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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개정판] 선무 [E]

[개정판] 선무 1-1권

2017.05.19 조회 6,582 추천 37


 # 서장
 
 나는 그날의 스승님을 잊지 못한다.
 거센 바람이 불던 그날의 스승님을······.
 
 “쉽지 않겠구나.”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만큼 강한 바람이 불었다.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아서 버티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스승님은 그런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셨다.
 그 앙상한 손이, 그렇게도 부드럽고 따스할 수 없었다.
 그러던 순간, 스승님의 눈이 바다의 한 곳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나도 스승님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용오름.
 그것은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거대한 용오름이었다.
 바닷물이 강맹한 바람에 회오리치며 하늘까지 빨려 올라간 채, 마을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앞에서 직접 마주한 용오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무서웠다. 그것은 주위의 바닷물을 계속해서 빨아들이며 덩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것은 더욱 강맹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스승님과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서, 정확히······.
 
 파도는 거대했다.
 나는 단연코 이렇게 무서운 파도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무엇이라도 집어삼킬 만한 엄청난 파도······.
 몸이 벌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있었고, 이내 젖은 모래마저도 이리저리 휘날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찡그린 채 실눈을 뜨고 스승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셨다.
 오히려 스승님의 눈빛만큼은 평소 때보다 더욱 고요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촤라락― 촤라라락!
 스승님의 양손에서 부채가 펼쳐졌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님이 내 앞에서 두 개의 부채를 펼쳐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바람이 더욱 거세져서 이제는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다고 느껴진 순간, 그 바람을 가르며 스승님의 몸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귓가로는 여전히 잔잔한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량아,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이제부터 내 모습을 잘 봐 두어라.”
 “스, 스승님······!”
 스승님의 주문과는 다르게 나는 전혀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빤한 위험 속으로 다가가는 스승님의 모습에서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두려움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 순간.
 거대한 용오름을 마주한 채로 가만히 부채를 들고 서 있던 스승님에게서 한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본문 최고의 절기인 선무이니라!”
 귀청을 잔뜩 괴롭히는 바람 소리 사이로 들린 그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대자연의 거대한 분노 앞에서도 스승님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의 협이다.”
 그 말과 함께 스승님의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는 눈을 찌르는 듯한 거센 바람도, 귀를 찌르는 온갖 시끄러운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스승님의 춤사위에 빨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휘휘 날려 버릴 것만 같은, 대자연의 그 압도적인 힘.
 그리고 그 앞에 선 한 인간의 위대하고도 성스러운 저항.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일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그날의 스승님을 잊지 못한다.
 
 
 # 1. 노부는 ‘천하제이인’이었다
 
 ‘노부는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었다.’
 ― 그것은 ‘무공’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했던 날, 스승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
 
 강호 밥을 먹는 사람치고, 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선선자(仙扇子) 경무구(景無垢).
 
 하지만 백 년 전 그 당시에는 ‘선선자’라는 칭호도 거의 쓰이지 않았다. 다른 호칭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천하제이인.
 사실,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천하제일인’도 아니고 ‘천하제이인’이라는 호칭이 더 많이 회자되기는 힘드니까. 누구든지 일인자는 기억하기 쉬우나 이인자는 기억하기 어렵게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이인이라는 호칭으로 더 친숙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선선자 경무구였다. 그는 비록 이인자이되, 사람들의 뇌리 속에 보다 깊이 각인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를 위해 위대한 일인자의 자리를 양보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일인자로서의 모든 영광을 뒤로한 채, 홀로 초연히 사라진 인물이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만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사라져 갔다.
 
 ***
 
 노인.
 상당히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성성한 백발에서는 아직까지 윤기가 흐르는 듯 보이는 노인.
 백색 내지는 은색으로 화한 듯, 도도하게 뻗은 그의 수염까지 더해져 비범한 풍채를 물씬 풍기는 노인이다. 감았다가 살며시 뜬 그의 눈에서 정광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도인의 완벽한 풍모였다.
 노인은 엄숙한 자세로 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많은 날을 살아왔고, 많은 일을 행하였으되······.’
 그의 온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했고, 또한 도도했다.
 ‘좀 전까지도 인간사를 초연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사슬처럼 얽혔던 세상의 모든 고리들이 사라지고 수많은 번뇌의 늪에서 헤어 나오자, 그 세상마저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이 곧 정중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는 상당한 시간들을 살아오면서 많은 잘못이 있었고, 또 그보다 더한 어리석음들이 있었사옵니다.”
 노인은 도대체 누구를 향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제 스스로 느끼기에도 아직 많이 부족한 몸이기에 선인들께서 보시기에는 더욱 부족하겠사옵니다마는, 이제는 저 또한 선배들의 뒤를 이으려 합니다.”
 도대체 노인이 말하는 선배 선인들이라는 자들은 누구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는 노인의 모습은 충분히 이상하게 여겨질 만했다.
 “비록 선인이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을지 모르겠사오나, 저는 이제 그 길을 가려 합니다.”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노인은 지금 선인의 길로 접어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그가 우화등선(羽化登仙,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신선의 반열에 오른다는 뜻)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일까?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신선이 된다는 것은 전설 속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때때로 그러한 전설들이 있지만, 실제로 노인이 신선의 길로 접어들려 하는 것이었다니.
 놀랄 일이다.
 “세상사에서 쓰이던 소인의 이름은 경무구. 그 보잘것없는 이름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사옵니다. 이제 저는 세상사에서 초연하여 더욱 넓고 이로운 도를 추구할 것을 천지신명과 선배 고인들께 고하옵니다.”
 경무구!
 그 노인이 바로 선선자 경무구였다니?
 능히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과 명성을 뒤로한 채, 천하제이인을 선택했던 인물.
 백여 년 전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던 그가 지금 이곳에서 우화등선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노인 경무구는 거기까지 말한 후 잠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그 눈은 이내 조용히 감겼다.
 곧 경무구는 무릎 꿇었던 자세를 고쳐 정좌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다. 허나 어떤 면에서 삶이라는 것은 죽음의 연장선이 될 수 있고, 죽음이라는 것도 삶의 연장선이 될 수 있는 것. 사랑도 미움도, 욕심도 미련도 결국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잔상들일 뿐······.’
 그때 돌연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의 몸에서 반투명한 푸른빛의 서광이 이는 것이 아닌가.
 ‘초연하고 또 초연하면 그러한 모든 것들은 무(無)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꼭 유(有)가 아닌 것은 아니니······.’
 바람도 없는데 그의 백발이 미약하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영원한 삶을 원하는 것 자체가 미련함일 뿐이요, 죽음을 싫어하는 것도 모순이나 죽음을 좋아하는 것도 모순이 아닌 것이 아니다. 나는 죽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는 것이 싫은 것도 아니다. 어지간한 것의 도(道)는 그 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니, 그런 것을 깨달은 나는 이제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것일 뿐.’
 우우우웅―
 신기한 소리와 함께 그의 도포 자락이 잔잔한 바람에 나부끼듯 자연스럽게 펄럭였다.
 ‘이는 더 커다란 도를 깨닫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다. 선인(仙人)의 길에 들어서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행운도 아니요, 행운이 아닌 것도 아니다.’
 경무구의 몸에 일던 서광은 더욱 강렬해져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리며 조용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저, 그러하기에 그러한 것일 뿐.”
 그 한마디와 함께 그의 몸 주위로 새하얀 빛무리가 일기 시작했다. 그 빛은 갈수록 강렬해져 갔지만, 경무구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우화등선에 성공할 수 있다.
 게다가 아무런 욕심이나 미련 등이 없을뿐더러, 실패한다고 해도 그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니 그 무슨 번뇌가 있으랴?
 그의 얼굴이 담담하고 평온한 것은 그의 그러한 생각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평온하기만 했던 경무구의 표정에 변화가 나타났다. 감겨 있던 그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이곳의 지붕 위로 뭔가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경무구의 얼굴에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떨어져 내리는 물체는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확실했다. 선인지경에 다다른 그의 초감각이니 거의 맞는다고 봐야 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이대로라면 우화등선할 수 있거늘, 왜 갑자기 이런 때에?’
 이날을 위해 신경을 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계절과 날짜, 그리고 시간, 게다가 장소까지.
 깨달음을 근래에 얻기는 했지만, 날짜나 장소 그리고 날씨 등에 있어서 근 몇 년 동안 오늘처럼 좋은 조건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화등선에 실패한다면 앞으로 또다시 몇 년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우화등선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진원지기에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약간의 주화입마가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인영은 계속해서 자신이 거하고 있는 곳의 지붕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곳이 아무리 끝없이 높은 절벽의 아래라고는 하지만 이곳에 수십 년간 기거하면서도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은 중원이 아니다.
 대륙의 외곽 중에서도 외곽이다.
 경무구가 기거하고 있는 곳은 바다에 인접한 제법 높은 산중이었고,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근처에 작은 어촌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위험하다며 절벽 근처에는 가지도 않는다.
 ‘그런 곳이거늘,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경무구의 얼굴에 고뇌의 표정이 드러났다.
 결국 우화등선의 마지막 단계로 들어서던 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업이련가······.”
 그 말과 함께, 정좌해 있던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가 싶었다.
 곧 그의 신형이 방문을 박차고 나감과 동시에 지붕 위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 즈음, 정체불명의 인영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경무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경무구가 떨어져 내리는 그 인영을 향해 양손을 뻗으니 돌연 인영이 추락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 낙하하던 인영이 경무구의 품 안에 가볍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놀라운 능력을 펼친 경무구의 얼굴은 어느새 다시 담담해져 있었다.
 그 인영을 안아 든 채 지붕을 내려가는 경무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초가지붕 위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한마디만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 갔다.
 “그저, 그러하기에 그러한 것일 뿐······.”
 
