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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만 친다 1-1권

2016.12.15 조회 2,306 추천 19


 # 프롤로그
 
 초등학교 6학년의 여름.
 철거중인 마을 공터에서 친구들과 야구에 빠져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던 그 시절.
 까앙!
 “홈런이다. 홈런!”
 “이겼다!”
 “박기찬! 박기찬!”
 나름 동네 4번 타자였던 내가 옆 동네와의 시합에서 끝내기 홈런을 날리고 친구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홈인하던 그 순간······
 어머니와 친한 옆집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기찬아. 네 아버지 회사에서 사고 나셨다더라. 어서 빨리 집에 가봐라.”
 그 말에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돈과 야구라고 믿으신, 늘 회사 퇴근하시면 ‘어이 홈런왕!’이라고 부르시던 그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야구를 하지 않았다.
 
 
 # 금수저를 부르는 홈런타자
 
 “내일 아침 7시랬지?”
 “이번에도 그 괴물 같은 자식이 던진데?”
 “네. 이번에도 선발로 나온 데요.”
 “선발이면 또 완봉이겠지.”
 “쳇, 그 새끼 엄청 잘 던지던데. 타석에 서니까 엄청 후달리더라고. 그게 사람이 던지는 공이냐? 총알이지.”
 “최고 구속이 130킬로 넘는데요.”
 “씨발, 그 정도면 2부에서도 통하는 거 아니야? 그런 놈이 왜 4부에서 지랄이야.”
 “제구만 되면 1부에서도 통할지도 몰라.”
 “만만하던 그깟 녀석들이 그놈 하나 땜에 괴물 팀이 되어버렸으니 말 다한 거죠.”
 “병수 너 몇 킬로 던진다고 했지?”
 “평균 90 정도고, 최고속이 109 딱 한 번 찍어 봤어요. 뭐 막 던진 거라 제구는 개판이었지만······.”
 “이게 일반인의 야구 수준이라고.”
 “그래도 나름 투수입니다만.”
 “선수출신이면서 속인 거 아니야?”
 “자기들 말로는 뒤늦게 깨우친 늦둥이 천재래요.”
 “늦둥이 천재? 지랄. 돈으로 매수한 용병일거면서.”
 “우리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지.”
 “연습장에서 140도 쳐봤지만 그놈 공은 못 치겠던데?”
 “연습장 기계랑은 달라요.”
 “맞아. 그냥 타이밍만 맞추면 되는 기계랑 인간이 던지는 게 같을 리 없잖아.”
 “그······ 그런가?”
 
 금요일 저녁.
 퇴근 후 근처 곱창 집에 회사 현장 직원들끼리 모여 소란스럽게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회사 현장사람들의 모임인 사회 야구팀 ‘다크사이드’ 팀원인 그들은 모레 있을 경기로 모두 흥분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성적은 4부 리그에서도 최하위, 그저 취미 정도의 실력이라 대부분의 시합은 패배였고 그나마 고만고만한 팀을 만나 어렵게 이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늘 그런 모습을 보던 박기찬은 모두가 한심하게 보였다. 마치 모든 인생이 야구 속에라도 있는 듯 모이기만 하면 오로지 야구 얘기만으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뭘 그렇게 목숨 걸 만한 일이라고 저렇게 열을 올리는지. 쯧, 쯧.’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말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빠른 공도 자꾸 상대하다보면 익숙해질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보기엔 우리 팀도 잘하는 것 같더만······.”
 그래도 나름 기찬은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말했다. 우리 팀이라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회사가 같기 때문일 뿐 팀 소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게 사회생활이 아니던가.
 “너도 실력 되면 같이 했으면 좋았을걸.”
 옆 사람들과 열심히 떠들고 있던 회사 선배 장경근이 살짝 곁눈질로 영혼 없는 말을 건넸다.
 ‘퍽이나.’
 물론 말뿐이라는 건 기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하겠다고 해도 어떻게든 말릴 거면서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기찬이 거절하는 모양이 자연스럽다.
 사회생활이다. 사회생활.
 “제가 원래 운동엔 젬병이잖아요.”
 실제로 기찬의 조금 비대한 체형은 운동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포스는 4번 타자 감인데.”
 “맞아. 맞아.”
 선배 하나가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곁의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했다.
 “하하하.”
 기찬은 그냥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선배의 말은 기찬이 생각해도 맞는 말이다. 키도 180이 넘는 데다가 살집이 좀 있어 제법 강타자의 포스를 풍기는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운동신경이 꽝인 것은 어디 가지 않는다.
 100kg에 가까운 비대한 체구로 운동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다.
 “진짜 그 괴물투수 녀석 정체가 뭐야?”
 대화가 다시 상대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직구 하나만 가지고 승부하는 이상한 녀석이에요. 다른 공을 사용하는 건 본 적이 없으니.”
 “다른 구질은 없대?”
 “들리는 말로는 몇 개 있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직구 하나만 사용한대요.”
 “씨발, 난 배트속도가 못 따라 간다니까. 거기다 공이 너무 빠르니 타석에 서면 제법 위협적이라 겁나서 제대로 휘두를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하긴 직구 하나도 공략이 힘든데 다른 구질이 필요하겠어?”
 “젠장 맞을, 어디서 그런 괴물을 영입한 거야?”
 “그쪽 리더가 제법 발이 넓어서 그렇다던데요.”
 “대장. 우린 어디 데려올 용병 없어?”
 “회비도 빠듯한데 무슨 소리야?”
 만날 저런 식이었다.
 늘 경기는 대패를 하는 주제에 모두 분석가들 나셨다니까.
 “그 새끼 던지면 이번 경기도 솔직히 무리겠지?”
 “뭐 공략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다른 투수가 나오지는 않을까?”
 “아닐걸요. 겨우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데다가 저번 주엔 다른 녀석이 던졌다고 하더라고요.”
 “아 진짜. 또 밥되는 거 아닌가 몰라.”
 선배 한 명이 머리를 감싸 쥐는 시늉을 했다.
 “그 자식들 조만간에 2부 리그까지 진출하는 거 아니야?”
 “들리는 말로는 그 괴물 투수가 오랫동안 그 팀에 머무르진 않을 거래요.”
 “그래? 그건 다행이네. 언제까지 놈들에게 농락만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솔직히 이전까지만 해도 상대전적이 앞서고 있었잖아요.”
 “하긴 그 투수만 아니면 쥐뿔도 아닌 녀석들이긴 하지.”
 물론 이전까지 라이벌이었던 팀이라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상대전적이 앞선다고 해봐야 3승 안팎의 고만고만했다는 건 기찬도 잘 알고 있던 터라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당연히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워낙 약해서 다른 팀과의 경기는 거의 양민학살 당하는 수준이라 4부 리그 팀이라고는 해도 리그전에는 그다지 잘 참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순히 취미로만 모인 사람들이다보니 보통은 상대팀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래서 수준이 고만고만한 팀끼리 그저 친선정도의 게임만 해오고 있었던 것인데 수준이 비슷한 팀과 만난 이후로는 계속 끼리끼리 붙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도 상대팀에서 새로운 투수를 영입하는 바람에 계속 연패를 하는 모양이었다.
 한심한 수다들을 듣고 있다 보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취기가 돌자 시계를 들여다 본 기찬이 몸을 일으켰다.
 “저 먼저 가볼게요.”
 기찬의 말에 몇 명이 떠들다 돌아보았다.
 “벌써 들어가는 거야?”
 몇 명이 관심을 보이는 척 돌아보며 물었지만 그저 형식적인 말에 불과하다.
 “네.”
 늘 기찬은 술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위해 사람들과 어울릴 뿐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탓이었다.
 “수고했어.”
 사람들도 이런 기찬의 모습이 익숙한지 한마디씩 했다.
 “월요일에 보자고.”
 “네. 들어가 볼게요.”
 “형, 들어가세요.”
 “응, 그래.”
 아마도 월요일이 되면 항상 그래왔듯이 마치 근소한 차이로 졌다며 헛소릴 할 것이 분명하다.
 ‘동네 야구가 그렇게 재밌나?’
