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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아이돌 1-1권

2016.09.29 조회 4,374 추천 36


 # 프롤로그
 
 오래전 동쪽에서 건너온 기인이 있었다.
 도포로 황하 바람을 가르며, 넓은 대륙은 제집마냥 돌아다녔다.
 두 손을 휘두르면 천산이 들썩이고, 크게 걸으면 요동부터 서하까지 한달음에 닿았다.
 요괴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신선인지.
 누구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기인은 오랜 세월 많은 이름을 남겼다.
 동녘에서 온 신선이라 하여, 동하선.
 바람을 타고 거닌다 하여, 풍신.
 행함에 규칙이 없다하여 혼군.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악마라 경외되어 온 이름 천마(天魔).
 
 기인은 수많은 이름만큼 수없이 많은 이적을 행했다.
 어떤 것은 선하게, 또 어떤 것은 악하게.
 마치 구름 낀 날에 비가 오고, 높은 산에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당연한 천재지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 날······
 기인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죽었다. 등선한 것이다. 은거했을 뿐이다.
 많은 추측이 난무했지만 어느 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 Chapter1. 세상살이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천마라고요?”
 한 청년이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래 된 야외 화장실, 잔뜩 금이 간 거울이었다.
 노란 조명이 거울에 비친 얼굴을 기묘하게 변색시켰다.
 “허어, 그렇다니까. 이 몸이 바로 천마시니라.”
 놀랍게도 거울에서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탁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신선처럼 날아다니기도 하고, 죄 지은 사람에게 천벌을 내렸다는 천마요?”
 “그렇지. 잘 듣고 있었구나.”
 청년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한 달 내내 말하고 있는데, 그걸 기억 못하면 바보게요?”
 “크하하하! 그래, 우리 제자 놈이 똑똑하구나!”
 “언제 제자가 됐다고 그래요.”
 호탕한 목소리에 청년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허!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이 몸의 제자라면 당연히 포부가 커야지! 고작 그 정도로 무슨 일을 하겠다고!”
 “이 할아버지가 또 시작이네.”
 “쯧쯧쯧. 내가 네 나이일 때는 이미 동해 용왕의 멱살을 잡고 천산에 올라서, 신선들 수염을 뽑았다. 선산의 천도를 전부 털어서 굶주린 아이들에게 나눠주니 날 보고 상제라고 부르지 않더냐? 크하하하하!”
 청년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대화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니 너도 어서 내 무공을 익히 거라! 천변의 도리가 모두 담겨 있으니, 1할만 익혀서 인세에 널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어허! 군소리 말고 따라 해라! 공즉사 무변일도······.”
 거울 속 노인은 72자의 경문을 늘어놓았다.
 얼핏 듣기로는 그럴싸하다.
 하지만 청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치매 노인의 헛소리······.’
 천마라 칭하는 노인과 만난 게 벌써 한 달.
 기대는 거품 빠진 경제마냥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 일하러 가요.”
 청년이 중얼거리는 천마를 그냥 둔 채, 몸을 돌렸다.
 거울 속 천마의 얼굴은 청년이 멀어질수록 점차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화장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
 
 청년, 정은수는 가장이다.
 갓 성년이 된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동생 둘을 떠맡아 키웠다.
 친척은 있었지만 필요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돈. 돈이 문제였다.
 2남 1녀. 돈 먹는 기계를 셋이나 껴안고 살 만큼 인정이 넘치는 사람은 없었다.
 네가 맡아라, 네가 맡아라.
 책임을 떠넘기다 결국 전부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절망스러운 상황.
 하지만 그래도 은수는 낙담하지 않았다.
 나이 스물에 학교를 때려치우고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몸은 튼튼해서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했다.
 다치기도 많이 다치고 욕도 많이 먹었다.
 서러워서 이불을 입에 물고 우는 날도 허다했다.
 왜 자신들만 두고 세상을 떠났냐면서 부모를 원망한 적도 많았다.
 스물이 된 청년이 열심히 일 한다고 박수 쳐주기에는 사회가 그렇게 너그럽지 않았다.
 수염 숭숭 난 아저씨가 경쟁자고, 가슴도 나오지 않은 계집이 상전이었다.
 병아리마냥 입만 벌리고 있는 동생들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 치고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고난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천마를 만났다.
 “힘 좀 쓴다고? 용돈벌이라도 한 번 해 볼 테냐?”
 근처 대학의 보수 공장 현장에서였다.
 바닥이 기운다는 얘기에 밑을 파 보았더니, 시대불명의 굴이 나왔다.
 연대불명의 부장품도 수두룩했다.
 척 봐도 돈이 될 법한 것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몇 개를 훔쳐왔다.
 도덕적 고결함을 따지기에는 은수의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지니를 불러내는 것처럼 굵은 구슬 하나를 천으로 닦았더니, 천마가 나왔다.
 처음에는 미친 줄 알았다.
 바닥을 치면서 죽도록 고생했더니 정신병이 생겼다고 억울함을 토로하기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다 보니 미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말이 직접 머릿속에서 들리고, 스스로를 상고시대의 천마라 칭하는 노인과 대면하고 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이 몸은 천마니라!”
 천마는 상제와의 싸움에서 패해 구슬에 봉인됐다고 말을 했다. 시간이 오래되어 봉인이 약해 진 걸 은수가 건드리면서 깨어진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말로 미친 게 아닐까?
 고민을 해 봤지만 구슬에서 사람이 말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건 인연이다! 네게 내 무공을 전수해주마!”
 그리고 그렇게 지겨운 신세타령이 끝났을 때, 천마가 말했다.
 무공을 배우라고. 무공을 배워서 자신의 진신절기가 끊이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은수도 처음에는 혹했다.
 무공이라는 것이 영화나 소설의 절반만이라도 유용하다면 대단한 능력 아니겠는가.
 같은 막노동을 하더라도 기술 하나 배운 인물이 돈을 더 받는 세상이니,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구결이라고 알려 준 72개의 글자를 전부 기억했을 때 알아챘다.
 이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천천히 읽어도 보고, 누워서 읽어도 봤다.
 혹시 몰라 거꾸로 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결은 그냥 지루하고 뜻 없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했다.
 천마라 칭하는 노인은 치매에 걸렸다.
 그것이 은수가 내린 결론이다.
 매번 거울 등으로 불러 낼 때 마다 자신의 업적을 늘어놓고 상제에 분노를 토하는 노인.
 그리고 끝에는 자신을 대신해서 진신절기를 이어 달라며 같은 72개의 단어를 늘어놓는다.
 딱 보니 감이 오지 않는가?
 치매에 걸린 노인이다. 그런 노인의 말에 혹해서 별 짓을 다해본 스스로가 웃길 뿐이다.
 하루에 18시간 이상을 일하고 집에 돌아와 동생들 돌보는 게 두어 시간. 쪽잠으로 겨우 피로를 풀고 나가는데, 그걸 낭비했던 것이다.
 상고의 기물이니 천마의 무공이니.
 그냥 한 여름날의 단꿈에서 나온 신기루일 뿐이다.
 그림 속에 그려진 떡.
 먹을 수가 없었다.
 
 ***
 
 여의도에 위치한 KSS공개홀.
 수많은 방송들이 이곳에서 진행된다.
 방송관계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연예인들의 얼굴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무언가 방송이라도 있다 치면 사람이 몰린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부산스러운 날이다.
 음악방송 촬영이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스테이지 위해서 춤추고 노래하는 스타들.
 그 스타를 보기 위해 모인 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알까?
 화려한 무대 뒤에서 정신없이 발을 놀리는 조력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PD, AD, FD를 비롯한 연춤팀과 작가진. 조명감독과 음향감독, 스테이지 관리를 위한 잡역부까지.
 수많은 땀이 뭉쳐 이 자리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은수야, 아직 멀었냐?”
 “지금 가요! 소품 쪽에서 딜레이 생겼다고 지금 내줬어요.”
 그리고 은수는 그 중 하나다.
 계약직 스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소품을 옮기거나 의상 공수. 어떨 때는 조명이나 음향 쪽 보조로도 사용된다.
 일 하는 만큼의 보수는 절대로 나오지 않지만, 그나마 할 일이 많아서 돈줄이 끊이지는 않는다.
 “수고했다. 하여튼, 그 새끼들은 지들 사정밖에 몰라요.”
 소품을 정해진 곳에 옮기고 난 뒤, 돌아오자 석 FD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하루 이틀인가요, 뭐. 대충 예상하고 있었어요.”
 “파하하! 그래. 내가 그래서 우리 은수를 좋아하지.”
 “징그럽게 왜 이래요. 그런 말 거면 보수라도 더 주시던가.”
 “내가 돈 주냐? 너나, 나나 계약직인건 마찬가진데.”
 투덜거림에 은수가 픽 웃었다.
 석 FD나 자신이나 언제 잘릴지 모르는 입장인건 비슷하다.
 그래서 유독 그와 친하게 지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 스탠바이!!
 그때, 스테이지에 올라간 A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허설 시작하나보네.”
 “오늘 리허설 스타트는 누구에요?”
 “핵분열? 상반기에 데뷔한 애들이라고 하던데?”
 “이름이 그게 뭐래요.”
 “난들 아냐. 대표가 이과인가보지.”
 가벼운 농담에 두 사람이 나란히 웃었다.
 리허설이 끝나기 전까지는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다.
 본래라면 석 FD가 신호에 맞춰서 큐 사인을 넣어야 하겠지만 AD의 열정이 대단했다.
 덕분에 손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아, 나온다.”
 이내, 무대 위로 화려한 복색의 남성 5인조 아이돌이 올라갔다. 하나같이 잘생겼다.
 방청을 위해서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동작에 맞춰서 환호성을 질렀다. 숫자는 적지만 좋아하는 아이돌을 위한 노력인지 박력이 대단했다.
 쿵쿵 거리는 비트와 화려한 무대가 진행되었다.
 “히야. 이렇게 보니까 멋지네. 조만간 폭발하겠어.”
 “핵분열하고 터지면 몽땅 다 날아갈 텐데요?”
 “그 기세면 차트 1위 찍는 것도 우습겠네.”
 농담을 주고받으며 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역동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
 땀방울이 조명에 반사되어 강렬하게 반짝거렸다.
 “자식. 눈에서 불이 나오네. 부럽냐?”
 “부럽죠.”
 은수가 거짓 없이 대답했다.
 “오, 새끼. 애늙은이처럼 수당이나 따질 줄 알았는데, 너도 피 끓는 청춘이구나.”
 “아뇨. 그런 게 부러운 건 아니에요.”
 “그럼?”
 의아한 듯 석 FD가 고개를 기울였다.
 은수가 낮게 코웃음을 치고는 답했다.
 “저렇게 춤추고 노래하면 얼마나 돈을 벌 지 그게 부러운 거예요.”
 “아이구, 우리 은수 어르신. 결국 돈이냐?”
 농담 반 비아냥 반.
 충분히 이해했지만, 은수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돈이 안 된다면 저런 일이 부러울 게 있나?’
 세상은 돈이다.
 은수가 이내 무대에서 시선을 뗐다.
 
 ***
 
 서울 외곽 오래된 빌라촌.
 은수가 반지하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빠왔다아아아!”
 힘찬 외침소리와 함께 어린 소녀가 달려와 안겼다.
 10살이나 겨우 넘었을까. 은수의 가슴팍에 정수리가 간신히 닿았다.
 “우리 소영이 잘 있었어요?”
 “응! 응! 소영이 잘 있었어요!”
 머리를 쓸어내리며 웃어주자, 그것이 좋은지 발끝을 통통 튕겼다.
 “야, 정소영. 먹은 거 설거지 하고 가라 했지?”
 그때, 주방에서 한 소년이 다가왔다.
 소영보다는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외모.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무테안경을 쓰고 있어서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그리고 있었다.
 “서, 설거지 할 거야! 오빠가 와서 먼저 나왔어! 소영이 안 나빠!”
 “퍽이나 하겠다. 또 그러고 징징거리다가 잠들 거면서.”
 “아, 아니야! 소영이는 다 할 줄 알아!”
 “달라붙지 마.”
 욱 해서 동동 거리는 소영의 이마를 소년이 짚었다.
 팔을 흔들어도 닿지가 않는다.
 그것이 화가 나는지, 소영이 씩씩 거리며 은수를 돌아보며 소년을 손가락질 했다.
 가서 혼내 달라는 의미임이 분명했다.
 “싸우지 말고. 소영이는 가서 먹은 거 설거지하고, 준영이는 그만 놀려.”
 “작은 오빠가 소영이 놀렸어요!”
 “그래, 그래. 내가 때찌해줄 테니까, 우리 소영이는 착한 일 해야지?”
 “우······.”
 볼을 부풀리기는 했지만, 착한 일이라는 말에는 반응했다. 짧은 다리를 바삐 놀려서는 주방으로 향했다.
 가면서 준영을 한 번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이리와라.”
 그렇게 소영이 사라지자, 은수가 손을 쫙 벌렸다.
 “뭐, 뭔데?”
 그 모습에 준영이 살짝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영이가 혼자 애정을 독차지 한다고 삐진 거 아니었어? 이 형님은 애정이 넘치니까 걱정 할 필요 없다.”
 “됐거든!! 누가 그런 게 필요하대?”
 “정말?”
 은수가 미동도 없이 웃으며 준영을 바라봤다.
 한껏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던 준영이 힐끔 곁눈질로 그 모습을 살폈다.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에이, 진짜! 밖에서 고생했으니까 그냥 한 번 봐주는 거야!”
 그러다 못 이긴 척 와서는 은수의 품에 안겼다.
 ‘오냐, 오냐.’ 작게 읊조리며 은수가 준영의 등을 두드렸다.
 ‘좋네.’
 이 둘이 있기에 밖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고 들어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루의 피로를 털어내며 은수가 웃었다.
 