 어떻게 보면 청년은 경무구의 우화등선을 방해한 괘씸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무구는 청년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중요한 도가 또 어디에 있으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지난날 자신이 행했던 죄악들에 대한 업보이리라.
 무림에서 활동할 당시, 자신은 옳다고 생각한 길을 당당하게 걸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로 인해 억울함을 당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의 입장이라는 건 각양각색이니까.
 ‘그렇다. 그 과오들에 대한 업보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가 내게로 온 것도 인연일 수 있는 것이다. 잇닿고 잇닿은 것이 이렇게 되었을 뿐이니······.’
 괜히 우화등선을 시도했던 위인이 아니었다. 경무구의 수양은 그만큼 깊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 청년의 상태는 자못 심각했다.
 당시의 청년은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일 정도였다. 도검에 의한 상처는 없었으나 이런저런 타박상들은 제법 심각해 보였다. 기력도 매우 쇠한 상태였다.
 그런 청년을 치료하기 위해 경무구는 지난 사흘간 매우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신체의 여러 혈도를 짚으며 기운이 잘 통할 수 있게 했고, 때로는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기도 했다. 이에 더해서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약재들이나 타박상에 좋은 약재들을 달여서 먹이는 등, 경무구는 최선을 다해서 청년을 치료했다.
 그 결과 청년의 안색은 차츰 활기를 되찾아 갔다.
 ‘이제 그가 스스로 깨어나기를 기다려야겠지.’
 대강의 치료가 끝나자 경무구는 한결 여유로운 눈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열여덟 살쯤 되었을까?
 그는 아직도 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듯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렇듯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어쩌다 이렇게 호된 꼴을 당했을꼬? 게다가 왜 저 위에서 떨어진 겐지······.’
 심한 타박상 등의 흔적으로 볼 때, 누군가가 완전 범죄를 위해 그를 밀어서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청년이 실족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청년이 스스로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선 어떤 이유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청년의 인상에서 어딘지 모를 그늘이 느껴진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 가지는 추측해 낼 수 있었다.
 ‘마음의 병이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경무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허허헛. 보면 볼수록 잘생긴 얼굴이야.”
 하지만 그러한 경무구의 생각에는 분명히 오류가 있어 보였다.
 일단 청년의 왼쪽 얼굴에는 화상의 흔적이 가득했는데, 이로 인해 청년에게서는 잘생겼다는 느낌보다는 흉측하다는 느낌을 먼저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곰보와도 같은 청년의 얼굴 피부는 그러한 그의 얼굴을 더욱 흉하게 보이게 했다. 게다가 좌창(痤瘡, 여드름)도 많았기에 청년의 용모는 거의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무구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경무구가 다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상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곰보와도 같은 피부는 어려서 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좌창이야 일시적인 것이지. 꾸준한 내공 수련으로 체내의 탁기를 제거하고 맑은 기운을 받아들이면 느리게나마 조금씩 회복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기는 힘들고, 아무래도 환골탈태가 되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터. 골격이 저리도 좋은데 어쩌다가 악화가 겹쳤누? 쯧쯧쯧.”
 그 모습만 보고도 이미 대강의 연유를 알아내고 있으니, 확실히 경무구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정도의 수양과 깊이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청년의 본모습을 그 누구라서 알아볼 수 있었으랴.
 잠시 혀를 찬 경무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린 것일 뿐. 내가 나서서 돕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을 일은 아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소년이다. 그가 겪고 있는 마음의 병에는 물론 자신이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저 흉한 얼굴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마음의 병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헤쳐 나가야 치료될 수 있는 것.
 “그것을 이겨 내고 바른 정신을 갖지 못한다면 아무리 노부의 힘을 이용하여 그를 본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해준들, 그가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결국 청년에게 달린 일인 것이다.
 “일단은 잘 치료해서 이 청년이 다시금 삶의 희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나 자신의 역할은 다하는 것이 될 터.”
 소를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했다. 치료를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삶의 무게를 이겨 내지 못한다면, 그 또한 청년의 운명일 것이다.
 그나마 호흡이 안정된 청년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경무구가 이윽고 방을 나섰다.
 
 ***
 
 청년이 깨어난 것은 그가 떨어진 후로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모옥의 밖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경무구가 청년이 깨어난 것을 감지하고 서둘러 방 안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침상 위에 걸터앉아서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아, 자네 이제야 깨어났는가?”
 다소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경무구가 그렇게 물었다.
 경무구가 그렇게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직은, 말을 하기가 힘든가?”
 경무구가 청년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물었음에도 청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보통은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하기 마련이고, 목숨을 구해 주면 감사를 표하게 마련인데, 이 청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무구는 청년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충분히 기분 나쁠 만도 하건만, 그에게서는 전혀 그러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에 관한 부분에서 어느 정도는 초연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을 잊은 겐가? 아니면 말을 할 줄 모르는 겐가?”
 경무구가 다시 물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는 청년의 표정을 세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
 청년에게서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경무구는 그의 표정을 통해 뭔가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청년은 최소한, 자신을 놀리거나 답답하게 하기 위해서 저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현재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은, 경무구 자신이 모르는 어떠한 문제나 사정이 있기 때문으로 보였다.
 “많은 것이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절벽에서 떨어지는 자네를 구한 것은 노부일세. 그 후에 노부가 임의적으로 약간의 치료를 했네. 아직은 움직이거나 활동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좀 더 쉬다 보면 점차적으로 좋아질 게야.”
 역시나 청년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그런 고로 지금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 그러다가 몸이 좀 가뿐해지면 기분도 한결 나아지겠지. 혹시라도 배가 고프면 내게 말하도록 하게. 나는 항상 마당 앞의 바위에 앉아 있을 테니까. 알아듣겠는가?”
 경무구가 그렇게 물었음에도 청년은 계속해서 멀뚱멀뚱 그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청년의 눈빛에서 여러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적어도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경무구가 곧 신형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쯧쯧.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안타까움이 깃든 목소리로 경무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큰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일시적인 실어증인가?’
 확실한 건 하나.
 청년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
 
 *성명 : 가유량(賈流亮)
 *나이 : 18세
 *성별 : 남
 *학교 : 강산 고등학교 이 학년생(일 학년 당시 종합 전교 석차 1/357, 이 학년 현재까지 종합 전교 석차 120/355)
 *특이사항 :
 ― 고아로 알려짐.
 ― 얼굴 왼쪽 볼이 온통 흉한 화상으로 덮여 있음.
 ― 얼굴 전체의 피부가 곰보. 여드름이 가득함.
 ― 일 학년 초의 활발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 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어두워지고 말수가 적어졌음. 이 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 시 그저 몸이 좋지 않다고만 진술함.
 ― 친하다 싶은 친구가 없음(그나마 일 학년 시기에는 몇몇이 있었던 듯 보이나, 현재는 전무한 상태로 보임).
 
 참으로 지옥과도 같은 나날들이 아닐 수 없었다.
 특이한 성과 특이한 이름에서부터, 생긴 것까지.
 나아가서는 공부를 잘한다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이 괴롭힘을 당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일 학년이 끝나 갈 무렵부터 시작된 따돌림과 각종 구타 및 유린 행위들.
 그것은 가유량이 고아였다는 사실마저 밝혀지면서 더욱더 심해졌다. 괴롭힘의 강도가 점차 심해짐에 따라, 그나마 남아 있던 극소수의 친구들마저 다 떠나 버렸다.
 그래도 가유량은 스스로 충분히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 자기 혼자뿐인 것도 아니리라.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잘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 자신이 떳떳한 바에야 충분히 견딜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자신을 미워하되, 그것은 말 그대로 그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일 뿐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들도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괴롭힘을 멈추리라고 생각했다.
 따돌림 따위, 충분히 견뎌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흘러가는 상황은 가유량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견뎌야 해. 견뎌야 해!’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고, 아울러서 따돌림을 당하는 빈도도 잦아져만 갔다.
 최선을 다해서 살리라.
 그러기 위해서 공부만큼은 열심히 하리라.
 그렇게 다짐했건만, 가유량에겐 그런 것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이게 진정 청소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행동은 악랄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학교에서는 공부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등굣길이나 하굣길이라고 해서 절대 순탄할 수는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그나마 덜했지만, 쉬는 시간이건 점심시간이건 가유량은 언제나 긴장하며 눈치를 봐야 했다. 물론 수업 시간에도 그야말로 덜한 정도였을 뿐, 온갖 방식으로 괴롭힘은 지속되었다.
 
 그것은 너무도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고등학교 이 학년 학생이면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일 뿐이다. 그 나이에 그 모든 짐을 홀로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겨운 일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다 보니 스스로의 의지와는 다르게 성적은 떨어져만 갔다.
 오로지 교과서와 수업에만 충실하여, 그것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유추하며 공부해 왔던 가유량이었다. 고등학생이라고는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사고의 폭이 넓어지니, 고액 과외를 받는 학생들보다도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방해받지 않았을 때까지였다.
 괴롭힘을 당하고 공부마저 방해받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선생님들이 가유량을 불러서 면담도 하고, 그가 처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그는 선생님의 앞에서조차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할 수 없었다.
 악랄한 협박 앞에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꼬발르기만 꼬발라 봐, 아주! 무서운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 키키키!’
 다른 학생들은 그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 애써 못 본 척하며 방관했다.
 가유량은 벗어날 수 없는 늪 안에 있었다.
 
 그런 나날들이 지속될수록 가유량의 일기장에는 일기가 아닌 편지글들만 가득해졌다.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썼다.
 처음엔 미워하지 않는다고 썼다.
 최근엔 미워하지 않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진다고 썼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썼다.
 자신이 괴롭힘 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친구들에게도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썼다.
 처음엔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
 최근엔 처지를 이해하지만 자신은 너무나도 힘들다고 썼다.
 편지를 쓴 이유는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이 될 것 같아서, 미움과 분노마저도 눈물에 담아 흘려 버렸다. 그리고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오기였다.
 그것은 가유량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는 끈이었다.
 이미 그의 인내는 보통 사람의 그것을 뛰어넘어 있었다.
 
 고아원의 원장 선생님 내외분은 너무나도 좋은 분들이셨다.
 그분들의 걱정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성적에 대해서 여러 차례 물으셨지만, 유량은 그분들에게도 자신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다 큰 자신이 아닌가.
 고아원 동생들의 일에 대해서 신경 쓰시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찬 분들에게 어찌 그런 일을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상황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정도껏이다.
 눈에 띌 정도로 폭락하는 성적에 대해서 걱정하시며 추궁하시는 그분들 앞에서 가유량은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
 왜 그렇게 감출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상반신을 가린 옷가지를 모두 벗어 냈다.
 얼굴에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과는 다르게, 그의 상체에는 온통 시퍼런 멍 자국이 가득했다.
 원장님은 그날, 가유량의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가유량도 그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바로 다음 날, 원장님은 학교에 찾아오셨다.
 당연하게도 학교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철저히 조사해서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학교 측의 발표가 있은 후에야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바로 그날, 가유량이 속해 있던 고아원은 그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해 학생들 쪽에 재벌가의 조카가 있었는데, 그와 연관되어 벌어진 일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고아원의 모든 식구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울었다.
 그것은 거대한 힘 앞에서,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더 불쌍해질 수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
 원장님 내외는 시골로 내려가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시골 교회 목사님과 함께 이 일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을 보이셨으나, 가유량은 그럴 수 없었다.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원장님 내외분들은 허리가 끊어질 지경일 텐데, 자신까지 따라가서 짐이 될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고아원에서의 마지막 날 밤.
 가유량은 원장님 내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고는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대충 둘러댄 후, 휑한 고아원 건물을 나섰다.
 고아원 건물 밖에서 원장님 내외가 기거하는 방을 향해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우산도 쓰지 않은 상태였기에 온몸은 금방 젖어 버렸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 빗물에 감추고 천천히 일어섰다.
 
