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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메즈 1-1

2016.08.26 조회 6,016 추천 61


 1. 귀족 알바에서 만난 운명
 
 
 
 
 ‘침팬지 뇌······.’
 하얀 실험 가운을 입은 강토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이온 고정액이 가득 채워진 실험관이 손에 닿았다. 실험관 표면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졌다. 특수하게 제작된 실험관.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침팬지 뇌와 강토가 마주섰다. 실험관 안의 이온용액은 고요한 은빛으로 보글거렸다.
 보글!
 어떻게 보면 대구의 이리를 뭉쳐놓은 듯도.
 보글!
 또 어떻게 보면 뻥튀기 된 호두알 같기도······.
 이 침팬지도 백수였을까?
 한참 회자되는 인구론, 즉 인문계 졸업생 9할이 논다의 주인공이라 문송한 강토. 하다하다 뇌파실험 알바까지 경험하다 보니 침팬지 뇌에게서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인문계 9할이 놀고 있는 현실. 학비부터 유흥비, 용돈에 목마른 백수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든 알바였다. 특별하게 어려운 일도 아니면서 일급도 빵빵한 뇌파실험 대상자. 알파파, 베타파, 세타파 측정비교에 신경세포 검사 몇 가지, 가끔 뇌 표본과 놀아주거나 황공하게도 뇌파 장비 장착한 채 잠만 자도 되는 일. 샘이 난 덕규는 ‘마루타’라고 빈정거렸지만 다시없는 귀족 알바였다.
 거기다 최근 국가적 프로젝트 수행으로 주목 받는 뇌과학연구소였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까지 겹쳤다.
 혹시나가 뭐냐고?
 <연구소에 잘 보이면 정규직 낙점.>
 바로 그것이었다.
 정규직!
 그 얼마나 가슴골 벅찬 단어인가?
 대학 다닐 때는 컨설팅 회사 차려서 원만한 조직생활을 돕는 컨설턴트가 꿈이었던 강토. 막상 졸업하니 그런 건 사치에 불과했다. 하루하루 풀칠하기도 바쁜 판에 웬 꿈? 웬 컨설팅 회사? 계약직이라도 조건만 무난하면 땡큐를 따따블로 외칠 판이었다.
 그런데 뇌 연구소 직원들은 사립학교 교직원.
 무려 신의 직장으로 꼽히는 일터란 말이다.
 당연히 정규직으로 눈도장을 받을 확률은 정자가 난자와 도킹할 확률만큼 낮은 일.
 그래도 지원자들 안에서 최후의 일인으로 살아남았다. 그럭저럭도 아니고 난다긴다하는 SKY 이공계 현역들까지 물리친 쾌거였다.
 사실, 처음 지원했을 때에는 기분이 시궁창 오염 모드로 되기도 했었다. 출신 학교에 따라 알바 일당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SKY 졸업 및 재학생은 일급 20만원 다이아몬드 대우.
 -서성한 중경외시 라인은 15만원 골드 대우.
 -국숭숙세단 광명상가까지는 12만원 귀족 대우.
 -기타 지방대 포함 전문대는 10만원 꿀 대우.
 뇌 관련 알바라 그런지 지원자의 뇌에도 레벨을 매긴 모양이었다.
 강토는 세 번째 라인이었다. 어디 가도 개무시를 받지는 않지만 큰 주목도 받지 못하는 중하위권 인서울 대학 졸업생. 그 어정쩡한 타이틀 덕분에 졸업 후 취업 시험에서 32전 32패라는 불멸의 기록을 갱신 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역전타를 쳤다. 처음 100여 명으로 시작한 뇌파 배틀에서 최종 실험 대상자로 남으며 막강 경쟁력을 과시한 것이다. 게다가 어제, 수면 뇌파에서 마지막으로 밀어낸 경쟁자는 S대 4학년 재학생이었다.
 <최종 실험 대상자.>
 단어를 곱씹어보면 찝찝한 뉘앙스가 느껴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싸라비야!’
 미모의 정 박사에게 최종 통보를 받았을 때, 강토는 괜히 울컥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취업 과정에서 깨지고 밟힌 한이 액기스로 남았던 모양이었다.
 뇌파!
 단어가 키포인트였다.
 아이큐가 아니고 그냥 뇌파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끌리던 알바였다.
 뇌파에 대한 자신감의 근거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토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 강토는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성장기에 있었고 엄마도 살아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 이윤이 날 때마다 캄보디아의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고 있었다. 발단은 강토였다.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강토, 캄보디아의 오지 ‘코욱 모언’의 학교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이다. 그건 학교가 아니라 허름한 창고에 불과했다. 밤이면 쥐가 오가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애들이 불쌍해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 캄보디아에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언제 생각해도 아버지는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그중 한 학교의 준공식에 초대 받아 갔을 때였다. 캄보디아 밀림에는 스펑(spoan)나무가 많았다. 뿌리의 힘으로 인류의 유산으로 불리는 앙코르 와트 사원을 무너뜨리고 있는 바로 그 나무다. 뿌리가 어찌나 멋대로 뻗는지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나갈 기세였다.
 호기심에 학교 앞의 나무 위에 올라갔던 강토, 그만 발을 헛디디며 추락하고 말았다.
 뻥!
 중력의 법칙을 제대로 배웠다. 게다가 머리부터 떨어진 것이다. 머릿속에 뇌전이 빠직거렸다. 강토는 병원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깨어났다. 머릿속이 멍했다. 스펑 나무의 뿌리가 머리에서 멋대로 발을 뻗은 느낌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그저 작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뇌파였다.
 “뇌파가 특별하네요. 일반인보다 엄청나게 강한 거 같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병원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정전기로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몸에서 정전기가 잘 일어난 것이다.
 “앗, 따가워!”
 덕분에 친구들 좀 골려먹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옷을 벗으며 문지르면,
 빠지직!
 은빛 전류의 그물이 낙뢰처럼 보일 정도였다.
 인간 발전기!
 덕분에 그런 별명도 생겼다. 뭐 그뿐이었다. 악동 친구 녀석들이 배터리 충전하자고 놀리기도 했지만 정전기는 시나브로 약해져 버렸다.
 아무튼 그 덕분(?)에 이런 귀족 알바를 알려준 덕규는 떨어지고 강토는 붙었다. 게다가 최후의 실험 대상자로 남게 되었으니 전혀 연관이 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감격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았다. 최후의 경쟁자를 물리쳤지만 그의 일당까지 넘겨받는 건 아니었다. 일당은 실험 대상 알바생들의 수준별로 책정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단다.
 쉣!
 그나마 3주 정도 더 귀족 알바를 할 수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한 달 가까이 채우면 360여만 원······.’
 초거금이었다.
 그만한 자금이라면 앞으로 서너 달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면 알바 없이도 구직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토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실험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특별하게 제작된 실험관 속에는 크고 작은 뇌가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험관의 이온용액들도 제각각 색깔이 달랐다.
 무색!
 빨강!
 초록!
 은빛!
 늦은 밤, 가만히 뇌를 바라보면 기분이 묘했다. 때로는 오바이트가 쏠리기도 했고, 또 때로는 괜히 슬프기도 했다.
 ‘내 뇌가 달랑 도려내져서 저 안에 들어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우워어!
 몸서리 쳐지는 일이었다.
 우르릉!
 창 밖에서 번개가 울고 있었다. 오후 늦게 시작된 빗발이 더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4번 실험관 원숭이 뇌부터 6번 실험관 큰 침팬지 뇌까지 진행하고 잠시 쉬었다가 수면검사 들어갑니다. 시작하세요!>
 스피커에서 정 박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토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실험관에 딸린 실험 헬멧을 썼다. 오늘은 야간 실험일. 헬멧에는 무수한 첨단 센서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교감!
 뇌파로 그걸 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젖 먹던 힘을 다해.
 이 실험동 안에 있는 샘플 뇌들과의 감정 교환.
 강토는 그 말에 충실하게 따랐다. 강토가 살아남은 이유였다. 많은 알바생들은 코웃음을 쳤었다. 그 결과 수일 만에 탈락의 비애와 포옹을 해야 했다.
 뇌 표본하고 무슨 뇌파 교감?
 미친······.
 물론, 그 말에는 강토도 공감이다. 하지만 무려 12만원을 버는 귀족 알바였다. 택배 분류나 오토바이 배달 같은 노가다 알바 한 번 뛰어보라. 뇌 표본과 키스를 하래도 하게 될 테니까.
 -헬로우 미쓰, 아니면 미스터 뇌?
 -난 인간 이강토야.
 -나 느낄 수는 있냐?
 -그 안에 있으면 기분 어떤지 모르겠다. 꿀꿀하냐? 아니면 혹시 사이다 맛처럼 시원하냐?
 지지직!
 상상의 뇌파를 보낸다.
 못 할게 무엇인가? 마침 대학 때까지도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던 강토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은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세 발치 옆의 6번 실험관. 그 실험관이었다. 뇌 연구소 안에 있는 수많은 실험관 안에서 두 번째로 큰 뇌. 백지수표 차 박사가 미국에서 가져왔다는 침팬지 뇌가 감정을 전해온 것이다.
 감정!
 상상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이었다.
 <난 사람이야!>
 분명히 그런 울림이 건너왔다. 눈과 귀가 동시에 교감했다. 출렁하는 동공과 메아리치는 머릿속······.
 강토의 반응은 어땠을까?
 꽈당탕!
 혼비백산에 기절초풍. 바로 그것이었다. 놀란 강토는 뇌파 헬멧을 벗어던졌다. 정 박사와 차 박사가 뛰어 들어왔다.
 “이거 침팬지 아니죠? 사람 뇌죠?”
 하얗게 질린 강토, 온몸을 와들거리며 차 박사에게 물었다.
 차 박사!
 뇌과학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백지수표 박사로 불리는 그는 표정 없이 강토를 바라보았다. 다른 알바생들 표정보다는 많이 나았다. 그들은 죄다 ‘저 새끼 또라이 아니야?’ 하는 얼굴로 강토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강토는 또라이가 아니었다. 그건 강토가 최종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증명하고 있었다. 중도에 짤려 나간 알바생 안에는 SKY가 무려 여덟 명이었고, 그 안에는 의대생도 두 명이나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니 설마 의대생이 또라이인 건 아니겠지?
 “다시 해보게.”
 그때 차 박사가 한 말이었다. 혹시 짤릴까봐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온 건 싸아한 느낌뿐이었다.
 “갑자기 추운데요?”
 느낌을 그대로 전달했더니 차 박사, 강토 센서의 기록들을 살펴본 후에 실험실을 나갔다. 다행히 강토, 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같은 과정에 있던 경쟁자들이 전부 탈락했다.
 4번 뇌.
 강토는 그 뇌를 바라보았다. 뇌하고 놀아주기. 스스로 정한 테마는 그것이었다.
 ‘안녕!’
 ‘······.’
 ‘밖에는 비 와. 주륵주륵!’
 ‘······.’
 ‘이런 날은 덕규하고 컵라면에 소주 한 잔 까고 자면 좋은데.’
 ‘······.’
 ‘너도 잠은 자냐?’
 ‘······.’
 묻고 나니 헛웃음이 샌다. 고정액에 담긴 뇌가 하는 일은 영면이 아닌가? 영원한 잠······.
 <5번 샘플로 옮겨가세요.>
 정 박사의 멘트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5번 뇌는 고양이다.
 고양이?
 야옹!
 원숭이와 침팬지 사이에 웬 고양이? 생뚱맞지만 알 바 아니다. 강토는 4번 뇌에게 한 것과 비슷한 말을 건넸다. 비슷한 말을 건넸다. 샘플 뇌에서는 아웅아웅 하는 울림만 건네 왔다. 5번까지의 반응은 그랬다.
 <6번까지 하고 쉽니다. 아시다시피 차 박사님이 주목하는 샘플이니까 잘해보세요.>
 6번 뇌.
 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강토는 지금까지 이 뇌와 두 번이나 교감(?)을 나누었다. 한 번은 앞서 말한 그 사건이었고 또 한 번은 경련을 느꼈던 것. 실험참가 알바생들 중에서 유일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게 착각인지 혹은 뇌의 정상적인 반응인지 연구소 측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슬슬 미쳐가는 지도······.’
 때로는 밤 새워 수면 검사도 받아야 하는 일. 일은 고되지 않지만 피로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자정이 지난 밤, 저 수많은 뇌 샘플과 한 공간에 있어보라. 딱 우주의 사생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강토는 6번 뇌와 연결된 헬멧을 집어 들었다.
 우르릉!
 천둥은 본격적으로 몸살을 앓았다. 문득 실험관 안의 뇌를 죄다 꺼내 저 벼락 속에 던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락을 맞으면 뇌들은 어떻게 될까? 고소한 뇌 바비큐가 될까? 아니면 팔딱거리며 비명을 지를까?
 ‘안녕!’
 좀 슬프지만 다시 생존 알바에 충실했다.
 ‘······.’
 ‘저 소리 들리니? 천둥소리, 그리고 벼락 떨어지는 소리······.’
 ‘······.’
 ‘저거 한 방 맞으면 어떨까? 죽지 않고 살아나면 사람이 확 변할 수 있을까?’
 ‘······.’
 ‘그래서 좋은 데 취업만 되면 맞아줄 각오도 있는데.’
 ‘······.’
 ‘이상하게도 난 벼락이 무섭더라. 괜히 나를 골라서 떨어질 것도 같고······.’
 ‘······.’
 ‘어릴 때부터 그랬어.’
 잘도 논다. 이쯤 되면 영락없이, 정신적 마루타와 다르지 않았다.
 우엉우엉웅웅웅!
 그때 돌연 실험관의 울림소리가 커졌다.
 응?
 강토가 고개를 들었다.
 <계속 하세요.>
 강토가 흠칫거리자 정 박사의 멘트가 헬멧 안으로 들어왔다.
 끄덕!
 카메라 쪽을 향해 사인을 보내고 다시 실험관을 바라보았다. 까라면 까는 게 알바의 생리다. 아무리 최후 생존자라지만 개기면 한 방에 갈 수 있었다.
 ‘네네파바바아아.’
 순간, 또 다른 소음이 잠깐 감각을 밀고 들어왔다.
 설마?
 강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험관을 집중했다.
 응?
 돌연 미간이 찡그려졌다. 한순간, 뇌의 중심부에 살짝 경련이 인 것이다. 컨트롤 타워의 정 박사가 이온의 농도에 변화라도 준 걸까? 강토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6번 뇌의 중심부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네네 파파아아!’
 조금 더 선명한 소리가 울림소리로 전해왔다.
 ‘너?’
 강토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네 뇌파아아.’
 ‘파아아?’
 ‘네 뇌파!’
 몇 번 만에야 6번 뇌의 느낌이 선명하게 전해왔다. 놀란 강토가 벌떡 일어섰다.
 와당탕!
 의자가 넘어갔다.
 <왜 그래요?>
 정 박사가 물었다.
 “샘플 뇌가 말을 해요!”
 카메라를 바라보며 강토가 소리쳤다.
 <뭐라고요?>
 “네 뇌파··· 분명 그렇게 들었어요!”
 <헬멧 벗지 말고 계속 시도해 봐요.>
 “······?”
 <어서요!>
 “이거 죽은 뇌 맞아요?”
 <어서 진행하라니까요. 그냥 느낌에 충실하세요!>
 “침팬지 뇌 맞냐고요?”
 <내 말 안 들려요?>
 “화장실 좀 가야겠어요. 쌀 거 같아요.”
 <······.>
 “싸요?”
 <다녀와요.>
 정 박사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강토는 헬멧을 벗어놓고 이중 자동문을 지나 복도로 나왔다.
 “휴우!”
 식은땀과 함께 한숨이 밀려 나왔다. 벽에 기대 몇 번이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벌써 세 번째 느끼는 기묘기괴한 반응. 그때마다 박사들은 재촉하고 강토는 아뜩함에 떨었다.
 나······.
 이러다 미치는 거 아니야?
 계속 이러고 살아야 하나?
 울적한 생각이 들지만 일급 12만 원짜리 알바였다. 세상에 꽁으로 먹는 돈은 없다.
 
