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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악신 1권 (1)

2017.01.11 조회 972 추천 11


 @프롤로그-각성의 날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 말에는 숨죽인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 명령에 따라야 할 기사로서 주군의 분노에 사죄의 말을 꺼내야 하건만, 페일 엑키온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오히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체념의 감정만이 내심을 지배하고 있을 뿐.
 머릿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것은 이미 수년 전의 기억이었다.
 하얗게 방을 꾸미고 있던 융단은 붉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그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은 가녀리기 그지없는 연약한 귀부인. 아니, 어쩌면 귀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모습으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비틀거리며 다가간 자신의 품속에서, 그녀는 스러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엑키온 경······ 카이를, 내 아이를······ 지켜 주세요.
 
 자신을 지켜야 할 기사가 뒤늦게 도착한 것에 대한 질책이나 분노의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그 작은 음성에 담긴 것은 슬픔과 걱정 그리고 체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겠노라고.
 
 -······미안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사죄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눈앞에 선 자신의 주군의 목소리가 페일 엑키온을 차가운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또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척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말해 주지.”
 “······.”
 기사 페일 엑키온이 충성의 맹세를 한 주군,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은 차갑게 가라앉은 태도로 명령을 내렸다.
 “곧 황태자가 성에 도착할 것이다. 난 중앙에서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니 이번 원정에서, 그 아이를 내버려 두고 오도록. 마할 족의 손에 죽어 존재 자체가 지워지도록 버려두고 오라는 말이다!”
 “······.”
 페일 엑키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죽어 가며 했던 마지막 부탁과 결코 어길 수 없는 주군의 명령 사이에서 몸이 떨려 왔다.
 “알겠나, 페일 엑키온. 지금까지 눈감고 지나갔던 것은 그대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용서하지 않는다.”
 “······예, 영주님.”
 여기까지였다.
 자신은 기사. 때문에 여기까지다.
 그녀의 마지막에서 이루어졌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십여 기의 기마와 백여 명의 병사들이 초원을 걷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든 초원은 푸른빛을 잃고, 스산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제국의 남부, 야만족인 마할 족들이 넓게 분포해 있는 남부 초원의 국경선은, 어디를 가나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을의 손길에 의해 황금빛 초원은 점차 죽음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소규모의 마할 족 토벌군은, 흔들리는 갈대들 사이로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이미 마할 족의 영역으로 들어선 이상, 죽음의 기운은 초원에 국한되지 않고 토벌군 전체로 전염되고 있었다.
 토벌군을 인도하고 있는 십여 기의 기마 속에서, 페일 엑키온은 표현할 수 없는 절박함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아가는 전마의 한 걸음 한 걸음 속에서 절망이 피어나고, 죄책감이 피어나고,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쌓여 가고 있었다.
 이 무모하기까지 한 소규모 토벌군의 진정한 목적이, 그를 미치도록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황토 빛의 초원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는 페일 엑키온을 향해, 옆에서 힘겹게 말을 이끌고 있던 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엑키온 경.”
 회색 머리칼에 어쩐지 우울한 감정이 담긴 검은 눈동자의 소년. 이제 겨우 십 대에 들어선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전투마를 인도하느라 힘들어하는 ‘그녀’의 아들의 부름에, 페일 엑키온은 몸을 흠칫 떨었다.
 숨겨야 한다. 때문에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름에 응했다.
 “예, 소영주님.”
 제국 남부를 책임지는 드레이크 변경백령의 후계자이자, 소영주라 불리는 작은 소년은 떨리는 눈초리로 초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엑키온은 그 눈동자 속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소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영주님께선 역시 저를······ 미워하시는 걸까요?”
 “······!”
 그 물음에 페일 엑키온은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추고 말았다. 그 시리도록 차가운 진실이 소년의 입에 담기는 순간, 품고 있던 수많은 감정이 격류처럼 심장을 내달리고 있었다.
 애써 나온 대답은,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영주님은 장차 드레이크 변경백령을 다스릴 후계자이신데요.”
 “하지만······ 저번에 토벌군에 참가했을 때도 엑키온 경 덕분에 겨우 죽을 위기를 넘겼었는데, 한 달 만에 또 토벌군에 참가하라고 하셔서······.”
 “······.”
 한 달 전. 아마 자신의 주군이 자세한 언급을 회피하던 명령을 그토록 직접적으로 내린 것은, 그 토벌전 때문일 것이다.
 마할 족에 의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이 소년을 힘겹게 구출해 낸 자신의 행동에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페일 엑키온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 이 어린 소년에게 차마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소영주님께선 장차 이 초원을 지키고, 제국을 지켜 나가실 분입니다. 때문에 영주님께선 소영주님이 강한 전사로 성장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때문에 위험한 임무에 참가하도록 하실 뿐. 오히려 큰 기대를 하고 계신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걸까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변명이었으나, 소년의 눈이 조금 밝아진 듯한 느낌이 들어 페일 엑키온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몸서리쳐야 했다.
 멍청한 녀석.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 어린 소년을 속이고 만족한단 말이냐.
 차라리, 차라리 모든 진실을 밝히고, 도망치라고, 기사의 맹약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이 소년을 데리고 먼 곳으로 도망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켜 낸다면······.
 “······예. 때문에 저를 비롯한 기사들이 소영주님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동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자신은 기사다. 이미 기사의 맹약으로 묶여 있는. 그녀를, 이 소년을 만나기 전부터 자신은 이미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의 기사였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가치였다.
 “그렇네요. 엑키온 경 덕분에 저번에도 무사히 살아났으니까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엑키온 경. 이번엔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할게요.”
 이번엔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말이 얼마나 큰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히는지, 이 소년은 알고 있을까.
 “아닙니다. 전 영주님과 돌아가신 에우리케 님에게서 소영주님을 지켜 달라는 명을 받은 몸.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그녀, 에우리케를 백작 부인이라 칭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고 힘겹게 말을 몰아 황야를 나아가고 있었다.
 그 동작이 마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아, 가슴이 쓰렸다.
 
 
 
 마할 족의 부대와 조우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몇 개의 구릉이 이어지며 초원을 어지럽게 만드는 지형에서, 그 뒤에 숨어 있던 마을에서 뛰쳐나온 마할 족의 전사들이 토벌군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마할 족 전사들의 수는 오십여. 백을 넘는 토벌군에 비하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다. 하지만 그런 계산을 무너트리는 것이 마할 족의 전사들로, 태생적으로 강력한 전사의 피를 타고나는 마할 족 전사들은 백 명의 일반 보병 정도는 우습게 도륙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전투마를 탄 열 명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체계적으로 공격에 대비한다면 비등하게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벌군은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페일 엑키온을 비롯한 열 명의 기사들이 마할 족과 조우하는 순간 전장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백여 명의 보병들은 말을 탄 기사들을 따라 도망칠 수 없었고, 때문에 마할 족 전사들과 부딪쳐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 병사들 사이에서, 소년이 떨고 있을 것이다.
 구릉을 넘어 말을 달리며, 페일 엑키온은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이걸로 끝이다. 이제 그녀의 아이, 그 어린 소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주군이 내린 명령 그대로.
 눈물이 미처 흐르기 전에, 옆에서 말을 달리던 기사가 말을 건네 왔다.
 “드디어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군. 안 그런가?”
 “아, 아아······.”
 힘없는 대답에 옆의 기사는 이해한다는 듯 쓰게 웃었다.
 “자네가 소영주를 아끼고 있었단 건 이해하는데, 주군의 뜻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또 다른 기사가 끼어들었다.
 “뭐, 나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긴 한데, 어차피 백작 부인으로도 불리지 못하는 여자의 자식이잖아. 어차피 이럴 운명이었다고. 신경 쓰지 마라, 엑키온.”
 “······.”
 비록 사실이건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네가 영지 제일의 기사로 불려서 지금까지 무사했던 거지, 계속 소영주를 감쌌다간 어떻게 됐을지 모르네.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어.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그 출신에 소영주라 불리면서 지금까지 살았던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그렇긴 하지.”
 “······.”
 페일 엑키온은 눈을 감았다. 시야를 덮은 어둠 속에서 말이 달리는 소리와, 자신의 심장박동만이 세상을 울렸다.
 그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자.
 그때 다른 기사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침범해 왔다.
 “호오, 아직도 버티고 있는걸? 금방 전멸당할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버티는구만.”
 “뭐?”
 눈을 뜨고 내려다본 구릉의 아래에선 전투가 한창이었다. 지휘관을 잃은 일반 병사들이니 금방 전멸당하리라 예상하고 있었건만,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마할 족에 저항하고 있었다.
 “의외로군. 악착같이 싸우는데?”
 “저거, 소영주를 보호한다고 하는 짓 아닌가?”
 “아아, 저기 가운데에······.”
 귓가에서 울리는 기사들의 목소리 가운데, 페일 엑키온은 떨리는 눈으로 아래의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병사들은 둥그렇게 뭉쳐서 누군가를 보호하듯 싸우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악착같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강력한 마할 족의 전사들을 상대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그 절박함의 발로였다.
 저 병사들은 어째서 저렇게까지 버티고 있는 것일까.
 저들도 이미 자신들이 소영주에 딸린 희생양으로 버려졌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을 텐데.
 “성을 나오기 전에 소영주가 병사들을 엄청나게 챙겼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가?”
 “아, 가족들까지 모두 불러서 식사를 대접하고 이것저것 편의까지 봐줬다는 거?”
 “뭐, 소영주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거겠지. 이번 토벌에서 자신과 병사들은 모두 죽을 거라고. 그래서 비싼 술에 음식을 마구 내주고 가족들에겐 몰래 돈까지 전해 줬네 어쩌네 하는 말도 있던데.”
 “하긴, 한 달 전 토벌 때에는 병사들 중에 탈주자도 나오고 했는데 이번엔 묘하게 조용했지. 애초부터 각오하고 있던 거구만, 병사들도.”
 “아아, 어쩐지 백인장이 십인장들을 데리고 뭔가 얘기하고 하더라니, 자기들끼리 소영주를 살려 보겠다던 거였나 보군.”
 “애초에 소영주도 죽을 거라 각오하고 나선 길이고, 마할 족을 상대론 별 소용도 없겠지만.”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기분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죽을 거라 예상하고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다고?
 전혀 모르고 있었다. 주군이 내린 명령에 혼자 고민하면서, 성을 나오기 전까지 방에 틀어박혀 혼자 괴로워하고 있었으니 알 수 있었을 리가.
 소영주가, 그녀의 아이가 혼자 죽음을 준비하고, 병사들까지 챙기고 있는 와중에도 혼자서만 괴로워하고 있었을 뿐.
 자신이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 그 어린 소년은 혼자 괴로워하고, 담담하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결연함으로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다.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숨기면서.
 
 -이번엔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할게요.
 
