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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디엔 전기 1-1

2017.03.29 조회 3,949 추천 31


 아르디엔 전기 1권
 
 목차
 Prologue
 Chapter 1 미래와 현재가 공존하는 밤
 Chapter 2 라하트마의 자서전
 Chapter 3 리더니까
 Chapter 4 절대 우위
 Chapter 5 미래의 안배
 Chapter 6 새로운 시작
 Chapter 7 광속의 기사
 Chapter 8 잠룡의 시대
 Chapter 9 바뀌는 흐름Ⅰ
 Chapter 10 바뀌는 흐름Ⅱ
 Chapter 11 잘못 건드리다
 Chapter 12 가을밤의 악몽
 Chapter 13 상그레이 산맥의 광산
 Chapter 14 위기일발
 
 
 
 Prologue
 
 
 
 눈을 떠.
 돌아갈 시간이야.
 
 
 
 Chapter 1 미래와 현재가 공존하는 밤
 
 
 
 4년 전, 내 출생의 비밀이 풀렸다.
 황금의 백작이라고 불리는 자가 있다.
 이름은 세레넬 드 하이미언.
 하이미언 백작은 남부러울 것 없이 살면서도 가슴에 몽우리 진 한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친아들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평생 사랑했던 한 명의 여인이 있었고 자식도 그 여인에게서 얻은 사내아이가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부인을 너무 사랑했다.
 그런데 부인은 아이를 출산 도중 산고로 죽음을 맞았다.
 부인에 대한 사랑이 크디컸던 하이미언 백작은 모든 원망을 아이에게 돌렸다.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아이에게 표출시키며 죽이려 들었고 이를 주변에서 하인들이 겨우 말렸다.
 백작은 그 아이를 자신의 눈에 띄게 하지 말라 일렀다.
 하인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백작이 모를 곳으로 보내 버렸고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백작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내쳤던 아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에 나섰다.
 그는 아내를 잃고 난 이후부터 급격하게 몸이 쇠약해지더니 이제는 임종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되고 보니 더더욱 아이가 보고 싶어진 것이다.
 하이미언 백작은 결국 자신의 피가 섞인 친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넘겨주겠다고 공고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계부와 계모를 대동하고 몰려들었지만 그중에서 단 한 명도 하이미언 백작의 아들은 없었다.
 그의 아들에겐 남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다.
 왼쪽 어깨에 있는 용 모양의 반점이다.
 그것은 백작이 사랑했던 부인에게서 그대로 유전되어진 것이었다.
 내가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아느냐고?
 하이미언 백작이 임종한 이후 그의 유서가 공개되었는데, 모두 거기에 적혀 있던 얘기들이다.
 그리고 그 용의 반점은 바로 내 어깨에 있었다.
 그래, 불과··· 9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스스로 파내 버려서 흉측한 상처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어렸을 적부터 그 반점 때문에 놀림받으며 커왔다.
 난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늘 외톨이였다.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게 끔찍할 만큼 싫었다.
 뭐, 사실··· 지금에 와서 반점이 남아 있었다고 한들 난 하이미언 백작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다.
 지금의 난 곧 죽을 위기에 처해 있으니까.
 게다가 황금의 백작 역시 지금은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
 “망할··· 재수도 없지.”
 내 직업은 기사.
 그러나 평범한 기사는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일당백의 힘을 자랑하는 최정예 기사들이었다.
 이그드라엘 대륙에는 세 개의 강대국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서로를 견제만 하던 강대국들 중 그라함 왕국과 가르테아 제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라함 왕국은 내가 몸담고 있는 내 조국이었다.
 나는 그라함 왕국 내의 고아원에서 길러졌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에게 검술과 박투술 같은 것들을 가르쳤다.
 당시의 난 일반적인 고아원의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으니,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열심히 배워 나갔다.
 훗날, 나를 비롯한 고아원의 아이들에게는 무적기사단의 단원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언제든 전쟁이 일면 투입될 수 있도록 긴장을 풀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적기사단은 그라함 왕국을 위해 싸워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실 무적기사단은 가르테아 제국의 첩병이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가르테아 제국이 진짜 우리의 나라이며, 언제든 가르테아 제국의 명이 떨어지면 그에 따라야 함을 교육받아 왔다.
 우리들은 내부에서부터 그라함 왕국을 무너뜨려 나갔다.
 밖에서는 가르테아 제국이 정신없이 치고 들어왔다. 그라함 왕국이 무너지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로 이루어진 무적기사단은 그렇게 그라함 왕국의 병적인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가르테아 제국은 우리를 버렸다.
 이제 더는 쓸모없는 폐품처럼 우리를 죽이려 들었다.
 우리들은 억울함에 소리치며 대항했지만 가르테아 제국의 ‘기이한 힘’을 지닌 자들에 의해 처절히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힘을 이용했으며, 마법사들까지 끌고 나와 쉽게 승기를 쥐었다.
 이런 건··· 너무 억울했다.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피가 토해져 나온다.
 이제는 뻥 뚫려 버린 복부에서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감각조차 마비된 듯하다.
 고통이 사라지고 점점 몸이 편안해진다.
 천천히 감기는 시야 너머로 전우들의 시체와 땅에 박힌 검들이 보인다.
 그 모든 것은 붉은 노을 아래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억울해.’
 그 감정만이 온통을 지배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게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이토록 멍청한 일생을 되밟진 않으리라. 평생을 타국의 꼭두각시처럼 살다 가진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에 와선 다 부질없는 바람이다.
 천천히 눈이 감겨온다.
 붉게 물든 대지는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이게 내 생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되겠지.
 “이봐 형제, 이게 무슨 꼴이야? 볼품없이.”
 형제? ···누구지?
 누군가가 내게로 다가섰다. 희미한 시야에 검은색 신발이 보였다.
 “네가 갖고 있던 능력을 벌써 사용해야 한다니. 조금만 더 살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더욱 많은 미래를 보아두고 죽는 게 너에겐 이득이거든. 뭐··· 크게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타임 리셋’의 능력은 네가 죽지 않는 한 발동하지 않으니까.”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타임 리셋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네. 내가 누군지도 전혀 짐작 못하는 것 같고. 무리도 아니지. 아무튼 부러워.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능력이라니. 과거로 돌아가 버리면 그때 나는 너와 어떤 관계로 지내게 될까?”
 “끄으윽······.”
 입을 열어봤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어쩐지 낯익은 것 같다.
 대체 누구지?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모르겠다.
 “우리는 오래전에 만났지. 그리고 난 널 항상 지켜봤어. 넌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택된 ‘하멜의 일족’이야. 하이미언 백작이 고작 부인에 대한 사랑과 핏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널 찾은 것 같아? 정신차리라고, 친구.”
 하멜의 일족? 그건 또 뭐란 말이야.
 “아,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돌려주지. 이번엔 파내거나 하지 말라고. 이건 네가 선택된 자라는 증표 같은 거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왼쪽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어깨에서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일었다.
 뭘 한 거지?
 어깨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목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상황이 의문 속에 파묻혀진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 아직도 기억 못하는 것 같은데. 난 말이야······. 아니, 내가 누군지에 대해선 하나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지. 힌트를 주자면 ‘그림자’ 정도일까?”
 ···의식이 끊어지려 한다.
 그 와중에 나른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눈을 떠. 돌아갈 시간이야.”
 
