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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색황 1

2017.12.06 조회 423 추천 0


 천무색황 1권
 서장
 
 
 중원의 남쪽 황과수(黃果樹)라는 촌락에서 태어난 남궁호 (南宮豪)는 도박에 미친 남궁욱(南宮郁)과 진초초(晋草草) 사이의 아들이었다.
 과거 황과수 제일부호였던 부친은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고 쫓기다시피 그곳을 떠나 중원으로 향한다.
 곤륜파(崑崙派) 장로 창궁일학(蒼穹一鶴)의 제자인 곤륜일미 설부용(雪芙蓉)은 사형들과 협행(俠行)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색마와 접전을 벌이던 끝에 사형들은 모두 죽고 그녀는 장력에 격중되어 절벽으로 떨어진다.
 뇌호혈(腦護穴) 부위에 심한 손상을 입어 모든 기억을 상실한 그녀는 때마침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 위하여 움막을 짓고 살던 남궁욱에 의하여 구함을 받고 그곳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너무도 추운 중원의 겨울을 견디다 못한 남궁욱 부부가 황과수로 돌아온 지 열흘만에 남궁호가 태어나고, 그는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여전히 도박에 미친 남궁욱은 늘 도박장에 붙어살다시피 하였고, 남궁호는 성장하면서 점차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된다.
 도박장은 황과수 현령의 유일한 여식이 운영하는 곳이었고, 그녀에게는 진교연(晋嬌燕)이란 남궁호와 동갑내기 여식만이 있었다. 따로 친구가 없던 둘은 곧 친숙해졌다.
 어느 날 좋은 꿈을 꾸었다며, 현령의 아들이 운영하는 만전장(萬錢莊)에 들러 은자를 빌린 남궁욱은 일확천금 직전에 모든 것을 날리고 알거지가 되어 버리고 그는 끝내 자살을 택한다.
 그의 사후, 만전장주가 모든 기억을 상실하여 자신의 이름이 진초초로 알고 있는 남궁호의 모친을 강제로 끌고 가 그녀를 능욕한다. 그의 일곱 형제는 그가 떠벌리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차례로 그녀를 능욕하여 결국 진초초는 그들 형제의 공동 정액받이가 되어 수년간이나 비참한 삶을 연명한다.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남궁호는 먹을 것을 찾기 위하여 돌아다니던 중 아무도 가지 않는 폭포 주변에서 무진장 서식하고 있는 축년영지(畜年靈芝)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식 삼아 먹는 한편, 도박장에 들러 실력을 키워 간다.
 이럴 즈음 유일한 친구였던 진교연은 화산파(華山派)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진초초가 만전장 하인 가운데 하나에게 겁탈당할 때 반항하다 뇌호혈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게 되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녀는 절망감에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게 된다.
 우연히 황과수에 들러 도박장의 은자를 엄청나게 따는 흑검수라(黑劍修羅) 장호삼(張昊三)이 속임수를 쓴다는 것을 알게 된 남궁호는 어떻게 그런 수를 쓸 수 있느냐며 그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고, 그는 그것이 속임수가 아니라 무공이며 황과수 북쪽에는 드넓은 중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 뒤 떠난다.
 그들의 행위를 입 다물어 주는 대가로 그에게서 은자 일백 냥을 얻은 남궁호는 그 길로 만전장에 들러 모친을 빼내 오는 데에는 성공하나 그녀는 앓기만 할 뿐이었다.
 모친의 약값을 구하고 현령의 아들들에게 복수할 일념에 불탄 남궁호는 도박장에 들러 모든 은자를 긁어모으게 되고, 종래에는 현령의 자식들의 전 재산마저 따서 그들로 하여금 쫓기듯 황과수를 떠나게 만든다.
 황과수의 모든 것을 소유한 그는 모친을 간병하다 그녀가 곤륜일미였으며, 그녀의 사부가 창궁일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나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강호로 유입한 남궁호는 강호의 도박판을 휩쓸며 엄청난 은자를 따 도신(賭神) 운구기일(運九技一)이라 불리게 된다.
 전에 만났던 철기보(鐵騎堡)의 흑검수라에게 들러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에 그곳에 들렀던 그는 간세로 몰리게 되고, 철기보 형당 당주인 냉혈장비(冷血張飛) 독고태인(獨孤?引)으로부터 엄청난 고문을 받게 된다.
 약 일 년이나 지속된 고문 속에서도 오기로 버틴 남궁호는 우연히 모친의 사부인 창궁일학을 지하 뇌옥에서 만나 그에게서 무공에 입문하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철기보의 지하 뇌옥을 빠져나온 그는 너무도 허기져 설익은 과실을 먹다 체해 고통스러워할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손해랑(孫海郞)이라는 희수(水)에서 약포를 운영하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의 도움으로 당분간 약포 일을 도우며 몸을 추스르기로 한 남궁호는 그곳에서 그의 손녀인 희수약녀(水藥女) 손약빙(孫葯氷)을 만나게 되고, 강호오기(江湖五奇) 중 하나이자 고금제일색마로 지칭되는 천면인(千面人) 추자도(秋孜淘)가 남긴 삼촌설력(三寸舌力)이란 희대의 기서를 보게 된다. 또한 그의 방중비학인 옥방진결(玉房眞訣)을 얻게 된다. 몇 달을 머무는 동안 남녀간에 애정이 싹트게 되고, 결국 둘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작고한 창궁일학의 유명으로 남궁호는 남경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마침 살인사건으로 객잔에 출입이 제한되자 시간을 때우기 위하여 화련득전장(華蓮得錢場)이란 도박장을 찾게 되었다.
 화련득전장의 장주는 남궁호보다 한발 먼저 중원 도박판을 휩쓴 귀수신장(鬼手神藏)이라는 외호를 가진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 요지빙녀(瑤池氷女) 금기향(金琦香)이었다.
 제일 큰 도박판에 끼기 위하여 배짱 좋게 은자를 융통해 줄 것을 요구한 남궁호가 최근 운구기일이라 불리며 중원 도박판을 독식하는 도신임을 안 그녀는 운명을 건 한 판의 마작을 요구하게 된다. 서로간에 누구의 도박 실력이 뛰어난지를 가리기 위한 판이었으나 몸을 걸었던 요지빙녀가 패하고 만다.
 결국 남궁호는 그녀와도 부부의 연을 맺고 그녀의 원한을 대신 갚아 주기로 한다. 그녀는 북해빙궁을 멸망시킨 잔결오마(殘缺五魔)가 잔마유령단(殘魔幽靈團)에 투신하였음을 알고 은밀히 파잔대(破殘隊)라는 비밀 결사를 키워 오고 있었다.
 남궁호의 무공이 형편없음을 안 그녀는 그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각종 기서를 닥치는 대로 사들여 그에게 공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남궁호는 고금제일신의인 생사신의(生死神醫) 곽홍(郭弘)이 남긴 유학을 얻게 되어 일약 의술의 대가가 되고, 이 세상의 어떠한 고문(古文)이라도 해독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연일 계속되는 방사에 질린 요지빙녀는 이곳엔 더 이상의 무공이 없으니 때마침 상계(商界)의 후계자를 뽑기 위하여 관문을 설치하고 도전자를 기다리는 금겁장(金劫莊)으로 가게 한다.
 길을 가는 동안 남궁호는 관문 중에 무공을 시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생사신의가 남긴 내용을 절묘하게 응용하여 복용하면 한 시진 동안 일 갑자의 내공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사신단(生死神丹)을 십여 알 제련하게 된다.
 금겁장이 있는 낙양에 도착한 남궁호는 주루에서 우연히 마마혈보(魔魔血堡)의 소보주인 무영마랑(無影魔郞) 음진종(陰振宗)과 귀향요정(鬼香妖精) 도옥진(淘玉珍)을 보게 되고, 태극은하궁(太極銀河宮)의 이룡일봉(二龍一鳳)인 옥기린(玉麒麟) 을지인(乙支仁)과 새반안(塞潘安) 을지형(乙支亨), 그리고 세외천미(世外天美) 을지예인(乙支睿吝)을 만나게 된다.
 세외천미의 요청으로 새반안을 진맥한 남궁호는 그에게 심각한 고질이 있으며,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며 치료할 방도를 알려 주게 되자, 원래 금겁장의 관문에 도전하려 왔던 그들은 즉각 회궁하게 된다. 후일 남궁호를 궁으로 초대하기 위하여 남겨진 세외천미는 할 수 없이 그와 동행하게 된다.
 다음 날 금겁장 관문에 도전한 그는 금겁오관(金劫五關)을 깨고 당당히 금겁장에 들어가게 된다. 곧 상계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금겁장주의 여식인 광뇌변태(狂腦變態) 용문경(龍雯瓊)을 가르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극에 달한 오만으로 인하여 약한 광증을 보이는 그녀를 남궁호가 은밀히 치료를 하게 되고, 이 사실을 안 상황은 계략을 꾸며 그가 용문경과 혼례를 올리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혼례식 날 신방을 잘못 든 남궁호는 엉뚱하게도 사대총관 중 하나인 빙화(氷花) 황보혜(皇甫惠)와도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상황(商皇)의 추천으로 남궁호는 태극은하궁과 친분을 쌓을 겸 세외천미를 대동하고 태극은하궁으로 떠나게 된다.
 길을 가던 도중 백호와 혈랑들의 공격을 받은 남궁호는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져 극심한 부상을 입게 된다. 그의 부상이 치료되는 동안 세외천미는 남몰래 그를 흠모하는 마음을 키워 간다.
 태극은하궁을 들렀다 남궁호가 다시 강호로 올 즈음 어릴 적 친구였던 화산파의 제자들인 화산칠수(華山七秀) 중 막내인 천향소화(天香小花) 진교연이 마마혈보에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하여 가던 중 태원부에서 오백여 낭인들을 고용한 남궁호는 우연히 귀향요정과 조우하게 된다.
 사부인 음혈마신(飮血魔神)을 시해하고 스스로 보주직에 오른 무영마랑은 강호제패와 색욕에 젖은 인물이었다. 감히 사부를 시해한 그를 치기 위하여 은밀히 기회를 노리던 그녀는 남궁호의 요청을 수락하고 마침내 함께 마마혈보를 급습하게 된다.
 위태로운 순간들이 있었으나 남궁호는 한참 무영마랑에게 능욕당하고 있는 진교연을 구할 수 있었으나 적지 않은 내상을 입게 된다. 또한 귀향요정 역시 무림의 금기인 묵강쇄혼마장(墨?碎魂魔掌)에 격중되어 부상을 입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궁호는 상대의 장력을 맞받아 상대에게 넘기는 수공이타(受攻以他)라는 불완전한 장법을 창안하게 된다.
 마마혈보의 마졸들에게 추적당할 것을 우려한 남궁호가 은밀한 동혈로 찾아들어 그곳에서 자신의 내상을 치료한 뒤 밖을 살펴보니, 엄중한 부상으로 경각에 달한 귀향요정을 발견하고 그녀를 동혈로 데리고 간다.
 산중인지라 마땅한 방법이 없던 남궁호는 음양화합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치료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축년영지의 엄청난 양정이 폭발하면서 색욕에 젖은 한 마리 짐승이 된 남궁호는 마혈이 짚여 꼼짝도 못하는 진교연을 거의 겁탈하다시피 소유하게 된다.
 한편 강호에는 일궁, 이단, 삼장, 사보가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태극은하궁, 귀수혈사단, 잔마유령단, 금겁장, 경천문집장(驚天文集莊), 호련백마장(護聯百魔莊), 마마혈보, 철기보, 사일검보(斜日劍堡), 만화옥녀보(萬花玉女堡)가 그들이다.
 그 중 귀수혈사단, 철기보, 호련백마장, 마마혈보 등은 천하를 제패할 야욕에 불타는 문파이고, 만화옥녀보는 천하를 여인왕국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하는 문파였다.
 수어장군부의 여식인 백리무영은 황궁의 희란공주로 인하여 부친과 오라비가 참수를 당하자 살수 집단인 잔마유령단을 찾아 그녀를 살인해 줄 것을 청부하여 그들은 호시탐탐 희란공주의 목숨을 노리게 된다. 하지만 때마침 사일검보에서 황자들을 살해하려 자객들을 보내는 바람에 황궁 경호가 엄청나게 강화되어 무위에 그치고 만다.
 호련백마장은 장주인 암흑제왕을 치고 독제(毒帝) 경수유가 새로운 장주로 등극하게 된다.
 이 즈음 강호의 서쪽 끝 당고랍산맥 깊숙한 곳 혈황곡(血皇谷)에서는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나며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탑인 만마앙복탑(萬魔仰伏塔)이 솟아나는 기현상을 보였으나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곳이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은 이천 년 동안이나 자신들을 대적할 상대가 없어 침묵을 지키던 악마의 무리들이었다.
 한편 황궁에서는 갇혀 사는 것이 지겨운 희란공주가 남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다.
 또한 경천문집장의 천금인 만뇌서시(萬腦西施) 기연빙은 자신이 고질인 구음절맥폐맥협심증(九陰絶脈閉脈狹心症)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남은 여생이나마 천하를 두루 구경하면서 혹시 구할지도 모르는 영초(靈草)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떠났다가 장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녀는 조부인 무답대학사(無答大學士) 기치우(奇峙瑀)가 자신을 찾으러 정처없는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여인들만의 문파이자 강호제일의 정보 수집력을 자랑하는 만화옥녀보에 투신하기로 마음먹는다.
 강호를 정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정확한 소식통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던 귀수혈사단과 호련백마장의 급습을 받은 만화옥녀보는 그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기적적으로 도주를 하여 태극은하궁에 도움을 청하려 이동하는 중이었다.
 남궁호는 귀향요정과 진교연으로 하여금 희수약녀와 요지빙녀를 금겁장으로 데려오게 하고 자신은 황도 북쪽 팔달령을 유람하던 중 잔마유령단의 살수들에게 쫓기는 만전서생(萬全書生) 주영군(朱瑛君)과 하오밀문의 황도 담당 향주였던 묘랑(猫浪) 유옥교(兪玉嬌)를 발견하게 된다.
 생사신단을 복용하여 일 갑자 내공을 지닌 그는 악전고투 끝에 살수들을 물리치나 곧이어 들이닥치는 다른 살수들에 의하여 곤궁에 처하게 된다.
 그러다 귀향요정에게서 배운 진세로 살수들의 일부를 가두는 데 성공하나, 나머지는 계속하여 추적하여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먹이를 찾아나섰던 대호(大虎)들의 공격이 있자 그 틈을 노리고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도주하게 된다.
 금겁장의 비밀 창고인 금창(金廠)에 들어간 남궁호가 간신히 숨을 돌릴 무렵 막강한 추적력을 가진 잔마유령단 호법인 신안마군(神眼魔君)이 그들이 은신해 있는 장소를 샅샅이 뒤지게 된다. 남궁호 일행은 금창의 기관을 봉쇄하고 숨죽인 채 그들이 가기를 기다렸으나 신안마군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신안마군은 그들이 숨어 있는 장소의 유일한 통풍구가 의심스럽다며 독탄과 함께 신선환락분이라는 춘약(春藥)을 넣게 된다.
 춘약에 취한 남궁호는 만전서생이 실은 여인의 몸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으나, 곧 그녀와 묘랑의 청백을 차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두 여인은 완벽한 음양조화를 체내에 지니게 되어 영원히 늙지 않는 기연을 얻게 된다.
 만전서생이 황궁의 공주인 희란공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그 안에서 생활하던 일행은 우연히 빨려 들어간 연못을 통하여 고금제일거부이자 강호오기 가운데 하나인 금강산 황보휘의 유품을 만나게 되고, 두 여인은 단숨에 칠 갑자 내공을 지닌 절대고수로 변모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남궁호는 황보휘가 다가올 두 번의 겁난을 대비하여 재물을 숨겨 두었다는 사실과 자신에게 그 겁난을 해소할 임무가 있다는 서찰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천하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이만에 달하는 금강수라마강시들이 나타나 무지막지한 살행을 자행한다.
 황산 부근에서 처음 출현한 그들은 귀수혈사단주 구등존자(九燈尊子) 엄운혁(嚴熉奕)과 그의 아들들인 마등이십사숙(魔燈二十四宿)에 의하여 제련된 그들은 인간 살상 병기였다.
 곧 장강 이남은 시산혈해가 되었고, 여인들은 그들에 의하여 미추노소를 가리지 않고 능욕당하였다.
 여인들을 능욕하면서 얻은 순음지기로 그들은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하지만 죽은 여인들의 시신이 목내이처럼 변하지 않았기에 천하인들은 그들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사일검보를 치기 위하여 황궁에서 파견한 십만 토벌대가 전멸하였고, 사일검보 역시 멸망하고 말았다.
 또한 철기보의 인물들 중 청룡단이 전원 몰살하는 비운을 맞았다. 장강 이남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모든 촌락이 파괴되었으며,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그들의 손에 죽어야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죽은 금강수라마강시들의 시신 일부가 황궁으로 운반되어 철저한 검시를 받은 결과 보통의 병장기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금강불괴지체이며, 그들의 선혈은 모두 독혈임을 알게 된 황제는 은밀히 전설의 명검인 간장, 거궐, 막사, 어장과 같은 명검을 만들도록 어명을 내린다.
 그러나 황궁에서 만든 파강검은 불과 일만 자루뿐이고, 그나마 한 자루로 하나의 금강수라마강시의 목을 치면 톱날처럼 부서지게 되는 불완전한 검을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강남을 박살내는 과정에서 금강수라마강시는 이만에서 일만오천으로 줄었으나 그들 가운데 일만을 없앤다 하더라도 나머지 오천으로 충분히 장강 이북을 박살낼 위력이 있음을 안 황제는 궁여지책 끝에 천하에 방을 붙이게 된다.
 곧 누구든 금강수라마강시들을 물리칠 묘안을 내면 즉각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직에 제수하고 황금 백만 냥을 주겠다는 방을 붙였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다.
 황도로 들어간 남궁호는 만화옥녀보가 끌고 다니는 만화향차를 보고 흥미를 느끼던 중 그들이 금겁장에 보의 재건에 필요한 재원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금겁장에서는 파괴된 강남을 재건하기 위하여 거의 모든 재물을 옮겨 두었는지라 정중한 거절을 하러 총관을 보낸다.
 노발대발한 만화옥녀보주 산화옥녀(散花玉女) 취소군(翠小君)은 감히 금겁장에서 천하의 여인들을 적으로 만들고도 상계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의 말을 하게 되자, 곁에서 구경만 하던 남궁호가 나서게 된다.
 새로 만화기찰전주가 된 만뇌서시 기연빙은 남궁호가 금겁장의 후계자인 금겁공자임을 알고 독대를 요청하고 그는 흔쾌히 이를 수락한다.
 천하의 여인들을 적으로 만들어 좋을 것이 없다 판단한 남궁호는 겁난을 일으키는 무림의 각 문파에 대한 정보를 대가로 그들이 요청한 황금을 주려 하였지만 이를 오해한 만뇌서시는 자신의 몸을 추가로 걸게 된다.
 황금이 오는 동안 남궁호는 태극은하궁의 소궁주인 옥기린 을지인을 만나 회포를 푸는 과정에서 그들이 만화옥녀보의 재건과 무림의 안녕을 위하여 파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황금이 도착한 날 만뇌서시가 스스로 몸을 바칠 준비를 하는 동안 남궁호는 한 잔 술을 마시면서 사실은 농담이었다는 말을 하려 고민하는데, 그가 마시는 술에는 미혼향이 섞여 있었다.
 급작스런 취기로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남궁호는 시비의 손에 이끌려 정실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한 여인과 부부지연을 맺게 된다. 그녀는 전대 천하제일미이자 만화옥녀보주인 산화옥녀였다. 의매인 만뇌서시가 보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그녀는 그녀를 대신하여 스스로 청백을 바쳤던 것이다.
 남궁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말없이 금겁장으로 향하게 된다. 며칠 후, 만화옥녀보에서 이 겁난의 주역인 금강수라마강시들이 바로 귀수혈사단에서 파견한 자들이라는 것과 마마혈보와 잔마유령단이 그들의 수하가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해 온다.
 남궁호는 희란공주와 연락하여 황제 알현을 요청하고 그와 독대하면서 일만 자루의 파강검을 줄 것과 황군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황제는 희란공주의 간청으로 요구 조건을 수락하지만 만일 실패하였을 때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한편 귀수혈사단에서는 호련백마장의 마인들이 십만대산 깊숙한 오지에 은신해 있음을 알고 금강수라마강시들을 그곳으로 보내 그들을 전멸시킨다. 그 와중에 금강수라마강시들의 수효는 일만삼천오백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독제 경수유가 지니고 있던 만독참혼검(萬毒斬魂劍)은 전설의 명검에 버금가는 신병이기였던 것이다.
 남궁호는 황군과 상황호천대, 하오밀문과 태극은하궁, 그리고 만화옥녀보와 파잔대, 마지막으로 구파일방에서 도움을 얻어 귀향요정과 만뇌서시가 새로 창안한 절진으로 금강수라마강시들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절진으로 황산 지옥곡으로 향할 수밖에 없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일만 자루 파강검을 든 연합세력이었다.
 후일 황산전투로 기록된 이 혈투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결과, 팔천오백에 달하는 금강수라마강시들을 세상에서 없애는 데 성공한다.
 진세를 열자 귀수혈사단 총단이 있는 곳을 버티고 있던 절벽 아래 수십만 근의 폭약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전각들은 무너지고 그들과 금강수라마강시 간의 혈투가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중인들은 귀수혈사단이 바로 대원제국의 잔당이며 그렇기에 한족(漢族)을 완전히 말살시키려 금강수라마강시들을 제련하여 보냈음을 알게 된다.
 결국 귀수혈사단은 구등존자를 포함한 아들들인 마등이십사숙 전원이 지옥으로 가고 수하들은 전원 몰살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구등존자 엄운혁의 절독유린에 의하여 한 줌 재가 되어 버린 금강수라마강시들이 상당수 있어 그 수효는 오천에서 사천으로 줄었다.
 하지만 그 수효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또 한번 혈겁으로 젖게 할 수 있기에 남궁호는 그들을 금사멸악진(禁邪滅惡陣) 영원히 가둬 둘 심산으로 황산 지옥곡을 영원히 금역으로 선포하도록 한다.
 황궁으로 돌아온 남궁호는 대명제국의 부마도위로 인정받고 승상직을 제수받으나 이를 고사한다. 결국 정마대원수(征魔大元帥)에 책봉된 그는 또 한번 군웅들을 이끌고 운강석굴로 들어가 그 안에 숨어 있던 마마혈보를 괴멸시키고 무영마랑을 죽인다.
 또한 소호(巢湖) 한가운데 안락도(雁落島)에 은신해 있던 잔마유령단을 화공으로 공격한 뒤 그들을 섬멸한다.
 강호의 혈겁을 잠재운 남궁호는 세인들의 눈을 피해 꽃처럼 아름다운 부인들을 대동하고 고향인 황과수로 돌아가 행복한 생활을 한다.
 
