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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마협기 1

2017.11.17 조회 245 추천 1


 천은마협기 1권
 서장
 
 
 피 끓는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이 숨쉬는 대지!
 예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 그곳은 다름 아닌 무림(武林)이라는 곳이다.
 지난 수천 년 간 수많은 무림인들이 군림천하(君臨天下)를 꿈꿔 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절대강자(絶代强者)로 명실상부하게 무림에 군림한 인물은 시대는 달랐지만 절대삼천종(絶代三天宗), 단 세 사람뿐이었다.
 그들이 있던 시대를 제외하고는 강자존(强者存)이 원칙인 무림에는 서로를 견제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치열한 혈전을 거듭하였을 뿐이다.
 
 천이백 년 전 후한(後漢) 효환제(孝桓帝) 때 정종(正宗) 무적천신(無敵天神) 용후린(龍侯燐)은 약관 이십에 비룡신궁(飛龍神宮)의 팔백 궁도들과 한 자루의 천신뇌정검(天神雷霆劍)으로 무림을 제패하고 정도무림의 지주가 되었다.
 그는 정도무림이 천하를 평온하게 이끌자, 군림 이십 년 만에 후계자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오백 년 동안 정도무림은 전성기를 보냈으며, 정도가 영원히 무림을 지배하리라 믿었기에 정파 무림인들은 무공연마를 소홀히 하였다.
 
 팔백 년 전 동진(東晋) 효종(孝宗) 목제(穆帝) 때 마종(魔宗) 경혼마겁(驚魂魔劫) 전의비(全倚毘)는 지옥천마방(地獄天魔幇) 이천 방도(幇徒)들과 마도 최강 무학이었던 지옥멸혼도법(地獄滅魂刀法)으로 무기력한 정도무림을 철저히 농락하였다.
 그들은 다시는 마도(魔道)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정도무림의 젊은 영재(英才)들을 모조리 참(斬)하였다.
 또한 각 문파의 비전비급(秘傳秘?)을 바치게 하여 불태워 버렸다. 힘에 눌린 정도무림은 혈루(血淚)를 뿌리며 무릎을 꿇은 채 자신들의 진산무학(眞山武學)을 바쳐야만 하였다.
 마치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재판(再版)인 것 같던 시기였다.
 양민(良民)들은 불안에 떨며 세월을 보냈으며, 흉악한 마도 무리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했다.
 마종 전의비는 혈마(血魔), 천마(天魔)라 부르는 두 명의 제자에게 자신의 무공을 반반씩 전수하였으며, 그들의 야망을 부추겨 서로 견제하게 하여 자신의 아성(牙城)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천하를 오시(傲視)하며 군림하던 그는 육십 세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연히 은거(隱居)하였다.
 마종이 은거하자 두 제자는 서로 자신이 후계자라며 모든 권력을 행사하여 유혈 충돌을 일으켰다.
 결국 세력이 무림을 반반씩 통치하던 혈마교(血魔敎)와 천마성(天魔城)은 양패구사(兩敗具死)하고 말았다.
 그때 오십 년 간의 지옥 같았던 혼돈기(混沌期)를 보내며 칼을 갈던 정도무림의 숨은 영재들이 들고 일어나 무림에는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왔다.
 
 오백오십 년 전 당조(唐朝) 헌종(憲宗) 때 수라혈사궁(修羅血邪宮)의 궁주(宮主)는 후세에 사종(邪宗)으로 불려진 아수라혈황(阿修羅血皇) 초무강(草武强)이었다.
 그는 수라혈사궁의 삼천 궁도(宮徒)들과 일천 구의 지옥혈강시(地獄血?屍)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이끌고 아수라미리지옥편법(阿修羅迷理地獄鞭法)으로 나약해진 정도와 마도들을 무참히 추살(追殺)하였다.
 강호를 평정한 그는 사도무림(邪道武林)을 이끌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팔십 년 동안 무림을 지배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수라혈사궁의 너무나도 사악하고, 잔인한 처사 때문에 양민들은 그들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이때 육백여 년 간 조용히 무공 증진에 힘쓴 정도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소림사를 비롯한 구파일방(九派一幇)이 연합맹(聯合盟)을 만들었다.
 맹주는 당시 소림장문인인 태허신승(太虛神僧)이 추대되었다.
 태허신승은 태산에서 수천 초에 달하는 혈전 끝에 수라혈사궁주 초무강의 사지(四肢)를 잘랐으며,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곡(無底谷)으로 떨어뜨리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결국 오합지졸이 된 수라혈사궁은 붕괴되었으며, 사도 무림인들을 잡아 무림맹에서 만든 참회동(慘懷洞)에 가두게 되었다.
 다시 정도가 득세하자 마도무림과 사도무림은 모두 칩거에 들었으며, 양민들은 마음 편히 생업(生業)에 힘쓸 수 있게 되어 정도연합맹을 연호(宴?)하였다.
 그러나 정도무림에도 좋은 사람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에 암중에 양민을 해치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작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정도의 세력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자, 맹주 태허신승은 정도연합맹의 권한을 강화하여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정도인들을 척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정도연합맹의 모든 우환은 해소되었다.
 이후 무림이 다시 평온해지자 태허신승은 정도연합맹을 해체하며 무림의 평화를 해하는 사악한 세력이나 나타나거나 외세의 침공이 있을 때 다시 연합맹을 만들자는 약속을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한 후 열반에 들었다.
 
 지난 사백칠십 년 간 소뢰음사(少雷音寺)의 중원 침공과 남만(南蠻)의 혈황만독곡(血皇萬毒谷)에서 독인(毒人)들이 출현하였을 때, 그리고 감숙성(甘肅省) 북산(北山) 지옥곡(地獄谷)에서 사공(邪功)을 익힌 무리가 있었을 때 정도연합맹은 다시 결성이 되었다.
 그때마다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정도연합맹은 새로운 맹주를 선출하여 그간 양성한 인재들의 죽음을 각오한 살신성인의 정신이 그들을 물리쳤었다.
 덕분에 구파일방의 피해도 엄청나서 작금(昨今)의 정세는 평화로웠지만 군림천하를 꿈꾸는 세력들이 무수히 생겨나는데도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에 나서서 참견하기엔 세력이나 힘, 모든 것이 부족하였기 때문이고, 우선은 자파(自派)를 회생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오직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만이 그 동안 무공 증진에 힘써 수많은 양재를 길렀다.
 그 결과 작금에 이르러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 이후 누구도 익힌 적이 없다는 칠십이 절예(絶藝)를 소림 방장의 사제이자 장경각주(藏經閣主)인 혜능선사(慧能禪師)가 완벽하게 깨우치는 개가를 올렸다.
 
 무림엔 오래 전부터 사라진 절대삼천종의 무학(武學)을 얻는 사람이 영세군림(永世君臨)할 것이라는 노래가 생겨났다.
 덕분에 매일 절대삼천종의 유학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돌아다니는 사람이 강호에 그득하게 되었다.
 
 
 제1장 혜능선사(慧能禪師)
 
 
 만추지절이 되어 낙엽들이 산사(山寺)로 오르는 산로(山路)에 가득 떨어져 있었고, 소슬한 바람에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의 은은한 소리가 풍취를 더하고 있었다.
 낙일(落日)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러 만월(滿月)이 훤하게 비추는 소림사 내전(內殿)은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였다. 저녁 예불(禮佛)도 끝난 지 이미 오래라 드넓은 소림의 경내는 적막과 어둠에 싸여 있었다. 모든 곳이 어둠에 싸여 있건만 오직 한 곳, 장경각(藏經閣)에서만 작은 불빛이 창 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적막하기만 하던 경내를 휘돌아 누군가 나오더니, 장경각 앞에 공손히 시립한 후 적막을 깨뜨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각주님, 향차(香茶)를 올릴까요?”
 “들어오너라.”
 안에선 창노하면서도 밝고 맑은 음성이 들렸다.
 창노한 음성의 주인은 바로 장경각 주인 혜능선사였다.
 이마에 계인(戒印)이 뚜렷한 혜능선사는 붉은 가사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백염(白髥)을 보기 좋게 기르고 있었다.
 장경각 안으로 들어간 나이 어린 사미승은 결가부좌의 자세로 좌선(坐禪)하고 있는 노승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소반에 있는 다구(茶具)를 내려놓고 따르며 물었다.
 “각주님, 저도 훌륭한 무승(武僧)이 될 수 있을까요?”
 사미승의 말에 노승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너도 마음을 명경(明鏡)처럼 닦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무공일도에 정진한다면 못 이룰 것도 없지. 하지만 네가 모든 것을 깨우치려면 더욱더 고진(苦進)하여야 할 것임을 명심하여야 하느니라. 음, 다향(茶香)이 참 좋구나. 이만 나가 보도록 하여라.”
 사미승이 나가자 차를 마시던 노승은 창문 밖 어두운 천공(天空)을 바라보며 근심 어린 눈빛을 띠었다.
 ‘아미타불······, 천기(天機)를 보니 사황성(邪皇星)의 혈색이 갈수록 점점 짙어지는구나. 아직 마황성(魔皇星)의 성광(星光)은 약하지만, 그에 비하면 천강성과 자미성의 빛은 너무도 미약하구나. 아······, 조만간 무림에 또다시 혈풍(血風)이 몰아치려는가? 으음, 정도가 요즘처럼 취약할 때가 없었는데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빨리 장경각 금서(禁書)들의 무공을 정도의 무공으로 바꾸는 일을 해야겠다. 소림 칠십이 절예를 익힌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있어 이 일을 할 것인가, 어디 금서의 목록부터 찾아볼까?’
 노승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승방(僧房) 한 켠에 있는 서가(書架)를 옆으로 밀더니 서가 뒤에 있던 흑색 상자를 꺼내 들었다.
 흑색 상자는 보기에도 몹시 육중해 보이는 상자였으며, 상자의 표면에는 누군가가 붙여 놓은 부적이 붙어 있었다.
 좌정한 후 뚜껑을 열자 신성한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사악한 사기(邪氣)와 마기(魔氣)가 서리서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기와 마기를 뿜어대는 것은 바로 상자 안에 있던 낡디낡은 비급들이었다.
 혜능선사가 비급들을 꺼내자 거기엔 비급명들이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무극마록(無極魔錄), 절정마검보(絶頂魔劍譜), 사영환마록(邪影幻魔錄), 사도사경(邪道邪經), 역천마경(逆天魔經), 혈루경(血淚經), ······.
 “으음, 이 많은 것들은 언제 다 한단 말인가? 쯧쯧쯧······.”
 혀를 차던 혜능선사는 무림의 태산북두를 자처하는 소림의 장경각주답지 않게 금서(禁書)들을 펼쳐 보며 상념에 잠겼다.
 
 혜능선사는 오래 전부터 금서의 무공을 익히며 마도와 사도의 무공 중 장점은 살리고, 사기와 마기를 제거하여 정도인들이 금서들의 무공을 쉽게 연성할 수 있게 바꾸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영락제(永樂帝) 오년, 몹시도 무더운 여름날 혜능선사는 녹이 잔뜩 슨 철경(鐵經)인 천마철경(天魔鐵經)을 마지막으로 장경각 안의 모든 금서를 정도의 비급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천마철경의 마지막 부분에 천마의 모든 무공이 마도무공(魔道武功)의 진수가 아니며, 혈마(血魔)의 무공과 합쳐져야 제 위력을 찾는다는 내용의 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혈마가 은거한 곳의 위치가 그려진 도면(圖面)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은 하남성(河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별산(大別山) 운무곡(雲霧谷)이었다.
 그 길로 방장실(房長室)로 간 혜능선사는 장문인이며 자신의 사형인 혜공선사(慧空禪師)에게 자신이 정도무학으로 바꾼 마도와 사도의 무공 몇 가지를 전하였다.
 아울러 사형에게 소림의 승려들에게 합당한 무공을 전수하여 살겁(殺劫)에 대비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혜공선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사제(師弟)! 자네가 의로운 일을 하였든, 악한 일을 하였든 난 자네를 믿는다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사제가 금서를 보며 마공과 사공을 익힌 것은 용납할 수 없다네. 소림의 승려로서 그것은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네. 우형이 자네보다 무공이 약한 데도 장문인이 된 것에 늘 미안함을 느꼈네. 하지만 자네의 승적(僧籍)을 박탈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여 주게나.”
 혜공선사의 말을 듣던 혜능선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형! 저도 사형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괴로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소제는 이름 없는 무승(武僧)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혜능선사는 사형이자 소림장문인인 혜공선사에게 합장을 한 후 산문을 나와 대별산으로 향했다.
 
 ***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뜨거운 기운은 온 천지를 달구려는 듯 작렬하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엄청난 더위가 지속되고 있었다.
 감숙성에는 오래 전부터 양민들은 물론 무림인들까지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예전에 지옥곡의 총단이 있던 곳이었다.
 무림의 금지가 된 감숙성(甘肅省) 변방(邊方)의 북산(北山) 지옥곡이 있던 곳에는 쓰러진 석탑과 건물이 있던 잔해만 을씨년스럽게 뒹굴고 있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아 이곳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그것들도 더위에 지쳤는지 축축 늘어져 있었다. 인적이 드물기에 이곳에는 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는지 여기저기 짐승들의 굴이 보였다.
 석탑은 무너지기 전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였을 만큼 큰 기단(基壇)만 제대로 있을 뿐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었다. 기단 하부에는 가늘고 긴 금이 잔뜩 있었다.
 사위가 정적에 잠긴 한낮 오후, 조용하던 이곳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덜컥! 덜컥!
 석탑 기단의 금이 점점 벌어지더니 덜컥거리며 열리고,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들 만한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 곧 사람의 머리인 듯한 것이 드러나고, 그곳에서 장발을 흩날리며 회삼(灰衫)을 입은 십오 세 가량의 소년이 귀신처럼 솟구쳐 오르며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뜨렸다.
 소년은 온통 봉두난발이었으며, 의복은 여기저기가 심하게 헤져 있었다.
 “으하하하핫······, 드디어 지옥곡의 모든 무공을 익혔다!”
 소년의 앙천대소에 초목들이 몸서리를 쳤다.
 소년은 눈앞에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선조(先祖)들처럼 실패하지 않겠다. 그들은 정도를 깔보았고, 자신들의 힘을 너무 맹신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나는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태산 무저곡에 가서 수라혈사궁의 궁주였던 사종(邪宗) 초무강의 비급을 찾아내겠다. 그것을 익혀 흩어져 숨어 지내던 사도인들을 규합하여 그 동안 우리를 핍박한 정도 무리를 쓸어버리고 사도의 세상을 이룩하겠다. 크하하하핫······, 천하의 어떤 자라도 내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만들 것이다! 기다려라, 사도인들이여! 내가 사종의 무공을 익혀 다시 세상에 나타나면 온 세상을 핏빛으로 물들일 것이다. 이 드넓은 대지여! 나 백문호(白雯昊)를 기억하라. 사도의 종주 아수라(阿修羅)가 되는 날, 선조들의 한을 풀어 줄 것이며, 영원히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영세군림하게 하리라.’
 소년은 나타났을 때처럼 신비롭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절정의 신법을 익히지 않으면 흉내조차 내기 힘든, 지금은 절전된 경신술인 유령섬뢰비(幽靈閃雷飛)였다.
 그가 사라지자 그가 나타났던 구멍에서 사남일녀의 괴이한 기운을 흘리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마치 해골처럼 깡마른 몸매에 염소 수염을 한 인물은 헐렁한 혈포(血袍)를 걸쳐 더욱 마르게 보였고, 한 명은 너무 비대해 두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꼽추여서 키가 삼 척 정도로 작아 혈포를 땅에 질질 끌고 있었고, 한 명은 구 척 장신에 몸매가 장대하여 입고 있는 혈포가 너무 작아 어른이 아이의 옷을 입은 듯 보였다.
 남자 모두 회갑(回甲)을 넘긴 듯 보였지만, 속살이 훤히 비치는 혈색의 망사의(網絲衣)를 입은 여인은 삼십 전후의 팽팽함을 지니고 있었다.
 깡마른 염소 수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으히히히히······, 사제들! 우리 유령오환사(幽靈五幻邪)의 염원이 이뤄졌구나. 우리가 지난 십오 년 간 그의 성장을 도왔지만, 그가 아수라가 되어 돌아오기 전에 각자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할 것이야.”
 말을 마친 그는 일행을 어디론가 이끌고 사라졌다.
 
