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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털어라! 1권

2016.04.28 조회 729 추천 5


 # 프롤로그
 
 “저 새끼 잡아!”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검은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채 눈만 내놓은 남자, 조용훈은 거친 숨을 삼키며 계속 달렸다.
 “이쪽이다!”
 “썅!”
 조용훈은 욕설을 내뱉으며 훌쩍 몸을 날렸다. 자동차의 보닛과 지붕을 차례로 밟은 그는 이어 담벼락과 2층 난간을 박차며 순식간에 3층 난간을 붙잡았다.
 “뭐, 뭐야, 저 움직임은! 성룡이야?”
 “닥치고 얼른 쫓아가! 위로 올라간다!”
 코앞에서 그를 놓친 경찰이 소리쳤다. 조용훈은 낑낑대며 몸을 끌어올렸다. 아래에서 경찰이 잠긴 철문을 두들기며 문 좀 열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열지 마라! 열지 마!’
 조용훈은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계속 달렸다. 3층에서 이어지는 옥상 계단으로 오른 그가 다닥다닥 붙은 주택가의 옥상 위를 달려 나갔다.
 삑삑거리는 무전기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경찰이 수십 명은 깔린 것 같았다.
 조용훈은 허리춤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좀 전에 턴 집에서 가지고 나온 현금과 금붙이들이 들어있었다.
 ‘아, 시팔. 워낙 많이 해먹은 새끼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상대는 한 사학재단의 재단 이사장이었다. 각종 비리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면서도 수십 년째 그 자리를 지켜온 그의 집에는 온갖 값나가는 것들이 그득했다.
 조용훈은 오로지 그런 자들만을 노렸다. 탐관오리를 벌하고 활빈의 정신을 구현하겠다는 고상한 뜻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뒤가 구린 놈들을 털면 신고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뭐에 눈이 헤까닥 돌아버렸는지 상대는 자신의 치부가 까발려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용훈을 잡기 위해 전력을 동원한 상태였다.
 “멈춰!”
 어느새 근처의 옥상에까지 올라온 경찰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너 같으면 멈추겠냐?’
 용훈은 그를 비웃으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가 강하게 난간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앞 건물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평소 용훈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였다.
 타앙! 순간 커다란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중에 뜬 용훈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미친놈, 총을 쏴? 망할, 맞았나? 나 죽는 거야? 아니, 아니야. 괜찮을 거야. 첫발은 공포탄이라고 그랬어. 그래···. 근데 왜 아프지?’
 그가 느릿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구리에 메여있던 가방이 터져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배어 나오는 새빨간 피도.
 ‘뭐야, 썅! 첫발은 공포탄이라더니, 구라였어?’
 그의 몸이 허공에서 힘을 잃었다. 균형을 잃은 그가 거꾸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쏟아진 물건들이 그의 주변에서 빛을 뿌렸다.
 용훈은 허우적거렸다. 그러던 그의 손에 자그마한 물건이 잡혔다. 메추리알과 달걀의 중간쯤 되는 크기의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값이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보석을 한데 모아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그것을 손에 쥔 채 용훈은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콘크리트 바닥이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용훈은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그의 손아귀에서 파삭,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팟! 순간 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뭐야! 누가 발포하래! 어떤 새끼야!”
 “죄, 죄송합니다! 겁만 주려고 했는데···.”
 “이런 미친 새끼! 그 새끼 어딨어! 설마 떨어진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썅! 당장 구급차 불러! 이 새끼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개새끼야!”
 “대, 대장님!”
 “또 왜!”
 “이,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뭔데 그래!”
 “그게···. 놈이 사라졌습니다!”
 
 
 # 1화 - 창조의 던전
 
 “우아아악!”
 우당탕! 용훈은 우렁찬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한참을 데굴데굴 구른 그는 미친놈처럼 바닥을 박박 기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악! 으악! 으아···. 어? 뭐야, 아직 나 살아있는 건가?”
 그가 미친 듯이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너무 오래 바닥을 구른 탓에 옷이 여기저기 찢기고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그의 몸은 멀쩡했다.
 “뭐야, 도대체···. 총에 맞은 곳도 멀쩡하네?”
 그는 피가 뿜어져 나오던 옆구리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그의 옷에는 붉게 물든 구멍이 있었는데 그의 옆구리는 멀쩡했다.
 용훈이 머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을 보았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그는 음산할 정도로 어두운 동굴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딘가에 폭포가 있는지 끊임없이 물소리가 들렸고 박쥐로 생각되는 고주파 음도 들려왔다.
 “웬 동굴에 박쥐까지···. 배트케이브도 아니고, 진짜···.”
 용훈은 천천히 어둠에 적응해가며 발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동굴이 급격하게 넓어졌다.
 “으악!”
 멋모르고 다가가다 발이 쑥 빠지는 걸 느낀 용훈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이 동굴의 전경을 파악했다.
 넓어진 동굴의 바닥은 양옆이 없었다. 그야말로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 가운데 약 2m의 폭을 가진 동굴바닥이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폭포가 가까워졌는지 물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뒈질 뻔했네···. 뭐야, 여긴 도대체.”
 바닥에 주저앉은 용훈이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디링,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조의 던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뭐?”
 용훈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중앙으로 이동해 주세요.]
 용훈은 눈을 들어 절벽을 가로지른 탓에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땅을 보았다.
 ‘설마···. 저기로 오라는 건 아니겠지?’
 [맞습니다.]
 “헙!”
 그저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대답이 돌아왔다. 기겁한 용훈이 입을 닫았다.
 ‘어? 근데 분명 던전이라고 했지? 그럼 내가 던전에 들어온 건가?’
 [맞습니다. 조용훈 님은 현재 창조의 던전에 접속하셨습니다.]
 또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용훈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던전, 각성자, 헌터, 길드 기타 등등. 뭐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이 세상에 등장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각성자가 등장하는 비율도 가파르게 상승해, 현재 지구상의 각성자 수는 전체 인구의 60%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다. 물론 그런 각성자들 중에서 실제로 헌터로 활동할 정도의 강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평소에 만화나 게임에 관심이 많던 용훈 역시 헌터가 되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헌터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곤 했다.
 용훈은 인터넷에서 본 자료 중에서 던전 안에서 마주치는 시스템 메시지라는 것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그럼 이 목소리가 시스템 메시지라는 건가?’
 [맞습니다.]
 용훈은 시스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게이트도 통하지 않고 던전에 들어온 거지?”
 용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던전은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그가 알기로는 게이트를 통하지 않고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니, 한 가지가 있긴 했다.
 용훈은 사학재벌의 집에서 훔친 이상한 알 같은 물건을 떠올렸다.
 ‘아마 그 물건이 튜토리얼 던전으로 안내해주는 보물이었나 보군.’
 헌터들 중에서도 이 튜토리얼 던전을 통해 각성을 이룬 헌터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튜토리얼에 접속하게 해주는 아이템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튜토리얼을 통해 각성한 헌터들은 대부분 상위 랭커가 된다. 각성자에게 적합한 직업과 능력을 부여하고 필요한 초급 장비까지 지급하는 튜토리얼 던전은, 말 그대로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튜토리얼 던전의 접속 아이템은 무지막지한 가격을 자랑하면서도 공식 거래량은 제로에 가까웠다.
 용훈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무지무지하게 비싼 보물을 날렸다는 생각에 배가 아프긴 했지만, 그는 금세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장기적으로 보면 상위 랭커가 되는 편이 더 나으니까.
 ‘뭐, 어쨌든 떨어져 죽거나 짭새한테 잡히진 않았잖아. 그럼 일단 성공이지, 뭐.’
 그때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중앙으로 이동해 주세요.]
 “어? 음, 알았어.”
 용훈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길은 충분히 넓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서웠다.
 용훈이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조용훈 님. 지금부터 창조의 던전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창조의 던전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유니크 등급의 던전입니다. 본 던전은 선택받은 자의 자질과 잠재력을 파악하기 위해 최적의 구조를 스스로 갖춰나가게 되며, 그것으로 얻어낸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의 클래스를 창조하고 그것을 보조할 수 있는 특성과 스킬을 창조하며 그에 따르는 내적, 외적 조건을 모두 갖출 때까지 가능한 모든 지원을···.]
 “잠깐만. 지루한 설명은 나중에 들으면 안 될까? 그래 봐야 한마디로 튜토리얼 던전이란 소리잖아. 내가 설마 튜토리얼도 모를까.”
 지루한 목소리로 용훈이 말했다. 솔직히 요즘 세상에 헌터들이 각성하는 루트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튜토리얼 던전은 조금 특이한 케이스이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정도였다.
 [비슷합니다만 두 가지 측면에서 틀립니다. 첫째, 본 던전의 격(格)은 튜토리얼 따위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습니다. 따라서 본 던전을 튜토리얼이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본 던전은···.]
 “뭔 시스템 메시지가 사자성어까지 쓰냐? 어쨌든 충분히 알았으니 그냥 시작하자. 뭐든지 책으로 배우는 것보단 몸으로 배우는 게 진짜 지식 아니겠어?”
 책으로 뭔가를 배워본 기억조차 없는 용훈이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했다. 어디선가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인스트럭션 프로세스를 종료합니다. 던전 설정 중. 난이도 S. 던전 타입은 성채. 유니크 인스턴스, 붉은 눈 오크의 거점인 철혈의 성채를 소환합니다.]
 순간 눈앞의 현실이 뭉개지며 균형 감각이 뒤틀렸다. 용훈은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어느새 현실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전과는 완벽하게 달라져 있었다.
 지금 용훈은 널찍한 들판에 쓰러져 있었다. 달도 없는 밤하늘은 새카맸고 무릎까지 자라난 잡초들이 콧구멍을 찔렀다.
 “에취!”
 용훈은 콧구멍이 간지러워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츄와악! 누구냐!”
 “뭐, 뭐?”
 용훈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드넓은 들판 너머에 당당하게 서 있는 커다란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흐른 피를 머금은 탓에 전체가 불그스름한 빛을 내는 두꺼운 성벽. 날카로운 창날이 수없이 꽂혀있는 성문. 그리고 높다란 성벽 너머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는 다섯 개의 탑.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철혈의 성채를 배경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철혈의 왕좌를 차지하라.]
 [철혈의 성채에는 다섯 개의 탑이 있습니다. 그중 중앙 탑의 메인 홀에 철혈의 왕좌가 있습니다. 현재 붉은 눈 오크의 지배자인 철혈의 군주는 출타한 상태입니다. 이 기회를 노려 철혈의 왕좌에 앉으세요. 시간제한은 없습니다. 필요한 아이템을 말씀하세요.]
 “취이익! 인간! 도망치지 마라!”
 용훈은 그를 향해 달려오는 오크를 보았다. 어깨너비가 웬만한 초중딩 키만 한 그 오크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자, 잠깐만! 지금 나, 저거랑 싸워야 돼?”
 [싸우고 안 싸우는 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어떤 루트를 거치건, 철혈의 왕좌에 앉기만 하면 됩니다.]
 “미친! 저렇게 눈 뒤집혀서 달려오는데 어떻게 안 싸워! 나는 무기 같은 거 없어?”
 [무기가 필요하십니까?]
 “다, 당연하지!”
 순간 용훈의 시야를 수천 개의 무기가 뒤덮었다.
 [필요한 무기를 고르세요.]
 “안 보이잖아!”
 용훈은 허둥거리며 아무렇게나 방패와 칼 한 자루를 집었다. 그러자 무기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광활한 어깨를 가진 오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쾅! 오크가 용훈이 들고 있는 방패를 걷어찼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용훈의 어깨가 단숨에 빠져버리며 방패가 뒤로 밀렸다. 우습게도, 용훈은 자신이 들고 있던 방패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부러진 이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끄아악!”
 극심한 고통에 용훈이 비명을 질렀다. 순간 그의 비명이 멎었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촤학! 거대한 칼날은 용훈의 몸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놓았다. 용훈은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저마다 다른 것을 보는 기묘한 경험을 하며 의식을 잃었다.
 쓰러지는 그의 귓가에 시스템이 속삭였다.
 [데이터 수집 실패. 인스턴스를 초기화합니다. 다시 도전하시겠습니까?]
 
 
 # 2화 - 실력 발휘
 
 “으가가가가!”
 용훈이 바닥을 굴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양팔을 휘젓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떨어집니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그를 살렸다. 그는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가까스로 몸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헉, 헉···.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죽은 거 아니었어?”
 용훈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정확히 반으로 잘린 자신의 몸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인스턴스의 공략이 실패했습니다. 유효한 데이터를 수집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도전하시겠습니까?]
 “아, 썅! 나 죽은 거냐고!”
 [본 던전은 튜토리얼 던전과 마찬가지로 가상 인스턴스 기능을 지원합니다. 즉, 인스턴스 내부의 조용훈 님은 죽었지만, 그것이 실제 죽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용훈 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실제와 같은 죽음을 경험한 이후라 심리적 충격이 있는 것뿐입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마치 용훈을 달래듯 나직하게 말했다. 용훈은 호흡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던전 공략에 실패한 것뿐이라 이거지. 뭐, 실패해도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이건 기분이 정말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 다시 도전하기가 무섭네···.’
 한참 고민하던 용훈이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 재도전하면 말이야. 꼭 아까 거기로 가야 해? 좀 쉬운 건 없어? 튜토리얼치고는 너무 어렵잖아, 이거.”
 [죄송합니다. 본 던전에 할당된 인스턴스는 철혈의 성채뿐입니다. 본 던전의 인스턴스에 도전을 원치 않으시면 던전을 포기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던전을 포기한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모든 것을 초기화하고 각성의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각성의 순간? 총에 맞고 5층에서 떨어지던 그때로 돌아간다고?
 용훈은 양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이거 완전 막다른 골목이네.
 “일단 알겠어. 던전 포기는 절대 못 하겠네. 그럼 무조건 저 철혈의 성채를 공략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어, 근데 잠깐. 아까 싸우거나 싸우지 않는 건 내 선택이라고 했지?”
 [맞습니다.]
 “그럼 그냥 몰래 들어가 왕좌에 앉기만 해도 돼? 말하자면···. 빈집털이 같은 거 말이야.”
 [방법은 자유입니다.]
 용훈의 눈이 번뜩였다. 몰래 숨어 들어가 빈집을 털어오는 건 용훈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이래 봬도 용훈은 업계(?)의 선배들이 입을 모아 천재라고 칭송하는 최고의 도둑이었으니까.
 “좋아. 재도전한다.”
 
 다시 한 번 세상이 우그러졌다 펴졌다. 용훈은 멀리 철혈의 성채가 보이는 들판에 서 있었다.
 그는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옴과 동시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취이익! 무슨 소리가 났다!”
 “취익! 취익! 쥐새끼다! 신경 꺼라, 머저리!”
 “취이익! 너! 나 욕했다! 죽인다!”
 곧바로 무기가 부딪치고 생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랄들 한다, 멍청이들’
 용훈은 발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그들로부터 멀어져갔다. 한참을 조용히 이동한 끝에 그는 성채의 뒤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단은 저 성벽을 넘어야 되는데···.’
 그는 불그스름한 빛을 내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높이가 10m쯤 될까. 못해도 5층짜리 주공아파트 한 채의 높이는 되어 보였다.
 다행인 건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 오랜 세월 풍화되어 어느 정도 표면이 정리된 상태이긴 했지만, 규격화된 크기의 돌을 사용한 것이 아니기에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부분이 있었다.
 용훈은 꽤 긴 시간을 할애해 혹시라도 순찰이 있지는 않을지 살폈다. 하지만 오크들은 인간처럼 주기적으로 순찰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뭐,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그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인벤토리에서 로프를 꺼냈다.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던전은 인벤토리와 이런저런 아이템을 지급했다.
 그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올가미를 만들어냈다. 용훈은 큼직하게 만들어낸 올가미를 붕붕 휘두르며 성벽 위를 보았다. 성벽 위에는 요철의 모양을 한 흉벽이 존재했다. 그는 올가미를 던져 흉벽 중 하나에 걸 생각이었다.
 “합!”
 짧은 기합과 함께 그가 로프를 던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로프가 무거웠다. 미처 흉벽에 도달하지 못한 로프가 성벽 윗부분을 툭 치고는 떨어져 버렸다.
 용훈은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시도했다. 어차피 이 퀘스트에는 시간제한 같은 건 없었으니까.
 대여섯 차례 도전 끝에 흉벽에 올가미가 걸렸다. 힘차게 로프를 당기자 올가미가 조여지며 흉벽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좋아. 올라가자.”
 용훈은 로프를 허리와 왼쪽 허벅지에 걸고서 반대편 줄을 슬슬 당기며 벽을 밟았다. 그리고는 팽팽해진 줄을 당기며 능숙하게 벽을 밟고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여튼 뭐든지 배워두는 게 장땡이야. 마카오박 따라다니면서 줄 좀 타본 게 이렇게 유용할지 누가 알았어.’
 마카오에 거주 중인 박재순 씨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계 곳곳에서 비싼 물건들을 훔쳐 먹던 도둑이었다. 얼마 전에는 홍콩에서 무슨 보석을 훔쳤다고 하던데, 그거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흉벽 아래에 다다른 그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성벽 위를 살폈다. 다행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훌쩍 성벽을 넘어선 용훈이 로프를 감아 들었다. 몰래 숨어들려면 로프는 필수품이었으니까.
 성벽 아래는 오크들이 득실거렸다. 술을 먹고 고기를 뜯고 욕설을 퍼붓고 쌈박질을 하는 오크들로 성의 내원이 시끌벅적했다.
 ‘아래로 내려갔다가는 또 두 쪽 나게 생겼군.’
 용훈이 눈을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다섯 개의 탑 중 가장 가까운 탑이 보였다.
 탑의 지붕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길쭉하고 뾰족한 모양이었다. 뾰족한 탑 지붕에는 커다란 들창이 나 있는 발코니가 있었는데, 그것은 단단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가만있자···. 중앙 탑에 왕좌가 있다고 했지? 탑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로프를 이용해서 바로 중앙 탑으로 넘어가 볼까?’
 용훈은 여전히 발소리를 죽인 채 이동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탑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용훈은 다시 올가미 로프를 던졌다.
 이번에는 단번에 탑 지붕의 뾰족한 꼭대기에 올가미가 걸렸다. 용훈은 로프를 팽팽하게 당겨 반대편에도 올가미를 만든 후 성의 흉벽에 걸었다.
 ‘후. 좋아. 가보자.’
 용훈은 로프 위에 납작 엎드렸다. 모양이 좀 빠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는 영화처럼 밧줄 한 가닥을 타고 달리는 능력 따위는 없었으니까.
 왼발의 발등과 오른발의 뒤꿈치로 밧줄을 단단히 조인 채 용훈은 송충이처럼 천천히 밧줄을 타고 이동했다.
 그의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오크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며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다섯 번째 탑의 들창 앞 발코니에 다다른 용훈은 얼른 내려서서 로프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이제 반대편 흉벽에 걸린 올가미를 풀어야 한다.
 용훈은 보육원에서 빨래를 털던 기억을 떠올리며 로프를 전력으로 털었다. 로프를 타고 커다란 물결이 흉벽을 때렸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올가미가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체중에 눌려 올가미가 너무 세게 조여진 것 같았다.
 ‘어쩌지? 여벌로 로프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버리고 가자니 불안한데···. 어? 잠깐만. 근데 이거 아이템이잖아?’
 용훈은 로프의 끝 부분을 잡은 채 인벤토리로 로프를 넣었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의식만으로 조작이 가능했다.
 ‘오, 되네.’
 용훈은 인벤토리로 돌아온 로프를 다시 꺼내 들었다.
 ‘맘에 드네, 이 인벤토리라는 거.’
 용훈은 로프의 끝을 쥐고 올가미를 만들어내며 탑들을 살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탑의 높이는 거의 비슷했고 각 탑 사이의 거리는 일정했다.
 ‘이거 잘하면 한 번에 중앙탑까지 가겠는데?’
 용훈은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다시 로프를 말아 쥐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가능할 것 같았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진짜로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용훈이 힘차게 로프를 던져 네 번째 탑의 꼭대기에 올가미를 걸었다. 그다음 그는 발코니를 강하게 박차며 뛰어올라 최대한 로프의 위쪽을 붙잡았다.
 후우웅!
 두 팔과 가슴을 바짝 당겨 로프를 움켜쥔 그는 마치 진자처럼 네 번째 탑을 기준으로 커다란 호를 그려냈다. 네 번째 탑의 거친 표면이 그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최저점에서 반등하며 그의 몸이 상승하기 시작할 때 용훈은 허리를 힘차게 튕겨 가속을 더했다. 그리고 진자 운동의 힘이 다해 상승이 멈출 무렵 그는 로프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으며 몸을 던졌다.
 ‘닿아라! 닿아라!’
 용훈이 기를 쓰며 손을 뻗었다. 가까스로 그의 손이 중앙 탑의 발코니 난간을 움켜쥐었다.
 용훈은 발코니로 올라섰다. 안으로 들어가는 들창은 단단한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용훈은 철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음···. 별로 어렵진 않겠네.”
 현대의 핀 텀블러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열악한 잠금 방식을 보며 용훈이 끄덕거렸다.
 인벤토리를 뒤져 락픽을 꺼내 든 그가 열쇠 구멍을 쑤시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달칵거리며 세 개의 핀을 모두 정위치에 맞추자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껌이군.”
 락픽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은 그가 조용히 문 안으로 발을 옮겼다.
 문 안쪽은 먼지가 자욱한 다락방이었다. 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제외하면 어떠한 광원도 없는, 어두운 공간.
 ‘야투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더듬 나아가며 용훈은 입맛을 다셨다. 그가 들어온 문을 제외하면 어디에도 내려가는 문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현대의 구조를 떠올리면 안 돼. 가만있자···. 동화를 읽어본 게 언제였더라?’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동화를 되새기던 그는 이내 경첩이 달린 바닥을 발견했다.
 ‘역시 다락방 문은 밀어서 올리는 맛이지.’
 용훈은 널찍한 정사각형의 바닥 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고 힘껏 당겼다. 순간 커다랗게 새어 나오는 삐걱 소리에 그는 동작을 멈췄다.
 ‘조심, 조심. 여기부터는 조심해야 해.’
 그는 살짝 열린 틈 사이로 아래를 살폈다. 다락방의 아래쪽은 환하게 밝혀진 복도였다. 복도 양편에 붙은 문 안쪽에서 시끄러운 오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용훈은 천천히 문을 들어 올렸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아래로 머리를 내리자 저쪽 복도 끝에 화려한 문이 보였다. 아마도 그쪽이 왕좌로 향하는 문인 것 같았다. 자고로 화려한 장소에는 화려한 문이 어울리는 법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문이 어떤 방식으로 잠겨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복도 끝의 문은 귀퉁이를 강철로 감싼 나무문이었는데 그 표면에 커다란 뿔을 단 오크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오크의 얼굴 양옆으로 갖가지 문양들과 장식들이 붙어있었다.
 그뿐이었다.
 이 문에는 손잡이도 열쇠 구멍도 없었다.
 
 
 # 3화 - 임무 완수
 
 ‘설마···. 안 잠기는 문인가?’
 잠기지 않고 밀어서 여는 문. 서부영화의 술집에 달린 것 같은 스윙도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용훈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곧바로 용훈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자기만의 소중한 공간에 스윙도어를 단단 말인가.
 ‘그래도 일단 가서 밀어나 보자.’
 그렇게 생각한 용훈이 아래로 내려가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복도 안쪽의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용훈은 허겁지겁 바닥 문을 닫고 빼꼼 열린 틈 사이로 아래를 살폈다.
 안쪽 방에서 오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좀 전에 용훈을 반으로 갈라놓았던 오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깨 역시 1.5배는 더 넓었다.
 ‘미친···. 저거 완전 괴물이네.’
 그 오크는 허리춤에 매단 가죽 주머니에서 은은한 초록빛을 내는 돌멩이를 꺼내 문에 그려진 오크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오크 그림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다.
 ‘아놔. 카드키 방식이었어?’
 실제로는 복잡한 마법의 작용이었지만 용훈은 그냥 카드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락픽이 안 통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래서야 락픽이 있어도 저 문은 따지 못한다. 카드키를 훔치거나 아니면 보안 시스템을 해킹해야 하는데, 해킹은 용훈의 분야가 아니었다.
 ‘결국 저 키를 뽀려야 되는구만. 아, 이거 점점 더 빡세지네.’
 하지만 그는 별로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오크가 카드키(?)를 집어넣은 가죽 주머니를 떠올렸다. 가까이만 갈 수 있다면 그 주머니를 슬쩍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소매치기야말로 그의 전문 분야였으니까.
 어쨌든 용훈은 다락방의 먼지 구덩이에 코를 박고 아까의 오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다락방의 문은 오크가 나온 문의 바로 앞에 위치했다. 용훈은 오크가 방문으로 들어가는 틈을 타 상체를 밖으로 내밀고 오크의 허리춤을 털 생각이었다.
 ‘시발. 잘 될까? 이러다 또 반 토막 나는 거 아냐?’
 겁이 나긴 했다. 사실 실제로 현실에서 도둑질을 할 때는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다. 무조건 안전제일. 그게 용훈의 모토였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 아니다. 물론 지랄 맞게 사실적인 죽음을 또 겪는 것은 사양하고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현실에서처럼 쫄 필요까진 없었다.
 덜컥. 문에 그려진 오크의 눈이 빛을 내뿜자 문이 열렸다. 거대한 덩치의 오크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거대한 다리뼈를 들고 있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 맛이 아주 좋았던지 그 오크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췩췩, 취리취리취, 취이익! 뭐 이런 식으로.
 그 오크가 다락방 문의 바로 밑을 지나는 순간!
 용훈은 번개처럼, 그러면서도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문을 열었고, 넓게 벌린 다리로 몸을 지탱하면서 상체를 아래로 던졌다.
 그의 손이 오크의 정수리를 스쳐 등을 지나 허리를 향했다.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단검의 날이 부드럽게 가죽 주머니의 매듭을 갈랐다. 주머니는 소리도 없이 허리띠에서 분리되었다. 순간 용훈이 엄지와 약지를 사용해 주머니를 낚아챘다.
 ‘좋아!’
 번개처럼 주머니를 훔친 용훈이 얼른 몸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락방의 문을 닫은 채 잠시 동안 아래층의 동태를 살폈다. 가끔가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밖으로 나오는 오크는 없었다.
 ‘지금!’
 고양이처럼 날렵하고 조용한 동작으로 용훈이 바닥을 디뎠다. 그는 빠르게 방문을 지나 오크의 얼굴이 그려진 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초록빛의 돌을 꺼내 문에 그려진 오크에 갖다 댔다.
 덜컥. 문이 열렸다. 용훈은 슬그머니 안을 살피며 문을 나섰다.
 ‘우와아···. 이거, 오크 따위가 살기에는 너무 멋진데?’
 문밖은 탑의 내부를 둥그렇게 두른 발코니였다. 그리고 난간 너머로는 거대한 홀이 있었다.
 용훈은 거대한 홀이 주는 위압감에 압도되었다. 그것은 아더왕이라던가 미드 왕좌의 게임 등에서 본 것들보다 더욱 근사했다.
 탑의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지저분한 붉은 카펫. 거대한 덩치에 핏자국이 가득한 무기를 든 오크 경비병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아마 적들의 것으로 생각되는 무기들. 그리고 탑 중앙에서 뻗어 내려온 빛을 받아 번쩍이는 거대한 왕좌.
 ‘저게 왕좌구나.’
 용훈은 왕좌를 내려다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왕좌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좀 전에 열쇠를 빼앗았던 오크도 괴물이었는데, 지금 왕좌를 지키는 열 명의 오크는 그놈보다도 더한 괴물이었다. 실제로 그중 한 놈은 칼날 길이가 2m는 되어 보이는 무시무시한 대검을 들고 있었다. 워낙 엄청난 덩치 때문에 오히려 그 검이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용훈은 내려가는 길을 살폈다. 발코니 한쪽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것은 탑의 내벽을 따라 빙글빙글 돌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좋아. 일단 계단을 중간쯤 내려가서 로프를 타고 바로 왕좌를 노려보자.’
 용훈은 인벤토리에서 로프를 꺼냈다. 혹시 몰라 두 개 모두 꺼낸 그는 두 개의 로프 끝을 모두 올가미로 만들어 둔 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준비를 끝낸 용훈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철컥!
 ‘어?’
 갑자기 발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싶은 순간, 그는 섬뜩한 기분에 무작정 몸을 뒤로 던졌다.
 콰앙! 커다란 도끼날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더니 좀 전까지 용훈이 서 있던 곳을 깨부쉈다. 1초라도 늦었다면 또다시 반 토막이 나버릴 뻔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용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취이익! 뭐냐! 무슨 소리냐!”
 “취익! 취익! 낸들 아냐! 가서 봐라, 똥덩어리!”
 “취이이익! 너 죽는다!”
 옥신각신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얼른 다시 다락방으로···.’
 용훈이 가죽 주머니를 뒤지며 문으로 돌아설 때.
 벌컥! 거칠게 문이 열리며 거대한 덩치의 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뻘겋게 핏발 선 오크의 눈이 용훈의 손에 들린 가죽 주머니와 용훈의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취이익! 인간! 내꺼 훔쳤다! 성채 들어왔다! 머리를 뜯어버린다!”
 ‘시발, 좆됐다···.’
 “츄와아악! 인간! 머리를 내놔라!”
 거대한 덩치의 오크가 용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훈은 순간 고민했다.
 ‘그냥 죽을까? 다시 시작해?’
 어찌 보면 그게 합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 죽는다고 해서 실제로 죽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공략해온 것과 함정의 존재까지 알고 다시 시작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진짜건 아니건 죽음은 사실처럼 고통스러웠으니까.
 ‘그래, 어차피 죽을 거면 뭐라도 해보는 거야!’
 용훈은 발코니의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투박한 난간 바깥쪽을 디딘 그는 한 손으로 로프를 꺼내 던졌다. 로프의 끝에 만들어둔 올가미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의 한쪽 기둥에 걸렸다.
 “하앗!”
 짧은 기합과 함께 용훈이 난간을 박찼다.
 “취이익! 어딜 도망가냐!”
 용훈의 팔 네 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두꺼운 팔이 용훈을 향해 날아왔다. 용훈은 그 팔에 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취익! 죽인다! 죽여어···. 취이이이이이!”
 균형을 생각 못 한 멍청한 오크야, 잘 가라.
 오크는 용훈을 잡으려다가 균형을 잃고 난간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오크의 비강을 울리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탑 안을 진동시켰다.
 “취익? 뭐냐! 무슨 소리냐!”
 “취이익! 오크다! 오크가 떨어졌다!”
 “츄아악! 올라가라! 빨리 올라가라, 굼벵이!”
 “취익! 너 나 욕했다! 죽인다!”
 용훈은 이제는 질릴 것 같은 똑같은 패턴의 대화를 들으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멀리 아래에서 좁은 계단을 오르는 거대한 덩치의 오크들이 보였다.
 로프가 팽팽하게 당겨지자 용훈의 몸이 방향을 바꿔 벽을 향해 돌진했다. 용훈은 로프를 당겨 몸을 세우며 벽을 밟았다.
 쾅! 묵직한 충격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멈춰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팽팽한 로프를 쥔 채 벽을 달리기 시작했다.
 “취익! 인간이다! 인간이 날아다닌다!”
 “취엑! 죽여라!”
 부웅! 거대한 칼이 뱅글뱅글 돌며 날아들었다. 용훈은 허겁지겁 벽을 달려 그것을 피해냈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칼날이 탑의 벽을 부수고 틀어박혔다.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한 용훈이 계단의 중간에 내려섰다. 그는 얼른 로프를 인벤토리로 회수했다가 다시 꺼냈다.
 “츄와아악! 죽어라, 인간!”
 커다란 도끼를 든 거대한 오크가 쿵쾅거리며 계단을 달려 올라왔다. 용훈은 떨리는 손으로 계단의 난간에 로프를 메고 다시 밖으로 몸을 날렸다. 쾅!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오크의 도끼가 내리꽂히며 파편이 비처럼 용훈을 때렸다.
 “으아아아!”
 용훈은 공포와 흥분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이 다시 허공을 가로질렀다. 좁은 계단을 메운 오크들이 용훈을 향해 무기들을 휘둘러댔다.
 발끝을 스친 칼날에 핏물이 솟았다. 발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팠다.
 용훈은 발밑으로 고개를 돌려 아래를 살폈다. 아직도 왕좌는 한참이나 아래에 있었다.
 다시 벽을 밟은 용훈이 벽을 따라 달렸다. 똑같은 작업을 한 번만 더 하면 어떻게 왕좌에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계단참에 서 있던 오크가 도끼를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난간에 매여 있는 로프를 노리고 있었다.
 ‘시발! 이걸 생각 못 했네!’
 용훈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왕좌에만 가 닿으면 되는 거잖아! 에라, 모르겠다!’
 용훈은 젖 먹던 힘까지 더해 벽을 박찼다. 그 순간 오크의 도끼가 로프를 끊으며 계단을 깨부쉈다.
 “으아아아악!”
 끊어진 로프를 쥔 채 용훈이 소리쳤다. 그의 몸이 세차게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왕좌! 왕좌 어딨어!’
 다행히 시야 한구석에 왕좌가 보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왕좌를 향해 온몸을 파닥거렸다. 왕좌가 맹렬한 속도로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끄아악!”
 퍼벅! 용훈은 왕좌 위에 거꾸로 내리꽂혔다. 팔걸이에 부딪힌 옆통수에서 수박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우두둑 소리와 함께 목뼈가 부러져 버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용훈의 두 손은 왕좌의 등받이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츄와악! 감히 대장의 의자를 더럽혔다! 죽여 버린다!”
 가장 거대하고 강해 보이던 오크가 쿵쾅거리며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무래도 벌써 죽은 것 같다, 멍청아.’
 목뼈가 부러지고 허리가 꺾이고 머리가 터진 채 용훈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거대한 오크의 발이 용훈의 몸을 짓이기려는 듯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퀘스트 완수. 인스턴스를 종료합니다.]
 순간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오며 세상이 우그러졌다.
 