 ***
 
 아르디엔의 어린 시절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고아원을 빙자한 무적기사단에 맡겨져서 자라는 내내 오른쪽 어깨의 용 모양 반점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었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용의 반점은 그저 아르디엔을 놀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의 성격에 있었다.
 늘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있으려 했다.
 게다가 심성이 여리고 겁이 많아 항상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더불어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도 놀림의 원인이 되곤 했다.
 그래서 아르디엔은 서로 뭉쳐야 할 부모 없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말았었다.
 무적기사단에 들어온 아이들은 갓난아이일 때 버려지거나 형편이 어려운 부모들이 팔아넘긴 경우였다.
 때문에 그들끼리는 유대관계가 깊어야 할 터인데, 아르디엔만큼은 지독하게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아르디엔은 성인이 되어서야 겨우 몇몇의 동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아무튼 그는 스스로도 상당히 예민할 사춘기 시절, 용의 반점 때문에 놀림받는 게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그 반점을 칼로 긁어내 버렸다.
 이후로는 더욱 인생길이 진창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끝없이 이용만 당하다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젠장, 그때 반점을 긁어내는 게 아니었어.’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아르디엔은 이미 죽었어야 할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그리고 몸이 매우 가볍다는 걸 느꼈다.
 ‘가만··· 몸이 가벼워? 나는 죽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조화지? 아니면 아직도 죽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질기기도 해라.’
 이왕 죽을 거면 빨리 좀 죽어버리지, 하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이미 거지 같았던 그의 인생에 미련은 없었다.
 아르디엔은 인생이 바뀔 만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모두 놓쳐 버렸다.
 더불어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던 행운까지 애써 무시해 버리곤 했다.
 어차피 그런 작은 행운을 잡아봐야 앞날이 바뀔 거라 생각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외로울 것이고, 밑바닥에서 전전해야 할 테니까.
 아르디엔은 이미 스스로의 인생을 그렇게 못 박아 놓고 있었다.
 ‘자, 끝날 거면 빨리 끝나라!’라고 속으로 외쳐 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게 숨을 쉬는 것이 편안했다. 더불어 어디에서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감각이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는 설마설마하면서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그런데,
 “헉!”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아르디엔의 눈에 들어온 천장이 매우 익숙했다. 천장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르디엔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우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살폈다.
 그는 2층 침대의 윗칸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천장이 가까웠던 것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혹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한때를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반문했지만 그렇다기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어떻게 된 거지? 엇!”
 아르디엔이 무심코 말을 내뱉다가 깜짝 놀랐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변성기가 끝나갈 무렵 소년의 그것이었다.
 천천히 목을 만져 보았다. 불룩 튀어나왔어야 할 목젖이 살짝 밋밋했고, 목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의 감촉도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아르디엔의 손은 검을 잡고 오랫동안 휘두른지라 딱딱하고 거칠어야 정상이었다.
 두 손을 바라보았다.
 푸른 달빛에 반사되어 비춰지는 손은 작았다.
 아직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의 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일부러 소리 내서 자문했다. 역시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직 앳됨이 남아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머릿속에서 문득 누군가의 속삼임이 떠올랐다.
 [눈을 떠. 돌아갈 시간이야.]
 “핫!”
 순간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그는··· 그는 누구였더라?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였는데.’
 아르디엔은 죽음을 맞기 전, 자신에게 속삭이던 인물에 대해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누구였을까?
 아니, 그보다 지금의 난 어떻게 된 것일까?
 아르디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은 트윈 문이 뜨는 밤으로, 두 개의 동그란 달이 밤을 비추고 있었다.
 크기까지 똑같은 쌍둥이 달.
 하지만 두 개의 달이 가지는 의미는 달랐다.
 푸른빛을 띠는 빌루이는 현재를 뜻하고 노란빛을 띠는 레너드는 미래를 뜻한다.
 오늘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밤.
 “아······.”
 아르디엔은 갑작스레 기시감을 느꼈다.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으로 향했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 중 분명히 트윈 문이 뜨던 날 밤에 잠에서 깼었던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꿨던 꿈이 하도 요란해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대륙력 368년 9월 15일.
 그렇다면 십 년 전의 상황.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그는 책장에서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기장을 펴보았다.
 자신의 필체로 마지막에 적혀진 일기의 날짜는 9월 14일이었다.
 지금은 자정이 넘었으니 9월 15일.
 아르디엔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빌루이와 레너드가 동시에 떠오른 밤.
 미래와 현재가 공존하는 밤이다.
 
 ***
 
 “언제까지 퍼 자고 있을 셈이야!”
 곤히 자고 있던 아르디엔의 귀로 갑작스런 노호성이 들려왔다.
 “일어나, 이 새끼야!”
 이번엔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이 목소리는 아르디엔에게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듣는 것만으로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지금 들려서는 안 되었다.
 들려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될 수 없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전쟁터에서 아르디엔보다 먼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이 잘려 죽은 것을 아르디엔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지금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그 녀석의 소년 시절 목소리였다.
 아르디엔은 힘겹게 눈을 떴다.
 역시나 그의 앞엔 익숙한 숙소의 천장이 보였다.
 “겨우 일어났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를 노려보고 있는 파란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요슈아였다.
 아르디엔과 한방을 쓰고 있는 요슈아는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행패를 부렸었다.
 아르디엔은 요슈아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십 년 전의 그때와 같았다. 아마 요슈아는 아르디엔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서 밥이나 처먹고 와.’
 “어서 밥이나 처먹고 와.”
 아르디엔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
 그것은 항상 그가 아침마다 내뱉은 입버릇 같은 것이다.
 갸름하지만 남자다운 강인함을 간직한 얼굴. 그게 요슈아의 인상이었다.
 아르디엔은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복도로 걸어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아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광경 속에서 아르디엔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가만히 훌쩍이다가 어느 순간 크게 울어 젖혔다.
 “돌아왔어··· 돌아왔어.”
 나라를 빼앗기기 전 그때로 돌아왔어!
 아르디엔은 한동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
 
 무적기사단은 대외적으로 고아원으로만 알려져 있다.
 대단히 폐쇄적이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고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아원 라우덴.
 그것이 세간의 이미지였다.
 라우덴 내에서는 백여 명의 아이를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교육시키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한 힘을 자랑하고 있는 그룹이 러스트리옴이고 2위가 데시에도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힘이 없는 그룹이 요슈아와 아르디엔이 속한 그랑로드였다.
 아르디엔은 그 그랑로드 안에서도 최하위의 서열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아르디엔은 매우 총명하고 뛰어난 기지를 가진 아이였다.
 게다가 또래에 비해 힘도 셌었다. 하지만 그런 아르디엔이 별 볼 일 없어진 것은 스스로 용의 반점을 파낸 이후부터였다.
 ‘이제부터는 달라지겠어.’
 굳게 다짐한 아르디엔은 앞으로의 일을 위해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내 기억대로라면 오늘 분명히 식당에서······.’
 아르디엔은 9월 15일 날 아침.
 식당에서 겪었던 치욕스런 일을 떠올렸다.
 모든 것은 평소 아르디엔을 가장 괴롭혀 왔던 다르난 일파 때문이었다.
 다르난은 아르디엔과 같이 그랑로드에 속한 아이였다.
 그랑로드 내에서 그의 서열은 썩 높지 않았다. 한데 자신보다 서열이 한 단계라도 낮으면 무조건 무시했으며, 서열이 높은 사람에게는 언제든 고개를 조아리고 아부를 떠는 치졸한 인간이었다.
 “후우.”
 우선 식당의 입구에서부터 조심해야 한다.
 들어서는 순간 다르난이 스프가 가득 담긴 식판을 고의적으로 아르디엔의 얼굴에 엎어버릴 것이다.
 아르디엔은 식당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그 순간!
 역시나 과거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는 다르난의 입에서 튀어나올 대사까지 알고 있었다.
 ‘이제 왔냐, 잠꾸러기.’
 “이제 왔냐, 잠꾸러기!”
 똑같았다.
 아르디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얼굴로 날아드는 식판을 가볍게 피했다.
 이에 다르난은 놀란 표정으로 허망하게 바닥을 구르는 식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아르디엔에게 시선을 옮기는 순간,
 퍼억!
 갑작스레 날아든 주먹은 다르난의 안면을 정확히 때렸다.
 “이, 이 새끼가!”
 다르난이 코를 부여잡으며 눈을 부라렸다.
 과거의 아르디엔이었다면 분명히 겁먹고서 도망을 쳤을 것이다. 아니, 주먹을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못해야 한다. 그는 분명 또래 아이들보다 몇 갑절이나 힘이 셌지만 항상 구타를 당하는 쪽이었다.
 그는 모질지 못했고 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더 이상 겁쟁이 아르디엔은 없었다.
 아르디엔은 다르난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다음엔 줄이었어.’
 식판을 받으러 가는 길목에서 다르난의 부하 격인 페토와 라이센이 줄의 양 끝을 잡고 숨어 있었다.
 과거의 아르디엔은 얼굴에 수프를 뒤집어 쓴 터라 그 줄을 보지 못하고서 그대로 걸려 넘어졌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구타를 당한 뒤, 바지가 벗겨져야만 했다. 새하얀 엉덩이를 모두에게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식판이 있는 곳으로 가는 그의 눈에 밧줄이 보였다.
 아르디엔은 그 밧줄을 힘껏 당겼다.
 그러자 밧줄을 잡고 있던 두 명의 아이는 괴물 같은 아르디엔의 힘에 이끌려 튀어나왔다. 아르디엔은 그런 두 녀석의 머리를 잡고 서로 박치기를 시켰다.
 쾅!
 “아야야!”
 “으악!”
 이에, 뒤에서 다르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 이 새끼!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열여섯이나 된 나이다.
 그런데도 이런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르디엔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아르디엔은 다르난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바닥에 그대로 메다꽂았다.
 꽝!
 “크윽!”
 등을 제대로 찍힌 다르난이 괴로워했다.
 아르디엔은 조소를 머금으며 한데 어우러져 있는 다르난 일파에게 다가섰다.
 더 혼내줄까 하다가 우스운 생각이 들어 관두기로 했다.
 “앞으로 날 건드리면 나도 더 이상 가만있지 않을 거야.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지만 다음부터는 엉덩이를 까서 두들겨 줄 테니까 그리 알아. 알았냐?”
 아르디엔의 눈에서는 살기가 타올랐다.
 그 살기가 어찌나 매서운지 다르난은 저도 모르게 도망쳤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람과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을 아르디엔에게 던졌다.
 
