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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형 반트 1권 (상)

2017.02.07 조회 1,082 추천 10


 프롤로그
 
 
 
 
 
 “내 제안이 어떤가?”
 근엄한 표정의 중년인이 물었다.
 그는 황금빛 갑옷을 걸쳤고, 휘황찬란한 투구에 온갖 보석이 장식된 그런 복장을 하고 있었다.
 좌우의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융단이 깔린 끝, 네 개의 계단 위 단상에 앉아 중년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 아래 한 청년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만,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청년의 대답이 너무도 의외였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중년인의 신분은 딱 그러했다.
 대륙 최강의 아르헨탈 제국. 그 제국의 대장군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중년인은 살짝 일그러지는 표정을 억지로 붙들었다.
 “이유는?”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자신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청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 가족이, 제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요.”
 “흐음, 지켜야 할 것들이라······.”
 중년인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지켜야 할 것들이 없어지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글쎄요. 그 전에 먼저, 그걸 없앤 놈들을 처리하고 나서 생각해 볼 문제 같은데요?”
 “역시······ 복수가 우선인가.”
 “예, 당연하게도 그래야죠.”
 청년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중년인은 피식 웃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에게 주겠다. 자격이 되니, 약속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대는, 황실 보물창고에 들어가 원하는 것을 하나 가져가라. 마찬가지로 황실 무기고에서 그대에게 맞는 걸 찾기를 바란다.”
 중년인의 선언에, 좌우의 기사들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원칙대로라면 주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청년이 거부했음에도 대장군이 말했다.
 들어주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호의에 주변 기사들은 당황했지만 감히 나서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장군이었다. 아르헨탈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가 선언했던 것이다.
 청년은 그런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청년이 바깥으로 나갔다.
 안내자를 따라 황실의 보물창고와 무기고를 찾아갈 게 분명했다.
 그렇게 청년의 모습이 사라지자 왼편의 기사가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근엄한 목소리에 기사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대장군이 다시 말했다.
 “제국으로써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 어차피 인재를 찾기 위한 방식 중 하나였고, 거부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좌우의 기사들은 잠시 긴장한 채로 대장군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약속은 약속. 우린 그걸 지켜야 한다.”
 그 짧은 말에 기사들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처럼 어둠의 장막을 가르고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처럼 말이다.
 그 사내가 말했다.
 “그냥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자의 행동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팔콘,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국의 보물을 들고 가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어차피 제국의 보물은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법.”
 대장군은 그렇게 말한 뒤 미소를 지었다.
 “자격을 입증하면 준다고 했다. 그건 곧 황제 폐하의 말. 우리는 그걸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부정한다면 그건 불충이다. 게다가 우리는 황제의 검이 아닌가?”
 사내는 주춤하더니 이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제국 아르헨탈입니다. 황제 폐하의 위엄을 보이려면 때론 잔혹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순히 보내 준다는 건, 맞지 않습니다.”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돌아봤다.
 마치 자신의 말에 동조해 달라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대장군은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괜히 그가 뽑혔다고 생각하는가?”
 “약간의 희생은 당연한 겁니다. 이로써 제국의 기강이 선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것이지요.”
 “그 생각을 버려야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대장군의 예리한 지적 때문일까?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나온 말은 의외로 간단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도록.”
 대장군은 가볍게 허락했다.
 더러운 일은 더러운 놈이 맡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심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곧 사내가 사라지자 대장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황성의 중앙, 넓은 대전이 있었다.
 웅장함을 강조하기 위해 천장까지 아무런 층을 만들지 않아 완전히 텅 빈 공간이었다.
 그 크기는 드래곤이 쉬어도 될 정도였다.
 이 넓은 곳을 네 개의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었다. 세계의 중심이 바로 아르헨탈 제국에서 시작한다는 걸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그 아래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그냥 가도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청년은 웃으며 말하면서도 조심스레 자세를 잡았다.
 분위기가 쉽게 보내 줄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안쪽으로 몰아넣으려는 듯, 수많은 병사들이 대형을 짜고 창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숫자는 무려 이백여 명, 게다가 상당한 수준의 기사들도 서른 명이 넘어 보였다.
 사내, 팔콘은 웃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그냥 가도 된다. 하지만, 제국의 보물을 가져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간단이 말해 협박이었다.
 그럼에도 청년은 웃으며 대꾸했다.
 “참 조잔하시군요. 수천 개 중에 달랑 하나 가져가는데, 이렇게 인심이 야박하다니.”
 “단 하나라고 해도, 제국의 보물인 법. 제국 외의 인간들에게 준다는 것은 일종의 수치지.”
 “그래서,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한참이나 하고 계신 겁니까?”
 “뭐, 뭐가 부끄러운 말이라는 것이냐?”
 “스스로의 약속을, 탐욕 때문에 저버렸지 않습니까?”
 청년은 그렇게 물으며 팔콘과 그 주변의 기사들을 쳐다봤다.
 순간 싸한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떳떳하지 못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약속을 하고서 지키지 않으니 어찌 태연할 수 있으랴.
 명령이니, 충성이니 하고 포장해 봤자, 아닌 걸 본인 스스로가 알고 있었으니 그게 당연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일까?
 팔콘은 순간 움찔거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이 많은 병사들을 뚫고 도망갈 수 있으리라 보느냐?”
 “뭐,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그 말에 팔콘은 더욱 열 받았다.
 “장담하마. 네가 가져가려던 보물들을 놓고 간다면, 몸 성히 놓아주겠다. 하지만 과욕을 부린다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충분히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보여 여기까지 왔다지만 이만한 전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청년의 말은 의외였다.
 “하하, 그럼 반드시 살아남아야겠군요. 이런 추태를 알리려면 말이죠.”
 순간 팔콘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는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막대한 보물을 걸었다. 당연히 시험에 통과한 이는 받아 갈 자격이 있었다.
 자신은 그걸 막고 있었다. 과욕을 부리다 보니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문득 팔콘은 대장군이 자신을 만류하던 것이 떠올랐다.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놈을······ 반드시 죽여라.”
 팔콘의 명령이 떨어졌다.
 동시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움직였다.
 한 청년을 죽이기 위해, 자신들의 추태를 덮기 위해.
 수십 개의 칼과 백여 개의 창이 청년을 향했다.
 그럼에도 청년은 웃었다.
 “제가 처음 황성에 들어왔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청년의 손이 가리킨 건 대리석 기둥 중 하나였다.
 “이 네 개의 기둥이 황성을 받치고 있다고.”
 그 직후 청년이 발을 굴렀다.
 쿠우우웅.
 엄청난 위력의 진각이었다. 청년을 중심으로 바닥이 물결치듯 출렁거린 것이다.
 병사들이 휘청거리는 그때였다.
 청년이 높게 뛰어올라 다리를 뻗었다.
 쿠우우웅.
 대리석 기둥의 허리에 균열이 생겼다.
 “서, 설마?”
 팔콘이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도 청년의 몸이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콰콰쾅.
 연이은 발차기가 한 곳에 집중되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기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팔콘의 얼굴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청년의 생각을 읽었기 때문이다.
 “야이! 미친 새끼야.”
 팔콘의 외침보다 기둥이 무너지는 것이 빨랐다.
 우르르르릉.
 천둥이 치는 소리가 울리고, 황성의 천장이 주저앉았다.
 팔콘과 기사,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떨어지는 돌조각을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무수히 많은 잔해들. 그들이 만들어 낸 먼지가 병사들의 시야를 가려 버렸다.
 그렇게 황성의 일부가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곧 먼지가 가라앉고 겨우 시야가 확보되었다.
 그런 팔콘의 눈에, 무너진 틈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청년이 보였다.
 청년이 툭 내뱉었다.
 “그러게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건드립니까?”
 
 그 후, 한 달 동안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제국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황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대륙 최강이라는 아르헨탈 제국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책임을 지고, 팔콘 백작이 장군직에서 물러났다.
 들리는 소문에 지병이 도졌다고 했다.
 고혈압이라나 뭐래나.
 
 1장 숲속의 거지
 
 
 
 
 
