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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색전기 1

2017.11.20 조회 404 추천 1


 십색전기 1권
 제1장 웃기는 주루(酒樓)
 
 
 “야, 천칠(千七)! 빨리 안 나갈 거야?”
 몹시도 뚱뚱하여 돈돈(敦豚)이라는 별호를 가진 장방(長房)이 주방 안을 들여다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 알았어요. 지금 가요!”
 이제 겨우 십사오 세 정도 된 어린 소년이 돈돈의 성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루 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소년은 주루에서 일하는 점소이답지 않게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지 비쩍 마른 몸집이었다.
 그의 의복은 남루하기는 하였지만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천소기(千召奇)라는 그럴 듯한 성명이 있으나 주루에서는 모두 그를 천칠(千七)로 불렀다.
 그가 주루에서 일하는 점소이 중 가장 말석인 일곱 번째를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기분 좋을 때 부르는 소리이다. 보통은 그를 천치(天痴)라고 부르며, 그를 조롱하기 일쑤였다.
 그에게 천치라는 좋지 않은 별호가 생긴 것은 순전히 그의 불학무식(不學無識) 때문이었다.
 천칠은 아직까지 자신의 성명 석자는 물론 한 일(一)자도 제대로 구분할지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천칠을 천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천소기는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말만은 청산유수였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제법 그럴 듯한 말을 주워댈 때면 손님들도 배꼽이 빠지라고 웃곤 하였다. 그건 천소기가 주워듣긴 들었는데, 그 뜻을 정확히 몰라 엉뚱한 고사성어를 읊어대기 때문이었다.
 
 돈돈이 천칠에게 거칠게 소리친 것은 손님이 왔음을 알려 주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천소기가 몸담고 있는 주루의 점소이들에게는 제법 엄한 규율이 있었다. 그 규율이란 게 하도 웃겨 누구나 농담인 줄 알지만, 그 웃기는 규율 때문에 혹독한 매질이 뒤따르곤 하였다.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점소이보다 하루 수입이 많으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첫 번째 규율이고, 손님이 왔는데도 자신의 차례를 지키지 않고, 먼저 나가거나 나중에 나가도 안 된다는 것이 두 번째 규율이다.
 주루에 드나드는 주객들이 때로는 기분이 좋아 우수리 은자를 가지라고 기분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점소이들의 수입은 괜찮은 편이다. 두 번째 규율은 제법 차려입은 손님이 오면 후닥닥 달려나가고, 허름한 의복을 걸친 손님이 오면 나가지 않으려는 점소이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돈돈이 만든 규율이었다.
 사실 전에는 제법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손님은 언제나 첫째 점소이인 도진(陶臻)의 차지였다.
 도진은 이곳에서 무려 십이 년이나 근무한 점소이였다. 다소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나이는 올해 이십이 세로 점소이 중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였다.
 그의 성격은 거만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점소이들의 세계에서만 그렇다.
 도진은 재신(財神)으로 보이는 손님에겐 간이라도 빼어줄 듯 굽실거리며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의복이 화려한 손님만 차지하고 남루한 의복을 걸친 손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은자가 없어 보이는 손님은 그의 눈에는 손님으로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첫째는 늘 한가하였다. 왜냐면 그런 손님들은 하루에 하나나 둘 정도밖에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꼴을 보다 못한 돈돈이 두 번째 규율을 만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규율이란 게 있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도진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 모든 점소이들을 데리고 주루를 떠나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돈돈이 보기에 점소이들조차 그의 편이 아님을 짐작하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예상대로 도진은 모든 점소이들에게 짐을 싸라고 명하였으나 누구도 짐을 싸지 않았다. 모두들 잘 가라는 말만 하고 돌아앉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아니면 마땅한 일자리가 없던 도진이 끝내 굴복하여 두 번째 규율이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그 후로는 은자가 있어 보이든 없어 보이든, 점소이들은 순번대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으러 나가게 된 것이었다. 그 바람에 도진의 수입은 왕창 줄었고, 반대로 늘 편안하던 몸은 무지하게 바빠지고 피곤해졌다.
 그래서 화가 난 도진이 첫 번째 규율을 만든 것이었다.
 도진이 장방인 돈돈이 만든 규율보다는, 자신이 만든 규율이 먼저라며 하도 두둘겨패서 그것이 첫 번째 규율이 된 것이었다.
 
 천소기가 머물고 있는 주루는 색향인 항주 외곽에 위치한 중간 규모의 주루였다. 물론 손님들이 자고 갈 수 있는 객실도 이십여 개나 있다.
 하지만 하도 허름해서 객실을 사용하는 손님은 외지에서 온 사람이거나 무림인들 외에는 별로 없었다.
 주루의 이름은 거창하게도 천하일주(天下一酒)였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명주(名酒)를 만들어 팔겠다는 뜻으로 지은 상호라고 하였다.
 돈돈의 조부는 점소이 생활 삼십 년 만에 그 동안 모은 은자로 천하일주를 만들면서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 그의 필체는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듯 구불구불하여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게 천하일주라고 쓴 것인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악필(惡筆)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천하일주를 드나드는 손님들은 그 현판을 전혀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천하일주에서 파는 술은 맛은 그저 그런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천하일주에서 정말 잘하는 것은 바로 차(茶)였다. 특수한 비법으로 우려내는 차맛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는 차의 본거지인 항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차를 달여내는 것은 순전히 돈돈의 부인인 돈화(豚花)가 하고 있었다.
 돈화는 돈돈만큼이나 뚱뚱한 몹시도 못생긴 추녀였다. 돈돈이 부친 밑에서 점소이 노릇을 할 때, 만취되어 건드린 여인이 바로 돈화였다고 한다.
 그후, 돈화에게 코가 꿰어 지금까지 그런 대로 살고 있었다. 그 돈화가 다른 재주는 없어도 차를 달여내는 재주만큼은 천하제일이었던 것이다.
 돈화의 말로는 전에 항주에서 동남방으로 약 오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범어산( 魚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표훈사(飄薰寺)에 불목하니로 머물렀을 때, 그곳 주지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비법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천하일주 내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하여간 차는 맛과 향이 그윽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확실히 돈화는 그 방면에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주에는 까다로운 미식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미식가들이 다른 음식들은 모두 다른 주루에서 먹고 마셔도, 차만큼은 일부러 천하일주를 찾아와 마시곤 하였다.
 천하일주가 생긴지는 대략 오십 년 정도 되었다. 돈돈의 조부가 운영하던 것을 대대로 물려받고 있는 것이었다.
 
 주루의 규율을 어겼다 하여 매일 얻어터지는 것은 가장 서열이 낮은 천칠이었다.
 둘째가 첫째의 눈밖에 벗어나면 둘째부터 일곱째까지 모두 집합하여 치도곤을 당했고, 넷째가 잘못 보이면 넷째부터 일곱째까지 집합하여 당하곤 하였다.
 따라서 천소기는 늘 집합에 참가하여 매를 맞아야 잠이 제대로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부를지 몰라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며 밤을 지새우곤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아는 서열 높은 점소이들은 집합을 해야 할 날임에도 일부러 집합을 시키지 않고 그냥 자 버린다. 그러면 밑의 점소이들은 다음 날 하루 종일 시뻘건 토끼눈을 한 채 일을 하여야 하였다. 이럴 때 점소이들은 차라리 매를 맞는 게 낫다며 투덜거리곤 하였다.
 장방은 특별히 천소기를 아끼고 귀여워하여, 그가 순서를 잊고 있을 때면 은근히 알려 주곤 하였다.
 돈돈이 천소기를 아끼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건 천소기가 자신의 다른 목적을 충족시키는 데 혁혁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부드러운 음성으로 손님이 왔음을 알려 주었는데, 이로 인해 천소기가 돈돈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알려져 수시로 집합에 끌려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그 후론 거칠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돈돈이 천소기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다른 점소이들을 볼 때와는 달리 부드러웠다. 어쨌든 돈돈은 남달리 천소기를 아끼는 것이다.
 점소이들이 천소기를 특별히 미워하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전에는 천소기가 다른 점소이들에 비해 어리고 영리하여 손님들의 비위를 잘 맞춰 늘 제일 많은 은자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은자를 그냥 착복하면 주루의 첫 번째 규율을 어기게 되는 것이므로, 그 은자는 공평하게 나뉘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첫 번째 규율이 생긴 이후로 천소기의 수입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돈돈은 천소기 를 꾀어 은자들을 강제로 뺏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돈이 천소기를 꼬인 것은 바로 글공부였다. 자신의 성명 석 자조차 쓸 줄 모른다고 매일 같이 놀림을 당하자, 어느 날 천소기가 돈돈을 찾아와 한 말이 있었다.
 “돈돈 아저씨!”
 “응? 왜?”
 돈돈은 하루의 매상을 집계하느라 정신없는데 천소기가 다가와 말을 걸자 귀찮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의 없이 대답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말해 봐! 들어봐서 들어줄 만하면 들어주고, 아니면······.”
 돈돈은 여전히 하던 일을 계속하며 성의 없이 대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돈화 몰래 몇 푼 은자를 감추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돈돈은 못생긴 돈화보다는 진회하의 유명한 기방인 진기원(眞妓院)에 있는 설화(雪花)라는 기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설화를 만나 하룻밤의 운운지정(雲雨之情)을 나누려면 적지 않은 은자가 필요했기에 돈돈은 매일 매상에서 조금씩 빼내어 비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꺼번에 빼내다 걸리면 돈화에게 그날로 묵사발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 딴에는 치밀하게 하는 것이었다.
 “저, 돈돈 아저씨! 기아(奇兒)한테 글자 쓰고 읽는 법을 좀 가르쳐 주실래요?”
 “뭐? 너, 지금 방금 뭐라고 했니?”
 “글자를 가르쳐 달라고요.”
 돈돈은 하던 일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천소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리지만 천소기의 눈에는 총기가 있어 보였다.
 “음······.”
 돈돈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돈돈도 글자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남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돈돈은 차마 자신도 글을 모른다고 말하기가 자존심이 상해 일부러 심각한 척한 것이었다.
 “안 돼요?”
 천소기가 빤히 바라보며 말하자 돈돈이 그제서야 마지못하고 입을 열었다.
 “음,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돈돈 아저씨! 일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은자가 생기면 다 드릴게요. 제발 글 좀 가르쳐 주세요. 예?”
 돈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풀어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천소기는 돈돈을 오해하고 말았다.
 “돈돈 아저씨! 아저씨가 바쁘시다는 것을 기아(奇兒)는 알아요. 하지만 형들이 기아더러 바보 천치라고 하는 소리는 정말 듣기 싫어요. 그러니까 제발 글 좀 배우게 해 주세요.”
 “흐음, 그럼······ 그럼 말이다. 네가 알다시피 나는 바쁘니까, 서당(書堂)을 다니도록 하여라!”
 “예? 서당이오?”
 천소기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돈돈을 바라보았다. 서당까지 보내줄 줄은 전혀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대신 너한테 생기는 수입은 모두 이 아저씨한테 주어야 한다. 훈장(訓長)한테 은자를 줘야 하니까.”
 “아저씨, 정말이세요? 정말 서당에 다니게 해 주실 거예요?”
 천소기는 너무도 좋아 팔짝팔짝 뛰면서 돈돈의 세숫대야만큼 큰 못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훈장에게 말해 두마.”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욕심 많게 생긴 돈돈의 얼굴이 그날처럼 천소기에게 예뻐 보인 적이 없었다.
 
