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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1991 1권-1

2017.02.01 조회 6,771 추천 62


 1. 동전 2개는 행운도 2배예요
 
 2014년 여름.
 46살의 중년 가장 김진혁.
 “휴우, 간신히 재웠다. 이제 옷 갈아입고 샤워 좀 해야지.”
 퇴근하고 9시에 돌아온 진혁은, 아빠가 돌아오기만 기다린 22개월 된 영민과 놀아 주느라 지금껏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12시는 넘기지 않았잖아.”
 아내인 순애는 시계를 보며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영민은 요즘 들어서 더욱 잠을 안 자려고 해, 진혁과 순애의 속을 태우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린 거실에서 자자. 괜히 아기 깨우지 말고.”
 진혁은 순애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은 후, 샤워를 하고 나왔다.
 순애는 소파에 앉아 열심히 뉴스를 보는 중이었다.
 [마지막 뉴스입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최근에 태양에서 일어난 거대한 흑점 폭발로 인해 토요일인 내일 오후, 수소폭탄 1억 개 위력의 태양 폭풍이 북반구를 강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진혁은 소파로 다가와 순애 곁에 앉았다.
 “내일 날씨는 어떻대?”
 “왜? 등산 또 가게?”
 순애는 진혁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내일은 회사 야유회라서 꼭 가야 해.”
 “흥! 핑계도 좋아. 그동안 사장님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많이 등산을 했으니까 내일 하루는 빠져도 되잖아.”
 “나 그러다 잘리면? 당신도 영민이 낳으며 회사 그만뒀는데 나까지 잘리면?”
 “으으! 또 그 소리야? 우리 영민이 이제 22개월이야. 영민이가 갓난아기 때부터 당신이 토요일에 같이 있어 준 적이 얼마나 돼? 아프다고 핑계 대고 빠져. 사장님도 당신이라면 봐주실 거야. 나 혼자 애 보는데 미칠 것 같아! 주말에는 당신이 옆에서 도와줘야 할 거 아니야!”
 순애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지난 2년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사장님과 같이 간다는 핑계로 토요일마다 등산을 했으니, 순애의 이런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미안하지만 내일은 진짜 안 돼.”
 여자의 눈물에 약해지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죽기로 결심했기에 양보할 수 없었다.
 지방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대학을 나와 중소기업에 취직, IMF로 인해 회사에서 잘리고 학습지 선생, 다단계 영업 사원, 대출 상담사, 보험 설계사 및 10여 개의 회사와 각종 알바를 전전하던 진혁.
 돈이 없으니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이 가까운 나이까지 결혼을 미뤄 오던 진혁은 38살에 선을 봐서 동갑의 아내 순애와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물론 양가 어른들은 당사자들이 늦은 나이라 혼수니 집이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아 순탄하게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또 결혼 후에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직원이 30명쯤 되는 중소기업에 대리급 직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결혼 후에 돈 관리는 진혁이 맡아서 했다. 하지만 말이 돈 관리지, 맞벌이로 한 달에 230만 원을 버는 진혁의 가정에서 돈 관리란 그냥 결제할 카드값 계산이었다.
 아기가 없을 때는 그래도 자신의 월급 120만 원에 아내의 월급 110만 원으로 어떻게든 버티면서 살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43살에 아기가 생기면서 문제가 터졌다.
 순애는 자신의 나이가 43살이라며, 이번에 낳지 못하면 평생 아기가 없을 테니 꼭 낳고 싶다고 애원했다.
 
 『제발! 응? 나 벌써 43살이야. 남들은 늦둥이 볼 나이잖아. 지금 낳지 못하면 평생 애 없이 살아야 해. 나도 아기를 낳고 싶어.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하, 하지만 우리 형편 뻔히 알잖아. 여기서 아기까지 생기면 감당이······.』
 『어떻게든 되겠지. 어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잖아. 아기들은 자기 먹을 건 가지고 태어난다고. 50년대, 60년대에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에도 집집마다 애들이 얼마나 많았어? 그래도 다 먹고살았잖아. 우리 아기도 자기 먹을 건 가지고 태어날 테니까 걱정 마.』
 『······.』
 50년대, 60년대는 지금과 다르게 물가가 훨씬 쌌기에, 월급만으로도 어떻게든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옛날에는 젖이 안 나온다고 분유를 사는 게 아니라 젖동냥을 했고, 기저귀도 일회용을 쓰는 게 아니라 천기저귀로 빨아서 썼으며, 아기를 위한 장난감이나 책은 꿈도 꾸지 않던 시절이었다.
 또 다들 가난하니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아무렇게나 입혀도 되었다.
 옛날이 오히려 나았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순애의 간절함이 느껴져 진혁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지금 버는 돈으로는 아기를 키울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진혁과 순애는 아기를 낳기로 했고, 10개월이 지나 44살에 아기가 태어나면서 아내가 일을 못하자 가정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순애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젖이 나오지 않았다.
 돈도 없는데 젖까지 안 나오니 순애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워낙 힘들게 낳았기에 그녀를 탓하지 못했다.
 아기가 백일이 되었을 때 분유가 떨어졌는데, 당장 수중에 가진 돈이 하나도 없어 아내와 대판 싸움을 했다.
 이날 아내는 진혁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주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능력이 없어?』
 『내가 어떤지 알면서 결혼했잖아. 이제 와서 새삼스레 왜 따져?』
 『따질 만하니까 따지지. 이건 없어도 너무 없잖아. 의사는 제왕절개를 하라는데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수술비가 싼 자연분만을 해야 했어.』
 『······.』
 수술비 얘기가 나오자 진혁은 가슴이 먹먹했다.
 순애는 무려 10시간이나 진통한 끝에 아기를 낳았다.
 진통이 7시간을 넘어가자 의사는 제왕절개를 권했다. 그러나 제왕절개는 수술비가 2배 이상 비쌌다.
 아기를 낳는 것은 생사를 다투는 일임을 잘 알지만, 진혁은 의사에게 제왕절개를 하겠다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돈 때문에 진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진통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순애는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고집스레 3시간이나 더 진통을 겪고 아기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돈이 없어서 남들 다 가는 산후조리원에도 못 들어가고, 돈이 없어서 그 흔한 아기 침대도 못 사고, 돈이 없어서 종이 쪼가리 모빌 하나 달아 주지 못하고, 돈이 없어서 일회용 기저귀 못 사서 천기저귀 빨아 가며 써야 하고, 돈이 없어서 명품 유모차나 브랜드 유모차는 고사하고 몇만 원짜리 휴대용 유모차도 못 사고, 이제는 돈이 없어서 아기 먹일 분유도 못 사잖아! 염소젖으로 만든 비싼 분유는 바라지도 않아! 분유 중에서도 제일 싸구려 분유 하나도 못 사!”
 진혁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데, 순애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상처 난 그의 가슴 위에 소금까지 뿌렸다.
 『우리 아기 그냥 죽일까? 굶겨 죽여?』
 『······.』
 남들 같으면 자식이 서넛은 있을 나이인 43살에 생긴 아기의 죽음.
 불치병을 안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오로지 돈이 없어 먹이지 못해 굶어 죽게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진혁의 온몸을 휘감았다.
 아내의 질타에 진혁은 아무 말도 못했다. 대신 밖으로 나가 현금 서비스를 받은 후에 분유를 사 왔다.
 
 그동안 악착같이 살면서 현금 서비스나 대출은 절대 받지 않았으나, 이날만큼은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이날 진혁은 남몰래 큰 결심을 했다.
 ‘내 나이 44살. 많이 살았어. 아기가 커 가는 걸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안타깝지만, 아기의 남은 일생을 위해선 생명보험에 가입을 해 놓고 내가 죽어야 해.’
 아기를 낳기 전에는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내가 낳은 2.8킬로그램의 아기를 처음으로 두 손에 받아 들었을 때, 아기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보험 가입 후에 자살을 결심하고,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방법을 찾다 떠올린 것은 등산 중의 실족사.
 죽으려고 단단히 작정한 진혁은 순애 몰래 보험사 5개를 정해 각각 생명보험을 3억씩 들었으며, 보험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다.
 이전에 보험 설계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기에 보험 약관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가입한 생명보험의 총액은 15억. 현재 능력으로는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이었다.
 결혼 후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해 준 것보다는 고생을 더 많이 시켰기에 자신이 죽은 후에 순애가 보험금을 받고,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더라도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아기만 잘 키워 주길 바랐다.
 보험 가입 후 3개월이 지나자 죽음의 유혹이 찾아왔지만, 아기가 크는 걸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에 양가의 도움, 대출과 현금 서비스 등으로 돈이 완전히 바닥 날 때까지 버티며 죽음을 미뤄 왔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2년이었다.
 
