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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투 1

2017.11.24 조회 556 추천 3


 색투 1권
 서장
 
 
 “헉헉! 제기랄,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거지? 벌써 이게 며칠째야?”
 한 인물이 어둡고 비좁은 통로를 기어가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제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하였다.
 “이런 제기랄! 정말 욕 나오네. 대체 어디에 붙어 있기에 이토록 찾기 힘든 거야? 빌어먹을!”
 연신 투덜거리는 인영의 음성은 대략 오십 정도 된 사내의 음성이었다. 어둠 속을 더듬으며 전진하던 그가 제자리에 멈춰선 것은 한참 뒤였다.
 “빌어먹을 놈! 하필이면 여길 털라고 해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키는 거야? 돌아가기만 해 봐라! 껍질을 홀랑 벗겨 적어도 삼 일은 매달아 놓고야 말겠어.”
 투덜대며 기어가던 그가 어느 순간, 바닥에 놓여 있는 밤톨만한 하얀 자갈을 발견하고는 맥빠진 음성을 토했다.
 “이런 제기랄! 미치겠네! 또 제자리로 돌아왔잖아? 대체 어떤 놈이 미로를 만들었는지 된통 잘못 걸려들었네. 이러다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가죽으로 만든 포대를 내려놓더니 바닥에 드러누워 이미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비어 있는 물통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물이 없다는 사실에 실소(失笑)를 지었다.
 “제길, 이젠 물도 없네.”
 어둠 속의 그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갈래길이 나오면 자갈을 하나씩 내려놓았는데, 이제 포대 안의 자갈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일천여 개 이상의 자갈을 내려놓은 후였다.
 미로는 수천 갈래로 이루어졌는데 전부 곡면(曲面)을 이루고 있었고, 수백 군데가 서로 마주치게 만든 탓에 방금 지나간 곳도 기억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채 미로 속을 헤맨 지 벌써 사나흘은 족히 지났고, 타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변이라도 받아 마셔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마신 것이 없으니 그나마 나올 것도 없었다.
 거의 탈진 상태로 누워 있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능글맞은 제자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천하의 공공신투(空空神偸)가 이런 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놈은 물론, 지나는 개들도 웃겠지?”
 천하제일 신투이자 신투동부(神偸洞府)의 동주(洞主)인 그는 남들의 조소가 두려운 듯 힘을 내어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또 하루가 지났을 즈음 운 좋게도 처음 지나는 통로를 접하자 기운을 내어 좀더 빨리 손발을 놀렸다.
 얼마 후, 그는 비좁았던 통로가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지자 비로소 자신이 원하였던 곳에 도달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온 목적만 아니라면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안공(夜眼功)을 극성까지 익혔지만 워낙 칠흑같이 어두운 탓에 조심조심 석벽을 더듬으며 전진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며 무너진 탓인지 바닥이 고르지 않아 가끔 휘청거렸다.
 덜그럭! 떼구르르르 ―.
 무언가 발에 차여 구르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는 바닥에 엎드려 조심스레 손으로 더듬었다. 둥근 물체가 손에 잡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촉감(觸感)을 곤두세워 더듬다가 깜짝 놀란 듯 던져 버렸다.
 휘이이익 ― 으지직 ―.
 “젠장, 해골바가지였잖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불을 밝혀서라도 빠져나갈 곳을 찾아야지.”
 품에서 화섭자(火攝子)를 꺼낸 그는 불을 밝혔고, 엄청나게 큰 광장에 수북한 먼지에 쌓여 있는 수많은 인골(人骨) 더미를 발견하고는 전율하였다.
 “으으으, 분명 이 해골들은 이곳을 만들었던 장인(匠人)들의 것이 틀림없다.”
 너른 광장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는 기관장치는커녕 자신이 들어온 곳 말고는 다른 출구가 없음을 알고 주저앉았다.
 “휴우! 이제 어떻게 한담? 혹시······?”
 한참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유골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시신들의 의복은 삭을대로 삭아 버려 건드리기만 해도 으스러졌고,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고 끌려와 죽음을 당했는지 아무리 헤쳐 보아도 변변한 물건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한참 유골 더미를 뒤지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반대쪽에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좌정한 채 남아 있는 유골이 있었다. 유골의 손가락뼈가 한쪽 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벽으로 다가섰다. 벽에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어 실망한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벽을 쓸어 보았다. 감촉으로 보아 작은 홈들이 파여 있는 것을 느낀 그는 벽면을 급히 소매로 문질렀다. 먼지가 날려 시야를 가렸지만 분명 그곳에 패어져 있는 것은 이곳의 설계도가 틀림없었고, 자신이 있는 곳이 표시되어 있었다.
 “후우, 이제 살았다.”
 그의 눈은 석벽에 고정되었고 뇌리에 도면을 각인(刻印)시키려 정신을 집중시켰는데, 어찌나 복잡한지 자신이 들고 왔던 가죽포대를 뒤집어 자갈을 쏟아내고 안쪽에 모조리 베끼기 시작했다.
 작업을 마치자마자 신형을 날려 자신이 들어왔던 통로로 들어선 후 머뭇거림 없이 통로로 들어섰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그는 자신이 나가야 할 곳을 정확하게 찾아 목표 지점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이곳은 황궁 지하였다. 그가 대체 무엇을 노리고 황궁에 잠입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1장 대도(大盜)와의 인연
 
 
 사월 초,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들판에 아지랑이가 솟아오르고 혹독한 겨울을 보낸 초목들이 긴긴 잠에서 깨어 파릇파릇한 신록의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호시절이다.
 호남성(湖南省) 성도(省都)인 장사(長沙)의 뒷골목에 남루하기 짝이 없는 비렁뱅이 복장을 한 팔구 세 가량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앉은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중 덩치가 제일 커다란 아이가 제일 작은 아이를 노려보다가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진영(璡嶺)! 네놈은 오늘도 공쳤단 말이냐? 이대로 돌아가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우리 모두 벌을 받게 될 거다.”
 딱!
 “으윽!”
 잔뜩 인상을 구긴 아이가 울상을 짓자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아이가 말렸다.
 “두삼(杜三)! 벌을 받는 것이 뭐가 대수롭다고 진영을 때리는 거냐? 우리 모두 고아 신세고 비록 개방( 幇)에 소속되어 백의개(白衣? : 처음 입문하여 삼 년 동안 의결권이 없는 거지)지만 계속 마음 편히 지내고 싶다면 지금은 서로 협력해야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몰라?”
 두삼이라는 아이가 벌컥 화를 내었다.
 “왕린(王麟), 넌 언제나 내 속을 긁어 놓는구나. 야, 임마! 이대로 돌아가면 또 밥을 굶게 될 텐데,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냐? 덩치가 남들보다 커서 배가 쉬 고프단 말이다. 너도 네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으면서 벌을 받는 것이 대수냐고?”
 왕린이라 불린 아이가 표정을 굳히며 반문했다.
 “나는 남에게 구걸하는 비렁뱅이 짓이 싫은 탓에 네가 구걸하는 동안 빈화객잔(賓華客棧)에서 땀흘리고 일해 음식을 얻어왔지만 그래도 돼지 고깃덩이라도 얻어왔으니 너보다는 실속을 차렸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틀렸냐?”
 아이들이 왕린의 말에 동조하듯 머리를 끄덕이자 두삼이 허연 비듬이 마구 떨어지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래, 너 잘났다. 빨리 가서 벌받는 것이 네놈의 잔소리 듣는 것보다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 난 가야겠다.”
 두삼이 일어서자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일어서서 마을 어귀 관제묘(關帝廟)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진영이라는 아이는 뒤쳐져 걸었는데, 자신의 포대에 힘들게 얻어온 돈육(豚肉)을 넣어 주는 왕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어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왕린, 아까는 고마웠어. 음식을 얻지 못한 것은 내 탓이니 이렇게 하지 마. 이걸 내게 주면 너는 빈손으로 가야 하는데, 아마 엄청 두들겨맞게 될 거야. 그러니 도로 가져가.”
 진영이 돈육을 부대에서 꺼내 전해 주려 하자 왕린이 저만큼 달려가다가 돌아서서 입가에 손을 모으더니 외쳤다.
 “이러다 꼴찌로 들어가면 더 혼날 테니 빨리 가자.”
 진영은 왕린에게 돈육을 돌려주기 위해 달리기 시작하였고, 왕린은 잡힐 듯하다가는 거리를 벌리며 달렸다.
 관제묘에 제일 먼저 도착한 왕린과 진영은 손을 내밀고 있는 십삼사 세 정도로 보이는 일결(一結) 제자에게 포대를 내주었다.
 그는 몸이 몹시 말라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반천우(潘泉雨)라는 개방의 방도였고, 장사(長沙)의 백의개에겐 악명을 떨치는 소화자(小化子)였다.
 진영의 자루에서 묵직한 돈육을 꺼낸 그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무언의 칭찬을 표했는데, 왕린이 빈 자루를 내밀자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왕린! 네놈이 항상 잘난 척하더니 오늘 잘 걸렸다. 독종인 네놈을 때려 봐야 배만 고파질 테니 지금 당장 토굴(土窟)로 들어가 삼 주야간 금식(禁食)해라.”
 진영이 울먹이며 반천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돈육은 제가 얻어온 것이 아니고 왕린이 얻어온 것이니, 제게 벌을 주시고 그를 용서해 주세요.”
 반천우의 검미가 치켜 올라가며 고개를 저었다.
 “흥! 감히 날 기만하려 들다니 더욱 용서할 수 없다. 왕린! 지금 당장 뛰어가지 않고 왜 여기에 서 있지? 대가리 터지게 맞고 싶은 모양이군.”
 그가 몽둥이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왕린이 토굴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헤헤헤······, 천우 형! 삼 일 후, 나오면 되는 거지?”
 그의 밝은 표정을 본 반천우는 기가 질렸다.
 그가 말한 토굴은 사실 거지들이 기거하는 일반 토굴이 아니라 지면 이십 장 아래 음습(陰濕)한 곳에 만들어진 탓에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어두운 암굴(暗窟)이었다.
 간혹 붕괴되어 안에 있던 죄인이 압사(壓死)당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누구도 들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흥! 어디 삼 일 후에도 네가 웃을 수 있을지 두고 보겠어!”
 소년이 이를 갈고 있을 때 두삼과 나머지 아이들이 들이닥쳤다. 반천우가 일일이 그들이 가져온 양을 점검하고는 만족하였는지 커다란 가마솥에 쏟아 붓고 주걱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네놈들은 먼지 나지 않게 저쪽에 가서 기다려.”
 아이들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모여들어 낡아빠진 의복과 모발에 바글거리는 포동포동한 이를 잡으며 시간을 때우는 동안 까치머리의 아이는 토굴로 들어가 안쪽 깊숙한 곳 바닥의 판자를 들어올리고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통로는 어른 하나가 기어갈 정도로 비좁았고 습기가 많아 매우 미끄러웠다.
 “우라질! 뭐가 이렇게 미끄러워? 지난번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나빠졌는데?”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가던 왕린은 한순간 균형을 잃고 경사(傾斜) 때문에 주르륵 밀려 내려갔고, 이리저리 부딪치며 빠른 속도로 아래로 향하다가 외양간 크기의 평탄한 곳에 떨어졌다.
 쿵!
 “아이고, 아파라!”
 한 번 갇히면 며칠씩 지내야 했기에 그곳은 대소변 냄새가 배어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어휴! 삼 주야 동안 허기를 참는 것은 그런대로 견딜 만할 테지만 이 악취를 어떻게 견디지? 몸에 배면 지난번처럼 칠 주야 내내 수욕(水浴)을 하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텐데······.”
 왕린은 품속을 뒤져 재산 목록 일호인 부싯돌을 꺼내 탁탁 튀겨 찰나의 순간 동안 비치는 빛을 이용하여 발로 지면 바닥에 있는 오물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벽의 흙을 파서 덮었다.
 누울 만한 자리가 만들어지자 자신이 이곳에서 억울하게 벌을 받는 것을 잊으려고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웠다.
 “히히히······,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그는 어느새 태평스럽게 코까지 드르렁대며 잠에 취해 버렸다.
 꼬박 열두 시진 동안 세상 모르고 늘어지게 잠을 잔 그는 뱃속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에 잠이 깼다.
 “아함! 잘 잤다. 아이고, 배고파라.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이라도 잔뜩 마시고 올 걸 그랬나?”
 한쪽 구석에 소변을 본 왕린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배고픔을 달래보려 하였지만 전날에 먹은 음식도 변변치 않은 탓에 꼬르륵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허기가 지니 잠도 오지 않았고 아직도 심한 악취가 후각을 자극하자 시간을 보내기 위해 벽면을 파서 오물을 덮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열심히 작업을 하였지만 어린아이가 맨손으로 벽을 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톱 밑에 흙이 끼여 통증이 느껴졌지만 왕린은 작은 손을 계속 놀려대고 있었고, 두 시진쯤 지나자 바닥을 거의 새 흙으로 깔 수 있었다.
 약간 냄새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고약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왕린은 다음 번에 다시 이곳에 들어왔을 때 냄새가 없기를 바라면서 벽면을 파헤쳤다.
 왕린은 작업하기 편한 무른 벽면을 파헤쳤는데, 습기를 머금은 탓에 맨땅을 파는 것보다 수월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작업을 계속했다. 어느 순간 손에 만져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벽면이 물컹거렸던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왕린은 부싯돌을 꺼내들고 내리치며 벽면을 바라보았는데, 하얀 석회(石灰)가 보였다.
 “응? 이곳에 왜 석회가 발라져 있지?”
 왕린은 서둘러 석회에 손을 박아 뜯어내기 시작하였고 빛이 없어 볼 수는 없지만 바닥은 온통 하얀 석회 덩어리로 채워졌다.
 석회 벽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이제 그의 모습은 토굴에서 보이지 않았고, 아예 벽면 중간의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석회 덩어리를 뜯어내고 있었다.
 
 우르르릉 ― 우르르릉 ―.
 갑자기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곳 장사에서는 몇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지진이었다.
 “으헉! 지, 지진이다. 모두 대피해라!”
 관제묘가 심하게 흔들리며 지붕에서 기와가 떨어졌고, 쌓였던 먼지들이 우수수 쏟아지자 안에 있던 분타주(分陀主) 만취귀개(漫醉鬼 )가 방도들과 급히 대피하였다.
 “빠, 빨리 왕린을 구해야 돼!”
 진영은 이 순간에도 왕린을 생각하고 있었다.
 “맞아! 왕린!”
 반천우와 진영은 왕린이 지하에 들어간 것을 보았기에 재빨리 판자를 들춰 올렸다.
 “앗! 안 돼!”
 우르르르르릉 ―.
 판자를 들어올림과 동시에 세찬 진동과 함께 지하 암동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천우 형! 빨리!”
 “아, 안 돼! 이러다간 우리 둘 다 죽어!”
 반천우는 암동 속으로 상반신 전체를 집어넣으려는 진영의 다리를 죽으라고 잡아끌며 뒤로 물러섰다. 암동 입구 주변의 흙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안 돼! 왕린!”
 질질 끌려가는 진영의 눈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지하로 들어간 왕린이 흙더미 속에 묻혀 죽어가는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하필이면······.”
 진영의 다리를 잡아끌고 있는 반천우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흐흐흑! 안 돼!”
 밖으로 끌려나온 진영이란 아이가 지진이 멈추었음에도 울부짖음이 이어지자 두삼이 다가가 야단쳤다.
 “이런 빌어먹을 겁쟁이 녀석! 지진이 멈추었는데 뭐가 무섭다고 아직도 울고 난리냐?”
 진영이 두삼에게 매달리며 울먹였다.
 “흐흐흑! 도와줘. 왕, 왕린이 갇힌 토굴이 무너졌어.”
 두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뭐야? 토굴이 무너져?”
 두삼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토굴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고, 무너진 흙덩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왕린! 내가 구해 줄 테니 기다려라.”
 백의개들이 연장을 가지고 토굴 입구로 몰려가는 것을 본 분타주 만취귀개가 주호(酒壺)를 입에 가져가다가 안색이 백짓장처럼 탈색된 채 허둥대는 반천우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까딱였다.
 대체 거지 주제에 무슨 급한 일이냐는 듯 태평스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반천우에게 백의개 왕린이 토굴에서 벌을 받고 있었다는 보고를 받은 만취귀개는 더욱 허둥지둥대며 급히 방도들을 풀어 토굴을 파헤치게 하였다.
 그러나 지진 때문인지, 아니면 며칠 전 쏟아졌던 폭우가 스며들어 잔뜩 물을 머금어서인지 파내려 갈 때마다 무너져 내렸다.
 수십 차례 시도하였으나 벽이 무너져 내리는 통에 시간만 소비하고 모두 지칠대로 지쳐 버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백의개 하나를 구하기 위해 그들은 열의를 불태웠지만 결국 다른 업무도 보아야 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의개들의 곡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간략하게 토굴이 있던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장례식을 치렀다.
 
