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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노래하다 1권 (상)

2017.11.03 조회 2,228 추천 19


 영혼을 노래하다 1권
 레이시안 현대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프롤로그
 1장 발연기 배우
 2장 계기
 3장 개화
 4장 뭐? 진구가?
 5장 얘 대체 누구야?
 6장 내가 무대에?
 7장 내가 그 정도야?
 8장 내가 가야 할 길
 9장 작업 한번 해 볼래?
 프롤로그
 
 
 
 
 
 리허설 두 차례를 마치고 식사까지 마무리하자 어느덧 공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후우······.”
 
 공연 시작 시간이 다가올수록 입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내가 콘서트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불과 1~2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무대로 향했다.
 
 철컥.
 
 문을 연 순간.
 
 와아아아아!!
 
 터질 듯한 환호성이 내 귓가를 가득 메웠다.
 어느덧 긴장이 사라지고, 짜릿함이 온몸을 채웠다.
 마치 낯선 곳에 처음 들어선 느낌과 비슷했다.
 이곳을 봐도, 저곳을 봐도 온통 보랏빛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라색 셔츠를 입은 여자, 보라색 스포츠 모자를 쓴 남자, 보라색 풍선을 흔드는 아이, 사람마다 한 가지씩은 보라색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을 위해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 말 그대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자신이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마주하는 모습.
 혹시 사라질까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떠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관객들. 그리고 줄어들지 않는 환호성.
 꿈도, 환상도 아닌, 현실이었다.
 풀린 눈으로 객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환호성과 짜릿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윽고 마이크 앞에 선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환호성이 줄어들고 이내 침묵이 찾아왔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
 그리고 몸을 가득 메웠던 짜릿함은 이제 희열로 바뀌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마이크를 들었다.
 시선을 돌려 관객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기대감이 가득한 저 눈빛들.
 좋다. 아니,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또다시 전율이 올라온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저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가슴 벅찬 설렘을 애써 누르고 입을 열었다.
 
 “······제 첫 공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 그 꿈을 이뤄 주신 여러분들에게 제 모든 것을 보여 드리고, 들려 드리겠습니다.”
 
 오프닝 멘트를 짧게 마치고 눈을 감았다.
 나는 노래로 말하는 가수, 그리고 관객들은 자신의 노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쇼 타임이다. 나의 목소리를 저들에게 들려 줄 시간.
 
 
 
 
 
 1장 발연기 배우
 
 
 
 
 
 가득 쌓여 있는 캐스팅 명부를 뒤적거리던 박경환 감독의 시선이 멈췄다.
 
 “그놈 참 잘생겼네?”
 
 옆에 서 있던 최주환 디렉터가 고개를 빼서 보더니 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역시 감독님이 알아볼 줄 알았습니다. 이 친구 실물도 예술이지만 카메라는 더 잘 받죠.”
 “아는 친구야?”
 
 박 감독이 고개를 들며 묻자 주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목소리 톤도 죽이거든요. 아마 여자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먹힐 겁니다!”
 “그래?”
 
 순간 박 감독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분명히 어디선가 봤던 얼굴 같은데.”
 
 순간 주환의 몸이 움찔했지만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낄 정도의 평안함을 준다는 것도 장점이겠죠?”
 “그건 그렇겠지. 어디 보자 연기자 출신이고······.”
 “모델 역할에 딱 맞는 외모 아니겠습니까?”
 
 능글맞은 주환의 말에 박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모델 출신이랍시고 캐스팅 잘못했다가 조진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 그래도 연기자 출신이니 기본은 되겠군.”
 
 그의 중얼거림을 듣던 김진희 작가가 끼어들었다.
 
 “누군데요?”
 “성진구라는 친군데. 혹시 아나?”
 
 박 감독이 사진을 내밀자 김 작가의 얼굴에 허탈하다는 감정이 돌았다.
 
 “에이, 누군가 했네··· 성진구를 보고 그러신 거였어요? 얜 안 돼요, 안 돼! 얼굴만 잘생겼지, 맨날 발연기로 욕먹잖아요. 감독님 눈에 찰 리가 없어요.”
 “발연기?”
 “네, 그 혹시 기억 안 나세요? 보살이라 불리던 최 감독님이 열 받았던 거.”
 
 순간 박 감독의 얼굴이 굳어졌다. 뭔가가 떠오른 표정이었다.
 
 “가만. 그러면 예전에 최 감독 그 친구가 하도 열 받아서 중간에 찍어낸 친구가 얘야? 야! 최주환! 너 무슨 정신머리로 얘를 캐스팅 명부에 끼워 넣은 거야! 어?”
 
 박 감독이 버럭 소릴 내지르자 주환은 발을 빼다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잠깐. JP엔터? 주포네?”
 “주포면? 성주포 대표네요?”
 
 주포라는 말에 김 작가도 주환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잘 아는 이름이다. 한때 반짝이었지만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던 가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아는 사실.
 
 “야! 이 씨발! 최주환이! 너 정말 죽을래?! 너, 성주포 회사라서 끼워 넣은 거지? 이거 같은 성씨인 거 보니까 성주포 친척이라도 되는 거 아냐?”
 
 박 감독이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 바로 성주포와 최주환은 잘 알려진 절친이라는 사실이다.
 
 “헉! 아, 아닙··· 아니, 맞습니다······.”
 
 콰앙!
 
 재떨이가 날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김 작가의 말리는 목소리가 버무려진 상황에서 진구의 프로필이 힘없이 쓰레기통으로 나부끼며 떨어져 내렸다.
 그 종이는 펄럭펄럭 떨어져 내리며 쓰레기통에 담겼다.
 하지만, 그 쓰레기통 안에서도 사진만큼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 * *
 
 “그대를 위한······.”
 “컷! 컷! 야! 성진구!”
 
 촬영장에서는 아침부터 커다란 고성이 울려 퍼졌다.
 배우의 대사를 중간에 끊을 정도로 감독의 목소리는 화가 난 상태였다.
 진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감독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어휴! 속 터져!”
 
 배우는 그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감독은 답답한 듯 대본으로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같이 신을 촬영한 유지현이 눈을 감고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 중 진구의 여자친구 역을 맡고 있는 탓에 가장 재촬영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유지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지금 이 신만 벌써 몇 번째 촬영인지.’
 
 그것도 자신과 합이 안 맞거나, 자신도 NG를 냈으면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상대가 계속 NG를 내다 보면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그녀와 진구 두 사람만이 나오는 신이라 이 정도인 거지, 여러 사람이 나오는 장면이었다면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선배님들이랑 같이 찍는 장면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나저나 정말 어떤 면으로는 대단하긴 하네. 저 정도로 혼나면 고치든가 그만두든가 하지 않나?’
 
 그렇게 한바탕 감독의 잔소리 폭격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신 촬영을 마치고 쉬고 있던 진구의 옆에 그림자가 비췄다.
 
 “진구 씨.”
 “아, 지현 씨. 죄송합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유지현은 뾰족한 목소리로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피해 보는 시간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대본 연습에도 최선을 다했고, 촬영에 단 한 번도 지각한 적도 없고, 인사성까지 밝았다.
 아마 감독도 그래서 화를 낼지언정 멱살잡이까지는 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은 진구만큼이나 경력이 짧은 신인이다.
 함부로 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런데.
 
 “좀 더 열심히 해서 지현 씨 불편하지 않도록 할게요.”
 “그러면서 배우 생활은 계속 하시려구요?”
 
 지현은 냉소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진구의 말을 끊었다.
 그 동안은 계속 참아 왔지만, 오늘은 담판을 짓고 싶었다.
 더 이상 혼자 끙끙거리며 상대의 사과만 받다가는 자신이 화병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구는 갑작스러운 상대의 공격적인 어투에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네?”
 
 지현은 팔짱을 끼며 틱틱댔다.
 
 “그만두실 생각은 없냐고요. 뭐 이 작품이야 어쩔 수 없이 찍겠지만, 혹시 다른 작품에서 또 진구 씨랑 만날까 봐 걱정되거든요?”
 
 지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작품이야 비중이 크지 않고, 반 이상 끝났으니 어찌어찌 버티겠지만, 다음에 또 만날 것을 상상하자 앞이 깜깜했다.
 매우 직설적인 말에 진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동안 유지현이 싫은 표정은 지었어도,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유지현은 막아 두었던 둑이 터진 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아니, 감독님한테 맨날 저런 소리를 들어가시면서 왜 계속 연기하시는지 모르겠다구요. 매니저 오빠한테 들으니까 진구 씨가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던데.”
 
 지현의 말에 진구가 반박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저는 연기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리고 저 스스로가 답답하지만, 아쉬워서 절대 포기하지 못합니다.”
 “아쉽다고요?”
 
 유지현은 웬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하면 더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구는 그런 유지현의 표정을 보고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신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연기에 대한 지적을 받는 상황이 달가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네.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거든요. 그리고 여기서 포기했다가는 다른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현은 그런 진구의 표정을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뒤돌아섰다.
 저런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대고 뭐라 말을 해봤자 벽과 대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하필 저런 사람이 걸리다니, 나도 참 운이 더럽네.”
 
 지현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그 자리를 떴다.
 그런 지현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매니저가 진구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구는 그 사과를 받아 주고는 눈을 감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후, 이제는 저런 애한테까지 이런 무시를 받는구나. 그 동안 선배 배우들한테서 받은 잔소리야 그러려니 했지만, 첫 작품을 찍는 아이돌한테까지 저런 말을 들을 줄은.’
 
 진구의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솔직히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자신이 불리한 상황.
 여기서는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꾹 참아 온 게 몇 년인데, 이 정도를 못 참을까.
 하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무시당하지 않을 것을 다시금 다짐했다. 자신이 설마하니 저런 여자보다 못하지는 않을 테니까.
 
 조마조마하게 유지현과 성진구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지현의 매니저는 생각보다 조용히 사태가 마무리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유지현과는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솔직히 진구 씨 때문에 지적받지 않는 거지, 지현이 너도 그리 잘하는 건 아니지 않냐.’
 