 가유량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학교였다.
 자퇴를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대로 교내로 들어섰다.
 상의를 벗어서 빗물을 몇 번 턴 후, 서무실로 가서 자퇴 신청을 했다.
 가유량은 바로 학교를 벗어나지 않고 옥상으로 향했다.
 수업 시간이었기에 계단을 오르는 동안 가유량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옥상에 오른 가유량은 구석으로 가서 교내를 바라보았다.
 처음 이 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이 옥상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꿈들을 키워 갔던가.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물에 방해를 받아도 눈을 깜빡거리며 참았다.
 잿빛 하늘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으니 순간적으로 어지러워졌다. 가유량은 눈을 비비며 들었던 고개를 내렸다.
 들리는 것은 빗소리뿐,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리는 느낌이다.
 “열심히···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거야······!”
 다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비록 힘든 시기지만, 열심히 살아간다면 분명히 좋은 날도 오리라. 이러한 시련들도 결국은 진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아파하는 진주조개의 과정일 뿐이리라.
 굴하지 않을 것이다.
 더 열심히 살 것이다.
 더 행복해질 것이다.
 ‘시련이 있어야 그 후의 성공도 더 빛난다고 하잖아?’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했던 이 모든 일들도 괜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어떠한 원인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렇게 되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이 시련들 또한 언젠가의 필요로 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층 더 나아졌다.
 훌훌 털어 버리자.
 다시 시작하는 거다.
 “모든 것이··· 그러하기에 그러한 것일 뿐.”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유량은 하늘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던 중,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가유량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어어?”
 비 오는 하늘에 광채를 뿜어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UFO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유량은 이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정좌하고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노인에게서는 잔잔한 빛이 흐르고 있었고, 갈수록 그 빛은 강렬해지고 있었다.
 “귀, 귀신?”
 가유량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허공에 저렇게 앉은 자세로 떠 있을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빗물도 그 귀신의 몸을 그냥 통과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대낮에 귀신을 본 느낌.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고 손발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가유량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귀신은 없어!’
 평소 귀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고 살았거니와, 이런 대낮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헛것을 봤을 수도 있다.
 가유량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헉! 저, 정말 귀, 귀신?”
 그 순간, 가유량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턱!
 어느새 그의 등은 옥상의 난간에 닿아 있었다.
 가유량의 고개가 세차게 뒤로 돌아갔다.
 운동장과 화단이 보였다.
 갑자기 육층이라는 높이가 더욱 높게 느껴지며 현기증이 일었다.
 “우악!”
 그 순간, 아래를 내려다보던 가유량이 비명을 질렀다.
 귀신은 분명히 허공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옥상의 아래에서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어어······!”
 갑자기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 순간, 가유량은 떨어지지 않으려 양팔을 이리저리 내저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죽을 수 없다.
 더군다나 대낮에 귀신을 보고 죽을 수는 없다.
 비록 힘들게 살아온 삶이고 지금도 너무 힘든 삶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정도로 나약한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의지와는 별개로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아래로 보이는 귀신의 모습에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떨어져 내리는 자신을 받기라도 하겠다는 듯, 귀신이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왠지 저 팔에 안기면 편안해질 것만 같은 느낌.
 그것은 어쩌면 귀신의 모습 때문인지도 몰랐다.
 멀리에서는 몰랐지만 가까운 곳에 다다르자 귀신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선 같지 않은가.
 그 편안한 느낌을 마지막으로 가유량은 정신을 잃었다.
 
 ***
 
 어떻게 깨어났는지도 모르게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고, 이상하게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가구가 없이 잘 정돈된 방안이었지만,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이질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노인이었는데,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며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노인의 말을 알아듣고 말고를 떠나서 가유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노인은······!’
 분명히 귀신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그때는 분명히 반투명한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의 모습일 뿐이었다.
 인자하고 편안해 보이는 노인의 용모 때문인지 경계심이 조금씩 풀려 갔다.
 노인이 또다시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뭔가를 깨달은 가유량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중국어?’
 갑자기 웬 중국어란 말인가?
 상황이 전혀 인식되지 않으니 가유량은 다시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신에게 중국어로 뭐라 말하는 노인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며.
 
 처음에 경무구는 청년을 적당히 치료한 후에 보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한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살면서 과연 어떻게 하면 저 나이가 될 때까지 말 한마디도 익히지 못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처음에는 청년이 실어증에 걸렸거나 아직은 입을 열기 싫어서 그럴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청년은 진짜로 한어를 모르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청년을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말을 가르치고 글을 가르치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은 경무구의 최선을 다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흐르자 청년은 어설프게나마 어느 정도의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말을 깨우칠 수 있었으며, 글도 약간이나마 쓸 수 있게 되었다.
 ‘가유량(賈流亮)이라.’
 청년은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그저 청년의 건강을 위해서, 경무구는 가장 쉬운 말로 풀이해서 가장 간단한 운기조식을 청년에게 가르쳤다.
 청년은 처음에는 어려워했지만, 며칠에 걸친 경무구의 노력 끝에 겨우 혼자서 운기조식을 해내기 시작했다.
 
 가유량이라는 청년과 만나게 된 지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어지간한 대화는 가능해졌다.
 그 즈음부터 경무구는 그를 위해서 글공부의 기초가 되는 책들을 구해다 주었다.
 한데 가유량이라는 청년의 배움에 대한 열의가 의외로 대단했다. 특히 공부할 때의 그 집중력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대단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년은 이미 운기조식을 일 년에 걸친 시간 동안 꾸준히 해 오고 있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청년의 머리가 더욱 맑아진 듯, 말과 글을 깨우치는 속도가 최근 들어 훨씬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유량이라는 청년과 만난 지 삼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제 청년은 말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어색함이 없었고, 글도 어느 정도 이상은 깨우친 상태였다.
 청년과 만난 지 딱 삼 년째 되던 날.
 경무구는 그제야 마음속 깊이 담아 두었던 궁금한 점에 대해서 가유량이라는 청년에게 물었다.
 가유량이라는 청년은 하루 종일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고,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경무구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어린 청년의 삶이 어찌 그리도 처절했단 말인고······.’
 그런 속에서도 가유량이라는 청년이 어느 정도의 도(道)를 이룬 듯 보였으니, 그 점이 더 대단했다.
 청년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곳에서 의지할 데라곤 한 곳도 없는 사람이었다.
 있다면 오로지 자신뿐.
 ‘만남이라······.’
 이런 특이한 만남이 있을 줄이야.
 분명히 정상적인 만남은 아니었고, 정상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만남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연인 것.
 ‘모든 게 그러하기에 그러할 뿐이지 않은가.’
 
 둘 사이에 긴 대화가 있었던 그 다음날.
 가유량은 노인으로부터 희한한 말을 들어야 했다.
 “노부는 ‘천하제이인’이었다.”
 
 
 # 2. 네가 배워야 할 것은 부채질이다
 
 가유량이 경무구에게 모든 것을 말했던 그날, 경무구만 혼란과 놀람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가유량도 같았다.
 “충격적인 말이겠지만, 이곳은 자네가 살던 세계와는 다분히 다른 곳인 것 같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예? 그렇다면 이곳은······.”
 막연하게 중국의 한 곳이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조차도 왜 그런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것이 아니면 다른 답은 없었다.
 “무림 또는 강호라고 불리는 곳이 있네.”
 그렇게 시작된 노인의 말에 가유량은 깜짝 놀라야 했다.
 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접했던 무협이라는 환상 속의 세계.
 노인은 이곳이 그 세계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의 말은 분명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도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자네는 희한하게도 전혀 다른 세계를 건너온 것 같군. 이것이 자네의 얘기를 듣고 난 나의 결론이네.”
 “전혀 다른 세계······.”
 가유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런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하지만······.’
 노인은 지난 삼 년간, 연고도 모르는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해 준 사람이었다. 삼 년간의 세월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가유량은 바보가 아니었다.
 분명히, 그 세월들은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이었다.
 “자네의 충격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네만, 자네만큼이나 노부 또한 큰 충격을 받아야 했네.”
 당연할 것이다.
 노인도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것은 현실이네. 노부도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라는 말이네.”
 가유량의 양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노부는 계속해서 생각했네. 과연 다른 세계의 인물을 만난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말이지.”
 노인의 말에 가유량의 몸이 움찔 떨렸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균형을 깬 존재이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마음을 안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균형을 깬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별 특이할 것도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지요. 저를 살린 분이 어르신이시니, 저에 대한 처분 또한 어르신의 몫입니다.”
 가유량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엄숙하게 숙였다.
 “분명히 비상식적인 일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그 누가 어떤 것이 옳다고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세계의 인물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 누가 단정 지을 수 있더란 말인가?”
 “······.”
 “모든 게 천지신명의 뜻이겠지. 그날 그렇게 자네가 내게 온 것도 천지신명의 뜻이겠지. 그 어떤 섭리가 있었겠지. 사람의 목숨이라든지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고 했으니, 모든 것이 그러하기에 그러한 것일 뿐.”
 노인의 말에 가유량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것일 뿐이라고? 그 말은 분명히······?’
 자신이 지금의 이상한 일을 겪기 전,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면서 중얼거렸던 바로 그 말이 아닌가?
 가유량은 이어진 노인의 물음에 그 생각을 미뤄야 했다.
 “그래,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노인의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어졌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아시다시피······.”
 “하긴, 괜한 질문이었겠군.”
 노인은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은 노부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그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어린 제 입장에서도 너무 염치가······.”
 가유량의 대답을 들은 노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부는 상관없네, 다만······.”
 “무엇입니까, 어르신?”
 “이 중원 천지는 매우 넓다네.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 그 중에서 자네는 유독 노부와 인연이 닿았네. 노부는 이 인연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사실, 노부는 무림인이라네. 물론 노부가 그곳을 떠난 것은 백 년이 훨씬 넘은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노부가 무림인이 아닌 것은 아닐세.”
 노인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어 가유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결국은 자네의 인연도 어떻게든 무림에 닿아 있다는 말이네. 그리고 무림에 관계된 삶은 언제든지 위험해질 수 있는 법이지.”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르신?”
 가유량이 묻자 노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먼 곳을 바라봤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노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이것도 하나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
 생각을 정리한 듯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시선을 먼 곳에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한평생 올바른 무(武)의 도(道)를 추구하며 살아왔네. 완전한 무의 도를 이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거의 근접했다고 확신할 수는 있네.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지.”
 노인의 어조는 담담했다.
 가유량은 진지한 표정으로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무를 펼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올바른 무의 도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세. 일반적인 무의 궤와는 다르기에 그 길을 걷는 것은 힘든 일이지. 그래서 노부는 제자를 받지 않았었네. 허나······.”
 잠시 말을 멈춘 노인이 시선을 내려 가유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듯 노부와 자네의 만남은 매우 특별하네. 우리 두 사람의 만남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노부는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여 무의 도를 추구하게 하고 싶네. 물론 자네가 원했을 때의 얘기지. 재차 말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니까.”
 노인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럼에도 가유량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던 가유량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추구하시는 것이 그 어떤 것이든, 저는 어르신을 믿습니다. 그 도(道)가 어떤 것이든, 저는 따를 것입니다.”
 삼 년간, 아무런 대가도, 아무런 요구도 없이 자신을 돌봐 준 노인이었다. 자신을 가르치고 길러 준 노인이었다.
 다른 차원의 사람인 것을 알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똑같이 대해 준 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게.”
 
