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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스톤 1권

2016.05.16 조회 8,596 추천 65


 # 1.프롤로그
 
 43.위저드 스톤
 
 이 돌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정확히 돌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한때 최고의 마법사였던 에레딘 마탑의 마탑주 제임스가 돌이다라고 한 것이 굳어져 정설로 된 것이다. 사실 외형적인 부분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그 이외의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 돌이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돌이 마법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고르의 피리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최고의 마법사가 되길 원한다. 각자 생각하는 최고 마법사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마법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되고 싶을 것이다.
 이 돌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마법에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는 재능을 준다. 마법서를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법을 가르쳐 준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꿈을 이뤄주는 것이다.
 몇몇 사람은 위저드 스톤이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헛된 산물이라고 말한다. 마치 바로 앞에서 소개한 현자의 돌처럼 말이다.
 하지만 위저드 스톤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꽤 다양하게 존재한다.
 일례로 마법사이자 역사학자인 존 제임스가 언급한······.
 
 -‘세계의 희귀한 물건들‘ 모티머 빌라이스-
 
 *이고르의 피리:‘모험가 레온’에 나오는 피리. 피리를 불고 소원을 말하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
 
 
 # 2.헌터 마을
 
 로이는 헌터 마을에 산다. 언제부터 살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냥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되었다.
 나이는 열넷. 아니면 열셋. 정확히는 모른다. 고아니까. 그저 마을에 키가 비슷한 아이들을 보고 그렇게 정한 것뿐이다.
 헌터 마을은 니잔 왕국의 아래쪽 디벨 남작 영지에 있는 30명도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구성원은 대부분이 남자고, 헌터다. 개중에 몇 명만이 결혼해 아내와 자식이 있다.
 마을에는 우물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다. 여관도 잡화점도 대장간도. 마을에는 오로지 마수들을 사냥하는 헌터만이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남작의 성까지 가야 한다.
 마을 주변은 대부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황무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냥을 업으로 삼는 마을로 발전됐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마을 근처에는 숲이 있다. 위쪽 숲은 평범하다. 적당한 높이의 산이고, 풀이 있고 나무가 있다. 동물도 있다.
 아래쪽 숲은 조금 다르다. 헌터들은 이 숲을 마수의 숲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숲에는 마수가 산다.
 마수의 숲은 무척 크고 넓다. 나무가 높고 울창해서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다. 그래도 헌터들은 먹고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헌터는 마수를 잡아 생계를 이어간다. 정확히는 마수의 부산물을 팔아 돈을 번다. 가끔, 마석이라도 나오면 대박이다. 헌터 짐은 작은 마석을 팔아 집을 짓고 결혼도 했다. 그 정도로 비싸다.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일한다. 남자는 마수를 사냥하고, 여자는 살림한다. 심지어 아이들도 일한다. 헌터들이 마수를 잡아오면 그 마수들을 해체하는 일이다.
 로이는 젝스 집에서 얹혀 산다. 젝스의 집에는 작은 창고 하나와 마구간이 딸려있다. 이 마구간에서 지낸다. 그 대가로 말처럼 일한다. 종이나 다름없다.
 언제고 이 생활을 벗어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생각만 하고 있다.
 젝스에게 거둬지기 전에는 길바닥에서 지냈다. 지금도 그때의 추위를 기억한다. 그런 생활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오늘은 주말이다. 헌터들도 주말에는 일하지 않는다. 마수를 잡아 번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젝스도 식사하고 있다. 지금쯤 발라리아산 위스키와 함께 양고기를 먹고 있을 것이다.
 그 옆에 로이는 없다. 위산에 오르고 있었다. 젝스가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뭐, 심부름과 상관없이 어차피 그것들을 먹지 못하지만 말이다.
 심부름은 필루를 뜯어오는 것이다. 필루은 씹으면 쓴맛이 나는 풀이다.
 젝스는 가끔 필루를 씹어 먹는다. 아니, 모든 헌터는 필루를 씹는다. 필루를 씹으면 마수를 사냥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 때문이다.
 반대로 필루를 먹으면 일찍 죽는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제 명에 못 살아서다. 헌터는 전부 언제고 마수에게 죽을 운명이다.
 로이도 씹어봤는데, 도저히 사람이 먹을 것이 아니었다. 물론 꾸준히 먹고 있기는 하다.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먹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필루는 절벽 아래쪽에서 나는 풀이다. 절벽은 산꼭대기에 있었고, 한 시간은 족히 산을 타야 나온다.
 땀을 비 오듯이 흘렸지만, 발을 멈추지 않았다. 늦으면 젝스에게 개처럼 쳐맞는다. 젝스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필루를 씹는다. 10년 동안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것만 보면 필루가 정말 힘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이가 보기에 젝스는 꽤 실력 좋은 헌터였으니까.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절벽 위쪽에 남작의 성이 보였다. 남작의 성에서 남작이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상상을 했다. 이곳에 와서 남작의 성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부질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고개를 내렸다. 바닥에는 필루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등에서 자루를 내리고 그것들을 담기 시작했다.
 한참 필루를 뜯고 있는데 무엇인가 눈에 들어왔다. 흙이 잔뜩 묻은 작은 돌이었다.
 로이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와.”
 딱 봐도 평범한 돌은 아니었다. 드러난 돌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장식품이 분명했다.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부적으로 삼기로 했다. 이 정도로 멋진 돌이면 부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로이는 손으로 돌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돌에 묻은 흙은 굳었는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적당한 바위 하나가 보였다. 돌을 바위에 톡톡 내리쳤다. 조금씩 흙이 떨어져 나갔다. 내려치는 힘이 점점 세졌다.
 그 순간 돌이 번쩍하며 빛났다. 뭔가 온몸을 관통하는 기분이 틀었다.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일단 돌부터 찾았다. 돌로 인해 기절한 것은 이미 씻은 듯이 잊었다.
 발아래를 더듬거리자 손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돌을 자루에 넣었다.
 재빨리 필루를 담기 시작했다. 잘 보이지 않아서, 대충 비슷한 것을 뜯어 자루에 쑤셔 넣었다. 자루는 금세 가득 찼다. 자루 입구를 단단히 조여 매고, 등에 멨다.
 그대로 산 아래를 뛰어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넘어지고 구른 것은 당연했다.
 로이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헌트의 집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에 있는 모양이다.
 숨을 한번 고르고, 이내 문을 두드렸다. 앞으로 닥쳐올 고통을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고 로이는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 이 개······ 뭐야?”
 젝스는 입을 다물었다.
 로이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있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 왜 피투성이야? 어디서 굴렀냐?”
 살짝 눈을 떴다. 그제야 바지가 시뻘겋다는 것을 알았다.
 “너 얼굴 들어봐. 얼굴도 피투성이네. 기다려봐라.”
 젝스는 안으러 들어갔다. 로이는 얼굴을 만져봤다. 손에 끈적한 피가 묻어났다. 그제야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했다. 젝스가 때리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만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잠시 후 젝스가 더러운 천 하나를 들고 왔다.
 “괜찮냐?”
 “예. 그냥 조금, 굴렀을 뿐이에요.”
 로이는 대답하면서 머릿속에 어디서 어떻게 굴렀는지 지어냈다. 물어보면 자세히 대답할 생각이었다.
 젝스는 질문 대신 천을 건넸다.
 “그래? 일단 닦아라.”
 “감사합니다. 저, 필루는······.”
 로이는 천을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이 닫히면서 대답이 들려왔다.
 “단에게 빌렸다.”
 “아.”
 덩그러니 남겨진 로이는 천을 들고 창고로 향했다. 자루를 풀어 구석에 놔뒀다. 정리는 내일 아침에 하기로 했다. 왠지 피곤하고, 조금 어지러웠다.
 로이는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왔다. 자루에서 돌을 빼서 뱃속에 넣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창고에서 빠져나와 마구간으로 향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구석으로 가 돌을 숨겼다. 옷을 벗고 주저앉았다. 속옷만 입은 채로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피가 있을 곳을 상상하며 열심히 닦았다.
 닦다 보니 천이 축축해졌다. 피로 잔뜩 물든 것이 분명했다. 계속 닦았다간 오히려 피가 묻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았지만 피가 잔뜩 묻어있다고 생각하니 찜찜했다. 이대로 잘 순 없었다. 옷도 걱정이었다.
 다시 옷을 입었다. 찝찝했지만, 참았다.
 천을 들고 마을 우물로 향했다. 우물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말이고, 늦은 시간이라서다. 로이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두레박을 집어넣고 물을 길었다. 물을 천에 조금씩 부으면서 천을 빨았다.
 내친김에 빨래도 하기로 했다. 옷을 벗어 바닥에 놓았다. 그 위에 물을 뿌렸다.
 옷을 발로 밟으면서 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그러고 있자니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대충 이 정도면 됐다 싶었다. 옷에 피가 다 빠지지 않은 것 같았지만, 춥고 팔다리가 아팠다.
 천과 옷을 집어 들고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벽에 걸려있는 이불을 내리고 대신 천과 옷을 걸었다. 내일 아침이면 마를 것이다.
 구석으로 가 돌을 꺼냈다. 주저앉아 짚으로 돌 표면을 닦기 시작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꼼꼼히 닦았다. 서늘한 바람이 맨살을 스치고 지나갔다.
 돌을 손에 쥐고, 짚에 몸을 뉘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그래도 조금 추운 느낌이 들었다. 더 짚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락했다.
 
 “으으.”
 로이는 눈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이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보였다. 집어다가 다시 구석에 숨겼다.
 온몸이 아팠다. 또 감기 걸린 것처럼 뜨거웠다. 할 일이 없었으면 그냥 누워있었을 것이다.
 옷은 다 말라 있었다. 조금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면 참을만했다.
 창고로 향했다. 구석에 어제 놔둔 자루가 보였다. 벽에 걸려있는 천을 내려 바닥에 깔고, 자루를 벌려 안에 있는 것을 그 위에 쏟았다.
 쏟아진 필루 속에는 필루가 아닌 것들도 잔뜩 섞여 있었다. 털썩 주저앉아 그것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자니 오늘 꾼 꿈이 생각났다. 보통 꿈을 꿔도 그 꿈을 꿨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남는데, 이번 것은 아직도 기억났다.
 내용은 조금 특이했다. 한 노인이 나와서 이상한 손짓을 하다가 마지막에 손에서 불이 나왔다. 그다음 배 이곳저곳을 쿡쿡쿡 찔렀는데, 뭔가 찌릿한 느낌이 배를 관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걸로 끝이다.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분류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루는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나머지는 들고 나가서 내다 버렸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개지 않은 이불을 다시 덮었다. 젝스가 부르지 않는 한 오늘은 종일 누워있을 생각이었다.
 눕자마자 젝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몸을 일으켜 집으로 향했다. 젝스가 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괜찮냐?”
 “예.”
 “그래?”
 젝스는 로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일순 주먹을 내질렀다.
 “악!”
 “어제 단에게 필루를 빌리면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거든. 가서 앉은뱅이 풀 좀 따와라.”
 젝스가 자루를 건네면서 말했다. 마치 제때 필루만 가져왔어도 이런 일은 안 했을 거다라는 말처럼 들렸다.
 어쩔 수 없이 자루를 들고 다시 산으로 향했다.
 앉은뱅이 풀은 산 중턱에서 자란다. 필루처럼 멀리 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30분은 가야 한다.
 걷고 있자니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빨리 갔다 와서 쉬고 싶었다.
 운 좋게도 도중에 산딸기를 발견해서 뜯어먹었다. 허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닥에 군데군데 앉은뱅이 풀이 보였다. 대충 뜯어 담기 시작했다. 어차피 젝스가 먹을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로이는 순식간에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에 있는 나무 앞에서 멈췄다. 자루를 내려놓고 천천히 밑동 부근을 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흙투성이의 작은 주머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머니를 손바닥 위에 뒤집었다. 크고 작은 코퍼 몇 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 돈이 로이의 전 재산이었다.
 천천히 그것을 세기 시작했다. 힘들면 와서 하는 짓이다.
 가끔 젝스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거나, 술로 만신창이가 됐을 때, 몰래 사냥해서 잡는 것들을 내다 판 돈이다.
 돈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를 다시 땅에 묻었다. 밖으로 나가겠다는 생각도 묻었다.
 다시 집으로 향했다.
 
 
 # 3.운수 좋은 날
 
 돌아오고 곧바로 마구간에 틀어박혔다. 젝스의 심부름으로 말린 토끼고기를 빵으로 교환하러 갔다 온 것을 빼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주말이라 일도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즈음, 잠에서 깼다. 열은 완전히 내려있었다.
 또 같은 꿈을 꾸었다. 노인이 나와서 이상한 손짓을 하다가 손끝에서 불을 피워냈다. 마지막은 역시나 몸을 쿡쿡쿡 찌르고 끝이 났다.
 다만 어제보다 기억이 더 생생했다. 노인이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지 기억났다. 갈색 로브를 입고, 머리에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손짓도 똑똑히 기억났다. 양손이 마치 춤을 추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뱃속을 관통하는 찌릿함도 더 또렷했다. 마치 배 속에 길이 생긴 것 같았다.
 이제는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돌로 향했다. 걸리는 것이 돌밖에 없었다.
 꿈에 나온 노인의 손짓을 따라 해봤다. 머릿속에 기억을 토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양손이 따로 놀았다. 쉽지 않았다.
 문득 왜 이것을 따라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 남자가 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인지, 꿈에 나온 노인이 손에서 불을 피워냈기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해가 뜬 이후였다.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창고로 향했다.
 물건 대부분은 창고에 있다. 검과 단도, 쇠뇌를 제외하면 전부 다 창고에 있다. 무기는 집 안에 있다. 젝스가 직접 손질한다.
 우선 자루에 구멍이 뚫린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모두 멀쩡했다.
 쇠뇌용 볼트도 살펴봤다. 나무가 갈라지진 않았는지, 깃이 빠지진 않았는지. 모두 멀쩡했다.
 포획용 그물을 살펴보고 있는데 젝스가 창고로 들어왔다. 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 사냥을 간다.”
 “예.”
 젝스는 그 말을 남기고 창고를 나갔다. 로이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본래 마을에 있는 아이들은 사냥에 따라나서지 않는다. 따라나설 때는 나이가 차서 헌터 일을 배우게 될 때뿐이다. 하지만 로이는 예외였다. 사냥에도 따라나서고, 마수를 해체하는 일도 한다. 힘들지만, 덕분에 알게 모르게 배운 것이 많다.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버틸만했다.
 일을 마치고 식사를 했다. 오늘도 흑빵이었다. 살살 녹여서 먹었다. 필루도 몇 개 집어먹었다. 아무 맛이 없는 흑빵만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식사를 마치고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사냥을 나갈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양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왜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인가 집중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시간은 잘 갔다.
 오후가 되자마자 젝스가 불렀다.
 “로이!”
 “예.”
 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젝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해라.”
 젝스는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별말 없는 것 보니 평소랑 같게 준비하면 될 것 같았다.
 창고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담기 시작했다. 볼트와 단도, 육포, 부산물을 담을 가죽 자루 몇 개를 잘 포개어 가방에 쑤셔 담았다. 철 국자와 막대기는 가방 옆에 끼워 넣었다.
 혹시 모르니 필루도 챙겼다. 사냥이 길어지면 캐오라고 시킨다.
 창고에서 나갔을 때는 젝스가 이미 준비를 마친 이후였다.
 젝스가 쇠뇌를 건넸다.
 “가자.”
 “네.”
 로이는 쇠뇌를 능숙하게 어깨에 멨다.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가방의 위치를 조정해서 조금 편한 자세로 만들었다. 그 사이 젝스는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둘은 그대로 마수의 숲으로 향했다. 숲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약 삼십 분 거리다.
 숲 입구에 도착하고 젝스는 바위에 주저앉았다.
 “가서 테린 좀 뜯어 와라.”
 “네.”
 로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숲으로 들어갔다. 깊숙이는 들어가지 않고, 그 근처에서 얼씬거렸다.
 잠시 후, 로이는 한 손에 풀 한 움큼을 쥐고 돌아왔다. 그사이 젝스는 불을 피워놓고 기름을 만들고 있었다. 철 국자 안에 기름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것을 막대기로 천천히 저었다.
 미리 만들어 둔 것을 끓이는 것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로이는 풀을 건넸다. 젝스는 풀을 받아 불 위에 살살 뿌렸다. 풀이 그을리면서 고약한 냄새를 뿜어냈다.
 가방을 열고 볼트를 꺼냈다. 미리 쇠뇌를 장전해뒀다. 그 사이 젝스는 검에 기름을 먹이고 있었다. 개기름과 담쟁이 풀을 섞은 것으로 벨로독에게 효과가 좋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로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빨리 벨로독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젝스도 숲에는 들어가기 싫은지, 꽤 오래 기다렸다.
 바램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저 멀리 숲 입구에서 벨로독 두 마리, 아니, 세 마리가 나타났다.
 로이는 재빨리 쇠뇌를 건넸다.
 젝스는 쇠뇌로 벨로독을 조준했다. 로이는 그 모습을 숨죽이며 쳐다봤다.
 벨로독은 냄새를 맡고 왔다가, 적을 발견하고 곧바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젝스는 쇠뇌를 발사했다. 쇠뇌는 가장 앞에 있는 벨로독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벨로독은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젝스는 로이에게 다시 쇠뇌를 건넸다.
 로이는 쇠뇌를 건네받자마자 바닥에 세웠다. 등자를 발로 밟고 양손으로 현을 있는 힘껏 당겼다. 단단한 현이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젝스가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장전을 못 해도 크게 위험하지 않다. 젝스는 벨로독 두 마리도 사냥 못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대신 언제나 그랬듯이 죽도록 맞는다. 어쩌면 젝스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을힘을 냈다.
 그 순간, 현이 쑥 당겨져 고정되었다. 로이는 재빨리 홈에 볼트를 넣고 젝스에게 건넸다. 벨로독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젝스는 쇠뇌를 받자마자 동시에 발사했다. 또 한 마리의 벨로독이 쓰러졌다. 젝스는 쇠뇌를 던지다시피 건네고, 검을 뽑아들었다. 기름을 먹은 검이 반질반질 빛났다.
 마지막 남은 벨로독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벌린 입으로 보이는 이빨이 무척 크고 날카로워 보였다. 턱도 발달해있어서 한번 물리면 끝장이다. 검도 부러뜨릴 정도다.
 대신 뒷다리가 조금 짧아 달리기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래도 끈기가 있어, 한번 쫓기면 결국 잡히고 만다.
 젝스는 벨로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벨로독은 칼질 몇 방에 피를 질질 흘리다가, 결국 목이 잘려 죽었다.
 로이는 싸움이 끝나자 가죽 자루를 들고 벨로독에게 다가갔다. 자루로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받았다. 자루는 금세 가득 찼다. 또 다른 자루를 꺼냈다. 자루는 가장 멀리 있는 벨로독에게 가기도 전에 가득 찼다.
 자루를 잘 묶어서 가방 옆에 놔두고 젝스를 쳐다봤다.
 젝스는 바위에 앉아 허공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허리춤에 있는 단도를 꺼내 건넸다.
 로이는 단도를 건네받고 벨로독의 가슴을 푹 찔렀다. 그대로 배까지 쭉 그었다.
 갈라진 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걸리는 것이 없었다.
 “마석, 없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다.
 로이는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곧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마수 해체는 성인들도 힘들어하는 일이었다. 한 마리는 괜찮지만, 여러 마리를 연속으로 하면 끝에는 팔이 벌벌 떨리기까지 한다.
 다 벗긴 가죽을 옆에 놔두고 발톱과 이빨을 빼냈다. 고기는 버린다. 마수의 고기에는 독이 있기 때문이다. 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연금술사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대로 두 번째, 세 번째 벨로독도 해체했다. 마석은 역시 나오지 않았다.
 가방에서 또 다른 가죽 자루를 꺼냈다. 가죽과 발톱, 이빨을 자루에 한 대 모아 담았다.
 “돌아가자.”
 “네.”
 재빨리 가방과 쇠뇌, 피와 부산물이 든 자루를 전부 등에 멨다. 묵직함이 어깨와 등허리를 짓눌렀다. 물론 젝스가 알 바 아녔다.
 젝스는 이미 출발해있었다. 열심히 발을 놀려 뒤를 쫓았다.
 마을에 도착할 때 즈음이 되자,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평소 같았으면 다리가 후들거렸을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젝스는 다른 헌터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저녁에 먹을 사냥감을 잡아오라는 말을 남긴 채.
 로이는 혼자 집으로 향했다. 그러길 잠시 로이에게도 한 소년이 찾아왔다. 니트였다.
 “로이.”
 “니트.”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인사를 받았다. 소년이 그 뒤를 따르면서 말을 걸었다.
 “사냥 갔다 왔어?”
 “그래.”
 “좋겠다.”
 니트는 로이보다 나이가 많다. 이미 사냥을 따라다닐 나이다. 하지만 몸집이 작다.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작다. 로이와 비슷한 정도다.
 이런 이유로 아직 사냥에 따라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가방도 들지 못하고, 해체도 못 하는 아이는 짐만 될 뿐이다.
 몸집이 작다는 것은 다른 아이들의 표적이 될 만한 이유로 충분했다. 마을의 몇몇 아이들은 니트를 괴롭혔다. 심지어 더 어린 녀석도 니트를 괴롭혔다.
 그중에 로이만 유일하게 괴롭히지 않았다. 할 일이 많아 그럴 정신도 없다. 그 시간에 그냥 한숨 자는 것이 낫다.
 물론 이유야 어쨌든 니트가 로이를 좋아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 잡았어?”
 “벨로독.”
 “이야기 좀 해줘.”
 로이는 걸으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벨로독에 대한 이야기는 수십 번도 더 했다. 그런데도 니트는 질려 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창고에 도착할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소년은 창고 밖에 서서 이야기를 들었다. 젝스가 로이 이외에 다른 사람이 창고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서다. 다른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정리가 끝났을 때 즈음에 이야기도 끝이 났다. 소년도 아쉬워하다 할 일이 있다면서 돌아갔다.
 로이는 잠시 주저앉아 쉬다가, 그 자리에서 흑빵 하나를 먹어치웠다. 부족한 배는 물로 채웠다.
 창고 벽에 걸려있는 작은 활과 화살통을 내렸다. 활은 한 손에 들고 화살통은 어깨에 걸었다.
 그 옆에 있는 단검도 챙겼다. 오래된 것을 젝스가 쓰라고 준 것이다. 그대로 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며 짐승의 흔적을 찾았다. 사슴이라도 나타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슴은 버릴 것이 없다. 고기와 뿔, 가죽 모두 돈이 된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이년 전, 산에서 다리가 부러진 사슴을 발견했었다. 간신히 근처에 있는 돌을 주워다 죽였다. 집까지 들고 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젝스는 사냥에 소질이 있다면서 작은 활을 사줬다.
 그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해와야 했다. 사냥에 실패하면 얻어맞았다. 또 하나의 때릴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덕분에 활을 쏠 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느덧 중턱을 넘어갔을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로이는 숨을 죽이고 그곳으로 향했다.
 고블린이다. 고블린 한 마리가 게걸스럽게 사슴을 뜯어먹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고블린은 보이지 않았다.
 고민은 짧았다. 고블린을 잡아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젝스가 잡는 것을 본 적은 있다. 고블린은 약한 몬스터다.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슴도 탐이 났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들킬 수도 있지만, 활이 빗나가면 더 위험해진다. 다행히 고블린은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꽤 가까이 가서야 멈췄다.
 소리 나지 않게 화살통을 내려놓았다. 화살통에서 화살을 세 개 꺼냈다. 두 개는 바닥에 꽂고, 하나는 장전했다. 고블린의 등이 아주 크게 보였다.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은 고블린 어깨에 박혔다. 고블린이 괴성을 질렀다.
 그사이 재빨리 바닥에 있는 화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고블린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다시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은 고블린 배 부근에 명중했다. 고블린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활을 어깨에 끼우고 화살을 챙겼다. 단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고블린에게 다가갔다.
 고블린은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조잡한 활로 고블린을 단박에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가까이 접근하자마자 냅다 머리를 밟았다. 고블린이 발버둥 쳤다.
 역시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영악한 놈이었다.
 그대로 뒷목을 그었다. 잠잠해졌다.
 고블린은 빈털터리였다. 무시하고 사슴으로 향했다. 고블린 자체는 돈이 되지 않는다. 뭐하나 쓸 데가 없다.
 사슴은 고블린이 뜯어먹은 배 부분을 제외하면 쓸 만해 보였다. 잠깐 고민하다가 배를 완전히 도려냈다. 앞다리와 뒷다리를 잡고 등에 멨다. 그대로 산 아래로 향했다.
 사슴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또 흘러나온 피로 금세 등이 축축해졌다.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운수 좋은 날이다.
 
 
 # 4.작은 용기
 
 사슴을 가져가고 젝스에게 크게 칭찬받았다. 이전처럼 또 뭔가 새로운 것을 얻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슴 해체뿐이었다.
 로이는 투덜대며 사슴을 해체했다. 뿔을 자르고 가죽을 벗겼다. 고기는 먹기 좋게 적당히 잘라냈다.
 잘라낸 고기는 돌소금을 넣은 물에 넣었다. 내일 즈음이면 신선하게 될 것이다. 뿔은 창고 구석에 잘 보관하고, 가죽은 널어서 말렸다.
 그날 저녁, 젝스는 다른 헌터들과 같이 사슴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로이도 고기 몇 점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맛있었다. 최근 며칠 중 가장 행복했다.
 파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같은 꿈을 꾸었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 생생했다. 마지막에 노인이 한 말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양손을 움직였다. 이전보다는 훨씬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손을 움직이자 가슴과 배 부근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움직임이 끝나고 노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파이어.”
 작게 중얼거리자, 손가락에서 작은 불이 피어올랐다.
 로이는 깜짝 놀라서 손을 털었다. 불은 금세 사라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노인의 손짓을 따라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막상 기대감이 현실이 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놀람과는 다른 두근거림이다. 머리가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손을 움직였다. 살짝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꼬였다. 손을 털고, 다시 침착하게 움직였다.
 머릿속에 노인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노인 손가락에 있는 불이 일렁거렸다. 배가 근질거렸다.
 “파이어.”
 다시 손가락에 불길이 치솟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컸다.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와 봤다. 따듯했다. 진짜 불이었다.
 “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껏해야 작은 불을 만들어 낸 것이지만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로이는 바보가 아니다. 단순히 작은 불을 피운 것이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바로 마법사다. 부싯돌을 사용하지 않고 손에서 불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이 마법사를 제외하고 누가 있을까.
 마법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알고, 언제나 골방에 들어박혀 책을 읽는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마법사가 매우 희귀하다는 것과 돈을 잘 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마법사가 되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모든 게 돌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돌을 찾았다.
 돌은 바닥에 있었다. 집어 들었다.
 돌이 손안에 들어온 것도, 그로 인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해봤다. 이번에도 불을 피워내는 것에 성공했다. 로이는 연거푸 그 짓을 반복했다.
 해가 뜨고 나서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었다. 이제 일과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돌을 구석에 잘 숨겨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로 향했다. 구석에는 어제 놔둔 바가지가 놓여있었다. 사슴 고기가 더욱 윤기 나게 바뀌어있었다.
 로이는 가죽 자루에 차곡차곡 고기를 담았다. 자루 바닥이 금세 축축해졌다. 갔다 와서 한번 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위에는 사슴 가죽을 올렸다. 뿔은 그 위에 올려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젝스만 일어나면 된다. 아마 늦은 오후 즈음에나 일어날 것이다. 해가 뜨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으니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들을 들고 도망가면 어떨까?
 로이는 지금까지 도망가겠다고 마음만 먹었지,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별것 아니다. 벗어나서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을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을 헌터 중 과반수가 힘들게 살고 있다. 개중에 몇몇은 힘도 무척 세고, 덩치도 크다. 경력도 꽤 된다.
 다른 헌터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 몇몇은 직업을 잘못 고른 것이라고 한다. 헌터도 적임자가 있단다. 물론 로이는 이런 설명으로도 충분히 납득가지는 않았다.
 그런 그들을 생각해봤을 때, 과연 스스로가 그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지, 혹은 나중에 더 뛰어나게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도저히 젝스의 집을 떠날 수 없었다.
 세상에 홀로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자신감이 없다고 해도 좋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바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자립하고 싶어졌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큰 용기를 주었다.
 단순히 불을 피운 것이지만, 그것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었다. 작은 불이 성화가 되어 다가왔다.
 단지 재능이 그것뿐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최악에는, 부싯돌 값이라도 아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것만 해도 큰 것이었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다. 로이는 곧바로 산으로 향했다. 돌아올 때는 돈주머니가 들려있었다.
 창고에 들어오자마자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뿔은 허리춤에 메고, 고기를 짊어졌다. 벽에 걸린 활과 화살통도 어깨에 멨다.
 곧바로 창고를 벗어나려는데 잊은 것이 생각났다.
 “돌!”
 로이는 다시 짐을 내려놓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구석에 있는 돌을 챙겼다. 창고로 돌아오는데 문득 집으로 눈길이 향했다.
 어차피 도망갔다가 잡히면 죽는다. 도망갈 거면 제대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젝스의 검과 쇠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들이 있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또 돈이 있으면 더 멀리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로이는 집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술을 먹고 깜박한 모양이다.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코 고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마음이 안정되었다.
 바닥에 어제 먹다 남은 음식과 술병이 널려있었다. 그것들을 피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젝스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젝스가 이 소리를 듣고 깨지 않을까 걱정되기까지 했다.
 침대 머리맡에 검과 쇠뇌, 가방, 갑옷, 벨트 따위가 보였다. 그것들은 일단 놔두었다. 돈부터 챙기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책장에 자물쇠가 달린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열쇠를 찾았다. 한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상자 채로 집어 들려고 했는데, 상자는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포기는 빨랐다. 대신 검과 쇠뇌, 가방, 벨트, 갑옷을 집어 들었다.
 집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것들을 들고 창고로 향했다. 죄책감 따윈 없었다.
 로이는 마치 사냥을 나가는 것처럼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돌, 상자, 돈주머니, 볼트, 국자 따위의 자잘한 짐은 모두 가방에 넣었다. 돌소금도 챙겼다. 쇠뇌와 검은 가방 양쪽에 매달았다.
 갑옷을 착용했다. 가죽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거웠다. 가슴 부근에 철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헐렁헐렁했다. 옆구리 쪽 줄을 당겨 단단히 고정했다. 여전히 딱 맞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나았다.
 벨트를 착용했다. 벨트에 달린 단도집이 허벅지에 닿았다. 든든했다. 반대쪽에는 사슴뿔을 매달았다.
 가방을 메고, 사슴 고기가 든 자루를 짊어졌다. 어깨가 짓눌렸다.
 고기를 조금 덜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괜찮지만, 나중에 힘들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다 그냥 들고가기로 했다. 나중에 힘들면 길거리에 조금 버리기로 했다. 나중에 힘들 것을 생각해서 지금 비싼 고기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나가는데 벽에 걸린 활과 화살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시하고 그냥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더 좋은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조심스럽게 창고를 빠져나왔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이는 재빨리 산으로 내달렸다. 성으로 가는 방향은 반대방향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빙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산을 타고 올라가다가 이내 다시 방향을 틀었다. 곧 길이 나타났다. 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슬슬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무게가 무게인 만큼 힘든 게 당연했다. 하지만 또 힘들지 않았다.
 보통 무거운 것을 들 때 드는 생각은, 언제 내려놓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게가 곧 돈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힘을 낼 수 있었다.
 로이는 묵묵히 발을 놀렸다.
 어느새 눈앞에 성이 보였다. 오는 동안 전혀 힘들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성문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로이는 맨 뒤에 가서 섰다.
 한참이 지나, 로이의 차례가 왔다. 경비병이 눈을 부라리며 쳐다봤다. 앞에 상인을 대할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름.”
 “로입니다.”
 “나이.”
 “열일곱입니다.”
 로이는 나이를 올려 말했다.
 “거짓말하는 거 아냐? 어려 보이는데.”
 경비병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위아래를 훑었다. 눈은 잠시 쇠뇌를 지나 허리춤에서 머물렀다. 허리춤에는 사슴뿔이 매달려있었다.
 “그것들은 다 뭐야. 훔친 건가?”
 “헌텁니다.”
 “헌터가 무슨 검을 가방에 매달고 다녀? 역시 훔친 것 같은데.”
 로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제 맘입니다.”
 “뒤에 그거, 자루는 뭐야.”
 “사슴 고기입니다.”
 “사스음? 훔친 거 아냐?”
 경비병이 실실 웃었다. 옆에 있는 경비병도 따라 웃었다. 둘 다 뭔가 기대하는 눈치다.
 로이는 이미 눈치챘다. 경비병이 이렇게 시비를 거는 것은 수고비를 받기 위함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정도까지 하면 보통 수고비를 주든지 한다. 헌터들도 대부분 사냥에 성공하면 그렇게 한다. 마수는 아니었지만, 사슴 정도면 욕심낼만했다.
 로이는 살짝 고민했다. 돈주머니는 가방 안에 있다. 꺼내려면 이것저것 복잡했다. 또 주기도 싫었다.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했다.
 주위를 한 바퀴 쓱 훑어봤다.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있을 리 없었다.
 로이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잡았습니다.”
 경비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하지 마라! 역시 훔친 거지?”
 “훔친 거 아닙니다!”
 로이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내밀고 쳐다봤다. 개중에는 조금 괜찮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다림에 지쳤는지, 모두 조금 짜증 난 표정이었다.
 로이가 노린 것이기도 했다.
 경비병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가 이렇게 딱딱하게 굴 줄은 몰랐을 것이다. 또 더 시간을 끌었다간 뒤에 받을 수고비가 줄어들 수도 있었다.
 경비병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너 이 새끼, 나중에 보자. 통과!”
 로이는 성큼성큼 성문을 통과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단순히 수고비를 주지 않은 것뿐이지만, 앞으로 한 발 내딛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5.행상인 배크만
 