 
 제1장 태평성대 그리고 음모
 
 
 “후후······, 이 녀석 좀 보게?”
 남궁호는 자신을 쏙 빼어 닮은 아이를 두 손으로 안고 눈을 맞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남궁진(南宮震)이라 이름 붙인 아이는 희수약녀 손약빙이 낳은 아이였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황과수(黃果樹)에서 지낸 일 년은 남궁호에게 있어 참으로 꿈결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 사이 그의 여인들은 각기 하나씩의 아이를 낳아 이제 그에게는 모두 아홉이나 되는 자녀가 생겼다.
 ‘정마장(征魔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이곳에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명제국 제삼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장중주였던 희란공주(囍蘭公主) 주영령(朱瑛玲).
 중원 상권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는 상황(商皇)이자 금겁장주인 개세거부(蓋世巨富) 용철수(龍?隨)의 장중보옥인 상계일미(商界一美) 용문경(龍雯瓊).
 당당히 강호를 십분했던 강호십정(江湖十鼎) 중 하나이자 여인들만의 문파인 만화옥녀보(萬花玉女堡)의 보주인 산화옥녀(散花玉女) 취소군(翠小君).
 천하제일 도박장인 화련득전장(華蓮得錢場) 장주이자 북해빙궁(北海氷宮) 공주였던 요지빙녀(瑤池氷女) 금기향(金琦香).
 화산파의 후기지수인 화산칠수(華山七秀) 가운데 막내이자 남궁호의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천향소화(天香小花) 진교연(晋嬌燕).
 금겁장의 사대총관 가운데 하나인 빙화(氷花) 황보혜(皇甫惠).
 하오밀문(下午密門) 문주인 천심투(天心偸)의 손녀이자 소문주인 묘랑(猫浪) 유옥교(兪玉嬌).
 과거 천하를 혈겁으로 몰아넣으려던 마마혈보(魔魔血堡) 보주 음혈마신(飮血魔神)의 제자이자 강호오기(江湖五奇) 중 고금제일 살인귀 수라혈귀(修羅血鬼) 노기심(盧琦尋)의 진전인 일만살인법(一萬殺人法)을 이은 귀향요정(鬼香妖精) 도옥진(淘玉珍).
 남궁호에게 첫 정을 주었던 희수약녀(水藥女) 손약빙(孫葯氷).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청백지신을 유지하고 있는 강호십정 가운데 하나인 경천문집장(驚天文集莊) 장주이자 현재 승상(丞相)인 무답대학사(無答大學士) 기치우(奇峙瑀)의 손녀 만뇌서시(萬腦西施) 기연빙이 현재 정마장의 안주인들이었다.
 이렇게 열 명에 달하는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은 한결같은 그의 사랑을 받으며 연일 행복한 교소(嬌笑)를 터뜨리고 있었다.
 단 만뇌서시만은 침울한 표정으로 있곤 하였는데, 그것은 고질인 구음절맥폐맥협심증(九陰絶脈閉脈狹心症)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데 가장 중요한 약재인 축년영지(畜年靈芝)가 정마장에 무진장 있기에 그녀의 생명은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고질을 완치시키지는 못하기에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닌 남궁호조차 그녀가 이러한 고질로 우울해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구음절맥이나 폐맥협심증 중 한 가지만 걸려 있었다면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나,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걸려 있었기에 겉으로 전혀 표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청백지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남궁호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처녀의 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남궁호가 그녀의 규방에 들를 때에는 고담준론을 나누거나 반상대담(盤上對談)을 나눌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의 접근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으로 그와 부부의 연을 맺어 만일 아이라도 태어나게 된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 한사코 거부하였던 것이다.
 