 한편 난생 처음 경험하는 지진에 놀란 왕린은 전신을 학질 걸린 사람처럼 심하게 떨며 무서워서 전신을 움츠리고 있었다.
 “어어어? 대체 왜 이렇게 흔들리지?”
 지진은 반각쯤 지속되었다가 멈췄지만 충격을 받은 탓인지 왕린이 들어왔던 통로 위쪽이 붕괴되며 흙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으윽! 큰일이다.”
 놀란 왕린은 열심히 손을 놀려 석회덩이를 떼어내 뒤로 던졌는데, 갑자기 표면이 곱게 다듬어진 돌로 만든 석벽 같은 것이 만져졌다.
 통로에선 계속 흙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어느새 그가 벽면에 파놓은 곳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허억! 안 돼! 빨리 석벽을 뚫고 들어가야 해!”
 왕린은 살아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손으로 돌이 쌓여 있는 여기저기를 밀었다.
 계속된 시도를 한 탓인지 다행히 돌 하나가 안쪽으로 밀려들었고, 그 다음부터는 무너지듯 석벽이 허물어졌다.
 와르륵 ―.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공기가 왕린의 폐부에 가득 찼고, 그는 흙더미에 깔리지 않으려고 무너져 내린 구멍 속으로 신속히 몸을 디밀었다.
 쿵!
 “아야!”
 그는 머리에 둔중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구멍에서 밀려드는 흙을 피하기 위해 편편한 바닥을 사력을 다해 무작정 기어갔다.
 오 장 정도를 기어간 그는 더 이상 흙이 밀려들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마터면 생매장당할 뻔했잖아?”
 급히 품속을 뒤진 왕린은 그 와중에 부싯돌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품에서 꺼내 부딪쳤다.
 폭이 일 장 정도 되는 벽돌로 된 통로에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달은 왕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으응? 여기가 대체 어디지?”
 왕린은 자신이 간신히 팔을 뻗으면 닿을 곳에 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까치발을 하여 깡충깡충 서너 번 뛰어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홰에 부싯돌을 그어 불을 붙인 왕린은 횃불을 들고 안을 둘러보았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지진의 여파로 곳곳이 무너져 내렸지만 튼튼하게 건축된 탓인지 통로가 막힌 곳은 거의 없는 듯 보였다.
 벽면 중간 중간에 홰가 걸려 있어 자신이 들고 있던 횃불로 통로를 밝히며 이백여 장 정도 걸은 왕린은 사방 십 장 정도 되는 넓은 실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 저게 뭐야?”
 장방형의 사방 모퉁이에는 신화 속의 사신(四神)인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나이 어린 왕린이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엔 투명한 유리관(琉璃棺) 같은 것이 있었다.
 “허억! 시체? 그럼 내가 지하에 있는 무덤에 들어왔다는 것 아냐? 이 일을 어쩌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겁에 질린 왕린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발을 떼려했지만 뜻과는 달리 발은 지면에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신은 자신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았고, 유리관 안의 시신(屍身)은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목을 조일 것 같았기에 급히 바닥에 엎드려 두 눈을 꼭 감고 몸을 움츠린 왕린은 간신히 혼백을 붙잡고 있었다.
 일각쯤 지나 조금 안정을 되찾은 왕린은 여러 곳에 유등(油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 무서워 사신과 유리관을 쳐다보지 않도록 조심하며 간신히 불을 붙였다.
 실내가 훤히 밝혀지자 고개를 들어 안의 전경을 다시 바라보았는데, 중앙에 유리관 두 개가 있었고 그 사이에 허연 것이 보였다.
 횃불을 들고 용기를 내어 유리관이 있는 곳으로 접근한 왕린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으아악! 이건 해골이잖아?”
 뒷걸음질쳐 물러났던 왕린이 다시 접근하여 유리관을 비쳤는데 우측의 시신 한 구는 완전히 삭아 있었고, 다른 한 구는 여인의 시신이었는데 보기에도 끔찍한 목내이(木乃伊 : 미라)였다.
 그들은 한인들이 즐겨 입는 복장과 다른 화려한 자수를 놓은 비단의(緋緞衣)를 걸치고 있었다.
 유리관에는 시신들이 사용했을 법한 의복과 신발이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악기(樂器)와 금은보석으로 만든 장신구, 정교하게 다듬은 목각인형들이 놓여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안을 들여다보던 왕린은 분타주 만취귀개 나극우(羅極宇)가 언젠가 들려준 전설을 기억해 내었다.
 장사엔 오대후당(五大后黨)의 초왕마은(楚王馬殷)의 묘가 있었다는 전설을 떠올린 왕린은 자신이 우연히 왕릉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시신에 허리를 굽혔다.
 “영면에 누를 끼치게 되어 죄송스럽습니다요.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나갈 테니 그때까지만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연신 고개 숙여 절을 하던 그는 유리관 사이에 있는 해골과 수북한 뼈 사이에 먼지가 잔뜩 쌓인 서책이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보았다.
 겉보기에는 오래되어 부스러질 것 같았으나 의외로 질긴 양피지로 만들었는지 펼쳐 보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고문자(古文字)가 많아 완벽하게 뜻풀이는 할 수 없었으나 대강 무공 초식을 설명하는 것 같았고, 인체가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서책 중간 부분까지 살펴본 왕린은 만취신개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시신 중 여인은 전한(前漢) 시대에 장사국(長沙國) 승상(承相)과 그의 처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삭아 버린 유골을 남긴 인물은 남몰래 승상의 처 민지하(閔芝霞)를 열렬히 사모하던 그 시대의 대도(大盜) 경진표(景震飄)였다.
 그는 승상 집을 털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민지하가 수욕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감히 승상의 처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도망치듯 물러나왔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떠오르는 그녀의 아름다운 알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를 잊기 위해 좋아하던 술을 끊는 등 부단히 애를 써보았지만 상사병에 걸린 그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고, 급기야 침상에 누워 지내야 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승상이 복상사(腹上死)하여 갑자기 세상을 뜨자 경진표는 그녀를 납치하여 자신의 여자로 만들 생각으로 그곳에 몰래 잠입하였는데, 민지하는 이미 목을 매달고 자살하였다.
 경진표는 그들 부부가 합장(合葬)된 이곳에 몰래 들어와 그녀의 시신을 지키다가 탈진하여 죽은 가련한 인물이었다.
 서책은 대도 경진표의 경신술(輕身術)과 투술(偸術)을 기록해 놓은 책자였고, 서책의 중간에 그가 따로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인연이 있는 자에게!
 본인은 중원과 세외 각국을 돌아다니며 엄청난 재물을 훔치고 수많은 여인의 마음을 훔쳤으나, 승상의 처 민지하에게 본인의 영혼을 빼앗겨 이곳에 뼈를 묻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이곳에 들어왔으나 유리관에 누워 있는 그녀는 돌아서려는 나의 발길을 붙잡았다.
 세상 밖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그녀를 정녕 잊을 수 없기에 비록 인세를 떠났지만 영원히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하여 유리관 옆에 정좌한 지 벌써 칠 주야가 지났다. 이제 기력이 쇠할대로 쇠해졌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삼 갑자의 내공을 고스란히 그녀의 시신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맨 뒷장에 장보도(藏寶圖)와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적어 놓았다. 잔재주지만 절전(絶傳)되는 것이 안타까워 본인의 경신술과 투술을 남기니, 부디 익혀서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
 만일 비급을 익히게 된다면 금기사항을 따로 남겼으니 지켜 줄 것을 당부하며 인연이 있는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물려주게 됨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되도록 이곳을 빨리 떠날 것과 여기에 있는 물건들을 더 이상 건드리지 말고 영면에 들 수 있게 해 주었으면 고맙겠다.
 
 대도 경진표.>
 
 ‘아하! 그래서 여인의 시신이 이처럼 오랫동안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구나.’
 그의 글대로 맨 뒷장에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었고, 자신이 생전에 훔친 엄청난 재물을 감춰 놓은 장소가 표기된 장보도가 있었다.
 왕린은 당장이라도 경신술과 투술을 익히고 싶었지만 배가 너무 고파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의 말대로 급히 이곳을 벗어나기로 작정한 왕린은 경진표와 민지하가 후대에 환생하여 맺어지기를 기원하고 유등을 껐다.
 자신이 들어왔던 통로를 다시 나가며 자신이 켰던 횃불을 모두 꺼 다시 어둠에 잠기게 한 후 반대쪽 통로로 다가갔다.
 좌우로 석실들이 줄지어 있었고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유물(遺物)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묵묵히 지나쳤다.
 나이 어린 왕린은 무덤 가운데에는 악독한 기관이 설치된 곳이 있기도 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경진표의 유언대로 하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란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경진표가 들어왔다는 지점에 이른 왕린은 바닥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적힌 대로라면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선 그리로 몸을 던져 수중동굴에 이른 다음 빠져나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숨을 멈춘 채 최소 십 장 거리를 잠수해서 헤엄을 쳐야 했다.
 몹시 겁이 났으나 유난히 물놀이를 즐기던 왕린은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서책을 품에 넣은 채 뛰어내렸다.
 휘이익 ―.
 풍덩!
 ‘으윽!’
 왕린은 수온이 너무 차가워 한기가 뼈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살기 위해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사력을 다해 힘껏 사지를 휘저었다. 손발이 저려오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빛이 들어오는 곳까지 무사히 나갈 수 있었다.
 간신히 수중동굴을 벗어난 왕린은 머리 위로 밝은 햇볕이 쏟아지자 삶의 희열을 느끼며 여력을 다해 위로 솟아올랐다.
 “푸우!”
 일상에선 공기의 소중함을 몰랐던 왕린은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관제묘에서 삼백 장 가량 떨어진 작은 연못이었고, 한 번도 물이 마르지 않은 탓에 물고기가 많아 가끔 고기를 잡으러 왔던 장소였다.
 “으응? 여기는 초항지(草沆池)잖아? 여기에 입구가 있었으니 그곳이 이제껏 잘 보존되었던 것이었구나.”
 왕린은 물가의 수초를 더듬어 손바닥만한 물고기를 능숙하게 잡아 뭍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다섯 마리를 잡은 왕린은 물가로 나와 마른나무를 모으더니 젖은 상태인 부싯돌을 이용해 간신히 불을 지펴 나뭇가지에 끼운 물고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익으며 향을 피우자 너무 배가 고팠던 왕린은 고기가 익기도 전에 허겁지겁 모두 먹어치웠고, 모닥불 곁에 앉아 의복을 말리며 양피지로 만들어진 책자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책자의 글씨와 도해가 모두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 왕린은 근처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능숙하게 기어오르더니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어린아이의 손이 들락거릴 정도의 구멍에 비급을 똘똘 말아 집어넣고 내려왔다.
 그 구멍은 탁목조(啄木鳥 : 딱다구리)의 둥지였는데, 유달리 장난기가 많은 왕린이 지난해 우연히 발견하여 둥지의 알을 꺼내 먹자 어미 새가 버린 둥지였다.
 ‘고아인 탓에 개방에 들어왔지만 틈틈이 비급을 익혀 세상을 주유(周遊)하며 사는 것도 괜찮겠지.’
 한참 후 뽀송뽀송하게 마른 의복을 걸친 왕린은 양지바른 곳에 누워 킬킬거리며 중얼거렸다.
 “히히히······, 지금쯤 내가 죽은 줄 알고 난리가 났겠는걸. 진영이는 질질 짜고 있을 테고, 매사에 툴툴거리는 두삼 녀석도 날 찾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겠지? 후후, 의리는 있는 친구지. 헤헤, 천우 형은 아마 만취귀개에게 무지 혼나고 있을 거야.”
 봄바람과 따스한 햇볕은 피로에 지친 왕린을 잠들게 하였는데, 서산마루에 기울던 해가 넘어가자 한기를 느낀 왕린은 벌떡 일어나 재만 남은 모닥불을 뒤적이더니 휘적휘적 관제묘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휴, 제법 쌀쌀한걸. 내가 나타나면 모두 놀랄 텐데, 뭐라고 해야 덜 혼날까?’
 걸어가며 궁리하던 왕린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더니 진흙 구덩이로 가서 뒹굴어 의복과 드러난 신체 부위에 모두 덕지덕지 진흙 칠을 하였다.
 
