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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맨 1

2017.05.02 조회 1,110 추천 6


 프롤로그
 
 
 높게 솟아오른 나무들로 울창하게 뒤덮인 숲 속.
 뾰로로롱!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내는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서 날아올라 숲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너무나 평화롭게 보이는 숲이었다.
 우우우웅!
 갑자기 엄청난 기운에 의해 숲의 한 공간이 이지러졌다.
 파지직!
 스파크를 머금은 빛의 구가 튀어나와 풀밭에 떨어졌다.
 지름이 약 10미터 정도 되는 빛의 구에서 스파크가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생명력이 높던 주위의 풀들이 빛의 구에서 일어나는 스파크 때문인지 빠르게 말라 죽어갔다.
 빛의 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밝기와 스파크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독하게 일어나던 스파크도 잠잠해졌기에 숲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했다.
 시간이 흘러 숲 속에 밤이 찾아왔다.
 어두운 숲 속에 은은한 빛의 구 때문인지 호기심을 가진 작은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빛의 구 사방 30미터 안으로는 불과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풀들이 말라 죽어 있었다.
 다람쥐와 비슷하게 생긴 작은 동물이 호기심에 빛의 구 30미터 이내로 들어섰다.
 찌찍!
 갑자기 다람쥐와 비슷하게 생긴 작은 동물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쓰러져 버렸다. 입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으로 보아 죽은 게 분명했다.
 작은 동물이 죽을 이유가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기운이 빛의 구에서 흘러나오는 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낮과 밤이 반복되었다.
 하루에 몇 마리씩 작은 동물들이 호기심에 접근했다가 전부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작은 동물들이 많이 죽어 있자 이제는 조금 더 상위의 큰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빛의 구는 여전히 그대로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죽는 동물들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었다.
 
 
 제1장 바렌츠 산맥의 이방인
 
 
 휘이이이!
 산들바람이 흙먼지를 동반해 불어왔다 저쪽으로 사라졌다.
 5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빛의 구는 그 자리에서 계속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스스스스.
 빛의 구에서 은은하게 내뿜던 빛이 갑자기 변화를 보이면서 점점 엷어지더니 순간 사라졌다.
 “크으으······.”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세히 보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남자였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으며, 나체인 온몸은 화상이라도 입었는지 처참해 보였다. 진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명 인간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괴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덜덜덜.
 추위라도 느끼는지 몸을 떨던 그의 몸에서 순간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주르륵 흘러내리던 진물도 말라버리고 피부도 메마른 사막처럼 건조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쩌쩌쩍!
 이번에는 말라버린 피부 각질이 갈라지면서 후드득 떨어졌다. 극심했던 상처가 다 나아버렸고, 새살이 돋아났다. 대머리였던 머리에도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번쩍!
 감았던 두 눈을 뜨자 안광이 무시무시하게 뻗어 나왔다. 하지만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그 안광은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세상이 이제는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몇 분이 흐르자 숲 속의 풍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으음, 여긴 숲 속인 것 같은데?”
 맑고 싱그러운 숲 속의 공기를 폐부 속으로 흠뻑 들이마신 그는 그제야 자신이 나체란 걸 알게 되었다.
 “으음, 옷과 로브도 사라졌군.”
 자신의 몸을 자세하게 살펴보니 뱀이 허물을 벗듯 그렇게 피부가 벗겨져 새살이 돋아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닥에도 자신의 피부 각질이 떨어져 있었다.
 “후후후, 죽는 줄만 알았는데 내가 죽지 않았구나.”
 그는 신의 아티팩트의 기운을 무리하게 흡수하다가 사라진 김준이었다.
 신의 아티팩트는 모두 5개이다.
 눈과 얼음의 권능을 가진 빌헤임(Bilhem), 수정 반지로 되어 있으며 변형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불의 권능을 가진 바나리르(Vanalir), 창에 루비 형태로 박혀 있다.
 바람의 권능을 가진 벤뵤르그(Venbjorg),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이다.
 파괴되거나 죽어가는 것을 소생시키는 권능을 가진 벤겔미르(Vengelmir), 에메랄드 보석으로 되어 있으며 활에 박혀 있다.
 혼돈의 권능을 가진 히민반가르(Himinvangar), 보라색 다이아몬드이며 팔찌에 박혀 있다.
 준은 신의 아티팩트 4개를 입수해 그 권능을 대부분 흡수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혼돈의 권능을 가진 히민반가르가 발견되어 그것을 무리하게 한꺼번에 흡수하려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너무나 강력한 기운이 5개나 한꺼번에 충돌하면서 공간이 이지러지며 빨려 들어가 이곳에 떨어진 것이다.
 신의 아티팩트는 비록 신의 권능이 일부 들어가 있는 것이라 해도 엄청난 힘이었다. 신의 아티팩트 하나의 권능만 하더라도 고룡급 드래곤의 힘을 능가하는 신물이기 때문이다.
 스스슷!
 일단 여긴 숲 속이라 몬스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먼저 보호막부터 펼쳤는데, 별다른 무리 없이 보호막이 간단하게 펼쳐졌다.
 준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상태에서 즉시 천왕대심공을 운용해보았다. 천왕대심공은 일인 전승으로 내려온 천왕문의 독문 심공이었다.
 하단전과 중단전에는 내공이 가득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단전의 내공만 움직여지고 중단전은 내공이 가득한데도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음, 신의 아티팩트 때문이군?”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해결하기로 하고는 마법이 사용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먼저 심장에는 9개의 마나 고리가 그대로 있었고, 천천히 지금도 휘돌고 있었다. 그리고 마나 고리 주변에는 신의 아티팩트의 기운 5가지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액체가 딱딱한 고체가 된 것처럼 그렇게 5가지의 기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기운들도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조금씩 풀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몸은 가벼워 움직이는 데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츠츠츠츠.
 준은 즉시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사용 가능한 마력이 겨우 5서클 마법사 정도의 양으로, 예전에 비한다면 정말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6서클 이상의 마법은 무리고 그나마 텔레포트 마법은 한 번 정도는 펼칠 수 있었는데, 다시 마력을 보충하려면 하루는 꼬박 마나를 끌어 모아야만 할 것 같았다.
 “으음, 그래도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야.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시 시작하면 돼.”
 하단전에는 내공이 가득했기에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오러 블레이드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음, 아공간은 열어지나 몰라? 나오너라, 나의 블러드 게이트여!”
 츠츠츠츠.
 준의 외침에 공간이 이지러지면서 앤티크 분위기가 나는 웅장하면서도 멋진 은빛의 거대한 문이 공중에 나타났다.
 문의 위쪽에 거대한 눈동자가 떠졌다.
 <주인님, 오랜만입니다.>
 “그렇구나. 블러드 게이트여, 내가 필요한 것들을 좀 꺼내야겠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꺼내드리겠습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공간 속을 바라보고는 우선 마법 주머니부터 꺼낸 뒤 옷과 신발, 여행자 로브, 그리고 롱 소드 한 자루도 꺼내었다.
 <주인님, 더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이젠 됐다. 필요하면 부를 테니 들어가 있거라.”
 <예, 주인님.>
 스스슷!
 블러드 게이트가 사라져 버렸다.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먼저 게르를 꺼내었다.
 야영할 때나 여행할 때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게 바로 게르로, 이것은 몽골식 천막이었다.
 모포 한 장으로 숲 속에서 야영하기보다는 따뜻하고 온갖 편리한 물품이 가득한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게 더 좋았다.
 주위에 게르를 설치하려다 죽어 있는 동물들이 많아서 숲 속을 조금 이동했지만 야영하기 적당한 장소가 없어 수백 미터를 이동하고서야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1백여 미터 정도 되는 풀밭이었고, 이곳에서 우선 야영하기로 결정했다.
 촤르르르.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게르가 펼쳐지면서 설치가 되었다.
 그것은 갈색 가죽으로 된 천막으로 겉에서 보면 특별할 게 없어 보였고, 사람 5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로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 사방으로 약 1백 미터 정도라 꽤 넓었다.
 그렇기에 그 속에는 온갖 편리한 물건들이 많았다. 목욕을 할 수 있는 욕조와 거대한 물통이 배치되어 있고,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식재료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도 있었다.
 밤에는 쌀쌀하기에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공간과 땔감도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또한, 준이 게르 안에서 마법 실험을 하거나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이렇게 각종 쓰임새가 많은 게 게르였다.
 준은 우선 몬스터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게르 주위에 결계부터 설치했다.
 “후후후, 이러면 안심이야. 안으로 들어가서 목욕부터 해야겠어.”
 게르 앞에 결계가 설치되면 밖에서 볼 때 나무들이 솟아나 있는 곳으로 보이게 하는 작용을 할 것이다.
 준이 설치한 결계엔 이렇게 약간의 환상 마법이 가미되어 있었다.
 저벅저벅.
 게르 안으로 준이 들어서자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파이어.”
 화르르르!
 준의 외침에 모닥불이 피어났고, 게르의 천장에 매달아놓은 마법등도 환하게 불을 밝혔다.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정화하기 위해 천장에는 마법의 아티팩트인 공기청정기도 매달려 있었다. 이 것으로 인해 게르 안은 늘 상쾌한 공기가 유지되었다.
 저쪽에는 마구간도 있었고, 그 옆에는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여러 가지 마법을 새겨 넣은 대형 금속 욕조가 한쪽에 놓여 있었다. 10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초대형 물통이었으며, 물통과 욕조가 금속관으로 이어져 있는 일종의 수도 시설이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물통에서 물이 콸콸거리면서 욕조로 쏟아졌다. 공기 방울이 올라오는 월 풀 욕조를 응용한 금속 욕조였기에 각종 마법이 동원되었다.
 2개의 금속관 중에서 하나는 차가운 물이 흘러나오는 관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는 관이었다.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는 관은 준이 화염계 마법진을 새겨 넣어 만든 것이었다. 차가운 물이 순간적으로 화염계 마법진을 통과하면서 뜨거운 물이 되는 원리였다.
 어쨌든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한꺼번에 욕조에 받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욕조에 공기 방울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고, 목욕 용품과 와인까지 준비된 박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목욕을 하면서 와인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준은 욕조에 들어가 등을 기대었다.
 손으로 스윽 팔을 문질러보았더니 피부에 붙어 있던 각질이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준은 따뜻한 물속에서 목욕을 즐기다 깨끗하게 씻고 욕조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목욕을 했더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룰룰루.”
 준은 휘파람을 불어가면서 신나게 요리를 준비했다. 모처럼 하는 요리라 무엇을 만들어 먹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밥을 짓기로 했다.
 반찬은 잘게 썬 고기와 채 썬 야채를 넣어 기름에 잘 볶은 고기야채볶음이었다.
 허기가 졌기에 이렇게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식사했다.
 “쩝쩝. 아, 맛있어.”
 그릇을 비운 준은 과일과 함께 차를 마셨다.
 글리아나와 같이 마셨으면 좋았을 텐데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준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혼자 차를 즐겼다.
 글리아나는 준의 부인이자 동시에 왕비였다. 또한 엘프 여전사라 검술 실력이 뛰어났고, 마법도 대마법사급이었다. 여기에다 얼굴과 몸매도 엘프 중에 경국지색이라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배가 부르자 피로가 몰려왔다.
 천왕대심공을 운용한다면 피로가 금방 회복되겠지만 오늘은 그냥 잠을 푹 자고 일어나고 싶었다.
 침대에 누운 준은 곧 잠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숲 속의 밤이 지나갔다.
 짹짹짹!
 게르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에 작은 새 2마리가 내려앉아 서로 부리를 부딪치면서 지저귀더니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에서 깨어나 샤워부터 하고 요리를 만들어 먹은 준은 이 숲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옷을 입고 허리에는 롱 소드를 매어 찼다. 그리고 여행자 갈색 로브를 겉에 걸친 채 게르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해가 머리 위에 있는 걸 보니 정오쯤 되는 모양이었다.
 “으음, 내가 늦잠을 잔 모양이군.”
 이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꿀맛 같은 잠이었기에 모처럼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플라이!”
 부우웅.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오른 준은 사방이 온통 숲이자 좀 더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평선 끝에까지 온통 녹색 물결이었다.
 “으음, 예전 드로이안 산맥의 고요의 숲이 생각나는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기분이 새로웠다.
 고요의 숲은 드로이안 산맥에 자리 잡고 있는 숲으로 엘프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마케리안 대륙의 남부 왕국인 오이란트 왕국의 남부 지역에 있는 켈리온 자작령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엄청나게 넓었기에 수일 동안 이동하고서야 겨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이곳도 그때의 고요의 숲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무척 넓어 보였다.
 고민하던 준은 무작정 숲의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페밀리어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숲이 너무 넓었기에 날개를 가진 페밀리어라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도 충분히 정찰할 수 있었다.
 츠츠츠츠.
 준의 손바닥 위에 눈이 붉게 물든 꿀벌 10마리가 소환되었다.
 “흩어져서 지평선 끝까지 정찰해 인간이 있는지 찾아라. 가라.”
 부우웅, 붕붕.
 꿀벌 페밀리어들은 날갯짓을 힘차게 하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잠시 숲을 바라보던 준은 땅으로 스르르 내려왔다.
 저벅저벅.
 준의 머릿속으로 꿀벌 페밀리어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면서 본 숲 속의 풍경들이 그려졌다.
 공중에서 사방을 실제로 전망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 광경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마력을 끌어올린 준은 결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치해두었던 결계의 핵심적인 곳이었다.
 스스스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주는 결계가 소멸되었다.
 “이제 설치해두었던 게르도 거두어야겠어.”
 스윽!
 준은 마력을 이용하여 게르의 한 곳을 눌렀다.
 차르르르.
 경쾌한 소리가 일어나면서 펼쳐졌던 게르가 순식간에 손바닥 정도 크기로 줄어들자 땅바닥에 놓인 게르를 마력으로 끌어당겨 허리에 묶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10여 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간 꿀벌 페밀리어들이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숲이었다.
 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숲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
 “으음, 이름도 모르는 울창한 숲 속으로 이동되었으니 빠져나가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어.”
 아직까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꿀벌 페밀리어가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몬스터 무리가 보였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게 오크였고, 그 외에 코볼트나 고블린도 있었다. 그리고 육상의 포식자라 알려진 오우거와 트롤도 가끔 한 마리씩 보였다.
 사방으로 정찰을 위해 날아간 꿀벌 페밀리어들이 새들의 공격을 받아 한 마리씩 사라졌다.
 보통 마법사들이 시전한 페밀리어가 잘못되거나 소멸당하면 시전한 마법사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준은 아니었다. 마도 시대의 마법서를 보고 응용한 페밀리어였기에 그냥 보이던 영상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 그의 정신이나 육체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준의 마음이 이렇게 느긋한 것이다.
 10마리의 꿀벌 페밀리어 중에서 이제는 겨우 2마리만 살아남아 아직도 해가 떠오른 동쪽을 향해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정찰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또 한 마리의 꿀벌 페밀리어 영상이 준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새에게 아마 잡아먹힌 것 같았다.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은 꿀벌 페밀리어는 계속 동쪽을 향해 날아가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고도를 낮추더니 활짝 핀 노란색 꽃 위에 내려앉았다.
 꿀벌 페밀리어는 꽃의 꿀을 빨아 먹기 위해 내려앉은 게 아니었다. 지금은 정찰 임무 수행 중이라 준의 명령 없이는 다른 짓을 하지 못했다.
 꿀벌 페밀리어의 눈에 사람의 이동 모습이 포착되었다. 모두 5명으로, 남자 4명에 여자 하나였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영상이 사라졌다. 꿀벌 페밀리어가 새나 곤충을 잡아먹는 동물에게 당한 모양이었다.
 “젠장, 조금만 더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 주다가 사라진 꿀벌 페밀리어는 준과 약 3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준은 플라이 마법으로 공중에 떠올라 동쪽을 향해 새처럼 날아갔다.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면 바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마나를 보충해 마력으로 가공하는 데 하루의 시간이 허비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플라이 마법 같은 것을 이용하면 마력 소모가 적기에 실용적이었다.
 쉐에에엑!
 파공음을 일으키면서 준은 빠르게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준이 동쪽을 향해 한창 날아가고 있을 때, 우측 하늘에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접근해오는 중이었다.
 몸통만 2미터나 되고, 활짝 펼친 양쪽 날개 길이가 10미터가 넘어 보였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7미터나 되는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와 목 부분까지는 흰 털이었고, 몸통은 갈색 털을 가진 괴조였다.
 준이 생각하기에 결코 만만한 새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스윽!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길이가 약 30센티미터 정도에 손가락 정도 굵기를 가진 은색 쇠막대기를 하나 꺼내 손에 쥐었다.
 이 쇠막대기는 예전에 준이 만들어놓은 아티팩트로, 매직 미사일이 발사될 수 있도록 공격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매직 미사일을 단발과 연발로 발사할 수 있으며, 5백 발까지 발사가 가능한 아티팩트였다.
 지금과 같은 때에는 아주 유용할 것 같아서 손에 쥔 것이다.
 “맛 좀 봐라, 매직 미사일.”
 츄츄츙!
 연속 3발의 매직 미사일이 생성되어 괴조에게로 날아갔다.
 엄청난 크기를 가진 괴조가 몸을 틀어 빠르게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피했다. 그러나 매직 미사일이 허공을 선회하여 다시 날아오자 결국 몸통에 격중되고 말았다.
 퍼퍼퍽!
 끼아아악.
 괴조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지만 곧 다시 자세를 잡고는 속도를 높여 준에게로 날아왔다.
 “젠장, 귀찮게 하는군. 매직 미사일.”
 츄츄츄츙!
 이번에는 아예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무려 30발의 매직 미사일을 생성해 괴조를 향해 발사했다.
 파공음을 일으키면서 빛의 매직 미사일 30발이 괴조에게로 날아가자 그제야 괴조도 겁을 먹고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한다고 매직 미사일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번 발사되면 목표물을 명중시켜야만 소멸되는 게 매직 미사일이었다.
 빠르게 하늘을 이리저리 날면서 피하려던 괴조였지만 매직 미사일이 조금 더 빨랐기에 결국 한 발이 몸통에 격중되고 말았다.
 퍼억!
 끼아악.
 이번에도 괴조에게서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괴조는 순간 충격을 받아 비틀거렸고, 뒤를 추격해오던 매직 미사일 29발이 시간차 공격으로 괴조의 몸통과 날개에 격중되었다.
 퍼퍼퍼퍽!
 끼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동시에 괴조의 몸통과 날개에서 녹색 피가 주르륵 흘렀다.
 괴조는 결국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콰콰콰, 와지끈!
 그리고 거대하게 솟은 나무들의 나뭇가지를 몇 개 부러뜨리면서 처박혔다.
 충격이 엄청난 듯 괴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듯 보였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다.
 준의 아티팩트에서 생성되어 발사된 매직 미사일은 전투 마법사가 펼친 매직 미사일보다 3배 정도 더 높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괴조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결국 추락하고 만 것이다.
 괴조를 처리한 준은 피식 웃으며 동쪽 하늘을 향해 계속 유유히 날아갔다.
 사사삭, 사삭!
 풀밭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이동하는 자들이 있었다.
 4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였다.
 앞장선 2명의 남자는 오크 가죽으로 만든 가죽 갑옷에 은빛으로 번뜩이는 끝이 뾰족한 창을 손에 들고 허리에는 각각 검을 매고 있었다.
 2명의 남자 뒤에는 갈색 로브를 입고 손에는 수정구가 박힌 마법 지팡이를 든 호리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면서 전진하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나 마법사요.’ 하는 차림이었다.
 마법사의 왼편에는 트롤 가죽 갑옷을 입은 날씬하면서도 가슴이 큰 금발의 여자가 손에 석궁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도 앞장서고 있는 남자들처럼 검이 매어져 있었다.
 일행의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 남자는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왼팔에는 원형 손방패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날이 크면서 양날 전투용 도끼인 배틀액스를 들고 있었다.
 중병인 배틀액스를 손에 든 것만 보아도 힘이 장사였다.
 이렇게 이들 5명은 파티를 이루어 숲 속을 이동 중이었다.
 갑자기 선두에서 이동 중이던 오른쪽 남자가 손짓하면서 자신의 상체를 숙였다. 그러자 일행도 즉시 상체를 숙여 전방을 노려보았다.
 8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사슴하고 비슷하게 생긴 동물들이 모여 풀을 뜯어 먹고 있었는데, 이 동물을 사람들은 라울이라 불렀다.
 모두 12마리로 적갈색의 털을 가지고 있고, 크기가 물소만 했다.
 라울의 암컷들은 뿔이 없었지만 3세 이상의 수컷들은 이마에 뿔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 뿔은 반달 모양으로 끝이 휘어져 있었으며, 각종 독을 해독하는 데 탁월했다.
 5세 이하가 가지고 있는 회색 뿔은 실버라 하고, 그 이상의 나이를 가진 노란빛이 나는 뿔은 로열이라 불렀다.
 실버 라울보다는 로열 라울이 더 해독 약효가 뛰어났다.
 라울은 고기 맛이 좋고 가죽도 고급이라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라울의 뿔이 가장 돈이 되었는데, 실버는 10골드, 로열은 1백 골드나 했다.
 라울은 큰 몸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리가 튼튼해 제법 스피드가 빨랐다.
 이들이 숲에 들어온 이유가 저 라울을 사냥하러 온 모양이었다.
 처척!
 준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와 나무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으음, 저들은 숲에 사냥하러 온 모양이군.”
 나무에 몸을 숨긴 준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스윽!
 파티원들 중에서 마법사가 주문을 중얼거리며 라울을 가리키자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라울들이 갑자기 쓰러졌다.
 꽈당!
 넘어진 라울들은 깜짝 놀라더니 벗어나려고 몸을 격하게 움직였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포박이라도 당한 듯했다.
 “서둘러, 시간 없어.”
 마법사가 소리치자 동료들이 재빨리 쓰러진 라울을 향해 달려갔다.
 일행이 라울의 10미터 정도까지 접근하자 라울은 포박에서 해제가 되었는지 벌떡 일어나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라울들은 마법 저항력을 약간 가지고 있었기에 겨우 20초 정도만 포박 마법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츄웅!
 석궁을 들고 있던 여자가 쿼럴을 발사했다.
 퍼억!
 로열이라는 뿔을 가진 라울의 목에 정통으로 쿼럴이 박히자 목에서 피를 흘리며 라울이 고꾸라졌다.
 “서둘러!”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
 근육질의 남자가 가장 먼저 라울에게 도착하더니 배틀액스를 휘둘러 라울의 머리를 강타했다.
 빠악!
 얼마나 강력하게 내리쳤는지 라울이 한 방에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9마리는 결국 도망쳐 버리고 잡은 것은 3마리뿐이었다.
 일행이 쓰러진 라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근육질 남자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젠장, 다 잡을 수 있었는데······.”
 “대장, 그래도 세 마리나 잡은 게 어디야?”
 석궁을 든 여자가 욕심도 많다는 듯 근육질 남자를 쳐다보자 머쓱해진 남자가 쓰러진 라울을 보면서 말했다.
 “로열 라울 한 마리에 실버 라울 두 마리를 잡았어.”
 “대장, 이 정도면 수입이 제법 짭짤해.”
 “메라, 다음 라울 사냥 땐 활을 준비해야겠어.”
 “그러게 내가 활을 준비하자고 했었잖아.”
 “쩝, 이럴 줄 내가 알았나? 어쨌든 매하슈, 수고했어.”
 마법사 매하슈는 대장 노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슥슥!
 카이와 카든 형제가 쓰러진 라울 곁으로 다가갔다.
 카이와 카든 형제는 얼굴이 많이 닮았지만 형인 카이의 입술 옆에 점이 하나 있었기에 그것으로 구별이 쉽게 이루어졌다.
 어쨌든 카이와 카든 형제는 로열 라울부터 조심스럽게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라울의 가죽에 흠집이 적어야 등급이 높고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죽을 벗기는 작업은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카이와 카든 형제는 그런 점에서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기에 이들은 어려서부터 각종 동물들의 가죽을 벗기는 기술을 배웠다. 그것이 오늘날 이렇게 파티를 이루어 라울을 사냥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라울의 뿔 실버 2개와 로열 1개를 조심스럽게 분리하여 한쪽에 내려놓았다.
 마법사 매하슈는 품속에서 검은 물소 가죽으로 만든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 주머니를 꺼내었다.
 스스스.
 라울의 뿔 실버 2개와 로열 1개가 순간 마법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카이, 카든 형제가 라울의 가죽을 벗겨 내려놓자 라울의 통가죽 3장도 역시 마법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슥슥, 스윽.
 라울 3마리 중에서 1마리의 뒷다리 2개를 잘라내고는 나머지 고기들도 전부 마법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 라울 고기도 정육점에 가져가 팔면 5골드 정도는 무난하게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라울은 뿔과 가죽, 고기까지 버릴 것이 없는 아주 유익한 동물이었다.
 나무 위에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준은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으음, 저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준은 매직아이 마법으로 저들의 몸속을 살펴보았는데,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심장에 3개의 마나 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울을 사냥할 때 펼친 홀드 퍼슨 마법, 즉 포박 마법을 사용하는 수준을 보니 3서클 마스터로 보였다.
 그리고 카이, 카든 형제는 소드유저 상급으로 보였다.
 검에 마나를 주입할 순 없지만 그래도 검술을 10년 정도는 익혀야만 소드유저 상급이었다.
 유일한 여자인 메라는 소드유저 중급의 실력이기에 이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졌지만 석궁을 보유하고 있어 단점이 보완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리더인 근육질의 노튼은 비록 배틀액스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라울을 내리칠 때 보니 약간의 마나를 배틀액스에 불어넣었었다.
 그것으로 보아 이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 보였으며, 동시에 소드익스퍼트 초급인 듯했다.
 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이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으음, 일단은 저들의 뒤를 따라가 보는 게 좋겠군.”
 스스스스.
 준은 투명화 마법을 펼쳐 모습을 감추었다.
 저벅저벅.
 한 시간 정도를 이동한 노튼 일행은 작은 골짜기에서 멈추었다.
 졸졸졸.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개울가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즉시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둥글게 돌을 쌓고는 그 안에 나무토막을 집어넣고 불을 피웠다.
 화르르.
 불길이 일어나자 찜통을 놓고 물을 부었다. 그리고 라울 뒷다리에 칼집을 넣은 뒤 그곳에 허브 잎을 꽂아 찜통에 넣었다. 간을 하기 위해 암염도 뿌렸다.
 찜통의 뚜껑을 닫아놓고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개울가에서 세수하고 손을 씻었다.
 노튼 일행과 약 2백 미터 정도 떨어진 나무 위에 은신해 있던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과일을 하나 꺼내 먹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글부글.
 노튼은 찜통 뚜껑을 열어 고기가 잘 익었나 칼로 찔러보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이 흘러 라울 뒷다리가 잘 삶아지자 삶아진 라울 뒷다리를 꺼내어 먹기 좋게 썰었다. 라울 뒷다리를 삶을 때 허브 잎을 넣었기에 라울 특유의 고기 잡냄새를 제거할 수 있었다.
 유일한 여자인 메라는 특제 소스를 만들어 가져와 내려놓았다.
 노튼 일행은 빙 둘러앉아서 삶은 라울 고기를 특제 소스에 찍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쩝쩝, 메라의 특제 소스는 최고야.”
 “음, 바로 이 맛이야.”
 라울 뒷다리가 2개나 되었기에 제법 고기가 많았지만 5명이 그것을 전부 먹어치웠다.
 노튼 일행은 식사를 끝마치고 소화를 조금 시킨 후에 다시 출발했다.
 “으음, 이제야 출발하는군.”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준은 노튼 일행의 뒤를 은밀하게 미행했다.
 한참을 이동하던 노튼 일행이 갑자기 멈추었다.
 “왜 그래, 매하슈?”
 “노튼 대장, 전방에 뭔가 있어.”
 “뭐라고? 모두들 전투 준비.”
 처처척!
 매하슈를 중심으로 전방에는 카이, 카든 형제가 서고, 매하슈의 좌측에는 메라가, 우측에는 노튼이 배틀액스를 가슴 앞으로 들어올리고 섰다.
 사사삭!
 길게 자란 풀을 헤치고 튀어나온 것은 10마리의 오크였다.
 오크들은 낡고 녹이 슨 칼과 전투용 도끼, 창, 나무로 만든 몽둥이까지 다양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녹색 피를 가져서인지 몸이 약간 푸르스름했고, 얼굴은 멧돼지와 유사했으며, 입에서 어금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신장은 노튼 일행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지만 어깨가 벌어진 게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취익, 연하고 맛있는 인간이다.”
 “취익, 공격해.”
 오크들이 자신의 일행을 공격하려고 하자 노튼이 즉시 외쳤다.
 “메라, 어서 저 오크 놈을 한 방 먹여!”
 “알았어, 대장.”
 슈웅!
 메라가 발사한 쿼럴이 오크 대장에게로 날아갔지만 그것을 눈치 챈 오크 대장이 머리를 옆으로 움직여 쿼럴을 피했다.
 하지만 오크 대장 뒤쪽에 서 있던 오크가 그만 날아온 쿼럴에 목을 맞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채채챙, 파팍!
 노튼과 카이, 카든 형제가 나서서 오크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마법사 매하슈와 메라는 뒤로 빠졌다.
 메라는 즉시 석궁에 쿼럴을 장착해 발사했다.
 슈슝!
 “캐에엑.”
 오크 한 마리가 이마에 쿼럴을 맞고는 뒤로 넘어갔다.
 마법사 매하슈가 공격 마법을 영창했다.
 “마나여, 적들에게 마법의 무서움을 느끼게 해주소서. 매직 미사일.”
 츠츠츠.
 마법사 매하슈의 전방에 5발의 매직 미사일이 형성되었다.
 스윽!
 그의 손짓에 의해 매직 미사일 1발이 먼저 오크에게 날아갔다.
 “취익, 마법사다.”
 퍼억!
 “캐에엑.”
 오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슈슈슈슝!
 나머지 4발의 매직 미사일이 한꺼번에 오크들에게 날아갔다.
 퍼퍼퍼퍽!
 “캐엑.”
 “컥.”
 “아욱!”
 “캐에엑.”
 4마리의 오크들이 매직 미사일에 맞고 머리가 박살나면서 뇌수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마법사 매하슈가 5마리의 오크를 처리하자 동료들이 여유롭게 나머지 오크들을 전부 죽였다.
 오크 대장은 노튼 대장이 휘두른 배틀액스에 머리가 잘려 쓰러졌다.
 “허헉, 헉헉.”
 모두들 숨이 찼기에 잠시 호흡을 고르며 쉬었다.
 “오크의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몰려올지 모르니까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노튼 대장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신속하게 그곳을 벗어났다.
 나무 위에서 이를 구경한 준은 피식거리더니 다시 노튼 일행의 뒤를 추격했다.
 숲에 밤이 찾아왔다.
 수 킬로미터를 이동한 노튼 일행은 거대한 바위 밑에서 야영을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로 인해 등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에 전방만 잘 주시하고 있었다.
 화르르, 활활!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낮에 잡았던 라울 고기를 불에 굽고 야채에 소스를 넣어 샐러드도 만들었다. 금속 주전자에는 팔팔 끓어오르는 물에 양유를 발효시켜 찻잎을 섞어서 만든 노란 양유 치즈 차도 넣었다.
 “쩝쩝쩝, 와사삭.”
 모두들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양유 치즈 차를 마시면 특유의 구수한 맛에 속이 따뜻하고 든든해졌다. 그래서 야영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필수품으로 애용하는 식품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메라가 먼저 보초를 서고, 일행은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웠다.
 숲 속의 밤은 제법 쌀쌀했지만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에 훈훈했다.
 초저녁에 보초를 서는 게 가장 편했기에 모두들 메라를 배려해주었다.
 2시간 정도가 흐른 뒤 두 번째로 보초를 서게 된 자는 마법사 매하슈였다.
 준은 나무 위에 등을 기대고서 노튼 일행을 관찰했다.
 천왕대심공을 극성으로 익힌 그는 더위와 추위가 침범하지 못하는 경지인 한서불침(寒暑不侵)의 몸이었다. 또한 그가 입고 있는 갈색 로브도 보기엔 흔한 여행자용 로브 같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혀 달랐다.
 로브 속은 족제빗과의 코코라는 동물의 가죽과 털을 최고 장인의 손을 거쳐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들었다.
 건국왕이었던 준이 사용하는 로브였기에 최고의 장인이 이런 로브를 10벌이나 만들어 바쳤었다.
 이 로브에다 준은 마법 약물을 첨가했다. 로브가 검이나 다른 무기에 베어지거나 불에 타지 않도록 마법적인 처리를 했기에 어지간한 물리력에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아공간 속에 넣어둔 그러한 로브를 준이 한 벌 꺼내어 입은 것이다.
 마법사 매하슈가 보초를 설 때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 번째로 보초를 선 자는 카이였다.
 한 시간쯤 아무런 일 없이 지나자 카이가 크게 하품을 했다.
 “아함, 왜 이렇게 피곤하지?”
 잠을 쫓아내보려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점점 더 피곤해졌다.
 카이는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렇게 극심할 정도로 피곤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스르르 몸이 옆으로 쓰러져 코를 골면서 잠에 빠져 버렸다.
 휘리릭, 처척!
 높은 나무 위에서 가볍게 바닥에 내려선 준은 태연하게 잠에 빠져 있는 노튼 일행의 곁으로 접근했다.
 “후후후, 모두들 잠에 빠졌군. 이제부터 슬슬 시작해볼까?”
 노튼 일행이 잠에 빠진 건 준의 수법 때문이었다.
 준은 나무 위에서 노튼 일행을 지켜보다가 밤이 깊어지자 수면 성분을 가진 말라린 가루를 마법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그런 후 그것을 마력으로 공중에 떠 있게 만들고 공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수분을 이용하여 잘 희석시켰다.
 그리고 안개처럼 고운 입자로 만들어 노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니 보초를 서고 있던 카이가 제일 먼저 잠에 빠져 버렸고, 이미 잠에 빠져 있던 나머지 일행도 희석시킨 말라린액을 코로 들이마셨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이다.
 콰악!
 쓰러져 있는 카이의 머리를 움켜쥔 준이 나직하게 외쳤다.
 “매직 메모리 스캔!”
 츠츠츠츠!
 준의 손에서 기이한 빛이 일어나더니 카이의 머리에 스며들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빛이 다시 준의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준은 카이가 태어나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기억을 마법으로 복사했다.
 카이의 기억을 모두 입수한 준은 이번에는 다른 일행의 기억을 한 사람씩 복사했다.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작업은 모두 끝났다.
 고개를 끄덕인 준은 투명화 마법을 펼쳐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한 후 노튼 일행의 중독을 치료해주기 위해 마법을 영창했다.
 “큐어 포이즌!”
 츠츠츠츠!
 노튼 일행의 몸에서 순간 기이한 빛이 번쩍이다가 사라졌다. 희석시킨 말라린액에 중독되었던 몸이 치료된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준은 이번에는 쓰러져 있는 카이를 마력으로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나무 위로 올라가더니 갑자기 마력을 거두었다.
 쿠웅!
 옆으로 쓰러진 카이는 깜짝 놀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다행히 일행은 그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카이는 불 옆에 놓아두었던 주전자를 들어 금속 잔에 부었다.
 쪼르르르.
 따끈한 양유 치즈 차를 한 모금 마시자 구수하고 맛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카이는 동생 카든을 잠에서 깨웠다.
 카든은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흔들어 잠을 깼다.
 모닥불의 불은 많이 약해졌지만 숯불 때문에 열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닥불에 준비해둔 나무를 몇 개 집어넣자 불길이 다시 활활 치솟았다.
 카든은 양유 치즈 차가 들어 있는 주전자를 들어 금속 잔에 부어 한 모금 마셨다.
 “아, 구수하고 맛있어.”
 그렇게 차례대로 노튼 일행은 밤을 지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보초를 섰다.
 한편, 노튼 일행에게서 기억을 복사해 살펴본 준은 충격에 빠졌다.
 “이, 이럴 수가!”
 노튼 일행 중에서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자는 마법사 매하슈였다.
 마법사들은 많은 것을 알아야 하기에 그 역시 마법 아카데미에 소장되어 있는 각종 책을 수백 권이나 읽었다.
 준이 충격을 받은 건 이곳이 뮤란 대륙이라는 것에도 있었지만 진정으로 놀란 건 시간에 있었다. 그가 마케리안 대륙의 엘도라도 왕국에서 살던 시대에서 무려 1천 년이나 세월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노튼 일행의 기억을 복사해 확인해보기 전만 해도 마케리안 대륙의 어느 오지의 숲이나 밀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약 2만 년 전에 중간계에 신마대전이 일어났다.
 서로 질 수 없는 싸움이었기에 그만큼 치열했는데, 최강의 힘이 서로 충돌하자 우주의 질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주신께서 현신하셨다.
 그때의 영향으로 마케리안 대륙이 지각변동을 일으켜 결국 대륙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사건이 있었다.
 그 떨어져 나간 대륙이 바로 뮤란 대륙이었다.
 마케리안 대륙의 5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뮤란 대륙은 지구 아시아 대륙의 2배 크기였다.
 한데, 뮤란 대륙이 지각변동의 영향으로 마케리안 대륙의 남서부에서 떨어져 나와 점점 멀어지다가 멈추었다.
 그것이 마케리안 대륙에서 보면 사선으로 약 2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마케리안 대륙과 뮤란 대륙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하늘을 날거나 워프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드래곤이 아닌 인간으로선 대해양을 건넌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항해술이나 배로는 대해양의 거친 폭풍과 온갖 종류의 해양 몬스터를 뚫고 왕래하지 못한다. 다만, 간혹 뮤란 대륙인의 배가 난파되면서 파도에 떠밀려 표류하다가 운이 좋아 마케리안 대륙의 해안에 도착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반대로 마케리안 대륙인도 같은 방법으로 뮤란 대륙의 해안에 도착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아주 극소수였다.
 신마대전 이후 마케리안 대륙과 뮤란 대륙은 교류 자체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준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충격을 받도록 했다.
 노튼 일행의 기억으로 준은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하고 깊은 사색에 젖어들었다.
 