 소년이 했던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아마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내심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도움을 청하는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조용히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지켜 주겠다 그녀와 약속했던 아이는······.
 ‘난, 뭘 보고 있었나.’
 페일 엑키온은 급히 말 머리를 돌렸다. 그 모습에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말을 멈춰 세웠다.
 “자, 잠깐! 갑자기 왜 그러나, 엑키온.”
 “어, 어이, 자, 자네, 설마······!”
 “미안하네.”
 “이, 이봐!”
 “이번에도 명령을 어겼다간 아무리 자네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어!”
 그의 각오를 눈치챈 듯 급히 만류하려는 동료들을 향해 페일 엑키온은 담담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어쩐지 들끓던 마음이 차분하게 진정되어 있었다.
 “주군께 기사의 맹약을 깬 죄, 내 목숨으로 사죄드리겠다 전해 주게.”
 “이, 이봐!”
 “엑키온!”
 빠르게 말을 달렸다.
 몇 년을 함께한 애마는 주인의 결심을 알았다는 듯 힘차게 울음을 터트리며 구릉을 뛰어 내려갔다.
 상쾌한 바람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채앵!
 과거 기사의 맹약과 함께 자이켈 백작에게서 하사받은 보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며 예리한 소리를 냈다.
 전장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크아악!”
 “막아! 소영주님을 지켜라!”
 “몸으로라도 막앗!”
 “소영주님을 돌려보내 드려야 한······ 아악!”
 악에 받쳐 마할 족의 전사들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외침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병사들조차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데, 기사라는 자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번엔 늦지 않는다.’
 4년 전, 지켜야 할 상대를 지키지 못했다. 너무 늦었다. 하지만 이번엔 결코 늦지 않는다.
 “크아악!”
 “막아아앗!”
 병사들의 비명을 들으며, 검은 가죽옷으로 몸을 감싼 마할 족들을 미친 듯이 베며 앞으로 돌진했다. 과거 이렇게 검이 가벼웠던 적이 있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츠팟!
 숙련된 기사라도 일대일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마할 족을 우후죽순으로 쓰러트리며, 페일 엑키온은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들었다.
 이제 가까운 곳에 소년과, 소년을 감싸려 애쓰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 도망치세요! 도망치라고!”
 악에 받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치란 말야! 날 지키지 말고 도망쳐엇! 도망치라고옷!”
 “물러나세요, 소영주님! 앞이 뚫렸다! 막앗!”
 “막아라! 소영주님을 지켜!”
 “마, 마할 족이······ 아악!”
 “도망치란 말이야아아아!”
 자신을 지키려는 병사들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소년이 보였다.
 절박하면서도 너무나 숭고하게 보이는 모습.
 아아, 난 대체 뭘 고민하고 있었을까.
 “뚫렸어! 소영주님을 지켜!”
 “막앗!”
 병사들로 이루어진 보호망이 찢어지며, 마할 족의 전사들이 소년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소년을 보호하려 드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소년이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것을 눈치챈 탓이었다.
 마할 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커다란 도끼가 번쩍이며, 소년의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페일 엑키온은 말 등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하아앗!”
 달려가던 속도와 말을 박찬 힘이 더해져, 순식간에 앞으로 날아들고, 휘둘러진 보검은 도끼의 자루와 마할 족 전사의 몸을 한 번에 갈라 버렸다.
 피 보라와 함께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전장에 순간적인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병사들의 벅찬 함성이었다.
 “페, 페일 님이닷!”
 “페일 엑키온 경이 오셨다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한번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쳤던 이의 귀환에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사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사함을 느끼던 페일 엑키온은, 뒤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에, 엑키온 경? 대, 대체 왜······.”
 자신을 버린 기사가 돌아온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멍하니 굳어 있는 소년이 있었다. 허리에 찬 검을 뽑지도 못하고 먼지로 더러워져 있는 작은 소년이 있었다.
 그녀의 아이는 아직 전장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소년을 버려두려 했었다.
 이제라도 돌아온 것에 모든 고민이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소년의 어머니를 지키던 기사는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소영주님을 지키는 기사이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소년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병사들에게 악을 쓰며 방어진을 재구축하던 백인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엑키온 경! 소영주님을 부탁드립니다!”
 그 결연한 목소리에 반응하듯 한 병사가 엑키온의 말을 이끌고 다가왔다. 말고삐를 전해 받으며, 페일 엑키온은 그들의 눈에서 죽음을 불사한 각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심코 지어 보인 미소에 병사들이 씨익 답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소년의 팔을 붙들고 말 위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전장이라고는 하지만 뒤엉킨 숫자는 백에도 이르지 못했다. 말을 타고 달린다면 빠져나갈 수도 있을 터.
 “소영주님을 부탁드립니다!”
 페일 엑키온은 소년을 품에 감싸듯 안아 보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인장의 고함이 전장을 울렸다.
 “마지막 힘을 내라 이놈들아! 가자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이제 서른 이하로 숫자가 줄어 버린 병사들은 미친 듯한 함성과 함께 사방으로 창을 내찌르기 시작했다.
 이히힝!
 힘찬 전투마의 울음소리와 함께, 보검이 사방으로 빛을 뿌렸다. 앞을 가로막는 마할 족의 전사들을 사방으로 떨어트리며, 말이 전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소영주님, 고개를 숙이고 계십시오!”
 “나, 난······.”
 소년과 페일 엑키온이 탄 말의 중요성을 눈치챈 듯 마할 족들이 마구 몰려들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반 이상 죽어 나가는 동안 쓰러진 마할 족 전사의 수는 고작 십여 명.
 “이히히히히아아아아!”
 “죽여라!”
 “제국의 기사다!”
 “키히이이이아앗!”
 사방에서 날아드는 도끼들을 쉴 틈 없이 쳐 내는 가운데, 넋이 나간 듯한 소년의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나, 난 이러려고 한 게······ 이렇게 해 달라는 의도는······.”
 아마 출정 전에 병사들에게 베풀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죽기 전에, 아마 자신에게 말려들어 죽게 될 병사들에게 미안함을 느껴 행했던 일이, 오히려 병사들이 죽음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결과로 돌아오자 당혹한 것이다.
 그 심정이 시리도록 전해져, 페일 엑키온은 말을 독려하며 애써 입을 열었다.
 “병사들 스스로가 선택한 일입니다.”
 “아······.”
 “그리고 저 또한.”
 “하, 하지만······ 결국 모두 죽을 텐데, 결국엔······.”
 “제 목숨을 걸고, 소영주님을 지키겠다 맹세했습니다.”
 손도끼가 하늘을 날아 말에게 날아들고, 피 분수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런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한 명의 기사가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제 평생에, 유일하게 마음에 담았던 레이디께 말입니다.”
 그렇다.
 이건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레이디에게 바치는 속죄.
 비록 주군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죽어 간 그녀이지만, 지키겠다던 자신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때문에 여기서 그녀의 아이를 위해 목숨을 건다.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품 안의 소년이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말이 전장의 경계를 뚫고 나섰다.
 드디어 앞에 보이는 것은 황량한 초원뿐.
 “가자, 테롯!”
 이히히힝!
 몇 년을 함께한 전장의 동반자는 힘차게 울었고, 순식간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구릉 사이의 낮은 지대가 금세 끝을 보이고 있었다.
 기어코 지켜 내,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구릉 위쪽에서 전투 도끼가 엄청난 기세로 날아든 것은.
 “크윽!”
 파카캉!
 숙련된 강한 전사가 내던진 거대한 도끼는 말이 달리던 속도와 맞물려 엄청난 기세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건 한 팔로 소년을 안은 채론 막아 낼 수 없는 위력으로 다가왔다.
 몸이 흔들리고 뒤이어 전장을 내달리던 동료의 단말마가 울렸다. 주춤하는 순간, 뒤에서 쫓던 마할 족들의 도끼가 말의 뒷다리를 끊어 낸 것이다.
 히히힝!
 말이 쓰러지는 것과 함께, 페일 엑키온과 소년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강렬한 충격이 몸을 휩쓰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페일 엑키온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벌어진 절망적인 사태였지만 단련된 신체는 바로 다음 사태를 대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구릉 위쪽에서 일곱의 기마가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저 말들은······.’
 달려오는 말 중 몇 마리는 성으로 돌아가던 기사들의 것이다.
 “······주변에 정찰대가 있었나.”
 아마 돌아가는 길에 마할 족의 정찰부대와 조우, 응전했지만 결국 모두 쓰러졌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수십 단위로 움직이는, 거기에 기마병까지 포함되어 있는 정찰부대를 만났다면 아홉의 기사로는 이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살아남은 정찰부대의 수가 저게 다인 듯하다는 것뿐.
 “······으득.”
 “엑키온 경······.”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소년이 힘없이 몸을 기대 왔다. 끝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페일 엑키온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보이는 것은 쫓아오는 마할 족의 전사들뿐이었다. 뒤를 막아 주던 병사들은 이미 전멸당했으리라. 그래도 숫자가 많이 줄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아마 병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져 저항한 때문일 것이다.
 ‘······30 대 1인가.’
 아니,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있는 한 훨씬 불리했다. 하지만 오히려 전의는 불타올랐다.
 “말을 빼앗겠습니다. 그 후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 성으로 달려가시는 겁니다.”
 “······.”
 “결코 뒤를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왜, 왜, 다들······.”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소년을 보며 한 명의 기사는 차분하게 웃어 보였다.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 가능한 한 오래, 그 무엇에도 굴하지 말고 살아남으십시오. 저와 병사들의 희생을 기억하신다면, 어떻게 해서든,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엑키온 경······.”
 소년의 떨림이 잦아드는 것에 미소를 짓는 순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달려든 기마들에서 날아드는 도끼를 힘겹게 쳐 내고, 뒤이어 달려드는 기마의 기수를 거칠게 떨어트린다. 하지만 공격은 또 이어지고, 어깨가 찢기듯 베여 나간다. 그럼에도 웬일인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고, 힘차게 검을 휘두른다.
 뒤에서 달려오던 적들이 지척에 다가와 소년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을 느끼고, 소년을 끌어당기며 검을 휘두른다.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보검은 너무도 만족스러운 예기를 발한다.
 자아,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달려드는 적의 가슴을 걷어차고, 날아드는 도끼와 검들은 치명적인 것만 막아 내고 곧바로 하나를 쓰러트리자.
 소년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은 왼팔을 희생해서라도 막아 내고, 일단 기마 몇 마리의 다리를 끊어 내자. 필요한 말은 단 한 마리뿐이니까.
 방금 뭔가가 허리를 훑고 지나간 것 같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다가오는 적의 심장을 뚫어 내자. 위에서 내리쳐진 도끼가 어깨를 가르고 들어서지만,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잃어버린 왼팔의 어깨니까.
 울먹이는 소년에게 아직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주고, 다시 검을 휘두르자. 한 팔로 휘둘러도 충분히 날카로운 검에게도 감사를 표하자. 이 검을 내려 준, 이젠 배신하고 만 주군에게도 마지막으로 감사를 표하자. 이가 나가고 금이 가면서도 아직 버티고 있는 나의 검,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다오.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공격을 막아 내고, 다시 막아 내고, 소년을 지켜 내고, 다시 검을 휘둘러 적을 쓰러트리자.
 이제 한 마리만 남은 말의 기수를 떨어트리자. 바닥에서 일어서려는 적의 머리를 걷어차고, 그녀의 아이를 말의 곁으로 밀어붙이자. 그녀의 아이다. 부친과 모친, 두 전사의 핏줄을 동시에 타고난 아이다. 말에 태우기만 하면 도망치는 것쯤은 쉽게 할 수 있을 거다, 분명히.
 이 아이가 말에 타는 순간 몸을 돌려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다시 검을 휘두르자.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아니 숨이 끊어진 후에도 어떻게든 적들을 막아 내자.
 그렇게 해서······.
 “엑키온 경!”
 어쩐지 소년의 절규와도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 듯했다. 왜일까.
 몸에서 힘이 빠지는 이유는 왜지?
 검을 쥔 손이 풀리고, 주군에게서 받은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왜지?
 몸이 앞으로 기우는 이유는 뭐지?
 내 몸을 붙잡은 누군가가 울부짖는 것은 왜지?
 아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마지막으로, 그녀의 아이를 품에 안아 보게 되는 건 나쁘지 않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약속을 지키다 가는 제가, 조금이나마 용서받을 수 있기를.
 
 또다시 날아든 도끼가 등에 박혀 드는 것과 동시에, 페일 엑키온의 신형이 허물어지듯 스러졌다.
 그리고 기사의 마지막 모습에 울부짖던 소년의 안에서, 잠자던 악신惡神이 눈을 떴다.
 
 
 
