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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기적을 그려라! [E]

기적을 그려라! 1-1권

2016.05.31 조회 8,014 추천 45


 # 0. 이상한 그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매 해마다 일정한 기간을 주기로 전시되는 미술품들이 바뀌며 사람들에게 미적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고마운 공간이다.
 하지만 이미 같은 미술관 방문만 수십, 수백 번은 넘었을 미대 지망생, 이진호에게는 더 이상 특별한 공간이 되어주질 못했다.
 “아, 지겹다. 이번 회차도 결국 비슷비슷한 거잖아. 이런 걸로 입장료를 받아 먹냐. 양심도 없네.”
 기부 입장이라는 것을 이유로 입장할 때 한화로 겨우 10원의 가치를 가진 1전짜리 페니를 내고 입장했지만, 그래도 돈은 돈이라고 뇌까리는 진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다른 미술관에서 더 다양한 전시회를 하고 있었지만, 그만한 입장료를 낼 처지가 못 되는 진호는 항상 이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만을 방문했고, 이곳을 통해서만 미술적 지식과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인 듯 했다. 진호의 눈에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이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고대 미술품들이 진열된 장소를 지나 천천히 시대별 작품들을 훑는 진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변화가 있을 수 없었다.
 “고대 이집트 전시장도 다 뻔한 거고. 마야 문명······ 에휴. 지겹다. 내가 알기로 이거 작년에도 올라왔던 건데. 좀 색다른 거 없나.”
 작품들을 살피며 뻔하다 못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진호는 곧이어 페인팅들이 전시된 장소로 향했다.
 낭만주의 화가 고야부터 시작해서 바로크 시대의 한 획을 그은 렘브란트 등등, 어느 누가 들어도 알 법한 명성을 가진 화가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으나 어느 작품 하나 진호에게 새롭지 않았다.
 한 달에 최소 10번, 평균 그 이상을 방문하니 아무리 거대한 미술관이라고 해도 그의 눈에 띄는 새로운 작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진호가 고대 그리스 로마 동상들이 잔뜩 세워진 공간 중앙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야 오늘도 포트폴리오에 쓸 작품 영감 얻기는 글렀네. 에휴.”
 올해 24살이 된 진호는 미대 지망생이었다.
 한국에서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아서 그림을 그렸다. 그에겐 만화도, 애니메이션도, 게임 일러스트도, 그리고 고풍스러운 미술품들도 모두 그림의 일환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속한 사회는 진호와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미대에 가려면 입시 미술을 배워야 한다. 사회가 짜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지 못하면 어느 것 하나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진호가 내린 선택은 유학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기 무섭게 진호는 비행기에 몸을 실고 뉴욕에 왔다.
 ‘젠장. 그냥 그때마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 게 뭐가 잘못이라는 거야?’
 진호가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 속에서 스케치북을 하나 꺼냈다.
 이미 수많은 그림들로 가득한 스케치 북을 한 장씩 넘기는 진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자기가 그렸지만 참 재밌는 그림들이다. 진호가 그렇게 생각하며 페이지들을 넘기다가 빈 공간이 나오자 이번에는 연필을 쥐었다.
 그렇게 그만의 스케치 시간이 시작됐다.
 슥슥, 연필을 쥔 진호의 손이 매끄럽게 종이 위를 휘저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있는 동상의 인체를 따라서 스케치를 시작하던 진호는 그 위에 자신이 상상하는 갑옷과 무기를 쥐어주면서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완성시켰다.
 “이렇게 재밌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그린 그림들의 가치가 크지 않다는 것을.
 진호가 날짜를 계산해 보면서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두 달 안에 포트폴리오를 완성해야 할 텐데······.”
 어학원에서 학생 비자를 유지하는 것도 이제 슬슬 한계였다.
 배우는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곳. 단순히 신분 유지라는 명목으로 이름만 올려놓았다. 물론 영어라는 언어를 어학원을 통해 배울 수 있겠지만, 진호는 차라리 그 시간에 현지인들과 맞부딪치며 말을 섞었고, 진짜 미국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영어를 배웠다. 처음엔 도저히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생했지만, 익숙해지니 이제는 귀도 트이고 회화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진호가 멍하니 스케치북을 바라보다가 덮었다.
 포트폴리오를 위해 대략 20점의 그림을 완성시켜야 하는데 아직까지 진호가 완성한 그림은 겨우 3점. 두 달간 17점을 완성시키려면 잠 잘 시간은커녕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튜디오에 죽치고 있는다고 없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리 만무했기에 진호는 기분 전환 삼아 오늘 미술관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진호의 영감을 깨워줄만한 무언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보다가 작업하러 가야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진호가 다시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현대 미술관에는 요즘 들른 기억이 없었으니 그 쪽만 조금 더 돌아보고 나가자는 요량이었다. 복도를 따라 걷다가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여태까지 보았던 정돈된 분위기가 아닌 자유로운 느낌의 전시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작품들도 전시장처럼 기이한 형태가 많았는데, 진호가 작품들을 보면서 자신이 장소를 제대로 찾아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막대기 하나 꽂아놓고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이 장소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어?”
 그때 진호의 눈에 바로 들어온 한 작품.
 매우 간단한 색채로 커다란 캔버스를 어지럽게 칠해놓은 그림이 진호의 시선을 끌었다. 처음에는 로스코의 작품인가 싶어서 패턴을 살폈는데 저 그림은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했다. 심플을 모토로 삼은 로스코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체 누가 그린 걸까. 아직까지 자신이 처음 보는 작품이 남아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가 정보가 적힌 이름표를 살피려던 진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죄다 물음표네?”
 이름, 알 수 없음. 년도, 알 수 없음. 종류, 알 수 없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정보가 기입되지 않은 이름표를 보면서 진호가 허탈한 얼굴로 다시 작품을 살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 아니란 걸 알게 되니 작품에 대한 진호의 생각이 급변했다. 이제 보니 칠도 투박하고, 젯소도 뭘 썼는지 덩어리가 져서 물감과 심하게 엉켜 있었다.
 “내참. 이럴 거면 내 그림이나 좀 걸어놓지. 나도 이 정돈 그릴 수 있겠다.”
 그러면서 팔짱을 끼고 대략 다섯 걸음 정도 물러서서 그림을 살피기 시작한 진호.
 멍한 얼굴로 그림을 보고 있던 중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어이, 학생.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남아 있어?”
 “예?”
 “곧 폐관 시간이야. 안 나가고 뭐해? 방송 못 들었어?”
 “폐, 폐관 시간이요?”
 백인 경비 아저씨가 한 말에 진호가 당황했다. 자신은 분명 점심 때 미술관에 입장했는데 벌써 폐관 시간이라니? 그러면서 혹시 이 경비가 자신에게 장난을 치나 싶어 시계를 살폈다.
 “지, 진짜네?”
 “그럼 가짜야? 얼른 나가. 정리해야 하니까.”
 놀랍게도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저녁 8시를 훌쩍 넘어가 있었다.
 진호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떨리는 동공으로 시계만 바라보고 있자 경비가 마지막으로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라고 한 마디를 더 했다.
 그제야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진호가 뚜벅뚜벅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도저히 현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청년이야.”
 경비가 멀어지는 진호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을 멍하니 몇 시간을 보고 있다니. 혹시 미친 사람인건가?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쯧쯧.”
 
 ***
 
 “대체 뭐야.”
 퀸즈에 위치한 반지하 방에 돌아온 진호가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머리를 털었다.
 너무도 허탈하게 시간을 보내버린 탓에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려야할 작품은 많았고, 이제 주어진 시간은 또 하루가 줄어 더 촉박해졌다. 겨우 하루라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겨우 하루가 벌써 한 달째 지속 되고 있었으니 분명 문제가 있었다.
 진호가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수건을 찾았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허공을 몇 차례 휘젓던 진호가 탄식을 흘렸다.
 “빨래한다고 다 치워놨지. 아오, 추워.”
 이제 11월. 가을의 기운이 완연한 계절. 따라서 진호의 말처럼 몹시 추울 정도는 아니었으나, 진호의 반지하 방은 어째선지 지금 날씨에도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마음이 불안하니 육신도 그에 따라 쇠약해지면서 아마도 온도에 더 민감해진 것이리라.
 “벌써부터 이러면 겨울엔 어떻게 사냐. 에휴!”
 물이 방울져 뚝뚝 흐르는 얼굴을 휴지로 대충 닦아낸 진호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 위를 향해 몸을 던졌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크게 삐걱이자 이불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공기 중에 떠도는 것이 눈에 보였다. 허나, 진호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이런 생활환경에는 진즉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미쳤네. 진짜.”
 혼잣말을 습관처럼 읊조린 진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까지 차가운 얼굴 표면이 그의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가만히 그러고 누워서 포트폴리오에 대해 생각해보는 진호가 이번에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망할, 대체 언제 17점을 완성시킨단 말이야! 아이디어가 도저히 안 떠오른다고, 아이디어가!”
 20점의 작품들을 싣는 포트폴리오는 그것들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대략적으로 어떤 식의 주제가 담긴 작품들을 학교에서 원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긴 했지만, 결국은 그리는 이의 창의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도 한 명은 나무에 매달린 사과를 그릴수도, 다른 이는 스티븐 제이스의 회사 마크를 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호는 어느 것도 그릴 수 없는 상태였다.
 무엇을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진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10시를 가리킬 시침을 확인하면서 진호는 이젤 앞에 앉았다. 어제 그리다 만 스케치가 연하게 남아 있는 캔버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진호가 손을 뻗어 연필을 쥐었다가.
 “여보세요.”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평소 조용하기만 하던 그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린 탓이다. 진호의 휴대폰 스피커를 타고 들린 목소리는 남성의 것이었다.
 [진호냐. 나와라.]
 “뭘 나와. 나 바빠.”
 [바쁘긴 개뿔이.]
 진호의 말에 전화 속 상대가 크게 웃었다. 친구, 조상철은 현재 진호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 처음 어학원에서 만나고 동갑이란 걸 알자마자 번호를 교환한 둘은 이후 미국에서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아니, 이것은 진호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상철은 진호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 친구들 중 하나였으니까.
 상철이 웃는 소리를 못마땅한 얼굴로 듣고 있던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런데 오늘은 저녁만 먹고 헤어질 거야. 나 작업해야 한단 말이야. 제출일이 진짜 코앞이다, 임마.”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노던으로 나와라. 오랜 만에 닭이나 뜯자.]
 통화를 끝낸 진호는 아까 외출할 때 입었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 그대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
 
