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현월비화 [E]

현월비화 1권 (1화)

2017.06.29 조회 1,312 추천 10


 현월비화 1권 (1화)
 제1장 이별, 그리고 만남
 
 
 아침부터 심상치 않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사천성 성도의 외진 곳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장원.
 빗줄기는 분풀이라도 하듯 장원의 지붕을 두들기고, 세찬 바람은 귀신의 울음처럼 문틈을 비집고 있었다.
 장원의 내전, 마루를 조금 높여 놓은 위쪽에 자리한 태사의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세월의 흔적인 듯 관을 쓴 머릿결에 조금씩 흰빛이 보였으나 각이 진 얼굴은 남자다웠고, 굳게 다문 입술이 의지의 견정함을 말해 주는 사내였다.
 그의 아래쪽으로는 십수 명의 사람들이 둘러싸듯 서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도 있었고, 청년들의 모습도 보였다.
 태사의 바로 아래쪽으로 열서넛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과 불안한 기색으로 그 소년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암울한 기운이 실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태사의에 앉은 사내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마치 눈 안에 담아 두기라도 하려는 듯 사내의 눈빛은 집요함을 담고 있었다.
 사내가 눈을 감으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요함이 깨어져 나갔다.
 “살문은 오늘부로 폐문한다.”
 사내의 말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지만 힘겨움을 감출 수는 없는 듯,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다시 눈을 뜬 사내의 눈동자에는 아릿한 아픔이 가득했다.
 몇몇 사람은 주저앉듯이 무릎을 꿇었고,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허탈함과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문주님!”
 “사부님!”
 문주라 불린 사내의 눈에 단호한 기색이 어렸다.
 “살문의 문주로서 마지막 명을 내리겠다. 살아남아라!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라. 그리고 살아남거든 살문을 잊어라! 복수 같은 것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말거라!”
 울분을 터트리는 듯 소리치는 사내의 목소리에 몇몇의 눈가에는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 살수가 행적이 드러나면 추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잊을 수 있으면 잊고, 잊지 못하겠거든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할 것이다.”
 사내의 입에서 탄식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말을 하면서도 사내의 심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원한을 가지든 잊든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인데, 지금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을 떠올려 보면 단 한 명의 생존자를 기대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사천성의 패자를 자부하는 당문의 정예 백여 명이 그리 크지도 않은 장원을 촘촘히 둘러싸고 있었다.
 세간의 평가와 같지는 않으나 스스로 정파라 자부하는 당문인지라 형식적으로나마 투항을 권유했고, 그 덕에 잠시나마 여유를 얻기는 했다.
 하나 문도와 잡일을 하는 일꾼들을 모두 합쳐 봐야 수십 명에 불과한 살문에 별다른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원한은 열 배로 돌려줘도 모자라다 말하는 당문이었다.
 모르고 한 일이라 해도 당문의 제자가 죽었다.
 투항한다고 해도 본보기라 하여 모두 죽일 것이 분명했다.
 사내는 눈가에 희미한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돌려 태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소년과 소녀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운비야, 이리 오너라.”
 사내의 말에 소년이 차분한 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얼굴이 어울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소년이었다.
 잠시 따스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나와 네 사형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 포위망을 뚫어 볼 생각이다. 너는 옥화와 수로 쪽에 몸을 숨겼다가 기회가 나는 대로 시장 방향으로 빠져나가도록 해라. 이곳까지 드러난 상황에 당문이 나선 일이니 요행히 빠져나간다 해도 추적이 없으리라 보기는 힘들 게다. 허나 하늘의 도움이신지 쉬이 그치지 않을 폭우가 내리고 있으니, 네 재지라면 생로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거운 분위기에 맞지 않는 사내의 부드러운 말이었으나 운비라 불린 소년은 얼굴을 굳히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옥화를 보호하여 빠져나가야 한다면 무엇으로 보아도 저보다는 대사형이 낫습니다.”
 소년, 조운비의 입에서 날이 선 듯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는 가볍게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진 능력이 너보다 첫째가 낫다는 것을 몰라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느냐? 사천제일세라는 당문이다. 분명 우리 살문의 중요 인물들에 대해서 적지 않은 조사를 했을 것이다. 천인살이라 불리는 첫째가 사라진다면 당문이 어찌하겠느냐?”
 사내는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은 듯 곧 말을 이어 갔다.
 “네 대사형이 옥화와 함께 빠져나간다면 필히 당문은 총력을 기울여 추적을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누구라 해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게다. 허나 너는 아직까지 한 번도 살행을 나간 적이 없다. 당문에서 너를 안다고 해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부는 그러한 점에 한번 기대를 해 보려는 것이다. 알겠느냐?”
 설득력 있는 말이었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였으나 조운비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피가 흐르도록 입술만 깨물었다.
 “사제.”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조운비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마른 체형에 창백한 안색의 청년이 조운비를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게. 다른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네. 사제가 가지 않는다면 옥화가 꼼짝이나 할 것 같은가? 사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네.”
 애써 웃음을 짓는 청년의 말에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옥화는 어린 나이 탓인지 명확한 상황은 모르는 듯 보였다.
 무거운 분위기에 억눌린 듯 무척이나 불안한 표정이던 이옥화가 조운비의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발견했는지 눈을 부릅떴다.
 사내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켜 조운비에게 다가섰다.
 크고 투박한 손이 조운비의 손을 부드럽게 덮었다.
 “운비야, 옥화를 부탁한다.”
 살문의 문주이자 이옥화의 아비인 사내의 처연한 눈빛에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쏴아아!
 비는 강풍에 파도라도 되는 듯 사위를 휩싸고 있었다.
 장원의 정문에서 이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두 명의 녹의인이 있었다.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의 모습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하관이 가는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날씨가 더 험해지는군. 포위망을 벗어나는 놈이 있으면 추적하기가 쉽지 않겠어.”
 노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는 눈매의 중년인이 살짝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염라대가 백입니다. 우중이라 하나 살수들 따위가 빠져나갈 틈은 없습니다.”
 약간의 불만이 섞인 중년인의 말이었으나 노인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만의 바탕에 깔려 있는 자신감이 싫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리라 생각되네만 조금 더 주의해서 손해날 것은 없겠지. 몇 명을 뒤로 빼서 주변을 살피라 이르게.”
 부드러운 노인의 목소리에 중년인이 가까운 곳에 있는 녹의인 한 명을 불러 무어라 지시를 했고, 녹의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날렸다.
 노인, 당문의 장로인 추혼수 당태화는 차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의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장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폭포수 같은 빗줄기와 세찬 바람에도 조금의 허술함도 보이지 않는 녹의인들의 모습에 당태화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당태화의 시선이 다시 장원으로 향했다.
 “시각이 어찌 되었는가?”
 당태화의 나직한 음성에 중년인, 염라대의 대주 당화기가 입 꼬리를 가볍게 비틀었다.
 “반 식경 정도가 남았습니다.”
 “그럼 곧 움직임이 있겠군. 적지 않은 악명을 얻은 자들이라 하나 고작 살수에 불과하니 피해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당태화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당화기에게 향했고, 당화기의 눈빛이 잠시 차가운 빛을 뿜었다.
 “있어 봐야 해가 되는 놈들이니 손속에 정을 남기지 말라 하였습니다.”
 물음에 맞는 답은 아니었으나 당태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느꼈는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순수한 무공만을 본다면 몇몇 세가나 구대문파의 정예에 조금의 모자람이 있었다.
 하나 무공을 살인의 기술로만 본다면 천하제일의 정예라 자부할 수 있는 염라대인 것이다.
 제압이 아닌 제거이고, 손속에 정을 두지 않는다면 살수들 따위에게 피해를 입을 염라대가 아니었다.
 삐이익!
 폭포수인 양 요란한 빗소리를 가르며 날카로운 소음이 장원의 동쪽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녹의인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종일 쏟아져 내린 폭우에 시달려 늪이라도 된 듯 길은 질퍽거렸지만 녹의인들은 한 몸이라도 되는 듯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삐이익!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또 한 번의 날카로운 소음이 대기를 갈랐다.
 당태화는 미간에 주름을 접으며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부질없는 노력이겠으나 그저 목을 내밀 수는 없을 터이니······.”
 
