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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혈객(追血客) 1권 1화

2016.06.29 조회 929 추천 2


 천한야장(天寒夜長 : 길고 차가운 밤)
 
 
 서(序)
 
 
 “사망 추정시간은 어젯밤 진시(辰時).”
 폭설이 휘날리는 중이었다.
 사방 천지가 온통 하얗디하얀 눈이었다.
 올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왔다. 사흘 걸러 한 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폭설이 내렸다.
 쥐 죽은 듯한 적막 위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산야(山野)는 한 길을 훌쩍 넘길 만큼 눈이 쌓였고, 사람들은 동면(冬眠)하는 짐승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참혹하군.”
 사람의 음성이 조용한 설원(雪原) 한구석에서 울려나왔다.
 굽이진 산자락이 넓은 들로 나가는 접경이다.
 하루에도 수십 대의 마차가 오가는 관도(官道)지만 엄청난 폭설은 마차는커녕 사람의 발걸음마저 보름째 끊어버렸다.
 관도, 그 한쪽 구석에 마치 버려진 물건처럼 시신(屍身) 한 구가 하늘을 쳐다보며 널브러져 있었다.
 
 ―뇌성삼점(雷聲三點) 공광필(功廣泌).
 
 여섯 시진 전까지만 해도 시신이 사용하던 무명(武名)이요, 이름이다.
 공광필의 성명병기(聲名兵器)는 진천필(震天筆)이다.
 두 자루가 한 쌍으로 이루어진 쌍필(雙筆)로서, 무게는 청강장검과 비슷하나 길이는 훨씬 짧았다.
 뇌성삼점 공광필은 진천필을 검처럼 늘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단병(短兵)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공광필 역시 신법(身法)이 현란하고, 초식(招式)이 극히 정교했다. 그러면서도 거력(巨力)을 실어냈다. 무명 중에 ‘뇌성(雷聲)’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진천필을 떨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우렛소리 때문이다.
 검문(劍門)을 지탱하는 육대주(六大柱) 중 한 명이라는 공광필이 전신 뼈마디가 조각조각 난 채 눈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것이다.
 “경추(頸椎) 이골(二骨)이 부러졌고.”
 감정이 한 올도 실리지 않은 담담한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뇌정삼점 공광필의 머리는 사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육체에서 분리된 것처럼 덜렁거렸다.
 사내는 공광필의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목뼈 중에서도 어느 부위가 부러졌는지 정확히 짚어냈다.
 “인중(人中) 역시······.”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소리도 은연중에 떨려나왔다.
 “특이한 점은?”
 사내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싶은지 곁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물었다.
 그는 시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폭설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산야를 쉴 새 없이 훑어댔다. 그의 눈매는 폭설에 숨은 먼지조차도 찾아낼 만큼 매서웠다.
 “정확해. 바늘로 찌른 것처럼······ 인중을 정확히 가격했어. 이때쯤 저항 능력을 상실했던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사내는 입 안에 맴도는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인중을 정확히 가격하는 것은 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
 현(現) 산동(山東) 무림(武林)에서 뇌정삼점의 인중을 정확히 가격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다. 그것이 기적이라면 공광필의 죽음은 기적보다 더한 일이 속하겠지만.
 “왼쪽, 오른쪽 늑골(肋骨) 전부······.”
 사내는 손으로 뇌정삼점의 전신을 훑어나갔다.
 특이한 점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훑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기해혈(氣海穴) 파괴. 정확히.”
 기해혈을 파괴당한 무인은 이미 무인이 아니다. 진기(眞氣)를 운집하는 뿌리가 뽑혀졌으니······. 설혹 무공(武功)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해혈을 파괴당하고는 살 수 없다.
 시신을 뒤집었다.
 “지양혈(至陽穴)······ 으음······!”
 사내가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가 신음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 시신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정확한가?”
 사내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물었다.
 “정확하게 일곱 번째 뼈만 부쉈어. 완전히.”
 사내는 이번에도 ‘완전히’라는 말을 사용했다.
 지양혈······ 척추 일곱 번째 마디다.
 지양혈이 으스러졌다면 살아 있다 해도 몸을 움직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죽은 것이 낫다고나 할까?
 “수법은?”
 “······.”
 대답이 없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시전하지는 못해도 중원의 모든 무공을 거의 대부분 견식했다는 천무광인(千武狂人)이 대답을 못 한 적은 아직껏 없었다.
 “제일(第一) 사인(死因)은?”
 “······.”
 천무광인은 이번에도 침묵을 지켰다.
 사실 천무광인의 사인 분석에는 모순(矛盾)이 있다.
 경추이골, 인중, 늑골 전부, 기해혈, 지양혈······.
 뇌정삼점은 가만히 서 있었단 말인가? 흉수(兇手)가 살수(殺手)를 펼치도록?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독(毒)으로 심신(心身)을 무력화시켰을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천무광인은 독(毒)이란 말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고 있다. 독살은 아니다.
 그럼 왜 뇌정삼점은 죽음을 택했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주변상황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폭설에 묻혀 당시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지만 격전(激戰)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성명병기 진천필이 시신으로부터 삼 장이나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것은 진천필이 허공을 날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삼 장이라는 거리는 뇌정삼점 최후의 초식인 비공천필(飛空天筆)이 작렬하는 거리와 일치하니까.
 싸움은 있었다.
 “······내 소관을 벗어난 일. 가지.”
 천무광인이 시신을 어깨에 들쳐맸다.
 폭설은 한시도 쉴 새 없이 계속 쏟아졌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듯 세찬 바람을 동반하고······.
 
