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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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 1

2017.10.26 조회 1,076 추천 1


 강자 1권
 
 
 서장
 
 
 강호무림(江湖武林).
 수많은 무인(武人)들이 살아 숨쉬는 곳.
 그곳에 돌연 혜성(彗星)처럼 나타난 이들이 있었다.
 
 대풍문(大風門)!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라 불렸던 절세(絶世)의 검객(劍客).
 독보강호행(獨步江湖行)을 고집했던 절정(絶頂)의 검객들.
 협의(俠義)와 함께 자신의 일가(一家)를 세우겠다 다짐한 무인.
 오로지 강함만을 좇아 들어온 초보무인.
 비천(卑賤)하다 여겨지며 멸시(蔑視) 당한 낭인(浪人)들.
 각자의 사연을 지닌 무림인(武林人)들.
 그들이 대풍문이라는 한곳에 모였다.
 그들의 이야기이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을 이끌었던 한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진정한 강자(强者)라 불린 사내였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제1장 심상치 않은 인연(因緣)
 
 
 "반드시! 살겠다!"
 어스름한 달밤을 비쾌(飛快)하게 질주하는 인영(人影)의 입에서 처절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듣기에 따라서는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의 섬뜩함을 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을 울리는 서늘한 원한의 목소리였다.
 수줍은 새색시마냥 구름 뒤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노란 보름달이 천천히 얼굴을 드러냈다. 뿌연 달빛이 한순간 환해지면서, 밤하늘 아래를 빠르게 질주하는 인영을 또렷이 비추어주었다.
 피의 갑옷이라도 걸쳤나 싶을 만큼 전신이 붉은 혈흔(血痕)으로 얼룩진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그도 잠시, 만약 무림인이 그 혈인(血人)의 정체를 확인했다면 스스로 두 눈을 비벼보았을 것이다.
 "이 혈마천검(血魔天劍) 자운경(慈雲經)! 너희들에게 잡힐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혈마천검 자운경!
 당금(當今) 무림에 적수(敵手)를 찾기 힘들다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천하제일고수! 그런 그가 온몸에 혈흔을 남긴 채 악에 받친 듯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구름을 완전히 벗어난 월광을 등지고 자운경은 달리고 또 달렸다. 살기 위한 몸부림? 그랬다.
 그는 살기 위해서··· 달렸다.
 
 ***
 
 "크윽···!"
 신음을 흘린 자운경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다섯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강남오협(江南五俠).
 무림의 명망 높은 절정의 고수들로, 이미 강남에서는 그들보다 뛰어난 협의지사(俠義志士)들이 없다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정파(正派) 무림의 한 기둥이다.
 "이게 끝인가?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자운경도 그다지 대단하진 않군. 그저 그런 사파(邪派)의 마두(魔頭)일 뿐이었어."
 멋들어진 콧수염을 꽤나 정성 들여 기른 중년인이 혀를 차며 자운경을 내려다보았다.
 "···정파라 자처하는 놈들이 사파 무림인들까지 끌어들여 나를 모함하고 결국에는 이렇게 만든 네놈!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한! 결코 잊지 않겠다!"
 원한 서린 자운경의 독설에 중년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쯧쯧쯧! 그러게 사람이란 신의(信義)가 있어야지. 네놈이 제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한들, 수백의 인원을 당할 수는 없는 법. 제 잘난 맛에 살던 네놈의 말년을 봐라. 결국에는 수하들에게까지 뒤통수를 맞지 않았느냐?"
 "닥쳐라! 네놈이 무정혈화산(務停穴化散)을 이용했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무정혈화산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마냥 웃음 짓던 중년인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뒤이어서 살기(殺氣)가 얼굴 가득 뒤덮였다.
 "무정혈화산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
 중년인의 말이 끝나자 그의 주위에 서 있던 네 사내가 각자 빠르게 각자 무기를 꺼내들고 자운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차앗!"
 기합성과 함께, 한 사내의 펄렁이는 왼쪽 소매에서 생각지 못한 강력한 바람이 자운경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그는 외팔이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운경의 신형이 다섯 발자국이나 밀려났다. 신형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왼쪽과 위쪽에서 각각 한 자루의 검은색 도와 푸른색 창이 날아들었다.
 "이놈들!"
 자운경의 애병(愛兵) 적화(赤火)가 사선으로 크게 베어지면서 쾌적섬렬검법(快適閃烈劍法) 오초(五招) 풍전섬화(風電閃火)를 시전하자 칼끝에서 강맹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바람에 도를 휘두른 사내는 도신(刀身)을 이용하여 급격하게 바람의 진행을 막아섰고, 창을 내질렀던 사내는 창대를 끌어당겨 그 중간어림을 부여잡고는 풍차처럼 돌렸다.
 "크윽!"
 도신을 이용해 바람을 막아서던 사내가 신음을 흘리며 퉁기듯이 뒤로 밀려났다. 그의 검은색 도는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도병(刀柄)을 잡고 있던 손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를 사용했던 사내가 퉁겨나기가 무섭게 창을 돌리던 사내도 제법 커다란 비명과 함께 동료보다도 더욱 많이 밀려났다. 그의 창 역시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손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일고 있었다.
 두 사내가 잠시 밀려나자 자운경은 다시 한번 적화를 가슴까지 끌어당겨 쾌적섬렬검법의 다른 초식을 펼칠 준비를 취했다.
 "어림없다!"
 어느새 귀신같은 신법으로 다가온 중년인이 거무튀튀한 장갑을 양손에 끼고 쌍권(雙拳)을 내질렀다.
 "크으윽!"
 자운경이 급하게 적화를 들어 막았지만 내상(內傷)을 입은 그로서는 중년인의 쌍권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다섯 발자국이나 밀려난 자운경은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보다도 중년인의 무공에 놀라고 있었다.
 "네, 네놈!"
 자운경이 놀란 얼굴로 말을 하자 중년인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자신의 두 주먹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천무강권(大闡武强拳)! 어째서 이런 대단한 무공이 내 손에 있을까? 그리고··· 이 흑요갑(黑曜鉀)···."
 "네, 네놈···!"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고. 어차피 손에 쥐는 자가 임자 아닌가?"
 유들유들하게 내뱉는 중년인의 말에 더욱 분노한 자운경은 기혈(氣穴)을 역류하는 내공(內功)을 끝내 억제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커억! 쿨럭···!"
 붉은 핏덩이가 자운경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산산이 흩어지듯이 빠져나가는 내공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중년인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상이 치명적이었던 모양이지? 손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군. 이제 명성 자자한 천하제일고수 혈마천검 자운경과의 승부를 다시는 할 수 없는 건가? 조금은 아쉽군."
 "네··· 네놈을··· 쿨럭! 요, 용서··· 않···."
 자운경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허물어지듯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미안하군. 난 네놈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 없거든."
 말을 마친 중년인은 창을 든 사내에게 전음(傳音)을 보냈다.
 '쥐새끼가 있다! 처리해라.'
 중년인의 전음에 창을 든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쏜살같이 몸을 날려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자 쓰러진 자운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년인이 곁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짓을 받은 사내는 무겁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쓰러져서 미동도 하지 않는 자운경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중년인은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나머지 두 명의 사내들도 천천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천하제일고수 혈마천검 자운경··· 영광인가?'
 자신의 발아래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는 자운경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는 왠지 모를 허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내는 단번에 끝내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빠르게 내리그었다.
 슈아아악-! 까-앙!
 "누, 누구냐!"
 무언가의 방해로 인해 자운경의 목 부근에서 멈춰진 검.
 검을 내리그은 사내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갑작스런 외침에 자리를 벗어나려던 중년인과 두 명의 사내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우리 강남오협의 행사(行事)를 방해하는 것이오?"
 중년인의 내공이 가득 담긴 커다란 목소리가 주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웬만하면 넘어가려고 했더니···."
 짜증이 역력히 밴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소리는 작았지만 무공을 익힌 네 사람에게는 또렷이 들렸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보기 드문 청발(靑髮)에 방금 전까지 잠을 잤는지 두 눈에는 눈곱이 달라붙어 있었으며, 곧게 뻗은 코와 두툼한 입술에 조각을 해놓은 듯 수려하게 깎인 턱선은 충분히 미남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젠장! 내 잠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감히 내 집 앞에서 살인을 하겠다고? 뒈지고 싶어서 환장들 했냐?"
 대략 스물셋에서 넷? 그에 비하면 두 배는 족히 살아온 자신들에게 하는 말치고는 개미 눈곱만큼의 예의도 없었다. 아무리 강남오협이라는 협명(俠名)을 얻었다고 하여도 이 정도의 말을 듣는다면 누구도 참지 못할 것이다.
 "어린 놈이 말을 씹어먹는구나! 네놈이야말로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늙어서 뼈마디가 쑤시냐? 내가 좀 주물러줄까? 한 번만 더 어린 놈 어쩌고 하면 그땐 정말 뒈진다."
 사내의 말에 중년인은 멍청한 얼굴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두 눈에 살광(殺光)을 일으키면서 온몸에 요동치는 기운을 몸 밖으로 한꺼번에 내뿜었다.
 주위에 얌전히 있던 작은 돌 조각들이 중년인의 힘에 떠밀려 이리저리 굴러다녔고, 잡초들이 몸을 누이며 그가 내뿜는 힘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오호-! 꽤 하는데? ···라고 할 줄 알았냐? 잔재주 부리지 말고 꺼져!"
 전혀 겁을 먹지 않는 사내의 모습에 중년인은 새삼 경각심을 일으키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기척을 자유자재로 숨길 수 있을 정도의 절정의 무인이란 말인가? 내, 내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을 하던 중년인은 이를 갈며 두 눈을 더욱 부릅떴다.
 '그럴 리 없다! 내가 누구인가! 저 어린 놈이 나보다 고수일 리 만무하다! 그저 객기일 뿐이다!'
 "네놈은 누구냐!"
 중년인의 말에 사내는 귀를 후비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아직도 안 갔냐?'라고 하는 듯했기에 중년인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최소한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나는··· 나일 뿐이다! 으하하하!"
 사내의 대답을 듣자 중년인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신형을 뽑아 올렸다. 순식간에 사내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간 중년인은 자경운에게 했듯이 쌍권을 내질렀다.
 "어쭈? 뒈지고 싶어서 나한테 감히 주먹을 휘둘러? 오냐! 늙은 놈 주먹이 센지 팔팔한 내 주먹이 센지 겨뤄보자!"
 중년인의 쌍권을 향해 사내도 자신의 두 주먹을 내뻗었다.
 콰아앙!
 "크으윽!"
 "큭!"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흑요갑이라는 절대 기물(奇物)을 끼고 있는 상황에서도 중년인의 신형은 무려 일 장(丈: 대략 3m) 이상을 밀려나갔다. 반면 사내는 제자리에서 자신의 두 주먹을 어루만지며 꽤나 아픈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년인은 확연해진 자신의 패배에 놀란 얼굴로 두 주먹을 바라보았다. 폭발하듯 터져버려 너덜거리는 흑요갑은, 끼고 있다기보다는 주먹에 살짝 걸쳐져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이, 이럴 수가···."
 흑요갑을 바라보며 중년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젠장! 무슨 놈의 주먹이 저리 돌주먹이냐! 내가 이십칠 년 살면서 저 늙은 놈처럼 단단한 돌주먹은 처음이군!"
 그 말에 사내의 나이가 스물일곱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자신의 나이보다 약간 동안(童顔)인 것이다.
 "대, 대형(大兄)!"
 세 사람이 한꺼번에 중년인을 부르며 다가왔다.
 중년인은 세 사람의 부름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아직도 주먹을 연신 어루만지는 사내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심해라. 엄청난 고수다."
 "저희도 보았습니다."
 세 사람은 사내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무기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주먹을 만지던 사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땅 넷이 덤벼도 겁 하나 나지 않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그리고는 은연중에 자신의 힘을 발현(發現)하였다. 그러자 무형(無形)을 넘어선 유형(有形)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헉!"
 숨이 턱 막히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외팔이 사내가 얼굴에 두려운 빛을 띠었다.
 '대, 대형. 우리가 질 가능성은 없지만··· 이길 가능성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물러나야 한단 말이냐?'
 '그게 상책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의 수모는 후일에 반드시 갚으면 되는 것입니다.'
 중년인이 한창 고민을 하는 사이 지루한 기색이 완연한 표정으로 사내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뒈질래? 그냥 곱게 도망갈래? 나 지금 무지하게 졸리거든. 이것 봐, 나 하아-품 하는 거 보이지?"
 살다 살다 눈앞의 사내처럼 방자(放恣)하고 오만(傲慢)한 자를 본 적이 없었던 중년인은 생사를 걸고 싸우고픈 욕구를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하나만 묻지. 이름이 뭐냐?"
 "알려주면 갈 거냐?"
 여전히 빈정대며 짜증이 팍팍 묻어 나오는 사내의 대답.
 "그, 그러지···."
 "그럼 선심 써서 알려주지. 귓구멍 후비고 잘 들었다가 후세에 널리널리 기억하라 일러두라고. 이 몸의 존성대명(尊性大名)은 풍천옥(風天玉)!"
 그 생소한 이름은 중년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죽는 날까지도 잊지 못할 최악의 이름으로.
 "가자!"
 이름을 듣자 중년인은 싸늘하게 몸을 돌리며 차디찬 말을 뱉어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머지 세 사내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 수모는 반드시 갚겠다!'
 중년인의 전음이 사내, 풍천옥의 머릿속에 스치듯이 지나갔다.
 