 ***
 
 은수가 커다란 수첩을 손에 들고 움직였다.
 방송에는 수많은 소품이 사용되고, 이는 적절하게 수량 파악과 교체를 해야 한다.
 제때 교체를 하지 못하고, 수량 체크가 안 되면 여러 가지 불편함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체크, 체크. 이건 곧 부서지겠네. 교체해야겠어.”
 방송국 지하에는 주차장과 연결된 창고가 하나 있다.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소품들을 내려 보내 보관하는 장소다.
 버리거나 교체해야 할 것들이 수두룩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대로 쌓이게 되는 것이다.
 은수는 이것들의 종류와 수량을 파악해서 위로 보고하는 일을 했다.
 워낙 어둡고 습한 지하 창고의 일이라 기피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은수는 직접 나서서 맡았다.
 남들이 안 하는 일이다보니 보너스가 두둑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힘들지도 않고.’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이미 정리해둔 데이터가 있어서 힘들지는 않다.
 출, 입고 수량만 잘 파악해 두면 나머지는 간단한 산수였다.
 ‘이 정도면 됐네.’
 수첩의 마지막 부분까지 체크한 뒤, 은수가 적당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어차피 시간을 주고 일을 시킨 게 아니라 적당히 뻐기다 가도 무방하다.
 열과 성을 다해서 일한다고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굳이 고생할 이유는 없었다.
 끼익······!
 그때, 타이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가 벌떡 일어나서 창고의 박스더미 건너편을 바라봤다.
 “아, 시팔! 저 아저씨 또 저렇게 대 놨네?”
 창고와 지하주차장 연결통로의 절반이 승합차로 막혔다.
 어차피 차량이동이 거의 없는 지역이니 상관은 없겠지만 은수는 교체해야 할 재고를 옮겨야 한다.
 길이 좁으면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한 마디 해야겠어.’
 은수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렇게 차를 대고 가면 그 날은 안 온다.
 재고 파악 및 정리로 며칠은 더 일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미리 처리해 둬야 할 일이다.
 ‘잠이나 자자.’
 고개를 흔들고 구석 진 곳에 자리를 잡아 몸을 뉘였다. 박스가 한 가득 쌓여 있어서 밖에서는 안 보인다.
 한 잠 때리고 저녁 시간에 맞춰서 올라가면 딱이다.
 ‘다른 일이 다 이랬으면 좋을 텐데.’
 그럼 참 일할 맛이 날 것 같다.
 달콤한 상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지 마요!”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은수가 잠에서 깨어났다.
 몽롱한 머리를 흔들어 깨우고, 눈을 비볐다.
 슬쩍 핸드폰 시계를 보니 아직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뭐야? 누가 여길 왔나?’
 박스를 조금 밀어 틈을 만들었다.
 “이거 왜 이래? 여기까지 따라온 거면 너도 마음이 있는 거잖아. 안 그래?”
 “그, 그렇지 않아요. 그냥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따라왔을 뿐인 걸요······.”
 일남 일녀의 모습이 보였다.
 말싸움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랑싸움인가?’
 그렇다면 특이하다.
 굳이 지하창고까지 와서 싸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에이, 솔직해지자고. 그럴 마음이 없는데, 여기까지 오는 게 말이 돼?”
 “전 그냥 순수한 팬의 마음으로 왔어요.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요.”
 “하, 이거 참. 무슨 수녀야? 내가 사인이나 해 주려고 여기까지 왔겠어?”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몸이 돌아가면서 얼굴이 은수의 눈에 들어왔다.
 ‘저 인간······.’
 얼마 전에 리허설 하는 모습을 봤었다.
 핵분열의 리더 성광열이다.
 “이, 이러지 마요! 자꾸 이렇게 나오면 소리칠 거예요!”
 “아, 미치겠네. 소리친다고? 소리쳐봐. 여기까지 누가 오는데?
 여자가 반항을 했지만, 성광열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하창고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공간이다.
 은수가 오지 않았다면 또 몇 달간은 그냥 방치했을 테니까.
 “다, 당신 후환이 두렵지 않아요? 이러면 큰일 난다고요!”
 “아이고 그러세요?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그쪽도 좋아서 날 따라온 거잖아. 쌍방이 좋아서 일 치르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난 이만 갈 거예요!”
 여자가 소리치며 뛰어나가는 찰나, 성광열이 팔을 잡아서는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창고에 쌓아 둔 박스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웃기고 있네. 내가 빠순이 년들 몇이나 여기서 먹었는지 알고 있냐? 어차피 너희들은 똑같잖아. 이 스타께서 친히 좋아해준다는데 어디서 반항이야?”
 “미, 미친······!”
 “뭐, 반항하면 조금 더 색다른 맛으로 먹을 수 있겠네.”
 성광열이 그대로 여자를 찍어 눌렀다.
 한 손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당겨 풀고, 벨트를 끌렀다.
 “하, 하지마!! 하지 말라고 이 미친 새끼야!”
 “큭큭. 신선하게 날뛰네?”
 여자가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창고 안이라 밖으로는 전달되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이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통로가 길고 이용자가 적어서 누가 듣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여자를 도울 수 있는 은수뿐이었다.
 ‘어쩌지.’
 은수는 고민했다.
 도리로 따지자면 나서서 돕는 게 당연하지만 세상살이가 워낙 팍팍하다보니 그게 쉽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일을 잘 해결한다고 해도, 상대는 대형 기획사에서 밀어주는 스타다.
 말단에서 일하는 직원 하나 잘라달라고 전화 넣는 것 따위는 쉬운 일이다.
 “꺄아아악!!”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두면 큰일 날 판이다.
 ‘아, 시팔!’
 도움이 필요 할 때 나 몰라라 하면 자신을 외면하던 친척들과 다를 게 뭔가.
 아무리 세상이 지랄 같아도 동생들 보기에 떳떳한 사람은 되고 싶다.
 은수가 박스를 밀어 재끼며 튀어나갔다.
 “뭐, 뭐야 이 새끼!?”
 “도와주세요!”
 반응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은수가 망설임 없이 달려가 성광열의 허리를 잡아챘다.
 큰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세게 굴렀다.
 “이 새끼! 뭐하는 거야!?”
 “닥쳐, 강간범 새끼야! 거시기를 잘라서 개 먹이로 주기 전에!”
 “뭐, 이 시팔! 미친 새끼 아냐!?”
 창고 바닥을 마구 굴렀다.
 둔탁하게 주먹을 주고받기도 했다.
 순식간에 몰골이 엉망이 되었다.
 “저리 안 비켜! 너 뭐하는 새끼야!?”
 “강간범 새끼 잡으러 온 저승사자다. 왜 쫄려서 뒈지겠냐?”
 “시팔, 별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성광열이 휘두른 주먹이 은수의 얼굴을 강타했다.
 코피가 팍 터졌다. 두어 걸음 뒤로 휘청거리다 고꾸라졌다.
 “병신아, 내가 가라데 유단자라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성광열이 소리쳤다.
 은수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들어 본 적이 있다. 핵분열의 멤버들이 저마다 한 가지씩 특기가 있는데, 성광열은 그게 가라데라고.
 “아가씨 지금 경찰에 신고해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은수가 일어났다.
 아직도 골이 울려서 앞이 흐릿했다.
 “야! 너, 신고하면 뒈질 줄 알아!”
 “흐윽······!”
 여자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큭······!’은수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 진짠 어디서 병신 같은 게 튀어나와서 이 지랄이야. 내가 존나 만만해 보이든?”
 “컥!”
 복부를 걷어차는 발길질에 은수의 몸이 들썩였다.
 속이 뒤집히는 거 같았다.
 “존나 기분 좆같네. 간만에 싱싱한 년 하나 먹고 몸보신 하는 줄 알았더니.”
 이 와중에도 성광열의 시선이 여자의 몸을 훑었다.
 블라우스 단추가 열리고 바지가 절반쯤 내려가 있어서 굉장히 선정적이었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핏물을 집어 삼키며 은수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 좆 하나 못 다뤄서 껄떡거리고 있다.
 잘라서 개 먹이로 줘도 모자란 새끼다.
 — 공즉사 무변일도······
 그 순간 갑자기 천마가 알려준 경문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맑아졌다.
 ‘이거······.’
 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상태가 호전되었다.
 웅크린 자세에서 그대로 허리를 펴며 튕겨나갔다.
 자신만만하게 서 있던 성광열이 깜짝 놀라서 손을 휘둘렀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 모두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맞은 것이다.
 “쿨럭······! 쿨럭! 이 시팔 새끼가 진짜!”
 “누구보고 새끼래, 이 개 좆만도 못한 놈이!”
 다시 달려 나간 은수가 그대로 머리로 받아 버렸다.
 수박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악!! 이 미친 새끼!”
 “아프니까, 쫄리냐 새끼야?”
 피를 뚝뚝 흘리며 은수가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섬뜩하던지, 성광열이 입을 닫았을 정도다.
 ‘이거 진짜 미친 놈 아니야?’
 더 싸우면 유단자인 자신이 이기겠지만, 미친놈하고 싸워서 멀쩡할 자신은 없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너, 시팔 다음에 두고 보자! 그리고 거기 계집년! 신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 알아서 처신해!”
 “어딜 도망가!”
 “꺼져, 병신아!”
 은수가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성광열이 밀쳐놓는 박스에 부딪쳐 잡지 못했다.
 우당탕 거리며 바닥을 구르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성광열은 저 멀리 도망친 후였다.
 “젠장!!”
 잡지 못한 분함에 은수가 바닥을 손으로 후려쳤다.
 아팠지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괘, 괜찮아요?”
 그때, 몸을 추스른 여성이 다가왔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은수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가씨, 빨리 신고해요. 지금 신고해야 저런 새끼 쳐 넣을 수 있어요.”
 “시, 신고요?”
 “네. 걱정 말고 신고해서 족쳐요. 제가 증인으로 가 줄게요.”
 은수가 강경하게 말했지만, 여자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핸드폰을 잡은 손만 계속 달싹였다.
 “아, 거 참. 지금 신고해야 저런 새끼 잡을 수 있다니까요.”
 “저, 저기요. 도와주신 건 고마운데 신고는 아무래도······.”
 “아니 왜요? 겁나서 그래요?”
 “그, 그것도 있지만 그런 일 당한 여자라고 소문나면 안 되니까······.”
 싫다고 소리쳐 놓고서는 지금은 영 딴판이다.
 은수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바라봤다.
 ‘겁먹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럼 이렇게 해요.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천천히 생각을 해 봐요. 강간하려고 한 미친놈을 그냥 풀어줘야 되겠어요? 신고해서 콩밥 먹게 해야죠. 안 그래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은수가 회유했다.
 여자가 고민하는 얼굴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가요.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아, 아니에요! 차는 저기 있어요. 그냥 제가 알아서 갈게요.”
 “아니 그래도 그냥 보내는 건······.”
 “제, 제발요! 그냥 혼자서 갈게요.”
 아무래도 남자가 곁에 있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 같았다. 은수가 잠시 생각하다 알았다고 말 했다.
 여자가 차를 세워둔 곳까지만 바래다주고는 터덜터덜 다시 창고로 돌아왔다.
 “하아······.”
 창고는 피와 망가진 박스 더미로 엉망이었다.
 보고 있으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
 
