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0: 프롤로그
강혁준.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강혁준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던 일을 아무렇지 않게 성공시켰다.
첫 번째로 그는 인간의 육체로 각성자의 기원을 이루어냈다.
유일무이한 SSS 등급.
그는 단신으로 악마의 군단을 상대할만큼 강한 남자였다.
두 번째로 그는 홀로 악마 대군주를 사냥했다. 원래 대군주는 대적불가능한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상식이 강혁준에겐 통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그는 더 이상 사냥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포식자로 거듭난 것이었다.
세 번째로 그는 공의로운 지도자였다.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차별을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
그것은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향락도 마다하고, 인류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라 그마이스 요새.
악마 대군주 나베리우스를 처단하고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강혁준은 그곳을 보금자리를 삼았다. 그리고 내려진 칙령은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능력고하를 따지지 않고 성의 시민을 받아들인다.
비각성자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강혁준 앞에서는 각성자와 비각성자는 동일한 위치에 존재했다.
강혁준은 철권통치를 하였지만,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쇠퇴한 인류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러시아 시베리아 벌판.
그 춥고 척박한 곳에서 강혁준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쿨럭······.”
강인하며 지칠 줄 모르던 육체는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되었다. 왼팔은 이미 갈가리 찢겨졌으며, 그의 복부에는 이미 여러 개의 창칼이 박혀 있었다.
“흐··· 흐흐흐······.”
그런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강혁준은 실성한 듯 웃는다.
“무엇이 그리 웃기는가?”
단단한 갑주를 입은 자가 묻는다.
그의 이름은 김주찬.
주작 클랜의 마스터로서 S등급의 각성자이다. 강혁준이 아니었다면 인류 최강의 자리에 오를 사내였다.
“너 같은 머저리가 설마 배신을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지. 하하하······.”
김주찬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결국 분함을 못 참고 볼품없이 쓰러져있는 강혁준에게 일갈했다.
“하! 결국 패배한 것은 너다. 쓰레기처럼 죽는 것은 바로 너라고!”
“물론. 100퍼센트 나는 죽겠지. 하지만 너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강혁준의 비꼬는 목소리는 비수가 되어 김주찬을 괴롭혔다.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는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나는 최선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의 변명은 구차했다.
강혁준은 인류의 미래가 저절로 그려졌다. 자신을 배신하는 대가로 악마들은 거짓 평화를 약속했을 것이다.
‘악마 주제에 평화라고?’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다.
강혁준은 악마들을 몰아내고 다시 지구를 인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수천만의 악마 군대를 무찌르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었다.’
현실에 안주할까봐 일부러 자식은 만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과 그들의 무궁무진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희생은 두렵지 않았다.
‘안타깝구나.’
강혁준은 고개를 젖혀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도 없는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결국 큰 오점을 남기고 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주작 클랜의 무사가 묻는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데, 전설이라고 불리는 남자를 처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없다.”
강혁준은 짧게 말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가지에서 떨어진 꽃이다.
스르릉!
한 자루의 칼날이 햇빛에 비쳐서 눈부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강혁준은 자신도 모르게 소원을 빌었다.
‘다시 한 번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렇게 전설은 쓰러졌다.
# Part 1: 회귀하다
투둑··· 투두둑······
돌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강혁준은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크으······.”
온 몸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죽은 자에게 고통이라니?
“나는 분명······.”
강혁준은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분명 목이 잘리고 죽음을 맞이했을 터인데······.
‘그나저나 이곳은 왜 이리 어두운 것이지?’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SSS등급의 각성자로서 전설이라고 불리던 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자.’
어두운 동굴 안에 있는 느낌이다. 허리를 숙여서 빛이 새어나오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
“큭······.”
밝은 빛이 눈을 아프게 만들었다. 혁준을 손을 들어서 햇살을 가렸다. 이윽고 눈부심이 가시고 전경이 드러났다.
거대한 균열이 바닥을 가로지르고, 무너진 건물은 그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적어도 수십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도시를 강타한 것이다. 다만 강혁준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것은 분명 10년 전, 판데모니엄의 시작을 알리는 대지진이었다.
“······.”
부서진 유리창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흐릿하지만 분명 풋풋한 20대의 대학생이 그곳에 서 있었다.
“되돌아왔구나.”
그것은 분명 과거의 자신이다.
강혁준은 죽음에서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그러나 다시 그 악몽들이 재현되겠군.’
서기 2017년.
전 세계적으로 대지진과 쓰나미가 세계를 강타한다. 그 날 하루 동안 지구에서 죽은 인명이 수억 명이나 되었다. 강혁준 역시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기숙사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대지진은 판데모니엄의 시작에 불과했어.’
대지진은 이후에 일어날 사태에 비하면 그저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다음 징후가 분명 얼마 있지 않아서 일어날 터였다.
“혁준아!”
뒤를 돌아보니 기숙사의 동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예전 기억을 굳이 되살릴 필요는 없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 처참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니까.
“살아있었구나. 몸은 괜찮아?”
동기 중 제일 친하게 지냈었던 임규환이었다. 넉넉한 살집만큼 사람 좋은 미소로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던 친구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에 질려 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괜찮다.”
혁준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규환에게는 낯설었다. 그가 알던 혁준은 내성적이고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녀석이었다. 반면에 지금 혁준의 인상은 마치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기도가 달라졌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너··· 아니다.”
규환은 뭔가 말하려다가 얼버무렸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다. 재난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끔찍한 현장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혁준아 큰일이다. 지금 전화도 불통이고 TV도 켜지지 않아.”
규환은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말했다. 그 반면에 혁준은 반응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지. 인간이 누리던 이기를 이제 모두 포기해야하니까.’
판데모니엄의 두 번째 징후가 바로 전자기의 종말이다. 그 효과는 마치 EMP 폭탄을 맞은 것과 동일했다. 인체에는 무해하나 각종 기기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동수단(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까지 무용지물이 된다. 특히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불시착을 피할 수 없다.
“모두 이곳으로 모이세요.”
기숙사 사감인 김진수가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우고 있었다. 평소에 빡빡한 규율로 학생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곳의 유일한 책임자였다.
그의 통제 아래 모인 사람은 대략 50여 명쯤 되었다. 그들은 모두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엄청난 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젠장. 휴대폰이 켜지지 않아.”
“구조대원은 왜 오지 않는 거지?”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김진수는 어떻게든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 혁준아. 어디 가는 거야?”
혁준은 말없이 무리를 떠나려고 했었다. 어차피 이들과 같이 있어봤자 이득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다음 시련이 들이닥치기 전에 준비해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알 것 없어.”
만류하는 규환을 무시한다. 이유를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것이다.
저벅저벅······.
혁준은 어느새 무리와 떨어져 먼 곳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규환은 한참 고심했다. 이대로 이곳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무모해보이지만 혁준이를 따라갈 것인지.
“에라 모르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를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기다려. 혁준아!”
비대한 몸으로 혁준이에게 달려간다. 하지만 평소의 운동 부족이었을까?
“헉··· 헉······.”
규환은 헐떡이면서 그를 따라잡는다.
“같이 가자니까.”
“왜 따라온 거지?”
혁준의 질문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규환은 애매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우··· 우리 친구잖아. 당연히 서로 도와야지.”
맞는 말이다. 적어도 친구 사이라면 이런 위기일수록 힘을 합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현명한 행동이냐고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지.’
체력이 약한 규환은 곧 있을 위기에 살아남을 확률이 지극히 낮다. 분명 데리고 간다면 짐 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버리고 가는 것이 옳다.
“따라 오지 마라. 거추장스럽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혁준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말이다. 하지만 규환은 차마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혁준의 기에 눌린 것이다.
혁준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규환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떠나는 혁준을 바라보았다.
혁준은 다음 징후를 대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무기가 필요해.’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다. 그러던 중 신축 건물을 짓는 현장을 발견했다. 짓다만 건물은 지진으로 반쯤 파괴되어 있었다.
‘빙고.’
인부는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런 재해로 모두 도망친 것이 분명해보였다. 주변을 살펴보던 도중 쓸 만한 것을 찾았다.
바로 슬렛지 해머와 지렛대였다. 흔히들 속어로 오함마와 빠루라고 불리는데, 이정도면 괜찮은 무기를 찾은 셈이다.
“이제 곧 악마들이 기어서 올라올 시간이군.”
판데모니엄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봉인은 차례대로 풀리고 있었으며, 사회의 안정망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지상은 이제 곧 지옥으로 돌변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쿠구궁······.
땅이 흔들린다. 평범한 여진처럼 느껴지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탐욕스러운 악마가 그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지진의 영향인지 지상에서는 쉽게 균열을 찾을 수 있었다. 여진이 끝나고 크고 작은 균열에서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다.
케르르륵···.
