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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일기 1

2017.09.26 조회 247 추천 1


 드래곤의 일기 1권
 
 
 제1장 인간으로의 유희
 
 
 372년 6월.
 날짜:며칠인진 기억이 안 난다.
 날씨:우중충.
 오늘은 레어 밖으로 한번 나가보았다.
 지나가는 오크가 나에게 인사를 했고, 나는 그때 마침 배가 고플 때라서 그냥 그걸 꿀꺽 삼켜 버렸다.
 쯧, 누가 내 눈에 보이래?
 오랜만에 옆집에 사는 카이오네스나 보러(옆집이라곤 하지만 저만큼 떨어져 있는 앞산이다) 나는 내 거대한 몸을 공중에 띄워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온갖 몬스터들에게 ‘나 외출한다~’라는 메시지(여기에는 ‘집 잘 지켜라~!’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와 함께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며 앞산으로 날아갔다.
 “크하하핫~! 카네스! 나왔다~!! 엥?”
 그런 내 눈에 보인 것은 작은 쪽지 하나.
 
 옆집에 사는, 그리고 심심할 때마다 나를 찾아와 나를 괴롭게 하는 망할 블루 드래곤 시크리오프스 보아라. 나는 유희나 즐기려고 산 아래로 내려간다. 네 등살에 내려가는 거니 반성 좀 해라. 참, 몬스터들은 찜찜해서 집을 맡기기가 좀 그러니 네가 우리 집 관리 좀 해놔라. 그럼 몇백 년 뒤에 다시 보자.
 
 이 덩치만 커다란 드래곤 주제에 나를 놔두고 바람 쐬러 갔다 이거지?
 크아아악~! 블랙 드래곤 카이오네스~! 나만 놔두고 간 것도 용서가 안 되는 일인데 감히 나에게 네 집 관리나 하라니!!
 광포해진 나는 그대로 이 집(당연히 레어다)을 엎어버릴까도 생각을 했지만 곧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참자, 참아. 나는 자비의 블루 드래곤이 아니신가?
 이놈이 인간 세상으로 바람 쐬러 나갔으면 나도 같이 가면 될 것 아냐?
 그러고 보니 열낼 일이 아니네?
 흐흐흐, 오랜만에 유희나 즐겨볼까?
 
 372년 6월.
 날짜:며칠인지 기억 안 난 다음날.
 날씨:우라지게도 좋다.
 역시 내 폴리모프한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경외스럽다.
 나는 거울에 내 아름다운 모습을 한번 비추어 보았다.
 푸른빛의 탐스럽다 못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머릿결이 발목을 넘어서 땅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나는 긴 머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폴리모프했을 때는 꼭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놓고 다닌다.
 묻지 마라. 이것도 개인 취미다.
 잠시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내게 일족의 누군가가 내 레어로 오고 있다는 감이 왔다.
 “아니, 어떤 자식이 하필 이런 경사스런 날에 오는 거야?”
 투덜거리며 중얼거리는 내 눈앞에 곧 이어 거대한 드래곤이 쿵쿵거리며, 안 그래도 짧은 발을 열심히 놀리며 레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시크리오프스님, 유희를 즐기려고 나가시는 중입니까?”
 저 쉐리.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골드 드래곤 프라니바투스! 망할~! 하고 많은 드래곤들 중에 왜 저 쉐리가 우리 집에 온 거지?
 “용건만 말해라. 내 염장 지르러 이곳에 온 건 아닐 테고?”
 그렇다. 이놈과 나와의 사이는 4천 년 간 이어진 원수 사이였던 것이다.
 “아, 로드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내일이 2천 년에 한 번 모이는 각 일족의 수장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당연히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시크리오프스님은 잊지 않고 계시겠죠?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유희는 잠시 뒤로 미뤄야겠군요. 쿠쿡.”
 ······잊어먹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왜 하필 2천 년에 한 번뿐인 일족의 수장들의 모임이 내일인 거야? 으··· 그것보다 저 녀석은 왜 하필 우리 집으로 온 거지?
 아냐, 왜 하필 내가 일족의 수장이 된 거지?
 “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호오~ 그러십니까? 그러시는 분치고는 왜 하필 오늘 유희를 가신 다는지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드래곤 염장 지르는 데 타고난 놈.
 내 살아 생전에 골드 드래곤이 이 정도로 얍삽한 줄은 처음 겪어봤다.
 “다 전했으면 빨리 꺼져라!”
 “하하, 그렇게 열내시면 혈압에 좋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히 전했으니 내일 뵙죠.”
 꼴에 이놈은 골드 드래곤 일족의 수장이다.
 으··· 오늘 본 것도 재수가 없는데 내일 또 저놈의 면상을 봐야 하다니······.
 
 372년 6월.
 날짜:며칠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오늘부터 안 쓰련다.
 날씨:맑다.
 결국 어제 나는 인간 세상으로 유희를 나가지 못하고 오늘 이렇게 2천 년에 한 번 모이는 일족의 수장들의 모임에 나가야 했다.
 모임 장소는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서 하기로 했다.
 레어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여덟이 넘는 드래곤들이 모두 들어가기에는 좁은 장소라서 드래곤들은 각기 자신의 마음에 맞는 종족으로 폴리모프를 해서 이번에는 조금 독특하게 드래곤 로드 레어의 앞마당인 큰 초원의 풀밭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아, 시크리오프스! 오랜만이네. 흠, 근 700년 만인가?”
 웬 살라만더 한 마리가 내게 다가와서 띠껍게 나를 쳐다보며 한 소리였다.
 무식한 놈들은 이것을 보며 불타는 도마뱀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이건 엄연한 불의 중급 정령이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을 하대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드래곤밖에 없다.
 그중에 나와 친분이 있으며 화염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은 하나뿐.
 레드 드래곤의 수장 라그네시크.
 살라만더가 그렇게 좋았나?
 그래도 보기에는 민망하군.
 띠껍고 기분 나쁜 면상.
 낼름거리는 혓바닥.
 이렇게 말해도 어쩌리?
 자기 취향인데······.
 “그래, 반가워 미치겠다.”
 “그 말투하고는. 정떨어진다.”
 “너한테서 정 찾고 싶은 맘 없어.”
 이 정도 말까지 들었을 때 보통 레드 드래곤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벌써 싸움 한판 벌어지고 남았겠으나 이놈은 어째 레드 드래곤답지 않은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이다(이 설정은 어쨌거나 레드 드래곤 중에서 말이다).
 내가 나름대로 이놈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내리고 있을 때 나는 발 밑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끄아아아아아~~”
 쿵!
 제길,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내 시야에서 띠꺼운 살라만더 하나가 사라지는 동시에 발 밑이 허전해지면서 나는 이런 엽기적인 곳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 시크리오프스님이셨군요?”
 “어떤 놈이야~!!”
 허, 허리가··· 삐끗해 버렸다.
 우드드드득―
 허리를 펴려고 하자 허리에서는 5중주의 아름다운 화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갑작스런 통증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앞에 빙글빙글 웃으며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는 땅의 하급 정령 노움.
 이놈도 드래곤이었나?
 “누구냐!”
 “아~ 블랙 드래곤의 수장 카이오스키입니당~”
 카네스보다도 어린 놈.
 어린 티를 팍팍 내는군.
 떨어진 구멍 위로 익숙한 얼굴들이 아닌, 별로 못 보던 얼굴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아는 얼굴들이 있어도 폴리모프한 모습이 이상야릇해서 못 알아본다).
 “괜찮습니까?”
 “바보같이 떨어지긴.”
 “방향 감각 하고는.”
 저, 저것들이?
 “꺼져 버렷!!”
 “쳇.”
 “꾸엑~ 빨리 회의나 시작하자구. 꾸엑~”
 “알아서 올라오겠지 뭐.”
 오, 오크로 변한 놈도 있었군.
 엉금엉금 기어 구덩이 위로 올라가 보니 오크, 엘프, 살라만더, 노움, 인간 등 각양각색의 종족들이 모여 있었다.
 정상적인 건 저기서 끅끅대며 웃고 있는 프라니바투스 놈하고 로드님과 나뿐인가?
 믿을 수 없어! 대체 미를 추구하는 드래곤들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저기 기어다니고 있는 오크는 뭐냐구우우우우~!!
 “어디 아프십니까?”
 로드님께서 친절히 내게 물어오신다.
 “아뇨, 잠시 삶에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호호홋~ 이번 모임에는 각자의 취향이 독특하죠.”
 도대체 저놈들의 미적 센스란 원······.
 “자, 자, 자~ 입들 닥치세요~ 지금부터 드래곤 수장들의 2천 년 동안의 보고가 있겠습니다.”
 로드님··· 난 당신이 두려워요. 그렇게 빙긋이 웃는 얼굴로 저런 말을 하면 어쩐답니까?
 우글우글, 왁자지껄.
 로드님··· 아무래도 당신의 말씀이 보기 좋게 씹히신 것 같습니다.
 저기 있는 간 큰 놈들이 로드님의 말씀을 안주 삼아 떠들고 있지 않습니까?
 “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부터 드래곤 족이 이렇게 타락했는지 원······.
 윗사람이 말씀하시는데 계속 말을 하다니.
 “천공에 떠돌고 있는 수많은······.”
 로드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는 나는 조용히 내 주위 곳곳에 실드를 쳤다.
 그냥 시동어 한마디만 해도 될 것 가지고 왜 귀찮게 저렇게 말하는 건지······.
 “운석 소환!!”
 하늘이 장관이구먼.
 어느새 눈치 빠른 몇몇의 드래곤의 자신의 주위에 실드를 쳤고, 우리가 있던 하늘을 새까맣게 메우던 운석들이 떨어질 때쯤에는 드래곤 모두가 실드를 친 상태였다.
 이 정도도 못 피하면 그게 드래곤이냐?
 “끄악~”
 내 옆에서 들리는 난데없는 비명 소리.
 헐, 이걸 못 피한 놈도 있었구먼.
 “로드님!!”
 “엥? 로드?”
 옆을 쳐다보니 로드님은 운석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겨우 실드를 쳤는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 하핫, 실드를 치는 걸 깜박 잊었어요. 그럼 모임을 시작할까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자신이 걸리다니······.
 로드님, 당신의 머리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본다면 좋겠군요.
 이거, 로드 뽑을 때 제비뽑기로 뽑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일 거라는 생각이 팍팍 드는군.
 
 “꾸엑~ 그럼 저희 화이트 드래곤 족부터 보고하겠습니다. 꾸엑~”
 저, 저 무식하게 생긴 돼지 머리가 화이트 드래곤의 그 고고하고 재수없는 그 계집애였단 말이냐~!!
 완벽한 미(美)를 추구하던 계집애가 어쩌다가 저렇게 됐단 말이냐!!
 아아~ 통탄이로다.
 “꾸엑~ 이번에 페이드리온이 헤츨링을 한 마리 낳아서 꾸엑~ 경사적인 분위기이며, 막 성룡이 된 드래곤 2마리가 유희를 떠난 것 이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꾸엑~”
 제, 제발 저 꾸엑거리는 소리 내지 말란 말이다~!
 어쨌든 화이트 일족부터 시작해 너도나도 자기네 일족들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보고하게 되었다.
 “뭐, 저희 블루 일족은 이번에 성룡이 된 즈리카리안과 골드 일족의 프가크리스가 충돌해 산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것 빼고는 그리 큰 일이 없었습니다. 덕분에 둘은 근신 처분을 내렸으며, 이상으로 보고를 마칩니다.”
 참으로 간단한 보고다.
 내가 말한 내용은 아까 프라니바투스가 말한 내용과 같은 내용이었기에 로드님은 고개만을 끄덕이셨을 뿐이다.
 “가출하는 헤츨링들이 늘고 있기 때문에 헤츨링 단속을 강화시키십시오. 요즘 얘들이 오냐오냐하니까 버릇이 없어져서 한 번 가출하면 사뿐히 즈려밟아 준 뒤에 길을 들여놓으시길 바랍니다. 대체 왜 5백 년을 못 참고 가출을 하는 건지 원······.”
 로드님,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샌 것 같소이다.
 어쨌든 내 보고가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모임의 축제(?)가 열렸다.
 한마디로 넌 따라라~ 난 마시련다. 이러면 알겠냐?
 그러는 도중에 프라니바투스와 나와의 약간의 신경전이 펼쳐졌지만 라그네시크의 중재로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열받은 나는 곁에 있던 와인을 원샷해 버렸고, 그 결과가 이 꼴이다. 유난히 술에 약한 내가 헤롱대면서 레어까지 기어 들어와서 뻗어버렸다.
 프라니바투스! 이 모든 사건의 원흉! 내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음하하핫~
 쿨럭,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군.
 
