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나는 고아였다.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다.
지지리도 기구한 운명.
친인척 하나 없어 고아원을 나올 때까지 그 어떤 혈육도 만나지 못했다.
빌어먹을 세상! 기필코 성공하겠어!
부모 없어, 돈 없어, 백 없어.
뭐 하나 가진 것 없으니 이 악물고 세상과 부딪치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끼이이이익! 콰앙!
운명의 신은 기어코 또 악몽만 줬다. 세상이 아닌 트럭에 부딪치는 지랄 같은 결말을.
시발.
초록 불이었는데.
***
퓨전 판타지 소설을 보면 으레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하나 있다.
주인공이 트럭에 치여 난데없이 판타지 대륙으로 이동하는 그런 흔해 빠진 스토리.
볼 때마다 코웃음 쳤던 그 장면이 어이없게도 내 운명에 찾아왔다.
베일 대륙.
스물셋 외톨이였던 나는 그곳의 네크로맨서 유망주로 새롭게 태어났다.
아니, 차원이동했다.
***
대륙력 516년.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네크로맨서로 평가받던 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조그마한 마법진 하나에 올랐다.
“정말 가시렵니까?”
“어, 간다.”
“제국 황제께서 공작보다도 높은 작위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건, 이건 너무나 아까운 기회입니다.”
“여기서 빛 볼 건 이미 다 봤다. 공작이든 공공작이든 관심 없다.”
베일 대륙으로 온 지 15년.
그동안 많은 성장을 이뤘다. 스켈레톤부터 시작해 듀라한은 물론이요, 골렘까지 소환했다. 그 이상도 있지만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내 위상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단순히 마법사에 불과했던 호칭이 마제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로 바뀌었다.
돈, 명예, 권력.
모든 걸 얻게 되었을 때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가 ‘가여웠던 인생’을 뒤집어보자고.
휘하 마법사들을 전부 동원해 차원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최고위 마법이라 준비 기간만 3개월이 걸렸지만 괜찮았다. 갈 수만 있다면야 3년인들 문제인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말 가십니까?”
“간대도. 그동안 수고했다.”
고민 없이 마법진에 몸을 맡겼다. 믿음직한 놈에게 공석을 부탁해서인지 이쪽 세계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 귀환
[헌터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캐릭터 생성을 시작합니다······ 33%.]
귓전을 때리는 괴상한 음성에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운 밤하늘에 낡은 전봇대 하나만 있었다.
차원이동은 성공······했다는 마음을 가지기도 잠시, 종전의 음성이 다시금 이어졌다.
[캐릭터 생성 완료.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누가 귓속에 음성 구슬이라도 때려 박았나.
별 생각이 다 드는 가운데, 웬 반투명한 창 하나가 시야를 가렸다.
[이강수]
레벨 : 999
신장 : 187cm
체중 : 79kg
종족 : 인간
직업 : 네크로맨서
근력(3,750) 체력(3,574) 민첩(3,208)
마력(5,593) 영력(5,119) 정신(3,575)
매력(3,511) 통솔(3,984) 지휘(4,085)
투지(2,251) 용기(2,662) 지혜(2,533)
뭐야, 이건?
손으로 휘저어보지만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차원이동으로 인한 일시적인 환각?
그럴 일은 없었다. 비단 네크로맨서 안에서만이 아니라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정신력을 소유했으니까.
[튜토리얼을 진행하시겠습니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15년 전 이곳, 그러니까 현실에 있을 때 이따금 했었던 RPG게임과 똑같았다.
헌터니 상태창이니 튜토리얼이니 하는 대사들이 아주 낯설지 않은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니, 잠깐. 게임이랑 비슷하고 나발이고 간에 애당초 말이 안 되잖아?
미간을 찌푸리며 눈 마사지를 하는 그때, 갑자기 전봇대가 부러지며 웬 오우거 하나가 튀어나왔다.
시발, 뭐야 이거? 정말로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눈 비비며 다시 바라보지만 분명 오우거였다. 몸과 면상이 좀 더 크고 더럽게 생기긴 했어도 베일 대륙에서 줄곧 보던 바로 그놈이었다.
“우어어어어!”
들어보니 울음소리도 좀 더 컸다.
어불성설 같은 상황에 주위를 재차 확인했다. 차원이동을 하지 않았다면 오우거가 나타난 게 말이 되니까.
손 데면 흙 떨어질 듯한 허름한 주택들과 벽.
저쪽 구석에 쳐 박힌 녹슨 자전거 한 대.
아이들 뛰논 흔적 가득한 조그마한 놀이터.
거기다 부러진 전봇대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너무 현실 같아서 문제지 절대 베일 대륙은 아니었다.
······
그럼 대체 저 오우거는 뭐냐고.
어깨를 으쓱하며 손에 마력을 주입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일단은 저놈부터 처리해야 했다.
강단!
상황 파악보다 먼저 상황 처리에 초점을 맞추는 게 내 성격이었다.
“속박.”
기초 흑마법 하나로 놈을 묶으며 데스 에로우를 연달아 날렸다.
피이잉! 피이잉!
까만 마력이 잔뜩 주입된 그것은 놈의 몸에 박혀 알싸한 상처를 만들어냈다.
“우어어어어어!”
놈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트리플 헤드 오우거들에게도 통하는 공격을 맞았으니 잠시 후 알아서 쓰러지리라.
쿠웅.
예상대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머리를 땅에 떨어뜨렸다. 가슴팍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딱딱한 아스팔트 땅에 혈해를 만들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확인한 놈의 모습은 오우거가 아니었다.
***
세이크 길드의 부마스터 박민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C급 괴수 자이언트가 던전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는데, 웬걸.
자이언트는 어디가고 흥건한 핏자국만 있었다.
“좌표 다시 확인해봐. 여기 확실해?”
“맞아요. 여기예요.”
“탈출 시간은?”
“한참 됐어요. 나타나도 진즉 나타났을 겁니다.”
기가 막혔다.
위치 정확하고 던전에서 탈출한 시간도 진즉인데, 왜 자취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인가?
대답하던 대원인 서영일이 검지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냄새를 맡았다.
“형님. 이거 자이언트 핀데요?”
“뭔 개소리야?”
“제가 여러 번 맡아봐서 잘 알아요. 확실합니다.”
박민수는 버럭 화를 냈다.
“자이언트는 C급 괴수야, C급 괴수! 그런 놈을 어떻게 10분 만에 잡아!”
“그건 저도 잘 이해 안 되는데, 핏자국은 분명 자이언트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허튼 소리하지 말고, 죄다 흩어져! 아마 오류가 났을 거다! 자이언트는 이 주변에 있어!”
그렇게 5분.
근방을 모두 뒤졌지만 자이언트는커녕 F급 괴수 한 마리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
박민수는 서영일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저희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 자이언트를 잡았습니다. 사체도 같이 가져갔고요.”
“시발! 그 개 같은 소리를 믿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저도 말씀드리면서도 아이러니해요.”
박민수는 생각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지나친 헌터가 있었던가? 대형 길드라든가 유명 랭커라든가.’
전무.
아니, 애당초 말이 안 됐다. F급 던전조차 잘 없는 이 변두리 지역에 누가 굳이 발걸음 하겠는가.
자신들이야 알림을 받고 온 곳이고.
“돌아다니면서 흔적 발견 한 거 없어?”
“헌터들의 흔적이요?”
“그래. 이만 한 놈을 잡았는데 종적 하나 없이 사라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안 되는데, 없었습니다.”
“제기랄!”
박민수는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의문투성이인 본 상황에 분노가 치솟았다.
‘간만에 배 좀 불리나 싶었더만!’
자이언트의 사체는 헌터 장비를 만드는 귀중한 재료로 쓰인다. 부르는 게 값이요, 너도나도 가져가려고 한다.
경험치도 짭짤하다. 웬만큼 딜만 넣어주면 스탯이 쭉쭉 오른다. 그 복을 눈앞에서 놓쳤으니 분통터질 수밖에.
“다들 다시 흩어져! 이번엔 자이언트가 아니라 그놈 잡은 헌터들을 찾는다!”
“없다니까요, 형님?”
“입 닥쳐! 어서 어서 움직여!”
하나둘 동서남북으로 나눠 흩어지는 가운데, 박민수도 쌍심지를 켜고 자리를 떴다. 부하들에게만 맡기기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달랠 도리가 없었다.
모두가 떠난 자리.
웬 남자가 인근 주택의 옥상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등 뒤에 멘 커다란 도끼가 달빛에 번쩍 빛났다.
‘히야. 자이언트를 단신으로 잡아? 대체 뭐하는 놈이야? 박민수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바로 쫓아가는 거였는데.’
남자는 최상위급 헌터로 짐작되는 ‘의문의 사내’를 쫓아 서둘러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
혹시나 해서 말해본 ‘인벤토리’란 단어에 정말로 가상공간에 생성되었다.
근력 수치에 따라 흰 수염고래도 집어넣을 수 있는 곳.
오우거 비스무리한 놈의 사체를 일단 거기에 담았다.
그리고 ‘내 방’으로 왔다.
15년이나 지났지만 문제없이 찾았다. 몇 년을 뼈 묻고 지낸 곳이라 잊으려야 있을 수 없었고, 차원이동 자체가 좀 가깝게 됐다.
쓰러질 듯한 건물 아래 반지하 단칸방.
쾌쾌한 냄새와 거미줄, 곰팡이로 얼룩진 그곳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살았을까.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 쏠리는데.
베일 대륙에서 호화스런 생활을 해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거기선 귀족보다 더한 대접을 받았으니까.
지이이이잉.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도, 고향에 대한 추억 더듬기도, 내 몸 상태 점검도 아니었다.
구식 컴퓨터 부팅.
종전의 일로 인한 의문부터 정리해야 뭘 하든 시원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지이이이잉.
동사무소에서 최신형 컴퓨터라며 보급준 것인데, 그러기는 개뿔, 느려 터졌다. 굼벵이 구르는 게 더 빠르리라.