 은수는 겨우 난장판을 정리했다.
 피가 한 가득에 옷은 다 찢어져서 엉망이었다.
 창고 계단에서 굴렀다는 말로 둘러대고는 옷을 빌려 입었다.
 창고 물품들이 잔뜩 박살났지만 어차피 재고 정리하던 건 은수였다. 남는 상자에 부서진 것들 몰아넣고 모른 척 잡아뗐다.
 집요하게 검사하면 모르겠지만 그럴 거 같지는 않았다. 병원 가보라는 말과 몇 푼 더 받은 돈을 주머니에 우겨넣고는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오, 오빠야! 얼굴이 왜 그래!?”
 “형! 어떻게 된 거야? 누구한테 맞았어?”
 집에 오니 한 바탕 난리였다.
 여동생 소영은 치료한다고 구급상자를 들고 왔고, 남동생 준영은 경찰에 신고한다고 펄펄 뛰었다.
 겨우겨우 다독여 돌려놓고 나서야 간신히 쉴 수 있었다.
 ‘······그건 뭐였을까?’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내고 나자 생각이 미쳤다.
 성광열과 싸울 때 머리에서 들려온 경문.
 그리고 갑자기 몸이 개운해지며 기운이 솟았던 일.
 ‘우연은 아니겠지.’
 아드레날린이 돌면 사람이 갑자기 힘이 솟는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머리를 얻어맞아서 눈앞이 핑핑 돌았는데 갑자기 힘이 솟구쳤었다.
 “천마 할아버지.”
 은수가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닦고는 천마를 불렀다. 상처가 생긴 은수의 얼굴 대신 허옇게 샌 수염을 단 천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음! 자네가 날 불렀는가? 마침 잘 됐군. 이것도 인연이니 내가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줌세!”
 똑같은 레퍼토리. 안 들어도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다.
 “천마신공의 72구결. 그걸 외우면 갑자기 힘이 생길 수도 있나요?”
 “으음! 네가 어떻게 천마신공의 72구결을 알고 있는 것이냐? 아! 혹시 상제의 부하인가!?”
 “천마 할아버지가 알려 줬잖아요. 기억 안 나요?”
 “내가? 내가 알려줬다고?”
 거울 속 천마의 얼굴이 혼란스럽다.
 허연 수염을 손으로 뜯으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렇군! 그때였어! 내가 천산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을 때네!”
 은수가 인상을 와락 구긴 채,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다른 얘기를 하나 싶었는데 결국 제자리다.
 천산에 갔고, 누구와 만나고 싸웠다는 이야기. 그러다 마지막에는 자기 자랑과 상제에 대한 울분으로 끝난다.
 ‘나 혼자 알아봐야겠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줄기차게 이어지던 천마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
 
 은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출근했다.
 담당자에게 보고하고 창고 열쇠를 받아 내려왔다.
 전날 대충 치운 모습이 역력했다.
 ‘제대로 정리하려면 한참 걸리겠네.’
 한숨을 푹 내쉬며 도구들을 끌렀다.
 핏자국은 제대로 안 닦으면 흉한 얼룩으로 남는다.
 게다가 창고는 환기도 잘 안 되어 오랫동안 묵혀 둘 경우 다른 소품들에도 냄새가 배고 만다.
 걸레를 빨아와 세탁 용품을 묻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 여자. 오늘 중으로 연락이 오려나?’
 연락처는 받았지만 먼저 전화하는 건 조금 그렇다.
 마음이 진정되고 난 뒤에 연락을 해 준다면 경찰서로 같이 가주면 될 일.
 ‘그 호로 새끼 콩밥 먹는 건 꼭 봐야지.’
 그 뒤로, 방송국에서 거려해서 목을 날린다면 어쩔 수 없다. 하기 전에는 망설였지만, 이미 일을 벌인 뒤로는 딱히 후회가 남지 않는다.
 나중에 동생들이 왜 그렇게 됐냐고 물어봤을 때 자신 있게 대답 할 수 있으니까.
 “우리 동생은 오늘도 바쁘네?”
 그때, 창고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 FD가 커피 두 잔을 들고는 웃고 있었다.
 “호필이 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래요?”
 “하하. 멋진 윤PD님의 뒷수발 때문이지 뭐. 하여튼 그 인간은 짬밥은 뒷구멍으로 먹었나 봐.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내어주는 커피를 받으며 은수가 웃었다.
 석FD가 말하는 윤PD는 그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낙하산으로 들어와서 초고속 승진. 일의 경계를 잘 몰라서 아무나 막 부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형도 고생이 많네요.”
 “나야 뭐, 좋아서 하는 거니까. 또 아냐? 이렇게 구르다가 눈에 딱 뜨여서 픽업 될지.”
 “에이, 형 말주변으로 그러기는 어려워 보이는데요?”
 “인마, 내가 왜? 왕년에 봉이 석선달이라고 불렸어. 입만 딱 열면 다 넘어온다고.”
 되지도 않는 허풍에 은수가 픽 웃고 말았다.
 FD가 별 다른 연줄도 없이 픽업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별난 재주나 외모에 장기가 없다면 더더욱.
 석FD는 부지런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을 지녔지만, 유리천정을 뚫고 갈 만큼의 강점은 없었다.
 “형. 그러지 말고 공채시험 준비해 봐요. 저번에 붙은 사람들 보니까, 형보다 나은 것도 없드만.”
 “공채? 어휴, 내 스펙으로 무슨 공채냐. 학력 무시 재능 우대. 이런 말도 다 개뻥이지. 제대로 된 대학이름 없이 서류나 붙겠어?”
 석 FD가 한숨을 푹푹 쉬며 하는 말을 했다.
 예전에 비해서 등용문이 넓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바늘구멍이다.
 서울대, 연대, 고대를 비롯해서 빵빵한 스펙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서류통과는 말 그대로 요원한 일이었다.
 “아아, 아쉬워라. 형이 떡하니 PD가 되면 나도 연줄 잡고 낙하산이나 돼 보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조금 쳐지는 것 같자, 은수가 농담조로 말했다.
 “새끼. 내가 PD가 돼도 넌 안 쓴다, 인마. 돈이나 밝히고 요령 피우는 놈을 내가 왜 쓰냐?”
 “아니 형님.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요? 나처럼 일 잘하고 바지런한 놈이 또 있대요?”
 “어허, 이놈이 양심은 어디에 팔아먹으셨을까?”
 “남은 게 조금 있는데, 사실라오?”
 능글맞은 얼굴로 은수가 말을 붙여오자, 참지 못하고 석FD가 크게 웃고 말았다.
 “어우, 새끼야. 너도 진짜 못 말린다. 어디서 그렇게 뻔뻔한 것만 잔뜩 배워왔냐?”
 “이게 다 경험과 노화우 아닙니까? 구르다 보니 저절로 배워지더이다.”
 “어련하겠냐.”
 낮은 웃음으로 큭큭 거리며 석FD가 은수의 등을 두드렸다.
 그에게 있어 은수는 재미있는 동생 그 이상이었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 동료이며,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라 해야 할까.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석 FD가 은근한 눈으로 은수를 바라봤다.
 “이러다 커피 다 식겠어요. 이거나 다 먹고 얘기하죠.”
 그 시선이 조금 민망했을까.
 은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 우우웅!!
 그때였다.
 은수의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날의 싸움으로 액정이 반쯤 나가서 번호를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서울 영등포 경찰서, 도개준 순경입니다. 금일 08시 경으로 신고가 접수 되었으니, 서로 찾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신고요?”
 은수가 살짝 움찔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그 여자가 전화 없이 먼저 경찰서로 간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까지 가면 되죠?”
 “신고를 접수하신 분이 서에 나와 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지금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 받고 내려왔는데, 당장 가기는 조금 그렇다.
 하지만 전날 같이 가 준다고 말을 했는데 이 제와서 안 된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잠시 고민하던 은수가 석 FD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 나 잠시 나갔다 와야 하는데 누가 물어보면 변명 좀 해줘요.”
 “왜? 무슨 일인데?”
 “별거 아니에요. 금방 갔다 올게요.”
 석FD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서로 찾아가 볼게요.”
 “알겠습니다.”
 은수가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품에 쑤셔 넣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나왔으니 후딱 가서 증언하고 돌아오면 될 거 같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래. 뭐지 모르겠지만, 잘 처리하고 와라.”
 “땡큐, 땡큐!”
 말없이 수락해준 석FD에게 감사의 말을 던지고 은수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찰서는 방송국과 멀지 않았다.
 
 ***
 
 택시를 타고 이동하니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서로 들어가 몇 사람에게 물어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전날 보았던 여자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어······?”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성광열의 모습도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
 신고를 접수하고 사람을 잡아왔다고 보기에는 너무 빠르다.
 ‘따로 전화해서 부른 건가?’
 그렇다면 굉장히 행동력이 좋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수가 조사 중인 곳으로 걸어갔다.
 “아, 오셨군요. 그쪽에 앉아 주세요.”
 전화를 한 것으로 보이는 경찰이 손짓으로 안내를 했다.
 은수가 여자의 맞은편.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어젠 잘 들어가셨죠?”
 그러면서 슬쩍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
 그런데 말이 없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술을 잘근 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말을 섞기 싫어하는 피하는 것 같았다.
 ‘뭐지?’
 증언을 위해서 와 준 사람에게 보이는 태도라고 보기에는 이상하다.
 “정은수 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네?”
 “지금 무슨 일로 불려온 건지 이해를 못 하시는 거 같군요. 신고가 접수됐단 말입니다.”
 “아니,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제가 어제 정신이 개운해지면 신고를 하라고 했으니까요.”
 그러자 경찰관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어이없어 코웃음 치려는 걸 겨우 참는 얼굴이었다.
 ‘······이상한데?’
 그러고 보니 뭔가 묘하다.
 은수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몇 없는 자리에 앉은 이들이 하나같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기 형사님. 제대로 신고가 된 거 맞나요? 저기 앉아있는 핵분열 성광열이라는 놈이 여기 여성분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건데······.”
 “뭐라고요?”
 “뭔가 잘못 전달 된 거 같아서요. 전 어제 일을 증언하러 나온 거예요. 여기 피해자분이 제대로 말을 못 한 거 같은데, 필요하면 첨언할게요.”
 “하, 이거 참.”
 은수의 말에 경찰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가라앉은 눈으로 은수를 노려봤다.
 “이거 봐요 정은수 씨.”
 “······네?”
 “신고가 접수 된 건 당신이에요.”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은수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러고 보니 창고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도, 신고가 접수됐으니 나와 달라고 했다.
 증언이 필요해서 불렀다는 말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여 넘겨짚었을 뿐.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기 있는 윤가을 양에 대한 성폭행 미수. 그리고 이를 저지하고자 나선 성광열 씨에 대한 폭행. 당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신고가 들어왔다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은수가 말없이 마른 침을 삼켰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
 
