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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방이야! 1-1권

2017.05.31 조회 2,675 추천 21


 # Chapter 1.
 
 커피숍에서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성공기와 조일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조일수를 성공기는 삐딱한 고개로 째려보고 있었다.
 “공기야, 나도 어쩔 수 없다. 솔직히 나는 너가 퍼스트를 하는 게 좋은데 제작사에서 써어드를 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게 됐다.”
 조일수는 동갑이자 자신보다 먼저 영화판에 들어온 성공기에게 자신이 연출할 영화에서 제3조연출로 대우해줄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제작사에서 뭐라고 했다고?”
 성공기는 고개를 더욱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돌려 조일수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성공기는 기분이 나빠서 조일수를 째려보고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후~”
 조일수는 짜증이 난 듯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성공기를 빤히 쳐다봤다.
 “미안. 잘 안 들려서. 미안해.”
 성공기는 미안하다면서도 째려보는 건 그만두지 않았다.
 “흡후~”
 조일수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은 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보청기 어쨌어?”
 “저번 달에 잃어버렸어.”
 “제발 같은 말 또 하게 하지 좀 말아줘.”
 “응 미안해. 진짜 미안해.”
 성공기는 미안하다면서 더욱 심하게 조일수를 째려봤다.
 “째려보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 이젠 진짜 지겹다!! 미안하다는 말 좀 하지 말고 그냥 좀 잘 들어!!”
 “응 알았어. 미안해.”
 “아우 진짜!”
 조일수가 울화를 참으며 성공기의 왼쪽 귀를 잡고 말했다.
 “김.준.기 사.장.이 너 퍼.스.트.로 쓰.지 말.래 써.어.드.로 .쓰.래!!”
 조일수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또박또박 말하자 성공기는 그제야 알아듣고 째려보던 시선을 바로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생각해볼게. 여러 번 말하게 해서 진짜 미안해.”
 성공기는 어려서 오른쪽 귀를 크게 다쳤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았고 이후로 왼쪽 귀로 소리를 듣다보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보청기를 끼지 않았을 때는 말하는 대상을 째려보는 듯한 포즈가 되곤 했다.
 보청기를 잃어버린 지금은 누가 말을 하든 어쩔 수 없이 째려볼 수밖에 없다.
 “그럼 잘 생각해봐 먼저 갈게.”
 조일수가 일어나 나가자 성공기가 따라 나섰다.
 “만 원입니다.”
 카운터를 지나자 주인이 말했다.
 조일수는 이미 커피숍 문을 나갔고 성공기는 주인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문을 향해 갔다.
 “손님! 손님!”
 성공기가 문을 밀고 나가려고 하자 커피숍 주인이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손님! 커피 값은 내고 가셔야죠.!”
 그가 주인의 말소리를 듣기 위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째려보자 주인은 화들짝 놀라 잡았던 팔을 놨다.
 
 ***
 
 커피숍 문이 열리고 성공기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며 나왔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꼭 갖다 드리겠습니다.”
 “몇 만 원도 아니고 달랑 만원인데 말이야. 어쨌든 다신 오지 마세요!”
 커피숍 주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 후 문을 닫고 들어갔다.
 ‘내 이름은 성공기. 큰 성공을 해서 성공담을 책으로 내라는 뜻에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하지만 34년 내 삶은 아버지의 의도와는 다르게 언제 어디서도 공기처럼 존재감이 없는 삶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인정을 받는다거나 성공의 기쁨을 맛본 적 없는 주눅 든 삶을 살고 있었다.
 
 ***
 
 성공기가 C대학교 대학원 건물 앞에서 영화과 대학원 합격자 명단을 보고 있다.
 발표가 난지 열흘이 넘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확인하지 않았었다. 오늘은 시간이 돼서 확인하러 온 것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예비합격이라도 됐네.”
 예비합격 1번이다.
 3류 대학인 G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면서 충무로에서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다.
 박봉에 고된 작업환경은 영화의 스태프들이 이직을 하거나 그만두는 현상을 가져왔기 때문에 충무로에 나와서 두세 작품만 경험하고 나면 대부분 제1조연출이 됐다.
 하지만 햇수로 13년차인 그는 아직도 연출부에서 제2조연출이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판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감독으로 데뷔를 했다. 이번에 감독으로 데뷔하는 조일수도 성공기보다 늦게 영화판에 들어왔다.
 하지만 조일수 작품의 제작사에서는 성공기에게 제3조연출을 하라고 한다.
 군대로 치면 강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애초에 창작에는 재능이 없었어.’
 영화판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이 하는 게 연출부 제3조연출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쏟아 부었던 13년 동안의 열정이 쓸데없는 헛수고였다는 걸 다시 한 번 피부로 느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후회는 하지 말자.’
 영화창작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시절 교직과목을 이수했기 때문에 교원 자격증은 있었다. 하지만 몇 년에 한명 뽑을까 말까하는 영상연출 전공 중등교원 임용고사에 합격할 자신은 없었다.
 죽어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임용고사를 보지 않아도 되는 사립학교를 노리기로 했다.
 사립 예술 고등학교의 강사가 되고나면 운이 좋으면 정규직 선생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연극영화과 중에서 한글만 알면 들어갈 수 있다는 3류 대학인 G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어떤 사립 예술 고등학교도 G대 연극영화과 출신 선생이나 강사를 원하지 않는다.
 명문 C대학교 영화과 대학원 출신이라는 석사학위로 학벌을 세탁한다면 사립 예술 고등학교의 강사 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영화판의 재능 없는 연출부 생활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문제는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력이었다.
 명문 C대학교 영화과 대학원의 제작전공으로 입학하기 위해서는 학업계획서와 함께 그럴듯한 커리어가 있어야 했다.
 13년간 영화판에서 제2조연출을 했던 커리어는 제작전공으로 C 대학교 영화과에 입학하기에는 경쟁력이 전혀 없었다.
 행운을 기대해보기에도 34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운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론으로 전공을 바꿔서 입학시험을 쳤다.
 공부를 죽어라 하면 제작전공보다는 최소한의 가능성은 있으니까.
 ‘그게 5년 전이다.’
 이후로 매학기 C대 영화과 대학원에 이론전공으로 시험을 봤다. 이번이 10번째였다.
 모두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굉장히 긍정적인 점이 있었다.
 처음으로 예비합격에 이름이 올랐다는 점이다.
 그것도 예비합격 1번으로.
 