[성수동 괴물]
유명 포털 사이트에 다섯 글자를 입력했다.
인터넷이나 키보드에 대한 어색함은 없었다. 그랬다면 컴퓨터 부팅부터 낯설었겠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떠오르는 수많은 블로그와 질문, 그리고 사이트.
웬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1. 2000년 1월 1일 지구는 대격변을 맞이함.
2. 세계 곳곳에 ‘던전’이 생기며 몬스터, ‘괴수’가 나타남.
3. 던전은 동굴, 숲, 늪지, 산, 자갈밭, 바다, 지하철, 건물 등등의 다양한 필드가 있음.
4. 던전엔 유효기간이 있는데, 끝나면 자동으로 폭발하고 안에 있던 괴수가 탈출함.
5. 괴수의 종류는 인간형, 악마형, 동물형, 곤충형, 식물형 등등으로 매우 다양한데, 하나 같이 기괴한 생김새와 크기, 힘을 가지고 있음.
6. 괴수에겐 ‘실드’가 있어 현대 무기가 통하지 않음.
7. 던전 괴수야 괜찮았지만 탈출 괴수를 막지 못해 지구가 멸망할 위기까지 처함.
8. 2000년 6월 1일. 대격변 반년 만에 ‘헌터’란 존재가 나타남.
9. 헌터는 RPG게임처럼 레벨링 시스템을 이용해 괴수의 실드를 부술 수 있으며 직접 타격도 가능함.
10. 누구나 헌터가 될 순 없음. 만 18세가 되는 순간, 임의적으로 각성함(단, 대격변 시기에 이미 18세 이상이었던 사람은 그 즉시 각성함).
11. 괴수를 죽이면 마석과 사체가 나옴. 전자는 막대한 양의 천연자원, 후자는 헌터들의 장비나 약제, 가죽 등의 재료로 쓰이기 때문에 엄청난 이득 창출이 가능함.
12. 유일무이 괴수와 맞서는 존재인 헌터는 돈, 명예, 권력을 쥐며 단숨에 사회 상위계층으로 떠오름.
13. 바야흐로 대 헌터시대 개막.
블로거가 새 천 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지구의 변화를 짤막하게 써 놨다.
글 아래 협회, 스탯, 스킬, 레이드, 길드 등등의 사이사이 개념도 있었는데, 일단은 읽지 않았다.
공상가도 아니고 대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적어 놓는단 말인가?
베일 대륙에서라면 모를까 지구에선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었다.
엿 먹어라 외치며 다시 포털 사이트를 뒤지는데, 비슷한 글이 다른 블로그에도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무려 다섯 곳.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미지란에 들어갔다. 두어 차례 페이지를 넘기자 아까 잡았던 오우거 닮은 놈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가슴 속에 상태창이라 외쳐 보았다.
[이강수]
레벨 : 999
신장 : 187cm
체중 : 79kg
종족 : 인간
직업 : 네크로맨서
근력(3,750) 체력(3,574) 민첩(3,208)
마력(5,593) 영력(5,119) 정신(3,575)
매력(3,511) 통솔(3,984) 지휘(4,085)
투지(2,251) 용기(2,662) 지혜(2,533)
눈이 잘못 됐을 리는 만무하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분명 상태창이었다.
RPG게임 속의 캐릭터들이 으레 가진다는 그 시스템.
블로거를 욕할 게 아니라 진즉 믿지 못한 내 자신을 한탄해야 할 것 같았다.
내친김에 스킬창도 열어보았는데, 역시나 네크로맨서와 관련된 것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내 상태창과 하나하나 비교했다.
999레벨.
그리고 적게는 2천대에서 많게는 5천 중반대까지 아우르는 스탯.
따라올 자가 없었다. 랭커라 불리는 유명 헌터들과 놓고 봐도 내가 월등히 앞섰다.
이제 막 헌터가 됐는데?
헌터는 지금 시작했지만 네크로맨서 직업은 15년 전부터 가졌다.
그 몸 그대로 왔으니 당연히 힘이 남아 있을 테고 그게 고스란히 헌터 육성에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문득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40대를 바라보던 얼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스물셋 차원이동할 때의 젊음이 있었다.
과거로의 회귀?
그제야 모니터 우측하단의 오늘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2016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죽음이란 뭣 같은 선물을 받았던 날.
기가 막혔다. 난데없이 괴수가 나타나질 않나, 헌터라는 레벨링 시스템이 있질 않나, 과거로 돌아오질 않나.
하하하.
한참을 웃었다. 미친놈처럼 방 안에서 홀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어이를 상실해서?
그럴 리가. 좋아서 그렇다. 너무나 기뻐서 그 마음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
38살 이강수로 인생을 뒤집어보는 것보다야 23살 이강수로 그러는 게 훨씬 낫다.
지난날의 설움과 고통.
처한 상황 그대로가 재현된다면 더욱 제대로 갚고 메울 수 있을 것 아닌가.
휘이잉.
장롱을 뒤져 대충 외투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한 겨울이지만 추위가 두렵지 않았다.
베일 대륙에서 질리도록 기른 체력.
이 까짓 칼바람 따위야 맨 몸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E급 던전, 코볼트의 숲. 폭발까지 268일 남았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블로그를 뒤지며 봤던 집 근처 뒷산의 E급 던전에 도착, 손을 갖다 대자 뜬 알림말이었다.
밝혀진 최고 등급의 괴수가 A급이니 굉장히 약한 편.
아까 잡은 자이언트가 C급이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속박은커녕 멀리서 데스 에로우만 쏴도 3분 안에 잡을 수 있는 놈이었다.
어, 입장한다.
가슴속에 나직이 외치며 던전 안에 들어갔다.
코볼트.
땅딸보 난쟁이에 족제비 머리를 하고 있는 E급 괴수다.
베일 대륙에서도 숱하게 마주쳤던 놈이라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과장 보태 100마리가 나타난다 한들 가볍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오우거 100마리가 드래곤 한 마리와 맞서는 격이니까.
필드는 흔히 볼 수 있는 숲속이었다. 우거진 나무와 푸르른 창공이 주변을 꽉 채우고 있었다.
지저귀는 산새의 울음소리를 감상하며 걸어가길 약 10분.
저만치 앞에서 끽끽대는 코볼트 소리가 들려왔다. 대략 10마리쯤 될까.
헌터들이 적게는 예닐곱에서 많게는 서른 명 정도까지 파티꾸리는 걸 감안하면 사실 당혹스런 일이었다. 그 정도 인원이 잡아야 할 놈들을 단신으로 상대해야 하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 100마리도 두렵지 않은데 10마리가 무슨 대수인가.
귀 후비며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예상대로 10마리의 코볼트가 튀어나왔다.
조잡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꼴이 이상하리만치 반가웠다. 베일 대륙에서도 자주 가지고 놀았었는데.
“끼이이이익! 끽끽!”
“끼이익! 끼이이이익!”
“끽끽끽!”
통일해서 짖으면 그나마 듣기 편할 텐데, 대관절 어느 놈은 이렇고 어느 놈은 저렇고 어느 놈은 그렇고.
귓전이 따가웠다. 얼른 도륙내서 아가리를 봉인시키던가 해야지 원.
손을 펼쳐 마력을 주입한 후 속박을 시전했다. 수십, 수백 개로 나뉘는 흑마법이지만 요런 놈들 상대하는데 굳이 고위 마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끼이이익!”
몸이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정확히는 정지되자 놈들이 크게 당황했다.
서로 제 얼굴을 쳐다보며 짖어대더니 급기야 애원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종전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있었으면서 참으로 가관이었다.
“압축.”
데스 에로우를 쏴도 좋지만 열 마리에게 일일이 그러는 것보다야 마력으로 터뜨리는 게 장땡이었다.
푸슈슈슛!
손을 움켜쥐자 족제비 머리 10개가 동시에 터져나갔다.
분수처럼 폭발하는 피의 향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점들이 갈라졌다.
다시 손을 폈을 때 살아있는 놈은 전무했다. 저마다 머리를 잃은 채 저승으로 떠났다.
[낮은 등급의 괴수를 잡아 스탯 상승이 미미합니다.]
막 도착한 직후였다면 알림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을 테지만, 지금은 바로 이해가 됐다.
고레벨 유저가 저레벨 몹을 잡은 탓에 스탯 반등이 적은 것이다.
RPG게임에 빗댄 것이긴 한데 맥락은 같다. 999레벨이 코볼트 잡았다고 얼마나 상승이 이뤄지겠는가.
‘이게 마석이라는 거군.’
몇몇 놈들의 사체 위로 떠오른 둥그런 돌멩이 하나.
블로그에 의하면 이게 헌터들을 돈방석에 앉혀줬다는 바로 그 물건이다.
지금 이 E급 마석의 경우, 약 2천만 원.
죽자고 일하고 일해서 10만 원을 벌었었는데, 그 200배를 단 15초 만에 벌어들였다.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한편, 기쁨이 차올랐다. 이거만 반복하면 압구정 빌딩도 현금 박치기로 살 수 있으리라.
마석 3개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숲속을 돌아다녔다. 코볼트가 더 남았을 지도 몰랐다.
“끽끽끽!”
세 마리를 추가로 잡았을 때, 문득 생각했다.
구태여 E급 던전에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 레벨이라면 가장 최악이라 불리는 A급 던전도 가능할 터였다.
그에 앞서 한 가지 실험을 해봤다.
“죽은 자의 영혼에게 말하노니 이제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어 더욱 강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코볼트 사체를 앞에 두고 주문어를 외웠다. 스켈레톤이나 듀라한을 만들 때처럼 이쪽 괴수들도 써 먹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몇 초간 주문어를 더 읊고 마력을 주입하자 한 놈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대가리가 터져 생명줄은 단 하나도 없었을 텐데, 아침 기지개 펴듯 사뿐하기만 했다.
“부르셨습니까, 위대한 존재시여.”
“어, 반갑다. 힘은 좀 나냐?”
“예.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럴 건 없고. 저기 조용히 앉아 있어.”
