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때는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 태백산 깊은 곳에서 기합소리가 들렸다. 짧지만 절도 있는 기합소리와 더불어 무언가가 바람을 가로지르는 소리 또한 들렸다. 이어 한 청년이 나무로 만든 검을 일정한 간격으로 내려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청년의 얼굴에 맺힌 땀이 얼어붙은 땅을 적셨을 때, 청년은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다.
지고 있는 햇빛이 청년의 얼굴을 비추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청년의 복장은 다소 특이한 면이 있었다. 겨울이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그의 옷은 명주실로 만든 얇은 두루마기였기 때문이다.
청년은 검을 늘어뜨리고는 그 자리에서 심호흡을 했다. 몇 분간 심호흡만 하더니 가쁜 숨소리가 잦아드는 듯, 이내 숨이 고르자 청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청년의 뒤에는 거대한 체구의 노승(老僧)이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이 느껴질 만한 체구였다.
“한아, 이제 하산(下山)하거라.”
“······!”
노승의 말에 한이라 불린 청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노승은 한이 놀라든 말든 말을 이어나갔다.
“네 검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더 이상 너에게 깨달음을 주지 못할 것 같다.”
한은 그런 노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한은 눈을 감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때 우연인지 한의 주위로 강한 바람이 잠깐 몰아쳤다. 동시에 낙엽들이 한의 주변으로 흩날렸다.
한은 낙엽의 비를 맞으며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진심이시군요.”
노승은 어느새 챙겨온 목검을 한손으로 들고 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은 무심한 눈으로 노승과 목검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오거라.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수행을 했는지 보자.”
노승의 말에 한은 늘어뜨린 목검을 두 손으로 다잡았다. 노승은 한이 검을 제대로 잡자마자 투기를 뿜기 시작했다. 한 역시 노인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투기를 뿜었다.
선공은 노승이 먼저였다. 노승은 체구에 걸맞지 않은 속도를 자랑하며 한을 공격해 들어갔다.
노승이 노리는 곳은 한의 머리! 하지만 한은 노승의 눈을 주시할 뿐,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한의 검이 움직였다.
파팍!
“······!”
목검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승의 목검은 산산이 부서져 공중으로 흩날렸다.
하지만 한의 검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금이 나버리며 순식간에 검의 절반이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은 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제 만든 검이었는데······.”
“엄청나구나. 지난 시간동안 무슨 수련을 한 것이냐?”
노승이 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검을 던져버리고는 말했다.
“지난 십 년 동안 오로지 검술만을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스승께서 출타하신 다섯 달 동안은 제가 이곳에 온 뒤에 배운 두 가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베기와 찌르기 말이더냐? 난 분명히 다른 많은 기술들을 전수해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기술들은 수련하지 않은 것이냐?”
“얼마 전에 은사께서 가르쳐 주신 기술들 역시 베기와 찌르기에서 파생(派生)되어 나온 것들에 불과하단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겨울바람답게 매우 싸늘한 바람이었다. 해는 이미 져버려 주위는 어둠으로 가득 찼다. 노승은 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날이 추워졌으니 안에서 얘기 하자꾸나. 들어 오거라.”
“네.”
노승은 한을 데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노승과 한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거대한 바위 밑에 깔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암자(庵子)였다.
한이 암자 안으로 들어서자 밖과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이 자리에 앉자 뒤따라 들어온 노승 역시 한의 앞에 앉았다. 노승이 초를 키자 곧 주위가 환해지긴 했지만 냉기마저 가시진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한참동안 서로 말이 없다가 노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넌 내공을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배워볼 생각은 없느냐?”
“없습니다.”
노승은 한의 확고한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노승이 한숨을 내쉬자 한이 물었다.
“속세로 나가라는 말씀이······ 정말 사실입니까?”
“그렇다.”
“전 의지할 혈육이 없습니다. 제가 다섯 살 무렵 부친께서 하산하신 뒤로 속세에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있으면 아까운 세월을 흘려보낼 뿐이다. 승려로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넌 아직 젊다. 젊은 나이에 중이 되면 잡념이 많아져 깨달음을 얻기가 힘든 법이다. 속세에 내려가면 부친의 흔적을 발견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분명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노승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또한 한 역시 내심 속세에 나가보고 싶었다.
한의 나이 스물다섯. 5살에 부친에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와 은사를 만났고 은사와 은사의 동료 승려 몇 분을 제외하면 한이 만난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한은 그래도 고민했다. 속세로 내려가면 아는 이 하나 없다. 지금까지 산에서만 지내던 자신이 어찌 속세의 생활에 적응한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이 떠난 뒤 노승이 홀로 지낼 것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
“마음을 정하기 힘든 것이냐? 혹시 속세에서 길을 찾기 어렵다면 내 아는 시주께 부탁해 네가 부친을 찾을 때까지 도와달라고 청해 보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속세에 나가는 게 불안하기도 하지만, 은사께서 어떻게 생활 하실 지도 불안해서 말입니다.”
“허허, 내 걱정을 해주는 건 고맙지만 난 네가 떠나고 나면 원래 있던 절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걱정만 하거라.”
한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고민했다. 속세로 가는 건 확실히 불안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 발을 들여 놓는 다는 것. 그것은 실로 자신이 5살 때 이곳에 온 심정과 비슷했었다.
‘그래. 내가 이곳에 왔을 때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속세로 내려가도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나중엔 익숙해지겠지.’
이윽고 결심이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노승을 바라보았다. 한의 눈빛을 읽은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심이 섰구나. 속세로 나가기로 결정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한의 단호한 말에 노승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잘 생각했다. 그럼 속세로 나가기 전 주의해야 할 사항을 알려주겠다.”
“경청하겠습니다.”
노승은 한에게 이런저런 말을 해 주었고 한 역시 노승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고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밤사이 비가 조금 내렸는지 바닥이 조금 질척거렸다.
한은 문을 조금 열었다. 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노승이었다.
노승은 앞마당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물가로 간 뒤 세수를 했다. 노승은 세수를 하고 있는 한을 발견했는지 한에게 다가갔다.
“일어났느냐.”
“네, 그런데 하산은 언제······?”
“허허, 벌써부터 세상을 보고 싶어진 것이냐?”
“은사께서 말하신 강자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한의 대답에 노승은 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으나 온기가 느껴졌다. 한은 그런 손이 싫지 않았다.
“산을 내려가면 너도 잘 아는 시주 한 분이 계실 거다. 그분의 말씀을 잘 따르고 꼭 부친의 흔적을 찾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내가 어젯밤 알려준 금기사항 역시 잘 지키면 속세에서의 삶은 순조로울 것이다.”
“명심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자로 쓰거라.”
노승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돈이었다. 한은 돈의 가치가 기억나지 않았지만 꼬깃꼬깃하게 접혀진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한은 돈을 윗주머니에 챙긴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5살 때부터 살아온 곳이었다. 그런 정든 곳을 떠나려 하니 한은 왠지 마음 한 곳이 허전해졌다. 주위를 몇 번 더 둘러본 한은 자신의 은사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그렇게 커다랗게 보이던 체구가 오늘은 작아만 보였다. 한은 조용히 바닥에 앉아 노승에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일어나거라. 진흙이 묻는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그래. 훗날 연이 있거든 다시 보자꾸나.”
노승의 말이 끝나자 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옷이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은 노승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산을 내려갔다. 그렇게 노승과 한은 헤어졌다.
때는 2월의 막바지.
한은 나이 스물다섯에 속세로 내려갔다.
# Chapter 1 접속
펄럭—
한 청년이 현관문 밑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신문을 꺼내 펼쳐보았다. 신문의 1면에는 늘 그렇듯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기록되어 있었다. 청년은 관심 없는 듯 신문을 이리저리 넘겼다.
펄럭—
신문을 몇 장 정도 넘겼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건, 사고 면의 기사란이었다.
2058년 7월 4일자 XX 신문
대학생 K모군, 게임하다 쇼크사!
K군의 유족들, 가상현실게임 ‘ROR’에게 소송 걸어.
“타핫!”
기합 소리가 도장 안을 가득 메운다. 청년은 보던 신문을 잠시 접고 도장 안을 바라보았다. 도장 안에는 14, 5세 정도의 아이들이 죽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청년은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까지!”
청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휘두르던 죽도를 멈추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청년은 아이들을 한 번씩 쳐다본 뒤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청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청년은 다시 자리에 앉아 신문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 나가자 신문을 접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청년은 도장 구석에 있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책상 하나와 조그마한 침대, 그리고 선풍기 한 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청년은 책상 위의 사진을 들여다보였다. 사진 안에 있는 사람은 청년과 약간 닮은 듯한 얼굴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이를 바라보던 청년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던 중 현관문에서 청년을 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임기 설치 회사에서 왔습니다! 아무도 안 계세요!”
“아, 지금 나갑니다!”
청년은 사진을 책상 위에 잘 세워둔 뒤 도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열자 빨간 모자를 쓴 사내 둘이 자신들의 체구만 한 상자를 도장 안에 내려놓았다.
“이한 씨, 맞으시죠?”
“네.”
“여기다가 서명해 주시고요. 아, 그리고 여기도 서명해 주세요.”
검은 머리의 청년은 바로 한이었다. 한은 사내가 시키는 대로 서명을 했고 사내는 서명을 확인한 후, 상자를 들어 게임기를 설치할 장소에 대해 한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은 2층에 설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커다란 상자.
사내들이 상자를 2층의 방으로 옮기자 한은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산을 내려온 후, 한은 시주에게 가서 노승의 말을 전했고 시주는 한과 함께 한의 부친을 찾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의 부친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이 구청에 주민등록신청을 하기 위해 찾아 갔을 때 한의 호적에서 부친은 이미 사망했다고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에도 불구하고 한은 전혀 슬프지 않았다.
너무 어릴 적 일이라 이미 아버지의 얼굴마저 기억나지 않는 상황. 곁에 있었던 시주는 꽤나 놀란 듯이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말이다.
한의 주민등록신청을 마치자마자 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일이었다. 아무리 슬프지 않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부친이 상을 당했으면 언제, 어디서 상을 당했는지 그리고 묘는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시주의 도움으로 3개월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닌 결과 아버지는 자신이 속세로 나오기 3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유골은 마땅한 친척이나 자식이 없어 납골당에 화장된 채로 모셔져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한은 아버지의 유골을 찾기 위해 납골당에 가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한의 명의로 해 놓은 도장 한 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은 속세에서 거주할 곳이 생긴 것에 대해 매우 안심했었다. 더 이상 시주의 도움만을 빌린다는 게 왠지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한이 도장을 찾아 갔을 때, 도장은 매우 낡아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도장은 2층 건물이었는데 요즘 시대와는 맞지 않게 1층 바깥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었다. 2층 지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은 도장 기와가 자신이 살던 절의 기와와 흡사해서 마음에 들었다.
도장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했던 것만큼 낡진 않았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고 바닥에 지네가 몇 마리 돌아다니는 것과 천장에 거미 몇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는 것만을 빼면 말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도장 바깥도 기와에 먼지가 쌓이고 3년 동안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서 낡아 보였지, 실제로 오래된 건물은 아니라고 했다.
한은 도장을 깨끗이 청소한 뒤 2층 역시 청소를 마쳤다. 그리고 2층을 자신의 거처로 삼기로 하고 도장은 자신이 수련을 할 장소로 정했다.
속세로 나온 후,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한의 궁극적인 목표는 속세에서의 깨달음이기 때문이었다. 한은 이제부터라도 속세에 적응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한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시주의 도움을 받아한 달 정도 기본적인 물가와 현재 사회의 흐름을 배웠다.
2058년인 지금. 한이 살고 있는 나라인 한국은 인구가 더 이상 증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2030년까지만 해도 분단되어 있던 남쪽과 북쪽이 통합을 했다는 것. 그로 인해 약 8년간 한국의 경제가 매우 안 좋아졌고, 2040년부터는 빠른 사회, 경제, 문화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반대로 출산율은 점점 감소했다고 한다. 출산율이 감소한 이유가 뭐라고 하는 것을 들었지만 한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기억하지 않았다.
한이 유일하게 기억한 것은 군대 문제였다. 시주의 말로는 신체가 건강한 남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군대를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은 군대에 입대할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자격 조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은 신체도 건강하고 정신적인 면도 정상적이지만, 단 하나의 결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현재 군 입대 조건은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초등 교육도 받지 못한 한은 당연히 입대 조건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론적으로 한은 군 면제대상이었다. 이것을 알게 된 한은 내심 아쉬워했었다.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 전까진 속세에서 아는 이 하나 없이 생활하기가 힘들어서 군에 들어가서 사회경험을 쌓고 세상으로 나올 생각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받게 된 후로 한은 그런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이런 저런 많은 일이 있었지만 한은 지금 무사히 정착해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도장을 차렸고 이제는 제법 관원들도 생겼다. 또한 도장 건물 외에도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며 한에게 남긴 유산이 있었다.
보험금이었다. 한은 나중에 정말 돈이 필요해지면 쓰기로 결심한 뒤 통장을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다.
한은 사회로 나온 지 5개월여 만에 기초적인 사회지식을 습득했고, 도장을 열어 관원들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한의 주변에는 아는 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의 성격이 외향적이어서 다른 이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성격 또한 아니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관원들이 하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가상현실게임에 관한 얘기였다. 한은 처음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무관심했다가 그들의 대화중에서 자신이 고민하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얘기가 나와 관원들에게 가상현실게임에 대해 물어보았다.
가상현실게임.
통칭 ‘ROR’.
한이 관원들에게서 얻은 정보로는 ROR은 현실과의 시간개념이 다르다는 것과 연령,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가 보다 수월하단 것이었다.