 * * *
 
 층층이 하늘을 뒤덮은 칠흑 같은 먹구름은 긴 여정의 무게를 덜어 내려는지 끊임없이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이옥화는 반 시진 가까이 대책 없이 맞은 비에 한기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바르르 몸을 떨었다.
 꼭 쥐고 있던 자그마한 손의 울림에 조운비의 고개가 돌려졌다.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에 드러난 조운비의 눈동자에 근심의 빛이 떠올랐다.
 이옥화는 괜찮다는 듯이 파랗게 질린 입술로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니 조금만 더 참아 보거라.”
 조운비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이옥화는 애써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괜찮아.”
 대답의 의미와는 달리 이옥화의 목소리는 온몸에 스며든 한기로 인해 힘겹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이옥화를 바라보던 조운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몸을 돌려 발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사부와 사형들의 희생으로 장원의 포위망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장원을 촘촘히 포위했으니 굳이 다른 준비가 없을 수도 있지만 상대는 당문인 것이다.
 조운비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침착한 얼굴로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조운비였으나 그러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상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부와 사형들을 죽음 속에 놓아두고 도망가고 있다는 생각이 쉬지 않고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녹의인들의 손짓에 피 흘리며 쓰러지던 문도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만 같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사부님과 사형들 또한 녹의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운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옥화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 살아남는다면 언젠가는 갚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부는 잊으라 했고 복수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것이 진심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 죽을 줄 모르고 불길에 날아드는 나방의 운명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조운비도 사부의 생각이 그르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복수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던 자신을 구해 준 사부였고, 하인을 삼아도 감지덕지할 자신을 제자로 거두어 자식처럼 대해 준 사부였다.
 사부님이라 불렀으나 아버지라 생각했었고, 남들은 살귀라 해도 자신에게는 친형제 같던 사형들이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눈앞에 골목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곳에 이르면 시장 길로 들어서고 사방으로 퍼지는 미로와 같은 길들 사이로 자신과 옥화는 몸을 감출 수 있을 것이다.
 문뜩 조운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딱히 무엇인가를 봐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골목의 끝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운비는 몸을 멈춘 채 잠시 동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조운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이옥화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조운비는 곧 자신이 받은 이상한 느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바람과 짙은 어둠에 휩싸인 골목의 그림자 한편이 조금씩 꿈틀거리는 듯 보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조운비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긴장감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하자, 조운비는 깊이 숨을 들이켜 심호흡을 했다.
 피해 갈 길은 없었다.
 혼자라 해도 힘들 터인데 옥화를 데리고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이없는 기대이겠으나 당문과 상관없는 자이기를 빌어 보았다.
 조운비는 조심스럽게 꼭 쥐고 있던 옥화의 손을 떼어 내며 그녀의 앞으로 몸을 옮겼다.
 잠시 머뭇거리던 옥화는 조운비의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의지를 느끼며 그의 손길에 따라 뒤로 물러섰다.
 꿈틀거리던 그림자가 어느새 녹의인으로 변해 있었다.
 조운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짐작한 일임에도 막상 당문의 제자인 것을 확인하고 나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 전신을 옥죄어 왔다.
 서서히 걸음을 옮기는 녹의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설마 했는데 빠져나오는 것들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이런 꼬맹이들이라니.”
 녹의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절망 어린 눈빛이 되어 녹의인을 바라보던 조운비가 터질 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멍하니 있어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자신과 옥화의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신의 어설픈 무공으로 당문에서도 정예라 할 수 있는 염라대의 인물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했지만 곱게 죽어 줄 수는 없었다.
 냉정을 되찾은 조운비의 눈빛이 빠르게 가라앉으며 힐끔 주위를 살폈다.
 ‘저자 혼자다.’
 녹의인은 혼자인 데다 자신을 그저 어린아이로만 생각하고 무시하는 듯 보였다.
 잠시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린 조운비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듯 한 발을 뒤로 옮겼다.
 그런 모습에 녹의인은 비웃음을 떠올리며 긴장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겁먹은 꼬맹이들에게 굳이 암기나 독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운비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스쳤다.
 겁을 먹고 물러서는 연기를 했지만 실제로는 공격을 하기 위한 자세를 잡은 것이다.
 녹의인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한 모습이었으나 녹의인은 오히려 조운비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여 더욱 무시하는 듯 보였다.
 “흐흐,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녹의인이 입가의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다섯 걸음 정도 앞까지 다가섰다.
 조운비는 겁먹은 모습을 보이며 뒤로 뺐던 오른발을 힘주어 박차며 몸을 날렸다.
 섬전처럼 몸을 날린 조운비의 양손이 정신없이 휘둘러졌다.
 퍼엉!
 녹의인의 발밑에서 흰 연기가 치솟았고, 녹의인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며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쇄액!
 연기 속에서 세 가닥의 빛살이 솟아 나와 녹의인을 덮쳐 갔다.
 안색이 굳어진 녹의인이 빠르게 손을 휘두르자, 세 자루 단검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감히!”
 녹의인이 채 분기를 터트리기도 전에 조운비의 신형은 녹의인에게 부딪쳐 가고 있었고, 녹의인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찔러 가고 있었다.
 녹의인은 이마에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맨손으로 단검을 쥔 조운비의 팔을 쳐 나갔다.
 너무 거리가 가까워 암기나 독을 쓸 수도 없었고 검을 뽑을 만한 틈도 없었다.
 그저 겁먹은 꼬맹이라고 생각했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
 퍼억!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단검을 찔러 오던 조운비의 팔이 늘어졌고, 조운비는 튕겨 나가듯이 뒤로 물러섰다.
 녹의인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며 암기를 손에 쥐었다.
 “이 쥐새끼 같은······. 으윽!”
 분기 어린 말을 내뱉던 녹의인이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자신의 가슴으로 옮겼다.
 녹의인의 가슴에는 단검의 검날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바닥 한쪽에는 단검의 손잡이만 나뒹굴고 있었다.
 “큭! 이, 이깟 기관 따위에······.”
 고통과 억울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녹의인의 몸뚱이가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털썩!
 쓰러지는 녹의인을 바라보던 조운비는 입술을 깨물며 늘어진 한쪽 팔을 잡고 벽 쪽으로 다가섰다.
 기관이 장치된 단검의 검날을 발사하고 최대한 힘을 뺀 덕에 팔이 부러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어깨가 빠졌던 것이다.
 조운비는 이를 악물며 벽에 어깨를 부딪쳐 갔다.
 빠각!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조운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느새 다가선 이옥화가 불안한 듯 몸을 떨며 조운비의 소매를 잡았다.
 “오빠······.”
 고개를 돌린 조운비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이옥화의 손을 쥐었다.
 “괜찮아. 이제 가자.”
 조운비는 고개를 돌려 잠시 녹의인의 시신에 눈길을 주었다.
 자신이 녹의인을 죽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녹의인에게 조금이라도 긴장감이 있었다면 비도를 사용할 틈조차 없었을 것이고, 혹여 사용할 틈이 있었다 해도 당황하지 않았다면 검날이 발사되는 기관 정도에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녹의인은 죽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조운비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당장 살아나기는 했으나 자신과 옥화의 종적이 드러났다.
 녹의인의 시체를 숨기고 흔적을 지운다 해도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은 금방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당문의 제자가 죽었으니 총력을 기울여 추적을 할 것은 당연했다.
 ‘흔적을 지울 시간도 없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다.’
 조운비는 시선을 돌리고는 이옥화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옥화라도 살려야 할 텐데······.’
 조운비는 힘주어 걸음을 옮기며 눈을 빛냈다.
 골목을 벗어난 조운비는 거미줄 같은 시장 길을 헤치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평소 같으면 어느 정도 사람들이 오갈 시간이었으나 쏟아지는 폭우에 길은 스산하기까지 했다.
 이옥화의 손을 잡고 한동안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조운비는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향하더니 곧 몸을 세웠다.
 조운비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초라한 행색의 두 사람이 처마 밑 담벼락에 기대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중년의 여인과 십여 세 정도의 여자 아이였는데 언뜻 보기에도 모녀간인 듯 보였다.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던 조운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싸늘한 빛을 뿜었다.
 조운비는 씹듯이 입술을 깨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 가던 방향이 아니라 모녀가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중년의 여인은 뛰어오다시피 다가온 두 아이의 모습을 의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옆에 기대앉은 여자 아이의 눈에도 의아함이 서렸다.
 “무슨······?”
 중년 여인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조운비의 오른손이 섬전처럼 여인을 덮쳐 갔다.
 중년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했고, 눈빛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여인의 옆에 있던 여자 아이의 눈에 당혹감과 함께 공포심이 떠올랐다.
 막 비명을 터뜨리려던 여자 아이의 입은 조운비의 손에 의해 덮어졌고, 곧 내려쳐진 조운비의 손에 아이는 정신을 잃었다.
 중년 여인의 몸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씁쓸한 눈빛을 떠올리던 조운비가 빠르게 다가서며 여인의 몸을 담벼락에 기대어 놓았다.
 독침에 의해 죽었지만 얼핏 보기에는 잠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옥화야, 저 아이와 옷 바꿔 입어.”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던 이옥화는 이어지는 조운비의 말에 눈동자를 불안감으로 물들였다.
 장원을 탈출해 이곳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운비의 말을 순순히 따르던 이옥화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싫어. 난 오빠랑 같이 갈 거야.”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이옥화가 정신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조운비가 딱히 어찌하겠다고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옥화의 느낌이 말해 주고 있었다.
 조운비는 여기에서 자신과 헤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옥화도 대강의 상황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곳이 지금 어찌 되었을지, 다른 오라비들과 아버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그럼에도 이옥화가 그나마 안정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조운비가 자신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사랑해 주고 지켜 주었던,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 주던 조운비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옥화는 불안감과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운비는 자신을 떼어 놓으려 하는 것이다.
 불안감과 공포심이 갑작스럽게 이옥화를 감싸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난 오빠하고 같이 갈 거야!”
 조운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으나 곧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이옥화의 양손을 꼭 쥐었다.
 “옥화야, 오빠가 옥화한테 한 번이라도 거짓말한 적 있어?”
 잠시 생각해 보던 이옥화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조운비는 말을 이어 갔다.
 “오빠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오빠랑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어. 오빠 말 믿지?”
 이옥화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면 돼. 옥화는 저 아이와 옷을 바꿔 입고 이곳에 반나절만 있다가 우리 가끔 놀러 갔던 비밀 동굴에 가 있어. 동굴 끝에 땅 파면 나오는 상자에 돈이랑 패물들 있지?”
 “응.”
 “오빠가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다 배고프면 거기서 돈 꺼내서 옥화 좋아하는 유과랑 과자 사 먹고 하루 정도 지나면 백화루의 장 선생님한테 가 있어. 오빠가 그리로 옥화 데리러 갈게.”
 이옥화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정말? 정말 며칠만 있으면 나 데리러 오는 거지?”
 조운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이옥화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 주었다.
 “오빠가 한 번이라도 옥화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니.”
 “오빠 말 믿고 어서 옷 갈아입어.”
 조운비가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이옥화를 끌었다.
 이옥화가 옷을 바꿔 입는 동안 조운비는 불안한 기색으로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니 죽은 당문 제자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수도 있었다.
 “다 입었어.”
 시선을 돌린 조운비가 잰걸음으로 이옥화에게 다가섰다.
 초라해 보이는 차림의 이옥화를 바라보던 조운비가 바닥의 진흙을 집어 얼굴에 문질렀다.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얼굴을 돌리려던 이옥화는 곧 조운비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고개를 숙이고 아까 이 아이처럼 앉아 있어. 반나절 정도 꼼짝하지 말고. 알았지?”
 이옥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운비는 몸을 일으켜 이옥화의 옷을 입고 쓰러져 있는 여자 아이를 들쳐 업었다.
 
 * * *
 
 당태화의 얼굴은 분기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당태화의 발밑에는 심장에 검날을 꽂은 한 녹의인의 시신이 차가운 비를 맞고 있었고, 주변에는 몇몇 녹의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다가선 당화기가 굳은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 둘입니다. 살문 문도들의 시신들 중에 보이지 않던 살문 문주의 딸과 막내 제자인 듯합니다.”
 시선을 돌린 당태화의 표정은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우습게 생각하던 살수들에게 염라대의 정예 다섯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지는 상황에 어린애에게 목숨을 잃은 이까지 있으니 열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살이나 되었다고 하였는가?”
 쥐어짜는 듯 나직한 당태화의 목소리에 당화기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살문 문주의 딸이 아홉 살, 막내 제자가 열세 살이라 합니다.”
 짝!
 당화기의 얼굴이 옆으로 획 돌아갔다.
 당태화가 분기를 못 이기고 뺨을 후려친 것이다.
 “이, 이 병신 같은 놈. 아이들 교육을 어찌 시킨 것이냐! 살문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해 몇 놈이 목숨을 잃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리다고 무시하다 암수에 당해? 당문의 염라대원이 열세 살짜리 어린애한테 죽었다고 하면 무슨 소리를 듣겠느냐?”
 중년의 나이에 수하들의 앞에서 뺨을 맞고 욕을 먹는데도 당화기의 눈빛에서는 조금의 반발심도 찾을 수 없었다.
 분기로 뒤덮인 당태화의 목소리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수하이기도 했으나 따지고 들면 가족이 아닌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방계의 다른 성씨를 쓰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는 추혼대와 달리 염라대는 전원이 당씨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당태화의 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보이자, 당화기가 분기가 깔려 있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폭우 때문에 흔적을 찾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어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당태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리다고 손속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 * *
 
 조운비는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혼자 몸이라 해도 쉽지 않은 험한 길을 한 사람을 업고 가려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하나 업고 있는 아이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옥화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문뜩 자신의 등에 대충 옷을 찢어서 만든 끈으로 묶여 있는 여자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 죄 없이 죽은 중년 여인이나 등에 업혀 있는 아이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또다시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똑같이 그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타인이었고 이옥화는 자신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고아로 자라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던 조운비에게 사부가 손을 내밀어 주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자그마한 온정조차 베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타인에 불과하기 때문이었고, 조운비에게 다른 사람은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천 명의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이옥화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단 하나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옥화의 생명을 어찌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조운비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뒤따르는 자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계곡이 있는 곳까지는 가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계곡은 폭우에 힘을 얻어 미친 듯이 범람하고 있을 것이고, 자신이 향하는 곳에 있는 어설픈 통나무 다리는 분명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사천 땅에서 당문의 추적을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급한 심정에 계곡을 건너 도주하려다 폭우의 힘을 받아 광란 어린 질주를 하고 있을 계곡의 물에 자신과 이옥화가 휩쓸려 내려갔다고 당문이 보아 주기만 하면 충분하리라.
 이곳저곳 칼날 같은 바위들이 흉측하게 솟아 있는 험한 계곡 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자신과 등에 업혀 있는 여자 아이가 살아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혹여 살아날 수 있다 생각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옥화는 당문의 추적을 벗어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살문의 비동에 숨겨져 있는 자금이 그리 적지는 않을 것이고, 그 정도 돈이면 이옥화는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문뜩 백화루에서 기생들에게 기예를 가르치는 장 선생님의 후덕한 얼굴이 떠올랐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지만 홀몸인 데다 이옥화를 친딸처럼 아끼고 있으니 이옥화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정성을 다해 돌보아 줄 것이다.
 힘겹게 걸음을 옮겨 가던 조운비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옥화야, 이 오라비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구나. 어쩔 수 없었으니 나중에라도 용서해 주렴.’
 속으로 옥화에게 해 주고픈 말을 되새긴 조운비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콰콰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거대한 나무들까지 쓰러뜨리며 폭군 같은 위세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물줄기가 보였다.
 폭우의 힘을 보태 광란하는 계곡의 와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다가서는 조운비에게조차 본능적인 공포심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잠시 멍하니 계곡의 세찬 물살을 바라보던 조운비는 등 뒤의 꿈틀거림에 정신을 되돌렸다.
 업고 있는 여자 아이가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것이다.
 조운비는 빠르게 몸을 묶은 것을 풀어냈다.
 내려놓은 여자 아이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힘겹게 눈을 뜨고 조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운비가 다시 기절을 시킬 요량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조운비의 공력으로는 아직까지 점혈을 할 수가 없어 기절을 시켰던 것인데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자 아이가 깨어 있어서는 곤란했다.
 혹시라도 당문에서 이옥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운비가 손을 내려치려 하는데 여자 아이가 몸을 비틀며 다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생각지도 못한 차분한 목소리에 조운비는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끼며 손을 멈췄다.
 “유모는 죽었나요?”
 여자 아이가 급하게 말을 이었으나 여전히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냉철한 말투였다.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던 조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죄책감을 느껴서는 아니지만 아무 잘못 없이 자신으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니 몇 마디 말 정도야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 옆에 있던 여인이라면 죽었다.”
 여자 아이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신의 이름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말투와 태도에 조운비의 눈빛에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사라졌다.
 어차피 곧 자신과 함께 죽게 될 아이였다.
 “조운비.”
 대답과 함께 조운비가 손을 내려쳤고, 여자 아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원독이 서린 눈빛으로 조운비를 응시하다 정신을 잃었다.
 다시 여자 아이를 등에 업는 조운비의 시선에 멀리서 달려오는 녹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 * *
 
