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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해결사 고봉팔 1

2017.05.24 조회 2,327 추천 28


 무림해결사 고봉팔 1
 
 
 프롤로그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종종 세상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 자체도
 이미 또 다른 음모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신이 만족감에 미소 짓고 있다면
 세상은 비린내 물씬 나도록 그것을 비웃을 것이다.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의 무림맹(武林盟) 단주 회의실.
 “이번에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오?”
 도단(刀團)의 단주 부시영이 꽤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권단(拳團)의 천중일 단주께서 조사에 협조해주셨지만······.”
 “이게 벌써 몇 번째요! 다른 곳도 아닌 무림맹(武林盟)에서 무공 서적이 새나가다니! 이러다간 무림세가와 구파일방의 모든 무공 서적이 모조리 밀반출되는 것 아니오? 규율단에서 이번만큼은 흉수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소이까?”
 무림맹의 규율을 담당하는 단주 하상범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누구보다도 흉수를 잡고 싶은 게 바로 규율단이오! 말조심하시오!”
 “맹주께서는 뭐라고 하시오?”
 “이달 안으로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무림학관을 폐쇄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더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누가 뭐래도 이곳은 정파 무림인들의 자존심이 살아 있는 곳이오. 학관을 폐쇄한다면 묵룡관은 어떻게 상대한단 말이오! 이것은 사파의 무리들이 저지른 일이 분명하니 이번 기회에 중원 곳곳에 기생해 있는 떨거지들을 모조리 잡아버리면 될 것이오.”
 “부시영 단주, 지금 단주 말대로 했다가 엉뚱한 자가 흉수이거나 다른 단체에서 벌인 일이라면 도단에서 뒷감당할 수 있겠소?”
 “뒷감당은 무슨 놈의 뒷감당! 비루한 족속들 좀 치워버렸다고 누가 따질 수 있단 말이오!”
 무림맹의 다섯 세력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단주들은 신진 고수들을 키우기 위해 맹에 보관 중이던 무공 서적이 세 번이나 도둑맞는 일이 발생하자 계속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어차피 사파 무리의 우두머리인 사다인(邪多人) 유세적만 잡아버리면 모든 일이 쉽게 끝날 일이외다. 정파의 신진들을 육성하는 것에 방해할 자는 사파 맹주인 유세적 그자뿐이오!”
 부시영 단주는 사건의 본질은 무시한 채 틈만 나면 사파를 잡으러 가자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단주들은 이미 익숙한 그의 말투에 거의 무시하는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검단(劍團)의 호국형 단주께서 앞전에 추천한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오?”
 “아, 깜빡했구려. 호 단주께서 추천했던 인물의 조사를 부탁해놨는데······. 어디 있더라.”
 비마단(飛馬團)을 책임지고 있는 정원일 단주가 준비해온 종이 뭉치를 다른 단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문서 관련 2급 정보
 의뢰인:각 단의 단주
 의뢰 내용:호국형 단주가 추천한 고봉팔이라는 자의 신상명세
 
 이름:고봉팔(본명인지 확인할 방법 없음).
 나이:외관상 나이는 약관으로 보이나, 측근들이나 주변인들은 21~25세까지 다양한 나이로 알고 있었음. 결론적으로 정확한 나이를 아는 자가 없음.
 출신:알려진바 없음. 그의 직종과 분야를 통해 보면 하오문이나 낭인 쪽 출신으로 추측.
 특기:딱히 특기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없음. 단지 자신의 돈을 떼먹거나 무단으로 거래를 파기하는 자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복수하는 자임. 건드리기 어려운 위치의 인물들도 여럿 그의 복수극에 연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
 무공 수위:현재까지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은 없음. 맹(盟)의 고수를 통해 알아본 바로는 기본적인 권각술 정도는 익힌 것으로 사료됨. 그러나 고봉팔의 호위무사로 있는 조성은이라는 자는 일류를 넘어서는 자일 것으로 판단.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얽혀 있는지는 알려진바 없음. 최소한 금전적 고용 관계는 아님.
 현재:호위무사로 보이는 조성은이라는 자와 중경시(重慶市) 남녕(南寧)에서 제일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음.
 참고 사항:일단 돈 되는 일이라면 거의 안 가리고 참견함.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무림인들 몇몇과 원한 관계를 맺고 있음(대부분 돈과 관련된 내용임).
 
 추신:호위무사로 있는 조성은이라는 자는 명문 정파의 인재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순한 내공을 지닌 것으로 확인되었음. 어느 문파의 출신인지는 확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조만간 출신이 파악될 것임. 조성은 역시 약관의 나이로 보임.
 
 본 내용은 맹의 정보기관인 비마단(飛馬團)에서 조사한 내용이며 8할 가량의 신임도를 보증함.
 비마단주 정원일.>
 
 “이게 뭐요?”
 도단주 부시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마단주를 바라봤다.
 “보시면 알 것 아니오. 호국형 단주가 추천한 인물이라기에 뒷조사 좀 해본 것이오.”
 “여기 적힌 대로라면 별 볼일 없는 추색(追索)꾼에 불과하지 않소?”
 부시영은 짜증이 난다는 말투로 말하며 호국형 단주를 바라봤다.
 “사람이란 각기 타고난 자질이 있고, 또 그 자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바뀌지 않소? 내가 추천한 고봉팔이라는 자 또한 뭔가 찾아내고, 뒷조사하러 다니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요.”
 호국형은 부시영의 추궁하는 어투에 심기가 상한 듯 으르렁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오단(五團)이 총력을 모두 투자했어도 흉수를 찾지 못했는데, 이런 하오문도 같은 자에게 일을 맡기자는 것이오?”
 “정확히 이야기하면 맡기자는 것이 아니고, 부탁하자는 것이오. 하는 짓은 추레할지 모르나 위험하다 싶은 일은 칼같이 피해 다니는 자요. 사실 부탁한다고 해도 맡아줄지나 모르겠구려.”
 검단주는 자존심이나 내세우려는 도단주 부시영에게 톡 쏘듯이 말해버렸다.
 “흥! 검단주가 그렇게나 자신 있는 인물이라면 어디 한번 맡겨 봅시다. 두고 보면 알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던 부시영이 검단주의 말에 손을 들어줬다.
 고봉팔이라는 자가 이 일을 맡아서 성공적으로 해결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사라지는 것이요, 실패한다면 검단주의 콧대를 사정없이 밟아줄 수가 있으니 과연 일석이조의 결과였다.
 비마단주 정원일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자 바로 표결에 붙였다.
 “그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이자를 섭외하도록 하리다. 검단주, 고봉팔이라는 자를 데려오는 데 참고할 사항이 있다면 알려 주시오.”
 “그러니까 이자를 끌어들이려면······.”
 
 
 찾아라. 기다릴 것이다. 찾았느냐? 내가 기다린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치 않는 법이다.
 -고봉팔 어록-
 
 
 1장 해결사 고봉팔
 
 
 분명히 바람을 피우는 것 같은데
 도저히 꼬리를 잡을 수 없다. 열 받아 죽겠는데
 그 자식을 해코지할 방법이 없다.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기엔 나 스스로 구린 부분이 많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뒷골목의 해결사를 찾아가라.
 금액만 맞는다면 확실하게 움직일 인간들이 바로 해결사들이다.
 아! 그리고 잊지 마라. 일 끝나고 돈 떼먹으면 결국에
 엿 먹을 놈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영락 4년, 4월 12일. 호화 고급 객잔 화월각의 내원에 위치한 조그마한 건물 안.
 아침부터 찾아와 사람을 고민스럽게 만드는 저 인간들 때문에 점심도 건너뛰고 말았다. 내가 좀 알려지긴 했지만 무림맹에서 일을 맡기러 오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하지만 내가 선뜻 일을 맡지 못하고 버티는 것 또한 이 인간들이 무림맹에서 왔다는 점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개나 소 보듯 하던 인간들이 뭐가 아쉬워 날 찾아왔겠느냔 말이다. 그것도 청탁 비용이 내 1년 수익에 맞먹는 건수를 가지고 말이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구린내가 풍기는 것이 아차 하면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평소 내 신조가 길고 가늘게, 적당히 무리하지 않고, 눈에 튀지 않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절대 이놈들과 엮이면 안 된다.’
 “고 소장, 그러지 말고 협조 좀 해주시오.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청부액도 적은 금액은 아니지 않소?”
 무림맹 비마단주 정원일은 애절한 눈빛을 하고 고봉팔을 바라보았다.
 “당신네들 말대로라면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소. 하지만 그 어렵지 않은 일에 대한 청부 금액으로 보기엔 터무니없으니 이러는 것 아니오? 무림맹에 아무리 돈이 많기로서니 좀 한다는 인간들은 전부 모여 있다는 곳이 무림맹 아니냔 말이오? 그런데 나 같은 뒷골목 흥신소 소장에게 머리까지 숙여 가며 부탁을 하니 아무리 팔불출이라도 의심을 해봐야 하지 않겠소?”
 “어허~ 고 소장, 그게 아니라고 해도 왜 자꾸 그러시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진행된 대화만 쉰일곱 번째요. 지치지도 않으시오?”
 “돌다리도 두들겨 건넌다고 했소. 썩은 줄 잘못 잡아 세상을 등지고 싶지는 않소. 쉰일곱 번이 아니라 천 번을 넘게 반복한다고 해도 내 의구심이 사라지기 전까진 이 일을 맡을 의향이 없으니 포기들 하고 돌아가시오.”
 “······.”
 ‘지겨운 인간들! 이쯤 했으면 포기를 해야지 정말 끈질기네. 어떻게 해야 별 탈 없이 쫓아내려나. 뒤끝 없이 쫓아내지 않으면 그 잘난 무림맹 들먹이면서 계속 귀찮게 할 텐데.’
 “고 소장, 그러지 말고 협조 좀 해주시오.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청부 금액도 적은 금액은 아니지 않소?”
 비마단주 정원일은 고봉팔의 짜증스런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설득 작업을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 인간들, 정말 천 번이든 만 번이든 해보자는 거야?’
 “당신네들 말대로라면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소. 하지만 날 바보로 생각했으니 터무니없는 금액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돈 좀 밝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무 데나 굴리는 성격은 아니오.”
 “어허~ 고 소장, 그게 아니라고 해도 왜 자꾸 그러시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진행된 대화만 쉰여덟 번째요. 지치지도 않으시오?”
 고봉팔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팔자 모양이 되었다.
 ‘씨바!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내가 남들 뒷조사나 해주고 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영업 방침만은 확실히 세워두고 일하고 있소. 안전제일. 누가 뭐래도 안전제일을 추구한단 말이오.”
 “······.”
 그래,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지. 어디 한번 떠들어봐라.
 “휴··· 역시 금액이 적어서 이러는 것이오?”
 “아니,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똥통에 밥 말아먹었소? 일에 비해서 돈이 많다고 하지 않았소.”
 “좋소. 고 소장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진작 포기했으면 얼마나 좋소.”
 “일에 어울리는 금액으로 감해드리리다.”
 “하하하! 이제라도 뜻이 통한 것··· 뭐요?”
 ‘아니, 진짜 이 인간들이 대가리에 도끼라도 꽂고 왔나. 사람 미쳐 버리겠네. 성질 같아서는 콱! 밟아버리고 싶지만, 쪽수가 많으니 건들지도 못하겠고.’
 “고 소장이 그러시지 않았소? 일에 비해 의심스런 금액이어서 일을 맡을 수가 없다고. 그래서 저희가 양보하겠다는 것이오. 고 소장의 깨끗한 경영 방침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구려. 모름지기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액수를 올리는 인간들만 봐오다 보니 우리가 고 소장을 오해했던 모양이오.”
 “······.”
 ‘뭔가 꼬여 가는데. 이게 아니잖아.’
 “처음에 제시했던 금 일백 냥에서 딱 절반만 드리겠소. 그러니 일을 맡아주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일을 맡아주시는 걸로 알고 가겠소이다. 적당한 일에 적당한 금액이니 고 소장도 더 이상 다른 소리는 안 하실 거라 믿겠소.”
 “어, 어······.”
 ‘이···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이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후다닥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치네?’
 “야, 이 새끼들아!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소장님, 이미 갔는데요. 무림인들이라 그런지 동작 하나는 기가 차게 빠릅니다.”
 “이런 개 같은 자식들! 지들이 무림맹에서 왔으면 다야? 아침부터 사람 밥도 못 먹게 하더니 점심까지 굶게 만들어놓고, 염불 외듯 지들 말만 하더니 이대로 튀어? 으으으으··· 혈압이!”
 “소장님, 일단 진정하시는 것이······.”
 “성은아, 너 같으면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며칠 전엔 왕가 놈이 지랄을 하더니 이번엔 뜬금없이 웬 무림맹이야?”
 ‘진짜 고사라도 지내야겠다. 이러다 마교까지 일 맡긴다고 들이닥칠라.’
 “성은아, 소금 뿌려라!”
 ‘젠장! 무림맹 놈들, 이따위로 사람을 간보고 가다니. 뻔히 골치 아픈 일인 줄 훤히 보이는데 내가 일을 맡을 것 같으냐! 중경(重慶)에서 장사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군. 그동안 밀린 수금이나 부지런히 해야겠다.’
 “소장님, 잦은 혈압 상승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진정하시죠.”
 “지금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냐?”
 “하지만 어쩔 겁니까? 확 가서 무림맹주 목이라도 따올까요?”
 “······.”
 “그것 보십시오. 어차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거면서 성질 좀 죽이세요.”
 “성은아.”
 “네, 소장님.”
 “왕가(王家) 놈이 계속 결재를 미루며 버티고 있으니 마감 좀 봐야겠다. 이번에 일 봐주면서 들어간 돈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 좀 해봐라.”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오 일간 잠복하면서 들어간 부식비가 은자 한 냥에 황가 패거리가 낮 시간 동안 앵화 따라다니며 알아온 정보비로 은자 두 냥이 지급되었고, 앵화가 바람피우던 고가장의 대공자 뒤를 쫓다가 호위들과 칼부림 나면서 생명 수당이 은자 열 냥, 그리고 앵화가 왕 대인과 대공자의 눈을 피해 둘째 공자와도 밀애를 즐긴다던 정보 덕분에 밀애 장소를 급습하고자 애들 숨겨 놓느라고 들어간 투숙비가 은자 두 냥입니다. 우리가 왕 대인에게 착수금으로 받은 은자 다섯 냥을 제하고 나면 순수하게 본전만 열 냥이 부족합니다.”
 ‘내역을 듣고 나니 진짜 한숨만 나오는군. 그나저나 몸으로 뛴 시간은 제한다고 쳐도 본전을 채우려면 열 냥이 빈다는 말인데······. 왕 대인, 중경 최고의 해결사인 나 고봉팔을 우습게봤다 이거지! 이번 사건을 흐지부지 넘어갔다간 다른 놈들까지 등쳐 먹으려고 달려들 수가 있으니 조용히 넘어갈 수야 없지. 어디 망신 좀 당해봐라. 나에게 약속했던 은자가 서른 냥이니, 그만큼은 엿을 먹어야 할 거다, 왕가 놈아. 내가 이 바닥에 자리 잡은 지 벌써 삼 년째인데 감히 장난을 치려고 해? 중경에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주마. 흐흐흐! 일단은 똥독이 올라야 얘기가 빠르겠군.’
 “성은아, 왕가 놈이 오늘 저녁에 여기 화월각에 오는 게 확실한 정보지?”
 “네, 소장님. 삼 일에 한 번씩은 화월각에 들러서 도화와 선화를 불러놓고 술자리를 펼치니 오늘도 출근 도장을 찍을 겁니다.”
 “그럼 왕가 놈 담당하는 점소이에게 은전 좀 쥐어주고, 요것 좀 섞어서 넣으라고 해라. 도화와 선화에게도 미리 이야기해놓고.”
 “설마?”
 “그래. 예전에 섬서에서 일 끝나고 오리발 내밀던 그년 이름이 뭐더라?”
 ‘종종 뒤끝이 안 좋았던 인간들은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아니, 기억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겠군.’
 “무림에선 진미검녀(眞美劍女)로 더 유명한 아가씨죠. 남궁세가의 장녀 남궁소소입니다.”
 “그래, 맞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아무튼 그년이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도도하게 굴면서 뭐라고 했더라?”
 ‘천한 놈이 나에게 돈을 내라는 것이냐? 나 남궁소소의 일을 도와준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임을 모른단 말이냐!’ 이렇게 이야기했죠.”
 “성은아.”
 “네, 소장님.”
 “난 집구석 믿고 까부는 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더라. 알고 있지?”
 “하지만 그땐 좀 심하셨습니다.”
 “흥! 내 돈 떼먹으려는 놈들에게 어찌 자비로움을 택하겠느냐. 그런데 이 빌어먹을 왕가 놈이 감히 벼락 맞을 짓을 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저놈이 조금만 더 독하다면 정말 쓸 만할 텐데. 하지만 무임금 노동에 무공 실력도 낮지가 않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복덩이가 따로 없는 놈이지.’
 “나도 준비 좀 해볼까. 누가 뭐라고 해도 안전이 제일이다! 그리고 왕가 놈 일만 마무리하고 이 동네를 떠야겠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나 같은 영세업자들 등이나 처먹는 무림맹 놈들, 십팔 대 조상부터 대 끊어먹을 그놈들 후손들까지 모조리 똥독이나 오를 놈들 때문에 더 이상 못해먹겠다.”
 “······.”
 