 ‘영민이 크는 걸 더 보고 싶지만, 이제는 가진 돈이 다 떨어져서 더는 버틸 수 없다. 빌릴 곳도 더는 없어.’
 죽는 걸 다음 주 토요일까지도 미룰 수 없었다.
 주말이 지나 목요일이 되면 카드 결제일인데, 통장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 전에 해결을 해야 했다.
 “순애야, 내가 등산을 하는 게 바로 너와 아기를 위한 길이야. 난 힘없는 샐러리맨이야. 저녁에 오면 월요일 아침까지는 내가 온전히 전담해서 영민이를 돌볼게. 그러니까 나 좀 봐주라. 부탁한다.”
 “······내일 소나기 올 수도 있대.”
 순애는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순애야.’
 진혁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순애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당신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
 하루하루 살기 바빠서 과거는 떠올리지도 못했던 진혁은 당황했다.
 “과, 과거? 그건 왜?”
 “사는 게 슬퍼서. 죽으면 환생이라는 게 있다잖아. 난 환생보다는 과거로 가고 싶어. 젊은 20대 시절로. 그때가 내 황금기였어.”
 “흠흠! 20대면 난 옆에 없겠네?”
 “왜? 날 일찍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 미안하지만 난 당신 만나기 싫어. 20대에 만났으면 만날 산에만 끌고 다녔겠지. 당신은 그냥 산에서 죽어!”
 독설을 퍼붓는 순애.
 ‘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잠시 과거를 돌아본 진혁은 담담히 말했다.
 “만일 과거로 간다면 난 1991년이 좋아.”
 “왜? 그 해에 특별한 거라도 있어?”
 “특별한 건 없어. 그때가 군대 갔다 온 해거든. 더 어릴 때로 가면 군대 다시 가야 하잖아. 남자한테 두 번 군대 가라고 해 봐. 그게 얼마나 싫은 일인데.”
 예능 프로그램 중에 군대에 또 가는 것을 다루는 내용이 있는데, 진혁은 자신이 연예인이라면 아무리 인기가 높아진다 해도 그 프로그램만큼은 못할 것 같았다.
 “칫! 당신은 특별한 추억도 없지?”
 “내가 왜 없어! 91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T2라고 알아? 미래 로봇이 과거로 돌아와 구원자를 죽이려고 하는 영화의 속편. 마음대로 몸을 변형하는 로봇이 트럭을 타고 주인공이 탄 오토바이를 추격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지. 그리고 인육을 먹는 연쇄살인마에 대한 영화인 침묵의 양들. 얼마나 무서웠다고! 또 중국의 유명한 무술가인 홍비황 영화도 그때 나왔어!”
 순애는 콧방귀를 뀌며 진혁을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추억이 전부 영화야? 사귄 여자친구에 대한 거나, 친구들과 여행 간 거, 대학 가요제에 나갔다가 떨어졌다, 이런 게 추억이잖아. 안 그래?”
 “대학 가요제? 그래, 그 시절에 그게 엄청 인기였지.”
 옛날과 달리 이제는 인기가 사라졌고, 아직까지 대학 가요제가 열리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리고 군대도 갔다 왔으면 배낭여행도 다니고 그랬어야지. 그 시절엔 그게 인기 아니었나?”
 1989년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맞아. 하지만 그땐 돈도 없고, 해외에 무작정 간다는 것도 좀 무서웠고······. 당신은 배낭여행 갔었어?”
 “아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꼭 해 볼 테야. 요즘 할아버지들이 배낭여행 가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잖아. 젊은 애들을 내세웠으면 별로였을 텐데, 왜 할아버지들이 나오는 게 인기겠어? 할아버지들이 좋아서? 옛날 배우를 젊은 사람들이 좋아해? 그건 아니야. 요즘 애들은 약삭빠르고, 정보도 인터넷으로 다 얻잖아. 그러니 어리어리한 초보자 같지가 않지. 하지만 할아버지들은 인터넷도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검색도 못하고, 마치 90년대 배낭족들 같잖아. 그 시절에 배낭여행을 했던 사람들은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자신의 옛날 모습을 떠올리지. 그래서 인기가 있는 거야.”
 “네 말이 다 맞다. 하지만 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추억 만들기보다도 제일 먼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 테야. 가난하게 사는 게 정말 싫다. 미래에 태어날 자식에게도 미안한 일이야.”
 돈 없는 서러움만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아빠가 되고 보니 영민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못해 본 것들을 해 보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게 먼저였다.
 공감을 하는지 순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휴우! 그 시절에 로또가 있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로또 당첨 번호를 외워서 과거로 돌아가 단번에 돈을 벌 수 있잖아.”
 “한국은 없어도 미국엔 로또가 있었지. 유럽도 있었고. 인터넷에는 해외 것이라도 그 시절의 당첨 번호가 무엇인지 다 나올걸? 그러니까 배낭여행 가서 로또 사면 되지.”
 “당신, 술 한잔할래? 나 갑자기 당기네.”
 순애는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을 꺼내 잔 2개와 함께 새우깡을 가져왔다.
 “하! 새우깡? 언제 샀어?”
 “낮에 영민이 주려고 산 과자야. 옛날에는 소주에 새우깡 잘 먹었잖아.”
 “그래. 대학로에서 소주와 새우깡으로 밤새우던 기억이 나는군.”
 “그 생각 하면서 한잔하자구요.”
 순애는 소주를 잔에 따라 진혁에게 건넸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혁은 등산 준비를 했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순애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늦게 잔 영민도 꿈나라에 빠져들어 있었다.
 ‘순애야, 미안하다. 영민이 잘 부탁한다.’
 아쉬움에 한참이나 자고 있는 순애와 영민을 바라보던 진혁은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북한산으로 향했다.
 ‘휴우! 오늘따라 버스가 잘도 달려 주네.’
 버스는 북한산 등산로 입구의 정거장까지 신호도 몇 번 걸리지 않고 막힘없이 달렸다.
 정거장에서 내려 북한산 입구까지 걸어가니 회사 사람들 10여 명이 보였다.
 진혁이 다니는 중소기업은 정직원, 계약직을 합쳐 약 30여 명이었다.
 회사 사람들에게 다가간 진혁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다가, 한편에 서 있는 허연 머리를 한 영감님을 보고 허리를 크게 굽히며 인사했다.
 “영감님, 안녕하세요.”
 “어이구, 안녕하세요.”
 영감님은 똑같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진혁은 귓속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에이, 말 놓으세요. 저 사람들은 떨어져 있어서 저희 얘기는 잘 들리지도 않아요. 둘이 있을 땐 말 놓으시기로 했잖아요.”
 “그럼 그럴까?”
 영감님은 회사에서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영감님의 이름은 강정구.
 정구가 처음 진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직원들의 수군거림 때문이었다.
 직원들은 서른 후반에 낙하산으로 대리가 되어 입사한 진혁에 대해 못마땅한 소문을 퍼트렸고, 그 소문을 정구도 들을 수 있었다.
 ‘불쌍한 사람이로군. 곧 마흔일 텐데 눈칫밥 먹으며 회사에 다니려면 힘들겠어.’
 정구는 진혁이 얼마나 버틸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구는 진혁과 친해지자 숨겨 둔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23년 전에 아내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었어. 결혼하고 9급 공무원 생활 25년 만에 내 집인 아파트를 마련해서 무척이나 좋았는데, 새집으로 이사하고 이틀도 안 되어 건널목에서 신호를 어기고 과속으로 오는 차에 당했지. 새로 이사 온 동네라서 주의가 산만했던 아내가 차가 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가다 사고를 당했어. 무척이나 슬펐지. 그런데 아내의 죽음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어.”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지만, 아내가 죽고 3년 후에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소개로 만난 여자와 재혼을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정구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을 한 것이었다.
 재혼한 여자와의 행복은 단 1년뿐이었고, 이후로 그녀는 정구 몰래 수억이나 하는 아파트를 팔아 버리고 도망쳤다.
 이 사건으로 정구는 협심증이 생겨 심장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다행히 공무원이란 직업 때문에 간신히 직장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대출을 받아 작은 빌라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버티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5년쯤 후에 퇴직을 하게 되자 공무원 연금을 한 번에 받았는데, 이 돈은 세 자식의 결혼 자금으로 쓰였다.
 그런데 마지막 돈까지 들여가며 힘들게 결혼을 시킨 세 자식들 중 정구를 모시려고 하는 자식은 없었다.
 정구는 자식들과 등을 지고, 빌라를 판 후 남은 돈으로 월세 단칸방을 얻은 뒤, 경비로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14년째 지내고 있었다.
 진혁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는 정구에게 물었다.
 “수희는 안 왔나요?”
 “저기 오고 있는데?”
 정구는 북한산 입구로 올라오는 길을 가리켰다.
 화상 흉터가 있는 얼굴과 몸을 가리기 위해 코까지 가리는 큰 마스크와 눌러쓴 모자, 장갑, 목깃을 세운 긴 팔, 긴 바지를 갖춰 입고 배낭을 짊어진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수희는 이혼녀로 회사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줌마였다. 하지만 나이는 진혁보다 어린 40살이었다.
 5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22살의 이른 나이에 12살이나 연상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 그러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에게 16년이나 온갖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38살에 마음고생만 하던 수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더 이상 참지 않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술을 먹고 집에 돌아와 불을 질렀으며, 이 사고로 수희는 세 아이를 잃고 큰 화상까지 입었다.
 남편은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갔고, 수희는 화상 치료만 1년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는 했으나 그것은 육체뿐이었다.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친척의 도움으로 진혁이 다니는 회사에 청소부로 취직했으며, 제일 먼저 정구와 알게 되었고, 정구의 소개로 진혁까지 알게 되었다.
 진혁은 수희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수희도 똑같이 묵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나눴다.
 정구와 수희를 비롯해 회사 사람들과 대충 인사를 나눈 진혁은 평상시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옆을 지나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오늘 태양풍이 불어 닥쳐서 휴대폰이 안 된다는데?”
 “휴대폰뿐 아니라 방송도 안 나오고, 전기도 끊어질 수 있대.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붙어 있으라고 TV에서 떠들더라. 하지만 만날 등산하던 사람이 답답해서 집에만 있을 수가 있나?”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줄었어. 방송 때문인가 봐.”
 “그렇겠지. 날씨 예보를 들으니까 오늘 소나기 소식도 있던데, 등산하러 온 사람들은 정말 산을 좋아하는 이겠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산에 사람이 적은 이유가 이해되었다.
 30여 분을 기다리자 사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이 모두 모였다.
 사장님은 모두를 향해 간단한 연설을 했고, 드디어 등산이 시작되었다.
 
