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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유여향 1권 (1화)

2017.07.03 조회 1,520 추천 11


 칠포유여향 1권 (1화)
 서장
 
 
 자는 홍점(鴻漸)이며, 또는 계자(季疵).
 호는 경능자(竟陵子), 상저옹(桑苧翁), 동강자(東岡子) 등으로 불리는 육우(陸羽)는 당 현종 개원(開元:733년) 때 경능군(竟陵郡:현재 호북성 천문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로 버려진 육우는 용개사(龍盖寺) 주지인 지적 선사(智積禪師)에 의해 거둬졌고, 유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약관의 나이에 용개사에서 나와 많은 인물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십 대 청년이 된 육우는 난리를 피하여 난민과 함께 절강성 호주(湖州)에 정착한다. 후세는 호주를 가리켜 육우의 제이의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774년 육우는 호주자사(湖州刺使)로 부임한 안진경(顔眞卿)이 운해경원(韻海鏡源) 삼백육십 권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한다. 이 작업에서 육우는 차에 관계된 이야기를 수집하였고, 그 줄거리를 자신의 저서 다경(茶經) 칠지사(七之事) 편에 보충, 편집하여 비로소 다경을 탈고(脫稿)하였다.
 804년 칠십이 세의 나이로 호주에서 생을 마쳤으며, 그때까지 군신계(君臣契), 원해(源解), 점몽(占夢), 무림산기(武林山記) 등 많은 책들을 집필했으나, 후대까지 이어진 것은 오직 다경뿐이었다.
 그러나 육우는 아무도 모르게 다경 외에 마지막으로 한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이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을 자신이 어려서 자랐던 용개사 주지에게 맡겼고, 맡길 당시 ‘하늘이 내게 내려 준 소임으로 만들었으나, 이 책이 영원히 공개되지 않길 바라노라.’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진경(眞經).
 혹은 육우진경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이 바로 육우가 은밀히 남긴 그의 마지막 저서였다.
 그가 죽고 다시 용개사의 주지들이 여러 명 바뀔 때까지 그의 염원대로 진경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과연 진경은 그의 바람대로 영원히 잊혀질 것인가?
 그렇게 천 년의 세월이 흘러만 갔다.
 
 
 
 1장 대마두의 최후
 
 
 휘이잉······.
 산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무런 봉분(封墳)도, 비석도 세우지 않은 무덤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삼년상이 끝났군.”
 한 소년이 무덤 앞에 선 채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대략 열 살 정도 되었을까.
 일신에 걸친 남루한 백의가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졌는데, 머리 위에 쓴 것은 고루한 도사들이나 쓰는 도관(道冠)이었다.
 본래 이러한 도관들은 제법 나이가 든 도사들이 쓰는 것으로, 이처럼 열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러한 도관을 비스듬히 쓰고 있어 아이의 인상이 어딘가 삐딱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아버지 삼년상도 오늘로 끝났으니까, 이제는 유언을 지켜야 되겠군. 백천성(白天星), 천성아. 죽은 아버지의 유언을 반드시 지키려고 하다니······ 너야말로 천고에 다시없는 효자로구나.”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천성.
 이는 바로 그 자신의 이름이었고, 앞에 있는 무덤은 삼 년 전에 죽은 그의 아버지 백묵겸의 무덤이었다.
 평생 떠돌이 도사로 천하를 주유하던 아버지가 이곳에 정착하자마자 알지 못할 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뒤, 그는 무덤가에서 삼년상을 치러야만 했다.
 물론 이 삼년상이라는 게 많은 이들이 하고는 있지만, 당시 불과 일곱 살이던 어린 그가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삼년상을 끝내었고, 이제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무당파로 가서 한 사람을 만나라고 하셨지. 무당법문(武當法門)은 본래 무당파와 한 뿌리라고 하셨으니까. 근데 사람들은 무당파는 알아도 무당법문은 모르던데······.”
 죽은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무당법문은 무당파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무당파이면서 정통 법문의 맥을 이은 곳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 어린 그로서는 그 법문이라는 게 뭐하는 곳인 줄은 알 수 없었으나, 죽은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귀신을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술법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했다.
 ‘생전에 아버지가 허풍이 심했으니······ 아니, 심한 정도가 아니라 거짓말이나 다름없었지. 그러니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반은 접어서 생각한다고 해도, 아무튼 무당파가 무당법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랬기에 아버지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반드시 무당파에 가서 한 사람을 만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덤 앞에 놓인 투박한 찻잔에서 은은한 다향이 향불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찻잔 속에 담겨져 있는 건 아버지가 생전 즐겨 마시던 무이암차(武夷巖茶).
 무이암차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최고의 축복이다, 라고 늘상 말해 왔던 아버지 덕에 그는 거의 매일 무이암차를 마셔 왔고, 단지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는 차 전문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차는 여기다 놔두고 갈게. 아버지가 언제나 즐길 수 있도록 말이에요. 당분간 난 이곳에 오지 못할 테니까, 무량수불······.”
 흡사 팔십 먹은 노도사처럼 두 손을 합장한 채 도호를 외운 그는 옆에 있는 보따리로 손을 뻗었다.
 거의 자신의 몸집만 한 크기의 보따리.
 백천성은 지체 없이 큰 보따리를 등에 짊어졌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난 아버지를 따라 곤륜과 사천, 그리고 이곳 기련산까지 떠돌아다녔지. 근데 지금 무당파까지 가야 한다니······ 하필이면 왜 무당파인 거야? 쓰파······.”
 어린애답지 않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열 살의 꼬마, 어울리지 않은 도사 복장을 한 아이 백천성은 유난히도 파란 하늘을 보더니 첫 발을 떼었다.
 무당파.
 아버지가 묻혀 있는 이곳 기련산에서 쉬지 않고 걸어도 꼬박 석 달을 걸어야 할 거리였다. 그건 솔직히 열 살의 어린아이에겐 너무 먼 거리였다.
 
 * * *
 
 무당산(武當山).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이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이 산이 유명한 까닭은 산이 절경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산에 도문의 성지요, 천하만검의 으뜸이라는 무당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휘익!
 한 줄기 흑영이 무당산 산기슭을 비조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흐흐······ 드디어 성공했다.”
 득의 어린 웃음을 나직이 터트린 자는 이제 마흔 살가량 되어 보이는 흑의 중년인이었다.
 매우 준수한 용모이되, 고리눈과 입가에 음험한 기운이 흐르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사악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앞으로 십 년만 산에서 처박혀 내 진전을 잇게 된다면······ 넌 제이의 음양마, 아니 음양신녀가 될 수 있다.”
 흑의 중년인은 우수에 쥐어진 새하얀 부채를 습관처럼 가볍게 떨쳤다.
 “날 놓아줘! 안 그러면 곧 후회할걸!”
 그때 그의 왼쪽 아래서부터 악쓰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세히 보니 흑의 중년인은 왼쪽 옆구리에 대략 열 살가량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를 끼고 있는 상태였고, 백의를 입은 계집아이가 발버둥 치며 악을 쓰고 있었다.
 “나 제갈청아(諸葛靑雅)를 납치하다니······ 우리 할아버지가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흑의 중년인은 코웃음을 쳤다.
 “제갈염황(諸葛念滉)은 이미 내게 속아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러니 헛된 망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거짓말! 우리 할아버진 남에게 속지 않아.”
 “크크······. 꾀 많은 늙은 여우도 때론 노련한 너구리에게 당하는 법이다. 그 너구리가 나 음양마(陰陽魔) 두광(杜쮗)이라면 특히나 그렇지.”
 음양마 두광.
 그는 외관상 마흔 살가량으로 보이나, 실상은 팔십이 넘은 노마두였다. 그가 이렇게 젊어 보이는 것은 그가 연성한 음양화화마공(陰陽花化魔功) 때문인데, 그것은 여자의 순음진기를 취하여 공력을 높이는 사악한 공부로, 당연히 강호에선 금지된 마공이었다.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우연히 조부인 제갈염황과 세가 밖으로 유람을 나온 제갈청아를 보게 된 두광은 그녀의 재질이 매우 뛰어남을 알고는 자신의 제자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제갈염황의 분노를 사서 적지 않은 내상까지 입게 되었으나, 그를 엉뚱한 곳으로 유인해 버리고는 이처럼 제갈청아를 납치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네년이 이 사부의 눈에 띈 것은 천고에 다시없는 행운이다. 일단 내 진전을 잇게 되면 음양조화선(陰陽造化扇)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음양조화선은 바로 그가 우수에 쥐고 있는 새하얀 부채였다.
 “사실 이 음양조화선은 오백 년 전 기인인 조화 노인이 남긴 신물로, 천하에 다시없는 병기일 뿐만 아니라 한기와 더위는 물론 백독을 막아 주는 효능이 있다.
 촤락······.
 두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흰빛의 부채, 음양조화선을 가볍게 펼쳐 보였다.
 “또한 사부인 나를 통해 음양화화마공을 배우게 되어 흡기취정(吸氣取精)의 묘를 터득하게 된다면, 장담하지만 넌 삼십 년 이내에 천하제일의 내공을 가질 수 있다.”
 흡기취정이란 상대방의 내공을 빨아들여 자신의 내공을 쌓는 걸 의미하는데, 사실 이는 남녀 간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음양마 두광 이름 앞에는 천하제일색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그것은 그가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여인들을 강간하여 음기를 흡수한 뒤 죽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제갈청아가 음양마 두광의 제자가 되어 흡기취정을 배운다면 천하제일색녀가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갈청아는 아직 나이가 어려 흡기취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십 년이면 이 계집은 내 제자이자 내 여인이 되어 있을 터이니, 그땐 제갈염황이 아니라 누가 와도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된 상황······. 그 늙은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두광이었다.
 “크흐흐······. 지금이야 아직 어려서 네년이 앙탈을 부린다만······ 흡기취정의 묘를 알게 된다면 네가 나보다 더욱 설칠 것이다.”
 제갈청아는 여전히 앙칼지게 소리쳤다.
 “제갈세가의 후예는 다른 자들을 사부로 모시지 않아! 그러니까 날 어서 풀어 줘!”
 “시끄럽다!”
 두광은 차가운 어조로 버럭 소리쳤다.
 “어린 계집! 더 이상 떠든다면 네년의 입부터 찢어 놓겠다.”
 제갈청아는 찔끔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자신의 입을 찢어 놓을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조용한 곳에서 내상을 다스려야겠다. 제갈염황 그 늙은이에게 당한 일격을 방치한다면 자칫 더 지독한 상황에 빠질 수 있으니······.’
 두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갈청아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제갈염황에게 스치듯 일 장을 맞았으나, 그 내상은 절대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 늙은이의 절학인 천성귀원신공은 내가 연성한 음양화화마공과는 상극이니······?’
 내심 중얼거리던 그는 멈칫거렸다.
 어디선가 매우 고소하면서도 절로 입맛이 땡기게 하는 그런 맛있는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 냄새는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기에 두광은 입속에 절로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뭔가를 굽는 냄새 같은데······?”
 그는 냄새가 풍겨 오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 갔다.
 
