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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의 정복자 1

2017.08.23 조회 319 추천 0


 링의 정복자 1부
 
 
 프롤로그
 
 
 “와! 와!”
 
 “로우 킥! 로우 킥!”
 
 프라이드(PRIDE) FC의 특설링이 마련된 도쿄돔에서는 타원형의 돔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급격한 인기를 얻고 있기는 하지만 이종격투기 경기에 도쿄돔이 제공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도쿄돔은 일본인의 자존심이기도 하며 오래 전부터 보수적인 체육 인사들을 대변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니 일본에서조차 신주류에 해당하는 이종격투기에 도쿄돔이 제공된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이었다.
 
 퍼퍽
 
 “컥!”
 
 둔탁한 소리에 이어지지는 밭은 신음!
 
 로우 킥과 하이 킥이 번갈아 교차되는 순간 둔탁한 타격 소리에 이어 거친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트렁크를 걸친 두 개의 그림자가 그 짧은 순간 엉겼다 떨어졌다.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도 남을 것 같은 후끈한 열기는 반원형으로 곡면을 드러내는 돔 측면에 설치된 사이키 조명과 측면에 설치된 보조경기 등에서 뿜어지는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친 듯 연호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한강(韓江)의 귀를 찔렀다. 언제나 익숙하기만 했던 함성이 왜 그리도 이질적인지.
 
 지나치게 이질적이면서 귀를 아리게 하는 함성도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지만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드는 조명도 짜증이 났다. 어렴풋하게 알아듣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함성과 조명의 열기가 섞여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숨이 가빴다.
 
 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린 듯 목에서는 쇳내가 나고, 악문 마우스피스에서는 이물감과 함께 위장을 역하게 만드는 고무냄새가 났다.
 
 “훅!”
 
 거친 숨결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한강은 갑자기 다가온 한겨울의 추위에 놀란 어린아이가 몸을 움츠리듯 어깨를 웅크리고 가드를 올려 안면을 방어했다. 다시 한 번 눈앞으로 왼손 훅이 파고들자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오른쪽으로 돌았다.
 
 ‘거리 조절!’
 
 연속으로 잽을 내밀며 거리를 쟀다. 상대가 오른쪽으로 피하며 훅을 내밀자 위빙으로 허리를 흔들고 사이드 스텝을 밟아 오른쪽으로 반복해서 돌았다.
 
 거리를 좁혔다가는 스테플링 기술에 걸린다. 그라운드로 들어가 주짓수에 당하기라도 하면 반격의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권투 글러브와는 조금 다른 오픈 핑거 글러브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링이라는 사실만 보면 복싱의 링과 크게 다를 바 없는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도쿄돔이 일본에 있다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경기를 해본 경험이 있으므로 일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오늘따라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귀에 대고 질러대는 소리처럼 멍한 느낌이 들었다. 복싱 선수시절의 함성과는 약간 다른 것 같았다. 이미 이십여 차례 이상의 복싱 전적으로 링이라는 세계가 익숙했지만 여전히 이종격투기라는 무대는 낯설기만 했다.
 
 1회전에는 몇 번의 격돌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서로에 대한 탐색전이었다.
 
 이제는 결정을 내야한다.
 
 2회전을 지나 3회전까지 간다면 그래플링 기술이 약한 한강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이터는 그라운드 기술에 약하니 입식타격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 가장 좋다.
 
 ‘기회를 찾아야 해!’
 
 입 안이 바싹 타는 것 같았다.
 
 마우스피스에서 고무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숨이 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파이팅 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아득하고 경황이 없는 중에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는 사실이 차라리 신기했지만 여러 번의 경험으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연속으로 잽과 훅을 내밀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사이드 스텝으로 링을 돌며 슬쩍 고개를 들리고 보니 김 관장이 손가락 두 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제는 승부를 내라는 표시일 게다. 어차피 그래플링 기술이 약한 한강으로서는 상대가 강력한 태클을 걸고 그래플링 기술을 시도하기 전에 일발펀치를 날려야 한다.
 
 “사토 루미나!”
 
 “사토 루미나!”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싸우는 자국의 선수를 연호하고 있었다.
 
 심장이 뛴다.
 
 오른발을 내디딜 때마다 덜컥거리며 심장이 갈비뼈를 쳐들며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경기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기분이다.
 
 “끝내라고!”
 
 김 관장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우라질!’
 
 짜증이 났다.
 
 누구는 끝내고 싶지 않아서 끝내지 않는 것인가. 문제는 상대가 만만치 않은 격투기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한강 스스로 일발펀치에 승부를 내기에는 상대가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거다.
 
 더구나 이종격투기는 흔한 경험이 아니다. 복싱으로는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격은 한강이지만 이종격투기는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
 
 사토 루미나와 한강의 경기는 이종격투기에서 가장 일반적인 그래플러 대 그래플러가 아니라 타격기를 주로 하는 스트라이커와 유술기를 주무기로 하는 그래플러의 경기다. 복싱이라면 한강은 완벽한 인파이터라지만 이종격투기에서는 타격기를 주로 하는 스트라이커인 셈이다.
 
 “훅!”
 
 사토 루미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른손으로 목을 감으려고 했다. 푸른색 글러브가 목으로 감아드는 순간 한발 물러서며 목을 숙였다. 머리위로 사토 루미나의 손이 지나치는 순간 오른발을 내뻗었다. 아직 서툴기는 해도 로우 킥은 끊어 차면 실효성이 있다.
 
 사토 루미나가 폴짝 뛰어 뒤로 한발 물러났다.
 
 복싱으로 동양챔피언까지 오른 한강과 유도와 그레이스 유술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사토 루미나. 두 사람의 승부는 어차피 크로스카운터를 먹여 한강이 이기느냐, 혹은 사토 루미나가 그라운드로 끌고 개처럼 싸워 초크라도 전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승부의 분수령이다.
 
 “훅!”
 
 사토 루미나가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손을 뻗으며 따라붙었다.
 
 동양인치고도 격투기 선수로는 작다 할 수 있는 168센티미터의 키에 불과한 사토 루미나는 미들급의 한강이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빠른 스텝으로 다가들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전설적인 트레이너 칼슨 그레이시에게 그레이시 유술을 전수 받은 k’z factory소속의 선수로 가볍게 볼 수 없는 대상이었다.
 
 브라질 주짓수와 가라데를 기본기로 삼아 오랫동안 브라질과 미국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고 일본에 돌아온 사토 루미나는 정도관에서 대표적인 선수로 이름을 얻고 있다.
 
 한강이 백스텝을 밟자 기회를 잡았는지 사토루미나가 안면으로 파고들었다.
 
 급히 왼손을 뻗었다.
 
 사토 루미나의 안면에 가벼운 충격이 일고 고개가 덜컥거렸다. 한강이 달려들려고 하자 본능적으로 미들 킥을 뻗어 접근을 방어하고 오른손으로 큰 펀치를 휘둘러 방해를 한다.
 
 잽!
 
 사토 루미나가 접근할 때마다 한강은 오른손으로 가드를 방어하며 왼손으로 더블 잽을 넣었다. 파워가 강하진 못해도 연속으로 날아간 주먹이 사토 루미나의 턱을 가격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억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능한 접근전을 피해야 한다.
 
 이미 사토 루미나의 격투스타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슈투와 브라질 주짓수를 주특기로 하는 사토 루미나에게 복싱을 주특기를 삼는 한강이 접근전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사토 루미나는 한때 슈투 웰터급 챔피언이었으며 깨끗한 기술 구사가 돋보이는 선수다
 사토 루미나가 가까이 다가들며 손을 펴고 허리를 잡으려고 했다.
 
 한강은 몸을 비틀어 백 스텝을 밟으며 오른 주먹으로 사토 루미나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사토 루미나가 충격을 받았는지 급히 허리를 비틀어 위빙으로 피하며 연거푸 백 스텝을 밟았다.
 
 “오래!”
 
 “사토 루미나!”
 
 루미나를 연호하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사토 루미나는 격투기 선수답지 않게 잘생긴 캐릭터로 일본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몇 년 전 우노 카오루에게 타이틀을 뺏겼지만 2003년에 재기했다. 과거보다 더욱 실력이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극진회관과 더불어 일본 가라데의 맥을 형성하고 있는 정도관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기는 실력에 비해 높았다.
 
 1회전 시작하자마자 안면을 가격 당했기 때문인지 눈알이 무겁고, 축축 처지는 어깨가 쇄골이라도 부러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맹세컨대 쇄골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눈알이 터진 것도 아니다.
 
 이를 악물었다.
 
 ‘이겨야 해!’
 
 일본에서의 앞날이 오늘에 달려 있었다. 오로지 승리만이 앞날을 보장할 터였다.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은 복싱의 길을 포기하고 이종격투기의 세계로 들어온 이상 뿌리를 뽑아야만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그 말은 처음으로 일본으로 와서 이종격투기에 참가하고자 했을 때 들었던 말이다. 한강의 스폰서를 자청한 극진회관의 사범들이 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룰이 정하는 한 개처럼 싸워라!
 
 낭심을 걷어차지 않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개처럼 싸워라.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다!
 
 “야힛!”
 
 낮은 기합성이 들려오고 사토 루미나의 오른발이 빠르게 다가오며 왼손이 어깨를 잡으려 했다. 유술로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행동이 분명했지만 팔을 높이 올리자 작은 키 때문에 복부가 드러났다.
 
 한강은 위빙으로 허리를 흔들어 사토 루미나의 손을 피하며 열려진 복부를 향해 오른손으로 강한 펀치를 넣었다.
 
 주먹으로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복부 가격은 성공이었다.
 
 “컥!”
 
 밭은기침을 토하듯 비명을 지르는 사토 루미나의 몸이 출렁였다.
 
 연타를 넣으려고 몸을 세우려는 순간 사토 루미나의 땀 냄새가 나는 몸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몸이 매트에 뉘어졌다. 복싱이었다면 다운이겠지만 이종격투기에서는 권투의 다운이 없다. 눈앞으로 푸른색 글러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흔들어 주먹을 피하며 손을 뻗어 반대 주먹을 막았다. 사토 루미나의 오른 주먹이 매트에 꼽히는 순간 손을 뻗어 사토 루미나의 두 손 팔목관절을 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두 무릎을 세우며 사토 루미나의 복부를 걷어찼다.
 
 사토 루미나는 완벽한 제압을 위해 무릎으로 복부를 가격하려던 순간이었다. 한강의 왼 무릎과 사토 루미나의 오른쪽 무릎이 서로 허공에서 부딪쳐 옆으로 뉘어지는 순간, 한강의 오른 무릎은 그대로 허공을 찔렀다.
 