 ***
 
 대별산 운무곡 천장애(千丈崖).
 이곳은 천혜의 험지로 소문난 곳이라 약초를 캐는 심마니조차 들 수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천장애는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되어 잡초 무성한 곳이었다.
 천장애는 글자 그대로 깊이가 일천여 장에 달하는 매끈한 절벽이었다.
 자칫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즉시 돌멩이처럼 떨어져 한 줌 혈수로 변하고 말 그런 곳이었다.
 천장애 위에서 내려갈 방도를 모색하던 혜능선사는 품속에 미리 준비하였던 천잠사(天蠶絲)를 굵은 나무 등걸에 매어 놓고 그것을 잡고 조심스레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천장애는 무림의 고수인 혜능선사조차 함부로 내려갈 수 없는 곳이기에 미리 준비하였던 것이다.
 대략 네 시진 정도 걸려 혜능선사는 천장애 밑으로 무사히 내려설 수 있었다.
 그곳의 경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약초로 뒤덮여 있었다.
 혜능선사는 세외선경(世外仙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라 생각했다.
 수목마다 탐스런 과실들을 매달고 있었고, 달콤한 과즙을 뚝뚝 떨어뜨릴 듯한 과실에게선 향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한 줄기 계류는 천장애 밑을 돌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고, 기암괴석들은 수목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뿌려대고 있었다.
 혜능선사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둘러보며 나직이 탄성을 자아냈다.
 “아미타불······,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따로 없군.”
 혜능은 천천히 천장애 밑을 돌아다녔다.
 울창한 수목을 헤치니, 천장애 절벽면에는 여러 개의 동혈이 뚫려 있었다. 그것들 중엔 짐승들의 거처로 보이는 것도 있었으나 유독 한 동굴에서만은 음산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음, 저곳인 모양이군.”
 혜능선사는 마기가 흘러나오는 동혈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목이 무성한 곳을 지나자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들 만큼 좁은 동굴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혜능선사는 몸을 숙여 조심스레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야안공(夜眼功)을 익혀 어둠에는 익숙하였지만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동굴의 안으로 들어가자 점점 넓어져 커다란 광장 같아지더니 급기야 사방의 벽이 사선(斜線)을 그리며 급격하게 다시 좁아지고 있었다.
 동굴의 천장에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종류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한 줄기 계류가 넓게 흐르고 있었다.
 동혈의 밖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종류석에 반사되어 휘황한 아름다움과 함께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동굴의 바닥은 온통 돌인 듯하였으나, 오랜 세월 흘러내린 계류로 인하여 이끼가 잔뜩 끼어 다소 미끌미끌하였다.
 혜능선사가 주변을 둘러보며 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발 밑이 허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갑자기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기관이닷!’
 끄르르릉-!
 혜능선사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광약영술(浮光躍影術)의 신법(身法)으로 일 장쯤 솟구쳐 올랐다.
 동혈 밖에서 느낀 강렬한 마기를 보았을 때 뭔가 안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방에서 쇠털처럼 가느다란 독침(毒針)들이 전신 요혈을 겨냥하며 섬전처럼 쇄도해 왔다. 독침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혜능선사의 전신 삼백육십 대혈을 향하여 정확히 폭사되어 왔던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 기관을 설치할 때에 기관 발동과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을 공중으로 띄울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한 모양이었다.
 웬만한 경신술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악랄한 안배였다.
 “챠아앗-!”
 혜능선사는 이미 금강불괴를 이루었지만 감히 태만할 수 없어 기합과 함께 입고 있던 가사에 호신강기(護身?氣)를 유포시켜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소매로 독침들을 모조리 퉁겨낸 후, 십 장의 거리를 날아 사뿐히 지면에 내려섰다.
 외가기공인 철포삼(鐵袍衫)이나 금종조(金鐘槽)와는 차원이 다른 상승의 외가기공이었다.
 타탕! 타타타탕!
 “휴우, 지독한 안배였다.”
 독침들이 떨어진 곳에서는 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바위를 녹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독한 절독(絶毒)이 발라져 있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내려선 혜능은 이번엔 발을 떼지 않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현재 있는 곳은 넓었으나 안으로 들어갈 수록 좁아졌다.
 안력을 높여 자세히 살피니, 오십여 장 정도 떨어진 전면의 작은 암굴(巖窟)에서 지독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기관이 없나를 살피며 조심스레 암굴로 들어간 혜능선사는 삭아서 주저앉은 인골과 철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암굴의 끝 부분 벽에는 삭아서 녹이 분말로 부서져 내리는 검의 손잡이만 있는 것으로 보아, 검이 벽 속으로 박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혜능선사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검을 뽑아내지 않았다.
 녹이 슬 대로 슨 철궤는 너무도 쉽게 열렸다.
 철궤의 안에는 헤진 낡은 비급(秘?) 한 권만 달랑 있었다.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삭아 있는 이 비급의 겉장에는 이제 너무도 오래되어 희미하게 보이는 ‘혈마진경(血魔眞經)’이란 표제가 쓰여 있었다.
 “아미타불······, 마지막으로 이것의 마기만 제거하여 정도 무학으로 변모시키면 앞으로 내가 할 일이 없겠구나.”
 혜능선사는 그 자리에서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한 후 혈마진경의 무공을 익히기 시작하여 어느덧 삼매경(三昧境)에 빠졌다.
 칠 주야가 지났지만 혜능선사는 마치 돌부처라도 된 듯 제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혈마진경상의 마공을 익히고 있었다.
 혜능선사가 이렇게 마기에 빠지지 않고 마공을 익힐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금강항마신공(金剛降魔神功) 때문이었다.
 금강항마신공의 구결을 되뇌는 동안에는 결코 마기나 사기에 침범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혜능선사가 혈마진경을 익히는 이유는, 먼저 혈마진경의 마공을 정확히 알아야 마기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식음도 전폐한 혜능선사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보였다.
 혜능선사는 어느덧 혈마진경 후반부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동굴 밖에는 무더운 늦여름을 마감하는 시원한 소나기가 뇌성벽력과 함께 퍼붓기 시작하였다.
 꾸르르릉! 꽈과꽝!
 하늘이 노했는지 엄청난 굉음과 함께 소나기가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혜능선사는 밖에서 들려오는 뇌성벽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혈마진경의 후반부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때 동굴 앞의 기암괴석에 뇌전(雷電)이 떨어지더니 뇌성(雷聲)과 함께 동굴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동굴 바닥에 흐르던 계류는 뇌전의 전도체(傳導體)가 되어 독서삼매에 빠진 혜능선사에게 그야말로 섬전처럼 쇄도해 갔다.
 또한 엄청난 벽력성은 좁은 입구를 통하여 들어오다 넓은 광장에서 증폭되더니 다시 좁은 동혈로 모아지면서 곧장 혜능선사의 고막을 때리게 되었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혜능선사는 아무런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지라 뇌전과 벽력성에 격중당하자 신형이 펄쩍 튀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으아악······!”
 털썩!
 혜능선사는 뇌전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화상을 입었는지 피부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며, 내상을 입었는지 한 덩어리 선혈을 토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의 고막은 엄청난 벽력성으로 인하여 손상을 입었는지 그의 두 귀는 물론 칠공(七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끄으으응······!”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혜능선사가 힘겹게 눈을 뜨자, 그리도 맑던 혜안(慧眼)이 흉악한 마기로 가득한 혈광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칠공(七孔)에서 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은 흡사 흉신악살(凶神惡煞), 그 자체였다.
 혜능선사는 혈마진경의 마공을 거의 대부분 익혀 이제 마지막 단계에 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뇌전과 벽력성으로 인하여 주화입마와 비슷한 상태가 됨과 동시에 그의 뇌가 온통 흉악한 마성에 젖어 버렸던 것이다.
 “캬캬캬······!”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혜능선사는 붉게 물든 혈안(血眼)을 부릅뜨고 입고 있던 가사(袈裟)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순식간에 동굴 밖으로 튀어나온 혜능선사는 천장애 위로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으로 솟구쳐 올랐다.
 작금에 십 갑자의 내공(內功)을 가진 무림인은 혜능선사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공력으로도 감히 천장애를 단번에 뛰어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뇌전과 벽력성으로 인하여 체내의 모든 잠력까지 격발된 혜능선사에게 그것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현재 혜능선사는 거의 천신(天神)에 가까운 능력을 일시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었다.
 “크하하핫······.”
 천장애 위에 오른 혜능선사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대별산 정상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명망 높은 소림의 고승이 마기에 젖어 혹시 천하를 선혈로 물들이지 않을까 걱정되는 모습이었다.
 
 ***
 
 안휘성(安徽省) 남쪽에 위치한 황산(黃山)의 마곡(魔谷).
 정도의 위세에 눌려 흩어 지내던 마도인들이 언제부터인지 서로 의지하려 하나둘씩 마곡에 모이기 시작했다.
 마곡은 천혜의 험지로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운무도 넘지 못하여 늘 자욱한 운무 속에 있는 마곡은 곡 위에서 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고, 간간이 괴성(怪聲)이 들려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양민들이 마곡을 귀곡(鬼谷)이라고도 불렀다.
 막연히 무언가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거나, 아니면 인세에 발붙일 수 없는 귀신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였던 때문이다.
 마도인은 강(强)을 추종하는 무리인지라 그들은 그곳에서도 아귀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백여 년 전, 사도인들에게 멸망한 혈마성의 호법이었던 마라존자(魔羅尊子) 제연뢰(諸連雷)의 이십육대 손(孫)인 광심수라(狂心修羅) 제운비(諸雲飛)가 나타났다.
 그는 아귀다툼하는 마도인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보(堡)를 만든 후 마라혈마보(魔羅血魔堡)라 칭하고 무공의 순위에 따라 지위를 결정했다.
 강한 것을 추구하는 마도인들에게 강력한 절대자가 나타나고 무공의 순위에 따라 직위가 결정되자, 그들은 아귀 다툼을 멈추고 제운비를 중심으로 단합되었다.
 마곡 안에 대역사가 벌어졌으며,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지어지고, 대전각(大殿閣)들이 지어졌다.
 덕분에 황산 부근에 살던 도편수나 목수는 물론 수많은 양민들이 실종하는 사건이 심심지 않게 벌어졌다.
 삼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마라혈마보는 말이 보(堡)라 불릴 뿐이지 커다란 성(城)이나 다름없었다.
 외곽엔 성곽을 높이 쌓고, 성곽 주위로는 깊디깊은 해자(垓字)를 파고 독수(毒水)로 가득 채웠다. 또한 성곽 곳곳에 온갖 기관을 설치하여 가히 나는 새도 범접치 못할 철옹성(鐵甕城)이라 할 만했다.
 현재 무림에 가장 강한 마도 집단을 손꼽으라면 누구나 수라혈마보를 입에 올린다. 하지만 천하인들 가운데 누구도 마라혈마보가 황산 마곡에 있다는 것은 몰랐다.
 마도인들이 워낙 은밀히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라혈마보의 보주 광심수라 제운비는 지존전(至尊殿)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이십오 년 전, 아이를 낳다 죽은 자신의 아내를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 당신 생각이 오늘은 더욱더 간절하구려. 당신이 떠난 후 불면 날세라, 만지면 터질세라 아끼던 진아(珍兒)가 이 년 전에 강호를 유람한다며 보에서 나갔다가 사라져 지금 생사조차 알 수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이 모든 게 내 탓이오.”
 제운비가 술잔을 기울이며 창문을 통해 야천(夜天)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는데, 문득 야천의 별 하나가 밝아지는 듯하였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 동안 미동도 않던 마황성(魔皇星)이 점점 더 황색으로 물들며 서북쪽으로 마치 유성처럼 흐르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지금껏 회한에 젖어 밤하늘을 쳐다보던 제운비는 갑자기 격동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 마도인들이여, 경배하라! 마황(魔皇)의 탄생이 다가왔다! 그 동안 우리를 업신여긴 정도의 무리가 그분의 탄생을 막기 전에 우리가 그분을 보호해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구심점(求心點)이 될 만한 절대자(絶對者)가 없었기 때문에 정도의 위세에 눌려 힘을 모으지 못하고 흩어져 지내 왔지만, 이젠 다르다. 마도의 피 맺힌 한을 풀 때가 온 것이다.”
 제운비는 마황성이 흐르는 방향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잠력(潛力)을 폭발시키며 사라졌다.
 지존각에는 광심수라가 기울이던 술병과 술잔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호북성(湖北省) 무당산(武當山)에 위치한 무당파(武當派)는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태산북두로 지칭되는 유서 깊은 문파이다.
 조사인 장삼풍 진인(眞人)이 개파한 이래 무당파는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늘 정파의 중심에 있었다.
 제운비가 어디론가 사라지던 그 시각, 무당의 장문인인 청송진인(淸松眞人) 적염후(赤閻珝)가 야경(夜景)을 보며 산책하다가 마황성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 탄식을 하였다.
 “아, 아니! 마황성이······? 으으음, 큰일이다. 혈겁의 조짐이······.”
 하지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지금까지 요지부동이던 자미성(紫微星)과 천강성(天?星) 또한 밝아지며 동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찌푸렸던 인상을 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그러면 그렇지!”
 청송진인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에게 전서구(傳書鳩)를 띄우고 의발전인(衣鉢傳人)인 운학도장(雲鶴道長)과 제자 몇을 데리고 대별산 쪽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청송진인의 일련의 행동은 무당파의 장로들조차 알 수 없었다. 자칫 천기를 누설하여 모든 일이 공염불이 될 수 있다 생각한 때문이었다.
 나머지 팔파일방도 마찬가지였다. 청송진인이 은밀히 보낸 서찰을 받아 본 장문인들은 서둘러 서찰을 삼매진화로 태운 뒤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구파일방에서는 장문인들이 일제히 사라지자 그들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다.
 