 ***
 
 햇볕에 눈부시게 빛나는 청발.
 숲의 색을 그대로 입혀놓은 듯한 머리카락은 보기에도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가끔 그 주인이 머리를 흔들 적마다 찰랑거리듯 물결치는 모습은 더없이 황홀했다.
 자운경은 꿈을 꿨다.
 고아인 자신을 보름 동안 친손자처럼 돌봐주었던 이름 모를 자상한 스님과의 행복했던 한때를.
 "어쭈? 웃네?"
 청발의 주인, 풍천옥이 자신의 침대에 누워 웃는 얼굴로 잠을 자는 자운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 모를 자를 자신의 침대에 뉘어야 한다는 사실이 죽도록 싫은 그였지만, 그리해야만 했다. 적어도 그가 제일로 싫어하는 욕과 구타를 당하기는 싫었기에.
 "젠장! 이게 무슨 변이란 말인가! 어째서 내가 생판 모르는 남자를 나의 향긋한 체취가 묻어 있는 침대에서 자도록 해야 한단 말인가! 정녕 하늘은 날 버리시는가!"
 두 손을 하늘을 떠받들 듯 치켜올리고는 절규하는 풍천옥.
 "미친놈! 그럼 내 침대를 주랴?"
 어느새 나타났는지, 아주 적절한 순간에 한마디를 던진 누군가가 한 손에 작은 옥함(玉函)을 들고 문간에 서 있었다.
 "사부! 이 사람이 어째서 제 침대에서 자야 합니까? 그냥 내다 버리죠!"
 "님이라고 했지!"
 퍼억!
 풍천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부라린 사부가 벼락같이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조금의 방어를 할 새도 없이 그대로 주먹을 내뻗었다.
 꼴사납게 방 한구석으로 굴러가는 풍천옥. 과연 그가 강남오협의 대형인 자를 한순간에 물러서게 한 자가 맞단 말인가?
 "크윽···!"
 "아프냐?"
 안면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풍천옥에게 사부라는 사람은 '아프냐?'라는 단 한 마디 물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무마하려 했다.
 풍천옥은 무슨 중풍에 걸린 사람마냥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접떨지 말고 가서 약이나 달여 와라!"
 그 누가 말했던가! 제자 사랑은 스승이라고!
 사부의 말에도 풍천옥은 여전히 경기 맞은 사람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사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이 돼먹지 못한 놈아! 하늘 같은 사부의 말이 안 들리냐! 어서 가서 약 달여 오라고! 저 썩을 놈은 시간이 갈수록 사부 알기를 굴러다니는 개똥만도 못하게 보니!"
 사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천옥이 벌떡 일어서서는 두 눈을 빛내며 커다랗게 외쳤다.
 "싸부! 오늘··· 한번 붙읍시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와 코끝을 간질거렸다.
 봄.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이런 봄의 풍광(風光)을 무시하며 풍천옥과 사부는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뼈마디가 조금 붙은 모양이구나? 나한테 반항을 하고."
 "제 뼈마디는 언제나 붙어 있었습니다. 아직 사부는 잘 몰랐던 모양이군요? 흐흐흐!"
 두 사람의 대화에 북풍한설(北風寒雪)이 몰아쳐 봄날의 따스함이 단번에 저 멀리 사라졌다.
 "허! 젖먹이를 데려다 곱게 키워났더니 이젠 그 은혜를 아주 날로 먹으려고 하는군.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하는구먼.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 곱게 키웠다고요? 그리고! 자식이라고요? 하늘이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전 언제나 사부의 기분전환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죠! 맞으며 지낸 내 이십칠 년의 인생! 크흐흑! 생각만 해도 눈물이!"
 두 사람의 대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지만 정작 말을 하는 당사자들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 이상의 잔말은 필요 없다. 네가 죽고 내가 살자!"
 "더 이상은 저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겁니다! 사부의 그 물렁한 뼈다귀나 조심하십시오! 차합!"
 풍천옥은 말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빨랐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 하나면 충분했다.
 풍천옥은 진정 빨랐다!
 "이놈이 이젠 아주 노인 공경의 경로우대사상도 잊어버렸구나!"
 그렇게 외치며, 풍천옥의 사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역시 빨랐다.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파파파파팡!
 두 사람은 중간에서 맞붙었다. 둘의 주먹이 서로를 노렸고, 두 사람의 발이 허공에서 몇 차례나 부딪쳤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대결은 과연 그들이 사부와 제자의 사이인가를 의심케 했다.
 "네놈이 제법 한 수가 있구나!"
 사부가 제자의 사혈(死穴)을 거침없이 노리며 쌍장(雙掌)을 날렸다.
 "사부야말로 아직까지 몸이 굳지 않으셨소!"
 풍천옥은 몸을 비틀어 쌍장을 피했다. 언제 뻗어졌는지 그의 다리는 이미 사부의 단전(丹田)에 도달해 있었다. 피하기 힘들어 보였다.
 "이놈 봐라!"
 호통을 치며 빠르게 무릎을 올려치는 사부.
 퍼억!
 꽤 커다란 소리가 메아리쳤다.
 두 사람은 조금의 아픈 기색도 없이 다시 몸을 엮어갔다.
 두 사람의 때 아닌 박투(搏鬪)에 숲의 모든 짐승들이 울부짖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단지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여전히 따뜻한 햇살과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뿐이었다.
 
 "헉헉헉···!"
 "하아, 하아···!"
 두 사람은 여전히 거친 손속을 나누고 있었다. 단내가 풍길 정도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결코 서로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이미 날은 저물어 따뜻한 햇볕 대신 서늘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퍼억! 파팡!
 제자의 일권(一拳)이 사부의 어깨에 적중했다. 잠시 흔들렸던 사부의 일장(一掌)이 어느새 제자의 허리를 후려치고는 뒤로 빠졌다.
 고통이 심한 듯 두 사람 모두 얼굴 가득 찌푸리고 있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면 더도 덜도 없이 그대로 고통을 느끼게 해주었다.
 "젠장! 어디 이걸 맞고도 그 물렁한 뼈가 성할지 봅시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사부의 장력을 피한 풍천옥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일권을 내질렀다.
 "허엄! 이 미친놈! 그렇다고 취옥권(翠玉拳)을 사용하다니! 좋다! 갈 데까지 가보자!"
 그 말과 동시에 사부의 두 손이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어느새 붉게 변한 두 손으로 풍천옥이 내지르는 취옥권을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콰콰쾅!
 "크억!"
 "으음!"
 풍천옥의 몸이 퉁기듯이 뒤로 날았다. 반면 사부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치사하게 적수화멸장(赤手化滅掌)을 사용하다니! 쿨럭!"
 비틀거리며 일어선 풍천옥이 자신에게 쌍장을 거리낌없이 펼친 사부를 노려보며 말을 하다 피를 한 움큼 내뱉었다.
 "네놈이 먼저 취옥권을 썼잖아!"
 지지 않고 대꾸한 사부는 조금의 미안한 감정도 없는 얼굴로, 피를 내뱉는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살벌하기 그지없는 사제지간이었다.
 사부의 대응에 핏물을 소매로 쓰윽 닦은 풍천옥이 두 주먹을 꽉 말아 쥐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외쳤다.
 "내가 이것까지 펼치게 될 줄은 몰랐소! 정말로 이번에는 장난이 아닙니다, 사부!"
 말과 함께 풍천옥의 몸에서 가공할 만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비록 사부와의 박투로 이곳저곳이 많이 찢겨진 얇은 청색의 무복(武服)이었지만 최대로 부풀어오르며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헛! 저놈이 설마?"
 제자의 뜬금없는 기세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사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곤 쾌속하게 움직이는 제자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뜨고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소매가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마치 공기주머니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소매에서 푸르스름한 기류가 생성되었다.
 그러한 사부의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풍천옥의 신형이 사부의 바로 앞쪽으로 다가왔다.
 "사부도 내가 이걸 벌써 사용할 줄은 몰랐을 거요! 천무뇌력권(天武雷力拳)!"
 풍천옥의 두 주먹이 빛났다.
 진정 빛났다.
 쿠릉! 쿠릉! 쿠르릉!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두 주먹. 일권 하나하나를 내지를 적마다 천지를 개벽(開闢)시키기라도 할 듯 터져 나오는 우레소리.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이 같을까?
 제자의 뜻밖의 공격에 사부는 잠시 기쁨의 미소를 스치듯 보였다. 그리고 그 미소가 사라지자 그의 팽팽한 소매가 앞으로 내밀어지며 푸른 기류가 풍천옥의 공격과 얼굴을 맞대었다.
 콰콰콰콰쾅!
 때 아닌 소리에 잠이 들었던 모든 생명체들이 화들짝 놀라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분주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님도 놀랐는지 어느새 구름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저 바람만이 두 사람의 곁을 맴돌며 후끈 달아오른 열기를 식힐 준비를 취했다.
 "으윽···."
 신음과 함께 풍천옥이 무릎을 꿇었다.
 탈색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사부는 심호흡을 했다.
 "젠장! 천무뇌력권이 최강의 권법이라면서요!"
 풍천옥의 투덜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벌써 천무뇌력권을 펼치게 될 줄이야. 네 녀석도 이젠 어엿한 장부(丈夫)가 다 됐구나! 허허허허!"
 "사부는 내가 아직도 애새끼로 보입니까!"
 퍽!
 "큭!"
 벼락같이 가해진 꿀밤에 풍천옥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왜 때려요!"
 "이놈아! 내 눈에 네놈은 아직도 철부지일 뿐이다! 그리고 천무뇌력권의 진정한 위력은 네놈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더 이상 나불거리지 말고 약이나 달여서 그놈에게 먹여!"
 휑하니 돌아서서 멀어지는 사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풍천옥의 얼굴은 구깃구깃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으아아아-! 싸부우우-!"
 처절한 그의 외침만이 숲에 메아리쳤다.
 
 사부가 머물고 있는 작은 모옥 안.
 "사부, 반드시 강호무림(江湖武林)으로 가야 하는 거요?"
 "그래!"
 단호한 사부의 음성에 풍천옥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가야 하는 거요?"
 "어째서라니? 하늘 같은 사부가 가라면 가는 거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네놈이 부족하긴 하지만 천무뇌력권도 익혔으니 능히 제 몸 하나는 간수할 거다. 더 이상 이곳에 안주(安住)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어. 네놈도 사내라면 이제 넓은 곳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
 "사부, 언제 내가 이곳에서 안주했다는 겁니까! 그 모진 구박과 구타를 생각하면 이곳은 내게 지옥이요! 지옥!"
 퍽!
 "큭!"
 머리통을 부여잡은 풍천옥을 향해서 사부는 눈을 부라렸다.
 "이 돼먹지 못한 놈아! 천하에 나처럼 제자를 사랑하는 사부가 어디 있는 줄 알고나 하는 말이냐! 젖먹이를 데려다 키우고 무공까지 가르치고 이 얼마나 칭송 받을 사부냐!"
 사부의 유창한 언변(言辯)에 풍천옥은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답잖은 핑계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 앞으로 보름 안에 이곳을 떠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키는 사부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풍천옥이 고개를 저었다.
 "싫다니깐 왜 날 내쫓으려고 합니까!"
 풍천옥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던 사부는 중얼거리듯이 말을 내뱉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 없다."
 사부의 음성만이 풍천옥의 귓가에 아스라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사부! 한 번만 더 합시다!"
 "이젠 안 돼!"
 "사부!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더 합시다!"
 "허어! 이젠 안 된다니깐!"
 "젠장! 좀 제자가 하자면 합시다!"
 "이놈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 이미 난 두 번이나 했어! 원래대로라면 십 년인데 오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미 대법(大法)의 효력이 다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야! 귀찮게 따라다니지 말고 그놈에게 약이나 먹여!"
 반나절 동안 졸졸 따라다니던 풍천옥이 우뚝 멈춰 섰다.
 "젠장! 대법은 무슨 대법! 완전히 엉터리구만!"
 붉어진 눈으로 땅을 걷어차는 풍천옥을 사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놈아, 하늘의 부름을 벌써 두 번이나 거절했다. 인간으로서는 극한의 한계까지 온 것이나 다름이 없어. 내 나이가 몇 인지나 알기나 하느냐?"
 사부의 물음에 풍천옥이 몸을 휭 돌렸다.
 "잊어먹었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잊었느니 네놈이 알 리가 없지!"
 그 말에 풍천옥은 처음으로 사부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마치 눈에 단단히 박아놓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백설을 듬뿍 뒤집어쓴 듯한 백발(白髮)에 백미(白眉), 자글자글한 주름이 눈가를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두 눈동자만은 아직까지 반짝이고 있었다. 풍천옥이 다섯 살 때 이후, 급격히 늘어난 주름살은 이웃집 동네 정 많은 할아버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부···.'
 문득 눈시울이 붉어지자 풍천옥은 신경질을 내며 뒤쪽으로 달려갔다.
 "젠장할!"
 "허허. 녀석···."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를 무색케 하는 풍천옥의 행동에 사부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 앞에서만은 언제나 치기 어린 소년의 모습을 보이는 풍천옥이었다. 이제 그런 그를 두고 홀로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덧, 사부의 눈가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사부, 나를 위해서 이런 것 좀 만들어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퍽!
 "말로 합시다! 말로!"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는 풍천옥의 모습에 사부가 스치듯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내공이라는 것은 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주기 싫으니까···."
 눈을 부라리는 사부의 모습에 풍천옥이 찔끔해선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같은 풍천옥의 행동에 더 이상 서로가 껄끄럽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자운경의 입속으로 달인 약물을 흘려 넣었다.
 "흐음···."
 미약한 신음과 함께 자운경의 손가락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천천히 눈을 떴다.
 "음?"
 자운경은 웬 노인과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다급히 머리맡의 적화를 찾기 위해 손을 더듬거렸다. 오랜 무인 생활에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었다.
 "에? 기껏 살려놨더니 검을 찾아?"
 목숨을 구원받은 사람치곤 너무나도 예의 없는 행동이라 생각한 풍천옥이 눈을 부라리며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이놈아! 저러한 행동이 진정한 무인의 자세다! 잘 보고 배워!"
 "사부! 말이 됩니까? 내가 이 사람처럼 실력이 없어서 남에게 목숨이나 구원받을 것 같습니까?"
 풍천옥의 말에 검을 더듬거리던 자운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의 눈에서 살기가 은은히 내뿜어졌다.
 "눈 깔아!"
 자운경의 모습에 풍천옥이 대뜸 주먹을 날려 그의 머리를 때렸다.
 별이 반짝인다.
 멀리 있기에 아름답다고 칭해지는 별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별은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반짝이기에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정신의 끈을 놓기 직전에 노인과 청년의 대화가 흐릿하게 들렸다.
 "이놈아! 환자를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하냐!"
 "나한테 살기를 내뿜었잖아요! 그리고, 사부도 내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꾀병 부리지 말라고 때렸잖습니까! 아마도 이놈은 꾀병이 틀림없습니다!"
 청년의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 자운경은 생각했다.
 '심장을 도려내 튀겨 먹을 새끼! 감히 나 자운경을 뭘로 보고!'
 
 "흐음···! 여, 여긴?"
 정신을 차린 자운경은 생소한 곳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에 경계의 눈초리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특히,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심장을 도려내 튀겨 먹을 건방진 청년'을 찾았다.
 '놈이 없군. 그런데 어째서···!'
 그는 더 이상의 생각을 잇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모함에 의해 충성스럽게만 생각했던 수하들에게 배신당하고 수백의 무리들에게 사냥감 되듯이 쫓기었다는 사실! 더군다나 마지막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의 원흉에게 비참하게 당했다는 사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자운경의 눈앞에 비릿한 미소와 함께 언제나 성인군자 행세를 하는 강남오협의 대형 모용학(慕容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팡!
 모용학의 얼굴을 향해 자운경은 주먹을 내뻗었다. 주먹이 얼굴을 관통했지만 정작 그 주먹을 맞은 모용학은 더욱 비릿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반드시! 심장을 도려내서 갈아 마시고 말겠다!"
 섬뜩한 말을 끝으로 자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도 자운경의 가슴에 스며든 차가운 한기(寒氣)를 어쩌진 못했다.
 원한··· 그놈은 참으로 씻어내기 힘든 놈이다.
 