 “흐으윽, 흐극······. 우에엑.”
 “임마, 술도 못 하는 놈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냐? 어휴, 냄새.”
 “닥쳐······ 우웨엑!”
 닭집 화장실 한 편에서 연신 구역질을 하고 있는 진호의 등을 상철이 두드려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밥만 먹겠다던 놈이 나보다 더 마셨네. 얼른 토하고 입 헹궈라.”
 “우욱.”
 “어휴, 더럽게도 많이 토하네. 나 먼저 올라간다. 깨끗하게 씻고 나와.”
 상철이 코를 막고 화장실을 빠져나가자 이제 혼자 남은 진호는 변기통을 붙잡고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지만 몸에 술을 넣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는 날들이 가끔 있었는데, 그게 하필 오늘이었다. 상철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울컥 올라온 서러움에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연거푸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것이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후우, 후우.”
 변기 물을 내리고, 수돗물로 입을 헹군 진호가 휴지를 쭉 뜯어서 입가를 닦았다. 양념 치킨 때문인지 코가 약간 매웠다.
 비틀비틀 화장실 문을 열고 다시 자리로 향하려던 진호의 휴대폰이 주머니 속에서 떨렸다. 이 시간에 딱히 연락 올 곳이 없을 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 그가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하자.
 [아들, 오늘은 연락이 없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엄마 걱정한다. 생활비 보냈으니까 밥 굶지 말고. 시간 되면 전화 좀 줘.]
 “······.”
 한국에서 보낸 어머니의 메시지가 바로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답장을 보냈을 것이거늘. 오늘의 진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메시지를 읽는 진호의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고, 휴대폰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죄송해요. 엄마······. 없는 살림으로 미국까지 보내주셨는데······ 죄송해요······.”
 어학원 비용이 얼마인지, 또 진호가 사용하는 생활비가 한 달에 얼마인지. 차마 누군가한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진호는 아직까지 부모님들께 손을 벌리고 살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한 친구들은 이제 하나둘 취업을 하고 있는 마당에 자신은 아직까지 미대 입시 준비생이라니. 현실의 벽이 또 한 번 진호의 머리를 때렸다.
 진호는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 때문에 도저히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 한동안 벽에 기대어 서있던 진호가 상철이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가기 무섭게 겉옷을 챙겨들었다. 진호가 갑자기 나갈 기세로 움직이니 자리에 앉아 있던 상철이 당황해서 물었다.
 “응? 어디가 임마. 아직 다 안 먹었잖아?”
 “미안······. 여기 돈 있다. 나 아무래도 먼저 들어가 봐야 될 거 같다. 속도 많이 안 좋고.”
 “뭐야. 남자 둘만 먹고 있기 좀 그래서 여자 애들도 불렀는데. 네가 갑자기 가버리면 짝이 안 맞잖아. 미대 애들이라 생긴 건 진짜 예쁘다고. 좀만 더 있다 가라.”
 “정말 미안하다. 나중에 연락하자.”
 그렇게 가게를 빠져나온 진호는 계속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걸었다. 멀쩡한 상태로 걸어도 10분은 가야 나올 지하철을 술에 취한 상태로 향하려니 그에 두 배는 될 법한 시간이 걸렸다. 뉴욕 교통카드로 값을 치르고 지하철 플랫폼 안에 들어선 진호가 바로 의자에 앉았다.
 “······저거.”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그림 한 점.
 익숙한 그림이 플랫폼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면서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한 번 기억한 그림은 웬만해선 잊지 않는 진호가 아무리 기억의 도서관을 뒤적거려 보아도 떠오르는 정보가 없었다. 분명 비슷한 색채로 칠해진 페인팅을 본 기억이 있는데······. 단조로운 패턴인 것을 보면 로스코의 작품인가······?
 “아.”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진호가 그제야 그림의 정체를 떠올리고 환히 웃었다.
 “미술관에서 봤던 그림이구나.”
 그리고 이후로 진호의 기억이 끊어졌다.
 
 
 # 1. 흐린 빛이 담긴 그림
 
 통, 통, 통.
 제대로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세면대를 때리는 소리가 잔잔히 방안에 울렸다. 매우 작지만 일정한 소리. 잠을 자면서도 자연스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진호가 힘겨운 몸짓으로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를 잠갔다.
 “으, 밤새 흘렀나보네.”
 진호가 세면대를 붙잡고 중얼거리다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끔찍한 몰골의 남성이 있었다.
 퀭한 눈동자에 자면서 침이라도 흘렸는지 허연 가루가 입 주변에 가득했다. 잔뜩 떡 진 머리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진호가 못마땅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눈곱을 떼려는데.
 “······응?”
 진호의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의 오른손이 물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손뿐만이 아니라 옷이며 다리에도 물감이 튄 자국이 선명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진호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지금 그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술에 절어서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진호가 자책하듯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절규했다.
 “아, 미친놈······. 술 먹고 물감으로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물감이 얼마나 비싼데.”
 한 가지 색의 물감이 싼 것은 대략 3불. 그것도 매우 싼 것을 골랐을 때 이야기다.
 페인팅을 칠할 때, 질적인 것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매번 중얼거리며 비싼 값을 주고 물감들을 샀었는데, 그것에 술 처먹고 헛짓거리를 해놓다니. 진호는 자기 머리통을 연신 쥐어박으면서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도저히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술 재료들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으니까. 저것들이 모이면 현재 진호의 몸값보다 비쌌다. 사실 현재 가치가 마이너스 단계인 진호보다 값이 떨어지는 것이 세상에 있을 리 없겠지만.
 먼지 가득한 바닥을 질질 끌면서 이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진호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에휴, 물감 다시 사려면 대체 며칠을 굶어야······.”
 그렇게 신세 한탄이 섞인 말을 이어가던 진호의 입이 순간 멈췄다.
 진호는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젤은 분명 자신의 것이고, 스케치도 자신이 했던 것이 맞았다. 비록 어젯밤까지만 해도 스케치가 완성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스케치는 자신이 한 것이 맞았다.
 “······그림이 완성 되어 있어?”
 하지만 지금 이젤에 걸린 저 작품은 스케치 단계가 아닌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색, 조화, 구조 등등. 모든 것들이 진호가 상상하고 있었던 그 상태 그대로 완벽하게 재현되어서 말이다. 진호가 페인팅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이건 내 상상 이상이야. 여기 꽃의 질감 처리 부분이라던가, 음영은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진호는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헛것인가 싶어서 계속 눈을 비벼 보았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번에는 아직까지도 꿈속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았는데 찌릿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하······.”
 진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하던 그림이 술에 취해 자고 일어나보니 완성되어 있다. 이게 현실이 맞다는 말인가?
 
 ***
 
 “어응, 그러니까 나는 그냥 갔다고? 아, 그래. 깨워서 미안해, 상철아. 푹 쉬어라. 나 괜찮냐고? 어, 멀쩡하다. 그냥 안부 차 연락한 거야. 다음에 또 보자.”
 상철과의 통화를 끝낸 진호가 숨을 크게 내쉬면서 침대에 누웠다.
 이젤에 걸린 완성된 그림을 발견한지 벌써 몇 시간이 흘렀건만 진전이 없었다. 아니, 기억이 나는 게 아무 것도 없었으니 진전이라고 할 만한 것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냥 정황을 따져보면 내가 술 먹고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렸다는 건데······.’
 도저히 말이 되질 않았다.
 지금 완성된 그림의 붓터치를 본다면 저건 절대로 술에 취한 상태로 해낼 수 있는 터치들이 아니었다. 진호가 캔버스에 얼굴을 바짝 가져가 그림을 더 자세히 확인했다.
 그림의 붓터치는 매우 세밀하면서 정교했다. 굳이 평가를 내리자면 그가 살면서 본 적이 몇 안 되는 최상위 수준의 것이었다.
 마치 프랑스의 마네가 다시 되살아나 그의 손을 빌려 캔버스 위에 색을 입힌 것처럼 말이다.
 진호가 몸을 일으키고 여전한 얼굴로 그림을 뚫어져라 살폈다.
 ‘이걸 내가 했다고?’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자연스레 고개가 저어졌다.
 “하, 말도 안 되지.”
 진호가 캔버스를 다시 이젤에 걸어 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간 이마를 긁적이던 진호는 일단은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거니와,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어야 뇌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들어 있지 않은 지갑을 챙겨든 진호는 외투를 걸쳐 입고 그대로 문을 열고 반지하 방을 빠져나갔다.
 
 ***
 
 방값이 싼 탓에 퀸즈에서도 후미진 곳에 위치한 진호의 반지하 스튜디오.
 당연히 바깥 거리도 더럽고, 부랑자들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동냥질을 하고 있었다. 진호도 사실 머물 곳만 있다 뿐이지, 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저들보다 질이 더 안 좋을지도 몰랐다.
 ‘저들이 길거리에서 동냥질을 하고 있다면 나는 부모님 등골을 동냥하고 있는 거지.’
 부모님 생각에 또 안색이 어두워진 진호가 모자를 눌러썼다.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보기에도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길을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주 가는 중국 빵집 간판이 보였다. 허름하고 척 보기에도 문제가 많아 보일 빵집의 외관. 투명한 유리벽 건너로 엉망인 주방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위생을 생각하면 도저히 못 갈 곳이었지만, 진호의 주머니 사정이 그보다 더 긴박했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종이 딸랑이며 진호의 입장을 알렸다. 가게 주인인 중국인 중년인은 진호의 얼굴을 알아보고 씩 웃었다.
 “또 왔어? 빵보단 밥을 먹어야지.”
 “아저씨, 자꾸 그러다가 단골 잃어요.”
 “클클, 젊은 총각이 빵만 먹으면 힘을 못 써. 아직 힘 쓸 곳이 많을 나이잖아?”
 가게 주인의 농담에 진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연스레 바구니에 빵을 담는 그의 손길도 빨라졌다.
 “······글쎄요, 전 아직 없네요. 이거 다 해서 얼마에요?”
 “음, 4불 50전.”
 “윽, 가격이 또 올랐어요? 여기도 이제 못 오겠네.”
 “에헤이. 당연히 총각한테는 이 팥빵은 서비스지. 자, 이럼 됐지?”
 “사랑합니다, 사장님. 제 충성심은 변함없을 거예요.”
 진호가 값을 치르면서 빵이 담긴 봉투를 손에 들고 밖으로 향하려 할 때, 그의 시선을 붙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벽에 걸린 풍경화였다. 특이하지도 않을 풍경화를 진호가 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자 가게 주인이 고개를 기울이면서 물었다.
 “왜 그래, 총각?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가게 주인의 질문에 진호가 말을 더듬으면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게 주인이 도리어 답답해져서 재차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무슨 문제 있으면 말을 해 봐. 우리가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아······. 그게, 음. 어쩌면 되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응, 괜찮으니까 말해 봐.”
 가게 주인의 재촉이 진호가 결국 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제가 이 그림 다시 그려도 될까요?”
 “그림을 다시 그려준다고?”
 가게 주인이 되묻자 진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그린 이의 정성이라던가, 그림을 가게에 걸고 계시는 사장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이긴 한데······.”
 “괜찮아. 가져가. 가져가서 한 번 다시 그려 보던가.”
 “네? 괜찮아요?”
 진호가 확인하듯 묻자 가게 주인이 얼굴을 긁적이며 건성으로 답해주었다.
 “어차피 그거 내가 산 것도 아니야. 뭐, 친구 놈이 선물로 바자회에서 사준 그림이긴 한데······. 다시 그려오면 더 보기 좋아지는 거겠지?”
 “아, 예. 확신은 못 하겠지만 최대한 노력은······.”
 “그럼 됐어. 가지고 가서 다시 그려 봐.”
 너무도 흔쾌히 승낙을 받아내자 진호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면서 풍경화를 조심스레 벽에서 떼어냈다. 그동안 쌓인 먼지가 작게 공기 중에 떠올랐지만, 가게 주인은 크게 신경 쓰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음에 가게에 올 때에는 완성된 그림과 함께 오겠다고 했지만, 가게 주인은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만큼 시간을 쓰라고 했다.
 “후우.”
 빵을 사러 갔다가 엉겁결에 풍경화 한 점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진호가 작게 숨을 골랐다.
 일단 그동안 쌓인 먼지부터 가볍게 제거한 진호는 이젤에 풍경화를 걸어두고 턱을 괴었다.
 ‘대체 내가 왜 그랬지······.’
 남의 그림을 갑작스레 다시 그려 보겠다니. 평소의 진호였다면 상상도 못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 느낌이······, 뭔가 강렬한 느낌이 계속해서 날 건드렸단 말이야.’
 그리고 그 느낌은 여전히 진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젤에 걸어둔 그림을 지그시 바라보던 진호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사온 빵을 입에 물었다. 빵을 먹을 때에는 우유를 같이 마셔줘야 했지만, 지금 진호의 냉장고 속에 든 우유는 유통 기한이 최소 2주는 넘은 물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돗물을 담은 컵을 홀짝이면서 빵을 씹어 삼키던 진호가 머리를 긁던 손으로 이마를 긁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의 왼쪽 눈이 손에 의해서 가려졌다.
 “······어?”
 갑자기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정에 진호가 놀랐다. 놀란 진호가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다시 거두었고, 방금까지 느껴지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체 이게 무어냐 싶은 진호가 들고 있던 물 컵을 내려놓고 자신의 손을 눈앞에 펼쳐 내려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손을 올려 진호가 왼쪽 눈을 가렸다.
 “아!”
 또 한 번 느껴지는 감정에 진호가 감탄을 내뱉었다.
 오른쪽 눈으로만 그림을 바라보자 풍경화 곳곳이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그림의 어느 부분이 묘사가 부족하고 어떤 식으로 수정을 하면 더 나아질지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태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너무도 신기한 경험에 진호가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빛을 따라 그림을 살피는데 푹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오른쪽 눈으로만 풍경화를 살피던 진호가 손을 내리고 다른 손으로, 이번엔 왼쪽 눈으로만 그림을 살폈다.
 오른쪽 눈으로 살피던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떠오르면서 진호를 전율케 했다.
 [흐드러지게 핀 꽃과 들판. 봄의 향기가 싱그럽게 내 코끝을 간질이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푸른 초원에 넉살좋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붓을 쥐고 있자니······.]
 ‘풍경화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어?’
 왼쪽 눈으로 그림을 살피자 이번에는 풍경화가 그에게 당시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마음을 대변해 진호의 귓가에 속삭이듯, 이야기를 해주었다. 육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 마음이 통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호가 조심스레 눈을 가리던 손을 뗐다. 다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림을 바라보았고, 진호의 귓가를 간질이던 마음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이게 대체······.”
 도저히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얼굴로 펼쳐진 자신의 두 손과 풍경화를 번갈아 보던 진호가 이내 앉은 자리에서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진호는 천천히 숨을 고른 후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팔을 뻗어 손에 붓을 쥐었다.
 