 좌세량이 조운비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사천에 있는 지부에 들렀던 길에 사천 당문이 살문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하 둘을 데리고 구경삼아 왔던 길이었다.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위세는 상당한걸.”
 은연중 비웃음이 묻어나는 좌세량의 말에 뒤에 서 있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제깟 놈들이 위세가 있어 봤자 사천 땅에서나 행세하는 놈들 아닙니까. 천마대 스물이면 반 식경 안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중년인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백의인이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혀끝을 찼다.
 그런 백의인의 모습에 좌세량이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싶은데?”
 백의인, 이지문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대주님 말대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찌 당문의 염라대 따위가 천마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허나 저들과 천마대는 비교 대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 비교를 한다면 당문의 장로들과 저희 천마신교의 장로님들을 비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네, 맞아. 신교와 당문을 같이 놓고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
 이지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천하에 단일 문파로 천마신교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마신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포함한 천하의 정파 전부와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다. 당문의 일개 대와 천마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까.”
 이지문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단호한 말에 험상궂은 중년인, 마무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젠장. 그, 그게, 난 비교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실수라도 한 듯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무강의 모습에 이지문의 입가에는 얄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좌세량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장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원에서 뛰쳐나온 두 무리는 필사적으로 당문의 포위망을 뚫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으나 하나 둘 녹의인들의 암기에 맞아 흙탕물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볼 것이 없다고 느끼던 좌세량의 눈이 이채를 떠올리며 반짝였다.
 “호오!”
 가벼운 탄성과 함께 좌세량의 신형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지문과 마무강은 의아한 기색을 띠며 곧 뒤를 따랐다.
 좌세량이 몸을 세우고 시선을 주는 곳에는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어린것들이 용하게 빠져나왔네.”
 마무강의 말에 좌세량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지.”
 마무강의 눈가에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두 아이 앞에 녹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아이가 겁먹은 듯 주춤거렸다.
 “간이 작은 녀석이네. 그래도 어린애들인데 구해 줄까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마무강의 말에 좌세량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놔둬 봐. 겁먹은 게 아니야,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거지. 자세히 봐. 공격할 자세잖아.”
 좌세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아이가 몸을 날렸고, 순간적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녹의인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마무강의 눈이 놀람으로 가볍게 울렁였다.
 “허, 그놈 참 야무지네.”
 이지문의 눈빛도 가볍게 번뜩였다.
 “기초도 상당히 잘 잡혀 있고 재지도 범상치 않군요.”
 좌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지는 별로인 것 같은데. 저놈 흔적을 그대로 남겨 놓고 가잖아.”
 마무강의 말에 이지문이 다시 혀를 찼다.
 “쯧쯧, 단순하기는. 흔적을 지울 시간에 다른 놈들이 나타날 확률이 더 높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것이지. 뭐, 그래 봐야 저 여자애를 데리고 추적을 피할 방법은 없겠지만.”
 이지문의 말에 마무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좌세량에게 옮겼다.
 “대주님, 데려가죠. 싹수가 있는 놈 같은데.”
 좌세량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어찌하는지 조금 더 보고.”
 일행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두 아이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초라한 차림의 두 모녀에게 조운비가 하는 행동을 본 마무강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애새끼가 저리 독해?”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마무강의 말에 이지문이 고개를 흔들며 좌세량에게 시선을 옮겼다.
 “잘 다듬으면 정말 쓸 만한 놈입니다. 저는 재지보다는 냉철함과 독심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곧 당가의 추적이 따라붙을 겁니다.”
 좌세량의 결단을 재촉하는 의미가 담긴 이지문의 말이었다.
 당가가 본격적으로 추적을 하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능력으로도 아이들을 빼돌리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고, 빼돌린다 해도 추적하는 자들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당문의 떨거지 몇을 죽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나 그리하면 흔적이 남을 것이니 데려가려면 지금이 적당했다.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보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여자 아이를 업고 내달리는 조운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좌세량의 눈빛은 탐욕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
 좌세량이 다시 몸을 움직이자, 마무강이 입을 열었다.
 “대주님, 저 계집애는 어쩝니까?”
 “일단 놔둬. 우리라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야. 우선 저 녀석을 따라가 보자고. 그리고 당문하고 한판 할 수도 있으니까 생각하고 있어.”
 좌세량의 말에 마무강은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고, 이지문은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 되었다.
 한동안 조운비의 뒤를 따르던 좌세량이 의아한 듯 턱을 괴었다.
 “저리로 길이 있나?”
 뒤따르던 이지문이 고개를 저었다.
 “등천계곡이 있는 곳입니다. 통나무 다리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 폭우면 떠내려갔을 겁니다. 바위가 많고 험해서 물이 적을 때에도 빠지면 십중팔구가 죽어서 등천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입니다. 빠지면 하늘에 오른다는 뜻이라더군요.”
 어느새 조운비는 계곡 앞에 몸을 세우고 있었다.
 “근데 저 녀석이 어쩌려고 이리로 왔지?”
 좌세량의 의문 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십여 명 정도의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꼬맹이 둘 잡자고 많이도 왔군.”
 비웃음 섞인 마무강의 말이었다.
 “어찌할까요?”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만 더 보다가 꼬맹이가 위험할 듯 보이면 끼어들어.”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과 마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조운비의 앞에 십여 명의 녹의인이 다가섰다.
 좌세량의 일행은 나설 준비를 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조운비의 분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도와 살아남는다면 결코 당문을 용서하지 않겠다.”
 조운비를 둘러싸고 싸늘한 웃음을 짓고 있던 녹의인들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떠올랐고,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조운비가 여자 아이를 업은 채 순식간에 계곡으로 몸을 날렸다.
 “저, 저런 미친 녀석!”
 좌세량의 얼굴에 당혹감과 분기가 떠오름과 동시에 섬전처럼 계곡의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지문과 마무강도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독한 녀석을 봤나. 머뭇거리지도 않고 순식간에 뛰어드는데······.”
 이지문이 마무강을 말을 받았다.
 “도주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아까 놔두고 온 그 계집아이만 살리면 된다는 생각이었어. 허, 정말 대단한 녀석이 아닌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이지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십여 명의 녹의인들도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휘몰아치는 계곡 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좌세량은 물이 범람하지 않는 계곡 옆으로 섬전처럼 몸을 날리고 있었다.
 시선은 계곡의 물살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좌세량의 몸은 수많은 나무의 틈을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벌써 계곡을 따라 십 리 이상을 달려왔다.
 꼬맹이의 몸이 쇳덩어리가 아닌 이상 산산조각이 났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좌세량의 마음은 다급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까 낌새가 조금 이상하다 느꼈을 때 움직였어야 했다는 후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휘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조그마한 머리가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좌세량의 시선에 잡혔다.
 좌세량의 몸이 뒤로 휘어졌다가 활을 쏜 듯 튕겨 나갔다.
 좌세량의 날아간 몸이 물살에 언뜻 보이던 바위 끝을 가볍게 박차고 계곡의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계곡의 반대편에 내려선 좌세량의 손에는 축 늘어진 소년의 몸이 들려 있었다.
 좌세량은 재빨리 조운비를 바닥에 눕히고 손목을 쥐었다.
 희미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었다.
 “휴우.”
 좌세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조운비의 몸을 더듬어 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살았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가 아닌가?”
 좌세량의 미간이 다시 일그러졌다.
 팔다리가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뼈가 성한 곳이 거의 없었고 내장도 많이 상한 듯 보였다.
 그나마 얼굴이 멀쩡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느 틈엔가 이지문과 마무강이 계곡을 건너 좌세량에게 다가서 있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마무강의 말에 좌세량은 대답을 하지 않고 굳은 안색으로 품속에 손을 넣었다.
 곧 좌세량의 손에 조그마한 옥갑이 딸려 나왔고, 옥갑을 열자 청량한 향기가 번졌다.
 좌세량의 눈에 잠시 갈등의 빛이 어렸고, 이지문과 마무강의 얼굴에는 경악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공자님, 안 됩니다. 기재이기는 하나 천마신단은 과합니다.”
 이지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목소리만 다급한 것이 아니라 심정도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급한 나머지 천마대의 대주라는 직책으로 부르라는 좌세량의 신신당부조차 잊고 이공자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신단.
 천마신교의 무상지보라 할 수 있는 영약이었다.
 흔히들 소림의 대환단, 무당의 태청신단, 화산의 자소단을 합쳐 삼대성약이라 칭한다.
 숨만 붙어 있다면 목숨을 살려 낼 정도로 내상과 외상에 큰 효과가 있는 데다 무인이라면 보통 반 갑자의 세월을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공력까지 생기니 성약이라 할 수밖에 없었고,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무인들이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또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기물인 것이다.
 외부에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천마신교에도 그러한 효과를 가진 성약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마신단이었다.
 천마신단은 외부로 알려진다면 삼대성약이라는 말이 사대성약으로 바뀌어도 억울하다 할 만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성약들과는 달리 다시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백여 년 전 우연에 가깝게 만년삼왕과 이무기의 내단이 동시에 천마신교에 입수되었고, 천마신단은 인세에 보기 힘든 그 두 가지의 기물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에 만들어진 천마신단의 개수는 불과 이십여 개 정도였는데 이후 교주와 직계제자, 가끔 천마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에게 하사되었고 현재는 교주와 두 명의 직계제자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고작 다섯 개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러한 천마신단을 좌세량이 오늘 처음 본 아이에게 사용하려는 듯 보이니 이지문과 마무강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됩니다. 바위투성이의 물살에 십 리를 넘게 휩쓸려 내려왔습니다. 살아난다 해도 정상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게다가 기재임은 분명하나 명확한 성품이나 자질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아니, 설혹 제아무리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천마신단은 위급한 상황에서 대주님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기물입니다.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이지문의 정신없이 이어지는 말에 좌세량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어느덧 좌세량의 눈에는 잠시간 떠올랐던 갈등의 기색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맞아. 아마 자네의 말이 맞을 게야. 나도 그런 생각이 들더군. 분명히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자네 말을 따라야 할 게야. 헌데 그럴 수가 없어. 오늘 이 녀석을 보면서 심하다 할 정도로 욕심이 생기더군. 자네들도 내가 그리 욕심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거야. 그래, 맞아!”
 좌세량이 갑자기 탄성 같은 소리를 내며 잠시 말을 끊고 허리춤을 툭툭 쳤다.
 좌세량의 허리에 걸려 있는 은은한 묵빛의 검 자루가 그의 손길에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이 녀석, 혈영을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어. 내가 처음 혈영을 보고 얼마나 욕심을 부렸는지 자네들도 알지? 혈영을 처음 보았을 때가 그랬어. 이 녀석을 어떻게 해서든지 가지지 않으면 꼭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 그래서 처음으로 사부님께 억지를 부렸어. 사실 대사형도 이 녀석에게 욕심이 있었지만 사부님이 워낙에 마음에 들어 하셔서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내가 미친놈처럼 억지를 부려서 사부님이 어이없어 하시면서 내게 주셨지.”
 이지문과 마무강이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했었다.
 좌세량은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 혈영을 얻기 위해 사부인 교주의 언짢음이 역력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검을 달라고 들러붙었고, 상당히 기분이 상한 대사형조차 무시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헉!”
 “어엇!”
 이지문과 마무강의 입에서 때늦은 경호성이 튀어나왔다.
 어느 틈엔가 좌세량의 손에 쥐어져 있던 천마신단이 조운비의 입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좌세량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녀석은 검이야!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보검. 혈영 다음으로 내가 가질 보검이지. 어쩌면 천마신단이 내 목숨을 한 번 구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녀석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이라도 내 목숨을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이상의 가치를 할는지도 모르지, 하하하핫!”
 대소를 터뜨리는 좌세량의 모습에 이지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걸 어찌 아십니까? 그놈이 깨어난다고 해도 머리를 다쳐 바보라도 되었으면 어쩌시려고요? 저 녀석 머리가 깨져서 피 흐르는 것은 안 보이십니까?”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이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느낌이 그래. 내 느낌은 절대로 안 틀리는 거 자네도 알잖나.”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주님의 그 대단한 느낌 덕에 며칠 전 도박장에서 잃은 은자가 천 냥이 넘습니다.”
 좌세량이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다.
 “맞아! 머리에 피 난다고 했지?”
 몸을 돌린 좌세량은 조운비의 상세를 살핀 후 빠르게 손을 움직여 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좌세량의 머리 위로 허연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지문과 마무강은 어느새 좌세량의 좌우로 몸을 옮겨 주위를 살폈다.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좌세량의 손이 멈췄다.
 좌세량은 몹시 지친 듯 한숨을 내쉬고는 곧바로 좌정해 운기를 시작했다.
 다시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좌세량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잃고 있는 조운비를 옆구리에 끼고 몸을 날렸다.
 “상세가 그다지 좋지 않아. 깨어나도 며칠은 지나야 할 것 같아. 우선 사천지부로 가야겠어. 참, 무강은 가서 그 계집아이를 데려오도록 해. 이 녀석이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챙겨야지.”
 좌세량의 뒤를 따르던 마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좌세량이 이지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좌세량이 말도 꺼내기 전에 이지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저는 사천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의원 한 놈 챙겨서 가겠습니다.”
 왠지 허탈함이 섞인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 *
 