 다그닥, 다그닥.
 두 필의 말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말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연신 뿜어지고 땀에 젖은 갈기가 거칠게 휘날렸다.
 그 뒤로 수십 마리의 말들이 추격하고 있었다.
 선두의 기사가 소리쳤다.
 “잡아라. 칼리아 숲에 들어가기 전에 막아야 한다.”
 기사의 말대로 길이 끝나는 곳 이백여 미터 전방쯤 숲이 보였다.
 다급해진 추격자들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앞의 두 말은 많이 지친 듯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러자 점점 서로의 간격이 좁혀졌다.
 다행히도 앞의 두 사람은 추격자들에게 잡히기 전 숲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을 버리고 수풀 사이로 다급히 뛰어들었다.
 적당히 기울어진 태양과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숲은 어두웠다.
 쫓기는 자에게는 유리한 상황.
 그랬기에 쫓는 자들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선두의 기사가 말에서 내리며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기껏해야 계집 하나와 호위 기사 하나다. 지형이 험하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예.”
 “삼조로 나눈다. 선두는 나와 일조가, 좌측은 부단장 자펜이, 우측은 수석기사 판드가 맡는다. 중요한 사항은 속도, 빠르게 이동하며 수색한다.”
 “알겠습니다.”
 변경의 영지답게 군기가 잘 잡혔는지 기사들의 움직임은 무척 신속했다.
 몇 명의 기사들이 입구를 막고 마흔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숲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또다시 다섯 마리의 말이 나타났다.
 선두의 청년이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공, 아니 계집은 어떻게 됐나?”
 “숲으로 들어갔지만 금방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기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계집은 반드시 사로잡아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기사가 숲으로 들어가자 청년의 옆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르핀 자작, 일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는 것 아니오?”
 “이런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소?”
 도르핀 자작의 되물음에 중년 사내, 로이트 남작은 입을 다물었다.
 현재 폴트 왕국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불과 삼 년 전, 외척의 세력을 업은 클로베 이왕자가 반역을 시도하다 실패를 하고 말았다.
 원인은 클로베 왕자 측의 성급한 시도 때문이었다.
 별다른 피해 없이 정리되었기에 폴트 국왕은 클로베 왕자를 유폐시키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마찬가지로 클로베를 부추긴 왕자의 모친 크로아나 이왕비 역시 본국으로 쫓아 버렸다.
 그 크로아나 왕비의 부친이 바로 크라임 폰 판토스였다.
 도르핀 자작 영지의 경계, 칼리아 숲 너머에 있는 판토스 왕국의 국왕인 것이다.
 정략결혼으로 인해 이십여 년간 유지되던 평화는 그렇게 깨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 국경 지역에서는 수시로 분쟁이 벌어졌다.
 “로이트 남작도 잘 알다시피 최근 삼 개월 사이 교전이 벌어진 횟수가 스무 번이 넘는다오. 사나흘에 한 번 꼴로 정찰대끼리 마주치는 형국이란 말이오.”
 “알고 있소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다 받고 있소.”
 말의 내용과 다르게 도르핀 자작은 웃고 있었다.
 그 이유 역시 로이트 남작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맹 관계였다. 그리고 칼리아 숲 너머와도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해는 단지 보고서상의 기록일 뿐이란 말이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애초부터 클로베 왕자를 지지하던 이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말 괜찮겠소?”
 “나만 믿으시오. 풀루토 폴트 국왕이 가장 아끼는 이가 바로 장녀인 피리안 공주요.”
 도르핀 자작의 시선이 칼리아 숲으로 움직였다.
 마침 신호라도 하듯 숲에서 솟아나온 화살 하나가 밝은 빛을 뿌려 댔다.
 “포위한 모양이오. 우리도 들어가 봅시다.”
 도르핀 자작이 그렇게 말을 하며 움직이자 로이트 남작도 자신의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칼리아 숲으로 들어서며 로이트 남작이 물었다.
 “그런데 정말 놀랐소. 어떻게 피리안 공주가 남들 모르게 국경 시찰을 한다는 정보를 얻었던 것이오?”
 “후후, 돈의 힘이지요.”
 도르핀 자작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폴트 왕국의 수도 폴라트리움이 있는 방향이었다.
 ‘역시 고위급 귀족과 줄이 닿아 있었군.’
 로이트 남작은 그렇게 짐작하며 전방을 살폈다.
 마침 도르핀 자작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방향을 안내했다.
 도르핀 자작과 로이트 남작은 서둘러 움직였다.
 오 분도 되지 않아 수풀 사이의 한 공터가 드러났다.
 서른 명이 넘는 기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중심에 두 남녀가 보였다.
 여자는 활동하기 편한 짧은 치마에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다. 무기라고는 손에 들린 단검이 전부였고,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로 보이는 남자는 평범한 얼굴에 서른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체구가 크고 제법 단련된 근육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장이 빈약했다. 손에 들린 커다란 검과 흉갑, 어깨와 무릎의 보호대가 전부였던 것이다.
 도르핀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피리안 공주의 호위 기사라면 뭔가 대단할 것 같았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결과는 달랐다.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군.’
 그렇게 판단한 도르핀 자작은 피리안 공주를 쳐다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백금발과 긴 속눈썹이 하얀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고스란히 드러난 어깨와 허벅지에서 도르핀 자작의 시선이 멈추었다.
 ‘꿀꺽.’
 순간 도르핀 자작의 눈에 탐욕이 스쳤다.
 그때 피리안 공주가 말했다.
 “도르핀 자작, 그대가 원하는 게 뭐죠?”
 “공주님, 저는 단지 공주님을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을 뿐입니다.”
 “분명 거절의 뜻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소인이 미천하여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나 봅니다.”
 “지금 저를 기만하시는 겁니까?”
 피리안 공주가 따지듯이 소리쳤다.
 억지로 감정을 누르고 있음을 눈치챈 도르핀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예상 밖의 일이었군.’
 도르핀 자작도 공주의 행동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보았다. 하지만 며칠을 미행했고, 수하들을 파견해 인근의 수상한 이들을 모조리 조사했다.
 그로써도 안심이 되지 않아 로이트 남작을 불렀다.
 로이트 남작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였다. 심사를 받아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 덕에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얻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왕국 내에서 백 위 안에 속하는 실력자란 의미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초청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죠?”
 “호위 기사의 피로, 몸을 씻게 될지도 모릅니다.”
 피리안 공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르핀 자작은 예상과 다른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겁에 질려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 판단했는데 왠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리안 공주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대의 목적은 저를 판토스 왕국으로 납치해 클로베와 교환하려는 것이군요.”
 이번엔 도르핀 자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짐작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크라임 국왕의 지시를 받았나요?”
 “판단은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순순히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니, 웬 거지새끼가.”
 도르핀 자작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순간 장내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렸는데 도르핀 자작의 말대로 웬 거지가 보였다.
 그 거지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숲에 들어오니 방향 감각을 잃어서······.”
 “웬 상거지가.”
 다들 도르핀 자작의 말이 맞다고 느꼈다.
 막 숲을 빠져 나왔는지 머리카락은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할 정도로 제멋대로였고, 가죽을 기워 만든 옷은 때에 절어 있었다.
 게다가 덩치까지 커서, 어두운대서 보면 곰이라 오해할 소지가 무척이나 다분했다.
 문제는 그런 외모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악취가 뿜어져 나와 저절로 포위망이 열릴 정도였던 것이다.
 거지가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친절하신 분들 같지는 않지만······ 길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팽팽하던 고무줄이 툭 끊어진 게 아니라, 갑자기 그대로 늘어나 버린 느낌이랄까.
 도르핀 자작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넌 뭐하는 놈이냐?”
 “길 잃은 분입니다만.”
 너무도 태연한 대답은 도르핀 자작의 콧구멍을 벌렁거리게 만들었고, 이마에 주름의 파도를 불러왔다.
 “저 미친놈을······ 아니, 아니지. 어차피 이 상황을 목격한 이상 살려 둘 수 없다. 판드, 당장 저 거지를 죽여라.”
 도르핀 자작이 명령을 내렸다.
 수석기사 판드는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한 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거지한테 다가가려 했다.
 그때 피리안 공주의 호위기사가 불쑥 물었다.
 “자네, 어디 가는 길인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어투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일단은 왕성이 있는 폴라트리움으로 가려 합니다. 그런데, 괜히 온 것 같네요.”
 거지의 말에 호위기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기왕이면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빠르지 않겠나?”
 “뭐, 떨어지는 거라도 있습니까?”
 거지가 불쑥 머리를 디밀으며 밉살스럽게 물었다.
 호위기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길을 알려 주겠네. 원하면 숙식도 제공해 주고, 가장 먼저 씻을 수 있게 해주지.”
 “그거 아주 좋군요.”
 “그런데 자네, 인간적으로 너무 냄새 나는 것 아닌가?”
 “하하, 이거 제 입으로 할 말은 아닙니다만······ 솔직히 열흘째 숲을 빠져나가지 못했거든요.”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기사들은 황당해했다. 칼리아 숲을 횡단하는 데는 고작 사흘이면 충분했으니 말이다.
 호위기사는 한걸음 물러서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제발 부탁이니 가까이 오지 말게. 그리고 우리 피리안 옆으로 가지도 말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거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제야 도르핀 자작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거지와 제일 가깝던 수석기사 판드는 그대로 굳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로이트 남작 역시 가만히 선 채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른 정도로 보이는 호위기사가 너무 태연히 공주의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저들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다.
 마치 지금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가 아닌가.
 도르핀 자작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판드, 뭐하나? 어서 죽여.”
 거친 호통에 정신이 들었는지 판드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앞의 거지를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팅.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나며 검이 튕겨져 올라갔다.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도 본능적으로 위를 향했다.
 “악.”
 짧은 신음에 다들 판드를 쳐다봤다.
 판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한 팔을 머리 뒤로 내밀고 있었다.
 그 손을 잡아 제압하고 있는 건 거지였고.
 “손 놔.”
 판드의 고함에 거지가 말했다.
 “위에 봐.”
 판드가 고개를 드는 순간 튕겨 올라가던 검이 힘을 잃었다.
 제압당한 상태에서 머리로 떨어지는 검.
 그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사, 살려······ 으악.”
 단말마를 내지른 판드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검이 떨어진 곳은 정확히 판드의 무릎 사이였다.
 “이런.”
 거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모두가 볼 수 있었다. 판드의 갑옷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누런 액체를 말이다.
 “아오, 추접스럽게.”
 “험험, 가장 더러운 건 자네일세.”
 불쑥 말을 꺼낸 사람은 호위 기사였다. 아니, 위장한 가짜 피부를 뜯어내고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 늙은 기사였다.
 “······났소.”
 옆에서 들린 말에 도르핀 자작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로이트 남작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나 심했는지 검을 쥐는 것조차 못할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끝났······ 소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냔 말이오.”
 로이트 남작은 떨리는 팔을 겨우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데이몬트······ 후작이오.”
 그 말에 주위의 기사들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마찬가지로 도르핀 자작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폴트 왕국 공식 무력 서열 삼 위의 절대 검호.
 검의 명가 알폰소 후작가의 가주.
 거의 소드 마스터에 가깝다는 실력자이며, 장내의 모두가 덤벼도 머리카락조차 벨 수 없다는 절대 강자.
 그런 데이몬트는 씨익 웃으며 주위를 돌아봤다.
 “내 피로 목욕을 하겠다고, 어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그랬느냐?”
 그 질문에 감히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허허, 아무래도 내 목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어쩌겠나. 난 이미 검을 뽑았거늘.”
 데이몬트는 그렇게 말한 뒤 거지를 쳐다봤다.
 거지가 한쪽 눈을 찡긋하자 데이몬드는 고개를 돌려 도르핀 자작을 노려봤다.
 “안 오면 내가 가겠네.”
 데이몬트가 씨익 웃었다.
 거기에 거지가 슬며시 끼어들며 얄밉게 덧붙였다.
 “딱 반씩 나누죠.”
 