 졸졸졸······.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
 그 앞에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불 위로는 나뭇가지에 꽂힌 생선들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우리 아버지긴 하지만 좀 문제가 있는 양반이야.”
 생선이 구워지는 모닥불 앞에 삐딱하게 도관을 쓴 열 살가량의 소년이 투덜거리며 앉아 있었는데, 바로 기련산을 떠나온 백천성이었다.
 “누굴 찾아가라고 했으면 좀 더 정확한 정보를 남겨놨어야 하는 거 아냐. 최소한 어디에 산다던가 하는 것 정도는 말이야. 잘난 아버지 덕분에 생고생이란 말이야. 쓰파······.”
 습관처럼 마지막 말을 욕설로 끝냈다.
 사실 아버지가 남긴 유언대로 기련산에서 이곳 무당산까지 석 달 넘게 걸어오긴 했으나 문제는 무당산에 도착하고 난 다음이었다.
 아버진 단순히 ‘무당산 영취봉에 있는 ‘현허’란 도사를 찾아가라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실 무당산은 매우 산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넓었다. 산 전체 둘레만 해도 근 사오백 리에 달할 정도였다. 비록 찾아야 할 자가 영취봉에 있다고 했지만, 지금도 영취봉에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당산 안에 있는 봉우리만 칠십이봉······. 그런데 뭐, 무당산에 가서 현허란 도사를 만나라고······?’
 하루에 한 봉우리씩만 오르락내리락하려고 해도 칠십이 일이 걸릴 것이다. 더욱이 넓고 넓은 무당산 안에서 현허라는 도사를 만난다는 건 장님이 벼락 맞고 눈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울 아버지지만 대책 없다니까.”
 그가 투덜거리며 구워지고 있는 생선으로 손을 가져갈 때였다.
 바스락······.
 갑자기 옆에서 풀잎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또래의 계집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살벌한 인상의 흑의 중년인이었다.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하지.”
 두광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제갈청아를 휙 하니 백천성 앞으로 내던졌다.
 쿵!
 “으윽······.”
 제갈청아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기가 무섭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서 날 풀어 주지 않으면······.”
 “한 번만 더 그따위 소리를 하면, 제자고 뭐고 일단 팔부터 꺾어 놓고야 말겠다!”
 두광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제갈청아를 노려보더니, 이내 모닥불 위에 구워지고 있는 생선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어 그는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을 입으로 가져가며 음침한 눈빛을 한 채 백천성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무당파 도사냐?”
 ‘아, 쓰파······. 내가 구워 놓은 생선을 왜 허락도 없이 먹는 거야.’
 속으로 욕설을 해 대는 것과는 달리, 백천성은 겉으로는 매우 공손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척 보기에도 두광에게서 풍겨 오는 느낌이 매우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아닌데요. 그럼 이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백천성은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오랫동안 떠돌아다닌 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자리에 있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의해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네놈도 느꼈겠지만, 난 쫓기는 중이다. 이유는 내가 저 계집아이를 납치했기 때문이지.”
 ‘쓰파······ 듣고 말았네.’
 백천성은 갑자기 창백한 얼굴을 했다.
 그가 보기에도 느닷없이 나타난 저 자식은 완전히 범죄자의 느낌을 팍팍 풍기고 있었다. 그런 놈이 자신이 쫓긴다는 걸 말했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날 보내 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조용히 묻어 버리려 할 테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세상을 돌아다닌 백천성이니 눈치에 관한 한 노련한 강호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휴우······.”
 백천성은 고개를 떨구더니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재수 없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그는 옆에 있는 보따리 쪽으로 손을 뻗으며 제갈청아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아버진 차를 매우 좋아했지. 좋아하는 게 어느 정도냐 하면,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차를 마실 정도였으니까.”
 백천성은 보따리 안에서 휴대용 화로를 꺼내 앞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찻주전자를 꺼내더니, 앞에 있는 개울에서 물을 담고는 화로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늘상 따뜻해야 된대. 밖으로 자주 돌아다니게 되면 아무리 더워도 한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몸이 상한다고 하셨지. 그럴 때 풀어 줄 수 있는 게 이 차거든······.”
 “차는 별로 맛없는데······.”
 제갈청아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백천성은 노인처럼 끌끌 혀를 찼다.
 “그건 네가 제대로 된 차를 마셔 보지 못해서 그래. 참, 내 이름은 백천성이야.”
 “백천성······? 무슨 이름이 그래. 하늘에 있는 별이라니······ 그럼 구름 끼거나 비 오는 날이면 별 볼일 없는 거네. 난 제갈청아라고 해.”
 ‘그러는 네 이름은? 제갈청아라는 네 이름도······. 음, 이름이 좋네. 아! 쓰파······ 아버진 왜 하필이면 이름을 천성이라고 지어 가지곤······.’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삼킨 백천성은 찻주전자 속 물이 끓고 있는 걸 보자 이내 화로의 불을 껐다. 그러고선 다시 보따리 안을 뒤져 작은 찻잔과 잘 말린 꽃잎을 꺼내 찻주전자 안에다 넣었다.
 “그게 무슨 꽃잎이야?”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제갈청아가 신기한 듯 동그란 두 눈을 치켜떴다.
 백천성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국화······ 작년 가을에 따서 말려 놓은 건데······ 자, 한번 마셔 봐.”
 그는 이내 찻주전자를 들어 보따리에서 꺼낸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제갈청아는 그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 들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는 괜찮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훌쩍 마셨다. 은은한 국화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뱃속까지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와······ 이거 맛있다. 이제까지 내가 마셔 왔던 차는 별로 맛이 없었는데······.”
 제갈청아가 자신이 지금 납치되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백천성은 우쭐거리는 얼굴을 했다.
 “맛있는 게 당연하지. 지금 네가 마신 차는 내가 직접 따서 말린 국화 꽃잎 화차(花茶)니까. 사실 화차의 특징은 차의 향기와 맛에 있어. 이를 화차삼품(花茶三品)이라고 하는데······ 목품(目品)과 비품(鼻品), 그리고 구품(口品)이라고 하지.”
 “화차삼품······? 목품, 비품, 구품이라고······?”
 “한마디로 눈과 코, 그리고 입까지 즐거워야 진정한 화차라고 할 수 있다는 거야.”
 “이제 보니 넌 차에 대해서 엄청 많이 아는구나.”
 “솔직히 말하면 지금 네가 마신 국화차를 다루(茶樓)에 가서 팔면 적어도 은자 한 냥은 달라고 그럴걸. 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 만들어 낸 다른 차들에 비하면 거의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지. 어흠!”
 백천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이번엔 두광에게 차를 내밀었다.
 “아저씨도 한번 마셔 보세요.”
 “······.”
 두광은 솔깃한 얼굴을 했다. 비록 그가 대마두이기는 하나 나름대로 풍류(?)를 즐기다 보니 자연 차에 대해 알고 그 맛 또한 아는 터라, 백천성이 내민 찻잔에서 은은한 다향이 풍겨 오자 구미가 당기는 얼굴을 했다.
 “제법 괜찮은 향기를 풍기는군.”
 그는 슬쩍 우수를 들어 올려 허공섭물의 공력으로 백천성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찻잔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
 두광은 천천히 찻잔 속의 국화차를 한 모금 마셔 보고는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까지 지그시 감은 채 맛을 음미하며 차를 완전히 다 마시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차 맛 하나만큼은 일품이로구나.”
 “헤헤······. 당연하죠. 더군다나 단순한 차가 아니니까요. 사실 국화차 안에다 다른 걸 조금 탔거든요.”
 “다른 거······?”
 “에이, 그렇게 인상 쓸 거 없어요. 독을 넣은 게 아니라 약을 넣었으니까요. 설사약이긴 하지만······.”
 “설사약······.”
 두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마두인 자신이 한낱 어린아이에게 속아 설사약을 먹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머리 뚜껑이 열릴 일이었다.
 “이 빌어먹을 쥐새끼 같은 놈······.”
 그는 버럭 소리며 당장 몸을 날려 백천성의 목을 꺾어 버리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꽈튜튜튜퉁······.
 갑자기 배 안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그것은 두광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지만, 즉시 그는 창백한(?) 안색을 했다.
 ‘으윽······. 서······ 설사가······.’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했다.
 비록 그가 희대의 색마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대마두인 이상 똥개처럼 아무 곳에서나 똥을 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그가 파렴치한이라고 해도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는 쪽 팔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설사라는 게 제아무리 무공이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
 푸왁······.
 마침내 간신히 참고 있던 설사가 기어코 쏟아지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백도인의 공적이며,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희대의 악명을 떨치고 있는 대마두 음양마 두광이 그만 선 채로 싸고 만 것이다. 그것도 말똥말똥 두 눈을 뜬 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
 ‘그것도 내가 거둬들여야 할 제자 앞에서······.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그렇다면······.’
 바드득 이를 갈아붙인 두광은 살기 어린 눈으로 백천성을 노려보았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마빡에 피도 안 마른 애 녀석이 감히 나 음양마 두광을 농락하다니······ 네놈을 반드시 죽여 놓고야 말겠다!”
 “그렇게 날뛰면 안 될 텐데요······.”
 두광이 분노한 표정을 한 채 우수를 번쩍 치켜들자, 백천성은 짐짓 근심(?) 어린 표정을 했다.
 “내가 설사약을 넣기 전에 다른 약을 한 가지 넣었다는 사실을 말했던가요? 군자산이라는 약인데······ 뭐, 몸에는 그리 나쁜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군자산······!”
 두광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본래 군자산은 독이 아닌 약. 그러나 무인이 복용하면 일정 시간 동안 내공이 흩어지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는 터라, 어떤 면에선 독보다 꺼려하는 약이기도 했다.
 ‘내······ 내공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
 두광은 황급히 공력을 끌어 올려 보았으나 한 줌의 내공도 모아지지 않았다. 백천성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이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네······ 네놈이······!”
 “아참, 또 한 가지 잊고 있었네. 좀 전에 찻잔에 마비산을 조금 발라 두었는데······ 정신을 잃긴 하겠지만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백천성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외과적인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먹여 진통을 없애 주는 마비산을 복용하게 되면 이 하늘 아래 다시없는 고수라고 해도 온몸이 마비되어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쥐방울만 한 놈이······!”
 두광은 안색이 일변한 채 백천성을 덮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비산 때문이었다.
 “네······ 네놈이 감히······.”
 두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지고야 말았다.
 꽈당······.
 음양마 두광.
 천하에 악명을 떨치는 대마두이건만 어처구니없게도 어린아이가 쓴 독에 중독되어 그대로 기절하고야 만 것이었다.
 “쓰파······ 날 띄엄띄엄 보았다간 당하고 말지. 강호에서도 제일 어려운 상대가 여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라는 걸 알았어야지. 참, 내가 힘들게 잡아서 구운 생선을 다 처먹었으니까 그 계산부터 해야지.”
 백천성은 두광에게 다가가 그의 우수에 쥐어져 있던 새하얀 부채 음양조화선을 집어 들었다.
 ‘일단은 이게 값이 나갈 것 같단 말씀이지. 그리고······.’
 두광의 전신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이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은자 열 냥이 든 주머니와 낡은 고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히히······ 은자가 생겼네. 그리고 이건 웬 책이지.’
 잠시 멈칫거리던 그는 지체 없이 은자는 품속에 넣고, 음양조화선과 고서는 보따리 안에 쑤셔 넣었다.
 그때, 제갈청아는 재빨리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허공으로 힘껏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길이의 대나무통이었는데, 순식간에 허공중에서 소리 없이 폭발하며 새파란 연기를 뿜어냈다.
 “폭죽이야?”
 백천성이 신기한 듯 묻자, 제갈청아가 그의 옆으로 걸어왔다.
 “이건 우리 제갈세가의 비상용 폭죽이야. 이제까진 저놈 때문에 터트리지 못했는데, 지금 신호를 했으니 이제 곧 할아버지가 도착할 거야.”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광을 보며 걱정스런 듯한 얼굴을 했다.
 “깨어나지 않는 거지?”
 “군자산에 마비산을 먹었으니 당분간은 시체나 다름없지. 뭐, 그래도 찝찝하다면······.”
 힐끗 그녀를 본 백천성은 다시 보따리 안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그것은 작은 소도였다.
 부욱부욱······.
 백천성은 이내 소도로 두광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두광의 옷을 벗기려 했지만 격렬하게 설사를 한 탓에 소도로 옷을 찢어 버린 것이었다.
 이윽고 알몸이 된 두광을 보고 백천성은 입가에 만족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자가 깨어난다고 해도 이런 알몸으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거야. 그리고······.”
 그는 쓰러져 있는 두광을 개울 쪽으로 밀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놈!”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두광이 벌떡 일어서며 달려드는 게 아닌가!
 “히익!”
 백천성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미 기절해 있는 줄 알고 있었던 두광이 벌떡 일어나 달려드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두광이 마비산과 군자산에 중독되어 쓰러지긴 했으나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내공으로 군자산과 마비산의 약력을 간신히 억눌러 놓고 있다가 기회를 틈 타 백천성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틀림없이 저놈에게 해독약이 있을 것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백천성이 소도를 꺼내 두광의 옷을 찢어 버리고 다시 그를 개울물로 밀어 버리려 하자, 두광이 몸을 일으켜 달려든 것은 거의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두광의 일 수가 막 백천성의 머리를 움켜잡으려는 순간.
 “음양마 두광!”
 갑자기 허공중에서 창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허공을 쪼갤 듯이 가르며 곧장 날아드는 푸른 섬광.
 쐐애애액!
 그것이 푸른 검기에 휩싸인 한 자루의 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두광의 입에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크아아악······!”
 꽈직······!
 검은 그대로 두광의 가슴을 꿰뚫었고, 두광은 마치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전신을 퍼득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져 죽고야 말았다.
 현의 노인.
 가슴이 박살 난 채 쓰러진 두광 앞으로 한 줄기 인영이 스륵 모습을 드러냈는데, 일신에 정갈한 현의를 걸치고 탈속한 기품을 가진 깊은 눈빛의 노인이었다.
 “감히 내 손녀를 납치하다니······ 그러고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나 제갈염황을 너무 우습게 안 것이다.”
 어느 틈엔가 그의 우수엔 한 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바로 두광의 가슴을 박살 낸 바로 그 검이었다.
 제갈염황.
 하늘이 내린 천재적인 두뇌들의 가문인 제갈세가의 노가주로, 당금 천하에서 신기검왕(神機劍王)이라 불리는 절대 무인이었다.
 “할아버지······.”
 제갈청아는 반색하여 황급히 제갈염황의 품 안으로 달려가 안겼다.
 제갈염황은 그녀를 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괜찮으냐?”
 