 
 제2장 사색
 
 
 짹짹짹!
 작은 새 떼가 시끄럽게 지저귀면서 노튼 일행의 야영지를 가로질러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보초를 서고 있던 노튼 대장을 제외하고 잠에 빠져 있던 일행이 잠에서 깨어났다.
 일행은 정신들을 차린 후 서둘러 야영지를 정리했다.
 아침은 간단하게 빵과 양유 치즈 차로 때웠다.
 냄비를 비롯해 그릇과 각종 야영 물품들은 전부 마법사 매하슈의 마법 주머니 속에 넣어 보관했다.
 마법사 매하슈는 아직 3서클 마스터라 이런 마법 주머니를 제작하진 못했다. 마법 주머니 정도를 제작하려면 최소 4서클 마스터에는 올라야 가능했다.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들이 주로 제작해 대상단에 납품하면 대상단에서는 그걸 대륙 전역으로 운반해 마법 상점에서 판매한다.
 뮤란 대륙에서 통용되고 있는 화폐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가장 작은 돈이 코인이며 1백 코인이 1실버, 10실버가 1골드였다.
 그리고 대상단 때문에 고액권이 1천 년 전부터 생겨났는데, 그건 바로 1킬로그램짜리 골드바였다.
 무게가 정확하게 1킬로그램인 골드바는 1천 골드로 통용된다.
 1코인은 1백 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데, 밀가루로 만든 빵을 하나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뮤란 대륙의 평민 한 달 생활비가 1골드였다.
 “출발하자.”
 “알았어, 대장.”
 “서두르자고.”
 노튼 대장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쪽을 향해 출발했다.
 그때까지도 준은 나무 위에서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다.
 불치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연이 찾아왔다.
 천왕문의 제자가 되어 천왕대심공을 수련하던 중 폭우로 인해 드러난 동굴을 살펴보던 준은 새로운 세상으로 이동되고 말았는데, 그곳이 바로 마케리안 대륙이었다.
 현세로 되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드로이안 산맥의 월계수 엘프 부족의 케르킨 부족장에게서 신이 직접 만들고 기운을 불어넣은 신의 아티팩트에 관하여 듣게 되었다.
 신의 아티팩트 5개가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아름다운 엘프 여전사 글리아나와 함께 대륙을 여행하면서 신의 아티팩트를 찾아다녔다.
 승승장구하던 준은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동물이 복용하면 수명이 1만 년으로 늘어난다는 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듣게 되고, 그것을 어렵게 찾았지만 오크왕 쿠퍼가 그걸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레드 드래곤 마르시아까지 방해를 하여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준은 오크왕 쿠퍼와 레드 드래곤 마르시아의 협공을 받았는데, 그때 절대 마법인 파워 워드 킬이라는 마법에 공격을 당했다. 거기에다 석화 마법까지 맞으면서 겨우 순간 이동 마법으로 탈출했다.
 다시 깨어난 곳은 바렌 왕국의 베일레 자작령이었고, 베일레 자작에게 구원을 받아 그의 양자가 된다.
 그리고 프리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마법과 천왕대심공, 거기에다가 신의 아티팩트까지 입수하면서 경이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그 후 사랑하는 엘프 여전사 글리아나를 다시 찾아내어 둘은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아들과 딸도 낳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바렌 왕국이 반란으로 분열되자 베일레 자작령은 엘도라도 영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렇게 개국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면서 반란군들과 한판 승부를 벌여서 승리해 왕국을 개국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서둘러서일까?
 준은 혼돈의 권능을 가진 히민반가르를 입수하면서 무리하게 서둘러 기운을 흡수하다가 그만 공간의 틈 속으로 빠졌고, 1천 년 후의 뮤란 대륙으로 다시 빠져나왔다.
 그런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고, 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준은 나무 위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 3일이 지나고서야 깊은 사색에서 벗어났다. 그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기에 얼굴이 푸석했다.
 “후후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동안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져 보니 이해가 되는군.”
 준은 신의 아티팩트 4개를 입수해 그 일부 기운을 몸속에 흡수했는데, 그만 과욕을 부려 혼돈의 권능을 가진 히민반가르를 무리하게 많이 흡수하다가 사고가 일어났다.
 신의 아티팩트 5개의 기운이 서로 충돌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생겨나게 되자 공간이 견디지 못하고 구멍이 나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구멍 난 공간 속에 빨려 들어간 준은 천왕대심공을 운용하면서 어떻게든 힘의 조화를 시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 힘의 조화가 이루어지면서 신의 아티팩트 기운은 준의 몸속에서 강제 봉인되었다.
 공간의 틈 속에서 인간의 육체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었기에 남아 있는 기운을 대거 투입해 겨우 다시 공간의 틈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며칠이 지난 게 아니라 미래의 시간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그것이 1천 년이나 지난 시간이었으며, 또한 마케리안 대륙이 아닌 뮤란 대륙이었다.
 사랑하는 글리아나와 아들 아담 왕자, 샤이나와 꼬레아 왕자와 비너스 공주, 양부이면서 상왕인 베일레까지 가족들이 보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나마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려면 신의 아티팩트를 봉인한 걸 다시 해제하여 그 기운을 모두 흡수해야만 가능하게 생각되었다.
 5가지 신의 아티팩트 기운을 흡수한 준이라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 기운을 전부 흡수한다면 신계에서도 상급의 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멀게만 느껴졌기에 절망스러운 마음이었다.
 “언제고 난 다시 돌아간다. 그때까지는 이곳 뮤란 대륙에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정착해야겠어.”
 준은 일단 뮤란 대륙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마법사 매하슈의 기억을 복사한 걸 떠올렸다.
 뮤란 대륙은 준이 마케리안 대륙의 엘도라도를 발전시키기 이전의 낙후된 사회 수준이었다.
 위생 개념도 없고, 천일염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암염 한 가지만 소금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뮤란 대륙은 뮤란 대륙 공통어로 통용되고 있었는데, 글자는 매하슈의 기억에서 대충 알게 되었다.
 언어가 달라도 마법을 펼치는 원리는 똑같았다.
 뮤란 대륙 공통어를 배워야 했지만 준에게는 통역 반지가 있기에 의사소통은 걱정 없었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가 책을 읽으면서 배우려고 마음먹었다.
 준은 마법사 매하슈가 알고 있는 기억을 토대로 뮤란 대륙 역사를 살펴보았다.
 뮤란 대륙엔 2만 년 전 신마대전이 일어나 대륙이 떨어져 나온 이후 여러 개의 왕국이 멸망하고 다시 개국하길 반복하다가 2천 년 전에야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한 왕국이 있었다.
 그것이 뮤란 왕국이었는데, 대륙을 통일한 만큼 뮤란 제국으로 거듭났다.
 그동안 수십 개의 각종 언어와 넓이, 길이, 부피, 무게 등 각종 단위도 제각각이었는데 이것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버렸다.
 그것이 뮤란 제국어가 뮤란 대륙 공통어가 된 이유였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사용되게 된 이유였다.
 뮤란 제국은 800년 전까지 1,200년 동안 역사가 잘 이어져 내려오다가 그만 제국이 분열되어버렸다.
 현재의 뮤란 대륙에는 하나의 제국과 5개의 왕국, 2개의 연합국이 존재했다.
 뮤란 대륙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오다가 하나는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오고, 나머지 하나는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몬스터 산맥을 중심으로 나뉘었다.
 몬스터 산맥의 서쪽 서부 지역의 3분의 2는 벨렘 제국의 땅이었다.
 벨렘 제국의 남쪽에는 노스 왕국이 있으며, 그 밑은 아직 인간들의 발자취가 없는 미지의 몬스터 랜드였다.
 몬스터 랜드는 뮤란 대륙의 남부 지역으로 뮤란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넓은 땅이었다. 그리고 몬스터 산맥 너머 뮤란 대륙 북부 지역으로는 제국에서 왕국이 되어버린 뮤란 왕국, 그 밑으로는 레나 왕국이 있었다.
 뮤란 대륙의 동부 지역엔 딕손 왕국과 샬렛 왕국이 있었다. 다음으로 뮤란 대륙의 중부 지역과 몬스터 랜드를 제외한 남부 지역에는 이종족의 미스티 연합, 벨렘 제국과 다섯 왕국의 탄압에서 벗어나고자 뭉친 자유민들이 모여 만든 세력인 프리랜드 연합이 있었다.
 뮤란 대륙에서 가장 큰 땅과 세력을 가진 곳은 벨렘 제국이었고, 벨렘 제국에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왕국이 레나 왕국이었다.
 준이 현재 속해 있는 곳은 뮤란 대륙의 남부 지역 프리랜드 연합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프리랜드 연합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었기에 몬스터 랜드와 가까웠다.
 바렌츠 산맥은 뮤란 대륙의 몬스터 랜드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타원형 모양으로 생겼으며,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다.
 스윽!
 준은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서 은빛으로 번뜩이는 미스릴 반지를 하나 꺼내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밋밋한 미스릴 반지였지만 안쪽은 달랐다. 마법의 룬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스릴 반지를 잠시 바라보던 준은 왼손 약지에 끼웠다.
 “후후후, 통역 반지를 꼈으니 당분간 의사소통에는 걱정 없겠어.”
 꼬르륵!
 배 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피식 웃었다.
 “배가 고픈 걸 보니 우선 배부터 채우고 나서 생각해야겠군.”
 나무 위에서 몸을 날려 떨어지다가 공중제비를 멋지게 펼치면서 땅에 내려섰다.
 노튼 일행이 야영했던 곳이었기에 준도 여기에서 당분간 야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촤라라락!
 경쾌한 소리가 일어나면서 마법의 게르가 설치되었다.
 준은 게르 주변에 결계를 친 후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요리를 만들어 먹은 후 옷을 벗고 샤워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않았기에 몸이 지저분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에 든 준은 노튼 일행에게서 입수한 기억들을 다시 하나씩 꺼내어 살펴보면서 뮤란 대륙에 관한 것들을 파악했다.
 준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기억도 많았기에 그런 것들은 분리해 끌어 모았다.
 그렇게 정밀하게 입수한 기억들을 분석하면서 준은 뮤란 대륙에 관하여 조금씩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고 있었다.
 마법사 매하슈의 기억에서는 뮤란 대륙의 각종 지식에 관한 것들을 알게 되었고, 유일한 여자인 메라에게선 뮤란 대륙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뮤란 대륙의 귀족 여자들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였다.
 노튼 대장과 카이, 카든 형제의 기억에서는 뮤란 대륙의 용병들 생활과 그 밖의 평민이나 농노, 유민들의 실생활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자유민들이 모여 만든 세력인 프리랜드 연합이었기에 자유민들의 보편적인 생각도 중요했다.
 이런저런 노튼 일행의 기억들을 정밀하게 파악하는 데도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으음, 어쨌든 이곳 바렌츠 산맥의 숲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북동쪽으로 십사 일 거리에 있는 고카라스 빅 시티이니 일단 그곳에 거처를 마련해 좀 더 적응하는 게 좋겠어. 일단 이곳에서 적응하면 세력을 키워 왕국을 개국해야겠어.”
 프리랜드 연합은 왕국이 아니기에 도시 형태로 발전한 땅이었다. 그건 자유민들이 이 땅으로 하나 둘씩 이주해오면서 마을 규모에서 큰 도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현재 프리랜드 연합은 30만 명 정도 규모의 빅 시티가 5개 건설되어 있고, 하나의 빅 시티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5만 명 규모의 성을 4개나 축성해 빅 시티를 방어하도록 건설되어 있었다.
 4대 성 인근에는 목책으로 둘러싸인 1천 명 정도 규모의 마을도 20개 정도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프리랜드 연합은 빅 시티 하나에 4대 성과 마을까지 포함하면 50만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었다.
 프리랜드 연합엔 5개의 빅 시티가 존재하고 있으며, 각 빅 시티마다 이름이 달랐다.
 가장 세력이 큰 빅 시티는 바이잔 빅 시티이며 데르마, 두프, 고카라스, 빌마 빅 시티 순이었다.
 저벅저벅.
 준은 게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지난 3일 동안 프리랜드 연합에 관한 것들을 파악하고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기에 든든하게 식사하고 샤워도 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설치했던 결계부터 해제했다.
 촤라라락.
 경쾌한 소리가 일어나면서 마법의 게르가 준의 손으로 회수되었다.
 “자, 이제 가볼까? 플라이!”
 부우웅!
 공중으로 떠오른 준은 북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루냐 늪.
 굽이굽이 흐르는 루냐 강은 1,200킬로미터나 되며, 루냐 강에 가까이 있는 루냐 늪은 루냐 강의 영향을 크게 받는 습지이다.
 루냐 늪은 수 킬로미터에 이르고, 수위가 평소에는 4미터, 우기에는 6미터에 이른다.
 연중 봄과 같이 따뜻한 날씨이며, 우기는 세 달 정도이고 나머지는 건기였다.
 풍부한 먹이가 서식하고 있었기에 새들이 많이 찾아왔고, 각종 동물들도 물을 마시기 위해 찾는 곳이기에 오크 무리도 많이 사냥하러 왔다.
 사사삭, 사삭.
 길게 자란 풀을 헤치고 나타난 이들은 노튼 일행이었다.
 선두에서 움직이던 노튼이 갑자기 멈추며 상체를 숙였다. 그에 긴장하고 있던 일행도 즉시 상체를 따라 숙였다.
 “모두들 조심해. 저 앞에 오크 무리가 있어.”
 노튼이 나직하게 말하자 그제야 일행도 대각선으로 약 150미터 정도 떨어진 물가에 20여 마리의 오크들이 모여 있는 걸 확인했다.
 오크들의 맞은편 물가에는 검은 털을 가진 1백여 마리의 물소 떼가 번갈아 가면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물소 떼와 오크 무리가 약 30미터 거리를 둔 가운데에 루냐 늪이 자리해 있었다.
 오크들이 헤엄을 치지 못하는 걸 알기에 물소 떼는 안심하고 물을 마셨다. 그에 오크들은 맛있는 물소 고기를 눈앞에 두고 어찌해야 할지 고민들이었다.
 다행히 오크 무리에는 제법 영리한 쿠루라는 대장이 사냥에 참여하고 있었다.
 쿠루는 잠시 눈을 껌뻑거리며 생각하더니 좋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인지 뭐라 손짓했다.
 그제야 오크들이 갑자기 뒤돌아 풀 사이로 사라졌다.
 오크가 모두 사라지자 그동안 눈치만 보고 있던 나머지 물소들이 한꺼번에 물가로 다가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사라졌던 오크들이 끝이 뾰족한 창을 들고 나타나더니 일제히 물소 떼에게 던졌다.
 슈슈슈슝!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창은 물을 마시고 있는 물소의 머리나 등에 꽂혔다.
 우워어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물소 3마리가 옆으로 쓰러졌고, 나머지 물소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
 쿠루가 으쓱하자 동료 오크들이 양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면서 좋아들 했다. 일단 물소 3마리를 잡았으니 이젠 조금 밑으로 내려가 건너가면 저 물소들을 마을로 가져갈 수 있었다.
 노튼 일행도 오크가 사냥하는 걸 지켜보고는 제법인데 하는 표정이었다.
 무식한 오크들 중에는 간혹 저렇게 머리를 쓰면서 사냥하는 오크들도 있었다.
 쉐에에엑!
 갑자기 하늘 저편에서 파공음이 일어나며 빠른 속도로 뭔가가 날아왔다.
 노튼 일행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았다.
 1백여 미터의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갈색 로브를 입고 머리에는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기에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플라이 마법으로 간혹 마법사들이 공중을 날아가는 걸 보았지만 저렇게 수배나 빠르지는 못했다. 마치 석궁에서 발사된 쿼럴이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듯했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간 자는 준이었다.
 준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풀밭에 상체를 숙이고 있는 노튼 일행을 먼저 보았다.
 ‘육 일이나 먼저 이동했는데 겨우 여기까지밖에 이동하지 못했군.’
 처척!
 준은 잘 날아가다가 갑자기 땅으로 내려섰다. 그 앞에는 오크들이 사냥한 물소 3마리가 창에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호오, 이런 데 귀한 물소가 쓰러져 있네. 재수 좋은 날인데?”
 스윽!
 준의 손짓에 물소의 머리와 등에 꽂혀 있던 창이 스르르 뽑혀져 저쪽에 떨어졌다.
 두둥실.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를 벌리자 공중으로 떠오른 물소 3마리가 스르르 순식간에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름이 겨우 3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마법 주머니에 엄청난 몸집을 가진 물소 3마리가 들어가는 게 신기했다.
 피식 웃으면서 준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노튼 일행은 멍한 표정이 되어 사라지는 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저거?”
 노튼 대장이 입을 쩌억 벌리며 놀라워했지만 마법사 매하슈만큼은 아니었다.
 “으음, 대단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어.”
 10분 정도 지났을까?
 물소가 쓰러져 있던 곳에 나타난 오크들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이곳에 물소 3마리가 쓰러져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에는 자신들의 창이 물소 피를 묻힌 채 방치되어 있었고, 땅바닥에도 물소의 무게 때문에 선명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쿠루는 하늘과 땅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주위도 살펴보았다.
 그때, 쿠루의 눈에 노튼 일행이 숨어 있는 게 들어왔다.
 “취익, 저 인간들이 먹이를 훔쳐 갔다!”
 “취익, 인간을 잡아라.”
 황당한 상황에 잠시 방심한 노튼 일행이 상체를 들고 있다가 그만 쿠루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안 그래도 오크들은 인간들만 보면 연하고 맛있는 먹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냥한 물소까지 훔쳐 갔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20마리의 오크들이 노튼 일행을 향해 달려오자 노튼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
 “이런, 젠장. 튀어!”
 “이, 이런!”
 후다닥!
 노튼 일행은 분노한 오크들을 피해 재빨리 숲 속으로 사라졌다.
 흥분한 오크들은 노튼 일행의 뒤를 추격해왔지만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스윽, 슥슥.
 준은 우연히 획득한 물소를 마법 주머니에서 꺼내어 바위 위에 펼쳐 놓고는 조심스럽게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주변에는 바위들이 10여 개 있었는데, 준이 올라와 있는 바위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바위였다.
 높이가 10여 미터에 이르고 평평하면서 약 20미터의 넓은 바위였다.
 사아악!
 물소 가죽이 살에서 분리되고 있었다.
 준은 마력을 일으켜 공기를 응축해서 마법의 칼날을 생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 손짓만으로 조종해 물소 가죽을 벗기는 신기를 보여 주었다.
 3장의 물소 가죽이 벗겨지자 이번에는 공중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츠츠츠츠.
 공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수분이 한곳으로 뭉치면서 거대한 물방울이 형성되었다.
 거대한 물방울이 공중에 형성되는 것도 신기한데 그것이 그대로 둥둥 떠 있었다.
 스윽!
 바위에 놓인 물소 가죽 2장이 공중으로 스르르 떠오르더니 거대한 물방울에 뒤섞였다. 그리고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물소 가죽에는 피와 각종 오염 물질이 묻어 있었는데, 그것들이 일제히 제거되었다.
 이번에는 세척된 물소 가죽 3장이 준의 마력으로 수분이 전부 빠지면서 뽀송뽀송해졌다.
 수일간 잘 말린 물소 가죽처럼 된 것이다.
 물소 가죽을 손으로 만져 본 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족해했다.
 이번에는 가죽이 벗겨진 물소 3마리를 마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한꺼번에 들어올리더니 역시 마법으로 형성된 공기의 칼날로 각 부위별로 나누었다.
 마법의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 번씩 지나가기만 하면 뼈까지도 썩둑 잘려 버렸다.
 물소의 피를 모두 제거하고 고기와 내장은 따로 분리하더니 이번에는 물소 고기에 차가운 냉기를 불어넣어 살짝 얼렸다.
 스윽.
 마법 주머니를 내밀자 순식간에 물소 고기가 그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물방울을 움직여 지저분해진 바위를 깨끗하게 청소한 준은 저 멀리 그것을 날려 보냈다.
 촤아아악!
 1백여 미터를 날아간 거대한 물방울이 땅에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져다.
 준과 같이 마법을 이렇게 생활에 많이 활용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준은 높은 서클의 공격 마법을 펼치는 것만이 최고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생활에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아, 정말 이곳은 경치가 좋구나.”
 높은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는 녹색의 물결로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자세히 숲을 들여다본다면 약육강식의 거친 세계일 것이다.
 어쨌든 한가로이 바위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준에게는 마치 영혼을 정화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연은 이렇게 좋은 느낌이었다.
 지글지글.
 맛있게 고기가 불에 익어가고 있었다.
 연한 물소 고기의 등심 부위를 두툼하게 썰어 칼집을 내고 그곳에 향신료와 허브 잎을 섞어 넣고는 천일염으로 약간 간을 했다.
 그리고 마력으로 들어올린 준은 고기 밑에 화염계 마법을 약하게 일으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바위 위다 보니 모든 게 여의치 않아서 이렇게 마법을 응용하여 고기를 구워 먹으려는 것이다.
 고기가 잘 구워지자 은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각종 과일을 섞은 소스를 잘 구워진 고기 위에 뿌렸다.
 우물우물.
 잘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고 씹던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레드 와인을 한 병 꺼내어 잔에 부었다.
 “음, 역시 고기는 와인하고 같이 먹어야 돼.”
 제법 많은 양이었지만 그것들을 전부 먹어치운 준은 이번에는 디저트로 과일을 잘게 썰어 일부는 즙을 내어 유리그릇에 담았다. 그리고는 벌꿀을 집어넣고 공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수분을 끌어 모아 냉기를 불어넣어 얼렸다.
 쩌쩡!
 공중에 생성된 얼음에 압력을 가했더니 잘게 부서졌다. 마법을 응용해 간단하게 과일 빙수를 만든 것이다.
 준이 바위 위에서 금과 백금 콤비에 아름답게 세공된 금스푼으로 과일 빙수를 만들어 먹고 있을 때, 저쪽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며 접근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헉헉, 허헉.”
 거친 숨을 내쉬며 바위로 접근한 자들은 노튼 일행이었다.
 “저기 있다!”
 흥분한 카든이 그만 준에게 손가락질을 해버렸다.
 과일 빙수를 먹고 있던 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강자라는 게 느껴지는 그 모습에 카든을 제외한 일행은 잔뜩 긴장했다.
 특히 마법사 매하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싸한 느낌에 메라도 몸이 떨려 왔다.
 통역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준은 카든의 말을 알아들었다.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건가?”
 “당신 때문에 우리가 오크들에게 죽을 뻔했어.”
 “난 너와 만난 적도 없는데 무슨 말이지?”
 “당신이 늪가에서 물소를 훔쳐 갔잖아?”
 준은 카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지만 모른 척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무슨 헛소리냐? 난 그런 적 없다.”
 “이, 이··· 시치미를!”
 흥분한 카든을 동료들이 말렸다. 물소 3마리가 준의 마법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기에 그 안을 살펴보기 전에는 증거가 없었다.
 그의 말을 증명할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노튼 대장은 카든을 말렸다. 척 보니 준의 실력이 더 뛰어나 보였던 것이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면 득보다는 실이 클 것 같았다.
 스윽!
 준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자 카든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저러지?”
 퍼억!
 뭐가 어떻게 날아오는지도 모른 채 카든은 가슴에 한 방을 얻어맞고는 훨훨 날아가 떨어졌다.
 “커억!”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힘겹게 일어난 카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에서 주르륵 피를 흘렸다. 동시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료들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휘리릭, 처척!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위에서 가볍게 내려온 준이 노튼 일행에게 접근했다.
 준은 태연하게 접근했지만 노튼 일행은 그에게서 내뿜어진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는 뒷걸음쳤다. 스멀스멀 공포가 일어나 노튼 일행을 휘감은 것이다.
 “지금 나하고 한번 싸워보자 이건가?”
 “아, 아니요.”
 노튼 대장이 대표로 대답했기에 준이 노튼을 쳐다보았다.
 “뭔가 착각한 것 같으니 이번만큼은 내가 참도록 하지.”
 “······.”
 파악!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도약한 준은 그대로 플라이 마법으로 북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쉐에에엑!
 파공음이 일어날 정도로 빠르게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는 준을 본 노튼 일행은 또다시 멍한 표정이었다.
 “매하슈, 봤어?”
 “예, 대장. 몸에서 내뿜는 기운이 엄청났어요. 저런 사람은 처음 봐요.”
 “으음, 나도 그렇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카든이 말했다.
 “대장,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이런 멍청한! 그자가 어떻게 펼쳤는지도 모르게 당한 것 잊었어?”
 “우욱, 안 그래도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그래? 매하슈, 카든의 상태가 어떤지 한번 봐줘.”
 “예, 대장.”
 카든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살펴본 마법사 매하슈는 깜짝 놀랐다.
 “이거 생각보다는 내상이 심한 것 같아. 오 일 정도는 무리하지 말아야 돼.”
 “뭐? 그 정도야?”
 “그래. 이것도 그 사람이 많이 봐준 것 같아.”
 “그거 정말이야?”
 “그래. 조금 전에 도약하는 거랑 하늘을 날아가는 것 못 봤어?”
 “······.”
 “우리 전부가 달려들어도 그자에게는 안 돼.”
 “뭐? 그 정도로 강한 자였어?”
 “응, 내가 은밀하게 그자를 마법으로 살펴보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강력한 기운에 의해 파악할 수 없었어.”
 “그거 진짜야?”
 “그럼 내가 지금 상황에 농담을 하겠어? 예전에 내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 보았던 교장 선생님보다 더 강한 기운이었어.”
 “아카데미 교장이라면 육 서클 마스터인 마제른 님을 말하는 거야?”
 “그래. 너 때문에 자칫했으면 다 죽을 뻔했어.”
 “······.”
 그제야 카든은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느낄 수 있었다.
 노튼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다른 말을 했다.
 “고카라스 빅 시티로 서둘러 가자.”
 “우린 빌마 빅 시티로 가는 것 아니었어요?”
 카든이 노튼의 의도를 모르고 되묻자 동료들은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이곳 루냐 늪에서는 고카라스 빅 시티가 더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자.”
 “정말 그러네요? 알았어요, 고카라스 빅 시티로 가죠.”
 카든이 앞장서서 걸어가자 모두들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뒤따라갔다.
 “잠깐!”
 갑자기 마법사 매하슈가 외치자 모두들 ‘왜 그러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조금 전 그자가 바위 위에서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한번 살펴볼게요.”
 “그래? 그럼 한번 살펴봐.”
 “마나여, 나를 공중으로 떠오르게 해주소서. 플라이!”
 슈우우!
 마법사 매하슈는 바위 위로 떠올라 그곳에 내려섰다. 마력이 약해 준처럼 오랫동안 공중에 떠 있지는 못하지만 10분 이하의 플라이 마법은 펼칠 수 있었다.
 준이 먹다가 놓아둔 과일 빙수가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스윽!
 마법사 매하슈는 과일 빙수를 손으로 들어올리더니 자세하게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 빙수는 마법사 매하슈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뭔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일행도 바위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마법사 매하슈가 손에 들고 있는 과일 빙수를 보더니 눈이 커졌다.
 이들도 처음 보는 음식이었지만 아주 고급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역시 남자들보다는 여자인 메라의 눈썰미가 더 뛰어났다.
 “어머, 유리로 만든 그릇이야!”
 그제야 노튼과 카이, 카든 형제도 눈이 커졌다.
 보석보다는 못하지만 결코 흔하지 않은 게 유리로 만든 물건이었다. 유리그릇의 아름다움을 보니 10골드는 줘야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건 금과 백금 콤비로 아름답게 세공된 스푼이었다.
 이것만 해도 놀라운데 더욱 놀라운 일은 유리그릇 속에 잘게 갈아 넣은 얼음과 꿀, 6가지의 각종 싱싱한 과일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더운 숲 속에서 이런 것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호사를 누리는 건 왕국의 공작쯤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이런 걸 만들어 먹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예사 인물이 아니란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마법사 매하슈는 잠시 고민하다가 금스푼을 들어 과일 빙수를 떠먹어보았다. 달콤하면서도 시원하게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었다.
 멍한 표정이 된 마법사 매하슈의 얼굴을 쳐다보던 메라도 그에게서 금스푼을 빼앗아들더니 과일 빙수를 한 입 먹어보았다. 역시나 메라도 눈이 커지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았다.
 “아, 너무 시원하고 달콤한 게 맛있어.”
 마법사 매하슈와 메라가 멍한 표정이 되자 이번에는 노튼이 한 입 먹어보았다. 그 역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더운 곳에서는 천상의 맛이었다. 입 안이 시원하면서도 달콤하고, 과일즙과 과육의 맛이 한마디로 끝내줬다.
 카이와 카든 형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 입씩 먹어보았다.
 노튼 일행은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서로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난리였다.
 그렇게 유리그릇의 과일 빙수는 금방 바닥이 났다.
 마법사 매하슈는 준이 그대로 두고 간 유리그릇과 금스푼을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고카라스를 향해 이동했다.
 카든은 이제야 노튼이 왜 빌마 빅 시티로 가지 않고 고카라스 빅 시티로 가는지 알게 되었다. 조금 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향한 곳이 고카라스 빅 시티였기 때문이다.
 고카라스 빅 시티 서성 외곽 열아홉 번째 마을.
 목책으로 둘러싸인 열아홉 번째 마을은 흙으로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고 10여 채의 통나무집도 보였다.
 마을엔 1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150명의 자경대원이 마을의 치안을 맡고 있었다.
 50명의 자경대원이 목책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처척!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준이 내려섰다.
 “으음, 드디어 뮤란 대륙에서 보는 첫 마을이구나.”
 스윽.
 준은 오른손 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면서 앞으로 내밀었다.
 츠츠츠츠.
 준의 손바닥에 아지랑이가 일어나며 투명한 작은 새가 생성되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라, 저 마을에 가서 상세하게 본 것을 나에게도 보여다오.”
 푸드득!
 준의 손에서 날아오른 마법의 투명한 새가 열아홉 번째 마을로 날아갔다.
 마법의 새가 본 것은 준도 전부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열아홉 번째 마을을 날아다니면서 상세하게 보여 주던 투명한 마법 새는 마력이 전부 소비되자 소멸해버렸다.
 “후후후, 마을이 파악되었으니 이젠 가볼까?”
 준은 태연하게 걸어서 열아홉 번째 마을로 접근했다.
 목책 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자경대원은 마을로 접근해오는 갈색 로브를 입은 자를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어디서 오는 거요?”
 “빌마에서 오는 길입니다.”
 “고카라스로 들어갈 거요?”
 “그럼요. 오늘은 여기에서 묵고 내일 들어갈 겁니다.”
 “문을 열어줄 테니 들어오시오.”
 “고맙습니다.”
 그제야 자경대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이익.
 목책의 한쪽에 있는 나무 문이 열리자 그곳을 통해 준은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마을은 오후임에도 한산했고, 땅은 각종 오물과 물이 뒤섞여 질퍽거렸다. 비가 오지 않아도 이런데 만약 조금이라도 비가 내린다면 더욱 땅이 질퍽거릴 거라 생각되었다.
 준은 마른땅만을 밟으면서 이동해 보석 상점 ‘골드’로 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골드의 주인은 안으로 들어서는 준을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처음 보는 낯선 인물이었지만 신분이 높은 자의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으음, 귀족인 것 같은데 여긴 무슨 일이지?’
 프리랜드 연합의 빅 시티들엔 노스 왕국의 귀족이나 샬렛 왕국의 귀족들이 정기적으로 대상단을 따라 여행 겸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려고 찾아오곤 했다.
 고카라스 빅 시티에도 그런 귀족들이 자주 왕래했다. 때문에 이곳의 4대 성에서도 흔하게 귀족들을 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각 마을에는 귀족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용병대를 이끌고 오는 귀족들은 있었지만 준처럼 이렇게 혼자서 상점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골드의 주인은 그것이 의외라는 듯 여행자 갈색 로브를 입은 준을 순간 살펴보았다. 상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갖추어져야만 장사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없어서 그러는데 보석도 매입하죠?”
 “예, 그렇습니다.”
 스윽.
 고개를 끄덕인 준은 3캐럿의 루비 하나와 2캐럿의 사파이어를 내밀었다.
 주인은 보석도 많이 취급해보았기에 척 보는 순간 예사 보석들이 아니란 걸 알았다. 보석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세공사들보다 한 수 위의 세공 실력을 가진 자가 만든 S급의 보석이었다.
 불순물과 흠집 없이 아름답게 빛나도록 잘 커팅된 루비와 사파이어였다.
 “으음, 대단한 보석들이로군요. 드워프제 같은데 대단합니다.”
 “맞습니다. 드워프제 루비와 사파이어죠. 얼마나 줄 수 있습니까?”
 “으음, 이 정도라면 사파이어는 천 골드, 루비는 이천오백 골드까지 쳐드릴 수 있습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이용하여 주인의 심장을 살펴보니 심장 박동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속이는 건 아니란 걸 알았다.
 “좋습니다. 그 정도면 적당한 수준이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전부 골드화로 드릴까요?”
 “아닙니다. 골드바 두 개를 주시고, 나머지 천오백 골드는 백 코인과 백 실버, 나머지는 골드화로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골드의 주인은 테이블 위에 준이 원하는 대로 골드바를 2개 먼저 꺼내고는 코인 1백 개와 1백 실버, 그리고 나머지는 골드화로 내밀었다.
 스윽!
 준은 로브를 옆으로 밀면서 허리에 매고 있던 마법 주머니의 입구를 열어 그것들을 손으로 집어넣었다.
 골드의 주인은 준이 허리에 매고 있는 게 마법 주머니인 것을 바로 알아보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돈을 전부 마법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준은 주인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고맙소.”
 “예, 다음번에도 저희 상점을 찾아주십시오.”
 “그러죠. 그럼.”
 준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인근에 있는 여행자의 집으로 향했다.
 