 그날.
 가유량은 가르침에 따라, 경무구를 향해 아홉 번의 절을 엄숙하게 올렸다.
 그렇게 경무구는 평생 최초로 제자를 들였다.
 가유량을 제자로 들인 직후, 경무구는 자신이 기거하는 곳의 이름을 ‘유별곡(有別谷)’이라 칭했다. 말 그대로 ‘별난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현 강호상에는 유명한 성수곡(聖手谷)이 있어 사람들은 그곳을 일곡(一谷)이라 일컬었다. 훗날 유별곡은 성수곡과 함께 이곡(二谷)이라 불리게 되는데, 이 일이 바로 그 시작점이다.
 이는 유별곡이라는 이름을 지은 경무구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
 
 ‘천하제이인이라고?’
 물론 노인, 아니 이제는 스승이 된 분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속으로라도 약간은 웃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라고 해서 무협에 관한 영화나 소설 등을 접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저런 식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실력 없는 삼류의 사부가 삼류의 제자를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천하제일’이라고 말했으면 말했지, ‘천하제이’라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스승님이 스스로 겸손해지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리라.
 가유량은 잠자코 경무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가 오늘부터 배워야 할 것은 부채질이다.”
 “예?”
 가유량이 되묻자 경무구가 말없이 그의 앞으로 뭔가를 던졌다.
 탁! 타닥!
 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부채였다.
 “이것은······.”
 “부채이니라.”
 이에 가유량이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스승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지금 저는 덥지 않습니다.”
 “아니. 이 선선한 가을 날씨에 땀이나 식히라고 준 부채가 아니다. 그것이 앞으로 너의 무기가 될 것이며 방패가 될 것이다. 노부가 네게 가르치려 하는 것은 부채의 무공이다.”
 “예? 부채의 무공이라니, 어리석은 제자는 잘······.”
 가유량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기색을 보일 때였다.
 바위 위에 앉아 있던 경무구의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높게 떠오르니, 가유량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 뒤로는 경악의 연속이었다.
 한순간, 경무구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부채가 수백 개로 늘어나며 허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고······.
 “헛······!”
 감탄을 길게 내뱉을 새도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수백 개로 늘어난 듯 보이던 부채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 가더니 수천 개가 되어 허공을 더욱 빼곡히 수놓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부채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그 부채는 이제 주변의 모든 것을 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아!’
 분명히 맑은 가을날이었는데 태양마저 없어진 듯 주위가 한순간 온통 흐려지는 것이 아닌가?
 가유량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경무구가 허공에서 뭔가를 외쳤을 때.
 수천, 수만 개로 늘어났던 부채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더니, 허공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부채 하나만 남아서 온 하늘을 가려 버리는 게 아닌가.
 팟!
 그 거대한 부채가 사라졌다고 생각되었을 무렵, 경무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처음과 같은 자세로 바위 위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휘이이이―
 갑자기 바람이 느껴졌다.
 가유량은 다시금 눈을 치켜뜰 수밖에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바람은 상당히 강한 바람이었는데, 그 바람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스승님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스승님이 부치고 있는 부채에서였다.
 ‘스승님과는 일곱 걸음 이상 떨어져 있는데······?’
 경무구의 입이 열렸다.
 “무릇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 대기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대기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바람은 그 대기들의 흐름이니, 바람 또한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느니라.”
 왠지 스승님의 말씀이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는 것 같았다.
 경무구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게 무공을 가르친다 하였지만, 실상 나는 네게 스스로 바람이 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뿐이니라.”
 
 ***
 
 건곤무위조화선공(乾坤無爲調和仙功).
 이는 애초에 스승인 경무구가 가유량에게 간단하게 가르쳐 준 바 있었던 심법이다.
 건곤무위조화선공은 경무구가 대자연의 이치를 연구하며 스스로 창안한 독문심법이다. 경무구가 스스로의 무공으로 무림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심법인 건곤무위조화선공의 신묘함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무구는 일찍이 이 심법을 익히기 위해서 그 전까지 쌓아 올렸던 일 갑자(一甲子, 60년)의 내공마저도 깨끗이 포기한 바 있었다.
 건곤무위조화선공은 대자연의 바르고 정순한 기운을 받아들이는 심법으로, 하나의 단점이 있다면 초기의 발전 속도가 매우 더디다는 점이었다.
 초기에 발전이 더딘 이유는, 다른 내공 공부에 비해 그 이치가 심오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치가 심오하고 현묘하니, 그 내용을 확실하게 깨닫기 전까지는 발전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승님, 제자가 그런 현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건곤무위조화선공에 대해 스승으로부터 설명을 듣다가 가유량이 그렇게 물었다.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는 차후의 문제다. 그에 앞서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느니라.”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님.”
 “깨닫는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가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바른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바른 공부를 한다는 것이지. 그렇듯 바른 길을 걷다 보면 그것이 비록 더디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
 “어떤 때는 그 깨달음이 순식간에 내지는 한꺼번에 다가올 수도 있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돈오(頓悟, 참뜻을 별안간 깨달음)’라고 말하기도 하지.”
 ‘돈오’라는 말은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있었다.
 가유량은 경무구의 말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흔히 쓰이는 말로 너에게 ‘무공’을 가르친다고 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가르치는 ‘무공’이라는 것은 ‘참된 무의 도’를 뜻하느니라. 참되다는 것은 곧 바르다는 것이니, 살펴서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예, 스승님.”
 “강해지고 싶으냐?”
 갑작스러운 경무구의 물음에 가유량은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였다.
 물론 자신은 약자였다.
 하지만 강자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괴롭혔던 부류들을 처단하거나 벌하고 싶어서 강해지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참아 왔다. 자신에게 있어 그런 건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은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의 앞에서까지 솔직해지지 않는 것은 꺼려졌다. 가유량은 그저 조심스럽게 그렇게 대답했다.
 “원, 녀석도 참······.”
 숙고 끝에 그렇게 말하는 제자를 바라보며 경무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운명을 타고난 자신의 제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던 터다.
 왜 강해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버려라.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버려라.”
 그 말에 가유량이 잠시 멈칫했다. 그 후,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대답했다.
 “예, 스승님······.”
 “진정 버릴 수 있느냐?”
 “버리겠습니다.”
 담담하지만 단호한 제자의 대답.
 한마디 한마디에서 자신을 향한 신뢰가 느껴졌다.
 ‘녀석은 분명히 용이 될 것이다.’
 아무리 자신들이 용이라고 외치지만, 실상은 토룡(土龍, 지렁이)이거나 이무기인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용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그 자신이 굳이 용이라 외치지 않아도 남들이 용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 스스로가 용이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강함이라는 것은, 무의 도를 추구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일종의 부산물인 셈이지. 절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라.”
 “예, 스승님.”
 “사람이 바른 길만 가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바르지 않은 길로 빠져 있을 수도 있지. 진정 용기 있고 현명한 자는 바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걷지 않느니라. 물론 그보다 더 상책은, 미리 숙고한 끝에 그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고.”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가유량이 답하자 경무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건곤무위조화선공에 대한 경무구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건곤무위조화선공은 바른 무공이었다. 또한 그만큼의 효용이 있었다.
 같은 수위의 공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그 첫 번째요, 세상의 어떤 것도 조화시킬 수 있는 신비한 묘용이 그 두 번째였다.
 “그것이 바로, 바른 공부의 힘이다.”
 “예, 스승님.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건곤풍운보(乾坤風雲步).
 하늘과 땅의 모든 바람과 구름 사이에서 노니는 보법이라는 뜻으로, 이 역시 심오막측한 절정의 보법이었다.
 “기실 내공에 대한 공부라는 것은 모든 무학 공부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학을 펼쳐 냄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으니, 이는 바로 보법이다.”
 경무구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특히 우리가 사용해야 할 선(扇), 다시 말해 부채라는 것은 공격이 곧 방어이고 방어가 곧 공격이 되니, 보법이라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너는 건곤무위조화선공과 함께 이 무학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연마해야 할 것이다.”
 “예, 스승님.”
 건곤풍운보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었다.
 건곤영보(乾坤影步), 건곤환보(乾坤幻步), 건곤무상보(乾坤無想步), 우주건곤보(宇宙乾坤步).
 경무구가 활동할 당시의 강호인들도 그의 보법이 단순히 건곤풍운보라는 것만 알았지, 그 안에 따로 네 가지의 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경무구가 강호를 종횡무진하고 명성을 얻기까지, 이 건곤풍운보의 역할이 매우 컸다.
 건곤영보가 건곤풍운보의 일 단계라고 한다면, 건곤환보는 건곤풍운보의 이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두 가지의 보법은 각각이면서도 연계되는 면이 있었기에, 이 또한 이해하고 깨닫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두 가지를 합치면 건곤환영보가 된다.
 “세 번째인 건곤무상보는 노부가 앞선 두 가지의 보법을 연구하다가 창안한 새로운 경지의 보법이니라. 그 두 가지의 묘리들 이외에 또 다른 묘리까지 합해진 것이지. 건곤무상보는 노부가 강호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단 한 번밖에 선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위력을 보이기에는 그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유량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으나,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것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려 애쓸 필요 없느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더욱 기억도 잘되는 법이지. 너의 노력은 가상하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억지로 잡으려 해서 될 일은 아니다. 대강 이해했으면 넘어가고, 핵심만을 기억해 두면 될 것이다. 앞으로 차차 알게 될 테니.”
 “예, 스승님.”
 “마지막의 우주건곤보는 노부가 강호행을 끝내고 은거한 후 십여 년이 흐른 후에야 창안하고 완성시킬 수 있었던 보법이니라.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마음의 보법이라고 할 수 있을 터.”
 놀라운 한마디였다.
 아마 무림인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그대로 경악했을 것이다. 당시의 무림인들은 경무구야말로 보법에 관해서는 천하제일이요, 고금을 통틀어도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라 여겼었다.
 그것도 당시에는 채 완성되지 않았던 건곤무상보를 단 한 번 본 후 내려진 평가였다. 그 이상의 보법은 더 이상 등장하기 힘들 것이라는 게 그들의 평가였었다.
 그런데 경무구는 이미 그 이상의 보법을 창안하고 완성시켜 놓았으니 이제는 어떠할 것인가?
 물론 그런 것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가유량으로서는 그저 스승의 말을 새겨듣기만 할 뿐이었다.
 