한은 그 얘기에 마음이 동해 어떻게 하면 가상현실게임을 할 수 있느냐 물었다. 관원은 잠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말해주었다.
“게임기를 사면 되잖아요.”
그랬다. 게임기를 사면되는 것이었다.
한은 그 사실을 알고 최근 배운 인터넷에 접속해 사흘 밤낮을 헤맨 끝에 게임기를 주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게임기가 배달되어 온 것이었다.
“웃차! 그럼 어디다 설치해 놓을까요?”
“이곳에다 설치해 주세요.”
한은 방구석에 남는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내는 공간의 크기를 가늠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얼추 맞을 것 같군요. 그럼 설치 시작하겠습니다.”
사내들은 상자를 개봉했다. 그러자 침대 크기만 한 원형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은 원형구체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틈에 사내들은 게임기의 설치를 시작했다.
설치는 의외로 복잡했다. 여러 가지 선을 꼬아서 어딘가에 연결시키기도 하고 공사장에서나 사용할 법한 중장비를 가지고 벽을 약간 손상시키기도 했다. 벽을 손상시킨 이유를 묻자 복잡한 선들이 행여나 뽑히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벽에 고정시켜 놓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사내들이 설명했다.
그렇게 약 1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사내들은 게임기의 설치가 완료됐다고 한에게 말했다.
“세 달에 한 번 정도는 점검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이 말을 끝으로 사내들은 돌아갔다. 한은 조금 있으면 고등부 관원들이 올 거란 것을 깨닫고 2층 문을 걸어 잠근 뒤, 밑의 도장으로 향했다.
***
오후 8시.
저녁을 다 먹은 한은 몸 좀 풀 겸 죽도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원한 저녁바람이 한의 몸을 감쌌다.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한은 죽도를 들고 내려치기를 몇 번씩 이어서 했다.
그로부터 약 두 시간 후, 한은 운동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아까 사내들이 설치해 준 원형 모양의 기계를 바라보았다. 원형 모양의 기계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는 오토바이의 헬멧처럼 생긴 무언가가 있었다.
한은 이것을 가지고 뭘 하란 것일까 하고 멍하니 있다가 기계의 의자 안에 들어 있는 설명서를 발견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설명서를 읽은 끝에 곧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다 외웠는데 그래도 뭘 어떻게 하란 건지 모르겠군.”
한은 지금 당장 게임하기를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내일 자신을 대신해서 게임을 실행시켜 줄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말이다.
이튿날.
한은 처음 자신에게 게임을 알려준 관원에게 게임 실행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게임 실행을 도와달라고. 남들이 보면 20대 중반의 청년이 10대 중반의 꼬마에게 부탁하는 게 한심해 보일지도 몰라도 한은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곽동혁이라는 이름의 중등부 관원은 2층에 올라가 한의 게임기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에게 20여 분에 걸쳐서 게임 실행에 관해 설명을 했다.
‘결론은 이 기계 안에 들어가 헬멧을 쓴 뒤, 뚜껑을 닫고 앞에 있는 버튼을 순서대로 누른 뒤 마지막에 왼쪽에 있는 레버를 당기란 소리군.’
한이 나름대로 납득할 때 쯤, 동혁은 한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알려주겠다고 했다.
우선 ROR의 레벨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게임과 달리, ROR의 레벨은 올리기가 매우 힘들다고 했다.
동혁은 처음 게임을 하면 초보자로 시작한다고 말했다. 초보자로서 5레벨을 달성하면 1차 전직을, 25레벨이 되면 2차 전직을, 그리고 50레벨이 되었을 때 3차 전직을 한다고 했다.
또한 이 게임의 레벨 업에는 일종의 ‘고비’라는 게 존재한다고 한다. 1차 고비는 24에서 25레벨이 될 때, 평균적인 경험치의 5배에 필요한 양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2차 고비는 39에서 40이 될 때. 이때도 5배에 해당하는 경험치의 양이 필요하단다.
마지막으로 3차 고비는 어마어마하게 헤쳐 나가기가 힘들다고 했다. 바로 49에서 50레벨이 될 때인데 이때는 1에서부터 49레벨까지의 총 경험치 량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ROR에서는 20~35레벨 대가 중렙, 35~49대가 고렙에 속한다고 한다. 50레벨부터는 랭커라고 하고 말이다.
열기를 띄며 설명하는 동혁의 모습에 한은 그저 ‘어렵겠군.’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홈페이지에 가셔서 초보자 가이드 몇 번 보시고 접속하시는 게 도움 되실 거예요. 아, 게임 상에서 제 이름은 ‘리프’예요. 17레벨 견습 마법사죠. 나중에 사범님 이름도 알려주세요.”
‘리프’라고 이름 밝힌 관원은 이내 도장으로 내려갔다.
한은 리프라는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곁에 있던 종이에 메모를 해 두었다.
그리고 어느덧 도장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한은 도장 문을 닫고 2층으로 올라간 뒤 컴퓨터를 킨 후 ROR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리프라는 관원의 정보를 참고해, 초보자 가이드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초보자 가이드는 기본적인 인터페이스와 게임의 시나리오만이 간략하게 나와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게임에는 없고 오직 ROR에서만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들을 설명하는 창이 나타났다. 한은 그 부분 중 크리티컬 파트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크리티컬 파트]
: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은 ‘크리티컬 파트’라는 부위가 있다. 인간형이나 짐승형 몬스터는 대부분 심장(핵)과 머리가 크리티컬 파트다. 이 부분을 공격하여 명중시키거나 파괴하면 적의 HP 잔여량이 남아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PK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 하지만 언데드 혹은 정령 계열의 몬스터와 준 보스 몬스터, 보스 몬스터에게는 크리티컬 파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티컬 파트라는 사실을 참고한 한은 더 늦기 전에 컴퓨터를 끄고 게임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게임기 안에 내장되어 있는 의자는 의외로 편안했다. 한은 의자의 끝에 걸려 있는 헬멧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이걸 머리에 쓰면 되는 건가?”
헬멧을 머리에 착용한 뒤 관원이 알려준 스위치를 차례대로 눌렀다. 그러고 나서 레버를 아래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곧 고요한 음악이 흐르며 시야가 차츰 어두워졌다. 한은 이제 가상세계로 진입 하나보다 생각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그렇게 음악이 천천히 끝나갈 무렵 부드러운 여성의 음성이 한의 귓가에 들려왔다.
[가상현실게임 ROR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회원 인증을 위해 뇌파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약간 어지러울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자 잠시 후 약간의 두통이 왔다. 이후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한의 뇌리를 적셨다.
[현재 고객님은 캐릭터가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네.”
한은 얼떨결에 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잠시 후 시야가 확 트인 것 같이 밝아졌다. 백색의 공간이었다.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허공인지, 그야말로 완전한 백색의 공간.
[캐릭터의 외형과 나이를 설정해 주십시오. 설정이 완료되었다면 ‘완료’라고 말해주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의 얼굴 앞으로 거울 하나가 나타났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었다.
거울의 옆에는 머리 모양 바꾸기. 얼굴 형태, 눈 크기, 코의 높낮이 등등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버튼이 허공에 나타났다. 한은 잠시 생각 해 본 후에 그냥 자신의 모습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이 부분에서는 좀 더 젊어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에 게임 캐릭터들의 평균 나이인 19세로 가기로 했다.
결정을 마친 한이 완료라고 말하자 잠시 후 허공에서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릭터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한.”
[존재하는 캐릭터 명입니다.]
자신의 실제 성명을 답한 한은 잠시 생각한 뒤 다시 답했다.
“이한.”
바로 자신의 성과 함께 답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들려오는 대답.
[존재하는 캐릭터 명입니다.]
“아······.”
한은 잠시 머리를 감쌌다. 이 세계에선 동명이인이 통하지 않는 건가······. 라고 한은 생각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로 했다.
“한.”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 명입니다. 이 이름으로 하시겠습니까?]
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더니······. 두 번 말해야 적용이 되는 건가. 라고 생각하며 ‘예’라고 말했다.
그러자 빛 무리가 허공에서 떨어지며 한의 머리를 비추었다.
[축하합니다. 캐릭터가 정상적으로 생성되었습니다.]
한의 정면에 아까보다 조금 더 큰 거울이 나타나며 한의 전신을 비추었다. 얼굴의 형태는 지금보다 약간 더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옷은 흰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의 옆에 캐릭터 정보창이란 것이 떴다.
한은 캐릭터 정보창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Lv : 1]
이름: 아한
나이: 19세
직업: 없음
HP : 100/100
MP : 50/50
근력: 5 민첩: 5
근성: 5 행운: 5
지능: 5 체력: 5
마력: 5
* 남은 능력치 포인트 : 0
“아한이라니······. 으음, 뭐 이건 이대로 괜찮겠지.”
한은 조금 당황했지만 곧 가상세계이니만큼 이름을 바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어 한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한의 기다림에 답하듯 허공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한 님이 대륙으로 나가기 전에 동의하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제1조 1항, 회사의 어떤 방침에도······.]
마치 교과서를 읊는 듯한 여성의 음성.
보통 사람이라면 넘겨짚을 말을 한은 주의 깊게 들었다. 전부 듣고 나자 이번에는 허공에 알 수 없는 종이 한 장이 떴다. 종이의 안에는 ‘동의’란 글자와 ‘동의 안함’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한이 ‘동의’라고 써진 글자를 가볍게 누르자 종이가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ROR은 게임 감각과 현실 감각의 비율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청소년이라면 제외됩니다. 성인은 최소 5%부터 최대 30%까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게임 감각을 설정하시기 전에 별도의 체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체험을 하신 후 곧바로 게임 감각을 설정 하시겠습니까?]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며 전방에 회색빛의 문자가 새겨졌다.
[게임 감각 비율은 한 번 설정하면 바꿀 수 없습니다. 또한 10%이상 설정하실 시, 별도의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며 사고 발생 시, 본사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또한 부분적으로 설정하실 수 있으니 생각 후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은 게임 감각을 설정하기로 했다.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법을 알기 위해 이 게임을 하게 된 것이지만 지금 이런 설명을 듣자 또 다른 생각이 났다.
‘현실 감각의 30%를 적용시킨다는 소리는 현실에서 느끼는 감각의 1/3을 느낄 수 있다는 소리인가? 수련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겠군.’
[게임 감각을 설정하시는데 동의하셨습니다. 감각 비율을 조정해 주십시오.]
“30%.”
잠시 한의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이내 한의 앞에 나무로 만든 인형 하나가 목검을 들고 서 있었다. 한이 어리둥절하고 있자 여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촉각 비율을 테스트 하겠습니다. 먼저 눈앞의 인형을 만져 보십시오.]
한은 인형에게 다가가 몸을 더듬었다.
딱딱했다. 현실의 느낌 그대로가 나진 않았다. 나무를 만지는 느낌인데 무엇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제 주먹으로 인형을 공격해 보십시오.]
이번에도 역시 시키는 대로 했다.
한은 자세를 바로 잡고 주먹을 말아 쥔 채 정면을 향해서 강하게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인형이 살짝 기울었다.
‘타격감?’
미약한 타격감이 들었다. 나무로 된 인형인데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종이 뭉치를 툭 하고 건드리는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이제 인형이 당신을 공격할 것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여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형이 목검을 위로 쳐들었다.
한은 긴장하며 주먹을 말아 쥔 채 인형과 대치했다. 인형은 목검으로 한의 어깨를 내려쳤고 피할 생각이 없었던 한은 그대로 맞아주었다.
툭—!
“······?”
큰 느낌은 없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난치듯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을 한 대 맞은 정도의 느낌이랄까? 곧이어 눈앞의 인형이 스르륵 하고 사라졌다. 정면이 어둡게 변하더니 눈앞에 맛깔스런 음식이 나왔다.
[이번에는 미각 비율 체험입니다. 이 음식은 게임 상에서 서비스 되는 음식 중에 하나인 ‘매운 오징어 볶음’입니다. 한번 드셔보십시오.]
요리의 옆에 수저가 놓여 있었다. 한은 별 의심 없이 오징어 볶음을 집어먹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굳었다.
“뭐······지? 이 맛은?”
고추장 한 숟가락에 물을 엄청 부은 것 같은, 밍밍하면서도 굉장히 맛이 없었다. 입에 머금은 오징어를 별로 씹지도 않고 삼켜버린 한은 다음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여성의 말이 들려왔다.
[방금 드신 오징어 볶음은 로그오프 상태에서의 조리법을 토대로 만든 요리입니다. 고객님께서는 감각 비율을 30%로 적용하셨기 때문에 현실상의 음식과 같은 음식을 맛보시려면 조리법에 나와 있는 양념 비율을 약 3배로 해 주시면 됩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눈앞의 오징어 볶음이 휙 하고 사라졌다.
다음은 조금 먼 곳에 있는 숫자였다. 몇 개는 잘 보였지만 그 밑에 있는 숫자는 잘 보이지 않아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한은 당황했다.
[이번에는 시각 비율 체험입니다. 멀리 있는 글자 중에 위에서부터 여덟 개 정도는 보이실 겁니다. 순서대로 답해주세요.]
“4, 2, 6, 7, 1, 2, 9, 0.”
보이는 숫자는 8개였다. 그 밑의 숫자는 흐릿하게 보인다. 다시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한의 귀를 자극한다.
[정확합니다. 감각 비율을 설정하지 않은 게임 상의 캐릭터 시력은 평균 1.0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고객님의 시력은 1.0입니다. 이제 고객님의 현실 시력을 투영하겠습니다. 화면이 수 초간 어둡게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 눈앞이 어둠에 덮였다. 이번에는 조금 오랫동안 어두움이 지속되었다. 지루함을 느낀 한이 하품을 할 무렵 눈앞이 차츰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앞에는 숫자가 놓여 져 있고 자신은 아까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앞에 있는 숫자가 전부 보인다는 점이었다.