 “허억!”
 
 한강의 신속한 반격에 미처 방어를 하지 못한 사토 루미나의 입에서 거친 비명이 터졌다.
 
 그래플러 성향의 사토 루미나와 가재 싸움처럼 엉겨 붙으면 불리하다. 되도록 거리를 두고 공격해야 한다.
 
 무릎이 복부에 틀어박히자 눈알이 퉁겨나올 정도로 강한 고통을 느낀 사토 루미나가 일순 멈칫했다. 한강은 반동을 주듯 몸을 퉁겨 사토 루미나의 몸을 밀어내었다.
 
 강한 충격을 참아내려고 애를 쓰던 사토 루미나는 복부를 끓어 안고 고개를 숙이며 일어서더니 주춤 물러섰다. 애초의 목적대로 한강을 짓누르고 얼굴을 가격하려던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간 뒤였다.
 
 한강은 두 손으로 링을 쳐 퉁기듯 일어서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사토 루미나의 얼굴에 오른손 어퍼컷을 날렸다.
 
 ‘퍽’
 
 어깨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이 높은 산에 오른 것처럼 상쾌한 기분을 주었다. 더블 스텝을 밟으며 한발 앞으로 다가갔지만 더 이상 펀치를 날릴 필요도 없었다. 사토 루미나의 몸이 뒤로 활처럼 젖혀지며 마치 땅에 닿은 뒤 강하게 퉁겨진 축구공처럼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이어 들려오는 함성!
 
 
 1장 서울의 오후
 
 
 1
 
 
 여명이 파고드는 어둠 속에 괴물처럼 웅크린 거대한 구조물이 드러났다.
 
 희미하지만 아직도 서녘하늘에 남아 있는 달빛 때문인지 거대한 구조물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었다.
 
 스이이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을 막을 것처럼 높게 세워진 흰 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벽돌로 지어진 문 주위의 높은 담은 삭막해 보이기도 했다. 꼬리가 보이지 않는 긴 뱀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든 담에는 수십 년을 자라온 듯한 장미넝쿨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부다다다다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이십여 대의 오토바이들이 대로에서 나타났다. 의정부 외곽에 지어진 교도소로 올라오는 좁은 시멘트 도로를 향해 돌진하듯 나타난 오토바이들은 마치 국군의 날 사열을 연습하는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하게 도착했다.
 
 교도소 문 앞으로 다가온 이상의 대형 오토바이에서 사내들이 내려섰다. 한결같이 부츠에 가죽 재킷을 입은 거구의 사내들.
 
 가죽 재킷의 사내들이 오토바이 사이에 도열해 마치 석상처럼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자 고급 세단 한 대가 날듯이 달려왔다. 그 뒤로는 1.5톤 복서 탑차가 달려와 모래먼지가 날리는 넓은 공터에 멈추어 섰다.
 
 “서둘러라!”
 
 희미한 커피색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색 양복을 입은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세단에서 내려 소리치자 세 명의 청년이 기를 쓰며 오토바이 한 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1200CC급 엔진이 탑재된 하레이 데이비슨 클래식이었다.
 
 “정렬!”
 
 선글라스를 쓴 청년이 소리치자 오토바이를 끌어내린 청년들도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오토바이 옆에 도열했다. 그 사이 탑차가 한쪽 구석으로 움직여 나무 밑에 멈추어 섰다.
 
 세단에서 내렸던 선글라스의 청년이 뒷짐을 쥐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고개를 돌렸다.
 
 “어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의구심과 걱정, 불만이 섞여 있어 정확한 의도를 깨달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수용 형?”
 
 도열한 청년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몸무게가 백 킬로는 나갈 것 같은 거구에 스냅링이 주렁주렁 달린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였다. 머리에 쓴 헤어밴드에는 해골이 수놓아져 있었다.
 
 수용이라고 불린 사내, 선글라스가 다가갔다.
 
 “야, 나기석!”
 
 “옛!”
 
 덩치로 치자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것 같은 거구의 사내 나기석이 순간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두 손을 바지 재봉 선에 대었다.
 
 수용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긴장을 흩트리기라도 하듯 한 대의 자동차가 엔진소리를 울리며 나타나더니 거구의 사내들과 조금 떨어진 잣나무 그늘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각선미 고은 다리에 이어 긴치마가 나타났다.
 
 차를 내리는 여자.
 
 나기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험!”
 
 누군가 헛기침을 토했다.
 
 그녀는 차에 엉덩이를 대고 반쯤 기댄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색함과 긴장을 지우기라도 하듯 발로 바닥을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그때마다 모래알이 튀었다.
 
 가을과 어울리게 하늘거리는 하늘색 원피스에 세무 재킷을 걸친 소녀는 긴 생머리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치고 있었다. 손에 든 손가방이 앙증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녀는 이미 성숙한 여자의 몸매를 드러내듯 도발적인 허리와 튀어나온 가슴,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바디라인을 지니고 있었다.
 
 수용이 기석에게 다가갔다. 기석의 곁으로 다가간 수용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등 뒤쪽의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진영이 아냐?”
 
 “그, 그런데요?”
 
 “누가 데려왔어, 임마.”
 
 “몰라요. 그녀 혼자 온 거란 말예요.”
 
 수용의 인상이 붉어지자 나기석이 엉거주춤 대답했다. 수용의 눈을 피해 거구의 사내들을 훔쳐보던 나기석이 인상을 북 긁었다. 거구의 사내들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미치겠군!”
 
 거친 숨을 불어낸 수용이 선글라스를 벗어버렸다.
 
 눈가에 난 작은 상처가 꿈틀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칼이나 예리한 흉기가 스쳐 지나가면서 만들어냈을 것으로 보이는 상처가 실지렁이를 연상케 했다.
 
 수용이 나기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니, 형님이 보며 어쩌려고 그래!”
 
 “나도 몰라요. 그녀가 혼자 온 거라고요.”
 
 “어떻게 알았지?”
 
 “얼마든지 알아 볼 수 있는 일이잖아요! 쫓아버릴까요?”
 
 나기석의 말에 수용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에게 손댔다가는 형님에게 맞아죽는다. 그만 두자.”
 
 나기석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거구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눈 깔어, 임마.”
 
 ‘퍽’
 
 복부에서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이어 거구의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거친 숨을 토했다. 나기석의 주먹이 거구의 복부에 박혀 있었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진영!
 
 그녀는 그렇게 서서 거대한 철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2
 
 
 지루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사내들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마네킹처럼 서 있는 사내들의 이마에도 끈적거려 보이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는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아직이야?”
 
 나기석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지루하다는 듯 내뱉었다. 어슴푸레하던 새벽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지고 이제는 중천을 향해 내달리는 태양 아래에 사람의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어림잡아 여섯 시간 이상 굳은 듯 서 있던 사내들은 따가운 햇살에 노출된 몸 구석구석으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들려오는 함성.
 
 분명 교도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거구의 사내들 동작이 갑자기 빨라졌다. 조금 풀어진 듯한 모습을 보이던 이들이 목석처럼 굳었다.
 
 “차려!”
 
 “정신 차려라!”
 
 나기석이 소리를 질렀다.
 
 몇 명의 사내가 교도소와 이웃한 미군 부대 헬기장을 바라보았지만 함성은 분명 교도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더구나 함성은 교도소 뒤쪽의 높은 산에 부딪쳐 메아리를 만들고 있었다.
 
 수용이 빠른 걸음으로 교도소 문 앞으로 다가갔다.
 
 ‘부우웅’
 
 고급 세단이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자 수용이 급히 뒷좌석 오른쪽 문을 열어놓았다. 거구의 사내들이 다시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형님이 나오신다.”
 
 나기석이 버럭 소리쳤다. 사내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결같이 거구의 사내들인지라 동작이 느릴 것 같지만 의외로 번개처럼 빨랐다.
 
 ‘삐이이이익’
 
 쇠붙이가 마찰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철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덜컹’
 
 사람의 키보다 두 배나 될 것 같은 거대한 철문이 좌우로 젖혀졌다.
 
 덩치 큰 사내들은 호기심과 열망을 담아 문을 바라보았지만 누구도 움직이거나 상체를 내밀지는 않았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거대한 철문의 틈으로 두 명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앞서 걸어 나오는 사내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185센티가 훨씬 넘는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떡 벌어진 어깨가 제법 그럴싸하지만 서구형 체형을 지녀 모델을 방불케 하는 사내가 머리에 햇살을 지고 나타났다. 문 앞에 거구의 사내들이 도열해 있어 위축되거나 잠시 머뭇거릴 만도 하건만 앞서 걸어오는 사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색이 바랜 청바지, 상체에 걸친 청재킷은 반쯤 풀어헤친 채였다. 그래서 가슴의 두께가 가늠될 수 있을 정도였다. 뒤를 따라 나온 교도관인 듯한 사내의 왜소한 몸과 비견되어 사내의 몸은 더욱 크게 보였다.
 
 그 뒤로 교도소 내부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경비실이 보이고, 이중의 철문을 움직이는 레일이 시선에 잡혔다. 그 뒤로 학교 운동장처럼 보이는 공간에 푸른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와아아아!”
 
 열려진 문으로 죄수들이 질러대는 함성이 들려왔다.
 한참을 따라 걷던 교도관이 멈추어 섰다. 문 앞에 길게 늘어선 사내들의 모습을 본 그는 잠시 위축된 표정이었지만 길게 숨을 불어낸 후 가슴을 폈다.
 
 “한산(韓山)!”
 
 교도관의 부름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지나치게 무표정하여 냉정함마저 느껴지는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머물렀다. 어찌 보면 차가운 눈과 잘 다져진 몸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지만 그것은 사람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지나치게 선량해 보인다고나 할까?
 
 “오랜만에 내 이름을 듣는군. 그동안 1456번이었는데.”
 
 사내가 입가에 조소를 매달았다.
 
 한산은 손을 내밀어 교도관의 손을 잡았다. 교도관도 익숙한 몸짓으로 그의 손을 잡아 상하로 흔들었다.
 
 “한산, 또 사고 치지 말고 잘 살아라!”
 
 피식
 
 한산이라고 불린 사내가 웃었다.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군. 언젠가 은혜를 갚을 날이 있겠지.”
 
 한산의 의미 있는 말에 교도관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는 한산의 손을 놓고 거구의 사내들을 살펴본 다음 다시 한 번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돌려 거대한 철문 안으로 돌아갔다.
 
 ‘끼이이이’
 
 다시 철문에서 마찰음이 들리고 이어 문이 닫혔다. 희미하게 보이던 교도소의 내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철문이 닫힐 때까지 그대로 서 있던 한산은 이윽고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긴 다리가 훤칠해 보였다.
 