 ***
 
 화월각 귀빈 전용 전각 3층, 매화실.
 “소장님, 일각 안에 왕 대인이 나올 겁니다.”
 “알았다.”
 ‘왕가 놈, 봉팔표 특제 설사약을 잔뜩 처먹었으니 속이 부글거리겠지? 화장실로 오는 순간, 네놈 인생은 끝이 될 거다. 어라? 성은이 녀석,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거냐?’
 “뭐야?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건데?”
 “인분으로 이루어진 독은 독인들이 쓰는 독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 담가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결국 내가 하는 짓이 맘에 안 든다는 눈빛이었군. 하지만 내가 세운 규칙들인데 스스로 깰 수는 없지.’
 “그런 말이라면 됐다. 네 일이나 잘해.”
 “무림인이던 진미검녀도 반 각을 넘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었습니다. 그때 소장님이 건져 내지 않았다면 죽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 대가를 치르게 할 뿐이지, 목숨을 뺏고자 하는 건 아니니까.”
 “가끔은 명예를 잃는 것이 더욱 치명적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성은이 너, 오늘따라 말이 많구나. 가끔은 명예보다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지. 성은이 너도 사실은 목숨이 아까워서 내 밑에 있는 것 아니던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긴 뭐가 지나쳐? 지금이라도 내 밑에서 일하기 싫다면 그 잘난 명예나 지키러 가시지. 그리고 그 명예라는 걸 지키러 갈 땐 내 눈에 안 띄었으면 해. 지 놈 무기에 목이 잘린 시체는 사절이니까. 하여간 정파 밥 좀 먹었다는 놈들은 툭하면 죽는다고 지랄이야. 세상에서 제일 비열하고 비겁하며 책임감 없는 놈들이 걸핏하면 기분 좀 틀어졌다고 명예니 멍에니 하면서 칼 들고 설치는 놈들이라니까. 카악~ 퉤!”
 “······.”
 “난 왕가 놈 기다리러 간다. 너도 일 봐.”
 ‘젠장! 성은이 저놈, 요즘 오냐오냐해줬더니 감히 소장이 하는 일에 참견을 해? 어디 꼬투리만 잡혀 봐라. 그나저나 올 때가 되었는데······. 호~ 저기 오는구나. 똥구멍에 힘이 쫙~ 들어간 것을 보니 약발은 확실히 받아서 나타났군. 왼쪽 마지막을 제외하곤 전부 공사 중이라고 써 붙여 놨으니 빨리빨리 들어가거라. 흐흐흐! 급하긴 급했나 보군. 바지춤을 내림과 동시에 쏟아내는구나. 크억! 냄새야! 젠장! 후다닥 해치우고 가야겠군. 왕가 놈 엿 먹이려다가 내 코가 썩겠구나.’
 투둑!
 “어, 어······.”
 ‘그럼 그렇지. 왕가 놈 근수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발판에 톱질을 해놨더니 적당한 시간에 빠개지는구나.’
 튼튼해 보이던 발판은 왕 대인의 놀란 목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겠다는 듯, 쩍쩍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나버렸다. 오만 가지 인상을 지어가며 괄약근에 힘을 주던 왕 대인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인분 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 사람 살려! 거기 누구 없소?”
 ‘크크크! 살려 달라는 목소리가 쓸개라도 빼줄 것 같구나. 이럴 때 일수록 차분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누··· 누구요?”
 “사람 살려 주시오! 뒷간 발판이 부서졌소!”
 “이런!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사람들을 불러오리다!”
 “자··· 잠깐만!”
 ‘흐흐흐! 그럼 그렇지. 멋 부리기 좋아하는 너희 족속들이 똥 묻은 비참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겠지.’
 “왜 그러시오?”
 “사람들까지 부를 필요는 없소. 근처에 밧줄 같은 게 있다면 그걸로 조금만 도와주시오.”
 “하지만 사람들을 불러오는 게 더 낫지 않겠소?”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으니 내 말대로 도와주시오!”
 ‘흥! 똥통에 빠져 죽게 생겼어도 체면은 차려야겠다, 이거지?’
 “알았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고··· 고맙소!”
 ‘왕가 놈아, 네놈이 그럴 줄 알고 적당한 길이로 밧줄을 준비해뒀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기어올라 오거라.’
 고봉팔은 미리 준비해둔 밧줄을 한쪽에 묶어 안으로 던져 넣었다.
 ‘자~ 이제 사람들을 불러 모아볼까나.’
 전각 위에서 고봉팔의 행사를 지켜보고 있던 성은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어버렸다. 벌써부터 사람이 인분 통에 빠졌다는 소리를 듣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은이가 본 것만 벌써 12명째 희생자였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하자. 일을 시켰으면 돈을 냈어야지. 소장님 성질이 고약하긴 하지만 억울한 사람을 괴롭힌 적은 없었잖아.”
 인분 사건에 매번 공범자로 활동했던 성은은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하며 지금의 상황들을 애써 외면해버렸다.
 
 ***
 
 “성은아, 어차피 돈이 될 만한 것은 전부 은자로 바꿔서 대륙 전장에 보관했으니 움직이기 편하게 짐은 작게 꾸려라.”
 “정말 이대로 도망쳐도 괜찮은 걸까요?”
 성은은 무림맹의 의뢰를 피하고자 사업을 정리해버리는 봉팔의 결정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이사 한두 번 다녀 보냐?”
 ‘자식이, 안 그래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자꾸 이야기 꺼내고 지랄이야.’
 “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그동안 모은 돈도 있고, 한곳에 머무르기엔 무림맹 놈들이 신경 쓰이니 얼마간은 여행이나 다니자. 소주(蘇州)로 갈 생각이다.”
 “아! 소주라면?”
 단순히 무림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소주로 여행을 떠난다는 봉팔의 말에 성은은 밝은 표정이 되었다.
 “크크크! 너도 기대되나 보지?”
 “당연하죠. 산에서 내려온 뒤론 소장님 덕분에 뒷골목만 전전했지 않습니까?”
 ‘흠··· 그러고 보니 삼 년간 너무 부려먹기만 했군.’
 “알았다. 이번 기회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지.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널 부려먹기만 하고 신경을 써주지 못했구나.”
 고봉팔은 성은이와 함께 그동안 흥신소 사무실로 사용하던 화월각 내원을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려고 화월각을 나서는 순간, 전날 고봉팔을 찾아왔던 비마단주 정원일과 딱 소리를 내며 마주쳤다.
 “고 소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용 하나는 확실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이렇게 영업장까지 정리하고 도와주실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 당신!”
 “천천히 이동한다고 해도 삼 일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봉팔의 표정을 살피던 성은이 앞으로 나서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나 비마단주는 성은의 적대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싱글거리는 모습으로 계속 입을 열었다.
 “미약한 능력이지만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정보를 다루는 일이라 그동안 몇 가지를 알아봤습니다. 같이 계시는 분 성함이 조성은이시죠? 화산파 전대 장문인께서 말년에 얻으신 제자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화산에서 협객행을 떠나신 게 삼 년 전인데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흥신업에 종사하시는 것을 사문에서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봉팔의 명령을 기다리던 성은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무림맹의 단주라는 자가 기껏 한다는 것이 협박이란 말인가?”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화산파에서 조 소협을 발견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기에······.”
 봉팔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성은아, 긁어서 부스럼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
 ‘젠장! 성은이 놈, 종종 고리타분하긴 했지만 설마 명문 정파 출신일 줄이야. 나와 함께 지낸 걸 알면 그 고리타분한 화산파 영감들이 가만있지 않겠군.’
 “소장님······.”
 “됐다. 진작 네 신상 소개나 들어둘 걸 그랬다. 카악- 퉤! 비마단주라고 했소?”
 봉팔이 정원일 단주의 신분을 확인하듯 물었다.
 “듣자하니 우리 성은이가 편 가르기 좋아하는 명문 정파의 제자인 것 같은데, 맞소?”
 “네, 소장님. 무림구파 중에서도 매화 검법으로 이름을 날리는 화산파의 제자 분입니다. 배분상으로 현 장문인의 막내 사제가 되시니, 거의 장로급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쩝! 무림 문파들의 족보까지 뒤지고 다니는 취미는 없으니 그리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소. 상태를 보니 성은이 놈이 나와 함께 다니면 난감한 입장이 되는 것 같으니 조용히 데리고 가쇼.”
 “저는 고 소장님과 조 소협이 무림학관에 같이 입소하시는 걸로 생각했었는데?”
 “물귀신 작전이오?”
 “고 소장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것이고, 있는 그대로 봐주신다면 아닌 거겠죠.”
 “일단 화월각으로 들어갑시다. 의뢰 건에 대해 다시 한 번 들어봐야겠소.”
 “소장님!”
 성은은 자신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 같아 다급하게 봉팔을 불렀다.
 “됐다. 어차피 들어보고 결정할 것이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라. 그리고 그런 신분을 가지고 이런 동네에서 놀고 있으면 쓰겠냐? 집안 어르신들 걱정 그만 끼치고 집으로 돌아가라.”
 봉팔은 그렇게 말을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월각으로 들어가 버렸다.
 비마단주 정원일은 봉팔의 맞은편에 앉아 의뢰에 대해 다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혼자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봉팔도 간간이 질문을 던져 가며 대화를 나누는 모양이 되었다.
 “대충 종합해보면 무림맹의 신진 교육기관인 무림학관에 입교해서 애들 뒷조사를 해달라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애들 뒷조사는 해서 뭐 하려고 그러는 것이오?”
 “고 소장도 아시겠지만, 정사대전이 끝난 지 이십오 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서로 간에 큰 타격을 입었기에 지금까지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가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무림에서 말하는 평화란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 잔뜩 웅크려 있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무림맹은 신진 고수들을 키우는 데 집중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을 해도 세작은 숨어들기 마련이죠.”
 “결국엔 겉으로 봐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으니, 안에서 찾아달라?”
 “역시 말이 통하는군요.”
 ‘뭐야? 잘난 체하고, 거드름 피우는 애들 사이에서 알랑방귀 뀌라는 소리잖아?’
 비마단주는 고봉팔이 다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마지막 수를 꺼내들었다.
 “맹(盟)에서는 고 소장님이 이 일을 맡아주시기만 한다면 의뢰금의 액수는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의 특성상 신분을 조작하여 차후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드릴 생각입니다.”
 ‘음··· 일 자체로만 본다면 여전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무림인들의 특성상 정사 간의 문제라 확대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 하긴 일반적인 뒷조사와는 격이 다르긴 하군. 무공을 지닌 자들을 건들다가 머리 아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좋소. 몇 가지 조건만 만족된다면 일을 맡겠소.”
 “하하하! 물론입니다. 어떤 조건이든 말씀만 하시죠.”
 “복잡한 건 아니고······.”
 봉팔은 점소이를 불러 지필묵을 준비하더니 계약 내용과 금액, 그리고 부가적인 사항들을 적어 내렸다.
 “서로 간에 차후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서면 계약이 좋소. 읽어보시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수인을 찍어주시오.”
 비마단주는 봉팔이 내민 문서를 받아들었다.
 