 ***
 
 아르디엔은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아침부터 식당에서 크게 한판 벌였지만 이를 두고 나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라우덴에서 아이들에게 온갖 무술을 가르치는 이른바 ‘선생님’들은 주먹다짐 정도는 눈감아주었다.
 오로지 강해지기 위한 살인 병기를 만드는 마당에 오히려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오히려 놀라서 아르디엔을 눈여겨보는 것은 동년배의 아이들이었다.
 그 얌전하기만 하던 샌님이 하룻밤 사이에 변모하다니. 놀랄 노자였다.
 아르디엔은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눈에 확 띄었다.
 남자치곤 작은 얼굴에 곱상하다 못해 아름다운 외모까지 열여섯 살 무렵의 아르디엔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거울에 비친 그는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용의 반점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받는 것이 싫어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것을··· 내가 파냈었지.’
 아르디엔이 붕대를 살짝 움켜쥐었다.
 그때 그의 기억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 아니, 과거의 시절로 돌아오기 직전의 일이 떠올랐다.
 정체 모를 이가 그의 왼쪽 어깨를 손으로 짚었고,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일었다.
 더불어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돌려주지. 이번엔 파내거나 하지 말라고. 이건 네가 선택된 자라는 증표 같은 거니까.]
 “선택된 자의 증표······.”
 낮게 읊조린 아르디엔이 자신의 왼쪽 어깨에 감겨진 붕대를 풀어 보았다. 그러자 엄지손가락만 한 길이의 붉은 반점이 보였다. 용의 모양을 하고 있는 붉은 반점.
 ‘역시 그랬어.’
 의문의 존재는 그에게 사라졌던 용의 반점을 다시 새겨주었던 것이다.
 그는 용의 반점을 파내기 전까지 신체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기억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좋았다.
 무참히 버렸던 용의 반점을 다시 얻게 된 지금, 그는 잃어 버렸던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절대기억력을 전부 되찾았다.
 때문에 그가 겪었던 모든 미래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다음 날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 수 있단 얘기다.
 그의 가슴이 빠르게 요동쳤다.
 한참 동안 반점을 바라보던 아르디엔은 붕대를 다시 감으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이제 더 이상 용의 반점은 놀림거리가 될 수 없었다. 비단 반점뿐만이 아니라 곱상한 외모도, 하얀 피부도 콤플렉스로 존재치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놀리거나 핍박하려 든다면 깨부숴 버릴 뿐이다.
 “드르렁.”
 옆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룸메이트인 요슈아였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잠을 더 청한다. 라우덴에선 세 끼 식사를 꼬박 챙겨먹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먹고 싶은 사람만 와서 먹으면 그만이다.
 아무튼 그 때문에 요슈아는 아르디엔의 변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마 알았다면 편하게 자고 있진 못했으리라.
 아르디엔이 그런 요슈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엔 마냥 밉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다시 보게 된 그의 얼굴이 반가웠다.
 물론 다른 모든 동료의 얼굴도 반가웠다.
 현재 아르디엔에겐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악감정 따윈 없었다. 식당에서 다르난 일파를 혼내준 것도 그저 버릇을 고쳐 놓으려고 했을 뿐이다.
 아르디엔은 누구든지 굳이 시비를 걸어오지 않으면 건들지 않을 요량이었다.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린 아르디엔이 용의 반점을 쓰다듬었다.
 ‘확실해. 시간을 역행한 것은 오로지 나밖에 없어.’
 오늘 식당에서 겪었던 일들에서 미래를 기억하는 것은 자신 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멜의 일족··· 타임 리셋······.’
 아르디엔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별 다른 답이 나오질 않았다. 머리만 더 아파지는 것 같았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난 또 한 번의 기회를 손에 넣었다.’
 복잡한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은 지금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중요한 과제였다.
 생전에 놓쳐 버렸던 모든 기회들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아르디엔은 마음속으로 하나의 결심을 세웠다.
 본래 그는 나라에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적기사단을 이용하고 버린 가르테아 제국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당연히 그라함 왕국을 부강시켜야겠다는 욕심이 자라나도록 만들었다.
 아르디엔은 창가로 걸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하늘엔 흰 구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결코 그라함 왕국이 핏빛으로 물들게 하지 않으리라.
 그는 하늘을 보며 맹세했다.
 ‘지금부터 세상은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빌루이와 레너드가 동시에 떠오른 밤.
 미래와 현재가 공존했던 밤에 아르디엔은 새로이 태어났다.
 
 
 
 Chapter 2 라하트마의 자서전
 
 
 
 9월 16일.
 아침부터 또 요슈아의 행패가 이어졌다.
 “일어나, 이 새끼야!”
 퍽!
 오늘은 주먹질까지 해온다.
 덕분에 아르디엔은 허리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깨야만 했다.
 라우덴에 속해 있는 아이들은 모두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지옥 같은 훈련을 받아온 녀석들이다.
 그들의 주먹질 한 번이면 어지간한 어른도 견디지 못하고 나자빠지기 일쑤다.
 그러니 무방비 상태에서 자다가 얻어맞은 아르디엔의 고통은 상당했다.
 순간 화가 확 치밀었다.
 “이런 씹어 먹을······.”
 아르디엔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붉은 눈으로 요슈아를 노려보았다. 이에 요슈아는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죽거리며 아르디엔의 머리를 때려 버렸다.
 “뭐야! 한번 해보자는 거냐!”
 요슈아는 그랑로드 내에서 서열 5위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아르디엔을 거침없이 대했다.
 감히 서열 최하위의 인간이 자신과 한방에서 묵는다는 것 자체가 맘에 안 들었다.
 아르디엔은 윽박지르는 요슈아를 혼내주려다가 참았다.
 요슈아는 전쟁이 일었을 때, 아르디엔을 구하려다 적의 검에 목을 잘렸었다.
 문득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며 짜증이 한순간에 삭혀졌다.
 아르디엔은 피식 웃고서 방을 나섰다. 그러자 뒤에서 요슈아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집애 같은 새끼, 넌 우리 그랑로드의 수치야!”
 
 ***
 
 아르디엔은 식당에 향하기 전 세면실로 들렀다.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이 보인다.
 원체 동안인 그였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왔더니 더욱 어려 보였다. 어깨에 선명히 박힌 용의 반점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 반점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걸 지워서는 안 된다.
 그 순간 아르디엔의 강한 힘이 사라지고 만다. 더불어 하이미언 백작의 아들도 될 수가 없다.
 아르디엔은 용의 반점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
 