 
 제3장 고카라스 빅 시티
 
 
 여행자의 집 화이트.
 준이 간판을 볼 때만 해도 이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통나무로 지어진 화이트 여행자의 집 외관은 하얗게 칠이 되어 있었기에 선입견인지 모르겠지만 내부도 깨끗하고 조용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많이 달랐다.
 웅성웅성.
 화이트 내부는 손님들로 북적였고, 50여 명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기에 제법 시끄러웠다.
 테이블을 걸레로 닦고 있는 주인에게 다가간 준이 말했다.
 “오늘 밤 여기에서 묵어가고 싶은데 적당한 룸이 있소?”
 “혼자이십니까?”
 “그렇소.”
 “독실은 가격이 조금 비쌉니다.”
 “좀 조용한 룸이었으면 하는데요.”
 “독실은 대체로 조용한 편입니다.”
 “그래요? 하나 주시오.”
 “저녁 식사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식사도 하고 싶소. 어떤 식사가 있습니까?”
 “빵과 수프의 보통식은 이십 코인, 소고기 스테이크와 과일이 포함된 특식은 오십 코인입니다.”
 “그럼 특식으로 주시오.”
 “술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 참! 술도 한 통 주시오.”
 “예, 그럼 독실 일 실버에 특식 오십 코인, 술 한 통에 오 코인이지만 특식을 주문하셨으니 술은 그냥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레이야.”
 “예, 아저씨.”
 “이 손님을 이 층 삼 호 독실로 안내해드리거라.”
 “예, 아저씨. 손님, 절 따라오세요.”
 준은 금발 소년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 복도 끝에서 세 번째 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편히 쉬십시오. 곧 특식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스윽!
 준은 레이에게 10코인을 팁으로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
 레이는 팁을 받고 아주 좋아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준은 내부를 살펴보았다. 침대 하나와 테이블이 놓여 있고, 한쪽에는 간단하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통과 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간이 오물통도 뚜껑이 덮여 있었다.
 준에게는 아주 떨어지는 시설이었지만 평민들의 삶을 생각해본다면 그런 대로 괜찮은 시설이었다.
 “후후후, 왕이었던 내가 다시 평민들의 삶부터 시작해야 하는군? 봉인된 신의 아티팩트를 무리하게 풀기보다는 일단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야겠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레이가 식사를 가져왔다.
 주인의 말대로 특식은 제법 맛있었다. 수프와 빵, 소고기 스테이크와 과일 2개, 그리고 평민들이 주로 마시는 술 한 통까지 단조로운 식사였다.
 빈 그릇이 담긴 쟁반을 문밖에 내려놓고는 문을 닫아걸어 잠갔다.
 침대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준이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여 대주천을 한 번 시전하자 술기운이 사라졌다.
 몸이 개운해졌지만 한 번 더 대주천을 운용하여 최상의 상태로 만든 준은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기에 명상을 하면서 노튼 일행의 기억을 다시 꺼내어 살펴보는 걸로 시간을 때웠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새벽을 지나 아침이 가까웠다.
 아직 해가 뜨려면 2시간 정도 있어야 하기에 침대에 누웠다.
 살짝 잔 것 같았는데 창문의 틈으로 햇살이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는 준의 얼굴에도 비쳤다.
 아주 예민한 준이었기에 햇살의 영향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아침이군.”
 스윽!
 상체를 일으킨 준은 창문을 열었다. 오전 시간이었지만 벌써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위해 밭에 나가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행자의 집 화이트 주변은 조용했다.
 준은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분패를 하나 만들었다.
 신분패를 만드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무에다가 그냥 뮤란 대륙 공통어로 이름과 출신지, 태어난 해만 새기면 되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도둑 길드나 용병 길드 같은 곳에서 만들어야 했다.
 물론 행정소에서도 신분패를 발행했지만 30코인이나 했기에 보통 용병 길드나 도둑 길드에서 5코인의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노튼 일행의 기억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준은 간단하게 자신의 신분패를 만들 수 있었다.
 스윽, 슥슥.
 마력을 나무패에 불어넣어 앞면에는 ‘프리맨’이라 새겨 넣었고, 뒷면에는 뮤란 대륙력 2012년과 출신지는 루냐 강변이라 새겼다.
 이렇게 10분도 안 되어서 준의 신분패가 만들어진 것이다.
 “후후후, 이 정도면 되겠어.”
 간단하게 세수를 한 준은 여행자의 집 화이트를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서성으로, 상주 인원 5만이 거주하는 성이라서 그런지 제법 큰 규모였다.
 성문 앞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서서 성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하여 간단한 검문을 하고 있었다.
 신분을 나타내는 건 나무패에다가 이름을 새겨 넣은 것 정도였다.
 노예나 유민들은 이런 나무 신분패도 없었다. 다만 나무패는 평민을 나타내는 신분이고, 좀 더 높은 사람들은 동패나 은패, 금패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프리랜드 연합에는 귀족의 신분이 없었지만 유사한 신분은 있었다. 동패는 용병이고, 은패는 기사, 금패는 프리랜드 연합에서 귀족에 해당하는 자들이 주로 소유했다.
 각 마을에 들어갈 때는 신분패가 필요 없었지만 이렇게 성이나 빅 시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분패를 보여 주어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
 준은 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뒤에 줄을 섰다.
 얼마 후 준의 차례가 되었고, 검문하는 병사에게 신분패를 보여 주곤 바로 통과했다.
 서성 안으로 들어서자 전방에 시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고 아주 활기차 보이는 곳이었다.
 “자, 골라보세요. 빵 세 개에 이 코인.”
 “과일이 싱싱하고 좋아요.”
 두리번거리던 준은 시장을 가로질러 이동해 책을 파는 상점 앞에 도착했다.
 간판에는 책 모양의 그림에 ‘북스’라고 쓰여 있고, 상점 안을 들여다보니 선반에 책들이 주욱 진열되어 있었다.
 스윽.
 북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이 반갑게 준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뮤란 대륙 공통어 책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이쪽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알기 쉽게 되어 있는 겁니까?”
 “주로 ‘뮤란 대륙 공통어 완전 학습’이나 ‘뮤란 대륙 공통어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라는 책이 가장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주인이 내민 2권의 책을 펼쳐 살펴보던 준은 2권 다 구입하기로 했다.
 “이 두 권으로 주세요.”
 “예, 한 권에 이 골드씩 모두 사 골드입니다.”
 “혹시 뮤란 대륙 공통어 사전 같은 것은 없습니까?”
 “있긴 있습니다만 두꺼워서 가격이 좀 비쌉니다.”
 “그래도 한번 보여 주시죠.”
 “예, 여기 있습니다.”
 주인의 말대로 사전은 보통 책의 10배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오 골드나 하는데 구입하시겠습니까?”
 “예, 그것도 주세요.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물어보십시오.”
 “말을 하나 구입하려고 하는데 마시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 마시장이라면 밖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세 블록 가면 보일 겁니다.”
 “고맙습니다.”
 책을 구입해 북스를 나온 준은 인근에 있는 마시장으로 향했다.
 서성에서 고카라스 빅 시티까지는 3킬로미터 정도 되기에 걸어서 가기보다는 말을 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시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마시장에는 수백 마리의 말들과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준이 마시장으로 들어서자 호객꾼이 접근했다. 준은 여행자용 갈색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호객꾼이 보기엔 몸에서 돈 냄새가 강렬하게 풍겼던 것이다.
 “말을 구입하려고 오셨습니까?”
 “좋은 말 있습니까?”
 “어떤 말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백 마리의 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한번 봅시다.”
 준의 시원한 대답에 호객꾼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준을 이끌고 근처에 자신의 말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호객꾼의 말대로 여러 종의 말들이 울타리 안에 모여 있었다.
 그때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가 준에게 다가왔다. 그가 바로 말을 파는 상인이었다.
 “손님, 어떤 말을 원하십니까?”
 “저 검은 말이 좋아 보이는데 한번 이리로 끌고 와보시오.”
 “헛, 대단하십니다. 저희 집에서 최상품의 말을 단번에 고르시다니요.”
 상인의 손짓에 검은 말을 끌고 온 노예가 입과 발굽, 엉덩이까지 자세하게 보여 주자 상인이 말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주인의 말대로 말은 상태가 아주 좋았다.
 “하하하, 힘이 좋고 스피드가 뛰어난 파겔종인데 어떻습니까?”
 “길을 잘 들인 말입니까?”
 “그럼요. 성격도 온순해서 타보면 만족하실 겁니다.”
 “좋습니다. 얼마에 줄 수 있습니까?”
 “칠십 골드는 주셔야 합니다.”
 “으음, 육십 골드로 하죠?”
 “육십칠 골드 주십시오.”
 “육십오 골드.”
 “으음, 좋습니다. 육십오 골드에 드리겠습니다.”
 “말안장은 서비스로 주는 거죠?”
 “원래는 이 골드에 파는 건데 좋습니다. 그것까지 해서 손님에게 육십오 골드에 드리겠습니다.”
 상인은 노예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말했다.
 “겔, 말안장을 이 말에 달아서 이 손님께 드리거라.”
 “예, 주인님.”
 겔이라는 노예는 즉시 저쪽으로 뛰어가더니 말안장을 가져와 말에 채웠다.
 준은 주인에게 65골드를 주고 말고삐를 건네받았다.
 “잘 타시고 언제든 말이 필요하시면 저희를 찾아주십시오.”
 “그러죠. 그럼.”
 말 등에 올라탄 준은 천천히 말을 몰아 성문 쪽으로 향했다. 성을 나가는 사람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검문을 하지 않았다.
 바로 서성을 빠져나와 말 머리를 돌린 준은 고카라스 빅 시티가 있는 쪽으로 말을 몰았다. 구입한 말은 길이 잘 들어 있고 온순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다가닥다가닥!
 급할 게 없기에 천천히 말을 몰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카라스 빅 시티의 성문에 도착했다.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한쪽에 줄을 섰지만 말이나 마차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줄을 설 필요가 없었기에 준은 병사에게 신분패를 보이고는 바로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고카라스 빅 시티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길게 줄을 서 있는 자들 중에는 노튼 일행도 끼어 있었다.
 마법사 매하슈가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준을 발견했다.
 “대장, 저기 그 사람이야.”
 “엇? 정말이네!”
 “말을 타고 있어서 몰라볼 뻔했어.”
 “그렇군. 그런데 언제 말까지 구입했지?”
 “그러게? 나도 갈색 로브가 아니었다면 몰라봤을 거야.”
 준은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고카라스 빅 시티를 살펴보았다. 완만하지만 제법 큰 언덕이 하나 있고, 그 언덕 위에는 총독의 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프리랜드 연합엔 모두 5명의 총독이 있었다.
 이들의 공식적인 권한과 임무는 광범위했기에 사실상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빅 시티의 세입을 거두고 늘리는 일, 관리를 임명하는 일, 병사들의 관리와 그 수를 늘리는 일, 법을 집행하는 일까지 했기에 사실상 정치와 군사 등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총독의 성 밑으로 언덕의 초입에는 성벽이 쌓여 있었는데, 그 성벽이 아마 내성인 모양이었다.
 내성 밖으로는 고급 건물들이 구역별로 자리해 있었으며, 연못의 동심원처럼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집들의 수준이 떨어졌다.
 “으음, 삼십만이 살고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제법 규모가 크구나.”
 준은 엘도라도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대도시라면 왕국의 공작령의 도시에 버금가는 규모라 생각했다.
 “자, 당분간은 이곳에서 생활해야 할 것 같으니 집이라도 하나 구입해야겠어.”
 다가닥다가닥!
 말의 옆구리를 차자 말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검문을 마치고 성안으로 들어온 노튼 일행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카든이 한마디 했다.
 “젠장, 놓치고 말았어.”
 “걱정 마, 카든. 고카라스로 들어온 걸 보았으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마법사 매하슈의 말에 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럼, 걱정 마.”
 두 사람의 말에 노튼이 끼어들었다.
 “일단 잡화점에 들러서 우리가 잡은 라울 고기와 가죽, 실버와 로열을 처분하고 용병 길드로 가자.”
 모두들 노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동했다.
 한편, 말을 타고 대로를 이동하던 준은 길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더니 얼마 후 한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고카라스 빅 시티에 있는 용병 길드였다.
 말에서 내린 준은 말고삐를 묶어놓고는 용병 길드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갈색 생머리를 한 귀엽게 생긴 18살 정도의 소녀가 준을 맞이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예, 용병에 등록하려고 합니다.”
 스윽.
 준이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검은 머리카락에 잘생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 엘라는 눈을 반짝이며 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뮤란 대륙인은 금발이 가장 많고 다음이 갈색 머리, 그리고 붉은 머리, 초록 머리, 검은 머리 순이었다.
 50명 중에 1명꼴로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특이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2미터정도 되는 큰 키에 호리한 몸, 잘생긴 얼굴까지 보자 엘라의 눈이 몽롱하게 풀릴 만도 했다. 거기에다가 남자 같지 않게 흰 피부에 광택이 날 정도로 피부가 좋았다.
 입고 있는 여행자 갈색 로브를 자세히 보니 그것도 뭔가 달라 보였다.
 ‘여행자 로브치고는 고급 같아.’
 “용병 가입 신청서를 하나 작성해야 하는데 글은 쓸 수 있어요?”
 “그럼요.”
 “그럼 여기에 써주세요.”
 준은 엘라에게서 용병 가입 신청서를 건네받아 작성했다.
 스윽, 슥슥.
 자필로 용병 가입 신청서를 작성한 준은 그것을 엘라에게 내밀었다.
 엘라는 준에게서 용병 가입 신청서를 건네받아 살펴보았다.
 ‘프리맨? 뮤란 대륙력 2012년, 출신지가 루냐 강변이었어?’
 프리랜드 연합의 오지라 할 수 있는 루냐 강변 출신이라는 것에 믿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준의 얼굴은 잘생긴 것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귀티가 줄줄 흐르는 왕자님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니 엘라의 눈이 몽롱해져 있는 것이다.
 “프리맨 씨, 용병 가입 신청서는 됐고요, 이제는 용병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해 시험을 봐야 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옆에 보이는 문으로 나가서 이 서류를 내밀면 바로 검증 시험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스윽.
 엘라가 준에게 서류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용병 길드 건물 뒤편으로 운동장이 하나 마련되어 있고, 한쪽에는 각종 무기가 진열대에 걸려 있었다.
 40대 초반의 중년인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준을 보고는 일어났다. 그는 몸에 붙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탄탄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이었다.
 “용병 검증 시험을 보러 왔습니다.”
 “검술 연습은 얼마나 했나?”
 “이 년 정도 했습니다.”
 “그럼 저기 보이는 나뭇가지를 한번 잘라보게.”
 손가락 3개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뭇가지였다.
 한쪽에 놓인 롱 소드를 집어 든 준이 그것을 가볍게 내리쳤다.
 댕강.
 나뭇가지가 단번에 두 동강났다.
 고개를 끄덕인 시험관은 이번에는 모래시계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 모래시계가 끝나기 전에 여기를 다섯 바퀴 돌아야 합격이네.”
 “알겠습니다.”
 “시작!”
 후다닥.
 준은 모래시계를 쳐다보며 여유롭게 뛰어서 다섯 바퀴를 돌았다.
 “합격!”
 시험관이 합격 도장을 서류에 찍어주었다.
 시험관에게서 서류를 받아든 준은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엘라는 준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맨 씨, 용병 시험에 합격했으니 C급 용병이 되었어요. 즉시 용병패를 만들어드릴게요.”
 “예, 고맙습니다.”
 엘라는 용병 동패를 금방 만들어 가져왔다. 나무 신분패처럼 앞면에는 프리맨과 C급 용병이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대륙력과 출신지, 용병 동패가 발행된 오늘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용병 가입비 오 실버이고요, 앞으로 의뢰 건은 길드에 걸려 있으니 선택하시면 돼요. 보통 의뢰비는 절반을 먼저 받고 임무를 완수하면 나머지를 받아요. 단, 길드에 수수료를 십 퍼센트 지불하셔야 돼요.”
 “복잡하지는 않군요.”
 “예, 당분간은 경험을 쌓기 위해 난이도가 낮은 의뢰부터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 그렇군요. 그럼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부탁이라고요? 뭔데요?”
 “거주할 집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집을 구입할 곳 좀 소개시켜 줄 수 있습니까?”
 “아, 그런 일이라면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길드에서는 용병들의 편의를 위해 이런 일을 대행해주기도 하거든요. 어떤 집을 원하세요?”
 “잘되었군요. 조용하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에 있는 집이면 좋겠어요.”
 “그런 집이라면 세 곳이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
 “어떤 집입니까?”
 스윽.
 엘라가 수정구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스스스스.
 수정구에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가보지 않더라도 마법을 이용해 집 주변과 집 내부에 관해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세 곳을 전부 확인한 준은 두 번째 집을 선택했다.
 집이 2백 평에 마당도 있고 창고와 마구간도 있었기에 전체 평수가 5백 평은 되었다.
 “고카라스에서 북쪽에 있는 집이니 아주 조용할 거예요. 집도 크고 다 좋은데 시장이 좀 멀어서 집값이 저렴해요.”
 “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드는군요. 이 집은 얼마나 합니까?”
 “백칠십 골드예요.”
 잠시 생각해본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비싼 건 아니군요.”
 “그럼요, 시세보다 약간 저렴해요.”
 “좋습니다. 그 집을 구입하겠습니다. 그럼 집값 백칠십 골드하고 용병 가입비 오 실버를 드리죠.”
 “아니에요. 집을 구입하셨으니 용병 가입비는 깎아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이건 집 소유권 증명서니까 받으세요. 그리고 집의 위치는 폴이 가르쳐 드릴 거예요. 폴!”
 “알았어, 엘라.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부탁합니다.”
 용병 동패를 엘라로부터 건네받은 준은 집 소유권 증명서와 함께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앞장서는 폴의 뒤를 따라 용병 길드를 걸어 나왔다.
 “프리맨 씨, 혹시 말이 있습니까?”
 “예, 저기 있는 검은 말이 제 말입니다.”
 “그럼 잘되었군요. 저도 말을 타고 가려고 했거든요.”
 폴과 준은 각자 자신의 말을 타고 용병 길드를 출발했다.
 그때, 길 저쪽에서 노튼 일행이 나타났다. 하지만 폴과 준은 이미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카든은 이번에도 한발 늦었다는 생각에 옆에 있는 카이에게 말했다.
 “형, 저자가 용병 길드엔 무슨 일이지?”
 “그러게? 일단 엘라에게 물어보면 돼.”
 “맞아. 왜 그걸 몰랐지?”
 노튼 일행은 용병 길드에 들어가 엘라에게서 준이 용병 시험을 본 것과 집을 구입한 것까지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대장, 앞으로 프리맨이라는 그자를 자주 볼 수 있겠는데?”
 “그렇군. 카이, 너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 같지?”
 “분명한 건 엄청 강한 자라는 거야, 대장.”
 한편, 폴과 같이 구입한 집으로 향한 준은 마구간에 말고삐를 묶어놓고 집 구경에 나섰다.
 20년 정도 된 집이었기에 곳곳에 낡은 부분이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괜찮은 집이었다.
 폴은 준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 룸과 부엌까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하하하, 이 정도면 저렴하게 구입하신 겁니다.”
 “그렇군요.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집이 빈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많이 남으니 슬슬 혼자서 해보도록 하죠.”
 “그것도 괜찮은 생각 같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폴이 자신의 말을 타고 떠나자 혼자 남은 준은 집 주위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고카라스 북쪽 지역에 있는 집이라서 그런지 주위에 나무들이 많고 다른 집과 약 3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집은 컸지만 낡고 형편없었기에 준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으음, 위치는 마음에 드는데 집과 창고를 비롯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되겠군. 내가 직접 멋진 집으로 개조해야겠어.”
 마법을 사용하는 일이고 마력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결심해버렸다.
 스윽.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든 준은 마력으로 돌멩이에 무언가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도형과 룬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걸 보니 마법진인 것 같았다.
 투욱!
 마법진을 새긴 돌멩이를 땅바닥에 던졌다.
 쿠쿠쿠쿵!
 갑자기 땅이 요동치더니 5미터의 높은 돌담장이 솟아났다.
 담장이 없던 집에 갑자기 높은 돌담장이 생겨나자 더욱 멋있었다.
 “후후후, 이제야 좀 제대로 된 돌담장이 생겼군. 넝쿨 꽃도 하나쯤 있어야겠지?”
 붉은 꽃이 탐스럽게 마당 한편에 피어 있는 것을 본 준은 그것을 마력으로 뽑아 공중으로 들어올리더니 돌담장에 내려놓았다.
 “마나여, 나의 의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성장!”
 츠츠츠.
 준의 외침에 붉은 꽃이 갑자기 돌담장을 휘감으면서 퍼져 나가 땅에 뿌리까지 내렸다.
 높은 돌담장에 붉은 꽃이 휘감긴 모습은 아주 멋졌다.
 멋진 철주물 대문도 은빛으로 번쩍였다.
 “이제 집과 정원만 만들면 되겠군. 우선 남들의 시선을 피해야 좋겠지? 마법의 안개여, 이곳을 가려다오.”
 츠츠츠츠.
 마법의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준의 집 주위를 가려 버렸다.
 준이 양팔을 옆으로 벌리며 주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잠시 후 집과 창고, 마구간까지 전부 소멸되었다.
 이번에는 상당한 마력을 끌어올려 의지로 생성시켰다.
 쿠쿠쿠쿠!
 그러자 땅이 심하게 요동치면서 돌이 땅속으로부터 솟아올랐다. 거대한 돌을 조각품처럼 깎아서 만든 집이었다.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으로 지은 집이었기에 이런 게 가능했지, 안 그러면 결코 쉽지 않은 공사였을 것이다.
 집은 1층에 다락방이 있는 구조였지만 높이가 3층 정도 되었다.
 준이 신경 쓴 부분은 지하에 있었다.
 외부에서는 지하실이 있는 걸 모르지만 지하에는 거대한 공동이 만들어져 있었다. 준은 앞으로 이 지하 공동을 비밀 실험실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스윽.
 준의 손짓으로 이번에는 돌집 앞에 구덩이가 깊고 넓게 파였다. 거기에 돌다리를 만들고 구덩이에는 물을 채워 넣자 멋진 연못이 만들어졌다.
 밋밋하게 흙만 있는 곳에는 연한 황색의 금잔디가 마법의 영향으로 뒤덮였다.
 “후후후, 이제야 좀 제대로 된 집 같군. 집 지키는 가디언도 필요하겠지?”
 스윽.
 마법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의 돌로 깎아 만든 병사 10개를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고 그곳에 마력을 불어넣자 그게 점점 커지기 시작했는데, 무려 2미터나 되었다.
 이번에는 마법 주머니 속에서 하급 마나석을 10개 꺼내어 이마에 붙였다.
 스스슷.
 신기하게도 돌로 깎아 만든 병사 10명의 이마 속으로 하급 마나석이 스르르 파고들어가 버렸다.
 10명의 돌병사들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더니 순간 사라졌다.
 “집을 수호할 가디언들이여, 각자 자리를 잡고 대기하라.”
 <예, 주인님.>
 쿵쿵쿵쿵!
 10명의 돌병사들이 정원과 집 앞에 자리를 잡더니 붉게 빛나던 눈이 사라졌다. 평소에는 그냥 돌조각으로 보일 테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집을 수호할 가디언들이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자 준은 펼쳐 놓았던 마법의 안개를 거두어들였다.
 스스스스.
 마법 안개가 소멸되자 멋진 준의 집이 완성된 걸 볼 수 있었다.
 이히힝!
 그때 65골드를 주고 산 파겔종의 검은 말 스톰이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준은 그제야 스톰이 생각나 다가갔다. 겁에 질린 스톰은 뒷걸음쳤지만 곧 돌담장에 가로막혔다.
 스윽, 슥슥.
 준이 겁에 질린 스톰의 머리와 갈기를 쓰다듬어주고서야 녀석이 진정했다.
 “녀석,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이젠 겁먹지 않아도 된다.”
 푸르륵, 푸륵.
 “허허, 녀석도······. 이거나 먹어라.”
 스톰이 진정하자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과일을 2개 꺼내어 스톰에게 내밀었다.
 와사삭, 쩝쩝.
 스톰은 준이 내민 과일을 맛있게 잘도 받아먹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스톰이 지낼 마구간과 각종 물건을 넣어놓을 창고는 하나 있어야겠군.”
 스윽.
 준은 한 손을 들어 돌담장을 가리켰다.
 졸졸졸.
 돌담장 뒤쪽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물가에는 수백 개의 돌들이 흩어져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차돌 하나가 준의 마력에 의해 공중으로 스르르 떠오르더니 준에게로 날아왔다.
 처척!
 손바닥 위에 차돌을 올려놓은 준은 잠시 그것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면이 매끄럽고 색깔도 푸르스름하면서 자연적인 무늬가 있는 게 제법 괜찮은 차돌이었다.
 츠츠츠츠.
 준의 마력에 의해 차돌은 마치 두부처럼 표면이 조각되면서 떨어져 나갔다.
 이내 속이 파인 직사각형의 돌조각품이 완성되자 그것을 돌담장 앞에 내려놓은 준은 마법 주문을 중얼거렸다.
 쿠쿠쿠쿠.
 갑자기 준이 내려놓은 돌조각품이 요동치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경이적인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분명 경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곧 길이가 20미터에 높이가 5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조각품이 완성되었다.
 돌로 된 창고 겸 마구간이었는데 굉장히 멋졌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것같이 느껴졌다.
 스톰도 본능적으로 이것이 자신의 집이라는 걸 아는지 좋아했다.
 그렇게 스톰을 이끌고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 말고삐를 묶어놓고는 밖으로 나왔다. 돌집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준이 의도한 대로 잘 지어져 있었다.
 침대나 살림이 전혀 없었기에 내일 시장에 들러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집을 한 번 둘러본 준은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5백 평이나 되는 공동이었다.
 “으음, 이 정도면 됐군.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야겠어.”
 준은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서 게르를 꺼내었다.
 촤라라락!
 지하 공동에 게르가 순식간에 설치되었다.
 저벅저벅.
 게르 안으로 들어간 준은 저녁 식사 준비부터 했다.
 오늘은 새로운 집이 생긴 날이었기에 특별식을 해먹기로 마음먹고 쌀을 꺼내어 씻은 뒤 밥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공간 속에 냉동 보관되어 있는 1미터짜리 대형 물고기 한 마리를 꺼내어놓았다.
 예전에 칼집을 내고 내장을 제거해놓은 거라 언제든 바로 요리해 먹을 수 있었다.
 대형 찜기에 물고기를 집어넣고는 찌기 시작했다.
 뜨거운 김이 한 번 피어오르자 특제 소스를 뿌리고 솥뚜껑을 닫았다.
 생선찜이 익어가는 동안 이번에는 소고기를 꺼내 잘게 썬 뒤 갖은 양념으로 주물럭거린 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샐러드와 과일까지 준비했다.
 준이 혼자서 먹기엔 많은 양이었지만 어쨌든 다 준비했다.
 치이이이.
 소고기 주물럭 구이가 맛있게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소리뿐만 아니라 냄새도 기막히게 좋았다.
 “쩝쩝, 내가 만든 거지만 정말 맛있군.”
 밥과 소고기 주물럭 구이를 맛있게 먹은 준은 이번에는 특제 소스를 뿌린 생선찜을 먹어보았다. 부드러운 생선 살에 특제 소스가 잘 어우러져 입에 맞았다.
 샐러드와 과일까지 먹자 준의 배가 올챙이배처럼 볼록해졌다.
 “후욱, 훅훅··· 모처럼 배가 터지도록 먹었어.”
 준은 배가 불러 움직이기도 귀찮았지만 먹은 걸 소화시키기로 했다. 하단전에 내공이 충만해 있음에도 집을 새로 만드느라 마력을 대부분 소비했기에 그걸 보충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스스스스.
 가지고 있는 마력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인지 빠른 속도로 마력이 채워졌다.
 ‘응? 마력이 빠르게 채워지네?’
 공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마나를 몸속으로 흡수하여 그걸 가공해야 마력이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나 빠르게 채워지고 있어 이렇듯 깜짝 놀라는 것이다.
 아마 봉인되어 있는 신의 아티팩트의 강력한 기운 일부가 몸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엄청나게 먹었던 것들이 이제야 위에서 빠르게 소화가 되었다.
 사용할 수 있는 양만큼 마력이 채워지자 이번에는 천왕대심공을 운용했다.
 준은 이미 천왕대심공을 극성까지 익혔지만 대주천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지금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신의 아티팩트의 엄청난 기운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천왕대심공 덕분이었다.
 몸은 활력으로 가득했지만 정신적인 피로도가 약간 있었기에 가부좌를 풀고 침대에 누웠다.
 “아침이 밝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할 것이니 그동안만이라도 눈 좀 붙여야겠어.”
 쿨쿨쿨.
 준은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삐삐삐삐!
 갑자기 준의 귀에 경보음이 들렸다.
 잠에서 깬 준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는 눈을 감았다. 철주물 대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노튼 일행이었다.
 준이 이들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던 건 철주물 대문에 마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철주물 대문 위쪽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은 모습의 조각이 붙어 있었는데, 그 까마귀의 눈에 매직아이 마법진이 새겨져 있어 그것을 통해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이자들이 무슨 일이지?”
 침대에서 일어난 준은 갈색 로브를 걸치고 게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촤라라락!
 경쾌한 소리가 일면서 게르가 준의 손바닥으로 회수되었다.
 스윽.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 게르를 집어넣은 준은 지하에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저벅저벅.
 그리고 정원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편,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노튼 일행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두 달 전만 해도 이곳은 이런 집이 아니었다. 집을 신축한 지 20년이 넘었기에 수리할 곳이 여러 곳이었다.
 집터가 넓어 노튼 일행이 거주지로 삼기엔 좋아 보여 구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집을 구입하기엔 돈이 조금 모자라서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라울을 사냥하러 갔었던 것이다.
 이번 라울 사냥으로 160골드라는 거금이 생겼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용병 길드에 들렀는데, 준이 한발 앞서 이 집을 구입해버렸다는 엘라의 말에 분노마저 일었다.
 더구나 준과는 얼마 전 시비가 있었기에 약간의 감정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곳에 와서 집을 보고는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귀족의 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주 고급이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허락 없이 들어갔다가는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이렇게 대문 앞에 서성이면서 준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끼이익.
 철주물 대문이 열리며 준이 모습을 보였다.
 노튼 일행은 준을 쳐다보았고, 준도 대문 앞에 서 있는 카든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들 뭐야?”
 “······.”
 준의 말에 카든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그에 노튼 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이 집을 구입한 것이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용병 길드에서 집을 구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집이 맞소?”
 “너희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으음, 우리도 사실 이 집을 구입하려고 했는데 돈이 좀 모자라서 라울 사냥을 나갔다 왔더니 당신이 먼저 이 집을 구입했다고 해서 한 번 들러본 것이오. 한데, 진정 이 집이 맞소?”
 “맞다. 어제 분명 나는 용병 길드에서 이 집을 구입했다. 어젯밤에 약간의 집수리가 있었을 뿐이다.”
 “집수리?”
 “집이 낡아서 손 좀 봤다.”
 “으음, 거짓말하지 마시오. 이런 집을 지으려면 몇 년은 걸릴 거요. 한데, 하룻밤 만에 어떻게 이런 집을 지었다는 거요?”
 “지금 나에게 시비를 걸려고 왔나?”
 “그, 그건 아니오.”
 “그럼 그만 가봐. 난 바빠서 너희와 잡담이나 나눌 한가한 시간이 없다.”
 “······.”
 평소 다혈질인 카든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나섰다.
 “이, 이··· 정말 너무 우릴 무시하네!”
 “혼나기 전에 썩 꺼져라.”
 더 이상 참지 못한 카든이 결국 준에게 주먹을 날렸다.
 부웅.
 하지만 이런 어설픈 주먹에 맞을 준이 아니었다. 상체를 뒤로 젖히며 카든의 주먹을 피하더니, 어느새 그의 뒷덜미를 잡고는 집어던져 버렸다.
 꽈당!
 “크으.”
 등에 충격을 받은 카든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 다시 준에게 덤비려고 하자 그 앞을 노튼 대장이 가로막았다.
 “참아라, 너의 상대가 아니다.”
 “······.”
 노튼은 준의 얼굴을 한 번 노려보고는 일행에게 말했다.
 “가자.”
 “······!”
 노튼 일행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준은 피식 웃더니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가닥다가닥!
 스톰의 등에 올라탄 준은 말고삐를 잡고 시장으로 향했다.
 아공간에 보관했던 식량과 고기, 과일과 채소 등 각종 식재료와 먹을거리가 떨어질 때가 되었기에 시장에서 구입하려는 것이다.
 아공간에 식재료를 넣어놓으면 절대 변하지 않았기에 최적의 보관 창고라 할 수 있었다.
 먼저 곡물 상점에 들러 밀가루와 각종 곡물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곡물 상점 주인은 준의 구입량을 듣고 입을 쩌억 벌렸다. 1천 명이 1년간 먹을 엄청난 양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준이 찾은 곳은 정육점으로, 그곳에서 송아지 고기와 암소를 수십 마리 구입하고 싶었지만 물량이 부족해 오후에 집으로 배달해준다고 했다.
 그 밖에도 야채 상점과 과일 상점에 들렀고, 각종 향신료와 꿀, 찻잎까지 대량으로 구입했다.
 이렇게 준은 각 상점마다 돌면서 물건들을 전부 싹쓸이하다시피 해버렸다.
 시장을 돌아다녀 보니 동부 해안에서 잡은 물고기를 판매하는 생선 상점도 있었기에 먹음직스러운 각종 물고기들도 대량으로 구입했다.
 민물고기도 팔고 있었는데, 잉어처럼 생기고 알록달록한 무늬도 가지고 있어 관상용으로 길러도 되겠다는 생각에 1백 마리를 구입했다.
 아공간에 넣으면 공기가 없어 물고기가 죽기 때문에 배달을 부탁했다.
 가구 상점에도 들러서 집에 놓을 침대와 가구를 구입했다.
 준의 아공간은 워낙 크고 넓어 대량으로 구입한 물건들을 집어넣어도 아직 빈 공간이 넉넉했다.
 “으음, 필요한 물건들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가지고 있던 돈이 다 떨어졌군. 보석 상점에 들러야겠어.”
 시장을 벗어난 준은 근처에 있는 고카라스 보석 상점의 간판을 보고는 말을 그곳으로 몰았다. 그리고 그 앞에 도착해 보석 상점 입구에 서 있던 노예에게 말고삐를 내밀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금발의 미녀가 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보석을 처분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예, 손님. 어디 물건 좀 볼까요?”
 “예, 여기 있습니다.”
 준이 미녀 사라에게 내민 건 드워프제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하나와 2캐럿 루비 2개였다.
 금속판 위에 보석들을 올려놓고 잠시 관찰하던 사라가 순간 눈이 커지며 말했다.
 “손님, 대단한 보석이군요.”
 “얼마나 할까요?”
 “루비는 하나에 천오백 골드씩 해서 삼천 골드이며, 다이아몬드는 오천 골드까지는 해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 정도면 적당한 가격이군요.”
 “좋은 물건이었습니다, 손님.”
 “골드바 다섯 개로 주시고, 나머지 삼천 골드는 전부 골드화로 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손님.”
 사라는 선반 밑에서 검은 주머니 3개와 작은 흰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펼쳤다. 흰 주머니에는 골드바가 5개 들어 있고, 나머지 검은 주머니 3개에는 1천 골드씩이 들어 있었다.
 마력으로 8천 골드가 맞다는 걸 확인한 준은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 그것들을 전부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냥 나가려다가 멈칫하면서 다시 뒤돌아 미녀 사라에게 한마디 했다.
 “이건 아끼는 물건인데, 한번 감정해주시겠습니까?”
 “예, 얼마든지요.”
 스윽.
 마법 주머니 속에서 준이 꺼낸 건 대거였다. 날이 약간 휘어져 있고 칼날의 길이가 약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장식용 칼이었다.
 “어머! 이, 이건?”
 사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준이 꺼낸 물건이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거의 집은 황금과 동이 섞여 있는 데다 1캐럿의 루비와 사파이어, 에메랄드까지 각각 20개씩 모두 60개의 보석이 아름답게 박혀 있었다.
 또한 대거의 손잡이도 마찬가지로 황금과 동이 섞여 있었으며, 손잡이 끝은 드래곤의 머리 형상으로 되어 있었다.
 드래곤 머리 형상의 두 눈에는 1캐럿의 다이아몬드 2개가 박혀 있었다.
 스르릉.
 대거를 뽑아보니 은빛으로 날이 빛나는 게 소재가 미스릴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실드 마법과 파이어볼 마법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왕족이 아니고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 대거의 가장 놀라운 점은 최근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2만 년이나 된 마도 시대의 물건이라는 것에 있었다.
 “손님, 이게 어떤 물건인지 아십니까?”
 “뭐, 조금 알고 있습니다. 마도 시대의 대거가 아닙니까?”
 “으음, 그래요. 마도 시대의 물건이 분명해요.”
 “이건 얼마나 하겠습니까?”
 “이건 너무 엄청난 물건이라 경매를 해봐야 알 것 같아요.”
 “이십만 골드 정도면 팔 생각이 있는데 말이죠.”
 “예? 그게 정말이세요?”
 사라는 너무 놀라 눈이 커졌다. 이런 마도 시대의 귀한 물건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었다. 경매를 통하지 않아도 30만 골드 정도는 쉽게 받을 수 있었고, 경매를 통해 판다면 50만 골드까지도 가능한 물건이었다.
 “손님, 정말 이십만 골드에 파실 생각입니까?”
 “예, 물론 경매를 통하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겠지만 그냥 이십만 골드 정도면 팔 생각도 있습니다.”
 “으음, 그럼 저희 상점에서 당장 매입할게요.”
 “좋습니다. 팔죠.”
 사라는 밝아진 얼굴로 선반 밑에서 푸른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었는데, 바로 마법 주머니였다.
 그 속에서 골드바를 2백 개 꺼낸 사라가 그것을 내밀었다.
 “만 골드는 골드화로 주십시오.”
 “예, 그러죠.”
 사라는 골드바 10개를 가져가고 다시 10개의 주머니를 내밀었다.
 스윽.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 골드바와 골드화를 전부 집어넣었다.
 “다음에 봅시다.”
 “예, 언제든 들러주세요.”
 준이 고카라스 보석 상점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사라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폴리, 저자가 누구인지 미행해 알아보거라.”
 “예, 사라 님.”
 스윽.
 사라의 등 뒤 벽면에 있는 무늬가 갑자기 움직이면서 벽을 통과해 밖으로 사라졌다. 특이한 은신술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호호호, 잘생기고 비밀이 많은 사내 같았어.’
 고카라스 보석 상점을 나온 준은 스톰의 등에 올라 천천히 말을 몰면서 중얼거렸다.
 “일단 자금은 충분히 확보했으니 이번에는 집사를 구하러 용병 길드에 들러야겠군.”
 다가닥다가닥!
 준은 급할 게 전혀 없기에 여유롭게 용병 길드로 향했다. 용병 길드는 근처에 있어 가까웠다.
 스톰에서 내려 말고삐를 묶어놓은 준은 용병 길드로 들어갔다.
 “프리맨 씨, 어서 오세요.”
 “엘라 양,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오늘은 또 어떤 부탁인가요?”
 “집을 맡아서 관리해줄 집사가 필요한데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경험이 있는 사람이 좋겠죠?”
 “그럼요.”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어요. 얼마 전까지 집사를 하다가 집주인이 두프 빅 시티로 이사를 가서 그만두었거든요.”
 “잘되었네요. 어떤 사람인지 설명 좀 부탁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이력서가 있으니 직접 한번 보세요.”
 스윽.
 엘라가 이력서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준은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42세의 빈스라는 자로, 집사 경력이 25년이나 되었다. 가족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이었기에 집사로 고용하기엔 적임자였다.
 “마음에 드는군요. 그런데 월급은 얼마나 줘야 합니까?”
 “한 달에 오 골드를 줘야 하고, 길드에 소개비로 삼 골드를 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일할 수는 있는 겁니까?”
 “그럼요. 내일 오전에 프리맨 씨 집으로 보낼게요.”
 “알겠습니다. 여기 소개비 삼 골드 있습니다.”
 준이 소개비 3골드를 내밀자 엘라가 그걸 받아들었다.
 “아 참! 프리맨 씨, 오늘 아침에 노튼 일행이 집으로 찾아가지 않았던가요?”
 “왔긴 했습니다만, 상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프리맨 씨 집 옆의 땅을 구입했어요.”
 “내 집 옆의 땅을요?”
 “예, 그곳에다가 집을 신축한다고 했어요.”
 “으음, 조용한 곳을 원했는데 이거 앞으로 은근히 골치 아파지겠는데요?”
 “그럴 거예요. 고집이 센 자들이니까요.”
 “엘라 양, 어쨌든 좋은 집사를 구하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다음에도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찾아오세요.”
 “예, 그러죠. 그럼.”
 “예, 안녕히 가세요.”
 준은 엘라의 인사를 뒤로하고 용병 길드를 나왔다.
 스톰에 올라탄 준은 집으로 향하면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음, 귀찮은 자들이 꼬이는군.’
 집안 청소 및 여러 가지 집안일을 할 하인과 하녀도 필요했지만 그건 밤에 나가서 노예 상인을 통해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톰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준의 집 옆에 10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한창 바쁘게 움직이며 돌이나 흙을 짐수레에 실어 저쪽으로 날랐다.
 뚝딱뚝딱, 탁탁!
 통나무를 가져와 한쪽에서는 집을 짓고 있었다.
 노튼 일행은 그 한쪽에 앉아 휘파람을 불면서 준을 쳐다보았다. 대충 상황을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으음, 이것들이 내 집 옆에다가 집을 신축하겠다는 건가?’
 준은 조금 불쾌하고 신경 쓰였지만 옆에 땅을 사서 집을 신축한다는데 막을 명분이 없었기에 스톰을 몰아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으읏.
 나무 위에 은신해 있던 폴리라는 자는 잠시 준의 집을 바라보다가 사라져 버렸다.
 연못에 관상용 물고기를 집어넣던 준의 눈빛이 번뜩였다.
 ‘후후후, 이제야 미행하던 자가 물러간 모양이군.’
 준은 고카라스 보석 상점을 나설 때부터 폴리라는 자가 은밀하게 자신을 미행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무엇도 준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얼마 후, 대문이 열리며 시장에서 구입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배달되어왔다.
 준은 그것들을 집 안에 내려놓게 하고는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아공간을 열어 구입한 물건들을 전부 집어넣었다.
 그런 후 집 안에 침대를 놓고 가구를 배치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한창 신나게 신축 공사를 하던 일꾼들은 밤이 되자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노튼 일행은 공사 현장 한쪽에 천막을 치고 야영에 들어갔다.
 은근하게 준에게 시위를 하는 모양이었다.
 준은 스톰에게 푸짐하게 먹이고는 자신도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밤이 되자 준은 스톰의 등에 올라탔다.
 “자, 이제 노예들을 사러 가야겠군.”
 다가닥다가닥!
 준이 스톰을 타고 대문을 나서자 야영하고 있던 노튼 일행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준은 그것을 무시하고 노예 상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카든이 노튼에게 한마디 했다.
 “노튼 대장, 저자가 이 밤에 어딜 가는 거지?”
 “글쎄, 난들 알겠어?”
 노튼 일행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낮에 집 짓는 걸 거들어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이다.
 
