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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귀환 1화

2016.09.13 조회 2,322 추천 11


 제 1장. 죽음, 그리고 귀환
 
 
 
 쏴아아--!
 서풍이 몰고 온 폭우가 거대한 장원을 모질게 두드리고 있었다.
 장원은 규모에 비해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의 전각은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었고 무너진 담장의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장원의 커다란 대문은 반쯤 부서져 삐거덕거렸고 퇴색된 현판은 비바람에 금세라도 떨어져나갈 듯 비명을 질러댔다.
 
 中原第一天武世家
 
 그러했다. 폐가를 방불케 할 장원은 바로 지는 해를 목전에 둔 중원제일천무세가였다.
 전성기 때에는 일천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천무세가 소속임을 자부했지만 개천무신(開天武神)) 사후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백년 전에는 소속 무사가 삼백 명도 되지 않았고 작금에 와서는 오갈 데 없는 뜨내기 무사들 십수 명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중원제일천무세가란 현판이 보존돼 있는 연유는 수백 년 이래 가장 정의로운 개천무신을 기리는 강호인들의 마지막 예우라 할 수 있었다.
 
 “허어, 어찌 아기가 여태 태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노가주 천유문(天遊文)은 산실 앞에서 초조하게 후손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든 시비가 죽산을 씌워주고 있었지만 드센 비바람으로 인해 천유문의 낡은 장삼은 흠뻑 젖었다.
 산실에서 나온 산파가 천유문에게 고했다.
 “큰일입니다, 노가주님. 산모께서 몸이 허약하신데다 태아가 거꾸로 선 바람에 지독한 난산입니다.”
 “하면 어서 태아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러다가는 산모와 태아 모두 무사하지 못합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결단이라니?”
 “차라리······ 태아를 포기하심이······.”
 “뭐라!”
 천유문의 젖은 수염이 부르르 떨린다.
 “그럴 수는 없어. 아이는 우리 가문의 마지막 혈손이야. 반드시······ 반드시 태어나야 돼!”
 산파의 표정이 땅거미처럼 어두워졌다.
 “노가주님, 제가 오랜 세월 아이를 받아봤지만 이런 난산은 처음입니다. 더군다나 태아의 건강 상태도 병약해 속히 출산되지 못하면 태아는 사산되고 맙니다. 아씨마님 또한 탈진되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화급을 다투는 상황이라 노가주님께서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결정이라면······ 가문의 혈육을 포기하라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아씨마님의 회생이 불가합니다.”
 “······.”
 노가주는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난산으로 산모가 위험하면 태아를 포기하는 게 도리이며 원칙이다.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니까. 그러나 그것은 태아의 생부가 살아 있을 때의 상황이다.
 삼갑자 이래 독자로 위태롭게 이어진 천무세가는 현 노가주인 천유문이 유일한 계승자이다.
 천유문의 아들이자 가주였던 천인명은 지난 해 스물세 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천인명의 아내 손아영이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던 게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허어, 결국 우리 가문이 이렇게 대가 끊긴단 말인가?’
 사실 그가 가주로 있는 동안 혈통이 끊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다행히 부부가 열심히 치성을 드린 덕분에 그의 나이 마흔을 넘어 아들 천인명을 보게 되었다.
 한데 육순이 넘은 아비의 손으로 젊디젊은 아들의 장례를 치러야 했으니 그 비통함은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며느리 복중의 아이가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이제 그마저 끊기게 됐으니 죽어서 어찌 선조들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유문의 고뇌가 깊어지자 산파가 재촉했다.
 “노가주님, 산모의 진통이 길어질수록 태아와 아씨마님 모두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천유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며느리와 잠시 얘기를 나눠야겠으니 사산을 위한 조치를 취하게나.”
 “예, 노가주님.”
 산파는 급히 산실로 들어가 침술로써 산모의 진통을 진정시켰다. 출산 도중 산모의 진통을 억제시키면 태아가 위험해지지만 어차피 사산 시킬 태아이기에 산모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산파가 나가자 천유문이 들어섰다.