 사회야구 4부 리그라고 해봐야 결국은 동네야구의 수준일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기찬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떠들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박기찬은 곱창 집을 빠져나왔다. 빨리 빠져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시간은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쳇, 만날 야구밖에 할 이야기가 없는 한심한 인간들.”
 다시 한 번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기찬이 투덜거리며 걸었다.
 약간 취기에 오른 탓에 조금 비틀거리며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회사가 있는 곳은 시내와는 떨어진 시골의 공단이라 이 시간이면 인적이 드물었다.
 “으이그 정말 냄새 죽인다 죽여. 진짜 적응이 안 되네.”
 버스 정류장 인근에 축산 농가가 많은 탓에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제법 오래 일한 곳이라 이제는 적응할 만도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냄새의 깊이가 달라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버스가 오려면 30분은 더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지나가는 버스가 몇 대 되지 않는 시골이다 보니 시간표를 항상 가지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시간은 외우고 있는 편이었다.
 기찬은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밝은 달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달을 바라보던 기찬이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휴대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고 살짝 눈이 커졌다 사그라지고는 한숨을 푹 쉰다.
 “후우, 그러고 보니 오늘 아버지 생신이었네. 잊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매년 이날엔 생일상을 차렸었다. 하지만 엄마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나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후우.”
 허전한 마음, 왠지 모를 한숨이 또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재미없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받이에 기댄 채로 팔을 걸치자 어깨가 아려왔다.
 작년부터 어깨가 계속 결려왔다. 아마도 작업 특성상 박스 나를 일이 많다보니 직업병이지 싶었다.
 “돈도 없고 몸도 나빠지고, 사는 게 왜 이러냐?”
 뭔가 자신이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산한 정류장 벤치에 앉아 일로 인해 뻐근해진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풀고 있었다.
 반짝.
 그때 목을 풀던 기찬이 발아래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뭐지?”
 기찬은 호기심에 몸을 숙여 보았다.
 번쩍이는 금색에 둥그런 모양의 쇠붙이.
 “동전인가?”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워들었다.
 오백 원짜리보다는 조금 크고 매끄러운 표면의 금색 동전.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금화 같은 느낌이랄까. 밤이었지만 그 광택이 예사롭지 않았다.
 “설마, 금화는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동정을 들여다보니 뭔가 글씨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려는 순간.
 칭. 칭. 까앙!
 칭. 칭. 까앙!
 그가 앉아있는 버스 정류장 벤치 뒤쪽 건물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한적한 장소에다 이런 밤에 들려오기엔 조금 이상한 소리라 의아했다. 하지만 청아하게 울리는 그 소리에 잠시 멍한 상태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뭔가에 이끌려 발걸음을 돌렸다.
 평소라면 그냥 무시 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가로등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어두침침한 골목으로 들어섰지만 소리가 주는 강렬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덧 그 장소에 도착했다.
 “어?”
 발걸음을 멈춘 채로 바라보는 곳에는 낡아 보이는 배팅센터가 있었다.
 “이런 곳에 배팅센터가 있었던가?”
 회사에서 3년을 일했지만 근방에 이런 곳이 있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최근에 생겼다고 보기에는 건물이 낡아보였으니 오래전부터 있었던 건물은 분명해 보였다.
 기찬은 회사 인근은 모두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탓에 조금 어이가 없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약간 정신이 몽롱한 상태라 그냥 그러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이 위로 향했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
 낡은 간판엔 ‘진표 배팅센터’라고 적혀 있었는데 진표란 글자 때문에 아련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박기찬의 아버지의 이름이 박진표였던 것이다.
 그 때문이었었을까 조금 멍한 시선으로 낡은 간판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한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
 살아계셨더라면 야구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였으니 어쩌면 이런 배팅센터를 차리셨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생은 말이다 돈과 야구가 최고란다.
 그의 아버지 박진표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어릴 땐 지겹게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항상 돈을 강조한 그가 덧붙이던 말은 ‘돈이 있어야 남에게 굽실거리지 않고 소신대로 살 수 있다'는 거였다.
 “후우.”
 한숨을 쉬고는 곧 현실로 돌아온 기찬이 주변을 돌아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있는 배팅센터를 올려다보다 다시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장소는 익숙한 곳이 맞다.
 ‘분명 이곳엔 다른······.’
 그런데 순간 어쩐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곳에 다른 건물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는 했지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
 역시 술을 마셔서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점점 더 강렬해지는 호기심에 자신도 모르게 배팅센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분명 배트 타격 음이 들려왔었던 것 같은데 실내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끝내고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긴 그러거나 말거나 기찬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끼이익.
 녹이 설어 낡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한적하고 우중충한 실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낡았네. 아직 이런 배팅 센터가 있었나?”
 시설이 너무 낡아서 사람들이 별로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배트를 휘둘러보고 싶다는 욕망이 끌어 올랐다.
 어릴 적에 동네야구를 좋아하긴 했지만 10년 이상 야구라곤 해본 일이 없었다.
 물론 배팅 센터라면 몇 년 전에 친구들과 들렀던 기억이 나긴했지만 그때도 돈 아깝다며 결국 하지 않았었다. 거기다 마지막 야구 경기의 기억이 그를 괴롭힌 탓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이런 감정이 드는 자신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배팅센터 간판에서 잊고 지내던 아버지를 떠올린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뭔가 공교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 생신에 아버지 이름의 배팅센터라······.
 우연일 테지만 뭔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건 분명한 일.
 어쩌면 이런 것도 소소한 기적과 같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어 피식거렸다.
 “아버지 생신에 어울리네요.”
 살짝 그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황금색의 돈을 넣는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표면이 금색으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그런 박스가 보이자 뭔가 모를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박스에 다가가 동전 투입구를 바라보았는데 옆에 글자가 보인다.
 “골드코인을 투입하라고? 골드코인?”
 보통은 가격표시가 되어있어야 정상이 일 텐데 어쩐 일인지 그냥 골드코인을 넣으라는 글만 덩그러니 쓰여 있었다.
 “이거 뭐야? 따로 코인을 구입해야하는 방식인가?”
 그냥 가벼운 생각으로 들어온 터라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배팅센터엔 직원사무실 같은 게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아 결국 그 골드코인이라는 것으로 바꿀 방법이 보이지 않아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갈까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리려다 문득 버스 정류장에서 주웠던 금색 동전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머니를 뒤져보니 커다랗고 매끈한 동전이 만져졌다.
 잽싸게 꺼내 그것을 확인하자 표면에 영어로 ‘SUPER PLAYER'라 적혀 있었다.
 “이건가?”
 그리고는 곧 그 동전을 투입구에 가져다대니 구멍과 맞는 것 같았다.
 딸깍.
 동전이 들어감과 동시에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잉. 치잉. 치잉.
 “이야, 운 좋은 날이네.”
 우연이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운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물론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불운일 테지만 말이다.
 기찬은 벽에 세워져 있던 은색 알루미늄 배트를 들어올렸다.
 “오랜만이구나, 이거.”
 검은색 고무로 감겨있어 미묘하게 좋은 감촉의 배트 손잡이였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릴 적 야구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문득 잘 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참······. 감상적이 되어서는.”
 자세를 잡고는 몇 번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부웅.
 부웅.
 알루미늄 배트라 그런지 가볍게 돌아간다. 하지만 옆구리의 살이 배트 회전을 살짝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살을 빼던지 해야지.”
 살짝 투덜거린 후 타석에 들었다.
 삐리링.
 맑은 벨소리와 함께 피칭 머신이 있는 구멍 위쪽에 파란 불빛이 켜졌다.
 칭. 칭.
 기계음이 분명해지자 기찬은 공이 튀어나올 구멍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살짝 긴장감 때문인지 가볍게 흥분이 된다.
 탓!
 좁은 구멍 속에서 공이 날아왔다.
 치기 좋은 높이에다 공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 보이는 기분이라 가볍게 휘둘렀다.
 깡!
 배트에 맞은 야구공이 머리 위로 튀었다.
 약간 빗맞기는 했지만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좋았다.
 ‘이런 기분이었나?’
 오래전 동네 친구들과 야구하던 그 시절이 떠오르자 기분이 좋아졌다.
 [파울입니다.]