 * * *
 
 술집 ‘마시고 죽자’는 이름과 다르게 조용했다.
 도르핀 자작의 영주성, 그 앞의 번화가 중에 가장 큰 술집임에도 말이다.
 그 이유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단체로 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홀에 있는 건 단 두 사람뿐이었다.
 피리안 공주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도르핀 자작까지 포함하면 벌써 열세 명이네요.”
 “역시 후터 백작의 라인인가?”
 “예,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어요.”
 데이몬트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후터 웬디얼 백작은 폴트 왕국의 변경백이었다.
 서쪽 국경 중 남부의 절반이 그의 영지였고, 그 너머는 판토스 왕국이었다.
 판토스 왕국과는 적대적인 상황, 후터 백작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였다.
 문제는 첩자라 의심되는 귀족들 상당수가 그의 수하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심복이라 불리던 도르핀 자작 역시도.
 “빌어먹을.”
 데이몬트는 거칠게 소리치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후터 백작의 얼굴이 떠올라 짜증이 났던 것이다.
 “괜찮아요. 이번 일을 끝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됐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나 이제 미끼 작전은 못쓰겠군.”
 “호호, 이만큼 한 것만도 좋은 성과인걸요. 아쉬운 건, 이렇게 아름다운 미끼로 잔챙이밖에 못 낚았다는 거죠.”
 피리안의 자화자찬에 데이몬트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굳었던 표정이 풀어지자 피리안도 겨우 마음을 놓였다.
 사실 이번 계획은 데이몬트 없이는 불가능했다.
 일국의 공주가 움직일 때는 최소 스무 명 이상의 기사들과 백 명 이상의 병사들이 동행했다.
 적어도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절차였다.
 때문에 공주를 상처 없이 잡으려면 적어도 세 배의 병력은 필요했다.
 피리안은 이런 점을 노리고 국경을 시찰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은밀히 하기 위해 겨우 호위 기사 한 명만을 대동한다고 말이다.
 예상대로 판토스 왕국에 포섭당한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르핀 자작처럼, 다시 올 수 없는 천금 같은 기회라 판단한 것이다.
 만약 피리안을 붙잡는다면, 그래서 판토스 왕국에 넘긴다면 나라를 배신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판토스 왕국의 고위급 귀족이 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애초에 판토스 왕국에 포섭 당했을 때부터 폴트 왕국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버렸으니까.
 그런 그들이었으니 본색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미끼를 건 낚시대의 주인을 간과했다.
 폴트의 검 데이몬트.
 왕국 내 공식 무력 서열로는 삼 위. 하지만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이였다.
 그를 상대로 하려면 적어도 백작 가문 수준의 기사만 최소 백 명 이상이 필요했다.
 일인 군단이라는 평이 당연할 정도.
 게다가 데이몬트의 힘은 무력뿐만이 아니었다.
 후작이기도 했지만 유명한 검의 명가 알폰소 후작가의 가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국왕의 세 번째 왕비가 그의 여동생이었다.
 무력으로도, 권력으로도, 왕실과의 관계로도 거의 정점에 있다 봐도 틀린 평가가 아니었다.
 그런 데이몬트지만, 피리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따지면 외숙부와 조카 사이였지만, 딸이 없는 데이몬트에게 피리안은 그 이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무모한 계획에 동참한 것이고.
 “그런데 크라임 국왕의 속내가 궁금하군요.”
 “똑똑한 네가 그 정도도 짐작하지 못했느냐?”
 데이몬트가 되물었다.
 피리안은 열여덟이란 나이답지 않게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말과는 다르게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라임 국왕은 딸이 원한다는 이유와 자신의 외손자라는 핑계로 클로베를 요구했다.
 안 되면 다른 왕족을 납치해서라도 인질 교환을 하겠다고 떠들었다.
 그랬기에 왕국의 배신자들이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간단했다.
 후일을 위해서.
 왕위 계승 서열로 클로베는 두 번째였다.
 피리안 바로 밑의 클로인은 장남이라는 이유로 서열이 첫 번째였고, 막내인 클로니가 삼남이라 세 번째였다.
 마지막이 자신이었다.
 물론 고위급 귀족과의 결혼이 전제라는 조건이 붙어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장남인 클로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왕국의 법도상 클로베가 차기 계승자가 된다.
 그게 크라임 국왕이 원하는 그림이었다.
 게다가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인해 폴트 왕국의 귀족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또 이득을 위해 자신의 파벌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
 결국 그 행동들은 내분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렇게 폴트 왕국의 국력을 소모시킨 뒤, 귀족들의 단합만 막으면 보다 일을 진행시키기 수월해지는 것이다.
 그때 데이몬트가 말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간혹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지. 특히······.”
 데이몬트는 가만히 피리안을 쳐다봤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비취색 눈동자, 그 안의 강인한 눈빛은 어지간한 말로도 흔들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데이몬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특히 권력이란 놈을 쥐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피리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크라임 국왕이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자 왕국의 실리주의 귀족들은 유폐한 왕자를 보내자고 했다. 어차피 가두어 두는 것보다 뭐라도 건지는 것이 남는 장사라면서 말이다.
 피리안이 뭔가 말하려는데 갑자기 데이몬트가 손을 들었다.
 “자,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어차피 이번 일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니 후터 놈도 당분간은 몸을 사리겠지. 그나저나 어떻더냐?”
 “예?”
 “그놈 말이다. 그 거······ 지.”
 달리 호칭이 생각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 그분요. 그게······.”
 피리안의 표정이 이상했다. 연신 고개까지 갸웃거렸고.
 “제일 뒤에 있었으니 싸우는 것 봤을 것 아니냐?”
 “그랬죠. 그런데 그때 마침 돌풍이 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게야?”
 잠시 주저하던 피리안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데이몬트는 의문이 들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피리안의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일대일이라면 어지간한 기사에게도 밀리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게끔 자신이 직접 가르쳤으니까.
 그런 피리안이 움직임을 놓쳤다는 건, 상당한 수준이라는 의미였다.
 “목소리는 젊은 놈 같았는데······.”
 “하하, 제가 좀 동안입니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데이몬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홀의 중앙인데도, 바로 옆에 올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어? 누군······ 가?”
 데이몬트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청년은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 상태였다.
 무엇보다 깨끗이 씻은 덕에 사람이 달라 보였다.
 지저분한 수염도 보이지 않았고 복장 역시 깔끔해서 귀족가의 자제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단지 커다란 덩치가 기준치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말이다.
 “예? 저야 뭐, 같이 싸웠던, 하하, 뭐, 그런 사람입니다.”
 어색한지 몸을 과장되게 떨어가며 청년이 말했다.
 “허허, 이거 몰라보겠군.”
 “생각보다 잘생겨서입니까?”
 “아니, 상판대기가 의외로 멀쩡해서일세.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데 안 맞아 죽었다니 용하군.”
 데이몬트가 툭 쏘자 청년은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랍니다.”
 “호오, 실로 뻔뻔하기까지 하니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일세.”
 “가끔은 신의 자비에 감사하기도 한답니다.”
 청년은 오른손을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신관들처럼 경건하고도 엄숙한 표정까지 지었다.
 그 얄미운 행동에, 예상외로 데이몬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일단 안게.”
 “예, 감사합니다.”
 청년은 당연한 것처럼 의자를 빼서 털썩 앉았다.
 어떻게 보면 예의 없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상황, 희한하게도 데이몬트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다.
 이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피리안이었다.
 외숙부께서 저렇게 대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기억하기로는 믿을 수 있는 일부 측근들을 제외하면 농담조차 아끼는 사람이었고, 자식에게도 독설을 참지 않았다.
 혈기 넘치고 딱 부러지는 성격이랄까?
 그나마 마흔 중반에 이르러서야 조금 무난해지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웃을 때보다 화를 낼 때가 더 많았다.
 그런 외숙부가 놀랍게도 저 청년에게 친한 척 굴고 있었다.
 앞뒤 상황은 이해가 가지만 믿을 수 없는 광경인 것이다.
 피리안은 황당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일단 통성명부터 하지. 난 데이몬트라고 하네.”
 “아! 잘 압니다. 한때 왕국의 개망나······ 아니, 아주 개성이 넘치시는 칭호를 달고 계셨던 위대하신 분 아니십니까.”
 청년이 중간에 다급히 말을 바꿨지만 이미 들을 건 다 들어 버렸다.
 피리안이 예상하는 그림은 날아가는 데이몬트의 주먹과 피투성이 청년이었다.
 그런데 데이몬트의 말은 이랬다.
 “쩝, 망나니까지는 맞네. 그런데 개까지는 아니었어. 그리고 자네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막살아서, 예의 같은 걸 배우지 못했습니다.”
 “뭐, 아직 젊으니 이제라도 배우면 되겠지. 그래 이름이 뭔가?”
 청년은 잠시 망설이다 머리를 긁적거렸다.
 “반트라고 합니다.”
 “소속이 있나?”
 “예.”
 반트라는 청년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짧게 대답을 끝냈다.
 “아쉽구먼. 그런데 폴라트리움으로 가는 이유는 뭔가?”
 “제 헤르젠이 거기 있습니다.”
 헤르젠은 고대어로 심장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같은 심장을 가졌으니, 결국 같은 피가 흐르지 않겠느냐.
 무인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헤르젠이라 칭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반대로 마법사들은 고대어로 머리를 뜻하는 게르힌을 모임의 명칭으로 삼았다.
 지식과 연구가 우선이라는 의미였다.
 데이몬트가 서둘러 물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알고 있을 수도 있겠군. 헤르젠의 이름이 무엇이지?”
 “하하, 그게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반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끊었다.
 데이몬트는 상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음을 눈치챘다.
 그런 경우 묻지 않는 것이 예의.
 “그럼 다른 걸 물어봐도 되겠나?”
 “곤란한 것만 아니라면,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과장된 공손함이 마치 연극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피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날 한 번도 안 보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어떤 남자도 이렇게 자신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라도 해보려고 수작을 부렸고, 신분상 말을 걸지 못하더라도 곁눈질 정도는 했었다.
 ‘관심이 없나? 아니면······.’
 듣기로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했다.
 그런 부류라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피리안이 그렇게 오해하는데, 갑자기 데이몬트가 물었다.
 “자네, 칼리아 숲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반트는 그 질문의 의도를 잠시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이 그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고민한 것 같아 보였다.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을 밝히기가 약간은 부끄러웠다.
 반트는 국경을 넘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 숲에 들어서자 그 조용함에 명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솔직히 며칠이나 지났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무척 허기가 진 것과 제대로 씻지 않아 악취가 나기에 대충 열흘이라 둘러댔던 것이다.
 반트는 조금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길을 잃었다고.”
 “정말, 거기서 열흘이나 헤맸던 건가?”
 “농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반문에 반문이 이어졌지만, 이상하게도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졌다.
 “솔직히 말하지만, 정말입니다. 배도 고프고 먹을 것도 없고, 목도 마르지······ 뭐,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리자 냅다 그 방향으로 그냥 달린 겁니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배가 고프면 눈이 뒤집어지는 법, 앞뒤 사정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허허, 자네 정도 되는 사내가 길을 잃다니, 믿기 힘들군.”
 “사람은 완벽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거 빼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반트가 대놓고 자기 자랑을 하자 데이몬트는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가증스럽기는.’
 아는지 모르는지 반트가 물었다.
 “그런데? 식사는 안합니까?”
 “아! 미안하네. 금방 시키겠네.”
 데이몬트는 그렇게 말한 뒤 주방장을 불렀다.
 “일단 빨리 나오는 파이와 빵을 가져다주고, 고기도 적당히 구워서 내주게. 음료는······.”
 “맥주, 맥주입니다.”
 반트가 불쑥 끼어들자 주방장은 아주 살짝 당황해했다.
 “크험, 그래 맥주를 넉넉하게 가져다주게.”
 그 말이 끝나자 주방장이 사라졌다.
 그때 반트가 말했다.
 “정말이지, 맥주가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런가?”
 “예, 이 동네 맥주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를 겁니다. 판틴 왕국의 술은 오줌 맛이 나고, 아르헨탈 제국의 술은 달기만 하거든요.”
 “호오, 자네 그 두 나라를 다녀온 모양이군.”
 “하하하, 거기뿐만이 아닙니다. 동쪽으로 베르셀 왕국, 거기서 북쪽으로 알스란 왕국, 다시 동쪽에 있는 벤슬 왕국, 바다 건너 쿠만 왕국에 아이프 제국까지 다녀 봤습니다.”
 순간 데이몬트의 표정이 멍해졌다.
 “서, 설마 대륙을 횡단했다는 말인가?”
 “하하, 길을 잘못 들어서요.”
 반트가 아주 겸손한 자세로 말했다.
 하지만 데이몬트의 눈빛은 이랬다.
 ‘이런 미친 새끼. 어떻게 길을 잘못 들면 그렇게 가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했다.
 폴트 왕국의 동쪽으로는 베르셀 왕국밖에 없었다. 위쪽으로 가면 알스란 왕국과 벤슬 왕국이 있지만 그 역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쿠만 왕국와 아이프 제국은, 배를 타고 최소 보름 이상이 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전혀 다른 대륙인 것이다.
 데이몬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의 목적지가 어디였는데?”
 “그야 당연히 아르헨탈 제국이었죠.”
 순간 데이몬트는 입에서 나오려는 쌍욕을 참아야 했다.
 폴트 왕국 서쪽에는 지금 분쟁 중인 판토스 왕국이 있었다. 아르헨탈 제국은 바로 그 너머였다.
 이 반트란 놈의 말이 정확하다면 병신도 이런 상병신이 없었다.
 서쪽으로 한 달 거리지만, 동쪽으로는 일 년이 훌쩍 넘는 거리였다. 대륙을 넘고 넘어 정반대로 아르헨탈 제국에 도달했던 것이다.
 “제가 조금 길치라서 그렇습니다.”
 반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무리 길치라도 그렇지. 아니 잠깐, 베르셀 왕국에도 갔다고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만······.”
 “여기서 그쪽 왕국에 가려면 셀트 산맥을 넘어가야 하지 않는가?”
 “당연히 그렇죠.”
 반트의 태연한 대답에 데이몬트는 황당해했다.
 “셀트 산맥은 산적왕 카프리의 영역인데, 어떻게 거길 지났다는 말인가?”
 “아! 카프리 형님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분의 땅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 보니 소문만큼 그렇게 험악하진 않던데요?”
 “뭐? 산적왕을 만났다고?”
 “예, 식사도 잘 차려 주고, 갈 때는 여비까지 두둑하게 챙겨 주던걸요?”
 데이몬트와 피리안은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적왕 카프리는 무관의 제왕이었다.
 대륙에 단 열 명뿐인 절대 강자로 스스로의 힘으로 왕의 칭호를 쟁취한 명실상부한 괴물이었다.
 과거 폴트 왕국과 베르셀 왕국에서 함께 병사를 보내 산적 토벌을 시도했다.
 결과는 기사단의 괴멸, 병사 삼천 명이 시체가 되었고 고작 천명만이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산적왕 카프리는 단신으로 기사 백 명과 싸워 이겼다는 것이다.
 당시 서른 즈음이었던 그의 랭크는 대륙 최강의 더블 S급이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더 강해져 있을지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 눈앞의 반트는 그런 전설적인 인물을 옆집 아저씨처럼 말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반트는 데이몬트의 반응을 이해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믿질 못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정말 산적왕 카프리를 만났는가?”
 “예, 의외로 순박하신 형님이시더군요. 성격도 좋고, 호탕해서 술을 몇 잔 같이 마셨는데, 어쩌다 보니 호형호제하기로 했습니다.”
 순간 데이몬트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반트가 불쑥 물었다.
 당황한 데이몬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크험험. 아니, 아닐세. 잠시 실언을 했네.”
 “하하, 그렇군요. 저는 또 주변에서 저를 부를 때 쓰던 익숙한 단어인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반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데이몬트는 한참을 고민 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놈, 진짜 미친놈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돌아온 겐가?”
 “예, 볼일 볼 거 다 보고 왔으니, 이제 정착하려 합니다.”
 반트의 표정은 어딘가 미묘했다.
 기뻐하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뭔가를 후회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데이몬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떠난 지 제법 되는 모양이군.”
 “그렇죠. 삼 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셈이니까요.”
 “삼년이라······ 하긴, 그 정도면 오래됐다고 할 수 있겠지.”
 데이몬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주방장이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배고플 테니 많이 들게나.”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반트의 두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 모습이 정말로 열흘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 상거지가 음식을 입으로 쓸어 담는 모습이랄까?
 “누가 뺏어가기라도 한다는 겐가? 천천히 먹게나.”
 “아, 예. 우웁, 컥. 크허헉.”
 갑자기 대답하느라 목이 막힌 모양이었다.
 반트는 다급히 맥주로 목을 축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먹다 죽을 뻔했습니다.”
 “입안에 음식이나 삼키고 말하게.”
 “아,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파편 좀 그만 날리란 말이야.”
 “예, 알겠······.”
 “입 닫고 처먹어.”
 데이몬트가 발끈해하며 소리쳤다.
 반트가 오히려 씨익 웃은 뒤 먹는 데 집중하자 데이몬트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일단 안목은 대단하군. 한 번에 내 실력을 파악할 정도는 된다는 건데······.’
 사실 데이몬트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짐작하려 해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트의 실력이,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이다.
 정말 그건 의외의 일이었다.
 적어도 왕국 내에서는 자신의 눈을 속일 존재는 거의 없었으니까.
 ‘흐음, 욕심은 나긴 나는데, 아무래도 미친놈 같으니 그게 문제군.’
 데이몬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하는데, 더욱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피리안 공주였다.
 반트는 분명 삼 년 전, 폴트 왕국을 떠났다고 했다.
 그 방향은 셀트 산맥이었고, 산적왕 카프리를 만났단다.
 문제는 바로 그 시기였다.
 삼 년 전이라면, 클로베 이왕자가 반역을 시도했던 때였다.
 왜 하필 그때였느냐?
 당시 동쪽 국경 지역, 즉 산적왕 카프리의 영역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무려 오천 명이 넘는 산적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대이동을 했었던 것이다.
 그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싶어서, 폴트 왕성에서는 다급히 기사들과 병사들을 파견했었다.
 산적들이 영지로 내려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클로베 이왕자는 그 틈을 타 병사들을 일으켰고, 왕성을 점령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서둘렀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 보면, 거의 맞기는 맞는데.’
 심증은 있는데 확신은 없었다.
 정말 저자가 셀트 산맥에 들어가는 바람에 난리가 났고, 그 때문에 왕성에서 기사들을 파견했으며, 그 결과 반역이 일어났다는 건······.
 ‘아니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피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서 엄청난 음식 파편을 날리며 돼지처럼 처먹고 있는 반트였다.
 저런 사람이 움직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우연일 거야. 그래 우연이겠지. 그럼 우연이여야 해.’
 피리안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의 상상이 거짓이 아닌 것을.
 
