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천우영―
다섯 살에 무당파에 입문하였다.
나이 십오 세, 천우영은 검의 끝을 보았다고 말했다.
“검이라는 존재는 결국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죽이기 위한 것! 저는 검의 끝에서 살검지도를 보았습니다.”
<검을 통해서 도를 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검술에는 선도의 깨달음이 가득해도 검이라는 물건 자체가 살殺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검을 수련하면 끝에서 살검지도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천우영은 검의 끝에서 결국 검을 버렸다.
검결지―
검을 버린 손으로 검술만을 연마하며 살검지도를 버리기 시작했다.
살검지도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채운 건 활검지도였다.
천우영은 다시 말하였다.
“저는 검을 버린 끝에 활검지도를 얻었습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십팔 세였다.
천우영은 검을 버리고 활검지도를 통해서 검결지의 일지선一指禪을 얻었다.
무당파의 전설!
태극혜검을 완성하면 얻을 수 있다는 일지선이, 무당의 검학을 통해서 완전해진다면 얻을 수 있다는 일지선이, 모든 무당파의 무공의 정수에 도달하면 엿볼 수 있다는 일지선이, 결국 검을 버리고 활검지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었다.
천우영은 여기서 자신의 수련을 끝내지 않았다.
그는 검을 버린 손에 붓을 들었다.
그의 나이 약관이 되었을 때, 무당파를 떠났다.
“스승님! 저는 필검筆劍 속에 세상을 담겠습니다.”
천우영의 스승은 한탄했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는 선인이 등선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하산下山하는구나.”
활검지도를 통하여 일지선을 얻었다면 충분히 우화등선하여 활선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천우영은 비록 우화羽化하였지만 등선이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버린다면, 다시 그 기회를 얻는 건 무척 어렵다.
그는 그것이 정말로 한숨이 푸욱 나올 정도로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가 진실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천우영이 아니었다.
‘이 녀석은 그냥 우화등선이나 할 것이지······ 왜 기어이 나가서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제발 좀 조용히······ 등선이나 하여라.’
필검에 세상을 담겠다고?
그건 그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다.
물론 이해는 한다. 평생 무당산에서 수련만 했고 제대로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며, 이대로 그냥 등선하기에는 세상을 향한 미련이 가득 있었으리라.
‘그래, 네 뜻대로 충분히 세상과 뒤섞여서 즐겁게 살다가 등선하여라! 뭐 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내가 뭘 어쩌겠느냐?’
제 1장 화공 천우영
장강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동정호다. 동정호 옆의 악양은 아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이지 않을까. 강호의 온갖 시인묵객들이 머물기를 원하는 곳이 바로 악양이었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백화루百花樓>라는 기루였다.
백 명의 꽃이 있다고 하여 이름이 백화루였고, 기녀 역시 정확하게 백 명을 유지하고 있다. 백 명의 기녀는 모두 금기서화에 능하고 외모가 절륜하며, 특히 백화루는 기녀들의 아름다운 검무로 아주 유명했다.
그런데 백화루에서 가장 유명한 건 기녀들의 검무보다는, 사실 한 사람의 화공이다.
물론 그는 이 근처에서 꽤 유명할 뿐이었지 명성이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금기서화에 능하며 특히 글과 그림의 명성이 뛰어났지만, 가장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연서 때문이었다.
가슴을 울리는 시작詩作과 강하고 유려한 필법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력으로, 그가 연서를 대필해주고 지금까지 실패했던 적이 없었다.
그 소문을 듣고 남궁훈은 말을 타고 백화루까지 달려왔다.
‘호오?’
백화루의 현판을 보며 남궁훈은 감탄했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힘차고, 마치 생명을 가지고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힘이 느껴지는 필법이었다.
남궁훈도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필법가의 글자를 꽤 많이 봤는데, 저런 필법은 처음 보았다.
글자가 바람처럼 자유로워서 마치 현판을 곧 떠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천 공자께서 썼다고 들었습니다.”
남궁훈을 안내하기 위해서 나온 백화루의 사람이 누가 현판을 썼는지 알려주었다.
“안목이 있는 분들은 공자처럼 감탄하기도 하지만, 안목이 없는 사람은 악필이라고도 말하더군요.”
“하하하, 저렇게 힘 있는 글자가 악필이라······!”
그 정도로 자유롭다는 것인가?
남궁훈은 백화루의 화공 천우영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이 사내도 평범하지가 않군.’
역시 악양의 백화루라고 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기루에 기생하며 기도 행세를 하는 평범한 흑도의 사내처럼 보이지 않았다.
복장이나 거친 분위기는 흑도의 왈패 혹은 낭인검객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투나 눈빛을 보면 그렇게 같잖은 인간은 아니었다.
한 자루 검을 차고 있고 분위기를 보면 강호의 꽤 유명한 낭인검객일 확률이 높은데, 그런 사람이 기루에서 기도 노릇을 할 리는 없잖은가.
그것도 문지기처럼 손님을 안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텐데.
남궁훈은 남궁세가라는 명문의 자제로 이런 기루에 처음 출입을 해본다.
돌아다니는 사람 대부분이 여자들이라서 계속 주위를 힐끔거렸다. 저잣거리의 여인들이 아니라 모두 아름답게 화장을 했고 옷매무시도 역시 기녀이기 때문인지 남달라서 자연스레 눈이 갔다.
문지기는 남궁훈을 기루와 별채를 지나서 후원으로 데려갔다.
후원은 기루의 손님을 모시는 공간이 아니라 기루의 식솔들이 생활하는 장소였다.
즉 손님이 이곳에 올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여기 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천우영의 객들이었다.
“크흠! 천 공자, 손님을 모셔왔소!”
사내는 약간 어색한 말투로 문앞에서 제법 큰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내는 슬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훈이 앞에서 기다리자 다시 문이 살며시 열렸고, 사내고 조용히 손짓을 했다.
들어오라는 뜻이다.
‘허 참······!’
남궁세가의 후기지수인 남궁훈이었기 때문에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대청이 있었고, 화공처럼 보이는 약관의 사내 한 명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노비도 아닌 사내가 책상도 아니고 왜 바닥에 앉아 있담?
대청 반대편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후원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사내는 후원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바닥에 펼친 화선지를 보면서 붓을 들고 있다.
집중한 모습이다.
이미 천우영이라는 화공이 명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과연 뭘 하는지 남궁훈도 궁금해서 입을 다물고 뒤에서 화선지를 보는데.
사내는 집중해서 화선지의 한가운데 점을 하나 찍었다.
“하아······!”
그 후에 한숨을 푹 내쉰다.
겨우 점 하나 찍고?
“아······ 지, 진 무사! 내, 내 다리······ 다리에 쥐가 났소!”
약관의 사내는 다리를 펴고 몸을 구부렸다. 당연히 오래 바닥에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리지 않나?
사내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우영이 진 무사라고 부르는 진표는 천우영이 호들갑을 떨어도 별로 감흥도 없었고 그냥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약간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하긴 이걸 처음 보는 남궁훈도 좀 어이가 없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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