균열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듣기만 하더라도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하지만 강혁준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그는 능숙한 노동자처럼 해머를 어깨위로 올린다. 그리고는 천천히 균열이 벌어진 곳으로 걷는다. 그리고 우직하게 기다렸다.
“······.”
그리고 기다림은 곧 보상을 받았다.
“쿠에엑······.”
괴성과 함께 균열에서 튀어나온 것은 악마의 머리였다.
둥그스름한 머리통에 삐죽 튀어나온 두 개의 뿔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인류를 멸절시키기 위해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이다.
부우웅······.
오함마를 높이 지켜 올렸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찍는다.
“케륵?”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뭔가 거무튀튀한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악마는 자신도 모르게 의문을 표현한 것이다.
퍼걱!
어디 피할 곳도 없다. 오함마는 그대로 악마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한 치의 망설임이 없는 행동이었다.
주르륵······.
악마도 따지고 보면 생명체다. 뇌까지 곤죽이 된 생물은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준혁은 죽어버린 악마를 균열에서 마저 꺼내어냈다.
“임프라······. 역시 튜토리얼이 진행되고 있군.”
임프는 악마들 중에서도 제일 약한 개체였다. 먹이 사슬로 따지면 최하층의 존재라고 할까? 비각성자라고 하더라도 임프와 싸울 수 있다. 물론 재빠르고 교활한 특성을 가진 임프를 이기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어딘가 있을 텐데······.”
혁준은 임프 시체를 헤집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꽤나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지만 혁준은 개의치 않았다.
“여기 있군.”
혁준은 드디어 찾던 것을 손에 넣었다. 푸르스름한 돌덩어리였다.
그것의 이름은 악의 정수(Essence).
악마를 죽이면 얻을 수 있는 제일 값어치 있는 전리품이다. 그리고 인간은 정수를 가짐으로서 각성자가 될 수 있었다.
“휴우······.”
혁준은 정수를 얻었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직 마지막 단계가 남았기 때문이다. 정수를 가지는 것만으로 각성자가 된다면 얼마나 일이 편하겠는가?
혁준은 정수를 꾹 쥐었다. 그리고 정신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악의 정수와 동화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혁준의 무의식에서 이질적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각성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질문이었다. 중대한 갈림길이었지만, 혁준은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물론이다.”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게 될 것입니다.
악의 정수는 점점 눈 녹듯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되어서 혁준의 코와 입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크윽······.”
처음은 고통이었다. 사람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제일 효과적인 수법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바로 여기에서 의지가 꺾였다.
‘저항은 무의미해.’
‘너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나를 받아들여라.’
‘함께 하자.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라.’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인다. 이미 한번 겪은 것이지만 더러운 느낌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혁준은 굴복하지 않았다.
고통에 굴복하지 않자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취한다. 바로 쾌락이었다.
그 어떤 섹스와 약물도 경험할 수 없는 신기원이었다. 황홀한 느낌으로 고양감이 충만해진다. 말초신경이 하나하나가 바짝 타오를 만큼 충격적이며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다.
‘당신을 위해서 준비했어요.’
‘자 나를 따르세요. 더 많은 상을 내리겠어요.’
‘괴로운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랍니다.’
‘포기하세요. 그럼 모든 것이 편해진답니다.’
악의 정수는 혁준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계속 시도했다. 정수는 분명 각성을 도와주는 매개체이지만, 공짜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지겹다. 너희들은 창의성이 부족해.”
혁준은 SSS등급의 각성자였다. 이정도 유혹으로 그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각성에 성공하셨습니다.
# Part 2: 회귀하다 (2)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의 정수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혁준에게 흡수당해버린 것이다.
혁준은 비교적 쉽게 각성을 해버렸다. 하지만 많은 인간들이 정수의 유혹에 넘어갔다. 각성 단계에서 악의 정수에 굴복하면 그 결과는 엄청난 파멸로 다가온다.
타락.
정수는 그 자체만으로 불가사의한 힘이었지만 독을 포함하고 있었다. 바로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면 바로 악마화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의지는 사라지고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하는 살육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강혁준 역시 악마가 되어버린 인간을 많이 처단했었다.
한번 악마가 되어버린 인간은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다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누구나 각성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직 그 유혹을 이겨낸 자만이 새로운 힘을 가질 자격이 되었던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인류 최초의 각성자입니다. 그에 따른 보너스 포인트 5점을 부여해드립니다.
‘히든 피스라······. 역시 기대한대로군.’
각성자가 되는 것은 마치 게임 시스템과 동일했다. 혁준은 최초의 각성자가 됨으로서 남들은 얻지 못할 이득을 얻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히든피스는 여기저기 숨겨져 있었다.
‘전생에는 멍청하게 있다가 모두 놓쳐버리고 말았지.’
SSS등급인 강혁준도 처음부터 강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발주자라고 보는 것이 옳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대학생이었던 그가 악마와 싸우려는 마음을 가질 리가 없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만 다녔다. 그가 각성자가 된 것은 한참 후의 이야기였다.
‘일단 능력치부터 확인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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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준]
총합 : F 등급
능력치
근력: 5
체력: 4
인지력: 8
민첩성: 6
마력:0
물리 내성:0
마법 내성:0
보너스 포인트 : 5점
스킬
없음
고유 특성
아드레날린 러쉬 (S등급)(액티브) : 특성을 발동시키면 인지력을 극대화시킵니다. 수십 배 늘어난 인지력으로 당신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착각마저 느낍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아드레날린 러쉬가 길어지면 육체에 심각한 손상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전투 지능(A등급)(패시브) : 전투에 있어서 천부적인 센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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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역시 F등급이로군.’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처음은 모두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등급은 오로지 능력치로 결정된다. 처음 각성한 순간은 각성자나 비각성자와 큰 차이가 없다.
등급을 높이려면 악마를 죽이고 정수를 습득해야 했다. 흡수한 정수로 능력치나 스킬을 습득을 하면 점차 등급이 올라가는 형태이다.
색다른 점은 바로 고유 특성이다.
각성에 성공하면 사람마다 제각기 고유 특성을 가지게 된다. 특성은 매우 중요했는데, 어쩔 때에는 낮은 등급의 소유자가 고유 특성 하나만으로 높은 등급을 이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혁준의 고유특성은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드레날린 러쉬는 그를 전설로 만들어준 특성이었다.
‘그나저나 전투 지능이라······ 생각지도 못한 능력이군.’
전투 지능은 전생에서도 갖고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후천적으로 얻은 스킬이었다. 본래 갖고 있던 능력은 아닌 셈이다.
‘아마 회귀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전투 지능을 얻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다. 바로 수많은 전투 경험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할수록 적은 늘어났다. 어쩔 때에는 24시간 피에 절어서 싸움을 지속했던 적이 있었다.
비록 회귀를 통해서 육체는 약해졌지만, 그 경험과 전투 센스만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보너스 포인트 5점은 모두 인지력에 투자한다.’
인지력은 외부의 변화나 상황을 감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지력이 높을수록 반사신경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의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달려드는 자동차를 행인이 보고 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운이라는 요소도 있지만 반사 신경이 뛰어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강혁준의 경우는 아드레날린 러쉬를 극대화시키려면 기본 인지력이 밑받침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5점을 투자한 결과 인지력은 13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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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준]
총합 : F 등급
능력치
근력: 5
체력: 4
인지력: 13
민첩성: 6
마력:0
물리 내성:0
마법 내성:0
스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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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력이 높아졌지만 반면에 다른 능력치는 형편없다.
‘얼른 정수를 더 수집해야겠군.’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를 때려잡는 것이 제일 빠르다. 악의 정수는 후에 화폐처럼 거래되기도 하는 것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이다.
판데모니엄이 활성화되면서 첫 단계는 인간 하나당 임프 하나가 튀어나왔다. 처음이니까 난이도를 조절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각성자들은 그 당시를 튜토리얼이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생존의 난이도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악마대군주가 등장하면 인류는 그대로 게임오버다. 어떻게 보면 밸런스를 맞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전생의 자신은 튜토리얼 기간 동안 도망만 다녔지만, 이때 각성한 자들은 마치 스노우 볼링을 굴리듯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불공평하고 불친절한 방식이었지.’
그럴듯한 가이드라인 하나 없었다. 결국 눈치가 빠른 자가 이득을 독식했다. 그런 놈들이 후에 거대 클랜이 되었다. 비열하게 자신을 배신한 바로 그놈들 말이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그런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볼 바에 내가 독식해주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히든피스를 찾아야 했다.
‘기억이 맞다면 하루 만에 임프 50마리를 처치하는 것이었지?’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인류의 극소수는 그런 거짓말 같은 일을 해낸 자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히든피스라고 밝혀진 것이었고.
‘더 많은 사냥감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혁준의 머릿속에 기숙사에 있던 동기가 떠올랐다. 숫자는 대략 50명쯤 되었던 것 같았다. 그곳에 가면 많은 수의 임프를 잡을 수 있다.
