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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리 1

2017.11.03 조회 958 추천 6


 더 스토리 1권
 서장
 
 
 세상엔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외계인을 보았다는 사람, 죽은 줄 알고 장례까지 치렀는데 갑자기 살아났다는 사람, 꿈속에서 저승사자를 따라갔다 도망쳐서 살았다고 믿는 사람,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이 사라진 사람들까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에 대해 사람들은 그저 기적 또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나 미신이라는 말을 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주 가끔은··· 그러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아주 가끔은······.
 
 
 제1장 마른하늘에 날벼락!
 
 
 당신은 아는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아~ 씨발!”
 모니터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욕을 내뱉었다.
 나는 지금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는, 온 국민의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다. 스타 경력 3년!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내 배틀넷 승수는 무려 2,145승 1,003패! 이 정도의 전적이라면 어딜 가도 쉽게 패배하지 않는다. 확률적으로 봐도 대략 68퍼센트의 승률이었기에 웬만해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특히 1대 1로 붙는다면 웬만한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나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 나의 스타 실력이 지금 이 모니터 안에서는 철저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1대 1로 붙은 싸움에서 말이다. 철저한 계산 아래 정확한 타이밍으로 이뤄진 나의 정교한 드랍쉽이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막힌단 말인가! 이건 맵핵이다! 맵핵이 아니라면 내가 구석에 짱박아둔 시저가 이처럼 쉽게 발각되어 파괴되진 않았을 테니!
 “짜증나!”
 탁탁탁!
 마지막 총공격을 하기 위해 나는 확장기지에서 생산한 시저와 벌처를 센터로 모았다.
 “어디 니가 이것도 막는지······!”
 지금까지는 오로지 지상유닛으로만 서로 공방을 주고받던 싸움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 역시 공중유닛을 생산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스카우트 세 마리!
 “이 새끼 완전 맵핵이잖아! 아~ 열 받아!”
 탁탁탁!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병력을 뒤로 후퇴하는 사이, 놈의 스카우트가 내 시저를 괴롭혔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나는 글귀들.
 Wowking : ZZZZ!! BA BO!!
 바, 바보? 이 씨발 놈!
 09092342 : C BAL NOM!! YOU DIE!!
 맵핵으로 내 모든 것을 낱낱이 보고 있는 놈과 더 이상 싸울 의미가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게임에서 나와 버렸다. 놈이 맵핵을 썼든 그렇지 않든 내가 게임에서 나왔기에 1패가 늘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제는 맵핵 쓰는 새끼들 때문에 열 받아서 스타도 못해먹겠군. 뭐, 재미있는 게임 오픈베타하는 것 없나?”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지던 나의 눈에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온라인 게임이 들어왔다. 온라인 게임이라면 웬만한 것들은 다 해봤다고 자부하는 나이기에, 우선 게임의 이름을 확인했다.
 “12영웅지?”
 이름은 그럴 듯한데?
 판타지보다는 무협 쪽의 게임을 선호하는 편이라 당장에 12영웅지 홈페이지에 들어가 회원가입을 하고 게임을 다운받기 시작했다.
 “뭔 놈의 용량이 이렇게 크냐. 쩝······.”
 웬만한 게임은 10분 이내로 다 받아내는 내 컴퓨터가 무려 2시간이라는 다운 예상시간을 알려줬다. 그 사이에 나는 12영웅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홈페이지를 둘러봤다.
 화려한 무공들과 12명이나 되는 캐릭터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했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모든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는 고작해야 4명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에 각종 스킬은 내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캐릭터를 키워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갖게 해주었다.
 “이거 생각보다 복잡하겠는데. 그래도 다방면으로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으니까 그 재미가 쏠쏠하겠어.”
 오랜만에 괜찮은 게임을 건졌다는 기쁨에 나는 게임 인터페이스를 확실히 기억하기 시작했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바라보니 바늘이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착한 동생아, 이 형님이 배가 고프니까 라면 하나만 끓여다 줘라.”
 방문이 열리자 나는 동생임을 확신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은근히 코를 자극하는 술 냄새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술기운이 맴돌아 붉게 물든 두 눈. 그것이 꼭 술기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아버지의 호통에 나는 서둘러서 컴퓨터를 끄기 시작했다. 지금은 알아서 내가 기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버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대학을 못 갔으면 일이라도 하든가, 군대라도 가든가 해야지, 허구한 날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오락이나 하고.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따위 짓이나 하고 있는 거야! 니 애비, 어미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지만 사흘에 한 번씩 듣는 잔소리였기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이지, 속으로는 조금 후부터 시작하게 될 12영웅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열심히 해서 섭 지존이 되어야지! 그럼 오늘부터 열랩을 해보도록 할까? 크흐흐흐! 아무래도 검보다는 도를 사용하는 캐릭터를 골라야지. 아! 빨리 하고 싶다!
 “저 망할 놈의 컴퓨터!”
 순식간에 컴퓨터의 키보드를 뜯어내듯 거칠게 뽑아낸 아버지는 그대로 방바닥에 내던졌다.
 퍽!
 “아, 아버지!”
 “이놈의 컴퓨터만 없으면 더 이상 네놈이 방구석에서 빈둥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겠지! 내 오늘 이놈의 컴퓨터를 다 부셔버려서, 네놈 사람 구실 하도록 만들어주마!”
 힘겹게 힘겹게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내 사랑스런 19인치 LCD모니터가 아버지의 손에 우악스럽게 들리자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대번에 아버지가 소리를 내질렀다.
 “이놈의 자식이! 이거 안 놔!”
 “아버지, 컴퓨터는 망가트리지 마세요. 이건 철원이도 사용하는 공동물품이잖아요.”
 동생을 들먹였으니 최소한 컴퓨터는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다르게 동생은 공부도 잘했고, 부모님 속을 단 한 번도 상하게 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모범적인 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동생이었고, 나는 언제나 그런 동생의 그림자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했었다.
 그런데 내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퍽!
 “이놈의 컴퓨터 없어도 철원이는 지 할 일 알아서 다 잘하는 놈이야!”
 순간의 방심을 틈타 방바닥에 사정없이 패대기쳐진 모니터를 보면서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구입한 모니터였던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깨끗하게 닦아주었을 만큼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모니터다.
 뒤를 이어 본체까지도 아버지의 손에 처참히 부서지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제가 당장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잖아요! 군대도 영장 날아오면 알아서 갈 텐데, 그 잠깐 동안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세요!”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을까?
 나는 그간 아버지에게 억눌려 있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공부를 못한 건 인정해요! 하지만 철원이처럼 과외라도 한 번 시켜보셨어요? 대학은 뭐, 제가 가기 싫어서 안 간 줄 아세요? 제 친구들이 변변치 못한 삼류 대학이라도 가서 대학생 생활하는 거 보면 저는 아무렇지 않은 줄 아시냐고요! 제가 대학 간다니까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요? 그까짓 삼류 대학 가서 뭘 배워오겠냐면서 돈 낭비하지 말고 집구석에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어찌나 흥분했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나였기에, 아버지는 꽤나 당황스러워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철썩!
 “이놈의 새끼가! 어디서 두 눈을 부릅뜨고 대들어!”
 철썩! 철썩!
 아프다.
 볼을 얻어맞아서 아프기보다는 21년 동안 쌓아왔던 나의 하소연이 아버지에게는 고작 철없는 아들의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철썩! 철썩!
 “지금까지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잘 키워줬으면 됐지, 뭘 더 바래? 그렇게 불만이 많았으면 집을 나갈 것이지, 왜 아직까지도 빌붙어 있었던 거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상당히 흥분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다혈질적이고, 무뚝뚝해도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냉혹하거나 몰인정하진 않았다.
 “지, 진심이에요?”
 “그래! 너 같은 놈은 없어도 그만이니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뜨거워진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닦지 못했다. 솔직히 나나 아버지가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이런 말이 오갈지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 그러죠. 나가면 되잖아요!”
 “당장 나가!”
 아버지의 음성을 뒤로하고 나는 어질러진 방에서 뛰쳐나왔다.
 “형······.”
 언제부터였을까?
 철원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항상 말 잘 듣고 착한 동생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랑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나는 동생이 한없이 밉게 느껴졌다.
 동생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집을 뛰쳐나오는 나의 등 뒤로 동생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씨발··· 어디로 가지?’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입고 있는 추리닝에 만 원이 있었다.
 만 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막막했다.
 당장 어디로 간단 말인가······. 별안간 친구 집에 찾아가서 넙죽 ‘나 집 나왔다! 그러니까 니가 당분간만 재워줘라’라고 했을 때, ‘그래’ 라며 흔쾌히 받아줄 놈이 있기나 할까?
 이럴 줄 알았다면 그간 친구들에게 좀 잘해주는 건데. 하긴, 친구 놈이 받아준다고 해도 친구 부모님이 날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일이라고는 컴퓨터 게임밖에 없는 날건달 같은 백수 친구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어딜 가나 눈칫밥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젊디젊은 21살 인생이 이처럼 우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꼬르륵.
 “이런 상황에서도 배는 고픈가 보군.”
 힘없이 중얼거리며 나는 의식적으로 주머니에 들어 있는 만 원을 만지작거렸다. 이 돈이면 최대한 컵라면 10개는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나는 자꾸만 밥 달라는 뱃속의 거지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걸으면서 나는 지금쯤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계실 것이 분명했고, 동생은 어질러진 방을 치우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오시면 집의 이상한 분위기에 아버지와 동생을 오가며 상황을 판단하시겠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왜 그랬냐며 몇 마디 말을 할 것이고, 동생을 앞세워서 내 행방을 찾으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그랬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가끔 술을 먹고 화를 내셨지만 그 뒤끝은 길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로 인해 내가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항상 어머니가 곁에서 어루만져 주셨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집안을 이끌어 나가야 할 장남이, 언제나 컴퓨터 앞에서 오락이나 하고 있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 역시 그간 쌓여 왔던 감정이 아버지의 말로 인해 오늘 어쩌다 폭발하고 만 것뿐이다.
 “집을 나온 게 잘한 일일까?”
 괜히 부모님의 속을 또 한 번 뒤집어 놓은 것 같아서 나는 죄스러웠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집에 들어가긴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알량한 자존심뿐이었으니.
 한참을 더 걷다가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컵라면을 즉석으로 끓여 먹었다. 점심나절에서야 일어나서 밥도 먹지 않고 하루를 꼬박 굶었기에 양이 차진 않았지만, 좀 싱겁게 만들며 국물을 넉넉히 넣어 깨끗하게 먹어치우자 나름대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 나오던 내 눈에 보이는, 교차로 외의 잡다한 정보지.
 “우선 먹고 잘 수 있는 알바 자리라도 하나 구해봐야겠다.”
 이왕 이렇게 집을 나온 김에 얼마 동안이라도 혼자 살아보자는 의지로 교차로와 벼룩시장을 옆구리에 끼고 나는 근처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로 향했다.
 “어디 한 번 볼까?”
 교차로를 펼치자 무수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넘쳐났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아르바이트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가장 만만한 것이 주유소였지만 왠지 그곳은 가장 마지막에, 정말로 할 것이 없을 때 하고 싶었다.
 쉽게 말해서 최후의 알바라고나 할까?
 “알바 구함. 숙식자 우대. 월 백만 원! 우성농장.”
 농장? 농장이면 소, 돼지 키우는 곳인가? 이런 알바는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뭐, 농장이니까 소, 돼지나 키우는 곳이겠지.
 어쨌든 자연 속에서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니, 주유소나 식당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 흔한 핸드폰조차도 내겐 없었다. 몇 달 전에 고장이 나버렸던 것을 그다지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고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공중전화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공중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공중전화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거의 필수품이 된 요즘 시대에 공중전화를 보기란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아파트 단지니까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희망을 안고 나는 놀이터에서 빠져나왔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추리닝으로는 가을밤을 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가까운 PC방이나 만화방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자 자금의 압박이 나를 짓눌렀다. 이래저래 어두운 내일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싶어 발걸음이 절로 무거웠다.
 터덜터덜 걷는 내 두 눈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철거하기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둔 것 같았다.
 “전화번호가······.”
 따르르릉. 따르르릉.
 철컥!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아르바이트 구한다고 해서 전화 드렸는데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한 살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군필자를 찾거든요.
 “아··· 알겠습니다.”
 군필자를 찾을 거면 미리 그렇게 광고를 내야 할 것 아냐! 씨발, 괜히 전화하게 만들고 지랄이야!
 탁!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정보지들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길 건너에 보이는 PC방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빨간불.
 어렸을 적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길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고 배운다. 어렸을 적에는 또 그 말을 아주 잘 따른다. 하지만 나이를 조금씩 먹다보면 그런 것쯤은 항상 무시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처럼······.
 오른쪽은 시야가 확보되는 긴 직선도로였기에 차가 오지 않음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왼쪽은 심하게 꺾인 도로였고, 하필이면 관광차가 불법주차를 하고 있었기에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주의! 사망사고 다발지역!>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이 내 눈에 들어왔지만 그런 것에 겁을 먹을 만큼 나는 어리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PC방에 들어가 이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었기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가서 12영웅지나 해야겠다.
 뭐야? 언놈이 거울 갖고 장난질이야!
 갑자기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불빛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드는 한 대의 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끼이이익!
 쾅!
 “꺄아악!”
 “헛!”
 “저! 저런!”
 주변에서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가 내 귓가로 생생히 들려왔다.
 나는 하늘을 난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지나간 일들이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영화필름처럼 획획! 지나가기 시작했다.
 ‘씨발, 이따위로 죽는 거야? 씨발··· 정말로 우울한 인생이··· 이, 이게?’
 
