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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협 소운강 1

2017.06.02 조회 993 추천 1


 <마협 소운강 1권>
 
 
 작가의 말
 
 
 딜레마.
 논리학이 발달한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말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두 가지 명제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일컫는 이 말은 사면초가, 진퇴양난, 속수무책 등의 상황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뜻과는 구별되어 사용되는데, 그것은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누군가의 공격이 아닌 자신의 실수, 또는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고슴도치가 서로의 온기를 원해 다가갔던 것처럼 우리가 딜레마에 빠지는 대부분의 사태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리고 그 선택이 무엇이든 균형이 무너질 것이 확연히 보이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럴 땐 정말 난감하다 하겠습니다.
 나, 또는 누군가가 딜레마에 빠지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정신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물의 깊이가 자신의 무릎에도 차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딜레마란 녀석은 상당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슴도치의 선택이 종종 고통과 좌절을 가져올지라도 그 고통을 감내하고 겨울을 버텨 내는 동안 새로운 봄이 오고 있음은 ‘진리’에 속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딜레마는 ‘진리’에 가까운 봄의 귀환처럼 익숙하게 찾아오는 ‘겨울’과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겨울을 기다리고, 좋아하는 나일지라도 백야가 드리워지는 극점의 겨울은 과히 반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촘촘히 변해가는 가변적인 세상에 던져진 우리들은 이제 딜레마조차 즐겨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딜레마임을 이미 익숙해질 정도로 모두가 알고 있지 않는가.”
 태초에도 그랬듯이 선택이란 본능적인 바람일 뿐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는 남기 마련이고, 그것은 우리를 성장시킬 가장 낮은 곳의 밑거름이 되고 있음을 떠올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딜레마라는 것 성장통이지 않을까요?
 
 ***
 
 안녕하세요. 이문혁입니다.
 이번에는 봉팔이의 사부, 마협 소운강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독자 여러분들께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놔서 무슨 소린가 하셨죠.
 새롭게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 막막하고 답답한 감정,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때마다 한 단계씩 발전해나가는 작은 것들을 느낄 때마다 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기에······.
 
 작가라는 것, 탈고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문혁이지만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가 여러분과 만나고 있다는 점,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마협 소운강의 일대기··· 지금 시작합니다.
 
 
 1장 공자님 말씀에······
 
 
 수많은 관리들과 학자들을 배출했던 한림 서원에 글 읽는 소리는 사라지고 신경질적인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소씨 성을 가진 서생 하나 때문에 언제부턴가 이런 소란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한림 서원이다.
 “네··· 네놈이!”
 한림 서원의 최고참 서생이자 나름대로 학식을 갖추었다는 왕후정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내가 뭐!”
 “어찌 신성한 서원에서 그런 망발을 늘어놓는단 말이냐!”
 “훗! 신성 좋아하네. 언제부터 서원이 신성한 곳이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군.”
 “네 이놈!”
 왕후정은 해괴한 해석을 늘어놓으며 서원의 서생들을 반병신 취급하는 소운강의 망발에 분기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한판 뜨시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지.”
 소운강은 왕후정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꼭 그것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희죽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네놈의 다리를 분질러 쫓아내지 못하면 내가 성을 갈고 말겠다!”
 왕후정은 소운강을 향해 삿대질까지 해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출사의 길이 막혀 답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있던 왕후정이었다. 평소에도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던 놈이 알아서 시비를 걸어줬으니 실컷 화풀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후후후, 그럼 오늘 이후로 왕후정은 개후정이 되는 것인가?”
 “무··· 무엇이!”
 왕후정은 자신의 성을 개(犬)씨로 바꿔 부르는 소운강을 보며 결국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다.
 평소 색주가를 드나들며 힘깨나 쓰는 자들과 어울렸던 왕후정은 서생 복장을 하고 있다 해도 반쯤은 주먹패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다. 나름 사람을 패본 경험이 많은 왕후정이었기에 그가 내지른 주먹은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뻑!
 왕후정의 주먹이 소운강의 얼굴에 그대로 내리꽂히며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후정 편에 서 있던 서생들은 반항 한번 못해보고 얼굴을 내준 소운강의 모습에 고소한 표정을 지었지만, 막상 비명을 터트린 것은 소운강이 아닌 왕후정이었다.
 “끄아아악!”
 “크크큭,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잊지 마.”
 왕후정의 주먹이 날아올 때 살짝 고개를 숙였던 소운강은 죽는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감싸고 있는 그를 보며 킥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붉게 달아오른 이마를 몇 차례 쓱쓱 문지르던 소운강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자··· 잠깐!”
 왕후정이 다급한 표정으로 ‘잠깐’을 외쳤지만, 단단히 마음먹은 소운강을 멈춰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라 했다. 하다 말면 안 하니만 못하느니!”
 소운강은 끙끙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후정에게 거침없이 주먹을 날려 보냈다.
 퍽! 퍽! 퍽!
 연달아 세 번의 주먹질이 왕후정의 얼굴을 강타하자 붉은 핏물이 터져 나오며 그는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코피가 터진 것이다.
 “으아아아악! 피··· 피? 소운강 너 이 새끼!”
 왕후정은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반쯤 이성을 잃으며 고함을 질러댔다.
 “부르셨소, 개후정 선생?”
 “보고만 있을 것이오? 유서 깊은 한림 서원에 저런 망나니가 설치게 놔둘 생각이냔 말이오!”
 왕후정은 자신의 편에 서 있던 서생들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크크큭, 본시 말이 앞서는 자들치고 몸이 부지런한 자가 없다고 했지. 세상을 위해 학문을 펼치려고 수학한다는 자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세상 탓만 하고 있으니. 쯧쯧쯧!”
 소운강은 발악하듯 외쳐 대는 왕후정을 보며 그와 서생들을 싸잡아 욕해버렸다.
 “이··· 이놈!”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서생들은 소운강의 입에서 자신들을 모독하는 발언이 터져 나오자 너 나 할 것이 없이 얼굴이 붉어지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렇지! 바로 그렇게 움직이란 말이다!”
 소운강은 열이 넘는 서생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는 걸 보면서도 겁을 먹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네놈을 쫓아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곳을 떠날 것이다!”
 서생들은 소운강을 향해 온갖 인상을 써대며 주먹과 발을 날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어려서 무관에 다녔던 자들도 섞여 있어서 소운강이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도 있었다.
 가슴을 탕탕 내려치며 호탕한 웃음을 보이던 소운강이었지만, 한두 번 손발이 엉키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생들의 공격에 정신없이 얻어맞기 시작했다.
 “죽어라!”
 “빌어먹을 놈!”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이빨을 모조리 부러뜨려 주마!”
 서생들의 입에서 뒷골목 주먹패들이나 쓰는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다들 독기가 오를 대로 올라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상황이었다.
 “크하하하! 그래! 용기가 있다면 그렇게 만들어보거라! 공자 왈, 맹자 왈 냄새나는 헛소리는 그만 하고 그렇게 몸으로 움직이란 말이다!”
 소운강은 퉁퉁 부어올라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도 웃음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소운강은 탁상공론과 한탄 섞인 목소리로 세상 탓만 하는 서생들의 모습이 그 어떤 것보다도 보기가 싫었었다.
 “닥치지 못할까!”
 서생들은 정신없이 얻어맞으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는 소운강에게 더욱 거칠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라고 이렇게 사는 것이 답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몽고가 송나라를 무너트린 뒤론 출사의 길이 멀기만 했던 것이다.
 그때, 소란을 듣고 달려온 한림 서원의 학자들이 난장판이 돼버린 전각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당장 멈추지 못할까!”
 평소 성격 좋기로 유명한 서원의 원주 맹환진의 호통에 서생들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굳어버렸다.
 “스··· 승님.”
 “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냐!”
 왕후정과 서생들은 맹환진의 호통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맹환진은 멍석말이라도 당한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소운강을 내려다봤다.
 “어서 의원에게 데려가거라.”
 “네, 원주님.”
 맹환진의 뒤를 따랐던 학자들은 급히 소운강을 안아들었다.
 “오늘 벌어진 일이 타당한 절차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이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맹환진은 매서운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대로 전각을 나가버렸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던 서생들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사건을 일으켜 버린 자신들의 행동에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코피를 흘리고 있던 왕후정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번 기회에 그놈을 완전히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네. 놈을 궁지에 몰아넣을 확실한 방법을 강구하지 못한다면 서원에서 쫓겨나는 건 바로 우리들이 될 테니 말일세.”
 “설마 우리를 쫓아내기야 하겠는가? 개봉성 성주가 자네의 숙부 아닌가. 너무 걱정하지 말게.”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왕후정에게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며, 서생 하나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
 “그러네. 한 달이 조금 못 되었지.”
 “그랬군. 그래서 한림 서원의 특성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었군.”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휴! 자넨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내 숙부님이 설사 왕이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인가?”
 “한림 서원이 남송 때부터 있었다는 것은 자네도 알 테지?”
 “물론이네. 그래서 한림 서원이 유명한 것 아닌가.”
 정형도는 서생의 대답에 고개를 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림 서원은 오래되어서 유명한 게 아니라,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네. 만약 누군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가 황자의 신분을 지녔다 해도 거침없이 쫓겨나고 말 걸세.”
 “어떻게 그런 짓을······.”
 서생은 정형도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서생들의 표정이 모두가 한결같자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게 진짜라면··· 이러고 있어선 안 되지 않나! 왕 형의 말대로 빨리 방법을 찾으세!”
 “일단 놈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심문이 열릴 것이네.”
 왕후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심문이라니!”
 개봉성 성주의 조카는 심문이라는 말에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논리의 싸움일세.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 논리적으로 증명을 해내는 쪽이 승리를 하는 자리지.”
 “쉽지 않은 일이군.”
 “하지만 우리들의 힘을 하나로 뭉친다면 못할 것도 없지. 놈이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듣고 있다곤 하나,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일세.”
 서생들은 왕후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자신들과 비교되는 소운강이다. 이번 기회에 눈앞에서 치워버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
 