 “이름이 백천성이라고? 청아의 말로는 네 덕분에 음양마 두광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으니······ 실로 고마운 일이다.”
 제갈염황은 눈앞에 있는 백천성을 보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백천성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에이, 별일도 아닌데요. 뭘······.”
 “······.”
 그런 그를 보며 제갈염황은 다소 기이한 눈빛을 했다.
 ‘도관을 쓴 것으로 보아 도사인 것 같은데······ 그러면서 무당파의 제자는 아니라고 했지.’
 처음 그가 백천성을 보았을 때 도사 복장을 한 그를 보고는 무당파의 제자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물어본 결과, 그는 무당파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더군다나 저 아이의 말에 의하면 입고 있는 도복은 어려서부터 습관처럼 입었던 것이라고······.’
 이상하게도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아이였다.
 제갈염황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혼자서 그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으냐? 부모님은 어쩌고······.”
 백천성은 즉시 대답했다.
 “삼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누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고요.”
 “대견하구나.”
 백천성의 말을 들은 제갈염황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한 것이라니, 실로 감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 만약 달리 갈 데가 없다면 나중에라도 본 제갈세가로 찾아오거라. 제법 이름을 떨친 가문이니 찾기는 어렵지 않을 터······ 언제든 본 제갈세가의 문은 열려 있다.”
 “알겠습니다.”
 “꼭 와야 돼.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이제까지 조용히 서 있던 제갈청아가 다짐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약속······.”
 제갈청아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서 약속하고 도장 찍어.”
 “도장······?”
 백천성이 엉겁결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제갈청아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백천성의 엄지손가락을 꽈악 눌렀다.
 “이제 도장 찍었으니까 반드시 약속 지켜야 돼.”
 “으응······.”
 “최대한 빨리 와.”
 그 말을 끝으로 제갈청아는 할아버지인 제갈염황과 함께 떠나갔다.
 한동안 그들 조손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백천성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당산에 오자마자 엉뚱한 일에 휘말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문득 그의 시선이 바닥에 가슴이 뻥 뚫린 채 쓰러져 죽어 있는 두광에게로 머물자 얼굴이 일그러지고야 말았다.
 “깜박했네. 시체가 있다는 걸. 아버지 말에 의하면 객사한 시체를 그냥 내버려 두면 틀림없이 원귀가 된다고 했는데······ 저걸 언제 파묻어. 쓰파······ 열 받네.”
 
 * * *
 
 “저놈이다!”
 무당파에서도 아는 자가 거의 없어 스스로 무명기인이라고 생각하는 노도사 현허는 앞을 보며 두 눈에 불통을 튕겼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 무당파가 자리 잡은 무당산에서도 인적이 드문 영취봉으로 오르는 산길을 한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등 뒤로는 자신의 몸집만 한 보따리를 멘 채 허름한 도복에 머리엔 나이 지긋한 노도사들이나 쓰는 도관까지 쓴 어린아이.
 지금 현허가 심하게 분노하고 있는 건 어린아이가 도관을 썼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산길을 올라오면서 악을 쓰듯 부르고 있는 노랫가락 때문이었다.
 “현허야, 현허야! 너는 어디에 있느냐? 깊고 깊은 무당산에서 머리카락 보일까 봐 꽁꽁 숨어 있구나. 누가 널 보고 자라 새끼라고 해도 괜찮을 거야.”
 ‘자······ 자라 새끼라고······?’
 “아! 쓰파. 현허란 도사가 벌써 뒈졌다면 난 정말로 재수 없는 놈이로구나.”
 ‘저 빌어먹을 애새끼가······!’
 노래인지 저주인지, 멀리서 듣고 있던 현허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사실 사흘 전부터 느닷없이 들려온 노랫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그저 ‘어느 놈인지 엄청 노래 못하네.’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노랫말 중에 ‘현허’라는 이름과 ‘자라 새끼’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땐 분노로 머리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다.
 어려서부터 짜리몽땅했던 그의 키는 커서도 크나큰 약점이었고, 친구들에게서 늘상 ‘자라’라고 놀림을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감히 도가 하늘에 닿아 살아 있는 신선이자, 이제 얼마 후면 우화등선하여 진짜 신선이 될 내게 자라 새끼라고······?’
 현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 사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꼬마 도사 녀석아!”
 “······?”
 백천성은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온 바람난 무쪽처럼 볼품없게 생긴 노인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영감님은 누구세요?”
 “여······ 영감님······.”
 현허는 너무도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
 말이라는 건 ‘어’하고 ‘아’가 다른 법이다. 척 보기에도 고매한 도사인 자신에게 도사님이라고 못할망정 영감님이라니······.
 게다가 자신을 보는 저 삐딱한 눈초리는 흡사 자신을 ‘웬 망령 난 늙은이야?’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 빌어먹다 못해 평생 주저앉아서 뭉갤 놈아!”
 현허는 악쓰듯 외쳤다.
 “현허란 이름이 니가 기르는 똥개 이름이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지리를 통달하여 활불······ 아니, 신선이나 다름없는 거룩한 분에게 자라 새끼라고······? 네놈은 필시 원시천존님의 분노를 사서 벼락을 맞고 말 것이다!”
 그의 거창한(?) 욕설을 듣고 있던 백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현허를 욕하든 말든 영감님이 왜 그러세요?”
 “내가 바로 현허다!”
 다시 한 번 현허는 호통을 쳤다.
 그는 자신이 신분을 밝혔으므로 눈앞에 있는 사이비 도사와 같은 꼬마 놈이 넙죽 엎드려 용서를 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백천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구라 치지 마세요.”
 “구라 아냐!”
 “내가 알기론 현허란 도사는 제법 도력이 높아서 귀신을 부를 수도 있으며, 잡을 수도 있다던데······.”
 “그래, 맞아. 귀신을 잡아 족칠 수 있는 건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현허밖에는 없다.”
 “하지만 듣기론 현허란 도사가 보기에 매우 탈속한 기품을 풍길 정도로 그럴싸하다던데······ 영감님은 아니잖아요?”
 백천성의 의심스런 말에 현허의 노안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나잖아. 탈속한 기품······ 그건 전적으로 나 현허를 표현하는 수식어다······.”
 갑자기 그의 끝말이 사그라들었다.
 솔직히 말해 자신도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자신이 없는 그였다. 난쟁이 똥자루라는 표현에는 키가 작다는 뜻과 외모 또한 수준 이하임을 나타내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백천성이 영취봉에서 지난 삼 일 동안 노래를 부르고 다닌 것은 현허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영취봉을 이 잡듯 뒤졌음에도 현허 비스므레한 도사도 못 본 터라,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심정으로 욕설에 가까운 노래를 불러왔던 것이다.
 본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욕은 지랄발광하게 한다는 걸 그간의 생활로 터득한 그였다.
 “그럴 리가······ 아버지가 허풍이 심하긴 하지만 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백천성은 현허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현허는 발끈했다.
 “내가 현허가 아니라는 근거가 뭐냐?”
 백천성은 여전히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야 울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건 네 아버지가 사기 친 거야?”
 “물론 아버지가 평소에도 허풍이 심하긴 하지만 유언까지 거짓말하진 않았을 겁니다.”
 “으으······ 대체 네 아버지가 어떤 녀석이야? 이름이 뭐야?”
 “백씨 성에 묵 자 겸 자를 쓰는데요.”
 “백묵겸······? 그놈이 어떤 놈이길래? 이름을 보니까, 오래전에 도망친 내 제자 녀석과 이름이 똑같구나! 가만? 백묵겸이라고······!”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제까지의 표정과는 달리 얼음장처럼 굳어 버린 얼굴을 한 현허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백천성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네가 묵겸이의 아들······?”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질 아는 걸 보니까 정말 현허 도사님이신가 보네요.”
 그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현허에게로 내밀었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남긴 편지예요. 현허 도사님에게 주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현허는 그가 건네준 서찰을 받아 펼쳐 보았다.
 한동안 서찰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현허는 길게 장탄식을 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고 하더니······ 이어지지 말아야 할 인연이 또 이렇게 이어지게 되는구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그는 백천성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름이 무어냐?”
 이제와는 달리 무거운 신색이었다.
 백천성은 대답했다.
 “백천성인데요.”
 “천성이라······?”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현허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뜨더니 짧게 말했다.
 “날 따라오너라.”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에이, 하여간 우리 아버지 뻥은······ 탈속한 기품이 다 얼어 죽었네.’
 다시 한 번 아버지의 허풍에 얼굴을 구긴 백천성은 여전히 보따리를 멘 채 현허의 뒤를 따라갔다.
 
 
 
 2장 입문 무당법문
 
 
 이렇게 사부님에게 연락을 하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서찰을 사부님께서 받아 보셨을 때면 제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중략(中略)······
 제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의 이름은 백천성이라고 합니다. 비록 제자는 사부님의 기대를 받고도 법신을 이루지 못했으나, 그 녀석만은 사부님의 염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부디 천성이를 거두어 주십시오. 저승에서도 사부님의 건강을 축원하겠습니다.
 미욱한 제자 묵겸.
 