데스 코볼트 1호를 기점으로 다른 코볼트들도 하나둘 마력의 힘을 받았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보잘 것 없는 소생을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스켈레톤이나 좀비도 아니고 일반 몬스터를 되살리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시전자의 마력이 매우 거대하고 차분해야지만 놈들의 재생력이 빛을 발하니까.
내친김에 고이 넣어두었던 자이언트 사체도 꺼냈다.
C급에 속하는 놈이니 성공만 한다면 코볼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놈이 나오리라.
“팔이 좀 더 벌어지게. 다리는 오므리고.”
“알겠습니다.”
데스 코볼트 세 마리가 지시에 따라 자이언트 사체를 이리저리 조정했다.
몸길이 5m에 체격이 엄청나다보니 낑낑대기 일쑤였지만 군소리 없이 명령에 따랐다.
“오케이, 됐어. 그만둬.”
“더 시킬 일은 없으십니까?”
“옆에 빠져서 기도나 해. 마력이 잘 먹혀들라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분고분한 데스 코볼트들을 뒤로 하고 다시금 주문어를 외웠다.
질리도록 읊은 것이었기에 한 자의 오차도 없이 뱉어냈다.
그렇게 몇 분.
가슴팍이 죄다 찢어져 진즉에 생명을 잃었던 놈이 뻐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거대한 산 같은 그것은 약 3분이 지나서야 두 다리의 지탱능력을 찾았다.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집채만 한 놈이 꾸벅 머리 숙인다. 베일 대륙에서도 보지 못한 진풍경이었다.
그쪽에선 드래곤이나 트리플 헤드 오우거 등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큰 놈이 없었으니까.
“15초 준다. 저기 저 나무 찍고 와.”
“예!”
대답하기 무섭게 몸 돌려 다리 굴리는 데스 자이언트.
쿠웅. 쿠웅.
지진이라도 난 듯 지면이 크게 울렸다. 치타의 속도를 가진 코끼리 같았다.
“시간 안에 들어왔습니까?”
놈은 예상보다 더 빨리 돌아왔다. 숨이 고르고 동작에 흐트러짐도 없어서 앞으로도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잘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군주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명령에 복종하는 재생체들.
괴수란 괴수를 다 이런 식으로 재탄생시킨다면 핵폭탄보다 강력한 무적 군단도 가능하리라.
***
서울 강남구 메리아 길드 본사.
배부르게 저녁 먹고 휴식을 취하던 마스터 이만덕은 휘하 부하로부터 황당한 이야길 들었다.
성수동 근처의 한 변두리에 탈출 자이언트가 나타나 급히 숨었는데, 웬걸. 정체물명의 헌터 하나가 ‘홀로’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놈을 잡았단다.
그야말로 개소리.
세상에 그 누가 자이언트를 단신으로 잡는단 말인가?
고수라면야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지만, 그 정도의 헌터가 풋내나는 변두리에 있을 리 만무했다.
탈출 괴수는 사체를 남기니까 그걸 가져가기 위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 ‘실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이언트를 혼자 잡을 정도면 말했듯 상당한 실력자인데, 차라리 그 시간에 더 윗급 괴수를 잡는 게 나으니까.
자이언트의 사체가 아무리 비싸봤자 B급 괴수의 마석보다 값어치가 떨어지는 이유에서다.
“이놈이 정신줄이 나갔나?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정말입니다, 마스터!”
“당황해서 헛것을 본 것이겠지. 아니면 네놈이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그 사이 길드 하나가 왔다갔거나.”
“아닙니다! 제 아랫도리를 걸고라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남자로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아랫도리.
그런 것을 걸 정도라면 적어도 허언이나 과장된 말은 아닐 터였다.
“그럼 랭커라도 왔다 이거야?”
“약간 거리가 있어서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유명랭커는 아니었습니다.”
“무협지의 은둔고수도 아니고 대체 뭐야?”
“어쩌면 그렇다고도 볼 수 있는데 대단한 실력자임은 분명합니다. 자이언트를 주문 몇 번으로 속박 후 화살로 요리했으니까요.”
이만덕이 흥미로운 눈빛을 띠며 물었다.
“궁수계열인가?”
“그렇긴 한데 마법을 쓰는 걸로 봐선······ 워낙 짧게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변상호의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사실에 의거한다면 이건 기회였다. 실력자가 길드에 소속되어 있으면 큰 도움이 되니까.
요즘 가뜩이나 여타 길드들에 빌려 폼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터, 그런 존재가 왼팔이나 오른팔이 된다면······.
물론 의문이 들겠지. 실력자가 순순히 밑으로 들어오겠냐면서.
이만덕은 나름 계획을 세웠다.
달콤한 말로 유혹하며 계약서를 작성, 시원하게 갑질하면 오케이였다.
“강가에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예?”
“낚시꾼이 몰려드는 법이다.”
이만덕이 외투를 걸쳐 입으며 말했다.
“선수 빼앗기기 전에 잡으러가자. 지금 어디에 있댔지?”
“아아, 예! 그 부근 뒷산으로 가는 걸 확인했었습니다!”
“좋아. 각 부마스터 포함, 전 대원 그쪽으로 집합시켜.”
“전부요?”
“허접한 낚시대로는 물고기의 눈길을 끌 수 없다.”
혓바닥으로 날름 입술을 핥으며 김칫국 열 사발을 들이키는 이만덕이었다.
***
코볼트 던전에서 내가 얻은 수확은 크게 2가지.
하나는 족히 1억은 받을 수 있는 마석 다섯 개, 다른 하나는 괴수 재생체들이다.
당장은 전자 쪽에 관심이 가지만, 후자 쪽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쌓이고 쌓이면 큰 힘이 될 테니까.
휘적휘적 뒷산을 내려오는데 사사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범인이라면 바람으로 알겠지만 귀 밝은 내겐 확연한 인기척으로 느껴졌다.
대략 서너 명.
수풀 어딘가에 숨어 날 지켜보고 있었다. 후미에도 동료가 있다는 가정 하, 최대 서른 남짓 정도 될 것 같았다.
‘데스 실드.’
전신을 감싸는 보호막을 시전하며 다시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데, 숨어있던 놈들이 알아서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헌터님.”
인상적인 들창코를 가진 창 든 삼십 대 남자였다.
뒤로 수십의 사람들도 같이 나타났는데, 하나 같이 그처럼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헌터.
야밤에, 그것도 이런 산기슭에서 코스프레를 할 사람들은 없을 테니 필히 헌터임이 분명했다.
무슨 연유로 날 찾아왔을까. 아니, 그 전에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을까.
“불쑥 나타나 일단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사죄를 구하는 건 좋으나 그럴 거였으면 숨어서 지켜보지 말았어야 하리라.
정확히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터, 일단은 할 말 하도록 놔둬봤다.
“메리아 길드의 마스터 이만덕이라고 합니다.”
“메리아 길드?”
“나름 중형 길드인데, 못 들어보셨습니까?”
“잔챙이들한텐 관심이 없어서.”
아까 블로그를 볼 때도 대형 길드나 몇 개 훑어봤지 그 이하는 클릭조차 안 했다. 내 레벨 대비 그나마 급수가 맞는 곳은 그쪽뿐이었으니까.
거기에 소속되겠다 소속되지 않겠다의 문제는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찾아봤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 거의 다 베일 대륙이나 네크로맨서 관련이라 배움의 자세가 필요했다.
“하하하! 유쾌하시군요. 그런 농담도 하시고. 일단 성함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전에 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아아, 아까 저 밑 주택가에서 탈출 자이언트를 잡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제 부하가 봐서······”
“미행했다 이겁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만덕이 아닌 해당 부하가 직접 나와 설명했다.
“모시고 싶은 마음에 부득이하게 그런 수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좋아, 그렇다 치고 용건이 뭡니까?”
다시 이만덕이 끼어들었다.
“성함은······?”
잘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굳이 날 드러낼 필요는 없다.
상대가 먼저 제 소개를 했더라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한 거지 내가 권유한 게 아니니까. 애당초 이만덕이란 이놈을 소개받을 마음이 없기도 했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자 이만덕이 크흠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탈출 자이언트를 길드나 파티 없이 단신으로 잡으셨음에 감복해서입니다.”
“감복?”
“헌터님 같은 실력자를 그냥 보내면 마스터인 제 입장에서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이제야 이만덕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강한 헌터가 많을수록 길드는 세력이 커지는 법. 나를 그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것이리라.
“그래서 포섭하겠다 이겁니까?”
“하하, 틀리진 않으나 너무 앞서 가는 말씀이십니다. 일단 차차 얘기부터 나누시지요.”
이건 뭐 말만 공손하지 날강도나 다름없었다.
앞서 가지 않겠다는 놈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다? 부하들까지 죄다 끌고?
베일 대륙에서 숱한 위기와 역경을 넘었던 나다. 이만덕의 수가 뻔히 보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데리고 가겠단 뜻. 부하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다.
“거절한다면?”
“그러시면 좀 곤란합니다. 이만큼의 인원이 죄다 시간 빼서 왔는데 얘기도 나누시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얼씨구. 지랄하고 앉았네.
이만덕이 조소까지 머금으며 되도 않는 논리를 펼쳤다. 등에 업은 인원이 있어서 홀로 자이언트를 처리한 헌터라 한들 두려울 거 없단 태도였다.
고민 없이 속박 마법을 걸었다.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30명이나 되는 인원을?
드래곤 던전을 털 때 500마리의 가디언들도 멈춰 세웠었다. 이까짓 인간들 쯤이야 눈 감고도 가능하다.
“뭐, 뭐야?”
“모, 몸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누군가가 입을 연다. 날 봤다던 그 부하였다.
“마, 말씀드렸던 그 정지 마법입니다!”
“시, 시발! 어떻게 좀 해봐!”
당혹스러움에 육두문자를 쏟아내던 이만덕이 식은 땀 흘리며 날 쳐다봤다.
“허, 헌터님! 제,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뭐라 지껄이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데스 홀’에 넣어두었던 데스 코볼트 세 마리와 데스 자이언트 한 마리를 꺼냈다.
