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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골렘 1권 (1)

2017.08.16 조회 2,856 추천 16


 * 프롤로그
 
 
 
 크고 강해지고 싶었다.
 내가 작고 약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돈, 권력, 힘, 모두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절대복종하는 강력한 존재를 만들어 냈다. 내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으로.
 그리하니 마치 나 자체가 크고 강력하단 것처럼, 사람들은 날 존중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싫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나에게 절대복종하는 존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한 군대를 양성하리라 결심했다.
 언젠가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착하게 살고 싶다. 날 괴롭히거나 이용한 인간들이 역겨워서라도.
 사람들을 돕고 싶다. 누군가를 돕고 품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크고 강함을 의미하니까.
 누누이 봐 왔고 빈번히 겪어 왔다. 사람을 살리는 칼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칼도 있단 걸. 다수를 억압하는 거물과 다수에게 존경받는 거물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되레 내가 동정을 받는 입장이라면 어찌 누군가를 도우랴.
 하지만 이젠 달라질 것이다. 모든 여건을 뛰어넘을 것이다.
 내가 혁신을 이끌어 낼 것이다!
 
 
 
 * 1회용 천재
 
 
 
 끼릭, 끼릭.
 어두운 원룸 안, 빛바랜 자주색 후드를 뒤집어쓴 마른 체구의 청년이 뚫어져라 모니터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는 24세 살 이유식이었다. 고등학교 중퇴에 다리가 성치 않아 군대도 다녀오지 못한 남자였다. 어릴 적 그나마 같이 살던 부친도 경제 사정 때문에 그를 고아원에 버렸었다.
 ‘짜증 나는 삶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지.’
 그때부터 유식의 본격적인 고난은 시작됐다. 유식을 버린 그의 아버지는 매정하긴 했으나 적어도 가만히 있는 유식을 괴롭히진 않았다. 그냥 끼니를 챙겨 주지 않고 무관심한 것 정도였다.
 하지만 고아원의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 유식을 악랄히 괴롭혔다.
 ‘젠장,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치네. 어린애들이 어떻게 그리 잔인했을까.’
 유식이 몸도 삐쩍 마르고 약했을 뿐 아니라 성격도 유들유들하니 딱 괴롭히기 좋았던 것이다.
 ‘아, 어떻게 좋은 감정이나 기억이 하나도 없어.’
 유식은 씁쓸히 한숨을 내뱉었다. 어린아이들이 구상해 낸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온갖 괴롭힘이 아직도 생생한 상처로 유식의 마음과 뇌리에 남아 있었다. 때문에 유식은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아니, 분명 좋은 사람이 있단 건 알지만 혹시 나쁜 사람일까 봐 어느 정도 이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인가. 점점 더 꼬여만 갔지.’
 하지만 그런 내성적이고 소외된 성격으로 학교에서 오래 살아남을 리 만무했다. 덩치라도 좋거나 숨겨 놓은 성질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약골 유식은 학교에서도 내내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다리가 멀쩡했음에도 그 흔하다는 점심시간 농구 한 경기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내가 결정을 잘못 내린 건가? 하지만 아직도 후회는 안 된다, 이상하게. 단지 그 자식들이 미치도록 밉긴 하다. 왜 하필 나야?’
 그러다 유식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처음으로 용감한 결단을 내렸다. 자신을 괴롭히는 불량한 패거리에게 맞서기로 한 것이다. 없던 용기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생 내내 쌓여 왔던 상처와 울분이 끝내 발악이라도 해 보자는 싹을 틔운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지.’
 용감히 쇠 파이프까지 든 유식은, 그러나 머릿수와 힘에 밀려 불량 패거리에게 피 떡이 되도록 맞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괘씸하단 이유로 유식의 다리를 아작 내 버렸다. 다시는 걷지 못하게 말이다.
 ‘참······. 어리다고 잔인하지 않은 게 아냐. 개 같은 놈들. 안 그래도 꼬인 인생, 더더욱 뒤틀려 버린 거지.’
 당시엔 학교 폭력이 그리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지 않았었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유식을 괴롭혔던 무리의 우두머리는 교장의 외아들이었다. 유식은 도움이나 증언을 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외톨이 약골 고아였고 말이다. 뻔한 결과였다.
 억울하게 다리를 다치고도 뒷일 방지 때문에 중퇴생이 된 건 유식이었다. 부모 없는 아이가, 기나긴 입원으로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해 중퇴됐다고 하니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유식은 차마 규정을 따지며 반박할 여유조차 없었다.
 ‘정말 수없이 죽을까 생각했다. 마음이 여려 터져 그렇게도 못했지만······ 그땐 진심으로 세상이 미웠고 내가 싫었다. 왜 이리 약해 빠지고 불행한 걸까! 그래도 이렇게 이놈을 만난 게 다행이지.’
 그런 유식에게도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바로 컴퓨터와 인터넷이었다. 유식은 그러한 매체를 화풀이 수단으로 쓰지 않았다. 악플을 달거나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천성이 착해 자신이 이미 당한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 싫었던 것이다. 일부의 경우 자신의 상처를 누군가에게 되갚아 주고 싶어 하거나 다시 그런 고통을 당하기 싫어 자신이 가해자로 변모하곤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이 보편적인 변화일지 몰랐으나 유식은 평범치 않은 내면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곳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처음으로 마음이 편하더라고. 다 잊고 마구 파고들며 공부하고 실력을 키워 가니, 벅찰 만큼 마음이 놓였지.’
 유식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분야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쪽은 독학으로도 얼마든지 고수의 실력을 갖출 수 있는 분야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잘 찾아보면, 친절히 도움을 주는 실력자들도 꽤 많았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유식은 해커로서도 인정을 받게 됐다. 본래 프로그래밍과 해킹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았다.
 ‘깜짝 놀랐지.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넷상에서 꽤 인정받는 실력자가 돼 있었으니. 세계 최고의 비밀 해커 집단에서도 가입 제안이 오고 말이야. 무서워서 승낙하진 않았지만.’
 그런 유식에게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던 걸까. 아니면 그만큼 간절히 몰두했기에 그랬을까. 유식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다분히 천재성을 띠었다. 그는 거의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를 섭렵하며 반짝이는 재능을 드러냈다.
 ‘단지 그걸 누가 알아봐 주진 않았지. 내가 굳이 드러내지도 않았고. 그저 정부 기관이나 남의 기밀이나 훔쳐보며 그럭저럭 지냈지. 부유한 사람들이 해외에 불법으로 꿍쳐 놓은 신용 계좌도 조금씩 뺏어 먹고. 어차피 신고는 못 할 거거든. 나도 흔적을 철저히 지웠고.’
 그러다 어느 순간 무료함을 느낀 유식은 이대로 재능을 낭비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해서 그는 꽤 쓸 만한 사업용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온갖 정보와 노하우를 수집하고 추려 내 완성한 것이었다.
 당연히 빠른 시간 내에 프로그램을 구매하고자 하는 바이어가 나타났다.
 ‘1억. 정확히 1억에 팔았다. 덕분에 당장 생활도 안정되고 이런 좋은 노트북도 살 수 있었지.’
 유식은 천만 원이 넘는 전문가용 고급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마치 그의 씁쓸한 인생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전부 싸구려투성이인 그의 인생에 유일하게 화려한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동안 너무 편안하고 창창하게 성장했던 탓일까. 또 한 번의 실망이 유식을 엄습했다. 어느 날 유식은 웹서핑을 하며 자신이 비밀 서약을 한 후 완전히 팔았던 프로그램의 관련 기사를 봤다.
 ‘부가가치 100억 이상······. 그리고 꾸준한 주가 폭등. 새로운 플랫폼과 시장 형성. 흐흐흐! 난 왜 이따위일까?’
 당시 프로그래밍 외에 세상살이나 물정을 몰랐던 유식은 자신의 천재적 작품을 너무 헐값에 팔아 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사업을 하기도 두려웠고, 벌레 취급받으며 살던 청년에게 1억은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었으니까.
 “아아아악!”
 유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허탈감에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단순히 한두 번 비명 지르고 화낸다고 해서 지나갈 실망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잊힐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잘하면 인생이 뒤바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식의 무지함으로 인해 마치 대단한 제안을 한다는 듯한 바이어의 꾐에 넘어가 버렸다.
 ‘내가 부자들의 돈을 훔쳐 먹어서 벌을 받은 건가? 그럼 그 전의 인생은? 내가 잘못 없이 겪은 불행은? 이런 개 같은! 아아아악! 경제 공부를 일찍 시작할걸······.’
 가능성을 모를 바이어가 아니었다. 본래부터 1억에 사 적당히 가치를 올릴 심산이었다. 그런 것이 시대가 맞아떨어져 바이어도 예상 못 한 대박이 난 것이었고 말이다.
 ‘후······. 내가 만들었다고 알릴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다른 투자나 의뢰라도 받을 텐데. 그 빌어먹을 계약 조항들! 뭐 이리 사업계는 복잡한 거야?’
 유식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비밀 이메일 계정을 열었다. 오로지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지녀야 최소한의 메일을 주고받는 게 가능한 언더 스팟이었다.
 “음, 2개나 와 있네.”
 스팸 메일은 유식의 이메일 계정에 도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유식에게 온 메일은 태반이 모두 실속 있는 것이었다.
 “보자, 보자.”
 일단 하나는 얼굴도 모르지만 꽤 친한 편인 해커로부터 온 안부 메일이었다. 유식은 나중에 답장하기로 하며 다음 메일을 보았다.
 “음?”
 그런데 그 다음 메일은 꽤나 의아한 것이었다. 암호화 해독을 마친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유식 씨.
 저흰 미국 NASA를 위해 일하는 비공식 에이전트입니다. 저희들은 첩보를 통해 요새 주가를 올리고 있는 HBML 시스템의 시초가 이유식 씨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유식 씨에게 의뢰를 제안하고, 차후 유용하다고 판단될 시 비공식적으로 채용할 의사가 있습니다.
 일단 간단한 조건만 말씀드리자면, 유식 씨의 물리적 여건을 고려해 저희 요원 하나가 유식 씨의 거처로 가 유식 씨와 목표 지점까지 동행해 드릴 겁니다. 의뢰 수고 비용은 한화로 수락 수당 1억, 성공 수당 5억이며, 성공 시 적극적으로 채용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아래의 주소가 유식 씨의 주소 맞지요? 이 전화번호로 전화해 주시면 안전할 겁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뭐야······ NASA라고?”
 유식은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어 보았다. 실력 좋은 해커의 고약한 장난이거나 진짜 거대한 조직에서 의뢰를 해 온 것일 것이었다. 하지만 유식의 메일 계정에 접근할 만한 해커라면 함부로 유식에게 장난을 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랬다간 사이버상의 전투로 인해 득 될 것이 없음을 알기에. 적어도 해커 커뮤니티에서 유식은 쉽게 건드릴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실력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실력자 간의 대결은 대가가 결코 작지 않았다.
 ‘분명 메일에 적힌 내 주소는 정확하다. 거기다 물리적 요건이라니······ 어떻게 내가 몸이 불편한 걸 알았지? 내 오래된 입원 기록이라도 뒤졌나? 보통 장난이라면 이 정도로 심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는다. 게다가 별다른 악성 코드도 숨어 있지 않고······. 흠, 아무리 봐도 이상해.’
 유식은 잘 쓰지도 않는 구식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할 곳이 없어 요금도 아주 최소한만 집어넣은 핸드폰이었다. 유식은 잠시 번호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곳에서 하필 한국인에다가 별 쓸모도 없는 날 왜······? 국제기관인 NASA가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HBML이 대단하다지만 왜 하필 날?’
 의심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분명 유식은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그만한 사람은 결코 유일무이하지 않았다. 하필 유식에게 접촉해 오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설마······ 날 키워 주려는 건가? 하긴 비밀스럽게 쓸 인력은 인적 사항이 백지에 가까울수록 유용하다 했지. 씁쓸하지만······ 내가 없어지면 여기 원룸 주인 외엔 내가 사라진 걸 알아차릴 사람이 없어. 한 명도······.’
 유식은 슬픈 표정으로 뱅그르르 의자를 돌렸다. 그는 의자와 함께 돌며 텅 비고 낡은 원룸을 둘러보았다. 초라했다.
 유식은 자신이 컴퓨터에 관해 실력이 없지 않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간 세상을 싫어하는 마음과 지속된 무기력함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HBML 때 겨우 용기를 낸 것이건만 결과는 다시 무기력함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뒤라 그런지 다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간 심히 궁금해졌다.
 비밀에 둘러싸여 있는 NASA란 곳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 간다면 이 지루하고 비루한 인생이 어떻게 바뀔까. 잃을 게 그다지 많지 않은 유식이었다.
 ‘뭐, 일단은 전화만 해 보는 거니까······.’
 유식은 결정을 내렸다. 언제까지나 그저 그렇게 살 순 없었다.
 언젠간 용기 있게 밖으로 나아가야 했다. 유식은 지금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검고 긴 리무진 한 대가 NASA의 외부, 제7연구소가 위치한 제한구역 52구역의 입구에 천천히 정차했다. 곧 철조망에 붙어 있던 카메라가 고개를 움찔거리며 입구에 정차한 리무진을 살폈다.
 리무진은 텅 빈 황야에서 허전히 울타리와 기기 박스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위성 감시, 무인 드론, 헬리콥터, 저격수 등의 빽빽한 감시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52구역은 합법적으로 위험 ‘가능성’에도 즉각 사살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잠시 후 철조망 입구에 붙어 있던 기기 박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출입을 관리하는 요원의 목소리였다.
 방문 예약 일정이 있습니다. 방문자는 방문 코드 확인 바랍니다.
 리무진의 운전자는 매우 건조하게 전해져 오는 목소리에 급히 방문 코드를 대답했다. 그의 긴장한 모습은 52구역의 삼엄함을 아는 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한국인 이유식 씨를 데려왔습니다. NASA 측에서 초대를 위해 제공한 방문 코드는 A468172NNTK입니다.”
 운전자는 능숙하게 방문자와 방문 코드를 말했다. 방문 코드를 확인한 출입 요원은 즉각적으로 대답을 해 왔다.