[시력을 테스트하겠습니다. 제일 위에 있는 숫자부터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해 주세요.]
“4, 2, 6, 7, 1, 2, 9, 0, 11, 42, 91, 35, 23, 12, 17, 81, 63, 72.”
한은 2초 간격으로 숫자를 또박또박하게 말했고 잠시 후 여성이 시력 테스트의 결과를 고했다.
[고객님의 시력은 2.0입니다. 시각 비율을 30%로 적용시킬 경우 기본 시력 1.0에 +2.0의 30%가 적용됩니다. 즉, 고객님이 시각 비율을 30%로 설정하시면 고객님의 시력은 약 1.7정도가 나옵니다.]
어두운 장막이 내려오듯 저절로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한은 이제 적응이 되어 그러려니 했다. 곧이어 어둠속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후각 비율 체험입니다······.]
그 후로도 후각과 청각 등의 감각비율 테스트를 완료했다. 테스트가 끝나자 한의 귓가로 다시 한 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각 비율의 체험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감각 비율을 설정합니다. 고객님께서는 여전히 30%로 감각 비율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네.”
[10% 이상의 비율은 별도의 동의서가 나갑니다. 20% 이상은 자동으로 보험처리가 됩니다. 보험 요금은 별도입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시주가 한에게 조언해 준 것이 있다. 자신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으니 ‘보험’이라는 것을 하나 정도는 들어놔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복잡해져서 지금까지 보험을 들지 않았는데 게임에 접속하면서 자동으로 보험이 들린다고 하니 한은 내심 마음이 편했다.
“진행.”
한의 말이 끝나자 한의 눈앞에 하얀 종이가 생성되었고 느린 속도로 검은 글자가 종이에 새겨졌다.
[동의서]
1. 이 동의서를 작성하는 이는 본 제품을 사용하다 일어난 사고(질병, 부상, 사망 등)에 대해 본사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1. 본사는 고객이 설정한 감각 비율에 대해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1. 만약 고객이 감각 비율의 설정을 원한다면 그에 대한 적합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단, 감각 비율을 내릴 수는 있지만 올릴 수는 없다.
※ 주의 사항
고객이 감각 비율을 지나치게 높게 설정하여 피해를 받아 현실적으로 문제가 될 경우에는, 본사가 그 위험도를 판단하여 본사의 뜻대로 감각 비율을 설정할 수 있다.
이 름:
매우 간단한 동의서였지만 그 내용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하지만 한은 한 번 쭉 읽어본 다음에 중얼거렸다.
“동의합니다.”
띠링—
무슨 벨소리 같은 게 귓가에 들리면서 다시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감각 비율 설정이 30%로 설정되었습니다. 한 번 설정한 감각 비율은 적합한 이유가 없는 이상 바꿀 수 없습니다. 다음은 부분 감각 비율 설정입니다. 미각 촉각 후각 시각 청각 중에서 적용하지 않을 감각을 선택해 주십시오. 선택하지 않은 감각은 전부 30%로 설정됩니다.]
한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그대로 확인을 눌렀다.
[부분 감각 비율이 설정되었습니다. 아한님께서 설정하신 부분 감각은 미각, 촉각, 후각, 청각, 시각입니다. 설정하신 내용과 일치하십니까?]
“네.”
[게임 감각 비율이 30%로 최종 조정되었습니다. 이제 아한님은 대륙으로 나가셔서 모험을 즐기실 수 있게 됩니다. 시나리오와 초보자 튜토리얼 모드를 시작 하시겠습니까?]
“네.”
순간적으로 한의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한이 편한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감상하고 있을 때 동시간대의 다른 장소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
“저기······, 팀장님.”
“왜?”
이동민 팀장이라는 명찰을 왼쪽 가슴에 단 남자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를 부른 여사원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곧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방금 게임 감각 비율을 30%로 설정한 고객의 데이터가 접수 됐는데요······.”
여사원이 동민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동민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가방을 의자에 던지고는 외쳤다.
“3, 30%?! 얼마 전에 죽어서 신문에 난 애, 그 녀석 감각 비율이 몇이었지?”
“25%요······.”
여사원이 살짝 겁에 질린 목소리로 답했다.
동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한 번 휘젓고는 말했다.
“부장님이 이번 달 내로 10%~20%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적용 일시가······.”
“이번 주 금요일입니다.”
동민이 화를 낼까 봐 이제 막 퇴근하려고 준비하던 남자 직원이 재빠르게 말했다.
동민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젠장! 무슨 이번 주에 업데이트하는데 30%로 한 인간은 뭐야! 홈페이지 안보나?! 캐릭터 지워 버리고 정액제 몇 달 넣어줘!”
“벌써 동의서까지 써서 냈습니다만······.”
동민의 움직임이 굳었다.
동의서를 쓰면 캐릭터를 함부로 지울 수 없다. 동의서에 명시된 사항 때문이리라. 동민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런 젠장! 이거 또 재수 없으면 송장 치워야 하는 거 아냐?! 동의서까지 써서 냈다면 더 이상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일단 전화로 회유해서 안 되면······.”
말을 잇던 동민이 돌연 입을 닫았다. 잠시 후, 동민은 입꼬리를 스산하게 올리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포기하게끔 만들어야겠지.”
# Chapter 2 마을을 지켜라
게임의 시나리오는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한은 시나리오에 집중했다.
북대륙과 남대륙과의 전쟁······. 누가 악이고 선인지 구별할 수도 없었다. 오랜 전쟁은 끝이 나질 않았고 긴 시간 동안 지속되던 전쟁은 결국 동대륙과 서대륙까지 전화에 휩싸이게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전쟁이 지속된 탓인지 남대륙에서 휴전을 권해왔다. 북대륙 역시 80여 년간 지속된 전쟁이 무리였는지 휴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쟁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군이 다시 정비되고 각 대륙의 제국들이 힘을 회복하는 즉시 다시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유저들이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거의 끝나갈 무렵 화면에 커다랗게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나리오 모드가 종료됩니다. 종료 후 튜토리얼 모드를 시작하시겠습니까?
한은 주저 없이 예를 눌렀다.
시나리오 모드가 끝나자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여인의 모습에 한은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는지 무심한 눈길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ROR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튜토리얼 모드를 진행하겠습니다. 잘 듣고 설명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곧 한의 앞에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은 무의식중에 검을 움켜쥐었다. 무척이나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ROR의 무기들은 타 게임과는 달리 무게가 있습니다. 그 철검의 무게는 2kg이며 캐릭터의 힘에 따라 무기의 착용 유무가 갈리게 됩니다.]
“······!”
[하지만 본 사용자의 경우 감각 비율을 30%로 설정하셨기 때문에 캐릭터의 힘이 아닌 본인의 실제 힘에 따라 무기의 차용 유무가 갈립니다. 즉 사용자는 여기 있는 목검 무게의 1/3의 무게만을 느낍니다.]
지금 한이 들고 있는 철검의 무게는 2kg이지만 한이 느끼는 무게는 그의 30%이므로 한은 지금 1kg에 못 미치는 철검을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 무기를 잡고 앞에 나타난 고블린을 공격해 보십시오.]
여성의 말이 끝나자 한의 앞에 녹색 빛이 나는 괴생물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생물의 귀는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길었으며 키는 조금 더 작았다. 손에는 각목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고블린은 주위를 살피더니 한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한은 고블린의 공격을 옆으로 슬쩍 몸을 비트는 것으로 피하고는 검의 자루 쪽으로 고블린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고블린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이 터졌다.
하지만 이내 흐물흐물대더니 사라졌다.
한은 아주 약간 비릿한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하며 눈앞의 여성을 쳐다보았다. 여성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한에게 말을 걸었다.
[고블린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셨군요. 고블린을 공격하는 데 느끼는 촉감 비율 역시 30%이며 고블린이 사망했을 시 느끼는 비릿한 냄새도 후각 비율 30%가 제대로 적용된 것입니다. 제대로 적용이 된 것 같으시다면 눈앞의 ‘예’ 버튼을 눌러주세요.]
한은 주저 없이 예를 눌렀다. 한이 자루로 고블린의 뒤를 내려칠 때 미약하나마 감촉이 느껴졌고 또한 고블린이 죽었을 때 느낀 비릿한 냄새도 피 냄새였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이제는 아이템의 능력을 볼 수 있는 명령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ROR은 A부터 Z까지의 명령어가 있습니다. 그 명령어 중 능력을 볼 수 있는 명령어는 V입니다. 아이템을 응시하며 V라고 말하시면 아이템의 세부 정보가 드러납니다.
또한 감각 비율을 10% 이상으로 설정하신 유저 분들에게는 약간의 혜택을 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사용자께서 들고 계신 철검의 공격력은 1~5입니다. 1은 최소 데미지를 나타내는 것이고 5는 최대 데미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감각 비율 10% 이상 사용자께서는 이 철검의 데미지에 비율과 동등한 추가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즉, 지금 들고 계신 철검의 데미지는 1(+0.1)~5(+0.5)가 되는 것입니다.]
여성의 말에 한은 검을 바라보며 V라고 짧게 외쳤다.
그러자 한의 정면에 조그만 화면이 뜨면서 검의 정보를 나타냈다.
[초보자용 철검]
공격력 : 1(+0.3)~5(+1.5)
내구력 : 10/10
재 질 : 철
무 게 : 2kg
설 명 : 대륙으로 나가는 초보자들에게 주는 철검. 약간 날이 서 있으며 빠르게 공격 시, 바위도 패일만큼 단단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강화를 하지 못하며 내구도가 빨리 줄어드는 것이 단점이다.
[하지만 혜택이 있는 만큼의 페널티도 있습니다. 감각 비율 10% 이상 사용자께서는 +10%의 추가 데미지 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내구도 감소 비율 역시+10%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 유의하시고 게임 진행에 불편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무기의 내구도가 0이 되면 무기는 파괴된다. 파괴된 무기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추가 데미지를 얻는 대신 이런 페널티가 있는 것이다.
[다음은 포션 사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포션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HP회복 포션입니다. 이 포션을 마시면 해당 포션의 능력에 따라 HP가 회복됩니다. 하지만 포션을 마실 때는 모션을 취해야 하며 도중에 적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감각 비율 중 미각을 설정하신 분은 포션의 맛이 납니다. 포션의 맛은 토마토 주스 맛이 납니다. 다만 감각 비율 10%의 사용자께서는 토마토10%+물90%정도의 맛만 느껴집니다······.]
“아함—”
한의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하지만 한은 참고 설명을 계속해서 들었다.
[······포션에 각종 첨가 재료를 넣어 맛이 좋아지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포션의 효과가 떨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MP포션 역시 HP포션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지닙니다. MP포션은 포도 주스 맛이 납니다. MP포션 역시 HP포션과 동일한 감각 비율이 적용됩니다.
세 번째로 각종 효과증진 포션입니다. 이 포션은 통칭 BP포션이라 하며 각종 효과가 증진됩니다. 종류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 포션 역시 맛이 느껴지지만 어떤 맛인지는 포션 제작자들만 알 수 있습니다. BP포션은 좋은 효과증진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나쁜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포션 제작자들의 랭크가 낮을수록 나쁜 효과가 나타나는 BP포션 생성 확률이 높아집니다······.]
한은 거기까지만 들었다.
아까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여기서 지겨운 설명을 계속해서 듣다보니 졸린 것이다. 이 게임은 졸린 것 까지 감각 비율에 넣어 놨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잠들어 버렸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
푸확!!
갑자기 서늘한 느낌과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한은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에 한은 적잖아 당황했다.
‘분명 그 처자의 말이 끝나고······. 아, 중간에 내가 잠든 것인가. 그럼 여긴 어디지? 왜 이런 곳에······.’
그때 한의 앞에 섬이 보였다.
아니 섬이라기보단 항구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한은 어렸을 때 계곡에서 수영하던 것을 떠올리며 항구까지 헤엄쳐 들어갔다.
한참을 헤엄쳐 항구에 도착하자 멀리 한쪽에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은 온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노인은 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측은한 눈빛으로 한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동대륙의 어촌 마을이라네. 자네 꼴이 그게 뭔가? 이리 오게. 옷을 말려 줄 테니.”
노인은 이곳이 동대륙이라고 말했다. 한이 시나리오에서 기억하는 동대륙은 북대륙과 남대륙이 전쟁을 시작한 지 50년째 되던 날, 전쟁에 참가한 대륙이었다.
한은 동대륙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을 떠올리며 노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노인이 안내한 곳은 나무 울타리가 듬성듬성 쳐져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한을 신기한 물건 본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한은 기이한 눈초리들을 받으며 노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오두막집 안에는 화로가 지펴져 있었고 노파 하나가 누워 있었다. 노파는 노인과 이방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노인이 노파에게 달려가 말했다.
“누워 있어! 더 몸이 나빠지려면 어떻게 하려고!”
“잠깐 몸을 일으킨다고 바로 죽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영감.”
노파가 이방인, 한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 역시 노파의 인사에 보답하듯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노인은 노파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본 뒤 다시 자리에 눕혔다.
젖은 옷이 거의 다 말라갈 시간이 흐르자 노파는 어느덧 잠들어 있었다. 노인은 그런 노파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까지만 해도 건강했었는데······ 그놈의 전쟁이 뭔지······. 에휴.”
노인의 한숨 소리를 한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전쟁의 불씨가 이 노부부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한의 옷이 완전히 말랐을 때 밖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비상! 비상! 몬스터다! 몬스터가 쳐들어왔다!”