“사냥의 시간이 돌아왔군.”
***
기숙사에 있던 인물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갑작스런 재해 앞에서 그들은 무력하기만 했다. 기능이 정지된 휴대폰을 다시 켜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될 리가 없다.
“이것도 틀렸어. 자동차가 먹통이야.”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전화기, 휴대폰, 자동차 모든 것이 먹통이다.
“전쟁이라도 난 것이 아닐까? EMP 폭탄이라도 맞은 거 같잖아.”
밀리터리 지식이 있는 대학생 하나가 말했다.
“개소리 하지 마. 누가 우리나라한테 그런 폭탄을 쓰냐?”
“북한이라면 분명 핵을 가지고 있어. 핵폭탄을 성층권에서 터뜨리면 이런 EMP 펄스가 발생해서 모든 전자기가 먹통이 되어······.”
쿠르릉······
갑작스런 진동 때문에 학생은 마저 말을 하지 못했다.
“뭐야? 또 지진인가?”
지진이라는 말에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을 언제 해봤겠는가?
“휴······ 약간 흔들리는 수준이네. 난 또 저번처럼 다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어.”
수시간전 겪은 지진에 비하면 지금 수준은 애교에 가깝다.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와중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어? 저건 뭐야?”
남학생 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반대편을 가리킨다. 모두의 시선이 저절로 그곳을 향했다.
케르륵!
케륵!
거기에는 무려 수십 마리의 임프가 줄지어져 있었다. 균열에서 나온 그들은 입에 침을 뚝뚝 흘리며 인간들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저것들은?”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타다닥!
임프는 4발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비교적 작은 몸집이지만 원숭이처럼 날쌘 움직임이었다.
타악!
그리고 높이 점프한다. 임프의 목적은 멀뚱히 서 있는 대학생이었다.
털썩!
여러 마리의 임프가 그를 덮친다.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의 몸을 낭자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붉은 피보라가 일어난다. 뒤에서 그것을 보던 여학생이 소리 높여서 비명을 질렀다.
“까아아악!”
그것은 혼란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뒤로 도망쳤다. 누구도 임프에게 대항할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살려줘.”
“히익! 저··· 저리 가!”
임프는 기이한 웃음을 흘리면서 사냥을 이어나갔다.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사감 김진수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괴물과 맞설 용기가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생들은 각자 살아남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한 자리에 모여서 대항했다면 피해가 이정도로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키이익!
임프 하나가 인간의 내장을 들어올리면서 기쁨의 괴성을 지른다. 지옥에서는 먹이 피라미드의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 지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직 배고프다.’
‘하나씩 하나씩······ 사냥한다.’
‘키키키킥······.’
주변을 둘러보면 살덩이가 많고 무력한 먹잇감이 넘쳐나지 않는가? 임프 무리는 흩어지는 인간들을 보면서 입맛을 적신다.
***
“헉··· 헉······.”
규환은 남들에 비해 비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서 가진 힘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
타다닥!
하지만 임프는 훨씬 재빠른 존재다. 규환이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툭!
“큭.”
다리에 힘이 빠져서일까?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서 몇 번이나 구르면서 살갗이 까졌지만 규환은 그것이 아픈지도 몰랐다.
“키르륵···.”
임프의 괴성이 바로 뒤에서 들렸다. 듣기만 했을 뿐인데 오금이 저린다. 규환은 살기 위해 앞으로 기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임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키이익···.”
임프가 달려와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규환은 아무런 저항을 할 수도 없었다. 공포에 질려 몸이 움직이지도 않은 것이다.
임프가 마지막 일격을 가할 찰나였다. 규환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퍼억!
파육음이 들린다. 하지만 규환은 예상과 다르게 그 어떤 아픔도 없었다.
‘버··· 벌써 천국인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떴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머리가 박살난 임프의 모습이었다.
“키이······.”
털썩!
치명상을 입은 임프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단 한방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임프의 시체 뒤에는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 Part 3: 아드레날린 러쉬
“혁준아!”
피로 적신 빠루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반가웠다. 아까 전에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렇게 달려와서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는가?
고마운 마음에 그에게 한 번에 달려가서 포옹을 해주려고 했다.
“고맙··· 응?”
달려오는 그를 막아선 것은 피에 젖은 빠루였다. 조금만 더 달려갔으면 거기에 푹하고 찍혔을 것이다.
“방해된다. 저리가라.”
“으응.”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모습이다. 순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규환은 혁준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달려온 것이라 믿고 있었다.
반면에 혁준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정수를 얻기 위해 악마를 사냥한 것인데 어쩌다보니 규환을 구해준 것이다.
‘상관없지.’
혁준은 임프의 뱃속에서 정수를 찾아냈다. 그러는 동안 피가 옷에 튀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우욱······ 뭐하는 짓이야?”
규환은 비위가 상하는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혁준은 굳이 설명해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캐낸 정수는 그의 손에서 분해되어서 그대로 사라졌다.
-근력이 0.2점 올랐습니다.
임프는 최약의 몬스터다. 그러다보니 떨어지는 정수도 질이 매우 낮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능력치가 상승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히든 피스를 얻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이제 48마리다.’
그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규환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혁준아. 그곳으로 가면 괴물들이 잔뜩 있어. 위··· 위험하다구.”
오히려 듣던 중 반가운 목소리다. 위험하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길을 따라 내려갔다.
***
지진이 모든 건물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조그만한 창고 건물이 있었는데, 단층이라서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10명 가량의 학생들이 문을 막고 농성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혼비백산한 상황이었다.
“젠장······ 조그만 새끼들이 왜 이리 힘이 좋아?”
운동부 출신인 이지훈은 문 앞을 막으면서 소리쳤다. 문을 잠그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하기만 했다. 그것은 덜컹거리면서 임프가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흑···.”
“울지만 말고 도와달라고.”
창고 구석에서 여학생들은 모여서 울기만 한다. 답답한 이지훈은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외침이었다.
쨍그랑!
문이 열리지 않자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침입을 시도한다. 창문이 깨지면서 새로운 위기가 생겨났다.
“꺄아아악!”
시뻘건 팔이 들어와서 희생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있는 힘껏 떨쳐낸다.
“하악··· 하악······.”
임프의 손에는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쥐어져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긴 했지만, 그녀는 공포로 얼이 빠져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다. 이대로 있으면 모두 몰살이다. 죽음의 공포가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들은 무력했다.
깨어진 창문 너머로 임프가 자신의 몸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지훈아. 어떻게 좀 해봐.”
“운동했다면서! 남자라면 앞에서 막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겁에 질린 여학생이 지훈에게 소리쳤다. 반면에 이지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나는 육상 선수라고. 격투기가 아니란 말이야.”
이지훈은 앞장서서 괴물과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이들을 희생물로 던져주고 도망치고 싶었다.
‘빌어먹을. 이년들을 던져주고 몰래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얼굴도 잘 생기고 팔 다리도 쭉쭉 뻗어서 평소에 인기가 많았던 이지훈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늘 여자가 많았었다. 그렇지만 실상 그는 겁 많고 비겁한 인물이었다.
“밀지 마! 씨바. 밀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창고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 때였다.
“키륵···?”
기어들어오던 임프가 우뚝 서고 만다. 그러더니 다시 밖으로 쑥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응?”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임프의 다리를 잡고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무자비한 매타작이었다.
퍼억! 퍼벅!
한번 두 번 내려칠수록 임프는 다져진 고기가 되고 말았다. 아작난 임프를 내려다보며 그는 희미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우리 학과 동기잖아.”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아웃싸이더 혁준이었다. 워낙 내성적이라 존재 여부가 공기 같은 동기였다.
“위험해!”
여학생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른 임프가 무방비로 서 있는 혁준의 등 뒤를 노렸기 때문이다.
‘일일이 소리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인지력이 높은 혁준은 뒤에서 다가오던 임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허공에 점프해서 덮쳐오는 임프를 뒤로 돌아서며 후려친다.
뻐억!
날아오던 가속도에 더해 큰 충격이 임프에게 가해진다. 빠루의 단단한 몸통은 안면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크헥······.”
혁준은 마치 강타자처럼 빠루를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창고 주변에 있던 임프가 모두 혁준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괜찮을까?”
“위험해 보이는데······.”
창고 안에 있던 사람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혁준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얼굴만 아는 정도?
그렇지만 지금 혁준의 등장은 학생들에게 있어서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임프에게 당당히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훈아. 너라도 가서 도와줘.”
“그래. 이거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창고에서 찾은 마대 자루를 꺼내며 준다. 물론 이지훈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허접한 나무 작대기로 뭘 하자는 거야? 아니 그리고 왜 내가 저런 미친놈을 도와줘야 하는 거냐고?’
