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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한방에 100만불 [E]

한방에 100만불 1-1권

2016.12.02 조회 2,205 추천 14


 # 프롤로그
 
 “고동혁. 앞으로 나오라.”
 어둠 속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에 동혁은 자신도 몰래 앞으로 나섰다. 무언가 그의 어깨를 누르는 통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네 죄를 알렸다.”
 죄? 무슨 죄? 난 그저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단 말이야.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영혼을 짜부라트리는 듯한 압력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맞을 터이나, 네 삶의 막바지에 보여준 열정을 높이 사 최후 발언을 허용하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보도록.”
 하고 싶은 말? 물론 많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눈앞의 존재가 뿜어내는 기운에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할 말 없느냐?”
 “······.”
 “흠. 그럼 내가 한 가지 묻도록 하지. 너는 전생에 복싱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구나. 한데 성적이 형편없어.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가 뭐냐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동혁은 왠지 불끈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수많은 패배에서 비롯된 절망의 반동이리라.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자 한 자 힘겹게 내뱉었지만,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새어 나왔다.
 “그래? 정말로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네 영혼과 앞으로의 모든 생을 걸고도 말이냐?”
 “그렇습니다.”
 동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는 그 부분에 있어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죽을 만큼 노력해 왔으니까.
 “흐음. 그렇다면 너의 실패는 무엇 때문이냐. 설마 재능이 부족하다거나 운이 나빠서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 말에 동혁은 답을 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능이 부족했다. 누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것을 하기까지 남들보다 두세 배는 더 노력해야 했다.
 그나마도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부족한 펀치력과 연약한 턱은 그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괜히 복싱이 엘리트 스포츠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다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실존하는 세계인 것이다.
 “··· 재능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그것이냐. 재능, 운, 돈. 그렇게 남 탓을 하며 너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 말이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제게 겨우 한 줌의 재능이라도 있었다면 저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제 영혼과 남은 모든 생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동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거대한 존재를 보았다.
 너무나 거대해서 그냥 새하얀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존재.
 그런 존재가 동혁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하늘을 가득 메운 그의 눈이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래? 재능이 있었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재미있군. 그럼 나와 내기를 하나 하겠느냐?”
 “내기······. 말입니까?”
 “그래. 내가 너에게 그 재능이라는 것을 주겠다. 너는 그것으로 어떻게든 성공하는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너의 영혼과 남은 모든 생을 내가 갖겠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그 호언장담을 현실로 만들어 보인다면 내가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내려주마. 어떠냐.”
 동혁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좋습니다.”
 거대한 존재가 허리를 폈다. 마치 우주 전체가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내기는 성립되었다. 가거라. 언제나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과 동시에 동혁의 존재가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변기에 내려지는 오물마냥 어딘가로 쑥 빨려 들어가 버렸다.
 
 고동혁 26세. 영혼을 내기에 걸고 죽음에서 돌아오다.
 
 
 # Round 1 - 돌아오다.
 
 “쓰리!”
 뭐?
 “포!”
 이게 뭔 소리야? 아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파이브!”
 자, 잠깐만! 이게 다운 카운트 아니야? 그럼 얼른 일어나야······.
 “식스!”
 아, 일어난다고! 좀만 기다려!
 “세브—”
 어? 이상하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멈췄다.
 고동혁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앞에는 손가락 일곱 개를 내민 채 입을 반쯤 벌린 남자가 서 있었다.
 ‘시간이······. 멈췄어?’
 “그래요.”
 뜨억, 뭐야!
 “뭘 그리 놀래?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려보니 링사이드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긴 생머리에 검은 뿔테안경, 검은 치마 정장을 걸친 그녀는 OL 미녀의 교과서라 할 수 있었다.
 “맘에 들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허리를 짚으며 엉덩이를 부각시켰다.
 “······.”
 좋긴 하네.
 “이래도?”
 확.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새빨간 얼굴에 흰자위가 없는 새카만 눈, 그리고 이마 한가운데 삐죽 솟아오른 엄지손가락만 한 뿔까지.
 “으악!”
 동혁이 질색하며 놀라자 그녀는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꺄하하. 아유, 재밌어. 난 이 순간이 정말 즐겁더라. 아,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염왕 님의 명을 받아 고동혁 씨를 도우러 내려온 독각차사(獨角差使)예요. 앞으로는 나희라고 불러주세요. 김나희.”
 나희? 도깨비에게는 과분할 만큼 이쁜 이름이다.
 “그렇죠? 그래서 그 이름이 더 마음에 드네요.”
 생긋 웃는 그녀의 얼굴 위로 싸늘함이 감돈다. 앞으로는 생각도 조심해야겠군.
 “부디 그래 주세요. 그보다 동혁 씨, 첫 번째 미션이에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잖아요? 부디 첫 번째서부터 염왕 님을 실망시키지 말길 바래요.”
 ‘염왕’을 칭하는 대목에서 으스스한 살기가 느껴진다. 절대로, 절대로 염왕을 실망시켜서는 안 될 것 같다.
 “자, 첫 번째 미션은 데뷔전에서 승리하는 거예요. 이 경기, 기억나시죠?”
 김나희의 말에 동혁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여긴······.”
 주변 풍경이 낯이 익다. 여기는 그가 프로 데뷔전을 치렀던 관악구민 종합체육센터였다.
 맞은편을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조재호. 광동스타짐이라고 했던가. 웰터급치고는 사이즈가 큰 데다가 얼굴도 험상궂게 생겨서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나 데뷔전에서 얘한테 신나게 맞고 기절했었지, 아마.
 빠드득. 이가 갈린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온 이상 저번과 같지는 않을 거다.
 “좋은 자세예요. 하지만 객관적인 실력으로 볼 때 동혁 씨는 이번에도 신나게 맞고 기절할 거예요. 지금의 동혁 씨는 과거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 아. 의욕을 팍팍 꺾어주는구나.
 “그래서 염왕 님께서는 동혁 씨에게 특별한 선물을 내리셨어요. 자, 이걸 받으세요.”
 훌쩍 뛰어 링 위로 올라선 김나희가 탁구공만 한 물건을 건넸다.
 유리구슬 같은 모양의 안쪽으로 글자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는데 너무 작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글러브를 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것은 글러브를 쑥 통과하더니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고유특성을 획득했습니다.]
 [고유특성 : 야수의 감각]
 [위협적인 요소를 미리 감지하는 야수의 감각을 얻는다.]
 
 ‘고유특성? 뭐야, 이거. 꼭 게임 같잖아?’
 “맞아요. 정확히는 동혁 씨가 보다 쉽게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게임의 형태를 빌렸어요. 자, 시간이 다 됐군요. 가서 이기고 오세요. 고 게름, 타이거!”
 “··· 에?”
 “—브은! 이봐! 더 할 수 있나?”
 “네? 아, 무, 물론이죠! 저 아직 쌩쌩합니다!”
 동혁은 다시 흐르는 시간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글러브를 부딪쳐 팡팡 소리를 냈다.
 심판은 그런 동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뒤로 물러섰다.
 “박스!”
 그가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동혁은 문득 링사이드로 시선을 던졌다.
 김나희는 링사이드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생긋 미소를 날렸다.
 ‘절대로 염왕 님을 실망시키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동혁은 뜨끔한 마음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잔뜩 찌푸린 얼굴로 슬슬 다가오는 조재호가 보였다.
 조재호는 지금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반 죽여놨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멀쩡히 일어난 게 꼴 보기 싫었다.
 ‘뭘 또 일어나고 그래, 귀찮게. 그냥 누워있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푼 조재호가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다가왔다.
 동혁은 가드를 굳히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이렇게 다시 마주하고 보니 조재호에게 얻어맞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재호의 움직임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혹시 어디 다쳤나 싶어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럼 뭐지?’
 동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문득 뭔가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젖혀 조재호의 잽을 피해냈다.
 코앞을 휙 스쳐 지나가는 펀치를 보며 동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렇게 느려? 이게 잽이야?’
 조재호는 주먹을 당기자마자 또다시 잽을 날려 왔다.
 휙. 첫 방은 귓가를 스치고.
 퍽. 두 방째는 넋 놓고 있던 동혁의 콧잔등에 제대로 꽂혔다.
 “악!”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동혁은 허겁지겁 물러섰다.
 분명 상대의 주먹이 손에 잡힐 듯 보였는데 피하지 못했다. 상대가 느린 만큼 자신의 몸도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그제야 동혁은 알 것 같았다.
 빠르게 날아드는 주먹을 자신도 모르게 느끼고 피한 것은 바로 ‘야수의 감각’이라는 능력 덕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예전 그대로다. 갑자기 생긴 초인적 지각 능력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동혁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며 생각했다.
 ‘전부 피하는 건 어려워. 동작을 작게 하자. 큰 걸 피하고 크게 돌려주는 거다.’
 동혁이 가드를 굳히고 머리를 흔들자 조재호는 그가 겁을 집어먹었다고 판단했다. 조금만 더 때리면 대짜로 뻗을 것만 같았다.
 파방, 빡, 빠박! 원투에 이은 훅과 어퍼가 위아래로 동혁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마지막이다!’
 조재호는 살짝 열린 가드 틈으로 전력을 다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던졌다.
 ‘왔다!’
 동혁은 온몸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야수의 감각 덕에 보지 않고도 조재호의 라이트를 피해냈다.
 부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귓불 밑으로 조재호의 주먹이 스쳐 간다.
 그 순간 동혁의 눈에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뻗느라 활짝 열린 조재호의 옆구리가 보였다.
 마치 뭔가에 이끌린 듯 동혁의 허리가 맹렬하게 비틀어진다. 그와 동시에 잔뜩 당겨진 활시위를 떠난 그의 왼손!
 슈우욱, 꽝!
 ‘걸렸다! 제대로 들어갔어!’
 주먹에 걸리는 느낌이 묵직하다. 게다가 타격지점도 좋았다.
 일명 리버 블로라고 불리는 간장 치기.
 제대로 들어가면 횡격막이 멈추며 일시적으로 호흡이 끊어지고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본다는 것이 바로 이 리버 블로였다.
 얼굴이 흙빛이 된 조재호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찬스!’
 동혁은 쾌재를 부르며 달려들었다.
 파바방! 얼굴을 가린 조재호의 가드 위를 동혁이 무차별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조재호는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으며 물러섰다. 어느새 그의 등이 로프에 파묻혔다.
 ‘쓰러져! 쓰러지라고······. 어?’
 분명 조재호는 당장에라도 죽어 넘어질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설마?’
 혹시나 하면서도 동혁은 야수의 감각을 믿었다. 그가 허리를 크게 젖히며 왼발을 내디뎌 몸을 움직였다.
 부우웅! 혼신의 힘을 다한 조재호의 라이트 훅이 동혁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그리고 또다시 활짝 열린 옆구리!
 끼긱, 꽝! 또다시 리버 블로가 작열했다. 이번엔 갈비뼈가 나갔는지 손끝에서 뭔가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재호는 옆구리에서 수류탄이 터진 것만 같은 기분에 절망했다.
 너무나 아프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팔이 내려간다. 그리고 열린 안면으로 쏟아지는 펀치!
 왼쪽, 오른쪽, 또다시 왼쪽, 그리고 오른쪽!
 뻑! 뻑! 뻑! 뻑!
 레프트 훅에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조재호는 그대로 바닥에 거칠게 고꾸라졌다.
 얼른 달려온 주심이 그의 상태를 보고는 그대로 손을 들어 X자를 그린다.
 “으아아아아아!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고! 으아아아아아!”
 동혁은 승리의 성취감과 고양감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가 로프를 잡고 흔들며 괴성을 질렀다.
 그런 그의 괴성에 몇 안 되는 관객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한 손으로는 휴대폰 게임을 하면서.
 
