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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개정판] 창천마혼(蒼天魔魂) [E](종료230728)

[개정판] 창천마혼(蒼天魔魂) 1-1권

2016.05.30 조회 8,631 추천 52


 # 序. 제갈세가주사(諸葛世家主史)
 
 시조(始祖). 제갈량(諸葛亮)­촉한(蜀漢) 재상(宰相)
 ······.
 십오 대손. 제갈환(諸葛煥)­용천회(龍天會) 부회주
 십육 대손. 제갈권(諸葛淃)­용천회 총군사(總軍師)
 십칠 대손. 제갈중(諸葛重)­용천회 군사(軍師)
 십팔 대손. 제갈철(諸葛哲)­용천회 부군사(副軍師)
 ······.
 이십삼 대손. 제갈월(諸葛月)­정의련(正義聯) 군사
 이십사 대손. 제갈진(諸葛進)­정의련 군사
 이십오 대손. 제갈만(諸葛滿)­정의련 부군사
 ······.
 삼십 대손. 제갈의(諸葛宜)­승천맹(昇天盟) 문상(文相)
 삼십일 대손. 제갈종(諸葛淙)­승천맹 문상
 삼십이 대손. 제갈춘(諸葛椿)­승천맹 문상보(文相補)
 ······.
 삼십팔 대손. 제갈운(諸葛雲)­무림맹(武林盟) 문상
 삼십구 대손. 제갈성(諸葛晟)­무림맹 문상
 사십 대손. 제갈류(諸葛柳)­무림맹주(武林盟主)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 一. 이중인격
 
 1
 
 제갈세가의 제삼십구 대 종손이자 당금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성의 두 눈이 별안간 부릅떠졌다.
 두 눈을 부릅뜨게 된 것도 한순간, 그의 얼굴은 이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부들부들.
 곧 그의 양손도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떨리고 있는 그의 양손 위에는 그다지 두껍지 않은 낡은 책자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줄곧 그 낡은 책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치켜뜬 그의 눈에는 실핏줄까지 섰다. 곧 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음성을 토해 냈다.
 “이이이이! 이놈이······!”
 제갈성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빠드득―
 대신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실핏줄이 선 흰자위. 그리고 이 갈리는 소리까지. 현재 그가 얼마나 분노한 상태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으으으, 으아아아! 손을 댈 게 따로 있고 장난을 칠 게 따로 있지! 세가주사(世家主史)의 원본에다가 장난을 쳐 놔? 이 망할 놈의 자식! 이런 썩을 놈! 미친놈! 정신 나간 놈! 개념 없는 놈! 이놈의 자식 어디 있어!”
 제갈세가의 현 가주인 제갈성.
 그의 입에서 놀랄 만한 언사가 튀어나왔다.
 무림의 선비요, 강호의 성인군자로 불리는 제갈성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상상하기도 힘든 언사였다.
 실제로 무림에서 그의 별호는 무치군자(無恥君子).
 부끄러움이 없는, 무림의 유일한 군자라는 뜻으로 불리는 별호였다.
 그런 그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길길이 날뛰며 누군가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살기에 가득 찬 눈으로.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때였다.
 똑똑똑.
 “가주님, 장(張) 총관입니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곧 서재의 문이 열렸다. 이윽고 초로에 접어들었을 법한 문사 풍의 노인이 공손한 발걸음으로 서재에 들어섰다.
 “아, 장 총관. 어서 오시오.”
 부드러운 어조의 듣기 좋은 목소리.
 편안한 표정과 깊은 눈동자.
 절제된 기도와 안정된 분위기.
 가주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장 총관이 존경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 총관에게 있어 가주야말로, 무치군자라는 그 위대한 별호가 전혀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때 작은 시골 현의 관리였던 장 총관이 제갈세가로 적을 옮기게 된 건 오 년 전부터였다.
 현령은 탐욕이 많아서 온갖 부정부패에 찌든 자였다.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 또한 현령을 말리기는커녕, 그에게 동조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또 괴롭히기 일쑤였다.
 짐승은 올가미를 싫어하고 백성은 벼슬아치를 싫어한다더니, 그가 일했던 현의 분위기가 딱 그 짝이었다.
 그들에게 질리고 지쳐서 결국은 관리 일을 그만두었는데 인연이 닿고 닿아 제갈세가에 이르렀던 것이다.
 제갈세가의 총관을 맡은 이후로, 가주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주는 그야말로 군자의 표상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한결같이.
 가주는 세가의 자랑이자, 무림의 자랑이자, 장 총관 자신의 자랑이기도 했다.
 가주는 보기에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였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장 총관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제갈성이 짓고 있는 지금의 미소는 스스로 매우 만족에 겨워하는 미소였으니까.
 장 총관이 서재에 들어오기 직전.
 시뻘게진 얼굴로 길길이 날뛰며 누군가를 향해 악에 받친 욕설을 퍼붓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지금의 제갈성은 온화하고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으로, 세인들이 알고 있는 믿음직한 제갈세가주, 무치군자 제갈성일 뿐이었다.
 눈 깜짝할 새의 변화였다.
 저 정도라면 능히 귀신이라도 속여 넘길 만했다.
 여전히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장 총관이 입을 열었다.
 “밖에서 얼핏 가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소인을 부르신 듯하여······.”
 “아? 아하! 그랬던가요?”
 “뭔가 하명할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알고 싶은 게······ 있어섭니다.”
 “예, 하문하십시오, 가주.”
 “장 총관, 류아(柳兒)는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장 총관은 한동안 난처한 표정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기침을 아니 하신 걸로······.”
 “흐음. 장 총관,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었지요?”
 “미시 정(未時正; 오후 두 시)쯤······ 되었을 겁니다.”
 장 총관의 대답에도 제갈성은 특유의 온유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가주께서도 참······ 하여간 훌륭한 인내력이시지.’
 아마 자신이 그런 아들을 뒀다면 이 순간,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서라도 가만히 있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패대기를 치며 역정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가주는 어딘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었다.
 아무리 자식 때문에 성낼 만한 상황이 벌어져도 가주는 감정적으로 변하는 법이 없었다.
 가주는 자식의 문제에 있어서도 늘 이성적으로 대처했고, 혹시라도 자식을 꾸짖을 일이 있을 때에는 위엄을 잃지 않았다.
 저렇듯 훌륭한 성품을 지녔으니 누구라도 가주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주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 아이, 어젯밤에 나갔다가 언제 들어왔습니까?”
 “그, 그것이······.”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가주는 괜찮으니 말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이에 장 총관이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진시 초(辰時初; 오전 일곱 시)였습니다.”
 “으음, 제법 늦었군요. 쯧쯧쯧! 녀석하고는, 한창 놀 나이긴 하지만 밤새서 노는 것은 성장에 좋지 않은데. 그래, 어제는 어디에서 놀다 왔답니까?”
 “도련님이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는 분이기에 소인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정오쯤에 소화루(炤花樓)의 양(楊) 대인이 계산서를 들고 세가에 찾아왔던 걸로 미루어······.”
 장 총관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가주가 잘 모르겠다는 듯 묻는다.
 “소화루라······?”
 “일대에서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기루입니다.”
 “흐음.”
 가주의 양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가주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아무리 군자로 명망이 높은 가주라지만, 아직 소년이라고 볼 수 있는 자신의 아들이 기루에 드나드는 게 절대로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분명히 화가 나셨겠지······.’
 장 총관이 속으로 그렇게 짐작하고 있는데 가주의 표정은 의외로 금방 풀렸다. 이윽고 가주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허허헛.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었거늘, 녀석도 이제는 어엿한 사내라 이거군요? 뭐, 젊은 나이에 그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너무 방황하면 곤란하니 이따가 아비로서 차분하게 한마디 해 줘야겠습니다.”
 역시 가주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버럭 화를 낼 법도 한데 가주는 전혀 그러지 않는다.
 가주야말로 공자님이 와도 탄복하고 갈 만한 군자 중의 군자요, 선비 중의 으뜸이었다.
 장 총관이 제갈성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 송구한 말씀이오나······ 소인이 한 말씀 드려도 될는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장 총관.”
 “사실, 가주께서는 도련님에게 너무 관대하십니다. 물론 가주께서는 워낙 훌륭한 교육 방침을 가지고 계시니 그 부분을 왈가왈부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아직 어리시니 실수는 있는 법. 그런 때에는 조금 더 준엄하게 꾸짖으실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이에 제갈성이 빙그레 웃으며 점잖게 말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장 총관. 하나 내 생각은 장 총관과는 약간 다릅니다. 지금의 류아는 청소년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혼란스러워할 만한 나이지요. 이는 인간의 성장에 있어 당연한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라고 해서 그 시절을 반추했을 때, 사고 한번 안 치고 자란 건 아니지 않았겠습니까?”
 “그, 그렇지요.”
 존경하는 가주의 말이 옳았다.
 장 총관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자신이 딱 그 꼴이 아닌가.
 자신도 그 시절엔 사고도 종종 치고 다녔다.
 당시에 자신의 부모님도 많이 속상해 하셨다.
 ‘나는 그랬었지만, 가주께서는 사고 한번 안 치고 자라셨을 게야. 그야말로 군자다운 분. 아아! 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분인가?’
 장 총관이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갈성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때에는 이해하고 다독이면서 약간의 충고 정도만 곁들이는 게 교육상 좋습니다. 다그치기만 하면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 시절의 자신을 투영해 봐도 가주의 말이 옳았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자꾸 꾸짖기만 하면 역으로 반항심을 가지고 비뚤어지기 십상인 겁니다. 내 자식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자식도 하나의 대등한 인격체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주옥같은 한마디, 한마디였다.
 장 총관이 깊이 탄복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제갈성이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우리 류아는 어미 없이 자란 아이가 아닙니까. 아무리 유모가 있다지만 어디 친어미만 했겠습니까? 그 생각만 하면 나는 류아에게 너무 미안해집니다. 내가 류아에게 엄하게만 대할 수 없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측은한 아이니, 부디 장 총관께서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가주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연 가주십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저는 가주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는 소인이 가주님의 그 깊은 뜻을 몰라 뵙고 불경을 저지른 듯합니다. 아까 소인이 드린 말씀은 부디 잊어 주십시오, 가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 총관은 세가에서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장 총관의 조언은 언제든 환영이니, 앞으로도 내게 조언하고 싶은 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주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류아에게 가 봐야겠습니다. 녀석······ 깨워서 밥이라도 먹여야지요. 허허허.”
 장 총관은 서재를 나서는 가주의 뒷모습을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주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도 기품이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장 총관을 뒤로하고 서재를 나서는 제갈성의 표정은 이미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너 이 자식······ 오늘 아주 뒈졌어. 이 빌어먹을 놈은 자식이 아니라 웬수지, 아주. 장난을 칠 게 따로 있지, 가보에다가 장난을 쳐?’
 악귀의 얼굴도 지금 제갈성의 얼굴만큼 흉악하지는 않으리라.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이 자식아.’
 아들을 향한 제갈성의 분노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2
 
 현명한 신하는 주군을 가려서 섬긴다 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가주를 따를 것이다.’
 가주가 떠난 서재의 문을 닫고 나서며 장 총관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훌륭한 가주를 위해서라면 능히 한 목숨 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가진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세가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던 사람들도 지금의 가주를 마음깊이 따랐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가주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착실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단다.
 장 총관은 안타까웠다.
 ‘도련님이 가주의 반만큼이라도 훌륭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유아 시절의 도련님은 상당히 총명했다고 한다.
 뛰어난 가주에게서 나온 도련님 또한 총명했으니 그야말로 부전자전이었다. 그때의 도련님은 모든 세가의 희망이요, 기쁨이었다고 들었다.
 그랬던 도련님이 이상해진 건 자신이 제갈세가에 오기 두 해쯤 전부터였단다.
 세가의 사람들도 도련님이 왜 변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어느 순간 갑자기 변했다고 한다.
 ‘그 총명하셨다는 도련님이 왜 그렇게 변한 걸까.’
 장 총관은 그것이 궁금했다.
 총명했던 시절의 도련님을 상상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봐 온 도련님의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함’ 외길이었으니까.
 ‘그래도 하늘이 도련님을 버리지 않으신 게지. 가주님과 같은 훌륭한 부친을 두셨으니.’
 누군가가 말했다.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덕행이라고.
 그런 면에서 볼 때 도련님은 가주에게서 가장 큰 재산을 물려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련님이 하루빨리 가주의 마음을 깨달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하긴, 도련님은 이미 가주에게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긴 했다. 자신이 아는 한, 이 넓은 세상천지에서 도련님 같은 절세미남을 또 찾아보긴 힘들 테니까.
 
 3
 
 자신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들 때문일 것이다.
 아니,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긴 회랑을 지나고 마당을 건너 아들의 방으로 걸어가는 그 길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아들만 생각하면 이마에 주름이 늘어간다.
 아들의 방으로 향하며 제갈성은 한 여인을 생각했다.
 ‘소연(小娟)······ 멀리서나마 느끼고 있소? 우리 아이, 류아가 어쩌고 있는지?’
 지난날의 사랑.
 자신의 추억에 남은 유일무이한 사랑.
 지금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거니 하며 기대하고 있는 사랑.
 그녀를 만난 것은 세가를 떠나, 멀리 요동 쪽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가지가 멋들어지게 늘어진 버드나무의 아래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 해의 봄은 유난히 따뜻했었다.
 
 아름다운 들판을 어루만지며 살랑대는 봄바람에, 여유롭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멋스럽게 춤추던 그날.
 그 버드나무의 아래.
 마치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자신을 맡기듯.
 그녀 또한 버드나무 가지처럼 바람에 자신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서 있었다.
 선녀였다. 선녀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그렇게 아름다울 리가 없었다. 선녀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그렇게 신비하면서도 고고하고 또한 기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를 본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신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녀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눈동자를 보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그 마력 깃든 눈동자에 빠져들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랬으면 이별의 아픔을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테니까.
 아마 그랬으면······ 제 어미를 쏙 빼닮은 지금의 골칫덩이 아들도 없었을 테니까.
 