 수용이 빠르게 다가와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형님!”
 
 그것이 신호였다.
 
 “형님, 나오셨습니까!”
 
 이십 명이 넘는 거구의 사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너무도 일사불란한 동작은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 절묘한 타이밍을 유지했다. 더불어 그들의 함성은 거대한 교도소의 담장도 무너뜨릴 것 같았다.
 
 한산은 자신을 기다리던 아우들을 둘러보았다. 아우들은 한참동안 허리를 숙인 그대로 있었다. 한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저었다.
 
 수용이 손을 들어올렸다.
 
 “모두 허리를 펴라.”
 
 수용이 소리치자 고개뿐 아니라 허리마저 깊숙하게 숙였던 거구의 사내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마네킹처럼 도열했다.
 
 “드십시오!”
 
 달려온 나기석이 플라스틱 접시를 앞으로 내밀었다. 접시 위에는 네모반듯한 두부 한 모가 얹혀져 있었다.
 
 한산은 두말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두부를 움켜잡았다. 관절이 굵어 두툼해 보이지만 유려하게 긴 손가락이 두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두부를 입 속으로 우겨 넣었다.
 
 ‘후두둑’
 
 두부는 지나치게 커서 입 속으로 모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반 이상 떨어진 두부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두부를 먹은 한산이 팔 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담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용이 담배를 내밀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빠르게 켰다.
 
 허리조차 숙이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문 한산은 담배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깊게 빨아들였다. 담배연기는 수감자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누리는 해방감의 표시였다.
 
 한산은 담배를 빨아 거칠게 내뱉으며 주위를 살폈다.
 
 꿈틀
 
 한산의 눈초리가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나무 밑에 서 있던 진영이 달려왔다.
 
 “오빠!”
 
 한산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진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만 누구도 모르게 그의 눈에서 작은 흔들림이 있었을 뿐!
 
 “뭐야?”
 
 한산이 수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용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렀다.
 
 한산이 한발 물러서서 다시 담배를 힘차게 빨았다. 그 순간 울먹이며 다가오는 진영을 바라보던 수용이 손을 저었다.
 
 “막아!”
 
 잠시 주저하는 빛을 보이기는 했지만 수용의 명령을 거역할 거구들이 아니었다. 가냘파 보이는 진영의 몸 세 배는 넘을 것 같은 우람한 거구들이 일제히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진영이 어떤 여자이며 한산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기에 감히 손을 잡거나 밀치지 못하고 몸으로 막고만 있었다.
 
 진영은 미친 듯 달려왔다. 몇 명의 거구에게 앞이 막히자 마치 손사래를 치듯 손을 흔들며 다가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보던 한산이 고개를 저었다.
 
 ‘딱’
 
 한산이 오른손 엄지와 장지로 소리를 내자 사내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진영은 얼굴 가득 눈물을 머금고 그에게 다가왔다.
 
 “오빠!”
 
 한산은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 행동에 눈물을 뿌리며 다가오던 진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반가움과 야속함이 뒤범벅이 된 그녀의 몸 주위로 바람이 불었다.
 
 ‘휘이이잉’
 
 큰길에서부터 몰아쳐 온 바람이 좁은 시멘트 도로를 스치고 오르며 코스모스를 흔들고 붉은 담에 부딪쳤다.
 
 한산이 몸을 돌리고 가능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라.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오빠!”
 
 “돌아가라고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누구보다 한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진영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는지 그만 체념하고 돌아섰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몇 번인가 주저하며 몸을 돌리기는 했지만 한산과 눈이 마주치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전히 볼에 흐르는 눈물을 지우지 못한 진영은 뒷모습을 보이며 걷다가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러고도 아쉬움이 남는지 창문을 열고 한산을 바라본 후 엔진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아쉬움이 남았던가?
 
 한산은 멀어져 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형님!”
 
 수용이 낮은 목소리로 한산을 불렀다. 한산은 고개를 돌려 도열해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인 후 수용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가 출감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우들이 많구나?”
 
 “형님!”
 
 수용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산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뒤따르던 수용은 급히 멈추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산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연락이 안 된 건 아니겠지?”
 
 한산의 물음에 수용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형님의 자리가 너무 컸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애들도 배고픔을 참을 수 없으니······.”
 
 미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허공에 피가 뿌려지는 순간 수용의 몸이 사 미터나 날아가 패대기쳐졌다. 어느새 입술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수용이 급히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입가에 흐르는 피는 닦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죽을죄를······.”
 
 미처 말을 이를 수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형님!”
 
 도열해 있던 깡패들도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를 토했다. 한산은 아우들을 바라보았다.
 
 일 년!
 
 그 짧은 시간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의정부 교도소에서 썩은 일 년이 아우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가난하게 만들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가슴 밑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좌우로 무릎을 꿇은 아우들을 바라보며 한산은 오래도록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을 등 뒤로 날리게 만든 후에야 겨우 오른발을 떼었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다고?”
 
 “그, 그게······.”
 
 수용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업체를 모두 빼앗겼다는 소리구나.”
 
 한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다 빼앗긴 건 아닙니다.”
 
 나기석이 변명하듯 말했다. 수용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나기석은 앞으로 나섰고 수용은 한발 물러섰다.
 
 한산이 몸을 돌려 나기석을 바라보았다.
 
 믿음직한 아우.
 
 지난 몇 년 동안 나기석은 충실한 아우로서 한산의 행동대장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산이 손가락으로 담배를 퉁겼다.
 
 “얼마나 빼앗겼느냐? 아니, 얼마나 남았지?”
 
 한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수용이 머뭇거렸다. 이번에는 나기석이 주저 없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반은 남았습니다.”
 
 “어디?”
 
 “영등포와 마포는 남았습니다.”
 
 씨익
 
 한산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웃음을 보던 나기석의 눈가에 가는 떨림이 흘렀다.
 
 “출소하자마자 일거리라.”
 
 “죄송합니다, 형님!”
 
 수용이 허리를 굽혔다.
 
 한산은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의 오토바이 하레이 데이비슨 클래식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용이 그 뒤를 따랐다.
 
 나기석은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내밀었다. 한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글라스를 받아썼다. 그의 눈이 사라졌다.
 
 “수용, 이 약삭빠른 놈! 오늘로 날짜를 잡았느냐?”
 
 눈치 빠른 수용이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수용은 한산의 눈이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음에도 바늘에 찔린 표정을 지었다.
 
 수용의 몸이 급히 숙여졌다.
 
 “그렇습니다.”
 
 수용은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 일 년 동안 울분을 참고 살았다. 한산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그들에게 그의 출소는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이었다.
 
 이제 용트림을 할 때다.
 
 그의 생각은 오차가 없었다. 누구보다 한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수용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다. 이제 설움을 씻어낼 때가 된 것이다.
 
 수용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럼, 강남으로 간다.”
 
 한산은 자신의 애마이며 아우들이 일 년 동안 닦고 조이며 보관해온 하레이 데이비슨 클래식에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키를 틀고 클러치를 잡은 채 오른발로 가볍게 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당기자 하레이 데이비슨 클래식은 기분 좋게 몸살을 떨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산의 애마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아아아아’
 
 클러치를 풀고 오토바이를 전진시켰다. 육중한 1200CC급 오토바이가 교도소 문 앞을 출발해 경사가 진 시멘트 도로를 달렸다. 이어 큰길로 들어선 오토바이는 의정부 시청을 지나 서울 수유리로 들어서는 방향으로 길을 틀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자!”
 
 “고우!”
 
 이십여 대의 오토바이가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십여 대의 오토바이가 중간에서 합류했다. 이 열로 길게 늘어서 도로로 내달리는 오토바이 행진의 후미에는 하레이 데이비슨 클래식을 싣고 왔던 탑차와 수용이 모는 고급 세단이 따랐다. 포장도로였건만 피어오른 먼지가 오토바이 뒤를 따라 회오리를 만들며 내달렸다.
 
 
 3
 
 
 도시의 야경은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을 불러들인다.
 
 강남 역에서 신사동으로 이어지는 어느 으슥한 이면 도로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의 흥취가 무르익고 있었다. 돈을 써야 살맛이 나는 신흥 부유층과 돈을 찾아 나비처럼 날아드는 온갖 군상들이 모여드는 이곳에는 한낮의 풍요롭고 활기 넘치는 도심 풍경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은밀함과 끈적거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반주에 실려 들려왔다.
 
 호텔과 극장, 수많은 대형 카페로 이어진 골목 이면에는 대형 자가용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골목이 있고, 그 골목 좌우로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향락에 찌들고 돈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는 세계가 있었다. 울긋불긋한 빛을 뿌리는 네온사인이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유혹했다.
 
 ‘부아아아아’
 
 초저녁부터 돈과 육체의 향락을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골목길에서 난데없는 요란한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울렸다.
 
 “뭐야?”
 
 길을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좌우를 살폈다. 이곳의 지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부근의 공용주차장이나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찾아오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토바이의 출현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흥청거리는 거리를 걷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거추장스러운 방해꾼임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골목 부근에서 길을 걷고 있다면 분명 두 부류의 인간이었다. 하나는 술을 마시는 부류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술을 비롯해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파는 부류이다.
 
 ‘부드드등’
 
 갑자기 길로 들어선 이십여 대의 오토바이는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며 빠른 속도로 다가와 부근에서도 가장 큰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쾅’
 
 오토바이의 앞바퀴에 부딪친 간판이 깨어져 나뒹굴었다.
 
 동시에 큰길로 이어지는 골목 곳곳에서 가죽 잠바를 입거나 슬링으로 멋을 낸 거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뭐야!”
 
 “전쟁이다.”
 
 누구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이곳에서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호객행위를 하던 아르바이트생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호객꾼들이 꽁지가 빠져라 도주하고 일부 상점이나 술집들이 바삐 문을 닫아걸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취객이나 이제 막 술을 마시러온 사람들도 골목으로 달려가거나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음에도 도로는 북적거리기만 했다. 좁은 골목이라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모두 쫓아버려!”
 
 회색빛 건물 모서리에 오토바이를 세운 한산이 낮게 말했다. 그의 주위에는 날렵하게 생긴 행동대원 네 명이 따르고 있었다. 한결같이 가죽으로 만든 잠바를 입고 있었기에 그들 개개인이 지닌 인상과는 달리 거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거구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도로 옆의 상점이나 작은 술집들에게 문을 닫으라고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피해 없도록 하겠습니다.”
 
