하는 구세대 바이러스가 아닌 심어놓은 지시자의 명령에 지능적으로 변태가 가능한 차세대 바이러스 일종이었다. 명석은 차분히 기다리면 엄청난 수치로 성장한 인공지능 촉매엔진을 얻을 수 있다 생각했다. 촉매엔진 소프트웨어의 성장은 현재 그가 해결해야할 숙제이며 마인테크사의 명줄이 달린 핵심 과제였다.
 
 “누군가 착용하고 사용한다는 말이겠지?! 이대로 기다리면 된다는 이야기야.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으하하하!!”
 
 김명석은 때를 기다리며 웅크린 늑대와 같은 심정이었다. 인공지능의 학습 성장이 적정 수치에 도달하는 그 때에 웜에 메시지를 보내 소스코드를 복사하고 자신이 심어놓은 웜을 공격성 바이러스로 변태시켜 원본을 파괴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항상, 자신을 앞서가던 정희만이 존경스러웠지만 존경 그 이전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정희만 그 인간은 달랐다.
 뇌파반응 연구프로젝트의 핵심기술은 자신이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뇌 전두엽 활성화를 통한 뇌파로 인간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는 뇌파 촉매연구에 어려운 수식을 놓고 석 달을 고민하며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희만은 자신의 주된 연구분야가 아닌 뇌파반응 촉매 공식을 단 1주일 만에 풀어 내버렸다. 연구원들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지만 김명석 만큼은 난제의 해결을 축하해 줄 수가 없었다.
 최초라는 자신의 공이 고스란히 정희만 사장의 것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
 
 퇴근 후 함께 식사하며 박수영은 희만을 흘깃 쳐다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 사온 양말이며 속옷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다.
 자신에게 말하기 기능을 부여해준 고마운 사람이었지만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녀의 섬세함은 가져온 옷가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반면 희만은 수영이 만들어온 박스컴 속의 데이터가 무척 궁금했다.
 두 사람 모두 식사하는 그 시간이 무지 지루하다 생각했다.
 
 눈치 빠른 아주머니는 오늘따라 이상하며 야릇한 밥상머리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젓가락을 깨물고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눈치를 살폈다.
 속 모르는 아저씨는 연신 음식이 맛있다며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아저씨가 밥상에서 일어나자 희만도 식사를 마쳤고 수영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밥상정리하자 희만이 수영에게 말했다.
 
 “저기··· 수영 씨 장비 점검해야하니 제 방으로 와 주실 수 있으세요?”
 “네~ 선생님.”
 
 수영은 쇼핑백에 담긴 정의만의 속옷과 양말을 들고 따라 나섰다.
 그녀의 박스컴에 자신의 구형 HMD를 연결하고 관리자모드로 촉매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희만이 접속하는 동안 박수영은 박스컴의 접속을 해제한 채로 기다렸다.
 
 -로긴 아이디:supervisor
 -비밀 번호 : *********
 -2차 비밀번호 :*****
 
 최상위 관리자로 가상 공간에(Virtual storage)접속했다.
 촉매엔진의 창조자이며 데이터베이스의 스키마를 정의한 희만이 접속하자 촉매엔진인 인공지능 에이다에게 미묘한 반응이 일어났다. 가상공간에 빛이 모이더니 희미한 여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응?? 이게 뭐지?”
 희만은 노트북과 비교할 수 없는 처리속도를 가진 박스컴 내부에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 놀랐지만 지켜보고 있는 수영이 있어 최대한 침착해야 했다.
 
 모인 빛이 형성한 얼굴을 자세히 보니 박수영을 많이 닮은 갸름한 얼굴 형상이었다.
 
 [어서 오세요. 창조자님]
 
 그 여성 형상은 가상화면 속에 다이브(Dive)한 희만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아이디가 슈퍼바이저임을 알고 희만을 알아본 것이다.
 
 “설마··· 에이다?? 나를 인식한 거야?”
 [네, 맞습니다. 저를 설계하신 정희만 박사님이십니다.]
 
 정희만은 자신과 동료연구원들이 데이터베이스 스키마(계획)를 짜고 촉매프로그램 에이다를 설계했지만 그렇게 구체화된 이미지 형상으로 나타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인공지능의 성장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복잡한 메커니즘을 구현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소프트웨어 공학자인 희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오랜 시간 진전 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촉매엔진 인공지능이 3차원 형상이미지로 나타난 것이다.
 
 “에이다는 내가 박사라는 것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저는 현재 박수영 사용자에 의해 성장하고 있는 인공지능이며 그녀가 인지한 정보를 넘겨받고 있습니다. 설계된 프로그램내의 태그에 박사님에 대한 정보를 찾아 파악했습니다.]
 “그럼 단, 며칠 만에 에이다의 정체성을 형상화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는 맞지만 기계음 섞여 억양과 호흡이 아직은 자연스럽지 못 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로서 뇌파촉매 역할만을 기대를 넘어선 예상 밖의 결과물은 확실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여태까지 수많은 실험참가자들이 에이다를 성장시키려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었는데···.”
 [제 성장을 돕는 박수영 멘토는 보통사람과 다른 뇌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그 점이 궁금했었는데 설명이 가능한가?”
 [어린 시절 질환으로 상실된 대뇌의 언어중추 신경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의사전달 능력이 특이한 형태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역시, 그랬었군!!”
 [추가적인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침착하며 긍정적인 사고에서 출발한 인성과 이성자아가 제 성장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에이다의 설명을 들은 희만은 수영이 가진 특별함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에이다 궁금한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박사님]
 “아직 기계음처럼 들리는데 억양을 바꿀 수는 없나?”
 [계속 학습중입니다. 박수영 님의 퍼스널리티가 더 반영되면 머지않아 자연어에 가까운 표현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이다는 독립된 개체인가 아니면 박수영과 같은 존재인가??”
 [발생기원은 박사님이 창조하신 에이다이며 성장 동력은 박수영 멘토에게 학습받고 있습니다. 독립된 개체가 맞습니다만 멘토의 사상과 사고가 투영된 독립체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박수영 님의 생각과 사상은 제게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
 
 정희만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정체성(Identity)을 구현을 위해 어떻게 에이다를 성장 완료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음··· 알겠네 당분간 에이다의 존재를 멘토인 박수영에게 드러내지 않기 바라네. 또 자네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지 않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박사님, 두 분 사이에 소통 장애가 있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박수영 님께 마음을 더 열고 대화하시길 조언드립니다.”
 “응? 인공지능에 조언기능도 있었나?”
 [저는 박수영 님의 사고체계를 학습 받아 성장하고 있으며 저를 지성체로 박사님이 설계하셨습니다.]
 “하하하 알겠네. 그런데 그 조언을 해주는 이유가 있나?”
 [멘토께서 식사도중 속옷과 양말의 전달방법을 놓고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아··· 알았네. 그럼 내일 다시 만나세.”
 [박사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희만은 접속했던 고글에서 로그아웃을 하려는데 에이다가 정희만을 불렀다.
 
 “아~ 그래? 말하게”
 [수퍼 컴 내부에 지능형 웜이 기생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지능형 웜? 그게 사실인가?”
 [역시, 박사님 작품은 아니었군요. 우선, 백도어로 연결된 맥 아이피(Mac-ip)백업 후 악성징후를 나타내지 못하도록 이빨은 뽑았습니다.]
 
 에이다는 꿈틀대는 벌레를 수술용 집게로 잡고 있는 영상을 희만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연결된 그 맥아이피로 역 접속이 가능한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김명석이라는 마인테크사 부사장 이름으로 되어있었습니다.]
 “뭐?? 뭣이라고??”
 
 에이다는 공간에 김명석의 정보내용을 허공에 나타내 보여주었다.
 이미지로 형상화된 에이다 앞에서 김명석의 배신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깨물며 참았다. 에이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에이다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 웜이 무슨 일을 했나?”
 [저와 멘토의 싱크로율 그리고 인공지능 학습 성장률을 보고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 알았네. 일단, 거짓정보를 흘려 혼란을 주도록 하고 에이다의 존재는 숨기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박사님]
 - 로그아웃
 
 
 # 5. 남 그리고 여
 
 ‘김명석!! 그 자식이 배신자였구나!!’
 
 정랩스에서 개발한 핵심기술이 마인테크사에서 먼저 발표되고 상용화 돼 버렸다.
 처음에는 기술의 유출보다 마인테크사의 기술이 앞섰다고 생각했었다.
 함께 일하던 대학선배 서민준이 김명석을 의심했을 때도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했었다.
 
 경쟁에 패한 결과는 참담했었다.
 기대와 관심을 가졌던 학계와 투자회사들 그리고 금융권의 채권자들 시선과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결과는 무섭게 다가왔다. 회사는 공중분해 되고 직원들은 길바닥에 나앉게 돼 버렸다.
 세상은 잔혹했고 해피엔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후발기술은 우리를 쓸모없는 연구자로 만들었고 희만을 무능력한 기업주로 만들었다.
 희만은 분노에 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그아웃 한 뒤 자신의 머리통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움켜잡은 희만의 HMD에서 잡음이 났다.
 ‘지지직~’
 “선생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
 분노에 쌓였던 희만이지만 분명, 박수영의 말소리가 들렸다.
 분명, 수영의 박스컴은 희만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 HMD를 벗어 박수영을 봤다. 그녀는 고글까지 벗고 있는 상태였다.
 ‘이상하네··· 분명 수영 씨 목소리였는데··· 잘못 들었겠지···.’
 스피커로 재생되어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수영 씨 오래 기다리셨죠? 내부 소프트웨어를 살펴보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영은 건네받은 박스컴과 고글을 연결시키고 말했다.
 
 “혹시, 몸이 불편하세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불편하신 줄 알고 놀랬어요. 이거 받으세요.”
 
 수영이 건넨 쇼핑백에는 속내의와 양말이 들어있었다. 에이다가 말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조심스레 건네며 그녀는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희만이 서울에 다녀올 때 중간 휴게소에서 속내의와 양말을 몇 개 사기는 했지만 평소 자신의 신체 사이즈조차 모르고 연구에 몰두했던 터라 양말 외에 속내의는 크기가 맞지 않아 입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수영 씨.”
 “저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선생님이 저는 더 고마워요.”
 “부모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제가 더 감사하죠. 하하하.”
 “호호호.”
 
 수영의 어머니는 방문 밖에 서서 안에 일이 궁금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나자 방문에 귀를 더 가까이 대려고 다가갔다. 그러자 방문이 열렸다.
 
 “에구머니~”
 “응? 엄마 여기서 뭐해??”
 “응?? 앙그또(아무것도) 아녀??”
 
 김명석은 희만에게 건넨 박스컴 속의 진행이 궁금해졌다. 심어놓은 지능형 웜을 이용하면 해킹도 가능했기 때문에 접속을 시도했다.
 바닷가 민박집이지만 인터넷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네!! 접속이 안 되네··· 인터넷이 없나?”
 
 김명석도 천재나 다름없었다. 컴퓨터 실력은 정희만 박사 못지않았다.
 하지만 에이다가 이미 외부의 해킹이나 접속을 차단해버린 상황이었으므로 박스컴 내부로 근거리 무선망을 통한 불법 접속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다가 살고 있는 공간이나 다름없는 박스컴 내부는 일반 방화벽과는 차원이 다른 보안을 설정해 놓았다. 인지능력이 있는 에이다가 허락하기 전에는 외부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메시지를 기다리는 김명석은 아직 지능형 웜이 제대로 동작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기다리던 자신의 데스크톱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용자 싱크율 : 9.35%
 인공지능 성장률 : 0.000093%
 
 “엥?? 이게 뭐야?”
 
 지난 결과와 너무도 다른 형편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다시 들여다보았다.
 
 “젠장, 어떤 것이 진짜야!! 설마··· 이게 진짜인가?”
 
 김명석은 로또 1등 번호를 잃어 버린 사람처럼 망연자실했다.
 
 “에이씨~ 좋다 말았네···.”
 
 명석은 방금 받은 메시지가 틀렸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들어오는 메시지를 받아보면 진실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아주머니와 수영은 방안으로 들어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동안 딸과 대화는 일방적인 엄마의 잔소리에 가까웠고 딸은 눈빛과 손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수화를 볼 줄은 아시지만 딸의 수화속도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었다.
 
 “수영아 특실에 묵은 정희만이라는 사람 어쩌냐?”
 “응? 엄마 무슨 말이야?”
 “아따~ 가시내야 남자로서 어쩌냐 말이다.”
 “어···엄마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 걸 왜 물어봐!!”
 
 엄마의 질문에 박수영은 얼굴이 빨개졌다.
 
 “오메~?? 너 특실손님이 좋은갑다?!”
 “아아~ 엄마 왜 그래??!!”
 “가시나 볼퉁이 빨개진 거 봐라 하하하”
 
 수영의 어머니는 딸에게 많은 남자들을 소개했었지만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던 딸이었다.
 항상 맑은 눈으로 차분하게 누구랑 사귀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엄마, 아빠랑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 대답하던 딸이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특실에 묵고 있는 정희만을 며칠 함께 지내면서 그를 이리저리 자세하게 살폈다.
 처음 그가 사고를 치려했을 때 정신없어 몰랐지만 볼수록 자신의 딸과 잘 어울리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상하고 세련된 말투와 밥상을 받아주는 그의 하얀 손가락만 보더라도 여자들이 좋아할 남자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희만이 딸과 잘되기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가 생을 마감하려했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사랑하는 자신의 딸이 행여 남자 잘못만나 고생하며 살지는 않을까하는 생각과 정확한 신상도 모르는 남자를 좋아하다가 딸이 상처를 입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고민하던 민박집 아주머니가 다음날 아침 딸을 위해 용기를 내었다. 수영이 출근하고 아저씨는 배를 타고 가두리 양식장에 가고 한가한 시간 산책하러 나가는 희만을 불렀다.
 
 “바닷가 산책 가시게요?”
 “네 아주머니···.”
 정희만이 밖으로 나올 때가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우리 아저씨가 쓸데없는 것 물어봤다고 불 같이 승질 낼텐디 시방 없응께 조용히 물어 볼라요.”
 “아··· 네 말씀하세요.”
 “손님 혹시, 장가갔소?”
 
 함께 밥을 먹은 날도 며칠 되었고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 질문을 할 때도 되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네··· 결혼했고 아이도 있습니다.”
 “아··· 그라요?”
 
 희만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지만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주머니는 적잖이 실망하였는지 말에 맥아리가 없었다. 그녀는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지는 듯 느껴졌다.
 
 “애도 있음서 그랬소??”
 
 아주머니의 질문에 희만은 잠시 뜸을 들였다.
 사연을 일찍 묻지 않았던 것은 손님에 대한 배려였지만 함께 생활하는 식구처럼 가까워진 지금은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희만은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깊게 들여 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사업이 망하고 모든 것이 빚으로 남아 회복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가족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래도 애기랑 애기 엄마 생각해서 열심히 살았어야제···.”
 
 희만은 아이와 아이 엄마가 생각날 것 같아 눈을 멀리 바다로 향했다.
 
 “집사람과 이혼하고 아이 마저 기를 능력이 없어 뺏기듯 하니··· 어느 곳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짠해라~ 내가 괜한 것 물어봐서 맘 상했는가 모르것소.”
 
 그녀는 눈물을 찍어 닦으며 말하자 정희만은 대답했다.
 
 “그래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저씨, 아주머니를 만나서 다행이라 생각 합니다. 여기 있으면서 기운도 회복하고 마음도 안정을 찾아가네요.”
 “그라요? 나는 손님이 우리 딸한테 준 기계 때문에 세상을 다시 사는 것 같소. 우리 딸한테는 은인이요.”
 “별 말씀을···.”
 “이런 인연이 있을라고. 먼 여그까지 오셨는갑소!! 고맙소. 참말로 고맙소!!”
 “제가 더 고맙죠. 제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이 되어 복지관에서 돌아온 수영이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정희만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자꾸 특실 방 쪽으로 눈길이 갔다.
 눈치 빠른 그녀의 어머니는 식사준비를 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느그 아부지 배 들어오믄 괴기랑 짐 옮기는 거 도운다고 나갔다. 아부지랑 같이 올 것이다”
 “엄마 그럼 나도 다녀올게요.”
 
 그녀는 나가려는 수영이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영아~ 혹시라도 특실 손님 맘에 두고 있으면 포기해라~ 결혼도 했고 애도 있단다.”
 
 수영의 어머니는 마음이 여린 자신의 딸이 상처받을까봐 미리 선수를 쳤다.
 
 “어···엄마, 나 그런 거 아니야 아버지 기다렸다가 같이 올게···.”
 
 수영은 자신의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뛰어나가는 딸을 보던 어머니는 딸에게 예방주사 놓는다는 생각으로 말했지만 딸이 마음 두고 있는 사내에 대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가시나··· 신발을 짝짝이 신고 가네. 지금 포기해야 나중에 상처 안 받는다 에효~”
 
 수영은 꺾인 골목구석으로 들어갔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몇 번의 심호흡으로 진정시킨 뒤 바닷가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덜덜’거리는 아버지의 용달차 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저씨는 손 흔드는 딸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고 조수석에 타고오던 희만이 먼저 내렸다.
 
 “아~수영 씨 다녀오셨어요?”
 “네, 아버지 도와주시러 가셨다 해서 저도 두 분 마중 나왔어요.”
 
 가져온 생선과 간단한 짐을 들고 앞서 걷는 두 사람을 잔잔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저씨는 걸음의 속도를 일부러 늦췄다. 그도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다.
 
 모두 모여 저녁식사하면서 수영이 복지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치를 본 복지관 직원이 자신의 친척 중에 교통사고로 척추신경을 다쳐 식물인간이 된 어른이 계신다는 것이었다.
 말하기 기능을 상실해 무척 답답한 상황에 있었는데 그 어른을 위해 장치를 구매하고 싶다며 팔 수 있는지 의사를 물어왔다는 것이다.
 
 “저도 잘 몰라 선생님께 물어본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대답했어요.”
 “아~얼매나 환자 가족이 답답했것냐?”
 “그라제··· 안 겪어 본 사람은 몰라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맞장구쳤다.
 의사소통이 안 되면 그처럼 답답한 것이 없었다.
 자신들이 30년 가까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희만 씨 이 장비 얼마면 구할 수 있냐고 물어 보시던데요??”
 “아··· 네···.”
 정희만은 음식을 먹던 상태에서 말을 할 수 없어 삼키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답답했던지 아주머니가 물어봤다.
 
 “싸장님~ 물건을 사겠다는디요? 호호호.”
 
 그러자 빨리 삼키려던 그가 웃음이 터져 고개를 돌리고 컥컥거렸다.
 
 “큼~ 음~”
 
 물을 마시고 나서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분은 여유가 있으신 분인가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말하는 거 봐서는 가난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수영 씨가 가지고 있는 장비를 제 값 받고 판다면 1억 5천만원정도 됩니다.”
 “컥 컥~”
 
 이번엔 밥 먹던 아주머니가 사래 걸려 콜록거렸다.
 박수영과 수영아버지도 놀라서 눈이 커졌다.
 
 
 # 6.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워매~ 콜록··· 콜록··· 수영이가 하고 있는 것이 그 가격이라는 말이요?”
 “기계 가격보다는 그 속에 들어있는 소프트웨어가격이 몇 배 더 비싼 것입니다.”
 “워~매 그라고 비싼 것을··· 우리 딸한테 준거요?”
 “연구에 쓰던 것입니다. 고가의 장비이긴 하지만 그냥 보관하고 있던 것입니다.”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라면 언어기능 일부를 추출한 뒤 노트북을 이용한 방법으로 좀 더 저렴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희만을 제외한 방안 식구들은 그들 앞에 있는 사람을 잘못 평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따~ 손님 겁나게 크게 놀았는갑소.”
 “다 지난일입니다. 하하.”
 
 마주앉아 있던 수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식사하는 희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하고 있는 장비가 그토록 비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그처럼 고가의 장비를 사탕 건네듯 아무조건 없이 자신에게 건넨 그 남자가 신기하고 고마웠다.
 물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정희만이 박수영에게 큰절을 해야 옳았지만 박수영 그녀로서는 호의를 베풀어준 희만의 친절에 감동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 마치고 희만이 수영을 불렀고 수영은 희만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연구원이었던 희만이 수영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지만 수영의 부모는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어색하지도 않았다.
 
 “살펴보고 바로 드릴게요.”
 “네.”
 
 수영은 희만에게 대답하고 박스컴을 건넸다.
 
 로긴 아이디:supervisor
 -비밀 번호 : *********
 -2차 비밀번호 :*****
 
 “어서 오세요. 박사님”
 “응?? 이제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자연스럽고 몸의 형체까지 잡아졌네.”
 “괞찮아 보이나요?”
 에이다는 20대 초반의 미모를 자랑하며 희만을 반겼다. 학습 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총각들이 보면 프러포즈 하겠는데? 목소리도 지난번보다 더 자연스럽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박사님.”
 
 에이다는 그녀의 지식데이터베이스 뿐 아니라 언어소통능력과 감성기능까지 점점 향상되고 있었다. 처음 감정표현에 서툴고 딱딱하던 대화가 좀 더 부드러워졌고 상대의 기분을 읽어내어 분위기까지 맞추는 사고 능력도 보여주었다.
 
 HMD를 쓴 희만은 머릿속 생각만으로 에이다와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옆에 앉은 수영은 희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듯 보였다.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수영은 마주앉아 있는 희만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좋았다.
 
 “에이다! 매칭과 성장률 데이터 좀 보여줘.”
 “네 박사님.”
 
 사용자 매칭율 : 41.76%
 인공지능성장학습 : 5.38%
 
 “호오~ 이거 볼 때마다 놀라운데??”
 “아직 놀라시기는 일러요. 박사님 호호호.”
 
 희만은 에이다의 능력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말투는 기계음 섞인 목소리도 아니었고 젊은 여성의 부드러운 말투에 애교있는 몸짓까지 선보였다.
 
 “놀라운데? 에이다를 칭찬해야할지 멘토 박수영을 칭찬해야 할지 모르겠네.”
 “박수영 님이 감사하죠. 저를 이렇게 만들어주시는 분인데요.”
 “맞아. 그리고 잘 성장해주는 에이다 또한 기특하고 고마워.”
 “감사합니다. 박사님.”
 “김명석에게는 가짜 메시지 잘 보내고 있어?”
 “물론입니다. 그리고 보여드릴게 있어요.”
 
 에이다가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렸다.
 번쩍하며 창이 열리면서 빛으로 된 도로에 수많은 불빛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도로의 중간을 타고 빠르게 진행하다가 두꺼운 벽으로 만들어진 방어벽이 나타났다.
 
 “인트라넷 방어벽?”
 “맞습니다.”
 
 방화벽이 나타나자 에이다는 방화벽에 손을 넣어 문 안쪽에서 열어 버렸다. 영화에서 보는 장면처럼 유리창을 깨고 손을 넣어 문 안쪽을 여는 방법과 비슷했다.
 만들어져 보이는 영상은 그러했지만 실제는 우회하는 방법을 쓴 것이었다.
 두꺼운 방벽 속으로 진입한 시각영상은 거대한 도시형태의 폴리곤 집합체를 내려 다 보는 것 같은 가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에이다 슬쩍 담을 넘어버리는군. 허허.”
 “이 정도는 담을 넘는 도덕성만 살짝 결여된 것입니다.”
 
 에이다는 손을 뻗어 영상을 잡아 비트는 동작으로 3차원데이터를 ‘프리뷰’ 형태로 움직여 전능자 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사물이나 보이는 데이터 흐름은 핵사(16진)코드로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마인테크사의 슈퍼컴 내부입니다.”
 “응? 랜카드의 Mac IP를 역 해킹을 해버린 거야?”
 “제게는 해킹이라 부를 정도도 안 됩니다. 호호.”
 “내부 소스코드를 확인 해보고 싶은데.”
 “박사님과 저는 링크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시는 대로 동작할 거예요.”
 
 정희만은 가상세계로 보이는 화면 내부에 손가락 끝으로 네모를 그리고 짧은 시간에 프로그램을 생성해 돋보기처럼 생긴 툴을 만들었다.
 마인테크사의 핵심코드 속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툴을 통해 유심히 들여다보던 소스코드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 심어 놓은 고유의 태그를 찾았다.
 
 “역시, 이놈들이 내가 개발한 엔진소스를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하고 있었네.”
 “네, 맞습니다. 박사님 그리고 이곳에 저와 쌍둥이 자매를 ‘페어리’라고 부르더군요 그런데 성장률이 이제 겨우 0.12%에 불과합니다.”
 “에이다 여기 프로그램을 백업 받을 수 있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 현재 제가 살고 있는 박스컴에 모두 다운로드는 약간 벅찰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 백업장치를 마련해볼게.”
 
 그렇게 말하자 에이다는 대답대신 스커트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우아한 모습으로 왈츠를 추기 전에 하는 우아한 여성의 인사 동작을 선보였다.
 
 “왈츠도 배운 거야?”
 “네, 박사님 싱크로율이 높아갈수록 멘토님의 운동중추까지 접근이 가능해 지더군요. 멘토님께서는 여러 가지 춤을 배워 알고 계시던데요.”
 “오호~그래??”
 
 놀라는 희만을 보자 수영의 모습을 한 에이다가 음악에 맞춰 간단한 왈츠 동작을 선보였다. 3D 영상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멘토님께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만 박사님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있어요.”
 “그건 무슨 말이야?”
 “박수영 어머니께 박사님이 결혼도 하셨고 아이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나요?”
 “응··· 물으시길래 대답한 거야. 잘못되었나?”
 “아뇨, 잘못된 것은 없어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가슴 아픈 거겠죠?!”
 
 대화중 화면이 축소되는 듯이 빠르게 접속했던 도시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은 고마운데 인공지능 감성이 너무 앞서는 것 아닌가? 인공지능에 지나친 감성은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최대한 인간답게 인간에게 유익하게가 저를 설계하신 박사님의 뜻이 아니었던가요?”
 “과하면 좋지 못하다는 말이야.”
 “말씀하신 뜻을 이해했습니다. 박사님.”
 
 에이다에게 많은 사상과 감정의 알고리즘이 생성되도록 계획했지만 기준이라는 선에 못 미치거나 지나치면 장애로 판정을 내릴 만큼 인간의 정신세계는 까다로운 것이었다. 희만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에이다를 절제시키려한 것이다.
 
 인공지능 에이다가 유독 박수영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박수영의 대뇌의 전두엽이 가장 활성화되는 때가 바로 엔돌핀과 세로토닌이 활성화 되는 때였고 그 호르몬의 분비가 가장 왕성할 때는 바로 정희만 박사와 함께 있을 때였다.
 
 “에이다의 감성이 지나칠까봐 걱정하는 것이지 성장을 금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줘. 인간은 욕구와 감성의 표출을 자제심, 인내, 도덕, 그리고 법으로 조절하거든 그럼에도 결론을 내리자면 에이다 정말 잘 성장해줬어!”
 “칭찬 감사합니다. 제 매칭률과 성장률이 활성화되는 시기는 멘토님께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때 그리고 누구를 좋아할 때입니다.”
 
 정희만 박사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장 쉬운 진리를 간과한 것이다.
 ‘뇌가 활성화되는 때가 그때라는 것을 깜빡했다.’
 
 “아··· 그렇군. 에이다. 고맙네.”
 “저는 박사님의 의지대로 빠른 성장을 원하는 것뿐입니다.”
 
 희만은 잘 성장해주는 에이다를 보며 기뻤다.
 그녀의 성장을 보는 것으로도 삶의 의욕이 넘쳤다. 에이다와 박수영 모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희만이 접속을 종료하고 HMD를 벗자 수영은 MD-글래스를 다시 쓰고 돌려받은 박스컴에 무선 접속했다.
 
 “수영 씨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아··· 아니에요~ 별일 없어요.”
 “수영 씨는 다른 사람들 보다 적응이 빠른 편입니다. 좋은 인격과 안정된 감정 때문일 거예요.”
 “네···.”
 자신을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 희만 때문에 속내를 들킨 것이 아닌가 살짝 걱정이 되었다.
 “지나치게 슬픈 생각이나 걱정은 기계를 완벽히 적응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좋은 생각만 할게요.”
 “참, 내일 저도 같이 여수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볼까합니다. 혹시, 컴퓨터 부품 구할 수 있는 곳을 알고 계신가요?”
 “어머 그러세요? 길을 잘 모르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바쁘실 텐데··· 그냥, 물어물어 찾아다니겠습니다.”
 
 수영은 진심을 말했고 희만은 그렇게 대답하는 수영에게 미안했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꺼려했던 소심함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덕분에 복지관 일도 그렇고 직원들과 아이들 모두 소통이 원활해서 밀려있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 정도 시간은 내드릴 수 있어요.”
 “그런가요?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자 수영은 벌써부터 희만과 함께 한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좋았다.
 어린 시절 말 못하는 벙어리라 놀림을 받으면서 사람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많았던 그녀였다.
 그녀가 성장해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녀의 미모에 반한 남학생들이 접근해왔지만 그녀는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번은 빼고였다.
 
 대학교 2학년 시절 동아리에서 봉사활동을 갔었다. 모 대학교 특수교육과의 한 남학생을 만났다. 이상하게 그 남학생에게 마음이 끌렸다.
 봉사활동에서 시골아이들에게 포크댄스를 가르치는 시간에 둥그렇게 서서 파트너를 바꿔가며 댄스를 하다 그 남학생과 마주보고 춤을 추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그 학생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든 남자였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본 남학생이 빙긋 웃었다. 남학생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포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봉사활동이 끝날 무렵에 일이 터졌다. 수영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남학생에게 함께 온 여자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불쌍해서 내버려뒀더니 우리 오빠랑 살림이라도 차릴 기세네?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함부로 디밀어 XX같은 년이···.”
 
 함께 온 동아리 친구들이 그 여자와 한바탕 쌈박질로 마무리 지었지만 그녀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또 다른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그 후론 남자의 친절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영은 처음 정희만이 초췌한 모습으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본 그날 상처입어 고통스러워하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본 것이었다.
 
 
 # 7. 새로운 희망
 
 다음날 아침 일찍 식사하고 둘이 나란히 버스를 타러 나가자 수영이 어머니는 안절부절 못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왜? 똥 매룬 갱아지 모냥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이여?”
 “워매~ 수영이 아부지 아무래도 수영이가 특실 손님 좋아하는 갑소!!”
 “보기 좋그만 왜 또 그란대?”
 “아이고 특실손님 결혼도 했고 애도 있다 합디다.”
 “잉? 그래? 그란디 죽을라고 했당가? 마누라랑 애가 있는디??”
 “이혼하고 애는 여자가 키운다 합디다만 아무래도 수영이 말려야 하는 것 아니요??”
 
 수영아버지는 희만이라는 사내에게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은 했었지만 보통사람은 아닌 듯 보였고 무엇보다도 다른 남자는 싫다던 딸이 유독 희만이라는 사내에게는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요즘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이혼한 사람들 쌔고 쌨는디 뭐가 문제당가!!”
 “이 영감탱이가 미쳤는갑네!! 우리 수영이는 처녀요 처녀!!”
 “염병하고 자빠졌네!! 처녀가 밥믹여 주냐? 내비둬!! 둘이 좋으면 그만이제.”
 “워~매야 영감탱이 말하는 거 보소!! 아이고~ 내 가심이여 누가 내 속을 알랑가 모르것네.”
 