 식당에서는 여전히 각 그룹의 서열에 따른 자리싸움이 성행하고 있었다.
 서열 1위의 러스트리옴은 상태가 가장 양호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었고, 2위 데시에도르는 그보다 좋지 않은 식탁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그랑로드의 아이들은 제일 낡아빠진 식탁과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해야 했다. 그들은 아무리 일찍 식당을 찾아도 나중에 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랑로드가 식사하게 되는 시각은 6시 20분부터다.
 그때쯤이면 앞서 있는 두 그룹이 모두 배식을 마친 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같은 그룹 내에서도 서열 싸움이 있다.
 센 놈은 앞에서 줄을 서고 약한 놈은 마지막에 줄을 서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먹게 되면 항상 맛있는 반찬들이 동나 버리고 만다.
 때문에 아르디엔은 항상 변변찮은 식사만 해야 했었다.
 오늘도 아르디엔은 맨 끝줄에 섰다.
 성미 같아서는 그냥 앞줄에 서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제 슬슬 사건이 터질 때가 됐는데.’
 아르디엔은 오늘 식당에서 또 한 차례 벌어질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뭐야, 이 새끼야!”
 “······.”
 데시에도르 소속인 투나가 밥을 다 먹고 지나다가다 다르난과 부딪혔다. 순간 다르난의 식판에 담긴 스프가 투나에게 튀었고, 그 녀석은 이를 빌미로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다르난이나 투나나 서로의 실력은 비슷비슷하다. 투나 역시 데시에도르에서 하위의 서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시에도르는 그랑로드보다 그룹 자체의 서열이 높다.
 그래서 다르난은 만만해 보이는 투나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스프를 엎어놓고 사과 한마디 안 해?”
 투나는 눈을 부라리며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러자 다르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서 사과해!”
 투나가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다르난이었다.
 고작 이따위 놈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만만한 자식이 데시에도르를 믿고 설치는 꼬락서니라니.
 다르난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못하겠다면?”
 “뭐라고?”
 퍼억!
 다짜고짜 투나의 주먹이 다르난을 때려 버렸다.
 “네가 감히 데시에도르에 개기는 거야? 엉?!”
 퍽!
 이번엔 복부를 걷어차였다.
 다르난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신음을 흘리거나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이 정도면 몇 대라도 맞아줄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자존심이다. 다르난의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모두는 과연 다르난이 투나에게 주먹을 휘두를 것인지 관심있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르디엔은 알고 있었다.
 다르난은 결국 투나에게 맞기만 하다가 사과를 하고 만다.
 그것은 그랑로드의 모두를 위해서 그가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에는 다르난이 맞는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홀가분해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느껴지는 감정이 달랐다.
 자신의 동료가 데시에도르 녀석에게 맞는 것이 못마땅했다.
 아르디엔은 투나와 다르난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조용한 그의 움직임에 일단의 시선이 옮겨졌다.
 천천히 걷던 아르디엔은 한순간 발로 바닥을 탁 찼다.
 그리고 순식간에 투나의 앞으로 다가가서는 그에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넌 또 뭐야!”
 깜짝 놀란 투나가 뒤로 조금 물러서다가 아르디엔의 얼굴을 확인하자 안심하고서 고함쳤다.
 이에 다르난이 다급히 아르디엔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뭐하는 짓이야! 저리 빠져!”
 아르디엔은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폼 잴 때가 아니야, 인마. 투나 따위한테 얻어맞고 자존심 구길래?”
 “어제는 내가 방심하다가 너한테 맞은 거야. 고작 그 일 한번으로 기세등등해서 꼴값 떨지 말고 비켜라.”
 “야, 다르난.”
 “왜 인마!”
 아르디엔은 다르난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어제 때려서 미안했다. 역시 우리는 우리끼리 뭉쳐야지.”
 퍼억!
 아르디엔의 주먹이 투나의 얼굴을 가격했다.
 “컥!”
 투나는 돌덩이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아르디엔이 투나의 멱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다리를 걸었다. 투나의 무게 중심이 완전히 틀어졌다. 뒤로 넘어가는 투나의 명치를 발로 찍었다.
 퍽!
 “크악!”
 비명과 함께 투나가 대자로 뻗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씨팔······!”
 욕을 하며 겨우 몸을 추슬러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아르디엔은 투나에게 다가가 놈의 턱을 걷어찼다.
 “끄윽!”
 투나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고개를 따라 몸도 넘어갔다. 다시 대자로 뻗어버렸다.
 이에 식당에 있던 데시에도르 녀석들이 모두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다르난을 비롯한 그랑로드의 모든 아이들은 당장에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아르디엔만큼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다르난이 황급히 아르디엔을 만류했다.
 “너 왜 이러는 거냐? 지금껏 널 괴롭힌 우리에 대한 복수냐? 그런 거야?”
 “하여튼 어린놈들이 동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뭐?”
 다르난이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하는데 아르디엔이 소리쳤다.
 “지금 한번 해보자고 일어선 거지? 그럼 다 덤벼라.”
 순간 데시에도르의 모든 아이들은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그랑로드의 아이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르난도 더 이상 생각의 여지가 없었다.
 순식간에 식당 안에서는 그랑로드와 데시에도르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식판을 들고 휘두르는 녀석도 있었고 의자나 식탁을 집어 던지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광경은 아르디엔의 시선엔 그저 어린애 장난처럼 비춰졌다.
 이미 전장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져 나가는 경험을 해본 아르디엔이었다.
 고작 이런 싸움에 겁을 먹는다?
 ‘하!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버린 아르디엔은 주먹을 말아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서는 데시에도르의 서열6위인 페르코가 식탁 다리 하나를 꺾어 든 채 뛰어오고 있었다.
 “넌 오늘 죽었다고 생각해라!”
 페르코는 기세등등하게 외치며 흉기로 변한 식탁 다리를 휘둘렀다. 그는 분명 아르디엔이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제 깜짝 놀랄 정도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아르디엔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당하진 못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페르코만의 믿음’이었다.
 퍼걱!
 아르디엔은 그 자리에서 피하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은 페르코가 쥐고 있던 식탁 다리를 정통으로 맞췄다.
 빠각!
 식탁 다리가 부러졌다.
 그리고,
 퍽!
 페르코의 코도 부러졌다.
 “으악!”
 페르코의 얼굴이 뒤로 넘어갔다. 몸도 따라 허공에 붕 뜬 뒤 훨훨 날아갔다.
 콰당!
 식당 구석에 페르코가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뒷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페르코는 그대로 기절했다.
 아르디엔은 비호처럼 몸을 날려 다른 상대를 찾아 이동했다.
 그의 주먹이 한 번 휘둘러 질 때마다 한 명씩 바닥에 드러누웠다.
 퍼퍼퍼퍽!
 “끄악!”
 “악!”
 이미 지옥 같은 전장을 전전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던 아르디엔이었다.
 비록 몸은 어려졌지만 전생의 기억들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디가 치명적인 급소인지, 어디를 맞으면 바로 기절해 버리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터다.
 아르디엔의 활약으로 점점 그랑로드의 사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데시에도르에게 여지없이 패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용의 반점을 지우지 않은 아르디엔의 힘과 스피드는 또래 아이들에 비견하면 괴물 같은 수준이었다.
 과거에는 싸우기도 전에 주눅이 들어 얻어맞기만 해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힘이 있어도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하던 그때와 다르다.
 아르디엔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데시에도르의 녀석들을 계속 때려눕혔다.
 그러자 보다 못한 데시에도르의 서열 1위 카오란이 아르디엔의 앞에 섰다.
 “이제 그만 설치는 게 어때?”
 웨이브 진 금발 머리를 흩날리며 등장한 카오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카오란은 아르디엔 못지않은 미남이었다. 게다가 몸도 슬림했다. 때문에 그의 외형만 보고 샌님으로 판단했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훗날 가르테아 제국이 그라함 왕국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우는 것이 다름 아닌 카오란이다.
 지금은 러스트리옴의 일인자인 데젤의 실력에 밀려 이인자 역할을 하고 있지만, 카오란은 빠르게 성장해서 데젤을 능가해 버린다.
 아르디엔은 잠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니, 그리 오래된 기억도 아니다.
 그가 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한 이후, 시간을 역행하게 된 것이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니.
 한참 가르테아 제국의 배반으로 인해 무적기사단 모두가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있을 때.
 가장 치열하게 반항하며 덤벼들었던 것은 바로 카오란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동료들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스스로의 목숨은 생각지도 않고 검을 휘둘러 댔다.
 악에 받쳐 모두 도망가라고 소리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아르디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카오란은 정이 많은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 아르디엔의 미소는 카오란의 입장에선 자기를 비웃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간 카오란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정말 단단히 정신이 나갔구나.”
 말을 마침과 동시에 카오란이 아르디엔의 복부를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아르디엔은 오른발을 뒤로 빼내며 이를 피했다. 동시에 두 손으로 카오란의 발목을 잡아 허공에서 한 바퀴 확 비틀었다.
 카오란은 동물적인 반사 신경을 발휘해 발이 꺾이는 것과 동일한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면서 허공에 붕 떠버린 반대쪽 발로 아르디엔의 얼굴을 가격했다.
 터억!
 아르디엔은 잡고 있던 카오란의 발을 놓고 그것을 막았다. 그러자 카오란은 자유로워진 다른 발로 또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탁!
 아르디엔은 그것마저 막아버리고서 뒤로 조금 물러났다.
 카오란이나 아르디엔이나 실로 놀라운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새 데시에도르와 그랑로드의 모든 아이들은 카오란과 아르디엔의 주위를 빽빽이 둘러쌌다. 둘의 승패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이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군.”
 카오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르디엔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겁이 많고 주먹질 한 번 제대로 못해 무시만 당하던 아르디엔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아르디엔은 카오란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답해주었다.
 “너무나 긴 악몽을 꿨어. 그래서··· 다시는 똑같은 악몽을 꾸고 싶지 않을 뿐이다.”
 말을 마치며 아르디엔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의 주먹이 카오란의 얼굴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평범한 공격이 통할 리 만무했다. 카오란은 쉽게 아르디엔의 주먹을 피하며 반격을 가했다.
 쐐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카오란의 주먹이 아르디엔의 얼굴에 꽂혔다.
 퍼억!
 이번엔 제대로 적중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아르디엔의 입에서 피가 터지며 고개가 옆으로 확 꺾였다. 하지만, 쓰러진 것은 카오란이었다.
 얼굴을 맞는 순간 아르디엔은 카오란의 복부에 무릎을 박아 넣었다. 게다가 카오란의 주먹이 얼굴에 닿기 전, 미리 고개를 틀어 버림으로써 타격을 최소화했다.
 정통으로 복부를 얻어맞은 카오란과는 받는 데미지가 현저히 달랐다.
 동료들을 살리겠다며 전장에서 매섭게 몰아치던 카오란을 생각하면 여기서 끝내고 싶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그랑로드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선 조금 더 과격해질 필요가 있었다.
 “미안하다.”
 사과의 말과 함께 아르디엔은 카오란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순간 카오란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기절했다. 장내는 지독한 정적이 감돌았다.
 아르디엔은 내심 맘이 편치 못했다.
 그가 기절한 카오란에게 가서 쪼그려 앉아 말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르디엔이 카오란의 가슴을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후다닥 달려온 다르난이 아르디엔의 한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를 본 그랑로드의 모든 아이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이겼다! 우리가 데시에도르를 이겼어!”
 “우와아아아! 우리가 이인자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함성이 식당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랑로드의 모든 아이들이 아르디엔을 둘러싸서 그의 이름을 외쳐 댔다.
 매일 최하위 서열에서 설움을 당하던 그랑로드가 어깨를 펼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러스트리옴의 데젤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언젠가는 그랑로드와 러스트리옴의 전면전이 불가피할 것이 뻔했다.
 데젤은 얼마 안 있어 찾아올 전투를 생각하며 싸늘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
 