 “어라?”
 갑자기 들려온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귓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묘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피커 배치를 잘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피식 웃으며 그냥 수긍해 버렸다.
 술 때문에 약간 알딸딸해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겉은 낡아빠진 주제에 이런 방송도 해주는 건가?”
 뭔가 승부욕을 일으키는 느낌이었다.
 “좋아. 좋아. 승부다.”
 호기롭게 소리치며 팔을 걷어 붙였다.
 칭 칭
 탓!
 다시 두 번째 공이 날아왔다.
 미묘하지만 다른 느낌의 공이었다.
 물론 이것도 술기운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낡은 기계가 여러 가지 구질의 공을 날리는 기능이 있을 리가 없다.
 부웅.
 큰맘 먹고 과감한 스윙이 들어갔다.
 퍽.
 그렇지만 이번엔 배트가 공을 스치지도 못했다. 공의 움직임은 여전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한 것이다.
 “크억!”
 [스트라이크입니다.]
 [투 스트라이크 노볼 입니다.]
 “얼씨구. 볼 카운터도 세어주네?”
 제법 긴장감을 주는 여자의 음성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요즘 배팅센터에 유행하는 방식인가 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말뿐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슬슬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배트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두근두근.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냐?”
 투 스트라이크.
 불리한 볼카운트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기계와의 승부였지만 나름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던 그 순간 기계음이 다시 들려왔다.
 칭 칭
 탓!
 부웅!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탓에 제대로 공의 타이밍도 맞추지 못했다.
 퍽.
 덕분에 균형을 잃고 꼴사납게 회전하며 넘어지고 말았다.
 꽈당.
 “아쿠!”
 [스트라이크 아웃입니다.]
 그 말에 벌떡 일어서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우!”
 어쩐지 분한느낌 때문에 배트를 고무가 깔린 바닥에 몇 번 두들겼다.
 [1아웃입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호라, 3아웃이라 이거렷다.”
 이 배팅센터는 다른 곳과는 달리 개수가 아니라 이렇게 아웃카운터 형식을 사용하는 곳 같았다.
 그러나 어쩐지 승부욕을 엄청 일으키는 시설이라 조금 약 오르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꼭 이겨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드득.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며 공에 집중했다.
 칭, 칭!
 탓!
 깡!
 이번에는 그래도 배트에 맞았지만 역시나 뒤로 뜬 공이었다. 하지만 감이 슬슬 살아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파울입니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요.”
 약간 투덜거리던 기찬은 다시 자세를 잡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공은 어쩐지 아까와는 달리 타이밍이 조금 맞는다는 기분으로 휘두르자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다.
 까앙!
 왼쪽으로 강하게 날아갔다.
 “앗싸! 어떠냐? 내가 왕년엔 우리 동네 4번 타자였다고!”
 손에 울리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고 사실 제법 잘 날아가는 느낌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 기분도 잠시.
 [아웃입니다.]
 “뭐?”
 순간적으로 멍한 기분.
 “젠장. 도대체 기준이 뭐야? 누구 마음대로 아웃인 건데?”
 제법 잘 맞은 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웃이라니 짜증이 밀려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좌익수 플라이 아웃입니다.]
 “좌익수 뭐?”
 잘 맞았으면 ‘축하합니다.’ 뭐 이딴 소리가 나올 줄 알았던 기찬 으로서는 어이가 없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투 아웃입니다.]
 “기가 차네. 기가 차. 이거 뭔 배팅센터가 이래? 여긴 서비스 정신도 없나?”
 잘 쳤다고 생각했는데 좌익수 플라이 아웃이라며 지껄이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기 사람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런 한산한 곳에 야구 배팅연습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장사를 포기한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저 게임일 뿐인데, 자신이 너무 흥분한 것이 아닌가싶어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나도 참.”
 조금은 어이없다는 생각에 한번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오버가 심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시작한 게임이니 그냥 대충대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헛돈 쓰지 말자는 게 기찬의 인생관이었던 것이니 당연했다.
 물론 주운 돈, 아니 모조 금화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 판인가?”
 이미 투아웃 상황이니 원아웃이면 끝날 것이 분명하리라.
 처음과는 달리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도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
 눈을 한번 감았다 다시 뜨며 기계음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칭, 칭!
 탓!
 전보다 더욱 빨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공이 이전에 비해 더 잘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눈이 적응한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부웅.
 틱.
 배트를 스친 공이 방향을 꺾으며 뒤로 날아갔다.
 [파울입니다.]
 슬슬 청아하기만 하던 이목소리도 얄밉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흥분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어 두 번째 공이 날아왔다.
 깡!
 공도 훨씬 잘 보이고 느낌도 나쁘지 않았지만 타이밍이 늦은 바람에 공이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파울입니다.]
 “아우우.”
 아쉽다는 생각에 펄쩍펄쩍 뛰었다.
 분명 이번에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타이밍이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던 것이다.
 “후우. 후우.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심호흡을 하고 난 후 흥분을 가라앉히고 배트를 들어올렸다.
 두근두근.
 어쩐지 있지도 않은 투수가 눈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공이 튀어나오는 구멍을 노려보았다.
 “와라. 이 자식아.”
 오기가 생기니 몸이 흥분에 들뜨기 시작했다.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묘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곧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이 거칠어졌지만 오히려 마음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음 공이 날아들었다.
 까앙!
 이번에도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좋았다.
 그러나.
 [파울입니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배트가 조금 일찍 나간 바람에 좌측으로 날아가는 파울이 되어버렸다. 너무 잡아당긴 탓이다.
 “아깝다.”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집중력이 늘어나자 점점 재밌어지고 있었다.
 ‘야구가 이렇게 재밌었나?’
 어릴 적엔 동네 친구들이랑 공터에서 야구를 하며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있지만 그때야 뭐든 재밌던 시절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때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데 문득 그 느낌을 알 것도 같았던 것이다.
 찰나의 순간 그 시절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기계소리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탓!
 그리고 다음공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공의 모습이 이제까지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다르게 보인다기보다 더 자세히 보인다고 해야 맞는 상황.
 타이밍도 알 것 같은 기분이었고 그보다 뭔가 좋은 느낌에 전신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이었다.
 공의 회전이 보인다.
 “실밥도 보인다. 이 자식아!”
 배트가 움직였다.
 잘 모르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동시에 다리와 허리가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순간적이었지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 아버지.’
 까아아아앙!
 경쾌한 타격 음이 실내를 울렸다.
 순간 경쾌함에 전신에 전기라도 관통하는 것 같은 전율이 일었다.
 ‘손에 아무 느낌이 없다.’
 요란한 소리와는 다르게 기찬의 손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소리만 요란했을 뿐 맞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지 이 느낌은?’
 그리고 시원한 탄산수를 마신 듯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
 순간적으로 묘한 느낌에 조금 놀라고 있는데 곧 더 당황스럽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축하합니다.]
 [홈런입니다.]
 전혀 감정 없는 여자의 음성이었지만 그 어떤 환호성보다 저 강렬하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 순간 멍해 있던 기찬이 곧 소리를 질렀다.
 “끼야아호!”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누가 봤다면 어이가 없을지도 모를 그런 상황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감정보다 이 알 수 없는 기쁨을 만끽했다.
 “와하하. 어떠냐? 나도 한다면 한다. 이 말씀이야.”
 그렇게 좋아하는데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홈런 보너스가 생성됩니다.]
 “홈런 보너스?”
 [홈런 보너스를 받으시겠습니까?]
 이건 뭔 소린가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아마도 일종의 홈런 선물 같은 거라 생각되자 어쩐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준다는데 받아야지.”
 공짜 싫어할 인간이 있을까? 아니 홈런을 친 덕분에 생긴 상품이니 정당한 보상일지도 모를 일이니 공짜가 아닌 것이다.
 띠리링.
 짧은 벨이 울리더니 다시 음성이 흘러나왔다.
 [두 가지 보너스가 있습니다.]
 “두 가지?”
 [첫 번째 보너스는 ‘금수저를 부르는 홈런타자’입니다.]
 [두 번째 보너스는 ‘불꽃마구 괴물투수’입니다.]
 “어라?”