 2장 미친 개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태연하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청년이 있었다.
 바로 반트였다.
 “아니, 아닐세.”
 데이몬트는 황급히 고개를 저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동행한 지 오 일째, 그동안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우선 상대의 내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데이몬트는 폴트 왕국 내의 어지간한 헤르젠은 다 알고 있었다. 은밀한 마법사들의 게르힌과 다르게 무인들의 헤르젠은 거의 공개가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반트가 말하기로 헤르젠의 이름은 ‘징벌’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 의미가 섬뜩했다. 그리고 이 얼마나 오만한 이름인가.
 데이몬트는 자신의 기억을 뒤집어 봤지만 그런 이름은 찾지 못했다. 지금껏 살면서 그 비슷한 것조차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좋다. 일단 내력은 그렇다 치자.
 아무리 봐도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으니 실력만 있으면 끌어들일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실력조차 의문투성이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기습에 몇 번이나 맞았다. 가볍게 휘두른 주먹을 피하지 못해 코피까지 흘릴 정도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아니 때릴 수 없었다는 게 정답이었다.
 뭐라도 해볼라 치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게다가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미친놈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시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상대로 반트는 데이몬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약간 당해 주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절대 도발에 넘어가선 안 되었다. 일단 실력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귀찮아지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한 달 넘게 쫓아온 노인도 있었다. 운이 좋게 도망치기는 했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반트는 데이몬트를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두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공주와 후작이라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편하게 대해 준 것이다.
 사부 제릭의 말대로, 예의를 지키는 사람한테는 예의로 대하는 게 맞았다. 그랬기에 사소한 도발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옛날의 자신이라면 후작이고 나발이고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네.”
 “그렇게 묻고도 더 궁금한 게 남았다는 말입니까?”
 반트가 진저리치는 표정을 지었다.
 여행 동안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았는지 데이몬트는 쉬지 않고 질문을 날려 댔었다.
 “내가 반트, 자네를 봤을 때 아무리 봐도 특이해. 그게 자네의 원래 성격인지 아니면 그렇게 자란 것인지가 궁금하다네.”
 “헤르젠의 기치를 묻는 것입니까?”
 기치란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어떤 태도를 우선하는가를 뜻했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다. 사랑과 정의가 목적이라면, 상대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게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였다.
 즉, 데이몬트는 반트의 헤르젠이 지향하는 바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저희는 뭐, 아주 단순합니다.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착한 사람한테는 착하게 대하고 나쁜 놈한테는 나쁘게 대하라고 했습니다. 약한 사람에겐 약하게 보여서 다가가고, 강자에겐 강하게 대해서 인정을 받으라고요.”
 “거참, 보통의 헤르젠들과 많이 다르군. 삶의 태도를 기치로 거는 헤르젠은 거의 없는데 말일세.”
 데이몬트는 약간은 감탄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초창기의 헤르젠은 수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비슷하거나 같은 무예를 익힌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니 뜻과 성향이 같아진 것이다.
 그 이후, 헤르젠의 역사는 많은 질곡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가치를 인정받기 전까지 귀족과 왕들의 탄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헤르젠의 형태가 많이 변하고 말았다.
 일부는 기사 양성소처럼 사람들을 끌어모아 무술을 가르쳤고, 일부는 이름을 날려 힘 있는 귀족가에 몸을 맡겼다.
 아르헨탈 제국의 대장군처럼 황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헤르젠들은 점점 실리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삶의 태도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경지를 우선시하게 된 것이다.
 데이몬트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역사가 아주 깊은 곳인 모양이군.”
 “글쎄요. 길다면 길긴 긴데······.”
 반트는 거기서 말을 얼버무렸다. 피리안 공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주 먼 과거에 한 왕국이 있었다.
 끝에 이른 사치와 향락, 그리고 그걸 유지하기 위한 폭정이 몇십 년 간 이어졌다. 그로 인해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때 한 사람이 흘러들어왔다.
 거지들의 왕이라 불리는 자였고, 징벌의 헤르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징벌이 떨어졌다.
 왕성이 초토화되고 왕가가 몰락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폴트 왕국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너무도 오래전의 이야기.
 반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폴트 왕국의 생겼을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대충 한 삼백 년 정도 되는 모양입니다.”
 “허, 그렇게 오래된 명문이란 말인가?”
 “뭐, 오래됐다고 다 대단한 건 아니죠. 중간에 몇 번 맥이 끊긴 뻔한 적도 있었고, 모아 놓은 재산이 없어서 야반도주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반트가 농담처럼 말하자 데이몬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이놈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나저나 정말 길을 잘 닦아 놨군요. 예전에는 열흘 정도 걸렸는데 말이죠.”
 반트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딱히 볼만한 풍경이라 할 만한 건 없었다. 그럼에도 신기한 듯 기웃거리는 걸 보면 고향으로 돌아온 게 좋기는 좋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일단 수도에 도착을 했으니 헤르젠을 찾아야지요. 뭐,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죠.”
 “너무도 무대책에 가까운 말이로군.”
 “하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다른 결정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충분합니다.”
 “하기야 그렇기는 하네.”
 마침 마차의 창밖으로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폴트 왕국의 수도 폴라트리움이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차는 곧 폴라트리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도의 중심에 있는 왕성으로 향하는 대로를 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주저하던 피리안 공주가 결국 손을 들었다.
 마차가 서자 반트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제 서로가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반트가 마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도 따라서 내렸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반트는 주먹을 가슴에 대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데이몬트는 어딘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닐세. 오히려 지금까지 내 장난을 받아 줘서 고맙네.”
 “그런 장난을 자주 하시는 모양입니다.”
 “가끔, 아주 가끔 하긴 하지.”
 “그때마다 혹시, 한 명씩 죽어 나가지 않았습니까?”
 반트가 씨익 웃으며 묻자 데이몬트 역시 마주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 정도로 죽을 놈들한테는 하질 않는다네.”
 “정말 다행이군요.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큭큭, 역시 자네는 재밌어. 그리고 참 세상은 넓구먼.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데이몬트는 가만히 반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볍게 말을 던지긴 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감히 누가 폴트 왕국 제일의 개망나니 앞에서 반트처럼 실없게 농담을 하겠는가.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트가 말했다.
 “뭐, 저야 제국의 대장군한테도 할 말은 다 하는 놈이니까요.”
 “난 정말 놀랐네. 자네의 뻥이 그토록 스케일이 클 줄은 정말 몰랐어.”
 “진심으로 말하지만 전 거짓말 잘 안 합니다.”
 “알겠네, 알겠어. 믿어 주지.”
 데이몬트의 생각은 말과 전혀 달랐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다. 반트가 대륙을 횡단한 이야기들이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왕국의 습성과 특징들, 게다가 거기서 반트가 벌였던 활약까지 듣고 있으면 실로 한편의 대서사시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문제는 믿을 수 없다는 점이였다.
 무관의 제왕 중 한 명인 산적왕 카프리와 호형호제를 하기로 했단다.
 대륙을 건너며 또 다른 무관의 제왕인 해상왕 판사이르와 한편이 되어 해적왕 화이트팽과도 싸웠다고 했다.
 여기까지 등장한 무관의 제왕만 무려 세 명이었다.
 반트의 모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륙 너머에는 여기와 무예를 익히는 방식이 달랐다.
 일단 이쪽 대륙은 마나 심법을 통해 체내에 마나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힘을 내었다.
 반대로 저쪽 대륙은 정신력으로 힘을 끌어내는 ‘포스’가 존재했다.
 그 포스를, 이 반트라는 놈이 배웠단다.
 실제로 보여 준 적이 없으니 뻥이라 치부해도 되지만, 그 설명이 너무나 자세했다.
 한마디로 설득력은 있는데 증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데이몬트는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 일단 여지를 남기기로 했다.
 “이거 받게.”
 “이게 뭡니까?”
 반트는 데이몬트가 건네준 사각의 패를 받아 들였다. 네모난 방패 위에 두 개의 검이 교차되어 있는 조각이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알폰소 가문으로 찾아오게. 그걸 들고 오면 날 만날 수 있을 거야.”
 “예,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은 받겠습니다.”
 반트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데이몬트는 또 한 번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에게 저 패를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힘겹게 수련을 하는지, 정말 그걸 모르고 말하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동시에 저 반트란 놈의 머리를 살짝 쪼개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피리안 공주가 끼어들었다.
 “누군가를 찾으려면 칼튼 거리에 있는 파란 집으로 가세요. 호루스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도움을 줄 거예요.”
 “그거, 무슨 암호 같군요.”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해요. 그럼 이만.”
 피리안이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데이몬트 역시 반트의 어깨를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반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말을 마친 반트가 몸을 돌렸다.
 그때 마차 안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지금 어딜 가는 거예요?”
 “칼튼 거리로 가서 알아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반트가 되묻자 피리안의 입에서 한숨을 흘러나왔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칼튼 거리는 반대 방향에 있어요.”
 