 촤아아!
 비는 미친 듯이 쏟아졌다. 멈출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 비를 뚫고 현관을 나서는 사람이 보였다. 차 박사였다. 옆에는 반듯한 정장의 장철환이 동행 중이다. 권력과 지식의 동행. 두 사람은 천하무적처럼 보였다.
 ‘청와대 사람······.’
 강토는 숨소리를 죽였다.
 ‘청와대 쪽 사람이 온다.’
 늦은 오후에 출근하면서 들은 이야기였다. 차 박사의 연구는 청와대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차세대 산업으로써의 뇌 과학 선두주자였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대통령도 다녀갔고, 막후 실세라는 장철환도 처음이 아니었다.
 대통령 임기 3년 말 진입.
 재임 기간 중의 치적 만들기라는 소문도 돌았다.
 ‘퇴근하시나?’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차 박사가 자가용 문을 열었다. 차종은 평범한 SUV. 전속기사가 딸린 벤츠가 있으면서도 종종 자기가 운전하는 사람. 오늘도 그 날이었으니 검소함조차도 최고에 속했다.
 한마디로 완벽한 사람!
 그가 바로 차 박사였다. 나이는 고작 40대 후반. 실력은 월드 특급. 재미 한국 과학자 중에서 수 삼년 내 노벨상이 유력한 사람. 그렇기에 명문대 도약을 노리는 수도권 K대학 재단 이사장이 백지수표를 주고 모셔온 귀하신 분이었다.
 강토도 몇 번 마주쳤지만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 온화한 표정도 그랬고 알바생도 무시하지 않았다. 준수한 외모에 키도 작지 않은 편.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백지수표!
 얼마나 받았을까?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액수가 궁금했었다.
 100억!
 강토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았던 S대생이 말했다. 다른 알바생들이 추측한 액수는 조금 더 올라가 500억에 도달했다. 미국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던 그가 100억 정도에 미래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대세였다.
 배웅은 정 박사가 하고 있었다. 차 박사의 최측근이자 이 연구의 야전사령관이기도 한 정 박사. 그녀 또한 30대 초반의 미녀로 미혼.
 ‘어쩌면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일 지도?’
 알바생들은 그런 말도 했었다. 그때마다 강토는 웃었다. 알 게 뭐란 말인가? 백지수표의 박사와 그 오른팔이 침대에서 나체 연구까지 같이 하든 말든.
 “강토 씨!”
 화장실에서 나오자 정 박사가 다가왔다. 옆에는 공진구 박사가 보였다. 연구소 안에는 이공계박사들 천지다. 공박사 역시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뇌 프로젝트를 맡다가 스카우트된 인물. 뻑 하면 미국 유수의 명문대 이공계니 문과 출신 강토가 더욱더 작아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 박사의 가운은 아까와는 달리 앞단추가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그건 지금부터 그녀가 이 연구소의 캡틴이라는 의미였다.
 “차 박사님이 주고 가셨어요.”
 그녀가 만 원권 두 장을 내밀었다.
 “네?”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드는 강토.
 “아까 일 말씀 드렸더니 강토 씨 잘 먹여서 실험에 집중시키라고 하시네요.”
 “아, 네······.”
 땡큐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었다. 알바생에게 거금 2만원 식비라니? 황송한 대우였다.
 “강토 씨 뇌파는 좀 특별하다는 거 알죠?”
 “네······.”
 자세히는 모른다. 그렇다니 그런 것이다. 덕분에 계속 알바를 하고 있으니 나쁠 것도 없었다.
 “차 박사님 기대가 크셔요. 보통 우리가 대뇌에서 알파파와 베타파는 잘 잡아내는데 세타파까지 선명한 사람은 드물거든요. 잘하면 이번 연구 끝나고도 알바 계속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정말입니까?”
 강토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이 연구가 잘되면 우울증이나 치매 치료약도 만들 수 있고요 사람의 뇌를 활성화시켜 신체 능력을 증진시킬 수도 있어요. 시냅스 가소성을 높여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죠.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고 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도 김 박사하고 외부에서 손님 좀 만나고 와야 하니까 기왕 쉰 김에 식사시켜서 들고 해요. 배달해주는 곳은 알고 있죠?”
 “네······.”
 정 박사는 공박사와 도란거리며 멀어졌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따라 펄럭이는 그녀의 가운이 의기양양해 보였다. 한 대학이 전폭 지원하고 청와대까지 주목하는 실험. 그 실험의 최일선 야전사령관이었으니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2만 원!
 뭘 시킬 수 있을까? 이 정도면 브랜드 치킨부터 탕수육까지도 가능했다.
 부먹 찍먹!
 생각만으로도 군침 꼴깍이었다.
 강토는 알바생 휴게실에 놓인 음식점 스티커를 바라보았다. 비는 잘도 퍼붓는다. 뭘 주문할까 하던 상상은 거기서 접었다.
 질릴 정도의 폭우였다. 배달 알바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씨였다.
 강토도 두 달 동안 햄버거 배달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날 배달이 들어오면 저주가 저절로 나온다. 달랑 1인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물함을 열고 컵라면을 꺼냈다. 알바생을 위해 무료로 제공되는 간식. 하지만 백수 알바 주제에 간식과 주식의 구분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후루룩!
 캬아!
 국물을 들이키며 혼자 탄성을 자아냈다. 라면은 역시 국물 맛이다. 요걸 적당히 마셔주고 자판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면 한 끼로 매우 훌륭했다.
 달각!
 동전이 투하되었다. 종이컵이 튀어나오면 쫄쫄 커피가 내려온다. 슬쩍 돌아보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 같이 바글거리던 알바생들. 어느 책에선가 인생은 혼자라더니 이걸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결국 혼자가 되었지 않은가?
 텅 빈 복도는 연구소를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새 실험동에는 강토 혼자. 이 실험을 주관하는 정 박사와 김 박사까지 나갔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이제 쯤 커피가 다 나왔겠지? 커버를 열고 손을 넣었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응?
 ‘돈만 먹은 거야?’
 본능이 작렬하며 발끈 자판기를 두드렸다. 순간,
 빠자작!
 믿을 수 없이 맹렬한 굉음과 함께 낙뢰가 떨어지며 사방을 암흑으로 덮어버렸다.
 ‘뭐야?’
 놀란 강토가 복도를 바라보았다. 어두웠다. 통로를 가리키는 비상등만 희미하게 반짝일 뿐이다.
 ‘정전?’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를 때, 다시 한 번 맹렬한 벼락이 실험동 건물을 갈기갈기 후려쳤다.
 빠자자작!
 콰당탕탕!
 위세에 놀란 강토는 자판기 옆으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대로 떨어졌다!’
 K대학에서 수천억 원을 들여 구축한 대한민국 최고의 뇌과학연구실. 그런 첨단 건물이 벼락을 맞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 실험실, 완전 안전 불감증이다. 방재실에서 경보음 장치를 꺼놓는 데가 더 많아.”
 대학 때 이과과목 수강실에서 이과생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서해대교에 떨어진 의문의 벼락도 떠올랐다.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도 그 운용에는 소홀한 것이 한국의 실정. 강토는 현관 방향을 가늠하고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뇌 표본실 앞을 지날 때였다. 안 쪽에서 푸른빛이 음산하게 일렁이나 싶더니 엄청난 폭음이 튀었다.
 퍼엉 퍼엉!
 ‘우웃!’
 강토는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실험실의 이중 유리 문이 박살 나면서 사방으로 튄 것이다. 고개를 드니 실험실 안은 이미 낙뢰의 전류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직지직!
 전류가 복도까지 느껴졌다.
 실제 상황!
 ‘자칫하면 죽는다.’
 모골이 송연해진 강토는 깨진 유리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일어섰다. 그때였다. 짐승의 아우성처럼 처절한 울림소리가 강토의 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살-려-줘.’
 조금 늘어지지만 또렷했다.
 살려줘.
 그건 귀에 익은 그 목소리. 사람의 것도 아니고 귀신의 것도 아닌 소리.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라기보다는 느낌에 가까운 그 소리······.
 ‘설마?’
 강토는 실험실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빛을 따라 펼쳐진 안쪽은 이미 지옥의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가장 작은 생쥐의 뇌부터 특이하게 주름이 없는 플로리다메너티, 가장 커다란 범고래의 뇌까지 거의 모든 실험관들은 박살 나 있었고 이온용액이 쏟아져 바닥까지 흥건한 후였다.
 우르릉!
 다시 번개가 갈기를 세우자 그 빛이 실험실에 반사되었다. 흥건한 이온 용액 위에 멋대로 흩어진 뇌 표본들. 그건 실험관 안에 들어 있을 때와는 달리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으어어!”
 비명과 함께 뒷걸음질 치는 강토. 정말이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강토였다.
 “살려줘!”
 소리는 조금 더 높은 울림으로 강토의 뇌를 흔들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마치 뇌 표본들의 합창 같은 울림소리······.
 “으아악!”
 절규와 함께 강토는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멀리가지 못했다. 물커덩, 뇌 표본 하나를 밟으면서 나뒹굴고 만 것이다.
 “······!”
 살려줘!
 다시 메아리가 이어졌다. 벽을 짚고 일어서 재빨리 실험실을 스캔해 보았다. 완벽하게 작살이 난 실험실 안. 그나마 성한 건 6번 실험관뿐이었다.
 살려줘!
 소리는 거기서 나왔다. 소리의 간격을 따라 이온용액의 색깔이 파르스름한 청색에서 적색까지, 빛의 스펙트럼을 이루며 너울너울 변해갔다.
 “너야?”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지금 네가 나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강토가 물었다.
 “그래. 나······.”
 6번 뇌가 대답했다.
 “설마······.”
 오싹한 마음에 한 발 물러서는 강토.
 “이미 내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만큼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미?”
 “네가 실험에 참가한 지 4일 째 되는 날.”
 “맙소사. 그럼 그게 진짜?”
 “살려줘······.”
 6번 뇌의 경련과 함께 이온용액의 색깔이 한 번 더 스펙트럼을 이루며 변해갔다. 그러고 보니 뚜껑의 이온평형 조절기가 박살 난 채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살려달라고?”
 강토가 물었다.
 “그래.”
 뇌가 대답했다.
 쉣!
 “뭘 어떻게? 넌 이미 죽은 거 아니야?”
 “죽었지. 하지만 죽지 못했지.”
 “······?”
 “네 이름은 이강토······.”
 “······!”
 “가까이 와주겠어?”
 “······?”
 “시간이 없어. 이미 이온 평형이 깨졌거든.”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박사님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고······.”
 “상관없어. 여기로 들어와서 나를 꺼내주기만 하면 돼.”
 “꺼내라고?”
 “저쪽 벽 앞에 이온 탱크 콘트롤러 보이지? 거기로 옮겨줘.”
 6번의 말을 들은 강토가 고개를 돌렸다. 벽 쪽의 콘트롤러는 무사해 보였다.
 ‘젠장!’
 실험관의 높이는 대략 1.5미터. 입수하지 않고는 꺼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꺼림칙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샘플은 차 박사가 아끼는 샘플. 이거라도 구해놓으면 알바를 계속 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정직원이 될 지도?
 꽈자작!
 주저하는 사이에 뇌전이 한 번 더 몰아쳤다.
 “어서!”
 절망이 희미하게 깃든 실험관 안 이온용액. 강토는 실험대 두 개를 당겨 6번 실험관 옆에 쌓아올렸다. 망가진 이온 조절기 덮개는 그냥 떨어졌다. 실험관의 직경은 80센티미터. 위에서 흔들어보니 생각보다 견고해 당장 무너질 판은 아니었다.
 “어서!”
 6번 뇌의 재촉이 다시 이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강토는 양 팔로 실험관 입구를 지탱한 채 두 발을 먼저 밀어넣었다. 그런 다음 발로 이온용액의 느낌을 체크해 보았다. 차갑지 않았다. 그리 뜨겁지도 않았다. 강토는 비로소 지지하던 팔을 놓았다. 강토의 몸은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뇌를 밟지 않으려 조심했다.
 ‘젠장!’
 아래쪽에 있는 뇌를 잡으려면 몸을 낮춰야 했다. 몸을 구부려 손을 뻗었다. 결국 얼굴이 이온용액에 잠기고 말았다. 찝찔하지만 참을 만했다. 더듬고 더듬어 뇌를 잡았다.
 물컹!
 “······!”
 기분이 기묘했다.
 “고마워!”
 뇌가 울림소리를 전해왔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섬뜩한 느낌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
 불길한 느낌과 함께 강토는 머릿속에서 뭔가 확 방출되는 게 느껴졌다. 마비의 호르몬이라도 나온 걸까?
 버둥거려보지만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지 마비.
 자유로운 건 생각 하나뿐이었다.
 돌기와 뿌리들······.
 부드러운 빛무리를 이룬 망상······.
 그러나 이계 생명체를 보는 듯한 낯선 느낌들······.
 ‘뭐야?’
 강토는 감았던 눈을 떴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 사물이 없었다. 강토에게 보이는 건 그저, 우주를 뒤덮은 망상구조의 범람뿐이었다.
 ‘이 느낌······.’
 마치 전자파를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듯한 느낌. 어두운 우주를 덮은 벼락의 갈기 같은 형상.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날. 이 연구소에 와서 이 6번 실험관의 뇌와 첫 교감을 나눈 날이었다.
 수면검사 알바를 마치고 퇴근했음에도 잠은 계속 쏟아졌다. 역시 남의 돈 따먹기는 쉽지 않았다. 김밥 한 줄에 컵라면을 해치운 강토는 덕규와 함께 사는 지하벙커에서 곯아 떨어졌다.
 무의식이었다. 온통 막막한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강토 자신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은 왔다. 그 공간에 강토의 의식이 서 있다는 느낌.
 광막한 공간은 문득 문득 빛 무리를 피워 올리다 무너졌다. 흡사 외계의 느낌이었다. 살아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돌기와 뿌리······.
 무한 반복되는 그것들은 돌기 사이에서 고요한 무엇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꿈은 3일간 이어지다 그쳤다. 다시 그 꿈을 만난 것 역시 6번 뇌 샘플과 연관된 날이었다. 그러니까 6번 뇌 샘플의 경련을 느낀 그날 밤, 강토는 또 비슷한 꿈을 꾸었다. 다만 처음 꿈보다는 조금 더 강렬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것들이 아뜩한 충격을 이루며 찬란하게 들이치고 있었다. 오직 강토의 뇌 안으로.
 “이제 알았군. 우리가 이미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시크릿 메즈!”
 “시크릿 메즈?”
 “메즈는 게임 용어. 둔화, 속박, 기절, 수면, 최면 등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기술이지. 알지?”
 “알기는 하지만······.”
 “그걸 위해 기억 오픈 센서가 장착된 뉴런의 시냅스를 네 뇌로 옮겨주는 거야.”
 “······?”
 “통할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이해해줘.”
 “이봐.”
 “네 뇌에서 정보를 읽었어. 나름 정의감이 있더군. 너라는 인간······.”
 “······?”
 “너라면 차 박사의 가면을 벗겨줄 거라고 믿어. 아니, 이 세상 모든 두 얼굴의 인간들까지도······.”
 “차 박사님?”
 “그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졌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박사님처럼 좋은 분이 또 어디 있다고?”
 강토는 몸을 일으켜 이온용액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마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아니면 무기력이거나······.
 “사람들은 다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믿지. 하지만 이제 알게 될 거야. 눈이 아니고도 보고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이봐, 풀어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모르겠어. 나하고는 상관도 없고.”
 “이미 상관이 있게 되어버렸어.”
 “풀어달라니까!”
 “부탁해.”
 그 소리와 함께 울컥, 강토의 몸이 부유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6번 뇌의 경련이 미치도록 느껴졌다.
 “······?”
 잠시 눈을 뜨는 순간,
 퍼억!
 6번 뇌가 눈앞에서 생체 그물로 변해 무수한 파편으로 튀었다. 파편 다음에는 파우더. 그렇게 변한 뇌 조각들은 순식간에 이온용액에 녹아들었다. 곧바로 다른 느낌이 왔다. 거대한 그물 느낌의 에너지 충격이 강토를 향해 들이치는 느낌. 온몸으로 들이친 그물형 파동, 뇌의 가장 깊은 곳에 닿더니 한 줄기 빛을 남긴 채 정수리를 통해 빠져나갔다.
 그건 지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천국도 아니었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느낌. 고통이면서도 고통이 아닌, 희열이면서도 기쁨이 아닌······.
 아아아!
 -죽는 건가?
 -안 돼.
 -이렇게 죽어서는 안 돼.
 -난 나중에 잘 되면 발라줘야 할 인간이 있단 말이야.
 -꼭 그러고 싶은 인간이 있단 말이야.
 아아!
 발버둥의 끝, 가엾게도 맥이 풀어지는 그 순간, 뇌 안에 남겨진 빛 한 줄기가 초신성의 폭음을 터트렸다. 빛은, 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찬란하게 발산되었다.
 후웅후웅!
 죽는다는 것!
 그건 말이지······.
 아버지의 말이 영상처럼 스쳐갔다. 죽는 순간이 오면 사랑했던 사람들이 보인다고 했다. 평온하고 고적한 옛 풍경 속에서 그들을 만난다고 했다. 그 손을 잡으면 비로소 빠르게 공간이 바뀐다고. 엄마도 그랬다고 했다.
 -엄마······.
 -어디 있을까?
 -불의의 사고로 먼저 간 엄마······.
 웅웅우웅!
 귀전을 때리는 울림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제어불능의 그 소리가 최고조에 이르나싶을 때, 펑 하는 폭음과 함께 실험관이 터졌다.
 “우워어, 정 박사님!”
 어디선가 김 박사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애애앵!
 119 사이렌도 들렸다.
 탁탁탁!
 소란스러운 발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야속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뇌부터 수습해요. 알바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녜요!”
 정 박사의 목소리였다.
 ‘썅년······.’
 강토는 목을 넘어오는 소리를 다 뱉지도 못하고 의식의 한 줄까지 놓고 말았다.
 
