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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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홀릭 1권 (1)

2016.04.21 조회 15,014 추천 176


 * Prologue
 
 
 
 우르르르릉!
 뇌우雷雨가 몰아쳤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먹구름에 가려졌고, 그 사이로 시허연 번개가 용의 흔적을 남기듯 넘실거렸다.
 -레이드에 참여하셨습니다.
 -레이드가 종료되기 전까지 해당 지역을 이탈할 수 없습니다.
 유저들이 잔뜩 모여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서로에게 칼질을 못 해 안달이 났던 3대 길드가 한자리에 모이기에 그저 크게 한판 붙겠구나 싶었다. 한데 놈들은 이 평화롭기 짝이 없는 백두산 천지에서 청룡을 소환했다. 아니, 놈은 반쪽짜리였다. 용이 되어 승천했어야 하거늘, 저 미친놈들이 신령한 존재의 역린을 건드렸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눈깔이 희번덕거렸다.
 3대 길드의 초대형 레이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달 초, 저들은 터키로 넘어가 아이언 드래곤 티아메트를 사냥했다. 티아메트는 수메르문명부터 살아온 고룡이었으나, 그리스의 레드 드래곤 샐러맨드라와의 결전에서 드래곤 하트에 금이 간 상황이었다.
 한국, 일본, 중국의 대표 길드가 몰아닥치자 티아메트라 할지라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대 길드는 마력의 원천이라 불리는 드래곤 하트를 거머쥐는 데 실패했다. 마지막 순간, 티아메트가 마력을 폭발시키는 과정에서 드래곤 하트가 파괴된 것이다.
 이후 3대 길드는 아이언 드래곤 티아메트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뼈Dragon-Bone와 가죽Dragon-Skin을 차지하고자 저들끼리 혈전을 벌였다. 유저들은 3대 길드가 다시금 연합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확신했고, 나 역시도 그들과 같은 평가를 내렸었다.
 한데 모두의 예상이 깨졌다. 3대 길드는 한곳에 모여 여느 때처럼 치고받고 싸우는 대신, 승천하기 직전의 청룡을 공격했다.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노린 것이 분명했다.
 우르르릉!
 레이드 구역으로 규정된 광범위한 땅에 벼락이 떨어졌다. 줄기줄기 쏟아진 뇌우 기둥은 마치 하늘에 사는 어부가 육지에 거주하는 모든 것들을 낚으려고 흩뿌린 그물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것은 레이드 구역 끄트머리에서 덜덜 떨고 있는 내게도 내려졌다.
 -뇌화보갑雷火寶匣의 내구도가 42% 하락했습니다.
 유니크 아이템인 뇌화보갑이건만, 비껴 맞은 벼락 한 방에 내구도가 58%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저, 저게 무슨······.”
 청룡의 뇌우가 휩쓸자 전기 저항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 대거 목숨을 잃었다. 설령 저항 수치가 높다 할지라도 체력이 부족한 자들은 강제 로그아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체력이 높은 전사들은 버텨 냈으나 사제와 마법사는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범위 전류 공격은 저들의 계산 밖이었을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따앙! 따앙! 따앙!
 -뇌화보갑의 내구도가 1% 향상되었습니다.
 -뇌화보갑의 내구도가 1% 향상······.
 -뇌화보갑의 내구도가······.
 뇌화보갑 같은 유니크 아이템을 수리하려면 특별한 아이템이 필요하다. 청룡의 서식지로 알려진 백두산 천지에 찾아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뇌전의 기운이 실린 벽력석霹靂石을 채광하기 위함이었다.
 -벽력석이 파괴되었습니다.
 -재료가 부족합니다.
 뇌화보갑의 내구도가 72%에서 멈췄다. 벽력석의 내구도가 0이 된 까닭이었다. 본래는 벽력석으로 뇌화보갑과 세트를 이루는 뇌화투구를 만들 심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존이 우선이었다.
 카앙! 카앙! 카앙!
 곡괭이를 휘둘러 은은한 빛을 발하는 화강암을 두들겼다.
 -단단한 돌멩이를 습득했습니다.
 -벽력석을 습득했습니다.
 -채광에 실패했습니다.
 채광 스킬을 마스터했음에도 벽력석을 캐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금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다. 어찌어찌 벼락 한 방 정도는 버텨 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3대 길드가 청룡을 사냥하는 즉시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저들의 꼬라지를 보아하니 청룡을 잡기는 글러 먹은 듯했다. 청룡은 여전히 팔팔한 반면 대부분의 사제를 잃은 전사들은 치유 마법 대신 포션에 의존해서 부족한 HP를 채우고 있었다.
 ‘젠장, 퀘스트 하나만 해결하면 전설급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데!’
 가상현실 게임 운명Destiny이 시작된 이래로 전설급 아이템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용급의 몬스터가 전설급 아이템을 흘린다는 설도 있었으나, 여태껏 공개된 전설급 아이템은 북웨일즈의 거인을 사냥하고 나온 엑스칼리버Excalibur가 유일했다.
 전설급 아이템을 제작하는 즉시 돈방석에 앉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유일무이한 전설급 아이템 엑스칼리버만 하더라도 세계 3대 갑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중국 량원건의 친손자 량즈중이 32억에 사들여 회자되었다.
 무수한 가상현실 게임이 난립했으나, 운명은 세계 가상현실의 표준으로 손꼽혔다. 안정된 서버 운영과 밸런스, 그리고 전 세계의 설화를 담은 스토리텔링 덕분이었다.
 뇌화보갑과 뇌화투구를 망태 할아버지에게 전해 준다면 삼신할머니를 소환할 수 있다. 삼신할머니에게 ‘삼신의 모루’를 받는 즉시 나는 전설급 아이템을 만들어 낼 자격을 갖추게 된다. 삼신할머니에게 선물로 줄 생불꽃도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3대 길드 놈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우르르르릉!
 뇌우가 몰아닥쳤다. 거센 빗줄기와 함께 쏟아진 벼락은 이전보다 훨씬 두꺼워 보였다. 눈앞이 번뜩였다. 온몸이 저릿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강제 로그아웃하겠습니다. ······로그아웃 실패.
 “컥!”
 쩌릿했다. 실제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말이다.
 
 
 
 * Chapter 1
 
 
 
 가물가물한 시야에 반투명한 유리가 얼핏 보였다. 머리가 저릿했다. 뭐가 잘못됐는지 머리에 쓴 헬멧에 전류가 흐르는 듯 간헐적인 저릿함이 느껴졌다. 가상현실 게임 접속기를 벗으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어려웠다. 무력했다. 나에게만 몇 배의 중력이 가해진 것 같은 무기력함이었다. 괜스레 억울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나?’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약속이 있긴 했지만, 3대 길드 놈들이 설쳐 대는 통에 ‘운명’에서 오랜 시간 체류하지도 못했다. 피로했고, 그래서 눈을 감았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에는 나를 억누르던 중력이 조금 느슨해졌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고, 습관처럼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뭐지?’
 컴퓨터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TV를 켜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약간의 냉기가 느껴졌다. 냉동실에 담긴 냉동식품에서 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정전인가?’
 비칠,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가상현실 게임 운명을 하던 중이었고, 청룡이 쏟아 낸 괴랄한 벼락에 맞아 사망했다. 아니, 죽지 않았다. 사망했다면 광장으로 자동 이동되었어야 했다. 일부 아이템과 경험치를 잃은 채 말이다.
 “오류······인가?”
 오류가 발생했다는 안내 메시지를 들은 기억이 났다. 꿈이 아니었다.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 강제 로그아웃에 실패했다는 안내음까지 떠올렸다. 그 직후에 찾아온 통증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26년의 생을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격통이었다. 그 어찔한 고통을 되새기려 하자 정말로 머리가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다행히 배터리가 남아 있었고, 통신도 가능했다. 멈춘 것은 전기 관련 시설뿐인 듯했다.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았더라면 침대 위로 올라가 펄쩍 뛰었을 것이다.
 
 ······가상현실 게임 운명의 개발사인 (주)시니어 건물에 벼락이 네 차례 연거푸 떨어졌다. (주)시니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운명의 데이터가 저장된 서버가 망가졌으며 복구를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중국에 위치한 백업 서버의 데이터를 가져와 복구 작업을 실시하려 했으나, 게임 가동에 필요한 메인 시스템이 본사에 위치한 탓에 당분간 가상현실 게임 운명의 운영은 어렵게 되었다.
 
 “제기랄!”
 전설급 아이템 제작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온갖 값비싼 아이템으로 치장한 만렙 전사 캐릭터마저 내팽개치고 유저들 사이에서 노가다 캐릭터로 불리는 대장장이를 택한 것도 전설급 아이템 제작의 비밀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삼신의 모루, 우마왕의 망치, 에이빈의 설계도.
 세 가지를 모으고자 북유럽과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에이빈은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천재 대장장이였고 지그프리트의 양아버지였으며 명검 ‘발뭉’을 제작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즉, 이 설계도대로 아이템을 제작한다면 명검 발뭉을 거머쥘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전설적인 드래곤 슬레이어인 지그프리트의 명검인 만큼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 기대되었다.
 우연히 에이빈의 설계도를 얻은 이후 우마왕의 망치를 찾기까지 1년을 허비했다. 이후로도 삼신의 모루라는 아이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몇 달이 소요되었고, 그것을 획득하는 데만도 적잖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그 시간을 허비할 수만도 없었다. 대장장이 스킬을 마스터해야 하는 까닭에 쉴 새 없이 아이템을 제작하여 장인의 반열에 들어섰다.
 그러는 동안 한때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유저들이 길드를 이끌면서 드래곤이나 용을 잡았다. 배가 아팠다. 굳이 제작 스킬을 익히지 않아도, 극강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만으로 전설급 아이템을 획득할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태껏 열네 번의 레이드가 있었으나 전설급 아이템이 발견된 것은 단 한 번에 지나지 않았다. 전설급 아이템만 제작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이 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고지를 코앞에 두고 사고가 났다. 운명 홈페이지에 들어가려 했으나 먹통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난리도 아니었다.
 운명의 유저가 1억 명을 넘겼다고 했다. 2년 전 ㈜시니어에서 244개국의 1억 명이 넘는 유저가 3억 개의 캐릭터를 만들어 플레이했다고 공식 발표했으니, 운명의 인기가 한풀 꺾였다 할지라도 당시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듯했다.
 “이 잡것들이 피뢰침 하나 제대로 설치 못 해서는······.”
 커뮤니티 게시판에 욕설을 적으려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조금은 풀릴 듯했다. 한데 무기력했다. 스마트폰을 오래 들여다봐서 그런지 눈이 침침했다.
 “하아~.”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질어질했다. 뭔가 이상했다. 혹여 벼락의 영향이 내게도 미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시니어 본사에서 우리 집까지 15km는 넘게 떨어져 있다.
 ‘게임을 너무 했나?’
 나른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을 들어서 보니 어째 좀 앙상했다. 아니, 뼈에 가죽을 덧씌운 느낌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무성했던 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있긴 한데 솜털이었다. 모공도 좁아진 느낌이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손가락이 닿은 부분이 붉어졌다가 하얘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마땅히 있어야 할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손금이······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금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손금이 없었다. 손등과 손바닥에 차이가 없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미쳤나?’
 손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다른 것이 보였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아이콘?”
 시야 하단과 좌우에 늘어선 아이콘, 그리고 좌측 상단에는 내 사진과 함께 1이라는 숫자와 2개의 막대가 보였다. 하나는 붉은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란색이었다.
 “운명?”
 가상현실 게임 운명의 UI(User Interface)였다. 게임에서나 보여야 할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니 내가 아직 가상현실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었다. 가상현실 게임이 발전했다 할지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은 남아 있다. 가장 큰 차이는 통증이었다.
 “아파······.”
 운명에서 느끼는 고통은 기껏해야 살짝 꼬집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 정도 두통을 겪는 상황이라면 자동 로그아웃 시스템이 작동해야 했다.
 손을 뻗어 상태 창 아이콘을 클릭했다.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양새였지만 혹시나 했던 일이 벌어졌다.
 “여, 열렸잖아!”
 