 자운경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한 시선에 얼굴이 괜히 화끈거렸다. 언제고 자신이 이처럼 무례한 일을 겪은 적이 있던가? 당장이라도 살수(殺手)를 펼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지만 참고 참았다.
 그랬다. 천하의 자운경이 참는 이유는 그 시선의 주인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살린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흠흠!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단 말인가?"
 참지 못하고 자운경이 입을 열었다.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무례한 놈! 시건방진 놈! 내 생명을 구하지만 않았다면 네놈은 벌써 내 손에 갈기갈기 찢겨져 들짐승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자운경에게 노인과 청년이 다가와선 다짜고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특히, 청년의 얼굴을 본 순간 자운경은 자신도 모르게 펼쳐지려던 살수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사부, 이제 목숨도 살렸으니 그만 나가라고 합시다."
 이 한마디에 자운경은 살수를 참아야 했다.
 속으로 온갖 욕을 다한 자운경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고 말았다.
 으드득!
 "헉!"
 스스로 놀란 자운경이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기운이 방 안을 맴돌았다.
 "어쨌든 그대가 날 살려준 것은 내가 꼭 배로 보상하겠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피식!
 선심 쓰듯이 말을 하는 자운경을 향해 청발의 사내, 풍천옥이 웃음을 흘렸다. 마치 '네가 뭘 해줄 수 있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이놈! 어린 녀석이 방자하구나! 네가 어떻게 나를 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천하의 자운경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자운경이 두 눈에서 살광을 내뿜었다. 그나마도 최소한의 인내심이 행동 대신 말로 변형된 것이었다.
 "사부, 이거 괜한 놈을 살린 모양이오."
 가벼운 풍천옥의 말. 그의 말에 사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자운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노인장에게는 폐가 가지 않도록 하겠소. 하나! 이놈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말과 함께 자운경의 일장이 풍천옥의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벼락같은 일장이었다. 그만큼 빠르고 강력했다.
 "말로 해선 안 될 놈이군."
 자운경의 장력이 코앞에서 느껴질 때, 풍천옥은 여유 있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코끝을 스쳐가는 장세는 날카로움이었다.
 "허엇!"
 자신의 기습과도 같은 일장을 가볍게 피하는 상대의 모습은 자운경으로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과연 강호무림에 있어서 자신의 장력을 바로 코앞에서 피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신중해진 모습으로 자운경은 풍천옥을 바라보았다.
 역시 천하제일고수는 달라도 달랐다. 일반적인 무인이었다면 자신의 한 수를 가볍게 피하는 모습에 우롱 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무차별적으로 흉폭한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퉁기듯이 일어난 풍천옥은 어느새 자운경의 오른쪽을 점하고 있었다. 풍천옥의 오른손에서 일어난 일권이 자운경의 허리를 노렸다.
 "어딜!"
 갑작스런 풍천옥의 공격에도 자운경은 몸을 돌리며 일장으로 마주쳤다.
 펑!
 각각 일 보(步)씩 밀려났다.
 자운경과 풍천옥은 서로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람은 화(火)로 바뀌었다.
 서로 달라붙듯이 숨결이 느껴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손과 발을 쉴 새 없이 놀리는 박투가 전개되었다.
 팡! 파팟! 퍼펑! 파파팡!
 두 사람의 손과 발이 서로 얽히면서 수많은 타격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듯이 방 안은 두 사람의 공수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내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근력으로는 절대 그런 빛이 나타날 수 없었다.
 사부는 그런 살벌한 대결을 여유 있게 지켜볼 뿐이었다.
 "어린 놈이 제법이구나!"
 말을 하면서도 자운경의 손과 발은 그 움직임을 좇기 힘들 정도로 풍천옥을 공격했다.
 "뭐? 어린 놈? 한 번만 더 지껄여봐. 뱃속으로 들어간 태화영환단(太和鈴丸丹)을 토해내게 해줄 테니."
 태화영환단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자운경은 자신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풍천옥의 손과 발을 가까스로 막으며 생각에 빠졌다.
 '태화영환단? 놈이 무슨 영약(靈藥)을 사용한 모양이군. 빌어먹을!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제야 자신이 꽤 커다란 내상을 입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자운경은 문득 눈앞의 사내에 대한 고마움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커질수록 좀 더 참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면 앞으로의 일이 더 걱정되었기에 손을 멈출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이렇게 조금의 차이도 없이 맞대응하는 풍천옥과 더 겨루고 싶은 호승심 때문이라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이 천하제일인이라 불린 자운경의 자존심이요, 오만이었다.
 그런 자운경의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두 사람이 맞붙고 반 각(半刻: 약 7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자운경은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풍천옥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지는 데 비해, 자신은 시간이 갈수록 그 빠름을 뒤쫓기에 바빴다. 그가 천하제일의 고수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은 검법 때문이었지, 결코 권각술(拳脚術) 때문이 아니었다.
 '놈은 권각술을 익힌 놈이다!'
 풍천옥이 권각술을 주 무공으로 익혔다고 판단한 자운경은 내공을 끌어올려 단번에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런 공격에 순순히 응할 풍천옥이 아니었다. 이십 년이 넘는, 비무를 가장한 사부와의 매타작으로 단련된 그였기에 웬만한 경험을 지닌 무림인과는 동등한 실전경험을 지닌 몸이었다.
 허리를 비트는 동작으로 일장을 피한 풍천옥은 팔꿈치를 이용해 자운경의 복부를 가격했다.
 퍼억!
 "크윽!"
 상당한 통증이 자운경의 머릿속을 흔들어놓았다. 자연, 그의 몸이 한순간 고통으로 흔들렸다. 그런 기회를 놓칠 풍천옥이 아니었다.
 그만 됐다는 사부의 말이 아니었다면 자운경은 다시 한번 침상에서 수많은 나날을 보내야 했을지도 몰랐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건방···!"
 퍼억!
 "까불면 맞는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크윽···. 자, 자운경···."
 이곳저곳 찢겨진 옷. 아직까지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얼굴의 핏자국. 천하제일고수 자운경의 현 상태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자운경, 그런 그의 앞에 당당히 서 있는 풍천옥,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의자에 몸을 앉히고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하는 사부.
 '이,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자운경은 고개를 숙인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우냐?"
 한심하다는 듯한 풍천옥의 물음에, 자운경이 고개를 번쩍 들면서 버럭 소리쳤다.
 "나 자운경이 고작 네놈 앞에서 울 것 같으냐! 어림···."
 퍽!
 어김없이 풍천옥의 주먹이 허공에서 번쩍였다. 자운경은 첫 번째 주먹은 고개를 비틀어 피했지만 뒤이어 날아온 주먹에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말았다.
 "맞아야 정신 차리냐? 생각보다 멍청하군."
 으드득!
 세상 어디에서 자운경이 이런 치욕과 모멸을 겪을 수 있단 말인가! 자운경 스스로도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맞을 적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몸도 이젠 다 나았지? 그럼 가라. 더 이상 너랑 있기 싫다."
 풍천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 유명한 혈마천검 자운경인가?"
 자운경은 고개를 돌려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내가 혈마천검 자운경이오. 그러는 노인장은?"
 그의 물음에 사부가 슬그머니 웃었다.
 "나는 그저 촌(村)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보잘것없는 늙은이지. 그나저나 명색이 천하제일고수라는 자운경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인가?"
 "그게 무슨 말이오?"
 "저놈에게 개 맞듯이 맞고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냐고 물었네."
 '개 맞듯이'를 강조하는 사부의 말에 자운경이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자연, 그의 전신에서는 살기가 휘몰아쳤고 두 눈에서는 살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노인장의 제자가 죽을지도 모르오."
 싸늘한 자운경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풍천옥이 피식 웃었다.
 "꼴깝을 떠네."
 풍천옥을 노려보던 자운경이 사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부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허락이 떨어진 셈이다.
 "다시 겨루자. 난 네놈과 다르게 권각술보다는 검술에 자신이 있다! 내가··· 이 자운경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마! 참고로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면서 말하는 자운경을 향해 풍천옥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내가 권각술에 자신 있어한다고? 누가 그래? 그냥 주먹으로 때리는 느낌을 좋아서 권각술을 주로 사용할 뿐이지 나도 결코! 권각술이 진신무공(眞身武功)은 아니야."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풍천옥의 말에 자운경이 놀란 얼굴을 스치듯 보이고는 천천히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무공을 익혔단 말이냐?"
 정말로 진지하게 묻는 자운경의 모습에 풍천옥은 슬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 그가 풍기는 냄새와 아주 흡사한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알고 싶어?"
 명백히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비밀인데. 굳이 알고 싶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안?"
 의미심장한 풍천옥의 말에 자운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 제안! 내 요구에 응한다면 내가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자세히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보여줄 수도 있지. 어때?"
 귀가 솔깃하는 제안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떤 종류의 무공을 익혔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무공을 생판 모르는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무공을 남에게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다. 강호무림에서는 타인의 무공수련을 지켜보는 것이 금기(禁忌) 중의 금기였다. 혹 보게 된다면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라도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할 만큼, 타인의 무공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제안이지?"
 고기가 미끼를 물 듯이 자운경이 풍천옥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
 "간단해! 나랑 대결을 하는 거야. 난 나만의 무공으로 넌 너만의 무공으로. 물론, 승패는 갈려야겠지? 네가 지면 평생을 내 부하로 사는 거야. 나야 질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땅이 뒤집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질 정도의 가능성밖에 없지만 내가 지게 된다면···."
 자존심을 팍팍 긁어놓는 풍천옥의 말.
 자운경은 달아오른 얼굴로 낮게 되물었다.
 "지게 된다면?"
 풍천옥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거야 그냥 지는 거지. 어차피 난 내 무공을 네게 알려주고 보여주기로 했으니 그걸로 족한 거 아닌가?"
 말 그대로 자신의 무공을 보고 싶다면 직접 부딪쳐보자는 말이었다. 그러나 자운경은 섣부르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모를 결과에 자신이 저 싹수없고 오만방자하며 예의라고는 개미 똥만큼이나 없는 놈의 부하가 될지도 모르기에.
 세상에서 자신의 위는 오로지 황제뿐이라고 생각했던 자운경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무인은 무인.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한 가닥의 호승심과 자신을 권각술로 제압한 저 시건방진 놈의 무공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양 갈래의 길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자운경에게 사부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놈이 저렇게 보여도 제 한 목숨은 충분히 지킬 것이네."
 "사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내가 저런 놈에게 지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이놈아!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옛말에 이르길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다고 했다!"
 "사부! 그 따위 옛말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내가 설마하니 그 강남오졸인가 뭔가 하는 놈들에게 비리비리하게 당하는 저런 놈 하나 상대하지 못할까봐 그럽니까!"
 "이놈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명색이 혈마천검 자운경인데 뭔가 한 수가 있을 것 아니냐!"
 듣자듣자 하니 사부라는 사람이나 제자라는 사람이나 완전히 자신을 동네 파락호 취급을 하고 있었다. 뭐?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다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자운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풍천옥을 노려보았다.
 "이 빌어먹을 시건방진 놈! 그 주둥이를 내가 도려내고 말겠다!"
 그의 말에 사부와 풍천옥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은밀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제2장 기습 아닌 기습
 
 
 모용학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유난히도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불면(不眠).
 이 모든 것이 어떤 한 사내 때문이었다.
 "놈···!"
 청발의 사내. 달랑 이름밖에 모르는 사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의 이 두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사내!
 "풍·천·옥!"
 풍천옥을 떠올리자,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에 모용학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은 그자를 죽이는 것으로밖에 풀 길이 없었다.
 그러나 죽일 수 없다면?
 응어리는 가슴속에 묵직한 무언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무얼 하세요?"
 기억하기 싫은 얼굴을 떠올리면서 밤잠을 설치는 모용학에게 중년의 아름다운 미부(美婦)가 다가왔다.
 "왜 나왔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했지만 모용학의 말속에 따스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이 잠을 주무시지 못하는데 제가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모용학이 몸을 돌려 자신의 하나뿐인 소중한 아내를 바라보았다.
 벌써 오십에 가까운 나이를 먹었지만 그 미모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단지, 그 빛이 달라졌을 뿐이다. 젊었을 적에는 풋풋함과 상큼함,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던 깨끗함이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원숙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음이 편치 않으니 잠을 이룰 수가 없구려."
 모용학의 말에 남궁연화(南宮姸花)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냥 마음이 심란해서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하는 모용학의 말에도 남궁연화는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지속되는 불면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해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의 시간이 길수록 마음의 혼동만 더욱 깊어질 뿐이죠. 머리를 맑게 해야 좋은 방법도 떠오르는 법이니까요."
 그녀의 조리 있고 차분한 말에 모용학은 얼굴 가득 자랑스런 웃음으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참으로 내겐 과분한 사람이오. 그래서 내겐 당신이 더욱 자랑스럽다오."
 "저야말로 당신이 한없이 자랑스럽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뿌듯한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사랑을 질투라도 하듯이 어디선가 방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형."
 두 사람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온 사람은 모용학과 함께 강남오협이라 불리는 황무협(黃戊俠)으로, 자운경을 마지막까지 쫓았던 외팔이 무인이었다.
 강남오협 중에서는 서열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자였다.
 "무슨 일이냐?"
 어색함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모용학은 조금의 내색도 없이 황무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결코 탐탁지 않았다.
 그런 시선을 황무협 역시 느꼈을까? 그는 곁에 서 있는 남궁연화를 향해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말씀들 나누세요."
 괘념치 말라는 듯이 살짝 웃음을 보인 남궁연화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자리를 피하자 황무협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모용학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황무협의 말을 듣자마자 모용학이 살기 가득 찬 얼굴로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그렇단 말이지?"
 "예! 어떻게 할까요?"
 "제일(第一)을 보내라."
 모용학의 말에 황무협이 두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음성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 그들을 말입니까? 하, 하지만···."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이 모용학이 몸을 돌려 달빛을 바라보았다.
 "고수다. 충분히 가치가 있는 놈이고, 그들이 아니면 힘들지도 모른다."
 황무협은 모용학이 이처럼 상대를 인정하고 나오는 것은 자운경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자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새삼 상기했다.
 숨이 턱하니 막힐 정도로 대단한 기세를 내뿜었던 사내.
 권태로움? 아니다. 그건 권태로움이라고 하기보다는 진정한 강자만이 취할 수 있는 자만심과 오만이었다.
 오직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황무협의 귓가로 모용학의 끈끈한 살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그 시체조차 찾기 힘들게 갈기갈기 찢어 죽이라 명해라. 이 모용학을 가벼이 여긴 자는 저승에 가서도 후회하게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황무협은 모용학의 잔인한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에게 있어 모용학은 철저히 이중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자신을 비롯해 세 명이 더 알고 있었다. 그건···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이기도 했다.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세상에 소리 없이 묻혀져야 하는 비밀!
 