 ***
 
 딸랑.
 저녁 8시가 되어서 이제 슬슬 가게를 닫을 준비를 하던 빵집 가게 주인의 시선이 종이 울린 유리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 진호를 확인하고 주인이 씩 웃었다.
 “또 왔나? 저녁으로 먹을 빵 사러 왔어? 아까도 말했지만 젊어서 벌써부터 끼니를 빵으로만 때우면······.”
 “아뇨, 아저씨. 낮에 가져갔던 그림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돌려주러 왔다고? 설마 벌써 다시 그렸을 리는 없고······. 뭐,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놓게.”
 가게 주인은 진호가 다시 그리기를 포기하고 그림을 되돌려주러 왔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고 승낙한 것이 아니었으니 주인은 무심한 얼굴로 진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다시 가게 마감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진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게 주인이 예상했던 것과 반대되는 말이었다.
 “아니요. 완성해서 가지고 온 거예요. 그림을 가게에 걸기 전에 주인아저씨의 의견을 먼저 듣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왔어요. 가게 닫으실 시간인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도저히 내일까지 참고 있기 힘들어서······.”
 “응? 뭐라고? 완성을 한 거라고?”
 물건들을 수납장에 돌려놓던 가게 주인이 순간 놀란 얼굴이 되어 다시 진호와 눈을 마주쳤다. 진호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게 주인이 짐짓 턱을 쓸더니 검지를 뻗어 자신의 앞에 있는 빈 탁자를 가리켰다.
 “그럼 어디, 저기다 펼쳐서 한 번 보지. 이렇게 빨리 완성해서 오다니. 청년 혹시 미술하나?”
 “일단은 미대 입학을 꿈꾸는 지망생이기는 해요. 잠깐만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의 지퍼를 쭉 열고, 진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풍경화를 가방에서 꺼냈다. 양손으로 조심스레 그림을 받쳐 든 진호가 천천히 탁자 위에 그림을 올려놓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가게 주인도 진호를 따라 그의 옆에 서면서 진호가 가지고 온 그림을 살펴보았다.
 “세상에······.”
 그리고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이게 정말 아까 그 그림이라고?”
 “네. 아까 끼워져 있던 액자랑 같은 거잖아요? 물론 그동안 쌓인 먼지도 털어내고, 행주로 좀 닦아내니 전에 비해 새것 같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거 때문에 내가 놀라고 있는 게 아니야.”
 가게 주인이 눈을 비비면서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내가 비록 매일 빵을 굽는 것을 업으로 삼아 살아왔지만, 그런 나도 느낌이라는 게 있어. 이건 도저히 방금까지 내 가게에 걸려있던 그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가 아닌가? 꽃들에 입혀진 색깔들부터가 이제는 전과 달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가게 주인이 양손을 뻗어 액자 밑을 잡아 천천히 들어올렸다.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는 듯, 눈을 그림에 가까이 가져간 주인은 연신 감탄을 멈출 줄 몰랐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진호는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작품이 온전히 그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을 타고 새롭게 태어난 작품을 이렇게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한동안 그림 감상에 빠져 있던 가게 주인이 진호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이거 내가 돈이라도 줘야할 것 같은데? 이렇게 좋은 그림을 받게 되다니 말이야.”
 “아뇨, 어차피 처음부터 아저씨 물건이었던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아요.”
 “아냐, 그래도 무언가 보수로 주긴 줘야지. 자네도 하루를 꼬박 소비해서 다시 그린 그림이 아닌가? 아, 그래. 혹시 저녁 먹었나? 나랑 같이 돌아가서 밥이라도 먹지. 마침 집에 자리가 남으니까, 저녁상에서 한 자리를 자네가 채워주면 되겠어.”
 “그래도 괜찮을까요?”
 다른 무엇보다 밥이라는 말에 진호가 침을 삼켰다. 24살의 진호는 항상 배고픈 미대 지망생이었으니까. 가게 주인은 진호의 되물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진호를 이끌고 가게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근 후 그를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같이 길을 걷게 되는 동안 둘은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그동안 단순히 주인아저씨며 청년 정도로만 서로를 부르던 둘은 오늘 처음 이름을 알게 되었다.
 빵집을 하는 가게 주인의 이름은 라우롱 리. 진호의 예상대로 중국에서 건너온 이민자였다.
 미국에 건너온 지 햇수로 20년이 넘은 라우롱의 집은 가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둑판 위에 바둑돌들처럼, 빽빽하게 자리한 주택가 집들 중 하나의 현관에 들어선 라우롱이 문을 열어주며 진호가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나왔어.”
 “오면 온 거지 뭘 그렇게 광고하고 있어? 늦어서 음식 식겠어!”
 라우롱이 큰 소리를 내면서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이라 예상되는 곳에서 중년 여인의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어가 아닌, 진호가 이해할 수 없는 중국어였다. 라우롱이 처음에는 영어로 했던 말을 중국어로 바꾸면서 진호를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혼자 오는 게 아니라 손님이랑 같이 오느라 늦은 거야.”
 “손님? 지금 당신 뒤에 있는 사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응. 빵집 단골이거든. 한국인이야.”
 “한국인?”
 한국인이라는 말에 중년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진호의 얼굴을 확인했다가 다시 라우롱을 향해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진호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데리고 온 거야?”
 “응, 이 친구한테 기가 막힌 선물을 하나 받았거든. 그거 보답으로 저녁이나 한 끼 먹여서 보내려고.”
 “흠, 뭐. 당신 말이 그렇다면야. 이 자리에 앉아요.”
 중년 여인이 진호를 보며 의자 한편을 내주며 영어로 말했고, 진호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우, 우와.’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면서 진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평소 집에서 먹을 땐 햇반에다가 김치, 김, 그리고 스팸 정도면 거한 상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밥을 먹었던 진호에게 라우롱 씨의 저녁 식탁은 왕이 먹었다는 수라상에 비견될 정도로 반찬 종류부터가 다양했다.
 양념에 졸인 돼지고기로 시작해서 갖가지 튀김에 이르기까지. 족히 열댓 가지는 넘어 보이는 음식들을 바라보면서 진호가 군침을 흘렸다.
 “저, 지금 먹어도 돼요?”
 “흐흐, 그러라고 부른 거 아니겠어? 편히 먹으라고. 우리끼리 먹기엔 많은 양이기도 하니까.”
 진호가 젓가락을 들면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을 라우롱 씨와 그의 부인에게 전하고 가장 먼저 그의 앞에 있던 튀김을 집었다. 바삭거리는 야채 튀김이 진호의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들었다. 진호의 눈동자가 감격으로 물들었다.
 “너, 너무 맛있어요.”
 “흐흐, 집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요리는 정말 잘하거든. 내가 신붓감 하난 잘 골랐지.”
 “그럼 돈이나 더 벌어 와요.”
 “에헤이, 이만큼 벌었음 됐지 뭘 더 바라? 욕심은 좋지 않다고.”
 이내 두 사람의 아웅다웅거리는 대화 소리가 시끄럽게 주방을 떠돌았지만, 진호의 온 신경은 이미 음식을 향해 있었다.
 튀김에 이어 중국식 국물 요리와 면까지. 진호는 청소기가 흡입하듯 모든 요리들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그제야 너무 많은 음식을 입에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호가 입을 가리고 작게 콜록이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가 그에게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었다.
 “체하겠어요.”
 “고, 고맙습니다.”
 너무 음식에만 집중 하느라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몰랐던 진호는 일단 건네준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면서 이내 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속이 편해진 진호가 물을 건네준 상대를 향해 고개를 틀면서 재차 고개를 꾸벅였다.
 “후우, 고마워요.”
 “별 말씀을.”
 아직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앳된 소녀는 진호의 말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 더 이상의 진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라우롱 씨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진호 청년을 제대로 소개해주지 못했군. 옆에 앉은 저 아이는 우리 조카 아이. 당분간 우리 집에 얹혀서 지내게 됐지. 이번에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대 중 하나에 합격했거든. 그, 어디더라······.”
 “파슨스요.”
 소녀가 곧장 라우롱의 말을 이어주는 것으로 그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도왔다.
 단순히 학교 이름을 말하는 것뿐인데도 자부심이 대단했는지 단어 하나하나에 또박또박 단단히 힘을 주어 말했다. 라우롱이 소녀의 말을 듣고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손바닥을 쳤다.
 “맞아, 파슨스. 아무튼 학비 엄청 비싸다는 그 곳. 거기에 올해부터 신입생으로 다니고 있지.”
 “삼촌, 파슨스가 뭐가 비싸다고 그래요. 파슨스 정도면 그냥저냥 다닐만한 학교인거지.”
 진호가 소녀의 말에 삼키던 물을 뿜을 뻔 했다.
 파슨스 학비가 그냥저냥이라고? 학교에 입학할 때 통장 잔고를 확인해서 학교의 기준에 모자란다고 생각되면 입학도 불가능한 학교가 파슨스였다. 물론 진호도 포트폴리오를 완성한다면 파슨스도 희망 학교 중 하나로 생각할 터였지만, 전액 장학금을 받는 게 아니라면 입학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진호의 과한 리액션에 소녀가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냅킨을 건네주었다.
 “입가 닦으세요.”
 “아, 예.”
 진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녀가 건네준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우롱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고 보니 진호 청년도 미대 지망생이라고 했지? 둘이 하려는 게 혹시 비슷한가? 이야기나 한 번 나눠보지 그래?”
 “미대 지망생이요?”
 “아, 예. 일단은······ 내년 가을 학기에 입학하기 위해서 포트폴리오 준비 중에 있습니다.”
 “학과는 어디 생각하고 계세요?”
 “음, 일단은 일러스트레이션 쪽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확실한 건 아니고요.”
 처음으로 소녀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서렸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접시를 테이블 한구석으로 슬며시 밀어놓은 소녀가 진호 쪽으로 상체를 틀면서 물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꽃향기가 향긋하게 풍겨 나와 진호의 콧가를 간질거렸다.
 “가을 학기를 목표로 한다면 앞으로 준비 기간이 2달 정도 남았겠네요? 포트폴리오는 거의 다 완성하셨겠네요?”
 소녀의 질문에 진호는 폐부가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성은커녕 이제 겨우 도입부 정도만 처리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 진호는 솔직히 답했다.
 “그게 사정이 있다 보니 아직 3점 정도밖에······.”
 “3점이요?”
 아주 짧은 시간 머물던 소녀의 호기심이 진호의 답을 듣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최소 20점을 준비해야할 작품들을 아직 3점까지밖에 준비하지 못 했다니. 자연스레 소녀의 기대감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호가 그린 그림들이 궁금하긴 했기에 소녀가 계속 물었다.
 “혹시 그린 작품들 사진은 가지고 계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보고 싶은데.”
 “아, 예. 휴대폰으로 찍어서 가지고 다니긴 하는데. 잠시 만요.”
 진호가 호주머니 속에 담겨 있던 휴대폰을 꺼내 잠금을 해제한 후 사진첩에 들어갔다.
 가장 최근 3장의 사진들이 진호가 그린 작품들이었기에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에는 소녀에게만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라우롱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진호 뒤편에 서서 진호가 그린 작품들을 같이 살펴보았다.
 “흐음······.”
 진호의 그림들을 본 소녀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흐으음······.”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그림들을 이번 기회에 다시 보게 된 진호가 미간 사이를 좁히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이렇게 그림에 문제들이 많아?’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조금 부족한 부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진호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소녀의 붉은 입술 사이가 열렸고, 그녀의 가감 없는 생각이 새어나왔다.
 진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눈을 살며시 감은 진호의 시선에 닿은 그림은 형광등처럼 무시무시할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는, 부족함이 많은 그림이라는 소리였다.
 세 작품들 중 풍경화를 먼저 같이 살피는 둘이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진호가 그림이 담긴 휴대폰 스크린에 손가락을 대면서 그림을 확대시켰다.
 “일단 첫 째로 색상. 배경은 차가운데 물체들은 너무 따뜻하니······. 물론 그에 따라서 물체들이 돋보이긴 하나, 풍경화라는 의미를 잃은 그림이 되어버렸네요. 당장 그림보다 앞에 선 인물에 먼저 시선이 가버리니······. 풍경화에 인물이 나쁜 건 아니지만 너무 포커스가 몰렸네요.”
 “그리고 구조도 보세요. 너무 가운데로 쏠려 있어요. 이런 식의 구조는 재미가 없잖아요. 만약 여기서 조금만 더 사선으로 구도를 비틀어 봤다면 더 재밌는 그림이 나왔을 거 같은데요. 그리고 혹시 이 부분은 드리핑을 시도하신 건가요?”
 드리핑.
 물기를 빼지 않은 붓으로 머금고 있는 물감을 떨어뜨려 특유의 효과를 넣는 것을 말하는 용어였다.
 소녀의 하얀 손가락이 향하는 그림 한 구석에는 소녀가 물었던 것처럼 물감들이 본연의 색 그대로 방울 방울져 있다가 마른 자국이 남아있었다. 소녀가 가리킨 부분을 유의 깊게 살피던 진호가 얼굴을 붉혔다. 저건 드리핑을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제대로 물기를 빼지 않은 붓에서 튄 물감 같네요.”
 “그건 너무 초보적인 실수인데······. 이런 건 확실히 잡아야죠. 이대로 포트폴리오에 올라갔으면 무조건 불합격이에요.”
 “그러게요. 단순히 그것뿐만 아니라, 색도 중간 중간 칠이 비는 곳이 좀 있고······ 모자란 부분들이 참 많네요.”
 진호가 소녀의 말에 크게 동감하며 계속해서 자평을 이어갔다.
 아니, 혹평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진호의 평가들은 날이 바짝 서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소녀도 동감하고 있었던 부분이었기에, 소녀는 계속해서 진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따금 소녀가 무언가 하나를 지적하면 진호는 그 문제로 인해 발생한 또 다른 문제까지 꺼내오면서 소녀를 놀래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 부터는 진호가 말을 하고 소녀는 그의 평에 호응만 하는 분위기가 굳어졌다.
 ‘······응?’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세 번째 작품의 평이 한창 진행 중이던 순간이었다.
 소녀가 작은 입을 살짝 벌리고 동그란 눈동자로 진호의 옆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호응도 없이. 소녀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진호가 그제야 혼자서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차차‘ 라고 중얼거리면서 소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해요. 너무 저만 신나서 혼자 떠들었네요. 그쪽 의견을 물었어야 했는데······.”
 “아뇨, 그건 괜찮아요. 그보다 본인이 그린 그림 아니었어요?”
 “예?”
 소녀의 질문에 진호가 되묻자, 소녀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의 그림이라고 보여주셨는데, 그렇게 지적하실 부분들이 많다는 게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요. 보통은 자기 그림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힘들어서 친구들에게 감평을 요청하는데, 진호 씨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자기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아닌 사람처럼 느껴져서······.”
 소녀의 의문은 적절했다.
 스스로가 그린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와 내용을 화가 본인이 모를 리 없기에, 오히려 작품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에 자신이 그린 그림에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을 힘들어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다. 하지만 진호에게는 그게 없었다. 자기 작품이면 오히려 감싸도 될 부분을 더 부각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날 선 평은 듣는 소녀까지 칼에 베이는 기분이었다.