 방문 허가되었습니다. 차는 계속 정차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쪽에서 차량을 보낼 것이고 출입은 손님이신 이유식 씨만 가능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운전자는 가만히 앉아 백미러로 뒷자석에 앉은 유식을 흘겨보았다. 마르고 왜소한 동양인이었다. 게다가 다리까지 불편했다.
 그도 52구역과 연관된 요원이었지만 내막은 알지 못했다. 그는 유식과 거리를 두며 한국에서부터 52구역까지 동행한 자였다.
 “곧 사람이 올 겁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전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지요?”
 “예. 개인 물건 가지고 들어가시면 저쪽에서 새로운 브리핑을 해 줄 겁니다.”
 운전자는 뒷좌석에 탄 유식에게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그도 실제 유식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듯했다.
 유식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한국에서 가지고 온 자신의 노트북 가방을 어루만졌다.
 유식은 영어에 능통했기에 쉽사리 운전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프로그램 언어는 대부분 영어가 베이스였기에 유식은 독학을 통해 영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걸까? 개인 노트북을 가져와도 된다는 걸 보면, 또 나한테 의뢰를 한 걸 보면 분명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일인데.’
 유식은 마침내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기에 지금 52구역의 입구에 도달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유식에겐 구체적인 브리핑이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운전과 안내를 맡은 요원은 말을 아꼈고 말이다.
 유식은 인천 공항에 따로 구비된 개인용 제트기를 보고 나서야 상황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갑자기 후회되거나 의뢰를 거절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부담과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유식은 그저 떨며 앞으로의 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 저기 오네요.”
 장전된 머신 건을 지닌 험비 1대가 마침내 리무진 앞으로 다가왔다. 험비에서 기관총을 장비한 두 명의 군인이 내렸다. 다부진 체형에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위압감을 풍겼다.
 “다리가 불편하신 손님입니다. 휠체어 준비하셨습니까?”
 “네. 사전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저희가 손님을 인수해 가겠습니다.”
 군인들은 험비에서 휠체어를 꺼내 리무진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유식을 부축해 그가 휠체어를 통해 험비로 갈 수 있게 도왔다. 험비에 탄 유식은 슬그머니 군인들의 기관총을 훔쳐봤다. 무시무시한 살인 무기였다.
 유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식은 내내 외면하려 했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비밀스러운 장소에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유식은 최대한 조심하자는 생각을 했다.
 군인 중 하나가 태블릿 PC를 틱틱 두드리며 유식의 얼굴과 인적 사항들을 점검했다. 그는 다음으로 유식의 노트북 가방을 확인했다. 절차적인 수색이었다.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목적지까지 이동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유식은 긴장한 채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삼엄하면서 깍듯한 예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군인들은 내내 무표정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52구역에 진입할 것이었다.
 “약 30분가량 뒤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험비가 출발했다. 유식은 긴장되자 빳빳해진 목을 살며시 좌우로 틀어 보았다. 그래도 뭔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유식은 살며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텅 빈 듯하면서도 비밀스러운 곳이다. 신기하다. 이게 그 유명한 제한 금지 구역이구나. 웬만한 해킹으로는 기본 구성조차 파악할 수 없는 곳인데.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숨기는 거야?’
 유식은 띄엄띄엄 위치한 건물들을 구경하며 저러한 각각의 건물들에서 어떤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을지 상상해 봤다. 물론 온갖 음모론이 떠오르는 게 다였다.
 험비는 험한 길을 타고 꾸준히 황야를 헤쳐 나갔다. 의외로 52구역은 상당히 넓었다.
 유식은 목이 탔지만 딱딱한 표정의 군인들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어차피 물을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할 것 같았다.
 불편한 침묵의 시간 후 마침내 험비는 한 건물 앞에 정차했다.
 “도착했습니다. 방문 종료 시간은 7시간 30분 뒤입니다. 시간이 되면 이곳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면 다음 요원이 안내할 겁니다.”
 “수고하셨어요. 저······ 좀 내려 주실 수 있나요?”
 유식은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험비에서 내렸다.
 유식은 스스로 휠체어를 끌며 의외로 소박하고 단조로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다각도 스캔 검사를 거친 후 또 다른 요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의 끝자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에 도달했다.
 “환영합니다. 기본적인 정보들은 숙소에서 파악하시고, 오늘은 일단 메인 터미널을 조작해 보시게 될 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입력을 집어넣는 곳이죠. 참고로 파티클 드라이브는 시간 여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아, 그리고 숙소로 나가실 때는 여러 가지 사인을 통한 비밀 서약을 하실 것입니다.”
 유식은 요원의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킹을 통해 갖가지 기밀과 비밀 들을 접해 봤다지만 NASA가 구체적으로 시간 여행 기기를 개발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저 넷상에서 풍문만이 떠돌 뿐이었다.
 유식은 앞이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대단한 프로그래머라도 NASA의 초월적인 스케일 앞에선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그만큼 진보한 건가, 아니면 그만큼 돈이 많은 건가. 이 정도 프로젝트면 이미 이론을 넘어서서 실체를 구현하고 있단 건데······. 성공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규모만으로도 아찔하다. 내가 이런 곳에서 할 일이 있긴 한 걸까? 분명 내가 모르는 프로그램 언어를 쓸 텐데? 배우면 되긴 하지만.’
 마침내 유식과 요원은 지하 12층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엔진 등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들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구소는 거대한 입자 가속기를 품을 정도로 컸고, 그것과 연동되는 플라스마 발전기 역시 크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유식은 바쁘게 움직이는 수백 명의 연구원들을 둘러보았다. 꽤 많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일에 뒤처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유식과 요원은 메인 터미널실로 향했다. 내내 유식의 휠체어는 안내 요원이 밀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터미널실에는 오로지 소수 정예의 연구원들만이 있었다.
 “이상합니다! 전혀 오류 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추상적 연결 고리 몇 개가 빠진 것 같은데 아시다시피······.”
 “플라스마 어레이 중 한 줄이 세고 있는 것 같은데······. 직접 연결된 기기를 건드리는 건 위험합니다. 외부에서 터미널로 제어해야만 합니다.”
 “진짜 오류라면 심각한 재난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플라스마 발전기 폭발 같은······.”
 “이건 오히려 탐지기의 오작동이 아닐까요?”
 “흐음, 곤란하구려. 오, 마침 의뢰를 부탁한 청년이 왔구먼.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아, 안녕하세요. 이유식입니다. 여기가 제가 일할 메인 터미널이죠?”
 유식은 곧바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자신이 일할 현장에 가까워지니 적극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연구소장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은 반가운 기색으로 유식을 맞았다.
 “반갑네. 가식적인 소개 절차는 생략하도록 하고, 미리 설명을 받았듯이 우리가 지시하는 일을 해내면 보상을 받을 걸세. 잘하면 장래에 같이 일하게 될 수도 있고. 일단 거대 프로그램의 세부 디버그를 하는 일이라네. 지금은 별다른 증상이 없지만 위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오류야.”
 “아하, 디버그라······. 그런데 전 이곳에서 사용하는 모듈과 언어를 모릅니다. 민간인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를 쓰시진 않죠?”
 “물론이네. 잘 알고 있구먼, 허허. 하지만 일하기 편하게 중간 통역 전달 프로그램을 마련했어. 개인 노트북과 연결해 편히 작업하면 알아서 터미널과 교류가 될 게야. 내 연구원들이 볼 땐 어레이 관련 중추 기관의 제어 논리가 약간 꼬인 것 같아.”
 “음, 그렇군요. 한데 다른 분들 말고 저를 택하신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여기선 제가 별거 아닌 프로그래머일 텐데.”
 “허허, 그렇지도 않아. 솔직히 말해 첨단 장비를 다루다 보면 세세한 오류에는 맹점이 생기게 되거든. 귀찮은 것들은 다 자동화 과정을 거치니까 말이네. 그래서 이런 경우는 분야 최고 인재들이라 하더라도 가끔 골치를 앓곤 하지. 오래 붙잡고 늘어지면 결국 해결은 하겠지만······ 이 오류는 약간 급한 종류의 것이라서 말이야.”
 “아하, 그래서 오히려 민간 장비로 작업하는 제가 작은 단위의 오류를 잡아내는 데에는 유리하다 이거지요? 저 같은 경우 일일이 프로그램을 훑는 유형이니까.”
 “허허, 그렇다네. 또한 HBML 시스템을 대충 훑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실 자네는 이곳에서도 뒤지지 않는 상당한 수준이야! 단지 전문교육과 훈련을 못 거쳐서 그렇지, 주어진 여건에선 최고라 할 만해.”
 “아······ 감사합니다!”
 유식은 대단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 뛸 듯이 기뻤다. 그간 홀로 연마해 온 실력이 마침내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미국 최정예 인물에게 말이다.
 연구소장은 사람들을 시켜 재빨리 유식이 터미널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왔다. 유식은 특수 케이블로 노트북을 메인 터미널과 연결시켰다. 그는 자신이 쓰는 익숙한 언어의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곧 케이블로 인해 유식의 노트북에는 중간 통역 전달 프로그램이 깔렸다. 과연 유식은 자신이 쓰던 프로그램으로도 터미널을 조작하고 읽을 수 있게 됐다.
 “작업 시작할게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유식은 세차게 눈을 굴리며 빠른 속도로 터미널의 정보를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오류가 의심되는 어레이 부근을 건들기 전 다른 구조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가지, 방해되지 않게. 이유식 씨, 우린 잠시 회의 좀 하고 돌아오겠네.”
 “아, 네! 전 계속 작업할게요. 일단 부분 복사 후 가상 작업 중이니 제가 터미널을 고장 낼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이지. 애초에 터미널에도 자동 오류 수정 기능이 있긴 해. 그 기능을 넘어서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는 거긴 하지만.”
 유식의 번쩍이는 눈을 보고 연구소장은 찜찜한 표정으로 메인 터미널실을 나갔다. 연구원들도 그를 따라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유식은 어느새 노트북에 몰두해 있었기에 묘하게 감도는 스산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없었다.
 연구소장은 메인 터미널실을 나와 문을 꾹 닫았다. 마치 뭔가를 가두려는 듯했다. 연구원 하나가 찝찝한 표정으로 연구소장에게 물었다. 문 너머로는 소리가 새지 않을 것이었다.
 “연구소장님, 정말 이래도 됩니까? 아무리 우리와 관련도 없는 외국인이라지만······ 잘못될 경우 터미널실에까지 문제가 튈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될지 아시잖습니까.”
 “허어, 어쩔 수 없네. 정말 고칠 경우 앞으로 크게 키워 줄 거야. 반드시 실패하란 법도 없잖나. 언제나 리스크는 있기 마련이네.”
 “단지 본인이 모를 뿐이죠. 우리 연구원 중엔 제대로 건드릴 의사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채 도망칠 시간도 없이 터미널실이 초토화될 겁니다. 아무튼 전 이 일을 모르는 겁니다.”
 “당연하지.”
 엄한 눈빛을 하는 연구소장에 연구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사이 유식은 분주히 작업에 몰두했다. 5시간 넘게 부랴부랴 터미널 구조를 파악해 나간 덕분에 그는 마침내 오류 지점으로 의심되는 어레이 구조의 핵에 도달할 수 있었다.
 “흐흐, 여기 있구나, 이 자식!”
 위잉!
 한데 유식이 과감하게 어레이 핵에 접근하자마자 터미널실엔 붉은 등이 들어왔다. 유식이 무언가를 잘못한 게 아니라, 애초에 어레이 부근에 걸려 있던 오류가 지뢰처럼 민감한 상태였던 것이다.
 유식은 식은땀을 흘리며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터미널 구조는 통제를 벗어나 발광하고 있었다.
 ‘어, 이거 진짜 심각한데? 약간의 문제라고? 이 정도 오류를 왜 미리 경고해 주지 않은 거지?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이잖아! 빌어먹을, 실제 기기들과 연결돼 있어 위험한데······.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아니야, 아닌데! 게다가 오류 수치가 점점 더······.’
 위잉! 위잉!
 터미널에 본격적으로 경고등과 경고 알람이 켜지기 시작했다. 오류 신호는 플라스마 어레이 중 하나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단지 현재 상황에선 이유를 밝히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심히 상황을 지켜보던 연구소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젠장! 역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였나? 상황은?”
 “터미널실에 물리적 재앙의 위험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빨리 터미널실 역 벙커 실행해. 안타깝지만······ 벌써 시작된 것 같아.”
 “그러니까 아예 터미널실을 들어내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수십억 달러가 들어도 들어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요. 젠장! 쓸 만해 보이는 인재였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려다······.”
 “나로선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네!”
 상황만큼이나 유식의 표정 역시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오류는 이제 실제적인 범위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유식은 급히 노트북과 가방을 챙겼다. 아무리 봐도 대피는 불가피해 보였다. 그는 낑낑거리며 휠체어를 돌렸다.
 그러한 아비규환 중에서, 오류의 실체는 강제로 파티클 드라이브의 중앙장치를 작동시켰다. 중앙장치는 주입된 막대한 양의 축적 플라스마를 변형, 장치 밖으로 변질 파형을 토해 냈다.
 즈우우웅.
 그렇게 튕겨 나온 플라스마는 역으로 기기와 프로그램을 타고 돌며 가장 허약한 분출구인 터미널실로 뿜어져 나왔다.
 즈우우웅!
 겨우 휠체어를 끌기 시작한 유식을 맹렬한 플라스마가 집어삼켰다. 유식은 자각하기도 전 푸른빛에 둘러싸였다.
 “악!”
 푸른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된 터미널실에는 아주 짧은 외마디 비명만이 허무히 감돌았다. 그마저도 에너지 돌풍에 순식간에 묻혀 버렸지만 말이다.
 