 정마장의 내원에는 모두 열한 채의 고루거각들이 지어져 있었다. 각기 기린각(麒麟閣), 천향소축(天香小築) 등의 명칭을 지닌 이 전각들은 각기 한 여인이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녀들에게는 만화옥녀보에서 선발한 각기 네 명의 아리따운 시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한 개의 소축은 장차 자라날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하여 천하각지에서 구해 온 서책들을 정리해 놓은 서실이었다.
 서실의 지하에는 조용한 가운데 무공을 참오할 수 있도록 연공관(練功關)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었다.
 전각들의 중앙은 마치 세외선경(世外仙境) 같은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운치를 더해 가고 있었다.
 정원에는 옥연정(玉淵井)이라 이름 붙인 연못이 있으며, 인공적으로 만든 섬에는 휴정(休停)이라 이름 붙인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이곳은 간혹 정마장 내원의 모든 식솔들이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하는 곳이다. 내원 뒤쪽에는 무공을 연마할 수 있도록 연무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시비들이 생활하는 전각이 따로 지어져 있었으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 곳들도 있었다.
 정마장의 살림을 맡은 총관은 태원부에서 낭인들의 대부를 맡았던 용화서생(勇華書生) 단리운(段里雲)이 맡고 있었으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외부의 침입을 저지할 경비 담당 총관은 상황호천대(商皇護天隊) 특급시위였던 천행쾌검(千行快劍) 마진충(馬晋忠)이 맡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제는 해산된 파잔대(破殘隊) 대주였던 은자천수(隱者天首) 부의탁(扶宜濯)은 자라날 아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위한 무공교두(武功敎頭)로 초빙되어 있었다.
 정마장 안살림은 만화옥녀보 총관이던 다정선자(多情仙子) 방인영(方璘瑛)이 맡고 있었다. 이들은 정마사총관으로 불렸다.
 전에 있던 촌락에는 상황이 파견한 일천 상황호천대와 사백 파잔대, 그리고 본시 태원부 낭인이었던 이백오십 낭인들과 이천 만화옥녀보의 여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누가 와서 보더라도 평범한 양민처럼 농사를 짓거나 상행위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이뤄 아마 중원에서 가장 평화로운 촌락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주인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반목하거나 질시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황과수에는 중원의 다른 촌락처럼 기루(妓樓)도 있고, 객잔(客棧)도 있으며, 청루(靑樓)와 홍루(紅樓)도 있다. 또한 도박장도 있다. 따라서 누가 봐도 평범한 촌락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남궁호가 황과수로 돌아와 이곳을 재건하면서 황과수 주변에 엄청난 절진을 설치해 두었다. 현재는 전혀 진세가 발동되지 않으나 유사시에 돌 몇 개를 움직여 놓으면 즉시 그 어떤 것들도 난입할 수 없는 철옹성으로 변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 진세는 만일 중원에 또다시 금강수라마강시 같은 마물이 나타날 것을 우려하여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황과수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실은 무림의 그 어떤 방파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공동체이며,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남궁호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비록 황제와 개세거부, 그리고 하오밀문주가 알고 있기는 하나 그들은 결코 이러한 사실을 발설하지 않기로 단단히 약조를 해 두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한바탕 겁난의 손톱이 할퀴고 간 장강 이남은 무무색황(無武色皇) 남궁호와 개세거부가 내놓은 재원으로 한창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강 이북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촌락을 이루고 생활의 터전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장강 이남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겐 각기 은자 오천 냥이란 거금이 주어졌기에 장강 이북에서 곤궁하게 살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안고 이주하였기에 어디에서건 활기찬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림 역시 엄청난 겁화로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구파일방만은 별다른 손실을 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많은 손실을 본 철기보는 다시 무적철기병(無敵鐵騎兵)들을 훈련시키느라 여념이 없는지 잠잠한 모습이었다.
 강호의 마도 문파이던 귀수혈사단과 마마혈보, 잔마유령단과 호련백마장, 그리고 왜인들의 집단이던 사일검보가 사라진 현재 강호에는 수없이 많은 방파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구파일방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구파일방은 오랜 세월 동안 강호십정 때문에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강호의 일에 별로 상관 않는 경천문집장이나 금겁장, 그리고 이제는 활동을 하지 않는 만화옥녀보와 다시 대흥안령산맥 속으로 사라진 태극은하궁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자 예전의 영화를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 동안 늘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던 하오밀문이 더 이상 어둠 속에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소매치기나 양상군자 등의 집단이지만 현재 하오밀문주를 맡고 있는 천심투의 손녀인 묘랑이 무무색황 남궁호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과거와는 달리 무림의 한 문파로 당당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강호는 구파일방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마도나 사도를 표방하는 방파들은 꼬리를 내리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천하가 다시 태평성대를 맞이하자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돌아왔고, 많은 기인이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강호에서는 무무색황 남궁호를 천하제일인이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비록 그에게 내공이 없다 하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게 적대감을 표하거나 덤벼들 수 없기에 그러는 것이다.
 세인들이 천사쌍성(天賜雙聖)이라 부르는 귀향요정과 묘랑의 무공이 현재 강호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마마혈보를 치기 위하여 운강석굴에서 딱 한 번 보여 준 그녀들의 무위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아래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남궁호야말로 천하제일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말에는 그 어느 누구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인들은 천하의 재건을 위하여 엄청난 재화를 푼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남궁호는 천하인들의 민심을 얻은 것이다.
 그런 그를 찾아 보은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종적을 찾았으나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설마 그가 오지인 황과수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아미타불······, 이 모든 것이 무무색황의 덕이오이다.”
 무림의 태산북두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숭산 소림사 방장실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 나왔다.
 “후후······. 무량수불, 본파에서도 그것은 인정하고 있소이다.”
 승려의 방에서 웬 도호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그곳엔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바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었다.
 소림사 장문방장 영공선사(靈空禪師),
 무당파(武當派) 운학진인(雲鶴眞人),
 개방(幇) 무취신개(無臭神),
 곤륜파(崑崙派) 조화옹(造化翁),
 화산파(華山派) 열혈신창(熱血神槍) 두진악(杜秦岳),
 청성파(靑城派) 단천일섬(斷天一閃) 간연호(幹椽豪),
 아미파(峨嵋派) 구인사태(救仁師太),
 점창파(點蒼派) 현현수사(玄玄秀士),
 공동파 구룡검호(九龍劍豪),
 종남파(宗南派) 천현신도(天現神刀)가 그들이었다.
 “헬헬······, 아마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편안히 앉아 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오.”
 무취신개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쑤시면 말하자, 구인사태가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맞아요! 그 덕분에 우리 구파일방이 다시 옛 영화를 되찾은 것 같아요.”
 구인사태는 전에 잔마유령단에게 많은 제자들을 잃었었으나 남궁호가 이끄는 군웅들이 그들을 전멸시켰기에 호의적이었다.
 “맞소! 무무색황,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휴우! 그 다음은 말하기 싫소이다.”
 열혈신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닫았다. 그는 만일 남궁호가 없었다면 지금쯤 구파일방이 모두 박살이 나서 사라졌거나, 아니면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려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호천대(護天隊)가 모든 연공을 마칠 수 있게 되었소이다. 이제 노화순청(爐火純淸)의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만 계속하면 되게 되었소이다. 장문인들 모두가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덕이오이다.”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조화옹이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였다. 과거 구파일방에서는 다가올 겁난을 예견하고 각 파에서 가장 무공에 자질이 높은 백 명씩의 제자들을 선발하여 이곳 숭산으로 보낸 바 있었다.
 그들은 각 파의 장문인들로부터 직접 각 파의 비전절기를 아낌 없이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제 호천대가 만들어진 지 삼 년 만에 그들은 구파일방의 비전절기들을 모두 익혔다. 그들은 지옥과 같은 고된 수련을 겪었기에 이제는 예전에 비하여 괄목상대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아미타불······, 노납은 여러 장문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소이다.”
 영공선사 뒤쪽에 있던 승광대선사(承光大禪師)가 입을 열자 또다시 시선이 옮겨졌다. 그는 현 소림의 장문인인 영공선사의 사부이자 전대 방장이었다. 또한 호천대의 태상호법이기도 하였다.
 이제부터 호천대는 호천무맹주인 조화옹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태상호법인 승광대선사가 지휘하게 된다.
 “아미타불······, 호천대가 이 정도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이다. 하나 요즘 귀암마성(鬼暗魔星)과 혈요마성(血妖魔星)이 급작스럽게 빛을 더해 가는 것을 보니, 겁난이 머지않았음을 짐작하게 하오이다. 노납은 감히 장문인들께 이렇게 마음놓고 있을 일이 아니라 각 파로 돌아가 제자들의 무공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싶소이다.”
 승광대선사의 창노한 음성에 지금껏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차갑게 식었다.
 그렇다. 소림의 신화인 달마선사(達磨禪師)가 그토록 중요하다 강조하던 겁혈마전(劫血魔傳)에 기록된 귀암마성과 혈요마성은 요즘 들어 부쩍 그 빛을 더해 가고 있었다.
 세인들은 이것의 존재를 모르기에 밤하늘에 붉게 빛나는 별들을 보고 그저 천하에 태평성대가 오려는 징조로 알고 있었다.
 귀암마성과 혈요마성이 뿌리는 휘황한 빛은 월광보다 훨씬 더하여 요즘은 밤만 되면 하늘이 온통 뻘겋게 보이고 있었다. 조만간 천하에 또 한번 엄청난 혈겁의 회오리가 불어올 징조였다.
 “알겠소이다, 선사! 그럼 이제 오늘의 안건인 호천대주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합시다.”
 조화옹이 한 마디 하자 장문인들의 안광이 약간씩 빛났다.
 일천 호천대원 중 자파의 제자들이 각기 일백 명씩 있기에 비록 그들 전체가 구파일방의 공동제자라고는 하나 원래의 출신 성분이 어디냐에 따라 명예가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맹주! 빈도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소이다.”
 “말씀하시오, 진인!”
 “그간의 성적이 모두 집계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빈도는 그간의 성적순으로 호천대주와 각 단의 단주들을 선발하기를 원하오이다. 대주는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이다.”
 “아미타불······, 노납도 찬성하오이다. 호천대주란 무림의 겁난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발군의 기량을 보여야 한다 생각하오이다. 하여, 본사에는 특별히 대주의 무공을 높일 수 있도록 하나 남은 대환단(大丸丹)을 내놓겠소이다.”
 “······!”
 각 파의 장문인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소림의 대환단은 복용하면 단숨에 일 갑자 내공을 얻는 천고의 영단이 아니던가!
 하여 소림사에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하나 남은 대환단을 애지중지하여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귀한 것을 내놓겠다 하니 감격하여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흐흠, 노개는 전 무림을 대표하여 장문방장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오이다. 소림의 높은 뜻은 무림의 홍복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참으로 숭고한 뜻이외다.”
 무취신개가 해학스럽고 장난스런 평소와는 달리 정중히 포권하며 고개까지 깊숙이 숙였다. 그만큼 감격하였던 것이다.
 소림에서 이렇게 하는 마당에 다른 문파에서는 감히 반대할 수 없어 모두의 고개가 끄덕였다.
 각 파의 장문인들이 각기 찬성의 뜻을 표하자 마지막으로 승광대선사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것은 그 동안 연공한 호천대원들의 성적이오이다. 모두들 비슷하지만 발군의 향상을 보이는 대원도 몇 있었소이다. 그들 가운데서 일위부터 십일위의 성적이오이다.”
 말을 마친 승광대선사는 미리 준비한 듯 여러 장의 종이를 장문인들에게 나눠줬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각 장문인들이 호천대 교두 노릇을 하면서 매긴 성적이 합산된 것이었다.
 제일위 아미파 소수백연(素手白燕) 진추하(晉秋霞),
 제이위 곤륜파 요금추상(瑤金秋霜) 초군엽(草 燁),
 제삼위 청성파 흑요무후(黑妖武后) 석규미(石圭薇),
 제사위 소림사 정현대사(淨玄大師),
 제오위 무당파 규화진인(規華眞人),
 제육위 개방 상취신개(常醉神) 조금기(趙金琪),
 제칠위 공동파 육지신룡(六指神龍) 나궁(羅穹),
 제팔위 화산파 능공번천(能空飜千) 육영북(陸鍈北),
 제구위 점창파 적우교창(赤羽巧槍) 사공수(司空穗),
 제십위 종남파 사해조사(四海釣士) 소원추(蘇元),
 제십일위 소림사 정각대사(淨覺大師).
 각 파의 장문인들은 자파의 제자들이 하나씩 끼여 있자 모두들 안도하는 눈치였다. 만일 자파의 제자만 빠져 있었다면 천하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태산북두를 자처하던 소림과 무당은 자파의 제자들이 수석의 자리에 있지 못하자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미, 곤륜, 청성의 장문인들은 제자들이 소림과 무당을 누르고 상위에 있자 희희낙락한 모습이었다.
 “헬헬······, 상위 셋이 몽땅 계집들이구먼.”
 무취신개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호천대를 계집이 이끈다는 말씀이오?”
 점창 장문인이 입을 열자 조화옹이 그를 바라보았다.
 “장문인! 호천대는 명예를 위한 집단이 아니오이다. 다가올 겁난을 막아내려면 무엇보다도 무공이 우선이오. 그 다음은 지혜이오이다. 본 맹주는 그 동안 대원들이 연공하는 것을 세심히 살폈소이다. 아미파의 소수백연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무공에 대한 엄청난 잠재력이 있소이다. 게다가 지혜마저 뛰어나니, 그 아이가 단주를 맡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소이다.”
 곁에서 지켜보던 구인사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파 제자를 칭찬해 주는 조화옹이 역시 맹주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미타불······, 그건 맹주의 말씀이 맞소이다. 노납이 보기에도 그 아이는 뛰어난 무공뿐만 아니라 친화력이 있어 능히 호천대를 이끌 재목감이오이다.”
 영공선사에 이어 운학진인이 입을 열었다.
 “승광대선사의 말씀대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결정하기로 합시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여기 적힌 성적순으로 했으면 하오이다. 마침 각 파마다 한 사람씩의 제자들이 있으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들이 호천십단(護天十團)의 단주가 되도록 하고, 각기 아흔아홉씩을 지휘하도록 합시다. 호천대주는 소수백연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그렇게 해야 호천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없을 것이오이다.”
 “좋소이다. 진인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공동 장문인이 거들자 모두의 고개가 끄덕였다. 대세는 기운 것이다. 구파일방의 공동제자들의 집단인 호천대의 단주는 소수백연 진추하가 맡기로 결정된 것이다.
 “좋소이다. 그럼 장문인들께서는 이만 자파로 돌아들 가시지요. 노납은 호천대에게 이를 알리고 더욱 용맹정진하도록 하겠소이다.”
 방장실은 이내 휑하니 텅 비게 되었다. 승광대선사와 영공선사 사제만 남게 되자 승광대선사가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장문인, 이제 노납도 그만 가 보아야 하겠네.”
 “사부님, 사부님께 연락하려면 어디로 해야 할는지······.”
 “아미타불······, 모르고 계신 게 좋을 듯싶네. 호천대는 지금부터 구파일방과는 연락하지 않을 셈이네. 아무래도 이번 겁난이 예사롭지 않기에 무공을 좀더 연마해야 하겠네.”
 승광대선사가 나서자 영공선사는 따라 나서려다 그 자리에 멈췄다. 스승의 성격을 잘 아는 그인지라 한 번 아니라면 죽어도 아니기에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 사이 승광대선사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
 
 “무무색황이라고? 흥! 두고 보자.”
 이곳은 동정호가 그리 머지않은 악양의 한 객잔이었다. 방금 전 소리는 이층 주루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자음자작하던 한 청삼경장인이 내는 소리였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파락호인 그는 안주도 없이 독한 화주를 마치 붓듯이 그렇게 목구멍 속으로 들이키고 있었다.
 마시기 시작한 지 한참 된 듯 그의 탁자 위에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술단지들이 널려 있었다. 멀리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점소이의 눈에는 조마조마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저러다 쓰러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점소이, 여기 하나 더 가져와.”
 청삼인이 소리치자 점소이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사라졌다 곧 술단지를 들고 왔다. 아까 그만 마시라고 하였다가 뺨을 맞았기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점소이의 눈에는 조금의 불만도 서려 있지 않았다. 큼직한 은 덩어리를 선불로 받았기에 무전취식의 우려가 없을 뿐더러 청삼인이 제아무리 많은 술을 마신다 하더라도 적어도 반은 남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청삼인은 술단지의 뚜껑을 열더니 거침없이 들이부었다.
 “크하하하, 좋다! 크흐흐, 한 맺힌 이 세상! 모든 은원을 잊는 데는 그저 술이 최고야. 하지만 무무색황, 그 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도대체 천하인들이 모두 천하를 구원한 은인이라고 칭하는 남궁호에게 어떤 은원이 있어 이토록 말끝마다 그의 외호를 되뇌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청삼인의 말을 주루 안 그 어느 누구도 듣지 못했다. 너무도 나직했고 술에 심하게 취했는지 혀가 말려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삼인이 일어선 것은 서천이 아름다운 노을로 붉게 물들 무렵이었다. 휘청이는 걸음으로 주루 밖으로 향한 청삼인은 천천히 악양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침 만월인지라 관도는 환했다.
 “크흐흐흐, 무무색황 네놈이 감히 원수를 보호한단 말이지? 희란공주!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나의 모든 것을 버렸음에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어. 크흐흐흐, 두고 봐! 언젠가는 꼭 원수를 갚고야 말겠어.”
 휘청이는 걸음으로 관도 위를 걷던 청삼인은 낡은 관제묘로 들어가 큰 대자로 눕는가 싶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
 시간이 흘러 월광이 천천히 관제묘 안을 비추자 파립을 쓴 청삼인의 용모가 보였다. 씻지 않아서인지 약간 시커멓고 얼룩이 져 있었지만 청삼인의 용모는 천상미동처럼 수려하였다.
 그린 듯한 아미(娥眉)와 하늘거리는 귀밑머리, 그리고 가슴이 약간 불룩하고 체형이 아담하며 목울대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남장한 여인인 모양이었다.
 그렇다. 청삼인은 바로 잔마유령단에 희란공주 주영령을 살해해 달라고 청부하였던 수어장군부의 유일한 생존자인 백리무영이었다. 그녀는 안락도가 군웅들에 의하여 공격당하는 동안 이를 지켜보다 잔마유령단이 멸망할 것이란 것을 짐작하고 서고에서 마공비급을 잔뜩 꺼내 들고 탈출하였다. 백리무영은 예전에 부친인 수어장군으로부터 수공(水功)을 배운 적이 있는지라 수없이 떠 있는 시신들 틈에 끼여 시신인 양하다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 후, 정처없이 떠돌다 이곳 악양 부근 지헌장(知獻莊)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곳은 과거 수어장군으로부터 목숨을 구원받은 즙포사신(捕使臣)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머무는 장원이었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억울한 모함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수어장군이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고 음모를 파헤쳐 그의 무죄를 증명하여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처음 그녀를 발견한 그는 억울하게 죽은 수어장군을 생각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언제까지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지헌장에서 백리무영은 과거 잔마유령단주였던 칠지악법(七指惡法) 호굉(胡宏)의 무공과 잔결오마의 마공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무공을 연마하는 줄 눈치챈 즙포사신은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 한 뿌리를 구해 주었기에 현재 그녀의 내공은 거의 일 갑자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잔결오마 중 색환요희의 색공(色功)은 거의 극에 달해 있었다.
 그녀의 무공이 이토록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원한 때문이었다. 오백이 넘는 불구자들의 정액을 받아내면서 느꼈던 그 치욕이 그대로 기억나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이제는 철천지원수처럼 느껴지는 희란공주를 죽일 일념으로 무공일도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처로 맞아들여 보호하고 있다는 무무색황 남궁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척살 대상 이호가 되었다.
 “으으음,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깊은 잠에 들어 뒤척이던 그녀의 입에서 잠꼬대가 나왔다. 아마도 그녀는 꿈에서조차 희란공주를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일부함원(一婦含怨) 오월비상(五月飛霜)이란 말이 있듯이, 지헌장에서는 천하인들이 앙망해 마지않는 무무색황 남궁호와 희란공주 주영령을 해치고자 하는 작은 음모가 하나 탄생하고 있었다.
 