 황량한 초원에 반하듯, 연회장 안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사방에서 조명을 받은 보석들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웃음을 머금고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연회장 밖의, 성 밖의, 영지 밖의 초원에 흐르는 죽음의 기운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공간에서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한 그대로였다. 황태자 위에 올라섬과 함께 황실 수업의 일환으로 제국의 전역을 둘러보는 황태자의 행차는, 위험하기 그지없어 평소에는 황족의 방문이라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 남부 초원도 예외로 하지 않았다.
 황족을 호위하는 황실기사단과 수천 병력의 힘을 빌려 영지를 방문한 어린 황태자를 보며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 군부의 위치로는 제국 남부를 수호하는 변경백에 올라 있는 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황태자의 방문을 대비해 대부분의 병력을 풀어 마할 족의 접근을 방비하고 있었고, 덕분에 황태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성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극진한 환대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또한 올해 열다섯 번째의 생일을 기해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소년은 지위에 어울리는 영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폐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소, 변경백.”
 “무슨 황송한 말씀이십니까, 황태자 전하.”
 “나도 남부 초원의 치열함과 혹독함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소. 내가 변경백의 성에 아무런 장애 없이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변경백의 군사들이 노력한 결과임을 어찌 모르겠소.”
 “하하,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이 오지에 왕림해 주셨거늘, 그 정도의 일은 신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생각한다니 마음이 편하구려. 변경백의 노고를 꼭 기억해 두도록 하지.”
 “황송하옵니다.”
 남부 초원이 사지와 같은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제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 곳을 방문함에도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말을 위해서였다.
 우선적으로 황태자의 안위를 위해 병력을 움직인 자신의 충심을 전하고, 이런 위험 지대를 잠시나마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의 능력, 남부 초원을 완벽하게 방비하고 있는 힘을 은근히 과시한다.
 남부 초원의 드레이크 변경백령은 황실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지역. 황태자의 방문을 기회로 삼아 은연중에 전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전해야 한다.
 모든 병력이 움직여야 겨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마할 족의 위협을 역으로 전달할 수도 있으며, 어쨌든 그 마할 족을 막아 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지금까지처럼 독자적인 병력망의 구축을 눈감아 달라는 뜻은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빛나는 금발에 화려한 외모, 그리고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정평이 나 있는 정치 감각. 황태자는 확실히 제국의 후계자에 걸맞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이 소년이 후계 다툼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을 터.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은 만족하고 있었다.
 “허나 많은 기사들까지 초원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좀 아쉽군. 사실 만나 보고 싶은 기사가 있었는데 말이오.”
 어쩐지 아쉽다는 듯 말하는 황태자를 보며 드레이크 백작은 잠시 눈을 가늘게 했다.
 “제 부족한 기사들 중에 말씀이십니까?”
 황태자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려한 외모와 예복에 어울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백작과 황태자를 주시하고 있던 연회장 안의 귀부인들이 희미하게 술렁였다.
 “사실 내가 만나고 싶었다기보다는, 이 아이가 만나 보고 싶어 해 나도 흥미가 일었다는 것이 정확하지.”
 드레이크 백작은 황태자의 옆에 자리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는 반짝이는 은발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조용히 서 있었다.
 황태자의 바로 옆에서 따르고 있다는 것은, 아직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도 있는 높은 지위의 신분이라는 것을 뜻했기에 드레이크 백작은 큰 흥미를 보였다.
 “호오, 영애께서?”
 “아아, 이 아이는 여자의 몸임에도 기사가 되기를 꿈꾸는 아이여서 말이오. 듣기로는 어릴 적부터 선망하던 기사가 변경백의 휘하에 있다고 하더군. 사실 그 때문에 나와 함께 변경백의 영지를 방문한 것이기도 하고.”
 소녀가 수줍은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영광이로군요. 그 기사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황태자가 자리한 곳에서 소녀가 직접 입을 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황태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나는 기억할 수도 없는 시절의 일이지만, 황실기사단의 자리를 고사하고 백작을 따라간 기사라 하더군. 나를 호위하는 황실기사단의 기사에게 물으니 기사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종종 회자되는 일이라 하더이다.”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의 안색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누구를 말하는지 금세 눈치챈 탓이었다.
 “페일 엑키온 경이라고 했던가? 이 남부에서의 활약상은 나도 들은 적이 있었지.”
 “······예, 제 휘하의 기사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입니다.”
 “하하, 그렇소? 가능하다면 이 아이를 위해서도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그도 국경으로 나가 있소?”
 “안타깝게도, 그렇사옵니다. 기사단장의 자리도 사양하고 전장에 서기를 바라는 이인지라······.”
 “호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만나고 싶어지오만, 안타깝군.”
 황태자는 물론 소녀 역시 아쉽다는 표정을 하는 것을 보며 드레이크 백작은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페일 엑키온이 일찍이 자신의 뜻을 따랐다면 이 자리에서 소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자신의 뜻을 모른 척하며 ‘그놈’을 감싸고 돈 탓에 당장 불러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놈의 존재를 황태자를 비롯한 중앙 귀족들에게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때를 노려 토벌군에 끼어 내보낸 것이기에.
 영지 내에서야 여러 시선과 여론을 의식해 소영주라 부르도록 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자신의 눈이 닿는 이곳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놈은 전장에서, 자신의 후계자라도 목숨을 걸고 전장에 서야 한다는 대외 선전용의 희생물로 죽어야 했다.
 놈의 가치는 그 정도뿐. 그렇게밖에 쓸데가 없는 실패작이다.
 ‘엑키온 녀석······.’
 기사의 맹약을 맺긴 했지만, 신념에 너무 충실한 면이 있어 다루기가 힘든 자이기도 했다. 굳이 직접 그놈을 데리고 나가 버리고 오라 명령한 것은 그것을 꺾어 조금 더 다루기 쉽게 만들려는 의도가 강했다.
 기사로서의 자각이 강한 만큼,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할 테니까.
 “허나 그는 시찰의 임무를 맡고 나간 만큼, 곧 돌아올 것이니 황태자 전하의 뜻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소? 그거 다행이군.”
 미소를 짓는 황태자와 기대하는 기색을 보이는 소녀를 보며 드레이크 백작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놈을 버려두고 돌아오라 했으니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황태자가 원하는 바는 가능한 한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황도에 아직까지도 엑키온의 이름이 가진 영향력이 남아 있나 보군. 후, 그래서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만.’
 실력과 더불어 기사로서의 명성이 높은 자라 은근히 항명을 한다 해도 쉽게 처벌할 수 없는 존재가 페일 엑키온이었다. 하지만 빨리 돌아와 황태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항명은 아무것도 아니다.
 드레이크 백작은 페일 엑키온이 돌아오면 연락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황태자와의 담소를 이어 갔다.
 그렇게 페일 엑키온을 기다리며 화려한 파티는 계속되고 있었다. 연회장 밖의, 황폐한 초원에서는 피를 뿌리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그것을 신경 쓸 이는 없었다.
 남부 초원에 흐르는 죽음의 기운은, 화려한 연회장 안으로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 정복을 입은 전령이 뛰어든 것은 해가 저물어 가며 파티가 끝으로 치닫는 때였다.
 웃음소리로 가득하던 연회장 내에 잠시의 정적이 머물렀다.
 “여, 영주님······.”
 자신에게 달려오는 젊은 기사를 보며 드레이크 백작은 만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드디어 페일 엑키온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하, 엑키온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황태자 전하.”
 “오오, 그렇소? 다행이구나, 리디야. 네 뜻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니.”
 “예, 전하.”
 기꺼워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만족하며 드레이크 백작은 다가온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엑키온 경이 도착한 거냐?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만나고자 하시니 어서 정복을 갖추고 들라 전하······.”
 “여, 영주님······.”
 웃음을 머금고 말하던 드레이크 백작은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기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잠시 몸을 떨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 엑키온 경이, 저, 전사했다고 하옵니다.”
 “뭐, 뭣!”
 난데없는 말에 드레이크 백작이 경악해 소리쳤다. 황태자와 소녀 역시 놀란 얼굴을 하는 가운데, 드레이크 백작은 황태자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냐! 엑키온이 전사하다니!”
 “그, 그게, 엑키온 경을 비롯한 토벌군의 모든 기, 기사들이, 마할 족의 손에 저, 전사했다 합니다.”
 “뭐, 뭣이! 모두 죽었다? 네놈이 지금 내 앞에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서슬이 퍼런 고함에 젊은 기사는 파랗게 질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멍청한! 엑키온이 죽었다고 헛소리를 지껄인 놈이 누구냐! 토벌군에서 돌아온 놈이 있어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을 게 아니냐! 설마 엑키온이 당했는데 일반 병졸이 살아 돌아왔다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만족감이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진 탓에, 그리고 페일 엑키온이란 최강의 기사가 전사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에 거의 이성을 잃은 다그침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에 눌린 탓에, 젊은 기사는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그게······ 소, 소영주님이십니다.”
 “······뭐?”
 드레이크 백작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결코 나와서는 안 될 호칭이 황태자와 연회장 안의 수많은 이들 앞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더욱이 엑키온까지 죽은 판국에 그놈이 살아 돌아왔다니?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가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호오, 소영주라. 변경백에게 후계자가 있었소?”
 황태자의 물음에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드레이크 백작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화, 황공하옵니다, 황태자 전하. 소신이 잠시 이성을 잃어······.”
 “아아, 됐소. 페일 엑키온 경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나도 충격적이었으니. 그보다 소영주라면 변경백의 아들이란 말이겠군. 내 미처 모르고 있었구려.”
 드레이크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놈의 존재가 황태자 앞에 드러났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사정을 들어 보니 엑키온 경과 함께 출정했던 모양인데, 엑키온 경마저 전사한 전장에서 살아 돌아왔다니, 상당히 뛰어난 기사인 모양이오.”
 “······.”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드레이크 백작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황태자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옆의 소녀를 돌아보았다.
 “아,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구나. 괜찮으냐?”
 “괘, 괜찮습니다, 전하.”
 페일 엑키온의 전사가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던 듯 굳어 있던 소녀가 겨우 안색을 회복하는 것을 확인한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드레이크 백작을 향해 물었다.
 “지금까진 모르고 있었지만, 변경백의 후계자가 있다니 만나 보고 싶군. 사선에서 무사히 돌아올 정도의 기사라니 더욱이.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소만, 소영주의 나이는 어떻게 되오, 변경백?”
 “그, 그것이······.”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12세의 소영주를 토벌군에 참가시켜 내보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경험을 쌓게 하려 했다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페일 엑키온과 다른 기사들마저 몰살당했다는 마당에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이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는 순간이었다. 연회장의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소, 소영주님!”
 “안 됩니다, 소영주님! 화, 황태자 전하께서 계신 자립니다! 부, 부디 의복만이라도 다시 갖추시고······.”
 “소영주님!”
 만류하는 이들을 뚫고, 한 소년이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소년의 모습을 확인한 연회장 안에는 숨죽인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직 채 성장하지 못한 작은 소년이, 전신에 새빨간 핏물을 두른 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연회장 안으로 결코 침범하지 못하던 죽음의 기운이, 소년을 따라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거였을까.
 그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태어나게 한 아버지가 나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핏속에 잠겨 죽어 간 어머니의 흉수가, 자신의 아버지라 불리는 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엑키온 경이 아버지의 뜻과, 자신을 지키겠다는 약속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단지 그랬을 뿐이다.
 각오했기에, 자신과 함께 죽어 갈 병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속죄하고 싶었다.
 어머니를 지키려 했고, 이젠 나를 지키려 하는 엑키온 경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
 이제 죽음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였다.
 그런데 병사들은 나를 지키겠다며 목숨을 내던졌다. 나를 지키겠다며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핏물에 잠겼다.
 엑키온 경은 사지로 돌아와 나를 지키려 모든 것을 내던졌다.
 왼팔이 잘려 나가고, 온몸을 난도질당하고, 끝까지 나를 감싸다가, 내 앞에서 숨을 거뒀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아마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뭔가가 어긋나기 시작했겠지.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죽었다면, 이렇게 죽음이 내리지는 않았겠지.
 이제라도 죽어야 할까.
 이제라도 모든 것을 끝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떻게 해서든,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모든 걸 바쳐 나를 살리려고 했던 이가 있었다. 그저 죽기 전의 변덕, 조금의 사죄로 행한 일에 목숨을 내던진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죽을 수 없어.
 이제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죽음 속에 잠길 수 없다.
 난 살아남는다.
 이 세상 모든 곳에 죽음이 내리더라도, 나는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니 난 차라리 죽음을 내리는 자가 되겠다.
 그렇게 결심했다.
 그래서 귓가에는 목소리가 들린다.
 죽음을 부르짖는 악신의 음성이.
 그 목소리를 따르자 나는 피에 잠겼다. 피로 물든 갑옷과 의복이 몸에 달라붙고, 지나간 길에 죽음의 흔적을 남긴다.
 내가 만들어 낸 피의 발자국에 기겁하는 시종들이 보인다.
 그들을 죽이는 방법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린다.
 비켜라.
 나를 죽음에 담그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걸음걸음에 핏물이 흐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나던 연회장에 죽음의 흔적을 뿌리며, 소년은 아비의 앞에 서서 선언했다.
 “임무를 마치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자신에게 죽음을 내리려는 자의 앞에서, 죽음을 두르고 선언했다.
 “다음 임무를 주시지요. 다시 한 번 살아나 보이겠습니다.”
 그것은 선전포고다.
 이제 가만히 앉아 죽음을 맞지는 않겠다.
 나는 살아 돌아온다.
 그들이 바랐던 것처럼.
 
 각성의 날, 제국의 남부에서 악신이 조용히 포효했다.
 
 
 
 @남부의 악신 Ⅰ
 
 
 
 제국은 이스타나 대륙의 절반 이상을 잠식하고 있는 최대, 최강의 국가였다.
 대륙 서해안까지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극빙의 얼음 지대 직전까지, 대륙 남쪽으로는 황폐한 남부 초원의 초입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비뉴르 산맥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지닌 제국은 드넓은 영토 내에 강력한 힘을 비축해 두고 있었다.
 물론 적은 존재했다. 북부의 얼음 지대와 남부의 초원에는 아직 평정하지 못한 야만족들이 들끓고 있었고, 동쪽의 비뉴르 산맥 주변으로 두 개의 공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또 네 개의 왕국이 자리해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면서도 언제나 제국의 영토를 승냥이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서해안은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나,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해상연합국은 아직은 동맹일 뿐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우방은 아니었다.
 대륙의 풍요로운 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제국은 그 거대한 영토에서 오는 천문학적인 수익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상 마음만 먹는다면 동서남북 어느 방향이든 평정할 능력도 지녔다. 만약 한 방향이라도 적을 줄일 수 있다면 대륙 통일도 꿈은 아니라는 것이 대륙 전체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것을 수행하기에는 문제가 따랐다. 우선 해상연합국의 경우에는 해산물의 공급과 제국의 북부와 남부까지 아우르는 해상유통망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기에 점령전에 들어갈 시 전쟁 종결 전까지의 피해가 천문학적인 수치로 올라갈 것이다.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 없다.
 북부 얼음 지대의 경우에는 애초에 손에 넣어 이로울 것이 없는 땅이다. 얼음 아래에 매장된 자원들은 매력적이지만, 크게 필요한 것들은 아니며 북부를 평정해 얻는 이익은 북부 야만족의 소멸뿐인데 지금의 상황은 큰 위협은 제거한 판국이기에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남부의 초원 지대 역시 비슷한 여건으로, 이미 충분한 제국의 곡창지대를 배로 늘릴 필요도 없을뿐더러, 강력한 전사로 소문난 마할 족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제국으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드넓은 초원과 평야, 그 아래의 늪지에 흩어진 마할 족의 씨를 말리는 것은 너무도 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사실상 가장 만만한 방향은 동쪽의 두 공국과 네 왕국이었다. 다만 그 사실을 대륙 동부의 여섯 국가 역시 알고 있기에 제국의 침공 기미가 보이는 순간, 순식간에 연합군을 구성했다. 물론 여섯 국가의 병력 전부를 합쳐도 제국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그곳에 모든 전력을 투입하기에는 서북남의 적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도 힘을 응집시켜 쉽게 평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때문에 제국의 국경선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큰 이유는, 각지에서 십 년이 멀다 하고 일어나는 반란이었다. 사실 동부의 두 공국은 반란이 성공해 독립한 나라들로, 공식적으로는 제국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나 우호적이진 않은 나라들로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려 네 왕국이 지원하는 탓에 빠르게 진압하지 못해 잃어버린 제국의 땅이었다.
 동부 외에도 각지에서 반란은 일어났고, 제국은 그것을 진압하고 수습하느라 전력을 모아 영토를 늘릴 여유는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위태롭다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제국이 지닌 저력은 그런 움직임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했다. 하지만 그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가능성 역시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고, 사방의 적들은 바로 그때를 기다리며 항상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제국력 641년.
 거대한 영토, 그리고 계속해서 안정되는 것은 불가능한 황실의 통치. 그 가운데 제국은 또 한 번 반란의 움직임 속에서 내환을 앓고 있었다.
 