 * * *
 
 입구에서 출발해 등산로를 따라 수십 미터쯤 올라갔을 때, 옆쪽의 빈 공터에서 어눌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여러분, 여기 좀 봐 주세요. 여기 좋은 거 있어요.”
 지나가던 진혁이 슬쩍 보니 동남아인처럼 생긴 남자가 맨바닥에 천을 깔고 갖가지 액세서리를 팔고 있었다.
 ‘이런 데까지 와서 장사를 하는구나. 등산객도 별로 없고, 비도 온다고 하는데 고생하는군.’
 고개를 흔들며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동남아 남자가 걸어가는 진혁을 급히 불러 세웠다.
 “사장님! 사장님!”
 평생 남의 밑에서 일만 하고, 사장님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진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 사장님 아닙니다. 사장님은 저 앞에 계세요.”
 동남아 남자는 진혁이 가리키는 앞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제 물건 사 주시면 사장님 돼요.”
 “하! 하하!”
 진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뿐 아니라 주위에 있던 직원들도 동남아 남자의 넉살에 웃음을 터트렸다.
 ‘저 남자는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나름대로 상술은 있군.’
 뭐라고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죽으려고 결심한 날에 싸우는 게 싫어서, 진혁은 동남아 남자를 무시하고 갈 길을 가기로 했다.
 동남아 남자가 그런 진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와서 물건 보세요! 좋은 거 많아요. 행운 줘요. 돈 많이 벌게 해 줘요. 죽을 때 가져가는 것도 있어요.”
 우뚝.
 ‘죽을 때 가져가는 것?’
 자살을 결심하고 산에 오르던 차라, 죽을 때 가져가는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어났다.
 “죽을 때 가져가는 게 뭡니까?”
 무시하고 가던 진혁이 반응을 보이자, 동남아 남자는 얼른 바닥에 있는 물건 중 뭔가를 들어 올렸다.
 “이거예요.”
 동남아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5백 원짜리 동전처럼 생긴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동전이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가져온 동전일 게 분명했다.
 “이건 동전이잖아요?”
 동남아 남자는 고개를 급히 흔들었다.
 “그냥 동전 아니에요. 특별한 동전이에요. 이 동전은 우리 할아버지가 밀림에 있는 숨겨진 사원에서 가져왔어요.”
 “으음······. 유물이다, 이거예요?”
 “유물이 무슨 뜻이에요?”
 동남아 남자는 유물이란 단어를 모르고 있었다.
 “오래된 물건이란 뜻이죠. 유물을 훔쳐서 우리나라까지 가지고 왔어요? 유물은 개인이 가질 수 없어요. 모두 나라의 것이죠.”
 “훔친 게 아니에요. 주인 없는 물건을 주운 것뿐이에요. 오래되면 다 나라의 것인가요?”
 “······.”
 오래됐다고 다 유물은 아니기에 진혁은 대답을 못했다.
 “할아버지를 도둑이라고 하지 말아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유물은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거예요. 함부로 나라 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안 되죠.”
 “가치는 누가 따지나요? 이걸 가지고 올 때 우리나라 공항에서도, 한국 공항에서도 아무도 뭐라고 안 했어요. 사장님이 가치를 따질 자격이 있나요?”
 “어, 없죠.”
 대답을 하면서 진혁은 무안해졌다.
 솔직히 진혁은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이었다.
 ‘그래. 양쪽 나라의 공항에서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내가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내가 무슨 고고학자도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진혁은 거듭 사과를 해야 했다.
 동남아 남자는 동전을 들어 그것에 새겨진 모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동전은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동전이 특별한 것도 사실이구요. 동전에 새겨진 걸 잘 보세요. 여기 동전에 새겨진 강은 죽음의 강이에요. 강에 배와 뱃사공도 보이죠? 이런 걸 누가, 왜 만들었겠어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동남아 남자의 말처럼 동전에는 기다란 강과 강에 떠 있는 배, 배 위에 올라탄 사공 등이 새겨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 동전을 가지고 있으면 죽음의 강을 다시 건너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셨어요. 죽은 영혼을 데리고 강을 건너는 뱃사공이 동전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 준다구요.”
 진혁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론이란 뱃사공 얘기잖아요?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습니까?”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 속에 아케론이라는 슬픔의 강이 있는데, 이 강에 카론이라는 뱃사공이 있었다.
 카론은 바닥이 없는 소가죽 배로 혼령들을 강 건너 쪽으로 실어다 주는 저승사자인데, 그에게 동전 한 닢이라도 내지 않으면 절대로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건 굳이 신화에 대한 책을 읽지 않아도 진혁이 좋아하던 SF영화에도 비슷한 게 나와서 잘 알고 있었다.
 “맞아요. 그 이야기와 많이 비슷해요. 그런데 이 동전은 행운이 있어요. 뒷면에 행운의 클로버가 새겨져 있잖아요.”
 동남아 남자가 동전의 뒷면을 보여 줬는데, 네잎클로버와 비슷한 모양의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4개의 잎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보이죠? 클로버가 있어서 동전을 가지고 있으면 죽어도 다시 살아나요. 하나에 5천 원이에요. 2개 사면 행운이 2배가 돼요. 2개에 8천 원 드릴게요.”
 ‘어디서 이상한 동전을 가져와서 5천 원이나 달라고 해? 웃기는군.’
 진혁은 어이없는 가격에 킥킥거리며 웃었다.
 “크크! 돈 없습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전 죽으면 그냥 죽는 걸로 끝나고 싶어요. 다시 살아날 생각도 없어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면 더 큰 문제였다.
 산에서 실족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떨어질 테니, 죽지 않으면 평생 불구가 될 게 뻔했다.
 ‘불구가 되면 아내와 아기에게 큰 죄를 짓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이때 머리가 허연 노인이 끼어들어 동남아 남자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이보게, 남의 나라에 와서 환전하면 백 원이나 될까 싶은 동전 하나를 5천 원에 팔려고 하는 건 사기나 다름없어. 5천 원이면 꽤 큰돈이야.”
 진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정구였다.
 정구까지 나서니 동전을 팔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 동남아 남자는 진혁의 손을 덥석 잡은 후 급히 가격을 수정했다.
 “이 동전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게 아니라 환전 못해요. 비싸다면 하나에 4천 원으로 깎아 줄게요. 이 동전에는 행운이 있으니까, 그냥 살아나는 게 아니라 살면서 가장 좋았던 때로 살아날 거예요!”
 진혁은 동남아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손은 놓고 말해요. 그리고 진짜 돈 없어요. 살면서 좋았던 때라고 할 만한 기억도 없네요. 그냥 갈래요.”
 “3천 원! 젊었을 때로 돌아가요!”
 “장사 잘하세요.”
 “2천 원! 진짜라니까요!”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시네요.”
 진혁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남자의 마지막 외침이 들려왔다.
 “천 원! 배고파요!”
 우뚝.
 진혁은 다시 멈춰 섰다.
 천 원이라는 말보다는 배고프다는 말을 듣고 도저히 가 버릴 수 없어서였다.
 못마땅하게 동남아 남자를 흘겨보던 정구도 배고프다는 말에 굳어진 인상이 풀리며 안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품에 손을 넣고 지갑을 꺼내더니, 천 원을 빼서 동남아 남자에게 건넸다.
 “불쌍해서 동전 하나 사겠네.”
 동남아 남자는 얼른 천 원을 챙기며 동전 하나를 정구에게 주고 넙죽 절했다.
 “감사합니다.”
 “자넨 이름이 뭐야?”
 “쨔오.”
 “그래. 타지에 와서 고생하는군. 나이는?”
 “사십오.”
 “오! 나이가 꽤 되는데?”
 “돈 벌려고 한국 와서 아파트 짓는 일 했는데, 사장이 회사 망했다고 월급 안 주고 도망쳤어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나라 돌아갈 돈 벌려고 가진 물건 팔아요.”
 정구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쯧쯧! 그랬군. 내가 다 미안하이. 요즘 건설 쪽이 영 아니지.”
 “그런데 저 거짓말 안 했어요. 이 동전 특별한 거 맞아요.”
 “자네 말처럼 이 동전이 특별하다면 자네가 쓰지, 왜 우리에게 팔려고 하나?”
 “그, 그게, 행운이 있다고는 하는데 죽어야 행운을 얻는 거라서······.”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신 후에 과거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시지는 않았어? 동전을 가지고 계셨으니 그랬어야 하잖아.”
 정구의 예리한 질문이 이어지니 쨔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그것도 확인할 길이 없어서······.”
 “흐흐! 확인할 길이 없긴 왜 없겠나? 할아버지가 과거로 돌아가셨다면 그냥 있으셨겠나? 미래를 알고 계시니 큰 부자가 되셨을 테고, 자네도 지금 이 꼴로 남의 나라에 와서 고생이나 하지는 않겠지.”
 “······.”
 쨔오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정구는 의기소침해 있는 쨔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네. 자네를 탓하자는 게 아니야. 그리고 여기 와서 고생했다고 대한민국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게.”
 “감사합니다.”
 이때 수희가 천 원짜리를 동남아 남자에게 내밀며 끼어들었다.
 “배고프시다니 안됐네요. 저도 사 드릴게요. 동전 하나 주세요.”
 
 정구에 이어 수희까지 동전을 사 주니 진혁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지갑을 꺼냈다.
 ‘그래. 죽기 전에 좋은 일이나 하자.’
 지갑 안에는 천 원짜리 2장이 있었다.
 ‘에휴! 죽는 날에 가진 게 고작 2천 원이라니······.’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쨔오에게 건넸다.
 “저도 동전 하나 주세요.”
 곁눈질로 진혁의 지갑 속에 2천 원이 있는 것을 본 쨔오는 동전을 2개 내밀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저어, 2개 사시면 안 돼요? 2개에 2천 원이요. 혹시 천 원 더 있으시면 3개에 3천 원 드릴게요. 남아 있는 동전이 3개라서요.”
 진혁은 싫다고 말하려다, 지갑 속에 천 원짜리 한 장은 남겨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돈은 2천 원이네요.”
 지갑에서 다시 천 원을 꺼내 2천 원을 쨔오에게 내밀었다.
 쨔오는 2천 원을 받더니, 크게 미소를 지으며 동전 2개를 건넸다.
 “동전 2개는 행운도 2배예요.”
 “행운이 배라고 과거로 두 번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아니구요. 행운의 클로버가 2개잖아요.”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도와주려고 산 거지, 따지려고 산 것은 아니기에 진혁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동전 2개를 받아 들었다.
 “흠흠! 장사 잘하세요. 동전은 다 파시길 빕니다. 받은 돈으로 김밥이라도 사서 드시구요.”
 “고맙습니다.”
 쨔오는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2. 토션파를 이용한 시간 이동 장치
 
 회사 직원들과 함께 북한산 정상에 오른 진혁.
 ‘정상까지 왔는데 소나기는 안 오나?’
 고개를 들어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며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이왕 추락사를 할 바에야 비가 올 때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이때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두둑!
 ‘하하! 신께서 죽는 순간에는 도와주시는구나.’
 쏴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장대비가 퍼붓는 하늘을 보았다.
 주위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어떻게 비를 피할지 우왕좌왕했다.
 이젠 비를 피해 움직이다 미끄러져 절벽 밑으로 떨어지면 되었다.
 회사 직원들이 실족사하는 장면을 볼 테니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 의심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휴우! 마음 약하게 먹지 말자.’
 정상에서 가장 사람이 없는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회사 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해 떨어져 있던 정구와 수희가 서 있었다.
 ‘저 두 사람이 내 마지막을 보는 증인이 되겠군.’
 진혁은 두 사람의 옆에까지 간 후, 밑을 향해 미끄러지려 했다.
 그런데!
 뚝.
 어느 순간 갑자기 폭포수처럼 내리던 비가 멈췄다. 그리고 하늘에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오오오! 하늘 좀 봐요!”
 정상에 있던 누군가 한 손을 번쩍 들고 하늘을 가리키며 탄성을 내질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우와아아!”
 “어머머머! 이럴 수가!”
 죽으려던 진혁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절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오오오!”
 비를 품고 있던 시커먼 구름은 어느새 빨갛게 변해 있었고, 과학 잡지에서나 보던 푸른빛의 오로라가 높다란 하늘로부터 북한산 정상까지 긴 커튼처럼 펼쳐져 파도가 치듯 크게 일렁거렸다.
 진혁은 넋을 놓고 오로라를 감상했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났을까?
 커튼처럼 펼쳐져 있던 오로라가 진혁, 정구, 수희가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휘감기 시작했다.
 “어, 어어! 왜 나, 나를······.”
 “왜 우리를 감싸는 거야!”
 “어머머, 무슨 일이죠?”
 세 사람이 당황스러워할 때, 하늘에서 회오리치는 바람이 불어 닥치며 엄청난 번개가 쳤다.
 우르르릉! 콰아앙!
 번개는 곧바로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세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동시에 머리가 터지며 캄캄한 어둠을 맞이했다.
 ‘어차피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나? 이렇게 죽는 걸 알았다면 토요일마다 영민이 곁에 있었을 텐데. 그러면 순애도 날 덜 미워했겠지.’
 죽음이 찾아오는 찰나의 순간, 토요일마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한 순애와 영민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번쩍번쩍! 번쩍! 번쩍!
 그런데 벼락이 내리치던 때, 진혁, 정구, 수희의 주머니 속에 있던 동전들에서 강한 빛이 흘러나왔다. 동전들은 곧바로 시커멓게 타 버렸다.
 
 * * *
 
 기이한 오로라와 함께 벼락이 떨어진 지 약 5분 후.
 저벅저벅, 저벅저벅.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내 2명이 북한산 입구 쪽에 나타났다.
 “니꼴라이에게 동전을 훔친 쨔오의 마지막 행선지가 북한산이야. 비도 오고 벼락까지 내리치는데, 정상까지 올라가지는 않았겠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복장으로 산에 오르는 건 좀 그러니까. 안 그래, 세르게이?”
 “잠깐! 저길 봐, 실노프!”
 세르게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벼락을 맞아 군데군데 시커멓게 변한 시체가 있었다. 바로 쨔오였다.
 실노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으으! 설마 쨔오는 아니겠지?”
 “모르지. 가 보세.”
 두 사람이 가까이 가 보니 시체는 손에 부서진 동전을 들고 있었다.
 얇은 두께의 동전은 겉이 벌어지며 속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교한 회로와 칩들이 있었고, 모두 시커멓게 타 있는 상태였다.
 세르게이는 시체의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찾아냈다.
 “으으! 쨔오가 맞다. 그리고 동전은 못 쓰게 되었다.”
 옆에 있던 실노프는 동전을 살피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군. 아까 이쪽에 심한 번개가 쳤는데 쨔오가 번개를 맞았나 봐. 그런데 우리가 찾을 동전은 5개잖아. 여긴 하나뿐이야. 나머지 동전 4개는 안 보이는데?”
 세르게이는 바닥에 깔린 좌판을 살피며 말했다.
 “쨔오가 물건을 팔면서 동전도 함께 판 것 같다. 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이 샀으려나? 일이 복잡해지는데?”
 세르게이는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단축 번호로 저장해 둔 알렉세이 박사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Rrrr- Rrrrr-.]
 