 돈돈은 천소기가 간신히 걸을 때부터 그에게 일을 시켜 왔다. 그후 오늘날까지 돈돈은 참으로 엄청나게 천소기를 부려먹었다.
 천소기가 돈돈과 인연을 맺은 것은 십사 년 전 여름이었다. 엄청난 폭우로 집들이 떠내려 가던 우기(雨期)에 돈돈은 어린아이 우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당시 돈돈은 돈화를 잘못 건드려 신접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돈화가 생긴 것은 그렇지만 밤기술은 좋은지, 돈돈은 매일 밤 돈화의 배 위에서 잠이 들곤 하였었다. 또 그땐 왕성한 성욕을 주체할 수 없을 때이기도 하였다.
 짜증이 난 돈돈이 돈화더러 나가 보라 하였더니, 돈화가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 바로 인연(因緣)의 시작이었다.
 허름한 강보에 싸인 그 어린아이가 바로 천소기였던 것이다.
 그 시절 강호에는 수년 간 엄청난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허기를 면하기 위하여 풀뿌리는 물론 나무 껍질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벗겨 먹었다. 자연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돈화는 돈돈과의 사이에서 갓 태어난 아들을 땅에 묻은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아들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시름시름 앓더니 저 세상으로 갔던 것이다.
 천소기를 얻은 돈화는 잃은 아들 대신 천소기를 기르기로 마음먹고 우는 아이의 입에 젖을 물렸다. 그렇게도 울어대던 아이가 돈화의 엄청나게 큰 젖을 물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잠잠해지자 돈돈은 곧 잠이 들었다.
 사실 돈돈은 매일 밤마다 돈화의 엄청난 젖을 짜는 고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소기가 그 노릇을 대신해 주자 편안히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매사에 귀찮은 것을 싫어하던 돈돈은 차라리 잘 되었다면서 돈화가 천소기를 기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돈화는 돈돈과는 달리 약간의 글을 알고 있었다.
 돈화는 고민 끝에 천소기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의 성인 천(千)은 강보에 같이 있던 종이에 하늘 천(天)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지은 것이었다.
 강호에 하늘 천자를 성으로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일천 천(千), 천씨로 성을 지은 것이었다. 이름인 소기(召奇)는 돈화가 아이를 잃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죽은 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표훈사에 들렀다 만난 노승(老僧)이 지은 이름이었다.
 아이를 낳을 때 엄청나게 고생한 돈화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 돈화에게 아들이 생겼으니, 기이한 인연이라는 의미로 소기라 이름 지은 것이었다.
 돈화의 보살핌 속에서 천소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처음엔 돈돈도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천소기가 자라면 장차 주루의 점소이로 평생 부려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거의 매일 그의 키를 쟀다.
 돈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천소기는 불과 일곱 살의 나이로 주루의 점소이가 되었다.
 그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천소기는 매일 밤 한 병의 죽엽청(竹葉淸)을 들고 천하일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장(馬場)으로 갔다. 그곳에 천소기의 훈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천소기가 매일 방문하는 훈장은 바로 마장에서도 가장 말단인 말똥 청소 담당 혁(赫) 노인이었다. 돈돈이 천소기에게 사기(詐欺)를 친 것이었다.
 혁 노인은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주정뱅이였다. 그런 노인이 언젠가 주루에서 서생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돈돈은 그가 학문이 제법 되는 줄 짐작하고, 천소기를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주루의 장사가 모두 끝나는 한밤중에.
 대신 그에게 지불하는 것은 낮에 손님들이 남기고 간 술들을 모아 둔 술이었다.
 돈돈의 이야기를 들은 혁 노인은 처음엔 완강히 거절하였으나, 매일 한 병씩 술을 준다고 하자 승낙한 것이었다.
 그로써 돈돈은 천소기가 주루에서 번 은자를 몽땅 착복할 수 있었으며, 대신 어차피 버릴 술을 모았던 것이다.
 돈돈은 천소기로 인하여 한 달에 한 번 보기 힘들었던 진기원의 설화를 한 달에 무려 네 번이나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돈돈의 눈에 천소기가 예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혁 노인은 나이가 칠순 정도 된 호호백발의 노인이었다.
 지필묵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천소기는 혁 노인의 거처에서 대강 묶은 말총에 물을 묻혀 방바닥에 가져다 놓은 커다란 돌 위에 글씨 쓰는 연습을 하였다.
 그가 글씨 쓰는 것에 열중하다 돌아보면 어느새 혁 노인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곤 하였다. 하지만 천소기는 혁 노인에게 늘 사부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
 주루에 들렀던 어떤 서생이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라는 말을 하며, 그 뜻을 풀이해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소기는 이곳에 올 때마다 술 외에 따로 기름진 안주를 조금씩 들고 오곤 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천소기를 사랑하는 돈화가 준비해 준 것이었다.
 돈화는 천소기가 글을 배운다고 할 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돈돈이 설화라는 기녀에게 정신이 팔려 있음도, 그가 매상에서 조금씩 뺀 은자로 그녀를 찾아감도, 그리고 천소기에게 사기 쳤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천소기가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만 해도 어디냐며, 말없이 그의 글공부를 도운 것이었다.
 돈돈은 천소기가 혁 노인에게 가져다주는 죽엽청(竹葉淸)이 팔다 남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 술은 늘 새로운 독에서 따른 좋은 술이었다.
 천소기에게 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감히 그런 대접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돈화가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천소기가 혁 노인에게서 밤에는 글을 배우며, 낮에는 주루에서 점소이 생활을 하는 나날들이 이어져 어느덧 일 년이란 시간이 흘러 십오 세가 되었다.
 혁 노인은 처음엔 시큰둥하며 그냥 글자 몇 자를 알려 주고 연습하라고만 하였다가 의외로 천소기의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자, 요즘은 그 좋아하는 술도 마시지 않고 천소기에게 학문을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의외로 혁 노인의 학문은 매우 높았던 것이다.
 지난 일 년 간 천소기는 혁 노인으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까지 익힐 수 있었다. 한 일자도 모르던 그가 그만큼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니, 눈부신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하여도, 사서삼경을 떼려면 적어도 삼사 년은 죽어라고 공부하여야 가능한데, 불과 일 년 만에 이만한 성과를 올렸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혁 노인은 너무 노쇠한데다 추운 겨울에 몹시 앓았었기 때문에 요즘은 건강이 안 좋았다.
 천소기는 은자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약이라도 한 재 지어다 드리고 싶은데, 돈돈이 몽땅 긁어가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혁 노인은 요즘 천소기만 보면 자신이 몇 년만 젊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되뇌곤 하였다. 그러면 천소기에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천소기는 전과 같이 주루에서 천치로 불렸다. 그가 지난 일 년 간 전혀 배운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하일주의 점소이들 중 어느 누구도 천소기가 매일 밤 글공부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장사가 끝나면 잠자기 바쁘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분탕질 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천소기는 무림인인 듯한 험상궂은 장한의 탁자에서 거의 두 냥에 해당하는 은 부스러기를 얻었다. 이 모습을 본 돈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소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자 두 냥이 자신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주루의 한쪽 구석에서 이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점소이 중 첫째인 도진이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도진에게 걸린 손님들이 하나같이 의복이 남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도진에게 가장 싼 음식인 소면만을 시켰을 뿐이다. 당연히 생기는 것이 하나도 없는 소위 공치는 날이었다.
 도진은 하루 종일 소면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는 것으로 자신의 상한 기분을 나타내었다.
 도진이 보기에 천소기는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손님들이 그에게는 후했다.
 처음엔 단순히 천소기가 어리고, 인상이 깨끗해서 그런 줄 알고 나름대로 열심히 씻고, 의복을 깨끗이 입으며, 친절하게 했으나 별무 효과였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천소기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고 배우려는 것이다.
 천소기는 음식값과 함께 받은 은 덩어리를 돈돈에게 넘기며 주문받은 것을 말했다.
 돈돈은 자신만이 아는 전표를 끊어 천소기에게 넘기며 말했다.
 “자, 빨리 주방에 넘기고 너는 좀 쉬어라!”
 돈돈은 뜻밖의 횡재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도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바보 천치는 셈하는 줄도 모르나? 분명 은자 두 냥 가량이 남았는데······.”
 도진이 아무리 보아도 돈돈은 천칠에게 은자를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진은 천칠이 셈을 할 줄 모르는 것을 돈돈이 악용하여 그의 수입을 착복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음, 돈돈이 치사하게 셈도 할 줄 모른다고 그 동안 천치의 은자를 착복했구나.’
 도진이 생각하기에 지난 수년 간 분명 천치에게 적지 않은 은자가 모였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천치는 늘 남루하고, 다 닳은 의복만을 걸치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었지만 천칠이 남달리 검소하거나 천치라서 의복을 사 입을 줄 몰라 그러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모습을 보자 도진은 그 이유가 천치의 은자를 돈돈이 빼앗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살펴보니 천칠이 돈돈에게 준 은자 중 천칠의 몫은 족히 네 냥은 되었다. 그 돈이면 한가족이 보름은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 은자 모두를 돈돈이 가지고 내놓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도진은 그날 밤 집합을 걸었다.
 “번호!”
 “하나!”
 “둘!”
 “셋!”
 “······!”
 “여섯! 집합 끝!”
 도진이 손에 든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번호를 외치는 점소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좋아, 천치 앞으로 나와!”
 천소기는 도진이 자신을 지목하자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오늘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여 도진이 이렇게 화가 났나 하는 것을 더듬어 보았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도진에게 지목된 이상 천소기는 오늘 볼기짝이 터지도록 맞을 일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도진이 가고 나면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해서 여섯째까지 자신을 때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소기는 후닥닥 튀어나와 도진의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집합 끝!”
 그런 천소기의 모습을 본 도진이 점소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중에 정말 천치가 있다! 그 놈이 누군지 아는 사람?”
 도진의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도진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면 그 즉시 몽둥이 찜질이 있기 때문이었다.
 “몰라? 크흐흐······, 좋다! 바보 천치 네놈은 셈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세, 셈이오?”
 천소기는 느닷없는 도진의 말에 다소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렇다! 네놈은 셈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그, 그게······.”
 도진은 천소기가 셈을 할 줄 모른다 생각하여 한심하게 보인 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천치! 하나 더하기 하나는 얼마냐?”
 천소기는 이제 겨우 젖을 뗀 아이도 알 만한 문제를 내는 도진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더듬거렸다.
 “그, 그게······.”
 천소기는 도진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싶었으나 쉽지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러자 도진은 천칠이 진짜 하나 더하기 하나를 모를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이런, 천치 같은 놈! 도대체 네놈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느냐? 하나 더하기 하나도 모르면서 어떻게 점소이 생활을 한단 말이냐?”
 천소기는 설마 자신이 하나 더하기 하나도 모르는 천치 대접을 받을 줄은 몰라 항변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오늘밤 죽을 각오를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도진은 점소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하면서, 돈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인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돈돈은 도진에 의해서 어린아이 코 묻은 돈을 빼앗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었다.
 천소기는 도진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도진의 오늘 수입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천소기의 수입은 은자 네 냥이니, 천하일주의 규율대로 라면 일인당 적어도 은자 반냥씩은 분배될 수 있는데, 돈돈이 전부 착복하여 국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소기는 자신이 글공부를 하는 대가로 수입 전부를 돈돈에게 준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즉시 시체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돈은 밤새도록 점소이들에 의하여 성토(聲討)되었다.
 다른 점소이들도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든 것이 순전히 멍청한 천소기 때문이라며, 너도나도 나서서 천소기에게 셈을 가르치겠다며 대들었다.
 하지만 영리한 천소기는 짐짓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진짜 천치 흉내를 내어 그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소기는 점소이들도 포기한 천치가 되는 것으로 끝났다.
 천소기는 점소이들이 주먹으로 때리는 알밤을 맞으며 그렇게 밤을 지새웠고, 점소이들은 더 이상 천소기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다.
 천소기는 남몰래 마장으로 갔다.
 “사부님, 소생 기아이옵니다.”
 천소기의 음성과 태도 모두 집합 당시와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의젓한 서생 티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쿨룩쿨룩! 오, 기아냐? 어서 오너라.”
 “예, 사부님.”
 천소기는 허름한 골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혁 노인이 머무는 마장의 골방은 아무렇게나 기둥을 세워 놓고 흙을 바른 흙벽이었고, 바닥도 그냥 흙바닥이었다. 그 바닥 위에는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시커먼 거적이 달랑 있을 뿐이었다. 거적은 처음엔 청색이었는지 시커먼 가운데 얼핏 청색이 비치고 있었다.
 골방 안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것은 바로 황촉(黃燭)이었다. 가물거리는 빛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는 황촉으로 인해 방 안은 지저분하였지만 아늑하게 느껴졌다.
 이 황촉은 돈화가 남몰래 혁 노인의 거처에 놓고 간 것이었다. 천소기가 글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되라는 뜻에서 돈돈 몰래 배려한 것이었다.
 “허험! 그래, 오늘은 어디를 할 차례인고?”
 혁 노인의 앞에 단정히 무릎 꿇고 앉은 천소기가 낭랑한 음성으로 답하였다.
 “예! 사부님, 오늘은 여씨춘추(呂氏春秋) 맹하기(孟夏紀) 권학편(勸學編)의 말씀입니다.”
 “호오, 그래? 그럼 읽어 보거라!”
 천소기의 의젓한 말에 혁 노인은 진물이 흐르는 노안(老眼)으로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범학(故凡學)은, 비능익야(非能益也)요, 달천성야(達天性也)라. 능전천지소생이물패지(能全天之所生而勿敗之)라야,시위선학(是謂善學)이라.”
 천기의 나직하고 낭랑한 음성이 골방에 울려 퍼졌다.
 혁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하였다.
 “그럼 그것을 해석하여 보거라!”
 “예, 사부님. 배우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것을 따로 보태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천성에 통달케 하는 것이다. 오직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본성을 보전하여 해를 입지 않도록 할 수 있어야 배우는 것을 잘할 수 있다는 말이옵니다.”
