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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무영검(無影劍)

무영검(無影劍) 1화

2016.08.09 조회 2,894 추천 17


 제 1화. 전신(戰神), 척준경
 
 
 고려가 건국된 지 어언 백 수십여 년이 훨씬 지났다.
 황권이 안정되어 잠시 평화로운 듯 보이던 세상은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태조 왕건이 지방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펼쳤던 혼인 정책으로 그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외척과 황족은 황위를 위협하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 있었다.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황위에 오른 숙종 자신처럼, 어느 순간 수많은 황족 중 누군가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선이 닿아 있을 것이 분명한 저 믿지 못할 친황 호위대를 뚫고 자신의 침소에 자객이 들지 않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나인들 중 하나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독약을 넣지 않을까.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위협하는 황족이나 권문세가는 셀 수 없이 많았고 황제는 늘 불안에 떨며 낭떠러지 끝을 걷는 듯 하루하루가 두렵기만 하였다.
 세력이 제법 큰 황족이나 권문세가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적게는 수백여 명에서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르기까지 식객을 거느렸다.
 이들 식객은 언제라도 도성을 위협할 사병(私兵) 집단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런 세력가들은 암암리에 자객단을 키우고 있는 무림 단체들의 뒤를 봐주거나 자금을 대 주며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 아래 두었다.
 황제들이 자신의 주위를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였다.
 한편 외적들이 들끓는 국경도 어지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때 대대적인 정벌을 당하여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왜구도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해안 고을들을 괴롭혔다.
 민가를 헤집다가도 군대가 출병하면 벌써 어딘가로 도망치는 왜구놈들은 미꾸라지와 같은 존재였다.
 이 왜구들이 부스럼이라면 북녘의 여진족과 거란족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는 우환덩어리였다.
 이미 건국 초에 고려와 대규모 전쟁을 치룬 거란족은 대국(大國)으로 커버려 나라 이름을 ‘요(遼)’라 정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압수 건너 서북쪽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고려를 속국으로 삼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봐가며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막강한 기마대를 보유한 여진족은 고려의 동북면 천리장성을 수시로 넘나들며 이곳저곳에서 약탈과 방화, 납치를 자행하였다.
 침입하는 여진족은 수백여 명 정도가 무리지어 여기 저기를 약탈하고 재빠르게 사라지다보니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도적들의 수가 애매하였으나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여진 대부족장 오아속(烏雅束)의 군세가 부담이기도 하였다.
 여진족의 약탈에 백성들의 괴로움은 여간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일부 백성들은 아예 여진족에게 곡물이나 포목을 상납하며 비굴하게 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더 많은 국경지역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생활 터전을 버리고 남으로 피난을 내려와 유민이 되었다.
 도성 주위로 내려온 유민들은 살기 위해 무리를 지어 녹림 도적이 되거나 강도, 사기, 매춘 등 선량한 백성들의 생활을 불안하게 하는 일들을 하기에 서슴지 않았다.
 유민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소요는 하루를 멀다하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
 
 숙종에 이어 황위에 오른 예종은 황위 찬탈에 대한 불안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선황은 그나마 황위에 오르기 전 선황의 기반이었던 서라벌의 군사력이 있었지만 예종 자신에게는 그조차 없었다.
 자신의 비호세력을 스스로 만들어 황위를 지켜야 하는 황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백성들이 기뻐하고 황족을 끼고 있는 지방 호족이나 권문세가와 맞설 수 있는 믿을만한 수하들을 거둘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여진 정벌이었다.
 고려 예종 이 년, 천백칠 년 섣달.
 예종은 윤관을 대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십칠만의 별무반을 주어 대대적인 여진 정벌을 명했다.
 한 겨울에 들어선 북녘의 산과 들판은 시린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험준한 산과 산 사이를 휘감고 도는 삭풍은 동여맨 갑옷 사이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개경을 출발하여 빠르게 북상한 별무반 십칠만 대군은 천리장성을 넘어 정평성이 바라보이는 삼십여 리 떨어진 곳에 산을 등지고 진채를 내렸다.
 정평성에는 여진의 대부족장인 오아속(烏雅束)이 오만의 여진 정예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오아속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진 부족을 통합하고 여진족의 공포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북방의 효웅이었다.
 