 대별산에는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이 있었다. 워낙 산세가 넓고 깊어 지금까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계곡이 많았던 탓이다.
 뇌곡(雷谷)이라 이름 붙은 계곡의 뒤쪽에는 제법 넓고 평탄한 분지(盆地)가 있었다. 분지 한쪽에는 아담한 모옥(茅屋)이 한 채 있었다.
 모옥 주변엔 정갈하게 손질된 정원이 있었고, 정원엔 인세에서는 보기 힘든 온갖 기화이초들과 영초(靈草)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피어 있었다. 모옥의 뒤로는 울창한 죽림이 있었고, 전면으로는 계류가 졸졸 흐르고 있어 신선들이 노닌다는 도원경(桃源境)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담한 모옥 안에서는 여인의 다급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아악! 용랑(龍郞)! 아기가, 아기가······ 나오려나 봐요.”
 침상엔 산고(産苦)에 지치고 얼굴이 부었지만 산골 외딴집의 평범한 아낙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절세미부(絶世美婦)가 아기를 낳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용랑! 전 당신 닮은 아들을 낳고 싶어요.”
 곁에 있던 삼십 세 정도의 건장한 몸매의 사내가 있었다.
 여인의 남편인 듯한 사내는 우뚝한 코에 굳게 다문 입술을 지닌 헌앙한 장부의 모습이었다.
 부리부리한 호안(虎眼)에서는 정광(正光)이 흘러넘쳤고, 시커먼 구레나룻과 각진 턱은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사내는 누워 있는 여인의 손을 잡고 태산만큼 부풀어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매! 나는 당신이 당신처럼 아름다운 딸이 태어났으면 좋겠소. 우리 둘 다를 닮은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면 더욱 좋고.”
 사내는 고뇌 어린 표정으로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정도의 촉망을 받던 철혈협객(鐵血俠客) 사마룡(司馬龍)! 당신은 마도제일화(魔道第一花) 암향연화(暗香蓮花) 제려진(諸麗珍)! 우리가 비록 야반도주(夜半徒走)하여 소위 남들이 말하는 정마간(正魔間)의 불륜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모든 속세의 인연을 끊고 같이 살게 된 것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믿고 아끼며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겠소? 이제 우리의 자식이 태어나 자라나면 정(正)과 마(魔) 사이에서 혼란을 겪을 테니, 난 그것이 걱정되오. 우리의 신분을 감추고 평생 이곳에서 화목하게 지냅시다.”
 침상에 누워 있던 여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용랑(龍郞)! 당신이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잘 알고있어요. 하지만 아버님께 말씀 못 드리고 떠나온 것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요. 아기가 태어나면 아버님도 용서해 주시겠죠?”
 사마룡이 한숨을 푹 쉬고는 밖을 내다보며 조금 전까지 쏟아지던 소나기가 그치고 별빛이 총총하다며 딴청을 피웠다.
 제려진은 한 번만이라도 부모님을 뵙고 싶다고 하더니, 갑자기 배를 잡고 산고가 너무 심해 죽을 것 같다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아악! 흐아악······!”
 전신에 흐르는 땀에 젖어 누워 있던 여인이 말했다.
 “용랑! 절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님처럼 제가 죽으면 당신과 아기는 어떻게 될지······.”
 “진매! 그런 말일랑 하지도 마시오. 당신은 무사히 아이를 출산할 수 있을 것이오.”
 사내가 손을 더욱더 꼭 잡아 주자 여인은 조금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갑자기 야천(夜天)에 흩어져 있던 마황성, 자미성, 천강성, 세 개의 별이 서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모이는 기현상(奇現象)이 벌어졌다.
 세 개의 별이 한자리로 모이더니 갑자기 제각기 다른 빛을 모옥에 비추기 시작했다. 찬란한 성광(星光)이 모옥을 비추는 모습은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모옥 안에 있던 두 남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잠시 비명을 지르는 여인을 달래기 위하여 사내가 시선을 맞춘 채 손을 잡고 있는 사이, 기묘한 빛이 여인의 배 위에 비추고 있었다.
 청황자(靑黃紫), 삼색의 광선은 여인의 배를 뚫고 들어가려는 듯 강하게 비춰졌다.
 출산이 가까웠는지 여인은 쉴새없이 비명을 질렀고, 사내는 그런 여인의 안타까운 모습에 쉴새없이 격려의 말을 던지느라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아! 아아아!”
 “진매! 조, 조금만 참으시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아기가 나올 것이오.”
 제려진이 너무도 엄청난 산고에 촌각(寸刻)의 시간이 억겁(億劫)으로 느낄 때쯤 아기의 머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아악! 나, 나와요! 용랑! 아기가 나와요!”
 사내는 깜짝 놀라며 시선을 돌려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아기를 보았다. 어느새 여인의 배에 비추던 휘황한 삼색 빛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잠시 후 아기의 몸이 완전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사마룡이 아기를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깜짝 놀란 사마룡이 아기를 바라보자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기가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산고 끝에 아기를 낳은 제려진은 힘없는 목소리로 사마룡에게 물었다.
 “용랑! 우리······, 아기가 사내예요? 아니면······.”
 “으하하하······, 우리 둘을 꼭 빼닮은 사내 아기라오! 정말 수고하시었소. 당신을 사랑하오.”
 제려진은 새침한 모습으로 말했다.
 “흥! 당신은 내심 아들을 바랐으면서 저에게는 딸을 원한다고 말했군요? 아이의 이름은 지었나요?”
 사마룡이 기쁨에 흥겨워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당신이 아들을 낳을 줄 알고 사마린(司馬麟)이라 지어 놓고 모옥 앞에 있는 커다란 암석에 당신과 나,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오.”
 사마룡은 아기를 침상에 누워 있는 제려진 옆에 눕히며 말했다.
 “자, 우리 잘생긴 아들의 모습을 보시오.”
 제려진이 아기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자, 아기가 눈을 스르르 뜨고 빙긋이 미소를 보이는데······ 이게 웬일인가?
 아기의 한쪽 눈은 자색(紫色), 다른 눈은 황색(黃色), 그리고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청색(靑色) 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랑! 아기가 이상해요.”
 사마룡이 아기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앗! 전, 전설에만 있다던 삼극혼원신체(三極混元身體)가 현세에, 그것도 우리 아기가 그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다니······. 우리가 천복(天福)을 받은 모양이오.”
 그들이 기쁨에 겨워하고 있을 때, 밖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크흐흐흐······, 피 내음이 나는구나!”
 제려진과 사마룡은 느닷없이 들려온 괴성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이곳에 외인이 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싸인 제려진이 아기를 감싸안자, 사마룡은 자신의 애검(愛劍)을 뽑아 들고 황급히 모옥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자 의복도 없이 칠공에 피를 흘려 흉신악살의 모습을 한 괴인이 야공에서 천층답공술(千層踏空術)을 시전하며 나타났다.
 사마룡이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에 계인(契印)을 한 승려였다.
 사마룡은 자신의 애검을 천중(天中)의 위치로 가져가 철혈단양검법(鐵血斷陽劍法)의 기수식을 취하며 소리쳤다.
 “대사! 무슨 일로 나의 집을 방문하였는지 몰라도, 내가 좋게 말할 때 그만 물러가시오.”
 괴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사마룡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흐흐······, 모든 것을 소멸시키겠다."
 다가오던 괴인은 갑자기 양손을 합장했다가 떼며 사마룡을 공격했다.
 “천마탄강(天魔彈?)-!”
 고오오오오-!
 괴인의 손에서 나온 강기는 어른의 허리 굵기로 발출되며 사마룡을 향해 섬전처럼 폭사되어 갔다.
 사마룡은 상대가 다쳤지만 그래도 승려의 모습이라 방심을 하다가 마공을 쓰자 깜짝 놀라 신형을 띄워 이동하면서 철혈단양검법의 제일초 철혈무적(鐵血無敵)을 시전하였다.
 그러자 일 장 정도의 검강(劍?)이 쏘아졌다.
 쉬이이이익-!
 콰광! 콰과광!
 강기(?氣)와 검강(劍?)이 부딪치자 폭음이 터졌다.
 제려진과 은거하기 전에 무림의 일절로 손꼽히던 검법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사마룡은 그 충격으로 인해 오 장이나 날아가 거칠게 떨어지고 말았다.
 “으으윽······!”
 아무리 정도에서 촉망을 받던 후기지수였다 하더라도 사마룡의 내공수위는 이 갑자였을 뿐, 상대의 막강한 강기를 막을 수는 없었기에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뒤틀어지고 입으로는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가까이 다가온 괴인은 한 손으로 사마룡의 검을 부러뜨리고 그의 머리를 향해 마라탄강지(魔羅彈?指)을 쏘아냈다.
 슈우욱-!
 퍼퍽!
 사마룡은 피할 힘도 없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만 볼 뿐 머리에 정통으로 괴인이 펼친 지공을 맞았다.
 “으아악······!”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변변한 반항조차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개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사마룡의 비명 소리에 놀란 제려진은 산고의 아픔을 잊은 채 아기를 침상 밑에 숨겼다.
 침상 밑에는 그 동안 채취한 약초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파놓은 작은 동혈이 있었다.
 무림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연검(軟劍)을 부여잡고 모옥 밖으로 나온 제려진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남편을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제려진은 아직 하혈이 멈추지 않아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부군이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신을 보자 봉목(鳳目)에서 혈루(血淚)가 쏟아져 나왔다.
 “아악! 용랑!”
 제려진은 앞에 있는 괴인이 부군을 죽였음을 직감하고 자신이 수련한 검법 중 완전히 익히지는 못했지만 제일 강한 검법을 시전하며 쇄도해 갔다.
 “마라뇌천섬(魔羅雷天閃)-!”
 쐐에에엑-!
 제려진의 검에서는 삼엄한 마기가 쏟아지는 날카로운 검세가 펄쳐졌다. 하지만 아직은 빈틈이 많은 그런 검세였다.
 괴인은 제려진의 검법이 완벽하지 못한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어기부운(御氣浮雲)의 신법으로 간단히 피하며 반격을 했다.
 “반천회선지(半天回旋指)-!”
 슈우우욱-!
 제려진은 자신의 연검이 허공을 베자 연검을 몸에 둘러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도대체 상대의 지공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퍼어억!
 괴인의 일지를 배꼽 아래 일촌오푼(一寸 五分)에 위치한 기해혈에 정통으로 맞은 제려진은 온몸의 힘이 빠지며 쓰러졌다.
 “아아악······!”
 괴인이 다가와 제려진의 마혈과 아혈, 그리고 혼혈을 짚었다.
 “흐흐흐······, 참으로 미색(美色)이로구나!”
 괴인은 꿀꺽 삼키며 제려진의 옷을 벗겨 버렸다.
 제려진은 기해혈이 제압당하여 지니고 있던 전 내공이 사라짐과 동시에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해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발가벗겨진 제려진은 아기를 갓 낳은 몸이었지만 탄력 있고 매끈한 피부에 가슴의 설봉(雪峰)은 작은 수박을 반 갈라놓은 것처럼 커서 농염미(濃艶美)의 극치를 이뤘다.
 괴인은 누워 있는 제려진의 육체에 취한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괴인은 제려진의 설봉을 입에 넣고 혀와 이빨로 희롱하다가 이미 철주(鐵柱)로 변한 자신의 하물을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의 비궁(秘宮)에 비벼대기 시작했다.
 제려진은 괴인이 부군을 죽인 후 자신을 겁간하려 한다는 생각에 혈루를 쏟았으나 전혀 반항할 수 없음에 원독에 찬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다가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잠시 혼절하였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괴인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급급한 표정이었다.
 괴인은 남녀의 음양교합을 잘 모르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하물이 비궁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흠칫 놀랐다.
 하혈을 멈추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괴인은 교합이 이루어지자 제려진의 혼혈과 아혈을 풀어 주고 천천히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돌아온 제려진은 괴인이 자신의 몸에 올라타 자신의 정조를 더럽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비켜, 이 더러운 악마야!”
 괴인을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쓰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자,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되어 혀를 물고 자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괴인은 아혈을 제압한 후 조금씩 더 거세게 움직였다.
 아기를 갓 낳은 몸인지라 제려진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잔뜩 아미를 찌푸리며 혈루를 흘리고 있었다.
 괴인은 절정에 이르자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키자 제려진은 세상을 원망하며 비록 아혈이 막혔지만 자결을 하기 위해 혀를 깨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괴인은 만족한 듯 죽어 가고 있는 제려진의 가슴에 일장을 가했다.
 퍼펑!
 “······!”
 제려진은 아혈이 제압당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응애! 응애!”
 이때 침상 밑에 있던 아이가 자신의 부모가 죽은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태어나면서도 울지 않던 고고성(呱呱聲)을 터뜨렸다.
 괴인은 소리가 나는 모옥 안으로 들어가 침상 밑의 아기를 찾아내었고, 귀찮은 듯 아이의 정수리를 향해 무지막지한 일 장을 때리려 할 때 아이가 방긋 웃자 멈칫했다. 괴인의 눈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깨끗한 아기의 웃음이 흡사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웃음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기를 죽이려 쳐들었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인은 몹시도 고통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으윽! 대,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모옥 안을 둘러보던 괴인은 모옥 안에 자신과 방금 태어난 듯한 아기가 있을 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허연 뇌수를 흘리며 죽어 있는 사내와 발가벗겨져 욕을 본 미부의 시신을 본 괴인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이 행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미타불······!”
 괴인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미타불! 나 혜능(慧能)은 그 동안 온갖 정사마의 무공을 익혔지만 석가세존의 뜻에 따라 단 한 번도 살생을 저지른 적이 없었는데, 여인을 강간하고 살생을 저지르다니······. 아아!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구나.”
 참사를 벌인 괴인은 바로 소림의 장경각주인 혜능선사였다.
 혜능은 소림사 쪽으로 몸을 돌려 합장을 하며 말했다.
 ‘사형! 불가에 귀의하여 지금까지 제 자신에게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는데, 이제 제게 소림사와의 인연이 다 된 것 같습니다. 못난 사제는 저승으로 가서 이곳에서 죽은 부부의 한을 풀어 줘야겠습니다.’
 혜능이 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를 향해 장력을 발출하려 하자 모옥 안에서 다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애! 응애!”
 혜능은 자신의 천령개로 향하던 손을 늘어뜨리고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휴우! 대체 이 아이를 어쩐단 말이냐? 이곳에 이대로 놔둔다면 짐승의 밥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죽음으로써 속죄하는 일은 이 아이를 키워 장성한 다음으로 미뤄야 하겠구나.’
 혜능은 침상에 있던 포대기로 아이를 감싸안고 모옥 밖으로 나와 젊은 부부의 시신을 그들의 애검과 함께 봉분을 만들어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빈승의 업보는 이 아이를 장성시킨 후 갚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길······.”
 돌아서는 혜능선사의 눈에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보였다. 그곳에는 사마룡과 제려진의 성명 아래 사마린이라 쓰여 있었다.
 “아미타불! 사마린(司馬麟)이라······.”
 혜능선사는 어린 사마린을 품에 안은 채 허공으로 솟구쳤다.
 