 <고용인:무림맹 맹주
 피고용인:고봉팔
 내용:무림학관에 입교하여 일 년간 수련생으로 위장 근무, 수련생들의 뒷조사를 통해 불순분자를 찾아낼 것.
 의뢰 금액:황금 1천 냥(분실된 무공 서적을 되찾아줄 경우 추가 지급 가능)
 추가 사항
 一. 업무 중 과실로 무림맹의 인물이나 수련생이 다치는 일이 생긴다 해도 차후 추궁 받는 일이 없을 것.
 二. 목숨에 위협을 받거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해 본인이 피해를 볼 경우 추가적인 금액을 요구할 수 있음.
 三. 불순분자를 가려내는 중 수련생 외의 의심스러운 자를 발견하였을 경우, 추가 수당을 요구할 수 있음.
 四. 업무 방식이나 행동반경에 제한을 두지 말 것.
 五. 의뢰한 내용은 월 단위로 서면 제출하겠음.>
 
 “음······.”
 “왜 그러시오?”
 “다른 부분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만, 의뢰비가 황금 일천 냥이라면······.”
 황금 1천 냥이면 무림맹의 한 단에서 1년간 사용하는 금액과 맞먹는다. 비마단주 혼자서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거기다 위험수당은 따로 요구한다고 하니 상당히 부담스러운 내용이었다.
 사실, 검단주가 추천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상태였다. 봉팔이라는 자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자신이 직접 나서긴 했지만,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난 일에 비례해서 금액을 산정합니다. 한 푼이라도 깎고 싶다면 이 건수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아··· 아닙니다. 일단 맹에 연락을 취해 확답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든지.”
 비마단주는 손바닥만 한 종이에 내용을 옮겨 적어 부하에게 넘겨주었다. 정보를 담당하는 단이니만큼 내용을 암호화해서 맹에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전서구를 이용하면 오늘 밤까지는 답이 올 것입니다.”
 “알았소.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성은이 놈 집안에도 몇 자 적어서 보내주시오. 가출한 자식 놈 데려가라고.”
 뒤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성은이는 봉팔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소장님!”
 “시끄럽다. 어차피 의뢰가 성사되면 무림학관에 들어가야 하니, 너까지 신경 쓰긴 어려워. 집에 가서 못 다한 효도나 해라.”
 “······.”
 
 
 어차피 할 일이면 확실하게 받아내라. 깎아줄수록 물건의 값어치는 떨어지는 법이다.
 -고봉팔 어록-
 
 
 2장 무림학관(武林學館)에 입교하다
 
 
 학교란 무엇인가를 배우는 곳이다.
 학교란 분홍빛 미래를 위한 교류의 장소이다.
 학교란 평등한 배움의 장소인 듯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차별이 심하고, 일등과 꼴등이 명확히 드러나는 비정한 장소다.
 공자와 맹자가 말했다. 똑바로 정신 차리고 착하게 살라고.
 하지만 잊지 말자. 공자왈 맹자왈 떠드는 인간들치고
 구리지 않은 놈이 없다.
 
 
 “고 소장, 왜 이리 고집을 피우는 것이오? 고 소장이 여러 방면에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건 무공을 심사받는 것이란 말이오. 대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고 소장 무공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오.”
 ‘대놓고 말하고 있으면서 뭐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거냐!’
 “비마단주! 의뢰를 받기로 한 조건에 업무 관련은 독립적으로 진행한다고 분명히 명시했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무림학관의 특채 시험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란 말이오!”
 “누가 뭐라고 했소?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갑작스레 등장하게 되면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된단 말이오. 정상적인 경로로 침투를 해야 차후에도 문제가 없다는 점을 모르는 것이오?”
 “하지만 특채 시험을 보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데 맹에서 꾸밀 수 있는 서류들은 어떻게 해본다고 하지만, 무공을 시험하는 과정은 심사관들이 들어오기에 연극을 할 수가 없소! 그 말은 고 소장이 어떤 신분인지 교관들에게 공개된다는 것과 같단 말이오.”
 “혹시 누가 심사관인지 알 수 있겠소?”
 “맹 내에서도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쾌검자(快劍者) 필연도 교관이요.”
 “그 한 사람뿐이오?”
 “두 사람이 더 있소.”
 “다 말해보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고, 앞으로 아는 척이나 하지 마시오. 신입생이 무림맹 단주와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말짱 헛일이 될 것 같으니까.”
 “휴··· 알았소. 다른 두 사람은 일권무적(一拳無敵) 언주적 교관과 호접자(蝴摺者) 장필선 교관이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맹의 세력권에 들어가면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소. 이번 의뢰는 맹주님과 우리 다섯 단주들, 그리고 소수의 심복들만 알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오. 만약에 도움을 준다 해도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계약이 파기된다는 걸 의미하오.”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으니 잔소리 그만 하고 먼저 출발하시오.”
 ‘어차피 일을 맡을 때부터 귀찮아질 것은 예상했지만, 대체 뭘 믿고 이런 의뢰를 한 건지. 뭐? 이미 입교가 끝난 지 한 달이나 지났기에 뒷구멍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고? 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쯧쯧쯧!’
 봉팔은 비마단주가 떠나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단 돈 값은 해야겠지. 나도 슬슬 출발해볼까나~”
 
 ***
 
 무림맹 특기생 접수관.
 “이름.”
 “고봉팔.”
 “나이.”
 “스물셋.”
 “출신.”
 “태어난 곳을 물어보는 것이오? 아니면 문파를 물어보는 것이오?”
 “문파를 물어보는 것이다.”
 “딱히 문파 같은 곳에서 뭘 배운 기억은 없소.”
 “······.”
 접수 담당 맹철환은 특기생 지망자들 중에 이렇게 막나가는 놈은 처음이었다. 최대한 반말조로 대답하는 것을 보면 무림맹이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놈 같았다. 성질 같아선 실컷 두들겨서 쫓아버리고 싶었지만, 특기생을 받아들이는 곳인 만큼 가끔은 출신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자들이 찾아오곤 했기에 꾹 참고 있었다.
 무림학관에 입교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명 문파의 출신들이 추천장을 받아서 입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원 관계가 넘쳐나는 무림인들의 특수성을 고려해 철저히 신분을 보장해주고 특기생으로 뽑는 방법,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공개적인 시험을 통해 입교하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1년에 한 번씩 입교생을 받고 있었고, 두 번째 방법은 아무 때나 능력만 된다면 받아들였다. 세 번째 방법은 2년에 한 번씩 실시되었는데, 대부분 세력이 약한 군소방파의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형태가 되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은 신분이 공개된 상태였기에 어려운 점이 없었지만, 특기생의 형태로 입교하는 방식은 꽤나 까다로운 편이었다. 사파의 인물이 신분을 감추고 들어올 수도 있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문파를 형성하지 않은 무림 고수들의 제자들이 신청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6개월 전에 특기생으로 뽑힌 마지막 인물이 화룡 검객 노인환의 제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신분을 감추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오래간만에 출신 성분을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이 특기생 신청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출신을 꺼려하던 지망자들도 이렇게 말 짧은 놈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친절하고 길게 이야기하던 맹철환이었지만, 이름까지도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어린놈과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다.
 “사용하는 무공 종류.”
 “이것저것.”
 “······.”
 맹철환의 이마에 굵은 혈관이 솟아올랐다.
 “수련 기간.”
 “모르겠소.”
 “자신이 수련한 기간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당신은 먹고 싸고 기타 등등을 제외하고 수련한 시간만 따로 계산하며 살고 있단 말이오?”
 맹철환은 고봉팔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더 이상 이 건방진 놈과 대화하려고 했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삼 일 뒤 오전에 다시 이곳으로 오게나. 특기생으로 입교할 수 있을지 시험을 볼 것이네.”
 고봉팔은 맹철환의 말에 고개를 까닥거리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맹철환은 봉팔이 사라지자 괴성을 지르며 한동안 발광을 해야만 했다.
 봉팔은 처음엔 가명을 쓸까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쓰는 이름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봉팔이라는 이름이 무림인들 사이에선 촌스럽고 멋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평민들에겐 보편적인 고만고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잡아둔 객잔으로 이동하던 봉팔은 며칠간 집중적으로 조사했던 심사관들의 신상 정보를 떠올려 봤다. 어차피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간이 있다면 그게 어찌 인간이겠는가? 쓸 만한 정보는 얻었지만, 그 정보를 가지고 직접 고수들 앞에서 흥정을 벌이긴 싫었다.
 적당한 인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예전에 자신에게 빚을 진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이내 봉팔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
 
