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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무영검(無影劍) [E]

무영검(無影劍) 1

2017.05.10 조회 804 추천 3


 제 1화. 전신(戰神), 척준경
 
 
 고려가 건국된 지 어언 백 수십여 년이 훨씬 지났다.
 황권이 안정되어 잠시 평화로운 듯 보이던 세상은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태조 왕건이 지방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펼쳤던 혼인 정책으로 그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외척과 황족은 황위를 위협하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 있었다.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황위에 오른 숙종 자신처럼, 어느 순간 수많은 황족 중 누군가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선이 닿아 있을 것이 분명한 저 믿지 못할 친황 호위대를 뚫고 자신의 침소에 자객이 들지 않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나인들 중 하나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독약을 넣지 않을까.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위협하는 황족이나 권문세가는 셀 수 없이 많았고 황제는 늘 불안에 떨며 낭떠러지 끝을 걷는 듯 하루하루가 두렵기만 하였다.
 세력이 제법 큰 황족이나 권문세가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적게는 수백여 명에서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르기까지 식객을 거느렸다.
 이들 식객은 언제라도 도성을 위협할 사병(私兵) 집단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런 세력가들은 암암리에 자객단을 키우고 있는 무림 단체들의 뒤를 봐주거나 자금을 대 주며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 아래 두었다.
 황제들이 자신의 주위를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였다.
 한편 외적들이 들끓는 국경도 어지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때 대대적인 정벌을 당하여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왜구도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해안 고을들을 괴롭혔다.
 민가를 헤집다가도 군대가 출병하면 벌써 어딘가로 도망치는 왜구놈들은 미꾸라지와 같은 존재였다.
 이 왜구들이 부스럼이라면 북녘의 여진족과 거란족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는 우환덩어리였다.
 이미 건국 초에 고려와 대규모 전쟁을 치룬 거란족은 대국(大國)으로 커버려 나라 이름을 ‘요(遼)’라 정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압수 건너 서북쪽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고려를 속국으로 삼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봐가며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막강한 기마대를 보유한 여진족은 고려의 동북면 천리장성을 수시로 넘나들며 이곳저곳에서 약탈과 방화, 납치를 자행하였다.
 침입하는 여진족은 수백여 명 정도가 무리지어 여기 저기를 약탈하고 재빠르게 사라지다보니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도적들의 수가 애매하였으나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여진 대부족장 오아속(烏雅束)의 군세가 부담이기도 하였다.
 여진족의 약탈에 백성들의 괴로움은 여간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일부 백성들은 아예 여진족에게 곡물이나 포목을 상납하며 비굴하게 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더 많은 국경지역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생활 터전을 버리고 남으로 피난을 내려와 유민이 되었다.
 도성 주위로 내려온 유민들은 살기 위해 무리를 지어 녹림 도적이 되거나 강도, 사기, 매춘 등 선량한 백성들의 생활을 불안하게 하는 일들을 하기에 서슴지 않았다.
 유민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소요는 하루를 멀다하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
 숙종에 이어 황위에 오른 예종은 황위 찬탈에 대한 불안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선황은 그나마 황위에 오르기 전 선황의 기반이었던 서라벌의 군사력이 있었지만 예종 자신에게는 그조차 없었다.
 자신의 비호세력을 스스로 만들어 황위를 지켜야 하는 황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백성들이 기뻐하고 황족을 끼고 있는 지방 호족이나 권문세가와 맞설 수 있는 믿을만한 수하들을 거둘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여진 정벌이었다.
 고려 예종 이 년, 천백칠 년 섣달.
 예종은 윤관을 대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십칠만의 별무반을 주어 대대적인 여진 정벌을 명했다.
 한 겨울에 들어선 북녘의 산과 들판은 시린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험준한 산과 산 사이를 휘감고 도는 삭풍은 동여맨 갑옷 사이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개경을 출발하여 빠르게 북상한 별무반 십칠만 대군은 천리장성을 넘어 정평성이 바라보이는 삼십여 리 떨어진 곳에 산을 등지고 진채를 내렸다.
 정평성에는 여진의 대부족장인 오아속(烏雅束)이 오만의 여진 정예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오아속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진 부족을 통합하고 여진족의 공포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북방의 효웅이었다.
 밤하늘에는 차가운 보름달이 떠 있었다.
 십여 기의 호위 기병만을 이끌고 산 위에 올라 정평성을 내려다보던 윤관 대원수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 나선 중군 병마녹사(中軍兵馬錄事) 중랑장 척준경에게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선무검문(禪武劍門)을 떠난 지 벌써 이십여 년, 떠나올 때 품은 뜻과는 달리 이룬 바 없이 세월만 흘렀구나!”
 “문주께서는 아직도 검문(劍門)의 문상(文相)의 자리를 비워놓고 아직도 대원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허허. 문주께서도 어지간하시지. 내 결코 검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실 텐데. 검문을 떠나오면서 나라의 안팎이 모두 평온해져 황제 폐하와 백성들의 근심이 사라질 때까지는 검문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씀을 올렸거늘.”
 “그리할 만큼 문주께서는 검문을 위해서 대원수의 지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검문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무공과 문파의 세력 확장에 대한 문주님의 열정이 깊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문파를 더욱 강하게 키우려는 문주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냐. 단지 이런 어수선한 세상에서 우리 검문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지. 그리고 검문을 위해서도 나처럼 문파의 주위를 겉도는 이단자들이 꼭 필요도 하고.”
 “네? 무슨 말씀이온지.”
 “우리 고려는 물론 옛날의 고구려와 신라도 무림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 하지만 유독 선무검문만은 문파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느냐?”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사옵니다.”
 “그건 선무검문의 존립 가치가 나라와 백성에 있다는 것, 이것이 황실에도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우리 검문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라와 백성을 향한 충(忠). 검문이 세워진 후 일천 년이 지났어도 이 믿음은 바뀌지 않고 이어지고 있지. 만약 우리가 무공에만 열중하고 강함에만 집착하였다면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위험한 존재로 보였겠지. 그러면 결국 우리도 다른 문파들과 같이 살아남지 못했을 게야.”
 “그러면 우리 검문도 나라에 대한 충성이 의심스러워지면 멸문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야 당연하겠지. 그러하기 때문에 조정 안에서 검문을 옹호할 인물이 필요한 게야. 그건 그렇고, 나는 네가 선황폐하를 호위하며 황궁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많이 놀랐다. 무공에 대한 너의 열정을 잘 알기에 너만은 일생을 무공의 끝을 알기 위한 수련으로 보낼 줄 알았거든. 내가 검문을 떠나올 때 네가 검문 후기지수 중에서 단연 최고수였지 않았느냐?”
 윤관은 척준경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 희미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커다란 도(刀)를 가지고 선무검문의 독문검법을 부드럽게 시전하는 것을 보면서 너의 무예에 대한 오성과 신력에 혀를 내둘렀다. 분명히 무공에 미쳐 검문 일천 년 역사상 최고수가 될 줄 알았거든.”
 “소장도 한때 충과 무의 경계에서 많은 갈등을 하였사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고향 곡산에서 보았던 그 모습들. 여진 기마대들에 의해 힘없이 유린당하던 이웃들의 처참한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사옵니다.”
 “허허. 다정(多情)도 병(病)이다. 너도 충과 협, 그 때문에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가 올 지도 모르겠구나.”
 “소장도 한때는 선무검문의 호법원(護法院)의 우호법을 지낸 몸이옵니다. 충과 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도 두렵거나 억울할 것은 없습니다.”
 윤관은 그런 척준경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 너는 충분히 그럴 녀석이지. 허허. 혹여, 검도(劍道)의 끝을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느냐?”
 “왜 없었겠사옵니까? 하지만 우리 검문의 무공은 너무 외공에 치우쳐 있사옵니다. 제법 높은 경지의 내공 수련에는 아예 관심도 없으니 말이옵니다. 검문의 무공만을 통해 무공의 궁극을 경험하기에는 불가능할 거라는 소장의 생각이 틀리지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하여 소장도 문주님께 청을 넣어 문외(門外)의 내공을 따로 익히지 않았사옵니까?”
 “우리 검문은 무공 수련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고 군주와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그리 엄청난 경지의 무공이 필요하지는 않아. 강함이 그 어떠한 집단이든 개인이든 집중된다는 것은 군주에게는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 아마 선무검도의 최고 경지에 대한 수련 방법들을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서서히 없앴겠지. 선대 문주들도 마지못해 따를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래서 문주님께서 강함에 집착하시는군요. 하지만 실전(失傳)된 검문의 비전절기가 다시 이어지지 않는 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이옵니다.”
 “아마 그렇겠지. 음. 혹여 중천(中天)에 대하여 들어봤느냐?”
 “세간에 전설로 전해오는 문파 말이옵니까?”
 “전설이라니? 중천은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느니. 단지 황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숨은 것뿐이지.”
 “그걸 어찌 아시옵니까?”
 “너는 내가 검문의 문상이었다는 것을 잠시 잊은 듯하구나. 검문의 천서전에 수장(收藏)하고 있는 이천 년의 기록과 황실의 임천각에 소장되어 있는 서적들 중 내가 볼 수 없는 기록은 없다. 그들은 무림을 인정하지 않는 황실과의 대결을 피하고 순수한 무에 대한 열정을 지키기 위해 스무 명 남짓한 적은 수만을 고집하지. 그리고 세상 속에 섞여 살아가고 있지. 살아오다 늘상 눈에 띄는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장사꾼일 수도, 산과 들에서 땅을 일구는 촌부일수도,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샌님일 수도 있어.”
 “세간의 풍문처럼 그들이 힘이 그토록 강합니까?”
 “글쎄, 솔직한 내 생각으로는 우리 검문보다 훨씬 강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스물두 개의 분타에 오천 여명 넘는 무인을 거느리고 있고 거기에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고 있는 우리 선무검문보다도 말입니까?”
 “오백여 년 전, 중원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혈황의 난’을 알고 있느냐? 그 난을 스무 명의 문도만을 거느리고 잠재웠던 천무검제(天武劍帝)가 당시 중천의 천주였었지. 그 때 보여준 그들의 무공은 경천동지(驚天動地), 그 자체였다. 그때 보았던 천무검제의 신위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중원에서는 그가 사라진 이후 태산에 사당을 짓고 역대 중화의 황제들과 똑같이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러하옵니까? 혈황의 난에 대해서는 천서전의 옛 문헌에서 잠시 본 것이 전부라서 잘 모르고 있었사옵니다.”
 “음. 그럴 테지. 그 때 혈황은 거느린 고수만도 이만에 달하는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스무 명이 이만의 고수와 싸웠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야. 어디 이만의 고수가 한 곳에 모여 있었겠느냐? 그 혈투의 처음이자 끝은 혈교의 본타에 모여 있던 오백여 명의 혈교 최상승 고수들과의 싸움이었지. 하루 밤과 낮의 혈투에서 혈황을 포함한 오백여 명의 혈교 고수를 몰살시키고 천무검제와 천주의 네 호위 중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더군.”
 “그렇지만 순수한 무에 대한 열정만으로 뭉쳐진 중천은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을 텐데. 어찌하여 중원 무림에?”
 “허허. 처음 들어보는 중천이란 문파도 그렇고. 중원 무림은 어리둥절하였지. 아니, 왜? 그런데 그게 세상일이라는 것이 모든 거미줄처럼 얽혀지게 마련이거든. 후후. 인생이란 덧없거늘, 현경을 바라보는 경지에 이른 혈황이었건만 진시황처럼 영생에 대한 유혹을 버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더구나. 혈황의 심복들이 불로의 영약을 찾아 신선의 산이라는 봉래산에 오게 되었고 그때 우연히 마주친 천무검제의 식솔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시신까지 훼손한거야. 아마 그때가 혈황이 중원 무림일통을 꿈꾸던 때라,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였겠지.”
 “천무검제의 식솔들도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겠사옵니까?”
 “아니, 그건 아니었을 게다. 무공뿐 아니라 천무검제가 무인이라는 것, 더 나아가 중천의 천주라는 것조차 몰랐을 테지. 그게 중천의 참모습이지. 세상에 숨는 것. 천무검제의 외모도 그냥 시골에서 늘상 마주칠만한 촌로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혈육에게 호신을 위한 정도의 무예도 전수하지 않다니요?”
 “중천은 혈육이라고 무공을 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에 대한 근성만을 가지고 후인을 선택하지. 그러기에 소수이면서도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천주는 자신이 문파의 장문이었기에 그에 더 얽매였을 테고.”
 “······.”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구나. 나도 가끔은 그들이 부럽다. 세상에 무관심한 그들이.”
 “소장은 이런 생활이 더 좋사옵니다.”
 “그래? 후후. 준경아! 저놈들을 그냥 들이쳐 볼까?”
 대원수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정평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원수께서는 이미 염두에 두신 것이 계시지 않사옵니까?”
 “너도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너는 참마도를 휘둘러 저 녀석들의 목을 쓸어 버렸으면 좋겠지. 허나 우리 군이 쳐서 몰아내야 할 여진 부족이 너무 많아. 저 성안에 웅크리고 있는 오아속의 완안부 오만여 명이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오아속이 명령만 내리면 십여만의 여진병들이 하루아침에 모일 것이다. 첫 싸움부터 힘으로 밀어붙여 무리할 필요는 없어. 이번 기회에 아주 뿌리를 뽑아야 하느니. 힘을 아껴 두거라. 저 미개한 족속들을 우리의 땅에서 몰아내야 되지만 우리 소중한 병사들의 피를 되도록 적게 흘려야 하니까. 그만 돌아가자.”
 윤관은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진채로 돌아온 대원수는 부원수와 군사 겸 참군 격으로 원정군에 참가한 병부상서 위계정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들였다.
 “경들도 우리가 황제 폐하로부터 받은 황명을 잘들 아실 것이요. 저 미개한 여진족들이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도록 옛 고구려의 땅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외다. 본관은 그 방법에 있어서 조금은 비굴하고 수치스러워도 좋다고 생각하오. 다만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지아비인 우리 군사들의 피를 적게 흘리게 하고 싶소. 위 상서! 좋은 계책이 있겠소?”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만책을 쓰면 어떨까 하오만.”
 “어떤?”
 “우리의 군세는 십칠만이옵니다. 지금 정평성 안의 완안부의 병사들에 비해 월등한 군세지요. 적들도 우리가 곧 들이칠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이럴 때 화친을 제의하는 겁니다.”
 부원수 오연총이 발끈하며 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게 하실 말씀이오? 지금껏 그 못된 놈들 때문에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공(公)은 모른단 말이오? 이번 기회에 그 놈들의 목줄을 모두 따야 한단 말이오.”
 위계정은 살며시 웃음을 지으며 윤관 대원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원수! 부원수께서도 저리 역정을 내시는 것을 보니 어쩌면 성공할 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우리가 화친을 제의한다면 여진족은 많이 혼란스러울 것이옵니다.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속임수인지. 적들이 대화에 관심을 보이면 완안부의 부족장인 오아속에게 그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사로잡았던 여진 포로들을 돌려보내 주겠다고 제의하는 것이옵니다. 그 정도의 미끼는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런 쓸모없는 포로들은 돌려보내도 우리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렇게 화친을 하기 위해 십칠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하기에는······.”
 “으음.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어떻게?”
 “우리는 여진이 아니라, 요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였다고 말이옵니다. 길을 잠시 빌려주면 요나라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천리장성을 따라 서북진하여 요나라를 들이칠 거라고 말이옵니다.”
 “좋소. 그 정도면 우리 출병에 대한 변(辯)은 충분하겠소. 그러면 포로를 돌려준다고 제의한 다음은?”
 “그러면 오아속는 크게 기뻐하겠지요. 여진의 완전한 통일을 꿈꾸는 오아속으로서는 불필요하게 피를 흘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부족들의 신뢰를 더 얻을 기회도 되니까요. 그 때, 적당한 이유를 들어 오아속을 포함한 여진의 귀족들을 초청하는 것이옵니다. 우리의 초청에만 응해준다면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겠사옵니까?”
 하얀 수염을 쓰다듬던 대원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으음. 초청에 응하지 않으면?”
 “그러니 전령이 아니라 세객을 보내야지요. 더욱이 언변이 좋고 여진족들까지 잘 알고 있는 무게감 있는 인물로요.”
 “하지만 누가 자청하겠소? 이런 좋지 않은 분위기에 휩쓸려 목 없는 귀신이 되기 십상인데. 혹 저들이 사자의 목을 출정의 제물로 여길지도 모르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수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결심을 한 듯 눈을 뜨며 위계정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조정의 병부상서 정도는 되어야 저들이 믿겠지요?”
 “아마도.”
 “좋소이다. 제가 가지요.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 감군으로 따라온 것이 아니겠소이까? 허허.”
 “고맙소이다! 위 상서. 언제 떠나시겠소이까?”
 “다른 날로 밀어봐야 더 좋은 묘책이 나오겠소이까? 날이 새면 바로 떠나지요.”
 “날이 새면 바로?”
 “네, 대원수. 아~, 부탁이 있소이다. 군사들에게는 거란을 칠거라고 소문을 내시지요. 그리고 개경으로 전령도 보내시구요. 여진 포로들을 돌려보내야 하니 이 전서를 보는 즉시 이곳으로 포로들을 보내라고요. 아마 여진족들도 정찰을 위해 첩자들을 이곳저곳에 숨겨놓았을 테니, 운이 우리에게 있다면 전령이 여진 놈들에게 사로잡히겠지요. 그러면 제 명줄이 더 길어지지 않겠사옵니까? 허허.”
 “알겠소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셋만이 아는 걸로 합시다. 아는 입이 많으면 비밀이 새기 마련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른 아침, 위계정은 관복을 갖추고 시종도 없이 홀로 말에 올랐다.
 삭풍이 부는 들판에는 제법 눈이 쌓여 있었고 여명 속에 반짝이는 햇빛은 전쟁터의 긴장감을 한층 돋우고 있었다.
 ***
 오아속(烏雅束)은 호피의에 깊숙이 엉덩이를 붙이고 엄지와 검지로 지그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고려의 병부상서 벼슬을 하고 있는 거물이 사신으로 와서 고려군 대원수의 서찰을 전하였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위축되는 모습 없이 당당하게 말을 전하던 고려 병부상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고려가 군사를 이렇게 낸 이유는 거란 토벌에 있소이다. 단지 거란의 세작을 속이기 위해 귀 부족이 거주하는 동북 방향으로 진군을 한 것이오. 여진의 세력을 본국에서 염려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진과는 옛 고구려 시절에는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있던 형제가 아니오? 저희 황상폐하의 뜻도 여진과는 예전에 그러하였듯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오. 우리는 천리장성을 따라 서진할 것이오. 길을 조금만 양보해주시오. 저희 폐하께옵서 거란을 멸한 후 거란의 요서와 하북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여진과 반분하기를 원하시오.
 부하들에게 그 서신을 돌려 읽게 하였고, 이미 격렬한 설전이 오갔다
 ‘거란을 친다? 길을 빌려 달라? 포로들을 돌려보낸다? 진심일까? 만약 저들의 목적이 우리 여진이라면? 하지만 이것이 위계(僞計)라고 하기에는 고려의 군세가 너무 강하다. 우리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서라면 저만한 대군으로 그냥 밀어 붙이면 되거늘.’
 조금 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수하 장수들이 주고받던 말들이 떠올랐다.
 -저들은 위계를 쓰고 있소. 애초 우리 여진을 몰아내려는 게 목적이란 말이오.
 -속임수에 의지하기에는 군사의 수가 너무 많소이다. 저만한 대군을 이끌고 와서 속임수를 쓰다니요? 예로부터 자신들을 상국(上國)으로 모시라고 으스대던 고려란 말이외다. 그 알량한 자존심에 그렇게 하겠소이까?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오이다. 원래 전쟁터란 속임수가 많은 법이외다. 자신들의 피해를 줄여가면서 승리를 취하고 싶은 건 당연하오이다.
 -하지만 거란을 치기 위해 이리로 왔다는 저들의 말도 일리는 있소이다.
 -어차피 대군을 이동하였는데 거란이라고 모를 리 있겠소?
 -하지만 거란은 우리 여진을 자신들의 속국이라 여기며 하찮게 보고 있소. 고려보다는 우리와의 국경에 소홀히 여길 것은 확실하지 않소? 고려도 그것을 노리겠다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고 한 번의 속임수로 거란의 도성만 점령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소?
 -아니지요. 머리가 없으면 몸통은 저절로 약해지는 법. 고려는 요의 도성인 연경을 급습하여 점령하고 난 후, 우리 여진에 도움을 청해 가지들을 치려고 하는 거잖소.
 -맞소. 이런 위계나 쓰려고 고려군의 대원수도 무장이 아닌 전투라고는 모르는 문관이 낙점된 것이 아니겠소?
 -지금 고려 진중에 우리 여진의 포로들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외다.
 -그거야 협상이 받아들여지면 우리네 포로들을 데려올 수도 있지 않소이까? 협상을 제의하러 온 고려의 사신도 이런 하찮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거물이오이다.
 -그것이 고려의 얄팍한 속내라는 거외다. 그냥 저 사신 놈의 목을 쳐 우리 군사의 사기를 북돋우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전을 펼쳐야 하오이다. 이 추운 겨울에 제 놈들이 얼마나 버티겠소? 군기가 풀어졌을 때를 노려 들이치면 우리는 편안히 이길 수 있단 말이오.
 -하지만 고려가 제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드넓은 하북 평야를 생각해보시오. 우리 여진이 대국으로 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땅이오.
 설전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을 오아속은 손을 들어 멈추도록 하였다.
 ‘이를 어쩐다?’
 그 때 호위부장이 웬 고려 병사를 끌고 군막 안으로 들어왔다.
 “태사,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서 사로잡은 고려 전령입니다. 품속에서 이런 서찰이 나왔사옵니다.”
 서찰을 한참 들여다보던 오아속은 군사인 착화(捉靴)에게 서찰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으음, 우리 포로들을 이곳으로 호송해 달라는 적장의 서찰인데. 포로를 되돌려 보내주겠다는 거겠지? 적장의 협상 제의를 한번 믿어볼까?”
 착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믿어준 오아속인지라 자신의 입에서 뱉어지는 말이 곧 이 지루한 회의를 마무리 짓는 결론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네, 우선 성 밖 벌판에서 포로를 돌려받도록 하지요. 허허벌판에서야 대비를 철저히 한다면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딱히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요. 고려의 제의는 그 후에 수락하여도 되옵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저놈에게는 서신을 되돌려주고 풀어주도록.”
 “네, 태사.”
 ***
 위계정이 돌아와 적과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는 보고를 한 며칠 후, 윤관은 개경에서 도착한 포로들을 정평성 밖 벌판에서 돌려보내도록 명을 내렸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벌판의 양끝에는 고려군과 여진군이 서로를 노려보며 창날을 세우고 있었다.
 여진 포로들이 정평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갔고 여진군도 포로들을 호위하듯 뒤를 따라 들어가고 이어 성문이 닫혔다.
 하루가 조용하게 흘렀다.
 이튿날 아침, 윤관의 친서를 들고 다시 여진 군문을 방문한 위계정과 몇몇의 고려 권신들은 자못 상기되어 있었다.
 여진 포로들을 풀어준 것은 하나의 미끼였기에 세객(說客)으로서의 이번 방문은 그만큼 중요했다.
 고려 사절단에 대한 환영연은 꽤나 유쾌한 분위기였다. 위계정은 오아속을 중심으로 좌우로 자리 잡고 술잔을 들이키는 여진 장수들을 훑어보며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웃는 낯으로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장수들을 볼 때, 제대로 미끼를 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절반은 성공한 것인가. 이제 초대의 말을 꺼낼 적당한 기회가 와야 될 텐데.’
 “자, 조용히들 하시오. 오늘은 고려와 우리 여진이 그동안 묵혔던 좋지 않은 감정을 씻어내고 형제로서 다시 출발하는 즐거운 날이오. 하핫. 여기에 고려의 위계정 병부상서가 축하 사절로 와 계시오. 고려 조정의 최고 권세가가 이렇게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아 정말 고맙소이다.”
 “무슨 별 말씀을. 저희 황상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만 귀 부족과 피를 나눈 형제처럼 다툼 없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귀 부족과 우리 고려를 발에 낀 때처럼 하찮게 여기는 저 거란 놈들을 쳐 없애는 것이지요. 그걸 위해 저 같은 것이야 이런 발걸음 천만 번이라도 해야지요. 허헛.”
 “위 상서와 같은 충신도 드물 것이요. 자, 자. 한 잔 받으시오.”
 “이렇게 환대를 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태사.”
 “하핫. 허면~, 우리 쪽에서 귀 진영을 방문하여도 이렇게 잔칫상을 차려주실 수 있겠소?”
 “이뿐이겠소이까? 개경에서 산해진미와 미주를 아낌없이 가져와 섭하지 않게 자리를 마련하지요. 허허.”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끌어도 상관이 없겠소?”
 “출기불의(出其不意)! 거란은 봄이 되면 그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들이칠 것이외다. 그동안 여기서 세월을 좀 보낼 것이고요. 그러면 거란도 우리가 귀 부족과의 화친을 위해 무력시위를 벌이는 것이라 생각하겠지요?”
 “좋은 계책이오. 그러면 그동안 우리는 고려의 술과 음식 맛을 한번 봐야겠소이다. 하핫.”
 “허헛. 그러면 몇 명분이나 준비할까요? 아무리 많은 분들이 연회에 참석하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려.”
 “그럼, 참말이란 말이요? 나는 농담인 줄 알았소이다.”
 “그럼요. 귀 부족과 화친을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하면 개경에 계신 저희 황상폐하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자신이 직접 부족장들을 이끌고 적진을 방문하겠다는 오아속의 말에 수하들은 거세게 반대를 하였다.
 그 중 군사인 착화(捉靴)의 반대는 더욱 심하였다. 전장에는 어떠한 속임수가 있을지 모르니 태사는 성을 떠나서는 아니 된다고, 지도자는 가벼이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고, 그건 겨우 뭉치기 시작한 여진 부족을 원래의 힘없는 예전으로 다시 돌려놓는 일이라며 얼어붙은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간언을 하였다.
 저 차가운 얼음 땅 위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자는 자신이 일개 부족장의 동생 신분에서 이렇게 대부족장인 태사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오직 자신만을 위해 꾀를 내고 목숨을 걸었던 수하였다.
 “그래, 그렇게 하마. 그대가 사절단을 뽑아 보내도록 하라. 사절단의 규모나 구성은 그대에게 일임하겠다. 대신 고려가 보여준 성의도 있으니 사절단의 규모가 초라해서는 아니 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태사.”
 일단 오아속의 명을 받은 착화는 사절단에 포함되기를 원하는 장수들과 귀족들을 불러들였다.
 이 사절단에서 갈소관부, 오고률부, 포찰부, 도단부, 철리부 등 여진의 각 부족장들에게 전언을 띄어 부족장들은 참가를 자제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여진군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금패천호 함보(函普), 사현(史現), 안로(顔魯), 선봉장 루실(婁室), 흘석열부(訖石烈部)의 부족장 파자숙(頗刺淑) 등은 따로 언질을 주어 만일을 대비해 직속 병사들을 점고하도록 하였다.
 여진의 핵심 전력은 제외되었지만 의외로 커져버린 오백여 명의 대규모 친선사절단이 고려 진중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오랜 부족 간 전쟁과 수 년 간의 고려와의 대치 상태에서 부족을 위해 싸운 이들에 대한 보상의 차원에서 유흥을 마음껏 즐기라는 오아속의 허락을 받은 상태이기도 하였다.
 고려의 정갈하지만 푸짐한 음식이 혀를 감싸고 도는 맛과 깊은 술에 녹아난 여진의 귀족과 장수들은 밤새 마시고 또 마셨다.
 간밤의 연회 때문에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여진족들은 호의를 베풀어준 윤관 이하 고려 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이들을 바라보는 대원수의 눈은 미안함과 결연한 의지가 같이 서려 있었다.
 정평성을 바라보고 출발한 여진 사절단의 모습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자, 몸을 힘차게 돌리며 부하 장수들에게 짧게 외쳤다.
 “제장들!”
 갑자기 변한 대원수의 모습에 장수들은 멈칫했다.
 “네. 대원수.”
 “우세한 군세를 가지고도 적에게 화친를 청하는 본관에게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 십칠만 별무반의 목표는. 저 정평성 하나를 빼앗고 천리장성을 국경선으로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니다.”
 장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우리의 목표는. 이번 출병의 목표는 천리장성을 넘어 저 드넓은 함주 들판을 고려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다. 함주 평야는 척박한 북녘의 심장이다. 저 곡창지대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북쪽의 패자(覇者)가 가려질 것이다. 잠시 후면, 저 앞쪽 협곡에 매복하고 있던 척준경 장군이 저들을 척살하기 시작할 것이다. 제장들도 사절단에 섞여있던 많은 여진 장수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만 척살하면 우두머리를 잃은 여진 놈들은 우왕좌왕할 테지. 그런 틈에 정평성을 들이친다면 우리 병사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정평성 싸움은 여진 정벌을 위한 출발점이다. 전쟁터에는 속임수가 많은 법. 계책에 너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좌군장과 우군장은 지금 즉시 출발하여 성을 들이쳐라!”
 “네. 명을 받드오이다.”
 군례를 올린 좌군장 문관 상장군과 우군장 김덕진 상장군은 수하 장수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늦은 오후까지 쉼 없이 정평성의 동문과 서문을 들이쳤던 좌우군장은 여진족의 끈질긴 대항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예상대로라면 상당수의 여진 귀족과 장수들이 몰살당했고 우두머리를 잃은 성 안의 여진 병사들은 명령 체계가 없어 우왕좌왕해야 했다. 하지만 저놈의 여진 놈들은 자신들이 공격하는 방법을 바꿀 때마다 얄밉게도 자신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두 상장군들은 군사들을 독려하다가 참다못해 나중에는 자신들이 먼저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궁수들의 엄호를 받으면서 성벽을 오르던 병사들이 하나둘 돌이며 통나무에 맞아 떨어져 나갔다. 얼마 후에는 김덕진 상장군마저 적들이 쏜 화살에 오른쪽 어깨에 맞고 성벽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수하 장수들이 간신히 상장군을 들쳐 업고 뛰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대원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밤이 되면 성을 공격하기가 더욱 힘들어지겠지. 수백 명이나 되는 크고 작은 귀족들과 장수들이 죽었는데도 이렇게 집요하게 대항을 하는 것은 놈들의 지휘 체계가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말인데. 오아속이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는 어림없는 일이지. 옳지! 저 성루에서 움직이는 저놈들이 문제로군. 성문을 먼저 뚫기 위해서는 저놈들을 먼저 요절을 내야 하겠는데.’
 “적장들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자가 불러오라.”
 잠시 후, 고려군의 향도를 맞고 있는 여진족 출신의 별장이 불려왔다.
 윤관은 성루에서 고려군의 화살비를 쳐내며 좌우를 독려하고 있는 적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자들은 누구인가?”
 “방천화극을 거머쥐고 수염이 덥수룩한 장수는 여진족의 선봉장인 완안루실이옵고, 그 좌우에서 장창을 휘두르는 두 장수는 금패천호 함보(函普)와 사현(史現)이옵니다. 오아속이 가장 아끼는 여진 최고의 용장들이옵니다. 저들이 있는 한 성벽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여진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저들은 항우나 여포보다 더한 신과 같은 존재들이옵니다. 저들이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지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음······. 저들을 처치하지 않고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러하옵니다. 대원수 합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관은 좌우를 훑어보았다.
 쏟아지는 화살비를 무릅쓰고 성문을 뚫고 들어가 성루에 있는 저놈들의 목을 칠만큼의 믿음이 가는 장수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성문을 뚫고 저놈들의 목을 가져오겠는가?”
 침묵이 흘렀다.
 그 때 뒤쪽에서 팔 척의 장수가 앞으로 나와 군례를 올리며 말하였다.
 “소장이 가겠사옵니다.”
 윤관은 자신의 앞에 참마도를 거머쥐고 서 있는 척준경을 바라보았다.
 ‘과연 준경이를 보내도 되는가. 혹 이 길이 저승길이 될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준경이 만한 용력을 가진 장수도 없거늘. 이를 어찌한다?’
 머릿속에서의 고민과는 다르게 절실한 전황 탓에 입은 벌써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해보겠느냐?”
 “네, 해 보겠소이다. 합하.”
 척준경과 정평성의 성루를 번갈아 바라보던 윤관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호위별장!”
 대원수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호위별장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너는 좌군과 우군에 전령을 보내라. 좌군과 우군은 성벽의 동편과 서편을 더욱 세차게 공격하라고 전하라. 그리고 좌군은 병력의 절반을 빼어 후진으로 보내도록 전하라.”
 좌우의 장수들이 의아하다는 듯 대원수를 바라보았다.
 “그리하면 적들은 우리의 공격에 무슨 위계(僞計)가 있는 줄 알고 성의 동편과 서편에 병력을 더욱 집중하겠지. 그만큼 정문에 대한 대비가 조금은 느슨해질 테고. 척 중랑장이 성문을 돌파하기는 더욱 쉬워질 게야. 척 중랑장, 가 보거라.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척준경은 말에 올랐고 뒤이어 항상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곡산 출신 일백여 기의 관서기마대가 검은색 갑주에 검은 색 철창(鐵創)과 방패로 무장을 하고 말을 몰았다.
 잠시 후 좌군의 후위에 머물던 병력이 철수하는 듯하였으나 좌군과 우군의 공격은 한층 더 치열해졌다.
 궁수들은 성을 수비하기 위해 벽에 기대어 있는 적병들을 향해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았다.
 뒤 이어 수많은 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졌고 방패로 몸을 감추고 병사들은 앞 다투어 올라갔다.
 위기감을 느낀 여진 병사들이 성의 서편과 동편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철심을 넣어 거의 철판과도 같은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로 비스듬히 올려 적병들이 성루에서 쏘아대는 화살을 막아내며 척준경과 관서기마대는 성루의 아래에 도착하였다.
 방패를 서로 붙여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귀갑(龜甲)진을 만들고 철창(鐵創)으로 그 방패들을 받쳤다.
 성루에서 쏟아지는 화살이나 돌덩이가 흡사 거북의 등껍질과도 방패들에 부딪혀 튕겨져 나갔다.
 성문에 다다른 척준경은 양손에 하나씩 든 대부(大斧)를 움켜쥐었다. 양손에 기를 모으자 도끼에 시퍼런 강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하였다.
 시퍼런 강기 덩어리로 변한 도끼를 내리쳐 성문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실로 하늘이 준 힘이었다.
 충차의 공격에도 끄떡없던 성문이었건만 도끼가 성문에 부딪힐 때마다 그 두꺼운 나무판과 쇠못이 떨어져 나가고 파편이 튀었다.
 성문이 너덜너덜해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척준경이 양 옆에 있던 기마대 병사들이 성문 너머로 몰려드는 여진병들을 향해 철창을 찔러 넣기 시작하였다.
 성문을 가득 메우고 있던 여진병들은 그 위세에 잠시 머뭇거렸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성문이 넘어지자, 척준경은 양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적들을 향해 던졌다.
 서른 근이 넘는 두 개의 도끼가 마치 살아있는 바람개비처럼 여진병들을 향해 날아갔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강기 덩어리의 도끼는 말과 사람, 머리와 다리를 가리지 않고 핏덩이로 만들었다.
 십여 명의 여진병과 말들의 몸이 부서지며 성문 안으로 저절로 길이 열렸다.
 말 고리를 움켜잡은 척준경은 말안장에 꽂아두었던 자신의 애병, 참마도를 꺼내들었다.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기합 소리와 함께 성루로 뛰어 올랐다.
 그 뒤를 관서기마대가 방패와 철창을 휘두르며 주위의 여진 병사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성루를 향해 몰려드는 여진 병사들은 관서기마대가 내지르는 철창에 방패와 몸이 함께 꼬치가 되어야 했다.
 한편 성루로 뛰어오르는 고려 장수를 보고는 여진 세 맹장은 황당하였다.
 어찌 생겨먹은 놈이 참마도 하나 달랑 들고 겁도 없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보아왔던 적병들은 자신들의 기세에 눌려 몸이 굳고 옴짝달싹 못하는 놈들이 태반이었거늘. 이놈은 어찌된 놈인지.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이없이 피식 웃으며 금패천호 사현이 척준경을 덮쳐갔다.
 왼손에 철갑 방패를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커다란 반월형 대도(大刀)를 휘둘러 내리찍었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잔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척준경의 참마도가 상대의 몸통을 자르기라도 하듯 커다란 원형 회오리를 그리며 사현의 방패에 부딪혔다. 강기의 회오리가 일었다.
 순간 사현은 놀라움에 눈을 치켜뜨며 방패에 기를 불어넣어 척준경의 참마도를 되받아쳤다. 참마도와 방패가 부딪히자 불꽃이 튀고 기의 파도가 퍼져나갔다. 철로 만든 방패가 겨우 참마도에 몸이 잘리는 것은 막았지만 그 충격에 못 이겨 사현은 성벽 밖으로 튕겨 나갔다.
 성 밖에 떨어진 사현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기 전에 그의 몸 위로 고려군의 장창이 수없이 와서 박혔다.
 명성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적장의 무공에 놀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 샌가 적장의 참마도는 신속하게 방향을 바꾸어 금패천호 함보의 목을 향하였다.
 그 몸집에, 그 용력에 이런 빠름이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화경 같이 뜬 눈이 껌뻑하기도 전에 참마도는 함보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여진 최고의 맹장들인데. 어찌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내놓을 수가. 완안루실은 경악했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재빨리 기둥에 세워두었던 철창을 거머쥐었다.
 철창에 기를 불어넣자, 척준경을 향해 마치 살아있는 뱀의 머리처럼 꿈틀거리며 쏘아져 갔다. 루실의 절기인 분광섬뢰창(分光閃雷槍)이었다. 여진족이 자랑하는 환(幻)과 쾌(快)의 결정체였다.
 순간 척준경의 눈이 반짝였다. 살아 움직이는 철창의 수술 아래부터 참마도의 등으로 밀어내며 창대를 따라 그대로 훑어 내렸다. 창대를 따라 손등으로 떨어지던 참마도를 피해 완안루실은 창을 잡아 당겼다. 하지만 이보다 빠르게 참마도의 끝은 궤적을 달리해 완안루실의 가슴을 찔렀다.
 가슴의 엄심갑을 뚫고 참마도는 정확히 심장을 꿰뚫었다.
 성루 위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진 병사들은 넋을 놓았다. 전쟁터에서 당할 자가 없는 무신이라고 믿어 왔던 맹장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한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여진 병사들의 투지는 일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성 밖에서 성루에서 벌어지던 모습을 바라보던 윤관은 중군장을 독려하였다.
 “전군! 돌격하라. 기마대는 성문을 장악하라.”
 중군장의 명령에 기마대가 성의 남문을 향해 돌진하였고, 뒤이어 보군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았다.
 오랜 기간 전쟁터를 누벼온 오아속은 더 이상의 수성전은 힘들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역시 일방(一方)을 거머쥐고 있는 효웅답게, 전세를 바라보는 안목만큼이나 판단도 빨랐다.
 “금패천호 안로(顔魯)는 어디에 있느냐?”
 안로(顔魯)가 오아속 앞으로 나서며 군례를 올렸다.
 “너는 즉시 흑기군을 이끌고 북문에 퇴로를 확보하라.”
 안로(顔魯)가 떠나자, 군사 착화를 불렀다.
 “군사! 각 부족에 전서구를 날려라. 전서를 받는 대로 병사들을 독려하여 공험진으로 집결하도록.”
 착화가 자리를 뜨자 주위의 부하 장수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북문으로 후퇴한다. 성을 탈출한 후 함주성을 그냥 관통하라. 고려군이 함주성에 잠시 주춤거리는 시간만큼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게 된다. 공험진으로 집결하라. 북문을 빠져나가는 대로 공험진에 살아서 도착하는 병사가 이번 전투의 최고의 수훈일 될 것이다.”
 궁수대와 흑기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살아남은 여진 병사들은 패잔병답지 않게 빠르게 북문을 빠져나갔다.
 후퇴하는 여진군들은 이튿날 함주성을 그대로 통과하여 새벽이 올 무렵 공험진에 도착하였다.
 이미 공험진에는 전서를 받은 흘석열부(訖石烈部) 파자숙(頗刺淑)을 비롯하여 갈소관부, 오고률부의 부족장들이 삼만 여명의 여진 병사를 끌어 모아 진영을 가다듬고 후퇴해온 오아속을 맞아들였다.
 진중에 도착한 오아속은 날랜 기마병들을 사방으로 보내 흩어진 패잔병을 끌어모았다. 무서우리만치 신속한 대처였다.
 이튿날 아침에는 퇴각군을 지원하기 위해 후미에 남아 있던 안로(顔魯)의 흑기대까지 합세하여 고려군과 일전을 치룰 세력을 갖추었다.
 ‘아마 하루 정도의 여유는 있을 것이다. 적들도 공격을 하면서도 퇴로를 걱정할 테지. 우리의 뒤만 바라보고 쫓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되도록 많은 병력을 끌어모아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군사, 어찌하면 좋을까?”
 “일단 주위의 길주성, 복주성, 등주성들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을 집결시키시지요.”
 “성을 비우면 고려군이 쉽게 점령할 텐데?”
 “적들의 목적은 단지 성을 빼앗는 것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허면?”
 “우리 군을 몰살시켜 후환을 없애려는 것이겠지요. 하여 비어있는 성을 구태여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불필요한 피해를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허면 이 벌판에서 전투를 벌인다?”
 “그렇사옵니다. 기마대가 앞서면 질 전쟁이 아니옵니다. 송나라나 요나라의 장수들 사이에도 ‘여진 기마병 일만 명만 모이면 전쟁을 피하라.’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우리의 기마대는 천하무적이옵니다.”
 “지금까지 집결된 병사는 얼마나 되는가?”
 “칠, 팔만 명은 되옵니다. 그리고 태사께서 공험진에 도착하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 그 수는 빠르게 늘 것이옵니다.”
 “그럼 저 앞 들판에 진을 치도록 하라. 그리고 이후 도착하는 군사들에게 성의 수비를 맡기도록.”
 오아속의 명을 받은 착화는 각 부족장과 장수들에게 진세에 맞추어 각 부대의 위치를 알려주고 다가올 고려군과의 대전을 대비하였다.
 ***
 중군장의 명령에 따라 성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던 고려군은 황당하였다.
 강하게 저항할 것이라 생각되었던 여진군이 단지 장수 세 명이 죽었다고 저렇게 성을 포기하고 허둥대는 꼴이라니. 과연 저들이 고려와 요나라를 상대로 싸우며 북녘을 주름잡던 정예병이 맞기는 한 것인가.
 잠시의 소요가 일더니, 성벽에서 줄기차게 고려군에 대항하던 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속임수가 있는 것으로 추측한 중군장은 성문을 돌파하고 나서는 적병들이 사라지는 북문을 향해 서서히 거리를 좁혀 갔다.
 중군이 북문에 접근하자 적 기마대의 활을 떠난 화살들이 새카맣게 하늘을 가리며 날아들었다. 하나의 방패에 수십 개씩의 화살이 박혔다.
 중군의 접근을 일순 저지한 적 기마대는 여진의 최정예 군이라 하는 흑색갑주의 흑기대였다. 대국인 송나라에서도, 요나라에서도 두려워하는 동북아 최강의 전쟁광들.
 적 기마대를 대상으로 보군으로 이루어진 중군이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중군장은 장창대를 중군의 선두로 전진시켜 적 기마대의 기습에 대비하며 대원수의 명을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 흑기대가 서서히 북문 밖으로 이동하였다.
 잠시 후 성벽을 공격할 때 뒤에 빠져있던 별무반 신기군이 도착하였다. 여진 기마대를 상대하기 위해 윤관이 공을 들여 훈련시킨 기마부대였다. 같은 기병이기에 수적으로 우세한 신기군의 접근은 여진 흑기대에게는 위협적이었다. 신기군이 적 흑기대와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 들어가자, 팽팽한 긴장감이 전장을 눌렀다.