 이옥화는 자신도 모르게 떨려 오는 몸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쉼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느껴지는 한기 탓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조운비가 자신의 옆에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붙이고 있는 중년 여인의 딱딱해진 몸에서도 솟아나는 냉기에 이옥화는 몸서리를 쳤다.
 갑작스럽게 중년 여인이 시체라는 생각이 떠오르며 공포심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옥화는 조그마한 몸을 더욱 작게 움츠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오빠가 곧 올 거야. 아니, 조금 늦으면 동굴로 가면 돼. 오빠가 그리로 온다고 했으니까.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이옥화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머릿속으로 조운비와의 약속을 되새겼으나 불안감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조운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간 십여 명의 녹의인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옥화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오는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 내고 싶었다.
 ‘아니야. 오빠가 약속했어. 오빠는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아.’
 생각을 돌려 보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안감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녹의인들은 정확하게 조운비가 간 방향을 뒤따르고 있었다.
 조운비가 자신과 옷을 바꿔 입은 여자 아이를 업고 간 후 일다경도 흐르기 전이었다.
 이옥화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렁그렁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뜩 이옥화는 공포심을 느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진한 그림자가 느껴졌던 것이다.
 이옥화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쌍한 것. 옆에 있는 여인이 네 어머니냐?”
 안타까움이 가득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옥화의 불안감을 조금은 덜어 주었다.
 하얀 눈썹을 가진 부드러운 미소의 늙은 비구니가 눈동자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고 이옥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옥화는 왠지 안도감이 드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비구니가 천천히 몸을 굽히며 조심스럽게 이옥화의 볼을 쓰다듬었다.
 흠칫 고개를 돌리려던 이옥화가 노승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사로움에 얼굴을 맡겼다.
 “많이 추운 게지?”
 이옥화는 따스한 느낌에 눈을 내려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도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나와 같이 가자꾸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옥화가 놀란 듯 몸을 떨며 눈을 크게 떴다.
 “안 돼요. 오빠를 기다려야 해요. 오빠가 금방 올 거예요.”
 이옥화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급한 이옥화의 말에 남해신니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불안한 게지. 세상이 험하니 어린아이도 쉬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 이 어린것이 제 어미가 죽은 것은 알기나 하는지. 불쌍한 것.’
 남해신니의 입가에 다시금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알았다. 그럼 네 오라비가 오면 같이 가자꾸나.”
 남해신니의 말에 이옥화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떠올랐고, 남해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자신의 짐작이 맞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시간은 흘러 지나갔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남해신니는 조금도 이옥화를 재촉하려 하지 않았다.
 불안감에 있지도 않은 오라비 핑계를 대기는 했으나 곧 자신의 마음을 느끼리라 믿었고, 시간이 급할 이유도 없었다.
 아미파에 들렀던 일도 무척 만족스러워 불문의 고승답지 않게 기분도 들떠 있던 참에 우연히 발견한 사고무친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재질을 보아 데려가려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찬찬히 보니 상당히 빼어나 보이는 아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함을 보이던 이옥화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남해신니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문뜩 떠오른 듯 이옥화가 의문 섞인 목소리를 냈다.
 “스님은 빗속에 계신데도 어째서 옷이 젖지 않은 거죠?”
 이옥화는 스스로 말을 꺼내고도 자신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말을 꺼내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조운비가 종종 들려주던 무림의 이야기는 이옥화에게 무척이나 흥미로웠었다.
 조운비에게 들었던 믿겨지지 않던 이야기들 중에 분명 그러한 이야기가 있었다.
 무림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인들 중에서도 진정 빼어난 몇몇의 고인들은 심후한 공력으로 인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옷이 젖지 않는다고 들었었다.
 남해신니가 놀란 듯한 이옥화의 모습에 즐거운 듯 웃음을 지었다.
 “부러운 게냐?”
 이옥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요.”
 “나와 같이 가면 너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남해신니가 다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스님은 어디 사시는데요?”
 이옥화는 자신의 앞에 있는 늙은 여승이 대단한 고수라는 생각이 들자, 문뜩 얼마나 대단한 문파의 고인인지 궁금증이 들었다.
 하나 자신을 무림에 대해 전혀 모르는 평범한 여자 아이로 생각하는 노승에게 어느 문파냐고 물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는 곳이 어디냐고 돌려 물었던 것이다.
 남해신니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기껏 해 봐야 열 살도 안 된 아이었다.
 어디라 설명한다고 해서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나 물으니 대답을 해 주긴 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 언제나 바다가 보이는 신령스러운 산이 있단다. 그 산 위에 보타암이라는 곳이 이 늙은이가 사는 곳이지. 그곳에 가면 이 늙은이가 제일 높은 사람이란다. 네가 나를 따라가면 다들 너를 신주 모시듯 할 게야.”
 장난스러운 노승의 말에 이옥화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으나 사실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놀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보타암, 노승의 말마따나 조그마한 비구니들의 암자이기는 했으나 그 이름은 간단치가 않았다.
 불문답지 않게 보타암의 비구니들은 검을 주로 사용했고, 언제나 여중제일고수이자 제일검객은 보타암 출신이라 들었다.
 조운비가 해 주었던 이야기들 중에서도 스스로가 여인이다 보니 이옥화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았던 곳이 보타암이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그저 그러하다는 것을 알 따름이었고 잠시 선망했을 뿐이었다.
 이옥화에게 가장 중요한 이름은 여중제일고수나 제일검객이 아니라 조운비라는 이름이었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 아직 남녀의 정 같은 것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나 다른 오라비들은 언제나 할 일이 많았고,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곁에는 늘 조운비가 있었다.
 조운비도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며 무공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최우선은 이옥화였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자신이 찾으면 달려와 주는 것도 조운비였고, 너무 이옥화만을 챙겨 아버지와 다른 오라비들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조운비는 변함이 없었다.
 조운비에게는 마치 이옥화가 전부인 듯했고, 이옥화에게는 당연하게도 조운비가 전부이자 모든 것이 되었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든 이옥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남해신니는 이옥화의 그러한 모습에 다시금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보타암이라 하면 어린아이라 해도 혹시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남해신니였다.
 하나 아이는 호기심을 보이는 듯하더니 어린아이답게 금방 딴생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정말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닌가.’
 문뜩 느껴지는 인기척에 남해신니의 시선이 돌아갔다.
 멀리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빠르게 다가서더니 곧 적지 않은 수의 녹의인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남해신니는 눈빛에 의아함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옥화도 녹의인들의 모습을 발견한 듯 눈빛에 불안감을 떠올리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당문의 문도들 같은데 이 빗속에 무슨 일이 있는 겐가?’
 의아함이 들기는 했으나 굳이 상관할 일은 아닌지라 남해신니는 곧 생각을 접었다.
 한데 그저 지나칠 듯 보이던 녹의인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남해신니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보내던 녹의인들 중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놀란 듯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신니께서 사천에 방문하신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희의 죄가 작지 않습니다.”
 당태화는 혹시나 했다가 남해신니가 맞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 없이 지나던 중에 한 제자가 노승을 가리키며 빗속에 서 있는데도 옷이 말라 있다고 놀람 섞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무심코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남해신니는 가벼운 일로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 거물이었다.
 게다가 대체로 남해신니 정도의 고인들이 움직이면 방문하는 지역에 통보 정도는 해 주고 하루 이틀이라도 들러 가는 것이 보통인데, 당가에서는 그러한 통보를 받은 적이 없으니 당태화로서는 의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죄송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당태화의 말에 남해신니의 얼굴에 잠시 난감함이 어리는 듯했으나 곧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늙은 비구니일 뿐인데 과하십니다.”
 부드러운 남해신니의 말에도 당태화의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은 바뀌질 않았다.
 “사천에 오신 줄 알았으면 저희가 영접을 했을 것인데, 소식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여전히 죄송스럽다는 태도였으나 당태화의 말속에는 남해신니가 사천에 방문한 목적에 대한 의문 또한 섞여 있었다.
 “아미파에서 서장을 통해 들어온 불경을 구했다는 전갈을 하여 한 부 얻어 가는 길입니다.”
 남해신니의 말에 당태화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셨군요. 가시는 길이시면 당가에 잠시 들르시지요. 그냥 가시면 가주께서 섭섭해 하실 겁니다.”
 의아함이 가셔서인지 표정이 조금 밝아진 당태화의 말에 남해신니가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미파에 붙들려 있다 오늘에서야 걸음을 옮긴 참입니다. 더 늦어지면 보타암의 아이들이 이 늙은이가 객사라도 했을까 하여 찾아 나설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아미파야 불경을 이유로 갔지만 당문에 들른다면 청성파 또한 들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자면 일정이 너무 늦어질 듯하군요. 가주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완곡한 남해신니의 거절에 당태화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서렸으나 곧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오실 때는 신니께서 꼭 당가의 체면도 생각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은연중에 당가의 체면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질책이 섞인 말이었으나 남해신니의 온화한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헌데 우중에 무슨 일들이십니까?”
 남해신니의 물음에 당태화는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가 곧 가볍게 분기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살문이라는 금수만도 못한 살수 집단의 잔당들을 잡고 오는 길입니다.”
 “아미타불!”
 당태화의 말에 남해신니가 안타깝다는 듯이 불호를 외웠다.
 남해신니의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불호에 당태화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해충이나 다름없는 살수들을 처리하다 여섯이나 되는 세가의 가족들이 목숨을 잃어 속이 끓는 와중인데, 이 늙은 중은 살수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분기가 치밀자 당태화가 싸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열세 살밖에 안 된 어린것이 어찌나 독한지 더 어린 계집아이를 하나 업고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그 험한 등천계곡의 물살에 주저 없이 뛰어들더군요. 아마 지금쯤은 장강까지는 떠내려갔을 겁니다. 그 험한 물살에 휩쓸렸으니 지금쯤은 장강의 물고기들이 먹기 좋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요.”
 당태화는 분기가 오른 탓인지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심한 말을 내뱉었고, 그의 잔인한 말에 남해신니의 안색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찌 그 어린것들이······. 허허.”
 애잔하기 그지없는 데다 고통스러움까지 묻어나는 남해신니의 목소리에 당태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구나. 신니가 당문을 어찌 생각하겠는가?’
 실수했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당태화는 남해신니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총총히 몸을 돌렸다.
 한참 동안 속으로 불호를 되뇌며 얼굴도 모르는 두 아이의 극락왕생을 빌어 주던 남해신니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옥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통과 분노는 이미 다 타서 재가 되기라도 한 듯 이옥화는 백치와 다름없는 표정이 되어 굵은 눈물만을 하염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그러한 이옥화의 모습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어언 백 살이 넘은 지도 벌써 수년은 지난 남해신니조차 주책없이 코끝이 시큰거렸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험한 삶을 살았을 터인데 저러한 측은지심이라니.’
 남해신니는 마음이 아픈 와중에도 왠지 모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우연히 모친의 죽음도 모른 채 한기에 떨고 있는 아이가 안타까워 데려가려 했던 것인데, 그 아이의 재질이 범상치 않았고 험난한 세파 속에서도 천진함과 함께 깊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이 어찌 부처님께서 이끌어 주신 인연이 아니겠는가.’
 남해신니의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이옥화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조금 정신이 들자 가슴속에 오로지 원한만 가득 차올랐다.
 ‘오빠, 나는 못 믿어.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가 죽었다는 것은 상상이 안 돼. 분명히 오빠는 어디엔가 꼭 살아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나를 찾아오겠지. 분명 그럴 거야. 하지만 며칠 안에 돌아온다던 오빠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오빠가 옥화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지만 용서해 줄게.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아니까. 그리고 다시는 내게 거짓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으니까. 그래서 마냥 오빠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오빠를 죽이려 하고 아버지와 다른 오빠들을 죽인 그자들에게 복수할 거야. 내가 오빠보다 더 늦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줘. 아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빠는 날 기다려 줄 것이라는 걸 알아. 기다려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옥화의 이성은 조운비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감정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고, 곧 이성조차 감정의 힘에 밀려났다.
 멍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옥화의 귓가에 따사롭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련?”
 “이옥화.”
 “옥화야, 이 늙은이와 함께 가자꾸나.”
 이옥화는 백치처럼 텅 빈 눈빛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승의 따스한 손길이 이옥화를 이끌고 있었다.
 
