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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척안의 마도사 [E]

척안의 마도사 1-1권

2017.07.31 조회 6,455 추천 63


 # 프롤로그 ~ Prologue ~
 
 규칙도 없이 얼기설기 놓인 탁자들 위에는 파그넬 지방 특산물인 흑맥주와 함께 통돼지 구이, 닭고기 조림 따위가 놓여있다.
 그리고 탁자들 사이로는 수십의 용병들과 여인들이 앉아 목을 축이고 있었다.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흑맥주였지만, 용병들은 좋다고 목구멍으로 부어 넘겼다.
 “크하하핫! 그래서 내가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 자식의 목을 단번에 날려버렸더니, 다른 놈들이 낑낑거리면서 오줌을 지리더란 말이지! 그래서 내가 확!”
 “꺄아!”
 한 용병이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옆에 있던 여인의 가슴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 여인의 입에서는 금세 교성이 흘러나온다.
 방금까지 무용담을 자랑하던 용병은 떠드는 것을 멈추고 맹렬하게 여인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용병들이 시끌벅적하게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들을 주물러댔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조용히 자신의 술잔을 기울이는 이가 있었다.
 ‘쯧, 아무튼 같이 앉기 부끄럽다니까, 짜식들······.’
 그가 대작하는 이도 없이 홀로 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때였다.
 “망할 용병 자식들, 하필이면 이런 데서······.”
 윗층에서 용병을 욕하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용병들에겐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사내의 귀로는 확실하게 들렸다.
 그대로 슬쩍 시선을 올려보니, 2층에 있는 탁자에 척 보기에도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의 옆으로 백색 수염의 노인이 같이 앉아 있는 걸 보니, 어느 마탑에서 수련생들과 함께 외출이라도 나온 모양이다.
 사내는 마법사들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 ‘망할 개자식’만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쯤 저들의 옆에 앉아 있을 텐데. 따박따박 나오는 연구비나 받으면서 그렇게······.’
 용병으로 살아가며 겪은 험난했던 일들을 떠올리는 사내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편하게 시작하긴 했다지만, 그가 처음부터 용병 생활을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뭐야! 이 자식아!”
 “그건 니가 한 게 아니라 내가 한 거지! 어디서 이자식이 남의 공을······.”
 “닥쳐! 그게 여기서 할 소리야!”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두 명의 용병이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특이한 일은 아니다.
 용병들이 술자리에서 싸우는 것 정도는 평범한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음으로 일어난 일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엇! 피, 피해!”
 탕! 촤아아악!
 과거의 기억에 빠져 있는 사내의 머리통을 맥주잔이 치고 지나간다.
 빈 잔도 아니었다.
 그 안을 가득 메웠던 미지근한 맥주가 사내의 옷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방금까지 과거를 회상하던 남자의 이마로 크게 힘줄이 튀어나온다.
 동시에 방금까지 여자를 탐할 생각에, 술잔을 기울일 생각에, 그리고 싸움을 구경할 생각에 한창 달아오르기 시작한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아니, 찬물 정도가 아니다.
 마치 얼음장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 하. 하.”
 “도······.”
 “어떤 자식이야! 이 개자식들아!”
 “도망쳐라! 발트 저 자식 눈 돌아갔다!”
 발트라 불린 사내는 다른 용병들을 덮쳤고, 이내 그의 손에서는 온몸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생성되어 용병들의 머리 위로 부어지기 시작했다.
 “아악! 차, 차가웟!”
 “저, 저리가! 으아아악!”
 
 # 1장 망할 개자식
 
 로브를 뒤집어쓴 한 명의 남성이 책장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책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자가 꼬부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뭔가 답답하기라도 한 건지, 그는 이내 머리를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확 젖힌다.
 그러자 드러난 모습은 사내가 아니라 고작 열다섯 살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었는지 치렁치렁한 갈색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온다.
 “후우, 이 망할 개자식. 흡!”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가, 누가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확 틀어막는다.
 “후우······.”
 욕은 멈췄지만 한숨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발트, 너무나 평범한 이름의 소년이었다.
 고작 수습이라고는 하나, 우라드 왕국 소속의 창공의 마탑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마법사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저 평범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발트가 이 골방에 틀어박혀서 의미도 모르는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발트는 이 책을 자신에게 집어던졌던 그 망할 개자식의 얼굴을 떠올렸다.
 
 ***
 
 “야! 발트!”
 “······.”
 꼬장꼬장하게 생긴 청년이 뒤에서 발트를 불러 세운다.
 하지만 발트는 뭐에 정신이 팔린 건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청년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곧바로 손을 들어올렸다.
 “내 말 안 들려?”
 “악!”
 뒤에서 내려친 손바닥에 발트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 손바닥에는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발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예, 예! 부르셨습니까, 선배님!”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도련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
 “뭐, 좋아. 어쨌든 넌 더 이상 카르작 교수님의 수업에 나오지 말고 이거나 연구해.”
 그렇게 말하며 하르센이 내민 책의 제목을 본 발트가 그대로 굳었다.
 발트는 농담이시겠죠? 하는 눈빛으로 하르센을 쳐다봤지만, 하르센의 눈빛은 너무나 단호했다.
 “네가 교수님 수업에 계속 나온다고 해서 실력이 늘기나 하겠어? 마탑에 들어온 뒤로 계속 제자리걸음이잖아? 안 그래? 슬슬 연구 과제를 통과시키지 않으면 용병단에 팔려가던가? 응?”
 발트는 ‘네놈이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것을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겨우 자작가의 평기사에 불과했지만, 하르센의 아버지는 무려 왕국의 백작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연구 과제를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하르센은 벌써 하급 마법사의 자리에 올라가 있었다.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게르토 백작의 아들이라는 그의 위치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르센이 보인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만 봐도 그의 입으로 들어간 영약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저 망할 개자식이 자신을 줄곧 괴롭혀대지만 않았어도 자신 역시 지금보다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발트가 처음에 이 마탑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자신과 하르센의 재능은 비슷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소문에 따르면 하르센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도 그를 가르치는 상급 마법사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3년, 하르센은 마탑에서 가까스로 학비를 내며 버티고 있는 자신과는 꽤나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마법의 경지에서도, 마탑 내의 인지도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지금 하르센이 내민 책을 ‘예,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저는 고작 2서클의 수습 마법사입니다. 1세대 룬어를 대체 무슨 수로 연구하라는 말입니까.”
 그가 내민 책이 다름아닌 1세대 룬어와 관련된 책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에게 1세대 룬어가 새겨진 책이라고 하면 무언가 있어보일지도 모르지만, 발트는 저게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도저히 분리수거가 불가능한 쓰레기 말이다.
 괜히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2세대 룬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해석된 1세대 룬어의 효율은 최고라고 말해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잘못 해석되거나 해석되지 않은 룬어를 마법진에 사용했다간 마법진째로 폭발해버리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1세대 룬어의 대부분은 해석되지 않은 상태였다.
 1세대 룬어의 낮은 해석률의 가장 큰 이유는 1세대 룬어를 해석할 수 있는 기반 자료가 모자라다는 점에 있었다.
 자신에게 쏟아질 부와 찬사를 위해 1세대 룬어의 해석에 달려들었다가 마나 붐(Mana Boom)으로 폐인이 된 마법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나마 한두 개의 룬어를 해석하는데 성공해서 부를 움켜쥔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상급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상태에서 연구에 들어갔던 들이다.
 이제 겨우 수습 마법사인 자신이 달려들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르센이 발트를 향해 기분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이걸 계속 들고 있게 할 셈이야?”
 “아, 아닙니다!”
 하르센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발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저는······.”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난 믿어.”
 ‘믿기는 개뿔이······.’
 하르센은 발트의 반론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이 발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그를 지나쳐간다.
 그때, 발트를 지나쳐가던 하르센이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다시 발트를 향해 걸어왔다.
 하르센의 입에서 장난이었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발트였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그의 기대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아! 그리고 교수님 수업에 더 이상 안 나와도 된다는 건 진짜야, 내가 널 내 조수로 쓰겠다고 말씀드렸거든.”
 “······!”
 “네가 그 책을 연구하는 동안 쓸 연구실은 308호야, 알고 있지? 거기가 어딘지? 푸하하핫!”
 하르센은 히죽거리면서 그를 다시 지나쳐갔지만, 발트는 하르센의 표정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
 
 물론 그건 꿈이 아니었다.
 발트가 속한 창공의 마탑에서 제1세대 룬어를 연구하던 마지막 마법사가 마나 붐에 휩쓸려 마나 서클에 균열이 일어나 탑 밖으로 쫓겨난 지 아직 반년도 되지 않았다.
 지금 발트가 앉아 있는 연구실 308호는 더 이상 마법사로 살아갈 수 없게 되어 탑 밖으로 쫓겨난 그 마법사가 연구에 매진하던 그곳이었다.
 그나마 그 마법사는 겨우 목숨을 건지긴 했다지만, 그렇다고 그걸 다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그가 있을 곳도, 꿈도 미래도 모두 잃어버렸으니까.
 게다가 어쩌면 발트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가게 될지도 몰랐다.
 “으아아아아! 미치겠다, 진짜······.”
 발트는 마치 정신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비명을 지르다가도 금세 울적해진 표정을 지었다.
 하르센의 횡포에 화가 나는 건 당연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의 부모님에게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발트가 떠올린 건 무뚝뚝한 아버지의 얼굴이다.
 발트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자작님의 평기사로 뼈 빠지게 일하면서 번 돈의 절반을 털어서 자신을 이곳에 보내주었다.
 남은 돈은 그의 형을 기사로 키우는데 쓰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마법사가 되겠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며, 자립을 강요당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기사인 아버지가 장남이면서도 자신보다 체격도, 검술에 대한 재능도 더 좋은 형에게 집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호기롭게 집을 박차고 나온 자신은 훌륭한 마법사가 되기는커녕, 백작가 도련님의 장난감 노릇이나 하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질 상황이지만 마탑 안에서 감히 그에게 반항할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사인 아버지에게 배운 체술로 그 얼굴에 주먹이라도 박아 넣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비참하기 그지없는 최후만이 발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같은 마탑의 동료라면서 자신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지껄이던 그 당돌한 평민 수습생이 하르센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기사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은 평민보다는 분명 나은 것이었지만, 백작가의 아들과 비교해보면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하아······.”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책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마따나 하르센 그자식이 자신을 정말 조수로 쓰겠다며 상급 마법사에게 보고한 이상, 그가 연구 과제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간 큰일이 벌어진다.
 물론 그 큰일은 결코 발트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 2장 1세대 룬어
 