 ***
 
 세상이 푸르다. 온통 산으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푸른 산들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런 산 중에서 태행산(太行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으로 열 명의 그림자가 빠르게 산을 타고 있었다.
 태행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통나무집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솜씨 좋은 목수가 만들었는지 훌륭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질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침상과 탁자가 자리 잡고 있는 방 한가운데 붉은 머리카락의 대춧빛 노인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으로는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는데, 그것은 그의 독문무공인 혈천마공(血天魔功)이 마지막 단계인 제9단계에 막 들어서려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데 그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쾅!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통나무집의 지붕이 뚫리며 한 사람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우연찮게도 노인의 머리 위로 곧장 떨어져 내렸다.
 쿠웅!
 “크~ 악! 쿨럭! 쿨럭!”
 노인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붉은 기운들이 조각조각 나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은 붉은 대춧빛에서 시체처럼 하얗게 변했고, 그의 입에서는 선홍빛의 핏물을 꾸역꾸역 게워져 나오고 있었다.
 “으으으······.”
 지붕을 뚫고 떨어진 사람은 바닥에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더니 곧장 기절하고 말았다.
 “내, 내··· 내······.”
 연신 피를 게워내던 노인은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마지막으로 크게 피를 뿜어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노인의 몸에서 풍기던, 거역할 수 없는 기세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도록 사라진 후였다.
 무림 제일의 마두(魔頭) 혈존자(血尊者) 한승곽은 그렇게 자신의 평생을 바친 육십 년 모든 무공을 그렇게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곧 자신이 혈천마공의 9단계에 들어서면 무림에서 자신을 상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뛸 듯이 기뻐하던 순간도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그건···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제2장 참회동(懺悔洞)에 갇히다!
 
 
 당신은 아는가?
 참을 수 없는 참회동의 썩은 냄새를!
 
 
 한승곽의 집 주변으로 열 명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들은 모두 승려복을 입은 스님들이었는데, 이마에 찍힌 선명한 계인(契印)은 그들이 얼마나 불심이 깊은 승려들인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 볼 테니 너희는 이곳을 지키도록 하거라.”
 “예.”
 범상치 않은 기도의 네 승려가 제법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어차피 혈존자 한승곽이라면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수. 자신들이 아무리 은밀히 움직여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애써 발걸음을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돌연 각진 얼굴의 승려가 장탄식을 내뱉었다.
 “아미타불! 우리가 늦은 듯싶구나!”
 “사형, 아무래도 혈존자의 무공이 한 단계 더욱 발전해서 결국은 혈천마공 제9단계에 오른 모양입니다. 그처럼 강인한 기세를 풍기던 혈존자가 이제는 기척조차 느끼기 힘들 정도로 변한 것을 보니··· 아미타불!”
 부드러운 인상에 인자함이 돋보이는 승려가 불호를 뇌까리며 합장을 했다. 나머지 두 승려들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저으며 불호만을 외기 시작했다.
 그렇게 네 명의 승려가 집 앞에서 제법 뚜렷한 기척을 풍겼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말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흐음······.”
 분명히 집 안에는 누군가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무시하듯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것에 승려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형.”
 끝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꼬리가 축 처진 승려가 각진 얼굴의 승려를 바라봤다.
 끄덕.
 허락이 떨어지자 눈꼬리가 처진 승려는 가볍게 땅을 박차며 빠르게 집으로 접근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가볍고 빠른지, 그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정파 무림의 기둥이라는 소림사(少林寺)의 사대나한(四大羅漢)들이었다. 이들 중 대사형이 바로 각진 얼굴의 승려인 무상(無相)이고, 그 밑으로 부드러운 인상의 무심(無心), 가장 평범한 무공(無空), 눈꼬리가 처진 승려가 무애(無碍)였다.
 무애는 빠름 움직임으로,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한승곽의 집 문 앞에 멈춰 섰다. 혹시라도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무림 제일의 마두에게 어떠한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긴장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나지막이 불호를 왼 무애의 몸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았다.
 획!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비틀리더니 통나무집 지붕의 가장자리에 사뿐히 안착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음성이 터져 나와 주변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소림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자후(獅子吼)의 공력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한 시주! 소림의 무애가 방문을 하였소이다!”
 주변을 뒤흔드는 사자후에도 집 안에서는 그 어떤 말 한마디 들려오지 않았다.
 무애는 지붕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흥건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한승곽과 낯선 차림의 이방인.
 “······.”
 무애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무애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무상을 필두로 사대나한이 모두 집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무애 사제! 무슨 일이라도······!”
 무상은 말을 하다 말고 널브러진 한승곽과 이방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이가 이미 오십대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표정은 참으로 볼 만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무공이 조심스럽게 한승곽의 상태를 살펴봤다.
 “대사형! 혈존자의 무공이 모두 전폐(全廢)되었습니다!”
 “!”
 무공의 말에 무상이 두 눈을 부릅뜨며 급히 한승곽의 맥문(脈門)을 잡았다. 맥도 정상인보다 훨씬 불규칙적이었고, 무엇보다도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허허! 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무상이 헛웃음을 흘리며 한승곽을 바라봤다.
 “대사형, 혹시 이런 옷차림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무심의 물음에 무상은 그제야 이방인을 자세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 본래 검은색인 듯싶지만 인위적으로 물을 들였었는지 노란빛이 아직까지 옅게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옷차림은 자신의 삶을 아무리 돌아봐도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소재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거기에 신발은 더욱 기묘했다. 지금껏 저토록 정교하게 끈을 묶은 신발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옷과 마찬가지로 괴상한 소재로 만들어져 있는데, 살며시 만져보니 말랑말랑하면서도 부분 부분 딱딱한 것이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대체 이 옷차림과 저 신발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무심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지만, 무상이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혈존자와 함께 있었으니 우선은 본사로 데리고 가세.”
 자신들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공이 전폐된 한승곽과 낯선 이방인을 소림으로 데리고 가는 것뿐이었다.
 
 소림사(少林寺)!
 넓고 넓은 중원무림에서 소림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다. 불심(佛心)을 공부하는 수천 명의 수도승(修道僧) 즉, 학승(學僧)들과 불심을 밑바탕으로 소림사 무공을 더욱 깊게 수련하는 무승(武僧)들로 나뉜 소림사는 그야말로 무림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현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수 중 한 명이 소림의 무승이다. 그뿐만 아니라 무림에서 알아주는 수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소림의 무승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고수들이 바로 소림의 사대금강(四大金剛)과 사대나한이었다.
 현 소림사의 방장(方丈) 요성(了性).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비록 그의 사형제들인 사대금강에 비해서 무공 실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소림을 이끌어가는 능력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역대 소림 방장들 가운데 그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바로 현 소림 방장인 요성이다.
 방장 요성이 기거하는 방장실.
 이곳에 다섯 명의 승려가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승(老僧)들이었다.
 “그럼 혈존자는 앞으로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참회동(懺悔洞)에 가둬두기로 결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인자한 인상에 뭔가 조금 색다른 가사(袈裟)를 차려입은 노승이 바로 방장인 요성이었다. 그의 말에 다른 네 명의 노승들은 그저 합장을 하며 불호를 따라 외었다.
 “방장 사형,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백미(白眉)가 길게 늘어진 노승, 요명(了明)의 물음에 요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 혈존자로 인해 생길 문제들은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혈존자는 지금까지 저희가 가둔 마두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원한을 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역시도 다른 마두들과 마찬가지로 저희 소림에서 모두 거두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요명의 물음에 요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요명 사제, 그건 우리 소림이 떠맡아야 할 짐이네.”
 “방장 사제! 하나, 혈존자의 원한을 우리가 모두 떠맡으려 했다가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네! 나는 혈존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목숨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어느 정도의 원한풀이는 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네만!”
 카랑카랑한 음성에 제법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 요료(了了)였다. 그의 곁에 잠자코 앉아 있던, 동글동글한 인상의 요선(了禪)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소림의 자랑거리인 사대금강들이다.
 중요한 일의 결정은 반드시 이들을 먼저 거친 후에 소림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승려들과 다시 한 번 대회의가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대금강과 방장의 뜻이 만장일치로 합의되지 않는 이상, 대회의가 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사형,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원한이 깊다고 하여도 소림사 내에서는, 더욱이 참회동에 갇힌 죄인에게는 그 어떤 형벌도 내릴 수 없습니다. 참회동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죽음보다도 더한 형벌이 아닙니까? 더욱이! 저희 소림이 언제부터 그런 것을 두려워해 잡아들인 마두를 순순히 내어주었단 말입니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강경한 요성의 말에 요료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자신이 사형이고 요성이 사제라고 하여도 엄연히 방장의 위치를 맞고 있었기에 그의 의견을 제일로 존중해주어야 했다. 특히 지금처럼 요성이 강경하게 나온다면 이미 그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물러났던 것이다.
 “그럼 그 이방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요선의 물음에 요성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소림으로 호송되는 동안, 그 낯선 이방인은 정신을 차렸다. 당시 호송을 책임지고 있었던 사대나한의 무상은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이방인과 그 어떤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낯선 이방인은 무공을 배운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무상이 먼저 그의 맥문을 잡고 기경팔맥과 단전을 검사해보았지만 무공을 배운 무림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후에 요성과 요료도 직접 검사를 해봤지만 역시나 무공을 배운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재, 그는 아직까지도 주화입마의 영향으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한승곽과 함께 지객당(知客堂)에서 십팔나한들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 낯선 이방인의 정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자의 말이 동쪽 끝에 있다는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말과 가장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현재 본사에는 그 나라의 말을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자들이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이 통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확실하지 않은 상태이고, 그자의 행색이 워낙에 괴이했기에 쉽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자가 혈존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 차라리 그자도 함께 참회동으로······.”
 요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요성도 잘 알고 있었다.
 소림사에는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아는 학승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런 학승들을 모두 불러서 낯선 이방인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원활하게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조선어를 알고 있는 학승과 아주 간단한 말은 통했지만 어디까지나 단순한 것들에 한해서였다. 즉, 가장 중요한 한승곽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요선의 말대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어째서 그가 한승곽과 함께 그의 집에 있었느냐, 그것이다. 그가 무공이 아닌 그 어떤 방법으로 한승곽을 물리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이미 그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요선 사제, 그렇다고 그를 현존자와 함께 참회동에 가두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네. 그의 신분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지객당에 나한들로 감시를 붙여놓는 것이 도 좋을 듯싶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신분을 알아내는 것이 좋을 것이네.”
 “방장 사제,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될 말일세!”
 요로의 말에 요성이 그를 바라봤다.
 “사형,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자를 믿을 수 없네! 방장 사제도 알 것이네. 무림이 얼마나 음흉한 곳인지를! 더욱이 혈존자와 관계된 자라면 더더욱! 방심해서는 안 되는 법이네!”
 “사형, 쉽게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방장 사제, 혈존자의 무공이 어떠하던가?”
 계속되는 요료의 이상한 말에 요성을 비롯한 나머지 사대금강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존자의 무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타의 무공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네. 그에게는 우리처럼 무공의 근본이 되는 단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르네! 만약에··· 그 낯선 이방인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미타불!”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혈존자의 무공은 일반적인 무림인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렸을 정도로 특이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그 낯선 이방인의 단전을 아무리 살펴봐도 헛일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요료 사형, 하지만 듣기로 혈존자의 무공은 단계에 따라서 그 외형 자체가 변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방인은······!”
 “그의 머리카락 색이 어떻던가?”
 “하지만 혈존자의 무공은 붉은색으로 변한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또 다르다면 어쩌겠는가? 인위적으로 변한 듯 보였지만, 그것이 자신을 감추기 위함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요료의 말에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면, 사형께서는 어찌하셨으면 좋겠습니까?”
 한참 만에 요성이 요료에게 물었다.
 “나는 그자의 사지근맥(四肢筋脈)을 잘라 참회동에 가둬야 한다고 생각하네!”
 “사, 사형! 그건 너무 심한 말씀입니다!”
 “아미타불!”
 요료의 말에 모두가 놀란 음성으로 터트렸다.
 그럼에도 요료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요성을 바라봤다.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말했으니 이제 결정은 요성이 직접 하라는 뜻이었다.
 물끄러미 요료를 바라보던 요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형의 말씀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혈존자의 무공은 여타의 무공들과 그 궤를 달리하기에 어쩌면 사형의 말씀대로 그 이방인이 벌써부터 우리가 모르는 특이한 무공을 익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 사지근맥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우선은 참회동에 가두어 그를 감시하며 그의 신분을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또! 혹시라도 정말로 만에 하나 혈존자와 그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때는 그가 원하는 어떠한 것이라도 저와 소림의 명예를 걸고 들어주도록 약속하겠습니다!”
 요성의 말에 요료는 다소 얼굴을 찌푸렸지만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그 역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혈존자 한승곽!
 그는 무림의 기둥이라는 소림사도 극도로 긴장할 정도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대마두였다.
 “아미타불!”
 