 맹철환은 건방진 고봉팔이라는 놈이 특기생 시험에 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공의 성향이나 능력을 평가하는 심사관 3명은 맹 내에서도 까다롭고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맹철환이 보기에 봉팔이라는 자의 무공 실력은 그리 고강해 보이지 않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맹철환은 자신의 눈을 굳게 믿었다.
 “심사를 할 자의 신상명세입니다.”
 맹철환은 심사관으로 나온 3명의 교관에게 고봉팔의 신상명세를 넘겨주었다. 서류를 받아든 세 사람은 가장 윗줄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는 순간 얼굴 표정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자를 들어오라고 하시오.”
 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쾌검자 필연도가 입을 열었다. 오늘 심사는 필연도가 책임을 맡았다.
 봉팔은 자신을 부르는 맹철환의 말에 임시 심사장으로 사용되는 외관 연무실로 입장했다.
 “언 교관께서는 고봉팔이라는 자의 내공 성향을 확인해주시고, 장 교관께서는 가볍게 대련을 부탁드리겠소.”
 진주언가 출신의 일권무적 언주적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고봉팔의 맥을 잡았다. 언주적이 할 일은 상대의 내공이 음유한 기운을 띠지는 않는가, 정상적인 내공이라면 어느 정도의 내공 수위인가를 확인하고 책임자에게 소견을 말해야 했다.
 “음······.”
 언주적은 고봉팔의 맥문을 잡고 자신의 기운을 흘려 넣었지만, 음유한 기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내공 자체를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원래대로 하자면 무림맹의 특기관을 무시한 대가로 호통을 쳐 내쫓아야 했지만,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덕분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음유하거나 사파의 내공을 익힌 흔적은 없습니다. 다만, 공력이 일 갑자조차 되지 못해서 약간 염려는 됩니다. 특기관은 일 갑자의 공력을 통과 기준으로 잡고 있어서······.”
 일 갑자가 못 된다는 언주적의 말에 다른 두 교관의 얼굴빛이 시커멓게 바뀌었다. 어차피 고봉팔이라는 자가 정상적인 능력을 지녔다면 자신들에게 치부라 할 수 있는 내용의 편지가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언주적의 말에 토를 달아 문제가 없게 만들어야 했다.
 “신상명세를 보니 정상적으로 무공을 익히진 않은 것 같습니다.”
 무당의 속가제자로 입문했지만 장법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일가를 이룬 호접자 장필선이 먼저 바람을 잡았다.
 “그렇군요. 사실, 명문 정파에서도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로 일 갑자의 내공을 지닌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 않겠소?”
 쾌검자 필연도가 장필선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말을 해놓고도 한참을 후회 중이던 언주적은 화색이 밝아지면서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체계적으로 무공을 익혀도 사실 쉽지 않은 부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내공을 지녔다는 것은 이 청년이 얼마나 힘들게 단련을 해왔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일단 이번 심사에서 내공에 대한 부분은 문제를 삼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심사에 떨어지면 실컷 야단을 쳐서 쫓아내려던 맹철환은 세 교관의 대화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부터 특기생 심사 과정에 이런 대화가 필요했단 말인가? 그동안 조금만 기준에 어긋나도 두말없이 돌아가 버리던 모습과는 달리, 부처님이라도 현신한 모습들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제가 장법을 특기로 하는 것은 두 분도 아실 것이니 이 청년과 가볍게 장을 나눠보겠습니다. 무공 부분을 보니 딱히 하나의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부를 해온 듯하니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호접자 장필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봉팔의 앞으로 나섰다.
 “내가 장을 내밀 테니 자네는 걱정하지 말고 맞받아치도록 하게. 자네가 어떤 장법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내력의 운용적인 측면을 보는 것이니 어려울 것은 없을 것이네.”
 봉팔은 장필선의 말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내밀어진 그의 손바닥에 장을 쳐냈다.
 짝!
 손바닥과 손바닥이 만났을 때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마찰음이 연무관에 울려 퍼졌다.
 장필선은 모자라는 한 갑자의 내공이라 생각하고 내심 기운을 끌어올렸다가, 말 그대로 육장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질 않자 당황하는 모습이 되었다.
 장필선이 왜 당황하는지 아는 사람은 내공을 확인해주었던 언주적뿐이었다. 언주적은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났다는 생각에 얼굴색이 다시 한 번 푹석 내려앉았지만, 장교관의 한마디에 다시 화색이 돌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최근 들어 이렇게 깔끔하게 장을 마주친 기억이 없는 것 같군요.”
 장필선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물론 깊이 있는 평가나 내력의 운용에 대한 부분은 제외한 상태로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혹시나 자신이 다칠까 염려하고 내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청년을 살리는 방법이라 판단해버렸다. 만약 이도저도 아닌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교관들이 절대 살려서 보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본처 모르게 만들어놓은 배 다른 자식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장필선과 언주적의 염려와는 달리 쾌검자 필연도에겐 특기생의 역량이 충분하다는 말로 들려왔고, 그나마 형편없는 인물을 합격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마도 심사를 통과하기에 아슬아슬한 실력을 지녔기에 조금은 비열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라 판단해버렸다. 물론 아주 형편없는 인물이었을지라도 절대 불합격 처리할 생각이 없던 필연도였기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두 분 교관들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합격을 시켜도 무리는 없을 것 같군요.”
 “네, 그렇습니다.”
 언주적과 장필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맹 서기.”
 “네, 교관님.”
 “저 청년의 능력이 특기생으로 입교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니, 오늘 내로 생활관을 지정해주고 필요한 내용들을 알려 주도록 하게. 그리고 저 청년의 입교 분류는 청룡급일세.”
 “네? 아··· 알겠습니다.”
 필연도와 다른 두 사람은 맹철환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급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맹철환은 고봉팔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합격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과목만 찾아가서 교육받는 자유 연무급이라니, 거의 졸업반과 같은 대우를 해주라는 소리였다.
 “청룡급 생활관이 어딘지 한번 가봅시다.”
 건방진 입교생 고봉팔의 목소리가 맹철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봉팔은 반쯤 넋이 나간 맹철환의 안내를 받아 무림학관 청룡급 수련생들이 머무르는 관사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보통 청룡급은 한 해에 30명을 넘지 않았기에 다른 급 수련생들이 생활하는 관사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에 속했다. 물론 작다고 해서 일반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면 곤란하다. 3백 명 단위로 생활하는 관사들에 비해 작을 뿐이지, 시설이나 대우 면에선 관사 중 최고급이었다.
 “무림맹에 돈이 많기는 많은가 보구나. 일개 수련생이 생활하는 장소라고 보기엔 너무하는군. 특급 객잔도 울고 가겠어.”
 청룡급 관사는 4인씩 배정받는 주작관이나 현무관과는 달리 10평 정도 되는 공간을 혼자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연무장 또한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도록 독립적인 공간을 지정해줬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져 놓고 생각에 잠겨 있던 봉팔은 숙소 외엔 무림학관의 다른 시설이나 교육 시간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넋 나간 맹철환 때문에 중요한 부분들은 하나도 전달받지 못한 것이다.
 “맹 서기라고 그랬나?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양반이네. 어떻게 해야 한다.”
 자신에게 일을 의뢰한 이상 치명적인 사고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활동에 제재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에 침투한 수상한 자들을 찾아내는 데 공개적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것 또한 어렵다고 했으니, 퇴학만 당하지 않는다면 그 외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저것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일단 동네 구경이라도 해봐야겠군.”
 봉팔은 청룡관을 나와 무림맹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청룡급 수련생들은 어차피 정해진 수업도 없는 데다, 자신의 경지를 높이기 위한 개인 학습에만 신경 쓰도록 되어 있어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고 문제 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지낼 수 없는 노릇이니, 건물들의 위치와 무림학관 부서들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는 습득해놓아야만 했다.
 무림맹 내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을 리 만무하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청룡급 수련생을 증명하는 청룡패 역시 빠뜨리지 않았다.
 청룡 관사를 나와 한 시진 정도 무림맹 관람이라는 특이한 사명을 띠고 어슬렁거리던 봉팔은, 드디어 현무급과 주작급 두 급을 묶어서 현주급이라 부르는 수련생들이 교육을 받는 곳에 도착했다.
 어차피 무림학관에 입교할 때부터 무인으로서 준비된 삶을 살아온 이들이었기에, 주작이나 현무급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일류 무인에 근접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다.
 나이가 어리거나 여자라고 해서 섣불리 장난을 걸기엔 사문과 자신의 무공 실력에 자부심이 강한 놈들이다. 이들을 상대할 때는 일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그들의 자만심과 허영심을 이용해야만 적절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실수하면 그들의 사문 전체와 불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독불장군이나 다름없는 봉팔의 입장에선 절대 원치 않는 상황이다.
 어쩌다 보니 무림맹까지 흘러들었지만 언제라도 목숨에 위협을 느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튈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봉팔의 신조는 ‘안전제일’이다.
 봉팔은 적당히 구경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교육장 뒤쪽으로 낮은 언덕이 있었는데 위쪽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적당히 그늘져 있어 관람용으로는 딱이었다.
 “주작급 수련생들의 수가 신입생이 육십 명에 이 학년이 삼십 명, 그리고 삼 학년이 열두 명이라고 했겠다. 현무급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으니, 다 합치면 이백 명이 넘어서는군. 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걸.”
 평소 인간들 뒷조사에 실력을 갈고닦아 흥신업계에서 상위권에 올라설 때까지 수많은 인간들을 만나봤지만, 이번처럼 무림인들만 수백 명을 조사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아니, 이런 대규모 조사 작업을 일개 개인이 착수한 경우는 무림사에 처음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봉팔은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현주급(현무급, 주작급) 수련생들은 어느새 교육 시간이 끝났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젠장! 그나저나 그 양반들, 아무리 뒤가 구려도 그렇지. 날 청룡급으로 넣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활동 반경은 자유롭지만, 애들 속에 끼어들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머리 아프잖아!”
 심사관들이 자신을 합격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신입들과 생활하도록 현주급으로 넣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봉팔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평소 깐깐하기로 소문난 심사관들이 누군가를 합격시켜 신진들 속에 넣었다고 치자. 하지만 심사 대상의 인물이 허접한 상태라면 금방이라도 비리라는 말이 터져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청룡급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심사관들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셈이다.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던 봉팔에게 현주급 수련생들 몇몇이 다가왔다. 봉팔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물들을 슬쩍 바라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니 안면이나 트자고 다가오거나, 이상한 놈이 자신들의 교육 시간을 지켜보고 있으니 심기가 불편해 현무, 주작급 애들 중에 일진으로 활동하는 놈들이 장난이나 쳐 보려고 다가오는 것이렷다.’
 봉팔은 실실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목표로 접근하는 다섯 놈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 뻔해 보이는 몇 가지 항목을 나열했다.
 “너는 누구기에 감히 무관 수련 시간을 훔쳐보는 것이냐?”
 ‘두 번째 이유군.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하나. 무턱대고 청룡패를 들이민다면 효과는 직방이겠지만 현주급들에겐 어려움의 대상이나 거부감만 줄 것이고, 그냥 심심해서라고 하면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아니, 죽이면 곤란하니 적당히 병신으로 만들겠지. 거부감도 주지 않고 병신도 안 되면서 친해져야 하는데······.’
 봉팔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거만한 몸짓으로 봉팔을 지켜보던 5명의 얼굴엔 짜증스러움이 묻어났다.
 옷차림도 민초들이나 즐겨 입는 무명옷인 데다, 나이도 자신들과 비슷해 보여 맹 내에서 일꾼으로 있는 자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뭔가를 잔뜩 생각하는 표정으로 대답이 없자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명문 정파의 혈통을 이었다는 대견스러움과 자랑스러움 덕분에 잔뜩 망쳐 버린 더러운 성격들이 이대로 넘어갈 리 만무했다.
 “지금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깨끗한 피부에 단호한 눈빛,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흑발을 휘날리며 여수련생들과 동기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학업 중인 남궁철이, 변성기를 막 거쳐 앳된 소리가 사라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다 보니.”
 “뭐··· 뭐시라?”
 남궁철은 봉팔의 거침없는 반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으나, 잘나가는 후지기수답게 바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감히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이 새끼는 뭔데 뱉는 말마다 반말 짓이야? 나이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 새끼 말투는 고쳐 놓고 말겠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난 봉팔이라고 한다. 너희들과 같은 무림학관의 수련생이야.”
 “······.”
 봉팔의 입에서 같은 무림 수련생이라는 대답이 흘러나오자 노기 서린 표정으로 손발을 놀리려던 다섯 놈의 행동이 겨우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보다 좀 늦게 들어오긴 했지만 나이는 좀 되거든. 반말하는 것에 불만이 있다면 너부터 조심하는 게 좋겠다.”
 봉팔은 인생 선배답게 적당히 타일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궁철의 오른쪽에 있던 놈이 앞으로 나섰다.
 “신학기가 개교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너 같은 놈은 본 적이 없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이거 왜들 이러나······. 여기가 어딘지 모두들 잊은 모양인데, 지금 우리가 두 발로 서 있는 곳은 무림맹이야. 뻔한 거짓말로 명을 재촉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지. 그렇지 않나?”
 봉팔은 뭐가 문제냐는 듯 무림맹을 들먹거렸다.
 “흥! 우리는 지금까지 너와 비슷하게 생긴 놈도 본 적이 없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계속 거짓말을 하는군.”
 계속해서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다섯 놈 때문에 봉팔은 슬슬 짜증이 일었다. 이대로 뒀다간 청룡패를 꺼내봤자 ‘흥!’이라는 한마디와 함께 우르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과 안면을 튼다는 계획은 물론, 말투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교육을 시켜 놓겠다던 자신의 다짐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씨바! 세게 나가자!’
 “어린놈의 새끼들이 어디서 말끝마다 반말지거리야? 네놈들은 어미도 없고 사문도 없고 선배도 없냐? 이런 쌍놈의 새끼들! 한 번만 더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면 뒷구멍을 시원하게 넓혀 주마! 카악~ 퉤! 재수가 없으려니까 애새끼들까지 이래라저래라 지랄 염병이야.”
 봉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토해내는 삭막한 몇 마디에 남궁철을 포함한 일진 녀석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감히는 뭐가 감히냐? 야~ 너! 그래, 너 인마!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 너 말이야.”
 봉팔은 손가락으로 남궁철을 가리켰다.
 “네놈이 아주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놈이었구나!”
 남궁철은 봉팔이 손가락질까지 하며 자신을 부르자 사용할 수 있는 안면 근육은 모조리 동원해 분노의 일갈을 뱉어냈다.
 “너 말 한번 잘했다. 내가 몇 가지 물어볼 테니 한번 들어봐라.”
 봉팔은 금방이라도 연장질을 할 듯 자신을 노려보는 일진들을 향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일단 반말한 것에 대해 알아보자. 나이가 많고 적음이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어린 사람이 나이 든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
 “실제로 나이가 어려 보일지라도 첨 본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
 “만약 내가 너희들보다 학년이 높고, 나이도 많다면 지금까지 목숨 걸고 떠들어댄 것이 누가 되는 것이냐?”
 “······.”
 “집법관에 하극상, 그것도 목을 따버리겠다는 다수의 협박 때문에 선배의 체면에 손상이 갔다는 보고를 올리면 너희들 사문이나 가문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
 봉팔은 다섯 놈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쏜살같이 질문을 던졌다.
 봉팔이 말을 하는 동안,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장에 손을 대던 다섯 놈들은 뒤에 2가지 질문이 흘러나오자 완전히 굳은 얼굴이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옷차림은 수수하다(?) 할지라도 수련 시간에, 그것도 혼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농땡이를 피울 수 있는 존재에 대해 빠르게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수련생이며 선배이자, 한 달 동안 얼굴을 볼 수 없는 존재가 누가 있을지 부지런히 떠올려 본 것이다.
 2, 3학년 선배들은 입교식 때 이미 인사를 나누었으니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존재들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청룡급 선배들뿐이다. 개교 20년 이래 가장 많은 청룡급 수련생들이 탄생했다고 하지만, 그 많다는 숫자가 겨우 셋이라는 신비한 선배들.
 만약 지금 자신들이 동네 개 패듯 밟으려 했던 이가 청룡급 선배라면··· 이라는 생각이 들자, 남궁철을 포함한 4명의 일진들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색이 파랗게 변하면서 어느새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호··· 혹시 처··· 청······.”
 “그래, 나 청룡급이야.”
 봉팔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주는 청룡패를 꺼내들고 일진들 코앞에 가져다 붙였다.
 “하··· 한 번만 용서를!”
 “연장에서 손 떼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을까?”
 “힉······.”
 남궁철과 아이들은 여전히 병장기를 움켜쥐고 있던 자신들의 손을 저주하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휴··· 이렇게 겁들이 많아서야. 좀 전에 자신만만하던 기상들은 엿 바꿔먹은 거냐?”
 “아··· 아닙니다!”
 “후배님들.”
 “네··· 넵!”
 “이것도 인연인데 안면이나 트고 지내자.”
 “네··· 넵?”
 “자식들이 귓구멍에 못이라도 처박았냐? 친하게 지내자고.”
 “여··· 영광입니다!”
 ‘흐흐흐! 똘마니들이 다섯이나 생기다니 의외의 소득인걸. 확실히 겉멋만 잔뜩 든 어린놈들이라 말장난하기 재미있는걸. 그건 그렇고 청룡급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대우를 받는 존재들인가? 생각도 못했던 일인걸. 심사했던 교관들, 진짜 미친것들 아니야?’
 만약 그날 심사관으로 들어왔던 교관들이 봉팔의 푸념 섞인 말을 들었다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 없다지만, 무림인들처럼 이름 석 자 지키려고 물불 안 가리는 인간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야 한다. 이름 좀 지켜보겠다고 설쳐 대는 통에 그들의 주머니 속엔 먼지 정도가 아니라 굵직한 돌멩이들을 담게 된다는 사실을.
 먼지는 털기 전까진 조용하지만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들어버린 돌멩이들은 더욱 많은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더욱 다양한 포장을 하고자 발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수렁 속에 빠진 명예가 될 것이며, 스스로 파는 무덤이지 않을까.
 봉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소장님 실력이라면 당연히 청룡급으로 입교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봉팔의 귓가에 많이 들어보던 목소리가 살랑거리며 흘러들었다.
 ‘어라? 성은이 녀석은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어디서 전음을 날리는 거지?’
 남궁철 등은 봉팔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무슨 일인가 싶어 같이 두리번거렸다.
 “성은이 너, 집에 돌아간 것 아니었냐?”
 봉팔이 위쪽 나무숲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자 일진들의 시선 역시 한곳으로 집중됐다.
 “돌아갔었습니다.”
 봉팔은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성은을 보며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성은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한 음색으로 봉팔의 말에 대답했다.
 “돌아갔었다라니?”
 “사문에 돌아갔다가 사부님의 허락을 받고 무림학관에 입교를 했습니다.”
 “몇 년 만에 돌아갔는데 또 나돌아 다니라고 했단 말이야?”
 “하하하! 사실은 사부님이 이곳에 삼 학년 검술 교관으로 새로 오셨습니다. 겸사겸사 달라붙었죠.”
 “쩝! 잔소리꾼 사라져서 자유 좀 즐기나 싶었더니. 넌 몇 학년으로 들어온 거냐?”
 “너무하시는군요. 제 실력이라면 일반 교육생으로 들어가기엔 넘치고도 남죠.”
 “설마······.”
 “네, 저도 청룡급으로 들어왔습니다.”
 남궁철은 갑자기 나타나 존경해 마지않는 청룡급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자 역시 청룡급이라는 말을 듣자 하늘이 노래졌다. 3학년 졸업반까지 몇 번 보기도 어려운 존재들을 한꺼번에 둘이나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신입으로 들어와 청룡급 실력으로 인정받고, 무림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새로운 무림 경영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든 일이었다.
 봉팔이야 이런 계통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귀찮아했기에 모르고 있었지만, 청룡급은 수련생이라고 부르기엔 문제가 있었다. 청룡패를 부여 받은 젊은 인재는 무림학관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무림행이 가능했다. 보고 체계 역시 고유의 권한을 지녔으며, 협객행을 하는 동안엔 수행 무사를 거느릴 권한마저 지니고 있었다.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들은 청룡급 선배가 협객행을 나갈 때 수행 무사로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우등생이 되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부분의 선배들이 협객행의 수행 무사를 거치고 나면 무공에 대한 실력은 물론이고, 정신력까지 한 단계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남궁철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호명되어 떠나가는 것이 수행 무사이지만, 대부분 학교 생활에서 좋은 점수를 얻은 이들이 선택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협객행을 나가는 청룡급 선배가 그 선택 기준을 정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남궁철은 얼굴 도장을 확실히 찍어야 했다.
 “이번에 신입으로 입교한 남궁철입니다. 선배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역시 이번에 입교한 언가혁입니다. 영광입니다, 선배님.”
 “당문의 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당의 적송이라고 합니다. 선배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가혁이의 누나 됩니다. 주민이라고 합니다.”
 홍일점으로 사이에 끼어 있던 여수련생까지 자신의 소개를 하고 나자, 성은과 봉팔 역시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은이야 ‘착하게 살자’가 목표인 녀석이었고, 봉팔이는 일 때문이라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저 녀석은 화산파에서 한자리 꽤 차고 있는 조성은이고, 난 고봉팔이다.”
 성은을 앞에 넣어 화산파를 앞세우고 자신은 이름만 가져다붙였다. 남궁철들은 좀 더 자세한 것을 듣고 싶은 눈치였지만, 봉팔이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표정을 짓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궁금증 풀려다 실컷 찍히느니, 조용히 눈도장을 받아놓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봉팔은 여기에 더 있다가는 여러모로 귀찮아질 조짐이 보이자 성은에게 전음을 날렸다.
 -성은아, 일단 다른 곳으로 옮기자. 여기서 대화를 나누기엔 좀 그렇구나.
 -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후배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우린 일이 있어서.”
 봉팔은 그렇게 말을 던져두고 성은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궁철과 아이들은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청룡급 두 사람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정작 남궁철 등은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약점을 잡고 싶다면 일단 털어봐라. 풍진세상이란 말은 어떻게 살든 먼지가 묻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고봉팔 어록-
 