 이름 : 다크
 레벨 : 1(0%)
 직업 : 견습 대장장이
 종교 : 없음
 고향 : 대한민국 (체력 +5%, 지식 +5%)
 HP : 100/100
 MP : 100/100
 능력치 : 힘 10 민첩 10 체력 10 지혜 10 지식 10
 명성 : 0
 스텟 포인트 : 5
 스킬 포인트 : 1
 
 보조 캐릭터라고는 하나 최고 레벨인 100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내 레벨은 1이었고, 직업도 초기화되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헛것을 보는 것뿐이야.’
 게임 속 캐릭터까지 초기화된 것은 아닐 터였다. ㈜시니어의 보조 서버가 중국에 있다고 하니, 그곳에 있는 데이터를 복구한다면 내 다크 캐릭터의 능력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게 게임 중독인가?’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게임 중독자 중에서 상태가 심각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헛것을 본다고 했다. 나도 종종 헛것을 봤지만, 지금처럼 오랫동안 뚜렷하게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스킬도 초기화된 건가? 아예 사용할 수 없게 막은 것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직업 스킬과 보조 스킬이 목록에 표기되었으나, 그중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스킬은 다섯 가지뿐이었다. 그마저도 대장장이 캐릭터를 시작할 때 지급받는 기본적인 스킬이지, 내가 애써 획득한 상급 스킬은 봉인되어 있었다. 스킬 레벨이 1로 재설정된 것은 물론 몇 차례 승급했던 스킬마저도 하향 조정된 채 말이다.
 인벤토리를 열어 봤다.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몇 가지 아이템이 있었다.
 ‘오리하르콘과 아다만티움, 아다만타이트, 장인의 망치, 그리고 생명석 3개. 모두 파괴 불가 옵션이 붙어 있는 아이템이로군.’
 다른 아이템과 다르게 따로 떨어진 인벤토리 박스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불그스름한 보석이 담겨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석이었다.
 생명석은 매매가 불가능한 아이템이다. 생명석은 유저의 생명을 의미한다. 유저가 사망할 경우 생명석 하나가 소멸된다. 만약 생명석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사망할 시에는 캐릭터가 영구 사망하게 된다. 되살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신관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이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생명석은 보스급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면 획득할 수 있고, 퀘스트를 통해서 얻을 수도 있다. 최대 3개까지만 소지할 수 있다는 한계를 제한다면 생명석이 없다고 벌벌 떨 일은 드물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살인마에게 찍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레벨이 부족하여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장인의 망치를 꺼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역시나 싶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다른 것을 꺼내 봤다.
 “헉!”
 갑작스레 나타난 은색 광물을 잡으려 했다. 그 육중한 무게감에 놀라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오리하르콘을 양팔로 받아 내는 데 성공했고, 그 자세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마, 말도 안 돼!”
 허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정교했다. 그만큼 내가 가상현실 게임에 푹 빠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내가 아무리 미쳤어도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상현실 게임이 거듭 발전했다지만 현실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오감 중 후각만이 현실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을 뿐, 나머지 4개의 감각에서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한데 지금은 현실과 가상을 구분 짓던 어색함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리하르콘을 인벤토리에 넣어 봤다. 허공에 나타난 가로세로 다섯 칸의 공간에 오리하르콘을 넣겠다고 생각한 즉시 그것이 사라졌다. 대신 인벤토리에 오리하르콘 덩어리가 작게 표시되었다.
 “······일단 한숨 자자.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되돌아올 거야.”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피로했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몸을 뒤척이며 억지로 시간을 보냈고, 어느 순간엔가 까무룩 잠들 수 있었다.
 
 
 
 현실이었다. 가상현실 게임 운명이 현실로 넘어온 것이다. 심지어 이것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안내음이 들린다고?’
 신화길드 소속 사제 시온이라는 사람이었다. 깨어 보니 그도 나처럼 눈앞에 가상현실 게임 운명의 아이콘이 보였다고 했다. 나처럼 레벨이 1로 초기화된 채 말이다. 스킬을 쓰려 했으나 ‘신이 존재하지 않아 신성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안내음이 들렸다나?
 이 이야기를 대체 어디까지 믿어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다른 유저들도 이 글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연이어 쏟아지는 항의 글에 묻혀 버린 것이다.
 ‘나 말고도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또 있다는 건데······.’
 가능성이 높은 것은 레이드에 참여한 3대 길드의 길드원이 나와 같은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천룡의 뇌우에 맞은 자들에게 게임 속 능력이 전이되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고, 나는 이내 도리질을 쳤다.
 ‘말도 안 돼.’
 부정하려 했으나,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인벤토리가 있었고 거기에서 3개의 광물을 꺼낼 수 있었다.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강제 로그아웃을 당했을 당시의 상황을 알아봤다. 네 번째 벼락이 떨어지고 4시간 남짓이 흘러서인지 사건을 정리한 기사가 몇 개 올라와 있었다.
 뇌우가 몰아닥쳤다. 시간당 90mm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 전역이 아닌 한 지역에 집중된 뇌우 스콜이었다. 검은 비구름과 강수, 그리고 번개를 동반한 스콜이었다.
 거리는 삽시간에 물에 잠겼다. 차량이 떠올랐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빌딩이 밀집된 지역이었으며 휴일이라 출근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실종자가 2백 명이 넘었다. 특히 물에 잠긴 지역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2차 피해가 급증했다. 정부는 재난 구역을 선포하는 한편 스콜이 잦아드는 즉시 구조대를 파견했다.
 벼락을 연거푸 네 번이나 맞은 ㈜시니어 빌딩의 서버가 망가졌다. 단순히 유저 데이터만 날아간 것이 아니라 게임을 운영하는 시스템이 파괴되었다. 운영 재개는 불가능했고, 이 사건으로 보험업계는 사상 최대 규모의 보험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보험사가 파산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이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 능력이 생긴 것 같다고 떠들어 대는 건 미친 짓이겠지?’
 게임 데이터가 날아갔다며 항의하는 유저들의 작태가 구설수에 올랐다. 자연재해로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이 희생된 상황에서 그깟 게임 데이터가 문제냐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종종 올라오던 게임 능력에 관한 글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어쩌면 다들 작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혹시나 해서 운명에 접속하려 했으나 접속 자체가 불가능했다.
 꾸르르릉.
 -공복도가 2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음식을 섭취해 주십시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상황을 상식과 논리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은 사는 것이 먼저였다.
 서랍장에서 3분 카레와 즉석 밥을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이보다 뛰어난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레토르트식품이 넘쳐 났지만, 나처럼 가난한 취업 준비생에게는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카레도 감지덕지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공복도 52가 채워졌다는 안내음이 들렸다. 실제로도 약간 허전한 감이 있었다.
 무시하고 지낼 수도 있었다. 까짓것 게임 안내 창 따위 상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한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힘이 없어.’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하루 종일 게임만 하면서 폐인처럼 지냈다 하나 이 정도로 쉽사리 피로를 느낀 적은 없었다.
 어쩌면 초기화된 게임 능력치가 내 신체에 적용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론이었지만, 내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사실 여부를 확인해 봐야 했다.
 “관찰.”
 -관찰 모드를 시작합니다.
 견습 대장장이가 쓸 수 있는 기본 스킬은 다섯 가지다.
 관찰, 채집, 채광, 벌목, 제작.
 이 중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스킬은 관찰뿐이었다. 기초 제작을 하려면 도구와 재료가 필요하고 나머지는 산과 들, 광산에 가야만 써먹을 수 있다.
 ‘기분 탓인가?’
 어째 시력이 좋아진 것 같았다. 미미한 차이였지만 주변 사물들이 눈에 잘 들어왔다.
 지긋지긋하게 봐 온 공간이었다. 8평짜리 좁다란 원룸에 있는 것은 싱크대와 침대, 작은 책상과 의자, 화장실이 전부였다. 한데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물품들 위로 소복이 쌓인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들이 영 거슬렸다.
 관찰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MP가 서서히 줄어들었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안내음이 들렸다.
 -관찰 스킬 레벨이 2가 되었습니다.
 ‘눈이 좋아졌어!’
 큰 차이는 아니지만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매일 가상현실 게임에만 몰두하느라 시력이 상했던 터다. 사실 안경을 써야 했으나 귀찮기도 하고, 시력이 점점 더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안경 구입을 미뤘다. 지금은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처럼 시야가 환했다.
 “상태 창.”
 
 이름 : 다크
 레벨 : 1(4%)
 
 큰 폭은 아니었으나 경험치가 조금 올랐다. 전사나 마법사, 궁수 같은 기본 직업과 달리 보조 직업을 지닌 캐릭터는 스킬 레벨을 높이는 것만으로 경험치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관찰 같은 공통 스킬 레벨을 올려 봐야 획득하는 경험치는 크지 않다. 제대로 된 레벨 업을 경험하려면 대장장이 직업 스킬 레벨을 향상시켜야 했다.
 일단은 가장 안전한 관찰 스킬을 높이기로 했다. 스킬을 마스터하려면 레벨 10까지 올려야 하고, 레벨이 오를수록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스킬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관찰 스킬 레벨이 3이 되었습니다.
 -레벨이 향상되었습니다.
 5시간 가까이 눈을 부릅뜬 결과 관찰 스킬 레벨을 3까지 올릴 수 있었다. 가만히 눈만 뜨고 있다고 레벨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살피거나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스마트폰 설명서와 졸업 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대학교 전공 서적을 훑어봤다.
 상태 창을 확인해 보니 레벨이 2가 되었고, 스텟 포인트 5와 스킬 포인트 1이 추가되었다.
 체력과 힘에 각각 5씩 투자했다. 체력을 높이면 HP를 향상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움직여도 저하되는 체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힘은 근력을 높여 주는데, 해머를 휘두르며 철을 제련해야 하는 대장장이에게는 기본이 되는 능력치다.
 