 뭔가 유치한 느낌이라 조금 어이없어 하는데 다시 다그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10초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보너스는 사라집니다.]
 “아 진짜 뭐야? 왜 이리 조급한 건데?”
 선물을 주겠다는 건 좋은데 어쩐지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라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째깍. 째깍.
 [8초 남았습니다.]
 “나 참.”
 어느새 2초의 시간이 흘렀다.
 뭔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두 개로 나누어 놓았을 뿐 별다른 뜻이 없지 않겠나 싶었다. 아마도 배트나 글러브 따윌 선물로 주겠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초 남았습니다.]
 “아, 거 너무 급하네. 정말. 그래 알았어. 남자라면 그래도 홈런타자지.”
 ‘불꽃마구’란 말에 조금 마음이 쏠리기도 했지만 ‘금수저’란 말에 혹하고 말았던 것이다. 홈런타자와 금수저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어쩐지 끌렸던 것이다.
 아무튼 다급한 마음에 그렇게 소리치자 곧 시간 흐르는 소리가 멈추었다.
 우우웅.
 머릿속이 윙하며 울리자 살짝 어지러워졌다. 아무래도 오늘 술이 받지 않는 날인가 보다.
 빵빠라밤.
 팡파르 소리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다 낡아빠진 주제에 꽤나 이벤트가 재밌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얼씨구. 가지가지 하는구만.”
 [축하합니다.]
 [‘금수저를 부르는 홈런타자’로 각성하셨습니다.]
 [경기를 통해 경험치를 올려 더 높은 경지로 오르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띠리링.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
 뭔가 선물을 받을 거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말로만 부자 되라고 지껄이고 그걸로 끝인 거야? 뭐 주는 거 아니었어?”
 소리치며 말했지만 주변은 그저 정적만이 감돌뿐이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결국 땅바닥을 걷어찼다.
 “에이 정말.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썰렁한 배팅센터였고 시설도 낡아 있는 곳이었다.
 뭔가 선물을 기대하는 건 솔직히 딱 봐도 어려운 게 당연했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니 헛웃음만 나왔다.
 애초에 괴물투수고 홈런타자고 결국은 뭘 골라도 이딴 말만 들었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희망고문이라니 어째 허탈하구만.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철창문을 열고나오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뭔가 술술 풀리는 인생일리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지 않았던가?
 “대단하다. 대단해. 금수저를 부르는 홈런타자? 거기다 부자가 되라고? 정말 립 서비스만으로 거저먹는 대단한 낚시에 제대로 걸려버렸네. 그래 내 인생이 그렇지, 어째 운이 지독히 좋은 날인가 싶었다.”
 언젠가 오래전에 ‘부자 되세요.’란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기는 했었지만 이런 낡아빠진 배팅센터에서 놀림조로 당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쩐지 재밌었다는 생각에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그래 뭐, 부자 되라는 덕담도 나쁘지 않았어. 쩝.”
 어쨌거나 술 덕분인지 재미난 경험이었다고 생각했고 또 어쩌면 야구가 재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 홈런만 친다
 
 “일어나!”
 여자의 음성이 방문밖에 들려왔다.
 쾅. 쾅. 쾅.
 “일어나라고!”
 점점 앙칼지게 변하는 여자의 음성에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아 진짜. 모처럼 쉬는 날인데 자게 좀 놔둬!”
 일찍 일어날 이유도 없는데 깨우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침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아, 좀. 그냥 혼자 먹어. 아침 굶는다고 안 죽어!”
 짤깍 짤깍.
 방문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다시 문에서 이상한 소음이 감지되었다.
 “아 씨. 또 시작이네.”
 졸린 눈으로 기찬은 짜증을 버럭 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금방 문이 벌컥 열린 것이다.
 “안 일어날 거야?”
 갓 스물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가 거칠게 문을 열고 빽 소리를 지르자 짜증스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야! 네가 열쇠 도둑이냐? 방문을 왜 또 따는 거야?”
 기찬은 급기야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이런 이상한 기술을 익힌 것인지 언제부턴가 문을 잠가도 소용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왜 이딴 거만 배우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안 일어나니까 그렇잖아. 그리고 너 지금 야라고 했지? 죽을래?”
 “어휴. 정말 미치갔구만.”
 기찬의 눈앞에 있는 여자의 나이는 20세.
 이름은 이경희였다.
 성이 다른 그녀가 기찬의 친동생일 리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기찬에게는 이모라는 사실.
 외할머니가 낳은 늦둥이였던 탓에 분명 기찬의 어머니 막냇동생이자 그의 이모가 분명했다.
 “조카 주제에 까불래?”
 죽일 놈의 서열 타령.
 툭하면 저렇게 큰소리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모는 이모.
 쪼그만 주제에 이모라고 설치는 꼴이야 거의 평생을 봐오지 않았던가? 할 수 없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우. 알았으니까 제발 나가주라. 이모야.”
 “빨리 일어나서 세수부터 해.”
 “알았다니까.”
 “안 일어나면 계속 이렇게 지키고 있을 거야.”
 “아 진짜. 나 속옷차림이니까 좀 나가라고.”
 “이모 앞에선 괜찮아. 사내가 뭘 그런 걸로 부끄러워하고 그래.”
 입을 가리고 말하는 그녀 하지만 눈이 웃고 있다.
 “빨리 나가!”
 기찬이 험악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크’ 하는 표정으로 후다닥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다시 방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조카 좋아하는 동태 국이니까 빨리 나와. 호호호.”
 “아이고.”
 기찬은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감싸 쥐었다.
 
 그녀와 기찬이 함께 살게 된 것은 석 달 정도 전의 일이다.
 반년 전에 갑작스럽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혼자가 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두 명의 언니 집에서 번갈아 가며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차이가 많은 이모들과 그 가족들과 사는 일은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군식구가 늘어난 탓에 은연중에 구박 아닌 구박을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
 덕분에 눈칫밥을 계속 먹던 경희가 힘들어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을 우연히 알게 된 기찬이 이모 집에 찾아가 경희를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했다. 어릴 적부터 자신보다 나이 많은 큰 조카라고 몹시 따르던 그녀였던지라 모른척하기가 힘들어 욱하는 기분에 한 짓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과연 자신이 잘한 짓 인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기찬 역시도 몇 년 전에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고 그녀가 유일하게 남긴 방 두개짜리 조그마한 아파트였지만 혼자인 그에게는 조금 큰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다 항상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그에게 ‘막내이모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왔던 탓에 그냥 모른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녀와 자신의 처지가 혼자라는 사실만큼은 같았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대충 세수를 하고 식탁 의자에 앉자 역시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어제 뭐하느라 그렇게 늦게 들어온 거야?”
 “회식이었다니까 그러네.”
 “으그. 그놈의 회사는 무슨 금요일 저녁마다 회식이냐?”
 “몰라. 다 야구에 미친놈들이라 그런 걸 나보고 어쩌라고?”
 “조카도 옛날에 야구 좋아 했었다며? 그런데 왜 안 어울려?”
 “시끄럽습니다요.”
 “저기······ 그나저나 뽀독뽀독 씻었어?”
 기찬이 야구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경희가 살짝 눈치를 보더니 말을 돌렸다. 그녀도 예전에 기찬의 어머니인 큰언니에게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동태 국을 한 수갈 입에 떠 넣었다.
 “어때? 맛있지? 이모가 조카를 위해 준비한 스페샬이라고.”
 “쩝쩝.”
 “마트에서 이번에 반값에 할인 판매를 하던데 제법 싱싱해서 큰맘 먹고 샀지.”
 신나게 혼자 떠드는 경희를 기찬이 힐끔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이모.”
 “응? 왜?”
 “나이에 좀 맞게 살아. 뭔가 아줌마 같잖아.”
 기찬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경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그······ 그런가?”
 “그래. 어쩐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하지 말고 친구들이랑 좀 어울리기도 하면서 지내라고. 지금도 말이야 주말에 집에 틀어박혀서 그 좋은 젊음을 낭비하고 말이야. 이젠 대학생이잖아. 대학생. 그러니까 좀 즐기면서 살라고.”