 ***
 
 관제묘 근방의 공터에서는 반천우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백의개들이 모아온 음식들을 커다란 가마솥에 쏟아 붓고 커다란 국자로 휘휘 저으며 죽을 만들고 있었다. 타닥타닥, 불길이 일어나며 가마솥에선 제법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몰려나와 모두 손에 작은 그릇을 들고 군침을 삼키며 죽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것저것 쓸어넣은 가마솥에선 그들이 입맛을 다시게 할 만큼 제법 그럴 듯한 구수한 냄새가 근방에 깔렸다.
 반천우가 국자로 듬뿍 퍼서 가장 먼저 삼결제자인 만취귀개의 그릇에 담자 두삼이 코를 킁킁거리며 가져다가 바쳤고, 이후 지위 순서대로 퍼담자 백의개들이 부지런히 그릇을 날랐다.
 이결제자와 일결제자까지 배급을 마치고 반천우가 자신의 그릇에 수북히 담고 국자를 내려놓자 두삼이 국자를 냉큼 집어들더니 소리쳤다.
 “야, 임마! 배고픈 개 떼처럼 덤비지 말고 줄을 맞춰 서란 말이다. 알았어? 만일 새치기하는 놈이 있으면 죽인다!”
 짐짓 두삼이 주먹을 쥐어 보이자 아이들이 얼추 줄을 맞춰 서서 질서를 되찾는 듯하였다.
 두삼은 공평하게 죽을 배급하였는데 평소에 구박하던 진영에게는 웬일인지 좀더 퍼 주며 한쪽 눈을 찡끗거렸다.
 모두 퍼 주고 자신은 솥에 붙어 있는 찌꺼기를 긁어모아 빈 그릇을 채우려는 순간 흙투성이의 왕린이 나타나 소리쳤다.
 “아이고, 배고파. 두삼! 내 것은 남지 않았냐?”
 갑자기 들려오는 왕린의 목소리에 모두 놀라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걸개(乞 )들이 자신의 밥그릇을 팽개치는 일은 명이 끊어지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놀란 반천우는 자신의 죽그릇이 떨어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왕린에게 뛰어갔다.
 “너, 너는 와, 왕린? 어, 어떻게 살아 왔지?”
 귀신을 본 듯 놀라는 반천우의 음성에 고개를 처박은 채 연신 음식을 퍼먹던 두삼을 비롯한 백의개들이 그릇을 던져 버리고 다가섰다.
 “와아! 왕린, 너를 다시 보게 되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그 지진 속에서 살아 왔지?”
 왕린은 머리카락에 붙은 진흙을 떼어내며 답했다.
 “잠깐만 기다려. 먼저 분타주께 인사 올리고 이야기해 줄게.”
 만취귀개 나극우의 면전으로 다가선 왕린이 예를 올렸다.
 “백의개 왕린이 분타주께 인사 올립니다. 그 동안 별래무양(別來無恙)하셨습니까?”
 만취귀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꼬락서니를 살피더니 물었다.
 “네놈 때문에 난리가 났었는데 근심이 없을 수 있었겠느냐? 모습을 보아하니 고초가 심했던 모양이구나. 배가 고플 테니 우선 배를 채우거라.”
 만취귀개가 자신의 죽그릇을 넘겨 주자 왕린이 절을 올린 후 허겁지겁 비우기 시작하였고, 피골이 상접해진 그를 위해 이결제자들이 조금씩 죽을 덜어 주었다.
 낮에 물고기로 포식했던 왕린은 내색 않고 그릇에 넘치도록 덜어 준 죽을 게눈 감추듯 비우고 입맛을 다시며 배를 두드렸다.
 “쩝쩝쩝! 화아! 이제야 살 것 같네.”
 모두 왕린이 어떻게 생환할 수 있었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모여들자 토굴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천우 형이 들어가라고 해서 토굴로 들어갔는데······, 아휴! 들어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습기가 많아 축축한 것은 둘째치고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숨을 쉴 수가 없더라고요. 냄새를 가시게 하려고 벽을 파서 흙을 까는 작업을 하였는데, 갑자기 토굴이 진동을 하지 않겠어요?”
 “그, 그래서? 어, 어떻게 됐는데?”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마치 신나는 무용담을 듣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말을 하라는 듯 재촉하였다.
 “헤헤······, 너무 놀라 한쪽 벽을 마구 파헤쳤는데 입구가 무너졌는지 흙이 밀려들어 무릎까지 차오르더라고요. 간신히 발을 빼고 벽을 파헤치니 물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근처에 수맥(水脈)이 있다고 생각하여 소리가 나는 곳을 마구 파헤쳤죠.”
 “손으로 팠는데도 흙이 잘 파졌어?”
 “그럼요. 진흙덩이라 파기가 쉬웠어요. 하여간 작은 동굴을 만들며 벽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밀려든 흙이 토굴을 채우고 제 궁둥이에 밀려들더라고요. 아,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그때 진동이 멈췄어요.”
 “휴우! 다행이다.”
 누군가가 손에 땀을 쥐고 듣고 있다 일순 긴장이 풀렸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제 또 그런 일이 생길지 몰라 사력을 다해 구멍을 뚫으며 전진했는데, 갑자기 물이 쏟아져 들어와 숨이 막혀 혼절을 한 것 같아요 깨어나 보니 초항지 진흙 구덩이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전신의 힘이 빠져 빨리 올 수가 없어서 이제야 온 거예요.”
 모두 그의 생환을 기뻐하였고, 앞으론 벌을 받기 위한 토굴을 만들지 않을 것을 만취신개가 선포하였다.
 소년의 생환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백의개들이 아니라 일결제자 반천우였다.
 하루 사이에 그는 머리가 하얗게 쉴 정도로 왕린에게 벌을 준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는데, 그가 살아 나타나자 마치 자신이 아귀지옥에서 살아나온 것처럼 기뻐하였는데 겉으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헤헤헤······, 네놈이 죽었다고 생각해 시원했는데 또 괴롭혀 줄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다.”
 진영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흐흐흑······, 미안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옷 벗어. 내가 얼른 빨아 줄게.”
 왕린이 더럽혀진 의복을 모두 벗자 두삼이 그의 귀를 붙잡아 당겼다.
 “아휴, 십 년 감수했다. 이리 와! 수욕부터 해야 되겠다.”
 두삼과 아이들이 다른 가마솥에 끊고 있던 물과 찬물을 섞어 왕린에게 뿌려대기 시작하였고, 알맞게 데워진 따뜻한 물을 뒤집어쓴 왕린은 대충 흙을 씻어낼 수 있었다.
 그 사이 만취귀개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커다란 개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났다.
 “허허허······, 오늘은 요놈으로 몸보신을 하자.”
 보나마나 어디서 훔쳤든지, 아니면 남의 집 개를 살살 꼬여 끌고 온 것이리라. 개를 꼬인 도구는 보나마나 그가 신고 있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신발이었을 것이다.
 방도들이 달려들어 타구봉(打狗棒)으로 개를 흠씬 두들겨패고 불에 살짝 그을려 털을 제거하고 내장을 모두 꺼내 끓는 물에 삶고 통째로 굽기 시작하자 특유의 노린내가 진동하였다.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분타주가 특별히 하사한 곡주(穀酒)를 흠뻑 마신 탓에 몇몇 방도가 쓰러져 잠들었을 즈음 알맞게 익은 개고기를 뜯으며 모처럼 오랜만에 포식하였다.
 “히히히······, 매일 이렇게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
 방도들이 포만감에 젖어 코를 골며 잠들었으나 왕린은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빨리 비급에 적힌 무공을 익혀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픈 욕망이 끓어올랐던 탓이다.
 날이 새자 백의개들은 평소처럼 구걸하러 나섰지만 왕린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 삼 주야간 휴식을 취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눈치를 살피던 그는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초항지로 달려가 주변을 살핀 후 나무에 올라 비급을 꺼내 펼쳤다.
 그것을 해독하는 데에는 고문자가 많아 뜻풀이가 어려웠는데, 또 하나 해독을 어렵게 한 것은 워낙 악필(惡筆)이라 읽기가 쉽지 않았다.
 왕린은 첫 장에 경진표가 남겨 놓은 글을 읽었다.
 
 <무릇 세상의 모든 것에 도가 있듯, 투술(偸術)이 하오문의 잡배들이나 하는 짓거리라 알려졌으나 이것에도 도(道)가 있음을 세인(世人)들은 알지 못한다.
 세인들이 흔히 하는 말 중 도둑놈이라는 말과 양상군자(梁上君子)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중 군자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라.
 진정한 양상군자가 되어 투도(偸道)를 완성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금기사항이 있다.
 첫째, 노약자나 가난한 사람의 물건은 훔치지 말아야 한다.
 부유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가난에 찌든 양민의 고충을 헤아릴 수 없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생 그 고통을 겪으며 지낸다. 그들을 돕지 못할 망정 도탄에 빠뜨린다면 이는 투도에서 벗어난다.
 둘째, 진품(眞品)이 아니면 훔치지 아니한다.
 이는 진품과 가품(假品)을 한눈에 정확하게 구별해 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시대나 가짜 물건들은 있기 마련이다. 목숨을 걸고 애써 훔친 물건이 가짜일 경우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셋째, 목표물 이외에는 건드리지 않는다.
 노리는 물건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물건에 욕심이 생겨 정신을 판다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넷째, 남의 목숨을 담보로 물건을 취해서는 아니 된다.
 투술을 익힌 자가 자신의 투술이 약한 것을 빌미로 무기를 들고 강도짓을 한다면 이는 강도들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생명의 존엄성을 잊고 사는 마도(魔道)나 사도(邪道)를 따르는 것이 백 번 현명한 일일 것이다.
 다섯째, 한 번 훔친 물건은 다시 훔치지 않는다.
 한 번 훔친 물건을 팔거나, 남에게 넘겨 주고 다시 훔친다면 아무도 그런 짓을 하는 인물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짓은 본인의 직업을 밝히는 바보천치나 다름없는 짓이니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며, 탐욕을 절제하지 못한 탓에 투도를 완성시키기는커녕 투계(偸界)에 먹칠을 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여섯째, 청부를 받고 물건을 훔치면 아니 된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은 어떠한 것이라도 훔칠 수 있어야 진정한 양상군자가 될 수 있다. 하나, 청부를 받고 재주를 판다면 홍루(紅樓)에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기녀(妓女)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을 백정이나 망나니로 비하(卑下)하려는 자가 투술을 익힌다면 투계의 인물들을 싸잡아 욕먹이는 짓을 하게 될 것이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투술을 익히려는 자는 결코 대성할 수 없다.
 여섯 가지 금기 사항을 지킨다면 본인의 투술을 익혀도 무방하다. 그러나 본인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진정한 투도의 끝인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투술이다. 본인은 실력이 부족하여 간절히 원했던 여인의 마음을 훔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만은 완성시키지 못하였으니 후인은 부디 이것을 완성시켜 주기 바란다.
 천하 모든 여인의 마음을 훔칠 수 있게 된다면 세상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과 다름없다고 느껴질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내심 깊숙한 곳에 숨겨 있는 탐욕을 버리게 될 것이며, 또한 천하를 유유자적 독보할 수 있게 되니 부디 대성하기를 기원하노라.>
 
 ‘헤헤헤······, 도둑질도 가려서 해야 한다니 웃기는데? 하지만 유골 앞에서 약속을 하였으니 반드시 지켜야겠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왕린은 내공심법이 있는 부분을 펼쳤다.
 귀원토납심공(歸元吐納心功)이라 적힌 심법(心法)의 난해한 구결은 아직 무공 입문을 못한 왕린에겐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뜻을 알 수 없었던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자 인체를 그려놓은 그림을 보며 대충 살폈다.
 인체의 혈도와 흐름을 표기한 그림은 이해가 얼추 되었으나 단전에 내공 한 점이 없는 상태였기에 따라 할 수 없었다.
 “뭐가 이래? 혹시 되지도 않는 것을 써놓은 것 아냐?”
 투덜거리며 뒷장으로 넘기니 환영광류비(幻影光流飛)라는 경신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허나, 이 갑자의 내공이 없으면 흉내조차 내지 못할 극상승의 경신술을 나이 어린 왕린이 익힐 수는 없었다.
 그림으로 보아 처음 익힐 때 손목과 발목에 각각 일백 근의 무게를 지닌 물건을 매달고 삼 년 이상 지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왕린이 혀를 내둘렀다.
 “이건 더 말이 안 되잖아? 세상에 사람이 사백 근을 매달고 어떻게 운신을 할 수 있지? 난 어리니까 두 근 정도의 철환(鐵環)을 끼면 되지 않을까?”
 뒷장의 그림들은 인체의 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고 세부 동작들이 연속으로 그려져 있었기에 대강 따라 해 볼 수 있었다.
 한데 아직 근육이 덜 자란 왕린이 따라 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각각의 동작들은 매우 컸고 내공의 도움 없이는 흉내내기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투술편으로 넘긴 왕린은 남의 품에 손을 넣었다가 빼는 동작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관찰하고 빠른 속도와 관절이 기이한 각도로 휘지 않으면 흉내를 낼 수 없음을 알고 고개를 저었다.
 그림처럼 한쪽 손으로 다른 팔의 관절을 꺾어 보려던 왕린은 통증에 이를 갈아야 했다.
 우드드드득 ―.
 “아이구, 아퍼! 정말 이렇게 관절을 마음대로 휘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있을까?”
 잠시 휴식을 취한 왕린은 장보도를 살펴보았다.
 호남성(湖南省) 무릉산맥(武陵山脈) 중봉(中峰) 환영비동(幻影秘洞)이라 써 있었고, 산세와 환영비동이 있는 곳에 표기를 해 놓았기에 그곳으로 찾아가면 틀림없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휴우, 이것들을 익히느라 고생하지 말고 보물이나 챙겨 부자로 살아 볼까?”
 도저히 자신이 익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고심하던 왕린은 하다 못해 구걸도 쉽지 않음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흥! 천여 년 전의 경진표라는 인물이 이것을 익혔다면 나도 익힐 수 있을 거야. 아직 내가 어린 탓에 쉽게 익히지 못하는 것이니, 열심히 익힌다면 언젠가 결실이 맺어지겠지.’
 왕린은 비급 안의 내용을 한 번 더 훑어보고 나무로 기어올라 구멍에 감췄다.
 관제묘로 돌아오자마자 어릴 때부터 의복을 기워 입은 탓인지 능숙한 솜씨로 넝마들을 기워 주머니를 만들고는 모래를 채웠다.
 당장 철환을 구입하지 못할 형편이었기에 임시 방편으로 모래주머니를 달고 다닐 요량이었던 것이다.
 손목과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묶은 뒤 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모래를 너무 많이 채운 탓인지 거동하기가 매우 힘겨웠다.
 손목 부위와 발목 부위에 묶은 모래주머니는 부피가 컸기에 소매와 하의춤은 위로 불룩불룩 튀어나와 꼴도 사나웠다.
 ‘너무 많이 채웠나? 이렇게 하고 다니려면 너무 표가 나서 금방 들켜 버릴 텐데, 좀 덜어 볼까?’
 왕린은 주머니에 채운 모래를 덜어내려다가 생각을 고쳤다.
 ‘아냐! 두 근도 되지 않는데 더 무게를 줄인다면 환영광류비를 익히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차라리 소매와 하의춤을 늘리는 것이 낫겠다.’
 자신의 의복을 벗어 넝마를 연결하여 소매와 하의춤을 크게 수선하여 걸치니 한결 나아 보였다.
 ‘헤헤······, 오늘부터 열심히 수련하여 꼭 익혀야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었기에 죽그릇을 비우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릇에 담긴 죽을 쏟아내지 않으려고 한쪽 손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다른 손으로 잡은 숟가락으로 퍼먹으려니 덜덜 떨리기만 할 뿐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방도들이 모두 식사를 마쳤을 때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는 왕린은 절반도 먹지 못하였고, 낑낑대며 먹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백의개들이 모두 그의 곁에 모여 죽을 먹여 주려 하였다.
 백의개들은 무너진 토굴에서 간신히 살아온 왕린이 탈출하는 과정에 부상을 입어 전신이 욱신거린 탓에 거동하기가 힘든 줄 알았던 것이다.
 “어이그, 이 한심한 놈! 야, 이리 내놔 봐! 내가 먹여 줄게.”
 보다 못한 두삼이 죽그릇을 빼앗다시피 하여 숟가락으로 죽을 떠 주자 왕린이 인상을 구겼다.
 “야, 임마! 이리 내놔. 내가 어린애냐? 며칠 쉬다 보면 괜찮아질 것이니 내 걱정 그만하고 설거지나 해.”
 왕린이 죽그릇을 간신히 비웠을 때는 설거지를 마친 백의개들이 토굴로 들어가 꼼짝도 않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걸개들은 식사 후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하였다. 운동량이 많으면 배가 쉬 꺼지기에 밤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자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린은 설거지를 하기 위해 어기적거리며 냇가로 향했다.
 ‘휴우, 이런 속도로 가다간 날이 새야 돌아오겠는데?’
 간신히 냇가에 도착한 그가 그릇을 씻고 되돌아왔을 때는 그의 짐작대로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그제야 간신히 잠든 그는 사시(巳時) 무렵에야 깨어나 초항지로 향하였다.
 보보(步步)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넘어간 시각이었고, 몹시 지쳐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단 채 나무 위로 올라 갈 수 없어 풀어놓고 다람쥐처럼 민첩하게 오른 왕린은 비급을 꺼내 내려와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만취귀개가 비렁뱅이도 글을 알아야 한다며 강제로 천자문을 익히게 한 탓에 아는 글자도 있었으나 모르는 글자가 더 많았다.
 모르는 글자는 땅에 써가며 외우기 시작하였는데, 남달리 기억력이 뛰어나 귀원토납심공의 구결과 도해를 십여 장 외울 수 있었다.
 해석이 되지 않았기에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뇌리에 각인시킨 후 다시 몇 차례 바닥에 써가며 확인하였다.
 ‘헤헤······, 이렇게 매일 외운다면 보름이면 전부 외울 수 있겠네. 한데, 모레부터는 구걸을 나가야 하니 이를 어쩌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기에 관제묘로 향하며 고민하던 왕린은 모르는 글자부터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틀 후, 왕린은 오전 내내 품삯 받을 일을 해 주고 음식을 얻어 할당량을 채우면 시진에서 제일 규모가 큰 만서점(萬書店)으로 달려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청소를 해 주고 점주(店主)에게 모르는 글자들을 지면에 그려놓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학창의(鶴?衣)를 즐겨 입는 육십대 초반의 인자하게 생긴 만서점의 주인은 악유명(岳儒明)이었다. 그는 이곳 장사에선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석학(碩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조정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다가 혈혈단신으로 고향으로 낙향하여 만서점을 열고 글을 읽으면서 여생을 한가롭게 보내고 있었다. 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미소짓고 있었고, 서책을 구입하기 위해 온 손님은 항상 반갑게 맞이하여 나날이 번창하였다.
 개방의 백의개가 불쑥 찾아와 서점을 청소하고 가르침을 청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린이 적은 글자를 해석해 주었다.
 “허허허······, 그 글자는 척(陟)이라 읽고 올린다는 뜻이다.”
 왕린이 자신이 몰랐던 글자들을 그려놓기 시작하였고, 악유명은 어린아이들이 잘 쓰지 않는 글자들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보아하니 개방의 방도인 것 같은데, 글을 배우고 싶으냐?”
 왕린이 볼을 붉히며 답했다.
 “네! 개방의 백의개 왕린이라고 합니다. 분타주께서 거지들도 글을 익혀야 한다고 해서 천자문을 대충 익혔지만 모르는 글자가 너무 많아 답답해요. 앞으로 매일 청소를 해 드릴 테니, 글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악유명은 어린 왕린의 눈빛이 맑은 것을 보고 쾌히 승낙했다.
 “오냐! 노부가 혼자 이곳에서 지내느라 적적했는데 잘 되었구나. 그런데 그 글자들을 어디서 보았느냐?”
 왕린이 비밀을 밝힐 수 없어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하자, 악유명이 질문을 거두었다.
 “허허허······, 밝히기 싫은 모양이구나. 모름지기 사람은 배워야 하니 글을 배울 기회가 닿는다면 모두 익히는 것이 좋지.”
 그날 이후 왕린은 매일 만서점에 들려 청소를 해 주고 모르는 글자들을 익혀 갔고, 악유명은 현세에 통용되는 글자와 고문자를 물어오는 그를 언제나 막힘 없이 만족시켜 주었다.
 