 그라함 왕국 내부에서 라우덴은 그들의 국력을 키우기 위한 인재들의 육성 기관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라함 왕국의 국왕을 포함한 수뇌부 격의 귀족 몇몇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수뇌부들 중 라우덴을 만들자고 공모한 주도자들이 바로 가르테아 제국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오래전부터 거대한 권력을 손에 넣으려 했던 이들은 가르테아 제국의 꼬임에 넘어가 손을 잡고 일을 추진시킨 것이다.
 라우덴에서 길러지는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그곳에 있는 선생의 얘기만을 따랐고, 그들의 말만 믿었다.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가르테아 제국에 서서 그라함 왕국을 공격하라는 명령에도 일절 반발 없이 행했다.
 사위가 어두운 공간.
 희미한 램프 하나만이 빛을 밝혀주는 폐쇄된 장소에는 세 명의 사람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라우덴에서 ‘선생’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하나같이 형형색색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들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결코 라우덴 내에서 그것을 벗지 않았다.
 한참 동안 라우덴에 대해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던 중, 푸른 가면으로 인해 블루라는 가명을 쓰는 자가, 붉은 가면을 쓴 레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르디엔 말이야. 갑자기 달라지지 않았어?”
 “그러게. 마치 딴사람 같아.”
 이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은 가면을 쓴 자, 블랙이 끼어들었다.
 “원래 그런 변화는 한순간에 찾아오는 법이야. 그동안 당하고 살았던 억울함과 분노가 쌓여 있다가 터져 버린 것이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
 “흠∼ 뭐, 그런 변화도 우리한텐 나쁠 거 없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게 좋겠어.”
 세 사람 사이에서 짤막하게 튀어나왔던 아르디엔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들은 또 다른 화젯거리를 꺼내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점점 더 밤은 깊어졌다.
 
 ***
 
 요슈아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르디엔이 누워 있을 2층 침대의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발로 천장을 툭 쳤다.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왜?”
 전 같았다면 왜라는 물음에 건방지다며 욕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늘 아침을 먹지 않는 요슈아는 보지 못했지만, 귀는 열려 있다. 아르디엔이 데시에도르의 서열 1위 카오란을 꺾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아르디엔은 명실상부 그랑로드의 일인자로 대우받고 있었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랑로드의 서열 1위는 말수가 적고 과묵한 성격에다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바르타인이었다.
 아직 아르디엔과 바르타인은 붙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르타인보다 강한 카오란을 아르디엔이 쓰러뜨렸다.
 그렇다면 아르디엔은 바르타인보다 높은 서열이 되는 것이다.
 그게 힘의 법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라우덴의 성질이다.
 바르타인 역시 아르디엔이 그랑로드의 새로운 우두머리로 떠받들어지는 것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랑로드 서열 5위인 요슈아가 아르디엔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르디엔은 갑자기 달라진 요슈아의 태도에 피식 웃었다.
 “말해도 모른다. 자라.”
 “말해도 모를지, 알지는 들어보고 나서 판단할 테니까 좀 해봐.”
 “끈질기네.”
 “나, 사냥개 요슈아야. 한 번 물면 안 놓는다. 알지? 편안하게 잠들고 싶으면 그냥 얘기해. 안 그랬다간 밤새도록 물어볼 거야.”
 사냥개 요슈아.
 지금은 그 이름마저도 정겨운 아르디엔이다.
 요슈아는 오기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 후, 큰 사단이 벌어지지.’
 라우덴엔 절대적 금기가 하나 있다.
 바로 선생들에게 불복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슈아로 인해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대해 추문하는 선생들에게 요슈아는 끝까지 반항하며 대든다.
 그 덕분에 요슈아는 두 달 동안 독방 신세를 지며 매일같이 채찍질을 당하고 만다.
 끼니도 하루에 멀건 수프 한 접시가 다였다.
 물론 요슈아가 이토록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르디엔은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다.
 몇 년이 더 흐른 뒤, 요슈아가 아르디엔에게 마음을 살짝 열기 시작하면서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다.
 하나, 지금의 아르디엔은 요슈아가 무슨 사고를 치는지, 어떤 학대를 당하는지 미리 알고 있다.
 속으로 곧 닥쳐올 요슈아의 고통을 애도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안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뭐?”
 “적어도 지금의 내겐 축복인 것 같아.”
 “무슨 헛소리야?”
 “거봐, 말해도 모르잖아.”
 “끄응!”
 요슈아는 앓는 소리를 냈지만 더는 물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기가 강한 만큼 자존심도 세다.
 자신이 한 번 내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
 아르디엔에게서 대답을 들었으니 그걸 이해하고, 못하고는 스스로의 몫이다.
 요슈아는 답답함에 끙끙댔고, 아르디엔은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아침에는 어쩐 일로 요슈아가 아르디엔을 따라 식당에 향했다.
 러스트리옴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식을 받아 좋은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다음으로 그랑로드의 차례가 왔다.
 그랑로드의 아이들은 모두 아르디엔을 가장 앞줄에 세우려 했지만, 아르디엔이 이를 거절했다.
 어제 점심과 저녁때에도 아르디엔은 똑같았다.
 항상 다른 아이들부터 자기 앞에 세웠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배식을 마치면 자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배식을 받았다.
 이제껏 어느 그룹의 리더도 아르디엔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리더는 모든 것에서 우선권이 있었고, 그러한 권한을 충분히 만끽했다.
 하지만 아르디엔은 늘 자신의 동료들부터 챙겼다.
 이런 행동이 그랑로드의 아이들에겐 새롭게 다가왔고, 더더욱 아르디엔을 좋아하게끔 만들었다.
 그랑로드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상태가 양호한 식탁에 앉았다.
 어제부로 서열이 최하위로 밀려나 버린 데시에도르의 아이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배식을 받아 썩어빠진 식탁에 모여 앉아야 했다.
 한 그룹에 속해 있는 아이들의 수는 스무 명이다.
 라우덴의 아이들은 고아원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마어마한 훈련을 받는다.
 때문에 다들 성정이 거칠고 강인하다.
 이러한 아이들을 그룹의 리더로서 관리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른 아이들이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절대적 힘과 카리스마로 꽉 잡고 있지 않는 한,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려는 녀석이 생겨난다.
 지금 카오란의 입장이 그러했다.
 어제 그랑로드에게 패한 이후로 그의 입지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차라리 그때까지 그랑로드에서 서열 1위를 차지하고 있던 바르타인에게 깨졌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데 여태껏 왕따를 당하던 그랑로드의 최하위 서열인 아르디엔에게 무너졌으니 면목이 없었다.
 아르디엔이 갑자기 변했고, 다르난 일당을 보기 좋게 두들겨 팼으며, 지금은 그랑로드의 실질적 리더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그전까지는 계집애처럼 겁 많고 주먹질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찌질한 인간이었다.
 그 이미지가 아직까지도 데시에도르의 아이들에게는 더 크게 박혀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깨져 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정작 카오란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 치고 올라오려 들면 다시 밟아 버릴 것이다.
 그게 다다.
 잠시 정신 못 차리고 까부는 놈들은 매서운 맛을 몇 번 보여주면 절로 몸을 웅크리게 된다.
 카오란은 그보단 앞으로 아르디엔이 어떻게 행동할지가 더 궁금했다.
 지금도 식사를 하는 러스트리옴과 그랑로드 사이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체력 단련 시간이다.
 라우덴을 이끌어 가는 세 명의 선생, 블랙, 블루, 레드는 각각 하나의 그룹을 맡아서 지도한다.
 블랙은 서열 1위 그룹을, 블루는 2위, 레드는 3위 그룹을 맡고 있다.
 때문에 전까지는 블루가 데시에도르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그랑로드를 가르치게 되었다.
 블랙과 블루는 남자고, 레드는 여인이다.
 세 사람의 실력은 엇비슷하지만 근소한 차이는 있었다.
 블랙이 셋 중 가장 세고, 다음이 블루, 마지막이 레드였다.
 그들의 머리카락은 가면과 똑같은 색이었다.
 아니, 가면을 머리카락 색에 맞춘 것이다.
 세 개의 그룹은 넓은 운동장에서 각각의 서열에 맞게 선생들 앞에 나열했다.
 블루는 그랑로드의 아이들을 죽 훑었다.
 그의 시선이 아르디엔에게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흘러갔다.
 “어제는 너희가 라우덴의 서열 2위가 되었다. 때문에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를 지도하게 될 것이다. 알겠나?”
 “네!”
 그랑로드의 아이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 크게 대답했다.
 블루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도록.”
 블루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체력 단련을 해나갔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체력을 단련해야 하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여태껏 선생들의 고된 수업을 숱하게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들에게 가장 잘 맞는 단련법을 찾아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단계에까지 와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체련 단련에 충실히 임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약해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입지가 약해진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라우덴에서는 힘이 곧 법이다.
 그것을 지겹도록 겪으며 살아온 아이들이다.
 선생들은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르디엔은 아이들 속에서 나름대로의 훈련을 해나갔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미래는 달라지고 있다.’
 원래 그가 기억하는 오늘의 일상은 고달파야 했다.
 여전히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괴롭힘을 당하고 늦은 밤 녹초가 되어 울다 잠드는 것이 정해진 미래였다.
 하지만 달라졌다.
 이제는 오늘 하루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실하게 예측할 수가 없었다.
 ‘작은 것 하나가 바뀜으로 인해서 미래가 크게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 먼 미래의 일도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
 앞으로는 정해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다 변해 버린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당장은 아르디엔으로 인해 라우덴 내부의 상황은 변하겠으나 나라가 흘러가는 큰 정세에까지 영향을 끼치진 못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변하도록 만들 것이다.’
 조만간 아르디엔은 고아원을 나갈 생각이다.
 곧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찾아온다.
 그리고 2년 안에 다시 고아원으로 찾아와 이 거지 같은 세력을 초전박살 내놓을 것이다.
 아르디엔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전생에 그는 전쟁에 나가기 전, 무학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라우덴의 서재에 있는 전설적인 무신(武神)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몇 백 번이고 되짚어 읽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이미 백여 년 전 고인이 되어버린 라하트마는 자신이 꾸준히 적어왔던 일기들을 한데 엮어 두꺼운 자서전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당연히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노리는 이들이 이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욕심과 욕심이 부딪혀 큰 전쟁이 벌어지는 지경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난리 통에서 라하트마의 자서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데 그 책이 라우덴의 서재에 아무렇지 않게 비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라우덴의 아이들은 몰랐다.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만이 알고 있었다.
 아르디엔 역시 이를 모른 채로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읽었다.
 그저 라하트마의 일대기가 너무나 멋있어서 줄기차게 읽었던 것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자서전 안에는 라하트마가 깨우친 무학의 극의들이 교묘히 감추어져 있었다.
 아르디엔은 책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암기할 만큼 끈질기게 읽는 동안 무학의 극의를 깨우치게 된 것이다.
 이후 전쟁이 일었고, 아르디엔은 이전과 다른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이 무적기사단을 배신하면서 벌어진 싸움에서도 최후까지 버텼던 건 아르디엔이었다.
 지금도 아르디엔은 라하트마의 자서전이 고아원 내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토록 대단한 자서전이 대륙 각지에 마구 뿌려져 있을 리는 없다.
 라하트마는 생전에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었다. 활, 창, 검, 봉, 그 어떤 것을 쥐어주어도 신기에 가까운 무위를 선보이니 당할 자가 존재치 않았다.
 무기가 없어도 마찬가지였다.
 투술 역시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마법사 역시 그의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떠한 무서운 마법이라도 그에게 해를 가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절대적 지존이라 불리던 전설의 무신 라하트마.
 그의 극의를 아르디엔은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극의라는 것은 몸소 깨우쳐 느껴봐야 한다.
 말로 설명할 수가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 지금 아르디엔에게 와서 그 깨우침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도 아르디엔은 대답해 줄 수가 없다.
 사실 안다고 해도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무튼 전생에서 다른 아이들이 전부 각종 뛰어난 무술서에만 집중할 때, 아르디엔은 라하트마의 자서전만 읽어댔다.
 당시엔 왜 그런 쓸데없는 자서전을 읽느냐며 놀림을 받았다.
 하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아르디엔에게 득이 되었다.
 그리고 그 깨우침은 현재의 아르디엔의 영혼에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깨우침을 얻은 상황에서 하는 훈련과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하는 훈련은 그 효과가 다르다.
 아르디엔은 이미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
 가만히 서서 심박수를 조절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몸의 세포들을 조종해 근육과 피부, 그리고 뼈의 수축, 이완, 변형을 일으켜 외관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체력을 단련할 때마다 세포들을 더 활성화시켜 그 효과를 배 이상 얻어내는 것은 쉬웠다.
 아르디엔은 등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고 팔굽혀펴기를 했다.
 바위는 모양이 제멋대로인지라,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한데 아르디엔은 바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규칙적인 리듬으로 팔을 굽혔다가 폈다.
 그것을 벌써 쉰 번이나 쉬지 않고 반복하는 중이었다.
 역시나 용의 반점이 지워지지 않은 아르디엔은 괴물이었다.
 그랑로드의 아이들이 체력 단련을 하는 것도 잊고 그런 아르디엔을 놀라서 바라보았다.
 블루의 시선 역시 아르디엔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블루의 손이 아르디엔의 왼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르디엔은 팔굽혀펴기를 멈추고서 블루를 올려봤다.
 “이제는 반점을 가리고 다니지 않는구나.”
 전생이었다면 이미 반점은 사라지고 없어야 했다.
 아르디엔이 스스로 파냈기 때문이다.
 아르디엔은 반점을 파낸 이후에도 어깨를 계속 가리고 다녔다.
 처음에는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 이후에는 상처가 다 낫고 난 뒤에 흉이 심하게 져서 그랬다.
 반점을 없애겠다고 살을 파냈더니 그 자리에 더욱 흉측한 것이 생겨 버렸으니 소심한 아르디엔이 이를 당당히 내놓고 다닌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아무도 아르디엔이 반점을 파낸 것을 몰랐다.
 그저 병적으로 심하게 가리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네, 가리지 않습니다.”
 아르디엔이 대답했다.
 “왜지?”
 블루가 다시 물었다.
 “제 삶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블루는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으나 아르디엔에게 더 깊이 묻지 않고 물러났다.
 