 ***
 
 방장과 사대금강의 결정이 난 대책회의는 너무나도 수월하게 대회의를 거쳐서 모두 통과되었다.
 무심은 자신의 사부인 요료의 말에 따라 십팔나한의 감시를 받고 있는 혈존자와 낯선 이방인을 참회동으로 이송하기 위해 지객당으로 향했다.
 지객당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던 무승들이 저마다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으며 무심은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십팔나한은 이미 언질을 받았는지 더 이상의 말없이 문을 열었다.
 “수고했다.”
 희미하게 웃으며 십팔나한을 격려한 무심은 방으로 들어섰다.
 약 냄새가 진동하는 방의 가장 끝에 조금의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한승곽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치 끝에 낯선 이방인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아미타불!”
 무심이 불호를 외며 기척을 내자 낯선 이방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무심으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뿐이었다.
 “시주께서 제 말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으나, 저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아마도 고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아미타불!”
 무심은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했다. 알아듣든 그렇지 못하든 그런 것을 떠나서 해야 할 말이었기 때문이다.
 무심은 천천히 낯선 이방인을 향해서 다가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분명히 빌어먹을 교통사고를 당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재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겼다. 아주 강한 힘이었기에 나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그 이상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사후세계(死後世界)가 정말로 있었나?”
 아마도 틀리지 않다면 내가 처음 눈을 뜨고 처음 했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사후세계에서 왜 중들이 나를 끌고 가고 있었느냐, 바로 그것이었다. 결론은 사후세계가 아니고 내가 기적처럼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내가 어째서 스님들에게 끌려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났는지, 나를 끌어당겼던 그 힘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또한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다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는 것이 의문스러웠지만 뭐, 다치지 않았으니 굳이 그런 이유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한 말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가!
 기적! 하늘이 젊디젊은 나를 데려가기 껄쩍지근해서 살려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하필 중들과 함께 있단 말인가?
 불교를 믿으라는 계시라면 뭐, 한 번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환장하게도 이놈의 중들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어렸을 적에 많이 봤던 중국영화에서 듣던 말들과 비슷했으니, 중국어가 분명했다.
 한국어를 제외하곤 그 어떤 말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어찌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중들이 아무리 뭐라고 말을 해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 답답하긴 중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중국 중들에게 끌려가듯 이동했고, 나는 내가 끌려온 곳의 간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
 휘갈긴 듯한 글씨였지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한문이었고, 비록 ‘사림소’ 라고 적혀 있었지만 분명히 그건 소림사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액션 배우 이연걸이 소림사 출신의 영화배우 아니던가! 어째서 내가 중국의 소림사까지 끌려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관광이라고 생각하니 나쁠 것도 없었다.
 소림사는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내가 불교를 믿지 않고 절이라고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소림사보다 큰 절은 없을 것 같았다. 특히 나를 끌고 온 중들도 그랬지만 소림사 곳곳에 어깨가 딱! 벌어진 중들을 볼 때면, 소림사가 정말로 무술을 가르치는 곳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대로 소림사에서 무술 좀 배워서 영화배우 한 번 해볼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봤다.
 소림사에 도착해서 몇 십 명에 달하는 스님들 가운데 한국말과 비슷한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내가 사용하는 말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기에 서로가 뭔가를 묻고 대답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빌어먹을! 나는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나와 함께 있던 노인네와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것도 조폭을 연상시키는 중들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말이다!
 고개를 숙이고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빠진 나는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느끼곤 급히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나를 이 빌어먹을 소림사까지 끌고 온 중이었다.
 “스님, 내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빌어먹을 중이 알아들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벌써 며칠을 이곳에서 이렇게 갇혀 있었으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중은 뭐라고 말을 하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그다지 인상이 험악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겁은 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중들이 과격하게 다루진 않았기에 안심이 됐다. 불심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중들이 설마 나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아악!”
 팔을 그대로 으스러트릴 정도의 악력(握力)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흘러나왔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나를 잡아 일으킨 중은 나를 질질 끌고 나가다시피 방을 빠져나왔다.
 지금까지의 대우 중에서 가장 과격하다고 할 만한 것이라서 나도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어디 가는 거예요?”
 내 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그래도 내가 뭐라고 하자 중이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짓자!
 “어디 가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다시 묻자 중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뭐라고 중얼거리곤 다시 내 팔을 잡고 앞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젠장! 도대체 뭐라고 말하는 거야!
 나무로 이뤄진 건물에서 끌려나온 나는 곧바로 뒤따라서 들것에 들려나오는 노인네를 볼 수 있었다. 나이가 몇인지 알 수는 없지만, 폭삭 늙어버린 노인네의 얼굴로 봐서는 꽤나 끈질기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지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하던 중들은 곧 다시 나와 정신도 못 차리는 노인네를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목조건물 사이를 무려 10분가량 지나니 오솔길이 나왔다.
 “정말로 굉장히 넓군.”
 말을 모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음인지 그 누구도 내 중얼거림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솔길을 약 15분 정도 걷자 커다란 동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는 역시나 조폭을 연상시키는 근육질 중들이 보초를 서듯 미동도 없이 좌우로 서 있었다.
 “설마 저런 동굴에 나를 가두려는 건 아니겠지?”
 그, 그렇겠지? 하하하! 내가 저기 갇혀서 살 이유가 조금도 없잖아. 그냥 무슨, 동굴 탐험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가 아니잖아! 저 시체 같은 노인네랑 말도 통하지 않는데 무슨 놈의 동굴 탐험이야!
 “씨발! 왜 자꾸 끌고 가는 거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좋을 리 없었다.
 내 고함에 중이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금 나를 질질 끌고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이 씨발 중놈아! 날 왜 저런 동굴에 처넣으려고 하냔 말이야!”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중의 힘이 얼마나 센지 땅이 파이며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들아! 니네가 지금 국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아냐! 야! 이 씨발 놈아! 놓으란 말이야!”
 퍽퍽퍽!
 “크윽!”
 악을 써대며 중의 몸을 때려봤지만 어떻게 된 게 내 주먹이 더 아팠다. 이건 완전히 단단한 나무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TV에서 본, 무슨 철포공인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외공인가 뭔가 하는 무술을 익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예전에 TV에서 나온 어떤 소림사 중은 각목으로 몸을 내리쳐서 각목을 완전히 박살냈었다. 당시는 코웃음을 치며 쇼라고 생각했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이 중의 몸을 때려보니 그게 결코 눈요기를 위한 쇼가 아님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무심은 살이 파이는 고통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참회동에 자신이 갇힌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이 저항하던 이방인이 자신의 손등을 세게 물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이 심하게 전해져왔지만 무심은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시주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면 제가 할 수 일 또한 이것뿐입니다. 아미타불!’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참회동에 가두기로 결정한 수뇌부의 결정이 못마땅했지만, 무심으로서는 그것을 따르지 않을 권한이 없었다.
 “오셨습니까?”
 이미 말을 전해 들었는지 참회동을 지키는 두 무승이 무심을 바라보며 깍듯이 인사했다.
 “수고들이 많네.”
 “여기 있습니다.”
 좌측에 선 무승이 한 묶음의 열쇠를 건네줬다. 그것을 받아든 무심은 심한 악취가 풍겨오는 참회동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웩! 우웩!”
 자신의 손등을 물어뜯던 이방인이 참회동의 악취에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무심도 더 이상은 강제로 그를 끌고 갈 수 없게 되었다.
 뚝뚝······.
 붉은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심은 피로 물든 자신의 손등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이내 며칠 전에 먹은 음식물까지 쏟아내는 이방인을 바라봤다. 앞으로는 이런 곳에서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야 할 그였다.
 무심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웩! 웩! 컥컥!”
 이젠 더 이상 나올 음식물도 없는지 투명한 침만 흘러내리자 무심은 그대로 이방인의 팔을 잡고 참회동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주, 비록 이곳이 죄를 지은 죄인들을 가두어 놓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혹여 시주의 정체가 밝혀지고 시주께서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방장께서 책임지고 시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 들어드리도록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루 속히 시주의 정체가 밝혀지길 바라겠습니다. 아미타불!”
 이방인이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변명이기도 했지만, 소림을 위한 변명이기도 했다.
 이방인이 자신의 말에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대꾸했지만 무심은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그저 묵묵히 이방인과 혈존자가 머물 감옥으로 향했다.
 쾅쾅!
 “이 빌어먹을 땡중아! 당장에 나를 풀어줘라! 그렇지 않으면 내 이곳을 빠져나가는 대로 네놈의 대갈통부터 부셔버리고 말겠다!”
 “이보게! 내 자네에게 최고의 무공을 선사하겠네! 제발 날 풀어주게나!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이 땡중아! 당장에 이 어르신을 풀어주지 않으면 네놈의 심장을 끄집어내서 잘근잘근 씹어 먹고 말겠다! 당장에 이 문을 열어라!”
 쾅쾅쾅!
 “이보시오, 나는 결단코 잘못할 일이 없거늘 어찌 나를 참회동에 가두어 두고 풀어주질 않는 것이오? 내 잘못한 것이 무언인지 정령 모르겠으니 그것이라도 알려주시오.”
 “갈! 모두 닥쳐! 감히 나, 염화를 이따위로 가두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면 소림을 불바다로 만들어 풀 한 포기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만들고 말 것이다!”
 “씨팔! 염가, 네놈이나 닥쳐! 이 빌어먹을 중새끼야!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나를 가둔 거냐! 이제 보니 소림이야 말로 무림에서 제일 악독한 무리들이구나! 당장 날 풀어줘라!”
 양쪽으로 쭉 늘어선 철창들 사이로 지저분한 몰골의 사람들이 저마다 험악한 말을 내뱉으며 무심과 그의 뒤를 따르는 무승들을 협박했지만 누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무심은 불호를 외며 가장 중앙에 비어 있는 철장의 문을 열었다.
 철컹!
 “시주, 들어가십시오.”
 무심의 말에 이방인은 굵은 눈물을 쏟아내며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렸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지만, 참회동에서 그 누구 하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저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흥! 이제 보니 소림은 무공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무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까지도 마구잡이로 가두어 들이는구나! 이 더러운 땡중들! 이거나 처먹어라! 캬아악! 퉤!”
 백발을 풀어헤친 한 늙은이가 걸쭉한 가래침을 무심에게 내뱉었다. 그러나 무심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가래침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무심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방인의 혈도를 눌렀다. 자신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이방인의 얼굴이 금세 사색으로 변했다.
 “용서하십시오. 하루 속히 시주의 정체가 밝혀지길 고대하겠습니다. 정체가 밝혀지면 안전하게 이곳에서 나오실 수 있으니, 당분간만 참아주십시오. 아미타불!”
 “수작부리지 마라, 이놈의 땡중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너희 중놈들의 말을 듣느니 지나가는 똥개의 말을 듣겠다! 이보게! 저 땡중의 말은 모두 거짓이네! 자네가 이곳에 갇히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네!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하겠네!”
 “나 역시도 임가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에 내 목숨도 걸겠다!”
 그들의 말에 무심이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불호를 뇌까리며 고개를 돌려 한승곽을 들것에 들고 온 두 무승을 바라봤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혈을 집혀 꼼짝도 못하는 이방인을 조심스럽게 안아 철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승곽도 철옥의 한 곳에 내려놓곤 철옥을 빠져나왔다.
 철컹!
 “부디 하루 빨리 시주의 정체가 밝혀지길 바라겠습니다.”
 무심은 눈만 껌뻑이며 여전히 굵은 눈물을 비 오듯 쏟아내는 이방인의 모습에 착잡한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혈도야 자신이 참회동을 빠져나가기 전에 풀릴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악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방인의 눈빛이 무심의 발걸음을 자꾸만 무겁게 만들었다.
 “이, 이보게! 내 아까의 말은 다 취소하겠으니 어서 날 좀 꺼내주게! 이렇게 부탁하겠네!”
 “날 풀어주란 말이다! 이 땡중아!”
 쾅쾅쾅!
 무심이 몸을 돌려 참회동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길게 늘어선 철옥 안의 음성들이 더욱 높아졌다. 처음에는 무조건 욕설과 협박을 일삼던 이들 중에는 애원하는 이들도 생겨났지만, 무심은 여전히 그들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 당장이라도 사부님께 말씀을 드려봐야겠군. 혈존자와 무슨 인연으로 그의 집에 있었단 말인가! 그 이유만으로 이곳에 갇혀야 하는 것은 혈존자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겠지. 아미타불!’
 