 뒤따르던 수용이 손을 들어올렸다. 골목 곳곳에서 몸을 드러낸 거구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길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쫓아냈다. 섣부르게 어둠을 찾아들던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미처 일을 치르지도 못하고 우악스러운 사내들의 고함에 기겁을 하고 도주했다.
 
 한산은 주변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걸었다. 마치 구경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그의 주위로 이십 명이 넘는 거구들이 어슬렁거리며 따랐다. 그 사이 누구보다 몸이 빠른 나기석이 잰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오래지 않아 그들 앞에 제법 화려한 치장을 한 큰 문이 나타났다. 나기석이 멈춰 서자 한산도 발걸음을 세웠다.
 
 “여기?”
 
 “예, 그렇습니다.”
 
 한산의 물음에 수용이 빠르게 대답했다.
 
 제법 큰 건물의 지하로 통하는 문이었다. 출입구 안에서는 악기와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어 일반 건물의 지하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 앞에는 나이트클럽을 의미하는 간판과 온갖 전구로 치장한 출입구가 보였고, 밖이 소란스럽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십여 명의 덩치들이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 한결같이 살찐 돼지를 연상하게 하는 덩치들이라 그 기세가 제법 등등했다.
 
 “여기로군!”
 
 오랜만이지만 눈에 익었기 때문일까?
 
 한산은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자신이 장악했던 지역을 몰라볼 리가 없다. 한때는 젓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고 아우들을 먹여 살리던 곳. 더구나 건물이 헐린 것이 아니고 단지 입구의 장식이 바뀌었을 뿐!
 
 문 위에 걸린 간판을 힐끗 바라보던 한산은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이!”
 
 문 입구에 방해자가 있었다. 덩치만 놓고 보자면 한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내들이 앞을 막았다.
 
 한산이 걸음을 멈추고 선글라스를 꺼내 꼈다.
 
 피식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맴돌았다.
 
 “어쭈, 웃어?”
 
 아무리 보아도 살찐 돼지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덩치 하나가 출렁거리는 복부의 살집을 흔들며 다가왔다. 한산이 누구인지 몰라보는 녀석들이었다.
 
 “이 자식이!”
 
 덩치는 한산을 윽박질렀다.
 
 “들어갑시다.”
 
 한산이 조용하게 말했다.
 
 “안돼!”
 
 나이트클럽의 문 앞을 지키던 덩치들이 무턱대고 한산을 막았다. 언뜻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앞을 막는 것 같았지만 그들도 눈이 있고 마냥 호락호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만 보아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그들이기에 한산과 뒤를 따르는 거구들을 보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한산을 몰라본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한산은 피식 웃으며 그들 중 앞에 서 있는 가장 덩치 큰 사내를 바라보았다. 제법 험상궂은 얼굴을 지닌 사내는 흔히 말하는 나이트클럽의 기도로서 그럭저럭 어울리는 체구였다.
 
 한산이 웃자 덩치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자씨, 여기는 23세 이하만 출입하는 곳이라고! 물 흐리지 말고 사라져 주셔!”
 
 덩치는 시빗거리를 찾는 듯 보였다. 패거리를 몰고 온 사내라면 결코 순수하게 놀러오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테지만 비교적 평온한 얼굴이었다.
 
 한산쯤은 가볍게 뭉개버릴 수도 있다는 표정!
 
 피식
 
 한산은 다시 웃었다.
 
 “그런가? 나는 안 되겠군.”
 
 덩치를 바라보던 한산은 더 이상 대거리를 하거나 길을 열어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한발 물러섰다. 너무도 순순히 물러나기 때문인지 오히려 앞을 막았던 사내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덩치는 만족감으로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었다. 무엇이 그리도 자랑스러운지 손목관절을 풀며 위세를 떨기도 했다. 그의 얼굴에 흐르는 웃음은 경멸 같기도 했고 달리 보면 우월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평화와 자부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이제 21살이니 들어가도 되겠지?”
 
 한산이 물러서자 뒤따르던 나기석이 키득거리는 소리를 지르며 한발 나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나이트클럽의 입구를 막고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앞을 가로막았다. 덩치도 그에 합세했다.
 
 나기석이 걸음을 멈추었다.
 
 “비켜. 난 겉늙었을 뿐이야.”
 
 키득거리는 나기석의 입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곧 사라졌다. 대신 눈에서 불이 튀고 얼굴이 굳었다. 그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기 때문인지 문 앞을 가로막았던 사내들의 표정이 제법 딱딱해졌다.
 
 나기석은 덩치들과 대치한 상황인데도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끼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일일이 끼고 나자 목을 비틀어 관절을 풀었다. 이어 어깨를 흔들어 긴장을 풀고 덩치에게 한발 다가섰다.
 
 “이 개새끼가!”
 
 덩치 하나가 이를 갈았다.
 
 “엇, 철권 나기석이다!”
 
 누군가 나기석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움찔’
 
 기고만장하던 덩치의 몸이 경기를 하고 얼굴이 굳었다. 늦게나마 나기석을 알아보았다고는 하지만 너무 늦었다. 누군가의 비명 같은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나기석의 몸이 퉁겨진 시위처럼 달려 나가고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퍽퍼퍼퍽’
 
 마치 떡메를 치듯 휘두르는 주먹에 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앞에서 입구를 막고 있던 덩치 하나가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며 닭 모가지 비트는 듯한 비명을 토했다. 뱃살을 자랑하듯 앞을 막았던 덩치의 코가 뭉개지며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뒤이어 바람같이 달려든 나기석의 몸이 일시에 계단에 기대어 선 십여 명의 덩치들을 계단 아래로 굴려버렸다.
 
 나기석은 계단 안으로 달려들었다.
 
 “으아아!”
 
 “어서 피해라!”
 
 비명과 함성이 어두운 통로 안쪽에서 들려왔다. 경사가 진 통로에는 무거운 물건이 굴러가는 듯 퉁탕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뒤를 지켜라.”
 
 팔짱을 낀 채 소란을 바라보고 있던 한산은 주머니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어 단단하게 낀 후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네 명의 별동대원들이 뒤를 따랐다.
 
 어둠침침한 계단을 내려가자 계단에서 구른 덩치들이 피곤죽이 되어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기석은 나뒹구는 덩치들의 목을 밟고 서 있었다.
 
 한산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신음과 비명이 돼지를 잡는 도살장을 연상시켰다. 그의 뒤를 따라 내려온 별동대원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덩치들에게 연속으로 어퍼컷을 날려 편안히 잠을 자도록 만들어 주었다.
 
 계단을 내려선 한산은 인조 가죽으로 치장된 두꺼운 문을 밀었다.
 
 ‘끼익’
 
 가벼운 마찰 소리에 이어 후끈하면서도 곰팡이가 피는 듯한 비릿한 지하실 냄새가 귀를 아프게 하는 밴드 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사이키 조명이 이리저리 혼란스러움을 연출하고 있었고, 술 냄새가 역하게 밀려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계단보다 더욱 어두웠다.
 
 언뜻 보아도 내부가 이백 평은 넘을 듯 보이는 큰 나이트클럽이었는데, 이른 저녁시간임에도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바바바바 바바’
 
 고막이 터질 듯한 밴드 소리와 오랜만에 느껴보는 주객들의 목소리에 한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앞을 바라보니 무대 위에서는 나긋나긋한 여자 가수가 선정적인 옷을 걸친 것인지 반쯤 벗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모습으로 음정과 박자가 틀린 줄도 모르고 마이크를 괴롭히며 열창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비추어지는 사이키 조명에 눈이 부셨다. 스테이지에서 미친 듯 몸부림을 치는 남녀들이 꾸물거리는 송충이들 같았다.
 
 “장악해!”
 
 한산이 나지막하게 지시하자 뒤따라 들어온 수용이 손을 들었다. 그를 따라온 거구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심지어 화장실로 이어지는 복도마저 막아섰다. 혹 내부에서 움직일 수도 있는 모든 통로와 비밀 통로가 차단된 것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손을 들어올려 수신호를 보내왔다. 아우들의 수신호는 중요한 길목을 모두 점거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미 익숙한 건물이었다. 일 년 전만 해도 한산이 이끄는 형제들이 장악했던 건물이기에 건물의 구조는 물론 비상구마저 훤했다. 그래서 요소요소에 대한 장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좋아.”
 
 한산은 주먹을 쥐며 힘을 주었다.
 
 우드득
 
 주먹의 관절이 풀리며 요란한 마찰음을 냈다.
 
 한산은 빠른 눈으로 나이트클럽 내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가득 들어찬 손님들에게 술과 안주를 나르느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웨이터들 사이로 덩치 큰 사내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수용이 다가왔다.
 
 “장하사는 내부 사무실에서 나이트 사장에게 보호비를 흥정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맡겠다.”
 
 “쓸어버릴까요?”
 
 “우선 사장실을 차단해라.”
 
 수용이 달려갔다.
 
 불과 일 분이 지나지 않아 아우 십여 명이 사장실로 통하는 좁은 복도를 빈틈없이 차단했다. 그것으로 족했다.
 
 한산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와!”
 
 갑자기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며 일단의 무리가 홍수에 댐이 터진 듯 몰려들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처음에는 밴드조차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계속 악기를 연주했고, 여가수는 노래를 불렀다.
 
 그 사이 소란스러움을 눈치 챈 몇몇 사내들이 입구 쪽으로 달려가고 조명이 꺼지는 대신 밝은 불이 들어왔다.
 
 “뭐예요?”
 
 놀란 가수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벌어지기 시작한 후였다.
 
 한산을 따라 들어온 아우들이 입구를 막고 탁자를 뒤엎자 한 떼의 웨이터들이 쟁반과 몽둥이, 맥주병을 들고 달려들었다. 곳곳에서 술을 마시며 노닥거리던 덩치 큰 사내들도 일제히 술병을 깨거나 각목을 들고 나타나 무작정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테이블을 밟으며 건너뛰던 덩치 하나가 한산이 돌려 찬 발에 걸려 떨어져 내리며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았다.
 
 “싸움이야.”
 
 “도망쳐!”
 
 술을 마시던 취객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여자들은 테이블에 걸려 치마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입구 계단을 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서로 먼저 가려고 잡아당기는 바람에 몇 명의 여자가 속옷이 드러나며 나뒹굴었다. 의리 없는 몇몇 사내들이 여자들을 내팽개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 입구를 향해 달렸다.
 
 “막아!”
 
 약삭빠른 놈이 먼저 몰매를 맞았다. 무작정 문으로 달려 나가려던 주객들도 입구를 막고 있는 거구의 사내들로부터 손찌검을 당해 나뒹굴었다.
 한산의 아우들은 일일이 검사해서 손님을 밖으로 내보냈다. 검은 양복을 입었거나 양복의 겉저고리를 입은 사내들은 모두 좁은 방으로 끌려 들어가 감금되었다. 반항하면 주먹세례를 받아야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홀은 비워졌다.
 