 ***
 
 자운경은 적화를 끌어당겼다. 다행히 잃어버리지 않아서 크게 안심했던 그의 소중한 병기. 적화도 주인이 제 힘을 되찾은 것을 느끼기라도 했을까?
 우우웅-!
 적화의 검명(劒鳴)이 허공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검명을 듣는 자운경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런 모습을 풍천옥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림에 나가려면 돈이 필요한데···. 비싸 보이는군.'
 그의 생각을 들었다면 자운경이 길길이 날뛰며 적화를 휘둘렀을 것이다.
 "네 진신무공이 무엇이냐?"
 자운경이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풍천옥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그의 생각대로 권각술일 수밖에 없었다. 장법(掌法)이나, 지법(指法)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맨손으로 접근전을 펼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당한 수모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걱정도 팔자다. 잔말은 필요 없고! 덤벼!"
 풍천옥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자운경이 살기를 내뿜었다.
 "죽더라도 저승에서 원망하거라!"
 싸늘한 말과 함께 자운경의 신형이 빛살처럼 풍천옥의 전면을 향해서 쏘아져 나갔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적화가 더욱 소리 높여 울어댔다.
 "쾌적섬렬검법 일초(一招) 유운풍화(流雲風火)!"
 적화에서 불꽃이 확 일어나더니 풍천옥의 전신을 향해 이글이글 타들어 갔다. 풍천옥은 후끈한 열기에 감탄한 얼굴로 신형을 띄운 채 비쾌하게 다섯 번의 발길질을 해댔다.
 파파파파팟!
 발길질에 깃들어 있던 내공이 외부로 방출되면서 자운경의 불꽃과 충돌했다. 엄청난 열기가 얼굴로 확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안면이 벌겋게 달구어진 풍천옥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땅을 두어 번 걷어차며 뒤로 물러났다.
 "진신무공을 사용한다더니! 각법이 네 진신무공이냐?"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한 자운경은 빠르게 접근하며 적화를 휘둘렀다. 붉은 검기(劍氣)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풍천옥의 전신을 노렸다. 순간 검기의 물결이 자신을 노리자 풍천옥은 손바닥을 펼쳐서 허공을 가격했다.
 팡!
 푸르스름한 기류가 허공에 넓게 퍼지면서 검기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여전히 손을 놀리는 풍천옥의 모습에 자운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더욱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신형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수많은 공수를 주고받았다. 대부분 공격을 가하는 것은 자운경이었으며, 풍천옥은 수비에 모든 비중을 두고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내 절학(絶學)을 볼 자격이 되지!"
 풍천옥은 대결 도중 처음으로 말을 꺼내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말에 자운경은 더욱 분노한 얼굴로 검기를 뿌렸다. 천하제일고수라 불리는 자신에게 고작 무공을 볼 수 있는 자격 따위를 운운하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건방진 놈! 뼈를 갈아버리리라!'
 자운경의 두 눈에서 살광이 폭사되더니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강맹한 검기가 어지럽게 뻗어 나갔다. 무릎과 복부, 가슴을 향해서 다가오는 세 가닥의 검기를 보면서, 풍천옥은 그제야 품에서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까가강!
 풍천옥의 오른손이 휘둘러지면서 순식간에 세 가닥의 검기가 소멸되어버렸다. 분명히 무언가에 부딪치면서 소멸된 것이다.
 자운경은 그 무언가를 바라보기 위해 잠시 거리를 벌렸다.
 "어때? 괜찮지?"
 풍천옥은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네 개의 청색 구슬을 흔들며 자랑했다. 자운경은 다소 놀란 얼굴로 그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
 "청옥(靑玉)! 진정한 이름은 비령옥(飛靈玉)이라고 하지. 간단하게 청옥이라 불러줬음 좋겠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천옥은 하나의 청옥을 그대로 날려보냈다. 푸른색의 청옥이 대기를 가르며 자운경의 미간을 향해 비쾌하게 날아들었다.
 "어딜!"
 까앙!
 "크윽!"
 적화를 들어서 그대로 내리쳤지만 오히려 내리친 검이 위로 퉁겨져 올라가 청옥의 진로를 막지 못했다. 가까스로 고개를 젖혀 청옥을 피했지만 상상외로 강한 그 힘에 자운경은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닌데!"
 풍천옥의 손이 빠르게 허공을 휘저었다. 남아 있던 세 개의 청옥이 빠르게 날아갔다.
 자운경은 적화를 움켜쥐고는 검기를 날렸다.
 까가가강-!
 그러나 검기에도 끄떡없이, 청옥은 여전한 속도로 다가왔다. 그 놀랄 만한 공격에 자운경은 안면을 구기며 몸을 비틀어 세 개의 청옥을 피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손을 휘젓는 풍천옥을 향해 발을 떼려는 순간!
 "헛!"
 급격하게 변한 안색의 자운경이 몸을 회전시켰다. 찰나의 시간을 두고 하나의 청옥이 그의 등 부분의 옷자락을 그대로 찢어버리며 지나갔다. 풍천옥이 허공에 손을 휘저은 것은 괜한 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청옥을 조종하고 있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독특한 무공에 자운경은 있는 힘을 다 발휘하기로 했다.
 검기로 퉁겨지지도 않는 청옥. 그런 청옥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풍천옥의 독특한 무공. 자신이 지닌 바 무공을 모두 선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되돌아오는 세 개의 청옥을 향해서 자운경은 적화에 내공을 주입했다. 적화가 더욱 붉게 달아오르며, 불꽃에 휩싸인 듯 검강(劍쾝)이 솟아올랐다.
 "쾌적섬렬검법 육초(六招) 뇌력천무(雷力天武)!"
 우르르릉!
 적화에서 뇌성(雷聲)이 터져 나왔다.
 자운경의 신형이 대지에서 약 반 장가량 떠오름과 동시에 적화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 움직임 끝에는 세 개의 청옥이 있었다. 적화의 움직임에도 아랑곳없이 청옥들은 여전히 빠른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세 번의 커다란 충돌음이 온 대지를 휩쓸었다. 충돌이 일어난 부근을 중심으로 반경 일 장가량의 땅이 주저앉았다. 그만큼 자운경의 공격은 대단했다.
 "이, 이런!"
 천천히 내려오던 자운경의 신형이 급급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으로 인해서 그의 몸을 노리고 날아들던 세 개의 청옥이 허망하게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완전하게 피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허공에 길게 혈선(血線)이 그려졌다.
 자운경은 땅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몸을 굴렸다. 수치스러운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법이었지만 그 한 수로 인해서 그는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
 퍼퍼퍽!
 청옥은 땅속 깊숙이 틀어박힌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자운경이 놀란 얼굴로 풍천옥을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이 조금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만큼 그가 사용한 무공이 얼마나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흐음··· 이름이 뭐지?"
 자운경의 물음에 풍천옥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한참 만에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천뢰광무비(天雷光武飛)! 비령옥!"
 
 싸늘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휘감고 있었다. 그 싸늘함을 내뿜고 있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풍천옥과 자운경이다.
 "그만 포기하지."
 한참 만에 풍천옥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자운경이 되지도 않는다는 듯 큰 소리로 반박했다.
 "어림없는 소리!"
 풍천옥은 벌떡 일어나서 두 주먹을 말아 쥔 채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그만 포기하지!"
 "어림없는 소리!"
 덩달아 벌떡 일어선 자운경이 여전히 지지 않고 대꾸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분명히 약조를 했잖아!"
 "물론!"
 고개까지 끄덕이는 자운경의 모습에 풍천옥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까!"
 자운경의 말에 풍천옥이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내가 봐준 거잖아! 설마 죽고 싶지는 않겠지?"
 자운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풍천옥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를 봐줬다는 거냐!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내가 네 녀석의 모든 공격을 피했다!"
 "하! 내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까 그나마도 겨·우 피할 수 있었지! 설마하니 내가 늙다리 하나 못 죽일 것 같아?"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말과 늙다리라는 말에 자운경이 적화를 부여잡고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진한 살기가 가득 담긴 낮은 어조로 말했다.
 "사정을 둬? 늙다리?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다시 한번 겨루든지!"
 당장이라도 적화를 뽑아 휘두를 기세로 말하는 자운경의 모습에 풍천옥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꾸했다.
 "뒈질래?"
 그 간단한 물음에 자운경은 이번엔 적화를 잡은 손이 아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누구 맘대로?"
 "하! 아주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내 밑으로 기어 들어오기는 싫다?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네놈 정도의 실력을 가진 늙다리는 세상에 널려 있어!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으니까 잠자코 내 첫 번째 부하로서의 영광을 누려라!"
 오만과 자만이 뚝뚝 떨어지는 풍천옥의 말에 한때는 오만함과 자만으로 세상에 따를 자가 없었던 자운경이 맞받아 쳤다.
 "영광 좋아하네! 내가 누군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난 천하를 휩쓸었던 혈마천검 자운경이다! 나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는 세상 어디를 뒤져봐도 없다! 그리고! 늙다리, 늙다리 하는데! 난 정확하게 쉰두 살밖에 먹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풍천옥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펴더니 스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나보다 이십오 년이나 밥을 더 처먹었으면서 실력은 쥐꼬리만큼이군."
 확실히 무공 면에서는 풍천옥이 한 수 위였기에 자운경은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다른 이들보다 강하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이 싹수없는 놈보다는 솔직히 약했기에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겼다는 듯이 더욱 진하게 미소를 짓는 풍천옥의 낯짝을 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며 자운경은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입싸움을 해봐야 손해를 보는 것은 이십오 년이나 더 산 자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이 어린 사람과의 말싸움은 나이가 많을수록 손해였다. 물론, 무력(武力)이 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사부! 뭐라고 말 좀 해요.'
 풍천옥의 전음에 사부가 전음으로 대답했다.
 '차려놓은 밥상도 못 처먹냐!'
 "끙···."
 그 말에 풍천옥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운경은 모르고 있었지만 풍천옥과의 대결은 사부와 제자가 짜고 만들어낸 엄연한 함정이었다.
 바삭! 스스슥···!
 "손님이 왔나보군."
 사부의 말에 풍천옥과 자운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그들도 귓가를 간질이는 이질적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방을 빠져나가자 혼자 남은 사부만이 조금 힘든 기색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스스슥···.
 다수의 사람들이 빠르게 접근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두 사람의 귓가에 들렸다. 접근하는 이들은 은밀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었지만, 풍천옥과 자운경의 귀에는 천둥 치는 듯한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나, 둘, 셋··· 열다섯!'
 "열다섯이군."
 풍천옥은 자신의 생각과 딱 들어맞는 자운경의 말에 놀랐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냐?"
 "아니, 그냥. 생각보다 제법이라서."
 반박을 하려던 자운경은 입을 다물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들켰다는 것을 알아챈 열다섯의 복면인들이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풍기는 기도로 보니 모두 절정의 무인들이었다. 그럼에도 풍천옥과 자운경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천 쪼가리를 낯짝에 뒤집어쓴 이유는 보이기 흉할 정도의 지저분한 쌍판이기 때문인가?"
 풍천옥의 걸쭉한 조롱에 복면인들이 순간 부르르 떨었다. 그 중간에 서 있던 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어린 놈이 입이 거칠구나."
 "젠장! 왜 오는 새끼들마다 어린 놈 어린 놈 하는 거야! 그러는 네놈은 몇 살이나 처먹었냐? 나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더 이상 어린 놈이라고 하지 마."
 풍천옥의 싸늘한 말에 복면인이 비웃으며 되물었다.
 "한다면?"
 풍천옥이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해봐."
 "어린 놈···."
 피슛-!
 어린 놈이라는 짧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복면인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되는 거야. 다시 말해서 뒈져버리는 거라고. 알았어? 이 말은 저승에서 듣겠군."
 풍천옥의 말과 함께 복면인의 신형이 앞으로 넘어졌다. 그의 미간에 작은 점이 찍혀 있는 것이, 단번에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동료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복면인들은 바싹 긴장한 얼굴로 풍천옥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엄청난 고수였던 것이다.
 "이봐, 그럼 우리 이곳에서 승부를 가리는 게 어때?"
 풍천옥의 한 수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던 자운경은 표정을 바로 하고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풍천옥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천 쪼가리를 쓰고 꼴갑을 떠는 놈들을 누가 더 많이 잡아 죽이는지 그걸로 승부를 내자고. 내가 이기면 네가 내 부하가 되는 거고, 네가 이기면 그냥 순순히 이곳에서 나가는 거고. 어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듯이 자운경이 크게 소리쳤다.
 "불공평하다! 내가 이긴다면 네놈이 내 수하가 돼라!"
 물러설 수 없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는 자운경의 모습에 풍천옥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먼저 간다!"
 그 말과 동시에 풍천옥의 신형이 번쩍였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움직였는지, 어떻게 그토록 빠를 수 있는지 복면인들은 의문을 가져야 했지만 그런 의문보다는, 어느새 자신들의 가운데 뛰어들어 손과 발을 놀리는 풍천옥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은 풍천옥의 일권이 복면인의 가슴을 노리고 빠르게 파고들었다. 복면인은 몸을 뒤로 누이는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몸을 피하며 발끝의 힘으로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복면인의 움직임에 풍천옥이 입가를 살짝 뒤틀었다.
 "좀 하는 모양인데? 그래봤자 오늘은 니들 제삿날이야."
 싸늘한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두 눈이 번쩍이며, 그의 신형에서 지금까지 고요하게 뿜어지던 기세가 사납게 돌변했다. 어느새 그의 두 주먹이 앞쪽에서 검을 날리는 복면인의 양 가슴을 노리고 뻗어 나가고 있었다.
 얄밉게 선수를 빼앗긴 자운경은 급급하게 신형을 움직였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적화가 붉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승부욕에 처음부터 그의 절학인 쾌적섬렬검법의 일초 유운풍하가 복면인들을 향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적화의 검신에서 붉은 불꽃이 확 일어났다.
 복면인들은 어느새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쪽은 풍천옥을 상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자운경을 향해 쇄도(殺到)해 들어가고 있었다.
 불꽃이 넘실거리는 적화가 앞을 막아서는 복면인들을 향해 사방에 불똥을 튀기며 쏘아져 나갔다. 후끈한 열기가 복면인들을 주춤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 열기로부터 채 벗어나지 못한 두 명의 복면인들이 파랗게 빛나는 검기를 불꽃의 전면에 흩뿌렸다.
 콰르르릉!
 불꽃에 휩싸인 적화와 복면인들의 검기가 허공에서 얽히며 굉음을 토해냈다. 복면의 겉장이 축축하게 젖어들면서 몇몇이 비틀거리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
 충돌의 여파를 느낄 새도 없이 자운경은 비틀거리는 복면인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들어가 빠르게 네 가닥의 검기를 뿌려냈다. 비쾌하게 쏘아져 나간 검기는 각각 복면인들의 어깨와 왼쪽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두 복면인이 쓰러지자 자운경은 더욱 비장한 표정으로 적화의 검병(劒柄)을 바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저 싸가지 없는 놈에게는 절대 질 수 없지!"
 