 경기가 끝나고 동혁은 대기실로 돌아갔다.
 “잘했어, 동혁아. 연습한 대로 잘 해줬다. 아주 멋졌어.”
 안양氣(기)체육관의 관장 이기준은 동혁의 등을 연신 팡팡 두들기며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이놈, 연습 때는 비리비리하더니 막상 링에 올라가니 완전 달라지네? 그 뭐시냐, 무대체질 그런 건가?”
 같은 체육관 선배이자 늘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 정태화도 껄껄 웃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김나희가 들어왔다.
 ‘어? 쟤가 어떻게 여길······.’
 “아, 나희 씨 왔어? 경기 봤지?”
 이기준이 김나희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어, 관장님. 저기······. 저분 알아요?”
 “인마, 다운 한 번 당하더니 벌써 치매가 오나. 나희 씨한테 저분이 뭐야.”
 “에?”
 어리둥절한 동혁에게 김나희가 작게 고개를 흔든다. 나중에 얘기하자는 뜻.
 “동혁아, 아픈 데 없지? 가자, 갈 데가 있어. 관장님, 가도 되죠?”
 “아, 그럼요. 동혁아, 혹시 데미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일 하고 모레는 쉬고 월요일부터 나와라.”
 “아, 네······.”
 얼른 옷을 갈아입은 동혁은 김나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걸으며 김나희가 말했다.
 “이런저런 설정하기 귀찮아서 그냥 연인 사이로 설정해놨어요. 그러니 그런 줄 알고 그냥 받아들여요. 아, 그렇다고 저한테 막 이런 짓 저런 짓 하려 들다가는 도깨비 방망이 맛을 보게 될 테니 조심하시구요.”
 ··· 넵. 알아 모시겠습니다.
 “어쨌든 축하해요. 첫 번째 미션을 완수하셨어요. 보상으로 1티어 특성을 하나 드리죠. 특성은 상점에서 고르시면 돼요. 다음부터는 포인트로 구매하시구요.”
 “포인트요?”
 “네. 포인트는 경기를 마칠 때마다 얻을 수 있고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어요. 상점 오픈은······. 아, 이제 됐네요. 속으로 상점, 하고 말씀하시면 상점이 열릴 거예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아니, 그건 나중에 하시고. 일단 상태창을 먼저 확인해볼게요. 상태창도 상점처럼 속으로 ‘상태창’하고 말씀하세요.”
 “네, 네.”
 동혁이 상태창,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자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사용자 : 고동혁]
 [고유특성 : 야수의 감각]
 [보유 포인트 : 0]
 
 [보유 슬롯 : 1]
 [슬롯 1 : 비어 있음]
 
 “우리는 그걸 상태창이라고 불러요. 게임은 해보셨으니 아시죠?”
 “네, 그럼요”
 “특성이나 슬롯은 전부 포인트로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으니 앞으로 더 분발하세요. 그럼 이제 상점을 열어볼까요?”
 ‘상점.’
 속으로 상점을 외치자 갑자기 상태창이 사라지며 상점이 떠올랐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포인트 상점 ‘염왕 님의 복싱사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택하실 수 있는 카테고리는 총 네 개입니다.]
 [1. 특성]
 [2. 슬롯]
 [3. 체급]
 [4. 기타]
 
 “어? 체급?”
 “네. 포인트를 사용하셔서 특정 체급을 구매하실 수도 있어요. 체급을 구매하게 되면 그 체급으로의 감량을 자동으로, 고통 없이, 그러면서도 경기력에 지장을 주지 않고 하실 수 있게 되죠.”
 우와아아. 입이 떡 벌어지네.
 체급을 구매한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이거 잘하면 몇 체급을 석권하는 것도 꿈이 아니겠는데.
 “당연하죠.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요. 그럼 마지막으로 염왕 님의 전달사항을 알려드리고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또다시 염왕의 이름이 나오자 목덜미가 스산해진다.
 “염왕 님께서는 대한민국에서 복싱의 위상이 개 코딱지만 하게 격하된 것에 격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의 국민들이 주로 하는 대표적인 오해를 몇 가지 뽑아보았습니다. 동혁 씨는 앞으로 이런 오해들을 말끔히 해소해야 합니다.”
 못하면? 뻔하지. 지옥 불구덩이에 거꾸로 입수.
 동혁이 그렇게 생각하자 김나희가 눈부시게 예쁜 얼굴로 방긋 웃는다.
 “정확하시네요. 자, 우리가 뽑은 오해는 총 세 가지입니다. 첫째. 복싱은 재미없다.”
 흠. 이해는 한다. 포인트 위주의 소극적 게임 플레이와 이제 좀 치고받나 싶으면 엉겨 붙는 클린치 플레이는 정말 욕을 끊을 수 없게 만들지.
 “둘째. 복싱은 가난하다.”
 끄덕끄덕. 이건 사실이지.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하지만 외국은 다르다. 모든 스포츠 스타 중에서 연 수입 1, 2위를 복서가 차지했을 때도 있었으니까.
 “맞아요. 그리고 동혁 씨는 바로 그 스포츠 스타들처럼 크게 성공해서 한국 복싱의 새 희망이 되셔야 해요.”
 뭔가, 점점 더 부담이 심해지는 기분인데.
 “셋째. 복싱은 망했다.”
 이것도 사실이지. 이것 역시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말이다. 근데 이것도 내가 바꿔야 하나?
 “당연하죠. 걱정 마세요. 싫어도 바꾸게 되실 테니까.”
 ··· 저 예쁜 미소가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대충 오해는 이렇게 세 가지로군요. 앞으로 동혁 씨는 이 네 가지 오해를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세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대충 그림이 그려지시죠?”
 끄덕.
 당연하다. 그녀가 뽑은 세 가지 오해를 거꾸로 하기만 하면 된다.
 재미있게 시합하고, 큰돈을 벌고, 크게 성공하라.
 ··· 말은 쉽지.
 “그럼 마지막으로 염왕 님의 한 말씀.”
 후우웅! 김나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어느새 새카만 우주 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고동혁은 우주 공간이 좁아 보일 만큼 거대한 덩치의 염왕을 발견했다.
 그가 앉은 고풍스런 의자 아래로 ‘閻羅’라는 한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고동혁.]
 동혁, 동혁, 동혁. 무시무시한 에코가 우주 공간을 울린다.
 [역사에 다시없을 최고의 선수가 되어라.]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에 동혁은 벌벌 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셨죠? 그럼 전 이만. 오늘은 집에 돌아가셔서 푹 쉬세요. 그럼 내일 봐요~”
 눈이 하트로 변해버릴 만큼 눈부신 미소를 날리고 김나희가 멀어져간다. 역동적인 그 뒤태가 시선을 강탈한다.
 헉, 안 돼. 이러다가 걸리면 고자가 될지도 몰라.
 동혁은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며 몸을 돌렸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미래였던 과거에서도 같은 곳에 살아서인지 길을 잃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해도 겨우 5년 남짓. 그동안의 삶에 변화가 별로 없었으니 시간을 되돌린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야트막한 철문을 밀고 대여섯 개의 계단을 내려간다. 알루미늄 문을 삐걱 열고 들어서니 퀴퀴한 반지하 방의 습기가 동혁을 반겼다.
 휙. 가방을 던져놓고 매트리스 위로 몸을 던졌다. 그는 팔베개를 한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좀 전의 경기를 되새기고 있었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 소리. 그리고 훤히 들여다보이던 상대의 옆구리.
 끼긱, 하는 마찰음, 그리고 그와 함께 이동하는 체중.
 마침내 완성된 리버 블로, 그리고 상대의 옆구리에서 폭발하는 힘! 갈비뼈를 부수던 그 감각!
 불끈. 동혁은 눈앞에서 주먹을 쥐어 보았다.
 할 수 있다. 이 힘이라면 이길 수 있다.
 역사에 다시없을 최고의 선수가 되라고?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건 그저 올려다보기만 해도 목이 부러질 것 같은, 너무 높은 산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낮춰보면, 오늘 값진 승리를 일궈낸 자신의 두 손이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었고, 어찌 저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되살아나 시간을 되돌아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야수의 감각’이라는 놀라운 능력까지 얻었다.
 “이길 거야.”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묵직한 목소리.
 “이기고 이기고 또 이겨서, 꼭대기까지 올라가겠어. 되어주지. 그 최고의 선수라는 게 되고 말겠어. 반드시!”
 동혁은 이불킥을 팡팡 날리며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위층 아주머니가 시끄럽다는 듯 바닥을 쿵쿵 내리찧었다. 그 서슬에 동혁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에이, 씨. 기분 한참 좋았는데.”
 입을 비죽이던 동혁이 김나희의 ‘선물’을 떠올렸다.
 “아, 맞다. 아까 분명 그랬지? 1티어 특성 하나를 줄 테니 상점에서 구매하라고. 흠, 좋아. 그럼 한번 볼까?”
 그가 속으로 ‘상점’하고 말하자 또다시 반투명한 창이 등장한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포인트 상점 ‘염왕 님의 복싱사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택하실 수 있는 카테고리는 총 네 개입니다.]
 [1. 특성]
 [2. 슬롯]
 [3. 체급]
 [4. 기타]
 
 “어디 보자. 슬롯은 보유 슬롯을 늘리는 걸 테고. 체급도 마찬가지. 역시 중요한 건 특성이지. 뭐가 있나 한번 볼까?”
 속으로 특성, 하고 말하자 반투명한 창의 내용이 순식간에 바뀐다.
 
 [카테고리 : 특성]
 [Tier I]
 [Tier II]
 [Tier III]
 
 “역시 티어가 높을수록 좋은 거겠지. 그럼 일단 3티어부터 열어볼까?”
 Tier III을 열자 마치 옛날 OS의 부팅 화면처럼 수많은 글자가 위로 죽죽 올라간다.
 “워, 뭐가 이렇게 많아.”
 동혁은 스크롤 속도를 따라 바쁘게 눈을 놀렸다.
 “운체풍신? 더킹, 위빙, 스웨잉, 슬리핑 등 회피 동작의 숙련도와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고?”
 “에너자이저? 라운드가 지나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아? 와, 완전 사기네, 이거?”
 “파워 워드 KO? 타격 시 30% 확률로 1발 KO? 이런 미친!!!”
 놀라운 특성들의 향연에 동혁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특성들의 가격이 눈에 들어왔다.
 1,000,000 포인트.
 “배, 배배, 백만 포인트? 일만도 아니고 십만도 아니고, 배배백만? 아놔, 이걸 언제 모아!”
 동혁은 얼른 1티어 특성을 열어 가격을 알아보았다. 한 경기마다 얼마의 포인트를 벌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일단 1티어 특성의 가격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려는 것이었다.
 1티어 특성의 가격은 대략 1만 포인트에서 시작했다.
 매 경기마다 특성을 사재끼게 만들진 않았을 테니, 대충 따져보면 한 경기에 얻는 포인트가 많아야 5천 정도일 것이다.
 매 경기당 5천 포인트를 번다고 가정한다면 백만 포인트가 되려면 200경기를 뛰어야 한다.
 “200경기를 뛰어야 특성 하나를 산다고? 허!”
 프로 복서는 커리어 내에서 보통 50경기 내외를 소화해낸다. 물론 아마추어 경력까지 더하면 훨씬 늘어나겠지만, 그건 그에게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
 잠시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무슨 생각들이 있겠지. 설마 200경기를 이겨야 특성 하나를 살 수 있게 만들었겠어? 그럼 미친놈들이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 됐고, 1티어나 확인해보자.”
 1티어를 열자 또다시 반투명한 창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3티어에 비해 뭔가 단출한 느낌이었다.
 
 [묵직한 주먹. 펀치의 파워가 소폭 상승한다.]
 [고무고무총. 자신의 리치보다 먼 거리까지 타격할 수 있다. 리치 +1%.]
 [1인치 펀치.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펀치의 속도와 파워가 상승한다. 최대 상승 폭 10%.]
 
 “우······. 괜히 첨부터 3티어를 열어봤나? 너무 비교되잖아.”
 
 [반격의 달인. 피격 시 1회 한정으로 속도와 파워가 상승한다. 이때 내뻗는 펀치에는 ‘호밍 미사일 I’ 효과가 적용된다. 상승 폭 10%.]
 [오뚜기. 다운 시 다운 카운트를 세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
 [퀄리티 스타터. 초반 1, 2라운드에서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한다. 단, 3라운드 이후부터는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한다.]
 
 “다운 카운트가 두 배라니. 그럼 누워서 20초나 쉴 수 있단 소리잖아. 나쁘지 않네. 퀄리티 스타터, 이것도 괜찮아 보이고.”
 
 [날카로운 반사 신경. 인지와 행동 사이의 간격이 짧아진다. 신체의 민첩성도 소폭 상승한다.]
 [무쇠턱. 턱이 단단해지고 목이 두꺼워진다. 턱 피격 시 뇌로 전달되는 데미지가 15% 감소한다.]
 [거머리. 클린치를 시도할 때 받는 피격 데미지가 15% 감소하며 클린치를 하는 동안 빠르게 체력이 회복된다.]
 
 동혁은 한동안 말없이 Tier I의 특성들을 둘러보았다.
 종류가 한 번에 다 둘러보기 어려울 만큼 많았고 비슷한 걸 찾기 어려울 만큼 다양했다.
 “흠. 일단 생각을 좀 정리해보자.”
 무턱대고 아무거나 고르기에는 특성이 너무 많다.
 뭔가를 사야 한다면 그것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지금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면 더 좋다.
 “부족한 부분이라······. 난 뭐가 부족했더라?”
 빈약한 펀치력과 느린 발.
 매가리 없는 가느다란 목과 뾰족하고 얄팍한 턱.
 짧은 팔과 둔한 반사 신경.
 “··· 썅, 뭐 가진 게 없네. 난 뭘 믿고 프로가 되겠다고 했던 거지?”
 물론 단 한 가지, 다른 이들이 인정해주던 장점이 있긴 하다.
 그것은 투쟁심이었다. 그는 그 어떤 상대와도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단 링에 오르면 미친개처럼 겁 없이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동혁이라고 공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공포를 끝없는 연습과 상대에 대한 깊은 탐구로 달랠 줄 알았을 뿐이었다.
 “언제나 선택은 둘 중 하나지. 장점을 부각시키느냐, 단점을 보완하느냐.”
 다행히 지금의 그는 전생의 그에게 없던 장점이 있었다.
 야수의 감각. 마치 초능력처럼 느껴졌던 그 날카로운 감각을 제대로 살릴 수만 있다면.
 “좋아. 결정했다.”
 