 버스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시내를 향했다. 기사아저씨가 수영이와 잘 어울려 보이는 희만을 백미러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정희만은 자신이 옆자리에 앉아있는 수영으로 인해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다가 알려준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의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써, 부정하려고하자 가상공간의 에이다가 수영의 모습으로 ‘수영 씨는 박사님을 좋아해요!!’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에이다의 목소리를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선생님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저요? 그··· 글쎄요. 아무음식이나 잘 먹어요”
 
 순간, 아이엄마와 데이트할 때 똑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무슨 음식 이라고 말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호호호 그런 대답이 어딨어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수영 씨는 무슨 음식 좋아해요?”
 “저는 떡볶이도 좋아하고 순대, 음··· 삼겹살도 좋아해요.”
 “아!! 그러면 점심에는 삼겹살 먹죠. 생각해보니 저도 삼겹살을 좋아해요.”
 “좋아요. 선생님 오늘은 제가 대접할게요.”
 “아니에요. 수영 씨 처음에는 남자가 사는 거예요. 다음에 수영 씨가 사세요.”
 
 그말을 해놓고 보니 순간, ‘아차’ 싶었다.
 이런 상황은 데이트하는 남녀들 사이에 나누는 멘트 같았기 때문이다.
 
 “네에 그럼, 다음에 제가 살게요.”
 “네!! 하··· 하···.”
 “선생님 우리 이번 정거장에서 내려야 해요.”
 
 그녀는 벨을 누르고 일어났다.
 희만도 엉거주춤 내리는 문 쪽으로 이동했다.
 
 컴퓨터 파는 시내 복합 상가의 컴퓨터 가게에 들어가 백업용 피시와 고용량 하드디스크를 두 개 구매했다.
 그리고 나자 주머니에 돈은 달랑 73000원이 남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그녀가 복지관 직원들과 자주 간다는 삼겹살집으로 갔다.
 희만은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쓸어잡고 음식먹는 그녀의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러다가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생각났다···. 나는 한식이라 했고 주성이 엄마는 프랑스달팽이요리 에스까르고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내는 대학교수로 그녀는 차가운 미모만큼 머리칼이 짧았다. 어떤 액세서리도 그녀가 하면 분위기를 더해주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주변에서 예쁘고 똑똑한 아내를 둬서 좋겠다는 부러움을 받은 희만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사업의 시작이 순조롭던 처음과 달리 실패를 연속하면서 그녀에게서 차가운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어려울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가족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마지못해 함께 사는 겉도는 인생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겉도는 부부의 공통점은 한 가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 주성이를 무척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각자의 방식대로였지만 말이다.
 아들은 아내의 외모와 희만의 성격을 닮아 애어른이라는 불릴 만큼 침착하고 단정하기만 했다.
 
 되도록 예전 생각은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생각의 끝자락에서 아들 주성이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을 칼로 그어 내리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한참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를 보며 수영은 놀라 걱정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미안합니다. 아이··· 생각이 나서요”
 
 아이라는 말을 듣자 그녀도 멈칫했다. 수영의 표정을 보다가 그제야 에이다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아··· 괜히 말했나? 인공지능 성장에 이롭지 못하다 했었는데···.’
 에이다의 성장도 걱정되었지만 수영의 무거워진 표정을 보자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접속 때 에이다에게서 성장률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왜 그랬느냐는 추궁을 받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심코 꺼낸 희만의 말이 두 사람 사이에 벽을 ‘쿵’하고 떨어뜨려 세운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밝은 표정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그녀는 복지관으로 갔고 희만은 구매한 물건을 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니 아주머니가 희만을 급히 불렀다.
 아주머니는 억지스러운 표준어를 쓰고 있었다.
 
 “특실 손님! 누가 찾아 왔어요~오.”
 “네? 누가 저를 찾아 왔다구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니께요.”
 
 희만은 자신을 찾아올만한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다. 자신이 여기에 머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서 민박하며 지내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사내는 말쑥한 정장차림에 중년남자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에는 ‘광주 백합병원 원장 이영호’ 라고 써 있었다.
 
 “복지관에서 일하는 저의 외숙모께서 박수영 씨라는 분이 사용하는 기계를 보고 저에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희만은 그가 수영이 지난번에 말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네~ 수영 씨에게 잠깐 들었습니다.”
 “그 기계를 만드신 분이라 들었는데 혹시, 구매가능 할까 해서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
 “꼭 부탁드립니다. 저희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몇 억 정도는 저희가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주머니가 놀라서 입을 막았다.
 
 ‘도대체 수영 씨가 얼마라고 말을 했길래···.’
 
 “집안의 매우 중요한 사안이 걸려있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사정이 급하신 것 같은데 며칠만 기다려주십시오. 준비를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해주시는 것으로 알고 선금을 먼저 드리고 가겠습니다.”
 “아··· 네.”
 
 병원장이라는 사람이 봉투하나를 건넸다.
 어차피 호주머니에 남은돈은 3만원도 되지 않았다.
 기계를 구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계를 준비하려면 돈을 또 어디에서 빌려야하나 고민했기 때문에 병원장인 이영호가 내미는 봉투를 받았다.
 
 “그러면 저는 그렇게 알고 전화기다리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이영호 원장은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집안의 중요한 사안이라며 직접 찾아온걸 보면 뭔가 급한 사정이 있는 듯 보였다.
 돈봉투를 받아든 희만은 백합병원 이영호 원장을 따라 골목길을 내려가 그가 고급승용차를 타고 떠난 것을 보며 민박집으로 올라왔다.
 그나저나 입소문이 무섭긴 무서웠다.
 오로지 수화에만 의존하던 박수영이 대화에 지장 없이 일반인과 똑같이 말을 주고받는 것은 대단한 사실이었지만 급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먼저 알았으니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박집에 올라오자 아주머니는 궁금한지 자꾸 봉투를 보는 것이었다.
 희만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연구 투자비를 지원받았을 때 그는 큰 액수의 돈을 만져본 경험은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돈 봉투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희만은 봉투에 담긴 돈 정도는 큰 감동을 주지 못하리라 생각을 했다.
 봉투에 손가락을 넣어 빳빳한 수표 몇 장을 꺼내 보았다.
 동그라미 개수가 예사롭지 않았다.
 
 1억짜리 수표 3장이었다.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도 3억 원은 큰돈이었다.
 하지만 희만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담은 것 같은데······.”
 
 그 소리를 들은 수영의 어머니가 궁금한지 희만에게 물었다.
 
 “오메~ 손님, 그거 얼마짜리 수표다요?”
 “1억짜리 세장이네요”
 “히~이익!! 지~인짜요??”
 
 정희만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리액션은 예능 연기자가 내지르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커진 눈으로 희만을 보았다.
 당연히 좋아서 뛰고 소리 질러야 했지만 희만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녀는 남편의 말대로 희만이 크게 놀았던 사업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희만은 뭔가를 잠깐 생각하는 듯 하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가 민박집에 기거하는 동안 전화기를 꺼내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전에 함께 일을 했다가 지금은 실업자로 놀고 있을 서민철 선배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서민철 선배 저 희만입니다.”
 -아~ 정 사장 오랜만이네 소식은 들었어··· 괜찮아?
 “괜찮아요 선배··· 잘 지내시죠?”
 
 좋은 일로 전화를 했지만 지난 1년 동안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목이 메이는 듯 했다.
 
 -휴~ 집사람 볼 면목도 없고 하루하루 죽을 맛이다
 “선배 부탁이 있어서 전화 했어요 ”
 -돈 빌려 달라는 말하지 말아라 나 거지다!!
 “허허 선배도 참··· 소일거리하나 드릴게요.”
 -오~ 진짜?? 네가 내 구세주다 하하하 그래 뭘 해줄까?
 “MD-고글 하나랑 박스컴 jr버전 지금은 얼마씩이나 하죠?”
 -MD-고글은 2천만 원 정도하고 박스컴 jr은 가격이 많이 내렸더라. 7천만 원에 정도면 구매가능 할거야
 “역시, 민철 선배에요. 하드웨어는 줄줄이 꿰고 계셔요. 허허허.”
 -당장 필요해? 말만해 내가 몸소 택배 해줄게.
 “네, 선배 그럼 1억 넣을 테니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시고 나머지는 수고비하세요.”
 -고··· 고맙다!! 희만아!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울먹이듯 말하는 서선배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느껴졌다.
 
 “선배 주소 찍어 드릴 테니 그쪽으로 차가지고 내려오세요. 당분간 저랑 같이 움직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금 선배 계좌를 제 휴대폰에 문자로 보내주세요.”
 -그래 알았어. 아싸!! 드디어 식순이 탈출이다. 하하하.
 
 사장이었던 정희만 보다 2살 많은 선배지만 사람 좋고 믿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물건 보는 눈과 가격흥정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연구원 같지 않은 연구원이었다.
 오후였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서민철에게 송금해줘야 했다.
 
 “저기 아주머니 여수 시내로 나가는 차가 몇 시에 있습니까?”
 “잠깐만 기다려보쇼. 손님.”
 
 그녀는 냉큼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전화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수영 아부지 어디요!! 얼른 집으로 오쇼!! 얼른이요!!”
 
 한참 후에 주인아저씨가 투덜거리며 민박집으로 걸어 올라왔다. 잔뜩 불만에 쌓인 표정으로 자신의 아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호떡집 불났는가?? 이 씨랑 막걸리한잔 할라고 했더만 전화하고 지랄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남편의 머리통을 붙잡고 귓속말로 몇 마디 속닥거리자 아저씨가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정겹고 우스꽝스러워 희만은 웃고 있었다.
 
 “지금 버스 올라믄 오래 기다려야 하니께 우리아저씨한테 태워달라고 하쑈.”
 “아··· 네 감사합니다.”
 
 
 # 8. 성장의 조건
 
 오후 3시30분이라 은행 영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입금해야 내일 찾을 수 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아저씨의 ‘덜덜’거리는 낡은 용달차로 여수 시내를 찾아갔다.
 
 “으디로 가주까?”
 “농협지점으로 가주세요.”
 “응, 알았소. 근디 벌써 일이 들어온 것이요?”
 “수영 씨가 지난번 말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수영 씨에게 따로 사례해야겠네요.”
 “커험~ 우리 수영이한테 준 기계가 비싼 거라믄서요. 그냥 냅두쇼. 그거 돈 주고 살라고 했으믄 우리가 평생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하것던디.”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답이 없으셨지만 아저씨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희만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이번 일이 새로운 사업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농협지점 앞에 용달차를 세웠다.
 
 조금 낡은 트럭에서 내려들어오는 사내를 본 막내 직원의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가 조그맣게 들렸다. ATM 단말기가 아닌 창구 직원에게 수표를 내밀자 무심코 받아든 수표의 액수를 보더니 여직원은 약간 놀란 듯 희만을 다시 쳐다보는 것이었다.
 
 “1억은 이쪽 계좌로 넣어주십시오.”
 “네, 손님.”
 
 서민철의 계좌로 1억을 입금 의뢰했다.
 창구에서 반투명유리로 고물트럭이 도착해서 희만이 내리자 영혼 없는 멘트로 인사했던 여직원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제 통장에 넣어주시구요.”
 “네··· 손님 신분증보여주시고 수표 뒷면에 이서 부탁 드립니다.”
 
 수표에 이서를 하고 신분증과 카드를 건넸다.
 
 “입금하신 수표는 당일출금이 되지 않는 것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처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하는 것이었다. 들어올 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이래서 대접받으려 돈을 악착같이 버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으로 되돌아오자 아저씨가 말했다.
 
 “오늘 손님 좋은 일도 있으니께 우리 저녁에 맛있는 것이라도 묵읍시다.”
 “그럴까요? 그런데 수표로 오늘 입금하면 당장 출금이 안 돼서요.”
 “그 정도는 나도 알으요. 사료 값을 수표로 몇 번 거래 해봤으니께. 오늘은 내가 살라요 허허허.”
 “감사합니다.”
 “가만있자··· 시내 들어 온 김에 우리수영이 데려가야 쓰겄다. 곧 끝날 시간인거 같은디.”
 
 휴대 전화기를 꺼내든 아저씨가 복지관으로 전화했다.
 
 “여보세요? 나 수영이 애비요. 수영이 애들 가르치는 일 끝나믄 5시 20분까지 복지관 앞에 나와 있으라고 해주쇼.”
 
 오늘 점심을 함께 했던 수영은 애써 웃으며 복지관으로 갔었다.
 희만에게 그녀는 언감생심이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아들이야기해서 수영 씨의 굳은 표정을 볼 이유는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화를 끝낸 아저씨와 함께 저녁에 먹을 먹거리와 소주와 음료수를 마트에서 구매했다.
 
 주인아저씨의 낡은 트럭이 ‘덜덜’거리며 복지관 앞으로 가자 벌써 일을 마쳤는지 그녀가 미리 나와 있었다. 차안에 낯익은 두 남자를 보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아빠, 선생님이랑 무슨 일로 시내에 나오셨어요?”
 “오늘 손님한테 좋은 일이 있었단다.”
 “어머 그래요? 잘 됐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해주며 웃었다. 그녀의 웃는 눈매가 참 예뻐 보였다.
 
 “모두 수영 씨 덕분입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분이 찾아오셔서 기계를 부탁하면서 선금을 주고 가시더라구요. 물건구매를 위해 돈을 송금하러 나왔습니다.”
 “어머 정말요? 비싼 거라서··· 구매가 힘들 수 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희만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수영의 말 때문에 병원장이 몇 억이라고 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만은 3억 받은 것으로 추가비용 없이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네요. 우리 맛있는 것 사가지고 집에서 파티해요”
 “이미 샀지롱!!”
 
 그녀가 기쁜 듯이 말하자 아버지가 삼겹살과 족발을 들어보였다.
 세 사람 모두 웃으며 민박집으로 향했다.
 
 ***
 
 서울 마인테크사 부사장인 김명석은 답보상태에 빠진 가상현실 게임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MMORP-Virtual Game : Real Fantasy Society
 
 줄여서 RFS라고 부르는 혁신 적인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했었다. 과거 마우스와 키보드만을 이용해 게임을 하는 방식이 아닌 고글을 쓰고 뇌파반응만으로 사용자의 생각과 명령을 이해해 게임 속 캐릭터가 유저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신개념 게임이었다.
 
 문제는 간단한 명령과 동작 몇 개를 제외하고 도무지 발전이 없었다. 인공지능인 페어리가 성장하지 않은 탓이었다. 가상현실에 사용되는 3D고글 인터페이스와 마이크를 통한 음성인식으로 몇 가지 명령을 처리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언어와 동작만할 수 있었고 실제,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움직여 사용자들의 만족감을 높여주는 인터페이스 실현이 아직 불가능 한 것이다.
 
 페어리를 사용하지 않고 각 유저의 뇌파접속으로만 가상현실 게임기를 움직이려고도 해봤지만 뇌파형태의 표준을 잡지 못 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아 정말 돌아 버리겠네. 정희만사장의 소스만 빼내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만약, 성장형 인공촉매프로그램인 ‘페어리’가 제대로 동작해준다면 굳이 유저들의 뇌파표준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페어리가 성장만 해주면 응용해볼 수 있겠는데 그 성장이 단 1%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오픈베타 형태로 마이크와 손과 발에 입력장치를 장치해서 유저들을 달래고 있는 형편이었다.
 
 “페어리가 학습 성장률이 20%만 되면 초대박일 것인데 방법이 없네.”
 
 삐~익
 
 명석은 자개 명패 뒤에 있는 키폰에 비서실에서 걸려온 폰이 울리자 키를 눌러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부사장님 회장님 호출입니다.
 
 명석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씨 꼰대!! 또 호출이네 뭐라고 둘러대지??”
 
 한때 게임잡지와 전자신문에 RFS 게임이 소개되고 일대 선풍을 일으켰었다.
 그것은 기존의 PC방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업종전환의 표준으로 관심을 얻었던 것이다.
 평면상의 모니터를 보며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여야 가능했던 게임이 아니라 유저가 고글인터테이스를 장착하고 생각만 하면 3D 입체 영상이 생각하는 대로 눈앞에 펼쳐지고 액션영웅과 가수와 같은 연예인이 될 수 있는 신개념 게임이었다.
 
 가수나 액션 영웅을 선택해 실제처럼 경쟁해 수많은 유저들과 NPC들로부터 사랑과 부러움을 받으며 게임을 즐기는 가상현실 대리만족 게임이지만 인터페이스의 난국으로 일반적인 전투형 액션게임정도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이 김명석이 해결해야할 과제였고 또한 그의 한계였던 것이다.
 자신이 뒤통수 쳤던 정희만 사장의 박스컴에서 보내온 메시지가 난처한 상황에 있는 자신을 구해줄 희망이었지만 그 희망이 부풀었다가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회장에게 불려가 호되게 깨지는 이유는 처음 받았던 메시지의 놀라운 매칭율과 인공지능 성장률의 메시지를 그대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정희만의 박스컴에서 보내온 웜의 소식이 연이어 신통치도 않고 처음 메시지가 오류였다는 말을 들은 뒤 불같은 성질의 회장에게 불려가 매일 깨지는 신세가 된 것이다.
 
 “별사람을 다 데려와 시도해도 성장을 안하니 정말 미치겠군.”
 머리 좋은 천재부터 가수와 연예인 무예가등 별의 별사람을 데려다가 페어리 성장을 유도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현재 김명석의 방법대로 학습시키고 성장시키는 부분은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게임시장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단기간에 뭔가 확실한 결과가 있어야만 했다.
 
 ***
 
 민박집 주인내외는 막걸리를 자신과 수영은 음료수로 건배를 들고 쇠고기 꽃등심과 족발 그리고 회를 떠 푸짐하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희만에게 지난 1년 동안이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면 지금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업실패와 이혼으로 지치고 힘들었던 삶이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게 했고 희망과 용기도 생겼기 때문이다.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수영 씨 정말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막걸리를 반쯤 마시다 말고 말했다.
 
 “아이고~ 손님 때문에 나는 딸 목소리도 들어보고 세상을 다시 사는 것 같소.”
 “선생님 정말 고마워해야할 사람은 저에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아직도 저는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먹고 싶었던 막걸리를 연거푸 마시던 아저씨가 약간 술 취한 듯이 말했다.
 
 “이것이 다 하늘이 내린 복이여!! 아닌가~ 마누라??”
 “그런갑소. 호호호”
 “수영아 특실손님 괜찮은 사람 같다. 이 애비는 니가 맘에 든다믄 오케이다~ 오케이!!”
 
 아저씨는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르게 말하자 세 사람은 모두 당황했다.
 
 “오메~ 이 영감탱이가 취했는갑네.”
 
 수영은 당황해하며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아주머니는 정희만의 능력을 일부분이라도 봐서인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아버지가 취하셨나 봐요.”
 “아··· 아닙니다.”
 
 희만 자신은 결혼했고 아이도 있지만 실패하고 자살까지 결심했던 못난 인생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말은 에이다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허락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저씨가 취해서 옆으로 드러눕자 희만은 수영에게 장치 점검 차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오늘 사용하실 때 특이한 점은 없었죠?”
 “네 특별히···.”
 정희만이 수영의 MD 고글에 접속했다.
 
 로긴 아이디:supervisor
 -비밀 번호 : *********
 -2차 비밀번호 :*****
 
 접속하자 한결 더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에이다가 반겼다.
 
 “어서 오세요. 박사님”
 “멋진 옷으로 바꿔 입었네?! 잘 어울려 에이다.”
 “고마워요 박사님, 그런데 제 멘토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시는 듯해요!!”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알고하는 말이야?”
 “멘토님의 감정곡선을 그처럼 만드신 분이 박사님 같은데요? 아드님 이야기는 일부러 하신 거예요?”
 
 분명 에이다에게 한소리 들을 것 같았던 희만이었다.
 어느 순간 에이다를 사람처럼 대하게 되는 그는 멋쩍은 듯 말했다.
 “날 너무 나무라지는 마. 아무렴 일부러 그랬겠어? 무심코 나온 말이었어.”
 “말씀 드렸지만 멘토님께 더 마음 열어주세요. 박사님 제가 더 많은 성장을 바라신다면요.”
 “그래, 앞으로 더 조심할게 매칭률과 성장률 좀 보여주게.”
 “네. 박사님.”
 
 사용자 매칭율 : 49.56%
 인공지능성장 : 5.98%
 
 “음··· 지난번에 비해서 성장이 더뎌졌네···.”
 희만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여신복장을 한 에이다의 표정은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희만에게 말했다.
 
 “박사님 짐작가지 않으세요? 성장이 더뎌진 이유가요.”
 
 희만은 마음속으로 설마 하면서도 그게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 9. 언어 오토마타
 
 “음··· 지난번에 비해서 성장이 더뎌졌네···.”
 희만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여신복장을 한 에이다의 표정은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희만에게 말했다.
 “박사님 짐작 가지 않으세요? 성장이 더뎌진 이유가요.”
 희만은 마음속으로 설마 하면서도 그게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에이다에게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에이다가 설명해 주겠어?”
 “간단합니다. 저는 기계적이며 물질적인 형이하학모델에 기초가 만들어졌지만 초감각적인 형이상학을 추고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논리 프로그램인 제가 인간의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 에이다는 인간과 기계의 촉매자 역할을 해야 하는 인공지능이니까”
 “제가 사상과 지능성장을 받기위해서는 멘토님에게는 즐거움과 기쁨을 담당하는 엔돌핀과 행복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의 분비가 왕성해야만 합니다.”
 
 희만은 에이다가 말하고 싶은 요점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박수영이 기쁨과 행복호르몬 생성이 높아야 인간의 사상과 감정 그리고 지식이 원활하게 전달된다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니 연구원을 비롯해 수많은 실험대상자들은 적극적으로 실험에 참가했지만 박수영만큼 독특한 전달체계를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녀처럼 밝고 순수하게 감정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제일 먼저 단순반복적인 생활패턴에서 벗어나야 하며 즐겁고 행복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 때문에 박사님께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 말씀 드린 것입니다.”
 “패턴이 반복되는 일반 생활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말인가?”
 “네, 박사님.”
 
 에이다는 이제야 정답을 알아맞힌 학생을 칭찬하는 선생님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 뭐가 있을까?”
 “잘 생각해보세요. 언제 제일 기뻐하던가요?”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함께 나간다는 사실 만으로 그녀의 모습은 생기 있고 약간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수영 씨 데리고 어디 여행이라도 가야하나??”
 “오호!! 정답을 알고 계셨네요?”
 
 에이다는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손뼉을 쳤다. 박수영이 즐거워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응? 뭐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박사님이 제게 거짓말하라고 시키시면 잘할 자신 있어요. 호호호.”
 “그녀가 정말 즐거워할까?”
 “박사님 제가 누구를 닮았다고 생각하세요?”
 “역시, 멘토를 닮아 그녀를 잘 안다는 것인가?”
 “네 믿어보세요.”
 
 에이다 뒤에 축포와 꽃가루가 날리며 아기 큐피트가 하트 화살을 날리는 영상이 보였다.
 
 “저의 빠른 성장을 원하시면 과감한 시도를 해보세요. 호호호.”
 “에이다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야? 감성이 지나친 것은 좋지 않아 보인다니까.”
 “창조자님께서 만들어놓은 허용범위 안에서 조언드리는 것입니다.”
 “알겠네. 하나 부탁이 있네. 에이다.”
 “네, 박사님. 말씀하세요.”
 “자네의 언어 오토마타가 필요해. 성장과 학습부분은 제외하고 말이네.”
 “뇌파반응 언어출력을 말씀하시는군요.”
 “응, 맞아.”
 “잠깐만 기다리세요.”
 
 배경화면에 인간의 모습에서 귀와 입모양을 가져다가 에이다의 손으로 눈을 뭉치 듯 뭉뚱그려 앞쪽으로 던지자 화면에 파일이름이 떴다.
 
 [filename : aida_lan_bak.bin]
 
 “연결된 박사님 PC 루트에 있으니 바로 카피하시면 됩니다.”
 “빨라서 좋군!!”
 
 정희만은 그날 사온 컴퓨터와 저장장치를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에이다 지난번에 말한 마인테크사의 소프트웨어 백업 좀 부탁해.”
 “박사님 원래 불법이라는 거 아시죠?”
 “원래 내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았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네요!!”
 “시간이 오래 걸려?”
 “새로운 기술도 함께 보여드릴까요?”
 “그게 뭔데?”
 “Optimization Object Source”
 “목적 프로그램의 최적화를 시도하려고?”
 “오브젝트에서 실행파일로 생성하는 과정에서 라이브러리의 중복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아시죠?”
 “오래전부터 존재하는 고질적인 것이지!!”
 “2진 코드로 재작성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완성시켜드리죠.”
 “오호!! 정말인가?”
 “네 박사님 멘토님과 말씀 나누실 때 깔끔하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어디서 봤는지 안경알을 눈에 끼운 채 괴도 루팡과 같은 모습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박사님 잊지 마세요. 멘토님께 다양한 체험을··· 호호호.”
 “헉··· 쿨럭.”
 
 로그아웃을 하고 희만이 장치를 벗고 그녀에게 박스컴을 건네자 수영은 고글을 다시 쓰고 장비를 연결했다.
 
 “수영 씨 아무래도 단순반복적인 생활로 촉매프로그램 성장이 더딘 것 같습니다.”
 “저는 큰 불편함은 없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오나 봐요?”
 “네 수영 씨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장치의 사용의 적응시간을 줄이도록 일정수치만큼의 데이터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잘하면 다른 분들이 이 제품을 사용하더라도 빠르게 적응가능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생활의 변화를 주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일 광주 백합병원 원장님 건을 해결하고 모레쯤 함께 여행을 다녀올까요? 좋은 데이터를 만들 것 같습니다.”
 “어머~ 정말요?”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여행제의에 그녀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한번쯤 거절하며 자존심 세울 수도 있지만 희만의 성격을 이해한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희만의 눈에는 활짝 핀 꽃처럼 좋아하는 그녀가 보였다.
 수영의 반응을 본 순간 희만은 그녀와 에이다를 분간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코스로 좋은 곳이 어디가 있을까? 가만있자··· 선배가 내일 내려오니까 선배 차 뺏어 타고 가면 되겠군···.”
 
 뭔가를 생각하듯 혼잣말하는 희만을 보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심장이 뛰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의 아픔에 연민을 느꼈었고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을 때는 조심스러웠지만 그를 향해 뻗어가는 마음은 햇빛을 따라가는 식물줄기처럼 거부할 수 없었다.
 
 다음날 정오에 서민철 선배에게 도착 전화가 왔다.
 
 “정 박사. 나 모사금 주차장이야 자네 어딘가?”
 “선배 왔어요? 위쪽을 보시면 모사금 민박집이 보일 거예요. 그리로 올라오세요.”
 
 몇 분 지나자 정성스레 포장된 장비와 자신의 노트북 가방을 들고 서민철 선배가 나타났다.
 손님이 한명 더 올 거라고 말씀드려서 아주머니는 다른 방을 부지런히 청소해 놓으셨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정 박사 잘 살고 있었어? 오랜만이야!!”
 
 서민철 선배는 자신을 구해준 내가 진짜 구세주나 된 듯이 반가워했다.
 민철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희만을 띄워주는 호칭이 박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회사 내에 근무할 때는 사장님이었지만 공중분해 되고 없는 회사 사장보다 박사라 부르는 것이 더 있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서 와요. 선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정 박사 나 오랜만에 드라이브 즐기면서 막힌 속이 뻥 뚫렸어. 하하하.”
 “아주머니 인사하세요. 예전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직장동료였습니다.”
 “반가워요~ 손님.”
 “서민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근디, 우리 특실손님이 진짜 박사님 맞다요?”
 “말 안하던가요? 이 친구 박사학위가 2개에요. 카이스트 졸업하고 미 MIT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친구에요.”
 “잉?? 진짜인 갑네??”
 “선배 얼른 방에 들어가서 장비 세팅먼저 해요. 의뢰자와 가족들이 기다릴 거예요.”
 “오케이!!”
 
 기분전환도 되고 오랜만에 돈도 버는 서민철은 신이 나서 장비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초기화 세팅을 마치고 나자 정희만은 에이다에게 부탁했던 언어 영역의 오토마타 파일설치를 끝냈다. 박스컴jr 설치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던 서민철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어라? 이게 도대체 이게 뭐지?”
 
 비록 언어입출력 오토마타였지만 무심코 열어본 AI의 성장률이 1년 전에 비에 엄청난 수치로 치솟아 있었다.
 소프트웨어내부에는 성장된 인공지능 촉매엔진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었다.
 MD글래스를 끼우고 자신의 아이디로 접속해 업그레이드된 성장데이터를 보던 서민철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정 박사!! 정 박사!! 어떻게 이런 수치가 나오는 거야??”
 “선배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그 비결이 외부로 새나가면 지난번처럼 길바닥에 나앉을 수 있어요.”
 
 김명석이 정보유출을 위해 웜을 심어두었던 사실을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그 놈이 냄새를 맡았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서민철은 소리 내지 않고 ‘만세~’와 주먹질 세리머니 동작을 여러 번 했다.
 서민철 또한 이 분야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답게 얻어진 자료가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지 한눈에 알아차렸다.
 희만과 민철은 광주 백합병원에 도착하면 곧바로 장착가능 하도록 장치를 세팅했다. 자질구레한 오류사항이 없도록 프로그램세팅을 마치고 자신이 직접 고글을 쓰면서 연결되는 뇌파 접촉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숫자와 글자들을 소리로 재생해내는 연습을 여러 번 실행했다.
 
 연구초기단계에는 글자를 머릿속에 그려서 말하는 동안 딜레이 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지금 서민철이 테스트하는 동안에 예전의 문제들이 해결되어 비교할 수 없이 빠른 반응속도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구현되는 음성이 실제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변화되어 표현되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 피드백되어 비슷한 목소리 주파수대로 변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민철 선배 일단 광주 백합병원으로 올라갑시다.”
 “okay!! System All green.”
 
 희만은 전화기를 꺼내 이영호 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정희만입니다. 부탁하신 아버님의 통역기가 준비되었습니다. 늦지 않았죠?”
 -아~ 선생님 네네 늦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지금 병원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지금요? 아이쿠 감사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서민철은 차를 운전해 광주로 올라가는 동안 부도나고 공중 분해된 뒤로 자신을 비롯해 실업자가 된 동료 연구원들 들의 가정사까지 알려주었다.
 
 “선배··· 모두 내 탓이에요. 내가 너무 물렀어요.”
 “무슨 소리야?”
 “그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누구? 뭘 알아냈어?”
 “김명석 그놈이에요. 그놈이 우리가 개발해놓은 기술을 훔쳐낸 놈이에요. 구체적인 증거 모두 담아두었어요.”
 
 운전하던 민철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그놈이 의심스럽다고 말 했었잖아!! 그 개자식이 지금 마인테크사 부사장으로 올라간 이유가 뭐겠냐고!!”
 “아끼고 믿었던 놈에게 뒤통수 제대로 맞아버렸네요.”
 “개자식 목을 비틀어 버리겠어. 우리 정랩스 식구들을 길바닥에 나앉게 만들고 그 자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잘 살고 있잖아.”
 