 372년 6월.
 날씨:비 온다. 주룩주룩!
 숙취에 약 일주일 동안 헤롱거리던 나는 오우거로 만든 해장국을 한 솥 들이키고 나만의 보물 창고에서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흑, 이 피 같은 돈들. 내가 어떻게 모은 건데··· 그냥 유희를 가지 말아버려(어떻게 모으긴? 공갈했지)?
 설마 어떤 미친놈들이 내 레어를 털까 걱정이 된 나는 레어 전체에 알람 마법을 걸어놓고 누군가가 레어에 침입을 하게 되면 바로 나에게 연락이 오도록 마법을 걸어놓았다.
 쯧, 막상 가려니 귀찮군.
 텔레포트 마법으로 산 아래까지 아주 편안히 내려온 나는 동, 서, 남, 북 중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했다.
 결국은 남쪽으로 가기로 한 나는 별다른 계획 없이 쭈욱~ 내려가기로 내 마음과 합의를 봤다.
 지나가는 새와 말벗을 하고 지나가는 오크와 오우거들로 배를 채운 내가 2~3일 정도 걸어왔을 때 가까운 숲에서 뛰어난 내 청력에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싸움하는 건가?
 쿠쿠쿠~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과 남의 집 불 구경이라고 했는데.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 하게 생겼군.
 나는 내 기척을 지우고 나무 뒤에 있는 수풀에 바싹 엎드려(드래곤 체면이 말이 아니네) 사태를 관찰(?)했다.
 “흠, 여검사 하나에 애송이 마법사 하나··· 그리고 별 시답잖은 산적 놈들이라··· 실력이 어느 정도 엇비슷해야지. 이거 원··· 일방적인 살육이 되겠군.”
 물론 산적 놈들이 이긴다는 말은 아니다. 그 반대가 된다면 모를까.
 그런데 내 목소리가 꽤 컸던지 앞에 산적들과 대치하고 있던 꼬마 마법사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 의미심장한 눈빛은 뭐지?
 꼬마 마법사는 나를 보고는 씨익~ 웃더니 여검사의 손목을 붙잡고 내 쪽으로 죽어라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연놈들은 나를 방패막이로 삼고 내 뒤로 숨더니 산적들을 향해 혓바닥을 내밀었다.
 일명 ‘메롱’이라고 아시려나??
 “오호라~ 여기 아군이 한 명 더 있었군. 하지만 비실이 놈인데? 가서 엄마 찌찌나 더 먹고 와라.”
 나는 조용히 사라지려고 뒤로 돌아섰다.
 드래곤은 자존심도 없냐고?
 당연하다. 내 일도 아닌데 끼어들 일이 뭐가 있냐? 쟤들이 보내준다고 할 때 그냥 가야지.
 “숙녀와 어린아이를 나 몰라라 산적 소굴에 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가냐?”
 나는 한참을 그 뻔뻔한 연놈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너··· 일부러 내 쪽으로 뛰어온 거지?”
 이에 나와 눈을 마주치길 거부하는 여검사와 꼬마.
 “···하하, 그을세?”
 여, 영악한 놈들.
 “야! 비실이! 안 가냐? 빨리 꺼져라. 우리는 좀 볼일이 있어서. 우리가 살려준다고 할 때 좋게 꺼져라.”
 그런가? 저 우라질 놈들, 아까부터 여검사를 보고 침 흘리는 것을 보니 발정기인가 보군.
 나는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눈에 비친 곧게 뻗은 길.
 호오~ 저기로 도망가면 되겠군.
 퇴로를 확보한 나는 죽어라 일직선으로 뛰었다.
 “헥헥, 드래곤인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크하하핫~! 난 친절한 블루 드래곤. 이런 곳에서 별 우라질 같은 놈들에게 내 본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어차피 나 아니어도 이길 여검사와 꼬마 마법사이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달렸다.
 왠지 뒷 머리카락이 땡기는군.
 유난히 아픈 뒷 머리카락 때문에 열심히 발을 놀리던 중 슬쩍 뒤를 돌아본 나는 경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애송이 꼬마 마법사가 한 손으론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푸른빛 머리카락을 발목까지 기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머리카락을 가지고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고 생각해 봐라, 일직선으로 바람에 안 날리나. 영악한 꼬마 마법사는 그 점을 교묘히 이용해 내 머리카락을 잡고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 손으론 여검사를 붙잡은 뒤에 나와 같은 속도로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발정난 수캐들이 그 뒤를 엄청난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고, 나를 선두로 해서 꼬마 마법사와 여검사, 그리고 스무 명 가량의 산적들의 이상한 달리기가 대낮에 내가 유희를 나온 지 3일 되던 날에 이어지고 있었다.
 
 372년 7월(그 마법사 꼬마가 7월이란다).
 날씨:그저 그렇다.
 자고로 옛 드래곤들이 말하기를 유희를 나가면 동료를 잘 만나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동료를 잘못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앗~! 그거 양파 다 까버리면 뭘 먹으라구요~!”
 옆에서 잔소리하는 꼬마 마법사.
 난 왜 이놈들과 동료가 됐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속으로 잡소리를 늘어놓는 순간마저도 나는 양파를 까고 있었다.
 설마 위대한 드래곤인 내가 유희를 나와서 이렇게 기가 막힌 일행들을 만나 고작 저녁 식사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양파를 까리라고는 6천 년 드래곤 삶에 생각도, 아니, 꿈에서조차 상상도 못해본 일이며 절대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
 때로는 역경이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하는 법.
 이렇게 생각하는 드래곤도 나밖에 없을 거다.
 드래곤은 모두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
 그 대표적인 예로 골드 드래곤 프라니바투스!
 이놈~! 너 없을 때 내가 이렇게 씹어주마!
 “내참,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웬 여행을 다닌다는지 원.”
 저, 저 내 나이의 반이라도 살아서 저런 말을 한다면 백 번이고 이해를 한다.
 고작 내 나이의 발톱의 때만도 못 된 놈이!
 
 드래곤이 요리하는 거 봤냐? 봤어? 봤다면 그 드래곤은 드래곤이길 포기한 거다!
 “그만해, 다루스. 어차피 동료가 되기로 결정한 거 음식은 우리가 해도 되잖아.”
 이 꼬마 마법사의 이름은 다루스. 그리고 지금 말한 여검사의 이름은 세틸이라고 한다.
 나는 동료가 되겠다고 한 적 없는데 이들은 김칫국부터 마신다.
 김칫국 마셔봤냐구? 당연히 못 먹어봤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다.
 “세상에! 검술을 할 줄도 모르지, 마법도 못하지. 대체 어떤 배짱으로 여행을 다니는 건지 너무 궁금햇~!”
 쩝, 무슨 배짱이긴. 여차하면 레어로 텔레포트해 버리면 그만인데.
 나는 지금까지 유희를 다니며 사고 치고 다닌 적이 한 번도 없다.
 수많은 내 유희들 중 공격 마법조차도 쓴 적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며 드래곤으로 현신? 놀고 있네, 했으면 벌써 했다.
 나는 자비의 블루 드래곤~! 그깟 사소한 일로 현신하지 않는다.
 뭐, 울컥하면 현신하는 프라니바투스 같은 놈들은 드래곤을 대대로 망신시키는 놈들이다!
 “하하, 그게 말이죠, 제가 여행은 처음이라서······.”
 어색한 나의 변명. 어쩌랴? 말발이 딸리는데······.
 아아, 난 너무 예의가 발라서 탈이라니까~!
 요렇게 쪼그만 꼬맹이한테도 높임말을 쓰는 이 자비로움.
 “으··· 정말······.”
 “다루스! 시오스, 저녁 먹어요.”
 세틸은 다루스의 말을 자르며 엄하게 나무랐고 나에게는 방긋방긋 웃음을 지어주며 친절하게도 저녁을 먹으라는 말까지 했다.
 적어도 둘이서 쌍쌍으로 구박하는 일은 없겠군.
 쩝, 내가 기껏 생각해 낸 이름이 시크리오프스라는 내 이름에서 시오스만 따온 이름이다.
 뭐, 이것도 좋구만.
 “괜히 짐 하나 더 늘게 된 건지 몰라. 난 기척을 지우고 우리 앞에까지 왔길래 꽤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발정난 수캐들은 뛰다 못한 이들이 모두 처리해 버렸다.
 뭐, 그렇다고 죽인 건 아니구, 그냥 가볍게 손만 봐줬을 뿐이다. 드래곤 수준에서 가볍게니까 어느 정돈지는 알겠지?
 어느 정도 눈치는 챘겠지만 나는 지금 이들에게 영 순딩이로 보이고 있다.
 검술? 못한다고 잡아떼! 마법? 구경도 못했어! 라고 말이다.
 캬캬캬, 이게 바로 6천 년을 살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일명 ‘아무것도 몰라요~’ 작전이다.
 호오~ 음식은 맛있군.
 이들도 꽤 한실력 한다.
 내가 같이 다녀서 귀찮을 건 없겠지. 지네들 몸 지키기도 남는데 그 남은 여력으로 나 하나 못 지킬까?
 이렇게 내가 태평한 생각을 하는 동안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372년 7월
 날짜:6일(쩝, 날짜를 알았으니 쓴다).
 날씨:구름만 잔뜩 끼고 가끔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엄청난 궁금증에 빠졌다.
 이 일행의 정체는 뭘까?
 보통 일행은 아닌가 보다. 여자는 이미 검기를 쓸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와 있었고, 꼬마 마법사는 그 나이에 천재적으로 6서클의 마스터였다.
 도망 다니는 왕족인가?
 “으갸갸갹~”
 콰당~
 왕족은 아니군. 왕족이라면 예법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처음으로 돌뿌리 하나 안 굴러 다니는 평평한 땅에서 걷다가 자신의 발에 나머지 한쪽 발이 걸려 넘어지는 꼴을 구경했다.
 쿠쿡, 이것도 꽤 재밌군.
 “괜찮습니까?”
 일단 나는 그래도 예의상 물어보았다.
 “아, 네. 괜찮아요. 그쪽에서 그렇게 신경 써줄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
 쩝, 무슨 말을 해도 꼭··· 저거 나한테 뭐라 하는 거 맞지?
 한마디로 ‘니 몸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챙기냐?’ 이 말이지?
 ······맞는 말이다.
 하하, 보통 드래곤 같으면 이 말 듣고 폭발했겠지만 난 보통 드래곤이 아니다.
 6천 년 간 말발이나 좀 늘었으면 좋으련만 그건 제쳐 놓고라도 쓸데없이 인내심이라는 것만 늘어나서······.
 “조금만 더 걸으면 돼. 다루스! 곧 이쪽에 도시 하나가 나올 거야.”
 “쳇, 세틸은 언제나 그 말만 해. 조금 걸어서 나온다는 게 저번엔 사흘이었지?”
 뭐든 꼭 걸고 넘어가는군, 꼬마가. 사흘이면 짧구먼.
 “말대답하지 마, 다루스!”
 역시 세틸은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건방진 꼬마를 혼내주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스마일을 그릴 수가 있었다.
 잠시 조금 더 가다 보니 저기 앞에 상인 일행이 지나가고 있었다.
 역시 조금만 더 가면 도시가 나오나 보다.
 우락부락 용병들이 상인의 마차와 짐들을 호위하고 있었고, 아마도 이 상인은 여행 내내 안전에 안전을 거듭했을 것이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쏟아 부어야 용병들이 저렇게 철통처럼 지키고 있지?
 “여어~ 여행자 분들이신가 보군요!”
 갑자기 마차에 달려 있는 조그만 창문이 열리더니 학자풍으로 생긴 아저씨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아저씨라고 하니 좀 뭐하군.
 “아, 네!”
 세틸은 대답했고 곧 이어 그 아저씨는 마부에게 마차를 멈추라고 지시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상인답지 않은 호리호리한 몸매.
 나는 여태껏 상인은 돼지 비계 삶아 먹은 것처럼 뚱뚱하다 못해 옆으로 쭈욱~ 퍼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내가 예전 유희 중에 만난 상인의 얼굴이 그러했기에······.
 이 상인은 나의 환상을 깨기에 아주 적합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으니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녁은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내가 이 일행과 며칠을 같이 다니며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무슨 공짜가 있으면 무조건 달려든다는 것이다.
 “하하, 그렇다면 신세 좀 지겠습니다.”
 뻔뻔한 꼬마 녀석.
 세틸이 말했다면 그래도 ‘아~ 그렇습니까?’ 했겠지만 저 꼬마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
 에잉!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요.
 “아름다운 레이디께서는 아까부터 아무 말씀이 없군요.”
 그때 상인 옆으로 다가온 금빛으로 빛나는 금발머리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매우 뛰어나게 잘생긴 청년이 말했다.
 이걸 보니 골드 드래곤 프라니바투스가 생각나는군.
 여하튼 나는 황금색은 모조리 싫다!
 뭔가 이상한데?
 왜 세틸과 다루스가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그럼, 저 말이 나에게로 향한 것이었단 말이냐!
 난 분명히 미청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했다.
 지금 밝히지만 난 여성체다.
 어이~ 거기 놀라지 말라고.
 하긴, 내 말투를 보면 나조차도 남성체가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모프를 한다 해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이 여성체인 것에 대단한 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판을 놔두고 미청년의 모습으로, 절대 여자로 보이게 만들지 않는 미청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마법으로 굵게 남자답게 만들었기 때문에 절대 나를 알아볼 인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다!
 뭐, 몸이야 펑퍼짐한 로브로 가리면 굴곡이 없어지니까.
 이것을 알아볼 수 있는 종족이 딱~ 하나 있다.
 드래곤. 그러고 보니 이놈의 몸에서도 꽤 많은 마나의 양이 느껴지는군.
 뭐? 왜 진작 만났을 때 드래곤인 줄 몰랐냐구?
 당연하지.
 드래곤이 ‘나 드래곤이요~’라며 엄청난 마나를 개방하고 유희 다니는 줄 알았냐?
 그저 보통 인간보다는 뛰어나게 마나를 조정해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봐야 아는 것이지.
 “안녕하십니까, 시크리오프스님?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그··· 그··· 미청년은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아는 사이예요, 시오스?”
 세틸은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고 나는 그것을 나의 뛰어난 뇌에 입력시킬 수가 없었다.
 사고 회로가 정지되었기 때문에.
 “저를 만나신 게 그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군요.”
 내 본명을 알고도 저렇게 천연덕스럽고 가증(?)스럽게 말하는 인간이란 없다. 예전에 내가 유희를 다닐 때 만난 인간들은 내가 드래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간들 중에서 이런 인간은 없었다.
 설사 있었다 해도 몇백 년이 지난 일.
 살아 있을 수가 없다!
 드래곤이 유희 중에 다른 드래곤을 만나면 대게는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나는 이 청년을 보는 순간 골드 일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저 방금 성룡이 된 놈이 유희를 나왔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하! 지! 만!
 나를 이렇게 건방지게 부를 수 있는 드래곤은 골드 일족 중 그놈밖에 없다.
 그 이름도 유명한 프.라.니.바.투.스!! 이, 이놈도 유희를 나왔단 말인가?!
 쿵~!
 나는 머리에 둔탁한 충격을 느끼고 기절했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대로 뒤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땅에 머리를 박을 수밖에.
 흐려져 가는 내 의식 속으로 유난히 뚜렷하게 들리는 한마디의 말이 들려왔다.
 “오호라~ 절 만나신 게 이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군요.”
 그 반대다! 이눔아!
 