 왕후정의 예상대로 심문은 7일도 되지 않아 열렸다. 서원 내에서 일어난 집단 폭력 사태에 대해 양 당사자들의 증언을 듣고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자리였다. 물론 잘못이 인정된 자는 그에 합당한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심문에 호출된 자들은 사건의 당사자인 소운강과 왕후정, 그리고 그의 편을 들었던 서생들이었다.
 심문을 담당한 자들은 서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학자들이었고, 중앙에는 원주 맹환진이 굳은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다.
 “시작하시오.”
 “네, 원주님.”
 맹환진이 심문의 시작을 알리자, 질의를 담당하고 있던 학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본 사건은 학문을 연구하고 높은 뜻을 펼치기 위해 수학하는 신성한 학당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으로 소운강과 왕후정이······.”
 한동안 사건의 개요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심문을 시작하기 전에 사건의 정황을 모두에게 알린 것이다.
 “험험! 그리하여 소운강은 전치 삼 주의 부상을 입었습니다.”
 “본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시오.”
 “네, 원주님.”
 심문은 나름대로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시작을 알리는 원주의 선언과 사건의 개요를 알리는 정황 설명, 그리고 당사자들의 주장을 들어본 후에 앞뒤 정황과 주장을 비교해 논의를 나누는 형태였다.
 물론 논의를 나누는 것은 원로 학자들의 일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직접 해명을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원로 학자들은 양측의 주장을 듣고 잘잘못을 가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모든 합의가 마무리되면 원주가 판결을 내리는 형태였다.
 “왕후정은 앞으로 나오거라.”
 “네.”
 왕후정은 자신에게 먼저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앞서 발언하는 자가 상황을 주도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주절거리기 전에 자신에게 유리한 형태로 정황을 설명하고, 각색된 정황에 대해서 상대의 반박이 들어올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준비가 부족한 자들은 선(先)반언이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서생들과 수많은 논의를 거쳐 소운강이 반박할 내용에 대해 논리적 납득 조건을 준비해놓은 왕후정이었기에, 자신에게 발언권이 먼저 주어진 것은 자신의 손에 8할 이상의 승리가 이미 주어진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일어난 폭력 사건에 할 말이 있다면 해보거라. 지금부터 네가 하는 말들은 서기들이 모두 기록을 할 것이니, 차후 번복된 말을 하거나 잘못된 정황을 늘어놓은 것이 파악되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됨을 명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변론의 시작을 허락한다.”
 왕후정은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자신과 서생들이 세웠던 수많은 계획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변수가 많은 싸움이니 임기응변이 뛰어난 자가 오늘의 심문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왕후정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왕후정은 원로 학자들과 원주를 향해 사죄의 뜻으로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왕후정은 학자들과 원주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소운강이 한림 서원에 들어온 지 올해로 구 년째입니다. 그리고 서원에 사고가 끊이지 않은 지도 벌써 구 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왕후정은 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소운강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가 일으켰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서원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후정은 잠시 말끝을 늘이더니 다른 서생들 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눈만은 원로 학자들에게 향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서생들이 학문에 정진할 시간을 빼앗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여러 스승님들도 이미 파악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탁탁탁!
 왕후정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말을 끊는 소리가 심문장 안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심문장 중앙에 앉아 있는 원주 맹환진에게 향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책상을 두들긴 것이다.
 “왕후정.”
 “네, 원주님.”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사태에 대한 변론일세.”
 “무··· 물론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들먹이며 소운강의 과거를 공론화시키는 게 아니란 말일세.”
 “······.”
 왕후정은 맹환진의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심문에서 자신들이 승리한다고 해도 폭력을 사용한 것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왕후정이었다.
 심문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왕후정과 서생들은 사고의 발단이나 책임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 이상을 원했다. 자신들이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된 것에 당위성을 부여하려면, 누구라도 그 순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공감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소운강이 과거로부터 일으켜 온 모든 문제를 부각시켜 그동안 서원이 얼마나 몸살을 앓았는지, 또 그의 궤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서생들이 혼란에 빠져 들었는지 그것을 밝혀 고지식한 원로 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심문의 핵심을 비켜 나간 과도한 작업은 결국 자신에게 더 큰 문제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적정한 수준의 언급, 적정한 수준의 공감을 목적으로 가볍게 끌어낸 이야기였다.
 ‘빌어먹을! 원주 저 늙은이가!’
 원로 학자들의 얼굴이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변하려는 순간, 원주 맹환진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림 서원의 원주라는 직위는 결코 만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원의 황제, 대칸마저도 맹환진 앞에서는 예의를 차렸을 정도이니 자신 같은 일개 서생의 힘으로는 넘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림자조차 밟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원주가 자신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했으니 그나마 자신 쪽으로 돌아서려던 원로들마저도 금세 불쾌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지. 어차피 심문에서 밀리면 내 인생은 이걸로 끝장이야!’
 “공론화를 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이번 사건이 그동안 소운강이 벌인 일들과 무관하지 않기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심문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면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왕후정의 발언에 원주 맹환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정이 아니라 조심하겠다는 왕후정의 발언은 원주인 자신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왕후정.”
 “네, 원주님.”
 “자네의 말대로라면 서원에서 벌어졌던 폭력 사건의 원인이 과거 소운강이 벌였던 기행 때문이라는 것이군.”
 왕후정은 자신의 변론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원주가 계속해서 말을 걸고넘어지자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호굴에 들어선 이상 자신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계신 모두가 이미 숙지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림 서원은 선인들의 말씀과 글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곳입니다. 그런데 소운강은 그런 한림 서원의 모든 것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서원의 서생들을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인간들로 몰아세웠습니다. 물론 저희들이 소운강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희는 서원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큰 명예를 얻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희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해괴한 궤변을 늘어놓는 소운강의 행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흠······.”
 원주 맹환진의 입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이놈! 지금 이곳은 네 녀석들의 죄를 묻는 곳이다! 지금 누구에게 따지려 드는 것이냐!”
 원로 학자 하나가 원주의 표정이 좋지 않자 급히 왕후정을 나무랐다. 그러자 기세등등한 얼굴로 입을 놀리던 왕후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급히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당시에 소운강의 말이 떠올라······.”
 왕후정은 이미 정황에 대한 변론을 늘어놓기에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원주와 맞섰단 말인가.
 ‘평소 원주가 소운강 네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왕후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에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이 준비했던 모든 경우의 수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막돼먹은 소운강과 달리 자신과 서생들이 얼마나 서원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지 그것을 부각시킬 생각이었다.
 만약 끝까지 자신들의 죄를 물으려 한다면 결국 서원의 다른 서생들을 부추겨 일을 확산시키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파렴치한 놈 하나를 위해 서원의 모든 서생들이 바보 취급을 받게 된다면, 더 이상 한림 서원을 지지할 수 없다는 약속까지 받아놨으니 거칠 것이 없는 왕후정이었다.
 소운강의 사태를 그대로 두고 본다면 결국 나머지 서생들도 싸잡아 무능력한 먹물쟁이로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에 다른 서생들 역시 분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원주라 해도 서원의 모든 서생들을 억누르진 못할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후정은 내심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얼굴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왜 자신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통탄에 가까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지금 서원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바로 저자 한 명 때문에 편이 갈리고 싸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소운강 저자는 서원에서 학문을 탐구할 자격조차도 없는 자입니다. 저희가 분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것은 저희들은 물론이고, 한림 서원까지 싸잡아 욕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림 서원은 이미 죽은 자들의 무덤이고, 저희들은 그 무덤을 지키는 무덤지기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단 말입니다!”
 왕후정이 목이 멘 목소리로 소운강의 행태를 고발하자, 원로 학자들의 표정이 단번에 거무튀튀하게 변해버렸다.
 “그것이 사실이더냐?”
 “물론입니다. 지금 이곳에 호출된 서생들은 모두 그 말에 분을 참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런 싸움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희들은 정중히 사과를 요구했지만, 소운강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만약 그 말을 들으신다면 스승님들께서도 절대 참지 못하실 겁니다.”
 “말해보거라! 소운강이 또 무엇이라고 말을 한 것이냐?”
 원로 학자들은 왕후정의 말에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서원을 무덤이라고 한 것도 모자라, 그 이상의 말까지 뱉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제가 직접 이야기해드리죠.”
 조용히 왕후정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던 소운강이 입을 열었다.
 “말해보거라. 왕후정이 들었다는 말과 한 치도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수백 수천 번이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니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들려주겠다는 소운강의 말에 원로 학자들의 표정이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붓을 꺾고 농부가 되어라. 책을 덥고 어부가 되어라. 농사일도 모르고 어부 일도 모른다면 저잣거리에 나가 쓰레기라도 줍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습니다.”
 “무··· 무엇이!”
 학자들은 소운강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이 쩍 벌어졌다.
 “그랬더니 왕후정이 잔뜩 흥분해서 말하더군요.”
 소운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왕후정을 바라보았다.
 “왕후정,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소리 아니냐?”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왕후정은 소운강이 갑작스레 자신을 물고 늘어지자 언성을 높였다.
 “네 꿈은 ‘학문을 높이 닦아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지? 그래, 아주 멋진 말이야. 그리고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
 “학문을 닦는 자로서 당연한 것 아니더냐!”
 왕후정은 소운강의 말에 다시 목청을 높였다.
 “물론이야. 그것이 지켜만 진다면야 세상에 그것보다 높은 뜻이 있을까. 하지만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 다니는 건 세상을 농락하는 짓이지.”
 왕후정은 소운강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십시오! 저자가 하는 말을 보시란 말입니다!”
 “하하하! 이미 잘들 보고 계시니 네가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소운강은 볼 살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을 노려보는 원로들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네 이놈! 지금 이 자리에 왜 불려 왔는지 모른단 말이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 아닙니까.”
 원로 학자들은 거침없는 소운강의 말대꾸에 황당함을 넘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왜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아, 궁금하실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궁금하시겠죠.”
 “감히!”
 원로 학자들은 소운강의 무례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또다시 책상을 두드리는 부채 소리에 원로들의 움직임은 잠시 제재를 받았다.
 “조용히!”
 “원주님!”
 원로 학자들은 은근히 소운강을 두둔하는 원주 맹환진을 향해 불만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아직도 모르시겠소?”
 맹환진은 분을 참지 못해 수염을 나부끼는 원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왜 소운강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냐는 말이오.”
 원로들은 맹환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 상황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소운강은 동문수학하는 서생들은 물론이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서원까지 바보 취급을 하고 있었다.
 “소운강.”
 “네, 원주님.”
 “원로들이 궁금해하는구나.”
 “알겠습니다.”
 소운강은 원주 맹환진의 말에 불편한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섰다.
 “스승님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소운강은 원로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후정은 학자로서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대인의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인의 길은 꿈을 꾼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희생을 하고 싶다가 아닌, 희생을 함으로써 대인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승님들은 대인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원로 학자들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소운강의 질문에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희생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함으로써 대인의 길을 실천하고 있냐는 소운강의 질문은 순식간에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렸다.
 “똑같이 물었습니다. 왕후정과 다른 서생들에게 말입니다. 그랬더니 말하더군요. ‘희생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다. 감히 너 따위가 대인의 길을 논하다니 웃기는 소리다’. 후후후!”
 소운강은 왕후정과 서생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더니 마지막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에게 희생을 강요했단 말입니까? 스스로 대인의 길을 가는 게 꿈이라기에, 대인의 길을 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그냥 저 혼자만의 말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인의 길을 가는 것에 지표를 만들어주신 것은 바로 공자님 아니셨습니까? 평소 왕후정이 그토록 존경하는 선인의 말씀을 그대로 빌렸을 뿐인데, 그것이 누구의 말인지도 모르더군요. 대인의 길에 뜻을 품은 자가 그 길을 닦아놓은 분의 말씀조차 모른다니······.”
 왕후정은 소운강의 말에 얼굴이 시커멓게 변색되었다.
 “스승님들은 어떠십니까? 저희들에게 대인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만, 과연 스승님들은 그 길을 가는 데 망설임이 없으신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
 소운강은 자신의 질문에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자 고개를 저어버렸다.
 “공명이 죽은 뒤에도 그를 넘보지 못했던 것은 그가 평소 보여 줬던 언행의 일치가 모두를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두려워해 나서지 못했던 것처럼 학자의 소신은 언제 어디서든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한림 서원을 보십시오. 과연 이곳이 공자의 도와 공명의 도를 수학하는 곳입니까? 이곳이 무덤이 아니라면 어느 곳이 무덤입니까? 예의를 차리는 데 때와 장소가 없다고 했고, 도를 이루는 데 명확한 나날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위해 오물 하나도 치울 용기가 없는 자들이 공자 왈, 맹자 왈 떠든다고 해서 그것이 지켜질 수 있을지 진정 의문입니다.”
 소운강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서원 내 폭력 사건에 대한 심의 장소는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착 가라앉아버렸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으니 외롭지 않다)이라고 했다. 제자의 노력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스승을 어느 누가 덕으로 따르겠는가. 덕으로써 사람을 모으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으로 손을 잡으니, 어찌 의인의 길이라 하겠는가 말이다.”
 맹환진은 한탄 섞인 한마디를 꺼내놓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늘 심문은 이것으로 마무리하겠다. 조만간 다시 호출을 할 것이니 그때까지 사건의 당사자들은 근신을 명한다.”
 원로 중의 한 명이 급히 심문장을 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운강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폭력 사건의 심문으로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
 