 지현도 걸그룹의 비주얼 담당이라 연기에도 나섰지만, 이제야 데뷔도 1년이 갓 지났고, 연기는 첫 작품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말을 지현의 앞에서 했다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이다.
 큰 사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말리는 게 자신이 할 일.
 그리고 왜 진구가 지금까지 저 연기력으로 버텨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자신감과 당당함, 성실함이 묘하게 조화되어 있으니 애매한 거겠지.
 뭔가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딱 2%가 부족한 배우.
 하지만 그 2%가 메워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솔직히 자신이 봐도 외모도 괜찮고, 표정 연기도 나쁘지 않다.
 단, 대사 처리가 이래저래 어색하다는 부분만 뺀다면.
 
 * * *
 
 진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얄궂은 인물과 재회하고야 말았다.
 우연찮게도 촬영하기로 한 커플 화보의 대상이 유지현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지현 씨.”
 “어? 아, 안녕하세요. 진구······ 씨.”
 
 지현은 진구를 보자마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참 이 남자와 질긴 인연이다 싶었다. 한 달 이상 드라마를 찍으며 고생했는데, 오늘 또 여기서 만날 줄이야.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도 고생하겠네요. 매니저 오빠한테 자고 있으라고 해야겠네.”
 
 지현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고개를 홱 돌렸다.
 진구는 그런 지현을 보며 기분이 확 상할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이렇게 무시하는데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슨 뜻이죠?”
 “어차피 당신이랑 촬영하면 오래 걸릴 게 뻔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자라고 하는 거죠. 내가 틀린 말 했나요?”
 “하아······.”
 “지금 무시하는 거예요?”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며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다가 더 참지 못한 지현의 입이 열리려던 중,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현아 식사······ 아, 진구 씨.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진구는 매니저의 등장이 반가웠다.
 자기보다 어린 여자 아이돌과 말싸움해 봤자 좋을 게 없는데, 마침 잘된 셈이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결과로 보여 줄 수 있는데, 여기서 말로 길게 갈 필요가 없다.
 
 “저,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 아닙니다. 인사차 왔을 뿐이에요. 지현 씨, 나중에 보죠.”
 “흥. 남이사 가든 말든.”
 “지현아!”
 
 매니저는 질겁하며 지현을 말렸다.
 
 “죄송합니다. 진구 씨. 얘가 너무 말투가 직설적이라······.”
 
 지현의 괄괄하고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지난번 진구와도 문제가 생길 뻔했는데, 그 뒤로도 한 번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실장이 그 뒤로는 자신에게 지현을 혼내서라도 컨트롤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진구는 어쨌든 지현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있는 배우다.
 굳이 저렇게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데, 여하간 저 성격이 문제였다.
 저래서 앞으로 아이돌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런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진구가 말을 뱉었다.
 
 “아닙니다. 저보단 매니저 분이 더 고생하시겠네요. 그럼.”
 
 진구는 냉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자신은 성격상 웬만하면 남을 비웃거나 공격하지 않는 편이지만, 저 여자는 그 선을 넘었다.
 
 “뭐, 뭐?!”
 “어허이! 일단 앉자 지현아.”
 
 지현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급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앉히는 매니저였다.
 
 * * *
 
 “컷! 지현 씨! 거기서는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죠!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컨셉인데, 지금 표정은 완전히 못 이겨서 사랑을 고백하는 표정이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지현은 작가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거의 매 컨셉마다 작가에게 잔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야 했다.
 반대로 진구는 세밀한 지적만 당했기에 몇 번 듣지도 않았고, 작가 역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진구 씨의 표정을 보세요. 저런 표정을 지어야 아련하고 순수한 사랑이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절정은 작가가 진구를 비교대상으로 삼는 부분이었다.
 지현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하필 저 남자와 커플 화보에다가, 저 남자에게 비교를 당할 줄이야.
 이건 지난 드라마보다 더한 굴욕이었다. 그나마 촬영이 오늘 하루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진구는 그런 지현을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여기서 비웃음을 지어서 그녀를 도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생각이라는 게 진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소조차도 지현에게는 비웃음으로 보였나보다.
 
 “뭐에요? 지금 비웃는 거예요!”
 “아뇨. 저는 그냥 지금 상황이 재밌어서 그런 것뿐입니다.”
 “이익······!”
 
 지현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꾹 참아 냈다.
 가뜩이나 실장님에게 몇 번 깨졌는데, 여기서 화를 내 버리면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지현을 보며 진구가 슬쩍 한마디 던졌다.
 
 “진정하고, 촬영에 집중하시죠. 저도 시간이 그리 많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뭐, 뭐라구요!”
 “지현 씨! 이리 와 보세요!”
 
 참지 못하고 폭발하려던 지현을 막은 것은 사진작가였다.
 
 “두고 봐요.”
 “후.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더군요.”
 
 웬만하면 좋게좋게 넘어가는 진구였지만,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지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현은 이후 촬영에 복귀해서도 촬영 중간중간 자신에게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그때마다 진구는 눈웃음으로 답했다.
 그 모습이 더 얄미운 지현이었다.
 그 바람에 페이스가 더 흐트러진 지현은 이후 몇 차례 더 실수를 했고, 촬영장 내의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 * *
 
 거의 해가 지고서야 오늘의 촬영이 끝났다.
 지현은 제작진에게만 인사를 건네고는 빠르게 사라졌고, 매니저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와서 사과하고 돌아갔다.
 진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현의 매니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진구 씨. 항상 진구 씨랑 촬영하면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깔끔해서 좋아요.”
 “아, 작가님. 작가님이 자주 불러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저야 언제든 작가님의 모델이라면 환영입니다.”
 
 신예은 작가는 진구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워낙 잘생긴 데다가 비율까지 좋아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표정 연기까지 좋아서 촬영할 때 손이 많이 가는 편도 아니다.
 배우들을 쓸 경우 생각보다 표정 연기가 자연스럽지 않아서 조금 난감할 때가 있다.
 특히 외모가 되는 배우일수록 그 경향은 짙은 편.
 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배우는 몸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었다.
 
 “벌써 제가 진구 씨를 모델로 찍은 화보만 다섯 개 째네요. 처음에는 좀 어리바리하더니 이젠 완전 프로 모델 다 됐어요?”
 “하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지현 씨랑 무슨 일 있나요? 계속 트러블이 있는 것 같았는데?”
 
 신 작가는 조심스럽게 진구에게 물어보았다.
 중간에 높아진 언성도 몇 번 들었고, 휴식 중의 표정만 봐도 지현이 아니꼽게 여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느꼈으리라.
 
 “지현 씨가 지난 드라마 때 파트너였습니다.”
 
 진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신 작가는 웃으며 진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호호, 이번에도 발연기 때문에 NG 많이 내셨나 보군요?”
 “하아, 작가님은 너무 저를 잘 아십니다.”
 
 진구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신 작가는 드라마를 많이 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꽤 잘 아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촬영이 끝날 때마다 사담을 나누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신 작가는 지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저 애도 한참 멀었네요. 진구 씨가 드라마 쪽에서랑 화보 쪽에서의 대우가 다르다는 걸 모르나 봐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엎드려 절 받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진구 씨의 그런 면이 참 마음에 들어요. 과시욕도 없고. 허세도 없고. 연예인 치고는 참 겸손한 사람이랄까.”
 “아이고, 금칠 그만하세요. 뭐 안 나옵니다.”
 
 진구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 작가는 자신을 과하게 포장할 때가 많았는데, 지금도 딱 그 상황이었다.
 자신이 과시하거나 허세를 부릴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거만하다고, 초심 잃었다고 까이는 연예인도 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법이다.
 
 “호호, 그리고 저 애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저 사람을 다시는 내 촬영에 부를 일 없을 테니까.”
 “네?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당연하죠. 저 정도 급의 여자 모델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진구 씨 정도 되는 모델은 쉽게 찾기 어려운걸요. 진구 씨랑 안 맞는 파트너 캐스팅해 봤자 화보 망할 게 뻔한걸요.”
 
 신 작가의 말은 정론이었다.
 자신과 잘 맞는 모델이 있는데, 그 사람 위주로 맞춰야 찍는 사람도 편한 법.
 굳이 그 사람과 트러블이 있는 모델 뽑아 봤자 오늘처럼 자신만 피곤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혹시 그 마음에 드는 모델이 기분 나빠서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고. 굳이 그런 리스크들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진구는 신 작가와 짧은 담소를 나누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후. 정말 모델로밖에는 안 되는 사람인 걸까?”
 
 그렇게 돌아선 진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는 신 작가.
 신 작가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디터가 되물었다.
 
 “뭐가요?”
 “진구 씨 말야.”
 “아, 배우로서 왜 성공하지 못하는지 말이죠?”
 
 에디터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 작가의 진구 사랑은 자신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다. 신 작가는 잘생기고 성실한 모델이 필요할 때마다 진구를 캐스팅했었으니까.
 
 “응. 외모로는 거의 최상급이고, 화보 촬영할 때 보면 표정 연기도 빠질 게 없는 사람인데. TV나 스크린에서 보면 그렇게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단 말이야.”
 “좀 괴리감이 심하죠. 아마 그걸 가장 체감하는 게 우리 화보 쪽 사람들 아닐까요. 그중에서도 작가님이 가장 크겠죠.”
 “응.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나 할까.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작품을 찍었다고 들었는데, 나아지는 게 없어.”
 “호호. 그걸 설마 다 보신 거예요? 진구 씨 보려고?”
 
 자신도 모르게 진구의 광팬이라는 것을 드러낸 신 작가의 커밍아웃에 에디터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신 작가는 나잇값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서 반박했다.
 
 “아, 아냐! 그냥, 그냥 드라마 보다가 보게 된 거라고!”
 “후후, 작가님. 걱정 마세요. 저만 알고 있을 테니까요.”
 
 에디터는 그런 신 작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속삭였다.
 
 “어휴, 나도 참······.”
 
 신 작가가 에디터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디터는 이내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아까 얘기로 돌아가면, 말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게 크겠죠. 진구 씨가 연기하는 거 보면 표정은 상황에 맞는데 대사가 어색해요. 보는 시청자나 관객 입장에서는 몰입이 꽤나 방해되는 거죠.”
 
 신 작가가 되물었다.
 
 “자연스러워야하는데, 연기 같이 느껴진다는 뜻이지?”
 “뭐, 조금 다르지만 비슷하죠. 영상물은 화보와는 다르게 대사의 비중이 크잖아요······.”
 