 적의 흑기대도 진형을 갖추고 신기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북문 밖 함주성으로 가는 협곡에는 두 기마대의 대치 상태가 밤새 계속되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신기군을 노려보던 흑기대는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서서히 후퇴를 시작하였다.
 역시 전장과 북녘의 벌판을 누비며 그 위용을 자랑하던 여진의 기마대였다.
 질서 정연하게 후퇴를 하는 흑기대가 뿜어내는 투기는 전혀 줄지 않았다.
 윤관 대원수가 서서히 앞으로 나서자 마치 그를 호위하듯 척준경과 관서기마대가 그 뒤를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고려군을 노려보며 후퇴를 하던 흑기대의 기마병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선두에는 자신들이 신장(神將)으로 여겨왔던 여진의 세 맹장을 어린아이 다루듯 척살해 버린 야차 같은 놈이 참마도를 늘어뜨리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일순 진세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하였고 고려 신기군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안색이 굳어진 흑기대장 안로가 그의 애병인 방천화극을 땅에 꽂자, 흑기대는 재빨리 횡대 진형을 유지하며 말안장에서 맥궁을 꺼내 들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앞서 달리던 신기군의 선두 부대가 말과 함께 뒹굴었다.
 선두의 기병들이 넘어지자 공격이 주춤해진 사이 횡대로 섰던 흑기대는 다시 되돌아 함주성 안으로 재빨리 말을 몰았다.
 윤관은 다급했다. 적들이 함주성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또다시 농성을 시작한다면 정평성의 공성전처럼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흑기대는 성문을 통과한 후 그대로 성을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패주하는 흑기대를 추격하여 들어와 함주성을 점령한 고려군은 우선 성문을 봉쇄하고 후속부대가 입성할 때까지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윤관 대원수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정평성에 후군의 일부만을 남겨놓았기에 뒤통수를 얻어맞을 염려가 있기는 하지만, 함주성을 이렇게 쉽게 내줄 놈들은 아닌데. 공성계(空城計).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들이 성을 비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함주성을 지나면 공험진까지 평야지역이었다.
 ‘그러면 오아속은 저 들판에서 이 싸움을 마무리하자는 것인가. 그래. 놈들의 기마대는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
 이른 아침 떠오르는 햇살을 마주하며 기마대를 앞세우고 성을 나선 고려군과 여진은 함주 평야의 끝자락에서 마주쳤다.
 이 함주 평야는 북쪽 땅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였다. 이 들판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것은 두 쪽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쌀을 재배할 만한 평야지대가 없는 여진족으로서는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는 최고의 곡창지대인 셈이었다.
 이미 진을 구축한 여진의 군세는 그 위세가 자못 대단하였다.
 ‘여진의 군사가 어떤 놈인지 진법을 꿰고 있는 놈인가 보군. 저 장사진(長蛇陣)은 어느 곳을 치고 들어가든 공격하는 쪽이 피곤하다. 중앙을 치면 양 날개가 군대의 배후를 들이칠 거고 날개를 들이치면 중앙이 휘감아올 것인데. 거기다가 저놈의 기마대는 정말 대책이 안 서는군.’
 윤관 대원수는 좌우에서 적진을 바라보고 있는 장수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차륜전법을 써야겠다.”
 장수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차륜전법이란 원래 자신보다 훨씬 강하고 전력이 집중된 상대와 싸울 때 사용하는 전법이었다. 강한 적을 번갈아 공격하고 빠짐으로써 적의 힘을 감소시키는 것이 목적이기에.
 하지만 지금 적은 고려의 별무반보다 월등한 전력도 아니고 저 진세도 전력을 집중한 방형(方形)도 아니었다.
 “저 장사진을 어설프게 공격하면 되려 진 안에 갇혀 몰살당하기 십상이지. 하지만 양 날개의 기마대가 포위하기 전에 적진을 뚫고 지나가면 무용지물이다. 첫 번째 진이 뚫고 지나가자마자 두 번째 진이 같은 곳을 공격해 들어갈 것이다. 보통의 차륜전법은 공격을 하고 뒤로 빠지지만 우리는 뚫고 지나간다.”
 책사 격인 위계정이 말을 받았다.
 “적의 중앙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뚫고 지나갈 용력과 담력이 있는 장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정예기마대도 있어야 하고요.”
 이에 윤관은 고개를 돌려 척준경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겠느냐?”
 척준경은 한 곳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평소 자신을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묵빛 갑주의 관서기마대가 말고삐를 움켜쥔 채 철창을 세우고 적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너의 목숨을 번번이 요구하는 것 같구나. 저기 오만하게 말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오아속이 보이지 않느냐? 좌우 살필 것 없이 중앙을 최대 한도로 빠르게 뚫고 지나가거라. 네가 지나감과 동시에 네 뒤를 적 기마대가 포위하듯 덮칠 것이다. 그래도 앞만 보고 돌격하거라. 네가 출발하고 반 시진 후 교주도(交州道) 도단련사(都團練使) 최홍정이 이끄는 정예기마대가 네가 뚫고 지나간 곳을 다시 돌파할 것이다. 반 시진 정도 돌격하다가 우군 진영에서 고각 소리가 들리면 돌격 방향을 반대로 돌려 뚫고 오너라. 적진 중앙의 혼란으로 제법 정연해 보이는 저 진세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그 때부터 살육전이 벌어질 것이다. 이 싸움이 저놈들과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출발하라!”
 척준경이 이끄는 관서기마대를 선두로 신기군에서 가려 뽑은 오백 기의 기병은 쐐기처럼 적 중앙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질세라 적 흑기대도 마주쳐 오기 시작하였다.
 ‘저놈들을 다 상대하는 건 시간만 축낼 뿐이다. 선두에 선 저 우두머리 놈만 찍어 죽이면 수월해지겠지.’
 순식간에 간격이 좁혀졌고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두 기마대는 부딪혔다.
 두 기마대의 선두에서 내달리던 두 장수의 화극과 참마도가 뒤엉켰다.
 첫 합에서 힘과 빠르기에서 눌린 안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휘두르는 화극을 제대로 받아내는 인간은 없었는데. 대부분 칼과 몸이 하나가 되어 두 토막이 났는데.
 다시 한 번 적장을 살펴보았다.
 그놈이었다. 자신의 친구이자 여진 최고의 장수들을 참살한 그놈.
 안로도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른 무장이었다. 자기 자신도 의식하기 전에 화극은 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직선으로 척준경의 몸을 향해 다가가는 방천화극. 순간 척준경의 몸이 화극의 위로 환영처럼 떠올랐다. 척준경의 몸과 참마도가 하나가 되어 안로를 말과 함께 두 동강이를 내었다.
 안로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참마도를 보면서 눈앞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그것이 끝이었다. 안로의 몸이 채 쓰러지기도 전에 척준경은 적의 중군에 버티고 있는 오아속을 향하여 내달았다. 시퍼런 아지랑이가 웅웅 거리는 참마도를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었다. 무인지경(無人之境). 척준경과 관서기마대가 지나가는 곳, 그곳에는 피의 강이 흐르며 병졸들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척박한 북녘의 땅에서 생존을 위해 무공을 익히고 말을 자신의 팔다리와 같이 다루었던 흑기대 역시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동료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야차(夜叉)같이 달려들었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적을 향해 내력이 실린 참마도가 움직일 때마다 도광이 번쩍였고 기의 회오리가 일렁거렸다. 척준경의 좌우에 붙어서 적진을 뚫고 나가는 관서기마대의 철창도 피에 절어 있었다.
 고려 기마대의 돌격에 의해 생겨났던 길은 몰려드는 흑기대에 의해 순식간에 없어졌다.
 척준경은 자신이 돌격해 들어간 뒤 후방이 봉쇄되든 말든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다만 그의 뇌리 속에는 대원수가 고각소리가 울릴 때까지 앞을 보고 돌격해 들어가라는 명령을 자신에게 내렸다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대원수. 자신의 의부(義父)이자 검문의 선배 동문이자 고려를 떠받히고 있는 기둥이며 신(神)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적병을 베어 넘기며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더 이상 가로 막는 적병이 없었다.
 때마침 고각소리가 들려왔다.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운 척준경은 왔던 길을 되돌아 돌격을 시작하였다.
 순간 여진병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냥 뚫고 지나가리라 생각하였던 적 기마대가 다시 방향을 틀어 되돌아오기 때문이었다.
 뒤쪽에서 또 다른 고려 기마대가 공격을 시작했는지 뒤쪽도 어지러워졌다.
 오아속은 당황하였다. 지금껏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렇게 자신의 기마대가 힘없이 무너지지는 않았는데. 순식간에 진세가 무너졌다.
 앞쪽에는 고려 기마대를 이어 보군이 돌격을 시작하였다.
 한번 무너진 진형을 추스르기엔 너무 늦었다.
 여기저기 뒤엉킨 이런 전장에서는 더 이상 자신들이 자랑하던 기마대는 쓸모가 없었다. 대장이 참살당한 흑기대는 이미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새카맣게 몰려드는 고려군에 이미 밀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전투는 몰살을 의미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척박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생각할 때 너무나 중요했다.
 그때 중군을 뚫고 나갔던 그놈의 묵빛 갑주의 고려 기마대가 다시 자신의 뒤쪽을 짓이기며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맨 앞에서 뚫고 들어오는 놈의 검기는 수십 장이 떨어진 본진의 장수들에게까지 희미하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오아속이 이글거리는 눈을 부릅뜨며 짓씹듯 말했다.
 “누가 저놈을 죽이겠느냐?”
 그 말에 포찰부 출신의 맹장 살골출이 도끼를 휘두르며 척준경을 향해 덮쳐갔다.
 전광석화! 척준경의 참마도가 하얀 선을 그리며 위아래로 그어졌다. 살골출이 피를 뿜으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그 하얀 도광이 채 사라지기 전에 오아속은 자신을 향해 쏘아오는 첨마도를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자신이 아끼는 무장들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본 오아속은 믿기지가 않았다.
 ‘저 놈은 항우나 여포보다도 더한 놈이다. 저놈이 고려에 있는 한 고려를 넘보기는 힘들겠구나!!!’
 오아속은 완만하게 굽은 자신의 완월도(玩月刀)를 꺼내들었다. 적장을 향해 뛰어들으려 하는 순간 흘석열부(訖石烈部) 부족장 파자숙(頗刺淑)이 오아속의 말고삐를 잡았다.
 “태사. 이미 전세를 다시 돌리기에는 늦었습니다. 그리고 저놈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놈이옵니다. 너무 강하옵니다. 후일을 기약하셔야 하옵니다.”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너는 모르느냐?”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면 언제든지 다시 빼앗을 수 있는 땅이옵니다.”
 “아~. 그놈들의 농간에 놀아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병사들이 우왕좌왕하지는 않을 텐데. 너무 많은 장수와 지도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 한이로다. 그리고 저놈을 어찌해야하는지. 내 다시 돌아올 것이다.”
 “태사, 공험진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사옵니다. 상경까지 후퇴하여야 하옵니다.”
 “알았다. 길을 내거라!”
 후퇴하는 여진족을 별무반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이 싸움의 목적은 애초부터 단지 한 전투의 승리만이 아니었다.
 다시는 국경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여진 군사력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다.
 “적병을 쓸어버려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아니 된다.”
 어차피 패한 싸움이었지만, 여진병들도 험한 북녘의 벌판을 누비며 살아온 정예들이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여진 병사들의 대항도 거세었다.
 미처 퇴각하지 못하고 고립된 흑기대의 정예들은 자신들을 의지해 모여든 여진병들과 함께 진형을 유지한 채 살기를 내뿜으며 싸우고 있었다.
 전장의 가운데로 다시 돌아온 척준경이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열 장 밖으로 물러서라.”
 돌격에 참가하였던 몇몇 별장들이 척준경의 명령을 알 수 없다는 듯 우물거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내 옆에 붙어 있으면 내가 마음껏 참마도를 휘두를 수 없단 말이다. 물렀거라!”
 “네, 알겠습니다.”
 여진 흑기대와 고려 기마병 사이에 넓은 공간이 생기자 척준경이 흑기대 중앙을 향해 뛰어들었다.
 참마도를 휘두르는 척준경의 모습은 신이었다. 춤사위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시퍼런 도기가 스칠 때마다 바람에 풀이 넘어지듯 적병들이 쓰러졌다.
 조금 높은 구릉 위, 전장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고려의 수뇌부가 자리 잡고 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원수는 척준경의 전투 모습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다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부원수 이하 수뇌부에게 혼잣말처럼 말을 흘렸다.
 “저기를 보시오. 저것이 고려 무학의 정수이외다. 곧음과 구부러짐 그리고 빠름과 느림의 절묘한 조절. 꼭 필요한 만큼만 기를 불어넣어 휘두르는 검무. 저렇게 움직임을 작게 하며 외공과 내공을 본능적으로 조합하는. 검법의 형(形)을 의식하지 않은 채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검법.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싸워도 지치지 않을 것이외다. 저것이 실전 무학의 최고 경지요. 화경의 경지에 오른 무림의 고수들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진정한 전신(戰神)의 모습이오이다.”
 이건 전투라기보다는 살육이었다.
 시산혈해!
 함주 들판에서의 살육전은 하루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사실상 여진의 무력은 와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아속이 아무리 뛰어난 효웅이라고 해도 십 수 년 내에는 예전의 전력을 회복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적들은 이미 등을 돌려 달아나기에 바빴고 공험진까지 추격을 한 고려군은 그제야 척살을 멈추었다.
 전투는 짧은 시간에 고려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었으되 고려로서도 혼전 상태에서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오십여 명의 크고 작은 장수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여기저기서 신음하고 있었다.
 산 너머로 넘어가는 겨울 햇살이 남기고 간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척준경은 피에 절은 참마도를 늘어뜨린 채 대원수의 옆에 시립하여 적과 아군의 시체로 채워진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기든 지든 전쟁은 참혹한 것. 저놈들을 몰아내기는 하였으되, 우리 병사들의 피해가 너무 크구나. 이런 참혹함을 다시 보지 않기 위해 우리가 강국이 되어야 한다. 거란이든 여진이든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무력을 갖춘 나라. 힘이라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윤관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고려 수뇌부들이 모여들었다.
 부원수 오연총이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다시 추격을 시작할까요?”
 장수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윤관의 대답은 의외였다.
 “우리 군사의 손실도 예상외로 너무 크외다. 내 너무 쉽게 생각했었소이다. 함주 평야를 우리가 손에 넣은 이상, 저들에게 가장 큰 곡창지대인 함주 평야를 내준 저들은 다시 하나로 뭉치기 힘들 것이외다. 뿔뿔이 흩어진 여진족은 언제든 토벌할 수 있는 나약한 나뭇가지에 불과하오. 쓸데없이 의미 없는 피를 흘릴 필요는 없소이다. 우리는 이 곡창지대만 지키면 되오이다.”
 “하지만 애석하오이다. 여기서 멈추는 것이. 여진 족속을 멸할 수 있는데 말이오이다.”
 “너무 애석하게 생각할 것 없소이다.”
 “저놈들은 굶주리게 되면 다시 노략질을 시작할 거외다.”
 “아니오. 그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비책만 세우면 그뿐이오.”
 승리에 도취해 피로를 몰랐던 고려군들에게 해가 지고 전투가 멈추자 격심한 피로에 몰려왔다. 공험진 성벽에 의지하여 화톳불을 밝히고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윤관은 좌군을 쪼개어 진양진과 영주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하였고 우군을 복주와 길주 지역을 거쳐 계속 북진하도록 명하였다.
 함주 평야 주위의 전략적 요충지가 모두 수중에 들어오고 여진의 잔당들은 옛 발해의 영토로 완전히 숨어들어갔다.
 윤관은 점령한 동북 지역에 영주성, 진양진성, 공험진성, 길주성, 등주성, 함주성, 복주성, 숭녕진성, 동태진성 등 아홉 개의 성을 고쳐 쌓았다.
 그리고 동북 국경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변해버린 아홉 성에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더 이상, 함주평야 근처를 넘나드는 여진족들은 없어지는 듯하였다.
 
 
 제 2화. 흔들리는 황위
 
 
 천리장성 밖의 아홉 개의 성을 구축한 고려는 각 성에 방어사(防禦使)와 진장(鎭將)을 임명하여 여진의 약탈을 막고 때가 오면 북진을 계속할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수개월 동안의 축성 작업과 잔당 토벌로 국경 동북방은 차츰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동북 아홉 성이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는 생각에 나라 안의 이곳저곳을 떠돌던 유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성 안에는 제법 큰 장터까지 서게 되었다.
 게다가 마음 편히 농사지을 땅이 없어 살기 어려웠던 일부 농민들도 아홉 성을 개척하기 위해 조금의 세금만 내면 농토를 거저 준다는 조정의 약속에 서둘러 이주를 하였다.
 이듬해 삼월, 윤관은 별무반의 일부를 떼어 동북 아홉 성의 수비를 맡기고 개경으로 회군을 하였다.
 예종은 도성의 회경전에 정벌군의 총수인 윤관 대원수 이하 높고 낮은 장수들과 참모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에 참석한 예종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밝았다.
 왕좌에 오른 이후 항상 나라 안팎의 일로 인해 마음 편히 잠을 청한 적이 없는 황제였다.
 만인지상의 자리라하여 황위에만 오르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었는데, 다 부질없는 환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시름을 조금 털어내고 연회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북쪽 국경의 근심거리가 없어졌고 또 그토록 온통 적들로 둘러싸인 이 궁궐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윤관이 돌아와 있었다.
 백발의 대원수에게 친히 술잔을 건넸다.
 “대원수, 추운 북녘의 원정길에 고생이 심하셨소이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소신, 황상 폐하의 명을 받들어 여진을 징치함에 시일도 오래 걸렸을 뿐더러 이번 원정 중에 죽거나 상한 병사들도 많사옵니다. 죄인인 소신에게 이러한 연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옵니다.”
 “그 무슨 말씀이오? 대원수가 아니었으면 그 누가 있어 북쪽 오랑캐를 이렇게 쉽게 누를 수 있단 말이오? 겸양이 지나치시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개선 장수들은 피비린내가 나던 전쟁터에서의 무용담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하하. 중랑군은 함주벌에서 똥 씹은 표정인 오아속의 얼굴을 보았나?”
 “그럼요. 상장군. 그걸 저기에 계신 대소신료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한이옵니다.”
 “한이지 말고. 이제는 영영 더 힘들겠어. 그 오랑캐들이 북쪽으로 도망가 이제는 찾기도 힘들 테니. 하하.”
 “상장군. 한 잔 더 받으시지요?”
 “하하. 좋지. 자네도 한 잔 받게나.”
 “그건 그렇고. 자네 칼이 많이 무뎌진 모양이야?”
 “네?”
 “칼로 놈들을 베야지, 왜 베지는 않고 머리를 부수는가?”
 “참, 저는 또 뭐라고요. 그런 놈들 죽이기에 칼날이 너무 아깝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서 칼등으로 쳤지요. 하하핫.”
 오래된 긴장에서 풀린 탓도 있겠으나 황제의 너그러운 환대에 취기가 오른 무장들은 저마다 커다란 목소리로 무용담을 토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연회의 시중을 드는 궁녀들을 희롱하기는 자(者), 술에 취해 제 몸도 가루지 못하고 비틀비틀 여기저기를 오가는 자. 도저히 황궁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예법에 어긋난 행동이었으나 황제는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황제는 다소 황실의 예에 어긋나더라도 이런 날만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흥청대던 연회가 끝나고 모두가 퇴궁한 늦은 밤.
 황제의 부름을 받은 윤관은 황제의 침전인 만령전으로 향하였다.
 만령전의 황제의 침소에는 황제만이 술상을 마주하고 홀로 잔을 들고 있었다.
 “짐(朕)이 경에게 흉금을 털어 놓고자 이렇게 늦은 밤에 경을 불렀소.”
 윤관이 번을 서기 위해 침소의 문 앞에 시립하여 있는 내시를 힐끔 쳐다보았다. 두 해 전부터 내시서기(內侍書記)를 맡고 있는 설긍유였다.
 황제는 윤관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문하시중, 괜찮소이다. 긍유는 내시 중 유일한 유사(儒士) 출신이오. 다른 내시들은 모두 권문세가 출신이 아니오? 내, 궁에서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지요. 벗이라고나 할까? 믿어도 되오이다.”
 “네, 설 내시서기에 대해서는 소신도 이미 알고는 있사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오늘 연회는 유쾌했소이다. 참으로 오랜만이었소이다. 이 황위가 편치만은 않은 자리지 않소?”
 “폐하, 소신 듣기가 민망하옵니다.”
 “아니오. 사실이 그렇지 않소. 궁 안 여기저기 널린 것이 적들이니 말이오. 이 자리에 내가 얼마나 앉아있을지도 모르고.”
 “폐하······.”
 “오늘도 보지 않았소? 그 기쁜 자리를 비웃듯이 잔을 기울이던 황족이나 권문세가들을. 사실 그들은 짐(朕)보다는 이자겸의 눈치를 더 살피느라 정신이 없더이다. 어디 허울뿐인 황제가 눈에 보이기나 하겠소? 마음에 안 들면 갈아치우면 될 것을. 어허.”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 궁에서 짐(朕)이 의지할 곳은 경 밖에는 없소이다.”
 “오늘 보셨듯이 무장들은 폐하의 편이옵니다.”
 “아니오. 그들 무장들도 이자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소이다. 그들의 권력도 직책도 이자겸에게서 나오니 말이오. 그들의 충성의 대상은 이자겸이란 말이오이다. 그런 이자겸이 표면적으로나마 머리를 숙이는 것도 살펴보면 경이 있기 때문이오. 만약 경마저 없었다면 짐(朕)은 벌써 이 자리에서 내쳐졌을 것이오. 아니, 벌써 암살당했을지도 모르오.”
 “폐하, 망극하옵니다.”
 “아니오. 짐도 그 정도는 아오. 그러니 경은 오래토록 짐의 곁을 지켜야 하오.”
 “하오나, 폐하. 소신은 이미 너무 늙었사옵니다. 폐하의 곁을 오래 지키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 무슨 말씀이오?”
 “소신, 소신의 몸은 소신이 잘 아옵니다. 이삼 년만 더 살아도 천수를 누리는 것이옵니다.”
 “허면. 짐은 어쩌란 말이오?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소신도 많은 생각을 하였사옵니다. 하여 내린 결론이······ 폐하께옵서는 혹여 중랑장으로 있는 척준경을 아시옵니까?”
 “알다 뿐이겠소이까? 예전에는 선황 폐하가 사저에 계실 때 식객이었고 지금은 경의 의자(義子)가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그 아이를 의지하옵소서.”
 “그렇지만 일개 중랑장을. 아무런 힘도 없는.”
 “아니옵니다. 힘이란 직책에서 나오는 법. 그에게 그에 걸맞는 직책을 주면 되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자겸이 수긍할까?”
 “수긍할 수 있게 만들면 되옵니다.”
 “어떻게?”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고쳐 앉았다. 자신의 미래가 달린 절박한 일이었다.
 “세간에 척준경이 권력을 찾아 둥지를 옮겨 다니는 변절자라는 풍문을 내는 것이옵니다. 그 아이가 선황 폐하께옵서 서라벌 잠저에 계실 때 식객으로 있었던 것은 이미 저들도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입궁 후에는 소신에게 왔사옵니다. 저들에게 그 아이가 권세욕이 있다고 믿게 하기는 쉬운 일이옵니다.”
 “그런 연후에는?”
 “지난 여진 정벌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지 않겠사옵니까?”
 “저들도 서두르겠지.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재물을 끌어모을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뒤로 미루겠소?”
 “이미 저들도 이번 정벌에서 보여준 그 아이의 공(功)을 잘 알 것이옵니다. 사실 그 아이가 없었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중랑장의 무위(武威)가 그 정도요?”
 “네, 그러하옵니다. 이번 정벌의 공은 그 아이를 빼어 놓고 논할 수 없사옵니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도 이처럼 눈치를 봐야 한다니. 허······ 그래, 어느 정도의 직위를 내려야 하오?”
 “중랑장에서 장군으로 승차시키고 금오위장군에 임명하소서.”
 “장군은 정 사 품의 품계가 아니오? 그 정도는 너무 박하지 않소?”
 “아니옵니다. 정 사 품이 문제가 아니오라 금오위장군이란 직책을 얻기 위함입니다. 금오위란 사실상 황실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자리옵니다. 하지만 변고가 많았던 황궁을 지키는 일인데다가 도성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감문위에 밀려 그 세력이 약해져 장수들 사이에서는 서로 기피하는 자리옵니다.”
 “그래서요?”
 “척 중랑장에게 논공행상 이후 이자겸을 찾아가 이번 논공행상에서 자신의 공에 비해 적은 정 사 품계를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이자겸을 따르는 무장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오나 중랑장을 대적할 무장은 그 어디에도 없사옵니다. 이자겸도 솔깃할 것이옵니다.”
 “그렇다고 이자겸이 중랑장을 받아들이겠소?”
 “완전히 믿지는 않겠지만 받아들이기는 할 것이옵니다. 이자겸은 자만심으로 뭉쳐진 자이옵니다. 자신이 중랑장을 가두고도 남을 만큼 그릇이 크다고 생각할 것이옵니다. 적당히 금오위의 일곱 장령을 자신의 사저에서 뽑아 올린 장수들을 넣는 수준에서 그 아이를 금오위장군으로 인정할 것이옵니다.”
 “음. 그건 그렇고 중랑장의 짐에 대한 충심은 믿어도 되오?”
 “척 중랑장은 믿으셔도 되옵니다. 소신이 선무검문의 문상이었다는 것은 폐하께옵서도 아시지 않사옵니까? 그 아이 역시 선무검문의 호법원 소속의 우호법이었사옵니다. 호법원은 검문의 최정예이며 검문의 정신인 충(忠)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옵니다. 의심치 마시옵소서.”
 “짐이 선무검문의 정신을 못 미더워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근래에 들어 검문이······.”
 윤관은 잠시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듯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선무검문의 비전 무예인 선무검도는 옛 고조선시절부터 우리 민족을 지탱해주는 수양의 방편이었사옵니다. 고구려의 현무도, 신라의 화랑도들도 모두 검문의 갈래들이었사옵니다. 검문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그 모습을 같이 했던 조직이옵니다. 검문은 고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현임 문주가 짐(朕)과는 그리 원만한 관계가 아니지 않소?”
 “현임 문주는 황상도 알다시피 폐하의 종숙이자 호국대장군을 지내신 왕유(王流) 공이옵니다. 혹여 폐하께옵서 선무검문의 정신과 기백이 변절되었다고 염려하시는 것은 문주의 무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옵니다. 하지만 문주의 그러한 성품은 선황폐하와의 거북한 관계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옵니다. 선황폐하께옵서 어지러운 조정을 바로잡고자 행하신 혁명을 반대하신 까닭에 선황폐하와 소원해지셨고 그런 마음이 무공의 궁극을 알고자하는 욕망으로 바뀌었을 뿐이옵니다. 절대로 조정을 반대하거나 황실에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나라의 위험을 좌시하지도 않을 것이옵니다. 검문의 충심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면 검문은 예로부터 그랬던 것처럼 황실을 도울 거란 말이오?”
 “예,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내란을 바라보는 검문 내부의 시각은 문도들마다 서로 다를 수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폐하를 위한 무력 조직이 필요한 것이옵니다.”
 “허면. 경이 무장들을 달래주시지 않겠소?”
 “소신은 문관이옵니다. 소신이 대의에 기대어 설득을 한다고 해도 외골수 무장들이란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사옵니다. 무인들은 무공 자체로서 존경을 받아야 진정으로 승복을 하옵니다.”
 “그럼, 그 적임자가 척 중랑장이란 말이지요?”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황궁의 내성에서 폐하의 그림자가 될 친황 호위대를 새로 조직해야 하옵니다. 폐하의 안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옵니다.”
 “음. 짐의 신변이 보장되지 못하는 한, 어떠한 결단도 내리기 힘든 것은 사실이오. 그럼, 친황 호위대 문제는 경에게 일임하겠소.”
 “아니옵니다. 소신이 개입하면 이자겸도 쉽게 낌새를 챌 것이옵니다. 척 중랑장을 은밀히 불러 하명하시옵소서.”
 “알겠소이다.”
 궁을 나서는 윤관은 마음이 심란하였다. 황제의 안위가 항상 위협받는다는 것.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자신이 칼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미루어 왔건만, 이를 대비하기에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궁궐 문을 나서 용수산 아래의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참으로 오랜만에 가마에 올랐다.
 눈을 감은 채 가마가 주는 편안함을 느끼는 와중에, 말을 달리며 군사를 호령하던 자신이지만 서슬 퍼런 칼날 같은 시절을 아우르며 황실을 보필하기에는 너무나도 유약하다는 불안함이 스쳤다.
 ***
 며칠 후, 황궁 내시부의 설긍유가 척준경을 찾았다.
 늦은 밤 설긍유의 뒤를 따라 척준경이 도착한 곳은 황제의 침전이었다.
 황궁에 드나들면서도 감히 중랑장의 신분으로는 이렇게 가까이 황제를 모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야심한 밤중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자신의 앞에서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무장을 바라보던 황제는 조용하게 말문을 열었다.
 “문하시중이 전하길 경이 아니었으면 이번 정벌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고 하던데.”
 “아니옵니다. 정벌에 참가한 병사들 모두가 그만한 공은 세웠사옵니다.”
 “아니, 아니오. 그게 누구나 세울 수 있는 공은 아니지. 전쟁에서 그 공의 중함과 가벼움은 분명히 있소. 중랑장은 너무 겸손할 필요 없소.”
 “황송하옵니다. 폐하.”
 “중랑장!”
 “네, 폐하.”
 “중랑장은 우리 고려에 짐(朕)에게 진정으로 황명을 따를 자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아니, 뭔 소리인가? 순간 척준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려인 모두가 황제의 신민이거늘. 황제와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는 있을지언정 그 누가 있어 황명을 거역하겠는가. 고려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위해서만 살아온 척준경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돼먹지 않는 말이었다.
 외람되이 황제의 용안을 올려다보던 척준경이 대답하였다.
 “송구하오나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질 않사옵니다.”
 “짐(朕)이 말한 그대로.”
 “조정의 대소신료들부터 산속의 초부까지 폐하의 신민이 아닌 자, 누가 있겠사옵니까?”
 “그렇게 믿고 있소? 중랑장은 아직 순수한가 보군.”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옆에 세워져 있던 검대로 발걸음을 옮겨 보검을 잡았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날의 예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참으로 보기 드문 보검이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척준경의 무릎 앞에 검을 놓으며 황제는 쓸쓸한 어조로 말하였다.
 “검을 잡으시오.”
 어찌 황제 앞에서 검의 손잡이를 잡는단 말인가.
 “어찌 그러시옵니까?”
 “허허. 어차피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온 몸이오. 내일이 될지, 아니면 일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왔소. 이 검의 손잡이를 그대에게 맡기려 하오.”
 “······.”
 “청을 하나 해도 되겠소?”
 “망극하옵니다. 청이 아니옵니다. 그저 명을 내리시옵소서. 소장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폐하의 명은, 어떠한 명을 내리시든 그대로 행할 것이옵니다.”
 “짐(朕)을 지켜주시오.”
 척준경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고였다.
 무소불위.
 황제는 척준경에게 있어서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한데 그 신이 너무나 힘이 없었다.
 “문하시중과 저기 있는 저 설긍유밖에 짐이 믿을 사람이 없소. 저 문 밖의 호위대조차 짐의 사람들이 아니오. 수십 명만 내궁에 침입하여도 짐의 목숨은 더 이상 짐의 것이 아니오. 아니지. 짐을 죽이려면 군대도 필요 없소. 단지 잘 훈련된 자객 서너 명만 있어도 되겠지.”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짐의 목숨을 지켜줄 그림자들이 필요하오.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짐의 목숨을. 중랑장이 해 주겠소?”
 “흑흑. 폐하. 신명을 바치겠사옵니다.”
 이마를 침전의 바닥에서 떼지 못하고 흐느끼던 척준경이 비통함을 추스르며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냉철해질 필요가 있었다. 황제의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무사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호위대를 통째로 갈아치우려면. 눈빛이 흔들렸다.
 “하오나 폐하. 몸을 감추고 언제 어디서든 폐하의 주위에 머물 믿을만한 호위들을 뽑아 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외람되오나 그때까지는 폐하께옵서 굴욕을 참으셔야 하옵니다.”
 어른거리는 눈물 너머로 보이는 황제의 모습은 만인지상의 지존이 아니라 한낱 힘없는 백성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알겠소. 지금까지도 참아왔는데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하겠소.”
 “폐하······.”
 “짐(朕)은 그대를 금오위장군에 봉할 것이오. 금오위가 비록 황궁의 경비를 맡고 있으나 금오위장군의 품계가 낮을 뿐더러 황궁 수비대인 감문위에 비해 그 세력도 미약하오. 중랑장의 공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은 자리일 것이오. 하지만 그마저도 이자겸은 자신의 심복이 아닌 중랑장이 금오위를 맡는 것을 반대할 것이오. 하여. 중랑장이 이자겸을 찾아가 봐야겠소.”
 “······.”
 척준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자겸을 찾아가라니.
 “이자겸을 찾아가 그의 사람이 되어 주시오. 중랑장, 미안하오. 그대에게 힘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 추악한 간신배가 되라고 등을 밀고 있으니 말이오.”
 “아니옵니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폐하의 명이라면 소장의 목숨인들 아깝겠사옵니까?”
 “그의 수족으로 살아주시오. 때가 올 때까지 말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
 이자겸의 별채.
 이자겸을 따르는 조정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이 밀담을 나누며 술잔을 들고 있었다.
 “지난 연회 때 윤관과 몇몇 무장들이 보여주는 행태를 보셨소이까?”
 “어허, 아주 안하무인이더군. 이 고려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모양입디다.”
 “황제 폐하께옵서도 태부 합하를 잠시 잊고 계신 듯하였소이다.”
 “이번 원정의 승리도 실상은 합하의 공이 가장 크지요. 그 힘든 일을 다 주관하시고 또 사재까지 털어 군량을 마련하신 분이 누구이신데. 어디 합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언감 꿈이라도 꾸었겠소이까?”
 “태부 합하께서 연회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계셨어야 했소이다. 황위에 오르셔도 누가 감히 거역을 하겠사옵니까? 천하는 오로지 덕 있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소이까?”
 조용히 듣고 있던 이자겸이 이부상서의 말을 저지하였다.
 “어허······ 이부상서, 구족이 멸할 말이오. 말을 가려 해야겠소이다.”
 “송구하옵니다. 합하. 허나 소생은 있는 그대로를 말씀 올린 것이옵니다. 경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소이까?”
 “아무렴요. 입 밖으로 내지만 않을 뿐, 고려 백성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외다.”
 “하지만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소이다. 후한 시절 동탁의 선례를 보십시오. 어차피 하늘의 뜻은 합하에게 있사옵니다. 결국에는 고려가 합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것이외다.”
 “허허. 경들의 충심, 내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이다.”
 이자겸의 책사를 자처하고 있는 이부상서가 자못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저어~, 태부 합하.”
 지금껏 눈을 감고 조용히 측근들의 말을 경청하던 이자겸이 눈을 뜨며 대답하였다.
 “왜 그러는가?”
 “이쯤에서 무장들을 한 번 길들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황제폐하 쪽으로 붙는 무장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사옵니다.”
 “아니, 아직 그럴 필요까지 있겠는가?”
 “아니옵니다. 강둑이 무너지는 것도 조그만 구멍에서 시작하는 법이옵니다.”
 “도성을 에워싸고 있는 중앙군인 응양군과 용호군의 장령이 우리 사람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게다가 황실의 호위와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금오위장군과 궁궐 수비대인 감문위장군조차 나의 심복이거늘.”
 “이번 원정에 대한 논공행상을 조만간 하여야 하옵니다. 합하께옵서 그 일을 주관하신다 하더라도 많은 장수들이 승차를 하다보면 우리가 차지해 왔던 군권들이 분산되는 것은 필연이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이번 원정에 참가하였던 윤관 문하시중의 사람들로 채워질 것은 자명하옵니다.”
 “물론 그리 될 테지.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이번 원정에 공이 많은 대장군과 상장군들을 변방의 병마사나 절도사로 임명하여 내보내야 하옵니다. 그들을 도성에 남겨놓아 봤자 몰려다니며 작당이나 할 게 뻔하옵니다.”
 “음, 그래. 외직으로 내쫓자는 말이로군. 병마사나 절도사가 낮은 자리가 아니니, 저들도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하겠지. 그리고 이참에 고생했던 우리 사람들을 내직으로 옮기게 하고 말이야. 아, 그리고 참. 윤관 옆에 붙어있던 중랑장을 아는 사람 없는가? 이번 원정길에 여진족을 떨게 했다던 그 자 말일세.”
 “아, 척준경 말이옵니까?”
 “그래, 그 자 말이야.”
 “그 자에 대해서는 속하가 들은 게 있사옵니다. 그 뛰어난 무공만큼이나 시류를 잘 아는 자라고 하옵니다. 선황폐하의 사저에서 식객으로 있다가 중랑장을 꿰어 찬 자입니다. 선황폐하께서 붕어하신 직후에 윤관의 막하로 자리를 옮겼고 부자결의를 맺었다 하옵니다.”
 “음. 시류를 잘 안다? 하여튼 내, 그대들이 있어 다리를 펴고 잠을 편히 자고 있네. 하하. 술도 한 잔씩 해야 되지 않겠나? 내 집에 와서 술잔 못 들고 가면 되겠는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합하.”
 산해진미로 가득한 주안상을 받아 한 잔씩 걸친 대관들은 자시가 가까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가마들이 모두 돌아간 이자겸의 집 앞에 나타난 것은 척준경이었다.
 아직 잠에 들지 않고 있던 이자겸은 척준경이라는 무장이 이 밤중에 나타난 것에 대하여 의아한 심경이었다.
 아직 윤관이 건재한데.
 척준경을 마주한 이자겸은 그의 풍채에서 우러나는 기도에 매료되었다.
 저런 놈을 수하로 거느릴 수 있다면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대는 문하시중의 양아들이 아니더냐?”
 “네,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찾아왔느냐? 나와 문하시중은 결코 서로 섞이지 못할 물과 기름 같은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알고 있사옵니다.”
 “허면? 무슨 일로?”
 이자겸의 얼굴을 올려다본 척준경이 갑자기 자세를 고쳐 잡고 머리를 방바닥에 대었다.
 “합하, 소장을 거두어주십시오.”
 일순 이자겸은 당황하였다. 나의 그늘로 들어오려는 저자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소문의 반만 믿는다고 해도 저자의 무공은 고려 최고인데. 저런 자를 윤관이라고 홀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흠흠. 그 말을 내가 믿을 수 있을까?”
 “합하께옵서 믿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 소장의 충심을 받아달라는 것은 아니옵니다. 단지 소장을 막하에 거두어 쓰시고 때가 되면 믿어달라는 것이옵니다. 부려보시고도 쓸모가 없다 하시면 버리셔도 되옵니다.”
 “일단 믿지 않아도 된다?”
 “네, 그러하옵니다.”
 “그 말은 내가 버리지 못할 만큼 쓸모가 있을 거란 말로 들리는데?”
 “네, 그러하옵니다.”
 “허허. 좋아. 사내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그건 그렇게 윤관을 버리고 나에게 오는 연유가 무엇인가?”
 “문하시중은 이미 너무 늙었사옵니다. 소장이 기댈 언덕이 못 되옵니다. 사내가 세상에 나왔으면 이름은 남겨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 그 정도는 내 채워줄 수 있지. 자네가 노닐만한 넓은 연못을 내 만들어줌세.”
 “합하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자겸의 사저에서 돌아온 그는 동생 척준신을 불렀다.
 동생 척준신은 관서기마대의 대장으로 척준경의 지근거리 수하이자 선무검문의 동문이기도 하였다.
 “황제 폐하께옵서 그림자처럼 황상의 주위에 머물면서 호위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시더군. 외람되게도 어느 순간 황상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스며들지 모른다고 염려하고 계시단말야. 너도 알겠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사실 제법 규모가 큰 살수단을 키우고 있는 권문세력이 많으니 납득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하지.”
 “지금 황제 폐하를 지키는 친황대가 있지 않사옵니까?”
 “아. 그들. 폐하께옵서는 친황대가 황상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황상을 감시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네.”
 “그 정도였습니까? 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해체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친황대를 대체할 조직을 만들 수도 없구요.”
 “차라리 문주님께 청을 넣어 볼까?”
 “우리 검문의 무공은 외공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말을 달리며 창칼을 휘두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하지만 황제 폐하를 호위하며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보필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병사들 사이에서 제법 무공과 은잠술이 뛰어난 자를 가려 뽑는다고 해도 다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야.”
 “그렇지요.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는 이미 권문세가와 연줄을 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척준경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호위대를 새로이 조직하는데 시일이 더 걸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면 시일이 걸리더라도 아직 권력에 물들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끌어모아 무인으로 키워야 한단 말이지? 우리가 대놓고 키울 수도 없지 않는데? 설혹 우리가 키운다고 해도 결국은 우리 검문의 무공을 가르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
 한참을 고심하던 척준신이 조심스럽게 척준경의 의중을 물었다.
 “중천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들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이상으로 호위무사를 키울 수 있을 겁니다.”
 “네가 중천을 어찌 아느냐?”
 “소제도 한때는 문하시중 합하께서 관장하시던 검문 문천각의 부각주였습니다. 그 정도의 비밀은 알고 있습니다.”
 “본거지도 없고 단지 세상 이곳저곳에 숨어 지내는 그들을 찾을 수는 있겠는가? 천주가 있는 곳이 총단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인데······.”
 “예전 검문에 몸담고 있을 적에 합하와 고려 무림 정세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현 중천의 천주는 봉래산에 은거하고 있는 무아선인(無我仙人)이라 하더군요.”
 “그렇다고 해도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황실의 흥망도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같은 것이라고 치부하는 그들인데. 아마 고려가 망한다고 해도, 어떤 역적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폐하를 척살한다고 해도 무관심할 게다.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공명도 바람같이 보는 그들에게 어떠한 것도 흥정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야.”
 “거래 조건으로 고려에서 중천을 무림 문파로 인정하겠다는 황실의 약조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고려는 대대로 무림을 인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중천이 그 무시무시한 힘에 비해 중원도 아닌 변방에서 존재감도 미미하게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다 그 연유가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중천은 애초에 무림 패권에는 관심이 없는 문파야. 문도의 수를 스무 명 안팎으로 정한 개파조사의 명이 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 적은 수로는 무림 제패는 물론 교주도나 서해도와 같은 규모가 작은 지역조차 어찌할 수 없어. 그들은 단지 무공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무공광일 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자신들의 문파인 중천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자존심이 온전히 유지되는 것. 그 이상은 없을 거야.”
 “그럼 이는 어떻겠습니까? 중천은 총단이 없기에 자신들의 무공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천의 천주인 무아선인에게 무공의 끝에 대한 실마리를 보여준다고 제의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어야 말이지. 사실 우리의 검법이야 무아선인의 눈으로 보면 겉멋만 잔뜩 들은 하찮은 칼춤에 지나지 않겠느냐? 무아선인의 경지는 화경의 끝에 다다라 현경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상태라고 들었는데······.”
 “우리 검문이나 황궁의 무공이야 무아선인에게 아무런 흥미를 느끼게 할 수 없겠지요. 소제의 말은 무공을 알려주자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무아선인이 생각하는 적수는 누구일까 생각해보면. 아마 현세에는 고려는 물론 송나라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 자신의 무공 경지와 필적할 인물을 꼽으라면 선대 천주들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온 중천으로서는 선대 천주의 무공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었겠지요.”
 “허면?”