 
 제2장 거성(巨星)의 추락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유사 이래 천하에는 무(武)를 숭상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뛰어난 무예를 지닌 인물들을 중심으로 모여 무림(武林)이라는 곳을 만들었고, 급기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력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무림은 강자존(强者尊)의 원칙에 따라 철저히 약육강식(弱肉强食)이 통용되었다. 하여 일반 무인들이 익히는 정공(正功)보다 강한 무공을 익히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공을 익히는 무리가 생겼으니, 바로 마도(魔道)와 사도(邪道) 무리가 그 범주에 속해 있었다.
 마도와 사도의 무공은 속성(速成)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나타났으며, 시대별로 가장 뛰어난 영웅호걸들이 무림에 군림하였다. 그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한 마디는 무인에게는 황명(皇命)보다 더 우선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법과도 같았다.
 물론 모사꾼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난 통치자도 있었고, 불과 하루만에 절대자의 권좌에서 쫓겨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시대를 풍미한다는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연합하여 무림을 차지한 후 중원을 나눠 통치한 인물들도 있었으나 군림제일좌는 오직 일 인(人)만을 위한 자리였기에 그들의 통치는 오래 갈 리가 없었다.
 수천 년 간 무림의 군림제일좌(君臨第一座)에 오르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그치질 않았고, 시대마다 군림을 꿈꾸던 무인들은 골육상쟁(骨肉相爭)도 서슴지 않았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정도와 마도, 사도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며 무림을 통치하기를 원하였고 그들의 염원대로 각 시대를 거치면서 수차례 통치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군림제일좌에 오른 세력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점차 세월이 흐르면 나태해지기 마련이었고, 빼앗긴 군림제일좌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무예를 닦은 나머지 세력의 공격으로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수많은 신흥 방파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났으나 거대 방파로 세인들의 기억에 남는 방파는 정도를 대표하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불과 삼십여 개 안팎이었다.
 오늘날에도 무림에는 꿈을 쫓는 무인들이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그들은 점화된 도화선에 연결된 화약통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
 
 칠십 년 전 강호에는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비슷한 또래의 아홉 마두와 만든 극천마궁(極天魔宮)이란 신흥 방파가 나타났었다.
 그들은 당시 무림을 장악한 정도무림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당시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는 더 이상 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들의 가공(可恐)할 마공은 정도의 무공보다 한 수 위였다.
 궁주(宮主)인 제천마존(帝天魔尊) 여무황(呂武皇)과 그를 따르는 절대구마존(絶代九魔尊)의 마공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있어 세상을 경악하게 하였다.
 지난 오백 년 간 무림을 통치하던 정도무림의 인물들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며 그들을 조롱하였으나, 그들의 가공할 마공을 막기엔 역부족임을 느끼고 처참히 패퇴하여야 하였다.
 당시 절대구마존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공력은 자그마치 삼 갑자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들 개개인은 각기 한 방면에서 독보적인 절대마공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별호에 그것을 드러냈다.
 서열 일위 검마존(劍魔尊) 탁불수(倬?秀),
 서열 이위 도마존(刀魔尊) 정찬휘(鄭燦輝),
 서열 삼위 장마존(掌魔尊) 신도현(申燾賢),
 서열 사위 독마존(毒魔尊) 임종연(林琮延),
 서열 오위 비마존(飛魔尊) 우범모(羽汎瑁),
 서열 육위 귀마존(鬼魔尊) 전경환(全敬奐),
 서열 칠위 살마존(殺魔尊) 한사인(漢士認),
 서열 팔위 동마존(童魔尊) 선재혁(宣宰赫),
 서열 구위 색마존(色魔尊) 양재헌(楊財軒).
 절대구마존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독창적인 마공을 익힌 탓에 구파일방의 장문인(掌門人)들조차 그들 개개인과 대적하였을 때 십초지적(十招之敵)이 되지 않았으니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채 달포도 지나기 전에 구파일방의 현판(懸板)이 떼어지고, 제천마존의 면전에 무릎을 꿇은 장문인들은 분루(忿淚)를 삼키며 오십 년 간 봉문(封門)한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어깨에 한 자루의 보도(寶刀)를 걸치고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날리며 무림에 등장한 제천마존 여무황은 가공스런 마공을 지닌 절대구마존 덕택에 도갑(刀匣)에서 애병(愛兵)을 꺼내 보지도 않고 군림지존좌에 앉을 수 있었다.
 세인들은 제천마존의 마공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하였는데, 어느 날 절대구마존이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절대구마존 전원이 합세하여 공격하더라도 궁주의 일초지적이 되지 못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문을 흘렸던 것이다.
 제천마존의 도가 뽑히는 것을 본 인물은 예외 없이 염라부(閻羅府)로 직행한다는 소문에 감히 반기를 들기는커녕 너 나 없이 극천마궁에 가입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극천마궁에 대항하여 후세에 위명(威名)이 전해지는 것보다는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에 시원한 나무 그늘 속에 기어들어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무림은 반년이 흐르기도 전에 그들에 의해 일통(一統)되었고, 결국 모든 것은 극천마궁의 기치(旗幟) 아래에 움직였다.
 
 중원의 중심인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인 무한(武漢)에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졌고, 사방 백 리의 거대한 성곽이 세워졌다.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교통의 요충지였고 장강(長江)의 수로(水路)까지 닿아 있어 삽시간에 각 지방에서 전해 오는 온갖 건축자재로 화려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건축되었다.
 구중천(九重天)인 자금성(紫禁城)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건축된 철옹성(鐵甕城)인 극천마궁이 개파대전을 여는 날 정, 사, 마의 모든 방파의 지존들은 광장에 무릎을 꿇고 축하를 해야 했다.
 제천마존 여무황은 극마지공(極魔之功)을 대성하여 마인(魔人)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실제 그가 흉악(凶惡)한 행위를 한 적이 없었기에 정도의 인물들은 내심 그가 겉모습처럼 지내주기를 기대하였다.
 마공을 익혔으되 공명정대하였던 제천마존은 정도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나 철저히 탄압하였다.
 마인들을 교육시켜 양민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였으나 작은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싹을 뻗어내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고 드러나지 않은 뿌리가 지면 아래에 퍼지는 것처럼 극천마궁에 반기를 들 인물들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도와 사도, 각 파의 진산비급을 모조리 진상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말이 법이고 따르지 않는 자는 수급을 바쳐야 했다.
 무리한 요구를 한 탓에 처음에는 말들이 많았으나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각 파에 소장되어 있던 비급을 울며 겨자 먹기로 모조리 내주어야 했다.
 제천마존은 무(武)를 숭상한 인물이었기에 각 파의 절기가 실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엄청난 크기의 지하 장서고(藏書庫)에 모두 보관하였고,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군림하는 곳이 한 곳뿐이라 무림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마공을 익히느라 여인을 품어 보지도 못한 궁주를 위해 절대구마존이 앞장서서 주모를 구한다는 방을 내걸었다.
 전국 각지에서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들이 뽑혀 진상되었는데, 제천마존은 천여 명의 미녀(美女)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해남도주(海南島主)의 여식 산호낭낭(珊瑚娘朗) 지희연(芝喜燕)을 처(妻)로 맞이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은 산호낭낭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규수였는데, 강제로 끌려온 탓에 마도의 우두머리가 자신을 지목하자 경악하여 혼절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 주었건만 눈물을 흘리며 혼례식을 마친 산호낭낭은 신혼초야를 맞이하였는데, 나이는 들었지만 해남도에선 볼 수 없었던 준수한 용모를 지닌 제천마존의 실제 모습을 대하고 내심 동요하였다.
 어느 여인이나 혼기(婚期)에 들면 자신이 섬길 남편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 마련이고, 제천마존은 그녀가 꿈꿔 오던 용모와 체격을 지닌 절세미남이었던 것이다.
 합환주(合歡酒)를 마시고 상을 물린 그는 난생 처음 여인을 안은지라 초야를 치르는 일이 서툴기 짝이 없었는데, 산호낭낭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파과(破瓜)의 고통을 인내하며 자신의 순결(純潔)을 바쳐야 했다.
 여인을 처음 안아 본 제천마존의 정력은 실로 대단하여 그날 밤 침상이 부셔졌을 정도로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말로만 듣던 운우지락이 이런 것인가 할 정도로 쾌락에 겨워해야 했다.
 그들 부부는 그날 이후 서로 떨어져 자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금실이 좋았고, 자신들에게 다가온 행복을 만끽하며 지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그들 부부에게도 단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극 정성으로 기원했던 탓인지 혼례를 올린 지 무려 십오 년 만에 산호낭낭의 배가 불러왔다.
 제천마존이 그녀에게 각지에서 진상된 온갖 영약을 복용하게 하고 세심히 보살핀 탓인지 건강한 남아(男兒)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을 여추량(呂秋亮)이라 지은 제천마존은 태어난 아이를 벌모세수(伐毛洗髓)시켜 주었고, 희귀한 영단을 구해 먹였다.
 늘그막에 태어난 자식은 그들 부부의 애정을 듬뿍 받고 황자(皇子) 못지않게 귀하게 길러졌는데, 소년기에 접어들자 무공을 익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여추량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신분이었기에 힘들게 무공을 익히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세인들이 경멸하는 마공을 익히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극천마궁은 보이지 않는 분열이 생겨났다.
 제천마존이 자식을 절대자로 키우기 위해 회유하고 있을 때만 해도 절대구마존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으나 암중에 각자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크게 키워 갔다. 강자존의 무림에서 무공이 약한 주군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천마존은 웬일인지 그들을 수수방관하였다.
 극천마궁을 이끌 차기 궁주가 무공이 약하다면 무림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현재 군림제일좌에 앉아 있는 그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눈물을 머금고 여추량을 극천마궁에서 내쫓았다.
 일 년간 고생을 하다 보면 마음이 바뀔 것이란 생각에서 행하였지만 극천마궁에서 쫓겨난 여추량은 몰래 도와주는 절대구마존 덕택에 호화호식을 하며 편히 지냈고, 일 년 후 다시 불려갔을 때도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모친인 산호낭랑이 갑자기 중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한 때였다.
 제천마존이 슬픔을 잊기 위해 술만 마시며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히자 절대구마존이 극천마궁을 이끌기 시작하였고, 여추량을 대하는 태도가 돌변했던 것이다.
 여추량은 부친을 찾아가 자청하여 연공관으로 들어갔고,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나이 사십이 된 중년의 모습이었다.
 절대강자가 되지 못한다면 지금과 같은 향락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부친의 성명 석 자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공 연마에 전념했던 것이다.
 어릴 때 많은 양의 영단을 복용한 탓에 그의 내공은 무려 팔 갑자에 육박했고, 부친의 마공을 대성한 그는 예전의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엄청난 신위를 지닌 초절정 고수가 되어 있었다.
 부친과 모친의 용모를 반반씩 닮은 그는 사십이 되어서도 준수한 용모와 듬직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고, 감히 두 눈은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뇌전처럼 강한 안광을 쏘아내고 있었다.
 제천마존은 그때까지 항상 취한 상태로 허울뿐인 궁주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지존전(至尊殿)에서 자식의 출관(出關)을 기뻐하였으나 권력을 손에 쥔 절대구마존과 그의 자식들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제천마존은 아들에게 궁주직을 이양하려 하였으나 극천마궁을 둘러본 여추량은 이를 거부하고 누구든 일 대 일로 도전하여 자신을 이기면 군말 없이 극천마궁을 떠나겠다고 선포하였다.
 절대구마존의 자식들이 쾌소를 지으며 연이어 도전하였으나 그를 상대로 십 초(招)도 받아내지 못하였고, 심지어 뒤로 물러섰던 절대구마존도 십 초만에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이상하였던 것은 그날 대결에서 절대구마존이 자신의 무공을 십이 성 발휘하지 않았는데, 극천마궁의 궁도들은 그것이 충성심의 발로라고 판단하고 그들이 패하였음에도 유쾌히 받아들였다.
 그날 극천마황(極天魔皇)의 별호를 얻고 극천마궁의 궁주로 등극한 여추량은 절대강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무림에 존재할 수 없었고, 부친보다 막강한 영도력을 보였던 것이다.
 한데 권력을 맛본 절대구마존은 그의 앞에선 비굴한 웃음을 짓다가도 돌아서면 다시 자신들의 야망을 불태웠다.
 늦었지만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를 안겨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극천마황은 혼례를 서둘렀고, 돌아가신 모친과 거의 흡사하게 닮은 아름다운 규수를 맞이했다.
 그녀는 복건성(福建省)의 남단 장주현( 州縣)에 위치한, 이미 수백 년 전에 몰락하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정도세가인 동방가(東方家)의 후손 동방추련(東方秋蓮)이었다.
 그녀 역시 무공을 전혀 익히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벙어리 하인 하나만 달랑 데리고 입궁(入宮)하여 혼례식을 치렀다.
 그녀는 차디찬 냉혈을 지녔다고 소문이 난 극천마황을 대하고 소문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그의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은 따사로웠고 겁에 질린 그녀를 편안하게 대하였던 것이다.
 초야를 치르던 극천마황은 현숙한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가 자신의 율동에 요녀처럼 격렬히 반응하자 쾌락의 극치를 맛보았다.
 그들 부부는 밤마다 서로에게 애정을 쏟아 부으며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겼고, 좀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예로부터 여씨 가문에 손이 귀한 탓인지 그녀 역시 회임을 하지 못하였는데, 합방한 지 오 년만에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녀의 배가 불러올수록 절대구마존은 조바심을 냈다.
 자신의 자식은 물론 손자까지 대를 이어 극천마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을 견디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비록 권력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꿈틀거리는 욕망은 그들을 영원히 이인자로 머물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눈이 멀어 버려 군림에 등한시하던 극천마황 몰래 극비리에 회합을 열어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절대구천마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짧은 시간만에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들은 기약할 수는 없지만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제천마존이 죽은 후 거사를 행하기로 피를 나눠 마시며 혈맹(血盟)하였는데, 독마존은 자신의 독혈(毒血)이 모두를 중독시킬 수 있었기에 피를 섞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연로(年老)한 제천마존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마공을 지닌 탓에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반란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암중에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실 제천마존은 지병에 의해 벌써 죽을 목숨이었다. 그의 저승길을 제지한 것은 영약이 아니라 손주를 보고 싶다는 일념뿐이었고, 그것이 그의 끊어질 듯한 생명 한 가닥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
 