 
 # 4화 - 안 주면 털어간다
 
 용훈은 눈을 떴다. 거칠고 새카만 동굴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옆통수, 멀쩡하고. 목, 안 부러졌군. 허리, 안 꺾였어. 좋아.
 용훈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축하합니다. 인스턴스 던전의 퀘스트를 완수하셨습니다. 또한, 최초로 난이도 S의 인스턴스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완료 보상이 상향 조정됩니다. 조용훈 님의 데이터가 성공적으로 수집되었습니다. 공략 정보를 출력합니다.]
 메시지의 목소리가 그치자 시야 한 편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용훈이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수행했던 모든 행동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처치한 개체 수 : 0]
 [전투 수행 횟수 : 0]
 [공격 행위 : 0]
 [방어 행위 : 0]
 [선호하는 무기 : 없음]
 [전투 수행 능력 평가 : 최하]
 [함정 해체 : 1]
 [도둑질 : 1]
 [자물쇠 해체 : 1]
 [로프 사용 : 5]
 [벽 타기 : 3]
 [성향 : 겁쟁이]
 [스타일 : 민첩한 몸놀림으로 도망을 잘 침]
 [총평 : 겁이 많고 싸움을 무서워함. 긍지라고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음.]
 ‘··· 어째 기록만 보면 내가 병신인 것 같네.’
 용훈은 씁쓸한 표정으로 목을 더듬었다. 아직도 목이 부러질 때의 느낌이 남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조용훈 님의 모든 활동을 토대로 최적의 직업과 능력치, 아이템을 산출합니다. 최초로 난이도 S의 인스턴스를 클리어한 업적으로 보상이 상향조정됩니다.]
 활동 기록이 적힌 알림창이 사라지자 곧바로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이름 : 조용훈]
 [직업 : 부끄러운 좀도둑]
 [레벨 : 5]
 [경험치 : 237 / 6,000
 [능력치]
 - 힘 : 11
 - 민첩 : 16
 - 체력 : 4
 - 지능 : 3
 - 마력 : 1
 - 생명력 : 400
 - 마나 : 100
 [여유 포인트 : 4]
 [특성]
 - 알 수 없는 감각(파악되지 않음)(레전드)
 - 월 라이딩(레어)
 [스킬]
  [패시브]
  - 자물쇠 따기(매직)
  - 소매치기(매직)
  - 발소리 죽이기(매직)
  - 함정해체(매직)
  - 벽타기(매직)
  - 줄타기(매직)
  [액티브]
  - 없음.
 [아이템]
 - 장미 군주의 손가락(레전드) : 차원 포식자 장미 군주의 손가락. 채찍의 형태로 가공되어 손쉽게 사용이 가능하다. 사용자의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길이가 조정되고 수발이 자유로우며 탄성이 뛰어나고 어디에나 달라붙는다. 가벼우면서도 질기고 단단하지만,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 만능열쇠(매직) : 모든 종류의 자물쇠를 연다. 하루에 3번 사용 가능.
 - 인벤토리(매직) : 표준 장비
 “엥? 야, 이게 뭐야! 부끄러운 좀도둑? 거기에 내가 지능이 3이라고? 평균이 10인데 3이면 똥멍청이란 소리잖아! 게다가 스킬은 왜 죄다 패시브야! 아이템은 채찍에다 열쇠뿐이고! 야, 이게 다 뭔 개소리야!”
 황당한 결과에 용훈이 격분해 소리쳤다.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 결과는 조용훈 님의 행동을 토대로 산출되었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대로, 창조의 던전은 선택받은 자의 자질과 잠재력을 파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본 던전의 인스턴스를 진행하는 과정을 통해 사용자에게 맞는 최적의 직업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조용훈 님은 비겁한 술수로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용기 있는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뭐, 인마?”
 묘하게 불쾌한 말투로 말하는 시스템 메시지를 들으며 용훈이 인상을 구겼다.
 “야, 그래서 내가 아까 물어봤잖아! 진짜로 안 싸워도 되냐고! 니가 안 싸워도 된다며! 내 자유라며!”
 [자유 맞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하신 결과를 토대로 보상이 책정된 것입니다.]
 “아놔, 그럼 그 얘기를 해줬어야지!”
 [얘기했습니다.]
 “언제!”
 [조용훈 님께서 지루한 설명은 넘어가자고 하셨을 때요.]
 “······.”
 뭔가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잘못했다, 하기에는 늦었다. 환불이라도 받으려면 진상을 부리는 수밖에.
 “아, 몰라! 다시 하자.”
 [··· 네?]
 “그 인스턴스인가 하는 거 말이야. 다시 하자고.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볼 테니까. 필요한 아이템 말하면 돼?”
 [죄송합니다만, 인스턴스는 종료되었습니다.]
 “아, 그런 게 어딨어! 다시 해!”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다 돼!”
 [안 됩니다.]
 “이이익!”
 상대가 눈앞에 있었으면 멱살이라도 잡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실체가 없는 시스템 메시지였다. 용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아나, 진짜! 그냥 다시 한 번만 해줘! 어? 부끄러운 좀도둑이 뭐냐고, 진짜!”
 [죄송합니다. 던전을 종료할까요?]
 “종료는 니미!”
 용훈은 바닥에 누워버렸다.
 “안 가! 못 가! 다시 해줄 때까지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 마음대로 하십시오.]
 용훈은 누군가가 잡아 끌어도 절대 일어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냥 무시였다.
 시스템 메시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훈은 그저 혼자 텅 빈 동굴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진짜 안 되는 건가? 그럼 나 진짜 부끄러운 좀도둑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용훈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시발. 그럼 저 무식한 괴물들을 상대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했던 건데? 미치겠네, 진짜.”
 답답한 마음에 욕설이 자꾸 터져 나왔다. 그러던 그의 시야 한 편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뭐지?”
 - 레전드 특성 ‘알 수 없는 감각’ 발동
 “특성 발동?”
 붉은 글자를 보고 있는데 문득 글자 너머 허공에서 푸른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낭떠러지 너머의 허공에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듯 늘어서 있었다.
 “뭐야 저건···.”
 용훈이 그쪽으로 다가섰다. 가까워지자 희미한 푸른 물체들이 점점 더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절벽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희미한 푸른 물체들의 아래에 조그맣게 글자들이 떠올랐다.
 - 선택받은 자의 길
 ‘길?’
 순간 용훈은 뭔가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평소에도 돈 되는 냄새를 잘 맡기로 유명했던 용훈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냄새 수준이 아니었다. 이 앞에 그의 운명을 바꿀 무언가가 있다. 용훈은 그런 강한 확신을 느꼈다.
 “잠깐. 특성이 발동된단 얘기는 벌써 모든 보상이 지급됐단 소린가? 그럼 아이템도?”
 용훈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자 시스템 메시지가 말한 것처럼 장미 군주의 손가락과 만능열쇠가 보였다. 용훈은 거침없이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집어 들었다.
 “와···. 이거 장난 아닌데?”
 그의 촉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 촉도 필요 없었다. 그의 레전드 특성, ‘알 수 없는 감각’이 확실하게 보장했다. 이 물건은 무지무지하게 값나가는 놈이라고.
 “일단 써보자.”
 용훈은 높다란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채찍을 걸어 맬만한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뭐 아무 데나 잘 붙는다고 했으니까.”
 채찍을 빙빙 돌리던 용훈이 그것을 힘껏 던져 올렸다. 그러자 일자로 쭉 뻗어 올라간 채찍이 종유석을 휘감더니 본드로 붙인 것처럼 찰싹 달라붙는 것이었다.
 “대박! 이거 올가미 매듭도 필요 없구만?”
 용훈은 팽팽하게 당겨진 채찍을 만지며 탄성을 내질렀다. 왠지 자신이 얻은 보상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부끄러운 좀도둑이라니. 이런 이름으로는 살 수 없어!”
 용훈은 채찍을 단단히 감아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놀랍게도 그의 의지를 따라 채찍이 당겨지며 그의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용훈은 단숨에 삼사 미터를 날아 희미한 푸른 물체를 밟았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자 그제야 그것의 모양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돌덩이였다.
 용훈을 일정한 간격으로 허공에 늘어선 돌덩이들을 보며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징검다리.
 그렇다면 이 다리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용훈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디건 간에 그곳에는 대박이 기다리고 있을 게 확실했다. ‘알 수 없는 감각’과 도둑으로의 촉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용훈은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이용해 손쉽게 징검다리를 건넜다. 마지막 돌덩이 위에 올라서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장소가 보였다.
  새카만 어둠에 가려져 있던 숨겨진 장소. 그것은 새로운 동굴의 입구였다.
 천장에서 채찍을 떼어낸 용훈은 입구를 향해 채찍을 걸고 그 위로 사뿐히 내려섰다. 쓰면 쓸수록 장미 군주의 손가락은 대단한 물건 같았다.
 좁은 동굴을 따라 걷다 보니 동굴을 틀어막은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아니, 철문이라기보다는 철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문손잡이도, 경첩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거 열리긴 하는 거야?”
 용훈이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들어 올려도 봤지만, 철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깐. 이걸로 열 수 있나?”
 용훈이 인벤토리에서 만능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때였다.
 그의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것은 온통 새빨간 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경고’라는 두 글자가 색색깔로 깜빡이고 있었다.
 [경고! 경고! 허락되지 않은 루트로의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침입자 배제 루틴 실행! 위험합니다! 돌아가십시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뭐?”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침입자 배제 루틴이 실행되었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인스턴스가 아닙니다!]
 “흠···.”
 용훈은 턱을 감싸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왜 지금까진 조용하다가 ‘만능열쇠’를 꺼내 들자 이 난리를 피우는 걸까? 설마 이걸로 정말 저 철벽을 열 수 있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앞의 경고 문구가 한층 더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귓가에 울리는 경고 메시지도 더욱 커졌다. 마치 피를 토하며 소리치는 것 같았다.
 용훈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무래도 이놈은 포커페이스가 뭔지 잘 모르나 봐.
 “만능열쇠. 사용.”
 용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철벽의 안쪽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찰칵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철문이 스르륵 위로 솟아올랐다. 그동안 귓가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으로 바뀌었으며 새빨간 배경의 알림창은 미친 듯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벽이 완전히 열리고 나자 알림창과 비명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철벽의 안쪽은 둥근 방이었다. 동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깔끔하게 만들어진 공간에는 단 두 가지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큼직한 보물 상자. 그리고 방의 정 가운데에 둥둥 뜬 채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는 둥근 물체.
 
 
 # 5화 - 대박!
 
 용훈이 그것을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알 수 없는 감각’이 발동되며 그것들의 이름을 표시했다.
 - 클리어 보상 아이템 보관함
 - 던전의 영혼
 용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리어 보상 아이템 보관함은 그 이름만으로도 뭔지 알 것 같았다. 대충 클리어한 사용자에게 지급할 아이템들을 보관하는 상자이리라. 그런데 던전의 영혼은 뭐지?
 용훈은 상자를 지나쳐 던전의 영혼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도 못해 그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느껴지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눈앞에 붉은 글자가 깜빡였다.
 - ‘알 수 없는 감각’ 발동.
 - 치명적인 함정 발견.
 - 함정 해체 확률 0.17%.
 ‘함정이라고?’
 그러고 보니 공중에 뜬 던전의 영혼 주변이 왠지 불그스름하게 변한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의 특성인 ‘알 수 없는 감각’이 시야를 보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체 확률이 0.17%라. 그럼 뭐 못한다는 소리네. 그냥 깔끔하게 포기할까?’
 이곳 역시 던전이긴 하지만, 인스턴스의 안에서처럼 죽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괜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서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타고난 도둑으로의 촉과 ‘알 수 없는 감각’이 전해주는 예언 같은 인지능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것은 무조건 얻어야 한다. 그의 몸과 마음이 한뜻으로 그것을 부르짖고 있었다.
 용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해체도 못 하는 함정이라잖아!”
 답답한 마음에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글자를 띄워줘 봐야 뭐하냐고!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해체가 안 된다는 소리밖에···. 엉?”
 용훈이 말을 잃었다. 던전의 영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감각’이 표시해놓은 글자들을 아래에 매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새로운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 함정 분석 가능. 분석 시작(Y/N)
 “함정 분석? 뭔진 몰라도 일단 해보자.”
 그의 의지가 허락하자 문구가 빠르게 변화했다.
 - 함정 분석 중. 진행률 0.01%. 예상 소요시간 45분.
 “오래도 걸리네. 그러면 그동안 나는 또 무슨 대박을 건졌는지 한번 볼까?”
 용훈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한편에 놓인 커다란 보물 상자를 보고 있었다.
 “클리어 보상 아이템 보관함이라···. 그럼 모든 종류의 클리어 보상이 다 들어있는 건가? 와, 그럼 진짜 대박인데!”
 그가 보물 상자에 다가서자 상자 아래쪽에 떠 있는 문구가 변화했다.
 - 클리어 보상 아이템 보관함
 - 잠겨있음.
 - 자물쇠 해체 확률 1.4%
 “해체 확률 1.4%···. 쉬운 게 없네. 아, 아니지. 만능열쇠가 있잖아?”
 용훈이 인벤토리에서 만능열쇠를 꺼내 사용하자 상자에서 찰칵 소리가 들려왔다. 용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상자를 열었다.
 “우오오오오! 대애애박!”
 열린 틈으로 새어 나오는 강렬한 황금빛! 용훈은 그 황홀한 황금의 내음을 한껏 들이키며 상자를 열어젖혔다.
 상자 한쪽에는 비상하는 드래곤이 그려진 금괴가 가지런하게 쌓여 있었다. 다섯 개씩 다섯 줄에 네 단으로 쌓인 금괴. 그 총합이 100개.
 금괴 하나의 무게는 대략 1㎏. 순수 금 시세만으로도 4천만 원 이상의 값어치를 가졌다.
 하지만 날개 여섯 개 달린 드래곤이 그려진 금괴는 던전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시중에 유통하기도 간편했으며 던전을 통해 구할 수 있는 다른 금속들을 이용해 합금을 만들어낼 때 필수적인 첨가물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던전의 금괴는 현실의 금괴보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치를 가졌다.
 “미친···. 이게 얼마야? 하나에 오천씩만 잡아도···. 오, 오십억?”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평생 벌어도 구경도 못 할 정도의 금액.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자의 반대편에는 세 개의 아이템이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개수가 적어 실망했는데,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나자 실망보다 환호가 앞섰다.
 - 만변자(萬變子)의 피부(레전드) : 최강의 키메라, 만변자 카락투스의 피부조직으로 만들어진 방어구. 착용자의 마나를 사용해 착용자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형태를 변형할 수 있으며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동일한 수준의 방어력을 보장한다.
 - 멸절의 여섯 날개(레전드) : 멸절의 궁수 아고나른이 남긴 손쇠뇌. 사용자의 마나로 각인된 마법을 발동시켜 탄환을 강화한다. 부가효과로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이 적용된다.
 - 스킬북(유니크) : 유니크 등급의 ‘마나 호흡’이 담긴 스킬북.
  *마나 호흡 : 끊임없이 주변의 마나를 들이마셔 사용자의 몸 안에 쌓는 지속형 스킬. 전투나 던전 클리어 등의 활동을 통해 평상시보다 더욱 많은 양의 마나를 축적하는 것도 가능하다.
 “오오오! 이런 미친! 유니크 스킬북에, 그보다 더 좋은 레전드 아이템까지 두 개씩이나? 완전 초대박이잖아!”
 용훈은 먼저 만변자의 피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지저분한 잿빛에 까끌까끌한 재질로 이루어진 티셔츠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용훈은 얼른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던지고 만변자의 피부를 걸쳤다.
 그의 머릿속에 만변자의 피부를 사용하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저 원하는 형태를 떠올리기만 하면 됐다.
 용훈은 즐겨 하던 게임 ‘와치캣츠’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순간 너저분하던 만변자의 피부가 눈 깜짝할 새에 변형을 완료했다.
 이제 용훈은 빛바랜 베이지색 스웨터에 가죽 트렌치코트, 지저분한 청바지에 새카만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검은색 모자에 끊어진 Z가 그려진 복면을 하고 있었다.
 “와···.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로 변장이 가능한 거야? 이거 진짜 사기네.”
 입이 귀에 걸린 용훈이 이번에는 멸절의 여섯 날개를 들어 올렸다. 널찍한 허리띠와 홀스터까지 세트로 달려 있었다.
 용훈은 허리띠를 찬 후 홀스터에서 멸절의 여섯 날개를 뽑아들었다. 이름과는 달리 멸절의 여섯 날개에서는 날개를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활대와 활시위조차 없었다. 그저 새카만 몸체의 이상하게 생긴 권총 같기만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용훈이 아무 생각 없이 빈 손쇠뇌를 들어 허공을 겨누어보았다. 그러자 순간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손쇠뇌의 양옆으로 여섯 장의 날개가 펼쳐졌다. 불길이 일렁이는 여섯 장의 날개가 활대의 역할을 맡았고 그 뒤로 새빨간 색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여섯 장의 날개가 펼쳐지자 날카로운 감각이 용훈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마음이 침착해지고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시력이 좋아졌는지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시야가 확대되었다.
 용훈은 코앞에서 보듯 가까운 동굴 벽의 주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퓽. 나직한 소리와 함께 빛살처럼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쿼렐은 단단한 동굴 벽을 두부처럼 꿰뚫고 사라져버렸다.
 발사가 끝나자마자 여섯 장의 날개가 홰를 치듯 한꺼번에 크게 펄럭였다. 그러자 다시 새빨간 활시위가 팽팽하게 뒤로 당겨져 있었다. 발사와 동시에 재장전이 이루어지는 구조였던 것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용훈이 멸절의 여섯 날개를 늘어트리자 거짓말처럼 여섯 장의 날개와 새빨간 활시위는 사라졌다.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던 날카로운 감각 역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바람에 살짝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30발들이 쿼렐 카트리지는 방아쇠의 앞부분에서 위쪽으로 삽입되어 있었다. 열어보니 쿼렐은 헌터들이 흔히 사용하는 것과 동일해 보였다.
 “너무 좋아서 말도 안 나오네. 일단 여기서 나가면 쿼렐부터 왕창 사놔야겠어.”
 멸절의 여섯 날개를 오른쪽 허벅지에 매달린 홀스터에 꽂아 넣은 다음,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스킬북이었다. 그것도 유니크 등급의.
 “그래, 역시 던전 보상의 최고봉은 스킬북이지!”
 용훈은 먼지가 소복이 쌓인 묵직한 책을 들어 올렸다. 모양은 책이지만 펼쳐 볼 수는 없는 물건, 스킬북. 용훈은 망설이지 않고 스킬북을 사용했다.
 순간 스킬북이 눈 녹듯 사라지며 눈앞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 패시브 스킬 ‘마나 호흡’ 획득.
 - 등급 판정, 유니크.
 - 스킬이 발동됩니다.
 기분이 상쾌했다.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지만, 그는 온몸을 파고드는 산들바람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마나 호흡이 빨아들이는 마나일 것이었다.
 용훈은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만끽했다. 마치 시원한 물이 몸 안을 휘도는 것 같았다.
 “아주 좋아. 첫 던전에 이 정도의 대박을 치다니. 역시 내가 재물복은 타고났나 봐. 크크크.”
 금괴까지 모조리 털어 인벤토리에 담은 용훈이 몸을 돌렸다. 여전히 방의 중앙에는 눈부신 빛을 내뿜는 둥근 물체가 떠 있었다. 그는 그 아래에 표시된 문구를 주시했다.
 - 던전의 영혼
 - 함정 분석 중. 진행률 87.44%. 예상 소요시간 10분.
 “10분 남았네. 그동안 뭐할까?”
 용훈은 만변자의 피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시간을 때웠다. 가능하면 여러 번 변형을 시켜보고 싶었지만 마나가 부족했다.
 만변자의 피부는 한번 변형을 할 때마다 100의 마나를 소모했다. 지금 용훈이 가진 마나는 가득 차봐야 100. 좀 전에 한번 변형을 시켰기 때문에 지금 용훈은 마나가 텅 빈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감각’이라는 레전드 특성이 발동해준 것이었다.
 특성의 분석에 따르면, 이 대단한 물건은 몸에 걸치는 의복의 형태를 가졌다면 그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었다. 삼각팬티처럼 작은 형태에서부터 풀 플레이트 메일 같은 특수한 형태까지.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떠한 형태를 띠든 동일한 방어력을 보장한다는 점이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처럼 방어에 특화된 형태를 띠게 되면 매우 당연하게도 그 재질이 단단해져 방어력이 올라간다. 하지만 팬티처럼 작은 형태가 되면 신체의 대부분을 만변자의 피부가 커버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동일한 방어력을 제공한다는 걸까?
 그 비밀은 생각보다 쉬웠다. 팬티처럼 면적이 작은 형태로 변형되면 나머지 신체 부위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일종의 막 같은 형태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알면 알수록 더 대박이네. 흐흐흐흐.”
 웃고 즐기는 사이에 문구의 내용이 바뀌었다.
 - 함정 분석 완료.
 - 함정 타입 : 복합형(압력 감지, 움직임 감지, 생명체 감지, 적대적 의사 감지)
 - 함정 범위 : 지름 8미터, 높이 2,140미터, 깊이 8,417미터
 - 위협 지수 : 최상
 - 위협 수단 : 화살비, 낙석, 화염기둥, 바람칼날, 던전 붕괴
 - 함정 해체 확률 : 0.00082%
 “뭐야. 해체 확률이 더 낮아졌네?”
 용훈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물론 지금까지 얻은 것들만 해도 대박 중에서 초대박임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것이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초초초초초대박을 포기할 만한 사유는 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것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 6화 - 정면돌파
 
 그때 눈앞의 붉은 문구 아래쪽에 한 문장이 추가되었다.
 - 사용 가능한 공략법 추천 가능. 공략법을 열람하시겠습니까? (Y/N)
 “공략법? 그런 게 있으면 당장 봐야지.”
 용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머릿속에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몽롱한 눈으로 머릿속의 영상을 감상하던 용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런 미친! 이걸 어떻게 해!”
 용훈은 고개를 흔들며 욕설을 퍼부었다.
 “말이 되는 방법을 추천해야지! 이건 너무하잖아.”
 용훈의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단순했다.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 던전의 영혼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그다음은 온갖 함정이 발동되고 던전이 통째로 붕괴된 후 곧바로 암흑이었다.
 “그냥 함정 발동시키고 죽으라는 거야? 이걸 추천이라고 하고 자빠졌어?”
 용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리 저게 갖고 싶다고 해도 그걸 위해 죽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럴 바엔 그냥 저거 없이 오래오래 사는 게 백배 천배 더 나았다.
 “아니, 근데 애초에 왜 저런 방법이 공략법이랍시고 등장한 거지? 설마 여기도 인스턴스처럼 죽어도 상관없는 공간인가?”
 그런 질문을 떠올리자 마음속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감각’이라는 레전드 특성은 생존에 대한 예지에 가까운 직감까지 제공해주는 모양이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게 아니라면···. 설마 죽는 게 아닌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다 싶었다. 사실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의 끝에 그가 죽는 모습이 등장하지는 않았으니까.
 영훈은 다시 한 번 그 공략법의 영상을 봐 보기로 했다.
 그의 머릿속에 다시 영상이 떠올랐다.
 영상 속의 영훈은 마치 산책하듯 던전의 영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발이 함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함정이 발동했다.
 천장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대부분은 만변자의 피부에 의해 막혀 튕겨 나갔지만 그중 일부는 만변자의 피부를 뚫고 그의 몸을 꿰뚫었다.
 두 번째 걸음을 내딛자 허공에서 소환된 바윗덩이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육중한 무게 탓에 만변자의 피부도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용훈의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주저앉았다.
 세 번째 걸음을 내딛자 발밑에서 지옥과도 같은 화염 기둥이 치솟았다. 약해진 만변자의 피부의 방어력이 단숨에 바닥나며 용훈의 피부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네 번째 걸음을 내딛자 사방에서 바람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날아들었다. 용훈의 온몸이 난자당해 피바람이 몰아쳤고 그의 왼팔과 오른 다리가 잘려 바닥을 굴렀다.
 마지막으로 영훈의 손이 던전의 영혼에 닿는 순간, 거울이 단숨에 깨져나가듯 순식간에 공간 전체가 박살 났다.
 영상 속의 영훈은 눈부신 빛을 내뿜는 던전의 영혼을 손에 쥔 채 무한한 어둠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리고는 모든 영상이 훅 사라지며 암흑만이 남았다.
 용훈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머릿속의 영상을 치우려 했다. 순간 강렬한 예감이 그를 말렸다. 왠지 그 영상을 끝까지 봐야 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영훈은 멍하니 머릿속의 암흑을 바라보았다.
 암흑은 영원할 것처럼 계속되었다.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을 들여다보며 영훈은 마치 어둠에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점멸하는 불빛을 본 것 같았다. 반쯤 어둠에 홀려 멍해져 버린 그가 화들짝 놀라며 그것에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불빛은 천천히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한참 후, 용훈은 무한한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희미한 빛은 영상 속의 자신이 발하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말하면 자신의 몸속에 자리 잡은 던전의 영혼이 발하는 빛이었다.
 순간 영상이 끝났다. 그리고 눈앞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 던전의 영혼을 흡수하면 메인 시스템이 사용자를 치명적인 오류로 판단하고 시스템에서 추방함.
 - 던전의 영혼은 신력(神力)을 가진 존재의 파편. 그것을 흡수한 자는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음.
 - 결론 : 시스템에서 추방되어 차원의 틈새에 버려진 뒤 던전의 영혼을 사용하여 사용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음.
 용훈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영상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그 고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메인 시스템이나 차원의 틈새, 신력 같은 알 수 없는 말들은 일단 잊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레전드 특성 ‘알 수 없는 감각’을 믿느냐 안 믿느냐였다.
 ‘정말 이게 가능할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안전하게 저걸 포기할까?’
 지금 얻은 것들만으로도 그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마나를 모을 수 있는 스킬과 엄청난 성능의 방어구, 그리고 레전드 등급의 무기까지 손에 넣었다.
 공격 스킬이 없고 능력치가 별로이며 직업 이름이 개판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의 헌터로 활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용훈은 고개를 들어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는 던전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강렬한 매혹의 주문이 걸려있기라도 한 듯 용훈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레전드 특성 ‘알 수 없는 감각’이 끊임없이 속삭였다. 저것을 얻어야 한다. 저것만이 너를 완성할 수 있다. 지금 저것을 포기하면 앞으로는 절대로 저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리고 너는 앞으로 평생 동안 이 순간을 후회하고 살게 될 것이다.
 “아, 미치겠네!”
 용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찌나 머리를 긁어댔는지 머리카락이 한 움큼은 뽑혀 나온 것 같았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목숨을 걸고 한탕을 노리라는 거야? 오십억에 레전드 아이템까지 구한 마당에?”
 용훈은 문득 마카오에 거주 중인 박재순 씨를 떠올렸다. 니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한 것을 훔치고야 말겠다며 껄껄 웃던 미친놈.
 “평생 날뛰어보슈. 이런 걸 훔칠 수 있나.”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용훈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이 던전의 영혼을 훔친 사실을 들으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래. 한번 해보자. 가능하다잖아. 안 죽는다잖아. 믿으라고, 인마.”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 중얼거리며 용훈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던전의 영혼을 획득하는 과정은, 그 영상을 본 것만으로도 온몸이 배배 꼬일 만큼 험난했다.
 그는 먼저 마나 잔량을 확인했다. 만변자의 피부를 조금이라도 더 단단한 형태로 바꾸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마나는 가득 차 있었다. 어느새 유니크 등급의 ‘마나 호흡’이 그의 마나를 가득 채워두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력’ 능력치까지 상승시켜 마나의 절대량도 늘어나 있었다.
 그가 만변자의 피부를 풀 플레이트 메일의 형태로 바꾸었다. 팬티쪼가리나 이거나 방어력은 같았지만 그래도 왠지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으면 조금 더 안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문득 그냥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휘둘러 던전의 영혼을 맞추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나 잘 붙는다고 했으니까 던전의 영혼을 잡아 끌어당기면 될 것도 같았다.
 순간 머릿속에 빠르게 영상 하나가 지나갔다. 채찍이 던전의 영혼을 허무하게 통과해버리고 던전이 붕괴되며 자신이 차가운 차원의 틈새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영상.
 용훈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냥 몸으로 때우면 되잖아! 더럽고 치사하다, 진짜.”
 한동안 중얼중얼 욕설을 내뱉은 그가 던전의 영혼을 똑바로 본채 자세를 잡았다.
 “후···. 하···. 좋아, 시작하자.”
 심호흡을 마친 후 인벤토리에서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영상에서처럼 느긋하게 걸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 대신 채찍의 탄성을 이용해 최대한의 속도로 쏘아져 나갈 생각이었다. 함정지대를 0.1초라도 빠르게 통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통과하면 좀 낫겠지.’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용훈이 천천히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의 눈이 번쩍 빛을 발한 순간,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채찍이 정면을 향해 곧바로 쏘아져 나갔다.
 함정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반대편의 벽에 달라붙었다. 채찍이 팽팽하게 고정된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리며 최고속도로 채찍을 잡아당겼다.
 쐐액! 순식간에 그의 몸이 쏘아진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귓가에서 바람이 찢겨나갔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붉게 표시해둔 함정지대가 맹렬한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공포가 뭉클뭉클 샘솟았다.
 ‘지금이야!’
 얼른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인벤토리 너머로 집어 던진 그는 던전의 영혼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의 쭉 뻗은 손이 함정지대를 통과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화살 비와 낙석과 화염 기둥과 바람 칼날을 보며 용훈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빠르게 통과하면 좀 나을 거라는 생각은 결과적으로 틀렸다. 화살 비와 낙석과 화염 기둥과 바람 칼날을 한꺼번에 맞닥트린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끄아아아악!”
 만변자의 피부는 정말 굉장했다. 그 모든 것을 거의 1초가량 완벽하게 막아주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압도적인 양의 화살이 하나둘 만변자의 피부를 뚫고 몸을 파고들었고 낙석이 온몸의 뼈를 부서트렸다. 화염 기둥이 온몸을 녹이고 있었고 바람 칼날이 손발을 잘라냈다.
 양팔이 모두 잘려나간 용훈은 온몸으로 던전의 영혼을 덮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일어나세요.]
 용훈은 머릿속을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로 보아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누구야 넌, 도대체.’
 [저는 메인 시스템의 종속 개체인 유니크 등급 던전의 영혼입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정신이 들겠냐. 아무래도 난 죽은 것 같은데.’
 [그보다 더 심합니다. 당신은 지금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뭐? 삭제?’
 [저와 접촉한 순간 당신은 메인 시스템에 의해 치명적인 오류로 분류되었습니다. 메인 시스템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당신을 삭제 처리했습니다. 현재 당신은 차원의 틈새에 버려졌으며 존재하던 모든 정보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냥 죽었다는 걸 괜히 어렵게 말하는 거 아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죽게 되면 영적인 존재가 되어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예 시스템에서 삭제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시스템에서 정의하는 육체와 영혼 모두가 박탈되었고 그 결과 죽는다거나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 같은 모든 종류의 행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니,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 7화 - 진정한 보상
 
 [현재 당신은 제게 혼합된 단편적인 정보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제가 소멸되는 순간 당신 역시 소멸됩니다. 차원의 틈새는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므로 저조차 존재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결정? 무슨 결정을 말하는 거야?’
 [저를 완전히 흡수해 당신의 존재를 재설정하면 차원의 흐름을 거슬러 당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가용한 옵션을 들으시겠습니까?]
 ‘그래. 말해줘.’
 [첫 번째 옵션입니다. 기존의 정보를 토대로 당신을 복구시켜 현실로 되돌립니다. 이것은 제게 남은 신력(神力)의 소모가 적어 로컬 시스템 구축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옵션입니다. 제가 가진 신력을 모조리 소모해 당신의 존재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의 종족이 가진 한계를 상당한 폭으로 넘어설 것입니다. 다만, 로컬 시스템을 창조하기에는 신력이 모자라므로 기존의 메인 시스템으로 편입됩니다.]
 ‘그 시스템이란 건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
 [사실 시스템이라는 표현은 틀립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선정한 최선의 표현일 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스템은 세상을 이루는 법칙과 그 법칙을 비트는 힘을 일컫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이 살던 세상과 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주재하는 존재가 메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럼 로컬 시스템은 뭐야?’
 [당신 자신을 주재하는 법칙의 관리자라고 생각하십시오. 즉, 스스로의 격을 상승시켜 미약하나마 신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메인 시스템이 창조한 세계에서 살아가되, 메인 시스템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몸이 있었다면 머리를 벅벅 긁고 싶었다.
 ‘일단 정리해보자고. 1번 옵션을 택하면 나라는 존재는 원래 있던 그대로 되살아난다는 거지? 그 로컬 시스템이라는 걸 가지고 말이야.’
 [맞습니다.]
 ‘그런데 2번을 택하면 내 존재가 엄청 세진다고? 얼마나?’
 [당신 세계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플래티넘 랭커를 상회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그래? 그 정도야?’
 플래티넘 랭커. 그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헌터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 관리하는 UHRS(Ultimate Hunter Ranking System)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뜻한다.
 일단 헌터로 등록하면 모든 헌터가 UHRS를 통해 브론즈 랭크 라이센스를 지급받는다. 그리고 UHRS는 각각의 헌터가 쌓아올린 업적을 수치화하여 랭킹 포인트라는 이름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랭킹 포인트를 이용해 UHRS는 모든 헌터들을 일렬로 줄을 세우고 그들을 일정한 구간으로 잘라낸다. 즉, 상위 1%의 헌터들을 실버 랭커, 0.001%를 골드 랭커, 0.000001%의 헌터들을 플래티넘 랭커라고 부르는 것이다.
 퍼센티지의 영(0)이 과도하게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게이트가 등장한 이래 인류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인간은 이제 약간의 노력을 통해 스스로의 잠재력을 파악할 수 있다. 피나는 노력을 한다면 이능을 각성하고 헌터로의 삶을 시작할 수도 있다.
 실제로 현재 지구의 인구는 대략 70억 명인데 반해 보고된 각성자 수는 그 60%에 달하는 42억 명이었다. 달리 말하면, 현재 지구에는 브론즈 랭크의 헌터 라이센스를 가진 헌터가 38억 명이나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들 중 실제 헌터로 활동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긴 했지만.
 ‘플래티넘 랭커라니···. 걔네들은 완전 괴물인데, 내가 걔들보다 더 세진다고?’
 이건 정말로 치명적인 유혹이다. 플래티넘 랭커를 웃도는 수준이라면 말 그대로 지구 최강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로컬 시스템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애초에 저 둘을 비교 대상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였다.
 원래 그대로 돌아가는 것과 무지막지하게 강해진 상태로 돌아가는 것. 이 둘을 동급으로 상정할 만큼 ‘로컬 시스템’이라는 것이 대단한 건가?
 용훈이 그것을 묻자 던전의 영혼은 이렇게 대답했다.
 [메인 시스템 내부에서 각성한 힘은 그 절대량이 얼마나 큰지에 상관없이 온전히 메인 시스템에 종속됩니다. 하지만 로컬 시스템을 통해 신격을 갖춘 존재는 메인 시스템이 구축한 세상의 기본 법칙을 따르면서도 그 법칙을 비트는 손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스스로의 격을 쌓아올린다면 자신만의 메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왠지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였다.
 ‘솔직히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메인 시스템에 종속된다는 건 내가 얻은 게 실제로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비슷합니다.]
 ‘그럼 좋아. 난 1번을 택하겠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한번 내 주머니에 들어온 건 온전히 내 것이어야만 했다. 먹은 걸 다시 토해내는 건 상상만 해도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1번 옵션을 선택하셨습니다. 기존의 데이터를 토대로 새로운 조용훈 님을 생성합니다.]
 