 밤하늘에는 차가운 보름달이 떠 있었다.
 십여 기의 호위 기병만을 이끌고 산 위에 올라 정평성을 내려다보던 윤관 대원수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 나선 중군 병마녹사(中軍兵馬錄事) 중랑장 척준경에게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선무검문(禪武劍門)을 떠난 지 벌써 이십여 년, 떠나올 때 품은 뜻과는 달리 이룬 바 없이 세월만 흘렀구나!”
 “문주께서는 아직도 검문(劍門)의 문상(文相)의 자리를 비워놓고 아직도 대원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허허. 문주께서도 어지간하시지. 내 결코 검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실 텐데. 검문을 떠나오면서 나라의 안팎이 모두 평온해져 황제 폐하와 백성들의 근심이 사라질 때까지는 검문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씀을 올렸거늘.”
 “그리할 만큼 문주께서는 검문을 위해서 대원수의 지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검문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무공과 문파의 세력 확장에 대한 문주님의 열정이 깊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문파를 더욱 강하게 키우려는 문주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냐. 단지 이런 어수선한 세상에서 우리 검문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지. 그리고 검문을 위해서도 나처럼 문파의 주위를 겉도는 이단자들이 꼭 필요도 하고.”
 “네? 무슨 말씀이온지.”
 “우리 고려는 물론 옛날의 고구려와 신라도 무림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 하지만 유독 선무검문만은 문파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느냐?”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사옵니다.”
 “그건 선무검문의 존립 가치가 나라와 백성에 있다는 것, 이것이 황실에도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우리 검문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라와 백성을 향한 충(忠). 검문이 세워진 후 일천 년이 지났어도 이 믿음은 바뀌지 않고 이어지고 있지. 만약 우리가 무공에만 열중하고 강함에만 집착하였다면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위험한 존재로 보였겠지. 그러면 결국 우리도 다른 문파들과 같이 살아남지 못했을 게야.”
 “그러면 우리 검문도 나라에 대한 충성이 의심스러워지면 멸문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야 당연하겠지. 그러하기 때문에 조정 안에서 검문을 옹호할 인물이 필요한 게야. 그건 그렇고, 나는 네가 선황폐하를 호위하며 황궁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많이 놀랐다. 무공에 대한 너의 열정을 잘 알기에 너만은 일생을 무공의 끝을 알기 위한 수련으로 보낼 줄 알았거든. 내가 검문을 떠나올 때 네가 검문 후기지수 중에서 단연 최고수였지 않았느냐?”
 윤관은 척준경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 희미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커다란 도(刀)를 가지고 선무검문의 독문검법을 부드럽게 시전하는 것을 보면서 너의 무예에 대한 오성과 신력에 혀를 내둘렀다. 분명히 무공에 미쳐 검문 일천 년 역사상 최고수가 될 줄 알았거든.”
 “소장도 한때 충과 무의 경계에서 많은 갈등을 하였사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고향 곡산에서 보았던 그 모습들. 여진 기마대들에 의해 힘없이 유린당하던 이웃들의 처참한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사옵니다.”
 “허허. 다정(多情)도 병(病)이다. 너도 충과 협, 그 때문에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가 올 지도 모르겠구나.”
 “소장도 한때는 선무검문의 호법원(護法院)의 우호법을 지낸 몸이옵니다. 충과 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도 두렵거나 억울할 것은 없습니다.”
 윤관은 그런 척준경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 너는 충분히 그럴 녀석이지. 허허. 혹여, 검도(劍道)의 끝을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느냐?”
 “왜 없었겠사옵니까? 하지만 우리 검문의 무공은 너무 외공에 치우쳐 있사옵니다. 제법 높은 경지의 내공 수련에는 아예 관심도 없으니 말이옵니다. 검문의 무공만을 통해 무공의 궁극을 경험하기에는 불가능할 거라는 소장의 생각이 틀리지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하여 소장도 문주님께 청을 넣어 문외(門外)의 내공을 따로 익히지 않았사옵니까?”
 “우리 검문은 무공 수련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고 군주와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그리 엄청난 경지의 무공이 필요하지는 않아. 강함이 그 어떠한 집단이든 개인이든 집중된다는 것은 군주에게는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 아마 선무검도의 최고 경지에 대한 수련 방법들을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서서히 없앴겠지. 선대 문주들도 마지못해 따를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래서 문주님께서 강함에 집착하시는군요. 하지만 실전(失傳)된 검문의 비전절기가 다시 이어지지 않는 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이옵니다.”
 “아마 그렇겠지. 음. 혹여 중천(中天)에 대하여 들어봤느냐?”
 “세간에 전설로 전해오는 문파 말이옵니까?”
 “전설이라니? 중천은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느니. 단지 황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숨은 것뿐이지.”