 에디터가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화보에서는 배우로서의 약점이 드러나지 않는 거고요.”
 
 신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고 싶었다.
 에디터 정도면 충분히 안목이 괜찮은 편.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구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소속사가 바보도 아니고, 아마 이유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굳이 꺼내서 상처를 헤집을 필요는 없다.
 자신의 업계에서 진구의 단점은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진구가 이쪽에 집중한다면야 자신도 나쁠 것이 없고.
 
 “그리고, 솔직히 진구 씨가 확 떠 버리면 작가님이나 우리가 찍을 가능성이 낮아지잖아요.”
 “뭐?”
 
 에디터는 신 작가의 표정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팩트폭력을 가했더니 빨개지는 표정.
 물론 이는 에디터가 신 작가와 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하지 않다면 모욕이나 다름없는 말.
 
 “흥! 나 갈 거야!”
 “아, 또 삐지셨네. 같이 가요.”
 
 * * *
 
 늦은 시각, 어느 한 술집.
 최주환과 성주포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탁-
 주환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미안하다. 정말, 거의 다 됐는데, 한 끗 차이로 안 됐어.”
 “됐다. 더 말할 필요 없어. 충분히 고마우니까.”
 
 최주환은 이미 얼굴이 많이 벌개진 상태였고, 성주포는 그런 그의 주정을 웃어 넘겼다.
 이미 충분히 짐작한 일이었으니까, 주환에게 더 부탁하기도 민망할 정도였고.
 주환은 주포의 가라앉은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허세를 부렸다.
 
 “야! 정말로 거의 다 됐었다니까?”
 “알아. 믿는다. 더 이상 부탁하기 미안해서 아무 말 안 하는 거야.”
 “어? 야! 딱 프로필 사진 보는 순간 감독 그 양반 눈깔이 휙 뒤집혀지며! 엉? 거기서 딱 결정이 날 뻔했는데!”
 “재떨이가 날아왔지.”
 “······.”
 
 순간 말을 늘어놓던 주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주포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 친구 잘못 둬서 제삿날 받을 뻔한 거.”
 “드, 들었냐?”
 
 주환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주포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이 바닥 빠르잖아.”
 “끄응. 그래도 감독이 원래 좋게는 봤어. 진짜야.”
 “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위로해 주는 주환을 보며 주포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얼큰해질 즈음, 갑자기 그들의 탁자 옆에 한 사람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본 주환이 활짝 웃으며 과하게 반겼다.
 
 “이야! 우리 진구 왔구나! 이 새끼 너 더 잘생겨지면 어떡하냐!”
 
 들어온 이는 오늘의 주인공이었던 진구였다. 그가 미안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휴. 삼촌들 벌써 이렇게 드신 거예요? 볼링 쳐도 되겠네.”
 
 주포도 실실 웃으며 진구를 반겼다.
 
 “으흐흐. 우리 진구 왔냐.”
 “네. 주포 삼촌이 주호 삼촌하고 한잔하고 있다고 하셔서 들렀어요.”
 
 주환이 진구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래, 잘 왔다. 인사 해야지. 간만인데. 한잔 받아라.”
 “예.”
 
 주포는 결과가 어찌됐든 진구도 주환에게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게 예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구는 옆에 있던 술을 들어 주환에게 한 잔 따라 주었다.
 
 “삼촌,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애 많이 써 주셨다고 들었어요. 많이 힘드셨다고······.”
 “에이, 힘들긴 뭘! 저 녀석이 또 뭐라고 미사여구를 덧붙였나 보구만. 내가 그 정도도 못해 줄 사람이 아니다. 그냥 이번엔 운이 없었던 거야. 그놈의 제작사 인맥만 아니었어도······.”
 “얘도 들었어.”
 “응?”
 “재떨이.”
 
 주환이 표정이 굳어지며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쉰 뒤 말문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꼭 배역을 찾아 주마.”
 
 
 
 
 
 2장 계기
 
 
 
 
 
 주환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조카 같은 녀석이 매번 물을 먹는 것은 그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고.
 
 “아니에요. 저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삼촌한테 피해가 가면 그게 더 죄송한데······.”
 “피해는 무슨! 내가 그 정도에 문제가 생길 것 같냐? 걱정 마라.”
 
 진구는 너무 미안해서 손사래를 쳤지만, 주환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진구로서는 난감할 노릇이었다. 자신이 조연급 배역에 안정적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발연기’, ‘어색한 대사’ 등등.
 외모가 부각되면서 연기력이 떨어지는 아이돌이나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늘어났지만, 진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편에 속했다.
 잘생긴 외모와 맑은 목소리 톤, 그리고 삼촌의 인맥 덕에 몇 번 배역을 맡았었지만, 돌아오는 성적표는 가히 최악이었다.
 목소리 톤과 상황과의 부조화, 표정과 대사처리의 부조화 등.
 
 “쯧,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너는 술이나 한잔하고 가거라.”
 
 주포가 귓속말로 작게 진구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진구가 더 말해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말린다고 될 것도 아니고, 조카 앞에서 자존심을 챙기려는 것 같으니.
 
 “하하, 그래. 진구 너도 한잔 받아야지.”
 “네, 감사합니다.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진구는 주환이 따라 주는 술을 공손히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집에 가면 이런 저런 생각이 가득할 밤일 것 같았다.
 
 * * *
 
 “헉, 헉······.”
 “수고했어. 오늘은 여기까지.”
 “후우, 형도 고생하셨어요.”
 
 트레이너가 진구에게 물을 내밀었고, 진구는 그걸 받아 그대로 꿀꺽 마셨다.
 
 “하아, 살겠네.”
 “자식, 그러니까 좀 천천히 하지. 요즘 왜 이렇게 갑자기 텐션을 올린 거야?”
 “아, 뭐······. 별거 아니에요. 시간이 남아서 그런 거기도 하고······.”
 
 진구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충 말을 얼버무리자 트레이너도 대충 눈치를 채곤 입을 다물었다.
 이미 3년 가까이 1:1 PT를 해 온 사이다. 그래서 존댓말 대신 편하게 형 동생으로 지내는 관계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켜 줄 건 지켜 줘야 했다.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스케줄이 그래도 끊기지는 않았는데, 요즘에는 스케줄이 거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위로해 줄 말도, 조언해 줄 말도 마땅치 않았다. 자신은 헬스 트레이너지, 연예계 종사자가 아니니까.
 그래도 자신이 보기엔 잘될 것 같은데, 참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중, 주포가 나타났다.
 
 “진구야, 다 끝났니?”
 “네, 삼촌. 빨리 오셨네요.”
 “아, 형님. 오랜만입니다.”
 “응. 뭐, 그냥 제 시간에 맞춰 온 거지. 그래, 현민아 반갑다.”
 
 주포는 성진구와 그의 트레이너 김현민의 인사를 웃으며 받아 주었다. 웬만하면 진구가 혼자 다니는 편이지만, 오늘은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싶어서 오겠다고 한 것이다.
 김현민은 자신의 학교 후배였다. 축구 선수를 지망했지만, 결국은 한계를 느끼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와 이 헬스장에서 재회한 지도 3년. 진구가 아니었다면 여기서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형. 그럼 저는 씻으러 가 볼게요.”
 “그래, 나도 이젠 다른 사람 보러 가 봐야겠다. 형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진구와 현민은 시계를 보고는 각자 할 일을 찾아 일어났다. 주포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시작하신 거죠?”
 “아아, 네. 네!”
 
 현민은 진구의 다음 타임 PT 대기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는 탈의실을 향해 걷는 진구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진구 저 녀석. 그래, 녀석을 보고 저러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
 
 현민은 그간 진구의 뒤 타임에 들어온 여자들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렸다.
 
 -저분은 누구에요? 연예인인 거 같은데······.
 -와, 정말 잘생겼다······.
 
 여자들은 열이면 열 진구의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새 여자 고객에게 설명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녀의 시선이 아직 진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는 비슷했다. 그녀가 진구에 대해서 물어보고, 자신은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는 선 안에서 설명해 주는 식.
 이런 여자 고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유독 진구가 PT를 받는 시간에는 여자 고객들이 많았다.
 그리고 현민은 그녀들이 운동을 하면서 항상 힐끔힐끔 진구를 살펴보는 것이 이미 익숙했다. 다만, 진구는 운동에 집중하느라 눈치를 못 챘을지도 모르지만.
 
 “하긴, 내가 봐도 잘생겼지. 역시 신은 불공평하다니까.”
 
 성주포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진구와 저녁을 뭘 먹을까 찾아보던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그의 집중을 방해했다.
 
 “성 대표님.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누군가 돌아봤더니, 헬스장의 사장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미안함과 답답함이 섞인 느낌이었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안 할 수도 없다는 그런 느낌.
 
 “아, 네. 여기서는 조금 그러신가요?”
 “네. 제 사무실로 가셔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주포는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결코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는 느낌.
 사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주저앉자 사장은 주포의 앞에 차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주포는 마땅히 짐작 가는 게 없어 그저 차만 들이켰다.
 
 진구는 주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삼촌은 어디 간 거지······.”
 “아, 성 대표님은 사장님과 사무실에 들어가셨어요.”
 
 진구가 주포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본 다른 트레이너가 주포의 행적을 알려 주었다.
 진구는 감사를 표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사무실의 문을 두들기려는 순간,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진구는 순간 손을 멈추고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죄송합니다. 이번 달까지라도 좀······.
 -후우, 저도 이런 말씀 드리기 어려웠던 것 아시지요?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만······.
 
 이후 죄송하다는 말이 몇 번 더 흘러나왔다.
 진구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벽에 기대섰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주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삼촌. 일은 다 끝나셨어요?”
 “어, 어어. 그래. 다 씻었냐?”
 “네. 어서 가야죠.”
 
 주포는 문 근처에 있던 진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혹시 진구가 이 내용을 들은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한 심정을 감추고 진구의 표정을 살폈지만, 다행히 진구는 아까 봤던 표정 그대로였다.
 
 ‘그래, 다행이네. 너는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된다.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되지.’
 