 우주였다.
 우주가 아니면 전자파의 바다였다. 그 중심에 빛 한 줄기가 있었다. 그곳은 완벽한 신세계이자 친숙한 공간이었다. 낯설면서도 아늑한 느낌··· 가만히 손을 뻗었다. 아무런 자극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가 닿지만 느껴지지도 않았다.
 죽었나?
 죽었군.
 전파의 공간 안에서 강토는 생각했다.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면, 적어도 짜릿함 정도는 느껴질 테니까.
 사방은 같은 풍경이었다. 파동의 무한 반복. 어쩌면 촉수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생체 그물 같기도 한 그것들. 때로는 초록으로 또 때로는 분홍으로 색을 바꾸며 장대하게 줄을 이었다.
 그 막막함이 하나하나, 기억으로 변하며 강토에게 다가왔다.
 아기가 보였다.
 점점 선명해졌다.
 귀여웠다. 하지만 다리가 흔적뿐이었다. 선천기형아··· 아기 옆에 젊은 차 박사가 보였다. 차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차 박사는 아기를 외면했다.
 아이가 자랐다. 엄마와 둘이었다. 아이는 특별했다. 다리가 없는 대신 뇌가 남달랐던 것이다. 누운 아이는 뇌력으로 작은 물건을 옮기고, 스위치를 켜고, 뇌파만으로 키보드를 조작해 상대방 컴퓨터의 내용을 뽑아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그저 눈을 움직였을 뿐. 엄마조차 아이가 고백하기 전에는 알지 못할 정도였다.
 엄마는 걱정되었다. 장래도 그렇고 남다른 능력을 가진 뇌도 그랬다. 차 박사는 세계 최고의 뇌 과학자로 우뚝 선 그때. 아이를 위해 차 박사를 찾아갔다.
 아이는 스무 살 청년이 되어 다시 차 박사를 만났다.
 차 박사는 미소로 모자를 속였다. 휴양지 여행을 핑계로 모자를 불러내 약을 먹였다. 그리고 자신의 실험실로 옮겼다. 약은 박사가 만든 특별한 신경계통의 극약. 숨이 멈춘 모자는 사망자로 분리되어 박사의 집도를 받았다. 산 채로 뇌가 적출된 것이다.
 차 박사는 자신의 과거가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완벽한 스펙에 이물이 끼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뇌는 필요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뇌. 자신의 연구에 딱 쓰임이 될 것 같았다.
 생생한 영상은 아이의 안구가 뇌에서 분리되면서 끝났다. 차 박사의 야릇한 미소가 대미를 장식했다. 그의 손에는 금세라도 펄떡거릴 듯한 청년의 뇌가 들려 있었다. 김이 모락거렸다.
 딸깍!
 기억 영상은 그렇게 꺼졌다.
 살이 떨렸다. 기억 안에서 보았던 영상. 그건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의 느낌이 아니었다. 장면이 아니라 정보로써 기억에 저장되어 버린 것이다.
 헤이!
 잠시의 간격을 두고 소리가 밀려왔다. 이번에도 청각이 아니라 의식이었다. 느껴본 적 있는가? 귀가 아니라 머리를 치고 들어오는 소리······.
 6번 뇌?
 강토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하지만 이제는 네 일부가 되었지.
 내 일부?
 -미안, 정식으로 허락 받지 못해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네 뇌 안의 약간의 기억과 함께 신경세포망 네트워크에 비밀을 관장하는 뉴런을 옮겨주었어.
 기억?
 -방금 전 그것··· 유쾌하진 않았을 테니 미안해.
 그 기억··· 대체 뭐지? 영화야 실화야?
 -곧 알게 될 거야.
 좋아. 그런데 뉴런은 또 뭐지?
 -뉴런을 모르나? 인간의 뉴런은 1,000억 개. 하지만 너는 내 안의 1,000억 뉴런을 압축한 10,000개의 특별한 뉴런을 더하게 되었어. 보통 뉴런과 다른 매직 뉴런, 불멸의 뉴런이지.
 불멸의 뉴런?
 -그래. 인간의 뇌 기능을 컨트롤할 수 있는 특별한 파워를 가진 뉴런. 나이 먹는다고 잠들거나 침묵하지 않는 뇌 신경세포 뉴런. 현재 완성된 매직 파워는 하나하나 다 가동해보지 못했지만··· 이젠 네 거니까 너 하기 나름이야.
 뉴런···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하지만 난 문과라서 중학교 때 그저······.
 -몰라도 상관없어. 이건 그저 본능적인 거니까. 처음에는 게임 초보 유저처럼 서툴고 힘들겠지만 계속 하면 쓸 만할 거야. 계속하면 실력이 된다. 알지?
 무슨 말인지······.
 -한때는 게임 좀 했잖아? 플 삼위일체에 드캐 있는 친구 보면 부러웠고······.
 그거야 호기심이었지. 게임 폐인하고는 거리 멀어.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네 뇌 안에 불멸의 매직 아이템 하나가 장착된 거라고. 게임하면 그런 거 바라잖아? 남들에게 없는 나만의 아이템 득템.
 불멸의 매직의 아이템?
 -상대의 패 하나를 까볼 수 있는 치트키랄까? 그 이름 시크릿 메즈!
 시크릿 메즈?
 -메즈, 몰라? 게임에서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스킬.
 알기야 하지만······.
 -거기서 따온 건데 익숙해지면 그 누구의 방어도 저항도 허용치 않아. 당장 가능한 건 비밀 추출이지만 그것도 가치 없는 건 아니지. 치명적인 비밀만큼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드물잖아. 차 박사처럼 구린 인간에게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거야. 생체를 해킹하는 원리라 흔적도 남지 않고.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현실도 게임과 다를 바 없어. 상대의 눈을 통해 뇌의 신경세포를 장악하는 거지. 내 머리에 들어온 타인의 기억. 그 주인은 누구일까?
 그저 눈을 보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눈은 뇌의 스크린이니까. 뇌로 가는 고속도로······.
 아무런 절차나 대가도 없이?
 -대가와 수련은 내가 치렀어. 실험관 속에서······. 주검보다 더 고통스러운 아픔을 참으며 게임이론을 적용시켜 보았지. 그러니 너는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너··· 뇌에 접속해보니 좋은 직장에 취업이 되면 혼이라도 빼줄 용의가 있더군. 그런 각오라면 뭐가 문제야?
 제대로 돌았군. 공상과학소설광이었나? 아니면 게임 광폐인?
 -상관없어. 네 뇌파는 제법 특별해. 그래서 내가 모든 것을 걸고 키운 생체 스킬의 힘을 심어주는 게 가능했지. 그러고 보면 이것도 운명이야.
 내 뇌파?
 -그 능력 때문에 알바에서 최후까지 선택된 거니까.
 비슷한 말은 들은 것 같아.
 -보통 사람의 200배. 네 세타파는 정말 매력적이었지.
 무슨 말인지······.
 -기본 스킬은··· 처음에는 무조건이야. 최근 비밀 우선이지. 나도 아직은 뉴런의 패턴을 거기까지밖에 정리하지 못했어.
 이봐!
 -일단 써보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업그레이드하도록 해. 게임처럼 말이야. 타인의 뇌는 다 너의 서버와 다름없으니까.
 좋아. 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쳐.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너는 어떻게 뇌 표본 상태로 살아 있던 거지?
 -내 뇌 덕분이었지.
 뇌?
 -내 뇌는 특별했거든. 덕분에 차 박사도 내 뇌에 매력을 느껴 ‘유지’시켜준 거고.
 난해해.
 -요점만 말하면 이래. 차 박사는 우리 모자를 죽이러 왔지만 내 뇌 기능에 반해 자기 연구에 쓰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몰래 약을 먹인 후에 뇌를 꺼냈지. 그때··· 나는 내 생체 에너지를 전부 뇌의 뉴런에 저장해 두었어. 덕분에 뇌만 남았어도 생존이 가능했던 거지.
 차 박사도 알아?
 -반 반? 내 뇌가 워낙 특별했으니까 기능 일부가 반응한다는 건 눈치챈 것도 같아.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건 모를 거야.
 그럼 아까 내가 본 네 기억이 사실이라는 거네?
 -응!
 말도 안 돼!
 -청개구리 알아? 그놈은 겨울이 오면 심장 부근만 빼고 다 얼어버려. 생존 전략이야. 온몸의 에너지를 그곳에만 소모하면서 겨울을 나지. 거의 죽었다고 봐도 되지만 봄이 오면 불사신처럼 깨어나거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말이야. 세상에는 불가사의가 한둘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떤 불가사의는 시간이 지나면 그냥 당연한 일로 바뀌기도 하거든.
 허얼!
 -시간이 없으니까 한 가지만 부탁할게.
 부탁?
 -깨어나면 차 박사의 눈을 바라봐줘.
 눈?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야.
 차 박사가 나쁜 사람이라고?
 -아주 악질이지.
 설마?
 -어떤 사람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도 해. 그가 숨긴 비밀을 밝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왜 그래야 하지?
 -너는 알고 있었으니까.
 뭘?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거.
 6번 뇌······.
 -내 이름은 차태혁··· 죽은 척 했지만 필사적으로 살았어. 내 왕국인 이온용액 안에서······.
 무슨 말인지··· 그나저나 한국인이었나? 미국에서 가져왔다고 들었는데?
 -넌 이미 내 기원을 알고 있어. 그러니 다만 이름만 기억해주면 돼. 차 박사의 눈만 바라보면 돼.
 눈? 그게 다야?
 -그 이후까지는 내가 관여할 수 없을 테니까.
 이봐. 6번 뇌.
 -마음 같아서는 그 인간, 직접 죽여달라고 하고 싶지만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원한이 있구나?
 -그런 거 있어. 가장 기대했다가 가장 처절하게 배신당한 원한. 그걸 갚아주기 위해 혼을 뇌에 모았고 그 힘으로 박사를 연구했는데······.
 박사를 연구해? 말이 거꾸로야. 차 박사님이 너를 연구했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겠지. 하지만 아니야. 연구의 주체는 나였어. 그들이 나를 관찰한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관찰하고 명령한 거지.
 명령까지?
 -강력한 세타파··· 그걸로 상대와 동화되면 가능해. 간단한 명령··· 예를 들면 이온액 농도를 바꾼다든지 온도를 조절한다든지. 만약, 내가 뇌 표본이 아니었다면 더한 것도 가능했을 거야. 상대의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까.
 허얼!
 -아무튼 슬슬 그 인간을 징치할 수준에 이르고 있었는데··· 미안,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네. 느닷없는 낙뢰 덕분에······.
 대체······.
 -눈··· 부탁해. 그걸 보면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대신 힘들더라도 두 번 봐줘.
 두 번!
 -응, 두 번!
 그 말은 변곡된 음처럼 멋대로 늘어져 버렸다. 동시에 우주가 단 하나의 물체로 집약되기 시작했다. 끈끈한 촉수를 가진 이상한 물체. 꼬리의 돌기들이 무수하게 손을 뻗는 괴상한 운동성. 그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아스라한 이온 물질. 그것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강토 앞에서 우아한 빛이 되더니 꾸벅 인사를 남기고 소멸해 버렸다.
 안녕!
 아련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6번 뇌의 소리였다.
 화아악!
 화답이라도 하듯 강토의 뇌 안에 찬란한 섬광이 터져 올랐다.
 우억!
 화아아악!
 제곱 단위로 밝아지던 섬광은 딸깍, 하는 감각과 함께 순식간에, 제로로 돌아갔다.
 “우어억!”
 강토는 생경한 느낌에 몸을 비틀며 눈을 떴다.
 지직!
 “······?”
 지지직!
 온몸을 자극하는 전율이 느껴졌다. 흡사 생체전기랄까? 그런 느낌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오르락거렸다. 다행히 죽도록 아프지는 않았다.
 휴우!
 숨을 고르자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 번 더 고르자 이제는 차라리 개운했다. 머리 밀도가 높아지고 사이다의 탄산으로 뇌 청소한 기분이랄까? 눈빛도 어쩐지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강토는 머리를 갸웃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거긴 흰 벽이었다.
 왼쪽!
 “······?”
 참담한 풍경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흰빛에 섞인 소독약 냄새와 신음소리. K대학 부속병원이었다. 그것도 중환자실이었다. 멀리 겨누었던 시야를 가까이 거둬들였다. 마지막으로 강토의 눈에 닿은 건 바로 옆 침대의 환자였다.
 ‘차 박사?’
 강토는 눈을 의심했다. 강토의 옆에 누운 사람은 백지수표 차 박사가 분명했다.
 