 “불경죄입니다!”
 “그렇습니다. 감히 원로들에게 그런 말을 늘어놓다니, 이건 명백히 의도적으로 벌인 사건입니다!”
 “그런 아이를 계속 방치해둔다면 다른 학생들마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만 합니다.”
 원주 맹환진은 자신의 방으로 몰려온 원로들의 항변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허물은 감추고 상대의 잘못만 부풀린다.’
 전형적인 모리배들의 수법을 늘어놓으며 소운강을 퇴출시킬 것을 요구해온 것이다.
 “좋소. 원로들의 생각이 그렇게 일치되었다면 당연히 그 뜻에 따라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원로들은 자신들의 뜻을 반영해주겠다던 원주가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자 은근히 긴장된 표정들이 되었다.
 “소운강 그 아이가 했던 질문 말이오. 나에게 답을 주시겠소?”
 원로들은 예상했던 질문이 흘러나오자 그나마 안심하는 눈빛들이다. 행여나 원주가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질까 나름대로 답변들을 준비해놨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답을 해드려야죠.”
 맹환진은 원로들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밖에 기다리고 있던 학동을 불렀다.
 “좋소. 밖에 삼목이 있느냐.”
 “네, 사부님.”
 “가서 운강이를 데려오거라.”
 “알겠습니다.”
 원로들은 맹환진이 근신 중인 소운강을 데려오라고 하자 당장 표정이 변해버렸다.
 “원주님, 소운강 그 아이가 이 자리에 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 조만간 서원에서 나갈 아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고생이 심할 텐데 그냥 쉬게 두시지요.”
 “아닐세. 어차피 서원을 나가야 할 상황이니, 자신의 질문에 답 정도는 듣고 싶을 것이네. 자네들도 질문에 답을 할 것이라 했으니 이왕이면 참석시키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됐네. 운강 그 아이가 오면 바로 시작하세.”
 “끙!”
 원로들은 맹환진의 말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맹환진 앞에서 질문의 답을 하는 것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소운강 앞에서 답을 내놓는 것은 차후 자신들의 경력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제자의 화두에 사부들이 대답을 하고, 화두를 던졌던 제자는 사부들의 답변에 논평을 하는 묘한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군자는 스스로 떳떳하면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했네. 그 아이가 그러더군.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니, 어느 곳에 가든 군자의 도를 행할 수 있다고 말일세.”
 맹환진은 소운강을 불러온다는 말에 원로들의 표정이 소태 씹은 얼굴이 되자, 얼마 전 소운강과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분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었네. 그렇다면 스스로만 떳떳하다면 그것이 군자의 도냐고 말일세.”
 “뭐라고 답을 하던가요?”
 원로들 중 하나가 이야기에 관심이 생기는지 맹환진의 말에 슬쩍 끼어들었다.
 “떳떳하다고 말하는 자는 모두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하더군. 하나는 진짜 떳떳한 자, 다른 하나는 떳떳하다고 믿는 자로 말일세.”
 “틀린 말은 아닙니다.”
 “껄껄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서 다시 물었지. 그 두 가지 부류 중에 진짜 떳떳한 자가 군자의 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냐고 말일세. 자네들은 누가 군자에 가깝다고 보는가?”
 맹환진은 소운강에게 했던 질문을 원로들에게 똑같이 던졌다. 어느새 대부분의 원로들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짜 떳떳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자네들은 그리 생각하는가? 후후후! 하긴 나도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는 그리 생각했었지.”
 원로들은 맹환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강 그 아이는 달리 말했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 아이는 스스로 떳떳하다고 믿는 자가 군자의 도에 가깝다고 대답을 하더군.”
 “아니, 진짜 떳떳한 자가 군자의 도에 가까운 게 아니라, 그렇게 믿는 자가 가깝단 말입니까?”
 “나도 똑같이 물었었지.”
 “그랬더니 그 아이가 뭐라고 답을 했습니까?”
 맹환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원로들의 질문에 말을 이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원로들은 본론에서 살짝 벗어난 대답에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진짜 떳떳한 자는 어떤 짓을 해도 떳떳하기 때문에 자신의 떳떳함을 돌아보지 못한다고 하더군. 그러나 스스로 떳떳하다고 믿는 자는 자신의 떳떳함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진짜 떳떳한 자에 비해 유약해 보일지라도 진짜 군자의 도를 행하는 것이라 하더군.”
 “궤변입니다.”
 원로들은 맹환진의 입에서 소운강의 대답이 흘러나오자 딱 잘라서 궤변이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나도 궤변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 아이는 또다시 엉뚱한 소리를 하더군.”
 “아니, 원주님 앞에서 말입니까?”
 원로들은 감히 일개 서생 주제에 서원의 주인인 맹환진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것에 분개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왜 자네들이 흥분을 하고 그러시나?”
 “감히 일개 서생 주제에 분수를 모르니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주님에게 그런 궤변을 늘어놓다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흠······.”
 맹환진은 원로들의 반응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학문을 닦는 자가 타인의 의견을 포용하지 못할 때 드디어 편협해지기 시작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학문의 평등이 아닌 사람의 높낮이로 이야기한다면 망국의 원흉이라고 했네. 다시 말해 간신배들이나 하는 짓이지.”
 “······.”
 원로들은 맹환진의 높낮이 없는 한마디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지··· 지금 저희들을 간신배나 소인배 같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맹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간신배고 소인배라고 했네. 자네는 그렇게 행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클클클! 당연히 그래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유서 깊은 한림 서원에 그런 사람이 있어선 아니 되겠지. 학문을 논하는 데 사람의 높이를 따지려 든다면 그 사람은 간신배일 것이고, 학문을 논하는 데 타인의 말을 포용하지 못하는 자는 소인배가 될 것이니 말이네.”
 원로들은 그제야 맹환진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왜 소운강과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는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주어진 혜택은 쉽사리 버리질 못하는 법이네. 자네들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돌아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며, 사람의 나이와 높이를 따져 학문을 논하지 말아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배움을 행하는 데 어느 누가 부끄러움을 느낄까!”
 맹환진은 탄식에 가까운 음성으로 원로들에게 말을 건넸다.
 원로들 역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일을 겪고 봐왔던 자들, 맹환진의 답답한 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때 원로들 모두가 스승으로 모시던 맹환진이 아니던가.
 원로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또다시 용서를 베푸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하오리까.”
 원로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맹환진에게 무릎을 꿇었다.
 독선과 아집, 자신들이 올라선 자리와 움켜쥔 권력. 그것의 남용에 대한 경고와 질타를 해온 것이다.
 맹환진은 늦지 않게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용서를 구한 원로들을 보며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때, 밖에서 소운강을 데리러 갔던 학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모시고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네, 스승님.”
 “그만 일어들 나시게. 사람에게 높고 낮음은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것이 진실이겠는가. 높은 곳에 서면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가 어느 곳에서 시작했는지 그 시작점을 찾기는 어려운 법이라네. 그러나 이미 와버린 길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언제나 초심을 잃지 말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소운강은 원주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미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결심은 내려졌고, 이젠 그것을 지키는 길만이 남은 것이다.
 원로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의 퇴출을 요구할 것이다. 맹환진은 원로들과 달리 반대 의견을 내놓겠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
 운강은 이번 기회에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더 이상 서원이란 울타리에서 보호를 받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출사를 통해 뜻을 펼치고, 민생의 안락을 도모하는 것. 운강의 꿈 역시 다른 서생들과 다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라의 주인이 바뀐 뒤 출사의 길은 멀어져만 갔다. 종종 한족 출신 중에 고관의 자리에 오르는 이들도 생겨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예에 불과했다. 자신은 명예보다 실리, 그리고 그 실리를 통해 현실적인 군자의 도를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운강은 자신의 예상대로 원로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을 보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앉거라.”
 “네, 원주님.”
 운강은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좌정했다.
 “너를 이곳에 부른 것은 며칠 전 네가 했던 질문 때문이다.”
 ‘음··· 이건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시작이 다른데······.’
 운강은 원로들이나 원주의 표정이 무척 밝아 보이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네 질문에 대해 원로들께서 직접 답을 해주신다고 하니, 너는 이분들의 답을 듣고 그에 대해 논평을 해야 할 것이다.”
 ‘뭐야, 이 분위기는! 그리고 논평을 하라니,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운강은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원로들의 시선에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봐도 부족할 원로들이 아닌가.
 운강은 원주를 향해 정중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어찌 스승님들의 말씀에 평을 달겠습니다.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운강아.”
 “네, 원주님.”
 “떳떳함을 걱정하는 자만이 군자의 도에 가깝다고 하지 않았더냐. 오늘 원로들의 마음이 그와 같으니 너는 그것을 모른 척해선 아니 될 것이다.”
 운강은 맹환진의 한마디에 입이 얼어붙었다. 뭔가 잘못되어간다 싶었는데, 그 잘못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자신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원로들을 보며 어느새 원주가 원로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파악했다.
 ‘능력도 좋으셔라.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러면 서원을 나가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맹환진은 갈등의 빛을 보이는 소운강을 보며 알 듯 모를 듯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식으로 도망을 가려고 하다니. 운강 네놈은 아직 멀었다.’
 이미 소운강의 계획을 꿰뚫고 있던 맹환진이었다.
 ‘아, 미치겠네. 어떻게 한다. 소운강! 머리 좀 굴려 봐!’
 “어찌 대답이 없는 것이냐.”
 “무··· 물론입니다. 스승님들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운강은 맹환진의 재촉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마음속에서는 이게 아니라고 외치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다.
 ‘젠장! 원주님 머리에는 먹물만 가득한 줄 알았는데 완전히 여우 뺨치시는군.’
 운강은 맹환진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대충 감을 잡았다. 거꾸로 말하자면 자신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일을 벌였는지 상대도 이미 감을 잡고 있다는 말이 되었다.
 ‘킁! 천하기재 소운강, 여기에서 밀릴 수는 없지. 한 번 친 사고 두 번 치는 게 뭐가 대수라고.’
 운강은 일단 마음을 편히 먹고 원로들의 답변을 기다렸다. 논평을 원한다면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주 심장이 뚝 떨어지게 해드리죠. 무슨 방법으로 원로들을 저렇게 만들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성정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열 받으면 뚜껑이 열리는 겁니다. 그 이치에 따라 행동하면 원로들의 마음을 다시 뒤집는 건 식은 죽 먹기입니다.’
 운강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맹환진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이놈 또 머리를 굴리는구나. 그러나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고 원로들의 정신 상태를 초기화시켜 놓았다.’
 초심을 잃지 말라며 누누이 당부했던 맹환진.
 그 말속에는 단순히 학자로서 본분을 찾으라는 말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은 어떤 도발을 하더라도 원로들 역시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네 녀석의 그런 모습이 자신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자책하는 분위기로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네 녀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지. 크흐흐! 아직 세상에 나가기에는 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거든.’
 원주와 운강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속내를 모르는 원로들은 두 사람의 공방에 휩쓸려 자신들도 모르게 장기판의 말이 된 셈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네, 원주님. 제가 먼저 답을 놓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게.”
 청각(靑閣)의 스승이자 4명의 원로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문설주가 입을 열었다.
 운강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한 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답변을 듣기 시작했다.
 운강과 맹환진의 지략 싸움 때문에 얼떨결에 희생양이 된 원로들. 그들은 진짜 진지한 표정으로 문설주의 답변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운강이 던져 놓은 화두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어려워하는 원론적인 것이었습니다.”
 “잠깐!”
 문설주가 막 입을 연 순간 운강이 손을 들었다.
 “왜 그러느냐?”
 “말씀하시는 중간에 간간이 끼어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단순히 듣고 평하는 형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 간의 견해를 밝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문설주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맹환진 쪽을 바라보았다.
 “원주님, 운강의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환진은 운강이 손을 들어올린 순간부터 ‘무슨 속셈이냐!’를 외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운강 스스로 무덤을 파는 소리를 늘어놓자 맹환진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잘만 하면 정말 심도 있는 대화 분위기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땐 하나가 아닌 모두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맹환진은 운강의 감춰진 수가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다가, 일단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견해를 밝히고 답을 구하는 방식이라. 당사자 간에 결정할 일이니 그것은 자네 뜻대로 하게.”
 “알겠습니다.”
 문설주는 운강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방법도 신선할 것 같구나. 확실히 서원 최고 기재다운 발상이다.”
 ‘뭐? 기··· 기재? 최고?’
 혹독하게 괴롭혀 줄 생각으로 내놓은 방식을 매우 좋은 생각이라며 박수까지 쳐 주자 운강은 되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닌데······.’
 원로들이 너무 진지하게 나온 것이다. 대충 적당히 때우려 들어야 자신도 이리저리 말을 걸어가며 한바탕 소란을 피울 텐데, 저렇게 정색을 하고 나오면 어쩐단 말인가.
 ‘빌어먹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이렇게 되면 학구열에 불타는 학자에게 헛소리를 지껄일 수도 없잖아!’
 운강은 원로들의 행동이 자신이 알던 것과 너무나 다르게 움직이자 점점 평정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운강이 던진 화두는 과연 우리들이 군자의 도, 대인의 길을 실천하고 있냐는 거였습니다. 당시 심문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솔직히 대답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게 느껴지더군요.”
 문설주는 솔직한 심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운강 저 녀석에게 화도 많이 났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문설주는 그윽한 눈으로 소운강을 바라보며 ‘고맙다’는 눈빛을 연방 날려 보냈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운강은 갑자기 선인(善人)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문설주의 모습에 계속해서 당혹감을 느꼈다. 평소처럼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이를 가는 모습이 더욱 친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나와버렸었죠. 하하하!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행동이었습니다.”
 다른 원로들 역시 문설주의 말에 동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강은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화두에 반론을 펼치거나 독한 마음먹고 안하무인격으로 자신을 공격할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히 자아비판이 아닌가.
 “물론 오늘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나 치는 녀석이 군자와 대인의 길을 따지고 들었으니 당연히 화가 나 있었죠. 그래서 운강을 서원에서 쫓아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원주님을 찾아왔었습니다.”
 ‘예, 바로 그런 정신입니다! 제발 이상한 소리 그만 하고 본색(本色)을 보여 주시죠!’
 운강은 예상대로 원로들이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단 말을 듣고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운강 덕분에, 또 원주님의 크신 말씀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어서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저의 본모습을 돌이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을 얻었습니다.”
 문설주는 목이 타는지 탁자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운강이 물었습니다. 과연 스승님들은 군자의 도리를 지키며 대인의 길을 가고 있냐고 말입니다. 그에 대한 제 대답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저는 군자의 도리를 지키지도 않았었고, 대인의 길을 가기 위해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원로란 자리에 얼마나 연연했는지, 그리고 그 허망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큰 실수들을 해왔는지 그것을 알고 말았습니다. 운강.”
 “네, 스승님.”
 “난 네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네가 했던 기행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이제야 이해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학문의 길은 아직 멀기만 한데, 나 스스로 내가 선 곳만 내려다보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 있더구나.”
 “아니··· 그건······.”
 운강은 자신의 손까지 덥석 움켜쥐며 눈을 빛내는 문설주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모습에는 가식도, 어떤 이유를 가지고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반짝이는 눈망울에는 학문에 대한 열의에 새롭게 마음을 다잡은 개과천선한 중년의 사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젠장! 분위기를 보아하니 원로들 모두 똑같은 소리를 해댈 것 같은데······.’
 운강은 순식간에 사람을 바꿔놓은 맹환진의 능력에 감탄과 저주를 퍼부었다.
 ‘도대체 왜 막는 겁니까!’
 운강은 불만 섞인 눈빛으로 맹환진을 바라보았다.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문설주의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맹환진은 운강의 그런 눈빛을 느끼는 순간, ‘다 안다. 네 마음을 내가 아니면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알면 도와줘야죠!’
 원로들을 화를 돋워 서원을 빠져나가려던 운강의 계획은 맹환진의 연륜 앞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림 서원!
 들어올 순 있으나 나가기는 어려운 서생들의 세상.
 출사를 하거나 퇴출을 당하는 것을 제외하곤 이곳에서 평생 학문에 정진한다.
 한림 서원의 독특하면서 무시무시한 전통이 서원 최고의 반항아 소운강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날 순 없지!’
 운강은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분명히 원주는 자신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러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아직 협상의 여지는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원주님,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겁니다.’
 