쿠웅.
이만덕을 포함한 모든 이의 눈알이 금붕어처럼 튀어나왔다.
# 대형 신인
ㅡ 뉴스 속보입니다. 어젯밤 성수동 근처의 한 야산에서 메리아 길드가 전원 사망했습니다. 탈출 자이언트를 쫓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
본분 때문에 차분한 어투를 유지하는 앵커였지만, 알게 모르게 급박한 기색이 역력히 섞여 있었다.
사람 한 명 죽어도 화제가 되는 판국에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이 죄다 그래버렸으니까.
어젯밤.
메리아 길드는 데스 자이언트와 데스 코볼트에 의해 이승에서 하직했다.
나름 밸런스를 맞춰주려고 중간에 속박 마법도 풀어주었는데 찍소리도 못 내고 사라졌다.
일반 자이언트였다면 수적 우세를 발판으로 위기에서 벗어났겠으나 ‘데스’ 타이틀이 붙은 게 문제였다.
네크로맨서 시전자의 마력에 따라 힘이 더 강해지기 터라 이미 몇 대씩 맞은 헌터들이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ㅡ 한 가지 의문점은 협회 헌터들이 즉각 추적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탈출 자이언트의 종적을 전혀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못 찾지. 내 마력에 의해 나왔다 사라지는 데스 홀에 들어가 있는데.
흰 밥에 스팸으로 배도 채웠겠다, TV를 끄고 외투를 챙겨 입었다.
거미줄 뚝뚝 떨어지는 반지하 단칸방.
곰팡이 냄새 풀풀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협회에 들릴 참이었다.
거기서 뭘?
코볼트 잡아 얻은 마석 5개를 팔아 해치워야지. 그 돈으로 집을 구하는 것이고.
강남역 부근에 위치한 협회.
굳이 지도를 찾을 것도 없이 표지판 몇 개 따라가니 금세 모습이 드러났다.
족히 50층은 넘을 듯한 엄청난 높이의 빌딩 하나가 위엄 있게 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마석 팔러 왔습니다.”
들어가서 번호표를 뽑자마자 내 순서가 호명됐다. 바쁜 헌터들의 편의를 위해 카운터를 많이 둔 까닭이었다.
마석을 올려놓자 여직원이 호호 웃으며 잠시 기다려주길 부탁했다.
“감정가 9,582만 원 나왔습니다. 계좌로 넣어드립니까? 혹시 없으시다면 이쪽 전용으로 하나 만드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다양한 혜택이 있지요.”
고아원을 나와 일용직을 하면서 만들어둔 계좌가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혜택을 준다는데 구태여 그걸 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장롱 계좌기도 하고.
“어떤 혜택이 있죠?”
“예치만 하셔도 연 이자 5퍼센트에 던전이나 괴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즉각즉각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장점이 거의 열댓 가지가 넘었다. 단점도 있긴 했으나 딱히 두드러지게 느껴지진 않았다.
“예, 전액 예치하고 전용 체크카드도 하나 만들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체크카드를 받아 협회를 나왔을 땐 오전 10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곧 점심이라 뭘 하기엔 좀 애매한 시간. 하지만 고민 없이 계획을 짰다.
사냥.
C급 괴수를 잡는데도 1분이 채 안 걸리는데, 그깟 몇 시간에 애매모호함을 느낄 이유가 무엇인가.
어젯밤 헌터 사이트에서 찾은 정보가 있었기에 바로 자리를 옮겼다.
협회 근처의 대형 Z할인마트!
3개월 전, 그쪽 건물 옥상에 생긴 B급 던전 하나. 마석 값만 무려 15억을 호가하기에 쨍하고 해 뜰 날을 기대할 수 있었다.
택시 타고 도착한 할인마트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른 시간대임을 감안해도 언뜻 이해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불안감.
폭발까지 아직 많은 시일이 남았지만, 범인의 입장에선 은근히 꺼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폭발과 무관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괴수들. 만일의 가능성을 염두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옥상의 B급 던전을 처리하려 왔습니다.”
“예?”
소비자 센터를 찾아가 용무를 말하자 관리자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당장 올라가도 됩니까?”
***
Z할인마트 강남지점장 송태섭.
파리만 날리는 건물을 보며 가슴앓이 하던 그는 아래 직원으로부터 귀 트이는 소식을 들었다.
웬 헌터가 B급 던전을 제거해주겠다고 찾아왔단다.
“자세히 말해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뉴스나 협회 쪽으로부터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C급 이상부터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직접 관리한다.
최대한 그게 걸맞은 헌터를 뽑아 던전을 완전히 괴멸시킬 체계적인 계획을 세운다.
요컨대 대형 길드를 직접 초청, 포지션부터 장비까지 싹 다 재편성하는 식이다.
그만큼 C급 이상의 괴수가 강하단 뜻이요, 그래서 송태섭이 이토록 놀라는 것이다. 별 다른 계획을 듣지 못했는데 누군가 찾아왔다니까.
“불쑥 찾아와 B급 던전의 존재를 확인하더니 당장 처리할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 이상은 아무 말 없었고요.”
“어디 소속이라던가?”
“협회나 길드 소속은 아닙니다.”
송태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임시적으로 파티를 꾸렸다는 건가? 그런 식의 방법은 B급 던전에서 먹힐 턱이 없는데?”
“그것이······”
아래 직원이 약간 뜸 들이다 답했다.
“파티도 없습니다. 단신입니다.”
“뭣이?”
“그쪽 관리자도 처음엔 장난인 줄 알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손등에 헌터 표식이 있었답니다.”
송태섭은 황당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보단 맑은 정신이지 않을까.
“직접 가보겠네. 아직 소비자센터에 있지?”
***
가서 말만 하면 들여보내주는 줄 알았건만 상부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하단다.
범법자도 아니고 무작정 들이댈 순 없으니 잠자코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뭐, 거절하진 않겠지. 선뜻 손 내밀어준다는데 그 누가 고개를 저을까.
“안녕하십니까, 헌터님. 지점장 송태섭이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초로에 접어든 남자 한 명이 휘하 직원들을 대동해 이곳까지 내려왔다.
사안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지점장쯤 되는 사람이 직접 거동할 정도면 말이다.
“이곳의 B급 던전을 제거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짤막하게 뜻만 밝히자 송태섭 지점장이 괜히 크흠 하며 헛기침했다.
대충 심정 파악이 됐다. D급 이하 던전도 아니고 B급이나 되는 던전을 홀로 부수겠다고 하니 이해 불가능한 거겠지.
“던전에 대해선 저희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으니 일단은 알겠습니다. 단, 각서 하나는 써주십시오.”
“각서요?”
“예. 김 비서. 가져온 거 내드려.”
던전 하나 들어가겠다는데 뭔 놈의 각서까지? 의문이 드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블로그 글이 있었다.
지금처럼 건물이나 공공시설에 붙어있는 던전에서 헌터들이 레이드에 실패할 경우, 종종 돈을 요구한단다.
몸소 나서줬으니 그 정도 돈은 줘야지? 라면서.
의원직보다 높은 사회적 위치를 이용, 범인들의 주머니를 뜯는 것이다.
아마 송태섭 지점장은 그런 일을 사전에 미리 차단해 제 주머니를 지킬 뜻이리라.
‘레이드에 실패하더라도 어떠한 금전적인 보상이나 물리적 횡포를 부리지 않겠다······. 래, 좋다. 해보자.’
시원하게 사인을 갈기고 종이 한 장을 더 요구했다.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만?”
“저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공했을 시의 보상에 대해.”
흐뭇하게 웃어보이자 송태섭 지점장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내가 실패하리라 보는 것이다.
각서에 5억을 적었다. 마석의 3할 정도 되는 금액이니 보상으로 적절했다.
“그럼 올라가보겠습니다.”
“정말 저희는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알겠다고 하면서 옥상에 올라왔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서울 전경이 시야에 잡혔다.
가슴 탁 트이는 느낌을 만끽하며 오른쪽 모서리에 있는 허연빛을 보았다.
던전.
저기에 손만 얹으면 그 즉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범인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헌터 표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B급 던전, 트리플 헤드 오우거의 늪. 폭발까지 255일 남았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트리플 헤드 오우거.
베일 대륙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정수리에 뿔이 난 도깨비 얼굴 괴수로 배불뚝이 자이언트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보통 놈과 다르게 머리가 세 개인데, 그 영향 때문에 체격이 훨씬 더 크다.
‘오케이. 들어간다.’
나직이 외치자 삽시간에 주위 환경이 변했다. 바람 불던 옥상이 사라지며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황무지가 나타났다.
늪이라 뭔가 끈적끈적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마 트리플 헤드 오우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거란 의미에서 붙인 타이틀인 듯싶었다.
“각자 네 방향으로 흩어져 트리플 헤드 오우거를 찾는다. 니들이 이길 수 없는 상대니 발견 즉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도록.”
“예!”
데스 코볼트와 데스 자이언트를 소환해 내린 명령이었다. 이 넓은 황무지를 나 혼자 파악할 수는 없으니까.
뒷짐 지고 필드를 구경하길 5분 여.
데스 코볼트 한 마리가 뭐 빠져라 달려와 헉헉 거친 숨소리와 함께 말했다.
“군주님. 저쪽 언덕 뒤에서 동물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그래?”
나머지 데스 코볼트와 데스 자이언트를 호출, 그쪽 근처로 넘어갔다.
“크르르르르.”
트리플 헤드 오우거가 과연 들소 한 마리를 통째로 우걱우걱 씹어 먹고 있었다. 살점 하나 없이 뼈만 남기는 참으로 대단한 식성이었다.
“자이언트.”
“예, 군주님.”
“네가 저놈과 붙어라. 공격할 생각 말고 무조건 방어에만 전념해라.”
“알겠습니다.”
든든한 데스 자이언트의 답을 확인하며 7서클 소환체인 헬 하운드를 불러들였다.
말 그대로 지옥 개.