 
 
 
 2. 시크릿 메즈
 
 
 
 
 ‘차 박사가 왜?’
 깊게 생각할 여력도 없이 머리가 아뜩해지면서 온몸에 맥이 풀렸다. 강토는 까무룩 무너졌다.
 “어머!”
 그 모습이 간호사의 눈에 닿았다. 그녀가 다가와 강토의 눈을 까뒤집고 플래시를 비췄다.
 “선생님, 이 환자 정신이 들었어요!”
 간호사가 소리치지만 의사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중환자실, 누군가 방금 죽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그저 일상에 불과한 일인 모양이었다.
 “차 박사님은?”
 때늦게 다가온 의사의 관심은 차 박사에게 있었다.
 ‘나쁜 새끼.’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했을 주제에 환자 차별이라니. 강토의 목구멍에서 욕설이 아른거렸다.
 “아직······.”
 “이 환자가 현장에서 발견된 알바생이었나?”
 강토를 향한 의사의 말투는 심드렁하게 들렸다. 중환자실에서조차 강토는 찬밥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재수는 좋군. 위기는 넘긴 거 같은데?”
 강토를 체크한 의사가 중얼거렸다. 강토의 귀에는 빈정거림으로 들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 죽통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만한 힘이 근육에 맺혀오지 않았다.
 “이 친구는 됐으니까 내일 아침에 일반 병실로 옮기고 차 박사님에게만 올인하도록.”
 의사는 지시를 남기고 멀어졌다. 간호사의 발걸음도 의사를 따라갔다.
 ‘씨발······.’
 실험실에서 마지막으로 뱉었던 욕설이 다시 혀끝에 맴돌았다. 가련한 알바생 처지 같으니. 만약 박사급 연구원이거나 정직원이었다면 이런 대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백지수표 차 박사는 왜?
 숨을 고르고 차 박사 침대를 돌아보았다. 다시 보아도 차 박사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갑자기 알지 못할 적개심이 느껴졌다.
 적개심?
 고개를 저었다. 존경하는 차 박사에게 웬 적개심? 아무래도 병원에 누워 있을 만한 상태가 분명했다.
 아무튼 논리는 명쾌하지 못했다.
 차 박사!
 분명 청와대 측 인사와 퇴근을 했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 유유히. 실험실 사고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차 박사가 끼어든 상황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 백지수표가 강토 옆에 누워 있단 말인가? 왜 여기 누워서 알바 신세를 한 번 더 비참하게 만든단 말인가?
 가만히 손을 들었다. 더럽게도 많은 선이 달라붙어 있었다. 손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실험관에서 뒤집어쓴 이온용액 생각이 난 것이다. 그 안에서 잡았던 6번 뇌와, 폭발한 그것 생각이 난 것이다.
 “······?”
 겉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그 일들은 다 꿈이었던가? 뭐 그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강토가 6번 뇌의 이온관 안으로 들어간 일조차도 꿈일지 몰랐다.
 불멸의 뉴런?
 매직 뉴런?
 그런 게 있을 리가.
 하지만!
 꿈이 아닌 게 있었다. 손끝이었다. 손목이었다. 그리고··· 팔과 어깨, 심지어는 눈과 머릿속까지도······.
 지직!
 뭔가 느껴졌다. 소리조차 없는 뇌 안의 아우성. 캄보디아의 스펑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그때 느꼈던 것처럼 머릿속에 전자파 덩어리 같은 게 기어들어온. 그러나 그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 강토는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 보았다.
 뒤척!
 비틀면 어깨를 따라,
 바스락!
 발을 들면 하체를 따라,
 온몸에서 생체파가 지글거리는 느낌이 따라왔다.
 ‘시냅스?’
 희미하게 보였다. 뉴런의 흔적이다. 저희들끼리 말단으로 연결되어 통통거리고 있다. 눈을 감았다 떠도 결과는 같았다.
 말도 안 돼.
 6번 뇌가 말한 뉴런이, 온몸에 방탄 갑옷으로 휘둘러졌단 말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 박사와 김 박사, 하다못해 연구소 직원이라도 찾아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 건지······.
 그때 간호사 데스크 앞의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하는 가운데 여당 내에서 자파 공천을 위한 기세싸움이 극에 달해 국민들이 스트레스를······.”
 정치 뉴스······.
 병실에서도 피할 수 없는 뉴스였다. 여당 거물들이 화면에 아른거리더니 보도가 바뀌었다.
 “다시 사건사고 소식입니다. 나흘 전 발생한 K대 뇌과학연구소 폭발사고는 낙뢰로 인한 사고로 밝혀졌습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연구소 측이 설비용량을 초과하는 실험기자재의 작동으로 과부하를 일으킨 혐의를 잡고······.”
 강토는 뉴스를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앵커의 말은 천천히 이어졌다.
 “한편 같은 날 청량리 유흥가 부근의 건물 뒤에서 의식불명으로 발견된 뇌과학연구소장 차일환 박사의 사고는 연구소 사고와는 무관한 것으로 연구 과중으로 인한 심근경색의 발작이 원인······.”
 앵커의 말은 거기서 잠시 끊겼다. 반대편 구석의 중환자가 비명을 지른 까닭이었다. 간호사들이 달려가서 수습이 되고서야 앵커의 뉴스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상으로 사건사고 소식을 마치겠습니다.”
 “······?”
 강토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잠깐 듣지 못한 구간이 있지만 강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 또한 존재감 없는 알바생의 비극이었다.
 “저기요!”
 의식이 제대로 돌아온 강토가 간호사를 불렀다. 아까 그 간호사가 강토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침대 각도를 세워준 간호사가 물었다.
 “물 좀 마셔도 돼요?”
 “아직요. 의사 선생님께 물어볼게요.”
 “그냥 한 잔 주세요.”
 “네?”
 “안 마시면 죽을 거 같다고요.”
 “아, 알았어요.”
 간호사는 마지못해 수락해 주었다.
 물맛은 쓸개즙처럼 썼다.
 나흘!
 나흘이란다. 강토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시간. 그동안에 몸 안에 무슨 조치를 해놓은 걸까? 조금 더 자유로워진 손으로 몸을 확인해 보았다. 크고 작은 외상이 보이지만 큰 대미지는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 제가 담당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간호사는 신신당부를 하고 중환자실을 나갔다.
 다시 강토의 눈에 차 박사가 들어왔다.
 다시 까닭모를 적개심 작동.
 젠장!
 그나저나 심근경색?
 이 사람, 심장이 안 좋았던가?
 아이러니였다. 병을 고치는 의사가, 그것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뇌과학자가 자기 질병 하나 간수하지 못하다니. 왠지 무술 고단자가 동네 양아치 일진에게 개박살 난 것처럼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차 박사가 꿈틀 손가락을 움직였다.
 “······?”
 잠시 후, 차 박사의 눈꺼풀도 저절로 열렸다.
 “······!”
 차 박사의 무의식적 경련이었다. 초점 없는 눈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강토는 눈을 감았다 떴다. 바로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뇌 깊은 곳에서 아드레날린이 자극되며 전의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직지직!
 인체 표면을 따라 강력하게 올라오는 뇌파의 자극. 전기적 자극인 듯 화학적 자극인 듯한 그 자극. 동시에 또렷한 생각 하나가 강토의 뇌를 압박해 들어왔다.
 눈!
 차 박사의 눈.
 ‘차 박사의 눈을 바라봐 줘.’
 6번 뇌가 말하던 바로 그 눈.
 ‘눈을?’
 시크릿 메즈!
 불멸의 매직 뉴런!
 그거 꿈 아니었나?
 강토는 주저했지만 시선은 벌써 차 박사의 눈을 겨누고 있었다.
 
 울컥!
 강토는 소리 없는 파동막을 맞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아우성이 일어난 것이다. 피부였다. 머리였다. 끝도 알 수 없는 뇌 속이었다. 머리에서 발원된 파동은 눈을 통해, 소리도 형체도 없이 날아갔다. 그 파동이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차 박사의 머리였다.
 광속!
 그런 비행기를 타고 밖을 내다보면 이런 기분일까? 아찔한 속도감 속에서 차 박사의 뇌 속 구조가 언뜻언뜻 엿보였다.
 강토의 뉴런은 강력한 이온의 힘으로 겹겹 진을 친 시냅스의 문을 열었다. 맞춤형 나트륨 이온 앞에 축색은 스파인을 부풀리며 화답했다.
 전두시각령의 주름을 지나고 전두 연합령을 지나고, 두정엽과 후두엽을 통과했다. 다음으로 편도체의 뉴런들을 지나 유두체, 해마옆이랑을 끼고 해마에 닿았다. 거기서도 쉬지 않았다. 기세를 몰아 대뇌피질로 들이친 6번 뇌의 뉴런들은 측두엽의 시각령과 청각령을 낱낱이 훑더니 기억을 획득하는 CA1령,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CA3령까지 도달한 후에야 광속 돌진을 멈췄다.
 모든 것은 순식간. 그것은 마치 엔터 명령을 따라 검색어를 보여주는 컴퓨터와 같았으니 광속으로 측두엽에 도착한 뉴런은 여섯 층의 단계를 밀고 내려가 차 박사의 기억 서랍을 열었다. 심연보다 더 깊은 은밀함의 끝이었다.
 시크릿 메즈!
 그 믿지 못할 시킬이 시전되는 순간이었다.
 오픈!
 첫 서랍에 닿았다. 그게 비밀이라는 것, 감정으로 이입되어 왔다. 마치 강토 자신의 비밀을 은밀하게 떠올린 것처럼.
 ‘웃!’
 한 번 더 움찔하는 사이에 최초의 서랍이 열렸다. 기억을 따라 정보가 강토에게 역입력되기 시작했다.
 여자가 있었다.
 청량리 588 부근이었다.
 골목 끝에 정육점 불빛 네온사인이 보였다.
 장미모텔!
 낡은 간판의 작은 모텔 안이었다.
 차 박사는 늘씬한 여자와 변태적인 성교에 몰입했다. 구석에는 우산이 보였다. 연구소에서 쓰고 나간 그 우산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온갖 변태적인 성교를 마친 차 박사는 마지막으로 여자의 나신 위에서 야수의 교성을 내지르며 폭발을 마쳤다.
 오서영!
 기억 속에서 선 여자의 이름은 오서영.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속옷을 챙겨 입은 그녀 앞에 돈뭉치가 던져졌다. 5만 원권 한 다발이었다. 여자는 껌을 짝짝거리며 돈뭉치를 집더니 차 박사의 지퍼를 열고 물건을 꺼내 라스트 서비스를 안겼다. 기름진 단발머리를 한 채 고혹적으로 올려보며 서비스에 몰입하는 여자. 천국을 들락거리는 차 박사. 가히 환상의 짝꿍 파트너였다. 게다가 박사는 여자의 단골.
 단골······.
 <새디스트!>
 차 박사의 온화함 뒤에 숨은 건 새디스트.
 초절정의 변태였다.
 비밀스러운 기억정보를 넘겨받은 강토는 머리를 저었다. 이게 무슨 변괴란 말인가? 차 박사의 기억이 반응하는 것도 생경했지만 고귀한 백지수표 박사가 변태라니?
 우욱!
 스킬 시전이 끝나자 부작용이 따라왔다. 강토가 휘청 흔들렸다. 라면발 같은 뇌 주름이 마디마디 잘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맥이 하염없이 풀리며 아찔해진 것이다.
 하아하아!
 기를 쓰고 버텼다. 의식은 한참이 지나서야 느슨하게 돌아왔다. 단순히 눈을 바라본 것에 불과하지만, 굉장한 대미지가 분명했다.
 하아하아!
 겨우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시크릿 메즈.
 -매직 뉴런!
 6번 뇌 차태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귀한 백지수표 박사가 변태성욕자?’
 그 또한 엄청난 충격이었다.
 차태혁이 밝히고 싶었던 진실은 이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변태의 희생자는 혹시 6번 뇌 자신? 어쨌든 숙제 하나를 풀었다. 6번 뇌가 말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뇌 안에 불멸의 매직 아이템 하나.’
 차태혁의 말처럼 특별한 건 틀림없었다. 타인의 비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스킬이라니. 게임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니. 초대박이 아닌가?
 응?
 한숨을 돌리다 문득 부록으로 딸린 과제가 스쳐갔다.
 ‘그 인간은 두 번 봐줘.’
 두 번?
 왜?
 반문이 들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변태성욕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차 박사는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직업여성과의 성매매. 까발려진다면 매장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도 차태혁은 절박했었다. 그럼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적개심이 호기심의 등을 밀었다. 강토는 한 번 더 차 박사와 시선을 맞췄다.
 ‘와아앗!’
 두려움을 알고 시작했지만 아뜩함은 아까와 또 달랐다. 마치 뇌 전체에 전자파 폭풍을 맞은 듯 아찔한 느낌이 온 것이다. 강토는 처음보다는 더 고통스러운 시선으로 간신히 시냅스 폭풍을 바라보았다. 뉴런의 폭풍에 실린 시냅스 파동. 그 고요하면서도 광폭한 파동이 엮어내는 이온 쓰나미. 그건 뇌 안에서 우주가 폭발하는 듯한 아찔함이었다.
 우워어!
 고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라왔다. 매 초마다 온몸이 폭사 당하는 고통. 그 고통의 끝자락에 환각 같은 기억 하나가 아스라이 맺혀왔다.
 -미국이었다.
 -실험실이었다.
 기억 안으로 들어온 아까 그 장면.
 바로 거기였다.
 