 잠시 후, 휴대폰 너머로 굵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알렉세이 박사님, 세르게이입니다. 니꼴라이에게서 동전을 훔친 쨔오를 찾았습니다.”
 [오호! 다행이군. 동전은 찾았나?]
 “그런데 그게······.”
 세르게이는 쨔오가 벼락을 맞고 죽은 것과 손에 쥔 동전이 파괴된 것을 말했다.
 [흠흠! 벼락이라······. 동전 5개가 모두 파괴되었나?]
 “아닙니다. 쨔오가 손에 든 동전 1개만 파괴되었고, 나머지 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나머지 4개는 어디에 있나?]
 “쨔오는 이곳에서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팔았습니다. 4개의 동전들은 누군가 사 간 것 같습니다.”
 [니꼴라이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엉뚱한 도둑놈까지 나타나 더 속을 썩이는군. 니꼴라이는 어떻게 했나?]
 “단단히 묶어서 배에 태웠습니다. 곧 러시아로 출발합니다.”
 [니꼴라이만 잡아선 아무 소용도 없다. 그놈은 체레프닌 박사의 아들일 뿐이다.]
 체레프닌은 구소련의 과학자로, 그의 연구 분야는 텔레파시 통신을 할 때 뇌에서 발생하는 토션파였다.
 토션파는 1922년에 발견되었으며, 1970년 이후부터 100여 명의 과학자가 10,0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텔레파시 통신의 과학화가 추진되고 있으며, 이것이 토션 통신이다.
 체레프닌은 토션파는 빛보다 10만 배나 빠르기에 시간을 뛰어넘는 텔레파시 통신이 가능하다고 했으며, 뇌 정보 전체를 토션파에 실어 과거나 미래와 같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자신에게 보냄으로 시간 여행도 가능하다 했다.
 이때 뇌 정보가 빠져나간 육체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며, 뇌 정보를 받아들이는 다른 시간대의 자신은 평행우주이론에 따른 또 다른 우주 속의 자신이기에 현재 우주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잃어버린 동전 5개는 체레프닌 박사가 남긴 장치다. 박사는 죽기 전에 연구 자료와 함께 자신이 만든 장치를 모두 없애 버렸고, 남은 건 동전 5개뿐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한다. 부서졌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만일 동전 5개를 회수하지 못한다면 러시아에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라!]
 알렉세이는 차가운 목소리로 엄포를 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젠장! 산에 올라야겠군. 동전을 회수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도 말라는군. 정상까지 가면서 쨔오에게 동전을 산 자가 있는지 찾아보자.”
 “끄응! 그래야지.”
 두 사람은 부서진 동전을 챙긴 후, 쨔오의 시체는 내버려 두고 정상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시간 후, 정상에 도착한 실노프와 세르게이.
 두 사람은 벼락에 타 죽은 진혁, 정구, 수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시체 속에서 벼락에 맞아 쪼개지고, 부서진 4개의 동전을 찾을 수 있었다.
 
 * * *
 
 진혁이 죽은 후, 경찰은 진혁의 아내인 순애에게 연락하여 남편의 죽음을 알렸다.
 시체 안치소에 찾아온 순애는 진혁의 시체를 보며 오열했다.
 “여보! 여보! 나랑 영민이는 어떻게 하라고! 어떻게 하라고 죽어! 흑흑흑!”
 경찰 중 한 명이 순애에게 다가와 빈 지갑을 건넸다.
 “몸에 지니신 건 이게 전부였습니다. 돈은 하나도 없더군요.”
 “죽을 때 가져갈 돈도 한 푼 없었어? 이 지지리도 못난 인간아! 왜 죽어! 돈도 없으면서 왜 죽냐고! 흑흑!”
 한참 후, 겨우 마음을 진정한 순애는 미안해하는 사장을 만났고, 그로부터 진혁이 사장과 함께 토요일마다 등산을 다닌 사실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아니, 그렇다면 남편은 왜 토요일마다 등산을 다녔지? 날 속이고 혹시 딴 여자랑 바람이라도 났었나?’
 의심이 가득한 상태로 삼일장을 치른 후, 순애는 진혁의 시체를 화장했다.
 슬픔이 조금 가시고 집에서 진혁의 물건을 정리하던 순애는 진혁의 이름으로 된 3억짜리 보험증서 5개를 발견했다.
 ‘어, 언제 이런 걸?’
 없는 살림에 진혁이 전부 15억이나 되는 5개의 보험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순애는 화들짝 놀랐다.
 ‘진짜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 돈이 없어서 중간에 보험금을 못 내서 이미 해약된 거 아닐까?’
 순애는 반신반의하며 보험사에 연락했다.
 5개의 보험사에서는 갑작스런 소나기와 뜻하지 않은 번개로 진혁이 죽은 사실을 확인한 뒤, 순애에게 15억의 사망 보험금을 지급했다.
 또한 회사 야유회로 간 등산에서 사망했기에 산업재해로 처리가 되어, 여기서 나오는 보험금과 회사에서 지급하는 위로금으로 2억을 받을 수 있었다.
 보험 설계사 중 누군가 순애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편분이 산에 가서 혼자 자살하셨다면 보험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을 거예요. 실족사라 하더라도 보험사에서 자살인지 아닌지 다툼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요.”
 “다툼의 여지요?”
 “자살을 가장한 실족사일 수도 있잖아요. 판사가 실족사가 아니라 자살이다 하면서 보험사 손을 들어 주면 저희로서는 아무 힘도 없잖아요.”
 “그렇죠.”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남편분께서는 운이 좋으시다고 해야 하나? 회사 야유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산을 하셨고, 때마침 내리친 벼락에 맞아 돌아가셨기 때문에 보험사에서는 군말 없이 보험금을 다 지급한 겁니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위로금이 나올 테고, 업무 중 사망이니 산업재해에 해당되어 이 돈도 받으실 수 있어요.”
 순애는 운이 좋다고 하는 보험 설계사가 무척이나 미웠지만, 그가 하는 말 중 마음에 와 닿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자살이었다.
 총 17억을 받아 든 순애는 영민이를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영민아, 그동안 네 앞에서 아빠 욕 많이 해서 미안하다. 아무래도 아빠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 같아. 우리에게 보험금을 남겨 주려고 말이야.”
 아직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영민은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랐지만, 순애는 진혁에 대한 고마움에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진혁의 경우는 순애가 있어서 장례와 화장이 이루어졌다.
 정구는 경찰의 연락을 받은 둘째 아들이 시신을 인수받아 장례와 화장을 했다. 그리고 수희는 감옥에 있는 남편이 상주가 되어 장례와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쨔오는 경찰이 신분 확인을 한 뒤, 태국 정부에 연락을 취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쨔오의 시체를 넘겨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정부는 고심 끝에 미국에 쨔오의 시체를 넘기기로 했으며, 쨔오의 시체는 미국 군용기에 실려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 * *
 
 북한산 정상에서 벼락을 맞고 어둠에 휩싸인 진혁.
 ‘이것이 죽음의 세계인가?’
 머리가 터지는 아픔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일 줄 알았다. 그런데 천사도 악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냥 어둠뿐이었다.
 ‘천사와 악마, 저승사자는 어디에 있지? 옥황상제는? 뭐든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이게 끝이야?’
 그때 어둠 속에 나타나는 찬란한 빛이 있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천국으로 보내 줄 천사라면 다행이지만, 지옥으로 끌고 갈 악마가 나타날까 봐 두려움이 크게 일어났다.
 빛 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노년의 백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의사가 걸치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나는 체레프닌 박사다. 시간 이동 장치를 발명한 과학자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바로 동전을 만든 체레프닌이었다.
 진혁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고자 되물었다.
 “누구요?”
 하지만 상대는 진혁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이 영상은 시간 이동 장치의 실험자를 위해 미리 준비된 것으로, 실험자가 시간 이동을 하기 직전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실험자가 어떤 언어를 쓰든 상관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뇌파를 통해 설명을 진행한다.]
 체레프닌은 진혁이 쨔오에게 샀던 동전을 들어 보였다.
 진혁은 화들짝 놀랐다.
 ‘저건 쨔오가 판 동전이잖아! 저게 시간 이동 장치? 그렇다면 쨔오는 거짓말을 했어!’
 할아버지가 밀림의 숨겨진 사원에서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모두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시간 이동 장치는 아주 강력한 에너지를 주입하면 작동한다.]
 ‘아주 강력한 에너지라면 벼락?’
 하지만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진혁은 벼락을 맞아 죽었는데 어떻게 이 영상을 보고 있는지였다.
 “전 벼락을 맞았어요! 시간 이동 장치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구요!”
 답답한 마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체레프닌은 표정도 바뀌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시간 이동 장치는 육체가 아닌 사용자의 뇌에 담긴 모든 정보를 빛보다 10만 배는 빠른 텔레파시인 토션파에 담아 보내는 것으로······(중략)······사용자는 이를 통해 과거와 미래의 어느 시간대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다만 시간 이동에는 4가지 제약 사항이 있다.]
 “토션파?”
 처음 듣는 용어였다.
 하지만 텔레파시는 확실히 알았고, 텔레파시의 정확한 속도는 몰랐지만 빛보다 빠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빛보다 10만 배나 빠르다면 과거와 미래를 이동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하지만 뇌 정보만 보내서 뭐해? 육체는?’
 자연스러운 의문이었다.
 “육체의 이동이 없이 뇌 정보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요?”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던진 질문이었다. 역시나 체레프닌은 자기 말만 계속했다.
 [첫 번째 제약은 뇌 정보의 이동은 자기 자신에게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간 이동 장치는 어느 시간대이든 똑같은 토션파를 발생하는 뇌를 찾는다. 즉, 똑같은 토션파를 내는 자기 자신에게로 이동한다.]
 절로 콧방귀가 뀌어졌다.
 “흥! 과거라면 모를까, 미래엔 내가 살아 있겠어요? 벼락 맞아 죽었는데?”
 이것에 대한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두 번째 제약은 같은 우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우주 중에 하나로 이동한다는 사실이다. 즉, ‘평행우주’로의 이동이다. 평행우주는 현재 내가 속한 우주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하며, 그 우주에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이론이다. 이 평행우주이론에 속한 수많은 우주는 시간대도 서로 달라서 미래나 과거의 우주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뇌 정보를 옮김으로써 시간 이동이 가능해진다.]
 ‘헉! 미국 드라마에서 봤던 그 평행우주?’
 진혁은 평행우주가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국 드라마 중에 평행우주를 주제로 한 것이 있었다. 꽤 인기가 있어 시즌1부터 시즌5까지 방영되었고, 진혁도 재미를 느껴 매 시즌을 하나도 빼지 않고 보았었다.
 드라마에서는 2개의 우주가 있는데, 다른 우주에서 주인공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우주에서는 주인공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야 할 기로에서 대학을 가는 경우와 대학을 포기하는 경우로 나눈다면, 이 선택에 의해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단, 평행우주로의 이동이기에 이동한 우주에서 자신은 현재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수 있다. 현재 우주에서는 재벌이라도 다른 우주에서는 노숙자일 수 있다.]
 미래나 과거로의 시간 이동은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이동했을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제약은 시간 이동 장치는 왕복 비행기 표가 아니라 편도 비행기 표다. 즉, 한 번 이동하면 다시 출발했던 우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다른 이들이라면 불안해했겠지만 진혁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어차피 현재 우주에서 난 죽은 몸이잖아.’
 [네 번째 제약은 시간 이동을 하게 되면 남겨진 육체는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데, 육체는 가사 상태?’
 즉, 절대 깨어날 수 없는 상태로 실질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영상에서는 가사 상태라 말했지만 진혁의 경우는 벼락을 맞아 숨진 것이었다.
 [다섯째는 제약이 아니라 부작용이다. 시간 이동 장치를 2개 이상 동시에 작동시킨다면 토션파가 중복해서 발생하기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이론적이라면 발생된 토션파들이 각각 다른 우주에 독립적으로 전송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은 다를 수 있다. 나는 시간 이동 장치를 동시에 2개 작동시킬 때에 2가지 상황을 예상하고 있다. 첫 번째는 뇌 정보가 두 우주로 나뉘어 전송되며, 한 우주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때 가서 다른 우주로 이동한 뇌 정보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즉, 한 우주에서 죽게 되면 다른 우주에서 다시 깨어나는 것으로, 실제로는 죽음을 피해 한 번 더 생명을 이어 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뇌 정보가 한 우주로 동시에 전송되며, 뇌 정보가 중복하여 뇌에 입력되면서 뇌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2배나 되는 뇌 정보를 감당하지 못해 뇌종양이 발생할 수도 있고, 2배나 되는 뇌 정보를 수용하고자 뇌가 크게 성장할 수도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진혁은 체레프닌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설명은 끝이 났으며, 마지막으로 시간 이동 장치를 만든 나를 소개하겠다. 나는 구소련에서 태어나······(중략)······소련이 무너지며 여러 개 나라로 나뉘게 되었고, 러시아 정보국에서는 실험에 관한 모든 것을 내놓도록 했다. 그러나 나는······(중략)······러시아 정보국을 피해 25년여를 도피하며 6개의 시간 이동 장치를 완성했다.]
 ‘내가 2개, 정구 할아버지가 1개, 수희가 1개 샀다. 그리고 쨔오가 1개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들 외에도 시간 이동 장치가 1개 더 있다는 말이네?’
 [하지만 나는 암에 걸려 죽게 되었고, 더는 정보국을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해 가장 먼저 내가 실험자가 되어 시간 이동 장치를 1개 사용하기로 했으며, 나머지 5개는 아들인 니꼴라이에게 맡긴다.]
 ‘아들에게 맡겨? 그렇다면 쨔오가 니꼴라이에게서 훔쳤나? 니꼴라이가 쨔오에게 이 귀한 것을 주었을 리는 없겠지?’
 동전이 시간 이동 장치라는 것을 알았다면 단돈 천 원에 팔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쨔오는 동전의 가치도 모르고 니꼴라이에게서 훔친 것이다.
 [내가 미래로 갈지, 과거로 갈지, 또는 현재지만 다른 우주로 갈지 아무것도 모른다. 만일 실험에 참가한 그대가 시간 이동에 성공한다면 그곳에서 나와 내 아들을 찾아 실험이 성공했음을 알려다오. 그대가 가는 곳에서도 내가 시간 이동 장치를 만드는 과학자일지 모르지만, 실험의 성공에 대해 안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과거 내 주소는 모스크바······(중략)······마지막 도피 장소의 주소는 블라디보스톡······(중략)······부디 실험에 성공하길 간절히 바란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체레프닌의 모습이 사라졌다.
 “가면 안 돼! 가지 마!”
 크게 소리쳤지만 사라진 체레프닌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환한 빛이 가까이 다가오며, 진혁은 마치 블랙홀과 같은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 죽기 싫어!”
 체레프닌에게 시간 이동에 관해 설명을 들었지만 실감할 수 없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진짜로 이동을 시작하니 시간 이동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만 같았다.
 슈슈슈슈! 슈슈슈슛!
 