 주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자, 오늘은 좀 제대로 먹어 보자.”
 “삼촌, 오늘 메뉴는 뭐죠?”
 “아, 한우 맛이나 좀 보러 가자. 한우 안 먹은 지도 좀 되지 않았냐.”
 “음, 오늘은 삼겹살이 땡기는데.”
 
 주포는 예상외의 답변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성진구가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사 준다고 할 때는 흔히 소고기를 외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주 사 주는 것도 아닌 데다가, 진구도 데뷔 이후 풍족할 정도로 벌은 기억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몇 번의 기회에서 진구는 평소 먹고 싶었지만, 비싸서 못 먹는 것들을 말하곤 했다.
 
 “엥? 갑자기 웬 삼겹살이냐. 그래도 시간 내서 같이 먹는 건데, 제대로 먹어야지.”
 “아녜요. 저 돼지고기도 좋아하잖아요. 이 정도면 충분히 포식하는 거죠.”
 
 주포가 입맛을 다셨다.
 
 “쩝. 오늘은 간만이라 한우 정도는 먹을까 했는데, 정 부담스러우면 수입 소고기나 먹으러 가자. 몸보신도 할 겸.”
 
 주포는 진구가 가격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 눈치라 자신이 원래 사 주려던 것에서 한 단계를 낮추었다.
 
 “수입 소고기도 비싸잖아요. 그냥 삼겹살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래도 소고기 정도는 먹어야지. 인마, 원래 소고기 좋아하던 놈이 왜 그래?”
 “에이, 오늘은 삼겹살이 끌린다니까. 네? 삼촌, 어서 가요!”
 
 성진구는 주포가 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기 전에 얼른 잡아끌었다.
 주포는 갑작스러운 성진구의 행동에 미처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어버버 하며 끌려갈 뿐이었다.
 
 * * *
 
 성진구는 다음 날 회계 담당인 최미연이 야근인 것을 확인하고는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갔다.
 야근이 아니라면 점심이나 휴식시간에 따로 불렀어야할 텐데 다행이었다.
 
 “저기··· 누나. 잠깐 시간 돼요?”
 “어? 아, 진구구나. 뭐, 야근이라 오래는 시간 못 내지만, 잠깐이라면야.”
 
 최미연은 피곤한 탓에 빠르게 퇴근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자비를 베풀었다.
 자신이 이렇게 고단한 이유의 일부는 진구 때문이지만, 그래도 잘생긴데다가 예의 바른 동생인지라 마냥 잘못을 전가시키기도 뭐했다.
 
 “그, 헬스장 말인데요.”
 
 올 게 왔다는 것을 직감한 최미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 혹시 들었니?”
 “네. 아, 이거 삼촌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바깥에서 몰래 들은 거라서.”
 “그래.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들은 게 맞을 거야.”
 
 미연은 주포의 부주의함에 혀를 찼다.
 그렇게 재정 상태를 안 알려 주려고 하더니만 이런 데서 걸리다니. 뭐, 몰래 들었다고 하니 운이 좋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후, 헬스장 계약금을 못 낼 정도로 안 좋은 거예요?”
 “그래. 그 동안 대표님 사비로 메꿔 왔지만, 이제 거의 한계라고 봐야지······.”
 
 미연은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고, 진구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소속사에는 자신 외에는 소속된 연예인이 없다. 뭐, 삼촌도 연예인이라면 연예인이려나.
 원래도 크지 않았지만, 2년 전부터 서서히 작아지더니 작년에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연예인들이 이적하거나 계약 만료로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주포는 호탕하게 웃으며 걱정 말라고만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순진하게 그런 삼촌을 믿었고.
 물론 삼촌이 자신을 속이려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조카에게 어두운 이면이나 어려움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겠지.
 지금껏 주포는 진구에게 있어서 거대한 거목이었다.
 자신이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보내던 사춘기, 유일하게 자신을 지지해 준 집안 어른. 그리고 자신이 집안을 나와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 준 인물.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여기 있기는커녕, 반쯤 폐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작금의 현실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 * *
 
 진구는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왔다.
 머리가 복잡한지라 오랜만에 집 대청소나 할 생각이었다. 남자 둘이서만 살다 보니 얼핏 보기엔 깔끔해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진구는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한데, 삼촌 물건이 너무 줄어든 거 아닌가······.’
 
 애지중지했던 기타와 LP음반집이 보이지 않았다.
 삼촌에게는 화려했던 추억의 상징인 물건들.
 진구는 청소하다 말고 고민에 빠졌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삼촌. 기타는 어디 두셨어요? 청소하다 보니까 안 보여서 궁금해서요.”
 “으, 응?”
 
 주포는 오랜만에 진구와 같이 집에서 저녁을 먹는 시간이라 마음 편하게 먹던 중 일격을 당했다.
 자신도 모르게 당황해서 진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 그, 그거 말이지······. 너무 오래돼서 그냥 팔아 버렸어. 어차피 내가 더 이상 가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거 삼촌이 아끼던 거였잖아요. 나중에 애들 생기면 꼭 보여 주고 싶다고.”
 “아, 하하하. 그거야, 사진 같은 거 보여 주면 되잖아? 그래. 요즘 인터넷도 좋아져서 예전 사진이나 기사 볼 수 있잖아. 음, 요즘 세상 참 좋아졌네.”
 
 주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진구의 날카로운 추궁에 어물쩍 대답해 나갔다.
 진구는 눈매를 찌푸렸다. 누가 봐도 억지로 핑계대고 있다는 게 보이니까.
 하물며 자신은 삼촌과 같이 산 기간만 6년이 넘는다. 저 정도의 표정으로 속마음을 알아채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면, LP판 모아 둔 것들은요?”
 “아, 그것도······ 어차피 듣지 않으니까 정리해 버렸지.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듣는 게 좋지 않겠냐. 하하. 요즘 LP카페도 많고, LP판 향수가 한창이더라.”
 “······.”
 “음, 오늘 저녁 맛있네. 역시 집밥이 최고야.”
 
 진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삼촌이 저렇게 화제를 전환하려 애쓰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더 물어봤자 뭐하랴.
 진구는 눈가에 습기가 차는 것을 꾹 참아 냈다. 눈물이 살짝 날 뻔했지만, 삼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과, 삼촌에 대한 애잔함을 삼킬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식사는 침묵만이 흐른 채 끝났다.
 
 * * *
 
 “야, 성진구! 정신 안 차릴래!”
 ”아, 죄송합니다.”
 
 진구는 그날부터 혼란스러운 정신 탓에 하는 일마다 혼나기 일쑤였다.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뿐인 연기 레슨 시간인데, 집중을 하지 못해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선생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야?!”
 
 진구는 거듭된 꾸짖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머리가 복잡해서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차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기 선생은 진구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해 봤자 의미가 없을 거란 판단을 내린 것이다.
 
 “후우, 오늘은 그만 하자. 더 이상 해 봤자 둘 다 감정만 상하겠다.”
 “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진구의 연기 레슨을 담당하고 있는 배종현은 진구가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벌써 1년 이상 진구를 가르치고 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분명히 목소리도 듣기 좋으며, 다양하게 낼 수 있는데도 막상 연기에 들어가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감정이 메마른 것도 아니라 사적으로 대화하면 감정 표현도 꽤나 풍부했고, 대사 암기력은 웬만한 베테랑 배우들 못지않았다.
 차라리 카메라가 돌아갈 때 문제가 생기는 거면 카메라 공포증이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대화와 연기를 하기 위해 대본대로의 상황을 재연하는 게 다른 수준이었다.
 이런 케이스는 거의 보기 힘든 경우라, 배종현도 처음에는 진구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조금만 더 하면 괜찮은 배우가 될 것 같다고 말이다.
 하지만, 몇 달 만에 그 기대는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착하고 성실한 제자라 차마 포기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진구야. 너, 노래는 어떠니? 네 목소리면 충분히 괜찮을 거 같은데.”
 “아, 그건······.”
 
 진구의 표정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씁쓸해졌고, 배종현은 그런 진구의 표정을 보며 혀를 찼다.
 이게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두세 번 권유를 해 보았지만, 진구는 항상 저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묻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런 표정이라면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발전 없는 연기를 붙잡을 바엔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게 진구를 위해서 나을 것 같아 가끔 이렇게 지나가듯 권유하는 것이다.
 
 “후우, 아니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죄송합니다.”
 
 * * *
 
 “후우, 집중이 안 되네. 오늘도 한바탕 잔소리 거하게 먹었구나.”
 
 진구는 홀로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피곤해서 눕자마자 잠들어야 정상이지만, 오늘은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요 며칠 사이 너무 복잡하고 많은 사실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삼촌의 회사, 아니 자신의 소속사의 재정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삼촌의 속앓이.
 물론 삼촌의 회사가 잘못된 것은 자신의 탓은 아니겠지만, 자신이라도 잘했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였다.
 그래서 삼촌도 자신에게 잔소리 대신 격려만 해 주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삼촌이 안쓰러웠다.
 자신도 그렇게 힘들면서 왜 삼촌만 희생하는 걸까? 자신에게는 계속 격려와 유예만 주면서 말이다.
 원래도 연기 레슨 시간에 잔소리를 안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로 혼나고 말았다.
 심경이 복잡하다 보니 가뜩이나 잘하지도 못하는 연기가 눈 썩는 수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뒤척거리다 보니 연기 선생인 배종현의 마지막 한마디가 갑자기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노래, 노래라······.”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은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결국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계가 있을 것이다.
 솔직히 자신의 장점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있는 데다가, 그로 인해서 다른 것에도 지장을 많이 받아 왔다.
 삼촌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이 길에서 성공하려면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진구는 눈을 감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그 동안은 회피해 온 문제였지만, 더 이상 회피하기엔 너무 상황이 좋지 않다.
 진구의 어두운 표정은 방 안의 어둠과 맞물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 * *
 
 “야!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진구가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야, 이 자식아! 누군 주고 싶어서 주는 줄 아냐? 내 생각엔 현재 이게 최선이야! 맨날 진구 감싸지만 말고 정신을 차려!”
 
 사무실 내에서는 고성이 간간히 들려왔다. 주로 최주환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성주포 역시 만만찮았다.
 어떤 직원은 한숨을 내쉬었고, 어떤 직원은 혀를 찼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 어린 공통점은 ‘안쓰러움’이었다.
 