 “어째 조카가 더 늙은이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나이 훨 많거든.”
 “아하하 참 그렇지.”
 경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자 기찬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통 때라면 주말에 집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아주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나이 어린 이모랑 살고부터는 ‘집안에서 게임만 해서는 정상적인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이상한 잔소리에 떠밀려 쉬는 날이면 그냥 동네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내 집에서 왜 쫓겨나야 하냐고. 후우.”
 한숨을 쉬며 걷는 자신이 조금은 한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어린 이모를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지만 보기와 다르게 상처를 잘 받는 여린 여자애라는 건 어릴 적부터 봐왔으니 잘 알고 있었다.
 나름 이모 노릇하겠다고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럽기도 한 게 사실이었다.
 외할머니와 둘이서 살다가 갑작스럽게 혼자가 되면서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살도 엄청 빠져있던 그녀였다. 거기다 두 명의 언니들 집에서 얼마나 눈칫밥을 먹고 살았는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하고 있었다.
 하기야 엄마뻘 두 언니의 자녀와도 나이가 엇비슷한 데다가 애들 성격도 거지 같다는 건 기찬도 잘 알고 있었다.
 큰 이모와 둘째 이모의 자식들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그 싸가지 없던 성격 때문에 막내 이모를 제법 괴롭히던 녀석들이었다.
 아무튼 그 일이 있은 덕분에 이모들에게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하지만 그런 막내 이모가 기찬의 집에서 살고부터는 점점 성격이 다시 밝아졌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녀가 점점 아줌마 같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후우, 이거 내 잘못인가?”
 기찬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야말로 사는 게 엉망이었다. 집은 쓰레기로 가득했었고 설거짓거리들은 쌓여 있었지만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탓에 곰팡이가 피었을 정도였다.
 늘 식사는 라면이나 삼각 김밥, 혹은 즉석 만두 같은 인스턴트가 대부분, 거기다 집안에는 늘 물처럼 마셔대던 탄산음료 플라스틱 통이 굴러다니는 생활을 오랫동안 한 덕분에 기찬의 몸이 지금처럼 비대해진 것이었다.
 그런 때에 경희가 집에 들어왔고 부지런한 그녀가 그것을 그냥 보고 넘기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그때부터 경희는 3일에 걸쳐 대청소를 실시, 그제야 인간이 살 수 있는 거처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당연히 그 이후로 생활 패턴이 엉망인 기찬에게 규칙적인 삶을 강조했고 더불어 휴일에도 무조건 아침에 깨워 밥을 먹인 다음 지금처럼 운동 삼아서 동네를 돌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처음엔 110kg에 육박하던 기찬의 몸무게도 그동안 많이 줄어 그나마 며칠 전에 쟀을 때 96kg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기찬이 경희에게 받은 도움이 더 컸다 싶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효.”
 어린 나이의 이모가 보기에도 기찬의 삶이 한심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 곁을 지나고 있는데 사람들의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웃!”
 “이긴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 분명했을 텐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그 근거를 알 수 없어 고개를 돌려 한참을 학교 운동장 쪽으로 바라보았지만 담과 나무에 막혀 잘 보이지 않아 결국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운동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복장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제 퇴근시간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회사 동료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경기 장소가 여기였나?’
 그들의 이야기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늘 모임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디에서 경기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음······.”
 잠시 그곳을 향해 바라보며 턱을 긁던 기찬은 한쪽에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회인 야구라 그런지 응원이라고 할 만큼의 사람이 모여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친분 있는 사람이 몇 명 정도 거기다 경기 도중 마실 물 같은 것들을 관리하는 여자 한 명 정도가 보일 뿐이었다.
 발걸음을 돌리려다 어차피 갈 곳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멈칫했다.
 거기다 어쩐 일인지 어제 그 일 이후론 야구라는 것에 조금 관심이 가 그냥 발걸음을 돌리는 것도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도는 것도 지겨운데 그냥 구경이나 할까나.”
 그래서 응원보다는 그저 구경한다는 정도의 가벼운 생각으로 근처 나무그늘이 있는 벤치로 걸어가 그곳에 앉았다.
 날도 슬슬 더워지는 시기.
 이 좋은 휴일에 뭣 하러 저렇게 땀을 삐질 거리며 저렇게까지 하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야 상관없는 일이었다. 재밌기만 하면 그뿐.
 그리고 한쪽 검은 판이 보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0 대 5로 ‘다크사이드’가 지고 있는 상황.
 그런데 아직 2회였으니 그야말로 박살이 나고 있는 상황이 분명해 보였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스코어를 바라보다 상대팀의 이름이 ‘갤럭투스’임을 확인하고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DC와 마블의 싸움인가? 역시 하늘이 맺어준 라이벌들답네.”
 우습게도 우연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다크사이드’는 슈퍼맨으로 유명한 DC코믹스의 캐릭터였고 ‘갤럭투스’는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으로 유명한 마블코믹스의 캐릭터였던 것이다.
 덕후까진 아니어도 만화나 게임에 관심이 많았던 기찬은 그 이름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덕후가 맞나?
 “나 참, 이름만 거창하게 지었구만. 실력들도 형편없으면서······.”
 하지만 기찬은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구경꾼들이 다 그런 거지.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니 어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던 그 괴물투수라는 인간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사실 공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타석에 들어선 회사 사람들이 전혀 손쓰지 못하고 삼진을 당하는 걸 보면 분명 기찬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타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어라?”
 어쩐지 뭔가 사고라도 난 듯 보였다.
 그 증거로 회사 사람들이 타석으로 모여들고 있는 게 보였으니 말이다.
 “다친 건가?”
 상대 투수가 공을 던졌고 배트를 휘두른 것 까진 보았지만 정확한 상황은 알기 힘들었다. 다만 배트 타격 음이 들려온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배트에 맞은 공이 타자의 몸 어딘가를 가격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은 가능했다.
 
 “젠장, 괜찮아?”
 쓰러진 최형준에게 양성호가 급히 달려가 다리를 살피며 물었다.
 “아으······.”
 고통이 제법 심한지 계속 신음소리를 내자 성호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부어오른 다리를 보니 경기 속행이 어려울 듯 보였다.
 “야, 여기 좀 도와줘.”
 일단 성호는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차에 태운 후 구경 왔던 와이프에게 근처 병원에 데려다 주라고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쩌죠?”
 곁에 있던 춘대가 물었지만 성호는 대답 없이 그저 심각한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보통 때라면 두 명 정도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을 테지만 하필 오늘 두 사람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빠진 상태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급하게 부르기도 어려운 상황, 이렇게 되면 빨리 결정을 내려야한다.
 8명만으로 시합을 계속 해나가든지 아니면 누군가 한 명을 더 끼워 넣어야 한다.
 8명으로 하는 거야 어차피 친선경기에다 상대가 이기고 있는 상황이니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 자리를 비우고 경기를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장기 고수인 사람과의 승부에서 차포를 때고 하는 것 같은.
 그러나 이 상황에서 갑자기 누굴 끼워 넣을 것인가?
 감독 겸 주장인 양성호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이야 대타를 쓰면 되는 거니 그렇다 치더라도 수비에서 한 명이 비는 건 문제가 크기 때문에 문제가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있으니 상대팀의 리더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요즘 몇 경기 이기더니 기가 팍 살아 거들먹거리는 티가 팍팍 풍기고 있었다.
 건들거리며 다가온 녀석이 눈을 내리깔며 양성호에게 물었다.
 “거 숫자가 모자라는 거 아닙니까? 이래서야 경기 계속 할 수 있겠어요?”
 경기를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투로 빈정거리며 말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럼 여덟 명으로 하죠.”
 곁에 있던 혁이 상대의 말투에 빈정이 상해 퉁명스럽게 말하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이, 그건 안 되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그저 리그전도 아니고 단순한 친선경기니 괜찮지 않나 싶었다.
 “아무리 사회인 야구라도 지킬 건 지킵시다. 상대팀을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에 성호는 이를 악물었다.
 “우롱하긴 누가 우롱한다고 그래요?”
 “8명이 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팀을 우롱하는 게 맞잖아요.”