 ***
 
 체력 단련이 끝나고 난 뒤에는 한 시간 동안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하루 중 점호 시간을 빼면 유일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다.
 아르디엔은 버릇처럼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뽑아 읽었다.
 그 모습을 서재의 창 밖에서 블루와 레드가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저 책에 유난히 집착하는군.”
 블루의 말이었다.
 “저런 모습 보면 참 귀엽지? 내 밑에 있을 때도 그랬어. 가끔은 밤에 내 침실로 불러들이고 싶어진다니까. 생긴 것도 반반하고. 몸도 좋고. 소심한 성격이 문제였는데, 그것까지 극복했잖아, 이젠?”
 “적적하면 내가 상대해 주지.”
 블루가 레드의 가슴을 보며 히죽댔다.
 “사양할게. 난 질척대는 스타일은 별로라서.”
 “레드, 혹시 너 소문이 사실인 거 아니야?”
 “뭐?”
 “겉으로는 엄청난 색녀인 척 온갖 남자들 다 홀리고 다니지만 사실 키스도 해본 적 없다는······. 혹시 엄청난 순정녀인 것 아냐?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에게만 몸과 마음을 바치는?”
 “좋을 대로 생각해.”
 “하긴··· 네 성격을 보면 그런 순정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아무튼······.”
 레드의 가슴으로 향해 있던 블루의 시선이 다시 창 너머 아르디엔에게 향했다.
 “아무튼 이상하지. 그저 자서전일 뿐인데 말이야.”
 “모르지. 우리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저 안에 담겨 있을지도.”
 “웃기는 소리. 나도 저 책을 열 번이 넘게 정독했어.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물며 저런 애송이가? 농담해?”
 “두고 보면 알겠지. 앞으로도 잘 감시해.”
 레드가 블루의 어깨를 툭툭 치고서 자리를 떴다.
 
 ***
 
 고작 삼십 분 동안 그 두꺼운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읽어치운 아르디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랬군.”
 자신이 어떻게 라하트마의 자서전에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극의의 경지가 무언지 알게 된 이후 책을 읽은 적이 없었기에 그 전에는 그저 자신의 꾸준한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생각했다.
 책에 숨겨진 의미를 그래서 찾아냈다고 믿었다.
 한데 아니었다.
 자서전 안에 숨겨진 극의의 경지에 대한 언급은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었다.
 라하트마는 자서전에 또 하나의 장치를 해놓았다.
 아르디엔은 라하트마의 책을 읽으면서 빼곡히 적힌 글자들에 반응하는 세포들을 느꼈다.
 “이건 라하트마의 피였어.”
 라하트마는 그의 피로 일기를 적었던 것이다.
 극의에 다다라 세포 하나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라하트마의 피는 보통 피가 아니다.
 그것은 접촉하는 대상의 세포들을 자꾸만 자극한다.
 하지만 그 자극이 강렬하지 않아 사람들은 이를 느낄 수 없다.
 아르디엔은 몇 백 번이 넘게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읽었고, 그때마다 세포들이 라하트마의 피에 반응했다.
 그 작은 떨림이 십수 년간 매일매일 쉼없이 반복하다 어느 순간, 아르디엔의 세포 전부가 라하트마의 피와 공명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아르디엔은 슬쩍 창밖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지켜보던 레드와 블루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도 아르디엔을 감시하는 눈은 없었다.
 서재에는 오늘따라 아르디엔 혼자만 있었다.
 아르디엔은 한 켠에 놓인 호롱불에 불을 당기고서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태웠다.
 “자신의 피로 집필한 자서전이 두 권은 존재하지 않을 테지.”
 혼잣말을 내뱉은 그가 잿조각이 된 자서전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뿌려 놓은 뒤, 서재를 나왔다.
 