 
 제4장 적응
 
 
 그그그긍!
 돌문이 굉음을 일으키며 위로 올라가자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에 복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특이하게도 이마 부분에 검은별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 온통 돌로 된 석실이었다. 천장에는 마법등이 하나만 박혀 있어 은은한 조명이었다.
 석실에 먼저 들어온 자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원탁에 있는 의자는 모두 5개였고, 2개만이 비어 있었다.
 스윽.
 방금 들어온 검은별 복면인이 빈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탁을 중심으로 3명이 빙 둘러앉아 있었는데, 검은별의 좌측에는 은색으로 대거가 새겨져 있는 자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흰 삼각형이, 그 옆에는 정사각형이 새겨진 복면을 하고 있었다.
 빈자리에는 흰색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앞의 원탁에 수정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마 바쁜 일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마법 수정구로 대신하려는 모양이었다.
 사각형의 도형이 새겨진 복면인이 말문을 열었다.
 “모두들 바쁜실 텐데 이렇게 참석해주셔서 고맙소이다.”
 쉰 듯한 목소리가 듣기 거북했지만 그걸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거가 사각형의 말에 질문했다.
 “네모 님, 무슨 일로 긴급회의를 주재한 겁니까?”
 “아, 대거 님, 이번에 긴급회의를 주재한 사람은 내가 아닙니다. 크로스 님의 요청으로 주재한 겁니다.”
 “그래요? 크로스 님이 갑자기 무슨 일이죠?”
 스스스스.
 수정구에 십자가를 새긴 복면인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말했다.
 -으음, 대거 님, 긴급회의를 주재한 사람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 부득이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으음, 크로스 님,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주십시오.”
 -예, 그럼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회의 운명의 적이 될 자가 나타났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십 년 전에 제가 운명의 적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모두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 그럼 그때 크로스 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의 운명의 적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저의 예지 능력으로 좀 더 파악해보려고 했지만 거대한 운명의 기운이 가로막고 있어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프리랜드 연합 쪽에서 기운이 느껴졌으니 그곳을 조사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으음, 크로스 님, 이번 일은 우리 회의 존망이 걸린 아주 중대한 일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긴급하게 회의를 요청한 것입니다.
 “크로스 님, 여기 계신 분들이 동의하시면 제가 이번 일에 한번 나서보겠습니다.”
 -대거 님의 마음은 잘 알지만 이번 일은 검은별 님께서 나서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검은별은 갑자기 크로스가 자신을 지목하자 속으로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제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프리랜드 연합 쪽에는 아무래도 검은별 님만 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막막해서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서라도 좀 주십시오.”
 -그러고 싶지만 저도 자세한 건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그 운명적인 적이 강력한 기운을 몸속에 품고 있으니 그런 자를 중심으로 조사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에 나타난 자라면 더욱 가능성이 높을 것 같군요.
 “으음, 듣고 보니 크로스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나서서 한번 조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검은별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네모가 회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긴급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다음 정기 회의는 구 개월 후이니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검은별 님의 조사 결과도 듣기로 하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석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수정구에 나타나 있던 크로스의 모습도 사라졌다.
 혼자 남은 검은별은 잠시 생각에 젖어들었다.
 ‘으음, 운명의 적이 드디어 나타났구나. 도대체 그는 어떤 자일까?’
 석실을 나가려던 네모가 멈칫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는 검은별에게 말했다.
 “검은별 님, 안 나가십니까?”
 “아, 예, 나가야죠.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석실을 나온 검은별은 복도를 가로질러 공동으로 나왔다.
 공동에는 5개의 이동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대거와 세모는 이미 이동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네모는 자신의 이동 마법진 위에 서더니 검은별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검은별도 자신의 이동 마법진 위에 서서 자리를 잡더니 마법 주문을 중얼거렸다.
 번쩍!
 빛에 휩싸인 검은별이 공동에서 사라져 버렸다.
 공동의 천장에 조명을 밝히고 있던 마법등도 스르르 꺼지며 암흑으로 변했다.
 고카라스 노예 상단 베리아 타운.
 고카라스에 있는 3대 노예 상단 중의 한 곳이었다.
 준이 스톰을 타고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의 건물 앞에 멈추었다.
 허리에 검을 찬 경비병들이 입구에 서 있었다.
 말고삐를 묶어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준을 경비병들이 제지하지 않고 쳐다만 보았다.
 접견실은 제법 고급스럽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평민들도 가끔 찾아오지만 주로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잘 찾아오기에 이렇게 고급으로 시설을 갖추어놓은 것이다.
 책상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류를 작성 중이었고, 소파에는 남자가 태연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고 뺨 한쪽에는 길게 칼자국이 나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도 시선은 온통 서류를 작성 중인 여자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가슴도 풍만한 게 남자들이 좋아할 그런 타입의 미녀였다.
 “발비아, 오늘 나와 데이트 어때?”
 “헬싱 님, 오늘은 집에 바로 들어가 봐야 해요.”
 “그래? 그럼 내일은 어때?”
 “알았어요. 내일 저녁에 봐요.”
 발비아도 헬싱이라는 남자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헬싱은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주의 셋째 아들이지만 상단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조만간 두프 빅 시티에 분점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헬싱이 분점을 맡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헬싱은 내일 발비아와의 데이트를 생각하자 벌써 마음이 들떠 있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허리에 검을 찬 경비병이 문을 열어주었고, 준이 안으로 들어섰다.
 차를 마시던 헬싱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노예가 필요해서 왔는데, 지금 볼 수 있을까요?”
 “예, 그럼요. 어떤 노예들을 원하십니까?”
 “집안의 잡일을 할 노예들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삼백육십여 명의 노예들이 구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골라보실 수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헬싱의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환풍이 잘 되지 않는지 퀴퀴한 냄새가 심했다. 복도의 양쪽으로 쇠창살이 되어 있고 오른쪽엔 남자 노예, 왼쪽엔 여자 노예가 30명씩 들어가 있었다.
 “손님, 마음에 드는 노예가 있는지 구경하십시오.”
 “그러죠.”
 준은 쇠창살 안에 앉아 있는 노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모두들 희망이 없어서인지 눈빛이 많이 죽어 있었다.
 “남자 노예들은 얼마나 합니까?”
 “여기에 있는 남자 노예들은 하급이니 한 마리당 삼 골드만 주십시오.”
 ‘으음, 사람을 가축보다 못하게 취급하는구나.’
 “비싼 편은 아니구려?”
 “예, 그럼요. 저희는 다른 곳보다 저렴한 게 특징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준은 노예들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제대로 잘 먹지 못해 몸들이 형편없었지만 노예들의 몸 내부를 살펴보고는 10대 후반의 남자 노예 10명을 고를 수 있었다.
 전사급의 노예들이나 성노로서 인기를 끌고 있는 노예들은 다른 곳에서 별도로 관리를 받았고, 그런 노예들은 잘 먹여 주었다. 그래야 귀족들로부터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잡일에 사용될 노예들은 하급으로 분류되기에 씻지도 잘 먹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10대 후반의 젊은 여자 노예들을 살펴보았다.
 준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헬싱이 먼저 설명해주었다.
 “여자 노예들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약간씩 품질이 좋아 가격이 높습니다. 이 일 호실에 있는 여자 노예들은 이 골드부터 시작하고, 이 호실부터는 오 실버씩 높아집니다.”
 가격이 가장 낮아서인지 마음에 드는 여자 노예가 없었기에 준은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살펴보았다.
 5호실로 이동하자 그제야 제법 상태가 좋은 여자 노예들이 있었다.
 “손님, 여기 있는 여자 노예들은 사 골드입니다. 상태가 제법 좋은 노예들이죠.”
 “정말 그렇군요.”
 “여기에는 손님께서 원하시는 노예가 있을 겁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5호실의 여자 노예들은 10대 후반의 젊은 노예들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심하게 말라 있었다.
 준은 이번에도 그들의 몸 내부를 살펴보고는 10명의 여자 노예를 선택했다.
 “역시 이곳에서 고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더 필요하신 노예는 없습니까?”
 “이 정도면 됐어요.”
 준은 뒤돌아 나오다가 2호실의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 노예를 하나 발견하고는 눈빛을 번뜩였다. 조금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아, 이 호실의 여자 노예를 하나 더 구입하겠소.”
 “이 호실에 마음에 드는 노예가 있습니까?”
 “저 뒤쪽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 노예를 사겠소.”
 “저 여자 노예는 며칠째 저러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곧 죽을 겁니다.”
 “그래도 주시오.”
 “그러시다면 특별히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이 골드 오 실버나 하는 노예를 말입니까?”
 “예. 이십 마리의 노예들을 구입하셨는데 그냥 드리겠습니다.”
 헬싱은 병에 걸린 노예가 며칠 이내로 죽을 걸 알고 있었기에 서비스로 그냥 주었다. 안 그러면 준의 말대로 2골드 5실버나 하는 노예를 선뜻 서비스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이유는 준의 몸에서 지독한 돈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종종 큰 거래가 이루어질 것 같아 미리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이 인심 좋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접견실로 되돌아온 준이 소파에 앉자 발비아가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스윽.
 그리고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골드화를 꺼냈다.
 헬싱이 골드화를 세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손님. 어디로 배달해드릴까요?”
 “여기로 배달해주시오.”
 준이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자 헬싱은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북쪽 주거 지역의 끝에 계시는군요?”
 “그렇소. 돌담장에 붉은 꽃이 넝쿨을 이루고 있는 집이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집 옆에는 한창 통나무집 공사를 하고 있으니 참고하시오.”
 “예, 어디인지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노예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고개를 끄덕인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다가닥다가닥!
 스톰을 타고 천천히 집을 향해 이동하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후후후, 뜻하지 않게 하프 엘프를 노예로 구입하게 되는군.”
 준의 집 옆에는 노튼 일행이 모닥불을 피운 채 야영을 하고 있었다. 힐끗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지나가던 준은 보란 듯이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었다.
 “카악··· 퉤!”
 준이 더럽게 침을 뱉고 지나가자 다혈질인 카든이 발끈했지만 옆에 앉아 있던 노튼이 말렸다.
 “카든, 참아.”
 “······.”
 노튼 일행은 준의 막돼먹은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그것으로 시비를 걸 수는 없었다. 길에다 침도 마음대로 못 뱉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준은 유유히 스톰을 몰아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튼 대장,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도 참아야 됩니까?”
 “카든, 그래도 참아. 프리맨이라는 자는 아주 비밀이 많은 자이니 당분간 지켜보면 알게 될 거야.”
 “놈에게 언제고 뜨거운 맛을 보여 줄 겁니다.”
 “으음, 카든, 미안한 말이지만 넌 앞으로도 절대 그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지 못할 거야.”
 “예? 지금 날 무시하는 겁니까?”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야. 우리 모두가 협공해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강한 자야.”
 “그런 자가 겨우 C급 용병입니까?”
 “우리가 비록 B급 용병이긴 하지만 그는 S급에 이른 실력을 가진 자가 분명해. 그런데도 C급에 만족했어. 그건 용병패가 필요했기 때문인 것 같아.”
 “······.”
 카든을 제외한 일행은 노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을 만들어 먹은 준은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이히힝, 푸르륵.
 마구간 겸 창고에 있는 스톰이 반가운 듯 울음을 터뜨리자 준이 그곳으로 다가가 스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 슥슥.
 “녀석, 내가 그렇게 반갑더냐?”
 먹이를 푸짐하게 차려 주자 스톰은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준은 이번에는 연못으로 걸어가 관상용 물고기들에게도 먹이를 던져 주었다.
 사방에서 고기들이 몰려들어 서로 먹으려고 난리였다.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물고기들이 몰려들어 먹이를 먹는 모습이 생활의 여유를 느끼게 해줘서 준은 마음이 즐거워졌다.
 갈색 로브를 한쪽에 벗어놓은 준은 정원의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흰색 상의에 바지는 검은색을 입은 모습이었다.
 파파팡!
 준이 모처럼 몸을 풀기 위해 권법을 펼쳤다.
 천왕대심공을 익히기 전만 해도 사람이 공중을 펄펄 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 세상으로 건너와서는 풍부한 기로 인해 그것이 가능했다.
 그동안은 9서클의 마법을 익혔기에 특별히 초식을 연습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과 같이 힘이 봉인된 상황에서는 초식도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준이 초식을 연습하면서 약간의 내공을 불어넣자 파공음이 일어났다.
 아침부터 조용한 곳에 파공음이 일어나자 노튼 일행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가 무슨 일인가 하고 사다리를 이용해 준의 집을 구경했다.
 그들은 금잔디가 깔려 있는 곳에서 준이 혼자 권법의 초식을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이 커졌다. 파공음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혼자 정원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준의 몸놀림은 경쾌하면서도 스피드가 빨라 아주 위력적이었다.
 노튼과 메라, 카이는 준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보려고 집중했다.
 준이 마법사인 줄 알았던 마법사 매하슈는 그제야 그가 자신의 손과 발을 비롯한 온몸에 완력을 강화시킨 무투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무투가로서도 뛰어난 자였군.’
 평소 다혈질인 카든까지 준의 수련에 멍한 표정이었다. 무투가인 준을 도발해 얻어맞은 기억이 생생했던 것이다.
 권법 수련으로 충분히 몸이 풀린 준은 이번에는 롱 소드를 꺼내들고 마케리안 대륙의 3대 검술인 스네이크 검술과 대지의 검술, 번개의 검술까지 펼쳤다.
 노튼 일행은 처음에 준이 권법 수련을 할 때만 해도 생소한 동작이었기에 저것이 뭐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번에 펼치는 검술은 아니었다.
 현란하기까지 한 스네이크 검술은 노튼 일행의 입이 쩌억 벌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두 번째 준이 펼친 대지의 검술은 힘을 바탕으로 펼치는 거라 아주 위력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번개의 검술은 얼마나 빠른지 동체 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피피핏, 파팟!
 마케리안 대륙의 3대 검술은 뮤란 대륙에는 한 번도 보급된 적이 없었기에 처음 보는 검술임에도 아주 위력적이었다.
 노튼 대장과 쌍벽을 이루는 검술 실력을 가진 카이는 준의 검술에 속으로 경악했다.
 “노튼 대장, 저자가 무슨 검술을 펼치는 거지?”
 “글쎄, 나도 처음 보는 것이지만 대단한 검술인 것만은 분명해.”
 “마법도 상당한 실력이고, 거기에다 저렇게 대단한 검술까지 익혔다니 정말 정체가 의심스러운데?”
 “보니까 매일 아침 저렇게 검술 연습을 할 모양인데, 우리도 숨어서 배우자.”
 “그럴까, 대장?”
 “통나무집을 짓는 김에 전망대도 하나 세우는 게 좋겠어. 어때?”
 “좋아, 앞으로는 전망대에서 훔쳐보자고.”
 준은 노튼 일행이 훔쳐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면서 검술 수련에 몰두했다.
 대륙 3대 검술을 오랜만에 펼쳐 보았는데 그동안 수련을 등한시해서인지 검술의 현란함이나 스피드가 약간 떨어졌지만 며칠만 반복 수련한다면 예전의 실력이 나올 것 같았다.
 “아, 온몸이 활기찬 게 좋구나.”
 집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을 씻은 준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갈색 로브를 걸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마시며 삶의 여유를 즐겼다.
 삐삐삐삐.
 알람 마법이 울리자 준은 대문을 쳐다보았다. 집 안에 있어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 벽을 투시해볼 수 있었다.
 “저잔 누구지?”
 철주물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40대 초반의 금발인이었다.
 바로 준의 집사가 될 빈스였다.
 용병 길드에서 소개를 받기로는 이런 집이 아니었다. 빈스도 북쪽 주거 지역의 끝에 있는 집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와보니 낡은 집은 온데간데없고 멋진 돌담장에 붉은 꽃이 넝쿨을 이루고 있는 집이었다.
 철주물 대문도 미적 감각이 뛰어난 것이었고, 안으로 들어서자 금잔디가 아름답게 깔려 있었다.
 거기에다가 마구간 겸 창고로 쓰이는 것 같은 곳마저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깎아서 만들어 멋스러웠다.
 “으음, 정원 가운데에 큰 연못이 만들어져 있네?”
 연못을 건너가기 위해 구름다리가 만들어져 있고, 연못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다 보였다.
 이것만 해도 사치스러운 대단한 집인데 돌을 깎아서 만든 집을 보니 아주 환상적이었다.
 “으음, 이런 집이 언제 신축된 거지?”
 빈스는 준의 집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구요?”
 “예? 누, 누구?”
 뒤에서 들려온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 빈스는 갈색 로브를 입은 자가 자신을 보고 있자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용병 길드의 엘라 양에게서 프리맨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프리맨 님이십니까?”
 “그렇소.”
 “처음 뵙겠습니다. 빈스라고 합니다.”
 “빈스? 아, 새로 온 집사?”
 “그렇습니다. 집이 너무 아름답고 멋집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갑시다.”
 “예, 그러죠.”
 넓은 거실로 들어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자 준이 차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빈스 집사는 처음 보는 찻잔에 눈이 커졌다.
 “꿀 차를 탔으니 한번 마셔 보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이게 뭡니까?”
 “도자기라는 것인데, 여기에 차를 타서 마시면 맛도 좋고 빨리 식지도 않아서 좋지요.”
 준의 말에 빈스 집사는 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은접시 같은 것은 보았지만 도자기는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아직 뮤란 대륙에는 도자기라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프리맨 님, 하인과 하녀는 없습니까?”
 “하하, 지금은 그렇소. 어젯밤에 노예를 샀는데 곧 도착할 겁니다. 남자 노예 열 명과 여자 노예 열한 명 해서 모두 스물한 명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앞으로 빈스 집사가 그들을 잘 교육시켜 집안일을 해야 할 겁니다.”
 “예, 그런 일이 제 전문입니다. 며칠의 시간만 주시면 잘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앞으로 집안일은 빈스 집사가 맡아서 처리할 것이니 나는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예, 믿고 맡겨 주십시오.”
 “그럼 노예들이 오기 전에 집 안의 구조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니 같이 둘러봅시다.”
 “예, 감사합니다.”
 준의 뒤를 따라 빈스 집사는 꼼꼼하게 집 안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1층에 룸이 15개나 되었고, 다락방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준은 지하 공동을 보여 주었다. 아주 넓은 곳이었는데, 이런 게 왜 필요한지 빈스 집사는 알지 못했다.
 “이렇게 지하에 넓은 공동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럴 겁니다. 이곳은 앞으로 나의 연구실로 사용할 것이니 그리 아세요.”
 “예, 이제야 무슨 용도인지 알겠습니다.”
 “자, 이제 거실로 나갑시다.”
 준이 앞장서자 빈스 집사가 뒤따랐다.
 준이 거실에서 빈스 집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노예를 실은 짐마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준은 투시를 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빈스 집사에게 말했다.
 “노예들이 도착한 모양인데 나가봅시다.”
 “벌써 말입니까?”
 “그렇소.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서 오늘 오전에 노예들을 보내주기로 했는데 도착했으니 나가봐야 하지 않겠소.”
 “······.”
 준이 앞장서고 빈스 집사가 뒤따라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서둘러라, 서둘러.”
 “빨리빨리 내려.”
 남자 노예 10명과 여자 노예 11명이 짐마차 속에서 내렸다.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의 보고타가 노예들을 이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노예들이 세수를 하긴 했지만 입고 있는 옷이나 꼴을 보니 형편없었다.
 준과 빈스 집사가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보고타는 어젯밤에 노예들을 구입한 준을 한 번 보았기에 얼굴을 알고 있었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서 왔소?”
 “그렇습니다, 프리맨 님. 노예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렇군. 어제 내가 구입한 노예들이 맞군요.”
 스윽.
 준이 1골드를 내밀자 보고타는 그제 뭐냐는 눈으로 준을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수고했는데 가다가 술이라도 한잔하구려.”
 “아, 감사합니다.”
 그제야 얼굴이 환해진 보고타는 준이 내민 1골드를 받아들고는 노예들의 발찌 열쇠를 내민 후 돌아갔다.
 남녀 노예들은 모두 발목에 발찌가 채워져 있었고, 오른쪽 어깨에는 불에 달궈 지진 노예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인간에게 이건 잔인한 짓이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당연시되는 행동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스윽.
 준은 빈스 집사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빈스 집사, 노예들의 발찌를 풀어주게.”
 “예, 알겠습니다.”
 빈스 집사는 준에게서 건네받은 열쇠로 발찌를 풀어주었다.
 노예들은 발찌가 풀려도 감히 달아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노예로 붙잡혀 갖은 폭행과 정신교육으로 세뇌가 되었기에 감히 주인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노예의 근성이 이미 몸속 깊이 박혀 버린 것이다.
 노예가 도망치다 붙잡히면 바로 목을 잘려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였다.
 “따라와라.”
 “······.”
 준이 앞장서자 노예들이 뒤따랐고, 맨 뒤에는 빈스 집사가 노예들을 살피면서 뒤따라왔다.
 노예들은 아름다운 금잔디가 깔린 정원을 가로질러 다시 연못 위에 가설되어 있는 구름다리를 건널 때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고는 다른 세상처럼 느꼈다.
 그렇게 노예들은 걸어서 돌로 된 집 안의 거실로 뒤따라 들어갔다.
 노예들은 모두 맨발이었기에 거실 바닥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그것을 본 빈스 집사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스윽.
 준은 남녀 노예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나는 프리맨이라 한다. 너희의 주인이지. 너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뒤에 서 있는 빈스 집사가 알려 줄 것이지만 오늘은 딱 두 가지만 하면 된다.”
 “······.”
 노예들은 질문을 하지 않고 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너희는 지금 너무 지저분해서 씻어야 하지만 배가 고플 것 같으니 식사를 먼저 줄 것이다. 먹고 싶은 만큼 줄 테니 싸우지 말고 줄을 서서 차례대로 마음껏 먹어라. 그런 뒤에 몸을 깨끗하게 씻을 것이다. 날 따라와라.”
 “······.”
 노예들은 주인인 준이 먹을 것부터 준다고 하자 속으로 환호했지만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그렇게 준을 따라 주방으로 이동했다.
 주방의 한쪽에는 뷔페식당처럼 빵을 비롯해 수프와 삶은 고기 요리, 구운 고기 요리, 샐러드와 과일까지 다양하고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노예들은 입을 쩌억 벌렸다. 귀족들이나 먹을 그런 온갖 요리가 차려져 있었기에 입에서 절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준의 눈치만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잘못하면 심한 매질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서두르지 말고 줄을 서서 한 사람씩 그릇에 먹을 거를 담은 뒤 테이블에 앉아서 먹어라.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열 번이라도 더 먹고 싶은 만큼 음식을 줄 테니 절대 싸우지 말고 천천히 줄 선 대로 음식을 가져다 먹어라.”
 “······.”
 그제야 노예들도 자신들끼리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줄을 섰다.
 역시나 몸이 아픈 하프 엘프가 가장 뒤쪽에 줄을 섰다. 몸이 아파서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기에 초인적인 의지로 서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노예가 용기를 내어 숟가락과 접시를 들고선 음식을 접시에 덜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한 번 준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노예는 안심하고 테이블로 가 앉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에 나머지 노예들도 안심이 되었는지 첫 번째 노예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렇게 노예들이 차례대로 음식을 가져가 먹기 시작했다.
 노예들은 그동안 하루에 빵 반 개와 희멀건 수프가 전부였는데 입속에서 살살 녹는 음식 맛에 천국을 떠올렸다.
 그렇게 하프 엘프를 제외한 노예들이 모두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프 엘프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접시를 손에 들다가 그만 미끄러져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자 노예들의 눈이 커졌고, 일제히 하프 엘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프 엘프도 공포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스윽.
 그러나 준이 새 접시를 하프 엘프에게 내밀었다.
 멍한 표정이던 하프 엘프는 준에게서 접시를 받아들고는 환해진 얼굴로 음식을 덜어 테이블로 가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츠츠츠.
 바닥에 깨어진 접시 조각은 준의 마력에 의해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뭉쳤다.
 스윽.
 준의 손짓에 깨어진 접시 조각이 빈 통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음식을 가져다 먹은 노예가 그 많은 음식을 전부 먹어치우고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음식을 가져다 먹기 시작했고, 나머지 노예들도 눈치만 보다가 아무 일 없는 걸 알고는 안심하면서 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로 음식을 가져다 먹었기 때문일까? 먹는 속도가 느려졌고, 음식의 맛을 느끼면서 먹었다.
 1백 인분의 식사를 21명의 노예들이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그런데도 더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마치 음식에 원수가 진 듯한 모습이었다.
 노예들은 배가 올챙이배처럼 볼록했다.
 준이 그런 노예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무 그렇게 아쉬워할 것 없다. 깨끗하게 씻고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다시 맛있는 걸 먹여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나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먹을 걸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루에 세 번 이렇게 푸짐하게 먹여 줄 것이고, 오후와 밤에도 간식으로 먹을 걸 줄 것이다.”
 고카라스 평민들도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노예들에게 하루 세 번 푸짐한 식사와 두 번의 간식을 준다고 하자 빈스 집사도 깜짝 놀랐다.
 하나, 이어지는 준의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마라. 너희는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일 골드씩 나에게서 돈을 받을 것이다. 이 돈은 너희가 일한 대가로 받는 것이며, 그것으로 너희가 필요한 물건을 사도 된다. 또한 앞으로 오 년간 이곳에서 일하면 너희는 노예에서 풀려나게 된다. 주인인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준의 엄청난 말에 빈스 집사와 노예들은 눈이 커지며 입까지 쩌억 벌렸다. 상식을 파괴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프리맨 님,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빈스 집사, 뭐가 말이 안 되는 거지?”
 “노예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주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돈도 주고 노예에서 풀어주신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말이 안 되어도 상관없다. 너희의 주인은 나다. 내가 노예들을 풀어주겠다는데 누가 막을 것이냐?”
 가만히 준의 엄청난 말을 듣고 있던 노예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주인이 직접 풀어준다는데 누가 따질 수 있겠는가. 손해가 나더라도 주인이 나는 것이니 말이다.
 노예들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한 번도 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예 처음 있는 엄청난 일이었다.
 “빈스 집사.”
 “예, 프리맨 님.”
 “노예들을 이끌고 씻을 수 있는 욕실로 데려가 대기하라.”
 “예, 프리맨 님. 노예들은 나를 따라와라.”
 “······.”
 노예들은 준의 눈치만 보면서 빈스 집사의 뒤를 따라 욕실로 향했다. 거대한 욕실에는 냉탕과 온탕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안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빈스 집사와 노예들이 욕실에서 대기하자 준이 들어서면서 말했다.
 “오늘만 함께 목욕한다. 내일부터는 여자 노예와 남자 노예가 서로 다른 곳에서 씻을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
 노예들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니 남녀를 함께 씻도록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노예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윽.
 준의 오른손에는 비누가, 왼손에는 때를 벗길 때타월이 들려 있었다.
 “몸에 물을 묻혀서 이 비누라는 걸로 문지르면 거품이 일어나면서 몸에 붙은 때가 잘 씻어진다. 이것은 몸의 때를 좀 더 잘 벗겨지도록 해주는 때타월이라고 한다. 이것들을 사용해 몸을 깨끗하게 씻어라. 그리고 갑자기 많은 음식을 먹었으니 배가 아픈 노예들도 있을 것이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통이 오물통이니 그곳에서 볼일을 보면 된다. 서둘지 말고 시간은 충분하니까 깨끗하게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와라.”
 빈스 집사도 비누와 때타월을 보고는 신기한 표정이었다.
 “자, 너희는 어서 씻어라. 그리고 빈스 집사는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오도록.”
 “예, 프리맨 님. 노예들은 어서 몸을 씻어라.”
 빈스 집사는 준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와 함께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대화했다.
 “프리맨 님, 노예들을 어떻게 풀어주실 생각을 하셨는지 저로선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빈스 집사, 난 노예들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소. 이곳에서 앞으로 오 년간 열심히 일하면 말한 대로 노예들을 전부 풀어줄 것이오.”
 “손해가 크실 텐데요?”
 “하하하, 그런 정도로 손해라고 하면 안 되오. 그 대신 노예들이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할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곳은 스물한 명의 노예들이 일하기엔 턱없이 작은 곳이기에 며칠만 일하면 특별히 할 일도 없습니다.”
 “알고 있소. 이것도 노예들의 큰 복이라 생각하시오.”
 “으음, 프리맨 님의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씀하신 대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되오.”
 “이제 노예들이 거의 다 씻었을 테니 빈스 집사가 욕실로 가서 노예들이 입을 옷들을 챙겨 주도록 하시오.”
 “노예들이 입을 옷도 준비해놓으셨습니까?”
 “그렇소. 그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빈스 집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얼마 후, 깨끗하게 씻은 노예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는 모두 거실로 나와 줄을 맞춰 섰다.
 책을 읽고 있던 준은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이제야 너희들이 사람 같아졌구나. 너희는 날이 어두워지면 저녁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할 것이다. 내일 아침부터는 빈스 집사의 지시에 따라 이 집에 관한 잡일을 할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빈스 집사.”
 “예, 프리맨 님.”
 “빈 룸이 열다섯 개나 되니까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들은 다섯 명씩 룸 하나를 쓰도록 해주시오. 룸이 네 개면 충분할 거요.”
 “예, 프리맨 님.”
 “그리고 빈스 집사가 사용할 룸도 하나 골라서 쓰도록 하시오.”
 “예.”
 “너는 앞으로 나오너라.”
 “······.”
 준이 뒤쪽에 서 있는 하프 엘프를 지목하자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너는 앞으로 나의 곁에서 시중을 들어라.”
 “예, 주인님.”
 “빈스 집사, 노예들을 데리고 가서 룸을 지정해주시오.”
 “예, 프리맨 님. 노예들은 날 따라와라.”
 빈스 집사를 따라 노예들이 모두 사라지자 혼자 남게 된 하프 엘프는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그렇게 겁먹을 것 없다. 이름이 무엇이냐?”
 “루시아라 합니다, 주인님.”
 “루시아? 좋은 이름이구나. 너는 나를 따라와라.”
 루시아는 준의 말에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 지하 공동으로 내려갔다.
 파파팟!
 공동의 천장에 부착해놓은 10개의 마법등에서 일제히 조명을 밝히자 어두웠던 지하 공동이 환하게 밝아졌다.
 스윽.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게르를 꺼내어 지하 공동의 바닥에 던졌다.
 촤라라락!
 경쾌한 소리가 일어나면서 게르가 순간 펼쳐지자 그것을 본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마법의 아티팩트라는 걸 그녀도 안 것이다.
 “따라와라.”
 “예, 주인님.”
 준이 앞장서서 게르 안으로 들어가자 루시아는 거역하지 못하고 그를 뒤따라갔다.
 준이 테이블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옷을 모두 벗고 저 테이블 위로 올라가 누워라.”
 “······.”
 루시아는 하프 엘프였지만 절반의 엘프 피를 받고 태어났기에 아름다웠다. 그동안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병들어 있어 아름다운 외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라락.
 루시아는 체념했는지 옷을 전부 벗고는 준이 말한 테이블에 올라가 반듯하게 누웠다. 비록 노예라고 해도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는 거라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준은 피식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루시아, 언제 마나 고리가 깨어졌느냐?”
 “허억! 그, 그걸 어떻게?”
 “마나 고리가 깨어진 상태로 이제까지 버틴 것도 대단하구나.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며칠 버티지 못한다. 알고 있지?”
 “그래요.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글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내가 널 살려 주마.”
 “마나 고리가 깨어진 나를 정말 살릴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난 할 수 있다.”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루시아는 절망으로 생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준의 말을 듣고는 한 가닥의 희망을 맛보았다.
 “날 살려 주는 요구 조건이 뭐예요?”
 “후후후. 글쎄, 일단은 호기심이라 해두자. 널 살려 주면 나의 제자가 되어볼 생각이 있느냐?”
 “사 서클 유저였던 나예요. 그런데 나를 제자로 거두겠다고요?”
 “그렇다. 겨우 사 서클이니 앞으로 배울 게 많겠구나.”
 “허억! 도대체 얼마나 마법을 익히고 있는 거죠?”
 “글쎄, 나의 마법 실력과 능력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혹시 육 서클이세요?”
 “하하하, 너의 농담이 재미있구나.”
 “그럼 혹시 대마법사급인 칠 서클?”
 “좀 더 써보거라.”
 “아··· 마, 말도 안 돼요.”
 “뭐가 말이 안 되느냐?”
 “당신, 혹시 위대한 분인가요?”
 “드래곤을 말하는 거냐?”
 “그래요.”
 “후후후, 미안하지만 난 인간이다.”
 “뮤란 대륙에서 칠 서클 마스터에 오른 마법사는 한 명뿐이에요. 그런데 어찌 당신이 팔 서클이겠어요?”
 “그건 너의 말이 맞다. 난 팔 서클이 아니다. 구 서클 마스터지.”
 “예? 마, 말도 안 돼요.”
 “뭐가 말이 안 된단 말이냐?”
 “드래곤만 구 서클에 오를 수 있어요.”
 “그것은 너의 잘못된 생각이다. 난 분명히 구 서클 마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힘의 일부를 봉인해둔 상태지.”
 “힘의 봉인을요? 왜요?”
 “나의 몸이 그 힘을 전부 받아들일 수 없어서이다.”
 “······.”
 루시아는 준의 엄청난 말에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자, 어찌할 테냐? 나의 제자가 될 테냐?”
 “좋아요. 나의 마나 고리만 되살릴 수 있다면 당신의 제자가 되겠어요.”
 “좋다. 그럼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조금만 참거라.”
 “예, 꼭 참을게요.”
 루시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스윽.
 준은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루시아의 심장을 가리켰다.
 츠츠츠.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준의 마력이 루시아의 심장에 스며들었다.
 루시아의 마나 고리는 깨어져 심장 주위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것들이 준의 마력에 반응하면서 다시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고통이 밀려왔기에 루시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고통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파츠츠츠!
 엄청난 준의 마력으로 깨어졌던 마나 고리가 루시아의 마력을 보충하며 다시 마나 고리로 변했다.
 파파팟!
 루시아의 심장에 마나 고리 하나가 다시 생성되어 빛을 내면서 힘차게 휘돌기 시작했다.
 우우웅!
 루시아의 몸 밖으로는 공명음이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몸속 심장에서는 일어나고 있었기에 눈을 감고 있던 루시아는 그걸 분명하게 느꼈다.
 ‘아, 정말 마나 고리가 다시 생성되었어!’
 기쁨도 잠시, 또다시 엄청난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마나 고리가 다시 생성되었다는 기쁨에 고통도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루시아의 심장에는 마나 고리가 하나씩 다시 생성되어갔다.
 츠파파팟!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4개의 마나 고리가 전부 다시 생성되자 루시아는 이제 그만 하겠지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준이 아직도 마력을 더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라. 마나 고리를 하나 더 생성시켜 주겠다.”
 준의 말에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토록 노력해도 안 되던 일이었다. 어느 날 너무 무리해 마나 고리가 뒤틀리면서 결국 깨어져 폐인이 되었다.
 한데, 그런 마나 고리를 준이 하나 더 생성시켜 준다고 하니 잘 믿어지지 않았다.
 파팟, 우우웅!
 결국 루시아의 심장에 마나 고리가 5개 생성되어 힘차게 휘돌고 있었다.
 ‘아, 정말 내가 다섯 개의 마나 고리를 가졌어?’
 “루시아, 정신을 집중해 마나 고리가 안전하게 정착하도록 마나 고리를 진정시켜라.”
 “예, 알겠어요.”
 루시아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준은 마력을 불어넣던 걸 중지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대부분을 루시아에게 불어넣어준 그였다.
 ‘으음, 이제 마력을 보충해야겠어.’
 준은 한쪽으로 걸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천왕대심공을 운용하면서 호흡하더니 마나를 끌어 모았다.
 츠츠츠츠!
 역시나 이번에도 봉인된 마력의 일부가 흘러나오며 엄청나게 마나를 흡수했다. 루시아에게 마력을 불어넣어줄 때보다 더 많은 마력을 10분 만에 보유하게 되었다.
 ‘후후후, 역시 보유한 마력을 전부 소비해야만 이렇게 늘어나는 건가?’
 아직은 무엇을 단정할 수 없기에 차차 시간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지켜보기로 했다.
 준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조금 기다리자 루시아가 마나 고리를 안전하게 진정시키고는 눈을 떴다.
 다시 마나 고리를 보유하고 마력이 많아져서인지 그녀의 병들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푸석했던 피부도 이젠 광택이 일었으며, 훨씬 아름다워졌다.
 “루시아, 이제 옷을 입어라.”
 “예, 스승님.”
 루시아는 준을 스승으로 인정했다.
 고개를 끄덕인 준이 루시아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넌 나의 제자가 되었으니 먼저 두 무릎을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아홉 번 하도록 해라.”
 “아홉 번이나요?”
 “그렇다. 최대한 스승에 대한 공경심으로 정성을 다해 절을 해야 한다.”
 “예, 스승님.”
 루시아는 준의 말대로 오체투지의 절을 정성스럽게 아홉 번 하면서 준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루시아, 넌 이제 나의 첫 번째 정식 제자가 되었구나. 너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다오.”
 “예, 스승님.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말해줄게요.”
 준은 첫 번째 제자가 된 루시아의 지나온 세월을 듣게 되었다.
 루시아는 한 번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준이 자신의 스승이 되었기에 이렇게 과거를 털어놓은 것이다.
 하프 엘프 루시아는 인간의 나이로는 37세였다.
 인간 아버지와 엘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바렌츠 산맥에서 살았다고 한다.
 루시아의 아버지는 사냥꾼으로 바렌츠 산맥에서 동물을 사냥해 고기와 그 가죽을 팔아 생활했는데, 어느 날 엘프가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숲 속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구해주었다.
 엘프의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서로 사랑에 빠져 루시아를 출산했고, 몇 년 후 루시아의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그만 오우거에게 습격을 받아 죽고 말았다.
 루시아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루시아를 데리고 엘프 일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엘프 일족은 모녀를 받아들였고, 그곳에서 30년간 마법과 각종 지식이 담긴 책을 읽으며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크 부족의 대대적인 습격으로 엘프 일족이 흩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루시아의 어머니는 루시아를 데리고 도망치다가 2마리의 오우거와 싸우게 되었고, 1마리도 버거운 상황에서 2마리의 오우거에게 이길 순 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루시아는 큰 부상을 당했지만 결국 도망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몸을 혹사한 데다 마음이 급해져 무리하게 소비한 마력을 끌어 모으다가 그만 마나 폭주가 일어나 마나 고리가 깨어져 버렸다.
 죽었어야 정상이지만 운이 좋았던 건지 살아남았다. 그러다 노예 상인들에게 붙잡혀 몇 년간 끌려 다녔고, 이렇게 준에게 다시 팔리게 된 것이다.
 루시아의 말을 들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루시아, 고생이 많았구나. 앞으로는 이전보다 나을 것이니 걱정 마라.”
 “예, 스승님.”
 “넌 이제 마나 고리가 다섯 개가 되어 오 서클 유저가 되었지만 아직 오 서클의 마법을 펼치는 건 무리다. 열흘 정도는 마나 고리를 돌리면서 반복 수련으로 적응기를 거치도록 해라.”
 “예, 스승님.”
 “넌 이제 노예가 아니라 나의 제자이니 모든 집안일에서 제외된다. 나의 옆에서 수련만 하거라. 빈스 집사에게는 내가 일러놓겠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깨어졌던 마나 고리가 다시 생성되었으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질 것이다. 적응기를 거치면서 충분한 휴식과 음식 섭취를 해야 한다. 알았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나의 정체에 대하여 많이 궁금할 것이다. 언제고 내가 알려 주고 싶을 때 알려 주겠다. 그동안은 궁금해도 참거라.”
 “예, 스승님.”
 “난 현재 C급 용병인 프리맨으로 알려져 있지만 앞으로는 오 서클 마법사라고도 알려질 것이다. 너도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식사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마나 고리를 돌리면서 수련에 임하거라. 난 그동안 책이나 읽어야겠다.”
 “예, 스승님.”
 루시아는 준의 말대로 한쪽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면서 마나 고리에 대한 적응 수련을 시작했고, 준은 그런 루시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통역 반지를 끼고 있어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뮤란 대륙 공통어는 반드시 배워두어야 하기에 이렇게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한 달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짹짹!
 산새 2마리가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지저귀더니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정원의 연못가에는 통나무로 만든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정자의 지붕을 이는 데에는 기와가 있어야 하는데, 기와라는 것 자체가 없는 세상이기에 준이 직접 만들어야 했다.
 준은 점토를 재료로 하여 모양을 만든 다음 도자기처럼 유약을 발라 청색의 염료를 넣어 고온에서 구웠다. 그러자 표면이 매끄러운 게 마치 타일을 연상시켰다.
 정자에는 준과 루시아가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정원의 한쪽에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예들이 한가로이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금잔디에 잡초가 자라나는 걸 뽑는 작업이었다.
 노예들은 잘 먹고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기에 모든 일에 열성적이었다. 몸에도 살이 올라 이제는 평민들보다 더 좋아 보였다. 노예라고 해도 믿지 않을 정도였다.
 “루시아, 이제 차도 마셨으니 검술 수련이나 하자꾸나.”
 “예, 스승님.”
 루시아는 정자에서 준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준과 루시아는 어느새 손에 롱 소드를 들고 있었다.
 준은 흰색 남방에 검은색 바지 차림이었고, 루시아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파란색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 거기에다가 날씬한 몸매까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흰색 블라우스에 흰바지를 입었기에 더욱 돋보였다.
 “스네이크 검술을 펼쳐 보일 테니 잘 보거라.”
 “예, 스승님.”
 준은 자세를 잡고 스네이크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쉬쉬쉿, 파팟!
 스네이크 검술은 파공음이 일어나면서도 검술의 변화가 심한 게 특징이었고, 현란하면서도 날카로운 게 위력적이었다.
 전체 검술을 한 번 빠르게 펼친 후 부분적으로 세세하면서도 느리게 펼쳐 보였다.
 그렇게 두 번 펼쳐 보인 준은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약간 긴장한 루시아는 정신을 집중하고 준이 알려 준 대로 스네이크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쉬쉬쉿, 파팟!
 루시아의 머리가 영리해서인지 금방 따라 하면서 제법 검술을 잘 펼쳤다. 처음 시전하는 스네이크 검술이었지만 이 정도면 초식을 잘 펼친다 할 수 있었다.
 “하하하··· 루시아, 아주 잘 펼치는구나. 좀 더 익숙해지기 위해 백 번만 반복해서 펼쳐 보거라.”
 “예, 스승님.”
 자신감을 가진 루시아는 스네이크 검술을 반복해서 펼쳤다.
 한편, 전망대를 만들어놓은 노튼 일행은 오늘도 어김없이 전망대에 숨어 준의 정원을 훔쳐보았다. 특히 오늘은 아름다운 루시아까지 나와서 검술을 펼치는 모습에 메라를 제외한 모두가 환호했다. 루시아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같은 여자인 메라는 루시아에게 묘한 질투심을 가졌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너무 아름다운 그녀였다.
 30분 정도 스네이크 검술을 펼친 루시아는 얼굴이 온통 땀이었다.
 스윽.
 준이 루시아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닦아라.”
 “고마워요, 스승님.”
 “시원한 거나 만들어 먹자.”
 “스승님, 오늘은 어떤 걸 만들어주실 거예요?”
 “과일 빙수가 좋겠구나.”
 “과일 빙수?”
 “너도 좋아할 거다.”
 “······.”
 정자로 돌아온 준과 루시아는 마주 보고 앉았다.
 마법 주머니 속에서 재료를 꺼낸 준은 투명한 유리그릇에 황금과 백금을 섞어 만든 스푼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과일의 껍질을 깎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그리고 특별히 만든 빙수 기계에 얼음을 넣고 갈았다.
 촤르르륵.
 얼음이 눈송이처럼 잘게 갈리자 먼저 유리그릇에 각종 과일을 깔고는 얼음 가루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과일을 깐 뒤 얼음을 채우고 그 위에 또 과일을 올렸다.
 그 후 과일에 벌꿀을 뿌리고 남은 과일로 즙을 내어 조심스럽게 조금씩 부었다.
 “자, 다 만들어졌구나. 과일 빙수의 맛이 어떤지 한번 먹어보거라.”
 “예, 스승님. 보기만 해도 정말 시원하고 맛있을 것 같아요.”
 “먹어봐도 시원하고 달콤하고 그럴 것이다.”
 루시아는 과일 빙수를 한 입 떠먹어보고는 놀랍다는 듯 눈이 커졌다.
 “스승님, 정말 시원하고 달콤한 게 너무 맛있어요.”
 “땀 흘린 후 이렇게 시원한 걸 먹으면 기분까지 좋아진단다.”
 “예,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요.”
 준과 루시아는 과일 빙수를 같이 먹으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망대에 숨어 이를 지켜보던 노튼 일행은 부러움과 질투심이 함께 일어났다.
 “루시아, 오늘은 너에게 특별한 것을 선물로 주겠다.”
 “특별한 것을요?”
 “그래, 바로 이것이다.”
 준이 루시아에게 내민 건 마법 지팡이였다.
 “이건 마법 지팡이!”
 “손잡이에 수정구를 박고 그 속에 다시 상급의 마나석을 넣었다.”
 “허억, 정말 상급의 마나석을 넣었어요?”
 “그렇다. 네가 가진 마력의 열 배는 넘을 것이다.”
 “엄청난 마법 지팡이에요!”
 “너도 이제는 어엿한 오 서클 유저의 마법사이니 이런 마법 지팡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더구나. 그래서 특별히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고마워요, 스승님.”
 루시아가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제 이곳도 나름대로 적응이 된 것 같으니 사업이라도 해야겠어.’
 