 천소기는 공손한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말하였다. 이렇게 천소기가 당당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 골방이었다.
 그런 천소기의 모습을 지켜보던 혁 노인의 입이 열렸다.
 “호오, 잘하였다. 배우는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니라. 그것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어디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자기에게 부여된 성현의 본질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아 너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늘 학문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사부님.”
 혁 노인이 천소기의 해석을 좀더 다듬어 말하는 동안, 천소기의 눈빛은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북두칠성의 성광(星光)과도 같은 현묘(賢妙)로운 안광을 내고 있었다.
 혁 노인의 말에 천소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부의 말을 가슴 깊이 담았다.
 천소기의 눈빛은 조금 전 주루 옥상에서 집합하였을 때와 지금의 눈빛은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보이고 있었다.
 그 동안 천소기는 혁 노인으로부터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전수받았다. 또 숨쉬는 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처음엔 멀쩡히 숨을 잘 쉬고 있는데, 무슨 숨쉬는 법인가 하여 의아하게 생각하였었지만, 혁 노인이 가르쳐 준 숨쉬는 법을 배운 이후로는 천소기는 밤새 공부를 하여도 피곤함을 거의 느끼지 못하였다.
 천소기는 혁 노인에게서 배운 호흡법으로 자신의 신체가 강건한 신체로 변하는 것을 알고, 늘 가르쳐 준 대로 호흡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숨쉬는 법은 어떤 자세로도 가능한 것이기에 천소기는 주루에서 일하는 낮에도 끊임없이 그 방법대로 호흡하고 있었다.
 혁 노인이 거처하는 허름한 그 골방 안에서의 공부는 그렇게 되고 있었다.
 천소기가 주루에서 일하는 동안 늘 중얼거리는 것이 바로 밤새 혁 노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을 되뇌는 것이란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돈돈은 천소기를 혁 노인에게 보낸 이후 단 한번도 얼마나 배웠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의 그의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돈화만이 때때로 글공부가 잘 되느냐고 물었는데, 그녀도 천소기가 이 정도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천소기는 점점 주루의 명물(名物)이 되어 갔다. 그것은 그가 주루에 오는 손님들을 웃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하일주는 항주 사람들의 입에서 웃기는 주루[笑樓]라는 말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천하일주에는 차차 손님들이 늘었다. 늘 한가하던 주루 삼층까지 천소기의 우스운 모습을 보러 왔기에 주루는 늘 만원이 되었다.
 따라서 도진 이하 모든 점소이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전처럼 심한 집합은 사라졌다.
 그래도 첫 번째 규율인 도진보다 수입이 많은 것은 내놓아야 했기에 천소기의 재산은 조금씩 늘어갔다. 그것은 도진이 특별히 천소기의 몫을 따로 모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천소기에게 주었다가는 돈돈에게 몽땅 빼앗길 것을 우려한 처사였다. 도진에게는 이런 일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자신의 주머니가 두둑해진 일등공신이 천소기임을 알기에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천소기는 도진에게서 받은 은자로 혁 노인에게는 약재(藥材) 한 재를, 돈화에게는 비녀 한 개를 사 주었다.
 혁 노인과 돈화는 둘 다 똑같이 건성으로 고맙다는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둘다 타인에게서 무엇인가를 선물받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천소기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울컥 솟아나는 감격 때문에 더 이상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도 간단한 말이었지만 천소기는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껴 주는 두 사람에게 자신이 번 은자로 무언가를 사 줄 수 있었다는 자체가 너무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천소기로서도 이번 일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첫 번째 경험이었던 것이다.
 천소기가 주루에서 손님들을 웃기는 것은 고사성어(古事成語)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 때문이었다.
 어느 날, 어떤 주객들이 들어와 이야기하던 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 이야기를 천소기가 듣고 그 대화에 끼여든 것이 발단이었다.
 “아, 군계일학이라는 말 소인도 알아요.”
 “어, 그래? 그럼 그 뜻이 뭔지 한 번 말해 보거라.”
 술을 마시던 주객은 불쑥 끼여든 천소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허름한 주루에서 일하는 점소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에헴! 군계일학이란 말은 백 마리 닭고기보다 한 마리 학고기가 더 맛있다는 뜻 아닙니까?”
 “뭐라고? 으하하하하하핫······!”
 주루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정작 웃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천소기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왜 웃느냐는 표정을 지은 것이 정말 웃겼기 때문이었다.
 그후로 천소기가 풀이하는 고사성어는 즉시 항주 전역에 퍼지는 유행어가 되었다. 심지어는 서당의 학동들도 천소기가 해석한 기상천외한 고사성어 뜻풀이를 이야기하면서 낄낄거리기까지 하였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은 두씨네 집은 문이 두 개 있어 어떤 문으로 나가야 할지를 몰라 못 나간다는 것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뽕나무밭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어야 좋다는 뜻으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은 토끼가 죽으면 개는 삶은 토끼고기를 뜨거워서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는 힘으로 산을 뽑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기가 세서 그렇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천하일주는 완전히 웃음의 도가니로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천소기가 하릴없이 이런 엉뚱한 해석을 해대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혁 노인이 누구에게도 학문을 익혔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 하였기 때문이고, 생활 태도를 바꾸라 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천소기는 각종 고사성어의 뜻과 그것이 만들어진 연유까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가끔 집합이 걸릴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천소기는 엉덩이를 맞으면서 외치는 소리가 바뀌었다.
 어떤 날은 맞을 때마다 ‘자왈! 자왈!’ 하였다.
 점소이들은 그가 외치는 소리가 무슨 듯인지 몰랐으나, 실상 천소기는 맞을 때마다 전일에 배웠던 논어(論語)의 한 구절을 암송하였던 것이다.
 천소기는 논어의 구절 중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하였다.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그 아니 좋은가, 하는 말이었다.
 천소기는 매를 맞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아무도 몰래 학문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천소기는 혁 노인에게서 학문을 익히면서,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살아왔나를 절감하고 생활 태도마저 바꾸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웃으면서 사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 결과, 항주에 소루(笑樓)가 탄생한 것이었다. 남을 즐겁게 함으로써 자신도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천하일주가 소루로 소문나면서 일부러 소루에 와서 천소기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들은 천소기에게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대고 해석하여 보라고 시키곤 그의 엉뚱한 해석에 배꼽이 빠지라고 웃고는 기분 좋게 돌아갔다. 덕분에 천소기도 유명해져 이제 항주에서는 천하일주에 점소이로 있는 천칠이 유명인사가 되었다. 물론 그에 걸맞는 외호도 생겨났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외호는 천치(天痴)였다.
 이제 천하일주의 점소이들만 부르던 그의 별칭이 졸지에 전 항주 사람들이 부르는 외호가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소기의 얼이 빠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항주를 다스리는 항주부사(杭州府使)에게는 오직 여식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여식은 초향옥녀(草香玉女) 예아연(芮娥燕)이었다.
 종삼품의 품계를 가진 항주부사 예당(芮撞)의 장중주였다.
 예당은 올해 세수가 오십칠 세로, 초향옥녀는 그가 늦게 본 무남독녀였다.
 예아연은 미모가 뛰어나기로 이름난 여인이었다. 월궁(月宮)의 항아(姮娥)나 천상(天上)의 옥녀(玉女)가 인세(人世)에 내려온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들은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던 것이다.
 예당은 초향옥녀 예아연을 불면 날아갈 듯, 만지면 꺼질 듯 애지중지하여 키우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예아연은 평소에 오만하기로도 이름나 있었다. 웬만한 관인들은 항주부사의 체면을 보아 그녀가 무례하게 굴어도 내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오만함은 극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아연은 오만한 만큼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다. 사서삼경은 물론 삼교구류(三敎九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예아연은 올해 십육 세로 천소기보다는 한 살이 위였다.
 그 예아연이 누구에게선가 천치 천칠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소루를 찾은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웃기는 놈이길래 그토록 요란하게 소문이 났나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예아연은 그녀의 호위를 자처하는 항주에서 제법 힘깨나 쓴다는 집안의 자제들을 한 무리 대동하고 소루에 들이닥쳤다.
 물론 돈돈의 입은 귀까지 찢어졌다. 엄청난 수입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돈돈은 장삿속을 발휘하여 일부러 한가롭게 쉬고 있던 천소기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가 없는 동안 매상을 올리자는 속셈이었다.
 돈돈의 예상은 적중하여 그날 돈돈은 열흘 동안 영업을 하여야 만질 수 있는 엄청난 은자를 만질 수 있었다. 물론 그 중 상당수가 돈화 몰래 빼돌려졌다. 그 은자는 설화를 만나는 데 쓰일 것이다.
 예아연은 소루에 들어오자마자 천칠을 찾았고, 마침 자리에 없다는 말에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동안 그녀의 호위들은 엄청 먹고 마셨다.
 이윽고 돈돈의 명으로 예아연의 탁자로 다가간 천소기가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저께서 소인에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예아연은 천소기를 보자마자 입가에 교소(嬌笑)를 베어물고 입을 열었다.
 “호호······, 네가 바로 천치 천칠이냐?”
 그녀의 표정엔 천소기를 깔보는 모습이 역력히 담겨져 있었다.
 “헤헤······, 그렇습니다요.”
 천소기는 일부러 헤픈 웃음을 흘리며 예아연의 말을 받았다.
 “네놈이 정말 그토록 웃기는 천치란 말이지?”
 “하하! 맞소이다, 예 소저! 전에 소생이 여기에 온 적이 있는데, 저 놈이 바로 그 천치입니다.”
 예아연의 곁에 있던 매부리코를 한 청년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는 항주 관내에서 제법 힘깨나 쓴다는 표국의 둘째아들이었다. 예아연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늘 따라다니는 인물이었다.
 “그래? 그럼 한 번 본녀가 내는 고사성어(古事成語) 풀이를 해 볼 수 있겠느냐?”
 예아연의 말에 술을 마시던 주객들 전부의 시선이 예아연이 있는 탁자로 쏠렸다.
 천소기는 고사성어풀이를 하루에 한 번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잠시만 기다리면 기상천외한 고사성어 풀이로 또 한 번 크게 웃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사성어요? 헤헤······, 소생이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자신이 있습니다요. 문제나 한 번 내시지요.”
 “흥! 과연 네놈의 말대로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만일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예아연의 말에 천소기는 일부러 명쾌하게 대답하였다.
 “헤헤······, 만일 틀리면 소생이 소저의 종이 되겠습니다.”
 “호오, 그래? 좋다! 만일 틀리면 즉시 본녀를 따라 항주 관아에서 종노릇을 하여야 한다. 자신이 있느냐?”
 천소기는 설마 그러기야 하겠느냐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헤헤······, 말씀만 하시지요.”
 “흥! 좋다. 그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이 무슨 뜻인지 대 보아라!”
 “살신성인이오? 그러니까, 살신성인이란 사람을 많이 죽이면 성인이라 불린다 하는 뜻입죠.”
 “뭐? 뭐라고? 호호호······.”
 “으하핫······.”
 “하하하······.”
 “······.”
 천하일주는 온통 폭소의 도가니로 변하였다.
 예아연은 너무도 우스워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웃고 난 후,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생각하였다.
 ‘음, 이 놈을 데려다 놓으면 심심하지는 않겠어! 호호······, 이 놈이 틀리면 종이 된다 하였으니 잘 되었다.’
 생각을 마친 예아연은 언제 웃었느냐는 표정으로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호호······, 네놈은 틀렸다. 그러니 약속대로 네놈은 본녀의 몸종이 되어야 한다.”
 “예에?”
 천소기의 눈은 커졌다. 천소기뿐만 아니라 천하일주에 있던 모든 손님들과 점소이, 그리고 돈돈의 눈도 커졌다.
 모두 예아연이 했던 말을 단순한 농담으로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것을 빌미로 이렇게 트집을 잡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왜? 네놈은 네 스스로 약속하고도 안 지킬 셈이냐?”
 “······?”
 천소기가 일부러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지 않자, 초향옥녀 예아연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흥! 네놈은 분명 본녀에게 틀리면 종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도 발뺌을 할 셈이냐?”
 초향옥녀 예아연의 뜻이 분명해지자 당황한 것은 돈돈과 점소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소기는 은자가 샘솟는 화수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는데, 말 한 마디 잘못한 것을 가지고 종으로 끌고 간다하자 당황한 것이었다.
 천치 천칠이야 원래부터 천치라는 것이 소문나 있었고, 그의 고사성어 풀이가 엉터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는데, 설마 예아연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 소저!”
 돈돈이 당황하여 황급히 다가와 손바닥을 비비며, 말을 하려 하자 예아연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흥! 네놈은 누군데 본녀의 일에 끼여드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예아연의 차갑고 앙칼진 한 마디에 돈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초향옥녀 예아연의 성품을 모르는 항주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초향옥녀 예아연에게 있어 주루의 점소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죄나 뒤집어씌워 죽일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흥! 어떻게 할 것이냐? 빨리 대답하여라! 만일 네놈이 본녀와의 약속을 파기하겠다고 하면 즉시 관아로 끌고가 치도곤을 당할 것이니, 잘 생각해서 대답하도록 하여라!”
 예아연은 천소기가 피할 곳도 주지 않고 몰았다.
 천소기는 자신의 고사성어 풀이가 잘못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남아(男兒)가 한 번 한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는 혁 노인의 말이 생각나 힘없이 대답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소저를 따라가겠습니다.”
 천소기의 말에 돈돈과 점소이들은 이제 망했다 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이를 만류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예아연의 성격에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소기는 그렇게 해서 천하일주를 떠나 항주 관아 안에 있는 예아연의 처소인 초향소축(草香小築)에 머물게 되었다.
 매일 정오 무렵에 고사성어 풀이로 예아연을 웃기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었지만 초향소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론 혁 노인이나 돈화를 만나러 다닐 수도 없었다. 하지만 천소기는 천하일주보다 초향소축에서의 생활이 더 좋았다.
 초향옥녀 예아연 몰래 초향소축의 서실(書室)에 있는 서책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사성어 풀이는 하루에 한 번만 하면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자유시간이었기에 천소기의 학문은 날로 발전하여, 이제는 초향소축 서실에 있는 서책 중 안 본 것이 없었다.
 천치(天痴) 천소기는 어느새 서치(書癡)로 변모하고 있었다.
 