 유식은 콧등이 시큼함을 느꼈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큭.”
 유식은 찌르듯이 아파 오는 흉부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뒤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기를 내내 미루어 온 그였다. 아이러니하게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려 한 자이기에 더더욱 그 질문의 답이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난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몸이 아픈데······.’
 유식은 의아하다고 생각하며 살며시 눈을 떴다. 아직 시야가 흐렸고 머리에선 높고 얇은 ‘삐’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분명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주변의 환경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크헉.”
 유식은 격렬히 한 덩이의 피 뭉치를 토해 냈다. 내부는 딱딱한 형상을 한 괴이한 피 뭉치였다.
 피를 토하는 것과 함께 유식은 그 존재 자체가 유리 조각처럼 쩍쩍 갈라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허억! 헙!”
 유식은 마치 깊숙한 바다에 잠긴 듯이 숨이 막혀 옴을 직감했다. 게다가 온몸의 신경은 마치 크게 부푼 풍선처럼 터질 듯한 상태에 도달해 버렸다. 유식은 또다시 죽음의 공포를 마주해야만 했다.
 단순한 통증이 아닌 공간적 부정否定에 의한 고통이었다.
 “끅!”
 숨이 부족한 상태에서 유식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섬뜩할 정도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유식이 눈을 뜬 장소 주변에 있던 무너진 탑으로부터 푸르고 진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마치 갑작스레 나타난 유식이 반갑다는 듯 푸른 목소리는 유식을 간절히 불렀다.
 깨진 존재여! 내게로 오거라! 살고 싶다면 내게로 와!
 “끄허억! 억!”
 유식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선명히 푸른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절정으로 활성화된 생존 본능으로 인해 정확히 목소리의 방향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식은 다리가 불편한 몸. 목소리가 들린 곳에 도달하고 싶다면 온 힘을 다해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평소 휠체어를 끌어 상체 힘이 약하지 않은 그였지만 현 상황에선 전보다 훨씬 못한 여건이었다.
 “이익, 이아아악!”
 유식은 스스로조차 지니고 있는 줄 몰랐던 강렬하고 뜨거운 의지를 토해 냈다. 그만큼 그는 이제 삶에 대해 다시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내게 오거라! 그리하면 편안해질 것이야! 나를 삼켜라, 나를 소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불청객인 네가 살 수 있다!
 유식은 일말의 잡념도 품지 않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기어갔다. 손톱이 다 까지고 피가 날 정도로 유식은 무너진 탑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기어갔다.
 고통은 잠깐이라도 사그라질 만하건만 매정히도 항시 최대 강도를 유지했다.
 “으으, 으으윽!”
 유식은 질질 흘러나오는 침과 구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목소리에게 다가갔다. 모든 신경과 정신적 여유가 뒤꼬인 상태였다. 오로지 고통과 혼돈,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푸른 목소리만이 유식의 뇌리에 감돌았다.
 초월적 고통은 거의 유식의 존재를 흩어 버리기 직전이었다.
 잘했다! 잘했어! 이제 거부하지 말거라.
 유식은 손이 엉망진창이 되고 나서야 탑의 잔재 주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도달하자 탑으로부턴 푸르지만 매우 흐린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유식에게 자석처럼 달라붙어 서서히 그의 안으로 침투했다.
 “끄허어어억!”
 유식은 미친 듯이 숨을 들이켜며 힘겹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스며든 푸른 기운은 마치 퍼즐 조각을 완성하듯 유식의 공간적 존재를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이내 유식은 완벽히 수리된 도자기처럼 다시 안착된 형상을 가지게 됐다.
 유식에게 스며든 푸른 기운은 진하게 그의 뇌에 스며들어 중추신경을 타고 온몸에 뿌리를 내렸다.
 ‘빌어먹을! 방금 건 뭐지?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소름 끼치는 고통이다······.’
 유식은 그 어떠한 고문에도 비할 수 없는 고통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힘겹게 숨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안정을 되찾았다. 아직도 식은땀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유식은 조심스레 상체를 낑낑거려 보았다. 이미 휠체어는 온데간데없었다.
 잘했다. 네 이름을 물을 여유는 없으니 서둘러 설명하겠느니라. 난 무너진 마탑과 함께 사망한 전격의 정령이니라. 사망하였지만 그 잔존이 남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오랜 세월을 비참하게 잔재에 갇혀 있었느니라.
 “저, 정령이라고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당신은 어떻게 제게 말을 거시는 건가요?”
 그런 세세한 것을 설명할 여윤 없어. 그저 방금 전 네 신분 때문에 넌 무無와도 같은 날 감지할 수 있었던 거고, 난 천문학적으로 긴 해체 시간보다 네 깨진 틈에 스며들어 너에게 소화되는 걸 선택한 것이니라!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유식은 혼란스러워하며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고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일단 말이 통하니 소통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난 일방적으로 전해 줄 수밖에 없어. 곧 너의 안정된 정신은 날 빠르게 소화할 것이고, 난 더 이상 네게 인격체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듣고 기억하거라. 사라지기 전······ 내 정체성을 기억해 다오. 난 마법사들이 토르로 합성하려다 실패한 정령이니라.
 “토르요? 마법사요? 생소하긴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일단 기억할게요.”
 좋아, 다음! 일단은 네게 선물로 이곳의 언어 지식과 기본 마법 지식을 전해 주겠노라. 내 한계 때문에 오로지 네 무의식 속 안전한 곳에만 묻어 둘 수 있어. 차차 꺼내서 네 것으로 만들다 보면 다 이해가 될 것이니라.
 “네. 기다리며 무슨 말씀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식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계속해서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유식은 막연히 목소리로부터 엄청난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믿고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나의 완전한 죽음을 가능케 해 준 데에 대한 마지막 성의로, 네게 마법을 깨치게 해 주겠노라. 고통스럽더라도 따라와 다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느니라. 보아하니 몸이 불편한 것 같은데, 함께 네 방식대로 마법을 깨쳐 보자꾸나.
 “마, 마법을요? 지금 말이에요? 그것도 제 방식대로라니······.”
 유식은 사망한 정령이라는 존재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스스로 미친 것이 아닐까 의심되긴 했지만 상황상 마법이 아예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방금 전의 초월적 고통, 그리고 갑작스러운 안정. 그에 더한 정령이란 존재의 목소리는 유식의 기본 상식을 서서히 뒤바꾸고 있었다.
 자, 시야가 암전돼도 당황하지 말거라.
 “흡.”
 일순간 유식의 시야가 전부 검게 물들었다. 푸른 기운이 잠시 유식의 정신을 주도적으로 삼킨 것이었다. 유식은 떨리는 마음으로 목소리의 안내를 기다렸다.
 자, 곧 내가 도와주면 ‘마나’라는, 푸른 문양의 에너지가 인지될 것이다. 대기에 감도는 무한한 에너지이며 마법의 기본 재료니라. 재배열을 통해 실제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느니라. 마법사에 관한 지식은 너무 방대하니 간단하게 등급만 설명하겠다. 인간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등급은 7개의 별과 각각 별마다 7개의 각으로 나뉘느니라.
 “마나요······? 그러니까 마법의 발연체 같은 거군요. 그럼 마법 등급은 49개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마지막 현자 등급까지 합치면 50개니라. 자, 시간이 없어. 이제 인지된 마나를 네 정신으로 빨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무의식의 자력을 통해 행해지니라.
 곧 목소리의 말대로 유식의 검게 물든 시야엔 듬성듬성 푸른 문양이 떠올랐다. 유식은 어떻게 그러한 문양들을 빨아들일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비범한 수준으로 발달된 유식의 지능과 무의식은 조금씩 목소리가 심어 놓은 선물을 소화하여 의식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문양은 자석처럼 천천히 유식에게 끌려오다 한순간 쑥 유식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좋아, 지금 느껴지는 푸르고 시원한 에너지가 마나다.
 “허어······.”
 유식은 처음 느껴 보는 묘한 충족감에 입을 헤 벌렸다. 마나란 것은 육체와 정신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에 닿아 있는 에너지였다. 유식은 직접 경험하는 만큼 점점 더 마법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자, 이젠 네가 어떻게든 네 무의식 속 선물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넌 인간이니, 보통 마법사들이 거치는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지금 그럴 여유 따윈 없느니라. 마법은 그 발화점이 종족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니라. 정령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사안이지. 마나를 어떻게든 재배열해 보거라. 어떻게든, 될 때까지!
 “네······ 해 보겠습니다. 확실히 처음 느껴 보는 에너지가 정신 위에 떠다니는 느낌은 있네요.”
 유식은 서서히 흥미를 느끼며 검은 시야 중에서도 목소리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유식은 프로그래밍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마주했던 감정을 느꼈다. 흐린 안개 길 같은 그 시작이 싫지 않았다.
 유식의 무의식은 분주히 마나를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시작하는 방법이 다양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솔직히, 너무 막무가내잖아?’
 목소리는 몇 분 정도 기다려도 성과가 없자 다시 유식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직 성취하지 못하는 게 무리는 아니다만, 이대론 내가 시간이 안 되느니. 자,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더냐? 그래, 몸이 불편하지 않더냐?
 “네. 사실 다리가 불편해서 걷지도 서지도 못해요.”
 그렇구나. 자, 그럼 너의 논리 방식대로 그 불편함을 극복할 마법을 건설해 보거라. 내가 중간중간의 오류는 다 잡아 주겠느니라. 망설이지 말고 어서.
 ‘그래도 어렵다. 극복하려면······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켜야 하는데 그건 지금 힘들 것 같고······ 역시 휠체어 생각이 나는데.’
 유식은 흡수한 마나를 다양한 태도와 각도로 어루만져 보았다. 끝내 유식은 꿈틀거리며 변형되는 마나를 인지할 수 있었다.
 마나는 뒤틀리며 줄기가 가지를 뻗치듯 또 다른 문양과 파형을 뿜어냈다. 유식은 마나를 이리저리 어루만져 보았다. 참으로 신기하고도 어려웠다.
 좋아, 뭔가 되고 있어. 네 심상에 재밌는 도구가 잡혔구나. 가능해. 어서 계속해 보거라. 내가 옆에서 적극적으로 돕고 있으니.
 유식은 막연히 마나를 휠체어 형상으로 조립하지 않았다. 되레 천천히 각각의 재배열된 마나가 전해 주는 느낌을 훑으며, 그것들이 세부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목소리로부터 전해 들었다.
 ‘마치 톱니바퀴 같아. 작은 부품들이 서서히 하나의 완성품으로 합쳐진다. 서로 엉키고 뒤덮이고 변형되며······ 아냐, 기계보단 오히려 프로그램 같아. 각각의 재배열 조각이 작은 명령어 같고 조건부가 걸리면서 완성돼가는 것까지 닮았어, 히야!’
 쩌적. 순간 유식의 검은 시야가 깨져 버렸다. 곧바로 원래의 주변 풍경이 드러났다.
 이런! 대체······? 오호라······.
 목소리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놀랍다는 탄성을 내뱉었다.
 방대한 지식을 품고 있는 시한부 정령이라 할지라도 과연 놀랄 만했다.
 유식이 마법과 컴퓨터 프로그램의 근본적 닮음을 깨닫는 순간, 그의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풍부한 양의 선물이 곧바로 유식의 의식과 연결된 것이다. 그 연결점은 당연히 천재 프로그래머로서 지니는 자존감과 감각이었다.
 “아하, 이제 알겠어요! 갑자기 머릿속에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에요. 와, 빠르게 이해되는 것치고는 너무 한꺼번에 마법에 익숙해지네요.”
 아주 좋다. 시간의 부족을 잘 극복해 주었구나. 네가 본래 가지고 있던 지식과 연결되어 마침내 무의식 속 선물이 활성화된 것이다. 좋다! 네가 원하는 마법을 완성해 보거라.
 유식은 수월히 뚫린 마법적 감각으로 재빠르게 휠체어 마법을 완성해 갔다. 마치 휠체어의 몸체 부분을 바퀴에 탁 걸 듯 유식의 마법 또한 착착 개념적 틀이 갖춰졌다.
 ‘이거 뭐야. 완전히 머릿속으로 굴리는 프로그램이잖아! 단지 결과 값이 화면 안 정보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지. 결과가······ 마법이라니. 정말일까? 으으, 설렌다.’
 유식은 뿌듯한 마음으로 마법을 완성했다. 물론 태반은 목소리의 개입과 배려가 있기에 이루어진 부분이었다.
 잘했다. 다행히 내 마지막이 무의미하진 않겠어! 자, 이제 언어의 권능으로 마법을 주장해야 한다. 그 마법에 가장 적합한 이름을 내뱉어라. 그리하면 마법이 언어의 권능에 반응할지니.
 유식은 잠깐 동안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마법을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다. 목소리는 시간이 없다고 했기에 유식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블루 체어!”
 스응!
 마법을 시전하자 땅바닥에 힘없이 앉아 있던 유식은 허공으로 쑥 튀어 올랐다. 또한 어느새 그는 약간 땅으로부터 떠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반투명하고 파란빛이 감도는, 다소 심플한 디자인의 마법체였다.
 “와! 진짜로 가능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정말 내가 겪고 있는 일이 맞긴 한 건가? 허어······.”
 유식은 아직 자신이 겪은 일을 다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많은 새로움과 놀라움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유식은 정신과 연동된 블루 체어를 움직여 보았다. 낑낑대며 팔로 바퀴를 굴리지 않아도 부드럽게 블루 체어가 유식을 이곳저곳으로 옮겨 주었다. 완전히 날아다니는 의자였다.
 흐음, 만족스럽구나. 즐거워하는 너의 표정으로 인해 내 마지막 영향력을 자각할 수 있었어. 아, 곧 가야겠구나······. 그 전에 네 안전을 위해 2가지 정형화된 마법을 각인시켜 주마. 내가 준 선물에도 포함돼 있어.
 유식은 블루 체어를 멈추고 다시 정신을 차분히 했다. 자신이 신 난다고 해서 곧 사라진다는 목소리를 소홀히 대할 순 없었다. 유감을 가지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정도는 당연한 예의였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모두들 날 외면하고 방치하기만 했지. 프로그래밍은 나 혼자 깨쳤고. 그런데 마법을 가르쳐 준 분이 곧 사라진다니······ 뭔가 서글프네.’
 자, 호신용으로 적절할 것이다. 매직 미사일과 라이트닝 볼트니라.
 목소리는 유식의 시야 위로 두 개의 재배열 공식을 띄워 주었다. 유식은 재빨리 3차원 재배열 공식을 암기하고 그것을 언어의 권능으로 시전했다. 그의 무의식 속 선물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였다.
 유식은 양손 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직감적인 자세였다.
 “매직 미사일! 라이트닝 볼트!”