 ***
 
 실험실 벽에는 고정액에 잠긴 뇌 표본이 가득했다.
 실험대 위에는 젊은 남자가 누워 있었다. 알몸의 그는 온갖 센서에 연결되어 있었다. 다만 하반신이 거의 없었다. 흔적뿐이다. 선천장애인이었다. 차 박사는 메스를 들고 있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딱 하나의 움직임이 보였다.
 동공!
 그게 떨고 있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남자. 그 남자의 뇌를 꺼내는 것이다. 놀랍게도 아까 본 기억정보와 똑 같았다. 싱크로율 100%.
 아들 살인!
 차 박사의 기억이 감정을 전해왔다. 남자는 처절한 공포심, 차 박사는 극도의 이기심. 엇갈린 감정 속에서 차 박사는 끝내 두개골을 열었다. 산 남자의 그것을.
 <아들 살인.>
 -그 이름은 차태혁.
 -산 사람의 뇌를 들어낸 건 차 박사.
 -그 엄마의 뇌를 들어낸 것도 차 박사.
 -모자가 죽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일을 꾸민 것도 차 박사.
 “······!”
 이번에는 강토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아까 상기한 기억과 차 박사의 비밀이 매칭되는 순간, 격한 충격으로 나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쿵!
 어찌나 전격적이었든지 침대 전체가 출렁거렸다.
 “괜찮아요?”
 담당 간호사가 뛰어왔다.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이봐요. 이봐요!”
 간호사가 흔들어주고서야 숨 하나가 밀려 나왔지만 몸 안에 진동기라도 든 것처럼 와들거림이 멈춰지지 않았다. 진정제가 투여되었다. 그제야 조금씩 안정이 된 강토······.
 “무리하면 안 돼요. 선생님 곧 오실 거니까 얌전히 누워 계세요.”
 숨을 돌린 간호사가 강토를 진정시켰다.
 “그보다··· 차 박사님······.”
 강토는 겨우 옆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목소리가 맹렬하게 떨고 있었다.
 “어머!”
 돌아보던 간호사가 비명 섞인 소리를 냈다.
 “차 박사님 눈이 열렸네. 수 선생님, 차 박사님 동공이 열렸어요!”
 바로 호들갑 작렬이다.
 차마 못 볼꼴이었다.
 인간 신분에 귀천이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병원장이 오고,
 진료부장과 간호부장도 달려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 박사와 김 박사, 그 뒤를 이어 청와대 관련자인 장철환과 대학 이사장도 빠지지 않았다.
 “차 박사니임······.”
 말투조차도 미치도록 애절하다. 병원 스태프들의 설명은 너무 정중하기까지 해서 닭살이 오싹오싹 돋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이강토······.
 의식은 또렷하건만 누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기분 더러웠다.
 의료진이 집중한 탓일까? 차 박사의 의식이 돌아왔다.
 “와아아!”
 짝짝짝!
 중환자실에 환호와 박수가 울려 퍼졌다. 간호사들까지 도열해 박수를 친 것이다. 잠시 후에 취재진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차 박사를 촬영하고 인터뷰까지 마쳤다. 국민적인 관심사란다.
 “장 고문님과 식사를 마치고 헤어진 후에 성바오로 병원에 지인 문병 차 잠시 들렀다가 나왔는데 뒷골목 쪽에서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가보려던 길에 갑자기 심장이······.”
 차 박사는 급작스러운 심근경색 발생과정을 그렇게 설명했다.
 “큰일 날 뻔 하셨습니다.”
 장철환이 대표로 말했다. 침대 근처의 인사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인파는 신분 순으로 퇴장했다. 장철환과 이사장, 병원장이 먼저였고, 진료부장과 기타 박사들, 그들 시중을 들던 연구소 직원 둘······.
 끝까지 남은 건 정 박사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병원 복도에서 밤 좀 지새운 꼴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강토를 돌아보았다. 귀차니즘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얼굴이었다.
 <뇌부터 수습해요. 알바생은 중요하지 않아요!>
 강토는 그녀의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씨푸알녀언!
 강토를 뇌 표본만큼도 취급하지 않았던 그 여자 정선애 박사. 그녀의 얼굴에 차태혁 뇌의 이미지가 겹쳤다.
 -차 박사에게서 엿본 비밀.
 -말도 안 되는 그 비밀.
 -그 비밀을 연 시크릿 메즈.
 현실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현실이라면, 정 박사에게도 먹히는 아이템일까?
 해보면 알지.
 ‘어디······.’
 강토는 그녀의 눈을 겨누었다. 이제는 까닭모를 적개심의 발로가 아니라 강토의 의지였다. 이미 대미지가 수반되는 걸 온몸으로 학습한 강토. 침대 모서리를 죽어라 부여잡고 이를 문 채 정 박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웃!’
 불끈 힘을 주자 온몸에서 튀어나온 파동이 소리없는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열려라, 시크릿!
 강토는 그녀의 눈을 집중했다. 그새 눈 속으로 들어간 뉴런의 파도는 정 박사 뇌 안의 뉴런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통과!
 통과!
 최적의 나트륨 이온을 받은 뉴런들은 엄청나게 부푼 스파인으로 광속진행 도우미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어쩐지 차 박사와는 달랐다. 최종 목적지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지만 풍경이 살짝 달랐던 것.
 ‘몇 겹으로 이어진 벽이 보이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아무튼 비밀 서랍의 광장에 다다르기는 했다. 강토는 맨 앞 서랍을 여는데 성공했다.
 -연구 데이터보관실이었다.
 -안에는 공진구 박사가 있었다.
 -뭔가의 데이터를 검색 중이다.
 그 안으로 정 박사가 들어왔다. 커피 두 잔이 들려 있다. 커피를 마시는 중에 공박사의 손이 정 박사 어깨로 올라갔다. 정 박사가 안겼다.
 잠시 후······.
 공박사가 데이터실 문을 안으로 잠갔다. 그리고··· 다급하게 정 박사의 입술을 덮쳤다. 둘은 가뭄 끝의 단비처럼 서로를 탐닉했다. 실험가운을 입은 채 둘은 요긴한 부위만을 열어 볼일을 마쳤다. 숨을 할딱이는 정 박사의 표정은 나긋나긋하고 행복해 보였다.
 <유부남 공진구 박사와 불륜 중.>
 맙소사!
 정 박사의 최근 비밀은 불륜이었다. 그것도 같은 연구소의 유부남 공박사와.
 공진구 박사.
 -어쩐지 서로를 대하는 눈빛이 알뜰살뜰하더라니.
 -오냐, 그게 사실이라면.
 -퇴원하기만 하면 두고 보자.
 -그동안 나 엄청 갈구었지?
 -너 딱 걸린 거야!
 강토는 격렬한 피로감 속에서 안도를 느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 순간, 정 박사는 움찔 침대의 모서리를 짚었다. 뭔가 머리를 휘돌아나간 듯한 아뜩함. 그녀로서도 난생 처음 느끼는 작용이었다.
 ‘며칠 신경을 너무 썼어.’
 정 박사는 머리를 저었다. 실험실 대참사에 이어진 차 박사의 비보. 그러나 차 박사의 의식이 돌아왔으니 완벽한 파국은 면했다. 게다가 사고의 원인은 낙뢰로 나왔으므로 천재지변에 속하는 일. 이제 차 박사가 일어나면 연구는 다시 진행될 일이었다.
 그녀의 밥그릇은, 여전히 보장되고 있었다.
 후우!
 정 박사는 잠든 차 박사의 얼굴을 내려보며 숨을 골랐다.
 