 소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진호가 도리어 당황했다. 이거를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진호는 일단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게. 휴대폰으로 다른 분과 같이 작품을 보게 되니 평소 제가 몰랐던 부분이나 안보이던 부분이 더 잘 보이게 되네요. 아마 그, 생각해보니 이름을 안 물었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페이링 리에요. 친구들은 그냥 페이라고 불러요.”
 “아예, 아무래도 페이링 씨랑 같이 보게 되니 페이링 씨의 지식 덕에 더 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러네요!”
 “······흐음.”
 진호의 둥근 해설에 페이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동안 진호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는 페이링. 동시에 진호의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믿지······ 않는 건가?’
 진호는 너무 애매하게 설명한 게 문제인가 싶어 무어라 더 살을 붙여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 페이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처음 그림을 배울 때 선생님께서 옆에 앉아 계시는 상황에서 시야가 트인 적이 있었으니까요. 뭐,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해는 해요.”
 ‘후유.’
 페이링의 말에 진호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지만 페이링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림 실력으로 본다면 많이 모자란 것 같은데······. 차라리 감평 쪽에 길이 보이는 것 같으니 붓보다는 펜을 드시는 게 어떻겠어요?”
 “예?”
 “아, 혹시 제가 실례되는 말을 한 건가요?”
 “아, 아뇨.”
 진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페이링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분명 그가 보여준 그림들은 실제로 문제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페이링의 말에 호통을 친 것은 뒤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우롱이었다.
 “페이! 그게 무슨 말이냐! 벌써 사람의 재주를 평가할 정도로 네가 컸다는 게냐?”
 “아니 삼촌, 제 말 뜻은 그게 아니라요.”
 “맞아요, 라우롱 씨. 실제로 제 이 그림들은 문제가 좀 많은 거예요. 그리고 지적들도 다 제가 했잖아요? 페이링 씨한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에요. 잘못이 있다면 아직 그림들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저한테 있죠.”
 “허흠,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진호가 직접 나서서 페이링의 변호를 하자 라우롱의 기세가 크게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자네가 나에게 다시 그려준 그림은 분명 감탄이 나올만한 그림이었다고. 쩝. 이거 참.”
 “당신, 그렇게 떠들 힘이 있으면 주위 정리나 하고 쓰레기나 좀 밖에다 꺼내놔요. 오늘 안내놓으면 주말까지 기다려야 한다고요.”
 “아, 알겠어.”
 부인의 호통 소리에 라우롱이 어정쩡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도 거의 끝나는 분위기였으니 다들 그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를 시작했다. 진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치우는 것을 도왔고, 페이링도 자신이 사용한 식기를 가지런히 모아서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이어지는 간단한 식 후 티타임. 이번 자리에서는 진호와 부인, 둘 사이에서 대화가 주로 오갔다.
 “햐, 이건 무슨 차에요? 처음 마셔보는 데 깔끔하네요.”
 “호호, 제가 중국에서 살았던 고향에서만 나는 특산 차에요. 맛 좋죠?”
 “네. 정말로요. 오늘 덕분에 음식과 차에 대한 식견이 넓어진 기분이에요.”
 “어머, 그런 과찬을. 다음에 또 한 번 저녁 드시러 와요. 그땐 또 다른 요리들을 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땐 저도 빈손으로 오지 않을게요.”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호호.”
 진호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오늘 같은 저녁을 또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꼭 하나 손에 쥐고 오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진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조심스레 건드렸다.
 “저기요.”
 진호의 옆에서 계속 차를 홀짝이면서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던 페이링이 진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깐 미안했어요.”
 “예, 예? 미안하다뇨? 아, 혹시 아까 저한테 했던 말 때문인가요?”
 페이링이 갑작스레 사과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진호가 도리어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페이링은 진호의 되물음에도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한 번 더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뒤로 바짝 묶은 검은 머리칼 포니테일이 귀엽게 끄덕여졌다.
 진호가 페이링과 애써 눈을 마주치기 위해 허리를 굽히면서 계속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렇게 크게 마음 상하지도 않았고······.”
 “아니에요.”
 진호의 사과를 페이링이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 여태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과 귀, 그리고 포니테일이 쫑긋 섰다. 페이링이 하얀 검지를 세우고 앞뒤로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아마 저라도 누군가 저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화가 났을 거예요. 아니, 단순히 화로 안 끝나고 무어라 한 마디 단단히 해줬겠죠. 제가 하고 싶은 꿈이 있고, 일이 있는데. 단순히 그림 몇 점으로 그걸 평가해버리다니. 그것보다 더 실례되는 행동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음······.”
 페이링의 말을 들은 진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페이링이 왜 여태껏 조용했나 싶었던 진호였는데, 이제 보니 페이링은 당시 상황에서 서로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고 있던 것이었다.
 첫인상은 냉정하고 차갑게만 느껴지던 페이링의 따뜻한 이면을 알게 된 진호가 살며시 웃었다. 이렇게 걱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진호가 페이링을 일으켰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제가 감사해요. 마음은 잘 알겠으니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뇨, 단순히 사과를 받아주는 걸로는 공평하지 않아요.”
 “예?”
 페이링이 덥석 진호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이끌었다.
 “제 방으로 가요.”
 “페, 페이링 씨의 방으로요?”
 여러 가지 상상으로 진호의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으나, 페이링의 이어지는 말은 진호를 허탈한 웃음 짓게 만들었다.
 “네. 제가 진호 씨의 그림들을 봤으니, 이번에는 진호 씨가 제가 그린 작품들을 보고 같이 감평해요!”
 “아, 아아.”
 그런 의미였구나. 진호는 괜스레 붉어진 볼을 긁적이며 숨을 골랐다.
 아직까지는 10대인 페어링은 진호가 생각하는 것보다 순수했다. 아니, 이건 단순히 그가 타락한 걸까.
 진호가 잡념에 빠져 곧장 답을 해주지 않고 뜸을 들이자 페이링의 얼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혹시 거절하려는 걸까? 그럼 안 되는데······.
 붉은 입술을 꼭 깨문, 걱정 가득한 페어링의 기색을 읽은 진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그녀의 말에 답해주었다.
 “네, 좋아요. 그럼 라우롱 씨랑 아주머니.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진호의 말에 두 어른들은 가볍게 긍정의 의미로 웃어주었다. 긴 시간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진호의 언행이 곧았느니, 그에 대해 크게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페이링이 어른들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호의 손을 이끌고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페이링의 방은 2층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 방을 이렇게 막 들어가도 되는 건가?’
 “그럼 들어오세요.”
 잠깐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페이링은 방문을 활짝 열고 진호를 안으로 안내했다. 진호가 어색한 몸짓과 속으로 또 한 번 실례하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감탄했다.
 “와.”
 페이링의 방은 매우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벽 페인트칠도 새로 했는지 깔끔했고, 가지런히 정돈된 물건들은 페이링의 성격을 알려주는 듯 했다. 계속해서 방을 살펴보는 진호를 페이링이 손짓하면서 불렀다.
 “이리로 오세요. 포트폴리오는 지금 본가에 있지만, 제가 최근에 그렸던 작품들을 보여드릴게요.”
 “네, 페이링 씨. 그럼 좀 살펴볼게요.”
 “그냥 페이라고 부르세요.”
 페이가 애칭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하면서 미술 가방을 열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작품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총 다섯 점의 그림들을 보게 된 진호가 순수한 의미로 탄성을 흘렸다.
 “이것들은 좀······ 대단한데요?”
 “그런가요?”
 “네. 균형이며 색, 조화.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네요. 이걸 페이 씨가 전부 혼자서 그린 거예요?”
 “그렇죠. 과제로 내야하니까요. 아이디어부터 칠까지 모두 제가 한 작업물들이에요. 보기 괜찮나요?”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죠.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도 되죠?”
 “원하시는 만큼 보세요.”
 페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호가 그림들을 이젤에 걸었다.
 단순히 들고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어딘가에 걸어놓고, 거리를 바꿔가면서 작품을 보는 것이 전체적인 분위기부터 디테일까지 살피는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가장 먼저 초상화를 살펴보는 진호가 턱을 괴고 작품을 천천히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자연스레 그의 한쪽 눈이 감겼다.
 페이 자신의 얼굴과 동물 중 고양이를 합성해 그린 그녀의 초상화는 사람과 고양이 얼굴들이 가진 특징을 콕 짚어서 세밀하게 묘사하고, 어두운 색과 밝은 색에 반전을 줘서 색채도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우 재미난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호의 눈에 밟히는 문제가 있었다.
 “너무 화려하네요.”
 “네?”
 “다양한 시도를 해본 것은 좋은데, 색채가 너무 화려해요. 톤의 레벨을 음······, 대략 1부터 7까지 주었네요? 물론 페이 씨의 실력이 뛰어나서 이 정도 색채 톤 묘사가 가능했겠지만, 그게 오히려 그림을 너무 화려하게 만들어서 작품의 분위기를 죽인 것 같아요. 딱 봐도 초상화라는 목적보다는 화려함에 더 눈이 가잖아요? 작품이 색에 가려졌어요.”
 “······말씀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그리고 다음으로 이 정물화요. 혹시 이 부분, 투톤을 쓰신 건가요? 스크래치 효과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대부분은 투톤이 아니라 그냥 스크래치로 한 줄 알던데.”
 “뭐, 눈에 들어오니 대충 알았어요. 그런데 이것도 너무 기교가 심해요. 정물화 본연의 느낌이 죽고, 페이 씨의 테크닉만 강조되는 그림이에요. 한마디로 자랑이 심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진호의 날카로운 감평은 이번에도 이어졌다.
 다섯 점 모두 각기 다른 화풍과 테크닉이 사용된 그림들이었는데, 진호는 그것들을 모두 정확하게 꿰뚫어보면서 부족한 점에 이어 과한 점까지 꼽아주기 시작했다. 페이는 진호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까지 꺼내 필기를 했다.
 그렇게 네 번째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해가던 중, 진호의 설명을 듣던 페이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진호가 해준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말로만 지적을 받다보니 허황된 느낌이 든 것이다. 진호가 한창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을 때 페이가 살며시 끼어들었다.
 “저기요, 진호 씨.”
 “예?”
 “지금 말씀 하시는 부분 말이에요. 확실히 말씀 하신대로 색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바뀌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바뀌는 게 가능하겠어요?”
 네 번째 그림은 추상화였다.
 형태가 정해져있지 않은 그림.
 페이의 추상화에는 총 3가지 색이 번화하게 도화지에 뿌려져 있었다. 중간 중간에 비어있는 하얀 공백을 통한 미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어두운 색 3가지만을 사용해 그렸는데, 진호는 그 효과를 보다 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부드러운 색을 한 가지 더 추가하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페이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는지 단호하게 진호의 의견에 반박에 나섰다.
 페이의 생각을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붓이랑 도화지 한 장만 빌릴 수 있을까요?”
 “네?”
 “잠깐만 쓸게요.”
 “······여기요.”
 페이에게서 붓을 건네받은 후 팔레트에서 물감을 찍었다.
 한동안 빈 도화지와 페이의 그림을 노려보던 진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점차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
 진호가 그린 그림은 페이가 그린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었던 것이다. 아주 미세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정말 똑같다고 생각이 들 두 그림을 보면서 페이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겨우 보는 것만으로도 내 그림을 따라 그릴 수 있다고······?’
 “자 그럼 이제 여기서 이 부분을 보세요.”
 페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호는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이 할 말을 이어가면서 붓을 쥔 손에 새로운 물감을 찍었다. 페이가 고른 3가지 색깔들과 완전히 반전된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란색이었다. 노란색 물감이 묻은 붓을 살며시 그림 위에 포개듯 진호가 찍어내기 시작했다.
 “!”
 동시에 페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정말 달랐다.
 단순히 색깔 하나를 추가 했을 뿐인데······ 진호의 말처럼 페이의 그림은 한층 더 깊어진 모습이었다.
 ‘여태까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그게 저거였구나.’
 “어때요? 괜찮나요?”
 “······아, 예······.”
 페이가 살짝 기가 죽은 목소리로 답을 했지만 진호는 그걸 눈치 챈 기색이 아니었다. 진호는 또 신이 나서 다음 그림의 감평을 이어갔다.
 페이의 시선에 닿은 진호는 아주 환히 웃으면서 그림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막 그림이라는 것에서 처음 재미를 찾은 열댓 살 먹은 아이처럼 말이다.
 ‘나도 저렇게 열정적이던 때가 있었는데.’
 “페이 씨,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계속 해주세요.”
 진호가 페이의 안색이 살짝 나빠진 것을 걱정해 묻자, 페이는 씩씩하게 답했다.
 진호와 함께 있다 보니 페이도 조금씩 잃어가고 있던 것을 찾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둘의 대화는 감평을 주고받는 것이 아닌, 한 쪽이 가르침을 주고 한 쪽은 그걸 배우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다섯 작품들의 감평이 모두 끝났을 때, 페이의 손에 들린 노트는 진호가 말해준 것들로 빽빽하게 차있었다. 강의 시간중의 노트 필기도 이정도로 하지 않았는데······. 페이가 자신이 필기한 내용을 훑어보면서 찡그렸다.
 그 사이 진호는 십여 분간 쉬지 않고 말을 하느라 갈증이 일어서 잠시 물을 가지러 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덕분에 노트 필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페이가 숨죽이고 차근차근 노트에 적힌 단어들을 읽어나갔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좌절했다.
 여태 살면서 페이는 자신을 천재라고 굳게 믿고 살아왔었는데, 이제 보니 진짜 천재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바로 앞에 말이다.
 물이 담긴 컵을 양손에 들고 올라온 진호가 페이를 향해 컵 하나를 내밀었다.
 “목마르지 않아요? 이거 좀 마셔요.”
 “······네. 고마워요.”
 “?”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페이가 풀이 죽은 듯 했으나 그 이유를 모르는 진호는 그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
 