 그리하자 곧 유식의 양손으로부터 투명한 총알과 전력을 품은 화살이 발사되었다. 유식은 방금 자신이 시전한 마법들이 놀라워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허허, 그리 좋으냐. 다행이구나.
 “저어, 그런데 왜 저를 도와주신 건가요? 마법도 가르쳐 주시고······. 물론 전 너무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워서 인사를 미처 못 했어요. 고맙습니다!”
 유식은 문득 궁금해졌다. 플라스마 폭발 이후 유식은 갑작스레 목소리와 하나가 됐다. 이유는 모른 채 그저 살기 위해 목소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의식이 깨니 목소리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말했듯이 난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비로소 존재가 정리될 운명이었느니라. 하지만 너를 통해 일종의 조기 마감을 얻게 된 것이지. 특히나 잔재에 발이 묶인 나에게 너같이 깨진 불청객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 보답도 할 겸, 오랜 기간 잊었던 내 존재감도 확인할 겸, 너를 도운 것이니라.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유식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전부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유식은 막연히 목소리의 의중에 공감했다.
 ‘언제고 내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을 때 마지막으로 미친 듯이 고함을 친 것과 비슷한 거구나. 단지 이분은 더 초월적이고 유익한 마지막 기념을 가진 거고.’
 아무튼 이것으로 난 만족한다. 벌써 안녕이구나. 인간, 가기 전에 반쪽짜리 부탁을 좀 하자꾸나. 가능하다면, 부디 이 세상에 토르를 소환해 다오. 전격 정령들의 원초적 소원이니라. 그냥 나중에라도 그릇이 된다면 말이지······ 허흐흐.
 목소리의 말은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묘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저, 저기요. 아직 계신가요?”
 유식은 다급히 목소리를 불러 보았지만 더 이상 그의 머릿속엔 말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유식은 갑작스레 외로워진 기분을 뒤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으읍, 하! 공기 좋다.”
 현재 유식은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초록빛 초원 위에 떠 있었다. 사르르 부는 바람이 오묘하게 파도치는 잔디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유식은 상쾌한 공기를 한 번 들이마시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머리는 극도로 불길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잠깐. 그런데 난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여긴 생전 처음 보는 곳인데? 연구소는? ······설마!’
 유식은 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경악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가 마지막으로 접한, 오류로 휩싸였던 극비리의 기계는 NASA의 시간 여행 기기였다. 물론 유식은 폭발에 휩싸였지만 엄연히 시간 여행 장치로부터 뿜어져 나온 폭발이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연관된 장치라 해도 어떻게 그 정도로 고장 난 기계가······? 게다가 내가 있던 곳은 기계 부근이 아니라 그냥 터미널실이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유식은 최대한 빨리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현실의 상황은 이미 펼쳐져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즉 아무리 당황하고 고민해 봐야 직접 탐구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보세요! 누구 없습니까!”
 유식은 일단 급히 고함을 쳐 봤다.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또 다른 말동무를 찾게 됐다. 원랜 집에만 있던 그였지만, 푸른 자연 때문인지 마법의 경험 때문인지 유식은 전보다 훨씬 더 활발한 모습이었다.
 유식은 계속해서 사람을 찾아보았다. 주변은 인적 없는 조용한 자연의 한복판이었다.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유식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수풀 위로 드러난 무너지고 낡은 탑의 잔재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오래되고 낡은 폐건축물이었다.
 유식은 종종 건축학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가 절대적으로 동경하는, 거대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 건축양식이지? 생전 처음 보는 건데······ 게다가 이 정도 규모의 잔재인데도 관리가 아예 안 된 걸 보면······ 내가 처음 발견한 건가?’
 유식은 이국적인 마탑의 잔재들을 둘러보며 결국 이곳에선 얻을 수 있는 수확이 없음을 깨달았다. 독특한 장식을 지닌 온갖 물건들은 깨지고 녹이 슬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아, 맞아. 여기 있다니까! 크흐흐. 어······? 이봐, 너 뭐야!”
 “어어, 이거 곤란한 놈일세! 웬 파란 의자에 앉아 있는 거야? 저거 아티펙트 아냐? 야!”
 유식은 낯선 목소리를 듣자마자 잔재 뒤로 몸을 숨겼다. 블루 체어가 물 흐르듯 유식을 옮긴 것이었다. 유식은 낯선 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고함을 지르니 당황치 않을 수 없었다.
 한데 인간의 언어를 듣자마자 유식의 귀와 목이 밝은 푸른빛에 휩싸였다. 시한부 정령이 남겼던 언어 각성 기능이었다.
 “큭큭큭, 저놈 좀 봐. 겁먹어서 숨어 있는 꼴이란!”
 “몇 대 박아서 보내면 귀찮아질 일은 없겠는데? 도굴도 위아래가 있지. 어디 우리가 봐 논 곳을······! 파란 의자부터 뺏자. 아직 멀쩡한 거 같아.”
 “야, 이리 와 봐!”
 유식은 재빨리 두 남성의 인상착의와 장비들을 확인했다. 두 남성은 낡은 가죽옷과 펑퍼짐한 배낭을 두르고, 긴 막대기와 단검을 차고 있는 도굴꾼들이었다. 물론 유식에게는 매우 이국적이고 기괴한 생김새들이었다.
 ‘뭐지? 아무리 시골이라도 저 정도로 엉성한 옷을 입진 않는데. 심지어 농부의 작업복보다도 허름한 구성이잖아. 보이는 바로는 중세의 일반적 옷차림과 비슷한데······. 설마?’
 유식은 점점 더 불길하게 머릿속 가설이 분명해짐을 인지했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저런 옷차림으로는 숲 속을 거닐지 않는다. 적어도 유식의 현대 시대에선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젠장, 젠장.”
 “야!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나와 봐!”
 유식은 도굴꾼들의 말에 쭈뼛쭈뼛 잔재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하게 저들이 하는 말이 모국어처럼 유창히 이해되고 있었다. 유식의 귀와 목은 더 이상 푸른빛에 휩싸이지 않았다.
 “저어, 누구시죠? 왜 저한테 고함을 치고 그러세요······.”
 “뭐야? 이 자식이 건방지게!”
 두 도굴꾼은 화를 내며 긴 막대기를 꽉 잡아 쥐었다. 유식은 두 남성이 때리려는 시늉을 하자 블루 체어를 후진시키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복장은 우스꽝스러워도 화를 내니 급작스레 도굴꾼들이 무서워 보였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왜 남의 작업장에 얼씬거려?”
 “빨리 말 못 해? 따로 숨긴 거 있어, 없어?”
 “저, 저는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발뺌하다간 뼈도 못 추릴 거다, 이 자식아. 거기서 내려.”
 계속해서 위협하는 도굴꾼들에 유식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저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유식에겐 마탑이 도굴의 대상이 아닌 그저 그런 폐허일 뿐이었다.
 “이익!”
 “악!”
 도굴꾼들은 유식이 도망가지 않고 어물쩍거리자 그에게 확 막대기를 휘둘렀다.
 약골 유식은 반사적으로 블루 체어를 뒤로 뺐다. 얼떨결에 막대기를 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식은 비명만 지르고 반격을 하지 못했다.
 유식도 엄연한 성인이고 어느 정도 해커로서 인정을 받아 온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의 피해 경험이 유식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유식은 쭉 육체적 활동이 제한된 삶을 살아와 그런지 차마 도굴꾼들에게 덤빌 생각을 못 했다.
 유식에겐 그들의 눈빛이 왠지 익숙했다.
 ‘완전히 벗어난 줄 알았는데······ 또 저런 놈들한테 당하는 건가. 이번엔 얼마나 맞아야 끝나려나.’
 순간 유식의 눈에 오묘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시한부 정령은 사라졌으나 그 잔존은 유식의 정신이 소화한 상태였다. 엄청난 변화는 아니었어도 분명 영향이 있었다.
 ‘더 이상 맞고 살 수만은 없다. 몸은 불편해도 이젠 마법을 쓸 수가 있어. 어수룩한 고등학생 때와 달라. 재수는 없었어도, NASA에서 의뢰를 받을 정도로 컸어.’
 유식은 그러한 미세한 영감에 힘입어 방금 전 깨친 호신용 마법을 떠올렸다.
 “매직 미사일! 라이트닝 볼트!”
 유식은 마나를 끌어모은 다음 양손으로 마법을 발사했다.
 “컥!”
 “이악!”
 도굴꾼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마법에 한 번 놀라고 그 마법이 전해 주는 범상치 않은 고통에 또 한 번 놀랐다.
 매직 미사일을 허벅지에 맞은 도굴꾼은 피멍이 들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라이트닝 볼트에 맞은 도굴꾼은 다리가 풀릴 정도의 감전을 겪었다.
 ‘허······ 이렇게 강력한 건가. 미치도록 통쾌하다! 총이라도 쥔 것 같아. 되레 총보다 더 통쾌해!’
 유식은 처음 겪어 보는 감정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블루 체어에 앉아 여유롭게 두 손으로 마법을 발사했을 뿐인데, 도굴꾼들은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고통에 몸부림 쳤다.
 유식은 다시 한 번 마법을 발사했다.
 “아악! 그만! 그만!”
 “제발, 마법사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요!”
 유식은 이번에 도굴꾼들에게 전번과 각각 다른 마법을 발사했다. 감전의 충격으로 몸을 떨던 도굴꾼은 복부에 피멍을 얻었고, 피멍을 얻은 자는 감전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손짓 몇 번과 정신적 움직임만으로도 저 두 놈을 제압했어. 이런 게 강자의 여유구나. 그래서 그동안 날 괴롭혔던 놈들이 그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구나. 지금도 옥상에서의 기억이 생생해.’
 유식은 도굴꾼들을 통해 가해자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하단 것은 참 단순하면서도 달콤 씁쓸한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유식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자칫 자신이 가장 역겨워하던 유형의 인간과 똑같이 행동할 뻔했던 것이다. 자기 방어와 일방적 가해는 엄연히 달랐다.
 ‘아냐!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성인이고, 커서 용감해진 것은 좋다. 마법을 통해 이렇게 여유 부릴 수 있는 것도 너무 좋고. 하지만 한심한 놈이 되진 말자.’
 유식은 마음을 새롭게 하며 시한부 정령을 통해 얻은 마법의 힘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리적으로 강자가 돼 본 적이 없어 잠시 흔들렸던 것이었다.
 “저기요. 뭘 그렇게 사납게 원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전 관심 없습니다. 전 이곳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에요. 혹시 지도 같은 것 있으신가요?”
 도굴꾼들은 고통에서 겨우겨우 벗어난 채로 살며시 유식을 올려다보았다.
 유식은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도굴꾼들은 또다시 익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약자의 눈빛이구나. 내가 항상 저런 눈으로 그 쓰레기들을 올려다봤던 건가? 하아······ 진짜 속이 꼬일 정도로 싫다. 그래도 이젠 다르다. 어떻게 폭발 후 이곳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난 약하지 않다.’
 유식은 스르르 블루 체어를 도굴꾼들 앞으로 이끌었다. 유식은 대범히 도굴꾼들에게 다가가는 자신이 새삼 대견했다. 언제 이렇게 당당히 누군가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던가.
 아마 처음일 것이었다.
 “지,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지도만 드리면 저 무너진 마탑을 저희들에게 양보해 주시는 겁니까?”
 “예. 전 그런 거엔 관심 없어요. 처음부터 그랬는데······. 그러게 좀 차분히 물어보시지. 다짜고짜 화부터 내고 위협하니까 이렇게 되잖아요.”
 “아, 아하하.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흐헤헤.”
 유식의 말에 도굴꾼들은 희색을 띠며 얼른 배낭을 뒤적거렸다. 겪어 보니 마법사는 자신들을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마법사는 지도만을 원했다.
 ‘여차하면 가까이 왔을 때 단검으로 푹 찔러 버리려 했건만, 여기까지만 하고 봐주니까 우리 쪽에서도 좋게 넘어가야겠다.’
 피멍과 감전. 결코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무사히 마탑을 얻어 낼 수만 있다면 도굴꾼들 입장에선 참을 만한 경험이었다. 나중에 술이라도 거하게 들이켜며, 마법사를 쫓아내고 마탑을 독차지했다고 자랑하고 풀면 그만이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저어 그런데······.”
 “예?”
 도굴꾼은 슬그머니 유식의 블루 체어를 훑었다. 어찌 봐도 꽤 값나가 보이는 아티펙트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식의 블루 체어는 잘 알려지기는커녕 유식 스스로가 최초로 개발한 마법이었다.
 “혹시 그거 마탑에서 얻으신 아티펙트 아닌가요? 마법 같지는 않은데······.”
 “아, 마법 맞아요.”
 유식은 친히 도굴꾼들이 블루 체어를 만져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말만으로 우기면 믿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면서도 유식은 계속 도굴꾼들의 몸짓을 살폈다.
 “흐으음.”
 과연 시전자인 유식 외엔 블루 체어를 만질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손을 대면 투명한 안개처럼 스르르 손이 의자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
 유식의 당당한 태도에 도굴꾼들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뭐, 마법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만질 수 없는 아티펙트도 있으니까요.”
 “그럼 가 볼게요. 이 방향으로 가면 되나요?”
 “예. 그리로 나가시면 헤브람 숲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마을이 나옵니다. 살펴 가십쇼, 마법사님.”
 ‘마법사님이라니. 뭔가 간지러우면서도 좋다, 흐흐.’
 유식은 도굴꾼들을 먼저 마탑으로 보냈다. 혹시 몰라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
 도굴꾼들은 신 나는 기색으로 헐레벌떡 마탑으로 뛰어갔다. 그에 유식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식은 풍경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숲을 향해 이동했다. 블루 체어는 정신만으로도 조종이 가능하니 웬만한 기계식 휠체어보다도 나았다.
 ‘와, 정말 눈 깜짝할 새 엄청난 일들을 겪었구나.’
 유식은 방금 겪었던 일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러자 손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희열이 느껴졌다. 폭포처럼 만개하는 감정들을 유식은 느긋이 즐겼다.
 ‘마치 보상을 받는 것 같네. 그간의 재수 없는 삶에 대해서 말이야. 우후후, 블루 체어만 따져도 보물을 얻은 거잖아. 아, 그렇지!’
 유식은 갑자기 주르륵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천재 프로그래머로서 기발한 마법 개조법을 떠올린 것이다.
 유식은 빽빽하게 펼쳐져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깊숙한 곳은 수풀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안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유식은 왜인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일 대 다수
 