 
 3장 청룡급에 그녀도 있었다
 
 
 당신은 착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한 인간이거나,
 혹은 완벽한 바보일 것이다. 잊지 마라.
 좋든 싫든 인생이란 놈은 사정없이 꼬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긴 말도 있지 않은가?
 ‘삶은 고달프고 죽음은 달콤하다’
 하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하니 꾹 참고 버텨 봐라.
 종종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지 않은가.
 
 
 ‘이상하다. 화산파 영감 성격에 성은이가 뒷골목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인간이 아닌데.’
 고봉팔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청룡급 수련생으로 다시 모습을 나타낸 성은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나만 묻자.”
 “네, 소장님.”
 “화산파는 구파일방에서도 그 이름이 낮지 않은 명문 정파다. 그렇지?”
 “네, 물론입니다.”
 “네가 아무리 장문인의 사제라고는 하지만, 협객행을 하겠다고 나섰던 네가 삼 년 가까이 뒷골목 생활을 했다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닐 거라 생각이 드는데 말이지.”
 성은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봉팔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남들 같으면 그러려니 할 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고, 결과와 원인이 부합되지 않을 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분명히 물어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어볼 줄 알았다면 질문에 상응하는 답변도 준비를 해놨겠군.”
 “물론입니다.”
 ‘이놈 봐라. 그동안 시궁창 생활을 오래하더니 쓸데없는 부분까지 날 닮아가네.’
 “말해봐. 일단 들어나 보자.”
 “사문으로 돌아갔을 땐 소장님 생각대로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장문 사형께서 저에게 걸었던 기대가 남달랐던지라,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은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하하하! 이놈 연기가 진짜 많이 늘었어. 처음엔 온갖 생각과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던 순진한 녀석이었는데, 망가지긴 많이 망가졌구나.’
 봉팔은 3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엄청나게 변해버린 성은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계속해봐.”
 “결국 장문 사형께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삼 년 동안 금족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흐트러진 마음과 정신을 바로하고, 반듯한 명문 정파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부께서 나타나셨죠.”
 ‘역시 염소수염이 끼어들었군.’
 “사부? 전대 장문인 말이냐?”
 “네. 사부님께서 오시더니 삼 년간 누구와 어떤 생활을 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날름 고봉팔이라는 추색꾼과 손발을 맞췄다고 불어버린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의리 빼면 시체지 않습니까? 당연히 소장님 이름은 빼고 대충 둘러댔죠.”
 “그래?”
 “네. 그런데 사부님이 서신을 한 장 보여 주시더군요.”
 “무림맹이군.”
 “네, 무림맹에서 온 서신이었습니다.”
 “내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화산파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협박용 서신이군.”
 성은은 봉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서신에 적힌 것은 몇 자 안 되는 단순한 내용이었습니다.”
 “네가 삼 년간 어떤 인간과 붙어먹었는지 화끈하게 적어놨겠지. 순진한 널 꼬드겨 뒷골목 생활을 하게 만든 삼류 인간의 이름 고봉팔을 말이지. 결국 화산파는 너의 경력에 흠집이 되는 나를 제거하려고 할 것이고, 무림맹은 계약을 핑계 삼아 날 보호한다. 그리고 난 화산파의 검에 죽지 않기 위해 무림맹에 목숨 걸고 협조를 하게 될 것이고.”
 성은은 자신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상황을 쭉 읊어버리자 머리를 긁적였다.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무림맹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성운은 봉팔의 단호한 말에 당연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소장님.”
 “왜?”
 “저희 사부님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이신지?”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하지 않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소장님 이름이 적힌 서신을 보여 주시더니 사실이냐고 물으시더군요.”
 “결국 이실직고했군.”
 “휴! 거기서 더 버틸 방법이 있기나 합니까?”
 “왜? 의리 빼면 시체라며!”
 “······.”
 성은은 봉팔의 툭 쏘는 말에 입이 턱하니 붙어버렸다.
 “염소 영감이 한 말이나 늘어놔.”
 성은은 자신의 사부이자, 화산파 제일의 배분을 가진 임천벽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염소 영감이라고 호칭하자 눈이 동그래졌다.
 “소장님!”
 “젠장! 그래, 네 사부라 이거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염소 영감이 날 개자식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어르신이라고 불러줄 의무는 없다고 본다.”
 성은은 봉팔의 대답에 표정이 심각하게 뭉개졌다.
 ‘흥! 염소 영감이 나와 어떤 사이인지 직접 떠벌리기엔 머리깨나 아팠겠지.’
 “나와 네 사부 사이의 관계는 제삼자가 끼어들 만한 것이 아니니, 더 이상 관심 두지 말고 말이나 전해.”
 “휴··· 약속은 약속이랍니다. 먼저 깨는 쪽이 지는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거봐라. 네 사부도 입 다물라잖아.”
 “······.”
 “훗날 기회가 된다면 내가 아닌 네 사부의 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니 궁금해도 참아. 사실 나는 말해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네 사부가 곤란해질 거야. 그래도 상관없다면 무림맹 담벼락에 큼지막하게 써 붙여 주마.”
 “큭!”
 “그리고 더 있을 텐데?”
 “저보고 소장님과 다시 재계약하랍니다.”
 ‘염소 영감, 그렇게는 안 되지. 성은이가 당신 제자인 줄 모를 때야 맘 편히 데리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싫다.”
 “네?”
 “재계약 싫다고.”
 “왜요!”
 성은은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봉팔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어디서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먼지 나게 맞아볼래?”
 성은은 봉팔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지자 후다닥 물러섰다. 다른 땐 몰라도 눈썹을 팔자로 휘며 이야기할 땐 진짜로 먼지 나게 팰 인간이었다. 조심해야 한다.
 “이유라도······.”
 “귀찮아.”
 “네?”
 “네 사부에게 가서 내 말도 좀 전해라. 혹 떼려고 머리 굴리지 말라고. 만약 귀찮게 하면 매화(梅花)가 향기를 잃을 것이라고 전해.”
 “설마 그 혹이··· 접니까?”
 “알면서 뭐 하러 물어보냐? 그리고 무림맹과의 계약은 개인적으로 처리할 생각이니 끼어들 생각 말고. 나 간다.”
 봉팔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관사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크악! 도대체 사부와 무슨 관계인 거야!”
 성은은 뜻도 모르는 말들을 전하러 다니게 되자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사부에게 봉팔의 말을 전하기 위해 교관들의 숙소로 이동하던 성은은 사부의 말 이외에도 봉팔에게 꼭 전해줘야 하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음을 기억해냈다.
 “아! 그걸 잊어먹다니!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 하시겠지.”
 