 “며늘아가······!”
 천유문은 침상에 걸터앉아 가문의 종부(宗婦)인 손아영의 손을 쥐었다.
 “너를 더 이상 난산의 고통 속에 잃고 싶지 않구나. 복중 태아는 포기하기로 했다.”
 “아······ 안 됩니다, 아버님!”
 손아영은 혼몽 중에서도 기력을 짜내 천유문을 손을 힘껏 쥐었다.
 “아이는 천무세가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제가 죽더라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가야, 내 어찌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바라겠느냐? 하지만 태아가 거꾸로 섰기에 출산이 불가한 상황이야. 산파 말로는 아이가 태어나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가문의 혈육도 소중하지만 종부인 너 또한 소중한 존재가 아니더냐? 곧 사산의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흑, 아가······!”
 손아영은 참담한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부덕해 가주를 먼저 보냈으니 저는 가문의 죄인입니다. 그런 제가 시집 와서 천무세가를 대를 끊는다면 어찌 천무세가의 며느리로 죽을 수 있겠습니까?”
 “제발 그런 소리 말거라.”
 “저의 마지막 소청입니다. 부디······ 저의 배를 갈라 복중 태아를 구하십시오.”
 천유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허어,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를!”
 “아버님, 만일 아이를 잃는다면 저 또한 상심으로 인해 더는 살 수가 없습니다. 둘 중 하나를 구해야 한다면 아이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저는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구천에서 떳떳하게 서방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며늘아가······!”
 너무도 비통한 결정이기에 천유문은 절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어서 아이를 꺼내세요. 죽기 전에 아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때 문밖에서 산파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가주님, 사산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이만 나오십시오.”
 천유문은 결국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며늘아가, 우리 천무세가의 혈통이 보존된다면 모두 너의 헌신과 희생 덕분이다.”
 침상 아래에 무릎을 꿇은 천유문은 손아영을 향해 절을 올렸다.
 시아버지의 절을 받게 된 손아영은 너무도 망극했지만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아버님······!”
 “세상에 영원한 가문이 없기에 우리 가문도 대가 끊길 수 있다. 하지만 마녀의 저주 때문에 가문이 몰락한다면 이는 창건 조사님에 대한 불경이기에 어떻게든 가문의 대를 유지할 수밖에 없구나. 부디 이 못난 시아비를 용서하지 말거라.”
 문으로 다가선 천유문이 엄중하게 명을 내렸다.
 “아이는 내가 받을 테니 산파는 물론이고 모두가 내당에서 나가 있게.”
 “아이고, 노가주님. 그 무슨 당치 않으신 분부입니까? 이는 예법에도 어긋납니다.”
 “허어, 가주로서 명하니 모두들 물러가 있거라!”
 천유문의 엄중한 어조에 산파는 어쩔 수 없이 산실에서 물러서야 했다.
 “노가주님의 명이니 모두를 내당에서 나가세요.”
 산파는 시비들을 이끌고 내당을 나갔다.
 천유문은 탯줄을 끊기 위해 준비해 둔 칼을 손에 쥐었다.
 그는 천무세가의 역대 가주 중에서 유일하게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선천적인 절증 때문이었지만 덕분에 그는 역대 어느 가주보다 장수할 수 있었다.
 병기를 쥐고 손에 피를 묻혀 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가문의 혈통을 잇기 위해 며느리의 직접 배를 갈라야 했다.
 손아영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이를 악문 채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마침내 천유문은 탯줄을 끊고 복중 태아를 끄집어냈다.
 “아앙······ 아앙······!”
 모진 산고에 기력이 소진됐는지 세상을 나온 아이의 울음소리가 너무 미약했다. 그러나 끊어질 뻔한 천무세가의 혈통이 태어났으니 천유문과 손아영 모두 감격스럽기만 했다. 더욱이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천유문은 아이를 강보에 싸서 며느리에게 안겨 주었다.
 “아들이다······ 며늘아가, 네가 아들을 낳았어.”
 “오오, 천지신명이여, 감사하옵니다.”
 손아영은 진심 어린 기원을 올리고는 품에 안긴 아기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가······ 네가 부디 가문을 재건해다오.”
 그것이 손아영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천무세가의 팔대종부 손아영.
 그녀는 가문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바꾸었다.
 
 그리고 십오 년이 흘렀다.
 