 
 
 울창한 숲 속의 한복판. 유식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분주히 수풀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는 블루 체어를 통해 한정된 속도만을 낼 수 있었다.
 ‘대체 뭐야! 뭐가 따라오는 거지? 설마 맹수인가?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사람이라 하더라도 불길해.’
 유식은 도굴꾼들로부터 얻은 지도로 수월히 숲을 헤쳐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유식은 점점 등 뒤가 찝찝함을 느꼈다. 미행이 붙은 것이었다. 짐승이 냄새로 유식을 따라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까 그 도굴꾼들은 아닌 것 같고. 누구지? 몰래 따라오는 걸 보면 별로 호의적이진 않은 것 같은데.’
 유식은 직감적으로 자신을 미행하는 존재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마법으로 도굴꾼들을 압도했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시 싸움을 생각하니 유식은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숲 속에선 불길한 느낌이 든단 말야. 풀 뒤에 뭔가 숨어 있는 것만 같고. 게다가 이렇게 질기게 날 따라오다니. 뭘 원하는 거야?’
 유식은 주욱 한번 사방을 둘러보았다. 잔잔한 벌레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유식의 직감은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날 불렀겠지? 무슨 꿍꿍인지 알 수 없다. 맹수일 가능성이 커. 잡혀선 안 된다. 젠장, 이게 블루 체어의 최대 속돈데? 확실히 빠르진 않아.’
 유식은 어느 정도 이동한 후 미행을 아예 떨쳐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숨는 방법을 통해 말이다. 유식은 급히 블루 체어를 해제하고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캬아?”
 유식을 따라오던 존재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급히 유식이 있던 곳으로 달려 나왔다. 유식은 쾅쾅 뛰는 심장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는 살며시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주먹돌을 잡아 쥐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방금 전에도 잘 싸웠잖아? 물러서기 싫다. 일단 급한 대로 돌이라도 쥐고 있어야지.’
 “킁킁! 끼르르.”
 유식을 미행하던 존재는 순간 묘한 냄새를 맡았다. 그 존재는 홱 고개를 틀며 무섭게 유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유식은 점점 의문의 존재가 가까워짐을 알아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어! 눈 딱 감고 한 번 더 맞서 보는 거야. 대상이 보이지 않으니까 돌이라도 먼저 휘두르고 마법을 발사하자. 나도 휠체어 굴리느라 팔 힘은 세다고!’
 “캬아!”
 휙!
 유식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확 돌을 휘둘렀다. 운 좋게 돌에 맞은 존재는 정신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유식은 급한 숨을 내뱉으며 살며시 기절한 존재를 살폈다. 그는 일순간 경직된 표정을 했다.
 “이, 이게 뭐야?”
 유식은 긴장을 놓지 않은 채로 기절한 존재에게 다가갔다.
 고블린이었다. 굽고 큰 코와 작은 키, 연녹색 피부와 긴 귀가 인상적인 몬스터였다. 물론 유식에게는 비현실적인 괴물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뭐야······. 정말 내가 제대로 깨어 있는 게 맞는 건가?”
 유식은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 만난 도굴꾼들이야 그렇다 쳐도 지금 이 키 작은 괴물은 도저히 그럴싸한 가설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나무판을 대서 만든 간이 갑옷을 입고 있어. 사람인 것처럼 단검도 차고 있고 말이지. 지능을 가지고 있단 건데······. 그럼 동물도 아니잖아?’
 유식은 기절해 있는 괴물을 유심히 관찰했다. 피부는 거칠었고 새근새근 숨 쉬는 걸 보면 얼핏 포유류 과의 생명체로 보였다. 유식은 일단 괴물이 차고 있던 단검을 뺏어 수풀에 던졌다.
 ‘어떻게 하지? 무시하고 지나가야 하나? 죽은 건가? 내가 죽인 거야? 피를 흘리긴 하지만 아직 숨을 쉬고 있어.’
 유식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존재는 키는 작았으나 징그럽고 위험해 보였다. 숲 속에 이런 존재가 가득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유식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끄륵?”
 괴물은 제법 빨리 의식을 회복하고 고개를 움찔거렸다. 그는 바닥에서 재빨리 일어나 유식에게 손톱을 드러냈다.
 “으으, 블루 체어!”
 유식은 얼른 마법 의자를 소환했다. 그는 적대적인 괴물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살아 움직이니 괴물이 더더욱 사실적으로 인지되었다.
 ‘진짜 살아 있는 놈이야. 사람도 동물도 아닌데······ 대체 저걸 뭐라고 부르지? 말이라도 걸어 봐? 아까도 말이 통하긴 했었는데······ 하지만 이건 사람이 아니잖아.’
 유식은 한 번도 마약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굳이 표현하자면 유식은 지금 마약에 취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감각은 분명 눈앞의 실체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캬락! 빌어먹을 인간! 왜 우리 숲을 마음대로 돌아다녀?”
 “뭐? 말을 할 줄 알아?”
 유식은 다시 한 번 경악하고야 말았다. 유식은 괴물이 꿀럭거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유식은 묘한 기분에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마주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유식의 귀와 목엔 다시 한 번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괴물의 언어를 각성한 것이었다. 또한 그와 함께 유식은 모호하게나마 괴물의 명칭이 고블린이란 것을 자각했다. 정령을 소화한 영향인 듯했다.
 고블린은 다급히 허리춤의 단검을 찾다가 어느새 그것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유식은 고블린이 능숙하게 도구를 찾으려 했음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끼예아아악!”
 고블린은 다짜고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매직 미사일!”
 유식은 그 외침을 범상치 않은 신호로 받아들이고 재빨리 고블린의 이마에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명중이었다. 깜짝 놀라 벌인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유식도 약골이긴 했으나 남자는 남자였다. 한 번 공격 경험이 생기니 위기 상황엔 즉각적으로 반응할 줄도 알게 됐다. 물론 시한부 정령의 잔존을 소화한 덕도 있었고 말이다.
 “끼에에······.”
 유식만큼이나 약골인 고블린은 엄청난 충격에 다시 기절해 버렸다. 유식은 얼른 고블린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은 통했지만 공격적인 놈이었다.
 ‘이해가 안 돼. 외모는 아니지만 행동하는 건 사람과 비슷하다. 지능이 있고 도구도 사용하고. 게다가 말까지 통해······. 대체 이 시대로부터 현대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뭐지?’
 유식은 다시 수풀 사이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부스스 소리와 웅성거림이 전해져 왔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한 놈이 아니잖아! 이제 어떡하지? 사방에서 몰려오니 도망치기도 애매하고······. 이렇게 된 거, 아까 개발한 걸 쓰자!’
 유식은 비장한 표정을 했다. 사방에서 작은 괴물들이 몰려온다는 공포는 다시금 유식의 생존 본능을 자극시켰다. 유식은 새로 개발한 마법식을 떠올렸다.
 “끼리리리!”
 “키야악! 인간이다! 우리 구역에 침범했다!”
 “본때를 보여 줘야 우릴 무시하지 않는다! 죽여라!”
 “킹굼이 당했다! 덮쳐!”
 유식은 모든 방향에서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달려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가만히 있다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정체도 제대로 모르는 괴물들에게 당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조금이라도 바깥쪽으로 이동한 상태로······.’
 유식은 지도를 재빨리 꺼내 본 다음, 숲의 바깥 방향을 향해 재차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대치 형상을, 포위 대치에서 일자 대치로 바꿔 놔야 했다.
 아무리 작은 고블린들이라 하더라도 날렵한 놈들이 사방에서 공격하면 위험했다.
 “키릭! 저'···다!”
 “죽여!”
 고블린들은 숏 소드를 치켜들며 한 방향에서 유식에게 달려들었다. 유식은 본격적으로 살의를 드러낸 괴물들로부터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적절한 때를 기다린 유식은 마침내 준비한 마법식을 외쳤다. 짐짓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식스 매직 미사일!”
 유식이 마법을 시전하자, 유식의 양어깨 위로 각각 3개씩의 매직 미사일이 떠올랐다. 유식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가락으로 고블린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총 6발의 투명한 총알이 유식을 쫓아오던 고블린에게 쐐액 날아갔다.
 “꾸락!”
 “끼엑!”
 정면으로 발사된 총알들은 5마리의 고블린들을 적중시켰다. 매직 미사일에 맞은 고블린들은 충격 때문에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떨었다. 나머지 고블린들은 당황해 잠시간 주춤했다.
 ‘좋아! 마법을 프로그램처럼 생각했을 때, 내가 보유한 마나 양 안에서 프로그램 덩어리와 프로그램 덩어리를 조합할 수 있다. 서로 상충하지 않는 공식으로 말이지. 즉 6번의 매직 미사일을 시전하는 것보다, 6개의 공식을 합쳐 놓은 총합 공식을 한 번에 사용하는 게 낫다.’
 유식은 뛰어난 프로그래머로서 배우지도 않은 마법 개조법을 깨쳤다. 이미 완성된 작은 공식들을 역량에 넘치지 않게 합치고 엮어 아예 한꺼번에 시전하는 개조법이었다.
 이로 인해 유식은 엄청난 피로를 대가로 상당한 효율을 얻게 됐다.
 “물러서지 마라! 퍼지면서 달려들어! 끼르르!”
 “끼르르! 인간의 피를 포기할 순 없다!”
 “덤벼라! 마법에 맞지 않게 조심해!”
 잠시 주춤하던 고블린들은 다시 숏 소드를 치켜들며 넓게 퍼져 유식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매직 미사일 다발이 한데 뭉쳐져 직선으로 발사됨을 알고 지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끼르르! 죽어!”
 “식스 매직 미사일!”
 유식은 다시금 매직 미사일 다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원래 설계한 대로, 모여 있는 매직 미사일들이 직선으로만 발사돼 이번엔 오로지 2마리의 고블린만을 제압했다.
 유식은 당황하며 블루 체어를 돌려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법에 맞지 않은 고블린들이 코앞까지 가까워진 것이었다.
 “끼리리! 거기 서라!”
 ‘젠장. 이렇게 빨리 약점을 알아내고 넓게 퍼져 달려들다니······ 진짜 지능이 보통이 아닌 놈들이잖아? 도망치는 동안 빨리 샷건처럼 넓게 발사되는 공식을 개발해야 돼. 식스 매직 미사일을 다시 개조시키면 된다!’
 유식은 최대한 도망을 치며, 부단히 머릿속으로 프로그램같이 엮여 있는 식스 매직 미사일 공식을 재개조했다. 직선으로 발사되도록 설정돼 있는 각각의 매직 미사일에 방향을 달리하게 할 변형 공식을 불어 넣은 것이다.
 ‘술술 진행돼서 다행이야. 사라진 목소리 말대로 마치 원래 배웠던 것처럼 머릿속에 필요한 정보들이 가득해.’
 유식은 잠시 마법을 깨치지 못한 상태로 고블린들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봤다. 끔찍했다. 다리도 못 움직이는 상태에서 유식은 속수무책으로 고블린들에게 살해당했을 것이었다.
 “끄락!”
 한 고블린이 도약하며 날카롭게 유식을 그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고블린의 숏 소드는 반투명한 블루 체어를 그었다.
 ‘으으! 거의 따라잡혔다. 나중에 블루 체어의 속도를 개선시킬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어!’
 유식은 뒤편에서 쫓아오는 고블린들 때문에 등에서 땀 몇 방울이 스르르 흘러내림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라도 등에 칼이 들어올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추격전이었다.
 ‘거의 다 됐다, 거의 다!’
 유식은 잔뜩 정신력을 끌어모아 마침내 재개조를 완료했다. 그는 확 방향을 꺾어 다시 고블린들을 마주 보았다. 고블린들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유식에게 달려들어 단검을 휘두르려 했다.
 “매직 미사일 샷!”
 유식은 순간 새로운 마법식을 외쳤다. 그리하자 유식의 정면을 시점으로 총 6발의 총알이 샷건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발사되었다. 멀리 갈수록 더 갈라지는 각도였다.
 “끌락!”
 “끼엑!”
 짧은 비명이 터지며 이번엔 6마리의 고블린들이 고꾸라졌다. 넓게 퍼지며 달려들면 수가 있을 줄 알았기에 고블린들은 다시금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들은 지능이 낮지 않았기에 무작정 달려드는 건 결국 피해만 늘리는 전략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물러서거나 도망가지 않고 계속 유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거야? 설마 단검 투척 같은 원거리 공격인가? 그럼 곤란한데!’
 유식은 슬슬 블루 체어를 후진시키기 시작했다. 그간은 원거리 마법으로 간신히 버텼지만, 고블린 측에서도 원거리 공격으로 나오면 유식에겐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텅텅텅.
 한데 숲 너머에서 아주 묵직하고 큰 발소리가 들렸다. 고블린들은 간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유식에게 조롱하듯이 단검을 휙휙 휘둘렀다.
 유식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발소리만 들으면 웬만한 맹수를 훨씬 뛰어넘는 존재가 달려오고 있었다.
 “크롸아아!”
 파스스!
 역시 예상대로 수풀에서 튀어나온 존재는 상당히 큰 괴물이었다. 외형은 분명 고블린과 비슷했으나 피부에 푸른빛이 돌고 키가 2.5미터에 달하며 유독 팔근육이 발달된 괴물이었다. 바로 홉 고블린이었다.
 홉 고블린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쇠망치를 유식에게 겨눴다.
 “크롸하하! 모두 물러서거라!”
 홉 고블린은 쇠망치를 강하게 허공에 휘두르며 한 발짝 한 발짝 유식에게 다가갔다. 고블린들은 움찔하며 얼른 홉 고블린 주변으로 물러섰다.
 유식은 침을 꿀꺽 삼키며 위아래로 홉 고블린을 훑었다. 징그럽긴 했으나 그간 상대한 고블린들은 자신의 앉은키보다도 작은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홉 고블린은 가히 괴물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미치도록 크다. 인간 중에서도 저 정도로 크면 국제적으로 유명한데······. 저 녹색 괴물들과 같은 종인가? 완전히 돌연변이 같아. 어쩌지, 보폭이 커서 도망갔다간 금세 뒤통수에 쇠망치를 후려 맞을 것 같은데.’
 유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쇠망치를 들고 있는 홉 고블린은 유식을 여유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었어도 위압감이 엄청났을 텐데 고블린의 형상을 하고 그런 덩치를 지니고 있으니 실로 분위기가 살벌치 않을 수 없었다.
 유식은 고블린들과의 전투에서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으나 본능적으로 홉 고블린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냥 보내 주면 안 돼?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유식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고함을 쳤다. 하지만 홉 고블린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프흐흐, 인간! 주제를 모르는구나!”
 홉 고블린은 묵직하게 쇠망치를 휘둘렀다. 유식은 얼른 뒤로 블루 체어를 물러 망치를 피했다. 쐐액 소리를 보니 보통 강한 물리력이 아니었다.
 “인간, 재밌는 것에 타고 있구나. 움직임이 제법 날렵해. 크르흐흐, 하지만 이 몸에게 네까짓 쥐새끼는 한두 방이다.”
 유식은 자신을 비웃는 홉 고블린을 보며 분노를 느꼈다. 사람도 아닌 괴물에게 무시를 당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꾹 삼켜 참았겠지만 유식은 대담히 화를 표출해 보였다.
 “더, 덩치만 큰 자식이 더럽게 말 많네! 덤벼 봐!”
 “크하하하! 맞아. 원래 난 말 많고 작은 외톨이였지. 하지만 그분 덕분에 이제 한 명을 제외하곤 내가 부족에서 제일이다! 네놈도 이 몸의 힘을 경험해 봐라!”
 쿵쿵.
 홉 고블린이 다시 그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쇠망치를 치켜들고 땅을 울리며 유식에게 달려들었다.
 유식은 내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작은 고블린들과 달리 홉 고블린은 너무도 압도적으로 크고 강한 존재였다. 하지만 유식은 도망이 현명한 판단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도망쳐 봐야 계속 쫓아올 것이고 홉 고블린의 보폭에 비해 블루 체어는 너무 느렸다.
 서서히 해커로서 컴퓨터 안에서만 가졌던 자신감과 자존감이 유식의 인격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계속된 전투는 유식에게 외적 자신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어 주고 있었다.
 “크롸!”
 “헙!”
 역시나 홉 고블린은 무식하게 유식을 찍어 내리려 했다. 무조건 상대방의 머리를 으깨 버리는 게 최우선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식은 과감하게 블루 체어를 옆으로 누이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마치 오토바이가 묘기를 부리는 것 같은 심히 누여진 각도였다.
 “매직 미사일!”
 “크흐흐.”
 유식은 피한 직후 홉 고블린의 허벅지에 매직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놈은 멀쩡했다. 보통 고블린이라면 피멍이 들어 다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을 테지만 홉 고블린은 뼈대와 근육이 워낙에 두터워 매직 미사일 정도엔 반응하지 않았다.
 “너도 결국엔 간질이는 정도구나! 마법도 별것 아니구나! 크롸하하!”
 홉 고블린은 더더욱 기세등등하여 마구잡이로 유식에게 쇠망치를 휘둘러 댔다. 근력이 워낙에 강하니 덩치가 커도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부웅, 소리가 나는 살벌한 망치질을 피하며 유식은 꾸준히 홉 고블린에게 밀려났다. 블루 체어가 최대 속도는 느려도 정신과 연결된 덕에 즉각적인 반응 속도는 빨랐다. 유식의 몸보다도 빨리 반응하는 덕에 유식은 아직까지 코앞에서만 쇠망치질의 위력을 느꼈다.
 ‘확실히 한 대만 맞아도 얼굴이 박살 나겠어. 겨우겨우 맞던 때의 감각과 경험을 살려 공격을 피하고 있다. 내 몸은 느릴 테지만 블루 체어가 부드럽게 이리저리 회피를 돕고 있다. 하지만 언젠까지 이럴 순 없어.’
 홉 고블린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유식에게 쇠망치질을 했다. 유식은 뒤를 보지 않고 계속해서 회피와 후진을 이어 가고 있었기에 어느 때라도 나무에 부딪힐 수 있었다.
 그때가 바로 머리가 으깨지는 때일 것이었다.
 “식스 매직 미사일!”
 유식은 약간의 틈이 생기자 얼른 마법식을 외쳤다. 그나마 얇아 보이는 홉 고블린의 옆구리에 발사한 것이었다.
 “크흐······ 제법이다마는, 부족해! 직접 부러뜨려 주마!”
 홉 고블린은 금세 충격에서 벗어나 이번엔 유식을 두 손으로 꽉 붙들려고 했다. 유식은 확 블루 체어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과격한 각도로 이리저리 블루 체어를 꺾으며 말이다.
 최대한 홉 고블린의 넓적한 몸매를 역이용해야 했다.
 ‘이제 도망가야지 별수 있나! 나무 사이로 도망치면 잠시간은 버틸 수 있다.’
 유식이 도망치자 홉 고블린과 고블린들은 신이 나서 유식을 쫓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홉 고블린 앞에선 별다른 위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론 유식이 아직 수준 낮은 마법사이기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끼리리! 역시 형님이시다! 겁먹어서 도망간다! 사냥을 다시 시작하자!”
 “끼리히! 인간의 피! 인간의 피!”
 “쫓아라!”
 유식은 열심히 도망치면서 또 다른 마법식을 생각해 냈다. 매직 미사일과 라이트닝 볼트 모두 홉 고블린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때문에 아예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 하나만 개조해선 안 돼!’
 홉 고블린은 유식이 자신에게 이길 가능성이 없어 도망간 걸 알았다. 때문에 그는 유식에게 흥미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다른 고블린들은 얼마든지 유식과의 추격전을 이을 의향이 있었다. 그들에게 인간 마법사를 압박하는 것은 보통 희열이 아니었다. 홉 고블린도 혹시 몰라 고블린들과 함께 유식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한번 해 보자! 프로그래밍도 일단 생각한 걸 시도라도 해 봐야 성공할 수 있어. 어차피 다른 묘안도 없고. 실패한다면······ 뭐, 그건 그때 가서!’
 유식은 혼신을 다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체화시켰다. 위기 상황 중에 목숨 걸고 시도하니 전보다 훨씬 진행 속도가 빨랐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가속의 실체였다.
 ‘됐다! 전번 개조식의 노하우를 응용했어!’
 휙!
 유식은 급히 뒤돌아서며 과감히 홉 고블린을 노려봤다. 놈은 순간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시 스윽 쇠망치를 치켜들었다. 고블린들은 한껏 숏 소드를 내민 채 우르르 유식에게 몰려들었다.
 “라이트닝 미사일!”
 유식은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새 마법을 발사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유식의 손가락으로부턴 전력에 휩싸인 매직 미사일이 발사됐다.
 치지직!
 라이트닝 미사일은 그대로 홉 고블린의 얼굴에 적중됐다. 놈은 강렬한 충격에 파르르 고개를 떨며 이내 그 육중한 몸을 쾅 뒤로 누였다.
 죽은 것은 아니었으나 버틸 수 없는 충격에 기절한 것이었다.
 “뭐, 뭐야! 대장님이!”
 고블린들은 홉 고블린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마법에 당한 걸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홉 고블린은 고블린들에게 무적의 상징이었다.
 “미, 미친! 대장님이 졌다! 도망가! 그분께 맡겨야 한다!”
 유식은 고블린들이 겁에 질려 도망가는 걸 보고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떳떳한 전투를 벌였다. 유식은 자신이 생사를 건 전투를 모두 버텨 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도 안 나네. 내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마법도 마법이지만, 난 생각보다 약하지 않은 놈인 것 같아. 분명 고 2때 난 맥없이 당했었는데. 그 전엔 싸워 보기도 전에 당했고.’
 유식은 손으로 스윽 땀을 닦으며 다시 숲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계속됐던 전투 탓에 온몸이 고단했다. 고블린들이 도망갔다곤 하나 언제 또 위험 상황이 닥칠지 몰랐다.
 “음?”
 그런데 어느 순간 유식의 블루 체어는 턱 이동을 멈추었다. 몸 또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아등바등거려도 몸은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뭐지? 마치 다리의 불편함이 온몸에 퍼진 듯한 느낌이야. 블루 체어는 멀쩡한데? 왜 몸도 블루 체어도 안 움직여지는 거야? 뭐야!’
 짤랑. 짤랑.
 그때 유식의 측면에서 의문의 존재가 천천히 접근해 왔다. 묘한 허브 냄새를 확 풍기는 그 의문의 존재는 살며시 유식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또 다른 고블린이었다.
 “끅!”
 그 의문의 존재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유식의 작은 살점을 콰득 뜯어냈다. 그는 고블린 샤먼이었다. 인간과 고블린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고블린과 인간의 얼굴을 이용해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는 기괴한 존재였다.
 “인간. 너는 상당히 잘 우려낸 고통을 품고 있구나. 맛있겠어······ 배부르겠어······. 이 정도면 벌을 받기에 충분한 고통이야······. 끼호오오.”
 유식은 허벅지에서 따가운 고통이 전해짐을 인지했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슬슬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블린 샤먼은 독한 향을 유식의 얼굴에 흩뿌리며 품으로부터 녹슨 단검을 스윽 꺼냈다. 유식은 내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긴박한 상황에도 계속된 전투 탓에 정신은 너무나도 피곤했다.
 “네게도 가르쳐 주리라. 인간은 우리의 영역을 맘대로 침범해도 되고 우리들은 너희들의 마을에 얼씬도 못 하는 그 불공정의 결과를! 끼로호!”
 