 ***
 
 “아버지 엄마! 저 왔어요.”
 “별일 없었지?”
 25년째 누워계신 어머니가 반겼다.
 이식받은 신장이 망가진 어머니는 하루에 한 번씩 투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요.”
 어머니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고 다시 신장을 이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언제 차례가 올지 기약이 없다.
 차례가 온다고 해도 신장이식에 드는 엄청난 비용 때문에 이식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성 감독 왔어?”
 10년 전부터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시는 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일어서려 하셨다.
 “일어나지 마세요. 대통령이 온 것도 아니고 아들이 왔는데 왜 일어나세요.”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지. 훌륭한 감독이 될 분이니까. 하하하.”
 아버지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하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하시지만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사실 내가 3수를 해서 3류 대학인 G대학 연극영화과를 간 것도, 13년 넘게 영화판 제2조연출을 한 것도 일정부분 아버지의 책임도 있다.
 “다음 장면에서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이 돼서 복수할 것 같아요.”
 뻔한 드라마는 몇 편만 보면 다음에 나올 내용을 예측할 수 있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린 내가 드라마의 다음 내용이나 대사들을 맞추는걸 보고 그쪽으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 영화 천재가 나왔어!!”
 자식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부모 없다지만 아버지의 잘못된 판단과 믿음은 내가 3수를 하면서까지 3류 대학인 G대 연극영화과에 가는 원동력이 됐다.
 애초부터 난 창작에 재능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공부로 부족한 창의력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영화와 책을 보며 공부를 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지 못했다.
 기억력도 좋지 못하고 이해력도 부족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공부에도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부족한 창의력을 대신할 만큼 공부를 해내지도 못했다.
 공부도 재능이다.
 야구에 재능이 있으면 야구선수가 되고 축구에 재능이 있으면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공부에 재능이 있으면 대부분 대기업 직원이 된다.
 조직의 부속품처럼 사는 대기업 직원은 되기 싫었다.
 사실 공부를 못해서 될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판단과 믿음을 믿었다.
 “공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빠는 니 재능을 안다. 넌 될 거다. 걱정 말고 꾸준히 계속하는 거야! 영화는 한방이야 한방!”
 아버지의 무한신뢰는 박봉과 험한 작업환경 속에서 연출부로서 버티는 힘이 됐지만 13년 연출부 생활을 한 지금은 창작에 재능이 없는 자신에게 시간을 허비하게 한 결정적 한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지난 일인데 아버지 탓을 해서는 안 된다.’
 결과가 안 좋다고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건 제일 비겁한 행동이다.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하는 게 맞다.
 하지만 부모로서 자식을 좀 더 정확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환기도 좀 하고 그러세요.”
 장마철이라 그런지 벽지에 핀 곰팡이와 환자 특유의 냄새가 방에 진동했다.
 개발지구로 지정돼서 곧 헐릴 집이기 때문에 벽지를 새로 바를 이유도 없고 돈도 없다. 하지만 환기를 자주 한다면 지금처럼 심한 냄새는 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그러려고 했는데 요즘 한 집 건너 집이 헐려서 말이야. 낮에 창문 열면 시멘트 먼지가 엄청나게 들어오거든.”
 “······.”
 나는 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빤히 쳐다봤다.
 아버지는 그제야 내가 보청기를 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몸을 질질 끌고 내 왼쪽으로 와서 다시 말했다.
 “낮에 창문 열면 시멘트 먼지가 엄청나게 들어와서 환기를 할 수가 없어. 어쨌든 가능하면 자주 환기할게 미안하다.”
 “네.”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께 환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찡그리고 있는 미간을 펴지는 못했다.
 “우리 성 감독 계약한다는 건 잘 됐어?”
 “제가 검토 좀 하겠다고 했어요.”
 아버지에게 제3조연출로 제안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의 기대가 아직까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업을 얻는다면 모르겠지만 얻지 못한다면 조일수가 제안한 연출부 제3조연출이라도 해야 한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제3조연출 생활을 하면서 버티다보면 새로운 학기가 되면서 다시 C대 영화과 대학원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예비합격 1번까지 됐으니까 다음에는 합격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BK21 플러스 사업에 지정된 C대 영화과 대학원에 이론 전공으로 입학하면 학비는 국비로 지원이 된다.
 연구원으로 등록되면 매달 100만 원 정도의 연구원 인건비도 나온다.
 연출부 생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수입이다.
 게다가 사립 예술 고등학교 강사나 선생님이 될 수도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갖출 수 있다.
 대단한건 아니지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지금 아버지에게 진로를 바꾸겠다고 말씀을 드릴 수 없다.
 “류미는 연락 없니?”
 “몇 달 전에 인턴 마쳤다는 말만 들었어요. 한번 집에 온다고 하긴 했는데, 모르겠어요. 자기 마음 내킬 때 오겠죠.”
 류미는 성공기의 여동생이다.
 “나도 대학 가고 싶다고!! 공부는 오빠보다 내가 훨씬 잘하는데 난 왜 못 가?”
 가정형편은 항상 어려웠다.
 공부는 성류미가 훨씬 잘 했지만 아버지는 장남인 나만 대학에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여상을 나와 은행에 취직했고 자신이 번 돈으로 공부를 해서 의대에 진학했다.
 “엄마 아빠가 해준 것도 없고 해줄 것도 없으니까 지금처럼 기대하지 않을게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성공할 때까지 찾지 마세요.”
 그녀는 의대에 입학하면서 집을 나갔다.
 이후로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자신이 벌어서 학교를 다녔다. 가족과 연을 아예 끊은 건 아니지만 몇 년에 한 번 밖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한 끼 식사를 하는 게 전부였다.
 “어서 쉬어라 피곤하겠다.”
 “피곤하긴요. 한 것도 없는데요. 뭐. 아버지 죄송한데 보청기 좀 빌려주실래요? 오늘 금요일이라 일찍 나가보려고 하거든요.”
 나는 연출부 생활을 하면서도 촬영이 일찍 끝나면 밤에 대리운전을 했다.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요즘처럼 영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일찍부터 대리 일을 하러 나갔다. 특히 불타는 금요일은 무조건 일찍부터 콜을 잡아서 뛰어야 한다.
 그래야 어머니의 투석비용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라 여기.”
 아버지가 보청기를 빼서 나에게 건넸다.
 통화를 수시로 해야 하고 손님의 요구에 응해야하는 대리기사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안 된다. 때문에 보청기를 잃어버린 뒤로는 아버지의 보청기를 빌려서 일을 나간다.
 “야이 새끼야! 또옥바로 운저언 안해!!”
 몇 달 전에 대리를 하면서 취한 손님에게 따귀를 맞았다.
 그때 보청기를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아버지의 보청기를 빌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나중에 보청기 값을 손님에게 받았지만 갑자기 늘어난 어머니 신장 투석비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보청기 없이 지내고 있다.
 “흐흐흑!”
 어머니가 울음을 터트리셨다.
 터져 나오는 슬픔을 참으려 숨을 죽였지만 울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공기야.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너한테 피해만 주면서 살고 있는 뻔뻔한 어미 때문에······.”
 “왜 그래요 엄마. 그런 말씀 마세요.”
 나만 대학을 가게 된 건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도 대학에 갈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내가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크게 망했고 이후 단 한 번도 형편이 좋아진 적이 없다.
 지금은 185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이지만 26년 전 한 학기를 다녔던 사립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또래보다도 체격이 많이 작았다.
 “야! 거기 땅꼬마! 이리와 봐!!”
 “왜? 그리고 나 땅꼬마 아닌데? 난 성공기야.”
 “이 새끼가 오라면 오지 말이 많아!”
 “악!”
 나는 같은 반에서 덩치가 제일 컸던 유정현에게 맞아 오른쪽 고막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유 없이 맞았다.
 당시 나보다 두 배는 덩치가 좋았던 유정현은 심심풀이로 아무나 때리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다니던 사립초등학교부터 C 대학까지 소유하고 있는 학원재단 이사장의 손자였기 때문이다.
 그 사고 때문은 아니지만 이후 나는 바로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상태가 안 좋아진 어머니의 신장이식 수술비 때문에 더 이상 사립초등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내 치료비로 유정현의 아버지에게서 거금을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귀를 치료하는 대신 어머니의 수술을 선택했다.
 “넌 아빠가 빨리 돈 많이 벌어서 고쳐 줄게.”
 “괜찮아요, 아빠. 치료 받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다 잘 들리는데요 뭐”
 어머니는 나의 치료비로 받은 돈까지 보태서 겨우 신장이식 수술을 마쳤다.
 나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지만 내 치료비가 어머니를 살리는데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기뻤다.
 한때는 이유 없이 나를 때려 거금의 치료비를 준 유정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미안하다 공기야 아빠가 빨리 돈 벌어서 치료해 줄게”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는 대화를 할 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째려보기 시작하는 나를 가슴 아파하셨다.
 점점 안 좋아진 귀의 상태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왼쪽 귀로 들어야만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니까요. 하나도 문제없어요.”
 뒤늦게라도 치료를 받아야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괜찮은 척 했다.
 부모님도 치료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내 귀 치료에 신경 쓸 경제력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째려보면서 대화해야한다는 것 말고는 아주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일 년 이 년 해가 가면서 오른쪽 귀의 청력을 거의 상실했다.
 왼쪽 귀로만 듣다보니 지금은 왼쪽 귀의 청력까지도 안 좋은 상태다.
 “공기야. 성공기! 야!! 성공기!!! 인마!!!! 슬레이트 치라는 말 안 들려?”
 13년간 영화판에서 제2조연출밖에 되지 못한 이유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청력 탓도 있었다.
 내 별명은 ‘착한 사오정’, ‘째려보는 사오정’ 이었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일을 잘 못하지만 성품은 착했다.
 열심히 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고, 그냥 놔두자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사람.
 사회에서 함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장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유형의 사람이 바로 나였다.
 “엄마 마음 편히 계세요. 몸에 더 안 좋아요. 그리고 제가 돈 많이 벌 거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요.”
 “미안하다 공기야. 못난 애비 때문에.”
 “뭐가 미안해요? 진짜 아버지까지 왜 그러세요?”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내가 치료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도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아들이 희생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내가 대학만큼은 다닐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결코 장남이기 때문에 대학을 보낸 건 아니다.
 실질적으로는 첫 학기 등록금만 빼고 나머지는 연출부 생활을 하며 직접 돈을 벌어 대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성류미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나만 부모가 뒷바라지 했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갔다.
 
 ***
 
 - 논현동 한신포차 → 청담동 엘루이 호텔. 2만5천원 -
 대리운전 콜을 잡는 단말기에 신호가 떴다.
 “역시 콜 밭으로 오길 잘했네.”
 강남 교보문고 사거리는 대리기사들에게 콜 밭으로 불리는 명당이다.
 주변에 술집도 많고 룸살롱부터 단란주점, 비즈니스 클럽, 룸 카페, Bar, 낮엔 다방 밤엔 싸롱인 주다야싸 등 온갖 술집들이 빽빽하게 있기 때문에 늦은 오후부터 대리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고객과 약속한 장소에 가니 3억이 넘는 B사의 플라잉스퍼가 서 있었다.
 “차키는 여기 있고, 이 차 운전 할 줄 알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만나자마자 대뜸 반말을 했다.
 대리기사를 시작한 초기 같으면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지만 반말 듣는 건 예삿일이기 때문에 지금은 느낌이 없다.
 반말을 듣는 것도 대리운전 서비스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사장님. 가시죠.”
 차키를 받아 운전을 시작했다.
 화려한 치장을 한 여자와 뒷좌석에 탄 남자는 운전하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진한 애정행각을 벌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름처럼 공기일 뿐이었다.
 무색무취의 존재감 없는 공기.
 대리기사를 하면서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운전에 집중했다.
 “야이 새끼야! 와이퍼는 그게 아니잖아. 오른쪽! 오른쪽에 있어.”
 키스를 하던 남자가 나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네 사장님 죄송합니다.”
 비가 내려서 와이퍼를 동작시킨다는 걸 선루프를 열었다.
 남자는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애정행각을 벌이다 쏟아지는 비를 맞고 기분이 상한 듯했다.
 고가의 외제차 중에는 우리나라 브랜드의 차량과는 기능 조작에 있어서 다른 차량이 많다.
 라이트를 켜거나 차 문을 열 때, 비가 올 때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킨다거나 할 때 여러 가지로 국산차와는 다르다. 경험이 없다면 운전하면서 기능을 조작하는데 애 먹을 수 있다.
 “이런 새끼들한테 차를 맡기느니 음주운전을 하는 게 나은데 말이야. 에이.”
 투덜거린 후 다시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남자를 룸 미러로 봤다.
 ‘어디서 본거 같은데.’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알 만한 사람 중 B사의 플라잉스퍼를 탈 만한 사람은 없다.
 ‘대리 고객으로 이용한 적 있는 사람이겠지.’
 청담동 엘루이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남자도 여자와 함께 비틀거리며 내렸다.
 “야 거기 멀대 이리와 봐!”
 남자가 나를 부르는 말투에서 그가 누군지 기억났다.
 유.정.현.
 26년 전 이유 없이 자신을 때려 고막을 상하게 한 학원재단 이사장의 손자.
 ‘야 거기 땅꼬마 이리와 봐!’ 라며 때리던 초등학교 때는 그가 훨씬 몸집이 컸지만 지금은 내가 그보다 족히 15센티미터는 더 크다.
 ‘형편없는 인품은 그대로구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는 여전히 인간 말종이었다.
 불쾌하거나 원수를 만난 듯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이놈 덕분에 모자랐던 어머니 수술비를 보탤 수 있었으니까.
 대리비만 받아서 헤어지면 끝이다.
 “왜 기분 나쁘냐?”
 그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다가가 그를 내려다봤다.
 머리숱이 없어서 하얗게 빈 정수리가 보였다.
 ‘정수리에 가래침을 뱉어줄까?’
 비틀거리는 그가 지갑을 찾는 동안 장난처럼 든 생각이었다.
 “자 여기!!”
 비틀거리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세장을 꺼낸 유정현은 주는 듯하다가 땅바닥에 뿌렸다.
 “오천 원은 킵 더 체인지. 킵 더 체인지가 무슨 말인지는 알지? 거스름돈 오천 원은 열심히 살라고 주는 거야 하하하.”
 “오빠 너무 큰 돈 아냐? 오천 원이면 집도 사고 땅도 살 수 있는 큰돈인데. 호호호. 빨리 들어가자 오빠.”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여자도 싸가지는 아예 탑재한 적이 없는 인간형이었다.
 유정현은 비틀거리며 여자와 함께 주차장에서 객실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탔다.
 ‘인간 말종 연놈들 둘 다 대머리나 돼라!’
 가벼운 저주를 퍼붓고 말없이 돈을 주웠다.
 대리기사를 하면서 술 취한 개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뿌린 돈을 줍는 것 정도는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유정현이 뿌린 돈은 무심하게 주울 수 없었다.
 최소한의 저주라도 내뱉어야 화가 쌓이지 않을 것 같았다.
 “개포동 오룡 마을 가주실수 있으세요?”
 올려다보니 영화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세련된 검정색 턱시도를 입은 금발의 외국인 노신사가 유창한 한국말로 대리운전을 요청하고 있었다.
 “오룡 마을이요?”
 오룡 마을은 내가 사는 동네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남구 개포동이지만 바로 앞에 있는 팰리스 타워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과는 180도 다른 판자촌. 재개발이 결정나서 한 채 두 채 집이 헐리고 있는 극빈촌이다.
 세련된 차림의 외국인 노신사가 저녁 6시가 다된 시간에 오룡 마을을 갈 이유는 없다.
 ‘뭐지?’
 다시 그를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차는 여기 있습니다.”
 “헉”
 롤스로이스 고스트다.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대리운전 한 적은 없었다.
 차량 가격만 5억이 넘는데다가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걸 기본으로 설정해서 나온 모델이다.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타는 사람이 운전기사가 없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었다.
 “운전해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유정현의 B사 플라잉스퍼도 운전하면서 조작이 서툴러서 애를 먹었다.
 ‘몇 푼 벌자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롤스로이스 고스트는 대리운전 보험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고가의 차량이다. 조그마한 사고에도 대리기사 십년 치 이상의 연봉이 날아갈 수 있다.
 “제가 급해서 그렇습니다. 백만 원 드리겠습니다. 국제면허가 없어서 한국에서 운전을 할 수 없거든요”
 백만 원이라는 말에 이성이 마비됐다.
 그 돈이면 이번 달 어머니의 투석비용은 걱정 없다.
 “기기 조작이 서투시면 그건 제가 알려드리면 되고요.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내가 설마 걸리겠어?’ ‘오늘 하루쯤이야’ 라는 마음으로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처럼 ‘설마 사고가 나겠어?’ 하는 마음으로 대리운전을 결심했다.
 