 그가 성과를 내야 하는 시간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두 달.
 이 두 달의 시간마저 헛되이 보냈다간······.
 “무능한 놈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하급 마법사로는 올라가지도 못하다가 용병계로 팔려가겠지.”
 그랬다.
 그의 부모님이, 그리고 다른 수습 마법사들의 부모님이 학비를 열심히 내긴 했지만, 그 돈은 정식으로 마법사를 키우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발트가 적디 적은 학비로도 마탑에 들어와 있는 것은 발트가 소속되어 있는 우라드 왕국, 카드기우스 3세의 칙령 덕분이었다.
 [더 이상 돈에 치여서 왕국 내의 마법 전력이 약화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다. 왕국 내의 귀족들은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 왕의 기치 아래 시작된 그의 개혁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물론 정해진 기간 안에 정식 마법사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마탑이 지정하는 용병단에서 5년간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긴 했다.
 하지만 평민들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기뻐했고, 왕실은 귀족들과 함께 그 지원금을 내는 대가로 왕국의 마법 전력을 정기적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발트는 그 칙령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기사의 아들이라는 신분 덕분에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검사해볼 수 있었고, 약간의 재능을 뽐낸 대가로 아버지의 금전적인 도움을 받아 마탑에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가 좋기도 했었는지, 마탑에 들어온 직후에는 차후 마탑을 이끌어갈 인재 중 하나로 주목받기까지 했다.
 물론 그 기대는 하르센이 자신을 주목하면서부터 차차 옅어졌지만.
 그리고 지금, 발트가 마탑에 들어오며 쓴 계약서가 지금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하르센이 앞으로도 계속 그를 괴롭히는 이상, 정식 마법사는커녕 용병계를 전전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용병계를 전전할 생각으로 마탑에 들어오는 평민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발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랬다간 진짜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내 꿈에서 한참이나 멀어지겠지.’
 발트는 전쟁터에 나가서 활약하고 싶다는 이유로, 혹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마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용병계로 가더라도 그렇게 걱정을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발트는 연구 마법사로서 귀족들에게 연구비를 지원받아가며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고 싶었다.
 발트가 마탑에 들어와 갖은 교육을 받은 뒤로 그 소망이 점점 확고해져가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발트는 상념을 집어던지고 다시 책을 펼쳤다.
 주변에 널브러진 책들 사이로 발트의 시선이 오갔고, 의미도 알 수 없는 꼬부랑 문자들 사이로 발트의 주석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발트는 계속해서 눈이 빠져라 책을 붙들고 있었던 덕분에 그나마 그가 쓸 수 있을 것 같은 1세대 룬어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온갖 고서를 뒤지고, 여기저기에 굽신거려 가며 자료를 구했다.
 그 덕분에 1세대 룬어책에 적힌 몇 개 문장의 대략적인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이번 실험에서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룬어는 ‘aint’와 ‘valr’라는 두 개의 룬어였다.
 “이 마법진의 여기에 ‘aint’를 넣고, 그 다음엔······.”
 물론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을 뿐이다.
 발트도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시도해보지도 않고 꿈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발트는 정말로 마탑에서 인정받은 정식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졸라 영주성에서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보이고,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마법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는 정말로 단순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발트는 한참이나 그리던 마법진에서 손을 떼고는 마법진의 중심에 하급 마나석을 올려두었다.
 이제는 정말로 신의 가호가 필요할 뿐이다.
 “이제 이걸로······ 제발, 제발, 제발!”
 발트가 마나석의 옆으로 그의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은 그의 마나홀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기도가 빛을 발한 것일까.
 마법진의 중심에서 시작된 빛이 마법진을 서서히 밝히기 시작했다.
 ‘오오오오!’
 정말로 그가 그린 룬어가 의미에 맞지 않았다면, 혹은 마법진을 그릴 때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다면 마법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수많은 마법사들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다.
 방금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잠잠하던 마법진이 그대로 펑 하고 폭발하는 일 말이다.
 그렇게 발생한 마나 붐이 바로 앞에서 마법진을 조율하고 있던 마법사에게 치명상을 안겼음은 물론이다.
 마나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빛이 나기 시작한 마법진은 발트에게 있어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다.
 빛이 나기 시작했다는 건 반 정도는 성공했다는 말이다.
 발트가 마법진을 그리며 원했던 성능과도 일치했고.
 이대로 마법진에서 빛 덩어리가 떠올라 방을 빙빙 돈다면 그때는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부와 명예를 움켜쥘 수······.
 투―콰앙!!
 “아아아아악!”
 그 순간, 마법진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빛의 섬광이 그의 눈을 향해 폭사했고, 발트는 주변의 기물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창공의 마탑의 상급 마법사, 라르젠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1층에 있는 의무실에 들어섰다.
 1층에 있는 의무실은 간혹 두통을 호소하는 수습 마법사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침대는 늘 비어 있었던 그곳에 한 명의 소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 소년은 발트였다.
 발트의 실험이 유발한 마나 붐은 창공의 마탑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물론 물리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다.
 각 방마다 보호 마법이 충분히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문제는 고작 수습 마법사에게 위험하기 그지없는 1세대 룬어의 연구를 맡겼다는 점이다.
 용케도 발트의 마나홀이 건재했지만, 그 책임 소재는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수습 마법사가 그 폭발과 함께 사망했었다면, 왕실에서 저 소년에게 그동안 들어간 후원금을 용병단이 아니라 마탑에서 갚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몇 번의 회의가 오가고, 결국 수습 마법사에게 1세대 룬어의 실험을 맡겼던 하르센은 3개월의 근신을 받았다.
 그나마 그걸로 그친 것은 하르센의 아버지인 게르토 백작이 저 수습 마법사가 깨어나지 못할 경우, 왕실에 갚아야 하는 후원금을 자신이 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생각도 거기까지, 라르젠이 의무실에 근무하는 메이드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이봐, 저 수습 마법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예. 아직은 반응이 없습니다, 라르젠 님.”
 “으음······.”
 라르젠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2주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발트는 깨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나홀이 멀쩡한 것을 봐서는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유지될 것 같았지만, 그것도 무사히 깨어날 때의 이야기다.
 그나마 마탑 전체를 총괄하는 의원인 수르펠이 발트를 옆에서 돌보고 있으니 희망을 품고는 있었지만, 마나 붐이 겉에서 판별할 수 없는 내상을 입히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으니, 그저 낙관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지금은 발트가 정신을 차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발트라는 저 수습 마법사가 저대로 죽어서는 곤란했다.
 후원금 문제는 게르토 백작이 해결해준다고 했지만, 어쩌면 발트의 마나홀이 멀쩡한 것이 어설프게나마 1세대 룬어의 실험에 성공한 덕분일지도 몰랐다.
 발트가 일으킨 마나 붐 때문에 308호는 엉망으로 변했으니, 그가 정신을 차려서 자신들의 의문을 풀어주어야 했다.
 바로 그게 상급 마법사인 자신이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였다.
 미동도 없는 발트를 내려다보던 라르젠이 가볍게 혀를 차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 3장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다
 
 ‘으··· 으으······.’
 발트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질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팔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내가··· 왜······?’
 발트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눈앞을 가득 메웠던 그 섬광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망할 개자식, 하르센의 얼굴, 1세대 룬어의 실험, 그리고 폭발.
 ‘그럼 난······.’
 자신은 죽은 걸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려던 찰나, 먼 곳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원님······.”
 발트는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어쩌면 자신이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그 희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줬다.
 “수르펠 의원님! 여기 수습 마법사가 눈꺼풀을 움직였어요.”
 그 명확한 목소리는 발트의 정신을 일깨웠다.
 정신이 확실하게 깨어나자 방금까지 눈꺼풀이나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발트는 갑작스레 눈을 떴다.
 “으윽······.”
 천장에 달려 있는 라이트 마법진에 눈이 부셨다.
 그때 저쪽에서 메이드의 목소리를 들은 수르펠 의원이 발트를 향해 다급히 뛰어왔다.
 “이봐, 수습 마법사, 정신이 드나?”
 “여, 여기는······.”
 “1층의 의무실이다.”
 “아!”
 발트는 의원의 뒷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황급히 눈을 감고 자신의 마나홀을 점검했다.
 어째서인지 마나 붐에 휘말렸던 기억이 생생한데도 불구하고 마나홀에 금이 가 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수르펠이 발트를 향해 말했다.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군. 자네도 확인했겠지?”
 “뭘 말입니까? 그리고 수르펠 님이 어째서 여기······.”
 발트는 수르펠이 자신의 건강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고작 일개 수습 마법사, 상대는 마탑 전체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원장이었다.
 수르펠은 발트의 의문을 못 들은 척하며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마나홀이 멀쩡하다는 것 말이네. 그것과 관련해서 자네에게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분들이 많네. 혹시 자네의 실험이 일부나마 성공하지 않았을까 해서 말이지.”
 “······.”
 그 말에 발트는 자신의 의문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
 수르펠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최소한 상급 마법사의 경지에 올라 있는 이들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자신의 실험이 명백하게 실패했다는 것이다.
 발트가 수르펠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이상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천장에 있는 라이트 마법진의 주변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광경 말이다.
 “수, 수르펠 님······.”
 “응? 뭔가?”
 “저건 뭡니까?”
 “······?”
 수르펠은 발트의 손가락을 따라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봤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멀쩡한 천장만이 보일 뿐이다.
 “뭐가 말인가? 평범한 라이트 마법진이지 않나.”
 “그, 그게 아니라······ 으윽!”
 발트는 누가 자신의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으으······.’
 머리를 꽉 움켜쥐고는 신음을 흘리자, 수르펠이 발트의 코에 약초를 가져다댔다.
 그러자 발트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과 함께 당장이라도 그를 기절시킬 것 같았던 통증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하네. 아직 대화를 나누긴 힘든 상태인 것 같군. 조금 더 쉬고 있게.”
 수르펠은 발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 방에서 나갔다.
 