 
 
 * 노마법사의 가르침
 
 
 
 강렬한 향은 불쾌한 녹색 고통이 되어 유식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싸우느라 피곤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젠장,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더더욱 고통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면 안 돼······.’
 유식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자신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있는 존재는 차분히 유식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순 없지! 몸은 약골이라도 독기는 자신 있다. 내가 어떻게 그 빽빽한 컴퓨터 코드를 독학하고 이해했는데!’
 유식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강렬하고 선명한 날카로움보다는 답답하고 짜증 나는 간지러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불쾌한 간지러움은 온 내장 사이에서 춤을 추며 점점 더 축적되고 굵어졌다.
 하지만 유식은 그간 프로그래머로서, 몸이 약한 사람으로서 꾸준히 정신력을 키워 왔다. 단지 그간은 상처투성이라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해 겁쟁이처럼 살았던 것이었다.
 유식은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으으······.”
 향이 머릿속 전부를 덮은 것만 같았다. 유식은 이를 바락 물었다.
 고블린 샤먼은 떼어 낸 유식의 살점을 미리 준비해 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보관해 놓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두개골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차분히 훑었다. 고블린 샤먼의 눈이 더욱 연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큭.”
 “괜찮아. 비명을 질러! 내게 고통의 양식을 다오. 요리되어야만 해! 끼로호오······.”
 이후 고블린 샤먼은 단검으로 유식의 팔을 살며시 그었다. 유식은 녹색으로 덮인 답답함 중에서 한순간 엄청난 지진이 읾을 인지했다. 지진은 점점 커지며 유식의 온 정신을 깨뜨려 가기 시작했다.
 털썩.
 유식의 정신이 흔들리며 블루 체어의 소환이 해제되었다. 유식은 굳은 그 상태에서 돌처럼 바닥에 넘어져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고블린 샤먼은 꼬인 쾌락을 즐기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거만하게 유식을 내려다봤다. 유식은 정신력으로 버티며 끝까지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느껴지나? 숲에 갇혀 답답해하는 우리 종족의 슬픔이······ 너희들의 문명은 문명이고 우리들의 문명은 야만적인 것인가? 어째서 너희들은 우리의 것을 무시하는가!”
 유식은 당연히 고블린 샤먼의 연설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유식의 온몸은 향만으로도 완전히 마비되고 깨져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유식의 정신력은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독한 향의 효과와 최대한 싸우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유식이 악몽에 접어들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허어······ 네놈의 고통이 굵고 질긴 만큼 배부르겠구나! 더 버텨 보거라.”
 고블린 샤먼은 향의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 지팡이를 치켜들고 나뭇잎이 바람에 휘날리듯 살며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점점 더 진한 녹색 기운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유식은 점점 더 가련하게 떨었다.
 쉐엑!
 그 순간 고블린 샤먼의 주변으로 화살이 날아와 주변에 있던 나무에 박혔다. 고블린 샤먼은 깜짝 놀라 지팡이로 몸을 보호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즉각적으로 화살을 쏜 존재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땅을 미세하게 울리는 무리의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블린 샤먼은 침을 한 번 뱉은 후 얼른 유식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네놈은 오늘 못 먹겠구나! 하지만 곧 단체로 찢어 먹어 주마! 끼로호!”
 “잡아라! 숲의 질병 같은 놈이다!”
 “사람이다! 어서 구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부터는 한 무리의 인간 자경대가 우르르 달려왔다. 멋들어진 아이언 갑옷을 두른 기사 한 명을 비롯해 스무 명가량의 무리였다.
 “괜찮으십니까?”
 기사는 얼른 유식에게 달려와 그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유식에게는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유식은 정신이 거의 넘어가려는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쫓아라! 그놈을 잡아야 더 이상 숲에서 사람들이 실종되지 않을 것이다!”
 “가자! 놈을 잡자!”
 기사의 명령으로 열 명가량의 인원이 다시 고블린 샤먼을 쫓기 시작했다. 얼핏 상황을 보니 이미 고블린들을 겨냥하고 숲으로 진입한 무리 같았다.
 기사는 유식의 생체 신호 몇 개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길, 고블린의 독에 걸렸다! 출혈도 있어!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빨리 마을로 돌아가자!”
 “들것 꺼내! 부상자를 운반한다!”
 그 말에 그들 중 하나는 등에 메고 있던 들것을 꺼내 유식을 그 위에 얹었다. 기사는 손을 거들며 최대한 빨리 유식을 마을로 옮기려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람 목소리 같은데. 시야가 모두 초록색이다, 빌어먹을.’
 유식은 오로지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들것에 실은 존재가 우호적인 무리이길 간절히 바랐다.
 유식은 마법을 사용한 피로에 주술의 고통까지 얹어져 더 이상 의식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유식은 잠에 빠져들었다.
 
 
 