“청년들은 입구 쪽으로 모여! 아이와 여자들은 어서 마을 안으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노인은 한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검사인 것 같은데······. 폐가 되지 않는 다면 우릴 도와줄 수 있겠나?”
그때 띠리링~하는 소리와 함께 한의 앞에 컴퓨터 모니터만 한 크기의 화면에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돌발 퀘스트-노인의 부탁]
- 노인의 부탁을 받아 마을로 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저지하라!
- 퀘스트 완수 조건 : 몬스터 퇴치 0/15
* 마을사람들이 5명 이상 사망하면 퀘스트는 실패한다.
* 노인과 노파가 사망하면 퀘스트는 실패한다.
* 실패한 퀘스트는 다시 수행할 수 없다.
* 퀘스트 완료 보상
- 20실링
- 능력치 포인트 북 1권(5p)
한은 눈앞의 글씨를 다 읽어 볼 새도 없이 바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한이 밖으로 나가자 몬스터라 불리는 존재가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피부가 녹색 빛인 걸로 보아 잠들기 전, 이름 모를 여성이 공격하라고 했던 물체와 비슷하단 것을 알았다.
“이봐, 여기서 뭐해! 촌장님! 어서 피하세요! 여긴 저희가······. 크헉!”
사람들이 다치고 있었다. 비록 이 사람들 전부에게 은혜를 입은 건 아니지만 마을의 일원인 노인에게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한은 검 자루에 서서히 손을 뻗었다.
녹색 피부의 생물체 두 마리가 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으로 정면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한 마리가 한을 향해 몽둥이를 치켜세웠다.
“위험해! 피해!”
서겅—!
생물체의 몸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주 잠시 몸을 떨어대더니 상반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 몸과 다리가 두 토막이 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의 검은 검집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다른 생물체 하나가 다시 한에게 달려들었다. 한은 별 감흥 없는 눈빛으로 다시 검자루를 잡았다.
서겅—!
결과는 똑같았다. 하지만 역시 한의 검은 뽑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적어도 마을 사람들이 보기엔 그랬다. 그때 누군가가 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이, 이방인! 미안하지만 입구 좀 부탁해. 난 이 녀석들을 옮기고 다시 올게!”
청년은 씨익 웃어 보이며 피투성이가 된 동료의 몸을 어깨로 부축하고는 마을 한 가운데로 향했다.
한은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면에는 오크라 불린 생명체들이 월등히 많았다. 수는 한 10마리 정도쯤. 그리고 오크들의 한가운데에는 다른 오크보다 약간 덩치가 큰 갈색의 오크가 있었다.
갈색의 오크가 한을 노려보며 뭐라고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다른 오크들 역시 함성을 내지르며 한을 향해 달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구 좀 부탁한다라······.”
한의 입술을 비집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의 검집에서 검이 뽑혔다. 검이 완전히 뽑혀져 한의 공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세 마리의 오크들이 심장에서 피를 뿜었다.
발도술. 혹은 발검술.
한이 아까 전부터 사용했던 기술이었다. 하지만 발도술의 최대 약점은 검을 집어넣을 때이다. 오크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쉴 틈 없이 사방에서 한을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콰직!
한이 오크의 얼굴을 발로 밟고 날아올랐다. 한에게 밟힌 오크는 주저앉았고 다른 오크들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 지면에 착지하자 검은 다시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한의 왼쪽발이 뒤로 쭉 밀려남과 동시에 검집에서 스산하게 검이 뽑히는 소리가 일순간 들렸다. 한의 검이 다시 검집에 돌아가 있을 무렵, 오크들의 상체와 하체는 이별을 고했다.
한의 무위에 놀란 탓일까?
오크들은 한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한이 남은 오크들을 향해 한쪽 발을 뒤로 밀고는 발검자세를 취하자 오크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집단이나 무모한 자는 있기 마련이다.
한 마리의 오크가 한을 향해 몽둥이를 치켜들고 달려왔다.
그때 한의 뒤쪽에서 검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 돌진하던 오크의 미간에 박혔다.
푸욱—!
오크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방인! 그런 장난감 같은 철검보단 그게 더 나을 거야! 그걸 쓰라고!”
아까 한의 어깨를 치고 갔던 청년이었다. 한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검보다는 이가 빠지고 흠집도 많지만 제대로 제련된 검이 더 좋을 것 같아 오크의 시체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초보자용 철검]
공격력 : 1(+0.3)~5(+1.5)
내구력 : 7/10
재 질 : 철
무 게 : 2kg
설 명 : 대륙으로 나가는 초보자들에게 주는 철검. 약간 날이 서 있으며 빠르게 공격 시, 바위도 패일만큼 단단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강화를 하지 못하며 내구도가 빨리 줄어드는 것이 단점이다.
벌써 내구도가 이렇게나 닳았나 생각하는 한이었다.
이번에는 오크의 미간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그러자 한의 눈앞에 해당 검의 상세 정보가 나타났다.
[자경단원의 검]
공격력 : 3(+0.9)~8(+2.4)
내구력 : 11/20
재 질 : 철
무 게 : 3kg
설 명 : 각 대륙의 자경단원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검. 대체로 날이 서 있으며 내구도 역시 보편적이다. 강화는 불가능하다.
방금 쓰던 초보자용 철검보다 약간 무겁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의 손에는 가볍게 느껴졌다. 평소에 드는 검의 무게는 약 3kg 정도. 그것도 팔 양쪽에 1kg씩의 납덩어리를 차고 난 후다.
무게가 3kg이라 봤자 1/3의 무게만을 느낄 뿐이다. 한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들어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딱 알맞게 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이군.’
주력 기술 중 하나인 발검술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한은 내심 안도했다. 이어 다시 오크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갈색 오크를 호위하듯 서 있는 오크 하나가 눈을 깜빡였을 때 그 오크는 날아오는 한의 발을 보았다.
콰직—! 퍼억!
한은 발로 오크를 걷어 차 버리고는 남은 옆의 오크 역시 팔꿈치로 강하게 밀쳐냈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서 있는 갈색 오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가각—!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갈색 오크가 검을 뽑아든 것이다. 검을 차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검을 뒤에 수직으로 차고 있어서 보지 못한 것이었다.
갈색 오크의 검은 매우 무거워 보이는 양손검이었다.
한은 살짝 뒤로 물러난 다음 갈색 오크를 바라보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발검술 자세를 취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재미있다.’
다수의 적과 목숨을 건 한판승부! 비록 게임 속의 일이었지만 이 상황은 한의 심장을 들뜨게 만들었다. 또 이 세계는 한에게 있어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과도 같았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한의 눈앞에 펼쳐졌다. 즐겁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리라.
한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한의 손이 검자루를 잡았을 때 오크들을 베던 기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빠르기로 검이 뽑히며 갈색 오크의 심장을 노렸다.
카앙!
갈색 오크가 한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과 오크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밀려남과 동시에 오크는 검을 한에게 매섭게 휘둘렀다.
하지만 한은 옆으로 슬쩍 몸을 돌리는 것으로 오크의 검을 피했다.
한의 검이 다시 오크의 미간을 노렸다. 오크는 한의 검을 손으로 막으며 지면에 박힌 검을 뽑아 한에게 휘두르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의 검을 막으려고 했다.
푸욱—! 푹!
실로 엄청난 빠르기의 찌르기였다.
한의 검은 오크의 손을 관통하면서 오크의 한쪽 눈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오크는 외마디 신음 소릴 흘리며 검을 손에서 놓았다.
일당백의 용사라 한들 사람의 신체 부위 중 가장 약한 눈이 찔리면 무기를 손에 놓아야 할 것이다.
오크의 눈에서는 터진 안구가 피와 섞여 흘러내렸고 오크는 고통이 꽤 큰지 무릎을 꿇었다. 한은 고통스러워하는 갈색 오크에게 다가갔다.
“스승님은 살생을 금하라 하셨지만······.”
한이 무심한 눈동자로 오크를 내려다봤다.
“너희를 그냥 보냈다간 또 이런 일이 반복되겠지.”
고개를 살짝 돌려 마을 사람들이 있는 방향을 본 한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속도의 베기에 갈색 오크의 목은 몸통과 작별을 고했다. 피분수와 함께 한의 흰 티셔츠가 붉게 물들었다.
단신으로 오크들을 처리한 한은 몸을 돌려 피 묻은 검을 청년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검을 빌려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유용하게 쓰였다.”
“휘익~ 이방인! 실력 한번 멋진데? 아니 아까 아한이라고 했지? 어때, 우리 자경대에 들어올 생각 없어?”
청년이 친근한 태도로 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넌지시 제안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은 한은 청년의 팔을 조심스레 밀어내고는 그와 거리를 뒀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종료라는 말을 입안에 머금었다.
[ROR 종료시스템 대기.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예.”
[접속종료까지 5초 전······ 접속을 종료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한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한은 눈을 감았다가 상쾌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이곳은 한의 방이었다. 창문이 열려져 있어 상쾌한 느낌이 났던 것인가. 아직 한밤중이었다.
한은 머리 위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10시정도였다. 게임을 시작할 때 시간이 8시쯤이었으니까······. 2시간 정도 지난 것이다.
“적어도 대여섯 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 이상하군. 아!”
한은 그제야 동혁이 알려준 사실을 떠올렸다. 현실 시간의 1시간은 게임에서는 3시간이라고. 이런 시간 비율은 모든 캐릭터들에게 적용되고 이 시스템은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한은 다시 게임에 접속할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몸을 한 번 풀고는 옥상마당에 놓여 있는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무로 만든 검집을 가지고 와 검을 넣고는 검자루는 오른손으로, 검집은 왼손으로 잡았다.
왼발을 뒤로 쭉 뻗음과 동시에 몸을 비스듬히 왼쪽으로 틀며 검을 뽑았다.
시이익—!
목검과 검집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시원스레 검이 뽑혔다. 약간의 검풍이 일어나 옥상 위 화분들의 꽃잎이 흔들렸다. 한은 빠르게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수련이 부족한 것 같군.”
# Chapter 3 절대로 잊지 않는다!
2058년 7월 8일자 XX 신문
가상현실게임 ROR의 게임 속 감각 비율 20%로 낮춰!
K군 사망 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며 비판!
신문을 펼치니 사회면에 또 ROR의 기사가 났다. 게임회사에서 감각 비율을 20%로 낮춘다는 소식이 한의 눈동자에 제일 먼저 비쳐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은 감각 비율을 30%로 설정한 상태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 그런 고민을 하던 한은 곧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혼자 고민해 봐야 아무 쓸모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은 신문을 고이 접었다.
처음 접속 후, 3일 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현실의 일이 바쁜 탓도 있었지만 게임 속의 한낱 미물이 자신의 검을 막아내자 수련이 부족한가 하고 3일 동안 옥상에서 수련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게임 방법을 알려준 동혁의 말에 따르면 가상현실이긴 해도 게임이기 때문에 캐릭터의 능력치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레벨을 올리란 소리였다.
‘오늘은 게임에 접속해 봐야겠어.’
“오늘은 여기까지. 해산!”
한의 교육은 이미 동네에서 유명했다.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선생이 학생을 함부로 손찌검할 수도 없는 사회다. 기껏 손들고 서 있게 해도 학대니 뭐니 하며 난리를 친다.
그러나 한은 그런 것은 일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동네에서 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은 오직 한의 도장뿐이다. 요즘 아이들은 체력이 너무 약하다고 이미 TV에서도 몇 번 방영된 적 있다. 자식들 체력이 걱정된 부모들이 자식들을 모조리 도장으로 보냈으나 처음의 40여 명 중 지금은 20명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만큼 한의 교육이 엄격하단 뜻이었다.
한 번은 한의 교육이 너무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알게 된 한 학생의 모친이 한의 도장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그때 그 모친의 잔소리 쓴 소리를 전부 다 들은 한은 그 말이 끝난 후 조용히 말했다.
“제자가 스승이 가르치는 방식에 참견을 하면 그 어찌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스승까지 무시하는 제자는 저 또한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 모친은 더 난리를 피웠다. 그렇게 난리를 피운 뒤 두고 보자고 한 뒤 자식을 데리고 도장을 나가버렸다. 그저 한은 나가는 둘의 뒤를 지켜보다 다시 도장으로 돌아갔다.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그 장면을 지켜 본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저런 상황이 전개되면 도장 주인은 공손히 무슨 일이십니까? 혹은 아이고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현재 이 사회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은 꼿꼿이 서서 고개 한 번 숙이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몇몇 아이들은 한의 카리스마에 반해서 도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한이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한의 별명이었다.
세상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인간.
중, 고등학생들이 주로 부르는 한의 별명이었다.
한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은 휘두르던 죽도를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자신 역시 땅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은 무려 25분이란 긴 시간을 죽도를 들고 휘두르게 했던 것이다.
보통 도장에서의 수업시간은 1시간이다. 한의 수업방식은 매우 간단했다. 25분 동안 내려치기를 한다. 5분을 쉰다. 다시 25분을 찌르기를 시킨다. 5분 동안 숨 고르는 시간을 준 뒤 장비를 정리하고 집에 귀가하면 된다.
아이들이 거친 숨을 차츰 진정시킬 무렵 한 아이가 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범님 ROR 해 보셨어요?”
동혁이었다. 제자들 중에서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준 제자이다. 다른 제자들은 한의 분위기가 너무 무서워서 아직까지도 말을 잘 걸지도 못한다.
그때 동혁의 말을 들은 일련의 무리들이 다가와 한에게 다가왔다.
“아앗! 사범님도 게임을 해요?!”
“캐릭터 이름이 어떻게 되요?”
게임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제자들이 내게 말을 거는 건가? 라고 생각한 한이었다.
한은 그들의 질문에 천천히 답해 주었다. 한과 그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
“사범님 언제부터 하셨어요?”