 “원로들에게 묻겠네.”
 “말씀하십시오.”
 “금번 사건이 여러 원로들과 서생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이었음은 사실이네. 그러나 그 안에 숨어 있는 대인의 뜻과 군자의 도리에 대해선 이미 충분히 이해했을 터.”
 원로들은 맹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의도가 좋았다곤 하나 서원에 풍파를 일으켰고, 좋지 못한 방법을 이용해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역시 사실이네.”
 원로들은 맹환진의 이어지는 말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는 좋았다 하나 그 과정은 바람직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허리 굽은 자가 길에서 돈을 줍는 우격다짐에 의한 결과나 마찬가지였네.”
 운강은 이랬다저랬다 결과를 뒤집어 이야기하는 맹환진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주님, 도대체 목적이 뭡니까!’
 운강은 자신에게 벌을 주겠다는 건지, 상을 주겠다는 건지 그 심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맹환진을 보며 계속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원주님, 그 과정에 격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모두가 만족한 결론을 얻었으니 운강에 대한 징계는 없었던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원로 중 하나가 맹환진의 말에 슬쩍 의견을 끼워 넣었다.
 맹환진은 원로의 말에 자신의 의견도 그와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마음과 다르지 않네. 하지만 한림 서원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네. 만약 이번 사태를 이렇게 넘어간다면, 그 의도를 깨닫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고 말 것이네. 추구하는 목표는 하나이나 그 가는 길은 수없이 많은 법. 어찌 운강의 방법을 두고 정도라 하겠는가. 선의의 거짓이 사람을 살린 순 있으나, 살려 낸 사람이 언제나 선인일 수는 없는 법이네. 그래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서원의 위계질서를 확립시킬 수 있는 징계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네.”
 원로들은 운강의 구제를 부탁했지만 맹환진의 결심은 확고했다.
 얼마 전만 해도 원로들이 징계를 요구하고 맹환진은 꺼려하는 분위기였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잠깐 사이에 그 양상이 완전히 반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운강마저도 의외였기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운강을 지지하는 나의 행동에 원로들이 평소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지지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았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오.”
 “물론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마음과 공인의 행동이 언제나 일치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서원의 미래를 위해 독을 마시는 심정으로 운강의 징계를 이렇게 결정하려 하오.”
 꿀꺽.
 맹환진의 표정이나 말투가 평소 한숨 섞인 분위기와 달리 냉엄함을 보이자, 누군가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묘한 긴장감이 흐른 것이다.
 “제자 운강은 들어라.”
 “네, 원주님.”
 운강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에 대한 징계가 내려지려 하자 오히려 반기는 모습이 되었다. 퇴출이 되지 않는다 해도 징계에 징계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에는 서원에서 쫓겨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강은 수인각(手人閣)에 몸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한림 서원은 모두 세 가지 형태의 제자들이 존재했다. 두 가지는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오고 감이 자유로운 열린 공간에 속해 있었으나, 나머지 하나는 출사를 하거나 퇴출을 당하지 않는 한 평생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수인을 맺은 제자였다.
 운강도 여타의 제자들과 달리 수인을 맺고 서원에 들어왔었다. 물론 차후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무리한 형태로 서원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지만, 당시 운강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인각에 포함된 제자들은 먹고 자는 것은 물론, 모든 교재와 문방사우까지 서원에서 무료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수인각의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서원의 규칙에 크게 제재를 받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사옵니다.”
 ‘뭐야? 나 쫓겨나는 거야?’
 운강은 맹환진이 수인각 제자 신분을 부각시키며 징계 강도가 높을 것임을 시사하자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다른 사람이 그런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다면 당연히 서원을 나가는 것이 합당하나, 운강은 그 이상의 결과를 도출해 서원의 발전에 도움을 준 것 역시 사실이다. 공을 본다면 징계를 피하고 상을 주어야 하나 그 역시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운강의 징계를 결정하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운강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수인각 제자 운강은 무인각(無人閣)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삼 년간 근신할 것을 명한다.”
 “네?”
 운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도 안 돼!’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허! 삼 년이 아니라 십 년 정도는 있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맹환진은 운강이 충격을 먹은 얼굴로 반문을 하자 냉엄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
 운강은 3년이든 10년이든 무인각에 갇혀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다 진짜 10년으로 징계 수위가 급상승할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맹환진의 결정에 충격을 먹은 것은 운강만이 아니었다. 다른 원로들 역시 ‘이건 아니야!’라는 표정으로 그를 말렸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며 눈을 감아버리는 맹환진이었다.
 “헤헤··· 무인각이라니······.”
 운강은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을 받으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쫓겨나긴 했지만 밖이 아닌 안으로, 서원 깊숙한 곳으로 쫓겨난 것이다.
 