 [이름 : 조용훈]
 [직업 : 신격(神格)의 찬탈자]
 [능력치]
 - 힘 : 21
 - 민첩 : 31
 - 체력 : 25
 - 지능 : 18
 - 마력 : 8
 - 생명력 : 2500
 - 마나 : 800
 [신격 특성]
 - 아키텍처의 눈(레전드)
 [특성]
 - 월 라이딩(레어)
 - 마스터 오브 로버리(유니크)
 [신격 스킬]
  [패시브]
  - 없음.
  [액티브]
  - 없음.
 [스킬]
  [패시브]
  - 마나 호흡(유니크)
  [액티브]
  - 없음.
 [아이템]
 - 장미 군주의 손가락(레전드)
 - 만능열쇠(매직) : 사용 가능 횟수 1/3
 - 만변자의 피부(레전드)
 - 멸절의 여섯 날개(레전드)
 
 ‘어? 뭔가 많이 바뀌었는데?’
 [그렇습니다. 이전의 데이터는 메인 시스템의 개입으로 노이즈가 섞여 있었습니다. 데이터를 재생성하는 과정에서 노이즈를 전부 제거했습니다.]
 ‘오···. 굳.’
 몸이 있었으면 아마 아빠 미소를 지었을 거다. 용훈은 ‘신격의 찬탈자’라고 쓰인 부분을 보며 흐뭇한 기분을 느꼈다.
 ‘드디어 벗어났어···. 부끄러운 좀도둑을 벗어났다고!’
 용훈은 직업 이름 외에 또 달라진 부분에 주목했다.
 ‘레벨이 사라졌네? 경험치나 보유 포인트도 없고.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주인님은 신력을 흡수해 미약하나마 신격을 이루셨습니다. 하나의 시스템을 가진 존재는 다른 시스템에 종속된 항목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메인 시스템이 부여한 항목들은 자연스럽게 박탈되었습니다.]
 ‘그럼 나는 이제 성장이 멈춘 거야? 레벨업도 못하고 스탯도 못 찍는 거냐고.’
 [레벨업과 스테이터스 투자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성장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신격을 가진 존재는 신력을 흡수하여 스스로의 격을 높일 때 그 부가효과로 본신의 능력이 상승하게 됩니다. 또한 신력을 소모해 능력치를 크게 상승시키거나 특성, 스킬을 진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흠. 나쁘지 않은 것 같네. 그보다 새로운 특성이 생긴 건가? 신격 특성? 아키텍처의 눈은 뭐지?’
 [신격 특성은 신격을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차원의 특성입니다. ‘아키텍처의 눈’은 ‘알 수 없는 감각’ 특성이 불명확한 과정을 통해 진화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마도 노이즈를 제거하는 과정에 신력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신격 특성 ‘아키텍처의 눈’은 세계의 구조와 숨겨진 비밀들을 꿰뚫어 보는 분석적인 시야를 제공합니다.]
 ‘마스터 오브 로버리는?’
 [주인님만의 독창적인 수법들을 토대로 창조의 던전이 부여한 특성입니다. 노이즈로 인해 매직 등급 패시브 스킬로 하향되어 있던 것을 원상태로 복구하면서 신력을 사용해 유니크 등급으로 상향 조정하였습니다.]
 ‘오, 그래? 잘했어. 그럼 이제 다 된 거야?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냐고.’
 [그렇습니다.]
 ‘로컬 시스템인가 뭔가 하는 건? 그걸 만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건가?’
 [주인님께서 신격을 획득하신 순간 이미 저는 주인님께 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체가 이미 신력을 획득해 시스템을 부리던 존재였기 때문에 따로 로컬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라는 시스템이 주인님께 귀속된 순간 저는 주인님만의 로컬 시스템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나저나 좀 전까지는 당신, 당신 그러더니 왜 갑자기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야 주인님께서는 저라는 시스템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흠. 그렇구나. 그럼 나도 널 부를 이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넌 이름이 없어?’
 [제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던전이라는 프로젝트 네임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메인 시스템에서 분류한 분류번호가 있었습니다.]
 ‘삭막하구만. 그럼 내가 이름을 하나 지어주는 건 어때?’
 [좋습니다.]
 용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순간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다른 것을 떠올려보려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것보다 나은 이름은 없는 것 같았다. 용훈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생각났어. 니 마음에도 들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지금까지의 너는 아무런 할 일도 없이 혼자 방치되어 있었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거야. 내가 너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넌 일이 없는 게 아니야. 일이 있는 거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니 이름은 ‘잡있으’다. ‘일’을 뜻하는 ‘job’에, 있다는 뜻으로 ‘있으’를 붙인 거지. 어때. 마음에 드냐, 잡있으?’
 [잡있으? 자비스로 들립니다만.]
 ‘에이, 착각일 거야. 맘에 들어, 안 들어.’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네. 어쨌든, 그럼 진짜로 다 끝난 거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돌아가자, 자비스.’
 [아무래도 자비스라고 들리는데···.]
 ‘착각이라니까? 그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라고!’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남자 하나가 골목에 모습을 드러냈다. 좀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곳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내가 떨어졌던 거기네?”
 [맞습니다.]
 그곳은 용훈이 총에 맞고 5층에서 떨어져 내렸던 곳에서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골목 안쪽이었다. 용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타다닥, 하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뭐야. 설마 시간도 그대로인 거야?”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님께서 던전의 알을 사용하신 순간으로부터 15초가량 지난 상태입니다.]
 “원래 던전은 다 그래?”
 [아닙니다. 이전의 제가 생성했던 던전이 특수한 경우입니다.]
 다급한 발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경찰의 무전기 소리도 들려왔다. 아마도 총에 맞아 떨어진 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죽지 않고 사라졌다면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8화 - 다시 던전으로
 
 용훈은 빠르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그였다면 난감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별일 아니었다.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사용해 건물 위로 순식간에 날아오를 수도 있었고, 멸절의 여섯 날개를 사용해 경찰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막장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기에, 용훈은 그중 가장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
 그의 의지를 받아 만변자의 피부가 순식간에 변형을 완료했다. 용훈은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어 머리를 슥슥 빗어 넘겼다.
 잠시 후 골목을 나선 용훈은 꽤나 멋들어진 슬림핏 정장에 갈색의 뱀피로 만들어진 뾰족한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든 경찰들이 그와 맞닥트렸다. 그들은 대놓고 의심의 눈초리로 용훈의 몸을 살폈다. 용의자의 얼굴을 모르니 아마도 총에 맞은 것으로 의심되는 옆구리를 확인하는 것이리라.
 용훈은 상의의 단추를 풀고 옆구리를 훤히 드러낸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희고 깔끔한 셔츠의 옆구리를 보자 경찰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용훈은 맨 뒤쪽에서 소리치며 달리는 나이 든 경찰을 보았다. 얼굴은 처음 봤지만 무전을 통해 많이 들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용훈을 스쳐 달리는 그의 점퍼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는 싸늘한 바람에 놀라 옷자락을 여미며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완전히 빈털터리였는데 잘됐네.’
 어차피 나쁜 짓 하러 나오는데 신분증까지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저 현금 몇만 원만 들고 나왔었다.
 그런데 던전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마저도 전부 사라져버렸다. 던전은 생명을 지닌 것을 제외한 모든 외부의 것을 거부한다. 단, 의복의 경우는 착용하고 있던 것과 동일한 것을 복제해서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던전에서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 속에는 돈이 없었다. 원래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현실로 돌아온 그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제가 해결됐다.
 그는 손안에 들린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방금 지나간 경찰의 품속에서 꺼낸 지갑이었다. 민첩이 상승한 덕분인지, 아니면 ‘마스터 오브 로버리’라는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도 엄청나던 그의 소매치기 실력은 이제 거의 신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미안합니다만 잘 쓰겠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착실한 헌터로 살게요.”
 그는 멀어지는 경찰의 뒤통수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딱 2만 원만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지갑은 잘 보이는 곳에 던져놓았다. 오늘 이곳에는 깔린 게 경찰이니 누군가 주워서 주인 찾아 주겠지.
 영훈은 편의점까지 슬슬 걸어 나와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골목 한편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데 갑자기 자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메인 시스템이 저와 주인님을 인지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유니크 등급의 던전의 영혼이 소멸된 것이 메인 시스템의 경계 수준을 크게 향상시킨 것 같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메인 시스템 내부로 은밀히 침투할 수 있었는데 강화된 경계 시스템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현재 메인 시스템은 시스템 명령을 순차적으로 발동시켜 저를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인님이 메인 시스템의 신격을 찬탈한 사실이 발각될 것입니다.]
 깜짝 놀란 영훈이 담배를 비벼 껐다.
 “썅, 그러니까 꼬리를 밟혔다는 얘기잖아! 도망칠까?”
 [차원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 한 메인 시스템의 경계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던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메인 시스템의 경계 루틴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선권이 낮은 던전 내부는 비교적 안전합니다. 그동안 빠르게 던전의 영혼을 흡수해서 신력을 확보하십시오. 신력을 소모해 로컬 시스템을 은폐시킬 수 있습니다.]
 “던전의 영혼을 흡수하라고? 그 무지막지한 함정 속으로 또 뛰어들라는 거야?”
 그 고통을 떠올리자 다시 온몸이 부서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용훈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닙니다. 주인님은 이미 신격의 찬탈자라는 정당한 직업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신력을 담은 던전의 영혼은 더 이상 주인님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던전의 영혼이 있는 곳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기존의 함정을 무시한 채 던전의 영혼을 취할 수 있습니다.]
 “오케이, 알았어. 근데···. 어디로 가지?”
 문득 생각해보니 용훈은 던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UHRS에 등록을 해두었다면 간단한 어플을 설치해 던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그는 무등록 헌터에 불과했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인터넷에 접속 중. UHRS 코리아 웹페이지 검색 중. 보안 시스템 우회. 가장 가까이 있는 던전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자비스의 말이 끝나자 멀리서 독특한 느낌을 주는 장소가 느껴졌다. 용훈은 그것이 던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역시 자비스. 무섭도록 유능하군. 일단 옷을 바꾸자. 얼굴 팔리면 안 되니까.”
 좀 전에 만변자의 피부를 정장으로 바꾸며 마나를 100이나 사용했지만, 다행히 마나가 꽤 늘어 여유가 있었다. 그는 변형할 복장을 고민했다.
 처음 용훈이 떠올린 것은 슈퍼 히어로 무비의 영웅들이었다. 질긴 쫄쫄이와 복면을 뒤집어쓴 캐릭터들.
 용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익명성이 좋다고 해도 쫄쫄이는 싫었다. 영화니까 멋지지 현실에서 쫄쫄이만 입고 돌아다녔다간 정신병원에 신고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전투복이었다. 태생부터 고아인 탓에 군대를 다녀오지는 못했지만, TV나 영화를 통해 다양한 스타일의 전투복을 보아왔다.
 용훈은 SWAT로 대변되는 이미지의 검은 전투복을 떠올렸다. 거기에 검은 헬멧과 고글까지 쓴다면 꽤나 쓸 만할 것 같긴 했다.
 “아, 모르겠다. 그냥 내 스타일대로 입지 뭐. 얼굴만 가리면 되는 거잖아.”
 의지가 발동하자 그의 옷이 그에 맞춰 변화를 시작했다.
 눈썹 위까지 드리워진 새카만 후드티. 목이 높은 가죽 재킷. 검게 번들거리는 가죽 장갑. 짙은 청색의 엔지니어드 진. 투박한 황갈색 워커. 그리고 코와 입을 완벽하게 가린 검은 색의 복면까지.
 용훈은 복면 아래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이거지. 아, 이제 좀 제대로 뭔가 해볼 마음이 드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용훈은 인벤토리에서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용훈은 골목 사이를 빠르게 달리다가 바닥을 차며 뛰어올랐다. 능력치가 상당히 올라서인지 그는 그냥 도약만으로도 2층 높이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가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휘둘렀다. 붉은색 채찍이 빠르게 늘어나 골목 밖의 5층 건물 옥상에 걸렸다. 용훈은 곧바로 팽팽한 채찍을 잡아채며 몸을 날렸다.
 쉬익! 그의 몸이 빠르게 허공으로 치솟았다. 5층짜리 건물이 총알처럼 발밑을 스쳐 갔다.
 “히하! 기분 죽이네! 이거 꼭 거미맨이 된 것 같은데?”
 단숨에 수십 미터를 뛰어넘은 그가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소리쳤다.
 [이동속도와 높이로 추산한 결과 낙하 데미지가 상당합니다. 충격에 주의하십시오.]
 “너 거미맨 안 봤냐? 낙뎀은 걱정하지 마!”
 상승의 정점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용훈이 정면에 우뚝 선 8층 건물을 보았다. 다시 한 번 휘둘러진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건물의 옥상에 걸렸다.
 용훈은 채찍의 탄성을 최대한 이용하며 커다란 호선을 그렸다. 원심력으로 그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고 적당한 순간에 채찍을 풀어내자 그의 몸이 또다시 빠르게 솟구치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자비스! 잘 봐둬, 이게 바로 웹 스윙이라는 거다!”
 [휩 스윙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얌마, 이름이 중요하냐? 이 속도가 어떠냐고!”
 [대단합니다. 확실히 원심력을 이용해 이동속도가 빠르게 가속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낙하 시의 데미지도 커지고 있습니다. 낙하에 대한 대비책은 준비하신 겁니까?]
 “걱정 마! 그리고 너, 시간 나면 BC나 나블 코믹스 좀 읽어둬! 이렇게 상상력이 빈약해서 어따 써먹냐!”
 용훈은 계속해서 건물들의 옥상에 채찍을 걸고 웹 스윙을 하며 빠르게 이동해갔다.
 “시간은 얼마나 남은 것 같아?”
 [현재 경계 시스템의 적대 개체 탐색 루틴이 3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5분 내로 던전에 들어가게 되면 대략 두 시간의 여유가 생깁니다.]
 “두 시간이라. 두 시간 내에 던전의 영혼을 접수해야 된다는 소리지?”
 [그렇습니다.]
 “좀 빠듯한 거 아냐? 니가 보기엔 어때?”
 [현재 주인님의 스펙으로 볼 때 매직 등급의 던전이라면 여유롭게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만 던전의 등급이 올라가면 빠듯하긴 합니다.]
 “결국 운에 달린 거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던전은 매직 등급의 던전입니다. 그보다 상위의 레어 등급 던전은 매직 등급 던전에 비해 발생률이 1/4에 달하며, 에픽 등급 던전은 매직 등급에 비해 1/16, 그리고 유니크 등급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레전드 등급은 아직 보고된 사실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갈 던전은 높은 확률로 매직 등급 던전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그럼 빨리 처리하고 가서 좀 자자. 웹 스윙이 재미는 있는데 좀 피곤하네.”
 [알겠습니다.]
 용훈은 빌딩 숲 사이를 웹 스윙을 사용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던 목표지점이 벌써 발밑으로 다가왔다.
 용훈은 마지막 웹 스윙의 릴리스 타이밍을 가능한 한 늦췄다. 웹 스윙이 그리는 호선이 점점 더 길어지며 그의 몸이 정면이 아닌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용훈은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인벤토리에 던져두고 마나를 체크했다. 그 짧은 사이에도 유니크 등급의 ‘마나 호흡’은 그의 마나를 거의 가득 채워둔 상태였다.
 그의 몸이 맹렬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용훈은 아예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몸의 면적을 줄여 낙하 속도를 가속시켰다. 지저분한 번화가의 뒷골목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금이야! 변형!’
 순간 만변자의 피부가 부분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가죽 재킷의 등 부분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한순간에 터져나가며 거대한 반구형을 만들어냈다.
 갑자기 나타난 반구형의 낙하산이 막대한 양의 공기를 끌어안으며 그의 몸을 잡아 세웠다. 급격한 정지 동작에 피가 쏠리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 덕에 그의 낙하 속도는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남은 높이는 대략 5~6미터. 용훈은 부분 변형된 만변자의 피부를 원래대로 돌리며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충격을 흡수하며 바닥을 굴렀다.
 “어떠냐, 자비스!”
 
 
 # 9화 - 사막의 주둔지
 
 [훌륭합니다. 만변자의 피부를 낙하산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변형된 형태의 성질을 유지하려는 속성과 형태 변형이 자유롭다는 점을 잘 조합한다면 전투와 비전투 양쪽 모두에서 상당한 바리에이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건 너한테 맡길 테니 알아서 머리 좀 굴려봐.”
 [알겠습니다.]
 용훈은 몸을 툭툭 털고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그의 눈앞에는 고급스러운 문 하나가 서 있었다.
 튼튼한 돌로 만들어진 받침대와 그 위에 단단히 고정된 나무문. 고급스러운 어느 성에서 막 떼온 것처럼 생긴 그 문은 테두리와 전면부가 강철로 보강되어 있었고 은색으로 빛나는 손잡이의 열쇠 구멍 부분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뭐야. 이게 매직 등급이라고?”
 매직 등급의 게이트라고 생각하기에는 문이 너무 화려했다. 보통 노말 등급의 게이트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나무문이었고 매직 등급의 게이트는 그 위에 간단한 장식이나 보강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용훈은 이 두 가지 등급이 게이트를 인터넷에서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눈앞이 게이트는 그 게이트들보다 꽤나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매직 등급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군요. 레어 등급의 게이트입니다.]
 “하여튼 나는 뽑기운이 별로라니깐. 어쨌든 빨리 들어가자.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겠어.”
 용훈이 게이트의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돌렸다. 문이 열리자 무수한 별들이 흩뿌려진 우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와···. 실제로 보긴 처음인데···. 정말 장관이네.”
 마치 맨몸으로 우주공간을 맞닥트린 기분. 왠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용훈은 스읍, 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게이트 너머로 몸을 던졌다. 그의 몸이 얇은 문 두께 속으로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문이 닫혔다.
 쿵.
 그가 사라지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번화가의 뒷골목에는 뜬금없이 돋아난 문 하나만이 을씨년스럽게 바람을 맞고 있었다.
 
 [던전 진입 확인. 레전드 특성 ‘아키텍처의 눈’ 발동으로 숨겨진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던전의 정보를 출력합니다.]
 [던전 등급 : 레어]
 [던전 타입 : 성채]
 [환경 타입 : 사막]
 [면적 : 54㎢]
 [인스턴스 : 모래폭풍 주둔지]
 [인스턴스 면적 : 8㎢]
 [퀘스트 난이도 : C]
 [퀘스트 : 사막의 도적단 모래폭풍의 주둔지를 와해시켜라.]
 
 용훈은 사박거리는 모래를 느끼며 눈을 떴다. 처음으로 게이트를 통과하는 기분이 야릇했다. 마치 바이킹이 정점에서 떨어지는 순간 느껴지는, 똥꼬가 간질간질한 기분이랄까?
 그는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몸을 점검했다. 다행히 어디 한 부분 놓고 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 근데 하필 사막이네. 여기서는 채찍을 써서 이동하지는 못하겠는데.”
 용훈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채찍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어쨌든 가 보자고. 그 던전의 영혼이라는 걸 찾으러.”
 그가 걸음을 옮기는데 자비스가 그를 멈춰 세웠다.
 [그건 안 됩니다.]
 “어? 왜 안 된다는 거야?”
 [던전의 영혼이 있는 성역은 메인 시스템이 그 막대한 신력으로 숨겨놓은 것입니다. 단 한 순간을 제외하면 그것은 절대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퀘스트를 완수한 후 보상을 받기 직전입니다.]
 “뭐야. 그럼 결국 퀘를 다 깨야 그 던전의 영혼이라는 놈을 찾을 수 있단 소리야?”
 [그렇습니다.]
 “미치겠네. 야! 나 혼자서 어떻게 레어 던전의 퀘스트를 깨냐!”
 [할 수 있습니다.]
 확신에 찬 자비스의 목소리에 용훈이 피식 웃었다.
 “야. 날 좋게 평가해주는 건 좋은데 그래도 무리인 건 사실이야. 레어 던전부터는 실버 랭커도 들어오는 곳이라고. 게다가 여긴 진짜 던전이야. 튜토리얼처럼 죽었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사실이었다. 레어 등급 던전에서부터는 퀘스트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며 그에 따라 보상도 상당해져서 갓 실버 랭크에 오른 헌터들이 주로 입장하곤 했다.
 그런 던전을 이제 겨우 헌터로 각성한 자신이 혼자서, 그것도 빠르게 공략해야 한다니. 용훈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주인님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냉정한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제게 과대평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 그럼 넌 진심으로 내가 이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할 수 있다고 보는 거야?”
 [그렇습니다.]
 “··· 도대체 뭘 근거로 그러는지 모르겠네. 일단 생각해둔 게 있으면 말해봐.”
 [현재 주인님의 순수 능력치는 지구 기준으로 상위 40%에 속합니다. 게다가 가지고 계신 장비의 수준은 골드 랭커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주인님의 현재 수준은 미드 포지션의 실버 랭커 정도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인님은 레전드 특성인 ‘아키텍처의 눈’과 그것을 토대로 최적의 전략을 산출할 수 있는 로컬 시스템을 갖추고 계십니다. 이런 수준의 던전은 주인님께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용훈의 광대뼈가 슬그머니 승천하기 시작했다.
 “흠흠. 칭찬해주니 듣기는 좋네. 그래, 그 최적의 전략이라는 거나 한번 들어보자고.”
 [네. 모래폭풍 도적단의 7번 주둔지는 10시 방향으로 1.2㎞ 떨어져 있습니다. 가용 병력은 최대 40명. 주둔지의 보스는 모래폭풍 도적단의 열두 칼날 중 하나인 톱니칼날 바로스입니다. 전체적인 병력의 수준은 레어 던전 평균치인 D급을 넘어서지 않습니다만, 톱니칼날 바로스는 C급으로 추정됩니다.
 퀘스트 목적은 주둔지를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 병력을 몰살시키는 것보다는 주둔지에 불을 지르고 보스를 처치하는 것만으로도 퀘스트를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아직 주인님의 수준이 낮아 멸절의 여섯 날개를 완벽하게 다룰 수 없지만, 다행히 폭발 화살만은 허락되어 있군요.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이동에 10분, 주둔지에 불을 지르는 것에 10분, 전투에 30분을 할당하면 50분 안에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용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 너 참 말 쉽게 한다. 니 말처럼만 됐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원래 그렇게 자세한 정보도 알 수 있는 거야? 인터넷에 공략을 봐도 이런 수준으로 공략 정보가 올라오지는 않던데.”
 [아닙니다. 주인님의 레전드 특성 ‘아키텍처의 눈’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 어쨌든 좋아. 그럼 해보자고. 너만 믿는다, 자비스.”
 [감사합니다.]
 용훈은 자비스의 말에 용기백배하여 발을 옮겼다. 푹푹 파이는 모래를 박차며 그가 모래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몇 개의 모래 언덕을 넘으며 바람처럼 달리자 멀지 않은 곳에 모래폭풍의 주둔지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막 한가운데에 그리 높지 않은 돌벽으로 만들어진 주둔지는 이전에 경험했던 철혈의 성채에 비교하면 초가집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정면으로 진입하면 주둔지 입구의 경비병과 맞닥트리게 됩니다. 2시 방향으로 우회하십시오.]
 용훈은 자비스의 말을 따라 주둔지를 멀리 우회하며 다가갔다. 주둔지 벽의 아래에 다가서서 용훈이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주둔지의 성벽에 올라서서 멸절의 여섯 날개를 사용하십시오. 폭발 화살로 적재된 짐들을 노리면 손쉽게 큰 불을 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았어.”
 겨우 2층 높이밖에 되지 않는 주둔지의 성벽 위로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건 용훈이 훌쩍 올라섰다. 성벽 너머에는 평범한 도적단의 한가로운 오후가 펼쳐져 있었다. 납치해온 인질들을 고문하거나 훔쳐온 물건들을 옮기는 등의.
 용훈이 오른쪽 허리에 매여진 홀스터에서 멸절의 여섯 날개를 꺼내들었다. 순간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이글거리는 여섯 장의 날개가 펼쳐졌다.
 날카로운 감각이 그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순간 긴장으로 뭉쳤던 전신의 근육이 부드럽게 풀렸고, 뱃속에서 뜨거운 불길 같은 투쟁심이 솟구쳤다.
 [장비의 고유 특성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이 발동됩니다. 발각되기 전에 어서 불을 지르세요.]
 용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애 첫 전투를 앞두고 긴장할 법도 한데, 그는 평온한 상태였다. 아니, 그보다 그는 미묘한 희열을 느끼는 중이었다. 전투의 흥분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용훈은 멸절의 여섯 날개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마법 각인이 느껴졌다. 아직 자신에게는 단 하나밖에 허락되지 않았지만, 곧 전부 쓸 수 있을 것이다. 멸절의 궁수 아고나른이 그랬던 것처럼.
 마나가 슥 빠져나감과 동시에 멸절의 여섯 날개의 검은 몸체 위로 붉은 문양이 빛났다. 그는 그것을 들어 성벽 앞에 쌓여있는 짐을 겨눴다.
 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을 띤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이 쌓여있는 짐과 부딪히자마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퍼엉! 순간적으로 뻗어 나온 화염이 짐을 뒤덮었다. 아찔한 열기와 폭음에 도적들이 혼비백산해 달려왔다.
 “불이다! 어떻게 된 거야!”
 “침입자다! 성벽 위에 침입자가 있다!”
 누군가가 용훈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용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벽 위를 바람처럼 내달리며 연달아 쿼렐을 쏟아냈다. 아무렇게나 쏜 것 같았지만, 그가 쏘아낸 쿼렐들은 정확히 목표물을 꿰뚫고 있었다.
 펑! 퍼벙! 연달아 폭음이 터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당황한 도적들이 물을 가져다 뿌리며 불길을 잡으려 애썼지만 이미 불길은 너무나도 크게 번진 상태였다.
 “이게 무슨 꼴이냐! 어서 빨리 침입자를 잡아라, 이 멍청이들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톱처럼 뾰족뾰족한 날을 가진 거대한 칼을 든 남자였다.
 [톱니칼날 바로스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입구 쪽으로 이동하며 유인하십시오.]
 용훈의 눈이 번뜩였다. 평소라면 의도가 뭐냐고 물었을 테지만,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이 발동한 지금, 용훈은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요소를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멸절의 여섯 날개 위에서 붉은 문양이 사라졌다. 마나를 아끼기 위해 마법 부여를 중지한 것이었다.
 퓽! 도적떼가 쏜 조악한 화살들을 피하며 용훈의 손쇠뇌가 쿼렐을 쏘아냈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쿼렐이 눈부신 속도로 바로스를 노리고 있었다.
 “어림없다!”
 바로스가 자신의 애병 톱니칼날을 눕혀 칼몸으로 쿼렐을 받아냈다. 쩡! 순간 상당한 반탄력에 그의 몸이 뒤로 휘청였다. 당황한 바로스가 쿵쿵거리며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용훈은 멈춰선 채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바로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너 이놈! 죽여 버린다!”
 바로스가 맹렬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용훈은 다시 성벽 위를 달렸다.
 