지훈은 얼떨결에 마대자루를 받긴 했다. 하지만 절대 밖으로 나가서 혁준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정말로 그건 바보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능력해.’
‘허우대만 멀쩡한 새끼!’
미적거리면서 뒤로 빼는 지훈을 보며 나머지 여학생들은 큰 실망을 느꼈다.
크르륵···.
키익!
숫자는 10마리.
혁준은 각성자라고 하지만 아직 그 능력이 미비했다. 진정한 각성자는 C급부터라는 말이 있다. F급 능력자가 임프 10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임프 10마리라······ 재미있겠군.’
반면에 혁준의 입가는 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강혁준이 전생에 SSS급 각성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멘탈 때문이었다.
강혁준은 위기에 맞서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발로 위험한 곳을 찾아다녔다. 리스크가 크면 클수록 보상도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을 즐기는 그의 성격은 지금 상황과 딱 맞아 들어갔다.
‘high risk. high return.(위험이 큰 만큼 이득도 많다)’
그의 좌우명덕분에 후발 주자임에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크라락······.”
“케르륵······.”
임프는 혁준을 중심으로 둥글게 포위했다. 개체가 약한 만큼 몰이 사냥에 특화된 악마들이다. 멋도 모르고 임프 무리에 달려들다가 비명횡사한 각성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강혁준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드레날린 러쉬!’
혁준은 곧바로 자신의 고유 특성을 개방시켰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혁준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솨아아아······.
인지력이 순식간에 뻥튀기 되었다. 동시에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임프의 움직임은 물론이며 창고 안에서 마른 침을 삼키는 학생들의 모습까지 각인되었다.
타닥······.
임프 여럿이 동시에 달려든다. 임프의 전략은 단순하다. 누가 되었든 먹잇감에 매달리는 것이다. 치명타를 주는 것은 힘들겠지만, 숫자로 밀어붙여서 바닥에 쓰러뜨리면 된다.
“크롸락!”
괴음을 지르면서 덮쳐온다. 하지만 놈이 날아오는 궤적은 이미 파악한 후였다. 옆으로 한발자국 움직이면서 피한다.
퍼억!
동시에 빠루가 임프의 팔을 부러뜨린다. 그것은 마치 짜고 치는 연극과 같았다. 피하고 내려치고, 다시 피하고 내려 찍어버린다.
뒤이어 연달아 달려드는 임프들은 좀처럼 혁준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의 움직임이 재빠른 것도 아니었고 임프들이 사정을 봐주는 것도 아니다.
퍼억!
퍽!
그는 미래를 미리 내다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사실은 극대화된 인지력으로 상대의 행동을 미리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이이익!’
‘인간 이상하다.’
‘물러나자.’
임프는 숫자가 반 정도 줄어들자 도망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것은 혁준이 바라던 것이 아니다.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서 임프를 부지런히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남은 임프들을 놓치게 생겼군.’
도망가는 임프를 따라가서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퍼포먼스를 벌이기로 했다.
텅!
들고 있던 빠루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강혁준을 제외하고 그곳에 있던 자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다.
“무기를 버리다니. 왜 저런 미련한 짓을 하는 거냐?”
창고 안에서 활약을 지켜보던 이지훈이 의문을 표했다. 여기서 혁준이 임프에게 당하면 그 다음 차례는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혁준은 거기서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말았다.
팅··· 티디딩······.
유일한 무기인 빠루를 발로 차 버린 것이다. 그것은 휙하고 날아가서 저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혁준은 완벽하게 비무장상태가 된 것이다.
“키륵?”
“캬아아아아······.”
그것은 임프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가진 우세를 일부러 포기하다니.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덕분에 임프들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무기 없는 인간, 약하다.’
‘복수한다.’
‘이제 그는 위험하지 않다.’
쇠로 만든 빠루에 비하면 인간의 육체는 연약한 살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임프는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을 지니고 있었다.
“케륵!”
재빠르게 달려드는 임프.
하지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강혁준은 SSS급 각성자로서 못 다루는 무기도 없었지만 그의 진정한 장기는 바로 맨손전투라는 점이다.
퍼걱!
달려드는 임프의 얼굴을 니킥으로 쳐 날린다. 전생의 그 강력한 육체는 아니다. 하지만 집요하게 급소를 노리는 노련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퍼억!
회전을 더한 뒤돌려차기.
그것은 깔끔하게 임프의 턱을 차올렸다.
“킥!”
턱 관절의 뼈가 순식간에 으스러졌다. 이 시대의 최고의 무술가와 싸우더라도 혁준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후우······.”
격렬한 움직임으로 임프들을 때려눕혔다. 하지만 금방 체력의 한계가 부딪혀온다. 그가 가진 체력은 고작 4점에 불과하다.
‘아드레날린 러쉬까지 사용했더니······ 금방 한계가 오는군.’
# Part 4: 잘못된 선택
이때까지 빠루를 쓰던 이유도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다행인 점은 이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키이익······.”
한 마리의 임프는 결국 놓치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잡고 싶었지만 아직 쓰러진 임프 중에서 몇몇은 살아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빠루를 잡고 부상을 입은 임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런 고민 없이 내려쳤다.
퍼억! 퍼억!
그것은 확인 사살이었다. 피와 살이 튀었지만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아쉽게 한 마리 놓쳤군. 이때까지 잡은 놈이 11마리이니까. 아직 39놈이나 남은 건가?’
역시 히든 피스답게 만만치 않다. 사실 임프 50마리 잡기를 해낸 놈들도 군인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가진 총기는 가볍게 임프를 잡을 수 있으니까. 냉병기로 일일이 때려잡는 혁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쉽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일단 죽은 임프들의 시체에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정수를 습득했다. 그런 작업을 하던 도중인데 뒤에서 여러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읍······.”
일행이 보기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사체를 해부하는 혁준이 그로테스크했던 모양이다. 특히 두개골을 깨부수고 맨손으로 뇌수를 헤집는 모습은 생명의 은인이라도 보기 힘들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몇몇 여학생은 참지 못하고 구석에서 토를 하고 말았다.
반면에 혁준은 자기 할 일에 몰두했다. 해가 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안녕. 이름이 혁준이라고 했던가?”
결국 누군가가 뒤에서 혁준을 부른다. 뒤를 돌아보니 이지훈이었다.
내성적인 강혁준에 비해 이지훈은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사실상 서로 친하게 지낼 접점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주변 여학생에게 물어서 미리 알아본 모양이다.
“······.”
이지훈은 이상할정도로 친근하게 다가갔다. 자신만만한 미소와 쾌활한 그의 태도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친화력을 발휘했다.
‘어떻게든 이놈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그의 속셈은 간단했다. 지옥처럼 변한 이곳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반면에 혁준은 끔찍한 괴물 10마리를 가볍게 처리했다. 그가 대신 괴물과 싸워준다면 생존은 어려워보이지 않았다.
비록 괴물의 사체를 헤집는 모습이 정상은 아닌 것 같지만 그게 뭐가 대수랴? 물에 빠진 사람은 동아줄로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잡아야 하는 법이다.
‘이 놈은 누구야? 기억이 전혀 없군.’
반면에 혁준은 전생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도 지훈에 관한 것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전생에서 이지훈은 임프에게 붙잡혀 한 끼 도시락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 제법 잘 싸우더라. 무슨 격투기라도 배웠던 거야?”
보아하니 말만 더럽게 많은 녀석이다. 혁준은 아예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말 없이 빠루를 들고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야! 잠깐만.”
이지훈은 순간 화가 났다. 살면서 이렇게 무시 받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혁준의 어깨를 붙잡는다.
“······.”
혁준은 짜증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헉······ 이게 아닌데.’
지훈은 아차 싶었다. 혁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바로 기가 죽어버린 것이다. 불과 5분 전만 하더라도 무서운 괴물을 단번에 박살내지 않던가?
“하아······. 용건이 뭐냐?”
반면에 혁준은 일단 한번 참았다. 어깨를 한번 잡았다고 경을 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인내가 요구되었다.
“그게 아니라······.”
일단 어물쩍 넘기려는데 뒤에 시선이 느껴졌다. 자기 좋다고 따라온 여학우들이었다. 동시에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시선들이 기억났다. 한 명의 남자로서 더 이상 얼빠진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혁준아.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 혼자서 쟤네들을 지켜주는 것은 너무 버거워.”
말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지훈은 주변의 상황을 이용해서 혁준에게 짐을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자고로 남자라면 당연히 연약한 여자들을 지켜줘야지. 설마 이대로 쟤네들을 버리고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네가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지훈은 자신의 말솜씨에 스스로 감탄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렇게 해버리면 혁준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래서 너희들을 뒤치다꺼리를 해달라?”
단번에 혁준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어떻게든 자신을 엮어서 괴물이 나타날 때, 도움을 받으려는 처사였다.