 한산의 아우들과 나이트클럽을 지키던 거구들은 각각 편을 나누어 대치한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거구의 사내들은 주방으로 들어가 식칼과 쇠파이프를 들고 나타났다. 심지어 각목과 포크까지 구부려 주먹에 감고 있었다. 몇몇 사내의 손에는 시퍼런 불빛을 반사시키는 과도와 짹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쓸어버려!”
 
 소리 지르는 나기석의 손에는 어디서 뽑아들었는지 야구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잘 닦여진 야구방망이에 전등 빛이 반짝거리며 원을 그렸다. 몇 놈의 덩치들이 달려들다 그 자리에서 머리가 깨지며 나동그라졌다.
 수십 명의 덩치 큰 사내들이 덤불처럼 엉겨 붙었다.
 
 “철권이다.”
 
 “나, 나······기석이다.”
 
 처음에는 나이트클럽을 지키던 덩치들을 따라 덤비려던 웨이터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기석이 다가가자 그를 알아본 웨이터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술집에서 구른 웨이터라면 나기석을 몰라볼 리 없었다.
 
 나기석이라는 이름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물불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덤비는 그의 이름은 이미 서울 바닥에 그 명성이 자자했다.
 
 “나기석이 뭐야?”
 
 “이 새끼들이······.”
 
 욕설과 아우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기석이 이끄는 별동대가 무리들을 뭉개며 돌파를 시작했다. 달려들던 깡패들이 별동대를 막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허공에서 몽둥이와 몽둥이가 부딪치고 각목이 거구의 허리를 꺾었다.
 
 “와아아!”
 
 함성이 울리며 밀실에서 다시 십 수 명의 깡패들이 달려 나왔다. 그중 몇은 나기석과 거구들을 가로막으며 섰고, 몇몇은 뒤로 물러서는 웨이터들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기석은 이미 강남뿐 아니라 서울 어느 지역에서도 통하는 이름이었다. 더구나 깡패들의 등살에 누구보다 알아서 기어야 할 웨이터들이라면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공포였다.
 
 한순간 대치가 이루어졌다.
 
 “그만!”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음성이 들리고 기둥 뒤에서 한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춤’
 
 몇몇 깡패들의 몸이 떨리고 일부 깡패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함께 짙은 두려움이 떠올랐다. 한산보다 두 배나 클 것 같은 덩치를 지닌 깡패들도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만 자지러질 듯한 표정이었다.
 
 ‘툭툭’
 
 ‘챙그렁’
 
 아예 식칼과 몽둥이를 집어던지는 깡패들도 있었다.
 
 한산이 빙그레 웃었다.
 
 “한때 내 아우였던 아이들은 이 전쟁에서 빠져라. 아우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덤벼라.”
 
 일시에 술렁거림이 이어졌다. 누구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었다.
 
 한산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깡패들 중 일부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예 물러서서 기둥에 기대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웨이터의 대부분은 이미 물러서서 대기 중이었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했지만 깡패들의 숫자는 순식간에 반으로 줄었다.
 
 “어떤 새끼가 감히!”
 
 날렵하게 생신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손에는 파랗게 보일 정도로 날이 선 회칼을 들려 있었다. 콧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손에 들고 있는 회칼의 칼날보다 예리해 보였다.
 
 힘만 믿고 설치는 거구들이나 덩치들과는 달랐다. 감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모습이 여간 예리해 보이지 않았다. 하늘거리는 몸이 갈대를 연상시킬 정도였지만 몸 전신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범상치 않았다.
 
 나기석이 나섰다.
 
 “진호!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내가 육 개월 전 경고했다.”
 
 “개새끼!”
 
 진호는 욕설과 함께 침을 뱉었다. 마치 시위하듯 회칼을 횡으로 긋는 그의 숨결이 거칠었고 눈은 고양이의 눈처럼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산은 뒤를 돌아보았다.
 
 “형님에게 허리를 굽혔던 열두 개 지부 중 강남지부 장하사파의 중간보스 연진호입니다. 우슈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가온 수용이 낮은 목소리로 알려왔다.
 
 한산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수용은 더 이상 묻거나 말하지 않고 한발 물러선 다음 손을 들어올렸다.
 
 그 사이 진호가 손에 들고 있던 회칼을 혓바닥으로 핥은 뒤 날카롭게 소리쳤다.
 
 “쓸어버려!”
 
 일단의 깡패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산을 따라 들어온 거구들도 일제히 테이블과 의자를 걷어차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허공에 맥주병이 날고 의자가 날았다. 양주병이 깨어지고 머리에서 피가 터진 깡패가 게거품을 물고 무너졌다.
 
 한산은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녀석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한산은 가볍게 발을 들어 고개 숙인 놈의 목덜미를 구두 굽으로 내리찍었다.
 
 ‘찍’
 
 마치 쥐새끼를 죽일 때 나는 소리처럼 목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에 이어 깡패 하나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한산은 버둥거리는 놈의 등을 밟고 섰다.
 
 “장하사파의 중간보스라······ 그럼, 한때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고?”
 
 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렇군.”
 
 한산은 여전히 빙그레 웃었다. 화를 낼 필요도, 혈압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주먹 세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한산이다. 더구나 마음이 변한 놈은 언젠가는 또 배신하는 법이다.
 
 한때 부하였다고 해서 다시 밑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런 놈은 기회를 노리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뿐이다.
 
 한산은 안다. 두 번 배반한 놈은 다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진호처럼 조직의 중간보스라는 자라면 판단이 달라져야 한다. 뭉갤 때는 완벽하게 뭉개버려야 한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사지 하나는 절단해야 다시 기어오르지 않을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완벽하게 다져놓아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사실 진호라는 인물은 한산의 기억에서조차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에나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거나 필요에 따라 호적을 옮기는 쓰레기도 아니었다. 그런 사내라면 결코 마음속으로 기회를 보고 한산이 없는 틈을 타서 기회를 잡지는 않았을 것.
 
 “나를 무시하지 마라.”
 
 말을 마친 진호가 두 손을 좌우로 벌리더니 두 개의 회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산은 두 팔을 편안히 내리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자루의 칼이 사이키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장하사파라!”
 
 한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일찍이 일 년 전에 손에 넣었던 하부 조직이었다. 공수부대 출신이며 특공무술의 대가였던 장하사는 제법 한가락 하는 이로 서울에서도 가장 얻기 힘들다는 강남을 단 여섯 번의 싸움 끝에 손에 넣은 삼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원래는 공수특전단 부사관 출신으로 제대 당시 계급이 상사였지만 공중낙하 중 사고를 쳐서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예우를 해주기 위해 장하사로 부른다고 했다.
 
 그 장하사파를 쓸어버린 사람이 바로 한산이었다. 그 장하사가 그가 비워둔 자리를 다시 차지한 것이다.
 
 진호는 이리저리 돌며 언제든지 회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산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도 파악하기 힘들었기에 기회를 노리는 진호의 몸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야잇!”
 
 귀에 익숙하지 않은 기합성이 들리더니 진호의 왼손이 바람처럼 다가왔다. 한산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오른손 팔목을 휘둘러 가슴으로 들어오는 손을 방어했다. 동시에 가슴으로 파고드는 예리한 감촉을 느꼈다.
 
 회칼!
 
 한산은 서두르지 않고 가볍게 허리를 비틀며 오른발을 들어 가슴 높이에서 앞으로 밀듯이 구두 굽으로 차버렸다. 앞차 부수기였다.
 
 ‘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호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가 탁자를 부수며 축 늘어졌다. 발에 차인 코뼈가 부서졌는지 콧구멍으로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부서지거나 빠진 이가 입술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만!”
 
 한산이 버럭 소리쳤다.
 
 그의 말 한마디에 싸움은 끝이 나고 말았다. 모든 웨이터들과 깡패들이 좌우로 물러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 두려움이 흐르고 있었다. 상대는 이미 반 이상이 피떡으로 변해 쓰러져 있거나 겨우 운신이 가능할 정도였다.
 
 한산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형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를 알아본 웨이터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복창을 했다. 일 년 전만 해도 자신들의 형님이었던 한산이 다시 나타났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4
 
 
 ‘제이(J) 나이트클럽’ 사장이며 한때는 서울 변두리에서 주먹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운 적도 있다고 알려진 정훈 사장.
 
 그런 그도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왜들 이러나. 이만 하면 되지 않나?”
 
 정훈 사장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변두리에서 주먹질과 인내로써 일궈온 재산이 이제는 강남의 노른자위에 나이트클럽으로 남았다. 이 재산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먹세계에서는 서로가 ‘나와바리’ 를 인정하는 법이다. ‘나와바리’ 를 인정하지 않으면 질서는 깨진다.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주먹세계에서는 선배가 아니던가?
 
 그러나 장하사는 그러한 주먹세계의 불문율조차 무시하고 있었다. 한산이 없는 사이 자신이 포기한 자리를 다시 차지하며 독립을 선언했다는 사실만으로 장하사는 이미 하이에나로 낙인 찍혔다. 언젠가는 다른 보스에게 먹힐 수 있는 운명을 가진 하이에나는 선후배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다른 선배들이 그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미 한산이 교도소에서 나올 날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며, 언젠가는 한산이 다시 삼킬 지역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산!’
 
 정훈은 한산이 그리웠다. 그의 보호를 받을 때는 서러움이란 없었다. 비록 공생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산은 선배를 깍듯이 인정하는 보스였다.
 
 ‘부르르르’
 
 정훈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도 한때는 아우들을 이끌고 밤거리를 헤맨 적도 있고 나이트클럽으로 돌며 보호비를 받은 적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깡패들의 생리는 변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권리와 구역은 인정하는 게 조직의 생리 아니던가?
 
 “왜 이러나. 보호비는 꼬박꼬박 챙겨주지 않았나? 자네 아이들까지 챙겨주고 직장까지 준 내가 아닌가?”
 
 “어허, 왜 이러시나! 부족하다는 말이요.”
 
 얼굴이 유난히 검은 사내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고 카펫이 깔린 바닥에 침을 뱉으며 키득거렸다. 어금니에 박은 금니가 번쩍거렸다. 코털이 뻗어 성격이 어떠한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장하사.
 
 성질이 개고기로 통하고 한번 문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하이에나가 바로 그였다. 장하사는 당장에 주먹을 들어올릴 기세였다. 부라리는 눈은 살기를 띤 듯 보이고, 곱슬머리는 개고기 같은 성질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봐, 나도 나와바리가 있었다고.”
 