 * * *
 
 영취봉 정상에 세워져 있는 허름한 모옥.
 사방이 각종 바위와 수풀 등으로 둘러쳐져 있어 미리 알지 않고선 절대 찾지 못할 그런 곳이었다.
 “네 아버진 널 내게 부탁했다.”
 현허는 자신 앞에 털썩 편안한 자세로 앉은 백천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네 아버지하곤 어떻게 생활했느냐?”
 “그냥 돌아다녔어요. 정한 곳도 없이 여기저기요.”
 ‘허어······.’
 다소 버릇없는 백천성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돌아다녔다는 그의 말에 현허는 안타까운 듯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애비는 오래전 내게서 법술을 배웠다. 무당비전의 법술······.”
 듣고 있던 백천성은 슬쩍 물었다.
 “무당비전이라는 건······ 혹시 무당파와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현허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당파와 우리 무당법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떤 면에선 우리 무당법문이 정통이라고 할 수 있지.”
 무당법문.
 생소한 명칭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파라고 하면 천하제일의 검파라고만 추앙하지. 그러나 관점에 따라선 우리 무당법문이 몇 배는 중요하고, 게다가 우리 무당법문이 없다면 무당파는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와······.”
 듣고 있던 백천성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돌던 그였으니 무당파가 당금 천하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현허. 즉, 죽은 아버지의 사부로 추정되는 자의 말대로 하자면 무당법문 없이는 천하의 무당파도 금방 쓰러질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천성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 무당법문의 무공이 무당파보다 뛰어난가 보군요?”
 “무······ 무공······.”
 현허는 멈칫거렸다.
 백천성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무당법문의 무공이 무당파가 자랑하는 십단금(十段錦)과 면장(綿掌)을 능가한다는 말이겠죠?”
 무당파에는 수많은 장공이 있으나, 그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이 십단금과 면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면 태청무극검(太淸無極劍)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가 되는 건가요?”
 태청무극검은 무당파에서도 장문인만 연성할 수 있다는 최고의 검학. 더불어 강호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열 가지 검 중에서 능히 수위를 다투는 검법이기도 했다.
 “무량수불······.”
 묵묵히 듣고 있던 현허가 갑자기 합장을 한 채 무겁게 도호를 외웠다.
 “속세의 하찮은 무공과 본 무당법문의 법술을 비교하려고 하느냐? 무공이란 단지 근육의 힘을 키워 상대를 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비유하자면, 무당파의 무공이 그저 일반적인 야산에 지나지 않다면 무당법문의 법술은 태산이라고 할 수 있는 터······. 법술이란 것은 위로는 하늘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고, 아래로는 지리를 통달하게 해 주며 만상의 도를 깨달아 궁극적으로 우화등선하게 해 주는 것이다.”
 “아······!”
 듣고 있던 백천성은 입을 쩍 벌렸다.
 비록 그의 나이가 이제 열 살에 불과하나 사이비 도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화등선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우화등선이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신선이 된다는 거잖아. 물론 나는 신선이 되는 것보다 그냥 잘 먹고 잘사는 게 좋지만······ 아무튼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겠지.’
 우화등선이 아무리 대단해도 일단 죽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별로 내키지 않는 단어였지만, 아무튼 지금 눈앞에 있는 현허의 말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그러니까 그 대단하다는 무당법문의 법술을 자신에게 알려 준다는 말이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게 이런 말을 할 리 없지. 아버지 감사합니다. 난 아버지의 유언을 순 이빨로만 생각했었는데······.’
 다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만상의 도를 깨닫는다.’라는 표현이 조금 식상한 감은 있지만, 어찌 되었던 천하가 인정해 주는 무당파보다는 한 끗발 높다는 말이 분명했다.
 그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말이 없자, 현허는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 녀석은 무당법문의 법술을 익힐 생각이 없느냐?”
 사실 물어보나마나한 것이었다.
 백천성의 나이는 불과 열 살,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가 마냥 떠돌아다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사부님······.”
 ‘사······ 사부······.’
 원칙대로 하자면 백천성의 아버지인 백묵겸이 현허의 제자였으므로 백천성은 그를 사조라고 해야만 했다. 그러나 현허는 그런 속례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었다.
 “우리 무당법문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현허는 짐짓 엄숙한 낯빛을 했다.
 “그것은 본 문에 가입하게 되면 절대 탈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탈퇴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기사멸조의 중죄에 해당되는 터······ 죽어서 나갈 수밖에 없다.”
 한 문파에 가입했다가 탈퇴하는 것이 어째서 기사멸조의 죄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백천성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내게 어서 구배지례를 올리거라.”
 “예.”
 백천성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현허를 향해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그는 현허를 만난 그날로 무당법문의 제자가 되고야 말았다.
 
 * * *
 
 “무당법문은 음양의 도로 앙천광신(仰天光身)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악한 술법의 귀도(鬼道)를 물리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터······ 천성아, 훗날 무당법문에 들게 된다면 비록 완전한 도사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반드시 그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동안 이곳에 걸어오기까지 꽤나 힘든 여정이었던 고로 백천성은 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고야 말았었다.
 한마디로 늘어지도록 자다가 불현듯 깼는데, 그 순간에 갑자기 죽은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불길해.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게 꼭 이런 걸 말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꼭 짚어서 말할 수는 없어도 왠지 찜찜하다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으면 밖으로 나오너라.”
 그때 모옥 밖에서 그를 부르는 현허의 음성이 들려왔다.
 백천성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직 여명이 터오지 않은 새벽이었던 터라 주위는 매우 어두웠고,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불어오는 새벽바람은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현허는 모옥을 등진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 무게 잡는군. 아버지가 평소 무게를 엄청 잡는다고 했더니 사부한테서 배운 거로구나.’
 백천성은 이른 새벽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생각에 못마땅해했으나, 이내 현허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현허는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성아, 너는 법술이 뭔지 아느냐?”
 백천성은 멈칫거렸다.
 “글쎄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거라······.”
 그의 말에 현허는 엄숙한 얼굴을 한 채 말을 이었다.
 “본래 도라는 것, 아니 도인이라는 존재는 수련을 통해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마치 불문에 든 중들이 득도하여 부처가 되는 것처럼······ 무공이라는 것도 결국엔 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선이 되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다.”
 “······.”
 “우리 무당법문의 법술 역시 그와 같다. 어쩌면 순수하다는 점에선 무당파의 무공보다도 더욱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는 터······ 천성아, 우리 무당법문의 법술을 배우기란 그리 쉽지 않고 고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천성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든 쉬운 건 없잖아요.”
 “······.”
 그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현허는 매우 심각한 눈빛을 했다.
 “그러한 각오라면 다행이로구나. 그런데 지금 넌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터······ 그것은 우리 무당법문의 법술이 매우 고차원적이며 형이상학적이고, 또한 철학적인 우주원리를 갖고 있는 정신적인 이능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
 “사실 법술을 연성하기란 매우 힘들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제대로 법술을 수련하자면 한 오십 년 정도가 걸리지.”
 “으······ 너무 길어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 십 년 안짝으로 법술을 대성할 속성 방법이 있기는 한데······.”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눈치를 살피는 현허였다.
 본래부터 편안한 길을 놔두고 어렵게 돌아가는 걸 선호하지 않는 백천성인지라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전 속성으로 하겠습니다.”
 “조금 힘들 텐데······.”
 “암만 힘들어도 오십 년 동안 하는 것보단 십 년 안에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훌륭한 선택이다. 그럼······.”
 현허는 갑자기 뭔가 주문을 외우며 우수의 검지를 허공에 곧추세우고는 뭔가를 휙휙 그려 내어 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에서 새하얀 선들이 피어오르며 곧장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무겁다는 의미의 중(重).
 마차 깜깜한 배경 위로 은가루가 뿌려졌다고 할까?
 허공에 떠오른 글자가 은빛으로 반짝인다고 생각된 순간, 글자는 갑자기 밝은 빛을 쏟아 내더니 백천성을 향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엇! 글자들이······.”
 백천성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눈앞에 있는 현허가 손가락으로 그려 낸 글자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글자가 자신의 몸속으로 날아와 박히는 것이었다.
 “아······ 아무렇지도 않네······.”
 백천성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흐······ 그게 바로 중압술(重壓術)이라는 거다.”
 현허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네가 연성하게 될 법술 중의 한 가지이지. 중압술에 걸리게 되면 네 몸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게 된다.”
 “제 몸이 무거워진다고요?”
 백천성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 현허를 보며 두 눈을 껌벅였다.
 현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중압술을 풀어 주지 않는 한 네 몸은 마치 천 근 바위에 묶인 것처럼 엄청난 무게의 압박을 받게 된다.”
 “그······ 그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잖아요······?”
 “그렇게 중압감에 시달리게 되면 육체가 더없이 단단해진다.”
 “하지만······ 그 법술이라는 게 부적을 만들거나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닌가요? 아버지도 늘 정신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어 보았겠지. 튼튼한 육체에서 건전한 정신이 나온다는 걸. 사실 법술이라는 게 엄청난 체력을 소비해야 하는 거다. 그게 어느 정도의 체력이냐고 묻는다면, 이 영취봉을 반나절에 열 번을 돌 수 있을 정도랄까.”
 “그럼 조금 지루해도 오십 년짜리로 할게요.”
 “휴우······ 진작 말하지 그랬냐. 이미 늦었다.”
 “왜요?”
 “그 중압술이라는 게 상당히 고차원적인 법술이라 한 번 펼치게 되면 최소 십 년은 가게 되는 거란다. 그러니까 싫든 좋든 중압술을 펼친 이상 해제는 십 년 뒤에나 가능하다.”
 그 말대로 하자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즉, 싫어도 십 년 동안 중압술에 걸린 채 법술을 수련해야 한다는 말.
 백천성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십 년 뒤에는 풀린다니 다행이네요. 쓰······.”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쓰파’라고 욕을 할 뻔하다가 마지막 말은 간신히 삼켰다.
 사실 법술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그인지라 중압술이라는 걸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오늘부터 무당법문의 법술을 수련하도록 하자.”
 현허는 그를 보며 얼굴을 활짝 폈다.
 “하지만 그전에 아침 식사부터 해야지. 쌀은 방에 있으니까 됐고······ 일단 밥을 하려면 물을 길어 와야 할 텐데, 영취봉 아래에 샘물이 있으니까 거기서 물을 길어 오면 되겠구나.”
 그는 말하면 슬쩍 모옥 앞에 놓인 물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즉, 물을 길어 오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하긴 사부가 엄청난 절학을 가르쳐 주기 전에 고생을 시킨다는 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건 통과의례와 같은 거겠군.’
 편하게 생각한 백천성이었다.
 그러나 물통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는 당혹한 외침을 터트려야만 했다.
 “어엇? 발이······ 무거워······.”
 마치 발에 쇳덩이를 달고 있는 것처럼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엎어지면 코앞에 있을 물통이건만 불과 몇 발자국을 떼기 위해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려야만 했다.
 결국 간신히 물통을 움켜쥔 백천성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현허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너무 힘들어요.”
 현허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겠구나. 하지만 밥을 못 먹게 되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들어질 게다. 참, 걱정스러워 미리 말해 놓겠는데, 몰래 도망치면······ 정 힘들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평생 중압술에 걸린 채 살 수밖에 없다. 그럼 네가 물을 길어 올 때까지 나는 한잠 자고 있으마.”
 탁.
 그 말을 끝으로 냉큼 모옥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현허였다.
 ‘아, 쓰파······ 똥 밟았네.’
 백천성은 오만상을 잔뜩 구겼다.
 사실 그가 먼 기련산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조금 편안하게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죽은 아버지가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사이비 도사였다 해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자신의 뒷일을 마련해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기대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은 계모에게 시달리는 불쌍한 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잖아. 무엇보다도 이 중압술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그때야 알았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걸.
 물통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 왔다. 움터 오는 여명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는 팔십 먹은 노인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갑자기 아버지 말이 떠오르더니만······ 재수 옴 붙었네.”
 그가 물통을 들고 모옥 바로 밑에까지 왔을 때 전신은 땀으로 인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기까지 했다.
 