 “그 중천의 선대 천주들의 기록을 보여주자는 겁니다. 황궁의 임천각 한켠에 비밀 서고가 있는 것은 아시겠지요? 아마 중천의 전대 문주들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을 것이옵니다.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 기록들이야 황실에게나 우리에게나 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아마 무공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중천에게는 흥미로운 제안일 것입니다.”
 척준경은 동생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중천의 선대 천주들의 기록들은 사실 자신도 그렇고 황실의 무사들에게도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아선인에게는 그 의미가 다르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간 선대 천주들의 무공에 대한 경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던가. 충분히 거래가 이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무아선인이 임천각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냥 빼앗으면 그만일 텐데?”
 “무아선인은 중천의 천주입니다. 그런 치졸한 일을 벌이겠습니까?”
 “딴은 그렇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을 옭아매기에는 너무 가벼워.”
 척준신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척준경은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어렸을 적부터 지혜가 남다른 동생이었다. 나이는 어렸으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마치 자신의 책사인 양 해결해 주던 듬직한 동생이었다. 그의 번득이는 두뇌에 반해 당시 검문의 문상이었던 윤관도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찻잔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튕기던 척준신이 입을 열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척준경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무사로 키워주는 대신, 그 아이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무아선인 마음대로 뽑아 중천의 후인으로 삼아도 된다는 조건을 내거는 겁니다.”
 동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척준경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후에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중천은 황실에서 허락한 문파가 아니었다. 후인을 양성하고 있다는 낌새를 황실에서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중천에게 있어서 문파를 이어갈 후인을 기른다는 것은 언제나 크나큰 숙제였다.
 그런데 마음 편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후인을 기를 수 있고, 게다가 충분한 물량(?)을 일단 가르쳐 보고 그 중에서 고를 수 있는 특혜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건 충분히 미끼로 쓸 만한 좋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중천의 후인이 될 아이는 기껏해야 스무 명이었다. 나머지 훈련된 아이들은 고스란히 호위대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척준경으로서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옳거니. 그 정도면 충분히 거래를 할 수 있겠지.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리고 네가 봉래산에 다녀오도록 해라. 혼자서 그 넓은 봉래산 자락을 뒤지기 힘들기는 하겠지만 비밀을 유지하려면 네가 고생을 좀 해줘야겠다. 너만큼 우리의 처지를 솔직히 말하고 설득할 만한 작자도 없고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형님.”
 어차피 논공행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척준신은 조정에서 그리 관심을 가질 만큼 비중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혹 누군가 찾는다고 해도 고향에 잠시 보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이튿날 아침 동이 트기 전, 평복으로 갈아입은 척준신은 도성을 빠져나갔다.
 이틀을 꼬박 걸어 봉래산에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척준신은 막막하였다. 이 넓은 산자락 어디에서 무아선인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자신이 무아선인이라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을 텐데. 봉래산의 험한 산세를 바라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현경의 경지에 근접하였다고 하니 몸 밖으로 새어 나오는 기(氣)는 없을 테고. 그냥 평범한 촌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테지.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들은 없을 테고. 또 무아선인의 거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주의 호위들은 지근거리에서 호위를 하고 있을 테고 말이야.’
 척준신은 봉래산 자락의 마을들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총단이 없는 문파라 하더라도 한 문파의 장문인인데 거처는 그럴싸하겠지라는 생각에서였다.
 ***
 한 달 가까이 봉래산 자락을 다 뒤졌지만 중천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잠시 천년송의 그늘 밑에서 고민하던 척준신은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천년을 넘게 숨어서 지내온 고금 최고의 문파인데, 아무리 자신이 무공을 익히고 오성과 지혜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작정 뒤져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들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을로 내려간 척준신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중천을 아냐고 묻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묻고 이웃 고을로 이동하여 또 묻고. 먹고 잠자는 것 외에 척준신이 열흘 동안 한 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하루 종일 여러 고을을 쉼 없이 돌아다녀 지친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주막에서 술 한 대접과 늦은 식사를 하고 방에 몸을 뉘었다. 서서히 잠이 들려고 하는 사이 누군가 자신의 사혈을 누르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척준신은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안에는 오늘 아침 지석골 초입에서 마주쳐 말을 섞었던 농부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척준신의 눈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여기는 대화를 나누기에 어울리지 않을 텐데요? 밖으로 나갈까요?”
 그 농부는 의아한 듯 척준신을 바라보았다.
 “아하~ 어차피 귀하께서 마음만 먹으면 나를 죽이는 데에 그리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텐데요. 아무리 내가 눈이 어둡다하여도 귀하의 경지가 나보다 몇 갑절 높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마을을 벗어나 사방이 트인 산등성이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이제 말을 해 보겠소? 왜 우리를 찾아다니는지? 목숨을 위협하지 않아도 솔직히 이야기 할 것 같은데.”
 “우선 본인의 소개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군요. 저는 선무검문 문천각의 부각주를 지내고 지금은 별무반 신기군의 관서기마대 대장을 맡고 있는 척준신이라고 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중천의 천주이신 무아선인을 뵙고자 왔습니다.”
 농부는 척준신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귀하의 눈에 어리는 정기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결코 악인은 아니로군. 검문의 사람이라고 하니 그럴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천주님은 뵙고자 하는 이유 정도는 내가 알아야 천주님께 말씀을 올리든지 말든지 결정할 수 있을 게요.”
 무아선인은 아니었다. 척준신도 처음부터 무아선인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는 귀하는 뉘시오?”
 “본인은 천주님을 모시는 호위 중 하나인 현무위이오다.”
 척준신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농부차림의 무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중천 천주의 사 호위(四護衛). 화경에 근접한 경지에 이른 최고의 무인들. 중원 무림이라면 가히 한 문파의 장문인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무인들이었다.
 과연 무공의 경지에 어울리게 몸 밖으로 새어나오는 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천주님과 한 가지 거래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어떤 거래인지 내가 들어도 되겠지요?”
 “우리가 내어놓을 조건은. 중천을 이 고려에서 공식적인 문파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황제 폐하의 약조가 첫째입니다. 그리고 후인들을 키우는데 장소와 재정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는 것이 둘째이고 선대 중천 천주님들에 대한 기록들을 넘겨드린다는 셋째입니다.”
 “그러면 그 조건으로 우리 중천이 해야 되는 의무는 무엇이지요?”
 “귀하들이 키운 후인들 중 귀하들이 원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황실 호위대로 데려가겠다는 것입니다.”
 “흐흐. 우리 중천에서 무사들을 키워 달라? 손 안대고 코를 푸시겠다?”
 “작금의 조정은 권문세가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친황대를 믿지 못하지만 우리가 내어놓고 호위대를 키울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옵서 내어 놓은 약조들이 중천으로서도 가볍게 볼만한 그럴 것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입니다. 위계는 없습니다. 제가 세객이 아니라서 더 이상의 말을 잇기가 어렵군요.”
 밤하늘을 한참을 바라보던 현무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척준신에게 말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한 번 천주께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해보지요. 머물렀던 주막에서 기다리시오.”
 척준신은 주막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다음 날 늦은 밤이 돼서야 현무위가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척준신은 일순 긴장하였다. 예서 거절을 당하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게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요연할 수밖에 없었다.
 방으로 들어선 현무위는 척준신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다른 동행은 없지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 밤길에 산보나 할까요?”
 “네, 그러지요.”
 잠시 앞서 걷던 현무위가 입을 열었다.
 “천주님께 황제 폐하의 약조를 전하였지요. 외람되지만 저희 천주께서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믿지 못하십니다. 아니, 황제 폐하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바뀔 지도 모를 권문세가들의 얄팍한 충성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천주께서는 우선 본문의 선대 천주님들에 대한 기록들을 한 번 보시고자 하십니다. 일단은 믿어보시겠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허면 그 기록들은 제가 봉래산으로 가져오면 되겠습니까? 그 중요한 것을?”
 “아닙니다. 이달 그믐날, 도성 장패문 밖의 주막에서 천주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저희 천주께서나 그 의미를 찾으실 뿐, 저조차도 그 기록에서 무공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천주님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중요한 기록은 아닙니다. 그것을 노릴만한 이유도 없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믐날 뵙지요.”
 홀가분한 기분으로 도성에 돌아온 척준신은 척준경에게 봉래산에서의 일을 전하였다. 동생의 말을 전해들은 척준경은 그날 밤 바로 내시부 설긍유의 집을 방문하였다. 어차피 시작된 일. 미룰 일이 아니었다.
 며칠 후 설긍유를 통해 얻은 책자의 표지에는 ‘중천잡기(中天雜記)’라고 쓰여 있었다.
 척준경은 제목을 보고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자의 가치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잡기(雜記)라 하여도 별 이상하지 않을 테지. 전신(戰神)이라 칭송을 받는 자신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
 중천잡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하였지만 예상대로 척준경이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무공에 대한 실마리는 하나도 없었다. 인물에 대한 묘사나 이름도 없는 무공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이 전부였다.
 무아선인을 만나고 온 척준신이 ‘중천잡기’를 척준경에게 내어 놓았다.
 “아니. 왜 이것을 다시 가져왔느냐?”
 “무아선인은 이 책자를 한 장 한 장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러더니 한참을 두 눈을 감고 앉아있더군요. 한 식경 정도 앉아 있은 후, 책자를 다시 소제에게 주더군요. 다시 가져가라구요.”
 “그리고는?”
 “우리를 믿어보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육 개월 후까지 오백여 명의, 열 살 안팎의 제법 근골이 뛰어난 아이들을 봉래산에 모아달라고 하더군요. 검문의 이름으로 모으면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해안이나 천리장성 부근의 국경 마을에 가면 부모를 잃고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이 많을 거랍니다.”
 “하기야 굶주리고 헐벗으며 추운 겨울을 지낸 아이들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아이들도 없을 테니.”
 “무아선인 자신도 오랜만에 유람을 하면서 후인이 될 만한 아이들을 찾아본다고 하더군요. 아마 이 기회에 차기 장문이 될 만한 재목을 키우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건 그렇고, 네가 본 무아선인은 어떠하더냐?”
 “도인 같기도 하고 쉽게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촌로 같기도 하고. 그냥 자상한 할아버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 얼굴을 모르면 바로 옆에 있어도 알 수 없겠구나.”
 “네, 그럴 겁니다. 우리처럼 몸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럴 테지. 후후. 그래서 무인이란 겸손해야 오래 사는 법이다. 저잣거리에 오가는 하찮아 보이는 짐꾼이라 하여도 사실은 나보다 훨씬 고수일 수 있을 테니까.”
 “네, 소제도 무아선인을 보면서 형님과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
 여진 정벌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다. 윤관의 천거에 의해서 중랑장이었던 척준경은 장군으로 승차하고 황성의 먼 호위를 맡는 금오위장군에 봉해졌다. 일부 대신들이 반대를 하였으나 이자겸이 인정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시비는 없었다.
 금오위장군으로 부임한 척준경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각 영의 장령들의 눈초리도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이놈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도성을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상관을 감시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놈들이었다. 이러다 보니 무공 수련을 위한 시간을 내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잠들기 전 잠시 내공을 수련하는 것이 전부였다.
 새해에 들어서자 요나라에서 축하사절이 왔다. 요의 제 일(一) 황자 야율설(耶律薛)이 이끄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거란과 고려가 형제지국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벌써 수십 년째 이어오는 양국 간의 빼어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였다.
 요의 사절단을 대접하는 연회는 선정전에서 베풀어졌다. 황제를 중심으로 고려의 권문세족들과 요의 사절단이 좌우로 자리를 잡았다.
 야율설의 눈에 비친 고려의 조정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가운데 높이 앉아 있는 고려 황제는 외톨이였다. 고려의 대신(大臣)이라는 것들이 황제는 안중에도 없고 태부라는 작자의 눈에 들기 위해 굽신거리기에 바빴다.
 근래에 요의 조정에는 화친이니 평화니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떠드는 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예 거란의 정기를 세우자고 외치는 자신을 평화로운 시기에 분란을 일으키는 이단아로 치부하였다. 하지만 송과 고려, 그리고 새롭게 강국으로 떠오른 여진을 생각할 때 자신의 나라는 결코 평화에 안주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자신의 이번 사절단을 이끌고 온 목적도 그 중 하나인 고려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이런 잡배들이 조정을 메우고 있는 나라라면. 자신이 요의 황제에 앉기만 하면 속국으로 만들 자신이 생겼다.
 야율설은 자신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황궁 시위대 부장 석환(惜煥)을 가까이 불렀다. 석환은 한낱 부장으로 지내고 있으나 야율설이 가장 아끼고 가까이 하는 무장이었다. 오십 근이 넘는 방천화극을 마치 부지깽이처럼 휘두르는 괴력의 소유자로 여포가 환생하였다는 칭송을 받고 있었다.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앉는 날 석환을 요나라의 전군을 통솔할 대장군으로 점지하고 있었다.
 조용히 석환의 귀에 대고 입을 열었다.
 “석환, 자네가 고려의 기를 좀 죽여줘야겠어. 고려를 형제지국으로 부르는 것이 나에게는 수치이거든.”
 고려의 대신들 뒤쪽으로 시립하여 있는 고려 장수들을 쭈욱 둘러보고는 석환이 제법 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명에 따르겠사옵니다. 헌데 고려에는 싸움을 할 만한 장수들이 없는 것 같사옵니다. 저하께서 너무 무료하실 것이옵니다.”
 “하핫, 그런가.”
 석환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난 야율설은 예종을 향하여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폐하, 이 장수는 본 황자가 아끼는 석환이란 무장이옵니다. 저희 요나라에서는 제법 무위가 알려진 장수이지요. 저기 뒤에 시립하여 있는 고려 장수들도 많은데 어디 한 번 무예시합을 하면 어떨 런지요? 이런 즐거운 자리에 검무가 빠지는 것도 예가 아니지요. 아니 그렇지 않사옵니까? 폐하.”
 야율설의 말을 들은 예종은 이자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결정은 이자겸이 할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장수 중 황제의 명령에 바로 움직일 장수는 없었다. 황제가 명령을 내린다고 하여도 이자겸의 허락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자겸도 석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법 위풍이 당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갑옷 속에 숨겨진 기세까지 알아볼 만한 눈은 없었다.
 “폐하, 그도 좋을 듯하옵니다.”
 대답과 동시에 자신의 뒤에 시립하고 있는 무장들을 둘러보았다.
 저놈의 오랑캐 놈들의 콧대를 한 번에 지근지근 밟아 다시는 이런 방자한 말을 못 하도록 만들어야 되는데.
 “누가 한 번 해보시겠소?”
 “소장이 해 보겠습니다.”
 좌우위대장군 마유가 나섰다. 저 정도의 풍채와 무예면 괜찮을 듯싶었다.
 이자겸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유는 선정전 앞의 뜰에 대도를 뽑아들고 내려섰다.
 방천화극을 늘어뜨리고 있는 석환을 노려보던 마유가 섬광과 같이 돌진하였다.
 직파참월(直波斬月)!
 마유의 칼이 석환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거침없이 그어졌다. 내려치는 칼을 일 촌 거리로 살짝 피한 석환이 방천화극을 좌상단을 향해 훑어 올렸다. 공격의 실패로 인해 몸의 균형을 잃고 미쳐 자세를 잡지 못한 마유는 방천화극을 피해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두 합의 공격을 피했으나 연이어 내려찍히는 방천화극을 기를 불어넣은 칼로 막아내기엔 그 힘을 몸이 지탱하지 못하였다.
 절로 무릎이 꿇려졌다. 무릎을 꿇고 방천화극이 뿜어내는 기세를 간신히 막아낸 자신을 석환은 여유롭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너무나 큰 실력 차이였다.
 이자겸은 당황하였다. 마유는 자신이 아는 몇 안 되는 실력 있는 무장 중에 하나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패할 인물이 아니었다.
 “소장이 운이 좋은 모양이옵니다. 소장의 무예를 견식할 다른 분은 안 계시오이까?”
 비릿하게 웃음을 띤 채 말을 하는 석환은 고려의 무예를 조롱하고 있는 듯하였다.
 잠시 좌중이 술렁거렸다.
 “소장이 한 번 검을 섞어보지요.”
 소리 나는 쪽을 둘러보니 이번에 대장군으로 승차한 최홍정이었다.
 용호군의 수장을 맡고 있는 도성 최고의 무장이었다.
 석환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최홍정을 보면서 이자겸은 만족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칼에는 눈이 없는 법. 좀 과하여도 탓하지 마시오.”
 자신의 분신인 사모를 틀어쥔 최홍정은 기를 끌어 올렸다.
 화경 같은 석환의 눈을 노려본 뒤 사모를 찔러 들어갔다. 마치 살아있는 뱀의 머리가 먹이를 향해 돌진하듯 기를 불어넣은 사모는 희미한 아지랑이 속에서 쏘아졌다.
 “파(破)!”
 석환의 방천화극이 시퍼런 강기를 내뿜으며 직선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사모를 후려쳤다. 두 기운이 부딪히자 불꽃이 번쩍였다.
 까앙!
 마주친 반동을 이용하여 최홍정은 몸을 회전하며 붉은색 기로 웅웅 거리는 사모를 가로 그었다. 마치 석환의 몸을 위아래로 양단할 듯 돌아가는 사모 주위에 회오리가 일었다.
 자신의 몸통을 자를 듯 회전하여 다가오는 사모를 보면서 석환은 화극을 세우며 사모를 맞받았다. 최홍정은 승리를 자신하였다. 반동을 이용한 회전력, 자신의 타고난 신력(神力), 그리고 기를 불어넣은 사모.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강의 힘을 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것을 피해야지, 이렇게 무식하게 막아서기는. 역시 자신의 힘만 믿는 무식한 오랑캐들이란. 쯧쯧. 화극이 잘리든지, 다행히 막아낸다면 화극과 함께 볼썽사납게 저쪽 전각 귀퉁이에 처박혀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최홍정의 사모는 마치 땅 속 깊이 박힌 천근만근의 쇠기둥을 후려친 듯 그 자리에 멈추었다. 순간 멈춰선 사모를 통해 몸으로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전해왔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저렸다. 몸을 꼼짝할 수도, 아주 자그마한 기를 모을 수도 없었다.
 석환이 천천히 화극을 들어 올려 어깨를 툭툭 쳤다. 고려 최고의 무장이라는 자부심. 이젠 쓸모없는 사치였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최홍정은 잠시의 정적이 지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야율설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고려의 무신들은 모두 국경을 지키기 위해 나가있는가 봅니다. 그래도 황궁인데 실력 있는 무장이 몇 명은 남아 지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자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약해빠진 장수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니.
 이자겸은 뒤쪽에 시립하여 있는 무장들을 훑어보았다.
 이자겸의 눈초리를 살핀 장수들의 머리는 복잡하였다.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도성 최고의 무장이라는 최홍정도 무너지는 판에 자신이 나선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무장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으흠!”
 이자겸은 불편한 심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신음을 토해냈다.
 이 때 선정전의 정문인 창합문으로 한 장수가 들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금오위장군 척준경이었다.
 척준경은 도성의 경비를 맡고 있는 금오위의 수장으로서 연회에 참석하기보다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여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 때 연회가 한창인 선정전 방향에서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더불어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몇 차례의 굉음과 강한 기의 파장이 퍼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무장들이 무예 대결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순찰을 멈추고 선정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인으로서의 본능이었다.
 창합문을 지나자 선정전의 앞뜰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최홍정이 보였다.
 상황은 자명했다. 요나라 사절단의 호위대장으로 온 저 거구의 석환이라는 이름의 요나라 장수에게 패했으리라. 북방의 거센 바람 속에서 살아온 요나라 최고의 무장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리라.
 하지만 최홍정이라면 이자겸이 아껴 왼팔을 자처하던 무장인데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연회장을 향해 발걸음을 조금 더 옮겼다.
 요나라 황자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맞추어 반대편에 앉아있는 고려의 대신의 얼굴은 다들 못 먹을 것을 먹은 표정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려 무장들의 모습을 보건데 이자겸이 무언의 채근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자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는 고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척준경은 서서히 다가가 석환의 앞에 섰다.
 “소장이 석환 장군의 방천화극을 받아 보겠사옵니다.”
 일순 이자겸의 눈가에는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내 어찌 척준경이 궁 안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지.’라는 표정이었다. 저 자는 천하의 여진 맹장들을 어린아이 가지고 놀 듯 하던 무신이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석환이라고 해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닐 것이었다.
 척준경은 야율설에게 군례를 올리며 사절단의 수장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황자 저하, 우리 고려의 장수들은 편한 궁궐에 머물기 보다는 찬바람이 일고 창칼이 오가는 북방의 산과 들을 더 좋아하옵니다. 하여 북방의 국경지역에 기거하기를 좋아하다 보니 도성에는 저기 계신 원로분들과 소인과 같이 무공의 격이 떨어지는 장수들이 머물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무공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핫.”
 말을 멈춘 척준경은 석환을 마주보며 참마도를 늘어뜨렸다.
 석환은 더 이상의 대결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웃음 띤 모습으로 야율설을 향해 호기롭게 말을 거는 장수를 흥미로운 듯 바라보던 석환은 일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향해 돌아서 참마도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고려의 장수를 마주하자 마치 장엄한 태산준령을 대하는 듯한 위압감이 밀려왔다.
 무공을 익히고 난 후, 무공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수많은 고수들의 목을 베어왔다.
 하지만 이런 찝찝함은 처음이었다. 진정한 고수를 만났다는 느낌. 검을 맞대기도 전에 벌써 움츠려지는 느낌. 도저히 무인으로서는 취할 수 없는 허술한 저 자세에서 풍겨 나오는 정순한 기의 흐름. 자신보다는 무공의 경지를 달리하는 고수였다.
 ‘저런 놈이 뭐가 아쉬워 고려 황궁의 하찮은 무장으로 있지? 황궁만 벗어나면 부와 명예를 주체하지 못할 텐데? 아하! 그놈이었구나. 여진족을 떨게 만들었다는 그놈.’
 그렇다고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쓸데없는 상상만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거란 최고의 무장이었다.
 하찮은 여진의 무장들과는 비교조차 불쾌했다.
 마음이 조급하였다.
 두 손으로 화극을 휘어잡았다. 화극을 잡은 두 팔뚝에 시퍼런 힘줄이 꿈틀거렸다.
 십이(十二) 성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석환의 주위에는 기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자신이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화극을 움직이기도 전에 패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척준경에게 다가간 석환은 화극을 내려 그었다.
 “분광점월(分光點月)!”
 하늘을 조각내듯 수많은 흰색 선들이 척준경을 향해 쏘아졌다.
 척준경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극들을 보며 참마도를 움켜쥐었다. 척준경의 주위에 마치 그물망이 쳐지듯 푸른색 강기가 이글거렸다.
 수많은 검기 속을 뚫고 빠르게 다가서며 제일 마지막으로 찔러오는 화극을 내리쳤다. 방천화극에서 쏘아져오던 검기들은 척준경의 호신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척준경의 참마도를 가까스로 막아낸 석환은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놀라움에 아우성치는 근육을 겨우 진정시키며 화극의 끝을 급히 잡아당겼다.
 “참(斬)!”
 크게 회전한 석환의 방천화극은 둥글게 궤적을 그리며 척준경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졌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가공할 공격이었다. 연회석에 앉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도 위축될 정도의 검기가 주위를 향해 퍼져 나갔다.
 척준경을 향해 내려친 방천화극이 어느 순간 두꺼운 철벽을 내려친 듯 멈춰 섰다.
 눈을 치켜 뜬 석환이 멈춰선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 강렬한 기운으로 이글거리던 방천화극은 척준경의 참마도에 가로막혀 멈춰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척준경의 입가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석환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놈은 나를 조롱하고 있다. 피하거나 공격할 필요조차 없으니 네 마음대로 가진 기량을 다 펼쳐보라는 듯.’
 이 때 척준경이 석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군의 무용은 이 정도면 충분히 견식한 것 같소이다. 이제 내 칼을 받아보시겠소?”
 척준경은 석환을 향해 순식간에 다가섰다. 그와 동시에 참마도는 석환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피할 수 있는 빠름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참마도가 마치 하나의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그저 살겠다는 본능으로 화극을 들어 간신히 막아내었다.
 막기는 하였는데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잠시 화극에 의해 멈춰선 참마도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 두 팔을 들어 올려 참마도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던 석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척준경의 참마도를 버티기 위해서는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했다.
 두 발이 땅에 박히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놈은 전력을 다하지도 않고 있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공력도 없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자신을 누르고 있는 참마도의 무게만 더 늘어가고 있었다.
 이제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무릎을 꿇든지 더 버티다가 몸 전체가 땅 속에 박히든지.
 하지만 저 정도의 무위라면 무릎을 꿇어도 기분 나쁠 것이 없었다.
 자신도 무장이었다. 비겁한 암수라면 몰라도 이런 엄청난 무공의 차이는 자존심을 세울,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졌소.”
 힘겹게 버티던 석환은 신음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한 마디를 토해냈다.
 참마도를 거두어들인 척준경은 황제를 향해 군례를 올린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돌아 걸어 나갔다.
 이곳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연회석이 아닌 선정전의 창합문이어야 했다.
 선정전 안은 조용하였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 정벌에서의 척준경의 무용담은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약간의 전공을 크게 포장하여 만든 가십거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풍문으로 전해들은 무용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사내로 태어나 무공을 익히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했다.
 자신들의 소속에 의해 할 수 없이 척준경에게 겉으로만 복종해 오던 금오위 일곱 명의 장령들에게는 더욱 충격이었다.
 무공 실력도 없는 자가 이자겸과의 담합에 의해 약간의 전공으로 금오위장군의 자리를 꿰 찼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본 척준경의 신위는 감히 자신들이 넘볼 수 없는 다른 경지의 무공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합문의 가운데에 멈춰서 참마도를 늘어뜨린 척준경의 좌우에 조용히 늘어섰다.
 “하하핫! 자, 잔을 들지요? 연회의 분위기가 이리 가라앉아서야 되겠소?”
 술잔을 높이 치켜든 이자겸이 좌중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 합하.”
 “자자, 합하께서 한 잔 하라고 하지 않소이까?”
 “금오위장군의 무공이 그저 쓸 만하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합하?”
 “합하, 금오위장군에게도 술 한 잔 내려주시면 감읍할 것이옵니다.”
 “하하, 그러면 그리해볼까?”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황제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 황제 자신을 염두에 두고 처신하는 신료들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이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척준경의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
 요나라의 사절단이 귀국한 후, 일 년의 시간이 지났다.
 봄꽃이 필 무렵 오아속의 친서(親書)를 가진 오고률부의 부족장인 아골산이 여진의 사절단을 이끌고 고려를 방문하였다.
 사절단의 목적은 동북 아홉 성을 다시 돌려받는 것이었다.
 여진 사절단은 도성 밖 객사에 여장을 풀었다.
 사절단의 부사 자격으로 따라온 착화는 고려의 황제를 만나기 전에 해야 할이 많았다.
 함주 평야를 빼앗긴 뒤 이 년여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부족민들의 식량 사정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렇다고 다시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부족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전쟁 없이 함주 평야를 되돌려 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여진으로서 헤쳐 나갈 최고의 방법이었다.
 착화 자신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하겠다고 오아속에게 말을 하였을 때, 오아속은 강경히 거절하였다. 착화를 믿고 의지하는 오아속의 마음은 두터웠다. 그런 주군을 모시고 있었기에 착화는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다고 항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니면 교류도 없는 고려에 들어와 그 짧은 시간에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착화는 오아속의 불호령을 들으면서도 끈질기게 주군을 설득하였다.
 이제 자신이 주군의 신임에 대한 보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 날 저녁 여진 사절단이 머물고 있는 객사에는 서너 명의 여진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착화의 명령을 받고 고려에 들어와 밀무역을 하고 있던 상인들이었다.
 착화는 부복하고 있는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너희들이 살펴본 고려의 권력은 어떻더냐?”
 “군사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이 고려의 모든 권력은 황제의 장인이며 태부인 이자겸이 틀어쥐고 있사옵니다. 비중이 있는 어떠한 사안도 이자겸의 결정이 있어야 하옵니다.”
 “흠. 그러면 무장들도 이자겸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이더냐? 아무리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심지가 깊은 무장 세력은 존재하거든. 그리고 이런 무장 세력이 견제 세력이기도 하고.”
 “네, 그런 것 같사옵니다. 문하시중인 윤관이 있기는 하온데 이 자는 출신이 문관이옵니다. 몇몇의 장수들이 윤관을 따르기는 하지만 이자겸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아니옵니다.”
 “음. 그렇다면 이자겸만 회유하면 우리가 어떠한 요구를 하더라도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로군.”
 “그럴 것이옵니다. 군사.”
 “알았다. 그동안 고생하였다. 내 다시 돌아가면 너희들과 교대할 자들을 보내도록 하겠다.”
 “네, 감사하옵니다.”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샌 착화는 이튿날 아침 이자겸의 저택을 찾았다.
 집사에게 금가락지 한 쌍을 슬그머니 건네며 이자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청을 넣었다. 뒤 끝을 흐리는 집사의 얼굴을 보며 보석이 들은 주머니를 찔러 주었다.
 늘상 있었던 일인 듯 주머니를 열어 속을 확인한 집사는 저녁 때 다시 오라는 말을 남긴 뒤 집안으로 사라졌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착화는 퇴청한 이자겸을 만나기 위해 어두워진 이자겸의 저택 문을 두드렸다.
 집사의 안내를 받고 고려의 실세라는 이자겸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 나에게 볼 일이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합하.”
 “여진의 장사꾼이 나에게 볼 일이라? 허어.”
 “소인은 여진의 장사꾼이 아니라, 여진의 대추장 오아속 태사 휘하의 군사 직분을 맡고 있는 착화라는 자이옵니다. 어제 도착한 여진 사절단의 부사이옵니다.”
 “허면, 예부에 기별하면 될 터인데?”
 “아니옵니다. 그건 내일이라도 하면 되겠지요. 어찌 고려에 오면서 합하께 문안을 먼저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옵니까? 합하께 올릴 예물을 가져 왔사옵니다.”
 “허헛. 내가 뭐 대단하다고. 헌데, 이럴 때는 뭔가 그럴 듯한 청이 있어서 그럴 텐데?”
 이자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착화를 바라보았다.
 “네, 그러하옵니다.”
 “그래, 그 청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합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함주 평야를 돌려주시옵소서.”
 “무어라? 함주 평야를?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동북 구(九)성을 쌓아 함주 평야를 지키고 있으나 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대규모의 군대를 오랜 기간 주둔시키는 것은 고려로서는 부담이 되지 않사옵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서 얻은 땅인데?”
 “함주 평야를 계속 고집하면 그만큼 재정적인 피해도 계속 늘 뿐 아니라 흘려야 할 피도 멈추지 않을 것이옵니다.”
 “네 감히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어차피 고려가 함주 평야를 차지한 목적은 국경을 안돈하고자 하는데 있지 않사옵니까? 함주 평야를 돌려주면 고려의 국경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사옵니다. 주둔하는 군대가 없어지는 만큼 고려의 재정 사정도 풍요로워 질 것이옵니다. 그리고 함주 평야에서 걷어 들이는 수확을 생각하여 고려에 매년 공물을 바치겠사옵니다.”
 “으음.”
 잠시 생각할 틈을 주었다가 착화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뿐 아니라 참지정사 상서좌복야(參知政事尙書左僕射) 합하께도 예물을 따로 준비하겠사옵니다. 여진의 특산물인 장백산의 최상급 호피나 대완마들도 말이옵니다.”
 “흐음. 나에게는 따로 예물을 바치겠다는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저희 여진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음. 좋다. 내, 그리하마. 내일 예부에 황제 폐하 접견을 청하도록 하여라.”
 “합하의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이튿날, 회경전에서는 여진 사절단의 황제 친견이 이루어졌다.
 여진 사절단이 올린 오아속의 친서를 통해 여진의 제의를 전해들은 조정 대신들은 모두 이자겸의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이 제의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이자겸의 한 마디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조정 대신들의 눈길을 외면하며 이자겸이 운을 떼었다.
 “대신들의 의향을 듣고 싶소? 한번 허심탄회하게 말들을 하시구려.”
 오랜만에 아픈 몸을 이끌고 입궁을 한 윤관이 입을 열었다.
 “이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소. 함주 평야를 차지하기 위해 흘렸던 고려 백성의 피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시오?”
 이자겸의 의중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이부상서가 윤관의 말에 대꾸를 하였다.
 “하지만 함주 평야를 계속 고집하면 더 많은 피를 계속 흘려야 되지 않소이까? 소중한 백성들의 피를 말이오이다.”
 “동북 구성을 내주면 여진족이 잠잠할 것 같소. 예전의 그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오. 백성들의 삶이 또다시 고단해진단 말씀이외다.”
 “그건 기우외다. 저들이 친서에 밝히지 않았소이까? 잠잠할 것이외다. 그들의 군사력은 어차피 우리 고려와 견줄 수 없소이다. 게다가 매년 공물을 바친다는 데 제의를 받아들여도 좋다고 보오이다.”
 “어찌 그리 편하게 생각하시오? 함주 평야가 저들의 손에 다시 넘어가면 그 곳에서 나는 곡물로 예전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키울 것이오이다. 그걸 다시 잠재우려면 두 해 전 정벌 때보다 더 큰 피를 흘려야 한단 말이오이다.”
 “문하시중 합하! 하지만 군대를 아홉 성에 주둔시키고 있는 지금의 어려움도 생각하셔야 하오. 지키기에 비해 그 곳에서 생기는 실익은 상대적으로 너무 적소이다.”
 “어허. 이부상서. 지금 눈앞의 이익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지 않소?”
 언쟁을 듣고 있던 황제가 이자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짐(朕)은 그래도 동북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태부의 의향은 어떠시오?”
 “소신이 보기에는 이부상서의 말이 합당하리라 보옵니다. 지키기보다는 내어주는 쪽이 더 이익이 클 것이라 보옵니다. 폐하.”
 황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자겸이 저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 난 것이다.
 저 늙은 여우가 여진 놈들에게서 뭔가 미리 챙겼으리라. 언제까지 이런 허수아비 노릇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경들도 그리 생각하시오?”
 “네,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러면.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여진 사절단이 귀국한 두달 후 동북 구성에 머물던 고려군은 천리장성 이남으로 후퇴하였다.
 고려군이 철수하여 비어진 아홉 성에는 여진의 정예병들이 속속히 들어차기 시작하였다.
 
 
 제 3화. 무영대 탄생
 
 
 봉래산.
 예로부터 불로의 신선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해동 최고의 명산이었다.
 봉래산 북쪽 끝자락. 반 년 전부터 숲이 무성하고 어두워 인적이 드문 북쪽 골짜기에 목수들이 수시로 드나들더니 몇 채의 커다란 오두막집이 들어섰다.
 그 후 반년 동안 서너 명씩 열 살 안팎의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이 건장한 장정들과 함께 산채에 모여들었다.
 이 곳 산채에 들어온 뒤 아이들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뜻하지는 않지만 추운 겨울바람을 피할 수 있었고 먹는 음식도 아침저녁으로 충분히 주었다.
 방은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침상이 있는 단순한 구조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방에 오십여 명의 아이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열 개의 방에 아이들이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눈이 쌓여 온통 은빛으로 변한 산줄기를 바라보며 몇 해만에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젠 꽁꽁 얼은 땅 위에서 거적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 마을로 가야 밥을 조금이라도 더 비럭질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행복(?)한 날들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길 바랐다.
 아이들이 무사들을 만났을 때는 동냥을 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있는 동안이나 배고픔에 지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담벼락 밑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더 이상 추운 배회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도 주겠다고 하였다. 게다가 무공을 가르쳐 주고 제대로만 익히면 나중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다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무사들은 은인이었다.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은 사치였다.
 방에 자유롭게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은 그동안 헐벗고 굶주려서인지 바싹 말라 뼈만 앙상하였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그 험한 세상을 겪어서인지 눈빛은 날카롭고 독기가 서려 있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노인 한 명과 네 명의 삼십대 사내가 산채에 나타났다.
 이들의 뒤를 한 명의 여자아이와 두 명의 사내아이가 뒤따르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이곳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른 처지가 아닌 듯하였다. 다른 아이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안내된 아이들은 구석자리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와 있던 아이들도, 새로 들어온 아이들도 서로에게 무관심하였다.
 아이들이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사내들에게 말을 건넸다.
 “저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거라.”
 뒤 쪽에 서 있던 네 사내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놀랍게도 반 년 전 척준신이 만났던 중천의 천주 호위인 현무위였다.
 “네, 알겠사옵니다. 천주님.”
 노인은 중천의 천주인 무아선인이었다.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그는 단지 정갈한 분위기의 시골 노인이었다.
 “저 세 아이들의 근골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독기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죽음이 오가는 그 헐벗고 추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챙겨주는 것으로 보아 심성이 비뚤어지지도 않았고. 내가 어릴 적 저러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나를 독종이라고 했지. 몸이 부서지는 것을 오히려 즐겼거든. 후후.”
 아이들이 기거하는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에서 몇 명의 무사들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앞서서 걸어오던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무아선인 일행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선무검문의 동계 지부장인 능필(能弼)이라고 하옵니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능필이 검문의 문주로부터 이들에 대하여 전해들은 것이라고는 이들이 아이들의 무공을 가르칠 것이고 무공 수위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라는 것. 그리고 문주 자신을 보듯 이들에게 예를 다하라는 것뿐이었다.
 무아선인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능필을 마주하였다.
 “지부장께서 고생이 많으셨소이다. 그럼 이제 우리가 아이들을 맡도록 하지요. 검문에서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관리해 줄 몇 명의 인원만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네,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귀하들께서 아이들 지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문주님의 명이 계시었사옵니다. 여러 명이 있어봐야 번거로울 테니 꼭 필요한 십여 명의 인원만을 기거토록 지시하였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연락을 주십시오. 바로 해결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네, 그리하지요.”
 “그리고 연공실은 미리 언질 해주신 대로 꾸며 놓았습니다. 다섯 척 정도의 폭과 깊이로 둥글게 구덩이를 팠사옵고 그 가운데에 한 사람이 겨우 앉을 만한 크기의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사옵니다.”
 “모양새만 비슷하면 되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이다. 허허.”
 “그런데 그런 모습이 수련할 때 도움이 되옵니까?”
 “선사(先師)께서 저에게 그리 가르치셨지요. 지금까지 보면 내공 수련할 때는 많은 도움이 되더이다. 아무래도 내력(內力)으로 생기는 기(氣)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어 바닥이 단단할 때보다는 방해를 받지 않으니까요.”
 능필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내공을 사용하여 유형(有形)의 강기(剛氣)를 만들 수 있다면. 이 노인은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면 만난 수많은 고수들과도 경지를 달리하는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능필은 부하들을 이끌고 산채를 떠났다.
 무아선인 일행은 안내된 막사 안으로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여장을 풀었다고는 하나 사실 풀 짐도 없었다.
 무아선인은 방에서 나와 막사 안에 거실처럼 꾸며진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수련실 겸 회의실로 쓸 양으로 오십 평 크기의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곳이다. 돌과 흙으로 다진 바닥은 평평하고 단단하였다.
 조그만 탁자 하나와 의자가 다섯 개. 이것이 가구의 전부였다. 무아선인은 흡족했다. 애초에 가지는 것보다 버리는 것을 즐겨하는 성품이라 탁자와 의자도 사치라고 여겨왔었다.
 탁자 쪽으로 다가가 가운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근래 들어 내가 너무 호사를 누리는군.”
 뒤 따라 들어왔던 사(四) 호위 중 백호위가 말을 이었다.
 “아니옵니다. 천주님. 천하 최강의 문파인 중천의 천주님이시옵니다. 본 천의 적수는 고려 뿐 아니라 중원 무림에도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어느 문파든 장문인이 이리 검소하게 생활하는 경우는 없사옵니다.”
 “백호위, 자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야. 몸이 편해지면 뜻이 느슨해지는 법이다. 우리 같은 무인들에게는 아주 커다란 병이지. 우리 중천이 추구하는 것은 무(武)와 협(俠)이지 편안함이 아니지 않느냐?”
 “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텐데. 우선 기본 체력과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 무공은 그 다음이다. 수련 방법은 너희들이 겪었던 방식이 어떻더냐?”
 “너무 어리지 않사옵니까?”
 “아니다. 어릴수록 더 좋아. 그리고 너희가 하였던 것보다 더 혹독하게 해야지. 기간도 단축하려면 말이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몸을 초월하는 육체에 쾌와 환을 갖춘 자객의 모습이다. 극한 체력과 인내심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느니라. 너희들도 알고 있지 않느냐? 동영의 인자술을 본 천의 반도가 동영에 전수한 것을. 자객과 호위대를 키우기에는 우리의 수련 방법만큼 좋은 것도 없느니.”
 “네, 알겠사옵니다.”
 “내일 아침부터 바로 시작하거라. 아참, 그리고 귀주에서 데려온 그 세 아이들은 더 유심히 살펴보도록 하거라. 우리 중천을 이끌 아이들로 키우고 싶구나.”
 무아선인은 귀주에서 보았던, 눈으로 얼어붙은 뒷골목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추위를 견디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추위와 배고픔에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이 있으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강하면서 정기가 어리던 눈빛들. 후인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들어나 보군. 감상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허헛.”
 중천 사 호위는 고개를 들어 무아선인을 바라보았다.
 단언컨대 살아있는 최고의 고수였다. 자신들에게는 신이었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속하들은 천주님께서 더 감상적이 되셨으면 바라고 있사옵니다. 수련도 조금씩만 하시고 말이옵니다. 천주님의 적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조금은 쉬셔도 되옵니다.”
 “아니다. 무공의 끝자락을 저기 보이는데 손에 잡히질 않는구나. 나는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니라.”
 “······.”
 무의 궁극으로 가는 길. 하지만 고금을 통틀어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머리로는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몸으로는 불가능한 경지. 선대 천주에게 들었던 무공의 궁극의 경지. 자연류의 경지. 무아선인은 그 경지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가서 쉬도록 하거라.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네, 알겠습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오백여 명의 어린 아이들이 막사 앞 공터에 모였다.
 중천 사 호위의 수좌인 현무위가 아이들 앞에 섰다.
 “이 앞에 서 있는 우리 네 명이 너희에게는 무술 사부이다. 이미 너희들은 이곳에 오기 전 여기에서 너희들이 겪어야 일에 대해서 말은 들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혹독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무공을 가르쳐줄 것이다. 수련 과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갈 것이다. 아니, 하루에 몇 명이 죽을 지도 모른다. 분명 너희는 나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너희들에게 약속한다. 이곳에서의 오 년 생활을 무사히 마치면 세상의 그 누구도 너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손에 검이 쥐어졌을 때는 너희의 적수는 없을 것이다. 자, 이제 선택하거라. 강요하지 않는다. 여기에 남든지, 아니면 여기를 떠나든지. 일각의 시간을 주겠다. 그 전에 떠나라. 일각 후 이 곳을 떠나려면 죽어야만 가능하다.”
 일각 동안 십여 명의 아이들이 산채를 떠났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이제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도 힘은 들겠지만 지금 저 앞에서 말을 하는 무사의 말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확히 일각 후, 남아 있는 오백여 명의 아이들에게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현무위가 앞서 산정상을 향해 뛰기 시작하였다.
 “나를 따라 뛰어라. 늦는 자는 무자비한 몽둥이 찜질이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되돌아오지 못하면 끼니는 없다.”
 칼날 같은 바위로 이루어진 곳만을 골라 현무위는 뛰었다.
 길게 늘어서 뛰고 있는 아이들의 중간 중간에는 나머지 백호위, 주작위, 청룡위가 앞뒤로 오가며 몽둥이 찜질을 해대었다.
 몽둥이를 맞지 않으려면 서지 말고 계속 뛰어야 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뛰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을 따라 뛰어가기에 정신을 놓을 수도 없었다.
 산 정상을 향해 뛰기 시작한 지 겨우 이각이 지날 무렵, 비명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절벽 아래도 바위였다.