 “우리가 일부러 8명으로 하자는 겁니까? 한사람이 부상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애초에 딱 9명만으로 경기에 임한 것 자체가 문제구만. 아무리 사회인 야구라고 해도 부상이 그리 희귀한 것도 아니니 미리 준비했어야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능글거리는 말에 동조해줄 수도 없었다.
 “난 오히려 저 투수가 의심스럽구만. 정말 저 친구 선수출신 아니에요?”
 “커엄, 정말 아니라니까 그러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는 꼴이 수상쩍었다. 하지만 확인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가난한 인간들 끼리 모여 하는 친선경기 수준이라 심판도 기록원도 없는 경기였으니까.
 “젠장. 하필 이럴 때.”
 그렇게 투덜거리던 그의 눈에 나무 그늘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
 ‘아 젠장. 눈 마주쳤다.’
 멍하게 바라보던 기찬은 양성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고 말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며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기찬아!”
 “쳇.”
 회사 선배인 양성호의 부름에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을 때 벗어났어야 하는데 판단을 빨리 내리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야, 박기찬!”
 자꾸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몸을 돌렸다.
 뭔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모에게 욕먹더라도 집에 그냥 있을걸.’
 ‘오늘은 아침부터 야구얘기로 기분을 잡치더니 기어이 야구로 망하는구나.’
 그 사이 달려온 날렵한 체형의 양성호가 박기찬의 얼굴을 바라보며 평상시와 달리 반가운 얼굴을 했다.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더니 다짜고짜 기찬의 팔을 덥석 잡고는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어, 왜이래요?”
 ‘이 인간 왜 이리 힘이 세?’
 날씬한 성호였지만 보기와 달리 힘이 좋은 탓에 맥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는 상대팀 리더에게 근처에 다가갔다.
 “이 친구가 빈자리를 채울 겁니다.”
 성호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기찬의 위아래를 슬쩍 훑어보았다.
 “이 사람이 대신 하겠다고요?”
 “네.”
 “혹시 선수 출신인 건 아니겠죠?”
 외모만으로 보면 강타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그가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절대 아닙니다. 딱 봐도 운동하고는 거리가 있어 뵈잖아요.”
 성호가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혹시나 하는 얼굴로 기찬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실 그도 자세한 건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닌 건 맞는데, 말을 꼭 그렇게······.”
 기찬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곧바로 끊어버렸다.
 “그럼 되겠죠?”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버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곧 자신들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고 설사 운동 좀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질리는 없다는 생각에 손을 내밀었다.
 “그럼 신분증 제시해 주세요.”
 “신분증요?”
 갑자기 신분증 제시하라는 말에 기찬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원래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나중에 문제될지 모르니까 확인차원에 그런 거야. 너 신분증 있지.”
 성호가 말하자 기찬이 잠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다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곧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었다. 늘 지갑을 가지고 다니던 습관이 이 순간만큼은 후회스러웠다.
 ‘역시 귀찮은 일에 말려들었어.’
 뭔가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평소 친분 있던 형이라 그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신분증을 다가온 사람에게 제시하자 가지고 온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조심스럽게 회사 동료 몇 명이 성호에게 다가갔다.
 “저기······.”
 곁에 있는 기찬을 의식하는지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형. 저 형 운동신경 꽝인 거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럼 이대로 경기를 포기해?”
 “그건 아니지만······.”
 “당장 불러올 다른 사람 있어?”
 “······.”
 더 이상 대답을 못하자 잠시 바라보던 성호가 다시 기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옷 갈아입을 시간은 없으니까 음······ 그거 가져와.”
 성호의 말에 한 명이 뭔가를 성호에게 건넸다.
 “일단 이거 쓰고 시작하자.”
 그리고 뭔가가 못마땅해 하는 얼굴의 기찬에게 타자용 헬멧을 씌었다.
 “네?”
 “빨리 빨리.”
 기찬은 얼떨결에 등이 떠밀리며 타석까지 서고 말았다.
 어느 샌가 자신의 손에는 방망이까지 쥐어져있는 걸 보니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둘러 양성호는 상대 리더에게 다가가 뭔가를 이야기했다. 아마도 복장문제에 대해 다시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대충 상황은 정리되었다.
 “투 스트라이크 원 볼로 시작하는 거 맞죠?”
 상대팀 리더의 말에 얼굴을 굳힌 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형준이 섰던 타석의 볼 카운트가 바로 기찬에게 이어진 것 같았다.
 “기찬아, 시작하니까 일단 배트 들어.”
 성호의 다그침에 한숨을 쉰 기찬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배트를 들어올렸다.
 ‘설마 아웃되었다고 날 원망하지는 않겠지.’
 스트라이크 한 개면 아웃이 되는 상황이니 아무도 기찬에게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에라, 될 대로 되라지.’
 그리고 상대 투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뭔가 주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거기다 어쩐지 얼음 인간이 아닐까 하는 싸늘한 느낌도 들었다.
 ‘뭐야 저 놈은?’
 뭔가 초면이지만 뭔가 자신을 깔보는 듯한 느낌의 시선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곧 지금 상황을 인식하자 긴장감이 몰려왔다.
 사람을 상대로 실제 타석을 들어선 것이 정말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투수가 준비를 취하자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딩동.
 [슈퍼 플레이어 DNA가 활성화 됩니다.]
 우우우우웅.
 머리가 띵한 느낌이 들더니 시야가 갑자기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밝아지자 주변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사물이 알 수 없는 문자의 형태로 형상화 되어 있었고 그것들이 뭉쳐 있는 모습의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자 소름에 머리가 쭈뼛거렸다.
 [경기 시작합니다.]
 여자의 음성이 들림과 동시에 기찬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볼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입니다.]
 어제 배팅센터에서 들었던 그 여자음성이 분명했다.
 “어······ 어?”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 투수 확인.]
 [플레이어의 각성이 시작됩니다.]
 다시 머릿속이 위잉 하는 소리가 울리며 상대팀원들을 일일이 확인하려는 듯 보이는 붉은 깜빡이가 사람을 찍으며 움직인다.
 기찬은 마치 자신이 영화 속 기계인간이라도 된 것 같은 시야에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 땀.
 혹시 자신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헉. 헉.”
 그리고 상대 선수들을 모두 확인했는지 더 이상 붉은 깜빡이는 보이지 않았다.
 [분석이 모두 끝났습니다.]
 [플레이어 각성을 마쳤습니다.]
 [‘금수저를 부르는 홈런타자’에 눈뜹니다.]
 [직구에 강한 대응 능력을 각성합니다.]
 너무나 당황한 탓에 계속 ‘어 어’거리며 눈을 비비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산만한 행동 때문에 기찬의 뒤에 있던 포수가 일어서더니 양손을 들어 타임을 불렀다.
 “아 정말 왜 그래요?”
 타석에서 기찬이 이상한 소리와 행동을 보이자 포수가 어이없어하며 기찬에게 따져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상태임을 알지 못하는 포수는 어쩐지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이봐요.”
 포수가 화난 음성으로 불렀지만 기찬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결국 타석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머릿속을 울리던 묘한 울림이 사라졌다.
 “저 자식 왜 저래?”
 기찬의 행동을 지켜보던 양성호가 어이 없어하며 바라보다 타석에서 물러서는 걸 보고는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저기······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이상한 소리?”
 “여자 소리요.”
 “뭔 봉창 뚜드리는 소리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성호역시 주변을 둘러보고 소리에도 귀 기울였지만 당연하게도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 정말 괜찮아?”
 “형 정말······.”
 기찬은 말을 더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양성호도 그랬고 주변 사람들 역시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것이다. 아무래도 이 현상은 자신에게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어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긴장 때문에 그런 걸 거야. 그러니까 심호흡 한번 하고 시작하자.”
 성호의 말에 곁에 있던 포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나 참, 가지가지 하네. 정말.”
 하지만 이런 표정은 상대 선수들뿐만 아니라 회사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기찬은 그런 주변의 반응보다는 아직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더 황당한 상태라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못했다.
 어쨌거나 성호의 도움으로 다시 타석에 들어선 후 다시 자세를 잡자 상대 투수가 약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곧 다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기찬의 머릿속이 윙 하고 울리더니 음성이 들려왔다.