 "하하하하!"
 파랗게 빛나는 양 주먹이 허공을 뚫고 복면인의 복부와 가슴을 때리는 장면은 그다지 낭만적일 것도 없었으며, 아름답지도, 특정한 즐거움을 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풍천옥은 유쾌하게 웃었다.
 돌연 그의 몸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무수히 회전을 하면서 가느다란 실 같은 유형의 기운으로 복면인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단단히 묶어두고는, 채 방어를 못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난폭하게 주먹과 발을 내질렀다.
 퍼억! 퍼퍼퍽! 퍼퍽!
 복날 개 패듯이 무자비하게 복면인들을 두드리는 풍천옥의 모습은 지옥에서 방금 인세(人世)에 올라온 야차(夜叉)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복면인들은 생각했다.
 '저 개자식은 인간 말종이다!'
 어떻게 몸에서 미세하게 뻗어 나온 실 같은 기운이 자신들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오로지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는, 아니 방어태세를 취하기도 전에 두들기고 보는 풍천옥이 저주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무림인의 생리가 그러한 것을! 힘이 없다면 힘이 있는 자에게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그들은 죽음의 순간, 처음으로 커다란 진실 하나를 절실히 느꼈다.
 무림은 진정 비정(非情)했다!
 "죽어라! 죽어! 나한테 개기면 오로지 죽음뿐이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흉폭하게 손과 발을 놀리는 풍천옥을 복면인들은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죽더라도 천하제일의 고수라 불리는 자운경의 검에 떳떳이 죽는 것이 무인다운 죽음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덧 복면인들은 하나둘 자운경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고 있었다. 절정의 무공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죽는 개 같은 경우만은 면하기 위해 복면인들은 필사적으로 자운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라? 어딜 도망가! 그 자식한테 가면 내가 지잖아! 돌아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풍천옥이 기겁을 하면서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떻게든 자운경보다는 많은 복면인들을 죽여야 했기에 그로서도 급급하게 비령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천뢰광무비 비령옥! 파검탄(破劍彈)!'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청옥을 허공으로 내던지며 손짓을 하자, 네 개의 청옥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복면인들의 뒤통수를 뚫고, 가슴을 뚫고, 복부를 뚫으며 사정없이 몰아쳤다.
 "썅!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살아생전 이런 싸움을 벌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한 복면인이 땅바닥을 구르며 외쳤다. 무인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이처럼 어이없는 싸움을 하게 된 것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놈-당연 복면인의 입장에서-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위(武威)를 지닌 것도 그렇지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구슬을 부리는 무공이라니!
 처음 모용학의 명이 떨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만만했다. 아무리 천하제일고수라 인정받는 자운경이 있었지만 자신들 열다섯이면 충분했다. 비록, 다른 한 사람이 제법 강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열 사람이 자운경을 상대하고 나머지 다섯이서 한 사람을 상대해도 충분하다 생각한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얼마나 허무맹랑했는지를 아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知彼知己 百戰百勝)!
 푸학!
 게으른 당나귀가 미친 듯이 땅을 구른다는, 무인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나려타곤의 수법을 펼침으로 가까스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바로 옆 동료의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청옥과 그 구멍에서 뿜어지는 피분수에 복면인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뒤로도 청옥은 살아 움직이는 복면인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몇몇은 가까스로, 있는 양껏 검기를 주입한 검으로 퉁겨낼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땅! 따다당!
 청색 검기를 한곳에 모아 청옥과 부딪쳐봤지만 피해를 입은 쪽은 복면인이었다. 다섯 발자국이나 처절하게 밀려나 깊게 팬 땅의 흔적과, 이미 복면을 무겁게 적시고 있는 입가의 혈선.
 "나 양화서(楊化徐)! 이따위로 개 같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복면인은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리고 커다랗게 고함을 지른 후 청색 검기를 줄기줄기 내뻗으며 풍천옥을 공격해 들어갔다.
 양화서라면 귀주성(貴州省)에서 화불검객(火弗劍客)이란 명호(名號)로 이름 높은 검객이다. 귀주성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무위가 높아서 그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이였다. 그런 그가 복면을 하고 기습 따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는 것은 심각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수십 가닥의 검기가 사방을 메우며 풍천옥의 전신 요혈(要穴)을 노리고 빠르게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풍천옥은 다른 복면인들을 노리고 날렸던 청옥을 급하게 회수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빠르게 휘돌렸다.
 '천뢰광무비 비령옥! 회륜착(回淪錯)!'
 파파파파파팟!
 풍천옥을 중심으로 마치 하나의 둥그런 원을 그리는 듯한 청옥의 움직임에, 양화서의 검기가 그 원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파검탄!"
 원을 그리며 빠르게 맴돌던 청옥이 반으로 나누어져 각각 양화서의 미간과 단전을 노리고 비쾌하게 쏘아졌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양화서가 자신의 전면을 향해 급급히 반원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결국 단전과 미간을 뚫리고 말았다.
 귀주성을 남부럽지 않게 활보하던 한 검객의 최후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했으며, 그것도 무명(無名)의 무인에게 죽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참했다.
 "나한테 죽었으니 넌 저승 가서도 존경받을 거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저런 뻔뻔스러운 말을 잘도 지껄이는지 그의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 자운경이었지만 당장에 시급한 위기부터 모면해야 했기에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푸른 섬광과 함께 자운경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허공에 나풀거렸다. 소름끼치도록 빠른 쾌검(快劍)을 사용하는 복면인은 자운경으로 하여금 한 사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검필사(一劍必死) 장백호(長百浩).
 정사 중간에 위치한 절정의 검객으로 그의 별호(別號)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번의 검놀림으로 반드시 상대를 죽인다는 섬뜩한 쾌검술의 달인이었다.
 "이거 이름 높은 쾌검술의 달인이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쓰고 남의 뒤통수나 치기 위해 몸을 움직이다니 놀랍군. 안 그런가, 장백호?"
 자운경의 조소에 몸을 흠칫거린 복면인, 장백호는 싸늘한 말로 대꾸했다.
 "저승에서 알아보도록!"
 장백호의 말에 왼쪽 눈썹을 꿈틀거린 자운경이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몸을 비틀었다.
 "음!"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황천길로 갈 뻔했던 자운경은 생각보다 장백호의 검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소문보다 훨씬 빠르군!'
 적화를 가슴까지 끌어올린 자운경은 거침없이 섬전멸화(閃電滅火)의 초식을 사용했다. 섬전멸화의 초식도 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기에, 천하제일인의 자존심으로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쾌검을 펼친 것이었다.
 불꽃이 터지듯이 다섯 번의 찌름을 행한 자운경을 향해 장백호는 속으로 감탄을 터뜨리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그의 검이 번쩍거리면서 자운경의 섬전멸화와 부딪쳐갔다.
 따다다다당!
 섬전멸화의 초식으로 탄생한 다섯 마리의 화룡과 장백호의 유성(流星)과도 같은 검기가 둘의 중간에서 충돌을 일으키자 가벼우면서도 듣기 거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백호가 자신의 섬전멸화를 막아내자 자운경은 이를 악문 채 다시 한번 섬전멸화를 펼쳤다. 또다시 불꽃이 터지듯 다섯 번의 빛이 장백호의 전면에 뿜어졌다.
 '크윽···! 역시 자운경이다. 단 한 번의 충돌로 내상을 입고 말다니.'
 속이 진탕된 장백호였지만 가까스로 검기를 날려 다시 한번 자운경의 다섯 마리 화룡과 충돌을 일으켰다.
 "커헉···!"
 장백호는 제대로 막지도 못한 채, 두 번의 충돌로 내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내상을 입고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입가는 어느새 붉은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여태껏 살아남아 공격을 취하려던 복면인들은 장백호가 단 두 번의 충돌로 회생불능이 되어버리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운경을 바라보았다. 자운경과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 놈은 너무나도 강했다.
 "이것이 천하제일인인가? 하하하···."
 한 복면인이 검을 늘어뜨린 채 허탈하게 웃었다. 그를 시작으로 마치 전염병이 돌듯이 여기저기서 병기 떨어뜨리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거나 의욕을 잃은 눈빛으로 고개를 떨구는 이들이 속출했다.
 "뭐야! 싸우다 말고 왜 미친 짓들이야? 목표가 있을 거 아냐? 사내라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동원해야지! 어이, 이제 막 물이 오르려고 하는데 무슨 짓이야? 빨리 덤비라고!"
 갑작스런 복면인들의 항복에 풍천옥이 열변을 토하며 그들을 다독였다.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다섯의 복면인들이 싸울 의사를 보이지 않자, 풍천옥은 얼굴을 찌푸린 채 죽은 자들을 세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복면인들과 자운경은 풍천옥이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기에 그저 멍한 얼굴로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죽은 복면인들을 하나하나 살펴본 풍천옥이 갑자기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자운경을 향해 말했다.
 "내가 여섯! 네가 넷! 내가 이겼다! 하하하하! 이제 넌 내 졸개다!"
 자운경은 그제야 입을 쩍 벌리며 이미 풍천옥이 파악한 시체들을 부랴부랴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풍천옥의 손에 죽은 자들이 둘 많았다.
 이를 꽉 깨문 자운경이 풍천옥을 향해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얘들이 남았잖아!"
 