 ***
 
 수르펠이 코끝에서 맡게 한 약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발트는 자신의 통증이 점점 누그러지다가 아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발트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천장을 노려봤다.
 단순히 통증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인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주변의 공기에서 끊임없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 아지랑이가 다시 천장의 라이트 마법진으로 향한다.
 그것에는 규칙성이 있었다.
 단순한 착시라면 이렇게까지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에이, 설마······.’
 저 현상이 무엇일까 계속해서 고민하던 발트는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상상을 떠올렸다.
 어쩌면 저건 눈으로 보는게 불가능하다는 마나일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물론 떠올리자마자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지만, 단순히 그것을 실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발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라이트 마법을 시전했다.
 마법의 구현은 시전자의 강한 이미지가 필요했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각각의 룬어의 배열, 그리고 주문의 영창, 수학적 계산을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시키는지에 따라 마법의 위력이 결정된다.
 “밝은 빛이여, 어둠을 물리치는 밝고 작은 빛이여, 라이트(Light)!”
 발트가 입으로는 영창을, 머릿속으로는 마법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룬어를 떠올리며, 그 수식에 따라 심장어림의 마나를 끌어내자, 주변에 있던 아지랑이들이 발트의 손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러자 이내 발트의 손 위로 작은 빛이 피어오른다.
 그때, 발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천장의 라이트 마법진으로 향하던 아지랑이가 그의 손으로 향하고, 라이트 마법이 발현되는 광경을 말이다.
 “······흡!”
 발트는 당장이라도 환호성이 터질 것 같아서 입을 꽉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라이트 마법이 취소되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발트는 자신이 마나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마나 붐을 겪으며 그의 몸에 자신이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만 좋다면 아무래도 좋다.
 물론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기는 했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 능력이 계속 지속될 수만 한다면 마법사로 살아가는데 큰 이점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를 반복하는 것일까.
 곰곰히 고민하던 발트는 왼손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가렸다.
 “아!”
 바로 맞췄다.
 왼쪽 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자 주변에 있던 아지랑이가 더욱 확연하게 보인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오른쪽 눈을 가려보자, 이번에는 아지랑이가 모두 사라졌다.
 그의 오른쪽 눈에 알 수 없는 능력이 깃든 것이다.
 ‘으, 으음······.’
 발트는 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며 마나를 보는 능력을 조절하고자 했다.
 만약 주변의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조절할 수 없다면 일상생활에서 큰 지장이 있을 것이다.
 그랬다간 언제나 시야를 가리는 아지랑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될 테니까.
 침대에 누운 채로 그것에 집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그가 몇 번 눈을 가렸다가 치웠다가를 반복하며 연습을 하자, 발트는 자신의 의지로 마나를 보는 능력을 조절할 수 있었다.
 발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발트는 자신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후, 후후후······.”
 “야! 뭐가 웃겨!”
 “······!”
 발트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위로 들어올린다.
 그러자 의무실의 입구에 삐딱하게 서 있는 하르센이 보였다.
 “하, 하르센 선배님······.”
 아무래도 자신의 새로 생긴 능력에 기뻐하느라 그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하르센이 애써 기척을 내지 않은 탓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르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발트가 재빠르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자 하르센의 폭언이 쏟아진다.
 “너 이자식, 누가 멋대로 그런 실험을 하라고 했어!”
 “서, 선배님이······.”
 “뭐 인마?”
 “······.”
 발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며, 잠자코 하르센의 말을 들었다.
 “넌 아주 끝인 줄 알아. 왜 내가 네 실험 때문에 3개월의 근신을 받아야 하냐고! 장담컨대 네놈이 이 마탑에서 편하게 지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넌 여전히 내 밑의 수습 마법사니까.”
 “······.”
 “알아들어?”
 “······알겠습니다.”
 “대답은 잘 하는구나. 대답은!”
 하르센은 한참이나 발트를 노려보다가 문을 쾅 닫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하르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발트는 침대에 다시 몸을 누이며 욕을 내뱉었다.
 “······망할 개자식.”
 하르센의 말을 하나하나 따져보니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막말을 내뱉고 갔는지 알 만도 하다.
 보나마나 고작 수습 마법사인 자신에게 위험한 실험을 시켰다는 이유로 근신 처분을 받은 것일 게다.
 그런데 마나 붐이 일어난 게 왜 자신만의 책임인가.
 일반적으로는 수습 마법사의 실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그를 맡은 하급 마법사가 챙기는 것이 보통이다.
 몇 번씩 보고차 그를 찾아갔지만, 귀찮다며 찾아오지도 말라고 했던 게 하르센 아닌가.
 한참이나 속으로 욕을 하던 발트는 다시 마나를 본다는 생각을 떠올렸고, 그의 눈에 라이트 마법진에 몰려드는 마나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 능력만 있다면 하급 마법사로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마탑에 자리만 잡을 수 있다면, 중급 마법사, 아니, 상급 마법사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르센의 횡포에서 자유로워지는 수준을 넘어 그를 발 아래 깔아뭉갤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발트는 침대에 누운 채 그런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침대에서는 쌕쌕거리는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리기 시작했다.
 
 # 4장 심문
 
 발트는 간호사를 통해 수르펠에게 머리의 통증이 없어졌음을 알리자 그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가 찾아오자 발트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실험실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발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트가 소속되어 있는 창공의 마탑에서 상급 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은 5서클 이상의 마도사들이었다.
 
 게다가 발트를 기다리던 그 자리에는 단지 그들만이 아니라 6서클 이상의 경지에 올라 있는 원로 마법사들까지 있었다.
 “모두 모인 것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모인 게 얼마만인지······.”
 “외부 활동 같은 걸로 바빴으니 말입니다.”
 1세대 룬어를 실험하던 수습 마법사가 마나 붐에 휘말렸는데도 마나홀에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사실은 탑 전체에 관심을 끌어 모았다.
 게다가 발트가 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덕분에 탑의 바깥에 나가 있던 상급 마법사들과 왕실에 파견 나가있던 장로 마법사들까지 탑에 복귀한 것이다.
 상급 마법사들은 너스레를 떨며 잡담을 늘어놓았지만, 그 앞에 있는 발트는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상급 마법사들의 위압감에 몸을 떨 뿐이었다.
 그렇게 누가 발트에게 말을 걸지 서로의 눈치를 보던 찰나, 자색 로브를 걸친 장로 마법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래서야 진행이 안 될 것 같군. 내가 진행하도록 하지. 괜찮나?”
 “······.”
 “그렇게 하게. 바르가스 자네라면 믿을 수 있지.”
 바르가스라 불린 그 사내는 현 마탑주와 같은 세대의 마법사였고, 호라닉의 뿔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장로 마법사였다.
 “자네는······ 발트라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장로 마법사님.”
 “내 이름을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난 바르가스라고 하네. 잘 부탁하지.”
 “그······.”
 친절하게 인사를 하나 싶었지만, 바르가스는 발트의 대답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자네를 이렇게 부른 까닭은 자네의 실험 때문이네.”
 “······.”
 “알고 있겠지만 1세대 룬어의 마나 붐에 휘말리고 마나홀에 타격을 입지 않은 케이스는 자네가 처음이네. 그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자네에게 쏠렸지. 만약에라도 자네가 실험에 일부나마 성공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
 발트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룬어의 정체를 밝히려던 애초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마나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힌다면 어떻게 될까.
 저들은 당장 자신을 해부하려고 들 것이다.
 실제로 마탑에 팔려온 노예들이 마법 실험 과정 중에 산 채로 해부당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마법사 특유의 광기가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창공의 마탑이 백마법을 행하는 이들이라는 이유로 노예들의 고통을 없앤 채로 해부를 진행하긴 했지만, 발트는 그걸 본 뒤로 이틀 동안 밥도 먹지 못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했다간 자신이 그들과 같은 꼴이 될지도 몰랐다.
 수십 쌍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발트는 침을 한 번 크게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마나 붐에 휘말린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저도 기억이 없습니다. 게다가 애초의 목적이었던 1세대 룬어의 해석에는 확실하게 실패했습니다.”
 “흐음.”
 그 대답에 바르가스는 뒷짐을 지고 있는 손으로 발트에게 보이지 않게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그러면서 사전에 메모라이즈(Memorize)해두었던 진실 탐지(Truth detection)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바르가스가 수인을 맺는 것을 완료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팔에 걸려 있던 팔찌가 작게 빛을 발했다.
 주변의 상급 마법사들은 그 기색을 느꼈지만,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발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혹시 무언가 들키기라도 할까봐, 그에게 마나가 보이지 않도록 마음먹고 방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르가스가 다시 발트를 향해 물었다.
 “다시 물어보지, 자네의 실험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를 이뤄냈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해주게, 발트 군.”
 발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그가 행했던 실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열심히 자료를 조사했고, ‘aint’라는 룬어와 ‘valr’라는 룬어를 사용해서 라이트 마법진의 효용을 늘리고, 주변을 자동으로 감시하는 것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마나 붐이 일어났고, 제가 폭발에 휘말리는 것과 동시에 제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마나 붐이 일어났다는 건 두 룬어에 대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거겠지요. 어째서 제가 무사한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발트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당시의 사정에 대해 말했다.
 그에게 다행인 것은 바르가스가 펼친 마법이 진실 탐지 마법이었다는 점이다.
 거짓말을 판별할 수 있는 그 마법은 발트가 아예 처음부터 꺼내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바르가스도 자신이 시전한 마법의 빈틈을 의식해서 발트에게 몇 가지의 질문을 더 했지만, 발트 역시 자신의 눈에 관련한 비밀을 교묘하게 피하며 대답을 마칠 수 있었다.
 그것은 발트 스스로도 그 자신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가능했던,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빈틈이었다.
 바르가스의 질문과 발트의 대답이 모두 끝나자, 주변에 모여 있던 상급 마법사들의 눈이 바르가스에게 향했다.
 바르가스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그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발트를 향해 말했다.
 “알겠네, 고생했네. 발트 군. 이만 돌아가 봐도 좋네.”
 “아, 알겠습니다, 바르가스 님, 그리고 제게 수르펠 님을 붙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며 자신의 치료에 대한 감사까지 마친 발트는 그제야 방을 나갈 수 있었다.
 발트가 문을 닫고 나가자 상급 마법사들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황급히 바르가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나?”
 “······자네들도 봤지 않나. 숨기는 것이 있었다면 순순히 방에서 나가게 하지 않았겠지. 그냥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 같아. 본인도 어떻게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 않나.”
 “······.”
 바르가스의 해명이 끝났지만, 상급 마법사들은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르가스를 쳐다봤다.
 혹시나 이놈이 발트라는 수습 마법사가 연구해낸 1세대 룬어의 비밀을 혼자 독차지하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눈빛은 장로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상급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창공의 마탑이라는 한 개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마탑주라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격적인 눈빛을 받은 바르가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
 “아, 알았네, 알았어.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데, 방금 내 말에는 거짓이 없네. 됐나?”
 그가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말을 마치자, 바르가스의 심장어림에서 작게 빛이 일었고, 그 뒤의 말까지 모두 마치자, 그제야 다른 마법사들의 눈에서 경계심이 사라졌다.
 발트에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그들은 무리를 지어 나름 친한 사이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쩝, 아쉽군.”
 “그러게 말이야. 뭔가 7서클로 올라갈 단서라도 얻지 않으려나 했는데.”
 “호오.”
 “왜?”
 “자네도 거기까지 도달한 건가? 그럼 내 실험과 같이 진행해보는 건 어떤가? 안 그래도 나도 벽에 막혀서 말이네.”
 “자네의 주 속성이 뭐였지?”
 “나는······.”
 발트의 일이 우연이었다고 판단한 그들은 그렇게 발트에 대한 일은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급 마법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발트가 떠난 회의실은 다른 의미에서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 5장 착각, 그리고 새로운 시작
 