 성으로 들어오자마자 검을 빼내 허리에 매달았다. 걸을 때마다 달랑거려서 불편했지만, 그냥 참았다. 조금 전과 같은 일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이어서 사슴 고기와 뿔, 가죽을 내다 팔았다. 가죽은 조금 상했지만, 고기와 뿔의 상태가 괜찮았다. 특히 뿔을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 억지를 부렸지만, 결국 성공했다. 그게 중요했다.
 사슴을 팔고 곧바로 성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젝스가 쫓아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멀리 도망가야 한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사슴이 없으니 몸이 훨씬 가벼웠다. 이 정도면 종일 걸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아.”
 식량을 산다는 걸 깜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몸을 돌렸다. 빵은 부피가 크니, 육포 따위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자네.”
 로이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모른 척 발걸음을 옮겼다.
 “헌터!”
 주위를 둘러봤다. 헌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최소한 추격자는 아닐 것이다.
 뒤를 돌자 덥수룩한 수염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나이는 사십 대 정도로 보였다.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자네 헌터지?”
 “그런데요.”
 로이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오해한 사내가 웃으며 답했다.
 “헌터인 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군. 아까 성문에서 봤다네.”
 “아.”
 이런 답변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결 맘이 편안해졌다. 물론 모든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개가 늦었군. 난 배크만이라고 하네. 떠돌이 상인이지.”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로이는 얼떨결에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아, 예. 로입니다.”
 “헌터가 남에게 함부로 이름을 막 알려줘도 되나?”
 로이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도 그런 것 같았다. 재빨리 한마디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가명······.”
 “농담이네! 하하!”
 사내는 손을 놓고 웃었다. 로이는 웃을 수 없었다. 이 사내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말투가 날카롭게 변했다.
 “뭡니까?”
 “미안하네. 옛날 생각이 나서. 자네 일거리가 필요하지 않나?”
 “저는······.”
 로이는 거절하려고 했다. 당장 그럴 여유 따윈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행상인이라네. 호위해줄 용병을 찾고 있지. 목적지는 아히크 남작 영지고, 마차로 이동한다네. 하루에 5코퍼. 점심 저녁 제공에.”
 “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사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로이는 그 손을 맞잡았다.
 아히크 남작 영지는 디벨 남작 영지 옆에 있다. 거기다가 마차로 이동한다. 식사까지 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부탁하고 싶었다.
 “자, 그럼 시간이 없으니 빨리 이동하지.”
 “알겠습니다.”
 로이는 사내를 따라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둘은 곧 성문에 도착했다.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이동하자 조금 넓은 공터에 짐마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인부 두 명이 그곳에 뭔가 싣고 있었다.
 로이는 그제야 성문에 있을 때 옆으로 마차가 지나갔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마차가 틀림없었다.
 “잠깐, 잠깐!”
 사내는 큰소리로 외치며 재빨리 그쪽으로 뛰어갔다. 인부는 들고 있던 짐을 마저 마차에 내려놨다. 사내는 마차에 실린 짐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살폈다. 조금 전까지 실실 웃던 것과 다르게 진지한 모습이었다.
 “됐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서 코퍼 몇 개를 꺼내 인부에게 던졌다. 인부는 그것들을 받고 사라졌다.
 사내는 짐칸에서 마부석으로 넘어가면서 외쳤다.
 “뭐하나, 안 타고?”
 “아, 예.”
 “짐은 뒤에 싣게.”
 로이는 가방을 벗어 뒤 칸에 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검도 실어버렸다. 단도가 있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마부석에 올라탔다. 둘이 타서 그런지, 마부석은 생각보다 좁았다. 사내의 엉덩이가 큰 것도 한몫했다.
 간신히 끝자락에 엉덩이 하나만 걸치고 앉았다.
 “됐나?”
 “네.”
 “가지.”
 사내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말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묘했다.
 마차는 곧 성문을 지나게 되었다. 아까 봤던 경비병과 마주치게 된 것은 당연했다.
 마차는 다행히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경비병이 로이를 위로 노려봤다. 왠지 통쾌했다.
 마차는 순식간에 성문에서 멀어졌다. 동시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자네.”
 “예?”
 “디벨 남작 영지에서 아히크 남작 영지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있나?”
 뜬금없는 질문에 로이는 조금 당황했다.
 “대충······ 마차로 열흘 정도 걸리지 않습니까?”
 대충 어림잡아 대답했다. 사내가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오 일이라네.”
 “아, 네.”
 “나는 니잔 왕국을 곳곳을 돌면서 10년 동안 장사를 해왔지. 이곳을 지난 것만 해도 손에 다 셀 수가 없다네. 그리고 단 한 번도 몬스터나 마수에게 습격을 받은 적이 없어. 주위가 탁 트여있어서 도적의 습격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지. 애초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도적도 없지만 말이네. 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야.”
 로이는 사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았다.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저를 왜 고용한 겁니까?”
 “뭐라고?”
 마차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린 모양이다. 로이는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저를 왜 고용한 겁니까?”
 “아까 말했잖나. 옛날 생각이 났다고. 나도 예전에 집을 뛰쳐나왔거든. 나는 상인이고 자네는 뭐 용병이긴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었던 거지. 앳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네. 그래서 고용했어.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그러면 그냥 태워준다고 했으면······.”
 “그랬으면 자네가 탔겠나? 자네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아까만 해도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같았다네. 어떤 손길도 할퀴어서 쫓아낼 것처럼 말이야.”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냥 도와준다고 했으면 거절했을 것 같았다.
 “또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자신의 힘으로 돈도 벌어봐야지. 알지 모르겠지만 5코퍼는 정말 적은 돈이라네. 나중에 제대로 된 일을 받을 때는 이 정도로 수락하지 말게나.”
 로이는 머리가 복잡했다. 배크만의 말만 들어보면 정말로 돕기 위해서 자신을 태운 것이다. 낯선 누군가를 단순한 호의만으로 도울 수 있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자신이 아는 선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거든. 그도 행상인이었지. 자콥 씨라고. 지금은 아주 유명한 상인이 되었지. 혹시 자콥 상회라고 아나?”
 “모릅니다.”
 “그렇겠지. 디벨 성에서는 못 봤을 거야. 작은 성이니까. 하지만 아히크에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지부가 있으니까. 나중에 운 좋게 만나면 내 이야기를 해보게. 아실 테니까. 지금도 연락하면서 지내거든.”
 “알겠습니다.”
 “여하튼 나도 처음 집에서 나왔을 때, 자콥 씨가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알려주셨지. 그때 생각했지. 나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꼭 그렇게 해주겠다고.”
 “아!”
 로이는 얼굴도 모르는 그 자콥 씨에게 속으로 감사인사를 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게 되지 않았는가.
 “자네도 삶이 좀 괜찮아지면 지금 자네 같은 사람들을 돕게나.”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 그럼 이제 자네 이야기를 해보게. 가는 내내 심심하지 않게. 길어도 좋으니까. 최대한 자세히.”
 “음.”
 로이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얼마나 다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머릿속으로 집에서 가출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을 때, 배크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집을 가출했건, 다른 용병의 물건을 빼앗고 도망쳤건 상관없다네. 나도 형 결혼자금을 들고 도망쳤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배로 갚아줬다네. 그러니까, 살인마랑 도망친 노예만 아니면 된다네. 아, 노예도 상관없긴 한데, 좀 골치 아파지니까. 물론 말은 안 할거네만.”
 사내는 쏜살같이 말을 쏟아내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무척 수다쟁이였다.
 로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어려서 거둬진 것과 마구간에서 지낸 것, 종처럼 일 한 것, 젝스에게 거의 매일 맞다시피 한 것들. 나이만 한 살 올려서 말하고 대부분 사실대로 말했다.
 배크만은 중간중간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그 추임새가 로이로 하여금 계속 말을 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배크만은 말도 잘하고,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었다. 조금 수다스럽긴 했지만.
 “그럴 거로 생각했네. 얼굴은 앳된데 무기나 복장은 무척 낡았거든. 당연히 다른 사람 것을 들고 도망쳐 나온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아마 경비도 그것을 알고 시비를 걸었던 게 분명하네.”
 “그렇군요.”
 로이는 무기와 갑옷을 팔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기랑 갑옷도 손에 안 맞고, 어차피 숙련된 헌터처럼 행동해봤자 들킬 거라면, 그냥 보이는 대로 초보자처럼 행동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그래야지 이렇게 도움도 받을 것이 아닌가.
 배크만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밖으로 나올 용기를 냈나? 그것도 어린 나이에, 쉽지 않았을 텐데.
 로이는 차마 돌을 마법을 익히게 돼서라는 것까지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돌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돌을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고블린을 잡고 나서인 것 같습니다.”
 “고블린을 잡았나? 검으로? 쇠뇌로?”
 “활로요. 활을 좀 쏘거든요. 아마 마을에서 가장 잘 쏠 겁니다.”
 다만 활이 낡아서 나올 때 두고 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거 대단하구만.”
 로이는 조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 다시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오늘 아침인데, 지금 이렇게 풀어져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슬슬 팔다리가 아파져 왔다. 엉덩이를 반밖에 못 걸치고 있어서 팔다리로 지탱하고 있어서다.
 다행히도 배크만이 가볍게 끼니도 때울 겸,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다. 마차는 조금 더 달리다가 한적한 곳에 멈춰 섰다.
 “저 나무 아래로 가자고.”
 배크만은 뒤에서 작은 가방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로이는 가방을 두고 맨몸으로 배크만의 뒤를 따랐다.
 둘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배크만이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로이도 그 옆에 주저앉았다.
 배크만은 가방에서 육포 몇 개를 꺼내 주었다.
 “당장은 이걸로 참게. 저녁에 수프를 먹을 거니까. 그래도 비싼 거니까 맛은 있을 거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끼니 대부분을 흑빵으로 때웠던 로이다. 육포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실제로도 육포는 향도 맛도 기가 막혔다. 조금 딱딱했지만, 전혀 문제 될 것 없었다.
 “어때? 맛있지?”
 “그러네요.”
 로이는 육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냥 씹어 넘기기에는 조금 아까울 정도였다.
 “그냥 넘기라고. 아직 많이 있으니까.”
 배크만이 가방에서 육포 몇 개를 더 꺼냈다. 그제야 로이는 씹던 육포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배크만은 육포 몇 개를 더 건네고, 마차 쪽으로 향했다. 짐칸에서 뭔가를 꺼내서 말에게 먹이고 있었다. 대충 귀리 정도로 보였다.
 로이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맛있는 육포를 먹고 있으니 밖으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왔다는 불안감과 젝스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로이는 육포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 6.긴 밤
 
 육포를 다 먹은 배크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배도 채웠으니까 잠깐 움직여보는 게 어떤가. 가서 쇠뇌 좀 가져와 보게. 자네 활만 쏴보고 쇠뇌는 써본 적 없지? 좀 가르쳐주지. 나는 쇠뇌도 좀 쓸 줄 안다네.”
 로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마차로 향했다. 뒤에서 볼트도 잊지 말라는 말이 들려왔다.
 쇠뇌와 볼트를 들고 돌아왔다.
 “어디 보자. 흠, 구식형인가.”
 배크만이 자세를 잡았다. 그럴싸했다.
 “쇠뇌를 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활보다 훨씬 다루기 쉽다네. 아마 금세 적응할 거야. 문제는 재장전인데······한번 당겨보겠나?”
 배크만이 쇠뇌를 넘겨주었다. 로이는 쇠뇌를 세우고 등자를 밟았다. 양손으로 현을 있는 힘껏 당겼다. 현은 순식간에 고정되었다.
 배크만이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그 나이에 그런 힘을 갖고 있다니. 훌륭한 용병, 아니 헌터가 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이리 줘보게.”
 배크만은 쇠뇌를 건네받고 볼트를 올렸다. 로이는 살짝 긴장했다.
 배크만은 쇠뇌를 나무쪽으로 향했다.
 “별것 없어. 그냥 적을 조준해서 발사하면 되지. 보통 좋은 것은 200미터는 넘게 날아가는데, 이건 그 정도는 안 될 것 같구만. 구식형에다가 낡기도 했으니. 그래도 사용하는 데는 지장은 없을 거네. 연습 좀 해보고 자신 없으면, 적이 가까이, 적어도 20미터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발사하게나. 그럼 빗나갈 일 없을 테니.”
 배크만은 쇠뇌를 발사했다. 볼트는 나무에 정확히 박혔다. 배크만은 노린 곳에 정확히 명중했다고 말했다.
 “한번 쏴보게.”
 로이는 쇠뇌를 건네받았다. 장전하고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봤다. 나무를 조준했다. 목표는 배크만이 쏜 볼트였다.
 방아쇠를 당겼다. 볼트가 날아가 나무에 박혔다. 노렸던 곳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오기가 생겼다. 다시 장전하고 발사하기를 반복했다. 점점 차이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배크만이 쏜 볼트 바로 위에 명중했다. 몇 번만 더 쏴보면 금방 손에 익을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배크만은 마차에서 자신의 쇠뇌를 들고 왔다. 쇠뇌는 딱 봐도 고급스러웠다. 쇠뇌에는 로이의 것에는 없는 장치가 달려있었다. 얼핏 보기에 손잡이 같았다.
 “보게. 자네의 것과는 조금 다르지? 쇠뇌는 강력하지만 가장 큰 단점이 장전시간이라네. 물론 자네도 알고 있겠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가 여러 가지 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라네.”
 배크만은 쇠뇌를 거꾸로 세워 무릎에 올렸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현이 천천히 장전되기 시작했다.
 “톱니와 크랭크가 달린 건데, 이건 적은 힘으로도 장전할 수가 있지. 그리고······.”
 배크만은 장전을 마치고 볼트를 홈에 올렸다. 곧바로 나무를 향해 발사했다. 퉁 소리와 함께 볼트가 나무에 박혔다.
 “강력하다네.”
 로이는 나무로 다가가 확인했다. 볼트는 꼬리 부분만 남기고 박혀있었다. 확실히 엄청난 공격력이었다.
 “자네도 돈을 모으면 쇠뇌부터 사게나. 오래 굴러먹은 노련한 용병들은 모두 좋은 쇠뇌 하나씩은 갖고 있다고. 활로는 이런 파괴력을 발휘할 수 없다네.”
 “알겠습니다.”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젝스도 쇠뇌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검이었다.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쇠뇌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도끼나 해머의 근접 무기였다.
 확실히 쇠뇌는 매력적인 무기다. 조금만 연습해도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거기서 더 발전은 없다.
 로이는 자신의 무기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검이 떠올랐다. 헌터는 대부분 근접무기를 사용하니까. 이어서 활도 떠올랐다. 활도 무척이나 잘 사용한다. 오히려 당장은 검보다 낫다.
 하지만 둘 다 곧 사라지고 마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당장은 작은 불밖에 피우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불덩어리를 집어 던질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마법을 갈고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가자고. 부지런히 가야 해.”
 “예.”
 둘은 쇠뇌를 짐칸에 싣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로이는 마차에서 마법을 연습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일단 손을 움직이는 것은 안된다. 옆에 배크만이 있어서다.
 차라리 그냥 말해버리고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마법 연습을 위해서다.
 하지만 역시나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를 보일 때는 그것이 힘을 발휘할 때다. 작은 불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손은 놔두고 머릿속으로만 상상하기로 했다. 곧바로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꿈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생각하고자 하면 자연스럽게 되었다.
 노인은 손을 휘적거리다가 불을 피우고, 그다음 배를 쿡쿡 찔렀다. 로이는 왠지 실제로 배가 근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로이는 계속 머릿속으로 마법을 연습했다. 가끔 배크만이 이야기를 할 때 빼고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상념을 멈춘 것은 어둑해진 후였다. 배크만은 마차를 세웠다.
 “어두워지면 이동하지 않는 것이 낫네. 몬스터나 마수들은 밤에 더 활발하게 움직이니까. 그냥 일찍 자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일찍 움직이는 게 낫다네.”
 “그렇군요.”
 헌터 밑에서 지낸 로이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배크만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 잠자리를 마련하자고. 가서 태울만한 것 좀 주워오게. 그 사이에 저녁 준비를 해놓을 테니까.”
 “예.”
 로이는 마차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주위에는 탈 만한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조금 떨어진 나무로 향했다. 어차피 주변에 있는 것들은 죄다 마른 나무라서 괜찮을 것이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자잘한 가지를 부러뜨려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조금 굵은 것은 단도로 잘라냈다.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내려왔다. 그것들을 다시 마차로 향했다. 배크만은 양손에 부싯돌과 부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물이 담긴 냄비가 있었다.
 “수고했네. 이리 놓게. 불을 피울 테니.”
 로이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앞에 내려놓았다. 배크만은 그 위에 부싯깃으로 쓸 만한 작은 종이를 올리고 부싯돌과 부시를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불 주위에 두를 돌을 줍기 위해서다.
 로이가 돌을 다 주워올 때까지 배크만은 불을 피우지 못했다.
 “이거 부싯돌이 다 했나. 영 안 되는데. 자네 혹시 부싯돌 갖고 있나?”
 “급하게 나오느라고 못 챙겼습니다.”
 “이거 큰일인데.”
 배크만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로이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안 될 텐데······.”
 “할 수 있습니다.”
 로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 당당함에 배크만도 부싯돌과 부시쇠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는 나뭇가지를 더 주워오지. 자네가 가져온 건 불에 잘 안 탈 것 같으니까.”
 배크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안 가려고 했으면 보내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알아서 가줬다.
 로이는 부싯돌과 부시쇠를 내려놓았다. 불을 피우는 데는 이런 건 필요 없었다. 마법이 있으니까. 괜히 자신 있었던 게 아니다.
 곧바로 양손을 움직였다. 오전에 했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움직였다. 오면서 머릿속으로 연습한 성과가 있는 듯했다.
 “파이어.”
 손가락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재빨리 부싯깃을 들어 갖다 댔다. 부싯깃이 순식간에 불에 타올랐다. 나뭇가지 속에 집어넣고 입김을 불었다. 곧 나뭇가지에 불이 옮겨 붙었다.
 성공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순히 불을 피운 것이 아니라, 마법을 제대로 써먹은 것이다.
 그때 배크만이 몇 개 안 되는 나뭇가지를 들고 다가왔다.
 “오! 성공했나.”
 배크만은 재빨리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 불길이 조금 더 커졌다.
 “늦지 않아 다행이로구만. 잘못했으면 불이 꺼질 뻔했어. 어떻게 피운 불인데, 그러면 안 되지.”
 배크만은 곧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라고 해봐야 불에 재료를 넣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로이는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불을 피운 것은 자신인데 생색은 배크만이 내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냄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수한 냄새에 묻혀 곧 사라졌다.
 배크만은 나무그릇과 수저를 건넸다. 이런 것도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수프는 무척 맛있었다. 그 따뜻함이 축나있던 몸을 녹여주었다.
 배크만의 입은 식사 때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주제는 흥미로웠다. 행상인을 하면서 여러 군데 돌아다닌 이야기였다. 한 마을에만 있었던 로이는 그 이야기를 무척 흥미롭게 들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는 기억해두었다.
 식사가 끝나고 땔감거리를 더 주워왔다. 둘이서 주우니 금방 수북이 쌓였다. 자다가 주우러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잘 때가 되지 배크만이 마차로 갔다. 짐칸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고 왔다. 로이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벨로독 가죽 아닙니까?”
 “역시 헌터라 그런지 알아보는구만.”
 “뒤에 실린 게 그거였습니까?”
 “내가 말 안 했나?”
 배크만은 천과 가죽을 넘겨주었다.
 “천을 깔고 가죽을 덮으라고. 따듯할 거야.”
 “고맙습니다.”
 “용병 생활을 하면 이런 호사는 없을 걸세. 들고 다니기엔 부피가 너무 크니까. 용병들이 괜히 망토를 걸치고 다니는 게 아니야. 잘 때 깔고 자거나 덮고 자려고 하는 거라고. 자네도 하나 장만해두게.”
 배크만이 잠자리를 다 피고 다시 마차로 향했다. 로이도 따라갔다. 무기를 챙기기 위해서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배크만도 쇠뇌를 챙겼다. 로이도 검은 놔두고 쇠뇌만 챙겼다. 단도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둘은 무기를 챙기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왔다.
 “불침번을 정하자고. 두 시간씩 돌아가면서 서는 거로 하지. 누가 먼저 설 텐가?”
 “음.”
 로이는 잠시 고민했다.
 배크만은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았으면 사실대로 이야기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람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자고 있을 때 갑자기 공격할 수도 있다. 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린아이 손가락 꺾기보다 쉬우니까. 그것을 노리고 태워준 것일 수도 있다.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고민을 마친 로이가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자겠습니다.”
 “그러게나.”
 로이는 잠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숨을 일정하게 내쉬었다. 코 고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는 척하는 것이 티가 날 것 같았다.
 신경이 온통 배크만 쪽으로 집중되었다. 배크만이 금방이라도 단검을 들고 다가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됐을 때 어떻게 싸울 것인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배크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로이는 바짝 긴장했다. 허리춤에 있는 단도를 꽉 움켜쥐었다.
 “로이!”
 로이는 눈을 번쩍 떴다. 배크만이 쇠뇌를 들고 서 있었다.
 “교대 시간이네.”
 로이는 몸을 일으켰다. 배크만이 뭔가를 건넸다. 모래시계였다.
 “첫날이라 깊이 못 잤나 보구먼. 바로 눈뜨는 걸 보니. 그게 다 떨어지면 두 시간이 지난 거네.”
 배크만은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그리고 졸면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이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왠지 배크만을 의심한 것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두 시간 동안 뭘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법 연습이다. 아까 불을 피울 때는 확실히 오전보다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연습할수록 실력이 느는 것이 보였다. 단 하루 만에 이룬 성과였다.
 이번에는 실제로 마법을 사용했다. 재밌었다. 맨손으로 불을 만들어 내는데 재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습하면 불을 움직이거나 크게 만들 수도 있을 거란 기대감도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다 보니 갑자기 배가 쿡쿡 쑤시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때는 잠시 쉬었다. 쉬고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두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로이는 배크만을 깨워 교대했다.
 잠은 또 오지 않았다. 잠에 빠지면 배크만이 공격해 올 것 같았다. 그러고 있는 사이 다시 교대 시간이 왔다.
 다시 불침번을 섰다. 다시 마법 연습을 했다. 다시 두 시간이 지나갔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켰다. 배크만을 깨울 시간이었다.
 결국, 로이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 7.놀
 