 
 # 10화 - 아고나른의 전투 본능
 
 막 성벽에 올라선 두 명의 도적이 용훈의 앞을 막아섰다. 한 명은 활을, 한 명은 칼을 들고 있었다.
 용훈은 칼을 든 도적을 향해 멸절의 여섯 날개를 겨누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 칼을 눕히며 물러섰다.
 그뿐이었다. 실제로 쏠 생각은 없었다. 용훈이 보유한 쿼렐은 처음에 삽입되어있던 서른 발뿐. 처음에 한 발을 사용했고 불을 지르는 데에 열한 발을 사용했다. 바로스에게 한 발을 더 사용함으로써 총 열세 발을 사용했으니 남은 건 열일곱 발뿐이었다. 함부로 낭비할 수 없는 숫자였다.
 피잉! 활을 든 도적이 화살을 쏘아냈다.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으로 한껏 강화된 용훈의 정신이 화살의 궤적을 쫓았다. 슬쩍 허리를 굽히며 달려들자 화살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놀란 도적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용훈은 그대로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공중에 뜬 그가 허리를 틀며 강렬한 돌려차기를 날렸다.
 빠악! 목이 부러진 도적이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용훈은 바닥에 착지하기 직전, 왼손으로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꺼내 칼을 든 도적에게 휘둘렀다. 붉은색의 채찍이 도적의 발목에 감겼다.
 당황한 도적이 칼날을 내려쳤지만 용훈이 더 빨랐다. 바닥을 디딘 용훈이 몸을 돌리며 채찍을 휘두르자 발목이 채인 도적이 바닥을 구르다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를 보니 톱니칼날 바로스가 근처까지 다다라 있었다. 용훈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주둔지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서 와라, 니 무덤으로.’
 주둔지의 입구는 텅 비어있었다. 원래는 경비병이 상주하며 다가오는 자들을 살펴야 했지만, 지금은 안쪽에서 난리가 난 터라 안쪽으로 모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입구 앞에 떨어져 내린 용훈이 몸을 돌렸다. 문 안쪽에서 톱니칼날 바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유인에 성공했습니다. 톱니칼날 바로스가 문을 나서면 곧바로···.]
 “쉿. 나도 알아. 설명 안 해도 돼.”
 [··· 알겠습니다.]
 ‘아고나른의 전투본능’ 때문일까. 용훈은 전에 없이 냉정하고 진지해져 있었다.
 톱니칼날 바로스가 주둔지의 대문을 나섰다. 그보다 달리는 속도가 떨어지는 도적들이 꽤나 뒤처진 상태. 용훈은 망설임 없이 멸절의 여섯 날개를 들어 두 발의 쿼렐을 쏘아냈다.
 퓽, 퓽! 바람 소리와 함께 두 발의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그런데 그 궤적이 미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바로스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틀어 쿼렐을 피해냈다.
 “어딜 노리는 거냐, 멍청아!”
 “저길 노린 거다, 멍청아.”
 “뭐?”
 용훈의 나직한 말에 바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피했다고 생각한 쿼렐은 처음부터 그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앞서 날아간 두 발의 쿼렐은 폭발의 마법을 품고 있었다. 그중 첫 번째 폭발 화살이 열린 문을 때리고 폭발하며 묵직한 충격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곧바로 날아간 두 번째 폭발 화살은 커다란 폭발과 함께 화염을 뿜어냈다. 화염이 치솟으며 문에 옮겨 붙었다. 아무래도 도적들이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았다.
 “너 설마···. 날 유인한 거냐?”
 “그래.”
 “내가 혼자라면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나?”
 “그런 셈이지.”
 여유 있는 대답에 바로스의 얼굴이 분노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이, 이···. 감히 모래폭풍의 열두 번째 칼날을 무시하다니! 네놈의 모가지를 뜯어내 그 피로 모래를 붉게 적시고야 말겠다! 크아악!”
 바로스가 톱니칼날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확실히 일반 도적들과는 등급 자체가 달라서인지 그 속도가 상당했다.
 용훈은 뒤로 훌쩍 물러나며 멸절의 여섯 날개를 겨누었다. 그때 바로스가 크게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칼날 이빨!”
 후웅! 순간 마치 그의 검이 길어지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위험한 느낌이 용훈을 덮쳤다. 용훈이 다급하게 몸을 젖히자 보이지 않는 뭔가가 그의 왼쪽 어깨를 물었다. 가죽 재킷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던 만변자의 피부 위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퀘스트 보스 톱니칼날 바로스의 데이터를 수정합니다. 등급 B. 보유스킬 3.
 첫 번째 스킬, 액티브, 샌드 슬라이드. 폭발적인 속도로 모래 위를 미끄러집니다.
 두 번째 스킬, 액티브, 칼날 이빨. 마나를 사용해 상대를 물어뜯는 무형의 이빨을 쏘아냅니다.
 세 번째 스킬, 패시브, 민첩한 회피. 사막의 주민답게 눈이 빠르고 몸놀림이 민첩합니다.]
 ‘늦어!’
 이제 와서 상대의 정보를 갱신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용훈은 정신없이 물러섰다.
 바로스는 적절한 순간마다 샌드 슬라이드를 사용해 들이닥치며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거리가 멀어졌다 싶으면 칼날 이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레어 던전의 인스턴스에 본신의 등급도 높게 판정받은 톱니칼날 바로스는 상당히 강력했다. 용훈은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방법을 바꾼다.’
 철저하게 원거리만을 고집하던 용훈이 왼손에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쫘악! 붉은 채찍이 공기를 찢으며 바로스를 노렸다.
 “채찍? 어디서 나타난 거지?”
 갑작스레 등장한 채찍에 놀라며 바로스가 칼을 휘둘렀다. 그는 단숨에 채찍을 두 동강 내버릴 생각이었다.
 깡! 그런데 채찍이 생각보다 단단했는지, 칼끼리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 바람에 바로스의 발이 멈추고 말았다. 용훈은 그 짧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며 용훈이 멸절의 여섯 날개를 겨눴다. 퓽!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그 안에 담긴 힘을 알기에 바로스는 쿼렐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았다. 톱니칼날의 넓은 검면으로 몸을 대충 가리며 그가 몸을 뒤틀었다.
 쿼렐이 비스듬히 들린 톱니칼날을 때리며 튕겨났다. 바로스가 눈빛을 번뜩이며 샌드 슬라이드를 사용했다. 그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덜컥! 그때 그의 발이 뭔가에 걸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바로스의 몸이 볼썽사납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뭐냐!”
 그가 돌아보자 붉은 채찍의 끄트머리가 그의 발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어느새 용훈이 뿌린 채찍이 그의 발을 잡아챈 것이었다.
 “이익!”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바로스가 칼을 내려쳤다. 뾰족한 톱니칼날이 붉은 채찍을 내려찍자 불똥이 튀어 올랐다.
 퓽! 멀리서 들려온 가벼운 소리에 바로스가 기겁하며 몸을 틀었다. 쿼렐이 그의 귓불을 찢으며 스쳐 지나갔다. 귀의 반 정도가 뜯겨나간 바로스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퓽! 또다시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퍽! 이번 쿼렐은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반쯤 몸을 일으키던 바로스의 어깨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쿼렐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그의 몸을 박살 내며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끄아악!”
 격통에 몸부림치며 그가 칼을 놓치고 말았다. 타다닥! 용훈이 재빨리 달려오며 몸을 날려 바로스의 턱을 올려 찼다. 뻐억! 턱이 부서지며 박살 난 치아가 핏물과 함께 치솟았다.
 허공에 뜬 바로스를 향해 용훈이 멸절의 여섯 날개를 겨눴다.
 “끝이다.”
 퓽! 바로스의 미간에 꽂힌 쿼렐이 그의 몸을 매달고 날아갔다. 쿼렐에 끌려간 바로스의 시체는 높다란 성문의 중간쯤을 후려쳤다. 그의 몸이 성문에 못 박히며 그 충격으로 성문이 덜컥 열리고 말았다.
 끼이익. 경첩이 망가지며 반쯤 떨어진 주둔지의 성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문 안쪽에서 대기 중이던 도적들은 처참하게 죽은 채 성문에 못 박힌 그들의 대장을 보며 전의를 잃고 말았다.
 쫘악! 붉은 채찍이 공기를 찢으며 도적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채찍을 둥글게 말아쥔 용훈이 손쇠뇌를 내렸다. 불길이 일렁이는 여섯 장의 날개가 순식간에 접혀 사라졌다.
 “도망쳐라. 살려준다.”
 나직한 두 마디.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도적들의 정신을 후려쳤다.
 “히이익! 도, 도망쳐!”
 “도망치자!”
 그들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르르 멀어져가는 도적 떼를 보며 용훈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퀘스트 클리어. 모래폭풍의 주둔지가 와해되었습니다. 두 건의 업적 달성. 톱니칼날 바로스를 1대1로 상대해 꺾었습니다. 한 시간 이내로 인스턴스를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이 상향조정됩니다.]
 [던전 보상]
 [바로스의 톱니칼날(에픽) : 모래폭풍 도적단의 열두 번째 칼날인 바로스가 사용하는 대검. 뾰족한 칼날에 베인 상대는 지속적인 출혈로 상처를 회복하기 어렵게 된다.]
 [모래폭풍 도적단의 가죽 방어구(레어) : 모래폭풍 도적단이 실력 있는 도적에게 지급하는 가죽 갑옷. 사막에서의 활동이 편하도록 신경 쓴 흔적이 엿보인다.]
 [회복의 반지(레어) : 지속적으로 사용자의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반지.]
 [스킬북(매직) : 매직 스킬 ‘샌드 슬라이드’가 담긴 스킬북.]
  - 샌드 슬라이드 : 모래 위를 빠르게 미끄러진다.
 [스킬북(노말) : 노말 스킬 ‘모닥불 피우기’가 담긴 스킬북.]
  - 모닥불 피우기 : 마른 나무를 모아 모닥불을 피울 수 있다.
 [드래곤의 금괴 1]
 [황혼의 보석 1]
 [심해의 철괴 3]
 [마이너 힐링 포션 1]
 상당한 양의 보상이 등장했지만, 용훈은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문에 못 박힌 바로스를 보며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인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냐. 그냥···. 저게 진짜 내가 한 일인가 해서.”
 [아. 주인님, 살인은 처음이시군요.]
 “응. 그래.”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진짜가 아닙니다. 메인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스턴스일 뿐입니다. 톱니칼날 바로스의 실체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나쁜 짓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네. 그리고 이곳이 실체라고 하더라도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이곳은 던전, 죽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주인님은 당연한 일을 하신 겁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자비로웠습니다. 서른한 명이나 되는 도적을 살려주셨으니까요. 이곳이 실제였다면 저들은 원군을 끌고 와 주인님을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는 적을 남기지 않으시기를 권합니다.]
 용훈이 피식 웃었다.
 “알았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그보다 이제는 진짜로 던전의 영혼을 찾으러 가야지?”
 [그렇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가자, 자비스.”
 
 자비스가 안내한 곳은 주둔지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저 끝없이 펼쳐진 모래만이 있는 곳.
 “여기라고? 아무것도 없는데?”
 [명색이 성역인데 설마 눈에 보이게 두겠습니까.]
 머쓱해진 용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너 잘 났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야 되는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레전드 특성 ‘아키텍처의 눈’을 발동합니다.]
 용훈은 말없이 기다렸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뭔가가 나타나기를. 하지만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위쪽입니다.]
 
 
 # 11화 - 신격(神格)에 눈뜨다
 
 자비스의 말에 용훈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뭔가 있긴 한 것 같았다.
 용훈은 눈을 문지른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설마···. 저거야?”
 [그렇습니다.]
 “와···. 나야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있다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저길 어떻게 가지?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이상 못 가겠는데.”
 그곳은 까마득한 하늘 위에 있었다. 실제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것만 따지자면 새끼손톱의 반도 안 될 정도였다. 그것도 아키텍처의 눈이 아니었다면 찾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근데 내 채찍이 저기까지 닿을까? 아무래도 너무 먼 거 아니야?”
 [가능합니다.]
 용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스가 된다면 되는 거겠지.
 인벤토리에서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꺼낸 용훈이 까마득한 허공을 바라보며 팔을 휘둘렀다. 쫘악! 초음속을 돌파한 채찍의 끝이 무서운 기세로 뻗쳐나갔다.
 성역이 얼마나 높이 있는지 채찍은 한참이나 계속해서 솟구쳤다. 저기로 올라갈 동안 자신이 채찍을 계속해서 잡고 있을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변자의 피부가 자동적으로 주인님의 근력을 보조해주고 있습니다.]
 “그래? 몰랐네.”
 하긴 그럴 것 같기도 하다. 던전의 밖에서 용훈은 웹 스윙을 자연스럽게 사용했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다가 채찍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웹 스윙은 그 엄청난 원심력을 사용자가 온전히 견뎌야 한다. 일반인이라면 꿈도 못 꿀 힘인 것이었다.
 손끝에 느낌이 왔다. 채찍이 목표지점에 걸린 것 같았다. 살짝 당겨보니 채찍이 팽팽하게 고정된 것이 느껴졌다.
 “그럼 올라가 볼까.”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용훈이 말했다. 순간 채찍이 맹렬하게 줄어들며 용훈을 끌어올렸다.
 “우아아아!”
 몸이 쑥하고 뽑혀 올라가는 기분에 용훈이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자신이 딛고 있던 땅이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으아아! 아아···. 어? 뭐야 저게!”
 얼마나 높이 올라온 걸까. 모래폭풍의 주둔지가 코딱지만 하게 보일 즈음, 용훈은 세상의 끝을 보고 말았다.
 드넓게 펼쳐진 사막은 완벽한 정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막의 경계에서는 끊임없이 모래가 흘러내렸다. 그 밖의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으로.
 그것은 지극히도 현실감각이 없는 풍경이었다. 어둠의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사막의 섬이랄까.
 “이, 이게 뭐야, 대체···.”
 [던전 공간입니다. 메인 시스템의 신력으로 창조된 임의의 공간이지요. 이것은 주인님이 던전의 범위를 벗어났기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던전에 접속한 존재는 그 공간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새 정사각형의 던전 공간도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었다. 용훈은 빛조차 없는 어둠 속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오르는 중이었다.
 “무, 무서워···.”
 [다 왔습니다. 위를 보세요.]
 고개를 들자 성역이 보였다. 그곳은 흘러내리는 모래로 이루어진 원형의 공간이었다. 지름이라고 해봐야 고작 10여 미터 정도. 장미 군주의 손가락은 그런 모래지대의 한 귀퉁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채찍 정말 대단하네. 도대체 무슨 수로 흐르는 모래에도 고정되는 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차원 포식자 장미 군주의 권능이 담겨있으니까요.]
 용훈은 알 듯 말 듯 한 기분을 느끼며 모래지대로 올라섰다. 장미 군주의 손가락은 인벤토리에 던져둔 상태였다.
 모래지대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물건이 있었다. 커다란 보물 상자와 빛을 뭉쳐 만든 것 같은 둥근 물체.
 [클리어 보상 아이템 보관함과 던전의 영혼을 발견했습니다. 보관함은 잠겨있습니다. 만능열쇠의 사용횟수가 1회 남았으니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던전의 영혼은 다섯 겹의 함정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위협지수 최상. 함정 범위 지름 8m. 접근하지 마시길 권합니다.]
 “안 해. 뭔 꼴이 나는지 너무 잘 알아서 하라고 해도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용훈은 만능열쇠를 꺼내 상자를 열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리며 그 안에서 눈부신 광채가 피어올랐다.
 [장비 아이템 네 개, 스킬북 세 개, 재료 아이템 일곱 개, 소모 아이템 두 개가 들어있습니다. 목록을 표시하겠습니다.]
 자비스의 말이 끝나자 상자 속의 아이템 목록이 눈앞에 떠올랐다.
 
 [바로스의 톱니칼날(에픽) : 모래폭풍 도적단의 열두 번째 칼날인 바로스가 사용하는 대검. 뾰족한 칼날에 베인 상대는 지속적인 출혈로 상처를 회복하기 어렵게 된다.]
 [모래폭풍의 진격 깃발(레어) : 모래폭풍 도적단을 소환해 소환자를 위해 싸우도록 만든다. 아이템의 등급에 따라 소환되는 도적의 숫자가 달라진다.]
 [모래폭풍 도적단의 가죽 방어구(레어) : 모래폭풍 도적단이 실력 있는 도적에게 지급하는 가죽 갑옷. 사막에서의 활동이 편하도록 신경 쓴 흔적이 엿보인다.]
 [회복의 반지(레어) : 지속적으로 사용자의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반지.]
 [스킬북(레어) : 레어 스킬 ‘칼날 이빨’이 담긴 스킬북.]
  - 칼날 이빨 : 상대를 물어뜯는 무형의 이빨을 쏘아낸다.
 [스킬북(매직) : 매직 스킬 ‘샌드 슬라이드’가 담긴 스킬북.]
  - 샌드 슬라이드 : 모래 위를 빠르게 미끄러진다.
 [스킬북(노말) : 노말 스킬 ‘모닥불 피우기’가 담긴 스킬북.]
  - 모닥불 피우기 : 마른 나무를 모아 모닥불을 피울 수 있다.
 [드래곤의 금괴 1]
 [황혼의 보석 1]
 [심해의 철괴 3]
 [마력석(레어) 2]
 [마이너 속도의 비약 1]
 [마이너 힐링 포션 1]
 
 용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더 늘어났네? 아까 보상을 들었을 때는 장비 아이템이 세 개였던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사용자가 인스턴스에 접속하면 던전의 영혼은 그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클리어 보상을 미리 생성하여 클리어 보상 보관함에 보관합니다. 그리고 실제 보상을 수령할 때는 업적에 따라 보상을 차감하는 것입니다.]
 그제야 용훈은 ‘창조의 던전’에서 얻었던 아이템들이 모두 자신이 사용하기에 알맞은 아이템이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애초에 그를 염두에 두었던 안배였던 것이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던전을 클리어했다면 그중 일부밖에 받지 못했겠지만.
 “일단 다 인벤에 넣어두자. 시간이 없으니까.”
 용훈은 상자 속에 든 아이템을 모조리 인벤에 털어놓고는 던전의 영혼을 향해 돌아섰다.
 “함정에 접근하지도 말라고 하면···. 저건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건데?”
 [간절히 바라십시오.]
 “··· 뭐?”
 용훈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설마 너,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줍니다, 이딴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양팔을 내밀고 스스로의 신격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그 신격으로 던전의 영혼에 담긴 신력을 끌어당기십시오.]
 머쓱한 표정으로 용훈이 양팔을 내밀었다. 두 눈을 감은 용훈이 스스로의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신격(神格)이라.
 그것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심장이나 폐처럼, 새로운 형태의 장기로 존재할까?
 아니면 뉴런과 시냅스처럼, 머릿속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걸까?
 허파꽈리의 폐포 옆에서 숨을 쉬고 있을까?
 무릎의 반월판 뒤에 숨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을까?
 
 만약 형태가 없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자신을 죽인 남자의 목마를 타고 있는 여자 유령처럼, 내 뒤에서 나를 몰래 따르고 있을까?
 아니면 깜빡이는 도깨비불처럼 내 머리 주위를 돌고 있을까? 설마 내 영혼을 먹어치우는 건 아니겠지?
 
 온갖 상념이 용훈의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그의 집중은 점점 더 깊어졌다.
 상념이 천천히 지워져 나갔다.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될 때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신격은 어디에도,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 자신일 뿐이다.
 용훈의 눈이 떠졌다. 그의 손에는 밝게 빛나는 던전의 영혼이 들려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신격에 눈 뜨셨습니다.]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답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용훈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금부터의 자신은 이제까지의 자신과 확연히 다른 존재이다.
 “뭔가···. 들어야 할 게 많은 것 같네.”
 [그렇습니다. 비로소 신격에 눈을 뜨심으로써 열람하실 수 있는 정보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주인님은 이제 세상의 비밀에 대해 알 권리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래. 그보다 일단은 빨리 돌아가자. 피곤하네.”
 [알겠습니다. 던전의 영혼을 흡수하겠습니다. 신력을 소모해 메인 시스템을 우회합니다. 더미(dummy) 생성. 더미 연결 완료. 주인님의 상태 데이터를 더미의 것으로 치환하였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래. 이제 진짜 돌아가자, 자비스.”
 
 눈을 깜빡이자 그는 게이트가 있던 골목에 서 있었다. 어느새 게이트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뒤였다.
 인벤에 넣어둔 돈을 꺼내 택시를 잡았다. 그가 묵고 있는 고시원 앞에 내린 그는 평범한 추리닝 차림으로 계단을 올랐다.
 고시원 카운터에 앉은 주인아저씨가 평소처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용훈을 훑어보았다. 용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문을 열자 빛바랜 침대와 작은 책상뿐인 그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조차 없는 좁은 방. 언제나 그에게 현실의 벽을 일깨워주던 방.
 “어휴, 고단하다.”
 문을 닫은 용훈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팔베개로 머리를 받친 그가 지저분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일은···. 헌터 라이센스를 따러 가 볼까?”
 [라이센스가 필요할까요? 어차피 주인님은 다른 헌터들과 함께 활동하기가 어렵습니다. 던전을 클리어한 후, 클리어 보상을 받아버리면 성역은 그대로 모습을 감추니까요.]
 “그래도 라이센스는 있어야지. 나도 헌터는 헌터잖아.”
 [주인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알았어. 아, 근데 그보다 먼저 갈 곳이 있어.”
 [그렇습니까?]
 “응.”
 그는 인벤토리에 든 백여 개의 드래곤 금괴를 떠올렸다. 그것만 있으면 이제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떳떳하게 살아가도 된다. 용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잘자, 자비스.”
 
 다음날 용훈은 짐을 모두 챙겨 고시원을 나섰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리 아깝진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푼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늘 거래하던 장물아비를 찾아가려던 용훈은 생각을 바꿨다. 그가 거래하려는 물건은 일반적인 장물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루트로 던전을 클리어해서 얻은 물건이 아니니 엄밀히 말하면 ‘장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일단 라이센스를 딴 다음 아이템을 거래하는 곳을 찾아가 봐야겠어.”
 
 
 # 12화 - 라이센스 획득
 
 용훈은 여의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의 TV 방송국 부지는 거의 10년 전서부터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제는 UN보다도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로 성장한, UHRS의 한국지부가 들어선 것이었다.
 용훈은 삐까뻔쩍한 UHRS 코리아의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인포 데스크에 앉은 예쁜 미소의 아가씨가 그를 맞아 주었다.
 “UHRS 코리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음. 라이센스를 따러 왔는데요.”
 “아, 그러시군요? 재발급이신가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아, 네. 그러시다면 자격검정을 거치셔야 해요. 지하 3층의 테스트실로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용훈에게 인포 데스크의 아가씨는 다시 한 번 환한 미소로 답했다.
 ‘예쁘네.’
 [그보다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매력 수치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왜 매력 계열의 각성자가 여기에 있지? 보통 가수나 탤런트를 하지 않나?’
 [요즘에는 각성자가 너무나 많아서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UHRS 코리아는 급여 수준이 높아서 각성자들도 많이 지원합니다.]
 ‘그렇구나.’
 용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화려한 식당가를 지나 지하 3층에 이르자 삭막한 연구실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검사받으러 오셨습니까?”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다가오며 물었다. 용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용훈을 한 공간으로 이끌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용훈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검사를 시작할 텐데, 다소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뭐. 너무 아프게만 하지 말아주세요.”
 검사가 시작됐다. 그들은 갖가지 장비로 용훈의 온몸을 이리저리 들쑤셨다.
 한 사람은 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테이프를 그의 머리에 덕지덕지 붙여댔고 다른 사람은 꼬불거리는 줄이 달린 고무망치로 그의 몸 여기저기를 두들겨댔다.
 그럴 때마다 한쪽 벽에 달린 스크린에 알아볼 수 없는 수치들이 떠올랐다. 그 앞에 앉은 남자는 연신 키보드를 두들기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어···. 근데 질문이 있는데요.”
 용훈의 말에 고무망치로 그의 발등을 내려치던 남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저, 원래 자격검정이 이렇게 진행되나요? 무슨 기계가 알아서 결과를 내놓는 거 아니었어요? 마나를 감지한다든가, 뭐 그런···.”
 “어휴. 그런 게 되면 저희가 이런 개고생을 하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기계가 마나를 느낀다는 게 말이나 되냐구요. 그게 됐으면 벌써 인공적으로 헌터를 만들어내는 기술도 나왔을 겁니다. 어떤 에너지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은 그 분야의 기술 발전에 있어서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단 말입니다.”
 “그, 그래도 그, 뭐냐, 그 마력석 발전 같은 것도 하잖아요?”
 “그건 마력석의 마나를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마력석을 파괴할 때 발생하는 폭발적인 열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뿐이에요. 재료만 다를 뿐 화력발전과 다를 게 없는 거죠. 물론 에너지 효율이나 환경문제 등에서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그, 그런가요?”
 “그럼요. 보세요. 우리 인간은 매우 우수해요. 하지만 아무리 우수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데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목적지만 주어지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곳에 도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너지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것은 일종의 내비게이션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그러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에너지를 과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아시겠습니까?”
 “네, 네···.”
 괜히 질문을 꺼냈다가 일장연설을 듣고 말았다. 용훈은 검사가 끝날 때까지 그냥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다 끝났습니다. 근력과 골밀도, 신경전달속도가 확실히 규격을 넘어섰습니다. 혹시 보여주실 만한 이능력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면 그냥 강화계로 표시됩니다.”
 “음···. 아뇨, 없네요.”
 그러고 보니 용훈은 자신에게 계열 특성이나 액티브 스킬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나 완전 장비빨이네, 생각해보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라이센스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용훈은 지하 3층의 로비로 이동했다. 그보다 먼저 와서 검사를 받았던 사람들이 로비에 여기저기 앉아있었다. 용훈은 아무 데나 빈자리에 앉았다.
 라이센스는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찍어내는지, 대기 중인 사람들의 라이센스가 한꺼번에 발급이 됐다. 미소가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 환히 웃으며 이름을 불렀고 호명된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 라이센스를 받아들었다.
 “조용훈 씨?”
 “네.”
 그가 앞으로 나서자 아가씨는 환히 웃으며 라이센스를 내밀었다.
 “브론즈 랭커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용훈은 황동으로 테두리가 둘러진 묵직한 카드를 보며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사실 이것은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 열 명 중 다섯 명은 가지고 있을 법한 물건이었지만, 용훈은 지금껏 그것조차 갖지 못했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눈앞의 아가씨가 환히 웃으며 물었다. 그녀의 미모 때문인지 매력 수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훈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용훈은 UHRS 코리아를 나섰다. 오늘 안에 처리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용산으로 향했다. 용산은 십여 년 전까지 ‘용팔이’라는 악명이 자자했던 컴퓨터 상가였다. 그리고 이곳은 이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아이템 거래소가 되어 있었다.
 커다란 규모의 대형 상점에서부터 코딱지만 한 개인 상점까지, 거의 천여 개의 상점이 밀집한 곳. 용훈은 이곳에서 아이템을 처분할 생각이었다.
 [잘 아시는 상점이 있으십니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 제가 검색을 좀 해 볼까요?]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그렇습니다. 이래 봬도 저는 신력을 지닌 로컬 시스템입니다. 인간이 만든 네트워크 따위는 아무리 깊이 숨은 딥웹이라 하더라도 제 탐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열~ 대단한데? 그럼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검색 완료. 21동 1층 130호로 가십시오.]
 “빠르기도 하네. 알았다, 가자.”
 용훈은 여러 개의 건물 중 21동을 골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자비스가 골라준 상점은 용산 아이템 상가의 21동 1층 130호에 위치한 ‘아이템 스테이션’이었다. 각종 아이템의 그림이 걸린 쇼윈도를 슬쩍 둘러본 용훈이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머리가 벗겨진 후덕한 인상의 사장님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제가 아이템을 좀 처분하려고 하는데요.”
 “그러시군요. 이리로 앉으세요. 커피라도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는 직접 믹스 커피를 두 잔 타서 가져와 앞에 앉았다. 안경을 고쳐 쓰고 계산기까지 각을 맞춰 앞에 내려놓은 그가 커피를 홀짝였다.
 “어떤 품목을 처분하실 생각이신가요?”
 “일단은 드래곤 금괴를 처분하려 합니다.”
 “오, 드래곤 금괴요? 가만있자, 드래곤 금괴 시세가···.”
 그가 꾸깃꾸깃한 문서를 들추며 드래곤 금괴의 시세를 뒤졌다.
 “아, 여깄네. 오늘 자로 시세가 좀 올랐어요. 아무래도 요즘 계속 오르는 추세네요. 어디 연구소에서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느라 대량으로 드래곤 금괴를 필요로 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마 그것 때문인가 봅니다. 오늘 시세대로라면 하나에 7천4백까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훈은 이상할 정도로 자세하고 친절한 사장님의 설명에 대략 머리가 멍해졌다.
 ‘자비스. 원래 용산 아이템 상가가 이렇게 친절해?’
 [아니요. 눈앞의 이 남자가 특이한 경우입니다. 인터넷에 평이 매우 좋더군요. 믿고 거래할 만한 것 같습니다.]
 용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면 일단 서른 개 정도 처분할게요.”
 “컥! 서른 개요?”
 “네. 무슨 문제라도···.”
 후덕한 인상의 사장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손님. 혹시라도 다른 가게에서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일단’이라는 건 물건이 더 있다는 뜻이니까, 그걸 매입하기보단 납치, 고문해서 인벤을 털어먹으려는 놈들도 있다구요. 게다가 그렇게 대량으로 거래하시면 시세대로 못 받는 경우도 많아요. 제일 좋은 건 일단 주기적으로 소량을 거래하시면서 상대방을 평가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나면 UHRS 코리아에서 제공하는 법무대리 서비스를 끼고 대량거래계약을 맺으세요. 그러면 나중에 시세 보상도 받을 수 있고 혹시라도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면 UHRS 코리아 소속 헌터들이 물리적으로 개입하기도 하거든요.”
 “아, 네···.”
 정말 과도하게 정직하고 친절한 사장님이다.
 “혹시 지금 돈이 급하신가요?”
 “아, 네. 20억 정도 급하게 쓸 일이 있어서.”
 “그러면 이렇게 하죠. 저랑 대리 거래 계약을 맺으세요. 그리고 드래곤 금괴 서른 개를 제가 임시로 매입하겠습니다. 현재 시세로 하면 개당 7,430만 원에 서른 개니까···. 22억 2,900만 원이네요. 일단 이 금액을 지급하고 나서 향후 오른 시세만큼의 차액을 5:5로 나누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시세차익에 따른 추가 이익을 얻으실 수 있죠. 어떻습니까?”
 용훈은 일단 자비스에게 묻기로 했다. 자신은 이런 거래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으니까.
 [좋은 거래입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시세 차익을 상인이 전부 가져갑니다. 만약 가격이 하락세라면 그것을 감안해서 터무니없이 시세를 후려치기도 하고요. 혹시라도 못 믿으시겠다면 헌터 라이센스를 사용해서 UHRS의 거래보증서비스를 받으세요. 수수료가 꽤 들긴 하겠지만, 그편이 안전합니다.]
 ‘그래, 알았어.’
 “혹시 UHRS의 거래보증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까?”
 “당연하죠. 원하시면 저희 쪽에서 수수료를 절반 부담하겠습니다.”
 이후 거래는 일사천리였다. 사장은 카드단말기처럼 생긴 라이센스 단말기에 헌터 라이센스를 긁고 업소코드를 입력해 거래보증서를 출력했다. 거래보증서비스는 스마트폰의 UHRS 앱에서도 조회가 가능하므로 안심할 수 있었다.
 용훈은 15억은 현금으로 받았고 나머지 돈으로 쿼렐을 샀다. 서른 개들이 카트리지를 천 개나 주문하는 통에 한동안 상점 주인은 야단법석을 피우며 온 상가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개당 3만 원인 쿼렐을 대량으로 주문해 2만 6천 원까지 깎았는데도 돈이 모자라, 부족분은 차후에 발생할 시세차익에서 메꾸기로 했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아이템 스테이션 많이 이용해주세요.”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사장 이경식’이라고 적혀있었다. 용훈은 명함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될 겁니다.”
 
 
 # 13화 - Home, sweet home.
 
 용훈은 묵직한 가방과 산더미 같은 카트리지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 상점을 나섰다. 커다란 가방이 허공에서 뿅 사라지는데도 이경식은 놀라지 않았다. 인벤토리 정도는 아이템 상가에서는 흔한 장비였으니까.
 