 건곤회풍무류(乾坤廻風無柳).
 이는 곧 신법(身法)이었다.
 “원래, 경신법(輕身法)이라 하는 것은, 몸을 가볍게 하는 무공 전체를 일컫는다. 빨리 달리기 위한 것을 경공(輕功)이라 하고, 공격을 피하거나 자신의 공격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을 보법이라고 한다. 앞에서 말했던 건곤풍운보가 보법이었다면, 이 건곤회풍무류는 경공인 것이지.”
 경무구의 설명은 이어졌다.
 “이것은 보법을 먼저 익히다 보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경공의 공부가 더 쉽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법들의 어려운 면을 깨닫고 나면 쉽게 느껴진다는 뜻이니라. 너는 왜 이 경공법이 ‘회풍무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량은 스승의 말을 들으며 나름대로 이해하려 노력해 보았다.
 ‘회풍무류? 바람처럼 돌되 흐름이 없다는 뜻인가?’
 말 자체의 뜻은 그와 비슷한 것 같지만 쉽사리 이해하기는 힘든 면이 있었다.
 “지금은 대략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너무 앞서가지 말거라.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니라.”
 “예, 스승님.”
 그날 이후, 스승님은 무공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대신, 가유량은 심법인 건곤무위조화선공과 보법인 건곤풍운보 그리고 경공법인 건곤회풍무류를 익혀야 했다.
 그 공부는 경무구로부터 그 세 가지 무공의 대략적인 내용을 들은 후, 정확히 일 년이 흐르기까지 이어졌다.
 물론 그동안 기본적인 권법이나 장법 내지는 각법을 비롯해서 인체의 주요 삼십육 개 혈도에 대한 공부도 병행되었다.
 
 다시 일 년이 흐르자 가유량의 무공 공부도 기본이 잡혀서 어느 정도는 구사할 수 있는 경지가 되어 있었다.
 가유량이 경무구를 만난 것이 열여덟 살 때였고, 말과 글을 익히기까지 삼 년을 소비했었다. 무공을 익히는데 다시 일 년이 걸리니, 여태까지 총 사 년이 흐른 셈이었다.
 그 사이, 착실한 내공 수련을 토대로 그의 얼굴 형태도 조금은 나아져 있었다.
 가유량의 나이 스물두 살의 일이었다.
 
 “부채란 무엇이냐?”
 스물두 살의 가유량은 많이 성장해 있었다.
 특히 그의 두 눈에서는 총기가 느껴졌는데, 이는 건곤무위조화선공의 영향으로 그의 내면도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손으로 쥐고 흔들어서 더위를 덜기 위해 쓰는 도구입니다.”
 “그렇다. 원칙적으로 이 부채라는 것은 무기가 아니다. 보통은 더운 곳에서 더위를 식히는 용도로 쓰이는 도구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일 뿐이다. 이런 부채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세분하면 훨씬 많겠지만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경무구는 여전히 바위 위에 앉아 있었고, 가유량은 그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정좌한 채 앉아 있었다.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것을 우선(羽扇)이라고 하고, 보통 둥근 모양으로 생긴 면에 손잡이를 달아서 쓰는 것을 단선(團扇) 또는 원선(圓扇)이라 한다. 말 그대로 둥근 부채라는 뜻의 단선이야말로 부채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
 가유량도 경무구가 설명하는 부채들의 모양을 알고 있었으나 그런 호칭으로 불린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상에서는 그냥 부채라고 할 뿐, 따로 부채의 호칭을 부르지는 않으니까.
 “또한 별선(別扇)이라는 것이 있다. 부채의 일반적인 용도와는 다르게 쓰이는 부채들이다. 햇볕을 가린다거나, 의미를 기린다거나, 혼례 등의 예식에 사용하는 등의 부채가 바로 이에 속한다.”
 경무구가 거기까지 말하더니 항상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부채를 펼쳤다.
 샤라라락―
 스승이 부채를 펼치는 모습은 언제나 신기하다. 손목을 털어 낸 것 같지도 않은데 부채는 항상 활짝 펴졌고, 그 펼쳐지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마치 느린 화면의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부채는 바로 이런 형태의 부채이다. 통틀어서 접선(摺扇)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부채이지. 접어서 쥐고 다닐 수 있으니 휴대가 간편하고.”
 스승이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다르다.
 마치 나뭇가지에 나뭇잎이 붙어 있는 모양처럼 매우 자연스럽다. 스승에게 있어 부채는 도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 같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가유량은 알 것 같았다.
 저런 모습이야말로 대가에게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하나의 풍모라는 것을.
 “너는 오늘부터 본격적인 노부의 무학을 전수받게 될 것이다. 여태까지의 과정도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네가 잘 따라와 줘서 기쁘구나. 본격적인 무공을 배우기에 앞서 너는 노부가 처음부터 강조했던 마음의 공부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의 도를 추구하겠다는 스승과의 약속.
 바른 길을 걷겠다는 그 약속.
 가유량은 그때의 마음을 상기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경무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림에는 간혹 잘난 체를 하기 위해서 부채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 노부가 뭐라 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네가 배우는 부채의 무공은 그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 스승님.”
 “부채를 가지고 잘난 체를 하려는 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그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멋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연스러움이 기본이다. 자연스러운 멋은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는 것. 노부가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남들 앞에서 부채를 들었을 때에 더욱 신경을 쓰라는 의미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헐헐헐. 잠시 딴 얘기를 해 봤을 뿐이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테니 잘 들어라. 참고로 실전에서는 보통 철선(鐵扇, 철 등의 금속으로 제작한 부채)을 쓰는 것이 보통이나, 노부는 실전 중에도 철선을 써 본 적이 없느니라.”
 
 무유선류(無有扇流).
 그것이 바로 스승의 무학이었고, 스승이 자신에게 가르칠 무학이라 했다.
 “나중에 잘 알게 되겠지만 네가 상승의 경지에 다다를수록, 다른 상승 고수들과의 격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스승에게서 가유량은 어떠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풍운선초(風雲扇招).
 무유선류의 가장 기초가 되는 무공들로, 무림에서 쓰는 보통의 선법(扇法)을 총망라하여 경무구가 보완시키고 발전시킨 무공이었다.
 총 세 개의 초식으로 이뤄진 무공이었는데,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묘리가 담겨 있었다.
 
 천풍선(天風扇).
 총 두 개의 초식으로 이뤄져 있으나, 각각의 무공이 완전 다른 무공이었다.
 일초는 천수일격(千守一擊)으로, 방어에 최대한의 중점을 둔 채 최소한의 공세만을 취하는 초식이었다.
 이초는 천풍비운(天風飛雲)으로, 일초인 천수일격과는 반대가 되는 개념의 초식이었다.
 
 무유선(無有扇).
 이것이야말로 선선자라 불린 경무구의 비전절기라고 할 수 있었다.
 총 다섯 개의 초식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전에 경무구가 가유량의 앞에서 뛰어올라 하늘을 온통 부채로 뒤덮은 무공도 무유선의 초식 중 하나였다.
 일초와 이초는 절정고수의 반열이라는 황화예(黃化詣)의 경지에나 들어서야 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삼초와 사초는 최절정의 경지라는 백연탄(白筵彈)의 경지에 들어서야 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나마도 마지막 초식은 초절정의 경지라는 대홍락(大弘落)에 이르러서야 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선무(扇舞).
 말 그대로 ‘부채춤’이라는 뜻으로, 무유선류의 최종 단계에 해당했다.
 “선무는 누가 봐도 무공이 아닌 듯 보일 것이다. 그저 한바탕의 춤사위에 불과한 듯 보이겠지. 하지만 보이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제대로 된 선무의 힘은 능히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할 수 있느니라.”
 솔직히 현재의 가유량으로서는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유량은 그런 마음이 문득 드는 것을 애써 눌렀다.
 “진실한 마음이 일고 진실한 깨달음이 일어야 비로소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무공이다. 노부의 무학 중에서는 최후의 심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노부가 무림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이 무공을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당시에 노부의 깨달음이 부족한 면도 있었지만, 이 무공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강한 적을 거의 만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가유량이 물었다.
 “그저 춤일 뿐인데도 그런 굉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냥 춤이 아니다. 깨달음의 춤이다. 대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야 하고, 진실한 마음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선무를 시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이니라.”
 스승의 말에 가유량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멈칫거리자, 그 모양을 본 경무구가 물었다.
 “녀석. 선무가 궁금한 게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자가 호기심이 동하여······.”
 “허허허. 굳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그렇다고만 알아 두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
 