 떨어진 아이들은 몸이 부러지고 뇌수가 터졌다. 잠시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더 이상 움직임은 없었다.
 아이들이 멈춰 섰다. 하지만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부들의 몽둥이가 머뭇거리고 서 있는 아이들의 몸 위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약한 감상이 아니다. 그저 어떠한 경우에도 살겠다는 강한 의지만이 필요할 뿐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같은 막사에서 잠을 자던 아이들이었는데.
 더 이상 생각을 이을 틈도 없이 아이들은 산 정상을 향해 뛰어야했다.
 한 낮이 지난 후에야 겨우 산정상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쉴 틈도 주지 않고 사부들은 몽둥이를 앞세워 다시 산채를 향해 뛰도록 다그쳤다.
 하산하는 길은 더 어려웠다. 이미 다리는 풀려있었고 정신도 혼미하였다.
 “죽기 싫으면 정신을 차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라.”
 하지만 그게 의지로만 될 일은 아니었다.
 하산하는 길에 다리가 풀인 아이들이 비명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해가 질 때까지 산채에 도착한 아이들은 없었다. 아이들은 해가 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였다. 아이들에게 저녁 끼니는 없었다. 아이들은 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잠시 숨을 헐떡이며 공터에 널브러져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술시가 되자, 아이들에게 사부들은 가부좌를 틀고 숨을 쉬는 법을 가르쳤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할 것이다. 지금 배우는 숨 쉬는 방법을 잘 기억하거라.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반복해야 한다. 얼마나 제대로 숨을 쉬었느냐에 따라 내일의 하루가 달라질 것이다. 제대로 숨을 쉬는 것. 이것이 너희들의 목숨을 지켜줄 것이다.”
 아이들은 오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잠들기 전까지 가르쳐준 대로 숨을 계속 쉬어야 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전날보다도 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하지만 신기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아랫배에 조금이나마 기운이 모이는 기분이었다.
 달리기 시작한 지 두 시진이 지나자 쓰러지는 아이들이 속출하였다. 아랫배에 모아지는 기운을 쓰기에 몸의 근육이 받쳐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위에 여지없이 사부들의 몽둥이가 떨어졌다.
 몽둥이를 세게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스치듯 맞기만 하여도 그 고통은 내장을 뒤흔들었다.
 몸의 근육이 뒤틀리고 기라는 기는 다 빠져나갔어도 몽둥이가 전해주는 고통에 두 다리는 계속 움직였다.
 오늘도 굶을 수는 없었다. 오늘 굶는 것은 내일의 죽음을 예약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아이가 절벽에서 미끄러져 나무뿌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냥 발아래만 보며 앞으로 달렸다.
 간간히 뒤에서는 절벽 아래로 멀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
 그들 셋은 눈과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귀주의 뒷골목에서 노인을 만났다.
 서로 끌어안고 추위를 견디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밤을 넘기기가 힘들 것 같았다.
 뒷산에 유일하게 있었던 폐가는 거지 떼들이 차지하였고 그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났다.
 노인이 말을 걸었다.
 “나를 따라 가겠느냐? 이처럼 비참하게 살지 않을 만한 힘을 주겠다.”
 여자아이가 옆에서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내아이를 보며 힘없이 물었다.
 “오라버니, 어떻게 할 거야?”
 또 한 사내아이도 여자아이가 오라버니라고 부른 아이에게 결정을 미루었다.
 “형이 결정해. 난 어떻게 해도 좋아. 형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갈 거야.”
 세 아이는 자기들의 나이를 몰랐다. 그저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이었다. 비슷한 나이에 몸집도 비슷하였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사내아이를 형으로, 오라버니로 의지하였다.
 아직은 조그맣고 연약한 몸집이었지만 한 번 입술을 깨물고 차분하게 말을 하였다.
 “따라가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생존에 대한 의지와 결단력. 그리고 어리지만 깊은 눈빛.
 노인은 이 사내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너희를 최고의 무사로 만들어주겠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혹독한 생활이 이어질 것이다. 그래도 가겠느냐?”
 “네, 할아버지를 따라가겠어요.”
 그렇게 그들은 봉래산 산채에 들어왔었다.
 ***
 아이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생존에 대한 의지는 대단하였다. 이틀째 저녁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먹었다. 저녁을 먹지 못한 몇몇의 아이들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산채 부근의 풀을 뜯어 먹곤 설사를 하며 탈진해갔다. 그 아이들을 돌봐줄 여유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갔을 뿐이었다.
 삼 일째 날이 밝았다. 뛰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단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다리를 번갈아 내딛고 있을 뿐이었다.
 세 아이는 이미 삼 일을 굶었다. 하지만 더 빨리 뛸 수는 없었다.
 다리를 다쳤는지 두 아이는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나머지 한 아이가 그 둘을 양쪽 어깨에 하나씩 부축하며 힘겹게 다리를 움직였다.
 “헉헉. 형, 먼저 가. 이러다가는 형까지 굶어 죽겠어.”
 “헉헉. 그래. 오라버니라도 먼저 가. 우리 때문에 오라버니까지 굶으면 되겠어?”
 “아니다. 너희들이 굶는데, 어떻게 내가 끼니를 때워? 약속한 거 기억나지?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는다.”
 심장은 이미 터질 듯 숨 한 번 쉬기가 힘들었다.
 신기하게도 사부들이 가르쳐 준대로 숨을 쉬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겨우 할 수 있었다.
 이미 굶는 것은 익숙하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제대로 뛰지도 못할 거고. 결국은 굶어 죽거나 저 천 길 낭떠러지에서 생을 마감하겠지.
 ‘더 이상 굶는 것은 곧 죽음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 한다.’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그렇게 믿고 따르는 동생들. 나이가 자기보다 많은지도 모르지만 그저 동생이었다.
 “내가 먼저 갈게. 너무 늦지 않게 와라. 너무 늦으면 밤에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알았지?”
 두 아이를 뒤로 하고 앞만 보고 달렸다.
 산채에 돌아왔을 때, 해는 아직 서산에 걸려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 아이들의 손에는 밥과 반찬을 합쳐서 뭉쳐놓은 주먹밥이 하나씩 주어졌다.
 주먹밥을 받자마자 아이들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주먹밥을 먹어치우는 동료들과는 달리 주먹밥을 옷의 안 춤에 넣고는 막사 옆 나무 밑으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각이 지나 기다시피 산채로 들어온 동생들에게 주먹밥을 가지고 다가갔다.
 주먹밥을 셋으로 나누었다.
 “자, 먹어.”
 두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우린 죽어도 같이 죽기로 했잖아.”
 동생들을 바라보던 아이가 말을 이었다.
 “아주 천천히 먹어라. 그리고 내일도 또 뛰어봐야지. 귀주 폐가에서 피떡이 되어 쫓겨나던 그 날 일······ 생각나지?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자.”
 세 아이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먹밥을 씹어 먹었다.
 무공의 끝을 잡고 하루 종일 씨름을 하다가 지친 무아선인은 잠시 수련실에서 나와 멀리 보이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았다.
 동해의 기운과 봉래산의 산세가 머무는 곳.
 기가 넘실거려 예로부터 신선의 땅이라 여겨지던 곳.
 보일락 말락 하는 무공의 끝자락을 잡기 위해 자리를 잡았는데. 기를 호흡하기에는 수월하였으나, 무언가 답답하였다.
 무아선인의 눈에는 공터 끝에서 모여 앉아 주먹밥을 천천히 씹고 있는 세 아이가 보였다.
 이상하리만치 애착이 가는 아이들이었다.
 이틀을 굶고서도 먹는 것을 서두르지 않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꽤나 쓸 만할 거야. 허허. 근골이야 저 아이들 셋 모두 타고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놈들이야. 저런 어린 나이에. 허헛. 혹여 내가 생사경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특히 저놈에게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을 훑어보고는 사 호위를 찾았다.
 수련실 안의 탁자에 모여든 호위들에게 무아선인은 다짐하듯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의 마음이 무거운 것은 잘 알고 있다. 저렇게 어린 아이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것이 편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저 아이들을 살리고, 저 아이들에게 약속했던 강자(强者)의 삶을 주는 길임을 잊지 마라. 너희들도 보지 않았느냐? 지난겨울 우리가 거두지 않았으면 죽었을 목숨들이다. 조금 더, 조금 더 다그치도록. 알겠느냐?”
 “존명!”
 수련실을 나온 사부들은 아이들을 공터로 모이게 하였다.
 “지금부터 자시(子時)까지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한다. 호흡에만 신경을 써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아이들은 자시까지 꼼짝을 할 수가 없다. 피곤에 지쳐 쓰러지면 여지없이 사부들을 몽둥이가 몸을 스쳐갔다. 사부들의 몽둥이가 스쳐가는 곳은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혈들이었다. 쓰러졌던 몸도 저절로 자리가 잡혔다.
 한 달이 지나자 아이들은 절벽을 타고 산길을 달리는 것이 익숙해졌다. 여전히 숨이 차고 힘들기는 하였지만 몽둥이를 맞지 않고도 해가 지기 전 산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충분한 식사와 돼지고기가 주어졌다.
 나름대로의 잔치가 있은 다음 날 아침, 사부들은 창고에 쌓여있던 열 근 짜리 쇠사슬을 꺼내어 아이들의 양 발목에 하나씩 묶도록 명령하였다.
 “그 쇠사슬은 앞으로 언제 어느 곳에 가든 항상 차고 있어야 한다. 다 묶었느냐? 그럼 산꼭대기를 향해 뛰어라.”
 아이들에게 지옥은 다시 시작되었다. 발목과 발등이 까지고 피가 흘렀다. 발목에 묶인 쇠사슬은 천근만근이었다.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지금 흘린 피가 훗날 너희 목숨을 살려줄 것이다. 지금의 고통을 견디지 못할 바엔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다. 무사의 길은 험한 길이다.”
 며칠간 횟수가 줄어들었던 추락 사고가 다시 늘어났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느덧 그 무게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되돌아오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공터 이곳저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또다시 한 달이 지나자 아이들의 양 팔목에 열 근 짜리 쇠사슬이 하나씩 더 감기었다.
 양 팔목의 쇠사슬까지 익숙해질 무렵 이십 근의 쇠사슬을 몸에 감도록 하였다.
 여섯 달의 시간이 흘러 가을이 시작할 무렵 삼백여 명의 아이들만 산채에 남았다.
 이제 아이들은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이면 이미 산채에 돌아올 만큼 날렵해졌다.
 동틀 무렵 막사의 앞에 모인 아이들의 앞에는 다섯 자 길이의 철장(鐵杖)이 쌓여있었다.
 “앞에 있는 철장을 하나씩 잡아라. 이 철장을 몸에서 떼어 놓지 마라. 잠을 자든 밥을 먹든 그 어디를 가든지 말이다.”
 철장을 하나씩 집어들은 아이들은 봉래산 정상을 향해 뛰었다.
 두 시진도 되기 전 산채로 다시 돌아온 아이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고통은 없었다.
 산채로 돌아온 아이들은 그 누구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자신들이 늘상 앉아 있던 자리로 가 가부좌를 틀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고 오시(午時)가 가까워지자 막사 앞으로 사부들이 나왔다.
 여기저기서 호흡을 하던 아이들도 막사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검술을 배울 것이다. 최고의 검술에 필요한 것은 검과 상대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필요한 만큼 검을 움직일 기(氣)와 힘이다. 몸이 빨라지면 눈도 맑아지는 법. 초식이란 동작을 엮어 놓은 형식일 뿐이다. 우리의 검술에는 초식이 없다. 단지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내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검을 움직이는 것뿐이다. 검을 의식하지 않을 때 새로운 검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이 과정이 얼마나 빨리 끝날지는 너희들의 능력에 달려있다.”
 잠시 말을 멈춘 백호위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검술의 기본은 보법(步法)과 격자지법(擊刺之法)이다. 보법에는 체보(掣步), 진보(進步), 진체보(進掣步), 충진체보(衝進掣步), 연보(連步), 도보(跳步)가 있다. 격법(擊法)은 들어치기(豹頭擊), 갈겨치기(剪擊), 나래치기(翼擊), 허리치기(腰擊), 걸쳐치기(跨右/跨左擊), 훑어올리기(僚掠)이 있고, 세법(洗法)은 들어베기(鳳頭洗), 허리베기(虎穴洗), 걸쳐베기(騰蛟洗)가 있다. 자법(刺法)은 역린자, 탄복자, 쌍명자, 좌협자, 우협자가 있고 격법(格法)은 거정격(擧鼎格), 선풍격(旋風格), 어거격(御車格)이 있다. 잘 보거라.”
 백호위가 검을 잡고 자세를 취하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동작을 외워라. 그리고 격자지법을 보법과 함께 모든 순서를 뒤바꾸며 쉬지 말고 반복하거라.”
 사부는 격자지법의 각 동작을 머리에 새겨 넣으라는 듯 천천히 동작을 반복하였다.
 “만류귀종(萬流歸宗)! 모든 무공이 이 동작들 속에 있다. 지금부터 시작하거라. 쉬지 않고 하여도 하루 밤낮은 걸릴 것이다.”
 아이들은 사부가 시키는 대로 순서를 바꿔가며 검술의 기본 동작을 반복하였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데도 아이들은 철장을 휘두르고 있었다.
 손과 발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순서가 틀리거나 잠시 멈추기라도 하면 사부란 놈들은 귀신처럼 다가와 사혈을 건드렸다.
 그 고통에 몸은 마치 조종을 받는 듯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날 밤이 돼서야 모든 동작을 단지 한 번 반복할 수 있었다.
 주먹밥 하나씩을 간신히 먹은 아이들은 막사 앞 여기저기에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도 이 호흡이 자신들의 고통을 줄여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잠과 싸우면서 한 호흡이라도 더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느 순간부터 아랫배에 뜨거운 기운이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기가 모였다는 것을 감지한 사부들은 그 기운을 어떻게 몸 안에 갈무리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말하였다.
 아침이 되면 봉래산 정상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검술. 그리고 호흡.
 이것이 아이들이 이 년 동안 한 모든 수련이었다.
 이제는 서너 번의 검술 수련을 마쳐도 하루해가 남아 있었다.
 아이들의 철장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막사 옆 노송 아래 무아선인과 네 명의 사부들이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도면 환영검(幻影劍)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구나. 무림에서는 신검합일의 단계에 이르는 초입이지. 무술에 어지간히 눈을 뜬 무장들이 보아도 저 아이들의 움직임이 쉽게 파악되지는 않을게야. 동작이 빨라졌다는 것은 안력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만큼 다른 사람의 몸놀림이 느려 보일 테고.”
 “속하들보다도 훨씬 빠른 시간에 환영의 초입에 이르렀사옵니다.”
 “그럴 테지. 너희들보다도 더 혹독하게 다루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말이다. 귀주에서 데리고 왔던 그 세 녀석들은 너희들이 보기에 어떠하더냐?”
 백호위가 무아선인의 물음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은 조금 특이하옵니다. 다른 아이들은 일주천을 몇 번하면 휴식을 취하는데 그 아이들은 유독 기를 다스리는 것에 집착을 하옵니다. 그리고 가르치지 않은 것까지도 앞지르려 하옵니다. 사색하는 버릇까지 생긴 듯하옵니다.”
 “으흠.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습관이지. 사색하는 것이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무사선인이 지나가는 말처럼 읊조렸다.
 “글도 가르쳐야겠지. 그리고 수련 횟수를 조금 더 늘리도록 하고. 아이들에게 암기도 수시로 던지도록 하거라. 감각이 무뎌지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또 삼 년이 흘렀다.
 이미 아이들은 환영검의 경지에 들어선 지 오래되었다.
 아이들이 휘두르는 철장은 때로는 아름다운 꽃처럼, 때로는 백색 장막처럼 보였다.
 ***
 예종 육년, 예종 자신의 버팀목이었던 윤관이 노환으로 죽었다.
 이미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황제로서는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비통하였고, 이자겸은 오래된 정적이 사라져 시원섭섭하였다.
 검소했던 윤관의 생전 모습과는 다르게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시호도 문경(文敬)이라 내어졌다.
 윤관의 죽음으로 황권은 더욱 약화되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황성은 평온하였다.
 동북 구성을 돌려주고 국경도 잠잠하였다.
 그도 잠시, 오아속에 반기를 든 여진 부족이 생기면서 다시 국경지역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여진족을 단속하겠다던 오아속은 여러 여진 부족을 어우르느라고 여념이 없었고 이틈에 여진 철리부는 힘을 키우기 위해 고려의 국경을 넘나들며 식량을 확보하고 장정들을 끌고 갔다.
 여진족과의 담판을 주도했던 이자겸으로서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수하들과 밀담을 나눈 이자겸은 여진 철리부를 멸하고 얻는 전리품을 풀어 세간의 평판을 돌리기로 작정하였다.
 이번 정벌을 질질 끌 필요도 없었다. 짧은 시간에 정벌을 마무리하여 자신의 세력을 과시할 필요도 있었다.
 전쟁을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금오위장군 척준경이었다. 정벌군의 수장으로 척준경을 명하고 일만 명의 신기군을 주어 철리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척준경은 일만 명의 신기군을 이끌고 개경을 출발하여 봉래산 초입에 다다라 숙영을 하였다. 육 년 전 무아선인에게 맡긴 아이들을 이번 원정을 끝내고 되돌아가는 길에 데리고 가야 했다. 이렇게 자신이 황궁의 밖으로 나오면 황제의 주위에는 황제를 지킬만한 세력이 없었기에 믿을 만한 황제 친위대는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
 이번 원정대의 부장 척준신과 참군 설긍유 만을 데리고 봉래산 산채에 들어선 척준경은 막사 앞 공터에서 이백오십여 명의 아이들을 마주하였다.
 여기저기서 철장을 휘두르는 아이들. 나무 아래, 바위 위 이곳저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아이들.
 철장을 휘두르는 아이들은 동작이 너무 빨라 마치 검이 춤을 추는 듯한 환영을 보는 듯하였다.
 가부좌의 틀고 앉아있는 아이들의 주위에는 미세하나마 기의 흐름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척준경은 놀라움에 혀를 찼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척준경 옆으로 현무위가 다가왔다.
 현무위에게 포권을 취하고 아이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척준경이 입을 열었다.
 “과연 오 년이란 짧은 기간에 저리 될 수 있소이까?”
 “무공 수련자들의 오 년과 저 아이들이 겪은 오 년은 다릅니다. 저 아이들은 매일 매일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오 년의 생활을 보냈지요. 저 아이들의 수련 정도는 일반 수련자들이 이십여 년 이상 죽어라 수련한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되지요. 사실 저도 저 정도로 강도 높은 수련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요. 허헛.”
 “그 정도였소이까?”
 “저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기를 조절할 수 있고, 의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신검합일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소이다. 저 아이들 수십 명이 합공을 펼치면 화경의 고수라도 어느 정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이다. 척 장군이 고려의 최고의 무장이지만, 귀하나 우리 중천 사위(四衛)나 신검합일의 끝에서 화경을 바라보는 경지가 아니겠소? 저 아이들이 십여 명만 작심하여도 우리 목숨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오.”
 “저 아이들을 이번 원정이 끝나고 회군하는 길에 황궁으로 데려가고 싶소. 이제는 황제 폐하의 곁을 그 역적들의 주구들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점점 불안해지오. 저들을 데려가 황제 폐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 쓰려고 하오.”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 무영(無影). 무영(無影)이라.”
 현무위는 무영이란 이름을 몇 번을 되뇌었다. 저들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척준경이 무언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오호. 저들의 이름을 무영대(無影隊)라 하면 어울리겠소이다?”
 “동감이오. 하하.”
 “헌데 귀하가 느끼기에 저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 같소이까?”
 “으흠. 지금껏 저 아이들은 고통을 즐기며 살아왔소. 오직 강자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말이오이다. 저들에게 확고한 목적 의식을 심어주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외다. 아마 황제 폐하의 따뜻한 한 마디면 족할 것이오이다. 저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삶의 의지를 심어주는 자(者), 아마 저들은 그를 위해 죽을 것이외다.”
 “고맙소이다. 참, 그리고 저들에게 우리 선무검문의 검법을 전수해도 되겠소이까?”
 “그야 마음대로 하셔도 되겠지요. 처음의 약속이었으니까요. 천주님께서는 황제 폐하의 친위 호위대로는 저들 전부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 하셨소. 회군하는 길에 데려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소.”
 “고맙소이다. 그러면 그 때 뵙겠소이다. 이번 원정은 두세 달이면 족할 것이오.”
 “무운을 비오.”
 척준경이 떠나자 중천 사 호위는 무아선인이 기거하는 막사로 모여들었다.
 “천주님. 척준경 장군이 회군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황도로 돌아갈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천주님께서 하명하신대로 아이들을 내주겠다고 말해 두었사옵니다.”
 “으음······ 그럼 아이들을 선별해 두어야겠구나. 저 아이들 중에서 성취가 높은 아이들은 백암산 산채로 이동하여 수련을 계속 시키도록 하고.”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이냐?”
 “천주님께 아뢰지도 아니하고 저 아이들의 이름을 지었사옵니다. 척 장군과 대화중에 자연스럽게 나온지라 속하가 말을 막기도 그러 해서.”
 “허허, 뭔 큰일이라고. 그래, 무엇이라 지었느냐?”
 “무영대라고.”
 “무영대라.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 허허. 마음에 쏙 드는구나. 그리고 저 아이들이 겪어야 할 검의 경지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리 잘 지었느냐?”
 “송구하옵니다. 천주님.”
 백암산에는 아이들의 수련을 위해 별도의 산채를 이미 세워놓은 상태였다.
 봉래산의 북쪽에 위치한 백암산은 위로 부전령과 아래로 황초령에 이르기까지는 천불산과 명당봉 등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일단 선황인 숙종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서라벌과는 반대 방향이고 여진에 근접한 지역이어서 이자겸 일당의 이목에서 벗어나 눈치를 보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어떠한 일을 벌이더라도 황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백암산 자락의 마을들은 여진족들과 국경을 접하여 여진족들이 손쉽게 넘어와 약탈을 자행하는 변방지역이라 항시 긴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때로는 전투에 참가하여 실전을 익히기 쉬워 목숨을 담보로 수련하기에는 최적이었다.
 실전무예를 몸에 배게 하고 항상 긴장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무예의 발전 속도를 몇 배로 빠르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키우려는 것은 자객의 모습이다. 자객은 갖추어야 할 인(忍), 술(術), 기(氣), 지(知)의 습성을 모두 갖추어야 하지. 진정한 자객과 진정한 무인의 모습은 같다고 봐도 돼. 척살을 위해서는 목표를 죽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야. 목표를 제거한 후에 몰려드는 호위무사들과 싸우며 살아서 돌아오는 것은 몇 배 더 힘들거든. 그런 목숨이 오가는 찰나에 얻어지는 것이 검술에 대한 깨달음이고 말이야.”
 무아선인은 네 명의 호위를 둘러보았다.
 호위의 수좌인 현무위에게 물었다.
 “혹, 너는 동영의 쾌검술을 본 적이 있느냐?”
 “네, 십여 년 전, 동영의 인자(忍者)들이 교주도의 제 이(二)황숙 사저에 나타났을 때 검을 섞어봤사옵니다.”
 “어떠하더냐? 검의 움직임을 알아보겠더냐?”
 “움직임이 기괴하고 빠르기는 하였으나 초식과 기의 운용 모두 알아볼 수 있었사옵니다.”
 “하기야 네가 무영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의 움직임만 보아도 이해할 수 있었을 테지. 아이들을 모두 모이게 하거라. 그리고 너는 동영 쾌검술을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르기로 초식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거라.”
 “네, 알겠사옵니다.”
 “현무야, 네가 보기에 몇 명이나 네 움직임을 알아보겠느냐?”
 “속하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따라갈 수 있으려면 최소한 환영의 단계에는 이르러야 하옵니다. 환영의 단계는 신검합일의 경지이옵니다. 이미 저 아이들도 환영의 단계에 올라선 지 오래되기는 하였사오나······ 상하의 실력 차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속하의 생각으로는 십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글쎄. 혹 아이들의 몸에 흐르고 있는 기가 보이느냐?”
 “기를 느끼기는 하지만 모여 있는 양이나 흐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사옵니다.”
 “아직 그럴 테지. 내가 보기에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을 것 같구나. 초식을 모두 이해하는 아이와 이해하지 못한 아이로 나눌 수 있도록. 거기에 따라 저 아이들의 앞날을 나누자꾸나. 그리고 여기에 남든 아니면 백암산으로 떠나든 그 뿌리가 모두 우리 중천에 있음을 각인시키도록.”
 아이들을 공터에 모아놓은 현무위는 아이들과 같은 묵빛 철장을 들고 있었다.
 철장을 머리 위로 치켜든 현무위는 두 손을 비틀며 오른손을 잡아당겼다. 여태껏 단순한 검은빛 쇠 지팡이인줄 알았는데. 현무위의 오른손에 잡혀 있는 것은 손잡이 없는 날렵한 묵빛 일자검(一字劍)이었다.
 “검을 뽑아라.”
 아이들은 자신들의 손에 들려져 있는 철장을 바라보았다. 철장의 윗부분에 미세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현무위가 하였던 것처럼 두 손으로 움켜쥔 철장을 반대 방향으로 비틀었다.
 끼-익-.
 미세한 마찰음이 들리며 철장이 분리되었다.
 손잡이도 칼날도 온통 묵빛이었다.
 아이들은 묵빛 검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현무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너희들의 손에 들려있는 묵검을 보아라. 이 땅의 정기가 서려있는 현철로 만들어진 검이다. 너희들의 지옥 같았던 수련의 시절을 같이 했던 아픔이 배어있는 검이다. 그 검을 보며 너희의 뿌리가 여기 봉래산에서 하나였음을 잊지 말거라.”
 아이들은 자신의 검과 주변의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에게 동영의 인자들이 익히고 있는 쾌검술을 보여줄 것이다. 기회는 단 한번이다. 잘 보거라.”
 현무위의 검은 하얀 빛을 발하며 휘둘려지기 시작하였다. 찌름과 베임이 교묘하게 섞인 빠름의 극치. 아이들의 눈은 검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굽이치듯 곡선을 이루다 어느 순간 급격하게 각도가 꺾이며 직선을 긋고 있었다.
 몸과 검이 하나인 듯 현란하게 움직이던 현무위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검무를 멈춘 현무위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보인 검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주춤주춤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왔다.
 “이제 더 없느냐?”
 아이들은 조용하였다.
 앞으로 나선 아이들은 거의 오십여 명에 가까웠다.
 현무위는 앞으로 나선 오십여 명의 아이들과 남은 아이들을 따로 모이도록 하였다.
 “몇 명이나 되더냐?”
 무아선인의 물음에 현무위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오십여 명 되옵니다. 허나 그 아이들을 제외하면 이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척준경 장군에게 넘겨줘야 하옵니다. 아깝지 않을 런지요?”
 “아니다. 그 정도면 족하다. 원래 우리 중천은 많은 후인이 필요하지 않아. 성취가 떨어지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을 필요도 없고. 그 오십 명의 아이들도 다 필요한 것이 아니야. 백암산에 이르면 더 혹독하게 다루어야 할 게야. 우리 중천은 무림 제패같은 것은 관심이 없어도 나약해져서는 안 되겠지. 그것이 장문인으로서 본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하고. 허헛.”
 “······.”
 “아 참. 그리고. 혹 본좌가 귀주에서 데리고 왔던 그 아이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 아이들은 당연히 백암산으로 갈 것이옵니다. 세 아이 모두 아주 특출나옵니다. 외람되오나 천주님께서는 그 아이들에게 애착이 많으신 것 같사옵니다.”
 “나이가 들으니 마음이 약해지는 게지. 늙기는 늙은 모양이지. 네가 보기에도 뼈가 흐물흐물해진 것 같지 않으냐? 허헛.”
 무아선인을 바라보는 현무위의 눈에는 이슬이 어렸다.
 인간이 그 얼마나 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 아래 최강의 무인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무아선인은 하늘이고 신이었다.
 그런데, 어찌.
 “아니옵니다. 천주님은 하늘이옵니다.”
 “허헛. 그리 생각하느냐? 허허······ 아니다. 때가 되면 하늘도 바뀌느니라.”
 무아선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두 무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갈 것이야. 황성으로 떠날 이백여 명은 고려와 황제를 위한 충(忠)의 길을, 백암산으로 가는 오십여 명은 우리와 같은 검(劍)을 위한 길을 가게 될 게야. 내일 아침 본좌는 청룡과 주작과 함께 환영의 경지에 오른 오십 명을 데리고 백암산으로 떠날 것이다. 너는 백호와 함께 여기에 남아 있다가 척 장군에게 나머지 아이들을 넘기고 오너라. 저들을 어디에 어떻게 쓰든 그것은 저들 선무검문의 몫이다.”
 “네, 알겠사옵니다.”
 “아하. 그리고. 아이들을 넘기기 전까지 아이들의 예기가 무뎌지지 않을 정도만 수련을 시키도록 하거라. 손과 발에 묶여있는 쇠사슬은 풀어주는 것이 좋겠지? 그 아이들도 그동안 고생이 심하였으니 짧은 기간 편안함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존명. 속하도 아이들을 척 장군에게 넘기는 즉시 백암산으로 따라가겠사옵니다.”
 ***
 철리부와의 전투는 의외로 손쉽게 끝났다.
 일차 여진정벌에서 척준경의 무위를 경험한 여진 장수들은 전투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부족장의 명령에 창칼을 휘두르며 다가오기는 하였지만 고려 본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배회하고 있었다.
 장수들이 이럴진대 병사들이야 한 발을 뒤로 뺀 상태로 고려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척준경을 선두로 돌진하는 고려군과 마주치기도 전에 여진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으로서는 난감하였다.
 여진 병사를 쫓기만 해서는 무엇 하겠는가. 이 기회에 약탈의 근거지를 뿌리 뽑고 싶었다.
 하지만 여진 경내로는 진군하지 말라는 황명이 있지 않았던가.
 최소한 눈앞에 보이는 동태진성(東太鎭城)을 점령하고 병사들을 주둔시켜야 약탈을 막을 수 있지 아니한가.
 이것이 나약하게 썩어빠진 고려 조정의 모습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 성을 점령하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동생과 함께 성을 바라보던 척준경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돌아가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성을 점령하지는 않더라도 시간을 조금 더 끌어 여진 놈에게 경고 정도는 남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어차피 한두 달 더 끌어봐야 종래는 같아지겠지. 그리고 금오위의 장령들을 아직 믿지를 못하겠어. 몇 년 같이 생활하면서 가끔 속을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이자겸의 그늘에 있다. 호위대 놈들은 더욱 못 믿겠고. 아마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많이 기다리고 계시지 않겠느냐?”
 “네, 그렇겠지요. 형님.”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봉래산에 들려야 하니 서두르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백암산 산채에 이르자 사부들은 아이들 앞에 오십 개의 현철로 만든 묵빛 가락지를 놓았다.
 가락지는 아무런 무늬도 없이 단지 ‘무영(無影)’이라는 글자와 일(一)에서 오십(五十)까지의 숫자가 음각되어 있을 뿐이었다.
 사부들은 그것이 우리들의 이름이라 하였다.
 하기야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여기저기를 헤매며 비럭질을 할 때부터 자신들의 이름을 잊어버렸었다. 아니, 기억이 난다고 해도 거의 비슷비슷한 그런 이름이었다.
 세 아이가 주워들은 가락지는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져가고 남은 세 개였다.
 「무영(無影) 사(四)」, 「무영(無影) 팔(八)」, 「무영(無影) 구(九)」
 “형은 어떤 거로 할 거야?”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어. 너희들이 먼저 골라.”
 “형이 ‘사(四)’를 가져. 그래도 제일 먼저잖아. 그리고 너는 ‘구(九)’를 가져.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손위잖아. 히히.”
 “알았어. 오라버니~.”
 그렇게 그들의 새로운 이름이 정해졌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을 것도 없었다.
 백암산 산채에서의 수련은 더 혹독하였다. 뛰는 거리는 더 멀어졌고 팔과 다리의 쇠사슬은 더욱 무거워졌다. 아무리 가려 뽑혀진 아이들이라 하여도 하루하루가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오르내리는 지옥이었다.
 몸이 고통에 적응이 되면 사부들이란 작자들은 기가 막히게 알고 수련 강도를 높였다.
 쇳덩이를 몸에 붙이고 뛰는 곳도 위험천만한 절벽의 끝만을 골라서 뛰었고 무영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더 높이라고 괴롭혔다.
 사람의 몸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 자신들을 실험 대상으로 여기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부턴가 몸에 진기가 모이고 몸의 고통이 편안함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있으면 몸이 불안하였다.
 항상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절벽 위를 뛰어야 했다.
 몸에 진기가 흐르는 상태에서 시퍼렇게 웅웅 거리는 묵검을 보이지 않게 휘두르고 있을 때, 가장 평온하였다. 검속에 기를 어떻게 불어 넣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 느낌만은 알았다.
 일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또 흘렀다.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니었다.
 수련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무아선인은 뿌듯하였다.
 중천의 장문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벗고 있는 기분이기도 하였다.
 “저 아이들의 성취는 이미 신검합일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 이제 수련 방법을 바꾸어도 되지 않을까? 너희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무아선인은 양쪽에 시립하여 있는 중천 사 호위에게 물었다.
 “저 아이들은 이미 속하들의 하수가 아니옵니다. 무공 수련의 동반자들이옵니다. 저희가 가르치기에는 너무 커버렸사옵니다.”
 “그래. 저 아이들은 이제 가르쳐야 할 단계가 아니지. 그냥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가 스승일 게야. 혼자 생각하고 혼자 무공의 길을 찾아가야 하는······ 저 아이들에게 사색이 곧 수련이지.”
 “속하들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후후. 너희들도 본좌로 인하여 무공 수련을 하고 싶어도 많이 참았을 게야. 때로는 힘들었을 테지?”
 중천 사 호위는 그 자리에 서둘러 부복하였다.
 “아니옵니다. 천주님을 모시는 것은 속하들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이옵니다.”
 “아니야. 무공에 대한 열정이 없는 너희였다면 본좌는 너희들을 아끼지도 않았을 게야. 본좌는 너희의 그런 모습이 좋았어. 때로는 안타깝기도 하였지만 말이야.”
 네 명의 수하들을 그윽이 바라보던 무아선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본좌에게 호위는 필요하지 않아. 너희들이 본좌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너희도 저들의 수련에 참가하도록 하여라. 그동안 고생한 너희들에게 이 정도는 해줘야 본좌도 덜 미안하지 않겠느냐?”
 “천주님······.”
 중천 사 호위는 말끝을 흐렸다. 끝없이 강하면서도 정에 약한, 자신들의 지존은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우리 중천 무공의 약점이 있다면 좁은 고려의 무림에서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것이지. 비무를 통해, 그것도 실전 비무를 통해, 목숨이 오가는 찰나에 문득 문득 떠오르는 것이 무공의 심득(心得)이지. 후훗. 본좌가 장문의 자리에 오르기 이전, 선대 장문인께서 본좌에게 마지막으로 명했던 수련 방법이 자객행(刺客行)이었다. 우리 고려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셨을 게야. 본좌는 동영과 송나라를 오가며 당시 최고의 고수들을 베었지. 그들을 죽이면 그 수하들이 떼거리로 덤비더군. 수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 그 목숨을 담보한 자객행에서 본좌는 무영의 경지에 이르렀다. 내 저 아이들에게 그 일을 시키려한다. 여진족들도 험한 북방의 바람 속에서 살아온 놈들이지. 의외로 강한 놈들이 많이 있을 테지.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황궁에도 정보 단체가 있을 테니, 척살 대상은 척 장군에게 부탁하면 선정해 줄 것이옵니다.”
 “그리하자. 현무야, 네가 한번 개경에 다녀 오거라.”
 “존명.”
 “본좌도 한 번의 환골탈태를 더 경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수련을 하였는지 모른다. 무림 역사상 유일하게 천검대제께서 경험하셨던 자연검의 경지. 그 경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허허. 저놈들 중 누군가에게 미뤄봐야지. 허허.”
 “속하들은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지존께서는 자연검의 성취를 이룰 것이옵니다.”
 “나이가 들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정확히 알게 되지.”
 ***
 척준경의 제 이차 여진 정벌은 이자겸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끝났다.
 아직 척준경을 믿기에는 석연치 않았으나 역시 척준경의 무위는 탐낼 만하였다. 미꾸라지처럼 날렵하고 호랑이처럼 사납기로 소문난 여진 철리부를 그렇게 순식간에 토벌한 것을 보면 역시 전신(戰神)이었다.
 이번 정벌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척준경에게 환심(?)도 살 겸 성대한 승전연회를 준비하였다.
 개선하는 병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환영 인파가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 앞을 발 딛을 틈도 없이 메우고 있었다.
 주작문 앞의 연무장에는 술과 고기가 가득하였다. 척준경은 일만의 개선군을 축하연에 밀어 넣고 직속의 금오위 소속 정예병과 이백여 명의 흑의 무사를 대동하고 외궁 밖의 동락정에 이르렀다.
 그 흑의 무사들은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앳돼 보이는 십칠팔 세의 아이들이었다.
 손에는 묵빛 철장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온통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척준신에게 금오위 소속 정예병들과 그 흑의 무사들을 외궁 북쪽에 위치한 금오위 병영으로 인솔해 가도록 일렀다.
 금오위의 세 명의 장령들과 신기군의 좌우 별장들만을 이끌고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는 이제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척준경이 도성을 떠나있는 동안 자신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였다.
 황제의 친위 호위대는 외부의 자객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와 외부의 어느 누구 사이에 연락이 오가는지를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업무였다.
 오죽하면 무장들 사이에서는 호위대장이라는 직책을 서로 기피하고 있지 아니한가.
 호위대장을 아무나 시킬 수도 없고 이자겸으로서는 호위대장을 임명하고자 할 때마다 이름 있는 무장 중 하나를 구슬려야만 했다. 그리고 일, 이 년 후에 그럴싸한 자리로 옮겨줘야 하니 이 또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호위대가 이런 실정이다 보니 황제로서는 척준경의 금오위가 내성 사대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황제와 이자겸의 환대는 대단하였다.
 그 자리에서 원하는 것이 무어냐 물었다.
 황제와 이자겸을 번갈아 보던 척준경이 말했다.
 “소신은 금오위를 맡고 있는 것으로 족하옵니다. 도성의 문을 지키는 것으로 소신은 충분하옵니다.”
 “아니오. 장군이 상을 거절하면 이번 정벌에 누가 있어 공을 이야기할 수 있겠소? 태부께서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오?”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자겸도 황제의 말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척 장군을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짐의 마음이 편하겠소. 말씀을 해 보시오.”
 척준경은 잠시 머뭇거렸다.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황제와 이자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주청을 올리겠사옵니다. 이번 원정에서 부장으로 따라 나선 장수들도 소신만큼이나 공을 세웠사옵니다. 특히 금오위의 제 일(一) 장령인 척준신은 아둔한 소신의 머리가 돼주었사옵니다. 하오나 전장을 누빈 장수들만큼 황성에 소신이 떠나 약해진 금오위의 약점을 메꾸어 주신 호위대장에게도 크나큰 공이 있사옵니다.”
 “마땅히 모두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래, 어찌하면 좋겠소?”
 선정전의 문 앞을 오가고 있는 호위대장 이원(李元)을 잠시 바라보았다.
 척준경의 말을 못 들은 듯 호위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목을 꼿꼿이 세우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지못해 호위대장직을 맡고 있는 이원은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불만인 듯 개선군을 곱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원정에 참여하여 그동안 쌓여있던 불만들을 여진 놈들의 목에 풀어놓고 그 공으로 서로 기피하는 이 호위대장이라는 자리를 빨리 벗어났어야 했는데. 이것이 이원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었다.
 “호위대장께서도 지난 이 년 고생을 하셨사옵니다. 외람되오나 호위대장을 대장군으로 승차시키시고 그 자리를 척준신에게 맡겨보시는 것이 어떠실 런지요?”
 황제는 이자겸의 안색을 살폈다.
 이자겸도 불만이 없었다.
 어차피 힘깨나 쓰는 무장이라고 하면 서로 피하려고 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저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호위대장도 지금쯤은 자리를 바꿔주어야 했다.
 “폐하, 그렇게 하시지요. 척준신이라면 무공뿐 아니라 계략에도 뛰어나다고 들었사옵니다. 무리 없이 호위대장 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좋소이다. 그리하지요.”
 황제의 친위 호위대의 호위무사들은 도무지 친황대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무공 실력이면 유명무실한 호위대에서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 대신 용호군이나 응양군에 들어가 십호장이라도 감투를 쓰고 으스댈 수 있었다.
 재수 없게 줄을 잘못서 친황 호위대까지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몸을 뺄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척준신으로 호위대장이 임명되면서 친황 호위대는 대대적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일천여 명에 가까웠던 호위무사는 이백여 명으로 대폭 감축되었다. 지금껏 호위대에 있던 호위무사들은 은화 오십 냥의 포상금을 주고 중앙군의 군관으로 편입시켰다. 그들이 떠난 호위대는 봉래산에서 데리고 온 무영대로 대치하였다.
 황금색의 화려한 무복도 버렸다. 황제의 호위무사라는 표시는 검은색 무복의 가슴 부분에 그려진 ‘황(皇)’이란 글자가 전부였다. 그들은 단지 황제의 주위에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검은 그림자들일 뿐이었다. 황제라는 자리 때문에 체면상 필요했던 친황 호위대이기에 조정의 대신들은 호위무사를 줄이는 것도 무복이 초라해지는 것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호위대는 금오위 군영이 위치해 있는 외성의 북쪽 군영의 한 전각을 숙소로 사용하였다.
 척준신은 이백여 명의 무영대를 무영 좌대와 무영 우대로 나누어 자신이 검문에서부터 아껴왔던 두 심복 무사를 좌대장과 우대장에 임명하였다.
 좌대와 우대는 번갈아 황제의 정전과 침전을 호위하였다.
 호위를 하지 않고 숙소에서 쉬고 있는 동안에는 선무검문의 비전 절기를 수련하도록 하였다. 무영대의 무사들은 어차피 중천의 문인들이 아니었다. 검문의 절기를 가르치고 검문의 정신을 주입시켜 검문의 문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무영 대원들은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봉래산의 그 살인적인 수련에서 벗어나 지금하고 있는 수련은 거의 휴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검법을 가르치는 좌우대장들의 무공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검문의 검법을 배우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호위대 숙소에 있는 동안 충분한 시간의 휴식과 전표가 주어졌지만 무영 대원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젖어온 생활. 몸이 편하고 시간이 남아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더 힘든 일이었다.
 때로는 봉래산의 그 험한 생활이 그리웠다.
 누가 시킬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연무장의 이곳저곳에서 무영검을 휘두르며 수련에 몰두하였다.
 황제는 자신의 호위대장을 바꾸고 나서 적이 마음이 놓였다.
 마음 편히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까지 하였다.
 자신의 뒤쪽에 시립해 있는 호위대장을 돌아보았다.
 “호위대장. 호위대는 눈에 띠지 않는구료?”
 “지금 이 선정전 주위에 백여 명의 호위대가 몸을 숨기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나타나라 명하실 때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저들의 이름은 무영대라 하옵니다. 황제 폐하의 그림자가 되어 죽을 것이옵니다. 저들에게 삶의 목적은 오직 황제 폐하시옵니다.”
 “저들의 무공은 어떻소?”
 “저들 개개인의 무공은 소장과 견주어 결코 아래가 아니옵니다.”
 “그 정도요?”
 “네, 그러하옵니다. 저들 이백여 명이면 감히 장담하건데 일만 명의 금오위 전체와 필적할 만 하옵니다. 저들의 호위를 받는 한 폐하께 위해를 끼칠 자는 없을 것이옵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황제는 알지 못할 당당함이 밀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에게는 폐하와 소장, 그리고 무영대 좌우대장의 명만을 듣도록 일러두었습니다. 설사 태부 합하가 명을 내린다하더라도 저들은 무시할 것이옵니다.”