 은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말하기가 어렵거든 숨을 크게 쉬라 하였다.
 몇 번 숨을 몰아쉬자 조금 진정되는 걸 느꼈다.
 “형사님.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성폭행을 하려 한 인간은 제가 아니라 저기 있는 성광열입니다.”
 구석에 앉은 성광열을 가리키며, 은수가 차근차근 얘기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도개수 순경이 차트를 슬쩍 넘기며 대꾸했다.
 “정은수 씨. 여기서 거짓말 하면 큰일 나요.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순순히 자백하세요.”
 “아니, 그게 무슨······ 아! 이봐요, 아가씨. 이름이 윤가을? 가을 씨. 어제 있었던 일 제대로 말 했어요? 내가 도와주고 그래서 무사히 돌아갔잖아요.”
 은수가 들어먹지 않는 경찰 대신 묵묵부답의 가을에게 시선을 돌렸다.
 “······.”
 “이봐요.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요. 어제 내가 도왔잖아요. 창고에서 저 새끼한테 성폭행 당하려는 걸 도와줬잖아요! 그래서 피도 나고 상처도 입었는데!”
 화가 끓어오르니 목소리가 커졌다.
 “이봐요, 정은수 씨! 조용히 하세요! 여기가 그렇게 마음대로 떠들 수 있는 장소 같아요? 가을 씨가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당신이 창고 근처에서 덮쳤다면서.”
 “제가요? 가을 씨를? 말 도 안돼요! 제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러다가 촬영 끝나고 내려온 광열 씨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난투에 돌입했다고 하던데. 증언 내용이 딱 맞고 시간상으로도 오차가 없어요. 발뺌해도 소용없으니까 순순히 말하죠?”
 은수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숨이 턱하고 막혀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거 같다. 자존심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한 방울 뚝 하고 떨어졌을 것이다.
 윤가을을 보며 말했다.
 “가을 씨······왜 이래요? 내가 도와줬잖아요. 도와달라는 외침에 내가 도와줬잖아요. 막 맞으면서도 버티고 당신 무사하게 도와 줬잖아!!”
 “소, 소리치지 말아요!”
 버럭 외치는 은수의 목소리에 가을이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있던 형사 하나가 재빠르게 다가오더니, 은수의 어깨를 짚어서 아래로 찍어 눌렀다.
 책상 위에 있던 볼펜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형사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은수에게 경고했다.
 “자꾸 그렇게 사건을 날조하려고 하면 죄목만 추가됩니다.”
 “날조라니! 내가 왜 날조를 한단 말이에요! 아니 애초에 내가 무슨 수로 가을 씨를 폭행하는데요? 뭐, 내가 초콜릿으로 유혹이라도 했나? 그 창고는 몇 달에 걸쳐서 한 사람 오기는 힘든 곳이라고요! 이게 안 이상해요? 안 이상하냐고요!”
 “그야 뭐······.”
 형사의 기세가 살짝 죽었다.
 그래, 아무리 날조를 해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은수가 배에 힘을 팍 주고 이어서 외쳤다.
 “그리고 촬영 끝나고 내려온 성광열이 발견했다고 했어요? 음방 끝나고 스케줄 가는 연예인이 거긴 대체 왜 내려가는데요? 차 빼러? 아니면 창고 청소하러?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팔을 풀고 일어나 책상을 후려쳤다.
 기세가 대단했다. 맞은편 경찰마저 순간 할 말을 잊을 정도로.
 “이거 지지부진 시간만 끄는군요.”
 그때, 성광열과 나란히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 좋아 보이는 양복과 반듯한 머리 스타일.
 나는 변호사야 라고 외치는 복장이었다.
 뚜벅뚜벅 걸어 곁으로 오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광열 군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거야, 최근에 면허를 따서 직접 몰아보고 싶다고 해서, 그런 겁니다. 창고와 연결되는 통로를 타고 비명 소리가 들려서 현장을 가 보게 된 것이고요. 이미 증언을 다 했는데, 그렇게 허둥대시면 곤란합니다.”
 “아, 음. 그렇죠. 죄송합니다.”
 형사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건 변호사의 말빨일까 아니면 질 좋은 옷일까.
 은수가 변호사를 노려봤다.
 “그리고 가을 양이 말하기를 그쪽이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던데. 기억 안 납니까?”
 “뭐? 무슨 소리입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가을 양은 방청을 하러 온 방청객이었습니다. 혹시 지하주차장으로 가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다더군요. 그러다, 창고에서 나오는 은수 씨를 보았고 손 좀 빌려달라는 말에 순진하게 따라갔죠. 가을 양이 험한 일을 당한 건 그저 남 돕기를 좋아하는 착한 마음씨를 지녔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하주차장과 창고는 인적이 드문 곳.
 따로 본 사람이 없다면 결국 현장에 있던 이들의 증언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
 “C······CCTV. 창고랑 주차장에 CCTV없었나요?”
 은수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물었다.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방송국에 물어보니 그쪽에는 없다고 하더군요. 따로 영상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
 은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분명 좋은 의도로 남을 도왔을 뿐이다.
 동생보기 부끄러운 형, 오빠가 되기 싫어서 각오하며 나선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결과가 겨우 이건가?
 성난 얼굴로 윤가을을 돌아봤다.
 “윤가을 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제대로 말해요. 내가 어제 어떻게 했는지. 당신이 위험 할 때 나서준 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저는······.”
 “어이, 거기까지 하자고.”
 성광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선 변호사가 어깨를 잡으며 말렸지만, 이를 뿌리치며 은수에게 다가갔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사람 얼굴 이렇게 만들고 그냥 가면 되나?”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켰다.
 전날의 싸움 때문에 상처가 여럿 있었다.
 은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제정신이냐? 성폭행하려던 건 너잖아. 그걸 막으려고 싸운 건 나고.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그렇지 그런 말이 나와?”
 “이래서 범죄자들은 안 된다니까. 사람이 이렇게 뻔뻔해요. 주제에 예쁜 여자는 알아본다고, 냅다 덮치기나 하고. 하긴, 창고에서 박혀 일하는 주제에 언제 이런 여자를 만나보기나 했으려나?”
 성광열의 손이 윤가을의 어깨에 닿았다.
 흠칫하고 떠는 모습이 은수의 눈에 들어왔다.
 ‘저러면서 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성광열의 턱밑에 손을 대며 으르렁 거렸다.
 “좆까 이 개새끼야. 내가 오냐오냐 넘어갈 거 같아?”
 “어이쿠야 무서워라. 이거 잘하면 한 대 치겠다? 거기 형사님들. 범죄자가 이렇게 설치도록 내버려둬도 되나요? 저기 유치장에 가둬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겁먹은 시늉하며 웃는 성광열의 모습이 역겹다.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대로 한 대 치고 싶다.
 코뼈를 분지르고 이를 박살내서 평생 죽이나 떠먹도록.
 — 공즉사 무변일도······
 그 순간, 천마의 72구결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구결이 똬리를 틀어서 뱀처럼 올라왔다.
 불같던 분노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는 심장에 자리를 잡았다.
 힘이 들어갔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여기서 치면······.’
 결국 죄만 추가 될 뿐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여기서는 화보다 현명함을 찾을 필요가 있다.
 “진술할게요. 전부 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 하는데, 저는 무죄입니다.”
 형사를 보며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억울하다고 발악해 봐야 손해.
 냉정하지 못하면 결국 더럽고 치사한 현실에 잡아먹힐 뿐이다.
 ‘죽어도 무죄를 밝힌다.’
 이를 거세게 깨물었다.
 
 ***
 
 길고 긴 진술을 마치고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창고 내의 CCTV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고, 엇갈린 진술에 대한 확인도 해야 한다.
 정황 상 은수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은 맞지만 바로 ‘너 범인’이라고 지목될 정도는 아니었다.
 추가 진술에 대한 약속을 하고 경찰서를 벗어났다.
 “······.”
 본래라면 방송국 돌아가 일을 해야 하겠지만 그럴 정신이 안 들었다.
 일찍 왔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화장실에 들어왔다.
 낡고 삭은 변기.
 그 위에 쪼그려 앉아서 팔로 발을 감쌌다.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경찰서를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윤가을에게 물었다.
 왜 이러는 거냐고.
 대체 왜 도와준 자신을 이런 궁지로 모는 거냐고.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 돌아온 대답은 이게 전부였었다.
 어쩔 수 없다. 대체 무엇이? 누가 이렇게 안 하면 목이라도 딴다고 했는가?
 전부 다 개소리일 뿐이다.
 어쩔 수 없는 것 따위는 없다.
 은수도 망설이던 것을 이겨내고 도와주러 나가지 않았던가.
 결국 변명이고 자기 위안의 표정연기일 뿐이다.
 ‘뭔가 받았겠지. 돈. 아니면 연기자로 키워준다고 말이라도 했든가.’
 하루아침에 사람이 그냥 변할 수는 없다.
 은수가 좋은 일 했다고 희희낙락하며 잠들었을 때, 성광열과 그를 돕는 회사의 인물들은 이미 윤가을을 포섭한 것이다.
 참 빠르기도 하다.
 회사의 스타가 구설수에 엮이면 안 되니까, 새벽잠까지 깨워가면서 움직인 건가?
 좋은 일 하겠다고 나선 청년 따위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 안 한 채?
 — 콰드득!
 분한 마음에 쥐었던 화장실 문고리가 부서졌다.
 오래 돼 낡은 것이 힘을 버티지 못한 모양이다.
 ‘안 되니까 별게 다······.’
 짜증이 몰아쳤다.
 하지만 그건 이내 사라졌다.
 지금은 짜증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만약, 성폭행 미수와 폭행이 성립된다면 구속되는 건 면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남겨지는 동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집에 남겨진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믿고 맡길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빠야. 무슨 일 있어요?”
 문고리 부서지는 소리가 컸을까?
 살금살금 다가온 소영이 문을 빠끔 열었다.
 은수가 황급히 다리를 내리고 부서진 고리를 뒤로 숨겼다.
 “아, 미안. 오빠 때문에 신경 쓰였구나.”
 “아닌데. 소영이 신경 안 쓰였는데. 오빠야가 얼굴이 안 좋아서 왔는데요.”
 “그랬니?”
 은수가 소영을 안아들며 화장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부서진 문고리는 몰래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오빠노릇을 제대로 한다고 말 할 수가 없다.
 “오빠야 힘들어요?”
 “아니, 전혀. 우리 소영이가 있는데 오빠가 힘들 리가 없잖아.”
 “응······ 근데 왜 힘들어 보일까요?”
 바닥에 내려온 소영이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서 은수의 얼굴을 매만졌다.
 나이보다 체구가 작은 아이다.
 어릴 적 사고에 휘말려 성장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아직도 대여섯 살 그대로의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에 대한 거라면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울컥 넘어오는 무언가를 삼킨 채, 은수가 말을 했다.
 “내가 우리 소영이 걱정하게 만들었네. 자자, 보렴. 오빠 이제 괜찮아.”
 그리고는 그녀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치 경극을 하듯, 손을 번갈아 옮기며 표정을 바꾸었다. 웃는 얼굴, 장난치는 얼굴, 놀리는 얼굴. 힘들어 하는 표정을 지우며 장난을 쳤다.
 “아하하하! 오빠야 표정이 웃겨요!”
 그제야 소영이 걱정을 지우고 웃었다.
 “크! 오빠가 나가면 잘생겼다고 다들 난리인데! 우리 소영이는 오빠 얼굴이 웃기는구나!”
 “아닌데, 아닌데! 소영이도 오빠 얼굴 잘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얼마나 잘 생겼는데?”
 “웅······ 이만큼?”
 최대한의 표현인듯, 소영이 발뒤꿈치까지 들어 올리며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이 버둥거리는 펭귄 같아서 은수가 가볍게 웃었다.
 “아, 오빠야 웃었다!”
 “아까 들어 올 때부터 웃었는데?”
 “아니에요! 소영이 숨어서 봤는데, 오빠야 안 웃었어요.”
 “아니 그걸 왜 숨어서 지켜······.”
 순간, 은수가 말을 멈췄다.
 머리에서 띵 하고 종이 울리고 있다.
 “소영아, 아줌마네 집에 가 있을 수 있지?”
 “응. 소영이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투를 챙겨들었다.
 “오빠는 급하게 할 일어서 그러니까, 아줌마랑 같이 있어.”
 “응! 알았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오빠인 은수가 급하다는 건 알 것 같다. 소영이 손까지 들어가면서 힘차게 대답을 했다.
 “그래, 그래야 착한 아이지.”
 머리를 쓱쓱.
 은수가 소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끝났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은수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벌서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은수! 야, 인마 너 어딜 그렇게 나가 있던 거냐? 재호 형이 너 찾고 난리 났어.”
 입구에서 석FD를 만났다.
 “죄송해요. 급한 일이 있어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너 그러다가 잘려. 재호형이 툭하면 애들 목 날리는 거 알고 있잖아.”
 직장에서 잘리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급한 것이 있었다.
 은수가 로비 저편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형, 혹시 지하주차장 창고 통로에 차 대 놓는 사람 알아요? 흰색 승합차.”
 “흰색 승합차? N 프로덕션 건가?”
 “누군지 알고 있어요?”
 “내가 누구냐? 방송국 감시탑 아니겠냐? 요즘 들어오는 외주 업체 중에 차 대고 세월아 네월아 하는 건 개들밖에 없지.”
 은수가 다급하게 석 FD의 소매를 잡았다.
 “혹시 번호 알아요? 급하게 연락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번호? 프론트에 기록해 둔 게 있으니까 찾아보면 나올 거다. 근데 무슨 일인데 그래?”
 “그건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은수가 그대로 몸을 돌려서 프론트로 향했다.
 뒤에서 석FD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있어야 한다.’
 발걸음이 다급했다.
 
 ***
 
 프론트 여직원과 한 바탕 실랑이를 하고 번호를 알아냈다.
 외부 소품제작회사의 직원으로, 최근 진행되는 방송 때문에 매일같이 방송국에 들렀다는 것이다.
 뚜르르르······
 통화음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이스 메일로 넘어갔다.
 “젠장!!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은수가 역정을 내며,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벌써 스무 통 이상의 전화를 건 것 같다.
 ‘······어제 밤샘 촬영이 있다고 했어. 만약 그쪽에 동원돼서 이동했으면 지금은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초조해지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머리를 굴렸다.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보자.’
 외주업체 번호야 인터넷만 찾아도 알아 낼 수 있었다. 사무실 번호라 적힌 것을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N프로덕션입니다.”
 낭랑한 사무실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KSS 윤일준입니다.”
 윤일준은 나이 찬 선임 조연출이다.
 외주업체에 대한 대응이나, 선별도 직접 하기 때문에 통화하기에는 적합한 이름이었다.
 “어머, 윤 피디님.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윤일준은 피디라 불리는 걸 좋아한다.
 그걸 아는 상대 반응에 혹시나 싶었는데, 다행히 분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기야 하루에도 몇 명이고 상대하는 사무실 직원이 그걸 분간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소품 때문에 그런데, 그쪽 직원 주소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주소요? 누구 말인데요?”
 “어제······ 8시에 방송국에 온 친구. 흰색 승합차를 모는데 알고 있나요?”
 “아! 필수 씨요? 알고 있죠. 근데, 무슨 일로 찾는지······.”
 뭐 이리 알고 싶은 게 많은 걸까.
 당연한 절차인데 짜증이 확 밀어 왔다.
 ‘진정하자.’
 그냥 사정을 설명하고 주소를 물을 수도 있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 성광열이 이것도 생각하고 접촉을 했다면 찾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소품 수량 때문에 그래요.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확인하는 게 제 일 아니겠어요? 크게 일 벌리기 싫어서 직접 알아볼까 하네요.”
 “어머! 진짜요? 그럼 전화로 하시지 않고······.”
 “통화가 안 되네요. 아마 자고 있는 거 같은데, 시간이 지금밖에 안 돼서요. 찾아가서 이야기만 듣고 오면 될 거 같아요.”
 “그럼 알려드려야죠.”
 물건이 문제가 생기면 방송국은 외부업체를 바꾸면 그만이다. 을의 입장인 만큼, 사무실 직원은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다.
 “주소가······.”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직원이 불러주는 주소를 받아 적고는 곧바로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멈춰 섰다.
 