 
 
 “병력이 없습니다.”
 루스펠 후작의 낮은 음성에 회의실 안에는 불편한 신음이 흘렀다. 예상하고 있던 말이긴 하나, 쉽게 인정하기 힘든 탓이었다.
 제국의 군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군무대신 루스펠 후작의 담담한 선언에 반응하듯 헤이안 후작이 짜증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반문했다. 군무대신과 내무대신이라는 차이와 대립에서 오는 개인적 감정도 가득 실린 기색이었다.
 “본국의 총 병력이 60만을 상회한다고 알고 있소만. 헤토르 자작이 포섭해 반란을 일으킨 병력이 5만 정도. 그걸 제해도 최소한 55만은 되겠군. 각 영지민들을 징집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데 반란을 진압할 병력이 없다는 거요?”
 머리와 수염 모두가 하얗게 샌 노귀족의 꼬장꼬장한 지적에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루스펠 후작은 잠시 침묵하다 한숨과 함께 설명을 재개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문제는 반란이 일어난 헤토르 자작령이 동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겁니다. 동부에 분산된 총 병력은 약 15만. 그중 5만은 헤토르 자작의 반란에 가담했으니 남은 것은 10만. 그중 8만은 헤토르 자작령 너머의 국경 지대에서 육국의 경계를 맡고 있기에 차출할 수 없습니다. 결국 동부군 중 남은 것은 2만가량입니다.”
 같은 후작의 지위와 대신의 자리에 있지만 나이의 차이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루스펠 후작은 말을 높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어느 정도 만족한 헤이안 후작은 목소리의 톤을 가라앉혔다.
 “흐음. 하지만 북부군과 서부군, 남부군이 남았지 않소. 오롯하신 황제 폐하 직속의 중앙군 역시 남아 있고.”
 그 숫자만 해도 40만을 넘는다. 간단한 수학적 계산으로 보면 5만 병력의 반란 정도는 손쉽게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북부군은 최근 북부 야만족, 카일 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쉽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서부군의 경우 해상연합국의 견제를 위해서 최소한 8만 이상의 병력을 남겨 둬야 하니 차출 가능한 병력이 거의 없으며, 애초에 해상 병력이 대부분이라 유용한 전력도 되지 않습니다. 동부까지의 거리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남부군이야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긴 하니 아마 3, 4만 정도는 차출이 가능할 겁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귀족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헤이안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회의실에 자리한 이들 중 대화를 나누는 둘보다 높은 지위의 인물은 침묵하고 있는 황제와 재상뿐, 그 외의 귀족들은 모두 낮은 지위의 인물들이기에 군권과 정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두 후작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럼 동부군의 남은 2만에 남부군에서 4만. 총 6만의 대군이로군. 이미 반란군의 규모를 웃돌고 있고 중앙군에서도 몇만 정도 추가하면 간단하지 싶소만. 꼭 중앙군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다른 군단에서 조금만 무리를 해서 1, 2만씩만 차출해도 충분하겠고.”
 “중앙군은 잠시 제외하고, 다른 군단에서는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어째서요?”
 헤이안 후작이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루스펠 후작은 대답하는 대신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헤이안 후작 쪽의 자리에 앉은 한 중년 귀족이었다.
 “그 문제는 제가 대답하는 것보다는······.”
 뜻을 알아들었는지 내무부 소속의 중년 귀족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곧 가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내무대신 각하.”
 “아, 그렇군.”
 내무대신의 자리에 그냥 오른 것이 아닌 만큼 단숨에 그 의미를 알아들은 헤이안 후작은 탄식을 토했다.
 제국의 총 병력이 60만을 상회한다고는 하지만, 그 전부가 상비군인 것은 아니었다. 귀족 사병들에 비하면 확실한 정규군이긴 하나, 60만에 달하는 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제국으로서도 큰 부담이었다. 때문에 절반가량은 평소에는 그 지역의 작물 수확을 담당하는, 일종의 둔전병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제국의 넓은 영토의 전부가 각지의 영지민들의 손에 경작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의 장병들이 경작하는 곳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곧 가을이 다가오니 많은 병력이 쌀을 비롯한 수많은 작물들의 수확에 투입되어야 한다. 쉽게 차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징집 역시 힘들다.
 더욱이 지금 당장도 밀 수확에 많은 병력과 제국민들이 투입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비해 반란군은 병력 5만을 모두 운용할 수 있다. 애초에 지키기만 하면 되는 판이니까. 문제는 진압을 위해 원정을 떠나야 하는 진압군에 존재하는 것이다.
 차라리 파종기였다면 병력을 쉽게 차출하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상당히 짜증 나는 상황에 놓였다는 걸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 전부가 파악하는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시 침묵을 깬 것은 헤이안 후작이었다.
 “그렇다고 여유를 둘 수는 없는 판이지 않소, 루스펠 후작.”
 “물론입니다. 겨울이 되면 군의 이동에 제약이 생깁니다. 전쟁을 치르기엔 힘든 시기가 되고, 방어하는 입장에선 더욱 유리해집니다. 더욱이 진압을 미루는 것은 제국의 위엄에 손상이 가는 바 불가. 파종 시기에도 병력을 차출하기가 곤란한 것은 당연하고, 그때엔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문제는 반란이 일어난 곳이 동부라는 점이었다. 지금껏 반란이 성공한 지역은 모두 동부. 왕국들이 개입해 달려들기 때문이다. 왕국들 쪽에서 군을 일으키기 전에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병력 5만의 반란은 쉽게 생각하기 힘든 규모다.
 “흐음. 그래도 중앙군의 대부분은 상비군이지 않소? 남부에서 최소한의 병력을 차출하고 중앙군을 대규모로 움직이는 건 어떨까 싶은데.”
 루스펠 후작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드러났다. 타당한 제안이긴 한데, 루스펠 후작의 판단으로는 그것도 쉽게 행하기 힘든 방법이었다. 물론 중앙군의 병력을 차출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대규모의 차출은 여러 가지로 위험성이 있었다. 다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그의 위치로도 가볍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읽었다는 듯 지금까지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제국의 재상, 제국에 단 두 가문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작가의 현 가주인 바이칼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또 다른 반란의 위협이 있다는 거겠지.”
 담담한 어투라 오히려 무겁게 다가오는 말에 회의장엔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미 하나의 반란이 일어나 제국 전체가 위태로운 판국에 또 다른 반란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지극히 위험했다.
 하지만 재상인 바이칼 공작에게는 그런 가능성도 직접 언급해야 할 책임과 힘이 있었다.
 루스펠 후작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중앙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북방 카일 족의 움직임과 동부의 반란, 그리고 최근 해상연합국에서 보이는 태도. 모든 것을 염두에 뒀을 때, 중앙군은 계속해서 강한 힘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반백으로 물든 밤색 머리칼 사이로 가라앉은 눈을 잠시 빛낸 바이칼 공작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황제는 이런 회의에서 거의 입을 열지 않기에 주관해야 하는 건 그 자신이었다.
 “그래서 중앙군에서 차출 가능한 수는?”
 루스펠 후작은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대부분의 일을 검토해 뒀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최대 3만 정도입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인다는 전제하에, 동부군을 제외한 다른 군단에서는?”
 “대부분이 해상 병력인 서부군은 효용 가치가 없습니다. 애초에 서부에서 동부의 전장까지 향할 시간적 여유도 없습니다. 병력이 본래의 주둔지를 오래 떠나 있을수록 피해가 가중됩니다. 따라서 북부군과 남부군을 더해 4만 정도가 한계라고 보입니다.”
 바이칼 공작은 나이가 들어 전장에서 은퇴하고 정계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름을 날리던 무장이었다. 때문에 루스펠 후작이 현재 구상하고 있는 작전을 대부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잔존한 동부군 2만에 북부 남부군 4만을 더해 일차적으로 공격,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다 3만의 중앙군을 출격시키려는 건가?”
 다른 지역의 반란을 견제하고 모든 사전 준비를 끝내려면 중앙군의 출정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북부군과 남부군은 동부의 인접 지역에서 바로 차출해 합류시킬 수 있지만, 황도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중앙군은 반란 지역까지 거리가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그렇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진압군 6만 대 반란군 5만이군. 주안 헤토르는 이름난 무장이다. 동부에서의 인망도 두터웠지. 1만의 우세로는 쉽게 뚫을 수 없는 자다. 또한 적이 반란의 무리임을 생각할 때, 징집을 시행해 병력을 늘리려 할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작은 반란군의 수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견지에서 작위를 제하고 헤토르 자작을 칭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의 이름에 작위를 붙이는 것은 일종의 반역에 해당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선언한 것이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정규군의 숫자가 5만이라 하더라도 징집 가능한 영지민들을 합세시키면 수는 훨씬 늘어날 겁니다. 비록 전력은 떨어지겠지만 만 단위의 병력이 더해질 겁니다. 반란에 합류한 귀족들의 사병들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안 헤토르는 최대한 수비적으로 나서 시간을 끌려 하겠지요. 겨울이 오기를 기다릴 겁니다.”
 “그건 어째선가? 겨울이 오면 군의 이동이 힘들어지기는 하지만, 차출 가능한 병력은 늘어나는데. 물론 시간을 끌게 되면 제국의 위엄에 손상이 간다는 점이 있지만.”
 침묵하고 있던 헤이안 후작이 끼어들어 질문했다. 군부의 귀족들은 어느 정도 이해하는 기색이지만 내무부의 귀족들은 자세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탓에 자신이 나서 설명을 유도한 것이었다.
 “물론 겨울이 오면 추위에 따른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게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군을 일으키는 것이 쉬워지는 것과 동시에 육국이 움직이기도 쉬워진다는 겁니다. 아마 주안 헤토르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을 겁니다.”
 “······그렇군.”
 헤이안 후작이 침음성을 삼켰다. 제국 내부를 돌보는 내무부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탓에 동부 국경 너머의 육국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군을 움직이기 힘든 것은 육국도 마찬가지. 하지만 수확의 시기가 지나면 육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육국의 연합군이 출정하고, 반란군이 동부의 국경으로 진군해 국경에 배치된 8만의 동부군이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수습하기 어려워집니다.”
 루스펠 후작의 말에 바이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최대한 빨리 주안 헤토르의 목을 베어야 한다. 기한은 언제까지로 보고 있나, 루스펠 후작.”
 “육국에서 병력을 일으켜 공세를 취하려면, 적어도 내년 초에서 봄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최선의 방법은 겨울 내에 반란을 진압하는 것. 늦어도 내년 봄까지는 일을 마무리 짓고 동부 국경에 대한 지원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수긍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루스펠 후작과 바이칼 공작의 표정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해결 방안이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차적으로 6만. 그리고 중앙군 3만. 더욱이 중앙군의 출정까지는 아마 시간이 걸리겠지. 가능하다고 보나?”
 소란이 가라앉고 시선이 루스펠 후작에게로 모여들었다. 9만 대 5만. 병력상으로는 압도한다고 할 수 있지만 상대는 작정하고 수비에 주력할 터. 헤토르 자작의 실력과 반란 지역까지의 이동 시간 등을 생각하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루스펠 후작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직접 나선다면 겨울 내에 일을 처리할 자신은 있습니다.”
 현 제국 최강의 기사이자 전략가로 불리는 이이기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군 총사령관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반란의 진압과 더불어 사방을 살피며 국내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대응하는 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불가하지. 다른 방안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차출 병력을 늘리는 수밖에 없나.”
 바이칼 공작의 말에 정적이 감돌았다. 무리를 해서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면 내년의 재정이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반란으로 인한 피해도 있는데 또 악재가 겹치면 회복에 시간이 걸린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루스펠 후작의 안색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이칼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한 방법이 있나, 루스펠 후작.”
 루스펠 후작은 쓰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병력을 차출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수락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의 도움은 되리라 생각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디지?”
 “남쪽. 일종의 독립군에 가까운 병력이 있습니다. 거리는 있지만 군의 대부분이 상비군으로 이루어져 있어 차출이 가능하며, 전력 역시 막강한.”
 남부군의 주둔지를 넘어, 제국의 최남단 초원 지대에 5만에 달하는 일종의 독립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국 남쪽의 위협을 완벽하게 틀어막기 위해 군권에 한한 한 큰 자유를 누리고 있고, 그 자유를 이용해 국경을 지켜 내고 있는.
 그리고 최근, 남부의 악신이라는 이름이 울려 퍼지는 곳.
 바이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한다는 의미였다.
 “드레이크 변경백령.”
 제국의 남쪽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어땠을까.
 조금 일찍, 각오를 다지고 선사된 죽음에 저항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를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들에게 죽음을 내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일찍 포기했으면 어땠을까.
 조금 일찍, 모든 걸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어땠을까.
 그러지 못한 것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너무도 겁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걸 극복하고, 보다 일찍 나락으로 떨어졌다면.
 그런 가정 속에서, 또 그들이 목숨을 걸었다. 그가 나를 보호하려 막아서고 최후를 맞이했다.
 그게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희들이 대신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렇게 해서 나는 살아남겠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주변에 피가 흐르는 것은, 귓가에 죽음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은, 과연 극복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내가 바로 죽음 속에서 웃고 있는 악신이니까.
 