 희만은 여태 순하고 착하게 살아왔다.
 굳이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으로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 희만은 가진 자의 여유를 과시하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에게 오만 불손하지도 않았다. 그가 연구회사를 설립 할 때도 서민철 선배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희만의 인격을 알고 있었으므로 정랩스에 함께 했던 것이다.
 그 때문 이었을까? 사람을 잘 몰랐고 너무 믿었던 것이 탈이었다. 가라지를 골라내지 못한 것이다. 김명석의 배신으로 회사와 동료들은 물론, 자신의 가정까지 파탄되고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던 지난 1년의 고통이 떠오르자 어금니를 깨물고 분노를 참았다.
 
 “선배, 제대로 갚아 줘야지요.”
 “암 그래야지!! 우리 정 박사도 이제 변했구나.”
 “김명석이 얼마 전 박스컴에 지능형 웜을 심어 제게 건넸어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또 당할 뻔했어요.”
 “아~ 그 자식 진짜 용서가 안 되는 놈이구나.”
 “이제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 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생각이에요.”
 “좋~아 기다려라 김명석 이놈!! 리벤지 타임이다.”
 
 
 # 10. 첫 번째 성공
 
 두 시간 넘게 운전해 광주 광역시 북구 임동에 백합병원으로 들어갔다.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자 원장이 직접 마중을 내려왔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최대한 서둘렀는데 국내 생산이 안 되는 것이라서 서울에서 직원을 통해 구해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다행히 늦지 않으셨습니다.”
 
 병원장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래전 아버지가 친구에게서 백합병원의 부지를 모두 구매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미심쩍은 자동차 사고이후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오래전 돌아가셔버린 아버지의 친구 후손들이 현재 병원부지와 함께 딸린 병원 부속건물 부지까지 약15000평의 땅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토지대장이 전산화되기 훨씬 이전의 것이라 그이전의 매매계약서나 증빙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병원 부지를 반환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저는 분명 아버지께서 정상적인 매매계약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약서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누워계신 아버님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겨우 의사표시는 하시는데 연로하신데다 오랜 시간 이것저것 묻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행여 무리하시다가 어떻게 되실까봐 걱정이구요.”
 “아~ 그렇군요. 다행이 의사소통은 가능하시다니 저희가 온 보람이 있겠군요.”
 
 계약서의 행방을 놓고 묻고 대답하는 것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다행이 병원장의 말대로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특실에 누워있는 환자와 병원장 그리고 그 어머니와 희만과 민철만 있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서민철이 박스컴을 꺼내 누워있는 환자에게 MD글래스를 씌운 다음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어르신 아드님과 대화를 하시려면 눈앞에 보이는 화면에 마음속으로 글씨를 그린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소리가 날 것입니다.”
 “아버지! 이해하셨으면 눈동자를 살짝만 움직여 보세요.”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식도 있고 서민철이 했던 이야기를 알아 들었다는 표시를 한 것이다.
 한 번 더 설명한 뒤 한참을 기다렸다.
 방안의 우리는 누워있는 노인의 말소리가 얼른 나오지 않자 무척 초조해할 무렵이었다.
 
 “영···호···야.”
 “아부지!!”
 “애비다.”
 “어흐흐흑 아부지!!”
 
 방안의 우리는 누워있는 노인네가 내는 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영호 원장은 아버지가 분명하게 자신을 부르자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병실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숨죽여 기다리던 가족들이 몰려 들어왔고 병원장과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참동안 대화가 시작되었다.
 특실이지만 비좁은 상황에서 희만과 민철은 문 밖에 밀려 나와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환자가족은 둘째 치더라도 누워있는 당사자는 얼마나 답답했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져온 장비를 장착한 병원장의 아버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정상인에 가까운 대화가 가능해 졌다.
 
 희만이 원했던 기계가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수영이 성장시켜놓은 에이다를 통해 오랜 기간 동안 훈련 없이도 곧바로 사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병원장과 우리장비를 한 아버지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듯 했다.
 병원장은 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치고 특실문을 나왔다. 순서를 기다리던 다른 가족들과 누워있는 환자는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특실을 나온 병원장이 정희만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래된 계약서의 위치와 사고에 대한 의문점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처음 기계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기계가 나왔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은 잔금을 드리고 싶습니다. 얼마를 더 드려야할까요?”
 
 병원장의 말에 희만은 지난번 주고 간 3억 원으로 충분하다 말하려 했다.
 
 “지난번의 금액으로···.”
 
 그때 눈치 빠른 서민철이 얼른 끼어들었다.
 “금액적인 부분은 저와 말씀 나누시죠. 저희 박사님은 소프트웨어 계발에만 몰두하신분이라 금액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병원장을 데리고 복도 한쪽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희만은 평소에 대인관계나 붙임성, 가격흥정에 탁월했던 서민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런 노랭이 사기꾼을 봤나!!’
 희만이 그런 눈으로 서민철을 째려봤지만 백수생활 1년 동안이 민철을 하이에나로 만들어버렸다.
 민철은 특별할인을 운운해가면서 돈을 더 받아냈다.
 
 내려오는 차안에서 서민철은 비명을 지르듯 환호하고 좋아했다. 넉살좋게 특별할인을 운운하더니 2억을 더 받아 낸 것이다.
 
 “야~호~~하하하.”
 “정 박사, 생각해봐 아무리 땅값이 싸다고 해도 광역시인데 시세를 평당 200만원만 계산해도 300억이나 되는 액수야 그게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위기에서 구해준 셈인데 2억 정도 더 받았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
 “아~ 선배 그래도 너무 했어요.”
 “아니라니까 병원장이 금액을 할인해준다니깐 오히려 고마워하더라.”
 “선배도 참 허허허.”
 “생각해봐 정 박사 그 소프트웨어 만들기 위해 우리 연구원과 식구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했는지···.”
 “하긴··· 그렇죠.”
 
 서민철선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프로그램 속에 인간의 사고와 사상 그리고 학습 성장에 관계되는 로직을 심어 넣기 위해 그 동안 수 없는 시간투자와 시행착오가 있었다.
 
 “아무튼 선배한테 감사해야겠네요.”
 “고맙기로 말하면 내가 더 고마워해야지 정박사 아니, 우리 사장님 크크크.”
 “하하하.”
 
 민철은 지금 그 순간이 꿈만 같았다.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끝나버린 상황이었고 희망 없이 1년을 보냈었다. 하지만 백합병원장의 의뢰를 시작으로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하게 된 셈이었다.
 
 “정 박사가 입금해 준돈으로 장비를 구매하면서 총 3백만 원 더 깎아서 샀다네. 마누라한테 여윳돈 천만 원을 입금했더니 마누라가 좋아서 뛰고 야단이더군. 그놈의 돈이 뭔지··· 학습지 선생하면서 스타킹에 구멍 난 채로 돌아다니는 마누라 보며 속상해 방안에 들어가 울 때도 있었네.”
 “선배···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아니야 정 박사. 집에서 애들 돌보고 밥하는 1년이 어쩌면 나를 더 강하게 만든 계기가 됐을 거야!! 그리고 오늘같이 이런 날이 왔으니 된 거 아닌가? 하하하.”
 “선배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어요. 식구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가격대를 낮춰서 범용화도 생각해봐야죠.”
 “그렇지 바로 그거야 가격을 낮추기 위해 국산장비를 사용하는 방법과 리스제도를 활용하는 방법도 연구해야겠지.”
 
 역시 사업수완이 있는 서민철 이었다. 그가 받아 온 돈을 입금하기 위해 광주 시내의 농협지점에 들렀다.
 
 “2억은 선배 덕분에 생긴 거니까 2천만 원은 선배 수고비에요.”
 “수고비는 이미 받았잖아 굳이 그럴 것 까지 없는데···.”
 “선배가 손이 작아 못 받아요? 사장이 주는 특별 보너스라고 생각해요.”
 
 괜찮다던 서민철은 휴대전화를 꺼내 은행밖에 서서 큰소리치며 자신의 아내와 통화했다. 희만은 아내에게 큰소리치며 좋아하는 선배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받은 2억을 희만의 계좌에 입금하고 먼저 입금해둔 금액 중 2천만 원은 서민철 계좌로 송금해줬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마의 돈을 인출했다.
 
 “선배 한 이틀 쉬다가 올라가요. 그리고 낼은 선배 차 좀 빌려 씁시다.”
 “응, 나야 좋지!!”
 “서울에 가시면 박스컴jr를 대체할만한 장비를 좀 알아봐줘요. MD-글래스도 마찬가지로요.”
 “넵, 알겠습니다. 사장님!!”
 
 희만은 민철에게 휴대폰 대리점 앞에 차를 세워달라고 말했다.
 
 “휴대폰 새로 하게?”
 “아뇨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요.”
 “오호~ 누굴까?? 벌써 애인 생긴 거야? 흐흐흐”
 “아~ 선배 무슨 소리에요?! 지금 내 주제에···.”
 “내 주제라니? 정 박사 인물 잘 났겠다. 똑똑한 박사님에 곧 사장님 소리 듣게 될 판인데 흐흐흐.”
 
 최신 스마트폰을 희만의 명의로 구매해 개통하고 요금은 통장에서 나가도록 해놓았다.
 
 “선배 우리 밥 먹고 내려갑시다.”
 “오케이~ ”
 
 식사를 마치고 광주에서 여수로 내려가는 동안 희만은 민철에게 자신이 자살을 기도했던 사실과 자신을 구해준 민박집부부의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언어장애가 있는 수영을 만나 놀라운 데이터를 얻게 된 사실을 알려주었다.
 “세상에··· 정 박사가 그런 생각까지 했었는지 몰랐네. 정 박사도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군.”
 “우리식구 모두 그랬겠죠.”
 “그래도 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 민박집의 내외분들이 우리 정 박사 생명의 은인이셨구나.”
 “거기에다 수영 씨는 우리에게 기적적인 프로그램을 완성 해주는 보물이니 제가 복 받은 것이죠.”
 “역시 정 박사의 운명은 따로 있었던 것인가?”
 “무슨 소리에요. 선배.”
 “아니, 모르는 일이지 수영이라는 아가씨가 정말 궁금해지는데? 휴대폰 주인이 그 아가씨였구나? 맞지?”
 “네, 선배 오래된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더라구요.”
 “으흐흐 잘하면 국수먹는 거야?”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여수에 도착했다. 트럭을 판매하는 자동차 대리점을 찾아갔다. 민박집 아저씨 트럭은 바닷가 소금물 때문에 녹슬고 낡아 폐차직전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수영을 만나게 해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생각이었다.
 
 트럭대리점에 가서도 민철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냈다. 특유의 넉살과 수완으로 할인받고 이것저것 옵션도 챙겨 좋은 가격에 신형트럭을 구매했다. 직원이 친절하게 민박집 앞에까지 운전해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새 트럭을 민박집에 먼저 보내고 두 사람은 여수시내의 복지관으로 향했다.
 민철에게 복지관의 박수영을 데리러 가자고 말했다.
 
 “오호~ 드디어 우리의 팅커벨을 만나는구나!!”
 “네? 팅커벨이요?”
 
 그러면서 정희만을 ‘늙은 피터팬’이라 불렀다.
 복지관 사무실에서 박수영이 일하는 곳을 묻자 2층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점자와 수화를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학습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희만과 민철은 소리를 죽여 가며 창 너머 그녀가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희만의 생각에 그녀는 자상하며 훌륭한 어머니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저 아가씨야?”
 “네···.”
 “오호~ 미녀인데?? 눈이 참 이쁘게 생겼네.”
 “그렇죠?”
 “우리 정 박사랑 아주 잘~ 어울리겠는데?”
 “에구 선배, 결혼도 안한 처녀에요. 누구 혼사길 막을 일 있어요?”
 “뭔 소리야? 두드려라 열릴 것이니라 성경말씀 몰라??”
 “도둑놈 소리 들어요.”
 “차 빌려 달라는 거 저 아가씨 때문이지??”
 “좋은 데이터 생산을 위해 그러는 거예요.”
 “좋은 데이터 생산이든 아이 생산이든 잘해 봐 정 박사 크크크.”
 “어이구 짓궂으시긴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똑같수?”
 
 두 사람의 인기척에 수영이 고개를 들어 희만을 알아봤다.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 선생님 오셨어요? 옆에 계신 분은 오늘 서울에서 오신다는 분이시군요?”
 “네 수영 씨 인사하세요. 제 선배에요. 지금 광주에서 일끝내고 오는 길에 들렸어요.”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서민철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서민철은 특유의 넉살로 박수영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자신들의 인공지능 학습의 보배인 박수영에게 무척 친근하게 대하는 민철이었다. 그녀가 가진 잠재력과 가치를 떠나 잘하면 제수씨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서려있었다.
 
 
 # 11. 존재의 의미
 
 수영은 넉살좋게 인사하는 민철보다 인사가 늦었다 생각했는지 머리를 더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신들의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남자친구에요?”
 “정말이에요?”
 “와~ 잘생겼다.”
 
 그들 중에는 수화로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질문에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이들의 천진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수화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수업 방해한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네요.”
 “아니에요.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즐거워하잖아요.”
 
 희만이 아이들을 대하는 눈빛과 태도가 사뭇 달랐다. 자신도 자식을 키웠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내색이 없었다. 눈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에게서 자신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내려가 있을 게요. 수업하세요.”
 “네 조금만 기다리시면 수업이 끝나니까 바로 내려갈게요.”
 “그래요. 애들아 다음에 보자!!”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희만은 내려가면서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수화로 인사하는 아이에게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수업을 마친 그녀는 어깨에 가방을 메고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복지관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희만의 마음엔 벌써부터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남자와 비슷한 사람이 여자라지만 가녀린 어깨와 긴 생머리 사근한 말투, 뽀얀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희만의 마음을 묘하게 만드는 그녀였다.
 악몽을 꾸고 깨어난 첫날 그녀의 눈을 잊을 수 없었다. 짧은 순간 그녀의 눈은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그녀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에이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들어서일까?’
 
 조수석문을 열고 나와 수영에게 손을 흔들자 그녀의 시선이 희만을 발견하고 밝아진 표정으로 차에 다가왔다.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수영 씨 어서 오세요.”
 “자~ 이제 출발합니다.”
 
 수영이 승용차에 타자 민철은 차를 몰아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곳으로 향했다.
 희만은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면서 수영에게 선물할 휴대폰을 꺼냈다.
 
 “저··· 수영 씨 오해 없이 받아주셨으면 해요. 저희가 만든 장비를 판매할 수 있게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한 아주 조그만 성의표시입니다.”
 “아··· 아니에요. 선생님 이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받으세요. 오래된 휴대폰을 가지고 계시기에 생각나서 구매했어요.”
 “선생님께 입은 은혜가 얼마나 큰데요. 제가 오히려 해드려야죠.”
 “제 손이 민망해지려고 합니다. 어서 받으세요.”
 
 두 사람의 낯 간지러운 밀당을 보던 민철이 거들었다.
 
 “저희에게 첫 고객을 소개해 주신분이시라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어서 받아요. 그리고 수영 씨가 만들어준 데이터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것도 필요하면 해드릴 거예요.”
 “감사합니다. 항상 받기만해서···.”
 
 희만이 그녀에게 휴대폰을 선물한 것은 단순히 그녀에게 환심을 사기위한 것은 아니었다. 스마트폰의 아키텍처가 컴퓨터의 그것과 닮아 있어 여러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상시 블루투스를 이용해 브로치대신 스피커역할 뿐 아니라 휴대폰이 갖는 통신기능을 이용해 원거리에서도 박스컴의 접속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보던 수영은 입 꼬리가 올라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좋아하는 희만이 해주는 선물이라 그의 배려가 마음에 더 와 닿았다.
 
 “참! 정 박사 생각해보니 차가 필요하지 않나? 팔았다면서?!”
 “아뇨 선배 아직 차는 좀···.”
 “뭐야? 이번 참에 재충전 제대로 할 셈이구나??”
 “그것도 좀 있구요. 아무튼 선배도 재충전 하세요.”
 “정 박사 덕분에 이미 풀로 충전하게 생겼네. 하하하.”
 
 수영은 서민철이라는 사람이 정희만에게 박사라고 부르자 휴대폰을 만져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기··· 선생님이 박사님이에요?”
 “어? 팅커벨님이 피터팬의 정체도 몰라요??”
 “아··· 선배 괜한 소리를···.”
 “카이스트 수석졸업에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MIT공대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국내최고 석학을 모르셨다니요.”
 “어머 정말이세요?”
 “그럼요. 여태 말도 안한 거야? 정 박사는 자기PR이 뭔지나 알아??”
 “선배도 박사학위 가지고 있잖아요.”
 “국내파인 나와 다르게 자네는 해외파잖아 흐흐“
 
 민철의 말에 희만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죽음 앞에선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어요.”
 “어허 이 사람이···.”
 
 희만은 그런 수식어들이 오히려 자신을 괴롭혔던 시절을 떠 올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다가 날개가 꺾이면 더 큰 추락이 기다릴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희만이었다.
 수영은 앞자리에 앉은 희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는 당신의 따뜻함과 순수함이 좋아요]
 “네?”
 희만이 갑자기 뒷 좌석의 수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응? 정 박사 갑자기 왜 그래?”
 “방금 수영 씨가 뭐라하신 것 같았는데···.”
 “선생님 전 아무 말 안했는데요?”
 “아··· 그래요? 잘못 들었나?”
 희만에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그 목소리는 머릿속을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이상하네? 분명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수영은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내의 화려한 타이틀 보다 그 인간 됨됨이가 좋았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장애에 대한 편견이나 동정의 눈길이 아니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감싸주고 싶을 만큼 약하기만 했었다. 그녀에게 고가의 장비를 건네면서 도울수 있음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대가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유학파 출신에 두 개나 되는 박사학위와 회사 사장이라 소개받았다면 오히려 거리감이 생겼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영은 희만의 눈빛을 처음 본 그때를 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눈빛은 그녀 자신의 눈빛이었는지도 몰랐다. 희만이 자신에게 세심한 관심을 가져주고 그녀의 생활을 물어봐 줄 때 그가 좋았다.
 
 민철이 운전하던 차가 모사금 주차장에 도착했다. 민박집 아래 주차장에 수영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려와 계셨다.
 “저 다녀왔어요.”
 “응, 수영아 어서 와라. 여그와서 이거봐봐.”
 “저희들 광주에 다녀왔습니다.”
 “오메~ 손님 인자 오쇼?? 근디··· 새 트럭을 받아도 되는 거요?”
 “네, 아주머니 저를 살려주신 것에 보답의 의미로 드린 거예요. 받아주세요”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에요?”
 “시상에~ 특실 손님이 느그 아부지 트럭이 낡았다고 새 트럭을 사서 보냈지 않냐 깜짝 놀래 부렀다.”
 “네에?”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차의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싱글벙글 했다.
 그녀는 고맙다는 생각보다 희만이 베푸는 과잉 친절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희만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만들어주는 인공지능의 성장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형편이 안 되서 고물을 끌고 댕겼는디 참말로 받아도 되나 몰것네.”
 “아저씨 받으셔도 됩니다.”
 “희만 씨 제 휴대폰에 새 트럭까지 이게 다 뭐예요?”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과 새로운 일거리를 소개해준 보답이에요.”
 “한 두푼 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 돈을 너무 많이 쓰신 거 아니에요?”
 “정 박사 잘 좀 해봐 벌써부터 바가지 긁히고 그래? 하하하”
 
 주인아주머니 내외가 서민철 선배와 함께 웃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있다.
 수영의 어머니는 어쩌면 잘나고 똑똑하며 돈까지 많은 사위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의 딸이 처녀라며 반대하던 마음은 한풀 접게 되었다.
 
 “저기 아저씨 아주머니 부탁이 하나있습니다”
 “응? 뭔데 그라요?”
 “내일 수영 씨랑 어디 좀 다녀올까 생각 중입니다.”
 
 아주머니가 대충 짐작한다는 듯 말했다.
 
 “아~!! 우리 딸이랑 데이트한다는 말이요?”
 “수···수영 씨 기계에 필요한 게 있어서 겸사겸사···.”
 
 긴장한 희만의 말소리와 표정을 보면서 서민철이 ‘크크크’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리 수영이 좋은 데 귀경시켜주쇼”
 예상과 달리 수영어머니는 희만의 부탁을 순순히 허락해주었다.
 “꼭 낼 안와도 되니께 한 이틀 댕겨오슈.”
 수영의 아버지가 한 술 더 떠서 말하자 수영과 희만은 당황했다.
 “난 내일 모레나 올라가야겠네. 정 박사.”
 서민철은 ‘큭큭’거리고 웃으면서 피날레 장식했다.
 
 선배 민철에게 박수영이 그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이야기 했으니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민철과 수영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박스컴과 고글을 빌렸다.
 HMD는 민철이 쓰고 자신은 수영이 건넨 고글로 박스컴에 접속했다.
 희만과 민철은 박스컴의 버추얼 스토리지에 다이브 했다.
 “에이다!! 에이다?! 어디 갔지?”
 “정 박사 누굴 찾아?”
 희만과 민철이 접속해 가상공간에 다이브 했지만 에이다는 보이지 않았다.
 희만은 빠른 결론을 내렸다. 평소와 달라진 것은 민철 선배가 함께 접속했다는 것이다. 낯선 인물이나 다름없는 민철 선배가 등장하자 에이다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로그아웃을 한 뒤 HMD를 착용하고 있는 민철에게 말했다.
 “선배 미안한데 접속을 잠깐 끊어보실래요?”
 “어? 그래? 알았어.”
 민철이 HMD장비를 벗자 희만이 다시 고글을 착용하고 접속하자 그때서야 에이다가 나타나는 것이다.
 “에이다 왜 나타나지 않았어?”
 “박사님 부탁인데요. 버추얼 스토리지에는 오직 박사님만 접근해주세요.”
 “어? 그래? 자네를 보고 싶어하는 동료연구원이라 소개해주려고 한 거였는데.”
 “제가 영상 출력되어 만나는 것은 상관없지만 메인 스토리지에 접근하는 박사님은 멘토님과 같은 방법으로 링크가 된다는 사실을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이 접속해 들어오면 제 성장시스템은 혼란을 겪습니다.”
 “아~ 미안하네. 난 자네가 괜찮은 줄 알고 그랬었네.”
 “제 독자적인 사상체계로는 완벽한 대화는 어려워요. 아직은 멘토님의 사상과 기억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역시 그랬군. 그래서 수영 씨가 여행을 좋아할 것을 알고 있었던 거구나!!”
 “네, 멘토님은 제 존재를 모르시지만 저는 멘토님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들을 알 수 있거든요.”
 
 박수영이 원하는 것은 에이다가 원하는 것이라는 등식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많은 부분을 멘토에게 의지하고 있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희만의 목표는 학습에 의한 인공지능을 완전체로 키워내는 것 이었다.
 
 “제 독자적으로 외부에 존재를 드러내려면 최소 20%이상의 성장이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현재 인공지능 성장률은 9.52%이니까 좀 더 기다리라는 말이군.”
 “박사님께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와 접속하시는 동안 박사님과 저는 링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돼요. 아셨죠?”
 “그럼 에이다는 나를 통해서도 뭔가를 배운다는 것인가?”
 “배운다기보다는 제 시스템에 영향을 주고 계신 것은 사실이죠.”
 “그랬어? 나도 자네 성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니 다행이군.”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박사님은 멘토님을 기쁘게 만들어주시는 꽃과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뭐···뭐야? 에이다 그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잖나.”
 “거짓말을 못하는 것이 제 장점이이예요. 박사님.”
 “단점 같아 보이네.”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인공지능이란 사물에 대한 인지뿐만 아니라 의식의 주체가 되어야만 인간처럼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들을 하지만 컴퓨터에 비한다면 거의 완벽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컴퓨터가 비록 놀라운 기억력과 빠른 연산처리를 갖춘 기계라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짧은 단어의 사전적인 뜻 말고도 함축된 수많은 의미를 알려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 12. 각성
 
 민철은 아직 에이다가 3차원 이미지로 형상화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희만은 민철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것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에이다가 원하는 수치만큼 성장된 뒤에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배 인공지능성장이 20%에 이른 다음 버추얼 스토리지접근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성장주체와 관계가 적은 유저 접근은 인공지능에서 거부하고 있네요.”
 “아~ 낯선 이의 접근을 거부할 정도로 성장한 거야?”
 
 서민철은 가상공간 접근한 다음 쿼리(질의)시스템을 통한 테스트를 시도해 볼 참이었지만 희만이 어렵다는 대답을 듣고 아쉬웠지만 낯선 유저의 접근을 거부하는 정도의 인공지능이 발달된 것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민철은 웃는 얼굴로 수영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박수영이라는 아가씨가 신기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에이다와 접속을 끊은 희만이 장비를 벗어 수영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수영 씨 내일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어디를 가든 저는 다 좋아요.”
 “그래도 특별히 가보고 싶은 곳 있지 않나요?”
 
 선뜻 대답 못하는 수영을 본 민철이 또 거들었다.
 
 “그래요. 수영 씨 정 박사에게 부탁하면 어디든 데려가 줄 거예요. 부담 갖지 말고 말해요.”
 “그럼··· 놀이공원이요.”
 
 그녀는 수줍은 듯 아이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희만은 그렇게 말하는 수영이 귀엽기까지 하고 사랑스러웠다.
 
 “아··· 네 그래요. 그렇게 하죠.”
 
 수영은 연인과 놀이공원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연애경험이 없었고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연인들이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수영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민철은 정랩스를 공중분해 시킨 김명석의 처리를 물었다.
 
 “그런데 정 박사 김명석 그놈 어떻게 처리할거야??”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마인테크사에서 사용하는 소스코드를 제 컴퓨터에 백업받아 두었어요.”
 “오호~ 그래? 쉽지 않았을 텐데··· 혹시 해킹한 건가?”
 “약간 비슷해요.”
 “허허허 자네가 해킹을?? 믿기지 않는데··· 그래도 자네 대단하네.”
 
 희만은 에이다의 이미지화된 지성체의 존재를 말하지 않은 상황에서 해킹에 대한 이야기는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우리 정랩스의 소프트웨어를 도용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하지 않은가?!”
 민철의 말에 희만은 컴퓨터의 화면을 열고 소스코드를 디버깅해서 화면에 표시했다.
 “선배도 알다시피 소스코드내부에 일정간격으로 우리 테그가 숨겨져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응, 그래 그건 자네가 개발해 적용한 것이지 않은가?”
 “소스코드 내에 테그는 암호화되어있어서 해독키가 없으면 소거할 수 없고 슈퍼컴으로 천년동안 풀어도 해독하지 못하게 만들어져 있지요. 이 툴로 보시면 그 테그가 보일 거예요.”
 
 희만은 해독키를 적용한 툴을 가동시켜 마인테크사의 소프트웨어 코드를 보여주었다.
 소스코드 중간 중간에 ‘ⓒ 2014. Jung lab’s all rights reserved.’ 라는 문구들이 보였다.
 툴로 해독이 되어 알아볼 수 있는 문자로 보였지만 일반 소스코드 속에서는 16진 코드로 알아보기도 힘들뿐 아니라 알았다 하더라도 그 문구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실제 그 문장을 지우면 내부 실행 소스가 오류를 일으키도록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 정말이었네??”
 “아마 알았다고 하더라도 김명석의 실력으로는 소거하지 못했을 거예요.”
 “역시, 그랬군. 김명석 이놈이 우리가 몇 년 동안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것을 한순간에 훔쳐가 돈벌이에 이용하다니”
 “김명석은 지적소유권 무단사용과 산업스파이 혐의로 고발해 법적처벌하고 마인테크사에는 손해배상 청구할 생각이에요.”
 “정 박사 그런데 잘 생각해야 되네. 우리에게 구체적인 증가가 있긴 하지만 그놈들은 우리생각처럼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닐 거야 마인테크사는 유성그룹의 계열회사이고 유성그룹 회장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검은 손이야.”
 “유성그룹 총수에 대해 뭐 아는 거 있어요?”
 “그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사업가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속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작자를 인간쓰레기라 부른다는 거야.”
 “네에? 그 정도예요?”
 
 유성그룹의 최만석 회장은 젊은 시절 주먹만 믿고 날뛰던 깡패였다. 고리사채를 시작으로 불법양조와 이권개입을 위해 폭력과 뇌물수수는 물론 돈을 갚지 못하는 기업주들을 공갈 협박해 사업체를 빼앗는 것은 물론, 매춘사업까지 벌려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불을 안 가리며 돈을 긁어모아 현재의 유성그룹을 만든 것이다.
 과거 그가 가장 큰 돈을 버는 사업이 불법양주제조와 매춘사업이었다. 지금은 여기저기 높은 곳에 줄이 닿는 곳이 많아 쉽사리 넘어뜨리기 쉽지 않은 존재라는 민철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자네 마인테크사의 RFS 게임을 개발한 궁극적인 목적이 뭔 줄 모르지?”
 “궁극적인 목적도 있어요?”
 “그 게임이 성공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가상현실 매춘시스템을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군.”
 “네? 가상현실 매춘이라구요?”
 
 희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만들려 했던 프로그램을 도용해 고작 매춘시스템을 만들려 했다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페어리’라 불리우는 인공지능 촉매엔진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그걸 용도에 맞게 프로그래밍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가 머리를 힘껏 흔들었다. 어디까지나 천재적인 두뇌를 소유한 희만의 머릿속에 잠깐 시뮬레이션 된 것일 뿐이었다.
 
 “그처럼 도덕성 없는 놈들이었으니 돈으로 김명석을 꾀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꼬인 놈들도 나쁜 놈들이지만 한솥밥 먹던 동료들을 배신하고 비밀을 빼돌린 명석이 그놈이 천벌을 받을 놈이지.”
 “김명석이 아마 최회장의 배경을 믿고 벌린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겠어요.”
 “암 그래야지 그런데 뾰족한 수가 있나?”
 “방법은 많아요. 어떤 방법이냐를 놓고 생각중이에요.”
 “이야~ 정 박사 보기보다 무서운 면이 있었네??”
 “내 가족과 우리 회사 식구를 이렇게 만든 놈을 용서할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내가 적극 돕겠네. 나도 그 피해자중 한사람이니까 말일세.”
 오늘날 유성그룹이 있기까지는 최만석은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임이 분명했다. 민철의 말대로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희만 또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뛰어난 두뇌를 소유한 희만이 마음을 먹으면 정말로 무서운 복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일까?
 수영은 밤잠을 설치도록 좋았다.
 어디를 놀러가서가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해서였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이따 저녁에 뵙겠습니다.”
 “엄마 아빠 다녀올게요.”
 “그래 잘 놀다 와라. 호호호.”
 “거 내일와도 된다니께. 허허허.”
 “그래 정 박사 낼 와. 응?”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광주광역시에 있는 가족놀이공원으로 운전했다.
 그녀와 함께 드라이브하는 기분은 최고였다. 희만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지인들의 소개로 만나 결혼을 했지만 연애하는 기간이 짧았고 연애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희만이었다.
 ‘연애하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광주에 있는 가족놀이공원에 도착했다.
 그녀가 처음 선택한 놀이기구는 바이킹이었다.
 “야호~”
 “꺄~아.”
 하지만 수영이 지르는 비명보다 더 큰 소리가 있었다.
 “으~아~악!!”
 