 능력치 : 힘 15 민첩 10 체력 15 지혜 10 지식 10
 
 ‘기분 탓일까?’
 아직까지도 작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피로도가 조금은 가신 느낌이었다. 레벨이 오르면서 신체 능력이 최상의 상태로 리셋된 까닭일 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의 능력이 현실에 적용된다는 것이 납득되질 않았다.
 -전화 왔숑! 전화 왔숑!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제야 저녁 약속이 떠올랐다.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었고, 서두른다 해도 약속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듯했다.
 -박민기! 어디야!
 전화를 받자마자 성원이의 괄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반갑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을 내비칠 때가 아니었다.
 “다, 다 왔어.”
 -웃기시네. 네 목소리 엄청 후달리거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크게 떨린 것을 나도 느꼈으니 말이다. 전화를 받으면서 눈알을 굴렸다. 하루 종일 집 안에 배치된 물품을 살폈기에 무얼 입고 외출할지 대강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10분 준다. 늦으면 오늘 술값은 네가 내는 거야.
 “야!”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난다고 멋 부릴 시간조차 없었다. 집 앞에 나갈 때 입던 옷을 고스란히 걸친 채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나는 당혹했다. 하필 이럴 때 옆집 사는 연희 씨와 마주칠 줄이야!
 연희 씨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옅게 화장한 듯 청초한 모습이었으나,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하나 걸친 그 모습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한 뒤 곧장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다행히 약속 장소는 집에서 가까웠다.
 ‘젠장! 벌써 숨이 차네.’
 1백 m도 안 뛰었건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릎을 양손으로 부여 쥔 채 숨을 헐떡였더니 거짓말처럼 피로감이 가셨다. 게임에서처럼 말이다. 잠시 쉬었다가 뛰기를 반복해야 했다. 나중에는 피로를 느끼는 간격을 파악할 수 있었고, 달리기와 걷기를 반복하며 피로도를 조절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게임 능력이 내게 주어졌다. 이 가정이 아니고서는 내가 처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모이기로 한 곳은 학창 시절에 자주 다니던 단골 술집이었다. 오랜만에 추억을 되새기자는 의미도 있지만, 다들 사회 초년생들이거나 백수인지라 값비싼 술집에서 모이기가 버거웠던 탓이다.
 “12분! 너 늦었어!”
 성원이가 내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고, 나는 성원이 옆에 앉은 기정이를 발견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다른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다들 아직 안 왔잖아! 괜히 뛰어왔네.”
 “너 설마 게임하다 나온 거야?”
 성원이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고,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야. 너도 들었잖아, 어제 난리가 나는 바람에 운명 서버가 날아간 거.”
 현실에서 게임 능력을 시험해 봤다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집에 틀어박혀 게임만 한다고 구박받는 처지에 밖에 나와서까지 게임 폐인처럼 굴 수는 없었다.
 “하긴······ 그것 때문에 기정이 저놈도 모임에 나올 수 있었으니까.”
 기정이는 나에게 술잔이 든 손을 흔들고는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무슨 이유인지 알 것 같았다. 유저들 사이에서 가상현실 게임 운명의 게임 데이터가 복구되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퍼진 까닭이었다. 그 소문의 근원지가 ㈜시니어의 직원이라고 하니 영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닌 듯했다.
 나 역시도 속이 쓰렸다. 아니, 눈앞이 막막했다. 그러나 날려 버린 게임 데이터보다 내가 처한 상황이 몇 배는 혼란스러워서 게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잠시 후 지훈이가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학창 시절에는 시간 약속에 철저했던 녀석인데, 대기업 들어가더니 바빠진 모양이었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흐트러진 와이셔츠, 아무렇게나 들려 있는 재킷으로 보건대 녀석도 나처럼 전력으로 뛰어온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잘 보인단 말이지.’
 관찰 스킬은 아직까지도 가동 중이었다. 어차피 MP를 크게 소모하지 않는 기술이었고, 줄어든 MP는 금세 차올랐다. 운명을 플레이할 때에도 관찰 스킬은 패시브 스킬처럼 켜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왔냐?”
 성원이의 물음에 지훈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녀석은 목이 탔던지 자리에 앉자마자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꼬라지가 왜 그래? 막노동이라도 뛰다 왔냐?”
 “사무실 정리. 침수 때문에.”
 성원이의 물음에 짧게 대답하는 지훈이였다. 지훈이는 본래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다. 저런 녀석이 대기업 면접을 당당히 통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런 건 따로 사람 쓰지 않아? 너희 회사 대기업이잖아.”
 “사무실은 우리가 해야지.”
 “하긴······.”
 사무실에 남아 있는 서류 중에는 대외비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피해 상황을 파악하는 것 역시 사무실 직원의 몫이었다.
 신참에게 일을 몰아주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이런 난리 통에도 용케 몸을 뺀 지훈이가 대단해 보였다.
 오늘 만날 친구들은 대학 시절에 만난 녀석들이다. 전공이 제각각이지만, 우리에게는 공통된 취미가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 운명.
 한때는 대학 원정을 다녔을 정도로 우리의 위명은 드높았다. 당시 만들었던 파티는 해체되었고, 현재는 기정이가 그 명맥을 이어 대한독립길드를 만들었다. 대한독립길드는 대한민국 길드 중에서 5위권 안에 드는 초대규모였고, 그런 길드를 홀라당 말아먹게 생겼기에 기정이가 저토록 좌절하는 것이었다.
 “늦어서 미안! 정말 미안! 안 늦으려고 했는데, 오는 길에 얘가 불쌍하게 떨고 있잖아.”
 부산하게 인사하며 다가오는 사람은 우리 모임의 홍일점인 시은이였다. 시은이의 등장에 기정이의 눈빛이 조금은 또렷해졌다. 기정이가 시은이를 오래전부터 좋아한 까닭이었다.
 미야옹!
 시은이의 품에는 여느 때처럼 길 잃은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새끼 고양이를 억지로 안으려다가 할큄을 당하기라도 했는지 시은이의 목과 팔뚝에 몇 개의 생채기가 나 있었다.
 물론 시은이가 고양이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기에, 상처를 낸 당사자가 어떤 고양이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시은이는 고양이를 닮은 수인족인 묘족에 반해서 운명을 시작했다. 우리와 함께 학교를 다닌 시간은 1년밖에 안 되었지만 꾸준히 운명을 하면서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유아교육학과가 적성에 안 맞는다며 자퇴서를 제출했는데, 지금은 당당히 한국 최고 명문 대학의 수의학과에 들어가 공부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시은이의 처지가 생각났다. 그녀의 부모님이 못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교육에 매진한 교육가 집안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시은이가 수의학과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모님이 반대하셨는데, 시은이가 대학 교수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말해 겨우겨우 수의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모님의 지원이 줄었다는 사실이다. 시은이는 나처럼 단칸방에 살며 학업에 매진했고, 그런 환경에서는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너 원룸 살지 않았어?”
 “맞아.”
 “근데 그걸 또 주워 온 거야?”
 대학 시절 이후로 시은이의 집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집에 고양이가 최소 세 마리 이상 있다는 것에 내 손모가지를 걸 수 있었다.
 시은이는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고양이를 끼고 살아서 그런지 시은이의 표정은 아기 고양이를 닮았다. 그래서 그녀의 청을 거부하기 어려웠으나, 다행히도 나는 시은이와 몇 년을 지내면서 면역이 생겼다.
 “안 돼.”
 내가 단호하게 대꾸하자 시은이는 성원이와 지훈이를 쳐다봤다. 그러나 녀석들은 진즉 시은이의 생각을 알아채고 저들끼리 술잔을 부딪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치사해, 너희들! 칫! 기정아~.”
 매번 이런 식이었다. 시은이는 마지막에 가서 기정이에게 부탁했고, 기정이는 마지못해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엄마한테 얘기해 볼게.”
 “고마워, 기정아! 너밖에 없어! 너희 다 나빠! 오랜만에 봤는데 친구 부탁도 안 들어주고!”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부탁부터 하는 건 어떻고? 그러지 말고 술이나 마셔.”
 성원이가 술잔을 돌리며 분위기를 띄웠고, 우리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소주와 삼겹살을 섭취했다.
 대한독립길드의 원년 멤버가 모두 모인 것은 아니었다. 아직 두 사람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모임의 주최자인 성원이에게 다른 녀석들의 행방을 물었다.
 “만수랑 현석이는?”
 “만수는 알아서 오겠지.”
 “오긴 온대?”
 “그냥 없다고 생각해.”
 만수는 온라인에서만 인기가 많은 녀석이었다.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일정 간격 이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허락지 않았다. 그런 점이 도리어 여자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는지 만수를 넘어뜨리겠다고 나서는 유저들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여태껏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자기 말로는 이름깨나 알린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라고 하는데, 현실의 모습은 온라인의 인기를 따라 주지 못했다. 뚱뚱했고 퉁퉁했으며 후덕했다. 온몸에 게으름이 덕지덕지 낀 모습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녀석은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뒷바라지해야 할 동생이 셋이었고 막대한 입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도 계셨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진 것 같지만, 그들을 챙기다 보니 자연스레 일에만 빠지게 된 것이다.
 “저기 왔네.”
 0.1t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 체구의 땅딸한 사내가 술집으로 들어섰다. 녀석은 세그웨이라 불리는 직립형 전동 오토바이를 끌고 왔다.
 “설마······ 그걸 샀어?”
 내가 묻자 만수는 층층이 쌓은 턱을 흔들어 대며 껄껄 웃어 댔다.
 “이 몸이 누구냐? 당연히 샀지.”
 원체 움직이기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그의 성향은 가상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직업은 암살자고, 추적이 특기였다. 발에 땀나게 목표물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최단거리를 주파하여 적에게 접근하는 한편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끝장을 보았다.
 그때 만수의 뒤편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돈도 많네. 근데 어째 살이 좀 더 찐 것 같다? 10근 정도 쪘냐?”
 흠칫!
 놀란 만수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현석이였다. 눈썰미 좋은 현석이는 만수의 체중 변화를 정확히 간파한 듯했고, 만수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내 곁에 앉았다.
 “민기야, 너 어디 아프냐?”
 현석이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고, 나 역시도 만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여야 했다. 자칫 게임 능력을 갖게 된 걸 저 녀석에게 들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친구들이라도 내가 처한 상황을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내 능력을 공개하는 것 역시 꺼려졌다. 나 스스로도 작금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안 움직여서 그렇지, 뭐.”
 “그런 것치고는 좀 심한데? 밥 좀 잘 챙겨 먹어. 운동도 하고. 그보다 병원부터 가 봐라.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병원에서 갓 퇴원한 전직 환자처럼 보여.”
 머리를 긁적였다. 현석이의 판단에 동의한다는 듯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체력부터 올려야겠어.’
 살기 위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성원이가 술병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현석이 저놈은 오자마자 잔소리야! 야, 잡소리 말고 마셔!”
 졸업하고 처음으로 모든 멤버가 한자리에 모였다.
 대부분 게임을 접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성원이는 아버지 카센터에서 일하고, 만수는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며, 지훈이는 대기업을 다니고, 시은이는 수의학 공부에 매진한다. 기정이는 대한독립길드를 운영하며 어지간한 회사원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었지만 졸지에 백수 신세가 되었고, 나와 현석이는 여전히 백수였다.
 하지만 현석이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녀석의 아버지는 외교관이고 어머니는 대학교 교수다. 현석이도 멘사 소속으로 머리가 좋은 편이라, 마음만 먹으면 취직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본인에게 취직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가상현실 게임 운명으로 만난 친구들이기에 운명에 대한 화제가 빠질 리 만무했다. 특히 프로그래머인 만수는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는 정보까지도 알고 있었다. 기정이는 핏발 선 눈을 껌뻑이며 만수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나 역시 안 듣는 척하면서도 정신을 집중했다.
 “그럼 유저 데이터를 살릴 수 있다는 거네?”
 “살릴 수야 있지. 그런데 그걸 가동할 만한 시스템이 없어. 너희도 알다시피 운명의 가상현실 시스템은 시니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거라, 다른 회사 가상현실 시스템과 호환도 안 되니까. 무엇보다 큰 문제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소프트웨어이기도 하고. 내가 듣기로 시니어 본사에 있는 서버가 완전히 녹아 버렸다더라. 운명 운영과 관련한 자료가 완전히 날아갔대.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도 있어.”
 “사상자?”
 “죽은 사람도 있고 다친 사람도 있다 이거지. 그것도 유저들 중에서 말이야. 벼락이 서버에 떨어졌고, 그 여파로 뭔가 오류가 생겼나 봐. 근데 논리적으로는 이게 말이 안 되거든. 아무리 서버와 가상현실 게임 접속기가 연결되었다 할지라도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기계거든. 설령 영향을 끼친다 해도 소프트웨어를 망가뜨리는 수준에서 그쳐야 하는데, 청룡 레이드를 하던 3대 길드원 중 일부가 이상 증상을 보였다는 거지. 한국만이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과 저 멀리에 있는 중국까지도 말이야.”
 “이상 증상이라니, 어떤 증상을 말하는 거야?”
 내가 물었고, 만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시니어 측에서도 쉬쉬하고 있으니까. 어쨌거나 사람이 죽어 나간 것 같으니 영원히 숨길 수는 없겠지. 피해자 측 유족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가 금세 내렸었거든. 이런 상황이라면 운명을 다시 여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제기랄!”
 기정이는 다시금 술잔을 비웠다.
 대학 시절부터 5년 가까이 투자한 게임 캐릭터가 사라졌다. 운명은 기정이와 나에게 그저 그런 게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었다.
 “너무 흥분하지는 마. 운명은 인기 게임이고 수익이 확실한 사업 아이템이니까, 이걸 집어삼키려고 눈알을 굴리는 가상현실 게임 업체가 수두룩하거든. 국가에서 주목하는 사업이기도 하고. 서버가 없다 할지라도 백업 데이터와 인력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어떻게든 운명을 되살리지 않겠어? 금년 중에는 불가능할 테지만.”
 빨라야 내년에나 복구가 된다는 말에 기정이는 좌절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잠자코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현석이가 나섰다.
 “중국에 백업 데이터가 있다고 하니 그 내용을 기반으로 보상금 청구 소송을 걸면 될 거야. 기정이 너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운명의 인기가 예전만 못해진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대한독립길드도 점점 힘을 잃어 가는 중이었잖아. 이 기회에 한몫 톡톡히 챙기고, 운명에서 손 떼.”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반박할 수 없었고, 내 가슴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 팠다.
 취업 준비한다면서 집 안에 틀어박혀 운명만 했다. 부모님께는 취업이 안 된다고 했고,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자신이 있었다. 운명으로 성공하리라, 그리 다짐했었다. 성공을 코앞에 두었으나 그것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인 까닭에 모든 것들이 실감이 가질 않았다. 캐릭터가 소멸된 것도, 내게 게임 능력이 생긴 것도 말이다.
 술에 취한 기정이가 이기죽거렸다.
 “냉혈한 자식.”
 “현실을 말한 거다.”
 “그건 우리의 꿈이었어!”
 “우린 사회인이야. 너도 이제 취직해야지.”
 나와 기정이를 제외한 모두가 운명을 그만두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운명을 제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간혹 취미 삼아 접속할 수도 있으나, 그러기엔 이용료가 너무 비쌌다.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우리에게는 부담이 가는 액수였다.
 ‘그래, 모두 끝났어.’
 현석이의 말을 듣고 나니 내 처지를 조금은 인정할 수 있었다.
 인생 한 방을 꿈꿨다. 전설급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즉시 잘나가던 전사 캐릭터를 처분하고 대장장이로 갈아탔다. 대한독립길드에서 탈퇴했으며, 친구들에게는 취업 준비를 한다고 둘러댔다. 딱히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성공한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다.
 운명에서 대장장이는 취미로 키우는 보조 캐릭터였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유니크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이 전부인데, 그 노력에 비해 대가가 터무니없이 작았다. 유니크 아이템 제작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전사나 마법사 캐릭터로 사냥을 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하지만 전설급 아이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을 단 하나만이라도 제작하는 즉시 인생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었다. 전설급 아이템 하나에 최소 20억은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모두······ 끝났어.’
 참담한 현실이 밀려왔다. 운명이 사라진 내 인생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내가 처하게 된 현실은,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허약한 몸뚱어리였다.
 ‘이젠 취하지도 못하는구나.’
 확 올랐던 술기운이 사그라졌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고, 그럴수록 내 상황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대학 때 머물던 원룸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만큼 저렴한 집을 구하기 어렵기도 했거니와, 옆집에 사는 연희 씨 때문에라도 이사를 가기가 꺼려졌다.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던 길에, 무리를 지어 걸어오던 학생들 중 하나가 비칠거리며 내게 다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고개를 숙여 대강 인사하고 가던 길을 가려는데 놈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야! 사람을 쳤으면 사과해야지, 어딜 내빼?”
 주변을 둘러봤으나 사람이 없었다. 저들이 학교 후배라고는 하나, 체육과 학생들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나는 괜한 일에 엮이기 싫어서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저 새끼 봐라. 사과에 진정성이 없네, 진정성이 없어.”
 혀가 꼬부라졌다고는 하나 저쪽은 셋이었고 이쪽은 하나였다. 놈들은 무리를 지어 내게 다가왔다. 체육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검정색 점퍼를 걸친 채였다.
 퍼억!
 HP를 나타내는 막대가 줄어들었다. 그 옆으로 91/100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게임을 하는 거였다면 10%도 안 닳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현실은 달랐다. HP가 절반만 줄어도 뼈 한두 군데는 부러진 상태가 될 듯했다.
 뻐걱! 퍽! 퍼억!
 세 놈은 무작정 나에게 발길질을 해 댔고, HP가 죽죽 줄어들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어.’
 아팠다. 갈빗대에 금이 갔는지 숨을 쉬거나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한데 정신은 말짱했다. 나를 짓밟는 놈들의 표정과 몸짓이 눈에 들어왔다.
 ‘피할 수 있어.’
 몸을 굴렸다. 놈들은 헛발질을 하더니 기우뚱거리며 서로를 의지하려다 넘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HP는 41까지 떨어졌고, 아주 천천히 차올랐다.
 ‘HP가 가득 차면, 부상도 치유되는 건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가설이었다.
 “저 새끼가······.”
 퍼억!
 넘어진 놈의 안면을 걷어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발 차기를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당황한 두 놈이 엉거주춤 일어났고 그중 하나가 자세를 취했다.
 ‘젠장.’
 술에 취했다지만 운동을 제대로 배운 것이 분명했다. 자세로 봐서는 태권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방금 전 내게 걷어차인 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면이 시뻘겋게 되긴 했지만 큰 충격이 가해지지 않은 듯했다.
 ‘대장장이 공격력이 그렇지, 뭐.’
 대장장이는 전투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전투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장장이는 부족한 능력을 아이템으로 채웠다.
 ‘그렇다면, 혹시······.’
 주위를 둘러봤고, 어둠 속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길거리에 세워 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저거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제작!”
 쇠를 다루는 경우 화로와 모루, 망치 등이 필요하지만 나무를 다룰 때에는 그조차도 필요가 없다. 그저 스킬명만 외치면 완성품이 나온다.
 물론 다양한 물품을 제작하려면 설계도가 있어야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나무 단검은 설계도가 없어도 만들 수 있다. 초보 대장장이를 위한 배려인 셈이었다.
 빛이 번쩍이거나 효과음이 들리지는 않았다. 아니, 안내음이 들리기는 했다.
 -초보자용 나무 단검을 제작했습니다.
 나무 단검의 공격력은 3이었다. 미약한 수준이지만 빈손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술 취한 놈들은 내 손에 들린 나무 단검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저들은 크게 신경 안 쓰는 표정이었다. 저들 좋을 대로 납득해 버린 것이리라.
 ‘오랜만이네.’
 수년 동안 대장장이 캐릭터를 키워 왔다지만 그 전에는 운명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전사였다. 검술을 배운 적은 없으나 기본적인 칼질은 할 줄 알았다.
 후웅! 후웅!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고작해야 검날 길이가 20cm 남짓인 단검이었으나, 검을 쥔 순간부터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체육과 후배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타닥!
 태권도를 배운 듯한 놈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놈은 날렵하게 발길질을 하려 했고, 나는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빠각!
 단검으로 놈의 정강이를 막았다. 손아귀가 찢길 것처럼 아팠지만, 다행히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 반면 나를 공격하려던 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제 다리를 부여잡았다.
 퍽! 퍽! 퍽!
 초보 전사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공격을 피하거나 막고, 그 다음에 맹공을 퍼붓는 것이다. 몬스터의 다음 공격이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운동을 했다지만 만취한 상태였다. 놈의 머리에서 피가 비어져 나왔고, 놈의 친구들은 당황해서 내게 손사래를 쳤다. 더는 싸우기 싫다는 의미였다.
 나는 나무칼을 거머쥔 채 뒷걸음질 쳤다. 나를 공격하려던 놈들을 퇴치한 것이라고는 하나,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공격했다. 이 와중에도 내 심장은 놀라우리만치 안정적으로 뛰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골목 모퉁이에 놓인 책장이 보였다. 누군가 쓰레기 처리 스티커를 붙이지 않은 채 몰래 버려둔 것이었다.
 “제작.”
 책장의 일부가 사라지면서 나무 단검이 나타났다.
 “제작. 제작. 제작. 제작.”
 -제작 스킬 레벨이 2가 되었습니다.
 경험치가 크게 늘긴 했지만 캐릭터 레벨이 오르지는 않았다. 레벨이 오를수록 다음 레벨까지 요구되는 경험치가 크게 증가하는 까닭이었다.
 나무 단검을 모두 가져다가 인벤토리에 넣었다. 초보자용 나무 단검은 인벤토리 한 칸에 전부 들어갔고 대신 그 아래에 6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그날 밤 나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제작 스킬을 펼쳤다. 99개의 나무 단검으로 인벤토리 한 칸을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13개의 단검을 더 만들었다.
 운명에서 인벤토리는 아공간의 개념이다.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얼마나 담든지 간에 유저는 무게감을 느끼지 않는다. 단, 인벤토리에 담을 수 있는 아이템의 무게는 유저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이제 운명도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까지 이 짓을 하게 될 줄이야······.’
 