 ‘난 버드나무를 좋아해요. 당신은 어떤가요?’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부터는, 세상의 그 어떤 희귀한 나무들보다도 버드나무를 제일 좋아하게 될 거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눈이 부셨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었다.
 그녀는 가문에서만 지내다 보니 답답해서 집을 나와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마침 자신도 비슷한 경우였으니 둘은 비슷한 처지에서 죽이 잘 맞았다.
 그녀의 이름은 ‘연(娟)’이라 했다.
 그녀는 특이한 구석이 많은 여인이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그녀는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성도, 나이도, 사는 곳도. 그녀가 말했던 가문도, 그녀가 가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그래도 예의상 자신이 이름을 밝히려 했을 때, 그녀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
 ‘서로가 누군지 밝히지 않기로 해요. 상대가 어디에 속해있고, 그전에 뭘 했던 사람인지 그런 건 묻지 않기로 해요.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그대로만 받아들이기로 해요. 지금의 가가와 지금의 나만을 생각하고 이 순간의 우리와 이 순간의 사랑에 최선을 다하기로 해요. 서로가 따지고, 의심하고, 상처받고. 우리는 그러지 말기로 해요.’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그녀가 전설 속에나 등장한다는 둔갑 여우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자신을 사랑했다.
 사랑만으로도 정녕 행복할 수 있었다. 그때는.
 청춘이었다. 그때는.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갔다.
 그녀와의 사랑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그러다가 그녀가 사랑의 씨앗을 잉태했고, 한 아이가 태어났다. 자신보다는 그녀를 쏙 빼닮아 아주 예쁘게 생긴 사내아이였다.
 그녀가 버드나무를 좋아하고 자신과 그녀가 처음 만난 곳도 버드나무 아래였으니, 이를 기념해 아이의 이름을 ‘류(柳)’라고 지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꼬박 첫돌을 맞던 날.
 ······그녀가 이별을 알렸다.
 ‘말도 안 되오, 소연(小娟)! 이건 말도 안 되오!’
 ‘미안해요, 가가. 미안해요······.’
 그날 그녀는 참 많이도 울었다.
 ‘어떻게 그대 없이 살란 말이오. 내게 어찌 이럴 수 있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가가······ 하지만 나는 가야 해요······.’
 그녀는 그렇게 떠나갔다.
 순수하고 고결했던 여인.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여인.
 ‘나를 잡지 말아요. 나를 찾지도 말아요. 미안해요.’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아이만 남겨 두고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4
 
 제갈성은 곧 아들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녀를 생각했다.
 ‘누구보다 훌륭하게 키우려 했다오, 소연. 당신과 나의 아이, 누구보다 반듯하게 키우고 싶었다오. 언젠가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을 만날 기회가 온다면, 멋지게 성장한 우리 아이의 모습을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오. 하나······.’
 아련한 추억에 잠겨 있던 제갈성의 두 눈에 또다시 실핏줄이 섰다.
 ‘아마 당신이 지금 내 입장이었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요.’
 이윽고 잔뜩 인상을 구긴 제갈성이 매우 조심스럽게 아들의 방으로 들어섰다. 대낮인데도 퍼질러 자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제갈성의 시야에 들어왔다.
 ‘보이시오, 소연? 그 예쁘고 총기 있었던 우리의 아이는 이제 없단 말이오. 느껴지시오, 소연? 내 앞에는 지금, 우리의 아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한심한 웬수 하나가 있을 뿐이오. 류아는······ 녀석은······.’
 제갈성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보시다시피 글렀소.’
 이윽고 방문이 조용히 닫혔다.
 제갈성은 곧 내공을 일으켜 방 안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늘 있었던 일이라는 듯, 제갈성의 그런 모습은 매우 익숙해 보였다.
 
 
 # 二. 만박서생(萬薄書生)
 
 1
 
 꿈을 꾸는 와중에도 그것이 꿈이라고 한순간씩 인식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인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꿈에 빠져 있곤 한다.
 제갈세가의 도련님인 제갈류도 현재 그런 상태였다.
 
 세가의 한쪽 구석에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어울려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무림의 유명한 문파나 세가의 자제들이었다.
 무가의 아이들답게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고사리 같은 손에 목검이나 목도 또는 목봉 등을 들고 있었다.
 “나, 이런 것도 배웠다!”
 모용가의 아이가 그 말과 함께 목검을 들고 멋들어진 초식을 펼쳐 냈다.
 겨우 예닐곱 살의 소년일 뿐인데도 그 아이가 펼쳐 낸 검에는 나름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깔끔하고 정교했다.
 “우와!”
 다른 아이들이 감탄하는 가운데 다른 아이가 목도를 들고 나섰다. 팽가의 그 아이 또한 기본이 탄탄하게 잘 잡힌 도법을 구사해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남궁세가의 남자 아이도 멋들어진 검법을 펼쳤고, 사천 당가의 여자아이도 앙증맞지만 정확한 암기술을 보였으며, 황보세가의 여자아이도 제법 각이 잡힌 권각법을 선보였다.
 그렇게 아이들이 서로에게 기량을 뽐내고 있을 때에도 근처의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들보다 더 예쁘게 생긴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또래들이 하는 양을 줄곧 지켜보고만 있었다. 여자아이 하나가 바위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그 아이를 불렀다.
 “얘, 류야!”
 “응?”
 “넌 뭔가 배운 것 없어?”
 “아, 난 그냥 구경하는 게 더······.”
 “에이! 그러지 말고 너도 배운 걸 보여 줘. 응? 제갈세가의 무공도 궁금하단 말이야.”
 여자아이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눈망울에 기대감이 가득 담겼다.
 “난 여러 가지 공부를 해야 했기 땜에 무공은 별로 못하는데······.”
 제갈류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안다는 듯 조잘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아!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제갈세가를 잇는 사람들은 무공보다는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대!”
 “응!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똑똑한 거래.”
 “그래도 무림인은 강해야 한댔어.”
 “맞아, 맞아! 우리 아버지도 그랬어. 무림에서는 강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댔어.”
 “그래서 난 무림맹주가 될 거야! 그래서 내가 무림맹주가 되면······!”
 모용가의 검법을 쓰던 아이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자,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로 쏠렸다.
 모용가의 아이가 짐짓 위엄 있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저기 있는 류아에게 문상을 시킬 거야! 왜냐하면 제갈세가의 사람은 당연히 무림맹의 문상이 되는 거니까. 류아, 너는 그때가 되면 내 명령을 잘 따라야 해?”
 이에,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던 제갈류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시······ 싫어.”
 그 의외의 대답에 모용가의 아이가 귀여운 눈망울을 찡그렸다.
 “시, 싫어? 왜 싫은데?”
 
 무림인으로서의 꿈이 무엇이냐고 묻던 할아버지의 말에 제갈류는 대답했었다. 자신도 나중에 커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문상이 되고 싶다고.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허허허. 류아야, 만약 학자라면 응당 최고의 학사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고, 장수라면 응당 대장군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게야. 또한, 관리라면 당연히 재상이 되기를 꿈꿔야 하듯, 우리는 무림인이니 당연히 천하제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란다. 우리가 무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
 “그, 그러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왜 천하제일인이 되지 않은 거예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류아만 할 때는 천하제일인을 꿈꾸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 제갈세가의 사람은 당연히 문상이 되는 거라고만 배웠지. 하지만 류아에게는 이렇게 할아비가 말해 주고 있지 않니. 무림인이라면 천하제일인을 꿈꾸라고 말이야.”
 “하지만······ 류아가 그럴 수 있을까요?”
 “해내지 못할 일은 없는 게야.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네 아비가, 이 할아비가, 나아가서는 제갈세가의 모든 선조들이, 단 한 명도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류아까지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는 게야.”
 그날의 할아버지는 이상했다. 늘 포근하고 자상한 그 모습은 똑같았지만 다른 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러니 류아야, 너는 천하제일인이 되어 보렴. 알았지? 이 할아비와 약속한 게다?”
 “응! 약속할게요! 류아는 커서 천하제일인이 될게요, 할아버지!”
 그리고 며칠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모용가의 아이가 눈자위를 찡그린 상태로 대답을 재촉했다.
 “류야! 왜 싫은 건데? 왜?”
 “내······ 내가······.”
 “니가······ 뭐?”
 “내가 천하제일인이 돼서 무림맹주가 될 거야!”
 “무슨 소리야? 제갈세가의 사람이면 당연히 무림맹의 문상이 되는 거랬어! 제갈세가는 당연히 그런 일을 하는 거랬어!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 무림맹주가 되면 류아 너는 나의 문상이 되어야 해!”
 모용가의 아이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제갈류를 향해 소리쳤다.
 “제갈세가의 사람인 넌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어!”
 “그다음에 내가 무림맹주가 돼도 류아가 문상이 돼야 하는 거야!”
 “맞아! 나도 무림맹주가 될 거야! 그러면 류아, 네가 문상이 돼서 내 명령에 따라야 하는 거야!”
 “제갈세가의 사람은 무공이 약하니까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댔어!”
 “싫어! 싫다고!”
 제갈류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넌 약하잖아!”
 “맞아. 약한 사람은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무공도 못 보여 주면서!”
 “얼굴도 여자애처럼 약하게 생겼으면서!”
 “이씨······!”
 결국 제갈류가 모용가의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제갈류는 그 아이를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오히려 맞기만 했다.
 다른 아이들까지 가세했다.
 이윽고 제갈류는 바닥에 쓰러졌고 두세 명의 아이들이 제갈류를 밟았다. 옆에서 보고만 있던 다른 아이들이 말렸을 때에야 상황은 진정되었다.
 구타하던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제갈류를 향해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약한 주제에!”
 “무공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아까 봤어? 류아는 내공도 못 일으키는 것 같았어!”
 “뭐야? 완전히 약하잖아?”
 “흥! 그러면서 무슨 천하제일인을 할 수 있다고?”
 아이들의 비웃음이 빗발치는 가운데 쓰러진 제갈류는 울고 있었다.
 “뭐야? 류아, 운다!”
 “여자애들이나 우는 거랬어!”
 “맞아! 사내대장부는 우는 거 아니랬어!”
 “얼레리꼴레리, 류아는 얻어맞고 운데요!”
 창피했다. 억울하고 분했다. 마음속에서 울분이 꿈틀거렸다. 그 울분을 어떻게 해서든 표출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제갈세가에서 태어난 나도 충분히 강할 수 있다고.
 너희들 따위보다 더 강할 수 있다고!
 제갈류는 쓰러져서 우는 와중에도 소리쳤다.
 “그, 그래도 난 천하제일인이······! 으아악!”
 