 ***
 
 참 힘들게도 도착했다.
 오래 된 아파트 입구에서 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기를 살피니 부재중 통화가 상당하다.
 아무래도 일은 잘릴 모양이다.
 ‘진짜 개같네······.’
 괜히 사람 하나 도와줬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이래서 흔한 인터넷 글들에서 나 몰라라하고 가라고 충고하는가 보다.
 인정이 독으로 다가오면 도의니 도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띵동—!
 집 앞에 도착해서 벨을 눌렀다.
 제대로 잠들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이나 벨을 더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더벅머리의 남성이 나왔다.
 “누구슈······?”
 “필수 씨 맞나요?”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눈치를 보니 다른 누가 찾아왔던 거 같지는 않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은수가 사정을 설명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성폭행당할 뻔한 여자를 도와 준 일. 그리고 그 다음 날 되레 독박 쓰게 된 일.
 “어이구야, 젊은 친구가 고생했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다행히도 필수는 호의적이었다.
 그도 말단에서 일하는 사람.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라면 남 못지않게 당해본 것이다.
 억울하게 옥살이 하게 생긴 은수의 사정이 남일 같지가 않았다.
 “일 할 때 쓰는 승합차 말이에요. 전방 블랙박스 설치 돼 있죠?”
 “그야 당연하지. 요즘은 필수라고.”
 은수가 안도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 반복해서 보면서 승합차에 블랙박스가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워낙 갑작스럽다 보니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소영이 숨어서 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깨우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우리 복덩이.’
 속으로 엉덩이를 토닥토닥하며 말을 이었다.
 “블랙박스 영상이 필요해요. 그 빌어먹을 년놈들의 모습이 분명히 찍혔을 테니까요.”
 “오, 그런가? 그럼 도와줘야지. 세상에 어디 사기 칠 사람이 없어서 힘들게 일하는 젊은이를 괴롭히나. 꼭 콩밥 처먹이게나.”
 “고맙습니다.”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게 있어서 은수가 필수의 손을 잡았다.
 아침만 해도 경찰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적인 거 같았다. 이렇게 별말 없이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나랑 같이 나가세. 어차피 방송국에 물품 대러 가야 하기도 하고. 미리 가서 경찰서에 영상 제출하면 되지 않겠어?”
 “그래주실래요?”
 “그럼. 우리가 뭐 남인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으면 동료지.”
 필수가 은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은수가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이라도 나올 거 같았다.
 ‘아직 아니지.’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엿 먹인 년 놈에게 콩밥을 먹이고 난 다음.
 그 뒤에 울 생각이었다.
 
 ***
 
 “어허, 이거 참.”
 영등포 경찰서 도개준 순경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바뀌었다.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겠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영상대로라면, 두 사람이 말한 진술은 전부 거짓이 되네요.”
 주변 경찰들도 하나 둘 다가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은수와 필수가 가지고 온 블랙박스.
 영상 안에는 성광열과 윤가을의 모습이 똑똑히 찍혀 있었다.
 “어때요? 이거면 두 사람 다 쳐 넣을 수 있나요?”
 “이 정도면 뭐 빼도 박도 못하겠네요. 얼굴도 제대로 나오고······.”
 “좋았어!”
 은수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하 잘 됐네. 잘 됐어.”
 “고마워요. 이게 다 필수형님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다. 다 은수 동생 은덕이지. 그럼 난 할 일이 이만 가 볼 테니까, 해결되면 연락해. 이것도 인연이니 같이 소주나 한 잔 하자고.”
 “네! 꼭 연락할게요.”
 경찰서 밖으로 나가는 필수의 등 뒤로 은수가 허리를 굽혔다. 진짜 사람이 곤궁에 처하면 이렇게 감정이 솟구치는가 보다.
 “그럼 두 사람에게도 연락하세요. 내가 그 면전에 대고 한 마디 해 주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때, 경찰서 문이 열리고 예의 변호사와 성광열, 윤가을이 들어왔다.
 “뭔가 찾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굉장히 빨리 도착했다.
 서의 누군가 은수가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따로 연락을 했다는 말이다.
 “사건 당시의 영상이 찍힌 블랙박스가 나왔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변호사와 윤가을이 블랙박스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성광열은 팔짱을 낀 채 껌을 씹고 있다. 뭐가 나왔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
 은수가 코웃음을 치며 노려봤다.
 영상까지 나온 마당에 과연 어떻게 할 셈인가.
 그 앞에서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이런 게 있었군요.”
 한참동안 영상을 보고 난 뒤 변호사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 말이다.
 “어때요? 이제 더 할 말이 있습니까?”
 “곤란하군요. 이런 게 있다니.”
 은수가 입술을 비틀며 변호사 앞에 앉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자리에 제대로 된 사람이 앉은 것 같다.
 “소속사 가수의 치태가 알려지는 건 원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무슨 소리입니까?”
 “형사님. 솔직하게 말 하죠. 핵분열의 성광열 씨는 조금 변태적인 성적취향이 있습니다. 영상에 나온 것처럼 거칠게 하는 걸 즐기죠.”
 하지만 변호사의 대응은 기대와 달랐다.
 “소속사 가수의 이미지 때문에 진술에 누락된 부분이 있고 말았군요. 그 부분은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자, 잠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성적 취향? 저게 어떻게 성적 취향이란 말입니까!? 누가 봐도 성폭행을 하는 모습인데!”
 “은수 씨. 죄송한 말이지만, 두 연인의 사생활을 타인이 왈가왈부 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개······.”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자면 윤가을 양은 얼마 전부터 JM. Ent의 소속 연예인으로 등록됐습니다. 즉, 사내 커플이라는 거죠.”
 은수가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이것 때문이었나?
 싫다고 소리치던 윤가을이 얼굴 싹 갈아엎고는 나 몰라라 하는 이유가.
 연예인?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저, 변호사 님. 두 분의 문제야 그렇지만, 가을 양이 진술한 걸 보자면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은수 씨를 범인으로 몰고 고의적으로 진술을 했으니, 무고죄에 해당하는 부분이죠.”
 어쩐 일인지 도개수가 은수의 편을 들었다.
 무고죄. 신고사실이 허위에 해당되어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면 해당된다.
 윤가을은 은수를 성폭행범으로 몰기 위해 고의적으로 허위 진술을 했으니, 분명히 해당되는 바였다.
 “물론 고의라면 그렇죠. 하지만 영상에서 보듯이 은수 씨가 굉장히 폭력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가을 양의 입장에서는 연인과의 밀회에서 뜻하지 않은 침입자를 맞은 것이죠.”
 하지만 이조차 예상했는지, 변호사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싸움 끝에 은수 씨가 광열 군을 이겼습니다. 보호자가 사라진 가을 양은 순순히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그 과정에서 느낀 정신적인 압박과 수치심은 충분히 폭행이라 부를 만합니다.”
 콰앙—!!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은수가 책상을 치며 일어나 변호사를 쏘아봤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반응이 없었다.
 대신 도개수 순경이 차분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재판까지 끌고 가면 장담하기 어려울 텐데요?”
 “판결이야 훌륭하신 분들이 내리겠죠.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일을 벌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합의를 하겠다는 말이군요.”
 “은수 씨가 동의를 한다면요.”
 “절대 안 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은수가 소리쳤다.
 범죄자 취급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합의를 하라?
 절대 안 된다. 어떻게든 콩밥을 먹여야 속이 풀릴 거 같다.
 변호사가 그제야 은수를 돌아봤다.
 “이거 보세요 은수 씨. 화가난건 이해합니다. 갑자기 범인으로 몰렸으니까요. 하지만 가을 양 입장도 이해를 해 주셔야죠. 얼마나 놀랬겠어요. 연인과의 밀회에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와 그 연인을 폭행했으니까요. 어차피 폭행 건은 쌍방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가을 양이 오해한 부분에서는 회사에서 보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넘어가죠. 이게 가장 깔끔한 방법입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목소리가 은근했다.
 “내가 그딴 말에······.”
 “오천. 합의금으로 드리겠습니다. 듣자하니 가정형편이 안 좋다고 하던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 오천만 원?”
 다시 한 번 개소리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오천만 원이라는 소리에 쏙 들어갔다.
 계약직 직원으로 저 돈을 모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버텨도 몇 년이나 걸려야 겨우 모을 수 있는 돈이다.
 아니, 몇 년으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마음이 크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난 부끄럽지 않은 형과 오빠가 되어야······.’
 되새기자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손과 발이 떨릴 지경이다. 부끄러움 없이 살자고 생각했는데, 고작 이런 것에 흔들리고 있다니.
 ‘하지만······.’
 오천만원이라면 반 지하에서 나와 조금 더 나은 집으로 갈 수도 있는 돈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바퀴벌레에 벽은 곰팡이로 덮인 지금의 집. 두 동생을 키우기에는 좋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으로 이사 갈 수 있다면 무엇도 아깝지 않다.
 새 옷이나 맛있는 음식.
 공부하는데 필요한 참고서도 넉넉하게 구해 줄 수 있다.
 어쩌면 소영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갈 정도의 돈이 될지도 모른다.
 “······.”
 분노와 수치심. 자괴심이 복잡하게 몰아쳤다.
 아무리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은수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 해 줄 사람도 없었다.
 — 공즉사 무변일도······
 그때. 천마의 72경문이 다시 머릿속을 스쳐갔다.
 청량한 기운이 가슴 안을 맴돌았다.
 은수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72글자의 경문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노, 억울함, 당황, 슬픔, 수치심.
 온갖 감정들이 쏟아져서 72경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경문의 글자들이 하나 둘 흩어지더니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배열이 바뀌고 순서가 달라졌다.
 가로 열로 보이지 않고, 선이 교차하여 십자가나 엑스자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런 것이 뭉치고 뭉치니, 선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구체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구체는 빠르게 회전했다.
 글자의 테두리가 사라지고 광활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고 한계 없는. 끝없는 공간의 연속성이 가슴을 두드렸다.
 속이 탁 트였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고민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란 것을.
 끝없는 하늘에 비교하면 하찮은 일일 뿐이다.
 수치심에 휩싸일 이유도, 이것으로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스스로가 오롯이 설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괜찮았다.
 머리가 맑아졌다.
 “후······.”
 은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변호사의 얼굴과 고개 숙인 윤가을.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성광열의 모습이 보였다.
 “결정하셨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변호사가 물었다.
 “결정했습니다.”
 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서로가 편한 것이 좋겠죠.”
 당연한 결과라는 듯, 변호사가 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지 결정했다는 말만을 들은 채.
 하지만 은수의 답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오해가 있는 거 같군요. 난 합의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 물론 필요하죠. 하지만 댁 같은 인간의 언변에 놀아나서 더러운 돈 받아먹고 잠 잘 정도로 난 속이 편한 사람이 아닙니다.”
 “······후회하실 텐데요?”
 변호사의 얼굴에 금이 가 있다.
 절반은 허풍이다. 철판 같던 그 얼굴이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거 같았다.
 “윤가을 양이 JM. ENT로 들어갔다고 했죠? 정식 계약 문서를 볼 수 있습니까? 진술내용을 바꾸는 대가로 새벽에 바삐 계약 한 건 아니고요?”
 “재미있는 말이군요. 그럼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겁니까?”
 “이미 한 차례 진술을 속인 바 있죠. 공무집행방해죄. 그리고 정식 계약이면 그쪽 회사 전산에도 등록되어 있을 터. 새벽부터 계약서를 조작한 분들이 그런 쪽에는 신경 썼나 모르겠군요. 이제 와서 로그를 조작한다고 해도 날짜변동은 흔적이 남을 텐데.”
 전산등록날짜가 서에서 진술한 시간 근처라면 이건 대가성 지불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군요. 하지만 그래봐야 가을 양의 진술이 변하지 않으면 바뀌는 건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그쪽 회사. JM은 소속 연예인의 범죄 행위를 감추기 위해 윤가을 양을 뇌물로 포섭. 사건을 은폐하고 이를 억지로 제게 덮어씌우려 한 죄가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JM을 고소하겠습니다.”
 “······뭐?”
 변호사뿐만이 아니라, 서 안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JM이면 국내 굴지의 기획사다.
 그만큼 힘이 세고 변호인단도 준비되어 있어 보통 사람이 대항하기는 힘들다.
 개미가 코끼리에 싸움을 거는 격.
 하지만 은수는 망설임이 없었다.
 “더불어 윤가을 양은 뇌물을 받고 고의적으로 사건을 은폐하여, 저를 범인으로 몰려 하였으니 무고죄로 고소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할 말이라도 있나요?”
 “그, 그건······.”
 입술만 달싹이는 윤가을을 쏘아봤다.
 그녀가 불쌍한가? 지랄. 뒤에서 껌 씹는 성광열이나 개소리 지껄이는 변호사만큼이나 싫다.
 가능하다면 혀를 뽑고 목을 베어서 벽에 걸어버리고 싶다.
 “히익······!”
 시선을 느꼈는지 윤가을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뒤통수에 레이저를 더 쏘아대다, 다시 변호사를 봤다.
 “성폭행에 대한 것은 가을 양의 증언이 없으면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황이 드러난 블랙박스가 있고, 계약이 어설프게 진행되었을 터. 들고 쑤시면 과연 누가 이길까요?”
 손해라는 생각 따위는 버렸다.
 5천만 원? 아깝다. 그리고 고소가 진행 될 때의 고통과 손해도 뼈아프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는다.
 “어디 한 번 일을 크게 벌려봅시다. 개싸움에 누가 죽는지 살펴보면 답이 나오겠죠.”
 “미친······ 제정신입니까!?”
 “제정신이다, 새끼야. 돈이면 다 될 줄 알았냐? 그럴듯한 옷 하나 입고 와서 주둥이 털면 다 그렇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알았나? 세상에는 나 같은 놈도 있는 거다. 새끼발가락에 박힌 가시가 얼마나 아픈지 한 번 당해봐라.”
 와락 일그러진 변호사의 얼굴이 즐겁다.
 떨어져 앉아있는 성광열의 표정도 더 이상 여유롭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고소가 진행된다면 이제 막 뜨기 시작한 핵분열은 공중분해다. 흠잡기 좋아하는 언론이 이것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자, 잠깐만요!! 저, 저 사실대로 말할게요!”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가을이 갑자기 나섰다.
 “가을 양!”
 “제가 눈이 멀었어요! 눈이 멀어서 그랬어요!! 사실 저 사람이 성폭행 하려고 한 게 맞고, 여기 은수 씨가 도와준 게 맞아요!”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어허. 진술을 번복하는데,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변호사가 윤가을을 만류하려는 찰나, 도개수 순경이 이를 막아섰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진술을 바꾸면 소속사 계약을 해 주고 배우로 만들어 준다고 했어요. 그 말에 넘어가서 허위로 진술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거 전부 다 공무집행방해죄에 해당하는 거 알고 있습니까?”
 “네, 네. 죄송합니다. 제가 미친년이에요. 미친년. 이번에는 제대로 진술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어찌 보면 태세전환이 빠른 여자다.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자 재빨리 배를 갈아탔다.
 하지만 과연 그 결과가 과연 좋을까?
 만약 배우에 대한 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앞으로 곤란해질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내막이 밖으로 알려지면 얼굴 들고 돌아다니기 힘들 터.
 ‘하지만 내 알 바 아니지.’
 은수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변호사와 성광열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이번에는 그쪽 말을 한 번 들어 봅시다.”
 이미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다.
 