 ***
 
 “빌어먹을 영감 같으니라고! 물에서 건져 놓았더니 아주 봇짐 내놓으라 이거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무림맹 놈들, 일 맡겨 놓고 뒤통수 깐다 이거지. 어떤 놈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확인만 되어봐라.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봉팔은 혼잣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하나씩 머릿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급에 다가갈 수 있는 인원들부터 파악해야겠군. 수련생 수가 이백 사 명에 교관들이 열두 명, 그리고 비급이 보관된 서고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열 명, 서고에 출입이 허가된 인간들이 단주들과 부단주, 그리고 총사와 맹주까지군. 큭! 기본만 따져도 이백삼십팔 명이나 되잖아! 이거 보통 일이 아닌걸.”
 봉팔은 생각보다 인원수가 너무 많자 두통이 몰려왔다. 한 명씩 불러서 취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쥐새끼처럼 한 놈 한 놈 확인해나가야 하니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금 일천 냥에 추가 지급 조건이라면 해볼 만한 일이야. 암, 그렇고말고. 젊어서 벌어야지, 늙어서까지 이 짓하기엔 좀 그렇잖아.”
 꼬르르륵.
 “이런! 맹 서기 때문에 어디서 밥 먹는지도 확인을 못했더니 배속이 말이 아니군.”
 봉팔은 자신이 벌써 두 끼나 굶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밥! 밥부터 먹자.”
 봉팔은 한동안 코를 킁킁하더니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군.”
 봉팔은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단층에 기다란 건물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무림학관의 수련생들이 단체로 식사를 하는 곳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아직 저녁 식사 전인지 음식 냄새만 진하게 풍길 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온 놈이 확실하게 먹는 거지.”
 봉팔은 느긋한 표정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종(鐘)이 울리지 않았는데 어딜 들어오는 것이냐!”
 한참 배식 준비를 하던 중년인 하나가 잔뜩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아! 죄송합니다. 학관에 들어온 지 하루도 되지 않은 데다, 어디서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이가 없어서 미처 규칙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꺼져라!”
 아이 머리만 한 국자를 들고 국을 푸던 중년인은 신경질적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런데 저기 혼자서 밥 먹는 수련생은 누굽니까? 규칙을 지켜야 한다면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저 수련생은 규칙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왜요?”
 봉팔은 중년인에게 얼굴을 쓱 들이밀며 질문을 던졌다.
 “이놈이!”
 중년인은 봉팔이 얼굴을 들이밀자 국자를 쳐들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몇 걸음 물러서버린 봉팔이다.
 “이유라도 알아야 수긍하고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중년인의 거친 말투에 심기가 불편해진 봉팔은 만약 이유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면 국통을 엎어버릴 심산이었다.
 신입생으로 입교해 수련생들과 어울릴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봉팔은 청룡급이라는 어이없는 평가를 받는 바람에 수련생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본래 계획을 상당 부분 수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국통을 엎는다면 미친놈 취급 받겠지만, 부당한 이유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수련생들의 관심과 호감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다.
 중년인은 봉팔이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맹의 1급 무사였던 중년인은 근무 중에 음주를 했다는 이유로 한 달간 식당 근무를 해야만 했다. 동료들은 정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때 자신은 국이나 퍼야 하는 상황이 되자 속이 부글거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놈이 고집을 피우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사고를 쳤다간 한 달간 식당 근무를 한 후, 다시 1급 무사로 돌아갈 자신의 미래가 심각하게 꼬일 수도 있었다.
 평 무사에서 10년을 넘게 고생해 1급 무사가 된 자신과는 달리, 무림학관의 어린놈들은 잘난 집안과 사문 덕분에 고급 무공은 물론이고, 무림의 명사들에게 개인적인 가르침까지 받는 놈들이었다.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엔 밥줄이 아니라 목숨 줄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중년인의 표정이 부르르 떨렸다.
 “저 수련생은 청룡급 패를 지녔다. 청룡급 수련생은 무림학관의 규칙에서 자유롭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빌어먹을! 내가 원한 대답은 그런 게 아니라고! 집안 잘나서 특급 대우 받는 그런 상황을 원했단 말이다!’
 국통을 엎어버릴 심산이었던 봉팔은 계획이 엇나가자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이제 알았으면 꺼져라!”
 ‘이렇게 된 것 밥이나 먹어야겠다. 그리고 성은이와 나, 그리고 다른 한 명이 청룡급이라고 했으니 이번 기회에 인사나 나누어야겠군.’
 봉팔은 중년인의 얼굴에 청룡패를 내밀었다.
 “청룡패!”
 “이제 밥 먹어도 되죠?”
 중년인은 봉팔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인상을 쓰고 있다가 순식간에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로 탈바꿈했다.
 “그러셨군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보통은 직접 배식을 받지만 소협께선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직접 최상급으로 준비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중년인의 두 눈이 소녀처럼 반짝였다. 중년인은 작은 실수 하나에도 호랑이 같은 어머니에 여우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새끼들이 자칫하면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음을 상기하며 연륜 있는 점소이처럼 봉팔에게 허리를 숙였다.
 ‘오! 이 아저씨야말로 강약강의 묘리를 제대로 아는 분이 아닌가!’
 한 달 동안 무림학관 급식을 책임지고 있는 무림맹 1급 무사, 천호통은 봉팔의 머릿속에 깊숙이 새겨졌다.
 봉팔은 거드름 피우다가 굶어 죽는 명문가의 가식자들보다 있는 그대로 삶을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이 좋았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보통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전형적인 비호감형 인간.
 ‘얼마나 인간적이냔 말이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1급 무사 천호통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끝장이구나. 하긴 청룡급에게 꺼지라고 했으니.’
 천호통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직급과 이름을 밝혔다. 이럴 때 망설이면 다른 이들에까지 불똥이 튄다.
 “무림맹 일급 무사, 천호통이라고 합니다.”
 “오! 천 아저씨였군요.”
 “네?”
 “아저씨,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아저씨가 너무 맘에 듭니다!”
 “소··· 협, 말씀을 낮추십시오. 저는 맹의 무사일 뿐입니다.”
 천호통은 누군가 듣지 않을까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무림이라는 세상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평소 땐 말 한마디 섞기 어려운 힘 있는 인간과 교류를 맺게 되었으니 끗발 잡았다고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무림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무림의 인간들은 코흘리개 아이에게도 항렬이 높으면 대뜸 고개를 숙이고 행동을 조심한다. 항렬이 같아도 힘 센 놈이 어른이고, 약한 놈은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야 하는 곳이 무림이다. 종종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겠다며 헛소리 지껄이는 놈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결국 며칠 못 버티고 들개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뿐이다. 죽어버리면 명예고 자존심이고 다 필요 없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은 무슨 세가니, 무슨 문파니 하는 곳에서 정식으로 무공을 수련한 대단한 인간도 아니다. 입에 풀칠이나 해보겠다고 낭인으로 나섰다가 단칼에 죽을 뻔했고, 안전하게 일해보겠다고 무림맹에 들어왔다가 3급 무사에서 지금의 위치에 오를 때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무림맹 1급 무사라고 하면 남들은 대단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이 세계를 모르는 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무림맹엔 여러 가지 서열이 있다. 일단 칼 한 자루 쥐고 맹에 가입하면 수련 무사의 직위가 주어진다. 죽어라 뛰어다녀도 한 달에 은자 반냥이다. 은자 반냥이면 두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금액이다. 그리고 수련 무사라고 해서 위험한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은 지금 당장 버려라. 무림에 떠돌아다니는 낭인들보다 쉽게 죽어나가는 것이 수련 무사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맹에서 딱히 투자된 게 아직 없는 인간들이니, 적당히 윗선에서 협작한 만큼 숫자 싸움에 끌려 다니고 적당히 소모되어버린다.
 그렇게 살아남은 수련 무사들은 겨우 3급 무사가 된다. 3급 무사가 되면 일단 쓰임새에 인정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물론 맹에선 가장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는 서열이긴 하지만, 맹의 정식 무사인 만큼 말도 안 되는 사건에 허무하게 소모품 취급을 받진 않는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사건이라고 했다. 수련 무사들이나 끌려 다니는 그런 일 말이다.
 맹의 정식 무사인 3급 무사는 말 되는 일에 끌려 다닌다. 일종의 명분 싸움 말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봤자, 윗대가리들 땅따먹기 싸움이나 이권 다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다 운 좋게 살아남으면 2급 무사가 되고, 역시 운 좋은 몇몇이 1급 무사에 오른다.
 캬! 1급 무사! 듣기도 좋고 급여도 좋다. 수련 무사가 은자 반냥에 목숨을 걸고 팔려 다닌다면, 1급 무사는 한 달 급여가 무려 은자 10냥이나 된다. 은자 10냥이면 우리 집 식구들 배 불리 먹고도 4냥은 남는다. 돈을 모을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난 그런 1급 무사가 된 지 올해로 3년째다. 1급 무사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높은 서열을 가지고 있고, 능력도 어느 정도 인정받은 고급 인력이란 말이다.
 하지만 내 밑으로 깔려 있는 서열보다 위에 쌓인 서열이 곱절은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맹의 무사는 무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돈 받고 몸으로 때우는 그런 관계일 뿐이다.
 이쯤에서 왜 저 소협과 교류를 맺는 것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지 이야기하겠다. 우리들은 맹의 옷을 입고 도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러니까 은퇴가 가능한 부류다.
 하지만 명문 세가나 명문 정파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무림인이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가 없다. 죽어서도 대대로 무림인이라고 불린다고 해야 맞겠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편을 가르고, 상대의 목숨을 순식간에 날려 버린다. 결국 그런 무시무시한 인간들과 친분을 맺게 되면 끝이 뻔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편저편으로 분류가 되고 파벌 싸움이나 문파, 세가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본보기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사이가 안 좋다고 하자. 그리고 틈만 나면 뭔가 핑계를 만들고 꼬투리를 잡아 명분을 만들어내고, 또 맞받아치며 싸움질을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남궁세가의 대공자나, 아니 대공자까지도 필요 없다. 그 아랫것들과 친분이 있다고 하자. 제갈세가에서는 남궁세가의 하인을 죽여서 시비를 거는 것보다 내 목숨을 단칼에 날리고 시비를 걸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결국 또 다른 소모품이라는 소리다. 맹의 소모품으로 남는다면 돈이라도 나오지만, 겨우 얼굴과 이름 좀 안 다고 해서 쳐 죽일 놈이 된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이런 내 생각이 너무 곡해된 억측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 바닥을 모르는 놈들이 ‘설마’라고 떠드는 것과 같다. 설마는 기필코 사람 잡는다. 지금 내 앞에 일반 문파의 문도도 아니고, 그냥 세가의 자제도 아닌, 무림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훗날 단주가 되거나 무림맹의 높은 자리에 올라, 결국엔 기득권 세력과 피터지게 쌈질이나 해대는 청룡급 인물이 친분을 나누자고 하니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애당초 봉팔이 무림학관의 수련생처럼 옷을 입고 다녔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허름한 옷차림만 보고 관내에서 일하는 녀석쯤으로 생각한 것이 이런 화를 불러온 것이다.
 “하하하! 왜 그러세요? 저 보기보단 화통한 놈입니다. 친하게 지내죠!”
 “맹의 무사는 맹의 업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제가 감히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보기보단 생각이 많으신 것 같네요. 머리 아픈 일 있으면 찾아오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힘써보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봉팔은 천호통의 표정에서 수많은 상념을 읽어냈다. 자신은 호의지만 상대에겐 비수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친하게 지내자고 더 떠들어봤자 천호통의 마음만 무겁게 할 뿐이다.
 “저쪽으로 가져다주세요. 같은 청룡급이라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이라 인사라도 나눠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봉팔은 천호통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신보다 먼저 식사 중인 청룡급 인물에게 다가갔다.
 ‘어라? 여자였어? 거참, 무림의 여인들은 성격이 너무 거칠던데······.’
 일반 무복을 입고 있었기에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가, 은근히 풍겨 오는 지분 냄새에 상대가 여자임을 확인하자 불편한 기색이 되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 역시 새롭게 등장한 청룡급 인물에 호기심이 들었는지 합석을 허락했다. 봉팔은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맞은편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헉!”
 “아··· 악적?”
 ‘크악! 이게 무슨 조화냐! 이 여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봉팔은 지체 없이 자리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
 “네 이놈! 서라!”
 “내가 미쳤소!”
 때마침 사부에게 다녀오던 성은이 식당 입구로 들어섰다.
 “소장님?”
 “이 자식아! 너 이미 알고 있었지?”
 “네?”
 “새끼 악적까지 한곳에 모였구나! 단칼에 목을 따주마!”
 “헉!”
 성은은 자신을 휙 지나치는 봉팔에게 또다시 사부의 말을 전하려다가, 식당 안에 울려 퍼지는 한기 서린 목소리를 듣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봉팔의 뒤를 따랐다.
 “서라!”
 “가까이 오지 마라! 냄새난단 말이다!”
 “소··· 소장님!”
 죽어라 경공을 발휘하던 성은은 봉팔의 대답에 발이 꼬일 뻔했다.
 “주··· 죽여 버릴 거야!”
 남궁세가의 첫째이자 무림삼미 중 한 명이며, 진미검녀란 이름으로 위명이 쟁쟁한 남궁소소의 얼굴이 봉팔의 말을 듣는 순간 핏기가 사라졌다.
 남궁소소의 발끝에서 기(氣)의 흐름이 요동치더니 순식간에 봉팔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남궁소소 20년 인생사에 최초이자 최고의 경공이 펼쳐졌다.
 
 
 세상은 넓지만, 인간관계는 좁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고봉팔 어록-
 
 
 4장 협상의 대가, 또는 꼼수의 대가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더군.
 그런데 이거 진짜 가능한 거야?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천 냥이나 되는 돈을 포기하겠냐고.
 뭐? 백 냥만 주면 천 냥을 안 갚게 해줄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말이 더 믿음이 안 간다.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백 냥이 아니라 오백 냥을 주지.
 
 
 무림맹은 2만 평이 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간혹 구파일방과 소수 문파들이 파견한 인원들이 생활하는 공간일 뿐인데 너무 낭비가 아니냐는 말도 하곤 하지만, 그건 정말 단순한 인간들의 생각이다.
 1백 명이 생활할 수 있는 전각이 있다고 하자. 구파일방과 다른 문파들이 파견한 인원은 모두 합쳐 봐야 2백 명 남짓이다. 규모와 숫자 놀음으로 따진다면 그런 전각 두 채면 그 인원을 수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숫자가 아닌, 각 문파나 무림맹의 업무를 분할하는 성격에 따라 건물이 따로 배정된다는 것이다.
 구파일방은 서로 간에 자신이 잘났다고 고개를 쳐드는 곳이다. 1명이 파견되었든, 2명이 파견되었든 일단 전각은 각 문파에 하나씩 지정된다. 그리고 그 인원이 먹고 싸는 공간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각 단의 건물과 맹의 무사들이 생활하는 공간까지 생각한다면 전각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거기다 무림맹은 관청의 행정 업무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틈만 나면 도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하는 무림 단체이다. 각 전각에 딸린 수련장의 공간까지 포함하고 나면 그 규모는 더욱 비대해진다. 그리고 신진 고수를 키워내기 위해 부가적으로 세워진 기타 건물들과 수련장까지 포함하고 나면 결국 2만 평이란 규모도 그리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림맹은 외성과 내성, 그리고 부성(附成)으로 나누어져 있다. 외성은 맹의 무사들과 각 문파의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내성은 무림맹의 행정을 관할하는 곳과 맹의 수뇌부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그리고 부성은 말 그대로 딸린 공간이다. 외성과 내성이 무림맹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부성은 맹과는 분할된 특수한 공간을 뜻한다.
 그렇다. 무림학관이 위치한 곳이 바로 그 부성이다. 외성이나 내성은 맹의 무사들과 각파의 고수들이 방어를 담당한다. 하지만 무림학관은 따로 무사가 파견되거나 문파의 고수들이 나서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 기관이라는 특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무림학관은 수련생들과 교관들, 그리고 학관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몇몇의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서고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은 수련생들과 교관이 모여 있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빈공간이나 다름없다.
 저녁 식사를 위한 종이 울릴 때까지 아직도 반 시진이나 여유가 있는 지금은 관사와 관사에 딸린 소규모 수련장을 제외하곤 곳곳이 텅 비어 있었다.
 