 
 제2장 세상에서 가장 재수없는 놈과 도둑 길드
 
 
 372년 7월.
 날짜:8일.
 날씨:주룩주룩~ 쏴아~
 내가 깨어난 곳은 의외로 마차 안이었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보인 것은 마차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등불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프라니바투스··· 이 녀석이다.
 날 기절시키게 한 장본인!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저는 유희를 즐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할 말 없다.
 왠지 이 녀석이 계획한 대로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왜 하필 이 넓은 대륙에서, 그 많고 많은 상인들 중 이 일행과 마주치게 된 거지?
 으··· 생각하기 싫다.
 “다른 인간들은?”
 “아, 가까운 곳에 동굴이 있어 모두 그곳으로 갔습니다. 제가 시크리오프스님이 깨어나면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뭐, 둘만이 이렇게 나눌 이야기도 있었고······.”
 으··· 이곳에 있기 싫다.
 빨리 그 동굴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
 이놈과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불쾌한 일이다.
 “내가 먼저 가지.”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동굴이 어디 붙어먹었는지도 모르는데··· 뭐, 가다 보면 나오겠지.
 완전 장대비가 주룩주룩 오는군.
 으··· 옷 젖는 거 싫은데······.
 하지만 나는 옷 젖는 것보다 이놈하고 같이 있는 것이 싫어 그냥 그대로 걸어갔다.
 “시크리오프스님!”
 그 말과 함께 나는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프라니바투스가 내 손목을 붙잡았고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옷 젖는 것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난 이놈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물론 싫어하는 것까지도 알려준 기억이 없다.
 이놈!! 스토커였나?
 프라니바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목을 붙잡아 마차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프라니바투스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마법으로 내 옷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아~ 따뜻해~!
 정성껏 내 옷을 말리던 프라니바투스는 문득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꼴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어투로 나에게 물었다.
 “3천 년 전의 대답··· 지금 해주십시오.”
 3천 년 전의 대답이라니?
 “응? 무슨 소리야?”
 “드래곤··· 맞습니까?”
 하하, 나도 가끔 그게 의심스러워.
 아앗~! 이게 아니지.
 나는 천천히 내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죽을 때가 되긴 됐나벼··· 기억력이 퇴화되는 것을 보니······. 쩝.
 “기억··· 나셨습니까?”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아마도 이놈은 그 대답을 원하고 있는 것일 테지······.
 내가 이놈을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건······.
 “그걸 꼭 지금 들어야겠나?”
 기분이 몹시 나빠진 내 목소리가 자연스레 아래로 깔렸다.
 “해주십시오.”
 “꺼져라.”
 내 대답은 간단했다.
 프라니바투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손을 하얗게 꽉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열받았나 보군.
 “제가 3천 년 간 기다린 대답이 겨우 이것이었습니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대답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에······.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이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거칠게 마차 문을 열었다.
 내 몸을 휘감는 바람과 빗줄기.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가운 빗줄기가 내 얼굴을 세차게 때리고 있으니 정신이 들 만도 하지만 내 의식 상태는 여전히 백지였다.
 순간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낀 나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372년 7월.
 날짜: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는지 모른다.
 날씨: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쬔다.
 나는 내 얼굴 위로 약간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정신을 차렸다.
 아아, 며칠 동안 여기 쓰러져 있었던 건가? 한심하군.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드래곤이··· 뭐, 나는 헤츨링 때부터 희귀하게도 몸이 약했으니까······.
 인간쯤이야 대뜸 날려 버릴 수는 있지만 사실 나는 화이트 드래곤보다도 약하다.
 치유 마법도 나는 쓰지 못한다. 다행히 드래곤의 자체 치유력이 높아서 그런 것은 별로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뭐, 치명상만 면하면 되는 거니까.
 아아~ 하늘이 도는구나. 아직도 띠잉~ 한 내 머리.
 “에구구, 이곳에서 대체 며칠을 보낸 거야?”
 나는 내가 어느 쪽으로 얼마만큼 걸어왔는지 알지 못한다.
 후우, 나 혼자 다시 여행을 다녀야 하는 건가?
 나야 좋지. 오랜만에 내 고귀한 입맛이 되살아나길 기원하며 나는 이 대륙에 있는 명소와 음식점들을 둘러보기로 결정지었다.
 뭐, 그 세틸과 다루스는 원래가 나와 상관없는 인간들이었으니······.
 프라니바투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
 제길··· 3천 년 전 일이 생각나 버렸다.
 사실 3천 년 전에 프라니바투스는 나에게 청혼을 했었다.
 나보다 2천 살이나 어린 주제에······.
 그것이 내가 프라니바투스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전에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유희를 다닐 때 그놈이 이번처럼 쫓아와서(나는 어느새 프라니바투스를 만난 것을 우연이 아닌 조작된 것이라 단정 지어버렸다) 깽판 놓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나는 그때 코웃음을 치며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프라니바투스! 끈질긴 놈! 그 대답을 3천 년이나 기다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히는군.
 아아~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싫다.
 이 기억을 지워 버리고 싶은데··· 쩝, 방법을 알아야지.
 기분 잡쳤다.
 제길··· 왜 이리 기분이 찜찜하지?
 레어로 돌아가 잠이나 퍼 잘까?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나무와 풀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고는 약간은 비틀거리는 걸음 모양새를 하며 가까운 나무 하나 골라잡아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서 하루 더 쉬다 가야 하나? 몸이 말을 듣질 않는군.”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자체 치유력은 어딜 간 거야?
 “하아, 하아··· 제길 유희 나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뜨거운 입김이 목을 타고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에 느끼는 건가?
 문득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좌표.
 내가 예전에 유희를 즐길 때 꽤 기억에 남는 장소라서 암기해 놓은 좌표가 있었다.
 “아마 도시 안이었지?”
 그쪽으로 텔레포트해서 들어가 가까운 신전에서 치료를 받으면 되겠군.
 “텔레포트!”
 시동어가 떨어지자 내 몸은 흰빛으로 둘러싸여 곧 이어 어느 지점에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으··· 아픈 몸에 무리하게 마법을 썼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군.
 나는 인상을 파악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 들고 설치는 남자 하나에 도끼, 표창, 롱 소드··· 엥? 무슨 무기들이 이리 많지?
 “누구냐!”
 빠른 상황 판단으로 나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나쁜 소굴에 떨어진 것 같았다.
 “우리 도둑 길드 한복판으로 텔레포트를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껑충껑충 뛰어다니는구나!”
 도둑 길드··· 였군··· 아직 그대로네······?
 그리고 이봐이봐, 내 간은 아직도 뱃속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네.
 올바르게 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안 그래도 아픈 머리에 혹 하나를 더 붙여야 했다.
 뒤에서 어떤 무식하게 생긴 놈이 칼등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기 때문이다.
 제길··· 일어나자마자 다시 기절하다니······.
 너··· 드래곤의 머리를 친 죄값은 크게 받을 테니 각오해······.
 그나저나 기절하는 기분 한번 더럽군.
 