 
 수렁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면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거나, 발버둥을 치다가 조금 더 빨리 죽는 수밖에 없다. 살고 싶다면 애당초 수렁 근처에 얼씬도 말아라.
 -수렁에 빠진 소운강-
 
 
 2장 무인각(無人閣)
 
 
 무인각(無人閣).
 이름 그대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아니,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한림 서원의 장서 보관소’.
 무인각의 또 다른 명칭이다.
 서원의 북쪽에 위치한 무인각은 서원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같은 장소라고 부르기에는 생각보다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부인이 아니라면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관심 밖의 장소. 그곳이 바로 무인각이었다.
 서원은 산중턱 분지에 만들어져 규모와 형태가 확실하고 장엄한 풍경을 보이는 반면, 무인각은 산꼭대기 바로 밑, 돌풍이 휘몰아치는 계곡 옆을 지나 반 시진을 더 돌아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정확한 길을 알지 못하면 찾아가다가 산속을 헤맬 수도 있는 곳에 감춰지듯 지어진 곳이 이곳 무인각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마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소운강은 확 도망쳐 버릴까 고민도 해봤지만, 근신이 끝나는 3년 뒤에는 수인각에서 쫓겨나 일반 제자로 강등된다는 말에 꾹 참고 버텨 내기로 했다.
 수인각 명부에서만 빠져나온다면 서원을 떠다는 것은 자유로울 터. 3년이란 시간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3년을 아껴 보겠다고 평생을 낙인 찍혀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생무상이로구나.”
 운강은 보름간 먹을 곡식과 그릇, 그리고 옷가지만을 챙겨 든 채 너털너털 무인각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물론 운강 역시 말로만 들었던 무인각에 직접 가보는 것은 처음이다.
 무인각이 서고의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보관소의 기능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이곳을 오가는 경우는 반년에 한 번. 새롭게 들어온 책들을 필사한 뒤 원본은 이곳에 옮겨 보관하는 것이다.
 운강은 그렇게 옮겨 온 책들을 3년간 정리하는 걸로 태반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듣기로 반년에 한 번이라곤 하지만, 그때마다 들여오는 서책의 수는 엄청나다고 알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여오는 책은 물론이고, 서원 내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서책들까지 이곳으로 옮겨져 보관되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반년에 한 번 무인각으로 책이 이동하는 날이었다.
 “십 년에 한 번씩 증축을 한다고 하니, 규모만 해도 어마어마하겠군.”
 운강은 나름대로 무인각의 규모나 형태를 상상하다가, 우마차에 실려 가는 책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 책들을 혼자서 삼 년간이나 정리해야 한다니··· 허리가 휘고 말겠다. 삼 년 뒤라. 그땐 내 나이도 스물이 되겠군.”
 
 운강이 투덜투덜 산을 오르고 있을 때, 맹환진의 거처에는 운강의 징계 소식을 들은 서생들과 원로들이 몰려와 항의를 하고 있었다.
 “원주님, 다시 한 번만 생각해주십시오. 그런 인재를 무인각에 묶어두다니요.”
 틈만 나면 운강을 쫓아낼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던 원로들은 그날 이후 완전히 사람이 돌변하여 계속해서 운강의 징계 수위에 대해 항의했다.
 물론 운강의 징계에 대해 박장대소를 하며 춤을 추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평소 운강의 기행에 은근히 지지를 보내고 있던 서생들은 원로들을 도와 한목소리로 징계를 낮춰달라 소리를 쳤다.
 “이미 내린 결정이네. 번복할 수 없단 말이네.”
 맹환진 역시 원로들과 서생들의 항의에 매번 똑같은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원주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를 벌하시고 운강을 용서해주십시오.”
 몇몇 서생들은 자신들이 대신 벌을 받겠다며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미련한 사람들. 어차피 그 아이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담을 넘어서라도 서원을 떠났을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맹환진은 보이는 것에만 목을 매는 원로들과 서생들을 바라보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신의 깊은 속내를 하나하나 밝힐 수도 없는 일이라, 맹환진은 계속되는 항의에도 묵묵부답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운강을 잡아두기 위해서 무인각으로 보냈다는 말을 꺼낸다면, 수인각의 규칙을 들어 운강을 잡으려 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결과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담을 넘거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병이 나는 것뿐이었다.
 물론 운강이 원하는 대로 바로 퇴출을 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했다간 서원을 벗어나는 순간 원한을 가진 소인배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 반복된 재앙이었으니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그동안 운강의 재능과 기행에 손해를 보거나 질투를 느낀 자들은 태반이 재력가의 자제나 가문의 성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던 자들이었다. 서원 안에서는 서원의 규칙에 따라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지만, 서원의 힘이 미치지 않는 순간이 오면 기필코 해코지를 할 인간들이었다.
 “한림 서원의 역사도 내 대에서 운이 다했음인가······.”
 언제부턴가 서원에 학자는 사라지고 명리를 좇는 소인배들이 채워지기 시작하더니, 운강의 말대로 군자의 도리를 찾는 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삼 년이라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힐 것이다. 운강이 너라면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맹환진이 운강을 무인각에 연금한 것은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도 충분히 수긍할 만큼 강한 징계임을 보이기 위해서였고, 운강에게는 아직 살펴보지 못한 수많은 서책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맹환진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연이 따른다면 그 이상의 것도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으니.”
 
 ***
 
 운강이 무인각에 도착한 것은 서원의 담장을 벗어난 지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산을 돌아서 가는 길이라 오래 걸리기도 했지만, 엄청난 양의 책을 싣고 가는 우마차의 느릿한 속도도 크게 한몫했다.
 “소 공자, 이제 한 식경만 가면 무인각이라오.”
 “생각보다 더 먼 곳에 위치하고 있군요.”
 무인각으로 이동하는 동안 말동무를 해준 마삼이 거의 다 왔다는 말을 해주자 고개를 끄덕이는 운강이다.
 “무인각에 도착하면 책은 누가 나르는 겁니까? 사람이 없을 텐데.”
 운강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본래 일꾼 몇을 대동하고 갑니다.”
 “그래요? 그런데 오늘은······.”
 운강은 자신과 마삼을 제외하곤 이번 운송에 참여한 사람이 없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주님 명이 계셨습니다.”
 “원주님이요?”
 “네. 올해부터는 무인각을 책임지는 사람이 정해졌으니 따로 일꾼을 쓸 필요가 없다고······.”
 “······.”
 운강은 마삼의 말에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삼 역시 말을 하면서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보는 것과는 달리 양이 꽤 많습니다. 소 공자 혼자서 서고 안으로 옮기려면 상당히 힘이 들 텐데, 왜 그런 명을 내리셨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꾼 다섯이 붙어도 꼬박 반나절은 걸리는 일인데 말입니다.”
 “휴! 고생 좀 하라는 뜻이겠죠.”
 “네?”
 “아, 아닙니다. 해가 저물어갑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시간을 아껴야죠.”
 운강은 무인각 생활 첫날부터 허리가 휘게 생기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원주님, 삼 년 뒤에 봅시다!’
 “이곳입니다.”
 마삼은 3장 높이의 거대한 문이 설치된 협곡 입구를 가리키며 무인각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무인각이 협곡 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입구는 그리 크지 않지만, 협곡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공터 하나가 나옵니다. 정확히는 그곳이 끝나는 곳에 무인각이 있습니다.”
 “흠······.”
 운강은 상당한 규모의 전각을 상상하고 있었기에 무인각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꼬박 하루가 걸려 도착한 무인각은 산꼭대기라고 불러도 무방한 곳에 위치했던 것이다.
 봉우리 바로 밑에 양쪽으로 갈라진 협곡을 통과하면 무인각이 나온다고 하니 더더욱 의구심이 밀려왔다.
 언뜻 보기에도 협곡을 지나고 나면 바로 봉우리 끝에 도착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안이 얼마나 넓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책을 보관할 수 있는 전각들이 들어서기엔 비좁아 보였기 때문이다.
 “협곡 안은 습한 바람이 많이 불어 서책을 보관하기엔 좋지 않은 장소 같습니다만······.”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알겠습니다.”
 마삼은 마차에서 한 자 길이의 열쇠를 꺼내더니 굳게 닫혀 있는 무인각의 문을 열었다.
 운강은 마삼의 말에 자신이 생각지 못한 독특한 방법으로 무인각이 지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일단 직접 확인하면 알 것이라는 말에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고 협곡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이건!”
 협곡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마삼의 말대로 공터 하나가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인각이 그 공터에 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운강이지만, 막상 무인각이 실체를 드러내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단하지요? 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소 공자님처럼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었죠.”
 운강은 마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무인각이 이런 형태로 만들어졌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장관이군요.”
 “장관이고말구요.”
 운강은 공터 맞은편,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절벽을 올려다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운강의 생각대로 봉우리나 다름없는 협곡 안은 공터가 있다곤 하나 건물을 짓는 일이, 특히 오랜 세월 수많은 서책을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규모의 건축물을 짓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단지 운강이 생각했던 ‘협곡 안의 무인각’이 아니라, 협곡이 끝나는 곳에 구름다리로 이어진 건너편 절벽에 무인각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산 반대편에 맞닿은 산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어느 누가 산이 반으로 나누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겠습니까. 이쪽도 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흙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건너편 무인각이 있는 저 산은 완전히 돌산(石山)이죠. 사실 이 협곡을 통하지 않고선 건너편으로 넘어갈 방법도 없습니다. 돌산 전체가 저렇게 깎아지른 듯 반듯한 형태라 도저히 산을 탈 수가 없는 곳이죠.”
 운강은 마삼의 설명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다리를 건너면 돌산을 깎아 만든 계단을 통해 다시 위쪽으로 30장 정도는 이동을 해야 무인각의 입구가 나온다고 하니, 이건 무인각이 아니라 천상각(天上閣)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많은 책들을 공자 혼자서 저곳까지 옮기셔야 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마삼은 반쯤 넋이 나간 운강을 바라보며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신이 도끼로 내려찍은 듯 날카롭게 솟아오른 절벽을 오르고 내려야 책을 옮길 수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일꾼들은 체격도 좋고 힘도 상당히 좋았기에 등지게라도 사용했지만, 운강은 평생 책만 보고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쉽지가 않을 것이라 느꼈다.
 거기다 절벽에 난 길은 겨우 두 사람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길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칫 발이라도 헛딛는 날에는 여지없이 추락사를 당하고 말 것이다.
 마삼은 운강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한 시선으로 절벽만 바라보고 있자, 가볍게 혀를 차더니 마차에서 책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도대체 누가 저런 곳에 서고를 만들 생각을······.”
 운강은 계단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절벽 중간쯤에 조그맣게 보이는 입구를 발견하더니 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마삼이 책을 모두 내려놓을 때까지 운강은 멍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책을 옮기는 동안 몸살은 기본으로 날 것이고, 자칫하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으니 정말 막막하구나!’
 마삼의 말대로 오늘 가져온 책들을 저곳에 모두 옮겨 놓으려면 며칠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할 것이 분명했다.
 “휴······.”
 운강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뱉었다.
 마삼은 책을 모두 내려놓더니 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거······.”
 “이건 뭡니까?”
 “원주님이 공자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운강은 마삼이 건네준 서찰을 받아들었다.
 “무인각 안에 들어가시면 차분히 읽어보라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날이 저물 텐데 어떻게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운강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마삼을 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야죠.”
 “아, 그럼 무인각에서······.”
 “아이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가 평소 책을 옮기긴 해도 한 번도 무인각에 들어가 본 적은 없습니다.”
 “네? 그럼 책들은 어떻게······.”
 운강은 마삼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인각에는 따로 일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 책을 가져다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삼이 무인각 입구까지 책을 옮겨 본 적은 있지만,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질 못했다고 하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저 같은 일꾼들이야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끝이지요. 하루 묵어가는 것도 이곳 공터에서 야영을 할 겁니다. 다른 때도 그렇게 하고 서원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저도 들은 말입니다만, 예전에 명령을 어기고 무인각에 들어간 일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뭔가 좋지 않은 결과를 들을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무인각에 들어갔던 그 일꾼은 끔찍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하더군요.”
 운강은 마삼의 말에 온몸에 한기가 스미는 느낌을 받았다.
 ‘젠장! 무인각에 귀신이라도 산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무인각 연금이란 징벌에 한숨만 나오던 운강이었다. 그런데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무인각 안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운강은 무인각에 들어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나도 이 밑에서 지낼까······.’
 소운강 17세··· 무인각의 여름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
 