 ***
 
 [가수 성광열 성폭행 미수로 고소]
 [핵분열 잠정 활동 중단]
 [JM. ENT 주가 폭락]
 
 며칠 동안 신문 일면을 장식한 기사들이다.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고 그것을 은폐하려 한 행위에 대해서 수많은 질타가 쏟아졌다.
 네티즌의 도덕성은 이럴 때 한없이 고결해진다.
 사과의 말조차 용납하지 않은 채, 넷상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렇게 하나의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공판이 진행되고 있던 초봄.
 은수는 방송국에서 해고 통지를 받았다.
 사유는 업무태만이었다.
 
 
 # Chapter2. 개신
 
 아직 방송국에서 해고되기 전.
 경찰서에서 돌아온 은수는 일주일간을 앓아누웠다.
 땀이 뻘뻘 나고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을 연달아 겪은 터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방송국에 사실을 알리고, 휴가를 받아서 며칠을 쉬었다.
 “오빠야, 괜찮아요? 소영이가 수건 가지고 왔어요.”
 덜 짜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건을 소영이가 들고 왔다. 거실 한 쪽에 자국이 선명하다.
 “우리 소영이가 고생이 많네.”
 “으응. 소영이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일주일간 은수가 앓아누웠을 때, 가장 걱정한 건 역시 남동생 준영과 여동생 소영이었다.
 준영은 학교까지 때려치고 돌아온다고 펄펄 뛰었다.
 소영이가 간호하고, 지나가는 감기라는 말로 겨우 만류할 수 있었다.
 ‘그냥 감기는 아니겠지.’
 앍기 시작한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나.
 팔과 다리의 피부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마치 여름 햇볕에 피부가 타서, 죽은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지독한 피부병이 왔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니, 어쩌면 그쪽에서 촉발됐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껍질이 벗겨지고 난 자리의 피부가 마치 아이의 것처럼 매끄러운 걸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힘으로 하는 일에 몸 던졌던 은수의 피부가 좋을 리 없다. 나이에 비해 주름도 조금 있고, 여드름 자국이나 상처도 여럿이었다.
 그 모든 흔적이 전부 사라져, 마치 도자기 표면처럼 변한 것이다.
 이게 단순한 피부병으로 나타 날 수 있는 일인가?
 절대 아니다.
 무언가 특별한 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천마의72구결이었다.
 “천마 할아버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천마를 불렀다.
 화장실 거울 속으로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음! 자네가 날 불렀는가?”
 똑같은 반응.
 말을 더 잇기 전에 재빨리 은수가 끼어들었다.
 “72구결을 익히고 난 뒤에 몸의 껍질이 벗겨졌어요. 제대로 익히고 있는 건가요?”
 “으음!? 네놈이 어떻게 72구결을 알고 있는 것이냐!?”
 “화가 나고 분노할 때. 몸 안에서72구결이 돌았어요. 제대로 익히는 건지 알고 싶어요. 그리고 제대로 익힌 거라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세요.”
 천마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대뜸 물었다.
 “72구결은······ 음. 껍질이 벗겨지면 음······.”
 무언가 다른 반응이 나왔다.
 “7단공의 첫 번째를 통과한 건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수했나? 그런 기억은 없는데.”
 천마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천마 할아버지가 저에게 전수를 해 줬어요. 7단공. 그 중 첫 번째 자리를 제가 통과한 건가요? 그럼 다음 단계는 어떻게 통과해요?”
 “내가 너에게 전수를 했다고!? 허허, 이놈. 농이라면 그만 두어라. 교의 아이들이 듣는다면 대번에 찾아가 너를 죽이려 할 테니까.”
 “교? 무슨 소리에요?”
 처음 듣는 말에 은수가 의문을 표했다.
 지난날의 자랑에서도 교라는 것은 한 번도 언급 된 적이 없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네가 나에게서 72구결을 배웠을 리도 없고, 일 단공에 도달했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익혔다면 어떻게 돼요? 일단공이라 했으니 역시 별 볼일 없겠죠?”
 “무슨 소리를!”
 천마가 역정을 냈다.
 수염이 꼿꼿하게 서고,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몸이 만들어낸 천마신공은 범인이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공만 이룬다 하여도 능히 새롭게 태어난다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
 “어떻게요?”
 “일단공은 개신(開身)이라고 한다. 몸을 열어 천지와 합일을 시작하는 단계지. 몸의 낡은 것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게 된다.”
 은수가 눈을 반짝였다.
 피부가 벗겨지고 새 살이 돋아난 것이 개신이라는 단계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요? 어떻게 돼요?”
 “크음. 새로워진 몸은 호흡을 하게 된다.”
 “호흡?”
 “세상과 통하는 호흡이지. 무엇이 밝음인지, 무엇이 어둠인지. 정해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불변하지 않으니 그것과 소통하여 새롭게 깨어나는 것이 개신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천마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간 매일같이 봐 왔던 치매 걸린 노인의 흐릿한 눈이 아니었다.
 현기가 가득 차 있고, 또렷한 신념이 박힌 눈이었다.
 “그래서 내 무공을 배우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하지만 길지 않았다.
 이내 평소와 같은 패턴으로 돌아와 버렸다.
 “천마 할아버지!”
 다시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질문을 던졌지만 결과는 같았다. 7단공에 대한 내용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은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몇 가지 힌트는 얻어냈으니까.
 ‘72구결은 천마신공 7단공을 이루는 요체야. 그 첫 번째가 바로 개신이라는 거고······.’
 게다가 천마의 반응으로 보건데, 천마신공에 꽤나 극적으로 반응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모습도 보였고.
 만약 계속 수련을 하여, 1단공의 다른 효과나 단계 너머의 어떤 것을 얻게 된다면 천마에게서 추가의 정보를 얻어 낼지도 모른다.
 개신의 거창한 설명을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화를 잡고 묵은 피부를 벗겨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효과다.
 이제는 더 이상 치매 노인의 헛소리가 아니다.
 ‘이건 어쩌면 새로운 기회 일지도 몰라.’
 직장은 잃었지만 대신 한 가지를 얻었다.
 어쩌면 매우 큰 것을.
 
 ***
 
 은수는 그날부터 아침과 저녁.
 꾸준히 하루에 두 번 산에 올랐다.
 몸의 변화를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움직여 보는 것이다.
 방송국에서 해고도 됐으니, 시간은 남아돌았다.
 “후우······ 후우!”
 은수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산을 달렸다.
 첫 날은 걸어 올라가는 것도 버거웠는데, 고작 일주일 만에 뛰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슴 속으로 공기가 잔뜩 들어왔다가 빠져가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어린 나이부터 몸 쓰는 일을 해 와서 체력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이건 다르다.
 팍!! 팍!
 바닥을 밟을 때 마다 돌이 부서지며 튕겨나간다.
 오프로드를 달리는 사륜구동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후우우우우······.”
 정상에 올라서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전신에서 피어오른 열기로 머리끝에 아지랑이가 생겨났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산소를 온 몸으로 공급했다.
 살아있다는 느낌. 알을 깨고 나와 기지개를 펴는 새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이래서 개신이라 하였구나.’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한다.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온 몸이 하나 둘 새로운 것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은 아는 것처럼 피부였다.
 그 뒤는 이빨. 몇 개씩 빠지더니 금세 새로운 것이 돋아나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카락도 비슷했다.
 몇 움큼씩 빠져버려서, 이상함을 숨기기 위해 반삭으로 머리를 밀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숨 쉬는 폐나 피를 밀어내는 심장까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아마 그것들도 전부 바뀌어 있을 것이다.
 ‘난 새롭게 태어났어.’
 새 출발을 위해서 하는 다짐 같은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와, 저 사람 또 왔다.”
 “뭐하는 사람일까? 헬스장 관장?”
 “그런 것 치고는 조금 말랐는데?”
 은수가 귓가로 스쳐가는 말소리를 음미하며 철봉을 잡은 팔을 당겼다. 중력에 묶인 몸뚱이가 쑥 하고 올라왔다.
 하나 둘······몇 번이고 반복했다.
 “대박. 서른 번 넘었지?”
 “어머어머. 저 팔뚝에 힘줄 봐. 완전 내 스타일.”
 “주책이다. 집에 애는 재우고 나왔니?”
 약수터로 갈라지는 길 중간에 있는 공터라 사람이 제법 있었다.
 벌써 며칠째 새벽바람에 나와 운동하는 사람이니 시선을 안 끌 수가 없었다.
 철봉, 윗몸 일으키기, 거꾸로 매달리기 등.
 소소하게 놓인 운동기구들을 사용해서 은수는 몸을 단련했다.
 새롭게 변한 몸은 주변 자극에도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강한 자극이 주어지면 그것을 견디기 위해 근육이 늘고, 오랫동안 달리면 이를 버티기 위해 폐활량이 늘어났다.
 단시간의 운동만으로 남들 몇 달 한 효과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 운동하면 말 그대로 몸짱이 되는 건가?’
 어쩌면 이 방향을 살려서 운동선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전문적으로 단련해 온 사람들에게 이 몸이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지만.
 — 우우웅!!
 그때, 품 안의 핸든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석 호필. 이름 석 자가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또 술인가.’
 짧게 자른 머리를 긁적이며, 은수가 산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
 