 현허의 말대로 샘물은 영취봉 중턱에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물통에다 샘물을 담고 다시 정상까지 올라가는 일련의 과정은 백천성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고문도 지독한 고문이었다.
 그저 단순히 물을 길어 오는 것이건만, 그가 모옥 앞까지 물을 길어 왔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다시 그 물에다 쌀을 씻어 불에 올려놓고 밥을 했는데, 정작 밥이 됐을 땐 그는 거의 녹초가 되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만을 몰아쉬어야 했다.
 “힘들어도 밥은 먹어야 한다.”
 만약 현허가 이런 말과 함께 강제로 그의 입속에다 밥을 쑤셔 넣지만 않았어도 그는 하루 온종일 굶었을 것이다.
 ‘차라리 굶는 게 나아. 그냥 잠만 잤으면 좋겠다.’
 사실 백천성은 이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밥을 먹고 난 뒤 현허는 방 한가운데에 앉은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밥을 먹었으니 이제 제대로 법술에 대해 공부해야지.”
 공부.
 사전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는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현허는 무당법문의 맥을 이은 자이고, 백천성이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법술을 공부한다는 건 잘 때 눈감고 잔다는 것과 너무도 똑같은 말이었다.
 “무당파가 삼풍 진인이 개파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 무당법문은 그보다 오랜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무당법문이 정통이라고 할 수 있지.”
 매우 엄숙한 얼굴로 무당법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한참을 떠벌리던 현허는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너는 네 아버지에게서 달리 배운 것은 없었느냐?”
 백천성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배우긴 배웠는데······ 부적 쓰는 법이라던가 주문을 외우는 법, 물론 순 엉터리지만요.”
 “다른 건?”
 “뭐, 차를 만드는 정도랄까요?”
 “차?”
 듣고 있던 현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차라면 어느 정도까지냐? 그저 만들어 놓은 차에다 물만 붓는 정도는 아니겠지?”
 “다예표연(茶藝表演)할 정도는 되죠?”
 “다예표연을······!”
 백천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현허는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다예표연이란, 차를 우리는 사람이 기교와 재주, 기술로써 차를 우리는 방법 및 맛을 보는 것까지의 모든 동작을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차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한 다양한 차들과 각종 다구(茶具)를 제대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차에 대해서라면 완전히 통달했다고 할 수 있었다.
 “네 나이에 다예표연을 할 정도라니······.”
 “지지리 궁상인 아버지 덕분에 투다(鬪茶)로 먹고살았거든요. 차를 좋아한 아버지가 반 강제적으로 알려 준 거지만······.”
 “차백희(茶百戱)까지······?”
 투다란 송대에서 성행한 것으로, 차를 애호하는 다인(茶人)들끼리 서로 차에 대한 지식이나 맛에 대해 승부를 가려 왔는데, 후일 이것은 살벌한 싸움으로까지 변질되었다.
 그랬기에 나중에는 투다라는 말 대신에 차백희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지금에 와선 자연스럽게 다예표연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죽은 네 아버지 덕분에 다예표연을 할 정도의 놀라운 다인이 됐다는 거로구나.”
 현허는 백천성을 보면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왠지 그 미소가 매우 불길하다고 생각된 백천성은 찝찝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껏 투다를 해서 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법술 공부는 하지 않을 건가요?”
 “물론 해야지.”
 현허는 그를 보며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무당법문의 법술을 수련하기 위해선 그보다 먼저 한 가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조화일심태극결(造化一心太極訣)······. 사실 이 조화일심태극결은 모두 일만 자로 이루어졌기에 만자진결이라고도 불린다.”
 일만 자의 글자로 이뤄진 조화일심태극결.
 이는 무당법문의 경전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도인양생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우며 수련하다 보면 세 가지 능력을 얻을 수 있을 터······ 귀안(鬼眼)과 광명부동심(光明不動心), 그리고 조화혼(造化魂)이 바로 그것이다.”
 “귀안과 광명부동심? 조화혼······?”
 “그렇다. 이제 조화일심태극결에 대해 알려 줄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할 것이다.”
 그의 설명대로 하자면 이랬다.
 일만 자의 조화일심태극결 중에서 삼분지일만 터득해도 세상의 모든 귀신을 단지 보는 것만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두 번째인 광명부동심을 이루게 되면 귀기에 홀리지 않은 채 오히려 귀신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며, 마지막인 조화혼에 이르게 되면 각종 천사만악의 존재들을 일시에 소멸시킬 수 있었다.
 “한마디로 조화일심태극결을 제대로 연성한다면 모든 귀신들의 왕이나 다름없게 되지. 다른 도문에선 고작 우화등선하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 무당법문은 신선은 기본이고 귀신들을 똘마니처럼 부릴 수 있다는 게 선택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현허와는 달리 지금 백천성은 내심 비명 같은 욕설을 터트리고 있었다.
 ‘으악! 일만 자나 되는 걸 오늘 밤중으로 다 외우라고······ 말도 안 돼.’
 지독한 현기증에 그는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천자문도 석 달 동안 이 악물고 공부해서 겨우 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만 자나 되는 글은 하룻밤 동안 다 외우라니, 억장이 무너지다 못해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뒤이어지는 현허의 말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우기 위해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지.”
 “특별한 방법······?”
 “정확하게는 아주 특별하고도 색다른 장소를 말하는 거다.”
 “그럼 여기서 그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운다는 게 아닌가요?”
 점점 미로에 빠지는 듯한 말에 백천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그곳으로 가야겠구나. 따라 나오너라.”
 현허는 벌떡 몸을 일으켜 모옥 밖으로 나갔다.
 ‘또 걷는 거야?’
 백천성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중압술에 걸린 채 물을 길어 오느라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한 그였다. 걷는다는 게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데, 이번에도 또 걸어서 어디론가 가야만 하니 저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쓰파······.”
 
 영취봉 북쪽 아래 은밀한 숲 속.
 모옥과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중압술에 걸려 있는 백천성은 거의 십 리쯤 걸어오는 것처럼 지치고야 말았다.
 “헉헉······ 이곳이 그 특별한 장소인가요?”
 그는 연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이 푹 꺼져 있는 작은 분지와도 같은데, 전체적으로 알 수 없는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단지 느낌뿐만이 아니었고, 스쳐 가는 바람이 피부에 닿자 절로 소름이 돌 정도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 여기저기엔 작은 무덤들이 솟아나 있었다.
 “서······ 설마 공동······묘지······?”
 백천성은 무덤들을 보며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현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산에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객사한 자들이 많이 있는 법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이런 이름 모를 공동묘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 설마 여기서 공부를 한다는 건가요······?”
 “조화일심태극결을 외우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지. 한눈팔 데도 없고, 정신 집중하기에도 좋고······ 천지사방을 다 뒤져도 여기보다 수련하기에 효과적인 곳은 없다.”
 ‘쓰파······ 돌아버리겠네.’
 어쩐지 무당법문에 입문한 지 하루 만에 욕설만 전에 비해 서너 배가 늘게 된 백천성이었다.
 대체 사부인 현허가 말하는 그 ‘법술’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지만,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무덤에서 왜 반드시 수련해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꼬이면 오해가 되는 법, 고로 그는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사부······ 정말로 반드시 여기서 해야만 하는 건가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의 뒷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현허가 그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한마디 했기 때문이었다.
 “천성아, 아직 몸이 가벼운 모양이로구나. 중압술 한 방 더 놔주랴. 이번엔 한 이십 년짜리로······.”
 이십 년짜리 중압술.
 도합하여 삼십 년 동안 애 낳기 직전의 임산부처럼 무거운 몸으로 살기 싫었으므로 백천성은 즉시 모든 걸 납득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역시 내 제자답게 말귀가 통하는구나. 그럼 이제 조화일심태극결의 첫 번째 구절부터 말해 줄 테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하나의 마음에서 여러 갈래의 길이 나오나니······ 길은 곧 법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
 아아, 순식간에 정신이 비몽사몽간에 사로잡혀 버리는 백천성이었다.
 현허의 말처럼 조화일심태극결이 모두 일만 자로 되어 있는지 세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설명을 듣는 동안 그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무슨 말이 이렇게 어려워. 외우기도 쉽지 않네. 쓰파······.’
 다시 한 번 욕설을 내심 비명처럼 외쳐 댔다.
 더욱이 단순히 외우는 것만이 아니었다.
 각 구절마다 그에 해당하는 몸동작이 있었다.
 예를 들어, 두 팔을 하늘 높이 들고는 숨을 내쉰다던가, 그러면서 혀는 입안을 마구 움직여야 하며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마보를 서되 엉덩이는 실룩거려야 한다는 등이었다.
 좋게 말해서는 건강을 위한 체조와 같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경기 들린 선무당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과 같았다.
 ‘이······ 이렇게 하면서 일만 자를 다 외워야 한단 말이지······.’
 백천성은 팔십 먹은 늙은이처럼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깜깜했다. 자신의 미래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창창하게 남은 미래보다는 당장의 일을 걱정해야만 하는 그였다.
 사부인 현허가 그를 노려본 채 음산하게 한마디 했다.
 “오늘 중으로 다 외우지 못하면 중압술 십 년을 더 추가해 주마.”
 ‘쓰파······ 저놈의 중압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까라고 하면 깔 수밖에 없는 신세였으므로 즉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사부가 말해 준 구결들을 외웠고, 몸은 그에 따라 미친놈처럼 움직여 갔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과 일각이 지났을 땐 그는 비 오듯 땀을 흘려야만 했고, 임종 직전의 환자처럼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다시 한 시진이 흘렀을 땐 그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져 기절하고야 말았다.
 ‘쓰파······.’
 그의 마지막은 항상 욕이었다.
 이렇게 무당법문에 입문한 두 번째 하루가 지나갔다.
 
 * * *
 
 백천성이 이제까지의 삶이 그래 왔지만, 앞으로의 인생은 이전보다 몇 배는 순탄치 않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것은 공동묘지에서 조화일심태극결을 기묘한 동작과 함께 수련하다가 끝내 기절한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사부인 현허가 말없이 눈앞으로 내민 한 장의 종이 때문이었다.
 시간표.
 하루의 일과를 잘 활용하기 위해 짜 놓은 시간표였는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생각해서 사부가 손수 짠 것이라고 했다.
 사부가 손수 작성했다는 시간표는 매우 간단했다.
 
 기상과 함께 물 떠 오기.
 아침밥 준비하면서 모옥 주변 청소.
 아침 식사 후 설거지.
 산책.
 공부.
 취침 시간.
 
 본래 시간표라는 것은 하루의 시간을 세분하여 정해 놓은 시간에 어떤 일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부가 짜 놓은 시간표엔 시간은 없고 오직 할 일만 쓰여 있었다.
 “······?”
 백천성은 의아한 눈으로 현허를 응시했다.
 현허는 그의 생각을 알았다는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너는 시간표에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데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터······ 시간은 이 사부가 그때그때 알려 주겠다. 그러니 그저 넌 내가 시킬 때마다 열심히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그럼 시간표를 짜나마나한 것이잖아요······?”
 “무슨 소리······ 인간이란 그 목표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알고 움직이는 것과 모르면서 움직인다는 건 그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
 참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빈틈없는 시간표.
 그것은 시간표의 당사자인 자신의 의견이나 행동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부의 일방적인 업무 지침서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시간표대로 하자면 그의 할 일은 눈뜨자마자 물을 길고 밥을 하며 청소하는 등의 가사 노동이 대부분이었다.
 ‘제자가 아니라 가사 도우미 수준이로군.’
 척하면 착이랄까, 시간표의 대부분 일과는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사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는 걸 눈치챈 백천성은 내심 욕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노동력 착취잖아! 확 관가에 가서 신고해 버려? 쓰파······.’
 하지만 그랬다간 평생 중압술에 걸려 무거운 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그는 참기로 했다.
 대신 조금 더 심도 있게 시간표를 파악하기로 했다.
 “사부, 저기 공부라고 쓰여 있는 건 뭐죠?”
 “그거야 네가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그럼 공동묘지에서······.”
 “그냥 훈련 장소라고만 생각하려무나.”
 “그런데 중간에 있는 산책이란 건 뭔가요?”
 “산책이란 말 그대로 산책이지. 피곤에 지친 네가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물론 산책 중에 다른 것도 해야 하지만······.”
 “다른 거······?”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산책을 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하니까.”
 정말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산책을 하는데, 한 달 뒤에나 가능하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그나마 잘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백천성은 물었다.
 “마지막에 취침 시간이라는 건······ 자는 시간이 정해져 있나요?”
 현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너무 일찍 자게 되면 게을러지고, 너무 늦게 자면 하루의 시작이 힘들어지지. 그러니까 아주 적당한 시간에 자야 한다는 게 이 사부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축시(오전 1시∼3시)가 좋겠군.”
 “축시요?”
 백천성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축시라면 사부의 말처럼 아주 적당한 시간이 아니라 매우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는 의미였다.
 “그······ 그럼 대체 언제 일어나나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도 많이 먹는다고 했으니······ 묘시(오전 5시∼7시)에 기상해야 한다.”
 ‘묘시······!’
 그러니까 자는 시간이 축시에서 묘시까지, 단 두 시진(4시간)이라는 말이었다.
 사부와 같은 아주 상늙은이라면 모를까, 자신과 같은 어린아이라면 응당 다섯 시진은 자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그였다.
 어린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먹는다는 건 그렇다 치고 자는 시간이 고작 두 시진이라는 건 터무니없이 짧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부의 자애스런 눈빛(?)에서 ‘수틀리면 중압술 한 방’이라는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눈빛을 번뜩이며 사부는 말했다.
 “천성아, 마침 지금 네가 일어난 시간이 기상 시간하고 거의 일치하는구나. 그럼 시간표대로 움직이거라.”
 사부의 말처럼 모옥 방문을 통해 서서히 밝아 오는 여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백천성의 얼굴은 어둡게 변해 갔다.
 ‘그러니까 물부터 떠 오라는 거겠지. 빌어먹을 쓰파······.’
 무당법문에 입문한 지 이틀 만에 욕만 엄청 늘어난 그였다.
 