“화요일부터.”
“캐릭터 이름이 뭐에요?”
“아한.”
“직업이 뭐에요?!”
“없다.”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질문들은 1분도 안 되어 끝이 났고 동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한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한은 책을 받아들었다.
책의 제목은 ‘ROR 초보가이드! 이 책을 읽는 순간 당신도 ROR 게임 고수!’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거 읽어 보고 하세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음, 고맙다.”
한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자 동혁의 친구들이 다시 한을 보며 경악어린 탄성을 내뱉었다.
“야! 사범님이 ‘고맙다’고 했어!!”
“분명 잘못 들은 걸 거야! 그렇죠. 사범님?!”
한은 뭐하는 놈들이냐는 눈빛으로 동혁의 친구들을 바라봐 준 뒤 말했다.
“요즘 사건 사고가 많으니 일찍 집에 들어가거라.”
다시 무뚝뚝한 말투로 돌아온 한의 말에 동혁을 포함한 아이들이 한에게 인사를 한 뒤 문을 나섰다. 한은 조용히 책을 바라보며 책을 신문위에 놓았다. 그리고 시계를 한 번 쳐다보았다.
오후 5시.
이제 30분 뒷면 고등부가 올 시간이다. 한은 그냥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게임의 설치부터 간단한 명령어들이 나와 있었다.
한은 잊지 않으려고 조그만 메모장에다 명령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대륙 지도가 나왔다.
대륙의 지도는 매우 간단했다. 북대륙과 동대륙이 붙어 있었고 서대륙과 남대륙이 붙어 있었다.
서로 붙어 있는 각 대륙의 사이에는 산맥이 놓여 있었고 바다 한가운데에는 중앙대륙이 있었다. 중앙대륙은 과거 전쟁에 주로 이용되었던 지역이라고 했다.
이곳은 아직도 전쟁지역이라 PK가 가능하다고 했다.
한은 책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시나리오가 적혀 있었다. 한은 다시 시나리오를 읽었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시나리오는 게임에서 본 시나리오보다 더욱 세세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 동대륙과 서대륙이 전쟁에 참가한 이유 역시 있었다. 한이 시나리오를 거의 다 읽을 무렵 누군가가 한에게 말했다.
“사범님! 저희 전부 왔는데······. 수업 시작하셔야죠.”
짧은 스포츠 형 머리의 키가 큰 관원. 이 관원의 이름은 경민이었다. 체력이 남들에 비해 눈에 띄게 좋고 성격도 좋아 고등부의 부장을 맡고 있었다. 한은 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35분.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한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미안하다. 잠시 독서를 하느라.”
한의 말에 고등부의 분위기가 일순간 굳었다. 분위기의 이상함을 감지한 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함을 표하자 경민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지금 미,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지금? 사범님이?!!”
“으음?”
“말도 안 돼!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어디서 스승에게 무례하게 삿대질을 하는 것이냐?”
의자에 걸쳐져 있던 한의 목검이 어느새 경민의 목에 위치해 있었다.
경민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정색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허리를 꺾으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음, 됐다. 모두 장비를 착용하고 삼십 분간 휘두르기를 시작한다.”
한의 말에 고등부 학생들은 김빠지는 소리를 했다. 그때 뒤에서 한 여학생이 말했다.
“사범님. 저희도 삼십 분씩 해야 하나요?”
한의 노트에 따르면 찰랑거리는 웨이브 스타일의 머리를 지닌 여성관원의 이름은 정은아였다. 얼마 없는 여자들 중 가장 실력이 발군인 아이였다. 남자관원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실력이었다. 물론 경민을 제외하고서다.
“물론이다.”
“사범님, 저흰 여자인데······. 조금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네? 사범니임~”
“제자에게 성별은 무의미하다.”
한의 단호한 대답에 은아는 한숨을 휘유 내쉬며 뒤에 있는 여자 관원들에게 말했다.
“들었지? 사범님이 우리의 팔뚝을 다리 종아리처럼 만드시려는 모양이야. 그래도 열심히 해 보자.”
은아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우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로 그 소리는 여자 관원들에게서 들렸다. 한은 원성을 무시하고 연습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자 경민이 한에게 다가와 말했다.
“사범님! 여자애들도 삼십 분! 저희도 삼십 분! 이건 저희 남자들을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저흰 사십 분을 하겠습니다!”
경민의 말이 끝나자 뒤에서 남성 관원들의 살기가 느껴졌다.
차마 한의 앞이라 경민을 팰 수도 없고······.
관원들은 경민의 뚫린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죽을 각오로 살기를 보냈다. 그때 묘한 대치상황을 보던 한이 입을 열었다.
“남성부는 벌써 살기를 뿜는 경지에 까지 이른 건가? 좋다. 여성부는 삼십 분. 남성부는 사십 분 동안 휘두르기를 실시한다. 실시!”
한의 말에 남자 관원들은 좌절했다. 경민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뭐해?! 자자, 어서 호구 착용하고 죽도 들어!”
‘다 네놈 때문이잖아!’
‘끝나기만 해봐라. 넌 뒤졌어!’
남자들의 살기를 한 몸에 받으며 경민과 남성부들은 휘두르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은아와 여성부들도 검을 휘두르기를 시작했다. 한은 다시 자리에 앉아 가이드북을 펼쳤다.
시나리오를 다 읽은 한이 페이지를 넘기자 몬스터에 관한 글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가장 하급에 해당하는 몬스터부터 중급 몬스터까지만 수록되어 있었다. 한은 거기서 낯익은 몬스터를 볼 수 있었다.
[녹색 오크]
* Lv : 2
* 설 명 : ROR의 세계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몬스터 종. 대륙의 구별 없이 많은 곳에 분포하며 보통 적게는 5마리, 많게는 수십 마리까지 몰려다닌다.
한은 어제 자신이 상대한 것이 몬스터란 것을 지금에야 알았다. 가상 세계란 오직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곳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나머진 다 본 적 없는 몬스터였지만 한은 무시하지 않고 천천히 정독하며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페이지를 대략 8쪽가량 넘겼을 때 다시 낯익은 몬스터가 한의 눈에 들어왔다.
[갈색 오크]
* Lv : 5
* 설 명 : 오크들의 전사. 출몰 지역 역시 오크와 동일하다. 무식하게 큰 대검을 들고 다니며 인간들을 적대시한다. 초보자 존에는 보스 몬스터로 각인되어 있으며 방어력이 높은 편이므로 초보자들은 파티를 이루어서 잡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이것은 사흘 전 한의 발검을 막아낸 몬스터였다. 한은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책 속의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약 20분 동안 몬스터 페이지를 다 본 한이 다음 장을 보자 그곳엔 NPC에 관한 글이 나와 있었다. NPC의 간략한 설명을 다 본 한은 그제야 그때 본 노인이고 노파고 마을 사람들이 전부 NPC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저들의 원활한 게임을 돕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들······.
‘비록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이라고는 하나 겉보기에도 인간의 형태고 그 내면 또한 인간이니 사람대접을 해 주는 것이 도리겠지.’
이상한 곳에서 묘하게 예절이 바른 한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한이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겼다.
다음 편은 아이템과 스킬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템에 관해서는 검에 관련된 것만 보고 후다닥 넘겨버렸다. 이제 스킬을 막 보려던 차에 죽도들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려 한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 관원들은 벌써 30분을 마쳤는지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은아는 땀을 조금 흘린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힘들지 않아 보였다. 은아가 한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죽도와 장비들을 한쪽 구석에 정리해 놓고 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사범님~ 뭐 보고 계세요? 책? 어?! 이거 ROR 가이드북이잖아요? 사······ 범님도 이거 하세요?!”
평소에 당당하던 은아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한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다. 은아가 마음껏 놀라고 있을 때 여자관원 몇이 한에게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남자 관원들 사이에서 놀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엑~! 사범님도 게임을 하세요?!”
경민이었다.
경민의 놀라는 소릴 들은 한이 경민이 있는 곳을 응시하며 크게 소리쳤다.
“수련 중에 잡담은 금물!”
한의 일갈에 경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여자들만 편애한다는 등의 군소리가 얇게 한의 귀를 간질였으나 한은 일체 무시하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흐응, 사범님이 게임을 하다니 놀랐어요오.”
여자 관원들 중에 유난히 말이 느린 관원 하나가 말했다. 관원의 이름은 정세아. 은아와 쌍둥이고 비록 일상에서 거의 모든 것이 느리지만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한을 제외한, 남성부 여성부의 구분 없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왜지?”
“그야~ 사범님은 세상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인가아, 으읍!”
은아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는 얼른 세아의 입을 막았다. 은아와 세아가 어색하게 웃을 때 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 내가 융통성이 없다는 뜻인가?”
한은 그저 생각한 바를 말했을 뿐이지만 은아와 세아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뒤에서 여자 관원들이 무언의 살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살기는 아까 남자 관원들이 경민에게 보내는 살기와 흡사했다.
‘너 때문에 사범님이 열 받아서 우리 기합주면 어쩌려고!’
‘으이그! 내가 언젠간 사고 칠 줄 알았다!’
무언을 해석해 보면 아마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한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내가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본디 수련에 있어서 융통성이란 단어는 독과 같은 것. 너희들이 보는 평소의 내 모습은 너희를 가르치는 모습이어서 부드러움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소의 행동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여자 관원, 그리고 남자 관원 역시 크게 놀랐다.
한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방금 한 말은 지금까지 한이 가장 말을 길게 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한의 말이 끝나고 관원들의 분위기가 진정될 때쯤 남자 관원들의 수련이 끝이 났다.
그러자 주저앉아 숨을 거세게 몰아쉬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경민이 한에게 후다닥 달려왔다.
“사범님도 ROR을 하신다니! 캐릭터의 존함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경민이 감격한 표정으로 묻자 옆에 있던 은아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캐릭터에게 존함이라니······. 한의 교육의 엄격함을 알려주는 대사였다.
“아한이다.”
“아한! 메신저에 등록을 해 놓겠습니다!”
경민의 감격하는 표정과는 달리 다른 남자 관원들은 다른 의미로 감격하고 있었다.
‘게임 안에서 만나면 지근지근 밟아버리겠어!’
‘신이시여! 저 냉혈한을 밟아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남자 관원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민은 웃는 얼굴로 재차 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런데 사범님. 대륙은 어느 대륙을 선택하셨어요? 북대륙? 남대륙?”
시나리오에 따라 유저들 간의 진영이 구분되는 것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한 한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동대륙이다.”
“동대륙이요? 거길 초보자가 어떻게 갔데?!”
경민이 크게 입을 벌리며 외쳤다.
이유는 본디 초보자가 선택할 수 있는 대륙은 두 가지뿐이기 때문이었다.
북대륙, 혹은 남대륙. 동대륙과 서대륙은 중 고렙 이상의 유저들만이 다닐 수 있는 위험한 지역이 대다수였다.
“아, 사범님 혹시 대륙 선택하란 말 뜰 때 선택 안 하신 거 아니에요? 가끔 10분 정도 동안 선택을 안 하면 랜덤하게 이상한 대륙으로 보내버리거든요. 그거 버그라고 그러는데 아마 오늘 점검 때 수정될 거예요. 그 홈페이지 가셔서 고객센터에 문의해 보세요. 그럼 다른 대륙으로 보내줄지도 몰라요.”
사실 한이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맞다. 잤으니까 선택이고 나발이고 없었던 것이다.
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다른 남자 관원들이 딴죽을 걸었다.
“고객센터에 문의해 봤자요. 거기 문의하는 애들이 하루에 수천 명이라 운영진들이 그냥 모범 답안이나 알바 돌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뭐, 소문이긴 하지만요.”
“맞아요. 올려도 처리속도가 굉장히 느려서 한 달 이상까지 질질 끈다니까요. 그냥 새로 만들어서 키우시는 게 현명한 선택이에요.”
남자 관원들의 말에 한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캐릭터를 지우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리라. 한이 자리에 일어나서 해산 준비를 하자 관원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앉기 시작했다.
“사범님! 제 캐릭명은 ‘기랑’이에요! 세아 캐릭명은 ‘가랑’이구요! 언제 한 번 뵐 수 있음 봬요!”
은아의 말에 경민이 질 수 없다는 눈빛으로 한을 쳐다보며 외쳤다.
“사범님! 제 캐릭 명은 ‘커크-룩’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실 때 연락하세요! 다 쓸어드리겠습니다!”
뭘 쓸어 준다는지······.
한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얼굴이 내려가 있어서 그 모습을 눈치채는 관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이 고개를 들었다.
“해산!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아, 그리고 여자 관원들은 아까 누구한테 보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살기가 느껴지더구나. 여자 관원 역시 다음 주에는 사십 분으로 늘리겠다.”
한의 말에 은아와 세아는 전신이 오싹함을 느꼈다.
“사범님! 그럼 저희는······ 커억! 크억! 뭐야! 너희, 억!”
경민이 말을 내뱉기 전에 남자 관원들이 경민을 구석으로 끌고 가 밟기 시작했다. 잠시 후, 관원들이 너덜너덜해진 경민을 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오늘의 수업은 전부 끝이 났다.
오후 8시 반.
한의 얼굴이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살면서 타인과 이렇게 말을 많이 해 본 것은 처음이군. 게임 하길 잘했어.”
뿌듯함을 느낀 한이 기계 안으로 들어가 헬멧을 집어 들었다. 사흘 동안 하지 못했던 게임을 실행시키려는 것이었다.
[가상현실게임 ROR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회원 인증을 위해 뇌파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약간 어지러울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고객님의 캐릭터는 아한(Lv-3)이며 현재 동대륙의 어촌마을 ‘브룬’에 있습니다. 접속하시겠습니까?]