 상급 마법사들과의 면담을 마친 발트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발트에게 배정되어 있는 연구실은 여전히 308호였다.
 한 번 마나 붐이 터진 곳이었지만, 방에는 그을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책을 주워 담고 정리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아니, 사실 그건 문제조차 아니었다.
 그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하급 마법사로 올라가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착각의 가장 큰 변수는 하르센이었다.
 “이번엔 이거다. 1세대 룬어에 대한 해석은 필요 없어. 대신 이 주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석해서 다음번 발표날까지 정리하도록 해. 알겠어?”
 “······알겠습니다.”
 “큭. 수고하라고. 기대하고 있을 테니.”
 하르센이 발트를 향해 비웃음을 한 번 내비치고는 사라졌다.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발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나를 볼 수 있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당장 하급 마법사로 올라가는 게 불가능한데.
 발트는 하르센이 던져주고 간 연구 과제를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건 1세대 룬어에 대한 해석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난이도의 연구 과제였다.
 “5서클 마법사가 6서클 마도사의 경지에 오르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라니······.”
 본래라면 이 정도 난이도의 연구 과제를 고작 수습 마법사에 불과한 자신에게 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게르토 백작의 아들이라는 하르센의 뒷배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게다가 발트는 설사 자신이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가며 제대로 된 보고서를 제출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르센의 손을 통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하르센이 그 보고서를 위로 올린다고 해도 문제다.
 상급 마법사들에게 그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했냐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자신의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발트는 1세대 룬어의 실험에 대해서 상급 마법사들에게 추궁을 받았을 때, 자신이 운이 좋았던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마나를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린다면 자신의 눈을 해부하겠다고 달려들 마법사도 수십이 넘었다. 고작 수습이라고는 하나 자신 역시 마법사였기에, 그들이 새로운 지식을 얼마나 광적으로 갈구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발트는 하르센의 괴롭힘이 계속되는 한 자신이 이 마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며칠······.
 발트는 조금 생각을 바꾸었다.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마나를 보는 능력이 있는 이상, 굳이 창공의 마탑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발트는 자신에게 시간과 장소, 그리고 연구에 필요한 자금만 주어진다면, 1세대 룬어의 완벽한 해석을 통해 그 누구보다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스스로 하나의 마탑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마탑 말이다.
 그런 발트의 자신감의 근거는 마나를 보는 능력과 1세대 룬어의 조합이었다.
 마법진에 1세대 룬어를 넣고 실험을 시도했을 때, 1세대 룬어가 마법진의 흐름에 반발한다고 해서 곧바로 폭발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그의 눈에 마나가 보이기만 한다면 마나 붐까지 가기 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원래라면 마나를 눈으로 본다는 발상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발상이었지만, 발트에게는 가능했다.
 “그래, 굳이 여기 매달릴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한 발트의 눈이 새롭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
 
 하르센의 방해 덕분에 창공의 마탑의 하급 마법사로서의 길을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발트가 마법을 배우는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설사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마탑의 서고에는 수많은 책이 있었고, 그 무엇보다 마나의 흐름이 그대로 보이는 눈이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는 것은 어렵기 그지없는 이론도 더욱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가 마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머리로 외워야 할 것이 반 이상 줄어들었다.
 “좋아, 이번에는 이 룬어군.”
 발트는 종종 혼잣말을 하며 실험에 몰두했다.
 물론 하르센이 내어준 불가능한 과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하르센은 발트가 실험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시약을 요청하는 것에는 특별한 방해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발트는 틈틈히 실험을 통해 1세대 룬어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하르센의 욕을 들을 생각으로 보고서를 대충 휘갈겨 그에게 내기 시작하자, 하르센의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의외로 발트 자신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그의 괴롭힘은 차차 줄어들었다.
 물론 발트에겐 이미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발트는 1세대 룬어의 연구에 푹 빠져 있었다.
 “이크!”
 잡념에 빠져 있던 발트가 황급히 마법진으로 들어가던 마나의 흐름을 차단한다. 마나가 해당 룬어의 흐름에서 반발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나의 흐름을 차단함과 동시에 마법진의 중심에 놓여 있던 하급 마법석을 들어 올리자 파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그대로 실험을 지속했었다간 또다시 마나 붐이 일어났을 것이다.
 ‘휴우~’
 나름대로 열심히 1세대 룬어를 해석하고는 있었지만, 발트 혼자의 힘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고작 하급 마법사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급 마법사 혼자의 힘으로 1세대 룬어 4개를 해석해냈다는 것만 해도 경이적인 성과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연구를 계속하며 발트는 자신의 눈이 가진 위험성을 더욱 세밀하게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해석된 1세대 룬어의 성능은 그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보다도 더욱 뛰어났다.
 1세대 룬어 한 개만 있다면, 그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는 마법사들 사이의 격언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발트는 자신의 눈의 비밀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느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밝힌다고 해도 해부당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 틀어박혀 종일 1세대 룬어를 해석하는 자리에 배치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좋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해부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니지, 아냐.”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발트가 마탑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은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니라, 마탑의 지원을 받아가며 연구를 계속할 때였다.
 발트가 다시 1세대 룬어 책을 뒤지고, 새로운 마법진을 땅바닥에 그리기 시작했다.
 