 ***
 
 오룡 마을을 가는 동안 외국인 노신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룸미러로 내가 운전하는 모습만 빤히 보고 있었다.
 금발의 외국인 노신사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극도로 긴장을 하며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몰았기 때문에 그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가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지?’
 “앞으로 보게 될 겁니다.”
 “네?”
 그는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내가 하고 있는 생각에 답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궁금증에 답을 한 게 아니었다.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룸미러로 쳐다보자 노신사는 나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미소 지으며 통화를 할 뿐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다행히 차들은 다가가기만 하면 알아서 길을 비켜줬다.
 봉은사 사거리의 막힌 도로에서도 홍해 갈라지듯이 차들이 피해주는 바람에 롤스로이스 고스트는 정말 유령처럼 청담동에서 개포동 오룡 마을까지 다른 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순식간에 도착했다.
 노신사가 안내를 해서 도착한 오룡 마을의 목적지는 우리 집 근처였다.
 “여기서 더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원하는 곳은 더 들어가야 했지만 일반승용차보다 훨씬 길고 큰 롤스로이스 고스트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있는 골목이 아니었다.
 사람이 다니기에도 좁은 골목이었다. 둘 다 차에서 내렸다.
 “고맙습니다. 여기.”
 그가 봉투를 줬다.
 묵직한 느낌이 진짜 백만 원 정도 되는 듯 했다.
 “고맙습니다.”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뜬금없는 그의 질문이었지만 지체 없이 대답했다.
 오늘 만난 유정현이 생각나서였다.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인격이 엉망인 걸레 같은 인간.
 “그럼 삶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계속 되는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왠지 전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럼요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삶이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말해놓고도 어떻게 이런 말을 반사적으로 했는지 신기했다.
 여태까지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삶은 나빠지기만 했다.
 결코 조금이라도 좋아진 게 없었다. 노력하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을 갖기에는 성공의 경험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삶은 노력하면 변할 수 있습니다.”
 금발의 외국인 노신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했다
 이후로 그는 생활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었고 나는 내 생각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라. 바쁜 분을 이렇게 붙잡고 있었네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선물입니다.”
 그는 작은 쇼핑 봉투를 건넸다.
 “체인지 마이 라이프!”
 “네?”
 노신사는 뜬금없이 유창한 영어로 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알아듣지 못했다.
 “또 보게 됐으면 좋겠네요.”
 그는 빙긋 웃으며 인사를 한 후 좁은 골목으로 걸어갔다.
 쓰러져가는 판자 집이 밀집한 골목이라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어두웠다. 게다가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하며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안보였다 했다.
 몇 초 만에 그의 모습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체인지 뭐라고 한 거 같은데······. 뭐라고 한 거야? 그런데 저런 외국인이 이런 판자촌에 올 일이 뭐가 있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영화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멋진 금발의 외국인 노신사가 다 쓰러져가는 오룡 마을 판자촌에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타고 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봉투를 열어보니 선글라스와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USB 메모리가 들어있었다.
 “뭐야? 쓰던 거 같은데?”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사용하던 흔적이 역력한 물건들이었다.
 갑자기 깜빡이던 가로등 불빛이 모두 꺼졌다.
 휘이잉~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바람이 불며 한기가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0시 5분이다.
 “헉!”
 시간을 잘못 봤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다시 봤다.
 새벽 0시 5분이 틀림없었다.
 “!”
 번개 맞은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직! 하고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대리하기 시작한 게 오후 6시경이었다. 청담동에서 오룡마을까지 거침없이 왔기 때문에 20분 남짓 걸렸다.
 넉넉하게 잡아도 오후 7시경에 도착했다.
 롤스로이스 고스트 밖으로 나와 그와 대화를 나눈 시간은 불과 몇 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 0시가 넘었다.
 다섯 시간이 넘게 시간이 빈다!
 노신사가 걸어가는 골목길 가로등이 깜빡이며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던 게 생각났다.
 귀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털이 곤두서며 몸에서 더욱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악!! 악!! 엄마!!!”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가 놀랐다.
 “왜 무슨 일이야?”
 “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배가 고파서요.”
 아버지에게 딱히 무슨 일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달려 들어온 것뿐이니까.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주랴?”
 “아니에요. 늦었으니까 그냥 참을래요.”
 방으로 들어가려다 아버지라면 외국인 노신사와 관련해서 알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지만 나이가 있는 오룡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서로에 대해서 잘 안다.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 정도다.
 다른 지역의 월세로 이사 갈 만큼의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룡 마을은 한번 마을로 들어오면 이사 나가는 사람이 없다.
 만약에 나간다면 재개발로 집이 헐려 쫓겨나거나 죽어서 장의차를 타고 나갈 뿐이다.
 “아버지 우리 집 나가면 밑에 있는 골목 있잖아요. 거기 혹시 외국인 살아요? 아니다. 돈 많은 외국인이랑 알 만한 사람이 살아요?”
 아버지는 얘가 왜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거기 집들 다 철거된 지 꽤 됐어. 살긴 누가 살아?”
 “네? 그럼 아무도 안 살아요?”
 “응. 우리 오룡 마을에서 제일 먼저 철거된 데가 거긴데?”
 “!”
 