 
 제1장 괴객
 
 
 1
 
 
 사망곡(死亡谷).
 조가촌(曹家村) 사람들은 걸어서 일 다경(茶頃)이면 도착하는 황폐한 골짜기를 사망곡이라고 부른다.
 그들뿐이다. 그들 외에는, 조가촌 사람들 외에는 그 누구도 사망곡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음산한 이름처럼 공포스럽기 때문일까? 사망곡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출입자사(出入者死)’라는 말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아니다. 모르기 때문이다.
 철마다 유람 삼아 산을 오르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태산(泰山)을 터전으로 삶을 살아가는 엽사(獵師)도, 약초꾼도 산 끄트머리에 사망곡이라는 곳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일부는 사망곡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냥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사망곡? 하하하! 그래, 사망곡이지. 그러고 보니 딱 맞는 말이네. 정말 사망곡이야. 하하하!”
 대부분의 반응은 그렇다.
 “사망곡이란 뭔가 죽는다는 뜻이잖아. 거기는······ 음, 절생곡(切生谷)이 어때? 아예 생명력이 없다는 뜻으로 말야.”
 일부는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공통된 점은 사망곡이라 불리는 골짜기를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사망곡이란 말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망곡.
 죽음의 땅이다. 일 년 열두 달, 햇볕이 들지 않아 음습하기 이를 데 없으며, 푸른 것이 있다면 음지(陰地)에 자생하는 약간의 식물과 이끼가 고작이다.
 조가촌 사람들에게 사망곡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골짜기일 뿐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그 무엇도, 하다못해 나물이나 땔감조차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곳은 그곳뿐이다.
 그런 점은 중원(中原) 오악(五岳) 중 하나인 동악(東岳), 태산을 찾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도가(道家)가 흥성할 때는 천하군림(天下君臨)의 지위에 오른 황제조차도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하기 위해 찾았던 태산.
 도가의 세(勢)가 수그러들었다 해도 태산은 도가의 성지(聖地)다.
 산정(山頂)에 태산부군(泰山府君)의 딸인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시는 옥황묘(玉皇廟)가 있어 매년 삼월마다 묘회(廟會)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드는 참배자 수가 수십만에 달하니······.
 그러나 그들 모두 사망곡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하기는 조가촌을 거치는 등산로는 엽사나 땅꾼도 힘에 부칠 만큼 험한 탓에 일 년 열두 달 유람객 한 명 지나가지 않는 산촌이기는 하다.
 하지만 설혹 이 길이 태산에서 제일 풍광 좋고 완만하여 모든 사람이 조가촌을 지나친다 해도 사망곡만은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워낙 험해서 산정으로 오르는 길마저 끊어져 버린 등산로보다 더욱 험해 보이는 지세(地勢)하며, 삭은 바위가 모래처럼 흐트러져 하얀 빛을 토해내고 있는 모습은 들어가 볼 엄두조차 가시게 만든다.
 짐승도 없다. 잡아먹을 토끼 한 마리 없고, 뜯어먹을 풀 한 포기 없는 땅에 어슬렁거리는 짐승이 있을까?
 사망곡은 죽음의 땅이다.
 그런데······ 두어 달 전부터 조가촌 사람들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사망곡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
 “······.”
 “누구······ 쇼?”
 “······.”
 “길을 잘못 든 것 같소. 이 마을은 막다른 곳이라······ 옥황정(玉皇頂)으로 갈 요량이면 오던 길을 다시······.”