 “아냐. 그래도 이건 아니야. 와 준 건 고맙지만, 이번 건 패스!”
 “야! 고집 고만 부리고! 그냥 이번 거는 해! 이거 하나 한다고 해서 진구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냐? 막말로 이렇게 해서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야지!”
 “그래도 너무 비중이 적잖아! 이런 거 해 봤자 진구에게 좋을 게 없어!”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은 다름 아닌 진구의 캐스팅 문제였다.
 주환이 가져온 대본은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그래서 주포의 눈에 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주환 입장에서는 단역이기는 하나 대사가 없는 수준도 아니었고, 화제성도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작품이기에 놓치기 아까웠다.
 그리고 그것 외에도 주포가 꺼려하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주환도 그것을 알기는 하지만, 정확한 내막까지는 모르기 때문에 그저 싫어한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드라마는 음악 관련 내용이 많다.
 아이돌과 밴드들을 다루는 드라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스팅된 배우들도 아이돌 출신 혹은 현직 아이돌들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연기력 논란을 주연급 배우들이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드라마.
 즉, 조연급 이하의 배우들은 연기력 논란에서 비켜 갈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주환은 그 점을 노린 것이다.
 
 똑똑.
 
 “저, 진구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크흠.”
 “그래, 들어오너라.”
 
 두 사람은 진구의 노크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애 앞에서 목소리 높여 다투는 모습을 보이려니 민망한 것이다.
 진구는 머쓱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미 바깥에서 다 듣고 들어왔는데, 마치 별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상황이 재밌었던 것이다.
 
 “제 캐스팅 문제 때문에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음, 아니야. 굳이 부를 필요가······.”
 “됐다. 진구야, 저놈 말은 무시하고. 나랑 얘기하자꾸나.”
 “하, 하하······.”
 
 진구는 난감했다. 주환이 주포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리고 자신을 향해 몸을 아예 돌려 버린 것이다.
 
 “야! 그건 안 된다니까!”
 “이놈아! 진구도 나이가 이제 스물다섯인데 자기 생각이 있을 거 아니냐! 애 얘기 좀 들어 보자고! 언제까지 네 맘대로만 할래?!”
 “아, 저기······ 삼촌, 일단 주환 삼촌 얘기를 들어 볼게요. 주환 삼촌도 진정하시고요.”
 “후후, 그럼, 그래야지.”
 “흥!”
 
 주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주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구를 말리지는 않았다. 주환의 말대로 진구에게도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이런 드라마야. 어떠냐? 네 입장에서는 조금 눈에 차지 않을지 몰라도,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가져왔다.”
 
 주환은 드라마와 배역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이 배역을 가져온 이유도 설명했다. 그러자 진구는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하죠.”
 “그러니까 고민을······응? 한다고?”
 
 주환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자 진구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뭐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요. 게다가 주환 삼촌의 생각도 맞다고 봐요.”
 “진구야!”
 
 주포가 미안한 얼굴로 진구를 불렀다.
 벌써 배우 역할을 안 한 지도 몇 달이나 지난 상황. 그리고 여러 감독 및 작가들에게 연기력 논란의 꼬리표가 붙은 상황이었다.
 즉, 더 이상은 조연급 역할을 맡기 힘들다는 것이다. 결국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회사의 재정 상황도 있으니 이제는 어떤 일이든 간에 닥치는 대로 하고 봐야 했다. 차마 주포는 그걸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환이 환한 얼굴로 진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너라면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을 거다. 솔직히 네 마스크가 단역 마스크는 아니잖냐? 웬만한 아이돌은 오징어로 만드는 너니까 반드시 눈에 뜨일 거다. 내 장담하지!”
 
 주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진구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주환은 캐스팅을 확정해서 다시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다행히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단역에 가까운 자리였기에 그의 권한 안에서 계약이 가능했던 것이다.
 단역인지라 솔직히 계약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정도였지만.
 주포는 계속 침묵하다가 주환이 사무실을 나선 뒤에야 입을 열었다.
 
 “괜찮겠니?”
 “뭐가요?”
 “대사가 있어도 단역이나 마찬가진데. 게다가······.”
 
 주포는 말을 잠시 흐렸다. 뭔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던 그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또 음악 드라마잖냐.”
 
 망설이며 내놓은 대답에 진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뭐, 제가 직접 부르는 것도 아니고, 무대를 보는 것뿐인걸요. 그리고 단역이잖아요.”
 
 진구가 밝은 얼굴로 대답하자 주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후, 그 동안 콘서트 같은 데 초대받아도 가기 싫다던 녀석이······.”
 
 성주포가 투덜거리는 말을 듣고 진구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주포의 말대로 지금 자신의 말은 과거에 했던 행동과는 모순되는 말이었으니까.
 분명히 아직 자신은 없다. 그 무대를 보고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하지만, 여기에서 계속 두려움과 좌절감에 젖은 채 멈춰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다가는 자신과 삼촌 모두 공멸할 테니까.
 아직 젊은 자신이 더 나아가 보는 수밖에.
 그리고 몇 년간 괜찮았으니,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아직 음악 그 자체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무대를 보는 것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캐스팅이 됐으니, 조금이라도 더 준비해야죠.”
 “그러려무나. 대본 가지고 가서 선생님하고도 잘 얘기해 보고.”
 “대사가 몇 되기는 하겠어요?”
 “끙. 그건 그렇네.”
 
 뒷머리를 벅벅 긁는 성주포를 뒤로한 진구는 미소를 남기며 문을 열고 나갔다.
 
 성주포는 조카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새끼 쪽팔리게.”
 
 사실 성주포가 경리를 통해 진구가 회사사정을 물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헬스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어제 자신에게 기타와 LP판들을 물어보기도 했고. 주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진구의 생각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한다면 하는 놈이니 믿자. 내 새낀데.”
 
 성주포는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진구에 대한 추억을 회상했다.
 
 * * *
 
 “진구야. 연습은 잘했냐?”
 “쟤 몸매 쩔지 않아?”
 “응? 누구?”
 
 성주포가 순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는 중, 진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게 다예요.”
 “······.”
 
 주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대사가 적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고작 한마디일 줄은 몰랐다. 반면 진구는 쾌활한 목소리로 주포에게 말했다.
 
 “뭐, 어때요? 대사가 하나뿐이라 연기력 지적도 안 받을 거고, 촬영장 분위기도 느낄 겸 괜찮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그냥 오늘은 구경 왔다고 생각하세요. 괜히 긴장하지 마시고.”
 
 주포와 진구를 살펴보면 대화가 뭔가 바뀐 것 같았다.
 매니저가 연기자를 위로하는 게 보통인데, 지금 연기자가 매니저를 위로하는 상황이었다.
 서로 의지하는 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촌극이었다.
 
 명색이 회사 대표인 주포가 운전석에 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재정 악화로 인해 몇 달 전부터 로드매니저도 정리했고, 진구가 혼자 다니거나 주포가 로드매니저 역할을 대신하곤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진구의 스케줄도 거의 없었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대사에 관해서도 오늘 처음 알았던 것이다.
 
 “하하, 그러는 삼촌도 걱정돼서 따라오신 거잖아요. 제가 혼자 가도 괜찮다고 했는데.”
 “거, 걱정하긴 뭘! 첫 촬영이니 인사도 겸해서 온 거다. 명색이 매니저가 돼서 첫 인사 정도는 하고 다녀야지.”
 “에이, 삼촌이 인사 다닐 정도는 아니잖아요. 차라리 제가 일일이 인사 다니는 게 동정도 얻을 수 있을 텐데.”
 
 지금이야 이런 영세한 회사의 대표지만, 성주포는 한때 시대를 풍미한 유명한 가수였다.
 즉, 이런 곳에 와서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다닐 급이 아니라는 것.
 전성기라면 그들에게 인사를 받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예 안 왔으면 모를까, 왔으니 일일이 인사를 다닐 수밖에 없고, 개중에는 인사 받기가 민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야가 다르다곤 해도 선배이자, 스타였던 사람이니까.
 물론 연예계는 연차로만 존경받는 세계는 아니다. 겉으로는 존중해 주지만, 결국은 인지도가 높낮이를 결정한다.
 
 주포와 진구는 아침 일찍 도착해 차량에서 대기하다가 촬영에 들어갔다.
 단역이라는 게 날짜만 알려 줄 뿐이지, 정확히 어느 타이밍에 들어갈지 모르기 때문에 아침부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진구가 연기를 할 시간이 되었다.
 감독의 큐 사인이 돌아가고 진구는 연기를 시작했다.
 
 “쟤 몸매 쩔지 않아?”
 “오! 죽인다!”
 “······.”
 
 성주포는 그래도 다른 단역보다 진구의 대사가 길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런 것에서 만족하는 본인에게 쓴웃음을 지었지만 말이다.
 
 “컷!”
 
 다행히 진구는 이 장면에서조차 핵심 인물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지적을 받지 않았다.
 다만 유현욱 감독은 무슨 문제가 있는지 굳은 표정으로 장면을 마무리하고는 조감독에게 물었다.
 
 “야! 아직도 안 왔어? 어디까지 왔대?”
 “아, 그게······.”
 
 조감독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작가 한 명이 헐레벌떡 유현욱 감독을 부르며 뛰어왔다.
 
 “가, 감독님!”
 “뭐야? 이제 온 거야?”
 
 유현욱 감독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작가를 바라보았다.
 작가는 황급히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 이거요!”
 “뭔데 그래? 지금 다음 장면 찍어야 하는데,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둔다.”
 
 유현욱 감독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작가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 그룹 출신 A씨. 음주운전으로 입건··· 단속 피해 도주까지>
 
 아이돌 그룹 멤버가 음주운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서울 송강 경찰서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 A씨를 음주운전 혐의(도로교통법 위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
 
 “아니지?”
 “맞습니다.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 같습니다.”
 “이런 씨발, 엿 같은 놈을 봤나! 촬영 당일 새벽에 음주운전을 해!”
 
 유현욱 감독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촬영 당일 새벽에 술을 마신 것도 직무유기나 다름없는데, 심지어 음주운전을 했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유 감독의 분노에 불똥이 튈까 두려운지 조용히 침묵한 채 고개를 숙였다. 자칫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이 새끼 연락은? 매니저는?”
 “그, 그게······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런 처죽일 놈들을 봤나. 이게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야?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 우리가 대처를 하지!”
 