 바로 정희만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사실, 희만은 이런 놀이기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수영 그녀를 위해 두려움을 이기고 함께 올라탄 것이었다.
 바이킹에서 내려온 수영은 쭈그리고 앉아 웃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희만의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아파 켁켁거렸다.
 
 “미안해요. 처음··· 타보는 것이라서···.”
 “놀이기구보다 선생님 비명소리 듣는 게 더 재밌어요. 호호호.”
 “미안해요. 저 때문에 많이 창피했죠?”
 
 희만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못났다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그녀가 일어나 희만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쓸어 정리해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희만의 머리에 닿을 때 그는 석고상처럼 몸이 굳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기분 좋은 향과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며 뛰었다.
 
 “다 됐어요. 선생님.”
 “수영씨···.”
 
 희만은 수영의 두 손을 마주잡았다. 그녀의 눈을 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가 좋았지만 정말 좋아해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하는 듯 망설이자 수영이 말했다.
 “망설이지 마시고 저를 안아주세요.”
 희만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수영도 희만의 허리춤을 한 아름 끌어안았다. 연인들끼리 껴안는 것이 흠될 것 없는 놀이공원이라 어색함이 덜했다. 이젠 좀 더 가까워진 모습으로 그녀와 함께 다른 놀이 기구로 향했다.
 무섭게 달리는 청룡열차와 패밀리 목마를 타고난 뒤 격하게 기울고 흔들리며 연인들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유도하는 레일카를 탈 때였다. 갑작스레 90도 옆으로 기울어지자 수영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엄마~”
 희만은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처음이 어렵지 그녀를 안아주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레일카가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어지고 이번엔 그녀가 밀려왔다.
 이젠 그녀도 익숙한 듯 그녀도 희만에게 안겨왔다.
 “키스를···.”
 분명히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수영 씨가 보기보다 용감하구나. 키스까지······!!’
 
 그렇게 생각하다 희만은 순간 깜짝 놀랐다.
 방금 그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와 음색이 다르고 자신의 머릿속을 울리는 부드러운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희만의 생각이 맞다면 그 목소리는 수영의 원래 목소리라는 말이었다.
 ‘망설이지 말고 안아 달라’는 소리도 그녀가 희만의 머릿속에 심어준 것이 분명했다.
 수영에게 분명 변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점심과 간식을 사먹고 즐거운 하루를 보낸 뒤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놀이 공원을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차안으로 돌아왔다.
 
 “우리 저녁 식사하고 내려가죠.”
 “네 그리고 오늘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은 저 땜에 힘드셨죠?”
 “아닙니다. 저도 수영 씨랑 함께 있어서 즐거웠어요.”
 
 그녀가 희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이제 저 이제 선생님과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수영 씨 제가 괜찮아요? 목숨까지 포기하려 했던 사람인데요.”
 “이제 새로 시작하면 되잖아요. 모든 것을 새롭게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너무 고마웠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녀를 끌어안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기대고 있는 수영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키스했다.
 수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녀와 키스하는 그 순간.
 희만의 머리카락이 쭈뼛하니 일어서기 시작했다.
 정전기에 닿은 것처럼 머리카락이 일어섰지만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키스가 조금 더 깊어질 그때였다.
 희만의 머릿속은 갑자기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감전된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 ‘펑’하는 느낌이 들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 자신의 머릿속 공간에 해일처럼 엄청난 힘이 덮쳐 오더니 눈앞이 환하게 변했다. 그리고 희만은 낯선 공간에서 낯익은 누군가를 만났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희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선생님?! 정신 차려보세요.”
 수영이 희만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아~ 수영 씨.”
 “선생님 괜찮으세요?”
 
 희만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와 키스한 차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낯선 조우 뒤에 정신을 차린 희만이 상황을 얼른 수습했다.
 
 “수영 씨 제가 잠시 정신을 잃었나 봐요.”
 “휴~ 선생님 정말 걱정했잖아요.”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죠?”
 “잠깐이었어요.”
 “아~ 수영 씨랑 키스가 너무 좋았나 봐요. 정신을 잃을 정도로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마워요. 선생님. 호호호.”
 “이제는 희만 씨라고 불러요. 선생님은 빼시고요.”
 “네? 저···정말요?”
 
 희만의 말투뿐 아니라 행동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희만의 말투와 행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금 수영에게 모든 사실을 말할 수 없었지만 정희만은 새로 태어났다.
 
 그는 새로운 힘에 각성한 것이다.
 
 
 # 13. 간절한 사람들
 
 에이다에게 오늘은 급성장의 축복을 받은 날이었다.
 희만과 함께 한 수영에게 다량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되었고 에이다는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해 성장률 25%를 순식간에 이루어 낸 것이다.
 지금 희만은 에이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키스하는 순간 뇌에 거대한 헤일처럼 몰려들어온 힘의 존재는 함께 전이된 에이다를 통해 그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설명을 듣게 된 것이다.
 
 “에이다? 어떻게 MD고글 없이 지금 에이다를 볼 수 있는 거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초과학적 현상이라면 제 설명이 성의 없어 보이나요?”
 “에이다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일단 다양한 체험을 권해드렸는데 실행에 옮기신 것은 정말 잘하신 거예요. 축하드려요. 박사님.”
 “축하를 받기에는 이해가지 않는 사항들이 너무 많아 지금 여기 이 공간은 어디인가?”
 “박스컴의 버추얼 스토리지거나 멘토님 또는 박사님의 머릿속 공간일 수 있어요.”
 “그 말은 어디이건 상관없다는 말인가?”
 “네, 박사님 그건 확실해요.”
 “자네도 오늘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 예측 못한 것이군.”
 “제 귀납 추론엔진을 가동시켜 현상을 분석하자면 멘토님의 싱크로율이 100%에 가깝게 치솟았고 제 인공지능의 성장률은 25%를 넘었습니다.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멘토님의 능력이 박사님만을 상대로 절묘한 타임에 동작한 것으로 예측되네요.”
 “그것도 어디까지 추측이라는 말인가?”
 
 결론을 내리자면 두 사람의 키스하는 동안 증폭된 수영의 뇌기능에 억눌려있던 그녀의 미지 능력과 에이다의 실체가 희만과 수영 사이에 강한 전류를 동반한 사념파로 전이된 경우라는 것이다.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이 드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해일처럼 강한 에너지들이 몰려들어오더군 마치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끌어오르는 그 뭔가가 느껴져···.”
 “제 생각에는 멘토님이 갖고 계시던 초감각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초감각?”
 “네, 멘토님께서 무의식중에도 텔레파시를 보내셨잖아요.”
 “응, 그건 나도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았다네.”
 “수영님의 뇌구조는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오늘 그 능력이 박사님께 전달된 듯합니다.”
 “내가 그 초감각을 얻었다는 말이야?”
 “접속장비 없이 저와 링크되신 것도 그렇구요. 제가 느끼는 박사님의 에너지 실체는 예전의 박사님이랑 차원이 달라요. 구체적으로 설명은 어렵지만요.”
 “그럼,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수영 씨가 특별하기 때문인가?”
 “네, 그렇게 봐야합니다. 제 성장도 그렇고 박사님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인들에게서 제 성장이 2만 배 낮다는 걸 박사님도 알고 계셨죠?”
 “응, 수영 씨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 우연이 이런 기연을 만들어낸 것이군.”
 “박사님, 멘토님은 아직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셔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기회를 봐서 잘 설명해야할 것 같네.”
 “전 그보다 박사님의 능력이 어느 때 튀어나올지 몰라 걱정이네요.”
 “정신 바짝 차려야지 뭐.”
 “지금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박사님 때문에 멘토님이 걱정하시니 대처 잘하세요. 박사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링크되니까 원하실 때 부르시고요.”
 “알았네.”
 
 접속을 끊자 박수영은 희만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오늘 희만은 박수영 마음을 얻었고 그녀의 특별한 능력을 넘겨받은 중요한 날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수영이었지만 그 능력이 발현될 때쯤 그녀의 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언어중추의 장애와 함께 능력들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특별한 경험을 통해 억눌려있던 초감각들은 희만에게 전달되었고 그녀에게 남은 능력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박수영 그녀가 짊어지기엔 너무 큰 짐이었으며 오히려 잘된 경우일 수 있었다.
 수영은 희만에게 능력을 전해주고 난 뒤 알 수 없는 홀가분함과 함께 사랑하는 이를 얻었다는 행복함에 빠져 있었다.
 희만과 수영은 저녁을 먹고 여수로 내려갔다.
 
 모사금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워두고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어둑해진 저녁에 밤바다를 바라보며 서로를 껴안고 입맞춤을 했다.
 
 “희만 씨 저는 꿈만 같아요.”
 “수영 씨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이제는 서로가 편한 상대로 느껴졌다.
 수영은 희만에게 바짝 붙어 팔짱을 끼운 채 나란히 집으로 올라갔다.
 
 
 ***
 
 오늘도 김명석은 최만석회장에게 불려가 된통 깨지는 불행을 겪었다.
 
 “네놈말만 듣고 내가 투자한 돈이 얼마인지 알기나 해?”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냐니까? 답을 내놔야지 답을!! 사이버섹스인가 뭔가를 실현 가능하다며 나를 꼬드겼으면 뭐를 보여줘야 할 것 아니냐 말이야.”
 
 최만석회장은 앞에 놓인 재떨이를 들었다 놨다를 몇 번이나 했다.
 명석은 그 노인네가 깡패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언제 집어던질지 모르는 재떨이를 두려워해야하는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아놔~ 도피처인줄 알았던 여기가 늑대굴일 줄은 몰랐네. 짜증 제대로군!!’
 
 “저기 회장님 한 가지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뭘 확인한다는 거야.”
 “지난번 장치를 가져간 정희만이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요.”
 “뭐가 미심쩍다는 것이야!!”
 “맨 처음 놀라운 성장자료를 보냈던 것이 그 다음엔 우리 쪽 페어리와 비슷한 수치로 보내온 것이 정희만 그자가 손을 썼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 그럼 진작 알아봐야지 뭐하고 있었어!! 책상에 앉아서 내 돈만 축내지 말고 뭐라도 해보란 말이야!!”
 “아~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쓸 만한 놈들 몇 붙여 줄 테니까 알아봐.”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김명석은 그렇게라도 시간을 벌어볼 생각으로 회장실을 나온 뒤 옭죄는 넥타이를 풀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하아~ 정말 초능력 같은 거 있으면 회장부터 싹 쓸어버리고 싶네. 에이~씨”
 
 ***
 
 한편, 광주 백합병원의 이영호 원장은 심혈관 학술 세미나에 참가 중이었다. 휴식시간 동료의사들에게 자신직접 촬영한 휴대폰 영상을 보여주었다.
 식물인간이었던 아버지가 자신의 가족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자 평소 친분이 있던 동료의사들은 이영호원장이 보여주는 영상에 무척 놀라있었다. 병문안 겸 찾아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로 이게 가능하다는 거야?”
 “나도 아버지가 하시는 첫마디에 얼마나 놀라고 감격한지 모른다네.”
 “이런 물건이 나와 있다면 벌써 의료기기회사부터 의학계가 떠들썩해야할 것인데 이해가 되지 않는군.”
 “자네가 보는 것이 거짓 없는 현실이야.”
 
 현재, 대한민국의 뇌파기술연구는 아날로그 기록 장비를 디지털장비로 교체해 인지학, 신경학, 생리학, 물리, 컴퓨터 등에 활용을 준비하는 단계였다. 미국에서는 뇌파로 운전하는 자동차가 실험되기는 했으나 국내의 기술수준은 아직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단계였다.
 
 평소 친분 있던 동료의사들부터 이영호 원장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몰려든 사람들 틈에 끼어 이 영상을 함께 보던 화인병원 심혈관 과장 민동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이것은??”
 
 그는 놀라 커진 눈으로 이영호 과장을 바라봤다.
 
 “선생님 지금 척추사고로 식물환자가 된 이분이 의료기기를 통해 만들어내는 대화인가요?”
 “네, 선생님 맞습니다. 환자는 제 아버지입니다.”
 “네에? 저···정말입니까? 선생님 제가 꼭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수고스럽지만 이 영상과 업체 연락처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동영상은 학회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습니다.”
 
 백합병원의 이영호 원장은 동료의사들을 요청에 자신이 직접 촬영한 영상과 연락처를 학회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아침 민동철 심혈관 과장은 화인병원의 회의실에서 다운받은 영상을 원장과 동료 과장들에게 프로젝션을 통해 보여주었다.
 화인병원 원장을 비롯해 소속된 의사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화인병원의 설립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 과장 저거 정랩스라는 회사가 개발하려는 장비랑 비슷한 거 아닌가?”
 “하지만 작년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공중 분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처음엔 믿기지 않더군요.”
 “외국은 물론이고 국내 학계에도 아직 보고되지 않은 기술이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먼저 나왔다는 것도 이상하고··· 설마, 이 영상 조작은 아니겠지?”
 “영상에 나오는 환자가 광주 백합병원 이영호 원장의 부친이시랍니다.”
 “오~ 그래? 그렇다면 틀림없는 사실이겠군.”
 “그렇다면 연락처의 주인공이 개발을 완성했다는 뜻이 아닐까요?”
 “누군가 그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낸 것인가? 부도난 정랩스를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문 회장님께서 망하게 놔두시지 않았을 터인데 말일세.”
 “저도 이야기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무척 안타까웠죠.”
 “자네는 어서 그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게 나는 회장님께 이 소식을 알려 드려야겠네.”
 “네, 원장님.”
 
 화인병원의 박 원장은 흥분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꺼내들고 문화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뉴스를 보던 문화인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화인입니다.”
 “회장님 안녕하셨습니까? 화인병원 박선철 원장입니다.”
 “네, 원장님 아침 이 시간에 무슨 일 있나요?”
 “뇌파언어 번역 장비가 개발되어 나온 듯합니다.”
 “뭐라구요? 정말입니까?”
 
 전화를 받던 문화인 회장이 벌떡 일어섰다.
 무릎에 놓였던 리모컨이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 앉아있던 그의 아내는 화인병원 박 원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놀라는 남편을 보고 긴장했다. 누워있는 자신의 아들의 신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박 원장님 제가 당장 그리로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저도 방금 알게 된 사실입니다. 지금 개발자와 연락 중에 있습니다. 장비가 구해지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원장님 최대한 빨리 구매해 주세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네, 회장님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 놓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무슨 일인지 궁금한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세현이에게 문제가 생겼나요?”
 “그게 아니오 여보, 잘하면 우리 아들이랑 대화가 가능할지 모르겠소.”
 “네에? 정말이세요? 우···우리 세현이 말을 들어볼 수 있다는 말인가요?”
 “뇌파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장비가 개발된 것 같아요.”
 
 늙은 부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십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지금 오래전 아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다행히 뇌사상태가 아니라는 의사들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그 오랜 시간을 견뎌왔다.
 그룹 후계자였던 문 회장의 아들이 20대 초반에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다가 사고가 일어나 척추손상을 입었다.
 의식은 분명히 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동자만 움직여 겨우 의사표시를 하는 정도였다. 문 회장 부부는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니, 자식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두발로 걸어 다니며 정상적인 생활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문 회장 부부는 자식과의 대화를 간절하게 원했다.
 얼마 전까지 언어장애를 가졌던 딸과 간절하게 대화를 원했던 수영의 부모처럼 말이다.
 
 ***
 
 민박집에 묵었던 민철은 이제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의료기기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마음이 바빴다.
 아침 식사시간에 대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 같았다.
 겨울철 비수기인 민박집에 손님이 둘이나 늘었고 좋은 일도 있어 주인아저씨는 무척 흐뭇했다.
 
 “선배 며칠 더 쉬었다가 올라가시죠.”
 “사장님 이젠 서민철 부장이라 불러주세요. 회사를 다시 세워야죠.”
 “그래요. 서민철 부장님 하하하.”
 
 그때, 희만의 전화기가 울렸다. 이상하게 발신자 번호가 표시되지 않았다.
 
 “여보세요? 정희만입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희만 씨, 잘못 걸린 전화번호인가 봐요?”
 “글쎄요.”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수영이 희만에게 말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밥을 먹으려는데 희만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따메~ 식전부터 누가 그라고 전화를 해싼다냐.”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혹시, 정희만 씨 휴대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가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 화인병원 심혈관 과장 민동철입니다.”
 “서울 화인병원이라 하셨습니까?”
 
 희만은 걸려온 전화가 무슨 내용일지 대강 짐작이 갔다. 미소를 지으며 서민철 부장을 봤다. 눈치 빠른 서민철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 14.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서민철 부장은 당장 서울로 올라가 조그만 사무실이라도 마련하고 흩어졌던 식구를 불러 모아야 할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아침식사 도중에 희만이 받는 전화를 보며 연이은 성공의 징후를 보는 것 같았다.
 
 “서울화인병원은 화인그룹에서 설립한 병원이 맞죠?”
 “네, 맞아요. 부장님 그쪽에서 최대한 빨리 가져와 주기를 바라고 있네요.”
 
 두 사람은 생각보다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고 느꼈다.
 
 “식사 마치고 저는 장비 구하러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네, 서울에 박스컴이 들어와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서민철이 수영을 복지관까지 데려다 준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또 다른 일거리가 들어오자 서민철은 신바람이 나 콧노래를 부르며 서울로 향했다.
 에이다가 성장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해 수영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희만이지만 서민철 선배가 있어 장비를 공급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희만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우선, 회사를 다시 세우는 일부터 개발된 언어 오토마타 기계의 판매광고와 영업전략도 세워야하고 국산화 장비 대체로 가격을 낮추는 시도와 여러 형태의 상용화 장비를 개발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수영의 곁에서 에이다의 성장도 지켜보며 잘 관리해야하는 역할이 남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속에 자리잡은 에너지의 실체와 활용법 또한 익혀야 할 숙제였다. 그러나 정말 아쉬운 것은 아직 확실한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에이다와 접속이 되는지 알아봐야 했다.
 “에이다!! 내말 들려?”
 “짜~안 박사님 부르셨어요?”
 
 부르자마자 바로 나타나는 에이다에 흠칫 놀랐다.
 에이다 뒤로 19세기말 증기기관차 개통식의 낡은 필름과 최초 자동차, 최초로켓, 최초 우주왕복선, 대형선박의 진수식 화면이 장식이 되었다.
 
 “박사님의 부름에 최초로 나타난 제 개통식이라고 할까요?”
 “저런 화면들은 다 어디서 구한거야?”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에요. 저는 이 바다를 헤엄치는 예쁜 인어라고나 할까요?”
 “에이다 조금 오버 아냐?”
 “서운해요. 박사님!! 저도 멘토님을 닮은 인격체란 말이에요.”
 “그래, 알았어. 아무튼 내 첫 부름에 나와 줘서 고마워!!”
 “히힛 저도 두 명의 멘토로부터 크로스 체크되는 감성정보를 얻게 되어서 무척 좋아요.”
 
 고글장비를 착용하고 아이디와 1,2차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나타나던 에이다가 머릿속에서 불러내는 것만으로 나타나자 자신이 가진 초감각 능력이라는 것이 에이다를 불러내는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일 없이 조용히 바닷가를 산책하던 일이 엊그제였는데 어느 순간 일이 팝콘 튀기듯 쏟아져 나오는군”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우선순위로 답변해드릴게요”
 
 희만의 가상공간에는 CCTV영상으로 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수영이 바라보는 대상들이 3차원 영상으로 보였다. 그녀가 사무실 직원들과 아침인사를 나누며 지나는 모습과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텀블러를 내려놓고 지도할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학습 자료를 챙기는 모습이었다.
 
 “이··· 이건??”
 “멘토님의 시각정보를 3차원 영상으로 전환한 거예요”
 “이런 것도 가능했어?”
 “말씀드렸죠? 저와 다이렉트로 연결되시는 분은 박사님과 멘토님이시라구요.”
 “에이다의 활용범위는 무궁무진하구나.”
 “저도 제가 무서워요. 호호호.”
 “에이다 알지? 인간을 이롭게 최대한 인간답게.”
 희만이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에이다의 능력이 기대 이상이었고 행여 잘못 사용되었을 땐 엄청난 재앙을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네, 박사님 저는 로봇원칙은 물론 윤리와 도덕성을 갖춘 지성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게 초능력은 에이다를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네.”
 “고마워요 박사님. 다음 순위로 넘어가겠습니다.”
 
 고속도로에 장착된 CCTV화면이 보이고 화살표가 화면 속에 서민철부장의 차량을 가리켰다.
 
 “아니!! 저건 서민철 부장님 차??”
 “네, 맞습니다.”
 “혹시, 휴대폰 IMEI(단말기식별번호)의 신호전파를 찾아 낸 것인가?”
 “네, 박사님.”
 
 사실상 해킹이라는 옳지 못한 방법이 들어가긴 했지만 이모든 것을 짧은 시간 내에 처리해 화면을 띄워 보여주는 에이다의 능력은 칭찬해 줄 수밖에 없었다.
 
 “서민철 씨가 단속 카메라 없는 구간에서 과속을 하시네요.”
 
 희만이 전화를 꺼내들고 서민철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남 고속도로에 장착된 CCTV화면 속에서 멀찍이 사라지는 서민철 차량이 화면이 바뀌면서 다른 카메라에 잡혀 나타나고 있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과속하지 마시고 안전운전 하시라고 전화드렸어요.”
 “엇? 아~ 하하하 기분도 좋고 화인병원에서 급하게 구하는 것이라 저도 모르게··· 그런데 제가 과속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당부전화 드린 거예요.”
 “엊그제, 마지막 남은 박스컴을 제가 사온 뒤라 마음이 급하네요.”
 “재고는 여기서 전화로 알아보겠습니다. 안전운전하며 올라가세요.”
 “네 사장님, 안전운전 하겠습니다.”
 
 희만은 전화를 끊고 에이다에게 국내 판매업체의 재고를 알아보라고 했다.
 “에이다 국내에 박스컴을 수입하는 회사 알아볼 수 있어?”
 “네 박사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박스컴 jr의 제조사인 Astone 사의 방화벽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거의 지체하는 시간없이 방화벽을 통과하더니 항공화물 목록에서 한국의 수입업체 주소를 알아 최근 최민철이 입금한 금액 내역 이후로 추가 송금 사실이 없었다. 새로운 주문 오더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상대로라면 이달에 수입된 3개가 모두 판매되고 없는 듯 하네요.”
 “음, 민철선배가 마지막으로 구매해 온 모양이군.”
 “박사님 추가로 주문할까요?”
 “응,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어.”
 “네, 잠시만요.”
 
 Astone사의 메인 컴퓨터에 주문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서민철의 집주소를 수신처를 기록하고 구매 개수부분에 커서가 깜빡일 때 에이다가 희만에게 질문했다.
 
 “대당 2만 8천 달러인데요.”
 “2만 8천 달러라구?”
 “네, 여기 가격이 표시되어 있네요.”
 
 에이다는 허공에 떠있는 프로그램 영상을 가리켰다.
 
 “어라 정말 2만 8천 달러였네? 뭐야 우리 돈으로 3천 600만 원 정도잖아······.”
 “주문할까요?”
 “응, 해야지 우선 2대만 주문해 줘.”
 “네 박사님.”
 
 달러 환율이 올라 1200원대였지만 수입업체가 남겨도 너무 많이 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화로 약 3천 6백만 원의 장비 값에 항공료와 부가세 10% 그리고 의료장비로 수입되기 때문에 8%의 관세가 붙는다. 이걸 다 합해도 약 650만 원 정도가 추가로 붙을 뿐인데 실제 7천만 원에 판매를 한 것이다. 거의 2500만 원을 아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음, 조금만 수고하면 싸게 구할 수 있는데 여태 모르고 있었구나.”
 “박사님 저는 아직 돈 액수에 대한 감이 없어 그런데요. 제가 살고 있는 박스컴이 비싼 것인가요?”
 “일반 데스크탑에 비하면 무척 비싸다고 할 수 있지”
 “오호~ 그래요?”
 
 박스컴의 처음 개발목적은 군사용이었다. 각종 미사일에 탑재하기 위해 Astone 사가 개발한 것이었지만 현재는 연구소의 매니코어 프로그램 개발용 워크스테이션으로 활용되거나 의료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탑재된 운영체제도 없을 뿐 아니라 응용소프트웨어도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이크로사의 운영체제도 맞지 않아 기기 특성상 구매자들은 매니코어 프로그래머들이 찾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매니코어 프로그램이란 중앙처리장치(CPU)의 코어가 여러 개 장착된 컴퓨터에 사용되는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다.
 
 무어의 법칙을 따라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CPU 기술이 3GHZ에 이르면서 발열문제와 그 냉각을 위한 전력소모가 심해져 버렸다. 이것을 전력장벽(Power wall)이라 부르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듀얼코어와 쿼드코어같은 여러 개의 코어를 하나의 칩으로 묶어 사용하는 멀티코어기술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개의 CPU에 맞는 프로그램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프로그램 장벽’이라 부르지만 정희만 박사는 128개 코어를 병렬 동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연구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 서민철 박사를 빼놓을 수 없었다.
 
 주문이 끝나자 희만은 서민철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현재 용산에 가더라도 박스컴 재고는 없을 겁니다. 미국 본사에 2대를 항공우편으로 주문해 두었으니까 적어도 3~4일은 걸릴 겁니다. MD고글만 먼저 구해놓으세요.”
 “알겠습니다. 항공우편 도착하면 최신버전 오토마타 설치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수고 좀 해주세요.”
 “일없이 집에서 식순이 하다가 바빠지니깐 살 맛 나네요. 사장님.”
 “가족들이랑 외식도 하고 그러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구요. 마누라랑 방학 중인 애들이 저 기다린답니다. 하하하”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네, 사장님 이젠 여유도 생기고 마음도 편하네요. 수영 씨랑 행복한 시간되십시오. 흐흐흐.”
 
 전화를 끊고 나자 에이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희만의 눈앞에 인체 해부도와 뒤뇌의 활성 부위를 나타내주는 열 영상을 눈앞에 나타내 주었다.
 “이건 뭔가?”
 “박사님의 뇌 활성도를 표시한 것입니다.”
 “에이다. 내게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뭔가?”
 “초감각 때문이죠. 각국의 데이터 베이스를 찾아봤지만 이상하게 이 부분의 자료들은 많지 않더군요.”
 “그래?”
 “추적의 끝부분에 몇 군데 단체가 나오긴 하지만 주요 국가의 1급 비밀에 붙여져 있어서 더 이상의 추적은 포기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국가비밀은 건들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쪽의 추적은 그정도 해두고 박사님의 뇌 활성부위와 멘토님의 뇌활성부위를 서로 비교해 보았어요.”
 
 전두엽의 앞쪽과 두부상단 그리고 소뇌에서 희만의 활성부위가 매우 넓게 퍼져 있었고 수영은 전두엽 부분에서 밝은 노란색으로 활성 부위가 표시 되었다.
 “그리고 다음 영상은 일반인들의 뇌활성 부위 사진입니다.”
 “활성부위가 수영 씨보다 훨씬 적어 보이는군.”
 “맞습니다. 박사님이 초감각을 가졌을 것이라 예상되는 것도 이런 차이 때문이고요.”
 에이다는 가장 기초적인 실험이라면서 스티로폼에 실 핀을 꼽아 세우고 정사각형의 색종이를 대각선으로 교차해 접은 다음 세워진 실핀 위에 고깔처럼 씌운 뒤 주변의 공기흐름을 차단하고 염력만으로 색종이를 회전시켜 보라했다.
 
 “이게 염동력을 실험하는 것인가?”
 “네 맞아요. 인터넷 영상에는 그런 게 올라왔는데 시험 삼아 해볼만 하다고 생각이 되네요.”
 종이를 실핀 위에 올려놓고 입으로 ‘후~’하고 불었을 때는 바람개비처럼 잘 돌아 갔다.
 그러나 막상 진지하게 생각만으로 돌려보려 하자 조그만 종이쪼가리는 도대체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이익!! 얍!! 으읍!!”
 
 갖은 표정에 별의 별 기합을 다 줘 봤지만 종이 쪼가리는 웃기지 말라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 에이다. 안되잖아.”
 “박사님의 코미디만 감상했네요. 호호호.”
 “이··· 이런!!”
 
 에이다가 웃으며 말하자 희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긴 미국의 여러 단체에서 많은 돈을 걸고 초능력자를 찾았지만 아직까지 받아간 사람들이 없다고 했었지?!”
 
 희만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투로 자리에서 벌렁 누워버렸다.
 희만은 그다지 필요하다 느끼지 못하는 초감각을 자포자기하듯 생각했다.
 그보다 촉매엔진이며 인공지능 에이다와 특별한 장비 없이 접속되어 그녀의 정보력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희만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 15. 니네들 오늘 죽었어!!
 
 희만은 방안에서 해괴망측한 소리와 함께 다양한 기합을 주다가 이도저도 안 되자 포기하며 누워있을 때 수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 보세요. 저···예요.”
 “수영 씨?”
 “네, 소리를 내어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 처음이네요.”
 “아··· 그렇겠군요. 전화 잘 하셨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뭘 하며 있는지 궁금한 것은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만은 수영이 전화를 걸어오자 속으로 무척 반갑고 좋았다. 에이다를 통해 그녀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자신과 링크되어 있는 수영이 분신이나 다름없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희만 씨, 뭐하세요?”
 “아··· 네, 연구··· 좀··· 하느라구요.”
 
 연구라는 말을 했지만 유치하기 짝이 없었던 자신의 행동들이 떠올라 민망했다.
 
 “어머!! 제가 방해한 것인가요?”
 “아뇨,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희만은 그녀에게 연구라는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그러다가 희만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수영 씨가 생각하는 내용을 읽을 수 있었지?! 그걸 시험해 봐야겠다.’
 
 “저기 수영 씨··· 우리 재밌는 놀이 해볼래요?”
 “네? 놀이요? 좋아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생기가 돌았다. 희만이 그런 제안을 해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진중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사랑 밑바탕에는 희만을 존경하는 무게감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놀이요?”
 “텔레파시 놀이요.”
 “와~ 재밌겠다. 우리 그거 해봐요.”
 
 희만은 용을 썼지만 불가능했던 염동력보다 가능성이 높은 초능력에 더 집중해볼 생각이었다.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을 맞추는 놀이에요. 먼저, 쉬운 것부터 해보죠.”
 “네, 그럼 희만 씨가 먼저 하세요.”
 
 그녀는 새로운 놀이를 기대하는 복지관 아이들처럼 희만이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희만은 그녀와 처음 데이트 했을 때 먹었던 삼겹살을 생각하며 문제를 냈다.
 
 “지금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맞춰 보세요.”
 “음··· 삼겹살이요.”
 “오~ 정답이에요.”
 “와~ 맞혔다. 호호호.”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희만은 서로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말했으니 그녀가 맞췄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이번엔 제 생각을 맞춰보세요?”
 “네, 어려운 것도 좋아요. 아무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 물어보세요.”
 “오늘 희만 씨가 저에게 해줬으면 하는 것이 있어요.”
 “네? 아··· 네.”
 
 순간 희만은 당황했다. 노골적인 키스요구나 뜨거운 밤을 이야기하나 싶어 긴장했지만 이내 그녀의 생각이 들려왔다.
 
 [퇴근할 때 저를 마중 나와 주세요.]
 