 
 3. 지금은 1991년이잖니. 넌 어제 제대했어!
 
 슈슈슈슛~ 쿠웅!
 한참이나 긴 통로를 지난 끝에 진혁은 밝은 빛이 비치는 어딘가로 떨어졌다.
 ‘으으! 어지러워.’
 아직 눈을 뜨지 못했지만 구토가 나올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툭툭, 툭툭.
 ‘헉!’
 진혁은 크게 당황했다.
 ‘주, 죽었는데 왜 내 몸이 살아 있는 것 같지?’
 어깨에서 오는 반응은 살아 있는 육체의 것이었다.
 이 순간, 체레프닌이 말한 시간 이동이 성공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귀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진혁아! 진혁아?”
 ‘이, 이건 어머니 목소리?’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벼락에 맞아 죽은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죽은 날 어머니도 돌아가셨나? 그래서 같이 천국에 왔나?’
 어머니는 칠순이 넘으셨다.
 요새는 팔구십이 일반적이라 칠순이 넘은 나이에 죽는 건 일찍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칠순 나이에 죽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혹시 내가 번개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도 놀라서 죽으셨나?’
 그런데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1시다. 밥은 먹고 자야지. 어서 일어나라.”
 ‘1시? 일어나라고?’
 진혁은 어이가 없었다.
 “어제 제대했으니까 피곤한 줄은 안다. 하지만 밥까지 굶으면 안 되잖니. 그만 자고 어서 일어나라.”
 ‘제대? 내가 자고 있는 거라고?’
 뭔가 이상했다.
 힘을 내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앞에 누군가 있는데 어머니 같았다. 진혁은 시력이 나빠 안경을 써야 사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안경 여기 있다.”
 진혁은 어머니가 건네주는 안경을 받아 썼다. 그리고 50대 초반의 젊은 어머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으어어어억!”
 “어머! 진혁아!”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진혁이 기겁하니, 어머니는 더욱 크게 놀라며 두 어깨를 붙잡았다.
 진혁은 말을 못하고 손으로 어머니만 가리켰다.
 “어, 어, 어어어!”
 “지, 진혁아! 왜 이러니!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밖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는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여보! 여보!”
 “무슨 일이야!”
 벌컥!
 방문이 급히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왔다.
 ‘오오! 아버지!’
 아버지도 어머니만큼 젊어진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여보, 진혁이가 이상해요.”
 
 어머니는 옆으로 비켜서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진혁을 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진혁에게 다가왔다.
 “진혁아! 너 왜 그러냐? 일어나자! 일어나!”
 아버지는 두 팔을 뻗어 진혁의 상체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걱정하며 끼어들었다.
 “여보, 진혁이가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어제는 괜찮더니, 자고 일어나니까 이상해졌어요.”
 훌러덩!
 아버지는 갑자기 진혁의 윗옷을 벗겨 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소리쳤다.
 “여보! 뭐 하는 거예요?”
 “가만있어 봐!”
 아버지는 진혁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혹시라도 제대하기 전에 얻어맞은 곳이 있는지 보는 것이었다.
 한편, 잠에서 깬 진혁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젊으셔. 두 분 모두 칠순이 넘으셔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는데······.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50대 모습이었다.
 진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 지금 저 살아 있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살아 있지!”
 “여보, 진혁이가 이상해졌어요.”
 꿀꺽.
 진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침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나 진짜 살아 있나?’
 하지만 46살까지의 삶을 모두 기억하고 있기에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눈앞에 있는 부모님께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여기 천국인가요?”
 “미친놈!”
 “정신 차려라, 진혁아!”
 아버지는 곧바로 욕을 했고, 어머니는 울상이 되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내가 언제로 깨어난 거야?’
 어머니가 어제 제대했다고 말했지만, 경황이 없는 진혁은 그 말을 잊어버리고 물었다.
 “지금이 몇 년도예요?”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너 제대한다고 얻어맞고 나왔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머니가 했다.
 “얘야, 지금은 1991년이잖니. 넌 어제 제대했어!”
 “허억!”
 진혁은 다시 기겁했다.
 ‘1991년? 23살?’
 1991년이면 북한산에서 죽은 2014년과 비교해 23년 전이었다.
 88학번인 진혁이 대학 1학년을 마치고 1989년에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나온 해가 바로 1991년이었다.
 믿기 힘든 현실에 진혁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저, 정말 1991년인가요? 정말이죠?”
 아버지는 대답 대신 진혁의 상체를 살폈다.
 “진혁아, 너 진짜로 어디 아프니? 아픈 데가 있으면 말해 봐라. 내가 볼 수 있게 바지도 좀 벗어 봐라.”
 “꿈이 아니죠? 저 좀 때려 주세요.”
 철썩!
 아버지가 진혁의 뺨을 때렸다. 너무 세게 맞은 진혁은 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며 괴로워했다.
 “으으! 아파요!”
 아버지 뒤에 서 있던 어머니가 그런 남편을 나무랐다.
 “애를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떻게 해요!”
 아버지는 아내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진혁이만 살폈다.
 “아픔이 느껴져? 아파?”
 “네!”
 진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돌아 버리겠다. 육체가 느껴지니 난 영혼 상태가 아니야. 살았다는 말이잖아. 하지만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도저히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부터 시작해 집 안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모든 게 새로웠다.
 방의 침대, 책상에 있는 전공 서적들, 거실의 인조가죽 소파, 찌그덕거리는 마루, 벽에 걸린 91년도 달력, 한쪽 문이 찌그덕거리는 안방의 장롱, 부엌에 있는 옛날 냉장고, 지금은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 그릇 등등.
 ‘23년을 거슬러 돌아왔다. 난 23살이고, 지금은 막 제대했을 때야. 그렇다면 시간 이동이 진짜였나?’
 이때서야 체레프닌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거야.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어. 동전은 정말로 시간 이동 장치였어!’
 시간 이동을 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지만, 추억이 깃든 정겨운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진혁의 모습을 본 그의 부모는 괜찮은지 여러 차례 물어보며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살폈다.
 진혁은 연신 괜찮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
 우선 부모님이 50대로 젊어져서 기쁘기는 했지만, 죽기 전의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형이나 누나처럼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또한 거울로 자신을 보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으! 이거 완전 애잖아!’
 군대에 갔다 왔지만, 그런다고 23살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젊어졌으니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삐쩍 마른 23살의 얼굴과 몸은 볼품없고,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처럼 보였다.
 ‘흐흐! 잘해 보자, 애송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머릿속에 지이잉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엄청난 두통이 밀려왔다.
 ‘으으! 머리가······.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진혁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쿠웅!
 “진혁아!”
 부부는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진혁에게 달려들었다.
 
 * * *
 
 진혁은 가까운 종합병원의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응급조치를 받고 정신을 차렸지만, 아침에 출근하는 과장급 의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밤새 병원에 있어야 했다.
 “두 분 다 계실 필요는 없으니까 한 분만 계세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진혁은 복잡한 응급실에 부모님이 계시니 마음이 불편해서 이렇게 말했다.
 “됐어. 넌 신경 쓰지 마라. 그냥 잠이나 자.”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고, 아버지는 슬쩍 진혁을 볼 뿐이었다.
 더 말한다고 부모님이 들으실 것 같지도 않아 진혁은 눈을 감고 왜 쓰러졌는지 생각했다.
 ‘시간 이동 때문인가? 뇌 정보가 급격히 바뀌니 이런 일이 생겼나?’
 