 ‘젠장! 성은이를 제외하곤 내가 무공을 안다는 것을 철저하게 감춰왔는데, 그나마 주변에 맹의 간자들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봉팔은 어떤 위험 속에서도 무력을 먼저 내세우기보다는 입으로 상황을 헤쳐 왔다.
 하지만 유일하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남궁소소였다. 사실 대화가 불필요한 상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남궁소소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뒤로 자신만 보면 검을 휘둘러 왔다. 설득을 하려면 일단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궁소소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서라! 악적! 죽어라!’ 단 세 마디였다. 한마디로 대화에 필요한 언어능력이 현격이 떨어지는 인간이 남궁소소였다.
 “서라! 서지 않는다면 기필코 네 목을 쳐 버릴 것이다!”
 “내가 미쳤냐? 선다고 해서 살려 줄 것도 아니잖아!”
 “이익! 선다면 곱게 죽여주겠다!”
 “이러나저러나 죽인다는 말이잖아. 너나 그만 따라와!”
 “감히 그동안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 오다니! 더욱 용서할 수 없다!”
 남궁소소는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던 고봉팔이 순식간에 다시 거리를 늘려 버리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뒷골목 건달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경공을 지니고 있자 자존심까지 상한 것이다.
 “소장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미친년 칼 들고 설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정 답답하면 네가 가서 한 방 날려 주든지.”
 봉팔의 뒤에 바짝 붙어서 도망을 치던 성은은 매번 이렇게 도망만 다니는 상황이 답답했다.
 “그러게 왜 저런 여자를 건드린 겁니까!”
 “야, 이놈아! 누가 들으면 내가 저년 속살이라도 들여다본 줄 알겠다!”
 “캬아아아아!”
 봉팔과 성은의 대화를 듣던 남궁소소가 혈압이 솟구쳐 오르는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버렸다.
 봉팔은 비어 있는 전각들을 빙글빙글 돌며 남궁소소를 따돌리고는 있지만,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남궁소소 때문에 자칫하다간 일이 복잡해질 것 같자 부지런히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서!”
 “그래, 섰다!”
 봉팔이 남궁소소의 외침에 우뚝 서버렸다.
 “으억!”
 “꺄악!”
 봉팔이 갑자기 서버리니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던 성은과 남궁소소는 그만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바닥에 뒹굴었다. 봉팔과 충돌을 피하려다가 몸의 기운이 역류했기 때문이다.
 “쿨럭쿨럭! 소장님!”
 “으··· 악적!”
 “성은이 넌 잠시 조용히 해라. 네 말대로 이대로는 못살겠다.”
 봉팔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검을 드는 남궁소소를 보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묻자.”
 “뭐냐! 악적!”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건데?”
 “흥! 비천하게 뒷골목을 전전하는 놈이 나를 능멸했지 않느냐!”
 “능멸?”
 봉팔은 남궁소소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웃기지 마. 오히려 비천하게나마 먹고사는 나를 능멸했잖아.”
 “헛소리!”
 ‘오냐, 오늘은 대화가 좀 되는군. 어디 한번 당해봐라.’
 평소라면 이를 악다물고 검을 휘둘렀던 남궁소소였지만, 갑작스런 반전에 말문이 열린 것 같았다.
 “당신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이 무엇이오?”
 남궁소소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넌 먹고 자고 싸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냐고! 설마 네가 먹고 입는 모든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라고 알진 않을 것 아니냐!”
 “난 네놈과 다르다. 그런 것들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느니,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것이 무인의 본분이다.”
 “그래? 그럼 나는? 당신이 다르다고 말하는 나는?”
 “무슨 소리를 하자는 것이냐!”
 “내 본분은 어떻게든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거든. 당신은 검을 쓰는 게 본분이라고 말했으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겠군.”
 “말도 안 되는 비교다!”
 “왜 안 되는데? 당신은 먹고 입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어, 단지 검을 휘두르지. 아니,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먹고 입는 데 전혀 문제가 없어. 아주 부자로 태어났기 때문이지.”
 봉팔의 눈이 남궁소소의 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난 거지로 태어났고,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아니 일을 해도 돈이나 먹을 것을 받지 못하면 바로 굶어 죽어야 해. 당신은 오늘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죽거나 하진 않아.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했지? 하루하루가 먹고사는 게 중요한 목표인 나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떼먹었잖아. 그것도 영광으로 알라면서 말이야. 난 황제의 칭찬보다 오늘의 만두 하나가 소중한 사람이야.”
 “······.”
 남궁소소는 봉팔의 말에 입을 악다물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서 난 복수를 한 것뿐이야.”
 “그냥 돈을 달라고 하면 줄 수도 있었어!”
 “웃기는 소리.”
 “사실 하필이면 그날 돈이 떨어져서 그랬을 뿐이야!”
 남궁소소는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솔직해야지. 무림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큰 의미를 둔다고 하더군. 당신 정도의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고 말이야. 그런데 솔직하지 못했지. 오히려 협박을 하며 나의 정당한 요구를 묵인해버렸어.”
 “아니야!”
 “그럼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건 네가! 날, 날······.”
 봉팔은 남궁소소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다른 인간들 같았으면 동네방네, 아니 대륙 전체에 소문을 내고 다녔을 거야. 하지만 당신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어.”
 “하지만 넌 그 사실을 알고 있잖아! 저기 작은 악적도 알고 있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어!”
 남궁소소의 말에 봉팔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호! 그래서 살인멸구를 택한 것이군,”
 “꼭 살인멸구를 하려던 것은 아니야. 단지······.”
 “약속하지. 당신이 먼저 실수를 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말을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그만 돌아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가진 직업은 신용이 생명이거든. 만약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면 이미 목이 날아갔을 거야.”
 남궁소소는 봉팔의 말에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봉팔의 말대로만 된다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고, 더 이상 그 오물 사건이 세상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할 일도 없었다.
 “좋아. 하지만 한마디라도 실수를 하는 날엔!”
 “믿어.”
 봉팔은 자신의 왼손을 상의에 쓱쓱 몇 번 문지르더니 남궁소소를 향해 내밀었다.
 “뭐냐?”
 “내 왼손을 걸고 약속하지. 이쪽이 내 심장에 가까우니까.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내 왼손과 하나뿐인 심장을 잃을 것이다.”
 두근!
 남궁소소는 봉팔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막살아도 난 일구이언하지 않아. 난 사나이다!”
 두근!
 ‘역시 고 소장님! 여자 후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어. 저런 거짓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늘어놓다니!’
 성은은 매번 감탄하면서도 또다시 감탄하게 되는 고봉팔의 뻔뻔함에 치를 떨기보다 환호를 질렀다.
 “좋아. 네 왼손과 심장, 내가 맡아주겠어.”
 “그리고 나도 부탁이 하나 있어.”
 “뭐지?”
 “내가 무공을 아는 건 비밀로 해줘. 네가 틈만 나면 검을 휘둘렀던 통에 나도 모르게 무조건 반사를 일으켰거든.”
 “아! 어떻게 당신이 무림학관에 있는 거지? 그것도 청룡패를 지니고!”
 남궁소소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듯 깜짝 놀란 목소리가 되었다.
 “일이야. 이번 고객은 그 정도 신분은 위장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누가?”
 “고객 정보는 비밀이다. 네가 나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나도 너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
 봉팔은 옷을 툭툭 털더니 성은에게 손짓을 했다.
 “가자. 밥 먹어야지.”
 “네, 소장님.”
 “그놈의 소장님 소리 좀 그만 해라. 여긴 사무실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넌 잘렸어.”
 “험험! 일단 식사하러 가시죠. 사부님의 또 다른 전갈이 있습니다.”
 봉팔은 남궁소소를 바라보며 씩 웃어주고선 성은과 식당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뭐야, 저 자식! 이제 보니 온통 반말투성이잖아!”
 한동안 씩씩거리던 남궁소소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심장이 왜 이러지······.”
 
 ***
 
 “소장님.”
 “왜?”
 “존경합니다.”
 ‘나도 안다. 존경스럽겠지.’
 “남궁소소를 말 몇 마디로 눌러버리다니. 진작 그렇게 하시지, 왜 그동안 도망을 다니신 겁니까?”
 ‘이놈아, 나도 진작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왜 도망을 다녔겠냐. 혹시나 하고 황가 놈에게 구입해놓은 미약 덕분이다.’
 “맨 입으로 가르쳐 달라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성은은 가슴까지 팡팡 쳐 대며 호언장담을 했다.
 성은은 봉팔과 지내는 동안 남들에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쉽게 해치울 때마다 그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아무리 연구해봐도 자신의 능력으론 성공 가능성이 굉장히 낮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기술들은 절대로 사문에선 가르쳐 줄 수 없는 분야이기도 했다.
 “그럼 네 사부가 전달하라고 했다는 그 말.”
 활짝 웃는 얼굴로 싱글거리던 성은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그거 전달하지 마라.”
 “그건······.”
 “그러면 가르쳐 주지.”
 성은은 봉팔의 말을 듣는 순간 순식간에 골백번의 고민을 거듭했다. 사부를 배신하고 탐나는 기술을 전수받을 것인지, 아쉽지만 포기하고 사부의 말을 전할지 말이다.
 “휴! 그냥 가르쳐 주기 싫다고 하세요.”
 “왜? 가르쳐 준다니까?”
 “소장님은 언제나 죽느냐 사느냐로 결정을 강요하시는군요. 제가 졌습니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사부의 뜻을 거부했다간 결과가 뻔합니다. 후환이 두렵습니다.”
 “황금 천 냥을 포기하고 싶으냐. 이렇게 말했지?”
 “헉! 어떻게?”
 성은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넌 그래서 아직 멀었다는 거야. 네 사부가 나에게 걸고넘어질 게 그것밖에 더 있냐? 다른 걸로는 아무리 약점을 잡아봤자 자신이 손해고, 불가항력일 테니 당연히 내가 손해 보는 걸 걸고넘어졌겠지. 결국 넌 네 사부의 말도 전하지 못했고, 독한 년을 꼬드기는 법도 알아내지 못했다.”
 ‘염소 영감의 수법이야 뻔하지. 과거를 들추어봤자 결국 자신만 손해니 입을 열었을 리 없을 테고. 그렇다면 결국 지금 영업을 방해해서 날 불편하게 만드는 수 외엔 길이 없었겠지.’
 “전 정말 아직도 멀었군요. 언제쯤 소장님의 능력을 배울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그래도 염소 영감이 오랜만에 제대로 짚었으니. 화산 꼭대기에서 방해하겠다고 했다면 콧방귀를 날렸겠지만, 하필이면 검술 교관이라니.”
 “그러면?”
 “그래, 혹 떼려다 혹 붙인 건 나인 것 같다. 일단 조건이나 들어보자.”
 “하하하! 별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말해봐. 어차피 너에게 조건이 있을 린 없고, 염소 영감이 뭔가 필요한 것 같으니.”
 “특별한 건 아니고요. 한 일 년 더 데리고 있으면서 소장님 기술 좀 전수해주랍니다.”
 “뭐야?”
 “하하하! 저도 의외였지 뭡니까. 보통 이런 쪽 기술이라면 노발대발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련을 허락하시니. 하하하하하!”
 ‘이놈의 영감이 무보수로 일 시킨 것도 모자라서 이젠 밑천을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네. 으이그! 그때 그 영감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과거의 한 사건을 떠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변한 봉팔이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네가 재량껏 배워라. 딱히 설명은 없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한 번만 그냥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뭘?”
 “독한 년 설득하기.”
 성은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을 냈다.
 “마가(馬家)촌 알지?”
 “네!”
 “거기에 돌팔이 의원 기억해?”
 “아! 황 의원 말이군요.”
 “그래, 그 영감에게 돈 좀 쥐어줘. 그럼 네가 원하는 걸 만들어줄 거야. 가격은 비싸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내가 알기론 중원 땅에서 황가 놈보다 약 잘 쓰는 놈은 없으니까.”
 “미약!”
 “그래, 이거다.”
 봉팔은 소매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자기병을 빼 던졌다.
 “그럼?”
 “그래, 그거 적당히 풀고 일단 대화로 풀어가면 돼. 대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인정하게끔 만들어야지 효과가 있다. 그냥 무턱대고 그거 뿌려 댄다고 상대방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거든. 약 자체는 거부감이나 적대감을 약간 줄여 주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어.”
 “결국 미약은 조건일 뿐이고, 본 기술은 언변이군요.”
 “너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늘었으니, 남궁소소처럼 흉기 들고 설치는 경우를 제외하곤 쓸 만할 거야.”
 “감사합니다.”
 “은자 스무 냥!”
 “공짜 아니었습니까?”
 “싫으면 말든가.”
 짤그락.
 다시 약병을 채가려는 순간, 봉팔의 손바닥에 은자 주머니가 떨어져 내렸다.
 “거래 성립!”
 ‘그래, 거래 성립이다. 그거 한 병에 은자 닷 냥이니 짭짤한 거래였다.’
 땡땡땡땡!
 “밥 먹으란다. 빨리 가자.”
 “네!”
 “아! 그리고 여기선 소장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그냥 형님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물론입니다. 예전부터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봉팔은 종종 아이같이 행동하는 성은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귀여운 녀석.”
 봉팔이 성은의 머리칼을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하하하! 제가 좀 귀엽긴 하죠.”
 식당 건물에 가까워지자 각 관사에서 몰려든 수련생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기다려!”
 식당으로 들어가려던 봉팔과 성은은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남궁소소입니다.”
 “나도 알아.”
 남궁소소는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자 곧바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게 있어서 왔다.”
 봉팔은 말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나는 청룡패를 소지한 이상, 앞으로도 계속해서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떤 경로로 청룡패를 소지했는지는 궁금치 않다. 하지만 청룡패를 지녔다고 해서 네가 말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앞으로 날 볼 때는 깍듯이 대해야 한다.”
 봉팔은 남궁소소의 말에 껄껄껄 웃어버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네가 무슨 일을 맡았는지는 모르지만, 의뢰를 실패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빌어먹을! 이게 어디서 뭔 소리를 들은 거야!’
 봉팔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확인했지만, 기운을 감추고 있는지 염소 영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형님, 남궁소소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꿍꿍이는 무슨 꿍꿍이. 네 사부가 끝끝내 사고를 치는구나!
 -네?
 봉팔은 성은의 전음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정확히 원하는 게 뭐야?”
 “바로 그런 말투! 네가 무슨 권리로 나에게 하대를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아무리 밝히지 못한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주길 바란다.”
 봉팔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남궁소소의 모습에 길게 한숨이 나왔다. 분명히 염소 영감이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남궁 소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수련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자 시선을 끌기 싫었던 봉팔은 남궁소소를 향해 정중히 사과를 해버렸다.
 ‘염소 영감, 나중에 두고 봅시다.’
 남궁소소는 봉팔이 별다른 소리 없이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오히려 당황스런 표정이 되었다.
 “더 이상 용무가 없으시다면 본인은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만······.”
 “그··· 그렇게 하세요.”
 남궁소소 역시 사람들이 모여들자 괄괄한 성격을 감추며 다소곳하게 맞대응했다.
 ‘이런 여우 같으니라고.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고, 여자의 내숭은 필요악이라고 한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곁에서 지켜보던 성은 역시 남궁소소의 급격한 행동 변화에 잠시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봉팔과 성은 두 사람은 남궁소소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방금 전까지 결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도도하고 건방지고 입 거칠고 성격까지 엉망인 여자가 두 사람이 아는 남궁소소의 진면목이었다.
 -마녀가 선녀가 되기도 하는군요.
 성은의 전음이 봉팔의 귓전에 슬그머니 스며들었다.
 “그럼 이만.”
 봉팔은 남궁소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식당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남궁소소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아이야, 앞으로도 그렇게 행동하거라. 그리고 꼭 잊지 말거라. 저놈의 눈썹이 팔자를 그리면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내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조만간 선물을 하나 주겠다. 그리고 네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 졸이지 말거라. 껄껄껄!
 목소리는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본래 남궁소소는 봉팔과 협상을 마무리 지은 뒤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때문에 다시 이곳까지 달려왔고, 보기 싫은 인간과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눠야 했다.
 봉팔이 순순히 응하지 않더라도 절대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은둔인의 말에 어느 정도 무시당할 걸 각오했었지만, 은둔인의 말대로 의뢰 이야기를 꺼내자 별다른 사건도 없이 자신의 요청은 단숨에 해결되어버렸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자신의 비밀을 안다는 것에 정신이 혼미해졌었지만, 분위기를 보니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그나마 안심을 한 남궁소소였다.
 “그런데 무슨 의뢰기에 두말없이 내 말을 따라준 걸까?”
 남궁소소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자신의 비밀을 안다는 것보다 언제부터인지 봉팔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들어왔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일단 부딪쳐 보면 알겠지.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거니까.”
 처소로 돌아가려던 남궁소소는 못 다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
 