 
 제3장 대승범천신공(大勝凡天神功)!
 
 
 당신은 아는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런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곳에 갇힐 만큼 잘못한 일이 있었나를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내 기억 속에선 그만큼 커다란 죄를 지은 일이 없었다.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짱히 살아났다는 것부터가 말이 될 수 없었다. 이건 지독한 악몽이 분명했다. 빨리, 하루라도 빨리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이건··· 악몽이다!
 
 “강가야, 저놈의 행색이 왜 저렇단 말이냐?”
 듬성듬성 이가 빠진 늙은이가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제법 깨끗한 몰골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철옥에 갇힌 이들은 상거지가 와도 절을 하고 갈 만큼 지저분했지만, 그나마 중년인은 깨끗함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런 개 불알 같은 놈! 네놈은 항상 우리보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 하며 으스대던 놈 아니더냐! 이제 보니 그 모든 것이 말짱 거짓이었구나! 흥! 네놈의 그 대갈통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구나!”
 “장 선배! 제가 박학다식하다고 해서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제가 단언하건대, 저자의 행색은 이곳에 갇힌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년인의 말에 늙은이는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 중에 어느 누구 하나라도 알고 있었다면 벌써 대답이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헤헤헤! 어쨌든 새 식구가 들어왔으니 인사나 받도록 하지. 이놈아! 여기는 어르신들이 많으니 어서 예의바르게 인사하도록 해라!”
 이방인과 한승곽이 갇힌 철옥에서 왼쪽으로 두 번째 위치한 곳에 갇혀 있는, 키가 아주 작은 노인의 음성이었다.
 상당히 키가 작다는 것과 왼쪽 얼굴에 주먹만 한 붉은 반점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이방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자 키 작은 노인 맞은편의 철옥에서 비웃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크하하하! 장가야! 아무래도 신참은 네놈에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나 보구나! 하긴, 나라도 네놈처럼 추레한 몰골의 노인네에게는 인사할 마음이 없겠다!”
 “이, 임가, 네 이놈··· 흥! 그러는 네놈에게는 인사를 하는지 보자! 분명히 네놈에게도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개 방귀 끼는 소리! 저자가 사람을 볼 줄 안다면 마땅히 절을 하겠지! 크험! 이보게! 내가 바로 임청무라네. 어째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잘 지내보세나.”
 임청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키 작은 노인이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임가, 이놈! 네놈 스스로 이름을 들먹이다니, 그게 무슨 추잡한 행동이냐! 나 역시 내 소개를 했다면 저놈은 마땅히 땅에 피가 흥건하도록 절을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동안에도 이방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먼저 소개를 했음에도 상대에게서 아무런 말이 흘러나오지 않자 임청무의 얼굴이 붉어졌다. 단언컨대 참회동에 갇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림에서 이 같은 대접은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이노오옴! 감히 내 말을······!”
 “크헤헤헤! 이제 보니 네놈은 이름을 들먹여도 통하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놈이었구나!”
 “장가, 이놈! 내가 철옥 문을 벗어나기만 하면 네놈의 그 세 치 혓바닥부터 자근자근 잘라버릴 테다!”
 “어디 그 철옥 문에서 나오기라도 해봐라! 그렇다면 내가 네놈에게 형님이라는 소리와 함께 삼천 배를 해주지! 크헤헤헤!”
 “자, 장가, 네놈······.”
 두 사람은 철창살에 바짝 달라붙어서 서로를 마주보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욕설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참회동까지 오게 되었소?”
 자신 스스로 박학다식하다며 자랑하길 부끄러워하지 않는 낯 두꺼운 중년인이 넌지시 물음을 건넸지만,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중년인은 조금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무슨 사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도 적응하다 보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이런!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나는 무림에서 신수서생(神授書生)이라 불리는 강영환일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크헤헤헤! 임가야, 저놈이 스스로 신수서생이란다!”
 “크하하하! 강가, 이놈아! 네놈의 그 낯짝은 도대체 얼마나 두껍기에 스스로 신수(神授:신이 내려 줌)라 자처한단 말이냐! 내가 알기론 네놈의 별호가 호리서생(狐狸書生)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그렇지 않더냐, 장가야?”
 “그렇고 말고! 여우같은 놈이라고 무림에 소문이 자자했지! 크헤헤헤!”
 어느새 죽이 맞아서 자신을 놀려대는 임청무와 장양의 행동에 강영환은 철옥 안에서 이를 갈아붙였다. 돌연 강영환이 씨익 미소를 짓더니 말을 꺼냈다.
 “무림에선 종종 헛소문이 나돌기 마련이죠. 그렇다면 두 선배님께서도 제가 무림에서 들었듯이 각각 소동마(小童魔)와 죽마귀(竹魔鬼)라는 별호를 가지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뭐, 뭐라고!”
 “이노오오옴!”
 그러고 보니 임청무는 굉장히 커다란 키에 살이라고는 조금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대나무 같았는데, 무림에서 그의 모습을 빗대어 죽마귀라는 우스꽝스런 별호를 갖다 붙였던 것이다. 물론 소동마라는 별호도 장양의 키로 인해서 생긴 것이었다.
 임청무와 장양은 그 별호 때문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는데 뭐, 꼭 그것 때문에 참회동에 갇힌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별호로 인해 벌인 살인이 이유가 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그 별호를 들으면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강영환은 이번 질문으로 인해 자신의 말대로 신수서생이 될 수 있었고, 장양과 임청무에게 멋지게 복수를 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끄응··· 강가, 네 이놈!”
 “빌어먹을! 저런 여우 같은 놈과는 두 번 다시 상종할 필요가 없지! 흥!”
 장양은 코웃음과 함께 철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잠시 참회동 안이 조용해지려는 순간, 임청무의 옆 철옥에 있는 인물이 이방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이놈아! 네놈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참회동에 갇혔단 말이냐? 그리고 그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시체는 누구란 말이냐?”
 꽤나 커다란 음성이었음에도 이방인의 정신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소리를 질러댄 인물은 더욱 화를 내며 철옥의 쇠창살을 깡마른 두 손으로 틀어쥐었다.
 “이노오옴! 본 좌가 누구인지 알고 그따위 행동을 보인단 말이냐! 당장 네놈의 눈깔과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대답을 하거라!”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거다.”
 이방인과 장양의 가운데 위치한 철옥의 인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특이하게도 참회동의 철옥들은 쇠창살로 칸을 막아놓고 있었기에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이방인의 바로 옆 철옥에 갇힌 강영환이 그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확실히 초점을 잃어버린 눈은 어디를 응시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당분간은 통성명도 하기 힘들겠군.”
 강영환의 말에 그제야 참회동이 조용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더 흐른 무렵에야 이방인이 제정신을 차렸다. 그때까지도 한승곽은 깨어날 줄을 몰랐다. 그만큼 그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는 것을 의미했다.
 “@#$%^&*$@@#”
 이방인의 말에 철옥의 마두들은 모두 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이방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첫날 한차례 듣기는 했지만, 신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가야! 저놈이 뭐라고 하는 거냐?”
 뭔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조건 강영환에게 먼저 물어보는 장구식이었다.
 “장 선배! 선배께선 왜 꼭 제가 모르는 것들만 물어보시는 겁니까?”
 “에라이! 이 천하에 쓸모없는 놈!”
 장구식의 말에 강영환이 울컥! 하려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다.
 그러는 사이에 이방인은 쇠창살을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지르다가 끝내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저놈 왜 저래?”
 임청무가 이방인의 행동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임가야! 네놈도 처음에는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지 않았더냐. 크헤헤헤!”
 “허, 헛소리! 나, 임청무가 저런 추잡한 꼴을 보였다니! 장가, 네놈의 헛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
 “크헤헤헤!”
 장양은 임청무를 바라보며 웃다가 자신의 옆 철옥에 갇혀 있는 냉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냉가야! 저기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놈은 도대체 살아 있는 거냐?”
 냉천은 무림에서 알아주던 살수였다. 별호는 냉혈일검(冷血一劒)이며, 소림의 방장을 죽이려고 소림사에 왔다가 붙잡혀서 참회동에 갇힌, 조금은 어이없는 경우였다. 그러나 그가 요성의 심장 바로 옆에 끔찍한 흉터를 만든 것에 비하면 죽지 않고 참회동에 갇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만큼 냉천은 뛰어난 살수였다. 무엇 때문에 그가 요성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살수인 만큼 누군가의 의뢰가 있었다는 것만은 추측할 수 있었다.
 참회동에 들어오고 나서 웬만해선 가부좌를 풀지 않던 냉천이인데 이번만큼은 그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선뜻 몸을 일으켰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한승곽의 모습에 냉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지 모르겠소.”
 냉천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쩝! 그런데 도대체 저놈은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군.”
 장양의 말대로 이방인은 계속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방인의 말에 호기심을 보이던 마두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둘 관심을 끊기 시작했다. 알아들어 먹지도 못할 말에 관심을 오래 둬봤자 속만 터지기 때문이다.
 탁탁탁!
 참회동 밖에서 목탁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세 명의 무승이 밥통과 반찬을 담은 통을 들고 참회동 안으로 들어왔다.
 “이 땡중아! 고기 구경 좀 하자!”
 장양이 투덜거리듯 소리를 질렀지만 무승들은 묵묵히 적정량의 밥과 반찬을 창살 안으로 퍼 넣어줄 뿐이었다. 예전에 한 번 장양이 장난삼아서 밥과 반찬을 퍼주는 주걱을 빼앗았다가 사흘을 굶은 적이 있었기에 그 누구도 허튼 짓을 벌이지 않았다.
 “@#$%^&@#*#@$”
 이방인에게 밥을 퍼주던 무승은 갑자기 창살에 바짝 달라붙어서 뭐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그의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참회동에 들어오고부터 넋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던 그였기에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처음 들어보는 괴상한 말에 무승은 밥을 넣어주는 것도 잊은 채 멀뚱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진(渡塵)! 무엇 하느냐!”
 심광(心光)의 호통소리에 도진이 허겁지겁 밥을 안으로 넣어주고는 강영환의 철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끊이지 않고 눈물로 호소하는 이방인의 행동이 자꾸만 도진의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아미타불!”
 도진은 애써 불호를 외며 자신의 일에 속도를 붙였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이방인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서 굵직한 눈물만을 쏟아냈다. 그 모습에 염화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도대체 언제까지 질질 짜기만 할 거냐! 닥치고 밥이나 처먹으란 말이다! 내 무공이 온전하기만 했다면 네놈의 그 아가리부터 다 찢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염화의 말에 그의 바로 옆 철옥에 갇힌 백발의 늙은이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염가야, 주둥아리 닥치고 밥이나 먹자꾸나.”
 그의 말에 염화는 금세 입을 꾹! 다물곤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참회동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분위기 파악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낯선 이방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쾅쾅쾅!
 그간 눈물이나 질질 짜면서 애원조의 말만 내뱉던 이방인이었기에 갑자기 악에 바친 듯한 그의 모습에 철옥의 마두들은 모두 헛웃음과 함께 그를 바라봤다.
 “그래, 이제는 아주 지랄발광을 해라.”
 장양의 말에 장구식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악몽이라고 수없이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전신에서 느껴지는 하나하나의 감각들은 결코 허무맹랑한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그 일이 그토록 잘못한 일이었나?
 이대로 이런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스님! 스님! 제발 날 꺼내주십시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우선은 날 꺼내주십시오!”
 동굴 입구를 억지로 바라보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주변 감옥에 갇힌 귀신같은 모습의 늙은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서로 주고받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쇠창살을 마구 흔들었다.
 쇠창살은 매우 단단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흠집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제발··· 제발 날 좀 꺼내주세요! 난 아무런 잘못도 없단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 부모님이라도 불러주세요! 제발··· 꺼내달란 말입니다······. 흑흑흑!”
 아무리 소리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자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흘렀다.
 무슨 이유에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이런 감옥에 갇혀야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나는 것이겠지.
 “나는··· 이런 곳에 갇힐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단 말이야······. 흑흑흑!”
 쇠창살을 부여잡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들어나 줄까 하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기에 나는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내 말과 행동에 호기심을 갖던 귀신같은 노인네들도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흥미를 잃었는지 더 이상 지들끼리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탁탁탁!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파고들었다. 나는 ‘혹시?’ 하는 기대감을 품고 급히 동굴 입구를 바라봤다.
 세 명의 중이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통을 들고 다가왔다. 워낙에 동굴의 악취가 심했기에 잘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하얀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아 밥임이 틀림없었다. 밥을 먹지 않은 지 꽤 된 듯했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도 밥을 먹는다면 나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나는 물끄러미 감옥의 귀신같은 노인네들에게 밥을 차례로 나눠주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나에게 밥을 떠주는 중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스님! 제발 날 좀 꺼내주십시오! 나는 아무런 잘못한 일이 없단 말입니다!”
 내 말에 깜짝 놀랐는지 밥을 떠주던 중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서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다가온 다른 중이 뭐라고 호통을 쳐대자 당황하며 나를 보던 중이 서둘러 밥을 퍼주곤 옆 감옥으로 이동해버렸다.
 “스, 스님! 날 좀 꺼내주세요!”
 아무리 불러도 중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빠르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밥을 건네주곤 도망치듯 동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세 명의 중들이 모두 감옥에서 나가자 나는 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동굴 입구를 바라봤다. 그러자 주위에서 ‘쩝쩝’ 대며 밥을 먹던 귀신같은 노인네들이 뭐라고 말을 꺼냈다.
 그들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한참을 울던 나는 돌연 화가 솟구쳐 올랐다. 도대체 소림사의 중들이 무슨 권한으로 나를 이렇게 가두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벌떡 일어선 나는 쇠창살을 있는 힘껏 흔들고 발로 걷어차며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쾅! 쾅!
 “이 씨발 중새끼들아!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감옥에 가두어 놓냔 말이야! 이 미친 새끼들아! 네놈들은 지금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단 말이야! 산속에 처박혀서 있다 보니 다 미친 모양이구나! 이 씨발 또라이 새끼들아! 내가 누군지 알아?! 당장 날 꺼내줘! 당장 이 문을 열란 말이야!”
 있는 힘을 다해 쇠창살을 걷어차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자 어느 정도 화가 풀렸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눈물로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이제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꼬르륵.
 며칠을 굶고 지금 남아 있던 힘을 쏟아 부었기 때문인지 갑자기 허기가 밀려들었다. 나는 천천히 중들이 주고 간 밥을 바라봤다.
 이미 차갑게 식은 흰쌀밥과 몇 가지 나물 반찬.
 “씨발 중새끼들!”
 소림사에 사는 모든 중들에게 욕을 하며 나는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쩝쩝······.”
 이미 감옥의 악취는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기에 밥을 먹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망가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꾸역꾸역 밥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밥 맛있네.
 