 아침이 되어 과장급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그는 진혁의 뇌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한국병원에 있는 김용인 박사를 소개해 주었다.
 진혁은 괜찮다고 말하며 집에 가길 원했지만 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진혁을 데리고 곧바로 한국병원으로 향했다.
 한국병원에 간 진혁은 입원을 한 뒤 뇌 검사를 했다.
 이 검사는 비용이 비싸서 부모님은 적금 통장을 깨야 할 정도였다.
 하루가 지나 검사 결과가 나오자 김 박사와 진혁, 그리고 부모님은 진찰실에서 상담을 하게 되었다.
 김 박사는 진혁의 뇌를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혹시 아드님이 IQ 검사를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대답은 어머니가 했다.
 “고등학교 때 했는데, 108로 나왔어요.”
 “겨우 108이요?”
 김 박사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진혁은 의구심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 제 IQ는 왜 물어보시나요?”
 “나이도 아들뻘로 어리고 하니 진혁 군이라 부르지. 그리고 난 의사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박사님이라 불리길 원한다네. 내가 자네의 IQ에 궁금증을 가지는 이유는 자네의 뇌 때문이네.”
 “제 뇌가 어때서요?”
 “주름이 많아.”
 “예?”
 너무나 놀란 진혁은 또다시 반문하고 말았다.
 “뇌에 주름이 많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그건 천재가 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얘기지. 뇌가 주름을 만드는 이유는 세포들이 분포할 만한 표면적을 늘리기 위함이야. 뇌세포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나?”
 질문을 한 김 박사는 진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을 원했다.
 진혁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글쎄요?”
 “글쎄요라니! 뇌세포가 있기 때문에 기억도 하고, 상상도 하고, 창작도 하고, 말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안 그래? 인간이 동물과 결정적으로 다른 게 뭐겠어? 바로 뇌잖아.”
 “맞습니다.”
 “물론 뇌세포가 많다고 꼭 똑똑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똑똑할 가능성은 높지. 그러니까 뇌에 주름이 많은 자네는 똑똑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야. 난 이제껏 자네처럼 주름이 많이 진 뇌는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자네가 천재라고 여겼지. 그런데 자네의 IQ는 무척이나 실망스럽군. 혹시 공부는 열심히 하나? 어느 대학에 다니지?”
 “지방대요. 공부는 거의 안 해서······.”
 잘난 게 없으니 스스로 위축되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래? 의외군. 내가 공부에 대해 물어본 이유는 간혹 공부를 많이 하면 주름이 늘어난다는 말도 있어서야. 공부를 많이 한다는 말은 자꾸 머리를 쓴다는 말도 되겠지.”
 이때 옆에서 듣기만 하던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박사님, 제 아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 이유를 좀 알고 싶은데요.”
 김 박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짧게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원인을 찾을 수 없군요. 다만 검사 결과, 아드님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래요? 제 아들이 제대를 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혹시 군대에서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되진 않았는지 걱정되는데요.”
 김 박사는 시선을 진혁에게 돌린 후 물었다.
 “진혁 군, 군대에서 머리를 심하게 맞은 적이 있나?”
 “제가 기억하기론 없습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정신을 잃을 만한 무슨 원인이 있나?”
 “······.”
 진혁은 말을 못하고 잠시 생각했다.
 ‘원인이라면 과거로 돌아온 거죠.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요.’
 그러나 이걸 밝힐 수는 없었다.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김 박사에게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졌다.
 “박사님,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에 의해서도 뇌에 주름이 갑자기 생길 수 있나요?”
 “갑자기? 그건 불가능한데? 자네가 아직 20대 초반이라 성장이 멈추지 않았다고 봤을 때, 적게나마 주름이 조금 늘어날 수는 있겠지.”
 성장이라는 단어를 듣자 진혁은 체레프닌이 한 말이 기억났다.
 ‘아! 시간 이동 장치를 2개 이상 동시에 작동시킨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고 했었어. 그리고 그가 예측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뇌가 크게 성장하는 것이지. 나에게 일어난 이 일이 바로 그것인가?’
 진혁은 계속해서 물었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초자연적인 일을 겪으면서 아주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주름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냐는 것이죠.”
 뇌 정보가 2배가 되었을 때라고 물으면 정신이상자로 볼 것이 뻔해서 초자연적인 일과 큰 스트레스라고 표현했다.
 김 박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내가 아무리 박사라도 그것까지는 모르겠군. 그런 사례를 들어 보지도 못했고. 그런데 자네 질문 속에 대답이 있는 것 같군. 초자연적인 일을 겪었다면 그걸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하겠나?”
 “무슨 말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초자연적인 일이 자네 뇌에 주름을 만들었다면, 그걸 내가 어떻게 설명하겠냐는 말이네. 나한테 묻지 말고 신께 물어봐야지.”
 “아하!”
 진혁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또다시 머릿속에서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극심한 두통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진혁이 깨어난 것은 다음 날 병원 침대에서였다.
 “으으으!”
 “어머! 정신이 드니?”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있었다.
 “죄송해요. 여긴 병원이네요?”
 “네가 정신을 잃었잖아. 네 안경 여기 있다.”
 어머니가 안경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진혁은 안경을 받을 생각은 안 하고, 어머니와 안경을 번갈아 보다 눈이 커다랗게 되었다.
 ‘잘 보여! 안경을 안 썼는데도 잘 보여!’
 어려서부터 눈이 나빴던 진혁이다. 사실 눈 때문에 방위로 가거나, 군대를 면제받을 거라고 기대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경을 안 쓰고도 아주 잘 보였다.
 진혁은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잘 보여요. 안경을 안 썼는데도 아주 잘 보여요.”
 스스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눈이 좋아진 사실을 부모님은 신기해했다.
 
 김 박사는 진혁의 뇌 검사를 다시 실시했다.
 얼마 후, 검사 결과가 나오자 김 박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진혁과 부모님을 불렀다.
 “진혁 군, 머리는 어떤가?”
 “괜찮아졌습니다.”
 “자네는 바로 내 눈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네. 어찌나 놀랐던지. 당장 자네의 뇌 검사를 다시 했지. 그리고 결과가 나왔는데 너무나 놀랍군.”
 “무엇 때문에요?”
 “지난번에 자네 뇌에 주름이 많다고 했었지? 그런데 말이야, 다시 검사하니 그 주름이 또 늘어났고, 골도 깊어졌네. 불과 하루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골이 깊어져요?”
 “주름이 있으니 쭈글쭈글할 테고, 주름과 주름 사이에 골도 생기지.”
 “아하!”
 진혁은 무슨 말인지 이제야 이해했다.
 “자네는 연구 대상이야. 솔직히 주름이 언제까지 늘어날지 무척 궁금하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가 김 박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름이 계속 늘어나면 아들이 어떻게 되나요? 이건 병입니까? 제 아들이 아프게 되거나, 머리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런 겁니까?”
 “주름이 늘어나는 게 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축복이죠. 아인슈타인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주름이 많아서 천재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다만 아드님의 경우는 아주 특별합니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주름이 늘어나다니요. 마치······. 마치······.”
 김 박사는 어떻게 말할지 몰라 난처해했다.
 “어떤 말이라도 좋습니다. 말해 주십시오.”
 “지난번에 아드님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말했었죠? 지금 그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아드님에게요.”
 “병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왜 아들이 두 번이나 기절을 했나요?”
 “뇌에 주름이 급격하게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정신을 잃지 않을 수가 없죠.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으면서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정신을 잃게 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름이 더 늘어나지 않게 된다면 기절하는 일도 없어집니다.”
 “그게 언제죠?”
 “아무리 주름이 계속 늘어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뇌 자체가 커지는 건 아니고, 표면의 주름만 늘어날 뿐이니까요. 주름이 늘어나는 속도로 봐서는 며칠 안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럼 며칠 후에는 모두 정상이 되나요?”
 “아드님은 지금도 정상입니다.”
 대답을 한 후, 김 박사는 진혁을 보고 물었다.
 “진혁 군, 깨어나서 무언가 느껴지는 변화는 없나? 또 머리가 아프다든지?”
 “시력이 좋아졌습니다. 안경이 없이는 사물을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안경을 안 써도 아주 또렷하게 보여요.”
 김 박사는 탄성을 터트리며 감탄했다.
 “오호! 그래? 다른 건?”
 “아직까진 없습니다.”
 “분명 또 다른 무슨 일이 있을 거야.”
 “어떤 일이요?”
 “정확히 뭔지는 나도 모르지. 그러나 자네의 뇌가 보여 주는 변화를 봤을 때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되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김 박사는 깊은 생각을 하는 듯 팔짱을 끼고 이마를 찌푸렸다.
 “흠흠, 예상이라······. 자네 말처럼 초자연적인 일이 생기지 않을까? 환상이나 꿈을 통해 미래를 본다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거나,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거나, 학습 능력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몇 개의 언어를 말하게 된다거나, 이런 것들 말이야. 앞으로 나는 자네를 계속 지켜보며 연구하고 싶으니, 일주일마다 한 번씩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게.”
 “전 괜찮습니다. 아까 박사님도 저에게 정상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냥 이대로 집에 가겠습니다.”
 “안 돼. 지금 퇴원시켜 줄 수 없네.”
 김 박사는 강경했다.
 진혁은 발끈해서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리려 했다.
 아무리 이곳이 병원이고 김 박사가 의사라지만,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퇴원을 해 주니, 못해 주니 하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옆에 계시니 꾹 참아야 했다.
 ‘부모님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참지만, 난 당신의 실험쥐가 아니야. 일주일마다 오라고? 웃기고 있네. 검사비는 누가 대고?’
 부모님도 돈 생각을 하셔서인지 확답은 안 했다. 대신 진혁을 하루 더 입원시켰고, 그 후에야 진혁은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난 정상이야. 몸이 나빠진 것도 아니니까, 이유야 어떻든 지금 일어난 일은 행운이라 여기자. 아무리 이상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과거로 돌아온 것보다는 못하잖아.’
 더는 신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4. CBS 방송국 여름 가요제 참가자 모집
 