 “그리하였는가. 아······ 혹시, 호위대장이 퇴궐하였을 때 저들에게 시킬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내시서기 설긍유의 전갈은 받들도록 일러두시게.”
 “네, 알겠사옵니다. 폐하.”
 ***
 백암산 산채.
 무영대의 무사들도 저 앞에 서 있는 인자한 모습의 노인이 자신들로서는 감히 범접하지도 못할 무공의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혀 무공이라고는 익히지 않은 모습. 하지만 고려 최강의 장수로 알려져 있는 척준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네 명의 사부들의 이야기들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무아선인은 오십 명의 무영대를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무공은 환영(幻影)의 경지, 보통 무림에서는 신검합일이라고 단계이기도 하지. 지금의 환영의 단계에서 검을 제대로 감출 수 있다면 새로운 무공의 단계를 깨닫게 되느니라. 그 단계가 너희 앞에 놓인, 다음 단계인 무영의 경지이니라. 무영의 경지는 실전에 의해서만 경험할 수 있느니라. 목숨을 담보로 하여 순간의 시간에 오가는 것이 새로운 무공의 경지니라. 이제 어떻게 수련을 하게 될 것인지 앞에 있는 사부들이 알려줄 것이니라.”
 무아선인이 막사로 들어간 후, 현무위가 무영대를 향하여 굵직하게 말을 이었다.
 “새로운 경지를 넘어서기 위해 실전 경험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너희들에게 자객의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주어진 척살 임무를 수행하면서 순간순간 검의 새로운 경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자객 임무임으로 너희가 누구인지 전혀 들켜서는 아니 된다. 꼬리를 달고 백암산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 지는 너희의 본능에 맡기겠다.”
 무영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쇠사슬을 주렁주렁 두르고 무영검을 왼손에 거머쥐고 현무위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라. 지금까지 너희들은 십여 년을 같이 지내왔다. 서로 믿음이 가는 동료들끼리 모이거라.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 자객행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지. 너무 많으면 은밀히 움직이기가 힘들 것이다. 지금부터의 모든 수련은 조별로 실시한다. 먹는 것, 잠자는 것, 수련하는 것, 모든 것을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 알겠느냐?”
 “네.”
 무영대의 대답은 낮고 짧았다.
 다섯 내지 여섯 명씩의 열 개의 조가 만들어졌다. 마지막 조만이 세 명이었다. 무영 사(四)호, 무영 팔(八)호, 무영 구(九)호. 그들이었다.
 열 개의 조에게 주어진 기한은 석 달이었다.
 무영대는 척살 대상 여진과 거란의 최고의 무장들을 암살하기 위해 북쪽의 땅으로 무리를 지어 흩어졌다.
 무영대에게 주어진 것은 각 조의 척살 대상이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것이 전부였다.
 북쪽의 땅으로 향하는 무영대는 막막하였다. 척살 대상이 무슨 무기를 사용하고 어떠한 절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호위대를 거느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고 있는 것이라는 하나도 없었다.
 석 달 후, 아예 돌아오지 못한 조도 있었다. 설혹 돌아왔다 치더라도 한두 명씩은 척살 도중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마지막 조가 돌아왔다. 조원이 모두 살아서 돌아온 조는 마지막 조밖에 없었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무영대는 자신들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척살 대상을 죽이는 것은 쉬웠다. 그동안 지옥의 사자처럼 자신들을 몰아붙이던 사부들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북방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살아왔다던 이민족의 무장들은 강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고통은 척살 대상을 죽인 후부터였다.
 추격대는 죽여도, 죽여도 계속 몰려들었다.
 사냥개와 북방 무림의 고수들을 앞세운 추격대 놈들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게다가 무영대의 귀환길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감추기 위해서도 여기저기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추격해오는 상대 고수들의 공격을 눈으로는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처치하기에 근력과 검의 움직임을 뒷받침해 줄 내공이 부족하였다.
 오랜 수련 과정에서 얻은 초인적인 인내력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뿐이었다.
 첫 번째 자객행 이후 무영대원들은 무영검을 휘두르며 검술을 수련하기보다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내공 수련을 하거나 무언가에 골몰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꽤나 쓸 만한 놈들이지. 허허. 수련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저놈들도 이제는 서서히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을 게야.”
 무아선인의 혼잣말과 같은 말을 현무위가 받았다.
 “수련이 혹독하지 않았사옵니까?”
 무아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상처를 치료할 시간을 주거라. 그리고, 다시 임무를 주어 절반 정도씩 보내도록 하거라.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검에 대한 심득이니 말이야.”
 백암산에 들어온 후, 다섯 번의 척살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동안 삼십여 명 안팎으로 줄어들어 무영대 척살조는 일곱 개가 전부였다.
 이번에 개경으로부터 도착한 척살 대상은 네 명이었다.
 이자겸의 오른팔을 자부하는 교주도 안찰사 최철진과 병부상서 곽신후, 오아속의 최측근이면서 여진 철리부 족장 파예, 거란의 우위익대장군 유소추.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 필요는 없었다.
 현무는 네 개의 척살조의 조장을 불렀다.
 “척살 대상 중 쉬운 곳은 없다. 상대의 무공이 떨어지면 그만큼 호위들이 강한 놈들로 들어차 있을 테니.”
 무표정하게 서 있는 ‘사(四)호’에게 물었다.
 “너희 조가 세 명밖에 되지 않으니, 먼저 고르거라.”
 “다른 조에서 먼저 고르고 남는 인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개경 쪽은 싫습니다.”
 사(四)호의 말과 함께 앞 편에 서 있던 두 조장들이 그래도 쉬워 보이는 최철진과 곽신후를 고른 후 막사를 떠났다.
 눈치를 보고 있던 나머지 조장은 거란의 유소추를 선택하였다. 아무래도 여진 놈들보다는 국경이 먼 거란 쪽이 경계가 덜할 것 같았다.
 “여진 철리부 족장이어도 괜찮겠느냐?”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쉬운 자는 없을 테지만 파예는 특히 어려울 것이다. 몇 번의 암살이 여진의 귀족들을 대상으로 일어나 이제는 그 경계가 대단할 것이다.”
 “······.”
 현무가 사(四)호에게 알려준 것은 오아속의 분신인 파예는 철리부를 떠나 여진의 새 도읍인 강주(江州, 길림성 부여현 동쪽 석두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척살조에게 주어지는 정보란 척살 대상의 이름과 머무르고 있는 곳이 전부였다.
 평범한 무채색의 잿빛 옷을 걸친 사(四)호, 팔(八)호, 구(九)호는 묵빛 철장을 지팡이처럼 놀리며 강주를 향해 떠났다.
 강주에 도착하여 파예가 머무는 장원을 찾아내기는 손쉬웠다. 보름 동안 파예의 주위를 살폈다. 매번 목숨을 내놓을 만큼 어려운 임무였다.
 하지만 파예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의 분신이라 생각하는 파예를 위해 오아속은 여진 최강의 고수를 호위무사로 내주었다. 게다가 여진 완안부의 비전절기인 청랑신공을 팔 성 이상 성취한 일백여 명에 가까운 고수들을 호위대로 내주었다. 파예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는 호위대를 먼저 뚫어야 했다.
 번갈아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오십여 명의 호위는 항상 파예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파예의 무공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행동하기에 앞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四)호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어찌한다.’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저놈들은 잘못 건들면 일백여 명의 고수에게 둘러싸여야 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게 되면 얼마나 많은 여진병들이 모여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팔(八)호와 구(九)호를 번갈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유인을 해주어야겠어. 팔(八)호, 네가 먼저 장원의 뒷담을 넘어. 호위대가 나타나면 최대한 빨리 한 놈 정도는 저 세상으로 보내고 백암산으로 귀환해. 아마 호위를 보고 있는 놈들 중 절반 정도는 너를 따라갈 거야. 하지만 네 경신술이면 저놈들에게 따라 잡히지는 않겠지?”
 “그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포위되기 전에 뛰기 시작하면 나를 잡을 놈은 없어. 흐흐.”
 “그럼 됐어. 그리고 구(九)호, 너도 팔(八)호가 떨거지들을 유인해 떠나면 장원의 반대편 담을 넘도록 해. 놈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을 테니. 제일 만만해 보이는 놈 한 놈만 목을 따고 최대한 빨리 도망을 가도록 해.”
 “그럼 오라버니는 어떻게 할 건데?”
 “너까지 쫓아가면 호위대는 몇 안 남을 거야.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밤이 깊어지자 파예의 장원 뒷담을 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몇 차례의 검이 부딪히는 금속성이 울려 퍼지고 수십 명의 무사들이 뒷담을 넘어 남쪽을 향해 달아나는 검은 인영을 쫓았다.
 장원 주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흘렀으나 쥐 죽은 듯 조용하였다.
 잠시 후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바람과 같이 반대편 담을 넘었다.
 “으악!”
 또 한 무리의 호위무사들이 쏜살같이 사라져 가는 인영을 따라 몸을 날렸다.
 뒤쫓아 오는 무리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도주를 하던 팔(八)호는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간간히 맨 선두의 적을 향해 암기를 날리며 도망을 가면 저놈들도 죽어라 쫓아와야 했다.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자객인데 어느 순간 지조도 없이 추격을 포기하고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또 다른 추격이 있는지 어둠 속을 살폈다.
 아무런 속임수는 없는 것 같았다.
 ‘저 놈들이 모두 되돌아가면 안 되는데. 그러면 형이 위험해.’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팔(八)호는 공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파예의 장원을 향해 경신술을 펼쳤다.
 되돌아가는 호위대를 따라 잡아 되도록이면 오랜 시간 잡아두어야 했다.
 저 정도의 고수들에게 둘러싸이면 자신의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바로 형의 목숨이었다.
 일각의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호위대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성난 호랑이처럼 호위대의 후미를 덮친 팔(八)호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무영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앞만 보고 달리고 있던 맨 뒤의 호위무사가 검과 함께 두 토막이 났다.
 “조심하라. 검기다.”
 “청랑검진을 펼쳐라.”
 열여덟 명의 호위무사들이 청랑검진을 펼치기 위해 정해진 방위로 흩어졌다.
 청랑검진. 위로는 검진의 이름처럼 푸른 한 마리의 거대한 늑대가 으르렁거리며 팔(八)호를 노려보기 시작하였다.
 “나머지는 장원으로 돌아간다. 따르라.”
 팔(八)호는 서서히 틀이 잡혀가는 검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진이 완성되기 전에 몇 명이라도 목을 따야했다.
 그 시간 구(九)호도 황당한 상황을 똑같이 겪고 있었다.
 ‘오라버니.’
 구(九)호는 악착스럽게 되돌아가는 호위대를 물고 늘어졌다.
 팔(八)호와 구(九)호가 수십 명씩의 호위대를 유인하여 사라진 후, 사(四)호는 가장 빠른 속도로 파예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 연무실로 뛰어들었다. 사방이 트인 넓은 공간이 암살을 피하기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파예는 연무실에 십여 명의 호위무사에 둘러싸여 의자에 몸을 깊숙이 감추고 앉아 있었다.
 사(四)호는 파예와 호위무사들을 훑어보았다.
 파예의 왼편에 시립해 있는 놈은 상당한 경지에 이른 놈이었다. 저놈이 호위대의 우두머리일 테지. 놈의 몸에는 내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머지 놈들도 몸에 기(氣)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이번 임무에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저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힘들어지겠군.’
 결심과 동시에 파에의 왼편에 서 있는 호위대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번개와 같이 몸을 움직여 무영검을 검집에서 빼자마자 위쪽으로 훑어 올렸다.
 그 빠름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호위대장은 몸을 뒤로 빼었다.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사(四)호는 호위대장이 몸을 뺀 거리만큼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위로 훑어 올렸던 검을 그대로 내리 찍었다.
 호위대장의 옆에 서 있던 호위무사가 그 검을 받았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무영검은 그대로 호위무사의 몸을 양단하였다.
 ‘이놈들과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저놈만 없으면 어찌할 텐데.’
 그 때 호위대장이 검을 찔러왔다. 순간 사(四)호는 망설였다.
 입술을 깨문 사(四)호는 찔러오는 호위대장의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호위대장의 검을 왼쪽 어깨로 받았다. 어깨에 칼을 맞음과 동시에 호위대장의 심장에는 무영검이 박혔다. 눈을 부릅뜬 호위대장을 발로 찼다. 호위대장이 연무실의 마룻바닥에 뒹굴었다.
 흐르는 피를 개의치 않고 파예의 목을 향해 내력을 불어넣어 이글거리는 무영검을 휘둘렀다. 놀라움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파예는 두 동강이가 났다. 사(四)호의 어깨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흘렀다. 지혈을 할 시간도 없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연무실의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놀라움에 서 있던 호위무사들의 창칼이 사(四)호를 향해서 어지러이 쏘아져왔다.
 한편을 막고 한편으로는 피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 몇 개의 검(劍)은 살갗을 찢으며 지나갔다.
 창칼이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피가 배어나왔다.
 고통을 느낄 시간이 없었다.
 문이 부서지고 사(四)호의 몸은 장원 앞마당에 떨어졌다. 그 때 장원의 담을 넘어 호위무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호흡이 거칠고 땀에 절어있는 것으로 보아 동생들을 쫓아갔던 호위무사들인 것 같았다.
 ‘후후. 녀석들. 그래, 너희들은 살아야지. 다행히 추격은 따돌렸나보군. 그럼 나도 슬슬 시작해볼까. 여진 놈들의 칼에 돌아가신 부모님들 한(恨)이나 풀어드려야지. 그러다가 죽어도 여한은 없을 테지.’
 무영검을 땅에 박았다.
 오른손을 들어 칼에 맞은 어깨에 피가 멈추도록 혈을 눌렀다.
 피를 많이 흘렸지만 마음은 평온하였다.
 피가 멈추자 땅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무영검의 주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청백색 검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하였다.
 오십여 명이 넘는 호위무사들은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자신들보다는 경지를 달리하는 고수였다. 검기라는 것이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청랑검진을 펼쳐라.”
 호위무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채 완성되지 못한 검진을 향해 사(四)호는 뛰어들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큰 움직임은 명을 재촉하는 행동이었다.
 안력이 빼어나 상대의 검의 움직임이 보이고 자신의 빠른 움직임 또한 자신이 있었기에 사(四)호는 달려드는 호위무사들의 약점만을 골라 검을 박아 넣었다.
 오래할 수 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어느 한 곳을 뚫고 도주를 해야 했다.
 만만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이미 검진은 완성되어 푸른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환상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이었다. 정문 쪽 청랑검진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검진의 뒤쪽에서 두 명의 무사가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자 호위무사들은 두 편으로 갈라졌다.
 “야, 이 빌어먹을 놈들아, 그냥 갔어야지, 뭐 하러 다시 돌아왔어?”
 구(九)호가 사(四)호를 흘겨보며 입을 삐쭉였다.
 “오라버니가 죽으면 어차피 우리도 못 살어.”
 “좋아, 너희가 왔던 곳을 다시 뚫어. 다행히 병졸들이 없어 화살 걱정은 없으니 무조건 앞만 보고 뛰어. 뛰는 것은 자신 있겠지?”
 척살조 세 명이 함께 휘두르는 검기는 대단하였다.
 파예의 호위대는 멈칫하였다.
 저런 검귀(劍鬼) 같은 놈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는 것. 그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어차피 자신들이 호위해야 할 파예 부족장은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 호위대장도 없었다.
 저 놈들의 무공을 보건데, 쫓아가봐야 자신들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
 자신의 이름은 단지 ‘사호(四號)’였다.
 이곳 백암산 골짜기는 봉래산만큼이나 기(氣)가 넘실거렸다.
 숨을 쉬면 쉴수록 몸 안에 내력이 쌓여가는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있었다.
 한 달 전, 여진의 철리부 부족장 파예를 척살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백암산으로 되돌아왔다.
 상대들이 찔러오는 검들이 모두 속도감 없이 보이고 상대의 움직임보다도 먼저 상대의 몸에 검을 쑤셔 넣을 수는 있었다.
 때로는 상대의 검과 몸을 동시에 두 쪽을 내야하고 끝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근력과 빠르기 만에 의존해서는 무리였다.
 여진의 무사들과 검을 섞는 그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문득 스치는 것이 있었다.
 몸속에 채워져 있는 기운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고 어떻게 검 속에 넣어야 하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하였다.
 휘두르는 검에 기가 넘실대는 것이 느껴졌다.
 온 세상이 멈춰있는 듯 조용하고 춤을 추는 듯 움직임이 편안하였다.
 몸과 검에는 청백색 기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신검합일의 마지막 단계인 환영검의 마지막 벽에 다다른 것이었다.
 
 
 제 4화. 전신은 사라지고
 
 
 예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에 자신의 병이 너무 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라 밖의 정세도, 조정 안의 꼴불견도 누워있는 황제를 계속 괴롭혔다.
 황위에 오른 이후 늘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윤관이 죽은 이후, 황제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침전의 한 켠에서 자신을 간호한다고 앉아있는 황태자가 걱정되었다.
 자신이 겪어왔던 그 험한 세월을 똑같이, 아니 자신보다 더 심하게 겪어야 할 텐데.
 자식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준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이제 어찌해야 되는지. 그래. 죽으면 끝일 텐데. 한갓 자존심이 무엇이기에.
 침전의 문 앞에 부복해 있는 설긍유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을 하였다.
 “태부에게 기별을 넣거라. 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설긍유가 침전을 나간 뒤 한 시진, 두 시진. 저녁때가 다 돼서야 이자겸은 황궁에 나타났다.
 병석에 누워있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고는 황제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식으로 황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제는 눈에 이슬이 맺혔다.
 힘없는 황제로서 받는 서러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핏줄인 태자가 겪어야 할, 험난한 앞길이 걱정되어서였다.
 “태부. 아니, 장인어른. 청이 있소이다.”
 “하명하시지요.”
 “태자를 어찌 생각하시오?”
 “어찌 생각하다니요?”
 “짐이 죽으면 성군이 되도록 잘 보필하실 수 있겠냐는 말씀이오이다.”
 이자겸은 못마땅하였다.
 아직도 태자를 어찌할지 고민 중이었다.
 몰아낼 것인가. 아니면 그냥 허울뿐인 황제의 자리에 올릴 것인가.
 황제의 눈물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어차피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었다.
 죽어가는 황제에게 선심을 쓰는 것도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폐하, 태자 저하는 폐하의 핏줄이지만 신(臣)의 외손이기도 하옵니다. 심려를 거두셔도 되옵니다.”
 황제는 이자겸의 저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안 들은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였다.
 “고맙소이다. 태부.”
 이자겸이 퇴청을 하고 난 뒤, 황제는 주위를 물리치고 호위대장을 가까이 불렀다.
 “호위대장!”
 “······.”
 “장군이 호위대장을 맡은 지난 일 년이 그래도 짐이 황위에 있던 세월 중에서 가장 마음을 편하게 놓였던 세월이었소.”
 “폐하. 망극하옵니다.”
 “아니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짐을 보아왔듯이 태자를 부탁하오.”
 “폐하.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그리고.”
 황제는 척준신을 자신의 머리맡으로 더 가까이 불렀다.
 “짐이 장군의 형제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하는가 보오. 그래도. 부탁하오. 내 부탁은.”
 황제는 척준신의 귀에 무슨 말인가를 한참을 이야기했다.
 황제의 말을 듣고 있는 척준신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제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머리를 침전의 바닥에 대며 부복하였다.
 “폐하. 심려 마시옵소서. 소신의 목숨을 걸고 폐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소신의 가형(家兄)도 당연히 그리 할 것이옵니다.”
 “아, 그리고 호위대장!”
 척준신은 목이 메여 제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선무검문의 문주이신 왕유(王裕)공에게는 기별을 하시었소? 한번 황궁에 들려 달라는.”
 “네, 폐하. 하온데 문주님께서는 황궁에 들어오시는 것을 꺼려하고 계시옵니다.”
 “음. 아직도 황위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서운함이 남아있는가 보오.”
 “그것은 아니옵니다. 문주님께서는 황위에서 밀려난 그 순간 단지 고려와 무공을 위해서만 사시겠다고 결심하신 분이옵니다.”
 “그럼, 짐이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피하는 게로군.”
 “문주님께서는 폐하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시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단지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황궁에 드나드는 것은 폐하를 위해서도 그리고 고려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전언을 보내오셨사옵니다.”
 “딴은 그렇군.”
 “선무검문은 항상 황제 폐하의 편이옵니다. 심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황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목숨이 붙어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은 어느 정도 마무리한 것 같았다.
 ***
 예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어린 나이의 인종이 황위에 올랐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자겸은 자신의 어린 딸을 예종에 이어 인종의 여인으로 황궁에 밀어 넣었다. 이 대에 걸쳐 황제의 장인이 된 것이었다.
 자신이 못할 것은 하늘 아래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황제의 자리를 꿰차는 것보다 지금이 더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권위도 황제에 비해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았다.
 이자겸으로서는 만족스러운 날들이 흘렀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외손이기도 하고 사위이기도 한 저 어린 황제가 자신의 세력을 모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과와 무과의 과거를 치렀다. 궁궐에 새로 들어오는 젊은 장수들과 문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새로 입조하는 관리들은 자연스럽게 황제를 독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건 황제와 독대를 하고 나오는 젊은 장수들과 문신들은 황제의 추종 세력이 되어갔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황제의 세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딸인 황후마저도 이자겸의 의향에 공공연히 반대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었다.
 황제를 너무 키워주지 않았나, 라는 후회가 들기도 하였다.
 황위에 오른 지 오 년여가 지나자 황제는 이자겸의 세력과 대항을 하여도 될 성 싶었다.
 도성의 경비는 척준경이 책임지고 있었다. 중앙군 이군 육위에 소속된 무장들 중에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 있었다.
 최소한 이자겸이 역모를 꾀한다고 해도 척준경이 금오위를 맡고 있었다.
 지방군의 수장으로 내보낸 황제의 심복들이 군대를 모아 도성으로 올라올 때까지는 충분히 역도들을 잡아둘 수 있을 것이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세력을 확신한 인종은 때로는 크고 작은 정책들을 독단으로 처리하였다.
 이자겸이 황제의 면전에 대놓고 위협을 하였건만 인종도 이제는 간이 클 대로 커져버린 상황이었다.
 저 간이 커져버린 황제를 어찌할 것인지, 싹이 더 커지지 전에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나은지. 이자겸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측근인 평장사 김인존, 동지추밀원사 이지언, 상장군 오탁을 자신의 사저로 불러들였다.
 이자겸은 황제를 제거해야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졌다.
 군대를 동원되어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황제만 갈아치우면 되는 것인데 어차피 힘없는 백성들이야 반대를 하고 말 것도 없었다.
 하루하루 살기 힘든 백성들로서는 황제가 누가 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어찌 시해를 해야 하는지. 그것이 문제이긴 하였다.
 내시 놈들도 설긍유가 내시서기를 맡은 이후로 황제의 곁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여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선대황제 때처럼 친황 호위대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다면 척살도 손쉬웠을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호위대 놈들에게 미리 황제를 제거할 거니까 자리를 비켜달라고 명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친황대는 호위대장이 척준신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자신들의 사람이라는 믿음이 딱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호위대 대부분이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들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무공의 수위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건드리면 뒷감당이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어차피 치러야 할 거사라면 실패할 여지가 있으면 안 되었다.
 새벽까지 밀담은 계속 이어졌다.
 이자겸은 자신의 개인 암살단과 같은 성격의 흑혈단의 특급 살수를 투입해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상장군 오탁에게 황제 척살 임무를 일임하였다.
 교주도의 태산준령 속에서 오십여 년 동안 재물을 아끼지 않고 쏟아 부으며 정성을 기울여 키운 자객단이었다.
 지금껏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척살 대상이 뛰어난 무장이 되었건 호위무사들의 장벽으로 둘러싸여있는 고관대작이 되었건 흔적도 없이 일을 처리하였다.
 오탁은 이른 아침 교주도의 험한 산속에 위치한 흑혈단의 본채를 방문하였다.
 흑혈단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드러내어 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흑혈단을 책임지고 있는 오탁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왕래를 끊고 지냈다.
 흑혈단의 단주와 마주한 오탁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단주, 한 사람을 죽여줘야겠소?”
 “상장군, 누구오이까?”
 오탁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天). 그렇다면, 황.”
 “그렇소이다. 태부께서는 특급 살수들을 투입해도 좋다고 하셨소이다.”
 “음. 헌데, 친황 호위대의 실력은 어느 정도이오이까? 그걸 알아야 몇을 보낼지 결정할 수 있소이다. 너무 많이 보내야 남의 이목만 끌 테니까요.”
 “그게. 아무래도 장담할 수 없소이다. 예전 같았으면 앞에 몇 놈만 베면 슬슬 뒷걸음칠 녀석들이 많았었는데, 새로 들어온 놈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가늠을 할 수 없어서.”
 “그럼. 특급 살수를 열 명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 정도면 예전의 호위대 이삼백여 명은 맞대결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맞대결이 아니라 암살만하고 빠질 건데 많이 과하지요. 흐흐.”
 “좋소이다. 그럼 언제하시겠소? 확실히 처리하는 게 중요하오이다. 촉박하게 시일을 잡을 필요는 없소.”
 “다음 달 그믐밤으로 하지요.”
 “알겠소이다. 수고해주시오.”
 밤하늘에 달은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황제가 잠을 자는 만령전의 담을 넘었다.
 만령전 밖은 조용했다.
 멀리 보이는 복도에는 내시와 궁녀들이 각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한발 한발 황제의 침전을 향해 다가갈수록 자신들을 지켜보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선두에 섰던 복면인이 복도의 초입에 다다르는 순간, 자신들의 주위에 갑자기 살기가 짙게 깔리는 것을 느꼈다.
 몸을 돌려보니 마치 귀신이 나타나듯 자신들의 뒤로 세 명의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만령전의 지붕에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가슴 부위에 황제를 가리키는 글자가 각인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황제의 호위대인 모양이었다.
 호위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얼굴 가린 것을 보니 자객인 모양이군. 제법 훈련을 받은 듯한데. 돌아가라. 지금 돌아가면 살려주겠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인가.
 하지만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저들의 실력은 자신들보다 위에 있다고 머릿속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순간순간 죽음의 칼날 위에서 살아온 자객의 생활이었기에 자신들의 직감을 그 무엇보다는 믿었다.
 자신들이 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흑혈단, 그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특급 살수들이 아니던가.
 우두머리인 듯한 복면인이 조용히 말을 뱉었다.
 “일 조는 저들을 막고 이 조는 나를 따르라. 하늘(天)을 없앤다.”
 다섯 명의 살수가 호위대를 막아서며 반월형 검을 뽑아들었다.
 흑혈단 살수들은 경악해야 했다.
 이미 자신들이 다가서기도 전에 앞쪽에 서 있던 호위무사가 순식간에 다가와 동료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일개 호위무사가 펼칠 무예가 아니었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는 극쾌의 검술이었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던 나머지 흑혈단은 호위무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빈 공간을 갈랐다.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놈은 이미 삼 장 밖으로 벗어나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이 또다시 움직였다. 시퍼런 검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또 한 명의 동료가 쓰러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살수(殺手)로 키워져 적과의 정면 대결에서 약하다고 해도 몸의 빠르기와 검에 대한 오성만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저놈은 검법에 형(形)도 없었다.
 쾌검을 자랑하는 자신들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가지고 놀고 있는 저놈의 빠름이란.
 뒤를 맡았던 나머지 세 명의 살수들은 얼음처럼 몸이 굳어졌다.
 황제의 침실을 향해 복도에 발을 들인 살수들도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기에는 마찬가지였다.
 세 명의 호위무사가 어느 틈엔가 나타나 복도의 입구를 막았다.
 “황제 폐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 조용히 돌아가라.”
 살수들은 대답 대신 검은 무복의 호위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일체의 방어를 배제한 공격만으로 이루어진 필살검.
 상대는 이 검을 피하든지 아니면 몸으로 때우든지.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호위대는 검을 향해 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빠름으로 인하여 검의 방향을 바꾸기는 이미 늦었다.
 검을 피할 만큼의 아주 조금만 몸을 틀며 검을 움직였다.
 “횡참(橫斬)!”
 맨 앞에서 달려오던 살수의 아래쪽에서 올라간 호위무사의 검은 몸을 비스듬하게 두 동강 내었다.
 양 옆의 두 명의 살수도 처지는 같았다. 단지 검이 뚫고 지나간 위치만이 다를 뿐이었다.
 흑혈단의 살수들은 이미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방심을 한 것도, 그렇다고 적이 미리 알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 큰 무공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었다.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도주를 해야 했다.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살아남은 살수들은 본능적으로 한 곳으로 모였다.
 “너희들은 살아남을 기회를 잃었다. 목숨을 내놓아라.”
 우두머리인 듯 앞서 있는 살수가 신음하였다.
 “너희와 같은 무공을 지닌 자들이 무엇이 아쉬워 이렇게 어둠 속에서 사느냐? 그 무공으로 어디를 가든 호화롭게 살 수 있을 텐데.”
 “후후. 그러는 너희는 무엇이 아쉬워 자객으로 살고 있느냐? 모두에게는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 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물도 지위도 아니다. 그저 우리끼리 어울려 있을 수만 있으면 되지. 원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단지 황제 폐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무영대일 뿐이다.”
 “갈(喝).”
 살아남은 살수 다섯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어올랐다.
 그중에 가장 머리를 쓴 자는 우두머리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호위무사를 향해 암기를 날렸다.
 암기를 피하기 위해 호위무사가 주춤한 사이 방향을 틀어 만령전의 담을 넘기 위해 경공을 펼쳤다.
 나머지 살수들은 검을 부딪치지도 못하고 팔다리 중에 하나씩을 내놓아야 했다.
 살아날 희망은 없었다.
 암살에 실패하여 사로잡히면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없던 사실도 불어야 했다.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본 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빨 속에 감추어져 있던 독단을 깨물었다.
 수하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흑혈단의 조장은 담장을 넘었다.
 어차피 수하들은 죽을 것이었다. 자신이 되돌아가더라도 시체를 하나 더 보태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었다.
 놈을 따라 만령전의 담장 위로 뛰어 오른 무영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살수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놈을 쫓을 필요는 없을 거야. 그리고 저놈이 돌아가 우리 무영대의 존재를 알려야 살수들을 쉽게 보내지 않지. 우리도 귀찮아지지 않을 것이고.”
 “네 말이 맞다. 그냥 돌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
 담장 위에 서 있던 무영대는 만령전 쪽으로 사라졌다.
 살아서 돌아온 살수에게서 결과를 전해들은 오탁은 아연하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실패를 모르던 흑혈단이, 그것도 특급살수 열 명을 투입했는데 친황 호위대를 뚫지 못하다니.
 “자신들은 황제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고 하였사옵니다. 그런 자들이 황제를 호위하는 한 암살은 불가능하옵니다. 자객은 소인들조차 기척을 느낄 수 없는 무공을 익힌 자들이옵니다. 소인이 거느리고 들어간 수하 아홉 명이 손 한 번 못 쓰고 당했사옵니다.”
 오탁을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자겸에게는 어찌 보고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 노회한 영감쟁이가 불같이 화를 낼 터인데. 오탁은 이자겸의 노화를 잠재울 비책을 찾아야했다.
 날이 밝자 만령전 안과 밖은 술렁거렸다.
 간밤에 황제를 시해하려 자객들이 만령전의 담을 넘은 것이었다.
 만령전 밖의 칼부림도 알지 못한 채 숙면을 취한 인종은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서야 그 일을 알았다.
 인종은 용포를 입히도록 시녀들에게 몸을 맡긴 채 설긍유를 불러 이번 사건에 대한 함구를 명하였다.
 ‘무영대라고 하였지. 참 좋은 이름이다. 짐을 위한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 그래도 반신반의하였는데 저들이 있으면 불귀의 객이 되지는 않을게야. 후후.’
 아직 만령전의 침상에 앉아 생각을 하던 황제는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호위대장인 척준신을 찾았다.
 “호위대장은 가까이 앉으라.”
 무릎 걸음으로 황제의 이 장 거리까지 다가선 척준신이 부복하였다.
 “그대는 선무검문의 문천각 부각주를 지냈다고 하였다. 윤관 시중도 그대의 지혜를 칭찬하였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잠시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은 이자겸이 외조부이기는 하나, 제거해야겠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잠시 생각을 정리하였다.
 그리고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수하들을, 그러니까 어느 정도까지 제거하고 싶사옵니까? 그 도당들을 모두 몰아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사옵니다. 그리고 그 여파도 상당히 클 것이옵니다.”
 “음······ 호위대장이 생각하기에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리라 보오?”
 “소신의 생각으로는 평장사 김인존, 동지추밀원사 이지언, 상장군 오탁, 문하시중 최식은 이자겸의 최측근이니 필히 제거하셔야 하옵고, 그리고 나머지는 옥석을 가려야 하옵니다.”
 “옥석을 가린다고는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 또한 가만히 있겠소? 아마 신변에 위협을 느껴 반기를 들 것이 틀림없소.”
 “덫을 놓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그 덫에 걸려든 자들은 모두 주살하셔야 하옵고 덫에서 벗어난 자들은 칙령을 내려 사면하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서서히 힘이 있는 자리부터 폐하의 사람을 심으시면 되옵니다. 머리를 잘라내면 역심(逆心)은 엄두도 못 낼 것이옵니다.”
 “그러면 덫은 어찌 놓겠소?”
 “소신이 무영대를 이끌고 호위대를 책임지게 될 적부터 마음에 두었던 계책이 있사옵니다.”
 “어떤?”
 황제는 눈을 크게 뜨며 상체를 앞으로 끌었다.
 “우선 도성에 주둔하고 있는 중앙군 중에서 이자겸이 덜 신임하는 육위의 병졸들을 변방지역으로 이동하도록 하여야 하옵니다. 근래 들어 북쪽의 국경에서 여진족들과 소규모 충돌이 잦아 병사들이 더 필요하기도 하옵니다. 이 때 황궁의 경비를 도맡고 있는 감군위와 금오위는 빼셔도 될 것이옵니다.”
 “황궁에서 짐이 그래도 의지할 만한 전력을 빼자?”
 “하면 응양군과 용호군만 남은 도성은 사실상 이자겸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볼 것이옵니다. 저들의 간도 그만큼 커질 것이옵니다.”
 “그럴 테지.”
 “이미 선황 폐하의 밀명을 받들어 금오위장군은 이자겸의 수하로서 처신하고 있사옵니다. 금오위장군으로 하여금 반역을 부추기도록 하여야 하옵니다. 금오위장군에게 이자겸을 도와 앞장을 서서 황궁에 진입하면 반도들은 거사가 반드시 성공되리라고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이 정도의 미끼를 던지면 공을 훔치기 위해도 앞 다투어 반역에 가담하겠지요. 되도록이면 많은 반도들을 끌어들여 기세를 완전히 꺾어놓아야 하옵니다.”
 “과연 내성 안으로 들어온 중앙군을 막아낼 수는 있겠소?”
 “사오천 명 정도는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음. 그런다고 감군위와 금오위 장졸들을 믿을 수 있겠소?”
 “금오위의 장졸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이자겸을 위한 일인지 아닌지가 중요치 않사옵니다. 이미 그들 장령과 병졸들은 금오위장군의 신위에 눌려 마음 깊숙이 승복하고 있사옵니다. 금오위장군의 명에 무조건 따를 것이옵니다. 그리고 감문위의 장령인 강수 대장군이 의기가 자못 곧사옵니다. 최소한 반기를 들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다고 금오위만을 가지고 저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소?”
 불안한 심기를 드러내는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척준신은 입을 열었다.
 “폐하, 반도들을 척살하는 것은 금오위가 아니옵니다.”
 “그러면? 누가?”
 “폐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옵니다.”
 “으흠. 호위대장!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하문(下問)하시옵소서.”
 “무영대의 정확한 능력을 알고 싶소이다.”
 “소신의 추측으로는 상당한 피해가 있을 것으로는 사료되오나, 중앙군에서 가려 뽑은 정병 사오천 명 정도는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백 명으로 말이오?”
 “네, 그러하옵니다.”
 “흠. 그러면 내성 안으로 반도들을 들여놓아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데. 좋소. 그리 합시다.”
 ***
 그동안 잠잠했던 여진족들이 다시 국경지역을 들쑤시기 시작하였다.
 여진은 동북 구성을 돌려달라고 사정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국경지역의 약탈을 자행하는 비적들을 단속해 달라는 고려 사신의 주문에도 나몰라라 하는 식으로 퉁을 놓기 일쑤였다.
 국경지역은 여진 정벌 이전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자겸은 백성들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국경의 방비를 굳건히 하자는 젊은 신료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리장성 밖에 주둔하는 병졸의 수를 늘리는 것을 수락은 하였지만 어디서 군대를 빼느냐는 것에는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맙게도 중앙군 중 육위의 병졸들을 국경지역에 투입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고려의 정예 중앙군라고는 하지만 그 수장으로 자신의 심복을 심어놓은 상태인 용호군과 응양군은 거의 자신의 사병과 같은 조직이었다.
 이보다 세력이 약한 육위의 장령들은 크고 작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상을 줄 수밖에 없는, 그리고 색깔이 애매한 무장들에게 선심을 쓰듯 넘겨준 자리였다.
 육위 중 어차피 경찰과 수문의 역할을 하는 감문위와 금오위는 빼낼 수 없었다.
 좌우위, 신호위, 홍위위, 천우위의 네 개의 진영, 사 만의 병졸을 투입해도 국경지역의 노략질은 충분히 잠재울 수 있을 것이었다.
 이자겸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전전긍긍하던 오탁은 황제 암살 사건의 전모를 이자겸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이것이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던가.
 이자겸의 화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어찌 키운 흑혈단인가. 재물을 아끼지 않고 그 오랜 세월 한결 같이 애정을 쏟아 부은 살수들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해 주었던 고마운 놈들이었는데. 특급 살수 열 명을 투입하고도 실패하다니.
 이자겸은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탁을 째려보았다.
 “그래, 상장군은 새로운 대책이라도 생각해보았는가?”
 “합하, 소장이. 이번 실패도 있고 심사숙고를 해보았사온데. 군대를 움직이심이 어떠할 런지요?”
 “뭐라? 군대를 움직인다?”
 “며칠 전에 중앙군을 북쪽 국경지역으로 이동시킨다고 황제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았사옵니까?”
 “그랬지, 나도 그 자리에 있었고.”
 “용호군과 응양군을 제외하면 도성은 비어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용호군과 응양군은 합하의 병사들이옵니다. 용호군은 내성에 진입하고 응양군은 뜻밖에 있을지 모를 황궁 밖의 일에 대비하면 황궁 점령은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예전에는 육위가 있어 꺼려하였지 않사옵니까?”
 “음. 그래도 감문위와 금오위가 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대가 말한 황제의 그림자들도 있고.”
 “척준경이 우리 편이니 금오위는 걱정할 것 없사옵니다. 그리고 감문위는 육위 중 기강이 가장 해이한 군영이옵니다. 정예병인 용호군을 동원한다면 순식간에 괴멸될 것이옵니다. 용호군 전군을 동원할 필요도 없사옵니다. 오천 정도면 충분하옵니다.”
 “맞는 말이긴 하군.”
 조금이나마 얼굴을 다시 편 이자겸은 집사를 불렀다.
 “금오위장군에게 내가 좀 보잔다고 연통을 넣거라.”
 이자겸의 연락을 받은 척준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말에 올랐다.
 무력으로 황성을 점령하자는 의논일 것이었다. 말에 올라 이자겸의 사저로 가고 있는 척준경의 머리는 복잡했다. 황제의 호위대장으로 있는 동생이 내어놓은 계책이기에 의심은 없었다. 성공을 확신하고는 있지만 거목을 쓰러뜨리는 크나큰 일이었다. 긴장으로 입술이 말랐다. 차라리 칼을 들고 고수를 상대할 때가 더 편안했다.
 “금오위는 걱정 마시옵소서. 소장이 비키라 하면 그들은 군말 없이 비킬 것이옵니다. 소장이 금오위를 맡은 지가 한두 해가 아니질 않사옵니까?”
 척준경은 이자겸에게 황성 점령에 대한 확신을 더 확실히 심어주고 돌아왔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약속한 거사일이었다. 밝은 해와 함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것이었다. 어차피 백성들이야 누가 황제가 되든 관심 밖의 일이니 말이었다.
 황성 밖 오천(烏川)으로 응양군을 이동시켜 혹시 모를 반대 세력을 대비하라고 명한 뒤 이자겸은 용호군의 오천 정예병과 측근들을 모두 이끌고 황궁의 정문, 숭평문에 이르렀다.
 숭평문의 문루에는 감문위장군인 강수가 천여 명의 감문위 병졸들을 거느리고 용호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호군의 표식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수의 호령이 밤하늘을 갈랐다.
 “어찌하여 이 밤중에 황궁으로 다가서느냐?”
 이자겸은 측근들과 용호군 장령을 포함한 도성에 기거하는 무장들을 이끌고 용호군의 앞으로 나섰다.
 “강수, 나 이자겸이다. 성문을 열어라.”
 “태부 합하, 어찌 이 밤중에 군사들을 대동하여 황궁에 드시옵니까?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시면 밝은 날 등청하셔야 하지 않사옵니까?”
 “황제가 아둔하여 하늘을 바꾸고자 한다. 길을 열어라.”
 “웬 망발이시오? 어찌 감히 신하된 입에서 황제 폐하의 폐위를 논하다니. 하늘이 두렵지도 않소?”
 “황제의 자리에 누가 앉느냐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는 법. 이미 하늘이 현 황제를 버렸다.”
 이자겸은 자신의 좌우에, 말에 올라 늘어서 있는 장수들과 조정신료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하늘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대도 동참하라.”
 강수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이런 역적 놈들. 내가 살아있는 한 어떤 놈도 숭평문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강수는 이미 성벽에 자리를 잡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진영에서 쉬고 있는 금오위와 금오위 병사들을 끌어 모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벽은 더 두터워지는 것 같았다.
 용호군과 상장군 급 장수들이 늘어선 위세를 보면 창칼을 거꾸로 잡고 성문을 열 줄 알았는데. 잠시 착각을 한 것만 같았다.
 이자겸은 조급하였다.
 곁에서 성문을 응시하고 있는 척준경을 바라보았다.
 “척 장군! 그대가 움직여주어야겠소.”
 “알겠사옵니다. 합하.”
 척준경은 서서히 말을 몰았다.
 그 뒤를 금오위 일영(一營)의 장졸들이 따랐다.
 뒤를 돌아보며 짧게 명을 내렸다.
 “성문을 태워라.”
 금오위 장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황궁의 성문을 태우라니.
 “화전(火箭)을 날려라.”
 일자로 늘어선 금오위 병사들을 훑어본 척준경은 다짐한 듯 명령을 되풀이하였다.
 금오위의 장졸들은 재차 척준경이 명을 내리자 망설임 없이 숭평문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숭평문이 불에 타 넘어가자 황궁 안으로 길이 트였다.
 성문에 가까이 다가간 척준경은 성루를 향해 외쳤다.
 “대항할 필요가 없다. 저항하면 목숨만 잃을 뿐이다. 성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너희 잘못이 아니다.”
 성벽에 기대어 있던 금오위의 장졸들은 척준경의 외침에 성벽을 넘어 대열을 이탈하였다. 자신들의 수장인 척준경은 무(武)의 신(神)이었다. 애초에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문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 수 이상의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하였다.
 강수는 낙심하였다.
 이미 싸움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자신의 생사를 결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성루 밑으로 모인 금오위의 잔여병들을 둘러보며 비통하게 말을 시작하였다.
 “내, 너희들에게 죽음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허나 나는 황제 폐하와 함께 죽을 것이다. 나를 따를 자는 만령전으로 퇴각한다. 떠날 자는 떠나도 좋다.”