 
 # Round 2 - 시너지
 
 동혁은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났다.
 가볍게 씻고 아침 식사 후 이어폰을 끼고 달려 체육관에 도착, 가벼운 웨이트로 몸을 풀고 있자 관장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왔냐? 며칠 쉬라니깐.”
 “에이. 쉴 수가 있어야죠. 그 짜릿한 손맛이 잊혀지지가 않아서요. 헤헤.”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다. 광동스타짐의 조재호 말이다. 늑골 복합 골절로 입원했단다. 병문안은 가봐야 서로 얼굴이나 붉힐 테니 과일 바구니라도 하나 보내라.”
 “아······. 네, 알겠습니다.”
 상대는 병실에 누워있는데 정작 때린 놈은 손맛을 운운하다니. 왠지 쓰레기가 된 기분이다.
 “뭘 그렇다고 죄진 놈처럼 고개 처박고 있어. 고개 들어. 나도 잘 안다, 그 손맛. 그게 아주 중독이야, 그냥.”
 분위기를 전환하려 이기준 관장이 농담을 던졌다.
 “헤헤, 그죠? 그래서 말인데요, 관장님. 저 다음 시합이 언제였죠?”
 “뭐가 언제였죠야, 잡히지도 않았는데. 너 어디서 뭐 들은 거 있냐?”
 헉. 그러고 보니 여긴 과거였지.
 “듣긴요. 그냥 빨리 경기를 하고 싶다 보니 실수했나 보죠. 그래서, 아직도 안 잡혔어요? 갈비뼈를 박살 내는 하드펀처 수퍼루키인데도요?”
 “너 인마 겨우 3일 전에 데뷔전 치렀어. 뭔 시합 타령이야. 그리고 너 이리 와서 손 좀 내밀어 봐.”
 이기준 관장은 동혁의 손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네? 뭐가요?”
 “너 말이야, 인마. 연습할 때는 비리비리하더니 갑자기 데뷔전에서 상대방 갈비를 작살 내? 너 설마 연습 대충대충 한 거냐?”
 “에이. 저 숨 깔딱깔딱하던 거 다 보셨으면서.”
 “그래, 봤지. 그래서 잘 아는데, 넌 절대 하드펀쳐 아니야. 굳이 분류하자면 소프트펀쳐? 아니면 귀후비개펀쳐 정도랄까?”
 “우와. 완전 상처받았어. 귀후비개요? 귀후비개로 맞으면 아픈지 안 아픈지 한번 보실래요?”
 “뭐, 인마?”
 발끈한 이기준 관장을 피해 동혁은 얼른 줄넘기를 잡았다.
 “그니까요, 관장님. 얼른 시합 잡아주세요.”
 “얌마, 무슨 시합이 주말마다 열린 대냐? 어련히 때 되면 다 잡혀. 연습 꾸준히 하면서 기다려, 인마.”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이 손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이거 잊기 전에 얼른 다시 뛰고 싶어요.”
 “알았다, 알았어. 열심히 알아볼 테니까 그만 좀 보채.”
 “근데요, 관장님. 관모체육관에 웰터급 선수 하나 있지 않았나요?”
 “관모? 아, 김종석이? 걔 왜?”
 “아니요, 전에 보니 괜찮은 선수 같더라구요. 붙어보면 괜찮은 시합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놀고 있다. 니가 프로모터냐? 이길 생각만 해도 이길까 말깐데 괜찮은 시합? 이 새끼가 약을 병째로 퍼먹었나. 너 일로 와 봐, 아주 딴 생각 못 하게 뺑뺑이를 돌려야겠어.”
 “으악!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그 후로도 동혁은 틈날 때마다 시합, 시합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동혁의 시합은 빠르게 현실로 다가왔다.
 “동혁이 시합 잡혔다.”
 “오, 그래요? 누구요?”
 동혁의 질문에 이기준 관장은 눈을 흘겼다.
 “누군지 말하면 니가 알아?”
 “알 수도 있잖아요.”
 “파주스타체육관의 강종훈이다.”
 “에? 관모체육관이 아니구요?”
 “이놈 또 관모 타령이야! 관모가 그렇게 좋으면 글로 가던가!”
 동혁은 이기준 관장이 집어 던진 백글러브를 민첩한 헤드 슬립으로 피해냈다.
 “에헤이. 여기가 최곤데 가긴 어딜 가요. 그래서, 시합은 언젠데요?”
 “한 달 후다. 좀 짧긴 한데 넌 감량 부담이 적으니까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
 이기준 관장이 멀어지자 동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바뀌었어. 설마 했는데.”
 사실 그럴 거라 예상하긴 했다. 졌어야 할 데뷔전을 KO로 승리했으니, 앞으로의 대전 상대가 전생과 같을 리가 없지.
 문제는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생에서 두 번째로 붙었던 상대는 관모체육관의 김종석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고만고만한 아웃복서.
 4라운드 내내 투닥투닥거리다가 판정으로 겨우 이겼었지.
 동혁은 지금 김종석과 다시 붙는다면 1라운드에서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강종훈? 그건 또 어디서 뭐 하던 놈이야?
 “일단 구글링을 좀 해볼까.”
 구글을 켜고 ‘강종훈’을 입력해 본다.
 역사학자 강종훈.
 강종훈 탱크 접기.
 4번 타자 왕종훈.
 “··· 뭐 이딴 거만 나오냐.”
 이번에는 검색어를 바꿔서, ‘권투선수 강종훈’.
 “어? 나왔다.”
 의외로 강종훈은 SNS를 하고 있었다. 클릭.
 - 파주의 아침. 격렬한 로드웍 후 마시는 한잔의 여유.
 돌격머리에 연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
 “놀고 있다. 이 새끼도 정신상태가 썩어 빠졌구만. 로드웍 하다가 커피를 처마시질 않나, 셀카를 찍지 않나.”
 동혁은 툴툴대면서 계속해서 트위터를 뒤졌다. 그러다 중간쯤에 동영상 사이트가 링크된 것을 발견했다.
 지인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듯 영상은 위아래로 길쭉했고 연신 흔들렸다.
 꿀꺽. 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만 봤을 땐 그냥 재수 없게 생겼다, 생각했는데, 영상으로 보니 몸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힘도 좋은지 상대가 펑펑 날아간다.
 압박도 좋다. 코너에 몰린 상대를 두들기는 장면만 벌써 몇 번째인지.
 트위터를 좀 더 들여다보니 전적이 나온다. 프로 데뷔 후 3전 2승 1패. 2승은 모두 KO. 1패 역시 KO.
 “화끈한 놈일세.”
 동혁은 한동안 트위터를 돌아다니며 상대를 파악했다.
 강종훈은 이런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맞은 만큼 패준다.’
 몸도 좋고 힘도 좋다. 맷집이 좋으니 웬만한 건 그냥 몸으로 때우며 들어간다. 한 대 맞고 두 대 때려서 이기겠다는 거다.
 “멧돼지구나, 너. 이런 놈이 또 잡는 맛이 있지.”
 씨익. 동혁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다음날.
 로드웍 후 한잔의 여유를 즐긴 동혁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체육관에 들어왔다. 중간에 셀카를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왔냐. 근데 이 새끼가, 로드웍 나가는데 선글라스는 왜 쓰고 지랄이야!”
 이기준 관장의 호통에 동혁은 얼른 선글라스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 앉았다.
 “그냥 폼 좀 잡아 봤어요. 어? 이거 강종훈이네? 프로필 준비해 오신 거예요?”
 그 말에 이기준 관장의 눈이 꿈틀한다.
 “너 강종훈이 얼굴 어떻게 아냐?”
 “에헤이. 관장님, 요즘이 어떤 시대입니까. 자그마치 인터넷 시댑니다. 제가 또 인터넷정보검색사 자격증 보유자 아닙니까! 제가 이미 사전조사 완료했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똥 싼다.”
 “어허, 똥 싼다뇨. 쌀까요? 여기다 쌉니다, 진짜!”
 막 바지를 내리려는 동혁을 말리며 이기준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정말 조사 좀 해 봤냐?”
 “그럼요. 강종훈. 24세. 군필. 해병대 제대더군요. 전적 3전 2승 1패 2KO. 패도 KO구요. 스타일은 오소독스. 전형적인 멧돼지형 복서입니다. 무조건 밀고 들어가서 한 대 맞고 두 대 때리겠다는 거죠. 기술 수준은 별거 없는데, 기세가 좋은지 압박이 상당해요. 원투는 볼 거 없고 코너에서 양훅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꿈뻑꿈뻑. 이기준은 온 얼굴로 ‘나 놀랐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정말 그런 게 다 인터넷에 나오냐?”
 “에이, 아니죠. 이렇게 자세히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자료를 보면서 종합하는 거죠.”
 “우와. 너 다시 보인다?”
 쌍 엄지를 드는 이기준 관장을 보며 동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점은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어느 순간부터 승보다 패가 두 배 가까이 많아진 복서가, 살아남기 위해 찾아낸 마지막 돌파구였을 뿐이니까.
 상대를 철저히 분석하기. 그리고 완벽한 대비책을 준비하기.
 타고난 무기가 없다면, 머리를 써서 이기면 된다고, 그렇게 절 가르친 건 바로 당신이었어요, 관장님.
 “그래, 그러면 어떻게 공략해야 되겠냐?”
 “당연히 카운터죠. 이런 놈은 투우하듯이 들이미는 턱주가리를 날려주는 게 제맛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근데 카운터가 그렇게 말처럼 쉽다냐?”
 이기준의 말에 동혁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관장님. 관장님이 잘 모르시는 게 하나 있는데, 저 사실 카운터 잘 쳐요.”
 “똥 싼다. 니가 무슨 카운터야, 맨날 헛방이나 던지기 바쁜 놈이.”
 “어허, 또 똥! 진짜 똥 한번 싸제끼는 수가 있어요, 그러다.”
 “그래라. 내가 그거 찍어서 그 인터넷이라는 데다가 올려 버리게.”
 “아, 진짜 안 믿으시네. 그럼 직접 한번 보시죠.”
 동혁은 엄지를 들어 어깨너머로 링을 가리켰다.
 “와, 고동혁이 너 많이 컸다? 나한테 링으로 따라오라고 하고. 니가 권상유냐? 옥당으로 따다와?”
 “에이, 농담은 여기까지.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동혁은 글러브를 끼고 먼저 링에 올랐다. 이기준 관장은 갸웃거리면서도 미트를 들고 그를 따랐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보자.”
 동혁은 이기준 관장의 미트를 보며 속으로 ‘상태창’을 외쳤다.
 