 
 제2장 해후(邂逅)
 
 
 “크하하하! 드, 드디어 때가 왔다! 지난 이천 년은 정말로 지겨웠다. 크흐흐흐, 앞으로 이 년 후면 본맥과 비무할 상대가 생겨난다. 드디어 인계(人界)를 완전히 장악할 날이 온 것이다. 이날이 오기까지 수없는 인고(忍苦)에 시달리며 본맥은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크하하하, 이천 년도 기다렸으니 이 년을 더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유일한 상대와의 결전을 위하여 준비를 해 두는 것도 괜찮겠지.”
 당고랍산맥 깊숙한 오지에 위치한 혈황곡 정상에 온통 시커먼 색으로 두른 구 척 장신이 바람에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오연히 밑을 내려다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마치 천신(天神)이 인계를 둘러보듯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는 사악함과 괴이함, 독랄함, 요사함 등으로 시퍼런 광채를 띠고 있었다. 너무도 사이한 그의 안광을 빼고 나면 그는 마치 솜씨 좋은 장인이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아 만든 작품인 듯 너무도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시원스레 뻗은 검미(劍眉), 우뚝한 콧날, 두툼한 입술과 두둑한 귓바퀴 등등 흠잡을 곳 없이 수려해 보이는 괴인은 이제 겨우 삼십줄에 다가선 듯하였다. 만일 그의 안광이 그토록 사이하지만 않다면 누가 보든 그는 인품 후덕한 학사나, 아니면 강인한 성격과 호탕한 성품을 지닌 관리로 보일 정도였다.
 그의 뒤로는 너무도 웅대하여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거대한 철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길이만도 오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현판에는 ‘만마앙복탑’이라는 글귀가 너무도 선명히 인골(人骨)로 쓰여 있었다.
 괴인의 출현 때문인지 쾌청하던 날씨가 급작스럽게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하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마치 몇 년 전 여름, 엄청난 폭우로 산사태와 지각변동을 일으키던 그날처럼.
 “크하하하하, 천하여! 본맥을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하라! 그래야 깨는 맛도 있지. 너희들이 준비한 모든 것을 철저히 분쇄하여 이제 더 이상 본맥이 어둠침침한 지하에서 생활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괴인은 미동도 않고 계곡 아래를 바라보며 엄청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얼마나 큰소리인지 뇌성벽력을 뚫고 들릴 정도였다.
 “크하하하! 이 년이다, 이 년! 크하하하.”
 괴인의 앙천광소는 그칠 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옆에 뇌전이 떨어져 수백 년 묵은 고목이 쓰러지고, 바로 몇 발짝 앞에서 엄청난 폭풍우를 견디다 못해 산사태가 일어나 굉음과 함께 바위들이 굴러 떨어져도 그의 앙천광소는 그칠 줄 모르고 있었다.
 대자연의 엄청난 재앙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외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괴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엄청난 재앙조차 비켜가게 할 능력의 소유자이거나 미친 작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세찬 폭풍우가 불어오는 한가운데 이렇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바탕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치더니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고 쾌청하게 변하였다. 하지만 하늘에는 달이 없었다.
 너무도 엄청난 광휘를 발하는 두 개의 혈성(血星)이 사위를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기에 월광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밤하늘이 온통 시뻘건 두 개의 혈성이 휘황찬란한 광휘를 뿌려대고 있는 가운데 유독 작은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수천 년 역사상 단 한번도 사람의 눈에 띈 적이 없는 별이었다.
 다른 모든 별빛은 혈광에 가려 전혀 보이지도 않건만 그 별만은 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려 두 시진 가까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던 괴인이 돌아서는가 싶더니 그의 신형이 둥실 떠올라 엄청난 고공으로 한없이 치솟았다. 이백여 장 높이의 거대한 철탑 꼭대기에 오른 괴인은 신형은 어느 순간 마치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괴인이었다.
 
 ***
 
 “하하하, 그 녀석 참! 아무 때나 이렇게 쉬를 하면 이 아비더러 어쩌란 말이냐?”
 귀향요정 도옥진과의 사이에서 낳은 남궁휘(南宮輝)를 안고 있던 남궁호는 가슴 부위가 뜨뜻하게 적셔져 오자 너털웃음을 지으며 강보를 흔들었다.
 “어머! 상공, 어쩌지요? 여긴 상공께서 갈아입으실 만한 의복이 없는데······.”
 곁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귀향요정의 이런 모습을 만일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린 마마혈보의 마인들이 보았다면 아마도 너무도 놀라 눈을 비비고,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후후, 괜찮소이다. 한데, 내가 전에 그 얘기 한 적이 있나?”
 “예에? 무슨 얘기요?”
 귀향요정은 건포(乾布)로 남궁호의 상의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만일 말이오. 내가 연매를 구하겠다고 섬서성에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무영마랑이 진매의 사부를 시해하지 않았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하하······, 그런 걸 보면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오. 안 그렇소?”
 남궁호의 말뜻을 모르는 바가 아닌 귀향요정은 나직이 한숨을 쉰 후 장미 꽃잎처럼 아름다운 입술을 열었다.
 “호호호, 아마 소첩도 운강석굴에서 죽었을 것이에요. 하지만 상공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걸요? 아마도 소첩이 동굴 곳곳에 지독한 암계(暗計)를 안배해 두었을 테니까요. 아이, 이런 얘기는 싫어요. 혹시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소름이 확 끼쳐요. 그러니 그런 얘기는 그만하세요. 그나저나 이를 어쩌지요? 이 녀석이 너무 많이 싸서 흠뻑 젖어 버렸어요.”
 “후후······, 괜찮소. 이 녀석이 알고 싼 것도 아닌데······. 그냥 벗고 있으면 되오.”
 남궁호가 상의를 벗자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매일 연무장에서 체력 단련에 힘써 온 결과였다. 그리고 매일 적어도 두 시진 동안은 운기조식을 하여 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단전에는 내공이 거의 없었다.
 생기는 족족 여인들에게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체내에는 엄청난 양의 양강지기가 내재되어 있어 완전한 음양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여인들과 음양교합을 할 때마다 내공의 반씩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체내에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양의 양강지기와 완벽한 음양조화를 이루기 위해선 적어도 일천여 명에 달하는 순음지기를 지닌 여인들과 교합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엄청난 음한지기를 취하는 기연을 얻어야만 한다. 전설로만 전해져 오는 태극음혈(太極陰穴)의 음기를 취하거나 극음지기를 지닌 영물을 얻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것 역시 요원한 일이다. 태극음혈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극음지기를 지닌 영물을 얻는 것은 삼천 겁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하는 엄청난 기연이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남궁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만큼 강력한 양강지기를 지닌 여인을 만나 음양교합을 하는 방법이 있다. 여인의 체내에 내재되어 있던 양강지기는 남궁호의 체내에 내재되어 있는 것과는 사뭇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이것 역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여인들의 신체는 양보다는 음이 많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엄청난 양강지기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하여 남궁호는 불가능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들은 달랐다. 그와 음양화합을 하는 동안 음양조화가 완벽해지는 기연을 얻었기에 늙지 않고 늘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게 된 그녀들은 지금은 괜찮으나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그만 홀로 늙을 것이라 생각하여 각종 영약 등을 구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시피 하였다.
 하여 틈만 나면 황과수 주변 울창한 삼림 속을 헤매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에게서 각종 약초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기에 정마장에는 엄청난 양의 약초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남궁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여튼 남궁호는 매일 연무에 몰두한다. 적어도 그 두 시진 동안은 어떤 여인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는 유일한 휴식 시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여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적당한 체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궁호의 신체에는 군살은 거의 없었다. 울룩불룩한 근육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의 벗은 상체를 바라보던 귀향요정의 눈에는 야릇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본 남궁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후후······, 알았소. 오늘은 예서 자고 갈 터이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어머! 아, 아니에요.”
 귀향요정은 내심을 들킨 것이 너무도 민망스러워 손으로 사래질을 하는 한편 고개까지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후후······, 아니긴 뭐가 아니오?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남궁호는 너무도 부끄러워하는 귀향요정의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를 안았다. 그러자 자연 그의 얼굴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 부위를 짓누르게 되었고, 그녀의 옥용은 더욱 빨개졌다.
 “어머나!”
 귀향요정은 엄청난 빠르기를 가진 남궁호의 손이 순식간에 상의 자락을 활짝 벌리고 젖가슴을 베어 물자 나직이 소리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 동안 엄청나게 갈고 닦은 솜씨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아이를 순산한 지 오래 되었건만 아직 그녀의 유두는 막 출산하였을 때처럼 컸다. 남궁호가 유두를 물고 빨아들이자 거기에선 유액(乳液)이 줄줄 그의 입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남궁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그의 머리를 더욱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건만 언제든 남궁호의 입이 가슴을 차지하면 그녀는 자지러질 듯한 쾌감에 전율하였다.
 “아아흑! 아아앙!”
 약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귀향요정은 완전히 흐트러진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궁장은 넓게 벌어져 있었고, 그의 손은 궁장 속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가 어디를 어떻게 건드리고 있는지 그녀의 고운 아미는 잔뜩 찡그려져 있었고, 무엇을 참는지 이를 악무는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길게 뻗쳐 있는 옥주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앙증맞은 발가락들은 힘껏 안으로 접혀져 있었다.
 두 개의 풍만한 젖은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고, 양지유를 바른 듯 기름진 복부는 거친 숨 때문인지 심한 기복을 보이고 있었다.
 남궁호 역시 어느새 모든 의복을 벗어버린 태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설육이 까칠한 숲을 헤치는 동안 그의 손가락 하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있었고, 그 움직임에 따라 귀향요정은 자지러질 듯한 신음과 교성을 내며 그의 머리카락을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이미 수없이 여인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체험한 그녀인지라 황홀함에 젖어 있으면서도 그가 움직이기 쉽도록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남궁호의 거대한 하물은 깊디깊은 수렁 속에 잠겼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둔부가 들썩임에 따라 귀향요정은 젖은 입술 밖으로 끊임없는 신음과 교성을 내며 자지러질 듯 경련을 일으키며 황홀이라는 이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바다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숙이 침잠하여 더욱 강렬한 폭풍우에 휘말리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폭풍일과 후 남궁호의 팔베개를 베고 누운 귀향요정은 그의 탄탄한 가슴을 쓰다듬으며 가늘게 호흡하였다. 그렇게 하면 황홀감이 좀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경험상 알기 때문이었다.
 남궁호는 그런 그녀의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들을 떼어내고 있었다. 그의 뇌리로는 어릴 적 양친의 기억이 떠올라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어머, 왜요?”
 귀향요정의 물음에 남궁호는 실소를 흘리며 어릴 적 기억을 찬찬히 풀어놨다.
 “어머, 정말 그러셨어요? 혹시 우리 휘아도 깨워서······.”
 “후후······, 만일 그렇다면 나도 아버님처럼 할 거요. 이 놈! 이 싸가지 없는 놈! 자빠져 잠이나 자!”
 “호호호호······.”
 남궁호의 익살스런 흉내에 귀향요정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한동안 웃음을 나누던 침실에 또다시 열풍이 불어닥치자 귀향요정은 요를 움켜쥐고 이를 악문 채 또다시 열락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하였다.
 다음 날 서실에 앉아 각종 진법서 등을 뒤적이고 있을 때 용화서생 단리운이 찾아왔다.
 “장주! 급한 보고가 있어 찾아왔소이다.”
 “어서 오시오, 총관! 한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이까?”
 “황궁에서 온 서찰입니다. 보시지요.”
 용화서생이 넘긴 두툼한 서찰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겉에는 ‘정마대원수(征魔大元帥) 친전(親前)’이라 쓰여 있었다.
 “죄송하오만, 가셔서 희란을 좀 불러 주시겠소?”
 “존명!”
 남궁호의 말에 용화서생은 두말 않고 밖으로 향하였다.
 남궁호는 황궁에서 온 서찰이기에 혹시 희란공주와 연관된 일이 아닐까 싶어 그녀를 불러 달라 하였던 것이다.
 
 <무심한 부마도위에게.
 짐은 짐의 장중주를 취하고도 짐을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부마도위에게 이 서찰을 보는 즉시 희란을 대동하고 황궁으로 입궁하라는 어명을 내리노라.
 대명제국 황제.>
 