한이 음악을 들으며 ‘예.’라고 중얼거렸을 때 다른 곳에서도 약간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
“팀장님, 최종 점검 완료했습니다. 이상 없어요.”
“아, 수고했어. 자, 즐거운 주말들 보내라고!”
“아! 팀장님, 그때 감각 비율 30%로 설정한 고객 말인데요.”
“아아, 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다음에 하게. 난 오늘 밤 낚시를 가기로 박 팀장이랑 예약 잡아 놨다고!”
팀장의 짜증 섞인 말에 직원이 주춤거리며 서류를 내밀었다.
“아, 그게 대륙 선택하는 데에서 선택을 하지 않아서 동대륙에 떨어졌답니다.”
“뭐? 아하하하! 이거 오늘은 즐거운 밤낚시가 될 것 같은데?”
팀장은 소리 높여 웃었다.
직원은 그런 팀장의 모습을 보며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대륙은 얼마 전 대규모 패치를 진행하면서 거의 모든 지역을 ‘전쟁지역’으로 바꾸어 놨기 때문에 초보자는커녕 20레벨 정도의 중렙도 혼자서는 살아남기가 매우 힘든 지역이 되어버렸다.
물론 동대륙의 수도라던가 큰 도시는 예외였다.
직원은 매우 재수가 없을 것 같은 감각 비율 30% 설정자에게 측은함을 느끼며 잠시 동안 묵념했다.
***
한은 지금 마을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참여하고 있었다. 사흘이나 시간이 흘렀기에 잔치는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유저가 접속하지 않은 공백의 시간에 대해서 NPC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자자, 내 잔도 받으라고! 쭈욱~ 들이켜!”
사람들이 자신에게 연거푸 술을 따라 주기 시작했다.
한은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마셨다.
하지만 술맛은 별로 없었다. 이곳의 술은 마치 막걸리와 흡사했다. 하지만 감각 비율이 30%이다 보니 이건 뭐 그냥 술에 물을 한바가지 탄 밍밍한 술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해 준 요리는 맛있는 편이었다. 매콤하고 짭짜름한 게 한의 입맛에는 쏙 맞았다.
‘30%가 이 정도인데 100%라면 이 음식은 짜서 못 먹겠군.’
“오오! 우리 마을의 명물인 ‘절규의 닭’을 담담하게 먹고 있다니! 역시 자네는 멋지구만!”
‘절규의 닭’이란 이 마을에서만 나는 닭을 잡아 요리한 흔히 닭볶음탕과 비슷한 음식이었다. 이 마을의 닭은 고추처럼 생긴 열매만을 쪼아 먹기 때문에 살에 매운 향이 배어 있다고 했다. 거기다 고추처럼 생긴 열매로 양념을 하니 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NPC들도 행복을 느낀다. 몬스터들이 물러나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NPC들도 아픔을 느낀다. 가족이 죽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한은 여전히 NPC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의 곁으로 청년이 다가왔다. 한에게 자경단 입단을 제안한 청년이었다.
“술 맛이 어때? 우리 마을에서 자랑하는 전통주지. 마을을 구해준 용사님에게 드리는 술이야. 자자, 내 잔도 받으라고.”
한은 말없이 청년의 술잔을 받았다. 청년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이 냄새를 감각 비율을 0%로 설정한 이들은 느끼지도 못하는 것인가? 한은 여전히 사고 중이었다.
“난 이 마을이 좋아.”
뜬금없는 청년의 말에 한이 고개를 들었다. 청년은 술에 취한 채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은 수많은 별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렸다.
마을의 위치가 약간 높은 절벽 정도에 위치에 있어서 일까?
차가운 바람이 청년과 한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한은 바람에 비린내가 섞여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바다 비린내인가 하며 무시했다.
“난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 이 마을에서 자랐지.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되었어. 내가 어렸을 때 저기 저분들이 우리 마을을 지켜주셨지. 이제 내가 이 마을을 지킬 차례야.”
청년이 가리키는 곳에는 촌장을 비롯한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다. 청년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한을 보며 말했다.
“다음 주면 저기 저 여인과 약혼해. 그리고 다음 달이면 결혼하고. 위험한 자경단원의 일을 이해해 준 고마운 사람이지. 하하.”
청년이 볼을 붉혔다.
볼이 붉은 이유가 마냥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제야 한은 깨달았다. 청년의 말을 듣는 순간, NPC고 인간이고 간에······.
“그런가. NPC라 한들 이 ‘사람’들은 이 세계의 ‘거주자’들이고 나를 비롯한 유저들은 이 세계의 입장에선 ‘이방인’이란 것인가. 간단하군. 하지만 그렇지도 않아. 오묘해.”
한은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깨달음인지 나쁜 깨달음인지 아직 한은 알지 못했다. 한이 혼자만 구시렁거리고 말을 하고 있지 않자 청년이 어깨를 툭 쳤다.
“어이, 축하 안 해 줄 거야?”
“음, 축하한다.”
“하하하! 이거 엎드려 절 받기인데?! 벌주로 한 잔 더 받으라고!”
청년의 거짓 없는 웃음에 한은 기분이 좋아져서 피식 웃었다.
이 게임을 한 이후로 아니,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한은 자신이 자주 웃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한은 이러한 변화가 싫지만은 않다고 느끼며 술을 마셨다.
바로 그때!
마을 어귀에서 피투성이가 된 사내 하나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피······ 피해! 락! 어······ 어르신들을 모시고 어서!”
“한스! 무슨 일이야!”
한과 술을 마시던 청년이 번쩍 일어나서 말했다.
청년의 이름이 락인가 보다······ 라고 생각한 한이 술기운을 몰아내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은 한스라 불린 피투성이의 자경단원 뒤에서 정체모를 기운을 느꼈다.
“엎드려!!”
퍼—억!
한의 고함 소리가 무색하게 한스의 얼굴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스의 머리 대신 거대한 메이스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메이스의 뾰족뾰족한 부분에는 한스의 머리 파편으로 보이는 살점들과 피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한스!”
락을 포함한 몇 명의 자경단원들이 검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한은 그들의 죽음을 느끼며 락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의 예감은 적중했다.
콰쾅! 콰콰쾅!!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침과 동시에 자경단원들이 숯 덩어리가 되었다. 고기 타는 냄새가 미약하게 한의 코로 흘러들어왔다. 한은 술기운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아, 전직 퀘스트의 시작이 고작 이런 곳이라니······. 재미없게.”
인간. 인간의 목소리였다.
몬스터인 줄만 알았던 한은 상대가 인간임을 느끼고 긴장하며 검자루에 서서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제크. 내가 전직할 때는 와이번의 알을 훔쳐오는 거였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두 사람이 아니다.
약 4명의 사람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체구. 약 2m에 육박하는 신장을 가진 남자와 구부정한 마법사 모자를 쓰고 있는 보랏빛 머리의 여성. 그리고 그 뒤에 전신을 검은색 천으로 가린 청년과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중년 남성까지!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파티였다.
“팔라딘 시험이 좀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뒤에서 나약하게 힐만 난사하는 프리스트보단 낫잖아?”
여성의 말에 제크라 불린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여성의 뒤에 있던 검은 천의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을 전부 쓸어버리면 되는 건가?”
“아아. 맞아 이곳이 뭐더라? 곧 전염병이 퍼질 마을? 그래서 전부 죽인 다음에 불태워 버려야 해서 위저드인 내가 따라와 줬잖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아아, 고마워. 나중에 술 한 번 살게 세린.”
세린과 제크의 잡담이 지겨웠는지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어서 해치워. 내 퀘스트도 해야 되잖아. 이 마을이 아니면 다른 마을로 가야 한단 말이다.”
“랄프. 걱정도 팔자다. 이 마을 다음엔 이제 저기 섬마을 하나뿐인데. 뭐가 걱정이야? 남는 게 시간이야 우린.”
“크아악!”
마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은 물론이고 락과 제크 일행마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검은 천의 사내가 마을 사람들을 무차별 적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야! 릭, 성질 좀 줄여! 아이씨! 제크! 랄프! 그냥 쓸어버려! 엄호해 줄게!”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변변찮은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그때 락이 한에게 팔을 놔달라고 소리쳤다.
“지금 가면 죽는다.”
한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분하지만 저들의 실력은 자신보다 위였다.
물론 현실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게임 속 안. 레벨과 능력치가 중시되는 세계다.
“나도 알아! 죽을지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난 자경단원이야! 그리고 이 마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단 말이다!”
락이 거세게 외쳤다. 한은 락의 팔을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외침에 실린 결의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한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크······ 크허억!”
“촌장님!”
“네놈들! 촌장님을!!”
자신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던, 불을 쬐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노인이 죽었다. 붉은 피를 허공에 뿌리며 초점을 잃어갔다. 그리고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에 한은 분노했다.
“죽어어!!”
락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락의 검은 릭이란 암살자와 같은 자의 조그마한 대거에 의해 동강나 버렸다. 그리고 릭의 대거는 락의 심장 부근을 노리고 맹렬하게 돌진해 나갔다.
카앙—!
하지만 릭의 대거는 목표를 성취시키지 못한 채 릭과 함께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릭은 의아한 눈길로 정면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녹슨 철검을 들고 있는 한 이 서 있었다.
“뭐냐? 네놈은?”
릭이 차갑게 말했다.
한은 녹슨 철검을 버리고 구석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는 검집에 집어넣었다.
“락! 약혼녀를 데리고 피해라. 이곳은 내가 맡겠다.”
“한!”
“어서!”
한의 외침에 락은 정신을 차렸는지 약혼녀를 찾기 시작했다. 릭은 묘하단 눈으로 한을 쳐다보았다.
“너······ NPC가 아니군. 유저인가? 그곳도 초보자?”
“야! 릭! 왜 죽이다 말고 멍하니 서 있어? 엉? 이 자식은 뭐야?”
“유저인 거 같더군. 그것도 초보 유저.”
“뭐? 어떻게 초보 유저가 동대륙에 있냐? 버근가?”
“가끔 그런 버그들이 생긴다고 하더라고. 아, 여긴 다 정리했어. 그리고 초보자. 죽지 않으려면 비켜. 우린 퀘스트 중이란 말이야. 매너 좀 지켜줘.”
여자 마법사. 세린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녀가 지나온 자리엔 한때 마을 사람들이었던 숯덩이 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어? 근데 왜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는 거지?”
“아아, 저 녀석이 두 놈을 보내줬어.”
제크의 물음에 릭이 답했다. 그러자 제크는 붉어진 얼굴로 한에게 삿대질을 퍼부었다.
“뭐!? 너 지금 내 퀘스트를 방해한 거냐?”
“퀘스트가······.”
“뭐?”
“한낱 퀘스트가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한의 질문에 주위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리고 들리는 비웃음 소리. 릭이 소리죽여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고 세린과 랄프는 대놓고 비웃었다. 제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그깟 이유로 내 퀘스트를 방해했냐!!”
제크의 메이스가 한의 머리를 쪼갤 듯 날아왔다. 한은 몸을 살짝 비틀었다. 당연히 한이 맞을 거라 생각한 제크의 몸은 앞으로 기울어졌고 그때를 노린 한의 검이 매섭게 제크의 목을 노렸다.
카앙—!
한의 검이 부러졌다. 릭이 대거로 막았기 때문이었다. 릭은 한에게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군. 하지만 이 덜떨어진 놈도 우리 길드원이라서 말이야. 초보자한테 죽으면 길드의 위신이 떨어지거든.”
제크는 자신이 초보자에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고함을 질러댔다.
“신이시여! 나에게 빛의 가호를! ‘홀리 아머!’ 적에게 성스러운 철퇴를! ‘홀리 웨폰!’”
제크의 메이스와 갑옷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이스의 공격!
한은 허리를 뒤로 접히고는 메이스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한쪽 손으로 지면을 잡고 구석으로 힘껏 굴렀다.
한이 구른 자리에 기둥에 박혀 있는 검이 있었다. 한은 빠른 속도로 검을 뽑아들고 제크를 노려보았다. 제크는 땅에 박힌 메이스를 뽑아내 다시 한에게 돌진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하지만 사람들의 살점과 피가 묻어 성스럽게 보이기는커녕 퇴폐적으로 보이는 메이스가 한의 머리를 부셔버릴 듯이 날아왔다.
한이 허리를 앞으로 굽히자 메이스는 한의 등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제크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고 한의 검이 매섭게 겁집에서 뽑혔다.
푸욱!
검이 살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한의 검은 제크의 오른쪽 가슴 부위의 갑옷만 약간 잘랐을 뿐이었다. 검에 살이 박힌 자는 한이었다.
제크의 위험을 감지한 릭이 대거를 던진 것이다. 고통을 느낀 한이 검의 속력을 줄여버려서 덕분에 제크는 목숨을 건졌다.
한은 자신의 허벅지에 박힌 대거를 뽑았다. 약간의 피가 흘렀고 한의 몸은 기울어졌다.
털썩—!
한의 몸이 실 풀린 인형처럼 지면에 떨어져버렸다. 그리고 한의 귓가에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한 님은 사망하셨습니다. 지금 초보자 존으로 돌아가 즉시 부활하는 방법이 있으며 10분간의 대기시간 후 제 자리에서 부활하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자는 경험치 5%가 손실되며 사망 페널티가 10분간 부여됩니다. 후자는 경험치 50%가 손실되며 사망 페널티가 30분간 부여됩니다.]
한의 귓가에 모기 앵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이 뭐라고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은 더 잘 듣기 위해 청각을 집중했다. 한은 감각 비율을 30% 적용시킨 자이기 때문에 기본 청력의 +30%가 적용 되서 약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다시 해야 하는 건가?”