 
 제2장 초향옥녀 예아연
 
 
 초향소축으로 거처를 옮긴 지도 어언 두 달이 되어 갈 무렵, 천소기는 이제 더 이상 서실에 볼 만한 책이 없음을 알고 초향옥녀에게 간청을 하였다.
 “아씨!”
 초향소축의 정실에서 시비들과 이야기하던 예아연이 천소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 천치구나.”
 초향옥녀의 표정은 전과는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가 처음 초향소축에 왔을 때에는 그저 재미있는 동물 정도로만 취급하던 것이,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정이 들었는지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저······, 저······.”
 천소기가 계속 더듬자 예아연이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냐?”
 천소기는 예아연의 말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 소인은 그 동안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밖에 나가보질 못하였는데, 항주 관아를 둘러보아도 괜찮은지 허락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뭐라고? 겨우 그것 때문에 그토록 더듬었다는 말이냐?”
 “예.”
 “호호,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예아연은 천소기의 말에 실소하며 쾌히 승낙하였다.
 “오, 감사합니다.”
 예아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천소기는 초향소축을 떠나 항주 관아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다녔다.
 항주 관아는 크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볼거리도 많았다. 뇌옥(牢獄)에는 죄인들이 그득하였고, 형리(刑吏)들이 있는 곳에는 각종 형구(形具)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어떤 곳은 각종 행사 때 사용하는 물건들이 그득하였고, 어떤 곳은 곳간인지 곡식들이 그득하였다.
 천소기가 제일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부사가 집무를 보는 집무청(執務廳)이었다.
 그곳에서는 한창 죄를 지은 죄인을 국문하고 있었다. 천소기가 가만히 들어보니 죄인은 공금을 횡령한 관인이었다. 죄인은 항주 부내에서 사용되는 모든 공금을 만지던 관인이었는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공금을 마음대로 꺼내 썼다가 발각된 모양이었다.
 죄목이 죄목이다 보니 어디서 몇천 냥, 어디서 몇백 냥 하는 식의 심문이 많았다. 마침 천소기가 들어가 구경하던 곳은 죄인을 국문하는 내용을 모두 기록하는 관인 곁이었다.
 그 관인은 엎드려 세필(細筆)로 모든 국문내용을 받아 적는데, 가만히 보니 손이 몹시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진땀까지 뻘뻘 흘리는 것으로 보아 심한 중병에 걸린 모양이었다. 기어이는 그것조차 힘든지 점점 쓰는 속도가 느려져 마침내 죄인의 국문 내용을 기록할 수 없는 지경에 달하였다.
 천소기는 가만히 다가가 관인 곁에 있는 세필(細筆)을 집어들고 말없이 국문 내용을 받아 적기 시작하였다. 만일 국문 내용을 모두 받아 적지 않으면 나중에 기록관이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이 염려되어서였다.
 사람의 말소리를 따라 글을 쓰기란 몹시도 힘든 일이었다. 보통의 숙련자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인데, 천소기는 능숙한 기록관처럼 죄인의 대화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받아 적기 시작하였다.
 천소기가 이렇게 속기(速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혁 노인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무슨 여유에선지 천소기가 글을 익히자,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빠르게 쓰라고 명하였기에 속기가 가능한 것이었다.
 혁 노인이 천소기에게 속기를 강요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혁 노인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고 천소기에게 속기를 강요만 하였던 것이다.
 가히 천하 명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는 시원하고 장쾌한 감까지 느끼게 하였다.
 국문 내용을 받아 적던 관인은 천소기의 이런 모습을 한 번 보고는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그후부터 모든 내용은 천소기가 모두 받아 적었다.
 항주 관아에서 근무하는 관인들은 천소기의 그런 모습을 보았으나 아무 소리 않고 있었다. 어차피 누군가 받아 적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들 모두는 천소기가 얼마 전에 초향옥녀가 거둔 종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문은 늦게야 끝났다. 감히 겁도 없이 관의 공금을 횡령하여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허비한 관인은 참수형(斬首刑)으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죄인이 끌려나가고 한동안 다른 국문이 진행되었다. 가지각색의 죄를 지은 죄인들은 항주부사의 명쾌한 판결로 무죄 방면되기도 하였고, 투옥되어 모진 매를 맞도록 판결되기도 하였다.
 오전부터 시작된 국문은 끼니도 거른 채 오후 늦게까지 진행되었다.
 한편 초향옥녀 예아연은 정오가 지나도록 천소기가 보이지 않자 시비를 시켜 천소기를 찾아오도록 하였다. 늘 정오 무렵에 고사성어 풀이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천소기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짜증이 난 초향옥녀는 만일 천소기가 항주 관아 밖으로 나갔다면 치도곤을 치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천소기가 국문장에 있으며, 그곳에 엎드려 무엇인가를 적고 있다는 말을 들은 초향옥녀는 그럴 리가 있냐면서 궁금한지 국문장으로 향하였다.
 시비의 말대로 천소기는 국문장 한켠에서 국문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놀랍게도 천소기는 달필(達筆)의 글씨로 국문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 적고 있었다.
 부친인 예당이 아무리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감히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천소기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부친으로부터 엄한 꾸중을 받을 것이 너무도 자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천소기의 필체를 보고 있던 예아연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리며 놀라고 있었다.
 놀랍게도 국문 내용을 적는 천소기의 손에서 구양순체는 물론 왕휘지체까지 다양한 필체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순이나 왕휘지 모두 천하에 명필이 아니던가!
 누구나 구양순의 글씨나 왕휘지의 글씨를 한 점 가지고 있으면 두고두고 자랑거리이며, 가문의 보물로 여기지 않던가!
 그런 구양순체나 왕휘지체와 거의 똑같이 갈겨쓰고 있는 천소기의 능력에 놀랐던 것이다.
 자고로 서예(書藝)란 심호흡을 한 뒤 정신통일을 하고 천천히 써 내려가도 잘 안 되는 것이건만, 그런데 지금 천소기는 거의 갈겨쓰다시피 하면서도 천하의 명필과 거의 같이 써 내려가니, 만일 그가 천천히 서도(書道)에 따라 쓴다면 대체 어느 정도가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예아연은 천소기가 화자(話者)에 따라 서체를 달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는 사람마다 서체를 다르게 쓰려면 적어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서체를 모두 알기 전에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중에 보아도 일목요연하게 누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아연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물러나 초향소축으로 돌아갔다. 초향소축으로 돌아가는 예아연의 옥용은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차가웠다.
 그 동안 천소기가 고의적으로 자신을 기만하였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놀잇감으로 생각했던 천소기가 거꾸로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되자 화가 난 것이었다.
 이윽고 모든 국문이 끝나자 어떤 관인이 와서 천소기가 적은 국문지(局問紙)를 항주부사 예당에게 전하였다.
 항주부사 예당은 애초부터 기록관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주 관아에서는 그가 유일하게 속기를 할 수 있는 관인이었기에 할 수 없이 배석시켰던 것이다. 국문을 하면서도 수시로 기록관 쪽을 바라본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런데 여식인 예아연의 종이 곁에 있다가 기록관을 대신하여 국문 내용을 받아 적는 모습을 보자 의아하였으나, 국문 중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천소기는 괜히 나서서 꾸중을 듣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었다. 하지만 항주부사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적어도 경을 치지는 않겠구나 생각되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예!”
 천소기는 항주부사의 부름에 얼른 다가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허······, 이게 정녕 네가 쓴 것임을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구나.”
 항주부사도 국문지에 쓰여진 천소기의 필력(筆力)과 필체(筆體)에 놀란 것이었다.
 “······.”
 천소기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다시 물었다.
 “그래, 글은 어디서 배웠느냐?”
 어느새 관인들은 하나둘 집무청을 벗어나 그곳에는 부사와 천소기 둘만 남았다.
 부사가 손짓으로 모두 물러가라 하였기 때문이었다.
 항주부사는 천소기에게 어디서 글을 배웠느냐고 물었고, 천소기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자칫 잘못 말하였다가는 큰 경을 칠 것만 같아서였다.
 모든 이야기를 소상히 들은 부사는 기록관의 몸이 나아질 때까지 국문이 있을 때마다 집무청으로 와서 그 일을 대신하도록 명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천소기는 부사에게서 칭찬을 받아 몹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초향소축에 도달하기 전까지였다.
 천소기가 초향소축으로 돌아오자 초향옥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천소기를 호출하였다.
 천소기는 초향옥녀가 국문장에 왔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말들이 너무 빨라 그것을 받아쓰느라 온 신경을 거기에 썼기 때문이었다.
 “흥! 네녀석이 감히 본녀를 속여?”
 천소기를 보자마자 예아연의 상큼한 아미가 올라가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천소기는 국문장의 일이 여기까지 소문이 났나 보다 하여 가만히 있었다. 그 동안 자신이 천치 노릇을 한 것이 그녀의 비위에 거슬렸던 모양이라고 생각한 천소기는 고개를 조아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흥! 네녀석이 감히 본녀를 속이고 천치 노릇을 하면서 그 동안 얼마나 본녀를 비웃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어디에서 학문을 익혔는지 바른 대로 말하거라!”
 “저, 저······.”
 천소기가 더듬자 예아연은 그가 일부러 천치 노릇을 계속하려는지 알고 화를 벌컥 내며 말하였다.
 “빨리 말하지 못할까?”
 천소기는 할 수 없이 예아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어떻게 돈화의 손에 안기게 되었고, 어떻게 점소이 생활을 하였으며, 어떻게 혁 노인에게 학문을 배웠는지를······.
 말없이 천소기의 말을 다 들은 예아연은 그토록 빈궁한 가운데서도 학문을 익히려 노력한 천소기가 다소 측은함을 느끼고 다시 물었다.
 “네 말에 하나도 거짓이 없으렷다?”
 “예, 아씨.”
 천소기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니 후련하였다.
 그 동안 남들을 속인다는 죄책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천소기의 말을 들은 예아연이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학문을 더 익히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
 천소기에게 학문을 더 익힌다는 것은 불감청(不敢請)일 망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천소기는 늘 학문에 갈증을 느끼고 목말라 하였던 것이다.
 배우면 배울 수록 더 깊은 것을 알고 싶었으나 마땅히 물을 사람도, 또 볼 만한 서책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그럴 수만 있다면······.”
 “됐다!”
 천소기의 말을 예아연은 중간에서 뚝 끊었다.
 “오늘부터 네 공부는 내가 가르친다!”
 “예?”
 너무도 놀라운 예아연의 말에 천소기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감히 상상도 못하던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아연의 표정은 흥미롭다는 표정 이상은 아니었다.
 천소기에게 놀라운 필체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그의 학문이 대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쇠뿔도 단숨에 뽑는 게 낫다며 천소기를 이끌고 서실로 간 예아연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천소기의 학문이 자신을 능가하면 능가하였지, 결코 아래는 아니라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실의 책은 이미 천소기의 손을 모두 거쳐가지 않았던가!
 시경, 서경, 역경은 물론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줄줄 외우는 것을 넘어서 그것들을 거꾸로 외우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예기, 춘추까지 도통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예아연은 천소기에게 삼교구류(三敎九流)와 하도(河圖), 낙서(洛書)까지 물었는데, 거기까지도 알고 있었다.
 천소기는 그 동안 틈틈이 서실에 들어와 예아연의 모든 장서(藏書)들을 읽었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아연은 자신이 오히려 천소기에게 배워야 할 수준임을 자각하고 항주부사의 서실에 있던 서책들까지 들고 와 물었다.
 항주부사는 학문이 매우 높은 학사로, 그의 학문은 능히 황사(皇師)에 버금간다고 소문나 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항주부사의 장서(藏書) 중엔 희귀한 고문진본(古文眞本)들이 수두룩하였다.
 천소기는 앉은자리에서 예아연이 넘겨준 서책들을 독파하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그런 천소기를 바라보던 예아연은 말없이 서실을 빠져나갔다.
 예아연이 다시 서실로 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천소기는 놀랍게도 밤새도록 독서삼매에 빠져 있었다.
 천소기의 장점은 바로 이런 집중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비가 들어와 황촉(黃燭)을 밝히고 나간 것도, 예아연이 수시로 서실 안쪽을 들여다 본 것도 모른 채 열중하였던 것이다.
 “다 읽었느냐?”
 예아연의 음성은 하루 사이에 매우 부드러워져 있었다.
 예아연의 물음에 천소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예. 아씨 덕분에 정말 보고 싶었던 서책들을 접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호호! 그래, 또 보고 싶은 서책이 있느냐?”
 “또 있습니까?”
 천소기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서책을 탐하는 모습이었다.
 그날도 천소기는 하루 종일 서실에서 이십여 권에 달하는 희귀본(稀貴本)들을 읽었다.
 다음 날 다시 온 예아연은 이번엔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이틀 동안 읽은 것들을 본녀에게 설명해 보아라!”
 “예.”
 천소기는 예아연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으로 알고 이틀 동안 읽었던 것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설명하였다.
 사실 천소기가 이틀 동안 읽은 서책들은 예아연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책들만 골라 천소기에게 준 후 과연 그가 얼마나 이해하는지를 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천소기가 그 동안 예아연이 정말 궁금하게 여기던 것들을 거침없이 설명하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예아연은 그 때부터 천소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
 며칠 후, 천소기에게는 새로 지은 의복 일습이 지급되었다. 그것은 관인들만 입을 수 있는 관복(官服)이었다.
 기록관의 병이 심해져 더 이상 공무(公務)를 볼 수 없었기에 항주부사가 내린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예아연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예아연이 부친에게 천소기에 관한 모든 내용을 소상히 말하고 그를 임시 기록관으로 임명토록 하였던 것이다.
 항주부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마침 기록관이 필요하였고, 천소기는 그 방면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천소기는 고사성어 풀이 같은 유희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하루에 적어도 두 시진 동안은 예아연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물론 예아연이 천소기를 대하던 태도도 크게 변하였다. 깨끗이 수욕하고, 봉두난발이었던 두발을 정리하고 관복을 입은 천소기의 모습은 그야말로 임풍옥수(臨風玉樹)였다.
 그 동안은 천하일주에서 입고 있던 남루한 의복에 더부룩한 머리를 하고 있어 그의 용모가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아연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준수한 모습을 본 그녀는 자신의 열여섯 꽃다운 방심(芳心)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천소기의 모습이 뛰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학문을 배우는 동안 예아연은 천소기의 인품이 인후(仁厚)하며, 어질고 선량하기까지 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를 보면 적어도 열을 아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두뇌에, 관옥(冠玉) 같은 외모를 지닌 천소기의 모습에 매료된 예아연은 자꾸 그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냉랭하였다.
 예아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천소기에게 학문 이외의 것들을 가르쳤다.
 금기서화(琴棋書畵)를 가르쳐 초향소축에서는 늘 칠현금(七絃琴)이나 비파(琵琶) 등의 선율이 끊이지 않았고, 기반(基盤) 위에 바둑돌 놓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소기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예아연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다. 엄연히 자신은 그녀의 종의 신분이 아니던가!
 종이 감히 주인아씨를 어떻게 해 보려 하면 최소한 능지처참이나 오마분시(五馬分屍)의 형(刑)으로 다스려진다는 것을 잘 알기에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학문을 마음껏 닦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그녀에게 끝없는 감사를 할 뿐이었다.
 이제 행동도 자유스러워진 천소기는 어느 날, 혁 노인을 찾아 마장(馬場)으로 갔었다.
 그런데 마장에는 혁 노인이 없었다. 힘이 든다며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천하일주에 들른 천소기는 돈화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점소이들과 돈돈은 관복을 입은 천소기를 마치 별종(別種) 대하듯 하였다. 주루에서 가장 서열이 낮아 언제든 두둘겨 팰 수 있던 그가 이제 자신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관인으로 변한 것에 질투를 느낀 것이었다.
 돈돈과 점소이들은 천소기가 초향옥녀에게 끌려가 갖은 재롱을 부린 끝에 관인이 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개 주루의 점소이와 관인의 신분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므로 그들은 일부러 천소기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오직 한 명 도진만이 다가와 만일 이 다음에 죄를 짓고 끌려가면 잘 봐달라는 말을 마치 비아냥거리듯 하였을 뿐이었다.
 돈화와 모처럼의 시간을 가진 천소기는 돈화에게 그 동안 키워 준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로 그녀를 울렸다. 돈화에겐 천소기가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천소기가 어엿한 관인이 되어 돌아오자 그만 서러움이 북받쳤던 모양이었다.
 돈돈 몰래 천소기를 위하여 돈화가 한 일은 엄청 많았다. 돈돈에게 혼나고 저녁을 굶은 채 잠들려 할 때마다 돈화는 따뜻한 음식으로 그의 곯은 배와 마음을 채워 주곤 하였다. 그녀는 지극 정성으로 천소기를 돌봐왔던 것이다.
 하직인사를 할 때 돈화는 품안에서 작은 보따리를 하나 꺼내 건네주며 말하였다.
 “이건 혁 노인이 떠나면서 네가 오면 주라고 맡긴 물건이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나, 누구에게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씀이 계셨다. 이것을 가져가거라.”
 “돈화 아줌마,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죽어서라도 잊지 않을게요.”
 천소기는 헤어지는 것이 서운해 하는 돈화를 뒤로 하고 항주 관아로 돌아갔다.
 초향소축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천소기는 혁 노인이 남긴 물건이 뭔지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보따리 안에는 반 토막난 검 한 자루와 약간 두툼한 서책 한 권이 있었다.
 서책을 펼치자 그 안에서 곱게 접은 서찰이 떨어졌다. 천소기는 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며 펼쳐들었다.
 서찰은 혁 노인의 필체로 빼곡이 적혀 있었다.
 