 # 6장 프루닐 교수와의 거래
 
 “하아, 더 이상 나한테 보고서를 올리지 않아도 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예. 알겠습니다.”
 발트의 대답을 들은 하르센이 대충 손짓을 하며, 발트를 자신의 연구실에서 쫒아냈다.
 하르센이 어떤 폭언을 퍼부어도 그저 예, 예, 거리기만 한지 이 주.
 발트가 하르센을 대하는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혹은 발트가 용병계로 떠나갈 때가 되어가기 때문인지.
 발트는 하르센의 괴롭힘이 명백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고, 마침내 오늘, 하르센이 자신에 대한 괴롭힘의 끝을 고했다.
 하르센은 또 다른 평민 출신의 수습 마법사를 찾아 괴롭혀대기 시작했고, 발트는 그렇게 그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발트는 거기에 대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마탑에서 마음이 떠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행동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그럼 이제 프루닐 교수님께······.’
 하르센의 방에서 나오며 발트가 떠올린 것은 프루닐 교수의 얼굴이었다.
 그는 흔히들 창공의 마탑의 얼굴마담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주변에서의 평판이 좋은 상급 마법사였다. 동시에 발트에게 마나 서클을 생성시켜주었던 상급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린 것은 다름이 아니다.
 이미 용병계로 떠날 생각을 마음먹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발트가 스스로의 마지막을 평범한 용병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발트가 프루닐 교수의 방을 찾아갔을 때, 다행히 그의 방 입구에는 아무런 팻말이 걸려 있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똑똑.
 “누구냐?”
 “수습 마법사, 발트입니다.”
 “들어와.”
 발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탁자에 쌓여 있는 수십 장의 서류더미가 보였고, 그 너머로 프루닐 교수의 얼굴이 보였다.
 “1세대 룬어 폭발 사건의 그 녀석이군. 여기는 어째서 찾아온 거지?”
 그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일로 그를 찾았다면 바로 내쫓아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발트에게 마나 서클을 생성시켜준 것은 그의 기억이 없는 듯했다. 그에겐 그것이 평범한 일상이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가 발트를 귀찮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발트가 1세대 룬어의 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유명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가 살아남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는 소문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발트를 추궁한 장로 마법사, 바르가스가 진실 탐지 마법을 시전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발트가 나름 심각하게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방에서의 대화를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습니까?”
 “뭐라고?”
 “······.”
 “쯧, 별 볼 일 없는 용건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프루닐 교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은 수정구를 매만졌다. 그러자 발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한순간에 마나가 확 하고 방을 뒤덮었다.
 “빨리 말해라. 무슨 일이냐?”
 “그때의 실험에서 1세대 룬어 한 개를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뭐, 라고?”
 발트의 침묵에서 그것이 진심임을 깨달은 프루닐 교수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사, 사실이냐? 아니, 그럴 리가. 바르가스 원로님은 분명······.”
 프루닐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바르가스 원로 마법사의 이름을 꺼냈다.
 발트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때의 심문에서 바르가스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것도 발트가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가정 중 하나였다.
 발트는 질문에 맞춰 미리 생각해두었던 답을 꺼냈다.
 “그때의 실험에서 1세대 룬어 중 하나의 해석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두 개째의 실험에 돌입했다가······ 마나 붐이 일어났지요. 당시에는 저도 실험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험 당시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어제, 마치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는 것처럼 실험 내용이 기억났습니다.”
 발트의 말이 끝나자, 프루닐 교수의 표정이 서서히 심각해졌다.
 하지만 당장 발트에게 무언가 손을 쓰지는 않았다.
 발트가 굳이 자신을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꺼낸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발트가 다시 그를 향해 말했다.
 “물론 제가 해석해낸 그것은 온전히 교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프루닐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이건 고작 수습 마법사인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건 뭐지?”
 프루닐 교수는 발트가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발트가 숨기는 것이 마나를 볼 수 있다는 능력인 것은 몰랐다.
 그저 심문 당시에 일부러 진실 탐지 마법을 회피했다고 여겼다.
 그리고 거래 상대를 물색하다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겠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발트가 원하는 것이 그리 크지 않다면 말이다.
 발트가 프루닐 교수의 속내를 짐작했다는 것처럼 입을 다시 열었다.
 “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절 괴롭히는 자가 게르토 백작가의 차남이니 그를 어찌해달라는 것도 부담되는 일이겠지요.”
 하르센의 아버지인 게르토 백작은 그저 왕국 내의 평범한 백작 중의 한 명이 아니었다.
 왕국 오대 상단 중 한 곳인 게르토 상단을 이끄는 자였다.
 발트의 말에 프루닐 교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1세대 룬어가 거래 대상이라고는 하나, 게르토 백작과 척을 지는 것은 아직 상급 마법사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발트가 먼저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 다른 것이라는 말이었다.
 프루닐 교수가 침묵을 지키며 발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약 발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한다면 강제로 빼앗는 방법은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짐작한 것인지 발트가 너무나도 손쉬운 요구를 해왔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제가 용병계로 팔려갈 때, 그나마 용병으로서 살아가는데 희망이 있을 만한 곳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투의 최전선이 아니라요. 딱 그것만 바라겠습니다.”
 “······고작?”
 “예!”
 프루닐 교수는 발트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봤다.
 하지만 발트는 교수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똑바로 바라봤다.
 “후, 알겠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럼······.”
 “대신, 내게 준다고 한 그 1세대 룬어는 확실해야 해. 그리고 소유권을 내게 온전히 넘기겠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어야 하고. 만약 나와의 거래를 마친 뒤, 다른 상급 마법사에게 또 다른 거래를 했다거나 하면 그때는······.”
 프루닐 교수가 말끝을 흐리며 발트를 압박했다.
 발트는 프루닐 교수의 눈빛에서 보이는 기세에 피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좋아. 믿어보지. 이리 와서 그 룬어를 말해보도록 해.”
 그렇게 말하며 프루닐 교수는 자신의 책장 한구석에서 1세대 룬어 책을 꺼내들었다. 직접 실험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 역시 1세대 룬어에 대한 욕심만은 확실히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다가온 발트가 책의 한 부분을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고, 그 설명을 들은 프루닐 교수는 자신의 수식을 머릿속으로 조금씩 교체해나갔다.
 그렇게 발트와 프루닐 교수의 대화가 모두 끝나자, 발트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앞에 섰다.
 그러자 프루닐 교수가 그의 방에서 나가려는 발트를 불러 세웠다.
 “발트, 잠깐.”
 “예?”
 “왕국어를 읽을 줄은 알겠지?”
 “그렇습니다.”
 “이걸 받도록. 네가 가게 될 곳이야.”
 프루닐 교수가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소책자를 던져주자 발트가 그걸 잡아들었다.
 책장 제일 앞에는 ‘라온 시의 용병 아카데미’라고 적혀 있었다.
 “상급 마법사 회의에서 말을 꺼내봐야겠지만 문제는 없을 거야. 그리고 이제 이 룬어에 대한 소유권은 내 것이 되겠지만, 이걸 자네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까지는 참도록 하지. 그리고 마탑을 나갈 때, 한동안 쓸 수 있는 돈도 내 사비로 지원해주도록 하겠어. 그럼 나가보게.”
 “······감사합니다.”
 발트는 프루닐 교수의 얼굴에서 피어오른 미소를 보며, 이 거래가 성공적이었다고 느꼈다. 이렇게 서로 웃으며 헤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트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
 
 라온 용병 도시의 용병 아카데미는 아무런 뒷배도 없는 수습 마법사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발트와 같은 전례가 없는 건 아니었다.
 교수에게 무언가 거래를 청하고, 용병으로서 조금 더 나은 자리를 구하고자 한 케이스가 발트가 처음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발트는 프루닐 교수가 던져주었던 책자를 펼쳤다.
 표지의 내용처럼 책 안에는 라온 용병 도시에서 전문 용병을 육성하는 용병 아카데미의 홍보와 각종 정보가 적혀 있었다.
 발트는 책상에 앉은 채로 그것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 7장 창공의 마탑 밖으로
 
 창공의 마탑 7층, 그곳에는 외부로 파견가지 않은 상급 마법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번 년도에 하급 마법사로 오르지 못한 수습 마법사들을 용병단에 배속시키는 회의를 하기 위함이다.
 “이번에 하급 마법사에 오르지 못할 수습 마법사들을 데려갈 용병단은 붉은 창 용병대, 푸른 이리 용병대, 그리고 파겔 협곡 원정대네.”
 “파겔 협곡 원정대라··· 왕국에서 진행하는 일인가?”
 “그렇겠지. 아마 다소의 희생자가 날 수도 있는 일이고.”
 “안타깝군.”
 상급 마법사들은 안타깝다고 말하는 입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수습 마법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앞선 용병대 두 곳으로 배정되는 이들은 그나마 용병 일을 배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터였고, 마지막의 원정대에 배정되는 이들은 목숨을 건 혈투에서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그 삼 분의 일의 확률 속에서 각 용병대의 이름 옆에 수습 마법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입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잠깐 기다리게. 조겔.”
 “음? 무슨 일인가, 프루닐.”
 “발트라는 수습 마법사에게 내가 빚을 하나 졌네. 그래서 그를 라온 시의 아카데미로 배정하고 싶네. 거기에 들어가는 돈은 내가 부담하도록 하지.”
 “발트······?”
 조겔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그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름에 경악의 외침을 내뱉은 것은 조겔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이었다.
 “설마 그 발트인가?”
 “그럴 리가!”
 “바르가스 님의 진실 탐지 마법은 우리도 정면에서는 피해갈 수 없을 정도야! 그런데 어떻게 그딴 애송이가······!”
 주변의 고함 소리에 조겔도 발트라는 이름이 어째서 익숙한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눈빛에 경악을 담아 프루닐을 쳐다보자, 프루닐이 그 경악을 자연스럽게 즐기며 입을 열었다.
 “본인 말로는 기억을 잃었었다더군.”
 “흐음, 기억을······.”
 “자, 자!”
 프루닐이 손뼉을 치며 주변의 시선을 끌어모으고는 다시 말했다.
 “일단 중요한건 발트라는 수습 마법사에게서 얻어낸 1세대 룬어가 내 손에 있다는 거지. 만약 필요한 자가 있다면 내게 적당한 거래를 청하도록 하게. 어쨌든 수습 마법사, 발트는 용병 도시 라온으로 보내고 싶은데 어떤가?”
 “······표결에 부치도록 하지.”
 조겔은 발트가 거래를 청한 자가 자신이 아니라 프루닐이라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드는 방식으로 약식 투표를 개시했다.
 그리고 그 약식 투표는 반대의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발트라는 수습 마법사의 1세대 룬어 실험이 일부나마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 우연히 벌어진 일일 것이다.
 게다가 마나 붐까지 겪은 이상, 발트가 1세대 룬어의 실험에 재능이 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괜히 여기에 어깃장을 놓아서 1세대 룬어를 얻은 프루닐과 척을 지느니, 그와의 우호적인 거래를 통해 그가 얻어낸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나았다.
 “결정 났군. 발트라는 수습 마법사는 라온 시의 훈련대로 배속하도록 하겠네. 그를 거기까지 데려가는데 필요한 비용은 프루닐 자네가 부담하도록 하게.”
 “그렇게 하지.”
 프루닐이 활짝 웃으면서 기꺼이 주머니를 열었다. 그가 오늘 이 회의장에서 얻어낼 것들의 가치를 합쳐도 발트에게 주게 될 가치의 수십 배는 넘었으니까.
 그렇게 수습 마법사들의 배치가 끝나자마자 이어진 것은 프루닐과 다른 마법사들 사이의 활발한 거래였다.
 