일반적인 하운드의 5배 정도 되는 크기에 전신이 불로 이뤄져있는데, 철근도 씹어 먹는 이빨이 주특기다.
“오랜만이다, 멍멍아.”
“크르릉! 크르릉!”
언어 능력이 없어서 짖는 걸로 대신하지만, 충성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기가 죽는 한이 있어도 군주를 먼저 지킨다는 신념!
7서클이라 마력 소모가 크지만 그 메리트 때문에 저버리려야 저버릴 수가 없다.
“이 자이언트가 저놈을 붙잡아 놓고 있을 거다. 그동안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라.”
“크르릉!”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헬 하운드가 허벅지에 몸을 비벼댔다. 하마만 한 놈의 애교도 나름 귀여웠다.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다리 하나만 아작내라. 다른 쪽은 엄두도 내지 말고.”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코볼트는 트리플 헤드 오우거와 비교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수준이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가벼운 손짓에도 날아갈 정도.
재생체라 죽어도 상관없긴 하나 구태여 허망하게 보낼 필요는 없겠지.
“자, 시작하자.”
헬 하운드의 등에 올라타 지시를 내리자 재생체들이 굳건한 얼굴로 트리플 헤드 오우거에게 돌진했다.
베일 대륙에서 운용했던 군단을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하지만, 그 의지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았다.
‘본 애로우.’
놈의 지척에서 헬 하운드를 보낸 후, 4서클 흑마법인 본 애로우를 시전했다.
속박 걸고 가둬 패면 그만큼 쉬운 일도 없지만, 놈에겐 그 방법이 안 통한다.
힘이 워낙 강력해 마력을 역으로 튕겨내기 때문이다. 이걸 감안하면 B급과 C급 사이의 갭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피이잉! 피이잉! 피이잉!
연달아 날아가는 본 애로우 앞에서 데스 자이언트가 전력을 다해 트리플 헤드 오우거를 막았다.
“크르르르르르!”
무서운 울음소리에도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오롯이 내 지시에 충실했다.
흐뭇한 미소로 본 애로우를 이어가는데, 헬 하운드도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용맹함이 물씬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이빨. 한껏 벌리며 놈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헬 하운드가 움직이면서 사냥은 더욱 원활한 흐름을 탔다.
트리플 헤드 오우거도 수컷은 수컷인지라 거시기를 물리니 전혀 힘을 못 썼다.
“크르르릉!”
비단 거시기뿐 아니라 허벅다리부터 종아리까지 이어졌고 나중엔 그 위까지 올라갔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민첩함.
이래서 헬 하운드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앞선에서 말했듯 주인을 공경하는 것도 그렇고.
쿠웅. 쿠웅.
놈이 발악하며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런 빈약한 수쯤이야 데스 자이언트에게 막혔다.
“나이스! 좋아!”
한 단계 등급이 더 낮을지언정 투지만큼은 놈보다 한 수 위에 있다. 물러서지 않는 배짱으로 절대 밀리지 않는 데스 자이언트였다.
“갉아주겠다!”
“딛지 못하도록 해주지!”
데스 코볼트들까지 이 악물며 덤벼드니 놈은 결국 얼마 못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르르르르!”
“크르릉!”
자신과 비슷한 울음소리에 진짜 오리지널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헬 하운드.
‘본 스피어.’
마무리를 위해 본 애로우를 해제하고 본 스피어를 올렸다. 마나 소모가 제법 되지만 이것만큼 날카로운 공격도 없다.
머리 위로 소환되는 큼지막한 창 한 자루.
뼈의 모양을 띄고 있는 그것은 마력의 힘을 받아 무서운 속도로 놈에게 쇄도했다.
스그극!
창공을 울리는 따가운 소리와 함께 놈이 남은 한쪽 무릎마저 떨어뜨렸다. 목숨은 붙어 있으나 유지하기 위한 여력은 더 이상 남지 않은 듯했다.
“정리하도록.”
“예!”
“크르르릉!”
말 끝나기 무섭게 각종 공격을 난무하며 놈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개체들이었다.
[모든 스탯이 15 상승합니다.]
B급 괴수라 코볼트와 다르게 스탯 반등이 확연했다. 가진 스탯이 12개니 총 180이 오른 셈이었다.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헌터 시스템은 게임과 흡사하지만 스탯면에선 약간 차이가 있다.
레벨 업보다는 스탭 업 개념!
괴수를 잡을 때마다 일정량의 스탯이 적게는 소수점, 많게는 십의 자리까지 오르는 식이다.
[이강수]
레벨 : 999
신장 : 187cm
체중 : 79kg
종족 : 인간
직업 : 네크로맨서
근력(3,765) 체력(3,589) 민첩(3,223)
마력(5,612) 영력(5,134) 정신(3,590)
매력(3,526) 통솔(3,984) 지휘(4,100)
투지(2,266) 용기(2,687) 지혜(2,548)
이미 999레벨이나 되는데 겨우 180에 무슨 의미를 두겠느냐만, 오히려 되묻고 싶다.
의미를 안 둘 이유가 무엇인가?
높을 뿐이지 만렙은 아니다. 노력 여부에 따라 1,000레벨, 나아가 그 이상도 가능하다.
서클 흑마법, 그러니까 스킬도 스탯량에 따라 강도나 지속시간이 높아진다.
매달리면 매달렸지 스탯을 내칠 필요는 전무한 것이다.
물론 ‘타 헌터들과만’ 비교한다면 한 십수 년은 더 제자리걸음해도 무방하긴 하다.
그나저나 이놈의 사체를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가 데스 코볼트나 데스 자이언트의 연장선을 잇기로 했다.
던전 안이라 어차피 없어질 터, 재생체로 전환시키는 게 백 번은 나았다.
아마 두 재생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무적 방패병이 탄생하리라.
“그놈 팔다리 조정해봐. 가지런히 벌어지도록.”
대자 모양이 완성되자 있는 대로 마력을 끌어 모아 주문어를 외웠다.
본 드래곤도 만든 경험이 있어서인지 제법 강한 놈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작업을 끝냈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종전까지 죽어 있다가 대뜸 일어나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트리플 헤드 오우거, 이하 데스 트헤오.
자이언트보다도 늠름한 그 자태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넌 15+5억짜리다.”
인벤토리에 마석을 넣으며 말하자 데스 트헤오가 눈치 빠르게 상체를 숙였다.
20억짜린데 머리 한 번 쓰다듬어줘야겠지.
***
서울 협회 본사 던전관리부.
부장직을 맡고 있는 고수철은 어처구니없는 수신에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모았다.
Z할인마트 강남지점 옥상의 B급 던전과 관련해 그쪽 지점장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오늘부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단다.
건물을 허물 것도 아니면서 대관절 무슨 소리일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ㅡ 웬 헌터가 찾아와 제거해줬습니다.
“뭐요?”
ㅡ 그것도 혼자서요.
손님 끊겨 매일 술 나발을 분다더니 과연 정신 나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선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없다.
고수철 부장의 억양이 다소 높아졌다.
“그쪽 던전 궤멸에 관한 안건이 드디어 통과됐습니다. 그동안 상심 크셨던 건 알겠으나 장난 그만하고 얼른 상태나 보고하십시오.”
ㅡ 장난이라면 제 직함을 내놓겠습니다.
전화기 상의 목소리에 불과하지만 진심이 가득 박혀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후로 3분간의 통화.
고수철 부장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를 외치며 협회를 나섰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엔 믿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이럴 수가······”
“보시다시피 깨끗합니다. 폭발은커녕 괴수의 괴자 걱정도 없습니다, 이제.”
Z할인마트 강남지점 옥상의 B급 던전이 정말로 사라져 있었다. 던전 특유의 허연빛이 어딜 봐도 보이지 않았다.
고수철 부장은 자신이 꿈을 꾸나 싶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번 안건 때문에 몇 개월을 고생했다. 거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고치고 바꾸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해결됐단다.
“정말 그 헌터 혼자서 없앴단 말입니까?”
“예. 덕분에 주머니에서 보상금 명목으로 5억이 나갔지요. 계약을 하긴 했지만.”
“누굽니까? 상위 랭커? 아니면 외국 랭커?”
“헌터에 대해 빠삭하진 않지만 한국인인데 상위 랭커는 아니었습니다.”
송태섭 지점장이 아쉽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캐묻고 캐물었는데도 소개를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각서도 명목만 내세운 거라 별 다른 정보가 없었고요.”
“제기랄!”
고수철 부장은 기둥을 탁! 차며 분노를 뿜어냈다.
사실 이번 안건은 그의 승진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제거하냐 못하냐에 따라 위로 갈 수도 제자리를 맴돌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하게 생겼으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무슨 수를 써야 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식으로라도 점수를 따야 했다. 아니면 족히 반년은 밤잠을 설칠 터였다.
‘그래!’
뇌리에서 번뜩이는 좋은 생각 하나. 그 헌터 때문에 실패했으니 그 헌터를 역으로 이용하면 된다.
실패를 기회로 삼아라!
고수철 부장은 지체 없이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B급 마석을 팔러오는 헌터가 하나 있을 거다! 무조건, 무조건 잡아놔!”
헌터들이 괴수를 잡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결국 돈.
그 헌터도 같은 집합 안에 있을 터, 분명히 B급 마석을 팔러 올 것이다.
그때를 노려 의문의 헌터 포섭!
가뜩이나 대형 길드에 밀려 협회의 입지가 좁아지는 요즘, 그토록 강한 헌터를 데려간다면 무한한 환대를 받으리라.
어쩌면 안건을 성공했을 때보다도 더.
***
서울 강남구 협회 본사.
오전에 들렸던 이곳을 점심 즈음 다시 찾았다. 15억짜리 돌멩이를 인벤토리에만 넣고 다닐 순 없어서였다.
“또 들리셨네요?”
“예, 사냥이 금방 끝나서.”
우연의 일치인지 아까 봤던 여직원과 다시 마주했다.
“어?”