 372년 7월.
 날짜:내가 며칠 동안 기절해 있었는 줄 모른다. 고로,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날씨:어두컴컴한 감방 같은 곳이어서 밖의 날씨가 어떤지도 모르겠다.
 “으윽··· 머리에 혹 하나 생겼겠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져 보았다.
 역시나 돌덩이만한 혹 하나가 덩그러니 머리에 자리 잡혀 있었다.
 이번 유희는 나의 수난 시대인가?
 “일단 살려두긴 했지만 저놈이 그런 가치가 있을까요?”
 “마법사는 상당히 고가품이다. 뭐, 정 안 되면 얼굴이라도 반반하니 귀족들의 노예로 줘버리면 그만이고······.”
 저게 뭔 소리다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갑자기 일어나자 꽤나 놀란 듯한 이들.
 “어, 어쩌죠? 마법산데··· 손에 결박도 해두지 않았으니.”
 “걱정 마라. 우리 도둑 길드가 어떤 곳인 줄 잊었느냐? 블루 드래곤이 창시한 ‘시크리오프스의 도둑 길드’! 드래곤님은 이럴 때를 대비해 이렇게 마법이 봉쇄되는 이 방을 만들어놓았다. 마법사 놈들은 마법을 쓰는 것만 빼고는 허약한 나무토막 같은 놈들이다.”
 이놈··· 상당히 마법사에 대해 쌓인 것이 많았군.
 곁에 있는 몽둥이를 들고 가까이 오는 이들.
 허억~! 저걸로 나 치려고? 안 돼!
 “기, 길드 마스터를 불러라~!”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저 몽둥이만은 막기 위해 내가 생각해도 조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녀라면··· 아직도 살아 있을 테지··· 엘프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보다는 훨씬 기니까······.
 “길드 마스터님을 왜 부르는 거죠? 아는 사이가 아닐까요?”
 “서, 설마··· 이놈 맞기 싫어서 공갈치는 것 아냐?”
 “진짜면 어떡해요!”
 두 패로 나뉘어졌군. 일단은 안심이다. 나는 지금 저 무식하게 생긴 몽둥이로 내 머리통을 박살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왜 마법을 쓰지 않냐고?
 나도 쓰고 싶다.
 하지만 저놈들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 도둑 길드는 내가 6백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유희를 나왔다가 내 동료들과 창시한 곳이다.
 이곳에는 마법을 무위로 돌리는 결계가 걸려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쪽팔리지만 나는 지금 내 실력으로 이 결계를 깰 수가 없다.
 사실 이 방이 마법 실험하다가 실패해서 자연스레 마법 무위의 결계가 쳐졌다면 믿겠는가?
 못 믿겠다는 표정이군.
 나조차도 못 믿겠으니······.
 저놈들은 그 사실을 무슨 내가 일부러 이래 놨다는 것으로 알고 있군.
 “안나를 불러줘!”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안나 프리안스.
 다크 엘프이면서 성격은 지랄맞게도 좋은 엘프.
 지금도 나는 꽤나 놀라고 있다.
 안나는 동정심이 꽤 강해서 이런저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이 길드를 말아먹었을 줄 알았다.
 “길드 마스터님의 성함을 알고 있는데요?”
 “빨리 가서 길드 마스터님을 모셔와라!”
 안나의 이름을 대니 내가 뻥친 거라고 소리치던 놈은 금세 잠잠해져 안나를 데리러 갔다.
 아아··· 6백 년 만의 상봉인가?
 빨리 보고 싶군.
 쾅!
 허억~ 문짝 부서졌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검은 피부에 대비되는 화려한 붉은 머리를 가진 여인이 약간 야시시한 옷차림을 하며 나타났다.
 여인의 붉은 눈동자는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저게 진짜 안나야?
 “아, 안나······?”
 “잘도··· 이제야 돌아오셨군. 시.크.리.오.프.스!!”
 왜···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안나는 아까의 내가 두려워했던 몽둥이를 보고는 그것을 양손에 잡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복날에 개 패듯 두들겨 맞았다.
 왜··· 내가 맞아야 하는 거지?
 “안나~! 살려줘!”
 “이 무정한 년아! 왜 이제야 기어나오는 거야? 그래, 거기서 잠이나 퍼 자니까 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나든? 엉? 어쩌다가 생각나니까 들러봤냐? 아예 평생 오지 말질 그래?”
 이번··· 유희··· 잘못 나왔다.
 사실 안나의 말이 맞긴 하다.
 안나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이것도 어쩌다가 좌표가 기억나서 무리해서 텔레포트해 온 거고······.
 고로, 난 맞아도 싸다.
 안나는 잠시 나를 때리던 몽둥이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만 때리려나 보군.
 으··· 온몸이 다 쑤시고 결리고 두통까지 심해졌지만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야, 이놈 여기서 어차피 마법도 못 써. 몽둥이 하나씩 들고 와서 패!”
 안나야~!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놈들은 몽둥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를 아주 잘 다져 놓았다.
 허억~! 왜 툭하면 기절하던 내 정신이 이때만큼은 말짱한 거야!
 기절하면 안나가 불쌍해서 치료라도 해줄 텐데~!
 드디어 내 정신이 나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떠나가려고 준비 운동을 했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 안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물 갖다 퍼부어서 정신 들면 도로 패!”
 무, 무정한 년······.
 이번 유희는 한참을 잘못 나왔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한동안 맴돌았다.
 
 372년 7월.
 날씨:모른다.
 “이제 깨어났냐?”
 안나, 이년! 기절한 나를 무식하게도 세 번이나 깨워서 도로 팬 년!
 나쁜 년, 내가 다신 여기 오나 봐라! 확 망해 버려라!
 옛날의 그 동정심 많은 성격은 어디 처박아 두고 이런 개 같은 성격이 나왔다냐!
 마음속으로 온갖 욕을 다 퍼붓고는 아직도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이며 욕을 하는 나를 안나는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온 거야?”
 보고 싶었다구? 나를? 그런데 보고 싶었으면 좋아해야지 복날 개 패듯이 패?
 “화났니?”
 너 같으면 화 안 나겠냐?
 나는 삐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삐순인가?
 “어제는 그냥 약간의 몸 풀이로 패줬는데 오늘은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구나?”
 안나의 일어나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얼른 나가려는 안나를 쪼르르 뒤따라 가서 꼬~ 옥 끌어안았다.
 “안나~! 많이 보고 싶었쪄~!”
 아··· 이런 내가 정말 싫다.
 몽둥이로 안 맞으려고 이런 고생을 하다니.
 쩝, 내 얼굴에 아양이라니.
 그러자 내 얼굴을 손으로 찰싹 때리며 안나는 붉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얼굴 도로 바꿔. 그렇게 말하니까 징그러워. 이거 생각할수록 열받네?”
 나는 안나가 화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내 얼굴에 걸려 있는 마법을 지워 버렸다.
 그러자 나타나는 본판.
 정말 싫다.
 이 가녀린 턱 선과 푸른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
 병에 걸린 닭처럼 비실비실한 몸에 정말 아픈 것 같아 보이는 너무도 하얀 피부.
 이거 어째 선탠해도 안 태워지냐.
 쥐 잡아먹은 것처럼 붉은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나는 안나를 쳐다보았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
 그러고 보니 몸은 치료가 되어 있군.
 내가 내 몸을 신기한 듯 쳐다보자 안나는 손가락을 내보이며 내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렇게 고마워할 건 없어. 네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포션을 몽땅 사서 뿌리니까 그렇게 흉터 하나 없이 낫더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그랬던가!!
 내 돈!
 포션! 그게 얼마나 비싼 약인데, 그 많던 돈으로 다 사서 이 망할 몸에 뿌려?!
 “그런데 난 줄 어떻게 알았어?”
 “당연하지. 이곳 좌표를 정확히 알아서 텔레포트해 들어올 놈은 너밖에 없고 푸른 머리를 촌스럽게 그렇게 기르고 다니는 놈도 너밖에 없어. 그리고 더 결정적인 건, 이곳 좌표를 너밖에 모른다는 거야. 뭐, 부하들이 나 몰래 너를 팔아먹으려 했지만 다행히 내가 그전에 너를 이렇게 구할 수가 있었지.”
 그게 왜 네 덕인데!
 내가 만약 안나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면 그대로 팔려갔다는 거군.
 “나··· 배고파··· 며칠 굶었는지 모르겠어.”
 “나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아아··· 내가 며칠을 굶었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뭐, 나야 몇 년을 굶어도 끄떡없지만 그래도 뱃속에서 요동치는 걸 어쩌라고.
 나는 안나의 손을 잡고 어린애처럼 방방뛰며 방문을 나섰다.
 보통 도둑 길드가 그러듯이 이곳은 아직도 번듯한 술집인 척 행세를 하고 있었다.
 뭐, 손님까지 모두 길드원일 테니까.
 내 눈에 탁자에 앉아서 술을 퍼마시며 안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는 놈이 들어왔다.
 아~ 반가워라!
 이렇게 다시 상봉하게 되다니.
 오오~! 마침 저기 나의 머리에 혹을 솟아나게 한 롱 소드가 있군.
 드래곤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킨 대가는 내가 후하게 받는다고 했지!
 나는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고는 롱 소드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음··· 꽤 무겁군.
 길드원들은 자신의 길드장이 웬 아리따운 여인과 같이 내려오자 이상한 표정을 지었고, 갑자기 그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의 길드원들 중 힘이 세기로 유명한 길드원의 뒷덜미를 롱 소드로 내려치자 하마터면 뛰쳐나가 말릴 뻔했다.
 하지만 여인의 옆에 있는 것이 누구인가?
 그 성격 더러운 길드 마스터가 아닌가?
 “너도 참 유치하게 노는구나?”
 “뭘! 저놈은 내 머리를 쳐서 이만한 혹을 만들었다구. 난 그걸 배로 갚아준 것뿐이야.”
 그러면서 쳐다본 길드원의 머리에는 혹 두 개가 쌍쌍으로 붙어 있었다.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드는 나였으나 이내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보통 드래곤 같았으면 살아 있기도 힘들었을 거야.
 술집 문을 열고 나온 바로 앞은 어이없게도 시장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이상한 표정 짓지 말라구.”
 “이곳··· 참 많이 변했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엔 조금 큰 공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 나는 일부러 공터가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길드를 세웠던 것이다!
 “6백 년이란 시간은 인간에겐 짧은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씁쓸한 듯이 중얼거리는 안나의 말에 약간의 미안한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제··· 안나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았군.
 엘프의 생명력은 천 년인가······?
 안나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안나가 3백 살이었으니··· 후후, 안나도 할머니군.
 “뭐, 그래도 시장이 있으니 먹을 것 걱정이 없어 좋아.”
 안나는 내 손을 잡아끌며 시장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배부르도록 먹었는데도 안나는 뭐가 부족한지 자꾸 나를 퍼 먹이려 들었다.
 시장 아주머니나 상인들과 친한 것을 보니 신뢰를 얻고 있는 듯했다.
 역시, 안나의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약간 포악성과 잔인성이 늘긴 했지만 그래도 한없이 착한 것은 여전한 것 같으니.
 왠지 안심이 되는 나였다.
 
 
 제3장왕궁을 털어라?!
 
 
 372년 7월.
 날짜:14일(내가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나 보군).
 날씨:하늘에서 고공낙하를 하면 딱 좋을 날씨.
 지금 나는 안나의 도둑 길드에서,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창시한 도둑 길드에서 말 그대로 놀고 먹는 중이었다.
 빈둥빈둥 굴러다니다가 안나를 보면 쪼르르 달려가서 아양 떠는 그런 객이 되었다.
 하아, 이러면 내가 레어에서 나온 의미가 없어지는데······.
 나는 달콤한 초콜렛을 입 안 가득 집어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내 주위에는 도둑 길드원 꼬맹이 녀석들이 훔쳐다 준 과자와 사탕, 그리고 심지어는 통닭까지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게 먹다간 살찐다.”
 “드래곤이 뚱뚱한 거 봤어? 그리고 나는 살 좀 쪄야 된다구. 이렇게 비루먹은 닭새끼마냥 비실비실한 몸··· 맘에 안 들어.”
 그렇다. 나는 이 몸이 무지 싫다.
 안 그래도 일족들 중 제일 약한데 몸마저 이렇게 약하게 보이다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 같아서 나는 이 몸이 싫다.
 나에게 자존심이란 것도 있었냐구?
 나도 드래곤이다.
 자존심만 어디서 주워왔는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말 많고, 몸집만 무식하게 크고, 사악(?)하고, 포악(?)한 종족이란 말이다!
 “갑자기 말하다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노, 놀랬다. 안나의 얼굴이 바로 내 코앞까지 와 있었기에······.
 “뭐, 뭐야?”
 “우리 한 건 하러 가자.”
 한 건? 도둑질을 하자고?
 나야 심심했으니까 만사 OK구먼.
 “그런데 길드 장인 네가 가야 할 정도로 큰 건이야??”
 “쿠쿠쿠, 당연하지.”
 왠지 불안해진다.
 “어딘데······?”
 “왕궁.”
 저년이··· 날 패고 나서 드디어 미쳤나 보군.
 거기가 어디라고 털어? 들어가자마자 바로 잡혀 목 잘릴 텐데.
 내가 아무리 미친 드래곤이라도 이것만은 동조 못한다.
 “잘 있어. 널 만나서 그래도 행복했다.”
 나는 미련없이 방문을 나섰다.
 “저년 붙잡아서 꽁꽁 묶어두고 멍석말이해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 뭐, 저번에 사논 포션이 있으니까.”
 방문 앞에 있는 놈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저, 저게 과연 친구란 말인가?
 “나~! 왕궁 털러 가고 싶었어.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내가 말했을 거양~!”
 내, 내가 싫다.
 “후후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럼 준비를 해야지?”
 안나는 그 말을 남기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궁을 털자고······?
 으··· 죽을 거 뻔한데 거길 왜 털어!
 돈에 환장한 엘프 같으니라고.
 대체 얼마나 준다고 했길래 왕궁을 털어?
 약간의 양심의 찔림을 받는 나.
 그래··· 돈 많이 준다고 하면 털 수도 있겠다.
 
 372년 7월.
 날짜:20일.
 날씨:아아··· 구름이 조금 끼었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연 6일 간의 엄청난 침투 작전을 세운 뒤에 왕궁을 털러 가기로 했다.
 그 작전이란 게······.
 
 1. 그곳과 가까운 정보 길드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왕궁의 내부 지
 도를 산다.
 2. 왕궁 주위를 배회하며 넘어(담 넘어) 들어갈 곳을 찾는다.
 3. 들어가면 찾는 물건만 찾고 만약 잡히면 각자 튄다.
 