 “음······.”
 유식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따뜻하고 안락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유식은 벌떡 일어나 허벅지의 상처를 어루만져 보았다. 제법 꼼꼼하게 응급치료가 돼 있는 상태였다.
 그가 있는 곳은 조용한 방 안이었다. 일단 아직까지는 모든 정황이 친절하고 우호적인 색채들이었다. 유식은 긴장을 놓지 않으며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방 안에는 기분 좋고 착한 향이 감돌고 있었다. 고블린 샤먼이 유식의 얼굴에 흩뿌린 것과는 대조되는 향이었다.
 “젊은이. 몸은 좀 어떤가?”
 유식은 이내 방 안에서 조용히 그를 지켜보던 노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노인은 엷은 고통이 스며든 주름 진 얼굴의, 인자한 미소를 지닌 호인이었다. 그는 유식에게 따뜻한 마실 것을 건네며 차분히 웃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를 숲에서 구해 주신 분인가요?”
 “허어허, 아니야. 그건 우리 마을의 듬직한 기사, 제네큰이었어. 마을을 위해 부단히 애쓰는 고마운 청년이지. 고든의 유일한 기사이기도 하고. 난 슐튼이라고 하네.”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혹시 여기가 숲 주변에 있다던 고든 마을인가요? 지도엔 그렇게 나와 있던데······.”
 “허허, 맞아. 이곳을 찾아오려다가 고블린들을 만난 것이로구먼. 고약한 놈들이지. 제네큰이 마침 고블린들의 위치를 알아차리고 젊은이를 찾아 다행이었어. 조금만 늦었어도 악몽에 정신을 빼앗길 뻔했으니까! 허허.”
 ‘역시 놈들의 명칭은 고블린이구나. 그들의 언어를 알게 되면서 동시에······. 흠.’
 유식은 유여곡절 끝에 자신이 방문하려 했던 고든 마을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유식을 구해 준 무리는 우호적인 무리였으며 이 마을의 작은 자경대였다.
 ‘다행이다. 그 괴물 같은 놈이 이상한 화학물질로 날 마비시켰었어. 게다가 광기에 가득 차서 원하는 것이라곤 내 고통과 죽음뿐이었지. 이분들은 은인이다. 또 모르는 것들을 여러 가지 물어볼 수 있겠어.’
 유식은 살아오면서 딱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몇 번 조언을 건네준 선배 해커들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동정이나 외면을 받았으면 받았지 호의는 유식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때문에 유식은 현재 고든 마을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목숨을 구해 준 것이었으니 울컥할 정도로 고마웠다. 유식은 내내 숲 속에서 홀로 고블린들과 대치하며 두렵기도 했지만 외롭기도 했었다.
 고블린들을 상대하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이 그리워진 것이었다.
 아직까지 유식이 슐튼이나 고든 마을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당장 본인 사정이 급했기에.
 하지만 유식은 앞으로 어떻게든 도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울 수 있단 건 내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걸 뜻할 테니까. 처음으로 프로그래밍 외의 길로도 인정받고 싶다. 마법을 배워 그런가. 이젠 세상이 다시 궁금해졌어. 특히 이곳은 이상하고 무서운 일도 많지만, 동시에 뭔가 흥미롭기도 하다. 회복되면 쫓아내지만 말아 다오.’
 털컥.
 슐튼이 유식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는 사이 방 안으로 기사 제네큰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음에도 떡 벌어진 어깨와 굵은 체격을 지닌 듬직한 사내였다. 사각진 턱 선과 잘생긴 얼굴 또한 더더욱 그가 기사임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젊고 멋있는 사나이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고블린 독이 너무 깊이 배지 않았나 걱정했습니다. 정신이 든 걸 보니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하하!”
 호탕하게 웃는 제네큰에 유식은 호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유식을 구했다고 해서 생색을 내거나 하지 않았다. 과연 슐튼의 말대로 듬직하고 남자다운 기사였다.
 제네큰은 유식이 내내 동경하던 인물상을 지니고 있었다. 강하면서 남을 도울 줄 아는 자. 항상 유식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 생각했다.
 “감사드립니다. 큰 빚을 졌네요. 제 이름은 유식입니다!”
 “아! 전 제네큰입니다! 하하, 옷이 멋있네요. 먼 곳에서 오신 분 같은데 편히 쉬다 가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절 찾으시고요!”
 유식은 예의를 갖추기 위해 먼저 이름을 말했다. 기사와 슐튼도 자신의 이름을 재차 말하며 유식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유식은 내성적이지만도 않은 사람이었다. 단지 몸의 불편과 주변 환경 때문에 외톨이로 지내왔던 것이었다.
 그들은 유식의 이름과 옷이 매우 이국적이라고 생각했다. 생김새도 그랬고 말이다.
 “아, 이 청년은 원래 실력이 좋은 기사라 이런 변방 말고 도시로 진출하거나 귀족을 섬겨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고향에 남았다네. 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허허, 얼마나 대견해.”
 “정말 그러네요. 기사라고 들었는데 마을을 위해 힘쓰는 모습이 참 멋있습니다!”
 “하하하! 아이, 아닙니다! 하하하!”
 제네큰은 다시 마을 주변의 순찰을 돌아야 한다며 곧 방에서 나갔다. 씨익 웃는 것이 참으로 호쾌한 사내였다.
 유식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기사를 봐서 기분이 좋았다.
 ‘중세 시대의 탐욕적이고 잔인한 칼잡이들이 기사의 실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기사도를 품은 사나이도 있구나. 이런 경험도 하고. 나쁜 것만은 아니네, 흐흐.’
 유식은 본격적으로 이곳의 사람들을 알아가게 됨에 알 수 없는 재미를 느꼈다. 본래는 만나 보지도 못할, 역사로만 접했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스스로에게 좀 더 떳떳한 상태에서 만나니 더더욱 반갑기만 했다. 유식은 마치 막 번데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나비와도 같았다.
 “그럼 그 마르고 작은 괴물들이 고블린이라는 거지요?”
 “그렇지. 아주 고약해. 어떻게든 토벌을 해야겠지만 마을의 사정상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항이라······. 나중에 듣겠지만 그 때문에 큰 작전을 마을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네, 허허.”
 슐튼의 씁쓸한 웃음을 보며 유식은 더더욱 돕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호인을 귀하게 여기는 자가 바로 유식이었다.
 분명 좋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아직 확신할 순 없었지만 슐튼은 좋은 사람의 향기를 풍겼다.
 “그런데 독에 능하신가 봐요? 제가 직접 겪어 봤는데······ 정말 독하던데요, 하하! 대단하세요. 지금은 완전히 해독된 것 같아요. 보아하니 방에 책과 실험 도구도 많으시고.”
 “아아, 연금술보다는 마법이야. 힐링과 디포이즌 마법을 사용했지.”
 “예? 마법요?”
 “허허, 그렇다네. 이래 봬도 1성 3각의 마법사야! 허허.”
 머리를 긁적이며 귀엽게 자신이 마법사임을 자랑하는 슐튼에 유식은 한껏 반가운 표정을 했다. 정령의 목소리가 사라져 버린 이후론 어떻게 마법을 발전시켜 나갈지 막막했었다. 매직 미사일과 라이트닝 볼트를 개조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유식은 꾸벅 슐튼에게 인사를 올렸다. 일단 잘 보이려는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사실 저도 마법사예요. 아주 얕은 수준의 초보긴 하지만요······ 헤헤.”
 “오오, 정말인가? 놀랍군. 하기야, 마법사라도 주술엔 약한 경향이 있지. 혹시 경지를 물어봐도 되겠나?”
 “경지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음? 본인의 경지를 모른다고? 음······ 그런가.”
 슐튼은 유식을 의심하진 않았으나 못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떤 마법사가 자신의 경지를 모른단 말인가. 그 하나하나의 단계마다 나타나는 차이가 엄청날진대 경지에 무심할 리 없었다.
 “허허허. 그럼 괜찮다면 서로 마법을 보이도록 할까? 자신 있는 마법을 말이지.”
 유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의 도움 없이는 새로운 마법을 배우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저 프로그래머의 재능으로 개조를 할 뿐이었다.
 유식은 노마법사 슐튼이 새로운 마법을 보여 줄 거라 기대했다.
 ‘설렌다. 어떤 마법을 보여 주실까? 가르쳐 달라고 하면 화내시려나?’
 “플레어!”
 슐튼은 손바닥에 작은 불을 띄웠다. 별것 아닌 듯 보이면서도 대단한 마법이었다. 분명 열기를 뿜는 작은 불이 꾸준히 슐튼의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우와아아······.”
 유식은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슐튼이 손바닥에 띄운 불꽃을 유심히 관찰했다.
 “······정말 놀랍습니다!”
 유식은 슐튼의 허락을 받고 주변에서 쓸모없는 종이를 가져와 슐튼의 손바닥에 그것을 가져다 댔다. 예상대로 종이에는 불이 붙었고 유식은 더더욱 놀란 눈을 지어 보였다.
 “정말 신기합니다! 어떻게 사람 손에서······ 게다가 이 온기나 종이가 타는 걸 보면 진짜 불이에요!”
 유식은 이미 마법을 겪었으나 여전히 플레어가 신기했다. 그가 깨친 3가지 마법과 실제 불을 띄우는 플레어 마법은 분명 다른 느낌의 마법이었다. 유식은 마치 중수 시절 대면했던 고수 수준의 알고리즘을 읽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초보적인 마법이었음에도 말이다. 아마 새로움 때문일 것이다.
 “허허, 간단한 마법인데 이리 좋아해 주니 이 늙은이도 기분이 좋구먼. 미약한 재주라네.”
 슐튼은 유식이 이토록 감명 깊게 자신의 마법을 감상하고 있단 사실이 자못 만족스러웠다.
 유식은 놀라워하면서도 수십 번이나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나이로 보나 마법으로 보나 분명 나보다 훨씬 마법에 능하신 분이다. 아까 뭐라고 하셨지? 1성 3각이었나? 분명 나보다 높은 경지일 거야. 이분한테 꼭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그래야 늘 것 같은데. 갑자기 부탁하면 무례하려나? 수업비라도 내야 되나? 돈도 수입도 없는데······ 아아.’
 유식은 슐튼의 눈을 바라보며 잠깐 사유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마치 오랫동안 마법을 알아 왔던 것처럼 마법에 친숙해. 목소리가 내 안에 선물을 심어 놔서 그런 거겠지? 전이라면 미친 소리라고 쉽사리 치부했을 텐데.’
 상식이 깨지거나 바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자마다 상식의 범주가 다르기에 때때로 사람들은 논쟁하고 갈등한다. 그만큼 상식이란 고집스러운 부문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오감과 경험 또한 매우 강한 설득력을 지닌 요소였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경험한 것은 설사 단단하게 굳어 있던 상식에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대단합니다. 그럼 언제부터 마법을 터득하셨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나는 어린 소년 시절부터 마법을 연마해 왔어. 솔직히 말해 타고난 재능은 없었지만 마법이란 게 참 신기했지. 게다가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고.”
 유식은 굳이 슐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마법사에게 그 개인적인 이유의 실체를 묻지 않았다. 슐튼의 얼굴에서 엷은 씁쓸함을 봤기 때문이었다.
 유식은 차차 슐튼과 친해지며 조심스럽게 마법을 배워도 되느냐는 제안을 할 작정이었다. 유식은 모진 심부름을 해서라도 꼭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마법을 3개만 알고 있어도 상당히 편하고 즐겁다. 하지만 더 배울 수 있다면······ 어찌 그 길을 마다하랴. 마치 프로그램 내에서 쓸 수 있는 명령어가 3개인 것과 그 이상인 것의 차이겠지.’
 유식은 신이 났다. 당장 본래의 현대로 돌아가야 한다면 못내 아쉬울 정도로 유식은 흥미가 동한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 전 아는 마법이 많지 않습니다. 지식도 거의 없는 편이고요. 하지만 슐튼 마법사님의 마법을 보고 문득 느낀 건데······ 마법의 종류는 거의 무한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이네! 나는 1성 3각의 마법사라 펼칠 수 있는 마법이 한정돼 있긴 하지만······ 예컨대.”
 슐튼은 다시 마나를 끌어모았다. 수준은 낮아도 오랜 세월 반복한 덕에 그는 비교적 재빨리 마나를 재배열할 수 있었다. 슐튼은 손에서 작은 난로처럼 타오르던 불꽃을 꺼트렸다.
 “라이트닝 볼!”
 파지직.
 이번에 슐튼의 손에 나타난 건 둥근 구球에 갇혀 활발히 움직이는 전류였다. 유식은 다시 한 번 감탄을 내뱉었다.
 슐튼에게 유식은 박수를 치며 존경을 표했다. 노인 앞이라 그런지, 유식은 긴장하지 않고 천진난만할 정도로 자신의 놀라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도 그렇지만, 사람 손에 결착된 전류를 보는 것이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일반적으로 전류를 볼 기회는 밤하늘에 친 번개 정도였으니 말이다.
 ‘라이트닝 볼트와는 또 다른 느낌이야. 공 같은 곳에 전류가 갇혀 있다라······. 한시라도 빨리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으으!’
 유식은 슐튼에게 허락을 받은 후 잠시 손가락을 라이트닝 볼에 가져다 댔다. 그리 강한 전류는 아니었다.
 “크윽!”
 “허허허, 따가울 거야. 장난기가 있구먼?”
 오랜만에 장난기가 발동한 유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슐튼의 마법은 마치 블루 체어처럼 계속해서 지속되는 마법들이었다.
 한순간 발사되고 사라지는 유식의 2가지 호신 마법과는 사뭇 다른 안정감을 지니고 있었다. 유식은 오랜만에 욕심이 생겼다.
 “멋있습니다, 슐튼 마법사님. 제가 못 봤던 것들이라 참 새롭고 신기합니다. 저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마법은 참 오묘한 것 같습니다!”
 “나도 처음 마나를 느끼고, 또 성공적으로 마나를 재배열했을 땐······ 부끄럽지만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 허어허.”
 “이리 정정하신데, 또 어떤 분야에 대해 열정을 가지신 걸 보니 부럽습니다. 본받고 싶습니다.”
 유식은 슐튼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했다. 꽤 고령의 나이에도 슐튼은 마법이란 고등하고 신비로운 학문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슐튼의 순진한 학문 추구를 보며 유식은 묘한 공감을 느꼈다. 그도 처음 프로그래밍을 시작했을 때 슐튼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실력에 반비례해 사그라진 눈빛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1성 3각이란 건 등급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서요.”
 “아아, 모호하게 알아서 본인의 경지를 몰랐던 거였나. 그러하네. 마법사에겐 등급이 있지. 일곱 개의 별이 일곱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형식이야. 물론 모든 별을 채운 8성의 현자는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단다.”
 “오호라. 역시 각각 별마다 7개의 뿔이 채워지는 형식이네요.”
 “그래. 난 아직 별이 한 개라 보잘것없어, 허허.”
 “아닙니다. 마법사이신 것만 해도 대단하신데요, 뭘.”
 슐튼은 오랜만에 유식에게 온갖 칭찬을 들어 내심 싱글벙글이었다. 유식의 칭찬과 감탄은 모두 진심이었고 그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슐튼은 이방인인 유식이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식이 느끼는 것처럼, 슐튼도 유식으로부터 비슷한 성향을 느꼈다. 무언가에 순수하게 몰두하는 성향 말이다.
 슐튼은 곧 유식이 어떤 질문을 할지 예상했다.
 “저······ 혹시 평소에 많이 바쁘십니까?”
 “꾸준히 마법을 연마하고 공부를 해 나가고 있긴 하지만,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언제든 환영이네. 오전 시간만 아니면 괜찮아. 허허.”
 “감사합니다! 절 보조라 생각하시고 꼭 심부름 같은 거라도 시켜 주십시오! 제가 편해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정식으로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지금은 허접스러운 수준이거든요.”
 유식은 더더욱 마법에 대해 깊게 파고들고 싶었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요소였다. 유식은 마법에 관해 이야기하며 살며시 손을 떠는 자신을 발견했다. 신이 나서 흥분한 것이었다. 컴퓨터 이후로 또 다른 열정을 찾은 것 같았다. 유식은 심장이 경쾌하게 뛰는 걸 느꼈다.
 “저어, 그런데 그 마법사의 등급은 어떻게 측정하는 건가요? 살짝 궁금해져서요, 헤헤.”
 “음, 내가 직접 살펴볼 수 있지. 마나에 관한 반응도를 보는 마나 리액션 마법을 걸어 대략의 재능과 수준을 알아내는 방법이야.”
 “아! 그렇군요. 부탁드립니다.”
 유식은 씩씩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슐튼은 손자같이 친숙히 행동하는 유식을 보며 얇게 미소를 지었다. 유식은 도움을 받은 은인에게 평범하지 않은 친숙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나 리액션!”
 슐튼은 유식에게 반응도를 극도로 높인 마나를 쏘아 보냈다.
 즈웅!
 슐튼이 마법을 시전하자 순간 유식으로부터 강력하고 푸른 전류가 뿜어져 나왔다. 푸른 전류는 또 다른 전류를 잉태하며 허공에 푸른 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멈추지 않고 푸른 원은 7개의 원으로 갈라져 각각마다 7개씩의 선을 뿜어냈다. 마치 질서 정연한 별들 같았다. 그러한 별들 중 오로지 1개의 별과 그 별의 1개 뿔만이 초록빛을 띠었다.
 잠시 후 허공을 수놓던 푸른빛들이 사라지며 대기는 다시 잠잠해졌다.
 유식은 어안이 벙벙했다. 결과는 그가 봐도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슐튼의 표정이 돌처럼 굳은 상태였다. 경악한 것 같았다.
 “마, 맙소사.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것은 천재의 재능 정도가 아냐! 마나 그 자체와 완전히 동화하는 모습인데? 혹시 태생이 어떻게 되는가? 아니, 선조 중에 하이 엘프가 있는지? 아냐, 그래도 인간과 피가 섞이면 마나 순화도가 반 토막일진대······. 이 어찌?”
 “아······ 죄송합니다. 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요.”
 “맙소사. 지금 수준은 1성 1각의 아주 낮은 수준이지만······ 자라날 배경이 너무나도 방대해. 믿기지 않네!”
 유식은 까무러치듯 놀라는 슐튼의 모습에 같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유식은 천재의 가능성마저 넘어서는 마나 순화도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재능이었다.
 유식은 문득 목소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화될 거라 했어. 마법을 가르쳐 준 그 정령을 소화해서 이토록 대단한 반응이 나오는 거구나. 여러모로 엄청난 선물을 준 거네. 난 그저 살기 위해 받아들였던 것뿐인데······. 다시 말을 나눌 수 있다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
 “반갑네, 반가워이. 아아,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설사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분명 가능할 거야!”
 슐튼은 갑자기 유식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연신 위아래로 흔들었다. 유식은 얼떨떨해하며 슐튼의 눈빛을 읽어 냈다.
 ‘뭐지? 마을의 큰 계획이란 걸 말씀하시는 건가? 좋아, 이렇게 반가워한다면 분명 마법도 더 배우게 되고, 그건 곧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다는 거야.’
 유식은 더 이상 세상에 나가는 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마저 느꼈다. 유식에겐 지금이 기회였다.
 