 [상대 투수 구질 분석에 들어갑니다.]
 “억.”
 기찬이 허둥대다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아 정말······.”
 포수가 짜증이 나는지 투덜거리자 기찬은 하는 수 없이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주변 분위기 때문에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양성호 마저도 표정이 좋지 못하니 더 이상 이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상대 투수 와인드업과 동시에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승부를 시작합니다.]
 [예상 경로를 파악합니다.]
 여자의 음성과 동시에 붉은 색으로 공의 궤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붉은 실선이 상대 투수의 위치에서 기찬의 뒤에 있는 포수까지 길게 뻗어있었다. 마치 붉은색 빨랫줄 같은 느낌이랄까.
 선의 위치로 보면 분명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지나고 있다.
 ‘이거 설마, 공의 이동 경로 인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손끝이 정확히 붉은 실선에 닿아 있고 공도 분명 실선을 걸치며 출발하는 걸 확인했다.
 ‘선과 타이밍.’
 갑자기 떠오른 생각.
 그리고 순간 갑자기 어쩐지 쳐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전신에 퍼졌다.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쳐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기찬은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배트를 휘둘렀다.
 상대의 공이 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계산을 마친 의지가 배트를 방향을 선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평소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부드럽게 휘두르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배트가 붉은 실선에 닿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까아앙!
 경쾌한 알루미늄 배트의 타격 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기찬의 손에선 별다른 느낌이 전달되지 않았다. 배팅센터에서 느꼈던 바로 그 시원한 느낌이었다.
 기찬이 쳐 올린 공이 허공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투수 머리 한참 위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어? 어?”
 다크사이드 팀 동료들이 벌떡 일어섰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기찬이 쏘아올린 공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줄곧 무표정하기만 하던 상대 투수마저도 그 모습에 놀란 기색이었다.
 상대 수비수들이 뒤로 달리는 모습들이 보였지만 곧 공을 쫓는 걸 포기 하고 말았다.
 그렇게 공은 먼 곳의 담을 훌쩍 넘어가고 말았다.
 [홈런입니다.]
 기찬 역시도 황당한 마음에 멍하게 서 있었고 주변 사람들 역시도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정신을 차린 양성호가 타석에서 아직 멍청하게 서 있던 기찬을 보고는 소리쳤다.
 “베이스 돌아. 베이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기찬이 여전히 얼떨떨해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득점에 곧 정신을 차린 팀원들이 뒤늦게 환호성을 질렀고 상대 투수는 그저 공이 넘어간 담장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찬이 베이스를 돌아 홈에 도달하자 다시 음성이 울렸다.
 [첫 홈런입니다.]
 [첫 보너스 스킬 ‘느림의 미학’이 생성됩니다.]
 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여자의 음성을 계속 되었다.
 ‘느림의 미학?’
 알 수 없는 스킬이 생성되었다는 말에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팀 동료들이 달려들어 온몸을 두들겼다.
 “야 이 자식 이런 재주가 있었네?”
 “기찬이 형. 대박!”
 “이 자식 숨은 한방이 있었네.”
 달려든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얼떨결에 1점을 만회해 1 대 5가 되었다. 아직 스코어 차이는 있었지만 홈런 한 방에 팀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상대 팀의 투수를 확인하고는 이전처럼 무득점 완패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기찬의 선전으로 무득점의 굴욕적 패배만은 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가라앉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곧 다음 타석에서 아웃이 되면서 공수 교대를 했고 기찬은 우익수에 배정받았다.
 둔한 몸집 때문에 움직이기 싫어하는 기찬으로서는 넓은 외야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 나름 부담되기는 했지만 운 좋게도 유달리 공이 그에게 날아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대부분 우타자에 밀어치는 센스가 있는 사람이 부족한 사회인 야구의 특성상 우익수 방면으로는 공이 별로 날아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양성호가 그곳에 배치시킨 탓이다.
 그렇게 득점 없는 3회에 한 점, 그리고 4회를 지나 5회 초에 한 점을 더 허용하고 5회 말이 되자 1 대 7의 상황. 그리고 다시 기찬의 타석이 돌아왔다.
 2사에 주자가 없는 상황.
 기찬은 여전히 어색한 모습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상대 투수의 시선이 다시 기찬을 살피기 시작했다.
 배트를 휘두르는 준비동작을 보면 그다지 강한 선수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첫 타석에서 그는 가볍게 자신의 공을 넘겨 버렸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살펴봤지만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첫 번째 홈런은 아마도 운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직구라는 것이 대충 타이밍만 잘 맞으면 우연히 큰 장타가 나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방심할 수는 없는 일.
 첫 번째보다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긴장 때문인지 손에 땀이 차오르자 로진백을 손위에 올려 툭툭 튕기다 땅에 떨어뜨렸다.
 기찬이 긴장한 얼굴로 께름칙한 표정을 지으며 타석을 내려다보며 다가갔다.
 그리고 타석에 선 기찬의 눈이 다시 커졌다.
 [승부를 시작합니다.]
 상대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예상 경로를 파악합니다.]
 “흡.”
 놀란 기찬이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도 상대의 투구 예상경로가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이번엔 첫 번째보다 약간 낮은 공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스트라이크존에 살짝 걸치는 직구였다.
 ‘또 직구인가? 정말 다른 구질은 던지지 않는 타입인가? 그나저나 이 선을 믿어도 되는 건가?’
 투수가 공을 던졌다.
 다시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
 [스킬 ‘느림의 미학’이 적용됩니다.]
 갑자기 날아오던 공이 미세하게 느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엇!”
 그렇다고 공이 갑자기 엄청나게 느려진 건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몸은 마치 익숙한 것을 대하듯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듯한 느낌. 아니 그보다 자신의 의지가 제대로 전달되는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리고 곧바로 가볍게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가 다시 예상 경로에 그어진 붉은 실선에 닿았다.
 까아앙!
 이번에도 첫 타석처럼 경쾌한 타격 음이 울려 퍼졌다.
 아니 첫 번째 타석보다 오히려 느낌이 더욱 좋은 타격감.
 “······!”
 맞는 순간 투수 변성철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며 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윽!”
 그도 나름 사회야구에서 경험 많은 투수였으니 지금 타자가 휘두른 배트가 정확히 공을 받아쳤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나올 결과는 잘 알고 있었다.
 공은 좌측 담장을 향해 쭉 뻗어 나갔다.
 이번에도 수비수들이 허겁지겁 공을 따라 달려갔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씨발.”
 “아, 젠장.”
 담을 넘어가는 공을 바라보는 수비수들의 입에서 허탈함에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홈런입니다.]
 [경험이 쌓여 좀 더 감각이 예민해집니다.]
 우와아아아!
 “연타석 홈런!”
 “대박이다!”
 “뭔 일이래? 오늘 기찬이 포텐 터지는 날이야?”
 “럭키가이, 박기찬!”
 “싸랑해요, 박기찬!”
 “반했어요, 박기찬!”
 팀 동료들이 벌떼처럼 일어서며 오버 섞인 고함으로 환호했다.
 처음은 그저 운이 좋아서 친 홈런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이를 갈고 있는 듯 보인 상대 괴물투수의 공이나 건드려 볼 수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진짜 물건이었다.
 늘 회사 동료들의 체육대회도 그저 건성으로 참석했고 솔직히 그나마 움직이는 것도 굼떠서 운동과는 담쌓고 지내는 그저 휴대폰 게임만하는 겜덕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괴물 타자였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팀에 끌어들였을 것이다.
 “저 자식 저런 실력을 숨기고 잘도 살았군.”
 베이스를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돌고 있는 기찬을 바라보며 성호가 얄밉다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반대로 싱글벙글 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의 활약으로 상대 리더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아직 경기 자체는 큰 점수 차로 밀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느덧 어슬렁거리며 홈베이스에 도착하자 이번엔 정말 기찬을 배구공으로 여기는 것인지 모두가 그에게 스매싱을 날렸다.
 온몸에 꽂히는 축하의 난타 스매싱들.
 “아악. 아퍼! 그만해!”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는 기쁨에 멈추지 않았다.