 ***
 
 며칠 뒤.
 “으으······.”
 발트는 자신의 가슴어림이 뻑뻑해진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단순한 통증과는 거리가 먼 기묘한 느낌에 발트는 마나를 일주천하며 상태를 살폈다.
 ‘응? 설마······.’
 설마싶은 심정에 자신의 마나 서클을 점검한 발트는 그 설마가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그의 마나 서클은 2서클의 경지를 벗어나 3서클에 진입하고 있었다.
 1세대 룬어의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겪었던 마나 붐의 영향 때문인지.
 발트는 자신의 마나 서클이 늘어나는 속도가 정상의 범주를 뛰어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래라면 마탑에 들어오며 상급 마법사의 도움으로 1서클의 마나 서클을 생성한 뒤로 2년은 지나야 2서클로 성장하게 되고, 하급 마법사의 칭호를 딴 뒤 또다시 몇 년은 수련에 매진해야 3서클이라는 숙련 마법사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제 막 창공의 마탑 3년차에 접어들고 있는 그가 벌써 3서클로 성장했다.
 이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사실이 밖으로 널리 알려지면 연구를 하겠답시고 상급 마법사들이 자신을 납치할지도 몰랐다.
 그런 불안감도 잠시, 발트는 3서클에 올랐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서클이 늘어난 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갑작스런 성장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좋은 일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어쩌면 4서클도, 5서클도, 어쩌면 그 이후에도 이 속도가 유지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트의 표정이 더욱 더 환해졌다.
 물론 6서클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마나 서클이 빠르게 성장한다는 사실 하나 만큼은 확실히 좋았다.
 “라온 시··· 철우(鐵牛)단이라······.”
 기쁨도 잠시, 발트는 잠들기 전 읽었던 소책자의 마지막 장을 되새겼다.
 아마 프루닐 교수가 자신과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자신이 들어갈 곳이 바로 철우단이 될 것이다.
 라온 시는 도시 전체가 용병 일을 중심적으로 운영되는 도시였고, 그곳의 주인은 늘 가장 큰 용병단의 주인으로 결정된다고 했다.
 또한 라온 시의 시장은 늘 수도로 올라가 백작위를 받게 된다는 희망적인 이야기와 함께, 그 백작의 자리가 당신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홍보 문구도 적혀 있었다.
 ‘물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만.’
 그런 과도하게 희망적인 문구까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라온 시는 막 용병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노예나 이종족을 용병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라온 시로 몰려드는 이들의 대부분이 우라드 왕국민이었으니, 라온 시의 용병단들도 수습 용병들을 혹독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만약 발트가 철우단에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수습 마법사보다는 여유와 기회가 있는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일단은 수식부터 점검해야지.”
 3서클에 올랐다는 것은 분명 희망적이었지만, 그것은 당장 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는 말과도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발트는 그의 마나 서클을 다시 점검하며, 머릿속으로 그의 서클에 맞춰 마법 수식을 새롭게 짜내기 시작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발트가 열댓 명의 수습 마법사들과 함께 여기저기 찢어질 때가 다가왔다.
 발트가 아침의 마나 호흡법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대충 짐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자, 익숙한 얼굴이 수습 마법사들을 인솔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인솔을 맡은 상급 마법사는 프루닐이었다.
 프루닐이 계단을 내려오는 발트를 발견하자, 발트를 향해 손짓했다. 발트가 그를 향해 다가오자, 슬쩍 작은 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드디어 오늘이 왔구나, 발트. 약속은 지켰다. 이봐! 레이너. 여기 이 수습 마법사가 자네가 철우단의 훈련소로 데려가야 할 청년이네.”
 프루닐의 그 말에 다른 수습 마법사들의 눈길이 발트에게 쏠렸다. 발트는 그 눈빛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무시하며, 프루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프루닐이 자신에게 건네준 주머니는 꽤나 묵직했다.
 발트는 주머니를 품속 깊은 곳에 넣으며 레이너라고 불린 용병을 쳐다봤다.
 그는 대략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꽤나 투박한 인상의 용병이었다.
 하지만 다른 수습 마법사들을 데려가려고 온 용병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허리춤에 찬 한손 도끼와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경장 갑옷, 그리고 등에 메여 있는 짧은 단궁까지.
 평범한 용병의 옷차림에 불과했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랐다.
 발트의 그 미묘한 눈빛을 느낀 레이너가 발트를 향해 말했다.
 “흐으, 꽤 감이 좋군. 맞다. 난 마나 유저야. 프루닐 님이 우리 훈련소로 추천할 만은 하군.”
 “······!”
 발트가 레이너의 말에 깜짝 놀라며 두 눈을 깜박였다.
 마나 유저라는 것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들을 구분하는 경지 중 하나였다.
 자세히 들어가자면 비기너, 유저, 익스퍼트, 마스터 등의 세부적인 단계가 있었지만, 일단 마나라는 것은 용병 생활을 하는 자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나 유저는 비기너를 막 벗어난 이들을 말했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고향에서 귀족 가문의 기사 생활을 하고 있는 발트의 아버지조차 겨우 마나 유저의 단계에 올랐을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다시 말해 눈앞의 용병, 레이너의 힘은 어지간한 기사와도 맞먹는다는 말이었다.
 용병의 마구잡이식 검술과 기사 특유의 체계화된 검술을 생각해보면 단순한 비교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레이너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군. 난 철우단 소속의 은급 용병, 레이너라고 한다.”
 “아, 반갑습니다, 수습 마법사 발트라고 합니다. 현재 2서클에 올라 있습니다. 라온 시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발트가 레이너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그 깍듯한 인사에 레이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8장 첫 번째 전투
 
 하지만 그 깍듯한 인사와는 달리, 발트는 자신이 3서클에 올랐다는 사실을 숨겼다.
 왠지 자신의 서클이 급상승했다는 것을 이곳에서 말하기엔,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프루닐이 거슬렸다.
 갑작스레 자신의 경지가 오른 사실에 대해서 발트 자신조차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프루닐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예의 1세대 룬어 실험에서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용병단으로 파견되는 수습 마법사들이 항상 2서클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레이너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발트라고 했나? 넌 꽤 운이 좋아, 발트. 이번에 내가 오지 않았다면 꽤나 위험한 곳으로 배치되었을 텐데 말이야.”
 “위험한······?”
 레이너는 슬쩍 고개를 오른쪽으로 향했다.
 오른쪽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들을 인솔하러 온 용병들에게 설명을 듣고 있는 수습 마법사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그들의 근처에는 기사로 보이는 이들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반신 갑옷에 우라드 왕국의 문양이 크게 새겨진 것을 보면, 귀족 가문이 아니라 왕실에서 나온 기사들인 것 같았다.
 “자자! 집중하게!”
 수습 마법사들과 용병들 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프루닐이 손뼉을 치며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모두 서로의 소개가 끝났으면 이만 떠나도록 하게. 수습 마법사들은 그동안 고생했네. 마탑에 들어오며 작성했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자네들의 5년은 해당 용병단에 귀속되어 있네. 마탑의 추적을 받고 싶지 않다면 5년 동안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용병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만약 계약을 어긴다면, 자네들뿐만 아니라 자네들의 가족까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말이네.”
 “······.”
 “네!”
 대답을 하는 이는 발트를 포함해서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침묵을 지킨 수습 마법사들은 갑작스레 닥쳐온 현실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설명을 들은 내용인데도 말이다.
 반면 처음부터 용병을 지망한 듯 밝은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고, 발트처럼 각오를 완전히 다진 듯 담담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오른쪽에 있던 이들은 여전히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말이다.
 프루닐은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냉정하게 등을 돌려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레이너는 다른 수습 마법사들을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열심히 그들을 설득하는 다른 용병들을 지켜보다가 발트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슬슬 출발하도록 하지. 발트 넌 따로 설득이 필요하진 않겠지?”
 “······예. 가죠.”
 발트라고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은 떠날 때였다.
 마음을 다시 다잡은 발트는 정든 마탑에서 발걸음을 떼며, 레이너와 함께 용병들의 도시, 라온 시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
 
 창공의 마탑이 있는 바그쉬트 후작령에서 라온 시까지는 몇 개의 영지를 지나야 했다.
 그렇다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이용비는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걸어서 가려고 한다면 몇 달은 계속 걷기만 해야겠지만, 그래도 레이너는 말 정도는 타고 다닐 능력이 있었다. 레이너가 마탑 입구 근처에 매어둔 말 두 마리를 끌고 오며 물었다.
 “말은 탈 줄 아나?”
 “예.”
 “······다행이군.”
 레이너는 발트가 말을 탈 수 있다는 사실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가르칠 시간을 덜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말이라는 것은 농사를 짓는 평민들이 어릴 때부터 탈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고, 마법사가 흔히 탈 수 있는 녀석 역시 아니었다.
 뭐, 자세한 신상 명세에 대한 것은 라온 시까지 가는 길에 물어보면 될 일이다.
 성문을 빠져나온 레이너는 발트에게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고, 발트 역시 말의 등에 올라 그의 뒤를 따랐다.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에는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타면서 대화를 나누다간 자칫 혀를 깨물 수도 있는 일이니까.
 대로를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중천에 떠올라 있던 해가 조금씩 기울어지고, 발트의 엉덩이가 저려올 쯤, 레이너가 먼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워워.”
 “무슨 일입니까?”
 발트가 레이너에게 묻자 레이너가 답했다.
 “슬슬 야영할 장소를 찾아야지. 발트 너도 슬슬 엉덩이가 힘들지 않나?”
 “어······.”
 “그 정돈 보여. 내 경력이 얼만데.”
 발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나름 오기를 부리며 올라오는 통증을 참아 보려곤 했지만, 발트는 고작 열다섯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은급 용병을 상대로 표정을 숨기긴 어려운 노릇이었다.
 레이너는 안장에 달려 있는 가방에서 작은 지도를 꺼내들었다.
 지도라고는 해도 선이 대충 죽죽 그어진 어설픈 물건이었지만, 한낱 용병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지도라는 건 그 정도에 불과했다.
 지도까지 살펴가며 주변의 지형을 살피는 레이너의 모습은 단순히 야영지를 찾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트는 아무런 딴지도 걸지 않았다.
 발트는 당장 용병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으니 말이다.
 “이봐, 발트.”
 “······.”
 “발트!”
 “아, 예!”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긴 네가 있던 안전한 마탑이 아니라고. 긴장해.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아, 알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따라와. 가다 보면 쓸 만한 공터 하나쯤은 나오겠지.”
 레이너는 빠른 걸음 수준으로 말을 천천히 몰아갔고, 그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쓸만한 공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쪽 방향이 빽빽하게 자란 나무로 막혀 있는 평범한 공터였다.
 “이쯤에 짐을 풀지. 아, 완전히 풀지는 말고, 잠깐 쉰다는 생각 정도만 해.”
 “······?”
 발트는 의문을 가졌지만,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고 마탑에서 챙겨온 짐에서 모포를 꺼내 땅에 깔았다.
 잠깐 앉아 있을 생각이라면 그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레이너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탁탁 하는 부싯돌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고, 그것은 이내 지푸라기로,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옮겨가며 쓸 만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발트가 레이너에게 물었다.
 “제가 들어갈 용병단의 이름이 철우단이라고 했나요?”
 “그래, 특이한 이름이지?”
 “뭐······.”
 “철우단을 만든 첫 용병대장이 동방 대륙 출신이라서 그렇게 지었다더군. 철로 만들어진 소······ 라는 의미였던가.”
 “소라니······.”
 “큭큭. 용병단이 소와 어울리지는 않지.”
 그렇게 발트와 레이너가 잡담을 나누며 친분을 쌓아가던 그때, 무언가를 느낀 레이너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슬슬 긴장해.”
 “네?”
 “몬스터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 말야.”
 레이너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발트의 표정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뭔가를 잡으려고 여기에 야영지를 차린 건가요?”
 “뭐, 겸사겸사.”
 “······.”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그냥 가는 길에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의뢰를 받은 거뿐이야. 널 무사히 라온 시까지 데려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의뢰니까.”
 “중요하다는 건······.”
 “이거지. 이거.”
 레이너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발트에게 보여줬다. 용병인 이상, 돈에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수습 마법사들을 데려가는 게 용병에게 의뢰라는 형식으로 주어진다는 건 처음 들어본 말이다.
 발트가 그것을 묻자, 레이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의뢰주의 이름이 프루닐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뭐 보나마나 네가 뭔가 대가를 치르고, 그 대가로 우리 훈련소에 들어가기로 한 거겠지만······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짓는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교수님이······.”
 바스락. 바스락.
 “쉿.”
 바스락거리는 걸음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방해했다.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발걸음, 하지만 대형 몬스터의 그것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발트가 목소리를 낮게 낮춰 레이너에게 물었다.
 “몬스터인가요?”
 “그래, 오크 도적 4마리가 이 주변 대로를 돌아다닌다더군. 간단한 일이야.”
 <취익! 취이이익!>
 오크 특유의 콧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빛을 보고 다가오던 오크들이 레이너와 발트의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오크는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도 있는 돼지 머리가 달린 몬스터다.
 하지만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건장한 그 체구를 본다면, 단순히 돼지 머리가 달렸다고 해서 그들을 우습게 여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놈들은 농민들 십수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힘으로 뿌리칠 수 있는 ‘몬스터’였으니까.
 <취익! 취이익!>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오크의 입에 길게 자라난 송곳니 때문에 나는 저 콧소리는 놈들이 흥분하거나 격양되었을 때 나는 소리다.
 즉, 전투를 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말이었다.
 