 “크흐!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남궁호는 혈겁 종식 후 황제와 독대를 하면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알현하겠노라는 약조를 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너무도 멀기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황궁에 간 적이 없었다.
 몇 달 전 희란공주가 옥동자를 생산하였을 때 이 소식을 알린 바가 있었으니, 필시 외손주인 남궁천(南宮天)을 보자는 소식이 올 줄 알았으나 이토록 빠를 줄은 짐작 못하고 있던 터였다.
 “호호호! 상공, 소첩을 부르셨나요?”
 “어서 오시오, 령매!”
 “무슨······ 일이 있나요?”
 희란공주는 남궁호의 신색이 약간 결연해 보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전과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천하의 여인 중 오만하기로 쌍벽을 이루던 상계일미 용문경과 더불어 지난 세월 동안 너무도 조신하고, 부덕을 두루 갖춘 여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하여, 낭군의 신색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던 것이다.
 “후후······, 황제폐하께서 입궁하라는 어명을 내리시었소.”
 “어머! 그, 그래요?”
 내심 너무도 반가운 소식인지라 반색하려던 그녀는 잠시 뒤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삼촌설력을 읽어 여심을 마치 제 속 들여다보듯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남궁호는 그녀의 내심을 짐작하고 웃음을 지었다.
 “후후······, 내놓고 반가워하여도 괜찮소이다.”
 “하, 하지만······.”
 희란공주는 남궁호가 어떤 기분인지를 모르는지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달라져도 엄청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후후······, 며칠 후 출발할 것이니 준비를 시키도록 하시오.”
 “예!”
 희란공주는 너무도 기분 좋아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으나 이를 감추고 조심스레 뒷걸음질쳐 밖으로 향하였다.
 ‘이야호! 만세!’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호는 문득 손약빙 등 많은 여인들이 그 동안 단 한번도 친정 나들이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심하였다.
 며칠 후 황과수에서는 수십 대의 향차들과 수백 필에 달하는 말들이 많은 사람들을 싣고 출발하였다.
 내친 김에 모든 여인들로 하여금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있도록 한꺼번에 출발하였던 것이다. 호위무사들은 모두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각기 오십 명씩 열 개의 대로 나뉘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여인 하나당 오십여 명의 호위무사들이 배치된 셈이다. 여인들 모두는 희희낙락한 모습이었다. 모두 오랜만의 나들이이기 때문이었다.
 가는 동안 여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일행과 헤어졌다.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궁호가 황궁에 들렀다 돌아가면서 다시 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며칠씩 묵는 바람에 황궁으로 가는 시간은 길었지만 늘 유쾌한 시간들이었다.
 황과수를 출발한 지 거의 석 달이 지나서야 간신히 황궁에 도착한 남궁호 일행은 극진한 영접을 받았다. 그것은 희란공주의 공주라는 신분도 남궁호의 부마도위라는 신분 때문도 아니었다.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천하를 구해낸 정마대원수 남궁호의 혁혁한 공로 때문이었다.
 문무백관들이 도열한 사이를 걷는 남궁호의 평범한 모습과 얼굴에 대하여 누구도 시기의 마음을 품는다든가 하는 마음이 없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황제를 밀어내고 스스로 보위에 오르겠다 하여도 반대할 마음을 지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만세! 정마대원수 만세! 남궁대협 만세! 무무색황 만세!”
 남궁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무무색황이라 칭하는 문무백관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고 다소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약간 고개를 숙였다. 이런 모습이 더 만조백관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엄청난 소리로 환호하였다. 아마도 황궁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함성이었을 것이다.
 “와와! 무무색황 만세! 무무색황 만세!”
 남궁호의 곁에서 말없이 미소지으면 걷던 희란공주의 옥용에는 흐뭇한 빛이 역력하였다.
 “황제폐하! 그 동안 심려를 끼쳐 드려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허허······, 무심한 사람 같으니. 그래, 천아(天兒)라 하였던가?”
 “그러하옵니다.”
 황제의 노안에는 반가운 빛이 역력하였다. 천하를 겁난으로부터 구해내고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승상에 봉할 터이니 이를 수락하라 그토록 전갈을 보냈건만 희란공주를 데리고 돌아설 적에는 괘씸한 마음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후 그토록 겸양지덕을 보이던 그의 태도가 어쩌면 더 황제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동안 어전회의를 하면서 만조백관들은 황제가 수없이 그의 명호를 거론하는 것을 들어야 하였던 것이다.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선 남궁호는 이번엔 승상부로 불려 들어갔다. 거기엔 당금 대명제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에 앉아 있는 승상 무답대학사 기치우가 있기 때문이고, 그는 만뇌서시의 조부이기에 거기 또한 처갓집이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강녕하시었습니까?”
 “허허······, 어서 오시게.”
 무답대학사는 미소 띤 얼굴로 남궁호를 맞았다. 그가 손서인 남궁호에게 하대를 하지 않음은 황궁의 부마도위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원체 고고한 그의 인품 때문이었다.
 무답대학사는 천하의 누구를 대하든 하대하는 법이 없는 인품 고고한 한 마리 학이었던 것이다.
 “어서 오시게. 원로에 애 많이 쓰셨소.”
 해운선자는 사위인 남궁호를 반갑게 맞았다. 그들 시부(媤父)와 자부(子婦)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해운선자 역시 집안에서 부리는 하인에게도 하대하는 법이 없는 그런 인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만뇌서시 기연빙은 조부와 모친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도 오랜만에 본 것도 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곳에는 얼마나 머물다 떠날 것인가?”
 무답대학사가 나란히 앉은 남궁호와 기연빙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며칠 후 태극은하궁으로 갔다가 온 후 떠날 계획입니다.”
 “허허······, 그런가?”
 승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라 무답대학사는 태극은하궁주가 황제에게 보낸 서찰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태극은하궁에서는 황궁으로 파발을 보낸 적이 있었다. 파발은 한 장의 서찰을 지니고 왔는데 그 서찰의 내용은 황제의 부마도위인 남궁호로 하여금 태극은하궁에 꼭 한 번 방문해 달라는 소식을 전해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동안 남궁호의 행방을 찾아 수소문해 왔지만 도저히 그의 행적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황궁으로 서찰을 보냈다는 첨언(添言)이 있었다.
 황제는 선왕이 친히 무림왕에 봉한 을지한담(乙支寒潭)의 수결(手決)이 있기에 이를 무시할 수 없어 핑계 김에 남궁호에게 서찰을 보냈던 것이다.
 “그럼 빙아는 이곳에 두고 갈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남궁호의 말에 지금껏 곁에서 말없이 있던 해운선자의 옥용에 화색이 돌았다. 오랫동안 그리던 여식과 함께 할 시간이 생겼기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남궁호는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마치 한 쌍의 금실 좋은 원앙(鴛鴦) 같은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기에 그들의 만면에서는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다.
 승상부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 곤혹스런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만뇌서시와 한 침상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동침한 적이 없는 둘은 내내 어색함 속에서 도란도란 고담준론이나 나누며 홀딱 밤을 새워야 하였다.
 둘째 날, 기연빙은 너무도 어색하고 부끄러워 침상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내내 의자에 앉아 있다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 그녀를 남궁호는 살며시 안아 침상에 뉘이고 자신은 곁에 앉아 잠든 그녀의 옥용을 바라보며 밤을 새웠다.
 도대체 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강제로 그녀를 범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을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 나날들이 며칠 이어진 후, 남궁호는 차비를 차려 태극은하궁으로 떠났다. 그의 곁에는 용화서생 단리운과 과거 태원부에서 낭인을 했던 오십여 호위무사들이 따랐다.
 그들 모두는 황과수에 머물면서 주모들로부터 각양각색의 무공을 전수받아 가히 특급 고수로 변모해 있었기에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황도에서 태극은하궁까지의 여정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황제의 어명으로 지나는 촌락마다 융숭한 대접을 하였음을 물론,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상황호천대들은 남궁호가 관할 구역을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였다. 설사 그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남궁호는 안전하였을 것이다. 천하의 그 어느 누구도 그를 해코지하려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흥안령산맥 깊숙이 진입한 남궁호는 전의 경험을 되살려 조심하였기에 백호나 혈랑의 공격도 받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하하, 어서 오게. 남궁 아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느라 이렇게 목이 길어졌다네.”
 “하하······, 그간 별래무양 하셨는지요?”
 남궁호는 옥기린 을지인의 환대 속에서 태극은하궁의 정문을 넘어섰다. 그는 혹시 남궁호가 오지 않을까 정문 위 망루에 서서 매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궁주님과 태상궁주님도 강녕하신지요?”
 “하하······, 그야 이를 말인가? 두 분 다 강녕하시다네. 아우도 잘 있네. 다만 인아가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문제이네. 그러나 이제 되었네. 아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의술이라면 문제없을 것이 아닌가?”
 을지인은 실제로 남궁호가 오면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던 하나뿐인 누이동생이 쾌차할 것이라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 태극은하궁 의사청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무림의 은인인 무무색황의 명성은 이미 여기까지 뻗쳐 있었던 것이다.
 천령군 을지후 등 궁의 수뇌부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그들과 거나하게 한잔을 나눈 남궁호는 다음 날 을지인의 안내로 곧장 무릉소축으로 안내되었다.
 을지인은 웬일인지 그곳 입구에서 남궁호만 들여보내고 용무가 있다며 사라져 버렸기에 남궁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기화이초들이 제각기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풍기는 선계(仙界)의 향기인 듯한 달콤한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곳곳에 만들어진 연못에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한창 유영을 즐기고 있었고, 그 위로는 수련(水蓮)의 넓은 잎사귀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찬란한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하자 대지는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울울창창하게 조성된 무릉소축은 덥기는커녕 시원한 기분마저 감돌 정도로 쾌적하였다.
 천천히 무릉소축의 풍광을 즐기며 산책하듯 걷던 남궁호는 가슴을 청량하게 하는 폭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시원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록 황과수의 폭포만은 못하지만 대략 십 장 높이에서 쏟아지는 폭포는 그 수량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맑기가 이를 데 없어 마치 수정처럼 보였다.
 폭포에서 쏟아진 물은 천천히 작은 계류를 통해 무릉소축의 모든 연못물들을 채우고 또다시 어디론가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호호호! 아, 시원해라!”
 문득 들리는 교성(嬌聲)에 고개를 돌렸던 남궁호는 폭포수 아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소(沼)에서 수욕을 즐기는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남궁호가 서 있는 곳은 위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지만, 아래에서는 여간해서는 그곳을 볼 수 없는 묘한 위치였다.
 소(沼)에서 수욕하는 세외천미 을지예인을 비롯한 세 시녀들의 태곳적 나신으로 돌아간 몸매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삼단 같은 머릿결은 흐르는 물에 둥실 떠올라 마치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한들거리고 있었고, 풍만한 가슴들은 물론 물 속에 잠겨 있는 하체의 검은 숲마저도 훤히 보였다.
 워낙 물이 맑았던 것이다. 마치 유영을 즐기는 인어처럼 그렇게 수욕을 즐기던 여인들이 물가로 나설 무렵, 남궁호는 세외천미 을지예인의 둔부에 마치 별 모양의 작은 점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후후······, 군자가 할 짓은 못 되는군.”
 나직이 실소를 흘리며 몸을 돌린 남궁호의 뇌리에는 인어 같았던 네 여인의 나신이 마치 화인이 찍히듯 그렇게 각인되고 있음을 몰랐다.
 또다시 천천히 소로를 따라 걷던 남궁호가 도착한 곳은 제법 큰 연못이었다. 연못의 중앙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 섬이 있었고, 그곳까지 화려하게 치장된 운교가 걸려 있었다.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운교는 마치 처음부터 한 덩이였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처럼 습기가 많은 곳에서 이음매 하나 보이지 않게 운교를 축조하는 기술에 혀를 차던 남궁호는 이번엔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정자의 지붕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우와! 세, 세상에!”
 정자의 지붕은 그야말로 금은보화로 치장된 하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금강석, 마노, 묘안석, 호박, 주옥, 금, 은 등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와는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하나하나의 기와가 모여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있는 듯한데, 밑에서 보니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식별할 수는 없었다.
 “후후······, 저 정자 하나만 뽑아다 팔면 단박에 거부 소리를 듣고도 남겠군.”
 상계의 후계를 이을 차기 상황의 입에서 이러한 소리가 나왔으니, 그 규모와 가치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을 일이다.
 천천히 운교를 건너 정자에 마련되어 있는 탁자에 도착한 남궁호는 말없이 앉아 무릉소축의 무릉도원과 같은 절경에 취해 있었다. 마치 선계의 한 귀퉁이를 훔쳐내어 가져다 둔 듯 사방팔방 절경이 아닌 곳이 없었다. 천령군의 세외천미를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할 만한 남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재잘거리는 여인들의 옥음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던 남궁호는 혼이라도 빠져나갔는지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운교를 건너오는 네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앞에서 걷고 있는 여인의 옥용은 만개한 장미와 같았고, 물먹은 울금향(鬱金香) 같았으며, 이슬에 젖은 한 송이 모란 같은 요염함과 화사함, 그리고 우아함 등 이 세상 모든 꽃송이들을 한곳에 축약시킨 듯 오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흑요석(黑曜石)같이 반짝이는 눈빛은 세상의 모든 신비를 간직한 듯 영롱하기 그지없었으며,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음색은 가히 혼을 뽑아내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는 바로 천령군의 장중보옥인 세외천미 을지예인이었다.
 전에 무려 두 달이 넘도록 함께 지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였던 아름다움이었다. 전에는 씻을 물이 부족하여 늘 꾀죄죄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전보다 약간 수척한 듯한 모습이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일층 빛내는 듯하였다.
 그녀는 아직 남궁호가 이곳에 태극은하궁에 도착하였는지를 전갈받지 못한 상태인지라 그가 정자 안 그늘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호호호! 아씨, 그 분과 함께 계실 때 정말 그러셨어요?”
 “헤헤헤, 누군지 몰라도 그 분은 되게 좋으셨것다. 아씨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두 달이 넘도록 같이 계셨다니······. 게다가 아씨께서 해 드리는 음식을 받아 먹으셨다니······.”
 “그럼 아씨, 혹시 그 분과······.”
 시비들은 세외천미에게서 오늘 처음 남궁호와 계곡 아래에서 같이 있었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한 듯 몹시도 궁금해하였다.
 “어머! 아, 아니야! 그 분은 그런 분이 아니야!”
 지금까지 그저 신비스런 미소만 머금은 채 꿈꾸는 듯한 표정이던 세외천미는 마지막 시비의 말끝이 모호해지자 약간 낯을 붉히며 손사래를 하였다.
 “호호호,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토록 우울해하셨죠? 한데, 웬일로 어제부터 그렇게 안색이 좋아지신 거죠?”
 “호호호, 맞아요. 이제 와서 얘기지만 매일 한숨만 푹푹 쉬시니까 소녀들도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제부터 옥용에 화색이 도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호호호, 그랬어?”
 세외천미가 또다시 신비스런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하자, 시비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래요, 정말 그랬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한숨일랑 쉬지 마시고 오늘처럼 소녀들하고 즐겁게 지내세요. 아셨죠?”
 “호호······,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볼게.”
 “그런데 진짜 이유는 뭐예요? 아씨는 모르시는 모양이신데, 갑자기 안색이 너무도 환해지셨어요.”
 시비들의 말에 또다시 입꼬리에 미소를 베어 문 세외천미의 입술이 나풀거렸다.
 “실은······ 그젯밤 그 분의 꿈을 꾸었어.”