“너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서로 돕자고 하는 말인데. 물론 네가 싸움 실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네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 거다.”
지훈은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했다. 만일 강혁준이 남의 평판을 중요시여기는 사람이었다면 지훈의 꼼수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재미있군. 전생에도 이런 놈들은 늘 있어왔지.’
산전수전 다 겪은 혁준이다. 이렇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놈들은 수 없이 보아왔다.
‘그럼 조금 어울려줄까?’
지훈이 뭐라고 지껄이든 그냥 떠나가면 그만이다. 혹은 놈의 잘난 얼굴에 주먹을 먹여주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다.
“좋아. 너희들과 동행해주지.”
혁준은 의외로 쉽게 승낙했다. 그 모습에 지훈을 포함한 나머지 여학생들도 반색했다. 이제부터 든든한 보디가드가 생긴 셈이었으니까.
“단 조건이 있다.”
누가 말했던가?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혁준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돌은 악의 정수다. 쉽게 말해서 이것만 있으면 나처럼 강해질 수 있지.”
혁준은 임프의 사체에서 입수한 푸른 보석을 보여주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래.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하긴 그렇다. 금방 들통 날 일을 수고스럽게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혁준은 악의 정수를 통해 각성을 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각성에 성공하면 각자 고유특성과 스텟이 생긴다. 그리고 정수를 추가로 습득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지. 마치 게임속의 캐릭터처럼.”
혁준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다가 여학생 하나가 물어보았다.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안거야?”
“예지몽을 꾸었다. 본가가 무속인 집안이라서 미래의 일을 읽었지.”
굳이 디테일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악마도 나타나는 마당에 어지간한 거짓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나 혼자서 너희들을 모두 지킬 수는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한 괴물이 등장할거니까. 방법은 단 하나다. 너희들도 악의 정수로 각성을 하면 된다. 그렇게만 되면 힘을 합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
어렵게 얻은 정수를 아무런 조건 없이 내밀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은 생각보다 미적지근했다. 여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보호였다. 악마와 직접 싸운다는 답안은 처음부터 없었다.
‘부작용까지 말할 필요도 없겠군.’
씁쓸하다. 비각성자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뒤에서 물러나 누군가 대신 흙탕물을 뒤집어쓰기를 원한다.
“좋아. 내가 해보지.”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지훈이 정수 한 개를 집었다.
‘이거만 있으면 강해질 수 있다고?’
그가 보기에 세상은 이미 발칵 뒤집어졌다. 이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지는 것이 필수였다.
‘이런 기회를 공짜로 넘겨주다니. 강혁준. 너는 정말 멍청한 놈이구나.’
이지훈은 마음속으로 혁준을 비웃었다. 그리고 얼른 각성을 하기 위해 정신집중을 하려는 찰나였다.
“잠깐!”
혁준이 갑자기 만류한다. 그 모습에 이지훈은 멋대로 오해해버렸다. 불만이 잔뜩 든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이제 와서 정수가 아까운 거냐?”
“설마. 나는 그런 좀생이가 아니야. 다만 주의할 사항이 있어서 말이지.”
강혁준은 악마화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마저 설명해주었다.
“거저 주는 힘은 없다. 각성을 하려면 먼저 정수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만일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강혁준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임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바로 저런 악마가 되어버린다. 각성을 하려면 그렇게 될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내··· 내가 악마가 된다고?”
“그저 가능성이다. 네 의지가 강하다면 정수의 유혹 따위는 가볍게 물리칠 수 있겠지.”
새로운 사실이었다. 혁준의 말을 들은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각성을 포기해버렸다. 각성에 실패하면 보기만 해도 끔찍한 악마가 되어버린다니······.
‘젠장······. 그건 생각지도 못했잖아.’
지훈은 지금이라도 무르고 싶어졌다. 죽더라도 인간으로서 죽고 싶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는데 혁준이 밉상스럽게 말한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악마가 된다면 내가 직접 저승으로 보내주겠다. 적어도 살인귀가 되어 모두를 해치는 일은 없도록 말이지.”
혁준의 표정은 여유만만했다. 지훈은 그 모습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왜 망설이지? 자고로 남자라면 당연히 연약한 여자들을 지켜줘야 하잖아.”
아까 지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답변이다.
‘빌어먹을 새끼······. 감히 너 따위에게 얕볼 내가 아니라고.’
“흥. 이따위 각성. 단번에 해주지.”
지훈은 다짐했다. 각성으로 힘을 얻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녀석을 배제할 것이라고. 그 때가 되어서 실컷 비웃어 줄 것이라 다짐했다.
‘강혁준, 너 따위가 해낸 일을 내가 못할 리 없어.’
지훈은 각성을 시도했다. 이윽고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성하시겠습니까?
“그래. 지금 당장 하겠어!”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크아악······.”
이지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누군가가 해머로 자신의 머리를 깨어 부수는 느낌이었다.
‘권위에 굴복하라.’
‘저항은 무의미하다. 필멸자여.’
‘포기하면 편해. 하지 마.’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였다.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 정신이 그대로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제발······.”
그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빌어먹을 소리를 멈출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렀군.’
혁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각성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은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끄으으어어!”
지훈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비명을 지른다. 동시에 혁준은 빠루를 고쳐 잡는다.
‘그 짧은 시간도 견디지 못하다니.’
투둑··· 투두둑···.
입고 있던 옷이 뜯겨져 나갔다. 영화 속의 헐크처럼 순식간에 몸이 팽창해버렸기 때문이다.
“쿠오오오······.”
주변에 있던 자들은 포효를 듣는 것만으로 혼백이 빠져나간다. 공포에 질린 여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강혁준이었다.
# Part 5: 각성
툭툭······.
빠루로 살인귀가 되어버린 지훈의 등을 두드린다.
“이봐. 네 상대는 나라고.”
그의 도발은 효과만점이었다. 타락한 이지훈은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부우웅!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풍압이 발생할 정도다.
쾅!
살인귀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주먹과 부딪힌 콘크리트 바닥은 거미줄처럼 갈라져버렸다. 단 한 대라도 허용했다가는 단번에 게임오버가 될 위력이다.
‘다만 그것이 적중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
살인귀는 강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지만, 너무 단조로운 공격 형식을 고수했다. 오히려 빈틈을 찾아낸 혁준의 카운터가 더욱 매서웠다.
퍼억! 퍽!
잠깐의 시간동안 살인귀는 수십 대나 얻어맞고 말았다.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진다. 분노의 힘으로 버티고 있지만 살인귀의 패색이 짙어져간다.
‘근력과 체력이 한참 부족해. 참으로 한심한 몸뚱이다.’
수준 낮은 적과 오래 드잡이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컥···. 쿠륵······.”
살인귀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진다. 강철 빠루가 그의 머리를 북어마냥 두드려 팬 결과다.
털썩!
내출혈이 너무 심한 탓일까? 살인귀는 쓰레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살···려 줘.”
죽기 직전, 살인귀는 제정신을 차린다. 혁준을 바라보며 자비를 구하지만 그를 살려줄 마음은 단 1mm도 없었다.
“모든 것은 너의 선택이었다.”
불쌍해서 살려주면 다시 살인귀가 될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삶을 끝내주는 것이 옳다.
푸욱!
빠루의 끝부분을 세워서 단번에 이마 중심에 쑤셔 넣었다. 이지훈은 잠깐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히든 피스 ‘배신자 처단’을 달성했습니다.
발동조건: 첫 살인귀를 죽여라
보상: 보너스 포인트 3점
이번 히든피스는 강혁준도 몰랐던 사실이다.
‘하긴 당사자가 털어놓지 않으면 히든피스를 모두 알 수가 없겠지.’
살인귀라고 하나 원래는 인간이었던 존재다. 어쩌면 동족을 죽인 것이 마음에 걸려서 비밀로 숨긴 것일 수도 있다.
‘내키지 않지만······.’
살인귀의 시체에서도 악의 정수를 캐낼 수 있었다. 그것은 임프의 정수보다 훨씬 크고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킨 정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 임프 수십 마리를 잡는 것보다 살인귀 하나를 잡는 것이 더 큰 이득인 셈이다
‘일단 능력치부터 올리자.’
지금 낮은 능력치로 고생만 주구장창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전리품으로 얻은 정수를 모두 흡수했다.
-임프의 정수로 근력 1점, 체력 1점, 민첩성 2점이 올랐습니다.
-살인귀의 정수로부터 스킬 ‘살인귀의 포효’을 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히든피스로 얻은 보너스 포인트는 모두 인지력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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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준]
총합 : F 등급
능력치
근력: 6
체력: 5
인지력: 16
민첩성: 8
마력:0
물리 내성:0
마법 내성:0
스킬
살인귀의 포효(D등급)(액티브): 스킬을 발동하면 자신보다 약한 적들에게 공포를 선사합니다. 마력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입니다. 하루에 한 번 사용가능합니다.