 
 제2장 예견된 오해
 
 
 황산(黃山)에서 마황성(魔皇星)이 흐르는 방향으로 신형을 날리던 마라혈마보의 보주 제운비는 장강(長江)에 도착하여 도강(渡江)하느라 공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야천을 보니 마황성이 흐르는 것을 멈추고, 정지하여 황색빛을 강하게 비추더니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아니, 벌써? 으으······, 늦으면 안 된다!”
 제운비는 혼신의 공력으로 마황성이 있는 곳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경공술 중 최고를 발휘하여 정신없이 달렸다.
 악서현(岳西縣)을 지날 때쯤 마황성이 대별산에 머무른다는 것을 알게 된 제운비는 서둘러 그쪽으로 향했다.
 황산에서 대별산까지의 거리는 일천이백 리에 달했다.
 제운비의 공력은 육 갑자였지만 쉬지 않고 일천이백 리를 달리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는지 산을 오를 때는 몹시 지쳐 거의 탈진한 모습이었다.
 마황성의 빛이 이미 흐려 있어 정기를 받던 곳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힘들게 되자 제운비는 대별산의 정상에 올라 마황성이 떠 있는 바로 아래로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갔다.
 뇌곡을 넘자 제운비는 근처에 인가라고는 모옥 한 채만 있을 뿐 다른 인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곳에서 마황성의 정기를 받은 아이가 태어났을 것이라 믿고 기쁜 마음으로 다가갔다.
 “으하하하······, 드디어 마황께서 탄생하셨다.”
 그러나 모옥에서는 희미한 등잔 불빛만 새어나올 뿐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둘러 모옥 앞에 달려간 제운비는 모옥의 문을 잡아뜯을 듯 열어제꼈다.
 모옥 안에는 나무로 만든 가구와 조금 전 아기를 출산하여 혈흔이 있는 침상만이 객을 반겼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모옥 밖으로 나온 제운비는 그제야 방금 만들어진 봉분(封墳) 하나를 발견했다.
 봉분으로 다가간 제운비는 그곳의 바위에서 그토록 애를 태우며 찾던 자신의 딸의 이름을 발견했다.
 ‘흐으음······, 설마 동명이인(同名異人)이겠지.’
 다급한 마음에 고인(故人)의 명복을 빌기도 전에 봉분을 파헤친 그는 시신 두 구가 반듯하게 눕혀져 있고, 시신들의 배 위에 그들의 검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저, 저 검은 진아(珍兒)의 십오 세 생일날 내가 선물로 주었던 은하연검(銀河軟劍)이 아닌가!’
 놀란 제운비가 여인의 시신을 자세히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진, 진아가······ 죽다니······.”
 아직 식지도 않은 여인의 시신은 겁간을 당했는지 아이를 출산한 비궁에서 피와 허연 정액이 엉겨 있었고, 가슴에 강력한 장력을 맞았는지 가슴이 완전히 부서져 버린 여인의 시신을 보던 제운비는 잠시 혼절했다.
 혼절했다가 깨어난 제운비는 여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흑······, 진아야! 반드시 너의 원수를 찾아내어 그 놈의 사지를 찢고 온갖 고통을 느끼게 하여 네가 죽을 때 느꼈던 고통과 공포를 백 배, 천 배 갚아 주마.”
 한참 흐느끼던 제운비가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자 딸의 시신을 내려놓고 남자의 시신을 살폈다.
 지풍에 맞아 두개골이 박살이 난 머리에는 선혈과 뇌수가 엉겨 있었고, 칠공에도 혈흔이 있었으며, 오장육부가 모조리 뒤틀려 있는 것이 엄청난 강기(?氣)에 휘말린 듯 보였다.
 다시 바위에 적혀 있는 사마룡(司馬龍)이란 인물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던 제운비는 그가 정도무림에서 위명(威名)을 떨치던 철혈협객(鐵血俠客)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흥! 감히 정도무림의 후기지수(後起之秀)라는 놈이 내 딸을 부추겨 이런 꼴을 보게 하다니! 앞으로 수라혈마보의 모든 힘을 기울여 정도무림의 후기지수들을 척살하겠다.”
 제운비는 딸의 죽음이 정도무림 때문이라는 듯 몹시도 흥분된 모습이었다.
 그것도 잠시, 제운비는 정신을 차려 바위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손주 사마린(司馬麟)을 찾아보려고 봉분을 더 파 보았지만 아기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어느 놈이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아이는 사라지고 진아와 저 놈을 이토록 처참히 해치다니······!’
 제운비는 자신의 딸을 해친 흉수(兇手)가 남긴 단서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모옥 안과 밖을 아무리 찾아봐도 흉수가 남긴 단서는 실 한 오라기도 찾을 수 없었다. 하긴 혜능선사가 이곳을 왔을 때 나신(裸身)으로 왔으니,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제운비는 시신에서 단서를 찾기 위해 시신의 상처 부위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들을 하나씩 비교하며 과연 이러한 상처를 남길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제운비는 죽은 딸의 시신의 상처가 반천회선지(半天回旋指)에 당한 것을 알고 그것을 시전할 줄 아는 무림인을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 무림에서 반천회선지법을 쓰는 무림인이 없자 사내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시신의 머리의 상처를 바라보던 제운비는 경악하였다. 시신의 두개골에는 흡사 보검으로 자른 것처럼 엄지손가락 굵기의 완전한 원형의 구멍이 깨끗하게 절단돼 있었고, 부서진 두개골의 잔해는 고운 분말로 변해 뇌수와 함께 엉겨 있었다.
 ‘아, 아니! 마라탄강지(魔羅彈?指)의 상흔이라니! 현 무림에서 이 지법을 사용하는 이는 나밖에 없고, 설사 내가 발출한 지법도 이 정도로 두개골을 완벽히 부숴 놓을 수가 없는데······, 대체 누가 이 지법을 사용한단 말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제운비는 시신의 가슴 상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살펴봐도 정도나 사도의 무공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연마한 마공(魔功) 중에도 이렇게 강력한 강기를 발출하여 보내는 장법이 없는데······. 혹시 전대(前代)에 실전된 천마(天魔)나 혈마(血魔)의 마공이 아닐까? 아무래도 흉수는 각기 다른 무공을 사용하는 세 명 이상의 인물일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위력의 무공을 가졌단 말인가? 제일 공력이 높은 혜능조차도 십 갑자뿐이거늘, 누가 그 이상의 공력을 지녔는지 알 수가 없구나.’
 
 ***
 
 무당산(武當山)을 하산한 장문인 청송진인(淸松眞人)과 그 일행은 자미성(紫微星)과 천강성(天?星)이 모여 있는 위치를 향해 쉬지 않고 향했다.
 이윽고 대별산에 도착한 일행은 뇌곡의 곡구(谷口)에 도착하자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덧 여명(黎明)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짙은 안개에 곡의 전경이 희미하게 보였다.
 멀리 모옥이 보이자 청송진인은 제자들을 독려하고 제일 먼저 모옥에 다가서는데, 모옥 앞 어느 괴인이 봉분을 파놓고 시신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청송진인은 그가 그들을 해친 것이라 생각하고 말했다.
 “무량수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제운비는 시신을 살피느라 누가 다가오는지 몰랐다가 갑자기 말이 들려와 뒤돌아보니 무당파의 노도사가 서 있었다.
 “흥! 냄새나는 도사가 여긴 웬일로 왔소? 본인의 심사가 몹시 좋지 않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청송진인은 괴인의 말을 듣고 그가 흉수(兇手)라고 단정하고 그에게 다가섰다.
 “무량수불······, 상종을 말아야 할 흉수로다.”
 도인이 자신을 향해 흉수라고 하며 다가오자 격분한 제운비는 신형을 틀어 올리며 쌍장(雙掌)을 출수(出手)했다.
 “마라쇄심장(魔羅碎心掌)-!”
 슈우우욱-!
 괴인이 쌍장을 휘두르자 강맹한 강기가 휘몰아치며 청송진인에게 쏟아졌다.
 청송진인은 괴인이 갑자기 출수하자 황급히 신법을 펼쳤다.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청송진인이 몸을 허공에 띄우자 발 밑으로 강기가 빠져나가며 뒤에 서 있는 나무에 정통으로 부딪쳤다.
 꽈과광!
 강기에 맞은 나무는 마치 폭발하듯 부셔져 버렸다. 그저 막연히 괴인이 악행(惡行)을 한 흉수라 단정했던 청송진인은 그제야 상대가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라는 것을 짐작하고 자신의 장을 내밀었다.
 “태극신장(太極神掌)-!”
 쉬이이잉-!
 제운비는 자신의 장력이면 충분히 냄새나는 도사를 떠나게 할 것이라 믿었는데, 도사가 몸을 띄워 피하며 자신에게 장력을 발출하자 이번엔 더 강력한 장력으로 맞받아 쳤다.
 “마라천붕장(魔羅天崩掌)-!”
 쐐에에엑-!
 청송진인의 장과 괴인의 장이 그들의 중간 지점에서 격돌했다.
 꽈과과광!
 “으윽!”
 청송진인은 자신의 절기(絶技) 중 가장 자신이 있는 장법(掌法)을 믿었기에 장으로 상대를 했건만 장(掌)을 타고 올라오는 괴인의 장력에 기혈이 뒤틀려 입으로 피를 한 움큼 토하며 뒤로 이 장(丈)이나 물러났다.
 그때 청송진인을 뒤따르던 운학도장(雲鶴道長)이 그의 몸을 부축했다. 운학도장은 청송진인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그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청송진인은 아무 말 없이 괴인을 바라보더니,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여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
 괴인은 단지 삼 보만 물러났을 뿐 내상을 입지는 않아 보였다.
 “크하하하! 내 그러기에 물러가라고 했건만 냄새나는 도사 나부랭이가 내 앞을 막다니, 그 꼴이 될 수밖에 없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곳을 떠나라.”
 분노한 운학도장이 제자들에게 명했다.
 “오행검진(五行劍陣)을 펼쳐라!”
 제자들 중 무공이 고강한 넷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이며 운학도장과 함께 검을 뽑았다.
 차차창!
 제운비는 검을 뽑아 든 무당의 제자들이 자신의 몸 주위를 둘러싸자 등뒤의 마라혈도(魔羅血刀)를 뽑으며 말했다.
 스르르릉!
 도를 오른손으로 가슴의 높이로 수직으로 세우고, 왼손은 언제라도 출수하기 위해 손을 펴서 옆구리에 붙였으며, 왼발은 오른발보다 반 보 정도 내딛자 완전한 수비의 자세가 되었다.
 “으하하하, 소위 정파를 대표한다는 무당파가 본인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떼로 덤비다니······, 우습군.”
 사실 제운비는 황산에서 대별산까지 쉬지도 못하고 와서 육 갑자의 전신 공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고, 사랑하던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후 청송진인과의 대결에서도 마공(魔功)으로 우위를 점했을 뿐 기력이 거의 고갈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세(現世) 마도의 종주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을 피할 수 없었다.
 무당파의 오행검진은 공수의 완전함으로 무림의 일절로 불리는 만큼 제운비는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운학도장이 먼저 그의 도를 든 손목을 향해 자신의 검을 내리쳤다.
 휘이익!
 제운비는 손목을 향하는 검에 자신의 도를 사선으로 내리쳤지만 운학도장은 검을 회수하여 그의 다리를 찔러 왔고, 나머지 네 명도 동시에 그의 사지와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들을 모두 쳐낼 수가 없었던 제운비는 신형을 이 장(丈) 정도 뽑아 올리며 마라쾌섬신법(魔羅快閃身法)으로 옆으로 오 장을 날아 진 밖으로 몸을 빼냈다.
 “크하하하······, 감히 본좌 광심수라(狂心修羅) 제운비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내 너희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 주마.”
 제운비는 마라쾌섬신법으로 진세의 우두머리인 운학도장에게 다가서며 그를 두 동강이라도 낼 듯 수직으로 도를 내리쳤다.
 “마라혈전도(魔羅血電刀)-!”
 위이이잉-!
 마라혈도에서는 붉은 혈색의 도강(刀?)이 일 장 정도 뻗치며 그를 향해 몰아쳐 갔다.
 오행검진을 펼치던 운학도장과 무당의 제자들은 그가 너무도 쉽게 오행검진을 빠져나가는 것도 기가 막힐 지경인데, 운학도장에게 도법을 펼치자 다시 오행검진의 진세를 갖추지도 못하고 운학도장의 좌우 옆으로 모여들며 그를 보호하려 했다.
 “태극검법(太極劍法)-!”
 쉬이이이익-!
 운학도장은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치는 도를 막기 위해 검을 들었고, 나머지 제자들은 제운비를 향해 검법을 펼쳤다.
 제운비는 수직으로 내려치려던 도의 방향을 틀어 수평으로 바꾸어 그들의 검과 부딪쳤다.
 까가가가강-!
 “으아악······!”
 도와 네 자루의 검이 부딪치자 검들은 마치 수수깡처럼 부러졌으며, 도강으로 인하여 운학도장과 제자들은 가슴에 횡으로 깊은 상처를 입으며 쓰러졌다.
 “하하하하, 모두 덤벼라. 오늘 이곳에 있는 놈들은 한 놈도 돌아갈 수 없다.”
 청송진인과 운학도장, 그리고 네 명의 사형들이 부상을 당하자 나머지 무당파의 제자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제운비를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창-!
 “장문인을 보호해야 한다.”
 그들은 은연중에 칠성검진(七星劍陣)을 펼치며 부상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운비에게 다가섰다.
 제운비는 막상 큰소리는 쳤지만 공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도법을 펼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딸의 원수를 갚기도 전에 이곳에서 정파의 조무래기들에게 차륜전으로 공격당하여 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신형을 띄워 올렸다.
 “흐흐흐······, 본좌가 지금은 그냥 간다만 멀지 않은 시일에 무당을 꼭 방문하겠다. 본좌가 너희 무당에 방문하는 날, 봉파하지 않았다면 너희들의 피로 무당산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갑작스레 광심수라가 허공으로 사라지자 무당의 제자들은 그를 쫓으려 했지만, 장문인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장문인의 둘레에 원형으로 둘러서 검을 뽑아 든 채 호법(護法)을 시작했다.
 일부 제자들은 부상을 당한 운학도장과 그 일행의 옷을 찢고 상처 부위에 금창약(金瘡藥)을 발라 주었다.
 상처를 입은 부상자들이 상처 부위가 금창약으로 인하여 서서히 아물고 있었다.
 진시(辰時)가 거의 끝나 갈 무렵, 해가 중천에 뜨자 두 눈을 감고 있던 청송진인이 입으로 시커먼 핏덩이 한 덩이를 토하며 운기행공을 마쳤다.
 청송진인은 깨어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물었다.
 “흐으음······, 그 마인(魔人)은 어찌 되었느냐?”
 제자 한 명이 나서며 말했다.
 “장문인께서 내상을 입으신 후 운학도장과 사형들께서 오행검진을 펼쳤지만 역부족으로 부상을 입으셨는데, 우리가 나서자 무슨 일인지 자신이 무당을 방문하기 전에 무당파를 봉파하라면서 홀연히 떠났습니다.”
 청송진인은 대노(大怒)하며 말했다.
 “갈! 봉파라니? 그 동안 수많은 시련은 있었지만 봉파를 한 적이 없거늘, 너무도 광오(廣悟)하구나. 대체 그 마인이 누구란 말인가?”
 장문인이 대노하자 앞에 나서던 제자는 머리를 더 조아리며 말했다.
 “장문인! 그는 자신이 광심수라(狂心修羅)라고 하더이다.”
 청송진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틀림없이 광심수라라고 했단 말이지?”
 청송진인은 자신이 그와의 대결에서 일초의 장에 패한 것이 그를 얕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요즘 마도(魔道)를 통치하는 마라혈마보(魔羅血魔堡)의 보주 제운비가 틀림없구나. 그러나 저러나 그 자가 봉파하라고 했다니 정말 큰일이구나. 무당으로 돌아가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상의를 해야겠구나. 무당의 힘만으로는 그 자 혼자를 막기에도 벅찬데, 마라혈마보의 마인들까지 나선다면 무당 역사 중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로구나.’
 “휴우!”
 청송진인은 한숨을 쉬더니 일어나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잘 가꿔진 정원, 간단한 가재도구만 있는 모옥과 시신 두 구가 묻혔던 파헤쳐진 봉분, 그리고 비석처럼 죽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만 있을 뿐 뇌곡 안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무량수불! 이렇게 참혹하게 죽이다니, 정말 흉악한 마인이로구나!”
 청송진인은 죽은 여인의 나신을 자신의 장포를 벗어 입혀 주고 제자들에게 시신들을 다시 잘 묻어 주라고 명했다. 봉분이 다시 만들어졌다.
 그때 청송진인은 바위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다.
 “사마룡(司馬龍), 제려진(諸麗珍), 사마린(司馬麟)이라······.”
 청송진인은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기억이 나지 않자 손을 이마를 집으며 생각해 보았다.
 ‘아······, 사마룡은 이 년 전 갑자기 무림에서 사라진 정도무림의 철혈협객(鐵血俠客)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풍문에 마도 여인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제려진은 마도제일화(魔道第一花)란 말인가? 제려진은 제운비의 무남독녀라는데, 그가 그토록 찾던 딸을 죽이지는 않았을 테고······. 딸을 잃은 아비에게 내가 흉수라고 말했으니, 이런! 내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했구나.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내가 직접 그에게 사과를 해야겠구나.’
 청송진인은 제자들에게 마라혈마보의 위치를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청송진인은 부상자를 부축할 제자 오 명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수일 내로 마라혈마보의 위치를 파악하여 본파로 소식을 전하거라. 만일 그들과 부딪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떤 일이라도 양보를 하거라.”
 청송진인은 자미성과 천강성의 정기를 받은 아기를 찾으려 왔다가 아무 소득이 없이 마라혈마보의 보주 제운비와 원한을 맺고 무당산으로 힘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라혈마보로 돌아온 제운비는 지존전의 자단향목(紫檀香木)으로 만든 지존좌(至尊座)에 앉자마자 전주와 각주들을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불렀다.
 지난 십여 년 간 전주와 각주들 모두 지존전에 모이라는 명이 없었기에, 지존의 호출이 있자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허둥대며 지존전으로 향했고, 잠시 후 지존전에 전주(殿主)와 각주(閣主)들이 모두 모여 좌우로 나뉘어 시립하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지존전은 개미 한 마리 없는 듯 고요했다.
 좌중을 둘러보며 제운비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뇌(魔腦)! 총사인 자네는 무당파를 쓸어버리는 데 얼마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는지를 보고하라.”
 조용히 양쪽으로 시립하여 있던 인물들이 움찔했다.
 키는 오 척 단신에 머리카락은 백발이고, 남들보다 머리가 두 배는 큼직한 인물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존! 갑자기 무당파는 무슨 일로 쓸어버리시려고 하십니까?”
 제운비는 대노하여 지존좌의 팔걸이를 잡아뜯어 마뇌를 향해 던지며 말했다.
 “흥! 네놈이 묻는 말에 대답을 않고 나에게 되묻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것이 아니냐!”
 뿌지지직! 퍼억!
 마뇌는 머리에 자단향목으로 만든 팔걸이가 날아오자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맞을 뿐 백발이 혈발(血髮)이 되었건만 고통을 참으며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지존! 전면전을 할 때와 암습(暗襲)으로 공격할 때의 인원이 서로 다르기에 여쭤 본 것입니다.”
 제운비의 분노가 조금 수그러지는 듯했다.
 “그래? 전면전으로 할 때와 암습으로 할 때의 인원을 상세히 보고하라.”
 마뇌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지존! 무당파는 무림의 이대 성역 중 하나입니다. 비록 도사들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들 개개인의 무공 수위가 높고, 그들이 펼치는 오행검진과 칠성검진의 위력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전면전을 치르려면 집법전(執法殿), 형전(刑殿), 약왕전(藥王殿), 해검전(解劍殿), 장로전(長老殿)의 오전(五殿)은 물론이고 연무각(鍊武閣), 접객각(接客閣), 독각(毒閣), 살수각(殺手閣), 집마각(集魔閣)의 오각(五閣) 모두 출진을 해야 합니다. 물론 지존과 사대호법, 모두 가셔야 합니다. 암습을 원하신다면 해검전과 접객각, 집마각, 연무각은 제외하셔도 되며 지존께서 직접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운비는 무당파의 도사들 때문에 딸의 시신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가 못마땅하여 직접 출진하여 무당파를 무림에서 제명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마뇌! 본좌가 직접 가겠다. 본좌가 무당에 도착했을 때 무당파에서 봉문을 하지 않았다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그곳에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할 것이니, 오늘밤이 새기 전에 철저히 출진 준비를 하고, 경신술(輕身術)이 능한 수하 십 명을 선별하여 대별산 뇌곡 안의 파헤친 봉분에서 시신 두 구를 수습하여 본인이 출진했다가 다시 보에 도착하기 전에 보(堡) 뒤편 야산에 합장을 해 놓아라.”
 마뇌는 술렁이는 부하들을 안정시키고 제운비에게 공손히 물어 보았다.
 “지존! 무당파를 쓸어버리라는 명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별산에서 시신들을 수습해 오라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운비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마뇌! 자네는 내 말이 우습게 들리나?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진아가 죽었다. 어미도 없이 곱게 자란 진아가 세상을 하직했단 말이다. 아직 내 사랑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그러니 잔말 말고 짐승 밥이 되기 전에 지금 즉시 사람들을 보내서 시신을 가져와라.”
 제운비는 마음이 격해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흐흑······!”
 지존전 안에 시립하고 있던 수하들 제운비의 말에 모두 숙연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존명!”
 마뇌는 서둘러 전주와 각주 모두를 퇴진시키고 보에서 경신술이 능한 수하들을 대별산으로 보냈다.
 무당파와 전면전을 치른다는 소식이 마라혈마보 안의 모든 수하들에게 전달되었으며, 모두 마도제일화 제려진의 죽음이 무당파가 저지른 일이라 생각되어 출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무당산 천주봉(天柱峰)에 위치한 상청관(上廳關)에서는 청송진인을 비롯한 무당파의 중심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잔의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올랐지만 아무도 찻잔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청송진인은 좌중(座中)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어두운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대별산에서 헤어져 마라혈마보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 제자들은 소식이 없느냐?”
 운학이 말했다.
 “사부님! 그들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청송진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경솔함으로 사문에 누를 끼치게 된 것에 대하여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오. 광심수라(狂心修羅)가 아무리 마인이라지만, 본 장문인이 죽음으로 용서를 빈다면 봉문(封門)은 면할 것이라 생각되오.”
 운학도장이 나서며 말했다.
 “사부님! 그 자는 심성이 흉악한 인물입니다. 만일 그 자가 무당산에 오른다면 이곳 성지를 더럽히게 됩니다. 무당산에 오기 전에 각 문파에 서신을 전해 이번 기회에 그를 없애는 것이 양민들과 억조창생(億兆蒼生)을 위하는 길일 것입니다.”
 청송진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학아! 너는 정파의 인물이면서 잘잘못을 가릴 줄 모른단 말이냐? 누가 보아도 명백히 내가 그에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했으니, 사죄를 해야만 한다.”
 청송진인이 명(命)했다.
 “여러분은 앞으로 그와의 일에 참견을 하지 마시오. 만일 그가 수하들을 이끌고 무당을 방문한다면, 상청관 뒤쪽으로 모두 물러나고 절대 그들과의 충돌을 금(禁)하오.”
 가만히 듣고 있던 청혜도장이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사형! 사형이 만일 저라면 장문인이 마도의 인물에게 머리 숙이는 것을 보고만 있겠소? 저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청송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제, 사제는 이번 일의 장본인이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과의 충돌로 제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내지 않고 봉문당하지 않는 것이 장문인인 내가 할 일이라네. 다시 한 번 명하지만 이번 일에 나서는 자가 있다면 장문령으로 용서치 않을 테니, 그리 알게나.”
 좌중의 인물들은 장문인 청송진인의 결정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모두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청송진인은 좌중의 인물들에게 차를 권하며 평시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마음 편히 지내라고 하였다. 그는 좌중의 인물들이 모두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청혜도장과 운학도장은 장문실로 오라고 하고 나머지는 돌아가라 하였다.
 모두 돌아가고 청혜도장과 운학도장이 청송진인의 뒤를 따라 장문실로 들어가자 청송진인은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입을 열었다.
 “사제! 만일 광심수라와의 일에 내가 잘못되면 운학에게 장문직(掌門職)을 맡길 생각인데,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청혜도장은 고개를 들어 청송진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형! 저를 믿지 못하여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너무하십니다. 사형과 동문수학(同門修學)을 한 지도 벌써 육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저를 모르신단 말입니까?”
 청송진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제! 자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세. 사제에게 미안함을 느껴 하는 말이지! 내가 잘못되면 둘 중 한 명이 장문직을 맡아야 하니 하는 말일세.”
 청혜도장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형! 사형께서는 너무 예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광심수라라는 놈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발을 들여놓겠습니까? 설사 이 곳에 와서 살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무림동도(武林同道)들이 용서치 않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만일 변고가 일어나도 장문직을 이을 사람은 사형의 의발전인(衣鉢傳人)인 운학이 맡는 것은 당연하지요. 누가 있어 그 일에 반대하겠습니까?”
 청혜도장이 말을 마치자 운학도장이 말했다.
 “사부님! 어째서 불길한 말씀만 하십니까? 사부님께선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자는 아직 모자라는 데가 많으니 장문직을 사숙(師叔)께서 맡는 것이 마땅합니다.”
 청송진인은 두 사람 모두 장문직을 상대에게 미루자 흐뭇했다. 그러나 둘 중 한 사람에게 장문직을 전해야만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장문직을 맡겨도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나는 나의 후사로 운학에게 장문직을 전하려 하네. 그리 알고 대비하도록 하고, 이만 물러나게나.”
 청송진인이 돌아앉자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장문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무당파 제자들은 금방이라도 마라혈마보에서 공격을 할 것 같아 잔뜩 긴장하여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황산(黃山)에서는 마라혈마보의 마인들이 노약자는 물론 아이들까지 출진 준비를 마치고 광장에 모여 도열하고 있었다.
 제운비는 금룡(金龍)을 수놓은 묵색(墨色) 전의(戰衣)를 입고 자신의 애마(愛馬) 위에서 검을 높이 빼들고 명했다.
 “여기서부터 무당산까지의 거리는 삼천 리다. 노약자와 아이들, 여자들은 모두 이곳에 남는다. 나머지는 단 한 명의 낙오자(落伍者)가 없도록 하고, 우리의 앞을 막는 것은 상대가 누구든 가차없이 베도록 하라. 출진이다.”
 제운비가 말머리를 돌려 활짝 열린 정문을 향해 달려나가자 보 안의 마인들이 썰물 빠지듯 뒤따랐고, 말들의 발굽에 지축(地軸)이 흔들렸다.
 두두두두-!
 쿠구구궁-!
 장강에서 오천여 명의 마인들과 말들이 도강(渡江)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 그들의 위세에 눌린 양민들은 피하기 바빴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어서 칠 주야 만에 무당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마인들은 저마다 공을 세우기 위해 선봉에 서려고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혈발(血髮)에 독안(獨眼)을 가진 마인 하나가 제운비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지존! 제가 앞장서서 냄새나는 말코도사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제운비는 화가 나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조용히 해라!”
 소동이 가라앉자 제운비가 말했다.
 “독안혈마(獨眼血魔)! 우리는 전면전을 하러 왔다.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모두 내 뒤를 따르도록 하라.”
 제운비가 천천히 상청관을 향해 무당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라혈마보의 마인들이 상청관을 향해 무당산을 오르고 있다는 전갈이 청송진인에게 전해졌다.
 장문실에서 도경(道經)을 읽고 있던 청송진인은 상청관 안의 모든 도인들을 뒤로 피신시키고 홀로 대전 앞 광장에 서서 광심수라가 오기를 기다렸다.
 ‘무량수불······,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할 말이 없구나. 무당파가 봉문되는 일이 일어나면 전대조사(前代祖師)들을 무슨 염치로 뵌단 말인가?’
 