 “형!”
 문이 열리자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작은 지하벙커에 함께 사는 후배 덕규였다. 냉정히 말하면 강토가 덕규의 셋방에 얹혀사는 신세.
 이른 아침, 강토는 병실을 옮겼다.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한 6인실이었다.
 “왔냐?”
 “괜찮아?”
 “뭐 그럭저럭··· 아!”
 몸을 움직이던 강토는 온몸이 결리는 걸 느꼈다. 아직은, 다 괜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도 진짜 다행이다. 처음에 형 봤을 때 아주 사망하신 줄 알았거든.”
 “자식, 말을 해도······.”
 “농담 아니거든. 그때는 진짜 사람 꼴 아니었어. 의사들도 뇌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 같다고 그랬고.”
 “연구소에서 너한테 연락한 거냐?”
 “아니, 내가 방송 보고 찾아갔지.”
 “그래?”
 그럼 그렇지.
 다시 한 번 부아가 치밀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처음에는 형 잘못 때문에 사고가 커진 것처럼 뉴스가 나왔었어. 연구소 사람들 분위기도 그랬고.”
 “뭐야?”
 “알바생이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막 건드렸을 수 있다고······.”
 “아니, 어떤 인간이?”
 “정 박사도··· 인터뷰에서······.”
 “정 박사?”
 뚜껑이 제대로 열리고 말았다. 실험실 사고는 우연한 것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시설 미비였거나. 문과출신 강토가 무슨 과학적 실력이 있어서 연구소에 낙뢰를 떨어뜨릴 수 있단 말인가. 진짜 그런 재주가 있다면 당장 정 박사의 머리통 위에 퍼붓고 싶었다. 아니, 그전에 이미 노중권이라는 인간부터 손봤겠지만.
 “으아, 그 여우 진짜······.”
 “여우?”
 “넌 몰라도 돼.”
 “그리고······.”
 대화를 나누던 덕규가 잠시 말문을 더듬었다.
 “왜?”
 “실은··· 형 아버지 와 계셔.”
 “아버지?”
 놀란 강토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버지도 뉴스보고 오신 거냐?”
 “아니, 뉴스에는 형 인적사항 안 나왔어. 그리고 형이 원치 않는 것도 알지만 의사들이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하길래 내가 형 핸드폰에서 아버지 번호 따서······.”
 “아··· 너는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미안해.”
 덕규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간호사들이 보관하던 걸 받아두었다가 내미는 덕규였다.
 “됐어. 돌팔이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라도 어쩔 수 없었겠지? 어디 계시냐?”
 “들어오시네.”
 덕규가 돌아보는 순간 병실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들어선 건 강토의 아버지 이상국이었다.
 “오셨어요?”
 강토는 침대에서 뻘쭘하게 인사를 올렸다.
 “괜찮냐?”
 가까이 다가온 아버지가 물었다.
 “예··· 걱정시켜드려 죄송해요.”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애비가 면목이 없구나.”
 “아버지가 왜요? 그냥 알바 뛰다가 생긴 일인데······.”
 “뇌파 실험 알바였다고?”
 아버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강토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캄보디아의 사고 이후 머리와 관련된 건 다 걱정하는 아버지였다.
 “예······.”
 “건강에는 지장이 없는 일이냐?”
 “그럼요.”
 “기왕 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만 다음부터는 알바를 해도 이런 일은 말 거라. 그렇잖아도 넌······.”
 “······.”
 “이거 받아라.”
 아버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돈이었다.
 “웬 돈을요?”
 “연구소 측에서 100만원 봉투 하나를 주더구나. 원래 알바생이라 치료비만 부담하면 되는데 연구소 배려로 특별히 주는 위로금이니까 이번 사고와 관해서 떠들지나 말고 다니라고······.”
 “연구소에서요?”
 “마음에서 우러난 돈이 아닌 거 같아서 면전에다 도로 던져주었다.”
 “······.”
 “몇 푼 안 된다. 병원비는 저들이 낸다고 하고 또 당연히 치료 받아야 할 권리이기도 하고··· 퇴원하면 싼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거라.”
 “아버지······.”
 “다행히 큰 이상은 없는 거 같으니 애비는 그만 가보마. 저녁에 어선이 출항해야 하거든. 갑자기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저 문제없으니까 가져가세요.”
 “애비 말대로 해라. 취직에도 돈은 필요할 테고.”
 “하지만······.”
 “힘이 못 돼서 미안하구나. 애비가 이 모양이라······.”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이 강토의 손을 잡았다. 순간 강토의 심장이 울컥 반응을 했다. 여자 손처럼 매끈하던 아버지의 손. 한때는 잘 나가는 벤처 중견기업의 사장으로 강토의 자랑이었던 아버지. 그러나 장비 납품을 받던 대기업 노중권 전무의 농간으로 하루아침에 몰락한 아버지······.
 노중권 전무······.
 강토는 그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대기업 계열사의 전문 경영인이 되어 국회의원 후보 물망에도 오르락거리는 인간. 그러나 그 인간도 차 박사처럼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개발한 신기술을 경쟁사 중소기업에 빼돌려 회사를 도산시켜버린 것이다.
 “강토야!”
 기술을 훔친 경쟁사가 똑같은 제품을 헐값에 납품하게 되자 설 곳을 잃은 아버지, 당시 고2였던 강토를 불렀다. 학원에서 돌아온 강토, 아버지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아버지는 3년 전에 죽은 엄마의 영정 앞이었다.
 “너 내 아들 맞지?”
 첫 마디부터 비장했다. 아버지는 강토 앞으로 들어둔 적금과 보험, 기타 통장 하나를 건네주며 뒷말을 이었다.
 “남자는 자기만의 황야가 있는 법이다. 네게 그 황야의 문을 조금 일찍 열어주게 되었어.”
 “······.”
 “네가 대학 들어갈 때까지 만이라도 참을까 했는데······.”
 “······.”
 “애비는 좀 먼 여행을 떠난다. 애비가 하던 말 잊지 않았지?”
 “난 놈, 든 놈, 된 놈 중에 된 놈이 되어라······.”
 “고맙게도 기억하고 있구나.”
 “······.”
 “잘할 수 있지?”
 아버지의 두 손이 어깨를 잡았었다. 뭔지 모르지만 뭔지 알 것 같은 아버지의 마음. 그 기세가 너무 높아 강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길로 집을 나선 아버지는 노중권을 찾아가 칼로 배를 접수해버렸다. 아버지다운 일이었다. 노전무는 배에 구멍이 났지만 무사했다. 무사하지 못한 건 아버지였다. 집안이 빵빵한 노전무 측에서 검찰 인맥을 동원해 살인미수를 적용했고 최고형량인 무기징역을 때린 것이다.
 형량은 법정에서 9년으로 줄었다. 강토가 대학을 마칠 무렵 출소한 아버지는 속초로 낙향했다. 그리고 지금은 연근해 통통선의 선원으로 일하고 있다.
 “간다!”
 아버지는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절룩, 아버지의 장애가 눈에 밟혀왔다. 노전무를 찌르던 날 생긴 장애였다. 차를 막아선 아버지, 그 아버지를 그냥 밀어버린 노전무. 그로 인해 관절에 변형이 생겨 장애를 입었지만 검찰은 노전무의 편일 뿐이었다.
 절룩!
 아버지가 병실을 나갔다. 낮은 문소리와 절룩이는 다리의 잔상은 오래 머리에 남았다.
 봉투 안에는 50만원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돈이 없다. 어선을 탄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장애 때문에 자주 타지도 못한다. 어쩌면 이 돈도 대출 받아왔을 지도 몰랐다.
 ‘노 사장 개자식!’
 잠시 잊었던 분노가 들끓었다. 몰락한 아버지를 보고 나니 다시 한 번 몸서리가 느껴졌다. 뒤를 이어 정 박사가 들어섰다. 그녀는 김 박사와 둘이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요?”
 정 박사가 덕규를 돌아보았다.
 “동생이라 괜찮습니다.”
 강토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실제로 덕규는 친동생과도 같았다. 신세도 많이 진 강토였다. 그러니 입맛이 뚝 떨어진 정 박사에게 쫓겨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거 안 받았더군요?”
 정 박사가 봉투를 들어보였다. 아버지가 말한 그 봉투인 것 같았다.
 “이유는 아버지께서 말했다던데요?”
 “받으세요!”
 정 박사는 일방통행식으로 봉투를 던져놓았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까?”