 2
 
 짜악―
 “으아악!”
 제갈류는 등짝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충격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눈물이 핑 돌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직 비몽사몽인 제갈류의 귓전으로 매우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잠꼬대도 지랄같이 하네, 아주.”
 상의를 탈의한 채 엎어져서 자고 있던 제갈류가 천천히 상체를 돌렸다. 맨살에 맞은 거라 등짝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직은 졸린 눈으로 제갈류가 고개를 돌리자 한 명의 중년인이 사악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갈류의 눈빛이 곧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흐헉! 아, 아부지!”
 “뭐, 이 자식아? 허! 천하제일인? 현실에서는 한심서생이요, 한량공자라고 불리는 같잖은 자식이 꿈에서는 천하제일이더냐?”
 아버지의 얼굴에는 분노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 아, 아부지! 어, 언제 온 거야?”
 무림맹에 갔던 아버지가 세가로 복귀할 시기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고 들었다. 그렇다던 아버지가 지금 이 순간, 왜 자신의 방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주먹이었다.
 퍽, 퍽!
 “악! 으악! 아파, 아부지! 왜, 왜 그러시는데!”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퍼 자, 이 자식아?”
 퍽퍽퍽!
 “악! 악! 으악!”
 “해가 중천에 떴어, 이 자식아! 삼 주 전에 나 무림맹 갈 때 니놈이 그 썩을 놈의 주둥이로 뭐라고 했어? 뭐? 새벽같이 일어나서 세가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전 세가인들의 모범이 되겠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그랬던 놈이 여태 퍼질러 자, 이 자식아?”
 퍽퍽!
 “으악! 악! 아부지! 아파! 아프다고! 세상에 자식 깨우는데 다짜고짜 쥐어 패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어디 있어, 이 자식아! 여기 있지! 그러니까 니놈이 약속을 지켰으면 될 거 아냐?”
 “도대체 언제 오신 거야! 왜 예정보다 일찍 오셔서 갑자기 이러는 거냐고!”
 “언제고 지랄이고! 일단 니놈은 쳐 맞아야 돼, 이 자식아! 넌 오늘 아주 뒈졌어!”
 퍼버벅!
 “아악! 아아악!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좀 늦게 일어났다고 이렇게 복날 개 맞듯 맞아야 돼? 아부지, 자꾸 이러면 나 진짜 폭로전 들어간다?”
 제갈류의 외침에 제갈성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제갈성이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제갈류를 응시할 때, 제갈류가 말을 이었다.
 “무림맹의 문상이자 무치군자이신 제갈성이라는 분은 사실 극악의 이중인격자라고 세상 사람들한테 폭로한다? 나, 그래도 되는 거지?”
 구타를 멈춘 아버지의 인상이 약간 찡그려지자 제갈류는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태껏 안 써먹고 아껴 뒀던 방법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쓰기 위해서.
 오늘 아버지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버지는 크게 분노하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효과가 있어 보였다.
 이윽고.
 퍽! 퍼버버벅!
 “폭로전? 허허 참! 해라, 해! 해! 이 자식아! 해 봐, 이 자식아! 사람들이 네놈 말을 믿을지 내 말을 믿을지는 어차피 빤한 것이니 해 보라고, 이 자식아! 무능한 제갈세가의 한량이 하는 소리 따위, 누가 믿을까 봐?”
 “아! 아! 아악! 아, 진짜! 그만 좀 때려!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거든? 진짜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망신 사지 마시고······! 크악!”
 “어찌 제갈세가의 외아들이라는 자식이 상황 파악도 그리 못하냐? 야, 이 자식아, 호부견자(虎父犬子; 아비는 범인데 새끼는 개)의 대표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평가받는 게 네놈이야! 그런 놈이 하는 소리를 누가 들어?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해 봐, 이 자식아! 이게 아주, 이제는 아비를 협박해?”
 “아악! 진짜 아프다고! 아무리 늦잠을 잤어도 그렇지, 오늘은 너무 심하잖아!”
 “내가, 이 자식아! 네놈 때문에 남부끄러워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들고 다녀!”
 “아, 진짜! 또 그 소리! 귀에 딱지가 내려앉겠어! 그만 좀 해, 좀!”
 이에 아들을 구타하던 제갈성의 손길이 멈췄다.
 그리고 찡그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 자식아, 어제는 어디서 퍼 놀다 왔어?”
 “아, 그냥 주루!”
 “주루? 어디? 소화루?”
 제갈성의 물음에 제갈류가 화들짝 놀랐다. 제갈성이 다시 물었다.
 “야, 이 빌어먹을 놈의 자식아, 소화루는 주루가 아니고 기루라던데? 그것도 인근에서 가장 비싼 기루라던데? 게다가 이 자식아, 오늘 정오에 소화루에서 계산서를 들고 사람이 찾아왔었다던데? 양 대인인가 하는 자가 아직도 세가에 남아서 네놈을 기다리고 있다던데?”
 “아, 아니, 그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자식이! 불알도 영글지 않은 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계집질을 하고 다녀, 이 자식아? 꼴에 사내라 이거냐? 응? 이 자식아? 게다가 뭐, 가장 비싼 기루? 지금 세가의 재정 상황이 얼마나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지 빤히 알면서도 그딴 곳엘 가? 이놈의 자식!”
 퍼버버벅!
 “크아아악! 그, 그게 아니라, 아부지!”
 “그러고도 니놈이 사람 새끼냐?”
 퍼버벅!
 “으아악! 아, 아부지. 살려 줘!”
 “살고 지랄이고 필요 없어, 이 자식아! 그냥 뒈져, 뒈져, 뒈져! 이 자식아! 네깟 놈은 살아 있을 필요가 없어, 이놈의 자식아!”
 “악! 악! 으아악!”
 “그리고 너, 이 썩을 놈의 자식! 장난을 칠 데가 따로 있고, 안 칠 데가 따로 있지! 제갈세가주사에다가 장난을 쳐 놔? 뒈지려고 환장을 했지, 이 자식아? 살기가 싫은 거지? 이 미친 자식!”
 퍽!
 “정신 나간 놈의 자식!”
 퍽!
 “이 망할 놈의 자식!”
 퍽!
 “이런 개념 없는 놈의 자식!”
 퍽!
 “으아아악!”
 자신에게 맞은 아들이 방문 쪽으로 나뒹굴었다.
 제갈성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볼 때 잽싸게 일어난 제갈류가 외쳤다.
 “우리 아부지는 이중인격자!”
 그렇게 외친 아들이 문을 열고 휙 도망간다.
 한심해도 저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서재에서 제갈성이 읽고 있던 낡은 책자가 바로 ‘제갈세가주사’라는 책자였다.
 그 책자에는 제갈세가의 가주였던 모든 선조들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세가에서 가보(家寶)로 여기는 귀한 책자였다.
 여러 권의 필사본을 만들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긴 했지만, 제갈세가주사의 원본이 유독 가보처럼 여겨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갈세가주사는 전대 가주가 타계한 이후, 다음 대의 가주가 전대 가주의 업적을 친필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갈세가주사의 원본에는 역대 제갈세가주들의 필적이나 필치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이 제갈세가주사의 원본이 가보로 여겨지는 커다란 이유였다.
 제갈성이 오랜만에 제갈세가주사를 들춰 본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전대가주의 업적을 기록하는 것이 현 가주의 책무였으니까.
 그런데······.
 경건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들춰 본 제갈세가주사의 목차에는 아버지의 직위와 자신의 직위, 이에 더해서 아들의 직위까지 이미 적혀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주, 천하제일인, 고금제일인.’
 아들의 직위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없이 아들의 필적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아들이 더 얼마나 한심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 대목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후우······ 써억을 놈!”
 
 3
 
 아들의 방을 벗어난 제갈성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들의 방으로 향할 때는 내내 그녀를 생각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때는 내내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아버지······.’
 젊었을 적, 집을 나갔던 자신이 세가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바라보며 황당해하던 아버지의 표정을 기억한다.
 세상을 배우겠답시고 세가를 나갔던 아들이 이 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 품안에 핏덩이를 하나 안고 있었으니, 자신이 그때 아버지의 입장이었어도 황당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기만 하다. 갓난아이였던 류아를 품 안에 들고 자신이 세가로 복귀했던 그때······.
 
 “에잉, 쯧쯧. 집 나가서 뭐 하다 온 게냐? 그렇게 하고 싶다던 세상 구경은 다 했고?”
 “죄송합니다, 아버지.”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의 아버지가 물었다.
 “세상을 배우러 간다던 놈이 그 갓난아이는 또 뭐고?”
 “······.”
 “어디 보자.”
 아버지가 갓난아이인 류아를 안아들었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류아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이목구비가 딱 네놈 여렸을 적 모습인 걸 보니 그냥 주워 온 애는 아닌 모양이로고?”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럼 애 어미는?”
 슬픈 얼굴로 고개만 젓는 그를 향해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아마 죽었다고 생각하셨던 건지도 모른다.
 “들어가서 쉬어라.”
 “예,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향해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노안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참! 복 달아날까 봐 자세히는 말 못하겠지만 말이다.”
 “예, 아버지.”
 “내, 간밤에 길몽(吉夢)을 꿨다. 간밤엔 별자리도 기가 막히게 좋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좋은 별자리는 내 난생처음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자신을 향해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웬일로 우리 가문에 대단한 길조가 있더라니 오늘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내가 아는 네놈은 용(龍)이 아니니, 그렇다면 내 손자 될 그 아이가 용이렷다! 크허허허!”
 “······.”
 “학문을 하면 공자님 못지않은 대학자가 될 것이요, 정치를 한다면 관중(管仲; 춘추시대 제 나라의 재상), 병법을 한다면 우리 시조 이래 최고의 군사가 될 수도 있겠다. 방금 네 아들놈 관상을 보아하니 충분히 그럴 만하겠다, 이 말이니라. 허허허.”
 갓난아이 류아를 데리고 세가로 복귀했던 그날.
 그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제갈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송구하오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버지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류아는 용이 될 거라고 하셨지요?
 하긴, 용이 되긴 되었더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버지가 바라신 천룡도 아니고, 무림의 미래라는 잠룡도 아닙니다.
 아버지가 용이라 하셨던 제 아들 류아는 말이지요. 그 아이는 지금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중룡(人中龍)’이 아니라, ‘견중룡(犬中龍)’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줄은 아버지께서도 대강 짐작하실 겁니다.
 사람 중에서는 막장이지만, 그나마 뭇 개들과 비교하면 용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아버지의 그 잘난 손자는 이렇게 불립니다.
 견룡서생(犬龍書生).
 예, 저렇게 불립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산다는 말입니다. 견자(犬子) 소리를 듣고 있거든요.
 공자요?
 예, 되었습니다.
 그 공자님은 아니지만 공자가 되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귀여워하시던 그 잘난 손자는 만박공자라고도 불린답니다.
 예, 예, 예. 좋은 별호지요.
 하늘에서도 기뻐하실 아버지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마냥 기뻐하실 일만은 아닙니다.
 두루두루 해박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라는 뜻의 만박(萬博)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놈에게 쓰인 만박(萬薄)은 두루두루 엷다는 뜻입니다. 지식도 엷고, 상식도 엷고, 무공도 엷고, 인망도 엷고, 됨됨이도 엷고, 인내력도 엷고······.
 죄송합니다, 아버지.
 엷고 얕은 게 너무 많아서 지금 이 순간 다 나열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뭐,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중요한 덕목에 대해서는 다 부족하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내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의 손자는 그런 의미에서의 만박공자, 또는 만박서생이라 불립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이것까지는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아이는 한심공자로도 불리고, 한량공자라고도 불립니다.
 멋지지요?
 아버지께서는 늘 제게 말씀하셨지요.
 자식을 낳아 보면 저도 아버지의 답답한 심정을 알게 될 거라고요.
 예, 아버지.
 이제는 저도 십분 공감합니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아들은······ 제 아들보단 낫지 않았습니까?
 양심에 손을 얹고 객관적으로도 그랬질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자신 있게 아버지를 향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를 보면서 답답하셨던 아버지의 그 심정, 저는 이제 알겠습니다만, 제 아들을 보면서 답답한 제 이 심정을 아버지께서는 절대, 절대 모르실 거라고 말이지요.
 아버지?
 그래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실 아버지께 송구한 마음을 가득 담아 여쭙습니다.
 이 부족한 아들이 감히 아버지의 점성술과 예지력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여쭙습니다. 아버지를 의심하는 불효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류아를 품에 안고 세가로 복귀했던 그날.
 길몽을 꾸셨다던 그 말씀은 사실이 아니셨지요?
 그 전날, 별자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다는 그 말씀도 사실이 아니셨지요? 그렇지요?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 주십시오, 아버지.
 제발······.
 
 
 # 三. 소화루주 고영
 
 1
 
 제갈세가의 넓은 뒷마당 한쪽에 세워진 가산(假山)의 정자 위에, 열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홀로 고요히 앉아 있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애매해 보이는 나이였지만 눈빛은 또래 치곤 깊어서, 그에게서는 전체적으로 제법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게 된다. 모든 사람이 그의 얼굴을 보고 예외 없이 놀라게 되는 이유는 같았다.
 관옥 같은 얼굴.
 세인들은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유해 그런 말을 쓰곤 하지만, 이 소년의 얼굴에 비유하기엔 그런 표현도 한참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느낌의 절세 미소년.
 그의 이름은 제갈류였다.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는 평가를 받는 그였지만 세인들도 그에 대해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생김새였다.
 덕분에 그는 옥면한량(玉面閑良)이라고도 불렸다.
 조용한 정자 위해 고고하게 앉아 있는 미공자 제갈류의 모습은 아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버지······.’
 제갈류는 방금 전 아버지와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타까웠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분노하신 것은 맞다.
 때릴 만하셨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제갈류는 보일 듯 말 듯 편안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방금 전에 부친에게서 크게 혼나고 구타를 당한 아들의 표정은 분명히 아니었다.
 ‘늘 그러셨듯이, 고도의 추궁과혈(推宮過穴) 수법······.’
 추궁과혈이란 원래 내공으로 혈도를 문질러서 내상을 치유하는 수법을 말하는 것이나, 무학이 발전하면서 그 방법들도 발전했고 여러 가지 응용법도 나왔다.
 얼핏 생각하기에 아버지의 구타는 분에 못 이겨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나, 실상은 적당한 세기로 인체의 요혈들을 때려 각각의 혈을 보정하고 기운의 흐름을 더욱 원활히 이뤄지게 만드는 상승의 수법이었다.
 아까도 그랬다.
 구타를 가장한 아버지의 손길 하나하나에서 잠력이 느껴졌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버지의 구타였다.
 아버지가 사용한 수법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매우 미세한 힘의 조절을 요구하는데, 그야말로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지라 심력의 소비도 크셨을 터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픈 것이다.
 아버지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그러셨겠지만, 실상은 아무 소용이 없기에.
 ‘하지만 저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희망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으니 시간이 더 필요할 뿐.’
 어렸던 시절 할아버지와의 약속. 그 꿈.
 결코 포기한 게 아니었다.
 다만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뿐이다.
 순간적으로 제갈류의 눈빛에 모종의 의지가 담겼다가 사라졌다.
 
 2
 
 정자 위에 앉아서 상념에 잠겨 있던 제갈류를 향해 두 사람이 다가왔다.
 제갈류의 고개가 다가오는 자들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도 뭔가를 고뇌했던 그였지만, 분위기는 이미 평온해져 있었다.
 다가온 두 사람은 후덕한 인상의 중년인 한 명과 그의 시녀로 보이는 이십 대 초반 가량의 여인이었다.
 “푹 쉬셨습니까? 공자께서 기침하셨다는 전갈을 받고 오는 길입니다.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그렇게 말하며 등장한 중년인은 오늘 정오에 계산서를 들고 세가에 찾아왔다던 소화루의 양 대인이었다.
 “왔어? 많이 기다렸어?”
 어른이 경어를 쓰는데 어린놈이 반말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대인은 조금도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혀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양 대인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었지만 제갈류의 시선은 그가 데려온 시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미소 띤 얼굴로 시녀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좋은 생김새도 능력은 능력이야. 방금 동생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반할 뻔했잖아?”
 “과찬이셔, 루주(樓主) 누님. 생긴 것이 어디 내 능력이었겠어? 부모님 능력이지.”
 이들이야말로 조금이나마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단 두 사람이었다.
 양 대인이 알고 있는 것은 무림에서 평가받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 정도였고, 누님이라고 불린 여인은 자신이 가진 신체의 비밀까지도 약간이나마 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라도 그 또한 재산은 재산인 거야. 능력이 밥 먹여 주지 얼굴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지? 하지만 그 말은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통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 동생은 얼굴로도 돈 잘 벌고 있잖아?”
 대답대신 제갈류는 미소만 지었다.
 얼핏 봐도 시녀는 제갈류보다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류는 전혀 거리낌 없이 반말을 썼다. 친구 대하듯.
 이상한 건 시녀 또한 그의 완전한 하대에 전혀 언짢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시녀의 복장을 하고 있는 소화루주가 양 대인을 향해 눈짓하니, 양 대인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제갈류의 앞으로 내밀었다
 시녀가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어, 동생. 받아.”
 양 대인이 내민 것은 몇 장의 전표였다.
 전표에는 누가 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액수가 적혀 있었다. 계산서를 들고 찾아왔다는 양 대인이 오히려 제갈류에게 거액의 전표를 내밀고 있으니, 희한한 일이었다.
 “하아······.”
 남들이라면 기뻐서 환장하거나 놀라서 졸도할 금액이다. 그런 돈을 보면서도 제갈류는 긴 한숨만 내쉬었다.
 “하여간 누님도 참······ 여태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나 말했잖아. 그러니까 도로 넣어 둬.”
 “그렇게 말하면 이 누님 섭하다? 그전까지 줬던 돈은 동생이 몸소 찾아와서 수고한 것에 대한 사례비였지.”
 “에휴, 그러니까 사례비 같은 거 챙기지 말랬잖아.”
 “내 입장에서는 안 챙겨 줄 수가 없는 문제야. 동생이 화우정(花雨亭)에 오는 날이면 내로라하는 소저들이 구름떼처럼 몰리잖아? 꽃이 있는 곳으로 벌이 날아드는 법이니, 그 몰려든 소저들 때문에 또다시 젊은 공자들이 물밀듯 밀려오지. 그런 날의 매출은 평소의 열 배가 넘어. 결론적으로 동생 덕분이잖아? 동생은 돈줄이거든. 그러니 동생 용돈이라도 챙겨 주는 게 당연한 거고.”
 