 “그럼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기회 될 때, 이번에는 손에 꼭 무언가 들고서 올게요!”
 “호호, 아까 한 말은 그냥 농담이었어요. 오늘처럼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줄 수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라우롱 내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진호를 짧게 배웅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라우롱은 씻겠다며 화장실로 향했고, 그의 부인은 봐야할 드라마가 남았다며 TV 앞에 앉았다.
 “하아, 후우.”
 그리고 페이는 이젤 앞에 자리를 잡고 숨을 골랐다.
 그녀의 앞에는 아까 진호가 감평을 해준 다섯 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럼······, 시작하자.”
 그녀는 곧장 아크릴 물감들을 팔레트에 짜고 색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그녀는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진호가 내려준 감평에 충실히 따라서 말이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들이었는데······. 고칠 곳을 알고 있는데 안 고친다면 그게 더 나쁜 거야.’
 평소 신념이 강하고 자신만의 프라이드를 꺾지 않는 페이였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진짜 천재가 보여준 길을 따라 한 번 걸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페이는 밤을 꼬박 새워 작품들의 수정을 시간 내에 끝을 냈고, 학교로 들고 가서 교수에게 제출했다.
 “페이링 학생.”
 “네?”
 과제를 제출하고 그 다음 날. 교수가 페이를 불렀다.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바로 자리를 떠나려던 페이는 갑작스런 교수의 부름에 놀란 얼굴이었다. 수업 중에 뭔가 잘못을 했다던가, 빼먹은 과제가 있는지를 떠올리던 페이였으나,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가방을 등에 메고, 페이가 교수가 앉아 있는 책상에 다가가 섰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페이가 서있자, 교수가 웃으면서 그런 페이를 다독였다.
 “특별히 혼내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긴장하고 있지 말아요.”
 “그럼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제출했던 과제 때문에 불렀어요.”
 “과제요?”
 지난번이라면 바로 어제, 진호가 감평을 내려주고 페이가 그에 맞춰 수정을 한 작품들이었다. 페이의 안색이 한 층 어두워졌다.
 ‘설마 뭔가 잘못 됐나······.’
 혼내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미술을 하는 사람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는 본인도 모르는 법이다.
 페이가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교수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는 현재 이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고개를 좌우로 살며시 흔들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무 잘했어요.”
 “네, 죄송합······. 예?”
 “갑자기 왜 사과를 하죠? 아무튼, 이번 과제에서 페이링 학생이 보여준 과제는 여태까지 제가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깨끗하게 씻겨줄 정도로 깔-끔 했어요! 그동안은 기교에만 신경을 써서 작품에 본연의 메시지를 담지 못한다거나, 작 중 의미를 흐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과제들은 균형이 아주 좋았어요. 아마 다음 수업 시간 정도에 과제의 좋은 예로 들어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페이링 학생의 허락을 물어보려고 오늘 부른 거였어요. 어때요?”
 “어, 어떻냐고 물으시면······.”
 “제가 페이링 학생의 과제들을 수업 중 예로 들어 학생들에게 소개해도 괜찮겠죠?”
 교수가 재차 묻자, 페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그런 페이의 반응에 또 한 번 싱긋 웃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둘은 다음 수업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페이는 하루 수업을 끝마치기 무섭게 라우롱이 일하는 빵집으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고 빵집 안으로 들어선 페이의 눈에 중국 방송을 보면서 낄낄 웃고 있는 라우롱의 얼굴이 보였다.
 “사, 삼촌!”
 “응? 페이? 이곳엔 무슨 일이냐? 아, 숙모한테 일할 때 TV보고 있던 건 비밀이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게, 그······. 어, 이건 무슨 그림이에요?”
 “응? 아, 그거.”
 페이는 빵집 한켠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우롱은 그런 페이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면서 천천히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말했잖아. 진호 청년이 좋은 선물을 하나 줘서 저녁에 초대했다고.”
 “그럼 설마 이 그림이······?”
 “맞아. 진호 청년이 그려준, 아니지. 수정해서 가져다 준 그림이지. 참 재주도 좋아.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저 그런 그림이었는데 말이야.”
 “······.”
 페이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녀도 빵집에 걸려 있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땐 지금과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그때는 단순하고 평범했던 풍경화였다. 색채도 그저 그랬고, 구도도 평범한, 그저 그런 그림. 어떠한 특이점도 없던 그런 그림이었는데······.
 ‘······이게 정말 그 그림이라고?’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그림은 도저히 그때 그 그림이라고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풍경이라서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도저히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페이가 풍경화에서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자 라우롱 씨가 뒷목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엔 무슨 일이냐? 빵집은 이제 지겹다면서 코빼기도 안 비치던 조카가 말이야.”
 “아, 맞아.”
 풍경화에 빠져있던 페이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작게 손을 마주치면서 라우롱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삼촌, 저 진호 씨랑 만날 수 있을까요?”
 