 참으로 무식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각자 튀라는 말이지······?
 각자 튀라는 말이지······?
 아아~! 네 번째 일기에서도 보여줬는데 이번에 나의 달리기 실력을 다시 보여줘야 하다니······.
 나는 어느새 우리가 잡힐 것이란 것을 확정하고 있었다.
 왕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인가?
 아니다. 왕궁! 그 이름만 들어도 누가 사는 집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잊은 점이 있다.
 이 왕궁이라는 집에는 그 누구 말고도 다른 누구들이 산다는 것이다.
 바로 기사들.
 공부와 예법은 기본이고 싸움도 디따시 잘하는데 칼질까지 디따 잘하는 놈들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기사단이다.
 “캬캬캬~! 완벽한 작전이야!”
 자신이 세운 작전을 대단히 흡족한 듯이 바라보고 있던 안나의 흡족함을 나는 단번에 깨버렸다.
 “그 정보 길드 녀석이 왕한테 불면 어쩌려고? 왕궁을 그렇게 샅샅이 알고 있는 인간은 정보 길드밖에 없으니, 왕궁이 털리면 제일 먼저 추궁당하는 것은 왕궁 사람이 아니라 정보 길드일 텐데? 길드 장이 무서워서 다 불면 어쩌려고? 아~ 그리고 정보 길드는 그 나라의 왕 밑에 있으니 지도 같은 건 애시당초 팔지도 않겠구나. 들어가기도 전에 수상한 놈으로 감옥행 하겠네.”
 “판 깨는 소리 그만 해라.”
 음산하게 목소리를 깔며 안나는 답했다.
 쩝, 기껏 말해 주니까.
 “그런데 도대체 무슨 물건을 털려고 이 짓을 하는 거지?”
 “후후후, 바로 왕자야! 왕자!”
 왕자······? 내가 알고 있는 왕자는 한 명뿐이다. 왕의 아들.
 “미, 미쳤어! 미쳤어! 물건도 아니고 사람을 훔쳐? 으악~! 세상에··· 이럴 순 없는 거야!”
 그렇다. 왕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왕의 아들··· 왕의 아들··· 왕족의 몸에 천민이 손끝 하나만 대도 바로 목숨이 달랑달랑한 판에 납치를 하자고? 걸리면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물론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살아남기 힘들 판이군. 그럼··· 내 일족들을 멸한다는 말? 드래곤을? 음··· 이건 아니군.
 “그··· 왕자가 몇 살인데?”
 “스물둘.”
 “다, 다 큰 놈을 납치하자고? 어떻게 들고 뛰어?”
 “크크큭, 니가 마법사잖아. 뭐, 납치하면 곧바로 텔레포트해서 여기로 날아오면 될 것 가지고.”
 스물둘이란다.
 세 명을 나한테 텔레포트시키라고? 나보고 남 좋은 일을 하라고?
 아···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는 마법사가 뭔 줄 아나?
 텔레포트 마법은 6서클 마법이다.
 고로 인간들에게 함부로 그렇게 펑펑 써댈 마법이 아니라 이거지.
 하지만 마법사 중에 6서클을 마스터했다고는 하지만 마나가 부족해 텔레포트를 할 수 없는 마법사가 종종 가다가 있다. 저번에 내가 만났던 꼬마도 천재라는 명칭이 붙은 것만은 확실하나 마나가 많이 부족해 텔레포트를 시도할 수는 없었다.
 보통 인간의 마법사가 텔레포트를 한번 하면 일주일은 앓아 누워야 되니까.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는 마법사는 바로 지 분수도 모르고 텔레포트를 시도했다가 마나가 부족해 공간의 틈에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마법사다.
 내가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인간의 몸으로 텔레포트를 나까지 합해 세 명을 시키라고?
 난 약한 드래곤이란 말이다~!!
 뭐, 내 실력으로 시킬 수는 있다.
 말 그대로 나는 마나가 부족하지도(아예 넘쳐흐르지) 체력이 딸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러냐고?
 그냥(퍼억~! 그렇다고 돌로 치면 어떡해! 아프잖아!).
 “흐음··· 내가 깜박 잊고 있었다. 의뢰를 한 사람이 왕궁의 지도를 구해다 줬거든.”
 어떻게 저걸 잊을 수가 있지? 크크크, 이번 일이 끝나면 왕궁 지도를 팔아먹어도 돈깨나 되겠군.
 “오늘은 푹 자둬. 내일 왕궁으로 떠날 테니까.”
 “며칠 걸리는데?”
 “9일.”
 “잘 자라.”
 어떻게 잘 잘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무식하고도 엄청난 작전 하나만 달랑 세워놓고 털러 가자고?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어차피 일 틀어지면 바로 텔레포트할 테니······.
 쓴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여는 안나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옛날부터 안나가 이렇게 무모했나?
 쩝, 세월이 참 사람 여럿 버려놓는군.
 
 372년 7월.
 날짜:26일.
 날씨:비 온 뒤 갬.
 화가 난다.
 엄청나게 열받았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는지요, 아름다운 레이디들?”
 “······.”
 “잠깐 얘기 좀······.”
 나는 옆에 있는 안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안나 역시 짜증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마침 저쪽에 괜찮은 찻집이······.”
 이··· 느끼한 놈.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별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아서 모르겠다.
 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지?
 벌써 3일째다.
 중간에 잠깐 들른 도시에서부터 이 느끼한 인간은 우리를 뒤따라왔다.
 우리는 되도록 이 인간을 무시하려 무진 애를 썼다.
 첫날에는 그저 우리 뒤만 따라오더니 그 다음부터 지금까지 연 이틀 동안 계속 짜증나게 옆에서 이러고 있다.
 처음에는 몇 마디 받아줬지만 1초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가시가 돋히는 녀석.
 어느샌가 안나와 나는 이놈을 처참히 무시하고 있었다.
 “안나, 짜증나.”
 “날려 버려.”
 간단한 안나의 대답에 나는 진짜 저놈을 날려 버릴까도 생각을 했지만 내가 누구냐?
 자비로운 블루 드래곤 시크리오프스가 아닌가?
 3일 후면 수도에 도착하기에 나는 그냥 참고 지내기로 했다.
 “이곳에 있는 도둑 길드로 갈래? 아니면 여관으로 갈까?”
 안나는 나에게 물어왔고, 나는 이놈이 혹시 이 소리를 들었을까 봐 슬쩍 느끼한 놈을 쳐다보았다.
 “도둑 길드······?”
 역시나 이놈은 그 소리를 들었다.
 안나는 무지하게 띠껍다는 듯이 그놈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한마디 만을 남기고 먼저 가버렸다.
 “기억 지우고 아무 데로나 날려 버려. 특히 드래곤 레어가 있는 곳이면 좋고.”
 쩝, 어쩔 수 없군. 후한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아, 나는 내 뒤에서 아직 안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놈을 잠시 쳐다보았다.
 내가 자신을 쳐다보자 이놈은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도둑 길드······? 그럼 댁들이 도둑 길드원?”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구.
 “인간들이 살아갈 때 듣고도 못 들은 척할 때가 있는 법이에요.”
 “······??”
 그놈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아, 이건 명대사야, 명대사!
 “텔레포트.”
 곧 이어 흰빛이 느끼한 인간의 온몸을 뒤덮었다.
 흰빛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나는 마음 편히 저기 멀리 가고 있는 안나를 뒤쫓아갔다. 드래곤 로드의 앞마당으로 텔레포트시켜 놨으니 뭐, 로드님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괴기스럽게 쳐다보았지만 나는 딱 한마디를 해줬을 뿐이다.
 “텔레포트 마법 처음 보나요?”
 아, 이 인간들은 처음 보겠군.
 “날려 버렸어?”
 “응.”
 “어디로?”
 “로드님의 레어로.”
 “캬캬캬~! 그놈 얼굴색이 어떻게 변했을까? 쿠쿡··· 크하하핫~!”
 이게 과연 여자가 웃는 목소리란 말인가?
 
 드래곤 로드 마리오네라는 지금 갑자기 자신의 앞마당에서 준비 체조를 하다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인간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더니 얼굴색이 하얗게 되다 못해 시퍼리멍덩해졌다.
 자신의 앞 발톱으로 그 인간을 톡톡 건드려 보니 움찔움찔 반응이 오는 게 재미있어서 아예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인간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으··· 으······.”
 드래곤을 보더니 입도 안 떨어지는 것 같은 인간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 직전이었고, 마리오네라는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발톱으로 그 인간을 들어 올려 레어 안으로 쿵쿵거리며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곧 이어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멈춰 서서 자신의 레어로 누가 간 크게 이놈을 떨어뜨렸을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력의 냄새를 맡았다.
 곧 이어 그 마력의 주인이 얼마 전에 유희를 나갔다고 전해진 시크리오프스의 마력 냄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나중 모임에 만나면 좋은 선물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전하리라 마음먹고는 다시금 짧은 발을 놀려 레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372년 7월.
 날짜:29일.
 날씨:구름 한 점 안 보이고 푸르기만 하다.
 프네스 왕국의 수도 가이네스.
 역시 수도라 그런가?
 성문에서의 검색은 약간 엄격했지만 그런대로 우리는 통과할 수가 있었다.
 “있잖아, 우리 언제 털어?”
 나는 아주 조용히 안나에게 물어보았다.
 사전 조사를 하고 털겠지?
 “오늘 저녁.”
 미, 미친······.
 “너, 생각이 있는 거야? 오늘 저녁이라닛!”
 “생각은 충분히 있어. 담 넘어가서 왕자 찾아다가 의뢰인에게 가져다 주면 될 것 아냐?”
 “어떤 인간이 이따위 의뢰를 했는지 심히 궁금하다.”
 진짜 궁금하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자를?
 정신 상태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이리도 간이 크단 말인가?
 “빨리와. 왕궁 쪽으로 한번 가보자.”
 그래. 간다, 가.
 네 맘대로 해라. 어차피 틀어지면 튀면 되는 거고.
 역시 왕궁이라 그런가? 담이 디따 높다. 이걸 넘을 수 있을까?
 마법으로 넘는다고 해도 설마 왕궁에 침입자를 대비한 알람 마법 하나 걸려 있지 않을까?
 “이걸··· 넘자고?”
 “크크크, 네가 설마 왕궁 마법사의 알람 마법 하나에 나가떨어질 인물이냐?”
 이년, 아주 날 봉황으로 믿고 있군.
 쩝, 사실인데 어쩌리?
 “그래. 넘자, 넘어.”
 나는 더 이상 안나의 말을 거역하길 포기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끝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날 밤······.
 “플라이!”
 별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까만 밤하늘 아래에서 내 목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러다가 기사단 쫓아오는 거 아냐? 뭐, 내 마력은 9서클은 간단히 뛰어넘는 10서클의 마스터이기에 왕궁 마법사가 나보다 높은 서클이 아니면 내가 마법을 썼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 인간들의 마법사 중에는 8서클 마법사가 인간 최대의 마법사로 알고 있다. 설마 이 왕궁의 인간 마법사가 8서클 마법사라 해도 나를 막지는 못한다. 쩝, 이거 너무 쉽구먼······.
 허공에 띄워진 안나와 나는 그대로 담벼락을 넘었다.
 으흑··· 왕궁 디따 크다. 이곳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다는 거야?
 아무리 지도가 있기로서니··· 우리는 왕자 얼굴도 모른다!
 난 왕궁을 처음 와봤다.
 이거··· 원 드래곤의 레어보다도 크다니······.
 쩝, 할 말 없다.
 “뭐 해? 안 내려가?”
 “그래, 내려간다.”
 콰당~!
 재촉하는 안나에게 열받은 나는, 아니, 사실 나를 개 패듯 팬 안나에게 약간의 감정이 있던 내가 안나에게서 바로 플라이 마법을 해제시키자 안나는 콰당~! 나는 우아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미안한걸? 저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에구구, 삭신이야. 너, 두고 보자.”
 그렇게 말해 봤자 하, 하나도 안 무섭다. 그런데··· 떨리는 내 목소리는 뭔가?
 역시 다크 엘프답게 어둠에는 익숙한 안나는 가까이에서 순찰 도는 경비병의 뒤로 돌아가서 그대로 목을 꺾어버렸다.
 이거 인간까지 죽이는 거야?
 “안나야, 안나야, 왜 인간을 죽이는 거야?”
 안나는 그 죽은 인간을 나무 밑에 아주 교묘하게 숨겨놓고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안나는 예전에 인간을 아주 사랑했었는데.
 점심을 잘못 먹었나?
 오늘은 왠지 안나를 건드리면 안 될 것 같군.
 기분이 매우 저조해 보여.
 “따라와.”
 약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안나.
 나도 아무 말 없이 안나를 따라가기만 했다.
 믿어야겠지.
 내 친구니까···
 믿어야겠지.
 만월의 밤이다. 난 만월이 싫다. 생김새는 둥그렇고 누런 쟁반이 하늘에 동동 떠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라. 뭐, 해는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내가 해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텅 빈 복도. 음침하게 횃불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다. 흐아, 여기에다가 로드님이 입가에 피 뿌리고 나타나면 딱 좋겠군.
 왕궁이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건가? 적어도 기사 한둘쯤은 있어야 정상 아닌가?
 나는 왕궁에 들어와서 아까 죽은 인간을 빼고는 인간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왠지 불길한 기운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의 단순함은 여전히 들어났다.
 “으하핫~ 안나야, 안나야~ 이것 좀 봐봐~”
 난··· 대체 정신이 있는 드래곤이란 말인가?
 “너··· 뭐 하는 짓이얏!!”
 “앙?”
 음침한 복도를 지나가다가 심심해진 나는 옆에 있던 문 하나를 열어젖혔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거기에는 각종 골동품들과 시장에 내다 팔면 꽤나 짭짤할 것 같은 물건들이 방 안을 진열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따라와.”
 “히엥··· 이거 전리품인데······.”
 “전리품 챙기다가 날 새!”
 “알았어, 알았다구. 쳇!”
 분위기를 좀 더 띄워보려고 했던 나의 노력은 물거품.
 안나에게 무안을 당한 나는 뚱해져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안나의 뒷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멈칫.
 “우갸갸갹~”
 쿠탕~
 안나가 멈춘 것을 몰랐던 나는 그대로 일직선으로 걷다가 무식하게 거대한 문에 그대로 헤딩을 해버리고 말았다.
 하, 이걸 어쩌나? 자체 치유력만 믿어야지.
 요즘엔 그것마저도 말을 안 듣더군.
 끼익.
 그 거대한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린다. 서, 설마 박치기 한 방 했다고 문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갑자기 쏟아져 오는 불빛.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낀 나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살짝 눈을 뜬 내 눈에 보이는 처음의 물건(?)은 바로 내 발 앞에 깔린 붉은 비단이었다.
 “꺄아~ 안나야~ 비단이야, 비단~ 비싸겠다. 그치?”
 살짝 발을 디뎌보자 부드럽게 내 발목을 휘감는 비단의 감촉이 너무나도 좋다.
 “바보야! 상황 파악을 하라구!”
 그때서야 나는 주위를 둘러볼 수가 있게 되었다.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칼을 들이대고 있는 기사들. 친위대에 겹겹이 쌓여져 있는 귀족 또는 황족이라고 생각되는 인간들. 그리고 너무나도 소중한 나의 친구.
 “넌 너무 친구를 쉽게 믿는 게 탈이야. 이렇게 배신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런가······? 안나가 나를······?
 나는 어느새 내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쯤이야 처리 못할 내가 아니다.
 여유롭게 마력을 개방하려던 나는 문득 마력이 개방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마력을 차단한 건가? 내 마력은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런 일을 할 존재라고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딱 한 존재밖에 없다.
 드래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헐··· 내가 살아오면서 꽤나 미움받을 짓을 많이 했나 보군.
 “미안, 시크리오프스.”
 그렇게 말한 안나의 단검이 내 어깨를 꿰뚫었다. 무표정한 기사들의 얼굴이 드래곤인 내게 두렵게 느껴졌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크윽······.”
 기사들은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았고, 그 방에 있는 모든 인간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이럴 땐 무대 체질이··· 이게 아니잖앗~!
 도대체 이 일들이 어떻게 된 일이지? 슬프도록 아름답게 웃고 있는 안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피가 빠져나가며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나는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호위되어 있는 쪽에 아주 익숙한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라니바투스.
 “저 여자가 드래곤인가?”
 “네.”
 “흐음, 왜 이렇게 약하지?”
 “글쎄요······.”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젊은 인간 하나.
 어이~ 그렇게 동물원 오크 구경하듯 쳐다보지 말라구. 내 기분이 더러워지니까.
 나는 쓰러지기 직전에 안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웃고만 있는 안나의 얼굴.
 역시 6백 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구나.
 