여직원이 놀란 눈으로 나와 올려둔 마석을 번갈아봤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꼼꼼히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이거 B급 마석 아닌가요?”
“맞아요. 트리플 헤드 오우거의 것이죠.”
아,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과 동시에 ‘매우 정중히’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대뜸 안으로 들어갔다.
마석을 챙겨가긴 했는데, 떠듬거리는 말투나 당황한 행동을 봐선 감정을 위함은 아닌 듯싶었다.
“안녕하십니까! 던전관리부 부장 고수철입니다.”
잠시 후, 여직원은 어디 가고 웬 양복 입은 중년의 남자가 왔다. 공손한 자세를 취하더니 양손으로 내부를 가리켰다.
“마석과 관련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지라.”
집 보러 부동산을 가야 하지만 아직 시간이 넉넉해 일단은 따라나섰다.
벽면마다 화려한 그림과 탁상 위로 난이 핀 고급스런 내실.
고수철 부장이 예의 그 어조로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던전관리부 부장 고수철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는 태도로 보아 비단 마석에 대한 얘기는 아닌 듯싶었다.
마치 상급자를 대할 때의 모습. 뭔가 부탁하거나 바라는 바가 있는 것이리라.
“제 이름은 아실 테고, 무슨 일로?”
“이 마석, Z할인마트 강남지점에서 얻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정말, 정말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어떻게 그만한 괴수를 혼자서.”
“죽을힘 다하면 못할 것도 없지요.”
이만큼의 네크로맨서가 되기 위해 한 노력을 생각하면 죽을힘이란 표현은 절대 과장한 게 아니었다.
고수철 부장이 껄껄 웃더니 답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혼자 없애셨다는 것도 그렇지만 왜 여태 이강수 헌터님을 몰랐는지 말입니다.”
“이름 없는 파티에서 조용히 사냥만 했습니다.”
적당히 둘러대자 고수철 부장의 얼굴에 살짝 조바심이 비쳤다. 차분한 척 느린 어조를 보이지만 그 속에 분명 급급함이 있었다.
“그러셨군요. 그럼 지금은 홀로 사냥을 하시는 겁니까?”
“예.”
“귀한 분 시간 잡아먹을 순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수철 부장이 한층 더 저자세로 말을 이었다.
“이강수 헌터님을 저희 협회 소속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협회.
던전이나 괴수, 마석을 관리하는 게 주목적이지만 헌터들에겐 연예인 매니지먼트의 개념이기도 하다.
장비 관리는 물론이요, 앞서 말한 것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낱낱이 알려준다.
요컨대 알짜배기 던전이 생성됐다 나왔다 싶으면 길드나 자유 헌터들보다 협회 헌터들을 먼저 챙기는 것이다.
안으로 굽는 팔.
맛난 초콜릿을 다른 집 아이한테 줄 순 없지 않겠는가.
표면적으로만 보면 협회에 소속되는 게 장땡이다. 각종 혜택까지 죄다 누리며 호의호식할 수 있으니까.
ㅡ 얼른 움직이십시오!
ㅡ 처리할 던전이 몇 갠데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ㅡ 급합니다, 급해요!
하지만 그런 장점이 덮여질 만한 커다란 단점 한 가지.
협회, 아니, 정부의 개가 되어야 한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상 치르는 헌터를 잡아다 던전에 집어넣은 전례가 있다.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부의 개가 되는 것도 그렇지만, 애당초 호랑이가 어찌 늑대 밑으로 들어가는가.
“생각 없습니다. 마석 값이나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강수 헌터님 정도의 실력자가 저희 쪽으로 오신다면 여태까지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엄청난 혜택을 약속······”
“두 번 말 안 합니다.”
뚝 끊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고수철 부장이 살짝 주춤했다. 물러나나 싶었는데, 돌연 자신 있게 한 마디 던진다.
“선불 계약금 100억. 이러면 어떻습니까?”
100억.
범인이라면 평생을 모아도 만질 수 없는 거액.
백만장자는 요즈음 부자 축에도 못 낀다는 말까지 감안하면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아마 내가 베일 대륙 가기 전의 스물셋 이강수였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갔다 온 스물셋 이강수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고개를 젓는다.
왜?
몇 시간 만에 보상금 포함, 18억을 벌었는데 구태여 100억에 목맬 이유가 무엇인가.
액수가 적단 뜻이 아니다. 더 벌 자신이 있으니 그 미래를 보는 것이다.
계약금에 불과한데?
많은 자금을 보유한 협회지만 한 사람에게 전부 투자할 만큼 넉넉한 살림도 아니다.
한 마디로 고수철 부장의 말엔 일종의 눈속임이 있었다.
그 부분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연봉은?”
“그 부분은 차차 협의할 문제입니다. 우선은 선불계약금 100억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역시나였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일어났다.
“바빠서 이만.”
“자,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다급하게 외치는 고수철 부장에게서 질질 끌 기미가 보였기에 탁상 위의 마석도 챙겨들었다.
“호랑이 잡는데 메뚜기로 유인이 되겠습니까?”
# 접수
한강이 내다보이는 최고의 전경.
외관은 물론이요, 적당한 평수에 입구부터 벽면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는 시설.
성공하면 꼭 살고 싶었던 아파트.
협회를 나서자마자 부근 부동산을 찾아 계약, 바로 그 꿈을 이뤘다.
혼자 사는데 무슨 사치를 부리겠느냐만, 거미줄 가득한 반지하 단칸방 시절을 생각하면 당연한 자기 보상이다. 벌어 놓은 돈을 애물단지처럼 모셔두기도 싫고.
한 동안 새 집에 취하다 급하게 장만한 최신형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이이잉은커녕 약간의 소음도 없이 부팅됐다.
헌터 사이트!
내일과 모레, 앞으로의 나날들을 위해 다음 사냥터를 알아볼 참이었다.
ㅡ 그거 들었음? Z할인마트 강남지점 B급 던전 없어짐!
└ 응? 리얼?
└ ㅇㅇ 누가 없애버렸다던데.
└ 어느 길드가? 협회 쪽에서 계획만 세웠단 소리만 들었는데?
└ 길드 없이 혼자였대. 물론 파티도 아니었고.
└ 뭐라고?
ㅡ 윗사람 개소리 완전 쩌네ㅋㅋㅋㅋㅋㅋ 허언증 말기인가ㅋㅋㅋㅋㅋㅋ
└ 너야 말로 개소리^^ 진짜니까 두고 봐^^
└ B급 던전을 혼자 클리어한 헌터가 있다? 그러면 내 손에 장 지짐.
└ ㅇㅋ 실천해라^^ 캡처해 놨다^^
자유 게시판에서 한창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연 그만한 던전을 혼자 제거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면서.
당사자로서 그런 글과 댓글을 보고 있노라니 우스운 한편, 벌써부터 소문이 났다는 게 신기했다.
하기야 그제 탈출 자이언트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떠들썩했는데, B급 던전이라면 더욱 파급력이 크겠지.
<대전 터미널 B급 던전에 관하여.>
시끄러운 자유 게시판을 나와 던전 게시판로 이동했다.
네크로맨서든, 마제든, 999레벨이든 이쪽 세상에선 잉여 백수.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 한다. 여유 즐기며 흡족한 삶을 살려면.
높은 등급의 던전일수록 수가 한정적이란 것도 한 몫 한다. B급은 거의 최상위급이라 전국을 통틀어도 100여 곳이 채 안 되니까.
세계적으로 따지면 수천 곳이 넘긴 한데, 비행기 탈 정도로 급한 상황은 또 아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한 단계 더 올려 A급 던전?
좋다. 쌍수 들어 환영이다. 다소 고생할지언정 클리어할 자신은 충분하다.
하지만 전국은 물론이요, 전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몇 곳 없다. 위치가 아프리카나 아마존, 남극 등의 오지라는 점도 그렇고.
‘요 밑에 있다 이거지.’
새 집에서 하루를 푹 쉬고 다음 날 아침.
B급 던전이 있다는 대전 터미널을 찾았다. Z할인마트와 다르게 왕래하는 사람이 제법 됐다. 할인마트야 다른 곳을 가면 그만이지만 터미널은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야하는 불편이 있어서겠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하 B급 던전을 제거하러 왔습니다.”
“예?”
어제와 마찬가지로 안내원이 화들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혹시······ 어제 B급 던전을 없애신 그 헌터님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이름만 밝혀지지 않았을 뿐, 내가 한 일에 대한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나 있다.
아니라고 하면 당장은 믿을지언정 이쪽 B급 던전을 제거하면 결국 또 의구심을 피우리라.
“안녕하십니까, 헌터님.”
이번에도 고위 관계자가 직접 찾아왔다.
이런저런 말과 함께 송태섭 지점장마냥 ‘다치셔도 책임지지 않는다.’란 같은 끝을 맺었다.
죄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실리를 위해 손가락 다섯 개 정도 펴줘야겠지.
“보상금은 5억입니다.”
“예? 보상금이라뇨?”
“이만큼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홀로 B급 던전에 들어가는데 5억이 큰 액수입니까?
날카롭게, 그러면서 교묘하게 틈을 파고들자 고위 관계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대신 확실히 처리해주셔야 합니다.”
“약속드리지요.”
빙그레 웃으며 지하에 내려갔다.
안내자의 유무에 상관없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성 때문에 근방을 차단해놓은 탓이었다.
넘실거리는 허연빛!
손을 갖다 대자 이제는 익숙한 알림말이 떠올랐다.
[B급 던전, 퀴퀴더스 오크 마을. 폭발까지 452일 남았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헌터 사이트에선 보스 오크니 어쩌니 하는 놈을 잡는 거라고 했었는데, 개뿔. 오크 마을 하나를 전부 날리란다.
‘그래봤자.’
베일 대륙에서 적색 산맥을 넘을 때 잡은 오크들의 마릿수가 얼마던가. 그때를 감안하면 한낱 마을쯤이야.
족장이 좀 강하긴 하겠으나 각종 재생체들과 소환체, 그리고 내 마력이 더해지면 말짱 도루묵이 되리라.