 ***
 
 이 감옥에 갇힌 지 얼마나 흘렀을까?
 동굴이었기에 낮과 밤을 구분할 순 없었지만 아침, 점심, 저녁을 일정한 시간에 갖다 주고 있었기에 나는 적어도 열흘은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밥을 주는 중에게 침도 뱉어봤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도 마음껏 퍼부어봤다. 하지만 중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나는 그것도 시들해져서 그만두고 말았다.
 감옥에는 총 13명이 갇혀 있었다.
 감옥 안에는 이상한 구슬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죄수들의 얼굴을 볼 순 없었다. 단지 나와 가까이에 있는 몇몇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내 바로 앞에는 백발의 늙은이가 갇혀 있었는데 문득문득 나를 쳐다볼 때 번뜩이는 그의 두 눈은 그 어떤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귀신보다도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갇힌 죄수들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이 늙은이가 이곳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쯤은 어느 정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보는 기준에서 백발 늙은이의 오른편에는 이가 노랗고 그나마도 몇 개 남지 않은 노인네가 갇혀 있었다.
 그 노인네는 가끔씩 나를 보며 그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씨익 웃었는데, 그걸 보면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가끔씩 들었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엄연히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웃음을 보게 된다면 아무리 예의범절을 몸에 달고 다는 사람이라도 저절로 튀어나가는 주먹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백발 늙은이의 왼쪽에는 깡마른 늙은이가 시도 때도 없이 뭐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 깡마른 몸에서 어찌 그 같이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했지만, 가끔씩 나를 보며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홧김에 나도 욕설을 퍼부은 적이 두어 번 있었다.
 세상에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고함만 질러대는 늙은이였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댔지만 그 늙은이와 상대하면 내 목만 아팠기에 웬만해서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깡마른 늙은이 바로 옆에는 키가 굉장히 크고 더욱 메마른 노인네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초등학생만 한 노인네와 고함을 질러대며 싸웠다.
 두 사람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며 싸움을 벌였는데, 이상한 점은 그렇게 싸우던 두 노인네들이 가끔가다 죽이 맞아서 웃고 떠드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두 노인네는 미친 노인네들이 분명했다.
 내가 갇힌 좌우로는 항상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냉막한 중년인과 나름대로 깔끔함을 유지하려 더러운 옷을 매만지는 중년인이 각각 갇혀 있었다.
 냉막한 중년인은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깔끔함을 유지하려는 중년인은 나름대로 똥폼을 잡으며 여러 노인네들에게 뭐라고 으스대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들 외에 다른 이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고, 거의 말도 없었기에 나 역시도 그들을 어떻다고 평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 갇힌 이들 중에서 정상적인 인간은 나를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어떻게 빠져나갈까?
 그것을 궁리하며 감옥을 왔다 갔다 하던 나는 문득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노인네를 바라봤다. 주기적으로 소림사 중들이 나를 제압하고는 노인네에게 침을 놓거나 이상한 약을 먹였는데, 그를 살리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나 같이 무고한 사람을 잡아가둔 것을 보면 그들이 살리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이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그의 상태를 검사하고 침을 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감은 왜 그렇게 됐수?”
 예전의 나라면 이런 말투를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감옥에 갇힌 후로 내 성격도 꽤나 변해 있었다.
 악과 깡만 남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성격이 삐뚤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 같다.
 내 말에 노인네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나는 처음보다 색이 많이 바랜 노인네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네의 머리카락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꽤나 붉은색이었는데 지금은 연한 분홍색이었다.
 “오~!”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제법 부드러웠다. 푸석푸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노인네의 머리카락이 무슨 샴푸 광고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처럼 부드러워서 나는 그 느낌이 좋아 한동안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모습에 감옥의 늙은이들이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았고, 이 두터운 쇠창살을 부수고 나올 만큼 힘 있는 늙은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씨발! 도대체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거야!”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분홍머리의 노인네에게서 흥미를 잃자 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에 깡마른 늙은이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저번과 다르게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늙은이는 더욱 약이 올랐는지 얼굴까지 뻘겋게 변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백발 늙은이가 뭐라고 한마디 하자 그의 고함소리는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쪽도 못 쓰면서 왜 까불어?”
 나는 깡마른 늙은이를 바라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신을 놀린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가 뭐라고 또 소리를 지르려다가 백발 늙은이의 눈총을 받았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지루하게 앉아 있었다.
 터벅터벅.
 적막감이 흐르던 동굴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었는지 감옥의 노인네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러대며 동굴로 들어서는 자를 바라봤다. 뭐, 빤한 일이다. 꺼내달라고 애원하거나 욕을 퍼붓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안녕··· 하십니다?”
 오늘도 역시나 허접스러운 한국말을 구사하는군.
 “오늘인가?”
 “예?”
 내 중얼거림에 감옥 앞에 앉은 중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다른 중들처럼 근육질이 아니었다. 왜소했으며, 마음도 제법 여리게 보이는 중이었다.
 “시주는··· 누구입니까?”
 올 때마다 묻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왜 매번 같은 물음을 건네는지 짜증스러웠지만, 이제는 그가 왜 같은 물음을 건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묻고자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사소한 모든 것들일 것이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라서 이런 식으로 매번 같은 질문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권철근이고, 나이는 21살. 다시 말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씨발!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보면 다 알 거 아냐!”
 이제는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이다.
 내 말엔 욕도 섞여 있고, 말 자체도 빨랐기에 중은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어차피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줘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시주··· 대한민······? 당신은 조선인이 아닙니까?”
 중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천천히 말했고, 발음에도 꽤나 신경을 썼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어느 정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방금 조선이라고 했나?
 “조선? 무슨 말이야? 조선이라니?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라고 조선을 찾고 지랄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한국 대사관이나 찾아가보라고! 이 미친 중새끼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 통에 나는 화를 내며 그를 다그쳤다. 그는 내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다시 물음을 건넸다.
 “한 시주와는 무슨 사이입니까?”
 또 이 질문이다.
 “씨발! 니가 말하는 그 한 시주가 누군데?”
 내가 짜증을 부리듯 소리치자 그는 역시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분홍머리 노인네를 가리켰다.
 “저 노인네?”
 나 역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 노인네 모르는데?”
 내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던 중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한 시주와의 사이가 밝혀져야 시주께서 풀려나올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알아들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말을 이리저리 곱씹어본 나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저 분홍머리 노인네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사이를 밝히란 말인가?
 나야말로 저 분홍머리 노인네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어째서 나와 함께 있는지를 말이다!
 “지금 무슨 착각들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저 노인네하고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니까! 네놈들이야말로 왜 날 저 노인네하고 같이 가두어 놓는 건데?”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중은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해댔고, 나는 짜증스러움에 그저 소리만 질러댔다.
 결국 더 이상 대화의 진전이 없자 중은 나에게 합장을 하곤 다시금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중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이 터져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이 미친 중놈아! 제발 한국 대사관에 좀 가란 말이야!”
 그렇게 내가 동굴을 빠져나간 중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순간이었다. 아주 희미한 신음소리와 함께 분홍머리 노인네가 몸을 뒤척였다.
 “어? 영감! 일어났수?”
 내가 생각해도 싸가지가 정말로 없어졌다.
 어떻게 처음 보는 노인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까지 변한 내 모습을 부모님과 동생, 친구들이 본다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이다.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나처럼 이런 감옥에 열흘 넘게 갇혀 있어 봐!
 내 말에 분홍머리 노인네는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순간처럼 노인네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
 그리고··· 노인네는 지금까지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던 것이 거짓이라도 된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터질 듯이 팽창한 두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헉! 뭐, 뭐야··· 요?”
 흔히들 말하는 ‘죽이기라도 하겠다?’라는 눈빛을 나는 그 순간 온몸이 찌릿할 정도로 느껴볼 수 있었다. 분홍머리 노인네는 그렇게 나를 죽일 듯이 사정없이 노려봤다.
 