“······잡아 왔어? 도망친 녀석들? 아 구워 버렸다고?”
‘락······ 도망치지 못했던 건가?’
“세린! 너밖에 없다······.”
“······있으면 ‘피의 기사단’ 길드로······ 와라 ······줄 테니까.”
‘피의······ 기사단? 그곳이 저 녀석들이 속해 있는 길드의 이름인가?’
“안 들린다고! 릭! 시체는 청력의 90%가 감소되는데 어쩔 거야! 아, 이 새끼 때문에 진짜 시간만 날렸네!”
“뭐 어때? 좋은 일 한 셈 치자고! 이 녀석도 버그 때문에 날아왔으니까 죽으면 초보자 존에서 부활할 거 아냐?!”
‘초보자 존? 원래 난 그곳으로 가야 하는 건가? 그럼 왜 난 이곳에······?’
“아, 근데 제크. 여기도 전염병은 없다. 섬마을로 가야겠어.”
랄프의 말에 제크가 인상을 구겼다. 세린은 홀가분하단 표정으로 기지개를 쭉 폈다.
“아우! 이제 이 지겨운 짓도 끝이구나~ 야 제크! 회다! 난 회만 먹을 거야! 한 상 크게 차려놔!”
“야야, 알았어. 일요일에 거하게 쏠게.”
그들이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누군가가 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 선물이다. 큭큭, 아 그리고 만약 제자리 부활을 하면 놀랄 이벤트가 있을 거야. 난 흑마법사거든? 뭐 어차피 안 들릴 테지만. 시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니까 말이야. 하하하!”
랄프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다른 일행들이 소리를 질렀다.
“랄프! 너 왜 안 와! 야! 너 또 NPC들 좀비로 만들어 놨냐?!”
“근데 쟤는 왜 흑마법사가 하얀 옷을 걸치고 다니는 거냐?”
“변태라서 그래.”
“······!”
그들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한은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보기 위해 눈을 좀 더 위로 올렸다. 그곳엔 검게 타버린 사람의 시체 두 구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락이었고 다른 하나는 락의 약혼녀였다.
이미 죽은 한은 냄새를 느끼지 못했지만 왠지 메스꺼운 기분이 드는 듯했다.
한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끝없이 한 단어를 생각했다.
‘······피의 기사단!’
[10분간의 대기시간이 끝났습니다. 제자리에서 부활하시겠습니까?]
‘예.’
[부활 의식을 시작합니다. 부활하면 30분간 각종 능력치 하락 및 경험치 획득 감소 등의 사망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또한 10초간 무적상태가 됩니다. 부활까지 남은시간 5초.]
순간 찬란한 빛이 한의 몸을 감쌌다. 한의 몸이 저절로 일어났다.
한은 손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여졌다. 그리고 느껴지는 고기타는 냄새와 피비린내. 범인이었으면 당장 로그아웃하고 싶어질 정도의 악취였으나 한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부활하였습니다. 경험치 -50%, 능력치 -20%, 경험치 획득률 -20%가 적용되었습니다.]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어진다. 타버린 마을 사람들의 몸을 식혀주려는 듯 차가운 비가 내렸다. 그리고 비는 한의 가슴을 차갑게 식혀버렸다.
우어어—!
우어—!
죽은 줄만 알았던 마을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났다.
비는 평등하게 그들의 몸을 적셨고 한의 몸 또한 적셨다.
한의 얼굴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 한의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비는 거세게 퍼부었다.
“크아아아!!”
“크아아!”
한을 향해 좀비들이 달려들었다. 한이 가이드북에서 본 좀비는 하급 몬스터로 분류되며 레벨은 6이라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한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론······. 빌······.”
‘자자, 내 잔도 받으라고! 쭈욱~ 들이켜!’
‘오오! 우리 마을의 명물인 ‘절규의 닭’을 담담하게 먹고 있다니! 역시 자네는 멋지구만!’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이곳과 현세의 구분 없이 친해진 ‘사람’인데······.’
과거에 론과 빌이었던 ‘고깃덩어리’들이 한의 심장을 파먹을 듯 맹렬하게 덮쳐왔다. 그때 빗물에 미끄러지듯 한의 왼쪽 발이 미끄러지듯이 뒤로 빠졌다.
스윽—!
고요하면서도 뭔가를 스치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좀비들의 육체가 덧없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허리가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한에게 꾸물거리며 다가왔다. 겉만 타버린 것인지 좀비의 상체에서 인간의 장기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한은 엄청난 악취를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피비린내가 깊숙이 한의 폐까지 파고든다. 한은 뺀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그리고 빠르게 손을 놀려 허리가 잘린 좀비들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것을 신호로 좀비들이 일제히 한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앗!!”
한의 검이 한때 인간이었던 좀비들의 머리를 찌른다.
심장을 찌른다.
허리를 토막 내고 산산조각을 내 버린다.
피가 튀고 목이 꺾인다.
급속도로 썩어버린 검은 핏물이 한의 몸을 적신다.
[시체의 독에 감염되었습니다. 10초 동안 초당 5의 피해를 입습니다.]
시스템상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한의 검은 자비로움이 없었다.
비가 서서히 잦아갈 무렵.
한을 제외하고 지면에 서 있는 존재는 거의 없었다.
“후욱······! 후욱······! 흐읍!”
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빗속에서의 전투는 생각 외로 매우 힘이 많이 들어가는 전투였다. 한이 전방을 바라보자 두 구의 시체가 한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락······.”
그것은 락의 시체였다. 이렇게 한 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두 시체만 목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을 잡은 채로 불에 휩싸였는지 피부가 불에 녹아 흉측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두 쌍의 좀비는 한에게 느리지만 맹렬히 다가왔고 한과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질 무렵 한이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다.”
서겅—! 서겅—! 서겅—!
발검술을 펼치며 역으로 한 번 휘젓고 마지막으로 아래에서 위로 검을 내저었다.
땡그랑—!
검의 내구도가 소진되었는지 맥없이 부러지며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락과 그의 약혼자였던 시체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것을 끝으로 비는 서서히 그쳤다.
빗방울이 한의 머리에서부터 흘러 코를 타고 흘러 내렸다.
가슴이 아팠다. 무언가에 찔리지도 않았건만 왜 이다지도 아픈 것일까?
비가 그치고 해가 뜨자 피범벅이 되어 던 흉측한 시체들이 불타오르듯이 사라져갔다. 모든 시체가 서서히 소진되어 가는 장면을 지켜본 한이 부러진 검을 보고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자경단원의 검]
공격력 : 3(+0.9)~8(+2.4)
내구력 : 0/20
(이 이상 사용할 시 손상도가 부여되며 손상도가 심해질 때는 무기가 파괴됩니다. 현재 손상도 -5, 무기 파괴상태)
재 질 : 철
무 게 : 5.8kg
설 명 : 각 대륙의 자경단원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검. 대체로 날이 서 있으며 내구도 역시 보편적이다. 강화는 하지 못한다.
한은 내구도가 다 한 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검은 지면에 깊숙이 들어갔고 한은 서서히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는 이제 거의 다 사라져 가는 락의 파편이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겠다! ‘피의 기사단’. 락의 원을 달래주기 위해 사십구일 안에 네 녀석들의 목을 이곳으로 가져오겠다.”
빠드득—!
한의 이 가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락의 시체가 햇빛에 녹아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비린내가 났다.
짭짜름한 바다비린내가······.
# Chapter 4 만남
7월 9일 토요일.
한은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고는 집으로 돌아와 ROR을 실행시켰다. 헬멧을 착용하자 경쾌한 음악이 들렸다. 하지만 한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제의 일이 생각나서일까?
어제 한은 락에게 맹세를 한 뒤 숲으로 나가서 오크들을 잡다가 로그아웃 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약간의 수련을 한 뒤 동혁이 준 가이드북을 다시 한 번 읽은 뒤 게임에 접속하는 것이다.
뇌파검사를 한 뒤 ROR의 세계로 향했다. 이제 막 로그인한 그를 반긴 것은 숲속에 서식하는 수십 마리의 오크 무리였다.
ROR은 타 게임과는 달리 로그아웃을 한 지점에서 로그인이 된다.
길을 잃으면 죽어야 한다. 아니면 귀환 스크롤을 사용하던가 해야 마을로 갈 수 있다. 그 이유가 리얼리티를 위해서라고 회사 측은 말했다.
물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로그인 후 5초 동안은 무적 상태였다.
한은 그 시스템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검집에서 매서운 속도로 검을 뽑았다. 검이 은빛으로 빛나며 오크들을 도륙했다.
“크아아! 인간! 크륵! 모두 쳐라!!”
오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갈색 오크 세 마리가 등장했다. 한은 오크들을 발로 걷어 차버리며 순식간에 갈색 오크들의 앞까지 당도했다.
갈색 오크들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한이 당혹스러웠는지 일순간 아무런 공격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수는 곧 자신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툭—! 투툭!
순식간에 갈색 오크 두 마리의 목이 지면으로 떨어졌고 목을 잃은 오크들의 몸을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의 검 면을 타고 오크들의 피가 지면을 적셨다. 오크들의 숫자는 예상외로 많았다. 오크들의 공격에 한은 서서히 상처를 입어갔다.
털썩—!
“사십.”
한이 40마리째를 쓰러뜨릴 무렵 오크들의 수는 얼마 남지 않았다. 오크들은 한의 광기 서린 눈빛을 보고는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한은 허공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오크들이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한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하아압!”
숨을 진정시킨 한이 오크들을 향해 다시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만약 타인이 한의 전투를 보면 혀를 차거나 공포를 느낄 것이다. 무식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발로 차고 검으로 벤다. 상대가 자신의 검을 잡으면 손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그리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감각 비율을 전부 적용했기 때문에 현세에서의 힘을 30%까지 끌어 낼 수 있다. 한의 검은 오크들의 정수리, 목, 가슴 세 군데만을 노렸고 녹색 오크들은 한의 검을 막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허억! ······허억! 흐읍!”
한이 거칠게 숨을 쉴 때 즈음 수많은 오크들이 시체로 변해 나 뒹굴고 있었다. 한은 피곤함을 느끼며 갈색 오크의 시체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이드북에서 본 명령어를 기억해 내며 C라고 중얼거렸다.
[Lv : 8]
이름 : 아한
나이 : 19세
직업 : 없음
HP : 82/275
MP : 120/120
근력: 12 민첩: 12
근성: 12 행운: 12
지능: 12 체력: 5
마력: 5
* 남은 능력치 포인트 : 70
캐릭터 정보창이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HP는 생명력을 의미하며 레벨 업 1회당 +25씩 추가된다고 했고 MP는 정신력을 의미하며 레벨 업 1회당 +10씩 추가된다고 했다.
능력치는 레벨 업 1회당 체력과 마력을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1씩 오르며 ‘능력치 포인트’라는 걸 따로 준다고 했다.
레벨 업 1회당 능력치 보너스는 +10을 준다고 했고 원하는 능력치에 투자하면 된다는 것이다.
동혁의 말로는 홈페이지를 보고 직업에 맞게 적절하게 분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망캐가 된다고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은 망캐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고 이제 숨 좀 돌리면서 능력치를 찍으려고 했다.
근력은 힘을 나타낸다고 했다. 근력 5당 데미지가 +2~4 추가된다고 했다. 근성은 의지력을 뜻하며 5포인트당 공격받을 시 데미지를 0.3% 수시킨다. 그리고 지능은 5포인트당 모든 속성 마법 데미지가 +2 추가된다고 한다.
민첩은 회피를 뜻하며 민첩 5당 회피율이 0.1%씩 상승한다고 했다. 행운은 정확성, 5포인트당 정확성이 0.2%상승하며 체력과 마력은 생명력과 정신력을 올려준다고 했다.
한이 그런 생각들을 되새기며 능력치를 찍으려 할 때 한은 잊고 있었던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검술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기교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는 근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이다.
한은 게임에서의 자신은 초보 검사이니 모든 포인트를 근성에 투자하기로 생각했다.
[상태창]
Lv : 8
이름 : 아한
나이 : 19세
직업: 없음
HP : 124/275
MP : 120/120
근력 : 12 민첩 : 12
근성 : 82 행운 : 12
지능 : 12 체력 : 5
마력 : 5
* 남은 능력치 포인트 : 0
아직 생명력이 전부 회복되지 않은 것 같다. 한은 생명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스킬 창을 열었다. 스킬 창은 별거 없었다.
[스킬창]
* 패시브-공격 : 무기로 적을 공격한다.
* 패시브-자연회복 : HP/MP가 자연 회복된다.
* 액티브-휴식 : 휴식을 취한다. 휴식 시에는 HP/MP 회복 속도가 200%증가한다.
* 액티브-장병술(掌兵術)-장타(掌打) : 무기가 없을 시 맨손의 공격력을 150%증가시켜 상대를 타격한다.
* 남은 스킬 포인트 : 7
검사로 전직을 하지 않아서 일까?
가이드북의 말로는 전직은 5레벨부터라고 했다. 하지만 한은 도시에 나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다. 한은 스킬창을 닫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곳에는 온통 검뿐이었다.
총 11자루의 검들······.
전부 자경단원들의 검이었다. 한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보았다.
전투 중에 부서져버린 검. 내구도를 확인했더니 역시 0인 상태였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내구도가 0이 되어도 계속 사용할 경우 데미지는 반만 들어가는 대신 ‘손상도’라는 것이 생긴다. ‘손상도’가 -5까지 되면 무기는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한은 손상도를 확인 해 -3정도면 인벤토리 창에 넣어 두고 다른 검을 썼다.
손상도가 –2 이하인 검이 벌써 8자루였다. 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인벤토리에 넣고는 내구력이 가득 차 있는 검을 꺼냈다.