 [사용자 : 고동혁]
 [고유특성 : 야수의 감각]
 [보유 포인트 : 0]
 
 [보유 슬롯 : 1]
 [슬롯 1 : 날카로운 반사 신경]
 
 동혁은 데뷔전 승리의 대가로 받은 1티어 특성 구매권을 사용해 ‘날카로운 반사 신경’을 구매했다.
 야수의 감각이 가져다주는 초인적인 지각 능력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고 반사 신경을 끌어 올린 것이었다.
 그게 전적으로 옳은 판단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동혁은 자신의 고유특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동혁이 슬슬 스텝에 시동을 걸었다. 생각보다 경쾌한 스텝을 보며 이기준 관장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팡팡! 미트를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 이기준이 턱과 옆구리에 미트를 댄다.
 턱은 정면, 옆구리는 왼쪽.
 ‘오케이, 접수 완료.’
 끼긱, 파방!
 잽을 던져 정면의 미트를 친 동혁은 동시에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이기준의 왼쪽으로 돌아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터지는 레프트 바디샷!
 이기준 관장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그와 동시에 미트의 위치가 바쁘게 옮겨진다.
 팡, 팡, 파방!
 ‘날카로운 반사 신경’의 부가효과인 민첩성 상승 덕에 동혁은 날렵하게 스텝을 놀렸다.
 ‘야수의 감각’은 이기준의 행동 하나하나를 예측하듯 빠르게 읽어냈고, 그 덕에 동혁은 미트의 움직임에 맞춰 전후좌우로 막힘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이기준은 내심 놀라면서도 동혁의 가능성을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팡! 미트로 훅을 받아내자마자 그가 한걸음 들어가며 잽을 날린다.
 갑자기 날아온 잽에 놀랄 법도 한데, 동혁은 슬쩍 왼쪽으로 빠지면서 머리를 숙여 잽을 피해냈다.
 ‘어쭈. 이놈이 이런 재주가 있었나?’
 피하고 막고 받아주면서 시간이 흘렀다. 그때 링사이드에서 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스트 10초. 한번 밀어붙여 볼까?’
 이기준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미트를 글러브처럼 놀리며 원투를 날렸다.
 “어이쿠!”
 동혁은 놀란 듯 소리를 치면서도 민첩하게 스텝을 놀려 펀치의 범위를 벗어났다.
 이기준은 그런 동혁을 따라 들어가며 펀치를 이어갔다.
 쾌속한 원투, 그리고 스텝인에 이어지는 레프트 훅.
 글러브를 내밀어 원투를 스톱시킨 동혁은 민첩한 스텝 아웃으로 훅을 피하며 이기준의 사이드를 잡아냈다.
 그런 그의 눈에 이기준이 자신의 턱에 갖다 댄 미트가 들어왔다.
 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왼손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스텝을 밟던 도중이라서일까. 펀치의 정확도가 아쉽다. 동혁의 레프트 스트레이트는 이기준의 턱이 아닌 허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순간 동혁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귓전에 대고 ‘궤도가 틀렸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기분.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 같은 감각을 따라, 동혁은 무의식적으로 펀치의 궤도를 조정했다.
 그리고 여기서 새로 구매한 특성 ‘날카로운 반사 신경’이 그 빛을 발했다. ‘야수의 감각’이 수정된 궤도를 지시하면 ‘날카로운 반사 신경’이 그 지시를 받아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이 순간 동혁은, 펀치가 날아가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목표를 수정하고 그 궤도를 컨트롤해 펀치를 정확한 위치에 꽂아 넣고 있었다.
 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동혁의 주먹이 정확히 미트의 중앙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공이 울렸다.
 땡!
 이기준은 미트를 벗고 동혁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혁은 왠지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이기준의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동혁아.”
 “네, 관장님.”
 “너 혹시 딴 데서 권투 배웠었냐?”
 “네? 아뇨, 절대 아니에요. 저 아시잖아요, 관장님한테 기본자세부터 배운 거요.”
 “그건 그렇지. 근데 이런 기술들은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이기준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 떨려.
 “그, 그게요. 사실 제가 무하마드 얄리의 광팬이라서요. 동영상 사이트를 하도 보니 따라하는 것도 좀 늘더라구요. 아, 제가 얄리 트위터 팔로워거든요. 심지어는 우리 맞팔도 한 사이에요. 보, 보실래요?”
 통할까? 이런 얕은 개수작이 정말 통할까?
 “오오! 얄리랑 맞팔이라고? 대박! 줘봐! 아, 빨랑 줘봐!”
 ··· 통하네.
 이기준은 한동안 동혁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엑쇼를 만난 여고생처럼 꺅꺅거렸다.
 “흠흠. 잘 봤다.”
 살짝 민망했는지 불그레해진 얼굴로 휴대폰을 건네는 이기준 관장.
 “어쨌든 말이야. 아무리 얄리 스텝을 보고 자랐다고 해도 너처럼 따라 하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솔직히 놀랐다. 거기다 마지막 피니쉬는 아주 깔끔했어. 실제 경기였다면 일발 케이오도 노려볼 만한 펀치였어.”
 “그, 그렇죠?”
 “그래. 그래서 말인데, 니 훈련 스케줄을 좀 조정해야겠다.”
 “네? 왜요?”
 “왜긴, 이놈이. 겨우 동영상 보고 따라 한 걸로 시합에 나가려고 했어? 그걸 진짜 니 기술로 만들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말이야, 동혁아. 너 카운터를 잘 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
 이기준의 은근한 눈빛. 아, 이런 전개 뭔가 불안한데.
 “바로 공포를 이기는 거야. 무서워서 눈을 찡그리거나 몸을 움츠리면 거기서 카운터는 망가지는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말이다. 이번 시합 대비 훈련의 키포인트는 담력 훈련이다.”
 빠악! 미트를 맞부닥쳐 무시무시한 소리를 터트린 이기준 관장.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흐흐. 이번 시합 무조건 이기게 해 주마. 나만 믿어, 인마. 흐흐흐.”
 ··· 이거 왠지 시합도 하기 전에 죽을 것 같은데?
 
 한 달은 빠르게 흘렀다.
 여의도의 KBD 본사에서 계체량을 마친 후 동혁은 곧바로 이기준 관장과 춘천으로 이동했다.
 경기는 다음 날, 춘천 외곽의 한 공장 앞마당에서 진행됐다.
 오늘 예정된 경기는 6라운드 한 경기와 4라운드 다섯 경기. 그중에서 동혁의 경기는 두 번째 경기였다.
 대기실이라고 만들어둔 천막 안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김나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우, 우와······.”
 그녀의 눈부신 미모를 보고 남자들이 침을 질질 흘린다.
 불쌍한 놈들. 눈알 뽑히고 싶지 않으면 고개 돌리는 게 좋을 거다.
 “동혁아. 잠깐 나와.”
 넵. 그가 순순히 따라나서자 그녀는 짐짓 다정한 듯 그의 손에 둘둘 묶인 테이핑을 만지작거린다.
 “준비는 잘해온 것 같군요.”
 “아, 그럼요. ‘절대로’ 실망시켜서는 안되는 분이 한 분 계셔서요.”
 피식. 김나희가 웃는다. 악, 실체를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렸어!
 “좋은 자세예요. 원래 이런 수준의 경기는 보러 오지 않으려 했는데 알려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아, 네.”
 “첫 번째 경기는 튜토리얼이나 마찬가지라 보상이 1티어 특성 구매권으로 대체됐었죠?”
 “그랬죠.”
 “이번 경기부터는 제대로 정산해서 포인트를 지급할 거예요. 지급되는 포인트의 양은 시합 결과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요. KO로 이긴다거나, 1라운드에 이긴다거나 등등, 성적이 좋을수록 보상은 올라가니까 분발하세요.”
 역시 동기 유발에는 인센티브가 직빵이지.
 “그럼 온 김에 경기 보고 갈게요. 화이팅!”
 생긋 웃으며 돌아서는 그녀에게서 황홀한 향기가 밀려든다.
 악악! 또 흔들리다니, 음란마귀가 쓰인 거냐?
 
 1경기는 생각보다 박진감 넘쳤다. 4라운드 내내 다운을 주고받으며 난타전이 이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생각보다 4라운드, 6라운드 경기는 꽤 재미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미완성이지만, 신인의 패기 하나로 밀어붙이는 선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난타전도 많이 나오고 KO도 심심찮게 나온다. 즉, 보는 맛이 있는 것이다.
 “자, 올라가자.”
 이기준 관장이 천막을 걷으며 말했다.
 천막 밖은 을씨년스러웠다. 환호도 없었고 관중도 없었다.
 등장음악? 그런 거 없다. 어디 챔피언 결정전이나 돼야 나올까, 4라운드 경기는 그냥 올라가서 붙는 거다.
 나뭇잎도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가 동혁을 반긴다. 공장 안뜰에 지어진 야외특설링은 왠지 서커스 무대 같다.
 “홍코너! 파주스타체육관 소속. 나이 스물네 살. 신장 178센티미터. 체중 65.6킬로그램. 3전 2승 1패 2KO. 강! 종! 훈!”
 링 아나운서가 홍코너를 외치자 딱 해병대 스타일의 강종훈이 중앙으로 다가온다.
 글러브를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데 몸에 근육이 장난이 아니다.
 ‘무슨 버추얼파이터여? 투도 아니고 원이네, 그냥.’
 “청코너! 안양기체육관 소속. 나이 스물두 살. 신장 179센티미터. 체중 65.98킬로그램. 1전 1승 1KO. 고! 동! 혁!”
 링 중앙에서 인사를 건네고 터치 글러브. 이제 시합이 시작된다.
 땡!
 “박스!”
 주심의 외침과 동시에 강종훈이 달려든다.
 ‘누가 멧돼지 아니랄까 봐 시작부터 돌진이냐.’
 동혁은 스텝을 밟아 몸을 물리며 잽을 연타로 집어넣었다.
 파방!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종훈의 얼굴에 잽이 박혔다.
 생각보다 빠르게 정교한 동혁의 잽에 강종훈이 멈칫한다.
 동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종훈의 오른쪽으로 돌며 레프트를 계속 던졌다.
 후웅! 순간 강종훈의 위협적인 라이트 훅이 날아온다. 하지만 이미 동혁은 멀찍이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훅, 훅! 열을 좀 받았는지 강종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목을 좌우로 뚜둑, 꺾더니 성큼성큼 걸어들어 온다.
 동혁은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계속 잽을 날렸다.
 파방, 팡!
 하지만 강종훈은 가랑비라도 맞는 듯 동혁의 잽을 무시하며 머리를 흔든다.
 ‘후. 역시 이런 타입은 싫다, 진짜.’
 강종훈 같은 타입은 무의식중에 상대를 위협한다. 때리는 사람이 지레 겁을 먹는 거다.
 분명 때린 손에 감각이 있는데, 상대는 안 맞았다는 듯 반응이 없다.
 어? 내 펀치가 안 아픈가? 내가 너무 약한가? 더 때린다고 쓰러지긴 할까?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이미 압도된 거다.
 물론 그건 베테랑이자 치트키 사용자인 동혁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
 턱. 어느새 등에 코너의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코너에 몰린 것이다.
 번뜩. 강종훈의 눈빛이 바뀐다. 동시에 그가 야수처럼 달려든다.
 
 흐흐흐. 어서 오렴.
 
 동혁은 맹렬하게 날아드는 강종훈의 라이트 훅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오른손을 뻗었다.
 쾅. 두 특성의 시너지에 의해 보정을 받은 그의 라이트가 정확하게 강종훈의 턱을 흔들었다.
 덜컥. 비정상적인 각도로 턱이 돌아간 강종훈이 훅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허물어진다.
 코너 패드에 얼굴을 비비던 그는 결국 꼴사납게 쓰러져 엉덩이를 쳐든 채 기절해버렸다.
 땡땡땡! 심판이 카운트도 없이 달려와 손을 흔들자 경기 종료의 공이 울린다.
 동혁은 링 아래를 둘러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하다.
 그럴 법도 하다. 너무 빨리 끝났다. 1라운드가 시작된 지 겨우 22초가 흘렀을 뿐이니까.
 짝짝짝.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여신처럼 예쁜 김나희가 박수를 치고 있다. 그 소리에 천천히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와! 저놈 꽤 하네?”
 “뭐야, 벌써 끝났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소란을 뚫고 이기준 관장이 링 위로 올라왔다.
 “아주 잘했다. 새끼, 넌 역시 실전 체질이구나?”
 주심의 승리 선언을 듣고 대기실인 천막으로 돌아오는데 주변의 아저씨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반은 술주정 같은 소리들이지만, 기분은 좋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김나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겼네요.”
 “당연하죠.”
 지면 무슨 꼴을 당하려고.
 “축하해요. 승리 수당으로 5,000포인트, KO 보너스 2,000포인트, 초살 보너스 2,000포인트, 연승 보너스 1,000포인트, 노데미지 보너스 1,000포인트, 압도 보너스 1,000포인트, 인기 보너스 1,000포인트, 헥헥, 뭐가 이래 많아. 어쨌든 다 해서 13,000포인트네요.”
 우와! 만삼천? 대박!
 “아, 아직 안 끝났어요. 4라운드 보정으로 -70%.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3,900포인트네요.”
 “에? 70프로 삭감? 왜요?”
 “4라운드니까요. 6라운드나 8라운드로 올라가면 40%만 삭감하고, 10라운드 이상으로 올라가면 더 이상 삭감은 없어요. 물론 보너스 포인트도 더 올라가고요. 그러니 더 열심히 정진하세요.”
 사기다. 이건 사기야. 그럴 거면 처음부터 보여주지도 말던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동혁의 어깨를 김나희가 슬며시 감싼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 뭐?
 피식. 황홀한 미소를 남기고 그녀는 떠나갔다.
 “얌마, 뭐하냐. 우리도 가자.”
 “아. 네, 관장님.”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머리는 복잡했지만, 낙심은 빠르게 사라졌다.
 남은 건 오직 손에 남은 라스트 펀치의 감각뿐.
 컴퓨터 그래픽처럼 단단하게 단련된 남자가 단박에 고깃덩이처럼 널브러졌다.
 강철같던 상대의 훅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고, 창처럼 빠르게 뻗어 나간 자신의 주먹은 상대의 의식을 끊어놓았다.
 문득 오늘 경기를 뛴 공장 부지가 떠오른다. 듬성듬성하던 관객석도. 꼬부라진 아저씨들의 목소리도.
 꾸욱. 동혁은 힘 있게 주먹을 쥐었다.
 ‘더 올라갈 거야.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때까지 말이야.’
 그래. 올라가야 한다. 더 올라가서······.
 ‘포인트 삭감을 피해야지. 아유, 아까워 죽겠네.’
 
