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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무림 1화

2016.07.04 조회 1,903 추천 19


 <序>
 
 
 명(明)이 건국된 것도, 연왕(燕王) 주체(朱?)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세상은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고, 백성들은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향유했다.
 그러나 세상이 평화롭다고 풍진강호까지 그러하랴!
 영락(永樂) 십구 년, 중원 어디든 가리지 않고 득세하던 일월신교(日月神敎)가 사교(邪敎)로 지정되었다.
 일월신교의 전신인 배화교(拜火敎), 명교(明敎)가 그러했듯, 사교로 지정된 일월신교는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무림이 난세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정교라 주장하는 일월신교와, 사마척결의 기치를 높이 든 무림맹이 충돌하기 사흘 전의 일이었다.
 구당협(瞿塘峽), 기문(夔門).
 운해가 깔린 거석 위에 한 명의 노인이 좌정하여 빠르게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선이라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노인이 또 있을까!
 청색 장포를 갖추어 입고 수염을 그럴듯하게 늘어뜨린 노인은 명사가 그린 팔선도(八仙圖)에서 갓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조용히 앉아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는 맹(盟)을 가지려느냐?”
 노인의 뒤에는 차가운 얼굴을 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중년인이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교(敎)를 가지려느냐?”
 “그 또한 아닙니다.”
 좌정하여 앉아 있던 노인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노인이 옅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럼 너는 무엇을 하려느냐?”
 표정 변화 하나 없던 중년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핏 보자면 호방한 영웅과 같으나, 자세히 뜯어보면 효웅(梟雄)의 기상이 배어 있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들을 움직이려 합니다.”
 중년인의 말이 끝날 무렵,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노인은 바람의 결을 느끼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곧 노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천하를 열독 속에 밀어 넣고 말았어.”
 중년인은 묵묵히 서 있을 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탄식하던 노인의 눈동자에 고요한 평화가 깃들었다.
 “무학(武學)은 배워 본 적도 없거니와, 지략은 더 이상 쓸 데가 없도다. 이제 나의 시대가 다하였으니, 한 점 미련도 없이 가리라. 허나 알아 두어라. 하늘의 그물은 성기어 보여도[天網恢恢] 놓치는 것이 없으니[疏而不漏]······.”
 중년인이 대답 대신 한 걸음, 노인 쪽으로 다가갔다.
 중년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박도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었다.
 언제 발도(拔刀)했는지 모르게 나타난 박도는 가느다란 도광만을 비추고 도갑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휘이잉!
 서늘한 바람 소리와 함께 목이 잘린 노인의 신형이 운해 속으로 사라졌다.
 아득한 절벽 아래에서 무언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인은 노인의 빈자리에 짧게 읍하고는 무심한 태도로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또다시 효웅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늘의 그물?”
 중년인의 보보(步步)는 호쾌하고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의 앞길에 놓인 운명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거늘, 중년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베어 보이지.”
 거세게 흘러가는 강물이 중년인의 목소리를 지웠다.
 곧 중년인의 신형이 운해 사이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일월신교가 패퇴하여 청해(靑海) 너머로 물러났다.
 무림맹 역시 온전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문파가 멸문당하고 수많은 절기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니, 상처뿐인 승리라 말해야 옳을 터였다.
 세월은 속된 인간사를 조롱하듯 그저 흘러갈 뿐이었다.
 
 
 
 <제1장> 의뢰(依賴)
 