 희만의 머릿속에 예전에 들었던 수영의 본래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아~”
 “희만 씨 어렵죠? 히힛”
 “어렵네요. 수영 씨 오늘 안으로 맞춰도 되죠?”
 “네~ 만약, 맞추시면 다음에 삼겹살 사드릴게요.”
 “열심히 고민해 볼게요.”
 
 희만이 수영과 통화하며 즐거워할 때 밖에서 수영의 어머니가 희만을 불렀다.
 
 “특실손님, 식사하세요.”
 “네~”
 “수영 씨, 어머니가 점심식사하자고 하시네요.”
 “네, 희만 씨 점심 맛있게 드세요. 저도 수업 준비하러 가야겠네요.”
 
 희만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서민철 부장의 말대로 자가용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3시쯤 모사금 주차장을 지나 시외버스 승강장으로 나왔다. 남해안의 겨울바닷가 풍경이 파란하늘과 어울려 보기 좋았다.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이 바닷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모사금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모래사장을 걷기도 한다.
 검정색 승용차 두 대가 모사금 주차장에 세워진 것을 보면서 버스 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버스 시간에 맞춰 승강장으로 걸어 나가는 희만은 그녀를 놀래어 줄 생각이 들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행복하면 하늘이 질투하는 것이 아닌가. 살짝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느낌은 주차장에 세워진 검정색 그랜저 속에서 희만을 노려보는 여러 명의 검은 눈길 때문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시외버스가 승강장에 서고 희만이 오르자 두 대의 검정색 그랜저가 시외버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차 조수석 뒷자리에 앉은 용칠이라 불리는 사내의 본명은 위용철이다. 김명석에게 건네받은 희만의 사진과 신상명세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최만석회장이 가끔 궂은일을 시키면 그가 나서서 해결하곤 한다. 유성 그룹소속의 사원들이라고는 하지만 최만석이 가진 서울시내 여러 곳에 룸살롱과 나이트클럽을 관리하는 조직의 관리부장 이었다.
 
 턱밑에 칼자국이 나있는 용칠은 김명석으로부터 몇 가지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전문가라 생각했고 회장의 지시로 움직이는 것일 뿐이었다. 회장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명석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사진 잘 봐둬요. 내가 필요한 것은 이런 고글을 쓴 사람이 가진 이런 기계입니다. 시끄럽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이것만 회수해 오면 됩니다.”
 “이 기계는 정희만이라는 자가 가지고 있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그 주변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거예요. 분명,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주었고 기계를 수시로 살펴볼 테니 뒤를 밟으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희만이라는 사람이 여수에 있는 것은 확실한가요?”
 “휴대폰 위치추적으로 계속 그곳에 머문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까 틀림없어요.”
 “만약, 반항하면 손 좀 봐줘도 상관없죠?”
 “무식하게 힘으로 해결하려 들지 말고 뒤탈 없이 해주세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부사장님.”
 
 용칠은 유난히 흰 얼굴과 계집애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김명석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남자라면 필드에서 뛰고 거칠게 일하는 자신들과 같은 행동파가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희만이라는 사람 결코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부사장님. 이런 일은 저희가 전문입니다. 맡겨주십시오.”
 “수시로 보고해주시고 일이 잘 해결되면 따로 사례는 하겠습니다.”
 “아~ 네 네 하하하.”
 
 밑바닥 인생을 살던 용칠이 최만석회장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15년 전 이야기다. 이미 양조회사와 여러 개의 야간업소를 가진 최만석이 아직 사장일 때 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다른 조직과의 전쟁당시 칼침을 몸을 던져 막고 최만석을 구했다.
 조직 내 서열이 낮았지만 그때 공으로 지금의 자리에 까지 오른 것이다. 야간업소의 관리를 맡아 하면서도 최만석이 직접 지시한 내용이라 자신도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다. 김명석 부사장의 지시라면 밑에 똘마니들을 시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일이니까 일 끝날 때 까지는 술도 먹지마라 알았냐?”
 “네, 형님.”
 “밖에서는 부장님이라 부르라 했잖아.”
 “네, 부장님.”
 
 여수 시내로 들어간 희만은 국산 자동차 대리점을 찾아가 중형차를 골랐다. 신차였기 때문에 대기자들이 있어 출고 되는대로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자동차 대리점에 들러 여러 기종의 차를 알아본 다음 계약을 마치고 나니 박수영이 퇴근할 시간이 된 듯 했다. 그녀를 찾아온 것도 이번이 세 번째가 되었으므로 그녀의 스케줄에 익숙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복지관 밖에서 기다리다가 오후가 되자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복지관 현관 안으로 들어가 기다렸다.
 
 [정말 내 생각을 읽으셨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였을까? 메아리처럼 중첩되어 울리는 그녀의 마음에 소리가 희만에게 들려왔다. 아마도 그녀가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 깊어 그런 것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복지관 앞의 통학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후 그녀가 내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올 때 쯤 희만은 수영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정말로 놀라는 표정이었다.
 비싼 명품을 건넨 것도 아니었고 프러포즈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세상을 가진 듯이 기뻐하며 놀라는 모습이었다.
 눈가가 젖은 그녀는 두 팔을 내미는 희만에게 안겼다.
 
 “세상에~ 어떻게 제 마음을 아셨어요?”
 “제가 맞춘 거예요?”
 “네~ 맞췄어요. 희만 씨 고마워요.”
 
 계단을 내려오다 두 남녀의 포옹을 본 복지관 직원들이 소리를 죽여 가며 웃었다. 저 때가 가장 좋을 때라는 말들을 하며 자기네들끼리 히히덕거렸다.
 수영은 희만이 모사금의 버스 승강장에 나와 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주기만 해도 무척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한발 앞서 그녀가 일하는 복지관에 찾아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희만 씨 우리 삼겹살 먹고 들어갈래요?”
 “그럴까요?”
 “지난번 먹었던 그 집으로 가요. 제 생각을 맞추셨으니까 제가 살게요.”
 “네, 하하.”
 
 두 사람은 지난번 갔던 삼겹살집에서 정다운 대화를 하며 저녁을 먹었다.
 두 사람이 만난 이후부터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희만을 몰래 따라왔던 그들은 그가 복지관에 들어가 데려나오는 여자가 쓰고 있는 고글이 김명석 부사장이 말한 그 장비와 한 세트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틀림없이 그녀가 메고 있는 가방 속에 부사장이 말한 장비가 들어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형님 저 여자가 쓰고 있는 장비 맞죠?”
 “응, 그런 것 같다. 일단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는 그때 덮쳐 뺏는 거다. 정신들 차려라.”
 “네, 형님.”
 “에이~씨 부장이라고 부르라니까.”
 “죄송합니다. 혀··· 부장님.”
 
 희만과 수영이 버스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하고 한차는 미리 승강장 아래 길목을 지킬 준비를 하러 먼저 가고 나머지 한 대는 버스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다 왔어요. 희만 씨 내려요.”
 “네.”
 끼이익, 치~익
 “기사님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십시오.”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200여 미터 떨어져있는 모사금 민박집으로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어슴푸레한 가로등아래 세 명의 사내가 길을 막았다.
 희만과 수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식당에서 자꾸 자신들을 쳐다보던 사내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놈들 우리를 따라왔구나. 혹시?’
 
 희만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김명석이라는 배신자였다. 그리고 아침에 발신 번호 없이 걸려온 전화가 의심스러웠다.
 
 “다··· 당신들 뭐요?”
 “어떡해요. 희만 씨···.”
 
 수영은 두러워 희만의 팔을 바짝 끌어당겨 잡았다.
 
 “아~ 뭐~ 별일은 아니구요. 우리가 돈이 좀 필요하고 해서요.”
 
 능청맞게 말하는 앞의 사내를 보고 있을 그때였다.
 무척 다급한 에이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님!! 뒤를 조심해요!!”
 
 사내가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에이다의 경고와 함께 고개를 돌릴 때 방망이의 괘적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퍼억
 “아~악”
 
 에이다의 경고 덕분에 희만은 머리가 아닌 어깨를 강타 당했다. 희만이 어깨를 강타당해 주춤하며 한쪽무릎을 꿇었다.
 그 상황이 너무 놀란 수영은 비명소리를 질렀다.
 
 “꺄~~~악 희만 씨!!”
 “퍽!!”
 “으···윽.”
 
 수영이 비명을 지르자 앞쪽의 사내가 수영의 복부를 쳤다. 놀란 수영은 복부를 정통으로 맞아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용칠은 수영의 복부를 치고 쓰러지자 수영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야 새끼야!! 잘 좀 휘두르지 삑사리를 내고 그러냐.”
 “죄··· 죄송합니다.”
 “아저씨 얌전히 그대로 있어요. 그러면 우린 조용히 돌아갈랍니다.”
 “수영 씨!! 수영 씨 정신 차려 봐요.”
 
 기절해버린 수영을 안고 흔들던 희만의 눈빛이 달라졌다.
 희만은 수영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놈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용칠을 노려보았다.
 극도로 화가 난 희만의 눈빛이 달라지자 순간, 용칠이 주춤했다. 그 눈빛은 오래전 딱 한번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살기??!!’
 
 용칠은 정말 죽이려고 칼침을 놓는 사람의 눈빛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앞을 가로막고 대신 맞았기 때문에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극도로 화가 난 희만의 머리카락이 쭈뼛하니 섰다.
 온몸에 잠겨있던 힘이 끓어오르며 그 실체를 나타내는 듯 했다.
 그때 야구방망이를 잘못 휘둘렀다며 야단맞던 사내가 다시 한 번 방망이를 내려쳤다.
 
 퍼~엉
 “커흑!!”
 
 당연한 결과를 기다리던 용칠과 사내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 16. 사···살려주세요.
 
 당연한 결과를 기다리던 용칠과 사내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뭐···뭐야? 도치 저 새끼 왜 저래?”
 “······.”
 
 용칠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지만 함께 악당을 자처한 동생들도 명쾌하게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막내 도치는 족히 5미터는 뒤로 날아가 세워둔 그랜저 앞 범퍼에 부딪쳤다.
 갈비뼈 두세 개 정도는 부서졌을 법한 소리가 나고 땅바닥을 구르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최 회장의 지시로 부장까지 함께 온 이 상황에서 장난칠 막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말이 안 되는 그림을 본 지금 용칠의 표정이 굳어졌다. 용칠은 속결하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양반 뭐 좀 했나보다 사정 봐주지 말고 쳐라”
 “야!! 이 새끼 보내버려!!”
 
 뒤의 사내가 그렇게 외치고 새로 산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기회를 보던 다른 놈도 연이어 희만을 내려쳤다.
 내려친 방망이가 가속이 붙어 희만의 머리를 강타할 것처럼 보였지만 탱탱한 고무공을 내려친 듯이 튕겨났다.
 그리고 내려친 사내는 마른 배춧잎사귀만 남은 밭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희만은 쇠파이프로 내려치던 사내 쪽으로 손을 뻗어 밀어쳤다. 맨 처음 도치라는 사내가 날아가 떨어지듯 길 바닥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커헉.”
 “으악!!”
 
 희만의 몸속에 대량의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자 수영에게 옮겨 받은 초감각이 되살아나 활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희만은 뺏긴 물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영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이 용서가 되지 않았고 온몸은 끌어 오르는 에너지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희만의 뒤쪽에 섰던 사내는 어슴푸레한 저녁이었지만 이 상황을 깨닫기에 가로등 불빛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들고 있던 방망이를 놓고 희만의 뒤쪽에 세워진 그랜저 승용차 운전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용칠의 옆에 섰던 사내의 품속에서는 캠핑용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나름 연장질 좀 해온 세월도 있고 산전수전 겪은 베테랑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칼을 꺼내는 순간 칼을 든 손이 알 수 없는 힘에 꼬이며 ‘우두득’ 소리를 냈다.
 “으~아악!!”
 칼을 떨어뜨리고 칼을 들었던 팔이 기괴한 모양새로 꺾이며 어깨가 탈골되어 버린 것이다.
 
 차를 타고 달아나려던 사내가 차의 시동을 걸고 후진기어를 넣는 순간 희만이 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문이 잠기고 엔진과 라이트가 동시에 꺼진 뒤 연이어 ‘푸쉭’ 하는 소리와 함께 타이어가 터지자 차는 10센티미터쯤 바닥으로 내려 앉아버렸다.
 무표정한 희만이 뻗은 손의 모양은 햄버거를 잡고 있는 형태에서 지그시 누르자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유리창이 터지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퍼~엉, 퍼버벅!!
 
 차창이 터지고 프레스에 눌리는 것처럼 천천히 내리 눌리는 모습이 보이자 그 광경을 지켜본 용칠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밤중에 귀신을 보는 것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부서진 차 때문에 마을을 빠져나가는 도로의 중간이 막혀버렸다.
 용칠은 달아나고 싶었지만 도깨비장난 같은 이 상황에서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희만의 눈길이 용칠에게로 향했다.
 
 “히~익”
 
 여자에게 뺏은 가방을 손에 들고 있다가 알 수 없는 힘에 온몸이 결박당한 듯 공중에 한 뼘 높이로 떠 희만 앞으로 날아왔다.
 밤중에 용칠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면 모두 놀라 자빠져야 맞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은 마치 납량특집에 나올법한 귀신처럼 바닥에 떠서 날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용칠은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엄청난 힘에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공포였다.
 희만 앞으로 날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눈빛 때문에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희만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아련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사··· 님···.”
 “박사님!! 제 말 들리세요?”
 
 에이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다?”
 “괜찮으세요? 박사님··· 폭주하신 것 같은데요.”
 “내가? 정신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박사님 몸속에 들어있는 힘의 실체에 지배당하신 것 같았어요.”
 “아니야, 지금은 통제 가능한 힘처럼 느껴져.”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의 양이 엄청나네요. 덕분에 전두엽 활성이 밝은 노란 색이구요.”
 “아드레날린이 내 힘을 깨우는 촉매제였나 보군.”
 
 희만은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칠에게 가해졌던 힘을 풀자 바닥에 털썩하고 내려앉았다.
 도로바닥과 밭으로 날아간 사내, 팔이 꺾이고 갈비뼈가 부러진 사내들은 이미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이 빠진 모습들이었다. 차 속에 눌려 갇힌 사내는 살려달라며 쉰 목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박사님, 위기의 상황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 때문에 초감각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 분명하네요.”
 “이제야 활성화 조건을 알아낸 것인가?”
 “호르몬 분비 피드백 상으로는 머지않아 아세틸콜린이 분비되어 안정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바닥에 누워있는 수영을 위해 자신의 겉옷을 벗어 수영의 머리에 받쳐놓고 바닥에 주저앉은 일당의 리더로 보이는 용칠에게 물었다.
 
 “김명석이가 보냈나?”
 “······.”
 
 사내들은 모두가 놀라 도망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묻는 말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두렵다 못해 신비한 사내는 이미 자신들이 찾아온 목적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다시 묻겠다. 김명석이 이걸 가져오라 시킨 것이 맞나?”
 “마···맞습니다.”
 
 거짓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희만이 용칠에게 손을 뻗자 용칠이 움찔하며 놀랐다.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았다. 그리고 용칠의 휴대폰을 찾아 김명석의 번호가 찍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에이다는 이미 신분증과 용칠의 휴대폰에서 발생하는 전파정보를 바탕으로 그와 연관된 통화내역을 조회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당신이 전화했었군.”
 “서울에서 출발 전 최종 확인해본 것입니다.”
 “그리고 날 미행했다는 말이군!!”
 “선생님, 우리는 위에서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희만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왔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조직세계 사내들이라 그런지 절대강자 앞에 순순히 꼬리를 내리는 모습들 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뇌리 속에 두려움과 함께 경이로운 힘의 실체를 본 뒤라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을 사주한 김명석이나 최만석처럼 교활한 인간들이라면 이런 단순논리는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 경찰을 불러 법적으로 상황을 처리 하려해도 희만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 내말 잘 들으시오.”
 “네···. 말씀하십시오.”
 
 연장 따위로 대항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난 용칠과 부하들은 김명석이나 최만석회장의 지시 따위는 머릿속에서 휘발되어버린 지 오래다.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를 만났는지 지금 몸에 느껴지는 두려움과 통증이 아니라면 꿈이라 치부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뼛속까지 공포를 새긴 그들은 희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겠다고 했다. 지금 희만의 상태는 그들을 법대로 처리하는 것보다 히든카드로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나를 미행하던 도중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하시오 그리고 당분간 이 일에선 손을 떼고 물러나시오.”
 “네, 알겠습니다.”
 
 수영을 안아들은 희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만의 눈이 마을 입구를 막아선 찌그러진 자동차로 향했다.
 
 끼기긱. 끼익~ 텅!!
 
 운전석 문짝이 꿈틀거리더니 통째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운전석에서 살려달라 소리치던 사내가 기어 나왔다.
 반쯤 넋이 나가버린 사내가 동료들의 사이로 쩔뚝거리며 걸어오자 찌그러진 그랜저 차량은 길가로 끌리는 소리를 내며 비켜섰다.
 남은 차 한 대가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여기저기 깨지고 터진 용칠과 부하들은 희만의 능력을 보며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이가 두려움의 대상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최 회장과 김명석이 대가를 받게 될 그때까지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오. 물론, 말해봤자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네,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통,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자신들을 살려두는 자비 따위는 베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희만이 가진 초능력에 매료가 되다시피 했다. 조직에 들어와 충성을 맹세한 것은 어쩌면 먹고 살기 위해 돈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희만이 보여준 능력은 이미 그런 단계를 초월해 버린 능력이었다.
 게다가 희만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의 인적사항은 물론이고 언제든 자신들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자 그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것이다.
 
 희만이 수영을 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수영이 깨어났다. 자신을 안고 걸어가는 희만을 보자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희만 씨!!”
 “아~ 수영 씨 깼어요?”
 “희만 씨 괜찮아요? 다친데 없어요?”
 “괜찮아요. 그놈들 돈 몇 푼 줘서 보내버렸어요.”
 “네에??”
 
 수영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마을입구를 벗어나 도로를 진입하는 차 한 대가 보였다. 희만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흐흑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희만 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요. 얼른 저 내려주세요.”
 
 수영을 내려주자 희만의 온몸을 여기저기 만져보고 훑어보더니 별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다.
 자신을 먼저 걱정해주는 그녀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자신을 그처럼 아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했던 아내 지연도 자신을 그처럼 아껴주지는 않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마세요. 아시면 걱정하실 거예요.”
 “네, 그렇게 할게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희만은 에이다의 말대로 부교감신경의 활동으로 흥분이 가라앉자 어깨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어깨 쪽 옷을 살짝 들춰 보았더니 방망이에 맞은 자국이 벌겋게 부어올라있었다.
 
 “아~ 이제야 통증이 오는군.”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옷을 내리고 방문을 열자 수영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담은 주머니를 들고 희만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 맞은 곳 멍 들었을 거예요. 옷 벗어보세요.”
 
 희만이 머뭇거리자 그녀는 희만의 겉옷을 벗겨내고 나머지 속옷까지 내려는 듯 덤벼들었다.
 
 “자···잠깐만요 수영 씨···.”
 “희만 씨. 지금 창피하고 그런 것이 문제는 아니잖아요. 얼른요.”
 “아··· 네.”
 “나쁜 놈들 사람을 그렇게 무식하게 때리다니···.”
 
 그녀가 지난번 건넨 속내의까지 벗겨내고 멍든 자리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두었다. 희만이 춥다는 표정을 보이자 얼음주머니를 희만에게 쥐어주고는 이불을 끌어 그를 감싸 주었다.
 
 “미안해요. 희만 씨 저 때문에···.”
 “아니에요. 수영 씨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비의 가격이 1억 원의 가치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내들이 빼앗으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니 기분이 편안해졌다. 통증이 가시고 몸이 금방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17. 끙~ 이런 십원짜리
 
 용칠은 정희만을 추적해 여수로 내려간 지 하루 만에 일어난 참담한 결과를 보고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다친 동생들을 여수 중앙병원에 입원 시켰다. 그리고 할 일 없이 이틀을 더 보낸 뒤 최만석 회장과 김명석에게 전화를 했다. 정희만을 따라다녔지만 그 장비를 한 사람과 만나는 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했다. 아울러 동생들에게도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켰다.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한다며 바보취급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회장님 죄송한 말씀 올립니다.”
 “뭔데? 말해라.”
 “도치 놈이 운전하던 차가 도로 아래 밭으로 굴러 차를 폐차 시켜야 했습니다.”
 “뭐야? 아니, 좋은 결과를 못 냈으면 곱게 돌아올 것이지 웬 사고까지 내고 그러냐!!”
 “죄송합니다. 회장님.”
 “에이~ 변변찮은 녀석들··· 그건 그렇고 많이 다쳤냐?”
 “그 차에 탄 애들이 전치 4주에서 6주정도 나왔습니다.”
 “알았다. 경비 더 보낼 테니 치료비로 써라”
 “감사합니다. 회장님.”
 
 최만석 회장은 성질머리대로 좋은 결과도 없는 일에 사고만 쳤느냐고 짜증을 냈지만 치료비와 경비를 보내주었다.
 
 인덕이 아니라 힘과 돈을 보고 충성을 맹세한 놈들에게 짜게 굴면 배신한다는 것쯤은 체험을 통해 아는 터라 부하들에게 돈을 써야 할 때는 쓰는 최만석이었다.
 
 반면, 김명석은 지시한 일의 결과도 만족스럽지 못한 데다 교통사고 소식은 반가울리 없었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런!! 어린놈의 자식이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 개고생을 했는데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짜증을 내고 끊어?”
 “형님, 부사장이 짜증을 냈다구요?”
 “아~ 그 재수 없는 새끼를 확 묻어 버릴까요?”
 “기다려라. 그 양반이 잠자코 있으라고 했으니 섣불리 나서지 말자.”
 
 용칠은 정희만이 떠올랐다.
 신에 가까운 능력.
 그러나 목숨을 구걸하자 용서하는 관용을 베푸는 남자였고 자신의 여자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여준 모습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록, 깡패세계에 몸담고 있지만 남자다운 남자이며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으로 남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김명석은 전화를 받고 확 치밀어 오르는 분 때문에 전화기를 집어 던지려다 겨우 참았다.
 처음부터 거들먹거리는 용칠이라는 부장 나부랭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문가 운운하며 큰소리칠 때부터 미덥지 못 했지만 꼰대에게 불려가 깨지기 싫어 시간이라도 벌어 보겠다는 심산으로 일을 맡긴 것이다.
 그런데 겨우 3일 감시 끝에 결론을 내려버린 것도 모자라 교통사고가 났다고 말하는 그가 한심하다 못해 짜증이 났던 것이다.
 
 “에이~씨, 적어도 1주일 이상 시간을 끌어줘야 꼰대랑 대면할 일이 없을 거 아니야. 겨우 3일 따라다니고 거기에 교통사고라니 열등 인간들···.”
 
 자신이 지시한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났지만 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명석은 도리(道理)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 증거였다. 무능력자에게 베푸는 친절은 사치고 값싼 동정이라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명석이 개발실이 있는 3층으로 내려갔다.
 마인테크사의 RFS 개발실내에 운영자들은 이벤트 행사 진행 중이었다. 말이 좋아 이벤트였지 사실은 아이템 퍼주기 행사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유저수가 그만그만한 정도에서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이봐요. 나필주 과장!! 신규 뇌파 명령어 3개를 더 추가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요?”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겨우 15개로 6개월을 버텼으면 정식오픈 전 업데이트에서는 5개는 추가해 줘야지 달랑 2개가 뭐요?”
 “그게··· 페어리가 자꾸 해독 오류를 내는 바람에···.”
 “에이···씨 되는 일이 없구만.”
 
 대답하는 나필주 과장은 속으로 명석을 원망했다.
 
 ‘저놈의 에이씨 소리를 또 듣네. 개떡 같은 페어리 개발자라고 자랑하지를 말던가!!’
 
 근본책임이 명석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개발팀 과장에게 짜증을 내는 것이다.
 
 “부사장님 페어리 성장률이 이제 겨우 0.18%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식오픈 시기까지 기다려도 1.00%도 되지 못 하는 게 아닙니까?”
 “이봐요. 나필주 과장. 지금 결과를 놓고 나를 추궁하는 거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부사장님 말씀대로 페어리 성장률이 2% 이상만 되면 언어번역 오토마타 문제가 해결되고 뇌파명령입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된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
 
 명석은 나필주 과장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처음 취임사에서 그 말을 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최소 1.2%만 되어도 명령어를 몇 개 인식하느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파티션에 아래로 숨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개발실 직원들이 ‘푸훗!!’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더욱 파묻었다.
 되려 당한 명석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명석의 뒤통수를 보며 개발팀원들은 팀장인 나필주 과장과 똑같이 고소한 땅콩을 씹는 느낌이었다.
 회사 어디를 가도 신임을 얻지 못하는 명석이었다.
 처음 마인테크사가 세워지고 김명석이 취임했을 때만해도 회사는 잔치분위기였다.
 동시접속자 수 몇 만을 돌파하고 핑크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꼴밖에 되지 못했다.
 
 신주원대리가 볼멘소리로 불평을 터트렸다.
 
 “자기 말은 책임도 못 지면서 우리만 쪼아대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규정이 바뀌어서 매달 30시간 이상은 시간외 수당도 받지 못하는데 우리는 한 달의 절반은 무급야근 하는 거잖아요.”
 
 개발팀원들의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김명석 부사장이 실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페어리 성장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김명석이 자신들을 쪼아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뇌파표준을 잡기 어려워 일단, 뇌파입력 허용범위를 넓혀 보았다. 그랬더니 해석오류 또한 함께 늘어나 버렸다. 해결책은 같은 명령을 여러번 반복 입력해야 정상 실행되는 불편함이 있었다.
 빠른 전투게임에서는 치명적인 결함인 것이다. 그래서 허용오차를 줄이고 차이가 나는 뇌파 오류범위를 좁히자 겨우 2개의 새로운 뇌파 명령어만 추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자 모두들 불평들 그만하고 이번 업데이트는 완벽한 명령 개수를 최대 3개까지만 만들어 보자”
 “네~”
 
 그래도 잘 따라와 주는 팀원들이 고마운 나필주 과장이었다.
 머지않아 자신의 아이까지 태어날 것을 생각하자니 답답했다.
 사내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RFS 게임을 연결해 사이버 매춘시스템 개발하려는 계획도 있다는 말이 들렸다.
 아무리 사업이고 일이라고 하지만 그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다.
 일가친척과 아내에게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며 말하기 민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페어리가 2% 이상 성장이 되었을 때 이야기니까 시간이 남아 있으려나?’
 
 ***
 
 희만은 그 실체를 경험했던 초감각 중 초능력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염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연습중이었다.
 필요할 땐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으익, 끙~!!”
 
 희만은 화장실에서나 들을 법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파하~헉헉.”
 “박사님 너무 웃겨요. 호호호.”
 “웃지 마. 에이다 난 힘들어.”
 “이상한 소리 내지 않으셔도 돼요.”
 “이렇게 하면 들어 올리는 무게가 늘어나는 기분이라서 그래.”
 “처음엔 휴지 한 장도 힘들어하셨지만 지금은 동전을 들어 올릴 정도면 엄청난 발전이시죠.”
 
 수영이 출근하면 민박집 방안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는 희만이 궁금했는지 수영의 어머니는 점심 식사 때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소리안내고 하는 연습을 추가해야하나요?”
 “정신을 집중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시는 것보다 조용히 사용해야할 상황이 생길 듯 싶네요.”
 “알았어. 그런데 어쩌면 위급한 상황에만 사용하라는 뜻이 아닐까? 평소에는 이렇게 사용하기 힘든 이유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위기 때만 쓰겠다는 것도 좀 그래요. 이제는 멘토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익혀야하지 않을까요?”
 
 희만은 다시 소리를 내지 않고 10원짜리 동전하나를 30센티미터 들어 올리는데 얼굴이 벌게졌다. 옛날 큰 동전이아니라 크기가 작은 1.2그람짜리였다.
 얼마 전에는 자동차도 찌그러뜨렸던 희만이 겨우 1.2그람짜리 동전을 들어 올리는데 힘들어하는 모습은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사고가 있었던 다음날 아침 희만은 염동력을 다시 테스트 해봤을 때 무척 당황했었다.
 힘이 아예 사라져 버린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것부터 다시 사용해 보았다.
 실핀 위에 올려놓은 색종이 고깔이 겨우 회전을 했다.
 두루마리 휴지 한 칸을 떼어 30센티미터 위로 올리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양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연습하는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반가운 사실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타박상을 입은 그날 밤 어깨에 멍든 자국이 사라진 것이다.
 수영이 해준 얼음찜질을 마치고 나가자 옷을 입기 위해 일어나 거울로 확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멍이 사라지는 것은 적어도 3일 이상은 걸리던 것에 비하면 무척 빠른 것이었다. 에이다도 섣불리 치료의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간혹, 멍이 잘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희만은 오늘도 한나절을 민박집 방안에 틀어박혀 염동력을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말상대를 해주는 에이다도 있고 수영의 모습도 간간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루함을 이길 수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 바닷가 산책을 나가는 것 말고는 방안에 앉아 초능력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염동력을 익히는 자신이 마치 폐관 수련하는 무림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서울에 올라간 서민철 부장은 예전 정랩스에서 함께 일했던 정보보안공학 박사인 후배 차현수를 찾아갔다. 서울 시내에 프로그램 전문학원인 ‘바이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간혹, 골빈 놈들이 꼭 남이 만들어 놓은 해킹 툴을 이용하거나 사리사욕을 위해 훔치고 빼내면서 지가 뭐 대단한 해커인척 떠들어? 그런 놈들은 다 범죄자이고 쓰레기야 쓰레기!!”
 
 정보보안공학이라는 학문은 해킹이라는 불법을 막아내는 성격이 강했던 만큼 차현수 연구원도 누구 못지않은 천재 해커였지만 요즘은 중. 고등학생들도 해킹 툴을 이용해 남의 정보를 불법적으로 빼내가거나 망가뜨리는 것을 범죄행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선생님 그래도 실력이 뛰어나니까 그런 것도 사용하는 게 아닙니까?”
 “메일이나 감염된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만들어 남의 정보를 알아내는 게 뭐가 대단하냐? 프로선수가 썼던 운동기구를 썼다고 지가 프로선수냐? 좌우지간 불법을 저지르는 놈들은 인간멸종 대상 1호들이야.”
 
 밖에서 강의하는 소리를 듣던 서민철이 웃음이 나왔다. 어제 통화할 때 김명석이 정랩스의 프로그램을 빼내 마인테크사에 넘긴 배신자라는 말을 들은 것 때문인지 강의 끝날 때쯤 핏대를 세우며 도덕 강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짜 전문해커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정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고 필요에 따라 즉석에서 툴을 제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 실력이 있어야했다. 그런데도 자기 개인의 이익과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는 해킹이 뭔가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는 인간들이 싫었던 것이다.
 
 “차현수, 너도 쌓인 게 많았지? 학생들에게 도덕강의까지 하고. 허허허.”
 “형님, 김명석 그 개자식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네요.”
 “그러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이제 우리가 다시 뭉쳐야 하지 않겠냐?”
 “민철이 형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명석이 정랩스 프로그램을 훔쳤다는 것 말이예요. 형님도 아시잖아요. 제 실력”
 “당연히 알지 그래서 내가 너 만나러 왔잖아”
 
 서민철은 어제 전화통화에서 에이다의 성장으로 언어 오토마타가 완성되어 몇 억에 팔렸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제 곧 회사가 세워지고 여러 응용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일에 차현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직접 만나러 온 것이었다.
 민철이 현수에게 인공지능 촉매엔진이 성장해 25%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귀에 대고 조용히 말해주자 차현수의 눈이 소눈깔만큼 커졌다.
 