 ***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으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풍천옥과 자운경을 급습(?)했던 복면인들이다. 복면인들의 정체를 확인한 자운경의 입에서는 헛웃음만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면면(面面)을 살펴보면 냉혈고검(冷血孤劍) 청명수(靑蓂樹), 혈룡북검(孑龍北劍) 마천(麻天), 소요신검(笑樂神劍) 맹창(孟敞), 풍령자(風令者) 고혈산(高孑山), 일검진천(一劍鎭天) 맹덕명(孟德明)으로, 각각 한 지방에서 이름 날리는 절정의 고수들로 모두 정과 사의 중간에 위치한 이들이었다.
 특히, 청명수와 맹덕명, 마천은 자운경이 문주(門主)로 있던 사황검문(死皇劍門)에서도 영입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아직까지는 그 어느 곳에도 구속받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네놈들은 모두 독보강호(獨步江湖)를 고집하지 않았나? 특히! 청명수, 맹덕명, 마천은 사황검문에서도 사람을 보낸 적이 있는데?"
 자운경은 차가운 인상이 특징적인 사십 대 중반의 청명수, 어느 것 하나 특별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인상의 삼십 대 후반의 맹덕명, 호목(虎目)에 강직해 보이는 사십 대 초반의 마천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렇소."
 마천의 짤막한 대답에 자운경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은근히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래도 명색이 이름 높은 절정의 무인들이 단체로 복면을 뒤집어쓰고 기습을 해? 이거 무림인들이 알면 기가 찰 노릇이군!"
 그 말대로 이 사실을 무림인들이 안다면 그들의 체면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욕을 하는 자, 뒤에서 비하하는 자들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오로지 무림을 떠나야 서서히 잊혀갈 것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들의 모습을 풍천옥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찮은 변명도 하지 못하는 자들의 면전을 향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자운경은 몸을 돌려 풍천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 담긴 그 눈빛에 풍천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력은 그런 대로 부려먹을 만하고···. 운경, 네게도 졸개가 있음 좋지?"
 마치 하인 부리듯 하는 그의 말에 자운경이 어느새 적화를 빼어들고 부르르 떨었다.
 "아직 이놈들이 남아 있다고 했을 텐데!"
 "시끄러! 자칭 천하제일인이라 자부하던 네가 고작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하다니. 쯧쯧쯧. 저기 고개 숙인 놈들과 다를 바가 없군. 실망이야, 운경."
 스스로 생각해도 억지였지만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기에 자운경은 크게 반박했다. 어떤 이유든 저 싹수없는 놈의 졸개 따위를 할 수 없다는 의지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이놈들을 베어버리면 내가 이기는 거다!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한들 네놈이 수긍하지 않을 것이기에 참고 있는 것이지만, 다시 한번 하인 부르듯 부르면 당장에 이놈들을 죽여버리겠다!"
 "꼴갑을 떨어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
 콧구멍을 후비면서 이죽거리는 그의 모습에 자운경은 결심한 눈빛으로 몸을 급회전하며 적화를 휘둘렀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다섯 명의 무인들은 헛바람을 들이켜며 살기 위해 몸을 뒤로 움직였다. 막 붉은 검기가 그들의 목숨을 취하려는 순간 벼락같이 몸을 움직인 풍천옥이 다섯 무인의 전면에 나타나 푸른 기류가 넘실거리는 양손바닥을 앞으로 펼치며 모든 검기를 마주쳐갔다.
 콰르르릉!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굉음이 터지며 자운경이 두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풍천옥은 부릅뜬 두 눈으로 자운경을 노려보다가 이내 몸을 날렸다.
 몸이 늘어난 듯 자운경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풍천옥은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노리는 것과 동시에, 왼손으로는 단전을 노리고 장력을 날렸다.
 "흥!"
 가벼운 코웃음을 친 자운경은 상체를 우로 비스듬히 비틀며 오른손에 들린 적화를 단전 부근에서 반 바퀴 회전시켜 장력을 소리 없이 흩뜨려버렸다.
 "운경아, 좀 맞아야겠다?"
 친근한 어조로 말을 마친 풍천옥은 서로의 콧김까지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좁히고 들어가서는 자운경의 복부를 향해 다섯 번의 주먹질을 날렸다.
 퍼퍼퍼퍼퍽!
 "커헉!"
 근접 박투술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자운경은 그대로 다섯 번의 주먹질을 맞고는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최고의 고수가 새파란 애송이에게 얻어맞자,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다섯 명의 무인들이 놀란 얼굴로 장난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운경은 빠르게 적화에 검기를 실어 풍천옥의 모든 방위(方位)를 점하고 검기를 퍼부었다. 적어도 이 정도의 공격이면 제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얼굴에는 은근히 뿌듯한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만만한 곳이던가? 풍천옥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검기의 폭풍을 바라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숨겨왔던 삼 할의 실력까지 모조리 뽑아 올렸다. 지금 시점에서는 오직 실력행사만이 앞으로 졸개 여섯을 군말 없이 거느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그의 무복을 보면서 자운경은 그 심상치 않은 기세를 오랜 경험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서, 설마···."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천무뇌력권!"
 예전 그의 사부와 대결을 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오른손의 일권을 내뻗고 정면으로 왼손의 일권을 뻗자, 주위의 공기가 요동을 치면서 백색의 빛무리가 넓게 퍼져나갔다.
 콰릉! 콰르릉!
 전신을 흔들어놓는 우레 소리에 자운경을 뺀 나머지 다섯 명은 눈을 질끈 감고 진탕되려는 내력(內力)을 바로잡기 위해 운기(運氣)에 들어갔다. 자운경은 이를 꽉 깨문 채 빛무리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천무뇌력권!"
 다시 한번 커다란 외침과 함께 안개 빛무리를 뚫고 나온 풍천옥이 자운경을 노리고 주먹을 연거푸 내질렀다. 그 모습에 기겁을 한 자운경은 급급하게 모든 내공을 적화에 불어넣어 쾌적섬렬검법 절초(絶招) 개벽천검(開闢天劍)을 사용했다.
 우우우웅-!
 커다란 검명이 사방을 진동하며 적화가 천천히 움직였다. 기이한 그 움직임에 대기가 쪼개지고 바람이 갈라졌다. 구름처럼 다가오는 풍천옥의 흰색 기류를 향해 적화에서 뿜어진, 타오를 듯한 붉은 검강이 느릿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다가갔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쿨럭!"
 "커헉!"
 "큭···!"
 정작 충돌을 일으킨 두 사람은 멀쩡하다는 듯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건만, 두 사람의 충돌에 운기를 하던 무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핏물을 뱉어냈다.
 '저, 정녕 인간의 무공이란 말인가!'
 청명수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 불신, 의혹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운경과 풍천옥은 한참을 서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자운경이 비틀거리면서 붉은 핏덩이를 한 움큼 뱉어냈다.
 "쿠웩!"
 "거봐. 까불지 말라고 했잖아."
 여전히 깐죽거리는 풍천옥이었지만 그의 안색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다한 내공 소모로 조금 어지러울 뿐이었지 자운경처럼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너희! 이리 와!"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풍천옥을 향해 다섯 명은 재빠르게 움직여갔다. 칼밥 먹는 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힘이었다. 아무리 수백을 짓누른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면 꼬리를 내려야 하는 것이 무림의 생리였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면 무엇하리! 정작 자신의 앞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새파란 애송이는 성질이 더러운 것으로 따지면 세상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인 것을!
 "내 신위(神威)를 잘 봤겠지?"
 햐! 어쩌자고 저토록 겸손이라는 미덕조차도 없단 말인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졸개 할래? 뒈질래?"
 아무리 눈앞에서 일신의 무공을 믿고 건방을 떠는 놈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하도 아닌 졸개···가 된다면, 앞으로 고생할 것만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쓰읍! 이번에 대답 안 하면 내가 정한다. 내 졸개 할래? 뒈질래? 양자택일해라!"
 나름대로 문자를 섞어서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다섯 사람은 더더욱 암울한 앞날에 한숨만 나왔다.
 그때!
 "지금은 비록 이런 모습이지만 적어도 그런 무시를 받을 이유는 없다!"
 풍령자 고혈산이 벌떡 일어서서 풍천옥을 똑바로 바라보며 큰 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갑작스런 반항에 네 사람은 무한한 존경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외로 자신의 신위에 반항하는 자가 나오자 풍천옥은 있는 인상을 다 쓰며 주먹을 어루만졌다.
 "뭐라고? 이 자식 봐라!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 건드리네. 되도록 나이 먹은 형씨들 점잖게 대해주려고 했는데! 이제 나한테서 예의 따위 찾지 마!"
 아니, 언제 지가 나이 많다고 예의를 차렸단 말인가? 그의 말을 들은 다섯 사람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고혈산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열변을 토해냈다.
 "언제 우리에게 예의를 차렸단 말이냐! 비록, 우리가 조금은 비겁한 암습을 계획했지만 네놈에게는 떳떳하다!"
 '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군.'
 '풍령자! 당신은 사내였군!'
 '혈산! 내 훗날에 술이라도 한잔 사겠네!'
 '허! 고혈산 자네, 옳은 일을 거침없이 행할 줄 아는 아주 속 깊은 인물이었군!'
 고혈산의 열변에 맹덕명, 마천, 맹창, 청명수는 각각 마음속으로 열렬한 응원을 보내면서 당장이라도 합세를 할 태도를 취했다.
 '어쭈? 이것들 봐라?'
 하나의 반항이 곧 다섯의 반항으로 늘어날 것에 대비해서 풍천옥은 가벼운 말과 함께 고혈산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어디 맞고도 그딴 말이 나오나 보자!"
 "허억! 자, 잠깐!"
 다급하게 잠깐을 외쳤지만 이미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풍천옥은 과감히 무시해버렸다.
 고혈산은 무공도 높았지만 그보다는 빠른 몸놀림으로 인해 풍령자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몸놀림보다도 빠른 정도가 아니라 눈으로도 겨우 쫓을 정도였으니 어찌 주먹을 피한단 말인가?
 퍼억!
 "케헥!"
 복부에 깊게 주먹이 꽂히자 고혈산은 한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신물이 그의 의지를 무시한 채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네가 오초를 받아내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하고 너희 모두를 풀어주마!"
 귀가 번쩍 뜨이는 요구에 고혈산은 억지로 부들거리는 다리를 곧추세우며 풍천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이를 꽉 물며 크게 소리쳤다.
 "쳐라!"
 '고 혀엉! 내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무한한 희망이 담긴 눈으로 고혈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고혈산은 슬그머니 그들을 바라보고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반드시 견뎌낸다!'
 다섯 명이 하는 짓을 조소와 함께 바라보던 풍천옥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크게 진각(震脚)을 밟으며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일초!"
 퍽!
 "커헉!"
 "이초!"
 퍽!
 "쿠억!"
 "삼초!"
 퍽!
 "흐으윽!"
 삼초를 견뎌낸 고혈산은 크게 휘청이면서 무릎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한 모습을 보이자 풍천옥은 한발 물러나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네 사람은 크게 놀란 얼굴로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고 형!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오!"
 맹덕명의 말을 바로 이으며 마천, 맹창, 청명수가 말했다.
 "풍령자! 사내답게 딱 두 대만 더 견디시오!"
 "아직은 쓰러지면 안 되오!"
 "고혈산! 적어도 오초는 받아내야 하지 않겠나! 반드시 견디게나!"
 네 사람의 불같은 응원에 고혈산은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하체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호기(豪氣)롭게 외쳤다.
 "쳐라!"
 "그럴 생각이었다! 사초! 연이어 오초다!"
 퍼퍼억!
 "······!"
 이번엔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풍천옥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네 사람은 들뜬 기대감으로 고혈산을 바라보았다.
 "고 형! 당신이 해냈구···!"
 쿵!
 경험 많은 노련한 나무꾼에 의해 거목이 통째로 넘어가듯이 고혈산은 그렇게 뒤로 넘어갔다. 그의 입가로 뿜어져 나온 게거품은 그가 이미 혼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졸개가 다섯이나 늘었군. 오늘은 기분이 좋군! 으하하하!"
 하늘을 바라보면서 대소를 터뜨리는 풍천옥의 모습에 네 사람은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게거품을 물고 혼절한 고혈산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어째서 그토록 근성이 없단 말인가!'
 '풍령자! 넌 사내도 아니다!'
 '제길! 다섯 대다, 다섯 대! 그걸 못 참다니!'
 '···앞으로 널 믿으면 내가 저 자식의 아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제3장 사부의 죽음
 
 
 "흐음···."
 또 가슴 깊숙한 그 신음에 풍천옥은 이를 꽉 물었다.
 단 며칠 만에 사부의 안색은 급격하게 나빠져 있었다.
 "사부, 제발 천륜역행법(天倫逆行法)을 한 번만 더 합시다."
 "이놈아,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었냐?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이 당연하거늘. 너무 삶에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사부의 말에 풍천옥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천륜역행법인데! 하늘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의미 아닙니까? 난 사부가 십오 년 전에 했던 말을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한단 말입니다!"
 풍천옥의 말에 사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일어섰다.
 "후우-! 봐라. 아직까지 건강하다! 그 따위 말은 이제 집어치우고 새로 거둬들인 놈들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좀 들어보자."
 사부의 말에 풍천옥이 신경질을 냈다.
 "그냥 장난삼아서 졸개로 거느린다고 했지만 솔직히 무림으로 나가면 그냥 돌려보낼 작정입니다. 줄줄이 끌고 다녀서 좋을 것도 없는데."
 퍽!
 "젠장! 내 머리가 무슨 북입니까!"
 "시끄럽다, 이놈아! 강호로 나가려면 수하가 많을수록 좋은 법이야. 더더군다나 그놈들도 절정의 고수들이니 네놈에게 도움을 주면 줬지 절대로 피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반드시 네 밑에 두도록 해라!"
 풍천옥이 몸을 일으켰다.
 "문파(門派)도 아닌데 무슨 수하가 그렇게 필요하다고···."
 "그래! 이 기회에 네놈이 문파라도 만들어봐라."
 뜬금없는 사부의 말에 풍천옥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잘 들어! 우선 자운경은 내 첫 졸개니까 대령(大令)이다. 무공도 이 중에서 나를 빼고 가장 강하니까. 이의 없겠지?"
 "웃기지 마라! 누가 네놈의 졸개가 된다고 했느냐!"
 여전히 기가 죽지 않은 자운경은 다시금 적화를 빼어들고 두 눈을 빛내며 풍천옥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풍천옥이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 그놈 참. 좋아! 네가 원하는 것이 뭐냐? 내가 크게 선심 쓰지! 자고로 많은 졸개를 거느리는 수장일수록 너그러움의 미덕을 지니고 있어야지! 그럼!"
 자화자찬도 절정의 수준인 풍천옥의 말에 자운경을 비롯한 다섯 졸개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우선 그 졸개라는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래 봬도 내가 사황검문의 문주로 있던 사람인데 한낱 수하도 아니고 졸개라니! 가령 수하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네놈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 차라리 날 죽여라!"
 사생결단이라도 내겠다는 듯이 결렬한 의지를 내보이는 자운경의 모습에 풍천옥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로서도 자운경은 쉽게 포기하기 힘든 졸개였다.
 "음···. 좋아! 비록 잘못된 사실이었지만 천하제일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적이 있으니 자운경 너는 내 바로 밑의 이인자의 자리를 내주마! 어떠냐?"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꾀임을 모를 자운경이 아니었지만 짐짓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우선 그 듣기 싫은 졸개라는 말이 정정됐으며, 지금이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명색이 이인자가 아닌가? 특히, 풍천옥이 조금 안하무인이라서 그렇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실력 하나는 천하제일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새롭게 생긴 졸개 다섯도 모두 절정의 무인들이 아닌가?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아 쉽사리 승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은 누그러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해도 네놈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네가 이인자 할래?"
 둘의 대화를 그저 풀죽은 모습으로 바라보던 고혈산을 향해 풍천옥이 긴급 제안을 하자 자운경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자운경을 바라보던 고혈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
 "시켜만 주신다면 이 한목숨 아깝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우렁찬 그의 대답에 남은 사 인(四人)은 부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운경은 다급한 심정으로 풍천옥을 바라보았다.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좋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좋다!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네놈이 그리 사정을 하니 내가 이인자의 자리를 맡도록 하지! 흐음!"
 고혈산을 가로막으며 자운경이 말을 내뱉자 졸지에 이인자에서 졸개로 전락해버린 고혈산이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런 우라질! 하기 싫다고 했으면 곱게 포기를 할 것이지! 네가 그러고도 혈마천검 자운경이냐! 퉤!'
 고혈산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운경이 아무도 모르게 전음을 날렸다.
 '눈 깔아. 나중에 죽는다!'
 흠칫 몸을 떤 고혈산이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자 풍천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순순히 자운경의 뜻을 거둬들였다.
 "좋아. 그런데 다시 한번 나한테 네놈 어쩌고저쩌고 하면 확! 잘라버린다! 이제부턴 풍 문주님이라고 불러!"
 "푸, 풍 문주?"
 "그래! 이제부터 우리는 대풍문(大風門)이다! 내가 그 창시자로, 대풍문의 일대 문주 풍천옥이다!"
 풍천옥의 말에 자운경을 비롯한 다섯 졸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에게는 엄연히 사문(師門)이 존재했거늘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저, 우리는 모두 사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 풍 문주님도 사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새로운 문파를 만든다는 것은 조금···."
 용기를 내어서 변명을 하는 고혈산을 향해 풍천옥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꾸했다.
 "사문? 난 그런 거 몰라."
 간단한 대꾸에 모두들 멍청한 얼굴로 풍천옥을 바라보았다. 어찌 자신에게 무공을 사사(師事)한 사문에 대해서도 모른단 말인가! 무림인으로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다 하더라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스, 스승님이 어떤 문에 몸을 담았는지조차 모른단 말입니까?"
 "우리 사부? 몰라. 그냥 가르쳐준다고 해서 배웠을 뿐이고, 한 번도 사문 어쩌고 운운한 적이 없었어.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고."
 사부의 말을 듣고 문파를 만들기로 했지만 그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풍천옥이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사문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풍천옥이었고, 스스로 사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않던 사부였기에 사문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고혈산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힘만 센 무식한 놈 때문에 졸지에 또 다른 문파에 몸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캄캄해졌다. 다른 이들도 다를 바가 없는지 허탈한 심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사실, 무림에 반드시 사문을 따라야 한다는 법이 있지는 않지만 정말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사문을 버리고 다른 문파에 몸을 담을 이유가 없었다.
 예를 들어, 몰락한 가문의 후예가 어느 특정한 문파에서 키워져 그곳의 무공을 사사받은 후에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독립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런 경우도 그리 많지가 않았다.
 더욱이 지금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몸뚱이 하나만 믿고 문파를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문파가 그리 쉽게 세워지는 줄 아나? 자금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적어도 문파를 세웠으면 무림에 이름을 드높여야 할 것 아니야! 그런데 고작 일곱으로 뭘 하자는 거야? 일곱이라 치더라도 앞으로 변변히 지낼 만한 집이라도 준비가 된 거야? 먹을 식량은? 또 앞으로 새로운 문도(門徒)를 받으려면 그만큼 많은 돈이 들어갈 텐데,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해?"
 따지듯이 물어오는 자운경의 말에 풍천옥은 씨익 웃으면서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니들 숨겨놓은 돈 다 내놔."
 "커헉!"
 "헉!"
 경악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저리도 무책임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단 말인가!
 "우리가 무슨 돈줄입니까!"
 참다못한 고혈산이 벌떡 일어서서 따졌다.
 "없냐? 그럼 어쩔 수 없지 가까운 전장(錢莊)부터 털자!"
 