 
 # Round 3 – 신인왕 등극!
 
 어느새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날씨가 추워져도 동혁의 일과는 변하지 않는다.
 변함없는 다섯 시 기상.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샤워. 그리고 이어폰을 끼고 인적 없는 아침 거리를 달린다.
 달라진 건 옷의 두께뿐.
 오는 길에 작은 동네 공원에 들러 철봉 사이를 달리며 가볍게 펀치를 뻗는다.
 철봉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스쳐 달리는 동혁의 스텝이 경쾌하다. 펀치 역시 날카롭다.
 야수의 감각과 날카로운 반사 신경. 이 두 특성은 동혁을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꿔놓았다.
 감각이 날카롭게 단련되니 정보의 습득이 빠르고 기술의 연마가 쉬워진다.
 반사 신경과 민첩성이 받쳐주니 육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며 훈련이 언제나 최고의 성과를 발휘한다.
 훈련을 하면 할수록 발전하는 것이 느껴지니 훈련이 재밌어진다.
 이런 선순환이 계속되면서 동혁은 지난 몇 달 동안 무섭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드르륵.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낯익은 얼굴이 그를 반긴다.
 “어? 태화 형, 벌써 나오셨어요?”
 “어. 나 시합 잡혔잖아. 텐션 좀 바짝 올리려고.”
 “아, 그랬지. 형, 상대 누구예요?”
 “박상철이라고, 병점복싱체육관 소속이래.”
 “오, 랭킹 3위 박상철이요? 그럼 그거 잡으면 타이틀도 사정권이네요?”
 “그건 그런데, 그게 만만치가 않다.”
 정태화는 정석적인 인파이터다. 두툼한 목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끝없는 맷집이다.
 그는 그 맷집을 앞세워 상대를 압박하고 코너로 몰아넣어 압살한다.
 물론 경기가 잘 풀릴 때의 얘기지만.
 그런데 이번 상대는 상성이 나쁘다.
 한국 미들급 랭킹 3위의 박상철은 발이 빠른 선수다.
 리치가 짧은 게 흠이긴 하지만, 펀치의 기교도 좋다. 게다가 인, 아웃을 가리지 않고 모든 거리에서 평균 이상의 기량을 뽑아낸다.
 그래서 그는 매 시합마다 상대에 맞춰 스타일을 조금씩 바꾼다.
 사실 이 정도는 모든 선수가 다 하는 일이긴 하지만, 박상철은 그 폭이 좀 큰 편이다.
 그런 박상철을 이기준 관장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넓고 얕은 새끼.’
 한마디로 깊이가 없다는 뜻.
 아마 이번에도 박상철은 정태화에 대비해 스타일에 변형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인파이터를 잡기 위해서는 당연히······. 어?
 “형. 저랑 스파링 한번 하실래요?”
 “음? 뭐, 좋지. 메도로 할까?”
 “당연하죠, 체급이 있는데. 저 때려죽이시려고요?”
 “2연속 KO 잡은 놈이 약한 소리는. 올라와.”
 정태화가 먼저 링에 올랐다. 메도 복싱을 위해 헤드기어까지 끼고서.
 메도 복싱(method boxing)은 힘을 뺀 펀치를 주고받는 스파링의 일종이다.
 서로 스킬을 교환하되 데미지는 주지 않는 방식.
 동혁은 두툼한 16온스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랐다. 저쪽 코너에서 몸을 풀던 정태화가 슬슬 다가온다.
 “근데 왜 갑자기 스파링을 하자고 난리냐?”
 “그냥요. 형 같은 타입이 저는 제일 무섭더라구요. 그래서 형한테 좀 맞으면서 내성을 좀 키워보려구요.”
 “놀고 있다. 인마, 니가 강종훈이 1라운드에 잡은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이빨 털지 말고 가드나 올려.”
 땡.
 공이 울리자 정태화가 가드를 굳힌 채 상체를 흔들며 다가온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데 저렇게 가드까지 굳히니 마치 철벽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통통. 가볍게 뛰던 동혁이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끼긱. 바닥을 스치듯 스텝을 밟으며 동혁이 정태화의 왼쪽으로 돌아나간다. 그와 동시에 던지는 빠르고 날카로운 잽.
 파바방! 정면에서 정태화의 가드를 두들긴 동혁은 어느새 그의 왼쪽으로 돌아나가 있었다.
 그런 그를 정태화는 단 한 번의 스텝으로 막아선다. 역시나 인파이터다운 압박 스텝.
 ‘역시 태화 형이네. 강종훈이랑은 완전 달라.’
 동혁을 코너 쪽에 몰아넣은 정태화는 슬슬 기어를 올리기 시작했다.
 빠져나오려는 동혁을 막아서며 날리는 묵직한 훅이 절묘하게 흐름을 끊는다.
 결국 가드를 굳히다 보면 스텝이 멈추고, 그 사이 정태화는 퇴로를 차단한다.
 어느새 코너에 몰린 동혁. 그런 그를 본 정태화가 상체를 숙이며 달려든다.
 어디의 누구처럼 턱을 완전히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닌, 정석적으로 가드를 굳힌 채 상체를 흔들고 있다.
 ‘이렇게 잘하는데. 그런 새끼한테 지도록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기억났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의 일이.
 그 기억 속에서 정태화는 박상철에게 8라운드 내내 끌려다니다가 판정으로 패배했다.
 정태화는 자신의 경기를 잘 펼쳤다. 문제는 박상철이 들고 나온 카드였다.
 무한 클린치 플레이.
 자신은 신나게 포인트를 따 놓고 정태화가 공격 좀 할라치면 끌어안고 탱고를 추는 박상철의 플레이에 동혁과 이기준은 이를 갈았었다.
 그리고 나중에 나온 이야기. 클린치 상황에서의 숏펀치를 좀 더 준비할걸, 하던 넋두리가 기억난다.
 그리고 동혁은 지금 그것을 미리 준비하게 해주려 하고 있었다.
 후웅! 동혁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훅의 궤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정태화의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윽, 야!”
 당황한 정태화가 가드를 내린 사이 동혁의 잽이 정확히 그의 안면을 때렸다.
 파방!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동혁이 멀어졌다.
 “야!”
 화가 난 듯 정태화가 헤드기어를 벗었다.
 “얌마, 무슨 메도 복싱에서 클린치야!”
 “에? 메도 복싱에서는 클린치하면 안 돼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할 거면 뭐하러 메도 복싱을 하냐?”
 동혁은 정말 죄송하다는 듯 허리를 꾸벅 굽혔다.
 “죄송해요, 형. 그래도 형이 무서운 걸 어떡해요. 맞으면 죽겠는걸.”
 “얌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이렇게 하면 형한테 이길 거 같았거든요.”
 “뭐?”
 “그렇잖아요. 지금 안면에 들어간 잽은 분명 유효타거든요. 아직까지 저는 노데미지고. 형 펀치는 무겁지만 안 맞으면 땡이잖아요? 그러니 나는 멀리서 점수 따고 형 펀치는 클린치로 지워버리고. 이렇게만 가면 제가 이기지 않겠어요?”
 “허. 이게 미쳤나. 야!”
 “둘 다 그만하고 내려와.”
 “어? 관장님 언제 오셨어요?”
 반갑게 링에서 내려가는 동혁의 뒤통수를 이기준 관장이 툭 건드린다.
 “새끼. 겨우 2전 뛴 놈이 선배를 가르치려 들어?”
 “에이, 가르치긴요. 혹시 박상철이가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뿐이에요.”
 그 말에 정태화의 표정이 풀어진다. 그런 정태화에게 이기준이 입을 열었다.
 “방법은 잘못됐지만, 동혁이 말도 맞다. 박상철이 입장에서는 태화한테 이겨도 본전이고 지면 망신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도 설마······.”
 “뭐가 설마야. 이 게임 잡으면 박상철이도 타이틀샷 노릴 수 있어.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카드를 꺼내오겠지.”
 “······.”
 “그냥 쉽게 생각해. 혹시 저 짓거리를 할지도 모르니 우리는 이왕 준비하는 거 하나 더 준비하면 되는 거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정태화가 다가와 동혁의 가슴을 툭 때린다.
 “다음엔 말로 해, 인마.”
 “네.”
 대답은 했지만, 다음에도 말로 할 생각은 없다. 말로 해서 알아들으면 다들 챔피언 먹게?
 “동혁이는 이리 와봐.”
 “네, 관장님.”
 “너 시합 뛴 지 좀 됐지?”
 “아, 그러니까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구요!”
 “아니까 조용히 해, 귀 아퍼. 동혁이 너 신인왕전 나가볼래?”
 신인왕전? 그러고 보니 곧 봄이구나.
 “좋죠. 3월쯤 시작하나요?”
 “아니, 2월에 16강전이 시작될 거야.”
 “그럼 한 달 반 정도 남았네요. 충분합니다. 하죠.”
 “체급은 그냥 웰터? 아님 감량 좀 할래? 지금 감량 부담도 별로 없잖아. 라이트급 정도로 내려가면 아주 경쟁력 있겠는데.”
 “경쟁력은 지금도 차고 넘쳐요. 기대하십쇼. 신인왕전 네 경기 모두 KO로 장식할 테니까.”
 “똥 싼다.”
 “그놈의 똥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요?”
 “니가 먼저 똥 싸는 소리를 안 해야지. 어쨌든 그럼 웰터로 신청서 넣을 테니까 바로 시합 준비해.”
 “넵! 알겠습니다!”
 빠박, 빡! 샌드백을 두들기는 동혁의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신인왕전 16강의 계체량은 수원의 한 종합병원에서 치러졌다.
 이번에도 별 무리 없이 계체를 통과한 동혁은 느긋하게 병원을 돌아다니며 다른 선수들을 관찰했다.
 “음?”
 한쪽 구석에서 한 선수가 정성스레 갠 옷을 펼치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이름으로 자수를 놓은 시합용 트렁크와 가운 세트였다.
 “와······. 멋있네. 나도 저런 거 하나 있으면 좋겠네.”
 그는 싸구려 3만 원짜리 트렁크에 이름만 박아서 쓰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동혁은 통장 잔고를 세어보았다. 난방비를 조금 아끼면 자신도 트렁크 가운 세트를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삐걱. 알루미늄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김나희가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다.
 “어? 김나희? 내가 번호를 저장했었나?”
 동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내가 저장했어요.
 “··· 아, 네.”
 변함없이 당황스러운 여자야.
 - 어머? 내가 정말 여자일 거라고 생각해요?
 어이, 이건 무슨 전개야. 인간이 아닌 건 그렇다 쳐도 여자도 아니라고?
 - 헤헤, 농담이에요. 저 여자 맞아요. 그것도 어~엄청 예쁜.
 “네네. 그렇겠죠.”
 영혼 없는 리액션.
 - 됐고요,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요. 방안에 박스 보이세요?
 “네?”
 동혁은 얼른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섰다. 과연 방안을 보니 한가운데에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다.
 “있긴 있네요. 근데 어떻게 이게 여기······.”
 - 그런 사소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박스부터 열어보세요.
 빈집에 누가 드나든 것 같은 사소한 얘기는 뭐, 나중에 하지, 뭐.
 전화기를 어깨에 끼우고 동혁은 박스를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 담긴 옷과 신발이 보였다.
 “어······. 이거 설마?”
 동혁은 옷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트렁크와 한 쌍으로 만들어진 가운이었다.
 검은 바탕에 테두리는 붉은색 실로 두껍게 장식되어 있었고 등에는 동혁의 이름이 흰색의 웅장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아치 형태를 이룬 그의 이름은 영어로 적혀있었는데, 가장 처음 두 글자와 끝 두 글자만이 대문자였다.
 DOng-hyuk KO. 이렇게.
 그런데 독특한 것은 대문자는 엄청 컸고 소문자는 또 엄청 작아서, 조금만 뒤에서 봐도 그 문구가 ‘DO KO(두 케이오)’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즐거운 듯 발랄한 김나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음······. 너무 좋네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 그래요? 다행이다. 혹시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동혁도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나희 씨.”
 나직한 웃음소리.
 - 그럼 끊을게요. 내일 경기도 힘내서 꼭 이기세요~
 남심을 저격하는 스윗한 목소리를 남긴 채 김나희는 전화를 끊었다.
 동혁은 트렁크와 복싱화도 꺼내 보았다. 저절로 광대가 승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타이밍 좋게 선물을 주다니. 설마 날 좋아하나?
 훗, 나란 남자. 설마 도깨비한테도 먹힐 줄이야.
 