 
 
 * Chapter 2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외출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밤마다 인근 골목을 돌아다니며 재료로 쓸 만한 것들을 수집했다.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즘은 밤낮 가리지 않고 골목을 누비며 폐품을 줍는 이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었다.
 
 직업 스킬
 채집 Lv. 3 채광 Lv. 1 벌목 Lv. 1 제작 Lv. 3
 
 보조 스킬
 관찰 Lv. 4
 
 스킬 레벨을 열심히 올린 덕에 캐릭터 레벨이 5가 되었다. 일주일 내내 노력한 것에 비하면 하찮은 성과였다. 만일 운명이었다면 퀘스트와 파티 사냥을 병행하여 1시간 만에 레벨 5가 될 수 있었으리라.
 체력과 힘을 올린 덕에 예전의 체력을 되찾았다. 아니, 이전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었다. 애당초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던 내 체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름 : 다크
 레벨 : 5(2%)
 직업 : 견습 대장장이
 종교 : 없음
 고향 : 대한민국 (체력 +5%, 지식 +5%)
 HP : 260/260
 MP : 100/100
 능력치 : 힘 20 민첩 10 체력 25+1 지혜 10 지식 10
 명성 : 0
 스텟 포인트 : 0
 스킬 포인트 : 5
 
 현 상황에서 캐릭터 레벨을 올릴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제작 스킬은 정체된 상황이고, 채광이나 벌목 스킬을 올리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한데 서울 한복판에서 나무를 자르거나 광물을 캐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물상에 있는 물건을 죄다 단검으로 바꿔 버릴까?’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적인 방식도 아니었다. 골목마다 설치된 CCTV에 발각될 수 있고, 폐품을 단검으로 바꿔서 가져오는 것은 도둑질이나 다름없었다. 자칫 경찰에 쫓길 수 있는 것이다.
 ‘일단은 여러 물건을 만들어 보는 수밖에 없겠어.’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별의별 것들이 다 나왔다. 그중에는 각종 설계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초보자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들도 많았는데, 그것들을 프린트해서 살펴봤다.
 “설계도 등록.”
 -등록할 수 없는 설계도입니다.
 수십 장의 설계도를 등록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어쩌면 게임 아이템이 아니기 때문에 등록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 스킬 레벨을 올릴 수가 없는데······.’
 나무 단검 제작 노가다만으로는 제작 레벨 3이 한계였다. 운명에서는 여러 재료를 사용해서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야 제작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직접 만들어서 등록하는 방법밖에 없으려나?’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다.
 운명에서 대장장이로 활동하며 수도 없이 많은 아이템을 만들었다. 그중 절반은 내가 직접 제조한 물품이었다. 나무를 깎거나 철을 두드려 비슷하게나마 아이템을 만들면 시스템이 그것을 인식하여 제법 그럴싸한 아이템으로 등록해 주는 것이다.
 제작 스킬을 활용하면 설령 손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은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다. 부족한 부분을 제작 스킬이 채워 주는 것이다. 이 또한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나, 당장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사냥을 해서 레벨을 높인다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설령 밀렵으로 동물을 사냥한다 할지라도, 몬스터가 아닌 동물 사냥으로 레벨이 오른다는 보장도 없었다.
 ‘레벨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결국 내 성장은 스킬 포인트를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달렸다는 건데······.’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사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스킬 레벨을 올리는 것으로 획득하는 경험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수리, 분해, 함정 제작, 자폭, 제련, 연성, 마정석 제작, 마법 부여, 아이템 합성, 내구도 향상, 성능 향상, 엘프의 기술, 드워프의 기술, 드래곤의 기술, 연금, 장인의 품격.’
 직업 스킬 목록이었다. 여기에 내가 익힌 네 가지 직업 스킬을 더하면 모두 스무 가지였다. 스킬 레벨을 올리면서 다량의 경험치를 주는 것은 직업 스킬이었다.
 ‘강인한 체력, 강인한 힘, 빠른 몸놀림, 인류의 지혜, 사서의 지식. 이 다섯 가지 기술부터 익힐까?’
 각기 체력, 힘, 민첩, 지혜, 지식을 높여 주는 보조 스킬이었다. 운명에서는 이 다섯 가지 스킬을 터득하여 스킬 레벨을 높이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에서 내 능력을 키워야 했다.
 -스킬 포인트 1을 소모하여 강인한 체력 스킬(패시브)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소모하여 강인한 힘 스킬(패시브)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소모하여 수리 스킬(액티브)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소모하여 분해 스킬(액티브)을 습득하셨습니다.
 
 강인한 체력 (보조, 하급, 패시브 스킬)
 스킬 레벨 : 1(0%)
 설명 : ;체력을 ‘스킬 레벨×2’만큼 향상시킨다. 마스터 시 체력이 10포인트 추가 향상된다.
 
 강인한 힘 (보조, 하급, 패시브 스킬)
 스킬 레벨 : 1(0%)
 설명 : '힘을 ‘스킬 레벨×2’만큼 향상시킨다. 마스터 시 힘이 10포인트 추가 향상된다.
 
 수리 (대장장이, 하급, 액티브 스킬)
 스킬 레벨 : 1(0%)
 설명 : ;망가진 아이템을 수리할 수 있다. 수리 시 일정 확률로 최대 내구도가 하락한다. 마스터 시 일정 확률로 최대 내구도가 증가한다.
 