 성문을 지키는 것을 포기한 강수는 자신을 따르는 이백여 명의 감문위 장졸만을 이끌고 만령전 앞으로 이동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저 반도들의 칼날 아래 죽는 것 밖에 없었다.
 반도들은 만령전을 포위한 뒤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만령전의 계단 입구에는 서로 창칼을 빼어들고 노려보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때였다.
 만령전이 활짝 열리며 황제가 호위대장과 설긍유와 함께 문 밖으로 내려섰다.
 만령전을 향해 다가서던 반도들은 황제의 모습을 보자 주춤하였다.
 반도들 중에서 이자겸을 발견한 황제는 침착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태부, 이 밤중에 병사들을 대동하고 어인 일이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이자겸은 반도들의 앞으로 나서며 황제의 말을 받았다.
 “폐하께옵서는 이 고려를 위해서 쉬셔야 하겠사옵니다. 안팎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폐하께는 너무 버거운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 태부가 이 자리에 오르시겠소?”
 “그야 모르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아니 되옵니다.”
 “허허. 짐을 이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고 보시오.”
 이자겸은 두 팔을 벌려 양옆과 뒤를 가리키며 웃음을 띠었다.
 “이 정도면 가능하지 않겠사옵니까? 폐~하~~.”
 “글쎄요. 그 정도 군세로 가능할지······.”
 “폐하께서는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하옵니다.”
 황제는 자신의 한 발 뒤에 서 있는 척준신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호위대장. 저 역적들을. 참(斬)하시오.”
 “네, 폐하.”
 척준신은 허리춤에서 호각을 꺼내 입에 물었다.
 긴 호각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순간 만령전의 안과 지붕에서 백여 명의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튀어나오며 반군들을 향해 돌진하였다.
 황제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는 그들. 무영대였다.
 믿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용호군에 접근하며 무영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현철로 만든 묵빛 일자형 장검을 빼어 들었다.
 차가운 검광이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뿌려졌다.
 무영대 무사들의 손발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었고 반란군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고려 중앙군의 최정예라고 일컬어지던 용호군이었건만 너무나 무력하게 제 일선(第一線)이 무너졌다.
 그러나 역시 용호군은 고려군의 정예였다. 이선(二線)에 있던 십부장들이 앞선으로 나서자 주춤주춤 물러서던 용호군은 어느 틈엔가 무영대와 맞서기 시작하였다.
 두 세력의 충돌로 생긴 소요가 일단 팽팽해지는 듯하자 척준신은 호각을 길게 불었다.
 피이익~~~.
 이곳저곳에서 창칼의 마찰음을 넘어 호각소리는 성벽 밖으로 퍼져나갔다.
 잠시 후, 내성의 밖에서 벽을 넘어 무영대 백여 명이 또다시 날아 들어왔다.
 오늘 밤 황제의 호위를 맡지 않은 나머지 무영대였다.
 앞뒤로 무영대의 공격을 받는 용호군은 정신이 없었다.
 사방에서 피바람이 몰아쳤다. 도륙이었다.
 용호군의 일반 병졸들은 자신이 어떻게 베어지는지조차 모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창칼에 익숙지 않은 문신들은 주춤 주춤 숭평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무영대에 비해 워낙 많은 머릿수를 가진 반도들이기에 숭평문을 향해 움직이는 자들을 막을 여력이 무영대에게는 없었다.
 용호군의 십부장, 백부장 등 무공이 높은 부장급 장수들이 무영대와 맞서기 시작하자 무영대도 반도들을 베어 넘기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척준경은 말고삐를 당겼다.
 무영대라면 어느 정도 출혈이 있겠지만 용호군의 장수들까지도 저 세상으로 보낼 수 있을 테지. 헌데 이자겸을 따라 나선 측근들이 뿔뿔이 성 밖으로 도주를 한다면 이백의 인원으로는 막기가 어려울 테고. 또 탈주한 자들이 성 밖의 응양군과 연줄이 닿는다면 황궁은 혼란 속에 빠지겠지.
 척준경은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금오위는 성벽을 점령하라.”
 숭평문의 문루에 오른 척준경은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금오위 병졸들을 향해 외쳤다.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는 파악할 틈도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금오위 병졸들의 귀에 들리는 척준경의 명령이 황제나 이자겸의 명령보다도 더 우선이었다.
 금오위 장령들의 명에 따라 평소에 번을 서던 정해진 위치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지금부터 숭평문을 통과하려는 자는 그 누구든 죽여라. 이것은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 내린 밀명이다. 알겠느냐?”
 척준경은 말에 높이 올라 참마도를 비껴들고 성문을 가로 막았다.
 이미 실패를 직감한 백부장 하나가 성문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에 주위의 백부장과 십부장들이 동참하였다.
 성문 밖 오천(烏川)에 진을 치고 있는 응양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처럼 보였다.
 마치 야차같이 움직이는 무영대였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용호군의 장수들의 합격에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선두에 서서 숭평문을 통과하려던 백부장의 목을 척준경의 참마도가 스쳐 지나갔다.
 아군으로 알고 있던 척준경의 공격에 뒤따르던 장수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아니. 장군. 왜? 우리를?”
 “너희들은 여기서 죽어야 한다. 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어찌 역심(逆心)을 품고 살기를 바라겠느냐?”
 척준경과 같이 숭평문을 지키던 금오위 일곱 장령은 용호군의 장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용호군의 장수라고 으스대며 우리 금오위를 얼마나 깔보아왔던 놈들인가.
 그동안의 설움이 칼 속에 녹아있는 듯 검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용호군의 장수들은 금오위 장령들과 창칼을 섞으며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저 뒤에 버티고 있는 척준경은 어찌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아군일 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나 적군이 되어버린 지금은 야차(夜叉)보다도 더 무서운 상대였다.
 창칼을 쥔 손에 힘이 빠지면서 몸속으로 이물질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두 시진에 걸친 도륙이 끝났다.
 이자겸을 위시한 반군의 수뇌들은 저항을 포기하였다.
 이미 내성 안에 들어온 자신들의 수하 장졸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없었다.
 숭평문을 탈출하여 응양군에 소식을 전한 자도 없으니 도움을 바랄 처지도 못되었다.
 이백 대 오천의 대결!
 무영대의 승리였다.
 감문위장군 강수는 살아있는 반군의 수뇌들을 만령전 앞으로 끌고 와 무릎을 꿇렸다.
 말에서 내린 척준경도 황제의 옆에 시립하였다.
 이자겸은 척준경을 노려보았다.
 저놈 때문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보이지 않는 호위대가 있다 하더라도 저놈이 배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황제를 저 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왜? 배신을 하였느냐?”
 척준경은 희미하게 웃었다.
 “태부 합하. 소장이 배신한 것이 아니옵니다. 소장은 여지껏 마음을 바꾼 적이 없었사옵니다. 소장의 주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황제 폐하시옵니다. 어찌 배신을 입에 담는단 말이옵니까?”
 이자겸은 그런 척준경을 씁쓸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었단 말이지. 너무 쉽게 믿는 게 아니었어.”
 자조 섞인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두려움에 차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반도들을 외면하며 황제는 척준경에게 말을 건넸다.
 “척 장군. 저들을 어찌하면 되겠소?”
 “아침 해가 뜨면 진정한 폐하의 세상이 되어야 하옵니다. 어두웠던 과거는 사라져야 하옵니다.”
 “음. 그래도 태부는 짐의 장인이자 외조부인데.”
 “폐하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제는 폐하의 세상이옵니다.”
 “고맙소. 이자겸은 옥에 가두라. 나머지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반도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감문위에게 명을 내리라는 듯 척준경은 강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의 명을 들으시었소?”
 강수의 명에 따라 감문위의 칼날에 반도의 수괴들은 목이 날아갔다.
 금오위와 감문위 장졸들은 만령전 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수습하느라 뛰어다녔다.
 척준경에게 척준신이 다가왔다.
 “형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척준경은 동생을 자랑스럽다는 듯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아니다. 네가 고생을 많이 했다.”
 시체들 사이에는 검은 무복의 무영대 무사들의 시체도 눈에 띄었다.
 “으음. 무영대의 피해는 어느 정도이더냐?”
 “이십여 명이 죽었습니다.”
 “예상보다 피해가 크구나.”
 “용호군은 고려 최고의 정예병입니다. 용호군의 십부장만 하더라도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결코 큰 피해는 아닙니다.”
 “아니야. 내가 봉래산 산채에서 저들을 처음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예기(銳氣)가 조금은 꺾인 듯싶다.”
 “아무래도 몸이 편해졌잖습니까? 그리고 수련을 한다고 해도 중천 사 호위가 직접 시킬 때보다야 느슨해질 수밖에 없구요.”
 “이제 황제 폐하의 호위를 지금껏 보다는 줄여도 될 테니 남은 무영대로도 충분하겠지.”
 “그럴 겁니다.”
 “충분한 보상을 해 주도록 하거라. 이번 일은 저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만큼.”
 “네,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보상이 없습니다. 저들에게는 재물도 계집도 휴가도 필요치 않습니다. 저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잠자고 수련할 장소만 주면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아마 중천의 기운을 받은 탓인 듯싶습니다.”
 “그래. 부럽구나. 진정한 무인이라면 저리되어야 하는데. 때로는 저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네?”
 “저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자유일 게야.”
 “아, 네. 그렇겠지요. 하지만 친황 호위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저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 숙명이라는 게 우리가 저들에게 억지로 씌운 굴레가 아니더냐?”
 새벽이 되자 도성 밖 저잣거리에는 방문이 붙어 있었다.
 간밤에 역도들이 황성을 점거하기 위해 역모를 꾀하였으나 도성에 진입한 반란군들은 진압되어 모두 참수 당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혹여 피치 못하게 반도들에게 동조하였던 자들은 과거의 반역 행위에 대한 더 이상의 치죄는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사면령도 내려졌다.
 반역에 뜻이 있었더라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자신이 머물던 자리로 돌아가 예전의 일을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었다.
 도성 밖에 머무르고 있던 응양군도 장령들의 명에 따라 자신들의 군영으로 되돌아갔다.
 단지 응양군의 장령들만이 내성 성문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응양군의 장령들은 이자겸의 추인(追認)에 의해 직에 임명되었다고는 하나 무예 역시 상당한 인물들이었다.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목을 친다는 것은 또 다른 반역을 부추기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제는 황제의 위엄을 보여야 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자는 더 이상 없었다.
 이자겸을 둘러싸고 있었던 측근들도 대부분 제거된 상태였다.
 황제는 이자겸에게 귀향을 명하였다.
 아무리 반역을 하였다 치더라도 자신의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다. 이자겸을 목을 원할 만큼 독하지도 못하였다.
 고려 개국 이래 참으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황권의 시대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밀려나면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대신하는 법.
 이것이 권세의 속성이었다.
 이자겸 일파가 제거된 이후 시간이 조금 흐르자 황숙인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 대장군 권수, 좌정언 정지상, 내시지후 김찬 등이 새로운 조정의 실세로 떠올랐다.
 이자겸이라는 같은 목표가 있을 때는 황제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되자 황제와 신료들의 꿈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황제대로, 조정의 신료들은 그들대로 꿈꾸는 세상이 달랐다.
 황제가 생각하는 세상은 황제의 울타리 안에서 평화로운 세상.
 그것이 황제가 꿈꾸는 고려의 모습이었다.
 이자겸의 역모 사건 이후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려오던 조정의 관료들이 권력의 맛을 느낀 듯 대범하게 황명을 거부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자겸이 권세를 누리던 시절과 그 정도만이 덜했지 상황은 비슷하였다.
 황제의 편처럼 보였던 무장들도 자신의 앞길을 위해 암암리에 당파를 만들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신하들 속에 묻혀 자신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한편 이자겸의 난 이후에 세력을 잡은 신흥 관료들도 나라의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만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멀리는 수나라의 양제. 가까이는 후고구려의 궁예. 모두 권력을 황제 혼자서 틀어쥐었기에 얼마나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던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신권과 황권이 어우러져 서로를 돕는 그런 세상이었다.
 아무리 하늘이 허락한 황제라고 하더라도 백성의 뜻을 외면하고 어찌 고려의 어버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와 신료는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받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서로 견제하며 고려를 지탱해야 할 두 축이어야 했다.
 자신들이 고려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황제의 힘을 누르는 것이라고 신흥귀족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자겸을 무너뜨린 황제가 자신의 멋대로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때로는 민심이라는 미명아래 황제의 앞길을 막아설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눈에 가시처럼 걸리적거리는 자가 있었다. 바로 척준경이었다. 이자겸의 개처럼 이자겸의 사저를 제집 드나들듯 하더니 이자겸을 무너뜨릴 때는 반군 중에 제일 먼저 변절하여 황제의 편으로 돌아서 반란을 잠재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 전에 황제와 밀약이 있었는지 아니면 믿고 의지할 확실한 세력이 없는 황제가 손을 먼저 내밀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아주 황제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저런 놈을 어찌 믿어야 하는지,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척준경의 무공과 그를 따르는 무장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도성의 군사력을 틀어쥐고 있는 척준경 때문에 대놓고 황제의 말을 반대할 수도 없었다.
 결국 신권(臣權)을 되찾기 위해서는 척준경을 지금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했다.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는 자신의 사저에 모인 믿을 만한 동지(同志)들에게 조심스럽게 척준경의 제거에 대하여 운을 떼었다.
 정지상 역시 제안공의 말에 동조하며 말을 이었다.
 “척준경은 도무지 믿을만한 자(者)가 못 되옵니다. 이자겸의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적보다도 못한 것이 그런 자입니다. 척준경을 제거하자는 제안공 저하의 말씀에는 저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내시지후 김찬도 정지상의 말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척준경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허리를 세우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상장군 권수가 입을 열었다.
 “소장(小將)이 응양군에 있는 첩보 조직에 명하여 나름대로 척준경에 대하여 조사를 해 봤습니다. 조사에 대한 보고를 오늘 아침에 받았는데. 이자겸의 측근이 되었던 것이 황제 폐하의 밀명이었다는 겁니다. 시류(時流)에 따라 자리를 옮겨 다니는 철새와 같은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습니다. 확실한 황제 폐하의 수족(手足)이라 생각해도 무당하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척준경 한 명이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무장들입니다. 척준경을 어찌 보던 간에 그들은 철저히 척준경에게 승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장들이 보기에 척준경의 무공은 가히 무신(武神)과 같습니다. 그리고 무장들의 복종이란 아주 위험한 것이라, 강자지존(强者至尊). 때로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황명(皇命)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라. 소장도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어찌 해야 할지를.”
 권수의 말을 듣고 난 후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척준경을 제거하기에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무력으로 제압하기에는 그의 무공이 너무 강하였다. 누가 있어 척준경 앞에 창칼을 앞세우고 대적하려 하겠는가.
 “황제 폐하를 압박하는 것이 어떨지요? 어차피 무력을 앞세워 척준경을 제거하지 못할 바에는.”
 정지상이 주위의 얼굴들을 조심스럽게 돌아보며 의향을 물었다.
 방안에 있는 자들의 눈이 빛났다.
 그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척준경이 진정으로 충심(忠心)이 있는 장수라면 그 또한 견디지 못하리라.
 제안공이 정지상의 말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리 합시다. 척준경을 탄핵하도록 하지요. 기회가 될 때마다 이구동성으로요. 그리고 많은 조정 신료들을 부추기어 상소도 끊임없어 올리도록 하고요. 황제 폐하께옵서 척준경을 감싸주는 것이 힘들어 보일 정도로 말입니다.”
 상장군 권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내세울만한 척준경의 죄(罪)가 있어야지요?”
 “허허. 상장군께서는 척준경의 죄가 얼마나 컸는지 모르십니까? 의도야 어찌되었건 황궁의 성문을 불태운 자입니다. 공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 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아하~. 그걸 소장이 잠시 잊었습니다.”
 잠시 만면에 웃음을 띠던 권수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헌데, 척준경이 스스로 죄를 청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순간 제안공은 짜증이 밀려왔다.
 “상장군! 너무 소심한 것이 아닙니까? 아니,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씀입니까?”
 “친황 호위대. 황제 폐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 말입니다. 설혹 그들이 반기라도 든다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실력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백여 명으로 오천의 용호군 정예들을 도륙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호위대가 백팔십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제거하려면 너무나 큰 출혈(出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황제 폐하께서 그들을 내치겠습니까? 폐하께옵서도 그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크실 텐데요.”
 순간 눈앞이 막막하였다.
 무영대라 일컬어지는 친황 호위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호위대장은 척준경의 동생이었다.
 척준경을 제거하려면 황제의 호위대도 제거해야만 하였다.
 모략으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하다고 할 내시지후 김찬이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권수에게 물었다.
 “상장군! 혹시 연줄을 댈 무림 세력을 알고 계십니까?”
 김찬의 질문에 권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기는 있소이다. 하지만 친황 호위대의 실력을 보건대 어떠한 무림 조직에 연통을 넣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없애는 것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창칼로는 힘들다는 얘긴데.”
 “무력이 아니라면 달리 방법이······. 이런 난감할 수가 있나.”
 김찬이 자신의 무릎을 치며 제안공을 바라보았다.
 “전하, 방법이 있사옵니다. 어차피 무영대는 몰살시켜야 하옵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한 척준경을 제거한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하옵니다.”
 “그래, 그 방법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소인(小人)이 몇 해 전 사신단을 따라 송나라에 갔던 적이 있사옵니다. 그 때 송나라 병기처의 관리와 친분을 나눈 적이 있사옵니다. 그런데 그 자가 화약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사옵니다. 검은색 가루로 되었사온데 속 빈 쇳덩이 안에 넣어 불을 붙이면 불덩이와 함께 터져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하였사옵니다.”
 “그것을 구할 수 있소? 그리고 사용할 수는?”
 “뇌물이 많이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구할 수는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화약을 다루어 본 사람도 몇 명 고용하면 될 것이옵니다.”
 “으흠. 좋소. 내가 뒷돈을 대리다. 고려를 위한 길인데 그 몇 푼 아껴서야 황실의 종친(宗親)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면 그 자에게 일단은 기별을 넣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화약 입수 후의 계책도 마련해 주시겠소?”
 “하하. 전하, 알겠사옵니다. 장담컨대 이 고려 안에서 소인의 계략을 넘어설 위인은 몇 없을 것이옵니다. 다음에 뵐 때는 흡족할 만한 계책을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김찬은 송나라로 사람을 보내는 한편 무영대를 제거할 계책을 세우느라 몇 날 며칠을 두문불출(杜門不出) 하였다.
 ***
 제안공과 정지상의 부추김을 받은 신료들을 회의 때마다 척준경의 죄를 거론하였다. 젊은 유생들은 척준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다.
 처음에는 이를 무시하던 황제도 탄핵과 상소가 반복되자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표시를 낼 수는 없었다. 선황 폐하께서 그에게 이자겸의 수하로 살아가라고 명을 내려 그리 된 것이 아닌가. 선황 폐하, 그리고 자신에 대한 충성에 대한 대가가 그를 버리는 것이라니. 황제 자신도 허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척준경에 대한 탄핵과 상소는 황제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당하고 덤비는 듯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척준경에 대한 비난은 커져만 갔다.
 황제가 척준경을 감싸면 감쌀수록 신료들은 마치 맛난 고기를 보고 달려드는 맹수들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황제는 생각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리 끈질기게 척준경을 물고 늘어지는지. 척준경의 제거는 결국 자신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지루한 신경전에 황제의 세력 하에 있던 신료들이 하나둘 이탈하였다.
 그들 역시 황제의 힘이 비대해지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몫이 작아진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척준경의 안색은 어두웠다.
 역적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갖은 모욕을 참으며 시궁창 냄새가 풍기는 역적의 소굴에서 태연히 버텼는데. 호랑이가 떠나고 늑대들이 황궁에 우글거렸다.
 저들이라고 이자겸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황권(皇權)과 신권(臣權)이 어우러지는 이상향(理想鄕)이 아니었다.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거대해진 황제의 힘을 누를 수 있는, 신권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빗발치는 탄핵에 심신이 상한 탓도 있지만 지겹도록 올라오는 상소에 시달리는 황제의 고뇌에 미루어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황제의 편에 서 있던 젊은 무장들도 저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받고 있었다.
 이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황제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죄를 청하고 황궁에서 떠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언젠가 윤관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녀석은 이 황궁에는 어울리지 않아. 황궁에서 지내기에는 황제나 백성에 대한 너의 순수함이 상처를 많이 받을 게다. 너를 위해서라도 차라리 검문에 남아 무공에 몰두하는 편이 가장 좋았을 텐데. 언제든지 치졸한 황궁의 술수들에 진저리가 나면 훌훌 털어버리고 황궁을 떠나거라. 미련을 갖지 말고. 사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처럼 생각하지. 그리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움직일 것 같지 않고. 하지만 꼭 필요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후후. 네가 없어도 고려를 걱정할 사람은 많이 있을 테니까. 지금껏 고려를 위한 너의 노력만으로도 충분해. 나도 요즘 들어 내가 없었어도 고려는 어떻게든 굴러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지금이 어버이로 모시던 윤관이 말한 그때인가 싶었다.
 자신이 떠난다고 하더라도 동생과 무영대가 있는 한 황제의 호위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거취에 대해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은 편하였다.
 ‘그래, 오늘 모두 매듭을 짓도록 하자. 그리고 내일의 떠오르는 해는 황궁 밖에서 봐야겠지. 이미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늦은 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척준경은 신흥 세력의 우두머리 격인 제안공의 저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금도 저들끼리 모여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 간의 동지(同志)의 끈을 더욱 튼실히 하고 있을 터였다.
 척준경의 방문에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 일행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안공 전하, 소장(小將)은 금오위장군의 직(職)을 내려놓고 고향인 곡산으로 내려가 초야에 묻히고자 하옵니다. 다시는 황궁에 발을 디뎌놓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요?”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척준경의 말을 곱씹었다.
 ‘어차피 밀려날 자리, 깨끗이 스스로 물러나겠다? 하지만 저 자가 물러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문제이지.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인(人)의 장막, 그자들도 제거해야 되거늘. 후후.’
 “장군 같은 충신이 조정에서 물러나면 감히 누구와 나라의 대소사(大小事)를 논하겠소? 지금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시일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언젠가는 가라앉겠지요.”
 척준경은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의 말에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뻔뻔할 수가. 조정 신료들의 탄핵과 상소 뒤에는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가 버티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늘. 하지만 척준경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옵니다. 전하.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옵니다. 소장(小將)은 단지 우둔한 무인(武人)일 뿐, 역시 정사(政事)에는 어울리지 않사옵니다. 그냥 소장은 한낱 무부(武夫)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옵니다.”
 “허허. 장군이 금오위에서 물러나면 황궁은 누가 지킨답니까? 그리고 지금 죄를 청한다면 삭탈관직보다도 더······.”
 “네,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이미 대화의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의 집을 나서는 척준경은 금오위의 장령 자리를 버리는 자신의 결정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역시 이런 추잡한 정치판에 진정한 무인을 꿈꾸는 자신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중천이 왜 그렇게 숨어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역시 무인은 무인의 길을 걸어야 했다.
 황궁으로 돌아온 척준경은 황제와의 독대를 청하였다.
 애처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앞에 부복한 척준경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였다.
 “폐하, 소장을 버리시옵소서. 소장을 내치지 않으시면 폐하께서는 너무 많은 것을 잃으셔야만 하옵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무인의 자존심까지 버렸던 신하가 아니었던가.
 “세상이 장군을 뭐라고 하더라도 짐(朕)은 장군을 내칠 수 없소. 짐(朕)의 명에 따랐을 뿐, 장군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아니옵니다. 소장의 몫은 여기까지인가 싶사옵니다. 소장의 능력은 오랑캐를 상대할 때나 필요할 뿐, 이런 평시에는 소장은 걸림돌일 뿐이옵니다.”
 “장군이 황궁을 떠나면 짐(朕)은 누구를 믿고 이 자리에 앉아있단 말이오. 다시는 거론치 마시오.”
 “이자겸을 몰아냈다고는 하나 아직 척신(戚臣)들은 많사옵니다. 그리고 이번 난(亂)을 겪으면서 권문세가의 중심에 새로이 자리 잡은 신료들도 많사옵니다. 게다가 중앙군의 장령(將領) 중에는 이미 저들의 편으로 전향한 자들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폐하의 권력에 대한 확신이 드실 때까지 저들과 치욕스럽지만 타협을 하셔야 하옵니다.”
 인종은 눈물로 촉촉이 젖은 눈으로 이 둘도 없는 충신(忠臣)을 바라보았다.
 이튿날 장시간의 설전 끝에 척준경의 죄는 암타도(岩墮島)로의 귀향으로 결론이 났다.
 고향 곡산으로의 낙향을 허락하자는 황제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황제도 신료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들도 이자겸과 다르지 않았다.
 ***
 척준경이 유배지로 떠난 며칠 후, 김찬은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의 집을 찾았다.
 “제안공 전하. 무영대를 제거할 계책을 마련했사옵니다. 척준경을 유배 보냈어도 무영대가 건재한 한은 척준경이 제거되었다고 할 수 없사옵니다. 척준경이 깃발을 세우면 그 밑으로 몰려들 무장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황제 폐하의 옥체를 언제든 끼고 있어야 하온데. 무영대가 있는 한 그게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 어찌하면 되오?”
 “예전에 말씀 올렸듯이 화약을 이용할 것이옵니다. 무영대 무사들은 화약이 어떠한 것인지 모를 것이옵니다.”
 옆자리에 앉아 김찬의 계책을 듣던 정지상이 말을 끊었다.
 “무영대를 한 곳에 모으지 않으면 화약도 무용지물이 될 터인데요?”
 “그래서 무영대를 어떻게 하면 한 곳에 모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였습니다. 무영대는 좌대(左隊)와 우대(右隊), 두 개의 대(隊)로 구성되어 한 대(隊)가 황제 폐하의 호위에 들어가면 나머지 대(隊)는 자신들의 숙소에서 쉬거나 수련을 하고 있지요. 호위를 서고 있는 이들과 쉬고 있는 무사들을 모두 모아야 하옵지요. 어떻게 하면 긁어모을 수 있을까 하는 것부터 고민하기 시작하였사온데. 전하, 혹시 설긍유를 아시옵니까?”
 “황제 폐하가 신임하는 내시서기가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무영대에게 황제의 칙명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옵니다.”
 “그래요?”
 “그 자를 포섭하였사옵니다.”
 “오호.”
 “하옵고, 무영대를 몰살시킨 후 척준신도.”
 책사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본 김찬은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에게 다가가 자신의 계책을 소곤거리기 시작하였다.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는 김찬의 계책이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고하시었소. 그대의 계책대로 하시오. 내 뒤를 감당하리다.”
 호위대장인 척준신에게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가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제안공(齊安公)과 왕래가 전혀 없던 척준신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최고의 실권자이자 황족의 연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안공의 집으로 말을 몰았다.
 제안공은 조촐한 술상을 마련하고 척준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시지후 김찬도 자리에 같이 하고 있었다.
 “내시지후에게 들으니 호위대장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생을 하신다고요? 호위대장을 위로하기 위해 내 잠시 불렀소. 결례는 되었는지 모르겠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공의 형제가 고려를 위해 헌신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도. 귀 형장(兄丈)께서 귀향을 가는 것조차 막을 수 없었고. 면목이 없소이다.”
 “아니옵니다. 소장의 형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시고 있사옵니다.”
 “그래요.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들이지요. 귀 형제들은.”
 술자리를 시작한 지 반 시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호위대장에게 꼭 빌려야 할 게 있소이다.”
 “전하, 그게 무엇이옵니까?”
 제안공은 척준신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천천히 손을 들은 제안공은 척준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조용히 읊조렸다.
 “호위대장의 목을 빌려야겠소이다.”
 갑자기 제안공는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문이 열리며 풍채가 당당한 세 명의 무장이 들어왔다.
 그들은 응양군의 천부장(千夫長) 들이었기에 척준신도 이미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척준신이 고려 최고 권력자의 면전이라 어떠한 대처도 못하고 있는 사이 세 자루의 검이 척준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황하여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려는 척준신에게 제안공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 형제의 충심은 깊이 기억하겠소. 하지만 그대들과 나는 가는 길이 너무 다르오.”
 제안공는 다짐한 듯 짧게 외쳤다.
 “베어라.”
 척준신의 몸에는 세 자루의 검이 순식간에 박혔다.
 “으윽.”
 척준신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던 제안공는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
 “네. 전하.”
 맨 앞에 서 있던 무장이 제안공의 집을 떠나 설긍유의 집을 향해 말을 달렸다.
 호위대장의 목을 베었다는 소식을 설긍유에게 전해야 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설긍유는 입궁을 서둘렀다. 이미 마음은 정하였다.
 이런 결정을 내린 자신이 때로는 치졸해보였다. 황제의 총애가 척준경에게 쏠리고 있다는 착각에 척준경의 제거에 동참을 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무영대의 몰락은 황권의 약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앞장서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입궁을 한 설긍유는 무영대의 좌우대장을 호출하였다.
 잠시 후 검은 무복의 날카로운 인상의 두 명의 무인이 내시부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두 분 대장님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대인.”
 “오늘 오후에 황제 폐하께옵서 선무검문의 문주님과 장로들을 접견할 것이오이다. 그대들도 잘 알고 있다시피 검문의 문주님은 황족이고 검문의 실력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한 것도 아니오이다. 그런데 말이오, 검문의 문주님은 선황 폐하께옵서 금상폐하를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드는 것을 거부하였었단 말이오. 그 의중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분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폐하의 호위에 유독 신경을 더 써야 할 것 같소이다. 그리고 아직도 중앙군의 천부장급들의 장령들이 이자겸을 잊지 못한 것 같다는 낌새도 있고 말이오이다. 그래서 말인데.”
 무영대의 좌우대장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설긍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명을 내릴 권한은 황제와 호위대장에게 있지만 그 말을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설긍유였다.
 “호위대장께서 무영대 좌우대 전원을 황성 밖 자남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팔각전으로 집결하라는 연통을 보내왔소이다. 폐하께옵서 납시기 전에 미리 팔각전 주위를 장악하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라는 명이오이다.”
 오늘의 호위 임무를 맡고 있는 무영 좌대의 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대(右隊)야 상관이 없겠지만 우리 좌대(左隊)까지 황궁을 떠나면 폐하의 호위는 어찌하고요?”
 이미 그런 말이 나올 것을 알았다는 듯 빙긋이 웃음을 띠우며 설긍유가 좌대장을 바라보았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궁 내에서야 무슨 일이 있겠소이까? 그리고 저희 내시부의 무예 실력도 그리 낮지만은 않소이다.”
 설긍유의 말이 맞기는 하였다. 자신들보다야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내시부의 무예 수준도 어지간하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곧 팔각전으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네, 팔각전 안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호위대장이 도착할 것이오이다.”
 선정전을 빠져나가는 무영대를 바라보며 설긍유은 한숨을 내쉬었다.
 팔각전에 이른 무영대는 내시부의 복장을 한 사내로부터 대기 장소를 안내받았다.
 전각 안으로 들어선 무영대는 인상을 찌푸렸다.
 창문이라고는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이라서 그런지 난생 처음 맡아보는 역한 냄새가 코를 괴롭혔다.
 약간의 차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호위대장이 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도 사내는 사라졌다.
 반각 정도 시간이 지나자 무영대 무사들은 무료해지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은 그들에게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좌대장이 입을 열었다.
 “지루하군. 차라도 한 잔씩 따라 마시도록 하지.”
 우대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지. 그건 그렇고 호위대장님은 왜 이리 늦으시는 거야? 차라리 수련이라도 하고 있으면 심심하지나 않지.”
 무영대 무사들은 먹음직한 음식을 하나씩 입에 넣고 찻잔에 다 식은 차를 따랐다.
 전각 밖에 다소 짙은 예기(銳氣)가 간간히 느껴졌다.
 검문의 문주가 행차하는 자리라면 문주 호위대가 나섰을 것이므로 이 정도의 무력시위는 당연할 것이었다.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이 친황 호위대가 된 이후 황제의 주위를 이리 오래 비워 놓은 적이 없었다.
 호위대장이 까닭 없이 늦는 것도 이상하였다.
 전각 밖의 기운도 험악해지는 듯하였다.
 이 때 이곳으로 안내했던 내시가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영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흔들렸다.
 “안, 안이 너, 너무 어두워서 불, 불을 밝혀야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더듬거린 뒤 떨리는 손으로 벽에 달려있는 횃불에 불을 붙였다.
 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며 불을 붙인 뒤 문을 나서기 전 천을 엮어 만든 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문을 나선 뒤 문을 닫는 것이었다.
 차를 마시고 나서 몸에서 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머리를 갸웃거리던 좌대장은 허둥대며 전각의 문을 닫는 내시를 보고 주위를 보고 외쳤다.
 “모두 밖으로 나가!”
 하지만 한발 늦었다.
 이미 전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검을 빼어든 좌우대장이 문을 후려치려는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폭발로 인하여 산산이 부서진 전각 안은 온통 핏빛이었다.
 여기저기 사지가 찢겨져 죽은 무영대의 시체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문 앞쪽으로는 재빠르게 탈출을 시도했던 무영 좌대장과 서너 명의 수하들이 팔다리가 절단되어 쓰러져있었다.
 폭발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진기(眞氣)를 끌어올려 즉사는 면하였으나, 이미 살아날 가망은 없는 듯하였다.
 뿌연 화약 연기가 사라지자 전각 밖을 에워싸고 있던 무사들이 조심스레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들어선 자는 상장군 권수였다.
 좌대장은 권수를 바라보며 힘겹게 신음을 토해냈다.
 “왜······ 우리를······.”
 권수는 아수라장이 된 전각 안을 둘러보고는 좌대장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너희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지.”
 “호위대장은?”
 “저세상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후후.”
 아는 것이 무공만일지라도 몇 년 동안의 황궁 생활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이놈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저들에게 있어서 무영대는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돌부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후후. 그런 것이었나? 하지만 상장군.”
 “······.”
 “네놈들은······ 착각을 하고 있다. 후후.”
 좌대장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하였지만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여기 있는 우리를 죽인다고 무영대가 사라졌다고 착각은 하지마라. 무영대를 적으로 돌리다니 아주 어리석은 짓을 한 거야. 무영대의 진정한 힘은 우리가 아니란 말이다.”
 말도 안 된다는 듯 화경같이 눈을 치켜뜨고 숨이 할딱거리는 좌대장을 쏘아보았다.
 “무영대의 본채에 남은 무영대 동료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괴물이지. 너희들은 우리를 죽이기 전에 그들을 먼저 죽였어야 했다. 후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권수가 차라리 불쌍하였다.
 “후후. 이 전각에 죽어있는 무영대 전원이 모두 달려들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지. 나도 그들이 부러웠거든. 같이 수련을 하였는데 어찌 무공의 차이가 날 수 있는지. 그들 열 명만 있어도 우리 무영대 좌우대 백여 명을 죽이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거야. 헉헉. 너희는 우리를 잘못 건드린 것이다.”
 권수는 경악하였다. 저놈이 죽는 마당에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만약. 거짓이 아니라면. 자신들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한 시가 급하였다. 좌대장의 목을 친 권수는 서둘러 팔각전을 빠져나왔다.
 이 사실을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에게 알려야 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말에 오른 권수는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의 집을 향하여 채찍을 휘둘렀다.
 
 
 제 5화. 중천의 몰락
 
 
 제안공(齊安公) 왕서(王偦)의 집에는 조정의 실세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차피 실패할 틈 하나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지금쯤이면 무영대는 몰살되었을 테고 상장군이 보낸 전령이 곧 당도할 것이었다.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 제안공에 집에 나타난 것은 전령이 아니라, 상장군 권수였다.
 근심에 찬 권수의 이야기에 일행은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들은 친황 호위대의 무위(武威)는 가히 초고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능가하는 또 다른 무영대가 존재한다니.
 만약 그놈들이 이 사실을 알고 보복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생각만 하여도 아찔한 일이었다.
 그자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되는지.
 서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머리를 자처하는 김찬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하니, 설긍유를 부르자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 전부였다. 달리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설긍유가 왕서(王偦)의 집에 도착하였다.
 마치 그들의 살 길이 설긍유에게 있다는 듯 왕서(王偦)의 내실에 모여 있던 일행은 설긍유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설긍유도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낭패한 표정으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이번 일에 깊이 관여를 하지 않고 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왜 그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는지.
 “제안공 전하. 소인은 금오위장군을 따라 백암산에 있는 무영대의 산채에 다녀온 적이 있사옵니다. 소인이야 무인이 아니기에 그들의 무위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옵니다만 그 수는 황제 폐하께옵서 척준경 금오위장군, 척준신 호위대장과 나누는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하건데 백암산에 남아있는 무영대는 오십여 명 안팎으로 추정되옵니다.”
 비스듬히 앉아 있던 제안공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탁탁 치고 있었다.
 “오십여 명이라.”
 설긍유는 제안공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곤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무영대도 무섭지만 그들보다도 더.”
 “무엇이 또 있단 말이오?”
 “네, 그러하옵니다. 그들을 키운 자들이 있사옵니다.”
 “척준경 금오위장군이 키운 것이 아니오?”
 “아니옵니다. 금오위장군이 키운 것이 아니옵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중천이라는 문파를 들어보셨사옵니까?”
 “중천?”
 제안공은 누구 들어본 사람이 있느냐는 듯 주위를 훑어보았다.
 모두 생소한 듯 선뜻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설긍유는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반응을 당연시 하였다.
 “무림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하실지 모르겠사옵니다. 대대로 우리 고려는 무림을 인정치 않고 있으니 말이옵니다. 하온데 우리 고려에 중천이라는 신비 문파가 있다고 하옵니다. 무영대를 키운 것은 그 중천의 천주와 네 명의 호위이옵니다. 소인도 문인이기에 그들의 진정한 실력은 모르옵니다. 하지만 전신(戰神)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금오위장군 척준경조차도 그들의 무공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무영대의 뒤에는 그 중천이 있다는 것이옵니다.”
 “무영대를 키운 것이 중천이라. 그럼 무영대를 쓸어버리려면 중천까지 없애야 된다는 말인데.”
 “그러하옵니다. 중천이 남아있는 한 무영대를 몰살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사옵니다.”
 “그런 것 같소. 허면 중천을 제대로 알려면 어찌하면 좋겠소?”
 “황궁의 임천각은 고려 내 모든 비밀이 숨 쉬는 곳. 임천각에 중천에 대한 비밀 기록이 있사옵니다. 예전에 척준경의 청으로 폐하께옵서 중천잡기(中天雜記)라는 고서(古書)를 내어준 적이 있사옵니다. 아마 전하께옵서는 황제 폐하께 주청을 드린다면 그 서책을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요?”
 “중천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옵니다.”
 “······.”
 제안공은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김찬을 바라보았다.
 “전하. 일단은 상장군으로 하여금 오늘 팔각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밀을 유지하도록 하시지요. 이 일이 백암산에 전해져서는 일이 너무 틀어지옵니다. 그런 다음, 전하께옵서는 폐하께 주청을 드려 중천잡기(中天雜記)라는 서책을 보셔야 하옵니다. 중천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야 방도를 마련할 수 있사옵니다.”
 “알겠네.”
 제안공은 권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례를 올린 권수가 방에서 나가자 제안공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등청을 서둘렀다.
 황제를 알현한 제안공과 측근 조정 대신들은 무영대가 제거되었다는 소식을 황제에게 알렸다. 무영대가 제거되어 비어있는 황제 호위대는 내시부의 무사들과 제안공의 사저에서 은밀히 뽑아 올린 무사들로 대체되었다.
 저녁때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온 제안공은 측근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그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중천이라는 문파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도대체 감이 잡히질 않소.”
 김찬이 자리를 끌어당기며 제안공에 물었다.
 “도대체 무어라 쓰여 있었는데 그러시옵니까?”
 “중천의 문도는 스무 명 안팎이라 하오. 그런데 선대 문주 중에 천무검제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자가 중원 무림을 피로 물들인 혈황의 난을 잠재웠다는구료.”
 팔각전을 정리하고 되돌아와 방의 한 켠에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권수가 눈을 치켜떴다.
 “천무검제라고 하셨습니까?”
 “그러하오. 분명 ‘천무검제가 혈황의 난을 잠재웠다.’라고 적혀 있었소.”
 “으음. 천무검제가 중천의 천주였다면 중천을 없애려는 계책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사옵니다. 현 중천의 주인이 천무검제보다 무공의 경지가 설혹 약하다고 하더라도 무림인들이 말하는 화경(化境)의 경지는 오래전에 넘어섰다고 봐야 하옵니다. 그리고 부천주(副天主)도 화경의 고수라고 보아야 하옵니다. 더군다나 문도가 이십여 명이라고는 하나 화경의 고수를 보필하는 자들도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미 올랐다고 보아야 하옵니다.”
 “화경이라니. 그게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공 실력을 말하는 것이오.”
 무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제안공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척준경 금오위장군도 화경에 이르지 못하였사옵니다.”
 “으흠. 그렇다면 중앙군을 다 쓸어 넣어도 그들을 없애기에는 무리이지 않소? 호랑이를 잡는데 토끼가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쓸모없지 않소?”
 빌어먹을······. 도대체가 왜 이리 꼬였는지 제안공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김찬이 입을 열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끌어모아야 하옵니다.”
 “어떻게?”
 제안공은 다급하였다. 무영대의 일이 저들에게 알려지면 어차피 주모자로서 자신이 지목될 것이었다.
 그리고 서책의 기록이 맞는다면 자신의 목은 이미 저들 손아귀에 있는 것과 진배가 없었다.
 김찬은 제안공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권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뢰한 행동이었으나 누구 하나 그를 탓하지 않았다. 잘잘못을 따질 만큼 여유롭지 못하였다.
 “상장군. 혹시 무림의 실력자들과 연줄을 넣을 수 있습니까?”
 권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고려 안에는 믿을 만한 무림세력은 흑혈단 정도입니다. 만약 더 필요하다면 동영(東瀛)이나 여진, 아니면 거란의 무림 방파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소이다. 중원의 무림은 중천이 천무검제의 후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에게 등을 돌릴 게 뻔하니 아예 생각지 말아야 하오이다. 하지만 동영과 여진, 거란에서 최고의 무인들을 포섭한다고 하더라도 그들만 가지고 중천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을 장담할 수는 없소이다.”
 “그럼 포섭은 가능하다는 말씀이지요?”
 “여부가 있겠소? 청부금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말이오이다. 그리고 아주 확실한 미끼가 있소이다. 그 세 곳은 천무검제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는데다가, 상대가 중천이라는 사실을 흘려주면 우리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외다. 무인이란 단순한 법. 전설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겠소. 우리의 제의를 망설임 없이 수락하겠지요.”
 “그러면 재물이 얼마가 들어가든지 최고의 실력자들을 포섭해주시지요. 상대는 최강의 무사들입니다. 시일이 촉박합니다.”
 “알겠소. 바로 연통을 넣도록 하지요.”
 “그리고 용호군과 응양군에서도 백부장(百夫長) 이상들도 언제든지 투입할 수 있도록 소집되어 있어야 합니다. 중앙군이 정예라고는 하나 십부장(十夫長)들이나 병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알겠소이다.”
 김찬은 무력 세력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제안공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전하, 혹시 그 서책에 중천의 인물들에 대한 자료는 없었사옵니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있겠소?”
 “흐흠. 중천이건 무영대이건 간에 놈들 하나하나의 무공 수위가 너무 높사옵니다. 놈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은 놈들에게 도망가라고 하는 것과 같사옵니다. 어떻게 하든 놈들을 한 곳에 모아야 하옵니다.”
 “그럼 놈들을 한 곳에 모으기만 하면 방법은 있겠소?”
 “송나라에서도 워낙 쉬쉬하는 거라서, 놈들은 화약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옵니다.”