 
 제4장 배신
 
 
 372년 7월.
 날짜:30일.
 날씨:캄캄한 밤이다.
 어깨의 통증이 너무 아려와 살짝 눈을 떠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화려한 불빛.
 방 안에 아무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살짝 일어나 보았다.
 아아~! 치유 마법도 쓰지 못하는데 부상이라니······. 쩝, 내가 너무 안일했나?
 레어로 돌아가~! 말어?
 약간은 큰 방.
 침대는 대여섯 명이 굴러다녀도 남아돌 정도로 크고 천장에는 화려한 무늬에 마법으로 띄운 빛들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조심스레 발을 딛자 푹신한 카펫 때문에 발목이 잠겼고 테이블에는 아직 뜨거운 스프와 따뜻한 물잔이 올려져 있었다.
 아직 사람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군.
 갑자기 움직인 탓인지 어깨를 감고 있는 붕대에 피가 배어 나왔다.
 으··· 6천 년 삶에 이런 큰 부상을 입다니.
 도대체가 인간들이 말야! 내가 지네들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아아, 이번 유희는 정말 최악이다.
 유희를 나온 지 한 달 남짓 됐는데 이런 꼴을 당하다니······.
 나는 레어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몇백 년만 자고 나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테지.
 프라니바투스! 전생에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리도 건방지게 구는 것일까?
 나는 붕대에 밴 피를 찍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아, 피 비린내······. 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배고플 때 오크를 씹어 먹어봐라. 피 안 나나)?
 혀를 내밀어 살짝 맛을 보자 짭짤하고도 비릿한 맛이 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런대로 내 피도 먹을 만하군.
 내가 이런 엽기적인 짓을 하고 있을 때 등 뒤에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딜 숙녀 방에 노크도 없이!!
 내가 자신의 피를 찍어 먹는 것을 본 프라니바투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상처가 벌어졌지 않습니까? 좀 더 누워 계시지 않고······.”
 드래곤 오크 생각하냐?
 “내가 이런 상처를 입게 된 게 누구 탓인지는 알아줬으면 좋겠군.”
 나는 내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대는 프라니바투스를 발로 걷어차 버리고는 침대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으··· 상처가 더 벌어졌잖아?
 운동을 너무 무리했나?
 생각 같아서는 더 밟아주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줘서 참는다. 참어! 아아~! 발이 우는구나!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 내가 무섭다.
 “너, 나한테 원수 진 거 있냐?”
 “아니요.”
 “그럼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태도가 뭐야?”
 아무 말 못하는군.
 나도 말발이 조금 세지기는 세졌나 봐. 하하핫~! 쑥스럽구먼.
 “레어로 돌아가겠다.”
 “아직은 안 됩니다.”
 엥? 드래곤이 레어로 돌아간다는데 지가 왜 말려? 내 유희는 여기서 끝이야! 끝!
 “그래? 너, 니가 더 나이 많이 먹었어? 내가 성룡이 됐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이 말이야! 다 컷다고 재는 거냐? 암튼 내가 간다면 가는 거야!”
 이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때 나는 창문으로 가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내 머리카락을 붙잡는 손길. 으으, 뒷골 땅겨! 잡아당기지 마!
 “이씨!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이곳 왕이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오호~! 그래? 그럼 니가 가서 도와주지 그러냐? 인간의 왕이란 아무리 대단해도 드래곤이 고개를 숙일 정도는 되지 않는다.
 쿠쿡, 그런데 저놈이 지금 인간의 왕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 말이지?
 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저러는 거지?
 유희 한번 진짜 실감나게 하는군.
 그렇다고 동족을 이 꼴로 만들어?
 “쿠쿡, 나처럼 허약해 빠진 드래곤에게 뭘 기대한다고?”
 “시크리오프스님!”
 “입 닥쳐!”
 열받는다. 겨우 그것 때문에 내가 이리도 큰 부상을 당하고 배신까지 당했다, 이 말이지?
 “이곳 왕? 그래? 도대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뭐길래? 오호라, 하나 있겠구나. 드래곤 하트? 좋아. 어차피 이런 삶에 미련없는 내 인생이다. 배 째! 배 째라구!”
 설마 진짜 배 째지는 않겠지?
 쫙―
 타격음이 들리며 곧 이어 나는 볼에 따끔따끔한 느낌을 받으며 내가 맞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참 골고루 한다.
 그런데······ 아프다.
 아파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깨의 상처보다 더 아프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프라니바투스를 바라보며 나는 뒤돌아서서 침대 위로 누워버렸다.
 저놈한테만은 내 눈물 흘리는 꼴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꺼져.”
 이렇게 말했는데도 놈은 꺼지기는커녕 도리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제 내 말까지 씹는다 그거지?
 “꺼져 버려! 미친 드래곤 같으니라구! 너 같은 놈은 그냥 브래스 뿜다가 기도가 막혀서 죽어야 해!”
 쿠션을 던지며 나는 소리쳤다. 진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시크리오프스님! 우셨습니까?”
 결국 프라니바투스는 내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으윽, 저놈에게 약점을 잡히다니!
 “우셨다니!! 울고 있는 거다. 이 언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드래곤아!”
 끝까지 자존심을 구기지 않는 나였다.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프라니바투스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나는 이제 피가 철철 쏟아지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놔두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죽겠군.
 그래도 유희 중에 출혈 과다로 죽은 드래곤이라고 소문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옆에 있는 구급 상자로 나름대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아아, 아프기는 더럽게 아프군.
 이거, 낫던지 해야 어딜 도망가든 하지.
 저놈 꼴을 봐서는 나를 곱게 놓아줄 것 같지는 않다.
 크크크, 안나가 나를 배신한 것도, 그리고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것도 모두 프라니바투스의 계략이다.
 겉으로는 왕의 명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달고 있겠지만 어차피 우리 둘 다 그런 것에 속을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드래곤이 인간의 왕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전례에도 없었고 후에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프라니바투스. 네놈이 도대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뭐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짓이다.
 아마도 나는 안나가 나를 배신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372년 8월.
 날짜:4일.
 날씨:왕궁 안인데도 땀만 디따 많이 나는 날씨.
 지난 4일 동안 프라니바투스는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내 팔의 상처도 자체 치유력 때문인지 약간 아려오기만 할 뿐 별다른 통증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치유 마법으로 치유를 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그만큼 밉다는 거겠지?
 쩝, 누구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썩 좋은 일이 아니다.
 기분이 찜찜하니까.
 난 지금 왕궁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누가 나가게 해줬냐고? 전지전능하며 신보다 우.월.한. 왕이(신보다 우월? 미친 소리. 왕이 신보다 우월하면 내가 벌써 왕 해먹었다) 부르신 댄다.
 그러니 가야지.
 힘없는 나야 뭐 별수있나?
 내 곁에는 왕궁의 기사들이 둘러싸고 한시라도 눈을 떼놓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왕궁 전체에 마력을 흩어지게 해놨기 때문에 마법을 쓰지도 못할 몸, 왜 이리 감시하는지 몰라? 이런 걸 바로 쓸데없이 힘만 뺀다라고 하겠지?
 약간은 소박한 방 안으로 나는 불려갔다.
 집무실인 듯한 방에는 프라니바투스, 안나, 그리고 엄청나게 젊게 생긴 왕이 하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안나였으나 나는 별다른 감정을 받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너무 큰 충격을 경험해서 정신이 돌아버렸다고나 할까?
 왕은 손짓 한번으로 내 주위에 있던 기사들을 물렸다.
 멋있군.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자세야.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 앞인데 이렇게까지 여유로울 수가 있다는 것은 자신감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천부적으로 멍청한 걸까?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는 그대의 힘이 아닌 지혜가 필요하오.”
 내 지혜? 놀고 있네. 아무리 6천 년 간 살았다 해도 머리에 든 게 있어야지! 머리에 든 게! 안 그래도 머리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는데, 이게 날 놀리나!
 “프라니바투스가 나보다 더 나을 줄 아는데?”
 “프라니바투스가 추천했기 때문이오.”
 저놈! 내가 6천 년 간 빈둥빈둥 하릴없이 지냈다는 것을 뻔히 아는 놈이 나를 추천해?
 차마 드래곤이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나는 꾸욱 참고 뭐든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내 지혜? 왜? 머리통이라도 잘라줄까?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인간 따위가 드래곤의 지혜를 원하는 거지?”
 나는 내가 그토록 자랑하던 높임말은 온데간데없고 아까부터 반말이 틱틱 나오고 있었다.
 이미지 관리 좀 해야겠군. 험험.
 “당연하지 않소? 전쟁이지.”
 왜 지네들 치고 박고 싸우는 데 드래곤이 끼어들어야 하는 거지?
 아아, 난 남의 집 늘리는 데는 관심이 없단 말이다~
 약간 대담하게 나는 책상에 앉아 있는 왕을 향해 아주 자연스레 걸어갔다.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왕의 얼굴을(이걸 아마 용안이라고 하지?) 빤히 쳐다보던 나는 의외로 이 왕이라는 인간이 잘생기고 어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자 납치극’을 꾸몄었는데 이렇게 어리면 왕자든 공주든 자식은 아직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안나에게 속은 건가? 잠시 그 왕과 눈이 마주친 나는 생긋 웃어주었다. 어린아이들은 어리석은 만큼 용감하다고들 하지.
 잠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상 위에 얹어 있는 것을 바라본 나는 나의 창백하리만큼 흰 손을 들어 그 인간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인간.
 보통 드래곤 같았으면 이곳에 손 한 번만 까딱했어도 목이 날아갔겠지?
 어느새 내 손가락이 그의 목을 파고들어 한 방울씩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나는 나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으나 역시나 이 인간이 그것을 막았다.
 잠시 내 손가락에 묻어 있는 피를 바라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그것을 낼름거리며 핥았다.
 으음, 노린내가 조금 심하군. 역시 내 피가 제일 깨끗하단 말야.
 뭐, 이 정도면 2등급 정도는 되겠군.
 1등급은 물론 나밖에 없지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내가 히죽히죽 웃고 있자 프라니바투스의 감정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해 주십시오.”
 저 녀석, 꼭 내가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깽판 놓는단 말야?
 갑자기 기분 좋던 내 기분이 저 녀석의 한마디로 아주 급상승 저하되었다.
 “나, 갈 거야. 너 땜에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싫어졌어.”
 “가지 못하시리란 것은 알고 계실 텐데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지만 내가 누구냐!
 어젯밤 한숨 자지 못하고 생각해 낸 비장의 무기.
 쩝, 좀 화려하긴 하지만 뭐, 내가 나갈 수 있는데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시 프라니바투스를 노려보며 나는 왕의 옆에 놓아져 있는 물잔을 들어 올렸다.
 프라니바투스, 네놈이 간과한 게 한 가지가 있었다.
 내가 물을 다스리는 블루 드래곤이라는 것을.
 아주 소량이라도 물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지.
 “설마······?”
 “그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들 옛 드래곤들이 말씀하셨지.”
 그대로 물을 나는 책상 위에 쏟았다.
 흩어져야 할 물들이 일정한 양으로 변해 각자 책상으로 스며들었다.
 처음 해보는 건데 이것도 되네? 하긴, 이렇게까지 폼 잡았는데 실패하면 뭔 쪽이냐?
 나의 의지를 담은 물방울이 제발 제대로 찾아갔기를.
 프라니바투스는 약간의 마력을 담은 손으로 내 손을 황급히 쳐내었다.
 제, 제기랄, 뼈 부러졌다.
 으··· 으윽, 참으로 6천 년 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요 며칠 새에 가지가지 해보는구나.
 축 늘어진 내 손을 보며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나는 그대로 발을 뻗어 프라니바투스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뼈 부러졌어.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지딴에는 막아보려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벌써 하늘 저편으로 보이는 상공에 푸른 점들이 늘어나고 있었기에······.
 제대로 찾아가긴 찾아갔나 보군.
 이 술법은 한마디로 ‘나 위험하니 너네가 알아서 찾아와 구해가라’ 이 말이다.
 이 말 듣고 안 오는 드래곤은 이미 죽은 놈이거나 죽고 싶어 환장한 드래곤이다.
 나이 순으로 수장이 되긴 됐지만, 감히 그래도 명색이 수장인 내 명을 안 듣고 개겨?
 내가 약하다는 것은 일족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이렇게 불러도 별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블루 일족의 수는 대략 50여 마리 정도 된다. 물론 나는 그중에 아주 소량만 불렀을 뿐이다.
 푸른 점의 수를 세어보니 대략 스무 마리 정도 왔군.
 다들 할 일이 없었나 보지? 그냥 몇 놈만 기어오면 될 것 가지고.
 왕궁의 바로 중앙에 떠 있던 드래곤들은 곧 이어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시도해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이런 훈련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지네들끼리 심심하면 모여서 훈련하나 보지?
 “블루 드래곤의 수장 시크리오프스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대표격이며 자칭 내 비서라는 드래곤인 카라드시크는 내 앞에 부복하며 외쳤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드래곤들.
 “수장님을 뵙습니다.”
 드래곤들의 규칙은 그리 엄격하지 않지만 연장자나 자신의 일족의 수장에게는 정말 깍듯이 예의를 차린다.
 하하, 이것도 한폼 나는군. 자주 애용해야겠어.
 “이것 좀 치료해 줘.”
 나는 카라드시크에게 부러진 팔목을 내보이며 말했다.
 바로 날카롭게 상황을 이해한 카라드시크.
 곧 이어 프라니바투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 블루 일족과 전면전이라도 펼치고 싶으십니까? 저희의 수장을 이렇게 감금하고 상처 입게 하다니요! 로드님께 이번 일을 건의드리겠습니다.”
 약간은 내 잘못도 있다.
 함정인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뚤래뚤래 따라온 죄.
 카라드시크의 말에 지금 있는 내 일족들 모두가 프라니바투스를 노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를 대하는 일족들의 태도가 엄청나게 우대하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블루 드래곤 일족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허약해 빠진 내 몸을 걱정해 헤츨링이 보호받는 것처럼 블루 일족 전체에게 나를 보호하도록 명했다. 그 약속은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루어질 테고, 만일 내가 타인에 의해 죽는다면 블루 드래곤 전체가 들고일어날 판이었다. 어차피 나는 약.한. 드래곤이니까.
 가끔 이런 대우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누구보다도 나를 아껴주는 동족들이기에 지금은 너무나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내가 보통 에인션트 드래곤이었다면? 하긴, 보통 그 정도 되면 이따위 마법은 아무것도 아니지. 흠··· 조금은 내 몸이 싫군.
 “저희들의 수장을 데려가겠습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아무리 자비의 블루 드래곤이지만 맹약으로 맺어진 저희들의 수장을 다치게 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역시··· 말발 하나는 끝내준다. 멋있어! 카라드시크!
 카라드시크의 말이 백 번 옳은 말이기에 프라니바투스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유희··· 앞으로 몇천 년 간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충분히 이번 유희 때 쓰디쓴 배신의 참 맛을 느꼈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안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일족들과 돌아와 버렸다.
 안녕···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하나뿐인 내 친구여······.
 