 1991년 5월 셋째 주.
 과거로 돌아오고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때르르릉! 때르르릉! 때르르릉!
 거실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히야! 옛날 전화기 소리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전화기의 전화벨 소리를 오랜만에 들은 진혁은 반가움에 시선이 저절로 전화기로 향했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은 뒤, 걱정스런 눈빛으로 진혁을 불렀다.
 “진혁아, 네 친구 경만이다. 전화 받을 수 있겠니?”
 “네?”
 경만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절친이었다.
 진혁은 지방대에 들어갔고, 경만이는 서울에 있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졸업 후 경만이는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수년 후에 외국계 회사로 옮겼다.
 반면에 진혁이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수차례나 돈을 꾸고 갚지 못하는 바람에 저절로 멀어지게 된 안타까운 친구였다.
 경만에게 마지막으로 돈을 꾸면서,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다음에는 만나지 말자는 묵시적인 동의가 있었다. 진혁은 미안해서였고, 경만은 더는 돈을 꿔 줄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주 친한 상태였고, 제대 당일 저녁에도 만나서 같이 술을 마셨다.
 물론 진혁의 기억으로는 23년 전이지만.
 진혁은 얼른 일어나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경만이니?”
 [그래. 잘 지냈지? 너 제대했던 날은 힘들었다, 자식아.]
 “왜?”
 솔직히 23년 전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모른 척하는 거야? 네가 취해서 내가 집까지 업어다 줬잖아.]
 “그, 그랬지.”
 진혁은 말을 더듬으며 옛날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일어났으면 나와라. 나 지금 너희 집 앞에 있는 정류장이야.]
 “그래? 그, 근데 정류장 이름이 뭐였지?”
 [이게 미쳤나? 이름은 왜 물어봐? 너희 집 앞에 정류장이 하나밖에 더 있어? 나 기다리게 하지 마라. 동전 없어서 끊는다.]
 “동전?”
 전화를 하는데 왜 동전 얘기를 하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래.]
 “너 휴대폰 아니야?”
 [······미친놈.]
 철꺽.
 뚜뚜뚜! 뚜뚜뚜!
 경만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 91년에는 휴대폰이 없지.’
 진혁은 뒤늦게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극구 식사를 하라고 해서 바로 나가지 못하고, 부모님이 걱정스레 쳐다보는 앞에서 대충 물에다 밥을 말아 먹어야 했다.
 진혁은 방으로 가서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다 입고 거울을 보니 촌티가 팍팍 났다.
 ‘으으! 23년 전 패션이라니. 내가 이러고 다녔었나? 나중에 괜찮은 걸로 좀 사야겠다. 당장은 시간이 없으니······.’
 다른 걸로 바꿔서 입으려 해도 가진 옷이 거기서 거기였다.
 단독주택인 집의 현관문을 나와 지저분한 냄새가 나는 골목길을 보니 또다시 감회에 젖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신기했다.
 병원에 실려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타고 온 후에 바로 집으로 들어가 골목길을 볼 수 없었다.
 ‘아아! 그래, 전에는 이랬었지. 맞아. 하하!’
 23년 후에는 아파트촌으로 바뀌지만 91년의 흑석동은 단독주택이 훨씬 많았고, 정거장까지 골목길을 지나야 갈 수 있었다.
 ‘이게 꿈이라 하더라도 좋아. 과거로 돌아온 게 너무 좋아. 즐기자.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최대한 과거를 즐기자.’
 추억으로 인해 한껏 감상적이 된 마음을 추스른 후에 진혁은 정거장으로 나갔다.
 23년 전인 1991년에는 버스중앙차선이 없었다.
 버스 정거장에는 낡은 정거장 간판과 그 옆에 동전을 넣어 전화를 거는 공중전화 박스가 눈에 보였다.
 정거장 앞에는 손을 흔드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어이! 진혁아!”
 “으윽!”
 진혁은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아이는 바로 친구인 경만이었다.
 경만이도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23살인데, 46살까지 살았던 진혁의 눈에는 정말 어리게 보였다.
 ‘23년 전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가까이 다가온 경만은 진혁을 나무라며 한마디 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인마! 근데 안경은?”
 “렌즈 꼈어.”
 눈이 좋아진 사연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둘러댔다.
 ‘나중에 수술했다고 말하자.’
 경만은 눈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탄성을 지르며 헤드록을 걸었다.
 “오호! 제대해서 렌즈까지 맞췄구나. 좋겠다, 이 자식!”
 얼떨결에 당한 진혁은 숨쉬기가 힘들었다.
 “으윽! 놔! 놔!”
 “쳇! 엄살은.”
 경만은 헤드록을 푼 후에 진혁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퍼억.
 “으윽!”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맞은 곳에 대한 아픔보다 경만이에 대한 어색함이 더 많이 밀려왔다.
 ‘어후! 경만이 너무 어리다. 얘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과거에는 스스럼없이 잘 놀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경만이가 너무 어리게 보일 뿐만 아니라, 헤드록을 거는 행동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휴우! 정신연령이 46살인 내가 23살짜리 친구와 놀아야 한다니.’
 난감했지만 문제는 경만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경만이는 진혁의 반응을 보더니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야, 너 왜 그래? 아씨! 날 처음 보는 것처럼 굴고 있잖아!”
 “아, 아니야.”
 속마음을 들킨 진혁은 애써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군대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사회에 적응이 안 되냐? 하긴 이제 시작이긴 하다. 그런데 너 계속 날 이상하게 대하면 나 삐치는 수가 있다.”
 “알았어. 그런데 우리 뭐 하지?”
 “흐흐! 이철이 휴가 나왔어. 그래서 만수랑 이철이랑 종로에서 5시에 보기로 했다.”
 진혁은 이철과 만수라는 이름을 듣자 기억이 떠올랐다.
 이철과 만수도 경만이처럼 고등학교 친구였다.
 이철은 소위 SKY 중 하나인 연세대학교에 다녔는데, 그것을 크게 자랑스러워했다.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이철은 친구들 앞에서도 은근히 뻐기며 행동했고, 지방대에 다니는 진혁은 고등학교 때는 친했지만 졸업 후에는 이철과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서 이철은 대기업에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했다.
 진혁이 보험 설계사를 하던 당시, 이철을 찾아가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났는데 이철은 그를 차갑게 대했다.
 
 
 『작은삼촌이 보험 설계사라 이미 종류별로 여러 개 가입했다.』
 『그래? 하지만 저축성······.』
 진혁이 보험 상품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자 이철이 중간에 손을 뻗어 말을 끊었다.
 『진혁아, 나 바쁘다. 몇 년 만에 연락이 와서 만나러 나왔더니 보험 얘기냐? 너도 다른 녀석들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구나.』
 『······.』
 『나 들어간다. 이런 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
 이철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가 버렸다.
 당시에 이철에게 진혁은 무척 서운해했다. 보험 가입에 대한 거절이야 이해가 되지만, 그를 무시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이날 진혁은 다시는 이철을 만나지 않으리라 결심했고, 이후로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철에게 연락이 온 적도 없었다.
 ‘이철, 그놈은 보기 싫다. 하지만 만수는 날 도와줬잖아.’
 만수는 삼수까지 하면서 경협 전문대에 들어간 친구였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군대를 갔다.
 만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나 삼수를 하고 전문대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부러울 게 없는 친구였지만, 사회에서는 그가 가장 잘나갔다.
 부모님이 하는 갈빗집을 이어받아 돈을 제일 잘 벌었기 때문이다.
 만수는 아내도 잘 얻었다.
 갈빗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 중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자를 꼬여서 결혼해 자식을 넷이나 낳았다.
 진혁이 보험 설계사를 할 때 찾아갔는데, 만수는 아무 말 없이 보험을 하나 가입해 줬다. 그리고 10만 원짜리 수표 3장을 주면서 말했다.
 『석 달쯤 있다가 해지할게. 그리고 이건 그냥 주는 거니까 써라.』
 『고맙다, 만수야.』
 진혁은 만수가 주는 돈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챙겼다.
 『그런데 이게 마지막이다. 내가 장사하니까 보험 부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넌 친구니까 특별히 하나 해 준 거야.』
 『그래. 더는 부탁 안 할게.』
 『왔으니까 밥이나 먹고 가라. 고기 많이 넣어서 갈비탕 준비하마.』
 만수에게 갈비탕을 얻어먹은 이후, 그곳에 다시 가지는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만수에게 서운한 게 아니라 정말로 고마웠다. 이 정도라도 친절을 베풀어 주는 친구가 귀했기 때문이다.
 
 이철과 만수 생각에 잠겨 가만히 서 있자, 경만은 진혁의 얼굴을 살피다가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너 무슨 생각 하냐?”
 “어? 아, 아니야. 5시에 만난다고? 지금이······. 몇 시더라?”
 진혁은 주머니를 뒤지며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다 곧바로 실수를 깨달았다.
 ‘아! 휴대폰 없지.’
 97년부터 휴대폰을 사용했는데 자연스레 시간은 휴대폰으로 확인했고, 손목시계는 차지 않았다.
 경만은 진혁을 살피더니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말했다.
 “2시 20분이다. 지금 종로 가서 둘이 시간 좀 보내다 만나면 되잖아.”
 “으음, 그래. 그런데 종로 가는 버스가 몇 번이더라?”
 “쳇! 다 까먹었냐? 여긴 버스 없잖아. 노량진까지 버스 타고 가서 지하철 타야지.”
 “아! 그렇구나.”
 경만의 얘기를 들으니 과거에 시내 나갈 때 어떻게 갔었는지 생각났다.
 
 23년 전에 진혁이 살았던 흑석동 버스 정거장.
 212번 버스가 오자 경만은 앞서서 버스에 올라탔다.
 ‘오호! 오랜만이다.’
 23년 전에 타고 다녔던 정겨운 버스를 보자 또다시 감회에 젖은 진혁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버스에 올라타던 진혁은 버스 요금이 얼만지 생각이 안 났다.
 “경만아, 버스비 얼마냐?”
 경만은 피식 웃었다.
 “야! 버스 처음 타 보냐?”
 경만은 어이없어하며 170원을 꺼내 운전사 옆의 철로 된 통에 집어넣었다.
 ‘아, 170원이구나.’
 진혁은 버스 요금을 머리에 기억했다.
 두 사람은 맨 뒤로 가서 5명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진혁이 계속 주위를 둘러보며 싱글벙글 미소를 짓자, 보다 못한 경만이 한마디 쏘아붙였다.
 “제대하고 버스 타니 기분 좋아?”
 “흐흐! 응, 좋아.”
 진혁은 바보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만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까지 좌우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에휴! 군대가 사람 하나 버렸어.”
 버스를 타고 흑석동에서 노량진까지 가는 짧은 시간에도 진혁은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 너머가 정겹게 느껴졌다.
 ‘이때만 하더라도 한강 주위가 아파트로 뒤덮이기 전이었어. 뭐에 홀린 건지, IMF를 겪었는데도 사람들은 모두 아파트에만 매달려서 부동산 투기에 빠졌지.’
 2008년 세계적인 금융 위기 이후로 아파트는 계속 폭락을 거듭하고 있었고, 하우스 푸어 무리한 대출로 인한 이자와 빚에 시달리는 집 구매자가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고 있었다.
 
 잠시 후, 노량진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거리 곳곳에 학원 간판이 즐비했고, 재수생들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히야! 학생들 정말 많구나. 그래, 우리 때까지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많았지.’
 이 당시에는 학생들 숫자가 최고를 달리고 있었다.
 이후로는 아이를 잘 낳지 않아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진혁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한 학년에 10반 이상은 기본이었고, 한 반의 학생 수도 60명에 달했을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었다.
 심지어 학생 수가 많아 오전, 오후로 나누어 등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길을 걷는데 거리의 학생들이 입은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 안경, 여자들의 화장, 액세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학생들은 전부 자신보다 한 사이즈는 큰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상의만 아니라 하의도 마찬가지였다.
 윗옷을 바지 속에 넣어 배까지 올려 입는 것, 얼굴에 비해 큰 안경, 단정해 보이는 머리 스타일, 여자들의 진한 화장 등이 촌스럽게 보였다.
 ‘하하! 맞아. 이때는 이랬지, 이랬었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진혁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땐 왜 이러고들 다녔는지.’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는데 91년의 히트곡이 흘러나왔다.
 “모자를 눌러쓴······.”
 우뚝.
 진혁은 마비가 걸린 것처럼 저절로 고개가 레코드 가게 안으로 향했다.
 ‘이야! 이 노래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
 같이 걷던 경만은 당황하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야! 너 왜 갑자기 멈춰?”
 “노래가 너무 좋아서.”
 “이 노래? 요즘 1위 하는 노래지. 근데 너 군대에서 노래도 못 들었어? TV로 만날 봤을 거 아니야. 이 노래 몰라?”
 “알지. 잘 알아.”
 “근데 왜 이래?”
 “말했잖아. 노래가 너무 좋아서라고.”
 진혁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어후! 이거 큰일이네. 의가사 제대해야 할 놈이 만기 제대한 거 아닌가? 너, 친구 만나러 갈 게 아니라 병원부터 가야겠다! 정신병원!”
 진혁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실 웃었다.
 “흐흐! 내가 이상해?”
 “그럼 안 이상하냐? 아까부터 계속 미친놈처럼 웃고 있잖아.”
 “자식, 네가 어떻게 내 맘을 알겠니? 가자!”
 진혁은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추억이 깃든 거리를 91년 히트곡을 들으며 과거 속의 사람들과 함께 걸으니,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노량진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종각역으로 향했다.
 전철을 탈 때도 진혁은 전철비가 얼마인지 몰라 경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가는 길에 진혁의 기분은 점점 좋아져, 종각역에 도착할 때쯤에는 날개만 없을 뿐이지 날아서 다니는 것 같았다.
 경만이는 신기한 동물을 보듯 진혁을 쳐다보았다.
 “야, 너 기분이 그렇게 좋냐? 제대하니까 그렇게 좋아? 너 동물원 원숭이 같아. 실성한 사람 같다고.”
 “하하! 좋아!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자신이 젊어진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추억이 한껏 깃든 과거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촌스럽고, 대형 마트도 없고 기타 등등.
 불편하고 없는 것도 무척이나 많지만, 그 시절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시대가 발전해서, 생활이 편해졌다고 해서 행복한 게 결코 아니야.’
 행복은 편리함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종각역에 도착한 진혁은 경만과 함께 지상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많은 인파로 북적였고, 노량진에서처럼 과거에 익숙했던 풍경이 재현되었다.
 “좋다, 좋아. 하하!”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경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너 오늘 너무 이상하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다.
 경만은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두 달 전에 마지막 휴가 나왔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잖아.”
 “······.”
 두 달 전에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나기에 침묵했다.
 “두 달 사이에 왜 이렇게 변했어? 지금 너는 수십 년은 감옥에 갇혔다가 방금 나온 사람 같아.”
 ‘감옥? 그래, 맞아. 난 절망의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거야. 돈 없는 중년 가장의 현실이 만들어 낸 감옥.’
 진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멍한 표정이 되어 북한산에서 자살하려고 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경만은 갑자기 변해 버린 진혁을 보자 어이가 없어 크게 웃었다.
 “하하! 내가 감옥이라고 말해서 화났냐? 너 표정이 왜 이렇게 금방 바뀌는 거냐? 난 그냥 네가 이상하다 할 정도로 좋아하니까 그러지.”
 “화 안 났어. 네 말처럼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이제야 풀려난 기분이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진혁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어, 그래? 그, 그런데 뭐, 어쨌든 지금은 밖에 나왔잖아. 안 그래?”
 “맞아. 모든 게 새로워. 그리고 너무 익숙해. 흐으으읍!”
 23년 전 종로의 공기를 아주 크게 들이켰다.
 ‘좋다. 너무 좋아.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더 좋겠어. 꿈이 아니라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지. 아니, 꿈이라도 깨기 전까지는 열심히 살 거야.’
 새롭게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오른쪽 건물의 벽에 붙은 벽보의 제목을 보고 진혁은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벽보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제12회 CBS 방송국 여름 가요제 참가자 모집>
 