고유 특성
아드레날린 러쉬 (S등급)(액티브) : 특성을 발동시키면 인지력을 극대화시킵니다. 수십 배 늘어난 인지력으로 당신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착각마저 느낍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아드레날린 러쉬가 길어지면 육체에 심각한 손상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전투 지능(A등급)(패시브) : 전투에 있어서 천부적인 센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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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가 소폭 오르기는 했지만 전생의 강함을 되찾으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구만리다. 하지만 살인귀 정수에서 스킬을 배웠다는 점은 고무할만한 점이다.
포효는 등급에 비해 굉장히 쓸만한 스킬이었다. 지금은 본연의 힘이 약해서 임프에게나 먹히겠지만, 후에 높은 등급에서 쓰는 포효는 훌륭한 군중제어기가 된다.
불과 5분 전만 하더라도 살인귀가 포효 한 번으로 여학생들을 모두 도망가게 만들지 않았던가. 전생에서는 포효를 사용해서 불리한 싸움을 이겨낸 적도 있었다. 다만 사용 횟수 제한이 크게 아쉽게 다가오는 점이다.
“케르르륵······ 케륵!”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임프의 음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여러 마리의 임프가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응?’
임프의 특성은 하이에나처럼 무리에서 쫓겨났거나 병이 들어 약해진 사냥감을 제일 먼저 노린다. 그리고 임프들의 시선에 혁준은 무리에서 쫓겨난 새끼 임팔라와 비슷해보였던 것이다.
“설마 나를 노리는 건가?”
F등급이나 비각성자나 임프들의 눈에는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덕분에 혁준은 일일이 찾아가는 수고를 덜 수가 있었다.
‘약자가 되어서 얻는 이득인가? 뭐 나쁘진 않아.‘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회귀를 하면서 터무니없이 약해졌지만, 반대급부로 몹들이 알아서 찾아온다.
“먹음직스럽군.”
임프들 하나하나가 탐스러운 정수 덩어리나 마찬가지다. 지금 상황을 게임으로 따지면 폭젠(많은 수의 몬스터가 리젠 되는 현상)이나 마찬가지.
“자! 들어와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임프가 달려든다. 한 자루의 빠루를 든 사나이는 기꺼이 그 무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
무너진 건물 사이에 오롯이 서있는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죽어버린 임프 시체가 가득했다.
-히든피스 ‘무력 행위’를 달성했습니다.
발동조건 : 하루 만에 임프 50마리를 죽여라.
보상 : 보너스 포인트 5점
털썩!
‘힘들다.’
강혁준은 지금의 상황을 단 한마디로 표현했다. 다른 이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하루 만에 임프 50마리를 잡은 것이다.
그것도 한 자루의 빠루만 가지고······.
‘그래도 얻은 것은 많다.’
임프를 잡으면서 얻은 정수가 제법 많다. 그 중에서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흡수했다. 마지막으로 보너스 포인트로 얻은 5점의 능력치를 모두 인지력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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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준]
총합 : F 등급 -> E 등급
능력치
근력: 9
체력: 11
인지력: 21
민첩성: 10
마력:0
물리 내성:0
마법 내성: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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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등급이 상향되었습니다.
원래 경사는 연달아 오는 법이다. 이제 혁준의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일단 인지력을 50점 이상 달성해야 한다.’
다른 능력치에 비하면 두 배나 되는 능력치이지만 혁준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판데모니엄이 진행될수록 상상도 못할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혁준 씨······.”
앉아서 쉬고 있는데 예쁘장한 여학생 하나가 다가와서 말한다. 그러고 보니 임프한테 죽을 뻔한 것을 구해준 기억이 난다.
“고··· 고마워요.”
몸을 배배 꼬면서 말한다. 얼굴에 홍조까지 띤 것을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혁준의 주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저 히든피스를 얻기 위한 행동이었건만.’
히든 피스를 달성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대로 임프를 때려잡았다. 분명 보상을 바라고 했던 행동이지만 결과는 많은 수의 사람을 위험에서 구출한 것이다.
‘죽다 살았네.’
‘쟤 옆에만 꼭 붙어있으면 살 수 있어.’
‘어떻게든 혁준이에게 잘 보여야 해.’
부담 어린 시선이 혁준에게 집중된다. 그리고 그 광경은 낯설지가 않다.
‘이런 또 시작이군.’
똑같다. 회귀를 하기 전, 혁준은 살아남기 위해 각성을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강자로 거듭났다.
그러자 사탕에 개미떼가 다가오듯이 수많은 난민들이 혁준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우리를 구원해주시오.’
‘당신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결국 난민을 받아들인 혁준은 라 그마이스 요새를 가지고 있음에도 제일 세력이 약한 축에 들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어.’
인류 역사상 최강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그 말로는 비참했다. 그의 인도적인 행동은 칭송받을 일이었지만, 결국 많은 수의 비각성자들은 혁준에게 커다란 짐이 되고 말았다.
‘판데모니엄에서 그런 낭만을 누리는 짓은 사치에 불과하다.’
튜토리얼 기간에는 남들보다 빠르게 히든피스를 독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발이 묶이면 안 된다.
“이름이 혁준이라고 했던가?”
사감 김진수가 다가와서 말을 붙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혁준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했어.”
그와의 친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지금은 오랜 친우처럼 달라붙는다.
탁!
붙잡은 손을 냉정하게 쳐낸다. 그리고 혁준은 차갑게 말한다.
“이만 바빠서.”
이곳에 더 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본다. 하지만 김진수는 끈질겼다.
“잠깐. 혁준아. 도대체 왜 그래?”
혁준의 앞을 막아서면서 진수가 외쳤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미안하지만 비켜주시면 좋겠군요.”
“자네 설마······. 우리를 버릴 생각인가?”
결국 그 단골 대사가 나왔다.
‘젠장, 무슨 애완동물도 아닌데, 버리니 마니 하는 거야?’
짜증이 확 솟구친다. 자신은 절대로 베이비시터가 아니다. 무정부가 된 지금 남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일어서야 할 때였다.
“사감님.”
이대로 떨쳐내고 갈수도 있다. 하지만 혁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 인생을 책임질 수 없지만 살아갈 길을 제시할 수는 있다.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 갈만큼 더 이상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시죠.”
“······.”
김진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절대 혁준의 말에 공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딱 봐도 화가 난 혁준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좋습니다.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조용해진 진수를 바라보며 혁준은 말을 이었다. 그는 남은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임프 시체에서 정수를 뽑아냈다.
“저처럼 강해지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각성이지요. 각성을 하면 정수를 수집하는 것으로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수를 흡수했다. 푸른 색의 조그만 돌덩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만 각성을 하기 위해서 정수의 유혹을 견뎌내야 합니다.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면 타락해서 악마가 되는 것이죠.”
웅성웅성······.
그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각성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그것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지상은 점점 지옥이 될 겁니다.”
# Part 6: 각성 (2)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수 5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흡수하면 능력치 1~2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구태여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가지고 있던 정수입니다. 타락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도전하세요.”
불안한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본다. 선뜻 나서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필요 없는 행동이었군.’
혁준은 실망하고 그곳을 떠나려던 찰나였다. 학생들 무리에서 한명의 남자가 나왔다. 그리고 그는 혁준도 잘 알던 사람이었다.
“내······ 내가 해보겠어.”
후덕한 인상의 임규환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각성에 도전했다.
‘규환이가 도전할 줄이야.’
이들 중에서 제일 용기없는 사람을 뽑으라면 바로 규환이었다. 평소에도 겁이 많아서 무서운 영화는 혼자서 못 보던 친구였다. 그런 이가 각성에 도전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정말로?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혁준은 재차 물어보았다. 비록 희미한 기억이지만 규환과 친하게 지내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각성을 실패하면 결국 살인귀가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결국 혁준이 그를 죽여야 한다.
“그래.”
규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본 혁준은 정수를 하나 집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꼭 성공해라.”
규환은 희미한 미소로 지으며 마음속으로 응답했다.
‘고맙다. 친구야.’
규환은 처음 혁준을 원망했다. 강한 힘을 가지고도 친한 친구였던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각성의 위험을 말해주었을 때 깨닫는 것이 있었다.
‘생떼를 부리는 것은 바로 나였어.’
규환은 혁준에게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그와 동등한 위치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성이라는 것을 성공해야 한다.
-각성하시겠습니까?
예의 그 음성이 들려왔다.
“네.”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각성이 시작되자 규환은 엄청난 고통과 마주해야 했다.
“으으윽···.”
고통도 문제지만 쉴 새 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유혹은 집요했지만 규환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나··· 나도 해낼 거야.’
규환의 노력이 빛을 발했던 탓일까? 고통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인가?’