 노인은 다 늦은 저녁에 불쑥 안마당으로 들어선 손님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몰골을 보아하니 거지에게 빌어먹고도 남을 정도이지 않는가. 보나마나 도인(道人)이랍시고 이곳저곳에서 동냥밥을 얻어먹으며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자다.
 눈이 한 길이 넘게 쌓였는데도 태산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어지간히 곤궁한 자인 것도 틀림없고.
 그러면서도 주둥이로는 ‘죽음으로 제한된 세상을 초탈할 때까지 세상을 떠돈다.’고 떠들어댈 테지. ‘불사(不死)의 신선(神仙)과 귀신(鬼神)의 세계에 들어갔다.’고 헛소리 늘어놓는 놈도 보기는 했지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호산호(胡蒜湖)에서 옥황정에 이르는 길목은 인심이 후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 덕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조가촌을 찾아드는 사람들은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입품이나 팔기 일쑤고, 뻔뻔한 작자를 만나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거지도인처럼 ‘밥을 달라.’, ‘잠자리를 제공해달라.’는 통에 인심이 좋을 리 없다. 떠날 적에는 도주(道呪) 한 마디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면서.
 노인은 손님을 뒤로하고 외양간으로 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을 여물통에 쏟아부었다.
 눈이 큼직하고 맑아서 마치 자식처럼 사랑스러운 놈. ‘천둥’이라 이름지은 황소를 볼 적마다 노인은 세상을 모두 얻은 듯 뿌듯했다.
 조가촌 같이 산 구석에 처박힌 외진 마을에서는 황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노인은 오늘만은 뿌듯함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
 뒤가 켕겼다. 대문 가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가짜 도인 ―설령 진짜 도인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이 신경 쓰였다.
 ‘빌어먹을······ 도사놈들이란······!’
 고구마 두어 개라도 던져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까웠다. 잠이야 헛간에서 자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요즘 같은 엄동설한에 얼어죽기라도 하면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이래저래 귀찮기 이를 데 없는 손님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결국 헛간이라도 비워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날이 저물었고, 돌아 나간다 해도 민가(民家)가 있는 곳까지 가기에는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지 않은가. 눈이 어른 허리춤까지 쌓인 요즘, 이곳까지 얼어죽지 않고 찾아온 것도 용한데 인간으로서 차마 어떻게 그냥 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쪽 이야기이고 저쪽 이야기는 또 다르다. 지금과 같은 날씨에 저쪽은 이판사판으로 달라붙을 것이 자명하다. 진드기처럼 달라붙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음 집을 쑤시겠지.
 한적한 곳에 자리한 마을들이 거의 그렇듯이 조가촌 역시 마을이 일가(一家)로 이루어졌다. 형님, 아우, 삼촌 아니면 조카······.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길손을 먹여주고 재워줘야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길손이 머물겠다 작심했으면 머물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짜증이 치미는데······.
 “저기가 헛간이우. 저기라도 좋다면 묵었다 가슈.”
 결국 노인은 탐탁지 않은 음성으로 말하며 턱 끝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헛간을 가리켰다.
 “······.”
 손님은 요지부동이다. 엄지손가락만한 눈방울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묵묵히 서 있다.
 ‘에잇! 빌어먹을······ 엄동설한에······.’