 세월은 흐르는 물과도 같이 걷잡을 수 없이 지나가기에 해가 바뀌고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 햇살이 따스한 오월로 접어들었다.
 극천마궁에는 소주의 탄생 소식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다리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궁주인 극천마황이었다.
 그는 주모의 양수(羊水)가 터져 나와 곧 소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의 지극한 사랑을 독차지한 동방추련은 정갈한 정실의 푹신한 이불 위에 보기 민망할 정도로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세운 채 태산처럼 불러온 배를 잡고 말로는 표현 못할 산통(産痛)에 들어갔다.
 “으으윽! 아아악······!”
 정실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극천마황은 아내의 극심한 비명 소리에 서성이며 안타까워하였다.
 “으음, 벌써 세 시진이나 흘렀건만 아직도 산고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러다가 잘못되면 어쩐단 말인가?”
 극천마황은 더는 못 기다리겠던지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측은하게도 동방추련의 전신에 땀이 배어 의복이 모두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이를 물고 산통을 견디고 있었다.
 천장에 매어 놓은 광목 줄을 붙잡고 하체에 힘을 주던 그녀가 그를 발견하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흑! 가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극천마황이 그녀의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을 슬며시 잡았다.
 “련매! 조금만 더 견디시오. 당신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할 줄 알았다면 자식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힘들게 답했다.
 “아니에요! 아이를 당신과 저 뿐만 아니라 아버님께서도 얼마나 간절히 원하였는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녀는 산고가 다시 시작되었는지 옥용을 찌푸리며 전신에 힘을 주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윽! 아아악! 가가, 제게 용기를 주세요.”
 그는 그녀가 고통에 찌든 표정을 짓자 마주 볼 면목이 없어 외면하였는데, 그때 산파의 목소리가 정실에 울려 퍼졌다.
 “주모! 아이의 머리가 나오고 있어요. 좀더 힘을 주세요.”
 극천마황이 얼른 그녀의 하체로 눈을 돌리니 아닌 게 아니라 아이의 머리가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려, 련매! 아이가 나오고 있소. 고통스럽더라도 참으시오.”
 아이는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얼마나 천천히 빠져나오는지 그녀는 산고의 고통에 숨이 멎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의 하체를 지켜보던 그는 허연 기름을 머리에 잔뜩 바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몸은 나오지 않았으나 아들이란 확신이 섰던 탓이었다.
 “하하하······, 련매! 힘을 더 주시오. 이제 거의 다 나왔소.”
 그는 급한 마음에 아이를 잡아당겨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었으나 그리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실에서 그녀의 비명 소리가 멎은 것은 그가 들어간 지 반시진이나 흐른 뒤였고, 이제껏 들리던 신음 소리 대신 갓 태어난 사내아이의 고고성(呱呱聲)이 울려 퍼졌다.
 “응애! 응애!”
 산파가 뒷정리를 하느라 손놀림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태반(胎盤)까지 모두 빠져나오자 그가 탯줄을 자르고 발버둥치는 아이의 몸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내고 비단에 감싸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련매! 정말 수고하였소. 극천마궁을 이끌 사내아이를 낳아 주었으니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는구려.”
 동방추련은 말없이 빙긋 미소지으며 상의를 열어제쳤고, 커다란 유방 끝에 매달린 유실을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극천마황은 산파를 독촉하여 뒷정리를 빨리 끝맺게 한 후 밖으로 내보냈고, 근처에 아무도 다가서지 못하도록 자신의 비밀 호위인 잠영오월마(潛影五月魔)에게 호법을 서게 하였다.
 아이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모친의 유실이 입에 닿자마자 힘껏 빨아대기 시작하였고 초유(初乳)를 양껏 먹은 후에야 숨을 쌕쌕 내쉬며 잠들었다.
 동방추련 역시 극심한 산고를 겪은 터라 아이가 유실을 빨아대는 것을 지켜보며 빙그레 미소짓다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모자가 잠든 것을 지켜보던 극천마황은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빼내 아이의 명문혈(命門穴)과 백회혈(百會穴)에 장(掌)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막강한 진기(眞氣)가 명문혈과 백회혈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는데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전신 세맥이 막히지 않아 솜에 물이 빨려들 듯이 진기가 아이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명문혈을 통해 들어간 진기는 아이의 임맥을 향해 밀려들었고, 백회혈을 통해 들어간 진기는 독맥으로 세차게 몰아쳐 갔다.
 투둑!
 아이의 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고, 너무도 쉽게 아이의 임독양맥이 타통되어 그의 진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모친이 많은 양의 영약선단을 복용한 탓에 아이의 몸에 전해져 있던 영약선단의 기운을 녹이며 아이를 세상에 알려진 벌모세수(伐毛洗髓) 이상의 신체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잠시 후, 아이의 전신 모공에서 모친의 뱃속에 있었을 때 생겨났던 나쁜 기운들이 빠져나가며 탈태환골(脫胎換骨)하기 시작하였다.
 우드득 ― 우드득 ―.
 아이의 뼈가 제멋대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뱀이 허물을 벗듯 피부가 무려 아홉 차례나 벗겨졌다.
 아이의 몸에서 서기(瑞氣)가 일기 시작하더니 머리 위로 세 개의 고리가 생겨 돌기 시작하였고, 수십 차례나 아이의 몸에 진기를 돌려 주던 극천마황이 피로를 느끼고 진기를 거두자 세 개의 고리는 아이의 콧속으로 스미듯 사라졌다.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 자신의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 상태에서도 기분이 좋은지 맑은 미소를 지으며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단전엔 호도알 크기의 내단(內丹)이 생성된 상태였다.
 ‘후후후······, 삼 갑자의 내공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이 녀석이야말로 세상에서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한 신체를 지니게 되었다. 운기조식을 마친 후 아버님께 기쁜 소식을 직접 전해야지!’
 그는 품속에 있던 단약을 하나 꺼내 물었는데, 향긋한 향이 정실에 퍼졌다. 아마도 진귀한 영약이 분명하였다. 그것을 타액에 녹여 꿀꺽 삼키더니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몰아지경에 빠진 그의 전신에선 마기(魔氣)가 흠씬 배어 나왔는데, 워낙 영롱한 빛을 띄고 있어 차라리 불타의 서광(瑞光)과 흡사하게 보였다.
 그는 자신이 아이에게 전해 준 선천진기를 보충하기 위해 운공을 시작했고, 누군가 지금 그를 노려 급습(急襲)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채 반각이 지나기도 전에 극천마궁에는 산파의 입을 통해 궁주가 사내아이를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고, 너 나 할 것 없이 희소식에 환호를 하며 즐거워하였다.
 한데, 그들 중 절대구마존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겉으론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내심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절대구마존은 급히 회동하여 아이를 없애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고, 비밀리에 길러온 일백 지옥밀(地獄密)의 수좌 비류살영(秘流殺影)을 불러 지시하였다.
 비류살영은 그들의 지시가 끝나기도 전에 찰나지간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동방추련이 아이를 낳기 위해 마련한 정실에서 일백 장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전방을 주시하던 그의 눈에 일순 이채가 일어났다.
 ‘흥! 호위를 세워 두었군.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로구나. 은잠술(隱潛術)을 펼치고 있는 줄 모르고 무심코 다가섰다가는 실패할 뻔하였군. 흐흐흐, 저놈들이 은잠술을 펼치고 있다면 필시 주위 경계에 소홀히 하고 있을 것이다.’
 비류살영의 신형이 흔들린다 싶더니 이내 촛불이 꺼진 것처럼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지하 십 장 아래에서 지둔술(地遁術)을 이용하여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한데, 극천마황의 호법을 서고 있는 잠영오월마는 그가 생각한 대로 경계를 게을리하는 것이 아니어서 촉각이 곤두서 있는 결코 녹녹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들 역시 극천마황의 보살핌 속에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는 고행을 하며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잠영오월마는 비류살영이 이십 장을 접근하기도 전에 누군가 홀로 지둔술을 펼쳐 다가서는 것을 감지하였다.
 그들은 전음(傳音)으로 대화를 나누며 비류살영이 가까이 다가들도록 수수방관하였다. 감히 궁주가 계신 곳을 향해 몰래 다가드는 자에게 경각심을 주어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주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일 인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한 후 그들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들이 발견할 정도라면 무공이 비슷한 경지에 이른 자가 분명하였고, 설사 자신들을 쉽게 해칠 수 있더라도 현재 중원무림 어느 누구도 궁주인 극천마황과 단독으로 맞설 수 있는 자가 없었던 탓이다.
 비류살영은 전진하며 그들의 호흡과 맥박이 일정한가를 주의 깊게 살폈고, 그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는 확신이 들자 빠른 속도로 접근하였다.
 잠영오월마는 접근하는 자가 이십 장까지 접근하도록 모르는 체하다가 그들 역시 지둔술을 펼쳐 다가서는 살수를 향해 쾌속하게 다가들었다.
 비류살영은 자신에게 다가드는 살기(殺氣)를 느끼고 일이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당황하며 후방으로 물러섰다.
 잠영오월마는 적이 빠른 속도로 후퇴하는 것을 느끼고 일부는 지면으로 솟구쳐 올라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비류살영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후퇴하였지만 잠영오월마의 신속한 대응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지면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으며, 잠영오월마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지옥밀의 밀주로 자신이 절대구마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탓에 그는 무공에 있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 개개인의 눈빛을 교환해 보니 자신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낙담하였다.
 잠영오월마는 그에게 검을 겨누고 조소를 보내며 물었다.
 “가소로운 놈! 네놈의 신상내력을 말하고 누구에게 사주받았는지 실토해라!”
 잠영오월마는 포위만 하였지 아직 그를 확실하게 잡지 못했음을 망각하고 다그쳤다.
 비류살영은 복면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아직 자신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고 눈빛을 강하게 뿜었다.
 자신이 극한까지 익힌 인자술(忍者術)은 동영(東瀛)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일도류(一刀流)의 창시자 무사시의 인자술이었기에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입을 열어 변성된 목소리를 흘렸다.
 “흐흐흐······,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서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난 그저 이곳을 지나려 했을 뿐이다.”
 잠영오월마는 자신들을 비웃는 복면의 인물에게 살기를 뿜으며 다가들었다.
 “흥!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잠영오월마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진을 펼쳐 복면괴인의 주위를 돌며 짓이겨 들었다.
 쉬이익 ― 쒸익 ― 쐑 ―.
 잠영오월마의 검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복면괴인의 전신을 난자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 빠름과 절묘한 어우러짐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비류살영은 베일 듯한 검기에 놀라 황급히 등뒤에 있던 도를 발도(拔刀)하여 그들의 검과 마주쳐 갔다.
 채채채채챙 ―.
 일 합을 겨뤄 본 그들은 상대가 자신과 동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비류살영은 그들의 검이 순차적으로 다가들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낭패당할 뻔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상대가 무거운 병장기인 도를 그토록 빠른 속도로 펼쳐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잠영오월마가 공세를 멈추고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비류살영은 기회를 보아 도주를 하긴 하여야 했는데 도무지 빈틈이 없으니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일부가 상하거나 떨어져도 감수를 해야겠다고 판단한 그는 제일 만만하게 보이는 상대를 향해 먼저 공세를 취했다.
 “일도단천(一刀斷天)!”
 쇄에에엑 ―.
 챙!
 잠영오월마 중 잔월마(殘月魔)는 자신에게 쇄도하는 도를 막으며 손목이 시큰거리기도 전에 검세를 변형시켜 복면괴인의 단전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고, 비류살영은 검과 부딪치는 반발력을 이용해 뒤로 물러나며 현월마(玄月魔)에게 도를 내리쳤다.
 그의 빠른 신법에 반발력을 더하니 더할 나위 없이 쾌속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현월마는 그의 등을 향해 검을 내리치다가는 양패구사(兩敗俱死)할 것을 우려하여 막을 수밖에 없었다.
 채챙 ―.
 비류살영은 선공을 하여 합벽검진을 흐트러지게 한 후 반월마(半月魔)를 향해 십이 성 공력을 쏟아 부으며 도법을 시전하였고, 반월마가 아끼는 애검에 흠집을 내며 그들의 공세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신형을 움직여 그를 다시 검진 속에 가두었는데, 비류살영은 자신이 죽더라도 한 놈은 같이 저승길에 오르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양패구사를 위한 수법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십 합이 지나기도 전에 비류살영의 의복이 붉은 선혈로 물들기 시작하였는데,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고,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기 시작하였다.
 잠영오월마는 살수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고 당황하였는데 아주 사라지기 전에 맹공을 퍼부어 생포해야 한다고 눈빛을 교환한 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의 합벽검진은 완벽하였고 최후 초식 천라지망(天羅之網)이 펼쳐지자 하늘을 나는 새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검기의 그물이 비류살영의 전신 곳곳으로 폭사되어 갔다.
 반월마의 이 빠진 검이 비류살영의 좌수에 스치며 지나가자 손가락 두 개가 허공에 떠올랐고, 고통에 촌각(寸刻) 동안 신형을 멈출 때 잠영오월마의 맏형 만월마(滿月魔)의 검이 살수의 가슴이 벌어질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내자 선혈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덮었다.
 자신의 선혈을 뒤집어쓴 비류살영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흐흐흐······, 오늘은 물러간다만 언젠가 너희들에게 이 수모를 갚아 주겠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듣기 거북한 음성을 향해 검을 날려 보았지만 살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혹시 살수가 궁주의 신변으로 다가들까 염려되어 제자리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사라진 살수는 멀리 도주하였는지 정실에선 아무런 기척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궁주가 소주(小主)를 보자마자 살수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분명 내부의 소행이라 판단하고 의구심과 함께 주변 경계에 더욱 만전을 기하였다. 극천마황이 운기조식을 마쳤을 때는 암살자가 달아나고 호위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였다.
 그는 잠시 자리를 비운 잠영오월마의 행위가 괘씸하여 안면을 실룩이며 밖으로 나섰다.
 은잠술을 펼치던 잠영오월마가 그의 면전에 모두 나타나 오체복지(五體伏地)의 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궁주! 소주의 탄생을 경하(慶賀)드립니다.”
 극천마황은 반월마의 검날에 이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주변을 바라보았는데, 이십 장 전면에 잘라진 손가락 두 개와 선혈이 지면에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만월마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궁주! 저희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침투하던 살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극천마황의 눈에 노기가 일기 시작하더니 마광이 뻗어 만월마 머리 앞의 지면을 강타했다.
 퍼퍽 ―.
 흙먼지가 퍼져 올랐지만 잠영오월마 누구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였다.
 극천마황은 처와 자식이 깰까 봐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는데, 그의 음성에는 감당하기 힘든 위엄이 실려 있었다.
 “뭐라 말했느냐? 살수가 나타났는데, 놓쳤다?”
 극천마황은 만월마에게 급히 전음을 보냈다.
 “살수에 대해 소상히 전음으로 답하라!”
 만월마는 자신들이 상대한 살수가 절대 자신들보다 하수가 아니었으며, 자신들의 합벽검진을 뚫고 사라졌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살수의 무공이 동영의 인자술과 일도류를 사용한다고 전하였고, 이곳의 지리를 아는 내부자의 소행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극천마황은 그들에게 함구할 것을 명하고 일천 잠영대(潛影隊) 모두를 집결시켜 주모와 소주(小主)의 신변을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이제껏 무림에 출도한 적이 전혀 없었고 특별히 남에게 원한을 산 적이 없었으므로 궁내(宮內)에서 갓 태어난 소주를 없애고 싶은 인물은 언젠가 극천마궁을 접수할 의도가 있는 최고위층의 인물이 분명하였다.
 그런 인물이라면 증거인멸을 하였을 테고 섣불리 드러내 놓고 범인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려 한다면 자신의 지도력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더욱 골치가 아픈 문제가 남아 있었다.
 범인과 사주한 인물을 색출하더라도 만일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많이 있다면 극천마궁은 분열될 것이고, 이대(二代)에 걸쳐 이룩한 터전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중요한 일이었기에 자신이 분노를 표출하는 경거망동을 해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권력을 이양시켜 주고 마도무림의 전설로 기억될 부친께 희소식을 전하러 병상으로 향하면서도 극천마황은 장고(長考)를 거듭하였다.
 제일 많이 의심이 가는 절대구마존 중에서 일 인이 벌인 일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그들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면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극천마궁이 세워질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공신(功臣)들이었으며, 부친과 자신은 그들을 섭섭하게 대우하지 않았기에 딴 마음을 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가 이번 사태로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군림지존좌에 앉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믿었던 그들도 그러한 뜻을 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부친이 계신 용천전(龍天殿)에 도착한 그는 호위를 책임진 혈영지마(血影地魔)의 제지를 받았다.
 그는 이미 세수 일백이 넘었건만 검붉은 모발과 피부색을 지닌 칠십대로 보이는 건장한 노인이었다. 지렁이가 지나가듯 우측 뺨에 남은 기다란 상흔(傷痕)은 언제 보아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궁주! 어떤 일로 납시셨소?”
 그는 극천마궁에서 극천마황의 명을 받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고, 부친의 죽마고우이며 지근거리에서 부친을 보호하는 인물이었기에 여추량은 포권을 취하며 최대한 공경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처럼 아버님을 보살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오늘 소생이 앞으로 궁을 이끌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버님께 전하려 하니 길을 터 주시지요.”
 혈영지마는 희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였고, 이내 한쪽으로 비켜섰다.
 “허허허······, 세월 한 번 빠르구나! 궁주가 재롱을 떨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하긴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지.”
 용천전에 들어선 그는 회랑(回廊)을 지나 부친의 병상이 있는 침소(寢所)의 문 앞에 섰다.
 “아버님! 소자이옵니다.”
 극천마황의 음성이 들리자 안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늙은 노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쿨럭! 쿨럭! 들어오너라!”
 침상엔 허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이십대 초반의 앳된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반쯤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이미 예전의 형형한 안광은 어디로 갔는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추량은 그토록 위풍당당하게 천하를 질타하던 부친이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눈물이 고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돌아서서 눈물을 씻고 시녀에게 눈짓을 하여 밖으로 내보낸 후 부친의 침상에 다가가 부축하여 편히 눕혔다.
 “아버님! 빨리 건강을 되찾으셔야지요?”
 제천마존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답했다.
 “허허허······, 아비의 지병은 화타(華陀)나 편작(偏雀)이 오더라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쿨럭! 쿨럭! 이 거친 무림에서 한평생을 풍미하고도 노환으로 병들어 죽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부친의 말에 여추량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 지병을 털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래야 손자의 재롱을 보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의 말을 들은 제천마존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되물었다.
 “쿨럭! 쿨럭! 지금 뭐라고 했느냐?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여추량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조금 전에 소자의 처가 사내아이를 순산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제천마존은 기운이 쇠약해진 병자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침전이 울리도록 대소를 터뜨렸는데, 이내 목소리가 잦아들며 병자의 목소리로 변하였다.
 “크하하하······, 참으로 기쁜 일이로구나! 그렇지 않아도 아이의 이름을 옥린(玉麟)이라고 지어 놓았다. 쿨럭! 쿨럭! 네 말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가 있다면 좋으련만······.”
 부친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아이의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옥린이라······. 아이의 용모와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자식의 환한 표정을 본 제천마존이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손자를 보고 싶구나!”
 여추량은 미소지으며 부친이 원하는 답을 올렸다.
 “지금 곧 옥린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여추량은 침소를 나오자마자 문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를 들여보내고 아이를 데리고 오기 위해 용천전 밖으로 나섰다.
 곧장 아이가 있는 정실로 향한 그는 아직 모친의 품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를 조심스레 안고 밖으로 나섰다.
 지금 그는 두 손이 자유스럽지 못한 상태였기에 잠영오월마를 따르게 하였고, 나머지 잠영대는 계속 동방추련을 호위하도록 명하였다.
 그가 다시 용천전에 아이를 안고 나타나자 혈영지마가 다가와 아이를 자세히 살피더니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천상의 용모로다. 천골지체(天骨之體)에 만상여의지체(萬狀如意之體)를 겸비하다니······. 궁주는 이처럼 대단한 자식을 보았으니, 천복을 받았구려.”
 여추량이 미소로 답례하고 안으로 들었다.
 한데, 그가 부친의 침소로 가기 위해 회랑의 반쯤 지났을 때 안에서 시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빨리 의원을 불러 주세요. 흐흐흑! 마존! 제발 눈을 떠보세요.”
 아이를 안은 여추량의 신형이 흐릿해진 순간, 그는 이미 활짝 열려진 침전의 안으로 들어섰다.
 시녀는 눈물을 흘리며 부친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여추량이 나타난 것을 확인한 시녀가 한쪽으로 물러서자 여추량이 부친의 침상으로 다가가 부친을 부둥켜안아 앉히더니 명문혈에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반각이 지나기도 전에 제천마존의 숨이 고르게 돌아왔고, 힘겹게 눈을 떴다.
 “흐으음, 량아로구나! 소용없으니 괜한 진력 낭비하지 말고 아비의 명문혈에서 장을 떼거라.”
 부친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던 여추량이 우장으로 계속 진기를 불어넣어 주며 품에 안은 아이를 내보이며 말했다.
 “아버님! 보십시오. 옥린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천마존은 아들이 내미는 손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만족한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부친이 그토록 염원하였던 손주가 태어났다는 희소식을 듣고 혼백을 놓았다가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상태를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여추량은 장을 떼지 못하였고, 제천마존은 염라부로 가기 전에 아이의 용모를 뇌리에 색인하기 위해 애를 쓰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친이 영면에 들었는데도 여추량은 한동안 진기를 불어넣다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흐흐흑! 아버님······!”
 극천마황의 흐느낌과 목소리가 용천전 밖까지 울려 퍼졌고, 혈영지마가 뛰어 들어왔다.
 친우의 죽음을 목격한 혈영지마가 망연자실하여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흐흐흑! 못난 위인 같으니! 차라리 나를 염라부로 보내지 그랬는가?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가면 어떻게 하는가? 손자의 생일을 축원해 주지는 못할 망정 기일(忌日)로 만들다니, 자네는 정녕 야속한 사람일세.”
 바닥에 갓난아이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던 여추량이 부친을 침상에 눕히고 머리 위까지 이불로 덮었다.
 그는 갑자기 닥친 상황에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한참 후 아이를 안고 나온 그는 아이를 만월마에게 전해 주며 정실로 데리고 가라고 명하였고, 반월마에겐 제천마존이 영면에 드신 것을 궁내에 알리고 전 마도인으로 하여금 애도(哀悼)를 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극천마궁의 궁도들은 소주의 탄생의 희소식을 접하고 연회 준비를 하기 위해 부산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들에게 전임 궁주의 별세 소식은 찬물을 끼얹는 비보(悲報)였다.
 제단을 세우기도 전에 궁도들이 구름처럼 용천전으로 몰려들어 바닥에 엎드려 곡을 하며 애도를 표하였다.
 그날 밤 백여 년 간 중원의 하늘을 찬란하게 빛내던 천마성(天魔星)이 빛을 잃어버렸다.
 제천마존의 소식은 마도무림과 사도무림, 정도무림은 물론 전서구(傳書鳩)와 인편으로 중원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극천마황은 제단(祭壇)을 세우고 전 마도무림의 인물들은 예외 없이 사십구재(四十九祭)가 끝나는 날까지 모두 상복(喪服)으로 갈아입게 명하였고, 그의 명은 천명과도 같은 효력을 지녀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각 파의 지존들이 문상을 위해 극천마궁에 입궁하기 시작한 그날 밤 절대구마존은 머리를 맞대고 언제 역모를 감행할 것인지를 숙의(熟議)하였다.
 당장 시행하자는 강경파도 있었지만 검마존은 효심이 남다른 극천마황의 마공을 무시할 수 없었던 탓에 사십구재가 끝날 때쯤이면 탈진할 것이라며 거사를 뒤로 미루었다.
 극천마황만 인명 피해 없이 제거할 수 있다면 극천마궁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기에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그들은 검마존의 의견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각자 군림지존좌에 앉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그들이 흩어져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동으로 지존좌에 오른다는 것은 모순(矛盾)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번번이 앞으로 나서기를 좋아하는 검마존이 금번 회동에서 하는 말과 행동을 보니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되면 주인만 바뀌는 꼴이었지만 홀로 나머지 팔마존을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는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였기에 그들과 적대관계에 빠질 수도 없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을 꿈꾸던 그들은 등불로 날아드는 나방같이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그물에 제 스스로 걸려든 꼴이 된 것이다.
 이틀 동안 마도의 인물들이 문상을 하기 위해 도착하여 극천마궁에 제물을 바쳤는데 정도의 인물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아 극천마황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다.
 한데 삼 일째 되는 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동행하여 극천마궁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하였지만 극천마황은 그들이 문상 와 준 것만으로도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
 소림사(少林寺) 장문인 천료신승(天了神僧),
 무당파(武當派) 장문인 태극천도옹(太極天道翁),
 아미파(峨嵋派) 장문인 금정사태(金頂師太),
 곤륜파(崑崙派) 장문인 운룡진인(雲龍眞人) 사마휘(司馬輝),
 화산파(華山派) 장문인 일검단천(一劍斷天) 추자치(秋紫梔),
 청성파(靑城派) 장문인 절정신검(絶頂神劍) 정휘명(鄭暉明),
 종남파(終南派) 장문인 개벽철권(開闢鐵拳) 천능풍(天凌風),
 점창파(點蒼派) 장문인 불패신검(不敗神劍) 제현수(諸賢帥),
 공동파( 派) 장문인 협의사신(俠義死神) 초진성(蕉震星),
 개방( 幇) 방주 불취신개(不醉神 ) 손풍비(孫風飛).
 그들 십 인은 정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고, 그들만으로도 정도가 최대한의 성의를 표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제단에 무릎을 꿇고 향을 올리며 문상을 마치고는 곧장 극천마궁을 빠져나갔다.
 정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곳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고, 그곳에 몰려든 마인들은 그들과 우호관계가 아니라 언제든지 서로 살상을 위해 손을 쓸 수 있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기에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서둘러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극천마황은 몸소 정문 밖까지 그들을 배송(拜送)하여 안전하게 보호해 줘야 했다.
 