 ***
 
 자리에 누운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나가서 롤스로이스 고스트가 그대로 있나 확인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짜 미치겠네. 다시 나가보지는 못하겠고.’
 외국인 노신사가 귀신이었다면 그가 준 돈 봉투와 작은 쇼핑 봉투가 그대로 존재할 리가 없다.
 봉투 안을 확인했다.
 돈 봉투에는 오만 원권 스무 장이 들어있고 작은 쇼핑봉투에는 선글라스와 블루투스 이어폰, USB 메모리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귀신이라면 물건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잖아.”
 외국인 노신사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있을까 싶어서 컴퓨터를 켜고 USB 메모리를 꽂았다.
 “이런!!”
 USB 메모리를 꽂자마자 악성코드가 자동으로 심어지듯이 저절로 압축파일이 풀리며 바탕화면에 연분홍 색깔의 폴더가 생겼다.
 - Change my life kit -
 “이거 뭐야? 악성코드 같은데?”
 일반적으로 폴더는 노란색이다.
 어떻게 된 건지 ‘Change my life kit’ 라고 쓰여 있는 폴더는 연분홍색이었다. 악성코드나 컴퓨터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았다.
 “에이 진짜 어떡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이야?”
 영어만 보면 울렁증이 생기는 나였다. 잠시 후 화면에 영어로 긴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뭔 소리야 이게!”
 메시지 옆에 언어를 선택하는 항목이 보였다.
 클릭해서 한국어로 언어를 선택하자 순식간에 메시지가 한국어로 바뀌었다.
 -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 -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
 잠시 후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에 대한 설명이 화면에 뜨기 시작했다.
 -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는 영국에서 최초로 개발돼서 오 년에 한 바퀴 지구를 돌면서 소유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었습니다. 미국의 제이미 카터 대통령은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잘 활용하여 대통령이 됐으며 가나의 코피 아이난은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 덕에 UN 사무총장이 됐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삶을 바꿔보세요. -
 “뭐야 이게?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메시지는 행운의 편지와 같은 느낌이었다.
 폴더를 통째로 삭제하려고 하는 순간 메시지가 또 나타났다.
 - 주의사항!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 사용 후 반드시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시간 이내에 트레이닝을 수행하셔야 합니다. UN 사무총장이 된 코피 아이난은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소홀히 한 결과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맸지만 다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꾸준히 수행한 후 완치되었습니다.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사용 후 트레이닝을 수행하지 않으면 건강에 큰 위험이 올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세요. -
 메시지가 끝났다.
 컴퓨터에는 Change my life kit 라는 연분홍 폴더가 바탕화면에 생겼다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이상 반응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포맷해야할 테니까 뭔지 살펴보기나 해야겠다.”
 바이러스나 악성코드가 심어졌다면 포맷을 해야 한다.
 어차피 컴퓨터를 포맷하기로 마음먹은 거 Change my life kit 폴더 안을 살펴보기로 했다.
 폴더를 클릭하자 ‘TP’ 와 ‘Before After’ 란 아이콘만 달랑 두 개 있었다.
 “티피······. 이게 트레이닝 프로그램이란건가?”
 클릭하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Before After’ 아이콘을 클릭했다.
 왼쪽과 오른쪽에 커다란 빈창이 떴다.
 “왼쪽이 비포고 오른쪽이 애프터네.”
 뭐가 비포고 뭐가 애프터가 된다는 건지 빈 창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성형효과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인가?”
 증명사진 파일을 비포에 끌어다 넣었다.
 애프터에는 비어있는 창 그대로였다.
 “아니네. 번역 프로그램인가?”
 비포에 Change my life kit 라고 영타를 쳐 넣었다. 역시 애프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변역 프로그램도 아니다.
 Change my life kit 가 어떤 종류의 악성코드나 바이러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연분홍 폴더가 바탕화면에 만들어진 것 말고는 컴퓨터의 성능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뭐야 이거? 전부다 아무것도 아니네.”
 비포에 이런저런 형식의 파일을 끌어다 넣어 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때였다.
 조일수가 연출하려고 하는 ‘여름왕자’ 시나리오 파일을 넣자 애프터에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
 마치 한글 맞춤법 검사기가 띄어쓰기, 철자법, 적절한 용어들을 검사해서 교정해 주는 것처럼 애프터 창에 시나리오가 수정돼서 나왔다.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창백한 피부의 여름왕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찬이라고 합니다. 채영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오면서 시나리오가 수정된 부분에 대한 정보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어!”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처럼 수정된 부분과 각색 이유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타탕성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비포에 첨부한 ‘여름왕자’ 시나리오를 가지고 스티븐 스필버스나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수정을 한다고 해도 애프터에 결과물로 각색되어 나온 시나리오보다 더 훌륭하게 각색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최상의 수준으로 각색이 된 건데.’
 전에는 실력이 부족해 보이지 않던 원작 시나리오의 오류들이 한눈에 보였다.
 비포 애프터가 작품을 각색하면 각색한 만큼 성공기의 시나리오 보는 능력이 높아지며 체화되는 듯했다.
 “이런 걸 이용해서 체인지 마이 라이프 한다는 거였나?”
 전에 내가 썼던 시나리오를 비포에 첨부했다.
 역시 수정이 돼서 애프터에 결과물이 나타나며 온몸에 전율이 왔다.
 수정된 정보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애프터에 결과물로 각색되어 나타난 내 시나리오는 원본 시나리오보다는 낫지만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다시 내 원본 시나리오를 훑어봤다.
 “행동의 동기도 부족하고 안타고니스트가 명확하지 않네.”
 주인공의 욕망만 설정되어 있었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려는 동기가 부족하고 안타고니스트(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가 명확하지 않아서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갈등이 없었다.
 순간 다시 전율이 오면서 각색된 부분에 대한 모든 정보가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
 비포 애프터의 성능에 대해 완전히 감이 왔다.
 비포에 첨부하는 작품의 수준에 따라서 그 작품을 수정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결과물로 변환이 되는 것이다.
 비포에 첨부하는 작품이 A라는 수준이라면 A라는 수준에서 최상의 결과물로 변환되고, B라면 B라는 수준에서 최상의 결과물로 변환이 되는 것이었다.
 “1점짜리를 100점짜리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7,80점짜리는 100점으로 만들어주고 1점짜리는 2,30점짜리로 만들어 주는 거네.”
 기능이 대충 파악됐다. 무심코 수정된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 작품 소개 부분을 봤다.
 “어!!!”
 연출자와 주연배우의 이름이 원본과 달라졌다.
 연출은 조일수에서 정현치로, 주연배우는 최보미에서 정리혜로 바뀌어 있었다.
 “최보미보다는 정리혜를 캐스팅해야하고 조일수보다는 정현치 감독이 연출을 해야 지금 수준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지금은 뒷방 늙은이 신세이긴 하지만 정현치 감독은 90년대를 풍미했던 멜로영화감독이다.
 조일수는 이제 데뷔를 준비하는 감독이다.
 ‘여름왕자’는 판타지 멜로 장르의 시나리오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장르의 영화는 개연성이 중요하다.
 판타지이기 때문에 개연성에서 관객에게 ‘그럴만하다’ 라는 공감을 얻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출을 할 때는 개연성을 구축하기 위해 사건에 치중하기 마련인데 ‘여름왕자’는 멜로 장르까지 혼합된 장르이기 때문에 감정의 흐름이 이어지게 연출을 해야 관객이 극에 몰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판타지의 개연성을 구축하기 위해 연출한 사건의 나열이 극중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
 “디테일한 감정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정현치 감독이 조일수보다 여름왕자 연출에 더 적임자라는 얘긴데.”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캐스팅이 바뀐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네.”
 주연배우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사에서 만화를 찢고 나온 여자처럼 아름다운 최보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기 때문에 원본 시나리오에서는 최보미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포 애프터가 수정한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정리혜로 바뀌었다.
 정리혜는 20대 여배우 중에 감정연기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배우다.
 “정말 이거 대단한데?”
 비포 애프터는 내용뿐만이 아니라 감독, 배우,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시나리오에 표기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최상의 결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수정이 되는 것 같았다.
 기능을 파악한 성공기는 비포 애프터 프로그램의 X 모양을 클릭했다.
 프로그램 실행이 종료되자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TP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며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사용하신 당신께 제공하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입니다. 시간 안에 트레이닝을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TP 화면에 3:00 에서부터 2:59, 2:58, 2:57···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일초 이초 타이머가 카운트다운 되는 걸 지켜봤다.
 시간이 줄어들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느낌이 왔다.
 “뭐야 이거··· 왜··· 이러지?”
 타이머를 보면서 괜히 심리적으로 쫓기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니었다. 실제로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0:30, 0:29, 0:28 시간이 줄어들자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흡이 점점 가빠지면서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0:03, 0:02, 0:01 시간이 줄어들고 0:00 이 됐다.
 TP가 실행되는 화면에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명상음악 같은 선율이 크게 흘러나오며 성별을 알 수 없는 3D로 만들어진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3D 이미지는 알 수 없는 동작들을 하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던 나는 더욱 심하게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콜록!! 콜록콜록콜록!!!!”
 몸속의 장기가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올 듯이 기침이 심했다. 이러다 진짜로 모든 장기를 입으로 내 뱉고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트레이닝 프로그램 수행!’
 순간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사용 후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수행하지 않으면 건강에 큰 위험이 올수도 있다는 메시지가 기억났다.
 ‘이걸 따라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건가?’
 3D 사람 이미지는 요가의 메뚜기 자세처럼 엎드려서 복식호흡을 하더니 턱, 가슴 손목으로 지탱한 후 다리를 뒤로 들어 올려서 자세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동작을 따라 했다.
 “아이······씨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완벽한 자세는 아니지만 열심히 따라했다.
 호흡이 점점 차분해 지고 기침도 잦아들었다.
 “오! 효과가 있네!!”
 하지만 잠시 후 3D 이미지가 다리를 몸 쪽으로 끌어올리더니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뭐야 이건 또 진짜!”
 이미지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내 방안이라고 해도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씰룩거리며 좌우로 터는 것은 따라 하기에 민망한 자세였다.
 호흡이 어느 정도 돌아왔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헉!!”
 트레이닝 프로그램의 동작을 따라하지 않자 바로 호흡이 가빠지고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콜록콜록!!!”
 다시 모든 장기가 입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후~ 흡! 후~ 흡!! 후~ 흡!!!”
 저절로 복식호흡이 되며 기침이 잦아들고 호흡이 돌아오는 듯했다.
 하다 보니 요가의 고양이 자세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좌우로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면 흔들수록 호흡이 빨리 잦아들었다.
 잠시 후 엉덩이 쪽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방안이다.
 누군가 보고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흔들었다. 하지만 왠지 뒤를 돌아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계속 들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친숙한 눈동자가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헉!”
 어머니는 늦은 밤 묘한 음악소리에 놀라 집안을 살피다가 성공기의 방문을 열었다.
 아들이 미친 듯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털고 있자 멍하니 보고 계셨던 것이다.
 “하던 거 계속해라.”
 어머니는 민망한 듯 자리를 피하려 하셨다.
 호흡이 가빠서 어쩔 수 없이 눈인사만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는 문을 닫았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희한한 요가의 동작을 몇 분 더 하고 트레이닝 프로그램은 끝났다.
 “휴~”
 희한했다.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쁘던 호흡도 돌아오고 기침도 나지 않았다.
 “뭐 좀 민망하긴 해도 할 만하네.”
 국선도나 태껸, 요가 같은 운동은 처음 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민망하다고 생각할 만한 동작들이 가끔 있다. 트레이닝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동작도 화면에서 나오는 걸 볼 때는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해보니 할 만 했다.
 선글라스와 블루투스 이어폰의 기능도 알고 싶어졌다.
 “이건 어떤 신기한 기능이 있는 거지?”
 선글라스를 꼈다. 세상이 어둡게 보일뿐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에이 뭐야!”
 선글라스를 착용하기 전까지 별의 별 상상을 다했다.
 투시가 되는 안경이라던가. 첩보영화에서처럼 사람을 보면 사람에 대한 정보가 안경에 뜬다던가.
 하지만 선글라스 기능 외에는 별 다른 기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것도 일반적인 이어폰인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 꼈다.
 내심 몇 킬로미터 밖에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리길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특별한 성능은 없었다.
 그때였다. 창 밖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
 아버지의 보청기를 빌려서 착용했을 때처럼 소리가 또렷했다.
 “보청기 값 굳었네. 히히히.”
 블루투스 이어폰은 보청기였다.
 “이어폰 기능은 당연히 되겠지?”
 스마트폰의 블루투스 기능을 켰다.
 바로 이어폰이 인식됐다. 저장되어 있는 음악 파일을 플레이하자 이어폰으로 깨끗하게 연주가 흘러나왔다.
 “우와~”
 비포 애프터 프로그램을 소유했다는 것보다 당장 보청기기능을 가진 블루투스 이어폰이 생겼다는 게 나에게는 더 와 닿는 기쁨이었다.
 금발의 외국인 노신사가 귀신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과 어머니 앞에서 엉덩이를 민망하게 흔들어댔던 것을 까맣게 잊고 기분이 좋아졌다.
 
 ***
 
 어머니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철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명상음악 같은걸 들으면서 화를 삭이나봐. 어제 새벽에 어느 집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오데?”
 아버지의 말에 나는 모르는 척했다.
 부모님께 비포 애프터와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한다고 해도 믿으시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왜 밤늦게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단지 아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해 한 이상행동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자신의 신장투석비용 때문에 내가 극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걱정하시는 마음을 풀어 드려야했다.
 “엄마 어저께는 몸이 좀 안 좋아서 요즘 건강에 좋다고 하는 요가 동영상보고 따라한 거예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명상음악 같은 게 니 방에서 난 소리냐?”
 “네 다음부터는 조용하게 소리 죽이고 할게요. 그리고 이거요.”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하고 금발의 외국인 노신사에게 대리운전비로 받은 백만 원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앞으로 투석비용은 걱정 마세요.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모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이번에는 제1조연출로 계약할 것 같거든요.”
 돈이 어디서 났냐? 무슨 돈이냐? 는 말씀이 나올 것 같아서 선수를 쳤다.
 이전 같았으면 돈을 잘 벌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못했을 텐데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수중에 넣고 난 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계약금이니? 어제는 너가 검토해보겠다고 했다면서?”
 아버지가 물었다.
 “계약금은 아니구요 제가 계약을 검토해보겠다고 했더니 제작사 사장이 일단 받아두라면서 기어이 주더라고요. 저번에 작품 잘됐는데 보너스를 못 챙겨줬다고 그러면서요. 어제는 피곤해서 까먹고 말씀을 못 드렸어요.”
 “이제야 충무로가 우리 성 감독을 알아보기 시작하는구만! 하하하!”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셨다.
 “그런데 너 오늘은 째려보지 않는다. 귀에 그거 보청기니?”
 “네.”
 하나하나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지 못하니까 줄줄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에 대해 사실대로 말씀을 드린다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이 어떻게 됐다는 걱정만 끼쳐드릴 테니까.
 
 ***
 
 조일수의 제3조연출 제의에 답을 해줘야 했다.
 “잠시만 참으면 되지 뭐. 13년 동안 한 일인데 그깟 몇 개월 못 버틸까.”
 제3조연출로 강등된다는 모멸감 때문에 연출부 일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에 입학이 된 것도 아니다. 자존심 때문에 제3조연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다른 일을 할 것도 없다.
 마땅한 다른 일이 생길 때까지 한 푼이라도 벌면서 지내는 게 현명했다.
 매달 만만치 않은 투석비용이 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실 제2조연출이나 제3조연출이나 감독이 아닌 이상 허드렛일을 하는 건 매한가진데 뭐.”
 쪽팔림은 잠시만 참으면 된다.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비포 애프터가 수정한 ‘여름왕자’ 시나리오를 출력하고 몸에 체화된 시나리오의 수정사항을 일목요연하게 문서로 작성했다.
 성실하기만 하고 능력이 없다는 평가를 쇄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정된 시나리오에서 감독과 주연배우의 이름은 정현치와 정리혜에서 원래대로 조일수와 최보미로 바꿔서 출력했다.
 “캐스팅과 연출을 선택하는 건 시나리오 수정의 범위를 벗어난 일인데 쓸데없이 까부는 인상을 줄 필요는 없지.”
 비포 애프터가 있는 이상 적어도 시나리오에 있어서는 점점 더 안목이 높아질 것이고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계속해서 체화된다면 집필 능력도 향상 될 것이다.
 인정받지 못했던 충무로 연출부 생활 13년을 버리고 어디서나 인정받는 영화인으로 새 삶을 살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
 
 “다녀오겠습니다!”
 영화 제작사를 가기 위해 집을 나왔다.
 금발의 노신사와 헤어졌던 골목길 쪽으로 가자 롤스로이스 고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볼일보고 직접 차를 몰고 가셨나보네.”
 비포 애프터의 신기한 성능을 경험하고 난 뒤 금발의 노신사가 귀신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어?”
 하지만 어젯밤 그가 사라졌던 골목길은 낮에 보니 시멘트 조각과 벽돌더미 뿐이었다.
 재개발로 모두 헐려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집은 한 채도 없었다. 벽돌더미에서 산다면 모를까 아무도 살수 없는 폐허였다.
 ‘누굴 만나러 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여길 왜 온 거지?’
 노신사가 강남의 극빈촌인 오룡 마을에 온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알 수 없었다.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왼쪽 귀에 대고 전화를 받으려다 스마트폰의 블루투스 기능을 켰다.
 “여보세요?”
 [C대학교 대학원입니다. 성공기 씨 되시죠?]
 선명하고 또렷하게 잘 들렸다. 보청기뿐만 아니라 블루투스 이어폰의 기능도 탁월했다.
 “네 전데요.”
 [영화과 대학원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네?”
 미등록자가 발생해서 예비합격 1번인 그가 추가로 합격한 것이었다.
 등록에 관한 설명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어이가 없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멍했다.
 C학교 영화과 대학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이다. 게다가 BK21 플러스 사업에 지원을 받기 때문에 모든 학비를 국비로 지원 받는다.
 쉽게 말해 공부에는 재능도 없고 한글만 겨우 깨우친 정도의 성공기가 국비 장학생이 된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입학을 포기한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대학원 입학시험을 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합격해놓고 돈 한 푼 안 들이고 다닐 수 있는 대학원을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일어났다.
 C대 대학원 추가합격은 거의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비슷한 확률이라고 보면 된다.
 ‘내 삶이 바뀌려는 신호탄인가?’
 34년 인생에서 단 한 번의 사소한 운조차 따른 적 없던 나였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영화 제작사를 향해 걷는 동안 나는 노신사가 행운의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를 만나고 난후부터 꿈도 꿔보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까.
 