 호북성의 북쪽에 위치한 양번(襄樊)에는 일 년 전에 화우정이라는 고급 주루가 생겼다.
 ‘꽃비가 내리는 정자’라는 의미의 화우정은 특이하게도 청춘 남녀들만을 대상고객으로 삼은 최고급 주루였다. 따라서 일정한 연령 이하거나 일정한 연령 이상이면 화우정에 출입할 수 없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화우정의 그러한 영업 전략을 비웃었다. 고객의 범위를 처음부터 좁히고 시작하는 장사가 성공할 리 없다고 여겼다.
 가뜩이나 술값도 싼 편이 아니었으니, 화우정은 곧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는 돈 많은 지역 유지의 자제들이나 이름난 상인의 자제들만이 그곳을 이용했다.
 사람들은 그러다가 망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상들과는 달리 화우정의 고객은 조금씩 늘어 갔다.
 고위층은 고위층과 어울리는 법이라, 곧 그들과 친분이 있는 지역 관리의 자제들도 드나들었다. 이어서 지역 명문가의 자제들이나 지역 유명인사의 자제들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름난 무관이나 문파의 자제들도 그곳을 이용하며 서로가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렇듯 일정한 수준 이상의 배경이나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 대부분이 화우정에서 교분을 쌓게 되었다.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젊은이들이 모두 화우정을 이용하니, 곧 알음알음으로 그들을 알던 지인들도 화우정에 드나들며 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곧 날개를 달고 퍼져 나갔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젊은이들도 인맥의 중요성을 안다.
 화우정에서는 어른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었으니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교류했고, 화우정의 인기는 계속해서 높아졌다.
 개점한 지 일 년이 흐른 지금.
 화우정은 초기의 우려를 완전히 뒤엎으며 호북성 최고의 명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호북성뿐만 아니라 그 인근 지역에까지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만에 화우정은 청춘 남녀들에게 있어 명실공히 최고의 사교 무대가 된 것이다.
 화우정에서 좋은 인연을 쌓아 혼사까지 성공하고 그 이후에도 잘 살고 있는 좋은 사례들이 이어지니, 화우정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그 화우정에서 최고의 인기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젊은이가 바로 제갈류였다. 제갈류에 대한 무림의 평가는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무림 외에서의 평가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백 년에 걸쳐 명문 무가의 자존심을 지켜 온 게 제갈세가였다.
 세가의 시조라는 제갈량은 신격화되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 후예라는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충분히 그 명성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 왔다.
 황궁에서까지 제갈세가의 인물들을 초청해서 고견을 청하곤 했으니, 일반인들에게 있어 제갈세가의 명성과 그 대단함은 경외심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다.
 제갈류는 그런 제갈세가의 장손이니 당연히 차기 가주가 될 사람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이유만으로도 제갈류는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가졌다. 게다가 그는 생김새까지 절세 미남이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제갈류는 뭇 소저들의 팔자를 바꾸고, 나아가서는 그 집안의 위상을 바꾸기에도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제갈류를 화우정에서는 매우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고.
 
 제갈류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여간 우리 누님 통도 크셔. 그 큰돈을 용돈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우리 루주 누님밖에 없을걸?”
 “어쨌건 이 전표들은 동생 거야. 동생은 엄연히 사업 동반자야. 지난 일 년간, 화우정에서 벌어들인 순수익에서 지분 대비, 동생의 몫을 계산했어.”
 제갈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업 동반자는 무슨? 지분은 무슨?”
 “화우정은 애초에 동생이 착안한 사업이야. 화우정의 사업 방식에 관해 처음 얘기할 때 동생이 그랬지? 잘되면 약간의 지분이나 챙겨 달라고? 동생도 알다시피 나는 약속 하나는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야.”
 “에이, 누님! 그땐 내가 그냥 농담 삼아 했던 말이잖아. 몰라서 그래? 내가 돈 바라고 했던 말 아닌 거, 누님이 더 잘 알잖아? 그러니 도로 가져가.”
 인근에서 가장 비싼 기루라는 소화루의 주인, 소화루주가 바로 화우정의 실제 주인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소화루주의 최측근인 양 대인과 정(鄭) 대인 이외에 딱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가 바로 제갈류였다.
 ‘청춘남녀만을 대상으로 한 특화된 주루, 화우정.’
 평소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소화루주에게 그 사업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제갈류였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정 대인은 소화루주의 비밀 측근으로, 표면상 화우정의 주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생이 이 돈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아. 하지만 나 또한 고마움도 모를 정도로 후안무치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 이 돈은 뇌물도 아니고, 암흑가의 돈도 아니고, 눈먼 돈도 아니잖아. 화우정은 동생이 착안했고, 나는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해서 투자했을 뿐이야.”
 “누님이 재복(財福)을 타고난 거야.”
 “동생! 이 누님의 사업 신조 몰라? 우물물을 맛있게 마셨으면······.”
 “우물을 파 놓은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알아라! 알지, 알아. 내가 왜 모르겠어, 누님.”
 “알면 받아, 이 돈은 엄연히 지분이니까. 만약 동생이 그래도 이 돈을 받지 않겠다면 나는 당장 가서 화우정을 때려치울 거야. 애초에 화우정이 없었어도 난 충분히 풍족하게 살고 있었으니까.”
 “아주 떼를 써요, 떼를. 천하의 소화루주가 어린애도 아니고.”
 “안 받으면 앞으로는 정보도 안 준다.”
 그 말에 제갈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헤이! 거참, 우리 누님 고집하고는.”
 결국 제갈류가 눈앞의 전표들을 대충 품속에 구겨 넣었다. 그제야 소화루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호호홋. 돈에는 꿈쩍도 안 하는 화우정 최고의 인기남도 정보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네?”
 “화우정 최고의 인기남이면 뭐 해? 누님도 무림에서 내 별명이 뭔지 빤히 알면서.”
 “한심함의 지존이라서 한심지존. 와룡서생이 아니고 한량서생. 한량이긴 하지만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생겼다고 해서 옥면한량. 사람에게 중요한 덕목에 있어서는 뭐든지 두루두루 얇고 옅다고 해서 만박공자. 사람으로 비유되기보다는 개로 비유되어······.”
 “어허! 거참? 알았어, 누님. 알았다고! 그러니 그만 좀 해. 뭐 듣기 좋은 소리들이라고.”
 “하지만 걱정 마. 이 누님은 동생에게 내려진 무림의 그런 평가들에 전혀 속고 있지 않으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진실로 속고 있는 쪽은 어디고, 속이고 있는 쪽은 어디일까?”
 소화루주가 오묘한 눈빛으로 제갈류를 바라보며 웃었다. 제갈류도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나저나 동생, 그 돈으로는 뭐 할 거야?”
 “글쎄? 애초에 받으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돈이잖아. 그러니 어떻게 쓸지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제갈류는 피식 웃었다.
 소화루주에게서 받은 거액의 전표를 생각하니 방금 전에 아버지한테서 혼나면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자식아, 오늘 정오에 소화루에서 계산서를 들고 사람이 찾아왔었다던데?’
 소화루에서 양 대인이 계산서를 들고 왔다는 건 세가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양 대인은 그전에도 계산서를 들고 세가에 몇 번 찾아왔었다. 시녀로 변장한 소화루주도 함께였다.
 소화루주의 정체는 따로 있었다.
 하오문(下午門) 소속, 호북성 양번 분타주 고영(高瑩).
 그것이 소화루주의 진정한 정체였다.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그녀의 두 측근을 제외하면 제갈류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두 측근 또한 하오문도로, 고영의 실제 수하였다.
 
 하오문은 여러 밑바닥 인생들로 구성된 문파였다.
 구성원들 중에는 배수(扒手; 소매치기)도 있었고, 소투(小偸; 도둑)도 있었고, 도곤(賭棍; 노름꾼)도 있었고, 기녀들도 있었다.
 최하류의 인생들로 구성된 문파였지만, 그들이 가진 정보망은 개방에 필적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하오문은 입수한 정보를 팔아 문파를 유지했다.
 개나 소나 개방의 정보를 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체의 정보력이 뛰어나지 않다면, 어쩔 수 없이 하오문에서 파는 고급 정보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갈류는 고영과 양 대인이 언제든 세가에 찾아올 수 있게 했다.
 세간에 알려지길 그들은 기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찾아온다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 대인에게 마치 돈 받으러 온 사람처럼 계산서를 들고 오게 한 것이다.
 
 고영이 여태까지와는 다른,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림맹주와 구파일방의 수장들이 모두 어딘가에 다녀왔어. 주요 세가의 수장들도 모두. 아마 네 아버지도 함께 다녀오셨을 거야.”
 제갈류의 표정도 진중해졌다. 정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두 사람은 누구보다 진지해졌다.
 “왜?”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도 몰라. 무림맹주와 구파일방의 장문인 그리고 무림 세가주들, 모두가 내로라하는 무림의 유명 인사들이야. 얼마 전에 회의 때문에 모두가 무림맹에 모였었지. 무림맹에 모였던 그들은 딱 하룻밤 동안 무림맹을 비웠었어.”
 “그분들이 동시에 움직인 건가?”
 “아니, 각자 이유는 달랐어. 수장들 중에서 몇 사람은 친목을 위해 무림맹 밖에서 회동한다고 나갔고, 또 어떤 사람은 동호를 구경한다고 나갔어. 어떤 사람은 선물을 사러 간다고 나갔고.”
 제갈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그날 밤 모두가 무림맹을 비웠었고, 그 이후의 종적이 묘연해. 사라졌던 그들은 모두 이튿날 낮에 띄엄띄엄 무림맹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어.”
 “우연은······ 아니었겠군?”
 “우연일 수가 없지. 무림맹주를 비롯한 수장들은 아마 밖에서 따로 모여서 함께 움직였을 거야. 함께 어딘가에 다녀온 거야.”
 고영의 대답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제갈류가 말했다.
 “돌아가는 정황으로 봤을 때, ‘그들’ 때문이겠네.”
 고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고 누님도 그렇고, 지금 똑같은 곳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누님?”
 제갈류가 그렇게 말하며 정자의 바닥에 손가락으로 네 글자를 썼다.
 
 <천마신교(天魔神敎).>
 
 그 네 글자를 확인한 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본문에서 조사 중이긴 한데, 정파의 수장들이 무림맹을 비웠던 그날 밤······ ‘그’도 자리를 비웠을 가능성이 매우 커. 그게 바로 삼 일 전 밤이야.”
 그 말과 함께 고영도 정자의 마룻바닥에 손가락으로 여섯 글자를 썼다.
 
 <당대 천마 윤무(尹楙).>
 
 “그 사람만? 주위의 수하들은?”
 “다른 거마들의 움직임은 없었어. 오로지 그 사람만.”
 “누님, 그 사람······ 최근에 어디에 있었다고 했지?”
 “중경부(重慶府).”
 “중경이라면······.”
 “무림맹이 있는 무창에서 멀지 않지.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어.”
 “더 중요한 사실?”
 “응. 아무래도 무림맹주인 종리백 대협이 그날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아.”
 고영의 말에 제갈류는 크게 놀랐다.
 “뭐어?”
 
 천마신교는 중원 무림을 피로 씻으려 노력해 왔다.
 그러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했던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막혔다. 정파 무림의 결집된 힘은 그만큼 만만치 않았다.
 당장 최근 백 년 사이에 천마신교가 중원 무림을 상대로 피의 전쟁을 일으켰던 적이 세 차례나 있었다. 덕분에 정파 무림에도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결국에 가서 승리한 쪽은 늘 정파 무림이었다.
 천마신교와의 마지막 전쟁은 이십삼 년 전에 있었다.
 그때의 천마신교야말로 역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앞선 두 차례의 전쟁에서 이겼던 무림맹이 설마하고 방심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정파 무림이 입은 피해는 매우 컸다.
 그때야말로 진정 천마신교의 천하가 되는 듯 보였다.
 그만큼 정파 무림은 위태로웠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던 시절에 정파에서 한 명의 절세고수가 등장했다. 그의 등장으로 정파 무림은 또다시 중원을 지킬 수 있었다.
 과연 정파 무림의 힘이었다.
 천마신교와의 마지막 전쟁에 등장해 정파 무림을 구한 절세고수의 이름은 종리백(鍾離帛)으로 별호는 천조검신(天助劍神)이다. 그때의 영웅행으로 그는 무림맹주에 추대되어 아직까지 맹주 직을 맡고 있었다.
 종리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하나 더 있었다.
 천하제일인.
 그야말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바로 그였다.
 