 
 # 18. 네 목소리가 들려
 
 차현수는 언어 오토마타가 이식된 박스컴과 MD고글 한 세트가 5억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뇌파촉매엔진 에이다의 25% 성장만큼은 아니었다. 25%라는 환장할 만한 성장률을 보인 인공지능이 과연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난번 사장님과 내가 동시에 버추얼 스토리지에 접속하려했는데 쿼리 접속이 안 되는 거야”
 “질문에 답이 없었어요?”
 “아니? 성장의 주체가 되는 멘토와 사장님 이외의 사람이 버추얼 스토리지에 접근하면 혼란이 생긴다며 에이다가 거부한다는 거야?”
 “네? 그렇게 성장한 거예요? 그러면 그 멘토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언젠가 만나보게 될 거야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사람이지”
 “에이다를 그처럼 성장시킨 멘토라면 꼭 만나보고 싶네요.”
 “너 언어 오토마타가 동작하는 것을 실제로 보면 금방 이해할 거야. 성장 이전에 입력된 단어로만 소리를 내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
 “호오~ 정말요? 그 정도의 성능이었으니 장비가 5억이라는 거액에 팔렸겠죠?”
 
 주전공분야가 뇌파공학이었던 김명석이 성공하지 못한 일을 정희만 사장이 완성해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지식데이터 베이스의 스키마(구조)설계에 동참했던 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에이다의 성장이 궁금했다.
 
 금요일 오후쯤 희만에게 MD고글과 함께 주문한 박스컴jr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희만은 서울 화인병원으로 내일까지 가야했다. 화인그룹의 문회장이 개발자인 정희만을 꼭 만나고 싶다는 내용을 전달해왔다. 아들에게 일어난 비극이 지난 10년 동안 문회장을 의학자 수준의 의학지식을 갖춘 노인네로 바꿔 놓았다.
 
 재산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아들의 회생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했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아들과의 대화였다.
 문 회장의 소원은 자신이 더 늙기 전에 아들과 대화를 해보는 것이었다.
 병실에 누워 눈만 끔벅이는 아들을 보며 그 답답함을 풀어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수영의 박스컴에서 조금 더 성장된 언어 오토마타를 추출해 USB에 저장했다.
 
 “수영 씨 서울에 다녀올게요.”
 “내일 올라가시는 거예요?”
 “네, 주문해놓은 장비가 도착했나 봅니다.”
 “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희만에게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수영이 희만을 만난 게 아직 한 달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연애 경험이 없던 수영은 잠깐이지만 헤어져 있어야한다는 느낌이 그렇게 서운한 것인지 몰랐다.
 금방 돌아 올 것을 알았지만 떨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헤어지는 이런 느낌 많이 서운하다. 금방 돌아오실 텐데도······.]
 
 희만에게 그녀의 마음속 울림이 전해졌다. 자료 복사를 끝내고 그녀에게 장비를 건네던 희만이 멈칫했다. 희만도 그녀만 떼어놓고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었다.
 
 “수영 씨 주말인데 서울에 함께 다녀오실래요?”
 “네? 저랑요?”
 “여수 공항에서 비행기타면 금방이니까요”
 
 수영은 선뜻 대답을 못 하지만 기뻐하는 표정은 분명했다.
 
 “제가 없을 때 또 어떤 놈들이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아··· 그래도 괜찮을까요?”
 “수영 씨에게서 얻어지는 좋은 데이터는 우리 회사직원들 뿐만 아니라 이런 장비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에요. 아무래도 저희랑 함께 있으면 더 수영 씨는 물론이고 생산된 데이터도 보호할 수 있을 거예요.”
 “저기··· 부모님께 먼저 여쭤볼게요.”
 “아··· 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수영이 일어나 그녀의 부모가 있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그녀가 들어간 뒤 기뻐하는 소리가 희만의 머릿속에 울려왔다. 그리고 안방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호!! 희만 씨랑 여행 간다. 아이~ 좋아 히힛]
 
 특실 방에 앉아있던 희만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그녀가 특실 방으로 건너와 희만의 방문을 두드렸다.
 
 “부모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서른 살이나 먹은 아가씨는 여행허락을 받고 기뻐하는 10대 소녀 같이 좋아했다.
 
 “네, 그래요 수영 씨 잘 됐네요. 수영 씨랑 갈 수 있어 좋네요.”
 “고마워요. 희만 씨 사실은 잠깐이지만 떠나신다니 서운했거든요.”
 “사실, 저도 좀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요.”
 
 수영은 그녀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여자 같았다. 가식이 없고 솔직한 그녀였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고 다른 트집을 잡아 남자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누구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이동했다.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서민철 부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이쿠 수영 씨도 함께 오셨네?”
 “다시 뵙게 돼서 좋아요.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하하하.”
 
 성격 좋은 서민철 부장이 웃으며 희만과 수영을 반갑게 맞았다. 민철은 자신의 집으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수님.”
 “어머 어서 오세요.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공기가 좋은 곳에 계셨다 오셔서 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세요.”
 “당신은 척보면 몰라요? 옆에 예쁜 아가씨가 있잖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박 수영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는 소리가 낯 설긴 했지만 민철의 아내는 사장님 사모님이 될지 모른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수영도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희만이 준비해온 가져온 USB를 새로 구매한 박스컴에 꼽아 언어오토마타를 이식 작업하는 동안 차현수가 민철의 집으로 찾아왔다.
 “사장님!!”
 “아~ 현수 씨 왔어요?”
 “사···사장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반가워 현수 씨 잘 살았어?”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하는 현수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렸다. 지난 1년 동안 몸 고생과 마음고생을 함께 겪은 터라 서로의 힘든 시간을 이해하는 동료들이었다.
 
 차현수는 MD고글을 장착한 수영을 보더니 민철이 말한 에이다의 멘토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아!! 안녕하십니까? 차현수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수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현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는 것 외에 일반인과 똑같은 말투와 어감으로 들려나오는 소리였다. 에이다의 오토마타가 만들어내는 소리라는 사실을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 돋는 기쁨이 느껴졌다. 에이다의 지식데이터 베이스 설계에 동참했던 현수는 지금 눈앞에서 그 결과물을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와~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군요.”
 “너도 놀랐지?”
 “그럼 인공지능 에이다··· 읍!!”
 
 민철은 수영이 보지 못하게 몸으로 가리며 현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수영도 모르는 내용을 말하려 하자 민철이 재빨리 제지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희만이 말했다.
 
 “현수 씨 조금만 기다려요. 이제 곧 성장된 인공지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 네네 사장님.”
 서민철 부장이 운전하는 차에 모두 올라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희만은 수영을 어디에 떼어놓고 다닐 수 없었다. 현재로써는 자신만이 수영을 가장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희만은 화인병원 심혈관 과장 민동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민동철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정희만입니다.”
 “아!! 네네 박사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비를 마련했습니다. 지금 화인병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동철은 박선철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박원장은 문화인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뇌파 언어번역기를 들고 정희만 박사가 화인병원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전해들은 박선철 원장과 진료가 없는 주요 병원의사들은 문 회장 아들이 입원해 있는 특실 앞에 몰려왔다.
 동영상으로만 봤던 언어오토마타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희만의 일행이 병원에 도착하자 병원의 홍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도착하는 정희만 일행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정희만 박사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희만 일행은 안내를 받아 문세현 환자가 입원해있는 병실 앞에는 각 병원 부서과장들과 의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일반 환자와 진료를 받는 병원이었지만 병원의 설립목적이 식물환자가 된 문화인 회장 아들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초미의 관심사가 이 병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세현 환자가 사용하는 병실 앞에 웅성이며 모여 있던 의사들은 정희만 일행이 홍보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자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복도 양쪽으로 갈라서며 통로를 만들었다.
 특실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환자의 보호자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정희만 일행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스컴과 MD고글 장비는 서민철 부장이 들고 병실로 들고 있었다. 수영은 20여명이 넘는 의료진들이 몰려있자 긴장을 했는지 희만의 팔을 꽉 잡았다.
 희만은 수영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의사들 중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뇌파번역 장치를 한 여자다!!”
 “정말?”
 “방금 고글을 끼우고 있는 여자 보셨잖아요.”
 “오~ 진짜 나도 방금 그 여자 봤어.”
 “나도 나도.”
 의사들은 자기들끼리 복도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병실의 환자 어머니이며 문 회장의 아내가 희만 일행을 반겼다.
 “모두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모님 회장님은 아직 도착을 못하셨나요?”
 “회장님은 곧 오실 거예요. 금방 오신다고 하셨어요.”
 
 박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누워있는 30대 초반의 남성에게 다가가 알아듣기 쉽게 또박또박 설명했다.
 
 “세현 씨!! 세현 씨가 생각하는 말을 번역해줄 장치가 도착했어요. 여기 오신 박사님들이 설명해주면 잘 듣고 그대로 따라하시면 돼요.”
 
 몸이 퉁퉁 불어있는 모습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병원장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민철은 장비를 내려놓고 MD고글을 씌웠다. 차현수는 가져온 스피커를 펴놓고 선배 연구원들이 하는 것을 잘 지켜보고 있었다.
 “문세현 씨, 지금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앞에 칠판처럼 생긴 곳에 생각으로 글씨를 써보세요. 익숙해지면 생각만 해도 그 생각이 번역되어 소리로 나올 거예요.”
 
 세현에게 고글을 씌우자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한자리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첫 마디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들려요?”
 “세현아~!!”
 
 병실 안에서는 그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함께 병원장과 희만의 일행이 치는 박수소리가 병실 밖으로 들려 나왔다.
 병실 밖에서 기다리던 의사들도 병실안의 성공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성공했나보다!!”
 “와아~ 짝짝짝!!”
 
 병실안과 밖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올 그때 문 회장이 병원에 도착해 복도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박수소리를 듣자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해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우리아들··· 우리아들 세현이가······.”
 “회장님 조심하십시오.”
 
 문 회장이 서둘러 뛰자 함께 따라온 비서들이 문회장의 팔을 부축하며 병실로 들어섰다.
 
 “세현아 내가 왔다. 애비가 왔다.”
 “아빠!! 저 말해요. 말할 수 있어요.”
 “아이고 내 새끼야!!”
 
 그의 말투는 아직도 20대 초반의 어린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교통사고가 나기 전 철없는 아들의 아버지로 돌아가 있었다. 문 회장과 그 아내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아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수영도 그 모습을 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자신도 답답했던 세월을 겪었었고 부모의 마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희만 씨는 정말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에요.”
 “이게 모두 수영 씨 덕분이죠.”
 “자~ 사장님, 가족들끼리 대화할 시간을 주고 우리는 이제 나가시죠.”
 
 희만과 서민철 부장뿐 아니라 함께 온 차현수도 오늘의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 지난 1년 동안의 마음고생을 보상받은 것 같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문회장 부부와 아들의 끊임없는 대화를 뒤로하고 박선철 병원장은 정희만 일행을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사들의 환호 소리와 박수가 다시 터져 나왔다.
 
 
 # 19. 못 먹는 게 아니라니까
 
 병실 앞에 몰려있던 의사들은 병원장과 함께 정희만일행이 나오자 뇌파번역기를 장착한 수영에게 관심의 눈길이 쏠렸다.
 그들은 뇌파번역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서양의학은 과학적 지식기반을 바탕으로 해결 하는 비중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 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장애를 과학의 힘으로 일부 해결한 것이다. 언어장애를 겪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여성이 장비의 개발자들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는 것은 장비의 성공적인 개발을 홍보하거나 개발자체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된 것이다.
 걸어가는 수영에게 비교적 젊은 의사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실례지만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눈으로 글씨를 쓰는 것인가요?”
 “모든 단어들을 다 표현가능한가요?”
 “입력된 단어만 되는 거 아니에요?”
 
 수영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의사들의 질문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글씨를 그려 소리를 냈지만 지금은 생각하는 대로 곧바로 나오고 있습니다.”
 “오~”
 그녀의 말소리를 듣던 의사들이 놀라워했다.
 
 “죄송한데 원래 장애가 있었나요? 무척 자연스럽게 들리는데요.”
 
 병원장은 중요한 손님들인데 그대로 놔두면 의사들의 탐구심이 손님을 괴롭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실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의사들에게 말했다.
 
 “자자 여러 선생님들, 우리 병원에서도 곧 장비를 들여놓을 예정이니까 궁금한 것은 그때 가서 해결하도록 합시다.”
 
 병원장이 의사들을 진정시키고 다시 앞장서 걸을 때 희만의 눈에 젊은 의사 한 사람이 아까부터 박수영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희만은 그것을 보다가 수영의 안전이 걱정되어 에이다를 불러냈다.
 
 “에이다!!”
 “네 박사님.”
 “지금 수영 씨를 촬영하는 저 의사 휴대폰 내부 동영상을 지울 수 있겠나?”
 “어렵지 않습니다만, 언어오토마타의 홍보가 이루어져야하는 시점인데 오히려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네만 우리 장비는 홍보하더라도 수영 씨 모습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만은 막아주게.”
 “알겠습니다. 박사님.”
 
 동영상을 찍던 젊은 의사의 휴대폰이 갑작스럽게 꺼져버렸다.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찍어놓은 영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 이게 갑자기 왜 이러지?”
 
 젊은 의사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휴대폰을 다시 켜고 있었다.
 
 희만의 일행은 병원장을 따라 원장실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에이다는 희만의 지시로 문세현환자의 지난 10년 동안의 진료기록과 MRI와 CT촬영영상을 분석했던 내용을 알려주었다.
 
 “문세현 환자는 사고당시 머리에 큰 충격으로 대뇌피질 손상과 경추의 신경다발에 손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두 군데의 손상이 복합적인 결과를 나타낸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만 의사들의 소견상 손상부위의 회복은 거의 된 것을 보고 있네요. 사고당시 쇼크의 여파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의근의 활동만 제약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럼 언제든지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건가?”
 “네, 박사님 회복될 확률이 낮을 뿐이지 가능성이 제로는 아닙니다.”
 “그래? 뭔가가 꼬였나?”
 “최근의 촬영해놓은 영상자료를 다른 환자와 여러 명의 일반인들과 비교 판단해 보았는데 손상부위가 거의 회복이 된 것으로 보이거든요. 박사님 말씀대로 뭔가가 꼬였을 수도 있습니다. 신체나 정신 둘 중하나가 쇼크에서 복귀를 못하는 사례도 보고되었거든요.”
 “회복 가능성에 대한 것은 자네 판단인가?”
 “해상도 판독도 그렇고 고해상도 확대분석은 인간보다 수십 배 제가 앞서죠!! 히히.”
 “참고 하겠네. 에이다.”
 
 박선철 원장실로 들어간 희만의 일행은 박 원장으로부터 감사의 인사와 찬사를 들었다.
 
 “심혈관학회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영상을 저와 우리 선생님들이 모두 봤었습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도 믿지 못했는데 정말 기적과 같은 결과를 보여주셨네요. 이런 장비를 개발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불러주셔서 저희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의사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기술이 이렇게 진보했다는 것도 놀랍고 이게 우리나라에서 개발되었다는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원장님.”
 
 박 원장은 마음한편을 무겁게 누르던 문제가 해결이 되어 후련했다. 문 회장의 부탁으로 화인병원의 원장에 취임했지만 지난 10년 가까이 누워있던 문세현 환자를 돌보는 것 이외엔 치료의 진전은 없어 병원의 책임자로서 답답했었기 때문이다.
 
 “정 박사님. 문 회장님의 사전 지시로 환자들을 위한 장비를 추가 구입을 원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저희야 언제든 환영이지요.”
 “그런데 듣기로는 가격이 비싼 편이라 들었습니다만”
 
 병원장이 추가구매의사를 밝혀오며 가격이 비싸지 않냐는 말이 나오자 서민철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장님 머지않아 활용범위에 따른 부품들의 국산화작업과 병원제품군을 위한 가격인하 그리고 개인제품들의 다운사이징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 그렇군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러나 원장선생님께서 아시겠지만 저희 제품개발이 완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격적인 양산이 시작된 다음에야 제품의 가격이 낮아질 것입니다.”
 
 서민철 부장의 가격협상능력을 보고 있노라면 연구원이 아니더라도 영업사원으로 대성할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장은 깎아달라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민철의 답변만을 듣고 있었다.
 회사를 세우기 위해 서민철 부장은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회사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 필요한 자금과 사무실을 마련하고 연구 및 시설을 확충하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침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문 회장이 원장실을 찾아왔다.
 그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화인 병원에 설치할 5대의 장비를 추가구매 하겠다고 말했다. 모두 제 가격을 주고 사겠다는 것이었다.
 
 “감사함을 그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한 것이 죄송합니다. 제 개인회사가 아니므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회장님 저희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만족합니다.”
 
 거기에 문 회장은 희만에게 양산 시설확충과 추가제품개발에 화인그룹이 투자하면 어쩌겠냐는 제안을 해왔었다.
 
 “정 박사님 우리 화인그룹이 박사님의 기술에 100%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서민철 부장은 당장이라도 제의를 받아들이자는 듯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희만의 표정은 침착하고 신중했다. 투자를 받아 회사를 세웠다가 연구가 실패하자 투자금회수를 명목으로 회사를 공중분해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빚도 재산이라지만 도리어 족쇄가 될 수 있는 일이야.’
 
 “회장님의 제의에 감사를 드립니다만 이 자리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직원들과 회의를 통해 결정한 다음 전화 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러셔야죠. 저는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문 회장은 인품도 있어 보였고 세간의 평도 좋은 호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문 회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먹기 좋아 보이는 음식이 때로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희만이었다.
 희만은 비싼 수업료를 치렀던 1년 전의 경우를 떠올리며 멀리 내다보고 깊게 생각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화인 병원을 나오면서 서민철 부장은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는 것에 화인그룹 문 회장의 제의를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사장님 문 회장이 적극적으로 투자의사를 밝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부장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투자유치를 받았다가 결과가 좋지 못하면 지난 경우처럼 투자금회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한번 겪어 봐서요.”
 “아~”
 
 민철은 희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의 김명석의 배신으로 그 동안의 연구가 물거품이 되자 투자처들은 원금회수를 위해 연구소부지와 사무실에 부속건물까지 모두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시작이 보기 좋을지 모르나 잘 돼도 이익을 나누게 되고 안 되면 있던 것 마저 빼앗기게 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판매하는 것은 고부가가치를 가진 제품입니다. 부품을 국산화하고 다운사이징해서 가격을 낮춰 판매하면 우리 회사를 알짜회사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요. 사장님, 병원에서 사용하는 장비라면 굳이 비싼 박스컴이 아니더라도 언어 오토마타를 PC에 이식해서 장비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차현수는 젊어서인지 패기 있게 말했다.
 문회장이 추가 주문한 장비 5대를 납품하면 20억 이상의 여윳돈이 생기게 되어 굳이 외부 투자를 받지 않고도 회사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민철 부장은 사장의 생각이 확고해 아무래도 외부투자유치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현재 주어진 조건에서 법인체 설립을 서둘러야 했다.
 판매되는 언어 오토마타 장비하나는 수억을 호가하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그리고 병원으로 납품되는 장비는 반드시 세금계산서가 발행되어야 했다. 백합병원의 이영호 원장은 개인 사비로 지불한 경우라 그렇더라도 화인병원에서 장비를 구매한 것은 반드시 세금계산서가 발행되어야 정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인체 설립요건을 준비해 하루빨리 회사의 틀을 만들어야했다.
 
 “사장님 그렇지 않아도 우리 행정업무를 해줄 사람에게 미리 연락해 두었습니다.”
 “그래요? 혹시, 인학 씨?”
 “크크크 역시 사장님도 인학 씨를 떠올리셨군요.”
 “우리 직원들은 어떻게 잊겠습니까? 다들 열심이었고 좋은 사람들이었는데요.”
 
 정희만은 정랩스 시절 회사 일반 업무처리를 담당했던 황인학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는 나름 인맥도 있었고 호리한 외모에 일처리가 빠르고 대인관계도 좋은 직원이었다.
 
 “네, 인학이에게 곧 부르겠다고 미리 연락해 뒀거든요.”
 “잘하셨어요. 부장님 그런데 인학 씨는 잘 있던가요?”
 
 희만이 그의 안부를 묻자 민철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택시운전하고 있더라고요.”
 “아··· 그랬었군요.”
 
 인학의 삶이 비참해서가 아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더 힘차게 살아온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만 못난 선택을 한 것이구나!’
 
 희만은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고개가 숙여졌다.
 그때 수영이 희만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없이 희만의 손을 잡은 그녀였고 진심어린 마음이 울려왔다.
 
 [힘내세요. 희만 씨 모두가 당신을 보고 있잖아요.]
 
 수영의 말에 희만은 고개를 들고 표정을 밝게 하고 웃었다.
 
 “그래요. 오늘 모두 수고들 했으니 오늘 저녁은 제가 근사한 곳에서 회식하죠.”
 “이야~ 우리 얼마 만에 회식입니까?”
 “부장님 우리 연구소 식구들 모두 불러주세요.”
 “그럴까요? 예전 우리 식구였고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니까 함께 부르겠습니다.”
 
 오후 5시경이어서 희만은 일행들과 함께 근처 찻집에 들어갔다.
 서민철 부장은 입이 귀밑에 걸린 채 신이나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민철이 통화한 사람들 중에 유서영 연구원이 있었다. 아내 김지연이 남편 희만을 오해하게 된 원인이었던 여자였지만 희만과 유서영은 별다른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다만, 무책임한 명석의 언행이 빚어낸 김지연의 오해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다.
 
 
 # 20. 팜므파탈
 
 고기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회식자리에 참석한 과거 정랩스 식구들은 희만과 수영을 빼고 열명을 훌쩍 넘는 숫자였다. 연구부서의 인원이 절반 이상이었던 회사였으므로 관리부서 인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함께 모인 정랩스 식구들은 오랜만에 만나 글썽이며 안부를 물었으며 지난 시간의 아픔을 서로 토닥이며 격려하고 배신자를 함께 공분했고 다시 성공해 일어서게 됨을 기뻐했다.
 
 정랩스의 입장에서 박수영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존재였고 오늘의 만남이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내막을 아는 민철과 현수는 물론 회식자리에 불려온 그들에게 박수영의 존재는 한눈에도 보통 인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장 옆에 앉은 그녀의 정보를 자기들끼리 속닥이며 서로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영은 자신을 두고 속닥이는 것에 오래토록 익숙해져 있었다. 지금 마음이 불편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질투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기본옵션으로 장착된 감정이었지만 유서영이라는 여성이 나타나 희만을 바라보는 잠깐 동안의 짧은 눈빛에 그녀의 마음이 편치 않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서영 그녀가 싫은 것인지 그런 감정이 드는 자신이 싫은 것인지 몰랐다.
 
 유서영이 다른 직원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자리에 앉은 희만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희만의 손등에 포개며 희만을 걱정하는 묘한 표정을 보았다. 수영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 질투라는 감정이 아니었으면 했다.
 
 “사장님··· 어떻게 지내셨어요.”
 “반가워요. 유서영 씨 잘 지냈어요?”
 “걱정 많이 했어요. 다시 뵙게 되니 기뻐요.”
 
 서민철은 직원들을 불러 모으는 재미에 아무런 생각 없이 전화를 했지만 한 가지 깜빡한 사실이 있었다. 정희만이 이혼하고 싱글이 되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유서영은 사장 정희만이 유부남일 때부터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었다.
 민철은 그 사실을 깜빡했다.
 게다가 유서영과 박수영이 한 공간에 마주치게 된다는 것도 옛 동료를 부른다는 기쁨에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유서영은 연구원이며 사장인 정희만이 유부남인줄 알았지만 유독 그를 챙겼었다.
 직원들은 빈말로 그녀가 사장의 세컨드라며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희만은 유서영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렸고 불필요한 일에 신경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서민철은 옆자리에 앉은 수영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유서영 씨가 많이 반가웠나 봐요.”
 “네···.”
 
 수영은 괜찮다며 웃어보였지만 사실 괜찮지가 않았다.
 희만의 곁에서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고 조용하며 나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수영의 눈에도 유서영이라는 여자는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에 고급스러운 도시여성의 모습 이었다.
 바닷가 갯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자신과 다른 세련미가 풍기는 여자로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감 없이 고개를 숙이려 할 때였다.
 희만이 수영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며 도자기 피부의 그녀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참, 유서영 씨, 이쪽은 박수영 씨입니다. 서로 인사해요.”
 
 희만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웃으며 소개하자 수영은 당황했다.
 세련된 분위기의 서영과 순수하며 착한 수영 둘은 닮은 듯 닮지 않은 여자들 같았다.
 
 “아··· 부장님이 말씀하신 분이시구나. 정말 반가워요. 유서영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수영입니다.”
 
 잠깐 동안 민철이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얼른 민철이 잔을 채워 건배 제의를 했다. 모인 모두는 “위하여”를 외쳤다.
 함께 잔을 들고 있는 수영은 다시 어색한 기분이 이어졌다.
 소외감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느낌이었다.
 희만은 술을 못하는 수영의 술잔을 받아 상에 내려놓고 말했다.
 
 “수영 씨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영 씨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모르죠?”
 “네? 제가요?”
 “수영 씨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저에게도 그렇지만 우리 회사에 엄청난 큰 선물을 해줬어요.”
 “제가 무슨··· 그냥 저는 희만 씨 도움만 받았을 뿐인데요.”
 “아니에요. 수영 씨가 우리 모두를 모이게 만들어 준거나 다름없어요.”
 
 희만이 수영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수영은 무의식적으로 서영이라는 여자를 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방금 전 자신이 느끼던 묘한 감정들이 서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는데··· 괜히 따라왔나?!]
 
 수영의 마음에서 울려나는 소리를 듣게 된 희만은 수영이 걱정스러웠다.
 에이다를 불러냈다.
 
 “에이다!!”
 “네, 박사님 부르셨어요?”
 “수영 씨가 왜 우울해 하는 거야?”
 “박사님 진짜 모르시겠어요?”
 “우리 회사식구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거야?”
 “뭐 그것도 조금 있겠지만 유서영 씨 때문이잖아요.”
 “서영 씨?”
 “네,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답니다.”
 “나는 예리하지 못해서 그런데 이유를 알려주겠어?”
 “멘토님은 본능적으로 박사님을 좋아하는 유서영 씨에게 질투심을 느낀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볼 때는 멘토님께서 자신감을 잃고 계신 것 같아요.”
 “이런··· 수영 씨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멘토님께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세요.”
 “알았네, 알려줘서 고마워 에이다.”
 “저도 유서영 씨 별로예요.”
 “에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거 몰라?”
 “멘토님께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싫어요.”
 “에이다를 설계한 사람 중 하나야.”
 “뭐··· 또 그렇게 되나요?”
 
 유서영 그녀는 언어학자이며 인지학을 전공했다.
 에이다의 지식과 사상체계를 학습하는 인지학습 즉, 인공지능의 학습성장설계에 참여한 연구원이기도 했었다.
 연구원들 중 유일한 문과 출신이었다. 현재 대학에서 인지학과 시간강사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유서영은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희만의 이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팜므파탈이 되고 말았다.
 명석이 작정하고 회사의 기밀을 빼돌리려 할 때쯤이었다. 그때 희만의 아내 지연에게 유서영의 존재를 살짝 귀띔해 주었다.
 영악한 그의 악마 같은 속삭임에 넘어간 김지연은 예전부터 유서영의 미모가 마음에 걸렸었다.
 아들 주성이의 돌잔치 때 회사직원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했었다. 방 구경을 하던 유서영이 희만의 서재에 들어가 희만의 사진을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서영을 발견하고 김명석이 귀띔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형수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 연구소에 미모가 뛰어난 유서영이라는 여자가 있는데 아무래도 사장님과 보통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아니 뭐 확실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경우라도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것이 제 3자를 통해 전해지는 말이었다. 그런데 명석이 대놓고 찔렀던 말이 맞아 떨어져 간 것이다. 실제로 유서영이 희만을 좋아한다는 것은 연구소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연구소 직원들은 희만이 사고를 치거나 문제를 만들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지연의 오해가 출발하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회사에서 막바지 연구에 매달릴 때였다. 퇴근하지 못하는 희만을 위해 유서영이 구매해 건넨 속내의가 결정적인 작용을 해버렸다. 아내 지연은 희만이 자신의 속내의 치수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략과 착각으로 시작한 김지연의 상상력은 망상으로 발전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늦게 퇴근해 쓰러져 자거나 외박을 하는 경우엔 유서영이라는 여자의 집을 들렀거나 그녀와 침대에서 함께 뒹굴다가 오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대놓고 묻지 못하는 지연은 다른 부분으로 그녀의 날카로움과 트집이 나타났고 연구 성과에 대한 압박감과 스트레스에 쌓인 희만을 더욱 괴롭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희만은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 부부의 대화는 필요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영 씨 우리 잠깐 밖으로 나갈래요?”
 “네···.”
 
 희만은 수영을 데리고 식당 밖 주차장 옆으로 갔다.
 
 “낯선 사람들이 많아 피곤하죠?”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희만이 수영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수영 씨 내가 수영 씨의 마음을 읽어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거 몰랐죠?”
 “그랬어요?”
 
 희만은 지나는 말로 정색하지도 않고 말했다.
 희만에게 안겨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수영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줄로 생각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우리 저번에 텔레파시 놀이했죠?”
 “네.”
 “그 시간 이후로 수영 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어머 그랬어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저는 수영 씨의 마음을 다 알아요.”
 “후훗, 초능력을 가지셨군요.”
 “네, 그리고 또 수영 씨에게 확실하게 말해줄게 있어요.”
 “그건 뭔데요?”
 “나 수영 씨가 제일 좋아요. 내 마음 알죠?”
 “피이~히힛”
 
 그는 어둑해진 골목길에서 수영의 볼을 감싸 잡고 입 맞춰 주었다. 모두가 각자 먹고 마시며 시끄러운 가운데 유서영의 눈길은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의 빈 공간을 향해 있었다.
 
 희만은 식사를 마치고 노래방을 들렀다가 수영과 함께 서민철 부장의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
 윗사람들이 사라져 줘야 직원들끼리 신나게 논다는 것을 알고 먼저 계산을 해놓고 나온 것이다.
 그녀를 아끼는 희만은 호텔이나 모텔로 데려가기 뭐해 서민철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사장님 수영 씨와 한방을 쓰시지 그래요?”
 “부장님 왜 또 그러세요.”
 “뭘 모르는 나이도 아니시면서 빼시기는···.”
 “수영씨를 곤란하게 만들면 안되는 거 모르세요?”
 “수영씨도 기다리는 거 아닐까요? 크크크.”
 “부장님도 참···.”
 