 강토는 냉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었다. 보아하니 이제 알바는 물 건너간 일. 그렇다면 딱히 비굴할 일도 없었다.
 “실험실 CCTV 돌려봤어. 이번 사고, 당신 때문에 커진 거야.”
 옆에 있던 김 박사가 지원사격을 하고 나섰다.
 “뭐가 문제라는 거죠?”
 강토가 받아쳤다.
 “아니면 그 난리 통에 왜 실험실에 들어갔어? 가서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틈에 비싼 장비라도 슬쩍할 생각이었나?”
 “이봐요!”
 발끈한 강토가 버럭 소리쳤다. 이 인간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원래는 손해배상까지도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강토 씨 미래를 생각해서 봐주는 거니 연구소 일은 기억에서 잊어버리세요.”
 관망하던 정 박사가 지원사격을 날렸다.
 “손해배상? 내가 왜?”
 강토도 지지않았다.
 “몰라서 묻나? 박살 난 실험실··· 그 뇌 표본들이 얼마짜리인 줄 알기나 해?”
 “당신은 알아? 그게 얼마짜리인 줄?”
 닦아세우는 김 박사에게 강토가 얼굴을 들이댔다.
 -시크릿 메즈.
 -매직 뉴런 출격!
 아이템이란 쓰라고 있는 것이다.
 후우웅!
 뇌파가 올라가자 강토의 뉴런들은 김 박사의 눈을 치고 들어갔다.
 어디 한 번 보자고.
 너는 대체 얼마나 깨끗하길래?
 
 ***
 
 ‘웃!’
 김 박사가 움찔거렸지만 이미 늦었다. 강토의 매직 뉴런은 어느 새 그의 뇌 속으로 들이쳐 마지막 관문에 버티고 선 뉴런의 시냅스들에게 시크릿 메즈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인간에게도 될까?’
 잠시, 강토는 숨을 멈췄다.
 첫 번째, 알아낸 차 박사의 비밀.
 그리고 두 번째, 정 박사의 비밀.
 마치 강토 자신의 기억인양 건너온 은밀한 곳의 기억정보······.
 ‘온다!’
 마지막, 측두엽의 뉴런들이 기억의 문을 열면서 김 박사의 비밀서랍 공간의 첫 번째 서랍도 강토의 뇌에 접수되었다.
 바스락!
 서랍이 열렸다.
 우억!
 토 나올 뻔 했다.
 이 인간의 최신 비밀은 쪼잔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며칠 전 동네 마트.
 2500원짜리 발가락 양말 두 켤레를 구입하고 만 원짜리를 주었다.
 다른 손님 때문에 바쁘던 아줌마가 착각을 해 7500원을 거슬러 주었다.
 문을 나서며 보니 2500원 횡재, 하지만 내친걸음이라 그냥 나와 버렸다.
 잠시 후 아줌마가 달려와 물었다. 거스름돈 더 받지 않았냐고.
 김 박사는 눈자위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 아줌마, 사람 뭘로 보고······.’
 흐얼!
 명색이 박사라는 인간이 돈 2500원에 양심을 팔다니······.
 이건 그대로 패스하고 한 번 더 매직 뉴런의 출격.
 이번에도 돈이 보였다.
 이번에는 많았다.
 -2천4백만 원!
 건네주는 사람은 대머리의 장비 업자였다.
 허름한 중국집 내실이었다.
 중국집 간판은 자금성.
 돈을 받은 김 박사는 밖으로 나와 자기 자가용 좌석 시트 밑으로 구겨 넣었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된 후였다.
 <2천4백만 원 뇌물수수.>
 “······!”
 구토 쏠리는 인간.
 강토는 허덕이는 몸을 지탱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맥이 미치도록 풀렸다. 누군가의 기억을 거푸 여는 일은 강토에게도 심한 대미지가 따르는 일. 마치 여름철 땡볕 행군을 하던 중에 느끼던 무기력증, 땀을 쏟고 쏟아 맥이 쫙 풀리는 그런 느낌··· 그나마 처음보다는 견딜 만했다.
 “이 친구 아주 맛이 갔군요. 감히 어디다 눈을 부라리고······.”
 머리를 두어 번 흔들며 정신줄을 세운 김 박사가 까칠한 반응을 쏟아냈다.
 “맛이 간 거 아니거든. 다른 건 몰라도 얼마인 줄 아는 게 있으니까.”
 강토의 분노가 제대로 폭발했다. 아직은 검증하지 못한 이상한 현상. 무시를 당하자 꼭지가 딸깍 열린 것이다.
 “뭐라는 거야?”
 “2천4백만 원.”
 강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뭐야?”
 이때까지도 김 박사는 의기양양했다.
 아닌가?
 잠시 주저했지만 강토의 비밀 저격은 직진으로 날아갔다.
 “누구한테 들었는데 중국집 자금성··· 그 내실에서 속알머리 시원하게 벗겨진 장비 업자로부터!”
 “······!”
 “그리고 발가락 양말 값 2500원도 웬만하면 돌려주시죠.”
 “······?”
 순간 김 박사는 눈동자에 대지진이 이는 게 보였다. 그 반응은 강토의 눈에도 환한 불을 켜주었다.
 -타인의 기억!
 -그 기억 속에서 엿본 비밀!
 -그러나 검증까지는 못했던 일.
 그런데······.
 이렇게 검증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착각이거나 환상이 아니라 명백하게 타인의 기억이자 비밀을 접수하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시크릿 메즈!
 순식간에 상대의 비밀 창을 여는 오묘한 바이오 파워.
 미치도록 마음에 들었다.
 “이 돈은 접수하죠. 나도 그날 사고 때문에 죽을 뻔 했으니까. 그런데 이걸로는 안 됩니다. 병원비는 당연히 당신들이 내는 거지만 최초 진단서 나온 대로 보상해 주세요. 처음에는 죽을 줄 알았다니 진단이 1-2주로 나온 건 아니겠죠?”
 봉투는 당당하게 접수했다. 이제는 꿀릴 게 없었다. 차 박사에게 엿본 기억이 사실이라면, 정 박사의 불륜이 사실이라면, 나아가 김 박사의 뇌물수수가 사실이라면.
 이들은 다 강토의 밥이 될 판이었다.
 “이봐요!”
 다시 정 박사가 나섰다.
 “천만 원!”
 강토는 단단하게 눈빛을 세웠다. 그날 사실, 죽을 뻔했었다. 그나마 나름 강심장이었기에 망정이지 약골이었다면 낙뢰에도 기절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다른 죄목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인간 개무시!
 바로 그것이었다.
 첫 번째로 실험실 안에서, 의식을 놓는 강토에게 던진 인간 이하의 취급.
 <알바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두 번째로 강토의 아버지를 무시한 것.
 그 두 가지만 해도 천만 원 가치는 넘을 것 같았다.
 “지금 장난해요? 당신에게 손해배상 청구하려다 말았다는 거 못 들었어요. 연구소 입장에서는 그거 아직도 유효하거든요.”
 정 박사는 냉소를 뿜었다.
 “그럼 박사님은 빠져요. 차 박사님하고 얘기하겠습니다.”
 “뭐라고요?”
 “빠지라고요. 어차피 연구소의 실권자는 차 박사님 아닙니까?”
 “이 사람이 진짜······.”
 “차 박사님 의식 돌아왔죠? 지금 어디 계신가요? 중환자실? 특실?”
 “이봐요!”
 “아님 공 박사라도 불러주시던가!”
 “공 박사님?”
 “당신하고 일심동체잖아요?”
 갈기를 세우는 정 박사에게 강토는 슬쩍 떡밥을 던져놓았다.
 “······?”
 정 박사의 눈빛이 엉망으로 엉클어지는 게 보였다.
 빙고!
 그녀의 비밀도 사실이라는 반증이었다.
 “덕규야, 그 남자 박사님 좀 모시고 나가 있어라. 내가 이 여자 박사님하고 긴밀하게 할 얘기가 있거든.”
 덕규에게 눈짓을 보냈다. 박사가 많으니 그것도 헷갈린다. 이미 허를 찔린 김 박사는 군말 못하고 덕규를 따라 나갔다.
 “일심동체라뇨? 무슨 소리예요?”
 정 박사가 도끼눈을 뜨며 자기 방어에 나섰다.
 “데이터 보관실··· 지난주에 당신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갔다죠? 좀 민망하더라도 날짜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까지 상세히 중계해 줄까요?”
 “······!”
 단 한 방이었다.
 정 박사의 눈빛은 완벽하게 허물어졌다.
 “당신······.”
 허둥대다 못해 갈라지는 정 박사의 목소리.
 “하긴 놀랍겠군요. 내가 알바 끝나고 퇴근한 후에 생긴 일이니······.”
 “CCTV 해킹했어요?”
 “해킹 같은 소리. 실험실에 벼락이 떨어졌을 때 당신이 나를 알바라고 개무시했으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신이 나에게 당신의 치부를 보여줬나보죠. 그러니 헛소리 말고 차박사님이나 만나게 해주세요.”
 “차 박사님······.”
 “다시 말하지만 방금 전에 한 말, 그냥 한 말 아닙니다. 김 박사의 2천4백만 원 그것까지 포함해서······.”
 “······.”
 “정 박사님!”
 “천만 원··· 주도록 알아볼 게요.”
 숨을 고른 정 박사가 입을 열었다.
 천만 원!
 먹고 떨어져.
 그렇게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천만 원 먹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입술이 멋대로 열려 버렸다.
 “미안하지만 차 박사님께도 따로 볼일이 있거든요.”
 응?
 돌연한 발언에 스스로 놀라버리는 강토. 강토의 의지와 다른 말이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차 박사님께도요?”
 “이 말을 전하세요. 청량리 588, 그리고 새디스트!”
 이어지는 말도 같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뇌 속에서 등을 미는 기분이었다.
 “588? 새디스트? 무슨 뜻이죠?”
 “그분이 아실 겁니다.”
 그 사이에 강토의 입술이 ‘자기 멋대로’ 쐐기를 박아버렸다. 정말이지 자기 멋대로였다.
 