 마삼은 새벽같이 일어나 서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밤에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더니 날이 밝자마자 도망치듯 내려가 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급하게 돌아가느냐는 운강의 말에 서원에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운강이 보기에 마삼의 부지런함은 결코 할 일이 남아서라기보단 조금이라도 빨리 무인각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운강은 마삼이 협곡의 문을 걸어 잠그자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아니, 문을 잠그면······.”
 이미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버린 마삼이 운강의 말에 바로 대답했다.
 “이곳은 인적이 없는 곳입니다. 자칫 맹수라도 뛰어들면 큰일 아닙니까.”
 “그··· 그렇군요.”
 “보름 뒤에 식량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 다시 뵙죠.”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마삼은 운강에게 보름 뒤를 기약하곤 그렇게 떠나버렸다.
 “밤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마삼과 달리 오랜만에 피곤함을 느낄 정도로 움직였던 운강은 정신없이 잠이 들었었기에, 마삼의 당황하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의아함도 잠시, 어제 무인각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일꾼의 이야기가 떠오르자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책들이 서고에 자동으로 정리될 이유가 없잖아.”
 운강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서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원주님 서찰이라도 읽어봐야 하는 것 아냐?”
 운강은 마삼이 건네준 서찰을 빼들고 한참 고민에 빠져 들었다. 마삼은 꼭 무인각 안에 들어가서 읽어야 한다고 했지만, 막상 무인각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고민스러워지자 맹환진이 마삼 편에 보낸 서찰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진 것이다.
 “아니야. 원주님이 무인각 안에서 읽으라고 한 것은 분명히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야. 괜히 먼저 열었다가 손해라도 보면 더욱 큰일이지.”
 운강은 평소 근엄한 척 뒷짐을 지고 돌아다니는 맹환진이 사실은 여우와 너구리의 변신이지 않을까 의심해본 적이 많았기에, 일단 서찰을 열어보는 건 잠시 미루기로 결심했다.
 “휴! 그나저나 답답하구나······.”
 운강은 공터에 쌓여 있는 서책과 절벽 중간에 위치한 무인각을 번갈아 보며 막막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당장 모든 일을 끝낸다고는 생각지 말자,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잖아. 싫든 좋든 삼 년은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운강은 서책을 무인각까지 옮기는 일에 한탄 비슷한 소리를 하면서도, 비가 오기 전에 서책들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깊은 산속, 그것도 고도가 높은 지역은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부지런을 떨어야 서책이 망가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운강은 다시 한 번 무인각의 입구가 있는 절벽을 올려다봤다.
 “쩝! 넋 놓고 있어봤자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일단 시작해볼까?”
 운강은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책을 집어 들더니 구름다리를 건너 천천히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운강은 혹시나 발을 헛디딜까 불안한 마음에 생각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다.
 “쳇! 아무리 담이 센 사람이라도 이런 곳을 오르게 되면 똑같을 거야. 나만 이러는 게 아니라고!”
 운강은 내심 호연지기를 기르며 학문에 정진해왔다고 믿었었지만, 막상 눈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몸에 쥐가 나도록 긴장을 하며 이각의 시간을 투자해 절벽을 오르자, 눈앞에 무인각 입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 한가운데 달랑 문짝 2개만 붙어 있는 무인각.
 “밑에서 볼 땐 뭔가 있어 보이더니, 막상 도착하고 보니 헛간 입구만도 못하구나.”
 운강은 죽을 동 살 동 아슬아슬하게 계단을 올라왔지만, 막상 무인각의 입구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자 괜히 심술이 생겼다. 하지만 입구는 그렇다 쳐도 오랜 세월 서원의 책을 보관해온 장소였기에, 그 안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규모가 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들어가 볼까.”
 운강은 조심스럽게 무인각의 문을 열었다.
 “응? 뭐야? 왜 안 열려!”
 당연히 열릴 것이라 생각했던 무인각의 문이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자 운강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리워졌다.
 “젠장! 뭐야? 왜 안 열리는 거야!”
 분명히 문의 구조를 보면 바깥으로 잡아당기는 보편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무인각 입구.
 운강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목숨 걸고 올라왔는데 문이 꿈쩍도 하지 않자 화딱지가 난 것이다.
 “열려! 열리라고!”
 쿵쾅거리며 일다경 정도 문을 잡아당기던 운강은 그새 지쳤는지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히이익!”
 아무 생각 없이 등을 문짝에 기대고 앞에 주저앉았던 운강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그렇게 잡아당겨도 꿈쩍도 않던 무인각의 문이 등을 기대는 순간 덜컹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린 것이다.
 그러나 운강 입장에서는 그것이 꼭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이라 생각했고, 내심 무인각 안에 ‘귀신’이 사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그의 마음을 그대로 뒤흔들어놓았다.
 “사··· 살려 줘! 살려 주세요!”
 문이 열리자 기대고 있던 힘 때문에 벌러덩 뒤로 넘어가버린 운강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손을 싹싹 비벼 댔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는 무인각 내부.
 운강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어올리며 빛이 들지 않아 컴컴한 무인각 내부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뭐였지?”
 운강은 아무리 살펴봐도 자신을 잡아당긴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자 부지런히 눈알을 굴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귀신’은 옷자락도 발견할 수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라면 그렇다고 이야기를 해줘야지! 이게 무슨 망신이야!”
 운강은 자신을 잡아당겼다고 생각한 무인각의 ‘귀신’이 사실은 문이 자신의 기대는 힘을 이기지 못해 열렸다는 걸 확인하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나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서원의 망나니들 중 하나라도 이 상황을 목격했다면 평생 겁쟁이 꼬리표를 달고 살 뻔한 것이다.
 운강은 몸에 잔뜩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조심스럽게 무인각 안쪽을 살폈다.
 그러나 절벽에 동굴을 파서(원래 있던 동굴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만들었기 때문인지 안쪽으로는 빛이 들지 않아, 아무리 눈을 동그랗게 떠도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뵈는 게 없네······.”
 운강은 바닥에 떨어뜨렸던 서책을 집어 들며 다시 한 번 좌절에 빠졌다.
 “뭐가 보여야 책을 가져다 놓든 말든 하지! 어쩌라고!”
 무인각 안쪽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른 운강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찔하군······.”
 무인각 문 앞은 겨우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제외하곤 어느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말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였다.
 운강은 무인각 문 앞에 가지고 올라온 책을 쌓아놓고서 일단 아래로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안쪽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들어간다 해도 어둠뿐이니 횃불이라도 준비를 해야 안쪽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인각 입구에서 발길을 돌린 운각은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올 걸 생각하니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오르고 내리는 데 삼각에서 반 시진의 시간이 소요되고, 한 번에 자신이 들고 올라올 수 있는 서책은 많아야 30권이 한계다. 그러나 구름다리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서책은 어림잡아 3천여 권. 한 번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해도 무려 1백 번을 오르내려야 하는 것이다.
 말이 1백 번이지, 시간상으로 따진다면 최소한 보름은 걸릴 것이다. 먹고 자고 싸는 시간에 짬짬이 쉬는 시간까지 포함시킨다면, 대충 계산해도 한 달은 투자해야 저 책들을 무인각 안으로 옮길 수가 있는 것이다.
 운강은 서책을 옮기는 데 필요한 시간을 대충 계산하더니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떤 미친 새끼가 이런 곳에 서고를 만든 거냐고!”
 <만든 거냐- 고- 오오오오!>
 “썅! 짜증나니까 따라 하지 마!”
 <하지- 마마마마마!>
 운강은 자신이 지른 소리에 산울림이 생겨나자, 마치 서고를 이곳에 만들었던 오래전 누군가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땅이 꺼질 듯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운강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도 된 것처럼 정말 움직이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무인각 입구에 서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남는 게 시간이라며 마음 편히 먹었던 운강이지만, 막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끔찍한 노동력 낭비인지를 인식한 뒤론 대충대충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생각을 낭떠러지 밑으로 확! 던져 버렸다.
 