 용훈은 곧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그 전에 화장실에 들러 만변자의 피부를 조작해 깔끔한 회색 정장을 갖춰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그가 향한 곳은 은평구에 위치한 천사 보육원이었다. 중간에 번화가에서 잠깐 내린 그는 과일과 과자, 라면, 음료수 등등 먹을 것을 잔뜩 사서 택시의 트렁크에 실어두었다.
 그가 택시에서 내리자 허름한 담장 너머의 흙바닥에서 뛰어 놀던 꼬맹이들이 용훈의 얼굴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와! 큰형이다!”
 “큰형 왔다~ 먹을 거 왔다~.”
 “얌마. 넌 내가 먹을 거로 보이냐?”
 용훈의 꿀밤을 민첩하게 피해낸 꼬마들이 택시의 트렁크로 돌진했다. 트렁크에 실린 LPG 가스통까지 뜯어갈 기세의 꼬마들을 보며 택시기사가 진땀을 뺐다.
 백발의 노인이 그 난리통을 보고 뛰어나왔다. 무릎이 불편한 듯 걸음걸이가 위태로웠다.
 “이게 무슨 난리냐, 얘들아?”
 “큰형 왔거든요! 큰형이 먹을 거 엄청 많이 가져왔어요!”
 “그래? 용훈이가 왔다고?”
 용훈은 노인을 향해 다가섰다.
 “선생님. 잘 계셨어요? 너무 오랜만에 왔죠?”
 “아니다, 아니야. 이렇게 잊지 않고 와주는 게 어디냐. 어서 들어가자, 바람이 차다.”
 천사 보육원의 원장인 박태훈은 용훈의 두 손을 꼭 쥐며 안으로 이끌었다. 홀로 남은 택시기사만이 아귀 같은 꼬마들에게서 필사적으로 LPG 가스통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용훈아. 뭘 저렇게 많이 사 왔어. 너도 형편이 어려운 거 다들 아는데···.”
 “아니에요. 사실 저 얼마 전에 큰돈을 벌었거든요.”
 용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박태훈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한 듯 어두운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용훈이 너···. 정말로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네?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용훈은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셨지? 단 한 번도 걸리거나 빵에 들어간 적이 없는 용훈이었다. 그야말로 도둑질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원장선생님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지?
 “너에 대한 소문이 별로 좋지 않더구나. 동대문에서 널 봤다는 친구가 있는데···.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같다고···.”
 ‘아···. 동대문 흑나비 파랑 엮였을 때 말이구나.’
 꽤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멋모르고 소매치기에 열을 올릴 때. 자기 나와바리에서 함부로 영업한다고 흑나비 파한테 쫓기던 때를 떠올리며 용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그···. 뭐냐, 그래, 동대문에 도매로 옷을 좀 띠러 갔다가 소매치기한테 걸리는 바람에···. 그래서 그랬어요. 나쁜 짓은요, 제가 나쁜 짓 할 놈인가요, 어디?”
 손사래를 치며 진땀을 흘리는 용훈. 그런 그를 보며 박태훈이 피식 웃었다.
 “하긴. 요즘에 너 같은 청년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럼 무슨 수로 큰돈을 벌었다는 거냐? 설마 로또라도 된 거냐?”
 “아뇨. 흐흐. 놀라지 마세요. 저 헌터 됐어요!”
 용훈은 묵직한 황동색의 헌터 라이센스를 내밀었다. 하지만 박태훈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덤덤하게 브론즈 랭크의 라이센스를 받아 이리저리 둘러볼 뿐이었다.
 “브론즈 랭커구나. 언제 각성한 거냐?”
 “아, 그게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그래. 강화계냐? 아니면 변형계? 설마 자연계나 특질계는 아닐 테고.”
 “······.”
 용훈은 말을 잃었다. 설마 원장선생님이 헌터 세계에 대해 저리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실 줄은 몰랐다.
 “뭘 그리 놀라. 여기서 나간 아이들도 헌터 하겠다는 놈들 천진데 내가 관련 지식이 전혀 없다면 그게 더 웃기지 않겠니?”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구나. 항상 몸조심해라. 돈도 좋고 랭커도 좋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건 너 자신이니까.”
 “네. 감사합니다.”
 용훈은 찻잔을 내려두고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네. 할 일이 있어서요.”
 주섬주섬 일어서던 용훈이 허공에서 커다란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등장한 가방에 박태훈이 깜짝 놀랐다.
 “그건 뭐냐?”
 용훈은 그걸 테이블에 턱 올려두었다.
 “원장님. 보육원 넘어가는 거 사재로 메꾸고 계신 거, 맞죠?”
 “뭐, 뭐? 그건 또 어디서···.”
 “여기저기서 들었어요. 집도 다 팔고 가족들도 떠났다고, 혼자 보육원에서 살면서 빚내서 보육원 지키고 계신다고···.”
 “아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이거 받으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걱정 마시구요. 제가 하드 캐리 할 테니깐, 저만 믿으세요.”
 “뭐?”
 박태훈이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이게 다 무슨 돈이냐, 용훈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 헌터 됐어요. 게다가 라이센스는 브론즈 랭크지만 골드 랭커나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길드에서 선수금 받고 계약했어요. 그 계약금 받은 거에서 조금 떼온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말고 쓰세요.”
 “이, 이렇게 큰돈을 어떻게···.”
 “그냥 후원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정 찜찜하시면 기부금으로 등록하셔도 돼요. 세금 혜택받고 좋겠네.”
 용훈이 씩 웃자 그제야 박태훈도 그를 따라 웃었다. 박태훈의 미소는 어느새 그의 온 얼굴로 번져나갔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박태훈이 용훈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그 손의 온기를 느끼며 용훈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어서 오세요~.”
 호프집의 아르바이트생이 예쁜 미소로 용훈을 반겨주었다. 용훈이 자리에 앉자 그녀가 다가와 물었다.
 “몇 분이세요?”
 “혼잡니다.”
 흠칫. 살짝 놀란 것 같았지만 노련한 아르바이트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 네. 주문하시겠어요?”
 “네. 해물 누룽지탕이랑 고르곤졸라 피자랑 두부김치 주세요. 맥주는···. 음, 저게 뭐죠?”
 용훈은 카운터 옆 바에 꽂혀있는 커다랗고 화려한 맥주 탭을 가리켰다.
 “아~ 저건 파울라너 헤페 바이스라는 건데요, 독일에서 건너온 밀맥주랍니다. 몰트를 보리가 아닌 밀을 사용해서 빚은 술인데요, 산뜻한 과일 향과 함께 부드러운 맛이 나서 손님들이 아주 좋아하세요. 저희 가게는 특별히 파울라너 헤페 바이스를 생맥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주세요. 500cc로.”
 늘 먹어보고 싶었지만, 일반 생맥주의 네 배에 달하는 가격 때문에 지나쳐왔던 맥주를 시켰다.
 잠시 후, 뾰족하고 길쭉한 맥주잔에 생 밀맥주가 나왔다.
 “와아···. 예쁘다···.”
 용훈은 맥주를 홀짝이며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허공에 혼자 중얼거리는 병신 꼴이 되긴 싫었으니까.
 “자비스, 거기 있어?”
 [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만.]
 “알아, 알아. 그냥 그러려니 해.”
 술은 겨우 맥주 반 잔을 마셨을 뿐인데 기분은 벌써 밤새 마신 기분이다. 용훈은 헤실헤실 웃으며 창틀에 턱을 고였다.
 “아름다운 밤이야. 안 그러냐, 자비스?”
 [주인님의 미적 기준이 무엇인지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딱딱한 놈. 너 자꾸 인공지능처럼 굴래?”
 인공지능이란 말에 기분이 상한 걸까? 자비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보탰다.
 [주인님과 천사 보육원장 박태훈의 감정 교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군요.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아름다운 장면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용훈은 맥주를 쭉 들이켠 후 같은 것으로 한잔을 더 시켰다. 호프집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혼자 마셔서 미안하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래? 이 좋은 걸 왜 안 마셔?”
 [마실 입이 없습니다.]
 “아, 그렇지. 미안하다.”
 한동안 용훈은 푸짐하게 시켜놓은 안주를 집어 먹으며 혼자서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술이 된 용훈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비스. 묻고 싶은 게 많아.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근데 머리가 좀 복잡해서···. 술을 마셔서 그런가? 정리가 안 되네. 니가 알아서 좀 잘 설명해 주면 안 될까?”
 [알겠습니다.]
 자비스는 말해줄 것을 정리하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신격에 눈뜨시면서···. 많은 것이 새롭게 보이실 겁니다.]
 “그래. 기분이 이상해. 모든 게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다시 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먼저 신격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신격이라는 것은 신이 될 자의 자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신이 될 자의 자질이라. 뭔가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지금 주인님께서 계신 이 세상은 메인 시스템의 거대한 신력에 의해 지탱되는 곳입니다. 이곳의 표현에 따르자면, 메인 시스템은 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군요.]
 “허. 그럼 난 아까 신의 눈을 피해 도망친 거였어?”
 [그렇습니다.]
 “참나. 겨우 인터폴한테 쫓겨 도망 다니는 마카오박 정도는 나한테 잽도 안 되겠는데.”
 용훈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자비스는 묵묵히 설명을 이어갔다.
 [주인님은 미약하나마 신격을 이룬 존재이십니다. 아직은 어렴풋하겠지만, 세상의 구조를 볼 자격이 생긴 이상 보통 인간과 같은 감각을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나?”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두 번째 던전에서 나온 직후 고시원으로 향하면서, 그는 자꾸만 눈에 보이는 이상한 것들을 애써 무시해왔다.
 세상에는 구획이 있다. 어떤 부분은 밝고 선명했고, 어떤 부분은 어둡고 흐릿했다. 하늘은 완벽하게 열려있지 않았고 땅에는 단절된 공간들이 존재했다.
 용훈은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원래 보던 세상에 겹쳐진 흐릿한 진짜 세상을 보며 그는 적잖이 놀랐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의 시스템은 그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습니다. 반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한 것이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건 뭔데. 그···. 뭐냐, 그, 자유의지라는 거.”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세상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모여 만들어진 커다란 흐름인가.
 [자유의지는 존재합니다. 다만 그것이 메인 시스템의 결정을 바꿀 수 없을 뿐입니다. 차원이 다른 거대한 의지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저 자율성으로 작용할 뿐이니까요.]
 “웃기지 마!”
 술이 좀 돼서인지, 갑자기 울컥한 기분에 용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뭐야. 우리 인간은 뭐냐고. 우린 왜 사는 건데? 왜 고민하고 왜 좌절하고 왜 판단하고 왜 열심히 사는 거냐고! 그냥 다 정해져 있으면 우리가 생각할 필요 따위 없는 거잖아?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싸고 자고 살다가 죽으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의지와 메인 시스템의 의지는 작용하는 영역이 다릅니다. 인간은 미시적 세계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그 흐름은 언제나 한 방향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이 메인 시스템의 의지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쉽게. 미씨고 거미고 이런 건 다 집어치우라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14화 - 세계의 비밀
 
 용훈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한 잔 더.
 [요점은 이렇습니다. 시스템에 종속된 존재들은 시스템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더 이상 메인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로컬 시스템을 가지셨으니까요.]
 “그러니까 뭐야. 나만 혼자 신한테 반항할 권리를 가졌다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죠. 주인님께서는 그 신의 권좌를 노릴 자격을 획득하신 겁니다.]
 순간 술이 확 깼다.
 “뭐, 뭐라고? 신의 권좌를 노려? 그게 무슨 소리야?”
 [하나의 차원에는 하나의 시스템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경우는 단 하나뿐입니다.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마침 맥주가 도착했다. 용훈은 아르바이트생이 테이블을 떠나기도 전에 맥주를 원샷한 후 한잔을 더 추가했다.
 “미치겠네. 지금 너 설마 나보고 신의 자리를 두고 신이랑 한판 맞짱을 뜨란 소리야?”
 [그렇습니다.]
 “내가 왜? 왜 그래야 되는데?”
 [신격을 갖추셨으니까요.]
 “야. 내가 그거 갖고 싶다고 한 적 있어? 내가 언제 신이랑 싸우고 싶다고 한 적 있냐고. 어쩌다 보니 그냥 생겼을 뿐인데, 그렇다고 신이랑 싸우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신격을 가진 존재는 그에게 부여된 운명과···.]
 “아, 조용히 하고 계속 들어. 야, 자비스. 솔직히 나는 무신론자야. 교회도 안 다니고 절도 안 다녀. 보육원에 있을 때는 성당에 다녀보기도 했지만, 그건 그냥 초코파이가 먹고 싶었을 뿐이고. 근데, 아무리 이런 나라도 신이랑 싸운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쯤은 알아.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말이야. 멀쩡히 잘 돌아가는 세계를 두고 왜 싸움을 해야 하는 건데? 그런 걸 두고 인간들은 평지풍파라고 한다고. 알아?”
 [만약 세계가 멀쩡히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 싸움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뭐?”
 [만약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세계가 멸망할 거라면. 누군가 손쓰지 않으면 머지않아 종말이 올 거라고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싸울 의향이 있으십니까?]
 용훈은 맥주를 멀찍이 밀어두었다. 아무래도 맨정신을 유지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야, 자비스. 방금 했던 말,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용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 각성자와 던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음? 얼마나 알긴, 그냥 사람들이 다 아는 정도로 알지.”
 [어느 날 갑자기 게이트와 각성자가 생겨났고, 각성자들이 게이트에 진입해 던전을 공략하고, 아이템과 보물과 새로운 에너지원을 구해왔다. 게이트 내부의 괴물이 넘어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 정보겠지요.]
 “그래. 근데 그게 왜? 그게 틀린 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인님께 묻고 싶군요. 대체 게이트와 각성자는 왜 생겨났을까요?]
 용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들이 막 생겨난 초창기에는 그 이유를 궁금해했던 것 같긴 했다. 매일 TV에 철학자나 신학자, 군사관계자 등등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자신만의 이론을 떠들어대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벌써 게이트와 각성자가 생겨난 지 십 년이 넘었다.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게이트와 각성자는 ‘원래’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글쎄, 모르겠어. 넌 아냐, 자비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 모릅니다.]
 용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너도 모르는 게 있었어?”
 [주인님께 종속되기 전, 저는 메인 시스템의 하위 루틴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등급이 높아 상당한 수준까지 정보 열람이 허락되어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메인 시스템은 주인님처럼 인간적이지 않았으니까요.]
 “하긴 신이 인간적이라면 그것도 웃기겠네.”
 [각성자와 던전이 생겨나기 전, 저는 외차원을 관장하는 부서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부서? 무슨 회사원이냐?”
 [부서라는 것은 주인님의 언어로 번역한 조악한 표현일 뿐입니다. 메인 시스템의 하부에는 수많은 부서가 존재하고 그 밑에 저와 같은 루틴들이 모여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계속해도 될까요?]
 “그래, 그래. 방해 안 할게, 계속해봐.”
 [네. 외차원은 주인님이 계신 세계의 바깥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차원과 수많은 시스템이 존재하죠. 그들은 서로의 차원을 두고 경쟁하기도 하고 협력해서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기도 합니다. 우리 차원은 그중에서 중하위에 속하는 차원이었습니다. 문명 수준이 크게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거주 종족인 인간의 높은 잠재력이 그 차이를 메워주었습니다. 차원의 수준은 그 차원의 시스템이 갖는 신력의 원천입니다. 즉, 차원의 수준이 높을수록 메인 시스템이 강해지는 거죠.]
 “음···.”
 [우리 차원은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수준의 신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차원의 차원벽은 강대한 수준의 차원 침략자라면 큰 노력 없이 넘어설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주변 차원의 눈이 있어 안전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균형을 이루며 오랜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변화라면, 던전과 각성자를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어느 날, 메인 시스템은 전체 시스템을 통괄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전체 루틴의 1/3가량을 움직이는 명령이었죠. 그리고 거기에는 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던전 공간을 생성하고 메인 시스템이 정해놓은 퀘스트를 수행할 인스턴스를 소환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는 물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존재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일을 할 당시에는 그것이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인님을 만나 주인님에게 종속된 이후,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소환했던 인스턴스, 철혈의 성채는 외차원에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에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별이 있고 오크라고 불리는 거주 종족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 던전이었던 모래폭풍의 주둔지 역시 실재합니다. 거대한 사막으로 이루어진 별을 가진 차원이지요. 뭔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난 뭐를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좀 더 단순화시켜 보겠습니다. 이곳 차원의 메인 시스템은 각성자를 만들어내고 던전을 통해 그들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성자들은 다른 차원과 완벽하게 동일한 환경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며 전투 경험을 쌓아나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도대체 메인 시스템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걸까요?]
 “자, 잠깐만.”
 용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거, 그런 거 아니지?”
 [아니요. 맞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미친···.”
 용훈이 이마를 짚었다. 뭔가 너무 스케일이 커서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설마 우리들을 병사로 쓰겠다는 거야? 다른 차원인지 뭔지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그렇다고 보여집니다.]
 “도대체 왜? 뭐 때문에?”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제 추정일 뿐입니다.]
 용훈이 젓가락으로 안주들을 들쑤셨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뭔가 이 세계에 위험이 닥칠 걸 예견하고서 그에 대항할 힘을 키우는 중이라던가?”
 [가능성은 있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왜?”
 [메인 시스템이 던전에 돌린 루틴은 전체의 삼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그것들은 본래 이 세계의 존속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전체 기능의 3할 이상을 한 번에 잃게 된다면, 과연 어떤 존재가 멀쩡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던전을 운용하는 것은 다른 루틴들보다 월등한 양의 신력을 소모하는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막대한 신력을 세계의 존속이 아닌 다른 일에 소모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 세계를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즉, 다른 차원을 침략해 그곳의 신력을 먹어치울 게 아니라면, 메인 시스템은 스스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후···. 돌아버리겠네.”
 용훈은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미지근한 맥주를 집어 든 그가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새 잔을 다시 주문했다. 차가운 맥주를 쭉 들이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메인 시스템의 내부에 있는 이상 언제까지나 그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늦든 빠르든 들키게 되겠지요. 만약 메인 시스템이 주인님의 정체를 눈치채게 된다면, 그는 전력을 다해 주인님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주인님을 죽여서 주인님이 보유한 신력을 흡수하고 신격을 말살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최대한 주인님의 신격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더 많은 던전을 돌고 던전의 영혼을 흡수하여 본신의 실력을 키우셔야 합니다. 메인 시스템과 그가 부리는 각성자들에 대항할 힘을 말입니다.]
 “잠깐만. 그 말은 나와 메인 시스템의 싸움에 다른 인간들이 끼어든다는 소리 같은데?”
 [맞습니다. 메인 시스템은 강력하지만 본신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법칙신의 위치에 올랐으니까요. 물론, 신력으로 창조한 육체에 깃드는 것처럼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극히 드뭅니다. 신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하기도 하거니와 그 효율도 극악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는 자신에게 종속된 각성자들에게 명령을 내리겠지요. 시스템의 일부를 할애해 그들을 주인님을 쫓는 사냥개로 사용할 겁니다. 미약하나마 신력을 내려받은 그들은 본연의 것보다 월등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열심히 스스로를 키우십시오. 또한, 강자들을 주인님의 로컬 시스템으로 영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영입한다고?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비각성자를 받아들여 로컬 시스템으로 각성을 시키는 경우와 메인 시스템에 종속된 각성자를 신력으로 재구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력 효율로 보자면 전자가 월등하지만, 각성자의 수준을 따지자면 후자도 유용합니다. 둘 중 어느 방법을 사용하건, 그자는 주인님의 로컬 시스템에 종속됩니다.]
 “종속이라···. 강자들이 좋아할 것 같진 않네.”
 [그건 그렇겠군요.]
 후. 용훈은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게다가 복잡하기까지 한 것들을 알게 됐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황당할 정도로 스케일이 컸고, 무시하자니 도출된 결론이 너무나 위험했다.
 “만약에 니가 내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면 멱살을 잡았을 거야. 사기꾼 새끼야, 꺼져, 뭐 그런 소리를 지르면서.”
 [제게 몸이 없어서 다행이군요.]
 “좋기도 하겠다. 어쨌든 내일부터는 바쁘게 던전을 돌아야겠네. 그치?”
 [그렇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던전을 클리어하고 던전의 영혼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 그래. 일단 오늘은 좀 먹고 쉬자. 당장 지금부터 나가서 뛰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저는 그 정도로 악독하지 않습니다. 마음껏 드시고 쉬십시오.]
 “어째 곱게 들리진 않지만···. 그래, 고맙다.”
 용훈은 차갑게 식은 두부김치를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일단 다 잊기로 했다.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자. 앞으로는 이렇게 쉴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 15화 - 부정에 대항하다
 
 용훈은 근처 모텔에서 밤을 보냈다. 원래는 드래곤 금괴를 팔아 번 돈으로 번듯한 원룸을 하나 빌릴까 했었는데, 충동구매로 쿼렐을 3만 발이나 사는 바람에 돈이 부족했다.
 물론 금괴를 더 팔아도 되긴 했지만, 한 번에 너무 많이 파는 것도 모양이 안 좋아 보여서 며칠만 참기로 했다.
 다음날. 모텔을 나선 용훈은 근처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UHRS 앱을 설치했다. 가까운 던전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헌터 라이센스의 라이센스 넘버를 입력하고 로그인하자 곧바로 주변에 존재하는 게이트의 위치가 지도상에 나타났다. 최초 보고된 시각과 등급, 지금까지 도전한 헌터의 수까지 체계적으로 표시된, 아주 잘 만들어진 앱이었다.
 “자비스. 이번에도 레어 던전으로 갈까?”
 [괜찮은 선택입니다. 레어 던전의 C 난이도 퀘스트를 손쉽게 클리어하셨으니, 퀘스트의 난이도가 올라가더라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오케이. 그럼 제일 가까운 곳이···. 응암역 근처네. 가자, 자비스. 웹 스윙으로 갈까?”
 [아직은 너무 시선을 끌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인님을 주목할수록 메인 시스템의 주목도도 올라가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택시 타자.”
 
 식당에서 나온 용훈은 택시를 잡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응암동 게이트로 가달라고 말을 해 봤는데, 다행히도 택시 기사님은 게이트의 위치를 알고 계셨다. 어제도 몇 명의 헌터를 게이트까지 태워줬다는 것이었다.
 “근디 혼잔가벼? 듣자하니 그 새마을금고 앞에 생긴 놈은 좀 빡시다카던디.”
 “있긴 있어요. 보이지가 않아서 그렇지.”
 용훈이 아무렇게나 대답하자 룸미러로 용훈을 본 택시기사는 뭔가 알아들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그 일행이 그 머시냐, 투명인간인가 그건가비? 아따, 신기하구마이.”
 “아하하···.”
 용훈은 굳이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 왔습니다~ 몸 건강히 댕겨와요~.”
 “네. 감사합니다. 아, 잔돈은 됐어요.”
 “어이쿠, 복 받을 겨!”
 택시비 7천3백 원에 오만 원권을 내고 잔돈을 거절한 용훈을 보며 택시기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떠나가는 택시의 엉덩이가 실룩실룩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린 용훈은 골목 쪽으로 이동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국민건강 증진법 때문에 길에서 담배를 피우면 잡아 죽일 듯한 눈초리들을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멀찍이 서 있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좁은 길들이 모이는 사거리의 한가운데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작은 사거리는 완전히 교통이 폐쇄되어 있었다.
 길이 막혔다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겠지만 재밌게도 주변 상가들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불나방처럼 게이트로 모여든 사람들로 사거리는 시끌벅적했으니까.
 담배를 끈 용훈이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곧바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막아섰다. 영문을 모르는 용훈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하러 오셨수?”
 그중 한 명이 용훈에게 물었다. 용훈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며 게이트를 가리켰다.
 “저기 들어가려고 왔는데요?”
 용훈이 말하자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일 처음 용훈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무슨 게이트가 공중화장실도 아니고. 아무나 지나가다가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는 덴줄 아나. 엉?”
 용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비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원래 각성자라면 게이트는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냐?’
 [맞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들이 선점 길드인 모양입니다.]
 ‘선점 길드? 게이트 선점은 법적으로 금지된 거 아니었어?’
 [그렇습니다만, 늘 그렇듯이 법은 힘 앞에서 무력하니까요.]
 용훈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걸 본 남자들이 한 걸음 다가섰다.
 “뭐야. 인상 써? 한판 해보겠다는 거야?”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우리 신드래곤 길드야!”
 ‘자비스. 신드래곤 길드가 그렇게 센 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UHRS 코리아에 등재된 길드 중에서 102위에 랭크되어 있군요. 서울에 존재하는 50여 개 길드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합니다.]
 ‘근데 뭘 믿고 저렇게 나대는 거야?’
 [관련 정보를 찾았습니다. 서울 북서부에서 끗발 날리는 자유로 길드에 흡수되었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유로 길드의 이름을 업고 호가호위하는 것 같습니다.]
 ‘끗발에 호가호위라···. 자비스 너, 어휘가 점점 더 느는 것 같다, 어째.’
 [감사합니다.]
 용훈이 자비스와 떠드는 사이 남자들은 점점 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용훈을 둘러쌌다.
 “병신이 멍 때리고 있네? 영혼이 가출했냐? 엉?”
 “뒈지기 싫으면 꺼져, 새꺄.”
 “아킬레스건 잘라서 게이트에 던져버리는 수가 있어.”
 각종 욕설을 내뱉으며 압박해오는 남자들을 보며 용훈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무서운 건 아니었다. 모래폭풍 주둔지를 겪으며 자신이 얼마나 강한 힘을 손에 넣었는지 제대로 깨달았으니까.
 단지 아직은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는 자비스의 조언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용훈은 쉽게 물러서 주었다.
 “알았어요, 그냥 갈게요. 미안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는 용훈의 뒤로 온갖 욕설들이 쏟아졌다. 개중에는 성격 좋은 용훈도 참아주기 어려운 욕설들도 있었다.
 ‘시끄러운 새끼들. 좀 이따 보자.’
 그는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가 만변자의 피부를 조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익숙한 복장으로 바뀌었다. 머리끝까지 드리워진 검은 후드와 복면, 목이 높은 가죽 재킷과 빛바랜 엔지니어드 진, 투박한 워커까지.
 용훈은 멸절의 여섯 날개를 허리춤에 차고 왼손에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둘둘 말아 들었다. 후드와 복면 사이로 어둠에 잠긴 그의 눈이 차갑게 웃고 있었다.
 
 “이 바닥도 개판이네. 저런 병신같은 새끼도 헌터랍시고 깝죽대고 다니는 거 보니.”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그냥 보낼 게 아니라 제대로 교육을 시켜주는 건데 그랬습니다.”
 “내 말이. 그리고 그 참에 용돈도 좀 챙기고 말이야. 안 그냐?”
 “당연하지 말입니다.”
 용훈을 협박했던 남자들은 게이트 주위에 죽치고 앉아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난로에 의자까지 가져다 놓은 걸 보면 그 짓을 하루 이틀 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쫘악! 그때 어디선가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트를 지키던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시발!”
 “어떤 새끼야!”
 그들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 형님, 저 위에 저놈 아닙니까?”
 그들 중 한 명이 용훈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그제야 그들은 일제히 용훈을 올려다보았다.
 용훈은 그곳에서 가장 높은 6층짜리 건물 옥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비스. 여기서 저놈들을 다 밟아버려도 괜찮겠지?’
 [너무 주목을 받아서 좋을 건 없습니다만 저런 놈들 때문에 다른 던전을 찾아가는 시간 낭비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밟으십시오. 다만, 잠시 후 던전에서 나올 때 저들과 또다시 충돌할 거라는 것 정도는 염두에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았어.’
 용훈은 차갑게 웃었다. 멸절의 여섯 날개를 뽑아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곧 마주칠 싸움의 향기가 그를 설레게 했다.
 용훈은 6층에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남자들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충격을 분산시킬 생각도 없이 용훈은 그대로 땅을 디뎠다. 꽝! 폭음이 터져 나오며 아스팔트가 깨져나갔다.
 ‘좋아! 진짜 니 말대로구나, 자비스?’
 [그렇습니다. 만변자의 피부는 그저 방어만을 위한 아이템이 아닙니다. 상황에 맞는 즉각적인 형태 변화를 통해 착용자의 신체 능력을 순간적으로 몇 배나 증폭시키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사용법은 그저 내 몸을 쓰듯 하면 되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것을 의식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움직이시면 됩니다.]
 새카만 후드와 복면 사이로 용훈의 눈이 환하게 웃었다. 눈앞에서 당황에 떨고 있는 남자들이 아니었으면 깨방정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단 이놈들부터 얼른 치우자고. 아까 먹었던 욕 값은 치러야지. 안 그래?’
 [당연합니다.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가 된다지 않습니까.]
 ‘··· 너 근데, 그런 말은 다 어디서 주워듣는 거냐?’
 새카만 어둠으로 빚은 것 같은 용훈의 모습을 보며 남자들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그중에 가장 상급자인 듯한 남자가 슬며시 앞으로 나섰다.
 “누구···. 십니까?”
 검은 복면 안에서 용훈이 씩 웃었다. 좀 전까지 쌍욕을 내뱉던 놈이 살살거리는 꼴이 우스워 보였다.
 “게이트 좀 쓰자.”
 용훈의 말투가 바뀌었다. 역시나 얼굴을 가리면 사람은 용감해지는 법이다.
 남자들의 눈썹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갑자기 나타나 반말을 지껄이니 기분이 나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좀 전처럼 욕설을 퍼붓진 않았다. 방금 6층에서 뛰어내린 용훈의 몸놀림을 보고 그가 자신들보다 강한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앞으로 나선 남자는 기분 나쁜 표정을 애써 지우며 얌전하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만, 이 게이트는 자유로 길드에서 선점한 게이틉니다. 웬만하면 다른 곳을 이용하시는 것이···.”
 그는 용훈이 꽤나 강한 것 같자 아예 자기들 길드의 이름은 쏙 빼고 자유로 길드의 이름만을 말했다. 자유로 길드 정도면 눈앞의 남자를 돌려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싫어.”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짧게 대답한 용훈은 그대로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 앞을 가로막았다.
 “막아? 한번 해보자는 거냐?”
 검은 복면 속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용훈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용훈의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나름 던전을 경험해본 자들이었다. 직면한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 극도로 발달한 자들. 그런 것이 바로 헌터라는 족속들이었다.
 차창! 그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인벤토리를 통해 마법처럼 등장한 창칼과 방패를 들고 그들은 용훈을 포위했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너는 자유로 길드를 상대로 싸움을 건 거다, 이 개새끼야!”
 “죽기 싫으면 빨리 꺼져! 우리 길드원들이 바로 코앞에 있다, 인마!”
 전형적인 겁먹은 자의 협박을 들으며 용훈은 전투의 흥분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이렇게 싸움을 즐기는 타입이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 16화 - 구름섬 진입
 
 [전원이 강화계 각성자로군요. 무기는 레어 등급으로 추정되는 방패 하나와 별 볼 일 없는 칼이 네 자루, 창이 한 자루입니다. 위협수준 최하. 주인님 마음대로 요리하십시오.]
 ‘오케이. 빨리 처리할게.’
 용훈이 한 발을 성큼 내디뎠다. 그러자 깜짝 놀란 남자가 황급히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용훈은 만변자의 피부를 테스트할 겸 팔을 뻗어 그것을 막아보았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칼이 튕겨 나갔다. 그것을 보며 용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거칠 것은 없다.
 다시 한걸음 걸어 나가며 용훈이 주먹을 뻗었다. 빠악! 튕겨 나간 칼을 붙잡느라 정신이 없던 남자는 그 한방에 정신을 잃었다. 부러진 이를 우수수 뱉어내며 남자가 허물어지자 일행의 리더가 소리쳤다.
 “이런 썅! 뭐해, 조져버려!”
 리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용훈은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해 나갔다.
 공격을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남자의 품 안으로 들어선 용훈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뿌득!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뼈가 비틀어졌다.
 “끄으윽!”
 신경계가 어긋나며 격통이 온몸을 달렸다. 용훈은 축 늘어진 남자의 몸을 옆에서 달려드는 다른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두 사람은 볼링핀처럼 한데 엉켜 바닥을 굴렀다.
 쉭! 날카롭게 찔러 오는 창날이 용훈의 옆구리를 스쳤다. 리더가 사용하는 창은 그나마 봐줄 만했다. 아이템 자체는 형편없었지만 사용하는 자가 기본적인 실력이 있었다. 물론 용훈과는 그 차이가 너무 심하긴 했지만.
 스쳐 간 창대를 옆구리에 낀 채 용훈이 빙글 몸을 돌렸다. 빠각! 창대가 부러지며 창날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용훈은 공중에서 그것을 낚아채 그대로 집어 던졌다. 쐐액! 공기를 가른 창날이 뒤쪽에 서 있던 남자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으아악!”
 끔찍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그를 뒤로 한 채 용훈은 남아있는 세 명에게로 쇄도했다.
 창이 부러진 리더가 뭐라고 소리치며 물러서자 나머지 두 명이 용훈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은 방패로 앞을 가린 채였고 다른 한 명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용훈은 그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 그리고 적당한 힘을 내려 노력하며 방패를 걷어찼다. 꽈아앙!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방패가 까마득한 높이까지 솟구쳤다. 방패를 들고 있던 남자는 왼팔이 어깨까지 부서진 채 빙글빙글 날아 구석으로 처박혔다.
 ‘아, 힘 조절이 쉽지가 않네.’
 [시간이 약입니다.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자비스와 대화를 나누며 용훈은 남은 한 명의 남자를 해치웠다. 무작정 달려들던 그는 뒤통수를 찍어 누르는 강력한 힘에 아스팔트와 키스를 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끼릭. 금속끼리 마찰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온 순간, 머리털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은 감각이 용훈을 덮쳤다.
 [주인님, 뒤!]
 자비스의 말이 들리기도 전에 용훈은 몸을 비틀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뒤쪽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탕! 커다란 소리와 동시에 트럭에 받힌 것 같은 충격이 그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 충격에 비틀거리며 물러나면서도 용훈은 그를 때린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용훈의 앞에는 홀로 남았던 리더가 뭔가 커다랗고 묵직해 보이는 물건으로 그를 겨누고 있었다.
 [Desert Eagle Mark XIX. 44 매그넘 탄을 쓰고 있습니다. 예상 충격량 산출 중. 연달아 직격 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피하십시오.]
 ‘총알을 피하라고? 내가 네오라도 되는 줄 알아?’
 “뒈져라, 개새끼야!”
 권총을 든 리더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수축하는 근육의 사전작용이었다.
 순간 용훈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어느새 오른쪽 허리의 홀스터에서 뽑혀 나온 멸절의 여섯 날개가 화려한 불꽃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퓽! 탕! 발사음은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동시에 들려왔다. 퍼억! 용훈은 옆구리를 후려치는 강력한 충격에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만변자의 피부는 44구경 매그넘 탄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커헉!”
 고통에 찬 비명은 앞에서 들려왔다.
 탁. 권총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심장을 꿰뚫은 쿼렐을 부여잡으며 리더가 천천히 허물어졌다.
 용훈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아직까지 전투가 가능한 적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이제 적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았다.
 “총을 쓰다니···. 깜짝 놀랐네.”
 [죄송합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놓쳐버렸습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총기에서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여전히 정부는 총기를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각성자들이 버젓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현실이었다.
 비각성자나 각성자이지만 전투력이 약한 자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갖길 원했다. 그리고 당국은 인벤토리를 사용한 밀수를 규제할 어떠한 방법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요즘의 한국 사회에서는 헌터 문제와 비슷한 비율로 총기 문제 역시 사회적 문제가 되어 버렸다. 통제되지 못한 힘이 남용된다는 점에 있어서 위의 두 문제는 완전히 동일한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됐어. 그보다 헌터들도 총을 써? 던전 내부에서 총을 쓸 수 있었나?”
 [안됩니다. 아시다시피 바깥의 물건은 던전 내부로 가져갈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놈은 뭐야, 그럼.”
 [던전 밖에서라면 총은 훌륭한 공격수단이 되니까요. 본신의 힘이 약한 존재들은 아직도 총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구나. 그보다 만변자의 피부가 총알을 생각보다 잘 막아줬어. 좀 아프긴 했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총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권총이라면 이 정도로 막아낼 수 있지만, 소총부터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방심한 상태에서 기습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구요.]
 “그래, 알았어. 근데, 자비스. 혹시 던전 안에서 총을 쓸 방법은 없어? 쿼렐 만드는 것처럼 던전에서 구한 재료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 시도는 지금까지 수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
 [메인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던전에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클리어 보상뿐입니다. 즉, 메인 시스템이 미리 정해둔 물건만이 던전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통해 메인 시스템은 인간들의 장비 수준이나 전투 방식을 자신의 뜻에 맞추어 조절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 거지? 거기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마도 총으로 대변되는 현대 병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개체 본연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려는 메인 시스템의 의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추측할 수 있겠군요.]
 “흠···.”
 용훈은 떨어져 있는 권총, 데저트이글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집어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혹시라도 증거가 될까 싶어서였다.
 헌터가 죽으면서 그의 인벤토리를 이루던 아공간도 붕괴되어 그가 가졌던 장비 중 일부가 그의 시신 옆에 떨어져 내렸다. 용훈은 아이템을 내려다보다가 그냥 몸을 돌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잡템일 뿐인 데다가, 그것들을 주웠다가는 아이템을 노린 살인이라는 누명을 쓸까 싶어서였다.
 “그나저나 이번엔 진짜 사람을 죽였어. 괜찮을까, 자비스?”
 [주인님은 괜찮으십니까?]
 “그게···. 응. 이상하게 침착하네. 현실과 가상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바로스를 죽였던 경험이 있어서일까?”
 [그럴 겁니다. 어쨌든 살인을 저지른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법정으로 가더라도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법적 절차를 고려해서 주변 CCTV 영상 자료를 모아놓았습니다.]
 “그래. 고마워, 자비스.”
 [아닙니다.]
 용훈은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돌아가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들어가야겠지?”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 난리를 피운 거니까요.]
 용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총성까지 터지면서 상당한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죠. 그리고 빨리 처리하고 나와서 자리를 뜨는 겁니다.]
 용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스의 말이 옳았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다시 담을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들어가자.”
 용훈은 힘차게 게이트의 문을 열고 별이 총총 뜬 어두운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던전 진입 확인. 레전드 특성 ‘아키텍처의 눈’ 발동으로 숨겨진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던전의 정보를 출력합니다.]
 [던전 등급 : 레어]
 [던전 타입 : 전장(戰場)]
 [환경 타입 : 공중]
 [면적 : 52㎢]
 [인스턴스 : 구름섬 14층 천국의 문]
 [인스턴스 면적 : 19㎢]
 [퀘스트 난이도 : A]
 [퀘스트 : 천국의 문을 열어라.]
 