 
 제5장 독점 사업
 
 
 고카라스 빅 시티 상업지역.
 각종 상점이 몰려 있는 곳으로, 이곳에 없는 것은 고카라스 빅 시티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3일 전부터 망해서 비어 있던 제법 큰 상점 하나가 팔리자 주위에 있는 상점에서는 머리를 흔들었다. 규모에 비해 장사가 그렇게 잘되는 상점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것은 근처에 많았기에 장사가 아주 불리했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지 비어 있는 상점을 샀다고 하니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 상점을 매입한 준은 피식거리고 웃었다. 누구보다도 사업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3일간 내부 수리가 이루어지더니 공사가 끝났다.
 간판에는 처음 보는 모양의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라고 되어 있었다.
 정오가 되자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 문을 열었다. 그곳은 특이하게도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충격 흡수 마법진이 새겨져 있어 유리는 충격에 아주 강했다. 게다가 아직 비싼 건축 자재였기에 고가에 거래가 되는 것이었다.
 전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내부가 환하게 다 보이는 구조의 상점은 실내 인테리어가 고급으로 되어 있었으며, 예쁜 아가씨 10명이 멋진 유니폼을 입고 서 있었다.
 다른 상점들과는 확연하게 달라 보이는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호기심에 한 중년인이 상점 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푹푹 찌는 무더위였는데 상점 안은 동굴 속에 들어온 것처럼 시원했다.
 “어서 오세요.”
 상냥하게 아가씨들이 인사하자 중년인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여긴 뭘 파는 곳이오?”
 “예, 아이스크림과 과일 빙수, 막대 사탕도 팔고 있어요.”
 “그게 뭡니까?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
 로라가 자세하게 설명해주자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설명해드린 가격표와 그림이 벽에 붙어 있으니 한눈에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렇군. 그럼 베라 빙수로 하나 줘보시오.”
 “예, 손님. 빈자리에 앉아 기다리세요.”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은 포도와 비슷한 베라라는 과일을 평소 좋아했기에 그것으로 만든 베라 빙수를 주문했다.
 베라 빙수는 10코인으로, 그렇게 싼 가격은 아니었다. 빵 하나가 1코인이니 10코인이면 제법 비싼 거였지만 귀한 얼음이 들어간다고 하니 그렇게 비싸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호기심에 시켜 본 것이다.
 연중 30도가 넘는 날씨에 폭염일 때는 43도까지 오르는 프리랜드 연합이었다. 특히 고카라스 빅 시티는 바렌츠 산맥과 가까워서 다른 곳보다 3도 정도 더 무더운 날씨였다.
 이윽고 로라가 베라 빙수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님, 맛있게 드세요.”
 “······.”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은 베라 빙수를 스푼으로 떠먹어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게 입 안에서 느껴졌다.
 ‘우아! 어떻게 이런 맛이? 너무 시원하고 달콤한 게 맛있다.’
 중년인은 허겁지겁 베라 빙수를 퍼먹었다. 한 그릇을 비우자 더위가 싹 물러가버렸다.
 “아, 맛있어.”
 중년인이 10코인을 지불하고 나가려는데 베라 맛의 막대 사탕이 눈에 띄었다.
 “이건 뭐라고 했소?”
 “베라 맛의 막대 사탕이에요.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 사볼까? 얼마요?”
 “삼 코인이에요.”
 “여기 있소.”
 중년인이 나간 후 호기심에 이끌려 하나 둘씩 손님들이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을 찾았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기도 했다.
 어쨌든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을 찾은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는 돌아갔다. 각종 과일 빙수도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부드럽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아이들에겐 더 인기였다. 특히 나갈 때에는 막대 사탕을 하나씩 사가지고 나갔다. 아이들에게는 아무래도 달콤한 막대 사탕이 최고 인기였다.
 난데없이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 들어서면서 최근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곳은 이곳이 되었다. 연중 내내 무더운 날씨를 가진 곳에 얼음이 들어간 시원한 먹을거리가 생겼기에 인기를 얻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입맛을 자극하는 시원함과 달콤함에 자유민들은 난리였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이끌고 막대 사탕과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건 흔한 풍경이 되었다. 부모들도 각종 과일 빙수를 한 그릇씩 먹으며 더위를 식혔다.
 이렇게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은 단기간에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워낙 독특하면서도 획기적인 먹을거리였기에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 이렇듯 인기를 누리다 보니 옆 건물까지 사들여 확장 영업을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준은 자신의 예상대로라는 듯 어느새 상점의 뒤쪽에 1백 미터 높이의 타워 전망대를 만들었다. 하룻밤 만에 마법으로 뚝딱 만든 것이다.
 타워 전망대는 모두 유리로 돼 있어 전망이 좋았다. 총 5층으로 되어 있고, 층마다 2백 명의 손님들이 과일 빙수나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타워 전망대도 빅 히트를 기록하면서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다.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 문을 연 지 겨우 한 달에 불과했지만 벌써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 남녀들이 많이 찾아왔다. 특히 타워 전망대로 올라가 그곳에서 시원한 얼음이 들어간 과일 주스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게 인기였다.
 준은 물과 얼음이 장사에 아주 중요하다는 걸 알고는 아이스크림 상점의 뒤쪽에 대형 창고를 마련했다. 빙계 마법진이 새겨진 대형 금속통에 얼음을 보관했는데, 일종의 냉동고였다. 무더운 날씨였기에 잘못 오염된 물을 마시면 배탈이 날 수도 있어 이 점을 특히 신경 썼다.
 물류 창고에는 대형 물탱크가 2개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의 물탱크에는 화염계 마법진이 새겨져 있어 그곳에 물을 부으면 팔팔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 뜨거운 물이 수도를 통해 그 옆에 있는 대형 물탱크에 들어가면 급랭이 되어 물이 금방 차가워졌다.
 그 물을 다시 빙계 마법진이 새겨진 금속통에 쏟아 부으면 급속으로 얼음이 만들어진다. 이 얼음을 상점 안으로 수시로 옮겨 얼음을 갈아 과일 빙수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별도로 만들어 물류 창고에 보관했다가 상점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떨어지면 즉각 채워 넣어 장사했다.
 이 모든 일의 핵심적인 것은 준의 제자 루시아가 맡아서 혼자 처리했다. 사업의 노하우가 알려지면 장사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만들어진 재료들을 상점 안으로 가져다 옮기는 일만 했다.
 그렇게 완벽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다 보니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고카라스 빅 시티의 총독인 알렉세이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부인과 아이들에게 이끌려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에 들른 그는 과일 빙수와 아이스크림, 막대 사탕을 먹어보고는 그 사업성에 놀랐다.
 또한 이곳까지 온 김에 타워 전망대에도 들러보았는데, 전망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았다.
 ‘으음, 프리맨이라는 자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이런 사업을 머릿속에 떠올린 거지?’
 아무리 장사 경험이 없는 자라고 해도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 돈이 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고카라스 빅 시티 상업지역에 있는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은 최근 가장 유명한 상점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고카라스 빅 시티를 찾은 상단들은 소문을 듣고 그곳에 들러 과일 빙수나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고 돌아가곤 했다.
 워낙 독창적인 사업이라 눈독을 들이는 상단이 많았다. 특히 연중 무더운 날씨인 다른 4개의 빅 시티에서도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의 분점이 열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준도 처음에는 다른 빅 시티에 분점을 개설해볼까 생각했지만, 거리가 멀고 관리가 힘들다는 점을 들어 포기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찾기에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것만 해도 벅찼다.
 인원 확충이 필요하다 판단한 준은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으로부터 20대의 젊고 건강한 노예들을 50명이나 더 구입했다.
 한 명당 3골드로 150골드가 들어갔지만 큰 부담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손을 덜게 되어 환영이었다.
 “나를 따라와라.”
 “······.”
 빈스 집사의 말에 노예들은 말없이 그를 뒤따라갔다.
 빈스 집사는 준이 이번에 새로 구입한 노예들을 일단 배불리 먹였다. 배가 부른 노예들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멍한 표정들이었다.
 그런 노예들을 이해한다는 듯 빈스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번에는 냄새나는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
 노예들은 함부로 대꾸하면 안 된다고 세뇌를 받았기에 눈치만 보았다. 빈스 집사는 그런 노예들을 욕실로 데려가 깨끗하게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노예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좋은 주인을 만났다며 좋아했다.
 배불리 먹이고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자 이제야 노예들이 인간답게 보였다.
 그렇게 5일간 적응 기간을 거치자 주눅 들어 있던 노예들도 이제야 약간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며 저희들끼리 나직하게 소곤거리곤 했다.
 “이곳은 천국이야.”
 “맞아, 하루에 세 번 식사를 주는데 고기가 한 번도 빠지지 않아. 특히 간식도 하루에 두 번씩 주니 살맛나.”
 5일이 지나자 노예들은 이곳이 천국이라 생각했다.
 주인이 하루에 세 번 고기가 들어간 식사에 두 번의 간식을 주어 배가 부르자 더 이상 불만이 없었다. 그런 데다 깨끗하게 매일같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으며, 그리 힘들 것도 없는 일만 했다.
 노예들은 너무너무 편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집의 관리에 필요한 노예들을 구입할 때처럼 이번 노예들도 처음에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인간다워졌다.
 준은 정원 한쪽에 돌로 이루어진 창고를 하나 만들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큰 크기가 아니었지만 창고 지하에 대형 공동이 마련되어 있었다.
 준의 마력으로 만든 곳이었는데, 천장이 높고 마법등이 매달려 있어 대낮같이 환했다.
 마법을 이용했기에 지하 공동은 엄청나게 넓었다.
 준은 이곳에 아이스크림이나 얼음을 만드는 시설을 마련하고, 이번에 구입한 50명의 노예들을 이곳에서 일하도록 조치했다.
 힘이 좋은 젊은 노예들을 잡일에 투입하니 일의 능률이 높아졌다. 노예들은 영양가 높은 식사를 주는 데다 때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에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집안일을 거드는 처음의 노예들과는 대우가 달랐다. 그들은 5년간만 이곳에서 일하면 노예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이번에 구입한 50명의 노예들은 아니었다.
 준은 이들 역시 기회를 보아 노예의 신분에서 풀어주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런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루시아는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 뒤에 마련되어 있는 창고 속에서 핵심적인 것들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도둑 길드에서 밤늦게 침투하는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노하우가 들통 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 시설을 철수해버렸다. 그리고 준의 집 정원 한쪽에 이번에 마련한 창고의 지하 공동에 새로 시설을 설치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하우의 유출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얼음과 아이스크림을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에까지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준은 만들어놓은 아이스크림과 얼음을 운반하기 위해 짐마차를 10대나 마련했다. 그리고 짐마차 속에 직접 빙계 마법진을 새겨 넣어 얼음이나 아이스크림이 운반되는 동안에 녹지 않도록 해두었다.
 30분 정도면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운반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도둑 길드나 각종 사고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용병 길드에 의뢰했다.
 혹시라도 물건이 도둑맞거나 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 용병 길드의 B급 용병들을 30명이나 고용해 운반 일에 투입했으니 걱정 없었다.
 물론 고카라스 빅 시티는 치안 상태가 좋았지만 미리미리 대비한다는 준의 생각으로 이번 용병 의뢰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첫 번째 사업이 대박을 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준은 정원의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연못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걸 바라보았다.
 “으음, 이번에는 어떤 사업을 해볼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비누였다. 만들기도 그리 어렵지 않고 주재료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후후후. 그래, 이번 기회에 미용 비누와 빨랫비누를 만들어 팔아야겠어.”
 미용 비누와 빨랫비누는 이미 하인과 하녀의 일을 하고 있는 노예들이 매일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용 비누와 빨랫비누를 확실하게 구분 짓기 위해 미용 비누에는 꽃향기를 넣기로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향수 산업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직 향수 산업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일부 귀족들을 위해 소량으로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는 게 전부였는데, 이 분야에 준이 뛰어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누를 생산하기 위한 시설과 향수 산업, 그리고 아름다운 용기를 위해 유리 공장까지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또 노예들이 필요했다.
 이번에도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으로부터 20대의 젊고 건강한 노예들을 1백 명이나 구입했는데, 겨우 3백 골드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 노예들만 많아졌기에 10대 후반의 젊은 여자 노예들도 50명을 구입했다. 이들 역시 한 명당 4골드로 2백 골드나 들어갔지만 준에게는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여자 노예들을 50명이나 구입한 건 며칠간 적응기를 거친 후 남자 노예들과 결혼시켜 가정을 이루게 해주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노예라는 삶은 미래가 없기에 이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부여하고자 준이 마련한 것이다.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면서 구입하는 게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약간 들었지만, 사회가 그러니 준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준이 노예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들을 구입해서라도 적당한 일을 시키며 인간답게 대우받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어쨌든 준이 구입한 노예들은 천국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다.
 준은 악덕업자가 아니었기에 노예들에게 하루에 8시간 정도만 일하도록 조치했다. 또 한 시간 일하면 30분은 꼭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그러니 노예들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준의 집 오른쪽에는 노튼 일행이 땅을 구입하여 통나무집을 신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별 쓸모가 없는 왼쪽 편에 있는 버려진 땅을 구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포기했다. 준의 집 뒤쪽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준의 집 왼쪽 땅으로 흘러가 집짓기 불편해서 버려져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땅이 바로 준의 집과 마주 보고 있는 땅이었다. 빈 공터에 불과했지만 준에게는 괜찮은 땅이었다.
 준의 집 맞은편 땅은 10배 정도로 컸다. 하지만 땅값은 저렴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그 땅을 매입한 준은 땅을 고르는 작업에 노예들을 투입했다.
 2백 명의 젊고 건강한 노예들이 동원되자 금방 땅 고르는 작업이 끝났다.
 준은 그 땅에 유리 공장과 향수 공장, 비누 공장의 초대형 건물을 신축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업 규모가 커진 것이다.
 준이 아공간에 보관해놓은 보물들이 엄청나기에 그것들을 처분해도 되지만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에서 팔아 거두어들인 돈도 엄청났다. 그 막대한 돈만으로도 충분히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영어 알파벳 ‘F’를 상표로 하여 출시된 준의 미용 비누와 빨랫비누가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 한쪽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 상표가 사람들에게는 생소했지만 식별하기 쉬운 장점도 있었다.
 빨랫비누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용기에 담아 판매했지만 미용 비누는 좀 더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해 유리 용기에 넣어 판매했고, 이것은 평민 이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또한 아름다운 유리 용기에 담긴 향수도 같이 출시하여 판매했다.
 유리 용기를 만들다 보니 유리 술병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준은 우선 빈 유리병을 많이 만들었다.
 이 뮤란 대륙에는 와인은 있지만 와인을 증류해서 만든 코냑은 없었다.
 와인은 온도에 민감해 숙성이 잘 되기에 멀리까지 운반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화물선에 실어 멀리까지 항해를 하다 보면 술이 숙성되어 신맛이 강한 와인이 되곤 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준은 프리맨 코냑이라는 술을 출시했고, 아름다운 유리병에 담은 증류주 프리맨 코냑은 맛도 좋아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고카라스 빅 시티에 있는 대형 술 생산업자에게서 계약을 체결한 준은 와인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술 공장에서 증류시켜 프리맨 코냑을 만들어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니 고급술로 인식되어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워낙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 인기를 누리다 보니 향기가 좋은 미용 비누와 향기는 없지만 빨래의 때가 잘 빠지는 빨랫비누, 프리맨 향수까지 날로 판매가 높아졌다.
 여기에다 결정적으로 프리맨 코냑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유리병에 담겨 판매되고 있었기에 선물용으로 많이 팔려 나갔다.
 준은 이렇게 여러 가지 제품을 독점으로 판매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고카라스 빅 시티에 살고 있는 지도층에서도 준을 주시하게 되었다.
 고카라스 빅 시티의 총독인 알렉세이가 이례적으로 준을 무도회에 초청했다.
 현재 준은 C급 용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고카라스 빅 시티 총독의 성.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준은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지금 대연회장에는 한창 무도회가 열려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끼이이이.
 대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준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보통 이 정도면 주눅 들게 마련인데 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후후후, 이 정도로 나를 주눅 들게 할 순 없지.’
 준은 당당하게 대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도복으로 멋지게 차려입은 그는 키가 컸기에 더욱 옷이 잘 어울렸고 멋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그런 눈빛이었다.
 준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바로 알렉세이 총독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시오, 프리맨 경.”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독 각하.”
 “최근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가장 사업이 잘되어 막대한 돈을 벌고 있는 프리맨 경이라 무도회에 초청한 것이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프리맨 경의 아이스크림 상점을 떠올리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려.”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허허, 운이 좋다고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죠?”
 “······.”
 “그건 그렇고, 최근에는 비누라는 것도 히트를 치고 있다면서요?”
 “그것이 벌써 소문났습니까?”
 “향수 산업과 주류 생산까지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오.”
 “그렇습니까? 향수 산업은 몰라도 프리맨 코냑이라는 술은 대륙 전역으로 한번 판매를 해볼까 고민 중입니다.”
 알렉세이 총독은 준이 프리맨 코냑을 대륙 전역에 판매 고려 중이라는 말에 눈을 번뜩였다.
 그도 프리맨 코냑을 마셔 보고는 감탄했다. 술이 좀 독해서 그렇지 향도 좋고 맛도 아주 좋은 고급술이라 생각했다. 술병도 유리로 특별히 제작했는데, 모양이 특이해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런 고급술은 주로 귀족들이 선호했다. 가격도 비싸기에 더욱 좋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요? 어느 상단과 거래를 할 겁니까?”
 “아직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조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하하하하. 프리맨 경, 사업에 어려움은 없소?”
 준은 알렉세이 총독의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총독이 프리맨 코냑을 마음에 두고 있군. 어디 한번 찔러보면 알겠지?’
 “혹시 총독 각하께서 운영하시는 상단이 있습니까?”
 “하하하, 그럼요. 안정적인 자금을 확보해야 하니 당연히 상단을 운영 중이라오.”
 “그러셨군요. 대단하십니다.”
 무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으면서도 귀는 총독과 준의 대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준은 현재 고카라스 빅 시티에 남들이 따라 하지 못하는 획기적인 품목으로 사업을 벌여 막대한 돈을 끌어 모은다고 알려져 있었다. 벌이는 사업마다 히트를 치면서 성공하니 상인들의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준이 펼치는 사업 중에서 가장 낮은 품목인 프리맨 향수라는 것도 기존의 향수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향수병이 독특하고 향기까지 좋아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제 고카라스 빅 시티에는 ‘프리맨’이라는 것이 하나의 인기 상표가 되었다.
 고카라스 빅 시티에 방문한 상단들은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에서 과일 빙수나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놀라곤 했다. 그리고 고카라스 빅 시티를 떠날 때 미용 비누와 빨랫비누, 프리맨 향수와 프리맨 코냑을 사가는 게 당연시되고 있었다.
 “프리맨 경, 무도회가 끝나고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괜찮겠소?”
 “그러죠, 총독 각하.”
 보는 눈이 많았기에 둘은 너무 사업적인 이야기만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도회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알렉세이 총독의 곁으로 흰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다가왔다. 늘씬하면서도 가슴이 풍만하고 금발에 오뚝한 코, 촉촉한 붉은 입술까지 전형적인 미녀였다.
 그녀는 프리맨 향수 중에 장미 향 향수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아빠.”
 “아, 비앙카.”
 “이분은 누구시죠?”
 “인사하거라. 최근 고카라스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프리맨 경이다.”
 “그래요? 안녕하세요, 프리맨 경.”
 “처음 뵙겠습니다. 프리맨이라 합니다.”
 “비앙카라고 해요.”
 비앙카도 준이 대연회장으로 들어설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알렉세이 총독과 대화 중이기에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저와 춤추실래요?”
 “그러죠. 잘 추지는 못합니다.”
 “그럼 제가 리드하면 되죠.”
 준은 비앙카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는 어떤 춤이 유행하는지와 어떤 춤들을 추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총독의 성으로 오기 전 간단하게 춤 연습을 해두었기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준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멋지게 추자 비앙카도 놀라는 눈치였다.
 “어머, 춤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그렇습니까?”
 “예, 이렇게 잘 추실 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실수하지 않아서 저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호, 그러셨어요?”
 두 곡의 춤을 춘 준은 비앙카와 함께 음료가 차려진 테이블로 이동했다.
 비앙카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몸에 열기가 올랐는데 과일 주스가 전혀 시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치 챈 준은 자신이 들고 있는 주스 잔에 마력을 일으켜 빙계 마법을 펼쳤다.
 츠츠츠.
 순간 주스 잔이 차가워졌다.
 “이것이 시원하니 마셔 보세요.”
 “똑같은 거 아니었어요?”
 “마셔 보면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비앙카는 준의 말에 한번 속아보자는 생각으로 그가 내민 주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너무 시원해요.”
 “그렇죠?”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약간의 빙계 마법을 펼쳤더니 시원해진 겁니다.”
 “역시··· 대단하세요. 마법도 펼칠 수 있었군요?”
 “이 정도 마법은 아무것도 아니죠.”
 “역시 프리맨 경은 신비스러워요.”
 “제가 말입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더욱 신기한 것을 하나 선물로 드려야겠군요.”
 “정말 저에게 선물을 주실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스윽.
 준은 비앙카에게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서 오르골을 꺼내어 내밀었다. 백금에 기이한 문양이 들어가 있는 데다 각종 보석이 박혀 있어 무척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준이 내민 오르골을 본 비앙카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예요?”
 “보통 오르골이라 부르는데, 제가 만든 거라 뮤직 박스라고도 합니다.”
 “보석함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 같군요?”
 “제가 사용법을 알려 드리죠.”
 스윽.
 준이 오르골의 뚜껑을 열자 작은 남녀가 춤추는 모양의 인형이 마치 실제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거였다.
 “어머,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네요?”
 “그렇습니다. 모두 삼십 곡의 음악이 들어 있는데 뚜껑을 닫지만 않는다면 차례대로 계속 음악이 흘러나올 겁니다. 물론 삼십 곡의 음악이 모두 한 번씩 흘러나온 후엔 다시 반복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죠.”
 “아, 정말 대단해요.”
 “재료비만 오백 골드가 들어갔습니다. 이런 진귀한 물건은 이천 골드를 주더라도 구입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요. 저도 처음 본 물건이지만 정말 대단해요.”
 “비앙카 아가씨에게 멋진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정말 감사해요, 프리맨 경.”
 사람들의 시선이 비앙카가 손에 들고 있는 오르골에 집중되었다. 오르골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기에 음유시인들도 음악을 잠시 중지시켰다.
 사람들의 인식에도 준은 무척 신비스러운 자였다. 사업도 그렇고, 비앙카에게 선물로 준 것도 아주 신기한 물건이었다.
 집사가 준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지금 총독 각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그러죠.”
 준은 집사의 뒤를 따라 대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사람들이 비앙카에게 다가오자 비앙카는 그들에게 오르골을 구경시켜 주었다.
 총독의 집무실로 들어온 준은 소파에 앉아 알렉세이 총독이 권해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총독 각하, 저를 부르신 용건을 알고 싶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던 프리맨 코냑에 관해 프리맨 경과 사업을 했으면 해서 말이오.”
 “그렇습니까?”
 “프리맨 경이 조건을 말해보시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 조건을 말해드리겠습니다. 현재 프리맨 코냑 한 병을 이 골드에 판매하고 있는데, 총독 각하의 상단에는 그 반값인 일 골드에 납품해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좋은 조건이구려.”
 “그렇지만 아직 생산 설비가 그렇게 많지 않아 하루에 백 병 이상은 힘듭니다.”
 “백 병이라면 너무 적은 것 아니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유리로 만든 술병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어쩔 수 없습니다. 대신 앞으로는 생산 시설을 더 늘릴 것이니 몇 달만 지나면 하루에 천 병까지 생산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루에 천 병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 것이오?”
 “생산 설비를 갖추어야 되니 약 오 개월 정도는 있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좋소,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소.”
 “그런데 말입니다, 저와 계약하기 위해서는 계약금으로 만 골드를 주셔야 합니다.”
 “뭐요? 만 골드나 말이오? 그건 너무 많은 것 아니오?”
 “물론 만 골드면 많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조금만 앞을 내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실 겁니다. 하루에 백 병이면 총독 각하께서는 백 골드의 이익을 보십니다. 한 달이면 삼천 골드입니다.”
 “으음, 그렇구려.”
 “예, 계산상으로만 놓고 보더라도 이런데 총독 각하의 상단을 이용해 멀리까지 운반해 팔면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제야 알렉세이 총독도 이해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맨 경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구려.”
 “예, 총독 각하.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제가 총독 각하께 만 골드를 받는 건 정말 푼돈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더욱 늘어날 물량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좋소, 당장 나와 계약합시다.”
 “한 가지 더 조건이 있습니다.”
 “뭔지 말해보시오.”
 “제가 프리맨 코냑을 운반하긴 힘드니 총독 각하의 상단에서 저희 공장으로 짐수레를 보내주십시오. 그럼 제가 공장에서 생산한 프리맨 코냑을 상단에 넘겨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
 “오늘의 이 계약으로 총독 각하께서는 앞으로 큰 수익을 올리시게 될 것입니다.”
 “허허허,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럼 계약서를 상세히 작성하겠습니다.”
 준은 준비해온 2장의 양피지에 계약서를 작성해 알렉세이 총독에게 내밀었다.
 똑같은 2장의 계약서를 읽어본 알렉세이 총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인장을 찍고는 사인했다.
 준도 똑같이 자신의 인장을 찍고 사인해 내밀었다.
 그렇게 각각 계약서를 품속에 집어넣은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리맨 경,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가집시다.”
 “예, 총독 각하.”
 준이 총독과 맺은 계약은 약간 불리한 거 같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앞으로 준이 사업을 펼쳐 나가는 데 총독이 뒤에서 많은 힘을 실어줄 것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는 아무도 알렉세이 총독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준에게는 큰 방패막이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기에 앞으로 사업을 펼치는 데 더 유리하게 된 것이다.
 쉬쉬쉿, 파팟.
 준은 정원의 금잔디에서 롱 소드를 휘두르며 검술 연습 중에 있었다. 현란하면서 날카로운 스네이크 검술을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게, 이제 완숙한 경지에 접어든 것 같았다.
 정자에선 루시아가 차를 마시며 준의 스네이크 검술을 구경하고 있었다. 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존경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준의 사업은 알렉세이 총독과 계약을 체결한 후 순풍에 돛 단 듯이 술술 잘 풀렸다.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은 고카라스 빅 시티의 자유민들뿐만 아니라 고카라스를 찾은 상단의 사람들에게까지 많이 알려지며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김준이 만든 오르골, 즉 뮤직 박스도 상점과 전망대에 놓아두자 아름다운 음악으로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었다.
 그것 때문인지 전망대엔 연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이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다 보니 늦은 밤까지도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모든 게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 덕분이었다.
 상점 한쪽에서 판매하고 있는 미용 비누와 빨랫비누도 잘 팔리고 있었다.
 전망대의 연인들은 5가지의 향수들 중 1가지를 구입해가곤 했다.
 또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프리맨 코냑을 많이 찾았다. 술병이 아름답고 술맛도 좋기 때문에 2골드라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이 많았다.
 “루시아.”
 “예, 스승님.”
 “뭘 그리 생각하고 있느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법 공부도 중요하지만 체력도 중요하니까 이번에는 네가 스네이크 검술을 펼쳐 보거라.”
 “예, 스승님.”
 뱀의 움직임을 보고 창안한 검술이라 그런지 변화가 많고 현란한 게 특징이었다.
 루시아는 준에게서 은밀히 내공심법도 전수받고 있었기에 롱 소드에 마나도 약간씩 불어넣을 수 있었다. 롱 소드의 검날에 불어넣은 푸르스름한 검기라면 나무나 방패 정도는 손쉽게 두 동강내버릴 수 있었다.
 쉬쉬쉿, 파팟!
 루시아의 스네이크 검술을 지켜보던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 그만 되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루시아가 준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준은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아, 아니다. 잠시 쉬고 있거라.”
 “예, 스승님.”
 루시아가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자 준은 정원 한쪽에 놓아둔 주물로 제작한 인간형 병사가 20명이나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롱 소드와 전투용 도끼, 창, 철퇴 등 보병들의 무기를 든 주물 병사들은 갑자기 두 눈이 붉게 물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이 마법을 이용하여 특별 제작한 주물 병사들이었다. 이것들은 실전 감각을 익히는 데 아주 유용했다. 다만, 칼에 몸이 베일 수도 있기에 날은 세우지 않았다.
 준이 빈손으로 주물 병사들에게 접근하자 주물 병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후우웅!
 파공음을 일으키며 제법 위력적으로 창이 날아오자 상체를 뒤로 젖혀 그 공격을 피한 준은 창을 든 주물 병사의 곁에 붙으며 순간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면서 이동했다.
 쩡쩡!
 쇳소리가 일어나며 주물 병사의 찍힌 가슴 부분이 움푹 들어갔다. 주물이 찌그러질 정도로 준의 권법은 위력적이었다.
 루시아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볍게 콕콕 손가락으로 찍은 것 같았는데 실상은 엄청난 위력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주물 병사 20명이 준을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스피드가 빠른 준은 여유롭게 모든 공격을 피하며 반격도 했다.
 주물 병사들은 준의 주먹 한 방에 휘청거렸고, 발차기에는 훨훨 날아가 떨어졌다. 수백 킬로그램의 무게를 가진 주물 병사들이 너무 형편없이 공격을 받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주물 병사가 결코 약한 게 아니었다. 그만큼 준의 무공이 높은 경지라는 뜻이었다.
 옆 통나무집의 노튼 일행은 오늘도 어김없이 전망대에 숨어서 그 장면을 훔쳐보고 있었다.
 퍼억!
 준의 손바닥에 맞은 주물 병사가 훨훨 날아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준이 파리를 쫓듯이 손을 흔들자 주물 병사 5명의 가슴이 움푹 들어가며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우우웅!
 준이 손에 내공을 불어넣자 그의 손이 푸르스름해졌다.
 후우웅, 퍼억!
 어느새 내뻗어진 준의 강력한 장력에 맞은 주물 병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와르르 부서져 버렸다.
 준은 보법을 밟으며 순식간에 주물 병사에게 접근하더니 천왕십이수를 펼치고는 바닥을 박차고 뒤로 튕겨져 착지했다.
 쩌쩌쩍!
 준의 천왕십이수에 격중된 주물 병사가 온몸에 금이 가더니 와르르 무너졌다.
 슈슈슉!
 바닥을 박차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주물 병사에게 접근한 준은 엎어치기로 주물 병사 하나를 날려 버렸다.
 콰쾅!
 7미터를 날아가 떨어진 주물 병사는 요란한 소리를 일으키며 처박혔다.
 보법을 밟으며 다시 주물 병사들에게 접근한 준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하게 권법을 퍼부었다.
 퍼퍼퍽, 빠악!
 격중음이 엄청났다. 얼마나 위력적인지 무게가 많이 나가는 주물 병사들이 튕겨져 날아가 떨어졌다. 공격을 받은 곳은 일부가 깨어지거나 찌그러져 있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주물 병사가 만약 인간이었다면 준의 권법 한 방에 즉사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20명의 주물 병사가 모두 쓰러지자 준은 그제야 씨익 웃으며 태연하게 정자로 걸어왔다.
 스스스스.
 20명의 주물 병사들은 자체 복원력으로 움푹 들어갔던 곳이 다시 원상태가 되었고, 일부 깨어진 곳도 스르르 다시 원상 복귀되었다.
 정원의 한쪽으로 이동해 줄을 맞춘 그들의 붉게 이글거리던 눈빛이 다시 꺼져 버렸다. 동상처럼 정지해버린 것이다.
 “스승님,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냐?”
 “예, 기사들이라고 해도 스승님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겠던데요?”
 “너도 열심히 수련해서 주먹에 내공을 불어넣는다면 나처럼 할 수 있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원한 과일 주스 드세요.”
 “그래, 고맙구나.”
 준과 루시아는 수련이 어느 정도 끝나자 정자에서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노예들은 정원의 한쪽에서 대기해 있다 준의 수련이 끝났다는 걸 알고는 금잔디가 뽑히거나 흙이 움푹 파인 곳을 다시 복구하기 시작했다.
 전망대에 숨어서 훔쳐보고 있던 노튼 일행은 입을 쩌억 벌렸다. 준의 엄청난 실력에 경악한 것이다.
 “우우··· 잘못 건드렸으면 큰일 날 뻔했어.”
 카이가 믿어지지 않는지 눈을 껌뻑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튼도 카든을 보며 말했다.
 “카든, 보았나?”
 “대장, 저자가 저렇게 엄청난 실력을 가졌을 줄은 몰랐어.”
 “이제라도 조심해. 잘못 도발했다가는 끝장날 수도 있겠어.”
 “아, 알았어. 앞으론 조심할게.”
 “그건 그렇고, 우리도 이제 제법 훔쳐보았는데 저런 실력은 나오지 않아.”
 “대장, 뭔가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게 아닐까?”
 “비법?”
 “내가 생각하기엔 주먹에 마나를 불어넣은 것 같아.”
 “으음, 정말 그게 가능할까?”
 “나도 믿어지지는 않지만 모두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잖아?”
 “그건 그렇군.”
 “어쩌면 마나 심법을 익히고 있는지도 몰라.”
 “으음, 일단 저들이 펼쳤던 검술이나 좀 더 수련하자.”
 “알았어, 대장.”
 전망대에서 내려간 노튼 일행은 마당에서 훔쳐 배운 스네이크 검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제6장 어쌔신의 습격
 