 “도대체 누가 있어 당금의 천하제일인에게 그토록 심각한 내상을 입힐 수 있단 말이야?”
 “아직 확실히 밝혀진 건 없어. 심각한 내상을 입은 건 무림맹주뿐만이 아니야. 그날 함께 갔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또한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었어. 하지만 무림맹에 복귀한 그들은 멀쩡한 척 행동했지. 그래서 그들이 다쳤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아마 그날 함께 갔던 정파의 수장들 중에서 무사한 분은 네 아버지뿐일 거야.”
 제갈류 자신이 보기에도 아버지는 멀쩡해 보였다. 방금 전에 아버지에게 맞아 봐서 잘 안다.
 아버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음. 이건 내 추측인데. 네 아버지만 무사하신 걸로 봐서는······.”
 고영의 추측은 무서울 정도였다. 정보를 취합하고 추측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제갈류가 가만히 고영을 응시하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밤에, 비무(比武)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비무라? 누가? 누구와?”
 “중경에서 자리를 비웠던 한 사람과, 무림맹을 비웠던 모든 사람들 사이의 비무. 일대일, 또는 일 대 다수의 비무.”
 “그렇다면 승자가······ 설마 그라는 얘기야?”
 “현재까지의 정황으로는······ 그래.”
 “다른 방면으로도 그토록 무서운 자가 천하제일인을 이길 정도로 무공까지 강하다고?”
 믿기 힘든 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의 물음에 고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고영이 입을 열었다.
 “동생. 그럼 그날 밤,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무림맹을 빠져 나가서 그들끼리 비무라도 했을라고? 서로에게 심각한 내상을 입힐 정도로?”
 제갈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누님의 말대로 그가 개입했을 수밖에 없겠네. 하지만 그렇게나 강하단 말이야? 그는 멀쩡해?”
 “아마도 멀쩡한 것 같아. 최소한 무림맹주나 각파의 수장이 내상을 입은 것보다는 훨씬 멀쩡한 것 같아.”
 
 당대의 천마인 윤무에 관해서는 온갖 소문만 무성했다. 당대의 천마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해서 천면천마(千面天魔)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어떤 이는 그가 무서운 책략가라고 했다.
 다른 이는 그가 대단한 정치가라고 했다.
 또 다른 이는 그가 외동딸을 지독하게도 아끼는 팔불출 아버지라고도 했고, 어떤 이는 그가 뛰어난 학식을 가진 선비라고도 했다.
 그를 일컬어 이름난 대상인들보다 더 대단한 사업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소문들이 있었지만 그의 무공 실력에 관한 소문은 여태껏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천하제일인을 이겼다고 하니 믿기가 힘들다. 그래도 제갈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영의 추측은 여태껏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다.
 “내가 전에 말했지? 지금 천마신교는 무림을 상대로 또다시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제갈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영이 말을 이었다.
 “그들은 그전처럼 중원 무림을 상대로 피의 향연을 벌이고 있지는 않아. 하지만 분명히 그들의 전쟁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어.”
 “소리 없는 전쟁.”
 “그래, 소리 없는 전쟁. 이미 중원의 서너 곳이 그들의 세력권에 놓였다고 했고, 중경도 그중의 하나라고 했지? 동생에게 그 얘기를 해 줄 때 내가 잘못 알았던 게 있어.”
 “뭔데?”
 “중원의 서너 곳이 아니었어. 내가 그 얘기를 할 때, 중원은 이미 육 할 이상 그들의 세력권 아래에 놓였었다고 생각돼. 지금은 칠 할에 육박할지도 몰라. 대다수의 무림인들이 모를 뿐이야. 아마 수뇌부는 알고 있겠지. 그런데 그들은 왜 밝히지 않는 걸까? 세상을 속이면서까지 그들이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십삼 년 전의 전쟁에서 정파가 승리한 이후로 무림은 태평하기만 했다. 그러니 고영의 말을 일반 무림인들이 들었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미친년 취급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믿기 힘든 놀라운 사안이었다.
 “무림은 이미 마도천하의 시기로 접어들었어. 그런 상태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그가 내 추측처럼 무공까지 강하다면, 아마도 이후의 무림은 확실한 마도천하가 될 거야.”
 제갈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났으니 고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 그럼 우리는 가 볼게.”
 “고마워 누님. 오늘 들은 정보의 값을 계산하려면 방금 누님한테서 받은 전표들로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일단 다 줄 테니 가져가.”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이 누님 진짜 화낸다?”
 “어이쿠! 알았수, 알았다고. 그럼 살펴 가, 누님! 양 대인 아저씨도 살펴 가시고.”
 “예, 공자님.”
 
 3
 
 고영이 제갈세가를 나서자 양 대인이 입을 열었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분타주님.”
 “그래 보이나요?”
 “예, 제갈 공자와 함께 있을 때면 늘 즐거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녀석이거든요. 무림인이면서 무공도 별로 못하고, 제갈세가의 피를 이었으면서 머리도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은 녀석이지만.”
 제갈류를 생각하며 고영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 대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타주님 말씀대로 제갈 공자는 무림인으로서도, 제갈세가의 후손으로서도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주께서는 처음부터 제갈 공자에게 매우 관대하셨지요. 본문의 일급 기밀까지 다 말씀해 주실 정도니까요.”
 고영이 공짜로 제갈류에게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은 아니란 걸 알고는 있다. 물론, 무림에서 판단하는 제갈류의 능력이 어떻든 간에 그런 것은 자신들과는 상관없었다.
 제갈류는 지금처럼 자신들의 장사가 번창하기까지 충분한 가치를 해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업에 있어서 그의 가치는 지금도 매우 높다.
 제갈류는 적어도 그에게 들어가는 정보들의 값어치를 충분히 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제갈류를 대하는 고영의 태도에는 어딘가 과한 면이 있었다. 단순히 그가 해주는 값어치만큼 정보를 제공한다는 느낌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거군요? 하긴, 궁금했겠지요.”
 “속하의 불경을 용서하십시오, 타주.”
 “그럼 나도 하나 묻겠어요. 양 부타주께서는 여자인 데다가 나이도 어린 제 밑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본단에서도 양 부타주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고, 때문에 몇 번이나 본단 복귀를 권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수하로 계속 남아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로지 제 능력 때문인가요?”
 고영의 물음에 양 대인이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고 분타주님의 능력을 매우 높이 샀기에 남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건 있습니다. 분타주님은 본문에서 여태껏 제가 함께 일해 봤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입니다.”
 그 말에 고영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녀까지는 아니었지만, 눈동자에 총기가 있었고, 특히 웃을 때의 모습이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고영이 입을 열었다.
 “부타주가 저를 생각해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애는 비록 능력도 별로 없고, 다소 버릇이 없어 보이는 면이 있지만, 믿음이 가는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세상에 뛰어난 사람을 찾기는 쉽지요. 하지만 믿음이 가는 사람을 찾기란 힘든 일이잖아요?”
 “저 또한 제갈 공자가 맘에 듭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잘난 척이나 해 대는 정파의 어린 공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지요. 다만, 타주께서 그렇게까지 믿으시는 이유가 궁금하긴 했습니다.”
 “이유라······.”
 어느덧 둥근 해의 아랫부분이 서산에 닿고 있었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걷다가 고영이 입을 열었다.
 “그는 기녀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나를 감싸기 위해서 스스로 모욕을 감수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 애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거든요. 제갈류, 그 아이는 제게 있어 생명의 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중한 은인인 건 확실하답니다.”
 “아······.”
 “사람들은 본문인 하오문을 무시하지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무시하고, 배척하고, 이용하려고만 하잖아요. 우리는 하류 인생들이 모인 집단이고, 실제로도 하류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무시당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
 “우리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벌고 있으니 모두가 우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죠. 심지어는 우리의 고객들까지도.”
 양 대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에 고영이 말을 이었다.
 “제갈세가는 정파의 충분한 명문세가잖아요? 그 애는 그곳의 외아들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단 한 번도 우리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긴 적이 없었어요. 언젠가 그 애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남들은 다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왜 넌 그러지 않느냐고.”
 양 대인은 고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갈류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궁금했다.
 “그 애가 그러더군요. ‘나도 제대로 무시를 당해 봤으니까. 무림인이면서, 그 대단한 제갈세가의 자손이면서, 무공도 못한다고 늘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까.’라고요.”
 “무시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안다는 얘기군요.”
 “그렇죠.”
 두 사람은 어느새 소화루에 다다르고 있었다.
 고영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세간의 평가처럼 그 애는 오만방자하고 건방져요. 사람들은 그 아이가 집안만 믿고, 생긴 것만 믿고 까분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적어도 그 아이는 누구에게나 그러지는 않거든요. 특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 四. 천면천마 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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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도 무림맹의 본성은 호북성의 무창에 소재하고 있었다. 높고 두꺼운 성벽에 둘러싸인 무림맹의 안쪽에는 수많은 고루거각들이 서로의 거대한 위용을 뽐내듯 늘어서 있었다.
 백도 무림맹은 정파인들에게 있어 상징적인 곳이었다.
 정파의 중심.
 당금 천하제일인인 무림맹주 종리백이 기거하는 곳.
 그런 상징성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무림맹 본성의 모습은 매우 웅장했다.
 현재, 무림맹의 본성은 상당히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무림맹주 종리백의 문주 총소집령 때문이었다.
 이에 주요 문파와 세가들을 비롯해, 무림맹에 소속된 중소 문파의 수장들까지 모두 호북성 무창에 있는 무림맹 본성에 모였다. 맹주 종리백은 명성 높은 백도 무림의 명숙들까지도 모두 초빙했다.
 문주 총소집령은 종리백이 무림맹주로 추대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종리백은 중차대한 발표가 있을 거라고 말했을 뿐, 내용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모두가 궁금해했다.
 