 “가 계슈. 먹을 것이라고는 고구마 두어 개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좋다면 갖다 주겠수.”
 “······.”
 이번에도 길손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기는 했다. 손가락으로 부엌 옆에 놓인 항아리를 가리키고 있으니까.
 ‘싸······ 쌀독······? 바, 밥을 지어달라는 건가? 이, 이 거지놈이!’
 노인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조차 열지 못했다.
 육십이 넘게 살아오면서 이런 놈은 처음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는 세상이라지만 하룻밤 묵어가게 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노릇이지 주인조차도 아까워서 먹지 못하는 쌀밥을 해달라고?
 “응······?”
 길손은 기가 막혀 말조차 잇지 못하는 노인의 눈앞에 거무튀튀한 돌덩이를 불쑥 내밀었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쌀독을 가리키면서.
 “이, 이게 뭔가······?”
 물어볼 것도 없이 돌덩이다. 세상에 흔하디흔한 것이 돌멩이인데 그것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면 두 눈을 떼어버리는 것이 낫지 무엇 하러 달고 다니랴.
 지천에 널린 돌덩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흑석(黑石).
 그런데······ 노인은 그 흑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흑오석(黑烏石) 같은 돌은 반 시진만 정성을 들여서 기름칠하면 이놈처럼 윤기가 흐른다.
 처녀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풋풋한 향기?
 물론 착각이다. 돌덩이가 향기를 뿜어낼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노인은 미녀의 매혹적인 눈짓에 현혹된 것처럼 흑석에 이끌렸다.
 어른 주먹 세 개 정도를 합친 크기의 흑석.
 “이, 이거 나 줄 건가?”
 물음은 길손에게 던진 것이 아니다. 빈 허공에 던졌다. 노인의 눈길은 여전히 흑석에 머무른 채 떨어지지 않았다.
 “······.”
 대답이 없다. 주는 거다. 주려고 흑석을 들이민 거다.
 대가는? 그것도 분명하다. 그는 여전히 쌀독을 가리키고 있을 게고, 밥 한끼 잘 차려주면 그만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마음이 이처럼 동할 수가 있단 말인가.
 평생 귀금속 같은 사치품이나 수석(壽石), 분재(盆栽) 같은 애장품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는데······. 천둥을 사온 다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듯 들떴었는데······. 내일이라도 당장 개천가에 가서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놈보다 더 모양 좋은 흑오석을 구할 수 있는데······.
 ‘쌀 한 줌이야. 한 줌이면 돼. 아무리 귀한 것이 쌀이라지만 한 줌쯤이야······.’
 노인은 결심을 굳혔다.
 
 “거 참! 희한한 사람이군.”
 노인은 눈발에 가려 희미해진 길손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둠이 짙게 깔렸는데, 눈발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데 자고 가라는 호의도 무시하고 길을 재촉하다니. 아무리 갈 길이 멀고 급해도 이런 날씨에는 아늑한 곳에서 몸을 녹이고 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인데······.
 인간사에 찌든 노인의 본능은 길손이 수상쩍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망자?
 도망자라고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도망자가 무거운 돌덩이는 왜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자신은 또 왜 하찮기 이를 데 없는 돌덩이에 귀한 쌀까지 축내 더운밥을 지어주었단 말인가.
 “영감탱이가 망령이 나도 유분수지 이까짓 돌덩이를 뭐에다 쓰려고 방구석에 들여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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