 아침은 어제 먹다 남은 수프였다. 로이는 쭈그려 앉아 수프를 퍼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배크만이 입을 열었다.
 “자네, 눈 밑이 검은데. 잠을 좀 설쳤나?”
 “그냥 첫날이다 보니 좀, 설친 것 같습니다.”
 “그 헌터인가 누가 쫓아올까 봐 그러는가. 그럴 걱정은 말게. 누가 자네를 성에서 봤다 하더라도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겠나. 설령 자네가 이 마차에 탄 것을 봤다 하더라도 어디로 갔는지 어찌 알겠나. 목적지는 내가 정하는 건데, 행상인이 목적지가 어디 있다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한 달 정도 처박혀있으면 포기할 거네. 듣고 보니 그 헌터가 부자도 아닌 것 같던데, 추격자를 고용할 돈도 없고, 스스로 추격할 수도 없을 거네. 이런 것도 다 돈이 있어야······.”
 로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걱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듣다 보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긴 했다. 의심했던 사람의 위로를 듣고 있자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아침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배크만은 떨어질 수도 있으니 마차를 꽉 잡으라고 당부했다. 로이는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실제로도 밤을 새운 적은 많다.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로이는 다시 머릿속으로 마법 연습을 했다.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아까워 해보려 노력했다.
 그때 배크만이 마차를 세웠다. 점심을 먹으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앞을 보니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마차를 돌리던 배크만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놀이네!”
 “놀이요?”
 배크만은 대답 대신 허겁지겁 짐칸으로 가 쇠뇌를 꺼내 장전을 시작했다. 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반응을 보니 마수나 몬스터인 모양이다.
 로이도 재빨리 짐칸으로 넘어가 쇠뇌를 꺼냈다. 동시에 배크만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쓰러진 나무 근처에서 허연 것들 몇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충 보니 나무 몽둥이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다행히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배크만 때문에 들뜬 가슴이 조금 안정되었다.
 “몬스터는 안 나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배크만은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조금 흥분한 듯 보였다.
 로이는 장전을 마치고 다시 질문했다. 놀이 어떤 몬스터인지 알아야지 상대하기가 수월하다.
 “놀에 대해서 말해주십시오.”
 “쉽게 생각해! 그냥 걸어 다니는 개야!”
 “약점은 없습니까?”
 “그냥 쏴!”
 배크만은 대답과 동시에 쇠뇌를 발사했다. 볼트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젠장!”
 로이도 놀을 조준했다. 거리를 생각해서 조금 위를 겨누고 발사했다. 놀 한 마리가 고꾸라졌다.
 “오! 명중했나!”
 배크만이 반색하며 외쳤다. 동시에 쇠뇌를 발사했다. 볼트는 놀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젠장!”
 그 사이 로이가 장전을 마쳤다. 다시 쇠뇌를 발사했다. 또 한 마리의 놀이 고꾸라졌다.
 로이는 침착하게 쇠뇌를 발사하고 장전하고를 반복했다. 쇠뇌를 실전에서 사용한 것은 처음이지만, 마수를 많이 본 경험 때문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배크만의 볼트는 전부 빗나갔다.
 결국, 놀은 전부 로이가 쓰러뜨렸다. 배크만은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많이 당황했던 모양이다. 역시 상인은 상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조금 안도가 되었다.
 단도를 뽑아들고 놀에게 다가갔다. 아직 살아있는 놈들이 있었다.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가까이서 본 놀은 정말 개랑 비슷했다. 물론 무기를 들고 걸어 다니는 개가 있을 리 없겠지만 말이다.
 로이는 놀의 머리 부분을 밟고 목을 단도로 찌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더 움직이는 녀석은 없었다.
 배크만이 마차 위에서 소리쳤다.
 “다 처리했나? 해체할 건가? 할 줄 아나?”
 “네. 해보려고요.”
 털이 수북한 것이 팔면 돈이 될 것 같았다.
 로이는 단도를 거꾸로 잡았다. 천천히 놀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배크만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 샌가 안정을 찾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죽이 상하지 않게 조심하게. 놀 가죽은 누린내만 잘 제거하면 괜찮은 가격으로 팔리니까. 또 이빨하고 발톱도 팔린다네. 그래, 상하지 않게······.”
 배크만의 말이 끝날 때 즈음엔 해체도 끝나 있었다. 처음이라 조심했던 탓인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두 번째부터는 조금 빨라졌다. 마지막 놀을 해체할 때는 이미 꽤 능숙해져 있었다.
 둘은 부산물을 마차에 싣고 출발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로이는 부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아마 배크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로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보통 이런 경우 부산물은 어떻게 나눕니까?”
 배크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보통은 잡은 사람이 모두 갖지. 해체를 한 사람도 몫을 챙기고, 또 그것을 나르는 사람도 몫을 챙기지.”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을 잡은 것도, 해체한 것도 자신이다. 결국, 배크만은 지금, 부산물을 나르는 값을 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놀 가죽 하나면 됩니까?”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로이는 배크만을 말없이 빤히 바라봤다. 누가 봐도 놀 부산물 중에 가장 비싼 부분이 가죽이다. 그것을 단지 마차로 옮겨주는 것만으로 주겠다는데, 더 요구할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다.
 배크만도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알겠네.”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무척 기분 좋았다. 몬스터가 공격해 온 것은 큰일이었지만,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수입을 얻었다.
 그 이후 마차는 지속해서 습격을 받았다. 하루에 거의 한두 번은 공격받았다. 첫날 공격받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덕분에 로이는 둘째 날부터는 편하게 잤다. 주변에 몬스터가 출몰하는 한, 하나보다 둘이 나으니까. 오히려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공격해온 몬스터는 모두 놀이었다. 주변은 완전히 놀 밭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한 무리의 숫자가 다섯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차를 멀리 세우고 침착하게 대응하면 별 무리 없이 잡을 수 있는 숫자였다.
 다만 싸움이 잦다 보니 결국 볼트가 바닥나서, 도중부터는 배크만 것을 대신 사용했다. 볼트가 다 비슷비슷해서 가능했다. 배크만도 이것까지 돈을 받지는 않았다.
 모든 싸움에서 로이는 큰 활약을 했다. 배크만도 운 좋게 한두 마리는 잡았지만 그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배크만이 로이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조심스럽게 변했다. 보여준 게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대로 로이는 배크만에게 무척 실망했다.
 쇠뇌 사용법을 알려줬는데 정작 자신은 잘 쏘지 못한다. 허울만 번드르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 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말한 것이 무색할 만큼 많은 습격을 받았다. 배크만은 예전에 왔을 때는 안 그랬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무래도 근처에 놀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단다.
 물론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용병을 고용했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힘든 며칠이 지나고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이제 하루만 더 버티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둘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불침번은 어떻게 할까?”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그러게.”
 배크만은 잠자리로 들어가 누웠다. 금방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배는 빨랐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고 한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로이는 배크만을 깨우지 않을 생각이었다. 즉, 잠을 안 자고 계속 불침번을 설 생각이었다.
 사실 배크만이 자신의 물건을 뺏기 위해 태운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심은 이미 거의 다 거둔지 오래다. 그럴 것 같았으면 첫째 날 밤에 공격했을 것이다. 첫째 날에는 몬스터가 공격해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변했다. 마차 짐칸에는 놀의 부산물이 잔뜩 쌓여있다. 저것이 탐이 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회는 오늘 밤뿐이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몬스터가 적어지니까.
 이런 이유로 그냥 맘 편하게 밤새우기로 한 것이다. 하루 이틀쯤 안 잔다고 안 죽으니까.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그것뿐이다.
 로이는 자리에 앉았다. 쇠뇌를 언제든지 쏠 수 있게끔 장전해두고 옆에 내려놓았다. 배크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코 고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안심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첫날에는 잠을 안 자서 꿈을 다시 안 꿨지만, 둘째 날부터 다시 꿈을 꿨다. 똑같은 꿈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에 조금 실망했었다. 돌이 조금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털어냈다.
 계속 꿈을 꾸고 있으니 아직 희망이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돌은 이미 할 일을 다 했다. 촌구석에 있는 소년에게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곳까지 데려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머지는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로이는 곧 마법 연습을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마법을 사용했다. 나중에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럴 때는 조금 쉬니 나아졌다. 그것을 계속 반복했다. 해가 뜰 때까지.
 밤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배크만이 몸을 일으켰다.
 “왜 안 깨웠나?”
 “깨웠습니다. 안 일어나시더라고요.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그냥 계속 섰습니다. 마지막 날이니까요.”
 “그렇군. 미안하네.”
 배크만이 모래시계를 건네받으면서 사과했다. 담담한 표정과 말투였다.
 둘은 아침을 육포로 때웠다. 마지막 날이니 마을에 도착하면 근사하게 먹자는 것이다. 로이도 동의했다. 물론 같이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배크만은 점심 전에는 도착할 것 같다고 말했다. 로이는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단도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예상대로 마차는 점심 전에 아히크 성에 도착했다. 습격은 없었다.
 로이는 성벽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디벨 성과는 크기가 비교도 안 되게 컸다.
 배크만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히크 성은 왕국 내에 있는 남작 영지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부유하지. 영주가 광산을 두 개나 가지고 있거든. 당연히 성벽이 크고 튼튼할 수밖에 없지. 안에 있는 건물들도 아주 멋지고 또······.”
 로이는 성에 정신이 팔려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배크만의 이야기보다 두 눈에 비친 광경이 더 강렬했다.
 마차는 성문에 멈춰 섰다. 배크만은 경비병에게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다. 경비병은 길을 비켜주었다. 그 모습이 무척 절도있게 보였다. 자연스럽게 디벨 성의 경비병과 비교되었다.
 마차가 성안으로 들어가서야, 로이는 마음을 놓았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지만, 그것은 긴장이 아닌 흥분 때문이었다.
 
 
 # 8.새로운 꿈
 
 배크만은 성문 옆에 있는 공터로 가 마차를 세웠다. 공터에는 이미 마차가 몇 대가 서 있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개중에 하나가 이쪽을 보고 손들었다.
 “어이! 배크만!”
 “오, 필립이 아닌가. 이거 오랜만이구만.”
 배크만은 마차를 세우고 그 무리로 향했다. 그사이 로이도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내렸다.
 몇몇 인부들이 배크만에게 다가갔다. 배크만은 이야기하다 말고 인부들에게 마차를 가리키며 뭔가 지시했다.
 인부들은 마차로 다가와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 짐에는 놀 부산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는 보수를 받고 바로 헤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부들이 놀 부산물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로이는 재빨리 배크만에게 다가갔다.
 “배크만 씨.”
 배크만은 이야기하다가 말고 로이를 소개했다.
 “자, 인사들 하라고. 여기까지 날 호위해준 용병이라네. 로이라고 하지.”
 “안녕하신가.”
 “반갑구만.”
 “안녕하세요.”
 상인들이 인사를 해오는 바람에 로이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호위는 왜 고용한 거야? 어차피 여기까지 오는데 뭐 별거 없잖나.”
 “그렇지 않다네. 이 사람이 없었으면 아주 끝장날 뻔했지.”
 배크만은 오는 길에 놀에게 습격당한 이야기를 했다. 상인들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거 큰일이군. 나도 디벨성에 들릴 생각이었는데.”
 “난 그냥 안 가야겠어. 어차피 별것 없지 않은가.”
 상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호위가 아주 고생했겠어. 이 친구는 입으로만 싸웠을 것 아닌가?”
 “소리만 빽빽 질렀을 게 뻔하지. 아마 혼자 싸웠을 때보다 배는 힘들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아주 실력 있는 용병이었구만.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이 사람들이! 뭐, 실력 있는 용병인 건 맞지.”
 배크만은 로이의 활약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연신 감탄을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반응 잘해주는 것은 상인 모두의 특징인가 싶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 일을 마친 인부가 다가왔다. 배크만은 수고했다며 코퍼 몇 개를 건넸다.
 덕분에 잠깐 이야기가 멈췄다. 그 사이를 노려 로이가 말을 꺼냈다.
 “배크만 씨.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왜 같이 점심 먹지 않고?”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는 상인들이 대신 이야기했다.
 “자네 같으면 자네랑 같이 식사하고 싶겠나. 수프 대신 침을 더 많이 먹을 텐데.”
 “그만 좀 하게. 뭐, 간다니 무척 아쉽구만. 그렇다면 정산을 해줘야지.”
 배크만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호위해준 것과 놀 부산물 값이네. 자네가 놀 부산물을 직접 팔기 힘들 것 같아서 대신 처리했네. 우리는 상인 길드에서 봐주니까 손해는 안 보거든. 한번 확인해보게. 아, 혹시 놀 부산물 가격을 확인해보고 싶으면 광장에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몬스터와 마수 부산물을 매매하는 상점이 있으니까, 거기서 확인해보고.”
 로이는 주머니를 받고 슬쩍 열어보았다. 실버와 코퍼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놀 부산물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들어있었다.
 “좀, 많은 것 같은데요?”
 “자네가 한 수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또 이것도 가져가게.”
 배크만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둘둘 말려 끈으로 묶여있었다.
 “이게 뭡니까?”
 “내 추천서네. 자네가 자고 있을 때 썼지. 그걸 용병 길드에 가져가면 용병패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걸세. 디벨 성문에서 있던 일이 또 일어나면 안 되잖나? 용병패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하거든.”
 배크만이 다가와 귓속말했다.
 “자네는 훌륭한 용병이 될 거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헤어질 시간인가. 다음에 만나면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알겠습니다.”
 로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대로 광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배크만이 말한 훌륭한 건물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광장에 도착하자 배크만이 말한 언덕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조금 걷다 보니 상점 하나가 보였다.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로이는 상점에서 나왔다. 조금 전보다. 더 복잡한 표정이었다.
 곧바로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았다.
 “여기 용병 길드가 어딨죠?”
 “저쪽으로 쭉 내려가시오.”
 “감사합니다.”
 로이는 행인이 시키는 대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과 방패 모양의 간판이었다.
 다시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았다.
 “여기가 용병 길드 맞습니까?”
 “그렇지. 용병이 되려고? 아직 어려 보이는데 할 수······.”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다. 뒤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했다.
 손에 있는 종이를 펴봤다. 알 수 없는 글이 잔뜩 적혀있었다. 맨 밑에는 사인이 있었다. 다시 끈으로 묶었다.
 로이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카운터에 서 있던 젊은 여자가 인사를 해왔다. 로이는 잠시 주저하다 카운터로 다가갔다.
 “용병 등록하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혹시 신분을 증명할만한 물건이나 소개서 같은 것을 가지고 있나요?”
 “여기요.”
 로이는 종이를 꺼냈다. 직원이 종이를 받고 펼쳤다.
 “상인 길드원의 추천서군요.”
 직원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글을 못 읽으니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배크만과 다른 상인들의 대화나 놀 부산물의 가격으로만 보면 이미 답은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또 몰랐다.
 직원이 종이를 돌려주었다.
 “등록금은 50코퍼입니다.”
 “등록금이 있어요?”
 심지어 비쌌다.
 “물론이죠.”
 직원은 등록을 하면 좋은 점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로이는 하는 수 없이 돈을 꺼내 건넸다.
 직원은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건물 안을 둘러봤다.
 별 대단한 것은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게시판뿐이었다.
 게시판으로 향했다. 종이 몇 개가 붙어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의뢰를 받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직원이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목패가 들려있었다.
 “목패에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처음에는 다 목패에요. 실적이 쌓이면 동패로 바꿔드릴 거예요.”
 직원은 동패를 얻기까지 보통 이삼 년이 걸린다는 말과 용병 백 명당 겨우 한 명만이 동패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말이 있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후 직원은 목패와 종이에 이름과 생김새 등을 적고 나서야, 목패를 건네주었다. 목패를 받고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여관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배를 채우고 빨리 자고 싶었다. 너무 피곤했다. 또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배크만은 그냥 수다스러운 사람이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꾸 배크만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물론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 불편함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혹은 나중에 배크만과 다시 만났을 때 식사를 하면서 풀면 될 것이다. 그가 자신과 식사를 하고자 할지 모르겠지만.
 길을 걷다가 여관의 것으로 보이는 간판을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봤다. 창밖은 아직 어둑어둑했다. 바닥은 푹신했다. 침대 위였다. 여관방이었다.
 손가락에 무엇인가 닿았다. 돌이었다. 돌을 집어 들고 입을 맞췄다. 그러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꿈을 꿨기 때문이다. 새로운 꿈이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좀 전까지 생생했던 꿈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노인은 손을 휘적휘적 젓다가 불을 피웠다. 여기까지는 같았다. 그다음은 달랐다.
 불은 점차 그 크기를 부풀렸다. 마지막엔 천장에 닿을 만큼 커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후에는 역시나 노인이 배를 쿡쿡 찌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돌이 이번에는 불을 키우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로이는 곧바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양손을 움직였다.
 “파이어.”
 손에서 불이 피어났다. 이번에는 배에 집중했다. 노인이 찌른 부분을 떠올렸다. 머릿속으로는 불이 커지는 상상을 했다.
 불이 계속 일렁거렸다. 조금 커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확실히 조금이지만 커졌다.
 계속 불을 보고 있자니 문득 어렸을 때 기억이 났다. 젝스에게 거둬지기 전 길에서 모닥불을 발견했었다. 꺼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나뭇가지를 주워다 넣었었다.
 그때도 이렇게 불이 일렁이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던 기억이 났다. 날이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아마 그 불이 없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불이 일순 사라졌다. 집중이 흐트러진 탓이다. 다시 마법을 사용해 불을 피웠다.
 로이는 다시 불의 일렁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배가 쿡쿡 쑤시고 살짝 어지러웠다. 마법을 너무 많이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불을 꺼버렸다.
 주위는 어느새 환해져 있었다. 마법 연습을 하느라, 해가 뜬 것도 몰랐다. 그 사실이 오히려 로이를 만족스럽게 했다. 제대로 집중해서 연습했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일단 아침을 먹고 오기로 했다. 돌부터 챙겼다.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침대 아래에 있는 가방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코퍼를 몇 개 꺼냈다. 머리맡에 있는 방 열쇠도 챙겼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는 이미 식사를 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접시를 치우던 여관 주인이 알은 척을 했다.
 “잠은 잘 잤나? 안 일어나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좀 피곤해서요.”
 로이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여관 주인이 다가왔다.
 “뭐 먹을래?”
 “으깬 감자랑 치즈, 햄이요. 따듯한 우유도요.”
 로이는 어제 먹은 저녁을 떠올리며 말했다. 한번 주문했던 것이라 이번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래.”
 여관 주인은 주문을 받고 사라졌다. 곧 음식이 테이블을 채웠다.
 로이는 천천히 음식을 음미했다. 어제처럼 제대로 맛도 느끼지 않고 허겁지겁 먹을 순 없었다. 하지만 맛은 곧 사라지고 생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원래는 일어나고 곧바로 용병 길드에 갈 생각이었다. 배크만을 호위했던 것처럼 상인을 호위해 다른 도시로 가는 일이 없나 알아보기 위해서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제고 젝스가 쫓아올 것 같아서다. 최대한 멀리 도망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룻밤 새 생각이 바뀌었다.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돌이 새로운 꿈을 주었다. 꿈이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꿈을 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일을 시작하면 마법 연습할 시간이 없다. 이전처럼 불침번을 설 때 마법을 연습하는 좋은 상황이 또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에 새로운 꿈에서 배운 것을 다 익히지도 않았는데, 또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면 큰일이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동시에 배크만이 한 말도 생각났다.
 디벨 영지 주변에 있는 영지만 해도 꽤 많다. 개중에 자신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어떻게 알고 쫓아올 것인가. 또 배크만이 그러지 않았던가. 찾는 데는 무척 많은 돈이 든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젝스는 저축을 하지 않는다. 그리 많은 돈이 있을 리 없다. 추격자를 고용할 돈도 없고, 일을 포기하고 직접 추격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또 이동하는 것보다 조용히 처박혀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게 나을 것이다. 생각이 굳어져 확신이 되었다.
 결국, 당장 도망가는 것을 포기했다. 마법 연습이 우선이었다. 젝스가 쫓아오면 가슴에 볼트를 박아주겠다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았다.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돌이 만져졌다. 돌을 꽉 움켜쥐었다. 모두 돌 덕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여관 주인에게 사흘 치 숙박비를 치렀다. 일단은 사흘 동안 처박혀서 마법만 익힐 생각이었다.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걸어 앉아 마법을 사용했다. 손에 불이 치솟았다. 다시 불의 일렁임에 빠져들었다.
 
 
 # 9.새로운 꿈(2)
 
 마법 연습은 순조로웠다. 불은 점점 그 덩치를 키워갔다. 조금씩이지만 발전하고 있었다.
 로이는 종일 마법 연습을 했다. 이때만큼은 젝스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지 않았다. 불길은 걱정마저 태워버렸다.
 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마법으로 만든 불이 생각보다 뜨겁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따듯한 정도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실제로도 화상을 입는지 궁금했지만, 시험해볼 용기는 없었다. 굳이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았다. 화상을 입으면 고생한다. 치료비만 나갈 뿐이다.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대신 또 다른 사실을 알았다. 불이 뜨겁지 않은 것은 손에 있을 때만 그런 것이고, 다른 곳으로 옮겨 붙으면 평범하게 뜨거워졌다. 신기했다.
 연습하는 동안 점점 시간이 흘렀다. 로이는 점점 아히크 성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처음에는 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 그러니까 가슴이 쿡쿡 쑤시고 머리가 어질어질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전에 마차를 타고 올 때처럼 머릿속으로라도 마법 연습을 하고 싶었지만,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다가, 머리로만 하려니 재미가 있을 리 없었다. 이전에 됐던 것이 신기할 정도다.
 결국, 로이는 밖으로 나갔다. 혹시 몰라 쇠뇌도 챙겼다. 젝스와 마주칠 것을 염려해서 말이다. 설마 성안에서 공격하진 않겠지만, 또 몰랐다.
 그렇게 며칠 지나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성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마음 편할 줄 몰랐다.
 아히크 성은 크고 멋진 건물도 많았다. 또 상점도 많았다. 가판대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나다니면서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다 광장에 도착하면 앉아서 햇빛을 쐬곤 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했다.
 세상에 참 여러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헌터 마을에만 처박혀 살았더니, 우락부락한 남자들과 억센 여자들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가죽과 리넨 천으로 만든 옷만이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세상에는 여자보다 더 호리호리한 남자도 존재했다. 치마를 입는 남자도 있었다. 안경 쓴 사람도 처음 봤다.
 예쁜 여자도 무척 많았다. 어릴 적 남몰래 좋아했던, 지금은 결혼해서 마을을 떠난 직스의 딸 제이니는 이제 보니 선머슴이나 다름없었다. 바람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개미허리의 여자들이 하늘거리며 걸어 다녔다.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더 신기한 것은 난쟁이를 본 것이다. 말로만 듣던 드워프였다. 너무 신기해서 쫓아가기까지 했다. 드워프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드워프는 모두 대장장이라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옷차림을 보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히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성직자, 귀족 혹은 부유한 상인, 기사, 대장장이, 학자, 귀족의 딸, 농부, 용병 등등.
 특히 멋지고 알록달록한 옷을 보고 있자면, 부럽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몇몇 부유해 보이는 여자들이 입고 다니는 옷은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보였다. 돈에 여유만 있었어도 당장에 사 입었을 것이다. 보드라워서 잠도 잘 올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음 한편엔 젝스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점점 무뎌졌다. 어쩌면 추격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럴 것이다. 짐작이 확신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마냥 돌아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용병 길드에도 매일 같이 들렸다. 용병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실제로도 적당히 할 만한 일이 있나 알아보기도 했다. 점점 줄어드는 돈을 보고 있자니 불안해진 탓이다.
 덕분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이 성에서 목패를 가진 용병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애완용 고양이 찾기, 쥐 퇴치, 팬던트 찾기, 떼인 돈 찾아주기, 무거운 돌-진짜 컸다- 옮겨주기 등등. 전부 목패 용병들이 할 수 있는 의뢰 목록이었다. 심부름 수준이다.
 간혹 근처 마을에서 몬스터 퇴치 의뢰가 들어오긴 하지만, 그마저도 동패 용병이 우선이었다. 물론 퇴치 대상도 고블린이나 놀, 늑대, 곰 정도였다. 지극히 평화로운 성이다. 장점이기도 했지만, 용병에게는 단점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헌터 마을이 나았다. 근처에 마수가 나오는 숲이 있으니까. 언제든지 가서 마수를 잡으면 돈을 벌 수 있다. 괜히 마을이 그 근처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다.
 여하튼 잡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돈이라도 많이 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시간 낭비였다.
 물론 그래도 용병 길드를 방문하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어느새 직원과 친해진 것이다. 아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그전에는 여관 주인하고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로이도 남자인지라 우락부락한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좋았다.
 이렇게 나름대로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불의 덩치가 성인의 머리통보다 조금 더 커졌을 때, 그 불로 여관 천장에 불이 옮겨 붙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밖으로 나가서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새로운 꿈을 꾸었다.
 
 “음.”
 로이는 눈을 감았다. 언제나 그렇듯 조금 전까지 생생했던 꿈이 다시 그려졌다.
 노인이 이전에는 불의 크기를 조절했다면, 이번에는 색을 바꾸었다. 불은 점차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꿈이었지만 직감적으로 불이 더 뜨거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불을 더 뜨겁게 만드는 방법임이 틀림없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그렇듯 배 부분을 쿡쿡 찌르는 것으로 끝났다.
 눈을 떴을 때, 로이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이 신비의 정점에 있는 마법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새로운 꿈을 언제 꾸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처음에 마법을 익히자마자 도망쳤으니, 일주일이 안 돼서 새로운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열흘이 안 돼서 새로운 꿈을 꾸었다.
 로이는 돌이 주기적으로 새로운 꿈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가르쳐준 마법이 익숙해지면 새로운 꿈을 주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물론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가르쳐준 마법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전자라면 익혀야 할 것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가르쳐주는 것은 남김없이 먹어치워야 한다.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는 숲의 괴물 트롤처럼.
 정신 차리고 마법 연습을 시작했다. 손에 불을 피워 그 색을 푸른색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조금이지만 푸른색을 띤 것이다.
 신기하게도 푸른색의 불은 커다란 불보다도 뜨겁지 않았다. 역시나 조금 따듯한 정도였다.
 혹시나 싶어 성 밖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태워봤다. 나뭇가지는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놀라서 나뭇가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다시는 시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손이 없으면 마법사고 뭐고 물거품이다. 손짓을 못 하면 마법도 못 사용하니까.
 여하튼 이 일만 빼면 축하할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하는 마법 실력과는 반대로, 주머니는 나날이 말라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이 고양이를 찾는 일이건, 나무를 옮겨 심는 일이건 간에.
 로이는 점심을 먹고 용병 길드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막상 마음먹고 갔는데, 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다.
 여관 주인 체트가 말을 걸어왔다.
 “왜, 표정이 어두워?”
 “할 만한 일이 없어서요.”
 로이가 테이블에 앉아 중얼거렸다.
 “저런. 기다려봐라.”
 체트가 주방으로 가서 우유 한잔을 들고 왔다.
 “마셔라.”
 “돈 없어요.”
 “그냥 마셔. 주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고 뜨거운 것이 들어가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체트가 맞은편에 앉았다.
 “일을 구하고 있다고?”
 “네.”
 “난 또 맨날 햄에 치즈만 먹길래 부자인 줄 알았는데.”
 “부자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나요.”
 로이는 팔을 들어 보였다. 팔꿈치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쌀쌀해진 탓에 그곳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와서 무척 신경 쓰였다.
 “꿰매면 되잖아.”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여하튼 일을 구하고 있다고? 길드나 한번 가보지. 용병이라며.”
 “조금 전에 갔다 온 참이었어요. 잡일밖에 없더라고요.”
 “저런, 고급인력이셨나?”
 체트가 비꼬듯 말했다. 로이는 약간 발끈했지만 참고 대답했다.
 “적어도 숙박비는 벌 수 있어야죠.”
 “쇠뇌를 팔아.”
 체트는 무슨 좋은 방법이랍시고 손뼉을 쳤다. 로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부가 배고프다고 낚싯대를 파는 것 봤어요?”
 “가지고 있어 봐야 쓰지도 않는 거는 그냥 팔아버리는 게 이득이지.”
 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체트는 해결책을 주기보다 놀리기 위해 온 것 같았다. 더 말해봐야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향했다.
 “가냐?”
 “피곤해서요.”
 누구 때문이라는 뒷말은 생략했다.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아무래도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뭐라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한 이틀 걸으면 놀을 마지막으로 마주친 곳이 나올 것이다. 놀 부산물은 꽤 돈이 된다.
 물론 혼자서는 무척 위험할 것이다. 또 늑대라도 만나면 끝장이다. 놀과 달리 빨라서 도망칠 수도 없다. 그래도 별수 없다. 고양이보다는 차라리 늑대가 나았다.
 생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용병 길드에 갔다 올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진짜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체트가 카운터에서 불렀다.
 “로이.”
 “왜요.”
 “이리 와봐. 빨리.”
 로이는 무시하고 가려다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왜요.”
 “너 성에 가서 일할 생각 없냐?”
 “성이요? 무슨 일인데요.”
 “네가 싫어하는 잡일. 용병은 자존심 상해서 못하는 잡스러운 일.”
 로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체트는 말을 참 얄밉게 하는 재주가 있다.
 “무슨 일인지는 말해줘야죠. 청소라든가 자신 없는데······.”
 “그런 건 하녀가 한다. 남자는 힘쓰는 일을 시키지.”
 “나이 제한 같은 건 없나요?”
 “나도 몰라. 애나가 잠깐 들렀다 갔을 때 들은 거야. 일손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더라고. 나보고 어쩌란 건지.”
 애나는 체트의 아내다. 남작 성에서 일한다고 들었다. 어릴 때부터 일해서 지금은 하녀 장이라고 했다. 체트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한다.
 로이는 잠시 고민했다. 밖에 나가서 놀을 잡아 부산물을 가져오는 것과 성에서 일하는 것을 비교해봤다. 길바닥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성에서 일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돈이야 딱 지낼 정도만 벌면 된다.
 중요한 것은 성에서 일하면서 마법 연습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용병 자존심은 개뿔도 없다. 용병이 되고 제대로 된 일 한번 안 해봤는데 무슨 용병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마법이었다.
 만약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면 그만두면 된다. 체트가 조금 난감해지겠지만, 로이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럼 체트가 말 좀 해줄래요?”
 “그래. 대신 계속 우리 집에서 머무는 거다.”
 “일만 잡아주면 그렇게 할게요.”
 “좋아.”
 체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로이도 속내를 숨기고 같이 웃었다.
 