 꿈과 상념의 가운데에서, 잿빛 머리칼의 청년은 조용히 눈을 떴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몸을 맡기고 있던 높은 나무에서 뛰어내린 청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작게 웃었다. 사나운 웃음이었다.
 “똑같군. 습격자들이 물러간 것 같다 싶으면 지하 대피소에서 기어 나오는 그 꼴은. 역시 집 바닥을 일일이 뒤지는 것보단 편히 잠이나 자고 있는 게 더 편하잖아.”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무너진 집들의 잔해 사이로 걸어가고 있던 일단의 무리였다.
 선두에 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뒤섞여 떠올라 있었다. 노인의 뒤로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젊은 남자는 단 세 명뿐. 나머지는 모두 여자와 아이들, 아니면 노인들이었다.
 나무 위에서 갑자기 뛰어내려 허리의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청년을 보며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그대는······.”
 “쥐새끼도 아니고 땅속을 그리 좋아하면 쓰나.”
 청년은 사납게 말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잘 벼려진 강철 장검이 밝은 햇살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제, 제국의 기사인가?”
 “일단은 그렇지. 너희들의 적이다.”
 노인은 땅을 짚고 있던 지팡이를 꽉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남부 초원의 구석에 위치한 마할 족 마을의 촌장이 노인의 신분이었다. 제국 토벌대의 습격에서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런데 병사들이 떠나고 조용해져 다른 마을로 피난 가려 나선 길에 또 제국군을 만나다니······.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저 젊은 사내 하나. 체격도 그리 크지 않고, 오히려 호리호리할 정도. 아무리 봐도 강하다는 인상은 없었다. 거기다 다른 군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생각을 한 마할 족의 세 남자가 무기를 움켜쥐며 앞으로 나섰다.
 “물러서십시오, 촌장님! 어차피 한 놈입니다!”
 “제국의 개! 동포들의 복수를 해 주겠다!”
 청년은 자신에게 날붙이들을 들이미는 사내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할 족의 남자들은 모두가 뛰어난 전사들이다. 드레이크 변경백령의 병사가 아닌, 다른 군단의 제국군이라면 셋이 하나를 상대할까 싶을 정도의.
 하지만 자신을 향한 두 자루의 전투도끼와 하나의 대검을 보면서도 청년은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듯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 이보게들, 괜찮겠나?”
 “걱정 마십시오, 촌장님! 마할의 태양에 걸고 반드······!”
 맨 앞에 선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년의 검이 번뜩였다. 그리고 바닥에 둥그런 것이 툭 떨어지며 땅 위를 굴렀다. 그리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올랐다.
 “마할의 태양은 너희들의 쥐 굴 속에서나 찾아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청년이 앞으로 미끄러지듯 달려들었다. 기겁한 두 전사가 무기를 휘둘렀지만, 그 사이를 순식간에 빠져나간 청년은 빙글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검광을 뿌렸다.
 대검을 든 전사의 상체가 반으로 갈려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붉게 핏발 선 눈빛과 함께 도끼가 날아왔다. 그 모습을 잠시 멈칫거리듯 서 지켜보던 청년의 몸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도끼의 날, 그리고 다시 검광.
 도끼를 쥔 팔이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으로 목이 잘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피가 치솟는 가운데 청년은 무심한 눈으로 고개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아빠!”
 “여보! 여보!”
 “아, 악마다! 악마가······!”
 뒤로 물러나 있던 마할 족 무리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산산이 조각나 쓰러진 사내들의 가족이 끼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청년은 희미하게 웃고는 검을 앞으로 겨눴다.
 “피, 피를 뿌리는 회색의······ 서, 설마······.”
 자신을 겨눈 검 끝을 보며 마할 족의 노인이 공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청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 내가 카이온 드레이크다.”
 “제, 제국의 악귀······?”
 청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본인 앞에서 악귀 운운하는 건 위험하지 않나?”
 “그, 그럼 역시······.”
 “아, 악마다!”
 “제국의 회색 악마다······!”
 “도, 도망쳐······!”
 생존한 마할 족들 가운데서 큰 동요가 일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 자리에 남은 몇몇 노인과 여자들을 보호하듯 선 노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도망치는 마할 족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청년을 향해 노인은 애원 어린 목소리로 간청했다.
 “제, 제발 부탁하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어린아이들과 힘없는 여자들뿐이니, 부디 우리 늙은이들의 목숨으로······.”
 “하나같이 그 소리로군.”
 차가운 반응에 노인은 움찔했다.
 “지금까지 쓸어버린 마을마다 그런 말들이더군.”
 “그, 그럼······.”
 “거절한다.”
 회색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다시 한 번 피 보라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스스로를 마할 족이라 부르는 부족의 노인들을 도륙한 청년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입가에 살기 띤 미소가 걸렸다.
 
 
 