어느새 생명력이 전부 회복되었다. 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간단한 운동으로 푼 뒤 더욱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의 기척에 무언가 감지되었다.
‘느리지만 무거운 녀석? 누구지? 미약하지만 피 냄새가 나는데······.’
한이 긴장하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 댔다. 한의 특기는 발검이었다. 검집으로 검을 미끄러뜨려 가속을 가하면서 적을 매섭게 공격하는 발검! 실로 강력한 일격이어서 한이 일대일 혹인 일대다수의 전투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술 중 하나였다.
‘온다!’
“흐어어! 크흐어!”
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크였다. 그런데 크기가 조금 컸다. 약 3m? 4m약간 안 되는 정도의 육중한 크기! 그리고 전신을 갑옷으로 치장했다. 한은 이 녀석을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기억이 났다.
[아이언-오크]
* Lv : 17
* 설 명 : 오크들의 대전사. 출몰 지역 역시 오크와 동일하나 랜덤하게 등장한다. 갈색 오크 20마리를 다스리는 존재로서 일반적인 오크 부족에도 몇 없는 강력한 존재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다닌다 하여 아이언 오크라 불린다. 이 오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무기를 강화해 줄 수 있는 사제나 강력한 화염이나 전기 계열의 마법사가 필요하다.
한의 앞에 있는 이 녀석은 약간 지친 듯 보였다. 갑옷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것이 필시 인간의 피리라. 한을 본 아이언 오크는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도끼로 한을 반으로 갈라버릴 듯 매섭게 내리쳤다.
그 타이밍에 맞춰 한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아이언 오크의 앞에 장식되어 있는 뾰족한 무엇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오크가 한의 위치를 확인하려 허공을 봤을 때 오크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낡아 이가 다 빠진 검이었다.
푸욱—!
한의 검이 오크의 눈에 틀어 박혔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해도 적을 보려면 눈은 갑옷으로 막을 수가 없었고 한은 그런 곳을 정확히 찾아내 찌른 것이다.
오크는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도끼를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그런 것에 맞을 한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오크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새 검을 하나 꺼낸 다음 검집에 넣었다.
“크아······! 크아아! 아아!!”
오크는 성난 듯이 자신의 눈에 박힌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갑옷을 껴입은 상태라 검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검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고 오크의 한쪽 눈은 피와 터진 안구가 섞여 흘러 내렸다.
오크는 검 뽑기를 포기하고 남은 한쪽 눈을 번뜩이며 한을 찾았다.
하지만 한은 이미 기척을 감춘 상태였다.
오크는 한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광분하며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러댔다. 오크의 도끼는 주변 나부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버렸고 한은 기척을 숨긴 채 오크의 주위를 맴돌며 틈을 찾았다.
‘어딘가 갑옷과 갑옷 사이에 이음새가 있겠지. 그곳을 찾아야 한다.’
한의 눈빛은 오크의 움직임이 아닌 오크의 갑옷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오크가 도끼를 허공에 들고 포효할 때, 한은 목과 몸통을 이어주는 곳에 약간의 이음새를 발견했다.
‘검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될 것 같군.’
숲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오크는 한을 보고는 기쁜 듯 고함을 질러댔다.
한은 신중하게 오크의 움직임을 살핀 뒤 오크가 자신을 향해 돌격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조금 더 가까이 와라······.’
이윽고 오크의 도끼가 수직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한을 향해 수직 낙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한의 검집에서 검이 뽑혔다.
카카카캉—!!
검과 도끼가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내구도가 가득 찬 한의 검이 한 번의 부딪침으로 두 동강이 났다.
하지만 오크의 도끼는 멀쩡했다. 그 대신 검의 가속도와 만나 오크의 몸이 뒤로 살짝 기울어졌을 때 한은 가볍게 점프하며 오크의 도끼를 타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오크의 가슴까지 올라간 한이 오크의 눈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았다.
스윽—!
검은 부드럽게 뽑혔고 오크는 고통에 못 이겨 뒤로 쓰러졌다. 한은 목 쪽의 이음새를 발견하고는 그곳을 향해 강하게 찌르기를 했다.
푸욱—! 푹!
“크르······ 륵!”
가래 뱉는 소리를 내며 오크가 생을 마감했다.
한이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한은 고스란히 오크의 피를 뒤집어썼다.
띠링—!
레벨 업하는 소리가 들린다. 왠지 레벨 업을 하면 전신이 상쾌해지며 피로가 달아나는 것을 느낀다.
[Lv : 10]
이름 : 아한
나이 : 19세
직업 : 없음
HP : 325/325
MP : 140/140
근력 : 14 민첩 : 14
근성 : 84 행운 : 14
지능 : 14 체력 : 5
마력 : 5
* 남은 능력치 포인트 : 20
순식간에 두 단계나 레벨 업을 한 듯싶었다. 하긴 8레벨 때 오크 한두 마리만 더 사냥하면 레벨 업할 정도로 경험치가 가득 차 있었으니 실제로는 한 단계 레벨 업 한 것과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한은 이번에도 전부 근성에 투자했다.
한은 한숨을 쉬었다. 검이 이제 두 자루 정도만 남은 것이다. 검이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면 되지만 녹색 오크를 비롯해 하급 몬스터를 제외한 다른 몬스터들은 권법으로 죽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한은 아이언 오크의 시체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검이었다. 아니, 도(刀)였다.
붉은 빛이 은은하게 맴도는 도. 길이는 자경단원의 검과 얼추 비슷했다.
한이 도를 검집에 집어넣어 보았다. 딱 맞았다. 그래도 약간 엉성하긴 했다.
한은 마을로 가는 즉시 직업을 선택하고 이 도를 넣을 도집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순간 이 검의 능력이 궁금해져 V라고 중얼거렸다.
[2등급-오크 부족장의 강철도]
공격력 : 28(+8.4)~40(+12)
내구력 : 50/50
부가능력 : 공격속도 + 5%
재 질 : 강철
무 게 : 5.5kg
설 명 : 오크의 부족장이 쓰던 강철도. 오크 대장장이가 붉은 철을 가공해 만든 도로 화려한 장식은 없으나 매우 날카롭다.
* 착용 가능 레벨 : 8
가이드북에 따르면 등급이란 것이 표시되는 아이템은 고급 아이템 이상이라고 했다. 3등급이면 고급, 2등급이면 레어, 1등급이면 유니크 순으로 말이다.
하지만 한은 내구력이 많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한은 아이언 오크의 시체를 등진 채 마을을 찾아 다녔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한의 앞에서 웬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젊은 남녀의 대화 소리. 오랫동안 숲 속에서 지내다 보니 감각이 매우 예민해졌다. 대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검자루를 더욱 꽉 쥐었다.
이윽고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한 갈색 머리를 포니테일 형으로 묶은 여성과 푸른색 더벅머리를 가지고 있는 남성이었다. 여성은 이제 열다섯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고 남성은 그보다 더 앳되어 보이는 나이에 푸른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집중해서 들어보니 ‘오크’란 단어와 ‘퀘스트’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들렸다. 한은 조용히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쉬익—!
머리 위로 검이 스쳐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한은 검의 사정권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여성 검사가 검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훔쳐 듣는 건 실례에요.”
“······미안하군.”
한은 순순히 사과했다. 복잡한 일이 생기기 전에 자리를 뜨려고 뒤를 돌아 다른 길로 향하였지만 여성의 말이 한을 붙잡았다.
“보아하니 초보자 같은데······. 혹시 마을로 가시는 길이면 저희가 안내해드릴까요?”
한의 걸음이 멈췄다. 이 세계 시간으로 한나절 동안 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런데 마을로 안내해 주겠다고 하니 한에게 있어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유 없는 호의는 경계하라고 스승님이 말씀하셨지······.’
일단 뒤로 돌아 여성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여성의 키는 꽤나 큰 편이었다. 키가 커서 약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성숙한 면이 있어 아름다워 보였다.
“제가 귀환 스크롤을 드릴게요. 대신! 저희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역시 조건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한은 무엇보다 저 귀환 스크롤이란 게 필요했다. 방금 착용한 도 역시 수없이 몬스터들을 베다보면 내구도가 다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한이 순순히 답하자 여성이 약간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여성은 환하게 웃으며 소개를 했다.
“저는 ‘르페아’라고 해요. 25레벨 검사죠. 지금은 소드 나이트의 전직 퀘스트를 하러 가는 중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저는 ‘모르도’라고 합니다. 22레벨 사냥꾼이에요. 페아 누님의 퀘스트를 도와주러 가는 중입니다.”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사냥꾼이라니? 그러고 보니 뒤에 활과 화살을 차고 있었다. 한의 눈빛에 모르도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마법사 로브를 입으신 게 궁금하신가 보군요? 제가 몸이 약해서······. 감각 비율을 적용해 버려서 말이에요······. 하하, 무거운 건 잘 못 입어요. 이 로브 안에도 천으로 된 옷 한 세트만 있죠.”
모르도의 말에 한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때 르페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자, 여기까지 하고.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아한. 10레벨. 무직.”
이번엔 르페아와 모르도가 놀랐다. 어떻게 그 레벨에 이곳까지 온 것일까? 그들의 놀람을 한은 짧은 한 단어로 한 번에 이해시켰다.
“버그.”
“아, 버그였군요. 하긴 초보자가 버그가 아니면 동대륙, 그것도 전쟁 중인 이 지역에 떨어질 리 없죠.”
르페아는 무언가를 한 번 생각한 후에 다시 한에게 말했다.
“당신은 저희 퀘스트를 보조해 주시면 돼요.”
르페아의 퀘스트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 숲의 한 가운데에 있는 오크 부족을 급습하여 오크 부족장의 도를 훔쳐내야 하는 것이다. 르페아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한은 짤막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미끼가 되란 소리군.”
“아~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구요. 으음, 여기 귀환 스크롤을 드릴게요. 저희는 북쪽 숲으로 들어갈 테니 당신은 남쪽 숲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소란을 피우면 오크들은 남쪽 숲으로 갈 거고 나랑 모르도는 도를 가지고 달아날게요. 그때 당신은 이 귀환 스크롤을 사용하시면 돼요. 알았죠?”
르페아가 주머니를 줬다. 꽤나 묵직한 게 귀환 스크롤 말고 다른 것도 든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이 귀환 스크롤을 들고 곧장 마을로 갈 생각은 안 해 봤나?”
“미안하지만 그 귀환 스크롤에는 우리 길드의 마법사 분이 타이머를 조절해 놓으셔서 약 삼십 분 후에 발동해요. 그리고 남쪽 숲에 있어야 발동 되겠죠? 왜냐면 오크들의 성채를 제외한 다른 곳은 반 마법 실드가 쳐져 있어서 마법을 써도 위력이 약해질 뿐 아니라 스크롤 류 마법은 사용조차 못 하거든요.”
한은 순간 그녀가 매우 치밀하다고 생각했다. 피식 웃으며 한이 남쪽 숲으로 향하자 르페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길로 쭉 가다 보면 오크 성채가 나올 거예요! 난리 좀 크게 쳐 줘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건지 만 건지 한은 묵묵히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오크들의 냄새. 오크들의 성채가 머지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오크들의 성채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입구를 보아하니 녹색 오크 네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한의 허리춤에서 귀환 스크롤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29:59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귀환 스크롤과 함께 하급 힐링 포션 두 병이 있었다.
가이드북에서 본 생명력 회복제. 한은 힐링 포션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는 입구로 향했다.
“이제 여기서 삼십여 분간 난리를 피우면 되겠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하나 꺼냈다.
내구력이 0이고 손상도가 -4인 자경단원의 검이었다.
한은 어깨를 뒤로 하더니 매우 빠른 속도로 오크에게 검을 던졌다.
콰직—!
검이 오크의 가슴을 뚫었다. 가슴이 뚫린 오크가 비명을 지르자 나머지 세 마리의 오크들이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한은 인벤토리에서 수명이 다한 검을 차례로 던져 두 마리의 오크들을 더 없앴다.
이제 하나뿐이다.
하나 남은 오크는 허리춤에서 뿔피리를 빼어들더니 길게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성채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남은 오크 역시 자경단원의 검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이 오크들의 성채 입구로 나섰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제 또 대규모의 전투가 이루어지리라. 그의 예감이 적중이라도 한 듯 저 멀리서 뿌연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오크 떼였다.
얼추 세어 봐도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갈색 오크만 5마리였다. 그래도 한은 아이언 오크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검자루를 잡았다.
“와라.”
한의 검집에서 붉은 빛의 도가 뽑혔다. 그리고 한과 오크 떼들은 격돌했다.
“누나. 빨리 와. 저 한이란 사람 벌써 한바탕하고 있는 모양인데?”
뿔피리 소리가 들린 후 모래바람이 남쪽 숲에 휘몰아쳤다.
그것으로 한이 한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안 모르도는 앞장서서 오크들의 북쪽 성채를 정찰했다. 4마리의 오크가 있었다. 그는 롱 보우를 뽑아 들더니 화살을 메긴 후 뿔피리를 차고 있는 오크의 머리를 노렸다.
“내가 통신망을 없애고 엄호할 테니 나가서 나머지 것들 좀 없애줘.”
“알았어.”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나의 오크가 쓰러졌다. 그것을 신호로 르페아는 검을 빼들고 고함을 질러대며 오크들에게 달려갔다. 르페아가 오크 하나를 벨 때 모르도는 또 하나의 화살을 오크에게 날렸다.
오크가 화살에 맞는 것을 끝으로 북쪽 숲을 지키는 오크들의 경비망이 뚫렸다.
모르도와 르페아는 신속하게 오크성채에 잠입 했고 부족장의 거처를 찾기 시작했다.
<『[개정판] 패시브 마스터』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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