 * * *
 
 휘이잉······!
 천무세가의 넓은 장원으로 을씨년스런 바람이 불어 닥쳤다.
 십오 년 동안 더욱 몰락한 천무세가는 거의 폐가와 다를 바 없었다. 위대한 현판마저 떨어져나가 이제는 이곳이 백년 넘게 중원제일가로 명성을 떨친 가문임을 입증할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드르륵······!
 늙은 하인이 바퀴 의자를 밀고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정자 주변으로 연못이 형성돼 원앙과 물새들이 노닐었지만 지금은 물이 말라 잡초만 무성했다.
 “콜록콜록······ 됐어, 왕로. 잠시 혼자 있고 싶어.”
 “예, 도련님. 그럼 소인은 이만.”
 늙은 하인은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정자에서 나갔다.
 바퀴의자에 앉아 담장 너머로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십사오 세 정도의 소년이었다.
 본래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을 눈망울에 서글픔이 가득했다.
 “어머니······ 목숨으로 낳아 주신 소자가 가문의 재건은커녕 후손조차 잇지 못했으니 이 불효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랜 병고로 인해 몸의 물기가 말려버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러했다.
 소년이 바로 천무세가의 구대독자 천무현(天武賢)이었다.
 십오 년 전 노가주 천유문이 며느리의 배를 갈라 끄집어낸 천무세가의 마지막 혈손.
 그가 본래부터 이런 병자가 아니었다.
 비록 허약하게 태어났지만 워낙 영특해 세 살 때 천자문을 떼었고 다섯 살 때 사서오경을 독파했다. 그가 열 살 때까지 독파한 천무서고의 서책만 수만 권이 넘을 정도였다.
 강호에서는 천고의 신동인 천무현으로 인해 천무세가가 재건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천무현은 열 살이 넘어서부터 급격하게 쇠약해져 하루 대부분을 누워 지내야 했고 수시로 마비 증세를 일으켜 혼절하기도 했다.
 노가주 천유문은 구대독자인 손자를 치료하기 위해 가문의 재보를 모두 털어 귀한 약재를 구했지만 천무현의 병세는 갈수록 위태로워졌다.
 천고의 절증인 구음절맥.
 구음절맥은 전설의 성약이 아니고서는 치료할 수 없는 절증이기에 백약이 무효했다. 구음절맥의 소유자는 가히 천년지재의 자질을 타고나지만 열 살을 넘길 수 없으니 이는 하늘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을 천유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가문의 유일한 혈통을 구하고자 선대의 재보를 모두 내다팔면서까지 손자를 절증의 치료하고 했다. 그러다보니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집안에는 늙은 하인 부부만 남아 조손을 수발들게 된 것이다.
 천무현은 낙조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시를 읊었다,
 “옥 같은 이슬이 단풍 수풀을 적시니······”
 자신의 짧은 생을 예감해서인지 시음이 서럽다.
 “혼자 남으실 할아버지를 위해······ 고통을 참고 버텨왔지만 더는 몸이 따라주지 않아. 콜록콜록······”
 천무현은 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고는 축 늘어졌다. 팔다리가 오그라들면서 호흡마저 힘겨웠다.
 이때 지팡이를 짚은 호호백발 노인이 정자로 들어섰다. 나이 팔순에 이른 노가주 천유문이었다.
 “무현아······!”
 천유문은 가쁜 숨을 헐떡이는 손자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거라, 제발 정신 차려!”
 천무현의 눈까풀이 꿈적이더니 구천으로 향하던 혼백이 되돌아왔다.
 “할아버지······”
 “오냐, 할아비다. 날도 찬데 왜 나와 있는 게냐?”
 “답답해서요.”
 “가자.”
 천유문은 힘겹게 바퀴의자를 밀며 정자를 나섰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런 소리 마라, 무현아. 세상에 만년인형설삼이 출현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더구나. 만년인형설삼을 복용하면 너도 회복될 수 있어.”
 “예······.”
 천무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전설의 성약이라는 만년인형설삼.
 하지만 만년인형설삼은 말 그대로 전설이다. 이미 영물이 된 만년인형설삼은 빛처럼 빠르게 이동하기에 누구도 그것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다.
 천무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직이 청했다.
 “할아버지······ 사당에서 선조님들께······ 향을 사르고 싶어요.”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한 천유문은 가슴이 저려왔다.
 ‘아, 무현이마저 떠나보내야 한단 말인가?’
 갑작스레 불길한 먹구름이 천무세가 장원의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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