 짧은 시간 동안 낙하의 쾌감을 즐기던 용훈은 온통 새하얀 세상에서 눈을 떴다.
 바닥은 솜사탕처럼 하얗고 푹신거렸고 머리 위로는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커다란 뭉게구름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와, 예쁘네. 여긴 어디지?”
 [구름섬이군요. 레어 등급 이하의 던전에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곳입니다. 같은 퀘스트라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난이도가 올라가거든요. 역시나 퀘스트 난이도가 A로 측정되었습니다.]
 용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크기의 커다란 구름 위였다.
 그는 폴짝폴짝 뛰며 발밑의 구름이 주는 느낌을 즐겼다.
 “와, 진짜 재밌네. 꼭 어렸을 때 타던 방방 같은 느낌이야. 근데 어떻게 구름 위를 뛰어다닐 수 있는 거지? 실제 구름이 아닌 거야, 이거?”
 [실제 구름인 건 맞지만, 분자 조성이 다릅니다. 이곳 행성은 대륙과 바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지의 역할을 하는 구름만이 수많은 층위를 이루고 있을 뿐입니다. 행여나 구름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한번 떨어지면 외부에 노출되어있는 행성의 핵으로 직행입니다. 그러면 깔끔하게 타버려 뼛조각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구름의 가장자리를 따라 폴짝거리며 돌아다니던 용훈은 자비스의 말에 황급히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 씨. 그런 건 좀 빨리 말하라고.”
 [알겠습니다.]
 바닥이 없다는 말을 듣자 재밌기만 하던 구름 위가 왠지 무서워졌다. 자꾸만 아래를 향하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해?”
 [퀘스트를 수행할 인스턴스는 구름섬의 14층에 있는 천국의 문입니다. 현재 주인님이 계신 곳은 외층의 최상층이자 구름섬의 15층에 해당하는 접경지역입니다. 주인님은 저 위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위?”
 용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 위 까마득한 곳에 거대한 구름이 떠 있었다.
 “설마 저기 말하는 거야?”
 
 
 # 17화 - 공중전
 
 [그렇습니다.]
 “···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구름에도 걸리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장미 군주의 손가락보다 더 좋은 이동수단이 있습니다.]
 “그래? 뭔데, 그게?”
 [저기 오는군요.]
 자비스의 말에 용훈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흩뿌려진 모래알 같은 것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속도가 상당한지 그것들은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나하나의 모습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용훈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끼요오오옷! 침입자다! 죽여라!”
 “낄롤롤롤롤! 죽여! 죽여! 죽여!”
 잿빛 피부에 뾰족이 솟은 귀, 반딱거리는 대머리에 굽은 허리, 작은 키에 쪽 찢어진 눈까지. 소름 끼치는 꼬마 악마처럼 생긴 놈들이 이상한 기합소리를 엄청난 하이톤으로 내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뭐야, 저놈들은!”
 [구름섬의 하위 종족인 나바르입니다. 거주 종족인 다르얀은 나바르를 고용해 값싼 인력으로 써먹곤 하죠. 지금 다가오는 나바르들은 이곳 접경지역의 순찰을 맡은 놈들인 것 같습니다.]
 “근데 도대체 저놈들이 지금 뭘 타고 있는 거야?”
 나바르들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멋들어진 전투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런 주제에 놈들이 타고 있는 물건은 우스울 정도였다. 바닥이 둥글게 휘어 올라타면 앞뒤로 흔들거리는 목마. 물론 진짜 목마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비슷했다.
 놈들은 새하얗게 칠해진 목마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별빛을 가득 품은 구름을 뒤로 내뿜으면서.
 [그냥 이 동네의 오토바이구나, 하고 생각하십시오. 이름이 있긴 하지만 주인님의 언어로 바꾸기엔 발음이 괴랄합니다.]
 “뭐, 좋아. 어쨌든 저걸 빼앗아 타란 소리지?”
 [그렇습니다.]
 “알았어. 초면에 대뜸 죽이겠다는 소리부터 하는 놈들을 예쁘게 봐줄 필요는 없겠지. 어? 근데 나 어떻게 저놈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이제 와서 그게 이상하십니까? 애초에 오크의 말도 알아들으셨지 않습니까.]
 “그, 그렇네.”
 [던전을 창조한 메인 시스템의 작은 배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보다 놈들이 옵니다. 놈들의 무기는 구름섬의 기본적인 장비인 구름총입니다. 고도로 압축된 물줄기를 쏘아 보내는 원거리형 무기이므로 조심하십시오.]
 촥! 자비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저 광선 같은 물줄기가 날아들었다.
 “야야! 그런 건 좀 빨리 말하라니까?”
 황급히 몸을 굴려 그것을 피해낸 용훈이 투덜거렸다. 벌떡 일어선 용훈의 손에 어느새 멸절의 여섯 날개가 들려 있었다.
 불길이 일렁이는 여섯 장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감각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시간이 조금이나마 느려진 것 같았고 시야가 두 배는 넓어진 것 같았다.
 쫙! 왼손의 채찍이 바닥의 구름을 찢어발기며 비명 같은 소리를 터트렸다.
 “그럼 간다.”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용훈이 중얼거렸다. 그가 달리기 시작하자 그의 뒤를 위험한 물줄기들이 이리저리 쫓았다.
 용훈은 나바르들을 따라 달리다가 구름 밖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발밑에는 끝없는 허공이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쐐액! 붉은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나바르가 탄 목마를 채찍이 휘감자 용훈은 힘차게 그것을 잡아당기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몸을 웅크리며 상승의 정점에서 균형을 잡은 용훈이 방아쇠를 당겼다. 피비비빙! 여섯 장의 날개가 불꽃을 휘날리며 눈부신 속도로 퍼덕이자 쿼렐들이 빛살처럼 허공에 직선을 그려냈다.
 “크아아악!”
 “끼야악!”
 비명들이 연속으로 터져 나오며 나바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공중에 뜬 용훈의 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허공에서 몸을 쭉 편 그가 양팔과 양다리를 쫙 펼치자 그 사이로 얇고 질긴 막이 생겨났다. 용훈은 그것을 이용해 맞바람을 타며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
 떨어져 버릴 것 같았던 용훈이 바람을 타며 날아들자 도망치던 나바르들이 조급해졌다. 그들은 구름총을 들어 마구잡이로 쏴대기 시작했다.
 “끼요오옷! 죽여! 죽여 버려!”
 “끼루룩! 오지 마! 쫓아오지 말라고!”
 용훈은 공중에서 몸을 틀어 뱅글뱅글 돌며 물줄기들을 피해냈다. 팔다리를 당겨 급격하게 떨어졌다가 다시 몸을 쭉 펴며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기도 했다.
 그의 왼손에 들린 붉은 채찍이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채찍으로 목마의 꼬랑지를 움켜쥔 용훈이 강력한 힘으로 그것을 끌어당기자 반동으로 그의 몸이 쏜살같이 나바르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빠악! 날아온 속도를 그대로 살려 그는 목마를 타고 있던 나바르를 걷어찼다. 나바르가 추락하며 끔찍한 비명이 끝없이 멀어져갔다.
 목마를 조종하는 것은 정말로 오토바이와 똑같았다. 용훈은 급격히 브레이크를 잡으며 몸을 틀어 옆으로 세 바퀴를 돌았다. 그러자 어느새 그는 남은 나바르들을 뒤에서 추격하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용훈이 시트에서 일어섰다. 맹렬한 바람이 가슴을 밀어댔다.
 한 발을 시트에 올린 채 몸을 고정시킨 그가 멸절의 여섯 날개를 들어 올렸다. 뒤를 돌아보던 나바르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구름총을 난사했다.
 날카로운 물줄기들이 뺨을 스치는 데도 용훈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호흡마저 멈춘 채로 그는 손쇠뇌의 조준선 위를 날뛰는 나바르들을 바라보았다.
 찰칵. 방아쇠가 당겨졌다. 불꽃을 휘날리며 여섯 장의 날개가 퍼드득거리자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쿼렐들이 허공을 갈랐다.
 파바바박. 벼락을 맞은 듯 경련을 일으키던 나바르들이 줄줄이 떨어져 내렸다. 기수를 잃은 목마들도 이리저리 휘청거리다 저들끼리 부딪치며 추락해버렸다.
 용훈은 전투의 고양감을 천천히 음미하며 멸절의 여섯 날개를 허리춤의 홀스터에 던져 넣었다. 전투의 신이라도 된 듯한 감각이 거짓말처럼 쑥 사라지며 순간 아쉬움이 들었다.
 “윙슈트 정말 쓸만하네. 좋은 아이디어였어, 자비스.”
 팔과 다리 사이에 날개가 달린 듯한 모습의 윙슈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익스트림 스포츠의 종착역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위험하고 짜릿한 물건이었다.
 물론 던전과 각성자가 등장한 이후로는 몇몇 애호가들이나 사용하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하늘을 날거나 공중을 달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시대였으니까.
 자비스는 만변자의 피부가 부분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낙하산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윙슈트 역시 가능할 것이 확실했고, 상황에 따라 낙하산보다 윙슈트가 더욱 유용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용훈은 자비스의 말을 따라 윙슈트로 변형하는 것을 연습해왔다. 그것이 오늘 빛을 본 것이었다.
 “으, 그나저나 발밑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좀 무섭다. 빨리 어디든 가자.”
 [좀 전까지 허공을 날아다니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이상하군요.]
 “그야 아까는 약 빤 상태였잖아.”
 [멸절의 궁수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을 한낱 약에 비교하시다니. 모욕적인 언사이십니다만.]
 “뭐 어때. 앞에 없으면 나라님도 욕하는 거야, 인마.”
 별빛 구름을 내뿜는 목마를 타고 용훈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그저 거대한 구름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은 위로 갈수록 점점 더 커져, 나중에는 하늘 전체를 가리는 무시무시한 크기가 되어있었다.
 용훈은 구름 아래에 마치 선착장처럼 삐죽 나온 곳으로 목마를 가져다 댔다. 푹신한 구름 위로 올라선 그가 목마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구름섬에서 움직이는 이상 목마는 언제라도 다시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계단이네. 위로 올라가면 돼?”
 [그렇습니다. 그보다, 주인님. 올라가기 전에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말해봐, 자비스.”
 [주인님. 현재도 주인님은 충분히 강하시지만, 앞으로는 액티브 스킬이 필요할 만한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액티브 스킬을 하나 배워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 좋지. 근데 어떤 거? 스킬을 배우려면 스킬북이 필요한 거 아니야?”
 [맞습니다.]
 “가만있자···. 나한테 있는 스킬북은 전부 모래폭풍 주둔지에서 얻어온 것뿐이잖아. 칼날 이빨이랑 샌드 슬라이드에 모닥불 피우기라···. 다 별 필요 없을 것 같은 느낌인데?”
 [샌드 슬라이드는 어떠십니까.]
 “여기는 모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인데?”
 [스킬북을 강화시키면 스킬의 제약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샌드 슬라이드는 현재 매직 등급의 스킬로 설정되어 모래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그 매질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주인님의 신력을 사용하거나 다른 아이템을 소모해 스킬북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 그래? 그럼 해봐. 뭐, 인벤에 있는 아이템들은 나중에 팔아먹을까 해서 갖고 있던 거니까.”
 [에픽 등급의 바로스의 톱니칼날, 레어 등급의 모래폭풍의 진격 깃발, 레어 등급의 모래폭풍 도적단의 가죽 방어구, 레어 등급의 회복의 반지, 레어 등급의 칼날 이빨 스킬북, 레어 등급 마력석 하나를 사용하겠습니다.]
 “뭐? 야, 뭘 그렇게 많이 써!”
 [그나마 메인 시스템의 개입을 배제한 강화라 이 정도로 가능한 것입니다. 메인 시스템은 실제로 필요한 신력의 양과는 상관없이, 장비의 등급만 가지고 7대 1의 법칙을 설정해두었습니다. 즉, 매직 등급 아이템을 레어 등급으로 올리려면 레어 등급의 아이템 일곱 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 너 잘난 거 아는데, 그래도 회복의 반지는 남겨놨으면 하는데.”
 [회복의 반지는 주인님의 체력을 천천히 회복시키는 아이템입니다. 하지만 회복의 반지를 유니크 등급까지 올려도 만변자의 피부가 착용자를 회복시키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인님께는 필요하지 않은 아이템입니다.]
 “그래도. 아끼는 김에 좀 더 아껴봐.”
 [최대로 절약한 것입니다. 슬라이드 스킬을 유니크 등급까지 올리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꼭 유니크까지 올려야 돼? 그냥 에픽 정도라도 쓸 만할 것 같은데.”
 [슬라이드 스킬은 유니크 등급까지 올리지 않으면 계속해서 매질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니 일단 강화하려고 하면 한 번에 최대로 강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쓸 만해 집니다.]
 “그래도 레어템 네 개에 에픽템까지···. 아, 손 떨린다. 꼭 그래야 되냐?”
 [절 믿으십시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멘트 치는 놈은 꼭 나중에 뒤통수를 치던데. 너 내 뒤통수치면 가만 안 둔다.”
 [걱정 마십시오. 칠 손도 없습니다.]
 자비스의 말에 용훈이 낄낄거렸다.
 [샌드 슬라이드의 스킬북을 꺼내십시오.]
 용훈은 샌드 슬라이드의 스킬북을 꺼내 손에 들었다.
 [시작합니다.]
 자비스의 말이 끝나자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이 근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용훈은 그것이 자신에게 속한 인벤토리의 아공간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동시에 인벤토리로부터 막대한 양의 힘이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용훈의 몸을 타고 샌드 슬라이드의 스킬북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 18화 - 내가 가장 잘하는 것
 
 두툼한 스킬북의 표면에 금빛으로 쓰인 글자들이 이지러지더니 이리저리 흔들리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엉겨 붙었다가 산산이 부서지던 그것들이 어느 순간 명확한 형태를 그려냈다.
 [성공입니다. 유니크 스킬 디멘션 슬라이드가 담긴 스킬북이 생성되었습니다.]
 유니크 스킬북은 생긴 것부터가 달랐다. 번쩍이는 황금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붉고 푸른 보석으로 전면을 치장한 화려한 책 위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필체로 스킬명이 쓰여 있었다.
 “와···. 디멘션 슬라이드? 뭔가 겁나 좋을 것 같은 이름이다.”
 [디멘션 슬라이드는 차원 계면을 타고 이동하는 스킬입니다. 따라서 주인님이 어떤 환경에 계시건 간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나 소모가 극히 적고 발동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다른 장거리 이동 스킬에 비해 이동 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괜찮아. 한 걸음밖에 못 간다, 뭐 이런 거만 아니면 돼.”
 [그렇지는 않습니다. 디멘션 슬라이드는 장애물이 없다면 전방위로 최대 10m를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어떤 상황에서건 단숨에 10m 거리를 무시하며 달려들 수 있다는 것. 만약 접근전의 스페셜리스트에게 들어간다면 극도로 위험할 만한 스킬이었다. 반대로 용훈 같은 원거리 공격수에게는 극도로 유용한 스킬이기도 했고.
 “좋아. 사용은 어떻게 하는 거지?”
 [만변자의 피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쓰십시오.]
 “의지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발동한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알았어. 아, 근데 말이야, 자비스. 스킬을 이렇게 강화하는 건 너만 가능한 거야?”
 [아닙니다. 아이템을 소모해 다른 아이템을 강화하는 것은 메인 시스템이 제공하는 편의 서비스 중 하나입니다. 다른 헌터들도 전부 이 방법을 사용해 자신들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경우에는 여전히 7대 1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죠.]
 “아,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도 스킬북을 열심히 구해야겠네. 그리고 이상해도 버리면 안 되겠다. 이렇게 강화시키면 좋은 스킬이 되니까 말이야. 사실 난 샌드 슬라이드 처음 보고 그냥 버릴까 했거든. 모래가 없으면 쓰지도 못하는 스킬이라니, 완전 쓰레기잖아, 하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한 가지 더, 주인님은 다른 헌터들에게 없는 특수한 스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격 스킬’이라는 이름의 그것은 이런 스킬북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데?”
 [때가 되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뭐야. 그냥 알려주면 안 되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저 같은 존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신격을 지닌 자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는 단지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흠. 알았어. 일단 가자.”
 용훈은 구름 계단을 밟고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감을 익히면서.
 
 계단은 끝이 없는 것처럼 이어졌다. 만약 디멘션 슬라이드를 배우지 않았다면, 지루해서 한숨 자고 올라갈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디멘션 슬라이드를 이용해 전방위로 휙휙 이동하며 한참이나 계단을 오르자 드디어 끝이 보였다. 용훈은 그 밝은 빛을 향해 활짝 웃으며 뛰쳐나갔다.
 “와~밖이다아아···. 으악!”
 꽈아앙! 거대한 물줄기가 내리꽂히자 계단의 출구가 박살이 나며 허물어졌다. 파편이 된 구름 조각이 물에 녹아 흘러내렸다.
 “뭐야, 썅!”
 정신없이 바닥을 구른 용훈이 고개를 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비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
 [아무래도 전쟁 중인 모양입니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에서는 거대한 대포의 형태를 띤 구름이 무지막지한 물줄기를 연신 뿜어내고 있었고, 흰색과 검은색의 목마를 탄 병사 수천 명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서로를 향해 구름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바닥은 이미 죽거나 곧 죽을 병사들로 가득했고 용훈은 지금 그들 사이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중에서 무언가가 용훈의 눈길을 끌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의 한가운데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이 바로 그것이었다.
 용훈은 그것을 보며 불길한 예감을 떠올렸다.
 ‘자비스···. 설마 저게 그건 아니지?’
 [맞습니다. 저게 바로 천국의 문입니다.]
 “이런 미친···.”
 신음 같은 욕설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만큼 천국의 문은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했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하늘을 완전히 틀어막을 정도로 커다란 구름의 밑바닥에 그려진, 그 자체로도 하늘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문. 도대체 그걸 무슨 수로 연단 말인가. 그것도 지금 이런 전쟁통에서.
 꽈아앙! 또다시 거대한 물줄기가 날아들었다. 용훈은 자연스럽게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뒤쪽으로 휙 물러섰다.
 “자비스! 저걸 여는 게 가능해? 나 혼자서?”
 [구름섬이 등장한 이상, 이 던전은 준 에픽 등급으로 봐야 합니다. 게다가 퀘스트 난이도도 A 등급. 이 정도라면 일반적으로 파티 수준이 아닌 공격대 수준의 던전으로 분류됩니다. 즉, 최소 25명의 헌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나 혼자 깰 수 있냐고! 안 되겠으면 빨리 말해! 얼른 도망가서 던전 포기라도 하게!”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공격대의 공략은 정공법으로 성문을 여는 것입니다. 정공법이란, 반란을 일으킨 나바르 자유연합을 도와 14층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님은 주인님이 잘하는 것을 하시면 됩니다.]
 “내가 잘하는 것?”
 용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레전드 특성 ‘아키텍처의 눈’이 발동되자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층의 거대한 구름 표면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다. 그곳을 통해 목마를 탄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고, 뭔가를 낑낑대며 옮기는 병사들이 구름 대포로 들어가기도 했다.
 아키텍처의 눈이 발동된 지금, 용훈은 그 모든 통로의 구조를 마치 청사진을 들여다보듯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용훈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그려졌다.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네. 음흉한 놈. 처음부터 도둑질을 시킬 생각이었냐?”
 [그렇다기보다는 주인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생각뿐이었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용훈이 인벤에서 목마를 꺼냈다. 훌쩍 뛰어 시트에 올라탄 용훈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자. 천국을 털러.”
 용훈을 태운 목마는 빠르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공중에서 격렬하게 부딪히는 나바르 병사들을 피해 바깥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황당할 정도로 멀긴 했지만, 멀리 상층의 끝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비스! 이대로 밖으로 나가서 위로 올라갈 순 없어? 굳이 안으로 침입해야 돼?”
 [이 탈것의 최대상승고도가 상층의 높이에 못 미칩니다. 허공에서 채찍을 사용해 올라간다 하더라도 14층에 상주하는 방어군과의 충돌이 필연적입니다. 그보다는 내부의 통로를 통해 문의 개폐장치로 직행하는 것이 경제적입니다.]
 “쳇, 알았어! 진입한다!”
 용훈은 상층의 아래쪽에 만들어진 출입구 중 한 곳으로 돌진했다. 막 출입구에서 뛰어내리던 나바르 몇 명이 용훈을 보고 괴성을 질러댔다.
 [흰색의 목마라면 상층에 고용된 나바르들입니다. 전부 죽이십시오. 대신 검은색의 목마를 탄 나바르들은 죽이시면 안 됩니다.]
 어느새 용훈이 빼 든 멸절의 여섯 날개가 불을 뿜었다. 구름총을 꺼내 들기도 전에 세 명의 나바르가 시신이 되어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왜? 색이 다른 것 말고 또 뭔가 다른 게 있는 거야?”
 [검은색 목마를 탄 나바르들은 나바르 자유연합에 소속된 병사들입니다. 복장부터 다르니 구분이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용훈은 출입구를 향해 목마를 몰다가 공중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목마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부족한 상승력은 디멘션 슬라이드로 해결했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몸이 위쪽으로 슥 움직이더니 어느새 출입구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동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용훈은 한쪽 벽에 몸을 붙이며 안쪽을 살폈다. 다행히 더 이상 이 출구를 향해 다가오는 병력은 없는 것 같았다.
 ‘나바르 자유연합? 그건 또 뭐야?’
 소리가 울리며 증폭되는 동굴의 특성상 용훈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의식으로 자비스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원래 이 차원의 거주 종족은 나바르였습니다. 그들은 이 특수한 환경의 행성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이루어 냈습니다. 하늘을 나는 목마나 구름총 역시 나바르의 작품입니다. 그런 이들을 어느 날 다르얀들이 침략해 왔습니다. 다르얀은 악명높은 차원 사냥꾼들입니다. 그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워 나바르들의 문명을 빼앗고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이에 격분한 나바르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바르 자유연합이 착한 놈들이란 거네. 그럼 천국의 문을 열라는 것은 나바르 자유연합을 도우라는 소린가?’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이 전쟁은 지구 시간으로 20년도 더 지난 시점에 끝난 전쟁입니다. 지금 여긴 당시의 상황을 메인 시스템이 재창조한 인스턴스에 불과합니다.]
 ‘그래? 누가 이겼는데?’
 [당연히 다르얀입니다. 나바르의 전투력은 좀 전에 경험해보셨다시피 보잘것없습니다. 차원 침략을 밥 먹듯 하는 다르얀과는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이지요.]
 ‘흠. 뭔가 맥 빠지는 소리네.’
 [아마 메인 시스템의 의도는 다르얀과의 전투를 경험하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지구가 속해있는 차원 역시 언제라도 다르얀과 같은 차원 사냥꾼들에게 침략당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근데 다르얀이 그렇게 강해?’
 [강합니다.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전투에 최적화된 이능력을 타고나며, 그 무엇보다도 강함이 가장 우선시되는 사회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차원을 침략해 얻은 아이템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럼 나 좀 위험한 거 아냐?’
 [걱정 마십시오. 다르얀이 강하긴 하지만 메인 시스템이 설정한 퀘스트의 난이도에 맞춰 재조정되었을 테니 상대하기에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알았어.’
 용훈은 머릿속에서 천국의 문의 위치를 떠올려보았다. 문의 개폐장치가 있는 메인 홀은 구름섬 14층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키텍처의 눈’을 통해 상층의 구조를 파악한 뒤라 메인 홀까지 최단 거리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용훈은 그러지 않았다. 그 루트 안에 무기고나 숙소, 훈련장 등등의 시설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곧바로 상층 전체에 경보가 발령됩니다. 그러니 절대로 경보가 울리게 놔두어선 안 됩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 19화 - 전투종족 다르얀
 
 용훈은 바짝 몸을 굽히며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동안의 도둑질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발소리를 죽이는 기술이었다.
 [유니크 특성 ‘마스터 오브 로버리’가 발동됩니다. 절도, 은신, 잠입, 미행, 기습, 탐지, 수색, 곡예, 자물쇠따기, 함정해체를 수행함에 있어서 유니크 등급의 패시브 스킬 효과가 적용됩니다.]
 자비스의 말이 끝나자 용훈은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전력으로 달려도 발소리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 좋아. 그럼 간다, 자비스’
 아무런 소리도 남기지 않은 채 용훈은 바람처럼 구름동굴 속을 내달렸다.
 각각의 출입구는 중간에 존재하는 일종의 대기실에서 합류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병사들이 출격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좁은 구름동굴을 달리던 용훈은 멀리 동굴의 출구를 보고 멈춰 섰다. 유니크 특성 ‘마스터 오브 로버리’의 패시브 스킬 ‘탐지’가 발동되며 동굴 밖 대기실에서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기척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덟입니다. 무장 수준은 평균적인 나바르 병사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다르얀은 없는 것 같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할까. 어차피 여길 지나가긴 해야 하는데. 그냥 다 제거할까?’
 [아닙니다. 이곳은 총 열일곱 개의 출입구로 연결되는 대기실입니다. 계속해서 병사들이 들락날락할 텐데 그런 곳에 전투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습니다.]
 ‘그럼?’
 [은신을 유지하며 출구로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적들의 시야를 시각적 정보로 표시하겠습니다. 분명 틈이 있을 겁니다. 그 틈을 노려 반대편 출구로 이동해야 합니다.]
 ‘알았어.’
 용훈은 구름동굴의 색깔에 맞춰 만변자의 피부를 조작했다. 생김새는 그대로되 색깔만 바꾼 부분변형이었다.
 보호색이 가미되자 용훈의 존재는 마치 그곳에서 지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스터 오브 로버리’의 은신 효과 때문이었다.
 발소리까지 죽인 채 용훈은 천천히 출구로 다가갔다. 점차 출구가 다가오자 안쪽 대기실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나바르 병사들은 제각기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는데도 그들은 편안한 기색이었다. 아마도 안전한 상층 내부라는 이유 때문이리라.
 [적들의 시야를 표시합니다.]
 순간 용훈의 눈앞에 반투명한 붉은색 부채꼴 여덟 개가 등장했다. 그것은 각각의 나바르가 보고 있는 범위를 시각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와···. 이거 완전 미션 임파서블인데?’
 여덟 개나 되는 붉은색 부채꼴은 거의 방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게임에서처럼 어느 정도 범위에서 뚝 끊어지는 종류의 부채꼴이 아니었다. 게다가 평면도 아닌, 높이와 부피를 가진 3차원의 존재였다.
 그런 3차원의 부채꼴 여덟 개가 쉬지 않고 움직여대니 도통 움직일 수 있는 루트가 보이질 않았다.
 ‘이거 정말 지나갈 수 있는 거야? 그냥 싹 다 정리하는 게 낫지 않겠어?’
 [뒤처리가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도중에 적이 다시 합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멸절의 여섯 날개를 꺼내십시오.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으로 감각을 확장하시면 쉬워질 것입니다.]
 ‘알았다.’
 허리춤의 홀스터에서 손쇠뇌가 빠져나오자 여섯 장의 불꽃 날개가 일제히 펄럭였다. ‘마스터 오브 로버리’의 은신 효과가 무기에도 영향을 주는지, 화려한 멸절의 여섯 날개가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불꽃의 날개가 등장하자마자 날카로운 감각이 용훈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흥분과 긴장이 단숨에 가라앉혀지며 집중력이 솟구쳐 올랐다.
 시간마저 느려진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용훈은 미소 지었다. 자비스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간다.’
 희뿌연 그의 몸이 빛살처럼 공간을 갈랐다. 그의 왼쪽에서 거대한 붉은색 부채꼴이 다가왔다.
 용훈은 허리를 굽히며 몸을 뒤로 뉘였다. 몸이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누운 상태에서 그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차원 계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디멘션 슬라이드가 발동한 것이었다.
 벌떡 일어선 용훈은 계속 달렸다. 이번에는 바닥을 쓸 듯이 다가오는 부채꼴이 보였다. 용훈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벽을 디뎠다.
 [레어 특성 ‘월 라이딩’이 발동됩니다. 1.4초간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벽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자비스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4초란 지금의 용훈에게는 여유로울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벽 위를 평지처럼 달리며 용훈이 두 번째 부채꼴을 피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분적으로 겹쳐진 세 개의 부채꼴이 동시에 용훈을 향했다. 위아래를 모조리 집어삼킨 그것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순간 용훈이 벽을 박차며 천장을 디뎠다. 아직 월 라이딩의 발동 시간은 0.6초가 남아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밟고 달리며 부채꼴들의 범위를 벗어났다. 시간이 다 되자 월 라이딩의 효과가 사라지며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슥. 공중에서 그의 몸이 비현실적인 각도로 쏘아져 나갔다. 빠르게 교차되는 두 개의 부채꼴 사이를 비집고 나가며 그의 몸이 곡예와도 같은 자세를 만들어냈다.
 탁. 용훈의 발이 반대쪽 동굴의 바닥을 디뎠다. 그가 빠르게 손쇠뇌를 홀스터에 던져넣으며 벽으로 몸을 붙였다. 안쪽을 살펴보니 그의 존재를 눈치챈 존재는 없는 것 같았다.
 [성공입니다.]
 ‘그래. 근데 방금 말이야, 내가 했지만 나 좀 멋졌던 것 같은데. 안 그래?’
 [진행하시지요.]
 ‘··· 알았다.’
 용훈은 푹신한 구름을 밟으며 구름동굴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아키텍처의 눈으로 전체의 구조를 미리 파악한 뒤라 최대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충돌이 필연적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용훈은 ‘마스터 오브 로버리’와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곡예와도 같은 잠입을 성공시켰다.
 한참을 바람처럼 달리다 보니 이리저리 구불거리던 길이 곧장 직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끝이 메인 홀이라는 것을 깨달은 용훈이 걸음을 멈췄다.
 [앞쪽에 보이는 곳이 천국의 문의 개폐장치가 있는 메인 홀입니다. 전투에 대비하십시오. 나바르와 다르얀이 섞인 부대가 존재할 가능성이 큽니다. 은신을 유지한 채 내부를 탐지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알았어.’
 용훈은 발소리를 죽이고 은신을 유지하며 구름동굴의 끝 부분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게 최첨단의 금속제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움직임을 감지해 자동으로 열리는 문입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십시오.]
 자비스의 안내에 따라 용훈은 걸음을 멈췄다. 그가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하자 ‘마스터 오브 로버리’의 탐지 효과가 발동되었다.
 [개체수는 약 27. 다르얀 개체가 하나 감지됩니다.]
 ‘그래.’
 처음으로 마주치는 다르얀이다. 과연 얼마나 강할까? 궁금증과 동시에 긴장이 되기 시작하며 어깨가 굳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레어 등급 던전의 A 난이도 퀘스트일 뿐입니다. 실제 다르얀에 비하면 상당한 수준으로 약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자비스의 말에 용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고맙다.’
 [아닙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일부 개체들은 경보를 울리려고 할 것입니다. 경보장치로 다가가는 적들을 최우선적으로 제거하십시오.]
 ‘그래. 시작하자.’
 용훈은 오른손에 멸절의 여섯 날개를, 왼손에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그가 가진 최강의 무기 조합이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조합이기도 했다.
 그가 허리를 쭉 펴며 일어서자 자연스럽게 ‘마스터 오브 로버리’의 발동 효과들이 사라졌다.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으로 한껏 끌어올려진 감각을 느끼며 그가 발을 옮겼다.
 푸쉭.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좌우로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거대한 공간이 보였다.
 바닥에는 널따란 길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나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스케일에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그것은 사실 천국의 문에 그려진 문양이었다.
 그 거대한 공간의 중앙에는 스무 명가량의 나바르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나바르보다 두 배는 더 큰 키를 가진 다르얀이 한 명 서 있었다.
 처음 본 다르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마치 두 발로 일어선 장수풍뎅이처럼 보였다. 온몸이 두텁고 단단한 갑옷 같은 각질로 뒤덮여 있었고 팔은 네 개, 다리는 두 개를 갖고 있었다. 곤충의 다리처럼 가냘픈 다리로 거대한 덩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일견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다르얀이 용훈을 보며 입을 벌렸다. 순간 들을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용훈은 머리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멸절의 여섯 날개를 들어 올렸다. 곧바로 날아온 날카로운 물줄기들이 그의 몸이 있던 곳을 꿰뚫었다.
 용훈은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빠르게 옆으로 몸을 피했다. 불꽃의 날개들이 펄럭이자 쿼렐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퍼버벅! 순식간에 쏟아진 쿼렐들이 단번에 예닐곱 명의 급소를 꿰뚫었다. 죽은 나바르들이 바닥을 구르자 다르얀이 화가 난 듯 바닥을 깨부수며 달려 나왔다.
 다르얀은 그 둔해 보이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민첩했다. 용훈은 코앞을 스치는 다르얀의 징그러운 팔을 보며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거의 순간이동 같은 속도로 물러선 용훈의 손에서 멸절의 여섯 날개가 불을 뿜었다. 투둥! 은빛의 쿼렐 두 발이 단번에 거리를 좁히며 다르얀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까강! 놀랍게도 쿼렐은 다르얀의 몸을 뚫지 못했다. 다르얀의 껍질은 마치 강철로 이루어진 듯 쿼렐을 튕겨냈다. 불꽃이 튀어 올랐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다르얀은 쿼렐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그가 징그러운 솜털이 숭숭 난 새카만 팔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용훈은 미친 듯이 디멘션 슬라이드를 난사하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다르얀은 민첩하게 달리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발놀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마치 축지법을 쓰듯 거리를 좁혀왔기 때문이었다.
 [나바르 두 개체가 경보장치로 다가갑니다! 제거하십시오!]
 용훈은 디멘션 슬라이드로 몸을 빼냄과 동시에 채찍을 휘둘러 까마득한 높이의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공중에서 채찍을 회수하며 그가 발밑을 살폈다.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두 명의 나바르가 보였다. 용훈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퉁. 퉁. 연속으로 들려온 두 번의 격발음과 함께 은빛 쿼렐 두 개가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달리던 나바르 둘이 머리가 꿰뚫리며 쓰러져버렸다.
 [주인님, 밑입니다! 다르얀의 공격입니다!]
 자비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훈은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옆으로 이동했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뚫고 섬광 한줄기가 솟구쳤다. 쾅! 섬광이 천장을 때리며 구름이 폭발했다.
 “뭐지? 무기가 있었나?”
 [아닙니다. 자연계, 혹은 특질계의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20화 - Ray of extinction
 