 
 제3장 반란(反亂)
 
 
 제천마존의 죽음은 중원을 들끓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무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양민들도 둘만 모이면 대화의 내용은 오직 이것 한 가지뿐이었다.
 정도의 인물들은 이제 정도가 다시 우뚝 설 것이라며 속으론 희희낙락(喜喜樂樂)하였지만 그것은 기우(奇遇)에 불과했다.
 마도의 인물들은 제천마존의 문상을 마치면서 극천마황에게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상을 빌미로 극천마황을 중심으로 단결하였고, 극천마궁은 전성기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 누구도 극천마궁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운데 절대구마존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틈틈이 회동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제천마존이 별세한 지 이십 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수없이 많은 문상객이 줄을 이었고, 오늘도 한바탕 난리법석을 떤 후 석식을 마친 인물들이 숙소로 향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모두 해가 진 후에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라는 명을 받았기에 궁내는 고요하였고, 경계 근무를 하는 경계병 외에 궁내에서 돌아다니는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하여 마치 텅 비어 버린 느낌을 줄 정도였다.
 한데 시각을 알리는 타종 소리와 함께 검마존의 숙소로 소리 없이 모여드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의 경공술을 발휘하여 경계병들의 눈을 피해 모인 음모의 주역들이었다.
 검마존의 화려한 별실 바닥에는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벽은 온통 매끈한 하얀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천장에 매달린 옥등(玉燈)에서 비친 불빛은 벽에 반사되어 실내를 더욱 밝게 비추고 있었다.
 커다란 자단목(紫檀木) 탁자 주위로 아홉 개의 의자가 놓여져 있었고, 세수 일백에 가까운 노인들인 절대구마존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독마존(毒魔尊) 임종연(林琮延)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내심에 있던 말을 꺼냈던 탓이다.
 “흐흐흐······, 우리가 동료로서 극천마황을 제거하고 과연 군림지존좌에 동시에 오를 수 있겠소?”
 조금 전 그의 물음에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검마존은 모반을 꿈꾸기 시작한 이래로 자신이야말로 군림지존좌에 앉을 유일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였지만 눈치를 보다가 중대한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형제들! 천하를 호령하던 제천마존도 흐르는 세월에 무릎을 꿇었네! 우린 이미 늙고 살 날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 후대에 물려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어차피 홀로 올라야 하는 군림지존좌에 오르기 위해 우리 형제들이 피를 흘린다면 세인들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네.”
 홀로 오른다는 말에 모두의 강렬한 눈빛이 검마존의 얼굴로 꽂혔고, 검마존은 태연히 그들의 눈빛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본존은 형제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네. 아직 거사를 행하기도 전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킨다면 아예 행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보네.”
 포기하자는 듯한 그의 말에 모두 웅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욕심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던 탓이다. 그들을 지켜보던 검마존이 다시 의견을 내놓았다.
 “본존을 포함한 형제들은 이곳의 누구 한 사람이 군림지존좌에 앉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궁주를 제거하는 데 반기를 드는 형제가 없다면 일단 그를 제거하고 힘을 모아 사태를 수습한 후 후손들로 하여금 비무대회(比武大會)를 열어 우승자를 군림지존좌에 앉히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보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주길 바라네.”
 색마존(色魔尊)이 벌떡 일어섰다.
 “형님들! 저와 제 자식놈의 내공은 형님들과 비슷하나 아둔하여 무공이 뒤쳐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와 제 자식놈은 어차피 군림지존좌에 오를 위인이 못 되니 지금처럼만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더 바랄 것도 없지요.”
 그의 말에 모두 경쟁자 한 사람이 줄었다는 만족의 미소가 감돌았는데, 색마존이 말을 이었다.
 “대형께서 의견을 내놓은 것에 덧붙여 할 말이 있습니다. 후손들로 하여금 우승자를 가리는 비무대회를 열되 상대를 죽이는 인물은 공적(公敵)으로 지탄받아야 할 것이며, 우승자는 나머지 인물들을 제거하지 말고 지금처럼 중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두들 색마존의 말에 동조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의견은 사분오열되던 그들의 흩어진 마음을 묶어 주기에 충분하였고, 이어 이어진 비밀투표에서 만장일치로 합의되었다.
 절대구마존은 생전 제천마존에 의해 각기 전각을 배정받았는데, 직접 부릴 수 있는 이천에서 삼천여 명의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합친다면 이만오천에 달하는 대군이 형성될 것이다. 그것은 극천마궁 전체의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엄청난 세력이었다.
 그들이 속에 쌓인 것을 풀고 일치단결하였으니, 극천마황의 생사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한 거나 다름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검마전의 밀실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고, 그들은 세부 계획을 짜며 혹시 자신의 후손이 우승자가 되어 군림지존좌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껏 부푼 꿈을 꾸기에 바빴다.
 실로 음모가 깊어지는 밤이 아닐 수 없었다.
 