 ***
 
 운강이 무인각으로 떠나올 때 챙겨온 식량은 보름치뿐이었다. 물론 무인각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황에서(반년에 한 번씩 책을 나르는 사람을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없다) 얼떨결에 쫓겨나듯 서원을 떠났었기에 준비가 미흡한 점은 있다 쳐도, 막상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원주조차 아무런 귀띔이 없었다는 것은 운강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원주님, 진짜 두고 봅시다. 이 년하고 십일 개월, 십 일이나 남았소!”
 쌀자루를 탈탈 털어 마지막 식사를 마친 운강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지만, 사실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20일이 넘도록 기온차가 심한 곳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데다 하루도 쉬지 않고 서책을 나르고 있었으니, 튼튼한 누군가라 할지라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눈은 퀭해졌고, 얼굴은 푸석푸석, 입술은 파르스름한 게 누가 봐도 중병을 앓는 사람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그냥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가 반년에 한 번씩만 돌아올까 보다. 아니야. 어차피 내려가는 길도 잘 모르잖아. 그러다 산속에서 길이라도 잃는 날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굽이굽이 도는 길이라도 꼼꼼히 살폈어야 했거늘.”
 운강은 무인각에 도착한 지 20여 일이 지난 시점에 큰 고민에 빠져 들었다.
 반년에 한 번씩 이런 무식한 짓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데다, 먹을 것조차 변변치 못하고 그것마저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니 처음 결심했던 것과 달리 심적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나름대로 아껴먹는다고 나누고 나눠먹긴 했지만, 결국 식량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휴! 그나저나 오늘 저녁부터는 뭘 먹지? 마삼 아저씨가 식량을 가져다 준다곤 해놓고 나타나질 않으니······. 미치겠군!”
 운강은 타지에 나가본 적도 없고, 어려서 서원에 들어온 뒤론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바깥 세상에 대한 경험은(말 그대로 먹고사는 방법은) 지식이 아주 없다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성인들의 말씀에는 쌀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건을 나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인지 아무런 언급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공부를 했던 것들이 정작 나 하나 살아가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 높고 넓은 학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운강은 재물을 논하고, 욕심을 멀리하라는 선인들의 말들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어버렸다.
 “개뿔이! 재물도 있어야 경계를 하는 것이고, 욕심도 부족해야 부리는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나에게 높고 깊은 성인의 말씀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운강은 삶이 고달프고 배고픈 민초들이 종종 터전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어 인간으로서 모습을 포기하고, 금수의 행동을 보이는 일들에 얼마나 분노를 했던가.
 운강은 그런 민초들을 구제하고자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들을 계도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었다.
 “크크큭, 목구멍에 거미줄을 칠지라도 학자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던 우리들이었는데······. 결국 거미줄은 고사하고, 목 한번 말라보지 못한 자들이 배부른 소리만 늘어놓는 꼴이었구나.”
 운강은 먼지만 남은 쌀자루와 밤마다 추위에 떨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을 얻었다.
 “책에만 얽매이며 죽은 학문이라 외쳐 대던 내가 결국 실천할 수 없는 학문에 목을 맨 셈이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오호, 통재로다! 크크크크! 킥킥킥킥! 하하하하!”
 운강은 왼손에 들린 쌀자루를 흔들어대며 협곡 안이 떠내려 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자만에 빠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본 운강은 어리석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 부끄러움의 크기만큼 스스로 어떻게 학문을 접해야 할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그의 웃음 속에는 허탈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통쾌함과 환희에 가까운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웃고 나니 그나마 채워놓았던 배 속이 더욱 빨리 허무해지는구나.”
 한참을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던 운강은 깨달음도 잠시,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학문도 내 마음에만 남아 있으면 내 마음은 학문의 무덤이 되고, 아무리 크나큰 깨달음도 산속에만 묻혀 있으면 태산이라도 내 무덤이 될 것이니······. 일단은 살고 보자!”
 운강은 오늘 자신이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일단 살아 있어야 뭐든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더라. 이렇게 지내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저승길로 향할 수도 있겠어.”
 운강은 무인각 주변에 뜯어 먹을 풀뿌리라도 찾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허기는 생존을 위한 자극제다. 배부른 자가 게을러지는 건 그 자극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인생을 부지런하게 살고 싶다면 절대 먹는 것에 목숨 걸지 말기 바란다.
 그래도 굶는 건 좀 그렇지?
 -배고픈 소운강-
 
 
 3장 무인각(武人閣)
 