 
 밤하늘에 구름이 많아 블루 문이 떠 있는데도 어두웠다.
 스스스스.
 검은 옷에 복면까지 한 흑의인들이 20명이나 준의 집 앞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이 집이냐?”
 “그렇습니다. 이 집이 프리맨이라는 자가 구입한 집입니다.”
 “으음, 마법적인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구나.”
 “이 집에 그럼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겁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마법의 기운이 일부 느껴지는 걸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알람 마법이라도 걸려 있을지 모르니 일단 그걸 파악해보고 신속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 프리맨이라는 자를 제거한다. 알았나?”
 “예, 대장님.”
 “루퍼, 알람 마법이 걸려 있나 확인해봐라.”
 “예, 대장님.”
 루퍼라 불리는 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준의 집을 살펴보았다.
 “살펴보니 알람 마법은 걸려 있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신속하게 뛰어 들어가 프리맨이라는 자를 제거하도록 한다. 노예들도 집 안에 있을 것이니 그들도 제거한다. 이상.”
 스윽.
 흑의인들 중 대장이 손을 앞으로 내뻗자 부하 흑의인들이 일제히 공중제비로 가볍게 돌담장을 넘어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것을 쳐다본 흑의인 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돌담장을 넘어 뒤따라갔다.
 정원 연못 앞과 집 앞에 돌병사 10명이 조각품처럼 세워져 있었다. 순간 그것들의 두 눈이 갑자기 붉게 물들며 흑의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억, 돌조각품이 움직인다. 조심해!”
 슈가각.
 “크아악!”
 돌병사가 날카로운 돌검을 휘둘러 흑의인 하나의 몸통을 두 동강내버렸다. 돌조각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스피드가 엄청났다. 흑의인들보다 배나 빨랐으니 흑의인들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흑의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돌병사가 앞을 가로막으며 공격을 퍼부었기에 쉽지 않았다.
 흑의인들도 롱 소드를 뽑아들고 휘둘렀다.
 카캉!
 롱 소드를 맞은 돌병사의 몸에서 불꽃이 튀겼지만 멀쩡했다. 마법적인 기능으로 더욱 단단해진 모양이었다.
 슈가각.
 “아아악!”
 이번에도 돌병사의 돌검에 베인 흑의인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돌병사들의 검술 실력도 대단해 흑의인들이 피하기 어려웠다.
 점점 수세에 몰린 흑의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흑의인의 대장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옆에 있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저것들을 막을 동안 너희 세 명은 집 안으로 들어가 놈을 죽여라.”
 “예, 대장님.”
 흑의인들의 대장은 배틀액스를 등 뒤에서 뽑아들고 돌병사를 공격했다.
 카카캉!
 돌병사는 흑의인 대장의 도끼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그때, 기회만 보고 있던 3명의 흑의인이 재빨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뛰어 들어갈 때보다 배는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나동그라졌다.
 “커억!”
 “아아악!”
 “캐에엑!”
 3명의 흑의인이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저벅저벅.
 집 안에서 걸어 나온 자는 준이었다. 준의 등 뒤에는 루시아가 굳어진 얼굴로 서서 흑의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
 츄츄츙!
 루시아가 흑의인들에게 매직 미사일 5발을 발사하자 루퍼라는 자가 흑의인 대장의 곁에서 외쳤다.
 “에어 실드.”
 스스스.
 공기의 방패가 생성되어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방어했다.
 콰쾅!
 매직 미사일은 공기의 방패에 격중되어 폭음이 일어나며 소멸되었다. 시간차 공격으로 계속해서 차례대로 날아갔지만 전부 공기의 방패에 가로막혀 소멸되고 말았다.
 스승이 있는 자리에서 공격 마법이 실패로 끝나자 루시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치잇, 실패했어.”
 “루시아, 그 정도로 실망할 것 없다. 매직 미사일.”
 츄웅!
 준의 손끝에서 매직 미사일 1발이 생성되어 루퍼라는 자에게 날아갔다. 5발의 매직 미사일도 막아내었는데 겨우 1발이 날아오자 그는 비웃는 표정이었다.
 퍼억!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것은 루퍼가 펼친 공기의 방패를 그냥 통과하더니 격중되었다. 그의 가슴에 주먹이 들락거릴 정도로 큰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끄으으··· 이게?”
 루퍼는 믿을 수 없는지 눈이 커지더니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흑의인 대장이 크게 외쳤다.
 “젠장! 후퇴하라, 후퇴!”
 흑의인 대장은 즉시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고, 나머지 흑의인들도 재빨리 뒤돌아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후후, 내가 그냥 보내줄 것 같으냐?”
 준의 양손이 앞으로 내뻗어졌다.
 파파파팡!
 파공음이 일어났다.
 “커억!”
 “으아악!”
 달아나던 흑의인들이 갑자기 비틀거리며 고꾸라졌다.
 파악!
 바닥을 박차고 화살같이 날아간 준은 아직 돌담장을 넘어가지 못한 흑의인들을 롱 소드로 베어버렸다.
 “크악!”
 “으아악!”
 흑의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수수 쓰러졌다.
 20명의 흑의인들이 다 죽고 이제 대장 혼자만 살아 있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준이 롱 소드를 휘두르자 그는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도약해 준의 공격을 피했다.
 슈슈슝!
 흑의인 대장이 자신을 향해 별 모양의 표창 2개를 내던지자 준은 즉시 상체를 뒤로 젖혀 표창을 피하며 롱 소드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슈가각, 투욱.
 “으악··· 내 팔!”
 흑의인 대장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쳤다.
 준이 천천히 그에게 접근하면서 물었다.
 “너는 누군데 날 죽이러 온 거지?”
 “크으으··· 이렇게 강할 줄 몰랐던 게 나의 패인이구나.”
 “너의 정체를 밝혀라.”
 “크흐흐··· 그건 알려 줄 수 없다.”
 “그래? 그럼 죽어라.”
 슈가각.
 준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흑의인 대장의 목을 베어버렸다.
 툭, 데구루루.
 흑의인 대장의 목이 허무하게 잘려 바닥에 뒹굴었다. 설마 이렇게 바로 자신의 목을 벨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스윽.
 준은 마력을 끌어올려 죽어 있는 흑의인들의 시신을 한곳으로 끌어 모아 공중으로 들어올린 뒤 고열의 화염계 마법을 일으켰다.
 화르르르.
 파란색 불길이 치솟으며 흑의인들의 시신에 불이 붙었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재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져 버렸다.
 흑의인들의 시신이 모두 불타 소멸되자 그제야 준은 화염계 마법을 거두었다.
 준이 흑의인들의 시신을 이렇게 소멸시켜 버린 것은 자경대원들이라도 몰려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예 증거를 없애버린 것이다.
 루시아가 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놈들의 정체가 뭘까요?”
 “글쎄다. 아직은 아는 것이 없지만 놈들이 실패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공격해올 것만 같구나.”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으음, 앞으로는 더욱 경비에 신경을 써야겠구나.”
 “어쨌든 스승님이 준비해놓으신 가디언들 때문에 위기를 잘 넘긴 것 같아요.”
 “그래. 루시아, 너도 보았겠지만 마법사는 언제나 준비하는 자라는 걸 명심하거라.”
 “예, 스승님.”
 “루시아,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예, 가요, 스승님.”
 준은 루시아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노튼 일행은 전망대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카든이 노튼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대장, 놈들의 정체가 뭘까요?”
 “글쎄? 정체를 숨기려고 흑의에 복면을 한 자들이니 낸들 알 수가 있나?”
 “아무튼 저 프리맨이라는 자,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가진 건 분명하네요.”
 “맞아, 대단한 자였어. 죽은 흑의인들을 한꺼번에 끌어 모아 불태워 소멸시키는 것 봤지?”
 “대장, 검술 실력도 대단하지만 마법도 그에 못지않았어요.”
 “으음, 알면 알수록 더 무서운 자야.”
 “그건 그렇고 대장, 우리 언제까지 이곳에서 프리맨이라는 자를 감시만 할 거예요?”
 “급할 것 없잖아? 한 달 정도는 더 지켜보고 움직이자고.”
 “한 달이나 더요?”
 “그래. 뭐든 나름대로 분석해보고 움직이는 게 좋아.”
 “알았어요, 대장.”
 “자, 우리도 그만 집 안으로 들어가자.”
 “예, 대장.”
 노튼 일행은 조심스럽게 전망대에서 내려와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쾅!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 렉스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앞에 서 있는 자를 쏘아보았다.
 갈색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눌러쓴 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십 명이나 보냈는데 실패했다고?”
 “으음, 죄송합니다.”
 “믿을 수 없군.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다크 어쌔신 길드가 그래, 굴러들어온 놈 하나를 처리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니 말이야.”
 “놈의 집을 습격했는데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길드에서 책임지고 이번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십 명으로도 실패했는데 가능하겠어?”
 “으음, 이번에는 어쌔신 백 명을 동원해서라도 처리하겠습니다. 또한 이번 의뢰비는 더 이상 청구하지 않고 저희가 책임지고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자네 생각인가, 아님 다크 어쌔신 길드장의 생각인가?”
 “길드장님의 생각이십니다.”
 “좋아, 그럼 길드장과 자네를 믿고 기다려 볼 테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프리맨이라는 자를 제거해야 할 거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자 때문에 술이 적게 팔리고 있어 상단의 매출이 엄청나게 손해를 보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그자를 제거해야 할 거야.”
 “예, 이번에는 확실하게 그자를 제거하겠습니다.”
 “좋아, 그만 나가보게.”
 “예, 그럼.”
 스윽.
 갈색 로브를 입은 자는 렉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혼자 남은 렉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흐음, 새로운 물건을 개발해 돈을 엄청나게 끌어 모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어쌔신들을 처리할 만큼의 무력도 가지고 있었나? 아님 프리맨이라는 자를 호위하는 자들이 있는 건가?”
 렉스는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진 렉스 상단을 소유한 상단주로 이곳에서 생산한 와인이나 곡물, 기타 몬스터의 가죽이나 부산물을 구입해 그걸 다른 곳에 파는 일종의 중계무역상이었다.
 바이잔 빅 시티나 데르마 빅 시티에 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거래를 하고, 1년에 한 번씩은 장거리 거래로 노스 왕국 남부 지역의 대영주 퀸즈 백작령의 대도시 골드스트에 철광석 거래도 했다.
 철광석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기에 높은 값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
 스윽, 슥슥.
 준은 집의 지하 공동에 마련된 연구실에서 한창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준의 제자 루시아는 스승인 준이 3일 동안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지하 공동에 마련된 연구실을 찾았다.
 삐삐삐!
 연구실 철문에 알람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경고음이 일어났다.
 “누구냐?”
 “스승님, 루시아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스승님이 걱정되어 왔습니다.”
 “난 괜찮다.”
 “연구실에서 언제 나오실 겁니까?”
 “지금은 바빠서 안 되고 저녁때는 나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스승님께서 좋아하시는 요리들로 준비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집이나 상점엔 별일 없느냐?”
 “예, 이상 없습니다.”
 “며칠 전 어쌔신이 쳐들어온 것을 보니 너도 신변에 대해 언제나 긴장하면서 신경 써야 할 것 같구나.”
 “예, 스승님.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만 물러가 있거라.”
 “예, 스승님.”
 루시아가 뒤돌아 계단을 올라가자 준은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준이 며칠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은 마법의 무기 언월도였다. 길이가 3미터에 이르고, 긴 손잡이에 폭이 넓고 긴 초승달 모양의 칼날을 부착한 무기였다.
 무게가 무려 1백 킬로그램이나 나가기에 보통 사람은 들기조차 버거운 것이었지만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 고작 3킬로그램 정도밖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사 1백 킬로그램의 무게라도 마나를 사용하는 준이었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준이 만든 언월도는 보통의 언월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강철 손잡이의 속도 비어 있는 게 아니라 통째로 쇠를 녹여 만든 것이라 무게가 많이 나가는 만큼 강도가 높았다.
 더구나 강화 마법까지 걸어둔 데다 미스릴을 녹여서 겉을 코팅했기에 몇 배나 강도가 더 높아지고 각종 마법을 새겨 넣기도 좋았다.
 10가지의 공격 마법이 새겨져 있으며, 던지더라도 회수되도록 해두었다.
 준의 언월도가 더욱 특별한 것은 마법의 시동어를 외치면 길이가 10배로 늘어난다는 점 때문이다. 3미터나 되고 무게도 많이 나가는 언월도를 평소에 가지고 다니기엔 불편하기에 그것을 마법으로 해결해버린 것이다.
 간단했다. 마법으로 형태를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대마법사급이 아니고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준은 마법의 언월도를 평소에는 손가락에 끼고 있다 언제든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반지로 만들었다. 그것은 밋밋한 은색의 강철 반지로 보였지만 안에는 각종 도형과 마법의 룬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반지에 새겨진 마법은 보통 때에는 보이지 않고 마나를 불어넣어야 비로소 확인이 가능했다.
 마법의 언월도를 세심하게 살펴본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이제야 완성되었구나.”
 후우웅!
 준은 언월도의 손잡이를 잡고 마음껏 휘둘러 창술을 시전해보았다.
 휘리릭, 파팟!
 언월도가 현란하게 춤추는 듯했다.
 20분 정도 마음껏 언월도를 휘둘러본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들었지만 멋지군. 변해라.”
 츠츠츠츠.
 준이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언월도가 순간 크기가 줄어들더니 액체 형태로 변했다. 동시에 스르르 손등을 타고 움직이더니 준의 새끼손가락에 자동으로 끼워지며 반지로 변했다.
 스윽.
 손을 들어 반지를 잠시 살펴본 준은 다시 손을 내렸다.
 지난 3일 동안 그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만든 건 언월도만이 아니었다. 마차 5대 분량의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는 마법 주머니도 1백 개나 만들었다.
 경량화 마법에 찢어지지 않도록 강화 마법을 추가로 걸어두었기에 아주 좋은 품질의 마법 아티팩트였다.
 마법 주머니 1백 개는 모두 아공간 속에 넣어두었다.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 사용할 것이었다.
 “자, 이제 나가서 맛있는 식사나 해볼까.”
 준은 뒤돌아 연구실 밖으로 걸어 나가려다 멈추었다. 지난 3일간 씻지를 않아서 냄새가 지독했다.
 “으음, 먼저 씻고 나서 먹어야겠군.”
 스윽.
 준은 허리에 매어놓았던 마법 주머니 속에서 게르를 꺼내어 살짝 던졌다.
 촤라라락!
 경쾌한 소리가 일어나며 몽고식 천막이 순간 설치되었다.
 저벅저벅.
 준은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게르 속으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은 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깨끗하게 씻고 수염까지 다듬은 준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니 그제야 잘생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자, 이제 깨끗하게 씻었으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지.”
 게르 밖으로 걸어 나온 준은 마력을 일으켜 게르를 회수해 마법 주머니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연구실을 걸어 나가 지상으로 올라갔다.
 테이블에는 맛있는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 요리들을 바라본 준은 흐뭇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모처럼 스승과의 저녁 식사라 자신이 직접 주방 식솔들에게 특별 지시를 해 이렇게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루시아, 너도 옆에 앉아서 같이 먹자꾸나.”
 “예, 스승님.”
 준은 야채수프부터 먹은 뒤에 스테이크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요리는 정성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인지 아주 맛있었다.
 루시아도 준과 같이 식사를 하니 기분이 좋았기에 요리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루시아, 식사한 후 나와 같이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 가서 노예들을 구입하자.”
 “스승님, 지금도 노예들이 많은 편인데 노예들을 더 구입해 어디에 쓰실 거예요?”
 “이번에 어쌔신들이 공격해온 것을 보니 앞으로는 집 안의 경비에 더 신경을 써야겠더구나.”
 “그럼 노예들로 하여금 집 경비를 서게 하시려고요?”
 “그래. 그렇다고 반항적인 전투 노예들을 구입한다는 건 아니다. 내가 직접 노예들을 가르칠 테니 말이다.”
 “알겠어요, 스승님.”
 “빈스 집사.”
 “예, 프리맨 님.”
 “오늘 식사 아주 맛있었어요. 식사 후 노예시장으로 갈 것이니 스톰과 루시아가 타고 갈 말을 준비해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루시아는 준이 가르쳐 준 스네이크 검술과 마법을 연습하느라 체력 소모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보통 때 먹는 것보다 2배가량 더 많이 먹는데도 불구하고 살은 전혀 찌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도자기로 만든 다기 세트를 꺼내었다. 그리고 화염계 마법진이 새겨진 금속판 위에 금속 물주전자를 올려놓자 물이 금방 팔팔 끓어올랐다.
 스윽.
 준은 직접 금속 물주전자를 들어 다기 주전자에 물을 부은 뒤 그 속에 찻잎을 넣고 찻물이 우러나자 찻잔에 부었다.
 주우욱.
 “루시아, 마셔 보거라.”
 “예, 스승님.”
 엘프 마을에 살았을 때도 다도는 접해보지 못했던 루시아는 준을 스승으로 모신 후부터는 이렇게 종종 같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루시아는 이제 제법 차 맛도 음미할 줄 알게 되었고, 다도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현자처럼 모르는 게 없으셔. 그러나 현자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야. 마법과 검술에까지 능하시니 말이야.’
 준은 차를 마신 후 다기 세트를 다시 마법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 이제 노예 상단으로 가보자꾸나.”
 “예, 스승님.”
 준이 앞장서고 그 뒤를 루시아가 뒤따랐다.
 이히히힝, 푸르르!
 스톰이 울음을 내지르며 좋아했다.
 스윽, 슥슥.
 준은 스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톰, 오랜만이구나.”
 이히힝!
 “그래, 모처럼 한번 달려 보자.”
 준이 스톰의 안장에 오른 후 서서히 출발하자 루시아도 말을 타고 뒤따랐다.
 다가닥다가닥!
 준과 루시아는 나란히 대문을 나서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준의 집 옆에 살고 있는 노튼 일행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마당에 횃불을 피운 채 한창 검술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그것을 준과 루시아가 쳐다보며 천천히 지나쳐 가자 그들도 자연히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았다.
 “······.”
 “······.”
 준은 노튼 일행을 쳐다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지나쳐 갔고, 노튼 일행도 준과 루시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검술 연습을 했다.
 준과 루시아가 그렇게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들도 준과 루시아를 여러 번 보았기에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준과 루시아는 경비병들에게 말고삐를 내밀었다.
 스윽.
 경비병들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무시했겠지만 준과 루시아가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의 큰 고객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눈치껏 즉시 말고삐를 받아들었다.
 “우리가 나올 동안 말들을 잘 보살펴 주게. 이건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씩들 하고.”
 준이 내민 1실버에 경비병들은 황송하다는 듯 연방 고개를 숙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상단의 셋째 아들인 헬싱이 소파에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헬싱, 그동안 잘 지냈소?”
 “예, 프리맨 님.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노예들을 대량으로 구입하려고 하는데 말이오.”
 “대량이라면 얼마나?”
 “삼백 명 정도 구입할 것인데, 가능하겠소?”
 “헛? 프리맨 님, 어떤 노예들을 원하십니까?”
 “열일곱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의 남자 노예들로 사지가 멀쩡한 자들을 원하오.”
 “그런 노예들이라면 하급부터 있는데 일단 구경부터 하시죠.”
 “그럽시다.”
 헬싱의 뒤를 따라 준과 루시아는 지하로 내려갔다.
 준은 쇠창살 안에 앉아 있는 노예들 중 10대 후반의 남자 노예들부터 찬찬히 살펴보고는 노예들을 선택했다.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무난하게 3백 명의 남자 노예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1층 사무실로 돌아와 흥정에 들어갔다.
 “프리맨 님,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하급의 남자 노예들은 한 마리당 삼 골드인데 이백 마리를 구입하셨으니 육백 골드입니다. 하지만 단골이시니 오백오십 골드에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중급의 남자 노예들은 얼마요?”
 “중급은 한 마리당 오 골드이니 오백 골드이지만 사백오십 골드 해서 천 골드에 모두 드리겠습니다.”
 “좋소. 그럼 대금을 줄 테니 내일 오전에 집으로 보내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스윽.
 준이 마법 주머니 속에서 1천 골드가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꺼내어 내밀자 여직원 발비아가 즉시 돈을 받아 확인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맨 님, 내일 오전에 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헬싱, 부탁하겠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도 노예가 필요하시면 꼭 방문해주십시오.”
 “그러겠소. 아 참! 혹시 드워프 노예는 없소?”
 “드워프 노예요?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얼마가 되든 전부 살 테니 알아봐주시오.”
 “예, 지금은 드워프 노예가 없지만 필요하시다니 제가 빨리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하겠소. 그럼 이만.”
 스윽.
 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루시아를 데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헬싱은 이번에도 짭짤한 수익이 예상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흐음, 드워프 노예를 원한다고 했으니 빨리 알아봐야겠군.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보았어. 앞으로도 우리 상단에 큰 고객이 될 자야.”
 “총독님을 제외하고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프리맨 님이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아요.”
 “맞아. 몇 개의 상점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많다고 하더라고.”
 1천 골드의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쓸 정도의 재력이 풍부한 준이었기에 헬싱은 흥분되었다. 준이 고카라스 빅 시티에 여러 개의 상점을 열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발비아,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마.”
 “······.”
 “프리맨 아이스크림 상점에 들러서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먹고 드레스도 한 벌 사줄게.”
 “정말이에요?”
 “그럼, 오늘은 돈이 많이 들어왔잖아.”
 “좋아요. 알았어요.”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서 3백 명의 노예들을 구입한 준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뒤를 미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검은 옷에 위장을 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준의 뛰어난 이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후후후,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루시아, 나에게로 가까이 오너라.”
 “예, 스승님.”
 루시아가 준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어쌔신으로 보이는 자들이 삼십 명 정도 우리를 미행하는구나.”
 “예?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다. 조금 더 가면 으슥한 곳이 나오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우리를 노릴 것 같구나.”
 “흥, 감히 스승님을 노리다니 제가 이번에는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루시아, 오늘이 첫 실전이 될 테니 정신 차려야 한다.”
 “예, 스승님. 걱정 마세요.”
 갈색 로브 차림의 루시아는 허리에는 롱 소드를 매고, 손에는 준이 만들어준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5서클 유저인 그녀였지만 매일같이 마법 연습을 했기에 이젠 많이 익숙해져서 마스터에 가까웠고, 롱 소드로는 매일같이 스네이크 검술을 연습해 검술 실력도 상당했다. 또 롱 소드에 검기도 불어넣을 수 있어 소드익스퍼트 초급의 기사 실력과 맞먹을 정도였다.
 어쌔신이 아무리 암습에 능하다고 해도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어쌔신들은 준과 루시아가 이미 자신들의 미행을 눈치 채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으슥한 곳에 도착하자 어쌔신들이 일제히 준과 루시아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먼저 어쌔신 4명이 석궁을 발사했다.
 쉐에에엑!
 파공음을 일으키며 4발의 쿼럴이 준과 루시아에게 날아왔다.
 “흥! 실드.”
 루시아는 즉시 보호막을 펼쳤다.
 티팅!
 2발의 쿼럴이 보호막에 가로막혀 튕겨졌다.
 준 역시 보호막을 펼쳐 쿼럴 2발을 튕겨 버렸다.
 “체인 라이트닝.”
 파지직!
 루시아가 전격계 마법을 펼치자 마법 지팡이에서 푸르스름한 번개가 내뻗어져 나와 어쌔신 2명을 격중시켰다.
 “으아악!”
 “커억!”
 2명의 어쌔신이 부르르 몸을 떨다가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어쌔신 대장 넥스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젠장, 일제히 공격해!”
 길 양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어쌔신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준과 루시아를 공격했다.
 넥스는 2명을 상대로 30명의 어쌔신들이 동원되었기에 비록 기습이 들키긴 했지만 그래도 무난히 그들을 죽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매직 애로우.”
 루시아의 외침에 공중에 빛의 화살촉이 10발이나 생성되어 둥둥 떠 있었다.
 스윽!
 루시아의 손짓에 10발의 마법 화살이 발사되었다.
 쉐에에엑!
 어쌔신들은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오는 마법 화살을 피하려 했지만 그것에 유도 기능이 있어 피하기엔 무리였다.
 퍼퍼퍼퍽!
 “으악!”
 “커억!”
 “크아아악!”
 10명의 어쌔신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우수수 쓰러지자 넥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사다! 저년을 먼저 죽여라!”
 어쌔신들은 넥스의 말에 루시아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투투퉁!
 6발의 쿼럴이 발사되어 루시아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런 공격에 당할 그녀가 아니었다.
 “흥, 내가 이런 공격에 당할 것 같으냐? 에어 실드.”
 츠츠츠.
 압축된 공기로 전방에 마법의 사각 방패가 형성되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사각 방패는 공기의 방패였지만 보호막보다 훨씬 방어력이 우수했다.
 티티티팅!
 공기의 방패에 가로막힌 쿼럴은 튕겨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한편, 자신에게도 어쌔신들이 달려들자 준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후후후, 그토록 죽고 싶어 하니 죽여주지.”
 스윽.
 준이 양손을 앞으로 내뻗어 부러뜨리는 장면을 연출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우두둑!
 “크악!”
 “아아악!”
 준을 향해 달려들던 어쌔신들이 갑자기 목뼈가 부러지며 쓰러졌다.
 여섯 어쌔신이 목뼈가 부러져 죽자 어쌔신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쳤다.
 “아까의 용기는 다 어디로 갔느냐? 덤벼 보아라.”
 “이익!”
 화가 치민 어쌔신 2명이 준에게 다가가며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나 준이 한발 먼저 허리에 매어놓았던 롱 소드를 뽑아들고 휘둘렀다.
 슈각, 피핏!
 “커억!”
 “아아악!”
 2명의 어쌔신은 분수 같은 피를 내뿜으며 고꾸라졌다.
 어느새 30명이나 되던 어쌔신들 중 겨우 3명만이 살아남았다. 그에 어쌔신 대장 넥스는 너무 놀라 경악했다.
 스르릉.
 루시아는 허리에 매어놓았던 롱 소드를 뽑아들고 말 위에서 도약해 공중제비를 펼치더니 어쌔신들을 공격했다.
 채채챙, 파팟!
 루시아의 검술은 스테이크 검술로 아주 현란했다.
 슈가각!
 “크아악!”
 어쌔신 한 명이 가슴에서부터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크게 베이며 쓰러졌다.
 어쌔신 대장 넥스는 준보다는 그래도 루시아가 조금 약해 보이자 살아남은 대원 한 명과 협공해 루시아를 공격했다.
 채채챙, 파팟!
 루시아는 어쌔신 2명과 싸우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준은 롱 소드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은 채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했다.
 어쌔신이 휘두르는 검을 롱 소드의 검면으로 살짝 막으면서 흘려보낸 루시아는 동시에 사선으로 롱 소드를 휘둘렀다.
 슈가각!
 “으아악!”
 어쌔신의 목이 루시아의 롱 소드에 베이며 허무하게 떨어졌다.
 넥스는 그제야 루시아의 검술 실력이 기사급에 버금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으으, 이렇게 강하다니. 젠장.”
 넥스는 그제야 검술로서도 루시아를 이기기 힘들다는 걸 알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공격했다.
 휘리리릭, 파팟!
 넥스는 루시아가 휘두르는 스네이크 검술에 정신없이 막기 바빴다. 연방 뒤로 물러나면서 위태롭게 방어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슈각!
 “우욱!”
 옆구리가 베인 넥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순간 주춤하자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루시아가 재차 공격했다.
 푸욱!
 “커어억! 내,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넥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배에는 루시아의 롱 소드가 절반 정도 박혀 있었다.
 아직은 배에 롱 소드가 박혀 있어 출혈이 적었지만 그것을 뽑게 되면 분수 같은 피가 흘러나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죽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허무해서일까? 넥스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흥, 실력도 떨어지는 주제에 감히 위대하신 스승님을 노린 대가라 생각하거라.”
 “······.”
 주우욱.
 루시아는 넥스의 배에서 롱 소드를 뽑아버렸다.
 콸콸콸!
 엄청난 피가 넥스의 배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비틀거리던 넥스가 루시아를 노려보더니 쓰러졌다.
 루시아는 오늘 첫 살인을 했기에 살인의 공포에 몸을 잘게 떨었지만 어느새 준이 다가와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팔을 올려놓았다.
 “루시아, 처음이라 그렇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걱정 말거라.”
 “예, 스승님.”
 “오늘 어쌔신들을 상대로 대응하는 걸 보니 참 훌륭하더구나.”
 “정말요?”
 “그래.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 걱정 말거라.”
 “예, 스승님.”
 스윽!
 준이 마력을 일으켜 쓰러져 있는 30명의 어쌔신들을 공중으로 떠올려 한곳으로 뭉친 후 화염계 마법을 일으켰다.
 화르르르.
 어쌔신들은 순간 고열의 불길에 휩싸였다.
 푸스스스!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쌔신들의 시신이 모두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준의 엄청난 마법 실력에 루시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난 언제쯤에나 스승님처럼 될 수 있을까?’
 준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루시아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루시아, 그만 가도록 하자.”
 “예? 예, 스승님.”
 준과 루시아가 말 머리를 돌려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스윽.
 그 순간 갈색 로브를 입은 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바로 렉스 상단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다크 어쌔신 길드의 특급 어쌔신 필립이었다.
 “으음, 비록 B급의 어쌔신들이었지만 무려 삼십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을 두 명이서 전부 죽이다니 대단하구나. 하지만 다크 어쌔신 길드가 나선 이상 너희는 죽는다. 크크크.”
 스스스스.
 필립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지평선 끝에 해가 떠올라 대지를 밝게 내리비췄다.
 저벅저벅.
 상쾌한 아침 공기에 준은 모처럼 정자로 걸어 나왔다.
 쉬이잇, 파팟!
 루시아는 2시간 전에 일어나 정원에서 한창 스네이크 검술을 수련 중이었다.
 어젯밤 어쌔신과의 싸움에서 첫 살인을 했기에 살인의 공포가 있던 그녀였지만 준의 영향으로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만약 어쌔신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윽.
 마법 주머니 속에서 다기 세트를 꺼내어 차를 마실 준비를 한 준은 팔팔 끓어오른 물에 말린 찻잎을 넣고 차를 우려내었다.
 쪼르륵.
 도자기 찻잔에 차를 따른 준이 천천히 음미하면서 차를 마시고 있자 루시아가 잠시 검술 연습을 멈추고 정자로 걸어왔다.
 “스승님, 나오셨어요?”
 “그래. 루시아, 스네이크 검술은 이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너도 올라와서 차를 마시거라.”
 “예, 스승님.”
 준은 루시아에게 직접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루시아는 양손으로 찻잔을 잡고 천천히 향을 음미하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대문을 밀고 5명이 들어왔다. 바로 이웃인 노튼 일행이었다.
 “스승님, 저들이 무슨 일로 왔을까요?”
 “글쎄다. 곧 알게 되겠지.”
 그들은 정자의 10미터 앞에까지 다가와 멈추었는데, 노튼 대장이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오?”
 “프리맨 씨,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 나에게 말이오?”
 “그렇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봅시다. 말해보시오.”
 “저희에게 검술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검술이라니, 무슨 검술을 말이오?”
 “레이디께서 매일같이 연습하는 그 검술 말입니다.”
 “아니, 그럼 검술을 매일 훔쳐보았다는 말이오?”
 “그, 그렇습니다.”
 “으음, 남의 검술을 함부로 훔쳐 배우다니,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오?”
 “죄송합니다. 너무나 현란하고 높은 수준의 검술이라 잘못인 줄 알면서도 훔쳐보았습니다만 흉내만 낼 뿐 도무지 익히기가 어려워 이렇게 배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엔 일행 중에 마법사도 있는 것 같은데 그도 검술을 배우려는 것이오?”
 “아, 아닙니다.”
 마법사 매하슈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삼 서클 마스터인 것 같은데 나에게 뭘 더 배우려는 것이오?”
 “제가 판단하기에 프리맨 님은 육 서클은 되시는 것 같습니다. 제자가 될 테니 마법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하하하, 나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혹시 당신들도 나의 제자가 되려는 것이오?”
 노튼은 잠시 동료들을 힐끔거리더니 말했다.
 “으음, 검술만 배울 수 있다면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려는 열의를 보니 어떤 마음인지 알겠소. 하지만 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가 이루어져야 하오.”
 “그,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되는 주인의 의식이오.”
 “주인의 의식이라니, 그게 뭡니까? 혹시 신에게 맹세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오. 주인의 의식이란 나와 마법적으로 맹약을 맺는 것이오. 그럼 어떠한 경우라도 나를 배신하지 못하게 되오.”
 “우리를 그렇게까지 믿지 못하는 겁니까?”
 “난 믿소. 하지만 어떠한 상황이 배신을 만들 뿐이라오.”
 “으음, 좋습니다. 나 노튼은 주인의 의식을 치르고 제자가 되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도요, 나도.”
 노튼 일행은 전부 준의 말대로 주인의 의식을 치러서라도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준이 말했다.
 “주인의 의식은 조금이라도 방해를 받으면 안 되니 나의 집 지하로 가서 치르겠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시아, 같이 가자꾸나. 너의 사제들이 생기는 날이니 너도 지켜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예, 스승님.”
 저벅저벅.
 노튼 일행은 준과 루시아의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천장에 달린 마법등이 환하게 실내를 밝히고 있어 돌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윽고 지하 연구실의 대문이 나타났다.
 그그그긍!
 준의 마력에 간단하게 철대문이 스르르 위로 올라가버렸다.
 지하 공동의 연구실 천장은 제법 높았지만 역시나 마법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공동은 아주 넓었으며, 한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준의 옆에는 루시아가 서고, 맞은편에는 노튼 일행이 섰다.
 준은 노튼 일행의 얼굴을 한 명씩 살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의 제자가 되기 싫은 사람은 밖으로 나가라.”
 “······.”
 역시나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오늘 주인의 의식을 거치게 되면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나갈 사람은 나가라.”
 “······.”
 “없는 걸 보니 지금부터 주인의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모두들 무릎을 꿇고 앉아라.”
 노튼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앉았고 뒤따라서 카이, 카든 형제가, 그 뒤로 마법사 매하슈와 메라가 무릎을 꿇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이한 주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주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문 속에서 언령의 힘이 느껴졌다.
 거침없이 중얼거리던 준의 주문은 1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마나여, 나의 의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인의 인장.”
 츠츠츠츠!
 황금빛 원에 기이한 도형과 마법의 룬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마법진이 공중에 생성되더니 노튼에게 날아가 이마에 스며들었다.
 번쩍!
 노튼의 몸에서 순간 황금빛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마법진이 다시 노튼의 이마에서 튀어나오더니 준의 치켜든 오른손 바닥에 흡수되었다.
 스윽.
 이번에는 준의 오른손 바닥에서 그 마법진이 튀어나와 3서클 마법사 매하슈의 이마에 흡수되었다.
 역시 매하슈의 몸에서도 순간 황금빛이 일어났다 사라졌고, 그의 이마에서 황금색 마법진이 튀어나와 준의 오른손 바닥에 흡수되었다.
 다음은 카이였고, 그 뒤는 여자 용병인 메라였다.
 카든이 가장 마지막으로 주인의 인장을 몸에 새겼다.
 그런데 놀라운 건 겉으로는 전혀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쨌든 준이 펼친 주인의 의식으로 이들의 몸에 주인의 인장이 새겨졌기에 죽기 전에는 절대 거역하거나 배신할 수 없게 되었다.
 “자, 이로써 너희는 나의 제자가 되었다. 나의 첫째 제자는 여기 있는 루시아다. 다음이 노튼이고, 그다음이 매하슈, 그리고 카이, 메라, 카든 순이다.”
 “예, 알겠습니다.”
 “이제 노튼부터 카든까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을 말해보거라.”
 “예, 스승님.”
 노튼이 자신의 출생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매하슈, 카이, 메라, 카든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모두들 고카라스 빅 시티의 남성에서 태어나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살았고, 검술을 수련해 용병이 되었다. 다만, 매하슈는 마법사 밑에서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이번에는 루시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사제들에게 해주었다. 역시나 노튼 일행의 예상대로 루시아는 하프 엘프였다.
 그녀는 엘프 마을에서 살다가 오크의 침입으로 도망쳤고, 그 후 노예 상단에 팔려 가게 된 것까지 전부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준이 말할 차례가 되자 그는 간단하게 얘기했다.
 “난 육 서클 마스터의 마법사이며 동시에 소드마스터다.”
 “허억, 스승님께서 소드마스터라고요?”
 노튼과 사제들은 눈이 커질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루시아는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 루시아가 배우고 있는 검술은 스네이크 검술이라고 한다. 이것 말고도 대지의 검술과 번개의 검술이 있다.”
 “으음, 스승님, 스네이크 검술만 해도 상승의 검술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 노튼. 이 세 가지 검술 중 한 가지만 제대로 익혀도 소드마스터에 오를 수 있다.”
 “허억,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이 세 가지 검술은 이곳 뮤란 대륙의 검술이 아니라 저 마케리안 대륙의 삼대 검술이니 말이다.”
 “스승님, 정말 마케리안 대륙의 검술입니까?”
 “분명한 사실이니 믿어라.”
 “뮤란 대륙과 마케리안 대륙은 대해양이 가로막고 있기에 절대 건너갈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이곳 뮤란 대륙인이 아니라 마케리안 대륙에서 살다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
 “내일부터 매하슈를 제외한 모두는 루시아에게서 검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당분간 매하슈는 나에게서 마법을 배운다.”
 “예, 스승님.”
 “좋아, 오늘은 그냥 통나무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 짐을 가지고 이곳으로 와라.”
 “예, 알겠습니다.”
 “아침 식사 시간이 넘었지만 아침 겸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할 테니 루시아와 제자들은 나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예, 스승님.”
 그그그긍!
 준의 마력에 철대문이 스르르 위로 올라가자 그들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제7장 노스 왕국의 어쌔신 길드 검은별
 