 정훈은 발악하듯 말했다. 장하사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
 
 “오메, 나와바리라꼬? 참으로 유식한 아저씨네. 일본어를 쓰시니 말이여. 근디 시방 그 말이 난 무슨 뜻인지 몰라부러.”
 
 장하사는 비꼬았다.
 
 주먹 세계에서 ‘나와바리’ 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는 족보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나와바리’ 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역 싸움으로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이 깡패들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공권력을 부르는 구실이 되고, 공권력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결국 조직의 와해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 간에 일정 구역을 나누어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고 있었다.
 
 정훈은 최소한 자신의 구역이라도 인정해달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가 아는 지식과 지난날의 생리로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는데······.
 
 ‘빡’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탁자 위에 얹혀져 있던 십 미리 두께의 유리판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장하사의 구두가 유리조각 사이에 묻혀 있었다.
 
 “이, 이······ 죽일!”
 
 장하사의 등 뒤에 서 있던 행동대장 한 놈이 손에 들고 있던 각목을 후려치자 정훈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버둥거리던 몸을 바로 세우기는 했지만 결국 사색이 되어 소파에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피부가 차갑게 식었다.
 
 “이봐, 자네는 선배도 없나. 너무 하는 거 아냐? 내가 언제 주지 않는다고 했나? 준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아따! 뭐가 심해부러요?”
 
 “일 주일 만에 다시 와서 보호비를 내라는 건 어느 세상 법이야. 정말 이러면 힘들어진다고. 정말이야.”
 
 정훈은 최후의 발악을 토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날려 유들유들한 장하사의 턱을 뭉개주고 싶지만 이제는 배가 나온 오십대의 장년으로, 그 동안 주먹세계를 떠나 사업에 전념해 지난날의 기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그가 아닌가?
 
 한때는 주먹이었다는 사실도 그저 흘러간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그는 심약한 장년일 뿐이다.
 
 장하사가 유리가 부서진 탁자에 다리를 올렸다. 발목에 감긴 나이프가 보였다. 언젠가 비겁하게 칼을 사용한다는 소문이 있었던 그 칼이었다.
 
 “정 사장, 이곳이 민주주의라는 걸 몰라. 민주주의가 뭔지 알아?”
 
 장하사가 키득거렸다.
 
 “그, 그거야······.”
 
 “민주주의는 극히 민주적이라는 이야기야. 말 그대로인데 모르는 모양이군. 중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나도 아는데 말야. 크캇캇캇!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것이 민주주의야. 보호비를 받는 것도 내 마음이라고. 우리가 다수결로 결정했으니 민주주의 아니겠어? 우리 아우들 모두가 찬성했다고.”
 
 장하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 득의의 웃음 속에는 모든 것을 손에 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표정이 숨어 있었다.
 
 “크하하하하!”
 
 장하사의 부하들이 박장대소를 토했다. 그러나 그 자유라는 것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
 
 “그럼 너희들을 뭉개버리는 것도 자유겠군.”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온 소리.
 
 장하사의 얼굴에 경악과 분노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참을 수 없는 울화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어떤 쉐이야.”
 
 장하사는 바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짙은 두려움과 함께 긴 숨결이 밀려나왔다. 하체가 가늘게 떨리고 턱이 딱딱거렸다.
 
 눈 안 가득히 투영되는 얼굴!
 
 장하사로서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셈이었다.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금 눈앞에 나타난 사내일 것이다.
 
 한데, 어딜 가나 사태 파악을 모르는 팔푼이가 있는 법.
 
 “미친 쉐이가.”
 
 장하사의 등 뒤에 서 있던 행동대장이 앞으로 퉁겨나왔다. 지방에서 스카우트 된 이 덩치는 제법 힘을 지닌 몸으로 일 년 전부터 지금까지 장하사의 앞길을 닦아왔다. 그의 임무는 장하사를 지키는 것!
 
 한산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앞으로 나서는 건 당연했다. 행동대장의 손에서 언제 뽑아들었는지 가늘고 예리한 칼이 빛을 발했다. 군용 대검으로 보이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놈이었다.
 
 바람 가르는 소리에 이어 예리한 칼날이 한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일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 난 듯 보였다.
 
 대검이 한산의 옆구리를 헤집어 피를 뿌릴 듯 보였다. 지극히 빠른 공격이었고 누구라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재미있어!”
 
 한산은 두 발을 바닥에서 떼지도 않은 채 위빙으로 몸을 흔들며 엉덩이를 뒤로 빼 칼날이 겨드랑이 아래로 스쳐 지나도록 했다. 칼은 겨드랑이 밑을 스쳐 가슴 앞으로 뻗어나갔다. 이어 팔을 안으로 말아 쥐며 행동대장의 팔을 옆구리에 꼈다. 한산의 팔 굽이 안쪽으로 향해지며 근육이 섰다.
 
 ‘우두두둑’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행동대장의 팔 굽이 밖으로 퉁겨지듯 부러졌다. 어깨가 탈골되었는지 축 늘어지기까지는 일 초도 필요치 않았다. 동시에 한산의 오른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안면에 작렬했다.
 
 ‘콰직’
 
 
 그것으로 끝이었다.
 
 “크아아악!”
 
 덫에 걸린 멧돼지처럼 비명을 지른 행동대장이 그 자리에 무너졌다. 눈동자가 터져 버렸는지 안구에서는 피가 흘러 앞을 볼 수 없었고, 턱 뼈가 수십 조각으로 부서졌는지 턱이 축 늘어졌다. 결국 팔뼈는 부러진 끝이 살갗을 뚫고 나왔다.
 
 “으아아아!”
 
 비명이 고통을 대변하지는 못했다. 행동대장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으로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한산이 몸을 돌렸다.
 
 장하사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개새끼!”
 
 ‘퍽’
 
 장하사의 주먹이 한산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장하사에게 돌아온 것은 벽을 친 것처럼 강한 반탄력이었다. 장하사는 복부에서 퉁겨져나오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며 주춤 물러섰다.
 
 “어리석은 새끼!”
 
 한산의 주먹이 공기를 갈랐다.
 
 ‘뻑’
 
 둔탁한 소리에 이어 장하사의 복부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에 들려왔다.
 
 장하사의 몸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한산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반을 돌더니 발등이 장하사의 목뒤를 가격했다.
 
 지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장하사의 등에 다시 한 번 발굽이 찍혀지고 주먹이 뻗어나갔다. 쇄골이 부서져 버린 장하사는 축 늘어져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큰 대자로 누워버렸다.
 
 다시는 인간으로서 구실을 할 수 없는 상태.
 
 한산은 뻗어버린 장하사 곁으로 다가갔다.
 
 “장하사. 하루의 시간을 주겠다. 이곳을 떠나 네 이름이 들리지 않게 해라. 다시는 주먹세계에서 명함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네 이름이 들리면 아주 깊숙하게 담가줄 것이다.”
 
 말을 마친 한산은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렸다.
 
 
 2장 암울한 미래
 
 
 1
 
 
 “헉!”
 
 오사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2라운드 중반을 지났을 뿐이지만 숨은 턱에 닿아 있었고 로우 킥으로 연타 당한 허벅지에서는 은근한 통증이 밀려왔다. 몸이 둔해지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뒷골을 무겁게 했다.
 
 미들 킥에 당했기 때문인지 간혹 숨을 쉴 때마다 늑골 아래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2회전을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두려움인가?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쳤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의 연속인데 충수염이라도 걸린 듯 오금이 당겼다.
 
 ‘빠가야로!’
 
 욕설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 같았다.
 
 입에 물고 있는 마우스피스가 오늘따라 답답하고도 질긴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뱉어버리고 싶지만 이와 턱을 보호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 한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한다.
 
 글러브를 내리고 스텝을 빠르게 밟으며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요잇!”
 
 땀 냄새를 풍기는 이시가와는 아직도 힘이 넘치는 작은 기합성을 터트리며 다가들어 연속으로 로우 킥을 구사했다.
 
 발을 들어 올려 막았더니 종아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미들 킥이 옆구리를 노렸다. 미끈거리도록 땀이 난 이시가와의 몸이 마치 코뿔소처럼 느껴졌다. 백 스텝으로 한발 물러서며 몸을 움츠리고, 가드를 내리며 발을 들어 정강이 앞부분으로 방어를 했지만 뼈가 부딪치는 순간 심장이 울리는 듯 고통이 밀려왔다.
 
 ‘강하다!’
 
 한숨을 삼켰다.
 
 오 분이 이토록 긴 줄 몰랐다.
 
 사방 7미터의 정방형 링이 축구장처럼 넓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세컨의 고함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컨이 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공격하라고?
 
 어떻게 공격하란 말인가?
 
 이시가와는 키가 크고 턱이 튀어나와 겉으로 보아서는 허술해 보이는 파이터이지만 막상 붙으면 막강한 체력과 우수한 발차기 실력으로 다가온다. 그뿐 아니라 그레이시 가문을 통해 익힌 유술까지도 가공할 만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시가와의 육중한 몸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것이 정도관과 연합세력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극진회관을 다시 세우는 길이다. 아직은 눈에 띠게 기울지 않았지만 자신마저 무너지면 정도관과 그 연합세력이 모든 영광을 가져갈 것이다. 극진회관이 사면초가에서 벗어나 이종격투기의 세계에서 왕자로 군림하는 것은 그의 역할에 달렸다.
 다가오는 이시가와의 몸이 보이고 근육에 싸인 옆구리가 드러났다. 오사부는 왼발을 단단히 고정시키며 상체를 들어 번개처럼 미들 킥을 뻗었다. 발목에 느껴지는 충격이 정확한 가격이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시가와의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연속으로 잽을 뻗었으나 이시가와가 더블 스텝을 밟고 위빙을 전개하며 연속으로 두 발을 물러섰다.
 
 오사부는 지체하지 않았다. 연속으로 밀어붙여야 승부를 가릴 수 있다. 적이 코너에 밀렸을 때는 지체하지 말고 밀어 붙여야 한다.
 
 1회전에 많은 점수를 잃었을 것이다.
 