 “그럼 화약을 이용하자는 말이군.”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무공이 높은 자들이니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는 자들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 때를 대비하여 원거리 천라지망을 펼치면 되겠지요.”
 “그러면 놈들을 모으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데. 으음.”
 잠시 손가락으로 찻잔을 튕기던 제안공이 설긍유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한 번 해보겠소? 무영대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 그대 밖에는 없으니까.”
 “네, 그리하겠사옵니다. 제안공 전하.”
 집으로 돌아온 설긍유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매달릴 만한 줄도 없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 자리를 지키기까지 머리 하나만을 믿어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제안공의 권유에 대답은 하였으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들을 어떻게 한자리에 모은다는 말인가. 답답하기만 하였다.
 이번 무영대의 제거에 한 몫을 하였다. 어차피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발을 담근 것이었다.
 웅크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부딪혀 볼 수밖에 없었다.
 우선 백암산엘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딱히 어찌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백암산의 중천 천주와 네 명의 호위를 만나 말을 섞고 이것저것 살피다보면 어찌 묘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른 아침 제안공의 저택에 들른 설긍유는 예전부터 눈여겨 보아두었던 보검 하나를 얻어 길을 떠났다.
 ***
 서너 번 오가기는 하였으나 다른 사람을 따라 오간 길이라 산채를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어렵사리 찾아든 백암산 산채는 을씨년스러울 만치 조용하였다.
 너른 마당을 지나 막사의 앞에 이를 때까지 설긍유를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
 막사의 문에 손을 대려하자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문에서 손을 떼거라. 목이 달아나기 전에.”
 설긍유는 미리 알고는 왔지만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백암산 어귀에서 여기까지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분명 막사의 문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거늘 그 짧은 순간에 마치 귀신처럼 나타나다니.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행히 예전에 안면이 있는 네 명의 사부 중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현무위였다.
 “소생을······ 알아보시겠소? 황제 폐하를 모시고 있는 내시서기 설긍유이외다.”
 “오호. 알다 뿐이겠습니까? 척 장군 형제분들을 따라 예까지 오시지 않으셨소? 헌데 황제폐하를 모시고 계셔야 할 귀하신 분께서 수행하는 자(者) 하나 없이 홀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만면에 웃음을 띠며 현무위가 말을 받았다.
 현무위의 부드러운 태도에 설긍유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꼬여진 일들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런. 요즘 정신이 없어서. 손님에게 무례를 범했군요. 허허. 안으로 드시지요.”
 탁자에 자리를 잡은 설긍유에게 차를 권하며 현무위가 입을 열었다.
 “먼 길 고생하셨을 텐데,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군요. 허허······. 그런데 어쩐 일로?”
 “황제 폐하의 명을 받잡고 왔소이다.”
 “무영대에 변고라도 생겼소이까?”
 순간 설긍유는 뜨끔하였다. 하지만 도성의 일을 천리 밖의 예서 벌써 알고 있을 턱은 없었다. 더군다나 중천은 황궁의 일에는 아예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허헛, 이 세상에 무영대를 건드릴만한 놈들이 어디 있겠소이까?”
 역시 괜한 걱정이겠지. 그 아이들을 대적하려면 웬만큼 무사들을 쓸어 넣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지. 또 무영대가 대결을 피하고 튀기로 작정을 하면 누가 감당을 하겠는가. 현무의 얼굴에는 자신의 몽둥이로 찜질을 당하면서도 버텨내던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 웃음이 번졌다.
 “그렇지요. 그 아이들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 허면 폐하의 명(命)이란?”
 “아, 소생이 실언을 하였소이다. 명이 아니옵고, 그간의 중천에서 보여준 노고에 대해 폐하께옵서 여간 흡족하게 여기고 계시옵니다. 그래서······.”
 설긍유는 지고 있던 등짐에서 보검을 꺼내 들었다.
 “폐하께옵서 천주님에게 이 보검을 하사하셨소이다. 그간 힘쓴 것을 생각하면 하찮지만 천주님께서는 무인이시니 보검에 기뻐하실 것이라 여긴 탓이지요. 그리고 혹여 불편함이 없는지, 필요한 것은 더 없는지 소신에게 잘 살피고 오란 명도 특별히 내리셨소이다.”
 “허허. 황제 폐하의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 하지만 워낙 물욕이 없으신 천주님이시라 어떠한 것이든 소유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시지요. 하지만 이 보검도 짐이라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생이 천주님께 직접 올리지요. 천주님을 뵈올 수 있는지요? 직접 천주님께 전하라는 폐하의 지엄하신 명도 있었고 말이오이다.”
 현무위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헌데 어쩌지요? 아쉽게도 천주님을 뵈올 수는 없소이다.”
 “백암산에 아니 계시는지요?”
 “그렇소이다.”
 설긍유는 어쩌면 잘 된 일이라 여겨졌다. 사실 무아선인을 만나서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주님께서도 무영대를 키우시느라 너무 고생하셨지요. 좀 외유를 하시며 쉬실 만도 하지요.”
 설긍유의 말에 현무위는 고개를 좌우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저희도 천주님께 그리 말씀을 올리시지만 천주님께서는 수련하는 것을 쉬는 것이라 여기시는 분이라. 지금도 수련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천주님의 무공 수위에서도 아직 더 수련해야 할 경지가 남아있단 말씀인지요?”
 “물론 천주님의 무공은 하늘 아래 적수가 없지요. 하지만 화경의 끝자락에서 현경을 바라보는 분이라 그 무공의 끝을 보고 싶어 하시지요.”
 “음. 그러면 이를 어쩌지요. 폐하의 지엄하신 명이 있는지라. 꼭 천주님을 뵈어야 할 텐데.”
 난감해하는 설긍유를 바라보는 현무위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 고려의 땅에서 황제가 무림을 이리 대접해 준 적이 있었던가.
 항시 황위를 위협하는 눈엣가시로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지금 앞에 앉아있는 설긍유가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정감이 갔다.
 결국에는 호형호제를 하게까지 되었다.
 “우리 산책이나 좀 할까? 주변 산세가 아주 좋다네. 자네도 이럴 때가 아니면 이런 좋은 풍광을 볼 수야 있겠나.”
 “네, 그러지요. 형님.”
 막사의 밖으로 나와 백암산의 산세가 모두 보이는 능선에 올라섰다.
 절벽의 끝에 위태로이 세 명의 아이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아니, 아이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성숙해 보였다.
 “후후, 녀석들.”
 “저들도 무영대이오?”
 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백암산의 무영대는 서른 명이네. 처음 백암산으로 오십여 명이 들어왔는데 여진이나 동영, 송나라의 고수들을 척살하는 이 년 동안 스무 명이 저세상으로 갔지. 참으로 아까운 녀석들이었는데. 그래도 저 녀석들이 남아있어 아쉬움을 달래고 있지. 저 녀석들의 실력은 최고이지. 후후.”
 설긍유가 보기에는 검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약해보였다.
 “연약해 보이는 데요?”
 “후후. 그런가? 하지만 외모만 그럴 뿐이네. 혹시 자네 작년에 여진의 무림을 발칵 뒤집혔던 일을 알고 있나?”
 무언가 떠오른 듯 설긍유는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하룻밤 사이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흑살방의 고수 오십여 명이 전멸했던 일 말이오?”
 “그렇다네. 여진 무림에서 그 위세를 떨치던 흑살방의 흑살십절(黑殺十絶)과 그 수하들이 하룻밤 사이에 불귀의 객이 되었던 사건 말일세. 흑살방의 제거는 황궁에서 밀지를 내렸던 것이라 자네도 잘 알고 있구먼.”
 “그럼요. 흑살십절(黑殺十絶)의 공동 전인들이 여진의 장수로 뽑혀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이 아는 사실. 그들이 여진의 뒤를 받치고 있어 그들의 군사력이 그리 막강한 것이 아니겠수? 그래서 그들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천주께 부탁을 드린 것이고요. 그럼, 그때에 무영대는 전원 투입되었겠소? 놈들의 심장부에서 그놈들을 모두 척살하고 돌아오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하하핫. 무슨 망발을. 그때 투입된 인원은 저 아이들 단 셋뿐이었네. 그리고 저렇게 멀쩡히 돌아왔고 말이야.”
 설긍유는 철퇴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만 같았다.
 저 아이들 셋이서 그 무시무시하던 흑살십절(黑殺十絶)과 그 수하들을 없애버리다니.
 바위 끝에 앉아 있는 남자 아이 둘에 여자 아이 하나.
 “저, 셋이서 말이오?”
 “그렇다네. 저 아이들은 천주님께서 친히 데려온 녀석들일세. 여기 대부분이 검문에서 뽑아 올린 고아들이 아니던가. 무영대를 만들기 위해 봉래산으로 입산(入山) 할 무렵, 천주님께서는 귀주를 지나던 길이었네. 그때 저 아이들을 보았지. 내가 보기에는 근골이 뛰어나기는 하였지만 저 정도로 성장할 줄은 몰랐네. 하지만 천주님께서는 어찌 알아보셨는지. 하여간 우리 중천의 다음 대를 이을 놈들이라고 천주님께서 특히 신경을 쓰시지. 하기야 신경을 더 쓰는 것이 저 아이들에게는 더 큰 고통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허허.”
 “으음.”
 “다른 아이들도 저 녀석에게는 한 수 접고 대하지. 하여간 기특한 녀석들이지. 허허.”
 설긍유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설긍유의 눈 속에는 절벽 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아이들이 어리고 유약한 껍데기로 가려진 아수라의 모습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죽음으로 길들여진 무사들. 황제의 곁을 지켰던 사라진 무영대의 능력은 저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산책에서 돌아온 둘은 산나물로 채워진 식사를 마쳤다.
 마치 십년지기(十年知己)를 만난 듯 늦은 밤까지 정담이 이어졌다.
 “현무 형님, 다른 호위 분들은 어디 가시었소? 산채가 너무 한적해서요.”
 “자네도 알고 있듯이 호위는 네 명이지. 천주님께서 수련에 드시면서 우리 호위들을 모두 이곳에 남아 산채를 돌보라 하셨지만 그럴 수야 없지. 수련에 몰두하시면 아무리 천주님이라 하더라도 위험해 질 수밖에 없지. 그래서 내가 천주님의 명을 거스르며 청룡과 주작에게 천주님을 뫼시라고 일러두었지. 소탈하신 분이라 번거로운 걸 꺼려하시지만 호위가 없어서야 되겠나? 천하 최강 문파의 천주(天主)이신데. 그러다 보니 여기 백암산에는 나와 백호가 남게 되었네.”
 “형님과 백호위 두 분만으로 산채를 건사하기에 힘드시겠소?”
 “무슨 말을 그리하나? 자네도 무영대를 겪어보지 않았나. 굳이 우리가 간섭할 것도 없지. 우리가 없어도 죽어라고 수련을 할 놈들이니까. 우리는 가끔 녀석들의 예기가 꺾이지 않도록 자극만 주면 되지. 덕분에 우리도 수련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말이야.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이곳을 떠날 수는 없어도 생활 자체가 구속되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현무의 얼굴에선 무아선인이 없는 백암산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은 없어보였다. 현무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설긍유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과연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황제 폐하를 위한 길인가. 설사 황제 폐하를 위한 길이라 하더라도 이런 순수한 무인들을 정쟁(政爭)의 틈바구니에서 희생시켜야 한단 말인가.’
 설긍유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렇게 나약해지면 안 되었다.
 애써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황제 폐하께옵서는 중천에 너무나 큰 수고를 끼쳤다고 생각하고 계시오.”
 “무슨 수고랄 것이 있나. 사실 본 천에서는 천주님과 우리 네 명의 호위만이 관여한 일인걸. 봉래산에 들어간 이후에 문도 전체가 모인 적이 없으니 말이야.”
 설긍유의 눈빛이 반짝였다.
 “천주님께서 손수하시는 일인데 다른 문도들은 관여하지 않았다니 말이나 되오, 형님?”
 “암, 말이 되고말고. 자네는 이해를 못 하겠지만 본 천의 존폐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특별히 모임을 갖지 않아. 이번 일도 부천주님은 자세히 알지도 못하시는걸.”
 아무리 비밀에 싸여있고 필요 이상의 왕래를 하지 않는 문파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고려에서 중천이 살아남기 위해서였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 같았다.
 순간 들떠있던 기분은 싹 사라졌다. 이들을 제거하려면 한 곳에 모아야하는데, 도대체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다 식은 찻잔을 들며 체념하듯 입을 열었다.
 “도대체 다른 문도들의 얼굴이 기억은 나는 거요?”
 “그럼, 사형제 간에 얼굴을 모르겠나? 원래 약속된 대로라면 십년지회(十年之會)가 올해 단오 날에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네.”
 “십년지회라니요? 그럼 십 년에 한 번씩은 만난다는 말이오?”
 순간 현무는 망설였다.
 문중의 비밀인데. 하지만 이미 이 정도는 황궁에서도 알고 있을 테지.
 일천 년을 지내오는 동안 외부로부터 중천이 위협을 받은 적이 어디 있었던가. 설사 저들에게 처음 알려지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걱정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자는 이미 호형호제를 허락한 설긍유가 아니던가. 여기에서 함구하기에는 설긍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 특별한 일이 생겨서 천주님의 명이 있지 않는 이상은 모일 필요가 없어. 그러다 보니 다른 사형이나 사제가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몰라. 하기야 알았어도 그동안 십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아마 바뀌었을 게야. 검밖에 모르는 미치광이들이다 보니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거든.”
 “그렇게 만나서야 어디 동문이라 할 수 있수?”
 설긍유는 과장되게 손을 흔들며 퉁을 놓았다.
 “허허. 어디 자주 만나야만 동문이라 할 수 있는가? 중천의 문도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자네는 잘 모르는군. 무인으로 태어나 중천의 문도가 되었다는 것은 왕후장상이 되는 것에 비할 수조차 없는 자부심이지.”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현무의 눈은 기쁨과 감격으로 일렁이는 듯하였다.
 “무인의 길은 애초에 외롭고 괴로운 길이지. 후후. 수련을 하다 보면 무공의 벽을 느끼게 되지. 그 벽을 뚫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겪기도 하고 수많은 불면을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그런 고통이 없이 새로운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암. 어림도 없지. 이런 힘겨운 길을 먼저 걸어가고 있는 사형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그 얼마나 힘이 되는 줄 아나? 또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제들도 눈물겹도록 고맙고. 그런 형제들을 위해 죽는다 해도 여한이 있을 턱이 없지. 후후. 무인들의 정(情)이란 것을 자네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십년지회의 밤은 흥겹기도, 가슴 뭉클하기도 하지. 그리고 그 간의 심득을 서로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고. 문도들의 수련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지.”
 “그런데 형님. 이번 십년지회는 열 수 있겠소? 천주님께서 수련에 들어가셨다면서요.”
 “그 때문에 천주님께서 청룡을 통해 명을 내리셨더군. 올해의 십년지회는 내년으로 연기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것을 부천주께 알리려면 개경으로 가야하는데. 백암산에는 나와 백호만 남아있어서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혼자서 산채를 건사하기가 어려워서. 고민을 하고 있다네.”
 “산채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현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네.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요즘 들어 북쪽이 어수선하기도 하고 말이야.”
 마치 큰 물고기라도 낚은 듯 설긍유는 얼굴을 폈다.
 “형님. 무엇이 고민이시오. 소제가 연락을 취해주면 되지 않소?”
 “오호~. 그래 주겠나?”
 “그럼요. 소제야 어차피 개경으로 가야하는데 무엇이 힘든 일이라고요.”
 “허허. 신세를 지게 되었구먼. 내년으로 연기되었다는 것만 전해주면 되네. 어차피 장소는 매번 천주님께서 새로 정하시니 말일세.”
 “아닙니다. 신세라니 가당치 않아요. 참, 천주님께서는 수련을 어디에서 하시오? 돌아가는 길에 이 검을 천주님께 드리고 가면 좋을 듯합니다.”
 현무는 아무런 의미없이 설긍유의 말을 받았다.
 “봉래산에 기거하고 계시네. 온 천하를 다 뒤져도 봉래산만큼 기가 넘실대는 곳은 없지. 또 예전에 쓰던 산채는 수련하기에는 딱 좋고 말일세. 하지만 자네가 가면 천주님의 수련에 방해가 될 걸세.”
 “그렇다고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명이 있사온데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수.”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하룻밤을 백암산에서 지낸 설긍유는 현무에게서 서찰을 한 통 건네받았다.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 무아선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도 봉래산에는 꼭 들려야 했다.
 ***
 개경으로 돌아온 설긍유는 제안공의 저택을 찾았다.
 설긍유가 백암산으로 떠난 후 제안공의 속은 까맣게 타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줄은 이미 누구도 책임질 수 없었고, 황도의 모든 중앙군을 쓸어다가 호위를 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의 사자(使者)들을 건드린 것만 같았다. 정치적인 타협도 할 수 없고 게다가 형체까지 없는 귀신이었다.
 집사의 안내를 받고 들어온 설긍유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백암산에 갔던 일을 채근하였다.
 현무와 오갔던 대화를 다 전해 듣기도 전에 제안공은 설긍유의 말허리를 잘랐다.
 백암산에서 있었던 일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방책이 있는지가 더 급하였다.
 “그래, 내시서기는 어찌하면 좋겠소?”
 설긍유는 백암산에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하였던 계책을 꺼냈다.
 “전하, 소신이 숙고한 계책을 말씀 올리자면. 중천과 백암산 무영대는 따로 처리해야 하옵니다. 우선 중천은 그들 사이에 거의 왕래가 없다는 점을 이용하면 어떨까 하옵니다.”
 제안공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설긍유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왕래가 없는 것을? 어떻게?”
 “그 자들의 연락 방법은 단순하옵니다. 천주가 호위를 통해 부천주에게 연락을 취하면 부천주가 나머지 문도들에게 명을 전달하는 식이지요. 이러한 연락 체계가 아무런 문제가 없어 지금껏 천년을 이어왔을 테고 말이옵니다. 이번의 연락은 이 서찰이옵니다.”
 “그래서?”
 제안공은 드디어 희망이 보인다는 듯 설긍유을 재촉하였다.
 “이 서찰은 천주의 명을 전하는 사자(使者)라는 징표이옵니다. 그러니 부천주 이하 모든 문도들을 밀폐된 공간으로 끌어 모으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대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겠소?”
 설긍유는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는 듯 웃음 띤 얼굴로 제안공의 말을 받았다.
 “자신들을 고금 최강의 무인이라 여기는 자들이옵니다. 설사 약간의 속임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자신감에 넘치는 자들이옵니다. 어떠한 덫이 있다하더라도 자신들이 모여 있을 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옵니다. 심려를 거두셔도 되옵니다.”
 딴은 그럴 만도 하였다.
 “좋소. 그대의 말에 기대를 걸어 보도록 하겠소.”
 “문제는 화약을 매설할 장소이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은 밀폐된 공간에 그들을 밀어 넣고 화약을 터트릴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들을 모으기 전에 화약을 매설하고 흔적을 지워야 하니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제안공은 이미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대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오. 내 이미 상장군을 시켜 황성 동쪽에 부흥산에 동굴을 하나 물색하였소. 그들을 모을 수만 있으면 되오.”
 “하오나 전하, 동굴 안에 화약을 매설하면 아무리 화약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특이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겠사옵니까? 설사 처음 맡아보는 냄새라 지나친다고 하더라도 동굴을 드나들은 흔적은 어찌 지우겠사옵니까?”
 “허허. 그 정도는 미리 생각해 두었소이다. 그 동굴은 부흥산 기슭 백정들이 제(祭)를 올리거나 천렵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곳이라 평소에도 백성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오. 동굴로 이어지는 발자취를 애써 지울 필요도 없소. 그리고, 냄새가 강한 삭힌 음식들을 섞어 제사상을 꾸며 동굴 안에 두면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오. 제를 지내던 곳이라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말이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사온데. 만에 하나 동굴에서 폭발을 견뎌내고 동굴 밖으로 탈출하는 자가 있다면 중앙군의 군사들로는 그들을 막을 수가 없사옵니다. 예전에 말씀 올린 동영이나 여진, 거란의 고수들은 포섭하셨사옵니까?”
 “지금쯤이면 이곳으로 출발했을 거요.”
 중천 문도 제거에 자신이 생긴 설긍유는 백암산 무영대로 주제를 바꾸었다.
 “허면 백암산에 있는 무영대가 문제이온데, 사실 이들은 한 곳에 모으기가 어렵사옵니다. 그래서 소신이 머리를 짜내본 것이온데, 전하께옵서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역시 설긍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길 잘했다는 듯 흡족하게 웃었다.
 “그대가 고민한 것이라면 어련하겠소?”
 제안공의 사저를 나선 설긍유는 황도(皇都) 외성의 남문인 태안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요즘 들어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말에 올라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점점 수렁에 빠지는 듯한 찝찝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들과 자신은 가는 길이 너무 달랐다.
 태안문을 통과하면서 현무의 말을 되뇌었다.
 ‘도성의 태안문 밖 십리파(十里坡)에 가면 천년송(千年松)이 있을 걸세. 그 소나무에 붉은색 천을 묶어 놓으면 되네. 필히 다가서는 자가 있을 테니 그분에게 이 서찰을 건네주며 십년지회를 일 년 연기한다는 말을 전하면 되네. 이 서찰 안에는 천주님 사자(使者)라는 비표가 되어있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불상사를 위해 본 천에서는 서찰조차 문서로 남기질 않네.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연락을 취하지.’
 천년 세월의 풍상을 겪은 소나무는 웅장하였다. 황실이 어찌 바뀌든지 일천 년 고려의 무림을 지켜온 중천의 모습과 같아 보였다.
 소나무 가지에 묶인 붉은 색 천은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소나무 아래의 바위에 걸터앉아 설긍유는 초조하게 주위를 살폈다.
 바람에 일렁이는 천을 바라보며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설긍유에게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일각. 이각.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대가 저 천을 걸어 두었소?”
 어느 틈엔가 다가선 자가 있었다.
 “그렇소이다.”
 설긍유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그대는?”
 설긍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는 바로 이곳 십리파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대장장이 노인이었다.
 쇠를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소문에 황명으로 비밀스럽게 무영검 제작을 의뢰하여 몇 차례 왕래가 있어 안면이 익은 자였다.
 세상 속으로 숨어 수련을 하면서 생활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황성 안에 이렇게 버젓이 섞여서 살아가고 있을 줄이야. 설긍유는 어이가 없었다.
 “그대가 부천주요?”
 설긍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장장이는 손을 내밀었다.
 서찰을 건네받은 대장장이는 석양에 비추며 자세히 살폈다.
 서찰 속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주님의 전서가 분명하군. 그래, 천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내리셨소?”
 “노인장께서 부천주가 맞느냔 말이오?”
 “그렇소. 내가 중천의 부천주 막여(幕廬)요. 그나저나 이젠 얼굴도 알려졌으니 황성을 떠나야겠군. 하기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지. 허헛.”
 눈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머리와는 달리 우람한 근육질의 몸을 흔들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천주님께서는 오는 단오날 저녁, 부흥산의 북쪽 골짜기에 있는 동굴에서 모든 문도들을 보고 싶다고 하시었소.”
 “알겠소. 그런데 천주님은 강녕하시오?”
 “뵙지는 못하였소. 현무위가 말씀하길 수련 중이라 하시었소.”
 “크. 천주님께서는 아직도 여전하시군. 천주, 아니 사형은 내 처음 뵈었던 열다섯 때부터 감히 넘볼 수 없는 하늘같은 분이시지.”
 막여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아련한 추억에 젖는 듯하였다.
 설긍유를 잠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고생하시었소. 천주님께서 그대를 믿으니 부탁을 하셨겠지만, 비밀은 지켜주시겠지요?”
 “그야 당연하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안하오. 못 믿어 드린 말씀은 아니오. 그럼 잘 가시오.”
 ***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단옷날 저녁.
 밭을 갈다가 천렵을 나온 농부들, 등짐을 지고 장삿길에 나선 장사꾼들,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잠시 쉬러 나온 서생들. 열서너 명의 군상(群像)들이 부흥산을 오르고 있었다.
 평소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던 듯 깊은 골짜기를 따라 작은 오솔길이 이어져 있었다.
 오솔길이 끝나는 절벽 아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굴의 입구가 나타났다.
 동굴의 앞 바위 위에 걸터앉아있던 막여는 동굴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십 년 전이나 똑같군. 그동안 수련들은 안 하고 늘어지게 쉬며 주안술(朱顔術)만 익혔던 모양이야. 허허.”
 “그러시는 부천주께서는 되려 회춘하시 것 같사옵니다.”
 “무슨 말을. 이제는 뼈마디가 흐물흐물하여 걷기도 힘든걸.”
 “하하하.”
 십여 년 만에 마주한 동문들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천주님은 안에 계시옵니까? 항상 천주님이 일착(一着)하시어 문도들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니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옵니다.”
 막여는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아니 계시네. 그런데 말일세, 이번에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야 할 걸세. 천주님께서 기다리다 지쳐 음식과 술을 마련해 놓으시고 잠시 산책을 나가신 모양이니 말일세. 허허. 동굴 안에 노루고기가 아주 먹음직스럽게 구워지고 있더구만.”
 “아이고, 이런.”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들 가세나.”
 십여 장 정도 안으로 들어가자 꽤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가운데에는 노루가 통째로 모닥불 위에 매달려 구워지고 있었다. 노릇노릇하니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비릿한 그 냄새만으로 뱃속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문도들은 저마다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모닥불 옆에 놓여있는 동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문도 하나가 히죽 웃으면 걸걸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형제들! 천주님께서 아주 좋은 술도 준비해 놓으신 모양입니다 그려. 술 향기가 아주 기막힙니다. 히히.”
 “그래요? 그럼 한 잔씩 해야지.”
 “그런데 천주님께서 아니 계신데 먼저 목을 축여도 되는지 모르겠네?”
 막여가 웃으며 술동이 옆에 놓인 표주박으로 술을 떴다.
 “천주님께서 언제 그런 거를 따지셨나? 먼저들 먹고 있으라고 준비하셨을 게야. 자자. 자네들도 한 잔씩 뜨게나.”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 아래 걸어온 터라 혀끝에 감도는 술맛은 꿀맛이었다. 모두들 서둘러 서너 잔씩 들이킨 후 잘 익은 노루고기를 잘라내어 질겅질겅 씹었다.
 십여 년 만에 만난 사형제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간의 수련한 경지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에 흥이 겨워 목소리는 점점 켜져 동굴 벽을 울리고 있었다.
 중천의 문도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 주위에는 검은 그림자들이 서서히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점점 늘어나 동굴 입구를 중심으로 두터운 벽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끝.
 몇몇의 검은 무복 차림의 사내들이 동굴 안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요, 막주?”
 자신의 얼굴을 가린 천을 벗으며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 나타난 얼굴은 놀랍게 상장군 권수였다.
 “그리하겠소이다.”
 독백과도 같은 권수의 말에 왼편에 서 있던 자가 동영(東瀛)의 말투로 어눌하게 대답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본관은 동영의 최강 인자(忍者) 집단이라 일컫는 살막의 막주께서 이렇게 직접 왕림해 주실 줄은 몰랐소이다.”
 “흐흐, 상장군이 그리 많은 재물을 보내지 않았어도 고려에는 꼭 오고 싶었소이다.”
 “허허, 그래요?”
 “어느 무인이 전설로만 알고 있던 중천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겠소. 단지 중천을 찾을 수 없어서 미루고 있었을 뿐.”
 살막의 막주는 칼자국이 선명한 볼을 씰룩이며 권수를 바라보았다.
 “본좌의 꿈이 뭔지 아시오? 계집이나 재물이 아니오. 본좌는, 본좌의 선친께서 꿈꾸었던 것처럼 우리 살막이 동영을 떠나 하늘 아래 최강의 문파로 우뚝 서는 것이오. 그리되려면 중천은 없어져야 하오. 하지만 중천과의 정면 대결은 감당이 안 되니 어찌하겠소. 흐흐······ 이런 방법이라도 해야.”
 절벽 아래에서는 손에 횃불을 들고 술통과 음식을 지게에 진 몇몇의 농부들이 동굴을 향하고 있었다.
 동굴에 들어선 농부들은 마치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서 기분 나쁘다는 투로 거칠게 입을 열었다.
 “아니, 제(祭)를 지내는 신성한 곳에서 이 뭐 하는 짓이요?”
 시비조의 말투에 막여는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좋은 날 기분을 잡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 미안하게 됐소이다. 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이해해 주시오. 그나저나 예서 제(祭)를 지내려 하시오? 그러면 우리는 저쪽 입구 쪽으로 자리를 옮기겠소.”
 입구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말에 맨 앞에서 막여를 노려보던 자가 당황하며 황급히 말투를 바꾸었다.
 “아니, 아니오. 조금 있으면 제를 지내려고 마을 사람들이 또 올라올 테니, 입구가 아니라 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주면 되오.”
 “고맙소이다.”
 막여는 불쾌해하는 문도들을 구슬려 좀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자리가 이어지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사형인 무아선인을 겪어본 바로는 이렇게 자리를 오래 비울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올라온 마을 사람들도 께름칙하였다.
 비록 몸에서 느껴지는 기(氣)는 없을지언정 사내들의 몸은 모두 건강하였다.
 ‘이를 어쩐다? 사형은 왜 아니 오시고.’
 무아선인이 없는 지금, 일이 벌어지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농부들은 하나둘씩 일어났다.
 지게 위에 놓여있던 술동이를 깨트렸다. 깨진 술동이에선 술이 아니라 기름이 흘러내렸다.
 동굴의 입구 쪽은 기름으로 흥건하였다.
 막여는 서서히 일어서며 문도들을 훑어보았다.
 “형제들. 잠시 술자리를 멈추어야겠다.”
 입구를 향해 발을 떼며 기름 동이를 깨뜨리고 긴장하고 있는 농부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에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였는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농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잘못한 것은 없소. 그리고 그대들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들이 모두 죽소. 우리도 어찌할 수 없소.”
 입구에 쏟아놓은 기름에 불을 붙인다고 해도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족을 볼모로 농부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자들이라면, 혹시 자신들이 중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다. 여태껏 천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된 적도,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 누가 있어 중천을 알겠는가.
 설혹 알고 있다고 하여도 중천의 모든 힘이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후후. 누가 그대들의 가족을 볼모로 잡고 있소.”
 “그건 우리도 모르오. 단지 검은 무복을 입고 있다는 밖에는.”
 놈들은 누구란 말인가. 자신들을 알고 있는 세력. 마을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통제할 수 있는 세력.
 갑자기 뇌리에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설긍유였다.
 ‘그렇다면. 그 세력은 황궁! 천 년을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왜?’
 농부들이 기름에 불을 댕기자 동굴 입구가 환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기름에 불을 붙인 농부들은 동굴을 황급히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 뒤로는 수많은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몰려 들어오며 칼을 뽑아 들었다.
 완만하게 휘어 올라간 외날검! 동영의 왜검이었다.
 ‘황궁에서 동영의 인자들까지 끌어들였단 말인가.’
 막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형제들! 뚫고 나간다. 동굴 밖에도 놈들이 깔렸을 테니 모두 조심하라.”
 몸을 날리려는 순간, 난생처음 겪어보는 폭발이 일어났다.
 동굴이 무너져 내리는 폭발과 함께 몸에 느껴지는 압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기를 끌어올려라. 몸을 보호하라.”
 중천의 문도들은 기를 끌어올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가장 앞쪽에 있었던 막여와 무예, 화경의 경지에 이른 두 호법만이 겨우 사방으로 튀는 날카로운 바윗돌에 몸이 찢기며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몸은 말이 아니었다.
 바윗돌로부터 몸을 보호하느라 기혈은 뒤틀리고 근육은 끊겼다.
 아무리 화경의 경지에 이른 몸이었지만 떨어지는 바윗돌을 버텨내며 뛰어나오기에는 무리였다.
 몸에는 끌어모을 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왜놈들은 인자들답게 베어도, 베어도 소리 없는 귀신처럼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같이 동굴을 탈출했던 두 호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허무하였다.
 어디에서 뒤틀어져 버린 것인가. 천년 세월을 이어온 천하 최강의 중천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자신의 뒤로는 무너져버린 동굴 속에 중천의 혼들이 잠들고 있을 터이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너무 쉽게 놈을 믿어버리고 조심성 없이 호랑이의 아가리로 들어와 버린, 너무나 경솔했던 자신의 잘못. 놈들은 치밀하게 일을 꾸민 듯하였다. 아무리 무위가 신과 같은 사형이지만 엄청 고생을 할 게 뻔하였다.
 내력을 쓸 수 없는 막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몸에 생긴 검상 주위는 시퍼렇게 부어오르며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놈들은 치졸하게도 칼날에 독까지 바른 모양이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칼을 휘두르는 막여는 아수라와 같았다.
 “뒤로 물러서라!”
 막여를 향해 불나방처럼 몰려들던 인자(忍者)들은 순식간에 십 장 뒤로 몸을 날렸다.
 인자들 사이에서 다가서는 자는 절벽 위에 서 있던 살막의 막주였다.
 막여의 앞으로 다가선 막주는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머리를 숙였다.
 “전설의 중천을 보게 되어 영광이오.”
 막여는 서 있기도 버거웠다.
 검을 잡은 이후 겪은 모진 수련과 중천의 자존심, 이것이 그의 몸을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황궁에서 사주하였느냐?”
 “후후. 이미 짐작하신 대로요.”
 “네놈도 무인일터. 이런 치졸한 방법을 써야 되느냐?”
 살막주는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들은 너무 강하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감히 그대 앞에서 검을 뽑기나 하겠소.”
 “하하핫. 네놈은 무인이 아니다. 검에 대한 경지는 목숨이 오가는 대결의 찰나에 오가는 법. 네놈은 그저 칼춤이나 추다가 말 놈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살막주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대가 독에 중독되고 기를 모을 수 없다고 하여도 좋소. 난. 그저 중천의 목을 베고 싶을 뿐.”
 “내가 중천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네놈은 중천의 작은 가지 하나를 치는 것뿐. 천주님이 살아계시는 한, 중천은 영원하다. 하핫. 내 죽더라도 네놈만은 저승으로 데려가야겠다. 오너라.”
 십(十) 성의 내력을 끌어올린 살막주는 전광석화와 같이 막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은 잔영을 뿌리듯 막여에게 접근한 살막주의 외날검은 반월의 그림자를 뿌리며 가로 그어졌다.
 막여는 자신의 검으로 살막주의 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비록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었기는 하지만, 이미 단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기를 불어넣은 살막주의 검을 막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막여는 몸을 비틀며 자신의 검으로 살막주의 검을 흘려 내렸다.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는 상태에서 비껴 막은 살막주의 검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검을 막아내는 막여의 검에 내력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살막주는 검을 거리낌 없이 움직였다.
 어떠한 움직임을 취하든지 저 몸으로는 역습을 못 할 테니.
 순식간에 십여 합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동영 쾌도류의 검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빨랐다.
 하지만 상대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검을 피하고 있었다. 그것도 닿을 듯 말 듯 한 치 정도로 차이로. 미칠 노릇이었다.
 살막주의 검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검풍이 일어났다.
 그 검풍에 살갗이 찢겨나가며 피가 흩어졌지만 그 정도로는 막여의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살막주는 조급해지지 시작하였다.
 단전이 파괴된 자를 상대로 창피하게도 동영 최고의 인자라고 자부하는 자신이, 마음과는 다르게 검은 계속하여 허공을 가르고만 있었다.
 막여의 움직임도 주춤하는 듯하였다. 살막주는 비어있는 막여의 가슴을 향해 검을 쭉 뻗어 찔러 넣었다.
 순간 막여가 몸을 살짝 틀며 검을 향해 다가섰다.
 검은 막여의 심장을 단 한 치만을 벗어나 파고 들어갔다.
 살막주는 당황하였다.
 검이 막여의 몸을 꿰뚫은 순간, 막여의 검도 살막주의 몸을 훑어 올라갔다.
 살막주는 검을 놓고 뒤로 빠지려 몸을 굴렸다.
 하지만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검을 잡은 오른팔이 이미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어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기에.
 볼썽사납게 땅바닥에 널브러진 살막주를 급히 다가선 살막의 인자(忍者)들이 부축하였다.
 혈을 눌러 급한 대로 지혈을 한 살막주의 눈에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독한 놈. 내 팔을 자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다니.”
 막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바위에 몸을 지탱한 채 허물어져 내렸다.
 “후후. 어차피 살기는 틀린 몸. 여한은 없다. 단지, 사형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쉬울 뿐. 사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 이번 일에 발을 담근 모든 놈들 또한 살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황제라고 해도.”
 물기가 맺혀있는 막여의 눈에는 편안함이 스쳐갔다.
 천천히 손을 들어 절벽 위를 가리켰다.
 “내 황궁 놈들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허허. 먼저 가서 너희를 기다리마.”
 힘없이 떨어진 손에 이어 막여의 몸이 가로누웠다.
 뒤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상장군은 소름이 끼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 이곳 부흥산에서 일어난 일이 무아선인의 귀에 들어가지 전에 먼저 무아선인을 죽여야만 했다.
 절벽에서 급히 내려온 권수는 외팔이가 된 살막주에게 서둘러 인사치레를 하였다.
 이미 일이 끝나버린 이곳의 사태를 수습하는 것보다 급한 것은 제안공의 사저로 가는 것이었다.
 중앙군의 백부장들에게 동굴 안에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를 놈들을 살피라 일렀다.
 급한 대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말에 올랐다.
 소문(言)이란 그 빠름을 가름할 수 없는 것. 이 일을 매듭짓기 위해서는 한 시가 급하였다.
 
 
 제 6화. 무아선인의 최후
 
 
 수련을 마친 늦은 밤.
 백암산의 하늘은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로 황홀하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현무와 백호는 나란히 앉았다.
 “현무 사형. 요즘 들어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하오.”
 백호를 흘낏 바라보던 현무가 하늘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도 그런가? 딱히 뭐라고 집어낼 수는 없어도 나도 마음을 잡을 수가 없구먼. 천주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아니, 그럴 리야 없지. 청룡과 주작이 어떤 놈들인데. 아무렴. 아무리 천주님께서 연공 중이라 하시더라도 사제들이 있으니 기우이지.”
 저 멀리 절벽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현무는 흡족한 듯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여보게, 사제. 저놈들은 화경의 벽을 깰 수 있을까?”
 백호는 현무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그럴 거라고 여겨지는데요. 사형은 아닌가 보죠?”
 “아니. 나도 저 녀석들은 화경의 벽을 꼭 깰 수 있을 거라 믿거든. 천주님도 힘들어하는 그 화경의 벽을. 그나저나 이젠 좀 쉬었으니 저 녀석들을 여진에 한 번 보낼까? 척살 임무를 주어 예기(銳氣)를 잃지 않게 해 주어야지, 그렇지 않나?”
 “그렇게 하죠.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황궁에서 온 척살 밀지가 하나 남아 있는데, 저 녀석들을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척살 대상이 누구인데?”
 “흘석열부의 대부호(大富豪)인 희우(希于)라고 하더군요. 여진 대부족장 오아속의 최측근 돈줄이기도 하고요. 하기야 오아속의 측근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우리와 상관없지만요.”
 “그 정도면 그리 어려운 척살 대상은 아닐 게야. 지금껏 암살당한 여진 귀족이나 무림방파의 장로(長老) 정도의 인물들이 많다 하더라도 그런 인물까지 고수들을 보내 호위하지는 않을 테니. 물론 재물이 많은 놈이니 재물을 털어 호위를 살 수는 있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저 녀석들이면 충분할 거야.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이 기회에 세상 구경도 하라고 단단히 일러야겠어. 시간도 넉넉히 주고 말이야.”
 “네, 그러지요. 사형. 사실 우리 중천의 인물들은 무공에 미쳐있어서, 세상 물정에 어둡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천주님께서도 그런 넋두리를 하시더군요.”
 “어찌 보면 설 소제(小弟)같은 인물이 우리 중천에도 필요할지 몰라.”
 “사형. 저는 반대입니다. 그리고 그 자는 왠지 맘에 들지 않아요.”
 “그건 우리 같은 무부와 다른 길을 가고 있어서 느낌이 그럴 거야. 그렇다고 딱히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 일부러 멀리할 필요는 없네.”
 “네, 알겠습니다. 사형.”
 ***
 이번의 척살 임무는 수월하다고 하였다.
 자객이 고려인이라는 것을 감추라는 것으로 보아 요나라를 거쳐 돌아오라는 것인데.
 기간도 넉넉하고.
 게다가 세상 구경도 이 기회에 한 번하라니.
 저 야차(夜叉)와 같았던 사부라는 작자들이 왜 이리 인심을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우선 척살 대상이 있는 지역도 마음에 들었다.
 다른 대원들은 개경이나 서라벌, 웅주 등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구경거리가 많은 곳으로 가는 척살임무를 좋아하였다.
 하지만 무영 사호(四號)는 싫었다.
 너무 어려서 겪은 일이지만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였다.
 여진의 병사가 내지른 창에 어머니의 등이 꿰뚫리던 일이.
 그 여진 놈의 눈빛이.
 자신이 살인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은 여진 놈들이어야 했다.
 척살 명령을 받은 다음날 아침, 팔호(八號)와 구호(九號)를 데리고 여진 흘석열부를 향해 길을 떠났다.
 요즘 들어 수련하는데 벽을 느끼고 있었다.
 사부들에게 물으려 해도 그 답답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검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 테니.
 한 발 뒤로 물러나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백암산 밖의 정경이 싫지만은 않았다.
 구호(九號)는 유독 즐거운 듯 쉼 없이 조잘거렸다.
 백암산을 출발한 지 닷새가 지나서야 흘석열부에 도착하였다.
 흘석열부에서 희우(希于)의 장원은 물론, 희우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너무나 쉬웠다.
 잦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여진의 백성들도 먹고 살기는 어려웠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끔씩 먹을거리를 뿌리는 희우의 소재는 거렁뱅이들에게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정보였다.
 거렁뱅이들로부터 희우의 소재를 알아낸 사호(四號)의 얼굴에는 긴장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일은 그 자를 기다려 적당한 곳에서 해치우면 될 거야. 아무리 고수들을 호위무사로 삼고 있다하더라도 한 개의 방파를 통째로 고용하지는 못했을 테지.”
 오아속의 진영에 군량미를 넘겨주고 돌아오는 희우를 흘석열부의 경계에서 기다렸다.
 기다린 지 사흘 째 되던 날.
 오십여 명의 호위무사에 둘러싸여 다가오는 서너 대의 마차를 발견하였다.
 서서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 세 명은 마차를 뒤따르기 시작하였다.
 거의 거렁뱅이와 같은 행색의 떠돌이 무사들, 그것도 고수의 풍모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갓 솜털이 가신 젊은이를 눈 여겨 보는 자들도 없었다.
 제대로 된 실력도 없는 주제에 호위무사로 여차저차 채용되어 숙식이나 해결해 볼까하는 쓰레기들로 보일 뿐이었다.
 희우의 호위대장은 귀찮았다. 저런 놈들은 굳이 쫓을 필요도 없었다. 상대를 해 주지 않으면 한나절 정도 따라오다가 제 갈 길로 갈 놈이었다.
 희우의 장원까지는 아직 백여 리가 남았다.
 오늘 밤은 이 들판에서 숙영을 해야 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천막을 치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저녁을 해결하였다.
 내일 저녁쯤이면 장원에 도착하여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곳에서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이었다.
 한층 여유로워진 일행은 느긋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 밤만 지나면 호위에 이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호위대장은 천막 주위로 화톳불을 밝히고 자신들의 물주(物主)를 보호하기 위해 십여 명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긴 어둠이 끝나갈 새벽 무렵.
 천막 주위로 조용히 움직이는 세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불침번을 서고 있는 호위무사들 곁으로 그림자가 지나갈 때마다 신음소리와 함께 호위무사들은 그 자리에 소리 없이 누웠다.