 
 
 분해 (대장장이, 하급, 액티브 스킬)
 스킬 레벨 : 1(0%)
 설명 : 아이템을 분해하여 재료 아이템을 습득할 수 있다.
 스킬 포인트 1은 일부러 남겨 두었다. 다음에 익힐 ‘성능 향상’ 스킬을 위해서였다. 제작된 아이템의 성능을 높여 주는 패시브 스킬인데, 이것을 얻으려면 2포인트가 필요했다. 중급의 스킬인 까닭이었다.
 스킬은 하급, 중급, 상급, 레어급, 유니크급, 전설급으로 분류되고 각기 1, 2, 4, 8, 16, 32의 스킬 포인트로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
 운명은 어떤 스킬을 택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능력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스킬을 획득할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상점에서 스킬 북을 구입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나에게는 차라리 잘된 건가?’
 전사 캐릭터를 키울 때만 하더라도, 전투에 필요한 스킬을 집중적으로 익히는 한편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스킬 몇 가지를 추가로 배웠다. 그래 봐야 스킬 숫자가 30개를 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쉰 가지 스킬을 보유했다. 대장장이 직업 스킬 스무 가지에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서른 가지 보조 스킬이 더해진 것이다.
 ‘만수의 설명대로 레이드에 참여한 사람들만 변을 당한 거라면?’
 일부는 죽거나 다쳤지만, 생존자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전투 계열의 기본 캐릭터였다. 사냥을 통해서만 경험치를 올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퀘스트 창.”
 -퀘스트 창을 열 수 없습니다.
 -오류가 감지되었습니다. 오류 내역을 송신합니다.
 -송신이 불가능합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십시오.
 게임도 아닌 현실에서 퀘스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사냥도 어렵다면 남은 방법은 PK였다. 다른 유저를 죽여서 경험치를 얻는 것이다.
 가상현실 게임 운명에서는 PK가 허용되었다. 상대 유저를 살해할 경우 경험치는 물론 아이템 1~3개와 생명석 1개를 탈취할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유저가 생명석을 얻고자 PK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도리어 살해당하여 캐릭터가 영구 삭제되는 일이 왕왕 벌어지곤 했었다.
 ‘설마······.’
 도리질을 쳤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생명석을 얻고자 서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습관처럼 운명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글이 지워졌어.’
 일전에 올라왔던 게임 능력에 관한 글이 사라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장 이 능력을 까발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자칫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정신이상자의 PK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일단은 내 능력을 감추기로 했다.
 게임 능력 때문일까. 예전보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술 취한 대학생들과 싸울 때도 그랬다. 당황하기는커녕 얻어맞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그 와중에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게임 능력을 얻게 됐을 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분해.”
 -초보자용 나무 단검을 분해하시겠습니까?
 “그래.”
 나무 단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짤막한 나무토막이 나타났다. 일단은 그것을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분해.”
 인벤토리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나무 단검을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나무는 또 다른 아이템 제작에 사용될 계획이었다.
 
 
 
 언제까지고 게임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편의점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보름을 쉬려 했으나 그런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쉬겠다는 말을 내뱉은 즉시 사장이 다른 알바를 구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이전에는 체력이 부족해서 일을 할 엄두가 안 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예전보다 건강해졌고 힘도 세졌다.
 ‘나도 이제 직장을 구해 볼까.’
 가상현실 게임 운명에 푹 빠져 지내느라 취직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마음 같아서는 퇴근 후 밤새도록 게임을 하면 될 것 같았지만, 정시에 퇴근시켜 주는 회사도 드물뿐더러 출근해서 꾸벅꾸벅 조는 놈에게 좋다구나 월급을 챙겨 주는 정신 나간 사장도 없었다.
 이제는 운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내 인생이 가상현실 게임과 합쳐졌다.
 ‘앞으로는 나도 평범하게 살아 보는 거야.’
 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부모님께 손 벌리며 살아온 것이 죄송스러웠다. 다른 친구들은 취업해서 부모님께 선물도 사 드리고 용돈도 드린다는데 우리 부모님은 여전히 내게 용돈을 쥐여 주셨다.
 “이력서가 어디 있더라······.”
 
 취업난이 점점 심각해진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감하지는 못했었다. 여태껏 취업에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기에, 내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무수한 이력서를 발송했으나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업체는 한 곳뿐이었다.
 ‘소셜타임?’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업체였다. 이름 모를 회사였고 서울 변두리에 위치했다. 회사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등 SNS를 활용해서 마케팅을 하는 업체였다.
 졸업식 때 입으려고 구입했던 양복을 처음 꺼냈다. 레벨이 오르면서 몸이 건장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기성복은 내 몸에 맞지 않았다. 어깨가 좁은 까닭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간에 맞춰 소셜타임 회사로 향했다.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렸고, 출근 시간이 어째서 지옥철이라 불리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보니 몸에서 땀 냄새가 풍겼다. 곱게 편 양복이 구겨져서 대강 차려입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대강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으나 집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게 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졸업 후 1년 동안 무얼 하셨죠?”
 “운명······ 앗!”
 면접관의 질문에 자연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바짝 긴장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고, 세 명의 면접관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서류에 글자를 끄적거렸다.
 면접을 보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다. 다들 한두 번 면접을 본 것이 아닌지 준비해 둔 말을 술술 읊었다.
 “졸업 후 1년 동안 필리핀으로 해외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의 현지인들이 다니는 칼리지에서 언어를 익혔고, 방과 후에는 필리핀 친구들과 스킨 스쿠버를 즐겼습니다. 주말에는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 활동을 했는데······.”
 다들 스펙이 빵빵했다. 그리고 그 스펙을 적당히 꾸미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나도 준비를 해 올 걸 그랬나?’
 기이한 것은 면접관들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게임 능력 때문인지 조금도 긴장이 되지 않았고, 관찰 스킬 덕에 면접관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었다. 면접관들은 지루해하고 있었다. 면접자들의 대답이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거나 틀에 박힌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면접관은 세 명이었다. 벤처기업이라 그런지 사장도 30대 중반 정도로 젊어 보였다. 과장과 대리도 많이 쳐줘 봐야 20대 후반과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면접관과 달리 면접자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나에게 비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이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뒤처졌다. 그러나 저들도 합격이 어려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면접관들의 반응에 집중했다. 저들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나는 저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뚱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사장이 눈을 치켜뜬 것은 고향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아직도 저런 것에 중점을 두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면접자 중 하나가 부산 출신이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장 말투가 조금 어색하긴 하네. 부산 출신이라 그런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그것은 과장과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20대 후반의 여자 과장은 전문 지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면접자가 지식을 갖추길 바랐고, 학력도 따졌다. 내 학력도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학점은 간신히 3점대를 넘은 수준이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대리는 일에 대한 열의를 높이 샀다. 사회 초년생이라 그런지 그는 자신처럼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려는 사람에게 점수를 주려는 듯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박민기 씨부터.”
 머릿속이 복잡했다. 당황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머리가 썩 잘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낮은 지식과 지혜 수치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 부산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외가댁이 부산이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사장의 눈이 빛났다. 그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나는 간신히 다음 말을 내뱉었다.
 “서울 못지않게 사람이 넘쳐 나는 부산 시내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서울에서 느끼지 못한 끈끈한 우정을 실감했습니다. 그중 몇몇과는 아직까지 연락을 하고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가상현실 게임 운명 덕분이었습니다. 운명에 있는 친구 찾기 기능을 활용했었거든요.”
 이번에는 여과장이 나를 쳐다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가 궁금한 눈치였다.
 “SNS 마케팅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에 집중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상현실 운명의 커뮤니티는 여타의 SNS 못지않게 파급력이 강합니다. 전 세계 1억 명의 인구가 모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웃기는 건, 다들 커뮤니티에 모여 게임 얘기를 할 줄 아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게임 외의 신변잡기를 다룬 잡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운명 커뮤니티를 활용한 SNS 마케팅을 시도해 보자는 건가요?”
 여과장이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면접자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예. 정확히는 가상현실 게임의 커뮤니티를 이용하자는 겁니다. 언론에도 공개됐다시피 운명은 운영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가상현실 게임 커뮤니티를 이용할 때에는 기왕이면 잘 알려진 유저를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알려진 유저가 본인이라는 건가요?”
 “그런 편입니다. 그리고 이쪽에 인맥도 많은 편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5대 길드에 속했던 대한독립길드의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고, 대한독립길드장이 제 친구 녀석입니다.”
 본의 아니게 기정이를 팔아먹게 되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면접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눈치를 보니 사장은 가상현실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고, 대리는 가상현실 게임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운명에서 대장장이 캐릭터를 키웠습니다. 두 번째 캐릭터였고, 전설급 아이템을 제작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그는 가상현실 게임 운명을 알고 있었다. 아니, 직접 플레이했던 것이 분명했다.
 “게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시겠지만, 그 정도 수준에 오르려면 그저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남들과 다른 탁월한 방법으로, 인생을 걸고 도전해야 하죠. 저를 이 회사에 입사시켜 주신다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싶었다. 그러나 이 또한 게임 능력의 영향일 터였다. 긴장하지 않고 이성의 끈을 붙들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판단과 언변을 구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를 바라보는 면접관들의 눈빛이 변했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여과장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실쭉 올라갔다. 웃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설마······ 내 외모 때문에?’
 전혀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던 부분이긴 했다.
 나는 기형적으로 어깨가 좁았다. 게다가 지금은 살까지 빠져서 옷 태가 더욱 살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 몸매를 일컬어 ‘비굴한 체구’라고 했다. 어딘지 모르게 비굴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 평가를 듣게 된 데에는 흐릿한 이목구비도 한몫했다.
 ‘남성미 스킬을 배워야 하나?’
 내게는 외모를 변화시킬 스킬이 하나 있었다. 남성미를 높여 주는 스킬이었고, 2포인트로 봉인에서 해제시킬 수 있었다.
 어차피 게임 속 캐릭터의 외모는 유저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쓸모없는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전사들이 남성미 스킬을 배웠는데, 그 이유는 스킬 마스터 시 지급받는 50포인트의 힘 때문이었다.
 남성미 스킬의 경험치를 올리려면 마초적인 행동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행동으로 경험치를 올릴 수 있는지, 무수한 유저들에 의해 해법이 마련된 상황이었다.
 남성미 스킬을 익힌다면 내 외모가 뚜렷해질 것은 당연했다.
 ‘성능 향상을 포기하고 남성미를 택해?’
 
 
 
 일주일이 지났으나 소셜타임에서 합격했다는 문자는 오지 않았다. 당연히 불합격했다는 문자 또한 없었다.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다른 회사를 알아봤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었다. 아니, 이력서를 아무리 보내도 면접 보라고 통보하는 곳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놀고만 있지 않았다. 열심히 스킬을 갈고닦았고, 그 결과 캐릭터 레벨을 7까지 올릴 수 있었다.
 남성미 스킬을 올릴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성능 향상 스킬을 택했다. 직업 관련 스킬 레벨을 올려야 캐릭터 레벨을 올릴 수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직업 스킬
 채집 Lv. 4 채광 Lv. 1 벌목 Lv. 1 제작 Lv. 3 수리 Lv. 3 분해 Lv. 3
 성능 향상 Lv. 1
 