 
 # 10.내성
 
 체트는 곧바로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 날 점심, 애나가 가게로 들어왔다.
 체트가 로이를 소개했다. 로이가 슬쩍 인사했다. 이전에 애나를 본 적 있어서 얼굴은 알고 있었다.
 로이를 본 애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인데 더욱 차갑게 보였다.
 체트는 소개 이후 주방으로 들어가서 안 나오고 있었다. 애나와 둘뿐이었다.
 모든 상황이 불편했다.
 애나는 말없이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로이. 로이라고 했죠?”
 “네.”
 “어디 출신이죠?”
 로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디벨 성이요.”
 “왜 이곳에 왔나요?”
 “용병이 되려고요.”
 “용병인가요?”
 “네.”
 “용병이 왜 성에서 일하려고 하나요?”
 로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정을 다 이야기하기에 좀 복잡했다.
 “아직 실력이 안 돼서 그래.”
 어느새 밖에 나와 있는 체트가 대신 대답했다. 애나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넘어갔다. 설명하기 귀찮았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있나요?”
 로이는 목패를 꺼냈다. 애나가 목패를 받아서 보고 다시 돌려주었다.
 “이걸로는 부족해요. 신원이 확실해야 해요.”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애나. 좋은 애라고.”
 보다 못한 체트가 한마디 했다.
 “당신은 조용히 해요.”
 애나의 한 마디에 체트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로이는 체트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자신이 아는 남자 중에 제일 한심했다. 여자에게 이토록 눌려 사는 남자는 본적이 없다. 적어도 헌터 마을에서는.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만한 건 없나요? 당신이 문제를 일으키면 추천한 저까지 문책받아요.”
 로이는 그냥 때려치울까 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예전에 용병 길드에서 직원에게 돌려받고 넣어둔 것을 깜박했었다.
 종이를 애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이전에 의뢰를 받고 호위를 했을 때, 상인에게 받은 겁니다.”
 애나는 종이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잠시 후 종이를 다시 건네주었다.
 “당신, 글을 읽을 줄 아나요?”
 “아니요.”
 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타깝군요. 이 종이에는 당신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며, 뛰어난 사람인지 적혀있어요.”
 “아.”
 애나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좋은 말들이 쓰여 있는 모양이다. 다시 또 배크만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언제고 마법사가 되어 크게 돈을 벌면 보답하리라 생각했다.
 “이 배크만이란 사람에게 감사하세요. 덕분에 내가 당신을 고용할 마음이 들었으니까.”
 “합격입니까?”
 “네.”
 애나는 집사에게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집사가 고용에 있어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집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그럴 일은 거의 없어요. 제가 추천한 사람은 전부 고용돼요.”
 로이는 한시름 놓았다.
 “저는 성에서 무슨 일을 하나요?”
 “무슨 일을 잘하나요?”
 애나의 질문에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마수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성에 마수가 있을 리 없으니까. 만약에 있어도 병사들이 처리할 것이 분명하다.
 로이가 우물쭈물하자 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은 많아요.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니까. 적당한 일을 한번 찾아볼게요.”
 “예.”
 카운터에 있던 체트가 다가왔다.
 “여하튼 일하게 돼서 잘 됐다, 로이. 다 내 덕인 거 알지? 우리 가게에서 계속 머무는 거다?”
 “안 돼요.”
 대답은 애나가 대신했다.
 “뭐가 안돼?”
 “성에서 일하면 성에서 지내야 해요.”
 “그런 게 어딨어? 당신은 왔다 갔다 하잖아.”
 “저도 잠깐 시간 내서 오는 거잖아요. 그것도 오래 일해서 가능한 거고.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성 밖에서 지내면 필요할 때 없고, 제때 일을 할 수 없어요.”
 로이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자다가도 깨워서 일을 시키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마찬가지로 체트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당신이 노력하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애나가 일어나서 체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체트의 얼굴이 금방 풀어졌다.
 로이는 그것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헌터 마을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애나는 곧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체트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애나는 먼저 임금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예상대로 많지는 않았다. 다만 숙식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어서 일하기 전에 알아둬야 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작님을 만났을 때 해야 하는 행동,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언제부터 일 할 수 있나요?”
 “아무 때나요.”
 “그럼 지금 같이 가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로이는 곧바로 짐을 챙겨서 내려왔다. 체트가 떠나는 로이를 보며 아쉬워했다.
 “네가 가면 햄이랑 치즈는 누가 팔아주냐.”
 “종종 와서 먹을게요.”
 로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체트는 자주 오라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여관을 나와 둘은 내성으로 향했다.
 내성 가까이 갈수록 로이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멀리서 눈으로만 보던 내성으로 직접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구간에서 지내던 촌놈이 출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귀족의 행실은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귀족들이 평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들어서 알고 있다. 이곳은 호랑이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내성 입구에 도착했다. 경비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성문에 있는 경비병보다 더 절도가 있어 보였다.
 경비병 중 하나가 다가왔다. 애나는 로이를 내성에서 일하게 될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경비병의 눈이 자연스레 로이가 메고 있는 가방을 훑었다.
 “가방을 보여라.”
 로이는 가방을 건네주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애나를 쳐다봤다. 애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경비병들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행여나 돌을 가져갈까 걱정스러웠다.
 검사가 끝났다. 돌은 무사했다. 대신 쇠뇌와 검, 단검을 빼앗겼다. 성에서 일하는 데 무기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둘은 입구를 통과했다. 애나가 나중에 성에서 나갈 때 돌려주겠다고 했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내성을 걷고 있으니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해왔다. 그제야 애나가 고용인 중에서도 꽤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애나는 로이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무척 훈훈했다. 복도에서 자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닥은 전부 매끈한 돌로 되어있었다. 얼마나 잘 닦여있는지 얼굴이 다 비칠 지경이었다. 또 걸을 때마다 소리가 크게 울렸는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복도 벽에는 장식용 촛대와 그림들이 쭉 걸려있었다. 그것들을 구경하며 애나의 뒤를 쫓았다.
 애나는 1층 구석 방 앞에서 멈춰 섰다.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잘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로이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남작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고 곧 그 남자가 남작이 아니라 집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사 이름이 노엘이라는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봐라.”
 로이가 고개를 들어 집사를 쳐다봤다.
 집사는 로이의 위아래를 훑더니 딱딱하게 한마디 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
 “예.”
 로이는 대답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부터 남작님을 뵐 것이다.”
 집사는 남작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말해주었다. 요지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냥 지금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집사가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집사는 계단을 올라가 3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로이는 이곳이 남작이 있는 곳이라고 확신했다. 모든 문중에서 유일하게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사는 노크 대신 낮은 목소리로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뒤를 애나와 로이가 따랐다. 가방은 경비병에게 맡겨놓았다.
 로이는 들어가면서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귓가에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치 죄진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사가 남작에게 뭐라 뭐라 이야기했는데,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등을 세게 툭 하고 쳤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애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남작님이 고개를 들라고 하셨는데!”
 집사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 쳤다.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남작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남작은 책상에 앉아있었다. 상체밖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무척 뚱뚱해 보였다. 젖은 마치 여자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배도 마찬가지였다. 임산부처럼 책상 위로 불룩 솟아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권력과 부의 상징처럼 보였다. 위엄이 느껴졌다.
 남작이 웃으며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로, 로이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지켜보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로이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 답했다. 넙죽 엎드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남작이 목숨을 구원해준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없던 충성심까지 생길 판이었다.
 왜 평민들이 귀족들 앞에서 벌벌 떠는지 알 것 같았다. 쥐가 고양이 앞에서 꼼작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분명.
 셋은 방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다시 한 번 집사의 호통이 떨어져 내렸다. 찍혔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성에 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불편한 것 투성이였다. 차라리 밖에 있을 때가 마음 편했다.
 그렇다고 때려치울 수도 없었다. 그만둔다고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호통은 계속되었다. 아마 다른 하녀가 오지 않았으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집사는 하녀를 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다.
 애나랑 둘이 남았다. 위로는 없었다. 대신 성 이곳저곳을 소개해주었다.
 이때 로이는 이미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경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장소의 위치와 이름을 기억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들어가면 안 되는 장소는 확실히 기억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해가 어둑어둑해졌을 때 즈음에, 방을 배정받았다. 다행스럽게도 일은 내일부터였다.
 로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을 둘러봤다. 작은 방에는 오로지 작은 책상과 침대밖에 없었다. 그래도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더 좋은 것은 혼자서 방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곧 다른 고용인들이 들어오면 같이 사용하게 될 테지만, 당장은 혼자였다.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혼자 있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은 없었다.
 로이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자연스럽게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온통 잘못하고 혼난 기억밖에 없었다.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피곤했지만 할 것은 해야 했다. 마법 연습이다. 오늘 아침에 잠깐 한 것을 제외하면 종일 하지 않았다.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불 크기를 키우는 것과 뜨겁게 하는 것을 번갈아가며 연습했다.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안정되어 있었다.
 연습하다 보니 가슴이 뻐근해졌다.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다.
 가방에서 돌을 꺼내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피곤했던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방안은 금세 코 고는 소리로 가득 찼다.
 
 
 # 11.야그나
 
 다음 날, 애나는 로이에게 일을 주었다.
 “불 담당이요?”
 “그래요. 땔감을 만들거나 돌을 달구는 것이 일이에요. 사우나 아시죠? 남작님이 사우나를 좋아하세요. 지금도 주에 한번은 하시고, 날이 추워지면 하루에 두세 번도 하세요.”
 로이는 애나를 따라 내성의 한 허름한 건물로 이동했다. 어제 봤던 기억이 났다.
 건물은 작고 굴뚝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건물 옆에는 땔감으로 쓸 장작이 잔뜩 쌓여있었다.
 “앞으로 별일 없는 이상, 이곳이 근무처가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이때부터 이 창고에서 머물면서 일을 시작했다.
 로이는 불 담당이라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해놓은 일 같았다.
 로이의 하루는 간단했다. 한쪽에 항시 불을 피워놓고, 돌 따위를 달구면서 장작을 패는 것이다. 그러다 뜨거운 물, 혹은 돌이 필요하면 준비하고 건네주면 끝이었다. 물론 미리 불을 피우기 위해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가장 늦게 방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젝스 밑에서 있을 때도 이 정도는 했다.
 애나가 겨울에는 무척 바빠질 거라고 했지만, 당장은 무척 한가했기 때문에 마법 연습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다른 고용인들과도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렛카와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렛카는 여자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몸을 청결하게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젊은 처녀였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하루에 한 번 목욕한다. 매일 밤 달군 돌을 가져가기 위해 마주치니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렛카는 로이가 와서 무척 다행이라고 했다. 이전에는 밤늦게 직접 돌을 달구고 씻고 눕느라, 남들보다 한 시간 정도 잠을 손해 봤단다. 하지만 로이가 온 이후로 항상 뜨거운 돌이 준비되어 있으니, 그 시간이 무척 단축되었다고 한다.
 다른 고용인들도 로이가 편한 일을 한다고 시기하면서도, 이것만큼은 무척 좋게 생각했다.
 로이는 이런 그렛카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렛카랑 이야기하다 보면 은은한 비누 냄새가 풍겨오는데, 그 냄새가 그렇게 향기롭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로이도 영향을 받아 자주 목욕하게 되었다.
 이것 이외에도 좋은 소식이 있었다. 내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새로운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불을 크게 만드는 것, 불을 더 뜨겁게 만드는 것 다음으로 배운 것은 바로, 불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노인이 보여준 모습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노인은 불을 피우고 그 불을, 한 손에서 반대편 손으로 옮기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옮겨붙이는 것이 아니라, 불이 허공으로 이동했다.
 로이는 남는 시간에 매일 같이 그것을 연습했다. 그리고 연습한 지 이주가 채 지나지 않아 성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전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것들과 비교도 안 되게 어려웠다. 아무리 용을 써도 불은 손아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을 많은 연습시간으로 찍어 눌렀다. 연습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도 장작 패는 일을 마치고, 창고 안쪽에 틀어박혀서 마법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로이는 재빨리 양손을 움직여 불을 피워냈다. 그 움직임이 처음과 많이 달랐다. 처음에 딱딱했던 움직임과는 달리 부드럽게 변했다.
 아니, 뭉개졌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몇 가지 동작은 아예 생략해 버렸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변했다. 이렇게 해도 가슴에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그대로였다. 마법을 사용하는 데는 지장 없었다. 오히려 덕분에 마법을 더 빨리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는 안다. 손짓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슴의 꿈틀거리는 느낌이 중요했다. 손짓은 그 움직임을 인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로이는 양팔을 펼쳤다. 집중했다. 오른손에 있던 불길이 꿈틀거리다가 곧 반대쪽 손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불길은 그 중간 지점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이동했다. 반대편 손에 도착한 불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불은 중간에서 멈췄다가 이동하거나,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은 이미 허공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나갑니다!”
 재빨리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빨간 머리를 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작고 예쁘장한 소녀였다. 소녀는 가볍게 미소 짓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였다.
 물론 로이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지만 말이다.
 “로이!”
 “예, 예.”
 “왜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 농땡이 피운 거 아니야? 아빠한테 말해야겠다.”
 “아닙니다, 야그나님.”
 로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뒤통수로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고개 들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소녀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소녀가 손짓했다. 로이가 몸을 낮추었다. 소녀가 한 번 더 손짓했다. 몸을 더 낮추었다. 그제야 소녀가 다가와 귓속말했다.
 “마법 연습하고 있었지?”
 로이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들키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하필 남작의 딸에게. 그렇게나 조심했는데.
 남작에게는 자식이 둘이 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첫째는 이제 막 스물이 넘었는데, 기사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다.
 둘째는 바로 눈앞에 있는 이제 겨우 11살이 된 작은 소녀다. 남작은 이 작은딸을 끔찍이도 아꼈다. 귀족의 자식이라는 것과 별개로 로이가 꼼짝 못 하는 이유기도 했다. 남작은 딸이 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니까.
 “하고 있었지?”
 야그나가 재촉했다.
 “예.”
 로이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야그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 안 하고 농땡이 피우고 있었다는 거구나. 아빠한테 말하면 큰 벌을 받을 거야. 팔다리가 잘려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게 될 테지.”
 야그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종종 이런 무서운 말을 내뱉는다.
 로이는 야그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마법을 어디서 배웠냐는 질문에 진땀을 뺐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도 저런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다행히 정체를 모르는 노인에게 배웠다고 말하고 간신히 넘어갈 수 있었다.
 가르쳐달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그 이유는 최근에 들었는데 마법을 배우는 것은 자신이 할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이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겠지? 응?”
 “예.”
 로이도 이제는 안다. 귀족이라고 평민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오히려 아히크 남작은 잘해주는 편에 속했다. 농땡이 피우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지언정 그것으로 팔다리를 자를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런데도 로이는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그나가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모르니까.
 “남작님께는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내 말을 잘 들어야지. 이쪽으로 와.”
 야그나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이가 그 뒤를 따랐다.
 “자, 해봐.”
 들어오자마자 야그나가 재촉했다. 무엇을 재촉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로이는, 양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그나가 기대에 찬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로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파이어.”
 “다음다음.”
 야그나가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로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집중했다. 불이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다.
 “다음다음!”
 야그나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로이는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했다. 불은 커지고 작아지고, 푸르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이 정도는 이제 꽤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다음다음!”
 야그나는 처음에 보여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로이는 최근에 익힌 것을 선보였다. 아까 연습했던 것이기도 했다. 불이 허공에서 왔다 갔다 하자 야그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로이는 불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지만, 야그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뿌듯했다. 시작은 야그나가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해서 연습하기 시작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야그나의 반응으로 연습의 성과를 판단하고 있었다.
 야그나 덕분에 새로운 것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면, 조금 고맙기도 했다. 남작에게 말한다고 협박만 안 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어느새 가슴이 쿡쿡 쑤셨다. 로이는 손을 내렸다.
 “이제 못하겠습니다.”
 “아, 마나가 부족한 거지?”
 야그나는 아쉬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로이는 구석에서 평평한 돌을 들고 왔다. 야그나는 그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정작 치마 밑단이 바닥에 끌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그사이 로이는 작은 막대기와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나무 상자에는 모래가 얇게 담겨있었다. 그것들을 들고 야그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 이름부터 써봐.”
 로이는 차근차근 야그나의 이름을 썼다. 가장 먼저 배운 단어이기도 했다. 심지어 로이의 이름보다 더.
 시작 전에는 언제나 야그나의 이름을 쓰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느새 이것이 의식처럼 되어버렸다.
 야그나가 모래에 쓰여진 자신의 이름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했어. 이게 가장 중요한 단어야. 왜냐하면, 넌 내 비밀 기사니까. 마법사긴 하지만 기사이기도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예.”
 그 말을 듣고 있자면 조금 안심이 된다. 야그나가 다른 사람에게 로이가 마법을 익히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로이는 계속해서 야그나가 말한 단어를 모래에 써갔다. 몇 개 안 되는 단어였지만, 최선을 다해서 익혔다. 안 그러면 혼이 나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는 마법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야그나의 지론이다. 덕분에 이렇게 마법을 보여준 다음에는 항상 글을 배웠다.
 “틀렸잖아! 손 내! 이런 간단한 것도 못해?”
 야그나는 막대기를 뺏어서 로이의 손바닥을 때렸다. 틀리면 손바닥을 맞거나 종아리를 맞는다.
 “잘했어.”
 야그나는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하면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것들은 선생이 야그나에게 하는 것을 야그나가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전에 가르쳐 준 것에 대한 시험이 끝나면 새로운 단어를 가르쳐준다. 로이를 야그나가 가르쳐 준 단어를 열심히 따라 썼다. 손바닥 맞는 것도 싫었고, 야그나 말대로 마법사가 글을 모른다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야그나의 영향이다.
 또 이왕 배우게 된 것 열심히 하고 싶었다. 스스로 용기를 내거나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자, 좀 쉬자.”
 야그나는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를 끌어냈다. 주머니를 열자 쿠키가 나왔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로이는 재빨리 손을 씻고 왔다.
 둘은 쭈그려 앉아서 쿠키를 먹었다. 야그나는 선생에게 배운 것을 이야기했다.
 로이는 야그나와 함께 있는 시간 중, 이 시간이 제일 좋았다. 맛있는 쿠키는 입에서 살살 녹았고, 야그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밌었다.
 또 이때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었다. 잡다한 지식부터 고급 지식까지. 그리고 아까 야그나가 말한 것처럼 마나가 부족하면 가슴이 쑤신다는 정보처럼, 알아두면 유용한 것들이 많았다. 마나가 무엇인지도 야그나에게 배운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들은 것을 시험을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 야그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벌써 창밖이 어둑어둑해졌다.
 “가야겠다.”
 야그나는 미련없이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문밖으로 야그나와 하녀가 대화하는 소리가 신기루처럼 멀어져갔다.
 로이는 야그나가 가르쳐 준 단어를 한 번씩 써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 12.그렛카
 
 그렇게 다시 이 주란 시간이 흘렀다. 성에 온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혼자 방을 사용한다. 새로운 고용인은 오지 않았다. 로이에게는 좋고 애나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 사이 로이는 돌과 야그나에게 마법을 배웠다.
 돌은 로이에게 새로운 마법을 가르쳐주었고, 야그나는 로이에게 간단한 마법 지식을 알려주었다.
 로이는 창고 한가운데 앉아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돌, 그 위에 있는 작은 리넨 조각을 보고 있었다.
 “휴.”
 천천히 양손을 움직였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파이어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 리넨 조각을 보고 정신을 집중했다.
 “파이어.”
 시동어를 외치자 리넨 조각에 작은 불이 붙었다.
 “휴.”
 결국, 이 미터 밖에 있는 것도 성공했다.
 지금 하는 것이 최근 꿈에서 배운 마법이다. 아니, 정확히는 파이어 마법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야그나에게 배운 마법 지식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익힌 마법은 파이어 하나뿐이고, 지금 배우는 것들은 그것을 응용하는 방법이라고.
 이번에 익힌 것은 멀리 있는 것에 불을 붙이는 방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앞에 배운 것 중에 가장 어려웠다. 집중하지 않으면 마법은 발동도 되지 않고, 바로 실패해버린다.
 그래도 발전은 있었다. 처음에는 코앞에 있는 것도 실패하더니, 이제는 꽤 멀리 있는 것도 태울 수 있게 되었다.
 로이는 조금 쉬기로 했다. 마나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피곤했다.
 이전에 배운 방법 중, 불을 크게 하는 것과 뜨겁게 하는 것은 마나가 빨리 소모되지만, 이것은 마나 대신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는 것 같았다.
 물론 쉰다는 것도,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서 구석에 있는 나무 상자를 들고왔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오후 시험 볼 단어들이다.
 단어 다음에는 문장을 썼다. 최근에는 간단한 문장도 익히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있자니, 누군가 문밖에서 불렀다. 로이는 글 쓰다 말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앞에는 그렛카가 서 있었다.
 “그렛카.”
 “로이, 바빠?”
 말투를 보니 부탁할 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아뇨.”
 어차피 주말이라 할 일도 별로 없었다. 남작도 자리를 비웠다. 갑자기 사우나 준비를 해야 한다든가 할 일도 없다.
 “그럼 나 좀 도와줄래?”
 “뭔데요?”
 “시내로 나가서 뭐 좀 사와야 하는데, 같이 좀 가자.”
 로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요.”
 “겉옷 안 챙겨? 추운데.”
 그렛카가 로이의 차림새를 보고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안 추워요.”
 “정말?”
 “네.”
 “그럼 가자!”
 그렛카가 다가와 살짝 팔짱을 꼈다. 향긋한 비누 냄새가 풍겨왔다.
 로이는 조금 당황했지만, 팔짱을 풀거나 하지는 않았다. 웃음이 나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걷고 있자니 그렛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코 주위를 간지럽혔다. 왠지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그렛카를 향한 동경과 자신을 향한 질투가 틀림없었다.
 그대로 시내로 향했다. 둘은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주로 그렛카가 이야기하고 로이는 듣기만 했다.
 그렛카는 최근 남작이 기분 좋은 것 같다며 덩달아 좋아했다.
 남작이 기분 좋으면 고용인들도 기분이 좋다. 떨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갑자기 상이라면서 내려온 맥주도 아마 이것 때문인 듯싶다.
 그렛카는 이야기하다 말고 슬쩍 로이를 쳐다봤다.
 “그런데 로이, 키가 좀 큰 것 같다?”
 “그래요?”
 “응. 한 달 사이에 좀 큰 것 같은데······.”
 결국, 그렛카는 멈춰 서서 손을 머리에 대는 둥, 나름대로 재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렛카가 무척 귀여워 보였다.
 “역시 좀 컸는데? 만났을 때만 해도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작았는데, 이제는 훨씬 크잖아. 한 달 동안 얼마나 큰 거야?”
 “글쎄요. 바빠서 그런 건 전혀 신경 안 썼어요.”
 컸다고 하니 조금 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정말 큰 것 같다.
 처음에 그렛카와 눈높이가 같았는데, 이제는 내려다보고 있다. 키가 컸다는 사실보다, 그렛카보다 크다는 사실이 더 기분 좋았다.
 “바쁘긴 뭐가 바빠? 솔직히 가장 편한 일을 하면서.”
 그렛카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살짝 치켜뜨면서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도 귀여워 보였다.
 화는 곧 신세 한탄으로 바뀌었다.
 “내 손 좀 봐봐! 얼마나 빨래를 많이 했으면 자글자글 주름투성이이잖아! 울긋불긋하고 물집도 잔뜩 잡혔고! 만져봐 봐!”
 그렛카가 로이의 손을 잡고 제 손으로 가져갔다. 확실히 그렛카의 손은 거칠었다. 로이는 왠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잠깐! 너 뭔 남자 손이 이렇게 고와?”
 “뭐가 고와요? 굳은살투성인데.”
 괜히 부끄러워서 화를 내는 척했다.
 “아니, 손바닥 말고. 손등 말이야. 이제 보니 땡땡이만 쳤네. 그리고 피부는 또 왜 이렇게 좋아? 맨날 불 앞에만 있어서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가?”
 로이는 손으로 볼을 만져봤다. 듣고 보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살면서 피부는 신경도 안 썼고, 또 피부 좋다는 말도 처음 들어서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텐데 넌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다. 난 얼음장 같은 물에 빨래해야 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야.”
 “제가 뜨거운 물 줄게요. 그걸로 빨래해요.”
 “됐어! 그러다 걸리면 애나한테 무슨 치도곤을 당하려고.”
 그렛카가 투덜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렛카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로이도 굳이 놓지 않았다.
 무척 행복했다. 살면서 이렇게 여자와 이야기한 적이 몇 번이나 될까. 헌터 마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렛카는 신세 한탄을 멈추지 않았다. 한탄은 곧 그런 신세를 벗어나고 싶은 갈망으로 바뀌었다.
 “이런 날 구원해줄 어디 좋은 남자 없나?”
 그렛카는 슬쩍 웃으며 쳐다봤다. 로이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여기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삼켰다.
 그렛카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잡은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난 말이야. 나중에 꼭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할 거야. 얼마나 돈이 많아야 되냐면, 집에 빨래를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야 해. 빨래는 이제 진절머리가 나거든.”
 로이는 돈을 벌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떠오르는 것이 용병 길드에서 본 일들과 마수 사냥밖에 없었다. 보고 들은 것이 그런 것들뿐이니, 다른 돈 버는 방법을 알 턱이 없었다.
 “아, 요리는 내가 직접 할 거야. 난 요리를 아주 잘하거든. 특히 사과 파이 만드는 게 특기야. 너 먹어 본 적 없지?”
 “네.”
 “나중에 한번 만들어줄게. 동생들이 정말 좋아하거든. 진짜 맛있다!”
 “동생이 있어요?”
 “응. 5명.”
 그렛카는 그 뒤로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특히 집을 나올 때 막내가 갓 태어났는데 지금은 얼마나 컸는지 보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 이야기로 그렛카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있다는 것과 집이 이 근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가 거의 끝날 때 즈음에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렛카가 오자고 한 곳은 옷감을 파는 상점이었다. 가판대에 놓인 옷감들로 알 수 있었다.
 가판대에 서 있던 가게 주인이 그렛카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렛카 왔나?”
 “성에서 주문한 거 가져가려고 왔어요.”
 “잠시만 기다려.”
 가게 주인은 큰 보따리를 들고 나와 건넸다. 그렛카가 로이를 쳐다봤다. 같이 오자고 한 이유를 알았다.
 로이는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졌다.
 “로이 안 힘들어? 들 수 있어?”
 “괜찮아요.”
 실제로 헌터 마을에서 들고 다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무게면 조금 과장해서 종일 들고 다닐 수도 있다.
 “이제 보니 힘도 아주 세구나. 이 근육 좀 봐!”
 그렛카가 드러난 로이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괜히 힘을 더 주었다.
 “그렛카, 이번에는 걔냐? 좀 어려 보이는데.”
 가게 주인이 실실 웃으며 그렛카를 놀렸다. 그렛카가 살짝 인상 썼다.
 “아저씨! 말조심해요. 우린 아무 사이 아니에요. 그렇지?”
 그렛카가 로이 옆에 찰싹 붙어서 대꾸했다. 그 행동 때문에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이 마치 우리 특별한 사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긴 한데. 그냥 조심하라고. 레슬로프 나온 거 알고 있지? 눈에 불을 켜고 널 찾더라고.”
 그렛카가 살짝 몸을 떨다가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난 잘못한 거 없어요! 그 멍청이가 멍청한 짓 하다가 잡혀간 건데.”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난 조심하라고 말해 준 것뿐이야. 조심하라고.”
 주인은 이번에는 로이를 보며 말했다. 그렛카가 재빨리 로이의 옷을 잡고 끌었다.
 “빨리 가자. 더 여기 있을 필요 없어.”
 “네.”
 “하하! 또 오라고.”
 등 뒤로 가게 주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로이는 왠지 화가 났다. 그 화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그렛카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로이는 궁금한 게 있었지만 참았다.
 결국, 로이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레슬로프가 누구예요?”
 “있어. 날 따라다니던 멍청이.”
 그렛카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사귀었어요?”
 “아니! 그 녀석이 날 일방적으로 좋아해서 이것저것 선물했던 것뿐이야! 사기꾼이었어. 돈 많은 부자인 척했거든. 그래서 난 진짜로 부자인 줄 알고 이것저것 부담 없이 받은 것뿐이고.”
 “그렇군요.”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찝찝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잡혀간 거는요?”
 “아, 그것도 별것 아냐. 내가 사기꾼인 걸 알고 더는 선물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않으니까 화가 나서 날 때리더라고. 결국, 경비병에게 잡혀갔지. 그런데 풀려났나 보네.”
 그렛카는 조금 인상을 썼다. 레슬로프가 해코지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군요.”
 로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걸었다. 궁금한 점은 모두 알았고,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렛카를 좋아하긴 하지만, 상관없는 일에 끼어드는 것이 모양새가 더 이상할 것 같았다.
 둘은 다시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내성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에 그렛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 레슬로프랑 안 잤어.”
 “네?”
 “혹시 오해할까 봐. 네가 입이 가볍다는 말은 아니고.”
 “오해 안 해요. 어디 가서 말 안 해요.”
 “정말이야. 확인시켜줄까?”
 그렛카가 살짝 치마를 들쳤다. 로이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렛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야. 하지만 안 잤다는 건 정말이야.”
 “믿어요.”
 사실 잤어도 상관없지만, 정말로 아무 사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둘은 내성에 도착했다. 로이는 그렛카가 말한 곳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렛카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수고했어. 도와준 보답을 해야 하는데······ 남작님!”
 그렛카가 말하다 말고 허리를 숙였다. 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볼에 따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되지?”
 그렛카는 웃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로이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 차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 13.사우나에서
 
 “로이.”
 같이 훈련장 옆에서 잡초를 뽑던 데얀이 말을 걸었다.
 기본적으로 한가하므로 가끔 이곳저곳 불려가서 일을 돕곤 한다. 지금도 데얀이 잡초 뽑는 것을 도와주려고 와 있다.
 “왜요?”
 “너 야그나 님이랑 친하냐?”
 “왜요?”
 “하녀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요즘 둘이서 붙어 다니는 것 같다고.”
 “붙어 다니는 건 아닌데······.”
 붙어 다니는 건 오히려 그렛카다. 지난번에 같이 시내를 갔다 온 이후 종종 같이 나가곤 하니까. 물론 일로써 말이다.
 야그나랑은 붙어 다닌다기보다 그냥 자주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딱히 관계를 정의하기도 힘들고, 설명하기는 더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상황 그대로 마법을 보여주고 글을 배우는 관계 정도다. 야그나에게 물어보면 기사로 만들기 위해 교육 중이라는 말을 하겠지만 말이다.
 “야그나 님이 네가 일하는 창고로 들어가는 걸 하녀들이 봤다더라. 그것도 꽤 자주.”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솔직히 못 보는 것이 이상하다. 창고가 내성 구석에 있긴 하지만, 하녀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으니.
 “혹시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로이가 깜짝 놀라 대꾸했다. 데얀이 말한 이상한 짓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남녀 간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손장난이라든가.”
 “아니라니까요.”
 “아니면 다행이고. 나도 네 목이 나무에 걸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아니니까 데얀이나 이상한 소문 내지 마요.”
 로이는 목이 나무에 걸린다는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안 내도 하녀들이 내고 있다니까. 여하튼 조심해. 뭐, 네가 조심한다고 해서 소문이 안 나는 건 아니니까. 별수 없나.”
 그 말을 끝으로 데얀은 다시 잡초 뽑기에 열중했다. 반면에 로이는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별수 없다는 말이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야그나가 원망스럽고 하녀들이 원망스러웠다.
 “로이, 손이 놀잖아. 오늘 내로 이거 다 해야 한다고. 빨리 움직여.”
 로이의 손이 멈춘 것을 보고 데얀이 재촉했다. 다시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으로는 무슨 일이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든 생각의 결말은 하나였다. 목이 걸리는 것. 혹은 잘리는 것.
 이왕이면 잘리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이 매달리는 것은 너무 괴롭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어디선가 애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로이, 가서 사우나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데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우나 준비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사우나 준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냥 돌을 달구고 들고 가면 된다. 큰 돌을 들고 가는 것이 조금 힘들긴 해도, 딱히 어렵진 않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힘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귀족과 마주치는 것.
 사우나를 준비하면 남작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남작이 미리 사우나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계속 돌을 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귀족과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힘들다. 지금은 조금 적응됐는지 처음처럼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지금 만큼은 정말로 남작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남작이 소문을 들었을 것만 같다. 화가 난 남작이 뜨거운 돌을 집어 머리를 내려칠 것만 같았다.
 로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느새 창고에 도착했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손과 발은 재빨랐다. 늦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보통 사우나를 준비하라고 하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 하지만 종종 남작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다. 귀족이란 원래 제멋대로니까. 아무래도 많이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돌 몇 개를 집어넣었다. 달궈지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큰 돌 두 개를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철 두 개를 일렬로 올렸다. 다시 그 위에 불에 달굴 돌 몇 개를 올렸다.
 양손으로 재빨리 수인을 맺었다. 수인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파이어.”
 시동어를 외치자 손가락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파이어 마법은 눈감고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마음이 조급한 상태인데도 마법이 실패하지 않은 이유였다.
 손을 돌 아래로 집어넣었다. 집중하자 배 아래가 근질근질했다. 불이 순식간에 커졌다. 불이 순식간에 돌을 집어삼켰다.
 이렇게 돌을 굽기 시작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마법 연습도 할 겸 종종 했던 적이 있다. 돌을 굽기 위해서는 바닥에 누워야 해서 자주 하진 않지만, 급하면 가끔 한다.
 돌은 순식간에 벌겋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이 안정되었다. 잡생각이 사라졌다. 집중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남작이 물으면 침착하게 대답하면 될 것 같았다. 남작은 생각 없이 함부로 아랫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다. 잘못에는 합당한 벌을 내리는 사람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다. 잘 말하면 들어줄 것이다.
 생각이 정리될 때 즈음에는 불을 달구는 일도 거의 끝나있었다.
 로이는 불을 끄고 돌을 나를 준비했다. 작은 철 수레를 꺼내고 걸개로 돌을 옮겼다. 그리고 수레가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사우나실로 향했다.
 사우나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작이 와 있었다.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앉아있었다. 빨리 준비하지 않았으면 오래 기다렸을 것이다. 서두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작 옆에는 기사 둘도 같이 앉아있었다. 기사가 눈으로 서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로이는 일단 남작에게 인사부터 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남작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끝이었다. 로이는 살짝 고개를 들고 남작의 얼굴을 살폈다. 남작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리하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빨리 일어나 돌을 옮겼다. 이것으로 할 일은 끝났다. 나머지는 사우나 하는 사람들이 구석에 있는 물을 바가지로 퍼서 돌에 끼얹으면 된다.
 돌을 다 옮기고 다시 한 번 남작한테 인사하고 나왔다.
 그때부터 로이는 열심히 왔다 갔다 했다.
 창고로 돌아가 달궈진 돌을 수레에 옮기고, 다른 돌을 아궁이에 넣는다. 수레를 끌고 사우나로 온다. 돌을 바꾸고 다시 창고로 돌아간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남작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창고와 사우나실이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건물을 지을 때부터 계획하고 그렇게 배치해놓은 것일 테지만.
 로이는 다시 돌을 들고 사우나실로 갔다. 이번이 여섯 번째였다. 최근에는 유독 사우나를 오래 한다. 날이 추워져서일까.
 바람이 불 때마다 으슬으슬했다. 옷이 젖어서다. 돌을 갈러 사우나실에 들어갈 때마다 조금씩 젖는다. 돌을 구울 때마다 조금씩 마르긴 했지만, 다시 사우나실로 들어가면 또 젖는다.
 날이 추워지니 이런 것마저 곤혹스러웠다. 더 날이 추워지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남작은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중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들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듣지 않았다. 때론 모르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돌을 가는 동안 남작은 아무 반응이 없다. 한 번 더 돌을 들고 와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수레를 끌고 나가려는데 등 뒤로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이다.”
 “알겠습니다.”
 로이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가려는데 한 번 더 등 뒤로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같이하자. 할 말도 있고.”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물쩍거리자 옆에 있던 기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눈 옆에 있는 상처가 꿈틀거렸다.
 로이는 재빨리 옷을 벗어 구석에 두었다. 속옷만 걸치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몸 좀 좋은데.”
 기사가 로이의 몸을 보면서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기사의 몸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상처도 많았다.
 “앉아라.”
 “예.”
 남작의 명령에 재빨리 기사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름이 로이였나?”
 “맞, 맞습니다.”
 로이는 남작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존경심이 솟았다. 그래도 여전히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사우나는 처음 해보나?”
 “예, 예.”
 한 번만 대답하라는 기사의 말이 들려왔다. 정신 똑바로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좋지?”
 “예.”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이 뺨 위로 흘렀다. 몸이 따듯해지기는커녕 차갑게 식어갔다.
 남작의 질문은 계속됐다. 로이는 대답하는 내내 곤혹스러웠다.
 질문 자체는 별것 없었다. 주로 일하는 데 불편한 것은 없느냐는 것과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정도였다. 오히려 챙겨주는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불편한 것은 대답하면서 눈을 둘 곳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남작이 질문하니 대답할 때도 남작 쪽을 봐야 한다. 대신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 안 된다. 그래서 평소에는 눈을 살짝 깔고 가슴께를 응시한다.
 그런데 지금 남작은 아래만 가린 채 벌거벗고 있었다. 도저히 쳐다볼 수 없다. 귀족의 맨몸을 보는 것은 왠지 실례인 것 같았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냥 실례인 것 같았다.
 로이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 남작이 다시 질문했다.
 “요즘 야그나와 같이 어울린다고 들었다.”
 올 것이 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작의 말투는 자상했다. 그것이 더 소름 끼쳤다. 똑바로 대답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안 그러면 가만 안 두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조금 진정되었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답은 간단했다.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한 것이다. 딱히 나쁜 짓 한 기억은 없다.
 문제는 마법인데,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해서도 안 되고 말하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야그나밖에 없다. 야그나가 누군가에게 마법에 대해 말했을 리도 없다. 왜냐하면, 자신은 야그나의 비밀 기사니까.
 “맞습니다.”
 “같이 무엇을 하고 있지?”
 남작이 손바닥으로 이마에 땀을 닦으며 물었다.
 “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글?”
 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야그나가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가르쳐주기 시작했다고. 또 그 밖에도 수업 때 배운 것을 이야기해주기도 했다고. 마법이니 비밀 기사니하는 이야기는 뺏다.
 이야기하다 보니 도중부터는 횡설수설하게 됐지만, 남작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들었는데, 이 때문인가 보군. 이거 상을 내려야겠는데. 안 그러나?”
 “맞습니다. 남작님.”
 기사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을 받는단다. 무슨 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을 받는다는 사실보다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요즘 야그나가 잘 이야기 안 하려고 하는데, 잘 됐군. 앞으로 종종 이렇게 같이 사우나를 하지. 그때마다 야그나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해라. 알겠지?”
 “알겠습니다.”
 로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나가지. 돌이 식어서 춥군.”
 “알겠습니다.”
 남작과 기사 둘이 사우나를 나갔다.
 로이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것이 수증기 때문인지 긴장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몸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구석에 처박힌 옷을 집어 들었다. 축축했다. 그냥 입었다. 어차피 몸도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수레를 끌고 돌아가는데 찬바람이 불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돌아가서 불에 몸을 녹이고 싶었다.
 