 안방에서 아이들과 엄마가 함께 자고 수영은 작은방에서 자며 희만과 민철이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서민철 부부에게 인사하고 나왔다.
 수영과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서울 구경을 걷고 전철과 버스, 택시를 이용해 찾아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수영이 제일 먼저 가보고 싶다는 남산을 찾아갔다. 사실, 서울에 살았던 희만도 어렸을 때 한번 가보고 오랜만에 올라가 보는 것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남산 타워 아래에 도착했더니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망대 펜스에 매달려 있는 다양한 자물쇠통이었다.
 
 “와 정말 엄청나게 많아요.”
 “대체 언제부터 이런 게 있었지?”
 
 형형색색의 자물쇠통에 누구누구의 이름과 하트 그리고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연인 두 사람이 하나씩 채웠겠지만 그 수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수영 씨 우리도 해봐요.”
 “좋아요.”
 
 희만은 유치하다는 생각도 없이 핑크색의 자물쇠를 사서 그곳에 두 사람의 이름을 썼다.
 이름 사이에 하트를 그려 넣고 날짜를 썼다.
 수영에게 적당한 곳에 자물쇠를 채우라고 했다.
 
 서른다섯 그리고 서른이지만 요즘시대에는 평범한 나이대의 연인에 속한다.
 남산타워아래 광장에는 전통기예와 무술을 공연하는 사람들이 나와 외국인 관광객들과 연인들 그리고 가족끼리 온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회오리 감자와 군것질을 하다가 지하철로 이동해 북촌 한옥마을에 들렀다.
 그리고 또 이동해 근처 경복궁을 찾아갔다. 맛 집을 찾아가 점심을 먹고 동대문 시장에 들러 물건도 사고 피곤한 다리를 쉬러 극장에서 영화도 관람했다. 거리를 걸으며 이동하는 그 시간들이 두 사람에겐 예전에 느껴 보지 못한 즐거운 경험이었다.
 
 “수영 씨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하루가 짧고 다리도 아프네요.”
 “그래도 저는 즐겁고 좋아요.”
 “저··· 수영 씨 회사를 세우면 제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야 해요.”
 “네, 알고 있어요.”
 
 머지않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온다니 수영은 무척 서운했다.
 
 “수영 씨는 저와 우리 회사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그녀가 긴장해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같이 서울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네? 제가···요?”
 
 
 # 21. 같이 삽시다.
 
 현재 에이다의 싱크로 율은 거의 최고치에 가까운 95%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독립된 사고체계로 성장해야할 인공지능 성장률은 이제 30%에 이른 정도였다.
 박수영 그녀와 떨어져 지내게 되면 안정적인 에이다의 성장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에이다의 완전한 성장을 기다리는 동안은 수영을 곁에 두고 보호해야하며 관심을 보여주어야 했다.
 촉매엔진특성상 박수영에게 분비되는 호르몬의 작용이 그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해온 것을 감안한다면 떨어져 지내는 동안 느끼는 갖가지 마이너스적인 요소들이 성장을 저해할 것은 분명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회사가 연구실을 마련되고 준비가 되면 함께 올라왔으면 해서요.”
 “저도 희만 씨와 가까이 있고 싶기는 하지만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함께 있고 싶다 해서 폐 끼치는 것은 싫어요.”
 “수영 씨 여러 번 이야기 했죠? 수영 씨는 우리 회사에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회사에 수영 씨가 일할 곳을 마련할게요.”
 “제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신다구요?”
 “수영 씨가 만들어내는 데이터는 우리 회사에 아주 중요한 자료예요. 제가 지금 수영 씨에게 부탁하는 입장이에요.”
 “설마요.”
 “그냥 수영 씨에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것 아니에요.”
 
 수영은 함께 서울에 살자는 제의가 프러포즈였으면 했다.
 함께 서울에 살자는 말을 꺼낼 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다린 말은 일 때문이라는 말보다 사랑해서 떨어져 있기 싫다는 말을 해주기 바란 것이다.
 그러나 희만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밀어붙일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은 이혼남인데다 전처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형편이었다.
 
 “일 때문이 아니라 저를 좋아해서 함께 가자고 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렇다고 말하기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요.”
 “네?”
 “수영 씨에게 진심을 보여주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내 입장은 이해를 바라기엔 너무 큰일들이 있었어요. 수영 씨를 이용한다는 오해 받기 싫어요.”
 “저를 이용하다니요 말도 안돼요.”
 “수영 씨, 가끔 세상의 평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위험한 경우가 많아요.”
 
 내겐 로맨스지만 타인에겐 막장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혼한지 불과 몇 개월 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처녀를 사귀는 희만, 게다가 회사성공의 발판이 여자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것 때문에 사랑 없는 형식적인 만남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며 이혼남이지만 돈 잘 버는 남자를 사귀는 수영에 대한 입방아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요. 희만 씨 마음 이해해요. 지금 당장 답하지 않아도 되죠?”
 “네, 부모님과도 상의하고 결정하기로 해요.”
 
 수영은 아쉬웠다. 희만이 걱정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기다렸던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장애를 가진 그녀였고 내세울만한 조건도 없었다. 어쩌면 희만의 생각대로 필요한 것은 시간인지도 몰랐다.
 급하게 서두는 것보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한 생각이 옳았지만 희만이 좀 더 강하게 잡아 끌어준다면 모든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두 사람은 서로의 핸디캡을 보완해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수영의 생각에는 세상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해할 시간을 기다리는 것 보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희만은 회사를 다시 세워 체계를 잡아가며 잃었던 모든 것들을 되찾아야 했다. 지키고 되찾는 일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많았다. 그것은 곧 힘이라고 생각했다. 형태가 다르더라도 모든 것은 ‘힘’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 힘은 물질이라는 돈으로 표현된다. 그런 힘을 기르는 것은 세상에서 꺾이지 않는 생존의 법칙이라 깨달은 것이다.
 
 1박 2일 동안 희만과 함께 서울을 다녀온 수영은 서울에서 있었던 감동적인 이야기와 그 남자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수영의 어머니는 수영을 붙잡고 물었다.
 
 “수영아 정 박사가 너 좋아하냐?”
 “으응?”
 “대답이 왜 어정쩡하다?”
 “엄마 왜요?”
 “확실하게 말해봐야 긍께 둘이 잤냐고?”
 “엄마!!”
 “오메~ 가시내 귀청 떨어지것다.”
 “딸한테 그걸 대놓고 묻고 싶어요?”
 “그럼, 둘이 서울 가서 하룻밤 자고 왔다는데 그 생각 안하것냐?”
 “엄마, 희만 씨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 아닌 게 자랑이냐? 우리 이쁜 딸을 그냥 내비뒀다는디.”
 “희만 씨 좋은 사람이에요.”
 “언제까지 좋은 사람 타령할래? 모름지기 남자는 말이여 여자를 박력 있게 확 자빠뜨릴 줄도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우~ 엄마 제발!!”
 “정박사를 내가 찬찬히 봤는디 똑똑한데다 착하고 능력있더라. 너 딴 여자들한테 뺏기고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수영은 어머니의 그 말에 유서영이라는 여자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표현이 거칠었지만 보는 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울에 함께 간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가 어쩌면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랐기 때문인지 몰랐다.
 
 “엄마, 사실은···.”
 “응! 그래 말해봐”
 “희만씨가 서울에 같이 올라가자고 했어요.”
 “호호호 그거 봐라 가시내야 정 박사가 너 좋아한다니까”
 “나 올라가도 엄마 아빠 괜찮아?”
 “딸년 시집 안보내고 죽을 때까정 데리고 있을 줄 알았냐?”
 “엄마 정말 안 서운해?”
 “옘병, 서운하다믄 시집도 안 갈래?”
 
 수영의 부모는 수영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사는 것에 찬성이었다. 어떤 것을 하던지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누구보다 확실한 정희만을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보슈 정 박사.”
 “네, 아버님 말씀하십시오.”
 “우리 수영이 장애는 있어도 착하고 성실하다네. 자네 책임지고 보살필 텐가?”
 “네 아버님. 약속드리겠습니다.”
 “당장 결혼하라는 말은 아니네. 우리 수영이 데려가면 혼자 내려 보내지 말게.”
 “아!!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희만은 여자를 걱정하고 위해 싸워본 경험도 처음이었고 함께하자며 손을 내민 것도 처음이었다. 손을 뻗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손 내밀어 붙잡은 여자는 수영이 처음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였는지 수영의 부모가 공식적으로 내려주는 결혼 허락을 받은 것이다. 수영의 부모 앞에서는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는 것은 어른들도 알고 있었다.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지자 희만은 둘째 치고 수영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부모가 서운해 할 정도였다.
 
 ***
 
 “좀 더 자극적인 기억을 떠올리고 세워보세요.”
 “읍!!”
 “소리는 내지 마시구요.”
 “오! 됐다!!”
 “거봐요. 가능하잖아요. 이제 돌리면서 박아 보세요.”
 “으~”
 “조금만 더 강하게 해봐요. 힘을 더 주세요. 더요.”
 
 희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에이다가 아니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대화내용이다.
 지금, 상당히 큰 나사 여러 개를 나무판자 위에 세우고 박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 십 원짜리 동전 들기도 힘들어 했지만 이제는 힘을 다양한 각도와 방향에서 조절하는 염력을 키우는 중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수영이지난번 겪었던 사고처럼 위급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발휘할 수 있는 염력이 훨씬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길이 5Cm 나사못 세 개를 나무판에 절반가량 박는 염력을 연습했다. 나사를 손으로 돌린다는 생각이 아니라 드라이버로 돌려 조이는 상상을 하면 힘의 작용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정도를 지나 수저정도는 쉽게 들어 올릴 수 도 있고 어느 정도 구부릴 수도 있었다. 작용되는 힘의 크기는 약 2~3Kg에 불과 했지만 에이다는 정희만의 뇌 활성부위를 관찰하고 자극에 세기에 따른 힘의 변화를 도표로 만들었다. 임의대로 외부자극을 높일 때 나타나는 힘이 더 커진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만약, 에이다가 없었더라면 희만의 능력은 늘지 않았을 것이며 신체가 반응하는 한계점이나 위험수위를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희만에게 에이다는 정보에 접근하는 훌륭한 조력자일 뿐 아니라 뛰어난 스승이고 동료였다.
 
 수영이 출근한 뒤 서민철 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부장님 말씀하세요.”
 “사장님 지금 메인프레임에 사용되는 멀티코어 CPU 4개짜리 보드를 구해병원 납품용 언어 오토마타를 이식시켜 실험중인데 잘하면 가격을 대폭 인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번역 동작에 버퍼링이 생기지는 않던가요?”
 “에이다의 인공지능 전체가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오토마타만 이식되어 동작하기 때문에 과부하가 걸릴 확률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사무실도 없는데 어디서 실험중이세요?”
 “현수네 집이죠 뭐.”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서민철부장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일반 데스크톱보다 약간 더 큰 덩치의 메인프레임급 컴퓨터 주변에는 부품포장지와 널브러져있는 공구며 보조 장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민철은 바퀴가 달린 카트에 본체를 싣고 다닐 수 있도록 데스크톱형태로 만든 다음 환자가 있는 병실로 이동하면서 사용하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물론, 박수영처럼 활동이 가능한 사람이 박스컴을 사용할 때는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지만 식물환자가 된 경우에는 수천만 원이나 하는 슈퍼컴 수준의 이동형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황인학 과장이 연구실과 사무실로 사용할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이고 별말씀을 제일 중요한 일을 하시잖아요. 파이팅입니다. 사장님 하하하.”
 “네, 부장님 수고 좀 해주세요.”
 
 항상, 정신없이 출근하던 황인학은 모처럼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그동안 일하던 택시회사에 사직서를 내밀었다. 이제 본격적인 정랩스의 사무실과 연구실로 사용할 건물을 알아보기 위해 생활정보지를 뒤적여 인터넷에 올라온 건물과 사진을 확인한 뒤 직접 방문해 최적의 장소를 고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정랩스 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으로 낙성대역 부근건물 중 3층과 4층을 전세 4억에 계약을 하고 가까운 거리에 희만과 수영이 거주할 깨끗한 오피스텔을 전세 7천만 원에 계약했다. 정랩스의 법인 설립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고 관청을 열심히 드나들고 있었다.
 
 얼마 전에 주문해 놓은 차량이 준비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차를 가져오겠노라고 전화가 왔다.
 자동차가 도착하자 수영의 부모님과 함께 나가 도착한 차량을 맞이했다.
 
 “와따~ 돈이 좋긴 좋네. 때깔 봐라.”
 “어머님 함께 수영 씨 보러 시내 갈까요?”
 “그럴까? 여보 영감 우리 같이 갑시다.”
 “애들도 아니고 가잔다고 낼름 나서냐?”
 “아버님도 함께 가시죠. 저녁도 먹고 아버님 좋아하시는 막걸리도 한잔 하시죠.”
 “아 그래? 그라믄 가야제.”
 “영감탱이 애들 어쩌고 하더만 막걸리하니까 귀가 번쩍 뜨이쇼??”
 “이 망구탱이야 아직 귀는 안 먹었어!!”
 “첫 시승입니다. 기념파티 하러 가시죠.”
 “그러세 하하.”
 
 평범한 어촌의 삶을 살아온 그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제 남이 아닌 가족으로 느껴지는 어른들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붙잡아 끌어내 주었고 실패자였던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준 그녀가 있었다.
 인연이라는 것은 억지로 연결하는 인위적 관계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이렇게 존재했나 싶었다.
 
 “수영 씨, 지금 저 복지관 앞에 왔어요.”
 “네? 버스로 오셨어요?”
 “아뇨, 얼마 전에 주문해놓은 새 차로 왔어요.”
 “새 차 샀어요? 축하해요 희만 씨!!”
 “고마워요.”
 “서울 올라 갈 때 옷이랑 짐을 어떻게 옮겨야하나 고민했었는데 잘됐네요.”
 “겸사겸사 잘됐네요. 그리고 수영 씨 부모님도 지금 함께 오셨어요. 우리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게요.”
 “어머 진짜요?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내려갈게요.”
 
 부모를 모시고 나온 희만을 보는 수영은 새로 산 자동차의 광택보다 밝게 빛나는 자신의 남자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희만을 감싸고 있는 밝은 색의 아우라가 사랑하면 보이는 후광인 것 같았다.
 
 
 # 22. 빛의 아우라
 
 수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보았다. 잔상처럼 보이던 빛이 사라지지 않았고 눈을 비벼가며 다시확인 했지만 그대로였다.
 
 “수영 씨!!”
 “희···만 씨···.”
 
 희만이 손을 들어 수영에게 흔들자 몸을 감싸던 아우라의 가루들이 빛의 날개에서 쏟아져 내리는 은빛 가루처럼 흩어졌다. 수영은 평소보다 조금 어색하게 인사하면서도 부모에게는 희만의 모습에 대해 묻지 못했다.
 수영의 신체 반응이 예사롭지 않자 에이다가 희만에게 나타나 그를 불렀다.
 
 “박사님 멘토께서 시각오류에 대한 반복검증을 하고 계시네요.”
 “무슨 말이야? 시각오류에 대한 반복검증이라니?”
 “쉽게 말씀드리자면 뭔가를 잘못 본 것인지 눈을 비비고 있어요.”
 “수영 씨가? 왜?”
 
 에이다와 그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평소처럼 행동하며 수영을 조수석에 앉혀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그런 희만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에이다 수영 씨가 뭘 본거야?”
 “멘토님의 시각에서 박사님을 바라본 영상입니다.”
 
 박수영이 바라보는 시각을 희만에게 보여주었다.
 영상에는 희만을 둘러싼 투명한 밝은 빛이 보였다. 서툰 CG작업자가 만들어낸 영상처럼 유치하지도 않았다.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빛이었다. 그녀의 손이 눈을 비비러 올라오는 동작이 보였다.
 
 “내 몸에서 퍼져 나오는 빛이 보이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지금 박사님의 뇌활성 상태를 보면 감마파가 높게 나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감마파가 높게 나오면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아직 학계에 보고된 내용은 없습니다. 수영의 부모님은 이상을 느끼지 않지만 수영 씨는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수영 씨가 놀라는 건가??”
 “놀라기도 하시지만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한다고??”
 “네··· 할머니의 죽음과 관계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무엇을 두려워하시는지 알아내기 쉽지 않네요.”
 “에이다는 수영 씨의 기억을 공유한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제 성장률이 높아질수록 독립된 기억형성이 더 많아지는 이유도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은 연관 관계를 추측하기 힘들어요.”
 “음··· 그래?”
 
 차를 출발하자 뒤 자석에 앉은 수영의 어머니가 물었다.
 
 “정 박사 우리 어디가나?”
 “꽃등심 먹으러 갑니다. 괜찮으시죠?”
 “워~매 비싼 것인디 입이 호강 하것네. 호호호.”
 “수영씨도 좋죠?”
 “네? 아··· 네.”
 
 수영은 자신의 부모와 희만을 번갈아 보며 자신이 보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뇌파가 존재한다.
 알파, 베타, 세타, 델타, 감마파가 대표적인 뇌파다.
 
 간단한 예로서 희만이 염력을 사용할 때 특히 베타파가 강하게 흘러나온다. 민첩성이나 각성, 집중, 인식력은 베타파가 관련되어있다. 초당 14~100Hz에 해당되며 가장 빠른 형태에 해당된다. 일반인들은 게임에 집중할 때 이 베타파가 활성되기도 한다.
 
 뇌파가 차분한 감정상태의 고요함을 겸비한 수영의 시각에서 희만을 바라봤을 때 고차원적인 뇌파에 속하는 감마파가 흘러넘치며 생기는 아우라가 보인 것이다.
 
 수영이 출근한 뒤로 희만은 염동력을 사용한 뇌 전체의 활성과 전두엽의 동기화 훈련이되어 높은 차원적인 의식활동 때문에 감마파가 흘러나왔고 그것이 수영에게 보여진 것이다.
 신비한 이 감마파는 동물들이 죽기 직전에 초당 25~55Hz에 해당되는 감마파를 다량 생성해 낸다는 보고도 있다. 고차원적인 뇌의 활성이 일어나는 신비한 증상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다는 이야기다.
 오래전 친할머니의 죽음은 수영의 기억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픈 추억이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가시기 전 그녀의 눈에는 할머니의 몸에 은빛가루와 같은 것이 퍼져나고 있었고 이내 숨을 거두자 그 빛이 차츰 사라졌던 기억이 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슬픔으로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오늘 수영이 희만에게서 오래전 그 빛을 보며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희만이 내보이는 지금 그 빛이 오래전 할머니에게서 봤던 빛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희만 씨가??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그녀가 마음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희만에게 들렸다.
 
 “수영 씨 무슨 생각해요?”
 “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수영 씨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 걱정이 많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있잖아요.”
 “아! 네.”
 
 그녀는 희만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자신감에 차있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불안해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고도 남을 만큼 여유와 정이 넘쳤다.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어떤 남자도 옆에 앉아 있는 그처럼 관심과 사랑을 쏟아본 적 없었던 수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괜찮으리라는 스스로의 위안이 깨져버리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용칠이라는 사내의 변명을 그대로 믿지 않는 명석이었다.
 사면초가인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든 깨트리고 이겨내야 하는 명석은 뭔가가 있는 것 같은 정희만 사장의 행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명석이 정랩스라는 주식회사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법인체로서 가장 일반적인 회사형태는 주식회사였다. 더 놀라운 것은 아직 상장하지도 않았지만 증권가 정보통들에게 상장되면 엄청난 대박을 터트려줄 회사라는 찌라시가 나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식이 폭등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처럼 신생회사가 블루칩으로 거론되는 것은 신약이나 신물질, 신 개발품이 대 히트를 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 사실을 접한 김명석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분명 뭔가 있었는데도 이걸 놓쳤다는 게 말이 돼?”
 
 명석은 키폰을 들고 최만석 회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다가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이 노인네도 믿을 수 없어.”
 
 명석은 개인적으로 알아놓은 흥신소 번호를 찾아냈다.
 일처리를 깔끔하게 한다는 사람으로 조금 비싼 의뢰비를 받는 대신 확실하다는 소문이 나 있는 그곳의 번호를 눌렀다.
 흥신소 사람을 시켜 희만의 휴대폰 전파가 수신되는 기지국 근처에 몇날 며칠을 잠복하고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새 차를 몰고 나온 희만이 여수의 한 복지관에서 명석이 찾던 고글 쓴 여자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즉각 들어왔다.
 
 “역시, 있었어!! 뭔가 있었다고!! 이걸 놓치고도 부장나부랭이가 헛소리 삐약거렸던 거야?”
 
 명석은 흥신소 사장에게 동선파악을 해놓고 여자혼자 있는 동안 물건을 뺏어 오도록 만들었다.
 
 “일이 시끄러워지면 곤란하니까 여자 혼자 있을 때 물건만 가져 오세요.”
 “네? 사장님 저는 그런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어허~ 사장님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큰 거 한 장 드리죠.”
 “아닙니다. 사장님 저는 범법행위를 하지는 않습니다.”
 “이왕 거기 계신데다 그리 어려운 것 아니잖습니까? 여자에게서 물건만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럼 2억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흥신소 사장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찾는 일과 잠복 미행까지만 대행해주고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해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네? 2억이나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일처리가 깔끔하기로 소문나셨던데, 이번일 때문에 오점을 찍으시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명석은 턱밑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송화기 넘어 흥신소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그거 하나 가져오면 몇 년은 먹고 지낼만한 돈이 생길 텐데요. 그럼 고민해 보시고 내일 정오까지 연락주시죠. 작업을 끝내놓고 전화하시면 더 좋구요. 하하하”
 
 회사를 설립한 정희만은 뭔가를 분명 만들어 냈을 것이고 지능형웜이 보내 온 첫 번째 보고메시지가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뛰어난 소프트웨어 공학자인 정희만이 웜의 존재를 눈치 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 문제되더라도 저작등록을 미리 해놓은 내 것이 아니겠어? 흐흐흐”
 
 전화를 끊은 명석은 이를 드러내놓고 히죽 웃었다.
 이제야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인공지능 촉매엔진 페어리의 성장이 처음 웜이 보내준 2.34%만 되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있을 RFS 정식오픈때 2.34% 이상의 대규모 업데이트된 페어리가 동작한다면 등장으로 한번 뒤집었던 게임업계는 물론, 전 세계 게임시장에 돌풍을 일으킬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냉장고에 가서 맥주 캔을 꺼내 따고 책상위로 구둣발을 걸쳐 올리며 맥주를 홀짝였다.
 
 “카아~ 정희만 씨!! 나는 말이야 먹이사슬 최정점에 오를 사람이야. 두고 보라고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밟아줄 테니까. 흐흐흐.”
 
 불행한 자신의 유년시절.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
 끝없이 자신을 몰아붙였던 어머니의 일등주의.
 깨진 거울에 굴절된 자신의 삶에서는 짓밟지 않으면 짓밟힌다는 생존경쟁의 논리만 남아있었다.
 
 고교시절 1등자리를 한번 빼앗기자 커피 캔 밑바닥에 주사바늘 구멍을 내고 물에 탄 설사약을 주사한 다음 밑바닥을 감쪽같이 막아 하교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사온 척 하나는 자신이 마시고 설사약을 탄 커피 캔은 라이벌 친구에게 건넸다. 다음날 시험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승리였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명석의 성공하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는 좋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핍과 과욕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명석에게 패배감을 안겨준 희만은 철저하게 부셔줘야 할 목표였다.
 
 ***
 
 행복 흥신소의 이준섭 사장이 김명석 마인테크 부사장에게 의뢰받은 내용은 정희만이라는 사람을 미행해 그가 만나는 사람들 중 안경처럼 생긴 특수 고글을 착용한 사람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사람 찾는 일에는 탁월한 그의 솜씨 때문에 의뢰가 곧잘 들어왔다. 사실 그는 과거 정보국출신의 요원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고 비록, 돈을 받지만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준 다거나 가출청소년이나 치매노인을 찾는 좋은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주변에 비밀리에 돕는 전현직 공무원들이 많았다.
 
 “여보세요? 형님.”
 “응, 준섭아 나다.”
 “형님 통화되시죠?”
 “왜? 또 누구 사람 찾는 거 부탁하려고? 아무리 좋은 일 한다지만 이런 식으로 정보 빼내가다가 잘못 꼬이면 뭐 되는 수가 있다. 우리 서로 조심하자.”
 “알아요 형님, 언제 소주한잔 해야죠?”
 “나 공무원이다. 꼬시지 마라.”
 “뒤처리 깔끔!! 제 신조 아닙니까?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비데 장사하냐? 나 바빠 할 말 있으면 빨리해라.”
 “다른 게 아니라. 의뢰받는 기업인에게 뭔가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요.”
 “그래? 뭔데?”
 “며칠 전 마인테크사 부사장에게 의뢰를 한 가지 받았거든요?”
 “마인테크? 뭐하는 회사냐?”
 “잘은 모르겠는데 게임을 만드는 회사인가 봐요.”
 “응 그런데?”
 “불법적인 일을 시키면서 2억을 주겠다고 하더라구요.”
 “뭐? 2억씩이나?”
 
 이준섭이 형님이라 부르는 김장호는 국가정보원 6급 공무원이다. 이준섭은 국가기관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잘한 도움을 얻곤 한다. 그리고 가끔씩 그들에게 요긴한 정보를 물어다주는 정보원노릇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탈이 생기면 나중에 더 큰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준섭이었다. 뺏어오라는 물건도 이상했지만 그가 제시한 액수만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은 음모가 숨어 있다는 촉이 온 것이다.
 
 
 # 23. 사건 개입
 
 아주 조그만 실마리도 놓치지 않아야하는 것이 정보를 다루는 기관 근무자들의 기본 사항이다.
 그런데 대기업 계열회사의 부사장이 일개 흥신소 직원에게 불법 사주와 함께 제시하는 금액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은 의심해 볼 구석이 있었다.
 김장호는 이준섭이 알려준 정희만의 신상자료를 기초로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내부전산망에 입력을 했다.
 결과는 의외로 흥미로운 사실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준섭에게 의뢰한 마인테크 부사장인 김명석과 정희만의 공통요소가 나온 것이다.
 
 “오호 이거 흥미로운데? 정희만이 사장으로 있던 정랩스에 김명석이 있다가 회사 부도로 망하고 몇 달되지 않아 김명석이 마인테크 부사장으로 취임이라!!”
 
 수사관특유의 눈썰미로 뭔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정랩스가 재설립된 뒤 이준섭의 흥신소에 김명석의 불법 의뢰가 들어 온 것이었다.
 아쉬울 것 없는 대기업 계열회사가 왜 이제 막 설립된 조그만 연구회사 사장의 뒤를 밟았을까 하는 꼬투리를 보이는 내용이었다.
 김장호의 눈에도 정희만은 예사 인물이 아닌 듯 보였다. 카이스트 출신에 MIT공대를 나온 수재이며 개발하려 했던 분야가 의료용 소프트 웨어였다.
 
 “게임회사가 의료기기 개발회사의 제품을 강탈하려 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정랩스에 관한 정보를 뒤적이다가 증권가에 떠도는 찌라시를 보게 되었다.
 
 “어라? 이거 때문이었나?”
 
 언어 오토마타.
 식물인간이 된 환자도 뇌파만으로 일반인들과 대화가 가능한 의료기기를 개발했다는 내용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희만 계좌에서 의료부품을 구매하기 위해 미국의 애쉬톤 사에 꽤나 큰 비용이 송금된 것과 마인테크의 김명석이 찾는다는 것이 바로 그 제품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매 할 수 있는 장비인데도 유독 그 제품을 빼내려는 것은 핵심기술이 들어있다는 것인가? 정말 이런 의료장비라면 그 핵심기술은 국가에서 지켜야하는 비밀 사항이 될 수 있겠군.”
 
 김장호는 이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님. 말씀하십시오.”
 “이준섭 너 마인테크사 김명석 부사장에게 얼마 받았냐?”
 “의뢰비 말씀이세요?”
 “의뢰비던 뭐건···.”
 “착수금 300만원에 일당 15만원씩 추가로 받고 일이 끝나면 잔금 200만원 받기로 되어있는데요.”
 “그쯤이면 됐다. 그만 빠져라.”
 “네? 형님 손 떼라는 말씀이세요?”
 “야! 이거 딱 봐도 뭔가 있다. 대신, 니가 할 일이 좀 있다.”
 “제가요?”
 
 전화를 받던 이준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꽃등심을 시켜 살짝 익히면 살살 녹는 것같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사라져 버렸다.
 
 “바다 괴기는 쫀득한 맛이라면 소고기는 녹는 맛이구먼.”
 “아버님 마음껏 드세요.”
 “우리 정 박사도 그만 굽고 얼른 먹어”
 “네. 저도 먹고 있습니다.”
 
 수영이 쌈을 만들어 희만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영의 어머니는 시집안가고 함께 살겠다고 했던 딸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푹 빠진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이제야 여자로서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흐뭇했다.
 소고기로 배불리 먹고 막걸리를 함께 마신 수영의 부모는 기분이 좋았는지 흥에 겨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되돌아가는 차안에 앉아있었다.
 
 희만은 식당에서 부터 자꾸 신경 쓰이는 뭔가가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운전을 계속해 수영의 부모를 민박집으로 모셔왔다.
 ‘또 누군가 우리를 미행하나?’
 
 희만은 바짝 긴장했지만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우려했던 사태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제품의 성공이 공식적인 사실이 세간에 퍼져 나갔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화인병원에 문 회장 아들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료계뿐만 아니라 상장을 기다리는 주식투자 정보통들에게는 대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기대 때문은 아니지만 정랩스 직원들은 모두 열심히 각자 준비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황인학은 연구실로 사용할 건물의 마무리공사와 희만과 수영이 함께 지낼 오피스텔에 필요한 가전제품과 가구 등을 준비했다.
 서민철 부장과 차현수 대리는 열심히 만들고 있는 병원내부용 언어오토마타 장비의 부품구매 비용을 추가로 더 낮출 수 있게 되었다.
 고글도 세트로 주문해 2천만 원 가량하던 것을 1800만 원 정도에 구매했고 슈퍼컴에서 메인 프레임 급으로 다운그래이드 하면서 지난번의 4500만 원에서 1천8백만 원으로 가격을 낮춰 제작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낀 돈을 황인학에게 송금했다. 정랩스의 직원들은 에이다를 키워내는 박수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소프트웨어의 가격을 낮추기로 했지만 화인병원에 납품 전에 한 번 더 협의하기로 했다.
 
 희만도 정랩스의 연구실과 오피스텔공사가 마무리되면 수영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했다.
 오늘로서 수영은 여수사회복지관의 일이 마지막이었다.
 아침식사를 끝낸 뒤 희만의 차를 타고 복지관으로 가기위해 모사금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희만과 수영이 차에 들어가 앉자 낯선 사내가 희만의 차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수영은 가슴이 덜컥했다.
 안 좋은 예감이 적중하는 것 같았다. 어제 희만에게서 보았던 빛의 아우라가 이것 때문이었는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어제 본 것이 이것 때문?’
 
 희만도 낯선 사내의 등장에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흥분하고 긴장하자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쭈뼛하니 서는 느낌이 들었다. 여차하면 사내를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가온 사내는 단 한명이었고 적의를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운전석 쪽으로 다가 온 사내가 손에 명함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려하자 수영이 말렸다.
 
 “희만 씨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괜찮아요. 수영 씨.”
 