 무림맹의 본성은 다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다.
 내성을 두르고 있는 벽도 외성의 그것처럼 높고 두꺼웠다. 맹의 심장부라는 중요성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각파의 수장을 보좌하는 수행원들은 외성까지만 동행이 허락되었고, 초빙된 각파의 수장들과 따로 초빙한 명숙들만이 내성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내성으로 통하는 거대한 문을 지나면 매우 넓은 뜰이 나온다.
 넓은 뜰의 바닥에는 비교적 밝은 빛의 점창석(點蒼石; 대리석)이 깔려 있는데, 그 넓은 뜰의 좌우로 몇 개의 건물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넓은 뜰의 정면에는 하나의 고풍스러운 누각이 거대하고도 고고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건물이 바로 청의전(淸義殿)이라는 곳으로 맹주의 전용 집무실이다.
 내성 안의 뜰에는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총소집령에 응한 각파의 수장들이었다.
 이윽고 청의전의 처마 아래로 이십여 명가량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때문에 뜰에서의 웅성거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청의전의 처마 아래, 기단(基壇)의 위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그리고 무림맹의 주요 인사 몇 명이었다.
 그들이 처마 아래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 청의전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백의를 입은 중년인 한 사람이 기단의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도 위엄과 기품이 넘치는 그 백의 중년인의 이름은 종리백.
 현세의 천하제일인이자, 당금 무림맹주였다.
 장내의 모든 이들이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충(忠)!”
 이에 모두가 오른손 주먹을 왼쪽 가슴에 대며 절도 있게 목례하는 것으로 맹주에 대한 예(禮)를 표했다.
 맹주 또한 오른손 주먹을 왼쪽 가슴에 대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예에 답했다.
 맹주 종리백의 입이 열렸다. 이에 내력이 담긴 웅혼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먼저, 본 맹주의 소집령에 응해 주신 각파의 수장들과 명숙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먼 길 오신 분들도 많으셨을 텐데, 수고하셨소이다.”
 맹주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가 없었다.
 “본 맹주는 모든 분들을 모신 자리에서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었소이다.”
 맹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으니 모두가 궁금해했다. 잠시 말을 멈춘 맹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죄송하오. 정말 죄송하오.”
 군웅들은 경악했다.
 죄송하다는 그 말과 함께 기단 위에 서 있던 맹주가 모두의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매, 맹주!”
 “이 무슨······!”
 기단 위에 서 있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또한 침통한 표정으로 모두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명실상부 정파 무림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다니?
 한동안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맹주가 그 상태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에야 장내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맹주의 입이 열렸다.
 “여러분의 무림을 지켜 드리지 못해서, 그래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오. 백도 무림맹의 맹주로서 여러분의 평화로운 백도를 지키지 못했소이다. 정말 죄송하오.”
 군웅들의 눈이 하나같이 휘둥그레졌다.
 천하제일인이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보다도, 애초에 맹주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매, 맹주!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도 무림을 지키지 못하셨다니요? 맹주께서 이십여 년 전의 정마대전을 종결지은 이후로 줄곧, 무림은 이토록 평화롭기만 하거늘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신 겁니까?”
 누군가의 외침에 맹주가 여전한 자세로 대답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지금의 평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금의 평화는 거짓이기 때문이오.”
 “예에?”
 “무림은 여태껏 평화롭기만 했으니 본 맹주도 그런 줄로만 알았소. 정녕 그렇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그 평화가 거짓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소.”
 “맹주! 지금의 평화가 거짓이라니요?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 겁니까? 게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니요?”
 여기저기서 질문이 빗발쳤다. 이윽고 맹주 종리백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중원 무림은 이미 천마신교에 의해 장악당했소.”
 천마신교라고 했다.
 장내에 소요가 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성 안은 웅성거림을 넘어서서 갈수록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군웅의 그런 반응은 당연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무림이 천마신교에 의해 장악 당했다니.
 “천마신교가 중원으로 진출했다는 소문 따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맹주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설령 맹주의 말씀이 맞는다손 치더라도, 천마신교가 중원을 장악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마인들에 의해 혈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조차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천마신교의 마인에 의해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문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된다며 외쳐댔다. 그 외침을 들으면서도 맹주 종리백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종리백의 웅혼한 음성이 다시 장내에 울렸다.
 “여러분의 그 심정, 본 맹주도 이해하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오. 그 소식을 듣고 본 맹주 또한 여러분처럼 전혀 믿지 못했소이다. 최초, 여기 계신 문상, 제갈 대협에게서 보고를 들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상에게 농담이 심하다고 타박을 했었으니 말이오.”
 문상 제갈성이 맹주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일견한 종리백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본맹에서는 사실 여부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소. 그렇게 사실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본 맹주 또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때 받은 보고들이 갈수록 사실에 가까워졌으니까. 결론적으로 사실임이 확실해졌으니까. 그래서 지금, 본 맹주가 여러분 앞에 무릎을 꿇어가면서까지 이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니까.”
 “마······ 말도 안 됩니다······!”
 맹주가 말했다.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믿기 힘들다고 해서, 사실이 거짓으로 변하는 건 아니지 않소?”
 군웅들이 멍해져 있는 사이 종리백이 말을 이었다.
 “본 맹주가 농담이나 하자고 여러분을 이 자리까지 모셨겠소? 농담이나 하자고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총소집령을 내렸겠소? 여러분께 있어 본 맹주는 그런 사람이었소? 아니라는 걸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소이까.”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맹주의 말이 맞다. 맹주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천마신교가 중원을 장악했다는 게 사실이란 말인가?
 “궁금하실 거요. 그렇게 조용했는데도 천마신교가 중원을 장악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실 거요. 이에 대한 궁금증은 문상께서 말씀해 주실 것이외다.”
 이에 맹주의 옆으로 문상 제갈성이 다가와 군웅들을 향해 포권했다.
 “제갈성입니다.”
 포권을 풀고 제갈성이 말을 이었다.
 “맹주님과 저는 감히 여러 영웅들을 현혹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또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세가주들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 사실이기도 합니다.”
 언제 들어도, 누가 들어도 청량한 그의 목소리와 어조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천마신교의 중원 침공은 늘 피를 몰고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암중에서 세력을 확장, 이미 중원 무림을 칠 할 이상 장악했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 모든 게 사실임을 제 양심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무림의 유일한 군자로 추앙받는 문상 제갈성이다.
 무치군자 제갈성이 양심을 걸었다는 건 그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말과 같았다.
 당연히 군웅들은 깜짝 놀랐다.
 중원 무림이 이미 칠 할 이상 장악을 당했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니?
 제갈성의 말이 이어졌다.
 “천마신교의 현 교주인 천면천마 윤무는 이십삼 년 전 정마대전 이후에 천마신교의 실권을 잡은 자입니다. 그는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던 천마신교주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입니다. 특이한 사람입니다.”
 군웅들도 천마에 대한 소문은 들은 바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제갈성이 말을 이었다.
 “그는 여태껏 천마신교가 써 왔던 중원 장악의 방법을 완전히 뒤집어엎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달라진 그 방식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가 이번에 중원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서 쓴 방식은······.”
 제갈성이 말을 잠시 멈추자 군웅의 시선이 그에게 더욱 집중되었다.
 그 많은 군웅들이 모여 있는데도 고요함이 느껴질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제갈성의 입이 열렸다.
 “조용한 전쟁입니다.”
 “조용한······.”
 “전쟁······?”
 군웅들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제갈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이미 피를 부르는 그들의 전쟁은 백도 무림에 의해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이에 천면천마 윤무는 다른 수를 쓴 겁니다. 이십삼 년 전의 정마 전쟁이 끝난 직후에 실권을 잡은 그는, 아마도 그 시기부터 조용한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 설마······!”
 “설마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전부터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중원 무림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실로 치밀하고도 무서운 자입니다.”
 군웅들은 어이가 없었다.
 믿어야 하는데도 믿어지지가 않는 것은 그만큼 현실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평화롭기만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중원이 천마신교에게 장악을 당했단다. 그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무림맹주와 무림맹의 문상이 하고 있었다.
 제갈성이 입을 열었다.
 “사실상 중원 상권의 팔 할 이상이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졌습니다. 상권뿐만이 아닙니다. 마도의 길을 걷는 그는 모든 사도 문파들마저도 자신의 발 아래로 귀속시켰습니다. 정사지간의 문파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상황이었다니?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의문을 가득 담아 제갈성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무림맹에 속했던 문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그의 영향력 아래에 떨어졌고, 그는 새외까지 선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모여 있는 여러분들 이외에는 모두가 천마신교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대에 소란이 일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그렇게 소란스러워졌는데도 말리는 이가 없었다.
 맹주 종리백도, 문상 제갈성도,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도, 오대세가의 가주들도.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더 들어 보자는 고함이 수십 번 울리고 나서야 소란은 진정되었다.
 이에 제갈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여 문파의 재정 상황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분들이 계신지요? 재정 상황이 악화되니 여러 방면으로 손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는 문파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눈치를 살피던 수장들이 하나둘 거수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되자 손을 드는 수장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손을 들지 않은 수장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대부분의 수장들이 각각 손을 들고 있으면서도 서로 놀라고 있었다. 재정난은 자기네 문파만의 문제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양새는 뭔가. 대부분의 문파들이 재정난을 겪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탄탄한 재정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문파의 문주들마저도 창피한 듯 붉어진 얼굴로 한 손을 들고 있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손을 내려주십시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본 세가의 재정 상황도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여러 세가주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군웅들은 놀라워했다.
 설마 저런 거대 문파들도 재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제갈성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니 우리 다 함께 힘내자는 말씀이나 드릴 만한, 그런 한가한 상황은 아닌 것 같지요? 그만큼 우리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겁니다. 맹주님과 제가 여태껏 드렸던 천마신교의 중원 장악은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이제야 조금의 현실감이나마 다가오기 시작한다.
 재정이 악화된 문파의 미래는 불 보듯 빤하다.
 돈이 없으면 문파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면 자연스레 문파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종래에는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
 군웅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갈성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방식을 파악한 후 맹에서도 손을 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맹주께서도 밝히신 바와 같이 때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한 겁니다.”
 “문상!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앉아서 당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천하제일인인 종리 맹주가 계십니다. 더 망하기 전에 빨리 나서서 힘으로라도 제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런 질문들을 모두 들은 제갈성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천면천마 윤무를 만났습니다.”
 군웅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제갈성의 충격적인 발언에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저만 만났던 것은 아닙니다. 맹주님과 저, 그리고 이곳에 계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함께 만났습니다. 천면천마 윤무는 우리와의 회동을 원했습니다. 그가 먼저 회동을 원했지만 우리도 그와 만나서 그의 속내를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그와 만났던 겁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어떤 자입니까?”
 “그는······ 여태까지 세간에 퍼졌던 소문들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협상을 제시했······.”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제갈성이 말을 덧붙이려 할 때 허공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혈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모두의 찡그린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무림맹 내성 위의 하늘.
 그 먼 허공의 위에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천천히 내성의 뜰로 하강하고 있었다.
 
 2
 
 뜰에 모여 있던 수장들은 오늘 하루 많이도 놀랐다. 그랬던 그들이 다시 한 번 크게 놀라야 했다.
 하늘에서 하강하고 있는 새는 대붕(大鵬)이었다.
 전설상에서만 존재한다고 들었던 그 대붕을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대붕이 시야에 가까워지니 그 크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펄럭이는 날개의 길이만 따져도 양쪽 각각 이 장씩은 되어 보였다. 압도적인 크기였다.
 눈매도, 부리도, 발톱도, 날카롭고 매섭기 그지없었다.
 저 정도면 그 사납다는 장백산의 호랑이도 너끈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뜩이나 칠흑빛의 깃털 때문에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쯤 되면 확실히 한낱 미물이 아닌 영물(靈物)이었다.
 대붕은 보란 듯이 뜰의 중앙에 착지했다.
 거대한 영물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인지, 아니면 대붕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절로 피하게 된 건지, 뜰에 서 있던 수장들은 대붕이 내려앉을 자리를 알아서 벗어났다.
 그 대붕의 위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연녹색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군웅들이 경계하며 검병(劒柄;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실제로 병기를 뽑아 든 자들도 있었다.
 이에 무림맹주 종리백이 손을 들어 군웅들을 제지했다. 착지한 대붕이 날개를 접자 대붕 위에 앉아 있던 녹의인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녹의인이 바닥에 착지하는데 아무런 소음도 일지 않았다. 마치 가벼운 깃털이 바닥으로 떨어지듯 가볍고 우아했다. 경신술이 예사롭지 않다는 증거니 뜰에 있는 수장들의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군웅들은 정체불명의 녹의인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격하며 그를 둥글게 에워쌌다.
 누군가가 물었다.
 “누, 누구냐!”
 하지만 녹의인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오연하게 들고 청의전의 처마 아래, 기단의 위에 있는 인물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녹의인의 입이 열렸다.
 “무림맹의 문상께서 본인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계신 줄은 몰랐소.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구려. 역시 전무후무한 제갈 무후의 혈통을 이은 분답소.”
 “······.”
 제갈성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맹주 종리백이 녹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셨소이까.”
 “다시 보게 되어 반갑소. 당신들도 내가 반가울지는 모르겠지만.”
 군웅들이 볼 때, 무림맹주를 비롯해서 청의전의 기단 위에 서 있는 거파 수장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녹의인이 나타나면서부터 그랬다.
 왠지 주눅이 든 느낌이랄까?
 누군가가 맹주를 향해 물었다.
 “맹주님, 이 사람은 누굽니까?”
 “그는······.”
 종리백이 잠시 뜸을 들였다.
 백도 무림의 심장이라는 무림맹에서, 그것도 맹주의 집무실인 청의전 앞에서 녹의인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참담했다.
 종리백이 그러고 있는 사이 아직까지도 뜰의 중앙에 서있던 녹의인이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천마신교주요.”
 다소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밝혀진 정체는 충격이었다. 그 한마디가 무림맹의 내성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어찌 마교의 우두머리가 이곳에 이렇게 당당하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림맹의 심장부였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정파 무림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였다.
 아무리 천마신교주라지만 고수가 즐비한 이곳에 단신으로 왔다.
 정신이 이상한 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인가?
 뜰에 있던 수장 중 누군가가 외쳤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귀들의 흉악한 우두머리가!”
 그때였다. 줄곧 오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천마신교주 윤무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방금 말한 자를 금세 찾아냈다.
 천마신교주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의 거리는 약 사 장.
 이윽고 천마신교주 윤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을 때.
 쑤욱―
 그 수장의 신형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윤무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군웅들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사람을 상대로 펼쳐진 격공섭물.
 의지가 없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그것도 고수를 상대로 펼쳐진 격공섭물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격공섭인(隔空攝人)이라고 해야 할까.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놀랐는데, 그런 일을 당한 당사자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 수장은 윤무에 의해 멱살을 잡혔다.
 여전히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윤무의 입이 열렸다.
 “말해 봐, 여기가 어딘데?”
 “······!”
 “글쎄, 여기가 어디냐고.”
 “무, 무림맹······.”
 “그래, 무림맹이지. 난 초대를 받고 이곳에 왔고. 그런데 뭐 문제 있나?”
 초대를 받았다고?
 의아함을 풀 새도 없이 윤무가 다시 물었다.
 윤무는 살기를 흘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 사방으로 폭사되는 엄청난 기세는 살기보다 더 무서웠다. 아득한 공포였다.
 “아까 본인더러 뭐라고 했지?”
 “······.”
 “다시 한 번 말해 보라고. 내 앞에서 똑똑히.”
 “그, 그건······.”
 “마귀들의 흉악한 우두머리라고 하지 않았나. 왜 말을 못하지? 아까의 그 용기는 어떻게 됐나?”
 “······.”
 이미 압도적인 그의 기세에 눌렸다.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멱살을 잡힌 그는 이미 온몸에서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는 상태였다.
 “본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고 자부하는데? 흉악하다? 본교에서도 그런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지금도 당면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러 온 건데?”
 폭풍과 같은 천마의 기운이 무림맹 내성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윤무의 말이 이어졌다.
 “천마신교주면 무조건 흉악하다는 건 편견이지, 이 양반아. 시대가 변했어, 시대가.”
 멱살을 잡힌 문주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천마신교주가 군웅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본인에게 더 하고 싶은 말 있는 사람?”
 그 말이 군웅들을 자극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지만 이곳엔 정파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게다가 천하제일인인 무림맹주가 있지 않은가.
 챙― 챙― 채재재재쟁―
 “그 검, 집어넣지들?”
 “시끄럽다!”
 “마지막 경고야. 우스운 꼴 당하기 싫으면 말로 할 때, 애들 장난감 같은 그 쇠붙이들 집어넣어.”
 자신을 적대하는 도산검림 속에서도 윤무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오냐,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요절내 주리라.
 이 자리에서 제마멸사의 기치를 드높여 정파의 혼을 새기리라.
 뜰에 있는 수장들이 그런 생각과 함께 독기어린 눈빛으로 윤무를 바라볼 때, 윤무가 입을 열었다.
 “남의 집에 왔으니 한 번만 더 인내해 주지. 셋을 세겠다. 그동안 검을 집어넣지 않으면 이자의 목숨은 없다. 하나!”
 멱살을 잡혀 있는 수장의 안색이 홱 변했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초연하기는 힘든 법이니까.
 그래도 그는 초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비록 자신의 목숨이 담보로 걸려 있다고 하나, 다른 수장들의 짐이 되긴 싫었던 모양이다.
 그의 입이 어렵게 열렸다.
 “나, 난······ 명예롭게 죽겠소. 그러니 나를 신경 쓰지 마시오. 절대 굴하지 마시오.”
 이에 윤무가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심하게 떨고 있어. 봐, 등줄기가 젖었잖아. 하지만 좋은 기개라는 건 인정하지. 둘.”
 그 말과 함께 윤무는 멱살을 잡고 있던 수장의 상체를 가볍게 밀었다. 그 수장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허공을 날았다.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허공에 떠오른 그가 중력과 관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날아서 동료들의 품에 부드럽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정녕 놀랄 만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지만, 군웅들은 다른 부분에서 또 놀랐다.
 천마의 입장에서는 수중에 인질이 있다는 게 꽤 매력적인 패였을 텐데, 그것을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그의 행태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유리한 패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마 윤무의 기세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를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은 그의 오만이 화를 자초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군웅들이 맹주를 바라보았다.
 천하제일인인 맹주가 왜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마음속으로 어떠한 결단을 내리고 있으리라.
 그는 천하제일인이니까.
 천마신교주가 오기 전에 했던 얘기들을 빼면 종리백은 자신들의 믿음에 부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뜰에 있는 수장들의 시선이 모종의 염원을 담아 맹주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인질도 없겠다, 망설일 이유도 없어 보였다. 이윽고 맹주 종리백의 입이 열렸다.
 “모두 무기를 집어넣으시오.”
 “맹주!”
 군웅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맹주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천마신교주라고 해도 피육(皮肉)으로 이뤄진 육신이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저자를 처단한다면 당금 무림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단신으로 온 건 천마신교주의 오만일 뿐, 백도 무림이 비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런 말이라니?
 맹주가 재차 말했다.
 “나는 분명히 여러분께 무기를 집어넣으시라 했소.”
 그럼에도 반응이 없자 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맹주령(盟主令)이오.”
 맹주가 맹주패까지 꺼냈다. 군웅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상황에서 맹주가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에 문상 제갈성이 뜰의 군웅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는 고집을 피우고 계신 게 아닙니다. 맹주님의 뜻에 따라 주십시오.”
 “문상, 그게 무슨 소리요?”
 “천마를 초대한 건 맹주님입니다. 협상을 위해 초대한 겁니다. 백도 무림을 이끌어 가고 있는 여러분들이 직접 보는 앞에서 현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래(古來)로 협상을 위해 온 사절을 공격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
 제갈성이 말을 이었다.
 “무기를 집어넣으라는 건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바 있을 겁니다. 맹주님과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그리고 오대세가주들이 일전에 저분을 만난 적이 있다고.”
 “그게 우리의 안전과 무슨 상관이 있소?”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제갈성은 말을 줄이며 맹주의 눈치를 살폈다.
 맹주가 제갈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성이 뒤를 돌아보니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주들도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갈성이 말을 이었다.
 “그날, 비무가 있었습니다.”
 “비무?”
 “일 대 다수 간의······ 비무였습니다. 일은 저기 계신 천마였고, 다수는 맹주님을 비롯한 그날의 동료들 모두였습니다. 무공이 약한 저 한 사람만을 제외한.”
 군웅들은 또다시 경악했다.
 천마신교주와 무림맹주 간의 일대일 비무가 아니었다고? 천하제일인인 맹주가 다수의 편에서 함께 비무를 진행했다고?
 이를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얼굴이 붉어진 제갈성이 말을 이었다.
 “하아아······ 정말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다수인 우리가 졌습니다. 저기 계신 천마 한 사람에게 우리 모두가 패한 겁니다. 겉보기에는 태연한 듯 보이시겠지만, 맹주님을 비롯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그리고 오대세가주들은 지금도 모두가 그때 입은 내상을 치유 중이십니다.”
 군웅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천하제일인이 패했단다.
 혼자 싸우다 패한 것도 아니란다.
 백도 무림을 대표하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함께 싸웠는데도 패했단다. 거기에 그 대단하다는 오대세가주들까지 함께였는데도 패했단다.
 그 초고수들이 다 달라붙었는데도 저 천마 한 명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제갈성의 말이 이어졌다.
 “여러분도 보고 계시다시피 저분은······ 멀쩡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달려들어도 저분 한 사람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게 맹주님과, 장문인들과, 세가주들과, 문상인 제 결론입니다.”
 제갈성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천면천마 윤무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얘기라도 듣는 듯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충격에 군웅들은 말을 잃었다.
 