 제운비는 정문에 다가서는데도 지키는 도인들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매복이 있는 것 같으니, 모두 조심해라!”
 제운비는 정문 위의 현판(懸板)을 내려 수하들에게 들고 따라오게 하였다.
 해검지(解劍池)에 모인 마인들이 그곳에도 아무도 없자 자신들의 무기를 빼들어 삼 장 크기의 해검지라 새겨놓은 바위를 쪼개며 냄새나는 도사들이 자신들이 무서워 모두 도망쳤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제운비가 선봉에 서서 산로(山路)를 올라 상청관 앞 광장에 다다르자, 전에 대별산에서 대결을 벌였던 도사가 홀로 숙연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제운비는 여기까지 오면서 무당파의 모든 도사 놈들을 죽이리라 결심했는데, 홀로 앞을 막자 어이가 없었다.
 “흥! 봉문하라고 했더니 모두 도망을 가고 네놈 혼자 우리를 막을 생각을 했더냐?”
 청송진인이 제운비에게 다가서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광심수라! 내가 이곳의 장문인이라오. 지난번 대별산에서 내가 오해를 해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소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구려. 용서해 주시오.”
 제운비는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는 작자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자, 그 동안 불쾌했던 감정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마인들은 지존의 명이 없어 나서지는 못하였지만 큰소리로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무당파의 장문인이 지존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있잖아? 흐흐흐······, 통쾌하구나. 무림의 성역이라는 이곳도 형편이 없구나. 아예 소림사도 찾아가 볼까?”
 청송진인은 마인들이 자신만 욕하는 것이 아니라 무당파 전체를 욕보이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이를 물고 참고 있었다.
 제운비가 말했다.
 “흥! 당신의 사과는 받아 주겠소. 하지만 저기 수하들이 들고 있는 무당의 현판은 내가 이십 년 간 보관하겠소.”
 청송진인은 그제야 무당의 현판이 마인들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다.
 “광심수라! 당신의 원한이 그리도 깊었소? 내 이곳에서 죽음으로 당신에게 속죄할 터이니, 그 현판만은 이곳에 남겨 주시기를 부탁드리오.”
 말을 마친 청송진인은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향해 자신의 오른손 장으로 내리쳤다.
 퍽-!
 “으으음······.”
 청송진인은 입으로 피분수를 뿜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상청관 뒤편에 피신해 있던 도인들이 모두 앞으로 달려나와 장문인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을 했다.
 “흐흐흐흑!”
 제운비는 청송진인이 갑자기 자결하자 허탈해졌다. 이때 운학도장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광심수라! 사부님의 명에 따라 지금 당신들에게 공격을 하지 않겠소. 하지만 당신들이 조금이라도 더 무당을 욕보인다면 우리도 더 이상 참지를 못하오.”
 구 척 장신에 수염이 뻣뻣한 사십대의 마인이 화가 난 듯 운학도장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 놈아! 네 놈이 죽고싶어 지존의 별호(別號)를 냄새나는 주둥이에 올리느냐? 너희 도사 놈들을 이곳에서 모조리 죽여 버리는 데 한 시진이면 시간이 흘러넘친다.”
 양 세력은 일촉즉발(一觸卽發)할 태세로 감정이 곧추서 있었다.
 “천력웅마(天力雄魔), 이제 그만!”
 제운비는 무당파를 쓸어버리려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무당파를 용서해 주기로 결심했다. 딸을 죽인 원수는 무당파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안혈마(獨眼血魔)! 현판을 이들에게 전해 줘라. 모두 보(堡)로 돌아간다. 대열을 갖추고 나를 따라라.”
 “존명!”
 독안혈마가 운학도장에게 현판을 전해 주었다.
 제운비는 격분해 있는 운학도장에게 말하였다.
 “장문인이 자결한 데 대해 복수를 하려면 언제든지 안휘성 황산 마곡으로 와서 나를 찾아와라.”
 말을 마친 제운비를 선두로 무당산을 떠나기 시작했다.
 제운비는 하산을 하며 생각했다.
 ‘내가 만일 그와 같은 일을 행했다면, 나는 마라혈마보의 인명을 구하기 위해 자결할 수 있었을까? 과연 정도무림의 성역인 이곳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을 배출시켰구나.’
 제운비는 오천여 명의 마인들을 이끌고 안휘성(安徽省)으로 돌아갔다. 그는 마라혈마보에 도착하자마자 대별산으로 보내 시신을 거둔 수하들을 불렀다.
 “너희들이 시신들을 거두어 왔느냐?”
 머리를 조아리던 수하 하나가 조용히 답했다.
 “지존께서 가르쳐 준 곳으로 가 보니 이미 봉분이 다시 만들어져 있었고, 저희들이 봉분을 파헤치니 남자의 시신과 무당파 옷을 입은 영애의 시신이 잘 합장되어 있었습니다. 두 구의 시신은 지존각의 뒤편 야산에 잘 합장하였나이다.”
 제운비는 무당파의 장문인 청송진인이 자기 자식의 나신을 가려 주었다는 것을 알았고, 죽은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중원무림에 마라혈마보의 광심수라 앞에서 무당의 장문인인 청송진인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 무림에 소리 없이 퍼졌다.
 이제껏 음지에서 독단으로 활동하던 마인들이 마라혈마보의 위치를 알아내고는 황산으로 모이기 시작하자, 마라혈마보에서는 건물을 증축하고 마라혈마성(魔羅血魔城)이라 개명(改名)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마인들을 선별하여 직위를 주었는데, 무공 순위에 따라 직위를 결정하다 보니 하루하루 직위가 번복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어찌 되었건 마도의 힘이 단결되자 어떤 세력도 넘보지 못하는 커다란 세력이 되었고, 광심수라 제운비의 위명(威名)이 전 중원을 떨게 하였다.
 광심수라 제운비는 어느덧 단결된 마도무림의 종주가 되었다.
 그는 강력한 권한으로 마인들을 단속하여 양민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였고, 무공이 약한 마인들에게 양지에서 살 수 있도록 각자에게 맞는 기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 결과 황산 밑의 마을에는 정착하는 마인들이 생겨났다.
 검을 만들던 마인들은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을 만들었고, 농사를 지을 줄 아는 마인들은 농사를 지었다.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을 행사하던 마인들은 저리(低利)로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었고, 이재(理財)에 밝은 마인들은 상점을 열어 장사하였다.
 포목점(布木店)도 생겨나서 비단을 짤 줄 아는 여인들이 비단을 만들면 가져다가 팔았는데, 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하북성(河北省) 상인들까지 황산을 찾았다.
 돈 있는 상인들의 출입이 잦아지자 청루(靑樓), 홍루(紅樓)도 생겨났으며 도박장(賭博場)도 생겼다.
 도박장 안에서 속임수를 쓰다간 손목을 자르는 엄벌에 처한다 소문나자, 황산의 도박장은 속임수가 없는 도박장으로 소문나 외지 사람들이 더욱 많이 도박장을 찾았다.
 약초를 채집하여 양민에게도 저렴하게 팔았고, 황산에 많이 묻혀 있는 황옥(黃玉)을 채굴(採掘)하여 장신구로 만들어 팔기도 했다.
 어시장도 만들어 물고기를 잡을 줄 아는 마인들을 장강(長江)으로 보내 어부로 생활케 하였고, 한혈보마(汗血寶馬)들이 끄는 마차로 수송하여 싱싱한 물고기도 팔았다.
 무공이 높은 마인들에게 호랑이나 표범, 늑대 등 맹수를 사냥하게 하여 호피(虎皮)나 표피(豹皮) 등은 비싼 값에 가죽 상인들에게 넘기게 하여 무공의 고하를 떠나 무슨 일이든 하게 했다.
 마곡 안의 마라혈마성은 이제 더 이상 흉폭한 마인들만의 세상이 아니었다.
 어중간한 명문정파가 있는 곳보다 살기가 좋았으며, 양민들도 자신들을 괴롭히는 일이 사라지자 마인들이 운영하는 점포에 스스럼없이 다녔다.
 마라혈마성에서 나간 마인들이 내는 세금만으로도 옛날 양민들을 괴롭히며 걷은 것보다 몇십 배의 돈이 걷혔다
 재물을 모아놓던 보고(寶庫)는 더 이상 넣을 수 없어 다시 커다란 보전(寶殿)을 세워야만 했다.
 마인들도 생의 보람을 느끼는지 표정들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모두의 생활은 풍족하였고, 딸을 가진 양민들은 젊은 마인들을 사위로 얻기도 했다.
 마라혈마성의 마인과 고락을 같이하는 양민의 수가 점점 늘어 삼십만에 달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구축되었다.
 성(城) 내외의 모든 마인들이 즐거움에 젖어 있는데, 단 한 사람만은 항상 우울하였다.
 바로 마라혈마성의 성주인 제운비였다. 지존전 내 그의 침실에서는 오늘도 한숨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휴우!”
 요즘 들어 부쩍 술로 밤을 지새우는 제운비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흉수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너무도 답답하구나. 대체 누가 그런 공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 정도의 마공을 시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벌써 무림에 소문이 났을 터인데. 구천을 떠도는 진아가 오늘밤도 이 못난 아비를 원망하고 있겠구나.’
 오늘밤도 제운비는 술을 마시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정도무림의 이대 성역이었던 무당의 청송진인이 자결한 후 운학도장이 장문인으로 추대하였다.
 청혜도장은 무당의 제자들에게 운학도장을 운학진인(雲鶴眞人)이라 부르게 하였으며, 운학진인이 장문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음양(陰陽)으로 도왔다.
 운학진인이 장문직을 맡으며 제일 먼저 한일은 무당의 현판을 다시 산문에 걸고 청송진인의 시신을 조사전(祖師殿)에 모시는 일이었다.
 청송진인의 위패 앞에 선 운학진인은 흐느껴 울며 말했다.
 “흐흐흑, 사부님! 제가 사부님의 원수를 꼭 처단하겠습니다. 무당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린 광심수라를 이 못난 제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운학진인은 정도무림의 각 문파에 전임 장문인의 타계를 전하였고, 소림을 위시한 각 파의 장문인들은 소식을 접하자 서둘러 무당을 찾았다.
 조문을 하기 위해 각 파의 장문인들이 수행원을 데리고 무당에 도착하였고, 정파의 무림명숙(武林名叔)들도 찾아왔다.
 상청관의 정실(靜室)에 장문인들의 회합이 있었다.
 탁자의 상좌에는 새로 무당의 장문인으로 선임된 운학진인이 앉아 있었고, 좌우에 각 파의 장문인들이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았다.
 소림장문인(少林長門人) 혜공선사(慧空禪師),
 아미장문인(峨嵋掌門人) 금화사태(金華師太),
 곤륜장문인(崑崙掌門人) 참마성수(斬魔聖手) 추련규(秋蓮揆),
 청성장문인(淸星掌門人) 무적신협(無敵神俠) 단목풍(段木風),
 종남장문인(終南掌門人) 만절교수(萬絶巧手) 도진(陶搢),
 점창장문인(點蒼掌門人) 검령수사(劍靈秀士) 손가형(孫柯亨),
 화산장문인(華山掌門人) 다정객(多情客) 육보무(陸珤武),
 공동장문인(??掌門人) 무영만리(無影萬里) 궁악비(宮岳飛),
 개방방주( 幇幇主) 만취신개(漫醉神 ) 사호대(史豪岱).
 운학진인이 슬며시 일어나 각 파의 장문인을 향해 일일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번에 새로 선임된 운학진인입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운학진인이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
 혜공선사가 나직하게 불호(佛號)를 터뜨리며 말했다.
 “아미타불······, 운학진인! 전임 장문인이셨던 청송진인이 광심수라 앞에 무릎을 꿇고 자결하셨다는 것이 사실이오?”
 운학진인은 여러 장문인들에게 죄송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청송진인께서 대별산으로 천강성과 자미성의 정기를 받은 아이를 찾으러 가셨다가 광심수라와 오해가 있었습니다. 광심수라가 그 일을 추궁하려 무당을 찾았는데, 청송진인께서 장문령을 내려 아무도 나서지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사과를 하셨지만, 그 자가 본파를 이십 년 간 봉문하겠다며 현판을 떼어놓은 것을 보시자 자결을 하셨습니다.”
 성급한 성격의 만취신개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이런 변괴(變怪)가 있나? 정도의 위신이 땅바닥에 뒹굴어도 한참을 뒹굴었구나! 청송진인이 어떻게 마도의 인물에게 그런 수모를 당했단 말이오? 대체 청송진인이 그 마인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소?”
 운학진인은 만취신개가 격분하자 더욱 죄송한 듯 머리를 수그리며 조용히 답했다.
 “청송진인과 저의 일행은 쉬지도 못하고 대별산까지 최대의 속력으로 달려갔습니다. 대별산까지 거리가 대략 일천칠백여 리나 되어 모두 몹시 지쳐 있었고, 사부님께서는 먼저 오르셨다가 광심수라와 일전을 벌였습니다. 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부님은 내상을 입으셔서 쓰러지고 있었고, 자세한 내막은 이곳에 돌아와서도 이야기 않으셔서 아무도 모릅니다.”
 청성장문인 무적신협 단목풍이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여러 장문인들께선 정도의 위신이 땅에 구르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으시겠지요? 이번 기회에 다시 정도연합맹(正道聯合盟)을 결성하여 마도를 뿌리째 뽑아 버립시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단목풍의 말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모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외쳤다.
 가만히 앉아 있던 혜공선사가 말했다.
 “아미타불······, 여러분들께선 조금 진정들 하시오. 광심수라에게 청송진인이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결을 하셨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오. 만일 청송진인이 잘못을 하여 그리 행하였다면 무슨 근거로 광심수라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이오?”
 혜공선사의 말을 들은 장문인들은 자신들의 경솔함을 깨닫고 침묵을 지켰다.
 “······!”
 하지만 운학진인은 혜공선사의 말에 분한 듯 입을 열었다.
 “혜공선사님! 맹을 결성해 무당의 원통함을 풀어 주십시오.”
 혜공선사는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운학진인! 여기 있는 무당인들의 원통함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동안에 마인들이 숨어 지내며 무림에서 악행을 저지른 것은 개개인이 저지른 일이지, 마라혈마보라는 곳에서 행했다는 소문은 듣지를 못하였소. 그러니 무림에 혈겁을 일으키지도 않은 세력 때문에 정도연합맹을 결성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운학진인은 혜공선사의 말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혜공선사님, 그러면 사부님의 죽음을 묵과하자는 말씀이십니까?”
 혜공선사는 운학진인이 자신의 뜻을 읽지 못하자 답답한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이보시게, 운학진인! 지금 맹을 결성하여 그들을 치면 세인들이 뭐라고 하겠나? 물론 지금 맹을 결성하면 그들을 치는 것쯤은 문제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청송진인의 죽음을 세인들의 입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야. 자넨, 자네 사부를 더 욕보이고 싶은가?”
 좌중을 둘러보던 혜공선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장문인들! 마라혈마보에서 무림에 혈겁을 일으키면 그때 맹을 결성해 그들을 처단합시다.”
 이번엔 운학진인도 혜공선사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모두의 의견이 일치되자 빈소를 찾은 뒤 울적해 있던 장문인들이 활짝 웃으며 담소를 나눴다.
 장문인들은 만일 맹을 결성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의견들을 분분히 내놓았다.
 하지만 마라혈마보는 더 이상 마인들의 소굴이 아니어서 마라혈마보를 치기 위한 정도연합맹의 결성은 먼 훗날로 연기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제3장 잠룡(潛龍)의 성장
 