 “어머, 그래요? 무슨 꿈이었죠?”
 “호호호, 그건 말할 수 없어.”
 궁장자락을 멋들어지게 휘두르며 말하자 시비들은 궁금한지 그녀의 옷자락을 잡으며 물었다.
 “아이잉, 말씀해 주세요. 일부러 말씀 안 하셔서 소비들을 궁금해 죽게 하시려는 거죠?”
 “호호호, 아무리 그래도 소용이 없단다. 하지만 이건 말해 줄 수 있어. 그날 밤 꿈에서 그 분이 내게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어.”
 세외천미는 또다시 꿈꾸는 듯한 신비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당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楊貴妃)나 서시, 달기와 같은 전설 속의 미녀조차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스런 모습이었다.
 천천히 걸어 정자 가까이 다가오던 세외천미는 문득 누군가가 안에 있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멈칫거리며 소리쳤다.
 “누구세요? 안에 누가 계세요?”
 남궁호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정중히 포권하였다.
 “후후후! 소저, 그간 안녕하시었소? 오랜만에 뵙소이다.”
 “어, 어머! 나, 남궁 공자님!”
 세외천미의 사슴 같은 눈망울 가득히 반가운 빛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영롱한 이슬이 맺히고 곧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마비라도 되었는지 반쯤 연 입술도 닫지 못하고 있었고, 손은 물론 몸 전체가 순식간에 경직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못 본 사이 몰라보게 아름다워지셨구려.”
 “고, 공자님!”
 남궁호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이야기하는 사이 세외천미는 거의 외마디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그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하였는지 그녀는 스스럼없이 그의 품에 안긴 것이다.
 “흐흐흑! 그 동안 왜, 왜 서찰도 안 보내시고······. 흐흐흑······!”
 세외천미와 남궁호는 장래를 언약한 사이도, 그렇다고 그런 언질 비슷한 것도 없건만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떠나 있던 정인이라도 온 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 홀로 남궁호를 그리면서 마음속으로 정을 키워 왔기에 그 역시 그런 줄 알고 잠시 착각한 것이다.
 “후후······, 소생도 소저를 보고 싶었소이다.”
 남궁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오돌오돌 떨기까지 하는 세외천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때 그들의 곁에서 지켜보던 세 시비의 눈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같은 여자의 몸이지만 그녀들이 보기에도 세외천미는 너무도 아름다워 이 세상에서 짝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 그녀의 짝이라면 적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준수한 미청년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아무리 보아도 남궁호는 준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어머! 아씨의 눈이 어떻게 되셨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토록 평범한 분을······.’
 ‘세, 세상에! 아씨께서 그토록 칭찬하시던 분이 바로 저 분?’
 ‘어머나! 이건 말도 안 돼! 적어도 아씨의 정인이라면······.’
 세 시비의 눈에 의혹의 빛이 그득할 즈음 문득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세외천미가 뒤로 물러서며 옥용을 붉혔다.
 ‘이, 이런! 공자와 난 어떤 언약도 없었거늘······.’
 너무도 쑥스러워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던 세외천미의 모습은 가히 천상의 선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고혹스런 모습이었다.
 ‘흐음, 역천내미지상(逆天內美之像)이라더니 과연······.’
 남궁호는 와락 그녀를 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곁에 시비들도 있고 하여 극고의 자제력을 유지하려 애쓰면서도 세외천미의 미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후후······ 소저, 소생을 이렇게 계속 세워 둘 참이오?”
 “어, 어머! 얘, 얘들아! 빨리 가서 차 좀 가지고 오너라.”
 “예에!”
 세외천미는 너무도 경황이 없었는지 말을 더듬기까지 하였고, 시비들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운교를 건너갔다. 이제 둘만이 남은 셈이다.
 “그래, 그 동안 어찌 지내셨소?”
 “소, 소녀는 잘 지냈어요. 그런데 경매와 혜매는 잘 있는지요? 그리고 공자께서도······.”
 어색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그녀는 자신의 옷자락을 조물락거리며 고개를 숙여 작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후후······, 소저 덕분에 잘 들 있소이다. 한데, 어찌 된 일이오? 궁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소저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던데······.”
 “아, 아니에요. 소, 소녀는 괜찮아요.”
 ‘흐흑! 실은 공자님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어요. 한데, 단 한 번도 소식도 전해 주시지 않고······ 너무해요!’
 세외천미는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으나 속마음을 있는 대로 드러낼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남궁호는 세외천미가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바로 고금제일색마인 천면인 추자도가 남긴 삼촌설력의 위력이었다.
 ‘후후······ 소저, 소생에겐 소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구려. 이미 소생의 곁에는 열 명의 처가 있거늘, 소저는 소생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과 맺어져야 할 것이오.’
 남궁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령군 을지후가 얼마나 세외천미에게 애정을 쏟으며 얼마나 기대가 큰지 익히 알고 있었다. 어제 저녁 천령군이 문득 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하하하, 이건 본 궁주의 자랑 같네만 인아는 장차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와 맺어 줄 셈이네. 그 아이는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아이이니, 아마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치 못할 것이네. 한데, 남궁 소협은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본 궁주에게 추천해 주길 바라네.”
 “하하하, 알겠습니다. 소생이 중원으로 돌아가면 눈에 불이라도 켜고 다니면서 뛰어난 인재를 추천하겠습니다.”
 남궁호는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쓴웃음을 짓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앞에 앉은 세외천미는 마치 따사로운 봄날 아름답게 지저귀는 종달새 마냥 그 동안 있었던 모든 대소사를 쫑알거렸다.
 “호호호, 아씨, 그렇게 즐거우세요?”
 “어머! 흥! 너희들이 이제 막 나를 놀리는구나, 호호호. 그래, 너희들 말대로 너무나 좋다. 왜?”
 “호호호, 알았어요. 차를 가져왔으니 마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그윽한 용정차(龍精茶)를 마시며 남궁호와 세외천미는 이야기꽃을 피워 갔다. 그런 그녀의 옥용엔 온통 화사한 빛이 그득하였고, 마치 빛이라도 나는 듯 그렇게 밝았다.
 이때 멀리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외천미의 큰 오라비인 옥기린 을지인이었다.
 두 남녀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사라졌다. 그는 남궁호를 이곳에 초청하면서 혹시 누이동생이 그를 연모하여 우울증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어 왔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남궁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어 타인을 끌어당긴다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평범한 외모이기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의 하나뿐인 누이동생이 이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도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벌써 열 명의 처가 있는 남궁호는 그의 상상 속에서 그 동안 애써 제외되고 있었다.
 ‘인아, 저 아이가 남궁 아우를? 설마 했는데······. 으음, 이 일을 어쩐다? 아버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을지인은 황급히 신형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태극은하궁은 강호에 알려진 대로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문파이다. 다만 그 잠재력이 강호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월등하게 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 태극은하궁주의 하나뿐인 장중주가 동족인 한족(韓族)이 아닌 한족(漢族)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예로부터 한족(韓族)은 단일민족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그렇기에 한족들은 같은 민족끼리만 혼례를 올릴 뿐 이방 민족과는 좀처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는 면이 강했다.
 과거 중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고구려의 후손들인 태극은하궁도들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방 민족과 혼례를 올린 적이 없었다.
 용맹할 뿐만 아니라 지혜도 뛰어난 한족은 어쩌면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 은연중 강호를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족의 특성은 어릴 적에는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으며, 성장하더라도 팔을 안쪽으로 굽히면 가로로 가늘게 주름이 잡힌다는 특성이 있었다. 이것이 이민족과 구분되는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하여 태극은하궁도들이 강호에서 비명횡사하더라도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외천미가 이민족인 한족(漢族)을, 그것도 이미 십여 명이나 처가 있는 사람을 연모한다는 것은 어쩌면 엄청나게 큰 사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옥기린이 황급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의 화기애애한 담소는 끝날 줄 몰랐다. 세외천미는 언제 우울증으로 시달렸는지 모를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아버님! 소자,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허허······,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예!”
 태극은하궁주의 처소인 태극전(太極殿)은 정갈하게 기와를 올려 만든 작은 전각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이를 축조한 장인들의 솜씨는 실로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여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중원의 전각과는 달리 이곳은 신을 벗고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
 황급히 혁화(革靴)를 벗고 안으로 들어선 옥기린은 한가하게 서책을 읽고 있는 천령군에게 고개를 조아린 후 입을 열었다.
 “소자, 무릉소축에 다녀오는 길이옵니다.”
 “호오, 그래? 그럼 인아는 어떻더냐? 이번에도 남궁 소협이 그 아이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 하더냐?”
 “후우! 인아의 우울증은 벌써 치료가 되었습니다. 한데······.”
 “오, 그래? 남궁 소협이 과연 신묘한 의술을 지녔구나. 그런데 한데라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게냐?”
 천령군의 말에 옥기린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갈등에 시달리는지 식은땀을 내고 있었다.
 “어서 말하거라! 인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냐?”
 “아, 아니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냐? 어서 말하거라!”
 천령군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자 옥기린의 입술이 지그시 깨물렸다. 차기 태극은하궁주가 될 그이기에 이러한 일은 빨리 매듭을 짓는 편이 양측 모두에게 좋을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아버님! 인아가, 인아가······.”
 “허어! 평소의 너답지 않게 왜 이리 뜸을 들이느냐? 이 아비가 답답해 죽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게냐?”
 옥기린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며 침음했다.
 “흐음, 인아가 남궁 아우를 연모하는 모양입니다.”
 “뭐, 뭐라고?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인아가 남궁 소협을 연모하고 있다고?”
 “그, 그러하옵니다.”
 천령군은 몹시도 놀랐는지 잠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이런 변이 있나? 인아가 그를 연모한단 말이지?”
 “예! 소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인아가 남궁 아우를 애타게 그리워하여 그토록 우울해하였던 모양입니다.”
 옥기린의 말에 천령군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궁으로 서찰을 보내 남궁호를 이곳으로 초청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그냥 두었다면 몇 년 후면 그 일을 잊고 다시 쾌활해졌을 것이다. 한데 너무도 우울해하는 세외천미를 보다 못하여 남궁호를 불러들인 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 천령군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흐음, 이를 어쩐다?”
 “······!”
 옥기린은 섣불리 의견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궁호와 맺어 주자고 할 수도, 그렇다고 그를 내치자고 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남궁호가 평범한 의원이었다면 그냥 내쳐도 무방할 것이나 이미 그에게서 새반안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과거가 있기에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남궁호는 현재 대명제국의 부마도위가 아니던가! 절대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분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천령군을 보며 침묵하던 옥기린이 반시진 만에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소, 소자의 생각으론······.”
 “그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천령군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옥기린이 입을 열자 바로 그 말을 받았다. 평소 을지인은 비록 학문에 있어서는 아우인 새반안에 다소 뒤지는 면이 있으나 처세나 기타 등에서는 지혜롭기에 지금까지 궁의 대소사에 관여하면서 단 한번도 그릇된 결정을 내린 적이 없었다.
 “아버님! 소자의 생각으론 인아의 감정이 흐르는 대로 그대로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옵니다. 인아는 아버님에게는 하나뿐인 여식이지만, 소자에게도 하나뿐인 누이동생입니다. 소자는 그저 그 아이가 좋은 배필을 만나 일평생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이는 아마 아버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
 “인아가 지금 방년의 나이라면 아직 어려서 잘못된 생각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그 아이는 지금 이미 혼기를 넘긴 과년한 나이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에게 총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총명하지 않습니까? 그런 아이가 남궁 아우를 저토록 연모한다면 필시 곡절이 있을 겁니다. 소자가 보기에 남궁 아우는 어디에 내놔도 괜찮을 그런 사람입니다. 다만 무공과 용모나 그럴 뿐······.”
 “그럼 인아를 그에게 주자는 말이냐?”
 천령군의 음색에는 다소 노화가 곁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일파의 지존답게 이를 억누르려는 것 또한 담겨 있었다.
 을지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누이동생인 세외천미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열망에 젖어 다음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직접 시험하셔서 모든 관문을 통과한다면 그에게 인아를 맡겨도 좋을 것이란 것이 소자의 생각이옵니다.”
 “그는 한족(漢族)이 아니더냐? 언제 본궁의 궁도가 이민족과 혼례를 올린 적이 있었느냐? 그건 안 될 말이다.”
 “흐음, 아버님······.”
 그날 밤 태극전에서는 밤새 입씨름을 하는 부자가 있었다. 을지인은 설득을 하는 쪽이고, 천령군은 설득을 당하는 쪽이었다. 옥기린이 비록 언변이 좋고 그릇된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명분상에서 그가 다소 밀렸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세외천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에 일평생 독수공방하는 불행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실 태극은하궁의 수많은 궁도들 가운데서 그녀의 배필을 찾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세외천미를 연모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천령군이나 옥기린의 눈에 차는 인물이 없었기에 지금까지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부자의 생각은 같았다. 진심으로 세외천미를 아껴 주고 일평생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배필을 원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지상 최고의 미모를 지녔고, 게다가 거기에 걸맞는 총명함을 지닌 그녀이기에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섯 관문을 넘어야 했다.
 태극오관이라 이름 붙인 관문에 도전한 젊은이는 오만이 넘었다. 하지만 단 하나도 아직까지 태극오관을 넘어선 인물은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도 태극은하궁 한 귀퉁이에 마련된 태극오관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천령군이나 옥기린은 누구도 태극오관을 돌파할 만한 인물이 적어도 태극은하궁 내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어려운 관문이었던 것이다. 있다면 그것은 궁주 삼부자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아침이 되어서야 천령군이 손을 들었다. 옥기린의 집요한 설득에 질렸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조건이 있었다.
 바로 태극오관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극오관은 무공을 시험하는 관문이 아니기에 옥기린 역시 그것만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남궁 아우가 태극오관에 도전해 줄 것인지······.’
 부친은 어떻게 설득하였으나 이번엔 남궁호가 관문에 도전하도록 하는 일이 남은 셈이 된 옥기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사라졌다.
 