 
 # 五. 마도천하의 시작
 
 1
 
 내성의 뜰에는 한동안 침묵만 흘렀다.
 오랜 침묵을 깬 사람은 맹주 종리백이었다.
 “그날. 귀하와 싸운 후로, 정확히 말하자면 귀하에게 패한 이후로, 나는 많은 생각을 했소. 그리고······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소.”
 내성 안의 모든 이목이 종리백에게로 집중되었다.
 여전히 시선을 허공에 둔 채로 천마가 맹주를 향해 되물었다.
 “뭐가 말이오?”
 수장들에게 하대하던 것과는 달리 윤무는 종리백에게 공대하고 있었다.
 “귀하의 그 말도 안 되는 막강함이.”
 종리백의 말에 윤무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무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런데······.”
 “말씀해 보시오.”
 “가끔 나 자신도 내 힘이 이해가 안 되오.”
 종리백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귀하의 강함은 상식을 뛰어넘었소. 강해도 너무 강하오. 말이 안 될 정도로.”
 윤무가 공감한다는 듯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백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소?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소이까?”
 “말해도 믿지 않으실 게요.”
 “더 믿고 싶어지는구려.”
 종리백의 그 말에 윤무가 가만히 종리백을 응시했다.
 한동안 종리백의 두 눈을 응시하던 윤무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 노력도 있었지만······.”
 윤무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에는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드디어 윤무의 입이 열렸다.
 “기연의 힘이 컸소.”
 “기······ 연······?”
 “그렇소, 기연. 나는 기연을 얻었소. 넓은 의미에서 말하는 기연이 아니오. 전설에나 나올 법한, 그런 절대적인 기연을 말하는 거요.”
 “허······!”
 종리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수긍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종리백이 판단할 때 천면천마는 비록 적이지만 허튼 소리를 하는 자는 아니었다. 윤무가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들 거요. 나도 믿기 힘들었으니까. 전설에나 나올 법한 기연은 그야말로 전설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듯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주는 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소. 그런데 그렇지 않더이다.”
 “믿고 싶은데도 쉽게 믿기지는 않는구려. 그렇다고 귀하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오. 그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뿐이오.”
 “맹주의 심정은 이해하오. 하지만 기연이 아니었으면 어찌 저런 것을 얻을 수 있었겠소? 게다가 내가 아무리 무공 자질에 있어서 천재라고 할지라도, 이 나이에 이토록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겠소?”
 윤무가 언급한 저런 것이란 그가 타고 온 흑색의 대붕을 일컫는 말이다. 이에 종리백이 답했다.
 “하긴······.”
 기연 때문이라면 수긍이 되었다. 두어 번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종리백이 말을 이었다.
 “그날 귀하는 사술을 쓰지도 않았고, 비겁한 수를 쓰지도 않았소. 귀하의 그 막강함이 기연 때문이든 뭐든 우리는 귀하에게 패했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그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오. 그러니 우리는 그날의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소.”
 군웅들이 약속이라는 말에 의아해할 때 종리백이 다시 윤무에게 말했다.
 “보셨다시피 나는 맹주령까지 내렸소. 이제 더 이상 이곳의 그 누구도 귀하를 욕보이게 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러니 그만 바깥에 있는 본인의 수하들을 놓아주시오. 부탁드리겠소.”
 맹주의 발언에 군웅들은 의아해했다.
 난데없이 바깥에 있는 수하들을 놔달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윤무가 대답했다.
 “그러겠소.”
 곧 윤무의 중후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내성의 문을 열라.]
 윤무로부터 육합전성(六合轉聲)의 수법이 펼쳐지자 그의 말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내성으로 통하는 거대한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후 문밖의 상황을 확인한 내성의 인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림맹의 정복을 입고 있는 무인들이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의 목에 도검을 겨눈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 또한 무림맹의 정복을 입고 있는 무인들이라는 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이마에 흑색의 띠를 두르고 있는 것 정도였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흑색의 띠에는 다시 백색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신교천천세(神敎千千歲).’
 굳이 그들이 어디 소속인지는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했다. 상황을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인지가 된다.
 ‘신교천천세’라는 글자가 새겨진 검은 띠를 두른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더 많았다.
 제압을 당한 무사들은 친구나 동료 또는 평소 호형호제하던 자들에게 별안간 뒤통수를 맞았다. 최소한 십 년 이상은 알고 지냈거나, 그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던 자들에게 당한 것이다. 방금 전까지의 동료가 갑자기 적으로 돌변한 꼴이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현실은 현실.
 천마신교가, 저 천마신교주가, 그 먼 과거로부터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 왔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천마 윤무로부터 다시 한 번 육합전성의 수법이 펼쳐졌다. 곧 그의 음성이 사방으로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포로를 포박하고 도검을 거두라.]
 “명(命)!”
 한결같은 외침이 들렸고 내성문의 박에서는 일사불란하게 포박이 진행되었다.
 “밖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소리조차 전혀 들려오지 않았거늘, 도대체 언제······!”
 수장들 중에서 누군가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외칠 때 맹주 종리백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대붕을 타고 내려오면서부터 공력을 이용해 내성의 음파를 차단했소. 여러분이 밖의 소란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이유일 게요.”
 군웅들은 무림맹의 심장부에서도 오연하고 태연하게 서 있는 천마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력으로 넓은 내성의 음파를 모조리 차단한 상태에서도 고수를 상대로 격공섭물, 정확히 말하자면 격공섭인을 펼쳤단 말인가?
 그것도 마치 애들 장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머릿속에서는 놀랍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 감정적으로는 놀라움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눈동자가 휘둥그레지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이 놀랐다.
 여태껏 살면서 놀랐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놀란 것 같았다.
 치밀한 수법이면 수법, 강력한 무공이면 무공.
 잠시 동안 그를 겪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 하나 무섭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가 왜 적의 심장부인 이곳에서 저렇듯 태연하게 서 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갈 듯도 했다.
 무림이 이미 천마신교에 의해 장악 당했다는 문상의 말도, 여러분의 강호를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맹주의 말도, 그의 앞에서 검을 집어넣으라고 말했던 그 어이없는 맹주령도.
 이제는 다 이해가 간다.
 천마는 원래부터 그릇의 크기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고맙소.”
 종리백의 말에 윤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종리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의 약속을 지키겠소. 귀하의 뜻을 말씀해 주시오.”
 종리백의 말에도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윤무가 뒷짐을 진 채로 입을 열었다.
 “잘들 아시겠지만 무림을 피로 씻고 중원을 차지하는 건 본교의 오랜 숙원이었소. 그리고 본교는 현재, 실제로도 그럴 수 있는 입장이오. 또한 그것은 지금 본교 전체의 분위기이기도 하오. 본교의 마두들은 당장이라도 중원 전체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보란 듯이 중원을 접수하길 원하니까.”
 종리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무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중원 무림은 절단이 날 것이오. 맹주는 지금 본인이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안타까운 얘기지만 지금의 중원에서 귀하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무인은 없소. 고로, 귀하께서 하고자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오.”
 맹주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이야기가 허풍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인은 피의 향연을 벌이고 싶지 않소.”
 “왜······ 그렇소?”
 “팔십여 년 전의 정마대전을 알고 있소? 아시다시피 그때도 본교가 패했었소. 당시의 천마였던 분이 바로 본인의 외조부요. 그분은 정마대전에서 패하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천마였소.”
 “흐음.”
 “내 외조부께서는 당시의 무림맹주와 최후의 일전을 벌였소. 그때 패해서 본교의 중원 진출은 좌절됐었지. 당시의 무림맹주가 베푼 자비 덕에 내 외조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오.”
 “그런 일이 있었구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본인이 어렸을 적에 외조부께서 말씀하셨소. 아무리 우리가 마두라고는 하지만 강한 자는 그때의 무림맹주 같은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귀하가 무림에 혈사를 일으키지 않으시려는 이유가 설마······?”
 “그렇소. 바로 내 외조부의 영향이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외조부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그 무림맹주의 영향이겠지.”
 윤무의 말에 종리백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작 본교에서도 본인의 이런 의지를 반대하는 세력이 매우 많소. 정파인들에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외치고 있지. 다만 본인의 힘이 막강하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을 뿐이오. 수하들에게 내세울 본인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 본인은 그들 또한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결론을 가져가야 하오.”
 종리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윤무가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소.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오. 그러니 선택하시오. 어느 정도의 굴욕을 감수하면서라도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 아니면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항전할 것인지.”
 그 말에 정파 수장들의 눈빛이 오갈 때 윤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굴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백도 무림을 유지시키겠다면 본인은 지금부터 그대들과 협상을 진행하겠지만,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항전하겠다면 협상은 그 순간 물 건너가는 것이지. 안 그렇소?”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누군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으나 윤무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윤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들이 후자의 경우를 선택한다면 아마······ 정파인의 후예는 설령 갓난아이라고 해도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오. 물론 그전에 이곳에 있는 그대들부터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겠지.”
 군웅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여기저기서 목울대를 타고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는 것도 괴로웠다.
 그가 말한 내용은 오만하기 그지없었으나 현실이었다.
 내성 안에 모인 수장들 중 그 누구도 윤무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윤무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말은 선택이라고 했지만 반 이상은 억지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나요. 그대들의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감안해 줄 상황이 아니오. 일전에 본인과 비무를 치렀던 분들에게는 미리 언질을 준 바가 있소. 이제 그대들의 대답을 원하오.”
 이에 종리백이 힘없는 눈동자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문상 제갈성도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종리백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최소한 본 맹주를 비롯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은 귀하의 뜻에 따르기로 했소. 오늘 모인 모든 군웅들께서 본인을 일컬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자라고 욕하셔도 할 수 없소이다.”
 수장들의 얼굴이 참혹함으로 물들어 갔다.
 종리백이 말을 이었다.
 “맹주의 입장에서 질 게 빤히 보이는 싸움을 종용할 수는 없는 문제요. 항전하게 되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될 터.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은 의미 없이 죽게 되오.”
 그랬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렇게 되면 백도 무림은 미래조차 보장받지 못하오. 백도 무림의 맹주로서, 나는 그런 결과를 원치 않소. 그러니 귀하께서는 협상안을 제시해 주시오.”
 설령 자신이 맹주라고 해도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군웅들 또한 모두가 한 문파의 문주요, 수장들이었다. 그러니 어떠한 단체를 이끄는 자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단순히 자존심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더 큰 것을 걱정하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천하제일인으로 추앙받던 무림맹주 종리백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면 이미 결론은 났다.
 ‘마도천하인가······.’
 모두의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백도 무림의 역사상 최악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2
 