 “뭐야? 두 사람, 기가 팍 죽어서 가던데?”
 복도에서 들어온 덕규는 기가 산 표정이었다.
 “다른 말은?”
 “몰라. 둘이 속닥거리면서 갔어.”
 “심장이 쫄깃해졌을 거다. 내가 그것들 아킬레스건을 잡았거든.”
 “아킬레스건? 어떻게?”
 “구린 비밀!”
 “구린 비밀?”
 “너 이거 보이냐?”
 강토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덕규가 그걸 바라보자, 강토는 덕규에게도 시크릿 메즈를 작렬시켜주었다.
 덕규의 비밀은···
 -취업되었다고 엄마에게 사기!
 아, 쪼잔한 놈.
 비밀치고는 차라리 슬픈 일이었다.
 덕규는 전문대학 졸업자. 새 봄에 어쩌다 걸린 면접에서도 역시나 불합격을 받아먹은 날, 그대로 고향 집에 내려가 사기를 쳤다. 입사시험에 합격했다고. 때때마다 엄마에게 보고하기도 지친 덕규였었다.
 강토와는 알바 때 만난 사이. 그때 의기투합해 덕규의 지하실 월세 보금자리에 합류한 강토였다. 무엇보다 마음이 맞았고 생활비를 줄여야 했다. 그렇다고 팔자 좋은 금수저들처럼 향긋한 암컷과 연합할 형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쪼잔한 자식아, 비밀이라는 게 꼴랑 엄마한테 친 취업사기냐?”
 나른해진 정신줄을 가다듬으며 강토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제발 좀 그럴 듯한 비밀 좀 만들어라. 하다못해 1층 미용실 세경이 엉덩이라도 훔쳐보든가.”
 “내 비밀이 보여?”
 “오냐!”
 “내가 술 먹다가 형한테 말한 거 아니고?”
 “내가 현실에서도 통하는 매직 스킬을 하나 득템했거든.”
 “형, 이거 몇 개?”
 덕규가 손가락 두 개를 흔들어댔다.
 “뒈질래? 나 한 잠 잘 거니까 출근이나 해라.”
 “아, 말도 마. 양 부장 개자식, 저도 못 받는 건을 던져놓고 나보고 해결하라고 지랄발광을 떨어서 미칠 지경이야.”
 “그때 말하던 그 건?”
 “응!”
 덕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규는 사채업자에게 발목이 잡혀 있다. 멋모르고 불법 변종 대출업체에서 급전 50만원을 빌렸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나중에 연리를 계산해 보니 무려 3000%. 부모를 찾아가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추심업체에 출근하게 되었다. 눈치 빠르고 몸이 탄탄한 덕규를 알아본 업체가 딜을 던진 것이다. 세 달 일하고 월급은 절반, 대신 빚을 퉁 쳐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허울에 불과했다. 은행권에서 회수불능 불량대출건을 똥값에 사들인 사채업자는 일당이 아니라 건수로 월급을 계산했다. 거기에 트릭도 보탰다. 출근한지 일주일 째 되는 날, 수상한 일이 벌어졌다. 덕규가 수금 받아온 돈이 가짜 수표였던 것.
 원래 그 건은 양 부장 담당이었다. 그런데 순순히 덕규에게 건네준 건. 덕규에게 올가미를 건 거지만 증거가 없었다. 결국 덕규는 두 달을 더, 식비와 차비만 받는 조건으로 양 부장 똘만이가 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경찰에 신고하랬잖아?”
 “아, 내 비밀까지 안다면서 왜 그래? 시골 고향으로 내려간 우리 엄마, 나 잘된 걸로 알고 있는데 사채업자들이 찾아가면 혈압으로 쓰러질 지도 몰라.”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풋사랑이 배신을 때리는 통에 험한 청량리 588에서 싱글맘으로 덕규를 키워낸 덕규 엄마. 이제는 고향으로 내려가 덕규 하나 바라보고 사는데 지병인 고혈압을 터트릴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고생은 나 혼자 해도 되니까 그만 가라. 한잠 때린 후에 연구소 인간들 만나고 나서 퇴원할 테니까.”
 “퇴원해도 된대?”
 “아니면? 이미 한 판 붙었는데 연구소에서 뒷바라지해주겠냐?”
 “뭐 그건 아니올시다겠지만······.”
 “여기 올라오기 전에 의사랑 얘기했는데 아침에 한 검사 결과가 좋으면 나가도 된다고 했다.”
 “하긴 의사 나리가 까라면 까야지.”
 “가면서 기도나 해라. 운 좋아서 천만 원 받으면 네 채무 까줄게.”
 “말만 들어도 눈물 나네. 천만 원은 모르지만 반이라도 받아내. 그래야 형도 취업할 때까지 좀 안정되지. 뭐 치맥이라도 뽀지게 쏘면 그걸로 땡큐 베리 망치고.”
 “치맥은 보장할 수 있으니까 가봐라.”
 “응, 뭔 일 생기면 전화 때려.”
 덕규가 나갔다.
 강토는 봉투 두 개를 열었다. 안에서 돈 냄새가 났다. 알고 보면 참 더러운 냄새다. 그러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냄새였다.
 눈을 감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직 사고 후유증이 남은 걸까? 아니면 매직 뉴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일까?
 지릿!
 지리릿!
 얇은 눈꺼풀이 닫히면 그 안에서 뇌파가 은빛 펄스를 이루며 몸서리를 쳤다.
 팔딱팔딱!
 잘도 뛴다.
 그 원리는 뉴런의 시냅스 동화(同和)···
 ‘뉴런이라···’
 핸드폰을 눌러 검색을 했다. 이미지를 보고 싶었다.
 “······?”
 몇 개의 이미지를 넘기다 한 화면을 만났을 때 강토는 핸드폰을 떨구고 말았다. 입에서 길고 낮은 숨이 거칠게 밀려 나왔다.
 그놈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우주를 이루던 찬란한 펄스. 그것들은 화면에 뜬 전자현미경상의 뉴런과 꼭 닮아 있었다.
 ‘시냅스···’
 강토는 화면을 더듬었다. 뉴런의 돌기에서 뻗어나온 셀 수도 없는 시냅스··· 강토에게는 수없는 촉수로 보이는 그 줄기들···
 강토의 호흡은 거기서 멈췄다. 문득 기척을 느낀 것이다. 시선을 돌리니 정 박사가 보였다. 그녀의 시선 역시 화면의 시냅스에 꽂혀 있었다. 그녀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차 박사님이 허락하셨어요!”
 허락?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하는 강토. 아까 이상한 기분에 멋대로 말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나저나 정 박사 편에 전해준 비밀 또한 허튼 게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게 허튼 거라면 차 박사가 응할 리 없었다.
 “언제 뵙자는 건가요. 저는 내일 퇴원할 것 같던데······.”
 생각이 많아진 강토, 정 박사에게 물었다.
 “괜찮다면 지금 올라오라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당장?
 강토의 시선이 허공에서 멈췄다.
 강토가 엿본 차 박사의 비밀이 사실이라면?
 거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당신 구린 비밀 내가 다 알아!’
 하고 돌직구를 날려? 그리고 쩔쩔 매면 몇 억 불러서 챙겨? 그런데 증거가 없잖아? 게다가 박사는 높은 사람도 많이 아는데? 자칫 잘못 나불대다 명예훼손으로 걸리면? 차 박사가 쟁쟁한 변호사 동원해서 나를 사장시키면?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이 되는 강토. 순간 머리에 터질 듯한 압박이 밀려들었다.
 ‘윽!’
 꿈찔 흔들리는 강토. 순간, 강토의 의지는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입이 멋대로 열리고 말았다.
 “못갈 거 없지.”
 말을 하고도 놀라는 강토. 이번에도 강토의 마음이 아니었다.
 ‘뭐야?’

댓글(6)

CPzero    
알파 베타 감마가아니라 왜세타?
2016.09.25 15:45
파이로    
90% 부분에서 "그 믿지 못할 스킬이 시전되는" 스킬로 바꿔주세염
2017.06.25 00:20
피냥    
두얼굴이면 산채로 뇌가 적출됬나보네
2017.11.08 15:33
극치    
능력을 너무 쉽게 드러낸거 아닌가요.. 나름 박사들이니 바로 눈치채서 쥔공 뇌 적출당해야 흐름이 맞는거 같네요...
2017.11.08 23:26
일누와르    
주인공이 인두문대라서 그런가? 어마어마하게 멍청하네
2018.08.09 20:37
n3************    
노잼
2019.09.09 17:15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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