안도하고 있을 때, 악의 정수는 새로운 방법을 취했다. 채찍이 통하지 않는다면 당근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아아아······.”
규환의 얼굴은 몽롱한 표정을 짓는다. 눈은 풀리고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진다. 해일과 같은 쾌락이 그의 머릿속에서 범람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 차려!”
좋지 않다. 규환의 상태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혁준이 소리쳤다. 각성 상태에서는 외부의 신호가 거의 차단된다. 그렇기에 헛수고에 불과한 행동이었다.
‘이 목소리는······.’
놀랍게도 규환은 쾌락의 늪에 빠진 상태에서 다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바로 혁준이 자신에게 외치는 그것을 말이다.
‘나··· 난 인정받고 싶어.’
그의 친구였던 혁준은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영웅이 되었다. 자신은 그것과 똑같이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발끝이라도 도달하고 싶었다. 그의 간절한 염원은 강한 힘이 되어주었다.
-각성에 성공하셨습니다.
그 즉시 속삭임은 사라졌다. 규환은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각성자가 된 것이다.
“축하한다.”
혁준은 만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규환은 거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내··· 내가 해낸 거야?”
혁준은 고개를 끄떡인다. 한편의 인간 승리를 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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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환]
총합 : F 등급
능력치
근력: 4
체력: 3
인지력: 3
민첩성: 2
카리스마: 6
마력:0
물리 내성:0
마법 내성:0
스킬
없음
고유특성
군주 (A등급)(패시브) : 당신은 강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추종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끈끈한 유대관계로 맺어진 혈맹은 커다란 힘을 발휘합니다. 카리스마 수치에 따라서 추종자 숫자가 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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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환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특성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혁준은 그의 설명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군주라······.’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기존의 세계 정부는 모두 몰락하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거대 클랜이었다.
군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클랜은 한 지역의 패자로 우뚝 서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인류 전체로 볼 때, 그것이 꼭 장점이 되지는 않았다.
바로 클랜 특유의 폐쇄성과 선민의식 때문이다. 클랜인들은 스스로를 신인류라고 생각하고 비각성자를 뒤처지고 나약한 종자라고 여겼다. 결국 21세기에 피라미드 형식의 신분제도가 생긴 것이다.
‘나 같은 돌연변이는 특히 군주들에게는 눈에 가시였지.’
반면에 혁준은 각성자나 비각성자나 차별 없이 대우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런 하찮은 것으로 배신을 결정하다니.’
군주라고 올바르고 좋은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옹졸하고 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과 몇 가지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지.’
전생에서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거대 클랜 때문이었다. 그들이 배신만 하지 않았다면 혁준의 염원은 이루어질지도 몰랐다.
‘방법은 단 하나다. 군주들의 생사여탈권을 내가 쥐는 수밖에 없다.’
전생에서 자신은 너무 물렀다. 그리고 그것이 독이 되어 스스로를 파멸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혁준은 군주들을 모두 자신의 발아래에 둘 생각이었다. 인류는 지구를 되찾기 위해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일 필요성이 있었다.
바로 강혁준이라는 이름의 구심점이.
***
날이 저물고 어둑어둑한 밤이 되었다. 혁준은 그날동안 3명이나 더 각성시켰다. 안타깝지만 남은 2명은 끝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가 되어버렸다.
내키지 않았지만 혁준은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안식을 내려주었다.
“괜찮아?”
규환은 피 묻은 빠루를 들고 있는 혁준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하지만 혁준에게 있어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규환아.”
“응?”
“네가 구심점이 되어라. 그래서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려라.”
“알았어.”
규환을 비롯한 3명의 각성자는 그들만의 클랜을 만들었다. 지금은 F급 능력자에 지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른다면 분명 한사람의 몫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늦은 밤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서 불을 피웠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한 곳으로 모아놓고 화장을 했다.
타닥타닥!
많은 이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죽음이 그들에게 닥쳤다. 간혹 울음을 참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혁준은 멀리서 그런 이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자리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규환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떠날 거야?”
혁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규환은 그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질 것 같은 강한 예감을 느꼈다.
“고마웠다.”
“별말씀을. 우리는······.”
혁준은 잠깐동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친구잖아.”
***
판데모니엄이 시작되고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대지진이 강타하고 전자기가 종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임프의 대 난동. 하지만 그것은 곧 이어질 재난에 비하면 준비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추아아악······.
대지에 갈라진 틈 사이로 고동색의 점액질이 분출한다. 그것은 끈적끈적하고 냄새가 고약했다.
“차근차근 시작되는군.”
그 점액질의 이름은 크립(Creep)이라고 불리 운다. 그것은 땅을 황폐화시키는 물질로서 어떤 식물도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그 지대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크립은 악마들의 주요 식량이라는 점이지.’
악마들은 생산활동을 일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굶어죽지 않는 이유는 바로 크립 때문이다.
환경도 조성되었겠다. 곧 있으면 지옥에 거주하는 악마들이 대량으로 몰려들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대지진이후로 이런 균열은 셀 수도 없이 많이 발생했다. 노력하면 한두 개쯤은 콘크리트로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깨진 독에 물 붓는 꼴이지만.
쿠르릉······.
땅의 울림이 시작되었다.
‘다음 징후의 시작이군.’
악마는 크게 데빌과 데몬으로 그 종류가 나누어진다. 언뜻 보면 데빌이나 데몬이나 같은 뜻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둘은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일단 데몬의 가치관은 무질서하며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른다. 생김새도 각양각색이라서 한 가지 형태라고 정의 내릴 수 없다. 예를 들어 거대 슬라임이나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그렇다.
반면에 데빌은 위계질서가 잡힌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데빌은 각각 근거지가 있으며, 우두머리가 늘 존재했다. 따라서 엄격한 신분제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은 인류에 대해서 무한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흉측하고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형상이지만, 전체적으로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라고 볼 수 있다.
‘데몬은 인간을 맛있는 간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서 데빌은 인간의 말살을 원하지.’
둘 다 인간에게 위험하지만 경중을 따지자면 데빌이 더 악질인 셈이다.
어쨌든 크립이 바닥에 깔리면 그것을 먹고 자라는 데몬이 대량 발생하는데 그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크립이 생성된 곳은 가까이 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사냥터가 생긴 셈이지.’
이때까지 잡은 임프의 정수는 그 질이 너무 낮다. 고생에 비해서 그 이득이 너무 적은 것이다. 반면에 이제 곧 생겨날 데몬은 훨씬 위험하겠지만 이득은 배로 챙길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장비부터 바꿔야지.’
물론 빠루가 쓸 만한 둔기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혁준은 그보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필요했다. 검이 가지는 출혈 효과는 악마에게도 제법 먹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땅한 이동수단이 없다. 아직 키가 꼽혀 있는 자동차가 도로에 가득 있지만, 그것은 이제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기 있군.’
여러 대의 자전거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아마도 지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턱!
혁준은 빠루로 잠금 장치는 뜯어내버렸다. 그 모습이 매우 익숙하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완전 개판이군.’
거리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판데모니엄이 진행되면서 지구는 거대한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 Part 7: 헬하운드
끼이익······
자전거를 급히 세웠다. 그가 도착한 것은 총포상이었다. 지진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형태는 온전했다.
“아무도 없습니까?”
인기척이 없었지만 예의상 인사했다.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자 혁준은 빠루로 문 연결 고리를 부숴버렸다. 그리고 발로 차자 텅하고 문이 넘어졌다.
건물 안은 지진으로 인해 매우 어지러워져 있었다. 그래도 그가 원하던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샷건이라······. 뭐 소총에 비하면 화력이 부족해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사냥용 엽총과 탄약을 챙겼다.
‘그래. 바로 이거지.’
그러던 중 한 자루의 마체테를 구할 수 있었다. 정글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인데, 주인장이 직접 쓰던 물건인 모양이다. 손질이 잘 되어있었는지, 칼날의 예기가 장난 아니었다.
‘자 그럼 악마를 사냥하러 가볼까?’
추아악······
멀지 않은 곳에 크립이 분출하는 것이 보인다. 시간이 갈수록 판데모니엄의 진행이 빨라지고 있었다.
산책 나가듯 그곳을 향해 걸었다. 그러던 중 먼 곳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혁준을 보고 대뜸 소리쳤다.
“도··· 도망쳐!”
‘맞게 찾아온 모양이군.’
크르릉··· 컹컹!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려드는 한 무리의 짐승들이 보인다.
바로 헬하운드였다.
데몬의 한 종류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대형견으로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가 세 개라는 점과 입에서 불길을 쏟아낸다는 점이다.
타다닥······.
헬 하운드 하나가 공중을 뛰어오른다. 그리고 도망가던 인간을 덮쳤다.
“으아악······.”