 잠시 후, 천막을 빠져 나온 세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침 햇살이 천막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을 보며 일어나 밖으로 나온 호위대장은 눈을 부비며 시원스레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의 분위기가 스산하였다.
 급하게 바지를 추스른 호위대장은 희우의 천막으로 뛰어 들었다.
 호위대장은 천막 안의 광경에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꿈쩍할 수가 없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희우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했다.
 자신의 무공 실력이면 어디가든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지만 저 물주(物主)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오아속이 문제였다.
 호위를 제대로 못한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뒤를 이어 천막 안으로 뛰어든 부하들을 보며 다음 행동을 선택해야 했다.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장주 어르신에 대한 대부족장의 신임은 두텁다. 이렇게 자객에게 당한 것을 알면 호위를 맡았던 우리 모두는 목을 내놓아야 한다. 여진의 모든 병사들이 우리를 쫓을 것이다. 뾰족한 방법은 없다. 여기서 흩어진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라. 그동안 나를 믿고 따라준 네 녀석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호의이다.”
 말을 마친 호위대장은 말에 몸을 실었다.
 그래도 국경과의 거리가 짧은 요나라로 도망치는 것이 그나마 살아날 가능성이 높았다.
 대국인 요나라 안으로만 들어가면 어차피 여진으로서는 추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호(四號)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수많은 여진의 병사들이 때로는 삼사십 명씩, 많게는 백여 명씩 요나라 국경을 향해 급히 말을 달려 지나갔다.
 지금쯤이면 부락과 부락을 잇는 모든 길이 막히고 수상한 자들을 찾느라 병사들이 마을을 뒤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진 놈들은 요나라 국경을 향해 말을 달릴 뿐 달리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십여 일이 지난 후, 별 어려움 없이 사호(四號) 일행은 요나라의 국경을 넘어섰다.
 ***
 이자겸에 의해 여진에 다시 넘겨진 공험진성은 함주 평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여진으로서는 성(城) 이상의 의미를 갖는 요충지였다.
 여진 병사들로 이미 꽉 채워져 있던 공험진성에 요 며칠 사이에 여진 무림을 주름잡는 고수들이 몰려들었다.
 개경 인근을 출발했던 살막의 인자(忍者)들도 검산령과 천불산을 거쳐 백암산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백암산 초입의 주막.
 탁자에는 세 명의 사내들이 앉아있었다.
 왜인 복장의 외팔이 인자(忍者), 호피의(虎皮衣)를 걸친 여진 검객, 그리고 학자풍의 고려인(高麗人).
 그 고려인은 설긍유였다.
 “두 분도 무인들이시니 전설의 문파인 중천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것이오. 지금 백암산에서 우리가 제거해야하는 자들은 그 중천의 두 호위와 그들에 의해 키워진 검귀들이오. 서른 명 남짓이라고 하나 그 정도의 인원만 가지고도 웬만한 무림 방파들은 하룻저녁에 씨를 말릴 수 있는 자들이오.”
 설긍유의 말을 받는 자(者)는 동영의 살막주였다.
 “중천의 무서움은 본좌도 잘 알고 있소. 부천주라는 자가 단전이 파괴되고 근육이 뒤틀린 상태에서도 내 오른팔을 잘랐소. 지금 생각하여도 소름이 끼치오.”
 살막주의 두려움에 떠는 얼굴 표정을 살피던 여진 무인이 자신의 검을 힘 있게 거머쥐었다. 검을 쥔 팔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으음. 본좌는 지금껏 살아오며, 중천이란 입담 좋은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전설로만 여겨왔소. 본좌 또한 북명무문(北溟武門)을 이끌고 북녘의 무림을 아우르며 천하 무림을 떠받치고 있는 무인(武人). 살아생전 중천의 인물과 겨루어 볼 수 있다면 목숨을 내놓아도 여한은 없지.”
 살막주는 가늘게 눈을 뜨며 째려보았다.
 “문주도 한 번 겪어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거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설긍유는 얼른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들의 실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오. 황궁에 무영대라는 친황 호위대가 있었소. 그들 이백 명으로 중앙군의 최정예군 오천 명을 도륙 내었소. 그보다도 더 뛰어난 자들이 백암산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이오. 중천의 대부분의 문도를 저세상으로 보냈다고는 하나 아직 천주와 네 명의 호위, 그리고 무영대 최고 정예들이 남아있소. 호승심은 버리는 것이 좋소.”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그들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척살하기란 불가능하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접어 두시오. 군자산(君子散)을 쓸 것이오. 효과가 부드럽고 공력을 일으킬 때까지는 자신이 중독되었는지조차 모르오. 그리고 중천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검술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독(毒)에는 무지하지요.”
 “그럼, 개경에서 제거하였다는 중천 문도들도 독을 사용하였소?”
 “아니오. 그들은 한 곳에 모을 수 있어 화약을 사용하였소. 하지만 백암산의 무리들은 밀폐된 곳에 모으기가 어렵소. 독이 최선책이오.”
 “그럼, 군자산은 어찌 먹일 작정이시오.”
 설긍유는 마당에 놓여있는 평상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사내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본관이 도성에서 미주(美酒)와 음식을 준비하였소. 산길을 따라 날라 오느라 고생 좀 했지요. 허허. 이곳이 지금은 여진 땅이 아니오? 그 먹을거리에 군자산을 풀고 곧 산채로 떠날 것이오. 본관이나 저 아랫것들은 내공이라고는 익히지도 않았소. 군자산을 먹는다고 해도 몸에 표시가 나지 않소. 산채에서 저녁을 먹게 되겠지요. 자시(子時)에 산채를 물샐틈없이 몇 겹으로 둘러싸고 공격하시오. 살아남는 자가 있으면 아니 되오.”
 “알겠소.”
 다섯 명의 장정들에게 술과 음식을 지우고서 산채에 나타난 설긍유를 보고 현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옵서 하사하신 술과 음식이오. 형님.”
 이런 수고를 해주는 설긍유가 고맙기도 하였지만 뭔가 찝찝하였다.
 무림과 황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필요에 의해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 이런 관심은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니오, 형님. 중천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난 이자겸의 반란을 제압하고 난 후, 폐하께옵서 하루도 중천의 고마움을 입에 올리시지 않은 날이 없으시오.”
 “허허. 아니야. 공치사 들을 일이 아니지.”
 “아니지요. 폐하의 호위대인 무영대는 중천의 문도가 아니오?”
 현무는 손을 가로저었다.
 “자네는 잘못 알고 있네. 폐하의 호위대는 단지 무영대일 뿐, 중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네. 우리는 단지 무공의 기초만을 가르쳤을 뿐, 검법은 선무검문에서 가르쳤을 테니 그들은 차라리 검문의 사람이라고 봐야 옳지. 우리 중천의 문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역시 이들은 무공에만 미쳐 있을 뿐,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이미 척준경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가요? 형님. 하여튼 그래도 이 술과 음식은 드셔야 하오. 덕분에 소제(小弟)와 여기까지 지고 오느라 고생한 저 사람들도 음식 적선을 좀 받지요. 허헛.”
 “그럼 그래볼까. 하기야 애써 가지고 온 것인데 고맙게 먹어야지.”
 옆에 앉아있는 백호에게 얼굴을 돌렸다.
 “사제, 녀석들에게 나누어줄까? 그런데 이런 기름진 음식이 녀석들의 입맛에 맞을지 몰라?”
 “흐흐. 술도 한번 줘 볼까요? 아마 술을 마셔본 녀석들이 없어서 오랜만에 구경거리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술과 음식은 서른 명 남짓이 먹기에는 충분히 많았다.
 먹을 것을 조심하는 것도 음식을 하사한 황제나 여기까지 가지고 온 설긍유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 오늘 밤만은 수련을 멈추기로 하였다.
 이런 포식을 해본 것이 언제이던가.
 저녁부터 시작된 잔치(?)는 자시(子時)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저렇게 말이 많은 녀석들이 어떻게 지금껏 말없이 수련에만 몰두했는지는 도통 납득이 가질 않았다.
 술기운이 올라온 현무는 흡족한 표정으로 무영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녀석들을 괜히 보냈군.’
 지금쯤이면 여진 땅을 헤매고 있을 세 녀석들에게 미안했다.
 산채를 둘러싸고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한 겹. 두 겹. 세 겹.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골짜기에 울렸다.
 설긍유가 천천히 일어났다.
 “형님, 소제(小弟)는 소피 좀 보아야겠소.”
 좀 떨어진 나무를 향해 걸었다. 비틀비틀. 취기에 몸을 가누질 못하는 듯하였다.
 “그냥 거기서 일을 보게나. 누가 보기라도 하는가?”
 십여 장 정도 걸어가고 나서 설긍유는 천천히 돌아섰다.
 “미안하오.”
 현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미안하다니.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설긍유의 옆으로 검을 거머쥔 무사들이 늘어섰다.
 다가서는 움직임으로 보아 상당한 수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특히 설긍유 옆에 붙어있는 두 놈은 거의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른 놈들이었다.
 “으음. 어찌 되었건, 이게 무슨 일인가?”
 “황제 폐하의 명이시오. 중천은 너무 강하오. 그건. 고려에게는 위험한 일이오.”
 “우리는 황궁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고려에 위협이 된다니. 너무 비약이 심하구나.”
 설긍유는 현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단지 중천의 생각일 뿐. 그 강함을 감추고 언제까지나 숨어 지낸다는 것은 힘드오.”
 “아니다. 우리는 이미 천 년을 숨어 지냈다.”
 “미안하오. 형님. 더 이상의 이야기는 무의미하오.”
 현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오냐. 황성에서 우리를 그리 생각한다면, 중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겠다. 천년 세월을 이어온 중천의 힘을.”
 내력을 끌어올리려던 현무는 순간 당황하였다.
 “네, 이놈. 무슨 치졸한 짓을 하였느냐?”
 “산공독(散功毒)이오.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오.”
 현무는 주위로 몰려든 백호와 무영대원을 훑어보았다.
 “후후. 살기는 틀린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 검을 잡아라.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어차피 검을 섞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미 취기가 올라왔고 그 취기조차 밀어낼 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 치 혀로 먹고사는 저런 모사꾼에게 마음을 내어 주다니.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주저함 없이 앞으로 걸었다.
 막아서는 자들은 동영의 인자(忍者)들인 듯 했다.
 취기에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검의 예기(銳氣)는 느낄 수 있었다.
 몸을 비틀자 검이 비켜갔다. 검을 그어 올렸다.
 한 놈이 피를 쏟았다.
 뒤이어 서너 개의 검이 동시에 찔러왔다.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옆구리에 검이 파고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잡은 검이지만 너무 느리다고 느껴졌다.
 놈들의 팔 두 개가 땅에 떨어졌다.
 베어도, 베어도 놈들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등줄기가 시큰하였다.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중천의 문도가, 저런 치졸한 놈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데. 하지만 이미 현무의 몸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백호에게 다가서는 이는 호피(虎皮)를 두른 자(者)였다.
 커다란 완월검(玩月劍)에 흐르는 기(氣)를 보건대 검법의 경지가 일가(一家)를 이룬 놈이었다.
 검를 들어 올린 놈은 백호를 노려보았다.
 “검을 처음 잡은 날로부터 귀하들을 만나보고 싶었소.”
 “그대의 검을 보니 북명의 도법인 것 같소.”
 “그렇소. 본좌는 북명무문의 문주요.”
 “그대의 무공에 대한 경지는 지금 거기까지요. 후훗.”
 “???”
 북명무문의 문주는 의아하였다.
 이 무슨 말인가.
 “그렇게 치졸하게 목숨을 아껴서야 진정한 무공이 눈에 보이겠소?”
 무인이 결투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야 자신의 실력을 한탄할 일이지 억울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분한 일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되어버린 일.
 구차하게 살아남고 싶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동영과 여진의 최강의 문파들을 모두 끌어들인 것 같았다. 내공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저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백호가 한 발을 내디뎠다.
 검문주의 완월검이 검광을 뿌리며 백호를 덮쳐왔다.
 백암산에 해가 떠오를 무렵.
 산채에는 한 무더기의 시체가 쌓였다.
 하나, 둘, 셋······ 서른 구(具).
 설긍유가 입을 열었다.
 “맞소.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있었던 모든 중천의 두 호위와 무영대들이오.”
 살막주가 진저리를 쳤다.
 “중천의 무학을 견식할 수 있다는 유혹에 호기롭게 이 일에 끼어들었는데. 후회스럽소. 무인으로서 수치스럽기도 하고. 괜한 짓을 시작하였소.”
 설긍유는 살막주의 초췌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후회해도 소용없소. 여기서 발을 뺄 수는 없소이다. 무아선인과 두 호위가 남아있는 한 중천은 아직 건재하오.”
 “후후. 이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아오. 하지만 그 셋을 죽이기 위해 우리 살막이 당해야 하는 피해는. 본좌가 잘못된 패를 잡았던 것 같소이다.”
 “으음.”
 살막주는 수하를 불렀다.
 “저들은 검을 위해서만 살았던 진정한 무인이다. 저런 무인들의 시신을 산짐승들에게 내어 줄 수야 있겠느냐? 산채와 같이 불태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도록 하거라.”
 “네, 존명(尊命).”
 설긍유의 눈길은 불에 타고 있는 산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시신을 정리하고 있는 무사들에게 눈길이 옮겨졌다.
 과연 저 정도의 인원으로 무아선인을 제거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시간을 늦출 수는 없었다.
 “몸이 날랜 수하 한 명만 뽑아 주시오.”
 설긍유의 말에 살막주는 웬일이냐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무아선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예무사를 더 불러들여야 할 것 같소.”
 살막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개경에는 고려의 무림의 최고 척살단인 흑혈단의 특급 살수들과 중앙군의 백부장(百夫長)급의 정예무사들이 모여 있소. 그리고 지금쯤이면 거란의 낭부(狼府) 고수들까지 합류하였을 것이오. 상장군에게 전언을 넣어 봉래산으로 급히 모이도록 해야겠소. 한 시가 급하오. 중천의 대(代)를 끊기로 한 이상,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되오.”
 “알겠소이다.”
 수하가 전서(前書)를 갈무리하고 떠나는 것을 보며 살막주는 설긍유를 재촉하였다.
 “고수들을 끌여들여 천라지망을 펼친다고 해도 무아선인이 도망가기로 작정을 한다면 막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오. 또 다른 숨겨둔 비책은 없소? 설마 무아선인을 그냥 들이치자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소이다. 본관이 아무리 서생(書生)이지만 부흥산에서도, 그리고 이곳 백암산에도 중천을 겪어보니 알겠소. 저들을 그냥 들이치는 것은 역시 무모하오.”
 “허면?”
 설긍유는 신음하듯이 말을 꺼냈다.
 “화약을 쓸 것이오.”
 “우리와 같은 무인들이 어느 정도 가까이만 접근을 해도 경계를 할 것이 분명하지 않소?”
 “그러니 무공을 익힌 자를 보내겠소? 봉래산 근처에 가면 전란을 피해 떠도는 유민들이 널려 있소. 자신의 식솔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할 사내들은 서너 명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오. 무공을 모르더라도 화약을 짊어지고 그 심지에 불만 붙일 수 있으면 되오.”
 “그 정도로 무아선인을 죽일 수 있겠소? 어림없소.”
 “물론 그 정도로 죽을 무아선인이 아니라는 것은 본관(本官)도 잘 알고 있소. 내력(內力)만 쓰지 못하게 한다면 그걸로 족하오. 나머지는 그대들, 무인들이 알아서 해야만 하오.”
 “으음. 그 후에는 무아선인의 목을 자를 때까지 밀어붙이자는 말이군요.”
 “그렇소.”
 “아무리 내공이 파괴된다고 해도 화경의 무아선인과 끝을 보자면 얼마나 많은 무사들의 목이 달아나야 하는지, 그대는 아오?”
 “그래도 할 수 없소. 무아선인이 살아있는 한, 중천의 제거에 관계되었던 고려의 무인(武人)뿐 아니라, 그대 동영(東瀛)의 살막(殺幕), 여진의 북명무문(北溟武門), 그리고 거란의 낭부(狼府)까지 언제 다가올 지 모를 죽음의 공포에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하오.”
 설긍유는 점점 더 치졸해져 가는 자신이 역겹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하늘(天)인 황제 폐하와 고려의 안위를 위해서, 반드시 중천은 사라져 주어야만 했다.
 결코 이러한 자신의 신념은. 바뀔 수 없는 자신에게 내려진 천명(天命)이었다.
 ***
 봉래산이 시작되는 곳.
 서쪽 초입에는 때 아닌 무사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백암산을 출발한 살막과 북명무문의 고수들은 산맥을 따라 은밀히 움직였다.
 이틀 밤낮을 꼬박 이동하여 봉래산이 올려다 보이는 유랑민 부락에서 이르러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 다음날, 해가 질 무렵, 개경에서 상장군 권수가 흑의(黑衣) 무복(武服)으로 갖추어 입은 용호군과 응양군의 백부장(白夫長)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뒤이어 두 시진의 간격을 두고 낭부(狼府)의 고수들과 흑혈단(黑血團)의 살수들이 들어차기 시작하였다.
 주인이 떠나버린 지 꽤나 오래 되었을 법한 폐가에는 여섯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자못 심각하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설공(薛公). 이제 어찌해야 하오.”
 “상장군. 이미 화약을 짊어지고 갈 사내들은 물색해 놓았소이다. 그 사내들의 남은 식솔들에게 여생을 굶지 않고 지낼 만큼의 재물을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말이옵니다. 그 사내들을 이끌고 소생은 산채로 갈 것이외다. 그러나 그 사내들과 한 약속은 상장군께서 제안공 전하께 전하여 주십시오. 그들도 고려를 위해 죽는 것이니 만큼 그 정도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오이다.”
 “으음. 그럼 공(公)도 무사하지 못하오.”
 “괘념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어차피 이번 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소생 또한 이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황국(皇國)의 신민(臣民)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안면이 있는 소생이 가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황위(皇威)가 바로 선 황제 폐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오. 살아서 보아야 되지 않겠소?”
 “아니 되오이다. 이 일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저승에서나마 그들에게 용서를 빌어야지요.”
 “공(公)의 충심(忠心), 내 반드시 황제 폐하께 고해 올리겠소.”
 “후후. 감사하오이다. 상장군. 어두운 밤이면 저들이 부상을 입는다 하더라도 숨거나 도망가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산채를 원거리에서 포위하고 있다가 폭발음이 들리면 들이치도록 하시지요. 빈틈없이.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면 아니 됩니다.”
 “잘들 들으시었소? 북쪽은 절벽. 동쪽은 바다(海)이니 두 방향만 철저히 틀어막으며 다가서면 되오이다.”
 “알겠소이다. 그렇게 하지요.”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네 명의 주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설긍유의 충심이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건다는 것.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자리를 잡은 이후 한 번도 입을 열은 적이 없던 낭부주(狼府主) 하아위(何阿偉)가 좌우의 장문(掌門)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아선인의 경지가 화경의 끝자락이라 하지 않았소?”
 살막주가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뱉었다.
 “그렇지요. 중천의 부천주인 막여라는 자(者)도 화경이었으니 말이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단전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본좌의 한 팔을 잘랐으니 말이오.”
 “그럼 무아선인이 화약을 모른다고 치더라도 그런 수에 당하겠소? 아마 털끝 하나 어쩌지 못할 거요. 약간의 폭발 압력만 느껴도 무아선인의 몸이 저절로 반응할 것이니 말이오.”
 낭부주 하아위의 조심스러운 말에 설긍유가 말허리를 잘랐다.
 “본관이 어찌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겠소. 무아선인은 지금 수련 중이라 하오. 그렇다고 그만한 고수가 검법을 수련하고 있겠소? 십중팔구 참선 중이란 말이오. 내공 수련에 충격을 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귀하들도 잘 알 것이오. 주화입마(走火入魔)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오. 아무리 무아선인이 화경의 고수라도.”
 하아위는 새삼 설긍유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데 저 의기(義氣)며, 심지(深知)는 존경스러웠다.
 같은 곳에서 태어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자(者)였더라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꼭 살아 돌아오시오. 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소.”
 설긍유가 하아위의 큼지막한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하리다. 친구.”
 이른 아침 설긍유는 네 명의 사내들에게 구운 고기로 살짝 덮은 화약을 나누어 지게하고 산채에 찾아 들었다.
 한 달 전에 들른 곳이라 산채로 가는 길은 눈에 익었다.
 천주의 연무실이 있는 막사를 향해 다가가자 문이 열리고 청룡위와 주작위가 막아섰다.
 “귀공이 웬일이시오?”
 설긍유는 무척이나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손사래를 쳤다.
 “그 무슨 섭한 말이오? 폐하의 명을 받아 약간의 음식을 가져왔는데 말이오. 그것도 먼 개경에서 말이오. 하하.”
 청룡은 저런 문인(文人)들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무인과는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얼굴을 맞대고 말을 섞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저놈은 툭하면 봉래산에 들락거리니. 다만 무아선인이 허락을 하니 말대꾸를 해줄 뿐, 전혀 정(情)이 가는 놈이 아니었다.
 청룡은 이런 상황이 불만이었다.
 중천과 황실은 가는 길이 달랐다.
 황제는 고려의 황제일 뿐 자신들의 황제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들의 하늘(天)은 무아선인 뿐이었다.
 고려라는 나라도, 고려의 주인이라 칭하는 황제도 자신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존재였다.
 황제를 들먹거리며 들어서는 설긍유가 반가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섭섭하였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천주님께서 운공(運功) 중이시니 외인(外人)이 오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소.”
 “하하. 이해하오. 그래도 폐하께옵서 하사하신 음식인데 맛은 보셔야지 않겠소이까?”
 설긍유는 청룡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사내들을 재촉하였다.
 “자자. 자네들은 음식을 안으로 들여놓게.”
 순간 청룡은 이를 막아야 하는지 망설였다.
 자신은 이 자가 께름칙하였다. 하지만 무아선인이 이 자를 멀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들의 몸속에 느껴지는 내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설긍유를 비롯하여 따라온 네 명의 사내도 무예를 익힌 자(者)들은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설긍유는 사내들을 이끌고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가 보였다.
 저 탁자를 건너 문을 지나면 연공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 안에는 무아선인이 수련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낮인데도 창을 가린 막사 안은 호롱불을 하나에 의지해 어둠을 겨우 면하고 있었다.
 설긍유는 호들갑을 떨었다.
 “자네는, 음식을 탁자 위에 내려놓게.”
 그 옆의 사내들에게 청룡과 주작의 시선을 피하며 턱으로 연공실을 가리켰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아. 내 정신 좀 보게. 하하. 그리고 자네는 저 호롱불을 들게. 그리고 등짐 속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천 조각이 있지? 거기에도 불을 붙이도록 하게.”
 청룡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부산해서 저런 놈들이 싫은 것이었다.
 사내들은 지고 온 등짐에 삐죽 흘러내린 천 조각에 불을 붙였다.
 연공실과 이곳은 얇은 흙벽만이 있을 뿐.
 이 화약이 터지면 저 연공실까지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하였다.
 천 조각이 거의 타들어가고 있었다.
 설긍유가 천천히 몸을 돌려 막사의 문고리를 잡았다.
 “공(公)들에게 원한은 없소. 이래야만 하는 본관(本官)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청룡과 주작은 어이가 없는 듯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타고 있는 천 조각이 없어질 무렵 무언가 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꽈-앙!
 순간 세 사람이 움직인 방향은 서로 달랐다.
 청룡과 주작은 터지고 있는 화약과 연공실 사이를 막아섰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위험한 것이었다.
 운공 중인 무아선인에게 충격이 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이 그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청룡과 주작의 몸은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설긍유는 사내들을 등지고 막사의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몸을 문 밖으로 빼기 전에 엄청난 압력이 설긍유의 몸을 밀어내었다.
 이미 몸은 허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무아선인은 운공 중이었다.
 몸속에서 뭉쳐져 원형이 되어버린 기(氣)를 혈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몸은 하늘로 오르는 듯 가벼워지고 있었다.
 양손에 검 모양의 청백색 광채가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 청백색 덩어리는 점점 커지며 형체를 잡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심검(心劍)의 단계에 한 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천무검제 이후, 중천의 천주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무(武)의 최고의 경지, 자연검(自然劍)의 경지에 올라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연공실 밖 탁자에서 완성되지 못한 자신의 몸을 향해 맞서기 어려운 압력이 짓이겨 들어왔다.
 막아야 된다는 의식보다도 먼저 몸이 반응하였다.
 지금 혈도를 타고 도는 내력(內力)이. 지금 움직이면 안 되는데.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무아선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기(剛氣)의 막(幕)이 몸을 둘러싸며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그 압력은 강기에 막혀 잠시 약해진 듯하였지만, 허사(虛事)였다.
 무아선인의 몸은 안과 밖의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
 혈도를 따라 움직이다 제멋대로 폭주한 내력이, 그리고 화약의 폭발로 생긴 압력이 무아선인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었다.
 이미 혈 속을 움직이던 기(氣)의 덩어리는 파괴되었고 단전은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입에서 한 움큼의 선혈이 흘러나왔다.
 “쿨럭, 쿨~럭.”
 순간, 무아선인의 몸은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자리가 푹 꺼지며 내려앉았다.
 뒤이어 폭발이 또 일어났다.
 막사의 지붕과 몇 겹의 흙벽들은 무아선인이 앉아 있던 자리를 덮으며 무너져 내렸다.
 산채를 둘러싸고 달려오던 무사들은 산채를 둘러싸고 멈추었다.
 무림 최고의 고수와 검을 섞어야한다는 중압감에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였다.
 무아선인과 호위들, 그리고 화약을 짊어지고 왔던 사내들의 몸은 그 형체를 제대로 찾을 수도 없이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설긍유만이 막사 밖으로 튕겨져 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달려온 하아위가 설긍유의 몸을 받쳐 안았다.
 “이보시오. 설 형(兄)! 눈을 뜨시오.”
 힘겹게 눈을 뜬 설긍유는 하아위의 얼굴을 쳐다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들은 다 죽었을 것이오. 으으······.”
 설긍유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놀란 낭부주가 설긍유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후후. 아직은 살아 있소. 다행이야.”
 설긍유를 안은 낭부주는 아직 멀쩡히 남아있는 가장 바깥쪽의 막사로 서둘러 걸었다.
 “의원을 데려오라.”
 수하에게 명을 내리고 침상에 설긍유를 눕히고 급한 대로 지혈을 하였다.
 무너져 버린 막사를 정리하던 무사들은 허탈하였다.
 수습을 할 온전한 시체도 없었다.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방파라고 알려진 전설의 문파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저들이 이렇게 죽지 않았다면, 자신들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였을 테니.
 상장군은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수하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시신들을 수습하여 저 소나무 아래 볕이 잘 드는 곳에 묻거라. 그리고 무너진 막사를 더 이상 훼손하지 말도록. 최소한 그 정도 예의는 차려야겠지. 우리 무인들이 마땅히 존경해야 할 고수들이다. 단지 가는 길만 달랐을 뿐.”
 ***
 피가 멎어 굳은 것으로 보아 하루 밤낮은 지난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하였다. 기억을 더듬었다.
 연공실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무엇인가 터졌었다.
 연공실 문으로 청룡과 주작의 몸뚱이가 그 폭발에 부서지며 쏟아져 들어왔다.
 자신의 몸은 저절로 내력을 일으켜 기의 막을 만들었다.
 막은 깨어지고 단전은 파괴되었다. 기는 역류하며 혈맥을 폭주시켰다.
 그 압력은 자신이 앉아있는 기둥조차 부셔버렸다.
 몸은 연공실의 구덩이 속으로 처박혔고 또 다른 폭발은 남아있던 벽과 지붕을 무너뜨리며 자신의 몸을 덮어 버렸다.
 몸을 일으켰다.
 기가 모이질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처음 무공을 배우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단지 의지와 몸에 붙어있는 여린 근육만으로 무공을 배우던 시절.
 “후후. 킁.”
 폐허가 된 막사가 들썩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무아선인은 무너져 버린 산채를 둘러보았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이 즐겨 앉아있던 소나무 아래에 웬 흙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뿌예졌다.
 ‘녀석들. 청룡, 주작. 너희들이로구나. 미안하구나.’
 하늘을 보았다.
 별똥별 하나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본좌를 겨냥한 것을 보면 여기를 잘 알고 있는 황실이겠지. 그리고 이미 문중(門中)의 사제들도, 백암산의 아이들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야. 천 년을 이어온 중천이 본좌의 대에 이르러 멸문을 당하게 되다니. 허헛.’
 피투성이가 된 무아선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선대 문주들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황실과는 연(緣)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 내 한 순간의 무지(無知)와 욕심으로 씻지 못할 죄를 지었구나. 이제 어찌한다?’
 자신의 몸은 이미 회복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예전의 무위를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화타(고대 중국의 명의)가 살아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길어야 한두 달 더 버틸 수 있을는지. 허허.’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밤하늘을 보며 하염없이 앉아있던 무아선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봉래산 산채를 벗어나야 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파를 이을 방도를 찾기 위해서라도.
 ‘그래. 일단은 백암산으로 가자. 혹여 녀석들 중에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녀석이 있으면. 그 녀석에게 내 죄에 대한 짐을 지워 주어야지. 아무래도 어린 녀석들이니 어쩌면 다시 맥(脈)을 잇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
 열흘을 걸어 겨우 도착한 백암산 산채는 이미 불에 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무너진 산채에 시신을 쌓아 태웠는지 불에 탄 시신과 무영대원들이 지니고 있던 묵환(墨環)만이 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녀석들을 산짐승들의 먹이로는 놓아두지 않았군. 최소한의 예의인가. 그리고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움직이기 어려운 몸이기는 하였지만 불에 탄 시체들이나마 산채 옆 공터에 모아 흙을 덮었다.
 죽은 무영대의 뼈에서 흘러 떨어진 묵환을 하나하나 긁어모으며 시린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녀석들도 본좌를 엄청 원망했겠지. 수련하는 동안은 악마로 보였을 테고. 죽을 때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여겼을 테지.’
 뼈 무덤 옆에 두 자 정도의 낮은 구덩이를 파고 묵환을 조심스레 하나씩 하나씩 던져 넣었다.
 마지막 묵환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때였다.
 그런데, 이상하였다.
 그 녀석들의 묵환이 보이지 않았다.
 사(四), 팔(八), 구(九).
 그것도 세 녀석 모두.
 자신이 봉래산에 수련을 하고 있을 동안, 임무에 실패하여 저 세상으로 한꺼번에 갈 그런 약한 녀석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녀석들은 세상 어딘가에 살아 헤매고 있을 터였다.
 백암산의 녀석들이 어찌 이리 쉽게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 녀석들이 같이 있는 한, 권문세가가 공들여 키운 척살단이 달라붙는다고 해도 목숨을 내놓을 녀석들은 아니었다.
 그러면 녀석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무아선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아마 그 녀석들이 백암산이 아니라면 그 곳에 있을 테지. 후후. 하늘이 우리 중천을 버리시지는 않으셨군. 허허. 서둘러야겠군. 그곳까지 이 몸으로 가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터인데. 몸이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선대 문인(先代門人)들과 사제(師弟)들을 위해서도 기필코 가야겠지. 녀석들이 나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희망일 테이니.’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무아선인은 힘겹게 발걸음을 떼었다.
 ***
 며칠 전부터 문도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계속 신경이 쓰이고 딱히 바쁜 일도 없던 터라 선무검문의 동계(東界) 지부장인 능필은 눈치 빠른 수하 하나를 불러들였다.
 “무슨 일인데 그리 웅성웅성 하고 있는가?”
 “지부장님, 봉래산 쪽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었다는 말들을 하고 있사옵니다.”
 “봉래산에서? 벼락이라도 크게 친 모양이군.”
 “네, 그러하옵니다. 지부장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옵니다.”
 “그래. 알았네. 저잣거리에나 나가볼까.”
 어슬렁거리며 저잣거리를 걷던 능필은 얼굴이 활짝 피어올랐다.
 한때 검문의 문하에서 같이 수련을 하던 동문을, 그것도 이런 저잣거리에서 만났던 것이었다.
 “자네는 자네가 용호군의 백부장(白夫長)이 되고 나서 처음 보는군. 이리 만나다니 정말 반갑군. 저기 주막에서 술 한 잔 하세.”
 주막으로 들어선 능필은 서둘러 술을 시켰다.
 “자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상장군이 며칠간 휴가를 주었네. 그리고 응양군과 용호군의 많은 백부장들이 이 고을에서 쉬고 있네. 다친 사람들 요양도 하고.”
 “허허. 무슨 큰 전투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중앙군의 백부장에게 떼거지로 모여 있고 말일세.”
 “하기야 큰 싸움이었지. 목숨이 오가고 말일세.”
 “아니, 자네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도 목숨이 오갈 일이 있단 말인가?”
 갑자기 백부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능필에게 가까이 앉으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자네, 혹시 중천을 아나?”
 “중천?”
 “그래. 중천 말일세. 전설의 문파(門派)라 불리는 그 중천 말일세. 우리 같은 무인들이 중천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나?”
 “아니,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의외여서 그렇네.”
 “중천이 멸문 당했네.”
 “그게 무슨 말인가?”
 “봉래산에 중천의 천주가 있었다는 말일세. 봉래산 동쪽 골짜기에 산채가 하나 있었네. 거기에 천주가 기거하고 있었고.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네.”
 능필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럼 며칠 전에 있었던 굉음과 연관이 있나?”
 “자네도 알고 있군. 그 날 중천의 주인이 세상을 떠났네.”
 “으음.”
 “나도 무인인데, 끼지 말아야 할 일에 엮였네. 아마 평생 후회될 걸세.”
 어찌 그런 일이.
 전설의 중천이. 멸문을.
 봉래산의 동쪽 골짜기라면. 분명 자신들이 지었던 산채가 맞을 텐데.
 그러면. 능필 자신이 수하들을 데리고 지었던 산채에서 만났던 그 노인이 중천의 천주라니.
 그냥 인자한 모습의 시골 노인처럼 보이던 그 인물이.
 능필은 밤새 뒤척이며 뜬눈으로 새웠다.
 아무래도 봉래산 산채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봉래산 산채에 머물던 사부들과 아이들이 떠나고, 일손을 도와주던 수하들이 돌아온 이후 이곳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소나무 아래 무덤이 새로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저 무덤이 중천의 주인의 무덤임이 분명하였다.
 잠시 멈추고 무덤을 바라보았다.
 전설로만 여기던 중천의 주인이 묻혀있다니. 무상(無常)하였다.
 발길을 옮겼다.
 막사는 폐허더미였다.
 연공실이 있던 막사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아선인은 연공실에서 수련 중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고 하였다.
 저기쯤이 연공실일 테지.
 그런데, 연공실의 중앙에 누군가 무너져버린 잔해들을 헤치고 나온 흔적이 눈에 띄었다.
 연공실의 중앙에 파여져 있는 원형(圓形) 구덩이. 내공 수련을 위해 만들어 달라고 하던 특이한 모습.
 이것은 능필 자신과 무아선인, 그리고 천주의 호위들만이 알고 있는데.
 백부장의 말로는 여기에 있던 모든 자(者)들은 사지가 찢겨져 죽었다고 했다.
 그럼 누구인가. 이곳을 헤치고 나온 자(者)는.
 폭발이 있었을 당시, 연공실의 여기 이 수련 장소에서 앉아 있었을 자(者)는.
 무아선인이었다.
 아뿔싸, 무아선인이 살아있는 것이었다.
 능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묻어야하는가, 아니면 알려야 하는가.
 상처받은 맹수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를 위해서는, 황제를 위해서는 묻어두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이 일을 주도한 황실에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무아선인을 살려두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마음을 정리한 능필은, 권수 상장군이 머물고 있다는 봉래산 동쪽에 위치한 동계 진군(鎭軍)의 병영을 찾았다.
 열흘 밤낮을 죽음의 기로에서 헤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설긍유의 첫마디는 무아선인의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설긍유가 누워있던 침상 옆에는 낭부주(狼府主) 하아위와 상장군 권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권수가 생각하기에 이만한 인물도 없었다.
 고려를 위해서 홍복(洪福)이었다.
 이 때, 문 밖에서 수하 백부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상장군. 선무검문의 동계 지부장이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상장군은 의아하였다.
 자신과 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혹시 봉래산 산채를 지은 것이 검문이라더니 그것 때문인가?
 “들이도록 하라.”
 내어 준 자리에 능필이 앉으려고 하는 순간, 설긍유가 상장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찌되었소이까?”
 상장군이 설긍유의 말을 받았다.
 “모두 죽었소. 산채에 있던 모든 자(者)들이.”
 설긍유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한층 여유를 찾는 듯 보였다.
 “후후. 이제 황제 폐하께옵서도 편히 주무실 수 있게 되었군요.”
 상장군과 낭부주가 설긍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장군.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이다.”
 갑자기 능필이 입을 열자 상장군은 불쾌한 듯 능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공(公)들은 잘못 알고 있소이다. 아직 무아선인은 살아있소이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될 법이나 할 일이오. 무아선인이 폭사(暴死)하였을 때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있었소. 그런데 그 수많은 눈을 피해 어찌 살아날 수 있겠소.”
 능필은 권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장군. 봉래산 산채를 지은 것은 우리 검문의 동계 지부(支部)였소이다. 그리고 본 지부장이 지휘했고 말이오. 그런데 연공실을 특별히 꾸며 달라는 주문이 있었소.”
 “어떤?”
 “연공실에 다섯 척 깊이와 폭의 원형의 구덩이를 파 달라고 하더군요.”
 “허면?”
 “그렇소이다. 오늘 아침 봉래산 산채에 들리었소이다. 그런데 그 구덩이에서 누군가 기어 나온 흔적이 있더군요. 그곳 막사의 연공실에서 지붕과 같이 묻혀있던 자가 누구이었는지는 상장군이 더 잘 아실 것이외다.”
 충격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자가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에게 발톱을 세운 맹수의 모습으로.
 그래도 북방의 험한 무림을 개척해 온 낭부주(狼府主) 하아위가 강골(强骨)답게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았다.
 “무아선인이 살아있다 하여도 그리 염려할 것은 아니오?”
 뒤늦게 끼어든 살막주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중천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오.”
 “무슨 말이오? 전설의 문파 중천의 무서움을 본좌라고 모르겠소? 본좌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오. 화약이 터질 당시 무아선인은 운기행공(運氣行功) 중이었소. 그런 상태에는 작은 충격에도 자칫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소. 그런데 그 크나큰 충격이라면 단전(丹田)이 파괴되었을 것이 분명하오. 대라 신선이 옆에 있다고 해도 몸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오.”
 살막주도 이 말에는 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태에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럼, 천천히 뒤쫓아 무아선인을 제거하면 되겠구려. 흐흐. 그 몸으로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고 제자(弟子)를 키워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막주의 말이 이상하게 설긍유의 뇌리에 맴돌았다.
 ‘제자(弟子). 제자(弟子)라.’
 설긍유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막주. 살막의 인자(忍者)들이 지난번 백암산에서 무영대의 시신들을 거두어 화장(火葬)을 하셨지요?”
 살막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다.
 “그렇소. 왜 그러시오?”
 “혹시, 그 시신 중에 여자가 있었소?”
 “아니오. 여자의 시신은 없었소이다.”
 설긍유는 신음을 내뱉었다.
 “어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으으.”
 설긍유는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눈을 뒤집으며 거품을 물었다.
 또 기절이었다.
 설긍유의 낙심을 방안의 사람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시신이 없다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화약이 터질 때의 부상도 크거니와 문인이라서 그런지 체질도 허약하였다.
 이틀이 지난 후에야 겨우 설긍유는 눈을 떴다.
 설긍유가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권수는 설긍유를 다그쳤다.
 “설공. 여자의 시신과 무아선인이 무슨 연관이 있소?”
 설긍유의 메마른 입이 열렸다.
 “그들이 살아 있소.”
 “누구 말이오?”
 “상장군, 예전에 백암산 산채를 몰살시키기 위해 소관(小官)이 백암산을 다녀온 걸 아시지요?”
 “그렇소. 그 때 제안공 전하의 사저에 나도 같이 있지 않았소.”
 “백암산에서 현무위를 만나 백암산 산채를 거닐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요. 그 때 백암산의 절벽 위에서 수련 중인 세 명을 보았사옵니다. 그 셋이 무영대원 중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릴 적 귀주에서 얼어 죽기 일보직전에 무아선인이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그 셋은 어딜 가나 항상 붙어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여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그 셋은 백암산에서 죽지 않았다는 말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백암산으로 빨리 가야 되옵니다. 무아선인이 살아 있다면 혹시 살아있을 지 모를 그들을 만나기 위해, 백암산으로 갔을 것이옵니다. 그들이 만나서는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
 몸도 제대로 못 추스른 설긍유였지만 천추의 한을 남길 수는 없었다.
 말에 올라 백암산으로 가는 길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백암산 산채는 을씨년스러웠다.
 산채에 도착한 설긍유는 산채 주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불에 탄 시신의 뼛조각을 모아 작은 무덤을 만들어 놓은 듯 보였다.
 분명 자신들은 막사와 더불어 시신을 불태우고 서둘러 봉래산으로 떠났었다.
 죽은 이들에게 이런 수고로움을 베풀 자들은 이미 모두 저세상으로 갔을 터인데.
 그렇다면. 무아선인이 벌써 머물렀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을 만났을까? 그건 아닐 것이었다.
 만약 그들을 만났다면, 불에 탄 저 통나무들을 들어 밑에 깔려 있는 뼛조각까지 수습했을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저 광경으로 보아 무아선인의 몸 상태도 힘든 상태일 것은 뻔하였다.
 설긍유는 산채를 둘러보고 있는 인물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권수 상장군, 낭부주 하아위, 흑혈단주 그리고 북명무문주.
 ‘그래, 살막이 제일 낫겠군. 아무래도 추격술이야 동영의 인자들이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
 “막주. 살막에서 길을 안내해야 할 것 같소이다.”
 “흐흐. 그런 건 우리 살막의 전문이지요. 걱정 안 하셔도 되오이다.”
 살막주는 인자들을 앞세우고 무아선인의 흔적을 쫓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산길을 따라가던 살막주는 고려와의 국경을 넘어서자 고을로 들어섰다.
 무아선인도 고수들이 자신의 뒤를 쫓을 것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장터에서 족적(足跡)이 섞이자 살막주도 당황하였다.
 며칠 전의 발자국이 남아있을 턱이 없었다.
 도대체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설긍유를 기다릴 수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하루 늦게 도착한 설긍유에게 살막주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디로 갈 것인지 방향이나 짐작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요. 무아선인이 산길로만 가는 것도 아니고······ 이처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고을이라도 들어서면 흔적 찾기가 영 힘들어지지요.”
 설긍유도 한숨을 쉬었다.
 이런 무식한 무부(武夫)들과 함께 일을 하려니 너무나 힘들었다.
 그 자들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 막막하였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은 설긍유는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씩 되새기기 시작하였다.
 과연 무아선인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무아선인은 가야 할 곳은 그들이 있는 곳일 것이었다.
 봉래산에서 수련 중이던 무아선인이 그들의 행방을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기필코 그들을 만나야만 한다면.
 과연 그들이 백암산과 봉래산의 산채를 떠나 갈 수 있는 곳은.
 그렇다.
 그 곳은 귀주 밖에 없었다.
 “무아선인은 아마 귀주로 갈 것이오. 서두릅시다.”
 ***
 너무나 힘들었다.
 몸은 이미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 녀석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목숨을 이어야 한다는 의지로 숨을 쉬고 다리를 번갈아 움직였을 뿐이었다.
 귀주에 도착하였다.
 이제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그 녀석들을 처음 만났던 골목에 흙벽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이제 방법은, 그 녀석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혹여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황실의 버러지들이 알았다 하더라도 피할 곳도 대적할 힘도 없었다.
 하루, 이틀. 해가 뜨고 해가 졌다.
 걸인처럼 보였는지, 가끔 먹을 것을 던져주는 인심 좋은 아낙들이 있어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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