 무유선류를 익히기 시작한 후로 가유량은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너는 노부가 전에 말했던 사파나 마교 등에 관한 내용들을 기억하느냐?”
 “예, 스승님.”
 경무구가 예전에 정파, 사파, 마교 등에 관한 무림 전반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물론 가유량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마(邪魔)의 무공이라는 것은 사이하고 또 지나치게 패도적이다. 또한 그들은 단시간 내에 강한 힘을 얻으려 노력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바른 무공이라 할 수 없느니라. 물론 노부는 그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무공을 익혔을 때, 심성이 사이하고 잔악하게 변해 가는 경우가 너무도 많으니, 이를 탓하는 것이다.”
 경무구는 항상 ‘바른 무공’에 관해 얘기했다. 그것을 잊지 않도록 언제나 주지시켰다.
 “도를 추구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강함만을 추구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이 효율적이고 우세할 수 있겠지만 결국 올바른 길을 걸은 자에게는 밑천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사마의 무리들 중에서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 그저 그들의 속성 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예, 스승님.”
 “정종의 무공이야말로 바른 길을 걷는 무공이라 할 수 있다. 원래는 그렇지. 하지만, 요즘은 정파인들 중에서도 속성의 무학을 추구하는 자들이 많아졌으니, 그런 자들 또한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른 길을 걷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법이다.”
 스승은 정파인들 중에서도 서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눈앞의 강함만을 쫓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아마 그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무유선류를 배우기 시작한 후로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가유량은 겨우 풍운선초의 세 초식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봄의 일이었다.
 가유량은 천재이거나 기재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수련해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약간 뛰어난 것은 골격 정도였고, 남들에 비해 매우 뛰어난 것은 인내심과 바른 성정뿐이었다.
 경무구는 결코 가유량에게서 빠른 성취를 바라지 않았다. 이는 여러 차례 드러난 그의 무학에 관한 철학이기도 하다.
 그렇듯 그 스승이나 제자나 전혀 서두르는 마음이 없으니, 가유량의 진전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 후로 또다시 반년이 흘렀다.
 가유량의 나이 스물 셋의 가을이 되었다.
 가유량이 무유선류의 이 단계를 거의 터득해 갈 무렵, 스승인 경무구가 물었다.
 “재미있느냐?”
 무학을 배운다는 일은 매우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가유량은 신경 쓸 일 없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요즘의 생활이 즐거웠다.
 “예, 스승님. 저는 무척 즐겁습니다.”
 “그러하면 되었다. 이제 너는 다음 단계인 무유선을 익혀야 할 차례인데, 지금은 무리다. 분명히 네 체내에 쌓인 기운은 바르고 정순하지만 아직 이십 년 공력에 불과하다. 전에도 말했듯 무유선을 제대로 익히려면 절정의 경지인 황화예에 다다라 있어야 한다. 공력도 최소한 일 갑자(60년)가 필요하지.”
 가유량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빛이 살짝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경무구가 말했다.
 “량아. 너는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잘해 왔느니라. 전에도 말했지만 성취가 빠르든 느리든 그것은 노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는 노부의 말에 따라 바른 길을 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장한 일이지. 굳이 조급해하지 않아도 너는 후일에 큰 성취를 이루게 될 게야. 조급해할 필요가 없느니라.”
 “제자가 잠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송구합니다.”
 가유량의 대답에 잠시 희미한 미소를 보이던 경무구가 입을 열었다.
 “세 번째 단계인 무유선부터는 노부가 기본적인 이론과 동작들을 알려 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기억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라. 훗날에 네 경지가 올라갔을 때 확실히 익힐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방향으로 하자꾸나.”
 “예, 스승님.”
 “이전에 배운 것들 또한 꾸준히 연마하고 스스로 확실하게 정리해 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다만 감각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시간을 투자하면 될 게야. 정작 네가 오늘부터 중점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할 일은 따로 있느니라.”
 그렇게 말하는 경무구의 눈동자는 묘한 빛을 담고 있었다. 가유량이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스승님?”
 “그건 바로, 노는 것이다.”
 “예에? 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유량이 놀라서 되묻자 경무구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너는 오늘부터 나비와 놀아야 한다.”
 “나, 나비라··· 하심은······?”
 “뒤뜰에도 있고, 앞뜰에도 있고, 사립문 밖에도 있고, 들판에도 있는 나비 말이다. 이곳에 있으면 사시사철 볼 수 있는 나비들을 일컫는 것이니라.”
 스승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대륙의 남동부에 위치한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스승과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은 해안가에 위치한 산중이었다.
 이 지역은 사시사철 기온이 높고 비가 자주 내리는 기후를 보이고 있었다. 겨울이라 해도 눈 구경이라고는 거의 할 수 없는 기후였다.
 아열대 기후에 가깝다는 사실들을 토대로 가유량은 이곳이 광동이나 광서 지역쯤일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위치가 그러하니 어쨌거나 나비와 같은 것들이 어디에나 사시사철 있기는 했다. 그래도 의아했다.
 ‘스승님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가유량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 스승인 경무구가 입을 열었다.
 “무얼 그리 깊게 생각하는 게냐? 그저 놀라면 아무 생각 없이 놀면 되는 것이다. 단, 부채를 가지고 놀면 된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 3. 나비와 놀고, 벼락과 놀고
 
 그날부터 가유량은 나비와 놀아야 했다.
 특히 따뜻한 시간대에는 무조건 나비를 찾아다녀야 했다.
 ‘도대체 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란 말일까? 나비와 동화되라는 말씀이신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무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스승은 그 말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궁리하고 있는 사이, 나비 세 마리가 보였다.
 가유량이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자, 나비들은 놀랐는지 이내 너울너울 날아가 버렸다.
 이에 가유량은 나비들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발걸음도 조용히 하고,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비들이 이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여러 날을 노력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가유량은 이제 아예 나비들이 있는 곳에 아침부터 죽치고 앉아 있었다. 가유량 자신이 마치 바위나 나무라도 되는 양, 움직임도 멈추고 그냥 그렇게 있었다.
 그럼에도 나비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위에 있는 다른 꽃과 풀들에 앉아 있다가, 가유량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면 이내 다시 날아가 버렸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직 나비와 노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매우 지루한 일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몇 달이 흐르니 해가 바뀌었고, 그렇게 가유량도 스물네 살을 맞았다.
 나비와 놀라고 말한 이후로 몇 달이 흐를 동안 경무구는 가유량에게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시간이라고는 고작 식사 시간을 비롯해서 ‘무유선’의 무공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르칠 때뿐이었다. 물론 그러한 시간은 잠깐뿐이었다.
 
 별의별 수를 다 써 봐도 ‘나비와 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바심을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일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가유량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그날도 가유량은 이미 배운 무공들에 대해 점검한 후, 나비들을 보러 나섰다. 때는 아침나절로 사시정(巳時正, 오전 10시경)쯤이었다.
 “어······?”
 고민스러운 얼굴과 함께 사립문을 나서던 가유량의 눈이 갑작스럽게 휘둥그레졌다.
 형형색색의 수많은 나비들이 한데 모여 봄바람과 함께 너울거리는 그 광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름다웠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이 느껴졌다.
 ‘스승님······!’
 그 속에 경무구가 있었다.
 한 손에는 부채를 활짝 펼쳐 들고 다른 한 손은 부드럽게 편 상태로, 경무구는 풀밭 위를 천천히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비들이··· 즐거워하고 있어······!’
 나비들의 표정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나비들의 움직임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경무구의 춤사위는 멈추지 않았다.
 한 번의 춤사위가 끝나면 똑같은 동작이 처음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었는데, 가유량은 금세 그러한 사실을 알아챘다. 그 이후로는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서 경무구의 춤만 바라봤다.
 세상에 오로지 스승과 나비만 존재하는 듯한 희한한 느낌.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뜻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것만 같은 스승님의 희한한 느낌.
 왠지 가슴이 떨려왔다.
 가유량은 어느새 양손의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시간이 오시정(午時正, 12시)을 넘기고 나서야 나비와 함께하던 스승님의 긴 춤사위가 막을 내렸다.
 따뜻하면서도 상쾌한 느낌을 물씬 풍기던 바람이 그때부터 자취를 감췄고, 그제야 가유량은 그것이 스승님의 바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비는 바람과 어울릴 뿐, 바람을 거스르지 않느니라.”
 한바탕의 춤사위가 끝난 후, 경무구가 가유량에게 한 말이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님.”
 현재의 가유량은 많은 면에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 신선한 충격은 가유량의 마음을 이미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렸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되는 것이다. 너는 역지사지라는 말을 알고 있지 않느냐?”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꿔서 생각한다는 말. 가유량이 모를 리 없었다.
 “한마디로, 나비와 놀기 위해서는 나비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너의 바람이 봄날의 훈풍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비들이 너에게 오지 않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나비가 너와도 마음껏 어울릴 수 있게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말이지. 너의 바람이 나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바람이 되어 준다면, 나비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 수 있지 않겠느냐?”
 “아아······!”
 스승님이 나비와 더불어 춤을 춘 것은, 스승님이 나비를 붙들려 하신 것이 아니고, 나비가 알아서 스승님과 더불어 춤을 추고 싶어 했던 것뿐이었구나.
 반면 자신은 어떠했던가.
 나비와 어울리려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였을 뿐, 나비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비들은 그저 따뜻하고 상쾌한 바람을 원했던 것뿐이었다. 자신들이 즐겁게 노닐 수 있는 그런 곳을 원했던 것뿐이었으리라.
 가유량 자신이 그런 곳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나비들만 탓했으니,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스스로 바람이 되고 스스로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제자가 어리석어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가유량이 그렇게 고개 숙이며 말하자, 경무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헛헛헛. 네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원래 노부의 요구가 어려웠던 것이다. 노부는 네가 그것으로 많은 고민을 해 보길 원했던 것일 뿐이다. 충분한 고민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그 고민의 시간만큼이나 깊이가 다른 법이니라.”
 가유량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경무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기실, 나비와 놀라는 말은 우리가 추구하는 무학과도 큰 관련이 있는 것이다. 네가 기억만 한 채 아직 익히지 못하고 있는 무유선의 제일초와 이초가 이를 기초로 한 무공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중에 네가 더 빨리 깨닫게 하기 위해서 노부가 약간의 편법을 쓴 것이니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럼 이제는 네 차례로구나. 기대하고 있겠다.”
 “예, 스승님!”
 