 
 
 Chapter 3 리더니까
 
 
 
 아르디엔이 과거로 회귀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랑로드가 서열 2위로 올라선 뒤로는 큰 사건이 나질 않았다.
 러스트리옴은 폭풍전야와도 같은 침묵을 지키며 그랑로드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데시에도르도 카오란이 나서지 않으니 숨죽여 지냈다.
 근래에 가장 큰 일이라고 하면 아르디엔이 라하트마의 자서전을 태워 버린 것이었다.
 그건 어찌 보면 국가적인 손해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직 라하트마의 자서전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 진가를 아는 건 아르디엔뿐이다. 자서전을 손에 넣지 못한 이들은 진가를 모른다.
 그리고 손에 넣은 이들은 딱히 대단할 것이 없는 책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그것은 겉보기엔 그저 일기의 나열일 뿐, 무학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라하트마의 자서전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타국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넘기는 것 외엔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선생들은 아이들을 소집해 누가 책을 태웠느냐고 물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나지만 라하트마의 책이 얼마나 큰돈이 될 수 있는지 자체를 모르는 아이들을 마구 혼낼 수도 없었다.
 아르디엔은 손을 들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손을 들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아이들 전부에게 금식 명령이 떨어졌다.
 이건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지옥 같은 훈련을 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는 건 가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 두려움을 참지 못한 데시에도르의 서열 3위 체로스가 페르코의 등을 떠밀었다.
 “야, 페르코. 네가 했다고 해.”
 “내가 왜?”
 “그랑로드랑 식당에서 한판 떴을 때 너 아르디엔한테 개처럼 맞았잖아.”
 “그 얘기를 또 왜 해?”
 “그것 땜에 열 받아서 책 태웠다고 해. 아르디엔이 그 책 얼마나 소중히 하는지 잘 알잖아?”
 “야··· 그건 좀.”
 페르코는 선생들에게 혼날 것도 걱정이었지만 아르디엔에게 맞는 게 아닌가 하는 근심도 들었다.
 하지만 당시는,
 “죽어볼래?”
 눈앞에 쑥 들이밀어진 체로스의 주먹이 더 무서웠다.
 결국 페르코가 누명을 뒤집어쓰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페르코의 걱정과는 달리 아르디엔은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선생들도 페르코에게 이틀간 아침을 주지 않는 가벼운 벌만 내렸다.
 그렇게 조용한 나날들이 흘러가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요슈아는 부어터진 몰골로 기숙사에 돌아왔다.
 아르디엔이 그런 요슈아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몰라도 돼.”
 요슈아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르디엔은 2층 침대에서 내려와 그런 요슈아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몰라도 된다고!”
 “알아야 되겠어.”
 “네가 왜 알아야 하는데?”
 “그랑로드니까.”
 요슈아가 매서운 눈으로 아르디엔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 건 아르디엔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질 않는다.
 게다가 아르디엔은 요슈아가 왜 저 몰골이 되었는지 익히 알고 있다.
 요슈아는 분명 러스트리옴의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훗날 알게 된 사건은 이러했다.
 러스트리옴의 서열 15위 샤르토는 대단히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녀석이다.
 그는 자기 기분에 따라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을 구타하고 괴롭혔다.
 사실 러스트리옴 내에서는 서열이 낮아 함부로 행동하고 다니지 못한다.
 때문에 늘 샤르토의 표적이 되는 것은 그랑로드와 데시에도르의 아이들이었다.
 이번엔 요슈아가 그의 표적이 되었다.
 실력만 놓고 따지면 요슈아가 샤르토보다 위다.
 샤르토는 러스트리옴의 뒷배를 믿고서 요슈아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냥 지나가다 시선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따귀를 날린 것이다.
 요슈아는 황당했지만 러스트리옴이 일원인 샤르토를 손댈 수 없었다.
 그래서 화를 꾹 눌러 참았는데, 그럴수록 샤르토의 구타는 심해졌고, 결국 뚜껑이 열린 요슈아가 녀석을 두들겨 팼다.
 이에 샤르토는 그 사실을 데젤에게 알렸다.
 데젤은 자신이 직접 나설 일이 아니라며 밑의 아이들 몇을 보내 요슈아를 집단 구타했다.
 요슈아는 가만히 참고 맞으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넘어가주겠다는 샤르토의 협박에 기절하기 직전까지 험한 꼴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이 몰골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로 샤르토는 작정하고서 요슈아를 괴롭혔다.
 아르디엔이 다르난 일파에게 당했던 것은 약과에 불과할 정도로 심하게.
 이에, 요슈아는 반 미쳐 버린 상태에서 분노가 폭발해 샤르토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한데 그 주먹 한 번이 잘못되어 샤르토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라우덴에서는 힘의 논리로 인해 벌어진 모든 사건을 눈감고 넘어가주지만 살인만큼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요슈아는 결국 선생들에게 끌려가 두 달 동안 독방에 갇혀 채찍질을 당하고 하루에 수프 한 끼를 먹으며 연명해야 하는 징벌을 받게 된다.
 ‘나로 인해 미래가 바뀌기 시작했으니, 이번 사건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꼭 일어날 사건은 일어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건이 더 커지기 전에 아르디엔이 나서서 정리하는 게 옳았다.
 어차피 러스트리옴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언젠가 한번은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아르디엔이 자신을 노려보는 요슈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자라.”
 요슈아가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려 누웠다.
 
 ***
 
 오늘은 실전 훈련이 있는 날이다.
 세 그룹의 아이들은 평소보다 일찍 아침을 먹고 선생들의 지도하에 인근의 숲으로 향했다.
 세 명의 선생 중 블루가 아이들의 앞으로 나섰다.
 실전 훈련은 그의 담당이었다.
 “룰은 언제나와 똑같아. 숲 속에서 하루를 버텨라. 그리고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죽이고 귀를 잘라라. 가장 많은 귀를 모아온 그룹이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그리고 승리한 그룹 내에서 다시 1위를 뽑아 외박권을 주겠다.”
 외박권이라는 말에 아이들의 눈에 불길이 일렁였다.
 그들은 라우덴에서 살인병기로 길러지고 있었지만, 세상물정 하나 모른다.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다.
 여태껏 외박권을 받은 사람은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선택받은 다섯 사람은 바깥 구경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마치 신기한 세상을 보기라도 한 것마냥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러니 아직 고아원을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이 외박권을 간절히 원하는 건 당연한 상황이었다.
 ‘외박권.’
 드디어 아르디엔이 고아원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어차피 몬스터들 귀를 잘라 모으는 건 일도 아니다.
 블루는 숲에서 가장 큰 나무 기둥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나무 기둥을 발끝으로 탁탁 차고 올라가 어느새 나무 꼭대기에 올라섰다.
 팔짱을 끼고서 주변을 휙 둘러본 블루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반경 4킬로미터 내에 있는 몬스터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인간이 몬스터를 불러 모은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블루는 가능했다. 그에게는 ‘뇌파’라는 기술이 있다.
 이 뇌파의 기술은 블랙에게도, 레드에게도 있다.
 하지만 뇌파를 이용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
 블루의 능력은 반경 4킬로미터 내의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다.
 몬스터들이 블루에게 현혹당하고 명을 따르기 전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라우덴의 아이들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으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런데 샤르토가 러스트리옴의 서열 16위 가르나트, 17위 팔토를 데리고 건들거리며 요슈아에게 다가왔다.
 “야.”
 샤르토는 요슈아의 머리를 툭 쳤다.
 요슈아가 그런 샤르토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뭘 노려봐? 왜? 치려고? 여기서 전쟁 한번 벌일래?”
 참아야 한다.
 요슈아는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 그렇게 눈 깔고 다녀. 앞으로도 계속. 이번에 아르디엔이 좀 설쳐서 살기 편해졌다고 너무 나대지 말란 말이야. 데젤은 괴물이야. 알지?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너희 전부 찢어발겨 버릴지도 몰라.”
 샤르토의 말이 맞다.
 데젤은 괴물이다.
 아무리 아르디엔이 카오란을 이겼다고 해도 데젤에게는 못 당할 게 분명했다.
 요슈아는 이를 앙다물었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주먹을 쥐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부터 우리 장난감이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줘야겠어. 따라와.”
 샤르토 일행이 요슈아를 데리고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레드와 블랙은 이를 보고서도 모른 체했다.
 