 ***
 
 "일령(一靈), 정말로 풍 문주의 생각대로 할 생각이오?"
 일검진천이라는 별호로 이름 날린 절정의 검객, 맹덕명이 안 그래도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차가운 인상의 청명수에게 말을 건넸다.
 "별수 없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풍 문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는 침울한 안색으로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현판(懸板)을 바라보았다.
 
 황룡전장(黃龍錢莊)
 
 이제는 대풍문의 흑오령(黑五靈)이 되어버린 다섯 사람.
 그저 풍천옥의 한마디에 졸지에 대풍문을 수호하는 다섯 명의 무인이 되고 말았다. 나이, 실력, 배경 따위는 다 필요 없이 그저 가까이 서 있었다는 이유로 일령부터 오령까지의 칭호를 부여받은 그들-청명수가 일령, 마천이 이령, 맹창이 삼령, 고혈산이 사령, 맹덕명이 오령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대풍문 문주의 명을 받들어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황룡전장을 털기 위해 은밀히 숨어 있는 중이었다.
 강서성(江西省) 구강(九江)에 위치한 황룡전장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규모의 전장이었다. 그러나 신용도 꽤 좋은 편이라서 그곳의 전표(錢票)는 타 전장의 어느 곳에서나 통용이 가능했다.
 "그냥 시간 끌지 말고 가서 다 털어 옵시다!"
 사령 고혈산의 말에 모두들 그를 노려보며 미약한 살기를 내뿜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질 거리도 없는 일이었지만 네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가 두 대만 더 견디었다면 이런 수치스러운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연 모든 잘못을 그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은근히 느껴지는 살기에 고혈산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려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 네 사람은 작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다시 황룡전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도 아니고 날이 막 밝은 아침나절도 아닌, 그야말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잦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조금의 긴장도 없이 굳은 다짐과 함께 몸을 날렸다.
 '최대한 신속하게 우리의 정체가 들키지 않도록 털어야 한다!'
 흑의(黑衣)를 맞춰 입고 죽립(竹笠)을 뒤집어쓴 흑오령 전원은 그야말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황룡전장의 문을 부수며 들어섰다.
 콰앙!
 문짝이 그대로 박살나며 커다란 소음이 황룡전장 전체를 휘감았다. 괴인 다섯의 갑작스런 등장에, 황룡전장에서 볼일을 보기 위해 찾아왔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줄행랑을 쳤다.
 경비를 맡고 있던 스무 명의 무인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흑오령의 앞을 막아섰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난입을 한단 말이냐!"
 떡 벌어진 어깨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장한이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극(戟)을 들고 두 눈을 부라리며 흑오령 전부를 노려보았다.
 장문열(長雯列)은 자신이 황룡전장의 안전을 책임지는 구 년 동안 이처럼 당당하게 대낮에 문을 부수며 들어오는 이들은 처음 보았다. 더욱이 시커먼 무복에 얼굴까지 죽립을 뒤집어쓴 모양새는 묻지 않아도 전형적인 강도의 행색이었다.
 "덩치는 저쪽으로 물러나고 장주(長主)를 불러라."
 일령 청명수의 싸늘한 말에 장문열이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비록, 상대의 실력을 알지는 못했지만 구강에서 자신의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만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염라전(閻羅殿) 앞에서 불러보거라!"
 생각보다 빠른 몸놀림으로 거대한 극을 쾌속하게 휘두르는 장문열의 공격에 일령은 작은 감탄을 표시했다.
 "제법이군."
 그 말과 동시에 몸을 비틀어, 가슴을 빠르게 지나가는 극날을 향해 우수(右手)를 가볍게 대었다. 상상치도 못했던 상대의 반격에 장문열은 다시 한번 기합을 지르며 상체를 틀었지만 이미 일령의 우수에서 시작된 장력이 그를 병기와 함께 멀리 퉁겨버렸다.
 쾅! 쿠웅!
 "흐윽···!"
 저 멀리 내동댕이쳐진 장문열은 극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곧추세우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빠르게 다가온 사령 고혈산이 그의 뒷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이런 곳에서 시간 끌지 말자고."
 쓰러진 장문열을 뒤로하고 고혈산은 성큼성큼 걸어 장주의 집무실(執務室)을 찾아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두머리인 장문열이 단 한 번의 손짓에 나가떨어지자 열아홉의 무인들은 그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죽으면 다 소용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러나는 무인들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황룡전장의 장주인 노도화(勞燾化)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밖의 소란스러움을 알고 있었던 노도화는 침착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황룡전장의 장주 노도화요. 무슨 일로 이렇게 발걸음을 하셨소?"
 너무나 태연스럽게 말을 꺼내는 노도화는 돈 좀 만지는 전형적인 배불뚝이 겁쟁이와는 상반되는 약간 마른 체격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침착한 눈을 가진 자였다.
 "이야기가 통할 것 같군. 간단하게 말하지. 황룡전장의 돈을 좀 가져가야 할 것 같군."
 청명수의 말에 노도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라면 들어주기가 힘들 것 같소."
 "그럼 죽을 수밖에."
 삼령 맹창이 말을 하고는 죽립에 가려진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소요신검 맹창은 항상 웃는 인상의 사내였다. 웃는 얼굴이라서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검을 들고 싸움에 임하면 그 웃음이 더없이 섬뜩해지는 사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별호가 웃음을 좋아하는 검객, 소요신검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당신들 무림인들은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사람의 목숨을 항상 그렇게 쉽게 취할 수 있단 말이오?"
 조금은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노도화의 말에 청명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물론, 무림인들이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지. 굳이 당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우리에게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는 법!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군."
 "아무리 당신들에게 사정이 있다고 해도 같은 무인도 아닌 힘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미안하다는 말로 용서가 될 것이라 생각하시오? 내가 무림인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당신들 무림인들은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없군!"
 노도화의 말에 고혈산이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지랄! 죄책감이 없다고? 웃기지 마라! 우리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아느냐! 풍천옥 그 자식만 아니면 애초에 이따위 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고혈산의 손이 구부러지며 노도화의 목줄기를 향해서 뻗어갔다.
 "풍천옥? 그 사내가 시켰단 말이오?"
 막 그의 목을 움켜쥐려던 고혈산은 노도화의 말에 급히 손을 회수했다.
 "뭐야? 당신 풍 문주를 아는 사람이야?"
 인상을 쓰면서 고혈산이 되묻자 노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이거 뭐야? 아는 사람 전장을 털라고 시켰단 말이야?"
 쾅!
 고혈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쪽 발을 강하게 굴렸다. 다른 흑오령의 얼굴도 다를 바가 없었다.
 "풍천옥이라는 사내가 이곳을 털라고 시켰단 말이오?"
 "그래! 왜?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강도짓을 당하려니 속에서 열불이 터져?"
 짜증스러움이 가득 깃든 고혈산의 말에 노도화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렇다면 순순히 드리죠."
 말을 끝으로 노도화는 등을 돌려 맨 끝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건장한 사내 넷이 궤짝을 들고 노도화의 뒤를 따라 나왔다.
 쿵쿵쿵쿵!
 노도화의 바로 앞에 궤짝을 내려놓은 네 명의 장한은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왔던 곳을 통해 사라졌다.
 "사십만 냥이오. 모두가 은자로 되어 있으니 사용하기엔 편할 것이오."
 노도화의 갑작스런 행동에 청명수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무슨 뜻이지?"
 "무엇이 말이오?"
 죽립에 가려진 청명수의 눈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똑바로 마주 보며 노도화가 엷은 미소로 답했다.
 "풍 문주님의 이야기를 듣자 당신은 곧바로 준비라도 했다는 듯이 돈을 주었소. 이 의문은 풀어줘야 할 것이오."
 청명수의 날카로운 말에 노도화가 약간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군. 그 사내가 일파(一派)의 문주란 말이오?"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현재는 그렇게 되었소."
 "문주라··· 혹시, 문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대풍문."
 청명수의 짤막한 대답에 대풍문이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어본 노도화는 손을 들어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아서 천천히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소."
 내키지 않았지만 청명수는 장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여전히 그를 노려보았다. 나머지 네 사람도 심상치 않은 눈으로 노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조금 황당할 것이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는다면 쉽게 의문이 풀릴 것이오."
 청명수는 노도화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노도화는 그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 힘들어 보이니 이곳에서 좀 쉬도록 합시다."
 "예. 장주님."
 노도화의 말에 여기저기서 등에 봇짐을 멘 이들이 소로(小路)를 벗어나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 잠시나마 피로를 풀기 시작했다.
 "장주님, 이제는 더 이상 남창(南昌)에 갈 일이 없으니 이번이 마지막이군요."
 황룡전장의 총관(總管)을 맡고 있는 황장(黃張)의 말에 노도화는 그를 바라보았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잘 보일 정도로 늙어버린 그는 소년 시절부터 황룡전장에서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벌써 나이가 육십을 넘었으니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황룡전장에서 보낸 것이다.
 "황 총관님에게 이런 일까지 맡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노도화의 진심 어린 사과에 황장은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장주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이래 봬도 아직 십 년은 너끈합니다. 허허헛!"
 "황 총관님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뿐이군요."
 "장주님, 그런 소리 마십시오. 어찌 장주님이 제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는단 말입니까! 오히려 이 늙은이를 내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황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노도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몸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아직 출발하지 않을 테니 더 쉬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노도화는 숲으로 몸을 돌렸다.
 "장주님,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황장의 외침에 손을 들어 대답한 노도화는 숲의 맑은 공기를 폐부(肺腑) 깊숙이 들이마셨다.
 주위의 경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문득 붉은 핏자국이 들어왔다.
 "사람의 피군. 짐승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모양이군."
 순간, 핏자국을 따라서 걷던 그의 귓가에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깜짝 놀란 노도화는 급히 몸을 숙이고는 천천히 그쪽으로 접근했다.
 피투성이가 된 한 무림인이 분투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무림인들과 많은 거래를 해보았지만 저토록 처절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노도화는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숨을 죽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혈인과도 같은 무림인이 피를 토하자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내상이 치명적이었던 모양이지? 손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군. 이제 명성 자자한 천하제일고수 혈마천검 자운경과의 승부를 다시는 할 수 없는 건가? 조금은 아쉽군."
 중년인의 말에 노도화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천하제일고수? 그 사황검문의 문주라는 자운경이 바로 저 사람이란 말인가? 음··· 얼마 전에 쫓기고 있다고 하더니, 이곳까지 왔을 줄이야.'
 노도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갑작스럽게 창을 들고 있던 한 무인이 날 듯이 달려왔다.
 "들킨 모양이군."
 자신의 힘으로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노도화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구냐!"
 무인의 말에 노도화가 재빨리 대답했다.
 "구강 황룡전장의 장주 노도화라고 합니다."
 "전장?"
 "예."
 "그런데 이곳은 무슨 일이냐!"
 "지나가던 길에 소피(小避)가 마려워서 이렇게 오게 된 것입니다. 저곳으로 조금만 가면 일행이 있습니다."
 노도화의 말에 무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일행? 혹!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냐!"
 "그저 장사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자신의 말에 의심을 품고 찬찬히 바라보는 무인의 눈초리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던 노도화는 다시 한번 커다랗게 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누, 누구냐!"
 그 음성에 노도화를 살펴보던 무인도 고개를 돌렸다. 중년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발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내의 등장에 무인과 노도화는 잠시 의문스러운 얼굴로 청발 사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한 차례의 접전.
 꽤 기나긴 시간 뒤에 중년인이 세 무인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자 노도화는 자신의 목줄기를 미약하게 누르는 날카로운 예기(銳氣)에 깜짝 놀랐다.
 언제 손을 썼는지 무인의 창이 노도화의 목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왜 이러십니까?"
 "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원망해라."
 인상을 일그러뜨리면서 어렵게 말을 하는 무인의 모습에서 노도화는 그가 번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급히 말했다.
 "전 그저 전장을 운영하는 평범한 상인일 뿐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소피가 마려웠을 뿐인데 이처럼 죽는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듣기로는, 당신들과 같은 무림인들은 협의(俠義)를 목숨처럼 여긴다고 하던데, 어째서 한낱 별볼일 없는 저 같은 상인을 죽이려 합니까?"
 노도화의 말에 무인은 표정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협의라···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민하던 무인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경고하겠는데, 이곳에서 본 것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시오. 그때는··· 정말로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내가 찾아갈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무인은 몸을 날려 중년인이 떠난 자취를 따라 멀어져갔다.
 "휴우···."
 죽다 살아난 노도화는 시선을 돌려 청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잠시 서성이던 청발 사내는 못마땅한 얼굴로, 쓰러져 있는 자운경을 들쳐메고 조금씩 사라져갔다.
 '천하제일고수를 살린 사내라···.'
 한순간 눈을 빛낸 노도화는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지난 일을 회상하던 노도화는 마지막 빛을 쥐어짜듯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풍문이라···.'
 그와 간단한 이야기를 마친 흑오령은 사십만 냥을 들고 돌아갔다. 그들이 풍천옥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지는 몰랐지만, 현재로서 노도화가 할 일은 다한 셈이었다.
 이제 결과만이 남았을 뿐이다.
 "장주님, 그들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황장의 물음에 노도화가 대답했다.
 "세상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부류로 나누는 일은 각자의 몫입니다. 설사 그 사람들이, 아니 대풍문의 무인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나 자신에게만은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중요한 것은 과연 저들이 제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겁니다. 신뢰에 대한 문제는 그 후의 일입니다."
 노도화의 말에 황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노도화는 풍천옥을 처음 본 날 이후 그에 대해서 조사를 했었다. 구강에서 약 팔십 리(里: 약 31km) 떨어진 숲에서 노인과 살고 있다고 알려진 풍천옥이 가끔 구강으로 들어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 그가 구강으로 들어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흑오령 다섯 사람이 제 발로 황룡전장에 들어온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이 내려준 필연(必然)일 것이다.'
 노도화는 이 우연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 일은 필연이었다.
 