 
 # 14.이 세상은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일 끝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책상에 작은 주머니가 놓여있었다. 단박에 남작이 약속했던 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머니에는 실버 몇 개와 코퍼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석 달 치 임금보다 많았다.
 큰돈을 받았지만,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긴 했지만, 뭔지 모를 꺼림칙함이 남았다.
 이런 꺼림칙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사라졌다. 남은 것은 돈뿐이었다. 기뻤다.
 그 이후 로이는 몇 번 더 남작과 사우나를 같이했다. 처음부터는 아니고, 그때처럼 마지막에만 같이했다. 다행히도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도 말을 잘 못 해서 더듬거린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지금 상황만 보면 적응 못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야그나에게 남작과 같이 사우나를 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야그나도 듣지 못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전처럼 관계가 유지됐다. 아는 단어와 지식이 나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로이는 양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배속에 마나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마법은 이미 완성되었다.
 “파이어.”
 시동어를 외치자 손가락에 불꽃이 치솟았다.
 수인을 맺고 시동어를 외치기까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수인은 단축할 대로 단축했다. 남이 보면 손 몇 번 휘적거리는 것으로 마법을 사용한 줄 알 것이다.
 불은 순식간에 그 덩치를 키웠다. 그러길 잠시 다시 작아졌다. 작아지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색도 변했다. 푸른 불길이 넘실거렸다.
 로이의 이마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불은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그 대신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꽃은 팔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렇게 가슴, 배, 다리, 발까지 몸 주위를 빙빙 돌면서 내려갔다.
 이마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발까지 내려간 불꽃은 다시 머리까지 빙빙 돌면서 올라갔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휴.”
 크게 한숨 한 번 내쉬었다. 집중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한숨이었다.
 로이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시선이 창고 구석으로 향했다.
 다시 양손을 움직였다.
 “파이어.”
 시동어를 외치자 수 미터 밖에 있는 리넨 천이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은 리넨 천을 잡아먹고 곧 사라졌다.
 “휴.”
 로이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마법에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성취감과 안도감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다.
 “휴우.”
 로이는 한 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한숨은 앞에 있는 것과 달랐다. 집중한 뒤 나오는 한숨도 아니었고, 안도감으로 인한 한숨도 아니었다.
 답답함 때문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앞에 배운 마법들은 이제 정말 잘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 달 동안 그것만 연습하면 누구든, 마법사라면 누구나 잘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달 동안 그것만 연습한 이유는 별 게 아니다. 새로운 마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은 멀리 있는 것을 태우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후, 새로운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물론 꿈은 계속 꾸었다. 노인은 여전히 꿈에서 멀리 있는 것을 태우는 마법을 선보였다. 그 모습을 한 달째 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돌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돌이 죽었다면, 꿈도 끊겼을 것이다.
 이런 희망과 절망을 품은 채로 한 달을 보냈다. 답답함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상태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주말 이 시간에 찾아오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야그나가 서 있었다.
 “야그나 님.”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로이의 얼굴에서 짜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성에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억제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안 그러면 큰일 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야그나가 창고로 들어오면서 투덜댔다.
 “여기 왜 이렇게 따듯해? 내방보다 따듯하잖아.”
 “남작님이 언제 사우나를 하실지 몰라서 불을 피워놨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어.”
 왠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법 보여드릴까요?”
 “아니, 됐어. 시험부터 보자.”
 로이는 말없이 글 도구를 가져왔다. 착잡했다.
 야그나가 마법을 보여달라고 안 한 지 이주나 됐다. 원인은 알고 있다. 계속 같은 마법만 보여주는데, 재미있을 리가 없다.
 몇 번은 실력 확인 차 해보라고 하긴 했지만, 이제는 귀찮은 모양이다. 보여달라고 안 한다.
 대신 글을 배우는 시간과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늘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로이는 글 도구를 가져오자마자 무릎 꿇고 한 문장을 썼다. 로이는 야그나의 종이자 기사다라는 문장이었다. 이전부터 야그나의 이름 대신 이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의식이기도 했다.
 야그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작하자.”
 야그나는 곧바로 진지한 얼굴을 했다. 천천히 어제 가르쳐준 단어를 읊기 시작했다.
 로이도 진지해졌다. 틀리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틀리면 혼쭐이 난다. 굵은 나뭇가지로 종아리를 맞는다.
 나뭇가지는 이전보다 훨씬 굵어졌다. 야그나도 점점 더 엄격해졌다.
 다행히 틀린 것은 없었다. 틀리지 않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잘했어.”
 로이가 머리를 숙였다. 야그나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렇듯 상은 이것이다. 벌과 비교하면 발전이 없다. 그래도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야그나는 새로운 단어와 문장을 알려주었다. 로이는 열심히 따라 쓰면서 외웠다.
 그것이 모두 끝나고 야그나는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먹을 것을 꺼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야그나라도 언제나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하필 안 가져온 날이다.
 로이는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짜증이 많이 난 날에는 단것을 먹으면 조금 기분이 풀리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오늘도 야그나는 어제에 이어서 니잔 왕국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최근에 야그나는 왕국의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역사 이야기를 하는 야그나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로이는 역사는 질색이었다. 전혀 흥미가 없었다. 왜 배우는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지난 삶에 즐거운 기억 따윈 없다.
 “로이.”
 정신 차리고 보니 야그나가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덜컹했다.
 혹시 인상을 찌푸렸나?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할까? 아니라고 해야 한다. 옛날 생각을 하다 그런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도 안 된다. 이야기를 안 듣고 딴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면 화를 낼 것이다. 화만 내면 다행이다. 종아리를 맞을 것이다. 종아리만 맞으면 다행이다. 남작에게 말할 것이다.
 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야그나가 남작에게 말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조금 침착하기로 했다.
 “로이.”
 야그나가 다시 불렀다.
 “예.”
 “너는 꿈이 뭐야?”
 야그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야그나는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긴장이 풀렸다.
 “꿈 말입니까?”
 “그래.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로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부자였다. 하지만 곧 야그나의 질문에 적합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다음 떠오른 것은 마법사다. 최근 새로운 마법을 익히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약에 마법사가 돈을 못 버는 직업이었다면 안 하려고 했을 것 같다.
 역시 세상은 돈이 전부다. 돈을 많이 벌어서 먹을 것 걱정 없이 살고 싶었다.
 결론은 나왔지만,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야그나에게 이런 대답을 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대답하지 않자, 야그나가 대신 대답했다.
 “나는 말이지 선생이 되고 싶어. 선생이 돼서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칠 거야.”
 야그나가 쭈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방에 선생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수업하는 그림이었다. 생각보다 그림을 잘 그려서 한눈에 알아봤다. 그림 그리는 수업도 받는다더니 정말인 듯싶었다.
 문득 최근에 엄격하게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 흉내를 낸 것이다. 맞는 것 같았다.
 로이는 야그나가 선생이 되는 상상을 했다. 아이들을 무릎 꿇리고 손바닥을 때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잘은 모르겠지만 절대 다정한 선생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울리긴 했다.
 “잘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
 야그나가 그림 그리다 말고 일어났다.
 “그래도 맞을 건 맞아야 해. 수업시간에 딴생각한 벌이야.”
 로이는 일어나서 종아리를 걷었다. 이만하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야그나가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종아리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고통이 지난 기억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젝스에게 맞을 때의 고통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잘못하면 정말 죽도록 맞았다. 그 고통을 떠올리니,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열 대 좀 넘게 맞았을 때, 야그나가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런 기분으로 더는 수업 못 하겠어.”
 야그나는 아예 수업이라는 말을 썼다. 완전히 선생 기분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썩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어울린다는 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내일부터는 조심해.”
 그 말을 남기고 야그나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로이는 주저앉아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조금 부어올라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나가자, 하녀 한 명이 서 있었다.
 “남작님이 사우나 하신대.”
 하녀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로이는 재빨리 사우나 준비를 했다. 미리 돌을 달궈뒀기 때문에 그냥 들고가기만 하면 됐다.
 돌을 수레에 싣고 사우나로 향했다.
 남작과 기사 셋이 사우나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진작 와서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도 꾸물거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이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도 몇 번 봤다고 이전보다는 덜했다.
 “남작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남작이 인사를 받는 것을 확인하고 돌을 날랐다. 계속해서 돌을 날랐다. 돌을 나르면서 생각했다. 오늘도 남작이 부르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다행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일곱 번째 왔다 갔다 했을 때, 예상대로 남작이 불러 세웠다.
 “그만하고 이리 오너라.”
 “예.”
 로이는 수레를 밖에 두고, 들어와 옷을 벗었다. 한 기사가 옆에 앉으라는 말을 했다. 그 기사 옆에 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오늘은 할 말 있느냐?”
 “있습니다.”
 “뭐지?”
 남작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로이는 조금 전까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꺼내 들었다.
 “야그나 님이 선생이 되고 싶어 합니다.”
 “선생?”
 “예.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셨습니다.”
 “역사?”
 “예.”
 더는 질문이 없었다. 슬쩍 보니 남작은 말없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는 기사가 입을 열었다.
 “선생은 무슨. 그런 고리타분한 일은 야그나 님께 어울리지 않지.”
 가슴이 덜컹했다. 당연히 남작이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아닐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만약 기사 말처럼 남작이 야그나가 선생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치도곤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야그나가 선생이 되고 싶어 한 이유는, 로이 때문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까 본 남작의 표정을 보면 거의 맞는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그나 님은 그런 것보다······.”
 “트라비크 경.”
 “예!”
 “조용히 좀 하시오.”
 “죄송합니다.”
 기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기사의 자세가 꼿꼿해졌다. 반대로 로이의 몸은 더욱 구부정해졌다. 고개가 자꾸만 수그러졌다.
 “로이.”
 “예, 예.”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잘 말해주었다.”
 “아닙니다.”
 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돌이 식었군. 그만 가지.”
 “예!”
 “예!”
 기사 셋이 동시에 대답했다. 장난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남작과 기사가 나가고 한참이 지났지만, 로이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지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일어나 뒷정리를 했다. 창고로 돌아가 몸을 닦고,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무척 피곤했다.
 침대에 눕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기사는 남작의 말 한마디에 꼼짝 못 했다. 그 대단한 실력-몸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을 가진 기사도 귀족의 말 한마디에 꼼짝을 못한다. 아까 내린 결론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 세상은 신분이 전부였다.
 
 
 # 15.상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소문을 들었다. 야그나가 왕국 수도로 간다는 소문이다. 정확히는 수도에 있는 기숙사 학교에 들어간다고 한다. 귀족 자녀들만 다니는 학교.
 로이는 그 원인을 자신이 남작에게 한 말로 생각했다. 물론 정말로 그런 것인지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야그나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수업은 더욱 엄격해졌다. 마치 떠나기 전에 최대한 많이 가르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루에 내주는 숙제의 양은 더욱 많아졌다. 외울 단어와 문장이 넘쳐났다. 종아리에도 불이 났다.
 로이는 마법을 연습하는 시간마저 줄여가며 공부를 했다. 야그나가 수도로 가게 된 것이 그녀에게 있어 좋은 일이든 아니든 간에, 그렇게 된 원인을 자신이 제공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름대로 뭔가 책임을 지고 싶었다.
 이별의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야그나가 당장 내일 출발한다고 했다. 입학은 초봄이었지만, 미리 가서 이것저것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야그나는 떠나지 전날까지도 수업했다.
 “공부를 한 거야, 안 한 거야?”
 야그나가 나뭇가지를 들고 로이의 종아리를 때렸다. 종아리는 이미 퉁퉁 부어있었다. 며칠째 계속 종아리를 맞은 탓이다.
 로이는 이를 악물었다. 숙제의 양이 너무 많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외워야 할 단어와 문장이 너무 많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야그나는 좋은 선생이다. 나쁜 것은 학생이다. 학생이 멍청해서, 가르쳐준 것을 다 소화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끔 놔두고 싶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러고 싶었다.
 야그나는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로이, 이리 와서 앉아.”
 “예.”
 로이는 야그나의 옆에 가서 앉았다. 야그나는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자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쿠키였다.
 “먹어.”
 야그나가 먼저 쿠키를 집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로이도 쿠키를 집어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았다.
 “나 내일 수도로 가.”
 “네.”
 “알고 있었어?”
 “예.”
 “그렇구나.”
 둘은 말없이 쿠키만 집어 먹었다. 창고에는 아삭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야그나였다.
 “너는 내 첫 번째 학생이야. 그걸 잊지 않도록 해.”
 야그나는 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내 건넸다.
 “내가 없더라도 공부 소홀히 하지 말고. 내가 가르쳤던 학생이 멍청하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무능한 것 같잖아.”
 “알겠습니다.”
 로이는 책을 받아들었다. 글을 배울 때 사용하는 책 같았다. 휙 넘겨보았다. 책 군데군데 손으로 쓴 듯한 글씨가 보였다. 야그나의 글씨였다. 어려운 단어에 대한 해석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따듯해졌다. 그동안 보지 못한 야그나의 진심을 살짝 엿본 것 같았다.
 “원래는 마법 책을 줄 생각이었는데, 못 구했어. 미안해.”
 “아닙니다.”
 로이는 조금 놀랐다. 야그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긴. 내가 좀 챙겨줬어야 했는데.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마법이 혼자서 익힐 수 있을 정도로 쉬운 학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거든? 당연히 윗사람인 내가 도와줬어야 했어. 미안해.”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말로만 비밀 기사니, 마법사니 하는 줄만 알았다. 자신의 마법 실력이 늘지 않는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귀족은 모두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귀족의 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마법 책을 받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윗사람의 일을 못 했으니, 주인이 될 자격이 없어. 비밀 기사는 오늘로써 끝이야.”
 야그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로이도 따라 일어났다.
 “공부 열심히 해. 안녕.”
 “안녕히······.”
 뒷말이 생각이 안 났다. 야그나는 살짝 웃고는 창고를 나갔다.
 로이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주저앉아 야그나에게 받은 책을 펼쳤다.
 책에는 이전에 배웠던 단어보다 조금 더 어려운 단어들로 가득 차있었다. 빈 곳은 야그나의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책을 덮었다. 괜히 심란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이런 로이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야그나는 다음날 수도로 떠나갔다.
 야그나가 떠난 이후, 로이는 약속을 잊기라도 한 듯 책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야그나가 사라지면서 공부에 대한 의욕도 사라졌다. 길거리에 있는 간판을 읽는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은 꾸준히 했지만, 이전만큼 간절함은 없었다.
 그래도 실력은 꾸준히 향상되었다. 사우나 준비를 하면서 자연스레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휘적거리는 손짓 몇 번으로 불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일상생활에도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남작이 사우나 도중 더는 부르지 않았다. 야그나가 없으니 당연했다.
 더는 남작 앞에서 벌벌 떨지 않아도 됐지만, 왠지 모를 실망감이 들었다. 어쩌면 남작처럼 높은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다른 고용인보다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끔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안다. 착각이었다. 남작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슴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함은 점점 더 커졌다. 그것과 상관없이, 로이는 한 살 더 먹었다.
 
 로이는 오랜만에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을 진작에 마쳤다. 내일은 주말이고 딱히 할 일도 없다. 누군가 부르기 전까지 계속 쉴 생각이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힘겹게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두드린 것은 그렛카였다.
 “로이.”
 “그렛카.”
 “할 일 없지?”
 “네.”
 “나랑 같이 시내 좀 나갈래? 할 일이 생겨서.”
 “지금이요? 급한 일이에요?”
 나가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진다.
 “응. 급해.”
 그렛카가 양손을 모으고 사정하는 시늉을 했다. 거절할 이유도,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요.”
 “고마워!”
 로이는 겉옷을 들고 그렛카를 따라 나갔다.
 내성을 벗어나자 그렛카가 춥다며 자연스레 팔짱을 껴왔다. 따뜻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네가 기운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지. 기분 전환이나 시켜주려고.”
 로이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렛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데 능숙했다.
 “농담이고 내일 손님이 온대서. 애나가 식료품 좀 사 오래. 가게에는 미리 얘기해놨어.”
 “누군데요?”
 “나도 몰라. 다른 귀족인가?”
 로이는 손님이 누군지 궁금했다. 일부러 이렇게 준비해야 할 정도면 꽤 중요한 손님 같았다. 그렛카 말대로 귀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렛카는 곧장 가게로 가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기분전환 시켜준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둘은 거의 해가 지기 직전에 가게로 향했다. 가게 주인은 미리 준비해놓은 보따리를 건넸다. 보따리는 상당히 크고 무거웠다.
 로이는 그것을 짊어졌다. 그렛카가 뒤쪽에서 받쳐주었다.
 둘은 다시 내성으로 향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깜깜해졌다.
 로이는 바닥을 보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었다. 어둡기도 했고, 짐이 워낙 무거웠다. 잘못해서 넘어졌다가는 큰일 난다. 넘어져서 보따리 안에 식품들이 엉망이 된다면, 로이도 그와 비슷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가는 것이 낫다.
 “로이, 발밑 조심해.”
 뒤쪽에서 그렛카의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가슴께에 큰 충격이 느껴졌다.
 둘은 보따리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로이는 곧바로 정신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은 온통 보따리에서 쏟아진 식품들 천지였다.
 그 옆에 그렛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렛카, 괜찮아요?”
 “어떡해!”
 그렛카는 대답 대신 울상을 지었다. 혼날 것을 걱정한 것이다.
 로이는 고개를 들었다. 가슴에 충격을 준 범인을 찾았다.
 눈앞에 남자 세 명이 건들거리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불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그렛카가 깜짝 놀라 외쳤다.
 “레슬로프!”
 “안녕. 그렛카. 만나기 참 힘들었어.”
 남자 중 한 명이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날 내버려두고 잡은 놈이 이깟 시퍼런 애송이였어? 실망인데.”
 “니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성에서 사용할 것들이라고!”
 “어떻게 하긴. 그건 이 녀석이 책임져야지. 이 녀석이 넘어져서 쏟은 것들인데.”
 남자가 손가락으로 로이를 가리켰다. 로이는 멍하니 있다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렛카가 소리 질렀다.
 “네가 때려서 그런 거잖아!”
 “내가 때리는 거 본 사람 있나?”
 남자가 능청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옆에 있는 남자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로이는 순간 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넌 죽었어.”
 남자가 중얼거리며 로이를 향해 다가왔다. 옆에 두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경비병!”
 그렛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남자가 가까이 와서 주먹을 휘둘렀다. 로이는 잠깐 마법을 떠올렸지만, 이내 같이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 넷은 순식간에 뒤엉켜 싸움을 시작했다. 로이는 맞으면서도 열심히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한 손이 세 손을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넘어져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그렛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요! 여기요!”
 쏟아지는 발길질도 멈췄다. 귓가에 남자 목소리가 또렷이 파고들었다.
 “이건 경고야. 또다시 그렛카 옆에 있었다가는 병신이 될 줄 알아라. 퉤!”
 몇 개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몇 개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로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렛카가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아?”
 “괜찮아요.”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피가 묻어나왔다.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침에 피가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이요?”
 뒤늦게 나타난 경비병이 물었다. 그렛카가 가까이 가서 흥분해서 설명해댔다. 로이는 그 사이 바닥에 널린 식품을 주워 담았다.
 “시발.”
 화가 났다. 모든 상황이 짜증났다.
 가만히 있는데 와서 때린 레슬로프라는 남자도, 그 원인이 된 그렛카에게도 짜증이 났다.
 하지만 가장 짜증이 나는 건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마법을 정작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마법에 쏟아부은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경비병은 별다른 조치 없이 돌아갔다. 그렛카는 레슬로프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깟 녀석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었다.
 로이가 대꾸하지 않자 그렛카도 입을 다물었다. 둘은 말없이 짐을 짊어지고 내성으로 돌아왔다.
 내성에 도착하고 그렛카가 헤어지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생각이 많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다음날, 로이는 일찍 눈을 떴다. 더 자도 상관없지만, 그냥 일어났다.
 씻기 위해 우물가로 향했다. 우물가에는 먼저 와서 씻는 사람이 있었다. 데얀이었다.
 “데얀.”
 “로이.”
 데얀은 씻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맞았어요.”
 “누구한테?”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
 데얀도 궁금하지 않은지 다시 씻기 시작했다. 로이도 그 옆에서 씻기 시작했다. 물은 무척 차가웠다. 데얀은 연신 차갑다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로이는 왠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속이 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데얀이 먼저 씻고 천으로 얼굴을 닦았다.
 “너 오늘 오는 사람 누군지 아냐?”
 “누군데요?”
 로이가 머리를 감으면서 물었다. 뒤통수로 데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사.”
 
 
 # 16.샌드위치와 위스키
 
 “마법사요?”
 “그래.”
 “어떤 사람인데요? 대단한 사람이래요?”
 “나도 몰라. 그냥 마법사라고만 들었어. 그래도 대단하긴 하겠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면 아침부터 이렇게 준비할 리가 없잖아.”
 “그렇겠죠?”
 다른 마법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좋은 정보를 알려줬으니 나 좀 도와줘. 네가 개구리로 변할 뻔한 걸 내가 구해준 거니까.”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예요?”
 로이는 천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너는 공주와 기사도 안 읽어봤냐? 거기에 나오는 마법사가 사람들을 개구리로 만들잖아. 네가 손님이 마법사인 줄 모르고 함부로 행동했으면 개구리로 변했을 테니까.”
 로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뛰어난 마법사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마법사건 아니건 함부로 대할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알았으니까, 여하튼 좀 도와줘.”
 “알았어요.”
 로이는 데얀을 따라 식품창고로 향했다. 바닥에는 전날 미리 재워둔 신선한 고기들이 소금물에 담가져 있었다. 그것들을 부엌으로 날랐다.
 하녀들도 청소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일하면서 그렛카와 마주쳤지만, 서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일하는 도중, 떠들기 좋아하는 하녀들에게 마법사의 정체에 대해 조금 들었다.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 중 하나라고 한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작이 특별히 초대했다고 한다.
 기대감이 부풀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왕국에서 제일가는 마법사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어느새 점심이 되었다. 로이는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다른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곧 온다고 해서 점심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하녀 몇 명이 돌아다니면서 준비하라는 말을 했다. 손님이 도착했다고 했다.
 고용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맡은 자리에 가서 섰다.
 남작과 남작 부인도 어느새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기사 몇 명과 하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녀들은 모두 젊고 예쁜 여자들이었다. 그렛카도 그 속에 있었다.
 곧 내성으로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어?”
 몇몇 고용인들이 입으로 소리를 냈다. 로이도 조금 놀랐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엘프였다. 로이는 엘프를 처음 봤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귀가 무척 길었기 때문이다.
 또 무척 예뻤다. 그래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엘프들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예쁘다고 들었다.
 엘프는 끝에 보석이 달린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갖가지 문양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것들이 엘프가 뛰어난 마법사가 맞다는 것을 뒷받침해주었다.
 그 뒤로 남자 하나가 따라 내렸다.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지팡이는 없지만, 로브는 걸치고 있었다. 일단은 마법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엘프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남작도 마법사가 엘프라는 것을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눈치다. 하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다가가 인사했다.
 남작과 엘프 마법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남작 부인과 남자가 따랐다.
 그때 옆에 있던 데얀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엘프는 고기 안 먹는 거 아니냐?”
 데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하녀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하지만 로이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남작이 고개를 숙였다. 절대자였던 남작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로이도 남작 위에 다른 귀족들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지만 실제로 남작이 고개 숙이는 모습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데얀.”
 “응?”
 “저 엘프 마법사 귀족일까요?”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엘프도 작위를 받나? 모르겠네.”
 “남작님이 고개를 숙이셨잖아요.”
 “그랬나? 그런데 작위가 있건 없건 대단한 마법사면 그럴 수밖에 없지.”
 “작위가 없어도요?”
 “당연한 거 아니냐? 왕국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마법사면 손짓 한 번으로 이 성을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을 텐데. 그 정도 힘이 있으면 작위가 있건 없건 고개를 숙여야지. 작위가 있더라도 그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받은 걸 텐데.”
 로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신분도 아니었다. 바로 힘이었다.
 돈으로 힘을 살 순 있다. 남작이 부리는 기사와 병사도 돈으로 부리는 것이다.
 신분도 그 자체로 힘을 가진다. 평민이 귀족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당장 목이 날아간다. 이 세상은 신분 사회니까.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힘이다.
 힘이 있으면 저절로 돈이 모인다. 힘이 있으면 작위도 받을 수 있다. 힘이 있으면 귀족도 고개를 숙인다. 이런 간단한 상식을 잊고 있었다.
 물론 어지간한 힘으로는 돈과 신분을 이길 수 없다. 아주 큰 힘만이 가능하다. 바로 압도적인 힘.
 궁금했다.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로이, 뭐해? 애나가 노려본다.”
 데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애나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로이는 데얀을 따라 재빨리 이동했다.
 둘은 재빨리 식품창고로 향했다. 애나가 시키는 대로 음식재료들을 꺼내 날랐다.
 요리사들은 재료를 앞에 두고 어물쩍거렸다. 무슨 요리를 해야 하는지, 못 정한 것이다.
 그때 집사가 나타나 딱 정해주었다. 채소와 과일을 제외하고 다 빼라고.
 다행히 요리는 금방 준비되었다. 채소와 과일을 접시에 보기 좋게 담으면 끝이었다. 하녀들이 그것들을 위로 날랐다.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같이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고생했던 것을 보답 받기라도 하듯 식탁에는 푸짐한 음식들이 잔뜩 놓였다.
 “웬 거예요?”
 데얀이 입에 음식을 한가득 넣고 대답했다.
 “미리 준비했던 음식들이잖아. 어차피 버릴 바에는 우리가 먹는 거지.”
 “그렇군요.”
 로이도 재빨리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음식에 모두 즐거워했다. 술은 없었지만 마치 파티라도 즐기는 듯한 분위기였다. 음식은 순식간에 동났다.
 식사가 끝나고 고용인들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바쁘지 않았다.
 로이는 다시 창고도 돌아왔다.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앉았다. 앉아서 기다렸다. 기회를 기다렸다. 무슨 기회인지, 기회를 잡으면 무엇을 할 건지도 모른 채, 그냥 마냥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결국, 기다리던 것이 왔다. 엘프 마법사 뒤에 있던 남자 마법사가 건물 밖으로 나온 것이다.
 남자는 밖으로 나와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훈련장 쪽이다.
 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냅다 부엌으로 뛰었다.
 부엌에는 하녀 하나밖에 없었다. 뒷정리하고 있었다.
 “요아나!”
 “로이, 무슨 일이야?”
 하녀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 마실 거 없어요?”
 “마실 거? 어떤 거?”
 “그냥, 마시면 따듯해질 만한 거요.”
 로이는 부엌을 뒤지면서 대답했다.
 “이거면 될까?”
 “위스키? 줘요!”
 로이는 하녀가 들고 있는 술병을 거의 뺏다시피 건네받았다. 구석에 있는 햄 샌드위치도 집어 들었다. 남자도 채소와 과일만 먹었을 것이라는 게 떠올랐다.
 그것들을 들고 곧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남자 마법사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남자 마법사는 벽을 등지고 앉아있었다. 텅 빈 훈련장을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로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막상 오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가 하얘졌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술병을 들고 서 있던 것이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일반적인 마법사와 자신은 경우가 다르다. 어떤 말을 듣건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뭔가 큰 것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이전에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로이는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님.”
 “뭐냐?”
 “이것 좀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위스키를 든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위스키, 샌드위치! 고맙군.”
 남자가 담배를 끄고, 술병과 샌드위치를 받았다. 술병은 바닥에 놓고, 샌드위치는 곧바로 입에 넣었다.
 로이는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냐?”
 남자가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물었다.
 “마법사님, 궁,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남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조마조마했다.
 “뭔데?”
 “어, 어떻게 뛰어난 마법사가 되실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아, 뭐야. 그런 거였어?”
 순간 남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난 또 스승님에 관해 묻는 줄 알았지. 스승님이 남자냐 여자냐 물었으면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하하!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봐라.”
 로이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용기를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샌드위치와 위스키를 받은 값은 해야겠지. 내가 어떻게 뛰어난 마법사가 됐는지 궁금하다고?”
 “예, 예.”
 “좋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주지.”
 남자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의 이야기는 중구난방이었다. 또 말이 무척 빨랐다. 그래도 몇 가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남자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평민이라는 것과 엘프 마법사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남자는 이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이 두 가지를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로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질문할 기회를 엿봤다. 마법을 어떻게 배웠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마법사가 가르쳐줬는지, 마법서를 보고 배웠는지, 그 방법이 궁금했다.
 돌이 더는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직접 마법을 익힐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당연했고, 얼마 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대신 점점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늙은이들은 언제나 혈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껄였지. 피는 속일 수 없다나? 나도 인정해. 마법사 대부분은 마법사 가문 출신이니까. 하지만 말이지, 그런 놈들을 다 제치고 결국 엘리할 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바로 나, 루카스란 말이야. 재능이 있으면 뭐해? 노력을 안 하는데. 그놈들은 간절함이 없어. 뛰어난 마법사가 되고 싶은, 성공하고 싶은 간절함 말이야. 귀족 출신이라 그런 거지. 재능은 물려받았지만 대신 절박함은 받지 못한 거야. 하지만 나는 절박했다. 그래서 배로 노력했고,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절박하지 않은 놈은 결코 위로 올라갈 수 없어.”
 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처지가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자도 죽을 만큼 노력했던 것 같다.
 남자가 말하는 절박함이 현재 자신에게 있는지 생각해봤다. 분명히 말해서 없다.
 최근에 가장 절박했던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가슴속에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용기 내서 마법사에게 다가온 지금을 제외하면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절박함이 있었으면, 돌이 마법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마법을 개발해 익힐 수 있었을까. 어제 레슬로프를 상대로 멋지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주위가 어두워졌다. 위스키도 다 떨어졌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이도 따라 일어났다. 남자가 로이를 보고 멋쩍게 웃었다.
 “흠흠. 조금 흥분했던 것 같군. 샌드위치랑 위스키가 없었으면 이런 얘기 안 했을 텐데! 여하튼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절함이다.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해. 남의 뒤통수를 찔러서라도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하란 말이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로이는 허리를 크게 숙였다. 남자는 어깨를 두들기고는 이내 사라졌다.
 남자와 헤어지고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다.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남자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애초에 내성에 들어온 목적을 잊고 있었다. 마법을 안전하게 익히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그 마법을 다 익혔다. 더는 익힐 것이 없다. 돌이 새로운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직접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로이는 조만간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새로운 꿈을 꾸었다.
 