 유현욱 감독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씨근덕거렸고, 바로 옆에 있던 조감독이 총대를 메고 유 감독을 말리기 시작했다.
 
 “저, 감독님. 진정하시고······ 일단 그쪽과는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우선 촬영부터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촬여어엉? 야! 그 새끼가 없는데 뭐 어떻게 촬영을 해? 그 새끼가 아무리 비중이 작아도 그 장면에서는 주인공이라고!”
 “그, 그러니까 일단 대체자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정도면 일단 물 건너 간 거다. 당장 다른 출연자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음주운전은 국민적인 손가락질을 받는 사건이다. 주연급 스타라도 하차를 논의해야 할 수준인데, 비중이 낮은 조연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조감독이 계속해서 유 감독을 말렸고, 다른 스태프들도 다가와 유 감독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순간 너무 분노해 화를 참지 못한 유현욱 감독이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태를 수습할 준비를 했다.
 문제는 빠르게 대체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드라마는 방영 중이었고, 오늘 찍는 장면은 다다음 주에 나가야 했다. 편집까지 생각하면 늦어도 다음 주에는 찍어야 한다.
 
 “일단, 캐스팅 매니저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아, 그래. 다행히 가까이 있었네. 그러면 그 새끼 대체할 만한 애 부르는데 얼마나 걸리지?”
 “그게······.”
 
 최주환은 어물쩍거릴 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주환으로서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주연급들을 제외하면 가장 캐스팅에 난항을 겪은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뭐? 야! 왜 캐스팅 매니저가 그걸 몰라? 그 역에 그 새끼 혼자만 물망에 오른 거 아닐 거 아냐?”
 
 짜증 섞인 유현욱 감독의 말에 주환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그 역할은 요구하는 스펙에 비해 비중이 너무 적잖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돌도 겨우 구한 겁니다. 웬만한 배역이면 2,3순위로 떨어진 배우들에게 연락해 보겠지만, 그 배역은 경쟁자 자체가 없고요.”
 
 유현욱 감독은 뚫어져라 주환을 노려보았고, 주환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감독이랑 눈싸움을 할 수도 없었다.
 유현욱 감독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씨. 네가 무슨 죄냐. 술 처먹고 사고 친 새끼는 따로 있는데.”
 
 당장 촬영 스케줄이 꼬이게 되었다. 이 상황이라면 결국 아무 신인 아이돌이나 박아야 할 판이었다. 그게 지금 상황에서는 차선이자 최선이었다.
 
 “차라리 립싱크 돌리죠?”
 
 그때 옆에 있던 조감독이 감독의 의중과 같았는지 조심스럽게 의견을 비쳤다. 그러자 유현욱 감독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디 얼굴 반반한 놈이라도 찾아서······.”
 “감독님?”
 
 유현욱 감독이 말을 하다 말고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자, 조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부르며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응?”
 
 컷 사인을 받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소란이 발생한 탓에 자리를 뜨지 못한 단역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유현욱 감독의 시선은 그쪽에 고정돼 있었다.
 
 “야, 저기 쟤 누구냐?”
 “누구 말씀이신지······?”
 “가장 왼쪽에 있는 애, 키 크고 청바지 입은 애 말이야.”
 
 유현욱 감독의 말에 조감독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사를 흘렸다.
 
 “아!”
 
 유현욱 감독이 가리킨 인물은 성진구였다.
 네 명이 같이 서 있는 와중에도 진구는 유독 빛났다. 단역들도 나름 잘생긴 인물들을 뽑아 놓은 것이지만, 진구와 같이 세워 놓으니 오징어가 따로 없었다.
 그때 유 감독의 눈치를 보던 최주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감독이 알아서 진구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성진굽니다.”
 “성진구? 단역 배우 이름까지 외우고 있네?”
 
 의외라는 듯 되묻는 유 감독의 질문에 주환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저 친구는 조연급 배역도 몇 번 한 친구입니다. 오늘은 단역이지만요. 그래서 이름을 알고 있는 겁니다.”
 
 최주환은 조심스럽게 진구의 장점을 강조했다. 혹시나 안 좋은 쪽으로 흐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거쳐야 할 일이었다.
 유 감독은 진구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연급 배역을 해 봤다고? 흠······.”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인 유 감독이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쟤 쓰자.”
 “그 펑크 난 자리에요?”
 “그러면 그 자리 말고 뭐가 있는데?”
 “음, 하지만 저 친구가 노래를 잘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배역은 노래도 불러야 하는 배역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캐스팅도 어려웠던 것인데······.”
 
 주환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문득, 진구와 주포가 음악과 관련된 배역을 기피한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심지어 이 배역은 노래를 직접 불러야 한다.
 즉, 어느 정도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다.
 감독은 그런 최주환의 우려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립싱크로 가자고 했잖아? 어차피 쟤가 노래하는 장면이 뭐 화제라도 될 거 같아? 뺄 수 없는 그림이라 가는 거잖아!”
 “그럼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최주환은 유독 ‘시키신 대로’라는 말에 힘을 주고 달려갔다.
 
 
 
 
 
 3장 개화
 
 
 
 
 
 “야 무슨 일 있냐?”
 
 달려온 최주환에게 주포가 물었다. 주환의 직책을 생각한다면 무언가 캐스팅 상에 문제가 생긴 것일 테니 말이다. 달려온 주환이 빠르게 답했다.
 
 “야, 캐스팅 펑크다!”
 “그럼 오늘 나가리냐?”
 
 어차피 오늘 분은 이미 다 촬영했지만, 주환이 걱정되는 듯 주포가 물었다.
 하지만 주환은 주포가 아닌 진구에게 말을 했다.
 
 “진구야. 너 박도준 해라!”
 “박도준요?”
 
 진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옆에 있던 주포는 뭔가 눈치챘는지 재빨리 되물었다.
 
 “펑크 난 게 그 배역이냐?”
 “어. 그리고 감독이 그 자리에 진구 쓰잔다.”
 “정말?”
 
 주환의 말에 주포의 얼굴이 환해졌다.
 
 “박도준 역할이요? 뭐하는 역할인데요?”
 “그게······.”
 
 그때 주환이 우물쭈물하는 게 이상했지만, 주포와 진구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주환을 재촉했다.
 결국 주환은 눈을 딱 감고 대답했다.
 
 “가수야.”
 “······.”
 
 주포는 일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구의 눈치부터 살폈다.
 누구나 즐기는 음악은 진구에게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주포는 빠르게 거절의 말을 뱉었다.
 
 “야! 음악 관련 역할은 안······!”
 “할게요.”
 “응?”
 
 주포와 주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주포가 경악의 눈동자라면, 주환은 의아한 눈동자라는 게 달랐을 뿐.
 
 “그 박도준 역할, 해 볼게요.”
 “진구야!”
 
 주포가 놀란 눈으로 진구의 이름을 불렀다.
 
 * * *
 
 최주환이 감독에게 달려가 진구의 승낙을 알리자, 유현욱 감독은 조감독에게 고갯짓했다.
 조감독은 곧바로 감독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종이를 뒤적거리며 몇 장을 꺼내 진구에게 향했다.
 
 “노래는 좀 하시나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구 스스로도 노래를 안 부른 지 오래된지라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조감독은 일순 이마를 찡그렸지만, 종이와 함께 헤드셋을 내밀었다.
 진구가 헤드셋을 받아들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푹신한 감촉의 헤드셋.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그 용도가 음악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조차 싫어 헤드셋은 물론이고 이어폰도 하나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느낌은 뭘까.
 진구는 그 오묘한 감정에 잠겼지만, 조감독의 목소리에 다시금 의식 아래로 묻혀 버렸다.
 
 “······구 씨? 진구 씨?”
 “아, 네.”
 
 조감독의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가뜩이나 노래에 대한 자신감도 없는 것 같은데, 정신까지 빠져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뭐하는 거예요? 지금 시간 없어 죽겠는데. 정신 차려요!”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진구는 조용히 사과했다.
 하지만, 조감독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잔뜩 짜증난 목소리로 간단하게 진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요구했다.
 
 “이 와중에 딴생각이라뇨? 이래서 괜찮으려나··· 쯧, 립싱크로 갈 거니까 노래 못해도 표정만 잘 잡아요. 어차피 풀 샷으로 갈 거니까 긴장 말고요. 그래도 감독님이 깐깐하신 편이니까 가사에 맞게 입모양 맞춰 주는 거랑 표정 연기 정도는 맞춰 주세요.”
 “네. 문제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해야 하니까, 드린 가이드 곡 다 외우면 말해 주세요. 삼십 분 이상은 드리기 힘들어요.”
 
 조감독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그대로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진구는 그런 조감독의 모습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자신의 손에 들린 헤드셋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주환은 멧돼지처럼 날뛰어야 할 성주포가 흐뭇한 표정을 짓자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이냐? 지난번처럼 바락바락 악을 쓸 줄 알았는데?”
 “뭐, 별거 아니다. 그냥 믿어 주기로 했을 뿐이지.”
 
 주포는 쓴웃음을 지었고, 주환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까지 음악이라면 치를 떠는 거야? 저 녀석 목소리도 좋은데.”
 “그건··· 아니다.”
 
 주포는 자기도 모르게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 아직까지는 묻어 둘 생각이었다. 진구가 완전히 그 문제를 해결한다면 말해 줘도 상관없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진구가 자신 있게 나서기는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면 지금까지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못 부르냐?”
 
 주환의 걱정스런 질문에 주포가 피식 웃으며 대답을 아꼈다. 그리고 이내 심각해진 얼굴로 진구만을 바라보았다.
 주포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더 말해줄 리가 없었다.
 
 ‘분명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주환은 답답했지만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음악과 관련된 문제는 이미 여러 번 겪었다.
 주포라면 언젠가는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 사람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곳에는 진구가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로 서 있었다.
 
 * * *
 
 진구는 무대 위에서 호흡을 다스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마치 귀에 달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서 본 무대, 그리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진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는 원인이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진구는 주변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가볍게 단역이나 하고 촬영장 분위기를 다시 느끼려는 생각으로 왔는데, 여기까지 왔다.
 비록 배역이라지만 그토록 피해 다니던 자리로 말이다.
 이게 과연 좋은 운인 걸까? 나쁜 운인 걸까?
 지금은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이었다.
 주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귓가에서 사라져 갔다. 그만의 시간이었다.
 