 보조 스킬
 관찰 Lv. 4 강인한 힘 Lv. 2 강인한 체력 Lv. 2
 
 취업은 안 되었지만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학교 근처라 술집 아르바이트 자리가 많았고, 급한 대로 호프집에서 야간 알바를 하기로 했다.
 아르바이트 지원생은 대학생이 많았지만 사장은 나 같은 졸업생을 더 좋아했다. 잘만 붙들어 두면 몇 년 동안 부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런저런 알바를 해 온 덕분도 있지만, 레벨이 7이 되면서 체력을 31까지 올린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체력도 체격도 좋아져서 이제는 어깨가 좁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왜 이러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너 일하는 게 서툴러서 도와주려는 거잖아.”
 나보다 두 살 많은 매니저는 새로 들어온 여자 알바생에게 치근덕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알바생이 내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나와 관계없는 일에 나섰다가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자가 술집 알바를 하면서 저런 매니저를 만난다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다른 알바를 알아보거나 매니저와 적당히 어울리거나. 음식점에 비해 시급이 높은 술집에서 알바를 택한 이상, 매니저든 손님이든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이 있을 거란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했다.
 저녁 6시에 출근해서 새벽 3시에 일이 끝났다. 보통은 그 전에 마지막 손님을 치렀으나, 매장을 정리하는 조건으로 시급을 더 받기로 했던 것이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스킬 레벨은 3이나 4에서 정체되었고 캐릭터 레벨도 7에 머물렀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대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였다. 일을 열심히 해도 크게 피곤하지 않으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술집 사장이 나를 괜찮게 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좀 더 잘생겨서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타입이라면 매니저 자리를 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레벨을 한 단계만 더 올려서 남성미 스킬을 익혀야지.’
 어차피 낮에는 시간이 비었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작성해 둔 이력서를 몇몇 회사에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집에 틀어박혀 나무 단검을 만들어도 제작 스킬은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성능 향상 스킬은 꾸준히 올랐다. 이전보다 성능이 좋아진 나무 단검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차피 나무 단검은 만들어 봐야 쓸데도 없었기에 기왕이면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자그마한 정리함부터 시작해 간이 책장에 의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들을 만들었다. 다행히 그 과정에서 몇몇 물품이 제작 아이템으로 등록되었고, 그것들을 만들며 제작 스킬 경험치를 조금씩 올릴 수 있었다.
 -스킬 포인트 2를 소모하여 남성미 스킬(패시브)을 습득하셨습니다.
 8레벨이 되자마자 남성미 스킬을 익혔다. 거울을 보니 흐릿했던 얼굴이 조금은 또렷해진 것 같았다. 눈썹이 굵어졌고 콧대도 살짝 솟은 것 같았다.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턱에 각이 생겨난 느낌이었다. 남성미 스킬을 마스터하게 된다면 서양 사람들이 선호하는 사각 턱을 갖게 되리라.
 “이런 건 남자에게 맡겨, 웃샤!”
 물품 정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레벨이 오르면서 받은 보너스 스텟을 힘에 투자한 덕에 어지간한 체육과 학생보다 힘이 셌다. 무엇보다 이런 대사를 뱉어 주고 힘을 쓰면 남성미 스킬 경험치가 조금씩 올랐다.
 술집에서는 남성미 스킬 경험치를 올릴 수 있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술 취한 손님들끼리 시비가 붙거나 여자 알바생에게 치근덕거리는 경우가 그랬다. 혹은 인사불성이 된 여자 손님을 업어다가 택시에 태우거나 인근 원룸까지 옮겨 주기도 했다.
 그 덕에 술집에는 손님이 늘었고, 가끔이지만 나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자도 있었다. 술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남성미 스킬이 3레벨까지 오른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오빠, 저 사람들 싸울 것 같아요.”
 “나한테 맡겨.”
 취객의 난동 처리는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대학생들은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했고, 거기에 술까지 마셔 댔으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나 다름없었다. 하루도 조용히 지날 날이 없었던 것이다.
 “어?”
 다툼을 일으킨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아니, 내가 눈여겨봐 온 유일한 여인이었다.
 “연희 씨?”
 “아, 안녕하세요. 옆집 사는 분이시죠?”
 아차 싶었다. 우리는 아직 통성명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연희 씨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우편함에 적힌 이름을 봤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연희 씨와 함께 온 여자 친구들과 맞은편 남자들이 싸우는 듯했다. 아마도 이 남자들이 여자를 꼬드기려다가 잘 안 되니 고성이 오간 것이리라.
 연희 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대학생이었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나는 예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녀의 매력을 보았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었고, 망연히 쳐다보기만 했다.
 “넌 뭐야?”
 술 취한 손님이 내 어깨를 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행복한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리라.
 짜증이 조금 일었으나 이내 사그라졌다. 여느 때처럼 일순간 솟구쳤던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졌다. 가상현실 게임은 유저에게 기쁨을 주는 콘텐츠였다. 긴장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이 씻겨 나가는 것도 유저의 즐거움을 위해서인 듯했다.
 “다른 손님들도 있으니 그만하시죠.”
 “뭐야?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이년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가만 보아하니 신입생들이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이리라.
 “그만하시죠.”
 “아까 저년이랑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그래서 노골적으로 저년 편을 드는 거야?”
 사내들은 넷이었다. 그들은 쪽수를 믿고 나에게 소리를 질러 댔지만, 이런 상황은 내게도 익숙했다. 넷이 아니라 여덟이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사내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해.”
 “뭐? 지금 손님한테······.”
 “거참, 말 더럽게 많네.”
 “꺄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만으로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뒤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술병?’
 잠시간 고민했다. 저걸 맞아 줘야 할까, 아님 피해야 할까. 결론은 정해졌다. 팔을 치켜들었고, 술병은 내 팔뚝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맥주가 내 몸을 흠뻑 적셨다.
 팔뚝에서 피가 흘렀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유리병이 깨지면서 긁힌 듯했다. 환부가 따끔거렸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이런 충격에는 조금씩이나마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금세 나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장은 회복이 느리지만, 싸움이 끝나고 나면 빠른 속도로 치유되었다. 게임의 법칙대로 말이다.
 나를 공격한 사내는 놀라서 맥주병을 떨어뜨렸다. 술김에 병을 휘두르긴 했는데, 내가 자상을 입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정당방위 성립되지?”
 “뭐?”
 뻐걱!
 술 취한 사내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는 것은 간단했다.
 강인한 힘 스킬의 보정을 받아 힘 능력치가 29다. 이 정도면 꾸준히 운동을 해 온 남성 정도 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길거리 싸움에서는 힘이 전부가 아니다. 중상을 마다 않는 깡, 그것 하나면 어중이떠중이들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우웨엑!”
 내게 얻어맞은 놈이 바닥에 토악질을 해 댔다. 나는 녀석을 밀쳐서 넘어뜨리고 남은 셋을 돌아봤다.
 “뭐, 뭐야?”
 당황한 놈들이 주춤거리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이내 내게 달려들었다. 주먹 휘두르는 걸 보아하니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게임을 하듯, 몬스터를 때려잡듯.’
 게임 능력을 갖게 된 이후로 내게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게임이 되었다. 강인한 체력 스킬 덕에 체력이 35나 되었다. 몇 대 얻어맞는다고 HP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 설령 저런 물주먹에 몇 대 맞는다 할지라도 감내하며 반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퍽!
 눈 감고 내지른 주먹에 어깨를 맞았다. 놈은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울상이 되었다. 자신과 함께 달려든 친구가 내게 싸대기를 맞은 까닭이었다.
 얼굴이 팅팅 부은 채 넘어진 놈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나를 때린 놈이 내 허리를 붙들며 태클을 걸었지만 두어 걸음 물러나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놈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헉! 하, 한 번만 봐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면상을 곤죽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이들은 손님이고 나는 알바생이니 말이다.
 “손님, 계산하고 조용히 가 주시겠습니까?”
 “예? 아, 예!”
 
 
 
 다음 날 아침, 나는 경찰서에 가게 되었다. 폭행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맥주병으로 후려치고 네 명이서 달려들었음에도 나는 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저들에게는 있고 나에게 없는 것이 두 가지였는데, 그것은 바로 증인과 진단서였다.
 유리병에 베인 상처는 하룻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술집 알바들이 내 편에서 증언을 서 줬지만, 경찰들은 정당방위치고는 과하게 손을 썼다며 적당히 합의를 보라고 했다.
 매장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질이 좋지 않았다. 술집이 다 그렇듯 조명이 어둡기까지 해서, 놈들은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을 때 폭력을 휘둘렀다며 거짓말을 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알바 중 하나가 내 소식을 전했고, 그 이야기가 돌고 돌다가 연희 씨의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연희 씨는 경찰에게 스마트폰을 내밀며 조곤조곤 따졌다.
 “이 사람들이 저에게 수작을 부리려 했는데, 여기 계신 분께서 저를 도와주셨어요. 저 사람이 맥주병을 휘둘렀고요. 이게 어젯밤에 찍어 둔 동영상이에요. 팔에 피 흘리는 것 보이시죠? 그다음에 저 세 사람이 달려들었고요. 오히려 저 사람들을 구속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동영상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그녀가 증인이 돼 주었고, 당시에 동석했던 친구들까지 불러서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졸지에 입장이 바뀌었다. 나를 가해자로 고발했던 자들이 되레 가해자가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왕 경찰서까지 온 것, 끝까지 한번 해 보자.”
 다음 날 사내들은 내게 돈 봉투를 가져왔다. 백만 원이었고, 당장 다음 달 월세 내기에도 급급한 나로서는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 찌질한 후배님들은 뒤끝이 있었다. 합의를 했으면 찌그러져 조용히 지낼 줄 알았건만, 툭하면 내가 일하는 술집에 찾아와 꼬장을 부렸다. 신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땀에 절어서 악취를 풍기거나 시끄럽게 떠들고, 맥주 한 병 시키고서는 매장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창가 자리에 틀어박혀 있었다.
 “미안하다.”
 “아뇨, 제가 더 죄송하죠.”
 사장은 월급을 정산해 주었고, 나는 그 돈을 들고 술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좋게 생각하자. 이 기회에 제대로 된 일을 구해 보는 거야.’
 
 
 
 어스름이 내린 저녁, 폐품을 주우러 돌아다니려던 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연희 씨와 맞닥뜨렸고, 그녀에게 보이기에는 내 모습이 너무 허름하여 민망했다. 내가 고갯짓으로 인사하며 지나치려 하자 연희 씨가 내게 물었다.
 “일······ 그만두셨다면서요?”
 “예. 이제 저도 취업해야죠.”
 그리 둘러댔다. 절반은 사실이었으니 거짓말이라 할 수만은 없었다. 후배 4인방이 합의금으로 쥐여 준 백만 원 덕에 한 달은 아르바이트 없이 살 수 있었다.
 “죄송해요.”
 “아녜요. 연희 씨 탓이 아니라, 제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 보고 싶어서 일을 그만둔 거예요.”
 “그래도요.”
 이후로 연희 씨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고 가끔은 안부도 물었다. 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오가며 인사하는 사이좋은 이웃이 되었다.
 