 
 아이를 안고 대별산 뇌곡에서 솟구쳐 오른 혜능선사는 자신이 영원히 소림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게 되자 운무곡 천장애 동굴로 향했다.
 천장애 동굴로 아이를 데려간 혜능선사는 자신의 항마법력(降魔法力)으로 아이를 개정대법(開頂大法)을 써서라도 벌모세수(伐毛洗髓)시키려 하였다.
 혜능선사가 항마법력을 운용하자 혜능의 머리 위에 오색(五色)의 고리가 영롱히 빛을 발했다.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였다.
 십 갑자의 공력이 쌍장(雙掌)에 모이자 혜능선사의 우수는 아이의 명문혈(命門穴)에, 좌수는 아이의 백회혈(百會穴)에 밀착시키고 진기(眞氣)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혈맥(血脈)을 따라 혜능선사의 진기가 사지백해(四肢百骸)로 거침없이 흘렀다.
 원래 사람은 태어나기 전엔 임맥(任脈), 독맥(督脈)의 혈맥이 뚫려 있다가 태어난 직후부터 세상의 혼탁한 기운 때문에 조금씩 막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혜능선사가 데려온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임맥과 독맥이 범인(凡人)과는 다르게 활짝 열려 서로 통하고 있었다.
 범인은 남이 진기를 주입하면 고통에 시달리는데, 아이는 두 눈을 감은 채 방긋 웃고 있었다. 아이는 마치 솜방망이가 물을 흡수하듯 혜능선사가 불어 넣어주는 진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아이의 머리 위에 아름다운 빛의 세 송이 꽃이 피어났다. 삼화취정(三花聚鼎)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혜능선사는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하여 진기를 불어넣었다. 명문혈과 백회혈에 장을 붙이고 있던 혜능선사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의 명문혈에서는 혜능선사의 진기를 빨아당기고, 백회혈에서는 혜능선사에게 반탄지기(反彈之氣)를 내뿜고 있었다.
 혜능선사는 자신의 진기가 빨려 들어가자 우수를 떼려 하였지만 자석에 붙은 쇠같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좌수는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온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퉁겨지고 말았다.
 ‘아미타불······,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혜능선사는 빨려드는 진기를 막기 위해 자신의 우장(右掌)에 전신 내력을 운용하여 간신히 떼어낼 수 있었다.
 ‘휴우! 하마터면 이 아이에게 진기가 빨려 죽을 뻔하였구나.’
 혜능선사는 금강부동선공(金剛不動禪功)에 몰입했다. 잠시 후, 깨어난 혜능선사는 사 갑자의 내공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만 늦게 장을 떼려고 했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구나.’
 혜능선사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마치 젖을 먹다 빼앗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두 눈을 떴다. 어리둥절해 하며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혜능선사가 아이의 두 눈에 각기 다른 이상한 빛이 나자 화들짝 놀랐다. 아이를 살펴볼 틈도 없이 이곳에 온 그는 그제야 아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의 한쪽 눈은 자색(紫色)이었고, 다른 쪽 눈은 황색(黃色)으로 안광(眼光)을 뿌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끝부터 사타구니까지 아이의 몸을 절반으로 가른 것처럼 청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러한 아이가 태어났단 말인가?’
 혜능선사는 전에 읽은 만사총요람(萬事總要覽)의 내용 중 신체에 관한 부분을 더듬어 기억해 내었다.
 
 <사람의 신체는 매우 오묘하여 제각각 조금씩 다른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보통 범인은 태음인(太陰人), 소음인(少陰人),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며 부모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영약(靈藥)이나 영독(獰毒)을 섭취하여 철골지체(鐵骨之體), 금강지체(金剛之體), 천룡지골(天龍之骨), 독중독인(毒中毒人) 등이 태어난다. 부모가 거령족(巨靈族)일 때는 거령신맥(巨靈神脈)이 태어난다.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으면 천형지맥(天刑之脈)이 태어나는데, 삼음절맥(三陰絶脈), 오음절맥(五陰絶脈), 칠음절맥(七陰絶脈), 구음절맥(九陰絶脈)이 그것이며 치료하기가 어렵다.
 남아의 양(陽)이 너무 지나쳐 태양절맥(太陽絶脈)이 태어나기도 하는데, 어릴 때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영재였다가 십팔 세가 가까울수록 백치(白痴)로 변하며, 이십 세가 되면 혈맥이 타 들어가 죽게 된다. 여아의 음(陰)이 너무 지나치면 태음절맥(太陰絶脈)이 태어나는데, 태양절맥처럼 어릴 때는 문일지십의 영재였다가 십팔 세가 가까울수록 백치로 변하며, 이십 세가 되면 전신 혈맥이 서서히 얼어붙어 죽게 된다.
 태양의 정기를 받고 아이가 태어나면 일양지체(日陽之體)가 되며,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면 월음지체(月陰之體)가 된다. 천강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면 천강성체로 태어나고, 마황성(魔皇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면 불사마신체(不死魔身體)로 태어나며, 자미성(紫微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면 항마성체(降魔聖體)로 태어난다.
 그리고 사황성(邪皇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면 천사지체(天邪之體)로 태어나며, 천살성(天殺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면 천살지체(天殺之體)로 태어나고, 혈황성(血皇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면 악마지체(惡魔之體)로 태어난다. 태양이나 달, 그리고 천강성과 자미성의 정기를 받고 아이가 태어나면 무림의 홍복(洪福)이고, 마황성이나 사황성, 그리고 천살성과 혈황성의 정기를 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이 혈겁에 빠지게 된다.
 보통 범인과 다른 신체로 태어나는 일은 몇백 년 만에 한 명씩이며, 몇천 년마다 한 명씩 두 가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
 인세(人世)에 아직 나타나지는 않아 전설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로, 세 가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 아이를 삼극혼원신체(三極混元身體)라 부른다. 아이의 특징은 신체에 서로 다른 세 가지의 기운이 흐르며, 그 세 가지의 기운은 아이의 몸에서 서로 견제하고 있다. 그 증표로 몸의 중심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져 있다.
 만일 삼극혼원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그 아이가 성장하여 무공을 익혀 세 가지 기운을 모두 몸 안에 녹일 수 있다면, 무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림인이 될 것이다.>
 