 < 기아(奇兒) 보거라!
 이 글을 볼 때면 아마 노부는 이 세상에 없거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난 후일 것이다.
 네녀석을 가르치던 일 년은 노부에게 있어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노부는 일백삼십 평생 살면서 참으로 남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한 악인 중에 악인이었다.
 노부가 악인인 것을 자각(自覺)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려고 마장에 들어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 년이 흘렀구나.
 마장에서 노부는 노부의 죄를 참회하며 속죄하는 의미로 일부러 가장 험한 일을 맡았다. 그것 외에는 노부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녀석을 만나고 나서 노부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였던 노부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네녀석을 훌륭한 인재로 키워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이 세상에 대하여 노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보은(報恩)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네녀석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 서찰을 미리 돈화에게 맡긴다.
 노부는 실은 무림인이었다. 무림에서 노부는 혈살도부(血殺屠夫)라고 불리는 악마였다. 이 다음에 강호에 나가면 노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수도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데 사용한 무공이지만, 여기 노부의 무공을 남긴다.
 비록 악마의 무공이지만 그것을 익힌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틀려진다는 것을 네녀석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같은 이슬이라도 독사가 섭취하면 독이 되지만, 꽃이 머금으면 꿀이 된다는 것을······.
 노부가 무공으로 무림에 해악을 끼쳤다면, 네녀석은 그 해악을 노부의 무공으로 걷어내는 구성(救星)이 되거라.
 네녀석이 강호에 나왔을 때, 만일 노부가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결코 노부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기 바란다. 지난날 노부는 죽을 죄를 너무도 많이 지었기 때문이다.
 부디 노부의 무공을 익혀 좋은 일을 많이 해 다오. 그리고 누군가 이 무공을 보고 묻거든, 절대 노부의 제자라는 말을 하지 말거라! 만일 그렇게 하였다가는 곧 전 무림에서 추적당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일단 노부의 무공을 익히되, 십이성이 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무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노부의 말을 명심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 비급은 다 외운 후 태우도록 하여라! 노부의 무공비급을 누군가 보게 되면 살신지화(殺身之禍)가 미칠 것이니, 노부의 말을 명심하도록 하여라!
 이 다음에 강호에 나와서 노부의 평판을 듣고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들의 말이 모두 사실일 것이나 노부는 늘그막에 모든 것을 참회하고 반성하였다.
 부디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길 바란다.
 네녀석과 오랫동안 함께 있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구나. 천지신명의 도움이 있다면 강호에서 한 번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 대명 원년 오월 초엿새, 너를 아끼는 혈살도부가 씀. >
 
 혈살도부가 천소기에게 남긴 서찰에는 살가운 정(情)이 물씬 흘러넘쳤다.
 혈살도부는 약 삼십 년 전에 무림에서 사라진 전대거마였다.
 그의 일장에 오악(五嶽)이 울리고, 사해(四海)가 떨었다. 그의 보보(步步)마다 선혈이 흘렀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남겨졌던 악마 중에 악마가 바로 혈살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선지 어느 날 갑자기 혈살도부의 모습이 강호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혈살도부에게 사문의 존장(尊長)이나 제자, 사형제를 잃은 무림인들은 혈살도부를 무림공적(武林公賊)으로 지목하고 끝없는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혈살도부를 찾을 수 없었다. 혈살도부와 같은 전대거마가 설마 자신이 저질러 온 죄업을 참회하고, 마장에서 말똥이나 치우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혈살도부는 어린 시절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부모를 흉적들에게 잃고 걸식으로 연명(延命)하던 중, 우연히 다 부서진 관제묘의 석탁 아래서 한 권의 무공비급을 얻었고, 그 무공을 익힌 후 강호에 나왔다. 그때가 그의 나이 이십일 세 때였다.
 처음엔 협행(俠行)도 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밀어(密語)를 속삭이던 중 그 여인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었다.
 무림 명문정파의 제자였던 그 여인의 사문 존장이 근본도 모르는 혈살도부와의 교제를 끊으라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결별 선언에 충격을 받은 혈살도부는 그때부터 사람이 변하였다. 원래 그가 익힌 무공은 마공(魔功)이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마공이었던 것이다.
 명문정파의 무공은 익히기 어려운 반면 마공은 속성(速成)으로 익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정공(正功)은 절정에 도달하고도 계속하여 그 정도가 깊어질 수 있으나, 마공은 한 번 절정에 이르면 좀체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하여야 한다. 자칫 마성에 젖어 희대(稀代)의 악마로 돌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림 역사상 많은 악마들이 준동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많은 마도 인물들이 악마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혈살도부가 막 절정에서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들 무렵 여인의 결별 선언이 있었다. 그로 인한 충격으로 혈살도부는 마공 안에 감추어져 있던 마성(魔性)의 지배를 받아 엄청난 혈겁을 뿌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가 무림에서 사라졌던, 삼십 년 전에야 간신히 마성을 억누를 수 있었던 혈살도부는 지난 팔십 년 동안 자신이 저지를 악행을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도 엄청난 혈겁을 일으켰음을 안 혈살도부는 그 길로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무려 십 년 간이나 면벽(面壁)을 하였다.
 그 동안 혈살도부는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하였고, 자신의 무공 속에 내재되어 있던 마성(魔性)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런 후 혈살도부는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일을 하며 일생을 마칠 것을 결심하였다.
 항주에 도착한 혈살도부는 처음엔 진회하에서 몸을 파는 기녀들을 위한 일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회하에는 워낙 무림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마장으로 갔다. 마장에서 혈살도부는 말똥을 치우는 가장 비천한 일을 스스로 자원하여 무려 이십 년 간이나 그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 혈살도부가 만년에 천소기를 만난 것은 인연이었다. 가끔 술을 마시러 가던 천하일주의 장방인 돈돈이 자신에게 찾아와 점소이에게 제 이름 석 자나 쓸 수 있도록 글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혈살도부는 거부하였었다.
 하지만 혈살도부는 돈돈이 매일 술을 한 병 준다 하자 그만 넘어갔던 것이다. 그는 너무도 노쇠한데다 병까지 겹쳐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술을 사 마실 은자가 없던 터였다. 할 수 없이 매일 술을 한 병씩 받는 조건으로 천소기를 받아들였을 때, 혈살도부는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저 이름이 무어냐고 묻고는 그 이름을 흙바닥에 써 주고 그대로 보고 그려보라는 말만 하였을 뿐이었다.
 그때 천소기는 흙바닥에 온통 자신의 성명 석 자를 써 내려가면서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성명 석 자를 쓰고 외우는 데는 불과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려 십 일 동안을 매일 똑같은 것들을 쉬지 않고 쓰는 모습을 보고 혈살도부는 다른 것을 알려 주었었다.
 그러면서 혈살도부는 배움에 목말라 하는 천소기에게 묘한 구석을 발견하고는 좀더 어려운 것들을 가르쳐 보면 어떨까 하였던 것이다.
 천소기는 마치 바싹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맹렬한 속도로 혈살도부의 가르침을 배워 나갔다.
 혈살도부는 천소기를 위하여 당송팔대가의 서체가 있는 파지(破紙)에 가까운 고본(古本)을 구입하였고, 천소기는 그것으로 서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호흡하는 법을 가르친다면서 혈살도부는 자신의 독문 내공심법(內攻心法)인 혈광심법(血光心法)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중에 무림에 나가면 무엇보다도 빠른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일부러 속기(速記)를 시켰다. 천소기는 혈살도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엄청난 기세로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혈살도부는 거의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야만 하였다. 천소기가 자신을 위하여 약포(藥鋪)에서 약을 지어 온 것이었다.
 혈살도부는 자신의 몸을 일부러 망가뜨리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운기조식을 하지 않아서 해소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것인데, 천소기가 지어 온 약은 그에게서 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한 물건이었고, 또한 일평생 타인에게서 받아본 첫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혈살도부는 천소기가 간 후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물론 그는 그 약을 정성스레 달여 복용하였고, 약효가 있었는지 몸이 좋아질 무렵 부득이 항주를 떠나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혈살도부는 은밀히 돈화를 불러 그녀에게 보따리를 맡기며 천소기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고 떠난 것이었다.
 
 천소기는 혈살도부가 남긴 무공비급을 펼쳤다.
 
 < 혈광마록(血光魔錄).
 혈광마록은 말년에 얻은 노부의 심득을 기록한 무공비급이다. 본시 혈광마록의 마공은 절정이 되면 마성에 젖어 천하를 혈겁에 빠뜨리도록 되어 있었으나, 노부가 그것을 배제 시켜 이 세상 어떤 정공(正功)보다도 안전하니 마음놓고 익히도록 하여라.
 혈광마록에는 강호에서 활동하려면 필요한 모든 무공이 망라되어 있다. 비록 처음엔 진전이 느리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익혀 주길 바라노라.
 노부가 직접 전수하려 하였으나 노부에게 일이 생겨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부디 혈광마록의 무공으로 협행하여 노부가 이 세상에 뿌린 악을 조금이라도 거두어 주었으면 한다.
 - 혈살도부 혁운휘(赫暈輝) 서(書). >
 
 첫 장에 적혀 있는 글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거기엔 정말 이 세상에 있을 만한 거의 모든 무공이 있었다.
 매끄러운 절벽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는 벽호공(壁?功), 팔이 늘어나는 통비공(通臂功), 좁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요긴하게 쓰일 축골공(縮骨功)은 기본이었다.
 보보(步步)마다 얼굴을 바꿀 수 있는 천고절학(天高絶學)인 만변제종술(萬變諸宗術)이 있었다. 이것을 익히면 인피면구나 역용약을 쓰지 않고도 얼굴 근육을 움직여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화할 수 있다. 칠십대 노파에서 이십대 소녀로, 다시 팔십대 노인에서 십대 소년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비법이었다.
 또, 변성술(變聲術)도 있어 얼굴에 맞는 음성을 제각각으로 낼 수도 있었다. 복화술(複話術)이라 하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며, 독순술(讀脣術)이라 하여 남의 입술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지둔술(地遁術)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기거나 땅 속에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그 밖에도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한 귀식대법(龜息大法)이나 은신술(隱身術) 등 많은 무공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천소기는 자신의 거처에서 혈광마록상의 무공들을 하나하나 익혀 갔다. 물론 그가 무공을 익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항주 관아 내에 단 하나도 없었다.
 천소기는 무공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익히기가 무척 어려워 익히는 속도는 매우 더뎠다.
 게다가 낮에는 예아연과 학문과 금기서화를 익혔고, 밤에만 익혔기 때문이었다.
 