 ***
 
 극천마황은 자신의 자식을 살해할 목적으로 살수를 보낸 흉수가 일 인이라는 것을 오판(誤判)하고 심복들을 파견하여 절대구마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게 하였다.
 한데, 그들은 모두 같은 보고를 올렸다.
 그들 모두 한통속이 되어 요즘 거의 매일 밤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에 극천마황은 놀라면서도 고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모의를 잠재울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제단을 지키다가 하늘이 무너질 듯한 충격적인 보고를 받은 극천마황은 제때 잠을 이룰 수도 없었고, 너무도 괴로운 탓에 심신이 공허하여 설상가상으로 심마(心魔)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약점을 그들에게 보인다면 당장이라도 반란을 도모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는 남몰래 운공조식을 하여 내상을 치유하기에 바빴고, 아내와 자식을 찾지도 못할 형편에 빠진 상태였다.
 다행히 자신이 믿을 만한 잠영오월마에게 처자식의 안위를 맡겼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는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으로 하루 또 하루를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이 의지할 곳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다가 부친의 막역지우(莫逆之友)였던 혈영지마를 남몰래 자신의 처소로 모셨다.
 궁주에게 절대구마존이 그러한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혈영지마는 한동안 믿어지지 않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절대구천마를 박살내려 하였지만 극천마황의 간청에 의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삼분의 일의 세력 중에도 저들과 동조하는 인물들이 있을 수 있었기에 신중을 기해야 하였고, 일단 외궁에 나가 있는 수하들을 집결시켜 최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극천마황이 내상을 입은 것에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극천마궁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혈영지마는 제천마존이 생존 시 그들을 그렇게 아꼈는데 영면에 들자마자 반란을 꿈꾸자, 그들을 짐승보다 못한 치사한 놈들이라며 치를 떨면서도 그들을 물리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너무도 분해하고 원통해하였다.
 늙고 기력이 쇠하여 친우의 아들을 위해 해 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그로서는 치욕과 다름없었다.
 지금 그로서는 절대구마존 일 인과 싸워도 승산이 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삼 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궁주에게 모두 물려 줄 결심을 하였다.
 “궁주! 숙부로서 부탁하겠네. 자네에게 개정대법(開頂大法)을 펼칠 터이니, 거부하지 말고 받아 주기 바라네.”
 그의 말에 극천마황은 강렬한 안광을 발하며 답했다.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아버님께서 운명하셔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운 터에 숙부까지 목숨을 버리신다뇨? 절대 그리 행할 수 없으니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들과 접전이 벌어지면 절대구마존 중에서 한 놈이라도 맡아 주십시오.”
 극천마황의 말에도 혈영지마의 눈빛은 결연했고,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비쳐지고 있었다.
 “궁주! 이제 극천마궁을 지키는 일은 궁주의 판단에 달렸네. 나같이 기력이 쇠한 늙은이가 절내구마존 중 최하수라는 색마존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들의 수하 몇 놈쯤은 해치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대세를 뒤엎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극천마황은 혈영지마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 사이 그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평생을 살면서 노부는 스스로 뜻을 거스른 적이 딱 한 번 있다네. 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네 아버지가 중원을 피로 물들이며 군림지존좌에 앉겠다고 했을 때 차마 도울 수 없어 은거하였었다네. 두 번 다시 자네 아버지를 보지 않겠다는 맹세를 깨뜨리고 다시 출도한 것은 기다리고 있던 나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우정이 깨지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기 때문이었네. 이제 자네에게 공력을 전수하고 자네 아버지 곁에 가고 싶네. 그러니 어서 등을 돌리게.”
 서로 상대의 눈을 마주 본 그들의 안광은 절대 물러섬 없이 팽팽하였다.
 극천마황은 혈영지마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도리였지만 현 상태에서 자신의 내상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유일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휴우! 제가 숙부의 생명을 단축시켜야 한다니, 저란 놈은 정말 못난 놈인가 봅니다.”
 극천마황은 혈영지마에게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구 배를 올렸고, 혈영지마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예를 받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법인데 그는 득도한 고승처럼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혈영지마의 장심이 돌아앉은 극천마황의 명문혈에 닿았고, 이내 막강한 진기가 장강의 물줄기처럼 혈도를 타고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몸에선 눈뜨고 지켜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마광이 일어나 그들의 전신을 감쌌다.
 이각이 흘렀을까.
 혈영지마의 혈발(血髮)이 급속도로 허연 백발로 변하였고 그의 신체가 오그라들기 시작하였고, 그의 전신에 일던 마기가 차츰 줄어드는 반면에 극천마황의 전신에선 찬란한 광휘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극천마황이 운공을 끝냈을 때는 혈영지마가 이미 좌화한 후였다. 그는 오그라든 그의 시신을 바라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흐흐흑! 숙부!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혈영지마의 너무도 가벼운 시신을 안고 밖으로 나와 그의 죽음을 알리고 부친과 같이 합장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처연한 궁주의 모습을 보는 궁도들의 눈도 축축해졌고, 이내 혈영지마의 시신을 수습하여 염을 마친 후 전임 궁주의 관 옆에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생전에 제천마존의 그림자밖에 되지 못했지만 죽어서 전 마도인에게 제천마존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의 숭고한 희생으로 극천마황은 내상은 치료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내공 증진은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절대구마존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으니, 수확이 작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단을 지키면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떠올리며 절대구마존을 상대할 마공을 찾기에 급급하였던 탓에 처자식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
 
 내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지존별부의 한 전각에서 옥동자처럼 어여쁜 아이를 품에 안은 화려한 비단으로 만든 궁장을 입은 여인이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휴우, 옥린아! 오늘도 네 아버님은 아니 오실 것 같구나! 불쌍한 것. 군림지존좌에 앉은 영웅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이처럼 천대를 받아야 하다니······.”
 옥음(玉音)은 듣기에도 싱그러웠지만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안타까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아이는 모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리 없었기에 생긋생긋 웃다가 배가 고픈지 울음을 터뜨렸다.
 “응애! 응애!”
 동방추련은 품을 열고 하얀 설봉(雪峰)을 내놓더니 아이에게 유실을 물려 주며 중얼거렸다.
 “아휴! 아이에게 젖을 물려 줄 시간이 벌써 지났는데 딴 곳에 정신을 쏟고 있다니, 어미로서 자격이 없는 것인가?”
 아이는 작고 여린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녀의 설봉을 붙잡더니 힘껏 빨아대기 시작하였고, 반각이 흐르자 배가 부른지 입을 오물거리다가 잠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유실을 문 채 잠이 든 아이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다가 배시시 미소지었다.
 지존별부를 지키는 잠영오월마와 잠영대는 빈틈없이 배치되어 그녀와 소주를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었기에 무림의 속성을 모르는 여인이었지만 직감은 예리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혼례 때 함께 입궁하였던 벙어리 하인을 들게 하여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지면 아이를 안전한 곳에 옮기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곳에 들 당시 무공을 전혀 익히지 못한 하인에 불과하였는데 극천마황이 특별히 하사한 영단을 복용하여 일 갑자의 내공을 지닐 수 있었고, 유달리 신법에 소질이 있어 빠른 발을 자랑한 탓에 폭풍아랑(暴風啞郞)이란 별호를 얻었다.
 세인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한 탓에 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신법을 익혔고, 신법만큼은 일류고수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방추련과 생활하여 그녀와는 수화(手話)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녀가 원한다면 설사 지글지글 끓는 용암 속이라도 뛰어들 충직한 하인이었기에 아이를 부탁하자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하였다.
 그 역시 이곳에 들며 수많은 제지를 받은 터라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날부터 무엇을 찾는지 여기저기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땡! 땡!
 자시(子時)를 알리는 타종 소리가 적막한 극천마궁에 울렸고, 날이 밝으면 제천마존의 사십구재를 마칠 시기가 도래하였기에 절대구마존은 검마존의 전각에 모여 마지막 회합을 가졌다.
 그들은 거사 시기를 사십구재를 마치고 광장에 수뇌부를 비롯한 궁도들이 모인 장소에 극천마황이 나타난 순간으로 잡았다.
 그 이유는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극천마황을 제거해야만 확실하게 극천마궁을 접수할 수 있었고, 자신들이 봉기할 때 모든 전력을 보인다면 설사 궁주를 따르던 인물들도 형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투신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자신들의 수하에게 모두 알리고 계획대로 추진키로 결정한 후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같은 시각 극천마황은 해검전주(解劍殿主) 몽환절마(夢幻絶魔), 약왕전주(藥王殿主) 진천야호(震天野狐), 집법전주(執法殿主) 혈비마종(血匕魔宗), 형전주(刑殿主) 음산마인(陰山魔人), 의전각주(儀典閣主) 생사집혼(生死集魂), 연무관주(鍊武館主) 등천비마(騰天飛魔) 등에게 명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십대에서 오십대에 달하는 자들로 극천마황의 심복들이었다. 또한 외궁의 당주(堂主)급과 향주(香主)급의 믿을 만한 수하들에게 이미 전갈을 놓은 상태였다.
 극천마황은 절대구마존이 거사 일자를 내일로 잡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들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제거할 요량이었던 것인데, 그의 판단은 그가 태어나서 가장 크게 오판한 중대한 착각이었다.
 그가 오늘이 지나기 전에 행동을 취했다면 그의 뜻대로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효심이 강한 그가 사십구재가 끝나기 전에 행동을 옮길 수는 없었던 것이 패인이었다.
 그날 짙은 어둠이 깔린 야밤에 절대구마존의 수하들은 모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는데, 통천(通天)에 다다른 마공을 지닌 극천마황을 배반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절대구마존 모두 같은 생각이고 모반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참형(斬刑)에 가한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을 고쳐야 했다.
 처음엔 반대하는 수하가 많아 어수선하였으나 생각할 시간을 준다며 동트기 전까지 결정을 내리라고 명하자, 새벽이 가까울수록 참가하겠다는 수하들의 수효가 점차 많아졌다.
 그들로서야 누가 주인이 되든지 지금보다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유혹하는 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극천마황을 배반할 수 없다며 병기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는 수하도 있었는데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동료에 의해 곧 상체에서 머리가 분리되어 참혹한 시신으로 변해야 했다.
 극천마궁은 칠십 년간 군림하면서 초창기에는 중원을 피로 적시었으나 중원 최강의 방파라는 위명이 진동하자 극천마궁에 대항하는 문파가 사라졌으며, 정도무림도 숨죽이며 힘을 기르고 있었기에 무림의 평화를 유지하였었다.
 반란군의 힘이 규합된다는 것은 그들의 야욕이 증대한다는 뜻과 더불어 중원 전역에 또다시 혈풍이 몰아친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다.
 