 “그걸 어찌 아시옵니까?”
 “너는 내가 검문의 문상이었다는 것을 잠시 잊은 듯하구나. 검문의 천서전에 수장(收藏)하고 있는 이천 년의 기록과 황실의 임천각에 소장되어 있는 서적들 중 내가 볼 수 없는 기록은 없다. 그들은 무림을 인정하지 않는 황실과의 대결을 피하고 순수한 무에 대한 열정을 지키기 위해 스무 명 남짓한 적은 수만을 고집하지. 그리고 세상 속에 섞여 살아가고 있지. 살아오다 늘상 눈에 띄는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장사꾼일 수도, 산과 들에서 땅을 일구는 촌부일수도,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샌님일 수도 있어.”
 “세간의 풍문처럼 그들이 힘이 그토록 강합니까?”
 “글쎄, 솔직한 내 생각으로는 우리 검문보다 훨씬 강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스물두 개의 분타에 오천 여명 넘는 무인을 거느리고 있고 거기에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고 있는 우리 선무검문보다도 말입니까?”
 “오백여 년 전, 중원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혈황의 난’을 알고 있느냐? 그 난을 스무 명의 문도만을 거느리고 잠재웠던 천무검제(天武劍帝)가 당시 중천의 천주였었지. 그 때 보여준 그들의 무공은 경천동지(驚天動地), 그 자체였다. 그때 보았던 천무검제의 신위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중원에서는 그가 사라진 이후 태산에 사당을 짓고 역대 중화의 황제들과 똑같이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러하옵니까? 혈황의 난에 대해서는 천서전의 옛 문헌에서 잠시 본 것이 전부라서 잘 모르고 있었사옵니다.”
 “음. 그럴 테지. 그 때 혈황은 거느린 고수만도 이만에 달하는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스무 명이 이만의 고수와 싸웠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야. 어디 이만의 고수가 한 곳에 모여 있었겠느냐? 그 혈투의 처음이자 끝은 혈교의 본타에 모여 있던 오백여 명의 혈교 최상승 고수들과의 싸움이었지. 하루 밤과 낮의 혈투에서 혈황을 포함한 오백여 명의 혈교 고수를 몰살시키고 천무검제와 천주의 네 호위 중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더군.”
 “그렇지만 순수한 무에 대한 열정만으로 뭉쳐진 중천은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을 텐데. 어찌하여 중원 무림에?”
 “허허. 처음 들어보는 중천이란 문파도 그렇고. 중원 무림은 어리둥절하였지. 아니, 왜? 그런데 그게 세상일이라는 것이 모든 거미줄처럼 얽혀지게 마련이거든. 후후. 인생이란 덧없거늘, 현경을 바라보는 경지에 이른 혈황이었건만 진시황처럼 영생에 대한 유혹을 버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더구나. 혈황의 심복들이 불로의 영약을 찾아 신선의 산이라는 봉래산에 오게 되었고 그때 우연히 마주친 천무검제의 식솔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시신까지 훼손한거야. 아마 그때가 혈황이 중원 무림일통을 꿈꾸던 때라,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였겠지.”
 “천무검제의 식솔들도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겠사옵니까?”
 “아니, 그건 아니었을 게다. 무공뿐 아니라 천무검제가 무인이라는 것, 더 나아가 중천의 천주라는 것조차 몰랐을 테지. 그게 중천의 참모습이지. 세상에 숨는 것. 천무검제의 외모도 그냥 시골에서 늘상 마주칠만한 촌로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혈육에게 호신을 위한 정도의 무예도 전수하지 않다니요?”
 “중천은 혈육이라고 무공을 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에 대한 근성만을 가지고 후인을 선택하지. 그러기에 소수이면서도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천주는 자신이 문파의 장문이었기에 그에 더 얽매였을 테고.”
 “······.”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구나. 나도 가끔은 그들이 부럽다. 세상에 무관심한 그들이.”
 “소장은 이런 생활이 더 좋사옵니다.”
 “그래? 후후. 준경아! 저놈들을 그냥 들이쳐 볼까?”
 대원수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정평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원수께서는 이미 염두에 두신 것이 계시지 않사옵니까?”
 “너도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너는 참마도를 휘둘러 저 녀석들의 목을 쓸어 버렸으면 좋겠지. 허나 우리 군이 쳐서 몰아내야 할 여진 부족이 너무 많아. 저 성안에 웅크리고 있는 오아속의 완안부 오만여 명이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오아속이 명령만 내리면 십여만의 여진병들이 하루아침에 모일 것이다. 첫 싸움부터 힘으로 밀어붙여 무리할 필요는 없어. 이번 기회에 아주 뿌리를 뽑아야 하느니. 힘을 아껴 두거라. 저 미개한 족속들을 우리의 땅에서 몰아내야 되지만 우리 소중한 병사들의 피를 되도록 적게 흘려야 하니까. 그만 돌아가자.”
 윤관은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진채로 돌아온 대원수는 부원수와 군사 겸 참군 격으로 원정군에 참가한 병부상서 위계정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들였다.
 “경들도 우리가 황제 폐하로부터 받은 황명을 잘들 아실 것이요. 저 미개한 여진족들이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도록 옛 고구려의 땅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외다. 본관은 그 방법에 있어서 조금은 비굴하고 수치스러워도 좋다고 생각하오. 다만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지아비인 우리 군사들의 피를 적게 흘리게 하고 싶소. 위 상서! 좋은 계책이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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