 ***
 
 천소기가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지나 이제 천소기는 열여섯이 되었다.
 예아연도 열일곱 꽃다운 나이가 되었다. 활짝 만개한 싱그런 작약(芍藥)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뿌리고 있었다.
 전에는 곧잘 세가(世家)들의 자손들과 항주 곳곳을 쏘다니곤 하였는데, 천소기가 온 이후로는 외출을 삼가 반년에 한 번 정도밖에 출타를 하지 않았다. 그것도 부친의 생신 선물을 사러 나가거나 모친의 기일(忌日) 때 불공을 드리러 나가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녀의 모친은 예아연을 낳으면서 죽었다고 하였다.
 예아연이 외출하였다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녀의 손에 천소기의 의복이 들려 있었다.
 부쩍부쩍 성장하고 있는 천소기의 의복이 금방 짧아지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천소기는 신장도 컸을 뿐만 아니라 적당히 살도 올라 그의 모습은 관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천소기는 항주부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정식 관원이 되었다. 그의 직책은 기록관이었다. 수많은 죄인들을 국문하는 국문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또 항주 관아의 모든 문서들을 관리하는 책무도 떠맡게 되었다.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공명정대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맡긴 것이었다.
 그가 작성하는 문서는 황제가 있는 남경(南京)으로 보내졌다.
 언젠가는 황궁의 관리로부터 천소기가 작성한 문서의 필체가 너무도 유려하며 필력이 흘러넘치는데, 대체 누군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다는 서찰이 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가 작성한 문서는 일목요연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좋았던 것이다.
 그 동안 천소기는 초향옥녀 예아연으로부터 금기서화를 배웠으나, 이제는 그녀를 압도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초향옥녀는 요즘 천소기로부터 거꾸로 금기서화를 배우는 입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초향옥녀 예아연이 천소기를 생각하는 마음은 전에 비하여 월등히 각별해졌다. 냉랭하던 표정과 말투도 풀어졌고, 요즘은 거의 하루 종일 그의 곁에 붙어 있다시피 하였다.
 초향옥녀는 형제가 없었기에 더욱 천소기에게 정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예아연은 홀로 있을 때면 종종 천소기를 장래의 부군(夫君)으로 생각하고 있기까지 하였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그를 싫어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부친인 항주부사 예당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천소기는 누구에게 비교하여도 전혀 뒤떨어짐이 없는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주부사는 올해 치러지는 과시(科試)에 천소기가 응시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작성해 둔 터였다.
 만일 천소기가 과시에 급제를 하면 미련 없이 예아연과 그가 혼례를 올리도록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소기는 여전히 예아연을 부를 때 ‘소저’라고 불렀다. 자신이 여전히 미천한 종의 신분임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여인의 마음이란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모르니 늘 조심하여야 한다는 혈광마록의 구절 때문이었다.
 혈광마록에는 여인의 방심(芳心)을 사로잡는 법까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혈살도부가 여인에게 배신당한 후 천하를 뒤져 찾아낸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혈살도부에게는 그 여인 이외의 다른 여인과는 인연이 없었기에 전혀 쓸모가 없어 버리려다가 혹시 천소기가 여인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끼워 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천소기가 낯을 붉히며 읽었던 방중비술(房中秘術)도 있었다. 소녀경(少女經)이나 옥방비결(玉房秘訣)이란 서책에 있는 것은 거기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내용이 있었다.
 아직 여인의 몸을 모르는 천소기지만 그것을 보면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필요가 있으니까 혈살도부가 남긴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혈살도부가 강호에 혈겁을 일으켰던 그의 진신무학(眞身武學)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밤이 되어 천소기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황촉불을 올리고 혈광마록을 펼쳤다.
 지난 일 년 간 늘 반복되던 일과였다.
 
 < 혈광마장(血光魔掌).
 혈광마장은 본신의 내공을 모아 장심을 통하여 경력을 발출시키는 장법이다. 이 장법을 발출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혈광심법(血光心法)을 익혀야 한다. 혈광마장은 모두 세 초식으로 되어 있다.
 제일초 혈광폭천(血光爆穿).
 혈광폭천은 그 위력면에 있어 여타의 장법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이것이 펼쳐지면 장심에서 혈광(血光)을 띤 장력이 상대를 향하여 폭사되어 간다. 특이한 점은 일체의 파공음(破空音)이 없다는 것이다.
 여타의 장법은 그 살상 범위가 넓은 반면 혈광폭천은 살상 범위가 매우 좁다. 뭉툭한 것을 손바닥을 누를 때에는 별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끝이 뾰족한 송곳으로 누르면 매우 아플 뿐만 아니라 구멍까지 뚫린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 장법이다. 혈광폭천이 시전되면 상대의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려 죽게 만드는 장법이다. 십이성이 되면 상대의 몸에 모두 일백팔 개의 구멍이 뚫릴 것이다. 한꺼번에 일백팔 경력을 모두 막을 수 없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장법이다.
 제이초 혈광폭멸(血光爆滅).
 제이초 혈광폭멸은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장법이다. 여타의 장법이 직선으로 나가는 반면, 혈광폭멸을 시전하면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장력이 휘어지게 된다. 따라서 장애물이 있을 때 사용하기에 적합한 장법이다. 혈광폭멸이 십이성이 되면 연속적으로 모두 십팔 개의 장력을 펼칠 수 있다. 십팔 개의 장력은 발출된 시간은 틀리나, 휘어지는 각도에 의하여 같은 시간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상대는 한꺼번에 십팔 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제삼초 혈광만천(血光滿天).
 제삼초 혈광만천은 혈광장법의 정수(精髓)이다. 혈광만천은 무음(無音), 무성(無聲)이기에 미리 감지하거나 막기가 매우 힘든 장법이다. 십이성이 되면 장심에 바늘 구멍만한 혈점(血點)이 생성되고, 그곳을 통하여 실처럼 가느다란 장력 한 줄기가 발출된다. 이 장력은 끊어짐이 없이 이어지기에 일단 발출한 후에 상대를 향하여 휘두르면 장력에 부딪치는 모든 것이 박살나는 장법이다. 일종의 장강이다. 물론 장력에 격중되면 설사 금강불괴라 할지라도 뚫리고 만다. 장력에 걸리는 것은 마치 예리한 도검으로 베어진 듯 베어지고 마는 천고의 장법이다. 물론 그것은 십이성 대성을 하였을 때 이야기다.
 혈광만천은 경력이 발출될 때 장력의 굵기가 굵을 수록 그 위력이 떨어진다. >
 
 
 제3장 혈광마록
 
 
 < 혈광검법(血光劍法).
 혈광검법은 온전한 검으로는 펼칠 수 없는 검법이다.
 혈광검법이 제 위력을 발휘하려면 도룡반검(屠龍半劍)을 사용하여야 한다. 혈광검법은 모두 세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연환검식(連環劍式)으로 펼칠 수도 있다.
 제일초 혈참(血斬).
 제일초 혈참은 쾌속함에 근본을 둔 검식이다. 이 세상 어떤 검법보다도 쾌검식(快劍式)임을 자부하는 검식이 바로 혈참이다. 마음이 일었을 때 벌써 상대의 인후혈(咽喉穴)을 벨 수 있어야 십이 성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발검(拔劍), 운검(運劍), 회검(回劍), 이렇게 삼 단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발검이다.
 발검을 하기 위해선 먼저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빠른 손놀림이 있어야 한다.
 제이초 혈붕(血崩).
 제이초 혈붕은 산악 같은 기세로 상대를 뭉개 버리는 검법이다.
 검은 결코 중병(重兵)이 아니다. 상대가 검보다 훨씬 무거운 유성추(遊星鎚)나 부(斧)를 사용하면 검세(劍勢)가 밀리는 것이 보통이나 혈붕을 시전하면 이 세상 어떤 중병보다도 무거운 기세를 뿌려댈 수 있다.
 제이초 혈붕을 익히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튼튼한 하체가 받쳐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익히기 전, 하체의 단련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 내공의 힘만으로 안 될 때 근력을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혈붕이 시전되면 산악 같은 검세가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산산이 부수며 파고들기에 막기 힘든 것이 특징이다.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내상을 면키 어려운 것이 바로 혈붕이다.
 제삼초 혈일(血溢).
 제삼초 혈일은 글자 그대로 피의 해일(海溢)을 부르는 혈광검법 최후의 초식이다. 혈일을 펼치면 반 검이 온 검으로 변한다. 나머지 반은 검강이다. 무릇 검강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누구나 발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검강을 발출하기는 쉬워도, 이를 갈무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혈일은 검강을 나머지 반 검의 형태로 갈무리할 수 있어야 십이성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검신(劍身)의 길이만큼밖에는 공격력이 없어도 혈일은 이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 갈무리된 검강의 위력은 이 세상 어느 것이라도 능히 격파할 능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막사(莫邪)나 간장(干藏)과 같은 신병이기(神兵利器)를 지녔다 하더라도 혈일에 부딪치면 산산이 조각날 것이다.
 하물며 여타의 병장기야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
 
 “휴우, 엄청난 무공이다! 혁 노인은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지? 그리고 왜 이런 무공을 가졌으면서도 말똥을 치웠어야 할까?”
 천소기는 혈살도부가 혈광마록의 무공 중 겨우 오성의 화후로 천하를 진동케 하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혈살도부가 남긴 혈광검법과 혈광장법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혈살도부 혁 노인이 이렇게 강한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왜 마장에 있었는지가 궁금하였다.
 천소기는 아직 그가 왜 그랬는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혈살도부가 얼마나 무서운 마왕(魔王)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소기는 곧 혈광장법과 혈광검법을 익히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그에게는 무엇이든 배운다는 것이 바로 그의 지상목표였기 때문이었다.
 
 ***
 
 대명제국이 막 태동한 대명 원년, 강호는 거대한 소용돌이와 직면하고 있었다.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대명제국을 건국하는 데 일조를 담당하였던 많은 무림인들이 황궁의 무장(武將)으로 의복을 갈아입었다.
 많은 정사마의 무림인들이 전장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 절정무공 중 일부가 실전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또 여기저기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대소방파들이 개파대전을 열고 제자들을 모집하던 때이기도 하였다.
 강호에는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를 비롯한 구파일방이 문호를 개방하고 제자들을 모집하는 동안 무섭게 세를 불려 나가는 문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소위 일궁(一宮), 이보(二堡), 삼방(三幇), 사곡(四谷)이라 불리는 문파였다.
 
 일궁은 태극궁(太極宮)이었다.
 이 태극궁은 청해성(靑海省) 서녕(西寧) 부근에 있다. 태극궁의 궁주는 올해 세수 칠십삼 세인 태극무존(太極武尊) 제인구(諸寅謳)였다.
 태극무존의 독문무공은 태극검법(太極劍法)으로 가히 검법의 일절이라 불릴 만한 검법이었다. 소림사의 상승검법인 수미혜검식(須彌慧劍式)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검법이라 알려졌다.
 태극궁에는 삼 전(殿), 구 당(堂), 이십칠 향(香)이 있으며 다시 그 밑으로 모두 팔십일 타(陀)가 있다고 하였다. 정말 대단한 성세가 아니라 할 수 없는 문파였다. 태극궁의 궁도들은 무려 십만에 달한다고 소문이 나 있다. 삼전의 전주는 태극무존의 이남일녀가 맡고 있다고 하였다. 천궁전(天宮殿)의 전주는 활검(活劍) 제호빈(諸豪彬)이고, 인궁전(人宮殿)의 전주는 사검(死劍) 제호량(諸豪亮)이 맡고 있으며, 지궁전(地宮殿)의 전주는 은하검희(銀河劍姬) 제연교(諸燕嬌)가 맡고 있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태극궁에는 삼 호법과 구 장로가 있다 하는데, 그들의 신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보는 등룡보(騰龍堡)와 혈영보(血影堡)였다.
 등룡보는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부근에 있다. 룡보주는 올해 세수 육십칠 세인 등룡마도(騰龍魔刀) 추비순(秋飛舜)이었다.
 등룡마도는 현 강호에서 적어도 도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도법의 달인(達人)이었다.
 마도의 인물인 등룡마도는 마도 인물답지 않게 공평함으로 보(堡)를 다스렸다. 하여, 그의 휘하에는 많은 마도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등룡보에는 사 각(閣), 팔 전(殿), 십육 당(堂), 육십사 향(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그외 등룡보에는 전대마두들이 있는 원로원(元老院)이 있으며, 육 호법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등룡마도에게는 일남일녀가 있는데, 소보주인 소수마도(素手魔刀) 추담(秋曇)은 부친에 못지않은 도법의 달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등룡마도의 장중주인 마뇌예향(魔腦霓響) 추진진(秋珍珍)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여인이라 소문났다. 등룡보의 모든 움직임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혈영보는 광서성(廣西省) 남녕(南寧)의 시진 한복판에 있다고 하였다.
 혈영보주는 세수 팔십팔 세인 적염신장(赤髥神將) 도태무(陶太懋)였다. 적염신장은 그의 붉은 수염과 당당한 체구로 인한 외호였다. 그의 외모는 너무도 근엄하여 누구도 그를 처음 보고 그가 사파의 인물임을 알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적염신장의 독문무공은 사파의 인물답게 사도대법이었다.
 그가 펼치는 각종 사법에 걸리면 누구든 미혹되어 헤매다 황천으로 향하기에 무림에서는 그를 기피인물 일호로 손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다른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는 천하에 내노라는 사도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혈영보에는 삼 단(團), 구 당(堂), 이십칠 향(香), 팔십일 대(隊)가 있다.
 적염신장에게는 아들은 없고 손자와 손녀만 있을 뿐이었다. 하나밖에 없던 아들은 혈살도부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소보주인 혈명귀수(血暝鬼手) 도시장(陶施璋)도 조부 못지않은 사파의 고수로 손꼽히고 이었다.
 손녀인 혈면귀요(血面鬼妖) 도교빙(陶嬌氷)은 어릴 적부터 면사를 쓰고 있어, 누구도 그녀의 진면목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는 신비에 싸인 여인이었다. 누군가의 말로는 도교빙의 사술이 오라비인 혈명귀수보다도 뛰어나다고 하는데 확인된 바가 없었다.
 