 경기 당일. 이번 신인왕전은 수원시에 지어진 수원시 복싱훈련장에서 진행됐다.
 “우, 좋다.”
 저번 경기가 서커스 무대 같은 야외특설링에서 치러진 터라 제대로 지어진 복싱 경기장이 더 좋게 느껴졌다.
 “동혁이 준비해라. 니 차례다.”
 “에? 전 마지막 차례 아니었어요?”
 “마지막 맞아. 4경기.”
 아, 그래. 국내 복싱계를 잊고 있었네.
 국내 복싱은 선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체급당 열여섯 명의 선수를 고르기 위해 지역별 예선을 거치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그저 열여섯 명이 다 채워지기만 해도 땡큐인 거다.
 “나머지는 8강으로 시작해. 그러니 말 듣고 라이트급으로 내려가자니깐. 그랬으면 너도 8강부터 시작할 거 아냐.”
 “네네. 일단 이거부터 이기고 생각해 볼게요.”
 링에 오르자 상대 선수가 보인다. 긴장으로 떠는 모습이 애처롭다.
 땡! 경기가 시작됐다.
 동혁은 안타까운 마음을 듬뿍 담아 강렬한 라이트 훅을 날렸다.
 꽝! 강렬한 타격에 상대가 가드째 밀려나며 당황한 상대의 얼굴이 보인다.
 상대는 이번이 데뷔전이라던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었다. 확실히 피지컬은 좋아 보였지만 당황한 얼굴을 보니 멘탈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야말로 프로의 조건이지.’
 동혁은 계속해서 상대의 가드를 후려갈겼다.
 결국, 시작부터 겁을 집어먹은 상대는 끝내 쓰러지지도 못하고 TKO로 패배했다. 반격의 의지도 없이 도망만 다니는 그를 심판은 단호하게 링에서 내려보냈다.
 “잘했다.”
 이기준 관장이 웃으며 링 위로 올라왔다.
 “잘하긴요. 화장실 갔다가 일 못 보고 나온 기분인데요.”
 “좀 싱겁긴 하더라. 그래도 이겼으니까 됐지, 뭐.”
 “다음 경기는 언제예요?”
 “음, 경량급 먼저 하니까 내일 오후나 모레 하겠지. 8강전은 이틀에 걸쳐서 하니까.”
 “땀도 안 났는데 그냥 지금 하지.”
 “새끼, 배부른 소리 하네. 그러다 다른 선수들한테 처맞는다, 너.”
 땀도 별로 나지 않은 터라 동혁은 과감히 샤워를 제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기준 관장이 물었다.
 “동혁아. 너 8강전에 붙을 선수들 아냐?”
 “어? 벌써 대진표 나왔어요?”
 “아니. 내일 뛸 선수들 계체가 오늘이잖아. 그거 끝나면 추첨할 거야. 그래도 홈페이지 가면 체급별 신인왕전 신청 현황 나와 있잖아. 이 새끼, 인터넷정보검색사라고 설레발치더니 별거 없네?”
 “에헤이. 아인슈타인도 관심 없는 분야에는 멍청이나 마찬가지래요.”
 “똥 싸지 말고 가서 뒤져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잖냐.”
 “똥 싸고 뒤져보면 안 돼요?”
 
 동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장실부터 들렀다. 별로 마렵지는 않았지만, 왠지 오기가 생겼다.
 큰일을 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클릭, 클릭.
 “아, 여깄네. 어디 보자, 아는 이름이 있나.”
 웰터급에 신청한 사람은 총 아홉 명이었다.
 주환봉. 강감찬. 조영구. 박창호. 박창호?
 “어, 박창호? 설마 그 박창호?”
 박창호.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에서 그는 OPBF 라이트급 챔피언이었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국내 무대를 휩쓴 그는 곧바로 OPBF 타이틀 도전을 위해 챔피언 벨트를 내려놓았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런 놈이 도대체 왜 웰터급 신인왕전에 참가한 거지?
 ‘잠깐. 그러고 보니 박창호가 원래는 웰터였었나?’
 생각해보니 그랬다. 데뷔는 웰터로 하고 나중에 라이트로 체급을 낮췄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놈이 웰터급 신인왕전도 출전했었나?
 혹시나 싶어 동혁은 구글에 ‘신인왕전 박창호’를 쳐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아무래도 신인왕을 먹는 게 쉽진 않을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동혁은 이기준 관장의 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
 창가에 이마를 댄 그의 얼굴이 심각하다.
 16강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경기 자체가 워낙 졸전이라 포인트를 많이 획득하지는 못했다.
 승리수당 5,000, 연승 보너스 1,000, 노데미지 1,000, 총합 7,000포인트에 70% 삭감으로 2,100포인트.
 전에 있던 3,900포인트와 더해 총 보유 포인트는 6,000.
 ‘상태창.’
 
 [사용자 : 고동혁]
 [고유특성 : 야수의 감각]
 [보유 포인트 : 6,000]
 
 [보유 슬롯 : 1]
 [슬롯 1 : 날카로운 반사 신경]
 
 6,000포인트면 아직 1티어 특성을 하나 사기에도 한참 부족하다. 2,000포인트나 하는 슬롯도 하나 구매해야 하니, 어림잡아도 12,000포인트는 있어야 한다.
 다행히 토너먼트 대진표를 보니 박창호와는 결승에나 만날 것 같다. 그렇다면 그를 만나기 전까지 두 번의 시합이 더 남았다는 뜻.
 ‘그래, 일단 박창호는 잊자. 이번 시합에 최선을 다하는 거야.’
 8강전 상대는 주환봉이라는 선수였다. 펀치보다는 발이 빠른, KO를 노리기보다 포인트를 쌓아가는 타입의 선수.
 예전의 동혁이었다면 고전했을지도 모르는 타입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빠르지만 가벼운 펀치는 동혁을 막아서지 못했고, 동혁의 빠른 스텝은 주환봉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크윽, 무슨 주먹이 이렇게 무거워!’
 주환봉은 가드를 굳힌 채 연신 몸을 물리고 있었다. 분명 가드로 받아냈는데도 팔뚝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동혁의 레프트가 가드 위를 노리고 날아왔다. 주환봉은 가드를 올리며 레프트를 막으려 했다.
 꽝!
 “커헉!”
 왼쪽 옆구리에 구멍이 나는 듯한 충격에 주환봉은 마우스피스를 뱉고 말았다.
 왼손 페이크에 이은 라이트 어퍼. 전진 스텝에 의해 체중이 실린 어퍼컷이 주환봉의 허리를 꺾었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끊긴 주환봉의 가드가 열린다. 그리고 동혁은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열린 가드 사이로 레프트 어퍼가 주환봉의 턱을 흔든다.
 그리고 휘청하는 그의 관자놀이에 강렬한 라이트 훅!
 꽝! 썩은 나무토막처럼 그의 몸이 허물어진다.
 땡땡땡!
 “1라운드 1분 47초. TKO로 고동혁 승!”
 동혁은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경기장으로 나왔다.
 “동혁아, 안 가냐?”
 “관장님. 이거 한 경기만 보고 가요.”
 “음? 그러지, 뭐. 근데 누가 나오는데?”
 “박창호라고 PJP복싱클럽 선수예요.”
 “아는 사람이냐?”
 “아뇨. 아까 대기실 들어가다가 봤는데 뭔가 한가락 하게 생겼더라구요.”
 “무슨 무당이냐, 딱 보고 알게. 일단 보자, 동혁 보살님이 얼마나 영험한가 보게.”
 박창호는 그날 웰터급 3경기에 출전했다. 상대는 어깨가 상당히 발달한 조영구라는 선수였다.
 “어우, 저놈 저거 한 방 있겠는데? 우리 동혁 보살님 잘못 짚으신 거 아니세요?”
 “아, 그냥 좀 보세요. 1라운드 안에 저 덩치 골로 갑니다.”
 땡!
 “박스!”
 생긴 값을 하듯 시작과 동시에 조영구가 달려 나왔다. 그는 넓은 어깨와 두툼한 팔뚝으로 선풍기 훅을 날려댔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그 파워만은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허접해도 일단 걸리면 한 방에 갈 만한 펀치였다.
 하지만 박창호는 냉정했다.
 절제된 위빙으로 훅을 걸러낸 박창호가 빠르게 원투를 꽂아 넣었다.
 워낙 제대로 들어간 터라 조영구의 짧고 두툼한 다리가 휘청거린다.
 부우웅. 또다시 조영구의 텔레폰 펀치. 이번에는 민첩한 스텝으로 사이드를 잡고 라이트 훅으로 조영구의 턱을 흔들었다.
 또다시 날아오는 커다란 훅을 피해 반대편 사이드로 옮긴 박창호. 이번에는 레프트 어퍼 더블을 조영구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 동혁아, 저놈 이름이 뭐라고?”
 “박창호요. PJP복싱클럽 박창호.”
 “박창호······.”
 박창호의 기량에 놀란 듯 이기준 관장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만큼 박창호는 압도적이었다. 거의 드워프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단단한 조영구를 샌드백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대고 있었으니까.
 쾅! 크게 휘두른 훅에 날카로운 카운터가 걸렸다. 일격에 신경을 끊어버리는 펀치. 아무리 육체가 단단해도 이건 버텨내지 못한다.
 조영구의 짧은 다리가 꺾이며 그가 링 위에 무릎을 꿇었다. 박창호는 이미 끝났다는 듯 돌아선 상태였다.
 “저거 진짜 물건이네. 어디서 갑자기 저런 게 튀어나왔지?”
 이기준 관장은 어느새 노트를 꺼내 필기까지 하고 있었다. 박창호라는 이름 아래에 벌써 메모가 가득하다.
 “야, 지금 우리가 태평하게 여기 처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가서 뭐라도 좀 짜내야지, 이거 안 되겠어. 아, 뭐해, 빨리 일어나.”
 박창호는 코너 패드에 편안히 몸을 기댄 채 기도하듯 무릎 꿇은 조영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박창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동혁은 몸을 돌렸다.
 