 천호통은 청룡패의 남녀가 우당탕 소란을 피우며 사라져 주자 내심 반가운 심정이 되었다.
 “휴! 식당 근무 첫날부터 인생 꼬이나 싶었는데, 알아서들 피해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구나. 아무래도 요즘은 길보다 흉이 많은 것 같으니 빨리 배식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어제는 반주 한잔 정도는 모르는 듯 눈감아주던 규율단이 신경질적으로 나오더니, 오늘은 청룡패 소지자에게 확실히 찍힐 뻔했다. 안 좋은 일은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일정 기간 동안은 그 파급 효과가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천호통이다. 또 다른 사건이 터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부지런히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천호통은 주방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봐, 소집 종 울리고 배식 준비하자고.”
 “네, 천 무사님.”
 주방에서 물건 등을 나르며 부지런히 움직이던 10여 명이 천호통의 부름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인근 촌락의 사람들이었는데, 맹 내의 무사들에게 적당한 뇌물을 주어 일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겐 천호통처럼 높은 직급의 무사는 두려움 반, 부러움 반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심사가 불편해 보이는 천호통에게 혹시나 꼬투리가 잡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한 달 동안 식구들이 먹고살 양식을 팔아 힘들게 잡은 일자리였다. 잡일을 하는 일꾼이긴 했지만, 보름만 지나면 그 돈은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꾸준히 매달 그 정도의 수입이 보장되니, 이들에겐 놓쳐서는 안 되는 일자리였다. 거기다 식당에서 남은 음식은 자신들이 챙겨 갈 수 있으니 다른 곳에서 일하는 일꾼들보다 더욱 좋은 보직이었다.
 천호통의 손짓에 한 사람이 종을 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나머지 사람들은 주방에 준비된 수많은 음식들을 식당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천호통은 식당 입구 쪽으로 걸어가 잠시 후면 들이닥칠 수련생들을 기다렸다. 1. 2학년은 아직 어린 편이라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3학년들은 은근히 잔소리하길 좋아했다. 천호통에겐 듣기 싫은 소리였지만 그럴수록 잘 굽실거려야 했다.
 “또 보는군요.”
 움찔.
 천호통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늘은 더 이상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청룡패의 주인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일꾼들에겐 호랑이 같은 눈빛을 뿌려 대던 천호통이었지만, 청룡패 앞에선 해맑은 사슴 눈이 되었다.
 “아, 다시 오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급히 가시는 바람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천호통은 봉팔과 성은을 안쪽 편안한 좌석으로 안내했다. 보통 수련생들과는 신분이 다르니 나름대로 조용한 자리를 잡아주었다.
 “이쪽입니다. 다른 곳보다 조용하고 시선도 끌지 않는 곳이죠.”
 천호통은 반 시진 전의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부지런을 떨었다.
 “오! 그렇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소··· 소협, 제발 말씀 좀······. 그러다 제명에 못 죽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천 무사.”
 “헤헤헤! 감사합니다. 식당에서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식당에 근무하는 동안엔 최대한으로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첫날이니 배식을 받으러 나가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따로 준비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크! 천호통 무사, 당신의 처절한 생존 욕구에 눈물이 납니다. 나 때문에 피 볼 일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고맙소, 천 무사.”
 천호통은 봉팔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급히 식당 입구로 달려갔다. 잠시 후, 천호통의 지시를 받은 일꾼 한 명이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가져다놓았다.
 “형님, 이번엔 어떻게 손을 쓰신 겁니까? 아무리 청룡패라곤 하지만 완전히 귀빈 대접이군요.”
 성은은 차려진 음식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연은 단순하지만 감춰진 사연은 복잡하구나. 음식은 화려하지만 마음은 편치 못하다.”
 신나서 젓가락을 잡던 성은은 봉팔의 푸념 서린 한마디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렇다고 차려진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더욱 편치 못한 일이지. 먹자.”
 봉팔과 성은은 의도치 않은 화려한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형님, 남궁소소가 또 이쪽으로 오는데요.
 -그냥 무시해.
 봉팔은 무시하라고 전음을 날렸지만 성은은 무시하기가 난감했다. 남궁소소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직선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
 성은은 남궁소소의 물음에 봉팔의 시선을 살폈다.
 “아직 수련생들이 오지 않아 자리가 이리 많은데, 꼭 이 자리에 앉으셔야 하겠습니까?”
 봉팔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거부 의사를 보였다.
 “자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곳만큼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남궁소소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주인이 정해진 자리도 아니니 앉으시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남궁소소는 불편해하는 봉팔의 표정은 관심도 없다는 듯 말이 끝나자 바로 착석해버렸다.
 “차별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군요. 차려진 음식을 보니 제가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하하하! 남궁 소저도 함께 드시지요. 사실 둘이 먹기엔 양이 많아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성은이 봉팔과 남궁소소의 불편한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고마워요.”
 남궁소소는 당연하다는 듯 젓가락을 들더니 차려진 음식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
 세 사람은 한동안 대화가 끊긴 채 음식을 먹는 데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때, 관사에 있던 수련생들이 몰려들었는지 식당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하나 둘 들려왔다.
 “성은아.”
 “네, 형님.”
 “청룡패 말이다.”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던 남궁소소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네, 형님.”
 “청룡패에 관련해서 자세히 설명 좀 해다오. 원래 계획은 일 학년으로 들어오는 게 목적이었는데, 심사를 담당하던 교관들이 한동안 정상적이지 못한 정신 상태에 처하는 바람에 일이 좀 꼬였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무림학관은 맹에서 운영하긴 하지만 거의 독립적인 기관입니다.”
 “그건 알아. 내가 궁금한 건 청룡패야. 중간 중간 궁금한 건 내가 물어볼 테니 본론으로 들어가.”
 성은은 전반적인 내용을 주르르 풀어내려다가 봉팔이 말을 잘라버리자 헛기침을 했다.
 “험험! 네, 청룡패 말씀이군요.”
 “그래.”
 “일단 청룡패는 두 가지 경로로 입수가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학관의 수련을 거쳐 삼 학년에 청룡 인증을 받는 방법입니다. 일종의 졸업 시험인데 그때 청룡패, 현무패, 봉황패의 소지자가 결정되죠.”
 “졸업하면 그 세 가지 패 중에 하나를 얻는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청룡패는 매번 많이 나와 봐야 한두 명입니다. 현무패와 봉황패도 청룡에 비해 조금 쉬울 뿐이지, 결코 가벼운 패는 아닙니다. 나머지는 그냥 학관 수료증만 받게 되죠.”
 봉팔은 성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패를 소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군.”
 “물론입니다. 그리고 각 패를 소지한 자들은 일 년 동안 맹과 학관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며, 청룡패는 무림 활동도 가능합니다. 청룡패 소지자들은 삼 년에 한 번씩 협객행이라는 명분으로 무림행을 나서지만, 사실은 사파에게 우리 쪽 인재의 힘을 과시하는 형태죠.”
 “그럼 협객행 나갔다가 죽어버리는 놈도 있겠군.”
 “물론입니다. 그 기간에 사파에서도 묵룡패의 소유자가 무림행을 시작하니까요. 간단히 말해 서로 적당한 장소에서 마주쳐 힘을 겨루는 방식입니다.”
 “그럼 현무나 봉황은 그냥 맹에서 한자리 꿰차고 일이나 하는 건가?”
 “아닙니다. 패를 소지하게 되면 일 년 뒤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맹에서 직위를 얻어 맹의 소속이 되거나, 패를 반납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두 가지가 있죠.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정도 되면 맹의 소속이 되기보단 사문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오히려 세가 약한 문파나 세가들이 맹에 남아 자신의 힘을 키우는 데 급급하죠.”
 “청룡패를 얻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성은은 남궁소소를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남궁 소저나 저, 또는 형님처럼 외부에서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학관에서 수련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종종 걸출한 인물들이 무림에 나타나는데, 그들을 포섭하는 또 다른 방법이죠. 보통 맹의 정보를 담당하는 비마단에서 추천을 하거나 무림에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명사의 추천으로 시험을 보게 됩니다. 물론 비마단과 명사의 추천이 있는 경우엔 이미 그 당사자가 나름대로 이름을 얻은 경우에 불과하죠. 그리고 사파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묵룡패의 주인을 찾습니다. 일종의 기재 쟁탈전이죠.”
 “고(高) 공자께서는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모르고 의뢰를 맡으셨나 보네요?”
 남궁소소는 우아한 미소를 보이며 은근슬쩍 봉팔을 비꼬았다.
 “그러게 말이오. 그 의뢰인이라는 자가 한시가 급하다며 학관으로 들어와 달라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소.”
 봉팔 역시 정중하게 답변했다. 하지만 가운데 끼어 있는 성은은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칙칙한 기운에 식욕이 줄어버렸다.
 ‘남궁 계집아, 계속 그렇게 달랑거려 봐라.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냄새를 몸 안에 새겨 줄 테니.’
 ‘흥! 악적! 네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의도가 불순하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이 식습니다. 빨리 드시지요.”
 성은은 암울한 분위기를 탈출하고 싶었다.
 -형님, 남궁 소저가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네 사부에게 물어봐. 나도 모르니까.
 “휴······.”
 “어휴······.”
 봉팔과 성은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자신이 바보 취급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남궁소소의 눈 끝이 추켜올려졌다.
 “남궁 소저가 아니십니까?”
 눈매가 매서워졌던 남궁소소의 얼굴이 순식간에 온화하게 바뀌며 고개를 돌렸다.
 “아, 모용 공자시군요.”
 “하하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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