 한승곽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노오오옴! 죽여 버리겠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힘이 없었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놈의 얼굴을 보니 전폐된 무공이 다시금 살아나듯 몸을 벌떡 일으킬 수 있었다.
 앙상하게 메마른 손으로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살기를 뿜어냈지만 곧이어 한승곽의 전신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털썩!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한승곽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긴장하고 놀랐는지 권철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승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한승곽은 다시금 살기 어린 눈빛으로 권철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한승곽의 질문에 권철근은 한참 후에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한승곽은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들어도 어느 곳의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저는 강영환이라고 합니다. 귀하는 누구십니까?”
 한승곽이 깨어나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있던 강영환이 물어왔다. 그가 평생을 듣고 해오던 말이었기에 한승곽은 강영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힘없이 말했다.
 “네놈이 호리서생이더냐?”
 호리서생이라는 말에 강영환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무림의 소문이 잘못되었을 뿐! 나는 신수서생이오! 그러는 노인장이야말로 누구란 말이오?”
 만약에 상대가 어떤 무명도 없는 잡졸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강영환은 한승곽의 입술을 주시했다. 물론 한승곽이 깨어나면서 지금까지 새로 들어온 신참의 정체를 궁금해 하던 참회동 죄인들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네놈이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지··· 허허허!”
 한승곽은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참회동 죄인들은 모두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새로 들어온 신참 역시 무공이 전폐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흥! 그래봐야 이제는 무공이 다 전폐된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할 뿐이지!”
 장양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한승곽은 굳이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천하를 오시하며 무림을 활보한 일대의 마두였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저 별 볼일 없는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 이름은 한승곽이지.”
 “하, 한승곽?!”
 “혈존자!”
 “당신이 정녕 혈존자 한승곽이란 말이오?!”
 감옥 이곳저곳에서 경악스런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혈존자 한승곽은 자신들이 알기론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수였다. 제아무리 소림사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를 잡을 수는 없다. 아니, 전력을 투입한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받을 타격을 생각한다면 소림으로서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한승곽은 주변의 놀람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자신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든 권철근을 죽일 듯이 바라봤다.
 일 각··· 그 시간만 더 있었다면 자신은 혈천마공 제9단계에 오를 수 있었다. 무림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가공할 무공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네놈을 사주한 놈이 누구란 말이냐?”
 한승곽은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들고자 한 사람을 반드시 밝혀내고 싶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죽어도 편히 죽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평생을 무너트린 자의 이름을 반드시 알고 싶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알 수 없는 말에 한승곽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강영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비록 볼품없는 늙은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한때는 천하를 뒤흔들었던 최고수가 아닌가?
 “그놈은 중원인이 아닌 듯싶습니다.”
 “중원인이 아니라면?”
 한승곽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강영환은 그간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흐음······.”
 강영환의 이야기를 다 듣고 한승곽은 신음을 흘렸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파멸시킨 자에 대해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들으려고 한다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자신의 희생이 너무나도 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승곽이 고민에 빠지자 하나둘 지루함에 잠이 든 이들이 생겨났다. 강영환도 자신의 이야기를 다 들은 한승곽이 무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이다.
 ‘어차피 끝난 인생이다. 나를 이렇게까지 만든 놈의 이름이라도 알아야 죽어서라도 원한을 갚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한승곽은 무언가 결심한 눈으로 권철근을 바라봤다.
 권철근은 한쪽에서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었다. 자신은 이처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놈은 잠이나 자고 있는 것이다.
 “죽일 놈! 내 반드시 네놈의 정체와 나를 이렇게 만든 놈에 대해 알아내고 말 것이다!”
 고함을 지르다시피 말을 내뱉은 한승곽은 곤히 자고 있는 권철근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체력이 많이 약해져서 쉽사리 끌려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갑작스런 상황에 그가 깨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한승곽은 만족하고 있었다.
 “@#%$!@%^&*”
 “닥쳐라!”
 한승곽은 뭐라고 떠드는 권철근에게 악귀처럼 소리를 질러대곤 곧바로 손가락을 뻗었다.
 탁탁탁탁!
 내공이 없었기에 부득이 선천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펼치려는 수법은 남아 있는 모든 선천진기를 다 사용해야 할지도 몰랐기에.
 한승곽의 고함소리에 잠에서 깬, 강영환을 비롯한 참회동 죄인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선천진기란 인간의 생명을 이어주는 힘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죽고 만다. 그런데 한승곽은 그런 선천진기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며 권철근의 혈도를 제압하려 하는 것이다.
 “저, 저런!”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죄인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한승곽은 당황한 얼굴로 두 눈만 굴려대는 권철근을 바라봤다.
 “후우~ 후우~!”
 주화입마의 영향으로 인해 체력도 현저하게 떨어져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한승곽은 괘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천진기를 끌어올렸다.
 ‘으음······.’
 선천진기를 끌어올린 한승곽은 잠깐 동안 뭔가를 심각하게 망설였다. 그러고 입을 꾹! 다물며 이내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손가락이 닿은 혈들은 모두 하나같이 치명적인 사혈들이었다. 어느 곳 하나 조금만 힘 조절에 실패하면 그대로 저승길로 들어서야 할 만큼 위험스런 곳들뿐이었다.
 탁탁탁탁탁탁.
 한승곽은 끊임없이 선천진기를 사용했고, 어느새 그의 전신에서 후끈한 열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왔다. 송글송글 맺힌 그의 땀방울이 ‘툭툭’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원수 놈에게 대승범천신공(大勝凡天神功)을 시술하게 될 줄이야······.’
 대승범천신공!
 이는 오래 전 서장(西藏)의 한 고승이 만들어낸 무공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대승범천신공은 세상을 놀라게 만들 정도의 대단한 무공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커다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장점이라는 것은 시술자가 피시술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모두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기억을 전이(轉移)시킬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한승곽이 대승범천신공을 알게 된 것은 십여 년 전이었다. 우연찮게 서장에서 건너온 한 노승과 대결을 펼치게 되었고, 그를 이김으로써 자연스럽게 대승범천신공 비급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승곽이 대승범천신공을 익히고 있는 이유는 무척 간단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해줄 제자를 찾으면 이런저런 수련 없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버린 원수에게 대승범천신공을 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점점 소진되는 선천진기와 체력으로 인해 한승곽은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대승범천신공을 계속 시전해나갔다.
 때 아닌 희한한 광경에 참회동 죄인들은 모두가 침을 삼켰다.
 
 “으아아악!”
 나는 죽어라 소리를 질렀지만 입술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온몸이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몸속에서 개미들이 기어가는 듯한 간질거림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으며,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캄캄한 어둠만이 눈을 뒤덮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희미한 영상들이 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다. 콧물도 흐르는 것 같고, 입술을 타고 침도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다. 전신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느낌이다. 아니, 온몸이 물에 빠졌다가 나온 느낌이다.
 숨을 쉰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힘든지 처음으로 느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울 줄 몰랐다. 이런 고통을 느끼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일 초에 수백 번, 수만 번씩 떠올랐다.
 빌어먹을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고함을 지르며 나를 잡아당겼을 때,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서 멍청하게 당하고 만 것이 이처럼 후회스럽긴 처음이다.
 내 생에 가장 후회스런 순간을 떠올리라면 나는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것을 꼽을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몸을 찌르자 나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감옥에 갇힐 당시, 그 미친 중새끼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그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곧 정상으로 돌아왔기에 나는 그저 이런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해 황당한 시선으로 분홍대가리 노인네를 바라봤다.
 노인네의 눈빛이 지옥의 악마처럼 변해 있던 것을 빨리 눈치 챘어야 했는데··· 씨팔! 이렇게 끔찍한 고통이 시작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봤을까?
 손가락으로 내 몸을 찌르면서 고통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간지러웠다. 그리고 서서히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따가워졌다. 그리고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핑핑 도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곧 이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을까!
 마음껏 비명이라도 지르면 고통이 조금 사라질까?
 그래. 아마도 그럴 테지. 그런데 나는 그나마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 눈은 보이지도 않는 뭔가를 보고 있었고, 몸은 뜨거운 불구덩이 속의 장작이라도 된 듯이 타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불이 꺼져가고, 내 눈을 지나치는 영상들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서서히 잠잠해질 시점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아니, 이제 진짜 죽는다고 생각했다.
 씨팔! 결국은 지옥의 고통을 맛보다 죽는 건가?
 더럽게도 재수 없는 운명이군.
 씨팔 놈의 하늘! 죽이려거든 좀 곱게 죽여주지······.
 