 ***
 
 조일수를 만나기 위해 영화 제작사에 도착했다.
 “어우 우리 성 감독 오셨나?”
 제작사 김준기 사장이 반갑게 맞았다.
 그는 나를 항상 대우해줬다.
 “그 정도 짬밥이면 다 감독이야. 언제 감독이 돼도 될 테니까.”
 감독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민망해하는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면 그가 했던 말이다.
 충무로 경력 10년차가 넘으면 언제든 기회만 닿으면 감독이 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는 충무로 연출부 경력 13년차인 나를 항상 성 감독이라고 부르며 기를 세워줬다.
 ‘말만 감독이라고 부르면 뭐해? 제3조연출이나 하라고 했으면서’
 면전에서는 항상 ‘성 감독’ 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제3조연출을 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에 대해 배신감이 컸다.
 하지만 티내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사장님. 조일수 감독 안 나왔나요?”
 “응 아직 안 나왔는데? 기다려봐. 좀 있으면 올 거야.”
 “네.”
 “차 한 잔 할래요? 커피? 녹차?”
 김준기 사장은 역시 사업가였다.
 자신이 제3조연출로 강등시키라고 했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걸 그도 알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친절하게 대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진짜 저 사람이 나를 제3조연출로 강등시키라고 했다는 게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이고 일은 일이다.’
 사장인 그에게 비포 애프터가 수정한 ‘여름왕자’ 시나리오 와 수정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문서를 줬다.
 “사장님 제가 여름왕자 시나리오를 각색해봤거든요. 여기요.”
 어차피 제3조연출을 하기로 마음먹고 왔기 때문에 그가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부담은 전혀 없었다.
 “그래? 역시 성 감독이네 기대도 안했었는데 정말 성실해. 하하하”
 그때였다.
 [재능만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노력이 가상하니까 읽는 척이라도 해야겠네.]
 김준기 사장의 말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내 귓가에서 속삭이듯 말을 했다.
 ‘뭐지 이 소리가?’
 김준기 사장은 수정한 시나리오를 읽고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누가 말을 했는데.’
 분명히 누군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오른쪽 귀에 속삭이듯이 말을 했다.
 하지만 김준기 사장 말고는 아무도 없다.
 무심코 스마트폰을 봤다. 액정에 문자가 떠 있었다.
 - 재능만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노력이 가상하니까 읽는 척이라도 해야겠네. -
 ‘헉!’
 방금 전에 누군가 오른쪽 귀에 속삭였던 말이었다.
 내용으로 봐서는 김준기 사장이 나에게 했던 말의 속뜻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지? 이게 진짜 김준기 사장의 속마음인가?’
 블루투스 이어폰이 속뜻을 해석해서 들려준 후 스마트폰으로 내용을 전송하는 것 같았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시 김준기 사장에게 말을 했다.
 “사장님 오늘 검정색 슈트가 멋있습니다. 제작자가 검정색 슈트가 잘 어울리면 영화제에 갈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잖아요. 여름왕자가 잘돼서 칸에 가게 되는 거 아닐까요?
 “진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허허허.”
 [얘가 왜 이러지? 못 먹을 걸 먹었나? 어울리지도 않는 립 서비스를 다 하네.]
 김준기 사장의 말과 동시에 이전처럼 누군가 속삭이듯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내 오른쪽 귀가에 말을 했다.
 동시에 들리는 말이라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강의 뉘앙스는 알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봤다.
 - 얘가 왜 이러지? 못 먹을 걸 먹었나? 어울리지도 않는 립 서비스를 다 하네 -
 화면에 나타나 있는 문장이 대강 알아들은 말이랑 같았다.
 “!”
 블루투스 이어폰은 속마음을 들려주는 성능을 가진 것이다!
 금발의 노신사가 작은 쇼핑봉투를 건네며 했던 말이 체인지 마이 라이프였다는 게 생각났다.
 ‘이것들로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긴가?’
 심장이 귀에서 뛰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정한 시나리오를 한참을 읽던 김준기 사장이 놀란 듯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인데? 수십 번 회의를 했어도 해결방법을 찾지 못했던 부분인데 성 감독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를 했어?”
 [진짜 이거 자네가 작업한 거 맞아?]
 나는 속삭이는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보고 김준기 사장의 속마음을 확인했다.
 - 진짜 이거 자네가 작업한 거 맞아? -
 “제가 작업한 거 맞습니다.”
 읽자마자 욱하는 마음에 김준기 사장의 속마음에 답변을 했다.
 “!”
 김준기 사장은 속마음을 들켜버린 듯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성 감독이 작업한 걸 의심하는 게 아니라. 너무 시나리오가 완벽해져서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야. 하하하.”
 그는 신이 나서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나는 각색 방향과 수정사항에 대해 가볍게 브리핑 했다.
 “여름왕자가 인간세계로 오게 되는 개연성을 부여하려다보니 중언부언 쓸데없는 장면이 있어서 그걸 들어냈고요 캐릭터를 보여주는 대사가 아니라 설명조의 대사들도 과감하게 쳐냈습니다. 대사는 전체적으로 설명조에서 캐릭터 감정의 흐름을 연결하기 위한 대사들로 바뀌었구요. 이건 수정한 부분하고 각색 방향에 대해서 정리해놓은 문서입니다.”
 내가 문서를 주자 김준기 사장은 문서와 비교해가면서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
 그는 정말 수정한 시나리오를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표정을 보면 그 시나리오가 재밌는지 재미없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해도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끝까지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김준기 사장은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꼭 제가 제3조연출을 해야 합니까?”
 어차피 제3조연출로 계약하려고 온 것이긴 해도 지금처럼 분위기 좋을 때 한번 쯤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이전 같았으면 우물쭈물 말도 못하고 마음만 상했겠지만 지금은 떳떳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내가 변했나?’
 전에는 없던 당당함이 조금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성 감독이 이제 영화판에 들어오는 애들이나 하는 제3조연출을 왜 해? 제1조연출을 해야지.”
 “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지도 않았고 스마트폰에 그의 속마음이 문자로 뜨지도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때 조일수가 들어왔다.
 “어!”
 그는 나를 발견하고 놀랐다.
 “왔어?”
 [이 자식이 왜 왔지?]
 그의 속마음은 적대적이었다.
 “응 계약하려고 왔어.”
 “아. 그래.”
 [정말 밸도 없는 새끼네. 제3조연출을 해야 한다고 하면 안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하지? 정말 귀찮게 됐네.]
 “!”
 제3조연출을 해야 한다고 한 말은 김준기 사장의 뜻이 아니었다. 조일수가 꾸며낸 말이었다.
 “잘 생각해 본 거야?”
 그의 속마음이 귓가에 들렸지만 혈압이 올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스마트폰을 봤다.
 - 얜 왜 이렇게 질기지? 저번 작품 때 내가 제1조연출 되는 걸 막았을 때 영화판을 떠날 줄 알았더니 이젠 제3조연출까지도 하겠다고 하네. 이 새끼는 능력만 없는 게 아니라 밸도 없는 거야? -
 피가 거꾸로 솟으며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지난번 작품은 조일수가 프로듀서였다.
 그가 중간에서 제1조연출이 되는 걸 막았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나는 지난번 작품에서 제1조연출을 맡게 될 줄 알았다가 제2조연출을 하게 돼서 영화판을 떠나려고까지 했었다.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랬지?’
 천천히 생각해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그와 내가 둘 다 연출부 제2조연출일 때였다.
 “넌 어떻게 공기보다도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냐?”
 “죄송합니다.”
 그는 당시 감독이었던 현종규에게 현장에서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나와 비교 당하며 혼난 적 있었다.
 창의적인 능력에서는 내가 부족했어도 현장에서 제작진행을 하는 실무는 조일수보다 나은 부분이 있었다.
 누구나 성실하기만 하고 능력 없다고 평가하는 나보다 일처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 조일수의 자존심에 상처가 됐을 것이다.
 그는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프라이드가 강했기 때문에 삼류대학인 G대학 연극영화과를 나온 나보다 일처리를 못했다는 것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나보다.
 ‘그래도 그렇지 자식이 비열하게······ 헉!’
 갑자기 가슴이 더욱 답답해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조일수의 속마음을 알고 화가 나서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비포 애프터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난 뒤의 증상과 비슷했다.
 “흡! 헉! 콜록 콜록.”
 호흡이 가빠지며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조 감독 어떻게 된 거야? 성 감독을 제3조연출로 쓰겠다고 했어?”
 “사장님. 잠깐만 저 좀 보세요.”
 김준기 사장이 묻자 조일수는 그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넣었다.
 호흡이 가쁘고 기침이 멈추지 않아서였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속마음을 읽었을 때도 비포 애프터 프로그램을 사용했을 때처럼 TP, 즉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한다는 직감이 왔다.
 블루투스 이어폰도 체인지 마이라이프 키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흡! 콜록! 콜록!!”
 노트북이 부팅되는 동안에도 호흡곤란과 심한 기침이 계속 됐다.
 부팅이 끝나자 화면에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위해 카운트 다운되고 있었다. 1:45, 1:44, 1:43······.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실행될 것이다.
 김준기 사장과 조일수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뜬금없이 사무실에서 요가 동작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면 수행을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방해받지 않고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했다.
 노트북을 들고 아무도 없는 곳을 찾기 위해 뛰었다.
 “콜록! 콜록!! 콜록!!!”
 심한 기침에 호흡곤란증상까지 겹쳐서 걷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1분여 안에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따라할 수 있는 아무도 없는 공간을 찾아야만 했다.
 피를 토하듯이 기침을 심하게 하며 뛰자 복도에 걸어가던 사람들이 중동호흡기 질환(MERS) 환자 보듯이 슬금슬금 피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회의실 문을 열었다.
 “이 프로젝트는······.”
 프리젠테이션 하던 사람과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문을 열고 기침을 해대는 나에게 주목했다.
 “죄······소······옹 하압······ 콜록!! 콜록!! 콜록!!”
 심한 기침을 하는 나를 보며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 뭐야!! 나가!!”
 지금은 MERS 때문에 온 나라가 예민한 시기다.
 “죄······소······옹······합니 콜록! 콜록!! 콜록!!!”
 황급히 문을 닫고 뛰었다.
 ‘옥상!! 그래 옥상에는 아무도 없을 거야!’
 비상계단 문을 열고 옥상으로 뛰었다.
 한 계단씩 오르는 것도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두 계단, 세 계단씩 뛰었다.
 “헉!! 콜록 콜록!!! 허어어업!!!!”
 기침을 참기 위해 숨을 참으며 뛰었다.
 0:20, 0:19, 0:18··· 0:03, 0:02. 결국 옥상으로 가는 문 앞까지 왔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자 하늘에서 바로 떨어지는 강하고 밝은 빛이 안구를 강타했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눈을 감고 옥상으로 나갔다.
 “흡!!!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참았던 숨이 터지며 내장을 쏟아내는 듯한 심한 기침을 시작했고 타이머는 0:00 이 되며 노트북에서 명상음악 같은 선율이 크게 흘러나왔다.
 노트북을 땅에 놓고 눈을 떴다.
 ‘휴~ 살았다!’
 옥상이 너무 밝아 노트북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눈을 가느다랗게 떠서 화면의 3D 이미지에 집중했다.
 3D 이미지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손을 짚었다.
 이후 다리를 뒤로 튕기듯이 쭉 펴서 푸시 업 자세처럼 만들었다.
 “이렇게 뒤로······.”
 그대로 따라했다.
 팔꿈치를 구부린 3D 이미지는 바닥에 온몸을 납작 엎드렸다. 생소하고 몸에 익숙지 않아서 하기가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동작을 따라했다.
 3D 이미지가 취하는 동작을 따라하는 순간부터 호흡이 진정되고 기침이 잦아든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명상음악 선율이 갑자기 경쾌한 리듬으로 바뀌며 땅을 지탱하고 있던 팔을 쭉 펴서 상체를 곧추 세운 3D 이미지는 고개를 등 쪽으로 젖히며 하늘을 봤다
 요가의 코브라 자세 비슷했다.
 ‘이건 좀 할 만하네.’
 갑자기 3D 이미지가 눈을 하늘로 치켜뜨더니 혀를 분당 300번 정도의 속도로 날름거렸다. 나도 따라했다.
 ‘자세가 좀 민망해서 그렇지 나름 재밌네. 하하하.’
 혀를 날름거리다 보니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언제 이렇게 혀를 날름거려보겠는가?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뒤로 젖혀진 나의 시선에서 사람들이 보였다.
 옥상 계단과 난간에서 담배를 물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었다.
 모두 ‘이건 뭐야?’ 하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뭐하는 거야?”
 “글쎄 요가 하는 거 같은데?”
 “요가를 왜 집이나 요가원 같은데서 안하고 회사 와서 해?”
 “우리 회사 다니는 사람 아닌 거 같은데?”
 “그냥 관심종자 또라이 아냐?”
 말을 안 해도 표정에서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옥상에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따라한 탓이었다.
 ‘에휴~ 지금 멈출 수도 없고 난감하네! 잘 살펴보고 시작할걸.’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수행을 해야 하니 아무리 요가의 동작이라고 해도 난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치미를 떼고 계속 혀를 날름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 같아. 우리 회사 사람도 아닌 거 같고.”
 “건물 관리인한테 신고하는 게 낫지 않겠어? 옥상에 이상한 사람 있다고!”
 사람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우르르 옥상을 떠났다.
 ‘건물 관리인이 오기 전에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끝나야 할 텐데.’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쫓겨난다면 여태까지 수행한 게 물거품이 될 것이다.
 3D 이미지가 바닥에 고개를 한쪽으로 대고 엎드렸다. 나도 똑같이 한쪽으로 고개를 대고 엎드렸다.
 3D 이미지는 복식호흡을 하는 듯 배를 부풀렸다 꺼뜨렸다 했다. 나도 따라했다.
 다행하게도 잠시 후 명상음악이 멈추고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끝났다.
 호흡이 완전히 돌아오고 기침도 나지 않았다.
 그때 저쪽에서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이에요!!”
 옥상에서 신고해야겠다고 투덜거리며 내려갔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남자는 건물관리인으로 보이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와 함께 오고 있었다.
 “이봐요!!”
 나는 노트북을 들고 젖 먹던 힘까지 다 해서 반대편 옥상 문을 향해 뛰었다.
 