 
 # 17.플레어
 
 노인의 양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지금까지 보인 파이어 마법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서 일순 붉은 불길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가 사라졌다.
 노인이 다가와 가슴과 배를 콕콕 찔렀다. 그것을 끝으로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뒤적거려 돌을 찾아냈다. 로이는 돌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끝이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걸로 끝일 리가 없었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분명 뻔뻔하다고 할 테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돌만 믿어주면 된다.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을 떠올렸다. 이전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더 선명해지고, 며칠 뒤에는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테니까. 분명 그럴 것이다. 꿈을 처음 꿀 때도 그랬으니까.
 노인이 쓴 마법을 떠올렸다. 앞으로 뻗어 나가는 붉은 화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마치 광대들이 입에 술을 머금고 횃불에 내뿜을 때의 모습이 이러할까. 본적은 없지만 분명 비슷할 것이다.
 이 불길이 사람에게 향하면 어떻게 될까.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열기 때문에 접근조차 못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로이는 천천히 노인의 손짓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처음 마법을 배울 때와 비슷했다. 어설픈 손짓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즐거웠다. 단순히 손짓을 반복하는 것뿐인데도 즐거워 미칠 것 같았다. 어색한 느낌이 좋았다. 새로운 마법을 익히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수인은 파이어 마법보다 조금 더 길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어 마법보다 대단한 마법이니, 수인도 더 길어야 마땅했다.
 동시에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어 마법 수인도 처음에는 길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이 간소화되었다. 사용하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 마법도 그럴 것이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정신 차리고 보니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재빨리 일어나 문을 열었다.
 데얀이었다. 데얀은 황당한 표정으로 로이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안 보인다 했더니, 너 이제 일어났냐?”
 로이는 문을 열어둔 채로 옷을 입었다. 옷을 입으면서 대꾸했다.
 “어제 좀 피곤했나 봐요.”
 “피곤하긴 내가 더 피곤하지. 하녀들이 더 피곤하고. 내가 안 깨우러 왔으면 어쩔 뻔했어? 그런데도 넌 툭하면 일하다 가버리기나 하고.”
 로이는 옷을 다 입고 나오면서 데얀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은혜 반드시 갚을게요.”
 “말로만?”
 굳이 대꾸하지 않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데얀이 웃으며 뒤를 따라왔다.
 은혜를 갚을 기회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다. 알고 보니 데얀이 도와달라고 깨우러 온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황당해 했지만, 덕분에 정신 차릴 수 있었으니 그냥 넘어갔다. 아마 데얀이 오지 않았으면 집사나 애나가 알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크게 치도곤을 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맙게 느껴졌다.
 데얀의 일을 도우면서, 마법사들이 아침 일찍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아쉬웠다. 남자 마법사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배웅하고 싶었다. 나중에 만약 만나게 되면 꼭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에 떠난 것은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과 같이 갔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데얀이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마법사들이 다시 돌아오는지, 남작이 언제 돌아오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다른 고용인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데얀은 마법사를 부른 것도 그렇고 뭔가 중요한 일 때문인 게 분명하다고 했지만, 로이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데얀의 일은 오전에 끝이 났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한가로워졌다. 그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지는 이미 명백했다. 열심히 손을 놀렸다.
 팔이 아파서 더는 움직이기 힘들 때, 쉬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성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접은 것은 아니다. 대신 그 시기를 조금 늦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새로 배운 마법을 성공한 이후에 나가기로 했다.
 생각을 마치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을 오래 하니까 팔이 아팠다. 이전에는 마법을 사용하다가 가슴이 쑤시면 앉아서 글을 썼다. 자연스럽게 글 생각이 났다.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돌아왔을 땐 한 손에 책이 들려있었다.
 구석에서 연습 도구도 가져왔다.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작 가져온 책은 펼치지 않았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 이유를 그동안 열심히 하지 않은 미안함 때문으로 생각했다.
 대신 그전에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써봤다. 오래 쉬긴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래도 계속 쓰다 보니 조금씩 다시 생각이 났다.
 글을 쓰고 있자니 마치 야그나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고 있었으면 많이 혼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종아리가 근질거렸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이전과 같은 공허함과 허탈감은 없었다. 오히려 글을 쓸수록 충만해졌다. 가슴 한구석이 채워졌다. 계속 글을 썼다.
 팔이 괜찮아지면 다시 수인을 연습했다. 팔이 아프면 다시 글을 썼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로이는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아직 깜깜했다. 그대로 창고로 향했다.
 창고로 들어가자마자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양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며칠 전의 어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노인이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가슴과 배 부분이 근질거렸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속을 휘젓고 다녔다. 뭔지 모를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일순 손을 내밀었다. 입가에서 계속 맴돌던 말이 튀어나왔다.
 “플레어!”
 시동어를 외치자, 손바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앞으로 향해 뻗어 나갔다.
 로이는 그 모습을 보며 거의 정신이 나갈 뻔했다. 마법을 처음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쾌감이 치솟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한 것 같았다. 성취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불길은 곧 사라졌고, 로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하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참 뒤에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더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마법을 사용하는 대신 지금 온몸을 지배하는 쾌감을 즐기기로 했다. 쾌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창고가 환해져 있었다. 일과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제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쉴 순 없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녀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몇몇은 무슨 좋은 일 있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로이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실제로는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하녀들이 이 기분을 알아줬으면 했다.
 흥분은 점심을 먹은 후에야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해보고 싶은 열망은 여전했다. 참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틀어박혀서 마법을 사용했다.
 다행히도 연습할 시간은 충분했다. 몇몇 사람이 일을 도와달라고 한 것을 제외하면, 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계속 창고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있었다.
 비록 오전에 느낀 것과 같은 큰 쾌감은 없었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내내 충분히 즐거웠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익히는 이유가 마법을 익힘으로써 따라오는 힘과 권력 때문이 아니라, 마법을 익히고 사용할 때마다 느끼는 이 즐거움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가면 이런 기분도 시들시들해질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그랬다. 그만큼 즐거웠다.
 그렇게 며칠을 마법에 정신없이 빠져 지냈다.
 
 데얀의 일을 도와주고 창고로 돌아오면서, 로이는 언제 일을 그만둘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에 플레어 마법을 꽤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마법을 연습한 덕분이다. 아마 마나만 부족하지 않았다면,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많이 연습했다.
 이렇게 마법을 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선뜻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별것 아녔다. 조금씩 계속 실력이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성에서의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남작이 자리를 비운 탓인지, 일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마법을 연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계속 실력이 늘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계속 눌러앉자 있었다.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렛카였다. 그렛카는 손 한가득 무엇인가 들고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최근 그렛카와 거의 마주친 적 없다. 그날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더는 도와달라고 찾아오지 않았다. 더는 목욕하기 위해 밤에 뜨거운 물을 얻으러 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마법 연습에 심취해 창고에만 틀어박혀 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로이는 그렛카를 보자 왠지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저도 모르게 그렛카의 뒤를 밟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무작정 따라갔다.
 그렛카는 우물가로 향했다. 한 짐 가득 들고가던 보따리는 빨래였던 모양이다.
 그렛카는 두레박으로 낑낑대며 물을 긷더니, 곧 빨래를 시작했다. 손에 입김을 물어가며 빨래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왜 찬물로 빨래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로이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렛카의 왼팔이 조금 어색했다. 왼팔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거의 오른팔로만 빨래했다.
 거기다가 종종 왼팔을 부여잡기도 했다. 처음에는 손이 시려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았다.
 머릿속에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가서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데얀을 찾아갔다.
 다행히 데얀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는 듯했다.
 “몰랐냐? 요즘 하녀들이 종종 그렛카 이야기하는데. 거기다가 너 그렛카랑 친하잖아.”
 전혀 못 들었다. 최근에 마법에만 빠져있었던 탓이다.
 로이는 데얀을 재촉했다.
 “못 들었어요. 무슨 일이 일었는데요?”
 “그 있잖아. 그렛카가 전에 만나던 남자.”
 “레슬로프!”
 머릿속에 맴돌던 이름을 말했다. 데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 여하튼 그 남자 때문이잖아.”
 “그 남자가 어떻게 했는데요?”
 “어떻게 했긴. 때렸겠지. 그렛카 말로는 계단에서 굴렀다는데, 맞아서 굴렀겠지. 자세히 보면 다른 곳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거든.”
 예상했던 바지만, 실제로 듣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전에 본 레슬로프는 그렛카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도 때린 것도 정말 좋아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설마 그렛카를 때릴 거라고 생각 못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쓰레기였다.
 데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최근에 집사랑 애나한테 엄청나게 구박받잖아. 곧 그만둘 거라는 말도 들리던데.”
 “그건 또 왜요?”
 “왜긴. 밖에 나갈 때마다 사고를 치니까 그렇지. 달걀 깨먹고, 천 더럽혀서 오고. 혼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 말을 듣고 바닥에 식료품을 쏟은 것이 생각났다. 레슬로프에게 가슴팍을 얻어맞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렛카가 그렇게 맞았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성을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다.
 
 
 # 18.살인계획
 
 데얀과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당장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쉽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죽인다면 첫 살인이다.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나 생각해봤다.
 한참을 생각했다. 레슬로프의 잘못과 그렛카에 대한 호감, 자신이 가진 힘을 저울질했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잘못만 놓고 보면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렛카는 얻어맞고 또 성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다. 자신도 지난번에 맞았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을 정도의 잘못인가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병신은 만들어놔야 한다. 그렛카를 떠올리면 그냥 놔둘 순 없었다.
 어느 정도 손을 봐주고 가면 당장은 괜찮을 것이다. 로이는 떠나면 그만이다. 실제로 손을 봐주고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렛카는 남는다. 레슬로프가 앙심을 품고 해코지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옛날 같았으면 죽이겠다는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수년 동안 때린 젝스도 죽이지 않고 나왔다. 그렛카에 대한 호감이 아무리 크더라도,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 리 없다. 아무래도 헌터 마을을 벗어나고 뭔가 변한 것 같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바꾼 것일까. 큰 도시에 와서 수많은 사람을 봤기 때문일까. 남작과 마법사 같은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그래서 레슬로프 하나쯤은 없어져도 별일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일까.
 아니면 마법을 익혀서 그런 것일까. 플레어 마법을 익히고 자신감이 생긴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로이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레슬로프를 죽일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이왕 결정한 일이니 문제없이 처리하고 싶었다. 살인자가 되면 곤란했다.
 일단 일을 그만두고 처리할 것인지, 처리한 이후 일을 그만둘 것인지 생각했다.
 일을 그만두면 무기를 돌려받을 수 있다. 수중에 쇠뇌와 단도가 생긴다. 특히 쇠뇌가 있으면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숨어있다가 뒤통수나 쏘면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비원들도 바보는 아니다. 조금만 조사하면 자신과 그렛카, 레슬로프와의 관계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일을 그만두고 무기까지 받아서 사라지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평생 숨어 살고 싶지는 않았다.
 먼저 처리하고 나중에 일을 그만두는 방법을 생각해봤다.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해 레슬로프를 죽이는 방법이 떠올랐다. 이번에 배운 플레어 마법으로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문제라면 저번처럼 제대로 써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익숙하지 않은 마법보다 주먹부터 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도록 연습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좋은 점을 생각해봤다. 한 가지 있었다. 목격자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레슬로프를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기 힘들 것이다. 불에 타죽은 시체를 어떻게 조사할 것이며, 그를 죽인 무기가 마법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다.
 꼭 마법으로 죽이지 않아도 된다. 방법은 무수히 많다. 어떻게든 죽이고 불태워버리면 된다. 아니면 묻어버려도 된다. 중요한 것은 의심을 받지 않는 것이다.
 꼭 마법으로 안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연습은 하기로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법이 반드시 도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레슬로프를 처리하고 떠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획대로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방에서 나와 우물가로 향했다. 그렛카는 여전히 빨래하고 있었다. 아직도 빨래가 잔뜩 쌓여있었다. 빨래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안쓰러워 보였다. 레슬로프를 죽이기로 한 것이 잘한 결정처럼 느껴졌다.
 로이는 재빨리 창고로 돌아왔다. 사우나를 준비하는 것처럼 돌을 달구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에 마법까지 사용했다.
 달궈진 돌을 수레를 사용해서 날랐다. 목적지는 당연히 우물가였다.
 그렛카가 빨래하다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로이.”
 “그렛카. 미안해요.”
 로이는 다짜고짜 사과부터 했다.
 “뭐가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요. 그날 이후 피한 것도 미안하고, 그렛카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한 것도 미안해요. 그렛카가 그렇게 될 때까지 가만있었던 것도 미안해요.”
 지금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통했는지 그렛카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다시 친하게 지내면 안 될까요?”
 “나야 좋지. 내가 더 미안해.”
 “사과를 받아줘서 고마워요. 사과의 선물이에요.”
 로이는 수레를 끌고 가까이 갔다.
 “이건 뭐야?”
 “돌 좀 구워왔어요.”
 로이는 돌을 집어다가 대야 안에 집어넣었다. 돌이 물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애나가 알면 혼날 텐데.”
 그렛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이가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누가 오기 전에 빨리해야죠. 도와줄게요.”
 팔을 걷고 주저앉았다. 빨래를 집어 들었다. 빨래가 꽁꽁 얼어있었다. 오래 걸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았다.
 빨래를 대야에 담갔다. 그제야 빨래가 풀어졌다.
 “이러니 오래 걸렸죠. 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렛카가 웃으며 반대편에 앉았다.
 “뻔뻔하게 어떻게 그래? 그리고 나랑 친하게 지내면 레슬로프한테 또 맞을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어.”
 “제가 잘못 했네요. 그때 묵사발을 냈어야 했는데.”
 “맞아. 네 잘못이야.”
 둘은 언제 어색했느냐는 듯이 웃으며 같이 빨래했다. 사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 내길 잘한 것 같다.
 만약 레슬로프만 죽이고 떠났으면 후회했을 것이다. 어설픈 이별은 야그나 때로 충분했다.
 빨래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둘은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전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연인이 될 것 같은 분위기는 더는 없었다. 대신 스스럼없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이전보다 더 좋았다.
 그렛카는 그 날 이후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얻어다가 목욕했다고 한다. 그러지 못했을 때는 찬물로 했단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추운 날씨에 찬물로 목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이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냥 미안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싶을 때 조심스럽게 레슬로프를 언급했다. 그렛카는 잠깐 주저하더니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날 이후 레슬로프는 한동안 그렛카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따라다녔을 뿐이라고 한다. 로이가 사라진 것에 만족한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렛카가 상대해주지 않자, 다시 예전처럼 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왼팔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달걀을 들고갈 때 레슬로프가 밀어서 넘어졌는데, 그때 다쳤다고 한다.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그러다가 감옥에 갔다고 했잖아요? 저희 맞았을 때, 신고 안 했어요?”
 “했지! 그런데 이번에는 들은 척도 않더라고.”
 그렛카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경비병이요?”
 “맞아. 레슬로프가 뒷돈을 준 게 틀림없어.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지.”
 그렛카는 신경질적으로 빨래를 세게 내려쳤다.
 로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디벨 성에서 경비병이 수고비를 받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어디에나 썩은 사람들은 존재하니까. 경비병이라고 다를 것 없다.
 하지만 아히크 성의 경비병은 다르다. 디벨 성의 썩은 경비병과는 다르게, 절도가 있었다. 레슬로프 같은 쓰레기의 돈을 받고 모른 척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남작이 다스리는 성에서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남작은 그런 일을 가만히 둘 사람이 아니었다.
 “남작님께 이야기를 해보면······.”
 “농담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이다. 그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슬로프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됐다.
 “최근에는 지도 답답한지 술을 잔뜩 먹고 오더라고. 가끔 집에 안 가고 술집에서 잘 때도 있는 모양이야.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아. 그러다가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자다가 죽을 것 같으니까.”
 “집이 어딘데요?”
 “레슬로프? 성 밖에 있어. 코딱지만 해. 레슬로프가 사기꾼인 걸 안 것도, 그 집을 보고 나서니까. 정말 작아.”
 그렛카는 한동안 레슬로프 욕을 계속했다.
 로이는 레슬로프의 집이 성 밖에 있다는 말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아무래도 성안에서 처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성 밖은 다르다. 또 밤중이라면 사람도 적을 것이다. 술 취해 돌아가는 레슬로프를 공격하는 상상을 했다.
 “로이!”
 “네?”
 정신 차리고 보니 그렛카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요.”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이상한 거 뭐요?”
 로이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됐고. 엉뚱한 생각하지 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니면 됐고.”
 그렛카는 다시 빨래에 집중했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사과 파이 구워줄게.”
 “말로만 하지 말고, 정말로 구워줘요.”
 그렛카는 웃으며 빨랫대야를 집어 들었다. 오른팔로만 들고 있는 모습이 불안하고 불편해 보였다.
 “도와줄까요?”
 “아니, 됐어. 내가 가져가야지 혼자 한 것처럼 보이지.”
 “그러네요.”
 “농담이야. 도와줘서 고마워. 사과 파이, 정말로 정말로 구워줄게. 내일 보자.”
 그렛카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로이는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창고로 돌아왔다. 오늘 마법 연습을 많이 못 했기 때문에 연습하고 갈 생각이었다. 습격하기 전까지, 최대한 능숙해져야 했다.
 레슬로프를 상대하는 상상도 했다. 아까 생각했던, 실전에 대한 연습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 생각을 하며 마법을 사용했다.
 밤늦게까지 연습하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이후 로이는 다시 그렛카와 친하게 지냈다. 마법 연습과 글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이면으로는 성 밖에 나갈 기회를 찾았다.
 원래는 지난번처럼 그렛카와 함께 나갈 생각을 했다. 그것보다 자연스러운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렛카는 함께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함께 있는 것을 보였다가는 또 문제가 생길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았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애나, 무슨 일이에요?”
 “로이, 내일 저녁 시간 있어요?”
 “내일요?”
 별다른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애나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물어보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애나가 조금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체트가 자꾸 로이를 데려오라고 성화여서요. 한번 물어보러 왔어요.”
 애나가 조금 불편한 얼굴로 물었다. 로이는 그 말을 듣고 단박에 상황 파악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로이도 웃음 지었다.
 
 
 # 19.고요한 밤
 
 다음날, 로이는 평범하게 일과를 시작했다. 머릿속에 내일까지 최대한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평소처럼 중간중간 마법 연습도 하고 글공부도 했다. 딱히 마법 연습을 더 하지도 않았다. 암살자가 암살하는 날,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과를 모두 마쳤을 때는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창고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애나가 나타났다.
 “가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둘은 내성을 빠져나가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 들어서자 체트가 둘을 반겼다. 정확히는 로이를 반겼다.
 “로이!”
 체트가 양팔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로이는 가만히 붙잡혀줬다.
 “왜 이제 온 거야?”
 “애나가 허락을 안 해줘서요.”
 “뭐? 내 이······.”
 체트가 고개를 홱 돌려 애나를 쳐다봤다. 애나가 무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로이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체트도 고개를 숙였다.
 체트가 귓속말했다.
 “내가 봐주는 거다.”
 “하하! 들어가죠.”
 둘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애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로이가 주위를 둘러봤다. 여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산하네요.”
 “그렇지? 네가 안 왔으면 망했을지도 몰라.”
 “체트, 엄살이 늘었네요. 예전에는 좀 더 어른 같았는데.”
 “너는 어른스러워졌다.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이전에는 뭔가 쫓기는 것처럼 움츠려있었는데.”
 “그런가요?”
 “그래. 키가 커서 그런가? 확실히 애들은 다르구만. 몇 달 만에 이렇게 크다니.”
 “조금 전까지 이제 어른이라고 했잖아요.”
 “그랬나?”
 둘은 웃음을 터뜨렸다. 애나가 접시 몇 개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것 다 먹으면 갈 거예요.”
 “안 되지. 안돼. 몇 달 만에 나왔는데, 그럴 순 없지. 이 집에서 잘하는 거 다 내오라고! 여기 로이가 살 테니까. 약속 기억나지?”
 “그럼요.”
 “들었지? 빨리빨리 내와.”
 체트는 마치 이미 만취한 것처럼 행동했다. 로이는 애나가 폭발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쳐다봤다.
 다행히 애나는 말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체트가 의기양양해졌다.
 “봤지? 꼼짝 못 하는 거. 여자는 이렇게 다루는 거야.”
 “체트, 애나가 노려보고 있어요.”
 “뭐?”
 체트가 움츠리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로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곧 애나가 음식 몇 개와 술병을 들고왔다. 구운 사과, 구운 감자, 달걀, 닭다리, 양고기 스튜 등 푸짐했다. 거기다가 브랜디까지. 애나까지 자신을 털어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그간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체트였다. 로이는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 돈을 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길 잠시 애나가 다가왔다.
 “로이, 이제 가죠.”
 “뭐? 안돼.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조금만 더.”
 “더 늦으면 성에 못 들어가요.”
 “당신 먼저 가고, 로이는 내일 아침 일찍 들어가면 되잖아. 그래도 상관없잖아.”
 “당신이 술 잔뜩 먹일 게 분명한데 어떻게 믿어요?”
 “안 그럴게.”
 체트가 고집 피웠다. 예상했던 모습이다. 로이도 가세했다.
 “애나, 그렇게 해줘요. 저는 술 안 마실게요.”
 “로이, 만약에 늦으면 정말로 크게 혼날 거예요. 혼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예.”
 그렇다고 대답하는데 별다른 도리가 없다.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체트, 부탁인데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애나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있었다. 체트도 그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어. 이것만 마시고 안 마실게.”
 “알았어요. 믿어요.”
 애나는 둘을 놔두고 여관을 빠져나갔다. 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관 문을 닫았다.
 “오늘 장사는 끝이야. 손님은 너 혼자다.”
 체트는 부엌으로 가서 술병을 더 들고왔다.
 둘은 다시 앉아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체트는 술을 권하지 않았다. 애나의 말을 지키려고 한 것인지, 남이 먹는 술조차도 아까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관에 온 지 얼추 두 시간이 지났을 때 즈음, 체트는 이미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있었다. 열심히 잔을 채운 보람이 있었다.
 잠시 후, 체트는 테이블에 코를 박고 잠들었다. 로이는 체트를 놔둔 채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왔다. 여관을 잠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쇠는 체트 품 안에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서 여관 문을 잠갔다.
 여관에서 나오자마자 열심히 뛰었다. 레슬로프가 있음 직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렛카를 통해 알아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로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슬로프를 찾았다. 자주 가는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혼자였다. 이전에 같이 있던 두 명은 그곳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술집 반대편 골목으로 향했다.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리고 레슬로프가 나오길 기다렸다.
 레슬로프는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에 참고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초조해졌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주변에는 더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이따금 토악질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로이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성문도 닫았을 것이다. 성 밖에서 레슬로프를 죽이고 돌아오겠다는 계획은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그때 누군가 술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레슬로프였다. 로이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레슬로프는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로이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 뒤를 쫓았다. 어디로 가는지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서 자는지 궁금했다.
 레슬로프는 술집 근처에 있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문을 두들겼다. 한참을 그렇게 두들겼지만, 문을 열리지 않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레슬로프는 그렇게 온 성을 돌아다니며 문을 두들겼다. 문제는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중에 한 군데는 열어주긴 했지만, 이내 쫓겨났다.
 이번에는 골목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따라 쭉 올라갔다. 상점들을 지나서 계속 올라갔다.
 로이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어디서 자려는 건지 궁금했다.
 레슬로프는 어느새 성벽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서 무엇인가 꺼냈다. 얼핏 두꺼운 담요처럼 보였다. 그것을 몸에 두르고 계단에 앉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곧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거라는 그렛카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애초에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인 탓이다. 성 밖은 아니었지만, 공격하기에 괜찮은 곳처럼 보였다. 고민 끝에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언제 공격하느냐다. 레슬로프는 도무지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예 안 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자면 얼어 죽는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무턱대고 공격하기도 망설여졌다. 많이 취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걸음걸이가 멀쩡했던 것이 생각났다.
 로이는 일단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당장 공격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오를 수도 있고, 잘 수도 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레슬로프는 술 한 병을 가지고 한참을 버텼다. 잠들지도 않았다.
 결국, 로이는 몸을 일으켰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부지런한 사람들은 일어나 돌아다닐 시간이었다. 심호흡 한번 하고 레슬로프에게 다가갔다.
 레슬로프가 술을 마시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말투다. 로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고 있었나?”
 “그렇게 허접스럽게 쫓아오는데, 모를 리가 없지. 누군지 확인하려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가는 중간중간 실수를 하긴 했다. 발밑이 어두워서 빈 병을 몇 번 건드린 것이다. 그것 때문인 듯했다.
 그때 다시 레슬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넌 누구지? 왜 날 쫓아왔지?”
 레슬로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알아보는 듯했다. 어두워서 그런 것이다. 또 지난번에 싸울 때 로이는 말 한마디 안 했다. 레슬로프 앞에서 말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못 알아볼 만했다.
 그 사실이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앞으로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레슬로프도 몸을 일으켰다.
 “말 안 한다는 거냐? 뭐 상관없지. 덤벼라.”
 레슬로프가 들고 있던 병을 깨뜨렸다. 순식간에 무기가 생겼다.
 로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기는 없지만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깨진 병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였다.
 레슬로프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수인을 맺었다.
 “뭔 장난질이냐!”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어둡기도 했고, 평생 누군가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을 테니 말이다.
 거리를 좁힌 레슬로프가 일순 몸을 날렸다. 술에 취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깨진 병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 자신이 있던 모양이다. 이전에는 셋에게서 맞아서 알아채지 못했다.
 레슬로프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마법도 완성되었다. 로이는 재빨리 한 손을 내밀었다.
 “플레어!”
 시동어를 외치자 일순 주위가 환해졌다. 불길이 훅하고 레슬로프를 상체를 덮쳤다.
 “으아악!”
 레슬로프는 불길에 휩싸인 채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불을 떼어내겠다는 듯이 양손으로 몸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불길은 더 활활 타올랐다.
 로이는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상할 정도로 냉정한 상태였다. 만약 부족하면 한 번 더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어느 순간 비명은 사라졌고, 레슬로프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불길도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자리를 떴다. 비명을 듣고 경비병이 다가오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로이는 한참 뒤에야 여관에 도착했다. 일부러 멀리 돌아오느라 늦은 것이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체트는 여전히 테이블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다가가서 열쇠를 다시 돌려놓았다. 그다음 체트를 흔들어 깨웠다.
 “체트. 체트!”
 “으······.”
 체트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흔들었다. 이곳에 계속 있었다고 증언해줄 이가 필요했다.
 한참 뒤에야 체트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 로이.”
 “저 이제 가보려고요. 늦으면 애나한테 혼나요.”
 로이는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면 될 거예요.”
 그제야 체트가 정신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를 들어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체트! 문단속하고 자요.”
 “어차피 손님도 없어. 잘 가라.”
 체트가 손을 흔들었다. 그런 체트를 놔두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고요했다. 경비병이 아직 레슬로프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내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잠했던 가슴이 그제야 뛰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서 로이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 20.밖으로
 