 권철근이 쓰러지자 한승곽도 십여 년은 늙어버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이제 기껏해야 일 년도 제대로 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한승곽은 권철근을 노려보며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죽어서도 내 원한을 갚고 말겠다.”
 이러한 집념이 그를 최고수로 만든 걸까?
 이른 새벽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참회동으로 몇 명의 스님들이 들어섰다.
 “······!”
 그들은 깨어나 있는 한승곽을 바라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곧 그들은 급급히 동굴을 빠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권철근과 한승곽을 감옥에 가둔 무심이 동굴로 들어섰다.
 “한 시주··· 깨어나셨구려.”
 무심의 말에 한승곽은 힘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살짝 비틀어졌다.
 “내가 고작 소림의 손에 잡히게 될 줄은 몰랐군.”
 무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무심은 물끄러미 한승곽을 바라봤다. 깨어났다고는 하지만 고작해야 일 년을 버티면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무심의 시선이 권철근에게로 향했다.
 그는 대승범천신공의 후유증으로 인해 혼절한 상태였지만, 무심의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한 시주, 저 이방인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한승곽은 무심의 말에 소림사에서도 권철근의 정체를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림도 별거 아니군.”
 “아미타불! 한 시주! 시주와 저 이방인과의 관계를 알려주십시오. 어쩌면 저희 소림은 저 이방인에게 크나큰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진실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사부인 요료는 권철근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죄? 무엇이?’
 무심의 말을 곱씹어보던 한승곽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가 권철근임을 소림사에서 모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소림의 입장에서 보자면 권철근은 혈존자 한승곽이라는 대마두를 파멸시킨 대영웅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 소림을 비롯한 정파 무림에 있어서는 영웅이지만, 자신에게는 원수일 뿐인 권철근······.
 한승곽은 독기를 품은 눈으로 무심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모든 것을 물려줄 기재를 찾았는데, 네놈들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구나! 내 죽어서도 소림을 가만두지 않겠다!”
 “아미타불! 하, 하면 진실로 저자가······!”
 “내 유일한 제자다!”
 한승곽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무심은 순수하게만 보였던 권철근의 눈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혈존자 한승곽의 제자··· 그는 젊고 심계가 깊었다!
 철저하게 진찰한 결과, 무공이라고는 조금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한승곽의 혈천마공이 특이한 성질의 무공이긴 했지만 참회동에 갇혀 있는 이상, 수련을 하게 되면 그 신체적인 변화로 인해 금방 들통 나고 말 것이다.
 ‘한승곽은 자신의 제자에게 무공을 전수하다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것인가? 아니면······?’
 무심은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혈존자라는 대마두는 무림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의 유일한 제자이자 어쩌면 장차 무림을 피로 물들일지도 모를 대마두의 싹을 미리 잘라버렸다는 사실!
 무심은 잠을 자는 듯 보이는 권철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운명이 이것이라면··· 아미타불!’
 더 이상 자신은 참회동에 발걸음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부터 권철근은 철저하게 참회동 죄인일 뿐이다!
 
 
 제4장 천만 배의 복수를 다짐하다!
 
 
 당신은 아는가?
 복수라는 이름의 정당함을!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고 받은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네놈은 누구냐?”
 나를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지옥의 고통!
 “씨팔! 죽여 버린다!”
 내 고함소리에도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도대체 누구이기에 나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이 씨팔 놈의 영감탱이야! 나는··· 엉?!엉? 커헉!!”
 나는 그제야 내가 저 분홍대가리 노인네와 말을 나누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귀신같은 늙은이들의 말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놈이 이제는 말을 제대로 하네?”
 “말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사흘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인 듯싶습니다.”
 “강가, 이 빌어먹을 놈아, 그게 그거 아니냐!”
 “허! 장 선배님의 말과 내 말이 어찌 같단 말입니까? 엄연히 큰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장 선배님의 말은······.”
 “퉤! 시끄럽다!”
 깔끔함을 유지하려는 중년인과 키가 작은 노인네의 투닥거림이 또렷이 들렸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어떻게 저들의 말을 알고 있는 걸까? 중국어? 한국어? 처음에는 한국어라고 느꼈지만,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분명히 중국어였다.
 “내가 어떻게?”
 나는 멍청하게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꿈인가 싶어서 내 스스로 볼을 꼬집어 봤다. 짜릿한 통증이 눈물을 핑! 돌게 만들어줬다. 꿈이 아니니 정신 차리라는 따끔한 충고였다.
 “네놈은 누구냐?”
 계속해서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분홍대가리 노인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저놈의 노인네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간 알 수 없었던 중국어를 이처럼 자연스럽게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영감,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혹시라도 내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았나?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벌써 죽었다고 생각하며 죽는 경험을 두 번이나 했지만, 다시 죽는다고 생각하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제법 그럴싸하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오히려 같잖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네놈은 누구냐?”
 그리고 또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빌어먹을 놈의 노인네!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나!
 “씨팔! 고집 더럽게 센 영감탱이네. 나, 권철근이다. 됐지? 그러는 영감이야말로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해!”
 “생긴 것도 그렇지만 이제 보니 싸가지도 없는 놈이군.”
 “뭐?! 내가 생긴 게 어때서?”
 솔직히 싸가지 없다는 말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지만, 얼굴도 싸가지 없게 생겼다는 말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잘났다고 자랑할 만한 얼굴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디 가서 손가락질 받거나 남들 눈살 찌푸리게 할 정도로 못난 얼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아니잖아?
 “그래, 네놈을 보낸 놈이 누구냐?”
 보내다니? 누가 나를 보내?
 나는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말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은 통하지만 서로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영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제법 진지하게 말하자 그제야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그 모습만으로도 그가 굉장히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워낙에 신기한 노인네이고 나한테 이미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한차례 준 사람이라서 절로 겁이 났다.
 “뭐, 뭐야?”
 당황하며 내가 뒷걸음질을 치자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피식 웃었다.
 으··· 쪽팔리네.
 당장 쓰러질 것처럼 골골거리는 노인네에게 잔뜩 겁을 먹은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쪽팔렸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적어도 그때와 같은 그런 고통은 겪고 싶지 않으니까.
 “어디에서 온 놈이냐?”
 어디에서 왔냐니?
 “집에서······! 대한민국에서 왔는데··· 요.”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장난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다. 만약 내가 ‘집에서 왔다!’라고 했으면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노인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번뜩였다.
 “대한민국? 뭐 하는 놈들이지?”
 “그게··· 그냥 일하고 밥 먹고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사는 놈들인데······.”
 점점 분홍대가리 노인네에게 주눅 들어가는 내 자신이 싫었지만, 워낙에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감히 처음처럼 대들 수가 없었다.
 “살수 놈들이냐? 아니면 새로운 신흥방파? 어디에 근거지를 두고 있냐?”
 살수는 알겠는데 신흥방파는··· 어?! 나는 분명 신흥방파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그런데 내 머리는 신흥방파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하나의 나라인데요.”
 내 말에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경악스럽게 내뱉었다.
 “명나라가 망했다는 말이냐!”
 명나라? 아··· 명나라. 명나라··· 명나라?!
 내가 ‘명나라’라는 말에 놀라는 순간, 내 머리는 또다시 내가 확인한 적 없는 사실들을 내게 알려줬다.
 명나라 제13대 황제인 융경제(隆慶帝)가 등극한 지 올해로 4년 째! 기원전으로는 정확하게 그 수치를 계산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國號)를 사용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 빌어먹을 중새끼가 말한 조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말도 안 돼······.”
 나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건 현실보다도 더욱 끔찍한 일이다.
 과거로 왔다!
 그것도 몇 년 전의 과거도 아니고 몇 백 년 전의, 한참 오래된 과거로 말이다. 거기에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지난 21년 동안 내가 밟고 있던 대한민국이 아니라 중국··· 현재로써는 명나라란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구한테 이런 말하면 백이면 백 모두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볼 것이다. 내가 살던 시대에도 타임머신이라는 초과학적인 기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도협2였나? 주성치 영화였는데 거기서 주성치는 초능력자였고, 어떻게 하다가 과거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어여쁜 여인을 만나고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미친··· 그러나 그건 영화일 뿐이잖아!
 나는 이놈의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나를 가지고 장난친다고 생각했지만 내 머릿속에 기억된, 나도 모르는 기억들은 너무나도 사실적이었다.
 나는 이 빌어먹을 현실로 인해 분홍대가리 노인네와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결과, 내가 명나라로 시공간을 초월해 순간 이동했다는 것과 내 머릿속의 기억은 모두 저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승범천신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해괴한 무공이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기억을 나에게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누가 믿겠는가?
 당사자인 나도 믿기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나와 긴 이야기를 끝낸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자신의 운명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한숨만 ‘푹푹!’ 내뱉었고, 나는 나대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 힘으로 2005년의 대한민국으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과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과거 시대에서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죽는 순간까지 이 감옥에 갇혀서 지내야 한다는 미쳐버릴 현실에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이곳은 소림사다.
 나처럼 아무런 힘이 없는 놈이 이 참회동을 빠져나가는 일은 하늘이 꺼지고 땅이 뒤집혀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나를 자신의 제자라고 거짓말한 분홍대가리 노인을 노려봤다.
 “이 영감탱이야!”
 침울하게 쭈그리고 있던 내가 벌떡 일어나자 한숨을 쉬던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빨리 중새끼들에게 내게 당신 제자가 아니라고 사실을 밝히란 말이야! 나 같은 젊은 청춘이 이런 감옥에서 평생을 썩어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냐고!”
 분홍대가리 노인네··· 무림 제일의 대마두 혈존자 한승곽이 그의 정체였다. 수많은 살인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하던 무시무시한 인간이었기에 나는 항상 그에게서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이미 내뱉은 말이다. 내가 다시 번복한다고 소림의 땡중들이 믿어 주리라 생각하느냐? 어림없다. 네놈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나,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이나 다 운명이다.”
 운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돌아눕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달려가 몸이라도 흔들고 싶었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다가 혹시라도 그가 남은 선천진기를 다 사용하며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씨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욕을 뱉어내는 것뿐이었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어디서 감히 그런 무례를 저지른단 말이냐!”
 깡마른 늙은이, 분홍대가리 노인네에게 염화라고 소개한 그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호통을 쳐댔다. 역시 목소리 하나는 참회동에 갇힌 그 어떤 죄인들보다도 컸다.
 “내가 싸가지가 없든, 무례를 저지르든 영감이 무슨 상관이야! 내 일에 신경 끄고 당신 할 일이나 잘해! 그리고 목소리 크면 다냐?!”
 “네··· 네··· 이노오오옴! 내 당장에 네놈의 눈깔을 파내고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고 말겠다!”
 “씨팔! 할 수 있으면 해보든지!”
 나는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염화를 뒤로하고 감옥 바닥에 벌러덩 자빠졌다. 여전히 내 귓가로는 염화의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상대하지 않으면 알아서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여기서 이렇게 죽을 때까지 갇혀 살아야 하나?”
 아직 여자 손목도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이 불쌍한 청춘!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려봤지만 내가 무공을 익혀 최고의 고수가 되지 않는 이상, 이곳을 빠져 나갈 방법이 없었다.
 “무공고수······!”
 내 머릿속에서 또렷이 기억나는 무공!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잠을 자려는 분홍대가리 노인네를 흔들어 깨웠다.
 “영감! 영감!”
 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았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길고 가늘게 살 필요도 없었다.
 “영감! 혈천마공이 영감 무공이지?”
 내 말에 그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퉁기듯 일으키더니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네놈······!”
 나는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기억나는 혈천마공!
 그것도 마치 내가 이미 한 번 경험한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마도 과거에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익혔기 때문이겠지.
 총 10단계로 이뤄진 혈천마공이었는데 그중에 9단계까지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당장 기억을 떠올리며 혈천마공을 익히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것처럼 말이다.
 