 
 노튼 일행은 준을 스승으로 삼고 첫 식사를 하게 되었다.
 테이블에는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귀족들의 식탁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입을 쩌억 벌린 노튼이 준에게 물었다.
 “스승님, 매일 이렇게 먹습니까?”
 “그렇다, 노튼. 앞으로는 아침, 점심, 저녁을 푸짐하게 먹을 것이고, 오후와 밤에는 이것보다 약간 적게 차려진 간식을 먹게 될 것이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 대신 검술 수련이나 마법 수련이 좀 힘들 것이다. 단시간에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어쩔 수 없다.”
 “아, 알겠습니다.”
 “자, 그럼 식사하자.”
 준이 먼저 요리를 먹기 시작하자 루시아도 스테이크를 썰어 먹었다.
 노튼은 잠시 그런 준과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접시에 놓인 요리를 덜어 먹기 시작했다.
 쩝쩝, 와사삭.
 요리들이 아주 맛있었기에 허겁지겁 먹는 약간 요란한 식사였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아가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약간 휴식을 취한 뒤 루시아는 정원으로 나가 사제들에게 스네이크 검술의 기본부터 가르쳤다.
 마법사 매하슈는 준을 따라 다시 지하 연구실로 내려갔다.
 준이 매하슈를 보며 말했다.
 “오늘 나의 제자가 된 기념으로 마나 고리를 하나 만들어줄 테니 앉아라.”
 “예, 스승님.”
 마법사 매하슈가 엉성하게 앉은 모습을 본 준은 직접 가부좌를 틀고 앉는 모습을 가르쳐 주었다.
 매하슈에게 가부좌는 어색하고 쉽지 않은 동작이었다.
 “처음에는 가부좌가 어색하고 힘들겠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더없이 편하단 걸 알게 될 것이다.”
 “예, 스승님.”
 “이제 내가 너에게 마력을 불어넣어줄 테니 참고 견뎌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할 테니 정신을 집중하라.”
 스윽.
 준은 매하슈의 등에 손바닥을 붙이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에 엄청난 마력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매하슈는 깜짝 놀랐다.
 준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매하슈의 몸속에 불어넣어준 마력을 심장 부근으로 인도했다.
 츠츠츠츠.
 매하슈의 마나 고리 3개가 휘돌고 있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황금빛이 일어나 선을 그으며 휘돌기 시작했다.
 우우웅!
 공명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황금색 선이 점점 굵어지면서 빛이 환하게 일어났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이었지만 몸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았다.
 츠파파팟!
 마나 고리가 생성되었다.
 매하슈는 마나 고리가 형성되는 쾌감에 멍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영원할 것 같던 행복한 느낌이 사라지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눈을 뜬 매하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준과 눈이 마주쳤다.
 “스, 스승님.”
 “축하한다. 마나 고리가 이제 네 개가 되었으니 사 서클에 올랐다.”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당분간은 적응 시간을 거쳐야 하고, 그런 뒤 사 서클 마법도 나에게서 배우게 될 것이다. 참고로 루시아는 오 서클 유저이지만 곧 마스터에 오를 것이다.”
 “예, 스승님.”
 “마법을 펼쳐 보면 알게 되겠지만 삼 서클일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날 것이다.”
 “예, 그건 저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삼 서클과 사 서클은 약 다섯 배 정도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예? 다섯 배나 차이가 납니까?”
 “그렇다. 당분간은 그것에 익숙해져야 하니 삼 일 정도는 무리하지 말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에 마법을 시전하거라.”
 “예, 스승님.”
 “당분간은 모든 게 불안정할 테니 조심하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스윽.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이번에 만든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 주머니와 마법서를 한 권 꺼내었다.
 “매하슈, 이것을 받거라.”
 “스승님, 이건 마법서가 아닙니까?”
 “그렇다. 사 서클 마법서다. 당분간은 그것을 읽으며 외우도록 해라. 그리고 이건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 주머니로 마차 다섯 대 분량의 물건을 넣을 수 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정말 감사합니다.”
 “일 년 안에 너를 오 서클에 올려 주겠다. 그러니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그럼 밖으로 나갈 테니 따라와라.”
 “예, 스승님.”
 매하슈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준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갔다.
 휘휘휙, 파팟!
 노튼과 카이, 카든 형제, 메라는 루시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네이크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매하슈, 보았느냐?”
 “예, 스승님.”
 “너는 비록 마법사이지만 너 역시 체술과 근력 운동은 해야 한다.”
 “스, 스승님······.”
 “마법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체술도 익혀야 위급할 때 써먹을 수 있다. 또한 평소에 충분히 근력 운동을 해야만 지구력이 높아진다. 사형제들처럼은 아니겠지만 스네이크 검술도 어느 정도까지는 익혀야 한다.”
 “스승님, 저는 마법사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만약에 몬스터나 적들과 싸우다 마법을 한꺼번에 여러 번이나 펼쳐 마나가 고갈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럼 넌 적들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
 “······.”
 “그때 필요한 것이 체술과 검술, 육체적인 힘이 아니겠느냐?”
 “그,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형제들처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익혀야 하는 것이다. 대사제인 루시아를 보거라. 그녀는 오 서클의 마법사이면서 검술까지 익히지 않느냐?”
 “스승님, 대사제는 검술 실력이 얼마나 됩니까?”
 “소드익스퍼트 중급이다. 스네이크 검술도 하루가 다르게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소드익스퍼트 중급이라고요?”
 “왜, 믿어지지 않느냐?”
 “오 서클 마법사에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검술 실력이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너도 앞으로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스승님, 정말 저도 그렇게 될까요?”
 “그렇다. 매일 연습하면 된다.”
 “그럼 저도 검술 연습을 하겠습니다.”
 “일단 삼 일간 휴식을 취한 후에 하거라. 루시아에게는 내가 일러두겠다.”
 “예, 스승님.”
 “앞으로 너도 나를 따라서 차를 마시거라.”
 “차를 말입니까?”
 “그렇다. 차를 매일 마시게 되면 머릿속이 맑아져 마나 수련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정신이 맑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실력 차이가 점점 벌어지기 때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고개를 끄덕인 준이 정자로 향하자 매하슈도 뒤따라가서 정자에 앉았다.
 주우욱!
 차를 끓인 준은 매하슈의 잔에 그것을 따라주었다.
 “마셔 보거라.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예, 스승님.”
 매하슈는 차를 마셔 보았다. 처음에는 차 맛을 모르니 그냥 풀 맛만 나는 것 같았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시니 뒷맛이 묘하게 느껴졌다.
 ‘으음, 못 먹을 정도는 아니군. 당분간 매일 마시게 되면 곧 익숙해지겠어.’
 노튼을 비롯해 카이, 카든 형제, 메라는 땀을 많이 흘리면서 스네이크 검술 동작 한 가지씩을 무려 5백 번이나 반복적으로 휘두르며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루시아, 모두들 그만 하고 이리로 오너라.”
 “예, 스승님.”
 모두들 정자로 걸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땀을 많이 흘린 것 같으니 내 특별히 시원한 음료를 만들어주마.”
 스윽.
 준은 마법 주머니 속에서 투명한 유리컵과 과일을 꺼내었다.
 두둥실.
 준의 마력으로 과일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절반으로 두 동강났다.
 손을 움켜쥐자 준의 마력에 의해 과일이 이지러지며 주르륵 유리컵 속으로 즙이 떨어져 잔에 채워졌다.
 거기에 벌꿀을 첨가해 휘저은 준은 이번에는 공기 중에 분포되어 있는 수분을 빙계 마력으로 순간 얼려 얼음으로 만들었다.
 후드득.
 공중에 떠 있던 얼음 알갱이가 유리컵으로 떨어지자 그것을 휘휘 저은 준이 앞으로 내밀었다.
 “시원한 과즙 음료이니 마셔 보거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모두들 준의 마법 실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유리컵을 들어 마셨다.
 주우욱!
 시원하면서 달콤한 게 정말 맛있었다.
 “캬아, 정말 시원하고 달콤한 게 너무 맛있습니다.”
 “이런 건 처음 먹어봅니다, 스승님.”
 “모두들 매하슈를 축하해주거라. 오늘 사 서클에 올랐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축하해, 매하슈 사제.”
 “축하해요, 매하슈 사형.”
 “매하슈는 앞으로 삼 일간은 휴식을 취하며 조심할 것이지만 그 후에는 너희와 같이 검술 수련도 하고 체력 훈련도 병행할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
 “스승님, 정말 매하슈가 검술 수련과 체력 훈련도 합니까?”
 “그렇다. 마법사라고 그런 것을 배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저희야 그렇게 한다면 좋습니다.”
 그때 철주물 대문이 스르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노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제대로 씻지 못한 데다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자들은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의 사람들이었다.
 노예 3백 명을 이끌고 온 자들 중에서 대표로 케이슨이라는 자가 프리맨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프리맨 님, 베리아 타운에서 왔습니다.”
 “어제 구입한 노예 삼백 명이 틀림없나?”
 “예, 그렇습니다.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노예들을 살펴보았다.
 “맞구나.”
 “그렇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감히 프리맨 님이 구입하신 물건을 속이겠습니까?”
 “헬싱에게 노예들을 잘 받았다고 전하라.”
 “예, 프리맨 님.”
 스윽.
 준은 케이슨에게 1골드를 내밀었다.
 “가다가 시원한 거라도 마시고 일하게.”
 “가, 감사합니다, 프리맨 님.”
 “조만간 다시 베리아 타운에 노예를 구입하러 들를 테니 헬싱에게 그렇게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케이슨은 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3백 명의 노예들이 정원에 서 있는 것을 본 빈스 집사가 집 안에서 걸어 나왔다.
 “빈스 집사.”
 “예, 프리맨 님.”
 “이들을 깨끗이 씻기고 배불리 먹이도록.”
 “예, 알겠습니다. 노예들은 날 따라와라.”
 3백 명의 노예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빈스 집사를 따라 이동했다.
 루시아는 그런 노예들이 불쌍해 보였지만 이제 좋은 주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오늘 검술 훈련은 이쯤 하고 통나무집으로 돌아가 이삿짐을 싸두거라.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오면 빈스 집사가 알아서 노예들을 동원해 이삿짐을 가져올 것이다.”
 “그럼 앞으로 통나무집은 어떻게 할 겁니까?”
 “통나무집과 주위에 노예들이 기거할 집들을 신축할 것이다. 조금 전에 보아서 알겠지만 삼백 명이 새로 들어왔다. 노예들만 약 육백 명이나 되니 거주지가 많이 부족해졌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너희는 통나무집으로 가고, 루시아는 날 따라와라.”
 “예, 스승님.”
 루시아를 제외한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나무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깨끗이 씻고 배불리 먹은 3백 명의 노예들이 집결하자 준이 걸어 나왔다. 준의 뒤에는 루시아가 갈색 로브를 입은 채 뒤따르고 있었다.
 준은 줄을 맞추고 서 있는 노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며, 이름은 프리맨이라 한다. 너희는 앞으로 교관과 조교들에게서 두 달간 집중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이 집에 배치되어 경비를 설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좋아, 조교들은 훈련 노예들에게 목검을 나누어줘라.”
 “예, 주인님.”
 빨간 모자를 눌러쓴 조교 노예들은 이미 루시아에게서 열흘간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기에 검술의 기본동작을 잘 알고 있었다.
 조교 노예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를 교관 노예로 임명해두었다. 교관 노예가 앞으로 훈련 노예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게 될 것이었다.
 조교 노예 한 명이 단상에 올라가 시범을 보였다.
 스윽.
 조교 노예가 검의 파지법을 훈련 노예들에게 보여 주자 교관 노예가 설명에 들어갔다.
 “잘 들어라. 검의 파지법을 알려 주겠다. 허리에 찬 검을 발도하여 정면 상태에서 오른손은 검의 손잡이 뒷부분을 잡고, 왼손은 손잡이 끝부분을 쥔다. 양 손목은 안쪽으로 살포시 조여 주어 양손이 칼등과 일직선이 되도록 둔다. 쥐는 손의 힘으로 감싸듯 쥐며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훈련 노예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조교 노예는 몇 번이나 검의 파지법을 보여 주었고, 그 후 훈련 노예들의 실습으로 이어졌다.
 자세한 설명과 모습을 보긴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곳곳에 자리를 잡은 조교 노예들이 잘 못 따라 하는 훈련 노예들에게 기합을 주며 다그쳤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오로지 검의 파지법을 익히는 데 보내자 훈련 노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다 따라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제 검의 파지법을 배웠으니 다음으로 발도를 배운다. 발도란 검을 검집에서 빼는 방법을 말한다. 발도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너희는 한 가지만 배울 것이다. 바로 정면 발도라는 것으로, 검을 허리에 찬 상태에서 검신을 정면으로 밀며 발도하는 방법이다.”
 스윽!
 조교 노예가 검의 파지법과 마찬가지로 여러 번에 걸쳐 정면 발도의 시범을 보여 주었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잘 되지 않았다.
 훈련 노예들은 각종 기합을 받으며 수백 번이나 반복적으로 정면 발도를 연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10분간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훈련 노예들은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부는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휴식 시간이 끝나자 훈련 노예들은 다시 검술 훈련에 들어갔다.
 “이번에 배울 검술의 기본동작은 내려 베기다. 내려 베기는 말 그대로 검을 치켜들었다 내려치면서 베면 되는 것이다.”
 조교 노예의 내려 베기 시범이 이어졌다. 보기엔 쉬웠지만 정확한 동작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에 익숙하지 않은 훈련 노예들은 힘들어했다.
 그들은 내려 베기만 무려 1천 번씩 했다. 곳곳에 조교 노예들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대충 하는 건 통하지 않았다. 만약 조교 노예에게 적발되면 혹독한 기합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동작 그만! 점심 식사 후에 다시 훈련에 들어갈 것이다. 훈련 노예들은 줄을 맞춰 서라. 대연회장으로 이동할 것이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좋아, 이동한다.”
 조교 노예의 말에 훈련 노예들이 서둘러 줄을 맞춰 섰고, 줄이 맞추어지자 대연회장으로 이동했다.
 훈련 노예들은 푸짐한 식사를 먹은 후 한 시간 휴식하고는 다시 정원으로 나와 검술 훈련에 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간식을 먹고 다시 검술 훈련이 이어졌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어둠이 밀려와서야 오늘의 검술 훈련이 모두 끝났다. 훈련 노예들은 비록 몸은 좀 피곤했지만 푸짐한 식사를 먹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다크 어쌔신 길드 본부.
 고카라스 빅 시티 상업지역 부근에는 빈민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빈민가의 밀집된 집들 가운데 수십 년 전부터 다크 어쌔신 길드의 본부도 비밀리에 존재했다.
 횃불이 이글거리는 지하 밀실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앉아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서 있는 채였다.
 두 사람 다 갈색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후드까지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스윽.
 서 있는 자가 후드를 벗자 그의 정체가 드러났는데, 바로 필립이었다.
 앉아 있는 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조금 쉰 듯한 목소리였다.
 “필립,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첫 번째 기습은 그렇다 쳐도, 두 번째 기습은 어찌 된 일이냐?”
 “첫 기습에서 이십 명의 어쌔신들이 죽었기에 이번에는 B급 어쌔신들로 삼십 명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리맨과 여자 노예 한 명이 지난밤에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으로 외출을 하기에 은밀하게 그들을 미행했습니다.”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 갔다면 분명 노예를 구입하러 갔을 거다.”
 “그들이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전격적으로 기습을 했는데, 프리맨이라는 자가 마법과 검술 실력에 어느 정도 능통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프리맨을 따라온 여자 노예에게 있었습니다.”
 “여자 노예?”
 “예, 그렇습니다. 여자 노예의 검술 실력이 엄청 났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엔 소드익스퍼트에 오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럼 그들 두 명에게 우리 다크 어쌔신 길드의 B급 어쌔신 삼십 명이 모두 당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지켜본 바로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더구나 놀라운 건 프리맨이 죽은 어쌔신들의 시신을 끌어 모아 화염계 마법으로 재를 만들어버렸다는 겁니다.”
 “뭐라?”
 “첫 기습에 어쌔신들의 시신이 없었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러니 전혀 흔적이 없었던 겁니다.”
 “으음, 그럼 렉스 상단주의 의뢰를 성공하긴 어렵겠는데?”
 “그렇습니다. 지금도 프리맨의 집을 감시하고 있는데, 노예들을 구입해 검술 훈련까지 시키고 있습니다.”
 “노예들을 구입해 검술 훈련을?”
 “예, 아마 집 주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의 경호를 위해 그러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럼 어쌔신 백 명으로도 의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렉스 상단주에게 의뢰비를 되돌려 주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안 된다. 우리 다크 어쌔신 길드의 신용이 떨어지게 되면 앞으로 의뢰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길드장님, 그렇다면 렉스 상단주에게서 받았던 의뢰비 절반으로 검은별에게 청부 살인을 의뢰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뭐? 노스 왕국의 어쌔신 길드 검은별에게 말이냐?”
 “그렇습니다.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그리 먼 것도 아니고, 프리맨이라는 자를 잘 모르는 검은별로서는 분명 A급 어쌔신 한 명 정도를 출동시켜 의뢰를 완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으음, 하긴 검은별에는 실력이 뛰어난 어쌔신도 많으니 굳이 한 명을 제거하자고 어쌔신을 대거 출동시키지는 않겠지.”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로선 검은별에서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성공해도 좋고, 만약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추궁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막대한 위약금을 받아도 되고 말입니다.”
 “으음, 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예, 그리고 이왕 검은별에 청부 살인을 의뢰하는 거, 위약금을 두 배로 할 게 아니라 아예 열 배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검은별은 만약 청부 살인 건이 실패할 경우 위약금을 물어주기 싫어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청부 살인을 성공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흐흐흐, 그렇구나. 검은별 자존심에 물러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저희들로선 되도 좋고 안 되어도 좋으니 말입니다.”
 “으음, 하긴 우리 다크 어쌔신 길드의 어쌔신이 무려 오십 명이나 피해를 입었는데 더 피해를 입는다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길드장님, 제가 판단하기에 프리맨이라는 자는 아주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는 무서운 자입니다.”
 “필립, 정말 그렇게까지 프리맨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프리맨의 능력은 어쩌면 지금까지 드러난 게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으음··· 하긴, 고카라스 빅 시티에서 단기간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 수완을 발휘한 것을 보면 결코 평범한 자는 아닐 거야.”
 “앞으로 우리 다크 어쌔신 길드는 절대 프리맨이라는 자의 의뢰는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건 일단 검은별에게 청부 살인 의뢰를 해보고 그 결과에 따라 생각해보기로 하자.”
 “예,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이번 청부 살인 의뢰는 내가 직접 하도록 하마.”
 “예, 그럼 저는 어쌔신들을 동원하여 프리맨의 집을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조심하거라.”
 “길드장님, 저의 능력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알았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예, 그럼.”
 필립은 후드를 다시 눌러쓰고 지하 밀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다크 어쌔신 길드장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은색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 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크크크, 필립이 프리맨이라는 자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했다면 검은별에도 쉽지 않은 의뢰겠어. 좋아, 청부 살인 건이 실패하면 위약금을 열 배로 한다는 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다크 어쌔신 길드장은 밀실의 뒤쪽 벽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그그그긍!
 굉음이 일어나며 통로가 나타났다.
 다크 어쌔신 길드장이 그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석벽이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이곳은 비밀이 많은 다크 어쌔신 길드의 본부였다.
 준은 지하 연구실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각종 용기에 색깔이 있는 가루들을 혼합하여 반죽했고, 염료와 향료에 식물성 기름을 첨가하여 색소를 잘 퍼지게 한 뒤 고형을 유지시키며 보존도를 높였다.
 준이 만드는 건 민감한 입술 부위에 사용하는 것이기에 재료가 주의 깊게 선정되었다.
 “후후후, 드디어 완성되었다.”
 준이 연구하여 만든 건 여성들의 필수품이 될 립스틱과 립글로스였다.
 립스틱은 입술 화장용이지만 립글로스는 바람과 햇빛, 지나친 습기로부터 입술을 보호하거나 광택을 내는 역할을 하는 화장품이었다.
 준은 향수와 더불어 립스틱과 립글로스도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받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립스틱과 립글로스가 완성되었지만 문제는 용기다. 일단 귀족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게 될 테니 용기가 고급스러워야 장기적으로도 꾸준히 인기를 받을 거야.”
 잠시 용기에 대하여 생각해본 준은 립스틱의 용기는 구리로 만들고, 립글로스는 유리 용기에 뚜껑만 구리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거기에 ‘프리맨’이라는 글자를 필기체 형식의 한글로 새겼다.
 그런데 한글이라는 것이 뮤란 대륙이나 마케리안 대륙에는 없는 글자이다 보니 아주 독특하면서도 멋있었다.
 립스틱과 립글로스는 제조 과정을 알고 있기에 걱정 없었지만 문제는 용기에 있었다. 준은 그걸 위해 손재주가 뛰어난 드워프 노예가 있으면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행히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서 드워프 노예 3명을 입수했다며 저녁에 들러달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으음, 이제 드워프만 구입하면 내일부터라도 립스틱과 립글로스를 생산해도 되겠어. 앞으로 이 두 가지로 돈을 더 많이 벌겠군.”
 준은 연구 시간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에게 검술이나 마법에 대해 가르쳤다.
 훈련 노예 3백 명도 매일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기에 머지않아 한몫을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다가닥다가닥!
 여행자용 회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말을 타고 평야를 달리고 있었다.
 외롭고 위험한 길을 혼자서 여행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5명 이상 무리를 이루어 여행을 하는 데 비해 혼자서 이렇게 말을 타고 여행하는 걸 보면 그만큼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으음, 두 시간만 더 가면 고카라스 빅 시티이니 해가 지기 전에는 들어갈 수 있겠군.”
 스틴은 잠시 생각에 젖어들었다.
 노스 왕국의 어쌔신 길드 검은별에서 A급 어쌔신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길드장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본부에 들어갔다. 고카라스 빅 시티에 살고 있는 프리맨이라는 자를 청부 살인해달라는 의뢰였다.
 귀족도 아닌 자를 죽이는 일이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의뢰를 받았기에 지금 고카라스 빅 시티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고카라스 빅 시티에도 5개의 어쌔신 길드가 있는데 왜 하필 노스 왕국까지 와서 의뢰를 했냐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표적이 검술과 마법에도 일가견이 있다며 A급 어쌔신을 부탁했다.
 검은별 길드에서는 의뢰자의 요구대로 A급 어쌔신 스틴을 보내게 되었다.
 스틴이 생각하기에 표적은 아마도 소드유저 중급의 검술 실력에 2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인 것 같았다.
 “크크크, 그러니까 의뢰자가 표적이 검술과 마법에 일가견이 있다고 말한 거겠지?”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청부 살인 의뢰 건의 기간이 두 달이며, 만약 실패할 시 10배로 배상하라는 거였다.
 길드장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스틴은 웃었다. 길드장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렇듯 스틴이 생각에 빠져 있다 깨어나 보니 어느새 고카라스 빅 시티의 총독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와 있었다.
 스틴은 간단하게 서성을 통과해 고카라스 빅 시티 안으로 들어갔다. 표적의 집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기에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프리맨의 집이 보이는 곳까지 접근한 스틴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나무에 묶어놓고는 품속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어 착용했다. 끝에 뾰족한 금속이 박혀 있는 약간 특이한 장갑이었다.
 스틴이 손바닥을 뒤집어 하늘로 향하자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났다.
 츠츠츠!
 손톱만 한 크기의 꿀벌 한 마리가 생성되었다. 그런데 꿀벌의 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의 꿀벌 페밀리어여, 가서 내가 원하는 곳을 보여다오.”
 부우웅!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른 꿀벌이 프리맨의 집을 향해 날아갔다.
 정원의 한쪽에선 훈련 노예 3백 명이 한창 검술의 기본자세를 연습하고 있고, 준은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훈련 노예들의 모습과 하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으응?”
 꿀벌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걸 본 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꿀벌에게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피윳!
 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력이 쏘아져 나가 꿀벌을 맞혔다.
 퍼억!
 꿀벌 한 마리가 그대로 공중에서 박살나버렸다.
 준의 집 부근에 숨어 꿀벌 페밀리어가 두 눈으로 보는 걸 똑같이 보고 있던 스틴은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고통을 참았다.
 “우욱!”
 꿀벌 페밀리어와 마법으로 이어져 있는 그였기에 갑자기 페밀리어가 소멸하자 가슴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으으··· 왜 갑자기 페밀리어가 소멸된 거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프리맨을 일개 상인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집의 정원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검술 훈련을 하고 있는 걸 보고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집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은 A급 어쌔신이었다. 밤에 은밀하게 침투하여 표적만 제거하고 빠져나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기에 별반 걱정하지는 않았다.
 “곧 날이 어두워질 테니 세 시간 정도 후에 다시 와서 표적을 제거하는 게 좋겠어.”
 스틴은 말고삐를 묶어놓았던 곳으로 되돌아가 말을 타고 표적의 집에서 멀어졌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은신한 그는 로브 속에서 마법 통신구를 꺼내어 통신을 시도했다.
 스스스.
 마법 통신구 속에 길드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길드장님, 저 스틴입니다.”
 -그래, 고카라스 빅 시티에 도착했나?
 “그렇습니다. 표적의 집까지 정찰해두었습니다. 세 시간 정도 후에 침투해서 제거할 예정입니다.”
 -그래, 알았다.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예,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습니다.”
 -이상한 거라니, 뭐냐?
 “표적의 집 정원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검술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것참 이상하군.
 “저도 그게 약간 꺼림칙하긴 합니다만 은밀히 침투하여 표적만 제거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각별히 조심하여 처리하거라.
 “예, 길드장님. 표적을 제거하고 다시 통신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알았다. 성공을 빈다.
 스스스스.
 마법 통신구 안의 길드장 모습이 사라졌다.
 스틴은 마법 통신구를 다시 로브 속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이다.
 “으음, 왜 이렇게 마음이 자꾸만 불안한 거지?”
 사사삭, 사삭!
 밤이 깊어지자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말을 묶어놓은 스틴은 소리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은밀하게 이동했다.
 표적의 집 돌담장은 제법 높았지만 넘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파악!
 땅을 박차고 도약한 스틴은 공중제비를 돌며 정원에 내려섰다. 정원의 곳곳에는 마법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정자에는 준이 혼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스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가 있나 확인해보았지만 혼자였다. 이상하게도 표적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으음, 뭔가 이상한데?”
 스틴은 성급하게 일 처리를 하는 것보다는 신중하게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연방 주위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일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준은 꿀벌 페밀리어를 자신이 직접 소멸시켰기에 밤에 누가 침입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집 안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도록 조치하고는 이렇게 정자에서 홀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틴은 비록 A급 어쌔신이었지만 소드익스퍼트 초급의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소드익스퍼트 중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매일 수련을 하고 있기에 몇 달 지나지 않아 중급에 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스윽.
 스틴은 배에 사선으로 꽂아둔 대거를 소리 없이 뽑아 쥐었다. 날이 35센티미터 정도였지만 아주 날카롭게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체 소리를 내지 않고 그렇게 정자로 접근했다.
 주우욱!
 차를 마시던 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나를 죽이려는 넌 누구냐?”
 “허억! 나를 어떻게 발견했지?”
 스틴은 깜짝 놀라며 주위를 살폈지만 표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으음, 내가 접근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게 중요한가? 너의 정체는?”
 “크크크, 난 어쌔신이다. 널 죽이려고 왔다.”
 “후후후, 너의 실력으로 날 죽일 수 있을까?”
 “뭐라고? 날 무시하는 거냐?”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볼까?”
 스윽.
 정자에서 일어난 준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복면을 한 스틴은 땅을 박차고 튀어나가는 동시에 사선으로 대거를 휘둘렀다.
 채채챙, 파팟!
 이상하게도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스틴은 그제야 준의 손에 이상한 병기가 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준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언월도였다. 평소에는 반지 형태로 끼고 있지만 언제든 이렇게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쉬이잇!
 준이 언월도를 앞으로 내밀며 스틴을 찔렀다. 스틴의 동체 시력으로도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채챙!
 스틴은 대거를 휘둘러 방어하면서 뒤로 훌쩍 물러났다. 가볍게 부딪친 것 같았는데 대거의 날에 이가 빠져 있었다.
 “으음, 중병기 같은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군.”
 휘리리, 파팟!
 조금 전 준이 찌른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준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엄청난 스피드와 파워가 느껴졌다.
 그 파공음만으로도 스틴은 연방 뒤로 물러나느라 바빴다.
 스팟!
 어느새 준의 언월도가 스틴의 배를 살짝 가르고 지나가자 스틴이 회색 로브 속에 입고 있던 검은 옷의 배 부분이 사선으로 길게 찢어졌다.
 주르륵.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부가 살짝 베이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게 되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는 스틴은 옆구리에 끼워놓았던 2개의 단검을 준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시간차 공격으로 가죽 장갑 낀 양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매직 미사일.”
 츄츄츙!
 3발의 매직 미사일도 발사되었다.
 시기적절한 공격이었기에 준이 피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채챙!
 준은 피식 웃으며 언월도를 휘둘러 2개의 단검을 칼날로 튕겨 버렸다. 그리고 뒤에 날아오는 3발의 매직 미사일을 보곤 언월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휘둘렀다.
 파팡!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일어나며 3발의 매직 미사일이 소멸되어버렸다.
 “허엇! 이, 이게?”
 믿을 수 없는지 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퍼억!
 준이 어느새 언월도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준과 스틴은 약 6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믿어지지 않게도 언월도가 주욱 늘어나며 스틴의 배를 뚫고 등 뒤로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스틴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끄으으··· 이게?”
 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에 쥐고 있던 대거를 떨어뜨렸다.
 소드익스퍼트 초급의 검술 실력을 선보이기도 전에 이렇게 허무하게 당한 것이다.
 스스스.
 준의 언월도가 순간 줄어들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새끼손가락에는 보이지 않았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눈을 부릅뜬 스틴은 휘청거리다가 순간 고꾸라졌다. 그리고 잠시 부르르 떨다 곧 잠잠해졌다.
 “으음, 어쌔신들이 자꾸만 기습 공격을 해오니 기분이 나빠. 누가 의뢰했는지 알아봐야겠군.”
 준은 죽은 스틴을 살펴보았다. 그의 몸은 흔한 문신 하나 없이 잔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손에 끼고 있는 가죽 장갑은 페밀리어 소환 마법진과 매직 미사일, 매직 애로우 마법이 걸려 있는 하급 아티팩트였다. 그리고 입고 있는 회색 로브와 속의 검은 옷을 살펴보니 마법 통신구와 약간의 골드화가 들어 있었다.
 땅에 떨어져 있는 대거를 살펴보니 무기 상점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중품의 대거였다.
 “으음, 어쌔신이라서 그런지 추격할 만한 것이 없군?”
 준은 죽은 스틴의 시체를 그냥 두면 안 되기에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윽.
 준이 마력으로 스틴의 시체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푸스스스.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스틴의 시체가 고열에 순간 타버리면서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완벽하게 시체를 흔적 없이 처리한 것이다.
 은신해 있던 필립은 준의 집에서 재빨리 멀어졌다. 준이 스틴을 죽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기에 그제야 은신을 풀고 물러난 것이다. 혹시라도 공포스러운 준에게 발각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필립은 다크 어쌔신 길드에서 부길드장에 있었지만 S급 어쌔신이었다. 검은별에서 A급 어쌔신으로 활약하고 있는 스틴이 고카라스 빅 시티로 들어온 것을 수하들을 통해 보고받아 이미 알고 있었다.
 준의 집 주위에 은신해 있던 필립은 스틴이 어떻게 준을 제거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런데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검은별의 A급 어쌔신인 그도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미처 실력을 선보이기도 전에 말이다.
 소드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가진 필립이었지만 준과 상대한다면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두려움을 주는 자가 바로 준이었다.
 “으음, 역시 검은별에게 의뢰한 건 잘한 거야. 이제 검은별에서도 자존심 때문이라도 물러서지 못하게 되었어.”
 필립은 준의 집을 다시 한 번 바라보더니 그렇게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제8장 드워프 노예
 