 
 
 3장 차시태극······ 차 덖음의 시작은 태극일지니······
 
 
 한 달.
 백천성이 무당법문에 입문하여 현허를 사부로 모신 지 벌써 한 달이 흘러갔다.
 속절없이 흐르는 게 물과 시간이라고 하지만 백천성에 있어 한 달은 인고의 나날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냐. 마치 뭍으로 걸어 나온 하마 새끼 같으니까, 걷는 것에도 이렇게 힘들다니······.’
 단순히 걷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지난 한 달 동안 뼈저리게 깨닫게 된 그였다. 현허가 걸어 놓은 중압술에 의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해도 온몸이 다 결리고 쑤시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거운 몸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처음보다는 괜찮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시간표에만 정해져 있는 산책 시간을 휴식 시간으로 쓸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시간표대로 설거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사부는 그를 향해 엄청 큰 망태기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산책을 해도 되겠구나.”
 백천성은 망태기를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 망태기는 뭔가요?”
 “허허······ 놀면서 염불한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산책하면서 산에 나 있는 찻잎이나 조금 따 오거나. 내가 젊은 시절 무이산에서 얻어 온 좋은 암차 씨앗을 여러 군데 뿌려 놨으니······ 지금쯤이면 제법 딸 만할 게다.”
 “차를······.”
 “말하건대, 시간표대로 움직이려면 부지런히 따야 할 거다. 산책하면서······ 참! 공부 시간까지는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치는 시간이 사시(오전 9시∼11시), 그리고 사부가 정해 놓은 산책 시간은 유시(오후 5시∼7시) 직전까지다.
 그러니까 산책 시간은 거의 세 시진이었고, 백천성의 키만 한 망태기를 준 것은 산에 자라나 있는 찻잎들을 망태기에 가득 채워 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백천성이 제대로 따 오지 못했을 경우, 뭔가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백천성은 커다란 망태기를 든 채 모옥 밖으로 터벅터벅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찻잎을 가득 채우려면 정신없이 찻잎을 따야겠구나. 그 말은 곧 쉴 틈도 없다는 말이겠고······.’
 그제야 알았다.
 시간표에 쓰여 있는 산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러니까 산책은 누군가가 사부가 마셔야 할 차를 따야 한다는 것이고, 그 누군가가 바로 본 문의 유일한 제자인 나라는 얘기겠지.’
 산책은 가사 노동에 지친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차를 즐기기 위한 사부의 간특한(?) 꾀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망태기를 어깨에 짊어진 채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무거운 건 그의 마음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무당법문에 입문한 것이 그리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관둘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압술에서 벗어나려면 십 년은 버텨야 한단 말이야. 지금 관둔다면 평생 이래야 할 거고······.’
 그가 살아온 지 어언 십 년.
 평생 처음 가는 산책길이었다.
 그렇게 다시 삼 년이 흘러갔다.
 
 * * *
 
 따뜻한 햇살이 녹음 사이로 파고드는 정오.
 등에 봇짐을 멘 두 명의 장한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행색으로 보건대 보부상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장한들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난 당분간 일 안 할 거야.”
 “이 친구······ 힘이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그냥 놀 생각만 하다니 어쩌려고 그러나?”
 “돈만 보고 일하면 그게 돈벌레지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나?”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을 때였다.
 문득 한쪽 옆에서부터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
 그들 앞으로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이제 열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좌판을 펼쳐 놓은 채 앉아 있었다.
 좌판 위에 올려진 건 찻잔들과 찻주전자.
 아마도 산길을 오가는 행인들에게 차를 파는 아이인 것 같았다. 사실 이처럼 차를 파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일이어서 별로 특이할 것도 없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이 도사들이나 걸치는 도복이라는 점이었다.
 “최고의 무이암차입니다. 둘이 마시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의 맛이죠.”
 소년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장한들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이런 산속에서 차를 팔다니······ 대단한 장사 수완이구먼.”
 “그러게 말일세. 아무튼 목이나 축이고 가세. 술이면 좋겠지만······ 차라도 괜찮지.”
 두 장한은 즉시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그 차가 진짜 무이암차란 말이냐?”
 차를 파는 소년 백천성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한번 드셔 보면 무이암차의 특징인 활감청향(活甘淸香)을 느끼시게 될 겁니다.”
 본래 무이암차는 무이산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찻잎을 따다 만드는데, 활력을 주는 살아 있는 맛[活]과 달콤[甘]하고 맑은[淸] 향기[香]까지 더해져서 흔히들 활감청향으로 품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이암차는 매우 비싸 고관대작들이 아니고선 엄두도 못 내는 최고의 차 중 하나, 이렇게 산길에 좌판을 벌여 놓고 팔 수 있는 차가 절대 아니었다.
 “하하······ 무이산에 있어야 할 무이암차가 이곳 무당산에도 있다니 놀랍구나.”
 “게다가 활감청향이란 말이지.”
 장한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한 잔 다오.”
 백천성은 멀뚱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선불인데요.”
 “선불······?”
 “그렇습니다. 요즘 치사한 인간들이 많아서요. 어린애가 먹고살겠다고 이런 좌판까지 하는데······ 차만 마시고 냉큼 튀는 치사한 인간들이 있어서요.”
 “그래, 그럼 얼마지?”
 “은자 한 냥입니다.”
 “은자 한 냥!”
 장한들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본래 도시의 잘나가는 주루의 경험 많은 점원들이 한 달을 꼬박 일해 은자 넉 냥을 받는다. 그런데 산길에서 좌판을 깔고 하는 차 한 잔 값이 은자 한 냥이라니······.
 그들 중 말상을 한 장한이 버럭 호통을 쳤다.
 “이 녀석이 감히 우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한단 말이냐?”
 백천성은 힐끗 그를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이암차가 비싸다는 건 알고 있겠죠?”
 “그······ 그거야······.”
 말상이 멈칫거렸다.
 백천성은 다소 뺀질뺀질한 얼굴을 했다.
 “사실 이 차라는 게 말입니다. 웬만한 서민들은 제대로 마셔 볼 수도 없는 거죠. 차 두 냥이면 금 두 냥이니······ 서민들에겐 다향까지도 사치인 셈이죠.”
 “그······ 그럼 우리가 그깟 차 한 잔도 못 마실 거라는 말이냐?”
 “아아, 그런 건 아닙니다만······ 현실이 그렇다는 거죠. 은자 한 냥이라는 건 쉬운 액수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차 한 잔에 은자 한 냥을 받는 건 찻값이라기보다는 부적 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 부적······.”
 장한들은 뜻밖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들도 소문은 들었겠죠. 요금 이 부근에 귀신들이 출몰한다는 거 말이에요.”
 “그······ 그건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대명천지에 귀신이 나온단 말이냐······?”
 장한들이 찝찝한 얼굴을 하자, 백천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이거 소문이 꽉 막혔네요. 어제만 해도 이 산을 넘던 행상들이 귀신에게 걸려 죽었다는 사실을······ 이달만 들어서 벌써 열 명 넘게 북망산으로 떠났는데······ 뭐, 아저씨들이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찻값은 됐으니까 그냥 가셔도 됩니다.”
 두 장한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이미 이 근처에서 출몰한다는 귀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나 헛소리라고 생각해 온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이가 저렇게까지 말하자 왠지 마음이 찝찝해졌다.
 “하······ 하지만 은자 한 냥이라는 건 너무 비싼데······.”
 “게다가 네가 말한 부적이 얼마나 효과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장한들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백천성을 바라보았다.
 백천성은 노친네처럼 혀를 찼다.
 “쯧쯧······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부는 평생 순수하게 도만 닦은 엄청난 도인이신데······ 부적은 바로 사부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이죠. 부적이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 부적을 그리는 사람의 도가 높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사와 황금 가루, 그리고 각종의 희귀한 약초와 동물의 피를 섞어서 부적을 그리죠.”
 “아······.”
 “은자 한 냥이라고 해도 경제적 가치로 따진다면 그건 원가에도 못 미치는 것입니다. 만약 귀신에게 해를 입은 사람만 없었다면 결코 부적을 내놓치는 않았을 겁니다. 본래부터 사부님께선 인간 존중을 제일로 여기시는 분이니까요.”
 순식간에 말을 와르르 쏟아 내자, 듣고 있던 장한들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 그렇지만 은자 한 냥이라는 건······?”
 여전히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때였다.
 돌연 그들 등 뒤에서부터 피 토하는 듯한 비명성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동시에 그들 앞으로 멀리서부터 한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기겁한 채 달려오는 자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 사람 살려! 귀······ 귀신이다······! 으아아아······!”
 “······?”
 느닷없는 외침에 두 장한들은 어리둥절하다가 달려오는 자의 등 뒤를 보고는 사색이 되고야 말았다.
 여인.
 달려오는 자의 등 뒤로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일신에 걸친 새하얀 소복과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눈빛. 게다가 놀랍게도 여인은 허공에 둥실 떠 있었는데, 응당 있어야 할 두 발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여인은 사내의 등 뒤로 따라오며 음산한 어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다리 내놔라······ 내 다리······.”
 “히익······!”
 “진짜 귀신······!”
 두 명의 장한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야 말았다.
 난생처음 귀신이란 존재를 본 그들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백천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지박령(地縛靈)이로군. 본래 지박령은 별거 아닌 잡귀지만 원한을 품고 죽은 여귀라면 상당히 귀찮긴 하지.”
 중얼거리는 그는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더니 앞을 향해 휘익 던졌다.
 부적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팔랑거리며 날아가더니 한순간 화락 불덩이로 변한 채 곧장 귀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끼아아아악!”
 마치 녹슨 기계를 강제로 돌리는 듯한 날카롭고도 귀에 거슬리는 괴성과 함께 귀신은 그 자리에서 한 줌의 불덩이가 되어 팍 꺼지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너······ 너······.”
 귀신에게 쫓겨 도망쳐 온 사내는 백천성 앞에 풀썩 엎어지며 다급히 소리쳤다.
 “부······ 부적을 내게 줘! 난 오늘 중으로 이 산을 넘어가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백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아까 부적을 사지 않고 그냥 지나치셨던 아저씨로군요. 진작 부적을 샀으면 귀신에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무튼 죽지는 않았으니 아저씨 운도 좋은 편이로군요.”
 그는 이내 품속에서 한 장의 부적을 꺼내 내밀었다.
 “부적 값이 은자 한 냥이라는 건 알고 있겠죠?”
 “여······ 여기 있다.”
 사내는 황급히 은자를 내밀고는 부적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아까 진작 네 말을 들을걸. 그랬으면 귀신에게 쫓기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내 부적을 품속에 넣고는 몸을 일으켜 왔던 길로 걸어갔다.
 허겁지겁 도망쳐 올 때와는 달리 다소 여유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 부적을 우리에게도 다오.”
 “은자 한 냥이랬지?”
 두 장한들은 서슴없이 은자를 꺼내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그들이었으나 직접 자신들의 두 눈으로 귀신까지 보았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백천성은 은자를 받아 품속에 넣고는 부적을 두 장 건네주었다.
 부적을 받아 든 장한들은 그제야 다소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빌어먹을······ 무당산에는 그 유명한 무당파가 있으면서 왜 잡귀들이 설치는 걸 놔두고 있는 거야?”
 “그러게. 그런 걸 보면 무당파가 이름만 그럴듯한 사이비 아닌지 몰라.”
 서로 투덜거리던 두 명은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귀신을 쫓는 부적을 받아 들고서도 행여 귀신이 나타날까 봐 안심 못하는 눈치였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백천성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삼 년 동안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한 보람이 있네.”
 사실 조금 전 장한들이 보았던 귀신은 그가 만들어 낸 일종의 허상이었다.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공동묘지에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해 온 그였다. 사부의 말처럼 법술을 펼칠 수 있는 법기가 어느 정도 축적되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귀신들을 볼 수 있는 귀안이 열리게 되었다.
 귀인이 열리게 되자, 그는 어느 정도 귀신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물론 잡귀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튼 조금 전에 나타났던 귀신은 사실 귀안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서 얻어지게 되는 일종의 부가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잔상이었다.
 즉, 진짜가 아닌 허상을 일으켜 일반인에게 귀신처럼 보이게 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당연히 그가 던진 부적은 아무렇게 낙서한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조화일심태극결인가 뭔가가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 은자까지 생기다니······.’
 이 고개에서 귀신이 출몰한다는 말은 그가 퍼트린 소문이었다.
 그래야만 가짜 부적을 팔아먹을 수 있을 것이고, 미심쩍어하는 놈들에게는 조금처럼 잔상을 보여 주면 그걸로 즉빵이었다.
 ‘제 눈으로 귀신을 봤으니 부적을 안 사곤 못 배기지. 그 말은 곧 다른 인간들도 엄청나게 부적을 살 거라는 말이 되겠고······ 이젠 시간 날 때마다 부적을 그려야겠구나. 히히······.’
 내심 흐뭇한 웃음을 흘리는 그였다.
 “그 차, 파는 것인가?”
 갑자기 앞에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중년 도인.
 언제부터인가 푸른 청의 도복을 걸친 사십 대 중반의 도사가 백천성이 펼쳐 놓은 좌판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백천성은 중년 도인을 보며 멈칫거렸다.
 정광이 번뜩이는 두 눈과 장대한 체구에서 도인이라기보다는 장수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호······ 혹시 무당파 신선들이세요······?”
 중년 도인, 무덕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난 무당파의 무덕이라고 한다.”
 백천성은 짐짓 두 눈을 크게 떴다.
 “우와, 난 처음이에요. 무당파 도사들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는 게 말이에요.”
 처음엔 신선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도사라고 했지만, 어린애다운 기대와 존경이 실려 있었기에 그런 거라고 생각한 무덕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무당파라고 모두 삼두육비의 괴물인 줄 알았느냐?”
 “그런 건 아니지만······ 손 한 번 휘두르면 바위가 부서지고, 하늘까지 날잖아요.”
 “그거야 무공을 연성했으니까 그런 것뿐이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무슨 나쁜 일이 있지 않았느냐?”
 무덕의 말에 백천성은 내심 뜨끔했으나 겉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쁜 일이라니요? 제가 아까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는데, 행상들만 몇 명이 지나간 정도였는데요.”
 ‘이것 참, 내가 잘못 느꼈단 말인가? 분명 이곳에서부터 극히 사이한 기운을 느꼈는데······아이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사실 무당파의 중진이라고 할 수 있는 무덕이 이곳까지 온 것은 우연히 산책하던 중에 극히 이질적이고도 사악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당파의 무공은 각종 천사만악한 기운과는 극성이라 그러한 존재가 부근에 있다면 자연히 반응하게 된다. 으음······.’
 무덕은 내심 곤혹스런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터라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수련하느라 너무 민감했던 모양이로군.’
 그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자 백천성은 슬쩍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차 한 잔 드릴까요?”
 “차?”
 “차 파는 거냐고 물었잖아요? 물론 도력 높은 도인 어른에게는 공짜로 드립니다. 뭐, 따지고 보면 저도 일종의 도사이니까요.”
 “일종의 도사······? 껄껄걸······ 그렇군. 그러고 보니 너도 도사 옷을 걸쳤구나.”
 무덕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이 무당산에는 무당파 말고도 수많은 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일정한 장소에 살며 도를 공부하거나 혹은 연단을 제련하는 등의 수련을 한다.
 그들 말고도 도사 옷을 걸친 채 오가는 행인들을 상대로 물건 등을 파는 장사꾼들도 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백천성이 그런 장사꾼이라고 생각했다.
 “도우가 주는 걸 거절한다면 원시천존님께서도 노하실 것이다.”
 ‘원시천존은 무슨 개뿔······.’
 백천성은 속으로 투덜거렸으나 이내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다 차를 쪼르르 따랐다.
 “드세요. 차는 아주 식어 버리면 맛이 없으니까 지금이 딱 좋을 거예요.”
 “고맙구나.”
 무덕은 그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다향이 입안 가득 번져 갔다.
 “허어······ 대단하구나. 내 비록 차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제껏 마셔 본 차들 중에서는 최고인 것 같구나.”
 백천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차 하나는 제가 최고거든요. 게다가 도사님이 마신 차는 제가 직접 따서 만든 차니까요.”
 “호오, 차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대단하구나. 그런데 왜 짐을 싸는 거냐?”
 무덕이 말하는 가운데 백천성은 주섬주섬 좌판을 걷고 있었다.
 그러고는 기대어 앉아 있는 나무 뒤쪽에서 커다란 망태기를 꺼냈다. 망태기는 거의 그의 키만큼이나 컸는데, 안에는 각종 잎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백천성은 거둬들인 좌판과 찻주전자 등을 망태기 안에다 쑤셔 넣었다.
 “늦으면 사부님에게 혼나거든요. 차 다 드셨으면 그 찻잔도 주세요.”
 “그······ 그래······.”
 무덕이 주는 찻잔을 백천성이 받아 들고는 다시 망태기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무량수불······.”
 백천성은 무덕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한 채 도호성을 외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덕은 걸어가는 백천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저렇게 느리게 걸어가다니······ 저건 걷는 게 아니라 기어가는 거나 다름없구나. 어허······.’
 어깨에 멘 망태기 때문일까?
 걸어가고 있는 백천성의 발걸음은 굼벵이가 연상될 정도로 더디기 짝이 없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걷는 형태였다. 본래 느릿하게 걷는 자들은 팔자걸음이라든지 혹은 어기적거리는 형태의 걸음걸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백천성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일자로 걸어가고 있는, 매우 정상적인 형태의 걸음걸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느리게 움직이다니, 정말 모르겠군.”
 무덕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사실 그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백천성은 한참 동안 부적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을 만들어 내는 잔상이라는 수법은 다소 사기를 동반하고 있기에, 백천성은 그것을 무덕이 눈치채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좌판을 거둔 것이었다.
 백천성은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고작 은자 다섯 냥밖에는 벌지 못했네. 쓰파······.”
 나이가 들었어도 욕은 여전했다.
 