 혈천마공은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익힌 유일한 무공이었다.
 대승범천신공도 익혔으니 유일하다는 말은 틀린 건가?
 어쨌든 혈천마공만으로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최고수가 되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무공이겠는가?
 혈천마공 제1단계는 혈천마공만의 단전을 만드는 일이다.
 내 기억에 일반적인 무림인들은 하단전에 내공을 쌓기 마련이지만 이 혈천마공은 하단전은 물론, 전신 혈도에 내공을 쌓는다. 즉, 몸 전체가 내공으로 가득 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의 내공을 몸에 축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전은 물론, 전신 혈도에 내공을 쌓을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직접적으로 내공을 단전과 혈도에 쌓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통해 내공을 축적할 수 있게끔 그 터를 잡아주는 일이다.
 과거에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이 1단계를 이루는 데 반년이 걸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필요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혈천마공 제2단계는, 내공을 축적할 수 있는 단전을 만든 후에 혈천마공만의 독특한 토납법을 통해 내공을 쌓는 일이다.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기억으로는 달이 떠오르는 시간과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가장 많은 내공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나는 참회동에 갇혔기에 언제 해가 뜨고, 달이 뜨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노가다를 통해 가장 내공이 많이 쌓이는 시간을 철저하게 기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3단계는 몸속에 축적한 내공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가장 까다롭고 중요했다. 과거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이 과정을 얼렁뚱땅 넘어가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질 뻔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그런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어떻게 내공을 운용해야 하는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 기억에 의존해서 그대로 내공을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이런 걸 기연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어떻게 보면 혈천마공의 제1단계부터 3단계까지는 일반적인 무공에서 내공을 쌓는 방법을 세세하게 나누어 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단전을 만들고 내공을 쌓고 그것을 운용하는 각각의 호흡이 다 틀렸으니, 이것만으로도 혈천마공은 다른 무공들과 큰 차이를 갖고 있었다.
 혈천마공 제4단계부터가 본격적인 무공수련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 이뤄져 있었다. 혈천마공은 병기를 사용하되, 사용하지 않는 무공이었다. 즉, 무식하게 내공을 이용해서 싸움을 벌이는 무공이었기에 주먹을 쥐면 권법이 되고, 손바닥을 펼치면 장법, 검을 들면 검법··· 이렇게 어떠한 것으로든지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혈천마공 제4단계는 내공을 뿜어낼 수 있는, 즉 검을 들면 검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수련하는 과정이다. 아쉽게도 이 과정 역시 나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뭐, 간단하지 않은가?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으니!
 제4단계에서 내공을 뿜어낼 수 있다면 제5단계는 뿜어낸 내공을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단계는 아쉽게도 머리가 기억한다고 해도 반드시 수련을 해야만 했다. 이유는 머리는 기억할지 몰라도 내 몸은 기억하지 못했기에 그것의 강약과 실질적인 형태를 직접 만들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제6단계는 강기(?氣)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제5단계가 강기의 구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5단계에서는 단순하게 내공으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즉, 6단계에서 진정한 강기 무공을 선보일 수 있도록 수련하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6단계 역시 수련해야 한다. 이 역시 내 머리가 기억하는 대로 몸이 따라준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기억이 맞는다면 제5단계와 제6단계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혈천마공 제7단계는 강기로 몸을 보호하는 호신강기(護身?氣)이다.
 호신강기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일반적인 검으로 내 몸을 건드려도 끄떡도 없는, 일종의 무적상태를 말한다. 뭐, 강기를 구사할 줄 아는 상대를 만난다면 상황은 틀려지지만.
 어쨌든 7단계는 내가 원하는 순간에만 호신강기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운기조식을 제외한 그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 내공이 나를 보호하게끔 만들어야 하는 과정이다. 즉, 일반적인 무적방어 상태가 아닌 무적 ‘자동’ 방어 상태이다. 만약에 운기조식을 하면서도 호신강기를 펼칠 수 있었다면 적어도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이토록 비참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거다.
 제8단계.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경지!
 제6단계에서 단순하게 강기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할 수만 있었다면 제8단계는 내 마음대로 강기를 다스리는 경지이다.
 간단한 예로,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예전에 한 번 정파 무림인들에게 포위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싸우다 싸우다 도저히 이길 수 없겠다 싶어서 도망을 갔다.
 어떻게 도망갔느냐?
 강기를 허공에 띄워놓고 그것을 밟으며 허공을 날아 도망갔던 것이다. 뭐, 대충 강기를 이용해서 공격한다는 것과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스린다는 의미를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그렇게까지 원했던 혈천마공 제9 단계! 분홍대가리 노인네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 나로 인해 경험하진 못했기에 나 역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뭐, 곧 경험하게 될 테니까 그때 가보면 알겠지.
 혈천마공에 대한 생각을 모두 정리한 나는 분홍대가리 노인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감, 뭐 원하는 소원이라도 있으면 말해봐.”
 나는 이 더럽고 재수 없는 참회동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이왕에 나가는 김에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작정했다.
 “원한다면 영감도 함께 데리고 가주지. 하하하하!”
 “네놈이 이곳에서 나가려면 적어도 10년은 있어야 할 거다. 난 앞으로 일 년도 못 살 테고······.”
 10년?!
 “영감! 무슨 그런 진한 농담을 하고 그래! 장난도 심하군! 하하하!”
 나는 10년이나 참회동에 갇혀 있을 수 없다.
 내가 살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면, 천하제일의 무공으로 온 천하를 마음껏 유람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만화와 소설에서만 보던 쭉쭉빵빵한 미녀들. 으흐흐흐!
 나의 그런 기특한 생각을 알기나 하는지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네놈이 제아무리 대승범천신공으로 인해 내 기억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혈천마공은 그 기억만으로 쉽게 이룰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그만큼 뼈를 깎는 수련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지! 네놈의 그딴 생각이라면 빨라야 30년은 걸리겠군.”
 10년에서 30년으로 불어나자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30년 후면 내 나이 51살이다. 아무리 인생은 50부터라고 하지만,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길어야 2년으로 예상하고 있던 나는 분홍대가리 노인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돼! 나는 늦어도 2년 안에 이 더러운 참회동에서 나갈 거야! 그러니까 영감이 많이 도와줘.”
 그러나 당연히 나를 도우리라 생각했던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콧방귀를 끼며 웃었다.
 “내가 왜 네놈 같은 싸가지를 도와야 한단 말이냐? 일 없으니 다른 곳에 가서 알아봐라!”
 예상 밖의 상황!
 “영감! 왜 이래? 그래도 나는 영감의 하나뿐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제자잖아? 제자가 이 더러운 곳에서 30년이나 썩는 모습을 봐야겠어? 좋은 게 좋은 건데··· 우리 힘을 합쳐봅시다! 싸부!”
 내가 분홍대가리··· 사부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지만, 그는 거칠게 나를 뿌리쳤다. 정말로 매정한 인간이다.
 “일없다! 나는 너를 제자로 거두기 위해 대승범천신공을 펼친 것이 아니다! 단지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의 배후를 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일 뿐이다! 너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나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쩝,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해보는 수밖에. 그건 그렇고, 영감이 원하는 것이나 말해보슈. 언제고 난 이곳에서 나갈 테고 그렇게 되면 영감의 소원은 들어줄 테니까.”
 어차피 내 머릿속에 혈천마공에 대한 모든 기억이 들어 있었으니 그의 도움이 그렇게까지 절실하진 않았다. 뭐, 열심히 하다보면 적어도 10년 안에는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자 약간 놀랐는지 분홍대가리 노인네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잘 해보라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자리에 누워버렸다.
 “생각나면 언제든지 말하슈.”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는 가부좌를 틀었다.
 “이보게,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나 좀 데리고 가게.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테니.”
 참회동에서 나와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나에게 매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단박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혹시라도 그랬다가는 이 사실을 소림사 중들에게 고자질할지도 몰랐기에 나는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며 흔쾌히 대답했다.
 “당신뿐만 아니라 이곳에 갇힌 사람들 중에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 데리고 나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슈.”
 내 말에 그는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내가 기억에 의존해 혈천마공 제1단계에 돌입하자 내 귓가로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임가야! 너는 저놈이 우리를 데리고 갈 거라 믿느냐?”
 “흥! 나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고?
 씨··· 팔! 예리한데······.
 “그럼 임가, 네놈은 어찌할 생각이냐? 혹시라도 저놈이 무공을 수련한다는 사실을 소림사 땡중들에게 고할 생각이냐?”
 이 질문에 있어서는 나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짝 긴장한 나는 임가라 불린, 키가 크고 메마른 임청무에게로 온통 신경을 쏟아 부었다.
 “그럴 생각은 없다! 저놈이 나를 데리고 나가든 말든 그건 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저놈이 소림사의 땡중 놈들을 때려죽이는 모습은 반드시 봐야겠으니까!”
 오~ 호! 그런 거였군!
 하긴 나 역시 소림사에서 그냥 나갈 생각은 없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나를 이런 참회동에 가두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있어서 소림사는 일생일대의 원수이다!
 기다려라, 소림사! 천만 배의 복수를 해주마!
 
 
 제5장 참회동에서 이루어진 거래
 
 
 당신은 아는가?
 악인(惡人)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혈천마공 수련은 내 예상대로 큰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분홍대가리 노인네 덕이었다. 그의 기억이 없었다면 무공이라는 것에 대해 일자무식한 내가 어찌 최상승의 무공을 홀로 익혀나갈 수 있단 말인가?
 불현듯···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캬!
 그렇다고 내가 생각한 것만큼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가장 큰 걸림돌은 내 나이었다. 21살··· 물론 일반적으로 그다지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무공을 배워야 하는 무림인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늦은 셈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50살 먹은 배불뚝이 아저씨가 발레 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배워야 했다면 절대로 배울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한 복잡한 신체의 혈도!
 나는 그것을 꼼꼼히 떠올리며 호흡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단전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과거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1년이 걸렸던 혈천마공 제1단계를 나는 한 달 만에 깨부순 것이다.
 그렇게 내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을 때······.
 “네놈의 자질은 형편없다! 내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놈이 고작 단전 하나 만드는 데 한 달이나 걸리다니··· 쯧쯧쯧! 보아하니 네놈은 30년으로도 부족하겠다!”
 빌어먹을 분홍대가리!
 그의 말이 조금 과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기엔 너무 늙어버린 내 신체를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형편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혈천마공 제2단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데에 또다시 한 달이 걸렸다. 그 결과에는 분홍대가리 노인네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고로 내공이란 그리 호락호락하게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 달 만에,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20년에 가까운 내공을 축적하게 되자 홀로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해답을 찾아냈다.
 “네놈이 단기간에 그리 많은 내공을 쌓을 수 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네놈에게 대승범천신공을 펼치면서 전해진 내 선천진기 때문일 거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지. 그리고 지리적인 요건도 한몫했겠지. 참회동의 위치는 숭산에서도 깊고 깊은 산중으로 자연의 기가 풍부할 테니.”
 결국은 내가 운이 억수로 좋다는 말이었다.
 이보쇼! 운도 다 실력이라고!
 어쨌든 더 이상은 내공을 쌓지 말라는 분홍대가리 노인네와 주변 참회동 죄인들의 경고에 나도 순순히 수긍했다. 이 사악한 소림사 땡중들이 혹시라도 참회동 죄인들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지 않을까 싶어서 불쑥불쑥 찾아와 죄인들을 일일이 감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불시 검문을 위해서 나는 단전에 한 줌의 내공도 남겨두지 않았다. 제아무리 무림에서 명성을 날리는 최고수가 온다고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할 신체의 구석 혈도에 내공들이 조금씩 분산되어 있었으니 그것을 찾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찾는다고 해도 단전에 내공이 없는 이상, 그들은 그것을 내가 쌓은 내공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더 이상은 내공을 쌓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 이유는 빌어먹을 혈천마공의 특성 때문이었는데, 일정량의 내공, 즉 20년 이상의 내공을 쌓게 되면 신체적인 변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분홍대가리 노인네가 그랬듯이 나 역시 머리카락이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 외에도 눈빛이 변한다거나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가 달라진다. 뭐, 어차피 제9단계를 넘기지 못하면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내공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혈천마공 제9단계에 들어서면 내공에 대한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에 아득바득 내공을 쌓을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도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이다.
 분홍대가리 노인네의 기억으로 인해 혈천마공 제3단계와 4단계는 수련할 필요도 없이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미 축적한 내공을 기억에 따라 혈도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굳이 내가 그 길들을 일일이 찾아낼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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