 4강전까지는 아직 보름 정도가 남아있었다. 이기준은 그동안 박창호에 대한 해법을 준비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오늘 본 경기가 놈의 전부는 아니니까.’
 기억 속의 박창호는 한마디로 올라운더였다.
 인이건 아웃이건 모든 거리에서 강렬한 펀치를 날릴 수 있으며 속도가 빠른 상대는 파워로, 파워가 강한 상대는 속도로 제압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나 펀치의 각도가 예리하고 연타의 회전이 빨랐다.
 이런 타입은 순수하게 기량으로 누를 수밖에 없다. 뚜렷한 약점이 없으니까.
 다행인 건 8강전에서 괜찮은 경기를 치른 터라 포인트가 꽤 들어왔다는 것.
 총합 12,000포인트에 70% 삭감으로 3,600포인트. 전에 모아두었던 6,000포인트를 더해 9,600포인트가 남았다.
 4강전에서 3,000포인트만 더 얻어도 목표했던 12,000포인트를 넘는다.
 “이 정도면 충분해.”
 동혁이 벌떡 일어섰다. 쉬쉭. 날카로운 잽 두 방이 바람을 갈랐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야. 동양 태평양 챔피언이 별거야? 난 세계 챔피언이 될 거라고.”
 중얼거리는 동혁의 눈빛이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다음날.
 드르륵.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온 이기준 관장은 후끈한 열기에 깜짝 놀랐다.
 파방! 파바방! 끼긱, 빡!
 리드미컬한 타격음이 연달아 터진다.
 “뭐야, 동혁이냐? 오늘은 좀 일찍 왔나 보다, 너?”
 “아, 오셨어요.”
 돌아서는 동혁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이기준은 살짝 놀란 얼굴로 수건을 들고 와 던졌다.
 “뭔 땀을 그렇게 흘려. 좀 닦고 해. 몇 시에 왔냐?”
 “아, 잠이 잘 안 와서 좀 일찍 왔어요. 몇 신지는 모르겠네요.”
 “좀 쉬면서 해. 이리 와 앉아봐. 4강전이랑 결승전 날짜 잡혔다.”
 이기준 관장은 프린트해온 종이를 내밀었다.
 “어? 결승전 메인이벤트가 태화 형이에요?”
 “그래. 상대가 랭킹 3위잖아. 이번 게임 이기고 타이틀샷 받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너 결승에서 지면 태화 얼굴에 똥칠하는 거다. 무조건 이겨야 해.”
 “4강도 못 이겼는데 벌써 결승 타령입니까?”
 “4강에서 떨어질 거면 그냥 지금 짐 싸서 집에 가, 인마. 처음에는 네 게임 전부 KO로 잡겠다고 설레발치더니, 박창호 그놈 보고 쫄았냐? 반응이 왜 이래?”
 “쪼, 쫄긴 누가 쫄았다고 그래요. 전부 KO 시킬 거니까 두고 보세요.”
 “그래. 그런 자세지. 못 먹어도 고, 이게 우리 스타일이지.”
 이기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린다.
 “아, 그리고 동혁아. 내가 박창호전 전략을 좀 짜봤거든. 들어볼래?”
 “좋죠. 근데 데이터도 없는 선수를 어떻게 파보셨어요?”
 “그놈이 원래 아마 출신이더만. 워낙 불량하게 놀아대서 시합을 못 나가서 그렇지, 일단 나가기만 했으면 금메달이 몇 개는 될 거라더라. 그놈 아마 때 가르치던 트레이너를 만나봤다.”
 “오~ 유능해. 대단한데요? 무슨 형사 같아요.”
 “형사는 무슨. 이 바닥 좁은 거 이제 알았냐. 어쨌든 아마 시절 연습 기록이랑 어제 경기로 볼 때, 이놈의 제일 큰 무기는 그 빠른 다리 같다. 물론 상체도 잘 발달해 있고 펀치도 좋지만, 그것도 전부 빠른 풋웍에서 나오는 위치 선정이 있어야 되는 거지, 아무 때나 강펀치를 날리는 놈은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 우리는 제일 먼저 놈의 다리를 묶는다. 어때.”
 “··· 너무 뻔해서 책에서 본 거 같은 공략법이네요.”
 “이 새끼 김빠지게.”
 “그렇잖아요. 복부 쳐서 다리를 뺏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인데, 그걸 박창호 그놈이 멍하니 맞아주겠어요?”
 씨익. 갑자기 이기준 관장이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멍하니 맞아주게 만드는 방법이 있지.”
 “네? 뭔데요, 그게?”
 “아마 시절 트레이너가 해준 말인데, 그놈 이상하게 얼굴 건드리는 걸 싫어한대. 새끼, 기집애도 아니고 왜 얼굴을 안 맞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한테는 좋은 거 아니냐?”
 어?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OPBF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았던 박창호. 그 얼굴이 어땠더라?
 그래. 박창호는 언제나 깔끔한 얼굴로 경기를 끝냈다. 종합적인 기량이 뛰어나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얼굴을 맞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프리티보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이상한 버릇 때문에 동혁과 주변 사람들은 그가 유리턱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물론 나중에 스타일이 바뀌면서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얼굴을 맞지 않으려 할 거라는 거다.
 “관장님.”
 “응?”
 “형사 취소. 관장님 최소 셜록 홈즈네요.”
 “뭔 소리야?”
 “아니에요. 어쨌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얼굴을 노려 가드를 업시키고 그 틈에 복부를 때린다, 이 말이죠?”
 “그래, 정확하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을 거야. 그놈 수준이 있으니 어중간하게 흉내만 냈다가는 역으로 털릴 수도 있어. 그러니 연습은 확실하게 위쪽 컴비네이션 위주로 간다. 그리고 웨이트를 겸하면서 어퍼컷을 파워업 하는 거다.”
 “오케이. 접수했습니다. 빡세게 해주십쇼.”
 그날부터 동혁의 훈련 스케줄은 두 배로 빡빡해졌다.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거의 2년을 해오던 설거지 알바도 그만둬야 했다.
 당장 알바를 관두면 생계가 막막하지만, 결승까지는 겨우 한 달여 남짓. 그 정도는 모아둔 돈으로 버틸 수 있다.
 컴비네이션 훈련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연타로 시작됐다.
 이기준은 원투, 원투원투, 원투양훅, 원투 스텝인 라이트 훅, 등등 기본적인 컴비네이션을 라운드 내내 계속 요구했다.
 기본적인 기술 수준이 높은 박창호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앞세운 압박 플레이가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컴비네이션 훈련을 마치면 휴식 후 오후부터 웨이트 트레이닝과 어퍼컷 훈련을 진행했다.
 웨이트는 주로 스쿼트와 데드리프트 같은 코어 운동 위주였다. 어퍼컷은 다리에서 밀어 올리는 힘을 상체의 회전으로 전달하는 펀치니까.
 훈련에 매진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4강전 경기 당일.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까똑.
 “누구지?”
 - 동혁 씨, 화이팅~♡
 눈부신 미소의 셀카와 함께 날아온 응원 메세지. 김나희였다.
 “뭐, 기분은 좋네.”
 피식, 웃어준 동혁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땡!
 “박스!”
 동혁이 뛰는 8경기가 시작됐다. 동혁은 링 중앙으로 다가와 상대와 글러브 터치로 인사를 했다.
 힐끔. 고개를 돌려보니 멀리 객석에 앉은 박창호가 보인다. 오늘의 3경기를 TKO로 마무리 지은 그는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언제까지 처웃고 있나 한번 보자.’
 목을 꺾어 두둑, 소리를 낸 동혁이 상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런 동혁을 피해 상대가 물러선다. 데뷔 후 4전 4승 4KO를 해오고 있는 동혁은 이미 꽤나 유명해진 상태였다.
 끼긱! 순간 동혁이 벼락같은 전진 스텝을 밟으며 상대의 가드 사이로 잽을 던졌다.
 빡! 생각보다 날카로운 타격에 놀란 상대가 가드를 굳히며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미 동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반대편 사이드로 빠진 동혁의 오른손이 가드 옆을 뚫고 상대의 턱을 흔들었다.
 쾅! 덜컥. 턱이 흔들린 상대가 휘청인다. 어떻게든 데미지를 회복하려 물러서는 상대.
 동혁은 그런 그를 한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쉬지 않고 펀치를 날렸다.
 공벌레처럼 얼굴을 감싼 상대의 가드 위로 펀치가 비처럼 쏟아진다.
 복부가 훤히 비었는데도 동혁은 여전히 가드 위만 두들겼다. 마치 가드를 두들겨 깨고 얼굴을 뭉개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그 무자비한 펀치 세례에 체육관이 조용해졌다. 오직 소나기 같은 펀치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결국 심판이 뛰어들고 나서야 연타가 그쳤다. 심판이 동혁을 밀쳐내자 그제야 상대가 가드를 내렸다.
 분명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였는데도, 상대의 얼굴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폭풍 같은 연타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스르륵 로프 위로 미끄러진 상대가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동혁은 뉴트럴 코너로 돌아가며 객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박창호의 눈이 마주쳤다.
 동혁의 눈이 가드 위를 얻어맞고 쓰러진 상대에게로 움직였다가 다시 박창호에게로 돌아왔다.
 으쓱.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린 동혁이 피식 웃었다.
 꿈틀. 박창호의 눈이 무섭게 일그러진다. 이것은 동혁의 명백한 도발이었다.
 심판은 그대로 경기를 끝냈다. 1라운드 1분 2초, 동혁의 TKO 승리였다.
 “뭐한 거냐?”
 링 위로 올라온 이기준 관장이 박창호 쪽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좀 긁어줬어요. 너도 얼굴 조심하라고.”
 그 말에 이기준 관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맹연습한 어퍼는 철저히 감추고 얼굴만 조졌냐? 그거 어필할라고? 이런 악마 같은 놈.”
 “에헤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건 관장님이시면서.”
 “흐흐흐. 그래. 잘했다.”
 동혁이 짐을 챙겨 나서는데 옆통수가 따끔했다. 아직도 남아있던 박창호의 시선 때문이었다.
 “고개 돌리지 마. 무시하면 더 약올라.”
 옆에 선 이기준 관장이 복화술로 말했다.
 “우와, 관장님이야말로 진짜 악마네요.”
 “흐흐흐. 그래 내가 원조 디아블로다. 크크.”
 두 사람은 박창호를 철저히 무시한 채 키득거리며 체육관을 나섰다. 그런 그들을 보는 박창호의 눈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동혁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상태창을 열었다.
 
 [사용자 : 고동혁]
 [고유특성 : 야수의 감각]
 [보유 포인트 : 13,500]
 
 [보유 슬롯 : 1]
 [슬롯 1 : 날카로운 반사 신경]
 
 4강전 시합으로 얻은 포인트는 3,900포인트. 남아있던 9,600포인트를 더해 13,500포인트가 됐다.
 
 [슬롯 추가 구매하기]
 [누적 구매 수 : 0]
 [구매 비용 : 2,000포인트]
 
 동혁은 망설임 없이 2,000포인트를 들여 슬롯을 하나 구매했다. 그리고는 1티어 상점을 열어 특성을 뒤졌다.
 수많은 특성들이 휙휙 눈앞을 지나쳤지만 동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마침내 미리 찜 해뒀던 특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혁은 그것을 보며 씨익 웃음을 보였다.
 “흐흐흐. 좋아. 넌 디졌다, 이제.”
 
 결승전 당일.
 동혁은 수원시 복싱훈련장 앞에 주차된 NBC 방송국의 중계차를 보며 눈을 빛냈다.
 “우와. TV 중계도 하나 봐요?”
 “그래. 전국에 생중계되니까 잘해, 망신당하기 싫으면.”
 “에헤이. 또 시작부터 초 치신다. 화이팅해줘도 모자랄 판에.”
 “넌 보니까 좀 밟아줘야 잘하는 타입이더라고. 아, 나희 씨도 왔네.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인사하고 들어와.”
 이기준은 김나희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어요?”
 “네. 결승은 와야죠. 동혁 씨의 화려한 커리어가 시작될 시점인데요.”
 “우. 부담되네요.”
 “준비는 잘하셨나요?”
 그녀의 말에 동혁이 씩 웃었다.
 “기대하세요. 볼만할 겁니다.”
 “어머. 동혁 씨의 이런 모습 처음이네요. 지면 지옥 불에 직화구이가 될 텐데도 이렇게 꿋꿋하다니, 정말 멋져요.”
 “··· 고맙군요.”
 “그럼 멋진 시합 기대할게요~”
 멀어지는 김나희를 보며 욕설을 씹어 삼키는데 누군가 그를 툭 쳤다.
 “어, 태화 형.”
 “뭐해, 안 들어가고.”
 “아, 갈 거예요. 형 컨디션은 어때요?”
 “최고야. 넌?”
 “전 별론데 그래도 이길 거예요. 지면 죽거든요.”
 “뭐?”
 “그런 게 있어요. 들어가요.”
 
 오픈 게임이 시작됐다. 동혁은 3게임이라 슬슬 몸을 풀고 있었다.
 “아, 멍청한 새끼. 따라 들어가야지, 그걸 구경만 하고 있네.”
 “아, 쫌! 어딜 치냐! 눈 감고 펀치 날리나, 저게 뭐야!”
 밖에서 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결승전에 TV 중계까지 되다 보니 관객도 꽤 모여들었다.
 “이제 올라가자.”
 “네, 관장님.”
 동혁이 대기실을 나섰다. 웅성거리는 관객의 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늘 텅 비어 있다 싶던 링사이드가 오늘은 가득 찼다.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 보였다.
 먼저 링 위에 오른 박창호가 동혁을 내려다본다. 그의 눈 속에서 동혁은 강렬한 적의를 읽었다.
 “얌마. 작전이 먹히긴 한 거 같은데, 오히려 역효과 나는 거 아니냐?”
 “에헤이, 부정 타게. 퉤퉤퉤 하세요.”
 “퉤퉤퉤. 미안하다.”
 링에 오르고 링 아나운서가 두 사람을 소개한다. 그리고 마침내 들려오는 세컨 아웃. 이제 링 위에는 두 사람뿐이다.
 땡!
 “박스!”
 주심의 선언과 함께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두 사람. 이미 적의에 적의가 더해진 터라 글러브 터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훙. 박창호의 잽이 바람을 가른다. 동혁은 오른손 글러브로 잽의 궤도를 쳐내며 날카로운 잽으로 응수한다.
 그의 잽을 스웨잉으로 피해낸 박창호가 전진 스텝을 밟으며 원투를 날린다.
 잽은 블럭을, 스트레이트는 위빙으로 피해낸 동혁. 동시에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날리는 왼손 스트레이트.
 동혁의 왼손 아래를 더킹으로 파고드는 박창호의 레프트 어퍼. 동혁은 그것을 오른쪽 가드로 막아내며 다시 왼손 스트레이트.
 빠박! 서로의 가드 위에서 불꽃이 튀며 두 사람이 멀어진다.
 잠시 멀어진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본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수준 높은 공방. 그것에 목말랐던 관중들이 그제야 호흡을 되찾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 우와아아!
 동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피가 끓어오른다. 몸이 한없이 가볍다.
 반면 박창호의 얼굴은 더 험상궂게 변했다. 동혁의 웃는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끼긱! 바닥을 걷어차며 뛰어드는 박창호. 그의 잽이 번개같이 허공을 갈랐다.
 미리 연습한 대로 오른손을 내밀어 잽을 받아내며 왼손 잽으로 응수하는 동혁.
 그와 동시에 연타에 시동이 걸린다. 왼손이 떠나기 무섭게 쇄도하는 오른손, 또다시 왼손, 그리고 또다시 오른손!
 빠바바박! 한 호흡에 밀어닥치는 네 발의 펀치가 박창호를 밀어낸다.
 그 서슬에 놀랐으면서도 박창호는 펀치를 내밀었다. 여기서 밀리기 시작하면 계속 밀린다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연타의 틈을 파고드는 박창호의 왼손에 동혁은 더킹을 걸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걸 본 박창호가 가드를 올려 얼굴을 보호했다.
 ‘역시 복부보단 얼굴을 보호하겠다는 거냐?’
 동혁은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박창호의 환히 오픈된 복부에 라이트 어퍼를 날렸다.
 팡. 강렬한 기세로 날아들던 동혁의 오른 어퍼가 맥없이 박창호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뭐야, 이건?’
 그 간지러운 기분에 박창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발 물러선 동혁의 시선이 뭔가 이상하다. 그 표정이 마치 겁먹은 사람 같다.
 ‘설마 이놈 어퍼가 형편없는 건가? 그래서 그렇게 안면만 노렸나?’
 그때 동혁은 박창호가 아닌,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보고 있었다.
 [폭약 장전 중]
 [장전양 18]
 ‘크크크. 좋아, 순조롭게 돼가고 있어.’
 그는 최근에 구매한 특성을 떠올렸다.
 