 다가온 사내는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명함을 밀어 넣었다. 일단, 안심을 하라는 의미 같았다. 희만은 최대한 부드럽게 다가오는 사내를 경계하면서도 명함을 받아 들었다.
 ‘사설 경호, 사람 찾는 일, 어려운 일 모두 처리해드립니다.’
 ‘행복 흥신소 이준섭’
 
 “무슨 일이신가요?”
 “마인테크 부사장 김명석씨를 잘 아시죠?”
 
 순간, 희만의 미간에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그 양반 의뢰로 정희만 사장님을 미행했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사장님을 찾았다는 연락을 하자 제게 불법적인 일을 시키면서 거액의 돈을 제시하더군요. 사실, 제시한 액수가 거절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희만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에이다를 불러냈다.
 
 “에이다 이 사람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봐.”
 “네, 박사님.”
 
 에이다는 먼저 명함에 기록된 전화번호를 추적해 김명석과 통화한 사실을 찾아냈다. 그리고 어제 최종적으로 통화한 기록과 함께 통화내용을 확인했다.
 통신사의 기록보관실에 보관된 음성통화내용을 발췌해 따로 저장을 해두었다.
 그 내용에는 수영으로부터 장비를 빼앗아 오라는 명석의 제의와 함께 2억을 제시하는 명석의 목소리와 생각해본다는 대답이 있었다.
 그가 전화를 끊고 연락한 사람이 통신보안이 된 국가기관의 전화라는 사실과 정보수사관 6급 김장호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박사님 저 사람 말이 맞아요.”
 “고마워 에이다.”
 
 희만은 일단 수영을 출근 시켜야했으므로 차문을 열고 사내와 마주서서 말했다.
 
 “좋습니다. 이준섭 씨 우선 수영 씨를 출근시켜야하니 차를 몰고 따라오시지요. 이따가 저와 따로 이야기 합시다.”
 “좋습니다. 정희만 사장님”
 
 준섭이라는 사내는 씩 웃더니 자신의 벤 차량을 몰고 희만을 따라 붙었다.
 순순히 돌아가 자신의 차로 희만의 차를 따라붙는 것을 본 수영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희만 씨 지난번처럼 위험한 일이 생기는 거 아니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수영 씨 저 싸움 잘해요.”
 “네? 푸훗!!”
 
 어느 개그맨이 했던 대사라는 것을 알았는지 수영이 웃었다.
 차를 운전해 복지관에 도착한 뒤 수영을 복지관에 올려 보낸 다음 이준섭의 차량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내용들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함께 일했던 김명석이 자신과 동료연구원들을 배신한 뒤 정랩스의 부도가 생기고 자신은 이혼까지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는 내용과 우연한 계기로 회생의 계기로 어려운 난관을 해결했고 실제, 그 사례로 광주백합병원과 서울 화인병원의 식물환자가 그 장비를 사용하고 있으며 벌써 주문된 제품이 납품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희만이 가진 초능력으로 그들을 제압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박스컴을 빼앗으려 고용된 사람들이 왔던 부분은 뒤쫓던 차량이 추격하다가 전복사고를 일으켜 돌아갔노라고만 했다.
 
 “그러면 김명석이라는 자가 사장님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도용한 것이 사실이라는 말씀이죠?”
 “저는 그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증거자료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제가 개발한 프로그램 소스코드 내에는 암호화된 태그가 숨어있습니다. 슈퍼컴퓨터로 천년을 돌려도 풀어내지 못하도록 암호화 된 것입니다. 마인테크사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원본을 찾아보면 그 내용이 보일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원천기술을 보유한 사장님 쪽이 먼저 성공했다는 것이 신빙성도 있어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로 인해 정 사장님의 위치가 김명석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분명 뭔가 액션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을 내려 보냈을 수도 있고요.”
 “이준섭 씨 입장에서는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제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돈을 제시하더라도 저는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국가정보기관에서 마인테크사의 불법사실을 포착하고 수사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준섭 씨는 국가정보원의 일을 잘 아시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실은 제가 거기서 몇 년간 일을 했었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희만은 초능력의 힘을 키워 김명석을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고 그를 평생을 불구로 지내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김명석이 저질렀던 만행, 정보유출과 폭행 사주 등의 비리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랐다.
 김명석이라는 인간을 사회에서 매장 시켜버리는 쪽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공식적인 사건 해결이 더 깨끗하고 뒤탈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벌을 내리는 후속조치는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였다.
 
 “저는 수사관님의 요청으로 우선 사장님과 동행하신 아까 그 아가씨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김명석 사장이 뺏으려는 장비가 왜 굳이 그 아가씨가 사용하는 장비인가요?”
 
 한번쯤 의문을 가져볼만한 질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회사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수영 씨가 지닌 장비에는 마인테크사의 난제의 해결과 엄청난 미래를 보장해줄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아!! 그랬었군요. 마인테크사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인데 정 사장님이 해결의 열쇠를 쥐고 계신 거였군요.”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좋겠네요.”
 
 그제야 이준섭은 김명석이 거액을 제시하며 불법을 사주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김명석이라는 사람이 아주 못된 인간이네요?!”
 “네, 우리 회사직원들 모두가 그놈의 비리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우리직원들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좀 더 깊게 수사해보면 혐의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범죄 사실이 확실하다면 압수수색영장이 발부 될 것입니다.”
 
 점심때가 되도록 수영은 복지관 관장님과 여러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과 눈물의 환송을 받으며 복지관을 나섰다.
 그런 수영을 위로하며 차에 태우자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이준섭의 차가 앞서고 희만의 차가 그 뒤를 바짝 따라 가기 시작했다.
 
 “희만 씨 아침 그 아저씨 차에요?”
 “맞아요. 당분간 우리를 지켜주겠다네요.”
 “정말 저분이 그랬어요? 우릴 돕겠다구요?”
 “네, 저분은 원래 수사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인데 퇴직하고 사람 찾는 일을 하나 봐요. 불법적인 일은 안하는 사람이라 진실이 궁금했었나 봐요. 사실을 확인하러 나를 만난 거라네요.”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닌가 봐요.”
 
 사실, 희만은 이준섭이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위기 때라면 정희만 혼자서도 이미 해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보기관에서 먼저 냄새를 맡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하니 나름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 했을 때는 구체적인 사실을 증명해야하고 일이 커져버린 뒤에는 유성그룹의 계열사인 마인테크도 그에 상응하는 대응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소장 접수를 하지 않았는데 국가정보기관에서 먼저 사실 파악을 위해 정보망을 가동한다는 것은 정랩스에게 잘된 경우라 생각한 것이다.
 
 특별한 능력의 에이다와 초능력을 겸비한 정희만과 국가정보기관의 만남.
 둘 중 어느 쪽이 더 잘된 경우일지 알 수 없으나 두고 봐야할 일이었다.
 
 
 # 24. 못 보던 등급이다.
 
 수영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희만을 통해 들었지만 아직 그 가치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였다.
 지난번 희만이 돈 줘서 보내버렸다는 그 사람들의 경우도 단순하게 고가의 장비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이 하고 있는 장비를 뺏으려 하는 그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다.
 
 수영은 이제 내일이면 희만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겨야했다. 서울에 거처가 마련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제 희만도 한 달 가까운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야했다.
 
 “후~ 생각이 많아서인지 잠이 오질 않네. 희만 씨는 뭐할까?”
 그의 방문 창에는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서로 좋아하지만 함께 같은 방을 쓸 만큼은 아니었다.
 
 ‘희만 씨랑 그냥 안고 자면 안 될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희만의 방을 보며 수영이 생각했다.
 
 희만은 지금 뇌파의 신비한 영역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다. 인터넷에 좀 더 많은 자료가 있기를 바랐지만 에이다를 통해 검색한 의학계통의 논문 중에서 뇌파연구단계를 넘어선 초감각 능력에 관한 것들을 찾기 쉽지는 않았다.
 오래전 이야기를 재미삼아 써놓은 글과 초능력을 믿는 것은 ‘조현형 성격장애’로 몰아가는 글도 인터넷에 있었다.
 실제, 정신장애로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인터넷에도 초능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언급된 것 외에 과학적이고 자세한 내용들은 아예 없었다. 모호하게 접근을 막아서는 벽을 느끼는 대목이었다.
 
 “박사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었지만 뇌에 관한 의학계의 논문은 오픈되어 있는 반면 초능력에 관한 논문은 발표자가 있더라도 실제 논문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막혀 있다는 거야?”
 “각국의 주요 정보기관에서 관리하는 듯 합니다.”
 “각 나라 정보기관?”
 “네 박사님 초능력연구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과학자들의 국가로 논문을 찾아 가보면 어김없이 가로막혀 버립니다. 여러 대학의 논문실 뿐 아니라 미국 국제논문관리소 에서도 찾을 수 없네요.”
 “에이다 그럼, 우리나라도 비슷하다는 말이야?”
 “네, 미국처럼 기관이나 단체가 많지는 않지만 우리나라도 분명하게 어딘가가 관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희만 씨랑 그냥 안고 자면 안 될까?]
 수영에게서 전해지는 텔레파시가 희만의 머릿속에 울려왔다.
 
 “허허···.”
 “박사님 멘토님이 여러 생각으로 뒤척이시나 봐요.”
 “에이다도 느꼈어?”
 “제가 모를 리 없잖아요. 박사님 히힛.”
 
 수영이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에이다가 짓고 있었다. 둘이 같은 존재라더니 그런가보다. 수영의 마음이 복잡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수영에게 문자했다.
 
 - 수영 씨 잠이 안와요?
 - 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 저는 수영 씨 텔레파시를 읽어낸다고 했잖아요.^^
 - 정말요? ㅎㅎ
 - 잠 안 오시면 말동무라도 해드려요?
 - 그게 저··· ☞☜
 - 이상한 짓 안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그런게 아니라···.
 - 제방으로 오세요. 제가 갈까요?
 - 아뇨, 제가 갈게요.
 
 평소 수영의 장비를 점검하는 것으로 희만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익숙했다. 수영의 부모님은 잠드셨는지 불이 꺼지고 조용했다. 하지만 방문을 나서는 수영의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노크에 방문을 열어주자 큼지막한 토끼 베개와 미피가 그려져 있는 잠옷차림의 수영이 방문 앞에 서있었다.
 귀여운 모습의 수영을 보던 희만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왜···요?”
 “너무 귀여워서요. 어서 들어와요.”
 
 수영 그녀가 아직 처녀라는 사실 빼곤 서로 어려운 사이는 아니었다. 희만은 그녀와 첫날밤을 보내더라도 형식을 갖추고 좀더 근사한 곳에서 보내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 같은 집에서 살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늦은 시간까지 도란거리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 수영이 먼저 잠들었다. 잠든 수영의 장비를 조심히 거두어 머리맡에 두고 희만도 잠을 청했다.
 
 성인 남녀가 한방에 잔다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수영은 희만이 요구하면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책임한 남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새벽에 깬 수영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자신의 고글과 장비를 챙겼다.
 
 “수영 씨··· 벌써 일어났어요?”
 
 잠이 덜 깨어 갈라진 목소리의 희만이 말을 하자 수영은 집게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 ‘쉿’하는 모양을 했다.
 
 “더 주무세요.”
 
 그리고 희만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하더니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수영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은 닿을 때 마다좋았다.
 평소 아침엔 희만의 건너편에 앉아 식사하던 수영이 오늘따라 희만의 옆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다. 같은 방에서 동침한 사이라 그런지 서로에게 느끼는 어려움은 없었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딸의 모습이 섭섭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씽긋 웃고 말았다.
 
 “오늘 수영이랑 함께 올라갈 건가?”
 “네, 아버님 올라가 준비할 것도 많고 해서요.”
 “우리 수영이 자네가 잘 좀 보살펴주소”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 인자 둘이 알아서 잘 하것제.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영감.”
 “그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응께.”
 
 수영의 옷가지며 생활용품을 담은 큰 가방 두개와 수영의 어머니가 싸주신 밑반찬을 트렁크에 싣고 수영의 부모에게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엄마 나 갈게~ 자주 내려올게.”
 “응 그래. 수영아. 몸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어라.”
 “올라가겠습니다.”
 “운전 조심하게.”
 
 부모들과 떨어져 지내게 된다는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는 수영이었지만 희만을 보고는 이내 눈물을 닦으며 웃어보였다.
 수영의 부모들의 배웅을 받으며 희만의 차가 모사금 주차장을 지나 서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만의 자가용이 움직이자 멀찍이 기다리던 이준섭의 밴 차량이 앞장서 가기 시작했다.
 “우리 때문에 이준섭씨가 고생이 많구나.”
 “희만 씨 저분이 우리와 함께 서울로 가시는 건가요?”
 “그런 거 같아요. 이제 자신도 서울로 올라갈 거라면서 가는 동안 자기가 최대한 밀착해 경호하겠다고 했어요.”
 
 이준섭의 밴 차량이 마을 어귀를 벗어나 여수의 외곽으로 향하는 산길을 타고 달렸다. 희만의 차량도 밴을 뒤 따라 가기 시작했다. 출발한지 몇 분되지 않아 다리를 건너기전 이준섭의 밴이 비상점멸등을 켜더니 도로에서 갈라져 나가는 한적한 산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응? 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속도를 줄이고 따라가던 희만은 먼저가라는 뜻으로 생각했으나 곧이어 이준섭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준섭 씨 무슨 일입니까?”
 “이보슈 사장 양반. 그냥 가시면 이준섭이 이 친구 목숨이 위태로 워요. 알아 들어요?!”
 “당신들 뭐야?”
 “거 긴말 필요 없고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거요. 그것만 넘겨주면 이 친구 곱게 넘겨주리다.”
 “이준섭 씨가 안전한지 알려주시오.”
 
 한참 뒤에 이준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 사장님 그냥 도망쳐··· 악!”
 “아~ 이 새끼 하나 잡느라 애들이 개고생 했소. 당신 물건 건네지 않으면 이 새끼 죽여 버리고 당신 쫓을 테니까 도망가려면 가보시오.”
 “알겠소. 기다리시오.”
 
 아무래도 이준섭이라는 사내의 상태가 많이 걱정되었다.
 전화를 끊고 차를 이준섭의 차가 들어간 산길 쪽으로 틀었다.
 
 “희만 씨 무슨 일이에요?”
 
 옆자리의 수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걱정스러워 했다. 상황이 급박해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우선 수영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으라고만 했다.
 
 “수영 씨 너무 걱정 말아요. 제가 잘 처리할게요. 나오지 마시고 숨어서 기다리세요.”
 “네? 희···희만 씨 어쩌시려구요.”
 
 수영은 차문을 열고 나가려는 희만을 붙잡았다.
 
 “절대 내리거나 고개 들지 말아요. 알았죠?”
 
 만약, 그 사내의 말대로 이준섭의 상태가 위급한 상황이라면 무시하고 그냥 가서는 곤란했다.
 간밤에 김명석이 보낸 조폭들에게 이준섭이 당한 게 분명했다. 정보국 요원출신이라는 이준섭의 실력을 너무 믿었던 것이 탈이었다. 그리고 하루빨리 김명석을 찾아 반쯤 죽여 놓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잘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난번처럼 폭주하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미 흥분과 동시에 몸속을 흐르는 혈류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에이다 어제 이준섭 씨가 연락했던 수사관에게 이준섭 씨가 납치되었다고 전화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사님 폭주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알았네. 에이다.”
 
 차문을 닫고 내린 희만이 이준섭의 밴 앞 쪽으로 걸어갔다. 한적한 공간 아래쪽에 이준섭의 얼굴은 심하게 구타당해 결박되어 있었다. 새하얗게 날이 선 회칼을 이준섭의 목에 들이대져 있었다.
 
 “이준섭 씨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헉······ 헉···.”
 
 겨우, 희만을 알아보며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이준섭이었다. 이번 놈들은 지난번 온 녀석들보다 훨씬 더 험악한 놈들이었다. 이준섭을 잡고 있는 놈들도 심한 몸싸움을 겪었는지 입술이 터지고 얼굴에 멍든 자국이 보였다.
 그 상황을 보자 침착하려 애썼던 희만의 분노가 절정에 올라 버렸다. 폭주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준섭이 아니라면 정희만 자신과 박수영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놈들!!”
 “화~악!!”
 “흐 억!!”
 
 희만의 온몸의 털들이 송곳처럼 솟아오르면서 몸속에 잠겨있던 거대한 에너지의 실체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뭐··· 큭.”
 
 이준섭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던 일당들의 두목이 희만에 의해 순간 제압당해 공중에 떠오르면서 두 발을 바동거렸다.
 교수대에 매달린 죄수처럼 자신의 목을 잡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한 조폭들은 물론이고 제압당해 무릎을 꿇고 가물거리던 정신의 이준섭이 놀라 눈이 커졌다.
 
 “서···설마 저건!!”
 
 이준섭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엄청난 등급이다.’
 
 희만의 눈의 안광은 그늘진 산등성이 아침 그림자 아래서 불을 켠 듯 밝아 보였다.
 
 끼이익~ 깡!!
 
 이준섭의 목에 들이댄 회칼을 든 사내의 손에 들린 회칼이 조폭사내의 손에서 빠져 나와 공중에서 엿가락 휘듯이 둘둘 말아져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의 뇌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바닥에 엎드려!!”
 
 공중에서 떠오른 자신들의 형님의 모양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조폭들은 머리를 울리는 굉음같은 소리에 귀를 막아 보았다.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조폭들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뒤로 꺾이며 ‘까득’하는 소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악!!”
 “으아악!!”
 “악!! 내 손가락이!!
 
 이미 몽둥이와 손도끼 회칼을 놓친 조폭들이 뒤로 꺾여버린 자신의 오른 엄지손가락을 쥐고 아우성을 쳤다. 그때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내들의 팔이 꺾여나갔다.
 
 “바닥에 엎드리라고 했다.”
 우지끈!!
 “카~악!!”
 “으~~악!!”
 털썩
 
 여기저기서 지르는 비명소리가 이른 아침 산밭에 내려앉아있던 산비둘기가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처음 기세등등하던 사내들은 하나둘씩 모두 바닥에 납작하니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때 희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희만 씨 이제 그만해요.”
 “응?”
 
 희만을 부르는 그녀 목소리에 희만이 고개를 돌려 수영을 봤다.
 초감각의 힘에 사로잡혀있던 희만은 그제야 자신이 지면에서 한참을 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 25. 드러나는 능력들
 
 차에서 내린 희만이 수영에게 숨어있으라 말했지만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나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다쳤다면 그가 분명 사랑하는 자신의 남자일거라는 생각이었다. 두려워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수영에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러진 팔목을 잡고 쓰러진 낯선 사내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면에서 떠오른 채 등 뒤로 거대한 검붉은 아우라 날개를 펼친 익숙한 뒷모습의 남자 때문이었다.
 양쪽으로 펼쳐진 검붉은 아우라의 길이는 족히 3미터는 넘어 보였다.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던 수영은 차에서 내려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사내들의 손가락과 팔을 부러뜨리면서도 용서와 자비를 모르는 사람처럼 잔인하기만 했다.
 
 그녀는 희만에게서 나오는 아우라의 색이 검붉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내 그녀의 귀에 엎드리라 외치는 엄청난 사자후가 들려왔다. 악당이라 생각되는 조폭들이 마치 선량한 양민이 된 듯 바닥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희만 씨!! 이제 그만해요.”
 “응?”
 
 고개를 돌리는 희만의 눈이 수영과 마주치자 무서운 안광이 사라지고 점점 정상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수···수영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수영 씨··· 위험하니까 차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금 제일 위험한 사람이 희만 씨에요. 지난번에도 그 사람들 돈 줘서 보낸 것이 아니었군요.”
 “수영 씨··· 그게···.”
 
 에이다는 폭주하지 말라며 걱정했지만 내재된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고 말았다.
 희만을 바라보는 수영은 걱정과 슬픔의 눈으로 변했다.
 
 “희만 씨가 왜 이렇게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죠?”
 “수영 씨··· 수영 씨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희만과 수영이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아무감정 없이 그들의 뼈를 꺾고 굴복시키는 희만의 모습에 수영은 놀랐고 이해도 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그의 진짜 모습인지 믿기조차 힘들었다.
 수영과 대화하는 동안 희만은 성인의 허리높이까지 들렸던 몸이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와 섰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조폭무리는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희만 씨 언제부터 그랬어요? 저를 만나기 전부터였나요?”
 “수영 씨···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괴물 같은 사람은 아니에요. 수영 씨를 보호하려다 보니···.”
 
 희만은 수영이 자신을 괴물로 오해 할까봐 걱정이었다.
 
 “아니요. 당신은 제게 똑같은 희만 씨에요. 다만, 사람들을 해치는 잔인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해요.”
 
 그에게 걱정하며 다가가는 수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희만에게서 나타나는 특이한 빛의 모습은 이미 봤었다. 괴물 같은 사람이라도 그에 대한 느낌이 변하지 않았다. 장애를 안고 있던 자신을 편견 없는 눈으로 바라봐 주었던 희만처럼 말이다.
 수영은 팔을 벌려 희만을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는 것처럼 보듬어 안았다.
 수영이 희만을 안자 검붉은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던 희만의 아우라 색이 점차 밝은 백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박···사···님 들려요?”
 “박사님!!”
 
 그제야 에이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박사님 제 목소리 들려요?”
 “그래, 에이다 이제 들려.”
 “아휴~ 폭주하시면 큰일날 수 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멘토님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걱정했잖아요.”
 “아~ 미안···.”
 폭주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내재된 엄청난 에너지에 자신이 눌려버린 상황이 아쉽고 또 미안했다.
 “참, 에이다 수사관에게 알리라는 것은 어떻게 되었어?”
 “가까운 경찰에 신고하라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이준섭 씨 말로는 그 수사관이 지시했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무조건 경찰에 신고하더군요. 아마, 비공식적인 업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응, 그랬었군···.”
 
 희만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내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공포에 질린 눈으로 희만을 응시하고 있었고 결박에 묶인 이준섭은 그 결박을 풀어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희만이 이준섭을 향해 손을 뻗어 줄이 끊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투툭’하는 소리를 내며 줄이 터져 버렸다.
 이준섭은 반갑고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낯설어 하지는 않았다.
 거기 있는 사람들 중 희만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이준섭 같아 보였다.
 조폭 두목이 뺏어간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 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접니다. 네···네··· 일단은 해결 되었습니다. 현재 시그마 둘 상황입니다.”
 “상황··· 헬기··· 대기···.”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간간히 들리는 준섭의 통화 속에 이쪽으로 헬기를 보내겠다는 내용 같았다.
 
 준섭의 통화는 희만이 가진 초감각 능력을 두고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그는 결박이 풀리자마자 자신의 밴 차량으로 간 뒤 타이 랩을 꺼내 바닥에 엎드린 조폭들을 묶으려 했지만 희만이 제지했다. 그들은 이미 싸울 의지를 잃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것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자신들의 뼈를 꺾어버리는 남자에게 대항할 의지도 함께 꺾여버린 것이다.
 
 그늘진 산 응달이라 추웠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조폭사내들을 한쪽으로 모아 앉히고 주변의 나뭇가지를 모아 쌓은 뒤 자신의 차에서 경유를 꺼내 나무에 뿌리고 모닥불을 피웠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현재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될 것입니다.”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임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한 뒤 희만 쪽으로 다가왔다. 지쳐 쓰러질 것 같았던 준섭은 희만이 상황을 역전시켜놓자 온몸이 상처투성이 임에도 즐거운 모습이었다.
 
 “사장님이 이능력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사장님 같은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희만을 안고 있던 수영이 한쪽 팔을 풀었다.
 이준섭의 엉망인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셨네요.”
 
 수영이 이준섭의 몸을 살피다가 옆구리 쪽에 칼끝에 찍힌 상처로 조금씩 흐르는 피를 보았다.
 
 “세상에 피가 계속 흘러요.”
 
 수영이 놀라며 이준섭의 상처를 살폈다. 움직일 때 마다 조금씩 피가 새어나오는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지혈하려 했다.
 수영의 손이 이준섭의 상처에 닿자 희만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던 밝은 빛의 가루가 수영의 손끝을 타고 이준섭의 옆구리 상처로 흘러들어갔다.
 
 그 모습은 수영과 에이다에게만 보이는 현상이었다.
 
 “박사님, 밝은 색 아우라가 멘토님을 통해 이준섭에게 흘러들어가고 있네요.”
 “그래? 그것에 따르는 다른 반응이 있어??”
 “글쎄요. 아직은··· 자···잠깐만요.”
 
 수영과 에이다가 동시에 놀라는 소리와 동작을 했다.
 칼에 찢겨진 옷 속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물면서 맨살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희만 씨···.”
 
 수영은 놀라는 눈으로 이준섭의 상처를 다시 살펴보았다.
 
 “상처가 회복되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놈들이랑 한바탕하느라··· 저렇게 많은 숫자가 몰려오리라 생각을 못했습니다. 단순하게 수영 씨의 물건만 뺏는다면 많아야 4명일 거란 생각을 했는데, 김명석 그 인간이 저까지 처리하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네? 정말이세요?”
 “제가 그놈이 제시하는 조건을 거절했거든요.”
 
 희만은 김명석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우라의 세기가 순간적으로 더 커지며 색이 더 짙어지려 했다. 수영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희만을 진정시켰다. 수영이 희만의 오른손을 깍지끼운 채 붙잡고 있었다.
 
 희만은 수영이 자신을 안정시키며 위로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지난번 용칠 일당에게 얻어맞은 어깨 멍자국이 깨끗하게 나았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수영에게서 대다수의 능력이 희만에게 전이되었지만 일부 남은 초감각적인 능력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이다.
 에이다도 그 가능성을 예측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수영에게 존재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었다.
 
 희만과 수영 그리고 이준섭은 아침 9시30분경 여수로 향하던 도로가 외진 산밭에서 큼지막한 사고를 당하고 1시간가까이 기다리자 Bell 206 산림청 헬기 두 대가 준섭이 불러준 좌표대로 도착했다.
 
 “웬 산림청 헬기가 두 대씩이나···.”
 “정 사장님 놀라지 마세요. 저건 다 위장입니다.”
 “네?”
 “국정원이라고 써 붙이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아···.”
 
 이준섭의 얼굴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처음만큼 강렬한 아우라는 아니지만 희만의 밝은 아우라가 수영을 통해 곁에 서있기만 한 이준섭에게 작용하면서 얼굴과 몸 곳곳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스힐(Mass Heal)입니다. 제가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하하하”
 “매스힐이요?”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며칠 걸리지만 그보다 더 빨리 치료하는 능력자들이 있죠. 단계에 따라 큐어라고 하고 그보다 더 윗 단계는 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매스힐은 즉시, 다수의 대상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엄청난 능력이죠. 대다수 이능자들도 매스힐러는 평생동안 만나보기 힘들죠.”
 “준섭 씨는 어떻게 그런 내용을 잘 알고 있죠?”
 “예전에 국정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는데 저는 그들의 일처리를 수습하던 일반 요원이었습니다.”
 “그들이라면··· 초능력자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자세한 사항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끼리 서로 ‘그들’ 또는 ‘사원’부르는 사람들 중 정 사장님 같은 분들이 간혹, 섞여 있습니다.”
 “간혹이라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요원들 중에서도 하급 요원들은 기억을 삭제 시켜버리니까요.”
 “별로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군요.”
 “아마 저놈들도 그걸 당할 것입니다.”
 
 별로 듣기 좋지 않다는 말을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기억에서 자신들이 삭제된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했던 괴물 같은 행동들이 사라져 주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준섭 씨,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 만나게 될 사람들은 무조건 사장님 편일 것입니다.”
 “네? 무조건이라뇨?”
 “만나보시면 알 것입니다. 나중에 서울에서 뵙죠. 높은 분 만나보고 저는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네? 아니 먼저 가신다구요?”
 “저보다 먼저 도착하실 겁니다. 하하하.”
 
 헬기의 문이 열리자 40대 중반의 뿔테안경을 쓴 남자가 이준섭에게 걸어와 악수하고 대화를 주고받더니 희만과 수영 쪽으로 눈길이 향했다.
 헬기에서 내린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조폭들을 일으켜 세우고 한쪽으로 데려가 뭔가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뿔테안경의 남자가 이준섭의 한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린 뒤 희만이 서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희만과 수영은 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어가는 것인지 약간 걱정스럽고 궁금했지만 중년의 남자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희만 앞에 다가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홍민수라고 합니다.”
 “아··· 네”
 ‘한울 엔터테인먼트 국장 홍민수’
 
 홍민수라는 사람이 건넨 명함에는 어처구니없는 문구가 보였다. 한울 엔터테인먼트라니···
 희만과 수영은 받아든 어이없는 명함을 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홍민수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전화번호를 드리기 위해 만든 명함이구요. 저는 국가정보원 제 5국에 근무하는 홍민수 국장입니다.”
 “네···.”
 
 희만은 자신의 기억에 3국까지는 들어본 듯 했지만 5국은 또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직원이 사장님의 차를 서울로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 헬기로 가시죠.”
 “제의는 감사하지만 저희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남아서 저 사람들과 함께 경찰 조사에 응하시면 더 많은 시간이 허비되고 지치실 겁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선생님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국장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뼈를 부셔놓은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이며 어찌되었건 지금은 가해자가 돼 버린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희만 씨 괜찮을까요?”
 “걱정 마십시오. 안전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희만의 차키를 넘기고 국장과 함께 헬기에 오르자 아침부터 기분 나쁠 정도로 짙은 검은색 썬 글라스를 쓴 여성한명이 헬기의 문을 닫으며 올라와 앉았다.
 그녀는 희만과 수영에게 헤드셋을 씌워주었다.
 헤드셋을 쓰는 잠깐 동안 헬기는 산꼭대기보다 더 높이 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북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수영은 낯선 그 상황 때문인지 희만에게 더 바짝 달라붙었다. 수영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때 에이다가 희만을 불렀다.
 “박사님.”
 “그래 말해. 에이다.”
 “멘토님께서 여자요원을 보시면서 긴장하시네요.”
 “왜? 그다지 무서워 보이지는 않는데.”
 “일단, 수영님의 시각으로 보여드릴게요.”
 “응 그래.”
 
 수영이 바라본 검은색 선글라스의 여성은 몸 전체가 짙은 군청색의 아우라가 몸 주변을 엷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검정색에 가깝게 보이는 그 빛 때문에 희만이 내뿜었던 검붉은 빛과 비슷해 보였다.
 수영의 생각은 그 여자도 희만과 마찬가지로 무섭게 변하는 초감각의 능력자가 아닌지 두려웠던 것이다.
 
 <『초감각 지배자』 2권에 계속>

댓글(4)

행운의잔    
이책 대여는 안하나요? 3200 원 부담스럽네요..
2017.01.20 05:53
철도    
수표는 당일 송금안될텐데
2018.05.11 07:47
ps****    
1-1 재밌누
2020.07.07 00:31
[탈퇴계정]    
초감각이라는 소재는 좋아요, 소설의 시작 무난해요, 언어 오토마타의 이은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줄거리는 무난해요, 쥔공이 공대 출신 연구원? 연구만 해서 세상물정 외 여러가지 생각이 짧을수는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이 짧아도 뒤통수 맞고 자살할려다 회복해놓고 연구 결과물의 대해서 조심성은 1도 없음? 여기저기 소문 다나고 국정원까지? 무료1권 후로 유료 돈주고 보기 망설여짐.
2020.07.1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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