 오백 정도의 기병들이 눅눅한 공기가 감도는 초원을 지나고 있었다.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드넓은 초원.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쉴 새 없이 사투가 벌어지는 이 땅은 제국과 남방 마할 족의 충돌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광활한 남부 초원 지대의 대부분은 하나의 영지에 귀속되어 있었다. 사실 영지라기보다 일종의 국경 지대로, 백작이라는 작위에 더불어 남부 국경 지대를 총괄하며 군권에 관한한 큰 자유를 지니는 남부 변경백의 직책을 가지고 있은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이 다스리는 드레이크 변경백령. 드레이크 영지는 물론 다른 귀족들의 영지 역시 변경백령에 포함되어 복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드레이크 변경백령은, 제국 남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왕국과도 같았다.
 그리고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인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과 그 휘하의 기사와 병사들은 제국 내에서도 강군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드레이크 변경백령의 총 병력은 약 5만에 달했다. 일개 백작이 지니기에는 위험할 정도의 전력이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마할 족을 상대해야 했기에 황실에서는 오히려 지지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드레이크 영지의 병사들은 남부 초원 곳곳에 퍼져 있어 집중된 힘을 내기는 힘들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초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몇 개의 마을을 소탕하기 위해 영지를 나선 토벌대 기병 5백 기는 일차 목표로 삼았던 두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합류 지점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천인장님.”
 천천히 이동 중인 토벌대의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던 사내는 지친 안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토벌대의 지휘를 맡고 있는 기사이자 드레이크군의 천인장인 메트 지바시였다.
 메트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쉬며 옆으로 다가오는 부관을 마주 보았다.
 “곧 소영주님이 남으신 마을이······.”
 “알고 있다.”
 처음 하나의 마을을 소탕한 후, 다음 마을로 향해 더욱 멀리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곧 나타날 마을에는 토벌대에 참가한 인원 중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국경 근처에 위치한 마할 족의 마을을 무너트리는 데 선두에서 피를 뒤집어쓰던 이가.
 메트는 말 머리를 돌렸다.
 “인솔을 맡도록. 207번 초소에서 합류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열 명만 나를 따라 소영주님을 모시러 간다.”
 “예!”
 초원을 울리며 이동하는 토벌대를 지켜보던 메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야산과 초원에 드문드문 자라는 들풀, 조금 떨어진 곳의 작은 숲. 왠지 모르게 허무하고 허전한 느낌이 폐부를 메우고 있었다.
 갖춰 입은 갑옷의 곳곳에 피를 묻히고 합류지를 향해 이동하는 토벌대의 모습을 확인한 메트는 말을 몰아 가며 남은 기병들을 이끌었다.
 “가자!”
 소탕한 마을은 저 야산의 아래에 위치해 있다.
 다가닥, 다가닥.
 토벌대가 휩쓸고 지나간 마할 족의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집들도 많았지만, 전투 중에 부서진 가옥과 울타리들, 곳곳의 불탄 흔적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메트는 말을 천천히 움직이며 마을의 곳곳을 살폈다. 떠나기 전에 시체를 모아 소각했기에 타는 냄새는 있더라도 썩어 가는 시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영주님은······.’
 이 마을에 남은 인물의 모습을 찾는 메트의 눈에 걱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작은 마을쯤은 혼자서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능력에는 의문도 많았다. 물론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인 드레이크 백작의 아들이며, 어린 시절부터 피를 뒤집어쓰며 전장을 누볐으니 실력이 붙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그 비정상적인 강함.
 그는 전장에서 적의 목숨을 거두는 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함은, 천천히 쌓인 것이 아니라 한 사건을 기해서 만들어졌다.
 ‘엑키온 경······.’
 십 년 전 초원에서 스러진 한 명의 기사.
 그리고 그와 함께 산화한 백 명의 병사들.
 메트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각성의 날, 전령으로 연회장 안으로 뛰어들었던 젊은 기사는, 이제 그날 죽어 간 한 기사의 뒤를 잇는 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소영주를 따르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자 중 하나인 메트 지바시는 이 마을 어딘가에 있을 소영주를 찾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건······.”
 메트는 부러진 나무 곁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이었다.
 ‘소영주님이 남으신 건 이들 때문이었나.’
 어떻게 알았을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가 행하는 일은 예전부터 이해하기 힘든 것들뿐이었으니까.
 그때 한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악! 제, 제발, 사, 살려 주세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메트는 그곳으로 황급히 말을 몰아갔다. 무너진 집 너머로,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를 붙들고 안은 마할 족의 여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다가가는 회색 머리의 청년도.
 “부, 부디 아이만이라도······ 제발······!”
 “미안하지만, 난 후환을 키우는 성격이 아니라서.”
 푹!
 눈물 섞인 애원 가운데로 검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품에 안은 아이와 여인을 동시에 뚫어 버린 검신을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털썩.
 검을 뽑아내며 시체를 밀어 버린 청년은 피를 털어 내며 옆을 돌아보았다. 말에 올라탄 기사가 착잡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꼭 죽이셔야 했습니까?”
 “물론. 왜, 기사도에 걸리나?”
 여자의 옷깃을 찢어 검신을 닦아 내던 청년이 귀찮다는 듯 되물었다. 메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소영주님을 따르기로 한 후, 저의 기사도는 의미를 잃었습니다. 단지 찝찝할 뿐입니다.”
 카이온 드레이크, 메트 지바시가 충성 맹세를 행한 대상인 청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는 후환을 키울 생각 따위 추호도 없어. 여자든 어린아이든, 원한을 품은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위협 역시 증가한다는 뜻이지. 위험 요소는 최대한 제거한다. 그게 살아남는 법이다.”
 “그게 소영주님의 길이라면 저 역시 동참할 뿐입니다.”
 이미 정통적인 기사도는 의미를 잃은 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많은 기사들이 정의를 꿈꾸며 검을 연마하고, 기사도라는 것에 목숨을 걸며 선망하고 있다.
 기사가 기사도를 버린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메트 지바시는, 소영주를 따르는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조금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건 아마 과거 자신과 같은 일을 행했던 선배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주군의 명을 거부하고 소영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기사.
 메트는 페일 엑키온이 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소영주를 지켜 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카이온은 아이를 품에 안고 쓰러진 마할 족의 여자를 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떠오르는 것은 과거의 기억. 아마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면, 이것과 같은 꼴로 죽어 갔을지도 몰랐다.
 “잔당이 있습니까?”
 아직 함락시켜야 할 마을이 하나 남아 있었다. 후환을 없애겠다는 카이온의 생각과 같이, 주변에 정보를 알릴 가능성이 있는 적은 없애 두는 것이 합당했다.
 “확신은 못 하겠군.”
 “알겠습니다.”
 메트는 뒤쪽으로 다가온 병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수색해라. 한 놈도 남기지 말도록.”
 고개를 숙여 보인 기병들이 폐허 곳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한 메트는 말에서 내려섰다.
 차갑게 식어 가는 모자의 시신을 발로 툭 걷어차는 카이온을 지켜보던 메트가 보고를 시작했다.
 “목표로 했던 다음 마을도 정리를 끝냈습니다. 병력은 207 초소로 이동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카이온은 뺨에 튄 피를 닦아 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에 받은 ‘영주’의 명령은 지금까지 함락시킨 두 마을을 포함한 세 개의 마을을 완벽하게 초토화시키라는 것이었다. 주어진 병사는 겨우 3백. 다만 그동안 조금씩 불려 온 세력과 키운 힘 덕에 그 병력은 두 배로 늘려 운용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정리했나?”
 “예. 다만 소영주님이 계시지 않았던 만큼 놓치고 있던 잔당이 숨어 있다 기어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별수 없지. 목표지와는 거리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니.”
 “예.”
 “목표지의 상황은?”
 마지막 남은 하나의 마을. 문제는 그곳이었다. 최종 목표지는 지금까지 무너트린 마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곳이었다. 이 마을만 해도 이미 국경 너머의, 마할 족의 세력권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리고 목표지는 더욱 깊숙한 곳에 있다.
 마을의 규모, 병력, 2차적인 위험 등의 모든 면에서 쉽게 손댈 수 없는 곳이었다.
 6백의 기병으로도 불가능한 목표물이다. 하물며, 실제로 영주가 내준 3백의 병사로는 더욱 불가능했던.
 실패하고 죽어 돌아오라는 내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임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에 비하면 이건 오히려 쉬운 편에 속하는 일이다.
 “마을이 보유한 전사들의 숫자는 예상과 같습니다. 약 3백 정도로 보입니다.”
 문제는 목표지가 위치한 곳 근처에 초원을 순찰하는 마할 족 정찰대의 기지가 있다는 거였다. 기본적으로 마할 족의 정찰 기지에는 5백 이상의 전사들이 머물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이 말을 보유한 기병이다.
 맞붙게 되면 그 이상 위험한 상대가 없다.
 “역시 문제는 정찰 기지인가.”
 “다른 지역으로 정찰을 나갈 기색은 없는 듯합니다. 문제는 동쪽에서 움직여 온 소규모의 정찰대도 주변에 있다는 겁니다. 봉화를 올리게 놔둔다면 일이 심각해집니다.”
 “······.”
 점령한 두 마을은 전사들의 숫자가 많지 않은 곳이라 단숨에 들이닥쳐 봉화를 피울 시간도 주지 않았지만, 보유한 전사만 3백이 넘는 목표지에선 상황이 다를 게 분명했다.
 “큭, 빌어먹을 상황이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짓는 카이온을 보며 메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지요. 말 한 마리 없이 보병 백 만 딸려서 내쫓기던 시절도 있었지 않습니까.”
 페일 엑키온이 죽었던 때와, 그 이후의 몇 년간은 그런 생색내기에 불과한 병력만 주어질 뿐이었다. 카이온은 그때에도 무사히 생환해 돌아왔다. 그리고 이십 대의 청년으로 성장한 지금은 최소 3백의 병사, 그리고 그중 백 이상의 기병을 끌고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영주의 명령 너머에서 카이온 스스로가 얻어 낸 힘으로 나머지 2백 역시 기병으로 바꾸고 3백의 기병을 더 끌어내 추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다.
 문제는 그래도 여전히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라는 거지만.
 “흥.”
 기분 나쁘다는 듯 웃는 카이온을 보며 메트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떠올렸다.
 카이온 드레이크, 소영주에게 처음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황태자가 참석했던 그날의 연회 때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로, 카이온이 연회장에 피투성이로 난입한 것은 호재로 작용했다. 황태자를 비롯한 중앙의 귀족들이 다수 참여한 파티장에서 소영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등장한 피투성이의 소년은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을 기점으로 카이온 드레이크는 영지 내를 넘어서 제국 전역에 알려진 드레이크 변경백령의 소영주가 되었다. 영주인 자이켈 드레이크조차 대놓고 손을 쓰기에 미묘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황태자마저 흥미롭다는 듯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으니 드러난 손길을 뻗기는 더욱 요원했다.
 때문에 여전히 최상의 시나리오는, 어떤 뛰어난 전사라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초원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죽도록 하는 것. 그것이 모두의 시선을 가리고, 오히려 드레이크 백작가의 이름을 높이는 방안이었다.
 모두가, 메트 역시 카이온이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페일 엑키온이 전사한 전장에서 홀로 돌아온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카이온은 언제나 피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성으로 귀환했다. 상처를 입고 돌아오든, 모든 병력을 잃고 돌아오든 어떤 모습으로라도 살아서 돌아왔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출정을 나서는 소년의 모습에, 그리고 점차 전해지는 그 압도적인 무위에 남부의 기사들은 격동하기 시작했다.
 페일 엑키온이 목숨을 걸고 살려 낸 소년.
 뒤집을 수 없는 혈통의 차이 때문에 날마다 생명이 걸린 전장에 서고, 그 속에서 반드시 살아남아 돌아오는 소년.
 모친의 혈통과 영주의 차가운 시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등의 불리한 요소 탓에 따르는 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지자의 숫자들은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늘어났다.
 마할 족과의 전투가 일상인 이 남부 초원은, 강한 자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온 드레이크는 그 질서 속에서 위로 향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토벌에서도 제외되던 미숙한 젊은 기사였던 메트 지바시는, 가장 먼저 카이온을 따르기 시작한 이들 중 하나였다.
 메트 지바시를 시작으로, 일반 병사들 가운데 카이온의 출정에 항상 따라붙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하지만 언제나 불가능한 명령만 내려오는 가운데 지지자들은 죽어 나갔고, 급격한 성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메트 지바시는 자신할 수 있었다. 이제는 영주조차 이 젊은 소영주를 대놓고 공격할 수 없다. 만약 카이온 드레이크가 일어서는 순간이 온다면, 최소한 만을 넘어서는 병력이 함께할 것이다.
 황태자의 입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제국 전체에서 알려지고 있는 남부의 악신이라는 이름에는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
 “결국 놈들의 정찰대가 몰려오는 순간, 이번 출정은 실패라고 봐야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힘과 인망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영주를 비롯한 이들이 잠자코 지켜보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카이온을 따르는 세력은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전장으로 파견되어 나가야 했고, 군권이 아직 영주에게 있는 한 카이온은 영주의 명령으로 내려온 토벌전에 있어선 멋대로 군을 늘릴 수 없었다.
 지금 최초 3백의 토벌대가 6백의 기병으로 바뀐 것은 성을 빠져나온 뒤 각지의 부대에서 조금씩의 병력을 몰래 빼돌린 결과였다. 아마 영주도 눈치채고는 있겠지만, 이 정도의 월권은 카이온이 지금 손에 넣은 힘으로 무마가 가능했다.
 문제는 이 이상은 힘들다는 것. 아마 영주를 비롯한 카이온의 죽음을 바라는 이들은 카이온의 세력을 모두 흩어 놓고 그를 사지에 몰아넣었다고 축배를 들고 있을지 몰랐다.
 아마 토벌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순간 엄청난 비난과 질타, 책임 추궁이 이어질 것이다. 단숨에 소영주의 자리를 뺏어 낼 가능성도 있었다. 카이온이 지금까지 소영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전 병력을 잃는 한이 있어도 임무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카이온 드레이크는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영주 놈이 나름 머리를 썼군.”
 “아마 스톨 자작의 생각이겠지요.”
 아버지이자 이 땅의 주인인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을 놈으로 칭하는 데 있어서 둘에게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이미 완벽하게 길이 갈렸다. 겉으로는 그 휘하에 있다고 할지라도.
 카이온 드레이크는 병사 하나가 주변에서 발견하고 끌고 온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타며 사납게 웃었다.
 “일단 정찰대를 옆으로 치운다. 드갈 맥다인에게서 연락은 있었나?”
 드갈 맥다인은 메트와 같은 천인장인 기사로, 여기서 동북쪽에 위치한 경계 기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뒤따라 자신의 말 위로 오르며 메트가 대답했다.
 “아직입니다만, 아마 곧 일을 시작할 겁니다.”
 그 자신만만한 대답에 카이온은 피식 웃고는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열두 군마가 초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놈에 대한 소식은 들어왔나?”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는 음성에 스톨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로 지정한 국경 부근의 두 마을을 이미 점령한 모양입니다.”
 콰드득.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은 의자의 손잡이를 쥐어 터트리며 이를 갈았다. 예상은 했지만 놈이 또다시 승승장구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감에도 전성기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괴력을 보이는 드레이크 백작을 보며, 영지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스톨 자작은 내심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 남부에서는 왕과 같은 권력을 지닌 이 변경백의 가신으로 들어온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치워 버려야 할 소영주의 존재조차 변경백이 긴장을 풀지 않고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207 초소에서 대기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아마 방도를 찾고 있는 거겠지요. 물론, 찾는다고 없는 길이 생기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 초원의 곳곳에서 날마다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기에, 드레이크 변경백군은 각지의 상황을 빠르게 전달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전장의 정보 전달 방법은 매우 다양하고 정교했다. 봉화는 물론이고 깃발과 반사판을 이용한 신호와 전서구, 독자적으로 운용되는 전령부대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국경 각지의 상황을 성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현재 카이온이 이끄는 토벌대의 상황 역시 초지급으로 성에 전해져 오고 있었고, 스톨 자작은 비교적 빠르고 세세하게 일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목표로 지정한 마을에만도 3백을 상회하는 마할 족 전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척에 있는 정찰기지, 주변의 정찰대들을 생각하면 놈이 가진 병력으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겁니다.”
 그 자신만만한 말에도 드레이크 백작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회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진녹색의 눈동자가 거칠게 타오르고 있었다.
 “놈은 그보다 더한 곳에서도 끈질기게 살아 돌아왔다. 안심할 수 없는 일이지.”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만.”
 사지로 향하는 임무와, 수많은 암살 시도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온 소영주였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걸 막기 위해, 또한 살아 돌아왔을 때를 대비한 최대한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각 부대에는 확실히 명령을 내려 뒀겠지?”
 “예. 한동안 그 어떤 움직임도 불허한다는 군령을 전달해 뒀습니다.”
 전장에 위치한 대부분의 부대에는 카이온을 따르는 기사와 병사들이 존재했다. 드레이크 백작과 스톨 자작은 그들의 움직임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전군에 대기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아무리 소영주의 세력권이 넓어지고 있다고 해도 군령을 어기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건 이미 반역의 범주에 들어간다.
 완벽히 지원을 끊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드레이크 백작은 비로소 굳은 표정을 풀었다.
 “결국 놈은 지금의 병력만으로 움직여야 한단 소리군.”
 “물론입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가능한 한 위험한 사지로 놈을 내몰았다는 것에 만족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이런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상대의 능력에 혹시나 하는 염려 역시 드는 탓이었다.
 그리고 스톨 자작은 그 일말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영주님.”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스톨 자작을 보며 드레이크 백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곧 밀리오 님의 15번째 생일이 돌아옵니다.”
 세 달 뒤 11월 말이면 밀리오 드레이크, 자이켈 드레이크 백작의 차남의 15번째 생일이 찾아온다. 그리고 15세가 되어, 제국 귀족가의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지니게 된다.
 밀리오 드레이크는 그 어떤 결점도 없는 하나뿐인 아들. 그가 성년이 된다는 지적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스톨 자작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 놈이 이번에도 살아 돌아온다면, 보다 강한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
 드레이크 백작은 무언으로 그 제안에 동의를 표했다. 더 이상 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쯤에서 완벽하게 잘라 내야 할 필요가 있다. 조금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물론 놈이 이번에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만. 훗.”
 마을의 방책 너머에 있는 3백의 전사와, 5백을 넘는 주변의 정찰대. 마할 족 전사들의 강력한 힘을 생각해 보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수였다. 아니, 만약 성공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터. 지금 소영주가 이끌고 있는 6백의 기병은 말하자면 최측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각 부대에서 조금씩 차출해 낸 소영주를 따르는 병사들. 그들을 모두 잃고 돌아온다면 다음 일을 진행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모든 게 순조로울 것이다.
 그 예상을 단숨에 깨 버리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뭐라?”
 스톨 자작은 다급히 찾아온 전령의 보고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드레이크 백작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라. 마할 족의 움직임이 어쨌다고?”
 “그, 그게, 지금 소영주 님의 부대가 있는 지역의 정찰대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병력이 남동 지역으로 집결하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소영주가 위치한 부근의 모든 정찰대가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렇게 되면 소영주의 부대는 3백의 전사밖에 남지 않은 마할 족의 마을을 쉽게 유린할 수 있을 것이다.
 “어, 어째서냐? 대체 왜······.”
 “제4군단의 천인대와 마할 족 가운데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아군이 전진하게 되어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듯합니다.”
 탕!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스톨 자작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이런 멍청한! 전군 대기령을 내렸는데 전투를 벌였다고?”
 “그, 그게······ 마할 족의 정찰부대가 먼저 공격을 해 왔다고 합니다. 아군 부대는 그에 응전하다가 물러가는 적군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판단, 추적한 끝에 적을 섬멸했는데 그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이익······!”
 아무리 대기령을 내렸다곤 하지만 선제공격을 당하고,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에서 전장 지휘관의 독자적 판단으로 부대가 움직이는 것까지 제어할 수는 없었다. 변경백군에서 선행후보고는 오히려 지향하는 것이다.
 거기다 결과적으로 공격해 온 적을 섬멸했다면 그건 공을 치하할 일이지 질책할 일도 아니었다. 현장 지휘관에게 그런 자유도 주지 못한다면, 이 남부 초원에서 마할 족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대체 어째서 이런 시기에 이토록 공교로운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이런 빌어먹을!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를 갈던 스톨 자작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질문을 던졌다.
 “그 부대, 앞으로 돌출한 부대의 지휘관은 누구냐!”
 전령은 손에 쥔 보고서를 다급히 살펴보고는 대답했다.
 “제4군단 소속 6번 천인대의 천인장, 드갈 맥다인 경입니다.”
 “맥다인이라면······.”
 드갈 맥다인은 소영주의 파벌로 확연히 분류되는 기사들 중 하나였다.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소영주가 만들어 낸 것이 분명했다.
 “카이온······!”
 조용히 듣고 있던 드레이크 백작이 들끓는 분노로 가득 찬 고함을 내질렀다.
 