 * * *
 
 “오늘은 일찍 오라고 했는데······ 늦었구나.”
 모옥 앞 평상 위에서 느긋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부 현허는 망태기를 짊어지고 다가오는 백천성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부님도 중압술에 걸려 보세요. 마음처럼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백천성은 걸치고 있던 망태기를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천성아, 요즘 들어 네 녀석의 말투에서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다는 걸 느끼겠더구나.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저절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해 줄 수도 있다.”
 보나마나 ‘십 년짜리 중압술 한 방 추가’였다.
 ‘존경은 개뿔······.’
 근자에 들어 어려서 해 왔던 ‘쓰파’란 욕설에다 ‘개뿔’이란 단어가 추가된 백천성이었다.
 존경은 늘 ‘심통 난 늙은이에게 하는 게 아니다.’라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그였으나, 이내 사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절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부는 하늘, 제자는 땅······ 이게 우리 무당법문의 전통 율법이 아니겠습니까?”
 “잘 알고 있구나.”
 “조금 전의 망동은 아까 만났던 무당파의 도사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몰상식한 도사 놈이······.”
 그는 하마터면 ‘찻값 은자 한 냥을 받지 않았다.’라고 말할 뻔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눈치가 날카롭기가 절세신검이나 다름없는 사부가 당장 협박(?)을 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자신이 몰래 가짜 부적을 팔아 모은 돈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결코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현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몰상식한 도사 놈? 누굴 말하는 거냐?”
 “우연히 만난 무당파 도사였어요. 어찌나 우쭐대던지,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던데요. 참, 근데 무당파와 우리 무당법문이 한 뿌리라고 하셨죠?”
 슬쩍 말꼬리를 돌리는 백천성이었다.
 그러자 현허는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그랬지······.”
 “그런데 어쩐지 그 도사 놈은 우리 무당법문을 모르는 거 같더라고요.”
 “설마 놈에게 무당법문에 대해 말했느냐?”
 “에이, 존경하는 하늘같은 사부님이 내리신 엄명인데, 함부로 말할 리 있겠습니까? 그냥 떠본 정도죠.”
 “어흠······. 우리 무당법문은 그야말로 구름 속에 실체를 감춘 용과 같은 극히 신비스런 문파인지라 웬만한 아랫것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마도 무당파 장문인이라면 알고 있을 터······ 그만큼 우리 무당파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사부의 말대로 하자면 천하인들이 다 아는 자금성도 허접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백천성의 정상적인 판단에 의하면 무당법문을 모르는 건 그만큼 중요해서가 아니라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당법문은 강호의 삼류 중에서도 삼류에 지나지 않는다. 난 그런 삼류문파의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이고······ 그러니까 사부의 말은 한마디로 까는 소리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생각대로 말했다간 성질 더러운 사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사부는 다시 말했다.
 “짐작했겠지만 오늘 일찍 오라고 한 것은 차를 덖기 위해서다. 어서 준비하거라.”
 “예.”
 