[입장합니다.]
***
케니스.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중의 대형 길드.
그곳의 마스터인 서진태는 은밀하게 들어온 정보지를 보며 정체모를 미소를 지었다.
Z할인마트 강남지점의 B급 던전.
그쪽이 어떤 헌터 한 명에 의해 궤멸됐는데, 그 자의 신상내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일반>
이름 : 이강수
나이 : 스물셋
가족 : 없음
출신 : 고아원
사는 곳 : 성수동 내 반지하 단칸방
<헌터>
경력 : 알 수 없음
레벨 : 알 수 없음
직업 : 알 수 없음
협회/길드/파티 : 소속 없음
일반 부분은 거의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현재 사는 곳이 약간 그렇긴 한데 조금만 더 추적하면 금세 답이 채워질 터였다.
문제는 헌터 부분. 경력부터 소속까지 전부 확인이 안 된단다.
서진태는 정보지를 올린 수하 대원에게 물었다.
“헌터 관련 사항은 왜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 거야?”
“그게······ 사실 마스터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길드의 정보력은 협회에 버금가는 정도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도 이강수의 헌터 정보는 단 한 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방면으로 뒤졌는데 걸리는 게 있어야 말이죠.”
서진태가 가장 싫어하는 말, 모르겠습니다.
눈치 있게 알아보겠다고 해야지, 대놓고 그런 말 던지면 짜증이 솟아오른다.
그걸 앎에도 불구하고 썼다는 건?
웬만한 방법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단 뜻이겠지.
“허, 참. 한 15년 딴 세상 갔다가 온 것도 아니고.”
“불가사의 합니다. 그렇게 종적 감추고 다니던 랭커들의 뒤도 다 캐냈는데.”
안 될 일이라고 포기할 순 없다. 아무리 좁은 입구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어디 있어, 지금? 잡아다 놓고 물어보면 될 거 아냐?”
“바로 추적해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날치기 당하면 곤란해.”
실력이나 자질 있는 헌터들을 포섭하는 건 비단 협회만의 일이 아니다.
각 길드도 그런 자를 데려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세력이 커지니까.
날치기는 여기서 비롯된 용어.
도중에 협회나 타 길드에게 빼앗기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수하 대원이 조심스럽게 반문을 던졌다.
“저, 그런데······ B급 던전을 혼자 클리어한 놈입니다. 잡는 게 가능할까요?”
“날 뭐로 보는 거야? 세계 랭킹 151위, 536레벨 서진태. 마음만 먹으면 나도 혼자서 B급 던전 들어갈 수 있어, 이 새끼야.”
들어갈 수만 있지 클리어할 수는 없잖습니까, 라고 다시 반문하고 싶었지만 꾹 참는 수하 대원이었다.
다혈질로 유명한 마스터.
괜히 그 성질 건드렸다가 오밤중에 비명횡사할 지도 모른다.
“뭘 서성여? 얼른 나가서 추적 시작해!”
“아,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나가는 수하 대원을 뒤로하고 서진태는 덥수룩한 수염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B급 던전을 혼자 깼다? 어디 그 실력 좀 보자.’
***
“정말 끝도 없구먼.”
푸르른 평야 사방에서 조잡한 돌도끼를 꼬나 쥔 오크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한 놈, 두시기, 석 삼, 너구리······ 셀 수 없이 많았다.
“멍멍이들아. 보여줘라, 진정한 인해전술이 뭔지.”
“크르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놈들이 마릿수 믿고 나온다면 나도 고대로 되갚아주면 된다. 헬 하운드 아닌 일반 하운드는 대량 소환이 가능하니까.
약 500마리.
세지 않아서 정확한 수는 모르겠으나 대략 그쯤 된다. 군주 앞에선 한없이 온순한 녀석들이라 이렇게나 많은데 짖지도 않는다.
“취이익! 죽여라!”
“몬스터들도 적으로 간주한다! 쳐라!”
“무서움을 보여주마!”
오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손 뻗으면 베일 듯한 그 기세등등함에 기가 찼다.
뒤룩뒤룩 비계 살이나 안고 다니는 놈들이 뭔 자신감으로 저러는 건지 원.
딱 5분.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놈들의 사기를 초전박살냈다.
하운드들이 이곳저곳을 물어 피를 터뜨리고 데스 자이언트가 주먹을 휘둘러 수풀에 쳐 박았다.
피날레는 데스 트헤오가 장식했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죄다 휙휙 날렸다.
“취, 취이익! 도망쳐라!”
“조, 족장님이 오셔야 한다!”
“우, 우리가 이길 놈이 아니다!”
도망갈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아는 놈들인데, 그러면 뭐하나. 재생체와 소환체는 고사하고 내가 있는데.
속박으로 간단히 움직임을 봉쇄, 데스 애로우를 수백 발 소환했다.
피이잉! 피이잉! 피이잉!
높은 민첩 스탯 덕에 정확도는 100퍼센트였다. 빗나감 없이 명중시켜 그나마 멀쩡했던 놈들까지 전부 제거했다.
‘이대로 끝날 리가 없을 텐데.’
예상대로 저만치 언덕 뒤에서 쿵쿵 거리는 대규모 발소리와 함께 또 다른 조무래기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중간의 족히 5배는 더 큰 듯한 오크 한 마리.
크기만 봐도 그렇지만, 등 뒤에 매단 휘황찬란한 도끼도 또 다른 증거였다.
데스 트헤오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널 시험해보겠다. 저놈을 힘으로 제압해봐.”
“예, 군주님.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내 재생체가 되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B급 괴수란 타이틀을 가졌던 녀석이다.
힘이라면 어디가도 꿇리지 않기에 오크 족장이라 한들 밀릴 이유가 전혀 없다.
“너희들은 계속 조무래기들을 정리한다.”
“크르릉!”
입지 좁아진 데스 코볼트들이 몽둥이를 움켜쥐고 결의를 보였다.
“저희들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해봐.”
한 놈도 빠짐없이 제 역할을 다 해준 덕분에 사냥은 오크 족장의 유무와 상관없이 10분 만에 끝을 보였다.
“취, 취이이익! 저, 정체가 뭐냐!”
“사신이다, 이 돼지새끼야.”
데스 트헤오가 붙잡아둔 오크 족장을 본 애로우로 마무리했다. 연달아 세 발 꽂으니 5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떨궜다.
마석을 챙기며 오크 족장을 비롯한 약 1천 마리의 조무래기들을 바라보았다.
‘네놈들은 바이바이다.’
탈출 괴수와 달리 필드 괴수는 사체를 남기지 않는다. 죽으면 몇 분 안에 연기화 되어 사라진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다. 비계 덩어리들까지 품을 정도로 잡식성은 아니니까.
“저, 정말 없애시다니······ 대, 대단하십니다.”
“박수는 됐고, 말씀드린 거나 준비해놓으십시오.”
“아, 예예! 물론입니다. 골칫덩어리가 없어졌는데 그깟 5억이 대수겠습니까?”
“말귀 잘 통하시네. 그럼 수고하십시오.”
던전을 나와 만난 터미널 고위 관계자.
끝까지 감탄사에 놀란 기색만 보이는 그를 뒤로 하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이강수. 스물셋. B급 던전을 박살낸 헌터. 안녕하십니까, 케니스 길드 부마스터 최인혁이라고 합니다.”
웬 미친놈이 내 소개를 지가 하며 손을 내민다.
케니스 길드.
대형 길드라 블로그에서 유심히 봤던 기억이 있다. 협회에 비등되는 정보력이 특징인데, 내 신상을 아는 건 아마 그 영향 때문일 것이다.
“뭡니까?”
“하하,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이강수 헌터님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은 개뿔.
최인혁 뒤로 여기저기 숨어 있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케니스 길드 소속 헌터들이겠지.
메리아 길드마냥 겉과 속이 완전 다르다. 친절한 척 하지만 그 속에 가시가 있다.
내 신상을 발설한 순간부터 이미 부정적이긴 했지만.
“무슨 대화요?”
“사는 얘기, 헌터 얘기, 사랑 얘기 얼마나 많습니까?”
여유롭게 말하는 최인혁을 보며 과연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싶었다.
“길 가다 객사해봤습니까?”
“예? 끄어억!”
지나는 행인들이 많아 크게는 안 괴롭히고 간단히 쥐어짜는 걸로 대신했다.
자유분방하게 뒤틀리는 최인혁의 사지.
튀어나올 듯 커지고 충혈된 눈동자와 함께 어느 순간 허옇게 게거품 무는 그였다.
“죄, 죄송합니다! 푸, 풀어 주십시오!”
“숨어 있는 열세 마리도 나오라고 시켜.”
“그, 그걸 어떻게?”
“물음표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최인혁이 고통을 호소하며 어딘가로 손을 흔들었다. 쭈뼛거리며 여기저기서 소속 대원들이 나왔다.
부마스터급이 꼼짝 못하는 걸 직접 본 영향인지 하나 같이 경계보단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떤 이는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존중이란 존중은 싹 빼고 최인혁에게 물었다.
“용건이 뭐야?”
대충은 예상 간다. 굳이 대전까지 내려와 날 찾은 걸 보니 그저께 메리아 길드나 어저께 협회와 용건이 같을 것이다.
포섭.
날 끌어들여 길드의 세력을 키우고 싶은 거겠지. 힘이야 B급 던전을 없앤 것으로 증명이 됐을 테고.
“이, 이강수 헌터님을 잡아오란 마스터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뭐? 잡아와?”
“아, 아닙니다. 마, 말이 헛 나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가끔은 진실일 때도 있다. 초장에 내게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더욱 가능성이 높겠지.
“가보자.”
“예?”
“대형 길드의 마스터인데 얼굴 한 번쯤 보는 건 나쁘지 않지.”
귀찮은 존재들, 종전까지는 재생체들을 이용해 황천길행 배에 강제 탑승시키려 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메리아 길드나 협회와 달리 케니스 길드라면 경우가 다를 지도 모른다.
막강한 정보력!