 ***
 
 집에 돌아온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은 평상시에는 보청기 기능을 하지만 블루투스 기능을 켜면 속마음을 해석해서 들려주고 보여주는 기능을 가졌다 이거지?”
 귀에 끼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서 봤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블루투스 이어폰일 뿐이었다. 이 작은 게 그런 엄청난 성능을 가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선물해준 금발의 노신사에게 감사했다.
 “어쨌든 조심해서 써야겠어.”
 비포 애프터도 그렇고 블루투스 이어폰도 마찬가지다.
 사용을 하고나면 육체적으로 무리가 오고 호흡곤란과 기침이 심하게 나온다.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3분 안에 반드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수행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강에 큰 위험이 올수도 있다는 경고 메시지는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보청기로만 써야겠어.”
 상대의 속마음을 알고자 할 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블루투스 기능을 끄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상대의 속마음 때문에 하루 종일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수행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나저나 어떡한다?”
 김준기 사장의 뜻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조일수가 자신과 함께 작업하는 걸 꺼려한다는 걸 알았다.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제3조연출이라도 하면서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한다.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C대 영화과 대학원에 붙었다.
 학비는 국비로 지원이 되니 걱정이 없다.
 밤에 대리운전을 계속해서 생활비를 벌면 되고 연구원으로 등록되면 매달 100만 원 가량의 수당도 나온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이용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모자란 어머니의 신장투석 비용까지 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깟 돈 몇 푼 벌자고 인간 성공기가 굳이 제3조연출을 할 이유는 없지.”
 순간 내가 한 말에 놀랐다.
 “!”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항상 눈치 보며 남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바빴던 나였다. 뚜렷한 대책 없이 막연한 자신감만으로 일을 저지른 적 없고 저지를 생각도 한적 없는 내가 지금 그깟 돈 몇 푼 벌자고 제3조연출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뭐지?’
 그깟 돈 몇 푼이 없어서 항상 주눅 들고 눈치 보면서 간을 조리며 살았던 나였기 때문이다.
 자신감은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의 내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자신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부모님께 C 대 대학원 합격 사실을 말씀 드렸다.
 하지만 제작전공이 아니라 진로를 바꾸기 위해 이론으로 합격한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다.
 “역시 우리 성 감독이야! 대단해! 그 어려운 C대 영화과 대학원을 합격하고 말이야!!”
 아버지가 실망하실 것 같아서였다.
 “연구원으로 등록되면 연출부 생활하는 것보다 오히려 손질 면에서는 더 괜찮을 거예요. 밤에 대리운전도 계속하고 또 대학원 들어가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가 많대요. 그러면 어머니 신장투석 비용도 문제없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내 말을 듣던 어머니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흑! 흐흐흑!”
 “엄마 또 왜 그러세요?”
 “미안하다 공기야 애미가 평생 너한테 짐만 되고······.”
 “짐은 무거워야 짐이에요. 난 엄마를 무겁다고 생각한적 한 번도 없어요.”
 “애가 괜찮다는데 당신은 왜 자꾸 그래? 좋은날에 말이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뭐라고 하셨다.
 “그렇게 질질짜고 미안해할게 아니라 우리 아들 장하다! 대견하다! 이렇게 칭찬해줘야지. 사람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살아야지 말이야.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 같아? 설령 앞으로도 이렇게밖에 못 산다고 해도 맨날 질질 짜고 미안해하고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어?”
 “네···.당신 말이 맞아요. 앞으론 안 그럴게요. 장하다 우리 아들.”
 웬만해서는 어머니에게 뭐라고 하시지 않는 아버지다.
 말씀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도 나에게 항상 미안해하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계속해서 나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자신이 있었다.
 [따르릉]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성 감독? 나 김준기인데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
 “저 통화 좀 할게요.”
 부모님께 말을 하고 안방을 나왔다.
 “굳이 만나 뵐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제3조연출 안 하기로 결정했거든요.”
 [그럼 당연히 알지. 성감독이 제3조연출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전화로 얘기하시면 안 될까요? 집에 들어와서 다시 나가기가 좀 그렇거든요.”
 아쉬운 게 없으니 눈치보고 간을 볼 필요가 없었다.
 당당했다.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성 감독 동네로 갈게]
 
 ***
 
 오룡 마을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천국과 지옥만큼 큰 차이가 있는 도곡동 팰리스 타워다.
 오룡 마을에는 커피숍 하나 없을 뿐 아니라 재개발로 폐허가 됐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김준기 사장과 도곡동 팰리스 타워 상가의 커피숍에서 만났다.
 “성 감독 좋은데 사네? 이렇게 좋은데 사는지 몰랐어.”
 “······.”
 굳이 그에게 내가 사는 동네는 여기가 아니라고 시시콜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죠?”
 “아유 무서워라. 성 감독 보청기 안 끼고 왔나?”
 김준기 사장의 말을 들으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안 끼고 온 것이다.
 보청기가 살 돈이 없어서 오랫동안 오른쪽 귀로만 듣는 버릇이 생긴 탓이었다.
 “아. 네 제가 깜빡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말을 좀 크게 하겠네.”
 고개를 바로 돌렸다.
 “일단 성 감독한테 내가 정말 미안하네. 제3조연출을 하라고 했다니. 나 같아도 기분 나빴을 거야. 이거 받아두게.”
 그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의 두께만 봐도 얼마가 들었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100장. 100만 원일 것이다. 천 원짜리 백 장은 아닐 테니까.
 “뭐죠 이게?”
 “내 성의니까 받아주게.”
 “네.”
 며칠 전만 같았어도 미안해하고 받을까 말까 주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당당하게 받았다.
 줄만 하니까 주는 것이고 받을만하니까 받는 것일 테니까.
 봉투를 집으며 벌려진 봉투 입구 사이로 안에 있는 돈이 보였다.
 ‘헉!’
 만 원짜리가 아닌 오만 원짜리였다. 오백만 원!!!!
 무엇 때문에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예상 밖의 큰돈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어떤 의미로 주는 돈인지 모르고 넙죽 받았다가 크게 곤란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큰돈인 것 같은데요? 왜 주시는 거죠?”
 “어차피 성 감독이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솔직히 말하겠네. 내가 성 감독을 제3조연출 시켜야한다고 한 게 아닌걸 알 테고.”
 “······.”
 “난 성 감독이 좋은 감독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네.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아직까지 제2조연출밖에 못했지만.”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안다. 이미 낮에 그의 속마음을 듣고 봤다.
 “이미 알았을 테지만 조일수 감독이 자네를 부담스러워 해서 여름 왕자는 그냥 자네 없이 제작에 들어가려고 하네. 그래도 자네한테 사례를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준비한 것이네. 각색계약을 한 게 아니라서 제대로 집행할 수 없지만 성의로 받아주면 고맙겠네.”
 여름 왕자 시나리오를 각색한 대가였다.
 일반적으로 각색계약을 맺고 작업을 했다면 각색료가 천오백만 원 이상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업은 연출부 계약을 하기 위해 비포 애프터 프로그램으로 성의차원에서 한 작업이었다.
 김준기 사장이 돈을 주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13년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하는 동안 유일하게 날 믿어주고 좋게 보아준 사람이다.
 “조일수 감독이 저를 부담스러워한다고 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김준기 사장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에게 수정본이라며 준 시나리오에서 밝히지 않았던 비밀을 말해주기로 했다.
 바로 비포 애프터가 수정한 감독과 주연배우에 관한 비밀!!
 “제가 시나리오를 수정할 때 여름 나라에서 온 왕자에 대한 개연성을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 부분을 과감하게 그렇다고 치고 생략했거든요. 대신 이후로 감정의 흐름을 그럴만하다고 관객이 느낄 수 있게 최대한 감정선을 살리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그 부분이 그 동안 몇 번의 회의를 거쳐서 각색을 했어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인데 성 감독이 아주 기가 막히게 해결해준 거지.”
 “그래서 말인데요. 여름왕자는 개연성을 구축하기 위해 사건의 나열에 치중하는 연출보다는 디테일한 감정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연출을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정현치 감독 같은 사람이요.”
 나의 생각, 아니 비포 애프터가 수정하고 내 몸으로 체화된 것을 가감 없이 설득력 있게 이야기했다.
 “그럼 연출자를 바꿔야 한다는 말인가?”
 김준기 사장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었다.
 “최종결정은 제작자인 사장님께서 하시는 거니까 제가 감히 이래라 저래라 말씀드릴 문제는 아닌 것 같고요 어쨌든 제 생각에 가장 좋은 조합은 주연배우도 최보미보다는 정리혜 같이 감정연기가 뛰어난 배우가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정현치 감독과 정리혜의 조합이요.”
 순수하게 김준기 사장이 고마웠기 때문에 한 조언이었지만 조일수에 대한 안 좋은 마음이 작용한건 부인할 수 없었다.
 