 내성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이 밝았다. 늦지 않고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곧바로 애나를 찾아갔다.
 애나는 체트가 약속을 잘 지켰다는 사실을 믿기지 않아 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굳이 체트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창고로 향했다. 밤새 찬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무척 피곤했지만, 쉴 수는 없었다.
 일하면서 속으로 언제쯤 소식이 들려올까 생각했다. 누가 소식을 들고 올지도 궁금했다. 데얀일까, 그렛카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혹시 경비병일지도 모른다. 누가 오든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식은 오전, 점심을 지나 오후 즈음에야 들려왔다.
 소식을 가져온 사람은 데얀이었다.
 “로이, 너 들었냐?”
 “뭐가요?”
 “경비병이 그렛카 데려간 거.”
 “그렛카를 왜요?”
 로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묻고 나서야 그 일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렛카를 먼저 찾아갈 거라고 생각 하지 않았던 탓이다. 당연히 자신을 먼저 찾아올 거로 생각했다. 덕분에 아주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왔다.
 “너 모르고 있었구나? 아까 내성 경비병이 와서 데려가더라고.”
 “무슨 일일까요······.”
 로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렛카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스러웠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다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더는 아히크 성의 경비병들을 믿을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다. 무슨 일인지 알게 되면 와서 말해줄게.”
 “고마워요.”
 데얀은 다시 일하러 갔다. 로이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데얀은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로이! 이유를 알았다.”
 “뭔데요?”
 “그 남자가 죽었대.”
 “그 남자가 누군데요?”
 레슬로프라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척했다.
 “그 있잖아. 그렛카 따라다니던 남자!”
 “레슬로프?”
 “그래,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여하튼 그 남자가 죽었대.”
 “왜, 어떻게 죽었대요?”
 “나도 몰라. 여하튼 그 남자가 죽어서 조사받으러 간 것 같다.”
 “그렇군요.”
 로이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사라졌다. 그 이후에도 계속 소식을 전해주었다.
 데얀은 레슬로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차례대로 전해주었다. 특히 어떻게 죽었는지 전해주러 왔을 때는, 그 데얀조차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이도 최대한 놀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로이는 문득 소식을 전해주는 데얀에게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데얀은 딱히 소식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하녀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들리면 듣고 아니면 마는 식이다. 딱히 찾아서 알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야기를 물어물어 전해주러 온다는 것은, 자신이 그렛카와 친하다는 것을 데얀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 써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결국, 그날 찾아온 것은 데얀밖에 없었다. 경비병은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렛카는 다음날에야 찾아왔다. 로이는 자연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렛카는 후련하다고 답했다.
 그렛카는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돌아갔다. 로이는 왠지 그 말이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어떤 말이든 아니라고 답했을 테지만 말이다.
 다음날, 그렛카가 이전에 약속한 것이라며 사과 파이를 들고 왔다. 왠지 다른 이유로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비병은 그 이후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조사는 진작에 끝이 났다고 한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그렇다고 들키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한 노력이 아깝다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렇게 잘 넘어간 것일 테니 말이다. 잡혀서 목이 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로이는 성을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애나에게 미리 넌지시 이야기해두었다. 그래야지 새로운 후임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애나는 후임이 구해지는 대로 바로 그만둘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 보름이 흘렀다.
 
 로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오늘이 바로 떠나는 날이었다.
 후임은 며칠 전에 구했다. 지금 옆 침대에서 뒤척거리고 있는 바로 저 남자다.
 인수인계도 끝냈다. 애초에 가르쳐줄 것도 별로 없었다. 남자가 그 사실에 기뻐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사우나를 준비하면서 남작과 한번 마주쳐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어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송별회를 해줬다. 그렛카, 데얀, 애나를 비롯해 몇 명의 고용인이 참석했다.
 몇몇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이 고마워서 로이도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 때문에 떠나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실제로 헌터 마을에서 보낸 십몇 년보다 이곳에서 보낸 몇 달이 더 행복했다.
 그래도 떠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곳에서는 더 발전이 없다. 더 큰 곳으로 나가야 한다.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몇 명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데얀과 애나, 그렛카였다.
 “송별회는 어제 했잖아요.”
 “그래도 마지막은 봐야지.”
 데얀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로이는 그 손을 강하게 내려쳤다. 반대로도 한번 하고, 데얀이 물러났다.
 다음은 애나가 다가왔다.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오늘 받기로 한 월급 주머니가 틀림없었다.
 “그간 수고했어요.”
 “고맙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인사와 동시에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묵직했다. 로이는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했다. 애나가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그렛카가 다가왔다.
 “로이.”
 “그렛카.”
 “고마워.”
 “저야말로 잘 지내서 좋았어요.”
 둘은 가볍게 포옹했다. 그렛카가 귓속말했다.
 “고마워.”
 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곧 떨어졌다.
 그것을 끝으로 로이는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성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무엇인가 건네주었다. 쇠뇌와 검, 단도, 볼트 등 들어올 때 반납했던 것들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무기를 만져보니 반갑기도 했지만 어색함이 더 컸다. 지금 다시 쇠뇌를 쏴보라면 이전처럼 잘 못할 것 같았다.
 벨트를 허리에 차고 단도와 검을 걸었다. 쇠뇌는 가방 옆에 매달았다. 내성에 들어올 때와 비슷한 복장이 되었다. 물론 비슷한 것은 겉모습뿐이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생각은 많이 했지만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그저 아히크 성처럼 평화로운 곳이 아닌, 용병이나 헌터가 할 일이 많은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경험을 쌓고 싶었다.
 로이는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런 곳을 알고 있을 만한 장소는 알고 있었다.
 조금 걷다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용병 길드였다.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초보자들처럼 보였다. 이전에 용병 등록할 때가 생각났다.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보였다. 시간도 때울 겸 게시판으로 향했다.
 게시판에는 종이가 잔뜩 붙어 있었다. 분명 이전에도 게시판을 봤었다. 지금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새삼 감격스러워 의뢰를 하나하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별 볼 일 없는 일 투성이였다.
 잠시 후, 남자들이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로이는 카운터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죠?”
 “뭐 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로이는 일단 목패를 가진 것을 밝혔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빨리 동패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생각했던 것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직원은 얼마 듣지도 않고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질문을 자주 듣는 모양이다.
 “추천해드릴 만한 곳이 세 군데 있어요. 먼저 라카제트 지방에 할 만한 일이 있어요.”
 “라카제트면······북쪽입니까?”
 “네. 하펜 남작 영지 북쪽이에요. 최근 아이스 트롤들로 시끌시끌해요. 하펜 남작이 트롤 퇴치 공고를 내렸어요. 꽤 많은 용병이 이쪽으로 향했죠. 생각 있으시면 참가하셔도 좋을 거예요.”
 로이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자, 직원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설명을 듣는 로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하펜 남작 영지는 왕국 최북단에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 데만 해도 한 달이 넘게 걸린단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트롤은 아주 무시무시한 몬스터다. 키는 4미터가 가볍게 넘고, 덩치 또한 엄청나다고 한다. 커다란 나무를 뽑아 휘두를 수 있는 괴력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트롤에 대한 설명이고, 라카제트 지방에 있는 것은 아이스 트롤이다. 로이가 알고 있기로, 보통 추운 곳에 사는 마수들은 덩치 크고 가죽이 두껍다. 그것이 트롤이라면 말 다 한 것이다.
 아무리 쇠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위험할 것이 틀림없다. 돈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추운 것은 딱 질색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라카제트 지방은 패스하기로 했다.
 “일단 다른 곳도 이야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또 추천해드릴 곳은 세게모르 지방이에요.”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게세모르가 어디죠?”
 “세게모르예요. 왕국 남쪽에 있어요. 디사트 남작 영지 왼쪽이죠. 늪지로 유명한 곳이에요. 들어본 적 없으세요?”
 처음에는 눈으로 가득한 설원으로 가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그 정반대인 늪지를 추천해준다.
 “예전부터 디사트 남작 영지는 리자드맨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어요. 그래서 항시 용병을 모집하고 있어요. 가신다면 한 몫 단단히 잡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역시나 직원이 추가설명을 해줬다. 그 설명을 듣는 로이의 표정은 이번에도 복잡했다.
 늪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질척거리는 바닥과 벌레다. 직원은 다행히 겨울이라 벌레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늪지의 물이 상당히 차가울 것이라고는 했다. 더 끔찍했다.
 거기다가 리자드맨이라면 로이도 조금은 알고 있다.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머리를 잘 쓰고 무기도 잘 다루는 종족이다. 또 늪지는 그들의 안방이나 다름이 없다. 상당히 골머리를 썩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아직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고.
 이번에도 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기, 앞에 두 군데 같은 곳 말고, 조금 약한 몬스터나 마수가 있는 곳은 없나요? 목패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는데······.”
 “목패를 지닌 용병들도 많이들 가셔서요. 어차피 쇠뇌로 싸우시니 상관없으실 텐데······.”
 자기 목숨이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는 직원이 얄미워 보였다. 물론 실제로 용병들이 많이 가니까 하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직원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곳은 어떠세요? 볼티모어 백작 영지 근처에 있는 숲이 하나 있는데, 요즘 자이언트 앤트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백작은 토벌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부산물을 가져오면 보상금을 주고 있어요.”
 직원은 백작 영지가 어디에 있고, 자이언트 앤트가 어떤 마수인지 이야기했다.
 백작 영지는 이곳에서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자이언트 앤트가 앞에서 언급한 아이스 트롤과 리자드맨보다 그다지 세지 않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은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로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용병 길드를 빠져나왔다.
 
 
 # 21.추천서의 가치
 
 로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백작 영지까지 어떻게 갈지 생각해봤다.
 일단 걸어가는 방법은 위험하다. 특히 혼자면 더 위험하다. 올 때도 놀의 습격을 받지 않았던가. 혼자서 놀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세지도 않다.
 그러다 문득 배크만이 떠올랐다. 이전처럼 행상인의 마차를 얻어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로이는 걷다 말고 가방을 내렸다. 안쪽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배크만에게 받은 추천서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것을 읽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모르는 글자가 몇 개 있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추천서에는 자신이 호위하면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적혀있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는 말도 적혀있었다. 그제야 추천서를 읽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삼 다시 감동했다.
 정신 차렸을 때는 눈앞에 마차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아히크 성에 처음 왔을 때 본 바로 그 장소였다.
 괜히 주위를 둘러봤다. 배크만이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 또 모른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어깨를 두들겼다. 로이는 놀라서 뒤로 홱 돌아섰다.
 “내가 놀래켰나? 미안하군.”
 한 중년 남자가 한 손에는 담배를 든 채 서 있었다.
 남자의 위아래를 훑었다. 낯이 익긴 했지만,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알은척해서 뭔가 사기를 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로이가 못 알아보는 듯하자 남자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손으로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나 모르겠나? 그때 배크만이 소개해줬었는데.”
 “아.”
 기억났다. 아히크 성에 도착했을 때, 배크만과 인사하던 상인 중 하나다.
 로이는 경계를 풀었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기억나나 보구먼. 필립이라네. 오랜만이군.”
 “예. 로이입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로이는 잠시 주저하다 사정을 이야기했다. 상인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볼티모어 영지로 가는 상인을 찾고 있었나? 같이 가려고?”
 “그런 건 아니고······그냥 한번 와봤습니다.”
 “잘 왔네.”
 “예?”
 로이가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잘 왔다고. 내가 바로 볼티모어 영지로 간다네.”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지.”
 로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태워주신다고요?”
 “그냥 태워주는 건 아니지. 자네가 호위해야지. 난 자네에게 보수를 주고.”
 “제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솔직히 배크만 때가 특별했던 거다. 이제는 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리라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믿기 힘든 것이다.
 “자네를 보고 결정한 것은 아니지. 배크만을 보고 한 결정이지.”
 듣기 썩 좋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솔직해 보여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솔직히 배크만 그 친구가 자네를 태우고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처구니가 없었다네. 또 그런 짓을 했나 싶었지. 가끔 그러거든. 그래서 무사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후에 추천서를 줬다는 말을 들었네. 그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그 친구가 아무나 태울지는 몰라도, 아, 아무나라고 해서 미안하네만, 여하튼 아무한테나 추천서를 써주진 않거든. 그 추천서를 가진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추천서를 써준 사람도 욕을 먹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천서 덕분에 용병이 되었다. 내성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추천서 덕분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추천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이 갈 건가 말 건가?”
 “가야죠. 예. 갈 겁니다.”
 행여나 상인이 생각을 바꿀까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잠깐 기다리게. 물건을 실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뒤돌아가는 상인을 붙잡았다.
 “저 잠시 어디 좀 다녀와도 됩니까?”
 “오래 걸리나?”
 “얼마 안 걸립니다.”
 “빨리 갔다 오게.”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조급한 마음에 뛰기 시작했다. 가방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가방을 맡기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먼저 들린 곳은 대장간이다. 대장간에서 볼트를 잔뜩 샀다. 마법이 있긴 했지만, 아직 부족한 실력이다. 놀이 나타나면 결국 쇠뇌로 해결해야 한다.
 볼트를 사자마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급한 마음에 역시나 뛰어서 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옷가게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뭘 사러 왔나? 얼마 전에 아주 좋은 천이 들어왔는데······.”
 “로브를 보여주세요.”
 “아, 로브. 가만 보자. 뭐가 어울리려나.”
 가게 주인이 가판대를 뒤졌다. 그 뒤로 원하는 조건을 내뱉었다.
 “겉모습은 상관없습니다. 따뜻해야 해요. 좋은 재질로 주세요. 쉽게 해지지 않게. 얼마 안 지났는데 구멍이 뚫리면 바꾸러 올 겁니다. 길이는 제 발목 정도로 오면 좋겠습니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그래도 따뜻한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봄에도 밤은 여전히 춥기 때문이다. 그것이 벽 없는 길바닥이면 말할 것도 없다.
 가판대를 뒤적거리던 주인이 로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게 딱이지. 입어보게.”
 일단 재질부터 확인했다. 뭐로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두껍고 부들부들했다.
 “뭐로 만든 겁니까?”
 “산양 가죽이라네. 무척 따뜻하지.”
 로브를 받아들고 걸쳐봤다. 무거웠다. 또 끝이 바닥에 조금 끌렸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건 없습니까?”
 “다른 거라······.”
 주인은 그 뒤로 몇 가지를 로브를 더 꺼냈다. 하지만 첫 번째 것보다 좋아 보이는 건 없었다.
 “첫 번째 것으로 주세요. 얼맙니까?”
 주인이 가격을 말했다. 로이는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비쌉니다.”
 “산양 가죽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겨울에 산양 가죽보다 더 따뜻한 가죽은 없다네.”
 일단 상인이 사기를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돈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왠지 꺼림칙했다.
 그때 갑자기 사기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펼쳐서 상인 앞에 들이밀었다. 손가락으로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보여요? 상인 길드 표식.”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표식을 알아본 듯했다. 재빨리 종이를 접어 품 안에 집어넣었다.
 “상인 길드원과 아는 사이입니다. 지금 산 다음 바로 가서 물어볼 겁니다. 만약 사기 친 거면 이곳은 손님한테 사기 치는 가게로 소문날 겁니다.”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그냥 깎아달라고 하면 될 것을 뭘 그리 무섭게 말하나?”
 상인은 다시 가격을 말했다. 처음에 부른 것에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이 정도면 사기다.
 화가 났다. 아마 시간만 있었어도 한소리 했을 것이다. 참고 값을 지불했다.
 “맞게 수선해줄까? 공짜로 해주겠네.”
 “됐어요.”
 로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공짜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시간이 없었다. 상인이 두고 떠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가방을 벗고 로브를 걸쳤다. 그 위에 다시 가방을 메자 숨이 턱 막혀왔다. 무거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무척 답답했다. 그래도 일단 따뜻하긴 했다. 이전보다 훨씬 나았다.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는 또 오라는 가게 주인을 뒤로한 채 발길을 재촉했다. 올 때보다 더 빠르게 돌아왔다.
 상인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그걸 사고 온 건가?”
 로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상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
 “잘 어울리는군. 조금 길긴 하지만.”
 상인이 위아래를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자, 그럼 가지.”
 로이는 상인을 따라 이동했다. 그곳에는 짐마차가 있었다. 마차는 조금 작았다. 비교 대상은 당연히 배크만의 마차였다.
 상인이 로이의 반응을 보고 웃었다. 마차에 올라타면서 한마디 했다.
 “마차가 조금 작긴 해도 둘이 충분히 탈 수 있다네. 난 배크만처럼 엉덩이가 크지 않거든. 아니면 뒤에 타든가.”
 로이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뒤에 타도된다는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됩니까?”
 “별 상관은 없지. 내가 좀 심심하겠지만.”
 그 말을 듣고 뒤에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에 타겠습니다.”
 가방을 짐칸에 싣고, 앞에 올라탔다. 상인 말대로 자리는 넉넉했다. 배크만의 엉덩이가 그렇게 컸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돼서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상인은 어디선가 천을 꺼내 얼굴에 감았다. 눈만 빼꼼 내놓은 채로 로이에게 천 하나를 건넸다.
 “얼굴에 감게. 지금은 괜찮지만, 막상 출발하면 춥지. 이렇게 안 하면 추워서 못 견딘다네.”
 거절하려고 했다가, 마지막 말을 듣고 천을 얼굴에 감았다.
 “출발하겠네.”
 “예.”
 마차는 조금씩 속력을 내더니 순식간에 아히크 성을 빠져나갔다.
 
 첫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추운 것만 빼면 별문제 없었다. 그래도 로브와 천 덕분에 버틸만했다. 로브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만 주고받았다. 그래도 어색함은 없었다.
 저녁에는 양고기가 아주 조금 들어간 수프를 먹었다. 건더기는 별로 없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몸이 아주 따뜻해졌다.
 불침번은 번갈아가면서 섰다. 상인이 먼저 섰는데, 로이는 이번에도 잠을 자지 않고 지켜봤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믿고 잠을 잤다. 로브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보드카를 아침 삼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로이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지난 기억에 의하면 놀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 활이 날아올지 모른다. 긴장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필립이 한마디 했다.
 “겨울에 나타나는 놀은 돈이 된다네.”
 “네?”
 로이가 필립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 말을 왜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겨울에 나타나는 놀은 돈이 된다고 했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네도 놀을 잡은 적이 있어서 잘 알 거네. 놀은 털이 수북한 것이 특징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겨울이 되면 그 털이 더 수북해지지. 값이 올라간다는 말이네.”
 “아.”
 갑자기 그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에 내심 놀이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긴장감이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필립이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는 필립의 박식함에 놀랐다.
 “볼티모아 백작 영지가 아히크 영지보다 못 산다고요?”
 “그렇지. 몰랐나?”
 “몰랐습니다.”
 백작이 남작보다 높은 신분이다. 당연히 그 영지도 더 잘 산다고 생각했다.
 백작 영지는 얼마나 크고 성은 또 얼마나 대단할지 생각하던 로이에게 필립의 말은 무척 충격이었다.
 “아히크 남작은 광산을 두 개나 가지고 있지. 어지간한 영지보다 잘사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렇군요.”
 “물론 볼티모어가 못사는 것도 있지. 근처에 마수가 나오는 숲이 있거든. 그 때문에 땅은 황폐하고, 농사도 잘 안되지.”
 “아.”
 로이는 지금까지 헌터 마을 주변이 황폐하기 때문에 사냥을 업으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립의 말을 들어보면 그 반대였다. 마수의 숲이 있어서 그 주변이 황폐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사실은 어떻게 다 아십니까?”
 “사실 내가 생각한 것은 아니고, 유명한 학자가 한 말이라네. 그런데 맞는 것 같아. 내가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마수의 숲 근처는 전부 다 황폐하더라고.”
 “그렇군요.”
 로이는 왠지 기분이 묘했다. 필립이 가르쳐준 것은 헌터 마을에 있었으면 평생 몰랐을 지식이다. 당연히 헌터 마을에 있는 헌터들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른 채 평생 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그들보다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밖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은 그 뒤로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주었다. 로이는 열심히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들었다. 알게 모르게 지식이 쌓여갔다.
 
 
 # 22.두 여자
 
 “왜 놀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로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필립이 로이를 힐끔 보더니 대꾸했다.
 “놀이 나타났으면 좋겠나? 내가 가죽이 비싸게 팔릴 거라고 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다. 그저 나타나야 할 놈들이 며칠째 나타나지 않으니 이상해서 한 말이었다.
 결코, 틈틈이 쇠뇌 쏘는 연습으로 사용한 시간과 볼트가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플레어 마법을 사용해보려고 했는데, 나타나지 않아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안 나타날 가능성이 크지. 애초에 이곳은 몬스터가 잘 나타나지 않는 지역이라네. 그래서 배크만과 자네가 놀에게 습격당했다고 했을 때, 모두 놀란 것이고.”
 “그렇군요.”
 “그러면 왜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음.”
 필립은 가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필립만의 대화할 때의 특징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곧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아서 짜증났는데, 이제는 적응했다.
 로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땅히 생각나는 답이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렇지.”
 “예?”
 대충 대답했는데, 맞았다.
 “사람들은 몬스터나 마수가 사람들만 먹고사는 줄 알지.”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는가.”
 로이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놈들도 동물 따위를 잡아먹고 산다네. 물론 사람만 공격하는 영악한 놈들도 있긴 하지. 경험을 통해 사람이 가장 사냥하기 쉽다는 것을 안 거지.”
 “사람은 약하지 않습니다.”
 로이가 괜히 발끈해서 대꾸했다. 검과 갑옷을 착용하고, 손에서 불길을 뿜어내는 사람이 약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필립이 로이를 힐끔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은 극히 일부야. 나머지는 잡아먹기 딱 좋을 정도로 야들야들하지. 사람이 토끼처럼 달리기가 빠른가, 늑대처럼 발톱과 이빨이 날카로운가. 그것도 아니면 가죽이 두껍나?”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여하튼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몬스터도 살지 않는다는 말이었네. 이런 곳을 쏘다니는 건 사람밖에 없지. 놀 말고 도적이나 나타나지 않을지 걱정하게. 그러면 정말 큰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놀 대신에 도적을 경계했다. 그렇게 다시 이틀이 흘렀다. 그 사이 놀은 물론이거니와 도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놀에게 써먹으려고 했던 플레어 마법은 불침번을 설 때나 실컷 사용했다.
 둘은 별다른 일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멀리 볼티모어 성이 보였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조금 지나자 성 주변에 있는 마을이 보였다. 마을에서 묘하게 헌터 마을이 겹쳐 보였다.
 밭은 황폐해 보였고, 가축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집 앞에 앉아 마차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구경했다.
 필립은 볼티모어 영지가 아히크 영지보다 조금 더 못산다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심해 보였다. 얼핏얼핏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디벨 영지와 비교될만한 수준이었다.
 마차는 곧 성 앞에 도착했다.
 로이는 고개 들어 눈앞에 있는 성을 바라봤다. 성은 조금 작고 낡아 보였다. 물론 비교 대상은 아히크 성이었다. 그래도 디벨 성보다는 좋아 보였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그다지 넓지 않아 보였다. 마차가 들어가기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였다.
 예상대로 필립은 마차를 성 밖에 세웠다.
 마차를 보고 한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얼마나······.”
 “음. 하루.”
 필립이 남자에게 코퍼 몇 개를 건넸다.
 “물건을 나를 사람도 불러주고.”
 “예예.”
 남자가 코퍼를 챙겨 사라졌다.
 “인부가 올 때까지 좀만 기다리지.”
 “예.”
 둘은 짐칸에 걸터앉았다.
 필립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약속했던 보수다. 주머니를 받아 품 안에 넣었다.
 인부를 기다리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예전에 아히크 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났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완전히 달랐다.
 성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 중 대부분이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다. 전부 마수를 잡으러 온 용병으로 보였다.
 그 복장이 무척 다양했다. 간단히 레더 아머정도만 걸친 사람도 있는 반면, 무려 체인 메일을 걸친 사람도 있었다. 공통적으로 무거운 갑옷을 걸친 사람은 모두 덩치가 좋았다.
 무기도 다양했다. 칼집 없이 칼만 덜렁덜렁 차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낡은 도끼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활과 쇠뇌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무기와 마찬가지로 덩치가 좋을수록 크고 무거워 보이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때 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필립 씨.”
 “뭔가.”
 “혹시 여자 용병 본 적 있습니까?”
 “여자 용병?”
 필립이 로이가 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여자 용병 하나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꽤 많지. 자네 설마 본 적 없나?”
 “예.”
 로이는 여자 용병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허리춤에 칼을 찬 모습이 신기하고 어색해 보였다.
 로이가 아는 여자의 역할은 대부분 집안에 존재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거나, 빨래하고 요리하고 옷을 꿰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헌터 마을에서도 그랬고, 내성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여자는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히크 성에 있으면서 많이 바뀌었지만, 여자가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여자가 용병을 할 수 있을까요.”
 “못할 것 뭐 있나? 저 여자 팔뚝이 자네보다 굵어 보이는데. 싸우면 지는 것 아닌가?”
 “절대, 아닙니다.”
 로이는 단호하게 외쳤다. 여자랑 싸워서 진다니 있을 수 없었다.
 “하하! 농담이네.”
 그때 멀리서 인부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다가왔다. 필립이 짐칸에서 내려가 그들을 맞았다.
 로이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시 여자 용병에게 눈이 갔다.
 팔을 들어 여자의 팔과 비교해봤다. 자신의 것이 조금 더 굵어 보였다. 그래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와 비교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거기다가 팔은 더 굵을지 몰라도, 더 용병다운 것은 여자 쪽이었다. 무기와 복장도 어울렸고, 얼핏 드러난 팔뚝과 다리에는 커다란 상처도 엿보였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경험만큼 용병처럼 보이게 했다. 왠지 필립의 말대로 싸우면 질 것 같았다.
 여자 용병이 사라진 이후에도, 로이는 계속 그 생각을 했다. 그 사이 필립이 일을 마치고 다가왔다.
 “무슨 생각 하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어가지. 식사나 같이하자고. 설마 나랑도 식사하기 싫은 것은 아니겠지?”
 배크만 때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로이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닙니다. 가시죠.”
 둘은 성문으로 향했다. 경비병이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을 요구했다. 필립은 상인 길드 소속 증명서를 내밀었고, 로이는 목패를 내밀었다. 경비병은 그것들을 대충 보더니, 통과를 외쳤다. 디벨 성처럼 수고비를 요구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히크 성의 경비병보다는 디벨 성의 경비병과 비슷해 보였다. 제대로 되었다기보다 게을러 보였다.
 성문을 지나 성안으로 향했다.
 성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제대로 되어 있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건물도 멋졌다. 그 모습이 오면서 본 마을과 대조되었다.
 필립은 좋은 곳을 알고 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필립을 따라 도착한 곳은 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었다. 식당 안에서 어렴풋이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맞는데······.”
 필립은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이전과 많이 바뀌었군. 일단 들어가지.”
 필립이 천천히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이가 그 뒤를 따랐다.
 식당 문을 열자 곧바로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한 여자가 식당 한 면에 설치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줄 달린 악기를 치고 있었다. 악기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여자는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음유시인이 분명했다.
 식당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몇 사람은 자리가 없어, 벽에 기대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가 없군. 어찌할 텐가. 기다릴 텐가?”
 “저야 괜찮습니다.”
 로이의 시선은 식당에 들어오고 줄곧 노래 부르는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본격적인 노래를 듣는 것은 것을 처음이었다. 좀 더 듣고 싶었다.
 “그럼 기다리지.”
 둘은 다른 사람들처럼 벽 쪽으로 가서 기댔다. 종업원이 오더니 이름을 받아갔다. 로이는 노래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잠시 후,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는 화답이라도 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로이도 열심히 손뼉을 쳤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였다.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살면서 본 여자 중에 가장 예뻤다. 그렛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훨씬 예뻤다. 그래도 얼굴보다 노래가 더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노래는 대단했다.
 한 남자가 무대에 올라가더니 잠시 후에 노래하겠다고 했다. 식당 주인으로 보였다.
 그사이에 자리가 났다. 종업원이 둘을 자리로 안내했다. 필립은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부터 했다. 그 사이 로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는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몇몇 사람은 귀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두 여자의 노래를 들으러 온 것 같았다. 대단한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러 왔다고 생각하니, 여자가 더 대단해 보였다.
 필립이 주문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자리를 찾기 힘들군.”
 “유명한 사람인가요?”
 “지금은 그런 것 같군. 그녀를 발견한 건 말했다시피 지난 여름이야. 아주 우연히 이 식당에 왔다가 노래를 들었다네. 마치 보석을 발견한 것 같았지. 반드시 또 오겠다고 마음먹었어. 아, 물론 노래 때문이네. 맛은 그저 그랬어. 지금은 모르겠군.”
 “그렇군요.”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 주위에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 모두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좋은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듯한.
 필립이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아무나 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 될 것 같군.”
 “이야기를 나눈 적 있나요?”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름은 에일하트라네. 여류 음유시인이고. 나이는 모르겠군. 비밀이라고 하더라고. 겉모습만 봐선 이십대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나도 아는 것이 이름밖에 없군. 그녀는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지금은······아닌 것 같네만.”
 필립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는 필립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곳에 온 이유도 장사보다는 그녀 때문인 게 분명했다.
 그때 요리가 나왔다. 테이블이 고급스러운 요리로 채워졌다. 양은 조금 적어 보였다.
 “자, 먹지. 맛있어 보이는군.”
 “예.”
 둘은 식사를 시작했다. 노래도 다시 시작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식사도 끝났다.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맛있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음식 맛이 아니라 노랫소리였다.
 식사는 끝났지만 노래 한 곡 더 듣고 가기 위해 앉아 있었다. 그러자 종업원이 다가와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라는 것 같았다. 자리가 금방 난 이유를 알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식사를 다 했는데도 계속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옷은 고급스러웠다. 알게 모르게 납득이 되었다. 비싼 음식을 먹어야지 오래 있을 수 있는 모양이다. 둘은 아쉬워하며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필립은 음식값으로 무려 30코퍼를 냈다. 그런데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값을 치른 필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조금 더 노래를 더 들을 수 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었다.
 나가려는데 다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식당을 나갔다.
 