 
 제3장 태동하는 겁난
 
 
 강호에 새로운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중원의 서쪽 청해성(靑海省)에서 발원한 소문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금강수라마강시 등으로 인한 혈겁이 끝나고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강호에 엄청난 기세로 확산되는 일월교(日月敎)가 바로 그것이었다.
 정파의 승리로 지하 음습한 곳으로 잦아들었던 마도인들이 대거 참여한다는 일월교는 해괴한 형상을 한 마신(魔神)을 믿는 종교 집단이었다.
 쌍두사비(雙頭四臂)를 한 마신의 이름은 혈황마군(血荒魔君)이라 하였다. 마신의 곁에는 늘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한 여마신이 있는데, 그녀는 사갈요희(蛇蝎妖姬)라 하였다.
 누구든 일월교에 몸을 담으면 절세의 절학을 전수받음은 물론 만일 누군가와 원한이 있다면 그 원한마저 풀어준다 하여 순식간에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흑색 장포를 걸치고 가슴에는 기괴한 형상의 철탑이 수놓아져 있다 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그늘에 묻혀 있었다.
 정식으로 개파대전을 연 것도 아니고 또 아직은 강호 마도의 위세가 잔뜩 움츠러든 상태인지라 겉으로 드러내 놓지 않고 암암리에 교세를 확장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듯,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이 소문 덕에 일월교의 성세는 오히려 늘어만 가고 있었다.
 깊은 산중에 은거 중이던 전대거마들이 대거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었고, 지금까지 하류잡배 노릇을 하던 많은 한량들이나 불한당들의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 일월교의 지파들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러다 강호에 또 한 차례 혈겁이 불어닥치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모두들 모였느냐?”
 “예, 전주(殿主)!”
 “좋다. 이번 달 목표 인원은 어떻게 되었느냐? 달성되었느냐?”
 “크흐흐······ 초과 달성이옵니다, 전주!”
 낙양성 저잣거리 한쪽에 있는 도살장 뒤편 허름한 전각 안에서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각 안에는 마치 뱀의 눈처럼 눈꼬리가 길게 찢어진 사십 전후의 인물이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여덟 명의 장한들이 공손한 자세로 시립하고 있었다.
 사십 전후의 장한은 이곳 낙양 뒷골목에서 불한당 짓을 자행하던 낙양일부(洛陽一斧) 장추린이란 자였다. 그는 원래 낙양의 유명한 홍등가인 추월로(秋月路)의 한 기원에서 매화부(梅花夫:기둥서방) 노릇을 하던 자다.
 그는 눈꼬리가 찢어지고, 입술은 얇으며,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고, 매부리코를 하여 대체적으로 잔인하며, 포악하게 생겼다.
 그는 생긴 대로 성품이 괴팍하고 잔인독랄하였다.
 그런 그에게는 무공은 없었지만 타고난 근력과 도끼를 다루는 솜씨만은 일품이었다. 하루에 보통 사람 일고여덟이 간신히 팰 수 있을 분량의 장작을 패는 그의 부술(斧術)은 미친 소의 정수리를 내리쳐 단 한번에 즉사시킬 정도였다. 전문적인 도부(屠夫)도 아닌 그의 이런 부술은 상당한 것이었다.
 평생을 기원의 기녀들 상대로 마치 기생충처럼 뜯어먹으며 살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일월교 낙양전 전주가 되어 나타났다.
 과거 낙양일부를 괄시하던 다른 무뢰한들이 그의 도끼에 정수리가 갈라지는 비운을 맞아하게 되자, 한 달 만에 낙양성을 주름잡던 다른 자들이 모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명실상부하게 낙양성의 암흑가를 장악한 것이다.
 그의 앞에 시립해 있는 자들은 과거 낙양성 암흑가를 주름잡던 악한들의 괴수들이었지만 이제는 낙양일부의 충실한 개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 그럼 낙양전의 인원이 몇이나 되는 것이냐?”
 “크흐흐······, 모두 삼백하고도 칠십이 명입니다, 전주!”
 “좋다! 다음 달엔 반드시 오백을 채우도록. 낙양전의 인원이 일천이 되면 너희들에게 절정의 무공을 전수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한눈 팔지 말고 교도들을 모집하도록 하여라. 한데, 교도들 가운데 여인의 숫자는 전부 몇이냐?”
 낙양일부의 매서운 눈초리에 지금까지 보고하던 장한은 겁을 먹었는지 약간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여인은 모두 열아홉입니다.”
 “열아홉? 그걸 지금 보고라 하였느냐? 본좌가 전에 무어라 하였느냐? 교주께서 우리 일월교는 교도들끼리 혼례를 올려 번창하여야 하니, 사내들뿐만 아니라 여인들을 많이 입교시켜야 한다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겨우 열아홉이라니?”
 장한은 또다시 주춤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모습은 몹시도 공포에 젖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 그게······ 일월교의 교리를 듣고는 모두 도망을 가는 바람에······. 그, 그래서······.”
 “뭐라고? 무엇이라 교리를 설명하였느냐?”
 낙양일부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올려지자 보고하던 자는 하의에 소변이라도 지렸는지 축축이 젖어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과거 낙양일부에게 보고를 하던 이인자가 그의 도끼에 정수리가 갈려져 뇌수를 쏟으며 죽는 것을 본 이후에 생긴 습성이었다.
 사실 낙양일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기원의 주인을 반으로 쪼개 죽인 일이었다. 추월루(秋月樓)라 이름 붙었던 기원은 낙양에서도 꽤 연혁이 깊은 기루였다.
 전에 이곳 매화부로 있을 적 기녀들을 혹독하게 다루던 그를 주인이 질책하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그를 죽여 버린 것이다. 그 후 누구든 그의 눈에 거슬리는 자는 그의 도끼를 선혈로 적셔야 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그가 일월교 낙양전주임을 밝힌 이후 그의 손에 죽은 수하들만 해도 벌써 이십여 명에 달하였다. 그렇기에 이토록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하는 자는 과거 낙양일부를 함부로 대한 경험이 있기에 언제 그의 도끼가 날아들지 모를 일이기에 더더욱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 그게 일단 일월교도가 되면 누가 원하든 그 자와 그 짓을 해야 한다고······.”
 “이런 바보, 멍청이 같은 놈! 그렇게 말하면 색욕에 미쳐 환장한 계집이 아니라면 누가 입교하겠느냐? 네놈은 머리가 그것밖에 되질 않느냐?”
 “그, 그럼 어떻게 말해야······.”
 장한은 더욱 겁에 질린 듯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이 바보 같은 놈아! 계집들을 입교시킬 때는 이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전부 맛보게 해 주겠다고 해야 한다 몇 번이나 말했느냐? 그렇게 해도 입교할까말까 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 그게 그 말 아닌가?”
 장한은 떨면서도 낙양일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일월교의 교리에 의하면 사내건 계집이건 같은 교도들 중 누가 원하든 항상 응해야 한다 되어 있었다. 신분의 고하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만일 여인이 더 높은 직급에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응해야 한다는 것이 교리였다. 만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즉시 일월십형(日月十刑)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일월십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형벌이다.
 가장 가벼운 형벌인 장형(杖刑)만 해도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무려 일 장 높이에서 떨어지며 내리치는 오백 장(杖)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가벼운 형은 석형(石刑)이다. 삼 장 거리에서 던지는 주먹만한 돌 오백 개를 맞아야 하는 형이다. 던지는 자가 제아무리 살살 던지려 해도 만일 죄수의 몸에 맞추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해지기에 세게 던지기 마련이다.
 셋째는 맨주먹으로 서장흑견(西藏黑犬) 다섯 마리를 물리쳐야 하는 견형(犬刑)이다. 거의 송아지만 한 서장흑견은 웬만한 늑대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이기에 대부분 그들의 먹이가 되기 마련이다.
 넷째는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사굴(蛇窟) 안에서 열흘을 버티는 독형(毒刑)이다. 굶주려 독이 잔뜩 오른 사굴에서 아직까지 살아난 사람은 없다 알려져 있었다. 이 형은 여인들에게만 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다섯째는 잔형(殘刑)이다. 음양교합에 응하지 않은 자가 사내이면 성기를 절단하는 것이고, 여인이라면 국부나 유방을 도려내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여섯째는 사형(蛇刑)이다. 비늘이 있는 뱀을 선택하여 사내의 항문이나 여인의 국부 속으로 넣은 뒤 이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형이다. 뱀이란 놈은 묘한 구석이 있어 앞으로 전진할 때는 비늘이 거의 일어서지 않으나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면 끌려가지 않으려 비늘을 잔뜩 세우는 경향이 있다. 이 형에 처해지면 사내는 거의 반년 동안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용변을 보아야 하고, 계집은 더 이상 계집 구실을 못할 정도로 국부가 망가지고 만다.
 일곱째는 첨형(尖刑)이다. 일 장 정도 길이에 굵기가 어른 팔목보다 조금 굵은 나무를 끝이 뾰족하게 깎은 후 이를 항문에서부터 박아 넣는 것이다. 형을 당하는 자가 제아무리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더라도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척추를 뚫고 목덜미까지 빠져나오게 한다. 이렇게 한 뒤 사람들이 오가는 한가운데 세워 두게 되면 필경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기 마련이다.
 여덟째는 말뚝을 박고 손목과 발목을 물에 잔뜩 불린 가죽끈으로 묶는 혁형(革刑)이다. 가죽이 말라 가면서 수축되어 사지를 잡아당기는데, 어찌나 조이는지 종래에는 사지 중 일부가 찢어져 나가게 되는 고통스런 형이다.
 아홉째는 침형(針刑)이다. 팔만사천 개에 달하는 제각기 굵기와 길이가 다른 침을 전신에 박아넣는 형이다. 침의 끝에는 고통을 주는 독이 발라져 지독한 통증에 스스로 혀를 깨물게 하는 잔혹한 형이다.
 마지막 열 번째 형은 교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정형(精刑)이다. 사내라면 지독한 음약에 취하여 오백 번을 파정(破精)할 때까지 음양교합을 하도록 하여 목내이처럼 삐쩍 말라죽게 하며, 계집이라면 쉬지 않고 오백 명의 남자들을 받아야 하는 형이다.
 이 형에 당하게 되면 사내든 계집이든 반드시 죽게 되는 형이다. 이런 일월십형이 있기에 일월교도들은 감히 교리를 어기지 못하고 원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대와 교합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장차 일월교의 기둥이 되기 위하여 혹독한 수련을 거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약관이 되기 전에 현재 구파일방 장문인에 버금가는 무공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기에 누가 어미인지 모를 것이고, 그 어미란 여인은 수도 없는 상대와 교합을 하였을 것이기에 자연 누가 아비인지도 모르게 된다.
 제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인성이 메마를 것이고, 그렇게 됨으로써 혹독한 수련을 거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일월교는 독특하게도 입교를 맹세하면 즉시 어깨에 해와 달을 문신하게 되어 있었다. 이는 일월교의 모든 교리를 철저히 지키겠다는 맹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교리를 미처 몰랐다고 항변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일벌백계 당하여 다른 교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월십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를 지켜본 다른 교도들은 심중으로는 불만이 있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전혀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장한은 교도들을 모집할 때 남과 여의 비율을 반반으로 하라는 말을 누누이 들었었다. 그래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건달이나, 불한당들을 찾아가 일단 일월교에 입교하면 적어도 교내에서만큼은 언제든 원하는 어떤 여인과도 즐길 수 있으며, 절정의 무공을 전수한다 감언이설로 꾀었다.
 그의 말에 혹한 대부분의 불한당들이 입교를 하였으나 여인들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질겁을 하며 도망쳤다. 그나마 입교한 열아홉 여인들은 모두 나이를 먹어 찾는 이가 아무도 없는 퇴기이거나 너무 박색이어서 모두가 외면하는 그런 여인들뿐이었다.
 하여 그의 말을 듣고 입교하였던 자들 중 상당수가 그에게 드러내 놓고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낙양전 내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여인이 없다고······.
 “이 멍청이 같은 놈아! 어떤 방법을 쓰든 빨리 계집들을 교도로 만들도록 하라. 다음 달까지 적어도 이백오십 명은 계집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만일······ 크흐흐흐,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네놈을 정형(精刑)에 처할 것이다.”
 “예에? 저, 정형이오?”
 “크흐흐흐, 그렇다. 네놈은 며칠 전 곽가 놈이 정형에 처해져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으렷다?”
 한 십여 일 전, 낙양성 대장간에서 일하던 곽가라는 자는 모든 일월교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정형에 처해졌었다. 몹시도 박색인 여인이 그와 동침을 요구했으나 거절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지독한 음약에 취한 상태에서 열아홉에 달하는 여인들과 차례로 음양교합을 하게 되었고, 예순일곱 번을 파정한 끝에 기력이 탈진하여 죽고 말았다.
 처음엔 황홀한 표정을 짓던 그였으나 파정의 횟수가 더해 감에 따라 점점 이지러지던 그의 표정이 생각나 장한은 부르르 떨다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거의 애원조로 말하였다.
 “저, 전주! 다음 달까지 이백오십 명을 채우라 하심은 속하더러 죽으라는 말과도 같소이다. 제, 제발 방도를 알려 주시오.”
 고개를 조아리고 이마로 바닥을 치며 애원하는 그 모습을 보던 낙양일부의 입가에는 조소가 떠올랐다. 과거 매화부 노릇을 할 때 눈앞의 장한은 옆 기원의 총관을 맡고 있던 자였다. 그때 그에게서 괄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면서 자신의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즐거웠던 것이다.
 “크흐흐흐, 그러니까 네놈은 바보라는 말이다. 말로 해서 안 되면 힘으로 하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 크흐흐흐,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강제로라도 교도를 만들어라. 그렇게 한다면 쉽게 이백오십이라는 숫자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럼 납치를 해도 괜찮다는······.”
 “크흐흐흐!”
 낙양일부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어리자 장한의 얼굴에도 금방 화색이 돌았다. 정식으로 일월교에 입교시킬 수 없다면 강제로 입교시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여인들을 납치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던가!
 예전에 그는 양민들의 딸이나 부인 중 반반한 여인들을 골라 점찍은 뒤 한밤중에 그녀들을 납치하여 온갖 재미를 본 뒤 사창굴에 팔아먹어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 자였다. 그러니 납치가 손쉽게 교도를 늘리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단 납치한 뒤 여러 명으로부터 겁탈을 당하게 되면 수치심과 아울러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여인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 것이다.
 “크흐흐흐, 이왕 그렇게 할 것이면 반반한 계집들을 고르도록 하라. 알겠느냐?”
 “존명!”
 장한의 얼굴엔 언제 공포에 떨었느냐는 듯 욕정에 번들거리는 듯한 안광과 흉소가 어려 있었다.
 “크흐흐! 걱정 마십시오, 전주! 다음 달까지 반드시 목표량을 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시식하실 숫처녀 삼십을 준비하겠습니다.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적적하지 않으실 겁니다.”
 “크흐흐, 좋다. 본좌는 네 말만 믿고 기대하고 있겠다.”
 “존명!”
 장한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 손은 주먹을 쥐어 가슴에 대는 일월교만의 예를 취한 후 사라졌다. 사라지는 장한의 뒷모습을 보던 낙양일부의 입에서는 앙천광소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크하하핫!”
 과거에는 감히 대들지도 못했던 자가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에 너무도 통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낙양일부는 너무도 심심한 나날들을 보내다 우연히 만난 괴한에게서 한 달 동안 일월교에 대한 교리와 무공을 배운 것이 꿈만 같았다.
 자칭 일월교 하남지부(河南支府) 순찰사자(巡察使子)라는 그는 엄청난 무공을 지닌 절정의 고수였다. 그에게서 배운 부술은 그를 단숨에 낙양성 암흑가를 장악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삼 개월 내에 낙양전에 일월교도들이 일천으로 늘면 자신을 일월교 총단으로 보내 집중적인 무공을 수련을 거쳐 자신과 버금가는 고수로 만들어 준다는 언질을 받았기에 이토록 교도들을 늘리는 데 신경쓰는 것이다.
 순찰사자의 말로는 중원의 각 성마다 각기 삼십 명씩의 순찰사자가 있으며, 각 성을 총괄하는 일월교 지부가 있다 하였다.
 각 성의 지부주(支府主)는 일월교도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장강을 기점으로 강북에는 혈황각주(血荒閣主)가 총괄하고, 강남은 사갈각주(蛇蝎閣主)가 지휘한다 하였다.
 혈황각 휘하에는 사단이 있는데 그들을 흑단(黑團), 자단(紫團), 적단(赤團), 황단(黃團)이라 하였다. 각 단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절정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였다.
 사각갈 휘하 사단은 청단(靑團), 녹단(綠團), 남단(藍團), 홍단(紅團)이라 하였다. 그들 역시 일백여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였다. 그들은 각기 소속된 단의 명칭과 동일한 색상의 장포를 걸치고 있기에 쉽게 신분을 알아낼 수 있다 하였다.
 이 각의 위로는 총단이 있는데, 거기엔 얼마만한 인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순찰사자도 모른다 하였다.
 결국 현재 중원에 있는 일월교도 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의 수효는 이천오백이 넘는다 하였다. 이 수효는 각 현(縣)이나 부(府)를 관장하는 전주를 포함한 교도들의 수효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니, 그 이하로는 얼마만한 숫자가 되는지 짐작조차 못할 일이다.
 낙양전주를 맡고 있는 낙양일부조차 하남지부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지부주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순찰사자 하나뿐이었다.
 “크흐흐흐, 이제 시작이다. 한낱 매화부로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던 내가 일월교 전주가 되다니······. 하루라도 빨리 천 명을 채워 총단으로 간 뒤 기필코 일월교 핵심인물이 되고야 말겠어. 크크크, 한데 이 자식들이 과연 잘 해낼까?”
 낙양일부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을 때 그의 휘하들은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혹시 낙양일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진심으로 일월교에 입교하고 싶어하는 여인들만 만나 왔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하여 삼백오십여 일월교도들은 눈썹이 휘날리게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점찍어 두었거나 자신들이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여인들을 납치하기 위하여 삼삼오오 짝을 이뤄 사라진 것이다.
 이런 일은 비단 낙양성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다른 지역에 비하여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벌써부터 천하각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여식이나 부인이 실종되었다며 그녀들을 찾아 헤매는 사내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처음에 사라진 여인들은 주로 청루나 홍루 등 홍등가에 있던 여인들이었다. 그들을 납치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일월교도들이 그 바닥에서 놀던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기루에 있던 여인들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는 양민들의 여식이나 고관대작의 여식, 탁발 나온 비구니나 여도사 등이 사라지더니 급기야는 무림 세력의 여인들까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일월교도들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올 정도로 대담해졌던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수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던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어떤 사내들이 열 계집을 마다하겠는가!
 일월교 각 전(殿)마다 반반한 계집들이 그득하고, 원하기만 하면 그녀들 중 아무하고나 음양교합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간 자들이 엄청난 숫자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일월교에 입교한 후 자신들이 원하는 여인들과 얼마든지 운우지락을 나눌 수 있었기에 나날이 일월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지고 있었다.
 소문으론 일월교도들의 수효가 백만이 훨씬 넘었다는 말도 들려왔다. 하지만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강호에 독버섯 같은 일월교가 날마다 창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강호의 제 문파들과 관에서는 그들을 색출하려 갖은 수를 썼지만 그들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과거 마마혈보가 그랬듯이 어쩌다 그들의 종적을 발견하여 완전히 괴멸시키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다른 전이 들어서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여 각 문파와 관아에서는 여인들을 지키기 위한 방책을 세웠다. 그러자 적어도 무림이나 관의 여인들 가운데 실종되는 여인들의 수효는 급감되었다. 그러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양민들의 여식이나 부인들은 더 많이 사라져야 했다.
 아무튼 강호는 새로운 겁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대형의 말씀은 소생더러 태극오관에 도전해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본궁에서는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여 그에 걸맞는 무공을 전수한다네. 과거 왕휘지가 말했던가?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을 자네는 알 걸세. 본궁의 무공은 중원의 무학과는 차원이 다르네. 이 무학은 몇 단계로 나뉘어져 있네. 그 중 가장 강한 무공은 아버님과 우리 형제 외에는 익히지 못했네. 본궁에도 그것을 익힐 만한 자질을 갖춘 자가 없기 때문이지. 본궁에서는 설사 궁주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질을 갖추지 못하면 무공을 전수하지 않는다네.”
 “한데, 왜 소생에게······?”
 “후후······, 자네는 이제 누가 뭐라 해도 도산검림을 걷는 무림인이네. 그러나 우형이 알기론 자네의 무공은 일천하기 그지없네. 비록 자네가 엄중한 호위를 받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한계가 있는 법일세. 만일 누군가 자네를 해하려 암습을 한다면,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와 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말일세.”
 “······!”
 남궁호는 옥기린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 암습하려 마음먹고 은신해 있다 공격한다면 자신으로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상황호천대 등의 엄중한 호위를 받기는 하나 혼자 있을 때라면 상황이 틀려진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형은 자네가 태극오관에 도전하길 바라네. 태극오관을 깬다면 아마 아우의 몸 하나는 능히 지킬 능력이 생길 것이네.”
 “한데, 소생은 태극은하궁도도 아니고 외인인데······.”
 남궁호는 자파의 무공을 외인에게 전수하려 하지 않는 습성이 강한 무림에서 왜 이런 호의를 보이는지 궁금하였다.
 “후후······, 우형에게 있어 자네는 남이 아니네. 아우의 목숨을 구해 줬고, 또한 인아의 우울증을 치료해 준 은인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제는 우형의 의제가 아니던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무림에서는······.”
 을지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며 남궁호의 말을 끊었다.
 “자네의 말이 무엇인지 우형을 잘 아네. 이건 충심에서 하는 말일세. 우형은 자네가 본궁과 좋은 유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으면 하네. 그런 자네가 살수의 손에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휴우! 그 다음은 말도 하기 싫으네. 우형이 며칠 전 아버님으로부터 내락을 받아 둔 상태이니, 우형의 말을 믿고 일단 태극오관에 도전하게.”
 “하지만······.”
 옥기린은 남궁호가 무림의 법도에 얽매여 계속하여 거절하려 하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궁에서 외인에게 태극오관을 허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세. 아버님과 장로 등으로부터 간신히 허락을 받은 것이니 두말 말고 도전하게. 자네가 만일 우형을 형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게. 그러나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앞으로 우형은 자네를 보지 않을 것이네!.”
 “예에? 그, 그건······. 알았습니다. 대형의 말씀대로 하지요.”
 남궁호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는 옥기린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자신의 안위를 바라는 열망에서 태극은하궁주를 설득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우우! 고맙네. 태극오관은 내일 열릴 것이니, 이제 가서 편히 쉬게.”
 “알겠습니다.”
 남궁호는 옥기린의 처소에서 나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며칠을 계속하여 무릉소축에서 지내는 동안 세외천미에게서 조금의 우울증 증상도 발견할 수 없어 그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일부러 수를 쓴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여 무릉소축에서 나와 태극은하궁 내원에 마련된 작은 전각을 배정받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 사이 많은 병자들이 그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는 한편 매일 저녁 새반안, 옥기린 형제와 더불어 고담준론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새반안의 제의로 셋은 의형제를 맺었다. 옥기린이 맏이고, 새반안이 가운데, 그리고 가장 나이가 어린 남궁호가 막내가 되었다.
 오늘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전각 안에 마련된 희귀한 서책들을 읽는데 옥기린이 보자는 전갈을 보내 그를 찾아갔더니 대뜸 태극오관에 도전하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대형이 정말 궁주님을 설득하느라 애를 많이 쓰신 것 같아.”
 남궁호는 아까 옥기린의 입술이 짓물러 터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심인성(心因性)으로 마음 고생이 많이 했다든가 할 때 생기는 것이었다.
 “태극오관이라······. 형님의 말대로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대장부가 아니지.”
 남궁호는 진심으로 옥기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러 나왔다. 외인에게 가전무학을 전수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에게 그것을 전수시키기 위하여 부친을 설득했다지 않던가!
 아마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라 짐작한 남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
 