 ***
 
 사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온 흑오령들을 본 자운경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런 그의 곁에서 풍천옥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의심 섞인 눈초리로 궤짝을 바라보았다.
 그 눈초리에 고혈산이 가슴을 펴고 당당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슬그머니 눈빛을 거두며 태연하게 대꾸하는 풍천옥을 향해 청명수가 황룡전장 장주인 노도화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황룡전장의 노 장주가 문주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이 풍천옥보다 한발 앞서서 자운경이 의문을 던졌다.
 "그자가 무슨 일로?"
 그 물음에 청명수가 답을 하기도 전에 풍천옥이 시비조로 입을 열었다.
 "니가 문주 할래?"
 아니꼽고 더러웠지만 따질 수가 없었기에 자운경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제야 풍천옥이 청명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사실은···."
 황룡전장의 노도화는 선친(先親)의 뒤를 이어서 장주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그의 선친은 그다지 수완이 좋지 못했기에 그저 명맥만 이어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노도화가 전장을 물려받은 당시에 황룡전장의 전 재산은 고작 이십만 냥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그러나 선친과는 달리 노도화는 장사수완도 좋고 머리도 뛰어났기에, 이십 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전장의 재산을 다섯 배가량 늘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커다란 야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중원오대전장! 더 나아가서는 중원 그 어디에나 그의 입김이 닿아야 하는 중원제일의 전장! 그가 가지고 있는 야망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그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걸림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선 들 수 있는 문제는 지리적 요건이었다. 그 어떤 장사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도시에서 시작해야 만지는 돈이 많아지는 법이다. 하물며 전장이라는 곳은 그야말로 돈으로 돈을 버는 곳이 아닌가. 노도화가 이십 년 동안 자리를 잡고 세를 불린 구강은 그의 야망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작았다. 적어도 남창 정도는 되어야 뭔가를 시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남창에는 중원오대전장 중 하나인 금룡전장(金龍錢莊)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누가 있어서 자신의 앞마당에서 장사를 하려는 꼴을 두고 보겠는가?
 때문에 노도화는 근 이 년 동안이나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금룡전장에 비해 자금력도 관부와의 인연도 없는 황룡전장으로서는 그 어떤 방법도 동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 남창에 자리를 잡고 싶다? 다시 말하면 황룡전장이 남창에 문을 열 수 있도록 뒤를 봐달라? 우리가 왜 대풍문인데! 무림에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자는 목적에서 문의 이름을 대풍문이라 지었거늘! 고작 코딱지만 한 전장이 남창에 자리를 잡도록 뒷일이나 해달라고? 그 새끼 죽고 싶어서 나한테 그 따위 제안을 해?"
 그랬다. 노도화가 마지막으로 결단한 방법이 바로 무력을 동원해서 남창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욱 불같이 화를 내는 풍천옥의 모습에 청명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노 장주는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아마도 기반만 튼튼히 다진다면 적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전장을 만들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천옥이 씨익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네가 보기에 난 그런 새끼 뒷일이나 하게 생겼냐?"
 "그, 그 말이 아,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면···!"
 "처음이야 힘들겠지만 후에는 뜯어먹을 것이 많아질 거란 말 하려고?"
 풍천옥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청명수를 비롯한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에 대한 생각을 새삼 다르게 하기 시작했다. 일신의 무공만 믿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라고 생각했던 풍천옥의 모습은 어쩌면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지금 이 순간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우리에겐 아무런 기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처럼 전장을 매번 털 수만은 없는 법 아닙니까? 문주님의 말씀대로 무림에 커다란 바람을 몰고 나타날 대풍문이 고작 작은 전장을 털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쨌든 노 장주의 제안은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만은 아닙니다."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청명수를 지그시 바라보던 풍천옥이 자운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의미였다.
 "나도 한마디 하지···요. 일령의 말은 그리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요. 적어도 이처럼 전장을 털어서 문파의 기반을 다질 생각이 아니라면 그 노 장준가 하는 자의 제안도 그리 크게 나쁘지만은 않다···요. 잘 알겠지만 남창에는 남황신장(南皇神長)이 자리를 잡고 있다···요. 금룡전장이라면 처음에는 자신들의 무인을 보내서 황룡전장을 몰아내려 하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에는 남황신장에 도움을 요청하겠지···요. 물론, 그 대가로 엄청난 금액의 돈이 들겠지만 어차피 그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 정도의 돈은 그야말로 한 끼 해장 값밖에 되지 않을 테고, 결과적으로 남황신장의 무력을 당하지 못한 황룡전장이 물러나리라 생각할 테니 금룡전장으로서는 그리 손해 보는 일도 아니지···요."
 "무슨 말이야?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요점만 간단히 말해. 그리고 그 '요'자는 똑바로 붙여."
 아직 적응이 안 되었는지 자운경은 반말을 했지만 곧바로 쏟아지는 풍천옥의 차가운 시선에 어쩔 수 없이 어물쩍하게 '요'자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제 말! 똑바로 해."
 바로 정정할 것을 요구하는 풍천옥을 싸늘하게 바라보면서 자운경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가 황룡전장의 제안을 승낙한다 하면 결국은 남황신장과 맞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인데, 과연 우리가 이 인원으로 그들의 공격을 쉽사리 견뎌낼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는 자운경의 말에 풍천옥이 예의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가볍게 대꾸했다.
 "남황신장? 그놈들이 그렇게 강한가? 자 호법(護法)은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던 사람이고, 흑오령들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절정의 고수들 아니야? 그까짓 남황신장의 떨거지들 몇 온다고 그리 겁을 먹어서야."
 대풍문의 호법의 자리를 맡은 자운경은 자신을 호법이라 칭하는 풍천옥의 말이 영 어색한지 잠시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가 남황신장을 무시하는 그의 발언에 정색을 표했다.
 "남황신장은 그리 가벼운 상대가 아닙니다. 무림십대고수(武林十大高手) 중의 일인인 남황 반야공(班惹供)이 세운 신장으로, 강서성은 물론이고 강남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대한 문파입니다."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남황 반야공은 성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평판에 따르면 속이 좁고 편협하다고 알려졌습니다. 비록, 정사지간에 위치한 인물이지만 속을 알고 보면 사도(邪道)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분명 우리가 남황신장의 무인들을 격퇴하게 되면 그때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황신장과 우리 대풍문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고 만다? 아니지, 어느 한쪽이 멸문(滅門)하기 전까지는 싸움이 끝나지 않겠군."
 말을 끊으며 정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읽어내는 풍천옥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청명수는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모두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남황신장은 정말로 그들 칠 인으로 어떻게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성벽과도 같은 곳이었다.
 천하제일인으로 불렸던 자운경이나 그를 이긴 풍천옥, 이름 날리던 절정의 고수 흑오령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수백의 무인들이 견고히 지키고 무림십대고수 중의 일인인 남황이 버티고 있다면 이길 가능성이 전무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오히려 풍천옥의 자존심을 긁었다.
 "머리통만 굴리고 있을 거냐? 네놈의 방식대로 부딪쳐라!"
 어느새 나타난 사부가 따끔하게 한 마디를 꺼냈다.
 "오셨습니까."
 자운경과 흑오령들 모두가 풍천옥의 사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좀처럼 모습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 여섯에게 있어서 풍천옥을 아무렇지 않게 쥐어박고 윽박지르는 존재에 대한 존경심··· 아니, 대리만족을 주는 사부는 손꼽아 기다려지는 존재였다.
 "사부, 몸도 좋지 않으면서 왜 나왔습니까! 그리고 대풍문의 일은 문·주·인 내가 직접 알아서 할 테니 사부는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풍천옥의 말에 사부가 번개같이 신형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퍽!
 "크윽! 사부! 졸개들도 보고 있는데! 이게 무슨···."
 "더 맞을래?"
 "끙···."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자운경과 흑오령이 일제히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런 그들을 노려보던 풍천옥은 사부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놈아, 잘 들어! 머리를 굴려서 해결되는 문제가 있고, 안 되는 문제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남황신장인가 뭔가 하는 놈들의 문제는 이렇게 머리통을 굴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몸으로 부딪쳐라! 그게 네 방식 아니냐?"
 사부의 말대로 풍천옥이 생각하는 진짜 싸움은 백날 생각만으로 하는 것이 아닌 직접 몸을 부대끼며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것이었다. 사부의 가르침도 그러했으며 그가 생각하는 싸움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근접 박투술을 좋아하는 것이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 남황인지 뭔가 하는 놈이 한가락 한다고 하더라도 나한테 덤비면 뒈지는 거고, 조용히 살면 그냥 냅두는 거요! 그게 내 방식입니다!"
 풍천옥의 말에 사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뭔가를 더 기대했던 자운경과 흑오령은 아쉬움과 함께 그의 말에 고개를 설레 저었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대풍문의 호법과 수신호위(守身護衛)들이었다.
 
 ***
 
 풍천옥은 사부의 부름에 그의 모옥(茅屋)으로 향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사부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찾지 않던 그였지만 오늘은 반드시 찾아오라는 사부의 말에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사부."
 "들어와라."
 어두컴컴한 모옥 안으로 들어선 풍천옥은 대뜸 인상부터 찌푸렸다.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귀신이 형님 하겠습니다!"
 풍천옥은 분주히 움직이며 창문을 열었다. 따스한 햇살이 모옥 안으로 바쁘게 스며들었다.
 "흐음. 좋구나."
 콧속으로 깊이 숨을 들이마신 사부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풍천옥을 향해 손짓을 했다.
 퍽!
 "악!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때려요!"
 "이놈아, 내가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렸냐? 그 눈빛이 뭐야."
 많이 쇠약해진 사부의 음성에 풍천옥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사부가 죽을병에 걸렸지 살 병에 걸렸습니까?"
 "이놈이 그래도."
 풍천옥은 사부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가선 무릎을 꿇었다.
 "천옥아."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부의 목소리에 풍천옥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세상이나 무림이나 쉽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강한 자만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네가, 그리고 우리가 숨쉬는 곳이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사부의 물음에 풍천옥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부이자 어버이이며, 할아버지입니다."
 "아니다. 난 네게 사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넌 나를 그저 사부라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무림에선 나를 어찌 부를지 너도 차차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그저 늙고 괴팍한 사부라고만 생각해다오."
 "하지만···."
 "내 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너를 만나고 너를 키우며 너와 함께한 시간이다. 부디 내가 없더라도 너 혼자 스스로 거친 세상을 이겨내야 한다."
 사부의 음성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왈칵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을 애써 닦으며 풍천옥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강자(强者)··· 강자가 되거라. 세상에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진정한 강자가 되거라."
 사부의 말에 풍천옥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사부··· 강자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려줘야지."
 풍천옥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직접 닦아준 사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누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인간. 자신의 행동에 정당함을 떳떳이 밝힐 수 있는 인간. 힘없고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비열한 놈들을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인간. 그런 인간이 바로 강자다."
 사부의 말에 풍천옥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반드시 사부가 말한 강자가 될게요."
 풍천옥의 음성에 희미하게 웃은 사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복받쳐 올라왔다. 턱이 덜덜 떨리고 두 눈은 뿌옇게 흐려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턱이 덜덜 떨려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사부의 손을 꽉 부여잡고 남아 있는 온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풍천옥은 아직 떠나지 못한 온기를 머금은 손을 끌어당겨 가슴에 갖다 대었다.
 따뜻했다.
 "사부··· 잊지 않을 겁니다. 사부의 사랑을."
 애써 웃음 짓는 풍천옥의 얼굴에 한 줄기 쓸쓸함이 스치듯 지나쳐갔다. 오늘 그는 눈물을 모조리 뽑아낼 작정이었다.
 기억나지도 않는 사부의 나이. 천류역행법이라는 대법을 이용해서 사부는 자신의 생보다 십오 년을 더 살았다. 후회는 없을 것이다.
 사부의 손을 제자리에 놓아둔 풍천옥은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는 모옥을 빠져나왔다.
 모옥을 향해 절을 올린 풍천옥은 모옥 전체를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으로 태우기 시작했다. 뭉클뭉클한 연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풍천옥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하늘로 오르는 사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부··· 그래도 하늘에서 내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사부의 육신은 곁에 없지만 정신과 온기만은 그의 가슴속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강자(强者)··· 강자가 되거라. 세상에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진정한 강자가 되거라.'
 
 어느새 풍천옥의 곁으로 다가온 자운경과 흑오령은 활활 타오르는 모옥을 향해서 절을 올렸다.
 
 ***
 
 대풍문은 오로지 문주인 풍천옥의 결정으로 황룡전장에 전폭적인 무력 지원을 약속했다. 남의 뒷일이나 맡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노 장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풍천옥의 눈에도 노 장주의 잠재적인 능력이 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풍 문주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노도화의 인사에 풍천옥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괘념치 마시오. 어차피 함께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까."
 두 사람을 비롯해서 대풍문의 호법 자운경과 흑오령들은 한자리에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풍천옥의 사부가 죽은 후로 이미 그들이 묵을 숙소까지, 황룡전장에서 마련한 커다란 전각으로 옮겼으니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대풍문은 황룡전장의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산해진미(山海珍味)라는 말로도 부족할 음식이 탁자에 넓게 차려졌고, 술은 죽엽청주(竹葉淸酒)로 은은한 맛과 열 가지가 넘는 약재를 넣어 숙성시킨 술이기 때문에 몸에 이로웠다. 그렇다고 과다한 양을 한 번에 다 마셔버리는 것은 좋지 않지만.
 "호법님도 한잔 드시지요. 듣자 하니 강호와는 인연이 없는 저로서도 자 호법님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무림십대고수의 수좌(首座)를 차지한다고 하던데, 과연 그 명성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인 듯싶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자운경의 명성은 무림제일이었기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 칭찬에 자운경이 헛기침을 하면서 커다랗게 말했다.
 "험험! 별말씀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남황신장의 남황 반야공도 따지고 보면 저보다는 한 수 아래라 보시면 되니 그리 크게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제일 반색하는 사람은 당연 노도화였다.
 남창에 자리를 잡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뭐니뭐니 해도 그곳을 근거지 삼고 있는 남황신장이었다. 남창은 물론이고, 강서지방에서 남황의 위치를 넘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만큼 그에 대한 걱정이 가장 앞서고 있던 차에 자운경이 자신보다 한 수 아래 운운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시! 자, 한잔 받으십시오!"
 자기절제가 강한 노도화도 이 순간만큼은 기쁨을 표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자운경의 잔에 손수 술을 따라주자 거부감 없이 술을 단번에 들이켠 자운경은 '카! 좋군!'이라는 말과 함께 노도화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둘이 갑자기 너무 죽이 잘 맞는 거 아냐?"
 고혈산이 자신의 옆자리에서 묵묵히 술을 들이켜는 마천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들도 이미 꽤 많은 양의 술을 먹었지만 조금도 취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군."
 간단하게 대꾸한 마천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 모습에 고혈산이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돌리며 맹창을 향해 말을 건넸다.
 "졸지에 풍 문주님만 닭 쫓던 개 꼴이 돼버렸군. 큭큭큭!"
 고혈산의 말처럼 노도화와 이야기를 나누던 풍천옥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운경과 노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졸지에 술 상대를 잃어버리자 혼자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어쩌겠어. 노 장주는 한 명인 것을. 자, 받아."
 웃는 얼굴로 대답한 맹창은 고혈산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고혈산은 꽤나 말이 많고 참견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흑오령 중 그 누구도 그처럼 넉살이 좋은 사람이 없었다. 차가운 얼굴에 자신의 일만을 철두철미하게 실행하는 청명수, 무뚝뚝하고 강직한 성품의 마천, 언제나 조용해서 그 존재마저 가끔씩 잊고 마는 맹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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