 천마 윤무가 짧게 입을 열었다.
 “호남, 강서, 절강, 복건, 광동.”
 “그 지역들을 말씀하시는 연유는······?”
 “본교에서 정파인들의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다섯 개 지역을 말씀드린 것이오.”
 “그, 그런······!”
 “무림맹이라는 단체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소. 하나, 그러고 싶으면 호북의 무림맹 본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오.”
 타협은 불가하다는 듯, 윤무가 단언했다. 윤무가 말한 다섯 개의 지역은 대륙의 동남부에 편중된 곳들이었다.
 충격으로 군웅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예외로 해 드리겠소. 단, 봉문(封門)을 해야 하오. 본산을 지키고 싶거든 그리 하고, 싫으면 아까 본인이 말했던 다섯 개의 지역으로 이주하시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제외하고도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문파는 따로 몇 곳이 있을 테니, 추후에 통보하겠소.”
 “봉문······!”
 봉문이란 말 그대로 문파가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문파의 모든 대외 활동이 정지되니 문도들의 강호 출입도 금지된다.
 어떠한 경우든 문파의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뜩이나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강호를 호령하던 거대한 문파들임에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은 참담함 가득한 표정을 유지한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윤무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이것은 일방적인 협상이오. 그 다섯 개의 지역도 본인이 최대한 양보해 준 거요. 봉문 또한 마찬가지요. 그게 싫으면 과거에 본교가 그랬듯 새외나 천축으로 피신을 하시든가.”
 “······.”
 “분명히 말하지만 본인은 당신들과 평등한 협상을 진행시키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방금 말씀드린 것이 첫 번째 조건이오.”
 윤무의 말이 끝나자 제갈성의 전음이 종리백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맹주님, 수락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본산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큰 인심을 쓴 겁니다.]
 “······알겠소.”
 제갈성의 전음을 들은 종리백이 그렇게 대답하자 천마 윤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조건은 인질이오.”
 “인질이라시면······?”
 “그때 본인과 비무했던 모든 분들이 본교에 인질로 오셔야겠소.”
 “······!”
 군웅들 모두가 놀랐다.
 천마와 비무했던 사람들이 누군가.
 무림맹주 종리백을 비롯해 백도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할 수 있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거기에 오대세가의 수장들까지였다.
 군웅들의 입술이 떨렸다.
 천마 윤무는 지금 그들 모두를 인질로 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굴욕도 굴욕 나름이지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분을 삭이는 눈빛으로 맹주를 바라볼 때 맹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소. 그리하리다.”
 “맹주······!”
 군웅들이 낮게 외치자 종리백이 고개를 저었다.
 “소란 피우지 마시오. 백도 무림을 위태롭게 한 건 본 맹주의 책임이고 우리들의 책임이오. 그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하지 않겠소?”
 종리백의 말이 끝나자 윤무가 입을 열었다.
 “그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본교는 향후 칠 년간은 절대로 아까 말한 다섯 지역을 침범하거나 그곳에서 어떠한 적대행위도 하지 않겠소.”
 “알겠소.”
 “이 협정은 칠 년 후에 갱신될 수 있으며, 이번의 인질들은 그때 자유로워질 것이오. 봉문 또한 최소한 그때까지는 유지해야 하오. 만약 이 협정이 칠 년 후에 갱신된다면 그때 우리는 또 다른 인질들을 지목할 수 있소.”
 종리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무가 말을 이었다.
 “만약 칠 년 후에 지금의 협정이 갱신되지 않는다 해도 지금 지목된 인질들은 풀려날 것이오. 물론 그 어느 때라도 인질들의 목숨만큼은 본인의 이름으로 책임지겠소.”
 “알겠소. 귀하께서 그 약속을 지켜 주시리라 믿소.”
 맹주의 대답이 떨어졌다.
 분위기가 너무도 참혹해서 초상집에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가 쓰디쓴 심정을 안으로 삭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상 제갈성이 윤무를 향해 말했다.
 “두 분이 말씀하신 내용은 이미 적어서 문서화했습니다. 먼저, 혈사를 막아 희생을 줄이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점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백도 무림이 절단 나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의 분위기는 침착했다. 과연 제갈가의 후예이자 무림맹의 문상다운 면모였다.
 ‘저런 사람 하나 천마신교에 있었으면 좋겠군. 사마(司馬) 군사가 들으면 기분 나빠 하겠지만.’
 윤무가 보기에도 제갈성은 탐이 나는 인재였다.
 제갈성이 말을 이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 우리의 처지가 처지다보니 귀하께 더 이상 뭔가를 요구하기는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이오?”
 “이제 향후 칠 년간, 백도 무림의 모든 안위는 귀하께서 약속해 주신 이 문서 한 장의 내용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릇 세상이 돌아가는 정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힘든 법입니다. 그래서 전해지길 십 년 넘는 권세는 없다 했고, 열흘 이상 붉은 꽃도 없다 했습니다. 당장 내일,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귀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또는 내일 당장 귀하의 의지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겠습니까?”
 “문상······!”
 제갈성의 옆에 있던 종리백이 조용한 어조로 제갈성을 말렸다. 그의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지금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천마를 자극시켜서 좋을 일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윤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닌 듯하다.
 윤무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무림맹의 문상께서는 지금 본인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이로군?”
 “귀하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각도로 변할 수도 있는 귀하의 주변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이지요.”
 천마의 표정을 보니 뭔가 사단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피눈물이 날 만큼 굴욕적이긴 하지만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협상이었다.
 천마의 기분이 나빠져서 이 협상이 무효로 돌아갈 경우, 당장 무림맹에서부터 피바람이 불 터였다.
 군웅들 모두가 윤무의 눈치를 살필 때 윤무는 가만히 제갈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무의 입이 열렸다.
 “그대는 목숨을 걸었군. 무림맹 문상의 목숨은 그렇게도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오?”
 “한낱 미물도 제 목숨 귀한 것은 압니다. 당연히 저 또한 제 목숨 귀한 것을 압니다. 하나 말씀드려야 할 것은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리 살아왔습니다. 오늘 만약 귀하의 손에서 살아난다 해도, 앞으로도 그리 살 겁니다.”
 
 윤무는 가만히 제갈성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곳에 모인 정파인들 중에서 무공으로 따지자면 하류에 속할 사람이 그였다. 그보다 더 무공이 강한 자들도 모조리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제갈성의 기세는 오히려 차분했다. 일전에 자신의 막강함을 제대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무분별한 방종으로 치부하기엔 현재 그가 보여 주는 눈빛이 너무 깊었다.
 윤무는 왠지 그에게 관심이 갔다.
 천마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군웅들은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강한 저 천마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절로 예상되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말이 흘러나오리라.
 군웅들이 그런 예상들을 하고 있을 때 윤무가 입을 열었다. 의외로 그는 웃고 있었고 표정에서는 불편한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허허허! 무림에 군자가 있다더니, 과연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구려.”
 “귀하의 그 말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소.”
 “감사합니다.”
 “그럼 본인이 어찌하면 좋겠소?”
 “어차피 우리는 무인의 자존심을 꺾어 가면서까지 귀하에게 승복했습니다. 맹주님과 구파일방의 장문인, 오대세가주들이 모두 인질로 잡혀 가는 것에도 승복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우리는 이 협상 자체에 대한 신뢰를 귀하에게 보였습니다.”
 윤무는 제갈성이 강조한 말을 되뇌었다.
 “협상 자체에 대한 신뢰라?”
 “예.”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당장 내일이라도 귀하의 마음이 변한다면 백도 무림은 그 다섯 지역에 모여서 그대로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귀하께서도 신뢰를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오늘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귀하의 그 의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도 그 담보를 믿고 구차한 삶이나마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
 의외로 천마가 수긍했다. 그는 이곳에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종리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도 무림에 있어 제갈성은 중요한 인재였다. 백도 무림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재목이었다.
 그런 제갈성이 목숨을 걸고 천마와 담판을 진행했다. 그것도 억지가 다분한.
 그런데 예상 외로 천마가 수긍한 것이다.
 그는 이미 천마를 납득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천마가 제갈성에게 위해를 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담보는, 그 누가 생각해도 귀하께서 의지를 보였다고 납득할 만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지. 그럼 무엇이 좋을까.”
 수긍은 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마치 제갈성이 자신을 시험하는 듯했지만 천마는 그조차도 흥미로운 게 사실이었다.
 상관없었다.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 후로 자신의 무림은 매우 무료했으니까.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제갈성의 억지에 관심을 기울인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작용했으리라.
 한데 아무리 궁리해도 협상을 신뢰하게 만들 만한 그 무엇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윤무가 자신의 딸을 떠올린 것은 매우 순간적인 일이었다.
 
 애지중지하는 자신의 외동딸은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아버지. 난 마인들과 혼인하지 않을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본교의 인물과는 혼인 안 할 거야. 특히 사대마천(四大魔天) 사람들과는 더더욱. 그러니 정략혼인에 나를 이용하지 말아 줘.”
 이유를 물었더니 딸이 대답했었다.
 “왜냐고? 그들에게 있어 나는 여자가 아니야. 아버지의 그 힘을 얻기 위해서 이용해야 할 수단일 뿐이지. 난 그런 거 싫어. 차라리 평범한 학자의 가문이나 관리의 가문에 시집을 보내줘. 아니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차라리 정파의 후손에게 시집을 보내주든가. 거기엔 그나마 착실한 사람들이라도 있잖아?”
 
 예전에는 사대마천의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던 딸이었는데 어느 순간 변했다.
 어쨌거나 상관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대마천 쪽에서 오래 전부터 혼사 얘기가 나왔음에도 대충 넘겨 왔다.
 하지만 딸의 혼사에 관한 건 매우 정치적인 문제라 계속해서 흘려 넘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생각을 하던 윤무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오냐, 딸! 아비가 그 소원 들어주마!’
 이윽고 윤무의 입이 열렸다.
 “내 딸을 걸겠소.”
 모두가 깜짝 놀랐다.
 내성 밖의 마인들도 놀랐다.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정작 신뢰를 보여 달라 요구하던 제갈성이었다.
 “따, 따님이라시면······.”
 “내 딸이 희아 말고 또 있소? 외동딸인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반문하고 있었지만 천마의 그 발언은 큰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천면천마 윤무에겐 많은 모습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딸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제일이란 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천마가 자신의 딸을 걸겠단다.
 “따님을······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갈성이 되물었다. 침착함의 교본이랄 수 있는 제갈성조차도 상당히 당황한 듯 보였다.
 “내 딸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내지는 그에 준하는 문파의 후기지수와 혼인시키겠소. 그렇게 해서 내 사위를 배출한 문파에게는 봉문도 철회하겠소. 아! 아직 내 딸은 어리니 일단은 약혼을 해 뒀다가, 한 이삼 년 흐른 후에 혼인을 시켜도 되겠지.”
 제갈성의 눈동자가 커졌다. 엄청난 파격이었다.
 윤무가 말을 이었다.
 “내 딸과 약혼······ 음, 어차피 나중에는 혼인을 시킬 것이니 이후로는 그냥 혼인이라고 하겠소. 어쨌건 그 상대방이 될 문파나 세가에 한해서는, 그들이 여태까지 누려왔던 지위도 최대한 유지토록 해 주겠소. 내 딸은 그 문파에서 살게 할 것이며, 본교의 정예 무사들을 동원해서 외곽을 지키게 할 것이오. 그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사위와 딸과 그 문파를 보호하겠소. 이에 더해서, 그곳의 수장은 인질로 데려가지도 않겠소.”
 실로 엄청난 발언이었다.
 “이 윤무, 비록 마인이되 사돈 된 도리마저 함부로 할 사람은 아니오. 오히려 본인의 사돈이 될 집안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힘을 갖추게 해 드리리다.”
 하루아침에 변한 무림의 판도에 놀라고, 천마 윤무의 어마어마한 힘에 놀라고,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파격에 또 놀랐다.
 너무 놀라서 이제는 오히려 멍하다.
 언급된 문파나 세가 수장들의 눈빛은 각기 달랐다.
 힘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천마신교와 연관되었다 해서 후세까지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때문에 어떤 이는 내심 자신의 문파에서 천마의 사위가 나오기를 바랐고, 어떤 이는 절대 자신의 문파에서는 사위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실리와 명예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제갈성을 바라보며 윤무가 입을 열었다.
 “본인은 방금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걸었소. 이 정도면 그대의 요구에 대한 답이 되었소?”
 제갈성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대신!”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에라도, 백도 무림은 본인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줘야 하오. 물론 상식에서 어긋난 부탁은 아닐 것이오. 이렇게 해야 제대로 된 거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천마의 말에 제갈성이 종리백을 바라보았다.
 [문상, 내친걸음이니 어쩌겠소? 어차피 이미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소. 이후의 상황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길 바랄 수밖에.]
 종리백은 입술을 달싹이지도 않았다. 소리를 기에 실어서 보내는 일반적인 전음이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수법은 어기전성(御氣傳聲).
 말 그대로 기를 다스려 소리를 전하는 상승의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제갈성이 윤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래, 받아들이겠습니다.”
 
 <『창천마혼(蒼天魔魂)』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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