 오사부가 자랑하는 유술에 말려 코너에서 심한 고전을 했다. 만약 적절한 방어를 하지 못했다면 링에 눕고 말았을 것이다. 1회전의 오 분을 링에 누워 견뎌내느라 체력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사부에게도 기회가 왔다. 이시가와가 태클을 걸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안면이 열리고 있었다. 투 스텝으로 다가들며 연속으로 미들 킥을 날렸다. 이시가와의 옆구리에 발목이 틀어박혔다. 이시가와는 자세를 낮추고 팔 굽으로 방어하려 했지만 미들 킥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이어 연속으로 발을 들어 숙여진 이시가와의 얼굴을 공격했다. 이시가와가 퉁기듯 물러났다. 링의 로프가 출렁이며 그의 몸이 다시 퉁겨져나왔다. 이시가와는 두 팔을 뻗으며 오사부를 껴안으려고 했다.
 
 오사부는 급히 한발 물러서며 로우 킥을 날려 이시가와의 허벅지를 가격하려 했다. 오사부의 공격이 기민했지만 이시가와의 방어도 유효적절했다. 이시가와가 몸을 웅크리고 다시 한발 물러나며 왼발을 들어 올려 로우 킥을 방어했다. 동시에 등에 닿은 로프의 탄력을 이용해 한발 앞으로 나서며 잽을 날렸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오사부는 번개처럼 몸을 비틀고 머리를 흔들어 잽을 피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가슴으로 파고드는 이시가와의 무릎은 보지 못했다.
 
 ‘떵’
 
 갑자기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안면이 흐릿해졌다.
 
 몸이 기우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뒷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는데 사물이 흐릿해졌다. 다가오는 이시가와의 모습이 가로놓여지는가 했는데, 점차 흐릿해지더니 조명이 눈 안 가득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와와와!”
 
 “오사부! 일어나!”
 
 오노 사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고함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를 만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코너를 향해 고개를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돔의 천장에서 뿜어지는 듯 느껴지는 조명만이 눈 안 가득 파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온통 환한 불빛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땀이 흘러 미끈거리는 링이 얼굴에 닿아 있었다. 미끈거리는 감촉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시켜 주었다.
 
 ‘일어서야지.’
 
 마음은 있지만 몸이 어떻게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숨이 찼다.
 
 이시가와의 오른팔이 오사부의 왼팔을 압박했다. 무릎이 하체를 누르고 있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이시가와의 왼팔이 오사부의 목을 눌렀다.
 
 하늘이 노래졌다.
 
 숨이 가빠와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어 보았으나 상하체 모든 것이 압박을 당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기는 고사하고 숨을 쉴 수조차 없고 움직이면 목으로 이어지는 고통이 너무 심했다.
 
 “일어나야 해.”
 
 오사부는 버럭 소리 지르며 혼신의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비록 상체를 조금 든 것에 불과했지만 레프리가 보기에 그의 동작은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시합을 중지시키려고 다가오던 레프리가 물러났다. 만약 미동조차 하지 못하거나 손으로 링 바닥을 두들기면 그 순간 경기는 끝나는 것이며 레프리는 경기를 종료시킨다. 선수 보호를 위해서도 그 같은 조치는 필요하다.
 
 ‘살아 있음을 보여줘야 해.’
 
 쓰러지거나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대로 무너져 버리기에는 염원이 강했고 어깨에 짊어진 책임이 너무 컸다.
 
 참아야 했다.
 
 죽는다 해도 패배할 수 없었다.
 
 포기해서도 안 된다.
 
 오사부는 이를 악물었다. 마우스피스가 이 사이에서 모래처럼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다. 목 부근에서 통증이 오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목을 감은 이시가와의 손이 점점 압박을 해오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밀치려 해도 삼각대처럼 조여진 네이키드 초크는 풀리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끝장난 셈이었다.
 
 “탭을 해!”
 
 이시가와가 그만 포기하라고 소리쳤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오사부의 저력이 두려운 모양.
 
 ‘죽어도 안 해.’
 
 오사부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희미하지만 천사의 모습을 지닌 그림자가 떠올랐다. 네이키드 초크에 눌린 경동맥으로 피가 흐르지 않아 산소가 부족해지며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그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참아야 한다.
 
 조금만 더 버티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오사부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손을 들어 이시가와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만약 그대로 있으면 레프리가 시합을 멈추게 한다. 그러면 패배다. 레프리에게 아직도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
 
 ‘죽을 것 같다. 그래도 버텨야 해. 싸워야 한다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들리는 소리가 다가오고 파란 하늘에 점점이 뿌려진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혼돈의 공간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초크 공격에 일순 모든 정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사부! 오사부!”
 
 오노 사범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몸은 하늘에 둥둥 뜬 듯하고 평온함이 절로 느껴졌다.
 
 ‘탁탁’
 
 누군가 다가와 팔을 쳤다.
 
 레프리가 팔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팔조차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팔을 들어올려야만 경기가 계속된다. 팔을 들어올리지 못하면 경기는 끝난다. 초크에 목숨마저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안돼!’
 
 손을 들려고 했다.
 
 손을······.
 
 소, 손을······.
 
 
 2
 
 
 일본의 수도.
 
 동경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극진회관 동경총회관은 지난 오십 년 동안의 영광을 상징하는 건물로 자리매김 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지난 몇 년 동안 부침이 여간 심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이 이미 지나간 수십 년간의 모든 부침을 모아놓은 것과 같은 격랑과 부침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둠침침하고 밤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대형 회의실에 어울리는 대형 창으로 바라보이는 거대 도시는 서서히 야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신쥬꾸 도쿄 도청사 전망대가 수천 개의 불빛을 뿜어내기 시작하고, 길게 뻗은 도시의 간선도로를 달리는 버스 불빛이 별자리처럼 반짝거렸다. 아름답기만 한 도시의 모습이지만 실내에는 우울함이 흐르고 있었다.
 
 침묵.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커다란 건물 내부에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메트로폴리탄 도쿄.
 
 도쿄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마루노우찌가 눈앞에 있었다. 일본의 대기업이라면 반드시 본사가 있다는 마루노우찌에 자리 잡은 극진회관 총재실은 지난 어느 때보다 침울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도쿄의 나이는 겨우 130살이요. 어쩌면 1868년 신일본 정부가 낡은 정치체제를 일신한다는 뜻에서 천년고도였던 교또(京都)를 버리고 오늘날 도쿄라고 부르는 에도(江戶)로 이전한 것처럼 가라데의 중심도 옮겨갈지 모르오.”
 
 나지막한 목소리가 창에 부딪쳐 실내를 울렸다. 마치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처럼 음울한 목소리였다.
 
 ‘드르륵’
 
 작은 리모컨의 푸른색 버튼을 누르자 창을 가리고 있던 버티칼이 밀리며 밀려들어오는 도시의 야경을 가로막았다.
 
 빙글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관장 마쓰이 쇼케이. 회전의자를 돌린 그가 장방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앞에 앉은 여러 명의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마주 앉은 원로들의 모습을 보던 쇼케이 마쓰이는 긴 한숨을 불었다.
 
 극진가라데를 창립한 한국인 제일교포 최영의!
 
 한국이름 최영의임을 부정하며 일본인들이 굳이 일본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오오마다 야쓰마쓰의 권한을 이어받은 극진가라데의 최고 고수이며 당대 가라데를 대표하는 마쓰이 쇼케이의 얼굴은 참혹하리만치 굳어 있었다.
 
 “흠!”
 
 마쓰이 쇼게이는 가벼운 숨을 뱉어내며 눈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앞에는 모두 십여 명이 앉아있었는데, 특히 극진회관에서도 발언권이 만만치 않은 세 명의 가라데 명인들이 장방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앉아 있었다.
 
 한때는 일본 무술계를 풍미했던 인물들이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어 기백만 남아 있는 극진가라데의 원로들.
 
 그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굳어 있어 차갑게 식어 있는 벽돌을 보는 듯했다.
 
 “우리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장방형의 탁자 오른쪽에 앉아 있던 칠십대의 노인이 오랜 침묵을 깨듯 입을 열었다. 나이와 비교해 눈이 살아 있는 노객이었다.
 
 살아 있는 전설 노부히코. 현재는 나이를 먹어 은퇴 상태이지만 한때는 동경에서 이국처럼 생각하는 홋카이도에 극진가라데를 전파시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그였다. 아직도 그를 추종하는 젊은 관장들이 적지 않고 저서를 통해 전 일본에 극진가라데를 알린 이가 바로 노부히코였다.
 
 마쓰이 쇼케이는 고개를 들고 노부히코를 바라보았다. 비록 나이를 먹어 늙었다고는 하지만 원로들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 더구나 그는 마쓰이 쇼케이의 실질적인 사부였다. 정신적 지주라고나 할까?
 
 “무슨 방법이라도 있다는 겁니까?”
 
 마쓰이 쇼케이가 묻기도 전에 노부히코 옆에 앉아 있던 마쓰다 혼슈 지국장이 몸을 돌리며 물음을 던졌다. 마쓰이 쇼케이는 물음을 던지려다 마쓰다 지국장이 먼저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묻고 싶은 말도 마쓰다 지국장이 던진 물음과 대동소이했다.
 
 노부히코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노객의 나이를 지녔음에도 절대 주저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그리곤 주위를 둘러보다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오사부가 진 것이 우리 극진가라데의 한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한 명의 제자가 경기에 졌을 뿐입니다. 물론 경기 자체도 가라데는 아닙니다. 경기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경기 한번 가지고 너무 긴장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정도회관 측의 제자들이 실력이 향상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 극진가라데를 아우를 정도는 아닙니다.”
 
 노부히코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마쓰다가 역정을 내었다.
 
 “그건 알고 있지요. 문제는 앞으로도 영원하리라는 법이 없다는 거요.”
 
 “그렇지만 가라데에서 프라이드가 전부는 아닙니다.”
 
 노부히코는 마쓰다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노부히코와 마쓰다의 눈이 마주치자 불이 튀었다. 두 사람 모두 나이를 먹었지만 젊었을 때부터 드러내놓고 다투는 앙숙 아닌 앙숙이었다.
 
 사사건건 부딪치는 두 사람은 정쟁관계나 서로를 헐뜯는 사이는 아니지만 성격이 극과 극이라 언제나 의견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 대립을 통해 나오는 의견이 마쓰이 쇼케이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노객들의 설전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마쓰다 쇼케이는 그들의 설전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생각인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물을 기회가 사라졌다.
 
 두 노인의 의견대립이 짜증이 난다는 표정도 얼굴에 떠올랐지만 그것마저 이내 사라졌다. 그는 극진회관을 이끌고 있는 이가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원로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쓰다 쇼케이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인지 마쓰다가 다시 한 번 주장했다.
 
 “물론 프라이드가 전부는 아니지요. 달리 생각하면 오사부를 쓰러뜨린 이시가와도 정도회관 출신이니 우리 극진가라데의 한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마쓰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몇 사람의 원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회관이 극진회관에서 분파해 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 방송에서도 공공연히 정도관이 극진회관에서 분파해 나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지금도 극진회관의 많은 사범들과 관장들은 제자들을 받아들일 때 그 같은 말로 극진회관이 실전형 가라데의 원조임을 주장한다.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오.”
 