 진구에게 핸드 마이크가 쥐어졌다.
 
 “가사는 다 외우셨죠?”
 “네.”
 
 진구는 그 촉감을 느껴보았다.
 색깔마저 검은색이라 그런지 어둡고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담담하다 생각했고, 그러려 노력했는데 몸은 아니었나 보다.
 
 “얼마 만이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이게 몇 년 만이지? 거의 10년? 아니, 8년 정도 겠구나. 자신이 음악 관련에서 손을 뗀 것은 고등학교 때.
 그 뒤로는 음악과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노래는 물론 악기와 춤까지. 즉, 지금 자신이 부르는 노래는 8년 만인 셈이다.
 진구는 시선을 돌려 보았다.
 주포가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눈동자에 비추어졌다.
 설렘 기대감 걱정.
 그 모든 감정이 담긴 얼굴로 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삼촌······.”
 
 진구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마치 유치원 학예회 자리에 부모님 앞에 선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구에게 주포는 삼촌이지만······.
 구원자이며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다. 친구이자 형이고 동료였다. 그리고 이 길을 선택하게 만든 동경의 대상이었다.
 음악이라는 무덤에서 허우적거릴 때 삼촌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숨 쉴 수 있었다. 꿈을 꿀 수 있었고, 즐거우면 웃을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삼촌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할 때였다.
 떨리던 몸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거칠게 뛰던 심장도 그런 주인의 마음을 느꼈는지 서서히 잔잔해졌다. 진구의 미소가 진해졌다.
 
 최주환은 점점 준비가 완료되어 가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진구의 노래를 들어보는 것이다.
 주포 때문에 진구와도 몇 년을 만났지만, 진구가 한 번도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진구와는 노래 기기가 있는 술집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대 위에 서 있던 진구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이제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자식, 웃고 있네.”
 “푸흐흐, 그러게.”
 
 주환은 진구의 웃는 표정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느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더듬다가 옆 사람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래, 진구의 미소는 주포의 예전 미소와 닮았다. 주포가 전성기 시절에 즐겁게 노래 부르던 그때의 표정.
 
 “야, 진구 말이지. 너랑 웃는 게 똑같다. 완전히 판박이야. 부자지간이래도 믿을 것 같다.”
 “그러냐······.”
 
 성주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주환이 뭔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주환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 하이, 큐!”
 
 유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30분간 반복해 듣던 노래의 전주가 귀로 흘러들어왔다.
 진구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자신의 배역에 맞게 움직이고 있는 배우들, 그리고 그들을 열심히 찍고 있는 촬영팀.
 그들은 모두 제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구가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친 것은 주포였다.
 주포의 입이 움직였는데,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의 목소리가 귀로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너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래, 나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보자. 내가 못한다고 해서 별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진구는 그 동안 부담감 없이 노래를 부른 기억이 없었다. 항상 온갖 기대감 속에서 노래를 했지만, 그 끝에는 혼나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리고 단란해야 할 가족끼리 그를 두고 목소리를 높였던 기억.
 더 어렸을 적. 그가 노래를 부르면 좋아했던 가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욕심. 부담. 그리고 서로를 향한 분노. 그리고 그 안에서 산산이 조각나던 어린 진구의 마음.
 어둠에 잠기고 다시 삼촌이 끌어 내 주며 잊었던 그 부서진 조각.
 지금까지 자신은 그것을 털어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이곳에는 그런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실낱같은 기대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을 믿어 주는 삼촌이 있다.
 가슴 속이 후련해졌다.
 그 동안 자신을 억눌러 왔던 것들을 털어 낼 시간이다.
 전주가 끝나고 그의 상념이 사라지며 입술이 열렸다.
 
 “점점~ 흐릿해지는 나의 꿈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 감았죠.”
 
 한 소절.
 이 한 소절만에 진구는 비로소 알았다.
 진짜로 털어 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진구의 몸속 잠들어 있던 세포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별 기대 없이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유현욱 감독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단 한 소절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 소절 만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린 것이다.
 같은 장면에서 다른 각도로 찍을 것을 기다리던 배우들도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무대 위를 향했다. 그저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입을 다물고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진구의 노래가 이어졌다.
 
 “더 이상 자신이 없어 그만둘까 싶었지만 다시 시작해요.”
 
 다시 시작한다.
 깨어진 추억도 어두웠던 기억도 이제 털어 버린다.
 나직하게 시작되었지만 그 소리는 또렷하게 울려 퍼져 나갔다. 그리고 힘차게 나아간다.
 
 “나는 천천히 한 걸음 나아가요. 언젠가 닿을 내 꿈을 위해~”
 
 꿈이다. 진구 그리고 삼촌인 주포가 함께 꾸는 꿈.
 스스로 말한다.
 그래,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자.
 하나의 퍼즐이 맞추어지자 감춰왔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갔다.
 그렇게 진구의 의식 깊이 침잠해 있던 것이 일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노래를 향한 사랑.
 진구는 8년 전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했다. 주변에서 그 사랑이 아집이 되었을 때 꿈을 접고, 오히려 그것을 싫어하게 되었을 뿐이다.
 노래 자체를 싫어하게 된 것도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지금 울려 퍼지는 소리와 감정이 그걸 증명한다.
 즐거웠다.
 미치도록.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흘러나왔다.
 억눌려 있던 어렸던 동심의 그 환한 미소가.
 
 진구의 노래가 끝났지만, 촬영장은 여전히 고요했다.
 촬영을 끝내야 하는 유현욱 감독이 컷 사인을 내지 않고 있었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 정적을 깨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흐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개중에 감성적인 면이 덜 발단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었는지 유 감독 옆자리에 앉아 있던 조감독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저, 감독님?”
 
 조감독의 부름에도 유 감독은 멍하니 대답만 했다.
 
 “어, 어?”
 “촬영 끝내 주셔야죠. 노래 씬 끝났습니다.”
 “어, 어. 그래야지. 커, 컷!”
 
 조감독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유 감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컷을 외쳤다.
 
 ‘저 친구는 누구지? 땜방용 아니었나?’
 
 유 감독은 진구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그러다가 주변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감독의 컷 소리에 주변 사람들도 정신을 하나둘씩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을 하고 있던 촬영팀들, 그리고 장면에 같이 있던 배우들, 그리고 다음을 기다리던 배우들.
 누구 하나 예외는 없었다.
 
 “와, 대박. 드라마 촬영장에서 이런 노래를 들을 수 있을 줄이야······.”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며 조용히 박수를 치는 사람들.
 
 “야, 너 울었냐?”
 “아냐, 울기는 뭘! 안 울었어!”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옆에서 지적해주자 그제야 자신이 운 것을 깨닫는 사람들.
 
 “배우 생활 20년 동안 촬영 세트장에서 노래 후의 정적을 볼 줄이야······.”
 “전 세트장은커녕, 심지어 초대받은 콘서트에서도 이런 건 못 봤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진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들까지.
 지금 이 순간, 이곳의 주연은 진구였다.
 
 * * *
 
 “야, 방금 거 음원 튼 거 아니지?”
 
 유현욱 감독은 귀를 후비며 조감독에게 물었고, 조감독은 유 감독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음원은 무슨 음원입니까? 이제는 라이브랑 음원도 구별 못하십니까?”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유 감독은 조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확실히 방금 노래는 라이브였다.
 그런 유 감독의 표정을 보며 조감독은 피식 웃었다. 자신이 유 감독과 몇 번째 같이 일하고 있지만, 이런 표정은 오랜만이다.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그런 표정을 지으시다니.”
 “하하핫! 대박이야, 대박!”
 
 유현욱 감독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 이상의 장면을 건진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땜빵이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장면이 명장면급으로 변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 감독은 이내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근데, 저 녀석 배우라며?”
 “네. 저도 그렇게 들었죠.”
 
 조감독은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의 다른 스태프들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에게 물었다.
 
 “근데 배우가 뭐 저렇게 노래를 잘해? 저 정도면 원래 쓰려는 아이돌 녀석보다 잘 부르는 거 아냐?”
 “당연하죠. 어디서 그런 애를 가져다 댑니까? 그 애 노래는 저도 들어봤지만, 비교가 안 됩니다.”
 “그렇지? 그래. 그러고 보니 최주환이 이 새끼 어디 갔어? 왜 그런 병신 같은 새끼를 캐스팅한 거야? 이런 보석이 눈앞에 있었는데! 야, 최주환!”
 
 유 감독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떠오른 생각에 최주환을 호출했다.
 말투는 격했지만, 그것은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정말 기분이 좋아서다.
 
 * * *
 
 유 감독의 컷 사인이 들리며 최주환과 성주포도 정신을 차렸다.
 
 “야··· 너 이 새끼······.”
 “······.”
 
 주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주포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였다.
 
 “왜 저런 애를 데리고 배우를 시킨 거야?”
 “그런가······. 이제는 괜찮아진 거냐.”
 
 주포가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주환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동문서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조카 놈 때문에 몇 번이나 욕을 먹고, 자존심까지 굽혀 가며 부탁을 했던가. 그런 자신의 노력이 빛이 바랜, 아니 능욕당한 기분이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왜 저렇게 잘 부르는 애를 배우만 시킨 거냐고! 엉? 노래를 싫어한다는 놈이 뭔 노래를 저렇게 잘해?”
 “······.”
 
 주환은 더 따지려다가 주포의 눈가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주포의 절친이라고는 하지만, 주포의 눈물은 처음 보았다.
 
 “야, 야. 너 우는 거야?”
 “아냐. 웃고 있는 거다.”
 
 주포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눈물은 진짜였다.
 그의 말대로 주포의 표정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가끔 들어보기는 했지만, 자신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흔히들 말하는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크크큭. 짜식, 울다가 웃냐?”
 
 주환은 건수를 잡은 듯 주포를 향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빠릿빠릿하게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 불호령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야! 최주환!”
 “이런 젠장! 일단, 이따가 보자!”
 