 
 운강은 자신의 입으로 씹을 수 있다 생각한 모든 것을 먹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협곡 안쪽에 나무뿌리와 칡이 풍부한 편이었기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절벽을 타거나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 없다는 점 정도(나가고 싶어도 협곡을 틀어막고 있는 3장 높이의 문을 넘어갈 방법이 없었다)였다.
 서원을 떠나온 지 한 달 만에 운강은 비쩍 말라버린 나무 뭉치처럼 준수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저분한 머리는 말할 것도 없으며, 제대로 씻지 못해 잔뜩 얼룩이 묻은 얼굴은 거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저분하게 변해버렸다.
 아직도 식량을 가져다 준다던 마삼은 올 기미가 없었다. 약속대로라면 이미 보름 전에 식량을 가지고 왔어야 했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처럼 무인각 근처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질 않으니 어떻게든 알아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처음에는 칡뿌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여름에 나는 칡은 쓴맛이 강하게 묻어난다. 처음 환호를 질렀을 때와는 달리 잔뜩 신경질을 부리며 칡뿌리를 던져 버렸던 운강이지만 그것도 잠시, 배 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와 목이 갈라지듯 타오르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쓰디쓴 칡뿌리라도 감사하게 먹는 처지가 되었다.
 “물을 구해야 해······.”
 운강은 시체가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로 물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산꼭대기에 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마삼을 따라 무인각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계곡이나 옹달샘은 본 적이 없었기에 운강은 아직도 협곡 밑으로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던히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협곡 안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공터에 쌓여 있던 책들을 무인각 안으로 집어 던졌다는 정도였다.
 하긴 하루 종일 먹을 걸 찾는 시간을 제외하곤 그것이 유일한 일이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인각에 들어가 볼까······.”
 운강은 새벽에 받아두었던 이슬로 목을 축이다 말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귀신이 산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서책도 안으로 던져 넣었을 뿐, 그것을 정리하려고 안에 들어가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았던 운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굶어죽든, 귀신에 잡혀 죽든 어차피 죽는 것은 피차일반이었다.
 이렇게 멍하니 주저앉아 천천히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결국 몸을 일으킨 것이다.
 “맹환진 그 영감탱이,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운강은 식량은 물론이고, 물도 구하기 어려운 협곡 안에 자신을 가둬버린 맹환진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맹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며 협곡 문을 닫아버린 마삼 역시 맹환진과 더불어 운강의 욕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운강은 소리 지르는 것도 삶을 낭비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며 천천히 무인각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따로 횃불을 만들 만한 물건도 없었기에 웃옷을 벗어 나뭇가지에 감고 소나무에서 송진을 묻혔다. 어차피 일회성 횃불이었지만, 무인각 안을 살필 수 있는(혹시 물이 없나) 시간은 버텨 줄 거라 생각했다.
 무인각 입구에 가까워지자 벼랑 사이를 오가는 매서운 바람이 운강의 몸을 흔들었다. 예전 같으면 굳건히 버티며 전진할 수 있을 정도의 바람이었지만,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엄청난 체중 감량에 성공한 운강으로서는 그 바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 무섭게 불어 닥친 바람에 운강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으아아악!”
 운강은 기껏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허약한 몸을 저주하면서도 절대 절벽 밑으로는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손을 휘둘렀다. 뭐가 되었든 손에 잡히기만 하면 목숨을 걸고 붙잡아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기껏 바람 한 번에 날아가 죽을 팔자는 아니었는지 아슬아슬하게 돌부리를 잡아낼 수 있었고, 사력을 다해 계단 위로 기어 올라갔다.
 “헉헉헉!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운강은 무인각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목숨에 위협을 받을 줄 몰랐었기에 보통 놀란 게 아니었다. 정말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엄청나게 놀란 운강이었다.
 바닥에 배를 붙이고 마음을 다스리던 운강은 계단에 떨어트렸던 횃불 가지를 집어 들고 겨우 무인각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이이익-
 스산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리는 무인각의 문.
 운강은 어두컴컴한 무인각 안을 들러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말 안 듣고 건들거리던 일꾼이 뭔가를 보고 놀라 뛰어내렸다는 곳에 드디어 발을 내디딘 것이다.
 운강은 한 발은 무인각 안에, 다른 한 발은 바깥에 걸친 채 허리춤에서 부싯돌을 꺼내들었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횃불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운강은 문 안쪽 귀퉁이에 마른 풀잎을 내려놓고 부싯돌에 치기 시작했다.
 횃불로 사용할 자신의 웃옷과 송진은 부싯돌 정도로 바로 불이 붙지 않았기에, 일단 풀잎에 먼저 불을 댕겨야 했다.
 탁탁거리는 소리와 곳곳으로 튀어나가는 불꽃.
 처음 무인각에 도착했을 때는 부싯돌로 불을 일으키는 것조차 곤욕이었던 운강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능숙한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몇 차례 자잘한 불꽃이 일어나더니 어렵지 않게 불을 일으켰다. 송진이 묻은 천 조각은 불에 가져다 대는 순간 화르륵 소리를 내며 불타올랐다.
 “준비는 끝났다. 물을 찾거나 이곳에서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운강은 마음을 강하게 먹고서 바깥에 두었던 발마저 무인각 안으로 들여다 놨다. 드디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뭐··· 뭐야!”
 무인각 안으로 들어선 운강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푹 꺼진 두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자신이 한 달 내내 던져 넣었던 수천 권의 서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 전부 어디로 간 거지?”
 운강은 무인각 안에 정말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달달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리기 시작했다. 찌릿찌릿한 감각이 중추신경을 자극하자 몸 전체에 소름이 솟구쳤다.
 “젠장! 무슨 놈의 서고가 이따위야! 아예 귀곡 산장이라고 해라!”
 두려움에 온몸이 덜덜 떨리는 운강이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온 이상 멈출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열 걸음 정도 옮겼지만 무인각 안쪽은 여전히 시커먼 동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일 뿐이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조심스럽게 횃불을 움직이던 운강은 절대 나서는 안 되는 소음, 그것도 자신의 앞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머리카락이 솔잎처럼 뻣뻣이 곤두서버렸다.
 투득- 부스럭-
 “으악!”
 운강은 소리가 난 쪽으로 횃불을 휘두르며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누··· 누구냐! 사람이면 모습을 드러내고, 귀신이면 썩 물러가렷다!”
 운강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심장 박동수가 크게 요동을 치자 얼굴이 화끈거리며 붉게 달아올랐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끝까지 흔들어버리자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이 된 운강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찾아내고자 눈의 깜빡거림마저 멈춰버렸다.
 부릅뜬 눈으로 어둠을 노려보는 운강.
 그러나 방금 전 자신을 소스라치게 만들었던 ‘무엇’인가는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화··· 환청이었나?”
 운강은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스스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레 놀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부스럭.
 “젠장! 환청이 아니잖아!”
 운강은 또다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자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끼이이익- 쿵!
 “뭐··· 뭐야! 안 돼!”
 밖으로 달려 나가던 운강은 무인각의 문이 특유의 소음을 만들어내며 굳게 닫히자 진짜 사색이 되고 말았다.
 덜컹덜컹!
 운강은 문을 열기 위해 거칠게 잡아당겼지만, 처음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운강은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자신이 나가지 못하게 문을 잠갔다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몸을 돌리고 문에 등을 가져다 댔다. 일단 등 뒤라도 보호할 생각인 것이다.
 횃불을 들고는 있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자신의 몸뿐! 깊고 칙칙한 어둠은 급조한 횃불 정도로는 도저히 밝힐 수가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랏!”
 운강은 눈을 부릅뜬 채 어둠 속을 쏘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러자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미미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으억! 진짜 귀신이야?’
 속에서는 미칠 것 같은 운강이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뭐라고 하는 것이냐!”
 “······.”
 ‘빌어먹을! 뭐라고 하는 거야! 흐느끼지 말고 말을 하라고! 무서워서 미쳐 버리겠네!’
 운강은 자신의 외침에 어둠 속의 ‘무엇’이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자 더더욱 무서웠다.
 귀신이든 괴물이든 말이라도 통하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사람 소린지 괴물 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괴이한 소음에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모습을 나타내라! 모습을 보이란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야 하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던 운강은 ‘그것’에게 모습을 보일 것을 소리쳤다.
 “누··· 으.”
 “뭐··· 뭐얏?”
 “누··· 우.”
 “누우? 그게 무슨 말이냐! 모습을 드러내라고 했다!”
 운강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엇’이 막상 자신을 공격하려는 기미는 없어 보이자 그나마 안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이었고, 그 ‘무엇’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젠장! 벌써 횃불이!’
 운강은 거칠게 휘둘러대던 자신의 횃불이 점차 수명을 다해가자, 잠시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심장 박동수가 다시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젠장! 횃불 때문에 저놈이 공격을 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운강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빛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빛을 담당하던 급조한 횃불이 점차 힘을 잃어가자 다급한 심정이 되었다.
 “누··· 우··· 그.”
 “뭐··· 뭐라고 하는 거야!”
 운강은 어둠 속에서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올 때마다 귀를 쫑긋거리며 정신을 집중했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어찌 보면 신음 소리 같기도 한 괴물의 소리에 짜증이 가중됐다.
 물론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난 짜증이 아니라,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흘려 대는 ‘그것’에 대한 짜증이었다.
 훅!
 “허억!”
 횃불의 수명이 다됐는지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불꽃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운강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그와 유사한 헛바람 소리!
 ‘젠장! 나 이렇게 죽는 건가!’
 운강은 그냥 공터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당장 죽지는 않을 것이니,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마삼이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으흐흑! 미쳤다고 무인각에 들어와 가지곤······.”
 운강은 이미 불은 꺼졌지만 그래도 몽둥이로서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는 횃불을 움켜쥐며 만약의 사태를 준비했다. 뭔가 다가오는 기미만 보이면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두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빛이 사라졌음에도 어둠 속의 그것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무인각 안은 운강의 숨소리가 크게 느껴질 정도로 한동안 적막감에 휩싸였다.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운강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것’이 꼼짝도 하질 않자, 처음 횃불이 꺼졌을 때보다 더욱 속이 타기 시작했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먼저 맞는 게 속이 편하다고 했다. 운강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분명히 자신을 잡기 위해 문까지 닫아버리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정작 잡을 수 있는 순간이 되자 꼼짝도 하질 않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반응을 기다려야 하는 운강은 놈이 덤벼드는 것보다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빌어먹을! 날 죽이든 놔주든 둘 중에 하나만 하란 말이야!’
 운강은 속으로 어둠 속의 ‘무엇’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마음속에서야 ‘죽이든 말든’이라고 했지만, 사실 한창 팔팔한 나이인 운강이 정말 죽고 싶겠는가. 답답한 심정에 그렇게 생각만 해볼 뿐이었다.
 속마음과는 달리 행여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내서 ‘그것’에게 핑곗거리를 만들어줄까 불안하여 오히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운강은 스스로 석상이라도 된 듯 그렇게 어둠 속에서 서 있어야만 했다.
 먼저 입을 열면 내기에 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침묵을 고수하는 운강과 어둠 속의 그것은, 횃불이 꺼진 뒤 벌써 반 시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쥐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운강은 쓰러지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버텨 내고 있었지만, 정신력은 둘째 치고 체력에 점차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못 먹고 못 자서 허약해진 운강이었기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을 계속해서 유지해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줌까지 마려워지자 운강의 참을성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으으으··· 싸··· 쌀 것 같아!’
 운강은 아랫배에 힘을 주며 최대한 요도를 움켜쥐었지만, 의지로 막아낼 수 있는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오줌 한번 시원하게 보겠다고 목숨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찔끔찔끔 싸서 말릴까?’
 운강은 참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지만, 어떻게든 나오려는 걸 무작정 막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결심을 내린 운강!
 ‘그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오줌 좀 지렸다고 누가 뭐라 할 거야!’
 운강은 결국 최대한 힘을 조절해 오줌을 흘려 내기로 했다. 괄약근까지 동원해 막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다 방광이 터져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조심··· 조심해서······.’
 운강은 단단히 조여 매고 있던 괄약근을 살짝 풀어주며 요도의 압박을 줄여 나갔다.
 찔끔.
 ‘꺼억!’
 살짝살짝 지려서 말린다는 계획하에 요도의 압박을 줄여 가던 운강은 첫 번째 오줌 지르기가 시작되자 ‘성공이다!’를 외치고 싶었지만, 막상 계획을 실행에 옮기자 찔끔찔끔 지리는 방식이 요도에 엄청난 고통을 선사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괄약근의 강력한 압박에서 겨우 찔끔 지릴 정도로 압박이 풀린 요도는 방광의 무지막지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쏟아내려 한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엄청난 빠르기로 괄약근을 조이자 찔끔 지리는 것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막 배출을 시작하려던 요도는 또다시 시작된 압박에 끔찍한 통증을 생성해내며 요동을 친 것이다.
 ‘끄아아악! 뭐가 이렇게 아파!’
 세상에 일부러 오줌을 찔끔찔끔 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가끔 요도에 문제가 생긴 사내들만이 비밀리에 공유하는 가슴 아픈 고통이었으니,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야 할 오줌이 불가항력의 압박을 통해 찔끔거려야 할 때 어떤 고통이 생성되는지 보통 사내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멀쩡한 기능을 가지고도 그런 고통을 경험해야 하는 운강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추억을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찔끔.
 다시 한 번 시도된 ‘지려서 말리기’, 그리고 거침없이 동반된 요도의 통증!
 다시 괄약근을 조일 때마다 이를 악물고 마는 운강의 상황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처절함 그 자체였다.
 ‘헉헉!’
 찔끔거리며 지려 낸 오줌은 뜨듯한 감촉을 만들어내며 오른쪽 허벅지를 타고 흘렀고, 곧 바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일단 줄줄 흘리는 사태는 막아냈으니 찔끔거리는 시간만 잘 조절하면 정말 ‘지려서 말린다!’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리에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강은 몇 차례 성공을 통해 점차 자신감을 얻었고, 괄약근의 조임력 또한 월등히 높아졌다.
 ‘이런, 냄새나잖아!’
 내심 지려서 말리는 한이 있더라도 어둠 속의 ‘그것’에겐 절대 기척을 드러내지 않겠다던 자신의 계획에 치명적인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침묵에 침묵을 고수하던 어둠 속의 ‘그것’이 결국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
 ‘제발··· 그냥 그러려니 생각해다오.’
 운강은 오줌의 향긋한 향기가 어둠 속의 ‘그놈’을 자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더러운 새끼!”
 “헉!”
 운강은 괴이한 소리만 흘려 내던 어둠 속의 ‘그놈’이 멀쩡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르자,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괄약근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주르륵! 쏴!
 “으악! 미친놈! 당장 안 나가?”
 “여··· 여자?”
 운강은 자신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대상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어둠 속이니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운강은 눈 끝을 실룩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철퍽철퍽!
 “꺄아악! 야, 이 새꺄! 오줌 튀잖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운강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잔뜩 고인 오줌물이 튀어 오르자 비명까지 질러대며 안쪽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다.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운강은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리며 허탈한 음성을 쏟아냈다.
 무인각 안에 자생하던 정체불명의 ‘그것’은 귀신은커녕 괴물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을 바보로 만든 웬 미친년 하나가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운강은 자신이 싼 오줌 물에 신발이 축축이 젖고 있었지만, 이미 ‘그런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자신은 ‘여자 앞에서 오줌 싼 놈’이 되고 만 것이다.
 “헤헤헤! 그것도 겁에 질려서 말이지······.”
 운강은 반쯤 넋이 나갔는지 바보 같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운강의 이성을 마비 상태로 몰아갔다.
 “이런, 쌍! 이 미친년아, 거기 안 서?”
 운강은 코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무인각 안으로 미친 듯이 달려 들어갔다.
 운강의 모습은 성난 황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운강은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오줌까지 지리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상황을 의도했는지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 특정한 의도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었다면··· 그래도 운강은 상대를 용서할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운강은 이미 눈이 뒤집혀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간의 감금, 한 달간의 중노동, 한 달간의 허기와 나무뿌리를 갉아먹어야 했던 처절함, 그리고 결코 타인에게 보일 수 없는 비참한 최후까지. 그 모든 것이 우연이든, 누군가의 계획이든 운강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지금 운강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비참함의 바닥을 경험하게 만든 ‘미친년’을 잡아, 자신이 느꼈던 치욕과 서러움을 똑같이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운강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살짝 미쳤다 해도 무방한 바로 그런 상태였다.
 빠악!
 두툼하고 적당히 단단한 무엇인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서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뒤흔들었다.
 “쿠에에에엑!”
 운강은 눈앞에 수천 개의 별빛이 솟아오르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껴야 했다. 방향감과 공간감을 상실한 운강은 단지 ‘미친년’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그만 동굴의 벽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끄어어억······.”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나 몸을 뒤척이는 소리, 그리고 숨넘어가는 소리 등이 혼합되어 한동안 동굴 안을 소란스럽게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무인각으로 향하는 동굴 안은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어느새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차피 빛이 들지 않는 어둠 속이라 밖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갔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멈춘 기괴한 곳은 아니니 분명히 얼마간의 시간은 흘러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 흘러갔을 때 운강이 침묵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윽!”
 운강은 이마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오자 조심스럽게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냥 기절해 있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미칠 듯이 욱신거리자, 나름대로 통증을 줄여 보고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통증을 분산시켜 이마의 고통을 덜어볼 생각이었다.
 “꼴좋다.”
 운강은 스스로 이성을 잃고 날뛴 결과를 확인하더니 자신의 행동을 책망했다. 아무리 분을 이기지 못할 상황이었다고 해도 상대의 의도도 알지 못한 채(그것도 여자에게), 무작정 달려든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단 귀신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운강은 자신이 당한 모든 일을 ‘귀신 확인을 위한 희생’ 정도로 결론을 내렸다. 그 이상이나 그 이하도 아닌, 딱 그것을 위한 희생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 것이다.
 더듬더듬 벽을 짚으면서 몸을 일으킨 운강은 무인각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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