 “아버님! 소자, 대손이옵니다.”
 “오, 그래. 들어오너라.”
 “예에!”
 철기보 내원 입구에 있는 보주의 집무처인 만세무적전(萬歲無敵殿)에 칠 척 장신 거한이 찾아들었다. 그는 철기보의 소보주인 무정검 북리대손이었다. 과거 청룡대를 이끌고 금강수라마강시들과 대적하였다가 수하들은 전멸하고 자신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바 있는 그였다.
 안에서 대답한 자는 철기보의 보주이자 파천검법이라는 강호 최절정의 검법을 지닌 철사자 북리승혁이었다.
 전각은 독특하게도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렸는데, 들여쌓기와 내쌓기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예! 무무색황이 다시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이옵니다.”
 “무엇이? 무무색황 남궁호가 나타났다고?”
 “그러하옵니다. 현재 황궁을 떠나 태극은하궁에 들어간 듯하다는데, 조만간 다시 남하하여 어디론가 갈 것 갔다 하옵니다.”
 북리대손의 보고에 철사자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좋다! 무슨 방법을 쓰든 그가 본보를 방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 알겠느냐?”
 “예!”
 “한데, 그 자는 어떻더냐?”
 무정검은 부친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태인은 현재 지하 뇌옥에 잘 있습니다.”
 “좋다! 그를 잘 감시하도록. 무무색황이 본보에 방문하면 그 자의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귀수혈사단에서 풀어놓은 금강수라마강시에게 그토록 호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냉혈장비 독고태인을 살려 두고 있었다. 그가 귀수혈사단의 간세임이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처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 무무색황이 빠져나간 듯싶은 지하 통로는 이미 봉쇄하여 두었으니,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 하더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무정검이 막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다시 철사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무무색황을 청할 때 절대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 알겠습니다.”
 무정검은 부친이 무슨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가 상황의 후계자라는 신분만 지니고 있을 때에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판국이었는데, 지금은 거기다 대명제국의 부마도위라는 지엄한 신분까지 겸비하게 되었으니 무례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만일 그의 비위라도 거스르게 된다면 혹여 관에서 질책을 받을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철기보가 제아무리 강호십정 가운데 하나였고, 지금은 예전보다도 강호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더라도 황궁에서 보면 일반 양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주지시킨 것이다.
 무적만세전을 벗어난 무정검은 지하 뇌옥으로 가서 냉혈장비 독고태인이 잘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곳에 갇힌 지 벌써 일 년이 훨씬 넘었기에 그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지하 뇌옥은 전과는 달랐다.
 그곳엔 죽어서 썩고 있는 시신도 없었고, 지저분한 건초더미도 없었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청석 바닥이 두꺼운 철판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과거 지하 뇌옥에서 탈출을 할 수 있었던 남궁호가 바로 무무색황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청석 바닥 밑 좁은 통로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하여 이곳에 두꺼운 철판을 깔아 더 이상 죄수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냉혈장비는 무공이 폐쇄된 듯 힘없는 모습으로 그냥 맥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산다는 것에 대한 애착이 없어 보였다. 그의 신체를 속박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재갈이었다. 스스로 혀를 끊어 자진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후후······, 잘 있구나.”
 “으으······ 으으으······!”
 재갈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던 냉혈장비는 무정검을 보자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후후······,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이 고문하였던 남궁호라는 사람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 자리에서 네놈은 모든 것을 실토하여야 할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냉혈장비의 처소에서 나온 수십 가지 증거물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그 중엔 중원 최고의 전장인 만해전장에서 발행한 은표가 수북하게 있었다.
 모두 이천삼백만 냥이 조금 넘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냉혈장비는 이를 남궁호로부터 얻었다고 하였으나 철기보에서는 믿을 수 없었다. 남궁호가 이곳에 억류된 것과 그가 상황의 후계자가 된 것에 시차가 있기에 도저히 그가 이런 거금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거금이 남궁호의 것이 아니라면 냉혈장비가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지금까지 살려 두었던 것이다. 사실 은자 이천삼백만 냥이라면 철기보 같은 문파를 열 개나 세우고도 남는 엄청난 거금이었던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이 거금을 지금까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잘 보관하고 있었다. 철기보가 비록 패(覇)를 숭상하는 문파이긴 하지만 결코 남의 재물을 탐하는 그런 문파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철기보에는 문파를 꾸려 갈 만한 충분한 재원이 있었다.
 그것은 어딘가에 감춰진 철광(鐵鑛)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철을 파는 것만으로도 능히 보를 운영하고도 남을 정도였던 것이다.
 “후후······, 그가 온 후 다시 보기로 하자.”
 “으으으······ 으으으으······!”
 냉혈장비는 눈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말뜻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갇혀서 사느니 차라리 통쾌하게 죽여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정검은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물론 그가 귀수혈사단의 간세라는 것을 알기는 하였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철기보에서는 최근 경사스런 일이 있었다. 개망나니 짓을 도맡아 하던 북리성린이 스스로 서책을 잡은 것이다.
 원래 그는 삼 세 때 사서삼경을 줄줄 읽어 내리던 신동이었다. 그렇기에 요즘 그의 서실을 담당하는 하인은 죽을 맛이었다. 매일 철기보 서실에서 그가 원하는 서책들을 고른 후 이를 날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라도 하였는지 그를 부르는 소리는 낮과 밤의 구별이 없었다.
 아무 때고 북리성린이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가 그가 원하는 서책을 찾아다 대령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처음 그가 이 소임을 맡았을 때 나머지 하인들은 그를 무척 부러워하였다. 북리성린이 독서하는 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매일 빈둥거려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차라리 낮에 뼈빠지게 일하고 밤에는 편히 쉴 수 있는 자신들의 처지가 그보다 훨씬 좋다고 자위하며 오히려 그를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군(馬郡)아! 마군아!”
 “예에! 소인, 달려갑니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북리성린은 어느새 성장하여 이제는 약관에 달하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관옥 같은 얼굴은 그의 모친을 닮은 것이라 하였다.
 “헉헉! 소인, 대령입니다요, 공자님!”
 “후후······, 그래. 지금 가서 천기누설진해(天機漏泄眞解)라는 서책을 찾아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요.”
 마군이라 부린 하인은 눈썹이 휘날리게 철기보 서실로 향하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남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제길!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고 저러는 건가? 에잉! 내 팔자야!”
 현재의 시각은 삼경이 넘어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홰를 치며 울 시간이었다. 그는 지난밤 의복도 못 벗고 신도 신은 채 꾸뻑꾸뻑 졸다가 놀라서 달려온 것이다. 요즘은 이런 생활의 연속이기에 그의 눈은 언제나 수면 부족으로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피로가 풀리지 않아 늘 전신이 뻑적지근하였다.
 “에잉! 전이 좋았는데, 차라리 매일 기원이나 가시지 왜 하필이면 서책을 읽는다고 이 고생을 시키는지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글을 모른다 할걸.”
 사실 그가 이 소임을 맡게 된 것은 순전히 제법 글줄 꽤나 읽을 줄 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언젠가 북리성린이 파천검보를 들고 나가 잔뜩 술을 마시고 돌아온 뒤 누이인 북리운혜로부터 모진 매질이 있었다.
 그 후, 그녀가 철기보의 모든 하인들을 집합시켜 놓고 누구든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때 마군은 손을 번쩍 들고 나갔었다. 다른 모든 하인들은 그보다 글을 읽는 실력이 낮았기에 그가 낙점(落點)되어 한동안 무지하게 편했던 것이다.
 “가만······, 천기누설진해라 하였던가? 어디 보자.”
 마군은 높이가 거의 어른 키만 하고 길이가 오 장에 달하는 수십 개의 서가를 돌며 북리성린이 원하는 서책을 찾고 있었다.
 “천기누설진해라, 천기누설진해라······. 이 빌어먹을 게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알아야지. 에잉! 쯧쯧쯧, 천기누설진해······.”
 거의 반시진을 돌아다니던 마군은 하도 집중해서 서책을 찾은지라 눈이 침침해져 옴을 느끼고 자신의 눈을 비비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이런 젠장!”
 그의 뇌리로 한 열흘쯤 전에 천기누설진해라는 서책을 찾아 대령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다시 북리성린이 있는 서실에 당도한 마군은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감정을 누르고 나직이 보고하였다.
 “공자님! 소인, 마군입니다요.”
 “어, 그래? 그래, 그 서책은 찾아왔느냐?”
 “예! 그 서책은 소인이 공자님께 벌써 열흘 전에 가져다 드린 것이옵니다.”
 마군의 음성은 볼멘 티가 역력하였다. 그의 말에 대답 없이 여기저기를 들쑤시는지 한동안 말이 없던 정실에서 북리성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어, 이거 미안하게 되었구나. 되었다. 이제 가서 자거라.”
 “예!”
 마군은 휙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잠들만 하면 또 깨우려고?”
 마군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처소로 사라졌다.
 요즘 북리성린이 있는 서실에는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하였다. 갑자기 서책을 잡기 시작한 그는 마치 지난 세월 동안 읽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읽으려는지 엄청난 속도로 서책들을 독파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그의 부친과 형, 그리고 누이는 요즘 흡족해하는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세인들은 모르고 있지만 철기보에서 잠룡(潛龍) 하나가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려 하고 있었다.
 
 
 제4장 태극오관
 
 
 “허허······, 남궁 소협에게 특별히 본궁의 태극오관을 개 방하겠네. 그곳을 통과하고 못하고는 오직 소협의 능력이 달려 있네. 만일 그곳을 모두 통과한다면 본궁의 비전절학을 전수해 주겠네. 그럼 무운을 비네.”
 천령군 을지후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하자 곁에 있다 기다렸다는 듯 옥기린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제부터는 소자가 남궁 아우에게 말을 할 터이니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허험, 알았다.”
 천령군은 뒷짐을 진 채 서서히 안으로 사라졌다. 그의 신형이 사라지자 옥기린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보게, 아우! 부디 무운(武運)을 비네. 최선을 다할 것이라 우형은 믿겠네.”
 “후후······, 궁주님과 대형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궁호는 빙긋 미소 지으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옥기린의 눈은 안타까움으로 그득하였다. 사실 남궁호로서는 굳이 태극오관을 통과하여 태극은하궁의 무공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엄연히 외인인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그러나 옥기린은 생각이 달랐다.
 방금 전 부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어 말을 하였던 것은 혹여 부친이 태극오관을 돌파하여야만 세외천미와의 혼례를 허락하겠다는 말을 할까 봐 조마조마하였던 것이다.
 아직 남궁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 옥기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보게, 아우! 정말 최선을 다해 주게. 태극오관은 우리 궁도들 가운데서 날고기는 자들도 통과하지 못한 어려운 관문이네. 과거 자네가 누구도 통과할 수 없었던 금겁오관문을 돌파한 것은 알고 있네만, 이것과 그것은 정말 수준이 다를 것일세. 최선을 다해 우형이 아버님을 조른 일에 대한 보답을 해 줄 걸로 믿겠네.”
 말을 하는 옥기린의 얼굴은 정말 진지하였다. 이런 모습을 본 남궁호는 너무 쉽게 대답하는 것이 그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하고 좀더 신중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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