 삼 방에는 귀무살겁방(鬼霧殺劫幇)과 만겁수라방(萬劫修羅幇), 그리고 철패사자방(鐵覇獅子幇)이 있었다.
 귀무살겁방은 산서성(山西省) 연안(延安) 부근에 있다고 하는데 확실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곳에는 마도에서도 고개를 돌린 악마들이 전부 집결하여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확실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귀무살겁방의 방주는 올해 일백삼십쯤 되는 전대거마인 혈살도부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도 사실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구파일방에서는 무림공적인 혈살도부를 치기 위하여 백방으로 진위 파악을 하려 하였지만, 구름에 숨은 듯 귀무살겁방의 총단 위치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만겁수라방은 요령성(遼寧省)에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방주가 누군지, 방도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론 만겁수라방은 살수들의 집단이라고만 알려져 있는데, 그것도 사실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만겁수라방의 방주는 사술에 있어서 적염신장과 쌍벽을 이루는 망혼귀매(亡魂鬼魅) 노진(盧瑨)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철패사자방은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 삼협(三峽) 어딘가에 있다고 하였다.
 철패사자방주는 철혈사자(鐵血獅子) 경만호(景滿昊)이다.
 철혈사자는 올해 오십이 세로 그는 패도(覇道)를 추구하는 정사지간(正邪之間)의 인물이었다.
 철혈사자의 독문무공은 개세부법(蓋世斧法)이었다. 적어도 부법에 있어서는 천하의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 세론(世論)이었다.
 철패사자방에는 오 전(殿), 십 각(閣), 이십 대(隊), 육십 단(團)이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몸에 철갑(鐵甲)을 두르고 다녀 웬만한 도검으로는 상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철혈사자에게는 오직 두 딸만이 있는데, 철패사자방의 암사자 자사화(雌獅花) 경희연(景喜延)은 여자의 몸이면서도 장차 철패사자방을 이끌 미완(未完)의 대기(大器)로 알려져 있다.
 자사화 경희연은 놀랍게도 천력(天力)을 타고난 장사들이나 사용하는 유성추(遊星鎚)를 병기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유성추 같은 중병(重兵)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면 설사 사내라 할지라도 신력을 타고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인의 몸으로서 그것을 사용한다 하여 한때 강호에 흥미로운 소문이 되기도 하였다.
 두 번째 딸인 홍예선자(虹霓仙子) 경희옥(景喜玉)은 언니와는 달리 요조숙녀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녀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녀가 철패사자방의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곡에는 선음곡(仙音谷)과 기인곡(奇人谷), 빙하곡(氷河谷)과 태양곡(太陽谷)이 있었다.
 선음곡은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부근에 있는 추화산(追華山)의 계곡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선음곡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추화산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심마니조차 선음곡이란 계곡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선음곡의 곡주는 올해 아흔 살쯤 된 천음선자(天音仙子) 매옥교(梅玉嬌)라고 한다.
 선음곡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번도 선음곡의 제자들이 강호에 나와 활동하였다는 말은 없었다.
 선음곡은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문파라는 말도 있었다.
 선음곡에서 제자를 선발할 때면 그 제자의 집에 늘 한 송이 만개한 매화를 놓고 간다 하여 매화곡(梅花谷)으로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선음곡에는 천상의 선율이 늘 탄주되어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라는 말도 나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선음곡이 어디에 있는지, 제자가 얼마나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음율(音律)을 사랑하는 선음곡이 왜 무림의 문파로 분류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인곡은 강서성(江西省)의 어딘가에 있다고만 알려져 있었다.
 기인곡주는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특별히 알려진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누구든 기인곡에 입곡하려면 기인곡의 입곡수칙(入谷守則)을 지킨다고 맹세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한번 입곡하면 영원히 기인곡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기인곡의 입곡수칙이라 하였다.
 일단 입곡한 입곡자는 누구에게든 도전을 할 수 있는데, 대결에서 승리하면 즉시 직급이 올라가므로 가장 강한 무공을 가진 사람이 바로 기인곡의 곡주가 되는 것이라 하였다.
 기인곡에는 따로 어떤 전(殿)이나 당(堂), 향(香) 같은 조직 구분이 없다고 하였다. 워낙에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 것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기인곡에 누가 입곡을 하였는지, 정사마 중 대체 어디에 속하는지, 누가 곡주인지 세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일단 기인곡에 입곡한 자가 강호를 돌아다닌다면, 그는 기인곡에서도 무척 신분이 높은 자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기인곡에서는 매년 일정수의 곡도(谷徒)들을 강호로 내보내 무엇인가를 찾는다고 하였는데, 대체 그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강호에 나와 있는 기인곡도들은 어떠한 시비에도 휘말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심지어는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고 있어도 절대로 손을 쓰지 않는다 하였다.
 들리는 말로는 기인곡에서 찾고자 하는 것을 찾기 전까지는 어떠한 시비에도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기인곡의 제일수칙이라 하였다. 하여간 기인곡은 그 이름만큼이나 신비한 구석이 많은 문파였다.
 태양곡은 복건성(福建省) 하문(廈門) 부근에 있는 화산(火山)에 근거지가 있다고 하였다. 화산은 수시로 용암(鎔巖)을 뿜어대기에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못한다고 하였다.
 태양곡 총단이 있는 곳은 엄청 뜨거운 곳이라고만 알려졌다. 혹자의 말로는 용암 위에 전각을 지어 놓고 거기서 산다는 말도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태양곡주는 폭염화군(暴炎火君) 진호(晋虎)라 하였다. 그의 나이는 대략 사십오 세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약 오 년 전에 부친으로부터 곡주직을 물려받았다고 하였다.
 폭염화군은 그의 외호에 걸맞게 열양장법(熱陽掌法)인 폭염장(暴炎掌)이 그의 독문무공이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그의 장력이 스치는 곳은 온통 잿더미가 된다고 하였다.
 폭염화군에게는 일남일녀가 있는데, 소곡주인 만폭장공(滿爆匠工) 진구범(晋救範)은 각종 화기(火器)를 제작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하였다.
 만폭장공으로 인하여 이름도 없던 태양곡이 강호에 소문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만든 진천폭멸뢰(振天爆滅雷)는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가진 화기라고 소문이 났다.
 언젠가 그가 진천폭멸뢰를 제작하여 시험하다가 산 하나를 완전히 뭉개 평지로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이었다.
 만폭장공 진구범의 누이동생인 벽력화(霹靂花) 진옥령(晋玉鈴)은 성격이 불보다도 급하다 하여 그녀의 외호에 벽력이라는 글자가 들어갔다고 하였다.
 올해 십팔 세인 진옥령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성격이 너무도 급해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양곡에는 태양전사단(太陽戰士團)이라는 것이 있는데, 각 단마다 각기 일백 명의 태양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태양전사단은 모두 삼십삼 단이 있다고 하는데, 인원은 적지만 가히 일당백의 무공을 소지하고 있다 하였다.
 그들의 진정한 무서움은 각단마다 각기 열 알씩의 진천폭멸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누구도 그들과 대적하려 하지 않는다 하였다. 만일 그들과 시비가 붙어 진천폭멸뢰를 한 알만 던지면, 웬만한 장원은 주춧돌까지 먼지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 아래 시신도 보존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빙하곡은 설산(雪山) 어딘가에 있다고 하였다. 빙하곡이 있는 곳은 너무도 추워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라 하였다.
 빙하곡의 연원은 꽤 깊어 벌써 빙하곡의 역사가 오백 년 가량 된다고 하였다.
 빙하곡주는 빙파파(氷婆婆)라고 알려져 있었다.
 빙하곡은 지역의 특성상 여인 이외에는 견디기 힘들기에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문파라 하였다.
 빙하곡은 일 년에 한 번 중원으로 들어와 여제자들과 합방할 인재를 납치한 후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한번 빙하곡에 납치되었던 인물들은 절대로 다시 납치하는 일이 없는데, 납치되었던 자들은 한결같이 죽기 전에 한 번만 다시 가 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을 빌면 빙하곡은 절대 춥지 않다는 것이다. 그곳은 전설의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곳이고, 선계(仙界)나 천계(天界)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형형색색의 과실나무들이 즐비하고, 달콤한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실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으며, 토끼나 사슴 같은 동물들이 전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이 오는 곳이라 하였다.
 태어난 아이들 중 사내아이들은 모두 그들을 거둘 만한 사람들의 집 앞에 갖다 놓는다 하였다. 물론 여아들은 빙하곡에서 성장하며 빙하곡의 제자가 된다고 하였다.
 빙하곡의 독문무공은 한빙쇄혼장(寒氷碎魂掌)이라 하였다.
 한빙쇄혼장이 시전되면 펄펄 끊던 용암도 얼어붙을 정도라 하였으나, 한빙쇄혼장이 시전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한빙쇄혼장이 이토록 유명한 것은 이백 년 전, 중원무림맹의 맹주였던 무성(武聖)의 말 때문이었다. 당시 무성은 한빙쇄혼장이 시전되어 용암을 얼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였다.
 빙하곡에서는 제자들 중 가장 아름답고 재능이 특출한 두 여아를 선발하여 각기 일공주와 이공주라 부른다 하였다.
 일공주가 차기 곡주가 되는데, 만일 일공주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이공주가 그 직위를 계승한다 하였다.
 
 그 밖에도 강호에는 무림의 대들보인 소림, 무당을 비롯한 칠파일방이 있고, 유수한 대소방파들이 있었다. 어떤 방파는 무섭게 세를 불려 나가는 반면, 어떤 방파는 조용히 침잠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였다.
 현재 강호는 우후죽순처럼 뻗어나오는 문파들로 인해 가히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주원장의 세력에 의해 북으로 북으로 쫓겨간 대원제국(大元帝國)의 잔당들이 실제 회복을 노리고 있었고, 서장과 남만에서도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이 중원을 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변방의 이민족들은 늘 기름진 중원을 정복하려 노려오고 있었고, 또 수없이 중원 침공을 감행하였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패배라는 쓴잔을 마시고 물러서야만 하였던 것이 중원의 사서(史書)에 명명백백히 기록되어 있었다.
 