 원룸의 최대 약점은 방음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옆집에서 뭐라 떠들든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지금은 대화 내용이 또렷하게 들렸다. 이것도 게임 능력의 일부가 아닐까 싶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오감이 향상되는 것이다.
 “정말? 정말? 미치겠다. 걔 왜 그랬대?”
 “나도 몰라. 요즘 민수에게 꽂혀서는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걔도 못 말리겠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현철이가 좋다고 난리더니.”
 “그러게 말이야.”
 연희 씨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온 듯했다. 그녀에게는 친구가 많았고, 많은 이들이 연희 씨 집에 드나들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떠들어 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목소리 좀 낮춰. 여기 방음이 잘 안 돼서, 옆집 시끄러울 거야.”
 연희 씨였다. 그녀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옆집에 아무도 없는 것 아냐? 아무 소리도 안 나던데. 그리고 우리가 언제 시끄럽게 떠들었다고 그래? 이 정도로는 아무리 떠들어 봐야 안 들려.”
 여자 넷이 모였을 때 한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두세 가지 주제로 동시에 대화를 나눴고, 신기하게도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그럴수록 옆방의 대화가 잘 들렸다. 뒤척이다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어차피 잠자기는 틀려먹은 것 같으니 일자리나 알아보자는 심산이었다.
 어느덧 새벽 2시가 되었다. 저녁 7시 이후부터 시작된 수다가 장장 7시간 만에 끝난 것이다. 지독하고도 대단한 여인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야 잘 수 있겠네.’
 똑똑.
 잠을 청하려는데 이번에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아닌, 벽에서 나는 소리였다. 연희 씨 친구들이 벽을 두드리는가 싶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잠을 자려는데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나를 부르는 건가?’
 혹시나 싶어서 나는 벽을 살짝 두드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옆집 현관문이 열렸다.
 끼이익.
 연희 씨는 남자 친구가 없는 것이 확실했다. 애인이 있었다면 저 문부터 고쳐 줬을 테니 말이다.
 똑똑.
 이번에는 현관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연희 씨가 찾아온 것 같았다. 나는 트레이닝복 상의를 걸치고 튀어 나갔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연희 씨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화장기 없는 모습이 청초했고, 졸음 가득한 눈은 귀여웠다.
 연희 씨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주무시고 계셨나요?”
 “아뇨, 이제 슬슬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에요.”
 “늦은 시간까지 정말 죄송해요. 시끄러웠죠?”
 “아녜요. 초저녁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 들리긴 했는데, 이후로는 헤드폰으로 음악 들어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우리 집에는 헤드폰이 없었다. 이어폰이 있었지만, 귀가 아파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는 연희 씨가 귀여웠다. 잠을 못 이룰 때는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녀의 사과 한마디로 모든 화가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아녜요, 정말 괜찮아요.”
 “이것 좀 드세요.”
 연희 씨가 나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백설기가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달달한 백설기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떡이네요?”
 “저희 부모님께서 방앗간 운영하시거든요.”
 “이 많은 걸 다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어림잡아도 열 덩어리 이상은 되어 보였다. 그저 하룻밤 시끄럽게 떠든 것에 대한 답례로 받기에는 많은 양이었다.
 “아녜요. 저번에 저를 도와주다 경찰서까지 가셨는데 답례도 제대로 못 해 드렸잖아요.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감사하다면서 떡을 보내 주셨어요.”
 “그럼 부모님께 잘 먹겠다고 전해 주세요.”
 “예, 그럴게요.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그럼 주무세요.”
 “예, 들어가세요.”
 떡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며칠간 밥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연희 씨와 오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당장 먹을 것만 놔두고 남은 떡을 냉동실에 넣으려는데 옆집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뭐야, 뭐야? 소개팅 안 한다더니 남자가 있었던 거야?”
 “그런 것 아냐.”
 “그럼 뭔데?”
 “전에 나 도와준 남자 있잖아, 술집에서 나 도와줬다가 경찰서까지 다녀온 사람. 그 사람이 옆집 살아.”
 “백마 탄 왕자님이 옆집에 계셨던 거야? 왜 말 안 했어?”
 연희 씨는 대꾸하지 않았고,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백마 탄 왕자님이라······.’
 이래저래 기분 좋은 밤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어.’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취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려고 해도 전공 학점이 안 좋은 것이 문제였다. 남들처럼 해외 연수도 다녀오지 못했고, 토익 점수가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뭘 한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내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그저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다. 가상현실 게임 운명의 사고가 며칠만 늦어졌어도 나는 수십억에 달하는 돈을 거머쥐었으리라.
 ㈜시니어는 유저를 대상으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래 봐야 한 달 치 사용료를 환불해 주는 것이 전부였고, 캐릭터에 대한 보상은 추후에 이뤄질 듯했다.
 또한 ㈜시니어의 백동일 사장은 금년 내에 운명을 재가동하겠노라 선언했다. 만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부정적이었지만, 일단은 그의 명성을 믿고 기다려 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다른 가상현실 게임을 플레이해 볼까 생각해 봤다. 그러나 운명만큼 큰 규모의 가상현실 게임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게임에서 벗어나 현실의 나를 돌봐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결국 게임 능력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으려나?’
 나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게임 능력이 있다. 설령 작은 회사에 취업을 하더라도 게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업이라면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확률이 컸다. 먼 미래를 바라보고 투자하기에는 내가 처한 현실이 지나치게 막막했지만 말이다.
 ‘돈이 될 만한 스킬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키워야 해.’
 50개에 달하는 스킬 목록을 살폈다.
 
 직업 스킬
 채집, 채광, 벌목, 제작, 수리, 분해, 함정 제작, 자폭, 제련, 연성, 마정석 제작, 마법 부여, 아이템 합성, 내구도 향상, 성능 향상, 엘프의 기술, 드워프의 기술, 드래곤의 기술, 연금, 장인의 품격
 
 보조 스킬
 관찰, 강인한 체력, 강인한 힘, 빠른 몸놀림, 인류의 지혜, 사서의 지식, 매듭, 탐사, 채찍술, 사주편법蛇蛛鞭法, 지도 제작, 은신, 테이밍, 수의학, 야영, 감정, 낚시, 자물쇠 따기, 마법 저항, 물리 저항, 재봉, 조각, 요리, 도축, 응급치료, 약초학, 해독술, 수영, 남성미, 달리기
 
 채집, 채광, 벌목으로는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채광 능력을 기반으로 광산에 취직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야말로 최후의 선택지라 할 수 있었다.
 다양한 대장장이 기술을 기반으로 장인 밑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미적 감각이 없었다. 스킬 덕에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예술적인 감각까지 쫓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장장이 스킬은 레벨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늘려야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장장이가 해낼 일은 많지 않았고, 이런 기술로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연금 스킬을 익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했다. 연금은 금속의 성질과 종류를 바꾸는 기술이다. 이를테면 은을 구리로 만드는 것이다. 현실에서야 은과 구리의 시세 차가 커서 큰돈이 되겠지만, 운명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스킬이었다. 차라리 아이템을 제작해서 내다 파는 편이 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저렴한 광물을 고가의 금속으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스킬 레벨이 최소 5는 되어야 했다. 그때까지 소멸될 금속을 고려한다면 지금 내 형편으로는 연금을 시도조차 해 보기 어려웠다.
 ‘직장은 보조 스킬과 관련된 곳으로 찾아봐야겠네.’
 그나마 실현 가능한 것이 감정사였다. 감정 스킬을 사용하면 물건의 가치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의 물건에도 적용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것을 알아보고자 스킬 포인트를 4씩이나 허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감정 스킬이 먹히기만 하면,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돈 되는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도 있을 텐데.’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지만, 일단은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테이밍과 수의학 스킬을 쓴다면 동물 병원에서 일할 수 있을 텐데.’
 학위가 없으니 정직원은 무리겠지만 알바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테이밍은 펫을 길들이는 스킬이지만 동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가 능력이 있다. 또한 수의학은 동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치료도 가능했다. 현실에서는 수술이 필요한 부상이라 할지라도 자동으로 부상이나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이런 스킬은 시은이에게 있으면 딱인데. ······아!’
 동물 병원은커녕 동물에 관해서도 일절 모르는 나지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시은이가 이쪽 계통에 아는 사람이 많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동물 병원 알바 자리가 수의학 문외한인 나에게 허용될지 미지수였다.
 수의사가 되는 것은 보류하고 다른 스킬을 살펴봤다.
 낚시 스킬을 갈고닦아서 낚시꾼이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바다낚시를 잘만 하면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얼핏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내 주제에 낚시는 무슨······.’
 운명에서도 낚시 스킬을 익혀 두고도 스킬 레벨을 높이지 못했었다. 가만히 앉아서 언제 낚일지 모를 물고기를 기다리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던 탓이다.
 재봉, 조각, 요리 스킬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보조 스킬은 여타의 스킬과 달랐다. 대성하기 위해서는 보조 직업으로 재봉사, 조각사, 요리사를 택해야 하는데 직업 퀘스트를 제공할 NPC가 없는 현실에서는 보조 직업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동네에서 알음알음으로 알아주는 정도가 한계란 뜻이었다.
 ‘도축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무턱대고 도축장에 찾아가 취업을 시켜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스킬 레벨을 높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동물의 가죽과 살을 베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라리 심마니가 낫지.’
 약초학과 관찰, 탐사 스킬을 고루 익힌다면 최고의 심마니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여기에 달리기와 감정 스킬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뛰어난 심마니조차 찾기 어려운 약초가 내 눈에는 형광색으로 빛나며 자태를 드러낼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심마니 역시 고려 대상에 포함시켰다.
 수영과 달리기를 마스터하고, 여기에 신체 능력이 뒷받침된다면 선수급 이상의 실력을 갖추게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당장 이루기 어려운 경지라는 사실이었다.
 은신과 달리기, 자물쇠 따기 스킬을 고루 익혀서 도둑이 되는 것도 고려했지만 은신 스킬이 사람의 이목을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CCTV까지 통과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 격투가였다. 레벨이 8일 뿐인데, 나는 체육과 학생들과 맞장을 뜰 정도로 단련이 되었다. 특유의 냉철한 판단력이 더해진다면 제법 괜찮은 격투가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투 스킬도 익혀 두는 거였는데.’
 나에게도 전투 스킬이 있기는 했다. 인디아나 존스를 꿈꾸며 채찍술을 익혔고, 사천당가의 채찍술인 사주편법도 배웠다. 그러나 채찍을 허용하는 무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운명에서 내가 50개의 스킬을 익히는 데 소모된 스킬 포인트가 152였다. 레벨 업을 통해 제공받은 스킬 포인트는 139였다. 레벨이 한 단계 향상될 때마다 스킬 포인트 1을 받았지만, 레벨이 10의 배수가 될 때에는 스킬 포인트 5가 제공되었다. 남은 13포인트는 퀘스트를 통해 획득한 것이었다.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니 13포인트만큼의 스킬은 포기해야 했다. 또한 캐릭터 레벨을 높일 방법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 획득할 수 있는 스킬 포인트는 많아야 50포인트 정도일 것 같았다.
 ‘당장 시도할 수 있는 직업은 동물 병원 알바와 심마니 정도인가?’
 둘 다 관련 스킬을 배워야 도전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당장 스킬 포인트가 1도 안 남은 상황이라 4포인트나 요구되는 테이밍과 수의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약초학과 탐사 스킬은 각기 1과 2포인트가 소모되었지만, 막상 심마니가 된다고 생각하니 꺼려졌다. 멀쩡히 대학교 나와서 심마니가 된다고 한다면 부모님께서 속상해하실 터였다. 나 역시도 산을 헤매며 약초를 줍는 일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취업이 가능한지부터 알아봐야겠다.’
 곧장 시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되든 안 되든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 판단해서였다.
 -민기 아니야? 네가 먼저 연락을 다 하고, 어쩐 일이야? 설마 여자 생긴 거야? 그래서 이 누나 도움이 필요해?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시은이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괜스레 자존심이 상했다.
 “여자 문제 아니거든. 혹시 일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나 해서 전화했어.”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려니 민망하고 미안했다.
 -일자리?
 “동물 병원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을까?”
 -동물 병원? 어느 동물 병원? 그보다 너 동물 안 좋아하지 않았어?
 시은이의 말은 틀렸다. 나는 동물을 싫어하지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취업을 위해 소소한 거짓말쯤은 늘어놓아 주어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이었다.
 “나 동물 좋아해. 원룸이 동물 키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어떤 동물 병원이든 상관없어. 그냥 네가 아는 병원이 있을까 싶어서. 혹여 아는 곳이 있으면 소개 좀 받았음 했거든.”
 -갑작스러운 부탁이긴 한데, 민기 부탁이니 알아봐 줘야지. 근데 너 정말 진지한 거야? 이쪽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 아르바이트로는 돈도 많이 안 주고. 수의학과 학생들 경험시켜 준다면서 데려다가 박봉으로 부려 먹기 일쑤거든.
 “그래?”
 역시나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르바이트도 경쟁력이 있어야 했다.
 -큰 병원은 어렵겠지만, 동네 병원 정도는 가능할 거야. 내가 한번 알아봐 줄게.
 “고마워.”
 시은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다음에 만나서 밥이나 한번 먹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시은이가 언제 일자리를 알아봐 줄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그 전까지 수의학과 테이밍 스킬을 익혀 두는 것은 물론 스킬 레벨도 올려 둬야 했다.
 ‘당장 테이밍과 수의학을 동시에 익히는 것은 무리야. 둘 중 하나만 배운 다음 차차 다른 스킬도 마저 익혀야겠다.’
 스킬 하나만 배우려 해도 4포인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레벨 10을 이룩해야 했다. 레벨이 10의 배수로 오를 때마다 스킬 포인트를 5씩이나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노가다부터 해 볼까나?’
 
 열흘이 넘도록 스킬 레벨을 높이는 데 전력을 다했다. 시은이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 어떤 일을 하든지 스킬 포인트를 모아 둘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레벨 10이 되었고, 전직 퀘스트와 함께 스킬 포인트 5가 주어졌다. 이로써 스킬 포인트는 6이 모였다. 레벨이 10의 배수로 오를 때마다 스텟 포인트도 10이 주어졌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나는 강철 체력을 보유했다. 온종일 중노동을 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말짱한 모습으로 일어나니, 요즘 같아서는 사나흘 밤새우는 것은 일도 아니겠다 싶었다.
 스텟 포인트를 힘과 체력이 아닌 지혜와 지식에 투자했다. 게임이었다면 힘과 체력에 올 인 했을 테지만, 현실에서는 똑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름 : 다크
 레벨 : 10(2%)
 직업 : 견습 대장장이
 종교 : 없음
 고향 : 대한민국 (체력 +5%, 지식 +5%)
 HP : 440/440
 MP : 150/150
 능력치 : 힘 30+6 민첩 10 체력 35+1+8 지혜 15 지식 15
 명성 : 0
 스텟 포인트 : 0
 스킬 포인트 : 6
 
 지식은 암기력에, 지혜는 두뇌 회전에 영향을 주는 듯했다. 이것은 게임에선 적용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가상현실 게임 운명에서는 지혜를 높이면 마법 계열 스킬의 위력이 증가되었고, 지식은 MP의 총량을 늘려 주었다.
 ‘다행히 전직 퀘스트는 가능한가 보네.’
 