 [폭탄 펀치 I. 펀치력을 희생해 폭약을 장전한다. 펀치마다 장전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장전양은 그 펀치의 타격력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장전된 폭약은 폭탄 펀치를 사용해 단숨에 폭발시킬 수 있다. 주의사항. 티어가 낮아 펀치력 대 폭약의 전환비가 좋지 않다.]
 
 ‘이게 뭔가 싶을 거야, 그치? 한 방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간지럽기만 하고. 설마 이놈 어퍼가 병신인가 싶지? 그렇게 늪에 빠지는 거야, 인마. 흐흐흐.’
 훙. 박창호의 잽이 얼굴을 스친다. 이번에도 동혁은 그의 얼굴을 향해 연타를 퍼부었다. 그런데 그 동작이 너무 급했다.
 “동혁아, 급할 거 없다! 천천히 가!”
 이기준이 소리친다.
 끼긱! 그때 박창호가 스텝을 크로스하며 동혁의 왼쪽으로 빠지더니 카운터펀치를 날려 왔다.
 ‘위험!’
 동혁은 어깨를 당기며 턱을 보호했다.
 쾅! 어깨에 반쯤 걸쳐 맞았는데도 머리가 띵하다. 확실히 풋웍으로 펀치에 체중을 실을 줄 아는 놈이었다.
 동혁이 휘청하자 박창호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야, 인마! 머리 흔들어! 발 멈추지 마! 동혁아!”
 링사이드에서 이기준 관장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동혁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몸을 물렸다.
 이번에는 박창호의 연타가 시작됐다. 원투가 턱으로 날아오나 싶더니 깊숙한 바디샷이 복부를 강타한다.
 동시에 반대편 어퍼가 다시 턱을 노리고 어퍼를 막아선 가드 안쪽으로 레프트 훅이 다시 동혁의 머리를 흔들었다.
 ‘이, 이 새끼! 회전이 너무 빨라!’
 또다시 휘청이며 동혁이 물러섰다. 빠르게 따라붙는 박창호.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펀치를 날리기 위해 벌어지는 순간.
 동혁이 아무렇게나 날린 펀치가 박창호의 얼굴을 건드렸다. 거의 스친 수준이었지만 놀란 박창호를 멈춰 세우기 충분했다.
 ‘아, 폭약 장전하다 죽을 뻔했네. 이 새끼는 아무리 봐도 신인왕 레벨이 아니잖아. 특성까지 사용하는데도 실력 차가 이 정도라니.’
 동혁이 슬쩍 시계를 본다. 1라운드가 40초가량 남은 상태였다.
 ‘폭약 장전 두세 방만 더 먹이고 라운드 마쳤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스친 주먹 때문인지, 박창호는 동혁을 죽일 기세였다.
 팡, 빡! 잽을 걷어냈다 싶은 순간 날아드는 스트레이트에 동혁의 상체가 휘청한다.
 이 정도로 빠른 펀치 교환은 야수의 감각으로도 피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워낙 회전이 빠르기도 하거니와 상하좌우로 연달아 날아드는 통에 체중 이동에 역동작이 걸리는 것이다.
 동혁은 풋웍을 살려 외곽으로 빠지려 한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두고 볼 박창호가 아니다.
 성큼 옆으로 발을 뻗으며 날아드는 라이트 훅이 동혁의 진로를 막아섰다.
 그런데 사실, 동혁에게는 이런 펀치가 더 좋다. 파워가 센 단발성 펀치는 아무리 빨라도 야수의 감각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림 같은 더킹으로 박창호의 라이트 훅을 피한 동혁이 또다시 솜방망이 같은 어퍼컷으로 박창호의 복부를 가격한다.
 팡, 팡.
 ‘장난치나!’
 배꼽 근처를 문지르고 멀어지는 동혁에게 박창호가 오른손을 내리꽂았다.
 ‘우웃!’
 동혁이 다급하게 허리를 꺾으며 스웨이백, 박창호의 주먹이 코끝을 스친다.
 [폭약 장전 중]
 [장전양 54]
 ‘됐어, 이대로 라운드 종료다.’
 몇 차례 더 주먹을 주고받는데 공이 울렸다.
 땡!
 청코너로 돌아오니 이기준 관장이 벌써 의자를 올려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동혁이 의자에 앉자 이기준이 그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얌마, 어퍼가 왜 그렇게 매가리가 없어! 똥꼬를 조이면서 빡, 올리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동혁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여기서 ‘폭약 장전 중입니다.’ 했다가는 이기준에게 맞아 KO 될 수도 있다.
 “세컨 아웃!”
 “야, 동혁아! 어퍼가 안되면 그냥 연습한 대로 컴비네이션으로 가! 너무 급하게 몰아치지 말고 타이밍 봐서 노려! 복부 섞어주면서! 알겠냐!”
 의자를 가지고 내려가면서도 이기준 관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어떻게든 동혁을 도와주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동혁은 로프를 잡고 이기준을 내려다봤다.
 “관장님.”
 “왬마!”
 “이번 라운드에 끝납니다. 잘 보세요.”
 “뭐?”
 “박스!”
 주심의 외침에 동혁이 돌아섰다. 박창호는 이미 링 중앙까지 나와 있었다.
 2라운드의 양상도 1라운드와 비슷했다.
 박창호는 물이 오른 기량으로 쉴 새 없이 동혁을 몰아쳤다.
 동혁 역시 그에 맞불을 놓았다. 야수의 감각과 날카로운 반사 신경으로 그는 기관총 같은 연타 속을 헤엄쳐 다녔고 착실히 폭약을 장전해 나갔다.
 수준 높은 공방전이 쉼 없이 이어지자 관객석이 난리가 났다.
 “좋아! 쳐! 후려 버려!”
 “야, 턱 당겨! 다리 멈추지 마!”
 도대체 누가 관중이고 누가 세컨인지 모를 정도로 사방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링 위의 두 사람은 그 소란스러움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몰입해 있었다.
 [폭약 장전 중]
 [장전양 187]
 ‘좋아, 다 왔어. 인마, 넌 이제 죽었다.’
 동혁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2라운드 중반, 기회가 찾아왔다.
 가드 위를 흔든 강렬한 펀치에 동혁이 휘청거리자 박창호는 이 김에 끝내겠다는 듯 커다란 펀치를 날려 왔다.
 동혁은 신들린 듯 그의 펀치를 피하며 계속해서 바디를 노렸지만, 박창호는 이미 그의 어퍼를 완벽히 무시하고 있었다.
 ‘장전양 238. 이번에 터트린다.’
 스텝 백으로 물러서는 동혁을 따라붙으며 박창호가 뛰어들 듯 왼손을 휘둘렀다.
 순간 동혁이 무릎을 굽히며 머리를 숙여 주먹을 피해낸다.
 무릎이 펴지며 뒷발이 몸을 밀어 올린다. 그에 맞춰 허리가 회전하며 체중을 주먹에 싣는다.
 온몸으로 밀어 올리는 어퍼컷이 박창호의 복부에 꽂혔다.
 꽈아앙!
 링사이드에 선 이기준도 들었을 만큼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컥!”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에 박창호가 마우스피스를 토해냈다.
 허리는 꺾인 채 펴질 줄을 몰랐고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던 두 손도 배 앞에 늘어져 올라올 줄을 몰랐다.
 ‘또 간다!’
 다시 가라앉는 무릎, 그리고 로켓처럼 솟아오르는 라이트 어퍼!
 ‘아, 안 돼, 가드를 올려야······.’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박창호는 가드를 올려 턱을 보호했다.
 꽝! 하지만 이번 펀치도 턱이 아닌 복부에 꽂혔다.
 “끄아악!”
 박창호의 비명이 체육관의 소음을 뚫고 모두의 귀에 들렸다.
 ‘아직이야!’
 세 번째의 어퍼컷이 발사대를 떠났다. 그리고 이때 박창호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턱? 복부? 시발, 도대체 어딜 노리는 거야!’
 한결같이 안면만 노려오던 놈이 갑자기 복부를 때려댄다. 박창호는 도대체 어디를 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동혁은 그런 박창호의 흔들림을 읽어낸 듯 그의 가드 사이로 턱을 노렸다.
 쉬이익, 꽝!
 우두둑, 소리와 함께 그의 목이 거칠게 꺾였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박창호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하지만 동혁은 아직 그를 쓰러지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한국의 프리티보이’라는 꼴사나운 별명을 완전히 지워주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작고 빠른 어퍼가 또다시 박창호의 턱을 올려치며 그를 끌어올린다.
 한순간 날아갔던 의식이 돌아오며 박창호가 가드를 올렸다.
 주춤주춤 물러서는 그에게 동혁은 전진 스텝을 밟으며 체중을 실어 오른손을 날렸다.
 꽝!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창호의 몸이 뒤로 날아간다. 로프에 튕겨 솟아오르는 그의 가드 위로 동혁의 소나기 같은 연타가 쏟아진다.
 빠바박! 빡! 빠박! 빠바바박!
 점차 가드하는 것보다 놓치는 것이 많아지며 박창호의 얼굴이 무참히 망가져 갔다.
 순전히 살려는 본능으로 박창호가 동혁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동혁은 냉정하게 숏어퍼로 그의 턱을 부순다.
 클린치한 상태에서 박창호의 몸이 계속해서 들썩였다.
 “스톱!”
 보다 못한 주심이 끼어들었다. 주심의 말에 동혁은 펀치를 멈추며 물러섰다.
 그러자 박창호의 얼굴이 동혁의 가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쿵. 거목이 쓰러지듯 박창호가 고꾸라졌다.
 동혁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 내쉬며 그런 박창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저 하늘의 별이라면 자신은 반지하 방에 깔린 이불이었다.
 그래야 했다. 그게 맞았다. 과거가 된 미래에서였다면.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는 걸레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다. 내 주먹에 의해. 내 발치에.
 그제야 ‘승리’라는 두 글자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동혁은 양손을 쳐들며 그 불길을 내뱉었다.
 “으아아아아아아!”
 2라운드 2분 38초, TKO에 의한 승리. 그것이 웰터급 신인왕전 결승전의 결과였다.
 
 경기가 끝나고 동혁은 대기실로 돌아왔다.
 무슨 정신으로 온 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구름 위를 걸어온 듯 머리가 몽롱했다.
 “괜찮냐?”
 “아, 음······. 별로 안 괜찮은 거 같아요.”
 “그래, 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괜찮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일단 좀 누워서 쉬어. 이따 괜찮으면 나와서 태화 경기나 보던가.”
 “네, 관장님. 이제 가보세요. 좀 있으면 태화 형 시합이잖아요.”
 “그래, 그럼 간다. 쉬고 있어.”
 “네.”
 탁. 이기준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적막이 찾아왔다.
 동혁은 천천히 몸을 눕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너무 많이 맞아서일까. 천장의 타일이 빙빙 도는 것 같다.
 문득 귓가에 환청처럼 관객의 환호가 들려온다. 링 위에 우뚝 선 그를 향해 보내는 반짝거리는 눈들이 보인다.
 “내가 이겼어.”
 무거운 침묵을 뚫고 그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울린다.
 “내가 이겼다고.”
 왜 눈물이 나는 걸까.
 
 <『한방에 100만불』 1-2권에 계속>

댓글(1)

쑤랑    
정타를 때렸을때 안아픈 복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펀치력도 강하게 설정 되었는데요. 정타를 맞추는게 어려운건데 정타에서도 아프지 않을만큼의 펀치력을 댓가로 헛방질 할 수도 있는 펀치에 강함을 얻는다니... 댓가성으로는 가치조차 없네요.. 판타지에서나 쓰일법한 재능이라 생각합니다
2019.04.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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