 ***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천소기는 이제 열일곱 당당한 장부로 성장하였다.
 그의 구레나룻과 코 밑에도 검은 수염이 나기 시작하였고, 어깨는 떡 벌어졌다. 또 신장도 부쩍 커서 그는 거의 육 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인의 허리 굵기와 비슷한 허벅지는 차체하더라도 그의 상반신의 근육은 실로 예술작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난 일 년 간 천소기는 장작패기와 기타의 단련으로 그의 몸을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로 바꿨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천소기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낮에는 초향옥녀와 금기서화는 물론 고담준론을 나누는 한편, 새로운 서책을 접하면 그것에 몰두하여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완전한 서치(書癡)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기록관으로서 임무도 충실히 수행해 내었고, 밤이면 천소기는 혈광마록에 있는 무학들을 섭렵하였다.
 이제 혈광무록은 이 세상에 없었다. 며칠 전 모든 것을 완전히 암기한 천소기가 그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일초반식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학을 익힌다는 것은 고행(苦行)이었다.
 처음엔 아무도 지도하거나 충고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진도가 느리고 이해하기가 어려웠었다.
 하지만 일단 그 고비를 넘기니, 다음부터는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었다.
 천소기는 혈광심법을 꾸준히 운용하였으나 아직 그의 내공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는 잠을 자지 않고도 피로를 몰아낼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지난 이 년 간 천소기는 실로 엄청난 자신과의 싸움을 하였다. 알 듯 모를 듯하던 무리(武理)를 깨닫기 위하여 제 머리를 쥐어뜯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의 결실로 천소기는 이제 혈광마록상의 무학은 어떤 것이든지 자신이 있었다. 다만 내공이 일천하여 제 위력을 내지 못할 뿐이었다. 또 하나는 전혀 실전 경험이 없기에 초식의 운용이 다소 서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완전하였다. 혈살도부가 실전에서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참으로 자세히 기록하여 두었기 때문이었다.
 혈광마록에는 내공을 얻는 방법이 여러 가지 적혀 있었다.
 첫째는 내공심법을 꾸준히 운용하여 얻는 방법이었고, 두 번째는 인세에 보기 드문 각종 영약이나 기물(奇物)을 복용함으로써 내공을 얻는 방법이었다.
 세 번째는 음적(淫賊)들이나 사용하는 채음보양대법(採陰保陽大法)을 시전하여 얻는 방법이었다.
 천소기는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을 기록한 것을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혈광마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천소기에게 가능하다면 의술의 대가를 찾아 그에게서 의술을 전수받을 수 있으면 전수받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의술을 배움으로써 인체의 경락(經絡) 구조나 기의 흐름 등을 배울 수 있게 되면 한 차원 높은 무공을 새로 창안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제 장정이 된 천소기를 바라보는 초향옥녀 예아연의 눈빛은 전과는 완연히 틀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촉촉한 연정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천소기와 함께 있는 동안 예아연의 입가에서는 싱그런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서 천소기는 종도 아니고, 제자도 아니며, 단순한 친구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천소기는 어느새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진 정인(情人)이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도 밤이 되어 처소로 돌아갈 때면 예아연은 왠지 섭섭함을 느꼈고, 어서 빨리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이제 예아연은 하루라도 천소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여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십팔 세 혼기가 꽉 찬 예아연을 바라보는 항주부사 예당의 눈길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지난해 항주부사는 과시에 천소기를 보내려 하였으나 갑자기 급한 공무가 생기는 바람에 과시에 보내지 못하였었다.
 때때로 천소기를 불러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눌라치면 예당은 날이 갈수록 급진전하는 그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함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학문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천소기에게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당은 천소기 정도의 학식이면 언제든 과시에 급제할 수 있다 판단하고는 천소기와 예아연을 돌아오는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혼례를 올려주려 마음먹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당과 예아연 부녀뿐이었다. 예아연은 부친으로부터 천소기와 혼례를 올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듣고 옥용을 붉히며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도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지만, 차마 청백지신(淸白之身) 처녀의 몸으로 금방 좋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예당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예아연에게 한 말이 있었다.
 “너희 둘은 너무도 잘 어울려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다. 하나, 이 아비에게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너희 둘 사이의 소생 중 하나에게 예씨 성을 물려주었으면 좋겠구나.”
 예당의 말은 둘 사이를 명백히 인정한다는 말이었다.
 아이라는 말에 예아연은 온통 새빨개져 도망치듯 부사의 처소를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통 행복한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후로 예아연은 마치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처럼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천소기에게 더 이상 ‘아씨’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여 천소기는 예아연을 그냥 ‘예 소저’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천소기는 천하일주에 가끔 들렀다. 여전히 천하일주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소루의 명성을 이미 퇴색해 버린 지 오래인 듯 손님이 거의 없었다.
 여전히 돈돈은 계산대에 앉아 졸고 있었고, 도진도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돈화는 천소기가 항주 관아로 간 이후, 상실감에 엄청 먹어댔는지 그 사이 엄청나게 뚱뚱해져 거의 거동이 힘들 정도가 된 것이었다.
 덕분에 돈돈은 한 달에 한 번 진기원의 설화에게 가서 객고(客孤)를 풀고 와야 했다. 돈화도 이제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천하일주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저 그런 주루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돈화가 너무도 뚱뚱해져 운신도 하지 못하여 더 이상 차를 우려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소기는 천하일주에 들를 때마다 일부러 관인들 수십 명을 끌고 가 매상을 올려줬으나 그건 그때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파리가 날아다닐 정도로 한가해졌던 것이다.
 천소기는 천하일주에 갔다 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아무튼 천소기는 초향소축에서의 생활이 너무 좋았다. 부족함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록관으로서의 그의 봉록(俸祿)은 전부 예아연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의복이 몸에 맞지 않을 때만 의복을 살 뿐 일체의 것은 모두 예아연이 준비해 주니, 그의 재산은 조금씩 불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천소기는 뜻한 바가 있어 예아연에게 맡겨 두었던 은자 전부를 찾아 가지고 항주 시진으로 향했다.
 항주 시진은 색향답게 없는 것이 없었다. 화려한 능라금의(綾羅錦衣)가 점포마다 즐비하였고, 가지각색의 옥잠(玉簪)들 또한 많았다. 사람 역시 많았는데, 모두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천소기는 두리번거리며 항주 시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낡은 관제묘(關帝廟) 앞을 지나게 되었다.
 “킬킬! 젊은이, 부디 이 늙은이에게 적선 좀 하게.”
 창노한 음성을 들은 천소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남루한 의복을 걸친 노인이 거적을 깔고 앉아 있었다. 노인은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모습이었다. 어찌나 쭈글쭈글한지 나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노인의 곁엔 아무렇게나 자른 나뭇가지에 깃발이 걸려 있었는데, 깃발엔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라고 쓰여 있었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곁엔 작은 글씨로 ‘모든 이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칠 수 있으니, 미리 알고 방비하면 큰 복록(福祿)을 누리리’라고 쓰여 있었다.
 천소기는 내심 남들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는 고명한 양반이 왜 이렇게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길바닥에 나 앉아 있나 하는 마음이 일었으나 상대가 노인이라 그런 표정을 짓지 않고 자리를 뜨려 하였다.
 그때 노인의 창노한 음성이 다시 들렸다.
 “젊은이, 그냥 가지 말고 점이나 한 번 보게. 이 늙은이는 어제부터 굶었다네.”
 그제서야 천소기는 아까 노인이 자신에게 적선하라던 말의 의미를 알았다. 굶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천소기는 차마 자리를 뜰 수 없어 노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하하! 노인장, 소생의 길흉화복을 정말 아실 수 있겠습니까?”
 “킬킬! 자네는 노부가 이렇게 하고 앉아 있으니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노부는 정말 모든 이들의 길흉화복을 알 수 있다네.”
 노인은 몹시도 익살스런 표정을 짓더니 코까지 찡긋거리며 말하였다. 그는 지금 천소기의 수중에 얼마나 은자가 있는지를 점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소생의 장래를 점쳐 주시겠습니까?”
 천소기가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실상은 믿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불쌍한 노인이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은자를 건네주려는 마음뿐이었다.
 “킬킬! 우선 자네의 생년월일을 대어 보게.”
 노인은 제법 역술인처럼 붓을 들고 적을 태세를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붓은 몽당 붓이었다. 어찌나 오래 썼는지 거의 모든 털이 닳아 끝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죄송한데······, 소생은 생년월일을 모릅니다.”
 “뭐야? 생년월일을 몰라?”
 “예.”
 천소기가 생년월일을 모른다 하자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중얼거렸다.
 “흐음, 그럼 관상(觀相)이나 봐야겠군.”
 노인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천소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침침한 노안인지라 자세히 보이지 않은지 노인의 얼굴은 점점 천소기의 얼굴에 가깝게 다가왔다. 결국 천소기의 면전(面前) 한 자 거리에서 노인은 천소기의 얼굴을 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동안 천소기의 얼굴을 들여다본 노인은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흐음, 젊은이는 살(煞)이 끼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예에? 무슨 살이······.”
 천소기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흐음! 도화살(桃花煞), 역마살(驛馬煞), 그리고 급살(急煞). 급살이 그 중에 가장 급박해.”
 “네에!”
 천소기는 노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흐음, 그리고 보니 젊은이는 부모 복이 없구먼. 자수성가할 팔자야.”
 천소기는 말없이 가만히 노인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처복(妻福)은 있겠는데······. 으음, 관리를 잘해야 되겠구먼.”
 “예?”
 천소기는 처복은 있는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말에 불현듯 의구심이 일어 반문하였다.
 “여인들 투기가 심할 거야. 잘못하면 집안에 분란이 끊이지 않겠어.”
 “예? 여인들이라뇨?”
 “켈켈켈! 좋겠네. 한 집에 여러 여자를 두고 살 팔자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킬킬! 그래도 몰라? 젊은이는 염복(艶福)이 너무 강해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 팔자야.”
 “······.”
 “흐음, 후분(後分)은 좋군! 하지만 죽을 고비를 세 번은 넘겨야 할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하자, 천소기는 의문이 일어 물었다.
 “젊은이는 당장 삼 일 내로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게 될 걸세. 그리고도 두 번은 더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될 걸세.”
 “······?”
 “가까이 있는 죽음의 고비는 자네가 입만 열지 않으면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일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킬킬! 말 그대로야! 입만 열지 않으면 살 수 있다고.”
 “입만 다물면 살 수 있다고요?”
 “그래, 입만 열지 마. 입을 열면 즉시 죽음을 당할 걸세.”
 “······?”
 천소기는 노인이 떠드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노인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고비를 넘기면 아주 좋네.”
 “······!”
 “그후로는 꽃피는 봄날이 이어질 걸세.”
 “······.”
 천소기는 노인의 앞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허무맹랑한 말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자신에게 많은 여인이 있을 것이란 말도 이해되지 않았다. 또 입만 열지 않으면 죽을 고비를 넘길 것이란 것도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천소기는 내심 길바닥에서 이렇게 쭈그려 앉아 있는 노인이 한끼 식사비를 벌기 위하여 얼토당토 않은 허무맹랑한 말로 자신을 현혹하려 하였다 생각하였다.
 “후후······, 고맙소이다. 살 길을 알려 주셔서. 복채는 얼마나 드릴까요?”
 복채 소리가 나오자 노인은 귀가 번쩍 열리는지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복채? 은자 열 냥만 내게.”
 “예에?”
 은자 열 냥이란 말에 천소기는 어이가 없어 큰소리로 반문하였다. 그 정도면 한 가족이 두 달은 족히 먹을 수 있는 큰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은자 열 냥이란 말을 하고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천소기를 보며 늘어져 있던 것들을 주섬주섬 거두면서 입을 열었다.
 “왜? 많다고 생각하나? 원래 죽음의 위기를 알려 줄 때면 열 냥을 받는 게 우리 역술인들의 규칙일세.”
 “죽음의 위기요?”
 “그렇네! 자네는 앞으로 삼 일 이내에 죽음의 위기를 겪을 것일세.”
 노인은 너무도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마치 진짜 삼 일 이내로 죽음의 위기가 천소기에게 닥칠 것이 기정사실인 모양으로.
 천소기는 왠지 기분이 서서히 나빴으나 아무 말 없이 은자 열 냥을 꺼내 노인에게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 이렇게 남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죽음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킬킬! 명심해야 할 걸세. 입만 열지 않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일어서서 가는 천소기의 등을 향해 노인이 창노한 음성으로 말을 한 후 일어서서 거적을 걷었다. 아마 오늘 일당은 한 모양이었다.
 천소기는 항주 곳곳을 돌며 실컷 구경을 하는 내내 노인의 말이 신경 쓰였다. 하긴 삼 일 이내로 죽음의 위기가 온다는데, 태연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원래의 목적을 포기한 천소기는 항주 관아로 돌아왔다.
 천소기는 돈화와 예아연을 위한 선물을 구입하려던 것이었다.
 초향소축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천소기를 본 예아연은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아니, 어디 아픈 거 아냐? 왜 그래?”
 천소기는 노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 그냥······ 뭣좀 생각하느라고 그래요.”
 “뭔데?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거야?”
 “아,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래?”
 예아연이 너무도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묻자, 천소기는 할 수 없이 저잣거리에서 본 노인에 대한 이야기와 점괘에 대하여 말하였다.
 “호호······, 엉터리 점쟁이한테 엉뚱한 소리를 들어서 그러는 구나?”
 “왠지 자꾸 신경이 쓰여요.”
 “호호······, 그딴 거에 신경 쓰지 말아. 여긴 항주 관아야! 그런데 어떻게 죽음의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거지? 여기 있으면 그런 건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그건 그래요.”
 천소기는 예아연의 말에 저으기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관아 안에 있는 관저는 항주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닌가.
 천소기는 애써 노인의 말을 잊으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보통 날과 마찬가지로 예아연과 학습을 한 후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다음 날, 천소기는 항주부사의 부름을 받고 집무청으로 갔다.
 “음, 왔느냐?”
 “예. 부르심 받고 왔사옵니다.”
 “우선 게 앉거라!”
 항주부사는 무엇인가를 쓰며 천소기에게 앉아 기다릴 것을 명하였다. 천소기는 여러 번 들어온 정실이지만 안을 둘러보았다. 항주부사가 집무를 보는 정실은 검박(儉朴)하면서도 우아한 운치가 흐르는 방이었다.
 사방에 늘어선 서가에는 많은 서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장방형 탁자 위에는 지필묵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이로 보아 항주부사 예당의 성품이 곧고, 고지식함을 알 수 있었다.
 “흐음, 이것을 가지고 남경으로 향하거라!”
 “예?”
 항주부사는 자신이 쓴 서찰을 접어 천소기에게 주며 말하였다.
 “남경에 가면 교국승상(敎國丞相) 진엄교(晋嚴敎) 승상댁인 화엄장(華嚴莊)이 있느니라. 그곳에 가서 이 서찰을 승상께 전하고 답을 받아 오너라.”
 “예!”
 항주부사는 비교적 자세하게 남경 지리와 화엄장이 있는 위치를 설명하였다.
 “지금 즉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가는 동안에도 조금도 지체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천소기는 더 이상을 묻지 못하고 바로 길을 떠났다.
 생전 처음 항주를 떠난 천소기의 눈엔 강호의 풍광(風光)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산과 들이 아름다웠고 계곡도 그러하였다.
 천천히 유람 삼아 걷는 동안 천소기는 쉬지 않고 혈광마록상의 신법구결을 되뇌었다. 이 기회에 비록 일천한 내공이지만 신법을 익히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어느 누구의 지도도 없이 신법(身法)을 익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때론 발이 엉켜 넘어지기까지 하였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연마한 결과, 저녁 무렵에는 제법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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