 “어휴, 시팔. 진짜 너무하지 않냐?”
 여의도 근처 작은 포차.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석FD가 소주를 들이켰다.
 “천천히 좀 마셔요.”
 맞은편에 앉아있는 건 은수.
 그도 볼이 발그레 한 것이 술 꽤나 마시 분위기였다.
 “마! 천천히 마시게 생겼냐? 일 잘하던 애를 그냥 석둑 잘라 버리고. 업무 태만? 그 동안 네가 해 준 일이 얼마인데, 갑자기 그럴 수 있어? 어휴, 내가 다 열이 받아서 살 수가 없어요!”
 “형이 왜 열 받고 그래요. 자자, 안주도 먹고.”
 깡 소주만 마시는 게 불안하다.
 은수가 냉큼 어묵을 한 점 집어서 석FD의 입에 넣어 주었다.
 화를 씩씩 내면서도 꼭꼭 씹어서 먹는다.
 “그리고 솔직히. 업무태만? 이게 말이냐 막걸리냐. 너도 알 거 아니야. 그쪽에서 전화 온 거. 사람을 얼마나 같잖게 보면 그냥 전화 한 통에 잘라 버리냐 이거야.”
 “억울해도 어쩌겠어요. 계약직의 서러움이죠.”
 내막을 알고 가장 분을 토했던 것이 석FD다.
 마찬가지로 방송국에서 해고 통지가 왔을 때, 노발대발 한 것도 역시 석 FD였다.
 “하, 시팔. 그래, 계약직. 너도 나도 계약직이지. 말이 좋아서 FD지, 사실 계약직 노동자 아니냐. 나도 여차하면 꼬투리 잡아서 잘라버릴 수 있다 이거지. 아, 서러워라!”
 “세상이 다 그렇죠. 자, 한잔해요.”
 “그래, 시팔! 오늘은 먹고 죽자!”
 술잔을 부딪쳤다.
 이미 서너 병 누워있던 바른 이슬이 하나 둘 숫자를 더해갔다.
 붉어져 있던 얼굴은 터질 듯 달아오르고 휘청거리던 몸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웨에에에엑!!”
 결국 석 FD가 먼저 뻗었다.
 예전 주량으로 보자면 은수보다 그가 두 배는 강하지만, 최근에는 달랐다.
 은수가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뭘 그리 많이 드셨대요.”
 “그으야 우리 은수가 불쌍하니까 그러취! 아니, 억울해서 구래! 은수 네가 뭘 잘못했다고 잘라! 우리 은수 돌려 달라, 돌려 달라!!”
 독립투사라도 된 것처럼 젓가락 두 짝을 들고는 소리쳤다. 주변 손님들이 하나같이 노려봤다.
 “형, 형! 볼륨 좀 낮춰요. 아주 광고를 하네요, 광고를.”
 “구게 뭐 어때서!? 광고 좀 하자! 우리 은수가 억울하게 잘렸다고. 응? 방송국이 뭐 대수야? 우리는 아무 때나 막 자를 수 있는 그런······ 뭐시기냐, 그거. 하여튼 그런 거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형님이 오늘 좀 취했네요.”
 볼륨이 줄어 들 생각이 없었다.
 은수가 석 FD를 다독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작 고래고래 소리치던 석 FD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잠들었는데.
 “거, 조용히 마십시다. 누군 억울한 일 없나.”
 “‘취한 거 같은데, 바래다 드려요. 괜히 술 먹고 사고 치면 골치 아프니.”
 불평 반 동조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같이 술 먹고 불평하는 포차인 만큼, 크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나 봐요?”
 “······응?”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포차 구석진 테이블.
 후드티를 깊이 눌러쓴 채 홀로 앉아있는 여자였다.
 이런 장소에 여자 혼자라니.
 쉽게 볼 수 있는 조합은 아니었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송국 얘기를 하는 거 같아서요. 불편하셨으면 사과할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요.”
 여자가 가볍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저도 방송국에서 일해요. 공중파는 아니지만, 크게 보면 다 식구 아닐까요?”
 “아쉽지만 전 이제 아니네요. 얼마 전에 잘렸거든요.”
 “근처면 KSS?”
 딱히 숨길 생각도 없다.
 은수가 반쯤 빈 소주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쪽이 소문의 그 사람이군요.”
 “소문?”
 “뒤에서 수군거리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방송국 임시직 직원이 엄한 스캔들이 휩싸여서 잘렸다고. 해당 소속사는 별 다른 반응이 없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들 사실이라 믿고 있죠.”
 은수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소문이 그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의외지만 딱히 관심은 없었다.
 이제 상관 할 이야기도 아니고.
 “되게 태연하시네요.”
 “뭐, 잘린 마당에 소문이 어떻든 상관없죠. 먹고 살 길이나 찾아봐야지, 심력 소모할 생각은 없습니다.”
 “마인드가 좋네요. 괜찮다면 제가 한 잔 사도 괜찮을까요?”
 여자가 소주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은수가 힐끔 쳐다보다가,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잔만 들고는 은수 옆으로 합석했다.
 “이모, 여기 닭똥집하고 소주 두병이요.”
 그리고는 냉큼 주문을 했다.
 은수가 순간, 돈 없어서 빌붙는 여자인가 의심을 했지만 그냥 무시하고 말았다.
 만약 그런 거라면 술상대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서은아라고 해요. 반가워요.”
 “정은수라고 합니다.”
 통성명은 짧은 한 마디면 족했다.
 은수가 빈 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자신의 것에도 따랐다.
 “벌써 한 가득 마신 거 같은데, 술이 세네요?”
 “이럴 때는 술이 잘 들어가더군요.”
 챙.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는 술을 넘겼다.
 알싸한 맛이 혀끝을 감돌다 사라졌다.
 “캬~! 역시 혼자서 마실 때보다는 둘이 먹을 때가 좋네요.”
 “그러고 보니 혼자 오셨던데. 종종 그러나요?”
 “일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가끔 그래요. 집이 근처다 보니 오가기도 쉽고.”
 “여성분 혼자 술 마시고 있으면 곤란한 일도 많을 텐데.”
 “걱정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몸 하나 건사 할 재주는 있습니다.”
 은수가 ‘그래도······.’라는 말을 입 끝에 올렸다가, 그대로 삼켰다.
 괜한 오지랖은 됐다.
 “그럼, 용감한 여성분을 위해서 한 잔 하죠.”
 “좋네요, 그 말.”
 한잔 두잔 술이 넘어갔다.
 
 ***
 
 쭉쭉 넘긴 술잔이 두 자리를 넘어섰다.
 테이블 위, 빈 술병을 놓을 자리가 없어 바닥이 장식장이 되었다.
 은수도 은아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니까, 나도 그렇다고요. 좋은 대학? 나오기 싫어서 안 나왔나? 그리고 솔직히 대학 잘 나온 거하고 여기서 일 하는 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죄다 연줄로 피디자리 차고앉아서 손가락질만 하는 거 아니냐고요.”
 은아가 술 취한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케이블 방송 ‘ATBC’의 PD로 몇 번이고 공중파 입성에 실패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능력이 좋아 어린 나이에 PD직함을 달았지만 부족한 학력은 끝끝내 그녀의 발을 잡았다.
 “그래도 요즘 케이블은 나름 경쟁력 있잖아요. 드라마나 예능 쪽에서도 두 자리 호가하는 작품도 꽤 있던데.”
 “가뭄에 콩 나듯 있는 것들이요? 사람들은 케이블에서 제작하는 드라마나 예능의 숫자를 잘 몰라서 그래요. 몇 개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지 알아요?”
 “그런가?”
 “공중파야 이미 채널을 쥐고 있으니, 굳이 모험해서 제작을 안 하잖아요. 외주 주고 몇 개 말아먹어도 상관을 안 하죠. 하지만 케이블은 달라요. 실험 정신이 높은 만큼, 새 얼굴로 갈아치우는 것도 많죠. 좋은 작품? 그러다 하나 둘 나오는 거예요.”
 은아가 하소연을 길게 하고는 다시 소주잔을 잡았다.
 비어 있었다.
 “이모, 여기 소주 두 병 더 주세요!”
 “은아 씨. 그만마시죠. 많이 취한 거 같은데.”
 “에이~! 남자가 왜 그래요? 이럴 때는 마시고 죽어야지!”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그러면 험한 꼴 봐요.”
 술 상대라면 모르겠지만, 취해서 널브러진 여자는 사양하고 싶다.
 또 무슨 꼴을 보라고 그런 걸 치우겠는가.
 소주를 취소시키고 찬 물을 은아의 앞으로 밀었다.
 “흐응. 되게 매너남 스타일?”
 “과한 건 좋지 않죠.”
 “매력 있네요, 그런 거.”
 조금 모호하게 답을 하며, 은아가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은수의 얼굴을 뜯어봤다.
 “왜 그렇게 봐요?”
 붉게 달아오른 볼 만큼 시선이 뜨거웠다.
 “은수 씨 이렇게 보니까 비주얼이 좀 되는 거 같네요?”
 “막일에 쩌든 제 얼굴인데, 설마요.”
 “아뇨, 아뇨. 막 꽃미남 같은 건 아니지만 선이 굵고 피부가 좋잖아요. 메이크업만 잘 받으면 어지간한 연예인 뺨 때리겠는데.”
 은수가 픽 웃고는 술을 넘겼다.
 살면서 잘생겼다는 말은 동생 둘에게서만 들어봤다.
 사람이 취해서 눈앞이 흐릿한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은수 씨 혹시 노래 잘해요?”
 또 이상한 질문이다.
 은수가 의아한 듯 바라봤다.
 “말 해 봐요. 노래 잘 해요?”
 “딱히 음치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잘 하는 것도 아니지만.”
 잘한다고 말하기에는 얼굴이 철판이 아니다.
 애초에 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때는 다른 쪽에 관심이 많았고, 커서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적당히 둘러댔다.
 “음치가 아니다. 좋다. 딱 좋다.”
 은아가 휘청거리는 몸으로 손뼉을 쳤다.
 “뭐가 좋아요?”
 “은수 씨. 혹시 나랑 같이 방송하나 안 할래요?”
 “······방송?”
 전혀 뜬금없는 말이다.
 은수가 뭐라 대응하지 못하고 가만히 은아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취기가 가득했지만, 눈이 반짝이는 것이 완전히 정신을 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KSS에서 억울하게 잘린 청년. 가수를 꿈꾸며 힘든 일을 감내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치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어때요? 그림이 될 거 같지 않아요?”
 “무슨 의미에요?”
 “이번에 파일럿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거든요. 사연 있는 사람을 불러와서 연습시키고 무대 위에 서게 하는 거죠. 은수 씨 정도면 사연도 탄탄하고 얼굴도 되니까 괜찮을 거 같아요.”
 말을 듣자마자, 은수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냥 술이나 한 잔 하고자 다가온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무언가 속셈이 있던 것이다.
 ‘여자는 다 이런 건가?’
 불쾌함이 몸을 때려, 취기가 단번에 날아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쏘아붙였다.
 “이미 제 소식 듣고 생각해 둔 바가 있던 모양이군요. 불쾌하네요. 그래도 나름대로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 어······ 은수 씨. 그게 아니에요. 나는 그냥 보다보니 괜찮을 거 같아서······.”
 당황한 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은수는 이미 마음이 떠난 후였다.
 엎어져 있던 석 FD를 들쳐 엎고는 그대로 포차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은수 씨!”
 “이봐요, 학생! 계산을 하고 가야지!”
 “어, 어! 이모 잠깐만요! 나, 급한 일이······.”
 “떽! 내가 그런 수법을 모를 줄 알고! 나가려거든 계산 하고 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은수가 계속 걸었다.
 ‘여자는 믿을 게 못 돼.’
 한 가지 교훈을 깊게 새기며.
 