 
 
 “신호가 왔습니다.”
 메트의 말에 카이온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돌아온 정찰병들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마할 족 정찰기지에 남은 병력은 없습니다.”
 “근처를 배회 중인 소규모 정찰대도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목표지에서는 우리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아.”
 카이온 드레이크는 회색의 장검을 뽑아 들며 말을 전진시켰다. 그 움직임에 맞춰 뒤를 따르는 6백의 기병이 천천히 이동을 개시했다.
 “단숨에 쓸어버린다.”
 “명을 받듭니다!”
 카이온의 전마가 앞으로 돌진하는 것과 동시에, 수백의 전마가 만들어 내는 말발굽 소리가 초원을 울리기 시작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말라 가던 초원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사신의 행렬이 마할 족의 마을 뒤덮고, 비명이 초원을 메워 나갔다.
 얼마간의 시간 뒤에 남은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마할 족의 시체들과 그 주변의 피 웅덩이뿐.
 무너진 마을의 한가운데에서 카이온은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뒤덮은 붉은 피가 뜨거운 기온에 천천히 말라 가는 것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끄악!”
 “제, 제발 살려 주······ 아악!”
 저항하기보다는 자비를 구하는 마을의 주민들을 병사들이 처리하는 소음이 울리는 가운데, 카이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악신의 음성이 점차 가라앉아 갔다.
 적어도 잠시는, 평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섬멸은 거의 끝나 가고 있습니다, 소영주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메트의 목소리에 카이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붉게 물든 세상이 시야를 메웠다.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의 식량을 챙긴 후, 모든 건물을 부수고 불태운다. 주변의 경작지 역시 모두 없애도록.”
 “알겠습니다.”
 마을을 무너트리는 이유는 마할 족의 전사들이 움직이는 거점을 하나씩 줄여 나가려는 의미인 만큼, 모든 건물과 경작지를 불태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피해는?”
 “칠십 정도가 사망, 중경상을 입은 병사들이 오십여 명입니다.”
 “나쁘지 않군.”
 칠십이 또 죽었다. 자신을 위한 희생자의 숫자를 잠시 되새긴 카이온은 상념을 털어 냈다.
 십 년 전부터 걸어가기로 결정한 길. 이제는 고민조차 사치스럽다.
 “맥다인의 연락은 들어왔나?”
 “소형 봉화가 세 개 올라왔습니다. 마할 족과의 큰 충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큭큭큭.”
 카이온은 숨죽인 웃음을 터트렸다.
 대기령을 어기긴 했지만 선제공격을 받은 후 이어진 섬멸전의 성공, 그리고 모여든 마할 족 병력과의 다음 충돌은 없었다. 이런 보고가 올라가면 드갈 맥다인에 대한 처벌은 내릴 수 없다.
 “열 좀 받았겠군.”
 정보가 들어가면 드레이크 백작과 스톨 자작은 분을 이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검을 닦아 검집에 갈무리한 후, 카이온은 토벌의 종결을 뜻하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일을 끝낸 후, 곧바로 귀환한다. 휴식은 성에 도착해 취하도록 하지.”
 “예, 소영주님.”
 마을과 주변의 농지를 제물로 타오르는 불꽃이 초원의 기온을 올리고 있었다.
 
 
 
 @남부의 악신 Ⅱ (1)
 
 
 
 성으로의 귀환은 조용하면서도 화려했다.
 드레이크 변경백령의 중심에 위치한 레트린 성의 거주지는 도시를 둘러싼 외성 안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유사시 영지민들을 수용하고 전투를 벌이는 요새형의 백작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부 국경 지대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레트린 성은 제국 중부의 큰 영지에 비해서도 꿀리지 않는 번화함을 지니고 있었다.
 카이온과 메트가 이끄는 약 2백의 병사들은 외성의 성벽을 지나 도시의 대로를 걷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행렬에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메트의 뒤에 선 백부장이 들고 있는 것은 회색의 천에 수많은 핏자국이 물든 깃발. 그것은 카이온 드레이크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토벌을 마치고 귀환하는 남부의 악신을 보고 싶어 하는 레트린의 영지민들이 몰려나와 피로 물든 병사들의 행렬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환호나 축하의 말은 일절 없다. 자리하는 것은 숨죽인 침묵, 공포와 경외뿐.
 카이온과 드레이크 백작의 반목을 익히 알고 있는 영지민들은 화려한 승전 의식보다는, 침묵으로 이루어진 조용한 관심만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그 속에는 카이온의 행보를 주시하는 가신들과 기사, 병사들의 시선도 뒤섞여 있을 것이다.
 소영주를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런 가운데였다. 카이온은 자신의 전공을 일절 내세우지 않고, 싸늘한 침묵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쌓이는 경외가 남부의 전사들에겐 점차 크게 부풀어 다가가고 있었다.
 “소영주님이시다. 또 토벌에 성공하고 돌아오신 게 틀림없어.”
 “겨우 저 정도의 병력으로······.”
 “벌써 몇 번째인지······.”
 “최근에는 황도에서도 남부의 악신이란 이름이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럴 만도 하지. 저 나이에 벌써······.”
 “계속 버티실 수 있을까?”
 “영주님이 아무리 싫어하신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 공을 세우시면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 거야.”
 “카이온 님이 영주가 되시면 마할 족의 씨를 말리는 것도 가능할지 몰라.”
 “저 피에 물든 모습은 정말······.”
 메트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죽인 속삭임에 절로 지어지려는 미소를 숨기려 애쓰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였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토벌을 마치고 귀환하는 소영주의 모습을 보며 점차 늘어 가는 영지민들의 우호적인 시선. 그 속에 공포가 담겼을지언정, 이 남부에서는 경외야말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만들어 낸다.
 소영주는 이런 식으로 이 영지의 주인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카이온을 따르는 이들이 소영주라는 호칭을 고수하는 것은, 언젠가는 영주가 되리라는 믿음을 표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앞서 말을 몰아가던 카이온이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속 편한 소리들 하는군.”
 “예?”
 메트가 화들짝 놀라 카이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성 가까이로 다가가며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른 곳에는, 성벽 위에 올라 이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드레이크 백작과 스톨 자작, 그리고 금발의 소년이 있었다.
 ‘밀리오 도련님······.’
 카이온을 증오의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소년을 보며 메트는 소영주의 말뜻을 이해했다.
 밀리오 드레이크. 현 백작 부인의 아들. 영주는 저 소년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카이온이 아니라.
 그때 들려온 카이온의 중얼거림에 메트는 눈을 크게 떴다.
 “······슬슬 한계인가.”
 무엇이?
 그가 차마 묻지 못하고 행렬이 계속되는 가운데, 카이온은 내성 안으로 들어서며 말에서 내려 성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메트가 그 뒤를 따르고, 병사들은 서서히 흩어지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성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사 이상의 이들뿐이었다.
 카이온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본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쪽에서 내리꽂히는 살기가 느껴졌지만, 추호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굳어 버린 피의 잔해를 복도에 뿌리며 걸어가는 그를 막아선 것은,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한 귀부인이었다. 서른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고 있는 에레스 드레이크, 현재의 공식적인 백작 부인이었다.
 카이온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백작 부인을 잠시 멈춰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태도에 분노를 느낀 그녀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걸음을 멈춘 카이온은 귀찮다는 듯 무심히 물었다.
 “······뭡니까.”
 “또 살아 돌아온 모양이구나.”
 “눈이 썩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바로 앞에 있는데도 잘 구분이 안 가십니까?”
 “이이······!”
 푸른 두 눈동자에 증오의 감정을 가득 실어 자신을 노려보는 백작 부인을 향해 카이온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버릇과도 같은 몸동작이지만, 그 모습이 상당히 건방지게 보였는지 그녀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건방진 것!”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귀찮아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카이온과 그 뒤를 따르는 메트를 보며 에레스 백작 부인은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외쳤다.
 “곧 죽어 자빠질 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메트가 몸을 움찔하는 것에 비해 카이온은 익숙하다는 듯 어깨 너머로 말을 받았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이익! 곧 밀리오가 성년이 된다! 그 천한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네 발로 당장 영지를 떠나는 게 이로울 게다!”
 “고려는 해 보지요. 그럼 어서 들어가 그 귀한 아들이나 감싸고도시길.”
 “네, 네놈이······!”
 카이온은 뒤에서 들려오는 저주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복도를 걸어갔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기에 메트는 쓸데없는 위로의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계속 복도를 걸어가던 카이온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 명의 여자였다. 그중 아직 조그마한 소녀가 카이온의 모습을 발견하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달려들었다.
 “카이 오라버니!”
 “워워.”
 카이온은 자신에게 안기려 드는 조그만 숙녀에게 손바닥을 펴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내가 몸이 좀 지저분하단다, 아리나. 안기는 건 참아 주렴.”
 “에헤, 알겠어. 앗, 안녕하세요, 지바시 경!”
 “안녕하셨습니까, 아가씨.”
 “네, 안녕했어요!”
 아리나 드레이크. 자신의 어린 이복 여동생이 헤헤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온은 천천히 다가오는 여인, 드레이크 백작의 두 번째 부인인 레이나 드레이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좋아 보이는군요. 몸이 나아지신 모양입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이에요, 소영주. 구해 주신 약이 잘 들은 모양입니다.”
 “그리 말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에레스 백작 부인에 비하면 꽤나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레이나 2부인은 청초한 외모에 어울리듯 몸이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그에 반해 이제 6세가 된 그녀의 딸은 건강하게 성안을 뛰어다니곤 했지만.
 드레이크 백작의 일가 가운데 카이온과 허물없이 지내는 이들은 레이나 부인과 아리나 모녀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애초에 영지의 후계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데다 기가 약해 백작 부인과 대립하지도 못하는 레이나 부인이었기에 카이온을 대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덕분이다.
 물론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지만 어린 아리나가 밀리오보다 카이온을 훨씬 잘 따랐기에 그녀는 주변의 시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카이온 역시 두 모녀를 상당히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미소를 짓고 있던 메트는 레이나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소영주님.”
 카이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레트린에 누가 남아 있지?”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이 몇이나 있냐는 소리였다.
 “체이스 경과 발트 경, 그리고 루하르트 경이 남아 있을 겁니다. 하론 백부장도 있을 듯합니다만.”
 “내 방에서 저녁을 들자고 전하도록. 자네도 함께.”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메트가 복도 한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도 가면 안 돼, 오라버니?”
 카이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루하르트 경이 보고 싶어서?”
 “응!”
 카인 루하르트는 금발의 잘생긴 기사로, 영지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청년이었다.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자.”
 “이잉.”
 “그러자꾸나, 아리나.”
 뭔가 중요한 일을 상의하려 한다고 느낀 레이나 부인이 딸을 말리고 나섰다.
 잠시 입을 내밀고 있던 아리나는 퍼뜩 생각이 났다는 듯 카이온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는 몸을 빙글 돌아 보였다. 작은 몸에 딱 맞는 녹색 드레스가 살짝 펄럭였다.
 “어때? 린이 사다 줬다?”
 린은 레이나 부인의 뒤에 시립해 있는 시녀였다. 카이온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예쁘구나. 잘 어울려.”
 “진짜?”
 “그럼. 나중에 내가 그 드레스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하나 구해 주마.”
 “그거 정말이지!”
 “물론.”
 “꺄아!”
 방방 뛰는 여동생의 모습에 작게 웃은 카이온은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검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상기하고는 손을 거뒀다.
 “이런, 일단 씻어야 놀아 줄 수 있겠는걸.”
 “또 악당들을 무찌르고 온 거지, 오라버니!”
 “그렇지.”
 “아, 그럼 내가 목욕 준비를 해 둘게! 린, 빨리 가자!”
 “아, 아가씨!”
 아리나가 통통 튀며 카이온의 방 쪽으로 달려갔고, 시녀가 다급히 그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온은 웃음을 거두고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레이나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카이온.”
 남들이 없을 때 한정이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편히 부르는 레이나 부인에게 카이온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덕분에.”
 “아리나와 제가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답니다.”
 “감사합니다.”
 레이나 부인이 살풋 고개를 숙였다.
 아직 이십 대의 젊은 나이인 레이나 부인은, 일단 카이온과 모자지간이라 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색할 수 있는 사이지만, 둘의 관계는 남들이 보기에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다. 때문에 좋지 않은 소문도 돌고 있었지만.
 에레스 백작 부인과 같은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레이나 2부인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화려한 미모와 차분한 정숙함의 차이랄까.
 카이온은 레이나 부인에게서 느껴지는 희미한 향기를 눈치채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향수를 뿌리신 모양이군요.”
 레이나 부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평소에 그리 치장을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일전에 카이온이 향수를 선물한 적이 있어 그것을 사용한 참이었다.
 “일전에 약과 함께 보내 주셨지요. 뒤늦게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목소리가 잦아들고, 둘은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방으로 향했다. 카이온의 방 옆에 딸린 욕실에서 아리나가 뛰어나와 밝게 소리쳤다. 반짝이는 금발에 어울리는 밝음이 소녀에게는 존재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네 시녀가 벌써 준비해 놓고 있었어! 그래도 내가 물에다가 꽃잎은 집어넣었어!”
 “하하, 고맙구나.”
 “목욕 끝나면 내 방으로 놀러 와야 돼? 엄마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꼭 가마.”
 “응, 기다릴게!”
 여전히 통통 튀며 달려가는 아리나와 살풋 웃어 보이고는 그 뒤를 따르는 레이나 부인을 미소로 전송하던 카이온은 세 여인의 모습이 사라지는 동시에 미소를 지우며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한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이온은 피딱지가 말라붙은 갑옷과 의복을 거침없이 벗어 던지고는 검만을 들고 물이 받아진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는 가운데, 옷가지를 모아 정리하는 시녀의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카이온은 뜨거운 물 속에서 근육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시녀는 수건과 옷을 준비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앤이라고 합니다.”
 “그래?”
 성안에서 카이온의 위치는 워낙에 미묘한 것이라, 계속해서 담당하며 모시는 시녀나 하인은 없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에서도.
 시녀가 비누와 수건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기척으로 느끼고 있던 카이온은, 피식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언제나 수중에 지니고 있는 장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오며 옆으로 날아갔다.
 “힉!”
 갑작스레 목 옆으로 다가온 검날을 보며 시녀가 숨죽인 비명을 내질렀다.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카이온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차갑게 물었다.
 “누가 보냈지?”
 “예, 예?”
 “영주냐, 백작 부인이냐. 아니면 스톨 자작인가? 아니면 다른 쓰레기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군. 누구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제, 제발······.”
 가녀린 목소리로 떨고 있는 시녀는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카이온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귓가에 악신이 속삭이고 있었다.
 ‘킬킬킬, 너는 단검에 목이 갈려 죽을지도. 아니면 심장이 찔리려나? 크크큭.’
 회색 장검이 시녀의 목에 살짝 닿았다. 시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대로 물러가면 목숨은 살려 주마. 성안에서 피를 뿌리면 그걸로 날 옭아매려 할 테니. 품에 숨긴 걸 내려놓고 나가라.”
 “······.”
 그대로 굳어 있던 시녀는 떨리는 동작으로 품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저는 그저 호신용으로······.”
 “나가라.”
 “예, 예······.”
 시녀가 황급히 욕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천천히 검을 거둔 카이온은 눈을 뜨고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욕실의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몇 번째일지 모르는 유치한 암살 시도였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이고 겪은.
 “······지겨워.”
 나른한 중얼거림과 함께, 카이온은 다시 눈을 감고 몸을 감싸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리나가 집어넣은 듯한 꽃의 향기는, 나쁘지 않았다.
 