 
 
 제2장 심결과 심공
 
 
 창천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구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육체와 정신이 괴리되어 있는 것 같은 둥 뜬 느낌만이 조운비의 감각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불분명한 그러한 감각조차 없을 때가 더욱 많았다.
 ‘살아 있는 것인가?’
 문뜩 조운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드는 끔찍한 고통.
 온몸을 쇳덩어리로 쉬지 않고 후려치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괴리되어 있던 감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크으, 으윽······.”
 폐부에서부터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으로 조운비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돈되기 시작했다.
 막상 이성이 회복되자 육신의 고통은 견뎌 낼 만했다.
 가장 처음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였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물살은 조운비에게 티끌만큼의 살아날 여지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불가능하다 여겨졌지만 쉽게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조운비는 격류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 했다.
 네 번에 걸친 온몸이 터져 나가는 것 같은 충격 속에서야 정신을 잃었고, 마지막 충격으로 조운비는 죽음을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깊은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하나 그러한 의문은 조운비의 머릿속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곧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옥화는?’
 처음은 걱정이었다.
 이옥화가 어찌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차근차근 채워 나갔다.
 ‘내가 성공했으니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것인지 모르나 지금쯤은 장씨 아주머니와 같이 있을 테지.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나 살아났으니 곧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조운비는 이옥화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왠지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이옥화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자 조운비의 사고는 자신에게 향했다.
 생각이 현실로 돌아오자 문뜩 코끝으로 진한 약 냄새가 느껴졌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자신의 몸이 정상일 턱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여 치료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선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팔다리 하나 정도는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위험했다.
 조운비는 온몸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조금씩 손끝과 발끝으로 힘을 전달해 보았다.
 쉽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움직여 보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조금씩 신체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에 표시가 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팔다리는 멀쩡했던 것이다.
 지속적으로 몸의 상태를 확인해 보며 만근 같은 눈꺼풀을 조금씩 밀어 올리던 중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다더니 손가락, 발가락만 꿈지럭거리고 있잖아. 저 꼬맹이 왜 저러는 거야?”
 마무강의 투덜대는 듯한 목소리에 침상에 누워 있는 조운비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지문이 묘한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거참, 이걸 똑똑한 놈이라고 해야 할지 괴상한 녀석이라고 해야 할지······.”
 이지문의 뜻 모를 말에 마무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뭔 소리야? 말할 때 알아듣게 좀 하라고 했잖아.”
 “보고도 몰라? 혹시라도 갑자기 움직이면 다친 몸에 문제라도 생길까 봐 차근차근 확인해 보고 있잖아.”
 이지문의 말에 마무강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럼 똑똑한 거지, 괴상하다는 건 또 뭐야?”
 이지문이 마무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인상을 썼다.
 “네 녀석의 머리는 도대체 뭐 하라고 붙어 있는 건지를 모르겠다. 최소한 생각이라도 한 번쯤 해 보고 나서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이지문의 말에 마무강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녀석이 괴상하다며. 네 녀석 머릿속에 있는 걸 왜 내가 생각해야 되는데?”
 “휴우, 됐다. 말을 말자. 그냥 설명을 하마.”
 이지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긴 해도 저 꼬맹이, 지금 온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데다 죽다 살아나서 머릿속도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복잡할 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성적인 생각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말이지. 보통 다른 사람이 저 꼬맹이 같은 상태라면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거나 어찌할 줄 모르고 몸을 비틀어 대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저 꼬맹이는 신음 소리조차 내뱉지 않고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저놈은 이제 겨우 열서넛이나 될까 말까 한 꼬맹이 아니냐.”
 이지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마무강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뭐가 괴상하다는 거야? 똑똑한 거 맞잖아.”
 마무강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이지문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느 틈에 눈을 뜨고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이 이지문의 눈에 들어왔다.
 이지문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조운비가 누워 있는 침상에 다가섰다.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이냐?”
 “쿨럭! 크윽.”
 대답을 하려던 조운비의 입에서 마른 기침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지문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힘들면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괜찮으면 눈을 한 번 감았다 떠라.”
 “괘, 괜찮습니다.”
 굳이 힘겹게 입을 여는 조운비의 모습에 이지문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으나 곧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머리를 다친 것이 상당히 걱정스러웠는데 멀쩡해 보이니 천마신단을 공으로 날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일어나서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군요.”
 곧 이어지는 조운비의 차분한 말에 이지문은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들을 말이 아니다.”
 이지문이 고개를 돌렸다.
 “무강, 대주님께 꼬맹이가 깨어났다고 전해 드리게.”
 “지는 발이 없나?”
 마무강이 투덜거리며 방문을 나섰다.
 잠시 후, 다시 방문이 열리며 좌세량과 마무강이 들어섰다.
 좌세량은 잘생긴 얼굴에 기꺼운 미소를 지으며 침상으로 다가왔다.
 “하하핫! 드디어 깨어났구나. 몸은 어떠냐? 꽤 아프지?”
 살갑게 들리는 좌세량의 쾌활한 목소리에 조운비는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괜찮습니다. 저를 구해 주신 분이십니까?”
 좌세량이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구했지. 내가 아니고서야 그 격류에 휩쓸려 가는 사람을 누가 구할 수 있었겠느냐. 하하하핫!”
 어찌 보면 뻔뻔하게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조운비는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아직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이렇게 누워서 인사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조운비의 예의바른 말에 좌세량은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았으니 일단 치료부터 하자. 우선 네 몸 상태를 알려 주도록 하마. 대충 겉으로 보이는 상처와 부러진 뼈들은 어느 정도 치료가 된 상황이다. 허나 처음 네 녀석의 상세가 워낙 위중했던 터라 완전한 치료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운비는 조금은 굳은 안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좌세량의 말이 이어졌다.
 “허나 치료는 상당히 잘되어서 그냥 놔두어도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이 될 것이다. 다만 무공을 사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조운비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그다지 충격을 받은 듯 보이지는 않았다.
 조운비의 그러한 반응에 좌세량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어째서 놀라지 않는 것이냐? 무공을 사용할 수 없어도 괜찮은 게냐?”
 조운비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은공의 말씀 중에 무엇인가 방법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설혹 방법이 없다 해도 무공이 모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쉬움이야 없지 않겠지만 죽을 것을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무도 차분한 조운비의 말에 좌세량은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어느 정도는 놀라는 모습을 기대했던 탓이었다.
 “거참, 재미없는 녀석일세.”
 좌세량은 고개를 휘휘 내젓더니 곧 말을 이어 갔다.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복수는 포기하려고 하느냐?”
 좌세량의 물음에 조운비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고, 다시 좌세량의 말이 이어졌다.
 “의아해 할 것 없다. 네가 당문에 쫓기는 것도 보았고 계곡으로 뛰어들기 전에 복수하겠다고 소리 지르는 것도 보았다.”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던 조운비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혹 제가 빼어난 무공을 갖춘다고 해서 그 무공만으로 당문에 복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무공을 잃는다면 더욱 힘든 길이 되겠지요. 허나 결코 복수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좌세량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던 이지문은 조운비의 대답에 혀를 내둘렀다.
 ‘냉철하고 독하고를 떠나 정말 강한 정신을 가진 녀석이 아닌가? 제대로 키운다면 천마신단의 값어치는 충분히 하고도 남겠군.’
 좌세량도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곧 조운비를 바라보던 좌세량의 눈빛이 번뜩였다.
 짙은 탐욕을 담고 있는 눈빛이었지만 조운비가 알 턱은 없었다.
 “네 말이 맞다. 무공이 전부는 아니지. 허나 일신의 무공이 뒷받침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척이나 크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 또한 무림 중의 일이니까. 인정하느냐?”
 “알고 있습니다.”
 좌세량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느끼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따를 것이다.”
 조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해심결이라는 요상에 효과가 큰 심결이 있다. 어긋난 근골과 혈맥은 물론이고 내부의 상처들을 고쳐 줄 수 있고 덤으로 신체를 무공을 익히기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어 주는 효과도 있는 심결이지.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고 배운 자도 없는 심결이기는 하나 효과는 믿어도 될 것이다. 우선 고해심결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 주도록 하마. 말한 바와 같이 무척이나 훌륭한 효과를 가진 심결이다. 그럼에도 배우는 자가 드문 이유는 이 심결을 사용하기 위한 첫 과정이 온몸의 뼈를 부수는 것이기 때문이다. 뼈를 부숴서 심결을 통해 재구성하여 환골탈태와 비슷한 효과를 얻어 보겠다는 것이 고해심결의 주된 목적이다. 효과는 좋으나 그 과정이 보통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지. 사실 제정신으로 하기 힘든 일이 아니냐. 그래서 이름을 고해라 붙인 듯싶다. 다행히 너는 뼈를 부수는 단계는 이미 한 셈이니 심결을 통해 재구성만 하면 된다. 허나 그 이후의 과정은 뼈를 부수는 것은 장난이라 치부할 정도의 고통이 따른다고 들었다. 게다가 심결을 운기하는 중에 정신을 잃으면 죽거나 폐인이 될 수도 있다. 뼈를 부순 사람은 몇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해 보겠느냐?”
 조운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세량은 잠시 머뭇거리다 곧 조운비에게 세 번에 걸쳐 구결을 불러 주고 구결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구결에 따라 운기를 하되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일단 운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한 번의 운기를 마무리할 때까지 멈추어서도 안 된다. 중도에 정신을 잃어서 진기가 흐트러지면 폐인이 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준비가 되었느냐?”
 조운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도록 해라.”
 좌세량의 말에 조운비는 눈을 내리감고 고해심결을 되뇌며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조운비의 얼굴은 용광로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온몸이 미친 듯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자 조운비의 몸 여기저기에서 무엇인가 터지는 듯한 투둑거리는 소리와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좌세량은 우려가 가득 담긴 심난한 표정이 되어 그러한 조운비의 상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한 녀석이기는 해도 고해심결은 모험 아닙니까? 요상결만으로도 회복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지문이 꽤나 걱정스러운 안색이 되어 좌세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좌세량이 조운비의 상세를 과장하여 말한 것은 평소의 행태를 보아 그런가 보다 했던 이지문이었다.
 아마 조운비라는 꼬맹이의 나이답지 않은 차분함에 놀려 보고 싶은 장난기가 생겼을 것이다.
 하나 고해심결을 가르친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세량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기는 해. 그런데 벌써 시작했잖아. 좀 일찍 말하지 그랬어.”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할 말을 잃었다.
 “뭐, 잘될 거야. 나도 고해심결이 문뜩 떠올랐는데 그것도 인연 아니겠어? 성공만 하면 환골탈태한 거나 비슷한데 치료만 된 것보다 훨씬 낫지. 안 그래?”
 좌세량이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비췄으나 이지문은 전혀 동조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다 제 놈 복 아닙니까? 살 놈이면 살겠죠, 푸하하!”
 마무강의 무신경한 말에 이지문은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조운비는 그들의 대화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좌세량의 말을 가볍게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고해심결을 운기하기 시작하자 전신을 휩싸는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진들 이러할까. 온몸을 찢어발기고 뼈를 으깨는 고통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조운비를 괴롭혔다.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정신만 놓으면 달콤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이 점점 조운비의 머릿속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 이대로 고통에 몸을 맡기면 곧 편안해질 수 있겠지. 어차피 죽으려 했었잖아. 그냥 포기하면 돼. 옥화를 구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거야. 사부님이 복수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잖아.’
 조운비는 머릿속을 채워 가는 죽음의 유혹 속에서 문뜩 스쳐 지나가던 한 단어를 잡아챘다.
 ‘옥화. 옥화는? 내가 없으면 옥화는? 옥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무서울 거야. 내가 곧 올 거라는 생각을 하며 불안에 떨고 있겠지. 살아야 해. 견뎌 내야 해. 옥화에게 가야 해!’
 조운비는 이옥화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죽음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었지만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보호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 *
 