 ‘아아······, 전설처럼 구전해 내려오던 삼극혼원신체가 틀림이 없다. 지금껏 인세에 삼극혼원신체를 타고난 인물은 없었는데, 내가 이 아이의 부모를 살해하고 여기로 데려온 것은 전세(前世)에 이 아이와 무슨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혜능선사는 아이가 자미성과 천강성, 그리고 마황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을 알았다.
 ‘흐음, 자미성의 정기가 나의 항마지공의 내공과 서로 상생하니 흡수하고, 마황성의 정기는 서로 상극이니 반탄지력으로 밀어내려 하였구나. 내 나의 모든 심혈을 기울여 이 아기가 자라나서 대마황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혜능선사는 마공을 익히던 동굴에 습기가 너무 많아 아이를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판단하고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와 다른 동굴들을 살펴보았다.
 마침 남쪽 양지바른 곳에 사람이 거주할 만한 암굴(巖窟)이 있었다. 동혈로 들어가니 짐승들의 뼈가 바닥에 널려 있었고, 두 사람이 거주하기엔 너무 크고 다듬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예전에 어떤 동물이 서식하던 곳인 모양이었다. 이십여 장 정도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웅덩이가 있어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혜능선사는 물의 빛이 너무 탁해 음용수로 사용할 수 있을까 염려하며 물의 맛을 보았다.
 “앗! 이, 이건······ 지령석수(地靈石水)!”
 주변을 살펴보니 지령석수의 영향 때문인지 지령석균(地靈石菌)이 동혈의 천장에 무수히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혈을 살펴보던 혜능선사는 암굴의 거의 끝에서 무엇인지 모를 빛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응? 저건 뭐지?”
 한쪽 팔로 아기를 안은 혜능선사가 빛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갑자기 두 개의 빛이 혜능선사를 향해 폭사되어 왔다.
 쉬익- 쉭!
 혜능선사는 황급히 탄지신통(彈指神通)의 절기로 날아오는 빛을 겨냥하여 지공(指功)을 펼쳤다.
 쇄애애액-!
 퍼퍽!
 꾸애애액-!
 우르르릉-!
 탄지신통에 맞은 두 개의 빛이 사라지며 괴성(怪聲)과 함께 동굴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일각이나 흘렀을까, 괴성과 흔들림이 멈추자 다시 동굴은 적막이 감쌌다. 자신의 탄지신통에 맞아 괴성을 지르던 물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동굴 끝으로 조심스레 다가간 혜능선사는 길다랗고 하얀 물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두 눈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물체는 손바닥 크기의 비늘로 몸을 감싸고, 길이가 십 장에 둘레가 이 장 정도이며, 머리 정수리에 일 장 크기의 하얀 뿔을 가진 거대한 뱀의 형상이었다.
 ‘세, 세상에! 전설에만 있다는 독각백린괴룡(獨角白鱗怪龍)이 내 눈앞에 있다니! 저 괴룡의 신체 약점이 두 눈인데, 마침 여기가 동굴 안이라 내가 정확히 지공을 시전할 수 있었구나. 밖이었다면 일 초에 저 괴룡의 두 눈을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혜능선사가 생각하며 괴룡의 곁으로 다가서자, 죽은 듯 꼼짝하지 않던 독각백린괴룡의 꼬리가 갑자기 날카로운 백린(白鱗)을 세우며 그를 덮쳤다.
 휘이익!
 퍽!
 양안(兩眼)을 실명한 독각백린괴룡은 혜능선사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위치를 파악해 그를 공격한 것이다.
 혜능선사는 황급히 피하려 했지만 워낙 괴룡의 공격이 신속했고, 동굴이 좁은 관계로 허리 부분을 괴룡의 꼬리에 살짝 맞았다.
 “으헉!”
 혜능선사는 그 충격으로 오 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다.
 혜능선사의 허리엔 검으로 난자당한 듯한 상처가 생겼고,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신체를 손상시키다니, 독각백린괴룡의 백린은 전설상의 어장검(魚藏劍)이나 막사검(莫邪劍)의 예기를 능가한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혈향(血香)을 맡은 독각백린괴룡은 혜능선사를 향해 일 장이나 되는 긴 혀를 날름거렸다. 긴 혀를 이용해 혜능선사의 위치를 파악한 독각백린괴룡은 스르르 움직여 그의 곁으로 다가와 한 입에 삼킬 듯 커다란 입을 벌려 그를 덮쳤다.
 혜능선사는 아이를 내려놓고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독각백린괴룡의 입 속으로 쌍장(雙掌)을 내밀었다.
 “항마천룡장(降魔天龍掌)-!”
 고고공-!
 혜능선사의 쌍장에서 엄청난 강기가 입을 벌려 덮치는 독각백린괴룡의 커다란 입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퍼어어어억-!
 꾸에에엑-!
 독각백린괴룡의 입 속으로 밀려 들어간 혜능선사의 강기가 괴룡의 뱃속을 온통 뒤집자, 괴룡의 입에선 괴성이 울렸고 십 장이나 되는 몸체를 비틀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동굴 안이 무너지며 독각백린괴룡의 꼬리 부분이 암반(巖盤)에 깔렸고, 아픔에 더욱 몸을 비틀었다. 혜능선사는 아이를 품고 탄허비행(彈虛飛行)의 경신술로 뒤로 수십 장 날아가 피했다.
 독각백린괴룡이 몸을 비틀 때마다 커다란 바위가 천장에서 떨어지며 괴룡을 덮쳤다. 십 장이나 되는 몸체가 절반쯤 파묻히자 독각백린괴룡의 움직임이 멈추며 입을 크게 벌린 상태로 늘어졌다.
 혜능선사는 독각백린괴룡의 움직임이 멎자 지혈을 하고, 금강부동심공(金剛不動心功)을 운공하여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치유를 마친 혜능선사는 독각백린괴룡이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입 속으로 들어가 내단(內丹)을 꺼냈다.
 어른의 주먹만한 내단은 오색영롱한 신비로운 빛을 뿜었다.
 혜능선사는 아이에게 내단을 먹이려 했지만 너무 커 먹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영물들이 그러하듯이 독각백린괴룡의 선혈도 천고의 영약과 맞먹는 효능을 지녔다고 생각한 혜능선사는 선혈을 아이에게 먹이기 위하여 내단에 선혈을 듬뿍 발라 아이의 입에 대었다.
 그러자 갑자기 내단이 아이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응애! 응애!”
 너무 커다란 내단이 입 속으로 들어오자 아이는 놀라 울기 시작했는데, 미끈미끈한 선혈 때문인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혜능선사는 독각백린괴룡의 내단과 선혈을 일반인이 먹으면 독에 타서 한 줌의 재로 변한다는 것을 모르고 선혈로 생각했다. 독각백린괴룡의 독혈(毒血)은 한 방울만으로도 수백 명을 중독시킬 수 있는 맹독(猛毒)이었다.
 갑자기 아이의 몸이 새까맣게 변하였다. 혜능선사는 아이의 몸이 새까맣게 변하자 자신이 아이를 죽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아이의 새까맣게 변해 버린 피부가 쫙 갈라지며 백옥처럼 하얀 피부로 바뀌었다. 피부의 허물이 아홉 번이나 벗겨지더니 이번엔 아이의 몸이 수축했다가 확장되었고, 그런 일이 반복되며 몸이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일 척, 또 일 척, ······. 허공으로 계속 오르던 아이의 몸이 삼 장 높이에 뜨더니 정지하여 사색(四色)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청, 자, 황, 백색의 영롱한 빛은 너무 밝아서 혜능선사조차 눈이 부셔 감아야 했다.
 일각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아이의 몸에선 둥근 원형의 후광(後光)이 현세에 나타나신 불타(佛陀)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난 일만 년 간 지령석수를 먹고 자란 독각백린괴룡의 내단과 독혈이 아이의 몸에서 효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제껏 아이의 몸에서 자미성의 정기와 천강성의 정기, 그리고 마황성의 정기가 서로 나뉘어 있었지만, 독각백린괴룡의 독혈과 내단이 그 정기들을 서로 융합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모든 기현상은 아이가 삼극혼원신체를 타고난 덕분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한 줌 새까만 재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의 몸이 서서히 지면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 아이의 복연(福緣)은 실로 대단하구나.’
 허공에서 내려오는 아이를 받아 든 혜능선사는 서둘러 일하기 시작하였다.
 혜능선사는 동혈의 바닥을 잘 다듬어 아이와 자신의 침실을 만들었고, 커다란 서실(書室)을 만들었으며,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침상 및 서가, 서탁, 식탁 등 가구들도 만들었다.
 비록 자신은 승려의 몸인지라 초식(草食)만 하였지만, 아이가 배고파 할 때 아이에게 과즙만 먹일 수가 없었다.
 혜능선사는 자신이 이미 살계를 범해 파계승(破戒僧)이 되었으니, 범인과 같이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의복이 없는 혜능선사는 사슴을 잡아 가죽을 벗긴 후, 그 가죽을 말려 의복을 만들어 입었다. 사슴의 피는 아이에게 과즙과 함께 먹이고, 고기는 잘라 육포로 만들었다.
 
 세월은 흘러 이미 늦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서고 있었다.
 사위(四位)의 모든 수목들이 서서히 월동 준비를 하는지 색색의 낙엽들을 떨구었고, 무심한 바람은 낙엽들을 어디론가 쓸어 가고 있었다.
 적막에 잠긴 천장애 아래에는 편월(片月)이 호선을 그리며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이가 잠에 빠지자 혜능선사는 천잠사를 매어 놓은 곳으로 가서 천장애 위로 올랐다.
 ‘내 다시는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건만, 아이 때문에 이번 한번은 가야겠구나.’
 대별산을 내려온 혜능선사는 자신의 수중에 은자 한 닢 없는 것을 알았다.
 ‘아미타불! 살계를 범한 내가 이젠 도적이 돼야 하다니······. 불타가 이걸 알면 뭐라 하실지 궁금하구나.’
 혜능선사는 인가에서 솥과 그릇 몇 점을 가지고 천장애로 돌아왔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혜능선사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과실들과 지천에 널려 있는 약초들과 지령석균(地靈石菌), 그리고 사람을 닮은 동자삼(童子蔘)을 원료로 하여 벽곡단(?穀丹)을 만들었다. 될 수 있으면 살생을 피하려는 혜능선사는 아이와 살고 있는 곳에도 식용으로 쓸 수 있는 사슴과 같은 동물들이 많았지만, 가끔 천장애 위를 돌아다니다 실족하여 떨어진 동물들의 가죽을 벗겨 아이의 이불과 옷을 만들었다.
 아이는 배가 고플 때만 칭얼댈 뿐 그가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가 칭얼대면 혜능선사는 벽곡단을 물에 개어 먹였고, 아이는 어미 새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잘 받아 먹었다.
 아이를 보살피는 중간 중간에 혜능선사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베어 자신의 수공(手功)으로 일반 서책 크기의 판자들을 만들어 쪼개지지 않도록 그늘에서 말렸다.
 잘 마른 판자들이 산더미같이 쌓이자 혜능선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불경의 내용과 정공은 물론 사공과 마공의 무공까지 판자에 가느다랗게 지공(指功)을 이용하여 무공구결과 도해를 자세히 새겼다.
 아이가 배고플 때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아이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 등 하루의 절반은 아기를 위해 보냈다. 다행히도 아이는 아무 탈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혜능선사는 자신이 승려였기 때문에 후사를 두지 못하여 조손(祖孫)간의 정은 몰랐지만, 아이와 정이 들어 실제 자신의 손자처럼 지극 정성으로 아이를 키웠다.
 
 십사 년의 세월이 유수(流水)처럼 흘렀다. 봄을 맞은 천장애 절곡 안에는 쌓였던 눈이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으며, 이름 모를 아름다운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아침 햇살에 지저귀고 있었다. 천장애 절곡 밑의 동굴에서 불경을 읽는 소리가 낭랑한 목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운뢰고철전(雲雷鼓 電)하고 강박주대우(降雹澍大雨)라도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으로 응시득소산(應時得消散)이며, 중생피곤액(衆生被困厄)하야 무량고핍신(無量苦逼身)이라도 관음묘지력(觀音妙智力)이 능구세간고(能求世間苦)라. 구족신통력(具足神通力)하며 광수지방편(廣修智方便)하야 시방제국토(十方諸國土)에 무찰불현신(無刹不現身)이라······.”
 
 <우레와 번개가 아주 심하고 우박과 큰비가 쏟아지더라도 관음을 생각하는 그 힘만으로 모두 활짝 갤 것이며, 중생이 곤액을 당하여 끝없이 몸을 괴롭히더라도 관음의 신묘한 지혜의 힘이 세간의 온갖 고통을 구해 주리라. 신통력이 구족하고 지혜의 방편을 널리 닦아서 시방세계 어느 곳이나 그 몸을 두루 나누네.>
 
 지그시 눈을 감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두 손을 다리 위에 포개고 앉아서 독경(讀經)을 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동(仙童)처럼 보였다.
 독경을 하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는 혜능선사는 지난 십사 년 간 머리를 길러 하얀 백발이 허리까지 내려왔으며, 얼굴에 주름살이 많이 늘어 계피학발(鷄皮鶴髮)로 변해 있었다.
 혜능선사는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을 할아버지라 부르게 하여 자신이 소림의 승려라는 것을 숨겼다.
 소년은 어릴 때 먹은 독각백린괴룡의 독혈과 내단으로 인하여 만독불침(萬毒不侵)은 물론 도검수화불침지체(刀劍水火不侵之體)와 한서불침지체(寒暑不侵之體)가 되었다.
 또한 내단에 있던 무지막지한 양기(陽氣)를 십여 년 간 음식으로 먹은 지령석수와 지령석균의 음기(陰氣)가 서로 조화를 시켜 태극성체(太極聖體)가 되어 있었다.
 소년의 양강지력(陽?之力)은 모든 물체를 태울 수 있으며, 음강지력(陰?之力)은 모든 물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소년은 혜능선사가 가르치는 모든 정사마공(正邪魔功)을 거침없이 소화해 내고 있었다.
 소년은 특별한 신체의 조건 때문인지 암기력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서가에 있는 모든 무공을 암기했고, 시전할 수 있었다.
 특히 마공을 배울 때는 원래 그 무공에 대해 알기라도 했다는 듯 대단한 진전을 보였다.
 혜능선사는 아이가 자라면서 마성(魔性)에 젖지 않도록 하루의 절반을 불경을 읽도록 하였으며, 특히 소림의 무공을 중심으로 가르쳤었다.
 불경을 외던 소년이 두 눈을 떴다.
 항마성체의 신체 특성에 소림 무공을 섭렵한 소년의 두 눈은 태어날 때 빛나던 황색과 자색의 기운이 안으로 갈무리가 되어 깊고 맑은 눈빛을 띠었다. 몸의 절반을 가르던 청색의 선도 희미하게 거의 사라져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태어나서 혜능선사의 내공을 흡수해 이미 사 갑자의 내공을 소유한 소년은 자라면서 먹은 독각백린괴룡의 선혈과 내단, 그리고 지령석수와 지령석균의 효능을 완전히 녹이지는 못했지만 자미성, 천강성, 마황성의 정기의 오묘한 조화로 인해 십 갑자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혜능선사도 동굴 안의 지령석수와 지령석균, 그리고 천장애에서 자생하는 산삼을 먹어 아기에게 주었던 자신의 공력을 되찾았다.
 소년이 정공이나 사공을 시전할 때는 평상시처럼 보였다. 다만 소년이 마공을 시전할 때면 한쪽 눈에서 황색의 마기가 형형한 안광이 뻗쳐 나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흐뭇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고 있던 혜능선사가 말했다.
 “린아(麟兒)야, 이제 그만 쉬도록 하여라.”
 가부좌를 했던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예, 할아버지. 이제 서가에 있는 모든 목판의 무공을 다 배웠는데, 더 배울 것이 없나요?”
 노인이 말했다.
 “린아야! 무공은 이론보다는 실전이 더 중요하단다. 네가 깨우친 것은 이론뿐이다. 비록 네가 능숙하게 그 무공들을 시전할 수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에 맞는 무공을 시전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은 소년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가 소년에게 무공을 소림의 무공부터 시전하게 하였다.
 소년은 우렁찬 목소리로 기합과 함께 무공을 시전하였다.
 “이얍! 천불금강수(千佛金剛手)-!”
 쉬이이익-!
 꽈르르릉-!
 소년의 수영(手影)이 천 개로 늘어나며 석벽을 향해 수강(手?)을 뿌리자 암벽에 한 자 깊이 수인(手印)이 수도 없이 찍혔고, 분진이 하늘을 뒤덮었다.
 분진이 가라앉자 석벽을 바라보던 노인이 말했다.
 “린아야! 이 무공은 너의 내공을 천 개로 나뉘어 쓰기 때문에 너보다 약한 하수가 다수의 힘을 믿고 너에게 덤빌 때 사용해야 한다. 이 무림에 너보다 높은 공력을 가진 인물이 없겠지만, 만일 너보다 높은 공력을 가진 이에게 이 무공을 썼다간 낭패를 볼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공을 펼쳤다.
 “탄지신통(彈指神通)-!”
 쇄애애액-!
 꽈과광!
 석벽에 주먹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일 장 깊이의 구멍이 났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린아야! 탄지신통은 속도가 빠르고 자신의 모든 힘을 한 곳으로 집중하는 데 있다. 내가 시전하여 보일 테니, 너와 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잘 보도록 하여라.”
 말을 마친 노인이 석벽을 향해 일지를 뻗었다.
 쐐액!
 퍽!
 소년은 노인이 발출한 지공이 별 위력이 없는 듯하자, 석벽에 다가가 노인의 지공이 맞은 곳을 살폈다. 자신이 발출한 탄지신통은 일 장 깊이의 위력을 보였었다.
 노인의 지공을 맞은 석벽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손가락보다 더 작은 구멍이 있었다.
 “할아버지! 방금 시전하신 지공이 대체 얼마 깊이로 뚫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린아야! 아마 삼 장의 깊이로 뚫렸을 게야. 탄지신통은 지력을 지금보다 더 가늘게 보내야 위력을 더하는 법이지. 네가 실처럼 가느다랗게 탄지신통을 시전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떤 것이라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게다.”
 노인은 소년에게 소림의 무공과 무극마록, 절정마검결, 사영환마록, 천마철경 등의 마공과 사도사경, 혈루경 등의 사공을 시전하게 하고 자신이 깨우친 것을 상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소년은 할아버지와 자기의 내공 수준이 같은데도 실제 무공의 위력이 천양지차(天壤之差)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깨달은 바가 크자, 곧장 노인의 설명대로 무공 연마에 빠져들었다.
 육 개월쯤 지났을 때, 소년은 노인과 대등한 위력의 무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다시 육 개월이 흐르자 자신이 시전할 수 있는 모든 무공에 자신의 심득(心得)을 더해 노인보다 강한 무공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혜능선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세히 설명한 덕분이었다.
 결국 모든 스승들이 바라는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어람(靑於藍)을 이룬 것이다.
 