 화다다닥······.
 잠시 후, 모옥 앞바닥에 돌로 간단하게 쌓은 화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백천성이 잔 나뭇가지들을 쑤셔 놓고 불을 붙이자 금세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로 위로는 기다란 세 개의 다리가 붙어 있는 무쇠 솥을 올려놓았는데, 둥근 형태로 된 무쇠 솥은 다소 납작하면서도 윗부분이 매우 넓어 솥이라기보다는 거의 냄비를 늘려 놓은 형태였다.
 바로 차를 덖는 살청(殺靑:말 그대로 푸른색을 죽이다는 뜻으로, 차의 산화를 방지하고 차의 색과 향을 유지시키는 작업) 솥이었다.
 “시작하거라.”
 여전히 평상에 느긋한 자세로 앉은 채 현허가 나직이 말했다.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말하네.’
 백천성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닥에 놓인 돗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돗자리엔 얼마 전에 따서 말려 놓은 찻잎들이 놓여 있었다. 말린 후 적당한 크기로 잘게 썰어 놓은 찻잎들.
 “불은 양이며 차는 음한 존재······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 인간의 힘을 빌려 조화를 이루게 되니······ 차시태극(茶始太極), 그런 고로 차 덖음의 시작은 태극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이란 끊임없이 순환하는 음양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것을 명심하고 차를 덖도록 하거라.”
 그때 차를 노려보고 있던 백천성의 귓가로 다시 사부인 현허의 유들유들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죽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차를 만들 정도의 높은 다제(茶製:차를 만드는 일)를 자랑하는 백천성이었으나, 차를 덖으면서 태극의 뜻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엄청 손을 데이겠군. 쓰파······.’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백천성은 돗자리에 있는 찻잎을 적당히 집어 무쇠 솥에 담았다.
 치이익······.
 찻잎들이 잘 달궈진 무쇠 솥 바닥에 닿자 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크······ 서둘러야겠군.’
 백천성은 흠칫 놀라며 황급히 두 손으로 찻잎을 들쑤시며 뒤적거렸다.
 본래 차를 덖을 때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해 두터운 장갑을 낀다. 그런데 지금 장갑이나 손을 보호할 그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뒤적거리다 보니, 몇 번 움직이지 않아 백천성의 손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비록 데이지는 않았으나 열기에 의해 뜨거움을 느낀 것이다.
 재차 현허의 음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차를 덖는 데 있어 손 모양은 난화처럼 하고 손동작은 지극히 가벼워야 한다. 이를 가리켜 난화경(蘭花輕)이라고 하고······ 또한 동작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듯 나가야 하니 이를 쾌속연(快速連)이라 할 것이다.”
 “······.”
 “다음은 상유면(像柔綿)이니, 찻잎을 덖는 손은 마치 솜털처럼 부드럽게 움직여야 하는 터······ 차를 어린애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움직일 때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이동하는 것이 그다음이니, 이를 천이원(擅移圓)이라고 한다. 마지막이 바로 건곤화(乾坤和)······ 차를 다룰 때는 몸과 마음, 그리고 표정까지 온화함이 있어야만 제대로 차를 만들 수 있다. 이 다섯 가지를 가리켜 태극오형이라고 말하느니······.”
 본래 차를 덖을 때의 손동작을 경(輕), 연(連), 면(綿), 원(圓), 화(和)의 다섯 가지 동작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지금 현허의 말처럼 그 다섯 가지 동작을 가리켜 태극오형이라고 하지 않으며,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다예표연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이 태극오형을 사부인 현허가 말하기 시작하고, 백천성에게 그대로 따라 할 것을 강요한 것은 불과 석 달 전부터였다.
 가볍고, 연속적이며, 부드럽고, 둥글게 움직이면서 온화함마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한 그대로 동작을 해 보라는 말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사부라고 하지만 그저 하는 일이라곤 말만 하는 것뿐······. 그러면서 꼭 말한 대로 움직이라고······ 으으······ 갑자기 열만 받네.’
 이제껏 말만 했지 단 한 번도 시범을 보여 준 적이 없는 사부였다.
 뭘 알려 줘야 배우든 말든 할 게 아닌가?
 덕분에 지난 석 달 동안 그의 손은 성할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차를 덖다가 하마터면 내 손이 잘 구운 고깃덩어리가 될 뻔한 게 한두 번도 아니었지.’
 내심 구시렁대는 것과는 달리 그의 손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양손에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기계라도 단 듯 무쇠 솥에 있는 찻잎들을 위로, 아래로, 좌우로 들쑤시며 덖어 내고 있었다.
 슥······ 스윽······.
 휘릭······ 파파파······.
 평소 현허가 펼친 중압술에 걸려 굼벵이처럼 움직여야 하는 백천성이다.
 그런 그가 이와 같은 빠른 손놀림을 보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헉······ 헉······ 힘드네······.”
 백천성은 자신도 모르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빠르게 움직인다는 건 그만큼 관련된 근육을 움직인다는 것이고, 중압술에 걸려 있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반인에 비해 열 배 가까운 힘을 소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둔한 놈······.”
 그런 그를 보며 현허는 끌끌 혀를 찼다.
 “차를 만드는 다인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여유조차 없단 말이냐? 네놈은 지금 찻잎을 빠르게 덖는 게 아니라 불에 델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백천성은 입술을 삐죽였다.
 “정 그러시면 한번 시범을 보여 주시죠?”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끼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방법을 전했다. 아둔한 제자 녀석이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일 뿐······.”
 “그거야 순전히 말로만 한 거죠.”
 “사부의 생각을 응당 제자가 알고 따라야만 하는 터······ 이를 가르쳐 불가에서는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사부님, 우리 무당법문은 도문이 아닌가요?”
 “도란 본래 종목을 불문하는 것이다.”
 사부가 제일 잘하는 게 있다면 꺾이지 않는 말빨이었다.
 불문의 이심전심을 갖다 붙인 사부는 평상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원숭이도 백 일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면 뭔가 깨닫는 게 있는 법이나, 네놈은 그것도 어렵겠구나.”
 ‘비유를 해도······ 하나밖에 없는 제자한테······.’
 “천성아, 차라는 글자를 생각해 보거라. 차는 나무[木]에서 난 잎을 인간[人]의 힘으로 다스려 조화를 일으키는 풀[草]······. 이 사부가 네가 차를 잘 덖을 수 있게끔 태극오형을 완벽하게 연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 주마.”
 백천성은 알려 준다는 말에 솔깃한 얼굴을 했다.
 “방법이라면 어떤······.”
 천천히 차를 덖고 있던 그의 옆까지 다가온 현허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조화일심······. 한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차를 덖는 거다.”
 “조화일심? 고작 그런 말로만······.”
 “그렇다면 한 가지를 더 명심하거라. 만약 한 달 내로 태극오형의 진정한 움직임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중압술 한 방을 더 놔주마. 이번엔 삼십 년짜리로······.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게다.”
 그 말을 끝으로 휘적휘적거리며 모옥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현허였다.
 중압술.
 백천성이 무당법문에 입문한 그다음 날에 걸렸던 이 술법이 언제나 사부의 해결책이었다.
 “개뿔······ 쓰파······.”
 기어코 백천성의 입에선 욕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결국 사부의 말은 이제껏 해 왔던 것처럼 순전히 몸으로 때워서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오로지 사부인 자신의 탁월한 가르침 덕분이었고, 실패하면 뒤떨어지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네놈 탓이라는 얘기였다.
 ‘틀림없이 중압술을 펼치겠지.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이렇게 착한 어린아이를 속여 중압술을 건 게 불과 삼 년 전이니까.’
 안 그래도 무거운 몸이다.
 여기서 더 몸이 무거워지거나 그 기간이 길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지는 백천성이었다.
 “빌어먹을······ 태극오형······! 야아아아합······!”
 버럭 고함을 지르며 차를 덖는 손을 마구 휘둘렀다.
 태극오형.
 결국 차를 잘 덖을 수 있다는 다섯 가지 수법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건 오직 연습, 피나는 연습밖에는 없었다.
 잘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 *
 
 달빛.
 은가루와 같은 교교한 달빛이 영취봉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달빛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와는 정반대인 공동묘지.
 그 한가운데 백천성은 우뚝 서 있었다.
 후욱······.
 사방이 이름 모를 묘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서 백천성은 호흡을 일정한 간격으로 몰아쉬고 있었다.
 들이마시는 숨과 내쉬는 숨.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일만 자나 되는 구결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화일심태극결.
 무당법문의 법술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이것의 처음은 숨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숨만 제대로 쉴 줄 알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했지. 사부의 말이어서 믿을 건 못 되지만, 그래도 조화일심태극결은 그런대로 쓸 만하단 말이야.’
 호흡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는 것.
 지난 삼 년 동안 공동묘지에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력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중압술에 걸렸을 처음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처음 중압술에 걸렸을 땐 물통에 물을 길어 오는 일조차 한나절이 걸렸다. 그러나 이젠 힘들긴 해도 일반인처럼 움직일 수 있다.’
 그의 움직임은 일반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단지 조금 느리다는 느낌을 준다는 정도랄까.
 사실 공동묘지에서 매일 밤 이처럼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한 지 일 년이 지났을 때부터 배속에 뭔가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부는 그것을 법기라고 했다.
 ‘법기는 무공을 연성한 무인들이 쌓게 되는 내공과 같은 것이라고 했었지. 법기는 내공보다 한 수 위라고 하면서······.’
 한 수 위라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무당법문의 법술이 무공보다, 특히 누구나 인정하는 무당파의 무공보다도 세다고 하면서도, 절대로 무당파 도사들과는 마주치지 말라고 강조하는 점이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법술이라는 것은 무당들이 가지고 있는 신기(신끼) 같은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것이 법기인지 신끼인지 모르지만, 얼마 전부터 사부가 말한 조화일심태극결을 수련하여 얻게 되는 세 가지 능력인 귀안, 광명부동심, 조화혼 중에서 귀안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귀안에 들게 되면 귀신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고 했으니까.’
 백천성은 중얼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휘우우우······.
 사방이 공동묘지인 터라 주위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귀신들이란 본래 육신이 없는 영적인 존재라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백천성의 눈에는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백천성에게로 다가와 요란한 울림으로 떠들었다.
 
 ―나는 억울하게 죽었다. 나 삼색신마의 무공을 알려 줄 터이니 내 원한을 풀어 다오.
 ―아니, 내가 먼저다. 평생 동안 황금을 모았으나 간부에 의해 독살당해 이곳에 버려졌다. 내가 그년 몰래 감추어 두었던 황금이 있는 동굴을 알려 줄 터니······.
 ―그깟 황금보다는 내가 모은 기병들이 훨씬 값어치가 있다.
 
 모기가 쉴 새 없이 앵앵거린다고 할까?
 조화일심태극결대로 호흡을 하고 있던 백천성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버럭 소리쳤다.
 “꺼져!”
 
 
 
 4장 인연과 비연
 
 
 퍼엉!
 “커억!”
 일 장을 맞은 흑의인의 가슴이 그대로 박살 나고야 말았다.
 묵의인.
 언뜻 보아도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이나 두 눈에서 쏟아지는 신광이 날 선 비수처럼 예리한 묵의 노인이 앞을 바라보며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사혼십팔영(死魂十八影)······ 이제 보니 너희들이 모두 움직였군.”
 열여덟 명의 흑의인들.
 묵의 노인 앞으로 열여덟 명의 흑의인들이 한 손에 검을 쥔 채 묵의 노인에게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조금 전 한 명이 묵의 노인에게 일 장을 맞고 가슴이 박살 난 채 열일곱 명이 되었으나,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사혼십팔영.
 죽음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열여덟 명의 무인들. 절대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을 키워 낸 것은 바로 묵의 노인이었으며, 그들 개개인의 살인 능력은 놀라워 각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능히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 중 맨 선두에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고군이 입을 열었다.
 “벽주, 우리를 이 자리에 올라오게까지 만들어 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오. 살왕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우리 사혼십팔영들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소이다.”
 “흐흐······. 그런데도 나 살왕(殺王) 여가랍(呂可拉)을 배신하겠단 말이냐?”
 삭막한 웃음을 흘리는 묵의 노인.
 살왕(殺王) 여가랍(呂可拉).
 이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살수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자. 이미 팔십 년 전부터 강호팔대공적 중의 한 명으로, 살아 있는 악마라 불리는 사신이었다. 또한 그가 벽주로 있는 북벽(北壁)은 세상의 모든 살수들의 요람으로 지칭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신이 아니요. 다만 다른 선택을 했을 뿐······.”
 고군이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여가랍은 두 눈에서 음산한 살기를 떠올렸다.
 “흐흐······. 선택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고작 네놈들만으로 나를 처치할 수 있으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우린 사혼십팔영은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소. 우리 모두가 공격한다고 해도 결코 벽주에게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벽주가 정상적인 몸일 때만 가능한 일······.”
 “내가 다쳤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허세는 통하지 않소. 이미 우린 벽주가 천붕혈산지독(天崩血酸之毒)에 중독되어 본래 내공의 삼분지 일밖에는 사용하지 못함을 알고 있소.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에 우리 사혼십팔영들은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을 테니까.”
 천붕혈산지독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극독하다고 알려진 독. 일종의 무영지독이기도 한 천붕혈산지독에 걸리면 금강불괴에 이른 최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한 줌의 혈수로 화할 수밖에 없었다.
 “크크크······.”
 문득 여가랍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랑이가 조금 상처를 입었다고 개에게 당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기르던 개라면······.”
 화악······.
 그의 오른손에 묵빛의 광망이 번득이더니 이내 그의 우수에 묵빛의 철갑이 채워져 있었다.
 묵룡철갑.
 그로 하여금 살왕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게 한 희대의 살인 병기였다.
 고군이 긴장하며 소리쳤다.
 “묵룡철갑이다! 모두 일제히 공격해!”
 쓰와아앙······.
 그가 번개같이 검을 내뻗자 눈부신 검광이 곧장 여가랍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동시에 나머지 사혼십팔영들 역시 지체하지 않고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여가랍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쐐애애액······.
 파츠츠츳······.
 사위를 찢어발기는 듯한 검광.
 그 속에서 여가랍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크크······. 네놈들에게 다시 한 번 알려 주마! 본 벽주가 왜 살왕이라고 불리는지를······.”
 번쩍!
 쿠콰쾅!
 열일곱 개의 검기와 여가랍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광이 충돌하면서 엄청난 폭음을 일으켰다. 어둠이 그대로 폭발해 버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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