헬하운드의 날카로운 이빨이 남자의 목을 단번에 물어뜯는다.
“끅··· 끄윽······.”
치명상을 입은 그는 경련을 일으켰다. 헬하운드는 강한 턱 힘으로 남자를 이리저리 패대기쳤다.
콰직!
결국 그의 목이 두 동강 나버렸다. 동일한 덩치의 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치악력(이빨로 쥐거나 물어뜯는 힘)이다.
그곳에 있던 일반인들은 헬하운드에 쫓겨 도망가고 있었지만 혁준은 오히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크르르르······.”
헬하운드는 먼저 적개심을 드러냈다. 반면에 혁준은 여유만만 했다. 전생에서도 이런 똥개는 질리도록 잡았다.
“컹!”
일직선으로 달려온다. 혁준은 바로 샷건을 꺼내어 조준했다.
헬하운드는 자세를 낮춘다. 동시에 타격 면적이 줄어들었다.
탕!
그러거나 말거나 혁준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공이가 샷건탄의 뇌관을 치자 작약이 폭발한다. 그 추진력으로 슬러그 탄이 일직선으로 하운드에게 날아간다.
푸확!
헬 하운드의 머리 하나가 폭발하듯이 날아갔다.
“크엉······.”
보통 머리가 파괴당하면 생물은 죽는다. 하지만 헬 하운드는 각각의 머리가 서로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완벽하게 죽이려면 3개의 머리를 모두 파괴해야 했다. 다만 혁준에게 있어서 약간 귀찮을 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퍼걱!
어느새 헬하운드에게 다가간 혁준은 박도를 찍어 눌렀다. 그리고 그것은 개 머리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칼날이 두개골을 가르고 그 내용물을 파괴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의 머리였다.
“끼잉··· 끼잉······.”
혁준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남은 개머리는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 모습이 개장수에게 끌려가는 강아지 같았다.
스걱······.
마지막 일격이 가해졌다. 치명상을 입은 헬하운드는 혀를 빼물고 쓰러진다.
시작하자마자 손쉽게 헬하운드를 잡았다. 하지만 그 행동은 다른 헬하운드의 주의를 이끌었다.
“크르릉······.”
5마리의 헬하운드가 천천히 혁준에게 다가온다. 임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악마가 바로 헬하운드다. 하지만 혁준은 오히려 즐거운 듯 미소를 짓는다.
‘이게 웬 떡이냐?’
초보 각성자라면 목숨이 10개라도 부족하겠지만, 혁준은 한때 전설이라고 불렸던 남자다. 이런 위기는 밥 먹듯이 접했다.
‘아드레날린 러쉬.’
고유 특성을 발동하자 인지력이 엄청나게 오른다. 동시에 헬하운드의 일거수일투족이 그의 머리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크헝!”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헬하운드.
혁준은 물리기 직전에 몸을 뒤틀었다.
콰직!
헬하운드의 턱주가리가 닫히면서 섬뜩한 소리가 난다. 조금만 깊게 들어갔다면 살이 한 움큼 뜯겨 나갔을 것이다.
‘그냥 보내주면 섭섭하지.’
서걱!
지나가는 헬하운드의 뱃살을 마체 떼가 훑고 지나간다.
주르륵······
붉은 피가 바닥에 쏟아진다. 동시에 잘려진 내장이 삐죽 튀어나온다.
“크르륵······.”
상처를 입자 더욱 분노를 드러낸다. 헬하운드는 데몬 중에서도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놈들이다. 어지간한 데미지가 아니면 오히려 화만 돋우는 것이다.
‘덤벼라.’
혁준은 똥개들에게 도발의 표시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주었다. 그것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흥분해서 달려든다. 다만 그 중 하나는 뒤늦게 출발했다.
이른바 시간차 공격이다.
서걱! 서걱!
다만 상대가 나쁘다.
먼저 달려드는 녀석을 여유롭게 피했다.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물리기 직전 사이드 스텝을 이용해서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이다.
서걱!
이번에도 박도가 카운터를 먹였다. 문제는 마지막에 달려든 녀석이다. 놈은 워낙 가까워서 피하긴 이미 늦은 것이다.
‘허리야. 버텨다오.’
혁준은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혀버렸다.
마치 림보게임 하듯이!
그 위로 점프한 헬하운드가 스쳐지나간다. 제 삼자가 그것을 본다면 마치 합을 맞춘 연극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민첩성이 아쉬워.’
마지막에 반격을 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높은 인지력과 천부적인 전투 센스는 헬하운드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가능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뛰어난 반사 신경을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크르릉······.”
이제는 헬하운드들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공격을 시도할수록 손해를 보는 것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안 들어오면 나는 좋지.”
혁준은 느긋하게 엽총을 재장전 시킨다. 그가 들고 있는 총은 더블 배럴 샷건이었다. 분명 무지막지한 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번 쏟아내면 무조건 재장전이 필요한 무기다.
재장전을 마친 혁준은 앞으로 움직였다.
한 손에는 샷건 다른 한 손에는 마체테를 든 그의 모습에서 약간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컹! 컹!”
헬하운드는 그제야 직감했다. 눈앞의 인간은 이제까지 봤던 무력한 사냥감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탕!
총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피 묻은 마체테가 헬하운드를 난자한다.
푸직! 탕! 서걱!
먹이 사슬 구조가 바뀌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이면 족했다. 혁준은 일부러 헬하운드의 다리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혹시라도 놈들이 도망가면 아까운 정수를 놓치기 때문이다.
“끼이잉··· 끼이이잉······.”
앞 다리가 싹둑 잘린 헬하운드가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머리 하나는 이미 형체조차 없었고, 찢겨진 배에서 선홍빛 내장이 쏟아졌다.
비위가 상하는 모습이지만 혁준은 개의치 않았다. 곧 수확하게 될 정수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쁨이 넘친다.
퍼걱!
큼직한 칼날이 두개골을 관통한다. 그놈을 끝으로 헬하운드는 모두 시체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는 죽은 헬하운드에서 부지런하게 정수를 수집했다. 임프의 저급한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질 좋은 정수다. 이런 추세로 정수를 확보하면 다음 등급도 순식간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좋아.’
덕분에 혁준의 욕심이 더욱 커져간다.
추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크립이 분출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데몬은 많아질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커다란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닥사(닥치고 사냥의 줄임말)의 계절이 시작 되었군.”
***
판데모니엄의 시작과 함께 인류의 생존은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회 안전망은 완전히 무력화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민들끼리 뭉치는 수밖에 없다.
OO동의 EE-마트는 240명의 생존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임프들이 나타났을 때에 경비 업체의 발 빠른 대처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
경비 업체 책임자였던 김형식 실장은 마트 자체를 요새화시켰다. 장애물로 입구를 막은 다음에 외부의 도움을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혼란은 커질 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각성자의 탄생이었다. 악의 정수는 그 존재만으로 사람의 의식을 자극한다. 영혼을 타락시켜서 살인귀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정수의 부름에 이끌린 마트의 직원 하나가 다행히 각성에 성공했고, 그 일을 계기로 각성자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김형식 실장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각성에 도전했다. 하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귀가 되는 자가 발생했다. 큰 피해를 입은 뒤, 무분별한 각성은 중지되었지만 20명 가량의 각성자가 탄생했다.
EE-마트의 입구.
각성자 2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혹시 모를 데몬의 침입에 대비 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은 매우 따분한 일이다. 마트 직원이었던 박준열이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형님.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무슨 이야기?”
생이별한 가족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던 임태원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새로 합류한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 사람들이 왜?”
“그 사람들에게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박준열은 일부러 목소리를 깔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괴물 사냥꾼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괴물 사냥꾼?”
난생 처음 듣는 소리다.
“박도랑 엽총 한 자루로 괴물이란 괴물은 싸그리 잡고 다닌대요. 그 덕분에 죽다 살아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랍니다. 머리 세 개 달린 똥개들도 그 양반이 다 잡았답니다.”
“난 못 믿겠는데······.”
임태원은 고개를 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자신 역시 각성자가 되었지만, 밖에 나가서 괴물을 잡으라고 하면 도저히 자신이 없다.
“캬······ 누군지 몰라도 이 시대의 영웅 아닙니까?”
박준열은 자신의 이야기에 푹 빠진듯했다. 반면에 임태원은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절망적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도시 전설이겠지. 괴물을 사냥한다는 말부터 어폐가 있어. 그런 무지막지한 놈들을 어떻게 잡아?’
지금까지 태원이 잡은 악마는 임프가 유일하다. 그래서 밖에 돌아다니는 데몬을 사냥한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린 것이다.
“그나저나 탐색조가 올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그러게 말입니다.”
김 실장은 수백 명의 시민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다. 아직까지 식량이나 의약품이 부족하지는 않다. 하지만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 탐색을 보낸다.
<『전설이 돌아왔다』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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