 
 # 2. 귀로 들리는 그림
 
 “아이디어가아~ 안떠오른다고오~, 아이디어가!”
 진호의 반지하 스튜디오 침대 위.
 방의 주인인 진호는 여전히 머리를 헝클면서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이러길 벌써 3시간 째. 진호의 이젤에 걸려있는 캔버스는 여전히 하얬다.
 “그나마 이전의 세 작품들은 다 수정해서 다행이긴 한데······ 하, 이어갈 작품이 안 떠오르냐. 미치겠네, 정말.”
 생각해보면 당연한 문제였다.
 진호의 실력이 어떠한 경우를 통해 좋아진 건 사실이었으나, 그의 머리나 생각의 방법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냥 무작정 그리면 뭔가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보긴 했으나, 화려하기만 했지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 그림만이 연이어 나오면서 진호를 좌절시켰다. 물론 저것들도 저대로 포트폴리오에 담고자하면 담을 수 있겠지만, 진호의 성에 차진 않았다.
 진호가 침대에서 기어 나와 차가운 수돗물을 컵에 담은 후 그것을 쭉 들이켰다.
 “날이 추워지니 그래도 찬물은 언제든 마실 수 있으니 좋구나······, 는 개뿔! 하, 안되겠다. 산책이라도 나가자.”
 진호는 일단 칙칙한 스튜디오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제에 이어 연달아 집에만 있었던 탓에 바깥 공기가 그립기도 했으니까.
 간단히 외출복을 걸쳐 입은 진호는 연필과 스케치북을 담은 가방을 옆에 메고 문밖으로 나왔다.
 진호가 향하는 장소는 맨해튼에 위치한 센트럴 파크.
 아무래도 혼자만 있는 시간이 길다보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장소가 그립기도 해서 오늘은 센트럴 파크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열심히 지하철을 향해 걷는 진호는 연신 손에 입김을 불었다.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손에 들고 다니면 좋으련만······. 아냐. 커피 한 잔이면 빵이 두 개다. 정신 차려라 이진호.”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뉴욕 교통카드를 긁고 플랫폼에 선 진호.
 멀리서 다가오는 지하철을 보고 반색했다. 평소 별의별 냄새가 다 나는 지하철에 타는 것이 썩 기쁘진 않았지만, 오늘같이 특히 추운 날에는 냄새고 뭐고 일단 따뜻한 장소 안에 들어가고 싶었으니까.
 N 이라고 적힌 지하철이 앞에 서기 무섭게 진호가 몸을 욱여넣었다.
 예상대로 오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따뜻했으니 그럭저럭 참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지하철이 다시 철로를 따라 이동을 시작했을 때, 기타를 멘 흑인 청년이 진호가 탑승하고 있는 지하철 칸 중앙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뉴욕에 사는 이웃 여러분. 어릴 적부터 음악에 꿈을 품고 있던 저는······.”
 뻔한 이야기였다.
 지하철에 타게 되면 이따금 악기를 들고 탑승한 뮤지션들이 노래나 연주를 하고난 후 사람들의 돈을 바라곤 했다. 이런 행위 자체가 불법이긴 했지만, 이제는 뉴욕 지하철 하나의 풍경처럼 굳어졌다. 뉴욕에 산지 이제 시간이 꽤 된 진호도 처음에는 저런 장면들을 매우 신기하게 바라보고 얼마 없는 돈도 몇 번 넣어주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짧게 설명한 흑인 청년이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레드 제플린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청년의 손길에 맞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호는 지하철 문에 기대어 서서 살며시 눈을 감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것은 꼭 미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지라, 지금처럼 음악에도 곧잘 심취하곤 했다.
 ‘흠, 잘 치네······. 어?’
 진호가 순간 탄성을 내면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뭐, 뭐였지?’
 눈을 뜬 진호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아직도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흑인 뮤지션을 찾았다.
 잔잔하게 반주를 이어가며 가사 하나하나를 읊조리는 뮤지션을 따라 진호는 자연스레 고갯짓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천천히 눈을 감은 진호의 귓가로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들려왔다.
 점차 빨라지는 기타의 핑거링과 그에 맞춰 터지는 보컬 톤.
 그때에 맞춰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이 진호의 뇌리를 뚫고 지나가면서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 이건 또 뭐야?!’
 진호가 알 수 없는 느낌과 떠오르는 이미지에 몸을 떨었다.
 마치 노래가 그의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보았던 흑인 뮤지션이 눈을 감고 있는 진호의 머릿속에 나타났고, 그를 중심으로 천천히 퍼지는 사운드가 시각화되어 진호의 상상 속의 스케치북을 이리저리 수놓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자유롭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의 춤을 보면서 진호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 이걸 그려야 해. 아니, 일단 스케치라도······!’
 진호가 서둘러 다시 눈을 뜨고 가방 속에 있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들었다.
 공백의 페이지를 펼친 진호가 떨리는 손으로 연필을 쥐고 최대한 차분히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주 간단한 제스처 드로잉으로 뮤지션을 대강 표현만 하고, 그 주위로 진호가 머릿속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최대한 실체화 시켜 스케치했다.
 지금 진호를 전율케 한 것은 단순히 음악을 하고 있는 뮤지션의 모습이 아닌, 그의 손길을 타고 연주되는 노래의 시각화에 있었으니 그것을 최대한 표현해보려고 노력했다.
 단순히 연필만을 이용해 스케치를 하고 있었기에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호는 최선을 다했다.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그의 연필 끝을 타고 그려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겨우 정거장을 하나 지나치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천년, 만년이라도 되는 것 같이 느껴지던 진호가 간신히 옅은 숨을 내뱉었다.
 ‘일단은······, 느낌은 충분히 살렸어.’
 언제부터였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까지 맺혔다. 그래도 스케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미지도 아직 선명하니,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작품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호가 손을 뻗어 이마의 땀을 슥 하고 훔치는데, 연주를 끝낸 뮤지션이 모자를 들고 지하철 칸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이동하는 흑인 뮤지션은 아무도 돈을 넣어주지 않았지만 계속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진호가 텅 빈 모자를 보면서 혀로 날름 입술을 핥았다. 어느새 인가 그의 손에는 지갑이 들려있었다.
 평소보다 더 얇게 느껴지는 지갑을 쥐고서 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얼마 없는데. 그래도 상대가 의도했든, 안했든, 뭔가를 받았으니······.’
 진호가 지갑에서 5불짜리 지폐를 꺼내서 자신의 앞을 지나치는 뮤지션의 모자에 꽂아 넣어주자, 뮤지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호의 손을 맞잡았다.
 “땡큐, 차이니스 프렌드!”
 “저는 한국인인데요.”
 “오, 한국인. 나도 김치랑 쎄이 좋아해요! 아이 러브 코리아!”
 “······.”
 괜히 돈을 줬나.
 후회는 언제해도 늦는 법이다.
 