 그리고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조운비는 끔찍했던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퀭하니 들어간 눈과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진 입술, 지쳐 보이는 모습은 그동안 조운비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나 고통과 고난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던가? 기어코 고통을 견뎌 낸 조운비의 눈빛만은 맑고 심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통은 컸지만 고해심결의 효과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직까지 과격한 움직임은 무리가 있었으나 가벼운 활동은 가능할 정도의 상상을 초월한 회복 속도였다.
 고해심결은 아직도 매일 두 시진씩 운기하고 있었다.
 여전히 고통은 변함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운비는 육체의 고통에 휩쓸리지 않고 관조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고해심결의 운기를 막 끝내고 눈을 뜨자, 침상 앞에 앉아 있는 좌세량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따라 언제나 뒤따르던 이지문과 마무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은공을 뵙습니다.”
 조운비는 자세를 바로 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좌세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는 좀 어떠냐?”
 “완전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다치기 전보다 가뿐한 느낌입니다.”
 “그래, 잘되었구나. 그럼 오늘은 나와 얘기를 좀 하자.”
 조운비는 시선을 들어 좌세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좌세량의 표정은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선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는 아무 상관없는 중년 여인을 한 명 살해했고, 여자 아이 하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 죄책감이 들지는 않느냐?”
 조운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좌세량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나 곧 생각을 접었다.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었다.
 굳이 속내를 감추거나 꾸미고 싶지 않았다.
 “죄책감이 없지는 않으나 스스로를 괴롭힐 정도는 아닙니다. 그른 행동을 하였다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째서냐?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이었고 또한 너와 무관한 자들인데 일방적으로 너의 필요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되지 않았느냐?”
 “그러합니다. 허나 그리하지 않았으면 제 여동생이 죽었을 겁니다. 저는 군자나 협사가 아니어서 대의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옳고 그름조차 구분할 줄 모릅니다. 다만 무관한 수십 수백의 목숨보다는 제 동생의 한 목숨이 더 귀할 뿐입니다.”
 “그럼 당문이 네가 속해 있던 살문을 멸한 것은 어찌 생각하느냐? 정파가 살수들을 죽인 것이 잘못이라고 보느냐?”
 조운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복수를 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군자도, 협사도 아니고 그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수가 되려던 자입니다. 제가 가족처럼 여기던 분들이 죽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복수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하하하! 네 녀석은 또 한 번 죽었다 살아나도 군자인 척하는 정파의 무리에는 낄 수가 없겠구나. 헌데 복수는 무엇으로 할 테냐? 지금 네 무공으로는 당문의 무인 하나도 이겨 내기 힘들 것이고 가진 것도 없지 않느냐?”
 조운비는 시선을 들고 눈을 빛내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많다고 할 수는 없는 나이입니다. 지금과 나중의 제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좌세량은 입가에 흠뻑 웃음을 머금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나를 어찌 생각하느냐?”
 “죽었어야 할 저를 살려 주신 분입니다. 평생을 갚아 나가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는 네가 복수할 만한 힘을 줄 능력이 있다. 나를 따르겠느냐?”
 좌세량의 나직한 말에 조운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그저 따르라 해도 마다하기 힘들 것인데 복수할 힘까지 준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조운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왜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생명이나 복수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겐 보살펴야 할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좌세량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조운비가 조건을 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어린 계집아이 하나 정도 챙기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예상했던 일이었고 그리하려고 했었다.
 “그때 그 여자 아이라면 어찌 된 일인지 사라졌다. 너를 구한 후 곧 무강을 보냈는데 죽은 중년 여인까지 없어졌다고 하더구나. 곧바로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을 풀어 주변을 수색했지만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문도 조사를 해 보았으나 당문에서는 그 아이가 너와 함께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조운비의 얼굴이 눈에 뜨일 정도의 당혹감으로 물들었고, 좌세량은 재미있다는 눈빛을 떠올렸다.
 ‘목석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 계집아이에 대해서는 꽤나 감정적이지 않은가.’
 잠시 멍한 기색이던 조운비가 시선을 들었다.
 “들러 볼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좌세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강과 함께 가도록 해라.”
 좌세량은 나중에 보자며 몸을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강이 방으로 들어섰다.
 “어이, 꼬맹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려고 하는 것 보니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구나.”
 우렁차게 들리는 마무강의 목소리에 조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 다닐 만은 합니다.”
 “그럼 후딱 나갔다 오자. 힘들면 업어 줄 테니 말하고, 하하핫.”
 마무강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몸을 돌려 방을 나섰고, 조운비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벗어나자 밝은 햇살에 눈이 시렸다.
 문뜩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앞서 걷던 마무강이 고개를 돌렸다.
 “근데 가야 할 곳이 어디냐?”
 “백화루에 먼저 들를 생각입니다.”
 마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가까운 곳이구나.”
 마무강의 말에 조운비가 주위를 둘러봤다.
 꽤나 큰 건물의 별채인 듯 생각되었다.
 “이곳이 어딥니까?”
 “어? 모르고 있었던 거냐? 천마신교 사천지부다.”
 마무강의 대답은 조운비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으나 조운비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천마신교.
 운남성에 자리 잡고 있는 단일 세력으로는 천하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이며, 정파 무림의 전부와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수백 년간 굳건히 존재하고 있는 사파 최대의 문파였다.
 가진 힘으로만 보면 세력이 몇 개의 성에 걸쳐도 모자랐으나 중원으로 세력 확장을 하기 위한 진입로라 할 수 있는 사천성에 청성, 아미, 당문 등 정파의 거대 문파 세 곳이 몰려 있는 데다 그 강함에 대한 우려로 천마신교에 대해서는 정도의 모든 문파들이 공동 대응을 하여 현재까지도 운남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천마신교가 아니고서야 어찌 당문을 그리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긴 동안 조운비와 마무강은 건물을 벗어나고 있었고, 조운비는 마무강에게 재차 위치를 물을 필요가 사라졌다.
 마무강의 말마따나 정말 백화루와 가까웠고 당문과도 고작 반나절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천리표국이 천마신교의 지부였었나? 당문은 코앞에 비수를 놓아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 조운비와 마무강은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백화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운비는 백화루의 정문에 서 있는 장한에게 다가섰다.
 조운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장한이 반가운 듯 웃음을 지었다.
 “이거 꽤 오랜만에 왔구나. 내 금방 장 선생님께 네가 왔다고 전하마.”
 말을 하던 장한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헌데 옥화는 어디다 두고 오늘은 혼자 온 것이냐?”
 장한의 이어지는 말에 조운비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장한이 하는 말의 내용으로 보아 이옥화는 백화루에 오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은 혼잡니다. 지금 장 선생님을 뵈었으면 하는데······.”
 혹시 모르는 일이니 확인은 해 봐야 했다.
 “그래, 잠시만 기다려라.”
 장한이 잰걸음으로 문 안으로 들어갔고 반각이 채 흐르기 전에 후덕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뛰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비야, 왜 이리 오래간만에 온 것이냐.”
 중년 여인이 조운비의 손을 잡으며 무척이나 서운한 듯 입을 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옥화는 오지 않은 것이냐?”
 의아함을 담은 중년 여인의 말에 조운비의 얼굴엔 눈에 뜨일 정도의 실망감이 떠올랐다.
 “아주머니, 옥화가 이곳에 오지 않았나요? 옥화를 가장 최근에 보신 것이 언제죠?”
 다급함이 느껴지는 조운비의 말에 중년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달쯤 전에 너와 같이 왔던 것이 마지막이 아니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조운비의 말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중년 여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아니에요.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한동안은 못 들를 것 같아요.”
 다급한 심정인 데다 중년 여인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조운비는 당혹스러워 하는 중년 여인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살문의 비고에 들어선 조운비는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왔다 간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조운비는 미친 듯이 동굴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동굴 끝의 바닥을 정신없이 파헤쳤다.
 곧 흙 속에 묻혀 있던 검은색의 상자가 드러났고, 조운비는 다급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서 금원보와 은자들이 반짝거렸다.
 ‘조금도 손댄 흔적이 없어. 이곳에 오지 않았어. 아주머니에게도 안 가고 이곳에도 오지 않았으면 도대체 어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좌세량에게 들은 대로라면 인근 지역에서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고 당문에 발각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도대체 이옥화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이옥화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불길한 추측들이 조운비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조운비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상자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혼이 빠져나간 듯 조운비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근방을 벗어난 것은 명확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이 오 일이요, 치료를 하며 누워 있은 시간이 십 일이었다.
 마음먹고 움직이면 성 몇 곳은 지나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넓은 천하에서 어디로 간 줄 알고 찾는다는 말인가.
 거의 한 시진을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던 조운비가 갑자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이유이든 당문과는 관계가 없으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다면 그 시기가 언제든 이곳에 올 것이다.’
 찌이익!
 조운비가 장삼의 한편을 찢어 바닥에 펴고 약지를 깨물었다.
 곧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조운비는 장삼에 그 피로 글을 써 나갔다.
 조운비는 혈서를 조심스럽게 접어 상자에 담고 다시 제자리에 묻었다.
 동굴 밖으로 나간 조운비의 눈에 지루한 듯 한껏 인상을 쓰고 있는 마무강의 모습이 보였다.
 