 
 다가닥다가닥!
 필립이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준은 루시아와 같이 말을 타고 집을 나섰다.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서 드워프 노예 3명을 입수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승님, 드워프 노예들은 어디에 쓰시려는 거예요?”
 “무엇이든지 잘 만드는 손재주를 가진 드워프들은 앞으로 나의 사업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드워프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데 괜찮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나에게 복안이 있으니 말이다.”
 “알겠어요.”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에 도착한 준과 루시아가 말에서 내리자 경비병들이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말들을 잘 맡아주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윽.
 준은 경비병들에게 1실버를 내밀었다.
 준이 이곳에 올 때마다 1실버를 주었기에 경비병들은 연방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헬싱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프리맨 님, 오셨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드워프 노예를 빨리 입수했구려?”
 “저도 시일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아 일찍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고 싶은데 가능하오?”
 “그럼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준과 루시아는 헬싱의 뒤를 따라갔다. 상품 가치가 달라서인지 드워프 노예가 있는 곳은 깨끗한 룸이었다. 다만, 탈출하지 못하도록 쇠창살은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철컹!
 철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서자 앉아 있던 드워프 노예 3명이 일어났다. 양팔은 자유로웠지만 두 발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들은 신장이 15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했으며, 얼굴엔 수염이 길게 자라 있었다.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에 양팔의 근육도 상당했다. 신장만 작다 뿐이지 전사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드워프가 모루이며 나이가 197살입니다. 중간에 있는 드워프는 디슈이며 182살입니다. 마지막으로 왼쪽에 있는 드워프는 야젬이라 하며 132살입니다.”
 “이들 드워프는 같은 부족인가?”
 “같이 잡혔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무기 제련과 보석 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군. 이들은 얼마인가?”
 “가장 나이가 많은 모루는 팔백 골드, 디슈는 육백오십 골드, 가장 나이가 어린 야젬은 오백오십 골드는 주셔야 합니다.”
 “그럼 모두 해서 이천 골드인가?”
 “그렇습니다.”
 “알았네. 내가 모두 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사무실로 나가시죠.”
 준은 드워프 노예들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뒤돌아 나갔다. 드워프들도 준이 자신들을 구입하려고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모루는 준을 유심히 살펴보다 강력한 기운을 느꼈다. 얼마나 강력한 기운인지 50년 전에 한 번 보았던 고룡급의 실버 드래곤 와르네프리보다 더 강력했다.
 이들 아치 드워프 부족은 미스티 연합령에 걸쳐 있는 몬스터 산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운이 없었던 건지 광산을 찾아 나섰다 오크들과 싸움이 생겨 위기에 빠졌고, 그때 마침 나타나 오크들을 죽인 빌마 빅 시티의 나비아 노예 상단에게 노예로 사로잡혔다.
 그렇게 나비아 노예 상단이 프리랜드 연합의 빌마 빅 시티로 향하던 중 그들이 드워프를 입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단의 헬싱이 1천 골드에 그들 3명을 전부 샀다.
 나비아 노예 상단은 같은 노예 상단이기에 약간의 이윤을 붙이고 도매가격으로 이들을 넘긴 것이다.
 준에게 2천 골드를 받고 드워프 3명을 넘긴 헬싱은 무려 1천 골드나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헬싱에게 드워프 값을 치른 준은 이례적으로 바로 데려간다고 했다.
 “예?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렇소.”
 “어려운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짐마차에 드워프 노예 모루와 디슈, 야젬이 실려 이동하게 되었다.
 쿠르르르!
 드워프 노예를 실은 짐마차가 출발했다.
 얼마 후, 준과 루시아는 고카라스 베리아 타운 노예 상인들이 이끄는 짐마차 한 대와 함께 준의 집에 도착했다.
 철주물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빈스 집사가 정원에 나와 있었다.
 “프리맨 님, 돌아오셨습니까?”
 “빈스 집사, 드워프 노예들을 데려가 먼저 목욕부터 시키고 배불리 먹이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드워프 노예 3명은 빈스 집사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그들이 도망칠 것에 대비하여 허리에 검을 찬 조교 노예 10명이 그들의 주위를 경계했다.
 빈스 집사는 준에게서 건네받은 열쇠로 드워프 노예들이 발에 차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너희는 드워프 노예들에게 목욕하는 법을 알려 주어라.”
 “예, 집사님.”
 조교 노예가 드워프 노예들에게 목욕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미용 비누를 처음 본 드워프 노예들은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조교 노예가 자세하게 알려 주자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뮤란 대륙어를 알고 있었기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드워프 노예들은 지난 한 달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해 기운이 없었지만 그래도 모처럼의 목욕이라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드워프 노예들이 입고 있던 옷들은 낡고 더러웠기에 세탁했다. 그에 그들이 입을 옷이 없자 어쩔 수 없이 가운을 주어 입도록 했다.
 드워프 노예들도 가운을 입어보고는 무척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곧 식사가 차려진 곳으로 가 배불리 먹었고, 시원한 맥주도 제공받았다.
 드워프 노예 모루와 디슈, 야젬은 무척 좋아했다. 거의 매일 시원한 맥주를 마시던 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바로 그것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주인이 바뀌면서 이렇게 시원한 맥주를 마시게 되어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디슈가 옆에 있는 모루에게 말했다.
 “모루 님, 이번에 바뀐 주인은 좋은 사람 같습니다.”
 “으음,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는 마라.”
 “저도 인간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새로운 주인을 보니 약간 안심이 됩니다.”
 디슈의 말에 야젬과 모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루였다. 그렇기에 어떤 계략을 부릴지 몰라 은근히 걱정했다.
 드워프 노예들의 식사가 끝나자 빈스 집사가 이들을 준에게 데려갔다.
 준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드워프 노예들은 소파에 앉으며 그런 준을 쳐다보았다.
 “목욕을 하니 이제 좀 깨끗해졌군. 드워프 노예들, 그래, 식사는 마음에 들던가?”
 모루가 가장 연장자였기에 대표로 대답했다.
 “시원한 맥주까지 있어 만족스러운 식사였소.”
 “그렇다면 다행이군.”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뭔지 말해보시오.”
 “드워프들이 가장 자신 있는 것.”
 “무기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오?”
 “아니다.”
 “그럼 쥬얼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오?”
 “그것도 아니다. 난 다른 것을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스윽.
 준이 드워프 노예들에게 내민 것은 립스틱과 립글로스였다.
 처음 보는 물건에 드워프 노예들은 관심을 보였다.
 “이게 무엇이오?”
 “이건 립스틱이라는 것인데 여자들이 쓰는 입술 화장품이다. 너희가 해줄 건 이 립스틱 용기를 만드는 거다. 그리고 이건 립글로스라는 것인데, 이것도 입술에 바르는 것으로 촉촉하고 광택을 낼 수 있게 해주는 화장품이다.”
 스윽.
 립스틱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고 자세하게 살펴본 모루는 이번에는 립글로스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능성이 있어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을 것 같았다. 또한 고급스럽게 용기를 만든다면 훨씬 비싼 값에 팔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제품은 내가 만들 것이고, 너희는 화장품을 담을 용기만 만들어주면 된다. 아무래도 예술품을 만드는 것은 너희가 나을 테니 말이다.”
 준의 말대로 지금 만들어진 것들도 상당히 고급스러웠지만 드워프들이 만든다면 좀 더 수준이 높을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라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 만들어주겠소.”
 “좋아, 너희는 나의 노예이지만 난 너희를 노예로 취급하지 않겠다.”
 “그게 무슨 말이오?”
 “쉽게 말해 이 집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다른 것들은 다 들어주겠다는 말이다.”
 “시원한 맥주도 말이오?”
 “그렇다. 또한 너희가 필요한 재료나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도 모두 조달해주겠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 너희는 앞으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 너희가 거주할 별동도 만들어두었으니 따라와라. 구경시켜 주겠다.”
 “······.”
 드워프 노예들은 준의 말에 만족스러워하며 뒤따라갔다.
 형식상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무리하게 무구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좋았다.
 드워프들을 위해 마구간 옆에 작은 창고가 한 동 신축되어 있었다. 보기엔 마차 한 대 정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드워프들도 처음에는 의아해했다. 그러나 곧 놀라움으로 눈이 커졌다. 작은 창고 지하로 내려갔더니 마법으로 지하에 드워프들의 작업실을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드워프의 작업실은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 천장이 15미터로 아주 높고, 넓이도 중심에서 약 1백여 미터나 되었다. 이 정도 규모면 아주 넓은 것이었다.
 게다가 대장간처럼 화로와 작업장이 갖추어져 있으며, 숙소와 창고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을 둘러본 드워프 노예들은 만족해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일할 수 있도록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나와 빈스 집사에게 말하라. 즉시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알겠소. 우리도 대우를 받는 만큼 열심히 일하겠소.”
 “한 가지 더 알려 줄 게 있다. 난 너희를 앞으로 오 년만 일하도록 할 것이다. 그 후에는 자유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그, 그게 정말이오?”
 “난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믿어라.”
 “드워프 노예를 풀어주었다는 인간은 들어보질 못했소.”
 “믿든 안 믿든 그건 너희의 자유다. 그러나 오 년이 지나면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드워프 노예 모루와 디슈, 야젬은 준의 말대로 5년 후에 자유를 받아도 좋고, 아니어도 크게 상관없었다. 노예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주지는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당장 작업에 착수해도 전혀 상관없을 정도였다.
 “인간이 만든 맥주보다는 드워프가 만든 맥주가 더 맛있을 테니 재료를 갖다 주면 너희가 만들어 먹어라.”
 “고맙소. 이제까지 이렇게 좋은 인간은 처음 보았소.”
 “앞으로도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신기한 것들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것이오?”
 “가령 하늘을 나는 것들을 만들어 타고 다니는 것 말이다.”
 “새도 아닌데 하늘을 난다는 말이오?”
 “그렇다.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모루는 준의 말을 듣고는 믿음이 생겼다. 그가 보기에 준은 절대 거짓말을 할 인간이 아니었다.
 드워프 노예들은 새로운 거주지가 아주 마음에 꼭 들었다.
 그렇게 준의 집에 새로운 드워프 노예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노스 왕국의 어쌔신 길드 검은별의 본부.
 길드장은 A급 어쌔신 스틴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에 직접 마법 통신을 시도해보아도 통신이 되지 않았다.
 “으음, 역시 실패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스틴이라면 충분히 이번 청부 살인 의뢰를 성공할 줄 알았는데 실패하다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A급 어쌔신 다섯 명에 B급 어쌔신 삼십 명을 보내어 처리해야겠군.”
 길드장은 의뢰자가 만약 의뢰에 실패하면 10배로 배상하라고 한 말에 비웃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A급 어쌔신 스틴이 임무에 실패하자 당황했다.
 “파우라, 거기 있느냐?”
 “예, 길드장님.”
 스스스스.
 바닥에서 무언가가 불쑥 일어나 형태가 순식간에 변형되더니 사람으로 변했다. 은신술과 마법이 적절하게 조합된 어쌔신만의 고급 기술이었다.
 “스틴이 임무에 실패했다.”
 “으음, 상인 하나를 청부 살인하는 간단한 일인데 실패라니 믿을 수 없군요.”
 “나도 그렇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임무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제가 한번 나서볼까요?”
 “S급인 네가 나서는 건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네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제가 간단히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니다. A급 어쌔신 다섯 명에 B급 어쌔신 삼십 명을 보내어 처리하기로 했으니 너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가 지켜보다가 만약 임무에 실패하면 그때 나서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오후에 그들이 고카라스 빅 시티로 떠날 것이다. 뒤따라가라.”
 “예, 길드장님.”
 “그럼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 테니 나가봐라.”
 “예, 그럼.”
 스스스스.
 파우라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은밀하게 사라져 버렸다.
 검은별 길드장은 서랍을 열어 그 속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었다. 알 수 없는 기호들로 가득한 암호문 쪽지였는데 그걸 거침없이 읽어 내려갔다.
 “으음, 검은별 마스터님으로부터 특별 지시가 내려온 게 삼 년 만인가?”
 검은별이라는 이름을 붙인 길드는 뮤란 대륙에 단 하나밖에 없었지만 검은별 마스터라는 자가 보유한 조직은 무려 9개나 되었다. 노스 왕국의 어쌔신 길드 검은별의 길드장도 9개 조직 중 하나를 관리하는 자에 불과했다.
 검은별 마스터는 여러 왕국에 정보 길드나 어쌔신 길드, 상단 등 여러 가지 다른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길드장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으음, 정적이 될 자가 프리랜드 연합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니 다섯 개의 빅 시티에 있는 모든 정보 길드를 동원해 알아보는 게 좋겠어.”
 길드장은 밀린 업무부터 처리한 후 프리랜드 연합의 각 빅 시티에 있는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쉬쉬쉿, 파팟!
 준의 집 정원에서는 훈련 노예 3백 명이 오늘도 기본 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루시아를 비롯해 얼마 전에 거두어들인 제자들을 한 시간씩 개인 지도하며 가르친 준은 점심을 먹은 후 드워프 노예들의 거주지로 내려가 보았다.
 화로에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3명의 드워프 노예들은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따따땅, 땅땅!
 야젬의 망치질 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구리를 얇게 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으로 몇 단계 공정을 거쳐 립스틱의 용기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미 립스틱 용기는 샘플이 만들어져 준과 의논한 끝에 3가지가 채택되었다.
 역시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드워프의 작품이었다. 그냥 사용하기 편한 보통의 용기가 있고, 금과 은을 뒤섞어 만든 용기도 있었으며, 최고급품에는 장식품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보석을 박아 넣은 것도 있었다.
 종류별로 가격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많이 팔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구리 뚜껑에 유리 용기로 제작된 립글로스는 혼자서는 제작이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디슈와 모루가 함께 제작하게 되었다.
 립글로스도 3가지 종류로 만들었다. 구리 뚜껑을 사용한 건 보통급, 그 위에는 금과 은을 적절하게 섞어 만든 고급, 그리고 최고급품엔 보석을 박아 넣었다.
 드워프 노예들은 그것들을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용기에 맞는 틀을 제작했다. 수공으로는 하루에 10개도 만들기 힘들었지만 이렇게 틀을 제작해 만드니 하루에 1천 개씩도 가능했다.
 준은 드워프 노예들이 만드는 립스틱과 립글로스 용기를 보고는 아주 만족했다.
 오늘 이곳을 찾은 것은 지금 판매되고 있는 향수의 새로운 유리 용기와 프리맨 코냑의 술병, 마지막으로 미용 비누와 빨랫비누를 담을 유리 용기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예쁜 용기를 제작하는 덴 드워프들의 미적 감각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드워프 노예들도 준이 새로운 일거리를 가져오자 환영했다. 공정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독특하면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물건이 대부분이었기에 좋아하는 것이다.
 향수라는 것도 유리로 제작하면서 동시에 특이한 모양으로 만들면 더 좋아 보였다.
 비누라는 것도 유리 용기에 담으니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여기에다 그동안은 와인이 온도에 민감해 쉽게 숙성되기에 술맛이 변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준이 가져온 프리맨 코냑이라는 술은 맛이 항상 변함없었다. 거기에다 술병도 유리로 제작하는 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와인은 대부분 나무통에 담아 운반하는 게 당연시되는 시대였다. 그걸 준이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프리맨 코냑은 날로 판매가 늘어나 이제는 뮤란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특히 알렉세이 총독과 협력하여 판매에 나섰기 때문일까? 주문이 많이 밀리고 있었다.
 이제 뮤란 대륙의 귀족들이라면 고급술로 프리맨 코냑을 인식하고 있으며, 일부 귀족들은 항상 프리맨 코냑만 마시곤 했다.
 준은 프리맨 코냑의 술병 디자인을 여러 개 그려 가져와 드워프 노예들에게 보여 주었다.
 드워프 노예들은 준의 감각적인 술병 디자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보기에도 전혀 손색없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준은 프리맨 코냑의 고급화를 위해 숙성된 와인별로 등급을 나누어 차등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최고급 프리맨 코냑의 술병에는 황금과 보석을 박아 넣어 용기를 고급화했다.
 귀족들도 이런 최고급 프리맨 코냑 술병은 절대로 버리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장식장에 진열하게 될 것이다.
 준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술병을 제작하려는 것이었다.
 드워프 노예들은 정말 준이 대단한 상술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다. 상술에 대하여 잘 모르는 그들이었지만 이런 고급품을 내어놓기만 한다면 팔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준은 드워프 노예들과 의논하며 작업장을 둘러보고는 기술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공정에 손재주가 뛰어난 노예들을 투입하는 것도 고려해보았다.
 “모루.”
 “예, 주인.”
 “너희 세 명이서 모든 공정을 한다는 건 무리다. 그래서 말인데, 기술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은 공정에 다른 노예들을 투입해보는 건 어떤가?”
 “인간 노예를 말입니까?”
 “그렇다. 그렇게 하면 너희도 그만큼 일손을 더는 것이니 좋지 않은가?”
 모루도 그동안은 드워프의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했지만 준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주인, 그럼 이곳 작업장에 백 명 정도만 지원해주시오.”
 “알았다. 오늘 오후에 노예들을 집결해둘 테니 너희가 직접 보고 뽑아라.”
 “알았소, 주인.”
 이렇게 해서 오후가 되자 정원에 250명의 노예들이 모여 있었다. 훈련 노예 3백 명을 제외하고 준의 집에서 잡일을 하는 노예들이었다.
 드워프들은 신중하게 살피며 그중에서 1백 명의 노예들을 뽑았다.
 1백 명의 노예들도 큰 불만은 없었다. 기술이 뛰어난 드워프에게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기에 나중에라도 노예에서 해방되면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몸에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지 많이 허둥거리고 불량품도 많았지만 며칠 만에 금방 적응해 불량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고카라스 빅 시티의 10여 개 양조장은 준과 계약을 맺고 와인을 납품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와인의 수요가 줄자 프리맨 코냑의 제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누군가 와인을 대량으로 구입해 준에게 타격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준은 은밀하게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여 바이잔 빅 시티를 비롯해 데르마 빅 시티, 두프 빅 시티, 빌마 빅 시티까지 직접 양조장을 찾았다.
 역시나 네 곳의 빅 시티에선 손쉽게 와인을 구입할 수 있었다. 오히려 가격이 고카라스 빅 시티의 양조장들보다 더 저렴했다.
 그렇기에 준은 아예 큰마음을 먹고 양조장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와인을 구입했다. 엄청난 물량이었지만 바로 대금을 치렀기에 양조장 주인들도 불만은 없었다.
 준은 아공간을 열어 간단하게 그것들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렇듯 사업 규모가 점차 늘어나자 적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프리랜드 연합에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지도를 보니 프리랜드 연합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빌마 빅 시티의 옆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빌마 빅 시티에서 동쪽으로 90킬로미터 떨어진 동부 해안을 주목한 것이다.
 이곳은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었다. 바다에는 해양 몬스터가 출몰하고, 육지의 해안에는 오크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이 수시로 이동하는 지역이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렌츠 산맥이 있고, 그 너머에는 몬스터의 천국 몬스터 랜드가 나온다. 그렇다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각 종족들의 연합 세력인 미스티 연합이 있기에 북쪽으로 진출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준은 이 해안가 땅을 주목했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세력을 키워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플라이 마법으로 공중에 떠오른 준은 주위 땅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해안가가 인접해 있는 데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들도 있고 평지도 있는 그런 땅이었다.
 언덕을 중심으로 사방 70킬로미터에는 인적이 없었다.
 최적의 장소라 판단한 준은 즉시 언덕 위에 자신의 성을 축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성 하나를 축성하려면 몇 년이 걸리기에 마법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준은 최상급 마나 스톤 한 개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마력을 전부 끌어올려 대규모 마법을 펼쳤다.
 쿠쿠쿠쿠!
 4개의 언덕이 이어진 지름 6킬로미터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대성이 땅속에서 솟아올랐다. 땅속에 있던 바위나 돌덩이를 마법으로 뭉쳐 대지 위로 강제로 끌어올린 것이다.
 준의 석성은 전부 돌로 이루어졌기에 단단했다. 성벽의 높이도 무려 20미터나 되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석성의 중심에도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내성을 만들기로 하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쿠쿠쿠!
 언덕 위에 거대한 바위들이 대지를 진동시키며 솟아올랐다. 준이 원하던 내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법으로 이런 엄청난 규모의 대성을 축성한 건 준이 처음이었다. 드래곤도 이런 마법을 시전할 순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기에 시도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눈으로 보았다면 이런 9서클의 절대 마법을 사용하는 게 더 미련스럽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준은 9서클의 절대 마법 주문과 자신이 보유한 6서클의 마력, 최상급의 마나 스톤 하나를 이용하여 결국 성공했다.
 일단 내성과 외성이 축성되었지만 앞으로 필요한 시설도 많이 갖추어져야 했다.
 준은 당분간 성이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기에 환상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독한 마법의 안개가 피어올라 준의 성이 가려졌다.
 외성과 내성 벽에도 대방어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성 무기에 직격되거나 마법사의 공격 마법에 버틸 수 있게 된 것이다.
 저벅저벅!
 준은 내성의 지하로 내려가 지하 공동에 거대한 이동 마법진을 새겼다. 3시간이나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결국 완성했다.
 준이 새긴 대형 이동 마법진은 한 번에 무려 5백 명의 사람과 50톤의 물건을 한꺼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그런 9서클의 절대 이동 마법진이었다.
 하지만 준은 현재 대부분의 힘이 봉인되어 있어 9서클의 절대 마법을 펼칠 수 없었다. 6서클까지만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가능했던 건 준의 몸속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과 아공간 속에 보관되어 있는 최상급 마나 스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형 이동 마법진을 운용하려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기에 3개의 최상급 마나 스톤을 대형 이동 마법진에 박아 넣었다.
 기본적인 작업이 모두 끝나자 소비한 마력을 끌어 모으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준은 그렇게 마나를 흡수하여 마력으로 가공해 저장했다.
 몸속에 저장해두었던 마력을 전부 소비하자 금방 보충되었다.
 “후후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준은 혼자서 이동하면 되기에 굳이 대형 이동 마법진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냥 텔레포트 마법으로 간단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텔레포트!”
 츠파파팟!
 공중에 흩어지듯 그렇게 준은 이동해버렸고, 고카라스 빅 시티에 있는 자신의 집 지하 연구실로 바로 올 수 있었다.
 지하 연구실에도 똑같이 대형 이동 마법진을 새긴 준은 그곳에 최상급의 마나 스톤을 3개나 박아 넣었다.
 “후후후, 대형 이동 마법진이 완성되었으니 이제부터 착실하게 준비하면 돼.”
 오늘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마력을 소비한 데다 정신력도 많이 사용해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던 준은 곧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
 두두두두!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말을 탄 무리가 평지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모두들 여행자용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눈빛이 날카롭고 허리나 등 뒤에 사선으로 롱 소드를 메고 있었다.
 이들은 얼마 후 고카라스 빅 시티의 서성으로 접근해 경비병들에게 신분패를 보이고는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말을 타고 달려 준의 집 근처에 있는 개울가에 말을 멈추었다.
 이들은 바로 노스 왕국의 어쌔신 길드 검은별의 A급 어쌔신 5명과 B급 어쌔신 30명이었다.
 A급 어쌔신 구트는 길드장으로부터 이번 청부 살인 의뢰를 받고는 일행의 대장을 맡게 되었다. 자신과 같이 이동해온 A급 어쌔신이 4명이나 더 있었지만 가장 연장자이며 검술 실력도 높고 경험이 많았기에 대장을 맡게 된 것이다.
 구트는 말에서 내린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해가 질 것이니 식사부터 한다. 밤이 되면 바로 공격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쌔신들은 즉시 말들을 한곳에 모아 말고삐를 묶어두고 육포와 물을 먹어가며 준의 집 주위를 살펴보았다.
 돌담장이 높고 정원까지 있는 제법 넓은 규모의 집이었다. 보통 평민들의 집 3배 정도 되었지만 귀족의 저택과 비교할 순 없었다.
 S급 어쌔신 파우라는 어쌔신들과 약 3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말을 멈추고는 나무 위로 도약해 은신하면서 어쌔신들을 지켜보았다.
 “으음, 식사부터 하는 걸로 보아서는 날이 어두워지면 바로 공격하겠군.”
 파우라도 품속에서 빵을 꺼내어 뜯어 먹으며 물을 마셨다.
 훈련 노예들은 철주물 대문 안과 정원, 집 현관문 근처에 1백여 명이나 배치되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모두 검이나 창, 손도끼, 석궁 등 다양한 무기를 보유한 채였다.
 비록 검술을 배운 지 며칠 되지 않아 소드유저 초급에 불과했지만 혹독한 수련 때문에 날로 검술이 익숙해지고 있는 그들이었다.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훈련 노예들을 제외한 나머지 2백 명의 훈련 노예들은 각자 적성에 맞는 무기를 선택해 훈련 중이었다.
 오전에는 기본 교육이 검술 훈련이고, 오후부터는 각자 맡은 무기로 훈련했다. 가령 창이 맞는 훈련 노예는 창술을 연습하고, 검이 맞는 자는 검술을, 아님 석궁이나 활 쏘는 연습을 하는 훈련 노예들도 있었다.
 이렇게 각자 맡은 무기별로 조교 노예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혹독한 지도 아래 모두들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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