그걸 등에 업는다면 헌터로서의 행보가 더더욱 탄탄대로를 밟을 것이다. 괴수나 던전에 관한 알짜배기 정보를 접할 수 있으니까.
케니스 길드 소속 대원으로 들어가는 거냐고?
그럴 리가. 정보만 받으면서 내 사이클은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을 택한다.
‘알맹이 꽉 찬 조개를 그냥 버릴 순 없지.’
***
마스터 서진태는 제 앞에 앉은 사내를 보며 공포를 느꼈다.
어떤 괴수나 헌터를 면전에 두고도 항상 어깨 펴고 살았는데, 이 사내에겐 그러지 못했다.
숨을 수 있다면 숨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부마스터 최인혁의 전화를 진중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앞에 앉은 사내의 정체는 이강수.
최인혁이 대전까지 직접 내려가 데려왔다. 도중에 이강수가 무서운 놈이라는 전화가 왔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대기업이 하청업체에게 고개 숙이는 법 봤는가?
대형 길드 소속인데 B급 던전 좀 털었다고 어찌 자유 헌터인 이강수를 올려서 보겠는가?
그런데 대면한 지 불과 10분.
도망갈 순 없는 걸까.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 숨 턱턱 막히는 답답함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날 잡아다 윗자리 주는 척 선심 쓰며 굴리려 했다?”
“그, 그리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손사래 치며 부정하지만 사실 이강수의 정리가 맞았다. 대형 길드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갑질하려 했으니까.
줄곧 써 먹던 방법이라 이강수에게도 통할 줄 알았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역으로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소름이 끼쳤다. 욕은커녕 강압적인 어조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이런 게 살기란 것일까.
“협회가 가진 정보량을 100이라 한다면 너희는 어느 정도지?”
“예?”
“묻는 거에 대답만 해. 이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문 앞에 몸이 기괴하게 꺾인 채 기절해 있는 또 다른 부마스터 변상준.
아까 자신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몰래 이강수를 치려다 변을 당했다.
이 부분은 아직도 의문스러웠다. 뒤통수를 알아 챈 건 둘째 치고 손 하나 깜짝 안 하고 고 레벨 헌터를 제압하다니.
의문도 잠시,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이강수의 미간을 보며 갑작스런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8, 8할은 될 겁니다.”
“엄청난 수준이군?”
“저, 전체적으로 대원들 레벨이 낮아 그쪽을 계속 팠습니다. 아, 안 그럼 경쟁력에서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강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좋아. 매일 아침 8시. 그 정보들을 내게 보고해.”
“그, 그 무슨!”
“내겐 결정권이 있지만 네겐 거부권이 없다.”
“이,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여전히 떨리지만 더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 모은 정보를 아무 보상도 없이 넘겨준단 말인가.
한쪽에 꼽아뒀던 창을 집어 드는데, 돌연 오른 팔이 휘청했다.
“뭐, 뭐야?”
“네 몸에 제어마법을 걸어놨다. 지금도 그렇고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데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그, 그런 마법이 존재할 리가!”
버럭 소리침에도 불구하고 이강수의 입가엔 더욱 웃음꽃이 피었다.
“꼭 경험해봐야 깨닫더라고.”
“끄아아아악!”
전신에서 밀려오는 고통. 알싸함을 넘어 찢어질 듯한 그 느낌에 하마터면 아랫도리를 적실 뻔했다.
“불신한 마음을 먹으면 즉각 발동되게 설정되어 있다.”
“제, 제기랄 놈이! 끄아아아악!”
“말도 조심해야지.”
“그, 그만해주십시오!”
살기 위해 다시 존칭했다. 아니 하면 죽을 것 같은데 어쩔 도리가 있을까.
이강수가 아직 식지 않은 차를 호로록 마시며 일어섰다.
“내일은 최신 정보와 함께 그동안 모아둔 것도 함께 보내. 언더스텐?”
“아, 알겠습니다.”
“아. 숨기거나 뒤로 내빼도 상관없다. 평생 병원 신세질 자신 있으면 말이야.”
이강수는 홀연히 문을 나섰다. 밖에 휘하 대원이 전부 대기 중이었지만 모세의 길 걷듯 편안하게 걸었다.
***
다음 날, 16년 1월 4일.
케니스 길드 측에서 약속대로 아침 8시에 맞춰 갖가지 정보들을 모두 보내왔다.
블로그나 뉴스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귀중한 것들!
‘단단히 겁먹었군.’
어젯밤, 서진태에게 시전해둔 제어 흑마법. 상대가 어디에 있든 심리적인 상태를 이용, 고통을 줄 수 있다.
536레벨의 고수지만 999레벨인 내 입장에선 한없이 초보라 가능한 일이었다.
‘되게 많네.’
도움 될 만한 것만 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양이 상당했다.
벌써부터 졸음이 몰려오지만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정독했다. 다 살이 되고 뼈가 될 자료들이니까.
ㅡ 최근 강남과 대전의 B급 던전이 잇따라 궤멸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부가 몇 개월을 고생해 처리하는 걸 불과 이틀 만에 끝냈다는 점에서 많은 국민들과 헌터, 누리꾼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 상태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정보지를 완독했다. 휴식 겸 TV를 시청하는데 나에 관한 뉴스가 한창이었다.
ㅡ 그와 관련해 협회 본사 던전관리부 고수철 부장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ㅡ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ㅡ 관심이 큰 만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B급 던전을 한 명의 헌터가 제거했다는 게 정말 사실입니까?
ㅡ 그렇습니다. 저희 협회는 물론, 길드나 파티 없이 단신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어젯밤에 듣고서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고수철 부장을 보며 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그저께 100억을 제안하면서까지 날 포섭하려 했으면서 몰랐던 척이라니.
캐치했으면 왜 진즉에 알리지 않았느냔 질타를 피하기 위함이겠지만, 제 이득만 챙기려는 티가 역력했다.
ㅡ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혼자서 그러는 게 가능합니까?
ㅡ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지요. 상위 랭커들이 아니고서야 들어가자마자 역으로 당할 겁니다.
ㅡ 그 헌터가 상위 랭커라는 말씀이신가요?
ㅡ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어서 이렇다, 저렇다, 그렇다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다만 상위 랭커가 움직이면 금방 소식이 들어오는 터, 그쪽은 아닐 공산이 큽니다.
고수철 부장은 날 안다. 앞서 말한 100억도 그렇고 직접 대면까지 했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거짓말.
어떻게 부장의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고수철 부장이었다.
ㅡ 그렇다면 대체 누굴까요?
ㅡ 금방 밝혀질 겁니다. 그 헌터도 마석을 팔기 위해선 결국 협회에 들려야하니까.
ㅡ 그렇기야 하겠습니다만, 한 가지 신기한 게 있습니다. 초등학생도 핸드폰 들고 다니는 시대에 어찌 그 흔한 사진 한 번 찍히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안 찍혔을 수밖에.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핸드폰을 왜 들고 있게 하겠는가.
ㅡ 너무 놀라 그럴 정신도 없었을 겁니다.
ㅡ 하기야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아무튼 간에 얼른 밝혀져 속 시원하게 인터뷰 한 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방송은 양날의 검이다. 잘 되면 긍정적으로 비춰지지만 안 되면 부정적으로 비춰진다.
자극적인 말만 싣는 관계자의 편집,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청자의 시선.
실제로 당해본 적은 없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보고 들은 터라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조건 싫다는 건 아니다. 연예인들처럼 유명세를 이용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문제니까.
‘아직은.’
뭔가 제대로 방향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대뜸 들이대면 남는 건 후회와 손해뿐이다.
베일 대륙에서의 네크로맨서 세월, 그리고 대한민국에서의 이강수 세월을 위해 잠시만 접어두리라.
***
OBS방송국.
던전이나 헌터 관련 전문 채널로 한때 이쪽 분야에서 엄지에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16년 현재.
<OBS방송국, 이대로 괜찮은가?>
<그나마 핫한 프로그램, ‘우리는 헌터입니다’ 마저 시청률 대 폭락.>
<OBS, 광고사가 꺼려하는 방송국 48주 연속 1위.>
정상의 자리에 있다고 안일했던 게 문제였을까. 나락에 나락을 거듭,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ㅡ OBS 진짜 존나 재미없음ㅋㅋㅋ 차라리 다큐멘터리 보고 말지ㅋㅋㅋ
ㅡ 개선 안 하냐? 일 안 해?
ㅡ 이런 프로그램들 만들 바에야 차라리 폐업해라ㅉㅉ
난잡한 관련 기사와 방송국 홈페이지.
보기만 해도 가슴 쓰라린 글귀들을 보며 개인 사무실에서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이가 있었다.
국장 이창도.
누리꾼의 말마따나 폐업 위기까지 닥친 이 사태를 대관절 어떻게 메워야할까 싶었다.
‘한방이 필요해, 한방이.’
연예계에서 흔히 쓰는 말인 한방이란 단어는 방송계에서도 고대로 통용된다. 대박 프로그램이나 기사, 인터뷰 하나만 잘 뽑으면 여태까지의 비난을 찬양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일례로, 비슷한 상황이었던 모 방송국이 ‘던전 집중 취재’라는 프로그램으로 단 번에 시청률 1위를 꿰찬 적이 있었다.
이후는?
그걸 발판 삼아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이다.
‘B급 던전을 제거한 의문의 헌터?’
불씨라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마우스를 누르던 이창도의 눈에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뉴스가 들어왔다.
‘이 놈 이거 아직도 정체가 안 밝혀졌어?’
메인 페이지 포함, 말미까지 스크롤을 내려 보았지만 그 어떤 곳도 의문의 헌터에 대해 파헤치지 못했다. 인터뷰도 당연히 없었고.
이창도의 머릿속에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쳤다.
‘안 돼. 미친 짓이야.’
스스로에게 욕을 던지지만 아련하게 지나가는 현 상황들이 결국 그를 돌려세웠다.
‘어차피 갈 때까지 간 상황. 어불성설이라도 해본다.’
<『나 혼자 999레벨』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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