 진구는 노래를 끝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대본대로라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을 노려봐야 했지만, 지금의 진구에게 그럴 정신은 없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취한 행동일 뿐. 평상시라면 NG를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감독의 호령과 함께 주변에 죄송하다는 인사를 연발해야 했을 터였다.
 문득 진구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즐거워하지 않으면, 노래를 듣는 사람은 기뻐할 수가 없다.’
 
 진구는 어릴 때에도 즐겁게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하지만, 지금의 진구는 그 어떤 때보다 행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사람들도 기분 좋게 들어 준 것이겠지.
 진구는 노래를 부르며 깊이 담아 두었던 나쁜 감정을 다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진구는 주포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에는 오로지 환희와 행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포는 그런 진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한참이나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은 십여 년 전 진구가 아주 어렸을 때의 모습이었다.
 
 ‘이제야 벗어났구나. 그래, 이제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어린 시절의 진구에게 주포는 항상 말하곤 했다.
 
 ‘진구야. 너는 충분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단다. 다만, 다들 그 기대가 너무 커서 저러는 것이지, 네가 못하는 게 아니란다. 네가 못하는 거라면 어떻게 1등을 계속하겠니.’
 
 하지만 이미 잔소리와 부담감에 익숙해진 진구는 주포의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친척들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했는데,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기만 하지 전혀 격려를 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들 중 자신에게 유일하게 좋은 말을 건네준 주포는 TV에서도 많이 나오고, 수상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런 주포를 딴따라라고 손가락질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어릴 때는 주포를 낮게 보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시각이 바뀌어 갔다.
 자신의 꿈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그 모습이 태양처럼 밝아 보였던 것이다.
 자신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이 길이 자신의 꿈이 맞는지도 고민에 빠진 시기.
 사춘기에 접어들며 조금씩 방황하자,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을 혼내기에 바빴다.
 결국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갔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를 고민할 때 자신을 받아 준 사람이 주포였다.
 자신을 데리고 나와 지금까지 책임져 준 존재.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후후, 이런 곳에서 저런 노래를 들을 줄이야.”
 “가수일까요?”
 
 옆에 있던 사람이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피식 웃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아냐. 창법이 흔한 가요 창법이 아냐. 대중가수라면 저런 창법을 쓰지 않겠지.”
 “그럼······.”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흥미로운 미소를 띠며 무대 위에 선 진구를 계속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지. 노래를 불러야 하는 장면에서 펑크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돼서 와 봤는데, 괜히 왔나 싶군. 아니, 잘 온 거라고 해야 되나?”
 
 한동안 주변의 웅성거림과 무대 위에 선 진구를 조용히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내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궁금하긴 하지만, 다음에 볼 일이 있겠지.’
 
 * * *
 
 “이런 명장면을 그냥 놔두려니 아까운데······.”
 “그러게요. 풀 샷으로만 남겨 두기엔 좀······.”
 
 유 감독의 중얼거림에 메인 작가인 박은숙이 자기도 모르게 맞장구를 쳤다.
 박 작가가 쓴 대본대로라면 박도준은 그냥 드라마 중반 몇 화에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용도의 라이벌로 나오고 끝날 캐릭터였다.
 하지만, 저 정도의 장면을 만들어 냈으니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저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배우가 있다면 제대로 쓰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외모까지도 출중하다면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박 작가의 동의에 유 감독은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박 작가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네. 그거야 당연하죠.”
 
 박 작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 감독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래? 자네 생각도 그렇단 말이지?”
 “자, 잠깐만요!”
 
 순간 박 작가는 불안감이 척추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그다음 말로 인해 현실이 되었다.
 
 “부탁해! 역시 박 작가는 대단한 사람이야.”
 
 유 감독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박 작가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기요! 감독님!”
 “난 자네를 믿네.”
 
 박 작가는 눈을 크게 뜨며 절규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자신의 눈앞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아도취에 빠진 유 감독의 얼굴만이 보일 뿐이었다.
 성진구라는 배우의 무대에 감탄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박도준 캐릭터의 비중을 늘리는 것은 쉽지 않다.
 편집이야 제작진의 권한이니 박도준의 장면을 여러 컷으로 찍어 올리는 것 정도는 쉽지만, 대본 수정은 간단하지 않다.
 심하면 스토리의 방향을 틀어야 하고, 최소한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영향이 간다.
 대사의 양도 느는 것은 기본이고, 사라져야 할 캐릭터가 더 오래 살거나 더 빛나게 되니까.
 박 작가는 머리를 감쌀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냥 쉽게 말해서 유 감독에게 낚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 감독의 저런 빠른 태세전환을 설명할 수 없다.
 유 감독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위안으로 삼았다.
 방치했던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게다가 자신이 봐도 꽤 매력적인 배우였다. 그렇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칫. 두고 봐요. 감독님. 제게 밤샘 선물 주신 거 잊지 않겠어요.”
 “하핫. 박 작가도 좋아했으면서 뭘 그러나.”
 
 박 작가가 샐쭉한 표정으로 째려보았지만, 유 감독은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흥. 저만 죽을 생각은 없어요. 다 같이 죽어야지.”
 
 박은숙 작가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작가들의 표정도 시커멓게 변했다.
 당연히 박 작가가 밤샘을 하게 되면 자신들도 다를 바는 없을 것이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막상 입으로 들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
 
 진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잊고 모든 것을 털어 버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렇기에 끝이 난 뒤의 반응에 대해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노래가 끝난 후 주변은 온통 고요했고, 컷 사인 이후에 곳곳에서 박수나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의아했을 뿐.
 그러다가 유현욱 감독이 자신의 무대를 찍은 장면을 다시 보여 주자 그제야 자신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대단했어. 작품 내에서 박도준이 보여 줘야 하는 감정, 그리고 그 노래가 담은 감정 모두 말이지.”
 
 그 신을 보여 준 후 유 감독이 던진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말은 진구의 가슴을 뛰게 해 주었다.
 
 “원래는 자네의 무대를 풀 샷으로만 가볍게 잡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네. 자네 위주의 장면도 따로 찍어야겠어.”
 “네?”
 
 진구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지만, 유 감독은 개의치 않고 진구를 채근했다.
 
 “괜찮겠나? 아까 최 디렉터한테 듣기로는 노래에 그렇게 자신 있는 편이 아니었다던데. 소속사에서 일부러 숨기라고 하기라도 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진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유 감독이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고 되물었다.
 
 “그럼 자신 있는 거지?”
 
 어느 배우가 자신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할까. 당연히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대의 의지나 상태를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예전의 진구였다면 머뭇거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자신 있습니다.”
 
 아까만큼의 감정 몰입도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 정도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디오는 아까 따 놓은 것을 쓰면 되니 말이다.
 
 “좋아. 그러면 다시 가 봅세. 자! 다시 방금 전 장면 찍을 준비!”
 
 감독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한 명.
 메인 작가 박은숙만이 대본을 쥐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감독의 대본 수정 제의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것이다.
 멀어지는 진구를 보며 박 작가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차라리 노래를 안 들었으면 이런 고민 안 하는데.”
 
 마치 나라 잃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 작가에게 유 감독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잘 부탁해. 박 작가.”
 
 박 작가는 그런 유 감독을 노려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진구도 다시금 무대를 향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들뜬 마음으로 불러서는 곤란하니까.
 
 다행히 추가적으로 촬영하는 신들은 간단했다.
 기본 풀 샷을 찍었기 때문에 타이트 샷과 측면 샷 같은 몇 장면만을 따로 건져 내면 끝이었다.
 그 장면들을 끝내고 감독은 진구를 다시 불렀다.
 
 “진구 씨.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도준 역이 대사가 많은 역할은 아니지만, 준비할 시간이 너무 적어. 게다가 원래 대본보다 더 비중이 늘어날 예정이야. 아마 내일 오면 작가가 그 뒤의 새로운 대본을 줄 거야. 그러니 오늘은 내일 촬영할 부분만 준비해 오게나.”
 “네? 새로운 대본이요?”
 
 진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로운 대본이라니? 저 말대로면 대사가 더 늘어난다는 소리인데, 자신이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을까?
 
 “그래. 아까 최 디렉터에게 들어보니 조연도 몇 번 했다며? 그러면 충분할 거야. 늘어난다고는 해도 배 이상으로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네! 감독님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진구는 잠시 불안감이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노래는 원래부터 좋아했고, 잘했던 것이니 트라우마만 사라져도 괜찮은 노래를 들려 줄 수 있었지만, 연기는 또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비중이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다시 부담감이 가슴을 옥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좋아. 일단 오늘은 그만 들어가 보게. 원래는 박도준 역을 찍을 장면이 더 있기는 하지만, 노래 신을 제외하면 내일로 미뤄도 되니까.”
 
 유 감독은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노래 신이야 별다른 준비 없이 금방 촬영이 가능했지만, 다른 장면은 그렇지 않다.
 어느 정도는 준비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었다.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괜찮은 연기를 바라는 건 도둑놈이나 할 짓이지.
 
 유 감독은 뒤돌아선 진구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진구 정도나 되는 재능의 배우가 이제껏 무명이라는 게 의아했던 것이다.
 단편적인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른 것이 아니라 그 노래에 담긴 감정은 풍부했고, 표정까지도 적절했다. 마치 뮤지컬의 한 무대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일반 연기도 나쁘지 않을 터.
 
 ‘흐음, 노래도 노래지만, 마스크가 상당한데. 저 정도 외모라면 웬만한 스타들 못잖은데 말이지. 그리고 목소리까지 좋아. 여성 시청자들이 딱 좋아할 달달한 미성.’
 
 그렇게 상념에 빠진 유 감독을 일깨운 것은 아까도 자신을 불렀던 조감독이었다.
 유 감독은 오늘따라 자신이 감수성이 예민해진 것 같아 쓴웃음을 지었다.
 
 “감독님? 다음 신 촬영 가셔야죠?”
 “아, 아아. 그래야지. 다음 신 촬영 준비는 다 됐나?”
 “네. 준비는 다 되었고, 감독님 사인만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오케이.”
 
 ‘일단은 나중에 생각할까. 당장 오늘도 찍어야 할 장면이 한가득이니.’
 
 유 감독은 일단 진구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당장 오늘 할 일이 산더미인데, 조연 배우 한 명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내일 또 볼 것이고, 내일 촬영을 마치고 나서 생각해 봐도 늦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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