 * * *
 
 서른 정도로 보이는 밝은 인상에 진한 눈썹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잘생긴 청년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좌세량이라 한다. 천마신교 교주의 둘째 제자이고 천마대의 대주를 맡고 있지. 참고로 나는 이공자라 불리는 것보다 대주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 청년의 앞에는 조운비가 앉아 있었다.
 “곧 신교에 돌아갈 것이다. 사실 네가 낫기를 기다리느라 꽤 늦었다. 쳇! 사부한테 잔소리 들을 생각을 하니 너를 괜히 구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미간을 찌푸리며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좌세량의 모습에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운비!”
 “네, 대주님.”
 “대주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조운비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분명 이공자라 부르는 것보다 대주라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운비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좌세량의 말이 이어졌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조운비가 눈을 크게 떴다.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그리하라 한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구명지은은 뒤로한다 해도 우선 나이 차이부터 근 이십 년이 났고, 좌세량의 신분 또한 평범하지가 않았다.
 왕이나 제후는 아니나 무림 중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좌세량이었다.
 한데 자신은 어떠한가? 근본도 알지 못하는 고아 출신에 고작 조그마한 살문의 제자였다.
 무슨 생각으로 좌세량이 그리하라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좌세량을 형님이라 부른다는 것은 누가 봐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난감함이 가득 담겨 있는 조운비의 대답이었다.
 “나를 따르겠다고 하고는 처음부터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짐짓 눈을 부라리는 좌세량의 우스운 모습에도 조운비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네 형으로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마신교의 이공자라 하셨습니다. 폐가 될 것입니다.”
 “근본도 모르는 고아에 살문 출신이라서 그러느냐? 그런 이유라면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나도 너와 다를 바가 없다. 사부님이 거두어 주시기 전에는 이름조차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다니는 거지였다. 사부님이 자신의 성을 주어 이름을 지어 주시기 전까지 내 이름은 거지새끼였다. 그리고 폐가 된다? 네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현재의 너와 미래의 네가 다를 것이라고. 내게 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인물조차 될 자신이 없는 것이냐?”
 쾌활하고 장난기가 가득하던 좌세량이 아니었다.
 좌세량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목소리는 진중하기만 했다.
 조운비는 생각지도 못했던 좌세량의 과거와 추궁 섞인 물음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다만 나는 너에게 형이라는 말이 듣고 싶구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족이니 정이니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사실 그다지 필요하다고 느꼈던 적도 없었다. 그런데 너를 만나고 네가 네 동생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문뜩 나도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다시 말을 이어 가는 좌세량에게 조금 전의 엄숙함이나 진중함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 표정이나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조운비는 왠지 울컥거리는 기분과 코끝이 아린 느낌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쉽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던 조운비였으나 무심한 듯한 좌세량의 말은 가슴속을 찌르는 부분이 있었다.
 조운비 또한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사부에게 거두어지고 사부와 사형들은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 주었다.
 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부친처럼 생각했던 사부였지만 부친은 아니었고 형제처럼 생각했던 사형들이었으나 형제는 아니었다.
 거리감이 없을 수 없었다.
 정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묶인 것이 맞았다.
 굳이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아무 쓸모가 없다면, 그래서 짐 덩어리밖에 되지 못했다면 자신은 버려졌을 것이다.
 아마 마음속 깊이 어느 한구석에 그러한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 노력하고 또 노력했을 것이다.
 조건이 없는 그저 가족이기에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러한 누군가를 그리워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기를 꿈에서도 원했었다.
 그리고 조운비의 그러한 바람은 이옥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옥화는 조운비의 모든 것이었다.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것이다.
 평범하게 가족들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감정이었지만 세상의 어둠 속에 언제나 홀로였던 조운비에게 가족의 의미는 삶의 빛이자 전부였던 것이다.
 좌세량이 조운비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지는 않다고 해도 꼭 다르지만도 않을 것이다.
 “운비야!”
 좌세량의 은근한 목소리가 하염없이 생각에 빠져 있는 조운비를 일깨웠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조운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혀, 형님.”
 “하하하핫! 듣기 좋구나.”
 좌세량이 즐거운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조운비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뜻을 이해해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그리고 이제 내가 너를 동생으로 삼았으니 은혜니 하는 말은 다시는 꺼내지도 말거라. 형이 동생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어찌 은혜가 되겠느냐. 그저 너는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
 갑작스러운 좌세량의 말에 조운비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한 얼굴이 되었고, 그러한 모습에 좌세량은 손을 휘휘 저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냥 그렇게 알고만 있어라. 그 얘기는 그만 하고 원래 하려던 것을 하도록 하자.”
 조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부르기에 온 것이니 원래 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신교에 가기 전까지 네게 무공의 기초를 잡아 주려고 한다. 너도 무공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이 없다. 우선 내공심법만 하여도 너무 하급의 것을 익히고 있는 듯하더구나. 네가 익히고 있는 심법이 육합심법이 맞느냐?”
 “네, 육합심법입니다.”
 “다른 무공은 배운 것이 무엇이 있느냐?”
 “비도술인 혈섬비와 삼재보법, 매영신법을 배웠습니다.”
 좌세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되었다. 다 잊어버리도록 해라. 우선 내공심법부터 다시 배우도록 하자. 그전에 먼저 네가 선택을 해야 할 것이 있다. 천마신공과 태허심공 중에 한 가지를 택하도록 해라.”
 이지문이나 마무강이 옆에 있었다면 기겁을 할 말이었다.
 태허심공도 문제가 적지 않겠지만 천마신공은 천마신교의 최고 심법으로 전수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아무리 좌세량이 교주의 제자라 해도 허락을 얻지 않고 전수했다가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 조운비가 그러한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제가 심법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운비의 말에 좌세량은 잠시 귀찮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입을 열었다.
 “내공심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정공과 사공이지. 정공은 말 그대로 정파의 내공심법이다. 사공은 사파의 내공심법인 것이고. 정공과 사공의 가장 큰 차이는 심법의 목적이다. 정파의 심법의 종류가 무수히 많기는 하지만 그 바탕은 불가나 도가에 근원을 두고 있다. 중이나 도사들의 수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흔히 말하는 해탈이나 우화등선을 위한 과정인 것이지. 그렇다 보니 심법 자체가 불순한 기운을 최대한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진기의 양은 적고 과정은 복잡하여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내공을 얻는 속도가 느리다. 장점도 적지 않다. 정순한 기운을 얻기 때문에 정신이 맑아지고 신체의 기능도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게 해 준다. 주화입마를 할 우려도 적지. 사공은 정공과 반대라고 보면 된다. 살상의 능력에 중심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효율을 가장 중요시한다. 내공을 얻는 속도가 정공과 비교하기 힘들만큼 빠르다. 짧은 시간에 강한 힘을 얻을 수가 있지. 오 년의 수련이면 정공을 십 년 수련한 정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불순한 기운까지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혈기가 들끓고 신체의 상태는 불안정하다. 주화입마의 위험도 크고 성격이 과격하게 변하기도 한다.”
 조운비는 좌세량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 자신에게 그러한 설명을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언뜻 명칭을 보아도 태허심공은 도가의 느낌이 물씬 풍겼고 천마신공은 천마신교의 심법인 듯싶었다.
 올해로 조운비의 나이가 열셋이었고 무공을 배운 지는 오 년이 되었다.
 좌세량의 말마따나 살문의 무공이다 보니 배운 무공 자체가 천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대단한 무공이 있으면 살수 따위를 할 필요가 없었고, 살수는 무공보다는 은신술이나 잠입술, 암습 따위의 흔히 말하는 잡술 쪽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열셋의 조운비가 지금부터 정공을 배운다면 명문 정파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자들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인 것이다.
 게다가 좌세량은 천마신교의 사람이었고, 어찌 되었건 자신도 좌세량을 따르기로 했으면 천마신교에 속하게 되는 것이니 천마신공을 배우라 하는 것이 옳았다.
 조운비의 생각을 끊으며 좌세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반적이라면 너는 천마신공을 배워야 할 것이다. 천마신공은 천마신교가 보유하고 있는 내공심법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으로, 보통의 사공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이 적은 데다 효율 면에서도 무척이나 뛰어난 심법이다. 허나 그러함에도 정공의 장점만을 본다면 모자란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공 자체의 결함이지. 그러한 이유와 너의 묘한 상태로 인해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조운비가 의문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저의 묘한 상태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선 네가 배운 심법이다. 육합심법은 하급의 심법이기는 하나 도가의 목적에 가장 충실하다고 할 수 있는 심법이다. 게다가 네 자질이 범상치 않아 네 나이에 비해 많은 내공을 얻었고 정순하기 이를 데 없다. 명문 정파에서 정통으로 배운 것에 못지않다. 쉽게 버리기는 아까울 정도이지. 그리고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너를 살리기 위해 천마신단이라는 영단을 사용했다. 내공 증진의 효험이 적지 않은 것이지. 내공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일 년 이내에 적어도 삼사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좌세량의 이어지는 말에 조운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의 몸 상태에서 살아난 것에 의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영단을 사용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언뜻 생각해도 그 효능이 소림의 대환단에 못지않을 영단이니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좌세량이 무슨 생각으로 처음 본 자신에게 그러한 기물을 사용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잠시, 곧 좌세량에 대한 고마운 심정이 가슴을 채워 갔다.
 “허나 사실 그 두 가지 이유뿐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너에게 천마신공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저 내공만의 차이라면 십여 년이면 천마신공이 태허심공을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익힌 고해심결이 나를 갈등하게 만드는구나. 말해 주었다시피 고해심결은 환골탈태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 천마신공을 익힌다 해도 사공의 폐해를 많이 감소시켜 줄 것이나 정공을 익혔을 때 얻어지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행히 내게 예전에 우연히 얻은 태허심공이 있으니 선택은 네가 하도록 해라. 태허심공은 지금은 사라진 전진파의 심법으로 정종의 심법 중에서도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심법이다.”
 조운비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 곧 입을 열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아는 것이 적어 장단점이나 득실을 판단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굳이 제게 고르라 하시면 그리하겠으나 기왕이면 형님이 선택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좌세량이 고민스럽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장단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 조운비에게 미루었던 것인데 듣고 보니 조운비의 말도 옳았다.
 조운비가 아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더 나은 것을 고르라고 하겠는가. 그냥 아무것이나 고르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던 좌세량의 머릿속에 문뜩 천마신공을 전수하려면 먼저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태허심공으로 하자.”
 좌세량이 품속에서 서책을 하나 꺼내더니 조운비에게 건네주었다.
 상당히 오래된 듯 보이는 서책에는 태허심공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나는 천마신공을 익혀서 태허심공에 대해서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다. 내공심법에 대한 원론적인 부분은 설명해 줄 수 있지만 실제로 익혀 본 바가 없으니 네가 그 심법을 익히면서 나타날 수 있는 징후나 현상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심파적 삼아 주석을 달아 놓았으니 보기 어렵지는 않을 게다. 혹시 막히는 부분이 있거든 지체 없이 물어보도록 하여라.”
 좌세량은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점점 미간이 일그러졌다.
 말을 꺼내고 보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연히 얻은 것이니 익힌 이에게 배워 본 적도 없었고 스스로 익혀 보지도 않았다.
 조운비가 제 길을 가는지 그른 길을 가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공을 익혀서는 사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천마신교의 무공들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복잡한 머릿속에서 기어코 고민거리 한 가지를 더 찾아낸 좌세량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도망치듯 방을 벗어났다.
 “일단 수련을 시작해라.”
 ‘대책을 찾아야 해, 대책을······.’
 좌세량이 대범하고 쾌활한 성격이다 보니 작은 일에는 무심한 편이긴 했으나 사실 이러한 일에 실수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허락 없이 천마신공을 가르치려 한 일이나 직접 배운 적도 없는 태허심공을 가르치기로 결정한 일들은 매우 중대한 문제들로, 평소의 좌세량이라면 결코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러함에도 좌세량이 연달아 실수를 하게 된 것은 상당히 들떠 있는 기분과 조운비에게 무엇이든 자꾸 해 주고 싶은 욕심이 섞여 만들어 낸 결과였다.
 좌세량의 기억 속에서는 이미 지워진 일이었으나 예전에도 지금처럼 실수를 연발했던 시기가 한 번 있었다.
 애검 혈영을 얻었을 때였다.
 조운비는 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좌세량의 등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는 곧 자리에 앉아 태허심공의 첫 장을 펼쳤다.
 ‘본도 왕중양은······.’으로 시작하는 전진파의 역사와 태허심공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적지 않은 분량을 이어 가고 있었다.
 열 장 가까이 책장을 넘기고서야 심공의 기초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복잡한 구결들의 나열이었으나 다행히 좌세량이 써 놓은 것으로 보이는 주석들이 꽤 세부적이라 크게 막히는 곳 없이 심공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조운비가 책에서 눈을 뗐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반복해서 읽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고심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모르고 빠져 들었던 것이다.
 ‘육합심법과는 비할 수 없이 복잡하나 기본적인 부분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형님의 고심이 적지 않아 주석과 함께 보니 크게 걸리는 부분도 없었다. 몇 번이라도 더 읽어 보고 뜻이 명확하게 느껴지면 운공을 해야 하는 것인가?’
 잠시 턱을 괴고 갸웃거리며 생각을 하던 조운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책을 본다고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조운비는 좌정을 하고 자세를 바로 하며 운공을 준비했다.
 처음의 시작은 육합심법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진기를 느끼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하며 조운비는 태허심공의 구결에 따라 운공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해에서 조금씩 진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은 차고 청량한 느낌을 주는 진기가 서서히 자리를 잡더니 곧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상쾌한 느낌이 차근차근 온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는 듯하더니 곧 제 길을 찾아 부드럽게 이동하며 심공이 정한 길을 한 바퀴 돌았다.
 태허심공의 구결에 따라 소주천을 이룬 것이다.
 한 번 길이 트이자 진기의 움직임에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때 진기의 양이 갑작스럽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양이 늘어나자 진기의 움직임이 과격해지기 시작했고, 조운비는 당혹감을 느끼며 진기를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크윽! 이게 무슨?’
 한참의 노력 끝에 조운비는 간신히 진기를 통제하여 운공을 멈추었으나 크게 놀란 가슴은 고장 난 마차처럼 덜컹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고심하던 조운비는 그러한 상황이 된 이유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온몸에 퍼져 있던 천마신단의 기운이 심공을 운기하자 합류하기 시작했으리라 생각되었다.
 ‘당분간은 운공을 할 때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겠구나. 정공이 안정적이라 위험이 적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구나.’
 사실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조운비의 결론이었다.
 물론 조운비가 추리한 것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에는 가장 큰 이유가 빠져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 빚어진 주된 이유는 고해심결이었던 것이다.
 사실 환골탈태에 비할 수는 없었다.
 환골탈태라는 것은 전설에나 몇 번 등장하는 경우로, 무공의 경지가 지극해지면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반로환동보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경지인 것이다.
 반로환동이라 해도 비유에 가까운 말이지 실제로 노인이 청년이 되거나 아이가 된다는 말은 아니었고, 무공이 절정에 이르면 다시 검은 머리가 나고 이가 새로 나기도 하기에 그러한 이들을 가리켜 반로환동의 고수라 칭했다.
 그러한 고인들은 종종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어 반로환동을 전설이라 하지는 않았다.
 하나 환골탈태란 말 그대로 뼈가 새로 바뀌고 살이 새로 생겨나 껍질을 벗는다는 것이다.
 옛말이 전하는 대로라면 온몸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신체를 완벽에 가까운 자연체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니 가히 신선이 된다는 우화등선과 비할 만한 일인 것이다.
 환골탈태의 실상이 그러하니 고해심결을 감히 그와 같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나 그 효과는 알려진 것 이상이었다.
 일전에 좌세량도 명확하지는 않으나 짐작되는 바가 있어 고해심결을 익힌 이유를 보태 조운비에게 태허심공을 배우라 했었으나 현실은 좌세량의 예상을 한참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저 익히라 한 좌세량은 알 턱이 없었고 스스로 배우고 있는 조운비도 몰랐으나 고해심결로 변화된 조운비의 몸은 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빨라 그 양이 많았고, 기의 통로가 넓혀지다 보니 운공의 속도가 빨라 정제된 진기를 얻는 시간이 단축됨으로 정공인 태허심공으로 사공인 천마신공을 익혔을 때나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놀란 가슴이 가라앉자, 조운비는 다시 운공 삼매경에 빠져 들어갔다.
 어느 틈엔가 날이 밝았는지 문틈을 헤집고 들어온 햇살이 방구석을 노니는 먼지 덩어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3장 등천관
 