 ***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오백만 원을 드렸다.
 “!”
 어머니는 크게 놀라셨다.
 어제도 백만 원을 드렸다.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오백만 원이라는 돈을 또 드리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엄마 때문에 나쁜 일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그럼요. 여름왕자라고 곧 제작에 들어갈 시나리오인데 제가 손을 좀 봐줬거든요 제작사 사장이 수정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는지 너무 고맙다면서 주더라고요”
 “아. 그래.”
 어머니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했다.
 “당분간 생활비하고 엄마 투석비용은 걱정 안 해도 돼요.”
 “고맙다. 공기야.”
 처음으로 어머니가 미안해하지 않으셨다.
 “앞으로는 고맙다는 말씀도 하지 마세요. 아들이 생활비 버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투석비용도 마찬가지구요.”
 “그래 그러마.”
 어머니가 웃으셨다.
 십 년 넘게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본적 없었다.
 “엄마 당분간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젠 돈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래만 사세요.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어머니의 웃는 모습을 보고 좋아서 정신이 잠시 어디 갔었나보다.
 돈 걱정 없게 하겠다는 말은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주겠다는 것만큼 실현 가능성 없는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이제야 충무로가 우리 성 감독을 알아보는구만! 공기야 애비가 뭐랬냐? 멈추는 걸 걱정해야지 느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니? 하하하.”
 아버지도 기분이 좋으셨다.
 
 ***
 
 대학원 입학식은 이 주가 남았고 내일 있을 신입생 환영회 빼고는 특별한 일이 없다. 하던 대로 콜 밭인 강남 교보문고 사거리로 대리운전을 나갔다.
 사람들이 경기가 안 좋다고 하는 말은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습관처럼 하는 말 같았다.
 오후 5시부터 시작한 대리운전은 밤 10시 현재 벌써 7건을 했다.
 주로 일식집이나 고기 집에서 1, 2차를 끝낸 손님들이 근처의 룸살롱으로 이동하기 위한 대리운전이었다.
 “여기 있으면 경기 안 좋다는 말은 실감할 수 없단 말이야. 돈 많은 사람 참 많아.”
 짧은 시간에 여러 건을 했지만 거리가 워낙 가까운 탓에 크게 돈이 되지는 않았다.
 “내일 신입생 환영회가 있으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다.”
 원래 대리운전은 새벽 12시가 넘어야 절정이다.
 그 시간이 장거리가 많이 나오고 손님도 많다.
 하지만 명문 C대학의 대학원생으로서 첫 선을 보이는 날이니만큼 최상의 컨디션으로 참석하고 싶었다.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콜을 잡는 단말기가 울렸다.
 - 강남 교보문고 사거리 -> 도곡동 팰리스 타워. 2만원 -
 ‘오케이!’
 순식간에 콜을 낚았다.
 팰리스 타워면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된다.
 어차피 집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한다.
 일찍 집에 가기 위해서라도 콜을 잡는 게 현명했다.
 ‘버스비도 굳고 돈도 벌고. 이런 걸 두고 꿩 먹고 알 먹고 라고 하는 거지’
 손님이 기다리는 장소로 가니 훤칠한 키에 볼륨 있는 몸매를 가진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팰리스 타워 가신다고 대리기사 부르셨죠?”
 “네.”
 “사장님은 어디 계시죠? 차는 어딨구요?”
 “제가 갈 건데요? 차는 여깄구요.”
 그녀가 가리키는 차는 경차였다.
 나는 그녀를 룸살롱에서 손님들이 귀가할 때 대리기사가 올 때까지 손님을 배웅하는 룸살롱 아가씨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쩐지 차림새가 얌전하더라. 그런데 일반인이 왜 이렇게 예쁜 거야?’
 키를 받아서 운전석에 올랐다.
 그녀가 뒷좌석에 타자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사모님.”
 “풉.”
 그녀는 마시던 생수를 뿜었다. 덕분에 내 뒤통수가 물에 젖었다.
 “죄송해요 아저씨. 어떡하죠?”
 그녀가 손수건으로 내 뒤통수를 닦아줬다.
 “괜찮습니다. 시원하고 좋네요. 하하하.”
 “그런데 저 사모님 소리 들을 정도로 나이 먹지 않았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아니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모님이 입에 붙어서.”
 “괜찮아요. 말씀 편안하게 하셔도 돼요 호호호.”
 그녀는 상냥했다. 술이 취해서 들뜬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성품이 친절한 사람인 듯했다.
 신호에 걸려 룸미러로 그녀의 얼굴을 봤다.
 ‘헉!’
 최다인이었다.
 ‘아니 어떻게 내가 최다인을 못 알아봤지?’
 그녀는 4살 때 아역부터 시작한 25년차 배우다.
 아역일 때 깜찍하고 귀여운 외모와 어른 못지않은 섬세한 감정연기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활동을 하면서도 학업을 놓지 않고 대연 외고를 최상위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을 하버드로 가면서 활동이 뜸해졌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드라마나 상업영화보다는 저예산이라도 사회의 소외받은 부분을 다루는 영화위주로 출연을 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중에게서 멀어졌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예쁘고 똑똑하면서 연기 잘하고 의식 있는 배우다.
 항상 화제를 몰고 다니는 연예인과는 거리가 있는 연기자였다.
 “어?”
 그녀는 룸미러를 보다 성공기와 눈이 마주쳤다.
 “성공기 조감독님 아니세요?”
 ‘헉!’
 아까는 어둡기도 했고 대리기사와 손님으로 만났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알아볼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제 이름을 기억하세요?”
 그녀와는 6년 전에 주연배우와 연출부 제2조연출로 한번 작업을 한 게 전부였다.
 “어떻게 이름을 기억하냐니요? 같이 작업했는데 왜 기억을 못해요? 촬영할 때 제가 추워하니까 저한테 재킷도 벗어주셨었잖아요.”
 그녀는 일반적인 배우들과는 달랐다.
 작업을 할 때 각 팀의 막내까지 모든 스태프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인격적이고 친절하게 대했다.
 인기 좀 있다고 어깨가 올라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턱을 치켜드는 안하무인 연예인병에 걸린 배우랑은 달랐다.
 “분칠하는 것들은 믿을게 못 돼.”
 그녀의 행동이 가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삐뚤어진 스태프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요. 전 이쪽에서 술 잘 안마시거든요. 그런데 오늘 이상하게 이쪽에서 친구들이랑 만나고 싶더라구요. 조감독님 만나려고 여기서 술 마셨나 봐요.”
 “그런가요? 저도 집이 팰리스 타워 쪽이거든요. 버스타고 들어가려다 팰리스 타워 콜이 떠서 잡았는데 이렇게 다인 씨를 만나게 됐네요. 하하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어느덧 팰리스 타워까지 왔다.
 “성공기 조감독님 영화 기다릴게요. 그리고 그때 제가 할 만한 배역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녀가 헤어질 때 한 말이었다.
 말이라도 그녀는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외고를 나오고 하버드를 졸업했으니까 잘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 사는지는 몰랐네.’
 그녀의 인성이 더 좋게 느껴졌다.
 팰리스 타워에 살 정도의 집안 환경에 연예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배우라면 절대로 경차를 타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웬만하면 최소한 독일 수입 차 정도는 탈 테지만 그녀는 경차를 타고 다녔다.
 “다인 씨 같은 유명배우가 이런 경차를 타고 다닐 줄은 몰랐어요.”
 “요즘 공부하느라 수입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수입차를 타요? 경차 유지하는 것도 저한테는 벅차요.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요. 그래도 성공기 조감독님한테 대리운전비 깎아달라고는 안 할게요. 호호호.”
 부자 부모에게 손을 벌려서 외제차를 타느니 자신의 힘으로 경차를 타겠다는 그녀는 보기 드문 의식 있는 배우였다.
 
 
 # Chapter 2.
 
 대학원 원우회 겸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C 대 앞 고기 집으로 가야했다.
 “어머니 저 신입생 환영회 갔다 올게요.”
 방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신을 신고 나가려다 보니 머리가 지저분해 보였다.
 교수들과 대학원 선배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최대한 깔끔하고 괜찮게 보이고 싶었다.
 ‘어떡한다?’
 커트를 하고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왁스를 바르기로 했다.
 나는 출입문 앞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며 왁스를 바르다 짜증이 났다.
 낡고 깨진 거울을 청 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여나서 얼굴이 전체적으로 어떤지 확인 할 수 없었다.
 “아휴! 거울을 하나 사든지 해야지.’
 깨진 거울의 작은 부분을 통해 본 머리는 왁스를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귀 부분이 덥수룩하게 보였다.
 오른쪽 귀에 꽂았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고 덥수룩한 귀부분에 집중적으로 다시 왁스를 발랐다.
 “어디보자~”
 효과가 있었다.
 왁스를 바른 귀의 윗부분이 납작하게 붙어 턱 선이 날렵해 보였다.
 “오케이!”
 나가려고 하는데 목발을 짚은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흥분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연예신문을 보여주며 말했다.
 “공기야! 이거 봤니?”
 아버지는 스포츠 신문의 연예란에 나온 영화 ‘여름왕자’ 에 대한 기사를 보여줬다.
 “제작사하고 감독하고 의견차이가 있어서 원래 연출하려고 했던 감독을 잘랐다네?”
 김준기 사장은 내 조언을 들은 듯했다.
 “주연배우도 최보미에서 정리혜로 바뀌었다는데? 감독 자르고 주연배우 교체했으니까 새로운 감독을 찾지 않겠어?”
 기사를 보니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
 “그렇겠죠.”
 김준기 사장은 내 조언대로 정현치 감독을 기용할 것이다.
 조일수가 구박할 때마다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야 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감독에서 잘리는데 내가 일익을 담당했다.
 그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주는 만큼 받는 것이다.
 김준기 사장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나도 그의 비즈니스가 잘되도록 선의로 보답한 것뿐이다.
 그동안은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을 살 것이다.
 그것이 호의든 악의든 간에.
 “너한테 감독해달라고 연락오지 않을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살짝 흥분해 있었다.
 내가 각색한 시나리오를 제작사 사장이 마음에 들어 하고 돈까지 줬다는 것에 대해 고무되신 듯 했다.
 “제1조연출도 안했는데 무슨 감독이에요? 그리고 당분간은 대학원 다녀야 해서 시간도 없어요.”
 “아. 맞다 우리 성 감독 국비 장학생 됐지? 그래 대학원 다녀야지 암. 그렇구말구!”
 원래 아버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하셨다.
 할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셔서 그 길을 가지 못하셨다.
 그 꿈을 내가 대신 이루어주길 바랬다.
 “대학원 마치고 나면 나중에 감독도 하고 다 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서운해마세요.”
 “누가 서운해한다고 그러냐? 국비 장학생으로 대학원에 붙는 아들한테. 영화야 나중에 해도 되는 거 아니겠냐?”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아버지가 서운해한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다시 충무로 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건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다시 차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
 