 
 제5장 수면
 
 
 372년 8월.
 날짜:5일.
 날씨:기분 드러운데 날씨는 왜 이리 좋은지······. 쩝.
 황당하다.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잠시 내 옆에서 버벅대고 있는 카라드시크를 바라보았다. 다른 드래곤들은 일찌감치 고개를 푸욱 내리깔고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예전에 내 레어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예전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었기에······.
 비죽비죽 솟아 나온 돌 무더기와 금화들.
 예전에 내 레어가 이곳에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물건들.
 곳곳에는 물 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발로 첨벙첨벙 밟으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내가 처음 성룡이 되었을 때 받은 선물이 바로 이 레어다.
 어언 6천여 년을 함께한 집이 이리도 처참하게 부서져 있을 때의 심정··· 아느냐?
 아아!! 이게 설마 부실 공사였단 말인가!
 지금까지 모아놓은 온갖 보물들과 서적들! 으갸갸갹~! 머리 빡돌아 버린다(뭐, 대부분이 로맨스와 그 밖의 쓸모없는 서적들이지만···).
 “설명··· 해 줘······. 간단명료하게 본.론.만.”
 내 말에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차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설명을 하지 못하겠는지 카라드시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문을 열었다.
 “저기··· 그게, 저번에 그 비가 엄청나게 왔던 날 있잖습니까······?”
 기억하지. 내가 그때 비 맞고 정신 잃었던 날.
 생각하니 씁쓸하다. 그때 도둑 길드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게 늙으면 주책이라니까! 고이 레어로 돌아가지 않고!
 갑자기 화가 무럭무럭 나는 나였다.
 “본론만 말해! 본론만! 이게 왜 이렇게 된 거냐고! 너, 우리 말 못 알아먹어? 그래~ 나 지금 반 미쳐 있는 상태니까 어디 완전히 미쳐 보자!”
 나의 가녀린 발에 사뿐히, 말 그대로 사뿐히 즈려밟히고 한마디로 내 밥이 된 카라드시크는 본론을 얘기했다.
 우띠, 한마디로 그 망할 골드 드래곤 프가크리스와 우리 블루 일족의 즈리카리안이 내 레어 앞에서 충돌했다가 프가크리스가 그 거대한 몸을 내 레어로 부딪쳐 들어왔다.
 안 그래도 비가 많이 와 약간 질퍽했던 산인데 그 거대한 몸이 내 레어 지붕을 치고 들어오니까 레어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그거지?
 아아~! 내가 미쳐, 미쳐! 그놈들 저번에 치고 박을 때부터 알아봤어!
 드래곤 싸움에 레어가 무너진다더니··· 내 레어가 꼭 그 꼴이잖아? 다행히 부실 공사는 아니었군.
 하긴 울 마미가 어떤 사람인데 부실 공사를 해?
 드워프들이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단체로 하직하고 싶어 환장하지 않았으면 그럴 일은 없겠지.
 “두 놈 다··· 불러와······. 반항하면 반 죽여놓고 데려와.”
 침착하도록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음산한 내 목소리에 이 자리에서 벗어나자는 욕망이 강했던 블루 드래곤들은 서둘러 두 패로 나뉘어 그 망할 놈들을 끌고 오기 위해 제각각 사라져 버렸다.
 눈치 챘겠지.
 내가 그놈들을 고이 데려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란 것을······.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내 앞에 두 드래곤의 거구가 떨구어졌다.
 드래곤인 상태로 죽도록 맞았나 보군.
 그래도 비늘이 보호해 주니, 에잉~! 이건 안 때린만 못하구먼!
 “이 쉑~! 감히··· 감히~!!”
 마, 말도 나오지 않는다.
 하아, 하아, 심호흡을 하고. 험험, 목청 가다듬고.
 “이 쉑들~! 빨랑 폴리모프하지 못해? 나보고 올려다보라고?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냥 죽여 버려!!”
 고래고래 소리치는 나를 카라드시크가 목숨을 걸고 간신히 뜯어말려 나는 이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흥분했나 보군.
 내가 이성을 되찾을 때 대략 14~15세 정도로 추정되는 인간 소녀, 소년으로 폴리모프한 이놈들은 나의 광포한 눈에 움찔거리면서도 서로를 야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눈 안 깔어?! 이것들이 반성은 못할망정 눈 치켜뜨고 야려? 앙?!”
 나에게 야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스트레스를 이놈들에게 퍼부어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 레어가 이렇게 됐다는 것에 대해 네놈들의 공이 아주 컸다고 들었다.”
 삐죽삐죽 올라오는 이마의 힘줄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며 나는 이를 앙다물고 한마디씩 내뱉었다.
 혈압은 노인 건강에 좋지 않은데······.
 “그게 아닙니다, 수장님! 프가크리스가 먼저 수장님을 욕보이길래······.”
 새침한 표정으로 푸른 머리를 가진 여자아이가 한 말이었다.
 나를 욕보여?
 “그 말, 다시 한 번 해보련?”
 내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즈리카리안에게 말하자 프가크리스를 향해 혀를 쏙 내밀어 보이던 즈리카리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 그대로 미주알고주알 나에게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뭐야, 뭐야?
 프가크리스가 내가 약해 일족들에게 쓸모없는 드래곤이라고 말하는 것을 즈리카리안이 울컥해서 둘이 붙었다는 것 아냐?
 “저런 괘씸한 놈!”
 “수장님! 골드 드래곤과의 전면전을 펼치는 한이 있어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습니다!”
 “제 손으로 그런 망발을 지껄인 저놈을 죽여놓겠습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싸웠다 그 말이지······? 왠지 내 레어가 불쌍해지는군.
 왜 하필 내 집 앞마당에서 싸웠다냐?
 프가크리스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은 블루 드래곤들의 이러한 반응에 얼굴이 하얗게 변했으나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하긴, 이놈들 이런 반응도 당연한 거지. 안 그래도 수장이 약해서 쪽팔린데 저런 말까지 들었으니··· 내 죄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즈리카리안. 나는 왠지 이놈보다 저년이 더 나쁘게 보였다.
 “애 쫄잖냐. 그만 해둬라. 아깝지만 레어는 다시 지을 수밖에······.”
 예상외의 나의 반응에 거칠게 항의하는 내 일족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말발이 조금 세진 나는 한마디만 내뱉고는 프가크리스에게로 다가갔다.
 “얘가 한 말 다 맞는 말이잖냐?”
 잠시 내 처분에 어리벙벙해 있던 프가크리스.
 내가 다가가자 흠칫하는 모습이 꽤 귀엽다.
 “걱정 말아라, 골드 일족의 성룡이여······.”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약간은 얼굴이 붉어진 이 꼬마는 곧 이어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죄, 죄송해요······.”
 그런 프가크리스를 노려보던 카라드시크는 나에게 물어왔다.
 “수장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레어는 어떻게······? 당분간 제 레어에서 같이 생활하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빠른 시일 내로 드워프들을 닦달해 레어를 복구시켜 놓겠습니다.”
 “난 신혼 드래곤을 방해할 만큼 생각이 없진 않아.”
 그렇다. 카라드시크는 약 6백여 년 전에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성격 더러운 레드 일족과······.
 한참 깨가 쏟아질 때에 내가 찾아간다면 얼마나 거북해할 것인가?
 그 정도 눈치는 아무리 둔치인 나도 챈다. 어느새 아까 죽일 것처럼 날뛰던 내 성질도 많이 가라앉았다. 쩝, 그러고 보니 나도 다혈질인가?
 쿠쿡, 그러고 보니 앞집이 비어 있었지?
 블랙 드래곤 카이오네스. 당분간 네 집 신세 좀 져야겠다.
 어차피 유희 나가서 몇백 년 뒤에나 돌아올 놈이니 빈 집 좀 쓴다고 해서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왠지 내 주위에서 말썽이 아주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나였다.
 그럼 앞집으로 날아가 볼까?
 카이오네스가 돌아오기까지 몇백 년 동안은 수면을 취해야겠다.
 잊고 싶은 기억이 아주 많기에······.
 