 ***
 
 “아, 머리야.”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드시라니까요.”
 윤종수가 한숨을 내쉬며 물을 건넸다.
 ATBC예능국 조연출로 이제 갓 1년차 된 신입이었다.
 “인마, 이것도 다 업무의 연장선이야. 어제 괜찮은 소재 하나 뽑았는데······ 아이구 머리야.”
 은아가 불만을 토로하다 머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숙취는 만약이 불통하다고 하던가. 좀처럼 상태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또 엄한 남자 하나 낚으려고 술 마신 건 아니고요?”
 “뭬야? 넌, 이 누님이 그런 여자로 보이디?”
 “아니 뭐 매일같이 남자 헌팅 나가시는 분이니 아니라고는 말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아오, 요 새끼. 내가 호랑이를 길렀지. 어디 되도 않게 후임 PD 키운다고 이런 놈을 가르쳤을꼬.”
 은아가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수가 냉큼 다가와 부축을 했다. 말과는 다르게 행동은 꽤나 깍듯했다.
 “너, 있다가 석태 좀 만나고 와라.”
 “석태형이요? 그 재수 없는 인간은 왜요?”
 “전에 일하던 직원 정보 좀 물어보려고.”
 은아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물을 들이켰다.
 찬 물이 몸에 들어가니 조금은 숙취가 씻겨나가는 거 같았다.
 “어제 만났다는 소재요?”
 “이번에 새로 파일럿 들어가는 거 있잖아. 포맷만 떠 놓은 게 생각나서.”
 “누님이 한 거면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이름 이상하냐?”
 “전 대답 안할래요.”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은아가 기획한 새 프로그램 이름이다.
 꿈을 접어야 했던 사람을 불러와 연습시키고, 최종 블라인드 테스트까지 진행. 일정표를 넘어서면 싱글앨범을 내 준다는 것이 기획이었다.
 섭외의 벽에 부딪쳐서 아직 진도를 빼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이것이 활로가 될 거라 믿었다.
 ‘이것만 터뜨리면 나도 스타 피디가 될 수 있다고.’
 몇몇 기획으로 스타의 반열에 든 피디들이 있다.
 제대로 하나만 터뜨리면 충분히 그 반열에 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저번에 그 누구냐. 기획사에 있다가 집안 부도나서 때려 치고 나간 사람 있잖아요. 윤도준이었나? 그 사람 섭외한다고 안 했어요?”
 “뭐, 그 사람도 사연은 나름 절절하긴 한데 화제성이 떨어져. 집안 사정 안 좋은 거야 흔한 이야기잖아. 게다가 너무 오래됐어. 이제 와서 들춰봐야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하긴 그건 그러네요. 그럼 이번에 섭외 할 사람은요? 뭐, 특별한 점이라도 있어요?”
 이 질문에 은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잘생겼어.”
 윤종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
 
 은수가 방 한 가운데 대자로 누워있다.
 바로 곁에 토끼인형을 꼭 안은 소영의 모습도 보였다. 인형놀이를 하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이다.
 — 나랑 같이 방송 하나 안 할래요?
 전날 들었던 목소리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속셈이 있다 생각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는 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무대 위에 올라가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열정을 쏟아내는 이들.
 ‘돈이 안 되는데 그걸 왜 해?’
 정답처럼 말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 우리 은수는 커서 뭐가 될 거니?
 — 나! 나! 저기 티비에 나오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요!
 — 어머, 가수?
 — 아니!! 반짝반짝 하는 사람.
 철없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있고, 삶에 쫓겨서 많은 것을 포기하기 전.
 ‘그때는 그랬나······.’
 화면 속 반짝이는 이들을 동경했었다.
 가수인지 배우인지 코미디언인지. 딱히 구별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롯하게 빛나는 그 존재를 그저 막연하게 동경했을 뿐이다.
 어쩌면 많은 일을 거쳐서 방송국 스텝으로 들어 온 것도 그 동경이 바탕이 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거······.’
 은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꿈은 꿈. 현실은 현실이다.
 나이 먹고 이제와 어릴 적 꿈을 되살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솔직히 재주도 없잖아?’
 은아가 물었던 노래만 해도 그렇다.
 제대로 불러 본 게 언제일까?
 어릴 적 장기자랑 정도가 아마 전부일 것이다.
 그 뒤로는 사는 게 팍팍해서 따로 시간을 내어 본 적이 없으니까.
 ‘재주 없겠지?’
 머리를 거칠게 긁적였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은수가 소영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좁은 집구석에 목소리 낼만한 곳은 화장실밖에 없었다.
 “아아······.”
 목청을 가다듬고 생각나는 노래를 한 구절 뽑아봤다.
 방송국을 오가며 들은 기억이 있어, 몇 곡 정도는 제대로 익히고 있었다.
 “사랑한 기억을······.”
 몇 마디 부르지도 않고 입을 닫았다.
 소리가 굉장히 떨려서 나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가 이랬나?’
 뭔가 민망하다.
 화장실의 서라운드 에코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큼큼.”
 민망함을 눌러놓고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여전히 소리가 떨려왔지만 그럭저럭 완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잘 부른 건지, 못 부른 건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개인적인 감상에 자기애 플러스 점수를 준다면 물론 잘 불렀다고 말하겠지만, 객관적인 지표는 아니다.
 “오빠야, 나 쉬.”
 그때, 소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수가 황급히 문을 열었다.
 “미안, 미안. 어서 들어가.”
 “응. 응. 근데, 오빠야 노래 불렀어요?”
 “드, 들렸니?”
 소영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기대감 서린 얼굴로 말했다.
 “소영이도 노래 잘해요.”
 “······응?”
 “복지관 애들이 그랬어요. 소영이는 노래 잘 한다고. 오빠야도 들어볼래요?”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소영이의 노래를 들어 본 게 언제이던가. 기억을 뒤져봐도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은수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소영이, 오빠랑 같이 노래방 갈까?”
 “진짜요!? 오빠야랑 같이 노래방 가요?”
 “그래, 그래. 조금 있으면 준영이도 학교 끝나니까 같이 가자.”
 “응! 응! 꼭 가고 싶어요!”
 그렇게 좋을까.
 신이 나서는 팔짝팔짝 뛰었다.
 ‘내가 신경을 많이 못 써줬구나.’
 그냥 돈을 가져다준다고 전부가 아니다.
 동생들을 키우는 것에 부족함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빠야, 근데 나 쉬야.”
 “아차차. 어서 들어가.”
 은수가 황급히 화장실 문 앞에서 비켜 주었다.
 이내 시원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의 건강은 전혀 문제가 없는 거 같다.
 
 ***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서 즐겁게 놀다왔다.
 소영이와 준영이는 의외로 둘 다 노래를 잘했다.
 평소 그렇게 투닥거리더니 화음 맞춰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천상 오누이였다.
 은수도 만족 할 만큼 노래를 불렀다.
 역시 반주가 제대로 받쳐주니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몇 곡을 완창하고 추가 시간을 받아서 어릴 적 18번도 불렀다.
 다만, 소영이와 준영이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던 것이 걸린다.
 설마 노래가 이상했던 걸까.
 차마 묻지는 못한 채, 그렇게 하루의 외유를 끝마쳤다.
 “후우······.”
 조금 늦은 시간에 산을 올랐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스며드는 것이 꽤 기분이 좋았다.
 매일같이 하던 운동을 빠르게 진행하고, 구석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오늘은 다른 할 일이 있었다.
 ‘아무도 없지?’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은 없었다.
 “아아······.”
 목을 풀고 조심스럽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방에서 실컷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무언가 콱 막힌 것처럼 더 많은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늦은 시간이면 등산로에는 사람이 없을 터. 괜찮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
 허밍을 섞어 나름대로 멋을 내 봤다.
 산바람 소리와 섞여서 그런지 괜찮아 보였다.
 “킥······!”
 그때였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생각했던 장소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은수가 황급히 입을 닫고 주변을 살폈다.
 “거기 누구세요?”
 “아, 죄송해요.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등산로 위편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노란색 운동복에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여자였다.
 나이는 겨우 스물을 넘었을까. 어둠 속에서 보아도 꽤 외모가 훌륭했다.
 “아······약수터에서 내려오시는구나. 이 시간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요.”
 “사람 없는 시간을 좋아해서요. 괜히 노래하는 걸 방해한 거 같네요.”
 민망함에 은수가 볼을 긁적였다.
 늦은 시간에 산에 올라와 궁상맞게 혼자 노래를 불렀으니, 당당하면 그게 더 우스웠다.
 “근데, 노래 부르는 방식이 조금 이상하던데. 혹시 어디서 따로 배우셨어요?”
 “아뇨. 그런 적은 없는데······ 왜요?”
 “뭔가 발성이 이상해서요. 혹시 부를 때 뒷목이 당기고 그렇지 않아요?”
 은수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정확하다. 이상하게도 음을 높일 때면 뒷목이 강하게 당겨왔었다.
 “헤에. 역시 그렇구나.”
 빙그레 웃으며 여성이 은수의 앞으로 걸어왔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160cm를 겨우 넘을 정도?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피부가 굉장히 하얗고 비율이 좋았다.
 ‘연예인인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
 “괜한 참견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한 번 해보실래요?”
 “어떻게······?”
 “음을 높이면서 조금씩 입을 크게 벌리는 거예요. 고음을 의식해서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거니까 그걸 풀어보는 거죠.”
 “입을 크게? 까짓것 한 번 해 보죠.”
 이미 한 번 얼굴을 팔았는데, 두 번이 어렵겠는가.
 조금 전 불렀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음이 조금씩 높아지고 고음 부분이 왔을 때, 조언대로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를 냈다.
 “······어?”
 여전히 답답한 부분이 있었지만, 목 뒤의 뻐근함은 많이 사라졌다.
 여자가 빙긋 웃었다.
 “되네요. 너무 힘이 들어가서 그런 거였어요. 입을 벌리면서 힘 빼는 연습을 하면 나아지실 거예요.”
 “신기하네요. 이런 건 어떻게 알고 계시죠?”
 “그쪽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까요.”
 싱그럽게 웃는 모습이 크게 다가왔다.
 연달아 여자에게 안 좋은 인상을 받지만 않았다면 한 눈에 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노래를 할 때 손짓이나 몸짓으로 같이 리듬을 타세요. 노래는 목으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몸 전체가 노래에 호응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기도 쉬워질 거예요.”
 “춤이라도 추면될까요?”
 “······킥!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가벼운 몸짓 정도면 충분해요. 이런 거?”
 여성이 가벼운 허밍과 함께 몸을 들썩였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리고 굉장히 리드미컬한 동작이었다.
 마치 조명이 짙게 깔린 재즈 바의 가수 같은 느낌.
 은수가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그렇군요. 작은 동작으로······.”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잘 하실 수 있어요. 내려오면서 들어보니 성량도 충분하고 목소리도 좋더군요. 금방 멋진 소리를 낼 수 있을 거예요.”
 은수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쑥 든 생각으로 늦은 시간에 운동을 나왔는데,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됐다.
 악연 둘에 선연 하나.
 나름 비슷해진 스코어였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연습하세요.”
 그때, 여성이 내려갈 기미를 보였다.
 “아, 잠시 만요. 혹시 산에 자주 오시나요?”
 “이 시간에는 운동하러 자주 나와요.”
 “그럼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요?”
 조금 뻔한 멘트아닌가.
 은수가 말을 하면서 민망함을 느꼈다.
 “오늘보다 좋은 소리가 나온다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성이 묘한 웃음을 띤 채 말을 맺었다.
 완곡한 거절 같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승낙 같기도 하다.
 “그럼 다음에······.”
 총총 걸어 산 아래로 멀어지는 여성의 뒷모습을 은수가 빤히 바라봤다.
 사방이 어둑해질 때까지.
 
 ***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산을 올랐지만 묘령의 여인을 또 만나지는 못했다.
 거짓말을 해서 피한 것일까, 아니면 개인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냥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와······ 며칠 사이에 진짜 많이 늘었네.”
 “이제는 좀 들을 만하냐?”
 “전에는 진짜 아니었는데, 지금은 뭐 그냥 들을 만해.”
 “오빠야 노래 좋아!”
 하지만 그날 받은 조언 덕분인지 노래 실력은 많이 늘었다.
 음이 떨리는 것도 많이 사라졌고, 고음 낼 때 뒷목이 뻐근한 것도 거의 없어졌다.
 빈말로나마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근데 형. 갑자기 노래는 왜 연습하고 그래?”
 “글쎄다. 이 형님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서?”
 “퍽이나. 그게 재능이면 나는 이미 가수가 돼서 월드투어 하고 있겠다.”
 “왜! 왜! 오빠야 노래 잘 부른다! 작은 오빠 멍청이!”
 “이게! 누구보고 멍청이래? 넌 가서 먹은 거나 치워 이 먹보야!”
 “오빠야!! 또 작은 오빠가 나보고 먹보래요!”
 한시도 투닥거리지 않는 시간이 없다.
 은수가 가볍게 웃으며 씩씩 거리는 둘을 떼어놓았다.
 “계속 싸우면 저녁에는 라면만 나올 줄 알아.”
 “윽. 먹을 거로 협박하는 게 제일 치사한 건데.”
 “소영이는 라면 지겨워요······.”
 그래도 제대로 먹혔는지 더 이상은 투닥거리지 않았다. 은수가 부드러운 얼굴로 둘을 다독였다.
 ‘그보다 이제는 슬슬 일을 알아봐야겠네.’
 오천만원을 포기하고, 일까지 잘린 채 놀고 있다.
 피로해진 심신을 쉬게 하고 천마신공을 익숙하게 하는 것도 하루 이틀.
 생활비가 허공에서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목에 풀칠할 일을 찾아야 한다.
 ‘방송국은 무리겠고, 예전에 일하던 공장이라도 찾아가야 하려나.’
 험한 일에 보수도 마땅치 않아서 내키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내키는 대로 직장 잡아서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우우웅······!!
 그때였다.
 거실 한 구석에서 충전 중이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일전의 싸움 이후 저가폰으로 새로 바꿨더니 진동 소리가 한층 더 요란해졌다.
 “······모르는 번호네.”
 보이스피싱이나 보험 전화일까?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받았군요. 안녕하세요, 정은수 씨.”
 이름을 알고 있다.
 은수가 미간을 가볍게 좁히며 말을 받았다.
 “누구시죠? 제 이름과 번호는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ATBC 조연출 송종근입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ATBC라면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여자.’
 악연의 연장일까.
 은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 아이돌』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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