 그 후로 가유량은 풀밭 위에 정좌한 채 눈을 감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이 약 한 달간 계속되었을 때, 가유량은 느낄 수 있었다.
 내공을 운용하고 있는 자신의 몸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자신의 주위에서 몇 마리의 나비가 노닐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것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의 일이었다.
 가유량이 담담한 눈빛으로 손목을 부드럽게 털었다.
 촤라라락―
 부드럽게 부채가 펼쳐지자, 가유량은 그전에 경무구가 했던 것과 같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단지 몇 차례 본 정도로 그 춤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은 가유량으로서도 무리였다.
 하지만 가유량은 그 춤을 추던 당시, 스승이 풍겼던 느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지 그 마음으로 이 춤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춤을 추는 가유량의 동작은 매우 부드러웠고 그의 표정은 매우 편안해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 가유량과 함께 춤을 추는 나비들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몇 마리뿐이었던 것이,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수십 마리로, 그리고 결국엔 수백 마리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춤에 몰입한 가유량은 눈을 감은 상태였기에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있었다.
 ‘내가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아······!’
 이 순간, 가유량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가유량은 수많은 무언가가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춤을 추는 와중에도 가유량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아아······!’
 주변에서 춤을 추고 있는 형형색색의 나비들이라니······!
 이 가슴 뛰는 광경이라니······!
 물론 스승의 경우보다 나비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다.
 하지만 가유량은 지금 이 순간, 날아갈 것 같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가유량은 계속해서 춤에 몰입했다.
 그 춤은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의 춤사위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춤을 멈춘 가유량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감은 채 잠시 그 상태로 있던 가유량이 곧 모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춤을 췄던 주변의 풀과 꽃들이 더욱 생기를 내뿜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밟았던 풀들이 그가 떠난 후에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다시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그날 이후로 가유량은 매일 나비들과 놀았다.
 먼 곳에서 제자의 변화를 직접 확인한 경무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운 일이다!’
 제자는 겨우 이십 년 공력을 가졌을 뿐이다.
 물론 누군가의 무공 수위를 가늠함에 있어 공력이라는 부분이 정확한 지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력만 놓고 봤을 때 제자는 겨우 이류 수준일 뿐이었다.
 나비와 놀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과정이 얼마나 힘겹고 고된 일인지를 느껴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제자가 이렇게 빨리 성과를 보여 줄 줄이야.
 이류 수준의 공력을 가지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무공을 펼쳐 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었다. 경무구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녀석은 기재(奇才)가 아니다.’
 가르쳐 본 결과 제자는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무학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제자의 골격은 좋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뛰어날 정도로 좋은 골격도 아니었다.
 노력을 열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이 무림에는 제자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자들도 많다.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경무구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녀석은 기재다.’
 기재가 아니라고 했다가 기재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
 ‘녀석은 무유선류를 익히는 데 있어 최상의 조건을 갖춘 가장 적합한 기재다.’
 제자는 이계에서 온 존재다.
 그는 그 세상에서도 그다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 변변치 않은 능력이 이곳에 옴으로 인해서 굉장한 능력으로 변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제자는 그저 이전의 세계에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만의 ‘도’를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만한 심성이 뒷받침되어 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터.
 ‘허허허허허!’
 경무구는 속으로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심성의 기재라! 헐헐헐.’
 돌이켜 보면 경무구 스스로도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에 비하더라도 제자는 너무도 훌륭하다.
 ‘언젠가는 온 무림이 저 아이로 인해서 경악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자신 때문에 제자 또한 무림에 연이 닿았다. 결국 제자 또한 어쩔 수 없이 무림의 일원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해서 무림도 바른 길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더욱 고민하게 되기를······.’
 조용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경무구의 입가에 문득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벼락과 놀 차례인가?’
 
 ***
 
 “소각주님, 여기는 노부가 맡겠습니다! 어서 피신을!”
 천추의 한이었다.
 남해검각(南海劍閣) 소속 좌호법 양일충(梁一忠).
 칠십 대가량으로 보이는 그 노인은 애초, 검각으로 돌아가는 소각주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를 위해 동원된 검각의 무인들만 해도 삼십여 명. 모두가 정예였다.
 하지만 현재, 그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 일의 책임자인 양일충 자신만이 남았다. 물론 소각주와 함께.
 양일충의 몸에는 거의 상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그의 얼굴에는 땀이 가득했다. 그의 입가로 약간의 핏자국이 보였다. 내상 때문에 피를 토했던 흔적이다.
 그랬다.
 양일충 또한 과히 좋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럴 수 없어요, 양노(梁老)! 제가 어찌 양노만 버리고 혼자서 달아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외친 사람은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바로 검각의 다음 대 주인으로 내정된 장서혜다.
 남해일미(南海一美) 장서혜(張瑞慧).
 그녀는 그 별호가 전혀 아깝지 않은 여인이였다.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엿보이는 귀여운 인상의 미녀였다.
 “소각주님! 그런 것에 연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어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저는 살 만한 세월들을 이미 다 산 늙은이입니다! 어찌 저의 마음을 몰라주십니까!”
 양일충의 목소리에서 처절한 감정이 그대로 배어 나왔다.
 그는 그만큼 절박했다.
 “하지만 양노······!”
 장서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소각주님! 눈물을 줄이시라고 제가 몇 번이나 더 말씀드려야 아시겠습니까? 제발, 빨리 피신하십시오. 이 늙은이는 이미 백 년을 넘게 살아온 몸입니다.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소각주님을 위해 남은 생을 불태우려 합니다. 이런 저의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더불어 이렇게 각주님을 보낼 수밖에 없는 노부의 불충을 용서하시기를······!”
 그 말과 함께 양일충이 왔던 방향을 되돌아 다시금 몸을 날렸다.
 “양노······!”
 등 뒤로 소각주 장서혜의 처연한 음성이 들려왔지만, 양일충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못다 한 충성은 저승에서나마 다할 것입니다, 각주! 그리고 소각주!’
 양일충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던 한순간, 양일충의 두 눈동자가 갑자기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 언제······!’
 마지막까지 남았던 다섯 명의 수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차이를 벌렸었다.
 그런데 흑의인들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추격을 해 온 것이다.
 양일충의 입이 절로 열렸다.
 “어느 곳의 사이한 무리들인지는 모르지만 제법 실력은 있구나. 허나!”
 양일충이 검을 바로 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 양일충이 있는 한, 너희들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그 외침과 함께 양일충은 남은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아마도 저들을 모두 처리하기는 쉽지 않을 터······!’
 그렇다면 소각주 장서혜를 위해 최대한 많은 적들을 황천길의 동료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흑의인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저들을 처음 만난 것이 나흘 전.
 그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흑의인들은 갖은 종류의 암기와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자들이었다. 강호 경험이 매우 풍부한데도 양일충은 흑의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무서운 자들이었다.
 “노부가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들을 만날 때마다 묻던 말이었다.
 양일충은 남해검각의 호법답게 여태까지 가장 많은 흑의인들을 처치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저들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잠깐이나마 짬을 내서 저들의 정체를 캐려 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생포된 흑의인들마다 극약을 깨물어 바로 자결했던 것이다.
 “······.”
 흑의인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순간, 그들을 노려보던 양일충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그러더니 그가 쥐고 있는 검에도 진한 기운이 실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검기(劍氣).
 이윽고 양일충이 흑의인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곧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남해검각의 절기인 남해검(南海劍)이 바다의 장대하고 웅혼한 기상을 담아 흑의인들에게로 쏟아졌다.
 흑의인들은 제각각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일부는 빠르게 좌우로 흩어지며 양일충을 포위해 갔다.
 채쟁―!
 “큭!”
 “윽!”
 처음에 양일충을 막았던 두 흑의인은 각각 도(刀)와 쌍겸(雙鎌, 두 개의 낫)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기와 함께 그대로 몸까지 두 동강 나서 쓰러졌다.
 그들이 죽으면서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그 소리조차도 크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독한 자들이었다.
 
 슈슈슈슈슉― 슈슈슉―!
 양일충이 일격에 흑의인 두 명을 처치할 때, 다른 흑의인들이 그 틈을 타고 사방에서 양일충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빠르고 정확하고 또한 매서운 수법.
 하지만 그들의 그런 수법은 자칫 동료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수법들이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흑의인들이 그런 식으로 죽기도 했다.
 그럼에도 흑의인들은 언제나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잔혹한!”
 순간적으로 양일충의 발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런 움직임과 함께 그의 발이 묘한 방위를 밟자, 그의 신형이 기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일충은 그런 움직임과 함께 날아오는 수많은 암기들을 피해 내는 한편, 몇몇의 암기들은 검을 이용해 쳐 냈다. 몸 상태가 상태이다 보니 그런 움직임도 힘에 겨웠다.
 양일충이 간신히 그 공격을 피하고 막았다고 생각된 순간, 무기를 든 다른 흑의인들이 이미 그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어려운 와중에도 양일충이 기합을 질렀다.
 “타핫!”
 그는 마치 마지막 남은 생의 불꽃을 활활 태우려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오로지 소각주인 장서혜를 위함이었다.
 지켜야 할 누군가가 있는 이는 강해진다고 했던가.
 양일충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격해 오는 무리들을 향해 두 번째 검초인 해천검(海天劍)을 떨쳐 냈다.
 하늘의 모습을 가득 담고 있는 대해처럼 잔잔하되, 그 힘이 위맹하기로 유명한 한 수였고, 그 수법은 흑의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한 수로 인해 흑의인 셋이 그대로 고혼이 되었지만 남아 있는 흑의인들은 아직도 많았다. 여전히 이십여 명의 흑의인이 양일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 몇 명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양일충을 향해 쇄도했고, 외곽에 있던 자들은 또다시 암기를 쏟아 냈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당했던 수법이었다.
 앞에서 각종 희한한 무기로 혼란스럽게 하면서 그 와중에 암기로 사각을 노린다.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지만 암기를 던지는 자들의 수법도 정확하고 빨랐다.
 양일충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보법을 밟았다.
 그의 신형이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움직이더니 병장기를 든 자들의 공격을 피해 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무리한 움직임이었다.
 그 때문인지 보법을 펼치는 양일충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더니, 결국 뭔가가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울컥!
 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기를 운용한 결과였다. 양일충은 그들의 공격을 피해 내는 와중에도 재빠르게 피를 다시 삼켜 약한 모습을 감췄다.
 ‘으으······.’
 그것은 단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뿐이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푹―
 양일충의 왼쪽 허벅지에 꽤 굵은 바늘 하나가 깊숙이 박혔다.
 “큭!”
 양일충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때부터 흑의인들의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흑의인들의 입장에서는 지난 며칠간 지독하게도 자신들을 괴롭게 했던 양일충이었으니, 그가 부상을 당하자 더욱 힘이 생긴 것이다.
 인상을 찡그렸던 양일충이 얼굴을 펴며 말했다.
 “독이라··· 그나마도 극독은 아니군. 다행이야. 노부가 최후의 절기를 펼칠 수 있을 시간은 충분하겠어. 허허허.”
 애초에 자신이 저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양일충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진기도 바닥이 난 상황.
 양일충은 남아 있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저들을 한 명이라도 더 황천길의 동료로 삼기로 결심했다.
 “말이 없는 사이한 친구들이여, 잘 보게나. 이것이 노부의 절초인 해천패검(海天敗劍)이라는 것이네.”
 우우우우웅―
 양일충의 검이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최후의 초식을 펼쳐 내려 할 때였다.
 갑자기 양일충의 입에서 한마디의 다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커헉! 소, 소각주!”
 소각주 장서혜가 십여 명의 흑의인들에게 붙잡힌 채로 자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소각주는 충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거늘······!’
 붙잡혀 있던 장서혜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양노, 미안해요······. 나도 최선을 다했는데 매복이 있었을 줄은······.”
 대강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양일충은 할 말을 잃었다.
 ‘아아! 정녕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그렇듯 속으로 탄식하는 와중에도 타개책을 강구해 봤으나 답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중원에서도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
 무림인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고, 게다가 인적도 거의 없는 숲속이었다.
 ‘아아! 만약 하루 정도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충분히 검각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뜻밖의 도움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 검각은 그대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을뿐더러, 척진 일도 없거늘, 왜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냐!”
 체내를 타고 독이 퍼지는 상황에서도 양일충은 엄청난 기세로 흑의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흑의인들은 애초에 말이 없는 자들이었다.
 흑의인들은 대답 대신 또다시 양일충을 포위하며 공격 태세를 갖출 뿐이었다.
 “흑흑흑··· 양노······.”
 장서혜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양일충이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아아! 하늘이 정녕 이렇게도 무심하실 수 있단 말인가!”
 어떤 기척도 없이 한 청년이 그들에게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르신,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라지만,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다니?
 양일충은 알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청년을 바라봤다.
 순박하게 생긴 시골 청년이었다.
 그는 언뜻 보기에도 그 어떤 병장기조차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무림인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가만히 청년을 관찰하던 양일충의 눈이 돌연 빛을 발했다.
 ‘저토록 맑은 눈빛이라니······.’
 죽음의 위기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지만, 청년은 참으로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허어······, 그런데 어쩌다가······.’
 청년의 얼굴은 추악했다. 그 표현이 가장 적당했다.
 그의 왼쪽 볼을 가득 메운 화상은 누가 봐도 흉측해 보일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의 눈빛을 보면 그런 생김새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점이었다.
 또한 청년은 분위기도 독특했다.
 마치 그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듯, 청년의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운부라는 읍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초행이라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잘 알지 못합니다. 실례지만 어르신께서 그 길을 좀 가르쳐 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청량한 목소리에 공손한 언행.
 하지만 거부감이 들 정도로 깍듯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청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이 살벌한 분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이 소로를 따라 숲을 빠져나가면 세 갈래의 작은 길이 나온답니다. 그중에서 서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쭉 가시면 됩니다. 어어······?”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장서혜였다.
 대답한 직후, 그녀는 스스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다.
 대답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물론 자신의 평소 성격이 활기차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위기 파악이나 상황 파악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처럼 청년에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이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다 여겼는지, 장서혜가 차마 양일충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푹 숙인 그녀의 얼굴은 창피함으로 인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흑의인들 마저도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언행이나 분위기가 너무도 자연스럽기에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장서혜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양일충이 물었다.
 “나도 자네에게 한 가지 묻겠네. 자네는 지금의 이 분위기가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인가?”
 한심함이 잔뜩 묻어 있는 어조였다.
 이에 청년이 대답했다.
 “파악하고는 있습니다만,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길을 알아내는 일이라서 그리했습니다. 마음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르신의 아까 그 말씀은 사실입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게!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험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인가!”
 곧 죽을 지경에 처해 있다고는 하지만 양일충은 정파인이었다. 비록 어리석은 청년의 목숨일망정 구해 주고 싶었다.
 “저분들과 원수도 아닐뿐더러 척을 진 일도 없다는 아까의 말씀에 대해서 여쭙는 겁니다.”
 마침 주변을 날아다니던 나비 한 마리가 청년의 어깨 위에 앉았다.
 나비나 청년이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은 영락없이 똑같았다.
 ‘저, 저게 무슨······!’
 양일충이 놀란 눈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비록 황당한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 한 폭의 그림 같이 멋지기도 했다.
 “맞아요······.”
 이번에도 입을 연 사람은 장서혜였다.
 “알겠습니다.”
 청년이 그렇게 대답할 때, 흑의인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수하들을 향해 턱짓했다.
 청년을 처리하라는 무언의 명령.
 이에 무기를 든 흑의인들 중 다섯 명이 빠른 속도로 청년을 향해 짓쳐들었다.
 