 몇 년째 잠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당근 날짜도 모른다.
 레어 안이라서 날씨도 모른다(도대체 아는 게 뭐야?).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유희 나갔던 그때의 악몽을 꾸었고, 고로 무지 심각해 눈물까지 흘렸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내 몸을 툭툭 치고 있다.
 귀찮아서 반응하기가 싫다.
 누구지?
 누가 내 잠을 방해하는 거지?
 툭툭 치던 놈은 이제는 아예 퍽퍽 치기 시작했다.
 아, 아프다구!!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본 나의 눈앞에 아주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카이오네스! 반갑군, 아주 반가워. 내가 유희를 나가게 한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놈!
 모두 이놈이 유희를 나가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친구, 내 레어가 왜 이 모양인지 말해 보시려나?”
 블랙 드래곤 특유의 새까만 비늘을 자랑하며 카이오네스는 나에게 으르렁거리며 물어왔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
 헉스~! 이게 웬일? 레어 안은 도둑이라도 든 듯 난장판이었다.
 한쪽 책장에 쌓아놓았던 책들은 모두 밖으로 굴러다니고 있었고, 보물 창고의 문은 뜯겨져 나가 레어 바닥에 보물들이 깔려 있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난리를 쳐놓은 레어 안을 보며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쩝, 내 잠꼬대가 너무 심했나 보다.
 “집··· 관리를 해놓으라고 했더니 아주 잘하는 지경일세.”
 하핫,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구.
 시꺼먼 눈깔로 노려보면 어쩌라구? 나도 충분히 쫄았다네, 친구.
 “오오~! 친구! 유희는 잘 다녀오셨나?”
 일부러 카이오네스의 말투를 따라하며 말을 돌리려던 나였지만 돌부처 같은 카이오네스, 절대 그런 싸구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 그렇게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친구?”
 나는 이놈이 폭주했을 때 어땠었는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다.
 아주 깔끔을 떠는 이놈.
 다른 건 다 용서가 돼도 자신의 물건을 잃어버렸거나 집 안이 더러운 것은 못 참는 이놈.
 지금 이놈의 성격은 틀림없이 폭주 모드일 것이다.
 그러니 화를 당하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이지.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하다가 레어의 입구를 향해 달렸다.
 헥헥, 짧은 발로 달리려니 힘들군 그래.
 레어의 입구에 도착한 나는 상공을 향해 날아갔다.
 설마 쫓아오지는 않겠지?
 그런 내 옆으로 애시드 브레스가 공기를 쫘악~ 가르며 지나갔다.
 쪼, 쫄았다. 이거··· 정통으로 맞을 뻔했잖아?
 뒤를 돌아보니 나를 바싹 쫓아오고 있는 카이오네스.
 제기랄······.
 도망가기에 바쁜 내 귓속에 사형 선고와 같은 처절한 절망의 한마디가 울려 퍼졌다.
 “이런? 빗나갔네. 친구, 너무 서운해하지 말게나. 아직 브레스를 뿜을 여력은 많이 남아 있으니.”
 죽일 놈.
 끝내 나는 이 망할 미친 드래곤의 손에 끌려 레어로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친구, 아무리 레어가 박살 났다고는 하지만 내 레어에서 지내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 미친 드래곤. 넌 친구도 아니야.
 친구가 집이 없어져 같이 지내는 게 그렇게 불만이냐?
 “누가 오는군.”
 카이오네스의 말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
 “시, 시크리오프스님! 안녕하세요! 이번에 수면에서 깨셨다고 해서······.”
 프가크리스.
 이놈이 어째서 내가 수면에서 깬 것을 알았냐고 묻고 싶겠지.
 쩝, 미친 드래곤한테 쫓길 때 로드님의 레어까지 갔었다.
 로드님께서는 나를 붙잡고 선물을 아주 잘 받았다는 말을 연거푸 하셨다.
 선물? 언제? 내가?
 난 절대 선물 같은 건 주지 않는 한마디로 쫌생이다.
 그런 내가 선물? 택도 없는 소리.
 하지만 내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친 드래곤이 내 뒤에 서서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기에······.
 마침 그때 로드의 레어로 찾아온 입 싸기로 소문난 화이트 드래곤 하이카나이스가 이 모습을 보고는 다른 드래곤들에게 찾아가 엄청나게 재잘거렸다.
 물론 내가 카이오네스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도 아마 생중계로 연재됐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한마디로 개 쪽당했다는 거다. 것도 대대적으로!
 “무슨 일인가? 골드 일족의 성룡이여.”
 나는 어느새 지배자의 모드, 즉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며 위엄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뒤에서 몽둥이로 내 머리를 죽어라 치는 카이오네스. 망할, 이미지 다 버리네.
 난 여성이라구! 여성!
 남성인 주제에 감히 결혼도 안 한 여인에게 이리도 폭력을 가해(내가 여자라는 자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그 말투하며 폭력성. 절대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한마디로 나 아쉬울 때만 여자를 찾는다 이거다)?
 “저기··· 프라니바투스님께서 이번에 근신에서 풀려 나셨습니다.”
 “근신? 웬 근신?”
 재수없는 이름··· 그 망할 드래곤. 근신을 받았단 말이냐? 음하하핫, 잘됐다, 잘됐어. 6천 년 묵은 체중이 내려가는구나.
 “저기··· 기억 안 나세요? 블루 일족들이 프라니바투스님의 처벌을 로드님께 부탁드렸던 거······.”
 설마 기억나지 않을까?
 내 일생일대의 최악의 생애였던 그 유희를······.
 그 일 때문에 근신을 받았다 이거지?
 캬캬캬~! 잘됐다. 잘됐어!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저기··· 그게······.”
 “빨리 말햇!”
 “이곳으로 오고 계시거든요?”
 허억~! 복수하러 온단 말이냐! 그렇다면 진짜 나쁜 드래곤이며 쪼잔한 드래곤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지축이 울리는 발걸음 소리.
 황금빛의 거대한 몸체.
 이쁘긴 이쁘다.
 하아~!
 쓸데없는 생각을 좀 줄여야겠군.
 “너! 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나 너 싫어!”
 나는 뒤에 든든한 아군이 있기에 맘 놓고 개길 수 있었다.
 내 팔을 부러뜨린 전적을 가지고 있는 이 녀석.
 내가 언젠간 기필코 니 두 다리와 두 팔과, 그리고 저 모가지를 비틀어주마.
 음하하핫~!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 앞에 부복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는 이놈.
 내가 뭘 들었지?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구나. 그렇게 콧대를 망치로 쳐도 낮아지지 않는 놈이 나한테 사과를 해?
 잠시 벙쪄 있는 나를 뒤에서 쿡쿡 쑤시는 우리의 웬수 카이오네스.
 “쟤 발 저리겠다.”
 쿠쿡, 드래곤이 그 거대한 몸체로 무릎 꿇는 거 보셨나?
 잘 꿇리지도 않는 무릎을 억지로 비틀어서 꿇고 있는 모습.
 약간의 안쓰러운 마음이 뒤따른다.
 “일어서! 이 바보 새끼! 그런다고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아아~! 정말 좁아 터지겠군. 성룡이 된 드래곤이 4마리나 그 좁은 레어 안에 있으려니.
 
 
 제6장 아들, 그 이름은 시오스!
 
 
 681년 3월(3백 년을 잠만 퍼잤단 말이냐!).
 날짜:2일.
 날씨:눈이 와서 그런지 쌀쌀하다.
 카이오네스는 로드님을 뵈러 간다고 하고 나가 버리고, 나는 서적을 조금 읽다가 곧 질려 버려 뒹굴거리고 있었다.
 뒹굴, 뒹굴, 뒹구르르르르~ 쾅~! 우르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레어에서 신나게 뒹굴거리던 놀이를 하고 있던 나는 방금 내가 부딪친 벽을 바라보았다.
 돌가루가 사방에 날리고 인간의 어지간한 집 한 채를 처넣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
 이, 이거 보면 그 새끼 또 발광하겠네.
 나는 어제의 그 사건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치워야지, 치워야지.
 모를 거야. 안다고 해도 잡아떼면 그만이지 뭐.
 낑낑거리며 거대한 빗자루로 돌가루를 쓸고 조금 큰 돌들은 프라니바투스의 레어 안으로 텔레포트시켰다.
 케케~! 머리에서 운석 소환 한번 받아봐라.
 일단 모두 치운 나는 뭔가가 찔리고 캥겼다.
 이거 레어가 더 넓어 졌는걸? 쩝.
 그놈이 와서 발광하기 전에 내가 먼저 피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눈이 와서 그런지 내려가기가 불편하군.
 쿠쿠쿠, 여기서 조금만 꼼지락대다가 올라가야지.
 내가 한 일 아니라고 해야지. 캬캬캬. 한마디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거지. 크크크······.
 그, 그런데 조금 춥다.
 당연하다. 나는 말 그대로 소매없는 나시에 약간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울 만도 하군.
 저번에 내가 유희를 끝낼 때가 여름이라서 그런지 옷이 모두 여름 옷이다. 쩝··· 뭐, 설마 감기에 걸리랴(여름에도 비 맞고 감기 걸렸으면서 겨울에 이러고 다니는데 감기 안 걸리길 바래? 바랄 걸 바래라).
 조금 천천히 걷다가 나는 곧 이어 트롤 세 마리를 발견했다.
 먹어버려? 어제 깨어나서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트롤 옆으로 다가가니 트롤들은 무슨 흰 보따리 하나를 두고 세상에서 제일 공정한 가위, 바위, 보로 주인을 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이어 나타난 나를 보고는 겁에 질려 다들 도망가기에 바쁘고 나도 뭐 귀찮아서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뭘 가지고 그렇게 처절한(?) 싸움을 했지?
 보따리를 조심스레 들춰본 나는 곧 이어 그것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 아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살이 보들보들 연하게 생긴 게 맛있겠다. 나중에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 전에 위장을 풀어주기 위해 먹는 것도 괜찮겠군.
 그 트롤들이 싸울 만했군 그래.
 이렇게 연하게 생겼으면 먹을 때 씹히는 맛도 죽이지.
 나는 아기를 들고 요리를 하기 위해 레어에서 저지른 일은 까맣게 잊고 다시 레어로 돌아갔다.
 간식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뭐, 어쨌든 맛은 죽여줄 게 틀림없다.
 헤헤~ 첨 먹어보는 거지만 그냥 씹어 먹다 넘기면 되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행복에 겨워 있을 때 잠자고 있던 아기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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