 “이 새끼 이런 실력을 이제까지 감추고 있었다니 용서 못 해!”
 “사랑스러운 형. 오늘부터 존경하기로 마음먹었어요.”
 “하하, 이 자식 거포의 피가 흐르고 있었네.”
 기찬의 홈런으로 점수는 다시 2 대 7의 상황.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상대의 리더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씨발, 왜 저 새끼한테만 홈런을 두 방이나 맞냐고. 혹시 선수 출신 아니야?”
 자신이 어렵게 데려온 용병이 한 녀석에게만 두 방의 홈런을 맞았으니 심기가 불편한 게 당연했다. 그래도 경기자체는 아직 압도적인 상황이라 걱정할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한 점도 줄 생각이 없던 그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더욱 화가 났던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상대의 리더가 투수에게 다가갔다.
 
 “투수를 교체하려나?”
 상대 리더가 걸어 나오는 걸 보고는 기찬의 팀 동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지.”
 “뭐?”
 “저길 보라고.”
 팀원 한 명이 눈짓으로 투수 쪽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투수에게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그에 반에 상대투수는 여전히 덤덤한 모습.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모습에 모두 놀랐다.
 “그냥 쇼하는 거야?”
 “쇼?”
 “그래. 어쨌거나 팀의 리더니 이 상황에서 뭔가 하려는 흉내라도 보여줘야 하겠지.”
 “그나저나 저 투수 정말 멘탈 갑이네.”
 “그러게 홈런을 같은 사람에게 두 방을 맞고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니 놀랍다.”
 “하긴 아직 점수가 앞서니까 상관없을지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행동으로 봐서는 그냥 계속 던지게 할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기찬과의 승부를 한 번 더 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리고 솔직히 두 명의 투수가 더 있었지만 이런 흐름의 분위기를 감당할 선수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다시 경기는 다시 속행되었다.
 하지만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기찬을 제외하고는 1루조차 밟아보지도 못하고 5회가 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멘탈을 가진 투수가 아닐 수 없었다.
 “진짜 징그러운 녀석이다.”
 “누가 아니래?”
 기찬의 팀원들은 혀를 내두르며 수비위치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7회 말 다시 만난 두 사람.
 점수는 6회 초에 1점을 더 내주어 2 대 8로 더 벌어졌다.
 2사에 주자 1루와 2루 상황.
 원래라면 저 두 명의 주자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뭔가 의도적으로 기찬과 승부를 내기 위해 출루 시켰을 거라고 모두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전혀 출루를 허용하지 않던 투수가 갑자기 포볼 두 개를 연속으로 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기찬은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원아웃이면 경기는 패배로 마무리 될 것이다.
 다크사이드 팀원들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기찬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이경기의 승패는 이미 상대 쪽으로 기울어진 게 확실했지만 기찬의 세 번째 타석에서 또 터질지 모를 기적을 보고 싶은 욕망이 강해서였다.
 기찬이 세 번째로 타석에 들어섰다.
 전의 홈런 두 방 때문인지 상대 투수의 눈빛이 불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거 눈빛 한번 무섭네.”
 이글거리는 시선이 기찬에게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르게 주눅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갑작스런 능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번의 타석에서 이미 홈런을 날린 덕에 조금은 야구에서도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 번째 타석이 되니 어쩐지 몸에 피로가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이놈의 저질체력.’
 별달리 바쁘게 움직인 바도 없고 그저 홈런 두 방으로 베이스를 돈 것 이외엔 무리한 기억도 없었지만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살아온 탓에 벌써 체력이 간당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투수의 기운이 바뀌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주위에서 하얀 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인 것이다. 두 번째 타석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빛이었는데 어째서 저런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 투수가 본연의 힘을 각성했습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황당하게도 상대방 투수가 각성했다는 소리에 기찬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상대방의 각성이라는 얘기까지 들으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 정말 정신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승부를 시작합니다.]
 상대 투수의 와인드업.
 느림의 미학이 자동 적용되므로 인해 기찬의 눈이 점점 더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쥐어진 공에서 미세하게 빛이 났다.
 그와 동시에 손끝에서 출발한 붉은 실선이 기찬의 근처까지 쭉 뻗어오다 갑자기 옅어지더니 선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이제까지는 선의 모습이 기찬의 앞에까지 쭉 뻗어 있었던 탓에 타이밍만으로 쳐낼 수 있었지만 이번 공은 어쩐 일인지 선이 근처까지 와서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기찬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공이 포수 미트로 빨려 들어갔다.
 파앙!
 [볼입니다.]
 공이 아래로 떨어진 탓에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것 같았다.
 [플레이어의 능력으로는 아직 변화구 대응능력이 부족합니다.]
 그제야 기찬은 선이 근처에서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이 변화하면 붉은 선이 사라지는 원리구나.’
 그제야 처음 들었던 ‘직구에 강한 대응 능력’이란 말의 진정한 뜻을 이해한 것이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기찬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씨발, 저거 커브 아니었어?”
 “아으, 소름. 저런 공을 어떻게 상대해?”
 “역시 직구만 가진 녀석은 아니었네.”
 “역시 선수 출신 맞다니까.”
 그러나 상대투수는 전과 달리 기찬이 전혀 반응하지 않자 놀라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유인구를 던졌는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움직이지도 않았으니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어디서 저런 타자가 튀어 나온 것인지 황당한 느낌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두 번의 홈런에 겨우 버티던 그의 멘탈이 상대의 이번 반응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투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이런 두려움을 동반한 긴장감을 느낀 것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모자를 다시 고쳐 쓰고 로진백을 들어 손에 톡톡 튕기고는 다시 땅에 떨어뜨렸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들어 타자를 노려보았다.
 겉은 어설퍼 보이지만 절대 속아서는 안 되는 녀석인 것이다.
 방금 전의 커브에 대한 타자의 반응은 마치 ‘이딴 공은 상대하지 않겠어.’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누가 뭐래도 빠른 직구다.
 어설프게 상대하려던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공을 던져 보이겠다고 말이다.
 
 팟!
 상대 투수의 몸에서 더 강한 빛이 일었다.
 ‘또 각성한 건가?’
 하지만 여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걸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와인드업.
 이번엔 상대 투수의 손에서 빛이 나지 않았다.
 ‘직구······?’
 금세 원리를 깨달은 기찬이 배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곧바로 그의 눈앞에 펼쳐진 붉은색은 실선.
 이번에는 자신의 몸쪽 스트라이크존에 걸쳐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른 느낌의 공이 투수 손을 떠나 포수의 미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붉은 실선의 궤적과 도달 위치를 확인한 기찬의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각성한 탓인지 이전과 달리 느림의 미학이 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날카로웠다.
 아마도 스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기찬의 눈에는 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찬은 타이밍에 맞춰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알 수 없지만 뭔가 모를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배트가 붉은 실선에 닿자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과 강한 충돌이 일어났다.
 묵직한 공이 순간 기찬의 배트를 밀어버릴 것 같은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기찬은 본능적으로 하체의 힘과 허리를 이용해 공을 밀어붙였다.
 “으아아!”
 기찬의 사력을 다한 배팅이 작렬했다.
 까아아아아앙!
 맞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져오는 쾌감에 전율이 일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짜릿한 순간이 있었을까?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지금은 필요하지 않았다.
 수비수들의 허탈한 시선이 날아가는 공에 모였다.
 이번에도 결국 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와아아아아!
 “씨발. 오늘 작살이다. 진짜!”
 “아오오오오!”
 “천하제일 강타자!”
 “박기찬! 박기찬! 박기찬!”
 ‘다크사이드’ 팀원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열광했다.
 [쓰리런 홈런입니다.]
 [경험치로 인해 몸놀림이 더욱 능숙해집니다.]
 그렇게 세 번째 홈런을 날리고 베이스를 도는 동안 상대투수의 표정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감정을 상실하기라도 한 것 같았던 그 마저도 홈런 세 방이 주는 충격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날 경기는 이렇게 기찬의 홈런 세 방으로 결국 5 대 8로 마무리되었다.
 비록 경기는 졌지만 인상적인 하루였고 기찬 자신에게도 잊지 못할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되었다.
 
 <『홈런만 친다』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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