 
 # 23.용병들은
 
 식당을 나오고 로이는 필립과 헤어졌다. 각자 다음에 보자는 기약 없는 약속만을 남겼다. 죽지 않고 살다 보면 언제고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로이는 일단 용병 길드부터 찾기로 했다. 현재 상황과 자이언트 앤트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여기, 용병 길드가 어딨습니까?”
 “없어.”
 “예? 없다뇨.”
 남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사라졌다.
 혹시나 해서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반응은 달랐지만, 대답은 같았다. 볼티모어 성에는 용병 길드가 없었다.
 로이는 난감해 했다. 자이언트 앤트를 사냥하러 왔지만, 무작정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냥감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어디에 나타나고, 약점은 무엇이고, 보통 몇 마리가 뭉쳐 다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사냥의 기본이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용병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키지 않았다.
 그때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술집이다. 술집 주인은 보통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다. 지금은 낮이니 대신 여관을 찾기로 했다. 여관은 식당과 술집을 겸한다. 더 좋을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행인은 로이의 위아래를 훑고는 성문 쪽에 여관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다가 본 기억이 났다. 그쪽으로 향했다.
 여관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았다. 모두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용병처럼 보였다. 행인이 이곳을 알려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로이는 바테이블로 향했다. 주인이 컵을 닦다 말고 다가왔다. 주문을 했다.
 “따뜻한 우유 한잔.”
 “여기 따뜻한 우유 한잔!”
 주인이 로이의 말을 크게 따라 했다. 여관 안에 용병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이는 화를 꾹 참고 돈을 건넸다.
 “물어볼 게 있는데.”
 주인의 태도에 저절로 반말이 나갔다. 주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뭔데?”
 “자이언트 앤트를 잡으러 왔는데, 용병 길드가 없더군. 어디서 정보를 얻지?”
 “아아, 용병이었나? 난 또 보따리상인인 줄 알았지.”
 주인이 로이의 가방을 가리켰다. 로이는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노려봤다.
 주인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해줬다.
 “정보를 얻고 싶으면 브랜디 한잔은 마셔줘야지.”
 “그럼 그것도.”
 로이가 코퍼를 튕겼다.
 “앞에 손님 브랜디 한잔!”
 주인이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 용병들의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감탄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도 들려왔다.
 앉아있으니 뒤쪽으로 음담패설이 들렸다. 욕설은 기본이었다. 용병들의 분위기였다. 적응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주문했던 우유와 브랜디를 가져다줬다. 로이는 우유를 집고 브랜디를 내밀었다.
 “마셔.”
 “통 큰 손님이었군.”
 주인이 브랜디 잔을 집고 내밀었다. 로이는 우유 잔을 들고 가볍게 부딪혔다.
 “궁금한 게 뭔가?”
 주인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하지만 로이는 바꿀 생각이 없었다. 계속 용병처럼 행동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용병처럼 살 거니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질문을 떠올렸다.
 “자이언트 앤트의 사냥터, 습성, 약점, 돌아다니는 무리의 수, 유인 방법, 그리고 부산물을 가져오면 돈을 준다고 했는데 어느 부위를······.”
 “잠깐 기다리게.”
 주인은 브랜디를 마시다 말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 건 따로 알려줄 사람이 있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런 게 아니라네.”
 “그럼?”
 로이의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날로 먹으려 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주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야기를 흥미로웠다. 이야기는 용병 무리에 대한 것이었다.
 시작은 자이언트 앤트를 혼자 잡을 수는 없다는 것부터였다. 무리로 몰려다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냥하려면 무리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즉, 파티로 사냥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은 이야기하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로이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갔다.
 “저기 저 친구, 그래. 저 친구. 저 친구네가 괜찮지. 전부 실력도 있고, 성격도 좋고.”
 지적을 받은 용병이 있는 테이블의 용병들이 웃으며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로이도 작게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보였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저 친구는 도끼를 기가 막히게 잘 쓰고. 테이블 아래 도끼 보이나? 저 큰 걸 자유자재로 다루지.”
 “우리는 안돼! 젖먹이는 안 키운다.”
 지적받은 대머리 용병이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로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풀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만있었다. 화를 내면 오히려 배포가 작은 인간처럼 보일 것 같았다. 도끼의 크기도 한몫했다.
 소개는 계속됐다. 몇몇 용병들은 호의를 보였고, 몇몇 용병들은 대머리 용병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호의를 보인 용병들을 잘 기억해뒀다.
 용병들 무리에는 드워프도 있었다. 유난히 시끄러워서 금세 알아챘다.
 드워프의 얼굴에는 문신이 가득했고, 지저분한 수염이 잔뜩 나 있었으며, 발아래에는 양날 도끼가 놓여있었다. 별것 아닌 듯 쓱 보고 지나갔지만, 드워프라는 이유만으로 인상에 남았다.
 주인은 여관에 없는 용병들도 소개했다. 로이는 그 용병들의 특징을 잘 기억해뒀다. 특히 성격 좋다는 용병들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실력보다는 일단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됐다. 문제를 일으키는 곳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 물어본 것을 알고 싶으면 모브란을 찾아가게나.”
 “모브란이 누구지?”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
 주인은 자이언트 앤트의 사냥터를 알려주었다. 사냥터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성에서 반나절은 걸어가야 했다. 모브란은 그 사냥터에 있다고 했다.
 로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보는 무척 유용했다.
 더는 주인에게 얻을 정보는 없었다. 남은 것은 그 모브란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면 될 것이다.
 물론 당장은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사냥터는 생각보다 멀다. 하룻밤 자고 내일 갈 생각이었다. 당장은 피곤해서 쉬고 싶었다.
 로이는 코퍼 몇 개를 더 내밀었다.
 “하룻밤 묵고, 남은 것은 한잔 더 마시라고.”
 “사양하지 않지.”
 주인이 웃으며 코퍼를 챙겼다.
 로이는 열쇠를 받고 2층으로 향했다. 침대에 앉아 마법 연습을 했다. 플레어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방에서 연습하기에 적합한 마법은 아니었다.
 대신 파이어 마법을 연습했다. 이제는 손에 완전히 익었다. 수인을 맺으면 자연스럽게 마나도 따라 움직였다. 뱃속에서 마나가 움직이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연습할 거리는 있었다. 최근에는 조금 떨어진 허공에 불을 피우는 것을 연습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물체를 태우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볼티모어 성으로 오는 길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시작하게 된 이유는 별 게 아니다. 플레어 마법은 마나 소비가 크다. 금세 배가 쑤셔온다. 그래서 적절히 파이어 마법도 같이 연습했다. 특히 멀리 있는 물체를 태우는 연습을 했다. 그것은 오래 연습하면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마나보다는 정신력을 더 많이 소모하는 마법이다. 플레어 마법과 같이 연습하기 적절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파이어 마법을 힘들게 익혔는데 단순히 불을 피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까워서, 달리 활용할 방법이 없나 생각하다가 시작한 것이다. 여차할 때 술이라도 끼얹고 그곳을 태우면 쓸 만할 것 같았다.
 로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했다. 마법이 어려운 건지 피곤한 것인지, 쉽지 않았다.
 곧 머리가 아파 왔다. 침대에 누웠다. 잠이 쏟아졌다. 저녁을 먹어야 했지만, 귀찮았다. 이불을 덮고 누웠다.
 문득 플레어 마법을 익힌 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새로운 꿈을 꾸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제 새로운 꿈을 꿀 때도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플레어 마법을 완벽하게 익히지 않아서 새로운 꿈을 꾸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열심히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파이어 마법처럼 손짓 몇 번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 생각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다음날, 로이는 새벽같이 일어났다. 밖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일찍 잔 것을 생각하면 무척 오래 잔 것이다. 피로가 쌓였던 모양이다.
 마법 연습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적당히 해가 뜰 때 즈음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만이 너저분한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시다 사라진 듯했다.
 “일어났나?”
 주인이 청소하다 말고 반겨주었다. 잠을 못 잤는지, 눈 밑이 시커멨다. 여관 주인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는 깨끗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침을 시켰다. 우유도 시켰다.
 주인은 어제처럼 우유를 먹는다고 놀리지 않았다. 대신 어제 브랜디를 산 것이 아까워서 저녁을 걸렀느냐고 한마디 했다. 받아줄 수 있는 농담이었다. 로이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침을 먹고 여관을 나왔다. 사냥터로 갈 시간이었다. 모브란도 만나고, 자이언트 앤트도 한 번 볼 생각이었다. 파티를 찾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성문을 나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이 어딘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앞뒤로 용병 몇 명이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관 주인에게 들은 방향이었다. 사냥터로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앞에 용병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사냥터에는 점심 즈음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사냥터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곳곳에 간이 텐트가 있었다. 용병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거나,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꺼진 모닥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했다.
 도착하자마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용병의 뒤를 따라가느라 쉬지 않고 걸었다. 어깨와 다리가 모두 쑤셨다.
 같이 온 용병들은 괜찮아 보였다. 좀 더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쉬고 다시 일어났다. 모브란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천천히 텐트 사이를 걸었다. 용병들은 로이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텐트 안쪽으로 주머니가 보였다. 주머니에는 시커멓고 기다란 것이 잔뜩 들어있었다. 딱 봐도 자이언트 앤트의 부산물처럼 보였다. 다만 그것이 더듬이인지 다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용병이 무기를 다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로이와 주머니를 번갈아가면서 봤다. 용병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용병이 원하는 데로 재빨리 자리를 비켜줬다.
 그때 멀리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듣기에 싸움소리처럼 들렸다.
 로이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자이언트 앤트와 싸우고 있다면 구경할 좋은 기회였다. 모브란은 조금 뒤에 찾기로 했다. 자이언트 앤트가 우선이었다. 기회만 있다면 한 마리 잡아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소란이 난 곳에 자이언트 앤트는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전부 죽은 것이었다.
 대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둥글게 모여 뭔가를 구경하는 모양새였다. 그쪽으로 향했다.
 가면서 바닥에 있는 자이언트 앤트의 사체를 구경했다. 당연하지만 개미와 비슷했다. 다른 것은 크기뿐이었다.
 작은 것은 팔뚝만 했다. 큰 것은 사람 반만 한 것도 있었다.
 껍질이 반들거렸다. 눈알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짙은 녹색 체액이 바닥에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레에게 거부감 따위는 없었지만, 확실히 이 정도까지 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도 눈을 떼지는 않았다. 역겹다고 사냥도 안 하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자이언트 앤트의 턱은 무척이나 크고 두꺼웠다. 슬쩍 만져봤다. 턱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손은 허리춤에 있는 단도로 가 있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것이 확실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시 사체로 향했다.
 다시 턱을 만져봤다. 단단했다. 사람의 발목을 자르기에 충분해 보였다. 위험해 보였다.
 껍질도 두드려봤다. 딱딱한 느낌이 확실히 전달되었다. 칼로 베기엔 힘들어 보였다.
 그때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이는 사체를 살피다 말고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다가갈수록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발걸음도 빨라졌다.
 
 
 # 24.여기저기
 
 로이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소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싸움이었다. 용병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무기를 들고 마주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어제 본 대머리였다. 젖먹이라고 말한 바로 그 용병이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용병은 양손에 커다란 도끼를 들고 반대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여유가 흘렀다.
 또 한 사람도 어제 본 사람이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차림새는 확실히 기억해서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어제 성문에서 본 여자 용병이었다. 여자 용병은 무심한 얼굴로 대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무기는 검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양손에 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어울렸다.
 “자, 시작하지.”
 한 용병이 손을 들었다. 심판인 듯했다. 싸움이 아니라 결투였다. 두 사람이 자세를 잡았다.
 로이는 여자 용병이 걱정스러웠다. 대머리가 저 큰 도끼로 여자 용병을 조각낼 것 같았다. 대머리의 여유로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누가 봐도 약자는 여자 용병이었다. 자연스럽게 여자 용병을 응원하게 되었다. 어제 필립과 했던 이야기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대머리가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 여자 용병은 독특한 자세를 잡았다. 한 검은 앞으로 내민 채 빙빙 돌리면서, 다른 한 검은 옆으로 뻗어 정면을 겨누는 자세였다.
 대머리가 한걸음에 달려와 도끼를 휘둘렀다. 커다란 도끼가 여자 용병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여자 용병이 움직였다.
 “어?”
 로이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떨어진 것은 대머리의 목숨이었다. 여자 용병의 검이 대머리의 목을 통과해있었다. 앗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눈으로 목격했으면서도 어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머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쓰러졌다. 여자가 칼을 뽑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옆에 있는 용병들이 중얼거렸다.
 상황파악이 안 되는 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그때 오른쪽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되고 할 것도 없어. 여자가 도끼를 피하고 검을 찔러 넣었다. 그뿐이야.”
 상황을 설명한 남자는 그 장면을 본 것 같았다. 뛰어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제 여자와 자신을 비교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기네 마네로 필립과 다투었다. 당연히 이긴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저런 실력자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여자와 싸우는 상상을 했다. 상상은 금방 끝났다. 목이 떨어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누구의 목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몇 번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쇠뇌를 쏘건, 마법을 사용하건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어떻게든 자신을 죽였다. 물론 어떻게 죽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런 강자를 두고 몰라봤다는 게 한심스러웠다.
 로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 놀란 표정이지만, 별일 아니라는 얼굴도 있었다. 저들도 최소한 여자 용병과 비슷한 수준일 게 분명했다. 세상에 강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
 플레어 마법을 익히고 조금 자만했던 것 같다. 살인 한번 했다고 못 이길 사람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마법 때문이었다. 마법은 선택받은 사람만 익힐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마법사인 것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을 배워서 강해져야 특별해지는 것이었다. 강한 사람이 특별한 것이었다.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여자는 대머리의 옷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품을 뒤져 주머니와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챙겼다. 도끼는 심판을 봐준 남자 발치에 던졌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도끼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대머리와 같은 무리였던 남자들도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 이상한 분위기였다. 결투란 이런 것이었다.
 여자 용병이 사라지자,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몇 명만이 남아서 결투 장면에 대해 떠들었다. 로이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 조금 전의 결투에서 느낀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자이언트 앤트의 사체가 발에 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텐트가 모인 곳으로 돌아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그러고 있었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 다시 일어났다.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다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가지 결론은 났다. 마법 사용하는 것을 용병들에게 보여도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사냥을 하려면 보여야 하므로, 언제고 보이긴 할 생각이었다. 시기의 문제였을 뿐이다.
 여자 용병의 실력을 본 이상, 자신이 익힌 마법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보물처럼 꽁꽁 싸매고 있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조금 마음이 후련해졌다.
 이제 움직여야 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돌아갈 수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까이 있는 용병 중에 그나마 난폭하지 않을 것 같은 용병에게 다가갔다.
 “질문 좀 하겠습니다.”
 이전에 여관 주인에게 했던 것과 다르게 정중한 태도였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뭐요?”
 “모브란이 어딨는지 아십니까?”
 “아아, 모브란?”
 용병이 알은 체를 했다.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절로 가보슈.”
 “감사합니다.”
 로이는 인사하고 용병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한참 걷다가 멈췄다. 방향만 들었지 모브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듣지 못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다시 질문할만한 사람을 찾았다.
 그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텐트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용병들의 텐트보다 배는 큰 텐트가 있었다. 텐트 안쪽에 색색의 병들이 잔뜩 놓여있었다. 텐트 한가운데 한 남자가 뭔가를 깔고 쭈그려 앉아, 모닥불에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로이는 대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용병처럼 보이지 않는 겉모습이 한몫했다. 그래도 일단은 존댓말을 사용했다.
 “당신이 모브란입니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 전체에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었다. 머리에는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씻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 분명했다. 그렛카가 보면 기절할만한 몰골이었다. 그래도 주변에 있는 색색의 병들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최소한 거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브란이다.”
 로이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바로 어두워졌다. 찾은 것은 기뻤지만, 뭐라고 질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짜고짜 자이언트 앤트에 관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로이는 뒤쪽에 있는 병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파는 겁니까?”
 “보면 모르나? 포션이지.”
 “아, 포션!”
 그 말에 다시 한 번 제대로 병을 쳐다봤다. 포션을 말로만 듣고,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관심이 생겼다.
 “포션을 마시면 어떤 상처든 곧바로 치유된다는 게 사실입니까?”
 남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어떤 멍청이가 그래? 그딴 게 어딨어?”
 로이는 얼떨떨했다.
 “그럼 무슨 효능이 있습니까?”
 “뒈질 놈이 병신이 되고, 병신이 몇 달 누워있게 되는 거지.”
 남자의 말은 거칠었지만, 아주 적절한 비유였다. 단박에 이해가 됐다.
 로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사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맙니까?”
 “뭘 살 건데?”
 “포션이요.”
 “포션이 한두 개야!?”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로이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괴팍한 사람이었다. 이런 태도로 용케 이곳에서 죽지 않고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자연스럽게 로이의 말투도 퉁명스러워졌다.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알려주시죠.”
 남자가 한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포션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포션은 진하고 연하고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붉은색이었다. 남자가 속사포처럼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로이가 알아들은 것은 한 가지였다. 가격에 따라 효능이 다르다. 싸구려는 싸구려 효능이고, 비싼 것은 비싼 값을 한다는 것. 한마디로 가격에 따라 효능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로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싸구려는 싸도 너무 쌌다. 그 가격에 과연 효능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싼 것이 오히려 단점이었다.
 비싼 것은 너무 비쌌다. 살 돈은 있었지만, 아직 효능도 확인하지 못했고, 또 너무 큰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남은 것은 하나였다. 가운데 것을 구매하기로 했다.
 “가운데 것을 하나 사겠습니다.”
 “자.”
 남자가 포션을 내밀었다. 포션을 받아들려고 했는데, 남자가 포션을 뒤로 빼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돈을 그 위에 올리고 나서야, 포션을 건네주었다.
 로이는 포션을 이리저리 살폈다. 유리라서 쉽게 깨질 것 같았다. 불안했다.
 “이거 안 깨집니까?”
 “떨어뜨리는 정도로는 안 깨진다. 궁금하면 떨어뜨려 보든가.”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확인해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깨지면 큰일이다. 남자 성격에 물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가방에 집어넣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로이는 떠나지 않았다. 아직 떠날 생각이 없었다. 볼일이 남아있었다. 진짜 볼일은 이쪽이었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데.”
 그래도 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고맙게 느껴졌다. 알게 모르게 남자에게 적응했다.
 “자이언트 앤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런 제기랄. 그걸 물어보려고 포션을 샀구나.”
 남자가 투덜거렸다.
 “물어봐라.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이번에도 남자는 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포션을 사면, 질문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 양심은 있는 듯했다. 여관 주인이 추천해준 이유가 있었다. 어느새 남자의 말투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로이는 행여나 남자가 마음을 바꿀까, 재빨리 준비했던 질문을 쏟아내었다. 남자는 묵묵히 듣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속사포처럼 질문의 답을 쏟아냈다. 로이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다행히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아까 자이언트 앤트 사체를 봤던 것이 도움되었다. 헌터 마을에서 오래 생활한 것도 한몫했다. 마법사이기 전에 헌터였다. 제대로 된 사냥은 아직이지만.
 남자의 이야기가 끝났다. 로이는 크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 유익한 정보가 많았다. 포션을 산 보람이 있었다. 여벌의 목숨은 보너스였다.
 로이는 웃으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이제 꺼져.”
 꺼지라는 말이 드디어 나왔다. 로이는 몸을 돌렸다. 지금이라면 기분 좋게 꺼져줄 수 있었다.
 로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자이언트 앤트의 사체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정보도 얻었겠다, 이제 살아있는 자이언트 앤트를 보러 갈 차례였다. 모브란의 정보를 확인할 차례였다. 알 수 없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 25.등장, 관심, 성공적
 
 텐트를 지나 자이언트 앤트 사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브란의 말에 의하면, 자이언트 앤트를 사냥하는 시간이 따로 있었다. 그전에 한 번 더 사체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몇 명의 용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사체를 살피고 있었다. 남아있는 부산물이 목적인 듯했다.
 부산물은 더듬이를 말하는 것이다. 자이언트 앤트를 처치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기도 했다. 더듬이를 가져가면 돈을 준다. 모브란을 통해 안 사실이었다.
 로이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용병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경쟁자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돌아다니다가 그나마 멀쩡한 사체를 찾았다. 주저앉아 사체를 살폈다.
 일단 단도부터 꺼냈다. 껍질을 긁어보기도 하고, 조금 세게 찔러보기도 했다. 껍질에는 별다른 상처가 나지 않았다. 단도로 상대하기에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도를 집어넣고 검을 꺼냈다.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조금 어색했다. 검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휘두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기껏 처음 검을 잡아 자세를 잡았는데, 첫 상대가 마수 사체라니 웃음이 났다. 성에 돌아가면 팔아버려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신 차리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천천히 검을 내려쳤다. 껍질에서 조금 둔탁한 소리가 났다.
 검을 내려놓고 껍질을 살폈다. 껍질은 멀쩡했다.
 다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조금 세게 검을 휘둘렀다. 점점 자세가 나왔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을까. 여전히 껍질은 멀쩡했다. 로이는 검을 내려놓았다. 무의미해 보였다. 또 손바닥이 아파서 더는 휘두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껍질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브란의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브란이 해준 다른 정보도 믿을만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확인했다. 껍질이 부서져 체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시체가 즐비했다. 용병들이 들고 다니는 거대한 도끼, 둔기 따위가 떠올랐다. 왜 그것들을 사용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검을 집어넣고 다시 단도를 꺼냈다. 쭈그리고 앉아 사체의 다리를 살펴봤다. 생긴 것이 개미와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털이 없는 부분을 확인하고 붙잡았다. 관절 부분에 단도를 대고 힘껏 그었다.
 다리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껍질과 다르게 관절 부분은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도로도 충분히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다만 움직이는 자이언트 앤트를 상대로 검을 휘둘러 관절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냥 껍질째 으스러뜨리는 것이 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할 경우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끝났다. 이제 한 가지만 더 확인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단도를 허리춤에 집어넣고 양손을 들었다. 사체를 보면서 수인을 맺었다. 뱃속에 마나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언가를 향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날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비록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마법의 위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플레어.”
 시동어를 외치면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불길이 사체를 향해 뻗어 나갔다. 사체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은 곧 사라졌다. 로이도 손바닥을 내렸다.
 슬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명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라고 외치며 호들갑을 떨거나 하는 사람은 또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다시 사체를 쳐다봤다. 사체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껍질은 생각보다 멀쩡했지만 상관없었다. 대신 다른 부분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있었다. 특히 다리 쪽은 아예 녹아서 사라져있었다. 만족스러운 공격력이었다.
 로이는 돌아다니면서 몇 번이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모두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플레어 마법으로 자이언트 앤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자신감이 생겼다.
 실험을 마쳤을 때 주위에는 꽤 많은 용병이 구경하고 있었다. 관심을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로이는 텐트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따라다니던 용병 중 하나였다.
 로이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는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되었다.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혹시 마법사?”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기억 안 나나? 지난번에 짐머가 소개할 때 있었는데.”
 여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여관 주인 이름이 짐머인 듯했다.
 다시 용병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확실한 것은 말을 함부로 했던 용병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법사인지 몰랐는데. 흥미가 생겼어. 같이 사냥하지 않을래?”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치가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오해했는지, 용병이 재빨리 몇 마디 덧붙였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 안 해도 돼. 그냥 같이 지내다가 마음에 맞으면 같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의 얼굴이 무척 밝아졌다.
 반면에 근처에 있는 용병들은 조금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거절하면 말을 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좋아. 따라오라고. 같이 있는 친구들을 소개해주지.”
 로이는 용병을 따라 텐트 쪽으로 향했다. 용병은 텐트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서야 발을 멈췄다.
 그곳에는 네 명의 사내들이 앉아서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개중에 한 명은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여관 주인이 소개할 때 손을 흔들었던 용병이다. 나쁜 인상이 아니었던 것도 생각났다.
 용병이 사내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어이, 새로운 친구를 데려왔다고.”
 용병들이 무기를 손질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로이에게 모였다. 한 명은 알아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머지는 누군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분명한 것은 그다지 좋아하는 듯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제 여관?”
 아는 체를 했던 용병이 입을 열었다.
 “맞아.”
 “너 분명히 별로라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집에서 가출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것이 분명하다고.”
 로이는 슬쩍 용병을 쳐다봤다. 용병이 한 말에 화가 난 것은 아니다. 용병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다. 어렴풋이 당황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예상과 다르게 용병은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그랬지. 그런데 내가 틀렸어. 놀라지 마시라.”
 용병이 로이에게 슬쩍 눈짓했다. 마법을 보여달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할 마법을 떠올렸다. 파이어 마법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로이는 손을 몇 번 휘적거려서 허공에 불을 만들어냈다가 없앴다.
 “와.”
 몇몇 용병이 감탄을 터뜨렸다. 다른 용병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마법사?”
 “맞아. 대단하지?”
 용병이 마치 자신이 마법을 사용한 듯이 으스댔다. 그 모습이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수해 보였다.
 “한 번만 더 보여 봐.”
 “아까 사용했던 마법으로 보여달라고.”
 로이를 끌고 온 용병이 다가와 말했다. 요청받는다면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단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 용병이 가방을 받아 구석에 놓았다. 마치 너는 이미 우리 파티다라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넓은 곳으로 이동했다. 텐트에 불이 붙으면 큰일이었다.
 플레어 마법을 떠올리며 수인을 맺었다. 용병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조금 전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이다.
 뱃속에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마법이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플레어.”
 불길은 앞으로 뻗어 나갔다가 곧 사라졌다. 하지만 용병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우와!”
 “이거 뭐야!?”
 용병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커다란 덩치가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야그나가 처음 마법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전혀 다르지 않았다.
 “뭐야?”
 주변에 있던 텐트에서도 사람이 다가왔다. 주변에 사람이 조금 몰렸다.
 로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조금 당황했다.
 그때 누군가 손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자신을 데려온 용병이었다.
 용병은 로이를 이끌고 텐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신 앉아 있던 다른 용병이 일어났다.
 “아아, 별일 아니니까 돌아가라고.”
 “별일이 아니긴, 내가 헛것을 봤나 그럼? 저 꼬맹이, 마법사 아니야?”
 “입을 조심하라고, 꼬맹이라니. 개구리로 변하고 싶냐?”
 꼬맹이라고 했던 용병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로이를 끌고 온 용병이 귓속말했다.
 “개구리로 만들 수 있나?”
 “그런 거 못 해요.”
 로이도 귓속말로 대답했다.
 “드디어 입을 열었군. 이름이 뭔가?”
 “로이.”
 “난 코크다.”
 용병이 손을 내밀었다. 로이는 그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
 그 사이 주위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더는 서서 구경하는 용병은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근처 텐트에 있는 용병들의 눈은 여전히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상황을 정리한 용병이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소개나 좀 하지. 난 테일러.”
 “닐.”
 “로치.”
 용병들이 소개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로이는 일일이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인사하면서 용병들을 유심히 살폈다.
 용병들의 첫인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일단 모두 젊었다. 잘 맞을 것 같았다.
 “로입니다.”
 “그래, 젊은 마법사 양반. 만나서 반갑군.”
 “원숭이 취급해서 미안한데. 뭐,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이 중에 마법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이런 종류의 관심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 왜 사람들이 유명해지려고 기를 쓰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동시에 궁금한 점이 생겼다.
 “마법사를 본 적이 없습니까?”
 “있을 리가 있나. 입에서 불을 뿜는 광대야 몇 번 보긴 했는데.”
 네 명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라는 것이 희귀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생각지 못했다. 아직 젊어서 못 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용병 하나가 주위에 있는 용병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중에 마법사 본 사람 있나?”
 “없지.”
 “있을 턱이 있나?”
 몇몇 용병이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은 용병도 고개를 저었다. 개중에는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용병도 있었다.
 그 사실이 로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끔 했다. 조금 전에 봤던 대단한 싸움으로 조금 의기소침해있었다. 마법사라는 것만으로는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충분히 관심받고 있었다. 대우받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위저드 스톤』 2권에 계속>

댓글(6)

gamebox    
되게재밋어요!
2017.02.18 12:36
악마풀풀    
차근차근 성장 하는 성장물 ~ 천천히 읽기엔 괜찮은 소설
2018.08.17 03:20
gk**********    
한낱 동네 파락호가 남작가 성에서 일하는고용인을 괴롭히고 때린다고? 남작 얼굴에 똥칠하는건데 이게가능한 이야긴가?쉬쉬하면서 모두아는 이야긴데 집사귀에만 들어가도 피바람이 불건데 개연성 꼬라지하고는...
2019.08.28 00:00
霹靂    
ㄴ개연성 꼬라지를 따지기 전에 당신 개념부터 챙기고 사세요. 남작 얼굴에 무슨 똥칠을 합니까? 남작하고 무슨 혈연관계인가요? 그냥 고용인일 뿐인데? 그런 사소한 일까지 명예 운운하면서 화내는 귀족은 당신의 뇌피셜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2019.08.28 04:55
slrg    
이 소설 재밌네요. 주인공이 계속 성장해가는 스토리입니다.
2021.01.02 02:34
마교만세    
재밌네요 하루 대여비로 1000골드씩 했으면 좋겠네요 무조건 한권당 3200골드군요
2022.06.11 22:24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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