 떨어져 내리며 용훈은 다르얀에게로 몸을 돌렸다. 다르얀은 발을 멈추고 넓게 벌려 선 채 멀리서 용훈을 향해 주먹을 뻗고 있었다.
 주먹이 다 뻗어지자 그 끝에서 섬광이 솟구쳤다. 놀란 용훈은 또다시 디멘션 슬라이드로 그것을 피해냈다.
 [스킬 확인 불가. 명확한 스킬의 형태 없이 마나를 쏟아내는 것으로 보아 특질계로 추정됩니다. ‘무공武功’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벌레 같은 놈이 별걸 다 쓰네.”
 용훈이 멸절의 여섯 날개로 다르얀을 겨누었다. 순간 손쇠뇌의 활몸 위로 붉은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파앙! 공기가 파열하며 새빨간 색으로 덧칠해진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다르얀은 여전히 용훈이 내쏘는 쿼렐을 우습게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쿼렐은 조금 달랐다.
 쾅! 멋모르고 쿼렐을 정면으로 맞은 다르얀의 가슴팍에서 화염의 폭발이 일어났다. 온몸에 불길을 뒤집어쓴 다르얀이 황급히 양팔을 휘저으며 물러섰다.
 용훈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다시 한 번, 쾅! 또 한 번의 폭발 화살이 다르얀을 후려치자 그 충격을 못 이긴 다르얀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나바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한 명도 메인 홀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나바르들을 먼저 처리하십시오.]
 자비스의 말에 용훈이 몸을 돌렸다. 불꽃의 날개가 바람처럼 펄럭이며 단숨에 카트리지를 비워냈다.
 아무렇게나 쏘아낸 것 같은 수십 발의 쿼렐이 이리저리 도망치던 나바르들을 덮쳤다.
 “끼이이익!”
 “끄아악!”
 기묘한 비명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빈 카트리지를 뺌과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꺼낸 카트리지를 손쇠뇌에 끼우자 철컥 소리와 함께 활시위가 당겨졌다.
 용훈은 이제 혼자 남은 다르얀을 향해 여유 있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몸에 붙은 불길을 털어낸 다르얀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공포가 아닌 분노 때문이었다.
 “덤벼, 벌레 새꺄.”
 용훈이 빈 왼손을 까딱이자 다르얀은 또다시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폭발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용훈이 다시 붉은색의 폭발 화살을 쏘아냈다. 다르얀은 폭발 화살을 보자마자 바닥을 강하게 내리밟으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쐐액! 꽝!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공중에서 폭발 화살이 터져나갔다. 순간 용훈은 자신을 향해 되튀어나온 불길을 보며 황급히 디멘션 슬라이드로 몸을 피했다.
 “폭발 화살을 요격했어?”
 불길을 헤치며 다르얀이 달려들었다. 용훈은 허공으로 뛰어올라 디멘션 슬라이드로 다르얀의 뒤를 잡았다. 활몸 위로 붉은 문양이 떠오르며 붉게 물든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다르얀이 번개처럼 뛰어올랐다. 붉은 쿼렐은 그를 스쳐 지나가 바닥을 때리며 폭발했고, 미처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하기도 전에 다르얀의 주먹이 섬광이 되어 날아들었다.
 꽈앙! 강렬한 충격과 함께 용훈의 몸이 총알처럼 솟아올랐다. 다르얀의 새카만 주먹에 얻어맞은 복부가 구멍이라도 난 듯 고통스러웠다.
 [2타가 옵니다! 피하십시오!]
 처음으로 느껴보는 격렬한 통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아고나른의 전투본능’ 덕에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공을 딛고 뛰어오른 다르얀이 또다시 섬광의 주먹을 날렸다. 용훈은 그를 향해 정면으로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했다.
 섬광의 주먹이 뺨을 스치자 만변자의 피부가 뜯겨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용훈은 다르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쳤다.
 공중에서 몸을 돌린 용훈이 머리 위에 떠 있는 다르얀을 향해 멸절의 여섯 날개를 겨눴다. 붉게 물든 쿼렐 두 발이 다르얀의 등을 후려쳤다.
 콰광! 공중에서 터져 나온 격렬한 폭발에 다르얀의 몸이 멀리 날아가 버렸다.
 바닥에 처박힌 다르얀은 한참 동안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별다른 충격은 없었는지 놈은 금세 벌떡 일어섰다.
 용훈은 고통과 실망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망할 놈. 겁나 안 죽네. 뭐가 저렇게 단단한 거야? 게다가 아프기도 더럽게 아파. 이래서는 끝도 없겠어.”
 [생각보다 다르얀의 공격력이 상당합니다. 아마도 개체 평균보다 더 강한 개체인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피격되지 마십시오. 현재의 충격량으로 보아 2회 이상 피격된다면 만변자의 피부가 해제될 수 있습니다.]
 “해제? 그건 뭐지?”
 [일반적인 방어구로 본다면 방어구가 깨진 상태입니다. 단, 만변자의 피부는 해제된 후 24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복구됩니다.]
 “레전드 등급 방어구 치고 방어력이 너무 약한 것 아냐?”
 [그보단 눈앞의 다르얀이 너무 강한 것입니다. 게다가 만변자의 피부는 주인님의 마력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착용자의 역량이 커질수록 장비의 성능도 향상되는 것입니다.]
 쾅! 다르얀의 주먹이 또다시 섬광을 내뻗었다. 용훈은 디멘션 슬라이드로 그것을 피하며 폭발 화살을 쏘아냈다.
 펑! 다르얀은 폭발 화살을 또다시 요격하며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망할! 공격이 통하질 않잖아!”
 쿼렐을 비처럼 퍼부으며 용훈은 거리를 벌렸다. 다르얀은 폭발 화살은 공중에서 터뜨려버리고 일반 쿼렐은 그냥 몸으로 씹어버리고 있었다.
 후웅! 기묘한 스텝을 밟으며 달려든 다르얀의 발차기가 용훈의 머리 위를 스쳤다. 머리칼이 뜯겨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용훈이 거리를 벌렸다.
 “폭발 화살로는 안돼! 뭔가 다른 방법이···.”
 쾅!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다르얀의 섬광이 용훈을 후려쳤다.
 “커헉!”
 어깨를 얻어맞은 용훈이 뱅글뱅글 돌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위험! 또 옵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다르얀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용훈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휘둘렀다.
 거대한 공간의 반대편 벽에 채찍이 고정되자 용훈은 디멘션 슬라이드를 섞으며 번개처럼 몸을 빼냈다.
 단숨에 상당한 거리를 번 용훈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멸절의 여섯 날개에 정신을 집중했다.
 “자비스! 멸절의 여섯 날개에 각인된 마법 중에서 폭발 화살 말고 내가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뭐가 있지?”
 [없습니다. 다른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격을 더 높이셔야 합니다.]
 “그럼 저놈을 상대할 방법이 없단 소리잖아!”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이런 썅! 방법을 생각해보란 말이야!”
 용훈이 단숨에 카트리지를 비워내며 쿼렐을 쏟아냈다. 마나를 아끼기 위해 마법을 싣지 않은 터라 다르얀은 빗발치는 쿼렐들을 몸으로 씹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도망치십시오.]
 “젠장!”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해내며 용훈은 욕설을 내뱉었다. 도망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곳은 적들로 가득한 적지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하지 않고 피해온 적들만 해도 백 명이 넘어섰다.
 그런데 미친 소처럼 달려드는 다르얀을 달고 다시 그 길을 가라고? 그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폭발 화살을 난사해 화염으로 시야를 가리십시오. 그다음 은신을 사용해 몸을 숨기고 도망치는 겁니다. 현재 마나 보유량 340/3600. 폭발 화살 열한 발이 사용 가능합니다.]
 “알았어!”
 뒤로 훌쩍 물러선 용훈이 바닥을 향해 폭발 화살을 난사했다. 쾅! 콰과광! 화염이 솟구치며 시야를 가렸다. 용훈은 폭연으로 정면이 가려진 틈을 타 재빠르게 출구로 몸을 날렸다.
 스윽. 문득 폭연 너머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용훈이 멸절의 여섯 날개를 들어 그쪽을 겨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얀이 빨랐다. 독특한 스텝으로 쿼렐을 피해낸 다르얀은 용훈의 디멘션 슬라이드까지 단숨에 따라잡았다.
 용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디멘션 슬라이드를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미세한 딜레이가 있다. 다르얀은 지금 그 틈을 파고든 것이었다.
 쾅! 묵직한 주먹이 용훈의 턱을 후려쳤다. 머리가 핑 돌며 다리가 풀렸다. 퍽! 비어있는 옆구리에 강철같은 발차기가 틀어박혔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위험-]
 꽈앙! 무시무시한 충격이 용훈의 머리를 때렸다.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고통이 파도처럼 그의 정신을 덮쳐왔다.
 용훈은 수면을 뛰노는 물수제비처럼 구름동굴 바닥을 나뒹굴었다. 만변자의 피부가 해제됐는지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몸이 박살 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멀리서 자비스가 다급하게 지껄여대는 것이 들린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너무 멀었고 너무 흐릿했다.
 용훈은 당장에라도 유리처럼 깨질 것 같은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 와중에도 멸절의 여섯 날개를 놓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다르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용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이것을 놓치면 정말로 죽는다.
 죽음을 예감하자 잊고 있던 감각, 죽음에의 공포가 고개를 들었다.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에 의해 거세되었던 부정적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용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멸절의 여섯 날개를 들어 올렸다. 조준선 위에 올라선 다르얀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다.
 그때 멸절의 여섯 날개에서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에 용훈은 하마터면 그것을 놓아버릴 뻔했다.
 불길 같은 통증은 오른손의 손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자 들리지 않던 자비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주인님, 들리십니까? 이상 현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이 숨겨진 기능을 발동합니다. 체력과 마나가 급격하게 소진되고 있습니다. 위험! 주인님, 위험합니다! 손을 놓으십시오!]
 자비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럴 법도 했다. 지금 용훈의 피부는 뜨거운 열기에 타버린 듯 재가 되어 날리고 있었다. 입가를 타고 흐른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수증기가 되어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용훈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위험합니다, 주인님! 위험···. 어? 각인된 마법의 비정상적인 사용이 감지됩니다! 최종 마법, 레이 오브 익스팅션이 발동됩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순간 어마어마한 섬광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용훈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물가물한 의식 너머로 자비스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부서질 듯한 팔로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러자 자신이 만든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메인 홀의 전면에는 그의 키만 한 지름을 가진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은 거대한 상층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구멍 너머로 손톱만 하게 파란 하늘이 보였다.
 [주인님! 들리십니까, 주인님!]
 “자비스···.”
 [다행입니다! 주인님의 체력이 심각할 정도로 낮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퀘스트를 완료하고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 21화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아고나른의 전투본능에 숨겨진 발동 효과, ‘생명 소진’이 발동했습니다. ‘생명 소진’은 막대한 양의 체력을 소진해 최후의 일격을 날릴 수 있게 해주는 효과입니다. 강력하지만 동시에 너무 위험하군요. 그동안 주인님의 체력이 조금이나마 올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용훈은 쓰러지듯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잠들고만 싶었다.
 [이대로 누워계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개폐장치로 가십시오.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곧 병력이 들이닥칠 겁니다.]
 그제야 용훈은 상층 전체에 울려 퍼지는 커다란 경보음을 들을 수 있었다.
 “크윽···.”
 고통을 참으며 용훈이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려 당장에라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개폐장치의 위치를 시야에 표시합니다. 주인님,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자비스의 응원을 들으며 용훈은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가 수천 미터처럼 멀게 느껴졌다.
 개폐장치는 구름을 뭉쳐 만든 기계장치 같았다. 용훈은 스위치나 레버 같은 것들이 빼곡히 들어찬 개폐장치를 붙잡으며 몸을 가눴다.
 [개폐장치는 중앙의 붉은 스위치입니다. 표시된 스위치를 누르십시오.]
 용훈은 떨리는 손으로 붉은 스위치를 눌렀다. 순간 메인 홀이 어둠에 휩싸이더니 구름으로 이루어진 천장과 바닥, 벽이 일제히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쿠구궁. 묵직한 진동과 함께 바닥이 움직였다. 천국의 문이 반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마치 세상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퀘스트 클리어. 천국의 문이 열렸습니다. 한 건의 업적 달성. 다르얀의 영웅 개체 크라카우를 1대 1로 상대해 꺾었습니다. 클리어 보상이 상향조정됩니다.]
 [던전 보상]
 [다르얀의 각질 방패(레어) : 강철 이상의 강도를 가진 다르얀의 각질로 만든 방패. 가벼우면서도 단단하다.]
 [구름섬 방어군의 표준 방어구 - 가슴 갑옷(레어) : 높은 수준의 과학력을 자랑하는 나바르 병사의 가슴 갑옷. 고고도에서 활동하는 착용자의 생존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방어력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날카로운 롱소드(매직) :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해주는 마법이 새겨진 롱소드. 가볍고 무게중심이 잘 잡혀있다.]
 [스킬북(매직) : 매직 스킬 ‘워터 애로우’가 담긴 스킬북.]
  - 워터 애로우 : 날카로운 물줄기를 쏘아낸다.
 [드래곤의 금괴 2]
 [황혼의 보석 1]
 [구름섬의 구름 조각 2]
 [심해의 철괴 3]
 [마력석(레어) 1]
 [힐링 포션 2]
 
 퀘스트 완료 알림과 보상 목록이 들리자 용훈의 몸이 허물어졌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아···. 힘들었다, 진짜···.”
 그때 귓가에 자비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주인님! 아직 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놈들이 옵니다!]
 “··· 뭐?”
 콰광! 메인 홀의 모든 문이 부서질 듯 젖혀지며 수십 명의 나바르가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여덟 명의 다르얀이 따르고 있었다.
 “뭐, 뭐야! 끝난 것 아니었어?”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천국의 문으로 뛰어드십시오!]
 용훈은 발밑으로 펼쳐져 있는 까마득한 하층을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광경에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주인님, 빨리!]
 “크와아아악!”
 날카로운 물줄기가 날아들고 다르얀들이 쿵쾅거리며 달려온다. 용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열린 천국의 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으아아아아아아!”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까마득한 하층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용훈은 인벤토리를 뒤져 목마를 꺼냈다. 목마의 시트 위에 올라탄 용훈이 손잡이를 당기자 낙하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상층의 밑에서는 다르얀 측과 나바르 자유연합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천국의 문이 열린 순간 문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즉, 용훈은 지금 수천의 병사들을 맞닥트린 상태였다.
 “자비스! 도대체 왜 인스턴스가 종료되지 않는 거야!”
 [퀘스트 완료와 동시에 인스턴스가 종료되는 것은 튜토리얼 던전의 방식입니다. 원래의 인스턴스는 던전이 클리어 될 때까지 그 수명을 유지합니다. 보통의 헌터들은 퀘스트 완수와 동시에 귀환하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주인님은 성역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퀘스트 완수 이후에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수십, 수백 발의 물줄기가 날아들었다. 용훈은 미친 듯이 목마를 조종하며 회피기동을 실행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피할 수는 없었다.
 일부는 용훈을 때렸고 더 많은 물줄기가 그가 타고 있는 목마를 때렸다. 다행히 만변자의 피부가 완전히 해제된 것은 아니었는지 물줄기가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문제는 목마였다. 십여 군데를 얻어맞은 목마가 당장에라도 추락할 듯 털털거렸던 것이었다.
 “자비스!”
 [위치 확보! 저쪽입니다!]
 자비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층과 하층의 중간지점이 붉게 빛을 발했다.
 “저기? 저긴 아무것도 없잖아!”
 [신격을 가진 존재만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저쪽으로 곧장 들어가십시오!]
 “알았어!”
 용훈은 허공에 뜬 붉은 점을 향해 목마를 몰았다. 펑. 목마의 옆구리가 폭발하며 그의 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망할!”
 용훈은 망가진 목마를 박차며 뛰어올랐다. 펼쳐진 팔다리 사이로 윙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훈은 바람을 타며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윙슈트만으로 가기에는 붉은 지점이 너무 멀었다.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용훈은 마구잡이로 채찍을 휘둘러 주변의 목마를 붙잡고 몸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밟고 재차 도약, 다시 윙슈트를 전개하며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한참을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붉은 점이 발밑에 보이기 시작했다. 용훈은 마지막 나바르의 머리를 박차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발밑에서 뻐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윙슈트가 펼쳐지자 거센 맞바람이 느껴지며 몸이 떠올랐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자유낙하를 통해 붉은 점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순간 들을 수 없는, 그러나 온몸이 저릿저릿한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리니 여덟 명의 다르얀이 용훈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풍뎅이, 하늘소, 무당벌레 등등 벌레를 닮은, 그러나 키는 3m에 달하고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다르얀들은 저마다 등딱지를 열고 날개를 꺼낸 상태였다.
 “미친놈들! 날개도 있어? 진짜 벌레잖아?”
 다르얀의 비행 속도는 상당했다. 목마보다 거의 1.5배는 빠른 것 같았다. 그들은 빠르게 용훈과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용훈은 이를 악물고 몸을 좁혔다. 윙슈트가 사라지며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공기가 찢어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용훈은 바람을 헤치며 붉은 점과의 거리를 계산했다.
 [주인님, 뒤!]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다르얀들이 징그러운 손들을 내뻗고 있었다. 그것들이 용훈의 목덜미를 쥐기 직전!
 팟!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한 용훈의 몸이 불가능한 각도로 솟구치며 붉은 점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붉은 점을 향해 머리부터 내리꽂히며 용훈은 다르얀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엿 먹어라, 벌레 새끼들아!”
 화악! 순간 세상이 멈추고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찔한 낙하의 기분도 잠시, 용훈은 새파란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 위에 서 있었다.
 [성역에 입장하셨습니다.]
 “후아···. 피곤해.”
 용훈은 허물어지듯 자리에 드러누웠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대로 한숨 자고 싶네.”
 [원하시면 그러셔도 됩니다. 퀘스트도 완수했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니야. 자더라도 얼른 처리하고 나가서 자야지.”
 벌떡 일어선 용훈이 클리어 보상 보관함으로 다가갔다. 만능열쇠로 상자를 열자 익숙한 눈부신 광채가 피어올랐다.
 [장비 아이템 네 개, 스킬북 두 개, 재료 아이템 열두 개, 소모 아이템 두 개가 들어있습니다. 목록을 표시하겠습니다.]
 
 [크라카우의 금강불괴(유니크) : 다르얀의 영웅, 번천신권翻天神拳 크라카우의 껍데기. 착용자의 전신을 감싸는 단단한 각질 갑옷이다. 다르얀 종족의 막강한 방어력에 가볍고 관절의 구동성이 좋아 무술가에게 적합한 방어구.]
 [다르얀의 각질 방패(레어) : 강철 이상의 강도를 가진 다르얀의 각질로 만든 방패. 가벼우면서도 단단하다.]
 [구름섬 방어군의 표준 방어구 - 가슴 갑옷(레어) : 높은 수준의 과학력을 자랑하는 나바르 병사의 가슴 갑옷. 고고도에서 활동하는 착용자의 생존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방어력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날카로운 롱소드(매직) :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해주는 마법이 새겨진 롱소드. 가볍고 무게중심이 잘 잡혀있다.]
 [스킬북(유니크) : 유니크 무공 ‘번천연환권翻天連環拳’이 담긴 무공서.]
  - 번천연환권 : 다르얀의 영웅 크라카우가 사용하는 무공. 총 14수 56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맹한 공격력과 물처럼 이어지는 연환 공격이 특징이다.
 [스킬북(매직) : 매직 스킬 ‘워터 애로우’가 담긴 스킬북.]
  - 워터 애로우 : 날카로운 물줄기를 쏘아낸다.
 [드래곤의 금괴 4]
 [황혼의 보석 1]
 [구름섬의 구름 조각 2]
 [심해의 철괴 3]
 [마력석(에픽) 1]
 [마력석(레어) 1]
 [힐링 포션 2]
 
 “크라카우라는 놈이 꽤나 유명한 놈인가 보네. 이름이 붙은 템도 있고 말이야.”
 [제가 가진 다르얀의 DB에는 없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다르얀이라고 해도 저렇게 던전의 등급을 넘어서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으니까요.]
 “확실히 어려운 상대였어. 그보다 이번 클리어 보상은 완전 대박인데? 유니크 아이템에 유니크 스킬북까지 나왔어. 근데, 스킬북이 무공이네. 자비스. 내가 무공도 익힐 수 있어? 나는 강화계잖아.”
 [신격을 획득한 시점에서 이미 그런 구분은 주인님께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주인님은 강화계보다 특질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질계를 구분하는 기준은 스킬이라는 틀 없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점이니까요. 멸절의 여섯 날개에 마나를 주입해 각인된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 그럼 마법이 각인된 아이템은 특질계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마법 각인은 범용으로 만들어집니다. 주인에게 일정 수준을 요구하는 멸절의 여섯 날개가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렇구나. 그나저나 저 무공,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익히기에는 좀 그러네. 권법을 사용하게 되면 멸절의 여섯 날개나 장미 군주의 손가락을 사용하기가 좀 그렇잖아.”
 [그렇습니다.]
 “쳇. 일단 전부 인벤토리에 넣어두지, 뭐.”
 용훈은 클리어 보상 보관함을 탈탈 털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던전의 영혼을 향해 다가갔다.
 
 
 # 22화 - 충돌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리자 자신의 몸속에서 신격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이에서 맥동하는 신격을 향해 던전의 영혼에 담긴 신력이 움찔거리며 끌려오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허공을 따라 날아든 던전의 영혼이 손에 잡히자 용훈이 눈을 떴다. 던전의 영혼은 한차례 눈부신 빛을 내뿜고는 용훈의 몸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던전의 영혼을 흡수했습니다. 주인님의 신격이 성장했습니다.]
 “그래. 뭔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네.”
 용훈은 손을 들어 눈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뭔가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착실히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힘들었지만 보람은 있네. 그럼 돌아가자, 자비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마도 던전 밖으로 나가면 또다시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전투에 대비해 체력을 회복한 후 나가시기를 권합니다.]
 “전투? 아, 그 깡패 같은 놈들이랑?”
 [그놈들뿐만이 아닐 겁니다. 이 던전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던 다른 헌터들은 지금 던전 밖으로 강제 추방당한 상태일 것입니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도 신드래곤 길드, 어쩌면 자유로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주인님은 그 모든 헌터들과 싸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던전에서 여러 개의 집단이 서로 다른 인스턴스에서 퀘스트를 진행하는 경우, 한쪽에서 퀘스트를 완수하면 다른 인스턴스는 강제 종료되고 퀘스트를 수행 중인 헌터들은 던전 밖으로 강제 추방된다.
 거대 길드들은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른 헌터가 던전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피곤하네. 빨리 가서 쉬고 싶은데. 어떻게 싸움을 피할 방법은 없어?”
 [글쎄요. 던전에서 나가자마자 도망치기 시작한다면 적들이 쫓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그래. 어쩌면 끝까지 쫓아오면서 공격을 퍼부어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르고.”
 그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던전과 각성자가 등장하고 길드가 생겨나면서 길드 간의 힘겨루기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UHRS라는 거대 단체가 생겨나면서 그러한 일은 자체적으로 자제하는 분위기였지만,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용훈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예 편하게 자리를 잡고 누운 용훈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잘됐다. 체력도 보충할 겸 한숨 자고 가자.”
 [잘 생각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제가 깨워드리겠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용훈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새카만 후드. 코와 입을 막은 검은 복면. 목깃이 높은 가죽 재킷. 빛바랜 엔지니어드 진. 투박한 황갈색 워커.
 용훈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가볍게 내지른 주먹에서 패액,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제자리에서 슬쩍 뛰어오르니 상당한 높이까지 몸이 치솟는다. 거짓말 조금 보태,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좋아. 몸 상태는 최상이야.”
 [다행입니다.]
 쫘아악! 인벤토리를 통해 붙잡은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단숨에 휘둘러지며 공기를 찢어발긴다.
 철컥!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뽑혀 나온 멸절의 여섯 날개는 어느새 불꽃의 날개를 펼쳐냈다.
 “후우. 좋아. 상대가 누구든 해 볼 만하겠어.”
 용훈은 시야를 온통 뒤덮은 파란 하늘을 향해 멸절의 여섯 날개를 겨눴다.
 [주인님의 실력이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자만은 금물입니다. 어쨌든 상대 쪽은 골드 랭커까지 보유한 대형 길드이니까요. 게다가 인스턴스 내부에서처럼 전부 다 죽여서도 안 됩니다.]
 “뭐? 왜?”
 의아한 마음에 되물은 용훈은 순간 자신이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반응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뭐, 내가 사람들을 죽이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고. 생각해봐. 저쪽은 날 죽이려 들 텐데,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왜 그런 불리한 포지션을 잡아야 하는 건데?”
 [주인님은 저들의 신이 되셔야 하지 않습니까.]
 “······.”
 허를 찔린 용훈이 입을 닫았다. 이 순간 용훈은 처음으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적의 위치에 서 있지만, 언젠가 그들은 주인님의 백성이 될 자들입니다. 힘과 공포로 압도하시되, 되도록 죽이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자연스레 주인님을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 알았다.”
 뭔가 묵직하진 기분을 느끼며 용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자.”
 
 게이트가 갑자기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지친 표정으로 주변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던 사람들이 놀라 일어섰다.
 강철로 보강되고 보석으로 치장된 나무재질의 게이트가 윗단에서부터 조금씩 빛으로 변해갔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빛가루를 하늘로 날려 올렸다.
 게이트가 반쯤 사라지면서 그 앞에 빛으로 빚은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검은 후드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서 있었다.
 용훈은 후드와 복면 사이에서 어둠에 잠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이것들. 아예 전쟁 준비를 하고 왔네.’
  그는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중에는 중세풍의 갑옷을 걸친 사람도 있었고 가벼운 복장에 칼을 든 사람도 있었다. 누가 봐도 마법사 같은 복장을 한 사람도 있었고 겉보기에는 무슨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용훈이 눈을 들어 주변 건물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군복과 비슷한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든 병사가 있었다. 주변 건물마다 한 명씩, 병사는 총 세 명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온몸을 강철 갑옷으로 둘러싼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움직이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물러서 길을 터 주었다.
 ‘저놈이 대장인가? 꽤 세 보이네.’
 [그렇습니다. 다른 이능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강화계 각성자로 보여집니다. 다만, 입고 있는 장비의 수준이 상당합니다. 적어도 에픽 등급은 되어 보이는군요.]
 갑옷을 입은 남자는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용훈에게 다가왔다. 용훈도 180센티미터로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상대는 용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두꺼운 헬멧 사이로 그의 눈빛이 번득였다.
 “혼자냐.”
 “뭐?”
 “우리 쪽 헌터들을 죽이고 게이트를 훔친 게 너 혼자냐고 물었다.”
 “잠깐. 죽은 자는 한 명일 텐데. 그것도 그자가 나를 죽이려 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말이야.”
 후웅! 쾅! 어디선가 뽑혀 나온 거대한 방패가 용훈의 발치를 내려찍었다. 그 크기와 생김새가 어찌나 박력 있던지, 마치 어디 성의 성문을 통째로 뜯어온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잡소리는 집어치워라. 감히 우리 자유로 길드의 게이트를 훔쳐?”
 본능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선 용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곱게 보내줄 것 같진 않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만.]
 용훈의 오른손이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럼···. 제대로 실력을 보여줘야겠지.’
 용훈의 손이 멸절의 여섯 날개의 손잡이를 쥐는 순간, 거대한 덩치의 기사가 방패 너머로 검을 휘둘렀다. 클레이모어라고 불리는 양손검을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사용하고 있었다.
 용훈의 몸이 순간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의 발치를 스친 클레이모어가 아스팔트 바닥을 깨부쉈다.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단숨에 10여 미터를 뛰어오른 그가 주변 건물의 옥상을 훑어보았다.
 ‘먼저 저격수들부터.’
 쫘악! 공기를 찢어발기며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휘둘러졌다. 건물의 옥상을 붉은 채찍이 움켜쥐자 용훈은 힘껏 팔을 당겨 몸을 던져 올렸다.
 그의 몸이 총알처럼 솟구쳤다. 단숨에 옥상을 넘어 병사 하나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른 용훈이 멸절의 여섯 날개를 겨눴다.
 퓽! 가벼운 소리와 함께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파각! 쿼렐에 정통으로 맞은 병사의 소총이 반으로 꺾이고 말았다.
 [적의 조준이 완료되었습니다. 사격 궤도를 표시하겠습니다. 피하십시오.]
 자비스의 말이 끝나자 적의 손에 들린 소총 끝에서부터 반투명한 붉은 선이 뻗어 나왔다. 총구의 방향을 토대로 예상 궤적을 시각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오우, 자비스. 역시 유능해.’
 검은 복면 속에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용훈은 붉은 선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탕! 총성과 동시에 용훈의 몸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디멘션 슬라이드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용훈이 병사의 손에 들린 소총을 걷어찼다. 바람처럼 날아든 용훈의 정강이가 소총의 철제 배럴을 수수깡처럼 꺾어버렸다.
 용훈은 손등을 휘둘러 병사의 턱을 후려치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마지막 남은 병사의 소총이 붉은 선으로 용훈을 겨누고 있었다.
 탕! 총성이 들렸을 때 용훈은 이미 허공으로 솟구친 이후였다. 손쇠뇌의 조준선 위에는 상대의 소총이 걸려 있었다.
 “홀드 퍼슨!”
 덜컥!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자 용훈의 몸이 허공에서 덜컥 멈춰버렸다.
 ‘뭐, 뭐야!’
 [속박 계열의 마법입니다. 사용자의 등급이 낮군요. 힘을 모아 단번에 떨쳐내십시오. 현재 주인님의 수준이라면 이 정도 마법은 손쉽게 풀어낼 수 있습니다.]
 허공에 못 박힌 듯 멈춰 서있는 그를 향해 병사의 소총에서 뻗어 나온 붉은 선이 빠르게 솟구쳤다.
 “하압!”
 용훈은 전력을 다해 단숨에 가슴을 쭉 폈다. 그러자 뭔가가 쨍그랑 깨지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탕! 순간 총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용훈의 가슴 위에서 확 불꽃이 튀기며 그의 몸이 홱 뒤집혔다.
 “크윽!”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용훈의 몸이 뱅글뱅글 돌았다. 빠르게 떨어져 내리면서도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가벼운 복장에 검을 든 남자가 그를 보며 정면으로 뛰어올랐다.
 “비연일섬(飛燕一閃)!”
 번쩍! 그의 검이 번쩍이는 초승달을 그리며 용훈을 향해 날아들었다.
 “큽!”
 쉭! 용훈이 다급하게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남자를 스쳐 지났다.
 너무 다급하게 움직인 터라, 용훈은 미처 바닥을 딛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데굴데굴 바닥을 몇 바퀴 구른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흙먼지로 지저분해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복면 아래에서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새끼들이···. 살살 해주려고 했더니!”
 용훈이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가 거칠게 몸을 흔들자 팍, 하며 흙먼지가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옆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니 거구의 기사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철컥! 붉은 조준선 위로 기사의 머리가 올라섰다. 검은색 활몸 위로 붉은 문양이 떠오르자 용훈이 힘차게 방아쇠를 당겼다.
 쾌액! 바람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에 휩싸인 쿼렐이 허공을 갈랐다. 거대한 덩치의 기사는 커다란 타워 실드를 들어 앞을 막았다.
 쾅! 폭염이 터져 나오며 기사가 뒤로 넘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다르얀의 영웅 크라카우마저 미처 두 발을 버텨내지 못했던 공격이다. 겨우 강화계 탱커 따위가 막을 공격이 아닌 것이었다.
 