 # 9장 둘 받고 하나 더
 
 전투에 앞서, 발트는 조심스럽게 마나를 보는 능력을 해방했다.
 그러자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세 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인다.
 하지만 레이너는 오크 도적이 네 마리라고 했다. 게다가 수풀 너머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만 봐도 놈들이 네 마리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마나를 보는 눈으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세 마리라는 사실에 마법사로서의 의문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발트는 고개를 저었다.
 의문은 나중, 일단은 전투를 시작할 때였다.
 레이너가 등에 차고 있던 단궁을 꺼내들며 말했다.
 “선공은 맡기지. 가능하겠지? 방향은 저쪽. 눈동자를 표적으로 삼도록 해.”
 “예.”
 발트는 레이너의 손가락 방향에 따라 머리 속으로 룬어를 배열하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 그리고 날카로운 화살. 내가 바라는 것은 적을 꿰뚫는 타오르는 화살.”
 머리 속으로는 룬어, 그리고 입으로는 주문의 영창을 알맞게 배치하며, 그 틈으로 마나를 끌어올린다.
 발트의 손에서 마나가 배열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내 붉게,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가라,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발트의 손가락을 따라 두 발의 파이어 애로우가 곧게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레이너 역시 단궁을 발사했다.
 슉!
 파악! 파아악!
 발트의 손짓에 따라 날아간 파이어 애로우와 레이너의 화살이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아까와는 다른 톤의 콧김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퀴익! 퀴이이이익!>
 그리고 무언가가 다급하게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해가 채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수풀 너머로 보이는 세 쌍의 붉은 눈동자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수풀 너머로 보이는 눈이 한 쌍 줄어든 것과 오크들이 저렇게나 흥분한 것을 생각해보면, 발트의 마법 덕분에 한 마리가 크게 다치기라도 한 모양이다.
 “좋아, 이제 내 차례군.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레이너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한손 도끼를 빼들고는 저쪽 방향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발트는 쉬지 않고 다시 주문을 외운다. 전투에 다시 참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안전을 챙겨서 나쁜 일은 없을 것이다.
 “······공격을 막는 방패, 실드(Shield).”
 주문의 영창을 모두 끝내고 시동어를 외치자, 발트의 전방으로 작은 방패가 떠오른다. 그렇게 단단하다고 하긴 힘들었지만, 갑자기 날아들 수 있는 공격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레이너가 사라진 수풀 너머로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오크의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발트는 그저 잔뜩 긴장한 채로, 실드 마법을 유지할 뿐이었다.
 5분이나 지났을까?
 시끄럽던 전투의 소리가 잦아들자, 적막이 발트가 있는 공터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부스럭, 부스럭.
 갑자기 들린 인기척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발트가 긴장했지만, 다행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이너였다.
 “휴우.”
 발트가 숨을 돌리며 실드 마법을 유지하고 있던 마나를 회수했다. 그러자 발트의 앞을 가리고 있던 실드 마법이 빠르게 그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발트가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는 생각에 레이너의 눈에서 이채가 맴돌았다.
 하지만 레이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닥에 도끼의 등을 탁탁 치며 오크의 피를 털어내더니, 침낭 옆에 준비해둔 천으로 그의 도끼를 닦아낸다.
 오크를 처리하면서 묻은 피와 기름을 닦아내는 것이다.
 그 처리가 늦으면 기름때로 인해 날에 녹이 슬어버리거나, 날붙이 특유의 예기가 줄어들 수 있으니 귀찮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처리가 모두 끝나자 레이너는 모닥불에 있던 장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잘했어. 그리고 따라와.”
 “예.”
 발트는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오크를 처리했다면 그 다음으로 할 일은 뻔했으니까.
 그들이 오크들의 시체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비릿한 피 내음이 코를 찔렀다. 발 아래로 땅에 누워 있는 네 마리의 오크 시체가 보였다.
 머리가 까맣게 타버린 녀석이 한 마리, 파이어 애로우를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모양이다.
 그 아래로 질질 끌린 자국이 남은 것을 보니, 레이너가 저쪽에 있던 녀석의 시체를 끌고온 것 같았다.
 하긴, 작업을 시작하려면 한 곳에 모으는 게 편하긴 했다.
 레이너는 들고 있던 횃불을 발트에게 건네주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집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더니 오크의 심장어림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네 마리 모두에게 같은 행동을 한 레이너가 피로 물든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후우, 네 마리 중 두 마리라. 수확이 좋은데?”
 오크 가죽도 해체한다면 충분히 팔 수 있었지만, 지금은 레이너와 발트 둘 뿐이니 그걸 옮기기가 힘들었다.
 갈 길도 멀었고.
 그러니 당장 오크의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몬스터의 몸에서 가끔씩 나온다는 마석이었다.
 땅 속 깊은 곳에서나 채취할 수 있다는 마나석에 비해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석은 일회용 아티팩트나 수습 마법사의 실험에 마나석을 대신해서 흔히 사용되는 녀석이었다.
 마나석에 비해서 효율은 확실하게 떨어졌지만 말이다.
 물론 기사단장급 기사만이 상대할 수 있다는 최상급 몬스터의 몸에서 나오는 마석은 어지간한 마나석보다 효율이 좋다고 알려져 있긴 했지만, 발트는 지금까지 그런 마석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레이너가 오크의 몸에서 마석을 파내서 들고 오자, 발트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그 알 수 없는 마나의 기척이 오크의 몸에서 마석으로 옮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마석은 두 개, 그가 느낀 기척은 세 개였다.
 발트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금세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첫 번째 공격에 머리가 까맣게 타버린 오크의 오른쪽 허벅지쯤에서 레이너의 손에 들린 마석과 똑같은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발트는 마탑의 수업에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마석의 위치는 랜덤성이 있고, 용병들이 사냥을 나갔을 때 심장 부근만을 파내는 것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마석을 파내려고 시체 여기저기를 파는 것이 여러모로 낭비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마석이 있을 확률이 높은 심장쯤만을 파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내 능력이 단순히 1세대 룬어의 해석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쓸데가 많다는 말이다.’
 발트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의 마나를 보는 능력이라면 시체 여기저기를 파낼 필요 없이 정확하게 마석이 있는 위치만을 알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단순히 심장에 마석이 있고 없고를 빠르게 판단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장 외의 위치에 있는 마석을 챙길 수도 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자금을 모으는데 큰 역할을 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환호성을 참아낸 발트는 머리가 까맣게 타버린 오크를 내려다보며 아쉬움이 들었다. 아쉽지만 당장 저 오크의 다리에 있는 마석을 채취할 수는 없었다.
 마나를 보는 능력은 본인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능력이었고, 레이너를 동료로서 신뢰하기에는 아직 많은 것이 모자랐다.
 발트는 흥분으로 얼굴이 상기되는 것까진 숨기지 못했지만, 레이너는 그것을 전투의 흥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넘겼다.
 “혹시 이걸 정화할 수는 있나?”
 “예, 2서클의 기초 마법이니까요.”
 아무래도 몬스터에게서 막 채취한 마석은 몬스터의 피로 오염되어 있기 마련이다.
 레이너가 건네는 마석을 받아든 발트는 마탑에서 배웠던 대로 룬어를 배열하고, 주문의 영창을 시작했다.
 그러자 발트의 손끝에서 시작된 마나의 흐름이 마석을 타고 올라가며, 이내 검은색의 마나가 마석에서 공기 중으로 나와 흩어졌다.
 발트의 정화가 모두 끝나자 레이너의 표정이 밝아진다. 정화를 거친 마석과 그러지 못한 마석의 가격 차이는 세 배가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레이너가 밝아진 표정으로 발트를 향해 말했다.
 “고맙군, 발트. 감사의 대가로 다음에 들리는 마을에서 맥주 한 잔 정도는 사지. 그걸로 괜찮지?”
 “어, 전 아직 나이가······.”
 “응? 괜찮아, 괜찮아. 용병으로 살 거면 술 정도는 배워야지. 하하!”
 레이너가 호탕하게 웃으며 발트의 등을 두드린다.
 아까의 야영지로 돌아오자 모닥불은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크의 시체를 처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해가 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야영지를 옮기지. 따라와.”
 오크 시체에서 나오는 피 냄새는 늑대나 들개 같은 야생 동물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건 야영에 좋지 못했다. 자칫하면 자다가 동물의 습격을 걱정해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레이너는 그대로 짐을 챙겨 다시 말에 올랐고, 발트 역시 모포를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 10장 라온 시에 도착하다
 