 
 1
 
 
 섬서성(陝西省), 안강(安康).
 안강은 예로부터 진나라를 대표하는 서안과 초나라를 대표하는 무한삼진을 연결하는 중요 요충지였다.
 오가는 사물이 많고 문화가 서로 교류하니, 천혜지지(天惠之地)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땅이 바로 안강인 것이다.
 그러나 강호의 무부(武夫)들에게 안강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천하를 경영한다는 무림맹이 바로 안강에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의 본당, 창룡검전(蒼龍劍殿)의 뒤편.
 후원 대신 꾸며진 자그마한 텃밭에는 한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울적한 얼굴로 텃밭을 둘러보던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작황은 영 좋지 않겠는걸.”
 노인의 뒤에 서 있던, 미려한 외모의 청년이 되물었다.
 “아직 봄이거늘, 가을걷이를 벌써 걱정하십니까?”
 “헐헐, 이 나이쯤 되면 반은 점쟁이가 되는 법일세. 올해 여름엔 가뭄이 질 게야.”
 “······.”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청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한들, 어찌 여름 날씨를 벌써 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갔던 일은 잘 되었는가?”
 “무불통지(無不通知)를 모셔 오지는 못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청년이 민망한 얼굴로 읍하여 머리를 숙여 보였다.
 노인은 텃밭으로 다가가 싹이 돋아난 벼를 어루만졌다.
 “역시 그렇게 되었구먼. 예상했던 일이니 너무 자책 말게, 운진자(雲眞子).”
 “다만 몇 가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노인이 말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을 수월히 진행하고 싶거든 황궁을 찾아 석명호(昔明弧), 석 학사(學士)를 청하라 하셨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잡초의 뿌리를 하늘로 향하여 올려놓은 노인이 허리가 아픈 듯 등을 두드렸다.
 “타인의 이목을 피하고 싶거든 장안(長安)을 찾아 원구장(袁舊章), 원 학사를 청하라 하셨습니다.”
 말을 이어 나가던 운진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노인은 하던 일만 계속할 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을 어렵게 하고 싶거든 무한삼진(武漢三鎭)의 한재선(漢再善), 한 학사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노인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노인은 천천히 잡초를 내려놓고는 손을 툭툭 털었다.
 “그렇다면 한재선이라는 친구가 좋겠구먼.”
 “일을 어렵게 하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운진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서(史書)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저 범부일 뿐, 열전(列傳)에 나올 만한 위인이 아니라네.”
 “백의검성(白衣劍聖)이 열전에 나올 위인이 아니라면, 천하에 누가 있어 무림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백의검성 유검학(劉劍鶴)!
 그는 시대의 거인이었고, 무림을 경영하는 일자(一者)였다.
 그의 현묘한 공부는 하늘에 닿았다 알려졌고, 인자한 성품은 굳이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킨다 했다.
 운진자의 말대로, 그가 아니라면 아무도 무림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할 터였다.
 “너무 거창하구먼. 그만하게.”
 노인, 아니 유검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유검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다른 이유가 있다면, 피를 보기 싫다는 이유일 걸세.”
 “피를 보기 싫다······?”
 운진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뇌었다.
 “열전을 만들자는 말은, 곧 내 보잘것없는 이름을 팔아 민심을 얻어 보겠다는 뜻일세. 마교를 토벌하자 주장하는 그들이 민심까지 등에 업는다면, 천하에 혈우(血雨)가 내릴게야.”
 “혈우라······.”
 운진자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마교가 패퇴한 지도 벌써 사십 년이 지났다.
 한때 천하를 장악했던 마교는 정도무림을 이겨 내지 못하고 청해까지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림맹은 아직 마교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했다.
 무림맹의 가장 중요한 안건 중 하나는 여전히 마교의 토벌이었고, 가장 많이 들리는 말 역시 ‘마교멸절’이었다.
 운진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흥! 모두 기득권 다툼일 뿐인 것을.’
 고인 물은 썩는다던가!
 사십 년의 평화 동안, 무림맹은 이득을 추구하는 무리들의 각축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교 토벌 역시 전쟁을 통해 금전을 벌어들이려는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통해 기득권의 확대를 노리는 거대문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나온 헛된 명분일 뿐.
 무림맹의 맹주인 백의검성 유검학이 제어하지 않았다면 벌써 선봉대가 조직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유검학이 주름진 얼굴로 혀를 찼다.
 “명분이야 옳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될 피를 억지로 볼 필요는 없지.”
 맹주의 열전이 완성되어 만천하에 알려지면, 틀림없이 민심이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맹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터.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한재선이라는 자에게 사람을 보내지요.”
 운진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하게. 누구를 보낼 생각인가?”
 “제 사제가 어떻겠습니까?”
 운진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 냉정하기만 하던 그였지만, 사제의 바른 성정을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해진 그대로, 교본 그대로 움직이는 사제는 고지식해 보였지만, 누구보다도 정도인다운 인물이었다.
 “무당(武當)의 현학(玄鶴)이라? 괜찮겠지. 자네 사제에게 이리 전하게. 무엇이든 그의 뜻을 따를 것이며, 다른 이에게 맡기지 말고 반드시 그에게서 원고를 받아 내라 말일세.”
 천하의 무불통지가 일을 어렵게 만들 사람으로 천거한 인물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연히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원고를 다른 이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이가 끼어들어 일을 제대로 처리해 버린다면 이모저모로 피곤해지는 것이다.
 “그리 전하지요.”
 “그래, 그래.”
 유검학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갓 자라난 나뭇잎에 내려앉은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검학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참, 그 한재선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이라던가?”
 
 
 
 2
 
 
 같은 시각, 청해.
 황궁에 비견해도 좋을 만한 거대한 전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세를 간직한 무인들이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단상을 바라보며 신음을 흘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본 교주의 명령이 이처럼 우스울 줄은 몰랐구나.”
 단상 위에는 타오르는 불길이 양각된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태사의 위에는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앉아 무심한 눈으로 좌중을 돌아보고 있었다.
 대전에 서 있던 배불뚝이 노인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삼가 신인(神人)께 고하옵니다. 뜻하신 바대로 소인의 목숨을 거두소서.”
 배불뚝이 노인의 눈에는 체념이 어려 있었다.
 살아날 길은 이미 사라졌으니 그저 명예롭게 죽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댓글(3)

ReDArachne    
다시 보아도 재미있군요. 전 번의 일은 잘 해결되었는지요?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2016.07.04 19:31
작면    
운전자
2018.04.14 06:13
절대영도A    
이거 정말 재밌습니다ㅋㅋㅋㅋ
2020.03.21 10:21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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