 ***
 
 “운부라는 읍성에 가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좀 사 오너라.”
 그게 스승, 경무구의 심부름이었다.
 나비와 노는 일이 끝나자 경무구는 그저 쉬라고만 할 뿐, 다른 가르침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에 가유량은 스스로 지난날에 배웠던 무학들을 다시금 연마하며 지냈다.
 그러던 와중에 스승이 이번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과 만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너도 이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노부가 해 왔으나 이제부터 생필품을 사 오는 일은 네가 하는 게 좋겠구나.”
 가유량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운부로 향하던 중이었다. 초행이라 약간 헤매던 차에 이들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딱 보기에도 노인과 여인을 위협하는 흑의인들이 악한 자들로 보였다. 다수에게 핍박받는 소수를 보면 누구라도 그 소수에게 동정심이 실리게 마련이다.
 자신이 그런 일들을 많이 당했었으니 그 상황만으로도 발끈할 수 있었겠지만, 가유량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섣불리 상황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후 사정을 확실히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이 옳다.’
 때문에 지금에서야 나서게 된 것이다.
 만약 노인과 여인이 어려움에 처한 것이라면 모른 척 그들을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스승에게서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가유량이 나서게 된 정황 자체가 그랬다.
 
 검을 든 자가 두 명.
 도를 든 자, 창을 든 자, 철퇴를 든 자가 각각 한 명씩.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했고, 공격은 매서웠다.
 흑의인들은 각 무기의 특성에 따라 서로 연계하며 가유량을 압박하고 있었다. 게다가 철저한 연계하에 들어오는 그들의 시간차 공격은 치밀했다.
 ‘쉽게 볼 상대들이 아니다!’
 빠른 판단과 함께 가유량은 품안의 부채를 꺼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발이 방위를 밟아 갔다.
 건곤영보.
 보법에 관한 한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렸던 경무구의 독문보법이, 백여 년 만에 강호에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건곤영보를 펼치자 가유량의 신형이 낮게 깔렸다. 그러더니 눈으로 쫓기조차 어려운 속도로 흑의인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가유량에게 있어 이 상황은 처음 접하는 실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을 통해 펼쳐진 건곤영보는 무리가 없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이 모든 게 경무구의 차분한 가르침과 가유량의 남다른 노력 덕분이었다.
 흑의인들의 눈동자는 이미 놀람을 담은 상태였다.
 단순히 시골 청년인 줄로만 알고 대충 살인멸구(殺人滅口, 어떤 비밀이나 내막을 잘 아는 증인이나 목격자를 죽여서 그 입을 봉함)하려 했던 그들이었다.
 그런 청년이 갑자기 절정의 보법을 펼치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탁! 탁!
 낮게 깔렸던 가유량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그가 들고 있던 접힌 부채가 한 흑의인의 종아리 뒤쪽과 그 옆에 있던 흑의인의 무릎 뒤쪽을 때렸다.
 가유량이 때린 부분은 각각 축빈혈과 위중혈로서 제압당하면 신체가 마비되거나 비틀거리며 쓰러지게 되는 마혈(痲穴)이었다.
 흑의인 두 명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검을 들고 있던 흑의인이 황급하게 가유량의 목을 찔러 왔다. 동시에 시간차를 두고 창을 든 사내가 가유량의 상체를 공격해 왔다.
 검을 피하려 고개를 비트는 와중에 가유량은 다시금 건곤영보를 밟았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창을 든 흑의인의 품속으로 빠르게 쏘아졌다.
 촤라락―
 가유량의 부채가 순간적으로 활짝 펴지더니, 창을 든 사내의 오른손을 지그시 눌렀다.
 가볍고 부드러워 보이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창을 들고 있던 사내는 자신의 팔을 내리누르는 그 육중한 힘을 버티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창촉이 자꾸만 땅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검을 든 자와 철퇴를 든 자들이 다시금 가유량을 공격했다.
 이에 가유량이 손목을 가볍게 털어 내며 부채를 접었다. 그와 동시에 창을 들고 있던 흑의인의 어깨 부근을 때렸다.
 비유혈이었고, 그곳 또한 마혈이었다.
 창을 든 무사가 쓰러졌다.
 하지만 그 즈음에는 검과 철퇴가 이미 가유량의 하체에 닿고 있었다. 가유량이 보법을 펼치면 신형이 아래로 낮게 깔린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하체를 공격한 것이다.
 곧 가유량의 눈에 힘이 실렸고, 그가 또다시 보법을 밟았다.
 이번에는 건곤환보.
 애초 신형이 낮게 깔리는 건곤영보와는 달리, 건곤환보는 공중에서도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 주는 보법이었다.
 가유량이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공격해 오던 흑의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가유량의 다음 동작이 이어지고 있었다.
 살짝 떠오른 가유량이 접힌 부채로 철퇴의 쇠사슬을 살짝 누르자, 엄청난 힘으로 날아오던 철퇴가 돌연 방향을 바꿨다.
 순간, 검을 든 흑의인의 눈빛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고······.
 “큭!”
 난데없이 동료의 철퇴에 의해 날벼락을 맞은 그의 신형이 힘을 잃고 날아갔다.
 그때 이미 가유량은 건곤환보를 밟으며 철퇴를 든 자에게 다가선 상태였다.
 철퇴를 든 흑의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가유량의 움직임이 이렇게 빠를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철퇴라는 무기는 유용하지 못하다.
 흑의인은 황급히 철퇴를 버리고 장법으로 가유량과 맞서려 했다.
 그가 막 장력을 발출하려는 순간.
 터억!
 접혀진 가유량의 부채가 어느새 그의 팔목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탁!
 그 부채가 흑의인의 팔꿈치 관절 안쪽을 때렸다. 그곳도 인체의 마혈 중 하나인 곡지혈이었다.
 그 흑의인도 그대로 쓰러졌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남아 있던 흑의인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시골 청년의 실력이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탓이다.
 남아 있는 흑의인들의 수는 아직도 스물다섯.
 그들이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순간,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가유량이었다.
 슈슈슉―
 장서혜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감지한 가유량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건곤환보를 펼쳐 내고 있었다.
 
 <『선무』 1-2권에 계속>

댓글(3)

n3************    
3-1까지 보다가 하차함. 기존 종이책도 권당 천원정도였는데 그걸 또 쪼개서 반권도 안되는 분량을 천원을 받음. 안보고 맙니다
2017.09.26 10:30
견정태    
이거 나온지 10년 넘지 않았나... 대여로 안풀고 구매라니
2019.07.08 12:57
su*******    
일괄 대여했는데 4권서 하차. 돈 겁나 아깝네 스토리는 매력적인데, 등장인물이 죄다 설명충임 "냉정한 사람이었는데 한 남자를 만나고 변했습니다 어쩌구...그 분은 어쩌구..." "아, 혹시 그 분이000인가요?" 그냥 누구 만나서 감명 받고 변했다고 하면 되지 뭘 마지막에 밝히노? 죄다 이런 식...
2021.11.1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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