 ***
 
 표면상 정도무림은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지 못한 상태였으니 절대구마존이 모반을 성공하면 칠십 년 전보다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하였다.
 그러나 정도무림은 지난 칠십 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것처럼 보였을 뿐 절전된 무공을 되찾기 위해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중원의 혼(魂)은 그들의 힘에 눌려 아수라 지옥에 빠진 듯했으나 깨어나기 위해 요동을 치고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현재 최강의 무인을 손꼽으라면 누구나 마도무림을 평정하고 군림제일좌에 앉았던 제천마제의 후광을 물려받은 일황(一皇) 극천마황 여추량을 말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세인에게 있어서 극천마황은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에 삼두육비(三頭六臂)의 잔혹한 인물로 잘못 알려져 있었고, 그의 극악무비한 마공은 그를 모시고 있는 마인들의 입을 통해 무림을 활보하는 그 누구도 받아낼 수 없는 악마의 무공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아직 세속에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속을 썩일 때 극천마황에게 데리고 가서 바친다고 말하면 순한 양처럼 길들여졌으니 그의 천하를 진동시키는 위명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그의 명은 지엄하였고 대명제국을 이끄는 천자의 황명(皇命)보다 우위에 있었으니, 그가 뱉은 한 마디는 설사 잘못된 명이라도 돌이키는 법이 없었고, 국법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지켜졌다.
 군림제일좌에 오른 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양민들은 그렇다고 치고 강호인들 또한 그를 몹시 두려워했으니 항상 입조심을 하고 모든 행동을 기해 왔다.
 이는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고, 제 스스로 올가미를 만들고 걸려든 것과 같았으니 실로 우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정도인들은 마인들의 눈을 피해 은인자중해 왔으나 이십 년 전부터 비밀리에 이미 입적(入寂)했다고 알려진 세수 일백오십의 소림사의 전대 장문인 태양성승(太陽聖僧)과 남해 보타암(普陀庵)의 암주 보타성니(菩陀聖尼)를 중심으로 뭉쳐졌고, 그 동안 드러내지 않고 무공 연마에 힘쓴 덕에 예전보다 나아지진 않았으나 거의 대등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태양성승과 보타성니는 제천마존이 무림에 등장했을 때 그의 무공에 패하여 무릎을 꿇어야 했던 비운의 장문인들이었다.
 당시 그들은 패배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실제 그들은 심산유곡에 은거하며 무공을 익혔고, 어느 정도 제천마존에 대한 자신이 생기자 은거를 풀고 소림사에 현신(現身)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정도인들은 비밀리에 태양성승과 보타성니를 이성(二聖)으로 추앙(推仰)하고 일치단결하여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극천마궁의 마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태공(太空)과 혜련(慧蓮)으로 줄여 부르기도 했다.
 그들 둘은 마도의 힘이 쇠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는 없었으나 묵묵히 정도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기에 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도인들은 용기가 샘솟았다.
 그들 이성(二聖)은 마도무림에 알려지지 않고 장막에 가려진 상태였으나 삼기(三奇)는 달랐다.
 삼기들은 드러내 놓고 중원을 활보하고 다녔지만 극천마궁의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극천마궁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궁도들을 파견하였지만 삼기 중 이 인은 진면목을 알지 못하기에 그리 할 수 없었고, 일 인은 건드리면 죽는다는 소문이 나서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삼기로 알려진 환영신투(幻影神偸) 공손기(公孫麒)의 활동이 제일 왕성하였다.
 그는 사십 년 전부터 무림에 출도하여 거부들의 재산을 털어왔으며, 워낙 신출귀몰하여 수많은 수문위사들이 지키는 고관대작의 집도 제 집 드나들 듯 출현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유유히 사라졌다.
 십 년 전부터는 극천마궁 외궁에 소속된 분타에도 나타나 양민들로부터 수탈하다시피 거두어들인 혈세(血稅)로 이룩한 재물을 몽땅 훔쳐 모두 양민들에게 되돌려 주는 대범함을 보였다.
 도둑맞은 분타주는 외궁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좌천당한 탓에 분타주가 되길 원하는 마인들은 조세(租稅)를 완화하기 일쑤였고, 환영신투가 출현했던 현(縣)의 양민들은 그에 대한 소문을 부풀려내기 일쑤였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던 현의 양민들은 도둑의 행차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위치가 파악되지 않은 신투동부(神偸洞府)의 부주였고, 항상 변체변용술(變體變容術)을 시전하여 자신을 감추었는데, 독보적인 그의 변체변용술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른 인물로 변하였으니 그 자신도 진짜 얼굴을 잊을 정도라 했고, 그의 신상내력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항간의 소문으로는 신투동부에는 수효를 알 수 없는 투술(偸術)에 능한 신투들이 소속되어 활동한다고 알려졌다.
 그곳에 소속된 신투들도 그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인물이 전무하다고 하니, 그의 진정한 신분은 천하에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그곳의 보고(寶庫)마다 진귀한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탓에 어린아이들이 어른 손톱만큼 커다란 금강석으로 공기놀이를 한다고 하니, 그곳의 재력은 세인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신투동부를 찾아 그곳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다면 자손만대까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투동부의 위치는 무림에서 군림하고 있는 극천마궁과 무림의 소식통이라는 개방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아 벼락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 많은 인물들이 중원 전역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했다.
 환영신투와 비슷한 시기에 출도한 귀령신안(鬼靈神眼) 모용산(毛湧刪)은 오백 년 전 몰락한 모용가문의 후세라고 알려졌을 뿐 그 역시 오리무중의 인물이었다.
 누구에게서 무공을 사사(師事)받았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외호는 참으로 적절하다고 알려졌다.
 그는 상대가 시전하는 모든 무공을 보는 즉시 파해법(破解法)을 만들어 약점을 향해 쇠꼬챙이같이 생긴 그만의 독특한 기형검(奇形劍)을 쑤셔 넣는 기인(奇人)이었다.
 언제나 상대를 향해 일 초식만 시전하여 일점쇄혼(一點碎魂)이라고도 불렸는데, 그의 기분에 따라 상대를 점혈(點穴)하기도 하였고 무공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목숨을 취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는 정사(正邪) 중간의 인물이었고 그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면 상대를 가리지도 않고 출수(出手)하였는데 유독 여인들에겐 손쓰지 않았다.
 전생부터 여인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탓인지 평소 앉아서 소변보는 족속들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지론을 펼쳤고, 그의 비위를 아무리 비틀더라도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인물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소문이 자자하였으니 자신의 목숨을 하찮은 파리처럼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감히 그의 면전을 가로막는 우를 범하지 않고 비켜서야 했다. 그는 항상 혼자 독보하였고 언제 어디에 나타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허름한 주막에 나타나 값싼 백건아(白乾兒)를 들이키고 있을지도 모르고, 갑부들이나 드나들며 미식을 즐기는 호화로운 기루(妓樓)에서 아리따운 기녀를 앉혀놓고 명차(名茶)로 알려진 천지차(天地茶)나 값비싼 소흥주(紹興酒)를 숙성하여 만든 화조주(花彫酒)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전대(錢帶)엔 언제나 엄청난 액수의 전표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어디서 생기는 것인지 사용해도 줄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그가 자객으로 나섰다면 막대한 재물을 모았을 테지만 그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전대에 가득 찬 전표가 줄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간혹 그를 몰라보고 전대에 욕심이 생긴 멍청한 녹림도들이 그를 노렸다가 낭패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낭객(浪客)이었고, 그 역시 변용술(變容術)과 변성술(變聲術)에 능해 그의 진면목을 본 인물은 없다고 알려졌다.
 삼기 중에서 만통자(萬通子) 팽진후(彭震侯)도 동시대에 출도하여 삼기에 낀 인물이었다.
 박식한 그의 지식은 하늘에 다다라 황궁에서 황자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천자가 그를 청하였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한 마디로 거절한 탓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천하에 알려졌다.
 허리가 굽은 꼽추인 탓에 오 척 단구였는데, 머리가 엄청나게 커서 대두왜타(大頭矮駝)라고도 칭하였으나 그는 그리 불려지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는 일반지식뿐만 아니라 천문지학, 점성술(占星術)도 능통하였는데 항상 땅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색동 장포를 입고 일 장 길이의 죽봉(竹棒)에 무불통지(無不通知) 만상만박(萬狀萬博)이라고 쓴 깃발을 달고 다녔다.
 점쟁이로도 활동한 그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처음 본 사람들은 포복절도하기 마련이었는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그런 자들은 억만금을 가져다 바쳐도 점을 쳐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대신 힘없고 가난한 양민들이 복채(卜債)로 동전 하나만 달랑 내줘도 성심성의를 다해 점(占)을 쳐주었다.
 점 보러 온 인물의 관상(觀相)만 보고도 그 인물에 대해 미리 알아본 것처럼 줄줄이 열변을 토하곤 했는데, 과거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어찌나 호통을 쳤는지 대개 기가 질린 상태로 허여멀건한 표정을 지으며 도망치듯 사라져야 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의 비리(非理)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인들은 대개 극천마궁에 대해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어떠한 갑부라도 재물을 보유하는 것이 삼대(三代)를 이어 가기 힘들다며 우회적으로 답변하곤 했다.
 그의 언동에 극천마궁에 소속된 마인들이 그를 압송하려 했는데, 일 갑자 정도의 내공을 지닌 그는 언제나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였다.
 그는 마인들에게 끌려가며 그들의 운세를 봐 주었다.
 그를 끌고 가는 인물의 운세는 항상 그에게 핍박을 준 시각으로부터 두 시진 이내에 비명횡사할 것이라는 간단 명료한 점괘가 나왔고, 실제 그러한 일이 번번이 일어났다. 그가 직접 손을 쓴 것이 아니라 예언대로 사고로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만통자가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 말하였는데 근방에 강이나 연못이 없다면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을 정도였고, 압사할 것이라 말하면 유구한 세월 동안 풍상에 견뎌온 튼튼한 성곽이 무너져 덮쳤기에 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항상 시간 맞춰 사고사(事故死)가 일어나니, 극천마궁의 궁도들은 우연을 가장하여 살해하는 것이 아닌가를 면밀히 조사하였지만 증거를 잡지 못해 그를 추궁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극천마궁에서 명을 내리더라도 궁도들 중에서 아무도 그에게 접근을 하지 않았고, 설사 우연히 그가 눈앞에 보여도 말 한 번 걸어 보지도 못하고 피한 탓에 유유자적 중원을 활보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는 극천마궁의 궁도들에겐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일황과 더불어 삼기의 명성은 천하를 위진(威振)시켰고, 무림에서 건드리지 못할 인물들로 두각(頭角)되었다.
 삼기가 모여 극천마궁에 대항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해가 흘렀건만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았기에 극천마황 여추량은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확고한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이제 그를 위해(危害)하기 위한 새벽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또 다른 세상이 왔음을 알리는 듯 제천마존의 사십구재가 끝나는 운명의 그날, 태양은 유난히 선혈처럼 붉은 기운을 품고 휘황한 광휘와 함께 떠올랐다.
 이른 새벽부터 외궁에 소속된 궁도들은 분타를 비우고 한 명도 예외 없이 극천마궁에 몰려들었다.
 그들의 안광은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자신들의 우상인 궁주에게 모반을 꿈꾸는 무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憤氣撑天)한 상태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만반의 무장을 하고 있었고, 쉽게 모반을 꿈꾸는 무리들을 퇴치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마 장로들인 절대구마존이 모두 참여하여 궁주를 해치려 한다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이번 기회에 공을 세워 극천마황의 눈에 들어 신분 상승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극천마궁의 광장엔 인파가 몰려들었고,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인들은 자리를 선점한 궁도들 대부분이 반란군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본궁에 소속된 장로전의 궁도들이 눈을 부라리자 찍소리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단상의 제일 가까운 안쪽에 의전을 책임진 의전각주 생사집혼과 약왕전주 진천야호, 집법전주 혈비마종이 그들의 수하 오천여 명과 자리를 잡았다.
 후미엔 해검전주 몽환절마와 형전주 음산마인, 연무관주 등천비마가 수하 팔천여 명과 장내를 정리하며 외궁에서 찾아온 궁도들을 안내하였다.
 해검시켜야 할 해검전주와 해검전에 소속된 궁도들이 궁도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지 않은 채 들여보내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비쳐졌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궁도들을 들이고 있었다.
 외궁에 소속된 궁도들은 대략 삼만여 명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본궁에 소속된 궁도들의 눈에는 오합지졸로 보일 정도로 하수들만 배치되어 있는 것이 해검전주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단상의 제일 후면에 제천마존의 위패가 모셔진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장정의 손목처럼 굵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장로들을 위한 아홉 개의 태사의(太獅椅)와 궁주가 앉을 구룡이 승천하는 모양을 새긴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의자가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고, 이미 장로들인 절대구마존이 상복 차림으로 태사의 앞에 서서 궁주가 제단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복을 입은 극천마황은 부친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무섭도록 예리한 안광을 연신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뇌리는 그 순간에도 어떻게 이 난관을 뚫을 것인가 판단하기 위해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외견상 그의 명을 이행할 충직한 수하들이 반란군을 포위하고 있었으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란 것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으나 억지로라도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로서는 뾰족한 묘수가 없었고, 어떻게 하든 오늘 해가 저물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그가 제단에서 향을 피워 올릴 시각, 그 동안 제천마존의 호위를 책임졌던 혈영지마의 충직한 수하들이 궁주의 명을 받고 지존전에 도착하여 잠영오월마와 그들이 이끄는 일천 잠영대와 합류하여 주모와 소주의 안전을 위해 안배된 곳에 배치되었다.
 그들이 배치를 완료하기도 전에 절대구마존의 자식들이 수하를 이끌고 지존전의 외곽을 둘러쌌다.
 부친들이 극천마황을 상대하는 동안 그들은 주모와 태어난 지 오십 일이 채 되지 않는 소주를 없애기 위해 밀려들었던 것이다.
 이제 광장이 있는 방향에서 신호를 알리는 화전이 발사되면 그들은 일제히 지존전으로 쇄도하여 살려둔다면 두고두고 화근으로 남을 싹을 잘라 버리는 임무를 맡았다.
 
 지존전의 지붕 위에서 말없이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폭풍아랑이었다.
 그의 신형이 꺼지듯 기와를 들어낸 지존전으로 사라졌고, 이내 주모와 소주가 계신 정실에 나타나 다급히 동방추련에게 수화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만일을 대비하여 소주를 대피시켜야 할 듯하니 소주를 넘겨 주십시오.’
 이것을 본 동방추련은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품속의 아이에게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옥린아! 어미가 너를 지켜 줄 힘이 없어 미안하구나! 이번 사태가 잘 풀린다면 네게 사랑을 더 줄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아이의 뽀얗고 부드러운 볼에 입맞춤하더니 결심이 선 듯 폭풍아랑에게 아이를 넘겼다.
 그는 귀중한 보물을 넘겨받듯 조심스럽게 아이를 받아 품에 안았는데, 그녀의 눈가에 매달린 옥루(玉淚)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하였다.
 시각이 촉박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으나 쉽게 헤어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폭풍아랑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그녀에게 수화를 보내고 서둘러 침상을 들췄다.
 그곳엔 그가 급조해 만든 암굴(暗窟)이 있었고, 자신이 나간 후 그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수화로 대화하였다.
 아이를 안은 그의 신형이 시커먼 암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자 그녀는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심적 고통을 느끼며 흐느꼈다.
 “흐흐흑! 옥린아!”
 하지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폭풍아랑이 수화로 그녀에게 부탁한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침상 아래에 있던 사 각진 석판을 낑낑거리며 밀어 암굴 입구를 막고 틈새를 메워야 했으며, 침상을 원래 위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설치해야 했다.
 그 일은 무공을 전혀 익히지 못한 여인이 감당하기엔 힘들고 벅찬 일이었지만 그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완벽하게 그 일을 완수하였고, 거듭 확인하였다.
 할 일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맥없이 침상에 주저앉은 그녀는 허망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어 오열을 터뜨렸다.
 “흐흐흑! 흐흐흑······!”
 자신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이불을 입에 물고 흐느끼고 있었는데, 잠월오월마 중 막내인 사월마(死月魔)가 비단보로 감싼 아이를 품에 안고 조용히 들어왔다.
 그녀는 사월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났으나 그의 전음을 듣고 기운이 빠졌다.
 “주모! 속하의 막내 자식입니다. 아이를 소주라 생각하시고 안고 계셔야 합니다. 만일 적들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챈다면 소주의 신변을 보호해 주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매로 눈물을 닦고 그에게 아이를 넘겨받았다.
 아이는 편안한 표정을 지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그녀의 포근한 품에 안기자 자신에게 닥칠 비운의 운명을 예견한 듯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음을 터뜨렸다.
 “응애! 응애!”
 아이가 울자 그녀는 마치 자신의 아이를 달래듯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는데 한 번 터진 울음보는 그쳐지지 않았다.
 “아가야, 울지 말거라! 네가 울면 슬프단다.”
 사월마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실내를 빠져나갔다.
 사월마가 사형들에게 소주가 비밀 통로로 이미 탈출했음을 알리고 비단 보퉁이 하나를 받아 품에 안더니 애검을 뽑아 들었다. 잠영오월마는 각자 비단 보퉁이를 안고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안은 것처럼 보이도록 손질하였다.
 만월마가 나머지 형제를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아우들! 모반에 참가한 저들을 보아하니 아마 오늘 우리는 모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 허허실실계(虛虛實實計)가 완성되고 소주께서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명심하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기 바란다. 지난 세월 형제들과 동고동락하며 우형(愚兄)은 즐거웠다. 내세에도 다시 만나 형제지연을 맺게 될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나마 기원한다.”
 잠영오월마는 모두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듯하였다.
 
 제단에 무릎을 꿇었던 극천마황이 분향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는 말없이 제단에 감췄던 애도를 꺼내 뽑았는데, 그의 가공스런 신위는 세상을 압도할 듯 보였다.
 단상에 있던 절대구마존은 심히 위축되는 느낌에 사로잡혔고, 궁주가 자신들의 계획을 눈치챈 것을 알았다.
 극천마황이 절대구마존을 향해 도를 겨누며 입을 떼었다.
 “후후후······, 그대들은 뻔뻔하게도 모반을 일으킬 생각을 하였다. 그대들의 허욕은 화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궁주로서 그대들의 장로직을 박탈한다. 무릎을 꿇어라!”
 극천마황의 분노는 애도에 맺힌 도강(刀 )으로 표출되었다.
 삼 장 길이의 도강을 뿜는 도를 치켜든 채 극천마황은 절대구마존을 향해 다가섰는데, 금세라도 그의 도가 절대구마존의 머리를 잘라낼 듯하였다.
 한데, 절대구마존은 무릎을 꿇기는커녕 각자 자신의 병장기를 급히 꺼내 들고 그를 향해 대치하였다.
 “크하하하······, 이제 세상은 그대 여씨 가문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극천마황은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자 분노하여 애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는데, 그때 검마존의 수하 하나가 중천을 향해 화전을 쏘아올렸다.
 구마전의 수하들은 이내 병장기를 뽑아 들며 전방과 후방에 있는 궁도들을 향해 일제히 진격했다.
 “와와와! 공격해라!”
 “아앗! 이것들이 미쳤나?”
 “아니다. 이들은 반역을 한 것이야. 막아랏!”
 함성과 함께 극천마궁의 궁도들은 엉겨붙었고 피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극천마황은 다급하게 외쳤다.
 “반도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처단하라!”
 그의 공력을 실은 음성이 퍼지자 수적 열세에 몰렸던 궁도들이 사기를 얻고 공격해 오는 반도들을 향해 반격을 시작했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사태가 실제로 극천마궁에서 벌어지자 극천마황은 절대구마존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도를 내리쳤다.
 “붕천유도(崩天流刀)!”
 우우우웅 ―.
 그의 애도가 대기의 힘을 모두 끌어모으는 듯 보였고, 도강이 굽이치듯 꿈틀대더니 절대구마존을 향해 쇄도하였다.
 마치 천하의 가장 무거운 물체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고, 절대구마존은 전신 공력을 운용하여 자신을 방어하였다.
 꽈꽈꽈광 ―.
 “우욱!”
 대기를 가르는 낙뢰와 동반한 벽력성과 같은 엄청난 굉음이 터지는 순간, 극천마황은 그들의 합쳐진 공력과 부딪친 충격으로 한 모금의 선혈을 뿜었고, 절대구마존은 손목이 저려 병장기도 들기 힘든 지경에 빠졌다.
 절대구마존은 제천마제와의 대결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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