 승급 퀘스트
 내용 : 흠 없는 물건 100개를 만드십시오.
 
 간단한 퀘스트였다. 하지만 운명이었다면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사냥이나 퀘스트로 레벨을 빨리 올린 반면 제작 스킬이 뒷받침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내 제작 스킬 레벨은 4를 코앞에 두고 있었으며, 성능 강화 스킬도 보유했다. 사냥이나 퀘스트를 할 일도 없으니 나는 여느 때처럼 방에 틀어박혀 나무 단검을 제작했다. 제작을 할 때마다 MP를 소모해야 했지만 기본 아이템인 나무 단검을 만드는 것만은 예외였다.
 삽시간에 나무 단검 100개가 만들어졌다.
 -다크 님께서 견습 대장장이에서 대장장이로 승급하셨습니다.
 -손재주 능력치가 생성되었습니다.
 
 손재주
 설명 : 손재주는 보다 정교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레어급 이상의 아이템이 만들어질 확률을 높입니다. 손재주 스킬은 아이템 제작을 통해 올릴 수 있습니다.
 -대장장이 망치를 선물받았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보세요.
 대장장이 망치는 소지하는 것만으로 손재주를 5나 높여 주는 레어 아이템이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보니 대장장이 망치가 있었다. 그것을 꺼냈고, 묵직한 망치가 손에 쥐였다.
 “게임 속 아이템이 현실에 나타나다니,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내게 벌어진 일이었다. 남에게 설명해 봐야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기에 나는 게임 능력을 영원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뚝딱! 뚝딱!
 날마다 방에 틀어박혀 가구를 만들었다. 재료는 넘쳐 났다. 나무 단검을 분해하면 목재가 나왔기에, 이것으로 가구를 만들면 됐다.
 만들다 실패하면 분해를 했다. 처음에는 어설펐지만, 제작 스킬이 내 어수룩한 실력을 보완해 주었다. 분명히 어정쩡한 물건을 만들었는데 완성하고 보면 그럴싸한 가구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손재주 능력치까지 더해지자 내가 보기에도 쓸 만한 가구가 만들어졌다. 당장 집에 두고 써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직업 스킬
 채집 Lv.5 채광 Lv.3 벌목 Lv.3 제작 Lv.4 수리 Lv.4 분해 Lv.4
 성능 향상 Lv.3
 
 보조 스킬
 관찰 Lv.5 강인한 힘 Lv.3 강인한 체력 Lv.4 남성미 Lv.5
 
 열심히 노력한 덕에 레벨이 11에 다다랐다. 나중에는 도저히 레벨을 올릴 수 없겠다 싶어서 채광과 벌목까지 했다. 밤마다 야산의 나무를 도끼로 찍어 댔고, 흙바닥을 삽으로 팠다가 다시 메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올릴 수 있는 스킬 레벨도 3이 한계였다. 그 이상으로 스킬 레벨을 높이려면 도끼질로 거목을 쓰러뜨리거나 광산에 가서 광석을 캐야 했다.
 스킬 포인트가 7이나 남았으나 아직까지도 수의학 스킬을 익히지 못했다. 시은이가 열심히 알아보고 있었지만 수의학에 문외한인 내가 일할 만한 동물 병원 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이것들부터 처분하자.’
 좁은 원룸에 가구가 가득했다. 괜찮은 것들만 모아서 차곡차곡 쌓아 뒀는데, 이제는 싱글 침대 자리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분해를 해 버릴 수도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아까웠다.
 내가 만든 것들 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녀석을 추렸다. 좁다란 3단 책장과 독서대, 발받침대였다. 그것들을 들고 집을 나섰다.
 똑똑.
 옆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저 옆집 사는 박민기입니다.”
 기척이 들렸기에 초인종을 재차 누르지 않았다. 다시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내가 챙겨 온 것들을 살폈다. 관찰 스킬까지 써 봤으나 흠잡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가구 제작에 대해 배워 본 적도 없고, 그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낸 방법으로 만들어 본 것인데 그럴싸한 물건이 만들어졌다.
 만드는 과정만 보자면 과연 이걸 가구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이 가셨다. 제작 스킬의 영향으로 허름한 부분이 저절로 수정된 것이다.
 “안녕하세요.”
 연희 씨가 당황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섰다. 화장을 하지 못한 것이 신경 쓰였는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조차도 내게는 아리따워 보였지만 말이다.
 나는 빙글 웃으며 챙겨 온 것들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책장이나 독서대가 필요하신가 싶어서요. 발받침대도 있고요.”
 “이게 웬 거예요?”
 “제가 만든 거예요. 요즘 제가 시끄러웠죠? 하루 종일 뚝딱거리기나 하고.”
 연희 씨가 집에 있을 때에는 자중하려 애썼다고는 하나, 소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때로는 제작에 심취해서 옆집에 사람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을 때가 있었다.
 “아녜요. 저는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거든요. 근데 이것들을 민기 씨가 만드셨다고요? 정말 잘 만들었는데요. 어디서 사 왔다고 해도 믿겠어요.”
 무작정 만들기만 했는데 누군가의 칭찬을 들으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만든 것들을 다시금 살펴봤다. 역시나 디자인이 형편없었다. 아니, 딱히 디자인이라 할 것도 없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희 씨가 나 듣기 좋으라고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취미 삼아서요. 근데 만들어 둔 것이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었거든요. 연희 씨가 필요하시다면 몇 개 드리려고요. 다른 것들도 많으니 필요한 것 있으시면 가져가세요.”
 우리 집 현관문을 슬쩍 열어서 연희 씨가 내부를 살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문밖에서 슬쩍 봐도 방 안에 가구가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연희 씨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 제 주변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책상도 하나 있어요. 의자도 있고요. 필요하시면 드릴게요. 배송비는 무료입니다, 하하.”
 우스갯소리를 한 것인데 다행히도 연희 씨가 웃어 주었다.
 “구경 좀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연희 씨를 집에 들인다는 것이 사뭇 긴장되었지만, 이내 마음이 진정되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연희 씨는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연희 씨는 가구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전문가처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했다.
 “민기 씨는 이쪽 일을 알아보시는가 봐요?”
 “아뇨, 제 전공은 경영학이었어요. 이건 말 그대로 취미죠.”
 “썩히기 아까운 재능인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내다 팔아도 되겠어요.”
 “이것들을 누가 사겠어요. 인터넷만 뒤져 봐도 이것보다 괜찮은 물건이 넘쳐 나는데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가구를 만들었다. 제작 스킬 덕에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지만 인터넷에서 본 가구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아녜요. 요즘은 화려하게 꾸민 것보다 민기 씨가 만든 가구처럼 단순한 디자인이 의외로 인기예요. 게다가 손으로 직접 만드신 거잖아요. 이런 것들은 공장에서 만든 것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고요. 그러지 말고 팔아 보는 것이 어때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이걸 진짜로 판다고요? 어떻게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당초 이것들은 팔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스킬 레벨을 높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이었다. 한데 연희 씨가 괜찮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주말마다 구청 앞 공원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거든요. 인터넷에서 미리 등록하면 동네 사람은 공짜로 간이 점포를 열 수 있어요. 저도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옷이랑 액세서리를 팔아 봤는데 의외로 사람들 반응이 좋더라고요.”
 “정말 괜찮을까요? 보다시피 디자인이 투박해서요.”
 “요즘은 이런 것이 더 인기라니까요. 근데 이 가구들 모두 원목인가 보네요? 그럼 더 비싸게 팔 수 있겠는데요?”
 내가 만든 가구는 골목에서 주운 폐품으로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싸구려 합판으로 제작되었지만 내가 만든 가구는 원목이었다. 분해 스킬 덕분이었다.
 나무 단검을 분해하면 원목 자재가 생겨난다. 운명에는 나무합판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럼 연희 씨가 도와줄래요? 수익금 절반 나눠 줄게요.”
 “절반이나요? 그럴 수는 없죠. 제가 만든 것도 아닌데요. 그냥 맛있는 밥 한 끼 사 주세요.”
 손사래를 치며 웃는 연희 씨가 예뻤다. 아주 잠깐이지만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그럴까요?”
 
 
 
 토요일 아침, 트럭을 한 대 빌려서 그동안 만든 가구를 옮겨 실었다. 내게 배당된 좌판은 가로세로 5m 남짓이었는데, 일단 뒤쪽에 가구를 쌓아 두고 바닥에 깔린 비닐천에 가구를 배치했다. 연희 씨 덕분에 좁은 천 위로 아기자기한 방이 꾸며졌다. 책상과 의자, 책장, 독서대 등을 멋스럽게 연출한 것이다.
 “이 책상도 파는 거예요?”
 “그럼요. 여기 계신 분이 직접 만든 가구예요.”
 “저 학생이요? 솜씨도 좋네. 이 책상은 얼마예요?”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인터넷에서 원목 책상이 10만 원 내외에 팔린다. 공장에서 만든 것이 그 정도고 수제는 3배 이상의 가격이 붙었다.
 ‘잘 만든 것도 아닌데······.’
 5만 원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10만 원이에요.”
 연희 씨가 나를 돌아봤다. 괜찮으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를 힐끔 쳐다본 아주머니가 ‘저렴하다’고 평해 주었다.
 “배달돼요?”
 “댁이 어디시죠?”
 “저 앞에 보이는 아파트예요. 105동 501호.”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지금 옮겨 드릴까요?”
 “학생 혼자서? 아서요, 원목 책상은 무거워서 안 돼.”
 “괜찮습니다. 저 힘세거든요.”
 책상을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자 아줌마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가져다줘요. 학생 고생하는 걸 보니 깎아 달라는 말도 못 하겠네.”
 술집에서 일해 봐야 1시간에 6천 원 내외를 받는다. 야박한 사장을 만나면 그마저도 못 받을 때가 많다. 법적으로 야간 시급은 기본 시급에 50%의 추가금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그건 현실과 동떨어진 저네들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틀 내지 사흘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내 손에 쥐였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말이다. 자재는 골목에서 주웠고, 제작 스킬 덕에 책상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물론 이전에 만들다가 실패한 책상이 수두룩했으나 그것들은 스킬 레벨을 높이는 과정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넘겼다. 이제는 실패 없이 책상이든 의자든 척척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책상을 팔고 온 사이 연희 씨가 몇 가지 물품을 더 팔았다. 그녀는 1만 원권과 5만 원권 현금을 펄럭이며 방싯 웃었고, 나는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동안 힘겹게 아르바이트하며 돈 벌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던 것이다.

댓글(10)

활성중심    
ㅎㅎ 수의사가 동물조련사인줄
2016.05.12 11:31
개체의반역    
이름이 다크야 ㅋㅋㅋㅋ엌ㅋㅋㅋㅋㅋㅋ 글 읽다가 공중제비 돌면서 배꼽 발사하게 만드네 ㅋㅋㅋㅋㅋㅋㅋ
2016.05.15 14:44
Ltd    
특수폭행이구만 주인공한테 질질 빌어도 모자란판에...
2016.10.29 08:30
Ltd    
증인만 있어도 다수대 한명 한거라
2016.10.29 08:31
서울의아들    
호구 주인공에 흔한 설정
2017.03.06 00:32
타이밍    
쥔공은 찌질이 병신인가..게임능력이 현실로 나타났는데 ..주접떠는건 먼가..한심하군.
2018.09.02 21:54
난독    
남성미스킬에서 그만 보련다 ...
2018.10.11 05:30
피냥    
게임좀 해봤다는 인간이 컴수리나 업글도 안해봤나 수리스킬을 놀리고 있네
2018.10.16 20:07
다크라이    
10점만점에서 시간있으면 한번에 끝까지보는 소설을 7점으로 뒀을때 이 소설은 5점쯤. 할인해서 한꺼번에 대여했으니 본 소설. 한편씩 대여했으면 다 안봤다.
2018.10.27 00:44
sk*****    
작가 참 한심하네 힘든일은 하니도 안하겠다는 거냐 대장간도 싫다 광산도 싫다 공장도 싫고 대장장이가 너가다 직업인데 힘쓰고 힘든일은 다 패쓰라니 ㅋㅋㅋ 엽기 작가네 이그
2022.09.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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