 규슈의 극진회관을 총지휘하고 있는 일흔일곱 살의 노객 오부나가가 반대를 했다. 마쓰이 쇼케이뿐 아니라 마쓰다와 노부히코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마쓰이 쇼케이가 스승으로 삼고 있으며 극진회관의 실질적인 의사참여를 하는 세 명의 원로 중 마지막 사람까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자 오부나가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사십 년 이상을 극진회관에서 가라데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난 한 번도 정도회관이 우리 극진가라데를 계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만든 K-1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 프라이드에서도 우리 제자들이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정도회관은 우리를 압박하기 위해 무슨 수라도 쓸 겁니다.”
 
 “그건 옳은 이야기요.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정도회관은 우리 극진회관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강도가 점점 강해질 것은 뻔한 일입니다.”
 
 오부나가의 말에 이어 노부히코가 말을 이었다. 노부히코의 부언 설명에 마쓰다 쇼케이는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으며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지 이야기를 삼가고 있을 뿐.
 
 묵묵히 듣고 있던 마쓰이 쇼케이는 오랜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모으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도관이 비록 우리 극진회에서 분파하긴 했지만 이제는 세력이 커진 만큼 다른 길을 걸을 겁니다. 이시이 카즈요시는 가볍게 볼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상업적으로도 혜안이 있는 자입니다.”
 
 이시이 카즈요시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들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 격투기의 대명사 중 하나인 K-1을 만든 사람은 극진회관에서 분파해 나간 정도회관(正道會館)의 이시이 카즈요시 관장이다.
 
 그는 93년 K-1을 주최하기 전부터 이미 많은 무도성 이벤트를 기획하고 추진한 인물이며, 정도회관이 가라데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극진회관에 비해 그 규모와 이미지가 미약하지만 꾸준한 활동으로 국내외의 다른 단체들과 많은 연합 전선을 펼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극진회관에서 분파해 나간 USA대산과 같은 단체이다.
 
 노부히코가 분연히 일어섰다.
 
 “더욱 두려운 것은 복싱을 주로 하는 서구인들과 그레이시 유술이지 정도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어요. 이제 우리는 강력한 파워를 지닌 서양인들의 도전을 받고 있어요. 그레이시 유술에 대한 대비가 더욱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극진회관과 정도회관에 대한 논의와 걱정은 기우일수도 있어요.”
 
 노부히코의 말에 마쓰이 쇼케이는 동조했다. 그러자 노부히코는 힘을 얻었는지 작정하기라도 한 듯 마음속에 있던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K-1은 초창기부터 태국에 바탕을 둔 킥복싱과 가라데의 대결 구도로 큰 관심을 끌어왔습니다. 경기에 따르는 룰마저도 킥복싱에 유리합니다. 여기에 동원된 킥복서들은 세계 최정상의 선수들이었으며 동시에 가라데는 정도회관의 공수가들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 극진회관은 나중에 끼어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극진회관이 전 일본의 실전 가라데를 이끌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부나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박했다.
 
 그의 표정과 언행은 반박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강한 부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평생을 극진가라데를 위해 살아온 그에게 패배와 이념은 불필요했다.
 
 결국 노부히코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요.”
 
 “변하지 않는 진리도 있는 법입니다.”
 
 설전의 불길은 노부나가와 노부히코의 입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마쓰이 쇼케이마저 중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들의 설전에 동조하거나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정도관이 두각을 나타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마쓰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들이 이끌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어요.”
 
 마쓰다의 주장은 곧 노부히코의 부정을 불러왔다.
 
 “그렇다고 합시다. 어차피 K-1이 정도관이 주최한 것이니. 그러나 굳이 전적을 말하고자 한다면 아직까지는 킥복싱이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초대 챔프인 브랑코 시카틱, 피터 아츠, 어니스트 후스트, 마크 헌트 등이 모두 킥복서라는 걸 아시잖소? 그뿐이 아닙니다. 영원한 강자인 제롬 르 반나, 마이크 베르나르도 등도 킥복서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라데 선수들이 늘 중요한 자리를 다 빼앗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거야 K-1이 스탠딩을 중요시하여 타격기를 주로 하는 선수들에게 유리한 룰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술을 위시한 스테플링을 인정하고 그라운드 펀치를 인정하는 프라이드에서조차 우리 제자가 밀린다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마쓰다가 이마에 주름을 팠다.
 
 평생을 가라데에 미쳐 살아온 그로서는 킥복서들에게 잔치 밥을 모두 빼앗겼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오부나가가 손을 저었다.
 
 “좋아요. 정도회관의 공수가들은 K-1을 빛내기는 했어도 그 전적이 약했다는 점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의 걱정은 지나친 감이 있어요.”
 
 “지나치다고?”
 
 마쓰이 쇼케이가 반문했다.
 
 오부나가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렇소이다. 오히려 뒤늦게 참가한 우리 극진회관 출신의 선수들이 킥복싱을 압박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가라데 출신의 챔피언인 앤디 훅도 나중에 정도회관으로 이적하기는 했지만 그 본바탕은 우리 극진회관에 두고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샘 그레코, 캐나다의 쟝 리비엘 등도 모두 우리 극진회관 출신이며 나중에 정도회관으로 이적한 선수들입니다.”
 
 “모두가 정도회관으로 이적했다는 게 문제 아니오?”
 
 마쓰이 쇼케이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일순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침울해졌다. 그들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이다.
 
 극진회관에서 무술을 익히고 정도관으로 간 제자들.
 
 더 이상 무엇으로 정당화 할 수 있단 말인가?
 
 훌륭한 제자가 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키워놓은 제자들이 극진회관의 기술을 전수 받고 정도관으로 이적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무도인들이 새로운 조류에 휩쓸리고 있었다.
 
 황금만능!
 
 “우리 제자들도 K-1과 프라이드에서 적지 않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필리오, 그라우베 페이토자, 니콜라스 페터스 등등의 우리 극진회관 출신들이 K-1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특히 가라데가 토너먼트로 치러진다는 특징으로 인해 원매치보다 그랑프리 같은 내구력이 요구되는 이벤트에서 더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극진회관의 이미지를 재고시켜줄 거라 생각하오?”
 
 마쓰이 쇼케이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오부나가는 자신의 주장을 피력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 극진회가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있는 이치게키, 즉 일격(一擊)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은 바로 프란시스코 필리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K-1 참전 초반에 일격 행진을 함으로써 극진가라데의 강력함을 다시 보여준 제자입니다. 그를 마스코트로 삼아 극진가라데의 강함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챔피언이 되지 못했어요. 어쨌든 아직까지 가라데 출신의 K-1 챔피언은 스위스 출신의 앤디 훅뿐이며 지금까지는 주짓수와 킥복싱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인지 마쓰이 쇼케이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 했다.
 
 의도적으로 결론에 가까운 말을 끄집어냈지만 뒤이어 노부히코의 추가적인 보충설명까지는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다.
 
 “문제는 정도관과 복싱을 주로 하는 타격가들이 정도관의 후원을 받아 K-1에 나타나는 것이며 아울러 정도관은 그러한 사실을 이용해 세를 불리고 있다는 겁니다. 정도관이 원하지 않아도 우리 극진회관의 이미지 제고는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쩌면 좋단 말이요. 그들의 연합을 깰 수는 없단 말이요? 아니면 우리 극진회관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셨소?”
 
 마쓰이 쇼케이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감한 문제였다.
 
 오십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극진회관으로서는 차라리 창피하고 곤란을 느끼는 문제였다.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선뜻 의견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연합세력을 대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확실한 제자를 내세워 그들의 연합세력을 분파하는 것이요. 현재의 이종격투기 조류가 무술 대 무술이 아니고 팀 대 팀, 혹은 개인 대 개인이기 때문에 우선 우수한 제자를 내세운 후에 그가 우리 극진회관 소속임을 알려야 할 겁니다.”
 
 오부나가가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의견을 말했다.
 
 반박이 없을 수 없다.
 
 “문제는 제자들이 술렁거리는 것이요.”
 
 마쓰다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들이 이끌고 있는 도장에서 성장한 제자들이 술렁거리고 있음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모두의 입에서 거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의견을 말씀하시라는 거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정도관과 연합한 세력이 배출하는 제자들을 격파하고 모든 격투기 선수들을 발아래 굽힐 제자를 발굴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마쓰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피해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마쓰이 쇼케이는 극진회관을 이끌고 있는 거목이다. 거목은 비를 많이 맞을 수 있지만 그늘을 만들어 비를 피하게 할 수도 있다. 마쓰이 쇼케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늘아래 비를 피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물러설 수 있다면 물러서겠지만 물러설 시기가 아니라면 전진해야 한다.
 
 그 같은 사실을 아는 마쓰이 쇼케이는 가슴을 폈다.
 
 “우리 극진회관의 제자는 많습니다.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제자들 중에서 발탁이나 육성이 가능합니다.”
 
 오부나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훑어본 뒤 좋은 생각이 있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시선을 끌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당장에 위상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니 그레이시 가문과 태국의 킥복싱 클럽과 연합하거나 인식 제고를 위한 연계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도관처럼 말이요?”
 
 마쓰이 쇼케이의 말에 오부나가가 입을 다물었다.
 
 진한 반박이 들어 있는 말이었다.
 
 마쓰이 쇼케이의 말처럼 정도회관은 K-1을 격투기 정상으로 올려놓고 정도관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도회관이 보유하고 있는 선수층이 얇고 그 경험의 폭이 좁은 것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한 타 단체와의 교섭과 여러 행사에 대한 공동 추진으로 빠른 시간 안에 정도회관의 위치를 레벨 업 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시이 카즈요시이다. 또한 거기에서 가장 공을 세운 이들은 K-1 초기에 많은 활약을 펼친 바 있는 사다케 마사아키, 아도카와 도시유키, 한국이름 김태영인 킨 다이에이, 그리고 저 유명한 감동의 공수가 가쿠다 노부아키 등이다.
 
 이들은 이시이 관장이 기획한 수많은 대회, 이벤트 등에 쉴 새 없이 참가하여 스스로를 향상시키고 끊임없이 정도회관의 이름을 알렸다. 특히 사다케 마사아키와 가쿠다 노부아키 사범은 K-1 외에도 TV의 프로그램, 영화 등에도 많은 출연을 하여 정도회관의 이미지를 보다 대중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강한 것으로 자리 잡게 한 일등공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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