 레이너는 적당한 공터가 나오자 곧바로 말에서 내려 야영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야영지라고는 해도 작은 모닥불과 침낭 설치 정도였지만.
 발트가 주변 수풀을 정리하고 돌아오자, 레이너가 배낭에서 작은 돌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건······.”
 “일회용 아티팩트, 알람석이야. 뭔지는 알지?”
 “예, 자주 만들어 봤으니까요.”
 수습 마법사에게 가장 많이 시키는 훈련 중 하나는 1서클 마법인 알람 마법이 들어간 일회용 아티팩트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회용 아티팩트가 모험가나 용병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물건이라고 듣긴 했지만, 직접 사용하는걸 보는건 처음이었다.
 “그럼 불침번은······.”
 “이녀석에게 맡기도록 하지. 오늘 밤은 푹 쉬라고.”
 “······예, 감사합니다.”
 처음 겪은 전투에 지쳐 있는 발트를 배려하기라도 하는지, 레이너가 발트를 향해 씩 웃어 보이더니 주변 땅바닥에 알람석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모닥불을 마주보고 앉은 레이너가 발트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잘했어.”
 “예?”
 뜬금없는 그 말에 발트가 영문을 몰라 하자, 레이너가 말을 잇는다.
 “나도 수습 마법사를 여러 번 데려가 봤거든. 물론 너처럼 라온 시에 데려가는 경우는 처음이지만. 어지간한 녀석들은 몬스터의 눈빛만 보고는 얼어서 마법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더라고.”
 “······.”
 발트는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용병단으로 불려간 수습 마법사들은 평민으로 살다가 마나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마탑에 불려간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처음 느끼는 그 살기에 몸이 굳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발트 넌 혹시 몬스터와 싸워본 적이 있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 많아요. 게다가 가끔 훈련에 참여도 시키셨구요.”
 발트가 고향에 있을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뭐하는 분이길래?”
 “고향에서 기사로 자작님을 모시고 있죠.”
 “호오······ 특이하군.”
 레이너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그 말에 발트는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레이너가 특이한건 아니다. 발트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말하면 돌아오는 평범한 반응이었으니까.
 하다못해 병사로 입대한다면 기사인 아버지의 밑에서 적당히 요령을 부리며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마법사가 되겠다고 마탑까지 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 형에 비해서 검술에 재능이 없었으니까요.”
 변명처럼 그 말을 내뱉자 그제야 레이너의 얼굴에 납득의 기색이 서린다.
 어지간히 여유가 있는 기사가 아니고서야 모든 아들을 기사로 키우는 것은 부담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기사라는 삶이 그렇게까지 부유한 것은 아니었고, 한 명의 남자 아이를 기사로 키우는 데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니 말이다.
 그나마 마법사는 나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재능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옛날 일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둘은 그렇게 침낭에 누운 채로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발트는 어느새 자신의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
 
 짹.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발트의 귀를 어지럽혔다. 서서히 발트의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발트는 눈을 간지럽히는 태양빛을 느끼며 인기척을 냈다.
 “으음······.”
 “일어났나?”
 “아, 예!”
 옆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발트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역시 용병이라고 해야 할까. 레이너는 어느새 짐을 모두 챙겨 말 안장에 올려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뿌려둔 알람석도 모두 가방으로 회수한 채였다.
 “잠깐 옆에서 몸 좀 풀고 있을 테니 이거라도 먹고 있어. 다 먹으면 곧바로 출발할 테니까.”
 레이너가 그렇게 말하며 발트에게 육포 꾸러미를 던져주었다.
 한손 도끼를 챙긴 채,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레이너를 보며, 발트는 주머니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꽤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 육포였지만, 침으로 살살 녹여먹으니 그런대로 씹을 만은 했다.
 정말 값싼 저급의 육포는 누린내 때문에 도저히 생으로는 못 먹을 수준이라고 들었는데, 레이너가 들고 다니는 육포는 그 정도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발트가 간단히 식사를 마치자, 어떻게 안 것인지 곧바로 레이너가 인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그럼 출발하자고!”
 “예!”
 떠날 준비를 마친 그들은 말에 오른 채로 발길을 서둘렀다. 다음번 잠은 노숙이 아니라 여관에서 자고 싶었다.
 
 ***
 
 다그닥다그닥. 다그닥다그닥.
 말이 땅을 박차고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앞서서 말을 달리던 레이너가 한쪽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뒤따르던 발트가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워, 워워.”
 발트가 속도를 줄이자, 마찬가지로 속도를 줄인 레이너가 저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발트! 저기 보이나! 저기가 라온 시다!”
 “아······.”
 발트는 용병들의 도시라고 해서 난잡한 무언가를 생각했는데,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라온 시는 생각 이상으로 잘 짜인 요새 도시였다.
 거대한 도개교와 해자, 그리고 석재로 만들어진 높은 성벽까지.
 그들이 창공의 마탑을 떠난 뒤로 지금까지 지나쳐온 몇몇 마을이나 남작령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더 달려서 성문 앞에 늘어진 긴 줄까지 도달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용병들만이 아니라 상인, 모험가, 의뢰주로 보이는 하급 귀족들 등 아주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다른 이들과 훨씬 짧은 줄에서 빨리 빨리 들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용병들의 줄 뒤쪽에 선 레이너가 발트를 향해 말했다.
 “이제야 도착이군. 이제 라온 시에 들어가면 발트 너는 말이야······.”
 아마 성 안에 들어갈 때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심심함을 때우기 위해서인지, 레이너는 발트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어떤 훈련을 겪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며, 행렬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레이너의 조언을 들으며 그를 따라가던 발트의 눈에 호승줄에 묶여서 끌려가는 수십의 사내들이 보였다.
 “저들은 뭡니까?”
 “음? 아! 아마 범죄자들일 거다.”
 “범죄자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겁니까?”
 “아니, 다른 영지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라고 해야 할까?”
 발트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알아챈 레이너가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가끔씩 착각을 저지르는 자유농민이나 농노들이 있지. 어떻게든 여기까지 와서 용병패를 발급받으면 과거의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들 말이야.”
 “그들을 어떻게 찾는 겁니까?”
 “우리가 찾는 게 아냐. 다른 영지에서 출발한 현상금 사냥꾼들이지. 우리 라온 시의 영주는 용병이지만, 귀족이기도 하다. 다른 영주의 명분 있는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지.”
 “흠······.”
 “뭐, 가끔은 용병들에게도 협조 요청이 오기도 한다. 그 보상금을 노리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용병들도 있고 말이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말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발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마나를 보는 능력을 사용하는데 있어, 조금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이! 레이너! 돌아왔나?”
 그때, 성벽 위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큰 목소리가 들렸다.
 둘의 시선이 성벽 위로 향했고, 레이너가 말했다.
 “아, 젠장. 코르조 녀석이군.”
 “코르조?”
 “신경 꺼도 된다.”
 하지만 신경 끄라는 레이너의 말과 달리 코르조라고 불린 사내는 순식간에 성벽에서 내려와, 레이너와 발트를 향해 다가왔다.
 “쯧.”
 “이야, 레이너, 네가 가 있는 동안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몬스터나 잡고 돌아다니지 그랬냐.”
 “혼자 뭔 재미로?”
 “하아······.”
 코르조가 발트를 슬쩍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게 이번 아카데미에 들어갈 부들나무인가?”
 “그래.”
 발트가 그 생소한 호칭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들나무는 어린애가 꺾어도 손쉽게 구부러지거나 부러지는 녀석이었다. 결코 좋은 호칭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슨······.”
 그러자 코르조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아, 이런, 미안하네, 마법사. 철우단의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신입생들은 전부 부들나무로 부르는 게 우리 관행이라 말이지. 대부분은 그냥 밭일을 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용병이 되려고 하는 체격 좋은 바보들뿐이라서.”
 “······.”
 “자네같은 케이스가 특이한 거야. 마법사가 굳이 우리 용병 아카데미의 빡센 훈련을 통과할 이유가 없거든. 아, 물론 나름 이유는 있겠지만 말이야. 나로선 왜 굳이 용병을 하려는지 모르겠어.”
 코르조의 부연 설명을 들은 발트는 또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코르조가 몰랐다고는 해도 자신이라고 용병이 하고 싶어서 여기 왔겠나. 그래도 결국에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코르조를 싫어한다고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코르조의 목에 걸려 있는 은색 용병패를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트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레이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는 라온 시의 용병 등급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라온 시의 용병 등급은 백석, 흑석, 황동, 강철, 은, 금, 미스릴의 단계로 나뉘어졌다.
 미스릴이라는 용병 등급이 오로지 라온 시에서 인정한 7인의 용병 단장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은급 용병이라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다.
 아마 코르조라는 저자도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인물일 것이다.
 사과도 잠시, 이내 코르조는 다시 발트를 무시한 채로 레이너와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
 코르조가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지만, 발트는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라온 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척안의 마도사』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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