 ***
 
 샤르토가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몽둥이로 만들었다.
 가르나트와 팔토는 그런 샤르토의 양옆에 서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제대로 신고식 한번 해보자.”
 샤르토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한 손에 든 몽둥이로 다른 손바닥을 톡톡 치며 요슈아에게 다가갔다.
 “이 꽉 깨물어.”
 나무 몽둥이가 높이 올라갔다.
 샤르토는 요슈아의 얼굴을 그대로 후려치려 했다.
 샤르토의 팔이 강렬하게 움직였다. 손에 쥔 나무 몽둥이가 바람을 갈랐다.
 쐐애애액!
 그대로 맞았다가는 턱이 날아갈 판이다.
 한데,
 턱.
 누군가 샤르토의 팔목을 잡았다.
 요슈아가 이 상황에 난입한 이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아르디엔.”
 “적당히 하지?”
 샤르토의 팔목을 쥔 아르디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악!”
 샤르토가 비명을 질렀다. 녀석의 손에 들린 나무 몽둥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에, 가르나트와 팔토가 아르디엔에게 달려들었다.
 아르디엔은 샤르토의 팔목을 더욱 세게 쥐었다.
 콰득!
 “으아아악!”
 샤르토가 비명도 모자라서 고함을 쳤다.
 녀석의 팔이 부러져 기이한 모양으로 휘었다.
 그 광경에 달려들던 가르나트와 팔토가 굳어버렸다.
 순간 두 녀석의 얼굴에 불이 번쩍했다.
 퍼퍽!
 “크억!”
 “억!”
 아르디엔의 주먹이 안면을 강타한 것이다.
 가르나트는 코뼈가 부러졌다. 팔토는 쌍코피가 터졌다.
 고작 한 대씩 얻어맞은 것뿐인데 정신이 어찔했다.
 그사이 아르디엔은 샤르토의 복부를 걷어찼다.
 뻑!
 “억!”
 샤르토가 뒤로 나가 떨어졌다.
 “샤, 샤르토!”
 “괜찮아!?”
 가르나트와 팔토가 얼른 샤르토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덥썩.
 아르디엔의 우악스런 손이 두 녀석의 뒷목을 쥐었다. 그러고서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 가르나트와 팔토의 발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떻게든 아르디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렸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아르디엔의 손을 풀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르디엔은 그 상태로 두 녀석을 박치기시켰다.
 빠박!
 “억!”
 “크악!”
 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비명을 내지른 가르나트와 팔토가 눈을 까뒤집었다.
 뇌에 심한 충격이 온 것이다.
 아르디엔이 그제야 뒷목을 놓았다.
 털썩.
 박치기를 당한 두 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바닥을 기던 샤르토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아르디엔을 바라보았다.
 아르디엔이 샤르토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아, 아르디엔. 잠깐만.”
 “시끄럽다.”
 퍽!
 아르디엔의 발이 샤르토의 턱을 올려 찼다.
 “꺽!”
 신음을 토하는 그의 입에서 피에 젖은 치아 두 대가 튀어나왔다.
 아르디엔의 발이 채찍처럼 움직여 샤르토의 뺨을 후렸다.
 퍽!
 “크허······.”
 샤르토의 초점이 풀렸다.
 입 밖으로 피가 줄줄 흘렀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흐느적대던 샤르토는 결국 정신을 잃고 완전히 뻗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아르디엔이 요슈아를 돌아봤다.
 “괜찮냐.”
 “너··· 어쩌자고······.”
 “어쩌자고, 뭐?”
 “러스트리옴 애들을······!”
 요슈아는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껏 꾹 참아왔다.
 그런데 그랑로드의 리더라는 녀석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화가 났다.
 요슈아가 아르디엔의 멱을 틀어쥐고 소리쳤다.
 “리더라는 놈이 대체 왜 그런 거냐고!”
 아르디엔이 옅게 미소 지었다.
 이 상황에서 웃어?
 요슈아는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는 순간, 아르디엔의 입이 열렸다.
 “리더니까.”
 “···뭐?”
 “동료가 위기에 처했는데 그냥 지켜봐야만 하는 건 리더가 아니야. 난 그렇게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이 녀석들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상황이······.”
 “좋아졌지. 네가 안 다쳤잖아.”
 아르디엔이 자신의 멱을 쥔 요슈아의 손을 부드럽게 풀었다.
 “가자. 곧 몬스터들이 몰려올 거야.”
 “어딜 가?”
 아르디엔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갑자기 나타난 이는 러스트리옴의 리더 데젤이었다.
 
 
 
 Chapter 4 절대 우위
 
 
 
 데젤은 처음부터 또래들과 남달랐다.
 발육이 빨랐다. 그만큼 키도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도저히 16세의 소년이라고는 안 믿길 만큼 터질 듯한 근육이 온몸 가득 박혀 있었다.
 검은색의 거친 더벅머리와 눈동자, 그리고 사나운 얼굴은 카오란이나 아르디엔과는 대조적이었다.
 요슈아는 데젤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르디엔은 건조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러스트리옴을 건드렸으니 대가를 받아야지.”
 “러스트리옴이 먼저 그랑로드를 건드렸다. 대가는 너희가 받아야지.”
 아르디엔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데젤이 피식 웃었다.
 “긴말하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만 놓고 가. 그럼 없던 일로 해주지.”
 “네 모가지 간수나 잘해라.”
 “그 말··· 후회하게 될 텐데.”
 데젤이 차가운 미소를 물었다. 아르디엔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데젤이 천천히 아르디엔에게 다가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요슈아가 마른침을 넘겼다.
 일촉즉발의 상황.
 두 사람이 서로의 사정권에 들어왔다.
 잠시 동안의 기 싸움이 이어졌다.
 데젤이 주먹을 말아 쥐고 들어 올리는 순간,
 두두두두두.
 대지가 흔들렸다.
 몬스터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김빠진 데젤이 주먹을 풀었다.
 “몬스터가 널 살리······.”
 퍽!
 “···컥!”
 데젤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아르디엔의 주먹이 데젤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데젤이 눈을 부릅뜨고서 아르디엔을 노려봤다. 아니, 노려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빠악!
 “악!”
 또다시 아르디엔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데젤은 쇳덩이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비틀대며 뒤로 물러났다.
 “너 이 새끼!”
 “싸우자고 온 거 아니야? 그럼 끝까지 해라. 몬스터 핑계 대고서 적당히 넘어갈 생각하지 마라.”
 ‘이건 미친 짓이야!’
 요슈아가 생각했다.
 그가 보기엔 데젤이 방심했기 때문에 얻어맞은 것뿐이었다.
 게다가 곧 몬스터들이 몰려올 텐데 싸움을 벌이다니.
 데젤만 해도 버거울 텐데, 어쩌려는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요슈아.”
 아르디엔의 부름에 요슈아가 대답했다.
 “어?”
 “샤르토 일행을 잘 지켜.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몬스터들로부터 샤르토 일행을 지키라는 말이다.
 요슈아는 그랑로드의 서열 5위다. 제법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을 지키며 몬스터 군단과 싸우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알았어.”
 요슈아가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달려드는 놈들은 오크였다.
 성인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신장에 돼지처럼 흉측한 얼굴이 역겹다. 온몸은 갈색 털로 뒤덮여 있고, 송곳니가 멧돼지처럼 불쑥 솟구쳤다.
 손에는 저마다 녹슨 검이나 도끼, 창 따위의 무기들을 들고 있다. 인간들의 마을을 약탈하며 빼앗은 것이다.
 “퀴이이이이이익!”
 “퀴익! 퀴이익!”
 오크들이 기분 나쁜 괴성을 질렀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요슈아는 기절한 샤로트 일행 곁을 지키고 섰다.
 허리에 차고 있던 롱소드를 뽑아 사위를 경계했다.
 데젤도 검을 뽑았다. 하지만 아르디엔은 검을 뽑지 않았다.
 데젤이 그런 아르디엔을 의아하게 봤다.
 라우덴의 아이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몬스터 군단을 상대로 싸울 땐 검이 없으면 힘들다.
 그런데 아르디엔은 태연자약했다.
 “퀴이이이익!”
 오크 한 마리가 데젤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데젤의 검이 작은 호를 그렸다. 달려들던 오크의 목이 잘리며 바닥을 굴렀다. 머리가 사라진 모가지에서 피가 분출했다.
 그때 데젤의 뒤로 또 다른 오크가 공격을 가했다.
 데젤이 몸을 틀며 검을 휘두르려는데, 갑자기 오크의 머리가 퍼석! 하며 터져 나갔다.
 아르디엔의 주먹이 먼저 작렬한 것이다.
 ‘날 도와?’
 데젤이 당황하는데, 갑자기 아르디엔의 주먹이 이번엔 데젤의 명치를 때렸다.
 뻑!
 “억!”
 데젤은 그대로 날아가 물수제비뜨듯 바닥에 튕겼다.
 그러고서는 기절한 샤르토 일행 곁에 널브러졌다.
 아르디엔이 데젤에게 말했다.
 “너도 거기서 샤르토 일행을 지켜.”
 “무슨 헛소리를······!”
 말을 하는데 오크 네댓 마리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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