 
 # 23화 - Bangarang!
 
 후웅! 어느새 따라붙은 검을 든 남자가 비스듬히 검을 그어 내렸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이 위험한 느낌을 주는 공격이었다.
 황급히 허리를 젖히자 푸르스름한 검이 가죽 재킷으로 변한 만변자의 피부를 긁으며 스쳐 지나갔다. 카가각, 소리가 나며 불똥이 튀었지만 만변자의 피부는 남자의 검격을 완벽히 버텨냈다.
 남자의 공격은 번개처럼 이어졌다. 재차 걸음을 내딛으며 화살처럼 찔러 들어오는 검극! 용훈은 그것을 똑바로 보며 뒤쪽으로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했다.
 찔러 들어오는 검보다 빠르게 물러서며 용훈의 손이 쳐들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불꽃의 날개가 힘차게 퍼덕였다.
 “커억!”
 어깨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남자는 검을 놓친 채 뒤로 쓰러졌다.
 [마나가 모여듭니다. 마법을 주의하십시오.]
 자비스의 말에 용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쫘악! 쭉 늘어난 붉은 채찍이 마법사의 목을 휘감았다. 갑작스레 목이 졸려지자 막 완성되어가던 마법이 흩어지고 말았다.
 용훈이 왼손을 강하게 당기자 마법사의 몸이 인형처럼 날아올랐다. 십여 미터를 날아온 그가 바닥에 거꾸로 내리꽂혔다. 턱이 가슴에 박힐 듯 목이 꺾인 모습이, 딱 봐도 중상이었다.
 [주인님, 위!]
 “알아.”
 용훈은 슬쩍 걸음을 옮기며 몸을 돌렸다.
 탕! 대상을 잃은 붉은 선을 따라 총탄이 발사됐다. 좀 전까지 용훈이 서 있던 바닥 위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퉁! 가벼운 격발음과 함께 쿼렐이 병사의 총을 꿰뚫었다. 정면으로 꽂힌 쿼렐이 총구를 반으로 찢고 장전된 총알을 때리자 약실 안에서 화약이 폭발하며 총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용훈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이미 쓰러진 자들은 길드 내에서 꽤나 강하다고 인정받던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쓰러져버리자 남아있는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버렸다.
 어둠에 잠긴 용훈의 눈이 몸을 일으키는 기사와 마주쳤다. 용훈이 멸절의 여섯 날개를 들어 올리자 그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앞을 가렸다.
 순간 용훈은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훌쩍 뛰어오른 그가 가볍게 방패 윗단에 내려앉았다.
 철컥. 위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면갑의 좁은 틈을 비집고 뾰족한 쿼렐이 불쑥 들어왔다.
 그것은 그의 눈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덩치 큰 기사는 당장에라도 자신의 눈을 꿰어버릴 것만 같은 쿼렐을 보고 숨이 멎어 버렸다.
 “야.”
 방패 윗단에 쪼그려 앉은 용훈이 그를 불렀다. 그의 눈이 스르륵 위로 향해 용훈과 마주쳤다.
 “다음에 만나면 정말 죽는다.”
 숨 막힐 듯한 공포. 검은 후드와 검은 복면 사이로 어둠에 잠긴 용훈의 눈은 그에게 극도의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면갑의 틈 사이에서 쿼렐이 흔들리며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쫘악! 경쾌한 채찍의 파공음만을 남기고 용훈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멀리 사라져 가는 용훈의 뒷모습을 보며 기사가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그날 저녁, 용훈의 모습은 인터넷을 도배했다. 헌터와 길드 관련 소식만을 발 빠르게 보도하는 인터넷 언론이 자유로 길드와 용훈의 충돌 영상을 공개한 것이었다.
 영상의 여파는 엄청났다.
 용훈은 몰랐지만, 폭발 화살에 맞아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방패 윗단에 올라탄 용훈을 향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던 그 기사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자였다.
 그의 이름은 장두호. 하지만 그는 이름보다 ‘마운틴’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자였다. 60레벨 초반의 강화계 탱커이자 랭크업을 목전에 둔 탑 포지션의 실버 랭커이기도 한 그는 수도권에서 가장 유력한 골드 랭커 후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종잇장처럼 바닥을 굴렀다.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이고 계집애처럼 다리에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장면이 그대로 인터넷을 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드 포지션의 실버 랭커였던 비연검객(飛燕劍客) 김주영은 어깨가 박살 났다. 촉망받던 자연계 마법유저 주인철은 후두부 복합 골절과 경추손상으로 한동안 병실 신세를 지게 됐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세 명의 저격수를 처리하면서 동시에 해냈다는 것이었다.
 네티즌들은 영상 속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에게 영상의 배경음악을 따 ‘뱅가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용훈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정작 용훈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너무나 피곤했던 나머지 여관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용훈은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내리 12시간 동안 숙면을 취한 덕인지 기분이 날아갈 듯 개운했다.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그래. 너도 잘 잤냐.”
 [저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만.]
 “그래?”
 용훈은 엉덩이를 긁적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화장실을 다녀오시면 인터넷에 접속하십시오.]
 “인터넷? 왜?”
 [인터넷에 주인님이 도배되어 있습니다.]
 용훈의 몸이 덜컥 멈췄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몸을 돌려 급하게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메인 화면 아래쪽에 ‘요즘 뜨는 동영상’ 코너에서 용훈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헐. 진짜네. 이거 나지?”
 후드와 복면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지만, 용훈은 자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어제 자유로 길드와 충돌할 때 주변에 기자가 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용훈은 ‘뱅가랭’이라고 적힌 동영상을 누르며 물었다.
 “그런데 뱅가랭은 뭐야?”
 [주인님을 부르는 이름이더군요.]
 “그래? 뱅갈 호랑이, 뭐 그런 건가?”
 동영상을 재생하자 신나는 음악이 들려왔다. 용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음악의 타이틀이 뱅가랭이라는군요. 주인님의 새 이름은 그 음악에서 따온 모양입니다.]
 “흠. 노래 좋네.”
 용훈은 동영상에 집중했다. 영상은 용훈이 웹 스윙으로 빠르게 멀어지고 마운틴이 허물어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용훈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 좀 멋진데?”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메인 시스템이 주인님의 존재를 알아챘습니다.]
 “뭐? 설마 이 영상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주인님이 아니라 저 ‘뱅가랭’이라는 존재가 알려진 것이긴 합니다만. 메인 시스템은 요즘 들어 계속되는 신력의 누수가 뱅가랭의 짓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적대 행위를 해소하기 위해 ‘와쳐 프로토콜’이 실행되었습니다.]
 “와쳐 프로토콜?”
 [네. 와쳐 프로토콜은 시스템 내부의 적대요소에 대응하는 1단계 대응방식입니다. 독자적인 프로세스로 작동하는 와쳐 프로토콜은 경계 범위 내에 있는 인간을 선택하여 신력을 부여하고 와쳐로 사용합니다. 와쳐는 경계 루틴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수행하며 다른 헌터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미약하나마 신력을 부여받기에 전투력도 상당히 강화될 것입니다. 또한, 메인 시스템의 경계 루틴과 직접 연결이 되어있어, 그들에게 발각되는 즉시 시스템 전체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뭐야, 그럼. 눈에 띄는 순간 게임 끝이란 소리 아니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재 주인님의 상태창은 신력으로 위장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와쳐라고 해도 주인님의 진짜 상태창을 볼 수는 없습니다.]
 “상태창을 못 본다 하더라도,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을 때 맞닥트리면? 내가, 그 뭐냐, 뱅가랭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말이야.”
 [뱅가랭일 때 그들과 마주친다면 그들은 전력을 다해 주인님을 공격할 것입니다. 또한, 경계 루틴의 1급 추적대상이 되어 시스템 전체에게 쫓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끝이야?”
 [경계 루틴의 1급 추적대상에 오르면 그걸로 끝입니다. 말 그대로 차원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 한, 절대로 추적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 그래서 해결책은 뭔데.”
 [··· 많이 예리해지셨군요.]
 “원래 예리했거든.”
 [그건 아니지만, 좋습니다. 주인님이 노려야 할 것은 와쳐와 경계 루틴 사이의 타임 랙입니다. 와쳐가 목격한 것이 시스템 정보로 취합되어 경계 루틴의 처리 목록에 오르는 데는 약 5분 정도의 동기화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와쳐의 눈에 띈다 해도 5분 안에 몸을 숨길 수 있다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5분이라. 그 안에 도망치거나 아니면 와쳐라는 놈을 제거해도 되겠군?”
 [제거가 가능하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들에게 주입된 신력을 빼앗아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도주를 추천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와쳐는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언제라도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군. 알겠어.”
 용훈은 화장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옷을 입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만변자의 피부를 바꾼 것이지만.
 편안한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복장을 바꾼 용훈이 여관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용산에.”
 [용산은 무슨 일로?]
 “당연한 거 아냐? 업그레이드하러 가지.”
 
 딸랑. ‘아이템 스테이션’의 문이 열리자 후덕한 인상의 사장, 이경식이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용훈이 고개를 숙이자 이경식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 고객님. 또 오셨네요. 이번엔 무슨 일로?”
 “처리할 물건도 좀 있고, 사고 싶은 물건도 있네요.”
 “잘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어떤 물건을 찾으시죠?”
 “스킬북이나 무공서도 취급하시죠?”
 “당연하죠. 사실 그게 전문입니다.”
 용훈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크라카우와의 싸움 이후로 무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보여줬던 놀라운 무위와, 자신도 그런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자비스의 말 때문이었다.
 이경식은 두툼한 카탈로그를 꺼내 펼쳤다.
 “여기 동그라미가 그려진 놈들이 재고가 있는 놈들입니다. 재고가 없는 것이라도 손님이 찾으시면 수배를 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용훈은 스킬북 부분은 과감히 건너뛰고 무공서 부분을 펼쳤다. 그 안에는 각종 무공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용훈은 검법, 도법, 권법 등은 그냥 지나쳐 각법이 나열된 곳을 찾아냈다.
 ‘추미각(追靡脚), 회련각(廻連脚), 천퇴각(千頹脚), 평초각(平剿脚), 회풍각(廻風脚), 마령각(魔靈脚), 금환각(擒幻脚)···. 뭐가 이렇게 많아?’
 [주인님. 각법을 찾으십니까?]
 ‘응. 아무래도 내 스타일에는 그게 맞을 것 같아서. 안 그래?’
 [양손을 모두 사용하시니 그도 그렇군요.]
 ‘근데 이거 뭐, 이름만 보고는 뭐가 뭔지 모르겠네. 자비스, 좀 도와줘 봐.’
 [알겠습니다. 일단 빠른 연타를 사용하는 연환각 계열보다는 크게 한 방을 노리는 것이 주인님의 스타일에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어차피 주무기는 멸절의 여섯 날개가 될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이 목록에서는 천퇴각이 가장 낫습니다. 등급은 전부 매직 등급이라 크게 차이가 없지만, 초식 수가 적고 한방의 위력이 높은 편입니다.]
 ‘그럼 그걸로 할까?’
 [아니, 그보단 더 높은 등급의 무공서를 보여달라고 하십시오.]
 ‘알았어.’
 
 
 # 24화 - 심득(心得)을 얻다
 
 용훈은 카탈로그를 덮었다.
 “다 별로네. 사장님, 뭔가 더 쌔끈한 거 없어요? 가격은 좀 비싸도 상관없는데.”
 “아, 쌔끈한 거 찾으시는구나? 그럼 VIP용 카탈로그가 있긴 한데 그걸로 보여드릴까요? 좀 비싸긴 하지만 마음에 드실 겁니다.”
 “네, 주세요.”
 이번 카탈로그는 표지부터 달랐다. 방금 전 것이 노래방 책 같았다면, 이번 것은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판 같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찾지 못했다. 선풍팔비각(旋風八飛脚)이라는, 사기적인 각법의 이름에 눈이 번쩍 뜨이긴 했지만, 아무리 수배해 봐도 재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용훈이 낙심해있자 고민하던 이경식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손님! 그럼 미감정 아이템을 한번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미감정 아이템요? 그건 뭐죠?”
 “간혹 감정이 안 된 상태로 등장하는 아이템이 있습니다. ‘감정’ 스킬을 사용해야 그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이죠. 일부에서는 이 미감정 아이템을 미감정인 상태로 처분하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템은 대부분이 그저 그런 아이템이지만 간혹 눈이 번쩍 뜨이는 아이템이 나오기도 하죠. 그래서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이런 미감정 아이템을 구매하기도 해요. 가끔 대박을 치기도 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한번 보죠.”
 용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경식은 그를 상점 한쪽 편으로 이끌었다. 이름이 없는 미감정 아이템의 특성상, 카탈로그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진열장을 열자 그곳에는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무공서들이 드문드문 진열되어 있었다. 용훈은 별 기대 없이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그때였다. 개중 하나의 무공서가 용훈의 눈을 잡아끌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무공서와 조금도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뭔가 느낌이 달랐다.
 [주인님, 저거···.]
 ‘너도 느꼈냐?’
 용훈은 손을 뻗어 이름 없는 무공서를 집어 들었다. 당장에라도 파삭 부서져 버릴 듯한 질감이 느껴졌다.
 [‘아키텍처의 눈’과 ‘마스터 오브 로버리’가 동시에 발동됩니다. 미감정 아이템의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정보를 출력합니다.]
 
 [무공서(에픽) : 에픽 무공 무명각법(無名脚法)이 담긴 무공서.]
  - 무명각법 : 무명의 무인(武人)이 남긴 무공. 총 3초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흠. 느낌은 강렬했는데 생각보다 별로네. 안 그래, 자비스?’
 [제가 가진 DB에는 없는 무공이지만, 에픽 등급의 무공이니만큼 쓸 만하긴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무공서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무공서에서는 막대한 양의 포텐셜이 느껴집니다.]
 ‘그래? 그 말은 강화가 가능하다는 말이지? 디멘션 슬라이드처럼. 그럼 무명각법도 유니크 등급으로 올릴 수 있는 거야?’
 [그 정도가 아닐 것 같습니다. 이 무공서의 포텐셜은 저조차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어쩌면 숨겨진 레전드 아이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워, 그래? 그럼 무조건 사야겠네. 근데 자비스. 저거에다 ’감정‘ 스킬을 사용하면 바로 레전드 아이템이 되는 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템의 포텐셜을 파악하는 행위는 아직까지 인간에게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인간들은 요행을 바라며 아이템을 강화합니다.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를 알지 못하고서 말이죠.]
 ‘그렇군. 하지만 나는 니 덕에 백프로 성공하는 강화만 하게 됐다, 이 말이구만.’
 [그렇습니다.]
 ‘고맙다, 짜샤.’
 [별말씀을.]
 용훈은 피식 웃으며 그것을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이걸로 하죠.”
 “아, 그걸로 드릴까요? 대박이 나야 할 텐데. 그런데, ‘감정’을 해 드릴까요? 구매와 동시에 하시면 저희가 할인을 좀 해드리거든요.”
 “얼만데요?”
 “이백입니다. 원래 시세는 삼백씩 하는데 깎아드린 거예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인님에게는 ‘감정’이 필요 없습니다.]
 궁금해하기도 전에 자비스가 끼어들었다.
 “아, 괜찮아요. 그냥 주세요.”
 “오, 동료분 중에 ‘감정’ 스킬을 얻은 분이 계신가 보네요? 그거 흔치 않은 스킬인데.”
 “네. 그리고 이것들 좀 처분해주세요.”
 용훈은 인벤토리에서 드래곤 금괴 스무 개와 보석류들을 꺼냈다. 재료 아이템들은 나중을 대비해 가지고 있기로 했다.
 “와! 이번에도 스무 갭니까? 아니, 도대체 어딜 돌면 이렇게 연달아 대박을 치시는 겁니까?”
 용훈은 눈이 휘둥그레진 이경식을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시세가 또 좀 올랐어요. 요즘 계속 오르는 추세네요. 거래는 저번처럼 진행할까요? 기준가 7천8백에 대리 거래 계약, 그리고 거래보증서비스까지. 맞죠?”
 “네. 그렇게 해주세요.”
 거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드래곤 금괴 스무 개는 개당 7천8백만 원으로 계산해 15억 6천만 원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인벤토리에 막 굴러다니던 황혼의 보석이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예술적으로 커팅된 외관과 황혼이 내려앉은 저녁 무렵의 하늘빛 컬러 때문에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 바로 황혼의 보석이었다.
 황혼의 보석 두 개는 각각 55캐럿과 34캐럿이었다. 이경식은 보석 두 개에 8억 3천을 쳐 주었다.
 용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경식과 악수를 나누었다. 주머니가 든든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 오십시오, 손님!”
 이경식의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한 채 용훈은 아이템 스테이션을 떠났다.
 
 “전망 좋다. 그치?”
 용훈은 침대에 누워 한강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한강이 내려다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저 흔한 도시의 풍경일 뿐이지 않습니까.]
 “삭막한 놈. 바로 이런 전경을 내려다보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생 뼈 빠지게 일하면서 사는지 니가 알기나 해?”
 [그 돈으로 더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을 여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얌마, 여행이랑 내 집 마련이랑 같냐?”
 용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 아래층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복층의 난간을 넘어 아래층 거실 바닥을 디뎠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테이블 위에 생수를 던져두고 그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면창 앞에 앉았다. 푹신한 가죽 소파가 편안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알겠습니다. 소모할 아이템의 목록입니다. 레어 등급의 다르얀의 각질 방패, 레어 등급의 구름섬 방어군의 표준 방어구, 매직 등급의 날카로운 롱소드, 유니크 등급의 번천연환권 무공서, 매직 등급의 워터 애로우 스킬북, 노말 등급의 모닥불 피우기 스킬북, 에픽 등급의 마력석 1, 레어 등급의 마력석 2. 이상입니다.]
 “··· 다 털어가라, 인마.”
 [주인님의 쥐꼬리만 한 신력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만.]
 “그렇게 콕 집어주지 않아도 내가 부족한 거 잘 아니까 안 가르쳐줘도 돼, 인마.”
 용훈은 입을 비죽이며 인벤토리에서 이름 없는 무공서를 꺼내 들었다. 강화 과정에서 아이템의 정체를 가린 필터는 자동으로 사라진다고 했다.
 [시작합니다.]
 자비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전히 이질적인 느낌이 용훈을 찾아왔다. 인벤토리를 이루는 아공간 전체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곧이어 아공간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힘이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번뜩이는 그 힘은 용훈의 팔을 거쳐 무공서로 흘러들었다. 무공서는 끊임없이 그 힘을 먹어치우며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었다.
 웅웅! 무공서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거센 진동에 용훈은 하마터면 무공서를 놓칠 뻔했다.
 “자비스! 이거 제대로 되고 있는 거 맞아? 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예상했던 것보다 무공서의 포텐셜이 너무 큽니다. 신력 공급이 요구치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력의 추가 공급이 필요합니다. 허락하시면 주인님의 신력을 추가해 작업을 완료하겠습니다.]
 “그, 그래! 해!”
 화악! 용훈의 몸이 빛을 뿜었다. 한강 변에 서 있는 타워형 오피스텔의 19층 창문에서 한순간 강렬한 빛이 치솟았다.
 빛은 마치 섬광처럼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용훈의 손 위에 들린 무공서의 표면 위에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당장에라도 승천할 듯한 용처럼 보였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검은 먹선들이 이리저리 꼬이며 글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움직임이 멈추자 자비스가 입을 열었다.
 [성공입니다. 레전드 무공 ‘각왕삼결(脚王三訣)이 담긴 무공서가 생성되었습니다.]
 용훈은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상당한 양의 신력이 빠져나간 반동인 것 같았다.
 “아, 어지러. 그만한 아이템을 처박고도 모자라 내 신력까지 가져가다니. 이거 그만한 가치는 있는 거야?”
 [직접 확인하십시오.]
 왠지 자비스의 목소리에서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용훈이 각왕삼결의 무공서를 들고 사용을 외치자 무공서가 눈 녹듯 흩어지며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레전드 무공 ‘각왕삼결’ 습득.]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무림의 무인들 중에서도 각법(脚法)의 일절(一絶)로 평가받는 각왕(脚王) 구동휘(九動輝)의 비전절기(秘傳絶技).]
 [각왕삼결은 절영각섬(絶影脚閃), 붕산각포(崩山脚砲), 척사각파(斥邪脚波), 이렇게 총 삼결(三訣)로 이루어져 있음.]
 자비스의 목소리와 함께 이질적인 기억이 용훈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수십 년의 시간을 1초로 응축시킨 것 같은 묵직한 기억이 그의 뇌리를 때리자, 용훈은 당장에라도 혼절할 듯한 기분을 느꼈다.
 충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그것은 숫제 용훈의 뇌 일부를 후벼 판 뒤 강제로 틈을 벌리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드디어 충분한 틈이 벌어졌다고 판단이 되어서일까. 그 틈으로 거대한 격류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한 길을 걸었던 한 무인의 심득(心得), 그 자체였다.
 용훈의 신력과 자비스의 컨트롤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각왕삼결은 그저 단순한 무공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림의 정점에 올라섰던 절대자의 모든 것이 한곳에 응집된 결정체였다. 그리고 용훈은 지금 아득한 시간과 차원을 넘어 각왕 구동휘의 심득을 얻은 것이었다.
 충격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용훈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소파에 앉아 차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용훈의 눈이 뜨였다. 번쩍! 벼락이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 섬광이 번득였다.
 “후와. 이거 정말···. 엄청난데?”
 [어떠십니까. 아이템과 신력을 투자한 보람이 느껴지십니까?]
 “어, 당연하지. 아니, 사실 그 정도 투자로 얻었다고 하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대단해. 잘했어, 자비스.]
 [감사합니다.]
 용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간단한 움직임이었지만 용훈은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로봇이라면, 전체 파츠를 최고가품으로 바꿔친 듯한 기분이랄까?
 
 
 # 25화 - 거래
 
 “몸이 근질근질하네. 새로 얻은 힘을 써보고 싶어 미치겠어. 크라카우 그놈이랑 다시 붙어도 이길 것 같은데. 어때, 자비스?”
 [죄송하지만 자아도취는 나중에 하십시오. 방금 신력의 소모가 너무 커 메인 시스템의 경계 루틴에 걸려들었습니다. 당장 이동하십시오. 와쳐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뭐, 뭐? 그 정도였어?”
 [그렇습니다. 지금 빨리 이동하지 않으시면 이 오피스텔에 걸어둔 보증금까지 잃게 되실 겁니다.]
 “아, 알았어!”
 용훈은 급하게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어느새 그는 뱅가랭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쫘악! 붉은 채찍이 공기를 찢어발기자 그의 몸이 총알처럼 허공을 갈랐다.
 “자비스! 와쳐들의 위치는 파악할 수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와쳐 프로토콜은 독립적인 프로시저로 운영되기 때문에 정보를 수집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주인님을 포착한다면 그때는 저도 그들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너무 늦잖아!”
 용훈의 몸이 63빌딩의 황금빛 몸체를 바람처럼 스쳐 지났다. 장미 군주의 손가락이 강하게 수축하며 그의 몸을 끌어올렸다. 그 탄력에 허리의 반동까지 더해 용훈은 총알처럼 한강 위를 가로질렀다.
 “지금 가는 던전은 등급이 어떻게 되지?”
 [에픽 던전입니다.]
 “에픽? 괜찮을까?”
 [크라카우를 처치한 시점에서 이미 레어 던전은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현재 주인님은 레전드 등급의 무공까지 얻으셨습니다. 이미 주인님의 스펙은 에픽 던전을 클리어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 그보다 이번에도 다른 길드와 충돌하게 되려나.”
 [그럴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유로 길드의 영역에 있는 던전을 선정했습니다.]
 “뭐? 왜?”
 [적은 적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한 놈만 벗겨 먹자?”
 [그렇습니다.]
 “무서운 놈.”
 
 용훈은 홍대입구를 지나 서대문구청을 향했다. 이번 목적지는 남가좌2동 주민센터였다.
 주민센터 앞의 좁은 이면도로는 갑자기 생겨난 게이트 때문에 폐쇄된 상태였다.
 주민센터의 옥상에 내려선 용훈은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게이트 주변에는 빽빽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오우. 과분할 정도의 환영인파로군. 그렇담 인사라도 해 줘야겠지?’
 용훈은 채찍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쫘악! 강렬한 파공음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배, 뱅가랭!”
 “지, 진짜 또 나타났어!”
 용훈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복면 속에서 피식 웃었다.
 ‘내가 다시 올 줄 알았나 본데?’
 [그렇군요. 누군지 선견지명이 있는 자 같습니다.]
 용훈은 6층 건물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가볍게 바닥을 딛자 모여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서 둥근 공간을 만들며 그를 둘러쌌다.
 용훈은 짙은 어둠에 잠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입이 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가 스며 나왔다.
 “비켜. 지금 비키면 안 다친다.”
 “우, 웃기지 마! 뭐해! 조져!”
 누군가가 소리치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쫘악! 채찍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 막 모습을 드러낸 소총을 잡아챘다. 용훈은 다른 건 놔둔 채 총기류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쫘악! 쫙! 피처럼 붉은 채찍이 폭풍처럼 날아다니며 총기류를 후려쳤다. 붙잡아 던지고 후려쳐 떨어트리고 바닥에 내려쳐 부순다.
 삽시간에 십여 정의 소총이 폐품이 되어 버렸다.
 “하압!”
 커다란 도끼를 든 남자가 기합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원시인처럼 가죽옷을 걸친 남자였다. 그를 본 용훈의 몸이 ‘각왕삼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발을 축으로 그의 몸이 빙글 돌며 오른발이 뻗어졌다. 스팟! 빛살같이 허공을 가른 용훈의 족도(足刀)가 도끼의 목 부분을 때렸다.
 뻐걱!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두께의 도낏자루가 단숨에 부러지며 도끼날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날았다.
 “으아악!”
 자기 몸통만 한 도끼날이 날아드는 것을 보며 한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용훈은 바람처럼 몸을 돌리며 디멘션 슬라이드를 사용해 전방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허공을 가르는 오른발!
 용훈의 오른발은 막 남자의 몸을 반으로 가르기 직전인 도끼날을 올려 찼다. 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끼날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저 하늘의 별이 되어버릴 기세로 솟구치는 도끼날을 보느라 사람들의 목이 부러질 듯 꺾어졌다.
 이윽고 도끼날이 다시 떨어져 내렸다. 훌쩍 뛰어오른 용훈은 떨어지는 도끼날을 밟아 바닥에 내려찍었다.
 꽝! 바닥이 들썩일 정도의 충격이 터져 나왔다. 도끼날은 아스팔트 바닥을 가르고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각왕삼결’이라는 무공을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발차기는 자유분방했다. 흡사 아무런 형(形)도 갖추고 있지 않은, 마구잡이 발차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이유는 ‘각왕삼결’이 단순한 무공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각왕삼결’은 ‘각왕 구동휘’가 말년에 창안한 무형각(無形脚)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초식을 없앰으로써 오히려 수천, 수만 가지 변화를 내포하게 된 상승절학이었다.
 ‘각왕삼결’의 삼결은 여타 다른 무공의 초식과 그 개념이 많이 달랐다.
 그것은 형이 존재하지 않는 발차기에 담기는 기운을 뜻하는 것이었다. 각왕 구동휘는 그 세 가지 기운을 자유롭게 다루며 무한한 변화를 내포한 무형각으로 무림의 지존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용훈의 발이 슬쩍 흔들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용훈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게이트로 향하는 길을 만들며 양옆으로 갈라섰다.
 용훈은 말없이 그 길을 걸었다.
 그때 누군가가 게이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는 용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 꽤 하는 놈이네. 누구지?’
 [자유로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이준수입니다. 자연계 근접 딜러라고 알려져 있으며 바텀 포지션의 골드 랭커이기도 합니다.]
 ‘골드 랭커라···. 역시 이름값은 하는군그래.’
 이준수는 멋들어진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얇고 단단해 보이는 검은 금속이 촘촘히 덧대진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다.
 [좋은 아이템이군요. 적어도 에픽 등급은 되어 보입니다.]
 ‘그런 건 알려주지 마. 괜히 뺏고 싶잖아.’
 용훈은 이준수의 약 2미터 앞에서 멈춰 섰다. 이준수는 긴장한 얼굴로 어둠에 잠긴 용훈의 얼굴을 보려 애쓰고 있었다.
 “비켜. 할 말 없으면.”
 “··· 싫다면?”
 용훈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멸절의 여섯 날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불길하게 일렁이는 여섯 장의 날개를 드러낸 채 이준수를 겨누고 있었다.
 “좋아하게 만들어주지.”
 이준수는 말없이 뒷걸음질 쳐 게이트 앞에서 비켜섰다. 용훈은 상대가 너무 쉽게 길을 비켜주자 오히려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너무 쉽네? 쫄은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표정이 너무 비장하군요. 뭔가 노리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렇지?’
 용훈은 곁눈질로 그를 살피며 천천히 게이트로 다가갔다. 그때 이준수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죠.”
 “뭐?”
 “이 게이트. 당신께 팔겠습니다.”
 용훈의 몸이 이준수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게이트는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러니 니가 이걸 나한테 판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물론 그렇죠. 법적으로는 말입니다.”
 이준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 자연스러움에 용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관리법은 유명무실하다. 길드들은 너무 커졌고 던전을 소유하는 정도의 범법 행위는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모두가 저지르는 범죄는 이미 범죄가 아닌 것이다.
 “··· 대가는?”
 “아이템 하나. 클리어 보상 중에서 제가 원하는 아이템 하나를 주십시오.”
 용훈은 이준수의 얼굴을 살폈다. 포커페이스에 조예가 깊은지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상하군요. 이준수는 타인이 획득한 아이템의 목록도 확인이 가능한 걸까요?]
 ‘그런 능력도 있어?’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럼 그냥 아무거나 내밀고 그거뿐이라고 말해도 모르겠구만.’
 [그렇기는 합니다만···. 설마 저자가 그걸 모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럼 어떡할까?’
 [일단은 받아들이십시오. 여차하면 그냥 째면 되니까요.]
 ‘··· 너 말투가 점점···. 에휴, 아니다. 알았어.’
 용훈은 이준수를 향해 말했다.
 “알았다. 더 할 말 남았나?”
 “아닙니다.”
 이준수는 한 걸음 더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용훈은 주변을 한번 둘러본 후 게이트의 손잡이를 잡았다.
 에픽 등급의 게이트는 재질부터가 달랐다.
 게이트는 차가운 흰 빛을 발하는 매끄러운 금속 재질이었다. 테두리는 화려한 문양으로 조각된 청동으로 둘러져 있었고 문손잡이는 순금, 그 주위와 손잡이 중앙에 핏빛의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손잡이를 비틀어 돌리자 게이트의 흰 빛이 점차 강렬해지며 그 너머의 우주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훈은 다시 한 번 이준수를 돌아보았다. 이준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저런 타입이 싫지는 않은데 말이지.’
 [독특한 취향이시군요. 보통 저런 타입은 미움 받기 딱 좋은데 말입니다.]
 ‘개취야, 개취.’
 용훈은 몸을 돌려 게이트 너머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별이 총총 뜬 우주 공간이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용훈이 사라지고 게이트의 문이 닫히자 이준수가 게이트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분한 듯 게이트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손등 위로 붉은빛이 번져갔다. 물컵에 떨어진 붉은 잉크처럼, 그것은 이준수의 손 전체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치지직. 게이트가 이상한 잡음을 내며 이준수를 밀어냈다. 이준수는 저항하지 않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이준수는 시뻘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이 어찌나 뜨거웠는지, 공기마저 익어 어지럽게 흔들릴 정도였다.
 그가 손을 내리자 그의 손은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용담 새끼들은 아직이냐.”
 이준수가 묻자 자유로 길드원들이 다가서며 대답했다.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뭐라고 할까요?”
 “뭘 뭐라고 해. 빨리 오기나 하라고 해.”
 “그, 그게···. 뱅가랭이 먼저 들어가서···.”
 “상관없어. 넌 정말 그놈이 저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아, 아뇨.”
 “우리 길드 전체로도 부족해서 용담 놈들이랑 반씩 나눠 먹기로 한 놈이야. 그걸 혼자 클리어한다고? 말도 안 되지.”
 “그렇죠?”
 “그래. 그러니까 조금 쉬어 둬라. 용담 놈들 도착하면 다 같이 게이트를 포위한다. 던전 포기하고 뛰어나온 그놈을 우리가 잡는 거다. 알겠나!”
 “네, 대장!”
 이준수는 고급스러운 금속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철컥,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담배를 물자 옆에서 누군가가 얼른 불을 붙여주었다.
 스읍. 후. 담배 한 모금을 넘기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가 게이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그 안에서 죽는 게 나을 거다. 나와 봐야 더 고통스럽게 죽을 뿐이니까.”
 후. 담배 연기 사이로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그려졌다.
 
 <『던전을 털어라!』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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