 ***
 
 마지막까지 진호의 손을 붙잡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던 흑인과 진호는 간신히 헤어졌다.
 진호의 목적지는 센트럴 파크였고, 흑인은 조금 더 지하철에 남아 연주를 할 생각이었으니 둘의 이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번호까지 받았어.’
 진호가 새로이 저장된 번호를 보면서 볼 주변을 긁었다. 자신의 이름을 맥스라고 소개한 흑인 뮤지션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피스 사인을 진호에게 흔들어 보이며 브라더라고 불렀다. 외모처럼 성격도 참 순박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좋은 게 좋은 것이다.
 그렇게 맘 편히 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은 진호는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길을 걸었다.
 고층 건물 사이로 가려져있던 하늘이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지는 녹색 공원을 보면서 진호가 미소 지었다.
 도시 속의 정원, 센트럴 파크. 맨해튼이라는 섬 도시 한 가운데에 위치한 이 울창한 숲은 항상 방문할 때마다 그에게 활력을 주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부터 잠시 짬을 내 휴식을 즐기러 나온 직장인, 그리고 사진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까지.
 다채로운 사람들이 제각기 공원을 배회하면서 그들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향한 진호는 인공 호수 주변을 걸으면서 진한 풀과 물내음을 맡았다.
 맨해튼이라는 도시가 가진 또 다른 면. 진호는 센트럴 파크의 그 점이 좋았다. 도시 한 가운데 있으면서, 도시 같지 않은 이 분위기가 말이다. 한국에 살 때 곧잘 숲과 산을 찾아다니는 그에게 당시 기분을 내게 해주는 딱 알맞은 장소였다.
 ‘그럼 적당히 이쯤에 자리를 잡고······.’
 진호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들고 대충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근처 벤치에도 앉을 자리가 비어있었지만 흙바닥에 앉을 기회가 많지 않은 요즘이었으니, 이런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진호는 어디 그릴만한 것이 없나, 라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단순히 센트럴 파크에서 보이는 풍경이나 인물들을 그리는 것은 재미가 없다. 아니, 재미를 떠나서 어느 누구에게도 크게 새롭지 않을 그림들이리라.
 ‘뭔가 좀 더 뉴욕만의 분위기, 그리고 나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한데······. 그런 걸 포트폴리오에 넣으면 당연히 더 반응도 좋을 테고 말이야. 유학 중이라는 내 특색을 내세울만한 건 역시 이런 거 밖에 없겠지······, 응?’
 생각을 이어가던 진호의 귓가에 음률이 들렸다.
 전자 피아노 소리였다.
 진호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시선을 돌리자 중년 남성이 허술한 장비들 사이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게 보였다.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중년인의 손길 하나하나에 건반이 눌리고, 건반에 맞춰 음이 연주되었는데 그 실력이 썩 괜찮았다.
 그렇게 피아노에 연결된 스피커를 타고 연주되는 피아노 소리가 주위를 은은하게 울렸다. 그 모습이 마치 숲속 콘서트라도 온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려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평범한 연주 속에서 진호는 기분 좋은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저 사람도 꽤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피아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것만큼은 진호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까와는 또 다르네.’
 진호가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면서 연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흑인 뮤지션이 연주하던 기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흑인 뮤지션의 기타 연주를 듣고 떠오른 그림은 거칠게 자신의 색과 개성을 표현하는 그림이었다면, 지금 피아노 소리를 듣고 진호는 차분하고 고고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었다. 마치 주위 사람들을 아우르는 듯한 그런 자애로움을 말이다.
 그렇게 한참동안에 음악에 빠져있던 진호가 눈을 뜨고 쥐고 있는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릴 그림의 이미지는 벌써 진즉에 떠올랐었다. 이제 그것을 그리기만 하면 된다.
 숲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중년인과 그 옆으로 동물들이 하나둘 짝을 이뤄 그의 음악을 감상하듯 모여든다. 사슴, 여우, 다람쥐······ 갖가지 동물들이 중년인의 옆에 앉아서 그의 관객이 되어주는 그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한 선을 그으면서 진호가 스케치를 완성해갔다. 아직 명암이라던가, 세세한 디테일보다는, 음악을 통해 느낀 것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더 컸기에 스케치는 오래 걸리지 않아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진호가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은데.’
 “자네가 그린 그림인가? 멋진데? 혹시 지금 저 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것은 내 모습인가?”
 진호가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의 뒤에는 아까까지 피아노에 앉아서 연주를 하던 중년인이 허리를 숙이고 진호의 스케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호의 볼이 자연스레 붉어졌다.
 “죄송해요. 몰래 그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훗훗, 괜찮네. 나도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고 밖으로 나와 연주를 했던 것이니까. 오히려 덕분에 누군가의 그림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이 상황이 영광스러울 뿐이지. 고맙네, 나를 그려줘서.”
 그러면서 중년인이 미소지었다. 진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미소를 말이다.
 자연스레 그의 미소에 화답하면서 중년인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게 된 진호는 그의 행동과 말투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고급스러운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입고 있는 옷도 깔끔한 가로 줄무늬가 그려진 네이비색 양복에 갈색 구두를 신은, 뮤지션보다는 신사에 가까운 차림새였다. 한동안 진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그림을 빤히 구경하던 중년인이 중절모를 고쳐 쓰면서 물었다.
 “미안한데 혹시 조금 더 자세히 봐도 되겠나? 요즘 시력이 점점 더 나빠져서 말이야. 내 손으로 직접 들고 본다면 더 고맙겠군.”
 “예, 물론이죠.”
 중년인의 부탁에 진호는 스케치북을 그에게 넘겼다.
 진호에게 건네받은 스케치북을 조심스레 든 중년인이 선글라스를 벗고 진중한 눈빛으로 그림을 이목저목 살펴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빤히 진호의 그림을 지켜보고 있던 중년인이 닫고 있던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
 “혹시 자네······.”
 “예.”
 진호를 향해 고개를 틀어 보인 중년인이 진지한 얼굴로 진호에게 말했다.
 “이 그림 팔 생각 없나?”
 “그림을 팔라고요? 이걸요?”
 진호가 놀라서 묻자 중년인은 여전히 스케치북에 시선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지간히 그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림에서 시선을 떼질 못하는 중년인이 담담하게, 하지만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살면서 누군가 나를 그려준 경우는 많지 않거든.”
 “하지만 이건 초상화도 아니고, 단순한 러프 드로잉일 뿐이에요. 누군가한테 돈을 받고 팔기에는······.”
 “종류나 틀이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그 거친 느낌이······, 내게는 정말 마음에 쏙 드는군. 그래서 팔 생각은 있나?”
 중년인의 거듭된 질문에 진호가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돈을 받고 그림을 판다. 어떻게 보면 진호가 항상 꿈꿔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의 가치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대충 그린 그림을 팔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트폴리오에 담기 위해 작품들을 모으는 게 순서였다. 그러기 위해 오늘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진호가 다시 한 번 거절의 뜻을 내비추려 하는데, 진호의 표정을 슬며시 훔쳐본 중년인이 턱수염을 한 차례 쓸면서 말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언제고 그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면 꼭 내게 팔도록 하게. 기한은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어. 자네가 이제 팔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든다면 언제든 내게 연락을 주게. 그때가 된다면 괜찮겠지?”
 남성의 말에 진호가 잠시 고심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작품을 완성하고, 포트폴리오에 넣은 후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면 그 이후에는 언제든 팔 수 있을 터였으니까.
 “그런 조건이라면 저도 좋아요.”
 “그럼 계약은 성립이 된 걸세. 구두 계약도 계약은 계약이니 꼭 지켜주길 바라네. 자네 휴대폰은 있나? 아, 요즘 세상에 휴대폰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 리 있나. 내 번호를 찍어줄 테니 잠시만 빌리지.”
 중년인이 신이 난 얼굴로 진호의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어 눌렀다.
 혹시 틀리진 않았는지 한 번, 두 번 확인한 것도 모자라 진호의 휴대폰을 이용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제대로 번호를 저장했다는 것을 단단히 확인한 후에야 다시 진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진호의 손에 휴대폰을 꼭 쥐어주면서 눈을 마주친 중년인이 재차 당부했다.
 “나랑 약속한 걸세! 꼭 잊지 말게나!”
 
 ***
 
 두 개의 스케치를 완성하고 집으로 돌아온 진호는 이젤 앞에 앉았다.
 두 작품을 그릴 준비를 대강 끝마쳤으니 서둘러 작품으로 완성시키기 위해서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온 것이다.
 진호가 마지막으로 스케치북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크기가 다른 스케치북과 캔버스 사이의 비율을 맞추기 위해 여백을 맞춘 후 구도와 배치를 다시 한 번 재조정했다.
 얼추 위치가 잡힌 것 같으니 곧장 페인팅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젯소로 코팅부터 하고······.”
 진호는 먼저 물에 희석시킨 젯소를 붓에 찍어 캔버스 위에 꼼꼼히 발랐다.
 캔버스에 일종의 코팅을 해주는 작업. 이렇게 해주어야 나중에 물감이 굳으면서 갈라지는 일이 안 생긴다.
 요즘 좋은 캔버스들은 젯소가 미리 발라져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값도 값이었고 진호는 이렇게 직접 일을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림도 정성이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제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릴 준비를 끝마친 진호가 연필을 쥐고 숨을 골랐다.
 “뜨거움. 두 뮤지션들을 담은 스케치엔 음악을 향한 둘의 뜨거운 열정이 같이 담겨 있어. 그걸 최대한 표현해야 해.”
 그림의 핵심이 될 부분을 다시 한 번 되뇌면서 진호가 연필을 움직였다.
 진호는 먼저 기타를 치는 뮤지션이 담겼던 스케치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을 쥔 진호의 오른손이 이젤 위에서 춤출 때마다 슥슥 선이 그려지면서 지하철을 배경으로 기타를 치는 뮤지션이 천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최대한 간단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진호는 디테일한 묘사보다는 배경을 포함해 인물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는데 중점을 두었다.
 세부적인 묘사는 연필이 아닌 색이 들어가면 그때부터 표현될 것이니까. 큰 그림을 먼저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대강 형태를 잡아가는 구조물들을 보면서 진호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정도면 됐겠지.’
 지하철 안에서 현란하게 기타를 연주하는 뮤지션과 자리에 앉아 잠들거나 휴대폰만 보고 있는 사람들.
 그런 상황에 좌절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아닌, 뮤지션은 더욱 화려한 연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진호는 한 발치 떨어져서 밑그림의 전체적인 균형을 확인한 후 만족한 얼굴로 읊조렸다.
 “괜찮네.”
 구도는 원하는 대로 나왔다.
 이제는 스케치한 그림에 색을 입힐 차례였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진호가 아크릴 물감을 팔레트에 짰다.
 “일단 밝은 색을 배경으로 쓰고······.”
 차츰 톤을 주어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진호은 노란색과 자홍색을 섞어 붉은 빛이 도는 밝은 색을 만들었다.
 항상 페인팅을 할 때 유의할 점은 원색을 그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색이 너무 강해서 후에 원하는 색채라던가 톤을 쌓는데 무리가 갈 수 있었다. 특히 어두운 계통의 색을 만들 때만큼은 꼭 두 가지 이상의 색을 섞어서 만드는 것이 보기에도 좋고 톤을 쌓기에도 적절하다. 단순히 검다고 해서 그 부분이 꼭 검은색 일색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빛과 색이란 것은 참 오묘한 것이었다.
 배경색을 대강 깐 진호는 이제 덩어리 물체들의 위치를 하나씩 잡아주면서 구도를 맞춰갔다.
 가장 중요한 뮤지션의 위치를 잡아준 후, 주위 사물들을 교정하는 진호는 스케치와 실제로 색이 입혀진 그림의 차이를 확인하면서 적절한 조정을 가했다.
 ‘실제로 이 부분은 생략이 가능하니 대충 색으로 덮고······, 흠. 이 포스터가 있는 위치는 예상 외로 균형에 맞는데? 좀 더 강조해야겠다.’
 덩어리들을 잡아낸 다음 진호는 서서히 톤을 쌓으면서 물체들의 밀도를 높였다.
 사람은 좀 더 사람처럼, 의자는 더 의자 같게. 그러는 와중에도 꼭 색을 섞어서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찮은 작업이지만 작품을 위해서였다
 ‘원색을 넣는 것은 마지막에 해야 해. 그때 필요한 부분에만 포인트를 넣어서 부분적으로 유화 같은 분위기를 내줘야하니까.’
 진호가 가장 선호하는 방식의 페인팅 법이었다.
 아크릴 특유의 광택을 지우기 위해 흰색을 조금 섞어 원색의 느낌을 살리면 아크릴 물감으로 유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아예 유화로 페인팅을 하는 것이 당연히 더 좋겠지만······.
 ‘유화 물감들은 너무 비싸단 말이야.’
 현실적인 이유를 탓하면서 진호가 연신 붓을 움직였다.
 중간 중간 한쪽 눈을 감고 페인팅의 진행 과정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빛이 나면서 수정을 요할 때에는 한동안 붓을 멈추고 생각에 잠길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막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칠에 집중을 했을까. 진호가 마지막으로 뮤지션의 기타에 색을 입히면서 페인팅을 마무리 지었다.
 “후우!”
 한동안 고도의 집중력을 쏟아내느라 숨도 참고 있었던 진호가 크게 숨을 내뱉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저녁 6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장장 3시간을 페인팅에만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지금처럼 그림에 빠졌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진호가 완성한 그림을 살폈다.
 그리고 스스로 감탄했다.
 “멋지다.”
 화려한 연주를 이어가는 기타리스트와 그가 연주하는 선율을 색으로 표현하면서 뮤지션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세세한 디테일은 대부분이 기타리스트와 그의 기타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림이 가진바 의미가 더욱 정확하게 와 닿는 듯 했다.
 게다가 기타리스트가 가지고 있는 열정. 그것이 확실히 표현된 것 같아 더 기뻤다.
 진호가 뿌듯한 얼굴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이제 이 기세를 몰아서 다음 작품도 완성시킨다면 20점 중 5점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되겠지.
 지이잉. 지이잉.
 그때 진호의 휴대폰이 떨리면서 전화가 오는 것을 알렸다. 혹시 또 저녁을 같이 먹자는 친구 상철의 전화인가 싶어 진호가 입맛을 다셨다.
 ‘한창 느낌 왔을 때 그려야 하는데. 어떻게 말하면서 거절한담?’
 그러면서 스크린에 떠오른 상대방을 확인했는데, 상철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던 곳에서 온 전화였기에 놀란 얼굴로 진호가 황급히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한 차례 말까지 더듬은 진호.
 그의 휴대폰 스피커를 타고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진호 씨 휴대폰 맞죠? 미대 입시 전문 학원, 맨해튼 아트 갤러리에요. 몇 주 전, 상담을 요청하셨었는데, 그동안 상담 예약이 모두 차 있었거든요.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신가요?]
 