 ‘오호! 여름 가요제!’
 어느 때부터인지 관심도 없어졌지만,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여름 가요제는 최고 인기였다.
 참가 자격이 주어지는 대학생들에게만 인기가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큰 인기였다.
 이 당시에는 여름 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많았을 정도였다.
 ‘노래? 유행가?’
 이때 머리를 번뜩이며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나는 미래의 유행가를 다 알잖아!’
 유행가를 만든 작사자, 작곡가들에게 미안한 소리지만, 진혁은 앞으로 어떤 노래가 유행하는지 알고 있었다.
 20대와 30대에 수많은 회사를 전전한 전력이 있는 진혁은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살아남고자, 많은 유행가를 가사와 함께 안무까지 외워서 회식 때 자주 써먹었다. 그로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목소리가 좋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모창이라면? 내 목소리에 잘 맞아서 흉내를 낼 수 있는 곡을 고른다면?’
 수많은 유행가 중에는 모창으로 원래 가수만큼 부를 수 있는 곡들이 있었다.
 ‘순애가 그랬지. 대학 가요제에 나가 본 추억 없냐고. 그래, 이것도 젊었을 때의 추억이잖아. 적당한 유행가 하나면 여름 가요제에서 1등을 할 수 있어!’
 1등은 대상이었고, 상금은 천만 원이나 되었다.
 ‘천만 원! 91년에 천만 원이면 엄청 큰돈이다.’
 진혁의 머리가 팍팍 돌아갔다.
 미래에 흥행할 유행가를 가지고 여름 가요제에 참가해 모두의 환호 속에서 대상을 받는 모습, 그리고 큰 인기와 많은 돈을 버는 자신이 떠올랐다.
 벽보를 자세히 보니 접수 기간이 아직 3일 남아 있었다.
 ‘오호! 아직 접수할 수 있다.’
 접수가 3일 후에 끝나고, CBS 방송국에서 예비 심사가 치러진 후에 본선은 한 달 뒤 남이섬에서 열린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여름 가요제를 통해 연예인이 될 수도 있어. 연예인이 아니라도 앞으로 유행할 유행가들만 모아서 음반을 내놓아도 대박을 칠 게 분명해.’
 91년에는 카세트테이프가 대세였다.
 이 당시에는 CD도 없고, MP3도 없었으며,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는 것도 없었다.
 인기 있는 가수의 경우는 음반을 내서 백만 장 넘게 팔았고, 이 당시가 가수들 입장에서는 돈을 더 많이 벌었다.
 ‘욕심 생기네. 하지만 남의 노래를 훔쳐서 내 것처럼 불러도 되려나?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도 바꿔 버리는 거잖아.’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과거로 왜 왔지? 또다시 구질구질한 삶을 살려고? 그건 아니잖아.’
 자의로 과거로 온 것은 아니지만, 일단 과거로 돌아온 이상 적어도 과거와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른 우주에 와 있어. 내가 살던 우주를 바꾸는 일도 아니잖아. 그러니 남의 노래니 뭐니 하면서 따질 필요가 있어?’
 죄책감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설사 원래 살던 우주로 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 이상 내 머릿속에 있는 건 전부 내 거야!’
 자기 합리화라 할 수도 있었으나, 진혁의 이런 이기적인 생각에 대해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진혁이 미래에서 죽은 뒤,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미래의 유행가들도 남의 노래가 아니라 바로 내 노래야. 노래만이 아니라 미래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정보는 전부 내 거다.’
 진혁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양심을 따지며 가만히 있을 거야?’
 복권 당첨 번호를 알고 있는 것도, 경마에서 어떤 말이 1등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진혁의 기억 속에는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가장 큰 사건만 하더라도 몇 개나 되었다.
 IMF로 인해 대한민국은 모라토리엄 직전으로 몰렸고, 이 당시에 헐값인 주식을 사 놓으면 나중에 큰돈이 되었다.
 또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수도권을 숱하게 돌아다닌 진혁이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면서 어느 지역이 얼마만큼 개발되는지 대충 알고 있기에 부동산 투자를 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업이 성공할지도 알고 있었다.
 46살까지 살면서 잘나가는 브랜드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빵집을 하더라도 어떤 브랜드가 인기인지, 옷은 어떤 브랜드가 인기를 얻었는지, 성공한 음식점이나 브랜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굳이 노래가 아니라도 이런 정보를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구질구질했던 과거를 털어 버리고자 미래의 정보를 이용할 게 뻔했다.
 또한 진짜 성공할 작곡가나 가수라면, 진혁이 그들의 노래를 자신 걸로 만든다 하더라도 다른 노래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릴 것 같았다.
 신께서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준 것은, 진혁이 기억하는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한 증거라 생각되었다.
 ‘그래. 신께서 시간 이동을 허락하셨는데, 괜히 양심에 걸리니 어쩌니 하면서 따지지 말자.’
 하지만 여름 가요제에 미래의 유행가를 가지고 참가하려 해도 문제가 있었다.
 ‘악보는 어떻게 만들지? 그리고 반주는?’
 노래나 안무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악보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몰랐으며, 반주를 위해 악기를 다룰 사람도 필요했다.
 ‘악보를 만들기 위해서 작곡에 대한 책을 사서 공부할까?’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접수가 3일밖에 안 남았다.
 ‘누가 날 도와주면 좋을 텐데. 작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처제!
 아내의 여동생이었다.
 ‘그래, 처제가 있었지! 아내의 2살 아래 여동생이 매일 전문대 음악과를 나와서 피아노 학원을 하잖아. 처제가 다녔다는 학교가 신촌 근처였어.’
 하지만 처제는 지금 만날 인연이 아니었다.
 순애를 처음 만난 게 38살이었고, 처제도 그때 소개를 받았기에 앞으로 15년이나 지나서의 일이었다.
 ‘무작정 찾아가서 뭐라고 하지? 미래에 형부가 될 사람이라고 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달리 다른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름 가요제는 접수가 3일 남았어. 지금 다른 누군가를 찾을 여유도 없어. 막무가내지만 처제를 만나 부탁해야 해.’
 진혁은 여름 가요제 접수가 얼마 안 남았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경만아, 우리 지금 신촌 가야겠다.”
 “갑자기 신촌에는 왜?”
 “······.”
 순간 진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처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 날 정말 미친놈으로 볼 테니.’
 경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신촌에는 왜 가자고 하는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진혁은 이렇게 얼버무렸다.
 경만은 그런 진혁의 대답에 어이없어하며 약속을 상기시켰다.
 “이철이랑 만수가 여기로 온단 말이야! 5시에 만나기로 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두 사람한테 연락해서 다음에 보자고 해. 아니면······ 이철이는 오지 말라고 하고, 만수만 신촌으로 오라고 해라.”
 자신을 홀대했던 이철이는 데리고 가기 싫었다.
 경만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만날 사람이 누군지부터 대답해 봐! 무작정 약속 깨고 가자고 하면 되냐? 너 오늘 정말 이상해!”
 “으음, 말하기 힘든데······.”
 설명하기 난처한 진혁은 이마를 찌푸렸다. 경만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새로운 질문을 해 왔다.
 “만날 사람이 남자냐?”
 “아니.”
 경만의 표정이 음흉하게 바뀌었다.
 “흐흐! 여자? 오호! 능력 좋은데? 신촌이면 그쪽 동네에 있는 대학에 다녀? 우와! 진짜야?”
 “갈 거냐, 말 거냐?”
 “크크! 가야지. 이철이는 집에 있을 테고, 만수는 아버지 가게에 전화하면 된다. 여자를 만난다는데 약속 따위가 중요하겠냐?”
 경만이는 희희낙락하며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이렇게 쉽게 풀리는 걸 괜히 난처해했군. 그래, 혈기 왕성한 이맘때에는 여자라면 모든 게 무사통과지.’
 진혁은 20대 초반 시절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계속...

댓글(8)

다크라이    
2권중반까지 읽은결과 남자는 우유부단의 극치. 결심도 못지키고 주변에 휘둘려 스스로의 다짐도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별것아닌것도 약점이되는 전형적인 호구. 주변인에게 컨트롤당하는 주인공을 싫어하면 비추
2017.02.11 03:56
하늘빛21    
아! 윗분 말 들을걸... 정말 진심 후회된다...
2017.04.15 21:59
형나경    
다음부터는 댓글을 읽고 사서 보겠습니다... 없던 병이 생길뻔;
2018.08.04 14:21
범어동사람    
이벤트로 보시는분께 경고드립니다. 윗댓글처럼 맞고요. 작가님이 정신분열증 있으신줄알았습니다. 아니면 아마추어 중고딩들이 대신 글쓰는건지. 전문성은 전혀없구요. 46세까지의 경험과 노련미는 어디 팔아먹었는지 과거로 돌아가니 없어보입니다. ㅂ신같은 주인공과 편하게 버스탈려는 팀원들... 노답입니다. 카카오페이지에서도 별 5.3점 이더군요. 얼마나 참혹할정도로 낮은 평가입니다
2018.08.08 15:14
쉼이터    
2014년에 대리 120만원 넘 무개념 조금 생각 좀 해보시고 글쓰세요.
2018.08.08 17:21
호호253    
2014년에 택시를 몰아도 120보단 많이 벌었어여...
2018.08.08 20:56
ok*****    
댓글좀 살피고 결재할걸...돈 아까워 어떻게든 보려했는데 도저히 못 보겠어요ㅠㅠ 이런댓글 안 남기는데 진짜 심해서 안 남길 수가 없네요
2018.08.11 14:19
광석석광    
먹을걸 가지고 태어 나는게 아니라 피임이란 개념이 없었던 거지....
2018.08.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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