 
 고아한 풍취가 느껴지는 방 안에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앉아 있는 사람의 수에 맞게 세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으나 차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어 보였다.
 차분한 분위기에 눈매가 매서운 문사풍의 중년인은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지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맞은편의 잘생긴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뭐가 어쨌다고?”
 이지문의 힐난하는 말투에 좌세량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딴청을 피웠다.
 마무강은 두 사람의 대화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 술이 아닌 것이 원망스럽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찻잔만 노려보고 있었다.
 “대주님, 정녕 몰라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그냥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허심공을 가르쳤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제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태허심공이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그게 대주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알려지는 날에는 교주님조차도 그냥 넘어가려 하시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 일이 대공자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릅니다.”
 이지문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주인이라 생각하는 좌세량이 저지르고 다니는 대책 없는 행동들은 도무지 그 한계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태허심공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태허심공은 정파의 내공심법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심법으로 가히 보물이라 할 만한 비급이며 천마신교의 최고 심법인 천마신공에 못지않은 심법이었다.
 천마신교라 해도 얻을 수만 있다면 수천의 피 흘림이나 수만금이라 해도 아끼지 않을 만한 가치가 있는 비급인 것이다.
 우연이든 어떤 사연이었든 그 정도의 비급을 얻었다면 교주에게 알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죄가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이지문은 정말 좌세량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스스로 익히지도 않을 심법이었고 연구를 위해서라면 보고한 이후에 필사본을 받아서라도 충분히 가능하건만 좌세량은 자신이 태허심공을 얻은 것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이지문은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나마 좌세량이 보관을 하고 있어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었다.
 한데 그것이 타인에게 전해진 데다 그 대상이 스스로 보호할 능력도 없는 열세 살의 꼬맹이인 것이다.
 이지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좌세량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천마신공을 가르친 것보다는 낫잖아.”
 이지문은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도대체 이 대책 없는 대주는 자신의 의견을 들어 먹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래, 맞아. 천마신공을 가르친 것보다는 낫잖아.”
 이지문의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마무강이 달래는 말투로 한마디 거들었다.
 이지문은 순간적으로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마무강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참아 내었다.
 말을 해 무엇 하겠는가? 자신만 갑갑할 것을.
 한동안의 침묵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이지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미 저지르신 일이고 돌이키실 의향도 없으신 듯하니 몇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그 녀석이 태허심공을 익힌 걸 어찌 숨기시겠습니까? 게다가 설혹 태허심공을 익힌 것이 알려지지 않는다 해도 정공을 익혔다는 것만으로도 그 녀석은 본교에 발붙일 자리가 없을 것인데 그것은 또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뿐입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나 본교의 무공은 사공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정공으로는 제 위력의 칠팔 할이나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다 어찌하시렵니까?”
 이지문의 연이은 물음에 좌세량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지금이야 어차피 공력이 천박하니 그리 표가 나지는 않을 것이고, 심법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이후라면 스스로 감출 수 있을 것이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인데, 그 중간이 문제로구나. 어찌한다······.”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리던 좌세량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며 탁자를 내려쳤다.
 “맞아! 그러면 되겠군. 하하하핫!”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좌세량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이지문을 한번 바라보더니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턱을 치켜세웠다.
 자신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게 또 해결책이 되는군. 그런 것을 바로 선견지명이라고 하지 않던가? 등천관에 집어넣으면 될 일이 아닌가. 원래는 내가 교로 데리고 가서 신경을 써 주면 사형이 싹을 자르려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려고 했던 것인데.”
 의기양양한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의 인상은 펴지기는커녕 더욱 일그러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번 등천관이 열린 것이 벌써 칠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그곳에 있는 녀석들은 칠 년차라는 말입니다, 칠 년차! 불과 며칠 전에야 제대로 된 내공심법 하나 배운 녀석을 그 지옥에 집어넣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자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면 죽습니다.”
 이지문은 하도 기가 막혀서 화도 나지 않았다.
 등천관.
 달리 수라등천관이라 한다.
 천마신교가 수백 년간 사파의 최강자로 군림해 올 수 있었던 강함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라등천관이었다.
 이십 년마다 한 번씩 열려 십오 년간 지속되는 수라등천관은 천마신교의 주축이 될 고수들을 키우는 과정, 혹은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수라등천관은 천마신교의 본산이 위치한 운남성에서도 가장 깊숙한 밀림 속 오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지문은 등천관에 대해서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지문 또한 마무강과 함께 등천관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수련 과정이 아니더라도 잠시만 긴장을 놓으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어 나가는 지상의 지옥 같은 곳이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온갖 독들이 사방을 뒤덮고 있고 상상도 하기 힘든 치명적인 독충들이 허다하며 괴물이나 다름없는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자연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적이 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한 장소에서 수라등천관의 과정이 시작된다.
 오 년을 준비하여 십오 년간 진행되고 그것이 반복되기에 수라등천관은 이십 년이 주기가 된다.
 보통 천마신교의 어린 후인들과 전 중원을 뒤져 구한 여섯 살에서 아홉 살 사이의 아이 천여 명이 수라등천관에 들고, 십오 년의 과정이 끝날 때쯤이면 백 명 정도만 살아남는다.
 그것도 남는 것이 그 정도라서가 아니라 백 명만이 출관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험난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학문과 무공을 익히는 것 외에는 규칙조차 없다.
 굳이 규칙이라면 살아남는 것이 전부이다.
 무공을 가르치는 교관들과 적지 않은 관리자들이 있었지만 가르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관여하지 않았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어떠한 상황도 이겨 낼 수 있는 강한 정신력과 음모와 귀계에 어느 정도는 운도 따라 주어야 했다.
 결국에 남는 자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니, 수라나 다름이 없고 수라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도 못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등천이라는 명칭에 맞게 천마신교의 주축이 되는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수라등천관인 것이다.
 이번 수라등천관이 시작된 것은 칠 년 전이었다.
 수라등천관이 시작되면 처음의 삼 년간은 교관과 관리자들의 보호 아래 안전한 지역에서 내공의 기초를 다진다.
 그리고 다시 삼 년간 생존하는 방법과 실전 무공을 가르친다.
 이 시점까지는 어느 정도 보호를 받지만 그러한 중에도 죽는 아이가 반 이상이다.
 이렇게 육 년이 지난 이후에는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무공 외에는 아무런 보호나 지원도 해 주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칠 년차라면 기본적으로 수라등천관에 완전히 적응을 한 아이들만이 살아남는 시기인 것이다.
 극한의 상황을 견뎌 내며 최고의 무공을 칠 년간 체계적으로 익힌 아이들이다.
 조운비가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애초에 상황과 조건이 다른 것이다.
 이지문이 지금까지 봐 온 조운비의 자질과 성품이면 굳이 수라등천관에 들지 않아도 오래지 않아 그곳의 아이들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하나 지금 조운비를 수라등천관에 들여보낸다는 것은 갓 태어난 새끼 호랑이를 늑대 소굴에 던져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지문은 당혹감에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질 정신도 없었다.
 천마신단을 복용하고 고해심결이 만들어진 이래 세 번째로 고해심결을 익혀 낸 데다 자질도 빼어나 십여 년 정도만 키우면 한몫을 단단히 할 녀석을 투자한 것도 못 건지고 공으로 날려 먹을 상황인 것이다.
 좌세량은 조금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등천관에 가면 운비가 죽는다? 그럴 리가 없지. 결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아. 운비는 거기 있는 녀석들을 다 죽이고서라도 살아남을 거야.”
 “아니, 그 꼬맹이의 뭘 믿고 그리 장담을 하시는 겁니까?”
 좌세량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느낌은 절대로 틀리지 않아!”
 별다른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지문은 망연자실하여 할 말을 잃었다.
 “근데 너 자꾸 꼬맹이, 꼬맹이 하는데 대주님이 동생 삼으셨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거냐? 조 공자님이라고 해 봐. 버릇을 들여야지, 푸하하핫!”
 두 사람만의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어 심심했는지 마무강이 이지문에게 한마디 건넸다.
 이지문은 멍한 시선을 돌려 마무강을 바라보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문뜩, 잠깐이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마무강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