 * * *
 
 “역시, 여기가 아닌가?”
 반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파란 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길을 잘못 든 건지 완전히 허름한 거리였다.
 거의 빈민가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할까.
 왕성이 있는 수도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빈부의 격차가 거의 반드시라 할 만큼 존재하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반트에게도 지극히 익숙한 풍경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자신이 떠돌았던 지역이란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이럴 때는 직접 물어보는 게 정답이지.”
 반트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으슥한 골목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적당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딱 봐도 불량하게 보이는 사내 셋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제법 수련을 한 듯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뻔한 전개를 예상하게 만들었다.
 반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머리가 벗겨진 사내가 웃으며 손짓을 했다.
 “어이 형씨, 잠깐 우리 좀 봅시다.”
 반트는 순순히 그들에게 걸어갔다.
 세 사내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반트의 주위를 둘러싸 버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너무도 뻔히 보이고 있었다.
 정면의 대머리 사내가 말했다.
 “딱 보니 그쪽도 도움이 필요한 것 같고, 우리도 도움이 필요하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게 좋지 않겠나?”
 대머리 사내는 반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마찬가지로 좌우의 사내들 역시 반트의 배낭을 잡고 허리의 주머니에 손을 대려 했다.
 “이 형님들이 술값이 없어서 그러는데······.”
 “하아, 왜 이런 놈들은 없어지질 않는 건지 모르겠군.”
 “뭐?”
 대머리 사내가 어이없어하는 그때, 반트가 움직였다.
 두 팔을 펼쳐 좌우의 두 사내의 목을 감았다.
 동시에 가볍게 뛰어올라 다리로 대머리 사내의 얼굴을 감아 버렸다.
 “이거, 뭐. 커컥.”
 반트의 몸이 비틀리며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투캉, 텅, 쿠당탕.
 두 사내는 자신들이 나왔던 골목으로 날아가 처박혔고, 마지막으로 대머리 사내까지 그 위에 포개졌다.
 반트는 손을 툭툭 털며 걸음을 옮겼다.
 “고작 삼 년만인데······.”
 반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뒤, 대머리 사내의 가슴에 살짝 발을 올렸다.
 “뭐, 뭐야?”
 대머리 사내가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건 밑에 깔린 두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반트가 대머리 사내를 쳐다봤다.
 “어이, 친구.”
 “예? 예.”
 꼬리를 만 개처럼, 대머리 사내의 태도가 갑자기 순종적으로 바뀌었다. 가슴을 누르는 압력도 위협적이었지만 반트의 미친놈 같은 눈빛 때문이었다.
 “너 어디 애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 이 동네, 붉은 늑대냐, 검은 곰이냐, 퍼런 너구리냐?”
 대머리 사내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 모양이었다.
 반트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정도도 안 되는 피라미였군. 됐고, 길이나 묻자. 칼튼 거리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지?”
 “아, 거기라면 바로 여기서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한두 블럭 정도요.”
 “그래? 고맙다.”
 반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발에서 해방된 대머리 사내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때 반트가 휙 뒤돌아봤다.
 “사람 볼 줄 모르는 눈으로 함부로 이런 짓 하지 마라. 그러다 칼침 맞는다.”
 그렇게 반트가 사라졌다.
 대머리 사내는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씨발, 거기 오른쪽인데······.”
 
 * * *
 
 옛말에 생각이 많으면 주위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딱 그런 경우였다.
 하나의 생각에 빠지면 상념과 망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현실로 돌아오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뒤늦게야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폴트 왕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걸 몰랐다. 거의 사는 곳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차린 건 셀트 산맥에 들어서고 나서였다.
 생각하고 명상에 빠지다 보니 며칠이 훌쩍 지났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최초의 목적지와 많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도착한 그곳은 바로 산적왕 카프리의 영역이었다.
 그 동네는 거친 사내들이 많아 사소한 오해로도 싸움이 쉽게 벌어졌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바로 산적왕 카프리였다.
 자신의 영지를 휘젓고 다니는 반트가 궁금해서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둘은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대륙 전체에 겨우 열 명뿐인 무관의 제왕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징벌 헤르젠과도 깊은 관계였다.
 무엇보다 서로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이 같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아까의 불한당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이 벌인 일도 말이다.
 “제길, 다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반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쉽게 결정을 내릴 일이 아니었다. 조금 더 상황을 보고 움직여도 늦지가 않는 것이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반트는 눈에 익은 장소를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그대로 얼굴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분명 칼튼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초의 목적지였던 장소는 바로 여기였다.
 그리운 가족들이 있는 곳.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대체 이게 뭐야?”
 반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무려 오층 높이의 커다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왼쪽에 잡스네 식당, 오른쪽에 게이츠의 빵집, 그리고 뒤쪽은 워렌네 잡화점. 그런데 우리 집은 어딜 간 거지?”
 반트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위만 보면 확실히 자신이 머물렀던 동네가 맞았다. 하지만 원래 있던 허름한 이층 목조주택이 오층짜리 벽돌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혹시 나 없는 사이에 엄청나게 벌었나?”
 반트가 그렇게 오해하는 그때, 건물 안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렸다.
 무인들을 키우기도 하는 헤르젠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반트는 일단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두 손으로 문을 열었다.
 정면에 커다란 덩치에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입문자인가?”
 “예?”
 반트가 황당해하자 수염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덩치가 좋군. 자네 정도라면 금방 실력이 늘 거야. 내 장담하지, 내 밑에서 딱 삼 년만 수련하게. 그럼 상급의 권사로 만들어 주겠네.”
 수염 사내는 익숙한 솜씨로 떠들어 댔다.
 반트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급의 권사가 되려면 못해도 십 년은 수련해야 했다. 자신처럼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런, 자네 몸을 보니 상당히 단련한 모양이군. 헌데,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몸을 망친다네. 잘못된 방식으로 수련을 한 모양이야.”
 수염 사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잘 왔네. 내가 제대로 된 무술을 가르쳐 주지.”
 수염 사내의 말을 바꿔 해석하면 이랬다.
 지금까지 잘못 배웠다고.
 반트는 본능적으로 손이 확 올라가려는 걸 참았다. 안 그랬다가는 상대의 입에서 피가 뿜어나올지도 몰랐던 것이다.
 하기야 입구에서 관리나 하는 사람이 뭘 알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수염 사내가 반트의 어깨를 만졌다.
 흠칫 놀라는 모습이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반트의 근육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적당한 살집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 단단함은 돌과도 같았던 것이다.
 반트는 더는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저기, 입문자가 아니라 뭘 좀 물어보러 왔습니다.”
 정중한 태도에 수염 사내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 뭘 물어보고 싶은 겐가?”
 “여기가 어디 헤르젠입니까?”
 수염 사내는 대답 대신 손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거기 커다란 나무판이 있었는데, 제법 웅장한 필체로 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침 제일 큰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폴트 왕가에서 인정한 상급의 권사. 프리히드 루틴 백작.
 그의 무술의 정수를 잇는 백열의 헤르젠.]
 