 
 # 3. 대신 그린 그림
 
 “후우.”
 맨해튼 미드 타운에 위치한 건물 앞에 선 진호가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자신을 추슬렀다.
 사실 이렇게까지 긴장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맨해튼 아트 갤러리.
 뉴욕에서 미대의 입학을 희망하는 유학생이나 현지 학생들이 꼽는 최고 수준의 미술 입시 전문 학원이었다.
 합격률 95%를 자랑하는 학원에는 일반인도 들으면 알 법한 미술 명문이라 칭해지는 대학들을 졸업한 선생님들로 가득했다.
 진호도 혼자서 포트폴리오와 미대 입학을 준비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상담을 요청했었는데, 그게 대략 2주 전의 일이었다.
 2주 전에 예약을 한 상담을 드디어 오늘에서야 받는다니.
 ‘대체 얼마나 대기자들이 많았다는 소리야? 대단들 하시네, 학생이며, 선생님들이시며······.’
 진호가 작게 떨리는 검지로 인터폰 버튼을 누르자 짧게 신호음이 울렸다 사라졌다.
 곧이어 들은 적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렸다. 진호에게 전화를 주었던 그 여성이었다.
 [맨해튼 아트 갤러리 입니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오늘 상담을 받기로 했던 이진호라고 하는데요.”
 [아, 진호 씨군요. 잠시 만요. 초록 불빛이 들어오면 문 열고 들어오시면 돼요.]
 이어 뚝 하고 스피커가 끊어졌고 여성의 말대로 빛이 나면서 잠금이 풀렸다. 진호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연스레 감탄이 나오는 복도가 보였다.
 ‘미술 학원이 이런 고급진 사무 건물에 렌트를 하고도 유지가 되나?’
 척 봐도 꽤 비싸 보이는 대리석이 바닥에 깔려 있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 중간 중간에는 미술품으로 보이는 조각들도 놓여 있었다.
 여태 뉴욕에서 살면서 고급 건물에는 처음 들어와 보는 진호는 진풍경에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에는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찾지 못해서 당황했다.
 난처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진호의 옆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층?”
 “아, 4층이요.”
 “지금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타시면 됩니다.”
 ‘경비가 엘리베이터까지 관리해 주나보네. 참······.’
 진호가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는데, 경비는 그 의미를 알았는지 살며시 미소 지으며 화답해주었다. 입은 웃지만 눈은 굳어 있는, 매우 사무적인 웃음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진호는 4층으로 향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2주 전, 상담 문의를 했을 때 혹시 그려놓은 그림이 있냐고 물어서 페이 씨가 보았던 것과 같은 3점의 작품을 보냈었지.’
 물론 지금은 수정을 가해서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된 작품들이다.
 진호는 수정한 작품들은 메일로 보내지 않고 오늘 직접 사진을 찍어 프린트를 하고, 가방에 넣어 왔다.
 어차피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굳이 메일로 미리 보낼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진호가 걱정 반 기대 반을 가슴에 품었다.
 곧 띵동하는 소리와 함께 도착을 알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또 한 번 짧게 이어지는 복도 끝에 ‘맨해튼 아트 갤러리‘라는 현판이 걸린 장소가 보였다. 진호가 반투명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그를 맞이해주었다.
 “진호 씨 맞죠? 어서 오세요. 맨해튼 아트 갤러리의 부원장을 맡고 있는 조미경입니다.”
 “아, 부원장님이셨군요. 안녕하세요.”
 “상담은 원장 선생님께서 해주실 겁니다. 그럼 사무실로 같이 가실까요?”
 조미경 부원장이 진호를 이끌고 학원 안쪽에 위치한 원장 사무실로 안내했다.
 진호는 이동하면서 꽤 많은 수의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과 열띤 대화를 나누면서 작업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개인 공간과 비슷한 장소에서 열중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안내하는 미경이 그들을 가리키며 설명해주었다.
 “선생님과 함께 작업 중인 학생들은 대부분이 포트폴리오를 준비 중인 학생들이에요. 개인 작업을 하는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거나 개인 전시를 목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죠. 다들 재능들이 뛰어나서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아, 예.”
 ‘그런 것 치고는······. 꽤······?’
 미경의 말에는 적절히 호응해 주었지만, 살짝 그들의 그림을 훑어본 진호로써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선생님과 대화중이던 학생의 그림은 무언가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 같았는데, 인체 비율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도화지에 그림의 크기를 맞춘다‘라는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몇몇 부분들은 도화지 위에 그려지지 못하고 잘려나가 있었다.
 그나마 개인 전시를 목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의 그림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부족한 모습들이 많아 보였다.
 ‘그래, 학원이니까. 무언가 부족한 부분을 고치기 위해 찾아오는 거겠지.’
 진호 자신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부원장의 뒤를 쫓았는데, 진호의 귓가로 선생과 학생의 대화가 들렸다.
 “아, 선생님. 그러니까 이거 좀 대신 그려줘요. 자꾸 비율이 안 맞아서 팔이 밖으로 나온단 말이에요.”
 “에휴, 답답아. 자리 비켜봐. 연필도 이리 주고.”
 학생의 자리에 앉은 선생이 연필을 쥐고 그림에 전체적인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비뚤어졌던 자세부터 시작해서 비율에 맞지 않는 머리 크기, 손 등등을 지우고 새로 그리면서 학생이 그렸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그림이 도화지에 나타났다.
 그걸 선생의 뒤에 서서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학생이 웃었다.
 “히히, 선생님이 하시는 걸 보면 되게 쉽게 그리시는데 왜 내가 하면 항상 엉망이지?”
 “그러니까 연습해. 그럼 이제 천천히 채워나가 봐. 필요하면 이따가 부르고. 다음은, 임호철. 너 페인팅 얼마나 진행했어? 뭐야, 아까 내가 봐줬을 때랑 전혀 달라진 게 없잖아. 에휴, 너도 붓 내놔봐.”
 선생은 학생들의 작품을 봐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 그림을 그려주기까지 했다.
 진호가 그 모습을 잠시 넋을 놓고 보고 있자니 미경이 그를 깨웠다.
 “진호 씨?”
 “아, 예.”
 “제 앞에 있는 이 사무실로 들어가시면 돼요. 안에서 원장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말은 고맙다고 했지만 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른 진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진호가 미경이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뿔테 안경을 쓴 남성이 모니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에 앉아요.”
 “아, 네.”
 계속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어서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진호가 사무실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괜히 민망해진 진호가 남성이 알려준 자리에 앉아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렇게 대략 5분이 지나서야 원장이 마우스를 마지막으로 한 차례 딸깍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 새인가 사무용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미안해요. 이진호 씨라고 했죠? 맨해튼 아트 갤러리의 원장을 맡고 있는 정우진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최근 파슨스 대학과 연계되는 활동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좀 조율하느라 사무실에 들어온 진호 씨에게 신경을 제대로 못 썼네요.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아, 예.”
 “그래서, 흠. 포트폴리오 때문에 문의하셨군요?”
 우진이 모니터로 손을 뻗어서 진호와 우진, 둘이 같이 화면을 볼 수 있게 각도를 틀었다.
 모니터에는 진호가 2주 전에 보냈던 메일과 당시 첨부한 작품 3점이 들어있었다.
 진호가 우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20점 정도를 준비해야 하는데······.”
 “기간은 대략 2달 정도 밖에 남질 않았죠. 그리고······, 메일에는 완성한 작품이 총 3개라고 하셨고요.”
 진호의 말을 중간에 끊은 우진이 진호의 그림들을 마우스로 눌러서 확대했다.
 곧 모니터에 수정하기 전 진호의 작품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이야기를 좀 드리려고 했어요. 그 전에 제가 최근 수정을······.”
 “학원비는 2달에 8천 불 정도 되겠네요.”
 “예?”
 갑작스런 우진의 말에 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진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로 똑똑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2달 안에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는 데까지 8천불 정도 필요하실 거예요.”
 
 <『기적을 그려라!』 1-2권에 계속>

댓글(4)

까칠서생    
중간에 선삭한 거네요.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지고 작가님 무리수에 하차한 작품
2017.02.16 11:41
ri****    
주인공의 실력 상승과 발휘가 짜릿함을 주고 현재까진 답답하지 않고 재밌네요~
2019.03.12 21:40
다크라이    
흠. 15권까진 괜찮게봄. 마지막사건이 뭐랄까.. 너무 큰그림을 그리다보니 무리수가 되고, 이건 좀 억지다라는 생각이 들긴 했음. 억지로 마무리할 자극적인 사건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았을 듯. 그래도 미술이라는 소재로 재밌게봄
2019.08.15 17:01
Ginx    
큰사건만 잡고 60%정도는 쳐내야 읽을만 합니다. 옴니버스도 아닌데 생뚱맞게 사건들을 질질 끌고 가는 것은 아니라 봅니다. 주인공이 나댐->주변시기 및 대중들 불신->주인공 실력보임->대중 승복. 이런 사건이 도돌이표 처럼 계속 나와 지루함. 저런 사건이 3~4개만 되어도 인지도 쩔건데,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되는 와중에 인지도는 눈꼽만큼 오름.
2019.08.22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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