 흐르는 계류는 눈이 녹아 내려 수량이 풍부해졌고,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물가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냇가에 돌을 쌓아 만든 보에 앉아 작은 사슴을 쓰다듬고 있는 소년을 비추고 있었다.
 일 년 사이에 키가 무척 자라서 어른의 몸집만 했지만, 동안(童顔)의 얼굴은 아직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소년은 시냇물에 돌을 던져 동그랗게 물결의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휴우!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신 세상은 무척이나 넓고 많은 사람들이 산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나는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산단 말인가?’
 소년은 친구라고는 그곳에 사는 동물들이 전부였다.
 그 동안 딴 데 정신을 쏟을 수 없이 서가에 꽂혀 있는 목판의 무공 연습에 빠져 있던 소년은 더 이상 배울 무공이 없어지자 외로움을 느꼈다.
 ‘이 사슴도 어미와 아비가 있는데, 난 왜 부모가 없을까? 오늘은 할아버지께 여쭤 봐야겠구나.’
 소년은 곁에 있던 사슴을 풀밭 위에 내려놓고 할아버지께 초상비(草上飛)의 신법으로 달려갔다.
 보통의 무림인이 봤다면 기절할 정도로 빠른 초상비였다.
 소년이 동굴로 돌아왔을 때 노인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음, 린아 왔느냐?”
 소년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하다 못해 미물(微物)들도 부모가 있는데, 왜 저에게는 부모님이 없어요?”
 소년이 묻자 노인은 마시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뭐, 뭐라고?”
 쨍그랑!
 소년의 작은 목소리가 마치 뇌성처럼 귀를 울리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할아버지께 여쭙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경악한 표정으로 찻잔을 떨어뜨리자 자신이 뭘 잘못했는가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다치시지는 않았어요?”
 소년은 땅에 떨어져 깨진 찻잔을 주우며 말했다.
 ”제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어 본 것인가요? 저는 그저 궁금해서 여쭤 본 것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말씀을 해 주시기 싫으시면 나중에 해 주셔도 괜찮아요.”
 어린 나이에 보이기 힘든 마음 씀씀이였다.
 노인이 안색을 고치며 말했다.
 “린아야, 물론 네게도 부모가 있었단다. 이 할아비에게 너의 질문에 답할 시간을 조금만 주면 안 되겠느냐?”
 소년은 할아버지께서 부모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물어 보았다.
 “할아버지! 그 답은 나중에 들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할아버지 말씀은, 저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인가요? 그 답은 궁금하니, 지금 해 주세요.”
 노인은 소년의 질문에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린아야! 내일 아침 모든 것을 이야기하여 줄 터이니, 오늘은 이만 밤이 깊었으니 잠을 청하도록 하거라.”
 소년은 너무 궁금하였지만 할아버지께서 내일 아침에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신다고 하시니,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소년이 뒤척이다 잠든 것을 확인한 혜능선사는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아미타불······, 린아가 벌써 십오 세가 되었구나. 이제 내 손에 원통히 죽은 그들 부부의 원한을 풀어 줄 때가 되었다. 린아의 자질이 뛰어나서 노납(老衲)의 경지를 뛰어넘었으니, 어차피 더 이상 가르쳐 줄 것도 없다.’
 혜능선사는 그날 밤새워 지나온 과거의 일들을 서가에 있는 목판에 새겨 놓았다.
 다음 날, 날이 밝아 오자 소년은 잠에서 깨어 동굴 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 간단히 조반을 식탁에 차렸다.
 식탁에 차려진 조반이라고는 지령석균과 동자삼 몇 뿌리, 그리고 지령석수를 그릇에 담아 놓은 것뿐이었다.
 소년은 조바심을 내며 노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흐음······.”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소년이 침상 옆에 서서 자신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소년이 아침 인사를 하자 노인은 몹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냐. 너도 잘 잤느냐?”
 소년이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할아버지! 오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는데, 제가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있었겠어요?”
 조반을 마치고 노인과 손자가 결가부좌를 하고 마주 앉았다.
 “할아버지, 어서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세요.”
 소년이 다그치자 노인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린아야! 이 할아비가 네게 시험을 해 볼 것이 있구나. 이 시험이 끝난 후 서가에 가 금강부동심공(金剛不動心功)이 새겨져 있는 글씨를 지우고 새로 새겨 놓은 글씨를 읽어보도록 해라.”
 말을 마친 노인은 소년의 등뒤로 돌아가 소년에게 금강부동심공을 운기(運氣)하게 하였다.
 소년은 곧 삼매경에 빠졌고, 소년의 머리 위로 다섯 개의 고리가 생겨났다.
 노인은 소년의 명문혈에 자신의 진원진기(眞元眞氣)를 불어넣어 주기 시작했다. 진기는 소년의 진기와 합쳐지며 소년의 사지백해(四肢百骸)로 거침없이 퍼졌다. 시간이 지나자 소년의 머리 위에 고리가 다섯 개에서 일곱 개로 늘어나며 칠채서기(七彩瑞氣)를 뿜으며 돌았다.
 반면 뒤에서 진기를 불어넣어 주던 노인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급격히 노쇠(老衰)하며 몸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소년의 머리 위에서 맴돌던 고리들이 소년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년이 눈을 뜨자 안광이 동굴 안을 훤히 비췄다.
 ‘응? 금강부동심공을 운기하고 나니, 공력이 오 갑자쯤 늘어났구나.’
 소년이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살펴보는데, 할아버지가 몇십 년 더 늙어 보이는 모습으로 자신의 등뒤에서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할, 할아버지! 정신 좀 차리세요!”
 소년이 할아버지를 깨우려 할아버지의 몸을 흔들자, 할아버지의 몸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소년은 그제야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몸에 할아버지의 진원진기를 불어넣어 주고 앉은 채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으아아아아! 할아버지께서 돌, 돌아가시다니······!”
 넋 빠진 모습으로 할아버지의 시신을 가슴에 안고 있던 소년은 혼절하고 말았다. 한참 후 혼절에서 깨어난 소년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지 할아버지의 시신을 흔들며 울부짖었다.
 “흐흐흑! 할아버지, 일어나세요. 린아만 남겨 두고 돌아가시면 린아는 어찌 살란 말입니까?”
 울부짖던 소년은 수차례 혼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소년은 기력이 쇠한 듯 힘없이 바닥에 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신이 굳으려 하자 소년은 할아버지의 시신을 들고 동굴 밖으로 나와 양지바른 남쪽에 잘 묻어 드렸다.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열을 터뜨리는 소년이 몹시 슬퍼 보였다.
 “으아아! 흐흐흑······!”
 ‘어제만 하더라도 정정하시던 할아버님을 내가 돌아가시게 하였구나! 나는 이제 할아버지도 안 계시니, 혈혈단신(孑孑單身)이 되었다. 가뜩이나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나를 놔두고 어째서 할아버지께서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가셨는가?’
 한참을 흐느끼던 소년은 할아버지께서 서가에 있는 목판의 글씨를 읽어 보라는 것이 생각이 났다.
 서가에 가서 금강부동심공이 새겨져 있던 목판을 보니,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며 새겨 놓은 듯 얼룩이 생긴 글씨가 새로 새겨져 있었다.
 
 <린아야!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 이 못난 할아비는 지옥에 가 있을 것이다. 나는 너의 친할아버지가 아니고 소림의 혜능선사라는 법호(法號)를 가진 승려였더란다. 장경각주였던 나는 소림의 칠십이 절예를 깨우친 후 그곳에 금서로 보관되어 있는 책들을 꺼내 마공과 사공을 정공으로 바꾸는 일을 하였다.
 네게 가르친 바 있는 천마철경의 맨 뒷장에서 혈마의 비급이 이곳 반대편의 동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곳으로 와서 그것을 익히다가 갑자기 내려친 뇌전 때문에 주화입마를 입게 되었다.
 마가 골수까지 뻗친 나는 인성(人性)을 상실하였고, 나도 모르게 네가 태어난 대별산 뇌곡의 분지 앞에 가게 되었다.
 모옥 안에서 방긋이 웃던 너의 모습으로 인성을 되찾은 후 밖으로 나가 보니, 시신 두 구가 처참한 몰골로 누워 있었다.
 너를 키우기 전에 소림사의 승려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살생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내가 그런 천인공노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은 너의 부모를 생각하면 의당 그 자리에서 자결해야 했으나, 울고 있는 네가 짐승의 밥이 될 거라는 생각에 오늘까지 너를 키우며 자결을 미뤄 왔다.
 어젯밤, 네가 너의 부모에 대해 물어 오자 이제 네 부모에게 용서를 빌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너의 나이가 벌써 열다섯이 되었구나. 이젠 내가 너를 보살피지 않아도 너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 너의 부모에게 도저히 용서받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은 죄를 덜은 것 같아 어깨가 가볍게 느껴진다. 살인을 저지른 내가 이곳에 돌아와 혈마진경의 뒷부분을 보니, 팔백여 년 전 무림을 혼돈에 빠뜨린 경혼마겁 전의비가 은거한 곳이 혈마진경이 있던 건너편 동굴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혈마진경을 익히다 너의 부모를 살해한 나는 혈마진경의 무공을 다시 익히지 않았으며, 네게 전수해 주지 못하였다.
 서가를 치우고 땅을 파 보면 목궤에 혈마진경이 있다. 네가 나를 용서한다면 혈마진경을 익혀 마기를 제거한 후, 소림사에 가져다 주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이 할아비는 이제 너의 부모를 찾아 용서를 빌어야겠다. 정말 네게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한 나를 용서해 주렴. 내가 죽거든 나를 묻지 말고 짐승들의 먹이로 나무 위에 걸쳐 놓도록 하거라. 이 죄인은 너의 손으로 땅에 묻힐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너의 부친은 철혈협객(鐵血俠客) 사마룡(司馬龍)이며, 너의 모친은 마도제일화(魔道第一花) 제려진(諸麗珍)이다.
 내 여태껏 너를 성도 없이 린아라 불렀으나, 너의 성과 이름은 사마린(司馬麟)이라 한다. 네가 이곳을 벗어나려면 북쪽 마기가 흐르는 동굴의 오른편에 천잠사를 매어 두었으니, 그것을 이용하도록 하여라.
 다시 한번 네게 용서를 빈다. 그럼 이만 줄인다.
 소림사의 파계승 혜능.>
 
 혜능선사가 새겨 놓은 목판의 장문을 읽는 사마린은 할아버지가 친할아버지가 아니고, 살부살모의 원수라는 내용에 충격을 받았지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읽었다.
 처음엔 혜능선사가 원망스러웠지만 십오 년을 승려의 몸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하고 길러 주신 혜능선사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밖으로 뛰쳐나온 사마린은 혜능선사의 봉분에 커다란 비석을 세웠다.
 
 <少林寺 藏經閣主 慧能禪師之墓. 손자 사마린 읍립.>
 
 ‘할아버지! 비록 할아버지께서 저의 살부살모지원수(殺父殺母之怨讐)지만 저를 키워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키워 주신 할아버지의 은혜가 하늘과 같은데, 어찌 제가 감히 할아버님을 용서한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영원히 저에게 인자하신 모습으로 기억될 겁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손자,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칠 주야 동안 혜능선사의 명복을 빌었던 사마린은 동굴로 돌아가서 목궤를 찾았다.
 마기가 넘쳐 흘러나오는 혈마진경을 손에 든 사마린은 혈마진경의 마공 때문에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 자리에서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혜능선사의 유언을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 앉아 마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혈마진경의 내용은 혈마잔월검법(血魔殘月劍法), 혈마마전지공(血魔魔電指功), 혈마천멸장(天魔天滅掌), 혈마무영신법(血魔無影身法), 네 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천마철경의 무공과 흡사한 면이 많았다.
 만류귀종(萬流歸種).
 뿌리가 같으니 혈마진경의 무공은 한 달쯤 지나자 사마린이 완벽히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혈마진경의 맨 뒷부분에는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혈마가 남겨 놓은 글이 있었다.
 
 <사부님께서 내게 무공을 다 가르쳐 주시지 않으셔서 무림에서 독존(獨存)할 수 없었다. 천마(天魔)와 양패구상(兩敗具傷)하여 이곳으로 피신했지만,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부님께서 이 근처에 영면(永眠)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사부님이 영면해 계신 곳의 동굴을 막고 이곳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곳에 드는 자가 있다면 나의 무공을 남겼으니, 그것만 취하고 발길을 돌려 사부님의 영면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 사부님께서 영면해 드신 이 동굴의 마기는 극한의 마공을 이루지 못한 자는 감당을 할 수 없다. 만일 나의 권고를 무시하고 석벽을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혈마(血魔) 위지청(偉智淸).>
 
 글을 읽은 사마린은 북쪽 동굴로 찾아갔다.
 몇 개의 동굴 중에서 유독 한 동굴에서 마기를 감지한 사마린은 거침없이 동굴 안으로 들었다. 동굴 안은 어둡고 습기가 많았지만 사마린에게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동굴의 끝 부분에 흩어져 있는 인골을 발견하고 잘 추슬러 한쪽에 묻어 주었다.
 인골의 주인은 바로 혈마였으리라.
 벽면에 검이 꽂혀 있는 것을 본 사마린은 검의 손잡이를 잡고 진기를 운용하여 뽑았다.
 꽈르르릉-!
 슈우우욱-!
 석벽이 무너져 내리며 안에서 무시무시한 묵색(墨色) 마기가 마치 사마린의 온몸을 찢을 듯 밀려 나왔다. 그는 전신으로 밀려오는 마기를 희미한 미소를 띠며 받아들였다.
 ‘흥! 혈마라는 자가 우습군. 이 정도 마기를 가지고 협박을 하다니!’
 마황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마린은 자신이 불사마신체(不死魔身體)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들었기에 태연히 마기를 몸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사마린은 어릴 때부터 마기와는 친숙하였다. 어떠한 마기도 그의 신체에 접하면 흡수되었고, 마공 증진에 도움이 되었었다.
 사마린은 그 자리에 앉아 마기를 전신으로 흡수하며 천마(天魔)의 천마심법(天魔心法)을 운공하였다. 그러자 묵색 마기가 사마린의 전신 팔만사천 모공을 통해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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