 반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열의 헤르젠은 그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아니 백열이라는 말은 알았다. 어떤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쓰는 말이었다.
 프리히드는 권사라고 했으니 어쩌면 화염 계열의 마나 심법을 익힌 모양이었다. 그 정점에 이르면 비로소 백열의 경지라 부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눈앞의 수염 사내에게서 전혀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혹시 누굴 찾아온 겐가?”
 “그건 아니고, 여기 헤르젠이 생긴 지 얼마나 됐는지 알고 싶습니다.”
 수염 사내는 잠시 흠칫했다.
 “그게······ 우리 헤르젠은 역사와 전통이 깊다네. 일이 년 생겼다 사라지는 그런 곳하고 비교하는 건 곤란해.”
 아무래도 뭔가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반트가 다시 물었다.
 “역사와 전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여기 이 자리에 언제 생겼냐는 겁니다.”
 “아아, 그런 것이라면 어렵지 않지. 한 일 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네.”
 “그 전에는요?”
 “그냥 빈 공터였지.”
 “예?”
 너무도 의외의 대답이었던 것일까?
 반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니까, 전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월세가 한 반년 치인가 밀렸다더군. 그래서 주인이 열 받아서 쫓아내려고 다 부숴 버렸다고 들었네.”
 수염 사내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하지만 반트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대충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떠난 건 삼 년 전이었다. 그리고 일 년 전에 가족들 역시 여길 떠났다.
 고작 월세가 밀려서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충분히 손을 써놨기 때문이었다.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하면······.”
 반트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수염 사내는 흠칫 놀라더니 연거푸 뒷걸음쳤다. 반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때였다.
 입구의 문이 열리며 스물이 넘는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수염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 그놈은 찾았냐?”
 “죄송합니다, 사범님.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사내 하나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반트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자신이 집어던진 그 대머리 사내였다.
 “어, 어!”
 “이거, 귀찮게 됐군.”
 반트의 본심이었다. 그냥 뒷골목 건달인 줄 알았는데 여기 헤르젠 소속이었다.
 그것만 봐도 딱 이 헤르젠의 수준을 알 것 같았다.
 이미 숫하게 봐왔던 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니까.
 반트는 주위를 둘러봤다.
 사범이라 불린 수염 사내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더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다 뭔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번 확인해 봐?’
 반트가 그렇게 판단하는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대머리 사내가 소리쳤고, 사범이 명령을 내렸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스무 명에게 포위된 것이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란을 듣고 위층에서부터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수준은 대머리 사내 정도. 다만 숫자가 백여 명도 넘어 보이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다행히 입구가 좁아 반트를 둘러싼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때 사범이 소리쳤다.
 “네가 우리 헤르젠을 무시하고 건드렸다는 놈이냐?”
 졸지에 입문자에서 놈이 되어 버렸으니 참으라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고민은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착한 놈에겐 착한 놈이 되고, 나쁜 놈에겐 철저히 나쁜 놈이 되라. 그리고 예의를 아는 사람에겐 예의로 대하라.
 이게 사부 제릭의 입버릇이었다.
 “이거 진심으로 말하는데, 정말 미안하게 됐군.”
 반트의 몸이 움직였다.
 그 직후, 폭풍이 백열의 헤르젠을 덮치기 시작했다.
 
 * * *
 
 “흠흠, 흐으음. 흐음.”
 입을 다물고 콧노래를 하던 게이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울리는 요란한 소리 때문이었다.
 게이츠의 지론은 간단했다.
 즐겁게 밀가루를 반죽하면 맛있는 빵이 나온다는 것.
 하지만 고막을 괴롭히는 소리 때문에 박자도 엉망이었고, 반죽도 한데 뭉치고 있었다.
 “어디서 공사를 하나?”
 게이츠는 손에 묻은 밀가루를 앞치마에 털었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옆 건물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 직후,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콰아앙.
 깜짝 놀란 게이츠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어라? 어디서 봤는데?’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콰직, 콰지직 소리가 들리고 쿠르르릉이 이어졌다.
 나무도 아닌, 벽돌로 지어진 옆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다행인 건 앞부분 일부만 떨어져 나갔다는 정도였다. 기둥들은 멀쩡히 버티고 있었고, 그 사이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이웃들이 보였다.
 게이츠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 지나갔던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랐던 것이다.
 “헐, 미친개. 미친개가 돌아온 건가?”
 
 * * *
 
 한때 수도 폴라트리움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늑대 잡는 개가 있다고.
 그 말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지금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난장이가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블루 라쿤.
 한때, 수도 폴라트리움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세 명의 보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라쿤은 나았다.
 자신과 겨루던 붉은 늑대와 검은 곰은 살아 있지 못했으니까.
 라쿤은 그때를 떠올렸다.
 멍청한 붉은 늑대는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쫓겨났지만 제법 이름난 헤르젠 출신이었다.
 뛰어난 실력으로 암흑가에 뛰어들었고, 세 보스 중 말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딱 거기까지 했어야 했다.
 붉은 늑대는 욕심이 지나쳐 밝은 곳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 시험 상대가 바로 자신의 구역에 있는 조그만 헤르젠이었다.
 암흑가는 가능하면 무인들의 헤르젠을 건드리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게르힌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기에 가끔 마찰이 생겨도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적당한 배상만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헤르젠은 드러나 있다.
 무척 자존심이 강한 무인들, 게다가 일부는 헤르젠의 명예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무시당하면 끝인 그들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해서 그들은 일이 벌어지면 끝장을 보았다. 상대를 몰살시키거나 패배를 선언할 때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그들과 시비가 붙어 뿌리까지 거덜 난 조직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붉은 늑대도 그랬다.
 오 년 전, 고작 열여덟 살짜리 청년을 얕보고 무시하다가 물리고 말았다.
 미친개가 그 꼬마의 별명이었다. 자신의 얼굴 왼쪽을 파랗게 만들어 블루 라쿤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준, 바로 그놈인 것이다.
 “확인해 봤느나?”
 “예,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수하의 말이 끝나자 라쿤은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개가 떠나면서 말했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가족들을 잘 챙겨 달라고, 돌아오면 꼭 보답해 주겠다고.
 그리고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문제가 생기면 각오하라고.
 “휴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사내라면 한 번 내뱉은 말은 책임져야 하는 법.”
 라쿤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루헨, 네가 직접 모셔 와라. 그래도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도 따지면 그 덕분이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루헨이라 불린 수하의 얼굴은 질문 이상으로 호기심이 넘쳐보였다.
 라쿤이 말했다.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
 그가 수시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루헨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조직의 입장에서 맡은 바 자리가 있었다. 그 안에서 성과를 내면 인정을 받아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것 말고도 아주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하극상이었다.
 그 때문에 라쿤은 수하들에게 자주 그런 말을 했다.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물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난쟁이라 외소해서 잘 못 싸울 것처럼 보이지만 라쿤은 자신보다 훨씬 강자였다. 자신의 전임이 함부로 대들다 박살이 난 것을, 눈앞에서 직접 봤던 것이다.
 루헨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라쿤도 루헨을 주시했다.
 이 녀석을 거둔 지 삼 년도 되지 않았다.
 실력이 있고 일처리가 깔끔해 조금씩 올라오더니 어느새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모를 것이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왜 미친개라고 불리는 줄 아느냐?”
 “그야 새파란 애송이일 때 붉은 늑대에게 달려들었다고 그렇게 불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라쿤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붉은 늑대와 싸웠다고 비교하기 쉽게······.”
 “아니다.”
 라쿤의 단언에 루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겁니까?”
 라쿤은 깍지 낀 손을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면, 놓질 않으니까.”
 
 3장 가족의 행방
 
 
 
 
 
 반트의 예상대로였다.
 딱 한 시간 기절할 정도만, 조절해서 때렸다. 예상대로 저녁을 맞은 지금 즈음이면 깨어나서 움직일 것이다.
 멀리서 지켜보니 사범이라 불렸던 수염 사내는 건물이 상태를 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후 절규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상황은 그의 선에서 해결할 수준을 훌쩍 넘어 버렸다.
 당연히 윗사람을 찾아갈 터.
 반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책임자가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벌이고, 그 상급자를 찾아가면 미행하는 식으로 말이다.
 반트는 지금 그런 생각으로 수염 사내를 뒤쫓고 있었다.
 ‘어라? 이쪽은?’
 반트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바로 성벽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구역이었다.
 수시로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기사들이 순찰을 돌았다.
 못갈 건 아니지만 몰래 쫓기 위해선 상당한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염 사내의 뒤에는 분명 귀족이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고작 몇 푼의 돈을 위해 헤르젠의 이름을 단 조직을 운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헤르젠이 괜한 구설수에 오르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었으니까.
 반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착각한 것 같았다. 과거의 그 일 때문에 예민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한때 암흑가의 조직들이 교묘히 법을 이용해 헤르젠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비를 걸어왔다.
 솔직히 무시할 수 있었지만 사부가 말했다.
 이것도 일종의 수련이라고.
 반트가 암흑가의 조직들과 싸운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반트는 많은 걸 보고 느꼈다. 암흑가가 밝은 곳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는지를 말이다.
 일단 보호비로 시작해 고리대금업으로 발전하는 게 기본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탈과 폭력이 이루어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들의 몫이었다.
 문제는 헤르젠을 통하면 합법적인 일이 된다는 점이었다. 힘과 능력이 있다면, 그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제도 때문이었다.
 그 결과 평민은 빈민이 되고, 빈민은 노예가 되었다.
 사부 제릭이 나선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지난 과거였다.
 ‘내가 오해한 모양이군. 더는 쫓을 필요가 없겠어.’
 반트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며 불필요한 감정을 접어 버렸다.
 미안함 같은 건 느낄 필요 없었다. 어차피 먼저 시비를 건 건 그들이었으니까.
 이제 중요한 건 사부와 사제들의 행방이었다.
 그때였다.
 ‘뭐지?’
 반트는 고개를 돌리려다 멈칫했다.
 폴라트리움에 들어와서 처음 느끼는 명백한 살기였다. 걱정할 수준은 아니지만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역시나 그 틈에 뭔가가 다가왔다.
 휙.
 짧은 단검이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반트의 왼손이 단검의 주인을 향해 뻗어 나갔다.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단검의 방향이 바뀌었다. 찍어 내려가다 수평으로 휘둘러진 것이다.
 그 짧은 변화의 순간, 반트의 오른쪽 다리가 부풀어 올랐다.
 터엉.
 상대의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품으로 파고들며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그리고 이은 팔꿈치 치기에 튕겨 나간 것이다.
 ‘가볍다?’
 반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인상이 무척 심상치 않았다.
 “썅.”
 반트는 다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우웩.”
 동시에 하늘에서 누런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 * *
 