 대학원 원우회 겸 신입생 환영회는 박사 2차 학기 명동훈 원우회장의 사회로 시작됐다.
 신입생은 이론전공 박사 한 명, 제작전공 MFA 과정 두 명, 이론 전공 석사 네 명을 뽑았다. MFA 과정 신입생 한 명만 빼고 모두 참석했다.
 (MFA: Master of fine Art. 영화나 미술학 계열의 석사학위, 영화에서는 제작석사라고 부르며 보통 3년의 수업과정을 거쳐 전공별로 제작한 영화와 논문 두개 모두 통과되어야 학위를 받을 수 있음.)
 깔끔하게 하고 나오려고 왁스를 바르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고 나왔다. 버스를 타자마자 알았지만 행사에 늦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그냥 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앞에서 사회자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집중해서 들었다.
 “안녕 하십니까 교수님 이하 원우 여러분. 진행을 맡은 저는 민중 C대 영화과 대학원 제33기 원우회장을 맡은 이론 전공 박사 2차 학기 명동훈입니다.”
 신입생과 재학생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먼저 저희에게 학문의 길을 이끌어주실 교수님들을 소개하겠습니다. 학과장이신 임용건 교수님이십니다.”
 임용건 교수는 C대 대학원에서 나와 그나마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졸업한 삼류대학인 G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다 내가 1학년 2학기 때 C대로 옮겼다.
 임용건 교수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1학년 1학기 때 나는 그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명동훈의 호명에 교수들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입생들은 호기심에 두리번거렸다.
 “임용건 교수님은 일본에서 세미나 후에 귀국하셔서 참석하시기로 했는데 비행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오시지 못했습니다. 대신 제가 임용건 교수님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재학생들은 잘 아실 테고 신입생 여러분들은 대학원 입학시험 볼 때 학업계획서 인터뷰 과정에서 임용건 교수님을 뵀을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 임용건 교수님께서 쓰신 시네마 아트나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이해 같은 책을 여러 번 보셨을 거구요.”
 임용건 교수는 영화이론이 전공이다.
 특히 할리우드 고전영화 이론 전문가였다.
 그는 50대 초반의 나이지만 학계에서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마친 그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답게 학문적 성과가 뛰어났고 깐깐하기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매스컴에도 자주 나오고 각종 영화이론 관련 연구 사업은 그가 없이 진행되는 게 없을 정도였다.
 각계에서 많은 연구비를 지원받는 교수로 학계와 학교 양쪽 모두에서 영향력이 큰 교수였다.
 명동훈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폈다.
 “임용건 교수님께서 꼭 전하라는 말씀을 제가 대신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생동감 있게 교수님 성대모사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명동훈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일순간에 장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교수들과 재학생들은 임용건 교수의 캐릭터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나처럼 한쪽 귀가 안 들려서 생긴 버릇은 아니었다.
 웬만하면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까다로운 성격 때문이었다.
 명동훈이 임용건 교수의 성대모사를 하며 메모를 읽기 시작했다.
 “임용건입니다. 이론 전공은 앞으로 저랑 같이 이런저런 연구 사업을 많이 할 겁니다. 공부 열심히 할 자신 없는 선생들은 오늘 자리가 끝나면 바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설렁설렁 시간 지나고 버티면 졸업 할 수 있는 대학원이 아니니까요.”
 명동훈의 성대모사가 끝나자 재학생들은 키득거렸다.
 “역시 임 교수님이야 하하.”
 하지만 신입생은 웃지 않았다.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지 않을 거면 그만두라는 식의 엄포를 놓는 교수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임용건 교수는 말만 ‘선생’이라고 존대했을 뿐 공부하지 않을 놈은 일찌감치 그만두고 꺼지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교수가 대학원생을 ‘선생’이라 칭하고 대학원생끼리 ‘선생’이라 존대하는 것은 C 대학교 영화과 대학원의 전통일 뿐이었다.
 명동훈은 무당이 접신에서 돌아오듯이 삐딱하게 째려보던 고개를 바로하며 원래의 말투로 말을 이었다.
 “임용건 교수님의 말씀이 끝났습니다. 다음은 역시 영화 이론 전공 송정규 교수님입니다.”
 전체적으로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더 많은 인상 좋은 남자가 일어났다.
 “대학원에 입학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송정규 교수는 푸근한 인상으로 유명한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할아버지처럼 서글서글하고 인상이 좋았다.
 머리는 거의 백발이었지만 피부 톤이나 얼굴의 주름으로 봐서는 임용건 교수와 비슷한 또래 일 듯 했다.
 “임 교수님께서 웃자고 신입생 선생들한테 겁을 주신 것 같습니다. 웃자고 하신 말씀에 울면서 진짜로 학업을 포기하는 분이 계실까봐 말씀 드립니다. 열심히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임 교수님은 워낙 학문적 성과가 높은 교수님이라 기대치가 높을 뿐입니다. 저는 임 교수님만큼 뛰어난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만 하시면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대학원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다 같이 노력하면서 열심히 해 보죠.”
 송정규 교수는 C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다.
 굳이 얘기하자면 그는 교수 골품제도의 최상위 계급인 성골이다.
 임용건 교수에 비해 대외적인 지명도나 학문적인 성과는 떨어지지만 C대 영화과 출신이었다. 때문에 본교 출신자들을 우대하는 C대학 교수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굳이 따지자면 성골이라 할 수 있었다.
 송정규 교수의 인사말에 대한 답례로 박수가 끝나자 명동훈은 제작전공 교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제작 전공 교수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연도기 교수님입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미국에서 CF 감독으로 크게 성공한 감독출신이다.
 CF와 뮤직비디오에서는 젊은 나이에 크게 인정을 받고 성공했지만 고국으로 돌아와 연출한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하고 교수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연도기입니다. 제작석사 MFA과정으로 입학하신 분 손들어보세요”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정현웅 씨죠? 유정현 씨는 안 오셨습니까?”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 유정현인가?’
 생각해보니 C 대학은 유정현의 할아버지가 재단이사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C 대학 총장이 유 씨인데.’
 만약 유정현이 자신이 아는 유정현이라면 생김새로 봐서 C대 총장은 그의 아버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겠지 유정현이란 이름이 한둘이야?’
 설마하며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기대는 무참하게 깨졌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아는 유정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싱글 슈트를 입은 그는 교수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들어와 신입생에게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저 놈이랑 같이 대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건가?’
 어렸을 때의 기억과 며칠 전 대리운전을 하며 다시 만났을 때 그의 행동이 떠올랐다. 유쾌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유 선생.”
 유정현은 행사에 한참을 늦었음에도 송정규 교수와 연도기 교수는 모두 그를 반겼다.
 개인적으로도 그를 잘 아는 모양새였다. 행사에 늦은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단 이사장의 손자이자 총장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교수들도 그에게 잘 보이려고 할 정도의 배경이었다.
 “그럼 제작석사 MFA 과정 신입생이 모두 왔으니 간략하게 앞으로의 제작전공 대학원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연도기 교수가 제작석사 MFA 과정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고 성공기는 찝찝한 마음으로 그의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명동훈이 다시 진행을 했다.
 “자 그럼 이제는 신입생 소개가 있겠습니다. 이쪽에서부터 각자 전공과 자신에 대한 소개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첫 번째에 앉아있던 신입생의 소개가 시작되자 유정현이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한테 잘못한 게 있나요?”
 갑자기 다가와 정중하게 말을 하는 유정현에게 놀랐다.
 순간 당황했다.
 “아······아니요. 왜 그러세요?”
 “아까부터 저를 계속 째려보셔서요. 제가 선생님께 무슨 잘못한 일이 있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
 ‘아!’
 나는 그제야 내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왼쪽 귀를 사용해서 소리를 들었던 습관과 최근에는 몇 달 동안은 그나마도 보청기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보청기 역할을 하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못 느꼈던 것이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이십여 년 간의 습관대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귀로 듣다보니 시선이 앞에 있던 유정현을 째려보는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를 티 나게 째려볼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다.
 체인지 마이 라이프 키트를 소유하고 엄청난 성능을 경험하고 난 순간부터는 조급함보다는 느긋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를 본의 아니게 째려본 건 순전히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놈한테 내 사정을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
 유정현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너한테 맞아서 이렇게 됐다고 하고 싶었지만 치료비를 받았기 때문에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요. 명동훈 선생님을 쳐다본 걸 앞에 앉아 계셨던 선생님을 째려보는 것처럼 느끼셨나봅니다.”
 “아. 네.”
 유정현은 뭔가 미심쩍었지만 아니라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개차반 같은 놈이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점잖고 괜찮은 사람인줄 알겠어.’
 뭔가 찜찜해하는 유정현을 모르는 척하고 신입생들의 자기소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한재광이라고 합니다. S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뉴 보스턴 창업투자에서 영화투자 심사역을 하다 이번에 이론전공 석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교수님 지도에 잘 따르겠습니다. 선배 선생님들께서도 잘 인도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중 C대 파이팅!”
 “민중 C대 파이팅!!”
 교수들은 화답으로 박수를 쳤고 재학생들은 ‘민중 C대 파이팅’을 외쳤다.
 ‘바보 같은 놈들. 민중 C대는 무슨’
 C대 재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민중을 위한 학교라는 자부심 때문에 C대학 행사의 앞뒤, 중간 중간에는 수시로 ‘민중 C대 파이팅’을 외치고 행사에 쓰이는 술도 막걸리만 쓴다.
 하지만 지금의 C대학은 민중이랑은 전혀 상관없다.
 독립운동을 했던 고정수 선생이 민족과 민중을 위해 설립한 학교지만 이십년 전부터는 유정현의 할아버지가 인수해서 운영 중이다.
 ‘민중 C대’ 라는 구호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민족이나 민중과도 상관없으며 설립자인 고정수 선생과도 전혀 관계없는 사학이다.
 학교의 뿌리는 민족과 민중을 위한 학교일지는 모르지만 유정현의 할아버지가 재단을 인수한 뒤로는 사학비리 사건에 노출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비리를 저지르는 사학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생은 한방이야!』 1-2권에 계속>

댓글(3)

비류휘    
무료 회차 부분이 이 소설 안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임 그러므로 구매를 생각해보고 하시기를 바람
2017.06.21 10:54
비류휘    
내가 일괄구매해서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읽고 끝내려고 했는데 가독성 정말 떨어지네 읽다가 걍 때려쳤음
2017.06.23 05:09
tonic    
change my life 도 못읽는데 대학원을 간다고?
2017.08.2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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