 
 
 “내일 봐, 오라버니!”
 밝게 인사하는 아리나를 뒤로하고 복도를 걸으며 카이온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곧 가을이 온다. 그리고 밀리오 드레이크의 15번째 생일, 성년식의 날이 다가온다.
 ‘슬슬 다른 움직임이 생길 때로군.’
 창밖으로 천천히 져 내리는 초원의 태양을 지켜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자신의 방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가운데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섯의 남자가 몸을 일으켜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불러 모으라 했던 이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영주님.”
 가장 연장자인 퀼 하론이 대표로 인사를 건넸다.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중년의 사내인 하론은 기사가 아닌 평민으로, 기병단의 백부장을 맡고 있었다. 신분상으로는 모인 이들 중 가장 아래였지만 애초에 카이온의 아래로 모인 이상 신분은 큰 의미가 없다는 판단 아래 기사들도 나름대로 예우를 해 주는 사내였다.
 카이온은 조촐한 음식이 차려져 있는 테이블의 상석에 앉으며 다섯 사내를 둘러보았다.
 “음식은 누가 준비했지?”
 뺨에 긴 칼자국이 나 있는 거구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제 아내에게 준비토록 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알겠다.”
 성의 주방에서 만들어 올린 음식에 독이 타 있더라 하는 것은 일상과도 같은 일이기에 이런 자리에서는 참석하는 이들 중 하나가 음식을 준비해 오곤 했다. 곧 마흔이 되는 바헬 발트의 아내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 자주 음식을 마련해 주곤 했다.
 네 기사와 한 명의 백부장이 자리에 앉자 카이온은 자신의 앞에 놓인 빵을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빵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그때 카이온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비교적 젊은 기사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심까, 소영주님? 역시 제2부인의 방?”
 갈색 머리칼을 뒤로 질끈 묶은 젊은 기사, 콜 체이스가 가벼운 어조로 던진 질문에 그 옆에 앉아 있던 카인 루하르트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체이스 경!”
 “에이, 궁금해서 그러지.”
 천성적으로 가볍고, 기사단 내에서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 본인은 위명이라 주장하는 명성을 날리는 콜 체이스는 호수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카이온을 응시했다.
 “역시 제2부인과 아가씨를 만나다 오신 건감요? 그렇죠?”
 “······.”
 카이온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체이스는 우후훗,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 위명을 걸고 하는 말입니다만, 제2부인은 분명 소영주님께 마음이 있슴다. 음핫핫! 하긴 다 늙어 가는 영주보다는 앞날이 파릇파릇한 우리 소영주님이 더 끌리는 건 당연······.”
 “무슨 무엄한 언사냐, 콜 체이스!”
 “이크!”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치는 루하르트의 서슬에 체이스는 몸을 움찔했다. 그야말로 기사의 정석으로 불리는 루하르트와 가벼운 난봉꾼의 정석으로 불리는 체이스는 항상 충돌하는 편이었다. 기사들 중 몇 안 되는 이십 대의 동료라 더욱 그런 면도 있었다.
 하지만 루하르트의 불타는 금안에 굴하지 않고 체이스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니, 난 뻔히 보이는 사실을 말하는 건데 그러긴. 제2부인의 그 뜨거운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감! 소문이 괜히 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떠심까, 소영주님. 소영주님도 은근히 마음이······.”
 조용히 빵을 씹고 있던 카이온이 나지막이 일갈했다.
 “닥쳐라, 체이스.”
 “넵.”
 천성이 가벼운들 카이온에게는 저항하지 못했기에 곧바로 찌그러지는 체이스를 보며 하론 백부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헛, 거참 체이스 경의 입은 지치지도 않는구려. 그렇게 폭주하면 피곤하지 않소?”
 “훗, 이제 저물어 가시는 영감님에 비하면 전 아직 피어나는 새싹이잖수까.”
 “거참.”
 보통 입을 잘 열지 않는 바헬 발트는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메트와 루하르트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카이온 일파의 회담은 주로 이런 식으로 분위기가 풀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필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카이온은 왼손으로 턱을 괴며 차가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무리다.”
 그 갑작스러운 말에 분위기가 사악 식는 것과 동시에, 모두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카이온을 향했다. 지금 이 자리가 심각한 자리라는 것을 파악했기에 단숨에 분위기를 바꾼 것이었다.
 “무리······라고 하셨습니까?”
 아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메트가 긴장된 어조로 반문했다.
 “그래.”
 “어떤 의미이십니까?”
 “곧 가을이 온다.”
 “······밀리오 도련님 말씀이시군요.”
 금세 뜻을 파악한 메트가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카이온과 메트를 번갈아 쳐다보던 체이스가 눈을 찡그렸다.
 “그 건방진 꼬맹이가 어쨌단 건감요?”
 대답한 것은 하론 백부장이었다.
 “곧 그 꼬맹이의 성년식이지 않나, 체이스 경.”
 “그런데요?”
 “귀족가의 자식이 성년이 되면, 정식 후계자위를 받을 수 있고.”
 체이스의 눈이 더 심하게 찡그려졌다.
 “지금 우리 영지의 정식 후계자는 소영주님이잖슴까.”
 “그러니까 바로 그게 문제다.”
 침묵하고 있던 발트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체이스의 얼굴이 점점 해괴하게 변하는 가운데 바헬 발트가 카이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에서 희미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어날 때라고 보십니까, 소영주님.”
 주로 조용히 침묵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바헬 발트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드문 일이라 체이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씨익 웃었다.
 “드디어 뒤집어엎는 건감요?”
 루하르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리오 드레이크가 성년이 되는 것과 함께, 영주의 공격이 시작되겠지. 지금까지보다 직접적으로.”
 “헤헹, 지금까지보다 더한 사지로 밀어 넣으려나?”
 “소영주님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으려 할 거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거나, 아니면 대놓고 공격할지도 모르지.”
 체이스의 눈에서 살광이 번뜩였다.
 “그럼 맞붙어 싸워야지. 애들만 제대로 끌어 모으면 붙어 볼 만하다고.”
 “동감이다.”
 순식간에 전의에 불타오르는 체이스와 조용히 끓어오르는 루하르트를 지켜보던 메트가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쉽게 말하지 마라, 체이스 경, 루하르트 경.”
 “엥?”
 “······.”
 체이스와 루하르트는 물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에게 동조하고 있던 발트와 하론도 의아한 눈으로 메트를 바라보았다. 메트는 굳은 표정으로 카이온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영주는 무리라고 했다. 그가 아는 한 소영주가 처음부터 힘들다고 언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은 힘들다고 보십니까?”
 카이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겠지. 영주 놈도 바보는 아니다. 이미 우리 세력을 묶어 둘 준비를 하고 있겠지.”
 “······.”
 무거운 분위기에 체이스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힘들다뇨! 웬 약한 말씀이심까! 근처에서 애들을 불러 모으면 단숨에 천 이상은 모일 테고, 해볼 만해요!”
 “······.”
 카이온은 침묵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듯 체이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미 전군 대기령이 내려와 있지. 영주가 그걸 계속 유지하며 영주 직속군만 레트린으로 끌어 모으면, 어렵다.”
 메트의 설명에 체이스가 다시 눈을 찡그렸다.
 “그럼 이대로 끌려감까? 이러다 병사 백 내주곤 늪지까지 돌격하라는 명령이라도 내려오면요? 어차피 뒤집어엎어야 해요!”
 “······.”
 그건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깨듯, 바헬 발트가 두 눈에 결의를 담고 입을 열었다.
 “제가 영주의 목을 취하겠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공식상 자신의 주군인 드레이크 백작의 목을 취하겠다는 것은, 기사로서 매장당하는 것은 물론 뒤의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자신이 희생해서 영주를 없애겠다는 소리.
 “영주만 없어지면 소영주님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충의로 불타는 발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온은 그 제안을 바로 기각했다.
 “안 돼.”
 “제 목숨을 걸면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영주가 좀 세긴 하니까 저도 가렵니다!”
 발트의 뜻을 알아들은 체이스가 편승하고 나섰다. 하지만 카이온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거부했다.
 “무리다. 영주를 죽여서 끝나는 일이었다면, 놈은 십 년 전의 내 손에 죽었을 거다.”
 “······.”
 뭐라 반박하기 힘든 말이었다.
 12세 꼬맹이가 제국 최강 중 하나로 통하던 영주를 죽일 수 있었냐는 의문은,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의 발을 묶는다는 건 병사들의 움직임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럼?”
 “밀리오의 성년식에 맞춰서, 가신들을 비롯한 주변의 귀족들을 모두 불러 모으겠지. 이미 하나 둘 모여들고 있을 거다. 그런 가운데 암살을 성공시켜 봐야 살아남을 수는 없다. 다른 놈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공격을 가해 올 테니. 우린 아직 귀족들의 지지까지는 손에 넣지 못했다.”
 “······.”
 카이온이 손에 넣은 힘은 대부분이 군사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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