 밤하늘의 아름다운 달과 별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추억을 떠올리며 밤하늘에 감정을 던질 것이고, 어떤 이는 별자리를 외며 밤하늘과 친숙해질 것이었으며, 어떤 이는 더더욱 깊게 들어가 천문학을 공부할 것이었다.
 유식은 중간 정도에 머무는 자였다. 그는 밤하늘을 아름다워하긴 했으나 깊숙이 공부하진 않고 그저 중요한 별자리 몇 개를 외워 놓는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 보는 밤하늘이야. 도저히 아는 별자리가 없다. 모두 뒤죽박죽이야. 게다가 달과 더불어 알 수 없는 위성 몇 개도 희미하게 엿보인다. 대체······ 분명 중세부터 현대란 짧은 시간 안에 저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날 순 없어.’
 유식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가설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곳의 기본적인 환경과 대체적인 인간들의 모습은 분명 유식이 알던 현대와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높이 뛰면 중력 때문에 다시 땅으로 몸이 내려왔고 시간이 지나면 해가 지고 밤이 왔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는 기괴한 현상과 특징도 있지.’
 현대와 겹치는 공통점에 더해, 유식은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일들을 겪었다.
 우선 생전 처음 보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결코 인간과 같지 않은 고블린들을 만났고, 또 알고 있던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마법을 경험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한 경험들이 시사하는 바를 유추했다.
 ‘아예 다른 세계다.’
 물론 이러한 유추는 시간 여행을 넘어선 더더욱 막연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제껏 유식이 경험한 바로 보면 그렇게 허무맹랑한 가설도 아니었다. 현대로 전해지지 않은 사실들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고 말이다.
 ‘마치 법처럼 통일돼 있는 마법 등급까지 존재할 정도면 분명 마법이 만연하게 알려져 있다는 뜻이다. 그 얘기인즉슨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은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것. 소수의 비밀이 아닌 다수의 공공연한 사실이니, 그토록 유용한 것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유식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전에 품지 않았던 가설에 무게를 실은 것뿐이었다.
 유식은 항상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분명한 결과 값이 나오지 않는 한, 한 번 더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 봤다.
 “하암!”
 유식은 현재 선선한 공기가 감도는 슐튼의 집 옥상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블루 체어는 대지에서 약간 뜬 상태로 유식을 옮겨 주기에 계단 등에도 이동이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작은 고든 마을의 밤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 램프를 두고 슐튼에게 빌려 온 책 몇 권을 살피기도 하며 말이다.
 “대체 그 목소리의 정체는 뭐였을까? 내가 깨졌기 때문에 나한테 소화될 수 있다고 했어. 불청객이라고도 했지. 그걸 보면 역시 다른 세계가 맞는 건가······.”
 유식은 목소리가 남겨 준 선물 중 하나인 언어 부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분명 언어 각성을 심어 놨다곤 했지만 유식이 얻은 언어 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유창하고 풍부했다.
 ‘마치 모국어처럼 대화를 나눴다. 사람뿐만 아니라 괴이한 고블린들과도! 확실히 한국어나 영어를 말하는 느낌은 아니었어. 너무 자동적이라 당시엔 크게 의식하지 않았지. 그게 더 놀라워. 내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다니.’
 유식은 마지막으로 약간 불길한 걱정을 했다.
 ‘목소리의 호의를 오해하긴 싫다만, 내 안에 뭘 남겼는지는 확실치가 않아. 꼭 좋은 것들만 심어 놨다고 확신할 순 없어. 난 그 목소리의 잔존 전체를 소화했으니까······.’
 유식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목소리를 소화한 덕에 빠르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친숙도를 이어받아 발현으로 활성화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에 더해 유식은 마법의 경험으로 인해 점점 더 내면의 자신감을 바깥으로 끌어내고 있는 상태였다.
 한시라도 빨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보다는 마치 여행을 즐기는 듯 보이는 유식이었다. 그만큼 그는 골방에 갇힌 스스로를 답답해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젠 스승님 덕에 확실히 마법 실력을 늘릴 수 있게 됐어.”
 유식은 슐튼에게서 빌려 온 책 한 권을 펼쳤다. 그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이곳 언어를 통한 독서나 필기 역시 유창히 해낼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원리에 의거하여 34형식으로 재배열한다. 그리하면······.”
 유식은 졸음을 쫓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내 책을 읽었다.
 독학에 자신이 있는 유식이었다. 그간 무식하단 소릴 듣지 않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외에도 기본 고등 과정을 독학으로 꾸준히 공부해 왔다. 잘 찾아보면 온라인으로도 꽤 수준 높은 강좌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 그렇다는 건.”
 유식은 몇 시간가량 독서에 집중한 결과 신비로운 사실을 깨칠 수 있었다. 원래 무의식에 심겨 있던 기본 지식과 감각이 독서로 보충된 것이었다.
 알고리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니 각각의 단계별 속성이 큰 그림에서 더 분명히 드러났다. 이러한 접근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특징이었다.
 ‘일단 몸통은 내가 알고 있는 기본적 공식과 과학 원리들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는 거의 반대된다고 할 만큼 독특한 형식을 지니고 있어. 줄기는 같지만 가지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대조된다. 마나가 법칙의 가지들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비튼다고 보는 게 맞겠지.’
 유식은 책에서 이런 지식들에 관한 증명을 못 찾았다.
 하지만 그가 살던 현대와 마찬가지로 가장 원초적인 지식은 사실 증명 자체가 불가한 경우가 많았다. 단지 실험이나 경험을 통해 꾸준히 확신의 정도를 늘려 가는 수준이었다.
 ‘이 책이 사실이라면······ 내가 알던 학문은 오류를 통해 지식을 수정해 가는 실패와 성공의 학문이고, 마법은 오로지 무한한 재배열의 가능성 중 딱 맞는 길의 재배열 형식을 따라야 성취할 수 있는 실패 혹은 성공의 학문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처럼 기반이 튼튼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꽃필 수 있다. 마치 개조 마법식처럼.’
 유식은 마법의 실체가 제법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일단 알맞은 길을 찾으면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열렸다. 경험하고 지식을 접하니 더더욱 이해가 잘 되었다.
 ‘좋아, 아직은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곧 프로그래밍처럼 인정을 받으리라. 또한 NASA 때처럼 내 실력을 인정받고 쓰임 받으리라. 이번엔 좋은 끝을 향해서······.’
 유식은 한참 동안이나 슐튼과 대화를 나누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유식은 슐튼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슐튼은 이론적으론 존재하지 않아야 할 만큼 강렬한 재능의 소유자를 가르치게 되어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유식과 슐튼, 둘 모두에게 좋은 결정이었다.
 둘은 사제지간으로 서로를 알아갈 것이었다. 또한 슐튼은 유식에게 중대한 프로젝트의 협력을 제안했다. 유식은 내막을 알지 못한 채 반쪽짜리 동의를 했고 말이다.
 ‘너무도 고마운 분이다. 내 생명을 구해 준 것도 모자라 마법까지 가르쳐 주겠다니! 정말 좋은 사람 같아. 이제야 용기 내 세상 밖으로, 사회로 나왔는데 그 첫 인물이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그분의 큰 계획이란 걸 반드시 성공시키겠어.’
 유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자신만이 펼칠 수 있는 특기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그러자 한 가지가 곧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프로그래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마법적 알고리즘 접근법.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새로운 길이었다.
 유식은 무의식 속에서 거대하고 푸른 변혁을 꿈꿨다. 컴퓨터의 바이너리 원리와 알고리즘은 전산 정보 안에서만 머물지만, 마법의 마나 원리와 알고리즘은 세상 전체에 펼쳐지리라.
 유식은 새로운 무대에 자신을 꽃피울 것을 다짐하며 벌러덩 드러누워 시원한 기지개를 폈다.
 “키르르.”
 자신 위를 맴도는 굵직한 녹색 파리 몇의 눈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이다.
 
 
 
 * 골렘
 
 
 
 
 추상적인 개념을 실체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유식은 슐튼의 저택 빈방에서 열심히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슐튼에게 마법을 배운 지 2주일이 다 되어 가는 때였다.
 마법에 관한 상식으로 보면 무의미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식의 행보는 가능성 자체가 달랐다. 때문에 유식은 벌써 수십 가지 마법을 터득한 상태였다.
 ‘블루 체어는 분명 평범한 휠체어를 훨씬 뛰어넘는 마법체다. 하지만 개조가 필요해. 스승님께서 지난번 블루 체어를 보고 상당히 놀라워하셨다. 1성 1각의 수준으론 보이지 않는 마법 같다고. 나만의 접근 방식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겠지.’
 유식은 더 이상 목소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 존재는 유식의 정신 안으로 소화된 상태였기에. 때문에 유식이 품는 모든 프로그래머적, 마법적 접근법을 면밀히 그리고 즉각적으로 고쳐 줄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스승님이 계신다. 즉각적이고 완벽하진 않아도 충분히 설명하면 내가 단계마다 뭘 하려 하는지 이해하신다. 시간을 두면 내가 원하는 충고를 받으며 다음 탈것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
 유식은 블루 체어를 좀 더 빠르고 유연하게 개조시킬 생각이었다. 그간 배운 수십 가지의 마법을 블루 체어에 삽입할까도 생각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정형화된 마법은 서로 공식이 닮아 있지만 블루 체어의 경우 완전히 새로운 구조와 뼈대를 가진, 아예 새로운 종류의 프로그램과도 같다. 이쪽 방면은 따로 신경을 써야 해.’
 유식은 슐튼을 통해 기존의 마법을 개조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그것은 꽤나 실력 있는 소수의 마법사들만이 시도할 수 있는 일이란 걸 알았다. 마법 경지보단 논리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유식은 고등한 프로그래머였고, 애초에 마법을 시작한 배경이 창조적 프로그래밍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식은 매우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성장 곡선과 방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마법을 각각 혹은 서로 개조시키는 것은 물론, 논리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의 마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보자, 일단 바퀴를 4개로 늘려야 해. 하지만 이 부분에서 단순히 자동차 같은 4개의 바퀴를 지니는 건 휠체어에서 약간의 진보밖에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지에 떠 있단 걸 고려하면, 오히려 바퀴보단 4개의 균형 중점체를 다는 게 낫겠어. 그럼 어제까지 개조한 몸통에······.’
 유식은 차분히 머릿속으로 마법 알고리즘과 개조 설계도면을 조립해 온 덕에 이제 거의 블루 체어의 개조를 끝마친 상태였다. 자신의 불편한 다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안이니만큼 유식은 더더욱 간절히 작업에 몰두했다.
 중간중간 막힐 때마다 노련한 슐튼의 충고로 수월히 문제를 극복해 나갔고 말이다.
 ‘스승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내가 언제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열심히 했던 적이 있었던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이번 작업은 뭔가 흥이 나.’
 유식은 더 이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얻는 피곤함과 두려움에 집중하지 않았다. 되레 유식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연과 기회들에 감사하며 그간 안에만 쌓아 왔던 자신의 기능성을 맘껏 펼쳐 내고 있었다.
 차근차근 말이다.
 ‘자, 이제 바퀴에 의존하던 이동성을 4방향으로 흩어 놓아야 한다. 하지만 추진력을 높이기 위해 각각의 균형 중점체에 가속 요소를 넣어야 해. 아직까진 변환 푸시 마법이 최적합하다.’
 유식은 머릿속으로 그간 개조한 몸체와 새롭게 구안한 4개의 특수 바퀴를 연결시켰다. 자동차와는 또 다른 연동 구조를 가진 흥미로운 부양체였다.
 물리적 실험이나 연동 없이, 단순한 마법적 논리만으로 완성됐으니 기능에 비해 설계 시간이 매우 짧았다.
 ‘자, 완성됐어. 이제 속도도 1.5배로 빨라질 것이고 심하게 차체를 눕히지 않아도 얼마든지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거야.’
 유식은 뿌듯하게 개조된 블루 체어의 설계를 마쳤다.
 유식은 심호흡을 한 후 머릿속 공식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유식은 곧 이용할 탈것이 얼마나 편하고 유용할지 미리 상상해 봤다. 막상 성취하기 전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블루 버기!”
 유식은 마침내 언어의 권능으로 자신만의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하자 땅에 앉아 있던 유식은 쑥 허공에 뜨며 이내 새로 생성된 탈것 안에 안착됐다. 새로 생성된 마법체는 약간 길고 얇은 몸체를 지니고 있었다. 유식이 약간 누운 상태로 이용할 수 있게 설계된 것이었다.
 또한 블루 버기는 전후좌우로 독특한 특수 바퀴를 달고 있었다. 추진력을 바깥으로 뿜어내며 각각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형식이었다.
 “크흐.”
 유식은 신 나 하면서도 정신적 컨디션 일부를 뚝 떼인 듯한 피로를 느꼈다. 역시 블루 체어에 비해 블루 버기는 엄청난 마나 양을 필요로 했다.
 ‘마법적 체력을 늘려야 운용이 쉬워지겠어. 지금은 소환한 것만으로도 정신력을 거의 다 써 버렸다. 이번에 스승님께 보여 드리고, 급할 때 아닌 평상시엔 블루 체어를 써야겠어.’
 유식은 그래도 최대한 밝은 표정을 했다. 피곤하긴 했으나 이 기쁜 성취를 슐튼에게 보이고 싶었다. 유식은 대견하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
 유식은 슐튼에 관해 안타까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자신은 지능과 재능을 겸비해 수월히 마법을 성취해 나가는데, 슐튼은 고령의 나이에도 그저 그런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때문에 유식은 더더욱 슐튼과 성취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유식은 부드럽게 버기를 굴려 재빨리 슐튼의 방으로 진입했다.
 “스승님! 슐튼 스승님!”
 유식은 씩씩하게 슐튼의 방 문을 열었다. 성취를 보여 줄 생각에 집중한 나머지 출입하지 않기로 당부했던 오전 시간에 슐튼의 방 문을 열어 버렸다.
 “스승님, 저번에 보신 체어를 새롭게······!”
 기뻐하던 유식의 표정이 싹 식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엔 의문과 슬픔이 피어올랐다.
 방 안 침대에 누워 있는 슐튼의 복부가 파랗게 껌뻑이며 아주 천천히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통에 힘겹게 힐링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힐링 마법을 효율적으로 시전할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의 노력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스승님, 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허허, 큭! 새로운 마법이로구나. 잘했어. 그래도 조금만 이따가 오지······. 지금은 내가 곤란한데 말이야, 크흑.”
 “스승님······. 죄송합니다.”
 “아냐. 한 가지만 명심, 또 명심하거라. 절대 네 잠재성과 특기를 나 외의 사람에게 자랑하지 말거라. 너의 그 재능만 해도 수많은 질투와 고초를 불러올 것이다. 하물며 그렇게 빨리 마법을 개발, 개조할 수 있단 걸 알면······. 이리 오거라.”
 슐튼은 힘겹게 손을 뻗었다. 유식은 얼른 슐튼의 손을 잡고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슐튼은 식은땀을 흘리는 중에도 유식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유식은 힘겨워하는 슐튼으로 인해 가슴이 아팠다.
 ‘스승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래서 오전 시간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신 건가? 어찌 됐든 맞는 말씀이다. 나를 숨길 줄도 알아야 해.’
 유식은 조심스레 슐튼의 파란 상처를 살폈다. 심한 화상의 형태를 닮았고 들끓는 용암처럼 일렁이는 괴이한 상처였다.
 슐튼은 힘겹게 숨을 쉬며 최선을 다해 스스로에게 힐링 마법을 시전했다.
 유식은 이 순간 당장에라도 힐링 마법을 성취하고 싶었지만 비현실적 바람이었다.
 “스승님, 어떻게 된 겁니까?”
 “허허······ 허억, 벌써 이런 꼴을 보이다니 속상하구나.”
 “죄송합니다. 원래 이 시간엔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너무 보여 드릴 생각만 하다가······.”
 “아니다. 너의 기쁨이 내게도 전해지는구나! 잘했어. 사실은 매우 놀라운 성취란다. 단지 지금 내 상태가 이러해서······ 꺼흑.”
 유식은 슐튼의 손을 꼭 잡았다. 유식은 차분히 슐튼이 입을 열기까지 기다렸다. 사정을 말하기 싫거나 말을 할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리라.
 그를 알고 슐튼은 잠깐 동안 최대로 힐링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잠시 후 그는 겨우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긴 듯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래서 저번의 그 블루 체어를 개조한 거라고?”
 “네! 블루 버기입니다.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좋지.”
 유식은 슐튼이 자신의 성과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길 바라며 슐튼의 침대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유식은 피곤이 몰려오는 중에 한껏 정신력을 끌어 올렸다. 블루 버기의 성능을 면밀히 보여 줘야 슐튼이 대견해할 것이었다.
 “자아!”
 유식은 블루 체어로는 행할 수 없었던 부드러운 회전 동작을 뽐냈다. 블루 버기는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돌며 언제라도 방향 전환이 가능함을 드러냈다.
 또한 유식은 블루 버기를 정신으로 조종하는 턱에 자유자재로 방 어디에든 버기를 배치하게 할 수 있었다. 심히 눕혀도 블루 체어와 달리 떨어질 위험이 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블루 버기는 급추진이 가능했다.
 “오오, 놀랍구나. 허허허······ 중간중간 도움을 주긴 했다만 대체 어떻게 완성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구나.”
 “아이, 아닙니다, 헤헤헤. 스승님, 아프신 곳은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그래. 좀 잦아들어 이젠 버틸 만하구나.”
 슐튼은 힘겹게 유식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보거라, 유식아.”
 “예, 스승님!”
 유식은 다시금 슐튼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슐튼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려는 것 같았다.
 슐튼은 드디어 파란 상처의 고통이 완전히 잦아들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무리 격의 힐링 마법을 시전했다.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계속된 연습 덕에 슐튼은 꽤 많은 양의 마나를 재배열할 수 있었다. 노장의 능력이었다.
 “유식아. 보다시피 난 1성 4각 이상의 마나 양으로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마나 역류의 화상을 입었단다. 어찌 치료할 수도 없는 고약한 놈이지.”
 “마나의 역류요?자기 등급보다 높은 마법을 쓸 수 있습니까?”
 “책에는 절대 하지 말라고 나와 있는 사안을 내가 스스로 발견해서 시도해 버렸단다. 호기 어린 도전은 아니었고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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