 딱.
 “윽.”
 루헨이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뒤통수를 날린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직 멀었냐?”
 “다, 다와 갑니다.”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였다. 반트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실력도 없는 놈이 왜 뒤통수를 치려고 해.”
 “죄송합니다.”
 루헨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벌써 같은 상황이 다섯 번째였으니까.
 실수로 대들었다가 첫 번째는 오른쪽 눈에, 두 번째는 왼쪽 눈에 멍이 들었다.
 세 번째는 참아서 무사히 넘어갔고, 네 번째는 발끈했다가 잘근잘근 밟혔다.
 그때 루헨은 왜 저 인간이 미친개라 불리는지, 물면 놓지 않는지를 깨달았다.
 도발을 한 뒤 패고, 또 도발을 하고 밟았다.
 무엇보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을 때까지 그걸 무한으로 반복할 기세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저 인간을 만나면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을 테니까.
 사실 반트가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몸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이었다. 신체의 제어가 풀렸고 아차 하는 사이 토하고 말았다. 피했음에도 일부가 옷에 묻어 버린 것이다.
 그게 기분이 나빴다.
 마침 목적지가 보였다.
 “지붕 두 개만 넘어가면 됩니다.”
 루헨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바로 눈앞까지 주먹이 와 있었다.
 그렇게 여섯 번째를 운 좋게 넘기나 싶었다.
 딱콩.
 이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나왔고 시야마저 어지러웠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에 불과했는데 이런 아픔이라니.
 순간 울컥하더니 무언가가 가슴에서 치솟았다.
 “이런 미친······.”
 루헨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잔혹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반트가 말했다.
 “역시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야.”
 곧, 반트의 주먹이 퍼부어졌다.
 
 * * *
 
 “여, 여기입니다.”
 억지로 겨우 입을 비틀어야 제대로 된 발음이 나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입구를 지키던 심복들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아마도 당분간은 죽만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반트는 그런 루헨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놈은 천성이 암살자였다.
 그것 자체도 문제지만 가장 위험한 건, 손을 쓰는 데 망설임이 없다는 점이었다.
 암살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즐긴다고 해야 할까?
 그 이유는 넘치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실력을 과신하기에 무서울 게 없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살인마가 되어 버리는 전형적인 흐름을 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제어하지 못한다면 쾌감에 더욱 집착하게 되리라.
 그 전에 한 단계 성장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반트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루헨은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보스가 대단하게 평가하기에 시험해 보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런 순간의 욕심 때문에 지금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이건 정말이지 소문보다 더하지 않는가?
 루헨은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해.”
 
 * * *
 
 텅.
 문을 살살 닫았음에도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방안에 있는 건 작은 탁자와 두 개의 의자, 그리고 라쿤 뿐이었다.
 라쿤은 평소의 모습대로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반트, 그에게서 과거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헨과 장난칠 때와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였다.
 공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만큼 무거워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였다.
 수초가 수십 초, 아니 몇 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라쿤은 겨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짧은 한마디였다.
 라쿤을 아는 자라면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낄 게 분명했다.
 씨익.
 반트의 입이 벌어졌다.
 라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이전의 그라면 말보다 먼저 주먹이 움직였을 테니까.
 “뭐, 아직도 나를 보는 그 눈빛이 여전한 걸 보니, 뭔가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 오해하지 말라고. 지금의 난 그때와는 다르니까.”
 자세한 설명을 하면 이야기는 길어진다. 게다가 철부지 시절의 부끄러운 과거를 떠들 기분도 아니었다.
 반트는 태연히 걸어가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할 말이 있으니 불렀겠지?”
 “예.”
 “안 그래도 그게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어. 분명히 붉은 늑대하고 검은 곰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라쿤은 깍지를 풀고 손을 무릎 위로 가져갔다. 키가 작은 그로써는 상체를 숙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 삼 년 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꺼내어졌다.
 이왕자의 어설픈 반역, 그 이후의 짧은 숙청.
 폴트 왕국은 이번 같은 일에 대비하기 위해 왕국 차원에서 헤르젠을 강화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르헨탈 제국처럼 말이다.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일정 수준의 무인에게 원한다면 작위를 준다. 또, 헤르젠 인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어 자체적으로 치안을 안정시킨다.
 그 내용이 알려진 뒤 상당수 귀족들이 반발을 했다. 괜히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까봐, 그리고 영지와 그에 미치는 영향력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원래 국법 아래, 따로 귀족법이 있었다.
 이전에는 귀족들이 알아서 편의를 봐주던 것이지만 국법으로 바뀌면 달라진다. 귀족들의 힘으로 헤르젠의 영향력을 억누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적절한 예가 바로 아르헨탈 제국이지.”
 “그렇습니다. 실력이 있고 충성을 맹세하면, 혈통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작위를 주었으니까요.”
 반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젠과 귀족의 충돌하면, 자연스럽게 황권이 강화되는 효과가 생긴다. 서로의 세력을 잡아먹고 견제하기 위해서 힘을 소모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성공적으로 제어한 예가 바로 아르헨탈 제국이었다. 그 결과 황제와 대장군의 권한이 절대적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닐 텐데?”
 반트의 말이 의미하는 걸 라쿤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일단 알폰소 후작 가문이 가장 적극적입니다. 휘하의 기사들이나 검을 배우러 온 이들을 내보내 하나의 헤르젠을 만들려 하고 있으니까요.”
 “데이몬트 후작 말인가?”
 “예,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대부분 그의 밑에 들어가길 원하고 있습니다.”
 반트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야 고작 폴라트리움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반대로 데이몬트의 미친 짓은 옆 나라 판토스 왕국까지 소문날 정도였다.
 그런 개망나니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했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인재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가만, 그렇게 되면······.”
 반트의 말에 라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시는 대로 많은 귀족들이 앞다투어 헤르젠의 영입에 힘쓰고 있습니다. 오늘 들렸던 백열의 헤르젠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덩치를 키우기 위해 질이 안 좋은 아이들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랬군.”
 낮의 일도 그런 경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오늘 하신 일이라면, 귀족 가문에서 알아볼 테고 알아서 자체적으로 정리를 할 겁니다. 소문이 안 좋게 나면 더욱 힘들어질 테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반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게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이전처럼 헤르젠 주변의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너희들은 어떻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라쿤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영향력이 겹치는 건 귀족뿐만이 아닙니다. 저희들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니까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라쿤, 어딘가 어려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검은 곰과 붉은 늑대가 죽었습니다.”
 “역시 그렇게 된 건가?”
 반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과정은 불과 몇 년 전 아르헨탈 제국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 황성 쪽은 정리가 끝나 있었고 그 영향이 변방으로 미치는 중이었으니까.
 반트는 직접 겪었다.
 힘이 없는 헤르젠이 어떤 일을 겪는지, 귀족을 등에 업은 이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아르헨탈 제국이라는 선례가 있다는 점이였다.
 현명한 피리안 공주라면 최소한 그 부작용 정도는 짐작할 터, 데이몬트 후작을 앞세운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라쿤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희 역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사부가 그랬어. 무엇보다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나? 뭐,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반트는 말과 다르게 표정이 어두웠다.
 라쿤은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저희가 뒤늦게 수소문해 본 결과, 수도를 떠날 때까지 다들 무사했습니다.”
 “그럼, 어디로 간 거지?”
 “정확한 행선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릭 님의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신다고······.”
 반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부의 친구 중에 제대로 된 인간들은 많지 않았다. 이용해 먹으려 드는 놈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이곳 폴라트리움까지 올라온 것이다.
 ‘왜일까?’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바로 눈앞의 라쿤 때문이었다.
 이전에야 자신이 어떻게든 벌어 온 것으로 꾸려 나갔다.
 자신을 포함해 겨우 일곱이었으니 그럭저럭 생활할 수준은 되었으니까.
 떠날 때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 바로 라쿤 때문이었다. 그가 보살피겠다고 한 이상, 가족들의 생활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 가능성도 컸다. 쓸데없이 엄격한 사부였으니 암흑가 조직의 돈을 받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으리라.
 차라리 본인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을 게 분명했다.
 친구에게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제길,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무심코 나온 말에 라쿤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다 반사적으로 말했다.
 “남문으로 나섰다고 들은 게 전부입니다.”
 “남문? 그럼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인데... 설마 콜튼 자작인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반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사람을 찾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정보 길드를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돈이 많은 든다는 단점은 있지만 신용 하나는 확실하거든요.”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에 있지?”
 “동쪽으로 가면 칼튼 거리에 하나 있고, 서쪽으로 가면 브로이튼 거리에 하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생소했다.
 “둘의 차이는?”
 “브로이튼 쪽은 아주 광범위합니다. 온갖 잡다한 것까지 다 취급하고, 거기서 필요한 것을 뽑아내는 방식입니다. 반대로 칼튼 쪽은 고급 정보를 위주로 취급하는 편입니다.”
 “흐음.”
 반트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피리안 공주가 칼튼으로 가라고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게다가 호루스가 보냈다고 하면 도움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뭐, 돈 따위야 문제될 게 없지만, 운이 좋으면 비용도 아낄 수 있으니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반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라쿤을 쳐다봤다.
 “혹시 문제가 되는 일은 없나?”
 “괜찮습니다.”
 “규칙을 어기는 애들은?”
 “결코 없습니다.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 암흑가라면 암흑가답게, 그래서 저희들은 절대 양지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반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사실 라쿤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기면 그대로 조직이 박살이 났을 테니까.
 하지만 그 덕에 헤르젠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고, 암흑가에 유일하게 남은 조직이 되었다. 세력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게 더욱 중요한 법이었다.
 라쿤은 초조한 눈빛으로 반트를 쳐다봤다.
 오 년 전, 그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반트는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 같았다. 게다가 미친개라는 별명이 너무나 어울렸다.
 단검 무술을 익힌 자신이었다. 붉은 늑대는 관절기를, 검은 곰은 신체 강화 계열의 무술을 익혔다.
 삼 대 일의 싸움.
 자신의 단검이 반트의 왼쪽 팔의 뼈를 쪼갰다.
 붉은 늑대의 손가락이 반트의 오른쪽 어깨를 무너뜨렸고, 검은 곰의 주먹이 갈비뼈를 박살내 버렸다.
 그럼에도 결과는 패배였다.
 늑대의 이빨과도 같은 손가락은 겨우 다섯 개만 멀쩡했고, 검은 곰은 허리가 부러졌다.
 자신 역시 블루 라쿤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얼굴 왼편이 파랗게 물들어 버린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라쿤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반트를 쳐다봤다.
 분명히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몰라 더욱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순간, 라쿤의 눈이 커졌다.
 
 * * *
 
 지금도 분명히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치욕적인 그날, 바로 삼 대 일의 싸움을 벌였던 그때를.
 그 싸움 이후, 세 조직의 보스들은 무려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 반트가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그날, 세 사람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반트가 정한 선을 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당시 그가 원했다면 암흑가의 세 조직을 통합해 움켜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련 따위는 없는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가끔 잘하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갈 뿐 조직의 일에 전혀 관여치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왔다.
 여행을 간다고, 폴라트리움을 벗어날 거라고 했다.
 그게 삼 년 전이었다.
 지금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외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처절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로 그 깊은 흔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드러난 날선 검이 아닌, 검집에 꽂혀 있는 검이 더 무서울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까 그놈을 불러줘.”
 아마도 루헨을 말하는 것이리라.
 라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반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자신이 만들었던 팔의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무려 한 뼘 이상을 그었고 뼈까지 깊숙이 박혔던 단검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었다.
 라쿤은 크게 놀라며 반트를 쳐다봤다.
 반트는 그저,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깨달음이라는 거, 참 좋더군.”
 
 * * *
 
 “여, 여기입니다.”
 루헨이 떨리는 입으로 말했다.
 “칼튼 거리, 파란 집. 역시 정확하군. 그런데 말이야.”
 반트가 돌아보자 루헨이 움찔거렸다.
 “혹시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자, 잘 모릅니다. 정보 길드라고 하지만 저희가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뭐?”
 반트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루헨은 다급히 손짓을 하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정보 길드라는 게 종류도 많고 힘도 다른데, 동네 구멍가게 같은 데야 서로 협력하지만 여기하고 브로이튼은 급이 다릅니다. 거의 왕국 전체를 아우르는 규모라서요.”
 “그래도 여기는 너희들 구역이잖아.”
 “하지만 이쪽 길드는 무리입니다.”
 “발리츠는 뭐라고 그래?”
 반트의 말에 루헨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발리츠 폴튼 백작, 왕실의 먼 친척 중 한 명으로 폴라트리움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자였다.
 문제는 그와 라쿤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수도의 경비 책임자와 암흑가의 수장이 손을 잡으면 보다 일을 진행하기 수월할 테니까.
 갑자기 루헨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발리츠 님도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높은 윗선하고 관련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으라고요.”
 반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높은 윗선이 말하는 바는 뻔했다. 귀족, 그것도 최소 백작급 이상에 왕실과 관련된 인물일 터.
 반트의 머리에 갑자기 피리안 공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말이군.’
 고개를 끄덕인 반트는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그때 루헨이 물었다.
 “따로 필요하신 게 없으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딜 내빼려고.”
 반트의 손이 루헨의 목덜미를 잡았다.
 “앞장서.”
 “예?”
 반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아는 놈 있지?”
 “아, 아니 그게······.”
 “우리 편하게 가자. 내가 편해야 너도 편하고, 내가 불편하면 너도 불편해지잖아.”
 반트가 손가락을 우드득거렸다.
 그 뜻을 파악한 루헨은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체념의 의미였다. 따져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있다는 행동인 것이다.
 정보 길드, 말 그대로 정보를 사고파는 곳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정보를 사러 온 사람에게도 뭐라도 캐내려고 했다.
 정보는 곧 돈이니까.
 그 때문에 정보 길드는 안으로 들어가기가 까다로웠다. 절차도 많았고 이런저런 확인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척 편했다. 번거로움을 피하고 서둘러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반트가 쐐기를 박았다.
 “왜, 불편해지고 싶니?”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루헨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반트가 말하는 불편이 그냥 불편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럼 가자.”
 그렇게 루헨은 멱살이 잡히진 않았지만, 아주 중요한 뭔가를 잡힌 사람처럼 고분고분 앞장섰다.
 몇 마디 말이 오가고, 곧 문이 열렸다.
 반트는 웃으며 루헨의 덜미를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덕에 몇 단계까지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마지막 방 안에서 그와 마주치기 전까지였다.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
 반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눈앞의 청년은 데이몬트 후작과 너무도 닮아 있었으니까.
 한 이십 년 정도 시간을 되돌린, 딱 그런 느낌이었다.
 많게 봐줘도 서른은 넘었을까?
 그런 얼굴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뭐가 필요해서 왔는가?”
 반트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았다.
 얼굴과 말투가 이십 년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애써 근엄하게 보이려는 게 도리어 너무 이상한 것이다.
 반트가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게 보였던 것일까?
 젊은 데이몬트가 발끈했다.
 “뭐가 불만인가?”
 당장에라도 뛰쳐나와 멱살을 잡을 것 같은 얼굴로 애써 화를 참는 모습이었다.
 “아아, 흥분하지 말고, 그냥 몇 가지 정보를 사려고 온 것 뿐이야. 그런데... 대체 데이몬트 후작과 무슨 관계지?”
 불쑥 본심이 나와 버렸다.
 그 말에 상대는 오히려 당황해하며 변명을 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나, 난 아무 관계가 없다.”
 “아니, 아무리 봐도 닮아서. 동생이라 해도 믿겠는 걸.”
 “가, 감히 네가 형님을 안단 말이냐?”
 “형님?”
 반트의 반응에 상대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쏟아진 물을 담을 수 없듯, 이미 내뱉은 말은 돌릴 수 없었다.
 특히 상대가 반트라면 더욱 그랬다.
 “오호라, 데이몬트 후작에게 이런 동생이 있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가만, 피리안 공주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순간 경악을 하는 상대였다.
 “네, 네가 감히 공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다니. 용서할 수 없······.”
 상대가 벌떡 일어나 검을 빼려 했다.
 동시에 반트의 오른손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검을 도로 밀어 넣었다.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상대는 용을 써봤지만, 헛짓일 뿐이었다.
 “자자, 진정하고. 난 단지 정보를 사러 온 손님이야. 그냥 네 형님과 며칠 함께 여행을 했고, 그때 공주도 같이 있었어.”
 “그게 정말이냐?”
 “증거를 보여 주지. 호루스. 됐냐?”
 순간 상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반트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게다가 갑자기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죄송합니다. 공주님의 손님이신 걸 모르고,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정중하게 나오자 오히려 어색해진 건 반트였다.
 “제 이름은 크란트, 데이몬트 후작님의 사촌 동생입니다. 단지 사정이 있어 일단 여기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아, 그게······.”
 반트는 일단 크란트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바르게 나오는데 망나니처럼 굴 수는 없는 법.
 “저는 반트라고 합니다. 몇 가지 정보를 얻으러 왔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저자세로 나오는 크란트의 모습이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일단, 호루스가 무슨 의미입니까?”
 크란트는 말없이 루헨을 쳐다봤다.
 “제가 알기로 동행하신 분이 이 동네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발리츠 님의 얼굴을 봐서 출입은 허가했지만, 이 이상은 곤란합니다.”
 곱게 포장했지만, 루헨 따위한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반트가 짧게 말했다.
 “너, 나가라.”
 루헨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잠시 멍해 있었다. 그러다 반트가 주먹을 쥐자마자 서둘러 도망쳤다. 있어 봐야 손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루헨이 밖으로 나가자 크란트가 말했다.
 “호루스는 공주님의 다른 신분이자 다른 이름입니다.”
 “그걸, 그렇게 쉽게 말해 줘도 되는 겁니까?”
 “공주님께서 이름을 알려줬다는 건, 충분히 그래도 된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 생각이 개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흐음.”
 반트는 대충 흐름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왜 피리안 공주가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반트가 알기로,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다.
 자신이 공주의 일을 도운 건 우연, 게다가 그 이상의 대가를 충분히 받았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때 크란트가 말했다.
 “공주님은 가능하면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주의입니다. 그리고 손을 잡을 만한 상대라면 상당한 호의를 베푸시는 편입니다. 결코 깊이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백 명에게 잘해주어 열 사람만 내 편으로 만들어도 남는 장사라 생각하시니까요.”
 “그거 참, 훨씬 손해 볼지도 모르는데.”
 크란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적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게 더 남는 장사니까요.”
 확실히 크란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정면의 적에게 여러 번 찔리는 것보다 뒤통수에 박힌 칼침 한 방이 더욱 아픈 법이었으니까.
 반트는 모르고 있었지만 피리안 공주가 판단을 내릴 때 아주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그럼 원하는 정보를 말씀하십시오.”
 “그럼 공짜입니까?”
 크란트는 웃으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공주님의 권한 이하라면 모든 게 무료입니다. 따지면 거의 전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말 마음씀씀이가 넓으신 공주님이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알고 싶은 건, 한 사람에 대한 기록입니다. 제릭 피닉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 반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사부이자 아버지였으며 가족이었다. 무려 십오 년을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크란트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일정한 신호대로 벽을 두드렸다.
 갑자기 천장에 문이 만들어지더니 책장 하나가 내려왔다.
 고작 두 팔을 벌린 정도의 크기였지만, 수백 권이 넘는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반트는 책장의 한 편에 영문으로 ‘J’ 자가 각인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제릭, 제릭이라······.”
 크란트의 손이 몇 개의 책을 넘기고, 다시 몇 개의 서류철을 옮겼다. 곧 그의 손에 잡힌 건 책도 아닌 그저 몇 장의 서류였다.
 반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사부는 고작 저렇게 평가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곧, 그 이유가 밝혀졌다.
 “제릭 피닉스, 피닉스 헤르젠의 주인. 올해 나이 마흔아홉이고, 중급의 무투가. 그리고 흐음······.”
 크란트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정보의 양과 정기적인 갱신 주기로 봤을 때, 대략 보름 전후에 사망했다고 나옵니다.”
 “뭐?”
 반트는 목소리가 급격히 올라갔다.
 반대로 크란트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분명히 사망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 * *
 
 폴트 왕국 동남부에 하나의 도시가 있었다.
 이름하여 라 폴트. 폴트 왕국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그런 의미였다.
 남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서 해상무역이 활발한 곳, 동시에 길이 잘 닦여 있어 수도까지 고작 오 일이면 갈 수 있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우선 라 폴트로 먼저 모였다. 최대의 무역항, 폴트 왕국 제이의 도시 등 실로 다양한 이름이 붙은 곳이 바로 여기인 것이다.
 마침 한 대의 마차가 라 폴트 외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가 선 것은 반트와 사부 제릭이 처음으로 만난 곳, 바로 외곽의 빈민가였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반트가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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